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좌윤(左尹) 최공(崔公) 묘갈명

손와 선생 문집 최석항

아베베1 2013. 11. 7. 21:45

 

 

 

 

 
 손와유고(損窩遺稿)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損窩先生遺稿
판심제  없음
간종  寫本
간행년  1933年謄寫
권책  原集 13권, 紀實 합 6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0.5×15.5(㎝)
어미  
소장처  國史編纂委員會
소장도서번호  D3B-235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69
 저자
성명  최석항(崔錫恒)
생년  1654년(효종 5)
몰년  1724년(경종 4)
 汝久
 損窩, 遯窩
본관  全州
특기사항  崔奎瑞, 鄭齊斗, 李光佐, 趙泰億, 尹淳 등과 교유
 가계도
 崔起南
 
 崔鳴吉
 領議政
 지천집(遲川集)
 崔後亮  
 府使
 廣州安氏
 監司 安獻徵의 女
 崔錫晉
 正郞
 崔昌憲
 
 崔昌演  
 
 崔昌敏
 
 崔昌億  
 
 崔錫鼎  
 명곡집(明谷集)
 崔錫恒  
 
 女
 
 尹濟明
 
 女
 
 申轂
 
 崔後尙
 執義
 崔錫鼎  
 領議政
 李慶億의 女
 
 崔惠吉
 監司
 崔後定
 
 崔後亮  
 
 崔後遠
 
 驪州李氏
 郡守 李以省의 女
 崔錫恒  
 
 靈山辛氏
 參奉 辛輔辟의 女
 崔昌億  
 
 女
 
 宋以鉉
 
 女
 
 鄭鈗
 

기사전거 : 行狀, 崔後亮行狀ㆍ崔後尙墓表陰記(崔錫恒 撰), 崔惠吉行狀ㆍ崔錫晉墓誌(崔錫鼎 撰, 明谷集 卷30, 卷25)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효종 5 1654 갑오 順治 11 1 8월 6일, 태어나다.
현종 14 1673 계축 康熙 12 20 4월, 생모 安夫人의 喪을 당하다.
숙종 5 1679 기미 康熙 18 26 봄, 榮川으로 歸覲하다. ○ 진사시에 합격하다.
숙종 6 1680 경신 康熙 19 27 別試文科에 丙科로 합격하다. ○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다.
숙종 7 1681 신유 康熙 20 28 淸風으로 歸覲하다.
숙종 8 1682 임술 康熙 21 29 6월, 史局에 천거되어 검열이 되다. 이후 대교, 봉교, 주서가 되다.
숙종 9 1683 계해 康熙 22 30 전적이 되다. ○ 가을, 太白山 奉化史閣으로 「顯宗實錄」을 봉안하러 다녀오다.
숙종 10 1684 갑자 康熙 23 31 병조 좌랑이 되다. ○ 2월, 정언이 되다. ○ 金煥의 鞫問을 청한 일로 譴逐당한 朴泰輔와 吳道一을 伸救하다. ○ 求言에 應旨 上疏하다.
숙종 12 1686 병인 康熙 25 33 7월, 關西 按廉御史가 되다. ○ 9월, 지평이 되다. ○ 전에 사간원에 있을 때 이조 판서 李翊을 논핵하였던 일로 대신이 배척하다. ○ 10월, 閔熙와 洪宇遠을 논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李尙眞과 金萬吉에게 疏斥받다.
숙종 13 1687 정묘 康熙 26 34 2월, 정언이 되다. ○ 4월, 尹宣擧의 신원 상소를 올린 羅良佐가 죄를 받자, 상소하여 伸救하다.
숙종 14 1688 무진 康熙 27 35 1월, 지평이 되어 동학교수, 교서관 교리를 겸하다.
숙종 15 1689 기사 康熙 28 36 1월, 부수찬이 되다. ○ 湖西의 京試官이 되어 天安, 沃川 등지를 들러오다. ○ 8월, 백형 崔錫晉, 조카 崔昌大와 함께 三角山 重興寺 등을 유람하다.
숙종 16 1690 경오 康熙 29 37 陽川 縣令이 되다.
숙종 17 1691 신미 康熙 30 38 高陽 郡守가 되다.
숙종 18 1692 임신 康熙 31 39 8월, 五冠山 節祭의 祭官에 차임되다. 大興寺를 지나다. ○ 조카 崔昌演, 李夏英과 閔漬巖을 유람하다.
숙종 19 1693 계유 康熙 32 40 겨울, 생부 崔後亮의 상을 당하다.
숙종 22 1696 병자 康熙 35 43 2월, 보덕이 되다. 이후 부수찬, 사인, 동부승지, 좌부승지가 되다. ○ 겨울, 沃川 郡守가 되다.
숙종 25 1699 기묘 康熙 38 46 2월, 우부승지, 대사간이 되다. ○ 安州의 宮家 折受를 혁파하다. ○ 6월, 형조 참의, 대사간이 되다. ○ 旱災로 응지 상소하다. ○ 金鎭龜가 草記로 성균관 齋任을 체차하도록 청한 것을 반대하다.
숙종 26 1700 경진 康熙 39 47 3월, 승지가 되다. ○ 5월, 대사간이 되다. ○ 冬雷로 陳戒하다. ○ 12월, 慶尙道 觀察使가 되다.
숙종 28 1702 임오 康熙 41 49 4월, 慶尙道의 輿圖를 작성하여 올리다. ○ 8월, 호조 참의, 대사간이 되다.
숙종 29 1703 계미 康熙 42 50 5월에 開城 留守, 9월에 平安道 觀察使가 되다.
숙종 31 1705 을유 康熙 44 52 8월, 대사간이 되다. 이후 우윤, 도승지가 되다.
숙종 32 1706 병술 康熙 45 53 1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상피로 체차되다. ○ 동의금, 대사성이 되다. ○ 5월, 이조 참판이 되어 예문 제학 등을 겸하다. ○ 12월, 대사헌이 되다.
숙종 33 1707 정해 康熙 46 54 도승지, 대사성, 이조 참판 등이 되다.
숙종 34 1708 무자 康熙 47 55 2월, 부제학, 예문 제학이 되다. ○ 11월, 형조 판서가 되다.
숙종 35 1709 기축 康熙 48 56 6월, 이조 판서가 되다.
숙종 36 1710 경인 康熙 49 57 1월, 형조 판서가 되다. 병조를 거쳐 다시 형조 판서가 되다. ○ 6월, 東郊로 省墓를 다녀오다. ○ 좌참찬, 판윤, 호조와 이조 판서, 판의금부사가 되다. ○ 10월, 海賊의 침입 소식을 듣고 都城 築城보다는 邊禦에 치중하기를 청하다. ○ 12월, 魚有龜와 李縡가 銓注의 불공정을 이유로 논척하자, 사직, 체차되다.
숙종 37 1711 신묘 康熙 50 58 1월, 판윤, 형조 판서가 되다. ○ 2월, 병조 판서가 되다. ○ 6월, 판의금부사를 겸하다. ○ 12월, 北漢山城의 築城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다.
숙종 38 1712 임진 康熙 51 59 봄, 庭試에 예문 제학으로서 參試하다. ○ 대사간 李宜顯이 出題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 主試官 홍문 제학 李墪과 함께 논척받자, 상소하여 진변하다. 결국 파직되다. ○ 곧 형조 판서가 되다.
숙종 39 1713 계사 康熙 52 60 1월, 우참찬이 되다. 이후 병조 판서, 예문 제학, 좌참찬, 판의금부사가 되다.
숙종 41 1715 을미 康熙 54 62 1월, 京畿 觀察使가 되다. ○ 11월, 凶人의 卦書에 이름이 들어 出城하다.
숙종 42 1716 병신 康熙 55 63 우빈객, 내국 제조, 형조 판서, 좌우 참찬, 이조 판서가 되다. ○ 7월, 藥院의 일과 都政을 마치지 못한 일로 파직되다. ○ 8월, 江華 留守가 되다.
숙종 43 1717 정유 康熙 56 64 10월, 병조 판서가 되어 판의금, 지춘추를 겸하다.
숙종 44 1718 무술 康熙 57 65 6월, 판윤이 되다. ○ 8월, 예조 판서가 되다. ○ 同月, 모친 李夫人의 喪을 당하다.
숙종 46 1720 경자 康熙 59 67 경종 즉위 후 11월에 병조 판서가 되다. ○ 이후 홍문 제학, 지춘추, 판의금, 승문원 제조가 되다.
경종 1 1721 신축 康熙 60 68 7월, 이조 판서가 되다. ○ 장령 朴致遠의 논핵을 받고 사직하다. ○ 8월, 建儲를 의논하기 위한 牌招에 나아가지 않은 일로 파직되다. 出城하여 東郊別墅에 우거하다. ○ 좌참찬이 되다. ○ 10월, 왕세제 聽政 소식을 듣고 밤 三更에 請對하여 불가함을 역설해서 왕명을 환수시키다. 이 일로 사헌부와 우의정 李健命 등의 疏斥을 받다. ○ 12월, 병조 판서가 되었다가 곧 우의정이 되다. ○ 逆宦 朴尙儉의 變이 일어나자 嚴鞫을 청하다.
경종 2 1722 임인 康熙 61 69 1월, 私親 追崇의 도리로 張禧嬪에게 稱號를 내리고 祠宇를 세워 제사지내도록 청하다. 이 일로 鄭亨益의 疏斥을 받다. ○ 3월, 獄事에 參鞫하다. 죄인 白望이 誣告함에 金吾門 밖에서 待命하다. 敦召를 받고 들어오다. ○ 4월, 부사직 申銋의 疏斥을 받고 물러나 상차하다. ○ 다시 나가 時事, 參鞫하다. ○ 金春澤의 동생 金雲澤의 停刑을 청하고, 張希載 어미의 諺札을 獄事로 만들지 말도록 하다. ○ 李頤命, 金昌集의 사형을 반대하고 참작하여 처분하기를 청하다. 趙泰采의 按律도 반대하고, 趙聖復을 伸救하여 위리안치에 그치도록 청하다. ○ 11월, 지평 具命奎 등이 獄事를 느슨하게 처리한다고 논핵하자, 出城하여 사직하다. 敦諭를 받고 入城하여 재차 鞫問에 참여하다.
경종 3 1723 계묘 雍正 1 70 9월, 좌의정이 되다. ○ 耆社에 들다. ○ 嚴敎를 받고 出城하여 待罪하였다가 敦諭를 받고 入城하다.
경종 4 1724 갑진 雍正 2 71 2월 24일, 皇華坊 聚賢洞 집에서 졸하다. ○ 官爵이 追奪되다. ○ 楊州 上道面 先塋에 장사 지내다.
영조 3 1727 정미 雍正 5 - 7월, 復官되다. ○ 10월, 趙泰億의 주청으로 賜祭하다.
영조 22 1746 병인 乾隆 11 - 9월, 관작이 추탈되다.
영조 28 1752 임신 乾隆 17 - 11월, 복관되다.
영조 31 1755 을해 乾隆 20 - 3월, 관작이 추탈되다.
영조 48 1772 임진 乾隆 37 - 11월, 복관되다.
영조 52 1776 병신 乾隆 41 - 정조 즉위 후 4월에 관작이 추탈되다.

기사전거 : 行狀,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자신의 시문을 잘 收錄해 놓지 않는 편이었지만 노년에 들어서 그 전에 지어 놓았던 몇 개의 詩帖들을 정리하고 跋文을 지어 남기기도 하였다. 본집 권12에 실린 〈壽席詩帖跋〉, 〈丙寅唱酬詩帖跋〉, 〈贐行詩帖跋〉, 〈仙樓酬唱詩跋〉이 모두 그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다른 시문들을 정리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遺命으로 文集을 간행하지 말도록 하였다. 게다가 저자 死後에 辛壬士禍의 원흉이라 하여 官爵의 追奪과 復官이 거듭되는 등 高宗代까지도 역적 죄인으로 취급되면서 자손이 零落함에 따라 문집은 끝내 간행되지 못하였다.
현재 寫本만이 전하고 있는데, 규장각(古3428-121)과 국사편찬위원회(D3B-235)에 각기 소장되어 있고 편차나 내용은 동일하다.
모두 原集 13권, 紀實 합 6책으로 되어 있는데, 詩는 七言과 五言을 구분하여 詩體別로 분류하고 기타 疏箚, 啓辭, 雜著 등의 文을 文體別로 분류하여 모아 놓았다. 이는 저자 사후에 아들 崔昌億 혹은 손자 崔守仁, 崔守溫, 崔守元 등이 家藏 草稿를 바탕으로 시문을 수집, 편차하여 두었던 것인 듯하다. 다만 書簡이 실리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의 정치적 여건 등과 관련하여 제외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 附記되어 있는 紀實 즉 行狀은 저자 死後 55년이 지난 1779년(정조 3)경에 손자들이 편찬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행장이 지어진 시기를 즈음하여 원집과 기실을 함께 엮어 정고본을 만들어 놓았을 듯하다. 그러나 간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의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은 1932년에 朝鮮總督府 朝鮮史編修會에서 李大榮씨의 소장 필사본을 수집하여 1933년에 謄寫, 校正, 檢閱한 것이다. 朝鮮史編修會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朝鮮史」의 편찬을 위해 만들어진 기구로서, 각 지방의 史料를 찾아 借入하는 과정에서 귀중자료에 한하여 複本을 작성해 놓는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李大榮氏는 少論 계열인 慶州李氏 李宗城의 族5代孫이자 李裕元의 族姪인데, 소론 계열 문집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본집도 간행본이 없어 그가 소장하고 있던 寫本이 귀중본으로 판명되어 複本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李宗城의 문집 「梧川集」도 1937년에 조선사편수회에서 등사한 본이 국사편찬위원회(D3B-312)에 남아 있으니, 같은 경로로 만들어진 것이다.
禮, 樂, 射, 御, 書, 數 6冊으로 나뉘어 실린 謄寫記에 의하면, 謄寫는 洪承綸, 任稷淳, 吳禧善 등 6인이 1933년 1월~4월에 하고, 校正은 澁江桂藏, 洪承綸 2인이 6월~7월에 하고, 檢閱은 中村榮孝가 7월 11일에 한 것으로 되어 있다. 朝鮮史編修會에서 1938년에 만든 「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를 보면, 日人인 中村榮孝는 1927년부터 1937년까지 修史官으로 활동하였고 澁江桂藏과 함께 圖書部와 整備部의 사무를 담당하였으니, 이 본이 만들어진 시기와 들어맞는다. 결국 「朝鮮史」의 편찬을 위한 사료 수집의 일환으로 이 본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규장각장본은 校正을 거치지 않은 필사본으로 誤字나 脫字 등이 그대로 있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과 비교하였을 때 더 정확한 정보를 주는 부분도 있다. 권11 持平時 〈引避啓辭〉의 小註에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에는 ‘丙寅 8월 18일’이라고 되어 있고 규장각장본에는 ‘丙寅 10월 초8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肅宗實錄」과 行狀을 참고하면 규장각장본의 기록이 맞는다. 따라서 좀 더 명확한 사실에 접근하려면 이와 같은 비교 검토는 필수적인 작업이라 하겠다. 이 규장각장본에는 1934년에 謄寫하여 所藏한 것이라는 규장각의 謄寫記가 붙어 있으니, 朝鮮史編修會에서 등사한 뒤에 바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왜 두 기관에서 따로 중복하여 등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니, 당시 규장각 내의 도서 정리 사업과 관련하여 좀 더 구체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본서의 저본은 1933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등사한 사본으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이다.

기사전거 : 謄寫記, 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시인사 刊), 梧川集謄寫記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原集 13권, 紀實 합 6책이다. 序跋은 없다. 맨 앞에 總目이 있고, 권별 목록은 없다.
권1~5는 詩이다. 권1은 칠언절구(46題), 칠언배율(2), 권2~4는 칠언율시(553), 권5는 오언(83)으로 詩體別 분류가 되어 있고, 각기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自註와 編者註가 다수 달려 있어 시의 이해를 돕고 있으며, 缺句가 있는 시가 많다. 1683년의 太白山 奉化史閣行, 1686년의 關西 御史, 1690년 이후 陽川, 高陽, 沃川의 수령, 1701년 이후의 慶尙道, 平安道, 京畿 觀察使, 1716년의 江華 留守 때 지은 서경시나 서정시가 주로 실려 있다. 그 외에 挽詩가 210여 제나 되는데 呂聖齊, 沈樞, 朴泰萬, 尹敬敎, 吳道一, 尹趾善, 宋奎濂, 羅良佐, 任守幹 등에 대한 것이다. 次韻詩도 다수 실렸는데, 伯兄 崔錫晉, 仲兄 崔錫鼎, 조카 崔昌大, 金壽恒, 吳道一, 南龍翼, 徐宗泰, 여러 上人 등과 나눈 시가 많다. 기타 다수의 贈別詩, 送詩가 실려 있다.
권6~10은 疏(134)이다. 1682년의 待敎 辭職疏부터 1721년 왕세제의 청정을 반대하는 뜻을 담은 〈陳所懷疏〉까지 연대순으로 실려 있고, 맨 뒤에 1717년 尹宣擧의 官爵 追奪을 취소하도록 청하는 〈擬上疏〉가 있다. 辭職疏가 대부분이고, 陳情疏와 陳所懷疏가 다수이다. 1684년 朴泰輔와 吳道一을 伸救한 상소, 1687년 羅良佐를 신구한 상소, 1710년 邊虞로 인하여 所懷를 진달한 상소, 1711년 北漢山城 築城을 반대한 상소, 1712년 이후 科獄의 일로 대죄, 사직한 상소 등이 있다.
권11은 啓辭(18)이다. 1684년 金煥의 鞫問을 청한 계사부터 1721년 10월 請對하여 왕세제의 청정을 환수하도록 청한 계사까지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1686년 李尙眞 등의 疏斥을 받고 避嫌하는 계사 등 〈避嫌啓辭〉가 다수이고, 1700년 冬雷로 修省하도록 청하는 계사 등이 있다.
권12는 序(6), 記(3), 跋(5), 雜著(5), 策問(7), 祭文(4), 上樑文(1), 頒敎文(1), 敎書(5), 不允批答(1), 墓表(2), 墓誌銘(1), 行狀(1)이다. 序는 경상 감사 시절 만들어 올린 嶺南輿地圖의 序, 「壺隱集」(洪受疇)의 序 등이다. 記는 강화 塹城壇, 옥천 喚仙樓 등의 기문이고, 跋은 壽席詩帖, 丙寅唱酬詩帖, 贐行詩帖, 仙樓酬唱詩 등 자신의 詩帖에 지은 글이다. 雜著는 청 나라 朱鶴齡이 지은 〈玉溪集(李商隱)序〉를 보고 지은 글, 洪重聖의 蓬萊錄에 적은 題後 등이다. 策問은 立, 策士, 動, 盟約 등을 묻는 試題이다. 祭文은 伯父, 從孫 등에 대한 것, 大報壇에 대한 親祭祭文이 실려 있다. 敎書는 강화 유수 尹趾完 등에게 내린 것이다. 기타 7대조 崔孝恭, 부친 崔後遠에 대한 묘표, 柳尙運에 대한 묘지명, 생부 崔後亮에 대한 행장이 있다.
권13은 諡狀(3)이다. 巡邊使 李鎰, 西溪 朴世堂, 叔父 崔後尙의 장인 李澥에 대한 것이다.
紀實은 行狀이다. 내용으로 보아 1779년경에 孫子가 지은 것으로 보인다. 맨 뒤에 遺事의 성격을 가진 두 조항의 逸話가 附記되어 있다.

필자 : 金炅希
 
 

 

 

 
損窩先生紀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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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行狀[崔昌億] a_169_595a
 


先府君姓崔氏。諱錫恒。字汝久。羅代之始。有六部大人佐之。崔其一也。後世著籍于完山。以高麗上將軍諱純爵。爲始祖。六世而至諱得枰。以選部典書致仕。生諱宰。重大匡完山君諡文貞。父子皆以廉直孝謹稱。有傳於麗史。生諱有慶。事我太祖。官參贊議政府事。諡平度。生諱士康。事世宗。官右贊成兼判吏曹。金宗瑞之開六鎭。實長兵部。參謀畫。諡敬節。寔公之九世祖也。高祖諱秀俊。累贈左贊成。曾祖諱起169_595b 南。登第有重名。歷應敎,舍人。卒官永興府使。後以仲子領議政完城府院君文忠公諱鳴吉貴。累贈領議政。完興府院君。祖吏曹參判諱惠吉。文忠公弟也。始文忠公無子。取參判公次子諱後亮爲後。官漢城左尹。襲封完陵君。卽公之生考也。有高識懿行。妣廣州安氏。觀察使獻徵之女。完陵公弟諱後遠。參判公季子也。文學名一時。累擧不中。官內侍敎官。無嗣。又取完陵公季子子之。卽公也。所後妣驪州李氏。郡守以省女。及公貴。累贈敎官公領議政。妣李氏封貞敬夫人。祖參判公左贊成。祖妣咸平李氏。順興安氏。169_595c 俱贈貞敬夫人。完陵公有三子。仲子諱錫鼎。爲領相。而亦出繼。國法。不得贈所生之親。公於是疏言臣兄弟幸蒙聖恩。俱升台鼎。而以皆出繼。封贈之典。獨不及於生親。望乞特恩。以伸人子報本之情。上特允之。於是又贈完陵公領議政。妣安氏貞敬夫人。始文忠公。爲完陵公擇婦。甞乘軒過。路中見一婢負處子行。年可十餘歲。以衣蔽面而風忽開。公瞥見而驚異之。遂跡其後。至一家。則僻巷席門。陋屋數間而已。問之則乃安司藝宅。盖觀察公時爲司藝。文忠公卽入見。定婚而歸。喜謂家人曰。吾今日得賢婦。當169_595d 多生貴子。興吾家。其後果生公兄弟云。公以顯宗甲午八月初六日酉時生。淸嬴善病。至十餘歲。猶不授書。而公內弟安公某。與公同年生。才名甚早。連登泮庠。安夫人深歎羨之。完陵公笑曰。彼雖才藝早成。氣象不過一措大。終必不達。吾兒大器也。其後安公年老窮不第。而公果貴。公晩始就學。勤苦刻厲。夜以繼日。常坐於一隅。終不起。至忘溺便。袴爲之腐。於是詞學日進。述作精工。癸丑。丁安夫人憂。制除。益自督課。以早失怙而科不逮親爲恨。親友或有先登第而來訪者。閉戶不與之語。讀書不輟。己未。中進士。完陵169_596a 公時守淸風。公省覲舟行。有詩曰。琴書行李隨緣客。雲水生涯得意鷗。文貞公見之歎曰。音韵流暢。意象無滯礙。眞達者之詩也。庚申。遂擢別試。隷承文院。壬戌。薦史局爲檢閱。例陞待敎,奉敎。移注書。復還奉敎。癸亥。陞典籍。甲子。移兵曹佐郞。遷正言。時自庚申以後。西人進用。而一隊名流。頗與宰輔。言議歧異。臺諫請鞫金煥誘脅翊戴誣告之罪。公又繼論。而朴公泰輔,吳公道一。執之愈峻。其黨大惡之。二臣皆被譴逐。公因求言應旨。疏陳數百言曰。朝廷者。四方之根本。士論者。國家之元氣也。未有士論携貳而朝著協和。169_596b 朝著不和而四方乂安者。今日士論。初豈有携貳之端。惟其論事之際。不欲苟同。自是淸朝之美事。而論議或異。則好惡生焉。好惡生而譴罰隨之。雖以一家之內。尙不能事事如意。况朝廷之上。人各異見。何可責其必同。設或苟同。不過爲衛國之大夫。何益於國事乎。今臺閣被譴之臣。要皆一代淸名之士。徒以言議之畧有異同。而遂成疑阻。一時並逐。如此而欲望士論之協和。朝著之寧靖。不已左乎。且引仁祖朝先祖文忠公箚救數三名流之斥黜。而極陳前後輩疑阻標榜之患。因其箚語。反覆論說。極其明切。上169_596c 皆嘉納。丙寅。有關西按廉之命。西路闊遠而山川峻狹。往來有人跡所不到處。自前繡衣。皆從大路而行。公盡心殫力。不避艱險。深山窮谷。無遠不到。常夜獨行。遇獵夫幾殆。公居家素脆弱。不堪勞苦。而遇國事。勇往不顧如此。十月始歸。未復命。拜持平。公曾在諫院。與同僚論吏判李翊。大臣至是非斥之。公疏辨。判府事李公尙眞入侍。有閔煕,洪宇遠酌處之言。講臣以兩司之不論劾爲斥。副校理金萬吉。又疏斥以救護欺蔽。公復拜正言。疏言一蔡確。而邢恕言之。則心在黨附。范純仁論之。則意非私護。丁卯。羅良佐仍宋169_596d 相時烈之疏。爲其師美村尹公宣擧。卞其寃。上疏被罪。公因辭職。疏陳尹宋兩家相失本末。及良佐譴罪過重。且曰。良佐之未陳疏也。大臣以勿捧爲請。欲爲鎭靖之計。及其呈疏。退却。旋又請對。遂有還入之命。至使搜覔閭閻之間。加之流竄之罪。豈有如許國體。如許事理耶。且此事雖是士林間一不幸。自朝廷觀之。不翅微事。元非關係國家。則置之可也。而遽加震怒。若治大戾。臣窃惜此處分也。若以語犯儒賢加罪。則宣擧亦一代之儒宗。頃年李景華輩極口醜詆。而未聞加以侮賢之罪。獨於良佐爲師訟寃未徹之疏。169_597a 繩以重律。尙何望鎭人心而弭國言乎。其後連拜持平。兼東學敎授。兼校書校理。己巳正月。始薦入玉堂。拜副修撰。庚午。爲養出爲陽川縣令。辛未。復爲高陽郡守。淸簡爲治。吏民愛戴。立碑以頌其蹟。癸酉冬。遭生先考完陵公憂。乙亥服闋。除輔德,副修撰,舍人。旋擢同副承旨。例轉至左副。其年冬。復求爲沃川郡守。己卯二月。入爲右副承旨。拜大司諫。公疏言臣兄方在政府。而臣又忝言議之地。其牽碍難便之端。不但爲一時盛滿之惧。乞亟改正。以安私分。上不許。於是請罷宮莊。時安州有樓盈筒。爲明禮宮所折受。而169_597b 永柔蘇湖,元堂欝億等三筒。曾屬於訓局及各衙門。本道以立番軍粮之需。啓請移屬。至是。亦爲宮家所占。公反復力爭。以爲宮家折受。本非美制。况在國家勤民之惠。備邊之道。尤不宜折給宮家。累啓蒙允。西民大賴之。六月。復拜刑曹參議。旋移大司諫。因旱應求言之旨。疏陳五事。曰立志。曰誠典學。曰克己私。曰恢聖量。曰和朝論。其克己私。畧曰。粤我宣庙朝後宮之有名號者。殆近十數。而未聞有營置第宅。王子駙馬之家。率皆樸陋淺狹。今殿下旁置數三姬侍。賜與之節。或不免過差。恩數之加。或不能中度。小則169_597c 服用之侈靡。饌品之珍奇。大則區占第宅。價踰千金。營置田莊。多占膏腴。且以近事言之。王子宮差。欲換浦於稷山之地。將掘民田數十里。本道備陳委折。該曹覆啓請停。則判付乃以詳問該宮後稟處爲敎。夫民生安保。國家榮懷。則貴爲王子。何患無田。而未及就傅之年。先占田園。已非敎義養福之道。而不顧生民之愁歎。不信道臣之啓聞。不聽有司之覆奏。只欲問於該宮。該宮亦不過憑問於宮差輩耳。彼特駔儈牟利之徒。操宮家之重。侵剝人民。利歸於身。怨歸於國。豈不痛哉。誠願夬賜明斷。特令停止。其他宮莊之169_597d 干係民隱者。亦望革罷。宮庭之間。躬率以導。以宣昭儉之化。其恢聖量。畧曰。竊覵殿下陽德過亢而有獨運輕視之意。英氣太露而少從容沉靜之味。群臣言動。或不少槪於聖心。則慢罵摧沮。無少假借。申銋之論人。以蹄齧爲事斥之。趙相愚之進言。以無識蔑禮責之。李喜茂稍失周旋於樽俎之間而加之以不敬之目。宋徵殷敷陳所懷而遽下不敢聞之敎。辭氣之間。豈不有傷於包涵之量乎。其和朝論。畧曰。東西標榜。已成百年。一隊士類。又分門戶。因微至著。積小成大。聖明懲創已事。務加鎭定。專務周容。是非不169_598a 明。此亦非破黨之道。欲望殿下澹然虛明。絶去意必之私。穆然端拱。無着偏倚之念。凡諸臣之言涉黨比者。只觀事理之當否而取舍焉。勿以雷霆之威怒而摧壓之。用人則惟其賢且才者而進之。聽言則惟其公且是者而從之。間或不祛舊習。甘心傾軋者。無論彼此。一倂退斥。明示昭旨。顯示好惡。則在庭諸臣。向風欽承。惕然改圖。孰不同歸於平蕩之域哉。上褒以忠愛而嘉納之。舘官金鎭龜。以草記請遞齋任。公疏斥以爲齋中施罰。或不無偏峻之弊。而惟當付之自中公議。本非朝家所與知。設有推上朝廷之事。169_598b 亦當委曲開諭。而未聞有摧折遞改之事。聖批乃以齋任遞改。自朝家指揮。似涉未安。更爲開諭爲敎。而擅自遞改。一任己意。堂堂大學。反爲戚臣所壞弄。庚辰冬。復入銀臺。因冬雷。與同僚陳啓。力言黨論調劑。未得其要而扶抑大偏。晉接之規。漸不如前而庶務益滯。末又論賜與之太廣。工役之漸繁。折受無節而生民日窮。陳灾不給而怨咨盈路。言多剴切。上皆嘉納。冬。拜慶尙監司。嶺南七十餘州。地大物重。素稱難治。而南接島夷。儐接應酬。尤極浩繁。文移簿書。動盈几案。雖以通才敏識素所著稱者。亦多不能裁169_598c 决。皆爲胥吏之所侵蠧。公始至。吏見其身體眇小。容貌瘦弱。咸易之。及見聽斷明審。剖析精當。老吏咸驚服。以爲百年以來所未有也。其於祛宿弊恤民隱。極加意焉。條陳其利害通變。多所狀聞。而刑獄重囚歷年所不能决者。審覈裁斷。區別其輕重而啓之。擧皆明切允當。上覽其狀而稱之曰。崔某文學。雖不及於兄。而其經濟之。才則遠過之諸道狀啓。類多糢糊。而嶺伯所陳。明白切宲。雖重獄疑讞。一見可曉。以此知其有器局也。是時。公兄文貞公。方以經術文章爲首輔。上所倚重。而公以藩任。又受上特達之知。169_598d 眷遇之意。於是益隆而有大用之意矣。公甞以爲圖籍。古有職方之掌。地形險易。道里遠近。取考於此。而公私所藏。擧皆疎畧不備。乃令褊裨之曉解經界者。掌其事。吏卒慣熟道路者。亦皆詢訪。作本道輿圖一通。嶺峽江河疆域程道。詳悉無遺。而戶口田結軍兵船艦之數。亦列於下。爲序投疏以進。壬午八月。以親病陳情。遞拜戶曹參議。旋移大司諫。癸未五月擢拜開城留守。九月。復拜平安監司。本道爲國家西北門戶。處關防之要衝。北邊闊遠。隣接絶塞。而直路當赴燕之路。商賈之所輻輳。物貨殷富。人民繁庶。一道稅169_599a 入。以備邊待客之需。例留本道。而從前莅任者。多出銀錢。貸民以取息。西藩之饒。甲於八路。利孔百出而弊亦不貲。邊郡皆武吏侵漁成習。管餉軍粮。徒有虛簿。戎伍不練。器械朽敗。公以爲官用錢穀。皆有常數。不可牟利以自潤。而猾裨奸胥。因緣乾沒。官物漸至損失而民有徵捧之苦。遂一切禁止。終公在官。不開庫門。營府無事而儲積充羨。公之爲治。以淸簡不擾爲主。而善因事通變。使不知更張而功自就。軍伍整肅。邊氓蘇息。期年之間。一路大治。乙酉瓜滿。拜大司諫。其間又拜右尹,都承旨。丙戌。拜副提學。以文貞公169_599b 在相府。兼帶史舘。法有應避之嫌。三疏辭遞。復拜同義禁,副捴管,大司成。五月拜吏曹參判,藝文提學,瓦署提調,校書提調。以籌司堂上。自丙戌至戊子三年之間。拜吏曹參判者四。大司憲者三。大司成者再。提學者一。副提學者再。其間連拜同經筵,右副賓客,戶禮兵工參判。而居亞銓者㝡久。戊子十一月。特旨授刑曹判書。公疏辭。批旨隆重而稱卿懇。卿懇。非相臣則不輒施。盖異恩也。己丑。復拜吏判。公又辭以臣兄方任元輔。而臣又忝東銓。國匀政柄。萃於一家。天道忌滿。鬼神害盈。私心危懍。已不可言。臣曾忝叨亞銓。169_599c 盖甞引斯義。累煩辭遜。今此天官之任。不比佐貳。豈可徒恃寵靈。不思歛退。乞賜改正。使免傾覆狼狽之患。三疏辭免。辭意懇至。上終不許。而勉諭益勤。批答輒稱卿懇。倚毗之眷。逈出常格。公不得已出肅。時朝論橫潰。黨習日甚。傾軋攻擊。紛然迭起。銓衡之職。尤爲猜疑指目之地。旁伺間窺。必欲斥逐而後已。前後居選部者。若不詭隨以求容。則亦多過激以取怒。公從容和衷。淸愼無私。不以愛憎好惡有所低仰於其間。其所以辨別可否。斟量輕重。隨材甄叙。莫不一循於公道。於是大爲聖明之所委信。而雖一世之169_599d 不悅公者。亦不得訾謷指斥之端。庚寅。拜刑曹判書。兼司僕提調。俄遷兵曹判書。上疏辭遞。復拜刑曹判書,左副賓客。六月。因省墓受由。歸到東郊。拜左參贊。復以病疏遞。旋除判尹。遷戶曹判書。兼濟用,繕工提調,惠廳堂上。未幾。復拜吏曹判書。兼知經筵。仍擢判義禁。上眷益隆。而忌嫉者始衆。文貞公旣屢被人言。而至是攻公者復迭起矣。顧公居官注擬。無可指議。而言者以公兄弟之在朝。或稱氣焰熏灼。或謂勢成威立。虛辭侵詆。無所不至。公雅志不欲處權要。因是屢疏力辭。上每開釋備至而痛斥言者。公不得169_600a 已承命入城。兼右賓客。復乞免。不聽。時北京報至。有海賊東搶之語。朝野惶駭。講備禦之策。上引公卿諸臣詢問。議者或以爲都城可守。北漢可保。或以爲洪福可築。紛然不一。公退而陳疏曰。諸侯有道守在四境。歷觀前史。關防所守。自有定處。如關中之崤函。荊楚之漢水。蜀都之釖閣。東吳之采石。又如我東三國鼎峙之時。各有關隘以禦外寇。高句麗以安市鴨綠爲固。百濟以炭峴白馬爲阻。新羅以竹鳥兩嶺爲重。設關屯兵。以備不虞。未聞敵兵傅都。蒼黃奔避者也。假使邊報果非虛警。此與壬丙已事。情形懸殊。盖169_600b 壬辰之亂。倭酋陰蓄射天之計。以百萬精兵。肆毒於我。丙子之變。彼有覬覦中原之志。而慮我之議其後。以大兵力。威定而歸。其不得據守都城。理勢然也。今之所虞。特一海島嘯聚之類。旣無壤地逼近之虞。又無積怨深怒之事。不過侵犯邊鄙。搶掠財貨。豈有孤軍越海直至都下之慮。莫如致力於沿海邑鎭。修繕城池。加意於津梁關隘。預設守備。殿下正宜穆然端拱。毅然持重。都城便否岩阻保守之論。更勿提起。使腹心凝固。邊圉增重。則衆情有恃。自爾安定。且言水軍多在山郡。收其番布。給代雇立。脫有緩急。將何169_600c 所恃。海邊島嶼。其數頗多。而島中居民。皆以漁採爲業。慣習波濤。善於操舟。宜命各邑各鎭。毋論公私賤。有役無役。就加團束。其田租身役。一倂蠲减。諸宮家各衙門漁箭鹽盆。並許出給以業民。庶可爲有用之兵而得力於緩急矣。此外擾民興怨之政。不可輕議。以爲鎭衆心熄奸弊之地。上皆優批嘉納。正言魚有龜疏論合啓參論人。不爲擬望。而又摭政注數事。多所臚列。盖參文貞公合啓之人。銓曹久已停擬。公入銓。以爲在私義。固不當干預於通塞。而顧身居首席。終有所不安於心。以從公銓叙之意。屢言於佐貳169_600d 及郞僚。遂有數人通擬之事。而諫臣之疏如此。憲府避辭。又謂朝廷一半之人。盡歸枳塞。趍合之類。乃遽冒通。公疏卞其事宲。且言近來搢紳之間。嫌避之路太廣。心常以爲未安。凡係恩怨。多所脫畧。人或以太無分界病之。而畢竟同歸於循私蔑公逞快私憾之科。上答以臺臣疏避一篇。精神專在於吹毛求疵擊去銓地爲敎。銓郞李縡又以新通事侵斥。公之位遇隆重。而睢盱者日益甚矣。公屢疏乞免。而皆蒙優批。至於疏三四上而得遞。辛卯。復拜判尹,刑曹判書,觀象監提調。二月。遷兵曹判書。兼軍器提調,判義禁,169_601a 左賓客。公時在墓下。因前銓曹事力辭。疏三上。上又答以前後詆斥。用意至深。世道至此。寧不慨惋。卿若因此不安。奉身而退。則不但適中其計。將至於位著殆空。寧有是哉。本兵重任。不可許改。卿其須體至意。從速上來爲敎。公又不得已入城供職。西銓掌武選。武士之求仕待補者。以千百計。因緣請託以媒進。敏於攀拊者。輒得官。其或抱材而貧殘無勢者。類多淹滯。公莅政。大革弊習。採輿誦甄材能。叙久勤振沉屈。延進武弁。問其能否與其所知有材器者。切戒以奔競苞苴。每有注擬。莫不允協公議。於是有材勇者169_601b 咸皆砥礪以待求。而干囑之俗。爲之大變。甞聞一武士長身善射。早登武擧。而貧無以求仕。三十年終不得祿。公聞之召見。遂差禁衛軍官。其人驚感。思欲報恩而無由。公甞於堂後鑿沼種蓮。朝退輒賞玩。其人家有恠石一雙。甚巧奇。卽與守奴議。置之沼側。冀公一顧。後十餘日。公偶推牎見之。問所從來。奴以宲對。公怒曰。吾以某有材而沉屈。置之幕下。乃欲以是而媚我耶。卽去其石。招入峻責而黜遣之。其人惶恐泣涕而終身以爲悔恨。此雖軍校微瑣之事。而亦足以知公爲政用人之一端矣。時議築北漢山城。公疏陳169_601c 不便之狀曰。夫山城保守之道。外險內夷。然後敵無攀緣傅近之虞。我有往來接應之便。而此則不然。內外俱險。守堞士卒。勢難周旋。此其不便者一也。山城周遭。半不及於都城。加以丘陵重複。石角槎牙。平地可居處。不及五之一。許多人民。宲無並容之勢。又况北漢當爲駐蹕之所。親兵勍卒。必將盡屬於此城。只以都民控守京城。則力分勢孤。萬無捍禦全安之理。北漢之孤絶。甚於南漢。而外城已破。獨保內城者。古未甞有也。此其不便者二也。使敵盤據都城。因糧於公私餘蓄。則此軍志所謂反客爲主之法。彼若初169_601d 不薄城。據守要害。遮截勤王之師。則我內乏粮餉之可繼。外無援兵之可恃。將何以爲計。此其不便者三也。都城士庶男女。無慮數十萬。多是朝不謀夕財利資生之類。臨急奔逬。坌集孤城。旣無自食之道。又無周給之資。不過旬日。必生變亂。此其不便者四也。且旣築城。爲他日駐駕之所。宮闕不可不建。省府不可不立。倉庫不可不置。寺刹不可不營。量其木石瓦甎。其數不億。當此國儲罄竭民生困悴之日。爲此巨役。已非細憂。矧又不可不廣置資粮。而必待糶糴斂散而後可無陳腐之患。畿邑人民。素多貧薄。而爲南漢169_602a 江都移轉之備。莫不怨苦難支。今又以北漢軍餉分給。則村閭窮窘。已無準捧之勢。石路險峻。又多顚踣之患。未及見敵。吾民先困。此爲必至之形。無窮之害。雖有智者。無以善其後矣。夫以京城咫尺。有此天險。而歷累朝數百年。終不設築者。深謀遠慮。必有所在。今日此擧。臣竊爲國家重之。時庙議已定。卒築城置餉。其後斂散之弊。果如公言。壬辰春庭試。公以藝文提學參試。司諫權疏論試場之濫雜。有試官傔從査問之擧。公與諸試官待命。而大司諫李宜顯又論出題事。至以兩提學接膝相議。非他試官所與聞爲169_602b 言。時弘文提學李墪主文。因承牌還家。欲搆成其罪。而引出題事以成案。故並及於公而侵詆之。公疏卞事狀。以爲入參諸臣。卽以班次俯伏殿上。臣之坐次。居西壁之首。金宇杭,李彦綱。循次而坐。李墪坐於其下。相去頗遠。雖欲接膝。固不可得。而墪搜閱在前冊子。拈示彦綱。彦綱傳示於臣。卽龔遂拜水衡事也。臣以爲易出東作。若以王生拜水衡丞爲題。則似不蒙塵。以此稟議於命官。元無與墪商確酬酢之事。而必欲擠之罔測之地。以爲一刺並中之計。獨不念聖鑑之在上而天日之可畏耶。上優批開釋。而命勿169_602c 待罪。其後臺章持墪益急。以承牌還家之事。墪竟竄配。而諸試官亦罷職。纔經月。卽命收叙。仍差籌司惠局之任。旋拜刑曹判書,司譯提調,藝文提學。移右參贊。公引試事。屢上章力辭。復拜判義禁。時因大臣所啓。有本府罪囚問議大臣別單啓下之敎。公以爲此雖出於省約文書。以便睿覽之意。而王府體例。雖微眚薄過。必請刑推。議處照律。次第擧行。所以重事。面請依前已行之規。循次入啓。上卽從之。公於莅官。務必謹守成規。不欲輕改舊章。而於議讞之際。尤所愼重。俄兼宗簿提調,承文提調,知經筵,內資提調,169_602d 右賓客。乙未。拜京畿監司。丙申。入爲右賓客,內局提調,刑曹判書,左右參贊,吏曹判書。時上候長未寧。威怒有時非常。以藥院事。忽有嚴敎。又以政注間事未畢都政。有特罷之命。出住郊舍。八月。特除江華留守。疏批。諭以藥院下敎悔悟之意。公惶恐入城。肅謝赴任。丁酉。召拜兵曹判書。兼判義禁,知春秋,軍器,典牲提調。未幾。以親病辭職。時大夫人年踰九耋。常有疾患。章屢上辭甚懇切。而上終不許。西銓闕貟。特令次官問議差出。公又辭以佐貳事權。雖不及於長席。均是一曹之官。因下敎。臨政擬望。有何不可。169_603a 而必使就問於在家之微臣。臣心惶悚。已不暇言。揆以國體。恐不當如是。時春宮代理答批。又不許。盖倚毗之篤。禮遇之隆。敻絶百僚。雖黨人熾張。排軋異己。位著之間。殆乎幾空。而獨於公眷顧。終始無替。巧詆極訐而不得售。可見公結知之深。有非群小所能間也。戊戌。連除禮曹判書,判尹,奉常提調。八月。遭內艱。庚子服除。拜兵曹判書。時肅廟賓天。景庙新登極。公以臣子之義。不敢固辭。一疏卽出供職。參都目親政。又拜弘文提學,知春秋,判義禁,承文提調。辛丑移拜吏曹判書。掌令朴致遠劾公以用意無嚴。濁169_603b 亂朝廷。而因擧丙申都政時事。以爲先大王深惡痛斥。特下罷職之命。厥後終不復授以銓衡之任云云。都政罷職。特出於一時之敎。旋卽收叙。畀以江都之任。才及周年。又有西銓之命。前後疏批。開釋備至。柄用如故。中適居憂。不得復授東銓。而黨人爲說至此。亦可謂矯誣之甚矣。玉堂處置。遞差致遠。而獻納徐命均疏斥致遠。答以憂時進言。予用嘉尙。公屢疏乞免。時公兼帶經筵,史局,藥院,弘提。而復差出疆之任。並皆力辭。答以此等風習。予實痛惋。决不可以此引入。中其逐去之計。卿以寬大之量。不必深嫌爲敎。169_603c 是時。元老宿德。幾盡凋喪。而獨公巋然在朝。爲上下之所屬望。黨人所以憚公者。實在於此。其百計搆捏。必欲斥逐而後已。公旣以臺評峻發。固辭不出。而八月。大臣卿宰。齊會賓廳。仍爲入侍。定建儲之策。公又以情勢。不得承牌。臺論果發。以公及禮判宋相琦偃然在家。違牌不進。請罷職。公於是出城。住東郊別墅。臺論旋停。而公又再疏力辭。亦皆優批不許。後因相臣筵奏。得遞。旋除左參贊。入城參冊封賀班。執義趙聖復疏請引接臣僚之際。東宮傍坐參聽。公搆疏論其不可。以闕門已閉。不得上。十月初十日。忽下169_603d 備忘。有聽政之擧。日暮。公始聞之。卽詣闕請對。時已三更。諸臣數人隨至。上命留門引見。公進曰。臣伏見備忘記。不勝驚惶。雖已夜深。敢此請對矣。自古帝王家。或有如許處分。皆由於人主春秋遅暮。或在位日久。勞편001成疾。積年沈痼。不得已而爲之。今我殿下。以春秋則纔過三十。以在位則未滿一年。以疾病則臣待罪藥院問安。批答每以無事爲敎。若請入診則以別無大段疾患。或以時無形顯之症爲答。所謂不安之節。不過痰火引飮小便頻數而已。此豈沈痼之篤疾乎。無此三事。而卽位之元年。猝下此169_604a 敎。先大王付托之意。果安在哉。况我春宮邸下。引接宮僚。至於涕泣。冊禮纔過一旬。乃有此擧。春宮情理。安得不如此乎。且言趙聖復疏。以傍坐參聽。講確可否爲言。微末臺官。何敢發此言乎。宜施屛裔之典。聖復疏批纔下而有此備忘。莫重莫大之事。因幺麽一人之言。猝然輕擧而不以爲難。今日國事。更無可恃矣。曾在先朝乙酉冬。有傳禪之敎。其時公卿百官。伏閤苦爭。臣以大諫入侍爭執。終至回天。先大王聽納之美。至今頌之。聽政與傳禪。雖曰有間。玆豈非殿下之所當法乎。今若快回成命。則上可169_604b 以慰先王在天之靈。中可以安春宮崩迫之情。下可以解臣民抑欝之心矣。反復數百言。懇惻開陳。上敎曰。重臣之言。若是縷縷。依允。公卽起收涕曰。今承此敎。不覺感泣。死無所恨矣。退出。夜已四更四点矣。公沒後。吳光運挽公之詩。有曰。辛丑邦家隻手支。四更三点淚垂垂。乾坤震蕩排閽急。星月昭森下殿遅。時以爲實錄云。聽政還收之後。凶黨益忿恚。憲府發啓。請罪當該承旨曰。備忘之下。所當急報大臣諸宰。齊會力爭。而不此之爲。乃反受人指揮。深夜啓請。續續請對。及至大臣來到。終不啓請留門。致令彷徨169_604c 路歧云。盖彼輩聞公請對。乃始來詣。則備忘已爲還收。無可請對。而巧餙爲說。如見肺肝。其無嚴如此。右議政李健命又上箚云。朝廷體貌。至嚴且重。雖是急遽之中。不宜放忽。一重臣深夜請對。有異常䂓。而政院之遽然啓請。未免率爾。今其所言。出於匡救處分。終歸至當。而後弊所關。不可置之。當該承宣。宜加警責。持平李瑜,正言愼無逸。又陳所懷。以謂乘諸臣之未到。潛俟挺出。忙急登對。逆杜諸人力爭之路。要衒自家獨辦之跡。掌令朴致遠又發啓請削黜。以謂傳禪與代理。截然有異。而輒以今日代理之命。指爲乙169_604d 酉傳禪之事。以爲公罪。公之奏對說話。明白可巧。而搆捏抑勒。爲此不成說之語。盖備忘還收。旣不可以爲罪。則或以深夜求對爲斥。或以不少遅待爲詆。終至於以代理爲傳禪爲罪。始則請罷承宣。末又請削公職。黃海監司李㙫疏言前參贊崔某。獨先入對。果何罪也。所欲言者。何等大事。身旣到闕。唯當卽時呼籲。以冀反汗。沁沁墨墨。遅待它人。夫豈分義之所宜乎。苟有若是者。誠可誅責也。今反以不如是爲罪。此非常情之所可度也。無論先後。但得回天。斯爲至幸。獨辦與共辦。其暇論乎。至謂備忘未下之前。先到闕169_605a 下。雖三尺童子。其謂信之乎。十二月。兵判李晩成。特旨改差。而授公兵判。公時在郊舍。下諭敦召。以縣道上章辭職。溫批催促。未數日。命卜相。艮齋崔公及公。一時升拜左右相。公方陳疏力辭。而猝有逆䆠尙儉之變。東宮引接宮僚。至欲辭位。而大妣殿諺敎。下于賓廳。公聞之震驚。卽入城肅謝。因與大臣諸臣。請對入侍。極陳東宮慰安之道。臚列䆠寺惎間之罪。言甚懇切。上卽命宮人及兩䆠出付有司正法。公又陳箚。請先嚴鞫得情。明正典刑。上批以宮人罪狀。旣有慈聖諺敎批下之事。兩䆠罪狀。東宮169_605b 引接宮僚時所言之事。予亦洞知。更無可問之事。依傳敎擧行。於是老黨乘隙而起。以不請鞫而徑先正法爲咎。譁然攻斥。語多危怕。公上箚自引。上又答曰。今番處分。予心所爲。於卿小無所失。卿其安心勿辭。甞因入侍筵臣有發私親追報之論。下詢大臣。公對以在殿下情理。不可無追報之道。臣意則別立祠宇。祭享之需。令該司封進。立稱號以重事體。恐合情禮。更議於諸大臣。處之宜矣。司果鄭亨益上疏。指斥以三年無改繼志述事爲言。公箚卞曰。先儒之言曰。天下豈有無母之人乎。又曰。子之於母。初無絶169_605c 道。宗廟之中。不以恩掩義。閨門之內。不以義勝恩。以此觀之。生則致奉養之節。死則盡追報之誠。此固天理人情所不容已。自古人君遭變處義之道。必如是而後恩義兩盡。情禮無歉。若如亨益之言。則必使聖上絶所生之恩。然後方可快於心。天下寧有是理。生而養。必有宮室。死而祭。豈闕祠屋。旣當有祠屋。仍舊則可。新建則不可云者。又何說也。所謂立號。不過別立題主之名號而已。至若先朝處分。初未甞萌心於改易。此於三年無改繼志述事之義。有何毫分相妨也。臣謹稽璿源譜略。王子名下。禧嬪出三字。此169_605d 必當時監董之臣。仰稟於先王而刊行。頒賜臣僚。人無不見。而亨益未甞一言及此。乃於殿下嗣服之後。建號立祠。情理之所必行。而了不關涉於先朝處分之事。獨以違先志改處分。勒成罪案。使廷臣不敢開口。聖上不得措手。是誠何心哉。壬寅三月。逆獄大起。公與首相參鞠。方按問之際。罪人白望欲沮敗獄事。忽以危言引獄官。侵及於按獄大臣。公與僚相。卽出待命於金吾門外。上遣史官。諭以勿待命而安心參鞠。復陳箚子。仰暴危懇。上答以凶人侵攻之言。不足深嫌。安心勿辭。速出參鞠爲敎。而復169_606a 遣史官敦召。公不得已趍詣賓廳請對。欲陳其委折。行司直申銋急投一疏。深攻按獄之失。至謂名入賊招。不爲請拿。移鞠本府。又異常規。又曰。按獄大臣。又爲待命。其亦緊出於罪人之招。槩可知矣。一番卞正虛實。在所不已。盖銋以八十老臣。受嗾而爲此疏。其指與白望一套。公未及登對。自閤門逬退上箚。卞其事狀。且言臣受兩朝不世之恩遇。致位至此。區區寸丹。天日下燭。幺麽逆竪死中求生之言。豈足以白地誣汚。而重臣乃云虛實可以對卞而知。痛寃之極。直欲無生。上答批開釋史官。敦召不置。公念國家169_606b 多事。鞠獄嚴急。不可以情勢前却。復出視事參鞠。獄旣不懾於凶鋒之危怖而有所回避。又不撓於時議之峻激而有所浮動。從容審察。議讞允當。承欵伏法之外。其餘干連證參之類。必皆務從平恕。依法裁斷。使無連及寃濫之患。前後酌處數十人。臺啓隨發。輒復還收。或陳箚論列。或登筵稟達。非止一再。金有慶名出賊招。至於就拿。而分揀放釋。洪錫輔屢經刑訊。久因牢獄。而指導生路。啓達箚陳。竟得免死。李晩成,洪啓廸等。亦皆申救酌處。臺啓以李晩成島配爲不可。仍論訓局禁營內遷與出外之爲可疑。又言易置169_606c 之擧。出於昌集。而就章又狼籍承欵。又以有一名官於三司會坐之中。傳洪致中與晩成問答之語。請以此兩欵。添入問目。嚴鞫得情。諭啓蒙允。公箚陳罪人鞫問。必以告者之言。或以他囚所供。或拈出渠之供辭中違端。發爲問目。自是流來之䂓。今若以外人私相酬酢。添入問目。則不但古無其例。且啓日後無窮之弊。臣意宰臣問答一欵。勿入於問目中。恐合按獄之軆。上允之。又請金雲澤停刑箚曰。鞫獄按治之道。自有次第。必須詞證具備。線絡分明。然後方始請刑。此乃自前通行之例也。行藥之說。出於盛節之招。169_606d 而崇祚,仁佐,義賓,德峻等。皆以灰金腹心。無不詳知云。故屢次嚴刑。相繼杖斃。而無言及於雲澤之事。階梯已絶。更無盤詰之處。只以春澤之弟慣習惡逆之謀。徑加刑訊。則雖快於一時之輿情。不但有欠於按獄之軆。亦將啓日後無窮之弊。至於趙洽云云之說。事關先朝。非今日臣子之所敢發問於罪人者。故獨對之說。屢出於諸賊之招。而臣與參鞫諸臣相議。初不提論於議啓中矣。以此添入於問目云者。非臣始慮之所及也。上答以金雲澤請刑。誠得臺軆爲敎。至於鞫招所出外影諸人。其數甚多。公慮其蔓延。169_607a 終不請拿。喜之母諺札。陰謀昭著。而不欲以諺札成獄。力主不問之議。金一觀承服時。以推戴人之三變其名。稱兵日子之相左。不爲載錄於議啓中。器之,龍澤。請勿追戮。麟重請勿孥籍。又皆考法例。慮後弊無所低仰。公之一遵三尺。按獄公正。盖如此。李頤命,金昌集。臺啓峻發。請正邦刑。是時。兩人子姪。多已承欵伏法。而聯箚之語。又屢出於爰辭。時議益嚴。公以爲聯箚節目。罪固罔赦。而以此深論。終有投鼠忌器之嫌。故議罪之際。多從寬平。初奏以不待按問。徑先處斷。有違法例。請拿鞫後正法。而繼又上箚。言厥罪昭169_607b 著。旣無可生之道。而曾經三事之人。施以栲掠之刑。終有所不忍。况曾前後命。多及於中道。遵先朝已行之例。取盤水加釖之義。參酌處分。似或得宜。上答曰。箚辭儘好。勿施栲掠之刑。因政院啓稟。有加釖之命。公又上箚言。加釖二字。本意不過泛引古義而已。若遵先朝已行之例云者。盖指賜藥之意也。上又答曰。箚辭得宜。依施。於是群議喧譁。謂公緩於討逆。臺閣交口侵斥。公與僚相。方坐鞫廳。又逬出引罪。上箚乞免。上答曰。臺言侵斥。何足爲嫌。卿其安心勿辭。三司發趙泰采按律之論。公屢上箚救之。又169_607c 因獄囚之言。以明其不預陰秘之謀。趙聖復亦以臺啓拿鞫。公以爲此與逆獄有異。渠雖無狀。職是臺官。一向嚴刑。終至殞斃。非聖世之美事。請參酌。絶島圍籬安置。上初允之。而又因臺啓拿來。公又言聖復之罪。俱在原疏。別無鉤得隱情之事。更杖嚴問。恐違鞫廳按問之䂓。還發島棘。恐不失爲聖朝寬大之典。上又允之。其後筵臣陳達。又從臺啓。公又上箚陳論。上答曰。趙聖復訊問。誠甚得宜。到今還收。未知其可也。盖是時三司年少之論。日漸譏激。凡公於獄事議處啓達箚陳。臺閣輒隨而發啓。斥公以緩獄。169_607d 侵詆之章。陳辨之箚。日交公車。而最後持平具命奎之疏。尤極臚列。專事詬辱。有曰臺諫力而拘諸獄。大臣暫而免諸國。末又以獄囚自出爲言。盖受一鏡之嗾而爲此疏云。上答曰。侵斥大臣。略無顧籍。良可異也。公徑出城外。連上疏辭免。答批優渥。承旨史官。相繼敦諭。最後疏批。有曰。噫。今日是何等時耶。歲飢民困。國勢無可恃之形。言念及此。中夜無寐。以卿休休之量。當岌嶪之秋。豈忍袖手恝視如平常乎。須念相須之義。勿復以情勢爲辭。卽速入來。用副至望。因遣承旨。敦諭偕來。公又不得已入城。時筵臣及勳府169_608a 堂上。屢以錄勳事陳達。公引中宗朝告變人盧永孫單勳例爲對。金一鏡尤欲錄獄官之勳。盛言單勳之不成體貌。公於筵中。嚴辭峻斥。以爲渠欲自錄而不避嫌耶。又言若如此。則不如初不錄勳之爲愈。吏曹參議李眞儒請對單付。金東弼爲光州牧使。柳壽垣爲禮安縣監。朴徵賓曾已補外。而以其程道之太遠。移付近邑。時金東弼疏論一鏡敎文之引喩不當。柳壽垣疏斥領相筵奏之失。而又有飭厲右相盡心鞫事等語。方在罷職中。朴徵賓則劾尹公淳而補外。公入侍奏言。補外之䂓。隨其外窠。擬望收點。若非自169_608b 上特命。曾無作窠單付之例。刱出新䂓。果於自用。有欠謹愼之道。曾在癸亥年間。故相臣金錫胄請黜三學士而指窠遠補。公議駭歎。豈意今日以佐貳之官。反效此習。不可無䂓警之道。請遞其本職。以懲其輕銳自用之失。臺啓以犯逆罪人父子兄弟。有職名者追奪。書院者毁撤黜享。公引璿源譜略後本之吳端還書職名。故相朴淳其孽子犯逆之後。無輟享之事爲證。論其不可上皆允從。盖公不爲已甚之論。而援據古例。指陳合宜。皆此類也。公旣積困人言。事不如意。雖黽勉入城。而不欲復當獄事。每於筵對。輒陳169_608c 悃誠。以爲獄囚自出。何等罪名。而豈可以按治之無人。晏然自當。且念臣曾以此罪人等酌處之意。陳箚筵達。皆已蒙允。雖仍臺啓還收。終至參鞫。若臣本意。如前無異。今此餘囚。皆是枝葉大獄之餘。或以一二倖免。似不至失刑。而實爲聖上好生之德。又甞因禁府。設鞫命下。以迷滯之見。終難自回。難安之勢。與前無異力辭。及因春塘入侍。又言臣於前日。累陳意見。凡獄囚按問。自有格例。雖名出賊招之類。一推再推。至於面質。必待情窮理屈而方爲限死加刑。今此罪人等。或楷梯路絶。或情迹難明。一向嚴刑有乖法169_608d 意。上多允從。公之前後所酌處者。雖因臺啓還鞫。而終始爭論。全活甚多。癸卯。升左議政。兼世弟傅,奉常,司甕都提調。公時年七十。又入耆社。上素信公。倚仗甚篤。而一日入侍。忽下嚴敎。人咸恠之。公惶恐逬退。卽出城陳章待罪。上答曰。省疏具悉卿懇。因一時之火。有過當之擧。筵中旣示悔悟之端。以卿休休之量。何足掛懷。卿其安心勿辭。從速入來。以副孤望。其於再疏。又答曰。卿之情勢。雖曰難安。前旨開釋。竭盡無蘊。退處荒村。恝視國事。是何情志。須體至意。斯速入來。勉副孤望。仍遣承旨傳諭偕來。三疏之169_609a 批。又答曰。前席下敎。因一時之火。則以卿休休之量。何足介滯乎。須軆心腹之辭。安心勿辭。幡然造朝。用慰思想之懷。公惶恐不敢苦辭。復入城。前此兩相。皆在外。唯公一人居位。數年之間。獨當勞劇。公年旣耆艾。竭力殄瘁。至是而病已深矣。甲辰正月。患痢疾。已而少間。至二月復劇。引人言上章辭位。上答曰。卿之所患彌留。深用慮念。卿以世祿之臣。倚仗王室。豈可以一時人言。過自引嫌。甘陷辜恩之歸哉。須軆至意。安心勿辭。卽遣御醫診視。內隷問疾。竟於是月二十四日。考終于皇華坊聚賢洞第之正寢。享年七十169_609b 一。訃聞。上震悼。下敎曰。新喪賢德。震悼之懷。曷可云喩。棺板一部。令該署卽爲擇送。禮葬等事。亦卽擧行。祿俸限三年仍給。以表予意。東宮卽於其日。亦擧哀。因召宮僚。諭以師傅之喪。臨吊之意。因稟于大朝。遂於二十七日。乘輿幸臨。將入。下令曰。乘輿至堂前。有欠於待師傅之禮。至中門外降輿。宮臣達以儀注。旣以至堂降輿爲言。且自中門至堂前。其間稍遠。不宜步入。邸下至靈前再拜後。就坐哭畢。令遺孤陞堂。邸下離坐。就執手撫慰曰。先傅歷事兩朝。忠勤已著。爲國元老。眷遇靡替。不意今日遽爾169_609c 喪逝。非但大朝震悼罙深。今予此來。只拜靈筵。不見儀形。追念師傅之義。一倍痛悼矣。又令曰。毁不滅性。聖人所戒。强進粥飮。終始支保。是予所望矣。於是闔門感泣。其非常之數。曠絶之恩。國朝以來所稀有。惟象村,月沙與公爲三人而已。以是年某月某日。禮葬于楊州上道面先塋後麓枕艮之原。公淸羸弱小。體不勝衣。而宇量寬弘。執守貞固。平生不喜皎厲浮華之習。專務精約切實之用。而安靜詳審。識慮深長。顧退然若無能。不事交遊。故人莫有知者。旣登朝。在侍從之列。唯居官盡職。恪謹自守。而未甞與朋169_609d 儕上下追逐。談議臧否。不甚爲名論所推許。及名位漸顯。履歷漸廣。臨民處事。聲績茂著。由是衆望漸服。謂公長於幹局。練於事務。有廊廟之才。而猶未能知公之蘊也。及夫進升台鼎。猝當變故。勤勞獨賢。應酬萬端。而事有妨碍。議多齟齬。公孤立一意。不動聲色。而裁斷鎭定。各得其宜。終能使兩宮乂安。宗社鞏固。先輩有識。始推公忱誠局量。眞可謂社稷之臣矣。顧知之者寡而毁之者衆。卒之身後齮齕五十餘年。躓於世路之險巇。困於黨人之搆陷。使公心事行迹。不得暴著於世。豈不悲哉。公與艮齋崔公少相169_610a 好。推重甚深。及與之同在相位。雖出處各異而議畧同。艮齋甞於辭疏。有曰。臣與右相少同里閈。結髮從遊。今至白首。平生心期。素相諳悉。今右相在朝。盡心國事。如臣已退之蹤。何用復出爲哉。盖以范蜀公自處。而以司馬溫公期公也。贊成鄭公齊斗。亦與公相許。甞論公兄弟。謂文貞公文章德業。近世罕有。而尤稱公忠誠器局。有先祖文忠公遺風云。公居相位。與雲谷李公光佐,謙齋趙公泰億。年輩懸殊。而引與同升。與共國事。兩公常深服公。其於後輩。獨愛白下尹公淳。每與之議可否决是非。尹公亦盡心事之。其後169_610b 梧川李公宗城,靈城朴公文秀。皆慕仰欽服。循襲緖餘。立朝持論。一以爲準。盖公處辛壬之事。周旋於艱難之際。殫竭於危險之途。不計目前之顚沛。不顧日後之禍患。惟知爲聖躬討逆。以扶宗社。爲東宮保護。以安國本。其苦心血誠。有足以質神明而貫金石。若其裁制時輩峻激之論。弭息黨人參夷之禍。精審之慮。欽恤之意。一出於至公無私。又非尋常淺見之所能識也。然方其在位當事。謗讟朋興。侵斥沓至。其疏箚辨陳。殆乎無日無之。而引入乞免。未甞一月安於朝。及其身沒事過之後。黨人之所以搆罪抵169_610c 釁。罔有紀極。雖其攻斥之端各自相反。而公之生前身後。積困於多口。其報國之忠。處事之公。至今掩蔽而不章。丁未初。謙齋趙公於筵席請賜祭曰。臣於故相臣崔某事。窃有所懷。崔某平日公平忠勤。受知肅廟。爲國有誠矣。頃年臨吊。近日復官。俱出異數。羣下孰不感歎。崔某於辛丑冬。拜相職纔數日。夜聞逆儉之變。驚惶罔措。不顧廉隅。片時出肅。請對極陳。卽此而其忠誠可見。至於鞫獄。事體自別。固難容議。而外影諸人。慮其蔓延。終不請拿。臺諫欲論啓。則力挽而止。此外不爲請拿者亦多。喜之母諺札。不爲成169_610d 獄。一觀招辭。不爲載錄。觀此數事。亦可知其用心。向日合啓勒捧賊招云者。宲宲是欺天也。乕龍處置之失着。實如前日宋寅明之所達賊招勿書。與柳孝立獄事。獄官不書干犯之語。同一苦心。一毫非出於欲置闇。此則可證天日矣。頃日聖上以局量爲敎。而崔某自少以身小量大稱之。小臣所見。則局量不如古人。故當事不能周思運轉。以致失着者有之。而至其爲國苦心。向殿下保護之至誠。實爲可質神明。上卽允之。趙相文命。主蕩平之論。多毁短諸公而獨稱公。公忠善處事。欲一陳白於筵中而未果。庚169_611a 申焚案之時。宋相寅明奏曰。當時大臣。若有一毫査滓。殿下豈得有今日。上首肯曰。予已知之。丙寅追奪時。金有慶聞之愕然曰。崔相有何罪。而又爲追奪乎。乙亥追奪時。李台重又謂人曰。吾輩之所謂懲討。不過一時偏論。豈眞以爲有罪乎。今於數十年之後。又有此擧。亦太甚矣。盖雖在岐論之人。異色之類。亦時有公心之未泯者。其言如此。而一邊報復之計。詆誣之說。已成膠固。氣勢所驅。擧世靡然。後出之輩。不復考其本末。隨聲逐影。動輒以隄防爲言。謂公當時之事。眞若可以爲罪者。豈不慟哉。惟我先大王169_611b 日月之明。洞悉忠欵。眷遇特隆。臨吊之擧。已爲不世之聖恩。而登極之後。筵敎備忘。多稱道褒嘉之語。甞敎以故相身雖小而量則大。又曰。晏嬰身雖小。爲齊名相。前後絲綸。不可悉記。顧微賤之蹤。無由祥聞而備錄。以爲傳家之榮。雖因朝局變換。黨燄熾盛。屢有追削之典。而旋復復官。爵秩如故。丁未賜祭之時。下敎曰。向來合啓。架虛鑿空。情外事。吾豈不知。崔相事。常用慨然。素多局量。吾知其不爲年少臺官所廹。黃覇相業。損於治郡時。似是氣衰而然。晏嬰身雖小。爲古賢輔。如彼之人。末稍如此。心常慨然。吾之致吊169_611c 時。招致崔昌億而慰諭矣。追奪後判若待二人。每恐人謂不誠信。然今番處分。非一時換局。欲使後人知其事也。壬申復官時。備忘有曰。至於崔某同時處分。意亦在焉。拜相後處義。非予初料故也。而辛壬事。黨人之與泰耈同搆。旣與其時爲相。故無一遺。而此乃報復之義也。頃年當其末梢。與泰耈大有間焉。同時診筵。已知其心。春塘帳殿。亦有見者。于今爲此人與泰耈同爲復職。一邊必不服。以泰耈之故。此人亦不復職。一邊亦必不服。然彼此不服。有何拘乎。但以予之絃韋處之。故相崔某。特復其官。戊子。又書復官。傳169_611d 旨筵中。有世孫甚明他日必爲之之敎。而廷臣爭執。遂寢不下。及至壬辰。竟伸前命。夬雪幽寃。先大王隆恩厚德。與天無極。九泉之下。必將飮泣而含感。闔門大小。只有攢手頌祝而已。尙何言哉。公性旣恬退。處以簡靜。未甞經營於事務。馳騖於言議。常病文貞公有所作爲。其在西藩。貽書勉戒曰。處身之方。莫如不出。謀國之道。莫如不爲。觀公此言。似若守分占便。無意於斯世者。及其臨大事當大難。徑情直前。懇懇之忠。不能自已。而其所處置。又皆周詳精密。深憂遠識。卓出於衆言眩惑之表。始壬寅獄起。其所干169_612a 連。無非世室巨族公卿宰列之類。而又其憑籍疑亂之辭。極其危怖。人心莫不扼腕齊憤。而一二有知計者。或慮日後之有報復。預爲引避之謀。尹公勸公勿當獄事曰。南人之積怒於彼輩久矣。討逆治獄。必無不盡。公宜辭退勿與。袖手傍觀。徐起而論其得失是非。則置身於穩便之地。而亦可無他日之患。公歎曰。是何言歟。吾受兩朝厚恩。致位至此。國有大獄。乃欲爲便身之圖。避而不當。是豈忠臣事君之道。且時輩麁疎。不顧前後。乘憤逞快。必至於不收拾之域。將置國事於何地耶。尹公於是深服其言。每語不肖兄169_612b 弟曰。大監之賢。非計較利害之說所能動也。乕龍告變之辭。語有犯於不敢言之地。公啓請勿書。李公匡德。因從兄。勸公治其凶言之罪。公答曰。少年何爲不見事而輕易妄論耶。獄事方張。鞫訊嚴急。先治告者。旣甚難處。况欲治凶言之罪。則自知必死。爲死中求生之計。何所不至。宜姑隱忍。以待他日之處置。李公怳然驚服。以爲不可及。時一鏡勢甚張。及敎文凶言事出。公付標請改。尹公又勸公上疏攻其罪。公曰。君言是也。予豈不知。今若攻之。則必多有起而救之者。他日將並與救之者而汚衊。吾不忍爲也。且彼雖有169_612c 氣勢。而名位猶未高。吾在相位。廟薦在手。若不陞擢撿擬。彼勢將自沮。亦不敢肆行臆。故公之在位。遠接伴送使前後陞卿秩者九人。終不一及於末副之擬。一鏡以是深憾。至有製疏嗾劾之擧。尹公亦嘗歎服不已。此事惟二公知之。他人未有知者。其居官也。綜達事務。曉暢物情。所居之職。事皆整理。及在廊廟當國家多事之時。雖日不暇給。而罷經理設廳料販之䂓。禁貢物年條賣買之弊。復受價剋减之數。原還穀逋負之責。凡在斂財興利之事。一皆杜絶。弛以與民。當此之時。新經大喪。勞費浩廣。客使相續。應169_612d 酬繁多。而經用有裕。民生樂業。尤能引大軆守成䂓。不輕改作。而訏謨籌畫之間。其所區處裁决。莫不曲當其宜。皆可以爲法。宋相寅明嘗語人曰。崔相公經濟之材。先輩莫及。至今備局所遵守者。皆其遺法也。其接物也。寬和有容。不責苛細。嘗在嶺營。初至視事。裨校列侍。吏卒滿前。營妓見公體小。在傍目笑之。幕裨怒而請其罪。公笑曰。我自貌寢。其笑固無足恠。何足罪乎。其在關西。甞當食啓器。有大蜈蚣偃於飯上。營中震駭無人色。公顔色不變。徐以箸攝置盤中。進飯如常。人莫測其意。及食畢。命拿食婢以入。問曰。汝169_613a 夫誰也。對曰。官廳吏也。又問汝夫有幾妻。對曰。有二妻。公復命拿其本妻以來。又問曰。汝何敢欲陷食婢而置毒耶。其女卽驚吐實。公卽曰。汝罪當死。今姑貰之。後勿爾。又拿其夫入。命待其二妻如一。於是一營大驚以爲神。公爲判書時。居憂在家。里有禁軍。適送馬遠出。而猝有習陣之令。隣盲崔姓家有馬。嘗借騎。至是。使其奴又往借之。其奴癡。至公家尋問。適日暮人散。公獨坐廳。隅見而問之。知其爲習陣借馬。卽命解廐馬牽去。其人曉乘而赴習陣。及天明。始知其非盲家馬。問其奴大駭。卽馳到公門外。伏地請罪。公召169_613b 入謂之曰。汝與吾隣居有年矣。借馬何足恠乎。且軍法至嚴。若日暮不得馬。以致後期。則汝當死。吾以是借之。衆皆服公之雅量偉度。非人之所能及也。於是人皆傳說。至流聞禁中。先大王甞屢道其事而稱其有局量。公又嘗入侍。脫耳掩置閤門外磚石。先大王時在冲年。戱持去入內。公退出尋不得。肅廟卽使掖隷取給之。先大王每於筵席。歎古宰相簡儉之風。其處身也。簡率儉約。不喜華靡。雖爵位崇顯。祿廩豐腆。而起居飮食。一如布素。田園不增。垣屋不修。家之有無。未嘗問焉。婢僕有往往不識其名者。尤169_613c 不欲以煩弊勞人。寢興之際。不須指使。嘗患痢。一夜數十起。侍者皆深睡。獨起如廁。至於顚踣。有田在湖南之靈光地。與牧場接境。牧子甞與之爭經界。公聞之曰。古人有毁家爲國者。吾今在廊庙之位。豈惜數頃之田而與民爭利耶。並割數十石地以與之。立朝四十餘年。未嘗與人爭競。標榜色目之說。不涉於口。愛憎好惡之私。不滯於胸。其於譏詆抨彈之至。不見有忿厲之色。自引之章。不以辭氣相加。只辨釋事理。明其是非而已。居官盡職。不擇劇易。公退之暇。閉戶讀書。晩節當國。又値鞫獄。按問訊治之勞。文案議啓169_613d 之煩。終日不休。有不堪其劇。而罷歸之後。夷然若無事。輒對案披書。誦讀不倦。不爲文學詞章。而經史百家。用工勤篤。奏箚明暢。辭理俱到。詩亦流麗精緻。文貞公方以文章服一世。而其子副學公有盛名。文學之士。咸趍仰之。公居其間。未嘗矜衒誇詡。而疏章之作。贐挽之篇。往往膾炙人口。文苑之望。世皆推許。再入剡薦。而適値文貞公在首席。竟以次點而不得與焉。公內行淳備。誠孝篤至。早喪安夫人。嘗以不逮養爲慽。事完陵公。左右無違。所後大夫人年踰九旬。公已位高年老。而奉養之節。躬執勞役。衣服飮食。皆169_614a 自劑量。溺溷垢汚。手親洗滌。公退之暇。非接大賓。未甞暫離。手執書帙。咿唔其側。及其遭艱。哭泣哀慕。雖隆寒大暑。不脫縗絰。人皆歎公之老而篤孝。事文貞公極其誠。待姊妹盡其愛。少妹申氏婦。常與公夫人爭分産相詰。公自外來問知。卽割而歸之無難色。徑出外舍。讀書不輟。夫人服公之襟懷夷曠。公雖和易。而居家方嚴。待子弟尤謹禮節。副學公名重而位顯。至有少過。輒呵責不置。文貞公甞戒侍妾曰。下宅大監性嚴。汝切宜恭愼。勿見過。其見憚如此。公甞自號損窩。盖取易損卦之義。居家處事。一以約損爲主。平169_614b 生所著文字。隨手散逸。未甞收錄。遺命勿刊文集。勿竪神道碑。勿請諡。盖公素志然也。夫人靈山辛氏。司甕參奉輔辟之女。判府事啓榮之曾孫。明達剛果。閨門整肅。奉舅姑友娣姒。咸有法則。恪官箴正家道。賙窮睦親。皆有內助焉。宗黨莫不歸仰。擧二男。夭。取伯兄正郞公季子▣▣爲後以蔭仕官至淸州牧使。孫男三人。長守仁氷庫別檢。次守溫,守元。皆生員。女一人。適士人申渘。守仁無子。取守元之子弘敬爲後。女適趙翰逵。早夭。守溫一子弘信。二女。長適李永源。早夭。次適權楘。守元一子弘敬。申氏婦早沒無後。嗚呼。169_614c 先祖之沒。已過五十有五年。日月寢遠。事蹟逾昧。前輩故老。皆已淪沒。家藏文字。亦多散失。大懼先祖之德業事行無可考信。謹摭家庭之所聞見。略加叙次如右。爲子孫之觀焉。
公體貌弱小。而氣像安重。其在開城。北使見之驚服。謂譯人曰。汝國宰相。在開城耳。及爲相。北使至。雲谷李公爲右相。先詣館所。李公狀貌魁偉。矜嚴有威。北使見其至。不爲動。及公至。北使不覺蹶然驚起。其後我使之燕。迎問崔相公平安。道其敬服之意。其見敬慕於異類如此。我使歸傳其語而公已下世矣。
169_614d其他如柳廣裕,沈搢,李瀗,尹慤,柳星樞,李壽民,李德峻,洪聖疇,趙洽等及內人墨世,一業。無不酌處。李健命論罪時。筵奏以封典順成。功可贖罪爲言。徐命伯則筵中陳達。不爲緣坐。其外應行之典。亦不爲之。其後先大王敎以是豈觀於渠乎。固是看予面而然也。王法不可貸。而猶且如此爲敎。

 

 損窩先生遺稿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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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生先考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行嘉善大夫漢城府左尹兼五衛都편001府副편002管襲封完陵君行狀 a_169_56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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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後亮。字漢卿。姓崔氏。自號靜修齋。系出完山。高麗上將軍諱純爵之後也。連世顯聞。至諱宰。麗季名臣也。官藝文提學。完山君。諡文貞。麗史累書之。生諱有慶。入我朝。官至參贊議政府事。諡平度。史稱廉169_564b 直自守。人敬憚之。生諱士康。官至左贊成。諡敬節。高祖諱嶪。用先蔭。官止氷庫別提。贈吏曹判書。曾祖諱秀俊。贈左贊成。祖諱起南。號晩谷少遊牛溪成先生門以文行見重當世。宣廟朝。除王子師傅。晩擢文科。歷應敎舍人。昏朝時。出爲永興府使終焉。贈領議政完興府院君。考諱鳴吉。號遅川。策靖社元勳。官至領議政。封完城府院君。諡文忠公。事業詳諡狀中。妣張氏。玉城府院君諱晩之女。生考諱惠吉。號柳下。官至吏曹參判。柳下公편003九畹李公諱春元之女。以丙辰八月二十日生公。公生三歲失母。鞠于169_564c 外家。九歲。文忠公取而子之。丁卯。張夫人下世。零丁孤苦。備嘗艱楚。而文忠公職宰樞。値國家多難。無意私事。不加敎督。然公明達夙成。文識日進。文忠公倚以爲重。家事悉以委之。一家咸稱爲能子。丙丁亂後。虜人索公卿子爲質。公以質子赴北。在瀋舘凡三年。壬午。文忠公以通信天朝事。爲虜所詰。被幽燕獄。公乘撥馬。三赴瀋陽。凡所以紓難緩禍之圖。靡不用極。得以無他。乙酉。從文忠公東還。丁亥。遭文忠公喪。公自在瀋舘。得忡悸之疾。眼眚兼苦。憂哀之餘。病益甚。絶賓客廢科擧。處靜養痾。先後二十年。辛卯。病稍間。169_564d 中生貟。孝宗甲午。除南別殿參奉。病不仕。後除四山監役。旋遞。年五十後。病漸愈。顯宗丙午。拜翊衛司侍直。叙陞歸厚別提。遷宗簿主簿,工曹佐郞,忠勳都事。庚戌。出爲白川郡守。明年。病遞。今上乙卯。張公善徵。爲司僕提調。辟公爲僉正。未幾。呈病辭遞。後連除珍山,沔川。皆不赴曰。吾老且病。不如在家之安閑。然其微意盖有在也。己未春。又除榮川郡守。人或以不赴二郡爲言者。僶勉赴任。明年遞還。庚申。討逆錄保社勳。公以靖社元勳胄子。參會盟祭。進階通政。辛酉。拜淸風府使。癸亥。投紱而歸。乙丑。公年七169_565a 十。時仲子錫鼎。爲副提學。因大臣進言。有推恩增秩之典。公於是進階嘉善。拜漢城府左尹。兼都捴府副편004管。襲封完陵君。長子錫晉。時爲堤川縣監。邀賓設筵。侈上之賜。南壺谷龍翼。首爲詩以賀。衆賓和之。仍成鉅軸。人以爲榮。公在京兆。數月解遞。自是閒居謝事。穆然淸坐。看書賦詩。種花蒔藥。或對客觀棊以自娛。甞曰。劉靑田論人命。以草澤閑人。居王公之上。吾雖不在草澤。老於太平。作一無事閑人。以終餘年。不亦樂乎。己巳春。時事又大變。削保社勳。公降資爲通政。公自世變以來。不出戶庭。口不及時事。以癸169_565b 酉十二月一日。考終于正寢。享年七十八。甲戌二月。葬于楊州板谷里天磨山下負艮之原。從先兆也。夫人祔焉。至甲戌。又復保社勳。還授公資秩。公已下世。復官致祭如儀。公天性寬厚。風儀端重。莊而不至於厲。和而不流於易。汎愛樂善。臨事周愼。外物接人。一出於誠心。絶無虛僞矯餙之意。人無賢不肖。皆愛慕忻忻焉。然英果有斷。雖在禍難危急之中。神志不亂。丁丑之難。公年二十一。奉母夫人入江都。虜兵犯城之日。晨往府中。觀其動靜。檢察使金慶徵。與副李敏求張燭坐堂上。令偏裨持稱錘稱分火藥。公謂曰。169_565c 賊勢方急。何可較量多少。目今手下有將校數百。盍令急率軍兵。遮截甲津。以少遏其鋒乎。兩人不能用。時賊已入城。士女波沸。多被搶掠。而諸公恇撓失措。不能施一策。公知無可爲。遂退而聚家衆爲圜陣。獨身步往虜軍。辟戟而前曰。吾欲見主將。有所言。虜開陣門迎之。公立主將之前。謂曰。聞李相國,崔尙書二家。有訪問勿害之令。然否。吾是崔尙書之子。誠欲相全者。盍有以護我母。爲亂兵所掠也。譯人傳言主將曰。何以知你爲崔尙書子乎。答曰。吾父爲國大臣。朝家事。吾無不聞之。若擧以問。則吾當條答之。且今本169_565d 國宰臣。多在此城。若令偏裨。率我往問。則可知也。虜以公往尹政丞昉及諸所問之。尹相執公手揮涕曰。此是吏曹判書崔某之子也。其人回告。於是虜將爲定護行將及軍卒若干俾護之。以此上下家衆。得以安保。親舊家依託而全活者亦多。一時諸公。皆稱公臨急善處。盖月沙李公廷龜。嘗奉使燕京。名聞中華。文忠公。丁卯以後。主羈縻之論。虜人有寬免之令云。當壬午文忠公之北行也。禍且不測。公日夜焦憂。抆血叩心。然當事安閑。無忙撓滲漏之失。時公客留平壤。而具洛州鳳瑞爲關西伯。心服之。每稱於人曰。崔169_566a 漢卿之雅量。不可及云。文忠公旣被。危機甚急。公歎曰。大人之事。固出於爲國竭忠。視死如歸。而人子之爲親求全。亦當不顧死生。遂齎金銀累千入瀋。以啗其用事者。其終免於大禍。亦公之力也。或擧問於文忠公曰。某固是佳子弟。然以未經事少年。能潛銷禍難。其才乃如是耶。文忠公答曰。才出於誠。時金淸陰亦在燕獄。或曰。淸陰素方嚴。必以諸君行計緩禍爲非也。公曰。是殆不然。入見淸陰。問曰。散宜生。何如人也。淸陰曰。古之聖賢也。公出語人曰。觀金公之言。其微意可知也。文忠公知公材器。甚重之雖軍國機務。169_566b 亦時咨訪。多所裨贊。戊寅。文忠公爲首相。而公還自質子。白文忠公曰。大人當國後。有二事恐爲差失。文忠公曰。何謂也。公對曰。攻斥淸陰及水路送僧二事是已。和議與斥和。雖皆爲公。而旣相角立。國事不幸。畢竟爲講和之歸。在我之道。惟宜推奬淸議。不宜與之相激。自貽疑阻。誠以大人文章。推明義理。洞開心事。頻致書淸陰。爲言斥和固是正論。而和議亦出於存國之權。因言國危如此。如公重臣。豈宜久遯荒野。以勉其起來。則淸陰之疑怒。必自漸釋。而年少浮峻之論。自可少熄矣。送僧事。別遣單使。另具奏文。由湖169_566c 西界發船。直向南朝。則一帆風可到。且無隣敵之疑。今徑抵洪軍門。使之轉通南朝。迂廻遼遠。未保其必通。而僧行取關西海路。當掠過遼瀋壤界。事或宣露。禍必不少矣。文忠公大悟。歎曰。吾所不及也。其後抵書淸陰。待之有加。至壬午。淸人果覺送僧事來詰。遂以文忠公北去如所料。公以質在瀋也。與鄭弼善雷卿相善。鄭公以宮僚從世子赴北。憤鄭命壽挾虜恣喝。質子數人謀奔之。事泄。鄭公終被慘禍。其事泄之初。公謂鄭公曰。公何不果言於我。答曰。君必力止之。言之無益。故不以相告矣。時文忠公與柳下公169_566d 皆在本朝。柳下公聞鄭公挑禍。慮公預其謀。甚憂之。文忠公曰。毋過慮。此子豈浪死者哉。及聞西報。公果無恙。一時諸名公聞之。皆稱爲父子知己。文忠公嘗歎曰。汝能服科。則足爲望重宰相。而遭値禍難。疾病又劇。其於不能力文學何哉。前輩長者如張谿谷維,李延陽時白,李白軒景奭諸公。皆器公之爲人。屢加賞歎。金淸陰尙憲號簡伉。愛重公殊甚。甞謂文忠公曰。傳不云乎。人樂有賢父兄。大監有賢子弟。豈不樂哉。時公病眼甚。而同儕有不喜公者。言於金淸陰。崔某特一盲漢。淸陰答曰。是所謂盲於目而不盲於心者169_567a 也。及公之將還。金淸陰爲作歌詩以贈之。又爲小序。稱道公不倦。公之外妹。爲李白江敬輿子婦。公旣還。外妹甞語公曰。吾舅還自燕獄。每稱吾兄之賢。嘖嘖不已。兄何以得此於長者。盖白江亦與文忠公同拘云。一時名宰如李咸陵澥,朴都憲潢及具公鳳瑞。皆傾心相與。許以忘年之交。朴公甞語柳下公曰。吾非令公之友。乃漢卿之友也。
公有沉慮遠識。料事多懸中。丁丑亂後。都城一夜相驚。傳言有鬼啄啄。鬼男婦相聚叫呼。或放砲。或擊金鐵器。擧城奔波。人或慮有事變。朝宰皆戎服詣闕。169_567b 時公正衣冠明燭危坐。李參議。延陽子也。着戰服佩釖猝至。將上堂。見公端坐。躊踷却立。公延之座。謂曰。何爲作此伎倆。答曰。國有變亂。吾輩寧能徒死耶。公笑曰。此必大亂後民志不固之致。何變亂之有。毋遽驚動。李公雅信重公。遂留話。至夜而去。已而。果無事。後李公常謂人曰。吾於崔漢卿。輸此一着。顯宗甲寅秋。都下有虛驚。傳言海寇。鄭錦率舟師來泊京江。士女奔走避亂。都城大撓。至有埋神主者。公之伯嫂送言欲同避亂。且問當向何方。公笑答曰。此必訛言。不過明日可知。已而果然。顯庙軆常不寧。萬機169_567c 多滯。縉紳多以委靡爲憂。公獨曰。此乃太平後日。當自知之。甲寅以後。朝著累變。士大夫多被刑戮。公言果驗。今上庚申春。屛絀一番人。登進舊臣。人皆謂太平萬世之基。公獨曰。不出十年。時事必變。或言時無衅隙。何至此耶。公笑曰。世故推遷。則衅隙自生。已而。有己巳之事。人始服公先見。公鑑視甚明。往往先知人吉凶。元監司萬里。於公爲同盟世交。將赴平安監司。公就見於其第。歸語諸子曰。今日吾見元令。言語擧止。如平常。而神彩虛脫。似不見有人然。殊可慮也。未過旬日。元公卒然喪逝。甲午春。公入楓岳遊覽。169_567d 到一庵子。有辟穀僧。面壁觀心已數月。僧徒稱爲高座。甚敬之。公入與語。出謂仝遊者曰。此僧全無見識。而操心甚急。不出旬日。必發狂疾。居無何。果發狂走出。同遊者驚以爲神。甲寅。顯庙大喪。公陪祭於外庭。還家謂人曰。有一宰臣立於前列。上大下小。骨法甚不好。决非令終之相。徐問之。乃吳挺昌也。至庚申。吳果伏法。當尹편005有盛名。公亦與相善。已而。見其不韙。早自疎貳。崔淮陽碩英。居同閈。情好甚密。甞謂公曰。聞尹希仲深於禮學。閔判書鼎重之子。欲學禮於尹。書要奎瑞。公盍令二哥同往乎。奎瑞。崔公㣧也。公169_568a 曰。吾兒方鎭日課讀。文理漸進。不必更師他人。且出入名人之門。後必有難處之事。崔公大悟。亦不送其子。편006甞侯公及張公善冲。不遇。皆留刺。其明日。張公來訪謂曰。君與我有異。已出仕路。不可無一謝之義。公笑不答。終不往謝。自此與편007絶。公之愛人濟物。出於天性。其在瀋時。淸人許贖被俘人口。我人齎金贖還者相續。其中有金少未售者。公輒捐槖中金以助之。得以贖還者甚多。其人皆仰公如父。侯事不怠。公自瀋還時寒甚。路遇一凍卒僵死。公見之惻然。使人視之。猶可活。卽令壯士朴尙中。挾來於馬上。抱持之。169_568b 與以湯漿。得甦。到義州。屬府尹救之而活。及守白川。値辛亥大侵。飢流載路。公竭心拯濟。節廩俸儲穀粟。且造空舍爲餘架。以接飢民。極擇忠信有鄕望者領之。日晨臨詣。親甞糜粥。吏卒不敢爲奸。糜粥精好。民賴以蘇。其土着者人。給糧種得以耕。秋果大熟。公常語諸子曰。古人云。活千人者。非誠莫可。吾所加意。只此一句而已。及遞歸。邑吏老幼。如失慈母。卽治去思碑。因朝禁未立。後二十年。追立其碑。題曰。萬世不忘。邑人過者皆下馬。長老至今相告語曰。當辛亥大飢。若非崔侯之德。吾輩死已久矣。今之生子抱孫。是誰169_568c 之賜也。其居官。以淸靜安民爲主。絶不爲矯情干譽之事。常曰欲得能吏之名。濫刑罔民。豈仁人所忍爲。又甞曰。人於平朝。空心氣乏。若被刑杖。易致病傷。吏民雖有罪。必待食後治之。榮川,淸風。俱有山水之勝。俗又淳朴少事。公退之暇。嘯咏以自適。惟束吏不令撓民。民皆樂業。牒訴稀息。其在榮川。庶弟後章。季子錫恒。同占司馬。衙設喜宴。自別堂盛陳音樂。帶月而歸。路經郡獄。時獄中只有係囚十餘人。公命吏放送曰。官長作此好事。而民係凍獄。豈無向隅之歎。榮人至今傳以爲美事。後甲子。有海寇虛驚。榮民父老議169_568d 送人京都。迎公避地。後知其浪傳而止。遺愛之入人如此。淸風民亦樹石追思。公雖謹飭自將。閔窮急難。如恐不及。其於風節氣義。尤所感奮。鄭公雷卿之被禍也。心欲濟之而無策。時孝庙以大君在瀋。公欲籍以爲力。遂謁孝庙于邸。袖進一詩曰。天下卽今無節俠。窮途知己更誰憑。虞卿急士歸公子。莫使侯生恨信陵。孝宗恤然曰。急士之窮。信陵之所難也。甲寅以後。縉紳章甫。以言事。流竄相繼。其有舊者。周給行資。如待親戚。雖無雅素。亦脫衣以與之。當己巳中宮之廢。吳判書斗寅。李參判世華及朴士元。以諫169_569a 受刑。公於是時寢疾已久。殆不省識。力起歎咜曰。吾閱歷世變多矣。老病不死。又見此事。因涕泣良久。悲痛不自勝。朴西溪世堂。士元之大人也。辭祿郊居。素淸貧。自禍慘後。家事益落。朝夕或不給。公聞而悲之。爲分俸米周之。公寡於物欲。飭身謹潔。其質瀋也。夫人病不能從。獨居累年。前後往還西關凡十餘。遭間留箕營。亦累月。地號繁華盛妓樂。公謂家國之慮如此。義不當燕樂。女色一無所近。具公鳳瑞稱於人曰。漢卿之苦節。過於蘇武。中年爲護眼病。常寢處外堂。障蔽囱牖如漆室。深居靜攝凡二十餘年。及夫人下169_569b 世。公未甚衰而不畜姬妾。終身甞語子弟曰。吾稟氣素弱。倍加愼嗇。至老無大疾患。盖得力於此。汝輩宜切戒之。又曰。莊子云。古之至人。入水不濡入火不焦。吾意指節欲者而言也。苟能節愼房色。則雖觸犯寒暑霧露。眞精內固。外患不能侵也。三居州郡。廉操愈勵。不以絲毫求益於家。周給親故。若過五斗。則輒嘆曰。吾於今日。又犯贓罪矣。俗傳守令用五斗米以上。爲贓。故云。張玉城旣喪。而張氏分田僮。公曰。吾爲勳臣子。豈至貧餓耶。遂一無所取。張氏感其義。以書冊二笥送公云。公少師谿谷,白軒。讀儒家諸書。又擩染169_569c 於家庭。早知學問路逕。而夙抱沉痾。未能刻苦加功。常以爲大恨。閒居。好觀史書。如資治綱目,宋鑑。無不淹貫。至國家治亂之際。賢邪進退之機。未甞不屢歎。甞曰。人皆爲諸葛亮之才。勝於蕭相國。吾獨以爲不然。蕭何知韓信於立談之間。薦爲大將。卒擒項羽。武侯與馬謖同處三年而不悟。竟致陳倉之敗。陳壽亞匹之論。不爲無見也。公旣以材識著聞。孝友之行。出於至性。文忠公拘幽四年。危辱多端。公奉以周旋。終始不去側。文忠公素多病。甞患胃不善飯。公躬執炊爨。以適親味。同館諸公。莫不嗟歎。及遭大故。弟應敎169_569d 公尙幼。公撫愛篤至提誨不倦。甞作書以勸學。汔有成立。及分田僮。必擇其膏腴肚宲者與之。公有庶妹一人。存恤曲備。不用俗䂓。優分田産。甞曰。先公血屬。只此兩人。豈可使窮乏也。應敎公簡直少許可。▣於公誠服。常曰。吾伯氏正大底人。又甞語其夫人曰。吾於世。無一心朋。只有伯氏。可謂知己。庶妹甞語公季子曰。先大監捐館後。令監顧復之恩。無異吾大監在世時云。尤致謹於奉先。文忠公衣履之藏。在淸州文貞公旁兆。公與諸宗人謀捐穀設契。命曰奉先稧。以每年十月之望。先設祭文貞公。次祭文忠公。李西河169_570a 敏叙爲作稧帖序以美之。先祖平度公墓。在龍仁紫鳳山。久無碑碣。無以識別。公發文諸孫。鳩材立石。吾崔譜牒甚踈畧。公博採於諸宗。累年修訂。編成一帙。諸庶之窮無依賴者。收而敎育之。經其婚편008。一家有喪病。皆有以軫恤相救。恩意融洽。由是內外親黨。凡有緩急。必以公爲歸。庶弟後章柳下公小子。早孤失學。公取養於家。與季子食則同案。寢則同被。敎育一與之。卒能成科名。及公喪後。後章。當降爲大功。而服期以報鞠養之恩。公旣病。不能力擧業。以訓子姪爲事。嚴立課程。率其勤惰。爲具餠餌。以救其飢乏。169_570b 命曰讀書餠。常曰。家道興衰。專在於此。其設敎。不徒尙文藝。必以學識爲重。嘗作箴以示仲子曰。心存則自然凝重。言寡則可無悔吝。取友必先器識。臨事宜思敬謹。公於詩文。才分甚高。雖以疾病憂患。不能肆力。出語往往警絶。其少作。淸陰諸公。亟加評賞。李公敏叙,朴公世堂,兪公㻛,趙公宗著,朴公玄石世采。與公酬唱。輒稱其調韵之過人。有私稿若干卷藏于家。夫人廣州安氏。觀察使諱獻徵之女。莊重端愨。不妄言笑。旣孝敬備至。甚得宗黨心。尤爲文忠公所眷愛。性勤紡績。未嘗安逸。衣不取華美。必潔而完。食不169_570c 尙珍貴。必精而旨。素不喜巫覡。一無所信。淸靜簡淡。絶無芬華侈美之習。至於祀享。必躬親鼎俎。盡其誠禮。待慈母甚謹。諸婦諸女。恩施必均。訓戒亦切。平居無疾言遽色。御婢使有方。咸得其懽心。夫人以辛酉九月初十日生。先公二十年癸丑四月十三日下世。壽僅五十三。擧三男二女。男長錫晉。蔭仕工曹正郞。次錫鼎。前領議政。次錫恒。今爲平安監司。女適進士尹濟明,縣監申轂。正郞四男。昌憲生貟。昌演都事。昌敏,▣▣昌億。▣▣議政爲應敎公後。一男昌大。今爲弘文校理。二女。適李聖輝,李景佐。尹濟明一女。適趙169_570d 命廸。申轂六女。適李聖臣,李蓍正,尹敬龍,朴弼載。餘幼。昌憲男守哲。女適李明復。昌演二男三女。男長守範。女適成德章。餘幼。昌敏二男二女。男長守約。餘幼。昌億爲監司後。一男一女。皆幼。▣▣男錫恒。謹狀。


 

 

 
損窩先生遺稿卷之十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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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諡狀
崇政大夫判中樞府事兼知經筵事弘文館提學朴公諡狀 a_169_57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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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世堂。字季肯。號西溪樵叟。少號潛叟。潘南之朴。爲東方大姓。而始顯於麗季。十代祖尙衷。爲右文舘直提學。與圃,牧諸賢並稱。主禑初。諫背明事元之非。爲權奸所害。至本朝。追諡文正。九代祖訔。佐太宗爲左相。有勳德諡平度。五傳至文康公諱紹。世稱冶川先生。以正學直道。擯于憸壬。遯荒以卒。官止司諫。是爲公之高祖。曾祖諱應川。隱德敦行。筮仕爲司宰監正。贈左贊成。祖諱東善。官止議政府左參169_576b 贊。贈領議政。諡貞憲。考諱炡。早年登第策靖社勳。官至吏曹參判。封錦州君。贈吏曹判書。諡忠肅。立朝鯁直。敢言不諱。朝廷肅然敬憚之。配楊州尹氏。觀察使安國之女。以己巳八月十九日。生公于南原衙舍。公幼時。雖當游戱急遽之際。未嘗跣而履地。行步之際。或掠物而致欹傾。則必就而整之。其資性之端正如此。公旣少孤。又經喪亂。年逾十歲。始受學。文理未甚貫通。而時能透得他人見不到處。長老奇之。旣長。淹貫書籍。必探賾其義。窮解乃已。己丑。遭內艱。與兩兄朝夕哭泣。哀毁過節。隣里親舊。莫不悲歎。公169_576c 文藝夙成。聲名藉甚。顯宗庚子秋。魁解額。始擧生員。仍中增廣文科。又魁殿試。人稱其晩。例授成均舘典籍。移禮兵曹佐郞。壬寅。拜司諫院正言。時刑曹判書缺。上命大臣以亞卿薦擬。大臣以金公佐明應命。遂得擢拜。公啓曰。國家擇任人才。當先示以公。而不出於肺腑之親。遠外聽聞。豈不以爲下之所擧。卽爲希旨上之所授。或係偏私耶。恐累淸明大公之道。啓日後無窮之弊。不可不速改。以彰聖上無私之明。又言大司成之任。所係極重。如非學識通明端重雅正之士。莫宜居焉。大司成李殷相。雖有169_576d 文才。未允士望。擧此兩事。欲爲論啓。而僚議不一。見輕之失著矣。請命褫斥。金竟還收。徐公必遠貽書曰。不意衰世有此好議論。異日靑史。將曰國有人焉。同春宋公。亦有書於藥泉曰。朴諫一着。聖朝風彩堪誇。癸卯。拜持平。論都承旨任義伯躁進無恥。專事譎詭。喉舌之長。自是淸朝峻望。安有目以鄙夫。爲人所賤如義伯而得以濫處哉。義伯附麗時論。其相好者。多不悅。陽坡鄭公語客曰。朴某有乃父之風。人之門地。不可不見。朝廷有別薦之命。鄭公以可合擢用薦公。時有玉堂新錄之擧。而公不得參。物議169_577a 譁然。以爲彈劾巨室之故。是年冬。以御史按江都軍儲。甲辰。選入玉堂。拜修撰。俄轉校理。丙丁之亂。被禍家子孫立朝者。當北使之來。輒陳疏解職。時上將臨接北使於館所。校理金萬均。自以被禍人之孫。不欲隨駕。陳疏乞免。徐公必遠爲都承旨。退却其疏。啓請罷職。卽允其啓。諫官將劾徐公。僚議不一。俱引避而處置。歸於玉堂。公箚直立異者。時議紛然。醜謗朋興。懷川大加忿詈。至有悖言。冬。以御史廉問海西。乙巳春。爲副校理。因登對。悉陳海西民瘼。以爲年久還上之逋欠。諸般身役之未收。督徵於鄰族。盡賣169_577b 田宅。亦難盡償。卽今民怨。無大於此。欲求應天之道。無踰安民之策。還上逋欠。身役未收。無論多寡。一倂蕩滌。庶可以慰民心而弭天灾矣。丙午正月。上將奉大妃幸溫泉。時有虹變。公因入侍啓曰。自上深憂慈殿症候。欲收沐浴之效。爲臣子者何敢有所云云。第念滛虹之變。自古可畏。當警懼之日。空闕出幸數百里外。豈非大可憂者乎。願加深思焉。又論內편001之弊曰。嘗聞此司。國初所無。而刱於中世云。闕中供用。自有進排之物。雖無內司。何患無財。直以種種所用。不可煩責於該司。歷代因循不能革罷。良可169_577c 歎也。三月。隨駕溫泉。乘輿疾驅。侍衛軍卒多顚仆。或致殞斃。玉堂議上箚陳戒。同僚難於爲辭。公立搆以進。略曰。人君動擧。萬姓屬目。固宜徐行緩駈。節以和鑾。古所謂吉行五十里。師行三十里者。非但觀瞻所係。不欲示輕遽之色而已。盖亦以萬衆偕動。不可竭力於一日之間也。伏見御駕微疾其駈。衛士奔馳。先後顚仆。奄奄垂盡。見之駭慘。隨聞殞命者至於二人。下卒雖微。人命至重。何忍恬視其死而不思改轍也。上嘉納之。上於路次。欲觀兵。公進曰。奉慈殿留住路次。已極未安。今日又是國忌齋戒。雖169_577d 尋常公事。亦不得出納。况此觀兵之擧。豈非未安之甚者乎。上不聽。旣還。遭南夫人喪。卜葬于水落山西麓長者谷。愛其泉石之勝。名其洞曰石泉。遂有卜居之意。時東宮將講小學。上以諺解句讀。多難澁不雅。命玉堂考證改定。諸僚莫有能當之者。公乃詳加玩索。以該解之錯誤。本由於註說之失旨。遂並與註說而辨편002之。同僚皆嫌其改易。公終不撓。凡所舛誤者。逐段論辨。付籤以進。上命就質于兩宋。懷川大加稱贊。歎其所論之明的。其中一二條。姑令仍舊。餘皆從之。丁未秋。爲北評事。夏。以修撰召還。169_578a 時上憫旱有求言之敎。公應旨陳疏。首以立聖志。爲勉勵圖治。轉衰爲盛之本。次論視事稀闊之失。仍及大臣厭事之弊。請自然奮發。日御法殿。召接臣僚。責勵大臣。以盡其職。又言鄰族侵徵之怨。軍制變通之宜。縷五六千言。無不明白切實。痛中時病。上雖賜優答。未見採施。識者恨之。是年七月。上將禱雨社稷。旣駕入幕次。因王候未寧。命大臣攝行。盖難於冒夜行事。坮臣請質明親行。公進曰。今日親祭。當以至誠感天。而攝行之擧。實爲未安。古云吾不與祭如不祭。有故而不能與祭。古聖猶以169_578b 爲如不祭。况今親詣壇下。不躬祀事。不亦未安乎。質明行禮。周以後通行。何不可之有。八月。又爲副校理。諸臣因引對。議凶歲裁减之事。公請罷尙方染色。减太僕馬匹。以其經費。補用賑需。俄遷持平。旋爲校理。時銓曹以注擬忤旨。特遞臺諫及儒臣。相繼陳諫。又被嚴旨。公以爲前後言事者。但知爲被譴諸臣分疏。而不敢言。上躬之闕失。故轉輾至此。遂自製箚草。略曰。夫君臣之際。軆貌爲重。古昔帝王。雖有譴責於其臣。亦未嘗不義嚴而辭謹。不比閭巷罵詈之爲。今殿下廹蹴重臣如僕隷。愚視臺閣如嬰兒。又169_578c 以慢辭加之於經幄之臣。雖古失道之君。其言語之不愼。恐不過是。凡事之可否。在理而已。不在於聲氣之間。或下之所諫。理有不可。則殿下不惜開曉。若其合理。亦須俯從。臣效其忠。君昭其德。相爭以公。和氣藹溢。夫孰曰不可。又何必先肆聲氣。自損其威重也。諸僚以箚辭直截。慮致轉激而難之。公曰。不然。明主可以理奪。遂上之。天怒爲之少霽。館中皆服。公久有休官之計。而顧無以解職。不製月課。得例罷。戊申。遂决意歸石泉。築室而居焉。連除三司春坊之職。皆不赴。秋。拜吏曹佐郞。時上將幸溫陽。公當隨169_578d 駕。而猶不拜命。親舊有貽書。責之以義理。譏之以固執者。猶不應。上特命拿問定罪。旣出。爲校理兼文學。冬。復爲吏部郞。兼持平。充赴燕書狀官。公以出疆遠役。義不可辭。出而膺命。渡江之日。書狀官例行搜檢。而前此奉使者。謾不擧行。公一一考闕。至夜始罷。在途所過山川道里及地名。我人之往來者流傳多誤。公考諸中華往牒及大明一統誌凡所可疑者。詢諸居民。多所証正。一行老譯輩。皆驚服焉。己酉三月。復命。在燕舘時。適當上元夜。與正副使出街觀燈。及還。坮官有致憾於正使者。並論彈之。公歸石169_579a 泉舊捿。自是連除校理,獻納,銓郞等職。皆不赴。庚戌秋。爲通津縣監。公以外任不比內職。强起赴任。時値辛亥大歉。竭誠賑政。訪民疾苦。一意不怠。不分土着與流丐。一視而並賑。又請得江都米。裁其闊狹而分之。一境無餓死者。秋。又以獻納召還。遂不赴朝。厥後連除三司亞長諸職。辭遞。癸丑九月。有寧陵遷奉之擧。公以都廳。受敦匠之命。義不敢辭。卽董于陵所。凡列邑進供。爲下吏所操切。多有刀蹬濫觴之弊。公令所供之物。無所點退。諸所需用。制其緊歇而策應之。工匠役價。量其鉅細而酌定之。又必早起治169_579b 事。終日不息。弊省而事辦焉。無何。以病遞任。甲寅二月。拜司時。仁宣王后昇遐。入謝恩命而歸。自是七年之間。屢除三司之官。間爲宗簿正,密陽府使。皆不赴。庚申。討逆策勳。會盟後。命靖社功臣衆子並加資。公亦加階通政。俄有陳白者。還收。秋。爲應敎。疏辭不許。繼而下別諭曰。爾之恬退淸苦之節。近所罕有。予常嘉奬。每欲招致之於朝廷者也。前後除職。遜辭懇欵。不肎就命。不得挽回爾心。予尤恨焉。迨慈新授。特降心腹之告。深示虛佇之意。爾勿固辭。從速上來。公上疏辭謝。略曰。臣以疾病纏困。中仕而止。169_579c 孤兩朝隆眷。負犬馬微忠。此臣之所自悼。衆之所見憫。况貧病。人皆之有。而獨臣緣病而蒙恬退之褒。緣貧而被淸苦之奬。是則貧與病亦有幸不幸於其間也。上優批回諭。冬。擢除同副承旨。陳疏辭職。優批不許。適値仁敬王后昇遐。公卽入城謝恩。踰月而遞職。翌日出城。自是遂不復入東脩門。其入城也。吟一絶曰。十年林下捿蹤穩。一日塵中逐影忙。堪笑石泉居士意。到頭無乃便荒凉。其出城也。復吟曰。粘身世網憂終陷。抽跡山樊得早歸。來往也須譏屑屑。勒移行亦到山扉。雅意所存。自發於吟咏之間169_579d 也。其在政院。常擁衾而卧。諸承旨笑曰。院中古䂓。盡壞於今日。金淸城語人曰。見季肯儀狀。已成山野之態。辛酉。爲忠淸道觀察使。辭遞。癸亥以後。屢除大諫,副學,吏議等職。皆不赴。己巳廢妃之變。士類百餘人相率陳疏。吳判書斗寅,李參判世華爲疏首。次胤泰輔士元製疏。疏入。上震怒。夜半出御仁政門親鞫。三臣俱被慘刑。而士元應對小無屈。受刑尤酷。公聞報驚馳。到闕下則已下禁府矣。及其出獄。公謂曰。吾以汝爲必死。今觀神氣。不無生理。因率往至露梁留數日。創甚濱危。乃與訣曰。向也或冀回生。今169_580a 則已矣。死生之際。須自從容。及其死也。載之素車。葬于東崗。是後朝命久不及焉。甲戌夏。中宮復立。因筵臣言。賜公食物。又命贈士元官。㫌表其門。仍賜祭。公入觀焉。是日。拜同副承旨。出城辭遞。六月。特除戶曹參判。辭不許。俄移大諫,副學。乙亥春。又以特旨召。拜工曹判書。先是。尹相國趾完。以疾釋負而留疏。盛稱公可倚任。故有是命。公上疏辭職曰。伏聞大臣以疾辭召。輒擧臣誤天聽。伏想聖明亦已洞察其言之虛誕。無毫髮近似。而特以平日隆禮大臣。而故欲慰藉其意。輕此爵命爾。又曰。病169_580b 若可勉而大臣忠。而豈其堅辭召命。如不可勉。曾不能以自悲其身者而悲臣乎哉。是後爲參贊,都憲者三。判尹者再。復爲工曹判書兼知經筵弘文提學。並不應命。戊寅。以滿年七十。入耆社。己卯春。筵臣有兩子泰維,泰輔俱經侍從。且有恬退之節爲言者。特命加崇政階。公上疏辭免。略曰。臣之得此恩數。一則爲臣亡故兩賤息侍從恩紀。雖緣比例混擧。而在於公朝廷事軆。不免推類太廣之失。在於微臣私衷。益贈追念不窮之痛。恐非兩盡公私之義。一則爲臣有恬退之節。臣之半生。藉此疑似之迹。誣169_580c 世罔上。蒙受殊渥。前旣非一。設令臣之以此見推。而衆論眞實而非虛妄。左右之進言。不當煩瀆之若是。奬與之隆旨。亦不當渫越之至斯。再疏有曰。國家典章。老人加秩。多係卑官。罕及宰列。其意有在。皇明法例。以子推恩。止於白身。而但假子銜。不復別與官職。寧有子弟官品相低。而推恩加秩於其位高之父兄者乎。其於事理國軆。倒置莫甚云云。公以今此超資。無義可遽。尤以爲不安。俄拜禮曹判書。遞移西樞。公旣階至一品。忠肅公當推恩加贈。子弟以爲請。公曰。先子以功勳。旣有贈爵。豈可以吾老職之169_580d 故而加贈虛秩。掩朝家紀績之榮哉。不許。庚辰秋。拜吏曹判書。六疏得遞。辛巳秋。仁顯王后昇遐。公有疾不得奔哭闕下。詣本州成服歸而。初白軒李相國早位卿相。而懷川宋相。未及大顯。其推薦慕悅特深。及宋相名位已隆。與白軒稍有釁端。用隱語致譏於賀壽之文。而軒相家未之覺。其後白軒上箚論事。宋相疑其有所指斥於己。陳疏自辨。而擧白軒曾製三田碑文事。至比於孫覿。詆辱備至。一時諸公。莫不惋愕。公自立朝時。已惡懷川之爲人。及撰白軒碑文。據事直書。辭義嚴峻。文未及脫藁。有傳其句語於169_581a 主時論而黨懷川者。於是衆恕如沸。儒生之投合時議者。有疏辨請罪之論。不得原文未卽發。有爲畫計者曰。原文旣未得。且此一事孤單。恐不足以驚動天聽。某曾有四書集註論辨之事。若以改易朱子章句爲罪。可以執言。時有金昌翕者。自托於方外而喜干預朝廷事。心有所憾。輒馳書詈辱。至是。又投長札於公之門人。極其醜悖。以爲公欲凌侮朱子。故攻斥尊慕朱子之人。其意極陰譎。其言甚悖戾。其書蜚傳。其同好者多在要津。內外和應。百般揣摩。或變換字句。或架鑿空虛。誘激儒生。使之陳疏。而目之以侮169_581b 聖醜正。請罪其人焚其書。疏入。上下該曹稟處。時金鎭龜爲宗伯。以請令朴某及李景奭後孫。呈納所改註說。與碑文論處之意回啓。尹世紀爲畿伯。移文本州。恐喝督促。急於星火。及納冊子。禮曹再啓。謂宜明辨嚴斥。請令儒臣逐段辨破。並與碑文。投之水火。捃摭滋甚。禍機急。公之門人修撰李坦。進士李翼明等。相繼陳疏。言此輩之怒。只在於碑文數句語。此則臣師平素之見。本自如此。臨文直筆。無所撓避。豈有私好惡於其間哉。至於辨論經傳。私自箚錄。前人之所已行。而今欲藉重於此。洩忿於彼。歷擧先正解經169_581c 同異之說爲言。金萬埰時在喉司。沮遏其疏。先自論斥。以售其先發制人之計。疏入不省。上旣從禮曹啓。仍命削奪官爵。門外黜送。臺官承風。請遠竄二啓而允之。鎭龜又兼判金吾。其佐貳有欲擇配湖南善地者。鎭龜乃定配于玉果。玉果素稱病鄕。故必欲置之於死地也。盖當壬戌之歲。公之長㣧泰維爲持平。首發萬埰父益勳遠竄之啓。至是。諸金乘機逞感。無所不至。時癸未四月也。公病不省事。及聞有坮啓。瞿然曰。雖病不可偃卧吾室。乃具囚服。詣城外待命。及命下。將舁疾赴配。判尹李寅燁上疏。有曰。某169_581d 今年七十有五矣。重得奇疾。氣息奄奄。朝暮就木。而今若配之以荒裔。廹之以嚴程。則必將死於道路。特丐其縷喘。終於牖下。豈不有光於聖上仁厚之德哉。某退休林下。已四十年。高風峻節。絶塵離群。有足以振勵衰俗。荷聖朝之褒崇。爲一世之推許。而徒以篋笥之私記。遽罹嶺海之遠謫。實非所望於聖朝。况某俱喪兩子。孑然隻影。獨寄人世。而泰輔之樹立。如彼卓卓。傳曰。子文之後。猶將十世宥之。有功於民。則子孫雖有罪過。尙此寬貸。今以泰輔之節。不能保其父。則其憫惻憐傷。爲如何哉。上納其言。遂169_582a 寢竄配之命。臺諫復啓請還收。久而乃停。公始歸本第。自是病尤沉綿。至秋挾感遂革。屬纊之日。謂左右曰。今日我當死。何不設席以待。遂扶掖遷于廳事而卒。享年七十五。是年十月。葬于宅後百餘步乙坐之岡。南鄭兩夫人並祔。從治命也。前配宜寧南氏。國初名相在之後。金城縣令一星之女。間愬不行於家庭。和樂不失於娣妹。後配光州鄭氏。副護軍時武之女。撫慈諸孤猶己出。執祀甚栗。宗黨稱之。後視公官秩。並贈貞敬夫人。南夫人生二男。長曰泰維。擢文科。官止持平。居家孝悌。立朝剛直。不容於時。卒窮169_582b 阨以死。次曰泰輔。文科壯元。官弘文館副應敎。有文章才學。己巳諫臣死。㫌閭。贈吏曹判書。鄭夫人生一男二女。男泰翰。筮仕爲齋郞。女長適正郞李濂。次適金弘錫。今爲文學。側出女。適引儀呂必建。持平初娶參奉金夏振女。生一女。適進士李德孚。後娶士人任震英女。生三男四女。男師心。女適趙漢弼。餘幼。應敎娶完南府院君李厚源女。無子。取弼謨爲後。一女適進士李德海。弼謨娶僉正辛受和女。生三男二女。男師允。餘幼。泰翰初娶士人李喜重女。生一男一女。男弼遜。女適崔象德。後娶士人黃植女。生三男二女。169_582c 男弼運。餘幼。李濂一男二女。男顯弼進士。女適尹勛,徐命宅。金弘錫五男二女。男光獻,光彦,光喆。女適李倚重。餘幼。公生四歲而忠肅公下世。旣長。不能記其儀形。常展忠肅公遺像。必泫然。每語及先故。必下氣低聲。含悽而言。聞者感歎。當先忌。則必入城而參焉。哭泣哀。無異三年之內。及其末年。自貞憲公以上三世。皆當祧遷。移奉于公家。公奉其祭祀。克致誠恪。雖至老耄。未嘗少懈。公常病近世祭禮家家不同。又古今異宜。難於適從。及得玄石與明齋往復所定圖說而悅之。略加增損。務合人情。遂爲定式而行之。公旣169_582d 少孤。伯氏護軍公亦早世。事仲氏承旨公如嚴父。友敬備至。或失其意。則下立庭前。終日拱手。不命之坐。不敢上第。三兄處士君年歲相近。隨肩讀書。未嘗捨。及沒而無嗣。寡嫂尹氏。卽美村先生之女也。公命次㣧繼其後而迎于家。奉養備至。及己巳禍變之後。又奉迎于石泉。辛未。尹氏遘癘。時公年旣衰暮。而終始視藥。及其喪。家人及親舊。苦勸出避。公不聽。手執禮書。指揮斂襲。成服後始移他所。外祖觀察公。汎海朝天。舟覆不返。公每痛其不得考終。語必悲咽。撫念從姪。恩意備至。每歲時。或得外方例餽。必先計內外先169_583a 代祭祀所用。然後始許供用。此則公居家行誼之篤也。公見解之明睿。得之天稟。加以工夫精密。自退閑之後。遂專意於四書。積年沉潛。融會貫通。然後始乃隨得隨錄。而於庸學。尤加致力。至於詩書。則盖以得於四子者推之。迎刃縷解。沛然有餘。旣成書。名曰思辨錄。盖取愼思明辨之義也。或謂辨語不能宛轉者。公曰。論辨之際。辭語不能宛轉。勢固然矣。以七十子之服孔子。而子路之言。至謂子之迂也。古人於其心之未契者。不厭極言竭論。不如後世之不問義理之如何。只察言語之末。以爲驚恠者也。當公休官之初。169_583b 玄石屢勸用力於學問工夫。公笑而不答。後玄石復有所云云。公乃作詩以見意云。求名求利等勞神。誰似愚夫解爲身。無事意慵兼廢詠。餘生天許作閑人。其小序曰。人說和叔欲我寧求作詩人。余聞而撫掌曰。吾弟所以憂我者。豈有他哉。正憂其猖狂謬戾。卒之無所善其名以死耳。憂之固當。然其所欲我者。未當。與吾爲詩人。寧爲閑人耳。夫求爲詩人。求有小名。名在人閑在我。吾將爲名乎爲人乎。聊述意以賦一絶。亦欲吾弟聞而笑之也。此則公專心爲己之學也。公嘗註老莊之書。尹明齋慮其流耽。貽書戒之。公答169_583c 曰。老莊之說。雖舛於聖人之大法。又不至都無可採。而乃爲說者所亂。使其意不明。旣不得其所以舛於聖法者。又倂與其可採者而泯之。在二子。醇편003俱掩。在後人。去取皆迷。所以不揆淺陋。畧爲箋解也。尤嚴於斥佛。嘗曰。先儒謂彌近理而亂眞者。亦是過與之辭。佛氏豈有近理者乎。孟子論陳仲子。不過曰避兄離母。惡得爲廉。其闢楊墨。不過以無父無君蔽其罪。彼三子者。豈無可觀者。旣曰無人倫。則餘不足言。彼佛則無父無君。合楊墨而爲一。其言寧有是非之可言耶。况其所謂近理者。則是脫胎於老莊者乎。公嘗169_583d 言陽明集。初未得全書。但見其傳習錄。何其言下頓悟者之若是其多也。其弟子之浮夸無宲如是。其師之所存。可推而知也。及得全書。逐段評駁曰。專務新奇。都是穿鑿人之流。入是學者。不知何所取而然也。此則公排闢異端之嚴也。自公休退之後。年少後生。束脩願學。爭赴門下。公皆欣然受之。爲搆書齋而處之。不問門地高下。隨其才品賢愚。皆至誠敎誨。其或有可敎者。則愛惜特甚。課督有程。每當冬月。學子多聚。公必早坐氊席。以次受業。勤勤懇懇。猶恐其不能解聽。雖已領得。而又重言之。或引喩事物之易見者。169_584a 或假設以俚淺之言以曉之。雖蒙學之士。莫不厭足而心悅。其或有疾病。則至誠憂念。極力救護。聞其死亡。則必設位而哀臨。存恤其家。請學之士。常滿齋。或訓誨經史。或勸課製述。問答講論。終日不倦。夕後則組帶列侍。談笑從容。至夜乃罷。日以爲常。春夏則杖屨多在田間。子弟挾冊隨往。藉草壠上。對坐講劘。每値除夜申夕。必置酒食。與之達宵團欒。常於花辰月夕。携冠童逍遙溪邊。風詠而歸。公平生。未嘗有引而自高之意。及門之人。率皆請肄文藝詞章之業。公亦皆諄諄誘導。俾得成就。嘗曰。欲業文藝者。讀書。必先169_584b 探究其義理。旣得於義理。則其於文藝。不期進而自進。若但專意於記誦章句而已。雖於文藝。亦不可成。及至晩年。及門之士甚盛。亦皆承公指敎。文行並進。策名登朝者甚多。或至宰列。而能以名節自礪。蔚爲世用。斯亦近代所未有也。此則公成就後學之功也。公天資篤厚。氣象嚴重。望之儼然有不可犯之色。而及其接人。言笑欵洽。和氣藹然。人皆敬憚而親慕之。平生㝡惡矯情近名之事。絶去駭俗苟難之行。平居恂恂無異於人。而至於義理所關。則一刀截斷。未嘗有毫髮游移。見道極明。析理甚精。於子思所謂不明169_584c 不措不得不措者。盖嘗服膺而用力。故思卞旣熟。觸處洞然。凡經傳文義之艱深難解者。衆方疑晦。莫得其頭緖。公徐以一言。發其歸趣。便令人脫然開悟。至其平居言論。則類皆平易愨宲。未嘗有一毫高遠之說。聽之雖似尋常。而苟知悅而繹之。則見其義理無窮。皆可終身服行。藻鑑甚明。預言人賢邪成敗。後多驗焉。或有制行之高。似乎難及。而若見其心術之不善。則痛斥之。行事雖有錯謬。而情有可恕者。則不棄也。不以一世之毁譽而有所取舍愛惡。故其初則頗與人觝牾。及其後。人始服焉。處明友立朝廷。羞爲169_584d 骫骳隨波之行。故世或目之以固滯。然當事處義。雖已有所定。必好問於人。不擇賢愚高下。苟有可採者。不吝舍己。至於講論文義。雖後學蒙識。若有一得之見。則傾倒奬與。其心無係着。物我無間如此。性簡亢少許可。而至於論人。則必取其一長。未甞有求備之意。與世寡合。絶交游簡還往。而至於當官奉職。則一心勤恪。未甞有厭事之意。是時。懷川主時論。當路諸人。競相和附。進退與奪。唯視其向背。公獨持讜議。不肎隨其俯仰。於是側目者衆。公知不可有爲於世。乃歎曰。與其屈志辱身。聽其翕張。豈若潔吾身行吾志。169_585a 以終於畎畒間哉。戊申。罷官歸石泉田舍。初亦間出應命。後遂稱病篤。終不起。石泉地磽确不宜穀。遂躬自治農。農月則與荷鉏負耒者。盡日於田間。終歲作苦。又種果賣樵爲生。而簞瓢亦至屢空。宲有人所不堪者。公處之晏如。畧無幾微之見於外。時携門下諸生。嘯咏溪山。自有無限好氣象。平生言行。一本於忠信。而敎導後學。必以此爲主。嘗曰。忠信。人之所得以爲人者也。可不念哉。嘗著訓戒以遺子孫。首言身後喪祭之節。則以節約爲主。次及讀書爲學之方。則以忠信爲本末。及兄弟親愛之道。則以不聽婦人言169_585b 爲先。又以三年上食非古禮。嘗曰。異日吾死後。汝曹宜深念吾言。無惑於紛紛者之論。古禮旣明。吾意素定。汝曹雖由此得罪於時。不可輕背吾訓。及公沒後。其家一遵遺訓。卒哭後徹上食。唯於朔望設殷奠。公甞戒門弟子曰。士大夫行身處事。當務誠宲。不可矯餙。設若陷於罪戾。言苟以宲。則人或相恕。餙辭文過。則非但人無救之者。吾過愈深矣。嘗曰。天之生民。皆有其職。若小民之怠棄其業不能自食者。士大夫之不事其事。自以爲高致者。皆天之棄人也。又曰。凶德有二。傲與惰也。傲者忤於物。惰者害于身。公心地寬169_585c 大。執守堅貞。凡世間是非榮辱。無足以動其心者。惟心之所安。義之所宜。執之而不撓。行之而不疑。至於出處大防。毅然自守。雖賁育莫能奪。先聖所稱可以託六尺之孤。寄百里之命。臨大節而不可奪者。非公之謂歟。嗚呼。世之知公者鮮矣。聖朝之所奬與一世之所尊。尙不出乎恬退一節。而抑不知公於學問。有深造獨得之見。眞正篤宲之工。潛心經訓。硏頤精微。平日制行。未甞䂓䂓於繩尺。而表裡誠愨。始終如一。苟非深知爲己之學。洞見大道之源。能如是乎。顧公病世之儒者類多徇華。遺言矯情干譽。常自處以169_585d 閒人。不欲以學問爲名。微意所在。人孰得以知之哉。窃觀自古辭榮退閒之士。或以䆠成名立。年至懸車。或以時危世亂。見幾色斯。如疏太傅,張季鷹。當時歎其高。後世稱其美。若公者。以年則未及强仕。以時則遭遇聖明。又無立錐之地。盖頭之瓦。而只以言不行道不合。浩然而歸。結茅爲屋。墾石爲田。糲飯菜羹。人不堪其苦。而悠然自得樂而忘憂。此固合於用捨行藏之義。今乃以勇退急流。爲褒公之第一義。其亦淺之爲知公也。不佞先祖遅川公。與公之先子錦洲公。早有同盟之誼而契許特深。先君子與公同里閈相169_586a 善。不佞粤自幼少時。稔聞公言論風範。景仰有素。及長。與二胤後先登朝。繼修舊誼。情好無間。亦甞訪公幽居。獲拜床下。或至移日開懷與語。討論經史。娓娓忘倦。雖無束脩之禮。寔有執鞭之願。若論其情誼。與及門之士何異。自謂慕公之篤。知公之深。非世之等閒尊慕者比也。公之孫弼基兄弟。袖家狀來請易名之文。義不可辭。因其狀文。就加刪潤。兼以平日悅服於心者。撰次如右。敢邀節惠之典。

 
損窩先生遺稿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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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表
七代祖秉節校尉副司果兼宣傳官府君墓表 陰記 a_169_56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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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孝恭。字令德。系出完山。高麗上將軍諱純爵之後。五世而至選部典書諱得枰。生進賢舘完山君諱宰。卽公之高祖也。曾祖諱有慶。入我朝。參贊議政。諡平度。祖諱士康。右贊成。諡敬節。考諱承宗。司饔院僉正。妣興閔氏。犇女。公年十九。以材蔭薦補宣傳官。早卒。不得爲世用。葬于果川霜草坪向巽之原。配全義李氏。縣監一仝女。墓在楊州檜岩。遺命葬無過169_562b 江語。在宜人誌文。擧二男。奉孫早歾無嗣。命孫從仕郞。生一男嶪。冰庫別提。贈吏曹判書。生二男。秀英參奉。秀俊贈左贊成。卽我高祖。此下詳載誌。不盡記。惟我完山之崔。以東方大姓。奕世崇顯。自僉正公以下。子姓零替。連世夭圽。不絶如縷。祖妣宜人。劬躬飭行。以維持門戶。至我曾祖晩谷公。奮起中衰。歷敭淸顯。遭時不辰。官止通政。王父遅川公昆季。際遇中興。官位隆顯。及不肖兄弟。蒙籍世蔭。致位台鉉。玆豈非祖先蔭德委祉之所及歟。從弟錫弼。篤於孝友。謹於奉先。葬其兩親於公之塋內。又移窆其祖考正郞公169_562c 於公之後麓。作兩舍于墓下。兄弟同居。脩飭丘墓。享祀不怠。下世後。諸弟能遵遺意。改竪墓碣。此可書也。畧記始末於後面。俾我後人知先懿之有自云爾。癸卯六月日。七代孫右議政錫恒。謹識。
損窩先生遺稿卷之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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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言
登萬景臺 在西門上頭 a_169_41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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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憇觀音窟。登臨萬景臺。峰巒平似掌。江海小如杯。山日鞭頭近。天風腋下來。探眞無限意。都付錦囊裁。

 

損窩先生遺稿卷之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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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言
道峯。用昌大韻。二首 a_169_42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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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山探勝遍。歸路近重城。薄晩前村雨。終宵不肯晴。捲簾添樹色。欹枕閙泉聲。淸坐燒香罷。泠然世外情。
蓮宇開香界。霞標認赤城。糾紛山左右。廻合樹陰晴。衆壑通雲氣。虛巖應水聲。玅觀羣有外。生滅了忘情。昌大
名賢棲息地。寧國舊山阿。嶽色千年秀。谿流一夜多。居然懷往事。聊復發長歌。叢桂在空谷。攀援那忍過。
169_420c歇馬參儒苑。披雲步澗阿。連峯雨氣合。萬壑水聲多。沂水懷琴韻。花源續棹歌。滯滛何所苦。吟嘯恣經過。昌大


 

 

 

 
 
 
 

 

 

연려실기술 별집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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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직전고(官職典故)
의정부 붙임 대신의 상사에 위문, 보조한 일


고려조에서는 문하부를 두어 이전(理典)을 맡게 하고, 삼사(三司)는 재정을 맡게 하였으며, 밀직(密直)은 군정(軍政)을 맡게 하여 각각 그 직책을 나누었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이 삼부가 모여 의논하였으니, 이것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라고 일컬었다. 그 직책과 예우의 수준이 모든 관료 중에서 가장 중하였으나 일정한 부서(部署)가 없더니 □종(□宗) 때에 새로 부서를 만들었다. 문하시중(門下侍中)과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판사(判事)를 삼고, 삼사의 판사 이하와 문하부의 찬성사(贊成事) 이하로 동판사(同判事)를 삼고, 밀직(密直)은 판사 이하를 사(使)로 삼아서 그 명칭을 바르게 하니 사사(使司)의 책임은 더욱 중해졌다. 당(唐) 나라는 다른 벼슬로서 동평장사(同平章事)를 겸한 사람이라야 재상이 되었던 것이니 곧 이 제도이다.
○ 고려 때는 도병마사(都兵馬使)를 두어서 시중(侍中)ㆍ평장사ㆍ참지정사(參知政事)ㆍ정당문학(政堂文學)ㆍ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판사를 삼고, 판추밀(判樞密) 이하는 사(使)로 삼아 큰일이 있으면 모여서 의논하기 때문에 합좌(合坐)라는 명칭이 있었지만 1년에 한번 모이거나 여러 해가 되어도 모이지 않기도 하였다. 그후에 고쳐서 도평의사(都評議使) 또는 식목도감사(式目都監使)라 하였다. 《역옹패설(櫟翁稗說)》
○ 태조 2년에 고려 말기의 제도를 모방해서 두 부[二府]를 창설하여 도평의사(都評議司)는 국가의 정무(政務)를 관장하고, 삼군사(三軍司)는 군사 행정을 관장하고 판평의사사(判評議司事)는 삼군부(三軍府)의 일을 통령(統領)하였으니 모두 정일품이었다. 군국(軍國)의 큰일은 두 정승이 결정하였고, 동판평의(同判評議)나 상의평리(商議評理) 같은 이는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하였다. 《정부고사(政府故事)》와 《무헌비고》에는 태조 원년이라고 하였다.
○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판사(判事) 2명은 시중(侍中)이 겸하고, 동판사(同判事) 11명은 문하부사(門下府使)와 상의부사(商議府使) 이상과 삼사(三司)의 좌우복야(左右僕射) 이상이 겸하였으며, 사(使) 1명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겸하고, 부사(副使) 15명은 중추사(中樞使) 이하와 중추학사(中樞學士) 이상이 겸하였으며, 검상(檢詳) 2명, 경력(經歷) 1명과 도사(都事) 1명은 모두 다른 벼슬이 겸하고, 또 문하부에 관원의 정원을 두었다. 모두가 고려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문헌비고》
○ 정종(定宗) 2년에 도평의사사를 폐지하여 의정부를 만들고, 다시 고쳐서 좌정승(左政丞)ㆍ우정승(右政丞) 정일품 과 시랑찬성사(侍郞贊成事) 종일품 와 참찬(參贊) 정이품 을 두었다.
○ 태종 원년에 또 문하부를 폐지하고 의정부에 합병시켰는데 백관을 총령(總領)하고 서정(庶政)을 고루게 하며 음양을 조화시켜 나라를 다스리게 한다고 하였다.
14년 갑오에 영부사(領府使) 1명과 판부사(判府事) 정일품 2명과 동판부사(同判府事) 종일품 2명을 두었으며, 참찬을 없애고 지부사(知府事)를 두었다. 얼마 후에 다시 고쳐,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 정일품 각각 1명과 좌ㆍ우찬성(左右贊成) 종일품 각 1명, 좌ㆍ우참찬(左右參贊) 정이품 각각 1명과 사인(舍人) 2명,검상(檢詳) 1명, 사록(司錄) 2명을 두었는데, 모두 당시의 청망(淸望)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녹사(錄事)와 도리(都吏)도 모두 문과에 처음으로 급제한 사람을 썼다. 정부고사(政府故事)
근래에는 사록은 처음 문과에 오른 사람을 쓰고, 녹사는 서인(庶人)을 썼으며, 관복(冠服)을 입고 매일 출근하였으며, 도리(都吏)는 이서(吏胥)를 썼는데, 사인(舍人)과 사록은 뒤에 1명을 줄였다. 정부고사
이때에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 신개(申槩)가 소를 올려 논하기를 의정부에서 일을 결재하는 것은 권한을 대신이 갖는 것이라 하여 그 불가함을 극력 아뢰었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애숭이 선비가 사체(事體)를 알지 못하고 대신들이 권한을 독단한다고 함부로 말하느냐.” 하였으나, 신개가 굽히지 않고 변론하니 대신들이 오히려 떨었다. 얼마 안 되어 의정부에서 결재하는 것을 파하였다. 〈사가집비(四佳集碑)〉
18년 무술에 좌의정이 이조ㆍ예조ㆍ병조 판서를 예겸(例兼 으레 겸하는 것)하였고, 우의정은 호조ㆍ형조ㆍ공조 판서를 예겸하였다.
○ 세종(世宗) 18년 병진에 전교하기를, “당우(唐虞) 때에는 백규(百揆 정승)가 구관(九官)십이목(十二牧)을 통령하였고, 주(周) 나라 성왕(成王) 때에는 총재(冢宰)가 육경(六卿)과 육십속(六十屬)을 통령하였는데, 혹자는 진평(陳平)이 돈[錢]과 곡식의 수량을 알지 못하는 것이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고 하지만, 한(漢) 나라 정승이 권한을 잃은 것은 진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나라를 창건한 초기에 도평의사(都評議司)를 설치하여 나라의 정치를 총리(總理)하였다가 고쳐서 의정부를 만들었으나 그 직임(職任)은 처음과 같았다.갑오년에 이르러 대신이 직접 작은 일을 보는 것은 마땅치 못한 일이며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은 의정부가 회의하여 아뢰고 그 나머지는 육조로 하여금 직접 아뢰어 시행하게 하였다. 이런 뒤로부터 큰일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두 육조로 돌아가고 정부와 관계가 없게 되었으며 참여하는 것은 다만 사형수를 의논, 결정하여 아뢰는 일뿐이니, 이는 정승을 임용하는 본래의 뜻에 어긋남이 있다.이제 태조가 만드신 법에 따라 육조는 자기들의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품하며 정부는 그 가부를 의논한 연후에 아뢰어서 전지(傳旨)를 받은 뒤 도로 육조에 내려서 시행하도록 하라. 오직 이조ㆍ병조가 벼슬을 임명하는 것과 병조가 군사를 쓰는 것과 형조가 하는 사형수 이외의 판결은 각기 본조로 하여금 직접 아뢰어서 시행함과 동시에 곧 정부에 보고하여 만일 당치 않는 일이 있으면 정부가 살피고 논박하여 바로잡게 하라.” 하였다. 《동각잡기》와 《문헌비고》의 합록(合錄 )
정부가 백사(百司)를 총괄해서 다스렸는데, 사인사(舍人司)와 검상사(檢詳司)가 보좌관이 되어 모든 정무를 분장하니 사람 선임이 중하다.
태종(太宗) 갑오년에 정부의 결재 제도를 파하고 사인사(舍人司)만 남겼으며 검상(檢詳)의 일은 예조로 돌려보냈다.
세종(世宗) 병진년에 정부에서의 총괄ㆍ결재 기능을 부활시킨 후로 처음으로 검상사를 회복시켰다. 이극감(李克堪)이 지은 〈검상사제명기(檢詳司題名記)〉
○ 옛날 제도에 삼공이 자리에 나와서 봉한 궤를 열고 도장을 찍어 결재하였고 찬성 이하는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더니, 세종조에 이르러 신개(申槩)가 찬성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삼공이 유고시엔 찬성이 대행하도록 명하였고, 또 승지를 집으로 보내서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 조종조(祖宗朝) 고사(故事)엔 군(軍)ㆍ국(國)의 큰일과 육조의 업무가 정부에 위임되어 삼공이 청사에 앉아 있을 때마다 육조의 관리들이 각자의 임무를 가지고 조방(朝房)으로 모였다. 임금의 재가가 내린 공사(公事)가 있으면 사인(舍人) 이하 모두 방(房)을 나누어 평리(評理)하여 정승의 재결을 얻은 후에 해당 관서가 시행하였다. 세조조에 이르러 육조가 일을 결정하는 법을 비로소 폐지하니, 이로부터 정부의 권리는 점점 가벼워졌다. 명종조에 이르러 처음으로 비변사를 설치했고 선조조에 이르러서 군ㆍ국의 중요한 일을 다 일임했다.이로부터 대신들은 의정부로 출근을 하지 않게 되었고 정부가 일을 보는 제도는 드디어 폐지되었다. 이래서 겨울과 여름 두 차례 있는 백관의 포상(褒賞)과 견책(譴責), 백사(百司)의 참알(參謁)과 망궐례(望闕禮) 또는 중국에 보내는 방물(方物)을 꾸릴 때와 제향(祭享) 때에 서계(誓戒)를 받을 때 외에는 정부가 항상 빈 청사가 되었으니 탄식할 일이다. 정부고사
○ 삼공이 청사에 앉아서 일국의 크거나 작은 일에 모두 참여하여 결정하기 때문에 정승의 권한이 높고 국체(國體)가 중하더니, 세조가 왕통(王統)을 이으면서부터 급히 그 제도를 파하고 정부의 권한은 줄어들고 국체도 또한 풀어지기 시작했다.
정부가 일을 결재하던 날을 당하여 좌ㆍ우사인(左右舍人)과 검상(檢詳)은 모두 이조의 낭관을 겸하였고, 사록(司錄) 2명은 옥당(玉堂)의 참하관(參下官) 1명과 예문관(藝文館)의 관원의 겸직이었으며,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 하나를 녹사로 써서 각각 육방(六房)을 장악하여 온 종일 수응(酬應)하기에 바빠 눈코 뜰 여가가 없다는 이유로 기악(妓樂)을 베풀어서 이들을 위로했었는데 결재 제도가 없어진 뒤에도 이 풍습은 아직 남아 있어서 대신들은 정청(正廳)에 모여 앉아 있는데 사인(舍人)이 있는 곳에는 노래와 풍악 소리가 공중에 퍼졌다.심지어는 전곡(錢穀)을 맡은 낭리(郞吏)들을 패초하여 벌주를 먹여 다그치고 또 시중의 부자를 잡아다가 공공연히 강요하여 많은 물건을 창고 속에 두고 광대나 기생들의 놀음채로 썼다. 선조조(宣祖朝) 때 장령(掌令) 유몽□(柳夢□)이 경연에 들어가서 그 폐단을 역설한 뒤로 감히 이런 짓을 하지 못하였다. 《지소록(識小錄)》
○ 중고(中古) 이래로, 삼공이 정부에 앉아서 국가의 정치를 결재한 지 오래였다. 인조 계해년 반정 초에 중흥공신(中興功臣)들이 도당(都堂)을 회복시키려고 하였는데 이원익(李元翼)이 반대하기를, “불가하다. 중고에 이 일을 폐한 것은 까닭이 있는 것이다. 국가의 대권(大權)을 대신들이 다시 마음대로 독단(獨斷)할 수는 없다.” 하였다. 오리유사(梧里遺事)
○ □□조 (□□朝) 때, 박세채(朴世采)가 소를 올리기를, “정부의 옛 제도에 육조가 여러 직책을 나누어 맡아서 서무(庶務)를 재결ㆍ처리하였고, 또 모든 업무를 정부의 결재를 받아야 비로소 전하께 아뢰었습니다. 심지어 군사와 백성에 관한 중대사까지도 전하의 전지를 정부로 보냈지 직접 본조(本曹)로 보낸 적이 없었으니, 체통이 높고 사리에 맞아 일세(一世)의 좋은 정치를 충분히 이룩했던 것입니다. 그뒤에 폐지했다가 회복했다가 하였으며 명종조 을묘년에 마침 왜변을 당하자 임시로 비변사를 설치하여 급한 사태에 대응하였던 것입니다.그후로 남북에 난리가 계속되어 혁파되지 않고 전후 수백 년 동안 예악ㆍ문장ㆍ정사의 논의가 모두 비변사로부터 나오게 되어 명분에 맞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는 체통을 높이고 사리를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옛 제도를 회복하되 먼저 비변사를 중서당(中書堂)으로 고치고 대신들로 하여금 날마다 그곳에 나가 앉아서 밑에서 올라오는 모든 사무를 결재하게 하고, 삼공이 이미 육부를 분장했다 하더라도 중대한 일은 함께 통의(通議)한 뒤에 전하께 아뢰어 처리한다면 비로소 체통을 얻을 것입니다.” 하였다.
○ 국초(國初)로부터 삼공은 물소뿔로 만든 띠[犀帶]를 전수하는 일을 경솔하게 하지 않았다. 하연(河演)은 신석조(辛碩祖)에게 전하였는데 석조는 겨우 계급이 2품이요, 벼슬이 유수(留守)에 이르러 죽었기 때문에 그 띠가 끝내 전수되지 못하였다. 《필원잡기》
○ 전에는 삼사의 관원이 삼공을 찾아보는 일이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자중(自重)하고 체모를 중히 여긴 때문이다. 이준경(李浚慶)이 정승이 되었을 때, 부제학 심의겸(沈義謙)이 찾아보고 인사하니, 준경이 사양하기를, “부제학이 무슨 일로 왔소.” 하였다. 의겸이 말하기를, “세시라서 찾아뵜을 뿐입니다.” 하니, 준경이 말하기를, “삼사(三司)의 장관이 삼공을 찾아보면 사람들이 듣고 필연 해괴하게 여길 것이니 뒤로는 찾아오지 마시오.” 하였다. 《지봉유설》
○ 중종 초에 정승 자리가 비어 있을 때이다. 공회(公會) 석상에서 누가 정승이 될까 하고 묻자 신용개(申用漑)가 잠자코 생각하다가 정광필(鄭光弼)을 돌아다보면서 “조정 신하 중에 아저씨 만한 분이 없으니 틀림없이 아저씨가 승진될 겁니다.” 신용개는 정과 인척(姻戚) 관계로 조카뻘이다. 하였는데 과연 광필이 정승이 되었다. 그뒤에 또 정승 한 자리가 비었는데 누가 또 물으니, 용개가 한참 동안 대답 않고 있다가 혼잣말로 “나만한 사람도 없으니 면할 수 없을 거야.” 하였는데, 그는 과연 정승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꼭 복상됨을 어렵고 조심스레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다. 근세의 복상(卜相)은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다. 일반 벼슬의 빈 자리를 보충하듯 오직 직품(職品) 차례로 올려 써서 정승 자리를 채운다. 《송와잡설(松窩雜說)》
○ 명종 무신년 5월에 좌의정 이기(李芑)가 갈리고, 홍언필(洪彦弼)이 그 후임이 되었다. 영의정 윤인경(尹仁鏡)이 아뢰기를, “의정부의 선생안(先生案)을 보면, 한명회(韓明澮)가 영의정에서 갈린 지 9년 뒤에 도로 좌의정에 임명되었고, 심회(沈澮)ㆍ정광필은 영의정에서 갈린 지 10년이 지나 다시 좌의정이 되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다만 홍언필의 좌차(座次)가 본래 신의 위에 있으니 청컨대, 언필을 영의정에 승진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기어코 사양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언필이 아뢰기를, “조정의 공회(公會)는 한결같이 순서에 따르는 것인데, 이제 정부에 들어오는 순서가 앞뒤가 다릅니다. 차례가 해당한 사람에게 주소서. 직위가 백료(百僚)의 어른이므로 혐의스럽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임금이 전교하기를, “사양하지 말라.” 하였으나, 인경(仁鏡)이 오히려 자리를 사양하지 않았다. 대사헌 구수담(具壽聃)이 ‘자리 순위로써 올리고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뜻으로 경연에서 아뢰므로 육조의 판서 이상과 양사의 장관을 불러서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자리 순서를 좇는 것이 마땅하며 또 전례(前例)를 상고해 보아도 역시 순서를 따랐다.”고 하여 인경(仁鏡)을 낮추어 좌의정으로 삼았다. 《동각잡기》
○ 선조 계미년에 노수신(盧守愼)이 상중에 있을 때, 좌의정 김귀영(金貴榮)은 임금의 뜻에 거슬려 사퇴하고, 우의정 정지연(鄭芝衍)은 이미 죽었고, 영의정 박순(朴淳)은 마침 배척을 받고 있었다. 임금이 주서(注書)에게 특명하여 수신에게 보내어 복상(卜相)을 청하여, “경(卿)은 대신이라 비록 상중에 있으나 고집스럽게 원칙만 지킬 것이 아니니 복상해서 올려라.” 하였다. 이에 수신이 정유길(鄭惟吉)ㆍ유전(柳㙉)ㆍ박대립(朴大立)으로 대답해 올려 드디어 유길(惟吉)이 정승이 되었다. 수신이 또 무자년에 정고(呈告 사퇴를 고하는 것) 중에 있을 때 임금이 명하여, “집에서 복상하라.” 하니, 수신이 김귀영(金貴榮)ㆍ이산해(李山海)를 써서 올려, 산해가 정승이 되었다. 〈소재연보(蘇齋年譜)〉
○ 언젠가 허봉(許封)이 말하기를, 사인(舍人)이 되어 오랫동안 허다한 정승을 겪었는데, 권철(權轍)은 극히 엄하고 굳세어도 사인을 지낸 경험 때문에 잔치하고 술 마시는 것을 매우 좋아하여 노래소리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해도 묻지 않았고, 노수신은 모든 일에 극히 너그러웠으나 사인의 잔치에 “노래와 음악이 너무 번거롭다.”고 여러 번 금지시켰다. 아마 그가 사인을 겪지 않은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 인조 갑신년에 정승 자리의 결원이 있었는데, 정경(正卿) 중에는 복상(卜相)에 추천될 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묘당(廟堂)에서는 아경(亞卿)에서 뽑아 승진시키기를 청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이에 부제학 이목(李楘)으로 수망(首望)을 삼고, 형조 판서 서경우(徐景雨)를 부망(副望)으로 올렸는데 경우가 낙점(落點)을 받았다. 《명재집(明齋集)》에 있는 〈송교행장(松郊行狀)〉
○ 효종조 때, 이시백(李時白)이 우의정에 임명되자 좌의정 조익(趙翼)과 혼인 관계가 있어 응당 피해야 하므로, 소를 올려 힘써 사양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혼인 관계의 혐의에 대한 법전의 본의는 일반관리에게 한정되고 정승 자리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데 어찌 구구하게 구애받아 어진 대신을 쓰지 않으랴.” 하고, 여러 번 사양하여도 허락하지 않았다. 《동춘집(同春集)》
○ 숙종(肅宗) 갑자년에 임금이 정승 김석주(金錫冑)로 하여금 병조 판서의 일을 겸하도록 하고, 관원의 임면(任免)ㆍ출척(黜陟)의 정사 자리에 나가서 참여하도록 하려고 대신들에게 문의하였다. 영의정 김수항과 우의정 남구만이 아뢰기를, “인조조 때, 우의정 심열(沈悅)이 호조 판서 겸직을 사양한 차자에서 말하기를, ‘신숙주(申叔舟)의 예조 판서, 박순(朴淳)의 병조 판서, 유성룡(柳成龍)의 이조 판서 겸임은 모두 실지 판서는 따로 있고, 대신은 겸임으로 총찰(總察)할 따름이요, 인물의 진퇴와 전례(典禮)와 군정(軍政)은 본조(本曹)의 당상이 왕래하면서 물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한직 벼슬의 임명 이외에 중한 임무와 긴요한 자리는 모두 문의하여 의망(擬望)하도록 하면, 그 용사(用舍)하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몸소 정석(政席)에 참여하는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좇았다. 〈비국등록(備局謄錄)〉
을축년에 좌참찬 신정(申晸)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대신이 체직되면 으레 중추부(中樞府)에 부치는데, 좌목(座目)의 차례에 따라 내려오기 때문에 지금 원임대신 민정중(閔鼎重)ㆍ이상진(李尙眞)은 모두 지사직(知事職)에 부쳤는데, 지사는 이품 벼슬로서 의관(醫官)이나 역관(譯官) 같은 잡류들도 될 수 있는 직위이니 본래 대신을 대접하는 도리가 못 되고, 녹봉 또한 이로 인해 낮아지니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이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좌의정 남구만이 아뢰기를, “영돈녕부사는 본래 한 자리지만 두 국구(國舅)가 있어서 더 설치하였습니다. 이로써 말씀드리면, 영중추부사도 마땅히 더 설치하여 대신을 정당하게 대우해야 하겠는데, 대신이 한두 사람이 아니므로 영중추부사를 네다섯 자리 더 내고 보면 또한 너무 많을 것 같으니, 중추부로 보내는 수에 따라서 판중추부사를 가설(加設)해서 정일품의 녹봉을 받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좇았다. 《국조보감》
가정(嘉靖) 갑신년에 사인(舍人) 어영준(魚泳濬)이 의정부 제명록(題名錄)을 썼는데, 국조(國朝)의 상신(相臣 정승)과 찬성ㆍ참찬 등 보좌관의 임명된 월일을 기록하고 그 밑에 주를 달고 이행(李荇)이 서(序)를 지었는데, 이때는 남곤(南袞)이 영의정, 이유청(李惟淸)ㆍ권균(權鈞)이 좌ㆍ우의정이 되었다. 《용재집(容齋集)》
○ 우리나라엔 전고(典故)를 맡은 관원이 없었다. 각사(各司)에도 등록(謄錄)이 있어야 되는데 없었다. 역대 임금의 길례ㆍ흉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일대(一代)의 제작 연혁을 상고할 데가 없다. 정부는 평일에 가각고(架閣庫)를 두고 녹사(錄事)가 이를 주관하였는데, 보통 수교(受敎)와 대신들의 수의(收議), 군(軍)ㆍ국(國)의 긴요한 문서들을 모두 이 가각 속에 간직해 두고 상고하게 되었는데 성종 이후부터 시행하였다. 가각은 중국 송 나라 관제로서, 문학하는 신하가 관장하는데 양부(兩府)에 다 두었으며, 대개 전고(典故)를 거두어 참고하기 위함이다. 상상컨대, 국초에 이로 인해서 설치한 것 같다. 《지봉유설》
○ 검상(檢詳)은 형조의 상복사정랑(詳覆司正郞)을 겸직하게 되어 있다. 때문에 형조의 낭청(郞廳) 서쪽에 북루(北樓)가 있는 것이며,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검상청이라 부른다. 《지봉유설》
○ 구례(舊例)에 사인사(舍人司)는 도당낭청(都堂郞廳)이 당대에 이름 높고 잘 생긴 사람을 뽑아서 연정회(連亭會)를 만들도록 되어 있다. 이행이 사인이 되자 어느 사람이 벽에 쓰기를, “도리(桃李)가 꽃이 없으니 이행(李荇)이 중서당(中書堂)에 들어왔네.” 하였으니, 대개 그가 색(色)을 멀리함을 말한 것이다. 사림들이 서로 전하면서 웃음거리로 삼았다. 〈용재행장(容齋行狀)〉
○ 본조(本朝)에서 부자가 이어서 정승이 된 사람은 황희(黃喜)ㆍ황수신(黃守身)과 이인손(李仁孫)ㆍ이극배(李克培)ㆍ이극균(李克均), 정창손(鄭昌孫)ㆍ정괄(鄭佸), 홍언필(洪彦弼)ㆍ홍섬(洪暹), 신승선(愼承善)ㆍ신수근(愼守勤), 정유길(鄭惟吉)ㆍ정창연(鄭昌衍)인데, 유길(惟吉)의 할아버지도 의정(議政)이었으니 실상 3대 정승인 셈이다. 《지봉유설》
3대를 연이어서 정승이 된 자는 심덕부(沈德符)ㆍ심온(沈溫)ㆍ심회(沈澮)인데, 근세의 3대 정승으로는 김구(金構)ㆍ김재로(金在魯)ㆍ김치인(金致仁), 서종태(徐宗泰)ㆍ서명균(徐命均)ㆍ서지수(徐志修)이다.
근세에 부자가 정승이 된 이는 윤두수(尹斗壽)ㆍ윤방(尹昉), 정태화(鄭太和) 창연(昌衍)의 손자ㆍ정재숭(鄭在嵩), 민정중(閔鼎重)ㆍ민진장(閔鎭長), 김수항(金壽恒)ㆍ김창집(金昌集), 조문명(趙文命)ㆍ조재호(趙載浩), 이세백(李世白)ㆍ이의현(李宜顯)이다.
형제가 정승이 된 이는 윤사분(尹士昐)ㆍ윤사흔(尹士昕), 허종(許琮)ㆍ허침(許琛), 이기(李芑)ㆍ이행(李荇), 심연원(沈連源)ㆍ심통원(沈通源), 김상용(金尙容)ㆍ김상헌(金尙憲), 정태화(鄭太和)ㆍ정치화(鄭致和), 김수흥(金壽興)ㆍ김수항(金壽恒) 상헌(尙憲)의 손자 민암(閔黯)ㆍ민희(閔熙), 윤지선(尹趾善)ㆍ윤지완(尹趾完), 최석정(崔錫鼎)ㆍ최석항(崔錫恒) 명길(鳴吉)의 손자 과 이건명(李健命)ㆍ이관명(李觀命), 조문명(趙文命)ㆍ조현명(趙顯命), 김약로(金若魯)ㆍ김상로(金尙魯), 정우량(鄭羽良)ㆍ정후량(鄭翬良), 신만(申晩)ㆍ신회(申晦), 홍봉한(洪鳳漢)ㆍ홍인한(洪麟漢)이다.
일문(一門)이 정승이 된 자는 이산해(李山海)와 그의 매부 김응남(金應南)ㆍ사위 이덕형(李德馨)이고, 형제가 정승이 된 이는 이행ㆍ이기와 심연원(沈連源)ㆍ통원(通源)이고 조손(祖孫)이 정승이 된 이는 심정(沈貞)ㆍ심수경(沈守慶)인데, 모두가 다 하나가 향기로우면 하나는 폐단을 끼쳤으니 해괴한 일이다. 《지봉유설》
○ 국조(國朝)에 젊은 나이에 정승이 된 자로 남의 이목(耳目)이 미치지 못한 것은 제외하고 선조 때의 박순(朴淳)ㆍ이산해ㆍ김응남은 나이 50세요, 유성룡ㆍ이원익은 49세이고, 이항복은 43세이며, 이덕형은 나이 38세였다. 또 늙은 나이에 정승이 된 이는 심수경ㆍ이헌국(李憲國)인데, 모두 75세였다. 《지봉유설》
이덕형이 나이 38세에 정승이 되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아직 건강하고 병이 없어 수안 군수(遂安郡守)로 있었는데, 광해(光海) 초년에 덕형이 중국 서울에 가서 책봉하기를 청하고 돌아오자 특별히 그 아버지를 판결사(判決事)로 삼으니 당시에 모두 일대 성사(成事)라고 일컬었다. 《지소록》
○ 건국한 이래로 대신으로서 부모가 있는 자가 몇이 안 되었는데, 성희안(成希顔)은 어머니가 있었으나 희안이 먼저 죽었다. 이 밖에 오래된 것은 기록할 수 없다. 선조 초년에 홍섬이 그의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임금이 명하여 대신이 부모상을 당했을 때 하는 부의(賻儀) 예(例)를 상고하게 하였으나, 전고(典故)를 맡은 이가 상고해도 얻지 못했으므로 다만 관(官)으로 하여금 장사지낼 제구를 갖추도록 하고 부의에 대하여서는 대신에게 하는 예(例)로만 하였다. 노수신이 친상(親喪)을 당했을 적에 역시 이 예를 썼다.
○ 태종조 때,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이 함길도(咸吉道)에 있는 능침(陵寢)을 두루 살피려고 떠날 때 임금이 동교(東郊)에 나가 전송하였는데, 하륜이 돌아오는 길에 정평(定平)에서 죽었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은 매우 섧게 울었고 3일간 정사(政事)를 중지하였으며, 7일 동안 소찬(素饌)을 하였고, 명하여 서울 집에 들어와서 빈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시호를 문충(文忠)이라고 내렸다. 《동각잡기》
○ 세종조 때, 좌의정 유정현(柳廷顯)이 죽자 세종이 백포(白袍)와 오모(烏帽)ㆍ흑대(黑帶)로 백관을 거느리고 금천교(禁川橋) 밖에다 장막을 치고 애도(哀悼)하는 의절(儀節)을 거행하였다. 유관(柳寬)이 죽었을 때도 그렇게 했다. 《동각잡기》
○ 중종 기묘년 10월에 좌의정 신용개가 죽자 임금이 예(禮)에 의하여 거애(擧哀)하려 하였으나, 대신과 예관(禮官)들이 ‘중난(重難)한 일’ 이라고 의논드려 행하지 못했다. 뒤에 조광조가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용개가 죽었을 때, 전하께서 거애하려 하시다가 그만 두신 것은 무슨 일입니까. 신은 들으니 유관이 죽었을 때, 세종의 곡하시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하여, 지금까지도 듣는 자가 송구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전일의 전하의 하교하신 뜻이 심히 아름다웠는데, 대신들이, ‘별전(別殿)이 없어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니, 그들이 전하의 좋은 뜻을 받들지 못한 것이 심합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임진왜란 후에 조신(朝臣)들의 초상 때, 나라에서 베풀던 예의가 이내 폐해져서 행하지 못하더니, 계묘년에 찬성 최황(崔滉)이 죽으니 임금이 특히 명하여 조상(弔喪)과 치제(致祭)의 예를 옛 법대로 하게 하였다. 《백사집》
○ 현종 신해년에 영부사 이경석이 죽자 영의정 정태화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경석은 집이 몹시 가난하여 지금 상식(上食)과 전(奠) 드리는 것을 잇기도 어려울 듯하니, 넉넉하게 도와주심이 마땅할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녹봉(祿俸)을 3년 한하고 그대로 주게 하였다. 대신이 죽은 뒤에 녹봉을 주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백헌년보(白軒年譜)〉
○ 중종 때에 김안국의 병이 심하자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문병하려 하자 승정원이 그러한 고사(故事)가 없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김안국이 비록 삼공은 아니나, 나라 일에 마음을 다했으니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문병하라.” 하였다. 승지가 그 집에 이르렀을 때는 안국은 이미 능히 일어나서 대하지도 못했다. 《호음집(湖陰集)》


 

[주D-001]구관(九官) : 순(舜) 임금 때에 고요(皐陶)ㆍ기(夔)ㆍ직(稷)ㆍ설(契) 등 아홉 현신(賢臣)을 구관에 임명하였다.
[주D-002]십이목(十二牧) : 순 임금 때에 12주의 목(牧)을 임명하였다.


 

 

 

좌윤(左尹) 최공(崔公) 묘갈명  (0) 2011.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