고려조에서는 문하부를 두어 이전(理典)을 맡게 하고, 삼사(三司)는 재정을 맡게 하였으며, 밀직(密直)은 군정(軍政)을 맡게 하여 각각 그 직책을 나누었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이 삼부가 모여 의논하였으니, 이것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라고 일컬었다. 그 직책과 예우의 수준이 모든 관료 중에서 가장 중하였으나 일정한 부서(部署)가 없더니 □종(□宗) 때에 새로 부서를 만들었다. 문하시중(門下侍中)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판사(判事)를 삼고, 삼사의 판사 이하와 문하부의 찬성사(贊成事) 이하로 동판사(同判事)를 삼고, 밀직(密直)은 판사 이하를 사(使)로 삼아서 그 명칭을 바르게 하니 사사(使司)의 책임은 더욱 중해졌다. 당(唐) 나라는 다른 벼슬로서 동평장사(同平章事)를 겸한 사람이라야 재상이 되었던 것이니 곧 이 제도이다.
○ 고려 때는 도병마사(都兵馬使)를 두어서 시중(侍中)ㆍ평장사ㆍ참지정사(參知政事)ㆍ정당문학(政堂文學)ㆍ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판사를 삼고, 판추밀(判樞密) 이하는 사(使)로 삼아 큰일이 있으면 모여서 의논하기 때문에 합좌(合坐)라는 명칭이 있었지만 1년에 한번 모이거나 여러 해가 되어도 모이지 않기도 하였다. 그후에 고쳐서 도평의사(都評議使) 또는 식목도감사(式目都監使)라 하였다.
《역옹패설(櫟翁稗說)》○ 태조 2년에 고려 말기의 제도를 모방해서 두 부[二府]를 창설하여 도평의사(都評議司)는 국가의 정무(政務)를 관장하고, 삼군사(三軍司)는 군사 행정을 관장하고 판평의사사(判評議司事)는 삼군부(三軍府)의 일을 통령(統領)하였으니 모두 정일품이었다. 군국(軍國)의 큰일은 두 정승이 결정하였고, 동판평의(同判評議)나 상의평리(商議評理) 같은 이는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하였다.
《정부고사(政府故事)》와 《무헌비고》에는 태조 원년이라고 하였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판사(判事) 2명은 시중(侍中)이 겸하고, 동판사(同判事) 11명은 문하부사(門下府使)와 상의부사(商議府使) 이상과 삼사(三司)의 좌우복야(左右僕射) 이상이 겸하였으며, 사(使) 1명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겸하고, 부사(副使) 15명은 중추사(中樞使) 이하와 중추학사(中樞學士) 이상이 겸하였으며, 검상(檢詳) 2명, 경력(經歷) 1명과 도사(都事) 1명은 모두 다른 벼슬이 겸하고, 또 문하부에 관원의 정원을 두었다. 모두가 고려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문헌비고》○ 정종(定宗) 2년에 도평의사사를 폐지하여 의정부를 만들고, 다시 고쳐서 좌정승(左政丞)ㆍ우정승(右政丞)
정일품 과 시랑찬성사(侍郞贊成事)
종일품 와 참찬(參贊)
정이품 을 두었다.
○ 태종 원년에 또 문하부를 폐지하고 의정부에 합병시켰는데 백관을 총령(總領)하고 서정(庶政)을 고루게 하며 음양을 조화시켜 나라를 다스리게 한다고 하였다.
14년 갑오에 영부사(領府使) 1명과 판부사(判府事)
정일품 2명과 동판부사(同判府事)
종일품 2명을 두었으며, 참찬을 없애고 지부사(知府事)를 두었다. 얼마 후에 다시 고쳐,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
정일품 각각 1명과 좌ㆍ우찬성(左右贊成)
종일품 각 1명, 좌ㆍ우참찬(左右參贊)
정이품 각각 1명과 사인(舍人) 2명,검상(檢詳) 1명, 사록(司錄) 2명을 두었는데, 모두 당시의 청망(淸望)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녹사(錄事)와 도리(都吏)도 모두 문과에 처음으로 급제한 사람을 썼다.
정부고사(政府故事)
근래에는 사록은 처음 문과에 오른 사람을 쓰고, 녹사는 서인(庶人)을 썼으며, 관복(冠服)을 입고 매일 출근하였으며, 도리(都吏)는 이서(吏胥)를 썼는데, 사인(舍人)과 사록은 뒤에 1명을 줄였다. 정부고사
이때에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 신개(申槩)가 소를 올려 논하기를 의정부에서 일을 결재하는 것은 권한을 대신이 갖는 것이라 하여 그 불가함을 극력 아뢰었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애숭이 선비가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고 대신들이 권한을 독단한다고 함부로 말하느냐.” 하였으나, 신개가 굽히지 않고 변론하니 대신들이 오히려 떨었다. 얼마 안 되어 의정부에서 결재하는 것을 파하였다.
〈사가집비(四佳集碑)〉18년 무술에 좌의정이 이조ㆍ예조ㆍ병조 판서를 예겸(例兼 으레 겸하는 것)하였고, 우의정은 호조ㆍ형조ㆍ공조 판서를 예겸하였다.
○ 세종(世宗) 18년 병진에 전교하기를, “당우(唐虞) 때에는 백규(百揆 정승)가
구관(九官)ㆍ
십이목(十二牧)을 통령하였고, 주(周) 나라 성왕(成王) 때에는 총재(冢宰)가 육경(六卿)과 육십속(六十屬)을 통령하였는데, 혹자는 진평(陳平)이 돈[錢]과 곡식의 수량을 알지 못하는 것이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고 하지만, 한(漢) 나라 정승이 권한을 잃은 것은 진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나라를 창건한 초기에 도평의사(都評議司)를 설치하여 나라의 정치를 총리(總理)하였다가 고쳐서 의정부를 만들었으나 그 직임(職任)은 처음과 같았다.갑오년에 이르러 대신이 직접 작은 일을 보는 것은 마땅치 못한 일이며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은 의정부가 회의하여 아뢰고 그 나머지는 육조로 하여금 직접 아뢰어 시행하게 하였다. 이런 뒤로부터 큰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두 육조로 돌아가고 정부와 관계가 없게 되었으며 참여하는 것은 다만 사형수를 의논, 결정하여 아뢰는 일뿐이니, 이는 정승을 임용하는 본래의 뜻에 어긋남이 있다.이제 태조가 만드신 법에 따라 육조는 자기들의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품하며 정부는 그 가부를 의논한 연후에 아뢰어서 전지(傳旨)를 받은 뒤 도로 육조에 내려서 시행하도록 하라. 오직 이조ㆍ병조가 벼슬을 임명하는 것과 병조가 군사를 쓰는 것과 형조가 하는 사형수 이외의 판결은 각기 본조로 하여금 직접 아뢰어서 시행함과 동시에 곧 정부에 보고하여 만일 당치 않는 일이 있으면 정부가 살피고 논박하여 바로잡게 하라.” 하였다.
《동각잡기》와 《문헌비고》의 합록(合錄 )정부가 백사(百司)를 총괄해서 다스렸는데, 사인사(舍人司)와 검상사(檢詳司)가 보좌관이 되어 모든 정무를 분장하니 사람 선임이 중하다.
태종(太宗) 갑오년에 정부의 결재 제도를 파하고 사인사(舍人司)만 남겼으며 검상(檢詳)의 일은 예조로 돌려보냈다.
세종(世宗) 병진년에 정부에서의 총괄ㆍ결재 기능을 부활시킨 후로 처음으로 검상사를 회복시켰다.
이극감(李克堪)이 지은 〈검상사제명기(檢詳司題名記)〉○ 옛날 제도에 삼공이 자리에 나와서 봉한 궤를 열고 도장을 찍어 결재하였고 찬성 이하는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더니, 세종조에 이르러 신개(申槩)가 찬성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삼공이 유고시엔 찬성이 대행하도록 명하였고, 또 승지를 집으로 보내서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 조종조(祖宗朝) 고사(故事)엔 군(軍)ㆍ국(國)의 큰일과 육조의 업무가 정부에 위임되어 삼공이 청사에 앉아 있을 때마다 육조의 관리들이 각자의 임무를 가지고 조방(朝房)으로 모였다. 임금의 재가가 내린 공사(公事)가 있으면 사인(舍人) 이하 모두 방(房)을 나누어 평리(評理)하여 정승의 재결을 얻은 후에 해당 관서가 시행하였다. 세조조에 이르러 육조가 일을 결정하는 법을 비로소 폐지하니, 이로부터 정부의 권리는 점점 가벼워졌다. 명종조에 이르러 처음으로 비변사를 설치했고 선조조에 이르러서 군ㆍ국의 중요한 일을 다 일임했다.이로부터 대신들은 의정부로 출근을 하지 않게 되었고 정부가 일을 보는 제도는 드디어 폐지되었다. 이래서 겨울과 여름 두 차례 있는 백관의 포상(褒賞)과 견책(譴責), 백사(百司)의 참알(參謁)과 망궐례(望闕禮) 또는 중국에 보내는 방물(方物)을 꾸릴 때와 제향(祭享) 때에 서계(誓戒)를 받을 때 외에는 정부가 항상 빈 청사가 되었으니 탄식할 일이다.
정부고사○ 삼공이 청사에 앉아서 일국의 크거나 작은 일에 모두 참여하여 결정하기 때문에 정승의 권한이 높고 국체(國體)가 중하더니, 세조가 왕통(王統)을 이으면서부터 급히 그 제도를 파하고 정부의 권한은 줄어들고 국체도 또한 풀어지기 시작했다.
정부가 일을 결재하던 날을 당하여 좌ㆍ우사인(左右舍人)과 검상(檢詳)은 모두 이조의 낭관을 겸하였고, 사록(司錄) 2명은 옥당(玉堂)의 참하관(參下官) 1명과 예문관(藝文館)의 관원의 겸직이었으며,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 하나를 녹사로 써서 각각 육방(六房)을 장악하여 온 종일 수응(酬應)하기에 바빠 눈코 뜰 여가가 없다는 이유로 기악(妓樂)을 베풀어서 이들을 위로했었는데 결재 제도가 없어진 뒤에도 이 풍습은 아직 남아 있어서 대신들은 정청(正廳)에 모여 앉아 있는데 사인(舍人)이 있는 곳에는 노래와 풍악 소리가 공중에 퍼졌다.심지어는 전곡(錢穀)을 맡은 낭리(郞吏)들을 패초하여 벌주를 먹여 다그치고 또 시중의 부자를 잡아다가 공공연히 강요하여 많은 물건을 창고 속에 두고 광대나 기생들의 놀음채로 썼다. 선조조(宣祖朝) 때 장령(掌令) 유몽□(柳夢□)이 경연에 들어가서 그 폐단을 역설한 뒤로 감히 이런 짓을 하지 못하였다.
《지소록(識小錄)》○ 중고(中古) 이래로, 삼공이 정부에 앉아서 국가의 정치를 결재한 지 오래였다. 인조 계해년 반정 초에 중흥공신(中興功臣)들이 도당(都堂)을 회복시키려고 하였는데 이원익(李元翼)이 반대하기를, “불가하다. 중고에 이 일을 폐한 것은 까닭이 있는 것이다. 국가의 대권(大權)을 대신들이 다시 마음대로 독단(獨斷)할 수는 없다.” 하였다.
오리유사(梧里遺事)○ □□조 (□□朝) 때, 박세채(朴世采)가 소를 올리기를, “정부의 옛 제도에 육조가 여러 직책을 나누어 맡아서 서무(庶務)를 재결ㆍ처리하였고, 또 모든 업무를 정부의 결재를 받아야 비로소 전하께 아뢰었습니다. 심지어 군사와 백성에 관한 중대사까지도 전하의 전지를 정부로 보냈지 직접 본조(本曹)로 보낸 적이 없었으니, 체통이 높고 사리에 맞아 일세(一世)의 좋은 정치를 충분히 이룩했던 것입니다. 그뒤에 폐지했다가 회복했다가 하였으며 명종조 을묘년에 마침 왜변을 당하자 임시로 비변사를 설치하여 급한 사태에 대응하였던 것입니다.그후로 남북에 난리가 계속되어 혁파되지 않고 전후 수백 년 동안 예악ㆍ문장ㆍ정사의 논의가 모두 비변사로부터 나오게 되어 명분에 맞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는 체통을 높이고 사리를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옛 제도를 회복하되 먼저 비변사를 중서당(中書堂)으로 고치고 대신들로 하여금 날마다 그곳에 나가 앉아서 밑에서 올라오는 모든 사무를 결재하게 하고, 삼공이 이미 육부를 분장했다 하더라도 중대한 일은 함께 통의(通議)한 뒤에 전하께 아뢰어 처리한다면 비로소 체통을 얻을 것입니다.” 하였다.
○ 국초(國初)로부터 삼공은 물소뿔로 만든 띠[犀帶]를 전수하는 일을 경솔하게 하지 않았다. 하연(河演)은 신석조(辛碩祖)에게 전하였는데 석조는 겨우 계급이 2품이요, 벼슬이 유수(留守)에 이르러 죽었기 때문에 그 띠가 끝내 전수되지 못하였다.
《필원잡기》○ 전에는 삼사의 관원이 삼공을 찾아보는 일이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자중(自重)하고 체모를 중히 여긴 때문이다. 이준경(李浚慶)이 정승이 되었을 때, 부제학 심의겸(沈義謙)이 찾아보고 인사하니, 준경이 사양하기를, “부제학이 무슨 일로 왔소.” 하였다. 의겸이 말하기를, “세시라서 찾아뵜을 뿐입니다.” 하니, 준경이 말하기를, “삼사(三司)의 장관이 삼공을 찾아보면 사람들이 듣고 필연 해괴하게 여길 것이니 뒤로는 찾아오지 마시오.” 하였다.
《지봉유설》○ 중종 초에 정승 자리가 비어 있을 때이다. 공회(公會) 석상에서 누가 정승이 될까 하고 묻자 신용개(申用漑)가 잠자코 생각하다가 정광필(鄭光弼)을 돌아다보면서 “조정 신하 중에 아저씨 만한 분이 없으니 틀림없이 아저씨가 승진될 겁니다.”
신용개는 정과 인척(姻戚) 관계로 조카뻘이다. 하였는데 과연 광필이 정승이 되었다. 그뒤에 또 정승 한 자리가 비었는데 누가 또 물으니, 용개가 한참 동안 대답 않고 있다가 혼잣말로 “나만한 사람도 없으니 면할 수 없을 거야.” 하였는데, 그는 과연 정승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꼭 복상됨을 어렵고 조심스레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다. 근세의 복상(卜相)은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다. 일반 벼슬의 빈 자리를 보충하듯 오직 직품(職品) 차례로 올려 써서 정승 자리를 채운다.
《송와잡설(松窩雜說)》○ 명종 무신년 5월에 좌의정 이기(李芑)가 갈리고, 홍언필(洪彦弼)이 그 후임이 되었다. 영의정 윤인경(尹仁鏡)이 아뢰기를, “의정부의 선생안(先生案)을 보면, 한명회(韓明澮)가 영의정에서 갈린 지 9년 뒤에 도로 좌의정에 임명되었고, 심회(沈澮)ㆍ정광필은 영의정에서 갈린 지 10년이 지나 다시 좌의정이 되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다만 홍언필의 좌차(座次)가 본래 신의 위에 있으니 청컨대, 언필을 영의정에 승진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기어코 사양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언필이 아뢰기를, “조정의 공회(公會)는 한결같이 순서에 따르는 것인데, 이제 정부에 들어오는 순서가 앞뒤가 다릅니다. 차례가 해당한 사람에게 주소서. 직위가 백료(百僚)의 어른이므로 혐의스럽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임금이 전교하기를, “사양하지 말라.” 하였으나, 인경(仁鏡)이 오히려 자리를 사양하지 않았다. 대사헌 구수담(具壽聃)이 ‘자리 순위로써 올리고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으로 경연에서 아뢰므로 육조의 판서 이상과 양사의 장관을 불러서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자리 순서를 좇는 것이 마땅하며 또 전례(前例)를 상고해 보아도 역시 순서를 따랐다.”고 하여 인경(仁鏡)을 낮추어 좌의정으로 삼았다.
《동각잡기》○ 선조 계미년에 노수신(盧守愼)이 상중에 있을 때, 좌의정 김귀영(金貴榮)은 임금의 뜻에 거슬려 사퇴하고, 우의정 정지연(鄭芝衍)은 이미 죽었고, 영의정 박순(朴淳)은 마침 배척을 받고 있었다. 임금이 주서(注書)에게 특명하여 수신에게 보내어 복상(卜相)을 청하여, “경(卿)은 대신이라 비록 상중에 있으나 고집스럽게 원칙만 지킬 것이 아니니 복상해서 올려라.” 하였다. 이에 수신이 정유길(鄭惟吉)ㆍ유전(柳㙉)ㆍ박대립(朴大立)으로 대답해 올려 드디어 유길(惟吉)이 정승이 되었다. 수신이 또 무자년에 정고(呈告 사퇴를 고하는 것) 중에 있을 때 임금이 명하여, “집에서 복상하라.” 하니, 수신이 김귀영(金貴榮)ㆍ이산해(李山海)를 써서 올려, 산해가 정승이 되었다.
〈소재연보(蘇齋年譜)〉○ 언젠가 허봉(許封)이 말하기를, 사인(舍人)이 되어 오랫동안 허다한 정승을 겪었는데, 권철(權轍)은 극히 엄하고 굳세어도 사인을 지낸 경험 때문에 잔치하고 술 마시는 것을 매우 좋아하여 노래소리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해도 묻지 않았고, 노수신은 모든 일에 극히 너그러웠으나 사인의 잔치에 “노래와 음악이 너무 번거롭다.”고 여러 번 금지시켰다. 아마 그가 사인을 겪지 않은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 인조 갑신년에 정승 자리의 결원이 있었는데, 정경(正卿) 중에는 복상(卜相)에 추천될 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묘당(廟堂)에서는 아경(亞卿)에서 뽑아 승진시키기를 청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에 부제학 이목(李楘)으로 수망(首望)을 삼고, 형조 판서 서경우(徐景雨)를 부망(副望)으로 올렸는데 경우가 낙점(落點)을 받았다.
《명재집(明齋集)》에 있는 〈송교행장(松郊行狀)〉○ 효종조 때, 이시백(李時白)이 우의정에 임명되자 좌의정 조익(趙翼)과 혼인 관계가 있어 응당 피해야 하므로, 소를 올려 힘써 사양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혼인 관계의 혐의에 대한 법전의 본의는 일반관리에게 한정되고 정승 자리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데 어찌 구구하게 구애받아 어진 대신을 쓰지 않으랴.” 하고, 여러 번 사양하여도 허락하지 않았다.
《동춘집(同春集)》○ 숙종(肅宗) 갑자년에 임금이 정승 김석주(金錫冑)로 하여금 병조 판서의 일을 겸하도록 하고, 관원의 임면(任免)ㆍ출척(黜陟)의 정사 자리에 나가서 참여하도록 하려고 대신들에게 문의하였다. 영의정 김수항과 우의정 남구만이 아뢰기를, “인조조 때, 우의정 심열(沈悅)이 호조 판서 겸직을 사양한 차자에서 말하기를, ‘신숙주(申叔舟)의 예조 판서, 박순(朴淳)의 병조 판서, 유성룡(柳成龍)의 이조 판서 겸임은 모두 실지 판서는 따로 있고, 대신은 겸임으로 총찰(總察)할 따름이요, 인물의 진퇴와 전례(典禮)와 군정(軍政)은 본조(本曹)의 당상이 왕래하면서 물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한직 벼슬의 임명 이외에 중한 임무와 긴요한 자리는 모두 문의하여 의망(擬望)하도록 하면, 그 용사(用舍)하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몸소 정석(政席)에 참여하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좇았다.
〈비국등록(備局謄錄)〉을축년에 좌참찬 신정(申晸)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대신이 체직되면 으레 중추부(中樞府)에 부치는데, 좌목(座目)의 차례에 따라 내려오기 때문에 지금 원임대신 민정중(閔鼎重)ㆍ이상진(李尙眞)은 모두 지사직(知事職)에 부쳤는데, 지사는 이품 벼슬로서 의관(醫官)이나 역관(譯官) 같은 잡류들도 될 수 있는 직위이니 본래 대신을 대접하는 도리가 못 되고, 녹봉 또한 이로 인해 낮아지니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이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좌의정 남구만이 아뢰기를, “영돈녕부사는 본래 한 자리지만 두 국구(國舅)가 있어서 더 설치하였습니다. 이로써 말씀드리면, 영중추부사도 마땅히 더 설치하여 대신을 정당하게 대우해야 하겠는데, 대신이 한두 사람이 아니므로 영중추부사를 네다섯 자리 더 내고 보면 또한 너무 많을 것 같으니, 중추부로 보내는 수에 따라서 판중추부사를 가설(加設)해서 정일품의 녹봉을 받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좇았다.
《국조보감》가정(嘉靖) 갑신년에 사인(舍人) 어영준(魚泳濬)이 의정부 제명록(題名錄)을 썼는데, 국조(國朝)의 상신(相臣 정승)과 찬성ㆍ참찬 등 보좌관의 임명된 월일을 기록하고 그 밑에 주를 달고 이행(李荇)이 서(序)를 지었는데, 이때는 남곤(南袞)이 영의정, 이유청(李惟淸)ㆍ권균(權鈞)이 좌ㆍ우의정이 되었다.
《용재집(容齋集)》○ 우리나라엔 전고(典故)를 맡은 관원이 없었다. 각사(各司)에도 등록(謄錄)이 있어야 되는데 없었다. 역대 임금의 길례ㆍ흉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일대(一代)의 제작 연혁을 상고할 데가 없다. 정부는 평일에 가각고(架閣庫)를 두고 녹사(錄事)가 이를 주관하였는데, 보통 수교(受敎)와 대신들의 수의(收議), 군(軍)ㆍ국(國)의 긴요한 문서들을 모두 이 가각 속에 간직해 두고 상고하게 되었는데 성종 이후부터 시행하였다. 가각은 중국 송 나라 관제로서, 문학하는 신하가 관장하는데 양부(兩府)에 다 두었으며, 대개 전고(典故)를 거두어 참고하기 위함이다. 상상컨대, 국초에 이로 인해서 설치한 것 같다.
《지봉유설》○ 검상(檢詳)은 형조의 상복사정랑(詳覆司正郞)을 겸직하게 되어 있다. 때문에 형조의 낭청(郞廳) 서쪽에 북루(北樓)가 있는 것이며,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검상청이라 부른다.
《지봉유설》○ 구례(舊例)에 사인사(舍人司)는 도당낭청(都堂郞廳)이 당대에 이름 높고 잘 생긴 사람을 뽑아서 연정회(連亭會)를 만들도록 되어 있다. 이행이 사인이 되자 어느 사람이 벽에 쓰기를, “도리(桃李)가 꽃이 없으니 이행(李荇)이 중서당(中書堂)에 들어왔네.” 하였으니, 대개 그가 색(色)을 멀리함을 말한 것이다. 사림들이 서로 전하면서 웃음거리로 삼았다.
〈용재행장(容齋行狀)〉○ 본조(本朝)에서 부자가 이어서 정승이 된 사람은 황희(黃喜)ㆍ황수신(黃守身)과 이인손(李仁孫)ㆍ이극배(李克培)ㆍ이극균(李克均), 정창손(鄭昌孫)ㆍ정괄(鄭佸), 홍언필(洪彦弼)ㆍ홍섬(洪暹), 신승선(愼承善)ㆍ신수근(愼守勤), 정유길(鄭惟吉)ㆍ정창연(鄭昌衍)인데, 유길(惟吉)의 할아버지도 의정(議政)이었으니 실상 3대 정승인 셈이다.
《지봉유설》3대를 연이어서 정승이 된 자는 심덕부(沈德符)ㆍ심온(沈溫)ㆍ심회(沈澮)인데, 근세의 3대 정승으로는 김구(金構)ㆍ김재로(金在魯)ㆍ김치인(金致仁), 서종태(徐宗泰)ㆍ서명균(徐命均)ㆍ서지수(徐志修)이다.
근세에 부자가 정승이 된 이는 윤두수(尹斗壽)ㆍ윤방(尹昉), 정태화(鄭太和)
창연(昌衍)의 손자ㆍ정재숭(鄭在嵩), 민정중(閔鼎重)ㆍ민진장(閔鎭長), 김수항(金壽恒)ㆍ김창집(金昌集), 조문명(趙文命)ㆍ조재호(趙載浩), 이세백(李世白)ㆍ이의현(李宜顯)이다.
형제가 정승이 된 이는 윤사분(尹士昐)ㆍ윤사흔(尹士昕), 허종(許琮)ㆍ허침(許琛), 이기(李芑)ㆍ이행(李荇), 심연원(沈連源)ㆍ심통원(沈通源),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정태화(鄭太和)ㆍ정치화(鄭致和), 김수흥(金壽興)ㆍ김수항(金壽恒)
상헌(尙憲)의 손자 민암(閔黯)ㆍ민희(閔熙), 윤지선(尹趾善)ㆍ윤지완(尹趾完), 최석정(崔錫鼎)ㆍ
최석항(
崔錫恒)
명길(鳴吉)의 손자 과 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조문명(趙文命)ㆍ조현명(趙顯命), 김약로(金若魯)ㆍ김상로(金尙魯), 정우량(鄭羽良)ㆍ정후량(鄭翬良), 신만(申晩)ㆍ신회(申晦), 홍봉한(洪鳳漢)ㆍ홍인한(洪麟漢)이다.
일문(一門)이 정승이 된 자는 이산해(李山海)와 그의 매부 김응남(金應南)ㆍ사위 이덕형(李德馨)이고, 형제가 정승이 된 이는 이행ㆍ이기와 심연원(沈連源)ㆍ통원(通源)이고 조손(祖孫)이 정승이 된 이는 심정(沈貞)ㆍ심수경(沈守慶)인데, 모두가 다 하나가 향기로우면 하나는 폐단을 끼쳤으니 해괴한 일이다.
《지봉유설》○ 국조(國朝)에 젊은 나이에 정승이 된 자로 남의 이목(耳目)이 미치지 못한 것은 제외하고 선조 때의 박순(朴淳)ㆍ이산해ㆍ김응남은 나이 50세요, 유성룡ㆍ이원익은 49세이고, 이항복은 43세이며, 이덕형은 나이 38세였다. 또 늙은 나이에 정승이 된 이는 심수경ㆍ이헌국(李憲國)인데, 모두 75세였다.
《지봉유설》이덕형이 나이 38세에 정승이 되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아직 건강하고 병이 없어 수안 군수(遂安郡守)로 있었는데, 광해(光海) 초년에 덕형이 중국 서울에 가서 책봉하기를 청하고 돌아오자 특별히 그 아버지를 판결사(判決事)로 삼으니 당시에 모두 일대 성사(成事)라고 일컬었다.
《지소록》○ 건국한 이래로 대신으로서 부모가 있는 자가 몇이 안 되었는데, 성희안(成希顔)은 어머니가 있었으나 희안이 먼저 죽었다. 이 밖에 오래된 것은 기록할 수 없다. 선조 초년에 홍섬이 그의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임금이 명하여 대신이 부모상을 당했을 때 하는 부의(賻儀) 예(例)를 상고하게 하였으나, 전고(典故)를 맡은 이가 상고해도 얻지 못했으므로 다만 관(官)으로 하여금 장사지낼 제구를 갖추도록 하고 부의에 대하여서는 대신에게 하는 예(例)로만 하였다. 노수신이 친상(親喪)을 당했을 적에 역시 이 예를 썼다.
○ 태종조 때,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이 함길도(咸吉道)에 있는 능침(陵寢)을 두루 살피려고 떠날 때 임금이 동교(東郊)에 나가 전송하였는데, 하륜이 돌아오는 길에 정평(定平)에서 죽었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은 매우 섧게 울었고 3일간 정사(政事)를 중지하였으며, 7일 동안 소찬(素饌)을 하였고, 명하여 서울 집에 들어와서 빈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시호를 문충(文忠)이라고 내렸다.
《동각잡기》○ 세종조 때, 좌의정 유정현(柳廷顯)이 죽자 세종이 백포(白袍)와 오모(烏帽)ㆍ흑대(黑帶)로 백관을 거느리고 금천교(禁川橋) 밖에다 장막을 치고 애도(哀悼)하는 의절(儀節)을 거행하였다. 유관(柳寬)이 죽었을 때도 그렇게 했다.
《동각잡기》○ 중종 기묘년 10월에 좌의정 신용개가 죽자 임금이 예(禮)에 의하여 거애(擧哀)하려 하였으나, 대신과 예관(禮官)들이 ‘중난(重難)한 일’ 이라고 의논드려 행하지 못했다. 뒤에 조광조가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용개가 죽었을 때, 전하께서 거애하려 하시다가 그만 두신 것은 무슨 일입니까. 신은 들으니 유관이 죽었을 때, 세종의 곡하시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하여, 지금까지도 듣는 자가 송구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전일의 전하의 하교하신 뜻이 심히 아름다웠는데, 대신들이, ‘별전(別殿)이 없어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니, 그들이 전하의 좋은 뜻을 받들지 못한 것이 심합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임진왜란 후에 조신(朝臣)들의 초상 때, 나라에서 베풀던 예의가 이내 폐해져서 행하지 못하더니, 계묘년에 찬성 최황(崔滉)이 죽으니 임금이 특히 명하여 조상(弔喪)과 치제(致祭)의 예를 옛 법대로 하게 하였다.
《백사집》○ 현종 신해년에 영부사 이경석이 죽자 영의정 정태화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경석은 집이 몹시 가난하여 지금 상식(上食)과 전(奠) 드리는 것을 잇기도 어려울 듯하니, 넉넉하게 도와주심이 마땅할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녹봉(祿俸)을 3년 한하고 그대로 주게 하였다. 대신이 죽은 뒤에 녹봉을 주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백헌년보(白軒年譜)〉○ 중종 때에 김안국의 병이 심하자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문병하려 하자 승정원이 그러한 고사(故事)가 없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김안국이 비록 삼공은 아니나, 나라 일에 마음을 다했으니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문병하라.” 하였다. 승지가 그 집에 이르렀을 때는 안국은 이미 능히 일어나서 대하지도 못했다.
《호음집(湖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