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3.3. 북악산 백사계곡

2011.3.3. 북악산 백사계곡 팔각정 북악터널 구기동)

아베베1 2011. 3. 5.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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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밑 여행] 부암동 '백사실' 
노대통령도 놀란 '무공해 1번지'

백사실 연못. 도시의 소음과 공해로부터 연못을 보호하겠다는 듯 수백년 된 거목들이 ??은 녹음으로 애워싸고 있다.
서울의 비경을 찾아

떠나고는 싶은데 돈 때문에, 시간 때문에 머뭇거리십니까. 생각을 바꿔 주위를 둘러보세요. 어쩌면 내가 사는 곳에 나만 몰랐던 멋진 곳이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유명 경승지에 견줄 도심속 숨은 보석을 찾아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경비는 얼마나 드냐구요? 교통카드 한장만 들고 나오세요. 생수 한병과 가벼운 요기거리가 있으면 금상첨화이구요.

“아니,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니…. 보석을 찾았습니다, 보석을.”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봄 백사실(白沙室)을 찾아 떠뜨린 탄성이다. 3월 국회의 탄핵의결로 직무가 정지됐던 노 대통령은 우연치 않게 백사실로 산보 나왔다가 그 절경에 감탄했고 이후 이 곳의 아늑한 정취를 못잊어 재차 찾았다고 한다.

산속의 비밀정원 백사실

백사실을 찾아 떠나는 출발지는 종로구 부암동. 광화문서 차로 불과 7,8분 거리의 청와대 바로 뒤편이다.

뒷골은 지금 앵두가 제철이다.
유명 중식당인 ‘하림각’ 정류소에서 버스를 내렸다. 급경사진 빌라 골목길을 이마의 땀을 훔치고 허벅지를 두들기며 올라가길 10분 남짓. 소나무 숲이 반갑게 맞는다.

솔향에 취해 몇 걸음 옮기다 보니 집채만한 바위가 가로 막는다. 누가 썼는지 ‘백석동천(白石洞天)’이란 잘 생긴 글자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다. ‘동천’이란 경치가 아주 뛰어난 곳에 붙이는 자구로 이곳이 예부터 알아주던 절경이었다는 표시다.

백석동천 바위 앞에서 물소리를 좇아 비탈 아래로 조심스레 내려가니 마치 산중에 요술을 부린 양 ‘비밀정원’ 백사실이 나타났다.

우선 계곡 바로 옆에 놓인 반경 10m의 아담한 연못이 시선을 붙들어 맨다. 물을 가득 담은 연못에는 수초가 싱그러움을 뽐내고 있고 수백년된 거대한 나무들이 연못을 둘러선 채 짙은 녹음을 뿜어낸다.

'백석동천 (白石洞天)' 바위. 동천이란 말은 절경에만 붙는다.
연못가 돌 테이블에 걸터 앉아 고개를 드니 짙푸른 나뭇잎에 가려 한 여름 땡볕도 힘을 못쓴다. 들리는 건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살갗을 간지는 바람소리 뿐이다. 연못 옆 계단을 오르니 잡초 무성한 양지에 무릎을 넘는 주춧돌이 옛 건물 터 그대로 남아 이곳이 조선시대 세도가의 별장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이 언제부터, 왜 백사실로 불려졌는지 누구도 자신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일부 주민들은 백사(白沙) 이항복의 별장터라고 믿고 있지만 문화재 전문가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노 대통령의 추천 덕에 조만간 백사실 발굴작업이 본격화한다니까 조만간 옛 주인이 밝혀지리라.

울 한복판의 두메산골 뒷골

백사실 옆 계곡을 따라 오르면 서울의 두메산골 뒷골이 나타난다. 그린벨트와 군사보호구역에 묶이고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로 단절된 이 곳은 아직도 18채의 가구가 밭농사 등을 지으며 전원생활을 즐기는 마을이다.

예전에 능금나무가 많아 아직도 능금나무골로 부르는 이들이 많다. 이곳 능금은 임금님께 바치는 진상품으로 맛이 뛰어났다고 한다. 뒷골을 안내한 종로구 남재경 구의원은 “능금나무는 손이 참 많이 가는 나무여서 그동안 관리가 안돼 이제는 다 사라지고 산속에 2,3그루만 남았다”고 말했다.

밭 매는 할머니. 서울에서 이런 풍경은 흔하지 않다.
대신 능금나무골은 앵두골이란 새 명찰을 달 채비다. 주민들은 그 동안 마을 곳곳에 앵두나무를 가꿔왔는데 마침 지금 앵두가 제철이라 길 주변은 온통 탐스럽게 농익은 앵두로 붉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물길은 올 4월 서울 도심서 도롱뇽 알이 발견됐다고 모든 언론이 야단법석을 떨던 바로 그 계곡이다. 하지만 이제껏 도롱뇽, 버들치, 가재와 함께 살아왔던 주민들은 “여기서 도롱뇽이 없어지면 그게 뉴스”라며 픽 웃고 만다.

뒷골 집들을 잇는 길은 손수레도 다니기 힘든 오솔길이다. 바짓가랑이로 수풀을 헤치며 걷는 이 길가에는 주민들이 심어놓은 나리꽃이 고개숙여 인사를 한다. 돌담너머 텃밭에는 감자, 배추, 고추, 콩 등이 정성스레 심겨져 있다.

남 의원은 “여기서 재배되는 것들은 모두 무공해 채소로 일부는 효자동 시장에 내다 팔리는 데, 뒷골 채소가 나오는 날만 기다리는 고정 고객이 있을 정도로 값이 비싸다”고 말했다.

● 백사실 가는 방법

시내버스를 이용해 백사실로 가는 코스는 대략 3가지. 부암동사무소, 하림각, 세검정 등 3곳의 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할 수 있다.

이중 경사가 완만한 부암동사무소 코스가 가장 추천할만 하다. 북악산길 입구에서 ‘능금나무길’ 이정표를 따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군초소를 지나자 마자 뒷골 마을에 도착한다. 녹색버스 0212(구기동-옥수동), 1010(정릉-광화문), 1711(국민대-공덕동), 7018(북가좌동-종로2가), 7022(갈현동-서울역)

하림각 코스는 하림각 건너편 ‘백석동길’을 따라 급경사진 골목을 10여분 올라가면 ‘백석동천’ 바위를 만날 수 있다. 버스는 부암동사무소와 같다.

세검정 코스는 개천을 끼고 홍제천길로 걷다 홍제천4길 골목으로 접어들어 현통사를 지나면 백사실이다. 파란버스 110(정릉-이태원), 170(우이동-연세대), 녹색버스 0212(구기동-옥수동)

● 부암동의 다른 볼거리

백사실 만으로 하루 나들이가 성이 차지 않다면 다른 문화 유적도 둘러보자. 부암동 일대는 북한산과 북악, 인왕산 자락이 춤추듯 어우러지고, 계곡이 굽이쳐 예부터 서울의 최고 절경으로 꼽혀왔다.

부암동사무소 뒤편의 무계정사(武溪精舍)터는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봤던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바로 여기라며 정자를 짓고 시문을 즐겼던 곳이다.

무계정사터 바로 아래가 빙허 현진건의 집터다. 자하문 터널 바로 옆에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정이 남아있고 그 중 사랑채는 세검정 삼거리의 석파랑이란 음식점으로 옮겨져 있다. 세검정초등학교에는 신라때 큰 절이었던 장의사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이밖에 자하문으로 불리는 창의문, 서울성곽, 윤응렬가, 메주가마터가 있고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의 성문인 홍지문도 둘러볼 만하다.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완당전집 제6권
 제발(題跋)
난정의 뒤에 쓰다[書蘭亭後]


난정 백이십 종은 이미 내부(內府)로 들어와 수장되었으며 유왕(裕王)의 저중(邸中)에서 일찍이 한번 빌려나온 일이 있었는데 자획(字畫)이 엉뚱하게 달라서 사람의 의사 밖에 뛰어난 것이 있었으나 바깥 사람은 그를 볼 길이 없었다. 인간에는 오히려 조자고의 낙수본ㆍ조오흥의 십삼발신여잔본(十三跋燼餘殘本)ㆍ고목난원본(古木蘭院本)ㆍ국학천사암본(國學天師庵本)ㆍ왕문혜본(王文惠本)ㆍ상구진씨 송탁구본(商邱陳氏宋拓舊本)ㆍ영정본(穎井本)ㆍ왕추평신룡구탁본(王秋坪神龍舊拓本)들이 있어 모두 다 산음의 진영(眞影)을 찾아 거슬러볼 만한 것들이다.
위강(僞絳)의 제1ㆍ제2본과 비각속첩(祕閣續帖)의 유무언(劉無言)이 모한 신룡본(神龍本)과 손퇴곡(孫退谷)의 지지각본(知止閣本)ㆍ진각장진궐삼항본(陳刻藏眞闕三行本)ㆍ희홍(戲鴻)ㆍ추벽(秋碧)ㆍ쾌설(快雪) 여러 본은 비록 각각 전번(轉翻)하여 진ㆍ와(眞訛)가 서로 섞였으나 역시 다 조본(祖本)과 계류(系流)를 찾아 볼 만한 것들이다.
이 때문에 백석(白石)의 편방고(扁旁攷) 밖에 구자손(九字損)ㆍ오자손(五字損)ㆍ군(群) 자에 대한 정무의 측하(側下)와 저무의 평정(平頂)과 차각(杈脚)이 있고 없는 것의 혹은 3층 2층이며 숭(崇) 자에 대한 산하(山下)의 세작은 점이 혹은 보이고 혹은 안 보이는 곳, 천(遷) 자의 입이 벌어지고 입이 안 벌어지고 등이 서로 대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전하는 난정모본은 정무에서 나왔다고는 이르지만 정무의 여러 증거와 하나도 합하는 것이 없으니 필경 이것은 무슨 본인지 모르며 비해당(匪懈堂)의 제한 바로 미루어 보면 하나의 선본을 얻은 것도 같은데 지금 추구할 길이 없다.
예전에 소재(蘇齋)ㆍ운대(芸臺) 여러 명석(名碩)들을 추종하여 그 서여(緖餘)를 들었고 또 여러 본에 대하여 자못 눈으로 본 것도 있기 때문에 거듭 전몽(前夢)을 거슬러 대략 여기에 기록하는 바이다.


 

[주D-001]위강(僞絳) : 위본(僞本)의 강첩(絳帖)을 이름. 강첩은 송 상서랑(尙書郞) 반사단(潘師旦)이 관첩(官帖)을 집에서 모각(摸刻)하여 석본(石本)으로 만들었는데 세상에서 이것을 반부마첩(潘駙馬帖)이라 일컫는다. 무릇 20권이다. 선병문(單炳文)이 이르기를 “순화첩(淳化帖)은 흔히 보지 못하며 그 다음은 강첩이 가장 아름다운데 구본(舊本)은 역시 얻기 어렵다. 반씨의 아들이 분산(分産)하여 살면서 법첩도 나누어져서 둘이 되었다.”라 하였음. 《輟耕錄》 강요장(姜堯章)이 《강첩평(絳帖評)》10권을 저술하여 세상에 유행한다고 함. 《齊東野語》
[주D-002]손퇴곡(孫退谷) : 청 익도인(益都人)으로 이름은 승택(承澤)이고 호는 퇴곡이다. 명 숭정(崇禎) 진사로 관은 급사중(給事中)이며 이자성(李自成)이 참위(僭位)하자 사천 방어사(四川防禦使)가 되었으며 청에 들어와 벼슬하여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수장(收藏)이 심히 풍부하였으며 저술로는 《경자소하기(庚子銷夏記)》 및 《상서집해(尙書集解)》 등이 있음.
[주D-003]백석(白石)의 편방고(扁旁攷) : 강 백석(姜白石) 《난정편방고(蘭亭扁旁攷)》를 말함. 백석은 송 반양인(鄱陽人)으로 이름은 기(夔), 자는 요장(堯章)인데 무강(武康)에 우거(寓居)하여 백석동천(白石洞天)과 더불어 이웃이 되었으므로 호를 백석도인(白石道人)이라 하였다. 그는 일찍이 난정(蘭亭) 자체(字體)에 대하여 정무본(定武本)을 주로 삼아 《편방고》 1권을 저술하였는데 뒤에 난정의 진위(眞僞)를 가리는 지침이 되었음.
[주D-004]비해당(匪懈堂) :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호인데 서법이 기절(奇絶)하여 천하 제일이라 칭하였음.

 

 

 완당전집 제8권
 잡지(雜識)
잡지


일전(日躔)황도(黃道)를 한 바퀴 돌면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을 거쳐 네 철이 차례로 가름하여 일세(一歲)를 이루는 것이다. 일세는 삼백육십오 일로 영수(零數)가 있으니 이는 한 가지의 일이다. 이는 세실(歲實)이라 한다.
달은 백도(白道)를 걸쳐 한 바퀴 돌면 초하루ㆍ조금ㆍ보름ㆍ그믐을 지나 해를 추급(追及)하여 일삭(一朔)을 이룬다. 십이의 합삭(合朔)은 모두 삼백오십사 일로 영수(零數)가 있으니 이것이 또 한 가지의 일이다.
옛날 성인은 백성들이 절기(節氣)가 궁(宮)을 지나도 쉽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인하여 우선 합삭의 일주(一周)를 따라 한 달로 삼고 합삭의 십이주로 일 년을 삼았으니, 진실로 생명(生明)생백(生魄)은 고개만 쳐들면 보기가 쉽기 때문에 그 수시(授時)의 편의함을 취한 것이요 합삭의 십이주를 곧 세실이라 한 것은 아니다.
세실은 스스로 세실이 되고 합삭은 스스로 합삭이 되어 하늘에 있어서는 각자 운행하여 본래 한 궤도[一軌]가 아닌데 지금 이미 합삭을 빌려서 세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실은 모두 삼백육십오 일로 영수가 있어 십이의 합삭과 비교하면 열 하루의 약(弱)이 더 많으니 기영(氣盈)이란 것은 이 열 하루의 약이요, 십이의 합삭은 모두 삼백오십사 일로 영수가 있으니 세실에 비교하여 열 하루의 약이 적다. 삭허(朔虛)라는 것은 이 열 하루의 약이다.
이 년이 되면 이십일 일이 많고 영수가 있는데 동지(冬至)는 장차 제 십이월인 때문에 삼 년이면 반드시 윤(閏)을 둔다. 대개 세실은 삼주(三周)가 차면 이미 삼십칠 합삭을 지나서 영수가 있는 때문에 하나의 합삭이 많아서 그것이 윤이 된 것이다.
채주(蔡注)에는 이미 “일행(日行)의 수와 월행(月行)의 수”라 이르고서 또 이르기를 “삼백 육십이란 한 해의 상수(常數)이다.”라 하였으니, 일ㆍ월의 행도(行度)의 밖에 이는 또 무슨 수란 말인가. 전혀 두루뭉수리가 되어 분별이 없으니 강해(强解)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요, 또 “기영(氣盈)과 삭허(朔虛)를 합하여 윤(閏)이 생긴다. 해는 하늘과 더불어 모이기 때문에 오 일이 많고 달은 해와 더불어 모이기 때문에 오 일이 적다. 그러므로 한 해의 윤의 율(率)은 곧 십 일이다……” 하였으니 그 오 일이 많은 것은 계산에 들 수 있겠거니와 오 일이 적은 것은 또 어떻게 계산에 들어가서 십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 또한 두루뭉수리가 되어 분별할 수가 없으니 강해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이다.
이십팔수(二十八宿)의 별은 비로소 《주례(周禮)》 빙상씨(馮相氏)에 나타났으나 그 명목은 자상하지 않다. 《이아(爾雅)》 석천(釋天)에는 별이 십칠수만 있고 여(女)ㆍ위(危)ㆍ위(胃)ㆍ자(觜)ㆍ삼(參)ㆍ정(井)ㆍ귀(鬼)ㆍ성(星)ㆍ장(張)ㆍ익(翼)ㆍ진(軫)은 없으며 월령(月令 《예기》편명)에는 겨우 이십육성(星)뿐인데, 대개 건(建)호(弧) 들어 있고 기(箕)ㆍ묘(昴)ㆍ귀(鬼)ㆍ장(張)은 없다.
《사기》역서(曆書)에 비로소 이십팔성의 호(號)가 자상히 갖추어졌는데 건(建)ㆍ벌(罰)ㆍ낭(狼)ㆍ호(弧)만 있고 두(斗)ㆍ자(觜)ㆍ정(井)ㆍ귀(鬼)는 없으며 또 필(畢)을 탁(濁)이라 이르고 묘를 유(留)라 이르고 유(柳)를 주(注)라 일러서 지금과는 같지 않으며, 지금 전하는 이십팔수의 명목은 비로소 《회남자(淮南子)》 시훈해(時訓解) 및 《한서》 역지(曆志)에 나타났다. 대략은 금성(金星)이 해와 사십 도의 거리에서 나타나므로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한 것이다. 옛날에는 추보(推步)가 없었고 지금은 윤(輪)의 교(交)를 측차(測次)하여 본천(本天)의 안에 들어가면 땅과 가까워 주현(晝見)의 경계를 얻는 것이며 다시 위도(緯度)로써 남북을 가감(加減)하여 주현의 시기를 정하는 것이다.

예(禮)는 태일(太一)에 근본한 것이다.
복희(伏羲)는 십언(十言)의 교(敎)를 지었는데 건(乾)ㆍ곤(坤)ㆍ진(震)ㆍ손(巽)ㆍ감(坎)ㆍ리(离)ㆍ간(艮)ㆍ태(兌)ㆍ소(消)ㆍ식(息)이다.
문자가 없는 것을 역(易)이라 이른다.
육 선공(陸宣公) 주의(奏議)의 균세(均稅)ㆍ휼백성(恤百姓) 육조(六條)에 이르기를 “대범 천지의 사이에 나서는 오재(五材)의 용(用)이 제일 급한 것이 되는데 오재란 것은 금ㆍ목ㆍ수ㆍ화ㆍ토(金木水火土)이다. 수ㆍ화는 작위(作爲)를 자뢰하지 않고 금ㆍ목은 스스로 산택(山澤)에 나며 오직 토만은 파식(播植)을 주로 하므로 힘이 아니면 이루지를 못한다.”라 하였다.
북두의 칠성은 이른바 “선(璇)으로 한 기(璣)와 옥(玉)으로 한 형(衡)으로 칠정(七政)을 제(齊)한다.”는 것이다. 표(杓)는 용각(龍角)을 연하고 형(衡)은 남두(南斗)의 은(殷)이요, 괴(魁)는 삼성(參星)의 머리를 베개한다. 황혼을 이용하여 중을 가리킨 것은 표(杓)이며, 두(斗)는 제거(帝車)가 되어 중앙에 운전하고 사방을 임제(臨制)하며 음양을 나누고 사시(四時)를 가리키고 오행(五行)을 고르게 하고 절도(節度)를 옮기고 모든 기(紀)를 정하는 것은 모두 두에 매였다. 두(斗)ㆍ괴(魁)는 대광(戴匡)의 육성(六星)인데 문창궁(文昌宮)이라 이르며 괴 아래 육성이 둘 둘로 배비(排比)된 것은 이름을 삼태(三能)라 한다.

《춘추》의 운두추(運斗樞)에 이르기를 “두(斗)의 제일은 천추(天樞)요, 제이는 선(璇)이요, 제삼은 기(璣)요, 제사는 권(權)이요, 제오는 형(衡)이요, 제육은 개양(開陽)이요, 제칠은 요광(搖光)이며, 제일에서 제사까지는 괴(魁)가 되고 제오에서 제칠까지는 표(標)가 되며 합하면 두가 된다.”고 하였다.
낭성(狼星)의 근지에 큰 별이 있어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라고 하는데 그 노인성이 나타나면 정치가 편안하다고 했다. 노인성의 한 별은 호성(狐星)의 남쪽에 있는데 인주(人主)가 수명을 연장하는 조응(照應)이 된다. 그러므로 수창(壽昌)이라 하며 천하가 안녕하다. 항상 추분(秋分)의 새벽에는 경방(景方)에 나타나고 춘분의 저녁에는 정방(丁方)에 나타난다.

석씨찬(石氏贊)에 이르기를 “노인성이 밝으면 임금이 수하고 창성하다.”라 하였다.

별이란 금(金)의 산기(散氣)로서 그 본(本)은 화(火)이며 한(漢 하한(河漢)을 말함)도 금의 산기로서 그 본은 수(水)이다. 한에 별이 많으면 물이 많고 별이 적으면 가물다.

《건착도(乾鑿度)》에 이르기를 “세(歲)는 삼백육십오 일인데 일(日)을 사분(四分)한 하나를 괘(卦)로써 용사(用事)한다. 한 괘는 효(爻)가 여섯이요, 효는 하루로 치면 무릇 육 일이다. 칠분(七分)은 윤(閏)으로 돌아간다. 초효(初爻)가 용사하는 일일(一日)은 천왕제후에 해당되고 이일은 대부(大夫)에 해당되고 삼일은 경(卿)이요, 사일은 삼공(三公)이요, 오일은 벽(辟)이요, 육일은 종묘(宗廟)이다. 효사(爻辭)가 좋으면 좋고 흉하면 흉하다.” 하였고 정강성(鄭康成)의 주(注)에 이르기를 “벽(辟)은 천자이다. 천왕제후란 것은 제후를 말한 것이요 그 길흉을 받는 것은 오직 천자일 따름이다.”라 하였다.

대부(大夫) 이하는 주(主)가 없다는 것은 정(鄭)의 의(義)라 하겠지만 그러나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에 “축(祝)이 작(酌)을 씻어 국그릇의 남쪽에 전(奠)하면 주인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축은 왼편에 있다.” 하였으며 정주(鄭注)에 “축이 왼편에 있는 것은 마땅히 주인을 위하여 신에게 말을 풀이하기 위함이다.”라 하였은즉 역시 정(鄭)도 사(士)로서 주(主)가 있음을 삼은 것이다. 교특생(郊特牲)“직제(直祭)에는 주에 축(祝)한다.”라 했고, 정주에는 “천숙(薦熟)의 때를 이름이니 특생(特牲) 소뢰궤식(少牢饋食)을 하는 것과 같다.”라 했으며, 정의(正義)에는 “천숙하는 정제(正祭)의 때에 축관이 축사(祝詞)로써 주(主)에게 고(告)함을 말한 것이다.”라 하였으니, 정(鄭)도 또한 대부ㆍ사의 예에 의거하여 풀이한 것이다.

《의례(儀禮)》에 말하기를 “달을 간격하여 담(禫)한다. 이달에 길제(吉祭)하되 오히려 배(配)를 아니한다.”하였고, 특생(特牲)ㆍ궤식(饋食)의 명서(命筮)하는 사(詞)에도 조(祖)만 말하고 배(配)에 미치지 않았으니 정히 이와 더불어 합치된다. 그런데 제가(諸家)들은 이로 인해 담월(禫月)에 조고(祖考)를 합제(合祭)할 때에도 다만 조(祖)만 제하고 비(妣)로써 배하지는 않는다 하고 있으나 모(某)의 생각은, 《의례》의 말한 바 배(配)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개 담월에 조묘의 길제를 만나면 새로 죽은 이를 조에 배식(配食)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비가 조에 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특생은 바로 사(士)의 상제(常祭)이며 담월의 길제에만 그친 것이 아닌데 어찌 그 배를 말하지 아니했다 하여서 상제에도 역시 비(妣)를 배하지 않는다고 이른다면 되겠는가.

훈호처창(焄蒿悽愴)은 주ㆍ소(注疏)가 다 백물(百物)의 정(精)으로써 말했는데 후유(後儒)들이 마침내 조고(祖考)의 신령(神靈)으로써 해당하게 하였으니, 모르괘라 이것이 근거가 있는 것인지? 백물의 정이란 그 정(精) 자는 신(神) 자와 더불어 크게 다르니 “신의 나타남이다[神之著]”라는 신으로써 혼합하여 보아 넘겨서는 불가하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훈호처창은 그 윗대문에 보이는 소명(昭明)과 또 크게 다르니 정과 신의 차(差)와 인(人)과 물(物)의 별(別)과 음과 양의 계(界)가 대단(大段)은 통할 수가 없다. 훈호처창의 정에 속하는 것과 신의 저(著)를 연대어 보면 어떠하겠는가. 대개는 소명(昭明)의 아래와 신의 저의 위에 문득 이 “훈호처창은 백물의 정이다.”라는 한 구절을 꽂아 넣어 위로도 붙지 아니하고 아래로도 연하지 아니하고 중간에 고립하여 귀속된 바가 없으며 “물의 정을 인하여[因物之精]”라는 구절에 끌고 와서야 비로소 연합될 수 있다.
그러나 “신의 나타남”이라는 한 구절이 또 두 사이에 가로질러 있어 혹은 끊기고 혹은 연하며, 연했다 다시 끊기어 일기(一氣)로써 아래에 접속됨이 없으니 이는 절대 착안(着眼)해야 하며 놓아 넘길 곳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조고의 신으로써 훈호처창에 구한다면 한갖 의의(擬議)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백물의 정 한 구절의 백(百)이 또한 너무도 군더더기가 아니겠는가.
대개 중생(衆生)이란 두 글자는 인과 물을 아울러 끌어 백물의 정에 관철시킨 것 같은데 “이를 귀신이라 이른다[此之爲鬼]”라는 한 구절로써 보면 이미 분별지어 말하여 정연하게도 어그러지지 않으며 더구나 명명귀신(明命鬼神)이라는 것은 곧 물의 정을 인한 것으로서 마치 인과 물을 아우른 것같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물도 또한 귀라 칭할 수 있는 것이다. 모르괘라 어떻게 풀이해야 할 것인가. 이 한 절(節)이 가장 해석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소가(疏家)는 위에 나타난 백물의 정에 있어서는 분별지어 말하고 아래에 있는 인물지정(因物之精)에는 인과 물을 혼병하여 분별한 바 없으니 예로부터 읽기 어려움이 이와 같은 것이다.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은 정주(鄭主)에 “명명덕은 그 지덕(至德)을 현명(顯明)한다.” 일렀는데, 지금 급고각본(汲古閣本)에는 현(顯) 자가 재(在) 자로 와전되었다. 명명이란 것은 현명의 의이다. 《시》노송(魯頌)에 “공소(公所)에 있으면 명명하다.”라 했으며, 그 전(箋)에 역시 《대학》을 끌어 증거로 삼았다. 공소(孔疏)에는 몸에 명덕이 있는 것으로써 말을 했으나 정의 의는 아니다.
《맹자》에 나타난 “인(仁)이란 것은 인(人)이다.”와 《중용》에 나타난 “인(仁)은 인(人)이다.”와는 어의(語義)가 동일하지 않다. 《맹자》의 “인이란 것은 인이다.”는 곧 능히 인은(仁恩)을 행하는 자는 사람이라는 것이요, 《중용》의 인(人)이란 것은 정(鄭)은 읽기를 상인우(相人偶)의 인과 같이 했다. 상인우는 곧 사람이 서로 존문(存問)하는 의를 뜻한 것이다.

강백석(姜白石) 요장(堯章)은 이르기를 “세상에서 중니(仲尼)가 계찰(季札)의 묘(墓)에 표(表)하기를 이러이러 했다고 전한다.”라 하였으니, 백석같이 금석에 정박(精博)한 사람으로서 고서를 끌어 인증하지 아니하고 단지 “세상에서 전한다.” 일렀다면 고서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가히 소급해 알 수 있다.
또 구양공(歐陽公)은 이르기를 “중니의 각국 순방을 상고해 봐도 오(吳)에 이르렀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또 글자가 특별히 크니 옛 글자가 아니다.”라 했다. 더구나 구비(舊碑)를 살펴보니 글자 크기가 한자[一尺]가 넘을 뿐더러 묘에는 본시 제자(題字)가 없었는데 동한(東漢)에 와서야 비로소 있었고 춘추 이상(以上)에는 풍비(豐碑)나 환영(桓楹)에 명전(銘鐫)이 있단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이는 뒷사람이 의탁한 것이 너무도 적확하다. 고서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 나라 장종신(張從申)의 발(跋)에 이르기를 “현종(玄宗)이 일찍이 은중용(殷仲容)을 명하여 모탑(摹榻)했는데 대력(大曆) 연간에 윤주자사(潤州刺史) 소정(簫定)이 계자(季子)의 묘(廟)를 짓고 이 비에 중각(重刻)하여 지금까지 전해온다.” 하였으니, 그 최고로 증거할 수 있는 것은 당 나라 사람의 문자가 된다.

일본(日本) 문자의 연기(緣起)는 백제(百濟)의 왕인(王仁)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나라 글은 그 나라의 일컫는 바에 의하면 황비씨(黃備氏)가 제정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중국과 통하지 못하고 무릇 중국에 관계되는 서적은 모두 우리나라에 의뢰했다. 지금 족리대학(足利大學)에 보존된 고경(古經)은 바로 당 나라 이전의 구적(舊蹟)이다.
일찍이 《상서(尙書)》를 번조(翻雕)한 것을 얻어 보았는데 제ㆍ양(齊梁)의 금석(金石)과 더불어 글자의 체가 서로 동일하며 또 신라 진흥왕비의 글자와도 같으니 이는 필시 왕인 시대에 얻어갔던 것으로서 지금 천년이 지난 나머지에도 고스란히 수장되어 있다. 이는 진실로 천하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나 소길(蕭吉)의 《오행대의》같은 등의 서는 다 중국에도 하마 없어진 것인데 오히려 그쪽에는 보존되어 있으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조감(晁監) 주연(奝然)은 지금 상고할 수가 없고 서경(西京) 동도(東都)의 사이에 그들의 한다는 문은 감루(弇陋)하고 벽유(僻謬)할뿐더러 그 언어를 따라 곧장 나가며 문세(文勢)는 부앙(俯仰) 전절(轉折)과 상하(上下) 토납(吐納)의 의가 없다.
《무림전(武林傳)》같은 것은 구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백여 년 이래로 등수(藤樹)ㆍ 물부(物部)의 학이 크게 성함과 동시에 시ㆍ문(詩文)은 전혀 창명(滄溟)을 숭상하여 약간 속체(俗體)를 변해 갔다. 그러나 옛날의 물든 것이 하마 고질이 되어 졸지에 면모를 고치기는 어려웠다.
지금 동도(東都) 사람 조본렴(篠本廉)의 문자 세 편을 보니 감루하고 벽유한 버릇을 깨끗이 씻어 사채(詞采)가 환발(煥發)하며 또 창명의 문격(文格)을 쓰지 아니하여 중국의 작가로도 더할 수가 없었다.
아! 장기(長崎)의 선박이 날로 중국과 더불어 호흡이 서로 통하여 사동(絲銅)의 무역은 오히려 제이에 속하고 천하의 서적도 산과 바다로 실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옛날에는 우리에게 의뢰해야만 했는데 마침내는 우리보다 먼저 보는 것도 있으니 조본렴이 아무리 글을 잘 아니하고자 해도 아니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일만 보고서도 천하의 대세를 알 수 있다. 그 사람들이 사동(絲銅)이나 서적 이외에 중국에서 얻어가는 것이 또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알리오. 아!

고금의 시법(詩法)이 도정절(陶靖節)에 이르러 하나의 결혈(結穴)이 되고 당의 왕 우승(王右丞)ㆍ두 공부(杜工部)가 각기 하나의 결혈이 된다.
왕은 혼솔이 없는 천의(天衣)와도 같으며 또 천녀(天女)의 산화(散花)와도 같아 많건 적건 막론하고 세간의 범상한 꽃으로서는 비의(比擬)할 바가 아니며 두는 마치 토석(土石)과 와전(瓦塼)을 땅으로부터 쌓아 올려 오봉루(五鳳樓)의 재목이 그 경중을 재량하여 이루어진 것과 같다. 그리하여 하나는 바로 신리(神理)요 하나는 바로 실경(實境)으로서 인자(仁者)가 보면 인(仁)이라 이르고 지자(知者)가 보면 지(知)라 이를 것이며 백성은 날로 써도 알지 못한다. 마치 하나의 문호를 각기 한 것 같지만 그러나 우ㆍ직(禹稷)과 안회(顔回)는 그 법이 한 가지다. 분별과 동이를 논할 것 없이 능히 이 한 관문을 뚫고 난 연후라야 시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의산(李義山 이상은(李商隱))ㆍ두번천(杜樊川 두목(杜牧)) 같은 이는 다 공부(工部)의 적파(嫡派)이며 백향산(白香山 백거이(白居易))이 또 하나의 결혈이 되어 그 광대교화(廣大敎化)의 명목에 부끄럽지 않다.
송의 소ㆍ황(蘇黃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은 또 하나의 결혈이 되며 육무관(陸務觀 육 유(陸游))의 칠언근체(七言近體)는 고금을 통하여 능히 구율(彀率)을 다한 것이며 금(金)의 원유지(元裕之)와 원(元)의 우백생(虞伯生)이 또 하나의 결혈이 되는데 우(虞)로 말하면 성정(性情)과 학문이 합쳐져 일사(一事)로 되었다.
명 나라 삼백 년에 와서는 하나도 족히 칭할 것이 없다가 왕어양(王漁洋 왕사정(王士禎))에 이르러 역하(歷下)와 경릉(竟陵)의 퇴풍(頹風)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또 능히 하나의 결혈이 되었으니 부득불 추대하여 일대의 정종(正宗)으로 삼지 않을 수 없으며 주죽타(朱竹垞)는 어양(漁洋)과 더불어 태화산(太華山)의 쌍봉(雙峯)이 아울러 일어난 것과 같아 갑을(甲乙)할 수 있다. 이 밖에는 다 방문(旁門) 산성(散聖)일 뿐이다.

문체(文體)의 유(類)는 열세 가지인데 그 문이 되는 것은 여덟 가지로서 이른바 신ㆍ리(神理), 기ㆍ미(氣味), 격ㆍ율(格律), 성ㆍ색(聲色)이다. 신ㆍ리, 기ㆍ미는 문의 정(精)이요, 격ㆍ율 성ㆍ색이란 것은 문의 추(粗)이다. 그러나 진실로 그 추를 놓아버리면 정이란 것이 어디에 부치리오.
배우는 자가 옛사람에 대하여 반드시 처음에는 그 추를 만나고 중간에는 그 정을 만나고 종경(終竟)에는 그 정한 것만 쓰며 그 추한 것은 버려야 하는 법이다. 지금 그 추를 만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정을 만나서, 그 정을 쓰며 그 추를 버리는 데 이를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매양 문(文)을 소도(小道)라 하여 경홀히 여기고 있는데 이는 문을 유희(遊戲)로 삼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며 문이 아니면 도가 부칠 곳이 없게 된다. 그러니 문과 도는 서로 필수적이며 갈라서 둘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역(易)》의 문언(文言)이 문의 조(祖)가 된 것이며 그 말단에 길(吉)한 사람의 말과 조(躁)한 사람의 말을 결부하여 거듭거듭 말하였으니 문의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어찌하여 붓을 잡으면 쉬지 않고 재제(裁制)하는 바도 없이 길을 달려 마구 나가 글자와 글구를 쌓고 쌓음으로써 문을 삼을 수 있겠는가. 이는 더욱이 크게 경계할 바이다. 어느 겨를에 그 정을 만나고 그 추를 만나는 것을 논할 수 있겠는가.

동인(東人)의 병체(騈體)는 임진년 이후부터 갑자기 변하여 송ㆍ원(宋元) 이후의 풍기가 되어 마침내는 하나의 공령문(功令文)의 웅(雄)이 되었다. 이는 근자의 형세로 보아 면치 못할 바이지만 비록 문원(文苑)의 대수필(大手筆)도 대체로 이와 같다.
대저 우리나라의 임진년은 이 무슨 백육(百六)의 대운(大運)이기에 위로는 국가의 전장(典章)으로부터 아래로 여항의 풍속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 없어 지금까지 옛을 회복하지 못했으며 문장ㆍ서화 같은 소도(小道)도 역시 따라서 천사(遷謝)되어 마침내 만회된 것이 없어서 명종ㆍ선조 이상의 왕성한 대아(大雅)의 풍(風) 같은 것은 얻어볼 수 없다.

고문(古文)의 체는 기정(奇正)ㆍ농담(濃擔)ㆍ상략(詳略)에 대하여 본래 일정한 법은 없으나 그 글을 만드는 지의(旨義)를 요약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도를 밝히는 일, 세상을 다스리는 일, 깊숙한 것을 드러내는 일, 속(俗)을 바르게 하는 일들이다. 이 네 가지를 지닌 뒤에 법률로써 묶는 것이다. 무릇 이렇게 한 연후라야 경ㆍ사(經史)를 우익(羽翼)하여 천하 후세에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친척 고구(故舊)에 관한 취산(聚散)과 존몰(存沒)의 느낌에 이르러는 한때에 기억된 바 있어 글로써 선양하여 그 성명(姓名)을 문집 속에 부현(附見)하게 하는 것도 있다.
이는 그 사람의 사적이 원래 고거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일체를 빼버리고 싣지 않은 것이며 본시 기록할 만한 것이 있는데도 글을 만드는 의법(義法)을 위해 생략하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은 아니다.

혼ㆍ계(惲桂) 두 집(集)은 과연 바로 남천이우(南遷二友)라는 말에 비해 그다지 사양할 것이 없겠다.
혼집(惲集)은 십 년 전에 구득한 것인데 이제야 비로소 천풍(天風) 해도(海濤)의 속에서 쾌히 읽게 되니 역시 묵연(墨緣)이 속해 있는 것인가? 그 문은 근대 사람 중에 약간 백력(魄力)이 있어 비록 망계(望溪)의 파류(派流)는 아니지만 망계ㆍ해봉(海峯)ㆍ매애(梅厓)ㆍ석포(惜抱 요내(姚鼐)) 여러 사람들의 지키고 있는 정궤(正軌)를 잃지 않았다. 그러므로 망계로부터 석포에 이르기까지 각각 미사(微詞)가 있기는 하나 현저히 배척하기를 죽정(竹汀 전대흔(錢大昕))과 같이 아니하고 한결같이 정궤로 돌렸으니 역시 조금 공안(公眼)을 가졌으며 분박(噴薄) 규노(叫呶)의 버릇은 내보이지 않았다.
대개 그 인품이 항상(伉爽)하고 문 역시 그와 같아서 왕척보(王惕甫) 같이 초잡(稍雜)하고 원자재(袁子才)의 검색이 없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평심(平心)하여 논한다면 석포의 평아(平雅)와 한담(閒澹)은 끝내 미쳐가기 어려우니 다만 백력(魄力)만으로 뒤덮으려 해서는 안 되며, 석포의 성취한 것도 역시 철저한 곳이 있으니 그를 넘어서는 것은 쉽지 못한 것인데 또 하물며 망계를 올라섰다 할 수 있으랴. 진소현(秦小峴)조미신(趙味辛) 제가도 역시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계집(桂集)은 너무도 영성(零星)하나 역시 한두 가지 볼 만한 것이 있으며 성운(聲韻)을 전치(專治)하였고 고문의 궤칙(軌則)에 이르러는 소장(所長)이 아니다. 그 인품이 매우 높아서 담계(覃溪)ㆍ운대(芸臺)가 자주 칭도(稱道)하였으니 영성한 문자 사이에 있지 않은 모양이다.

의상이 이르러 가지 않는 곳에 / 意想不到處
봉만이 갑자기 절로 열려라 / 峯巒忽自開

산 경지(境地) 곳을 따라 아름다우니 / 山境隨處佳
잘못 찾아와도 역시 기쁘네 그려 / 誤到亦可喜

만약 이 경지를 터득하고 나면 낱낱이 다 도(道)요 일일이 걸림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증남풍(曾南豐)의 시에

흐르는 물 차가워라 더구나 맑고 / 流水寒更澹
비인 창은 깊어도 저절로 밝네 / 虛窓深自明

외길이라 솔 밑으로 들어가 보니 / 一逕入松下
두 봉우리 말 앞에 비끼었구려 / 兩峯橫馬前

호상으로 경구와 마주 앉아라 / 壺觴對京口
말 웃음이 양주에 떨어지누나 / 笑語落揚州

라는 글귀는 다 아름다워 자못 도ㆍ사(陶謝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의 가법을 얻었다 하겠으며, 서중거(徐仲車)진형중(陳瑩中)에게 부친 시는 웅쾌하고 통절하여 소아(小雅)의 항백(巷伯 장명(章名)임) 과 더불어 기풍을 함께 하였으니 이는 정(正)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직(直)으로 기를 기른 공력이다. 어찌 괴방(怪放)하다 하랴. 그는 일찍이 학자에게 이르기를 “문자를 하려거든 섬려(纖麗)는 배우지 말고 모름지기 혼혼(渾渾)하여 고기(古氣)가 있어야 한다.” 했는데, 이는 자기를 두고 말한 것이다. 맹동야(孟東野) 시에,
천지가 가슴속에 들어를 오니 / 天地入胸臆
갑자기 천둥치고 바람이 이네 / 吁嗟生風雷
문장은 그 미묘를 얻었다며는 / 文章得其微
물상은 나에게서 재량이 되네 / 物象由我裁
라 하였으니 시를 논하여 이 지경에 이르면 조화를 배태(胚胎)한 것이다. 또 이를테면,
남산이 천지를 채워 있으니 / 南山塞天地
해와 달이 돌 위에 돋아나누나 / 日月石上生
산중이라 사람이 절로 바르고 / 山中人自正
길은 험해도 마음 역시 평평하구나 / 路險心亦平
일본(一本)에는 이 아래에 “천태산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니, 걸핏하면 적성(赤城)의 놀이 밟히네”라는 열 글자가 있음.
신령한 지경이라 물마다 곧아 / 靈境物皆直
만 그루 솔 하나도 비스듬 없네 / 萬松無一斜
이 등의 글귀는 자못 심경이 공활(空濶)하여 온갖 인연이 물러가버림을 깨닫겠으니 어찌 한검(寒儉)하다고 지목할 수 있으랴.
무릇 시도(詩道)는 광대하여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어 웅혼(雄渾)도 있고 섬농(纖濃)도 있고 고고도 있고 청기(淸奇)도 있으므로 각기 그 성령의 가까운 바를 따르며 일단(一段)에만 매이고 엉겨서는 아니 되는 것인데, 시를 논하는 자들이 그 사람의 성정은 논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습숙(習熟)한 것만으로써 단정하여 웅혼을 치켜들고 섬농을 그르다 한다면 어찌 만상(萬象)을 혼함(渾函)하고 촌심(寸心)이 천고(千古)라는 의가 될 수 있으랴.
이 때문에 두(杜)가 있고 왕ㆍ맹(王孟)이 있고 백(白)이 있고 한(韓)이 있고 의산(義山)이 있고 번천(樊川)이 있고 또 장길(長吉 이하(李賀))ㆍ노동(盧仝)이 있는 것이다. 지금 특별히 증남풍ㆍ서중거를 들고 끝맺음에 맹동야를 든 것은 따로 한 길을 찾자는 것이 아니니 정상(頂上)에 눈이 있는 자는 마땅히 거울과 거울이 서로 비치리라 믿는다. 오당(悟堂) 이아(李雅)가 시상(詩想)이 매우 묘하여 나에게 와서 시도(詩道)를 묻고 또 감산(甘山)의 시를 보여주기에 이를 써서 답한다.
오강의 물일랑 마시지 마소 / 莫飮吳江水
가슴속에 파도가 일까 두렵네 / 胸中恐有波濤起
상강의 고길랑 먹지를 마소 / 莫食湘江魚
분통터져 슬픈 울음 나오게 하네 / 令人寃憤成悲呼
상강 대는 화살을 만들 만하고 / 湘江之竹可爲箭
오강 물은 칼을 갈기 매우 좋거든 / 吳江之水好淬劍
화살로는 소인놈의 심장을 뚫고 / 箭射讒夫心
칼로는 소인놈의 얼굴을 베서 / 劍硏讒夫面
소인놈 심장은 깨졌다 해도 / 讒夫心雖破
가슴속의 쓸개는 오히려 크고 / 胸中膽猶大
소인놈 얼굴은 깨졌다 해도 / 讒夫面雖破
입 안의 혀 상기도 남아 있는 걸 / 口中舌猶在
살아서는 사람의 근심이 되고 / 生能爲人患
죽어서는 귀신 되어 해를 끼치네 / 死能爲鬼害
근심되고 해 끼치니 장차 어쩌리 / 患兮害兮將奈何
두 잔의 막걸리에 긴 노랫가락 / 兩巵薄酒一長歌
바람 향해 뿌리고 물에 흘리어 / 灑向風煙付水波
서산이랑 멱라에 조문하세나 / 遣弔胥山共汨羅
유자산(庾子山)의 시는 대장(對仗)이 가장 공(工)하다. 마침내 육조(六朝) 이후에 오고(五古)를 돌려 오율(五律)을 만드는 시작이라 하겠다. 그는 글귀를 만들되 능히 새롭고 고사를 사용함에 흔적이 없어 하수부(何水部)에 비하면 보다 나을 것도 같다. 무릉(武陵) 진윤천(陳允倩)이 이르기를 “두소릉(杜小陵)은 남(藍)에서 청(靑)이 나오지 못하고 곧장 걸으면 걷고 달려가면 달려가곤 하는 식이다.”라 한 것은 또한 너무나 심한 말이다. 그 명구(名句)로는 보허사(步虛詞)에 이르기를,
한제는 복숭아씨를 바라고 / 漢帝看桃核
제후는 대추꽃을 묻네 / 齊侯問棗花
라 하였고, 산지(山池)에 이르기를,
연꽃바람 멱 감는 새를 놀래고 / 荷風驚浴鳥
교(橋) 그림자에 노는 고기 모여드네 / 橋影聚行魚
라와 우문 내사(宇文內史)에 화답하기를,
나무에는 앵두를 문 새가 잠자고 / 樹宿含櫻鳥
꽃에는 꿀을 캐는 벌이 앉았네 / 花留釀蜜蜂
라와, 군행(軍行)에 이르기를,
변새는 멀어 유엽이 번득이고 / 塞逈翻楡葉
관산은 차니 기러기 털이 떨어지누나 / 關寒落鴈毛
라와, 법연(法筵)에 이르기를,
부처의 영은 호인이 기록하고 / 佛影胡人記
경의 글은 한어로 번역되도다 / 經文漢語翻
라와, 설 문학(薛文學)에게 수답(酬答)하기를,
양장은 구절판을 연대어 잇고 / 羊腸連九阪
웅이는 쌍봉을 마주 대했네 / 熊耳對雙峯
라와, 사람에게 화답하기를,
이른 우뢰 칩호를 놀라게 하고 / 早雷驚蟄戶
날리는 눈 하원을 길게 하누나 / 流雪長河源
라와, 원정(園庭)에 이르기를,
초부 은사 언제나 길 함께 가고 / 樵隱恒同路
사람과 새 더러는 집 마주하네 / 人禽或對巢
라와, 맑은 새벽에 조수에 다다라 이르기를,
잔나비 파람하니 바람 급하고 / 猿嘯風還急
닭이 우니 조수가 밀어 닥치네 / 鷄鳴潮欲來
라와, 겨울사냥[冬狩]에 이르기를,
놀랜 꿩은 매를 쫓아 날아가고 / 驚雉逐鷹飛
뛰는 원숭이 화살을 보고 굴러가네 / 騰猿看箭轉
라와, 사람에게 화답하기를,
여치는 틀이 없이 베를 짜는데 / 絡緯無機織
나는 반디 불을 띠고도 추운가봐 / 流螢帶火寒
라와, 화병을 읊다[詠畫屛]에 이르기를,
돌 험하니 소나무는 가로 꽂히고 / 石險松橫植
바위 매달리니 시내 서서 흐르네 / 巖懸澗竪流
고요를 사랑하여 고기 뛰놀고 / 愛靜魚爭樂
사람에게 의지하니 새 품에 드네 / 依人鳥入懷
라와, 꿈에 당내에 들다[夢入堂內]에 이르기를,
햇빛 받자 비녀 색깔 어른거리고 / 日光釵焰動
창 그림자에 거울꽃이 흔들리누나 / 窓影鏡花搖
라는 등의 글귀는 소릉의 이른바 청신(淸新)이란 것이 자못 이를 두고 이름이라 하겠다.
산중의 재상이라 선골을 지녔으니 / 山中宰相有仙骨
잿마루에 나는 하얀 구름을 사랑하네 / 獨愛嶺頭生白雲
이 그림을 벽에 걸면 놀래 넘어질테니 / 壁張此畫定驚倒
먼저 사람을 불러 부축하라 요청하게 / 先請喚人扶着君
라와,
난산이라 깊은 곳에 아지랑이 노을들이 / 亂山深處是煙霞
자욱한 비 갠 볕에 아침 저녁 아름답네 / 雨暗晴暉日夕佳
알괘라 선생님은 일찍이 여기 와서 / 要識先生曾到此
일부러 희필 남겨 그대 집에 걸렸구려 / 故留戲筆在君家
라는 등은 미원휘(米元暉 미우인(米友仁))의 제화시(題畫詩)인데 너무나 아름다워 한점도 연화(煙火)의 기는 없다.

문장의 논이 정해지기란 고금을 통하여 어려운 일이다. 원자재(袁子才)는 왕완정(王阮亭)의 시를 일컬어 “재주와 힘이 박하다.” 하면서도 부득불 추앙하여 일대(一代)의 정종(正宗)으로 삼았으니 이는 끝내 그가 차지한 지위를 뒤덮어 아주 빼앗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가사 그가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 봐도 재력(才力)과 정종이 함께 의논에 미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장심여(蔣心餘)는 또 당인(唐人)이 임서한 진첩(晉帖)으로써 비교했으니 역시 미사(微詞)라 하겠으나 오늘날에 만약 당모(唐摹)의 한 글자만 얻는다면 그 보배롭고 중함이 또한 진적(眞跡)에 내리지 않을 것이니 어찌 송ㆍ원 이후의 안각(贋刻)과 더불어 논할 수 있겠는가. 매양 굉장한 이름을 가지면 사람들이 다 증오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 깊이 경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능히 그 실지에 부응되지도 못하면서 우뚝이 스스로 거만을 떠는 자에 이르러는 도적도 빼앗으려고 생각하고 있다. 원ㆍ장은 진실로 당시의 척안(隻眼)이나 오히려 도적을 자초함을 면치 못했거든 하물며 이보다 못한 자들이랴.
그러므로 소릉(少陵)의 시에 보이는 “문장은 천고의 일이라면 득실은 촌심이 아는 거로세[文章千古事 得失寸心知]”의 한 마디 말은 전혀 혼전(渾全)하여 고금을 궤뚫은 것이다.
우연히 시를 논한 제십(諸什)을 뒤져보고 부질없이 이렇게 말을 마구 한다. 기우(屺友 강자기(姜慈屺))와 더불어 서로 보고 한번 웃으며 한 통(通)의 해설을 하게 했다.

강엄(江淹)의 의혜휴시(擬惠休詩)에 이르기를,
해 저무니 파란 구름 어울리는데 / 日暮碧雲合
아름다운 사람 자못 오지를 않네 / 佳人殊未來
라 했는데 지금 사람들이 마침내 휴상인(休上人)의 시로 쓰고 있으니 고사가 이처럼 그르친 것은 당(唐)의 시대부터 이미 그러했다.
석양남애(夕陽嵐靄)는 당자화(唐子華)의,
반조는 시내 동쪽을 지나는데 / 返照過溪東
중은 돌아가네 파란 안개 속으로 / 僧歸嵐翠裏
늦은 매미 소리를 실컷 들으니 / 厭聽晩蟬聲
대숲의 동산이 삼사리로세 / 竹園三四里
라를 모방하였고, 나소화(羅小華)의 사경(寫經)의 묵(墨)으로써 운서노인(雲西老人)을 임(臨)했는데,
열 길이라 우담의 저 숲 속에 / 十丈優曇林
현담하자 향기가 얼굴에 붙네 / 玄譚香着面
나무 밑에 경을 외던 그 사람은 / 樹底誦經人
달 비끼니 찾아도 보이지 않네 / 月斜尋不見
라 하였고, 노련(老蓮)은 전주(篆籒)의 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고졸(古拙)한 품이 위ㆍ진(魏晉) 시대의 수필(手筆)과 같아서 마치 고대의 신선 사람을 만난 것 같다. 그 제시에,
적막한 산마을 울타리 안에 / 寂寞山籬下
가을 뽕나무 높이 몇 자일는고 / 秋桑幾尺高
숨은 선비 장 중위를 찾고자 하니 / 欲尋張仲蔚
삼경이 봉호 속에 묻히었구려 / 三徑沒蓬蒿
미숙(美叔)의 제화시(題畫詩)는 연화(煙火)를 먹지 않은 것 같다.
옛사람들은 한 시를 함께 지을 경우라도 반드시 운을 같이 짓지는 않았으며 곧 운을 같이 하더라도 역시 한 운 중에서 가려서 쓰며 반드시 글귀마다 차운(次韻)하지는 않았는데 원ㆍ백(元白 원진(元稹) 백거이(白居易))으로부터 창시되어 피일휴(皮日休)육구몽(陸龜蒙)이 창화(唱和)함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심해져서 운(韻)으로써 주장을 삼고 뜻으로써 서로 따르게 되니 속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얼른 통달하지 못했다.
근대에는 오로지 이로써 장점을 보이며 이름은 화운(和韻)이라고 하지만 실상인즉 운을 따르는 것이니 마땅히 그 혈맥이 가로 뻗히고 구연(句聯)의 뜻이 끊기게 된다. 뜻있는 선비는 마땅히 속상(俗尙)에 얽매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는 심귀우(沈歸愚)의 말이다.

심 진사(沈進士) 두영(斗永)이 기기(奇氣)가 천 길이어서 가어(駕馭)를 할 수 없으며 시(詩) 역시 그 인물과 같아서 평소에 자질구레한 말은 쓰지 않았다. 일찍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우모(羽旄)를 바라보며 지은 시구가 있는데,
산은 만마를 따라 맴돌며 내려오고 / 山隨萬馬逶迤下
구름은 떼 용을 끼고 나풀대며 다니누나 / 雲擁群龍綷行
라 한 것은 심히 기굴(奇崛)하며 금강산에 들어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이생이 마휘령에 먼저 올라 하는 말이 / 李生先上摩暉語
팔월이라 높은 산에 하얀 눈이 쌓였다고 / 八月高山白雪長
옛날에 들은 것은 모두가 황홀할 뿐 / 昔者所聞都怳惚
갑자기 대하자니 지극히 황당하네 / 猝然相對極荒唐
멀리 보니 가을 일러 붉은 잎은 전혀 없고 / 遠看秋早無紅葉
가직이 오니 해 높아도 석양이 많다마다 / 近到日高多夕陽
쉬흔이라 네 해 동안 능사를 다 마치고 / 五十四年能事了
오늘에야 이 몸은 금강에 들었구려 마휘령(摩暉嶺) / 此身今日入金剛
또 그 아름다운 글귀로 이를테면,
각각으로 날아오르니 모두들 노한 듯도 / 落落飛騰如共怒
무리지어 끼고 읍하니 서로가 예쁜가봐 / 群群拱揖似相憐
만 이천봉 꼭대기에 마음 한번 풀어놓으니 / 放心萬二千峯上
오십 년이 지났어라 하계의 전생일레 헐성루(歇惺樓) / 下界前生五十年
또 이르기를,
바람 우레 아래서 이니 말 웃음이 평화롭고 / 風雷下作平談笑
하늘과 땅 중간이 비니 앉고 서기 자유롭네 / 天地中虛任起居
만리라 아득아득 동해의 갓이라면 / 萬里蒼蒼東海上
외로운 봉 우뚝이 선 석양의 처음일레 비로봉(毗盧峯) / 孤峯落落夕陽初
또는,
하늘에서 떨어져 서니 위태롭다 안정되고 / 從天落立危初定
바다 건너 날아오니 기세는 쉬지 않네 백운대(白雲臺) / 超海飛來勢未休
라는 등은 다 창해(滄海)를 거꾸로 뒤집고 은하를 구부려 쏟으려는 뜻이 들어 있다 하겠다.

서법이 변천함에 따라 유파(流波) 또한 혼란되었으니 그 근원을 거슬리지 않으면 어떻게 옛으로 돌려 놓을 수 있겠는가. 대개는 예(隸)의 글자가 변하여 정서(正書)가 되고 행초(行草)가 되었는데 그 전이(轉移)는 한말(漢末) 위ㆍ진(魏晉)의 사이에 있었으며 정서 행초가 남ㆍ북의 양파로 나누어진 것에 대해서는 동진(東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이 남파가 되고 조(趙)ㆍ연(燕)ㆍ위(魏)ㆍ제(齊)ㆍ주(周)ㆍ수(隋)는 북파가 된다.
남파는 종유(鍾繇)ㆍ위관(衛瓘)을 경유하여 왕희지ㆍ헌지ㆍ승건(僧虔)에 미쳐 지영(智永)ㆍ우세남(虞世南)에 이르렀으며, 북파는 종유ㆍ위관ㆍ색정(索靖)을 경유하여 최열(崔悅)노침(盧湛)고준(高遵)심복(沈馥)요원표(姚元標)조문심(趙文深)정도호(丁道護) 등에 미쳐 구양순(歐陽詢) 저수량(褚遂良)에 이르렀다.
남파는 수(隋)의 시대에는 드러나지 못하고 당 나라 정관(貞觀)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드러났다. 그러나 구ㆍ저 여러 인물들이 근본은 북파에서 나왔으며 영휘(永徽) 이후로 곧장 개성(開成)에 이르러는 비판(碑版)이나 석경(石經)이 오히려 북파의 여풍이 흘렀다. 남파는 바로 강좌(江左)의 풍류로서 소방(疏放)하고 연묘(姸妙)하여 계독(啓牘)에 장점을 가졌으나 필획을 감하여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전예(篆隸)의 유법(遺法)도 동진(東晉) 시대에 이미 고치고 변한 것이 많았으니 송ㆍ제는 논할 것도 없다.
북파는 바로 중원의 옛법으로서 구근(拘謹)하고 졸루(拙陋)하여 비(碑)와 방서(牓書)에 장점을 가졌으며 채옹(蔡邕)위탄(韋誕)한단순(邯鄲淳)위개(衛覬)장지(張芝)두도(杜度)의 전ㆍ예(篆隸)ㆍ팔분(八分)ㆍ초서에 대한 유법(遺法)은 수의 말기 당의 초엽에 이르러도 오히려 보존된 것이 있다.
두 파는 갈라짐이 강하(江河)와 같아서 남북의 세족(世族)이 서로 통하여 익히지 않았다.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것은 공통된 논이 아니다. 구양은청(歐陽銀靑)의 구성(九成) 화도(化度) 같은 것은 정호(精毫)가 아니면 불가능하며 추호(麤毫)를 가지고도 정필(精筆)처럼 쓸 따름이다. 삼묘(三泖)에서 윤생(尹生) 시영(始榮)에게 보이다.
“초미(貂尾)는 진재(珍材)로 붓을 만들어 쓸 수 있다.[貂尾珍材眞可筆]”는 것은 바로 황산곡(黃山谷)의 글귀이다. 박혜백(朴蕙百)이 자못 제필(製筆)에 공하여 청서(靑鼠)를 낭호(狼毫)의 상으로 삼으면서 스스로 그 묘리를 얻었다고 여기는 동시에 사람이 혹 그렇지 않다 해도 개의하지 않았다. 그는 급기야 초미를 보고서 크게 칭찬을 하며 품(品)이 낭호나 청서의 위라고 하는데 그 말이 진실로 빗나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밖에 또 초미나 낭호보다 더한 것이 있어 등수(等數)로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겠지만 호영(湖穎)의 여러 품종을 두루 보이어 그로 하여금 그 안목을 넓히게 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옛 선백(禪伯)이 이른바 “지붕 밖에 푸른 하늘이 있으니 다시 이를 보라.”는 말도 있거니와 동쪽 사람들이 원교(圓嶠)의 필에 묶여 있어 다시 왕허주(王虛舟)ㆍ진향천(陳香泉) 여러 거벽(巨擘)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필을 일컫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한번 웃음이 터진다. 천하의 일이란 견정(堅定)하고 주수(株守)하곤 할 수 없는 것이 마침내 이와 같음을 말해 둘 뿐이다.

황모필(黃毛筆)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숭상하는 바이나 살짝 거칠고 미끄러운 흠이 있다. 중국에서 뽑아낸 황영(黃穎) 같은 것은 또 동쪽에서 나와서 통행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와 같은 진재(珍材)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는 나지도 않으며 역상(譯商)들이 다니면서 파는 것은 또 하나의 하품ㆍ열품(劣品)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깨닫지 못한다. 초미는 이것이 중국의 자영(紫穎)과 같은데 중국 사람들은 또 황모(黃毛)를 초호(貂毫)라고 한다. 지금 통행하는 초호 소필은 다 초호라는 두 글자를 새겼는데 역시 우리나라에서 일컫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감히 초ㆍ황의 사이에 이름을 정하지 못하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컫는 청서(靑鼠)도 역시 중국 붓에서는 보지 못했으며 자영(紫穎)이 청서와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한데 자영은 본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컫는 초미요 청서는 아니다.

양호(羊毫)는 효자(孝子)나 순손(順孫)이 부조(父祖)의 뜻을 먼저 알아 받들어 순히 하는 것과 같으며 자영과 같은 일종(一種)은 너무 강하여 완력(腕力)이 약한 자는 거의 쓸 수가 없다.
일찍이 희헌유풍(羲獻流風)이라 새겨진 일종의 필을 보았는데 대나무 같이 강하고 딱딱했다. 유성현(柳誠懸)도 능히 희ㆍ헌의 유법(遺法)으로 된 붓을 쓰지 못한 것은 그것이 너무 강한 때문이었다. 지금 이 종의 붓은 과연 우군이 옛날 만들어 쓰던 그 유제(遺制)로 된 것인지는 모르나 희헌유풍의 위에는 다시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 필이 제일 상품이 되어 양호의 위에 있으니 이 묘법을 터득한 연후라야 필을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컫는 황모나 청서에 이르러는 어찌 대해(大海)의 구경에 참여할 수 있으랴. 곧 오봉루(五鳳樓)에의 옹유(甕牖)와 승추(繩樞)일 뿐이다.

결구(結搆)의 원만(圓滿)한 것은 전법(篆法)과 같고, 표양(飄颺)하고 쇄락(灑落)한 것은 장초(章艸)와 같고, 흉하고 험하여 두려워할 만한 것은 팔분(八分)과 같고, 요조(窈窕)하게 출입하는 것은 비백(飛白)과 같고, 경계(耿介)하여 우뚝이 선 것은 학의 머리와 같고, 울장(鬱杖)하고 종횡(縱橫)한 것은 고예(古隸)와 같으며, 점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붓을 거두는 데 있어 긴하고 중함을 귀히 여기며, 획을 만들 때는 반드시 늑(勒)으로 하는데 껄끄러우면서 더디고, 측(側)은 그 붓을 평평하게 해서는 안 되며, 늑은 그 붓을 뉘어서는 안 되며 모름지기 필봉이 먼저 가야 한다.
노(努)는 곧은 것만이 좋지 않으니 곧으면 힘을 상실하며, 적(趯)은 그 필봉을 보존하여 세(勢)를 얻어서 출봉(出鋒)해야 하며 봉을 끌고 내려가 세를 잡아 가슴을 내밀고 서며, 책(策)은 앙필(仰筆)로 나가 거두어야 하며, 약(掠)은 필봉이 왼편으로 나가되 예리해야 하며, 탁(啄)은 붓을 눕혀 빨리 나가 덮어야 하며, 책(磔)은 전필(戰筆)로서 출발하여 뜻을 얻어 서서히 출봉해야 한다.
무릇 점은 준각(峻角)을 요하여 원평(圓平)을 꺼리고 통변(通變)을 귀히 여기며, 합책(合策)하는 곳의 책은 년(年)의 글자가 그것이며, 합늑(合勒)하는 곳의 늑은 사(士)의 글자가 그것이다. 무릇 횡획(橫畫)이 모두 위는 앙획 아래는 부획(覆畫)으로 하는데 사(士)의 글자를 말한 것이며, 세 횡획이 어울리면 위는 평획(平畫) 중은 앙획(仰畫) 위는 부획(覆畫)으로 되는데 춘(春)ㆍ주(主)의 글자가 그것이다. 무릇 세 횡획에는 다 사용한다. 일설은 상은 앙획 중은 평획 하는 부획이라고 함. 측(側)은 그 붓을 측하여 내려가고 먹은 정(精)해야 하며, 늑은 그 붓을 뉘여서는 안되며 중은 높고 두 머리는 낮은데 필심(筆心)으로써 누른다.
단획(短畫)의 조(祖)로서 제일은 책의 법인데 앙필 역봉(䟐鋒)으로 가벼이 들고 나아가서 마치 편책(鞭策)의 세(勢)와 같이 한다. 두 머리는 높고 중은 낮다. 유종원(柳宗元)은 이르기를 “책은 앙필로 거두어 살짝 쳐든다.” 했다. 기(其)ㆍ천(天)ㆍ부(夫)ㆍ재(才)와 같은 유로써 무릇 단획은 다 책이 된다.
종파(從波)의 ⓐ은 오정(五停)인데 수(首) 일(一), 중(中) 삼(三), 미(尾) 일이요 횡파(橫波)의 ⓐ은 오정인데 수 일, 중 이, 미 이이다. 대체로 앙획을 만들 때에는 준(蹲)을 아니하고 봉으로써 겉으로 싸며, 준(蹲)은 삼면(三面)에 힘이 충만히 가서 순지(順指)로 비스듬히 내려가 힘이 가득차면 살짝 머물러 쳐들면서 삼과(三過)하여 출봉한다. 필획 중에는 또 삼과가 있어 수파(水波)가 기복(起伏)하는 것과 같다. 전(戰)은 전(顫)의 뜻인데 전동(顫動)하며 서서히 나간다는 뜻을 취한 것이며, 준(蹲)은 거(踞)의 뜻인데 돈주(頓駐)의 비유이며, 역(䟐)은 음이 역(歷)인데 가는 것이요, 석(趞)은 음이 석(昔)인데 측행(側行)하는 것이며, 억(抑)은 석행(趞行)하여 더디고 꺼끄럽게 나간다는 뜻이다. 서법에 또 수()가 있는데 수(竪)의 글자와 더불어 뜻이 같다. 수필(筆)이란 것은 짧은 노(努)를 말함이다. 이미 노의 법이 있는데 또 이 조목을 설치한 것은 진실로 췌문(贅文)이다. 각 본에는 또 오기(誤記)하여 수()로 되어 있는데 수()는 그 글자가 없다.
무릇 서를 공부하는 문(門)은 열 두 종의 은필(隱筆)의 법이 있으니 바로 지필(遲筆)ㆍ 질필(疾筆)ㆍ역필(逆筆)ㆍ순필(順筆)ㆍ도필(倒筆)ㆍ삽필(澀筆)ㆍ전필(轉筆)ㆍ와필(渦筆)ㆍ제필(提筆)ㆍ탁필(啄筆)ㆍ엄필(罨筆)ㆍ역필(䟐筆)이다.
무릇 용필(用筆)에 있어 생사(生死)의 법은 유은(幽隱)에 있고 지필의 법은 질((疾)에 있고 질필의 법은 지(遲)에 있다. 역입(逆入) 도출(倒出)하여 세를 취해 가감(加減)하고 때를 살펴 조정(調停)한다. 그 묘리를 믿기까지는 모름지기 공력(功力)이 깊어야 하며 쉽게 얻으려 들면 얻기 어려운 것이다.

붓의 가벼운 것은 양(陽)이 되고 무거운 것은 음(陰)이 된다. 무릇 글자 중에 두 개의 직획(直畫)이 있는 것은 왼편 획은 가늘고 바른편의 획은 굵어야 하며 글자 속의 주(柱)는 굵어야 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늘어야 한다. 이는 음양을 나눈 법이다.

정봉(正鋒) 편봉(偏鋒)의 설이 고본(古本)에는 없었는데 근래 사람들이 오로지 축경조(祝京兆 축윤명(祝允明))를 배우고자 하여 짐짓 이를 빌려 말한 것이다. 정(正)으로써 골(骨)을 세우고 편(偏)으로써 태(態)를 취하는 것은 자연 말자고 해도 말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서가 비록 장봉(藏鋒)을 귀히 여기지만 모호(糢糊)한 것으로써 장봉이라 할 수는 없으며 모름지기 붓을 쓰기를 태아검(太阿劍)이 자르고 베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대개 경리(勁利)로써 세를 취하고 허화(虛和)로써 운(韻)을 취하여 인(印)으로 인주를 찍는 것 같이 하며 송곳으로 모래를 긋는 것 같이 해야만 되는 것이다.

조문민(趙文敏 조맹부(趙孟頫)) 이 용필(用筆)을 잘 하는데 쓰는 붓이 완전(宛轉)하여 뜻과 같이 나가는 것이 있을 때는 그 붓을 선뜻 짜개어 그 정호(精毫)만을 가려서 따로 모은다. 그리하여 붓 세 자루의 정호((精毫)만을 합쳐 필공에게 주어 한 자루로 매게 하면 진서(眞書)ㆍ초서(草書)의 거세(巨細)를 막론하고 던지면 아니되는 것이 없으며 여러 해가 가도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서가(書家)가 이르기를 “진서(眞書)를 쓰면서 능히 전주(篆籒)의 법을 붙여 나가면 고금에 높다.”라 했다.

서법은 시품(詩品)ㆍ화수(畫髓)와 더불어 묘경(妙境)은 동일하다. 이를테면 서경(西京)의 고예(古隸)가 못[釘]을 베고 철(鐵)을 자른 것 같으며 흉하고 험하여 두렵게 뵈는 것은 곧 건(健)을 쌓아 웅(雄)이 되는 의(義)이며, 청춘(靑春)의 앵무(鸚鵡)는 꽃을 꽂은 무녀(舞女)가 거울을 당겨 봄에 웃는 의이며, 유천희해(遊天戲海)는 곧 앞으로 삼신(三辰)을 부르고 뒤로 봉황을 끄는 의로 시와 더불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상(象)의 밖에 초월하여 그 환중(環中)을 얻는다는 한마디 말에 벗어나지 않는다. 능히 이십사품(二十四品)의 묘오(妙悟)가 있다면 서경(書境)이 곧 시경(詩境)인 것이다. 이를테면 뿔을 떼어 놓은 영양(羚羊)과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는 저절로 신해(神解)가 들어 있으니 신(神)으로써 밝혀 나가는 것은 또 종적으로는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은 은술(隱術)로 십수 가지 법이 있으니 지(遲)ㆍ질(疾)ㆍ순(順)ㆍ역(逆)ㆍ도(倒)ㆍ삽(澀)ㆍ전(轉)ㆍ와(渦)ㆍ엄(罨)ㆍ탁(啄)ㆍ제(提)ㆍ역(䟐) 등의 법을 들고 있으니 발등(撥鐙)의 예행(例行)하는 통법(通法)으로써 제한하는 것은 불가하다. 이는 나이 젊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엽등(躐等)하여 나갈 수는 없는 것이며, 삼십 년의 노련한 공력이 있지 아니하면 절대로 망행(妄行)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한예(漢隸)의 한 글자가 해행(楷行)의 열 글자를 당할 만한데 요즘 사람들이 익히는 것은 다 동경(東京) 말에 만들어진 것이며 서경(西京)에 이르러서는 손을 댈 수가 없으니 능히 진예(晉隸)를 만들 수 있는 것만도 역시 다행이다.

예리하고 가지런하고 건강하고 둥근 것은 필의 네 가지 덕이다.

난곡(蘭谷)의 서법은 너무도 해숭위(海嵩尉)의 필의(筆意)를 지녔으니 어찌 그 연원이었던가? 창울(蒼鬱)하고 돈좌(頓挫)하여 속본(俗本)과는 매우 틀린다. 필은 봉(鋒)이 가지런하고 허리가 강한 것을 요하며 벼루는 윤택함과 껄끄러움이 서로 겸하여 거품이 뜨고 먹이 빛나는 것을 취한다.

백양산인(白陽山人)의 서법은 손건례(孫虔禮)양소사(楊少師)의 규도(規度)가 있으니 바로 초법(草法)의 정종(正宗)이다. 초법이 손ㆍ양을 말미암지 않으면 다 진택부(鎭宅符 집 지키는 부적)를 만들 뿐인데 동인(東人)은 더욱 심하여 악찰(惡札)이 아닌 것이 없다.

소재(蘇齋 옹방강의 호)는 원조(元朝)에 참깨 하나에다 천하태평(天下太平)의 네 글자를 썼는데 이때 소제의 나이 칠십팔 세였다. 글자가 승두(蠅頭)와 같은데도 역시 안경도 쓰지 않았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또 원조로부터 금경(金經)을 쓰기 시작하여 종이 한 장을 일과로 삼아 그믐날에 끝마쳐 법원사(法源寺)에 시주했다. 그리고 또 내가 공양하는 대사(大士)의 소정(小幀)에 제자(題字)한 글씨는 몹시 가는데 다 동시의 일이다.

육조(六朝)의 비로서 무평(武平)의 제석(諸石)과 조준(刁遵)ㆍ진사왕비(陳思王碑) 같은 것은 다 극적(劇迹)이며 정도소(鄭道昭)의 비는 곧장 초산명(焦山銘)과 더불어 갑을을 다툴 만하다. 이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비궤(棐几 우군(右軍)을 이름)의 풍류(風流)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랴.

옛사람이 글씨를 쓴 것은 바로 우연히 쓰고 싶어서 쓴 것이다. 글씨 쓸 만한 때는 이를테면 왕자유(王子猷)의 산음설도(山陰雪棹)가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오는 그 기분인 것이다. 때문에 행지(行止)가 뜻에 따라 조금도 걸릴 것이 없으며 서취(書趣)도 역시 천마(天馬)가 공중에 행하는 것 같다.
지금 글씨를 청하는 자들은 산음에 눈이 오고 안 오고를 헤아리지 않고 또 왕자유를 강요하여 곧장 대안도(戴安道)의 집으로 향해 가는 식이니 어찌 크게 답답하지 않겠는가. 지금 서극(西極)의 용매(龍媒)로 하여금 어노(圉奴)의 기적(羈靮)을 받아 준판(峻阪)에 올라가게 한다면 어떻게 섭운(籋雲)의 걸음을 펼 수 있겠는가. 필을 놓고 한번 웃는다.

홍보명(洪寶銘)은 역시 아름답다. 비록 시평(始平) 무평(武平)에 미치지는 못하나 오히려 북조(北朝)의 고격(古格)을 증명할 수 있다.
용용용필(用筆)의 법은 다섯 손가락을 사면에 성글게 벌리며 붓대를 식지 가운데 마디의 끝에 세워 잡아당겨 안으로 향하고, 엄지손가락의 나문(螺紋) 있는 곳으로써 눌러 밖으로 향하며 가운데손가락으로 그 양(陽)을 걸고 무평지와 새끼손가락으로 그 음(陰)을 받치면 손가락은 실하고 손바닥은 비어 운전하기가 편하고 빠르며, 운전하는 법에 있어서는 식지의 뼈는 반드시 가로 대어 필세(筆勢)로 하여금 왼편으로 향하게 하고 엄지손가락의 뼈는 반드시 밖으로 튀어나 필세로 하여금 바른편으로 향하게 해야만 만호(萬毫)가 힘을 가지런히 하고 필봉이 마침내 중으로 가게 된다. 만약 단단히 잡기만 하고 돌리지 않으면 힘은 붓대에만 있고 호(毫)에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구양영숙(歐陽永叔)의 이른바 “손가락으로 하여금 운용하여 완(腕)은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며, 동파(東坡)의 이른바 “비고 너그럽게 한다.”는 것이다. 가로 다붙이는 기(機)는 무명지의 손톱과 육(肉)의 사이에 있으며 밖으로 튀어나는 묘는 가운데손가락의 강하고 부드러운 그 사이에 있는 것이며, 또 “무명지의 손톱과 육의 사이로써 붓대를 떠받아 위로 향하게 한다.”는 말도 있다.

측(側)을 점(點)이라 하지 않고 굳이 측이라 한 것은 측으로 비스듬히 쏟아 점을 만드는 형세가 있음으로 해서이다. 면(宀)의 윗점 같은 것에 이르러는 역시 측이라 불러서는 불가하니 파(波)를 날(捺)이라 하고 별(撇)을 불(拂)이라 하는 호칭(互稱)과는 같지 않다.

“호를 편다[伸毫]”는 것은 바로 고금 서가의 들어보지 못하던 말이다. 필봉은 항상 필획의 안에 있어야 하며 한 획의 속에서도 기복이 봉초(鋒抄)에서 변하며 한 점의 속에서도 육좌(衄挫)가 호망(毫芒)으로 달라진다 하였는데 이는 본시 종유ㆍ 색정 이래의 진결(眞訣)로서 고금을 통하여 바꾸지 못하는 것이며 인(印)과 인처럼 서로 전하는 것이다. 근일에 동인의 이른바 호를 펴는 한 법은 곧 바람벽을 향하여 허위조작한 것으로 전혀 낙착(落着)이 없다. 만약 별(撇)의 말필(末筆)을 만난다면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는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후학들이 다 이의 그르침을 입어 점점 귀굴(鬼窟)로 들어간 것이다.

법은 사람마다 전수받을 수 있지만 정신과 흥회(興會)는 사람마다 스스로 이룩하는 것이다. 정신이 없는 것은 서법이 아무리 볼 만하다 해도 능히 오래두고 완색하지 못하며 흥회가 없는 것은 자체(字體)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기껏해야 자장(字匠)이란 말 밖에 못 듣는다. 가슴속에 잠재한 기세(氣勢)가 글자 속과 줄 사이에 유로(流露)되어 혹은 웅장하고 혹은 우여(紆餘)하여 막자도 막아낼 수 없는 것인데 만약 겨우 점ㆍ획의 면에서 기세를 논한다면 오히려 한 층이 가로막힌 것이다.

박군 혜백(蕙百)이 글씨를 나에게 물으며 서의 원류(源流)를 터득하는 방법을 청하므로 나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글씨에 뜻을 두었었다. 이십사 세 적에 중국 연경(燕京)에 들어가 여러 명석(名碩)들을 만나보고 그 서론(緖論)을 들어본 바 발등법(撥鐙法)이 머리를 세우는 제일의 의가 되며 지법(指法)ㆍ필법(筆法)ㆍ묵법(墨法)으로부터 분항(分行)ㆍ포백(布白)ㆍ과파(戈波)ㆍ점획(點畫)의 법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익히는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한ㆍ위(漢魏) 이하 금석(金石)의 문자가 수천 종이 되어 종ㆍ색(鍾索) 이상을 소급하고자 하면 반드시 북비(北碑)를 많이 보아야만 비로소 그 조계(祖系)의 원류의 소자출(所自出)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악의론(樂毅論)은 당의 시대부터 이미 진본은 없어졌고 황정경은 육조 시대 사람이 쓴 것이며 유교경(遺敎經)은 당 나라 경생(經生)의 글씨이며, 동방삭찬(東方朔贊)ㆍ조아비(曹娥碑) 등의 글씨도 전혀 내력이 없으며, 각첩(閣帖)은 왕저(王著)가 번모(飜摹)한 것으로써 더욱 오류(誤謬)가 되어 이미 당시에 미원장(米元章)ㆍ황백사(黃伯思)ㆍ동광천(董廣川 동기창(董其昌) 같은 이가 일일이 박정(駁正)한 바 있으니 중국의 유식자들은 악의ㆍ황정 등의 서로부터 각첩(閣帖)에 이르러는 다 말하기조차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대개 악의ㆍ황정 등의 서는 만약 근거될 만한 진본이었다면 당의 구ㆍ저ㆍ우(虞 우세남(虞世南))ㆍ설(薛 설직(薛稷),ㆍ안(顔 안진경(顔眞卿))ㆍ유(柳 유공권(柳公權))ㆍ손(孫 손건례(孫虔禮))ㆍ양(楊 양응식(楊凝式))ㆍ서(徐 서계해(徐季海))ㆍ이(李 이옹(李邕)) 여러 사람들의 쓴 글씨가 하나도 황정ㆍ 악의와 같은 것이 없으니 그 황정ㆍ 악의로부터 입문하지 않은 것을 입증할 만하며 다만 여러 북비와는 인과 인이 서로 합할 뿐만 아니라 방경(方勁)하고 고졸(古拙)하여 모릉(模綾)이 원숙한 것은 없다.
근일에 우리나라에서 일컫는 서가의 이른바 진체(晉體)니 촉체(蜀體)니 하는 것은 다 이런 것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며 곧 중국에서 이미 울 밖에 버려진 것들을 가져다가 신물(神物)과 같이 보고 규얼(圭臬)과 같이 받들며 썩은 쥐를 가지고서 봉새를 쪼으려 든다[腐鼠嚇鳳]는 격이니 어찌 가소롭지 아니한가.
혜백은 말하기를 “이 추사의 하는 말을 들어보면 전일에 정(鄭)ㆍ이(李) 여러 사람에게 익히 들었던 것은 모두 남원(南轅)에 북철(北轍)인 격이 아니겠소?" 하므로 나는 또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것은 정ㆍ이 여러 사람들의 허물이 아니다. 정ㆍ이 여러 사람들은 다 천분(天分)은 지녔지만 궁려(窮廬)에 묻혀 있어 옛사람의 선본(善本)을 보지 못했으며 또 유도(有道)의 대방가(大方家)들에게 취정(取正)하지 못하고 모두 옹유 승추(甕牖繩樞)로서 많이 보고 많이 들은 것은 없으나 그 학을 하는 고심(苦心)에 있어서는 무시하지 못할 점이 있다. 그래서 어렴풋이 그림자만 찾고 황홀하게 소리만 어루만져서 내심으로 생각하기를 “천상(天上) 옥경(玉京)의 경루(瓊樓) 금궐(金闕)도 반드시 응당 이렇고 이러리라.” 하며 능히 눈으로 보고 발로 가지는 못했으니 어떻게 경루ㆍ금궐의 실상을 증명할 수 있으랴.
옛날 동파(東坡)가 나한복호(羅漢伏虎)를 찬한 글귀에,
일념의 차로써 / 一念之差
비이에 떨어졌네 / 墮此髬髵
도사가 비민히 여겨 / 導師悲憫
너를 위해 빈탄하도다 / 爲汝嚬歎
너 같은 맹렬로서 / 以爾猛烈
본성 찾기 어렵잖네 / 復性不難
라 하였으니, 제군들도 다 일념의 차로써 타락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맹렬한 것도 역시 본성을 되찾기가 어렵지 않은데 특히 도사의 비민을 만나지 못한 탓이다 하고서 서로 크게 웃었다. 그 실상을 헤아려 보면 실로 정ㆍ이의 허물이 아니니 이는 책비(責備)만 해서는 옳지 않은 것이다.
원교(圓嶠)의 필결에 이르러는 가장 가르침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터럭을 편다는 법이라 하겠는데 이것이 더욱더 틀려나가서 그른 것이 쌓여 옳은 것을 이길 작정으로 구ㆍ저 여러 사람들을 다 무시하고 위로 종ㆍ왕(鍾王)에 접속하려 드니 이는 문 앞길도 거치지 아니하고 곧장 방 아랫목을 밟겠다는 격이라, 그것이 되겠는가.
조자고(趙子固)는 말하기를 “진(晉)을 배우려면서 당 나라 사람을 거치지 않는 것은 너무도 요량없는 것을 내보일 뿐이다. 해서(楷書)에 들어가는 길이 셋이 있으니 화도(化度)ㆍ구성(九成)ㆍ묘당(廟堂)의 세 비(碑)일 따름이다.”라 했으니, 자고(子固)의 때에 어찌 악의ㆍ황정이 없어서 이 세 비를 들어 말했겠는가. 때문에 악의ㆍ황정은 유식자로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황정은 오히려 육조 사람이 쓴 진본이 있어 사람이 다 볼 수 있으니 만약 이를 임서하고 싶으면 바로 우연히 한번 희묵(戲墨)으로 시험하는 데 불과할 따름이며 이 어찌 법을 세우는 정종이라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황정의 진본은 필세가 가볍게 드날려 근일에 행세하는 묵각(墨刻)과는 특별히 다르기만 할 뿐 아니라 빙탄(氷炭)과 훈유(薰蕕)가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하여 진체(晉體)라 일러 집집마다 떠받드는지 모를 일이다.

안평원(顔平原)의 글씨는 순전히 신으로써 나가 이는 곧 저법(褚法)으로부터 왔으나 저와는 일호도 서로 근사한 것이 없다. 황산곡(黃山谷)은 바로 진인(晉人)의 신수(神髓)라 했는데 사람들은 혹 우군의 과파(戈波)가 없다 하여 미사(微詞)가 있으니 다 그 변한 곳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논한 것이다.
근일의 유석암(劉石庵) 같은 이는 동파(東坡)의 서로부터 들어가 곧장 산음(山陰)의 문정(門庭)에 이르렀는데 지금 파서(坡書)의 형상을 가지고서 석암을 가책(苛責)한다면 되겠는가. 고예(古隸)도 역시 이와 같아서 한비(漢碑)를 보면 허화(虛和)하고 졸박(拙朴)하고 흉험가외(凶險可畏)의 상이 있는데 근세 사람들의 천량(淺量)과 소견(小見)으로는 오히려 문형산(文衡山)ㆍ동향광(董香光)의 한 획조차 능히 만들지 못하니, 어떻게 해서 동경(東京)의 한 파(波)인들 만들며 또 어떻게 해서 서경(西京)의 한 횡(橫)인들 만들 수 있으리오.
지금 한비로 현재 보존된 것은 겨우 사십 종류이며 또 잔금영전(殘金零塼)으로도 모추(摹追)할 만한 것이 있는데 촉천(蜀川)과 서로 통하는 곡부(曲阜) 제령(濟寧)의 밖에는 형언할 수 없이 괴괴기기(怪怪畸畸)하여 마치 공양(公羊)의 비상하고 가괴(可怪)한 것은 좌씨(左氏)에만 익숙한 자로는 규측(窺測)할 바 못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의심하여 심한 사람은 혹 묶어 저장해 놓고만 있으니 이 비록 하나의 소도(小道)이나 그 어려움이 이와 같아서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이원교(李圓嶠)가 황산곡의 글씨를 여지없이 논척(論斥)한 것을 보았는데 이는 곧 조미숙(晁美叔)의 말을 주워 모은 것에 불과하며 미숙의 이 말이 이미 산곡에게 감파(勘破)되었다는 것은 몰랐던 모양이다.
대개 논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디고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尊大)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원교마냥 곧장 당ㆍ송ㆍ육조를 뛰어넘어 지레 산음의 비궤(棐几)를 침범하려 드는 것은 바로 지붕 밖에 푸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격이다.
원교는 십가(十駕)로도 안평(安平)ㆍ석봉(石峯)에게 미치지 못하고 또 안평ㆍ석봉은 십가로도 동현재(董玄宰)에게 미치지 못하고 현재는 또 십가로도 동파(東坡)와 산곡에게 미치지 못할 터인데 그런 처지로서 어떻게 함부로 산곡을 논한단 말인가. 원교의 글씨는 어찌 일찍이 산곡의 파절(波折)의 법만이라도 지녔던가. 만약 원교가 파절을 모른다 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크게 놀랄 터이지만 실상은 파절의 오정(五停)하는 고법을 모른다.

조자고는 말하기를 “진(晉)을 어찌 쉽게 배울 수 있으랴. 당(唐)을 배우면 오히려 규구(規矩)는 잃지 않는다. 진을 배운다면서 당 나라 사람을 따르지 않는 것은 너무도 요량 모르는 것을 내보일 뿐이다. 해서(楷書)에 들어가는 것이 겨우 세 가지가 있으니 화도(化度)ㆍ구성(九成)ㆍ묘당(廟堂)이다.”라 했다. 지금 조자고의 시대를 들어 말하자면 이미 육칠백 년이 지났으니 지금 통행하는 황정ㆍ악의ㆍ유교 등의 법서 같은 것은 어찌 자고가 이를 보지 못했겠는가. 그렇지만 반드시 이 세 비만을 뽑아든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황정은 산음(山陰)의 글씨가 아니며 악의론은 이미 그때에 선본(善本)이 없어져서 표준으로 삼을 수 없으며 유교는 곧 당의 시대 경생(經生)의 글씨라 부득불 이 세 비에서 구할 수밖에 없으며 비록 석본(石本)이라 할지라도 원석이 상기 보존되어 있으니 진적(眞跡)에 비하여 한 등급이 낮지만 후세 석각(石刻)의 자꾸자꾸 서로 번모(飜摸)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서법은 신라 고려 두 시대에 오로지 구체(歐體)만을 익혀서 지금 남아 있는 구비(舊碑)로써 오히려 그 한두 가지를 거슬러 얻을 수 있는데 본조부터 이래로는 다 송설(松雪)의 한 길로만 쏠리었다. 그러나 신장(申檣)ㆍ성임(成任) 같은 여러 분들이 쓴 문방(門榜)의 액(額)은 웅기(雄奇)하고 고아하여 대단히도 옛법을 지녔으며 석봉에 이르러도 비록 송설의 기미는 있으나 역시 정성껏 옛법을 따랐던 것이다.
뒤에 와서 스스로 힘을 다하여 고법을 만회한다고 여기는 자들이 걸핏하면 다 황정ㆍ악의의 진체(晉體)를 말하고 있는데 모르괘라 황정ㆍ악의는 과연 이것이 무슨 본이었던가.
마침내 원교에 이르러는 또 예로부터 내려온 유규(遺規)를 다 말살하고 한 법을 억조(臆造)하여 붓 잡는 법에 있어서도 현비(懸臂)와 발등(撥鐙)을 익히지 아니하고 결자(結字)에 있어서는 “왼편은 위를 가지런히 하고 바른편은 아래를 가지런히 한다.”는 등의 법으로 예로부터 감히 바꾸지 못한 것을 알지도 못하며 온 세상이 육침(陸沈)이 되어 거의 돌이켜 깨닫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서가의 하나의 큰 변이라 하겠다.

글씨를 배우는 자가 진을 쉽게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당 나라 사람을 경유하여 진에 들어가는 지름길을 삼는다면 거의 그릇됨이 없을 것이다.
고현(古賢)이 글자를 만듦에 있어 공중에 올려 곧장 내림으로써 능히 신품(神品)에 들어가지 않는 자가 없는데 이는 현비(懸臂)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현비를 하면 공제(空際)에서 선전(旋轉)하여 가는 곳에 따라 살찌건 여위건 간에 다 묘취(妙趣)를 이룬다. 그러므로 장득천(張得天) 사구(司寇)는 글씨를 배움에 있어 먼저 현비를 하고서 원권(圓圈)을 그려 삼개월이 지나 그 권자(圈子)가 둥글고 깨끗하며 순숙(純熟)할 때를 기다려서 붓을 쓰면 자연히 주경(遒勁)하고 원전(圓轉)하여 여유가 작작하며 붓을 눌러 글자를 만들면 스스로 편봉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다만 권자만으로는 다 되지 못하며 지운(指運)으로써 참(參)해야 한다.

종정(鍾鼎)의 고문자는 다 예법(隸法)이 이로부터 나오게 된 것이니 예를 배우는 자가 이를 알지 못하면 바로 흐름을 거스르고 근원은 잊어버린 격이다.

우리들이 한예(漢隸)의 글자를 배웠다지만 모두 결국 당예(唐隸)를 쓰게 되고 만다. 그러나 당예도 미쳐가기 어렵다. 당예는 하나의 명황(明皇) 효경(孝經)에만 그치고 말 따름이 아니다. 한비(漢碑)에 없는 글자는 함부로 만들어 내서는 안 되며 만약 당비(唐碑)에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 모양에 의해 만들 수도 있으니 전체(篆體)와 같이 지극히 엄하지는 않다. 전자(篆字)는 결코 당으로 흘러가서는 안 되니 비록 이소온(李少溫)의 전(篆)이라도 단연코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강백석(姜白石 강기(姜虁))이 수장한 정무난정(定武蘭亭)은 바로 조자고(趙子固)의 낙수본(落水本)이다. 소미재(蘇米齋 옹방강(翁方綱)의 재호임)가 손수 모(摹)하여 호리(毫釐)의 차와(差訛)도 없다. 또 강개양(姜開陽)이 산음(山陰)에서 각을 했으니 난정이 강씨에게 있어 크나큰 묵연(墨緣)이라 하겠다.

서가(書家)는 반드시 우군의 부자(父子)를 들어 준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왕(二王)의 서는 세상에 전본(傳本)이 없으며 진적으로 상기 보존된 것은 쾌설시청(快雪時晴)과 대령(大令)의 송리첩(送梨帖) 뿐이어서 모두 계산해도 백자(百字)를 넘어가지 않으니 천재(千載)의 아래에 있어 비궤(棐几)의 가풍을 추소(追溯)할 것은 이에 그칠 뿐이다. 이 역시 내부(內府)로 들어가서 외인으로는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모(劉摹)나 장각(章刻) 같은 것은 오히려 한번 번모(飜摹)한 것으로서 모법(摹法)이나 각법(刻法)이 하마 송ㆍ원 시대에 미치지 못하는데 또 어찌 양모(梁摹) 당각(唐刻)을 상대하여 논할 수 있으랴.
육조(六朝)의 비판(碑版)은 자못 전본(傳本)이 있어 구ㆍ저가 모두 이에서 나왔다. 그러나 송ㆍ원(宋元)의 여러 분들이 그다지 칭도(稱道)함이 없는 것은 그 이왕(二王)의 진적이 지금과 같이 다 없어지지는 않은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마땅히 북비(北碑)로부터 하수(下手)해야만 제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초산명(焦山銘)ㆍ예학명(瘞鶴銘)은 곧 육조 사람의 글씨이며 또 정도소(鄭道昭)의 여러 석각 같은 것도 다 볼 만하다. 황산곡 같은 이는 자주 초산(焦山)은 언급했지만 정(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역시 이상한 일이다.

형방비(衡方碑)ㆍ하승비(夏承碑)를 올려 보내는데 하승비의 원석(原石)은 이미 있지 않으며 이는 다 중각(重刻)한 통행본이다.

윤백하(尹白下)의 글씨는 문형산(文衡山)에게서 나왔는데 세상이 다 알지 못하며 우선 백하(白下) 자신도 또한 말하지 않았다. 문(文)의 글씨로서 소해(小楷) 적벽부 묵탑본(墨塌本)이 우리나라로 건너온 것이 있는데 백하가 전심하여 이것을 배웠다. 그 짧은 수획(竪畫)의 위는 풍성하고 아래는 빤 것은 바로 문(文)에게서 얻어온 법인데 문의 서는 청완(淸婉)하고 경리(勁利)한 반면 백하는 살짝 둔하고 조금 살찌며 우선 문의 결구는 다 구ㆍ저(歐褚) 안ㆍ유(顔柳)의 서로 전하는 옛 식에 들어 맞는데 백하는 다 되는 대로 썼으며 한 글자의 안에서 그 횡(橫)ㆍ수(竪)ㆍ점(點)ㆍ날(捺)에 따라 늘어놓기만 했다. 그러나 그 천품이 매우 특이한데다 인공마저 더하여 끝내 하나의 가수(家數)를 이룬 것은 형산을 비근하다 여기지 아니하고 머리를 숙여 배우고 익히곤 하여 먼 데로 치달려 스스로 대단한 척하기를 근래의 종ㆍ왕을 망칭(妄稱)하는 사람같이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해(大楷)의 금석비판(金石碑版) 전면(前面) 글자는 오로지 파공(坡公)의 표충비(表忠碑)를 법받았으며 그 반초(半艸)는 미남궁(米南宮)을 귀숙(歸宿)으로 삼아서 모두가 송인(宋人)의 권자(圈子) 밖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곧 그 식력(識力)이 크게 상량(商量)을 가진 곳이다.
그 문하에서 진수를 얻은 사람으로는 원교를 제일로 삼거니와 원교의 초년에 쓴 해자는 곧 사문(師門)과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어 한 솜씨와 같았다. 실상 모를 일은 단지 사문의 써낸 것에서만 배우고 일찍이 한번도 사문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는 더듬어 보지 않은 점이니 이는 또 웬일이며 사문 역시 자기의 나온 바를 일러주지 않은 것은 또 웬일인가.
다시 생각하면 사도(師道)가 너무도 엄하여 감히 함부로 묻지 못했던 것이었던가. 사문이 일러주지 않은 것도 또한 박(璞)을 보여주지 않은 의에서였던가.
백하는 양호필(羊毫筆)을 썼던 모양이다. 서단양(徐丹陽)은 일찍이 말하기를 “사문의 쓰는 붓을 보니 중국의 대호로써 희기가 눈 같은데 끝내 무슨 붓이 되는지를 알지 못했고 또한 끝내 청해 묻지도 못했다.”고 했다. 대개 옛사람은 사도(師道)가 엄하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서ㆍ이(徐李)는 모두 그 고족(高足)이며 이(李)는 또 그 필법마저 물려받았으나 모두 양호인지는 알지 못했으며 비록 알았다 해도 백하는 능히 부려 쓸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필성(筆性)으로 보아 맞지 않을 것이다.

강표암(姜豹庵) 글씨는 바로 저하남(褚河南)에서 나왔으나 역시 어디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백하와 같으니 옛사람들은 이와 같은 곳이 많았다.

미남궁(米南宮 미불(米芾))의 글씨는 나양(羅讓)에게서 나왔는데 세상은 다만 미(米)를 알 뿐이요, 나(羅)가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난정(蘭亭)은 하나는 구(歐)의 모본(摹本)이요, 하나는 저(褚)의 임본(臨本)으로서 구는 구의 체가 있고 저는 저의 체가 있는데 세상에서는 다만 산음(山陰)의 것인 줄만 알고 도리어 이것은 구, 이것은 저임을 알지 못하며 만약 구ㆍ저의 서(書)를 들어 말을 하면 비록 구성(九成)ㆍ화도(化度)ㆍ삼감(三龕)ㆍ성교(聖敎 저(褚)의 안탑성교(雁塔聖敎)를 말함)라도 모두가 경홀히 여긴다. 중국 사람들은 일찍이 이와 같지 않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말살하려 든다. 이를테면 송ㆍ원의 여러 사람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침폄(鍼砭)하려 들며 서경(西京)ㆍ동경(東京)으로 곧장 뛰어넘어 올라가려 하나 그 실상인즉 화도ㆍ삼감을 보지도 못하고서 공연스레 허세와 공갈로만 오만을 부리는 것이다.
미남궁은 저임(褚臨)을 들어 천하의 제일로 삼았는데 그 당시에는 정무본(定武本)이 적지는 않았으나 반드시 저(褚)를 중히 여겼으니 남궁의 감식(鑑識)은 의당 참증한 바 있어 뒷사람의 천량(淺量)으로는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황 산곡(黃山谷) 같은 이는 또 정무본은 추켜들었으며 강백석(姜白石)ㆍ조이재(趙彝齋)가 다 정무를 진(眞)으로 삼았으니 후세 사람들이 정무를 일컫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상세창(桑世昌)유송(兪松) 여러 감상가들은 오로지 정무를 제일로 삼지 아니하고 아울러 저본(褚本)을 들었다.

악의론(樂毅論)의 양모ㆍ당각(梁摹唐刻)은 이미 북송(北宋) 시대부터 대단히 드물었으며 근세에 유행하는 속본(俗本)은 바로 왕저(王著)의 글씨이다. 동쪽 사람들은 더욱이 감별이 없어서 비궤(棐几)의 진영(眞影)으로 인식하고 아이 때부터 머리가 하얗토록 익혀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마치 채구봉(蔡九峯 채 침(蔡沈))이 전(傳)을 한 서경(書經)의 고문(古文)은 다 매색(梅賾)의 위본(僞本)임을 모르는 것과 같다.
서와 화(畫)는 도가 한 가지이다. 화가가 반드시 위로 조불흥(曹不興)장승유(張僧繇)만 찾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만약 왕우승(王右丞 왕유(王維))의 강간설재(江干雪霽) 전본(傳本)이나 오도현(吳道玄)의 보살천왕(菩薩天王) 모필(摹筆)을 얻는다면 받들기를 천구(天球)와 홍벽(弘璧)같이 한다. 송의 연문귀(燕文貴)역원길(易元吉)의 것 같은 것도 세상에 드문 보배로 삼으며 원의 사대가(四大家) 조송설(趙松雪) 예운림(倪雲林) 황대치(黃大痴) 왕몽(王蒙)를 말하더라도 역시 그 진본은 얻기 어렵다. 비록 명의 심석전(沈石田)ㆍ유완암(劉完庵)ㆍ문형산ㆍ동향광 같은 지극히 가까운 시대 사람들의 작품도 보기를 금과 옥조(金科玉條)처럼 하는데 글씨만은 그렇지 아니하여 반드시 종ㆍ왕을 준칙으로 삼으며 이것이 아니면 선뜻 다 경홀히 여긴다.
무릇 구ㆍ저 같은 이는 다 진인(晉人)의 신수(神髓)인데도 이원교는 방판(方板)이라 칭하여 하찮게 여기며 “우군은 이렇게 쓰지 않았다.” 하고 있으나 그 평생을 두고 익힌 것은 바로 왕저가 쓴 악의론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동향광은 바로 서가로서 하나의 큰 결국(結局)인데도 마구 말살하여 넘어뜨리고 있지만 중국 사람들은 동이 임서한 난정시(蘭亭詩)를 난정의 팔주첩(八柱帖) 안에 꽂아넣어 적파(嫡派) 진맥(眞脈)이 서로 전하는 것과 같이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목이 훨씬 중국의 감상가들보다 나아서 그렇단 말인가. 너무도 요량 없음을 보여줄 뿐이다.
만약 원교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고 창정(暢整) 경객(敬客)의 글씨로 향하여 배우고 익혔더라면 그만한 천품으로써 구ㆍ저를 거슬러 가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니 또한 반드시 깊이 가책(苛責)을 가할 것도 아니다.
이왕(二王)의 진적으로 지금도 오히려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우군(右軍)의 쾌설시청(快雪時晴) 원생(袁生) 등의 첩(帖)과 대령(大令)의 송리첩(送梨帖) 같은 것인데 이런 것도 그들은 다 심상(尋常)히 거쳐 가고 심상히 모습(摹習)하는 터이며 또 우모난정(虞摹蘭亭)ㆍ저본난정(褚本蘭亭)ㆍ풍(馮)의 난정ㆍ육(陸)의 난정ㆍ
개황난정(開皇蘭亭) 같은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찌 꿈엔들 이에 미쳤으랴. 이러한 도리를 알지 못하고 한결같이 미오(迷誤)되어 돌아오지 못하며 삼전(三錢)의 계모필(鷄毛筆)을 견집하여 걸핏하면 진체(晉體)라 칭하고 있으나 그들의 말하는 진체는 과연 무슨 본인고 하면 왕저의 악의론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아니하랴.
우연히 손과정(孫過庭 손건례 (孫虔禮))의 사자부(獅子賦)ㆍ임조(林藻)의 심위첩(深慰帖)을 펴보고 저도 몰래 신이 나서 한번 써 보았는데 손ㆍ임은 곧 진인(晉人)의 규칙이다. 초법(草法)을 배우고자 하면서 손의 문경(門逕)을 말미암지 않으면 또 촌구석 가게에나 술집 바람벽에 붙이는 하나의 진택부(鎭宅符)의 악찰(惡札)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가슴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 서품(書品)이나 화품(畫品)이 다 한 등급을 뛰어나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다 속장(俗匠) 마계(魔界)일 따름이다.
구(歐)의 서는 기화(奇花)가 갓 맺은 것 같아서 함축하고 드러내지 않는다. 옹사탑명(邕師塔銘)은 그 신(神)이 행하고 환(幻)이 나타난 곳으로서 사람들이 그 그림자나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저의 삼감(三龕)ㆍ맹법사(孟法師)ㆍ성교(聖敎) 등의 서는 해[歲]가 새로워짐을 보는 것 같고 꽃이 벌어지는 것을 만난 것 같아 유행하고 변형(變形)하여 헤아릴 수 없지 않는 것이 없다. 화엄누각(華嚴樓閣)이 한 손가락으로 탄개(彈開)하는 것은 미륵이 아니고서는 이를 판출(辦出)할 수 없고 선재(善財)가 아니면 이에 들어갈 수 없어 바라볼 수는 있어도 나아가지는 못한다.

서(書)는 현완(懸腕)ㆍ발등(撥鐙)ㆍ포백(布白) 등의 법과 부앙(俯仰)ㆍ향배(向背)ㆍ상하(上下)ㆍ조응(照應)에 여러 묘(妙)가 있으며 점과 획이 청초(淸楚)하고 장법(章法)이 구비해야 되는 것이다. 우선 종ㆍ색(鍾索) 이래로 능히 바꾸지 못하는 한 법식이 있으니 좌우의 글자 이것이다. 우가 짧으면 아래를 가지런히 하고 좌가 짧으면 우를 가지런히 하며 간가(間架) 결구(結搆)의 팔십여 격(格)도 이로부터 들어가지 아니하고서 함부로 한 획을 긋고 맹목적으로 한 파(波)를 뽑기를 근일의 속장(俗匠)과 같이 전도(顚倒)하고 창광(猖狂)하면 모두 다 이 악찰(惡札)일 뿐이다.
영정본(穎井本)ㆍ왕문혜본(王文惠本)은 소재(蘇齋)가 그다지 허여하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소재의 정법안(正法眼)만이 심정(審定)할 바이며 얕은 사람으로는 또 망령되이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상구진씨(商邱陳氏)의 송탁구본(宋拓舊本)은 운대(芸臺)가 이것을 정무(定武)의 원석(原石)이라 하였고 소재(蘇齋)는 송의 번본(飜本)이라 했으니 소재의 정확은 마땅히 특식(特識)을 갖추어 범안(凡眼)으로는 능히 뚫고 갈 바가 아니다.
운대는 고목난원본(古木蘭院本)을 두 돌에 각하여 하나는 고목난원에 두고 하나는 문선루(文選樓)의 가숙(家塾)에 두었으며 전매계(錢梅溪) 영(泳)은 조오흥(趙吳興 조맹부(趙孟頫))의 십삼발(十三跋)을 각했는데 이는 불에 타지 않은 이전의 완본이다.
조자고의 낙수본은 장씨(蔣氏)의 집 물건이 되었는데 소재가 빌려다 재중(齋中)에 두고 평소에 공력들인 것이 이에 있었다. 근자에 들으니 역시 내부(內府)로 들어갔다 한다. 조오흥(趙吳興) 십삼발의 이미 타다 남은 것은 현재 영후재(英煦齋)에 소장되어 있는데 역시 소재의 품정(品定)을 거친 것이다.

난정첩(蘭亭帖)은 다 당 태종(唐太宗) 때에 비로소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수(隋) 나라 개황(開皇) 연대에 이미 각본(刻本)이 있었다. 그 “변재(辨才)가 단단히 감춰둔 것을 소익(蕭翼)이 속여서 내왔다.”라는 말을 준신하여서는 아니될 것 같다. 지금 통행하는 정무본은 바로 구모(歐摹)요, 신룡본(神龍本)은 저임(褚臨)인데 구는 구의 체가 있고 저는 저의 체가 있으니 모르괘라 이 두 본 중에 어느 것이 과연 산음의 진영(眞影)이었던가?
미남궁은 저본을 평생의 진완(珍玩)으로 삼았고 황산곡은 정무본을 가장 칭찬했다. 그래서 송ㆍ원 이래로 정무본이 마침내 세상에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감상가들은 또 많이 저본을 주장하여 정무와 더불어 서로 갑을(甲乙)하였다.
회인(懷仁)이 성교서를 집자(集字)할 때에 혹은 구본의 글자를 취하기도 하고 혹은 저본의 글자를 취하기도 했다. 그때에 궁중에 수장된 것도 역시 각각 두 본이 있어 아울러 취한 것이니 다 진(眞)을 모하는 데에 해로움이 없어서 그랬던 것인가? 탕(湯)ㆍ풍(馮) 같은 여러 모본에 이르러는 또 어느 곳에 유장(留藏)되었던 것인가? 지금 중국 내부(內府)에 수장된 것은 백 수십 본이어서 그 사이에는 기체(奇體)도 많아 또 지금 통행본과는 크게 다르다고 한다. 그렇다면 단지 지금 통행하는 양 본을 난정의 진면으로 삼는다면 또 하나의 각주구검(刻舟求劍)에 불과하다 하겠다.
소릉(昭陵)에서 발굴한 이래 옥갑(玉匣)의 진본이 다시 나와 장사꾼의 손으로 들어가서 정강(靖康 송휘종(宋徽宗)의 연호) 연간에 직녀(織女)의 지기석(支機石)과 더불어 서울에 팔러온 것을 가사도(賈似道)가 직접 목도하였는데 이윽고 휘종(徽宗) 흠종(欽宗)이 북으로 가게 되어 마침내 그 물건이 간 곳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신물(神物)은 반드시 연운(煙雲)과 더불어 환멸(幻滅)할 리는 없고 마땅히 인간에 있을 텐데 특별히 사람들이 묵륜(墨輪)의 윤전(輪轉)할 때를 만나지를 못하고 있으니 오직 가섭(迦葉)의 출정(出定)한 해를 기다려야만 다시 제본(諸本)을 감험(勘驗)할 수 있을 것이다.

진(晉)ㆍ송(宋)의 사이에는 세상이 헌지(獻之)의 서를 중히 여기고 우군의 서는 도리어 중히 여기지 않았다. 양흔(羊欣)이 자경(子敬)의 정ㆍ예(正隸) 서를 중히 여겨 세상이 모두 존중하였던 것이다.
양(梁) 나라가 망한 이후로 비각(祕閣)에 수장된 이왕(二王)의 서가 처음으로 북조(北朝)에 들어가서 진위(眞僞)가 혼잡되어 당시에도 이미 분변하기 어려웠다.
도 은거(陶隱居)가 양 무제(梁武帝)에게 답한 계(啓)에 이르기를 “희지(羲之)가 선령(先靈)에 고하고 벼슬하지 않은 이후로는 대략 자수(自手)로 쓰지 아니하고 대서(代書)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세상이 얼른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그 느리고 다른 점을 보면 만년의 글씨라서 이렇다고만 했으나 그 실은 우군의 진서가 아니다. 자경이 나이 십칠팔 세에 전혀 이 사람의 글씨를 모방했다.”고 했다.
지금 이왕(二王)의 글씨는 일단 이와 같이 분별하기 어려운데 나아가서 경서를 읽으며 낡은 것만 고수하고 빠진 것을 안아서 끊어지지 않음이 실낱과 같은 것이 또 어찌 하나의 서가와 대비해 논할 수 있는 정도랴. 이는 학자로서 열백 번 신중히 생각해야 할 곳이다.
성저(成邸 성친왕(成親王))의 글씨는 송설(松雪)로부터 들어갔는데 늦게는 구의 화도비ㆍ송탁구본을 얻어 차츰 변하여 깊이 그 당오(堂奧)에 들었으며 초서의 법은 더욱 손건례(孫虔禮)의 구법(舊法)에 특장(特長)이 있어 악찰의 진택부(鎭宅符)의 속습을 깨끗이 씻어냈으니 족히 뒷사람의 법식이 될 만하다.
이 권은 대개 조(趙)의 필의가 많지만 그러나 한 체로 이름짓지 않고 종왕의 여러 법이 각각 그 묘를 나타냈다. 고순첩(苦荀帖)은 그가 수장한 것이며 내부(內府)에 비장한 진ㆍ당 이래의 극적(劇迹)은 다 그가 익숙히 익혀 침자(枕藉)하던 것이니 아무리 잘 쓰고 싶지 않지만 되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내력도 알지 못하는 각첩(閣帖)ㆍ난정ㆍ악의를 가지고서 곧장 산음의 정맥을 거스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삼가촌락의 동홍(冬烘) 선생이 고두강장(高頭講章)으로서 소릉(召陵) 북해(北海)에게 버티고자 하는 것이다.

일찍이 법원사(法源寺)에서 성친왕이 쓴 찰나문(刹那門)이라는 삼대자(三大字)를 보았는데 금시(金翅)가 바다를 가르고 향상(香象)이 바다를 건너가는 기세가 있어, 우리나라의 석봉으로는 열이라도 당해낼 수 없거니와 만약 다시 석암(石庵)ㆍ담계(覃溪)의 웅강(雄强)이라면 또 어떤 구경거리를 만들었을는지, 자신도 모르게 망연자실이 된다.

지영선사(智永禪師)는 철문한(鐵門限)을 만들고서 그 선조 우군의 가법을 독실히 익혀 횡획은 반드시 여위고 직획은 반드시 살찌니 이는 필세(筆勢)의 자연으로 말자도 말지 못하는 곳이다.
우군의 글씨도 역시 이와 같아서 혹은 은봉(隱鋒)하여 쓴 것도 있는데 그 절각(節角)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흔연한 일색(一色)으로 되어 비ㆍ수(肥瘦) 대ㆍ소(大小)의 구분이 없으나 자세히 보면 역시 차등이 있다. 이는 서가(書家)가 모를 깎아 원을 만드는 하나의 전변(轉變)인 것으로서 마치 양한(兩漢)의 문체가 종경에는 글귀를 단련하고 글자를 조탁하며 누런 것을 뽑아 흰 것과 대하여 문선(文選)의 이(理)로 된 것과 같다. 지금의 글씨 쓰는 자는 이러한 원류를 알지 못하고 걸핏하면 글씨란 크로 작은 획이 없다 하여 드디어 그 음양ㆍ향배ㆍ추세(麤細)ㆍ비수(肥瘦)로써 예로부터 일정하여 감히 바꾸지 못하는 체식(體式)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하나의 산자(算子)를 만드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종ㆍ색(鍾索) 이하의 서가는 다 전하는 비결이 없고 오직 입과 입으로 서로 주고받고 할 뿐이었는데 지영(智永)에게 와서 비로소 영자팔법(永字八法)을 글로 만들어 놓았으며 또 야(也)의 글자의 한 법이 있었으나 오로지 과구(窠臼)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팔법이 차츰 변하여 칠십여 칙(則)이 되었으며 또 은술(隱術)로 십여의 필이 있어 언어와 문자로는 형용할 바 아니니 신(神)으로써 밝혀나가야 할 것이다.

백정(白丁)은 운남(雲南)의 중인데 난초를 잘 그렸다. 매양 문을 닫고 혼자서 그리며 물로써 그 지면에 뿜어 먹빛이 나를듯이 피어나는데 아무도 그 법을 터득한 자 없고 오직 정판교(鄭板橋)만이 그것을 배웠다. 백정(白丁)의 난정에 제함.

이는 봉안(鳳眼)과 상안(象眼)으로 통행하는 법인데 이것이 아니면 난을 만들 수 없다. 비록 이것이 소도(小道)지만 법이 아니면 이루지 못하는데 하물며 나아가 이보다 큰 것에 있어서랴.
그렇기 때문에 잎 하나 꼭지 하나도 스스로 속이지 못하거니와 또 남을 속여서도 안 된다. 열 눈이 보는 바요 열 손이 가리키는 것이니 얼마나 무서운가. 이 때문에 난(蘭) 그림에 손을 대고자 한다면 마땅히 스스로 속임이 없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자고(趙子固)가 그린 난은 한 획 한 획이 좌로 향했다. 소재노인(蘇齋老人)이 자주 칭했다.

원 나라 사람이 그린 그림은 고묵(枯墨)으로써 시작하여 차츰차츰 먹을 쌓아 나가므로 끝마치지 못한 나무와 탑용(闒茸)한 산도 다 천기(天機)를 따라 얻어냈다. 대치(大痴)는 대치의 준(皴)이 있고 운림(雲林)은 운림의 준이 있으니 인력을 빌려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오(靜悟)는 청록(靑綠)을 연구한 삼십 년에 원인(元人)의 필로써 당인(唐人)의 기운을 운전하고 송인(宋人)의 구학(邱壑)을 만들었는데 붓끝에는 금강저(金剛杵)가 있어 천마(天馬)가 공중을 다니는 것도 같고 천의(天衣)가 꿰맴이 없는 것도 같고 신룡(神龍)이 머리만 나타내고 꼬리를 보이지 않는 것도 같았다.

백목단(白牧丹)을 두고 지은 시에 이르기를,
신선의 무리 속에 풍류롭긴 쉽지마는 / 神仙隊裏風流易
부귀의 마당 안에 본색 갖긴 어렵구려 / 富貴場中本色難
라 했고, 백도화(白桃花) 시에 이르기를,
후정의 노래 멎자 술기운이 다 깨고 / 後庭歌罷酲初醒
전에 간 사람 오자 귀밑 하마 하얗도다 / 前度人來鬢已華
라와, 또,
식국을 망하기는 홍분의 누로써요 / 亡息國因紅粉累
진인을 피한 것은 바로 백의의 존자로세 / 避秦人是白衣尊
라 한 것이 있으니, 시란 이(理)를 말하지 아니해도 참으로 이를 말한 것이 있다. 이를테면 당 나라 사람이 바둑을 두고 읊기를,
인심이 헤아릴 수 없는 곳엔 / 人心無算處
국수도 지고 말 때가 있구려 / 國手有輸時
와 돛을 두고 읊기를,
하마 몸이 머문 줄만 알았는데 / 恰認己身住
도리어 저 언덕으로 옮겨가는가 / 飜疑彼岸移
와, 눈을 두고 지은 시에,
무슨 수로 백성들의 따뜻함을 얻어볼꼬 / 何由更得齊民煖
숙맥에 하 많이 못 내린 것 한이로세 / 恨不偏於宿麥深
와, 구름을 두고 지은 시에,
한없는 가뭄벼가 말라져 다 죽는데 / 無限旱苗枯欲盡
한가하다 유유히 기봉만 만들다니 / 悠悠閒處作奇峯
라 하였다. 태제(台濟)에게 보임.
동정귤(洞庭橘)ㆍ당금귤(唐金橘)ㆍ소귤(小橘)ㆍ금귤(金橘) 네 종(種)이 상(上)이 되며 별귤(別橘)은 품종이 가장 귀하나 종자가 몹시 드물어서 능히 공납에 충당을 못한다. 산귤(山橘)은 가장 많으나 가장 하질이며 청귤(靑橘)ㆍ석금귤(石金橘)은 다 맛이 좋지 못하며 대귤(大橘)은 보지 못했으며, 감자(柑子)ㆍ등자(橙子)는 다 중국이나 일본산만 같지 못하다. 유감(乳柑)은 조금 시원하나 산미(酸味)가 많으며 당유자(唐柚子)는 농창하게 익어 봄을 지낸 것이라야 달고 시원하다. 감자는 향이 없으며 지각(枳殼)은 청귤과 함께 약에 들어간다.

동정귤은 고성(高姓)의 집 사원(私園)에 단지 두 그루가 있고 관원(官園)에는 단 한 그루뿐이며 당금귤(唐金橘)은 관원(官園)에 한 그루가 있을 뿐이다.
건초척(建初尺)은 성척(省尺)의 칠촌 오푼과 절척(浙尺)의 팔촌 사푼에 해당된다.
《원사(元史)》의 태조본기(太祖本紀) 및 야율초재전(耶律楚材傳)에 의거하면 “제(帝)가 동인도에 이르러 철문(鐵門)에 머물렀는데 각단(角端)이 나타나서 회군하게 되었다.”라 했는데 이것은 대개 송자정(宋子貞)이 지은 초재(楚材)의 신도비(神道碑)를 근본으로 삼은 것이며 태조의 군사가 설산(雪山)을 넘어서 북인도에 그쳤다는 것을 몰라서였다. 북인도에까지 왔었는데 무슨 까닭으로 갑자기 빈해(瀕海)의 동인도에 이르렀겠는가. 철문 같은 데는 가지 못했으며, 설산은 북인도와 거리가 상기도 멀다. 《담연집(湛然集)》을 상고해 보면 초재(楚材)가 서역에 있던 십 년 동안에 심사간성(尋思干城)에 머물렀으니 우연히 철문에 이르렀더라도 인도까지 갔을 리는 없다. 신도비를 짓는 사람이 공을 초재에게 돌리려고 했기 때문에 인도의 일을 철문에 옮겨 써서 부회(傅會)한 것이나 여러 가지가 서로 맞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몽고원류(蒙古源流)》에 이르기를 “성길사한(成吉思汗)이 장차 액납특아극(額納特阿克)을 정벌하기 위하여 곧장 제탑납능령(齊塔納凌嶺)의 산등성이에 당도하자 하나의 외뿔 돋은 짐승을 만났는데 제 이름은 새노(賽魯)라 이르며 한(汗)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니 한은 말하기를 ‘저 액납특아극은 바로 대성인이 강생(降生)한 곳인데 지금 기이한 짐승이 앞에 왔으니 자못 하느님이 뜻을 보인 것이다.’ 하고 회군하여 처소로 돌아왔다.”라 하였다. 이는 분명히 짐승을 만난 곳은 바로 설산에서이고 철문도 아니요 동인도도 아니요 또 초재의 간언(諫言) 때문도 아님을 말한 것이다.
대개 초재는 서역에 있은 십여 년에 머물러 심사간성을 지켰는데 곧 새마 이한성(賽馬爾罕城)이다. 종신토록 인도 북의 대설산에 가지 못했는데 뒷사람이 야율(耶律)의 신도비를 지으면서 반드시 공을 초재에게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설산의 일을 철문에 옮기어 천취(遷就)한 것이나 천리의 어긋남을 모른 것이다. 그런데 《원사》도 인습하고 《명사(明史)》도 인습하였다.

원 태조의 군사가 설산을 넘었으니 단실(端實)을 추산(追算)하면 북인도에 이르러 그쳤으며 중인도까지 친히 가지는 못하였다. 장춘서행기(長春西行記)가 있어 입증이 된다. 만약 겨우 철문에 그쳤다면 북인도도 오히려 가지 못했는데 하물며 중인도를 넘어 빈해(瀕海)의 동인도에까지 갔겠는가. 이는 만리(萬里)의 오류(誤謬)이지만 역시 야율의 신도비에서 비롯되어 《원사》가 인습하고 《명사》가 인습한 것이다.
오인도(五印度)의 강역(疆域)은 남인도는 큰 바다로써 한계하고 서인도는 홍해(紅海)ㆍ지중해(地中海)가 있어 한계하여 예나 이제나 절연(截然)하여 어긋나지 않으며 오직 동ㆍ북의 두 인도는 육지의 경계가 각국과 들쑥날쑥하다. 그러나 동인도는 항해(航海)가 서로 통하여 상이(商夷)가 모두 익히 내왕하며 북인도는 총령(蔥嶺)의 서쪽이 간격이 되어 내왕하지를 못한다. 또 원ㆍ명 이후에는 나라 이름이나 땅의 이름이 당 나라 이전과는 서로 일관되지 못하며 다행한 것은 극십미이(克什彌爾)가 당ㆍ송의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이 되어 천여 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대설산이 있어 그 북을 경계했는데 그를 근거로 하여 북인도의 계빈(罽賓)이 되었다.

《원사》에서 철문을 들어 동인도로 삼았고 《명사》에는 새마이한을 들어 고 계빈(古罽賓)을 삼아서, 중중첩첩(重重疊疊)으로 빗나간 것이 이로부터 일어났으니 이를 가려놓지 않으면 인도 북경(北境)은 끝내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한 나라 시대에 대월씨(大月氏)가 점령한 대하(大夏)의 지역은 바로 새마이한의 지역이며 겸하여 지금의 오한포합이(敖罕布哈爾)ㆍ애오한(愛烏罕) 여러 부(部)의 지역이다. 가정(嘉靖) 이후로부터 입공(入貢)하였는데 한 나라에서 왕이라 칭하는 자가 오십여 명이었으니 이미 사분오열(四分五裂)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총령 서쪽에는 다시 새마이한의 이름이 없으며 서역의 그림 그리는 자들도 그 구국(舊國)을 열거하여 총령 제부(蔥嶺諸部)를 총괄하였으며 곤여(坤輿)ㆍ직방(職方)의 제도(諸圖)나 해국문견록(海國聞見錄)ㆍ장씨지구도(莊氏地球圖)도 아울러 그러하다. 자못 실지를 고사하여 이제를 따르는 의가 아니기 때문에 상세히 분별하는 것이다.


[주D-001]일전(日躔) : 해의 운행하는 전차(躔次)임. 《방언(方言)》에 “日運爲躔”이라 하였고, 《원사(元史)》 역지(曆志)에는 “非日躔 無以交其列舍”라 하였음.
[주D-002]황도(黃道) : 천문학 용어임. 천구(天球) 상의 한 대권(大圈)이 1년 내에 지구상에서 보이는 태양이 지나가는 길이 되어 곧 지구 궤도의 평면이 천구와 서로 어울리는 선(線)이다. 지구 궤도의 평면을 황도면이라 하고, 적도면과 비스듬히 어울려 23도 27분의 각(角)을 이루면 황적대거(黃赤大距)라 하고, 또 천구의 중심을 통과하여 황도면의 직선과 수직이 되면 황도축(黃道軸)이라 하고, 이 축이 천구의 점(點)과 어울리면 황도의 극(極)이라 하는데 생략하여 황극이라 칭함.
[주D-003]백도(白道) : 달이 다니는 길로서 황적도와 더불어 비스듬히 어울리는데 오직 춘분ㆍ추분 절서에는 적도와 교점(交點)을 이룸.
[주D-004]궁(宮) : 역법(曆法)에 30도를 궁으로 삼는데 곧 원주(圓周) 12분의 1임.
[주D-005]생명(生明) : 재생명(哉生明)인데 초사흘의 달을 말함. 《서경(書經)》 무성(武成)에 “厥四月 哉生明”이 있음.
[주D-006]생백(生魄) : 재생백(哉生魄)인데 16일로서 이른바 달의 기망(旣望)을 말함. 재는 시(始)의 뜻임.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公以八月哉生魄庚子”가 있음.
[주D-007]수시(授時) : 옛날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책력을 만들어 민간에 반포하여 농시(農時)를 알려 주었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乃命羲和 欽若昊天 曆象日月星辰 敬授人時”라 하였음.
[주D-008]삭허(朔虛) : 《서경(書經)》 요전(堯典) 기삼백(期三百)의 채전(蔡傳)에 나와 있음.
[주D-009]이십팔수(二十八宿) : 고대의 천문학에는 주천(周天)의 성(星)을 나누어 이십팔수를 만들어 사방에 각기 칠수(七宿)가 있으니, 동방은 각(角)ㆍ항(亢)ㆍ저(氐)ㆍ방(房)ㆍ심(心)ㆍ미(尾)ㆍ기(箕), 북방은 두(斗)ㆍ우(牛)ㆍ여(女)ㆍ허(虛)ㆍ위(危)ㆍ실(室)ㆍ벽(壁), 서방은 규(奎)ㆍ누(婁)ㆍ위(胃)ㆍ묘(昴)ㆍ필(畢)ㆍ자(觜)ㆍ삼(參), 남방는 정(井)ㆍ귀(鬼)ㆍ유(柳)ㆍ성(星)ㆍ장(張)ㆍ익(翼)ㆍ진(軫)으로 되었음.
[주D-010]빙상씨(憑相氏) : 관명(官名)인데 《주례》춘관(春官)의 속(屬)임. 《주례(周禮)》 춘관(春官)빙상씨의 주에 “빙은 승(乘)이요, 상은 시(視)인데 대대로 고대(高臺)에 올라 천문의 차서를 살펴본다.” 하였음.
[주D-011]건(建) : 두성(斗星)에 가까이 위치한 별자리임.
[주D-012]호(弧) : 별 이름인데 낭성(狼星)의 동부에 있어 하늘의 활이라 이름.
[주D-013]벌(罰)ㆍ낭(狼) : 벌은 벌삼성(罰三星)을 말함이요, 낭은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其東有大星曰狼”이라 하였음.
[주D-014]추보(推步) : 일월(日月) 오성(五星)의 도(度)와 혼단(昏旦) 절기(節氣)의 차(差)를 추측함을 이름. 《後漢書 注》. 지금은 의기(儀器) 및 산술을 이용하여 천상(天象)을 고측(考測)하는 것을 추보라 이름.
[주D-015]태일(太一) : 《예(禮)》 예운(禮運)에 “夫禮必本於太一”이라는 대문이 있고, 그 소(疏)에 “천지가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의 혼돈의 원기를 이름이다. 극히 큰 것을 천(天)이라 하고 나누어지지 않은 것을 일(一)이라 하는데 그 기(氣)가 극히 크면서도 나누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태일이라 이른다.” 하였음.
[주D-016]육 선공(陸宣公) : 육지(陸贄)는 당 가흥인(嘉興人)으로 자는 경여(敬輿), 시호는 선공이다. 덕종(德宗) 때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조정에 있어 논간(論諫)함에 말이 개절(剴切)하여 그 주의(奏議)가 후세에서 존봉(尊奉)하는 바 되었음.
[주D-017]용각(龍角)을 연하고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杓携龍角”이란 말이 있고 그 집해(集解)에 “맹강(孟康)은 말하기를 ‘표(杓)는 북두의 표요, 용각은 동방의 별이며, 휴(携)는 연한다는 말이다.” 하였음.
[주D-018]은(殷)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집해(集解)에 “형(衡)은 남두(南斗)의 중앙이요, 은(殷)은 중(中)의 뜻이다.” 하였음.
[주D-019]대광(戴匡) : 광(匡)은 해갑(蟹甲)인데 형상이 광(匡)과 같아서 대광이라 함.
[주D-020]삼태(三能) : 능(能)은 태(台)와 통하므로 여기서는 능을 태로 읽음.
[주D-021]경방(景方) : 경은 본디 병(丙)인데 당시대에 어휘(御諱)로서 글자를 바꾸어 경이 되었음.
[주D-022]《건착도(乾鑿度)》 : 서명인데 역위(易緯) 8종의 제이(第二)이다. 구본(舊本)에는 정강성(鄭康成)의 주라고 칭했는데 당(唐) 이전에는 설경 제가(說經諸家)가 항상 서로 인용하였음. 그 태을행구궁법(太乙行九宮法)은 바로 후세의 낙서(洛書)가 이로부터 나온 것이다.
[주D-023]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 : 《의례(儀禮)》의 편명인데 특생은 큰 제사 때 쓰는 소 온 마리와 돼지 온 마리를 말함.
[주D-024]교특생(郊特牲) : 《예기》의 편명인데 교는 제천(祭天)의 이름이며 제천에 있어서는 붉은 송아지 온 마리를 쓴다. 그러므로 특생이라 한 것임.
[주D-025]직제(直祭)에는……축(祝)한다 :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보이는 대문으로 정주(鄭注)에 “직제의 직(直)은 정(正)인데 제(祭)는 숙(熟)을 정(正)으로 삼는다.” 하였음.
[주D-026]훈호처창(焄蒿悽愴) : 《예(禮)》 제의(祭儀)에 나오는데 그 주(注)에 “훈(焄)은 향취이고 호는 기(氣)가 증출(蒸出)하는 모양을 이름이다.” 하였으며, 소(疏)에는 “이 향취가 뭉게뭉게 위로 솟아서 그 기운이 호연(蒿然)함을 이름이다.” 하였음.
[주D-027]소명(昭明) : 《예(禮)》 제의(祭儀)에 나타난 훈호처창(焄蒿悽愴)의 윗 대문에 “其氣發揚于上爲昭明”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 주에 “發揚于上 爲昭明者 言此升上 爲神靈光明也”라 하였음.
[주D-028]강백석(姜白石) : 이름은 기(夔), 자는 요장(堯章)인데 송(宋) 파양인(鄱陽人)으로 무강(武康)에 우거(寓居)하여 백석동천(白石洞天)과 더불어 이웃을 하였으므로 호를 백석도인(白石道人)이라 하였음. 그 시는 풍격이 고수(高秀)하며 사(詞)는 더욱 정심화묘(精深華妙)하여 음절문채(音節文采)가 다 한때에 으뜸이었다.
[주D-029]계찰(季札)의 묘(墓) : 계찰은 오(吳) 계찰을 이름인데 춘추 시대 오 나라의 공자(公子)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므로 연릉(延陵)에 봉하였다. 그러므로 연릉계자(延陵季子)라 칭하였다. 그는 상국(上國)에 빙(聘)하여 당시의 현대사부(賢士大夫)를 두루 교제하였으며, 노(魯) 나라에 들러 악(樂)을 관찰하고 열국(列國)의 치란 흥쇠(治亂興衰)를 알았다. 춘추 시대의 현자(賢者)임. 세상에서 전하기를 중니(仲尼)가 계찰의 묘에 표하기를 “有吳延陵季子之墓”라 했다고 하여 그 글씨가 중니의 수필(手筆)이라 하는데 고증가들에 의하여 위작임이 판명되었음.
[주D-030]환영(桓楹) : 목비(木碑)임. 제7권 주 153) 참조.
[주D-031]장종신(張從申) : 당 나라 오군인(吳郡人)인데 진사제(進士第)에 뽑혀 관은 대리사직(大理寺直)에 이르고 글씨를 잘 써서 세상이 독보라 칭하였음.
[주D-032]은중용(殷仲容) : 당 나라 사람인데 무후(武后) 때에 비서승(祕書丞)으로 신주자사(申州刺使)를 지냈으며 인물ㆍ화조(花鳥)를 잘 그리고 전예(篆隷)를 잘 썼음.
[주D-033]천녀(天女)의 산화(散花) : 《유마경(維摩經)》에 “천녀산화의 꽃은 사리불등(舍利佛等)의 몸에 붙으면 떼어버리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하였음. 《심지관경 1(心地觀經 一)》에 “六欲諸天來供養 天花亂墜徧虛空”이라 하였음.
[주D-034]광대교화(廣大敎化) : 광대교화주(廣大敎化主)의 약칭임. 당(唐) 장위(張爲)가 주객도(主客圖)를 찬(撰)하면서 시가(詩家) 6인을 세워 주(主)를 만들고 나머지는 입실(入室)ㆍ승당(升堂)ㆍ급문(及門)으로 나누어 객(客)을 삼았다. 백거이(白居易)는 광대교화주, 맹운경(孟雲卿)은 고고오일주(高古奧逸主), 이익(李益)은 청기아정주(淸奇雅正主), 맹교(孟郊)는 청기벽고주(淸奇僻古主), 포용(鮑溶)은 박용굉발주(博容宏拔主), 무원형(武元衡)은 괴기미려주(瓌奇美麗主)라 하였다.
[주D-035]구율(彀率) : 활을 당기는 법을 이름. 《맹자(孟子)》 진심(盡心)에 “羿不爲拙射變其彀率”이란 대문이 보임. “率"은 “律"과 통용함.
[주D-036]원유지(元裕之) : 금(金)의 수용인(秀容人)으로 이름은 호문(好問), 자는 유지, 호는 유산(遺山)인데 7세에 능시(能詩)하여 관(官)은 상서성 좌사원외랑(尙書省左司員外郞)에 이르렀으며, 금(金)이 망하자 벼슬하지 아니하였음. 학술이 침심(沈深)하고 재기(才氣)가 탁월하여 금ㆍ원(金元) 시대의 문학하는 자로는 호문이 가장 드러났음. 《유산집》40권이 있음.
[주D-037]우백생(虞伯生) : 원(元) 인수인(仁壽人)으로 이름은 집(集), 자는 백생, 호는 도원(道園)인데, 홍재박식(弘才博識)하여 시용(施用)하면 적의치 않은 곳이 없었다. 관은 규장각 시서학사(奎章閣侍書學士)에 이르렀으며 일시의 대전책(大典冊)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저술로는 《도원학고록(道園學古錄)》 50권이 있음.
[주D-038]경릉(竟陵) : 명(明) 종성(鍾惺)의 자는 백경(伯敬)이요, 경릉인인데 원굉도(袁宏道)가 왕세정(王世貞)ㆍ이반룡(李攀龍) 시의 폐단을 교(矯)하여 청진(淸眞)을 외쳐서 공안파(公安派)를 이루었는데 종성이 다시 그 폐단을 교하여 변해서 유심고초(幽深古峭)를 만들었다. 그래서 동리(同里) 사람 담원춘(譚元春)과 함께 당인(唐人)의 시를 평선(評選)하여《고시귀(古詩歸)》를 만들었다. 그래서 종ㆍ담의 이름이 천하에 가득했으며 이를 경릉체라 이름함.
[주D-039]주죽타(朱竹坨) : 청 수수인(秀水人)으로 이름은 이준(彝尊), 자는 석창(錫鬯), 호는 죽타인데 강희(康熙) 시에 박학굉사(博學宏詞)에 시(試)하여 검토(檢討)에 제수되었으며, 고학(古學)에 사력(肆力)하여 글이라면 안 본 것이 없었으며 시문(詩文)이 승(勝)하고 금석 고증의 학(學)도 겸하였다. 8만 권의 서(書)를 저술하였으며 《폭서정전집(曝書亭全集)》이 있음.
[주D-040]산성(散聖) : 지위가 없이 세상에 떠돌며 사람의 존경을 받는 것을 이름인데 말하자면 출가한 포대화상(布袋和尙)과도 같음.
[주D-041]병체(騈體) : 사륙(四六) 대우(對偶)의 문(文)을 이름.
[주D-042]혼ㆍ계(惲桂) : 혼은 청 무진인(武進人)으로 이름은 경(敬), 자는 자거(子居), 호는 간당(簡堂)이며 고문을 전치(專治)하여 소순(蘇洵)과 더불어 서로 상하(上下)하며 법가(法家)의 언(言)에 가까웠다. 세상에서 양호파(陽湖派)라 칭함. 계는 계복(桂馥)인데 청 곡부인(曲阜人)으로 자는 동훼(冬卉), 호는 미곡(未谷)이요, 건륭 진사로 운남(雲南) 영평지현(永平知縣)에 데두되었다. 소학(小學) 및 금석, 전각에 정(精)했으며 일찍이 《설문(說文)》과 제경(諸經)의 의(義)를 취해 서로 소증(疏證)하여《설문해자의증(說文解字義證)》을 찬집(撰輯)하였음.
[주D-043]남천이우(南遷二友) : 송 소식(蘇軾)이 영해(寧海) 간에 귀양가 있던 시절에 도연명(陶淵明)ㆍ유 자후(柳子厚) 두 집(集)을 가장 좋아하여 남천이우라 일렀음. 《老學菴筆記 9》
[주D-044]해봉(海峯) : 유대괴(劉大槐)인데 청 동성인(桐城人)으로, 자는 경남(耕南), 호는 해봉, 고문(古文)은 장자(莊子)를 희학(喜學)하고 더욱 창려(昌黎)를 역추(力追)하였음. 요희전(姚姬傳)이 그를 종유하여 드디어 동성파의 지목이 있었음.
[주D-045]왕척보(王惕甫) : 청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기손(芑孫), 자는 염풍(念豐), 호는 척보이며 또 호는 능가산인(楞伽山人)이다. 공시(工詩) 선서(善書)하여 《연아당시문집(淵雅堂時文集)》의 저술을 남겼음.
[주D-046]원자재(袁子才) : 청 전당인(錢塘人)인데 이름은 매(枚), 자는 자재, 호는 간재(簡齋)요, 건륭 진사로 강녕(江寧)에 출재(出宰)하다가 소년(少年)으로 기관(棄官)하고 강녕성 서쪽에 수원(隨園)을 복축(卜築)하여 음영 저작(吟詠著作)으로 낙을 삼았다. 저술로는 《소창산방시문집(小倉山房詩文集)》 및 필기(筆記) 등이 있음.
[주D-047]진소현(秦小峴) : 청 무석인(無錫人)으로 이름은 영(瀛), 자는 능창(凌滄), 일자는 소현이며, 건륭 거인(擧人)으로 가경(嘉慶) 때에 관은 형부 우시랑(刑部右侍郞)에 이르렀다. 시와 고문이 다 고인의 품격을 역추(力追)하여 능히 자득(自得)한 바 있었으며 저술로는 《소현산인시문집(小峴山人詩文集)》이 있음.
[주D-048]조미신(趙味辛) : 청 무진인(武進人)인데 이름은 회옥(懷玉), 자는 억손(億孫), 일자는 미신이며 건륭 거인으로 관은 등주지부(登州知府)이다. 호학 심사(好學深思)하고 공시(工詩)하여 동리(同里)의 손성연(孫星衍)ㆍ홍양길(洪良吉)ㆍ황경인(黃景仁)과 더불어 손홍황조(孫洪黃趙)라 병칭(並稱) 되었으며, 저술로는 《역유생재집(亦有生齋集)》이 있음.
[주D-049]증남풍(曾南豐) : 송 남풍인(南豐人)으로 이름은 공(鞏), 자는 자고(子固)임. 가우(嘉祐) 진사로 중서사인(中書舍人)에 발탁되었다. 경술(經術)에 깊고 문장에 공(工)하여 저술로는 《원풍유고(元豐類稿)》가 있음. 당송팔가(唐宋八家)의 한 사람임. 또한 《전국책(戰國策)》에 주(注)하고 고문전각(古文篆刻)을 모아 《금석록(金石錄)》을 만든 바 있음.
[주D-050]서중거(徐仲車) : 송 산양인(山陽人)으로 이름은 적(積), 자는 중거임. 3세에 부친이 죽었는데 부친의 이름이 석(石)이었으므로 종신토록 석기(石器)를 쓰지 아니하였으며, 길을 걷다가도 돌을 만나면 밟지 않았다. 정화(政和) 중에 시(諡)를 내려 절효처사(節孝處士)라 하였으며 그의 한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절효어록(節孝語錄)》과 《절효집》이 있음.
[주D-051]진형중(陳瑩中) : 송인(宋人)인데 이름은 관(瓘), 자는 형중, 호는 요옹(了翁)임. 학문이 있어 진사 갑과(進士甲科)에 올랐다. 간관(諫官)이 되었을 때 채경(蔡京)을 써서는 안된다고 극언(極言)하였으므로 채경이 깊이 유감을 품어 누차 귀양을 갔었는데 사면을 받아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학자가 요재선생(了齋先生)이라 칭했다. 저술로는 《요옹역설(了翁易說)》ㆍ《존요집(尊堯集)》이 있음.
[주D-052]맹동야(孟東野) : 당 호주인(湖州人)인데 이름은 교(郊), 자는 동야이며 숭산(嵩山)에 은거하였다. 천성이 경개(耿介)하여 해합(諧合)이 적었는데 한유(韓愈)는 한번 보고 망형(忘形)의 벗이 되었음. 나이 50에 진사제(進士第)를 얻어 평양현(平陽縣)에 조용(調用)되었음. 시체(詩體)는 철마(鐵馬)를 깊이 몰아 층빙(層氷)을 밟아 깨뜨리는 것 같았고 문체(文體)는 춘산(春山)의 고죽(孤竹)에 두우(杜宇)가 피를 흘리며 우는 것 같았음.
[주D-053]촌심(寸心)이 천고(千古) : 두보의 시에 “ 文章千古事 得失寸心知”라는 글귀가 있음.
[주D-054]노동(盧仝) : 당인(唐人)으로 누거 부중(累擧不中)하여 동도(東都)에 살면서 스스로 옥천자(玉川子)라 하였다. 한유가 하남윤(河南尹)이 되어 그의 시를 사랑하여 후례(厚禮)를 올리고 시를 지어 보냈음.
[주D-055]정상(頂上)에……자 : 불가어로서 정문상유안(頂門上有眼)의 약칭임. 마해수라천(摩醯首羅天)에 삼목(三目)이 있는데 그 수(竪)의 한 척안(隻眼)은 정문안이라 이르며 그 눈은 가장 상안(常眼)보다 뛰어나다. 《벽암(碧巖)》 35칙 수시(垂示)에 若不是頂門上有眼 肘臂下有符往往當頭蹉過”라 하였음.
[주D-056]서산 : 오자서(伍子胥)는 춘추시대 초인(楚人)인데 이름은 원(員)이다.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섬겨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무너뜨리고 패업(霸業)을 이루었는데 뒤에 태재(太宰) 비(嚭)의 참소를 듣고 자서에게 칼을 내려 자결하게 하였다. 서산은 자서의 묘(廟)가 있는 곳임.
[주D-057]멱라 : 초 나라 굴원(屈原)이 처음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참소를 입고 상강(湘江)으로 귀양가서 이소(離騷)ㆍ구가(九歌)를 지어 임금의 회오(悔悟)를 기다렸으나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음.
[주D-058]유자산(庾子山) : 남북조(南北朝) 신야인(新野人)으로 이름은 신(信), 자는 자산이며, 군서(群書)를 박람하고 문장의 이조(摛藻)가 염려(艶麗)하여 서릉(徐陵)과 더불어 제명(齊名)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서유체(徐庾體)라 일컬었음. 양 원제(梁元帝) 때에 우위장군(右衛將軍)을 지냈으며 누천(累遷)하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ㆍ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으므로 세상에서는 유개부(庾開府)라 칭한다. 유신은 직위가 비록 현달했지만 행상 향관(鄕關)의 생각이 있어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지었다. 그 병우(騈偶)의 문(文)은 실로 육조(六朝)의 집대성이었음.
[주D-059]하수부(何水部) : 남조(南朝) 양(梁) 동해(東海) 섬인(郯人)으로 이름은 손(遜), 자는 중언(仲言)임. 8세에 능히 시를 지었으며 약관(弱冠)에 범운(范雲)과 더불어 망년(忘年)의 교호(交好)를 맺었다. 관(官)은 상서수부랑(尙書水部郞)에 이르고 문(文)은 유효작(劉孝綽)과 더불어 제명하여 당시에 하류(何劉)라 칭하였음.
[주D-060]진윤천(陳允倩) : 청 전당인(錢塘人)으로 이름은 조명(祚明), 자는 윤천임. 박학하여 속문(屬文)을 잘 하였음. 생활이 가난하여 경사(京師)에서 용서(傭書)하다가 객관(客館)에서 죽었으며 저술로는 《계류산인집(稽留山人集)》이 있는데 《폐추집(敝帚集)》이라고도 함.
[주D-061]산중의 재상 : 도홍경(陶弘景)은 남북조 때 말릉인(秣陵人)으로 자는 통명(通明)인데 제고제(齊高帝) 때에 일찍이 제왕(諸王)의 시독(侍讀)이 되었다가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숨어 화양은거(華陽隱居)라 자호(自號)하고 늦게는 화양진일(華陽眞逸), 또는 화양진인(華陽眞人)이라 호하였다. 국가에서 매양 큰 일이 있으면 찾아와서 자문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산중 재상이라 불렀다. 그는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 比中何所有 嶺上多白雲 只可自怡悅 不堪持贈君”이라 하였음.
[주D-062]장심여(蔣心餘) : 청 연산인(鉛山人)으로 이름은 사전(士銓), 자는 심여인데, 건륭 진사로 관은 편수(編修)이며 시와 고문사(古文辭)에 공(工)하여 성명(盛名)을 짊어졌다. 그가 찬(撰)한 구종곡(九種曲)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음.
[주D-063]미사(微詞) : 《공양전(公羊傳)》 정공(定公) 원년(元年)에 “定哀多微詞”라는 대문이 있는데 이는 존자(尊者)를 위하여 휘(諱)하며 그 과실을 현저하게 드러내고자 아니하여 살짝 그 뜻만 보인 것임.
[주D-064]강엄(江淹) : 남조(南朝) 양(梁) 고성인(考城人)으로 자는 문통(文通)이요, 관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다. 젊어서 문장으로써 이름이 났는데 말년에는 재사(才思)가 미퇴(微退)하여 시문(詩文)에 가구(佳句)가 없으니 시인(時人)이 재진(才盡)이라 일렀음.
[주D-065]노련(老蓮) : 진홍수(陳洪綬)의 별호인데 명말(明末) 제기인(諸曁人)으로 자는 장후(章侯)임. 명경(明經)으로써 등제(登第)하였으나 벼슬하지 않다가 숭정(崇禎) 간에 불러들여 공봉(供奉)을 삼았다. 산수(山水)ㆍ인물을 잘 그려 용면(龍眠)ㆍ오흥(吳興)의 묘를 겸했고 설색(設色)은 도자(道子)를 배워 역량과 기국이 구영(仇英)ㆍ당인(唐寅)의 위에 있었으며 당시에 삼백 년 내에는 이런 필묵이 없다고 일렀다.
[주D-066]피일휴(皮日休) : 당 양양인(襄陽人)으로 자는 습미(襲美)요, 문장에 능하여 진사에 올랐으며 맹호연(孟浩然)과 더불어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여 스스로 취사(醉士)라 호하였고 또 주민(酒民)이라 하였다. 육구몽(陸龜蒙)과 벗이 되어 《송릉창화시집(松陵唱和詩集)》 이 있음
[주D-067]육구몽(陸龜蒙) : 당 장흥인(長興人)으로 자는 노망(魯望)이요, 젊어서부터 고방(高放)하여 송강(松江) 보리(甫里)에 살면서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자호(自號)하며 혹은 보리 선생(甫里先生)이라 하였다. 뒤에 고사(高士)로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음.
[주D-068]심귀우(沈歸愚) : 청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덕잠(德潛), 호는 귀우이며, 건륭 진사로서 늦게 예부 시랑에 발탁되었는데 연력(年力)이 쇠약하므로 고귀(告歸)를 허락하고 원함(原銜)으로 녹을 받게 하였다. 졸년(卒年)이 97이며 시호는 문각(文慤)임.
[주D-069]심 진사(沈進士) 두영(斗永) : 청송인(靑松人)인데 전남 옥과(玉果) 출신으로 시(詩)에 공(工)하여 일세(一世)의 교유(交遊)가 모두 현사대부(賢士大夫)였었고, 특히 김이양(金履陽)과는 망형(忘形)의 교분이었음.
[주D-070]위관(衛瓘) : 진(晉) 안읍인(安邑人)으로 자는 백옥(伯玉), 관은 상서령(尙書令)이며 상서랑(尙書郞) 색정(索靖)과 더불어 때를 같이하여 초서를 잘 쓰니 시인(時人)이 이름하여 일대이묘(一臺二妙)라 하였음.
[주D-071]지영(智永) : 남북조 진(陳)의 영흔사(永欣寺) 승(僧)으로 속성(俗姓)은 왕(王)이요, 회계인(會稽人)인데 호는 영선사(永禪師)라 했다. 선서(善書)하여 능히 제체(諸體)를 겸했고 초서는 더욱 승(勝)하여 임서(臨書)한 30년에 진초 천문(眞草千文) 8백여 본을 만들었음.
[주D-072]최열(崔悅) : 후조(後趙) 동무성인(東武城人)으로 자는 도유(道儒)인데 석호(石虎)에게 벼슬하여 벼슬은 사도우장사(司徒右長史)이며 재학(才學)으로 일컬음을 받고 글씨를 잘 써 범양(范陽) 노침(盧湛)과 더불어 제명(齊名)하였는데 침(湛)은 종유(鍾繇)을 본받고 열(悅)은 위관(衛瓘)을 본받았음.
[주D-073]노침(盧湛) : 제8권 주 72) 참조.
[주D-074]고준(高遵) : 후위(後魏) 수인(蓨人)으로 자는 세례(世禮)요, 문사(文史)를 섭렵하여 자못 필찰(筆札)에 공(工)했으며 제주자사(濟州刺史)에 올랐음.
[주D-075]심복(沈馥) : 북위 선무제(宣武帝) 때 사람으로 서(書)에 공했다. 후위(後魏) 경명(景明) 3년에 일찍이 정정비(定鼎碑)를 정서하였는데 일명은 어사비(御射碑)라고도 함.
[주D-076]요원표(姚元標) : 북조 제(齊) 위군인(魏郡人)으로 관은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이르렀으며 공서(工書)로써 이름이 당시에 알려졌음.
[주D-077]조문심(趙文深) : 북주(北周) 완인(宛人)으로 자는 덕본(德本)임. 어려서 예해(隷楷)를 배워 11세 때에 글씨를 위제(魏帝)에게 올렸는데 자못 종ㆍ왕(鍾王)의 법칙이 있었음.
[주D-078]정도호(丁道護) : 수인(隋人)으로 관은 양주제주종사(襄州祭酒從事)에 이르렀으며 정서(正書)를 잘 써 후위(後魏)의 유법을 겸했다. 수ㆍ당(隋唐)의 즈음에 선서(善書)하는 자가 많았으나 다 한 법에서 나왔는데 도호의 얻은 바가 가장 많았다. 그가 쓴 양양(襄陽) 계법흥국사비(啓法興國寺碑)가 가장 정(精)하여 우세남(虞世南) ㆍ 구양순(歐陽詢)의 소자출(所自出)이 되었음.
[주D-079]채옹(蔡邕) : 동한 진류인(陳留人)으로 자는 백개(伯喈)이며, 영제(靈帝) 때에 낭중(郞中)에 제수되어 양사(楊賜) 등과 더불어 육경(六經)의 문자를 주정(奏定)하여 비(碑)를 태학문(太學門) 밖에 세웠는데 이윽고 사건이 생겨 면관(免官)되었다. 동탁(董卓)이 불러 좨주(祭酒)를 삼아 누천(累遷)하여 중랑장(中郞將)에 이르렀는데 뒤에 탁당(卓黨)으로 지목되어 옥중에서 죽었음.
[주D-080]위탄(韋誕) : 삼국 시대 위(魏) 경조인(京兆人)으로 자는 중장(仲將)인데 문재(文才)가 있어 사장(辭章)을 잘 하고 또 선서(善書)로 이름났다. 태화(太和) 중에 능서(能書)로써 시중(侍中)에 보직되어 관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마쳤으며 위씨(魏氏)의 보기 명제(寶器銘題)는 다 그가 쓴 것임.
[주D-081]한단순(邯鄲淳) : 삼국 시대 위(魏) 영천인(穎川人)으로 자는 자숙(子叔)이요, 박학유재(博學有才)하여 창아충전(蒼雅蟲篆)을 잘 썼음.
[주D-082]위개(衛凱) : 삼국 위 안읍인(安邑人)으로 자는 백유(伯儒)요. 젊어서부터 재학(才學)으로써 칭도(稱道)되었다. 한말(漢末)에 사공연(司空掾)이 되어 상서(尙書)에 이르렀으며 위국(魏國)이 건립되어서는 시중(侍中)에 제수되어 왕찬(王粲)과 더불어 제도(制度)를 맡았다. 그는 문장으로 현달하여 고문을 좋아하며 조전예초(鳥篆隷草)를 잘 하지 못한 것이 없었음.
[주D-083]장지(張芝) : 후한 서가(書家)인데 주천인(酒泉人)으로 자는 백영(伯英)이요, 초서를 잘 썼다. 임지학서(臨池學書)하자 못물이 다 검어졌으며 세상에서 초성(草聖)이라 일컬음.
[주D-084]두도(杜度) : 후한 사람으로 자는 백도(伯度)임. 초서에 공하였고 그 법을 최원(崔瑗)ㆍ최 실(崔實) 부자가 이어받았음.
[주D-085]왕허주(王虛舟) : 청 금단인(金壇人)으로 자는 약림(若霖), 호는 허주, 또는 양상산인(良常山人)이라 한다. 강희 진사로 관은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에 이르고 서화에 공하였음. 저술로는 《우공보(禹貢譜)》ㆍ《학용본의(學庸本義)》ㆍ《정주격물법(程朱格物法)》ㆍ《순화각첩고정(淳化閣帖考正)》 등이 있음.
[주D-086]오봉루(五鳳樓) : 《명의고(名義考)》에 “양 태조(梁太祖)가 오봉루를 건립했는데 주한(周翰)이 이른바. 땅에서 백 길을 솟아 하늘의 반공(半空)에 있어 다섯 봉이 날개를 쳐든다는 것과 같다.” 하였음.
[주D-087]옹유(甕牖)와 승추(繩樞) : 깨진 항아리 입으로 문을 만들고 노끈으로 돌조구를 동인다는 것으로 극히 가난한 집을 이름.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에 “陳涉甕牖繩樞之子”라는 대문이 보임.
[주D-088]환중(環中) : 공허를 비유한 말임.《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이라는 대문이 있고, 그 주(注)에 “시비가 반복하여 서로 다함이 없으므로 환(環)이라 이른다. 환중은 공(空)이니 지금 시비로써 고리를 삼아 그 중(中)을 얻은 자는 시도 없고 비도 없다.” 하였음.
[주D-089]손건례(孫虔禮) : 당 진류인(陳留人)으로 이름은 과정(過庭), 관은 솔부녹사참군(率府錄事參軍)에 이르렀으며 서(書)에 공하여 일찍이 서론(書論)을 저술했는데 절묘하여 그 지취(旨趣)를 다했으니, 곧 서보(書譜)이다. 원서(原書)는 6편인데 지금 전하는 진적(眞蹟)은 겨우 그 총서(總序)의 문(文)만 있고 전서(全書)는 이미 없어졌음.
[주D-090]양소사(楊少師) : 오대(五代) 주(周)의 화음인(華陰人)으로 이름은 응식(凝式), 자는 경도(景度)임. 외모는 못생겼으나 정신이 영오(穎悟)하여 문조(文藻)가 부유함으로 당시 사람들이 중히 여겼다. 후한(後漢)에서 소부(少傅)ㆍ소사(少師)를 지냈으므로 세상이 양 소사라 칭한다. 시가(詩歌)에 장(長)하고 더욱 필찰(筆札)을 잘 하였으며 서법은 안진경(顔眞卿) 이후로는 따라갈 자가 없었다. 황정견(黃庭堅)은 그 서(書)가 산승입성(散僧入聖)과 같다고 일렀으며, 조맹부(趙孟頫)는 그 서가 견지(見知)의 밖에 벗어났다고 일렀다. 구화첩(韭花帖) 일종은 더욱 유명함.
[주D-091]정도소(鄭道昭) : 북위(北魏) 형양인(滎陽人)으로 출사(出仕)하여 광주자사(光州刺史)가 되었으며 스스로 중악 선생(中岳先生)이라 칭하였음. 서(書)에 공하여 처음에는 심히 드러나지 않았는데 청(淸) 가ㆍ도(嘉道) 간에 이르러 운봉산(雲峯山)의 여러 석각(石刻)이 발견됨에 따라 포세신(包世臣)ㆍ장기(張琦)ㆍ오희재(吳熙載) 등이 극히 추중(推重)하여 마침내 북비(北碑)를 익히는 자의 종(宗)하는 바가 되었음.
[주D-092]초산명(焦山銘) : 초산정명(焦山鼎銘)을 이름.
[주D-093]왕자유(王子猷) : 진인(晉人)으로 이름은 휘지(徽之), 자는 자유이며, 희지(羲之)의 아들이다. 산음(山陰)에 살면서 하루는 밤눈이 개자 달빛을 타고 대안도(戴安道)를 찾아가 그 문앞에 당도하여 들어가지 아니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흥을 타고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가는데 어찌 꼭 만나보아야 하느냐.”고 대답하였다.
[주D-094]용매(龍媒) : 준마(駿馬)의 이칭임. 한 무제(漢武帝)의 천마가(天馬歌)에 “天馬徠兮龍之媒”라 하였음. 당(唐)에는 비황(飛黃)ㆍ길량(吉良)ㆍ용매ㆍ도여(騊駼)ㆍ쾌재(駃騠)ㆍ천원(天苑) 등 육한(六閑)이 있는데 모두 천자의 말을 기르는 곳임.
[주D-095]섭운(籋雲) : 섭(籋)은 섭(躡)과 같음. 사장(謝莊)의 무마부(舞馬賦)에 “蘊籋雲之銳景 戢追電之逸足”이라 하였음.
[주D-096]육좌(衄挫) : 육(衄)은 절(折)로서 꺾는다는 뜻이고 좌(挫)도 같은 뜻임. 서법의 술어임.
[주D-097]발등법(撥鐙法) : 제7권 주 328) 참조.
[주D-098]분항(分行)ㆍ포백(布白) : 서법에 관한 말인데 분항은 줄을 나누는 것이요, 포백은 곧 그 공백처와 착묵처(着墨處)를 포치(布置)하여 소밀(疏密)이 상간(相間)하게 하는 것임.
[주D-099]황백사(黃伯思) : 송인(宋人)으로 자는 장예(長睿), 별자는 소빈(宵賓)이며, 운림자(雲林子)라 자호하였다. 원부(元符) 진사로 비서랑(祕書郞)에 제수되었으며 책부(冊府)의 장서를 종관(縱觀)하여 침식까지 잊을 정도였다. 천성이 고문 기자(古文奇字)를 좋아하여 이기관지(彝器款識)를 모두 능히 변증하였으며, 육경(六經) 및 자사 백가(子史百家)를 정구(精究)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시문에도 공(工)했다. 글씨로는 전(篆)ㆍ예(隷)ㆍ행(行)ㆍ초(草)ㆍ비백(飛白)이 다 묘절(妙絶)했다. 저술로는《동관여론(東觀餘論)》 및 문집이 있음.
[주D-100]부서혁봉(腐鼠嚇鳳) : 《莊子》에서 나온 말인데 위에 자세히 보임.
[주D-101]비이 : 범이 성을 내어 갈기털이 꼿꼿하게 서는 모양을 말한 것임.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 “孟毅髬髴"의 구가 있음.
[주D-102]책비(責備) : 책현자비(責賢者備)의 준말로서 어진 자에게는 항상 구비하기를 책한다는 뜻임. 춘추(春秋)의 법은 항상 현자에게 책비하였으므로 나온 말임.
[주D-103]훈유(薰蕕) : 《좌전(左傳)》 희공(僖公) 4년에 “一薰一蕕 十年尙猶有臭”라는 대문이 있는데, 훈은 향초요 유는 취초(臭草)로서 두 가지를 한 곳에 모아 두면 아무리 십 년이 가도 오히려 취기가 있다. 그러니 선(善)은 소멸되기 쉽고 악은 제거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가어(家語)》 치사(致思)에 “薰蕕不同器而藏”이라 하였음.
[주D-104]조미숙(晁美叔) : 송인으로 이름은 단언(端彦), 자는 미숙이며 장돈(章惇)과 더불어 동생(同生)하여 동방급제(同榜及第)이고 또 관(館)의 직을 함께 지냈다. 그래서 항상 서로 삼동(三同)이라 불렀다. 소성(紹聖) 초에 장돈이 입상(入相)하자 단언이 그의 소위를 보고 힘써 간하다가 쫓겨나서 협수(陜守)가 되었다. 문장과 서법이 조야(朝野)의 종상(宗尙)하는 바 되었음.
[주D-105]이소온(李少溫) : 당 조군인(趙郡人)으로 이름은 양빙(陽氷), 자는 소온이며 건원(乾元)간에 진운령(縉雲令)이 되었다가 뒤에 당도령(當塗令)으로 옮겼는데 전서를 잘 썼음. 서원여(舒元輿)는 그 전서를 이사(李斯)에게 내리지 않는다고 일렀다. 지금도 그 유적이 전해 옴.
[주D-106]윤백하(尹白下) : 이름은 순(淳), 자는 중화(仲和), 호는 백하인데 해평인(海平人)으로 이조 판서 유(游)의 제(弟)이다. 숙종(肅宗) 계사년에 문과에 올라 관은 이조 판서에 이르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경신년에 평안 감사로 임소(任所)에서 졸했다. 선서(善書)하여 절예(絶藝)를 이루었으며 후학을 계발한 공이 석봉(石峯)ㆍ안평(安平)에 비할 바 아니었음. 원교(圓嶠)가 그 문하로서 사문(師門)의 진수를 얻었다 함.
[주D-107]박(璞)을……였던가 :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 “마원이 유소시(幼少時)에 큰 뜻이 있어 일찍이 제시(齊詩)를 배우면서도 능히 장구(章句)에 뜻이 가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형 황(況)을 하직하고 변군(邊郡)으로 나가서 목축(牧畜)을 하고자 하니, 황은 말하기를 ‘너는 대재(大才)라 마땅히 만성(晩成)할 것이니 양장(良匠)은 사람에게 박(璞)으로써 보이지 않는다. 너의 소호(所好)를 따르라.’ 했다.” 하였음.
[주D-108]고족(高足) : 품학(品學)이 넉넉한 문인(門人)을 이름.《세설(世說)》 문학(文學)에 “鄭玄在馬融門下 三年不得相見 高足弟子傳授而已”라 하였음.
[주D-109]강표암(姜豹庵) : 이름은 세황(世晃),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이요, 진주인(晉州人)으로 일찍이 부사(副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갔었는데 청조(淸朝) 사람들이 세황의 서화(書畫)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청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였다. 세황은 소기(小技)를 자랑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마지못해 몇 사람에게만 응하고 말았다. 일강관(日講官) 석암(石菴) 유용(劉鏞)ㆍ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이 글씨로 천하에 유명하였는데 세황의 글씨를 보고 천골개장(天骨開張)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음.
[주D-110]상세창(桑世昌) : 송 회해인(淮海人)으로 천태(天台)에 세거(世居)하였으며 육유(陸游)의 생(甥)이다. 저술로는《난정고(蘭亭考)》가 있으며《회문유취(回文類聚)》를 편집하였음.
[주D-111]유송(兪松) : 송 전당인(錢塘人)으로 자는 수옹(壽翁), 호는 오산(吳山)이며, 관은 승의랑(承議郞)이다. 저술로《난정속고(蘭亭續考)》가 있음.
[주D-112]조불흥(曹不興) : 삼국 시대 오(吳)의 오흥인(吳興人)인데 황무간(黃武間)에 화명(畫名)으로써 일시에 관절(冠絶)하였음. 이때 오 나라에 팔절(八絶)이 있었는데 불흥이 그 중 하나에 참여했으며, 그 화룡(畫龍)이 더욱 묘하다고 함.
[주D-113]장승유(張僧繇) : 남북조 양(梁)의 화가인데 오인(吳人)으로 관은 우군장군(右軍將軍)ㆍ오흥태수(吳興太守)에 이르렀으며, 산수와 불상을 잘 그렸다. 또 일찍이 네 용을 그리고 점정(點睛)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굳이 점정하기를 청하여 점정하자 점 찍힌 두 마리 용은 벽을 부수고 날아가고 점 찍지 않은 것은 그대로 있었다 함.
[주D-114]오도현(吳道玄) : 오도자(吳道子)인데 당 양적인(陽翟人)으로 회사(繪事)를 잘하여 필법이 초묘(超妙)하니 당시에 화성(畫聖)이라 칭하였다. 현종(玄宗) 때에 불러들여 공봉(供奉)이 되었으며, 또 불상을 잘 그렸음.
[주D-115]연문귀(燕文貴) : 송 오흥인(吳興人)으로 도화원(圖畫院)에 들어왔는데 인물ㆍ산수를 잘하여 세쇄 청윤(細碎淸潤)하여 일가(一家)를 자성(自成)하였음.
[주D-116]역원길(易元吉) : 송 장사인(長沙人)으로 자는 경지(慶之), 사생(寫生)을 잘하여 집 후원에 원포(園圃)를 쌓고 물새와 산 짐승을 순양(馴養)하여 그 동정을 엿보아 화사(畫思)의 바탕을 삼았다. 더욱이 노루와 원숭이를 잘 그려 식자(識者)는 서희(徐熙) 이후 일인이라 일렀음.
[주D-117]심석전(沈石田) : 명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주(周), 자는 계남(啓南), 호는 석전이며,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문(文)은 좌씨(左氏)를 배우고 시는 백거이ㆍ소식을 배우고 글씨는 황정견을 배웠다. 더욱이 화(畫)에 공하여 당인(唐寅)ㆍ문징명(文徵明)ㆍ구영(仇英)과 더불어 병칭하여 명의 사가(四家)가 되었음.
[주D-118]임조(林藻) : 당인으로 피(披)의 아들인데 자는 위건(緯乾)임. 소싯적부터 기지(奇志)를 품어 농(農)이 되기를 부끄럽게 여겼다. 구양첨(歐陽詹)과 더불어 문학에 각의(刻意)하여 굉사과(宏詞科)에 탁제(擢第)하였음. 관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임.
[주D-119]소릉(昭陵)에서……옥갑(玉匣) : 소릉은 당 태종(唐太宗)의 능임. 태종이 평소에 왕희지의 진적(眞跡)을 몹시 아껴 차마 손에서 놓지 못했는데, 그 뒤 고종(高宗)이 그것을 옥갑에 넣어 소릉에 저장하였음.
[주D-120]가사도(賈似道) : 송 태주인(台州人)인데 이종(理宗) 때에 자기 누나가 귀비(貴妃)로 되는 바람에 누진(累進)하여 관은 좌승상(左丞相)에 이르렀으며 추밀사(樞密使)를 겸했다. 원병(元兵)이 건강(建康)에 육박하자 송군(宋軍)이 자주 패하니, 진의중(陳宜中) 등이 사도의 죄를 탄핵하여 내쳤는데 도중에서 피살되고 말았음.
[주D-121]양흔(羊欣) : 진(晉) 남성인(南城人)으로 유소시(幼少時)부터 정묵(靖黙)하여 용지(容止)가 아름답고 언소(言笑)를 잘 하였으며, 경적을 박람하고 더욱 예서(隷書)에 장(長)하였음. 흔의 나이 12세 때에 왕헌지(王獻之)가 오흥태수(吳興太守)가 되어 몹시 지애(知愛)하였다. 그 서법은 더욱 당송인(唐宋人)의 일컫는 바가 되었음.
[주D-122]도 은거(陶隱居) : 도홍경(陶弘景)을 말함. 제8권 주 61) 참조.
[주D-123]건초척(建初尺) : 건초는 한 장제(漢章帝) 연호인데 그 당시 통용하던 동척(銅尺)을 말함. 완당이 옹성원(翁星源)으로부터 건초척 탁본을 기증받은 바 있음.
[주D-124]야율초재전(耶律楚材傳) : 원(元)의 명신으로 자는 진경(晉卿)이요, 요동단왕(遼東丹王) 돌욕(突欲)의 후손인데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원 세조는 군국(軍國)의 대사를 맡길 만하다고 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어 몽고의 누풍(陋風)을 다 개혁하였으며, 원 나라의 입국 규모(立國規模)는 다 초재의 소정(所定)이었음.
[주D-125]각단(角端) : 짐승 이름임.《송서(宋書)》 부서지(符瑞志)에 “각단은 하루 1만 8천 리를 가며 또 사예(四裔)의 언어를 이해한다.” 하였고,《원사(元史)》에는 “원 태조(元太祖)가 동인도(東印度)에 이르러 각단이 능히 말하는 것을 보았다.” 하였음.
[주D-126]《담연집(湛然集)》 : 야율초재가 저술한 문집임.

 

 

近齋集卷之三
 
入華陽洞 a_250_055d


蒼巖白石洞天開。水勢逶迤九曲廻。最恨吾生百年250_056a晩。未隨杖屨此中來。


 

 

 

 

 

 

 

 

 

 

 

 

 

 

 

 

李參奉集卷一
 
白雲洞 a_237_242c


山城連曉雨。看瀑下春臺。彰義門初入。雲溪洞忽開。木蓮攀蹔立。苔壁傍仍回。到處盡佳境。慚無陶謝才。
 而已广集卷之八
 七言律詩[下]
彰義門外賞花 a_270_509a


久矣桃源疑有無。紫霞門外始驚呼。炎山浣錦270_509b三千疋。凈土燒香八萬株。烘帶斜陽光纈眼。濃含宿雨氣淹膚。名區不是求高遠。今日誰成一幅圖。

 而已广集卷之六
 五言律詩
出彰義門避暑 a_270_441d


暑暍得風爽。神襟如復初。朝暉雲木淨。流水世情虗。偶立凉蟬處。閒看野老居。吾人求樂意。不獨在詩書。


 

藫庭遺藁卷之一
 䢜玄觀詩草
與小石金吾與侍郞洪登僚長及諸同人。游彰義門外姜家桃園。 a_289_402c


289_402d姜老園桃衆。蒸霞萬樹含。自耕太華曲。仍成百花潭。瑤圃仙人種。玄都道士參。休官棲隱計。西墖證優曇。


藫庭遺藁卷之三
 擬唐別藁
彰義門北原。雪晴寒望。擬陰岑宿雲埽。王江寧昌齡。 a_289_427c


仲冬雪初霽。澄宇稜稜靑。白雲化爲水。明波蕩泓渟。289_427d回林映蕭飋。哀壑散窈冥。崖松似膏髮。日月洗淸靈。漢陽佳麗州。儼開天帝庭。瑞氣自東來。蒼然擁宸星。九馗赫弘敞。雙闕竦峙停。聖人臨亨衢。羣龍翊昌廷。丹膏漾金液。遵海壽且寧。賤子亦何爲。猶堪守玄經。

연산 54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7월 13일(신축) 15번째기사
창의문 밖에 사는 사람을 모두 옮기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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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대왕 행장(行狀)

행장은 다음과 같다.
“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이며, 휘(諱)는 모(某)2288) 이고 자(字)는 모(某)2289) 이니, 원종 공량왕(元宗恭良王)의 큰아들이며 선조 소경왕(宣祖昭敬王)의 손자이시다. 어머니 인헌 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능안 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을미년2290) 11월 7일에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왕을 낳으셨다. 이때 왜구가 침략했기 때문에 모든 궁가(宮家)가 다 해주에 따라갔던 것이다.
탄생하시기 전에 일자(日者)가 점치기를 ‘모일에 탄생할 것인데 귀하기가 말할 수 없다.’ 하였는데, 그날 탄생할 때에 문득 붉은 빛이 비치고 기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였다. 이날 저녁에 인헌왕후의 어머니 평산 부부인(平山府夫人) 신씨(申氏)가 옆에서 졸다가 붉은 용(龍)이 왕후 곁에 있고, 또 어떤 사람이 병풍에 두 줄로 여덟 자를 쓰는 것을 꿈꾸었는데, 두 자는 흐릿하여 기억하지 못하나 귀자 희득천년(貴子喜得千年)이라 하였다. 부부인이 기뻐서 깨니 이미 탄생하셨다.
모습이 범상하지 않고 오른 넓적다리에 무수한 사마귀가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선조(宣祖)께서 보고 기이하게 여겨 이르기를 ‘이것은 한 고조(漢高祖)와 같은 상(相)이니 누설하지 말라.’ 하셨다. 겨우 2, 3세가 지나자 곧 궁중에서 길러졌는데,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우스갯말이 적으셨다. 이 때문에 사랑이 날로 융성해져 왕자들도 비교되지 못하였고 의인 대비(懿仁大妃)께서 더욱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셨다. 그 휘와 소자(小字)는 다 선조께서 지어 주신 것인데, 소자를 모(某)2291) 라 한 것을 광해(光海)가 듣고 언짢아서 말하기를 ‘어찌 이름지을 만한 뜻이 없어서 반드시 이것으로 이름지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5, 6세 때부터 선조께서 친히 가르치며 번거롭게 여기지 않으셨는데 문의(文義)가 날로 트이니 선조께서 더욱 기특하게 여기셨다. 만기(萬機)를 보살피시는 가운데에 간단(間斷)이 있을까봐 염려하여 외가인 능해군(綾海君) 구성(具宬)에게 배우게 하셨는데, 스스로 글읽기를 힘쓰고 내외척 사이에서 귀한 체한 적이 없으셨다. 정미년2292) 능양 도정(綾陽都正)으로 진계(進階)하고 이윽고 군(君)으로 봉해졌는데, 다 재능과 공로 때문이고 의친(懿親) 때문이 아니었다. 비(妃) 한씨(韓氏)는 영돈녕부사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따님인데, 선조께서 일찍이 왕자 부인(王子夫人)으로 뽑으셨다가 그대로 다시 왕을 위하여 배필로 간택하셨으니, 대개 또한 특별히 총애하셨기 때문이다.
광해 때에 원종(元宗)께서 덕업(德業)과 위망(位望) 때문에 매우 시기와 의심을 받으셨고, 왕의 두 아우 중 막내인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이 뜻밖에 화를 당하여 죽어 화가 또한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원종께서 늘 두려워 조심하다가 얼마 후에 몸져 누우셨다. 왕이 손가락을 찔러 피를 바쳤으나 지극한 정성도 보람이 없이 비통한 일을 당하시니, 밖으로는 두려움에 몰리고 안으로는 안정하지 못하여 곡벽(哭擗)2293) 이 예절에 지나치고 언 땅바닥 위에 거처하며 음식물을 드시지 않은 것이 여러 날이었으며 외제(外除)2294) 하게 되어서는 유모(孺慕)2295) 가 더욱 간절하셨다.
광해의 혼란이 더욱 심해져서 정사(政事)가 뇌물로 이루어지고 끊임없이 거두어들이며 토목 일이 해마다 잇따르고 그치지 않아 도감이라 칭하는 것이 열둘이고 민가를 헌 것이 수천 채였다. 모후(母后)를 유폐하고 골육을 도살하며 큰 옥사를 꾸미니 억울하게 죽는 자가 날로 쌓였다. 음란하고 포악한 행위가 이루 셀 수 없으며 척리(戚里)가 권세를 구하고 간흉(奸兇)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므로 모든 백성이 물이나 불 속에 있듯이 근심하였다. 왕이 아직 임금이 되기 전에 때를 기다리고 한가히 있으면서 깊이 근심하였다. 윤기(倫紀)가 무너진 것을 아파하고 종사(宗社)가 엎어지려는 것을 괴로워하여 어지러운 것을 다스려 반정(反正)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여기셨다.
마침 친근한 친족 중에 호걸이 많았는데, 이를테면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 능성 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具仁垕)가 함께 보필하고, 영의정 김류,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영의정 김자점(金自點), 영의정 최명길(崔鳴吉),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 영의정 홍서봉(洪瑞鳳), 우의정 장유(張維) 등이 꾀하지 않고도 말을 같이하여 힘을 다하여 협찬하니, 충분(忠憤)이 함께 격렬하여 내외에서 급히 응하여 몰려오고 문무의 선비들이 의리를 떨쳐 일어나고 풍문을 들은 자가 구름처럼 모였다. 드디어 함께 왕을 추대하여 창의문(彰義門)으로부터 들어가니 삼군(三軍)이 경모(景慕)하여 따르고 오묘(五廟)가 거듭 빛나니, 곧 천계(天啓) 계해년2296) 3월 12일이었다.
왕이 인정전(仁政殿) 앞에서 걸어 나가 서궁(西宮)으로 가려는데 뭇 신하가 연(輦)을 타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말을 타고 가서 궁문(宮門)에 이르러 걸어 들어가셨다. 이때 대비(大妃) 김씨(金氏)서궁에 유폐하고 그 문을 막은 지 11년이 되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열었다. 왕이 침전(寢殿)을 바라보고 두 번 절하고 곡하니 뭇 신하도 다 곡하였다. 대비께서 명하여 들어오게 하고 선조(宣祖)의 허위(虛位)를 설치하니, 왕이 또 두 번 절하고 곡하였으며 시신(侍臣)도 곡하였다. 왕이 대비를 뵙고 또 곡하니, 대비께서 말리며 이르기를 ‘이처럼 큰 경사에 어찌하여 곡하는가.’ 하셨다. 대비께서 명하여 왕에게 국보(國寶)를 전해 주게 하였는데 왕이 재덕(才德)이 없다고 사양하니, 대비께서 이르기를 ‘왕실의 지친(至親)이고 신민이 사랑하여 추대하였으니 덕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군(嗣君)은 이제부터 성주(聖主)가 될 것이니 종사의 복이다.’ 하셨다. 대비께서 이미 별당(別堂)을 청소하게 하였는데, 선조께서 정사를 돌보시던 곳이다. 왕이 절하고 나가 별당에서 즉위하고 팔도에 대사(大赦)를 내리셨다. 대비께서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왕은 총명하고 인효(仁孝)하며 비상한 모습이 있으므로 선조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다. 이름지으신 뜻에 미지(微旨)가 있었고 빙궤(憑几)하실 즈음에 손을 잡고 탄식하셨으니 촉망이 손자들 중에서 특이하셨다…….’ 하였다.
그리하여 폐희(嬖姬) 김상궁(金尙宮)을 죽이고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한찬남(韓纘男)·정조(鄭造)·윤인(尹訒)·이위경(李偉卿)과 총환(寵宦) 조귀수(趙龜壽) 등을 저자에서 환형(轘刑)하고, 학정(虐政)을 도운 박엽(朴燁)은 감사로 평양(平壤)에 있고 지당(支黨) 정준(鄭遵)은 부윤(府尹)으로 의주(義州)에 있었으므로 모두 그 곳에서 효시하고, 무신년2297) 이후 억지로 꾸민 옥사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탕척하고, 모든 영건(營建)·조도(調度)에서 남보다 혹독하게 한 무리의 거짓 훈록과 척완(戚畹)·권귀(權貴)의 전장(田庄)에 대한 감세(減稅), 복호(復戶)하는 따위 일을 모두 곧 혁파하고, 내수사(內需司)·대군가(大君家)에 빼앗긴 전민(田民)을 죄다 돌려주고, 폐단을 지은 내노(內奴) 두 사람을 참형하여 돌려 보이고, 가난한 백성의 해묵은 포흠(逋欠)을 모두 면제하게 하였다.
왕이 친정하여 맨 먼저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아서 황야(荒野)로부터 들어오게 하고, 정온(鄭蘊)을 사간으로 삼아서 제주(濟州)의 적소(謫所)로부터 소환하고, 윤방·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이정귀(李廷龜) 같은 선조(宣祖) 때의 기구(耆舊)인 신하와 그밖에 말 때문에 죄받은 자를 차례로 등용하니, 현능(賢能)과 홍석(鴻碩)이 조정에 벌여 있게 되었다. 이때 도성(都城)의 사녀(士女)와 시전(市廛)의 부로(父老)가 마치 다시 살아난 듯이 기뻐서 용동(聳動)하고 팔도의 백성이 술을 따라 서로 축하하며 말하기를 ‘성주가 나셨으니 우리들은 살았다.’ 하였다. 배신(陪臣) 이경전(李慶全)을 보내어 대비의 주문(奏文)을 가지고 경사(京師)에 가서 봉전(封典)을 청하였는데, 을축년2298) 에 황제가 태감(太監) 왕민정(王敏政)·호양보(胡良輔)를 보내어 조칙을 가져와서 왕과 왕비의 고명(誥命)·면복(冕服)을 내리니, 왕이 곧 배신 박정현(朴鼎賢) 등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고 진사(陳謝)하였다.
왕은 대비와 모비를 섬기는 데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고 용모를 유순하게 하고 낯빛을 유쾌하게 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신 적이 없었다. 갑자년2299) 에 대비를 높여 명열 대왕 대비(明烈大王大妃)라 하고 경덕궁(慶德宮)에서 진하(陳賀)하고 풍정(豊呈)을 올리고 아울러 모비를 받들어 상수(上壽)하였다. 병인년2300) 봄 모비께서 앓아 누우셨을 때에 왕이 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바치고 금중(禁中)에서 목욕하고 친히 기도하셨다.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행하려 하셨는데 예관·대간이 대통(大統)의 의리로 힘껏 다투었으므로 장기(杖朞)를 행하였으나 실은 심상(心喪)의 제도를 지키셨다.
일곱 달 뒤에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권제(權制)를 따르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엄친을 일찍 잃고 편모만을 의지하였는데 영양(榮養)한 지 오래지 않아 자당이 문득 비었으니 내 심사를 생각하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한 나라의 모든 것으로 봉양할 수 있게 되었는데 부모가 다 계시지 않으니 동쪽을 바라보고 서쪽을 돌아보며 통곡할 뿐이다. 초상 때부터 예제(禮制)를 따르고 지극한 정을 억누른 것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사(宗社)를 위하고 자전(慈殿)을 위하고 신민(臣民)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원(園)의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고 내 몸에 병이 없는데 어찌 권제를 따를 수 있겠는가. 요즈음 이 일 때문에 비통이 매우 심하다. 이 일은 해로운 것은 있고 이로운 것은 없다 하겠으니, 경들이 내 몸을 보전하고 싶으면 이런 계청을 빨리 멈추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셨다.
기년(期年)이 되자 백관이 전정(殿庭)에 모여 다시 계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상일(祥日)이 겨우 지났는데 경들이 또 이 말을 내니 내가 매우 놀랍다. 내가 변변치 못하기는 하나 결코 그럴 수 없으니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아서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셨는데, 잇따라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 입으실 복색은 대신의 의논에 따라서 행하소서.’ 하니, 왕이 심상의 예는 본디 명문(明文)이 있다고 분부하셨다. 담제를 지낸 뒤 망제(望祭) 때에 혼궁(魂宮)에 가서 애림(哀臨)하려 하시므로, 정원이 아뢰기를 ‘무릇 상을 당하여 담제를 지내면 곡이 없습니다.’ 하고 모두 세 번 아뢰었으나, 왕이 이르기를 ‘이는 대상(大祥)을 지낸 뒤에 담제를 지낸 것과 다르다.’ 하고 마침내 곡례(哭禮)를 거행하셨다.
신미년2301) 봄에 대비의 병이 위독하자 왕이 산천에 기도하고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셨는데, 회복된 뒤에 대비가 대신과 재신들에게 분부하기를 ‘주상이 밤낮으로 잘 구완해주신 덕분에 중병이 나을 수 있었다.’ 하였다. 임신년2302) 여름에 대비의 병이 다시 위독하자 왕께서 병구완하시느라 잠시도 떠나지 않으셨고 정성을 다하여 약은 반드시 친히 맛보셨고 묘사와 산천에 두루 기도하셨다. 승하하시게 되어 인경궁(仁慶宮)으로부터 경덕궁(慶德宮)으로 받들어 옮길 때에 대신과 예관(禮官)이 소여(小輿)를 타시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예에 어긋난다 하여 그대로 걸어서 따라가셨다. 27일이 지나기 전에는 대간을 임명하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명령과 교계(敎戒)를 하지 않으셨으며, 여러 날이 지난 뒤에 재신과 삼사가 상선(常膳)을 회복하시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여전히 거절하며 이르기를 ‘경들은 모두 사리를 아는 어진 사람으로서 예에 어긋난 이런 말을 하니 경들의 이 말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평소의 효성이 경들에게 믿음받지 못한 것을 스스로 한탄한다.’ 하셨다.
대비의 성품이 엄급(嚴急)하셨으나 왕이 뜻을 굽히고 안색을 살펴 받들어 조금도 어기는 일이 없으셨다. 대비께서 계축년2303) 의 화를 당하고는 죽을 들고 상중(喪中)의 음식을 드셨는데 이미 복위(復位)한 뒤에도 소선(素膳)을 드시다가 왕과 중궁(中宮)이 울며 간하는 것이 매우 간절한 뒤에야 고기를 드셨다. 왕의 정성이 귀신을 감동시킬 만하였으므로 대비전의 궁인 가운데에 말을 교묘하게 하는 자가 있기는 하였으나 감히 이간하지 못하였다. 대비께서 승하하신 뒤에 공주(公主)와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은 총애를 입은 것이 오히려 두터웠다.
왕이 모비를 잃은 뒤에, 부왕(父王)의 의관(衣冠)을 장사지낸 것이 폐조 때이므로 장지를 잘 선택하지 못한 것을 뒤미처 생각하여 분부하기를 ‘높은 산으로 형세가 급하고 단절된 산기슭으로 싸안은 것이 없으니 다시 영장(營葬)해야 한다.’ 하시어, 양주(楊州)로부터 김포(金浦)의 오향(午向)인 언덕으로 옮겨 모시고 모비를 부장(祔葬)하니, 곧 장릉(章陵)이다. 승정(崇禎) 임신년2304) 여름에 부왕을 추존하여 원종 대왕(元宗大王)이라 하고 모비를 인헌 왕후(仁獻王后)라 하였다. 배신(陪臣) 홍보(洪靌)·이안눌(李安訥) 등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추봉을 청하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고명(誥命)을 하사하고 공량(恭良)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는데, 그 칙서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그대는 대대로 동번(東蕃)을 지켜 왔거니와 그대의 아버지 휘(諱)2305) 는 습작(襲爵)받지 못하고 일찍 죽었는데 이제 추봉을 주청하니 효사(孝思)를 알 만하다. 특별히 해부의 의논을 윤허하여 그대의 아버지 휘를 추봉하여 조선 국왕으로 삼고 어머니 구씨(具氏)조선 국왕비로 삼아 고명을 내리고 시호를 주니, 그대는 이 영총(榮寵)을 입어 번복(蕃服)을 빛내고 오히려 성절(誠節)을 더욱 굳혀 전의 아름다움을 변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이 일찍이 《서전》을 읽다가 ‘조상을 받들되 효도를 생각하소서.’ 한 데와 ‘먼 것을 보되 밝게 할 것을 생각하고 덕 있는 것을 듣되 밝게 할 것을 생각하소서.’ 한 데에 이르러 반복하여 문난(問難)하셨는데, 강관(講官)이 ‘보고 듣는 것이 밝기는 가장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밝게 보고 밝게 듣기는 어렵더라도, 효도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니 효도를 잘할 수 있어야 온갖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부터 총명한 임금이 없지는 않았으나 효도를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다스리는 것도 융성하지 못하였다.’ 하셨다. 대개 왕의 효성은 타고나신 것이었고 그 학문을 강구하고 사리를 밝히는 깊이도 이러하셨다.
광해가 폐위되고 나서도 그 대우는 끝내 바꾸지 않았다. 이에 앞서 대비의 아버지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혼조에서 거짓으로 꾸민 옥사에 죽고 모부인(母夫人)이 절도(絶島)에 유배되고 어린 왕자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를 품안에서 빼앗아 죽여서 동기 세 사람이 다 혹독한 화를 입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비께서 광해는 종사의 죄인이고 국가의 원수라 하여 《춘추(春秋)》의 의리를 밝혀 처형해야 한다고 엄한 분부를 여러 번 내리셨으나, 매우 무도하기는 하나 군림(君臨)하였던 사람을 처치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왕이 부드러운 말로 간절히 간하고 반복 비유하여 밝히시니, 대비의 뜻이 조금 풀렸다.
광해가 서울에 있을 때에는 별당 하나를 가려서 있게 하고 지공이 정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사옹원을 시켜 특별히 지공하되 때에 따라 계속 바치게 하고, 또 승지에게 경계하기를 ‘오늘날의 조정은 다 그를 섬기던 사람이니 마음을 다하도록 더욱 경계해야 한다.’ 하셨다. 그가 나가서 안치되었을 때에는 왕이 폐비(廢妃)와 행희(幸姬)를 따라가게 하였으나 대비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는데, 왕이 마음에 차마 못할 바가 있어서 또 힘껏 청하여 같이 갈 수 있게 하였으며, 주선(廚膳)·일용(日用)을 특별히 명하여 넉넉히 갖추게 하고 추울 때와 더울 때의 옷을 계절에 따라 계속 보내고 중사(中使)를 자주 보내어 빠진 것을 물러 계속 보내주었다. 광해와 폐비가 마침내 천수를 다하니 모두 예장을 해주었고 폐동궁(廢東宮)과 폐빈(廢嬪)을 대우할 때도 모두 은례(恩禮)가 있었다. 광해와 폐동궁에게 다 서녀(庶女)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는 늠료(廩料)를 주어 기르고 자라서는 출가시켰는데 그 자장(資裝)을 갖추어 주고 노비와 전지를 많이 주었다.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은 혼조에서 수의(收議)할 때에 말한 것이 매우 도리에 어긋났고, 이괄(李适)이 반역하였을 때에 역적들이 끌어댄 말이 매우 흉악하였으므로 대간의 논핵이 준열하게 일어났으나, 왕이 폐조 때의 일에 깊이 징계되어 매우 자책하여 물리쳤다. 삼사와 2품 이상이 합사하여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한 해가 지나도 그치지 않았는데, 을축년2306) 에야 비로소 윤허하시어 간성(杆城)에 내보내어 안치하였다. 왕이 보고 싶지만 볼 수 없으므로 그 아들 이길(李佶)을 불러 공론에 몰린 사정을 갖추 말하고 눈물을 흘리시니, 궁인들이 모두 느껴 울었다. 또 수찰(手札)로 정원에 분부하여 강원 감사에게 일러 공해(公廨)에 거처하게 하고 잘 대우하게 하도록 하셨다. 얼마 후에 서울로 돌아오라고 명하셨는데, 무진년2307) 유효립(柳孝立) 등의 역옥(逆獄) 때에 역적들이 또 을 우두머리로 끌어대어 광해와 교통했고 자전의 분부라 사칭하여 흉악한 자들을 꾀었다고 사람들이 같은 말을 하니, 모든 관원과 모든 종실이 다 나아가 죽이기를 청하였다. 대비께서 분부를 사칭하였다는 말을 듣고 또 매우 진노하여 엄한 분부를 잇따라 내려 반드시 처형하려 하시니, 왕이 감히 어기지 못하여 자살하게 하였으나 슬피 생각하여 마지않고 얼마 후에 그의 관작을 회복하고 여러 아들에게도 아울러 벼슬을 주어 특별히 돌보셨다.
인흥군(人興君) 이영(李瑛)이 상중(喪中)에 있을 때에 왕이 국가가 왕자를 대우하는 도리는 외신(外臣)과 같게 할 수 없다 하여 그대로 품록(品祿)을 내리셨고, 임오년2308) 봄에 기근이 심하였는데 임해군(林海君)·순화군(順和君)·인성군(仁城君) 세 왕자 부인에게 모두 급료를 주라고 명하여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정축년2309) 난리를 겪은 뒤에 잡혀갔던 부마와 종실의 자녀를 모두 공가(公價)로 속(贖)하셨다. 친척의 부고를 들으면 편찮으신 중이라도 반드시 여러 날 동안 행소(行素)하셨다. 인헌 대비의 아우인 종모(從母)가 있었는데 왕이 정성으로 섬기셨다. 능창 대군(綾昌大君)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 하여 지사(地師)를 시켜 묘지를 잡게 하여 이장하고 문사에 능한 조신(朝臣)에게 명하여 만장(輓章)을 짓게 하여 애도하셨다. 아우 능원 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가 난리를 겪고 집이 없었는데 이현궁(梨峴宮)을 내려서 살게 하셨다. 그 돈독하고 화목하며 우애하시는 것은 천성에서 그러하셨다.
용의(容儀)가 단정하고 엄숙하며 행동이 법도에 맞으셨다. 제사 때에는 매우 깨끗하도록 힘쓰고 한밤에 일어나 새벽까지 근엄하게 서 계셨다. 한가한 동안에도 고요이 앉아 조용히 생각하셨고 가법이 매우 엄하므로 자손이 가까이 모셔도 감히 다가가지 못하였다.
잠저(潛邸) 때부터 뜻을 도타이하여 학문에 힘쓰되 경전(經傳)에 가장 뜻을 기울이셨다. 즉위하신 이래로 날마다 경연을 열어 유신(儒臣)을 가까이하고 토론하면 권태를 잊고 깊고 자세한 뜻을 철저히 문난하시는 것이 매우 뜻밖이므로 평소에 노숙한 사유(師儒)라는 자도 모두 탄복하였다. 밤에도 자주 사대(賜對)하여 고금의 치란(治亂)과 백성의 고락을 검토하지 않는 것이 없고 강독이 끝나면 술을 내리고 한밤에 파하시니, 조야에서 전해 말하기를 ‘태평한 옛일을 오늘날에 다시 본다.’ 하였다. 복더위가 한창 심할 때에 약방(藥房)이 경연을 잠시 멈추기를 청하면, 왕이 이르기를 ‘학문의 도리는 촌음(寸陰)을 아껴야 하는 것이니 덥다 하여 문득 멈출 수 없다.’ 하고, 윤허하시지 않았다. 혹 사고가 있어 경연을 멈추면 편전(便殿)에서 소대(召對)하고 혹 한재(旱災) 때문에 정전(正殿)을 피하면 전무(殿廡) 아래에서 경연을 여셨다.
일찍이 《서전》을 읽다가 ‘어진이에게 맡기되 딴 마음을 두지 말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되 망설이지 마소서.’ 한 데에 이르러 이르기를 ‘이것은 어렵다. 크게 간사한 자는 충성한 듯하고 으레 재주가 있으므로 임금이 혹 깊이 살피지 못하면 도리어 그에게 속아서 마침내 물리치지 못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셨다. 일찍이 인심(人心) 도심(道心)에 관한 설(說)을 강독할 때에 왕이 이르기를 ‘의리를 모르는 사람은 사욕을 공도(公道)로 여기니 이것이 도심이 없는 것이다. 모든 일은 공과 사에 달려 있으니, 한 사람이 하더라도 공변되면 옳고 사사로우면 그르다. 먼저 정일(精一)한 공부를 닦으면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장유(張維)와 기(幾) 자를 논할 때에 왕이 이르기를 ‘기미에는 두 가지가 있어서 공과 사를 분간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혹 식견이 밝지 못하여 시비를 모르는 자도 있고 혹 시비를 알아도 사욕에 가리워 살피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밝지 않으면 기미를 살필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두려운 것은 백성이라는 것은 지극한 말인데 후세에서 그 뜻을 모르고 혹 깔보아 마침내 나라를 망치기까지 하였으니 아깝다.’ 하셨다. ‘의(義)로 일을 바로잡고 예(禮)로 몸을 바로잡는다.’ 한 데를 강독하기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이 말은 가장 절실하니, 오늘날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마음에 간직해야 할 것이다.’ 하셨다. 익직편(益稷篇)을 강독하기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순(舜)은 임금이 되고 우(禹)는 신하가 되었으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오히려 이처럼 서로 경계하였다. 대저 글을 읽는 것은 입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니, 잘 읽는 자는 반드시 이 뜻을 먼저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셨다.
태갑 하편(太甲下篇)을 강독할 때에 왕이 이르기를 ‘앞에서는 덕이 없으면 어지러워진다 하고 뒤에서는 한 사람이 매우 어질면 만방(萬邦)이 바르게 된다 하였는데, 내가 이것을 읽으면 못 견디게 부끄럽다. 이제 이름 있는 사대부가 다 조정에 모였으나 치평(治平)의 조짐이 없고 난망(亂亡)의 조짐이 있으니, 이는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하셨다. 소대(召對)하여 고종 융일편(高宗肜日篇)을 강독하다가 ‘먼저 임금을 바루어야 한다.’ 한 데에 이르러 왕이 강관에게 이르기를 ‘너희들도 내 그른 마음을 바루도록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나무는 승묵(繩墨)을 따르면 곧아지고 임금은 간언을 다르면 거룩해지니, 내가 간언을 잘 따르지 못하더라도 경들은 내가 간언을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각각 마음을 다하라.’ 하셨다.
《중용》을 강독할 때에 강관이 아뢰기를 ‘이른바 몰아서 함정 가운데에 넣는다는 것은 환(患)을 피할 줄 모르는 것을 가리킨 것이고 스스로 함정 가운데에 들어가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또한 스스로 함정 가운데에 들어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난 일로 말하면 이이첨(李爾瞻)에게 편든 사람은 후환을 분명히 알면서 오히려 차마 그것을 하였으니, 바로 이른바 몰아서 넣는데 피할 줄 모른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천하·국가는 균일하게 할 수 있으나 중용은 잘할 수 없다 하는데 이 말은 의심스럽다. 균일하다는 것은 치평의 뜻이니, 중용의 도리가 아니면 어찌 치평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당 태종(唐太宗)의 일을 보면 이해가 간다. 태종의 치평은 삼대(三代)에 가깝다 하겠으나 그 처신을 생각하면 덕 없는 것을 부끄러워할 바가 크게 있으니, 중용은 잘 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하였다.
교사(郊社)의 뜻을 논의하면서 이르기를 《중용》 한 편(篇)은 성(誠) 자를 추연(推演)하여 지은 것이다. 그 정성을 다하여 교사(郊社)·체상(禘嘗)의 예(禮)를 밝힌다면, 나라의 큰일은 제사에 있으므로 그 나머지 나라를 다스리는 모든 일은 이에 따라서 조치할 뿐이다.’ 하셨다. 왕이 정경세(鄭經世)에게 이르기를 ‘예전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인재를 이대(異代)에서 빌려오지 않아도 일세(一世)의 인재를 잘 수용하면 일세의 치평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용사(用捨)할 즈음에 사정(邪正)을 가리지 못하면 나라의 위망(危亡)이 여기에 관계될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인이 하는 짓은 반드시 임금의 마음에 맞추어 아첨하고 뜻에 따르되 무슨 짓이든 다 하므로 가까이하기 쉽고 멀리하기 어려우니, 군자는 정직하게 혼자 행하고 일에 따라 바로잡으며 뜻에 맞추어 아첨하는 짓을 하지 않으므로 가까이하기 어렵고 멀리하기 쉽다. 임금에게 사욕이 없다면 어찌 소인을 가까이하고 정직한 자를 미워하겠는가.’ 하시니, 정경세가 대답하기를 ‘성감(聖鑑)이 이토록 밝으시니 종사의 행복입니다.’ 하였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할 때에 그 글에 맨 먼저 군신(君臣)을 거론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부자가 있고 나서야 군신이 있는 것이다마는, 치란(治亂)의 도리로 말하면 군신이 근본이다. 임금은 신하의 강(綱)이 되니 그 책임이 이처럼 중대한데 후세에 다스려진 때는 적고 어지러운 때가 많은 것은 그 임금이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강이 될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하시니,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이것이 어찌 오로지 임금에게 달려 있겠습니까. 신하들이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 주(註)에 임금이 바르면 신하가 바르다고 말한 것은 지극히 훌륭하다 하겠다.’ 하셨다.
왕이 경연에서 묻기를 ‘참설을 물리치는 것과 여색을 멀리하는 것은 어느 것이 어려운가?’ 하시니, 정경세가 대답하기를 ‘참설의 해독이 더욱 큽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여알(女謁)2310) 에는 어찌 참설이 없겠는가.’ 하셨다. 왕이 묻기를 ‘삼대(三代) 이후에 사람을 알아보고 임용을 잘한 임금은 누구인가?’ 하시니, 장유(張維)가 대답하기를 ‘한 고제(漢高帝)가 으뜸일 것입니다.’ 하고,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고제는 사람을 알아보았으나 믿는 것은 도탑지 못하였습니다마는 소열제(昭烈帝)공명(孔明)이 어질다는 것을 알고 전적으로 맡겼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소열제공명의 명성을 듣고 평소에 일을 같이하려 하였으므로 그처럼 전적으로 위임하였던 것이며 고제는 망명한 군졸 가운데에서 발탁하여 썼으니, 이것은 후세에서 미칠 수 없는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어진 신하가 어느 세대인들 없으리오마는, 그때의 임금이 알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이 걱정일 뿐이다. 금세에도 어찌 어진 자가 없으리오마는, 옛사람은 그 임금을 ·과 같게 하지 못하면 마치 저자에서 매맞듯이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인책하였으나 지금은 이러한 사람이 드물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인재를 얻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 현종(唐玄宗)으로 말하면 개원(開元) 초기에는 현능(賢能)을 써서 나라가 다스려졌으나 천보(天寶) 말기에는 간녕(奸佞)을 써서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이제는 현능이 뭇 직위에 벌여 있는데도 다스리는 데에 보람을 보지 못하니, 이것은 괴이하다.’ 하셨다. 상세히 묻고 밝게 가리며 겸손하게 받아들이시는 것이 대저 이러하였는데 이루 기록할 수 없다.
정경세가 부제학이었을 때에 진강하여 《논어》 일부를 끝내니, 왕이 그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운 것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한 계자(階資)를 올려 주었으며 정헌 대부(正憲大夫)가 되어도 논사(論思)의 직임에 떠나지 않게 하였으니 전후 모두 5년이었다. 동궁(東宮)은 사(師)·부(傅)·이사(貳師)를 위하여 거애(擧哀)하는 것이 예(禮)이나 빈객(賓客)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정경세가 빈객으로서 죽었을 때에 예조는 예대로 하기를 바랐으나 왕은 마음을 다하여 가르친 은혜가 있다 하여 특별히 거애하게 하였다. 「성학도(聖學圖)」·「황극도(皇極圖)」 및 무일편(無逸篇)을 유신(儒臣)을 시켜 써서 병풍을 만들어 가까이 두셨다. 학문을 좋아하고 유신을 우대하시는 것이 또한 이러하였다.
문학의 재능이 있는 유신을 뽑아 사가 독서(賜暇讀書)시켜 특별히 도탑게 총애하고 젊은 문신도 각각 전경(專經)하게 하여 전강(殿講)하셨다. 때때로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문재(文才)·무재(武才)를 시취(試取)하고 대사성(大司成)에게 경계하여 선비들에게 학문을 권면하게 하셨다. 사유(師儒)를 뽑아 사학(四學)의 교도(敎導)를 나누어 맡게 하고 하교하기를 ‘《맹자》에 어려서 배우고 장성하여 행하고자 한다 하였다. 국가가 학교를 설치하고 사람마다 자제를 가르치는 것이 어찌 그냥 하는 것이겠는가. 우리 나라의 법교(法敎)가 매우 상세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세도가 점점 쇠퇴하여 행실이 없거나 변변치 못한 자가 많고 충신하거나 온후한 자가 적으니, 이것은 참으로 임금과 부형들의 수치이다. 성균관과 사학을 설치하여 인재를 기르는 것은 치평을 이룰 이기(利器)를 얻으려 힘쓰는 것인데, 행실이 없는 무리가 그 사이에 낀다면 국가가 미리 기르는 본의에 어긋나고 또한 동렬(同列)을 물들여 더럽힐 염려도 없지 않을 것이니, 이제부터 오륜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 자는 장관(長官)을 시켜 영구히 성균관·사학에서 내쳐서 풍속을 격려하게 하라.’ 하셨다.
김덕함(金德諴)이 대사성이었을 때에 유생들이 가르침에 따르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왕이 근시(近侍)를 보내어 술을 내려 벌주고 이르기를 ‘선비에게는 군(君)·사(師)·부(父)를 위해서 죽어야 할 의무가 있으니 스승과 제자의 분의(分義)가 중대한데, 더구나 나라에서 사표(師表)로 정한 자이겠는가. 김덕함은 혼조에서 절개를 세우고 경전에 마음을 두었으니, 당세에서 찾아도 그만한 사람이 많지 않다. 유생들이 옛 규범을 본받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으니 잘못이 없다 할 수 없다. 지금 어온(御醞)으로 그대들을 벌하니 공경하라.’ 하시니, 유생들이 감동하여 기뻐하였다.
드디어 《삼경(三經)》 및 그 언해(諺解)와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의 서적을 양계(兩界)에 나누어 보내고 문관인 수령도 많이 차출하여 보냈으니 양계의 문교가 쇠퇴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양계는 이 때문에 문과(文科)에 오르는 자가 잇따랐다. 오륜가(五倫歌)를 번역하여 인쇄해서 중외에 펴게 하고 《삼강행실(三綱行實)》도 아울러 간행하게 하셨다. 또 인재를 기르고 풍속을 변하게 하는 데에는 《소학(小學)》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여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인쇄하여 바치게 하여 뭇 신하들에게 나누어 내리고 예조에 권면하여 동몽(童蒙)을 가르치고 잘 읽는 자를 뽑아서 생원시·진사시의 초시를 보게 하고 팔도의 감사에게 하유하여 두루 권장하게 하시니, 궁벽한 시골에도 글을 읽는 풍습이 조금 있게 되었다. 또 나라를 유지하는 방법은 명분에 있으므로 무릇 아버지의 일에 대하여 아들에게, 주인의 일에 대하여 종에게, 지아비의 일에 대하여 아내에게, 형의 일에 대하여 아우에게 물을 일이 있더라도 그들을 증인으로 삼을 수 없다 하여 경외에 널리 고하여 묻지 말게 하셨다.
어진이를 높이는 뜻이 그 생사에 관계 없이 차이가 없으셨다. 즉위하신 처음에 장현광(張顯光)·김장생(金長生)·박지계(朴知誡) 등을 모두 곧 역마로 불러서 쌍가마를 타고 오게 하여 혹 따로 사업(司業) 벼슬을 두어 제수하기도 하고 발탁하여 헌부(憲府)의 벼슬에 두기도 하고 또 강학청(講學廳)을 열어 세자를 가르치게 하셨다. 그들이 이르렀을 때에는 공경을 다하여 맞이하고 녹봉(祿俸) 이외에 늠인(廩人)2311) 이 곡식을 대어 주었고, 그들이 물러갔을 때에는 장리(長吏)를 시켜 세시(歲時)에 안부를 묻게 하셨다. 초야에 있는 인사에 대해서 조금도 버려져 있게 하지 않으시니, 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최온(崔蘊) 등이 다 뽑혀 쓰였고 임하(林下)에서 일어나 경재(卿宰)까지 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죽으면 조문(弔問)하고 그 부물(賻物)을 보낼 뿐만 아니라 관가에서 그 장구(葬具)를 마련해 주고 그 자손과 문생(門生)을 찾아서 임용하게 하셨다.
대신을 공경하는 데에는 예모를 갖추셨다. 접대하는 말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셨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문하셨으며 좋은 말이 있으면 반드시 따르셨다. 그들이 죽었을 때에는 부물과 수의를 특별히 주셨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늙어서 걷지 못하게 되니 궤장(几杖)을 내리고 술을 내려 잔치하게 하였으며 견여(肩輿)를 타게 하고 또 소환(小宦)을 시켜 부축하여 전(殿)에 오르게 하시니, 이원익이 은사(恩私)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가 물러가 금천(衿川)에서 노년을 보낼 때에는 왕이 자주 근시를 보내어 안부를 묻게 하셨다. 이귀(李貴)의 말이 대신을 범하였는데, 왕이 듣고 하교하기를 ‘대신은 임금 한 사람 아래에 있어 지위가 백관과는 아주 다르고 조정에서 예로 대우하는 것은 임금을 공경하기 때문인데, 이귀는 뭇사람이 모인 가운데에서 상신(相臣)을 욕하여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하니, 일이 매우 놀라울 뿐만 아니라 또한 이 버릇을 연장되게 할 수도 없다. 이 일을 방치한다면 어찌 내가 공신(功臣)을 끝내 보전하려는 도리이겠는가. 임금을 가벼이 여기고 조정을 업신여긴 데에는 나라에 법이 있으니, 내가 감히 사사로이 할 수 없다. 이 뜻을 양사에 말하여 공론에 따라 죄주게 하라.’ 하시니, 이귀가 이 때문에 파직되었다.
뭇 신하를 친근히 하는 데에는 병든 자가 있으면 반드시 의관을 보내어 묻게 하고 내약(內藥)을 보내셨다. 을해년2312) 에 왕이 목릉(穆陵)에 가서 제사할 때에 대사헌 김상헌(金尙憲)이 따라가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뒤떨어졌는데 왕이 듣고 어의(御醫)를 머물려 두어 구완하게 하였으며 길에서 사자(使者) 몇 명을 보내어 병문하게 하고 또 일행 가운데에 있는 족속을 물어 곧 역마를 타고 달려가 보게 하셨다.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에게는 진기한 과일과 옷감을 내리고, 봉양하기 위하여 고을살이를 청하는 자는 다 바라는 대로 되게 하셨다. 이경여(李敬輿)가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외직에 보임되기를 바랐는데 왕이 그가 경악(經幄)을 떠나는 것을 바라지 않으므로 쌀과 콩을 주게 하고, 박장원(朴長遠)이 월과(月課) 때에 반포오시(反哺烏詩)를 지었는데, 왕이 보고 가엾게 여기면서 그에게 편모(偏母)가 있으나 봉양할 수 없음을 알고 먹을 것을 주셨다. 성묘하는 자에게는 제수를 내리고 한겨울에는 때때로 추위를 막을 제구를 내리고, 경비가 부족할 때를 당하더라도 그 가난을 염려하여 봉록을 늘리고, 직분 안의 일이라도 조금 공로가 있으면 반드시 물건을 보내어 보답하셨다.
훈신(勳臣)를 대우하는 데에는 은수(恩數)가 특별히 융숭하고 총애하여 내리는 물건이 문득 많았다. 을축년2313) 에 정사 공신(靖社功臣)·진무 공신(振武功臣)을 거느리고 친히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하고 잔치를 내려 은수를 더하셨는데, 진무는 장만(張晩) 등이 역적 이괄(李适)을 평정한 훈호(勳號)이다. 수찰(手札)로 특별히 하교하기를 ‘경들이 아니면 윤기가 없어지고 종사가 엎어졌을 것이니, 경들의 공은 고금에 없던 것인데, 회맹례(會盟禮)는 지냈으나 갚을 길이 없다. 경들과 함께 어려움을 구제하여 고락을 같이하기를 바라니, 임금과 신하 사이에 각각 그 도리를 다하여 능히 사욕을 버리고 지극히 다스려지도록 꾀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던 때를 잊지 말라 각자 역량을 다하면서 조그마한 힘도 아끼지 말라.’ 하셨다. 병술년2314) 에 또 영사(寧社)·영국(寧國)의 신구 공신등과 회맹하셨다. 정사 원훈과 그 아들을 때때로 금중(禁中)에 불러들여 술과 고기로 대접하여 집안 사람끼리 대하는 예처럼 서로 수작하셨다. 세자에게 친후(親厚)를 길이 보전하라고 경계하기까지 하셨으나 혹 법을 범하면 또한 훈귀(勳貴)라 하더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셨다.
왕이 붕당의 화가 반드시 나라를 망칠 것이라 하여 번번이 연중(筵中)에서 뭇 신하에게 경계하여 ‘병화나 홍수·가뭄의 재앙도 당론보다 더하지 않다.’ 하셨다. 일찍이 영의정 김류에게 이르기를 ‘근일 백관이 직무를 게을리하고 기강이 해이한 것은 참으로 사욕을 따르고 붕당을 감싸는 탓에서 말미암았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기를 바라려면 대신과 도헌(都憲)2315) 이 마땅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 일은 상법(常法)으로 다스릴 수 없으니, 이 뒤로 붕당을 감싸는 일이 있으면 심한 자는 참형에 처하고 결코 용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하고, 또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선왕께서 의주에 계실 때에 시 한 수를 지으셨는데 시의 뜻은 대개 조정의 붕당을 경계한 것이다. 신하로서 그 시를 보면 조금 징계될 것인데 폐습이 날로 심해지니, 참으로 슬프다.’ 하셨다. 왕이 이처럼 매우 억제하셨으므로 반정 뒤에는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깨끗한 몸가짐이 있는 신하에게는 문득 칭찬하고 숭장(崇奬)하셨다. 이직언(李直彦)은 나이 많고 평소에 절조가 있다 하여 우찬성에 승배(陞拜)하고, 이원익(李元翼)은 벼슬이 재상에 올라도 초가에서 곤궁하게 산다 하여 경기에 명하여 기와집을 지어 주게 하고 베이불과 흰요를 내리고, 무신(武臣) 최진립(崔震立)은 간약(簡約)하다 하여 공조 참판에 탁배(擢拜)하고, 성하종(成夏宗)도 청렴하고 신중하여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북 병사(北兵使)가 되었다.
노인을 우대하는 법은 상례(常例)보다 훨씬 더하여 세수(歲首)에는 늙은 신하를 문안하고 또 옷감을 보내셨다. 경오년2316) 에 하교하기를 ‘노인을 공경하고 어진이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다. 옛 임금은 혹 친히 나아가 잔치하여 위로하기도 하고 벼슬을 내리고 비단을 내리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다 높이는 뜻이다. 지금 내가 덕이 없어 위로 천심(天心)에 부응하지 못하므로 7, 8년 동안 병화와 기근이 거의 없는 해가 없으니, 기로(耆老)를 생각하면 절로 부끄럽고 두려워진다. 지금 경비가 아주 없어 잔치하여 위로하는 일은 워낙 쉽게 의논할 수 없으나 벼슬을 내리는 은전은 거행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니, 해조로 하여금 노인작(老人爵)을 제수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지극한 뜻을 보이라. 늙은 과부에게도 등급을 나누어 물건을 내리도록 명하여 고루 은전을 입게 하라.’ 하셨다. 그래서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세상에 드문 은혜를 입었고, 이 뒤에 나이 많아서 벼슬을 더한 자가 매우 많았다.
홍서봉(洪瑞鳳) 등 여러 재신이 회연(會宴)하여 그 늙은 어머니를 축수할 때에 왕이 한 사람 앞에 풀솜 두 근씩을 내리고, 또 하교하기를 ‘경들은 다 늙은 어버이가 있어서 영양(榮養)을 극진히 하니 내 마음이 감동된다.’ 하셨다. 선을 베푸는 인자함이 흔히 이러하셨다. 충효를 포숭(褒崇)하되 찾아서 정표(旌表)하고, 나라의 일에 죽은 자는 부모 처자를 다 무양(撫養)하고 그 집에 다달이 늠료(廩料)를 주고 그 고아를 벼슬시키셨다. 김응하(金應河)의 집에는 여러 번 은 3백 냥을 내리고, 또 김준(金浚)의 일가가 안주(安州)에서 죽어 삼강(三綱)이 구비하였다 하여 그 아들 김진성(金振聲)에게 6품 벼슬을 초수하셨다. 항오(行伍) 중에서 전사한 자에게는 관직을 추증하고, 군정(軍丁)에게는 복호(復戶)하셨다. 왕이 문무(文武)를 병용하는 것이 장구한 도리이므로 무사를 대우하는 것이 박해서는 안 된다 하여, 조종 때에 후하게 보살펴 준 규례로 깨우쳐서 재국(才局)과 원식(遠識)이 있는 통정(通政) 이상인 자는 육경(六卿)과 승지(承旨)에 주의(注擬)하고 통훈(通訓) 이하인 자는 시정(寺正)·낭료(郞僚)에 차의(差擬)하게 하셨다. 또 한가한 때에는 친림하여 시열(試閱)하고 능한 자를 상주셨다. 장수를 대우하는 도리는 흔히 고례(古禮)를 본뜨셨다. 계해년2317) 에 도원수 장만(張晩)이 출정할 때에 왕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친히 상방검(尙方劍)을 주어 명을 따르지 않는 제장(諸將)을 베게 하시고, 그 뒤 김자점(金自點)이 원수(元帥)가 되었을 때에도 검을 내리셨다.
날씨가 추우면 번번이 변방의 장사(將士)를 염려하여 그 괴로운 정상을 자세히 적어 조서를 내리셨는데, 그 글의 대략에 ‘먼 곳 외로운 성에서 적개(敵愾)의 뜻이 절실하더라도 고향 집을 떠나 어찌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금할 수 있겠는가.’ 하고 차등을 두어 명주를 내리기도 하고 방한구를 내리기도 하고 군졸에게는 옷과 가죽을 주셨다. 무진년2318) 겨울 추위가 심할 때에 수찰(手札)로 하교하기를 ‘어공(御供)에 관계되는 모든 물건을 혹 하교에 따르거나 소차에 따라 거의 다 줄였으나 아직 줄이지 않은 것은 담비 갖옷이다. 해조는 반드시 추위를 막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서 폐지하기를 감히 청하지 않았겠지만 서방 백성이 얼어 죽는 때에 내 몸에 가벼운 갖옷을 입는 것은 마음에 매우 불안하니, 올해에는 진상하지 말고 그 대가인 무명을 양서에 내려보내어 헐벗은 백성에게 나누어 주라.’ 하셨다. 정묘년2319) 변란 때에 철산(鐵山) 사람 정봉수(鄭鳳壽)용골 산성(龍骨山城)을 지켜 적을 물리쳤는데, 왕이 소견하여 상방금단(尙方錦段)과 내구마를 내리시고 초천(超遷)하여 전라 병사(全羅兵使)까지 삼으니, 사람들이 다 권려하는 것을 알았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근로하시는 것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다. 재변을 당하면 반드시 이것은 내 죄라 하고 반드시 과실을 죄다 아뢰고 원옥(冤獄)을 심리하게 하셨다. 간원이 가뭄 때문에 친히 비를 비시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임금이 두렵게 여겨 몸을 움추리고 덕을 닦지 못하고 재앙을 만나면 빌 줄만 아는 것은 말세의 일인데, 그대들이 내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나에게 빌기를 권하니,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취한 것이다. 인사가 아래에서 바로잡히면 천기가 어찌 위에서 불순하겠는가. 인사를 닦지 않으면 하늘이 그것에 반응을 보이는 것인데, 내가 즉위하고부터 재앙을 내리는 꾸중이 매우 심하니, 밤낮으로 근심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대들은 말단의 일을 생각하지 말고 각각 곧은 말을 아뢰어 위로 내 잘못을 책망하고 아래로 백성의 억울한 일을 풀어 주라.’ 하셨다.
왕은 재앙을 당한 임금은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을 아울러 먹지 않는 것이라 하여 사옹원의 어전(漁箭)도 설치하는 것을 윤허하시지 않았으며, 정전(正殿)을 피하고 찬선(饌膳)을 줄이는 것을 말단의 일로 여겼지만 감히 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비는 것을 말단의 일로 여겼지만 또한 감히 친히 빌지 않은 적이 없으셨는데, 반드시 응답이 있었다. 일찍이 사직단에서 빌 때에 바야흐로 제사하려는데 비가 내리므로 유사(有司)가 장막을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또 우산을 받쳤으나 물리치시어 어의(御衣)가 죄다 젖었다. 만년에는 병환이 나서 거행하지 못하셨다. 일찍이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답답히 여겨 큰 베옷을 입고 앉아 뭇 신하를 불러 각각 극진히 말하게 하고 자책이 매우 간절하셨는데, 파하자 비가 크게 내렸다.
자기를 죄책하고 충직한 말을 구하는 하교가 전후에 누누이 있었는데, 그 대략에 ‘하늘과 사람은 같은 이치이므로 나타나고 은미한 것에 차이가 없으니 복을 주고 화를 주는 응답이 어찌 감동되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재앙을 그치게 하는 도리를 닦으려면 곧은 말을 구해야 할 것이다. 모든 내 과실과 좌우의 충사(忠邪)와 정령(政令)의 선악과 민생의 이병(利病)을 숨기지 말고 모두 말하라. 말한 것이 채용할 만하면 내가 상줄 것이고 혹 맞지 않더라도 죄주지 않을 것이니, 너희 중외의 대소 신하는 각각 소견을 실봉(實封)하여 조목조목 올리라.’ 하셨고, 또 이르기를 ‘일처리를 잘못해서 덕이 이지러졌는가. 죄 없는 자가 뜻밖에 죄에 걸려 지극한 원통이 풀리지 않았는가. 용사(用捨)를 제대로 못하여 인재가 답답해 하고 있는가. 형상(刑賞)이 미덥지 않아서 사람에게 권장되고 징계되는 것이 없는가. 부역이 고르지 않아서 서민이 원망하는가. 언로(言路)가 막혀서 아랫사람의 뜻이 통하지 않는가. 제사가 깨끗하지 않아서 온갖 신명이 흠향하지 않는가. 호강하고 교활한 자가 흉독을 부려서 마을이 시름하고 한탄하는가. 참소하는 자가 뜻을 얻고 사사로이 청탁하는 자가 극성을 부리는가. 안팎이 엄하지 않아서 뇌물이 행해지는가.’ 하시어 말씀이 매우 간절하였다.
병자년2320) 에 가뭄과 홍수가 잇따르니, 하교하기를 ‘한 가지가 지극히 많거나 지극히 없는 것은 홍범(洪範)2321) 에서 근심한 바이며 오래 비가 내리거나 오래 가무는 것은 잘못한 결과로 초래된 것이니, 이 가운데서 하나만 있어도 백성이 편히 살지 못하는데 더구나 아울러 있고 아울러 지극한 것이겠는가. 내가 외람되게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음에 덕은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지 못하고 재주는 일을 알 만하지 못하며 공검(恭儉)은 표준이 되지 못하고 상벌은 권징(勸懲)이 되지 못하여 병란과 수한(水旱)으로 백성에게 해를 끼칠 뿐이니, 사람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어찌 부끄럽고 두렵지 않겠는가. 올해에는 가물은 끝에 수재가 매우 혹독하니, 이것은 재변 가운데에서도 가장 절박한 것이다. 슬픈 우리 백성에게 죽음이 닥쳤는데 이런 때에 임금은 먹는 것으로 백성을 괴롭힐 수 없고 또한 방책 없이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 각도의 물선(物膳)을 모두 연한을 정하여 바치지 말고 공상(供上)하는 종이도 마찬가지로 시행하고, 재해를 입은 곳은 진휼하는 정사를 각별히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라.’ 하셨다.
번번이 흉년이나 병란의 화를 당하면 반드시 밀린 조세를 감면하고 그 부역을 줄이고 모든 삭선(朔膳)과 절일(節日)에 바치는 것과 조석으로 바치는 것과 내외사(內外司)에서 향온(香醞)을 빚는 일을 모두 절감하되 3년에서 4년에 이르는 것이 항상 많으므로 어주(御廚)에 여유의 찬선(饌膳)이 없었다. 태복(太僕)의 어마(御馬)까지도 말하는 것을 채택하여 그 수를 줄여서 재변을 경계하는 뜻을 보이셨다. 정해년2322) 에 또 가뭄과 홍수의 재앙이 있었는데, 호부(戶部)의 미곡 5만 석을 덜어서 백성의 공부(貢賦)를 갈음하게 하셨다. 백성이 굶주리면 혹 창고의 곡식을 내거나 다른 곳의 곡식을 옮기고 또 진휼청을 설치하여 죽을 쑤어 먹이되 착한 재신(宰臣)과 낭서(郞署)를 가려서 그 일을 맡게 하고, 외방에도 경중과 마찬가지로 아울러 신칙하셨으므로 길에 굶어 죽는 자가 없었다.
여역(癘疫)이 있으면 의국(醫局)을 시켜 약을 지어 구완하게 하고, 또 유사를 시켜 여사(廬舍)를 지어 거처하게 하고 관가에서 그 죽반(粥飯) 거리를 주게 하셨다. 난리를 겪은 뒤에 우역(牛疫)이 매우 치성하여 거의 다 죽었는데, 여러 목장에서 기르던 것을 몰아서 여러 고을로 흩어 보냈으므로 소가 크게 번식하여 백성이 밭갈이에 괴롭지 않았다. 혹 대신과 비국의 신하를 부르거나 근신(近臣)을 불러 과실을 듣기를 바라셨다. 일찍이 김류에게 이르기를 ‘원훈(元勳)은 국가와 고락을 같이하는 사람인데 입시(入侍)한 때에도 내 잘못을 말하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고 그 뒤에 또 대신에게 이르기를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법은 임금이 잘못을 고치는 것밖에 없고 또 인재를 얻기에 달려 있다. 이 두 가지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잘못이 있으면 대관(臺官)이 말해야 할 것이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는 책임은 대신이 담당해야 할 것이다.’ 하셨다.
왕은 늘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먹는 것은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라 생각하여 백성의 고통을 내 몸이 다친 듯이 여기고 백성을 때에 맞추어 부리셨다. 산릉(山陵)의 일과 칙사의 수용(需用)일지라도 민간에서 장만하도록 요구하지 말게 하고 각사(各司)에 저축한 쌀과 베를 가져다가 쓰게 하고 또 내부(內府)의 물건으로 그 비용을 돕게 하셨다. 전전(殿前)에 빈 땅을 개간하여 벼와 콩을 조금 심어서 풍흉(豊凶)을 점쳤는데, 중관(中官)이 물주려 하니, 그만두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우로(雨露)가 생성(生成)하는 것을 보고자 한다.’ 하셨다. 또 벽에 엎어진 배를 그려 두고 늘 보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붙이셨다. 혹 이익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하교하기를 ‘이익을 중시하고 백성을 경시하는 것은 내가 숭상하는 바가 아니다. 이해로 말하더라도 백성이 보존되는 것이 곧 나라의 큰 이익이다.’ 하셨다. 또 백성의 고락은 수령에 달려 있고 수령의 출척은 감사에 달려 있으며 곤수·변장도 다 군졸의 고락에 관계된다 하여 양전(兩銓)에 엄히 신칙하여 반드시 신중히 간택하게 하셨다.
글로 하유하기를 ‘임금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요체는 요역을 가볍게 하고 관리를 가려 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감식(鑑識)이 미치지 못하여 국가에 일이 많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백성이 혜택을 입지 못하니, 수한풍상(水旱風霜)을 당할 때마다 더욱이 절로 무안하고 꺼림하다. 내가 성취를 바라는 것은 경상(卿相)이고 함께 다스리는 것은 방백(方伯)·곤수와 수령·변장인데 능히 그 직분을 다하는 자가 매우 드무니, 내가 한탄한다. 이제부터 수령은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백성을 사랑하여 온 경내가 편안하여 원망이 없게 하고 성실로 자신을 단속하고 정성으로 공무에 봉사하며, 변장은 군무에 마음을 다하여 군졸을 돌보고 스스로 포기하지도 말고 스스로 한계짓지도 말아서 내가 군사와 백성을 돌보는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청덕(淸德)이 있으면 내가 한(漢)나라의 상(賞)을 써서 발탁하여 공경(公卿)에 제배할 것이고, 혹 탐학하면 내가 제(齊)나라의 형벌을 시행하여 정확(鼎鑊)2323) 에 넣을 것이다. 각도의 감사·병사를 시켜 특별히 신칙하여 실효를 요구하고 도리를 어기면서 명예를 바라는 것을 잘 다스리는 것으로 여기지 말로 군사를 침학하면서 군기를 갖추는 것을 직분을 다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게 하라.’ 하셨다.
사조(辭朝)할 때에는 고하를 막론하고 친히 보고 권면하고, 수령이 비면 혹 근신을 섞어 차출하기도 하고 혹 재신(宰臣)을 시켜 특별히 벼슬을 옮기게 하기도 하셨다. 가장 잘 다스린 자는 차서를 뛰어넘어 발탁하고 탐오한 자는 엄중히 다스렸으며 피폐한 직무를 다시 잘 일으킨 감사는 혹 계속 맡게 하거나 다시 제수하기도 하고 곤수도 그렇게 하셨으며 변장까지 다 상주고 벌주셨다. 또 자주 암행 어사를 보내어 그들의 재능을 살피게 하셨다. 이 때문에 감사·수령과 곤수·변장 중에 청간(淸簡)·선정(善政)으로 일컬어지는 자가 많았다.
간(諫)하는 자의 말이 곧으면 혹 술을 주거나 말을 내리거나 마장(馬裝)을 내리거나 표피(豹皮)를 내리고 이따금 발탁하여 써서 언로(言路)를 열고, 충직한 것을 알면 매우 기휘(忌諱)에 저촉되거나 견주어 말한 것이 도리에 어긋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죄주지 않으셨다. 정온(鄭蘊)을 대사간에 특제(特除)한 것은 그가 곧은 것을 아름답게 여겼기 때문인데,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정온이 강직하기는 하나, 전하를 접때에 견주었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예전에는 「폐하는 걸(桀)·주(紂)보다 심하다.」는 말을 한 사람도 있다. 또한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셨다. 이명준(李命俊)이 살아서는 간장(諫長)에 특배되고 죽어서는 장수(葬需)를 하사받았으니 또한 강직했기 때문이다. 최현(崔睍)이 역옥 때에 체포되었는데 국청이 형신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지난해 야대(夜對)에서 그 때 마침 처치가 미진한 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입시한 관원으로서 힘껏 다투어 마지않는 것을 내가 자못 괴로워하였으나 그 뒤에 생각하니 참으로 나를 사랑한 자였다. 지금 죄를 받았지만 처음 먹은 마음을 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고 곧 석방하도록 명하셨다. 대개 최현이인거(李仁居)의 반역을 모르고 처사(處士)가 큰소리한 것이라고 망령되게 말한 일 때문에 죄받았다. 그 말이 충직하면 한때에 취할 뿐이 아니라 또한 능히 오래 되어도 알아 주시는 것이 이러하였다.
왕은 인명(仁明)하고 예지(睿智)하신 것이 백왕(百王)보다 뛰어나셨다. 팔도·백사(百司)의 문부(文簿)는 세밀히 분석하여 곡진하게 사리에 맞게 하셨고 대소신민의 추감(推勘)은 매우 미세하더라도 어두워 밝히지 못하는 것이 없으셨다. 형옥(刑獄)에 대해서는 더욱이 삼가고 돌보도록 힘써 계복(啓覆)에 친림하여 평번(平反)한 것이 많고 한추위와 한더위에는 염려를 훨씬 더하셨다. 역옥이 일어나면 문득 이르기를 ‘백성이 원망하여 반역하는 것은 내가 어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고, 반역한 정상이 뚜렷하더라도 협박 때문에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으셨다. 왕이 스스로 심리하시면 억울한 생각을 품는 자가 하나도 없었고, 옥사를 국문하는 형장(刑杖)을 가볍게 하여 그 분수(分數)를 줄이고, 모든 사죄(死罪)에 대해서는 애매하면 이미 승복한 자라도 문득 용서하고, 갑자년2324) 의 억울한 자도 다 뒤미처 죄를 씻어 주셨다. 이 때문에 역변(逆變)이 여러 번 일어났으나 사람들이 뜻밖에 걸리는 것을 근심하지 않았다.
계유년2325) 한인급(韓仁及) 등을 보내어 장자(長子) 휘(諱)2326) 를 세자로 봉하기를 청하고 아울러 추봉(追封)을 사례하게 하였는데, 갑술년2327) 에 황제가 태감(太監) 노유령(盧維寧)을 보내어 세자의 고칙(誥勅)과 채단(綵段)을 가져와 칙서를 내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왕은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켜오며 예를 지키고 의를 따랐으므로 공순한 전통을 반드시 능히 이어받을 것인데 봉강(封疆)에 일이 많으니 빨리 주무(綢繆)해야 할 것이다. 이에 지금 이미 세자를 세웠으니, 이 가르침을 명시하여 전례를 따르고 변하지 말아서 국가를 보전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을해년2328) 12월 9일에 왕비가 승하하셨다. 왕비는 정정(貞靜)하고 인명(仁明)한 덕이 있고 왕을 모시되 풍간(諷諫)하신 것이 많았다. 장릉(長陵)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하였는데 파주(坡州) 북쪽에 있고, 그 사적은 본릉(本陵)의 지문(誌文)에 자세하다.
왕은 천품이 영의(英毅)하나 늘 스스로 겸손하셨다. 병자년2329) 여름에 하교하기를 ‘국가의 치란 상태는 임금의 덕에 달려 있다. 작은 말 한마디라도 흥망이 달라지고 깊숙한 곳에 혼자 있더라도 삼가지 않으면 나타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 두려움 때문에 감히 태만하고 안일하지 않았으나, 본성이 어리석고 학력이 없어서 말을 듣고 눈동자를 보아도 어진 사람인지 간사한 자인지 모르겠고 일에 임하여 헤아려도 시비를 가리지 못한다. 게다가 기로(耆老)가 많이 죽어 경외(敬畏)가 점점 느슨해져서 치령(治令)을 내는 근원이 바른 것을 얻지 못하니, 인심이 흩어지고 국가가 망하려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상을 당한 뒤에 오래도록 경연을 멈추었는데, 이것은 죽음을 슬퍼하고 어진이를 생각하는 데에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또한 잘못이다. 이제 하늘의 꾸중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귀에 대고 말하고 면전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니, 내가 매우 두렵다. 이제부터 허물을 고치고 착한 사람이 되어 위로 하늘의 꾸중에 보답하고 아래로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려 하니, 나의 신하들은 내가 허물을 고치려는 것을 받아들여 더불어 큰일을 할 수 없다 하지 말고 또한 각각 그 마음을 새롭게 하여 구습을 일변하고 성실을 다하도록 힘써서 함께 구제할 것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삼사는 허물을 바루고 잘못을 바로잡아 위아래에 과실이 없게 하고, 이조는 사욕이 없고 편파가 없이 오직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호조는 용도를 절약하고 피폐를 염려하여 백성의 힘을 손상하지 말고, 예조는 학업을 권장하여 교화를 밝히고, 병조는 인재를 장려하고 뽑아 써서 장수가 모자라지 않게 하고, 형조는 형벌을 삼가고 안타깝게 여겨 억울한 일이 없게 하고, 공조는 쇠퇴한 것을 닦아 일으켜 전일과 같지 않게 하라. 모든 관사도 마음을 다하여 그 직무를 폐기하는 일이 없게 하라. 조정이 한번 바루어지면 사방이 동화되는 보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아, 그대들의 할아버지와 그대들의 아버지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막중한 분의(分義)를 생각해서 해야 할 직무를 다하여 치평(治平)을 가져오고 교화를 일으키면, 그대들의 조상에게 어찌 영광이 있지 않겠는가. 능히 지극한 정성을 다하면 이것을 해내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니, 각각 힘쓰라. 옛말에 「어지러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엄중한 법을 쓴다.」 하였으니, 귀근(貴近)에 대해서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임금 노릇도 어렵고 신하 노릇도 쉽지 않다.」 하였으니, 위아래가 각각 조심하고 힘써서 위태로운 것을 바꾸어 편안하게 하면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셨다.
또 하교하기를 ‘정치의 요체는 인재를 얻는 데에 있고 치평을 가져오는 일에는 어진이를 구하는 것이 급한데, 나는 인재가 세상에 모자라지 않으나 어진이를 오게 하는 방도가 넓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어진 사람이 문지기나 야경꾼이 되고 은둔하는 사람은 더 깊이 숨지 못할까 염려한다면, 치평을 가져오려 하더라도 어찌 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방도로서는 유능한 자를 널리 구하여 천공(天工)을 대행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이를테면 몸가짐이 바르고 덕행이 있는 자와, 의리에 잠심(潛心)하여 학술이 있는 자와, 용맹과 지혜가 남보다 나아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자와, 기절(氣節)이 도탑고 굳어 직간(直諫)할 수 있는 자와, 강포하여 선한 일을 막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봉공(奉公)에 굳세고 과감한 자와, 세상일에 통달하여 처사가 명민(明敏)한 자는 다 크게 쓸 사람이니, 직위에 있는 문·무관(文武官)을 시켜 각각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또 각도의 감사를 시켜 찾아서 아뢰어 어진이를 버려두는 한탄이 없게 하라. 또 남을 알기는 매우 어려우나 스스로를 아는 것은 밝으니, 재능과 지혜가 뛰어나서 세상을 구제하고 적을 막을 수 있는 자는 각각 스스로를 천거하여 내가 기량에 따라 쓰도록 만들라. 아, 옛사람 중에도 자신을 천거한 자가 있거니와, 국가를 다스려 편안하게 한다면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셨다.
또 하교하셨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사람이 세상에 나서 오래 살아 죽지 않는 자가 없으니 아녀자의 손에서 죽어 초목과 함께 썩는 것보다 의리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 장부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낫다.’ 하셨다. 대개 정묘년2330) 금인(金人)이 깊이 들어왔을 때에 왕이 강도(江都)에 들어가 묘당의 계책을 써서 적이 화평을 청함에 따라 허락하셨는데, 계유년2331) 에 이르러 우리에게 폐물을 늘리라고 협박하고 군사를 원조하라고 꾀었다. 큰 의리가 달려 있어서 다른 것을 고려할 겨를이 없으므로 맹약을 어겼다고 꾸짖어 절교를 알렸더니, 병자년2332) 봄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왔다. 뭇사람의 의논이 준열히 일어나 사자를 베어 죽이기를 앞다투어 청하였는데 사자가 몰래 듣고 놀라 달아났다. 사기(事機)가 이미 변하자 왕언(王言)이 여러 번 내려졌는데 뜻은 더욱 격렬하였다. 12월에 적병이 갑작스레 이르렀으므로 왕이 강도로 향하려다가 일이 급해져서 방향을 돌려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셨는데 적이 군사를 더하여 에워싸니 왕이 친히 성을 순행하며 삼군(三軍)을 위로해 주셨다.
하루는 날씨가 춥고 눈이 내리는데 왕이 행궁(行宮) 뜰에 나와 기도하셨다. 향을 피우고 네 번 절한 다음 거적을 깔고 빌기를 ‘고립된 이 성에 들어와 믿는 것은 하늘인데 이처럼 눈이 내려 장차 얼어 죽을 형세이니, 내 한 몸은 아까울 것도 못 되나 백관(百官)·만민(萬民)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 개게 하여 우리 군사와 백성을 살리소서.’ 하고는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저녁이 되어도 그치지 않으셨다. 빗물이 어의에 스미므로 근시가 일어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대신이 다시 청하여도 따르지 않다가 옷자락을 끌고 울며 청한지 한참 만에야 비로소 일어나 네 번 절하고 물러나시는데 눈물이 턱으로 흘러내리니, 장사(將士)가 듣고 모두 느껴 울었다. 왕이 쓰던 취구(毳具)·모금(毛衾)을 내어 성 위의 군사들에게 조각조각 나누어 주고 호종(扈從)한 신하들이 앞다투어 의금(衣衾)을 보내니, 군사들이 추위를 잊었다. 적이 화해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시니, 밤을 타서 성을 세 번 쳐왔으나 세 번 모두 격퇴하였으므로 사기가 더욱 떨쳤다.
그러나 40여 일 동안 포위되어 성 안에 양식이 떨어지고 강도의 패보(敗報)가 또 이르렀으므로, 김류·최명길(崔鳴吉) 등이 왕에게 아뢰기를 ‘피폐(皮幣)·주옥(珠玉)을 바치는 일은 탕왕(湯王)·문왕(文王)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성에서 나가기를 굳이 청하고 세자도 스스로 가서 인질이 되겠다고 청하니, 왕이 종사(宗社)와 백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따르셨다. 정축년2333) 정월 29일에 적영(敵營)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오시니, 묘모(廟貌)가 퇴폐하지 않고 유민(遺民)이 온전히 돌아왔다. 곧 강도에서 군율(軍律)을 어긴 장수를 주벌하고, 상신(相臣) 김상용(金尙容) 등의 충성을 표창하고,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의 죽음을 가엾이 여겨 그 집을 돌보고, 전사한 군졸의 한데에 드러난 해골을 묻고 근신을 보내어 제단을 쌓아 제사하고, 이역(異域)에 잡혀간 사녀(士女)를 불쌍히 여겨 금을 내어 속(贖)하니, 민정(民情)이 크게 위안되었다.
왕은 반정한 뒤로 사대(事大)에 매우 근신하셨다. 바닷길이 험난하여도 조빙(朝聘)이 정성스러웠으며, 희종 황제(憙宗皇帝)의 휘음(諱音)을 듣고는 뭇 신하를 거느리고 애림(哀臨)하여 상복을 입고, 홍방(洪霶)을 보내어 진위(陳慰)하고 진향(進香)하게 하였으며 한여직(韓汝溭) 등을 보내어 새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게 하셨다. 정묘년에 기미한 뒤에 권첩(權怗) 등을 보내어 연유를 갖추어 진주(陳奏)하니, 예부(禮部)의 회자(回咨)에 ‘성지(聖旨)를 받드니 「왕이 병화를 입은 정상을 아뢴 것을 보고 짐의 마음이 매우 슬프다. 오랑캐와 통문(通門)하며 왕래하고 임시방편으로 군사를 파산한 것은 왕의 본의가 아니며 군신의 대의로 말하면 해와 별처럼 밝으니 왕의 충성은 짐이 환히 아는 바이다. 왕은 와신상담에 더욱 힘쓰고 엄히 방비하라.」 하셨습니다.’ 하였다. 유흥치(劉興治)가도(椵島)에서 반역하여 흠차 총병(欽差摠兵) 진계성(陳繼盛)을 공격하여 죽였을 때에 왕이 이서(李曙)·정충신(鄭忠信) 등을 보내어 그 죄를 성토하니 유흥치가 달아나 해도(海島)로 들어갔는데, 중국 장수들이 듣고 의롭게 여겼다.
관내(關內)가 병화를 입었다는 말을 듣고 정두원(鄭斗源)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가져가서 진위(陳慰)하게 하고 또 병기(兵器)를 바쳤으며, 이어서 고용후(高用厚)를 보내어 기보(畿輔)를 신속히 소탕한 것을 축하하게 하셨다. 경중명(耿仲明)·공유덕(孔有德) 등이 무리를 다 데리고 심양(瀋陽)으로 투항해 들어갔을 때에 군사를 일으켜 중국 군사와 협력하여 토벌하여 패주시켰다. 요동(遼東)의 사인(士人) 전세작(全世爵) 등 18인이 난리를 피하여 와서 의탁하였을 때에 가엾게 여겨 입히고 먹이니, 전세작 등이 죽음을 맹세하고 감사하였다. 표류하여 온 한인(漢人)은 모두 후하게 도와서 보냈는데 이런 일이 전후에 매우 많았다. 포위된 성 안에 있을 때에도 절일(節日)을 당하면 망궐례를 거행하되 마치 지척에서 대하듯이 하셨다. 환도한 뒤에 경연에서 《시전》을 강독하다가 ‘화락한 군자는 천자의 나라를 진수(鎭守)하리로다.’ 한 데서 이르러, 왕이 크게 탄식하고 줄줄 눈물을 흘리니, 좌우가 모두 슬퍼하였다. 한 범선(帆船)에 의지하여 순풍을 타고 가서 충성을 펴려 하였는데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으나, 만 굽이 물이 반드시 동으로 향해 가는 마음은 신명에게 질정할 만하셨다.
교린(交隣)에는 반드시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유구국(琉球國)임자정(林子政) 등 8인이 표류하여 우리 변방에 이르렀는데 위무하여 보냈더니, 중산왕의 세자 상풍(尙豊)이 우리 부경 사행(赴京使行) 편에 자문(咨文)과 예폐(禮幣)를 전해 보내어 사례하였다. 일본 관백(關白) 수충(秀忠)가광(家光)에게 전위(傳位)하고 사자를 보내어 내빙(來聘)하여 세호(世好)를 닦기를 청하였으므로, 정립(鄭岦) 등을 보내어 회답하고 잡혀갔던 1백 40여 인을 쇄환하였다. 대마 도추(對馬島酋)가 중 현방(玄方)을 보내어 공무목(公貿木)을 줄이지 말기를 청하고, 또 평성행(平成行) 등을 보내어 도중(島中)의 재물이 없음을 고하고 해마다 보내 주는 물건을 당겨 내어 주기를 청하였는데, 왕이 약조를 어기는 것이라 하여 윤허하지 않고 특별히 물건을 내려주셨다. 가광이 그 할아버지를 위하여 복을 비느라 큰 절을 세워 일광사(日光寺)라 이름하고 신필(宸筆)을 얻어 나라 안에 뽐내려 하였다. 왕은 천품이 작은 기예에 능한 것이 많아 널리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고 필법이 매우 기특하였으나 숨기고 나타내지 않으셨는데, 대신이 먼 데 사람의 희망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아뢰니, 종실 중에서 뛰어난 사람을 시켜 쓰게 하여 내려주셨다. 대개 작은 기예를 전해 보이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무인년2334) 조씨(趙氏)를 계비(繼妃)로 들이시니, 영돈녕부사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따님이다. 소현 세자(昭顯世子)정축년2335) 심양(瀋陽)에 가서 연경(燕京)으로 옮겨 들어갔다가 을유년2336) 봄에 돌아와 곧 병이 위독하여 서거하고 그 맏아들도 병들었으므로 시사(時事)에 근심이 많았다. 왕에게 봉림 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 두 아들이 있었는데, 봉림 대군은 인효(仁孝)하고 활달하며 나이도 위이었다. 왕이 나라에 연장한 대군이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라 하여 대신들과 경대부에게 물어 계책을 정하셨는데, 그때 봉림 대군이 막 북경에서 돌아왔다. 그래서 봉림 대군 휘(諱)2337) 를 세자로 삼으니, 여정이 일치하였다.
처음에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두 번 사퇴하는 글을 올리니, 왕이 두 번 수비(手批)를 내려 답하셨는데, 처음에는 ‘너는 총명하고 효우(孝友)하며 그릇이 작지 않으므로 특별히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어받는 예(禮)를 쓰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효제(孝悌)의 도리를 더욱 닦고 형의 아들을 네가 낳은 아들처럼 여기라.’ 하고 두 번째에는 ‘내 뜻이 먼저 정해지고 계책을 물었는데 다들 너를 어질게 여기니 너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도심(道心)을 공경히 지키라.’ 하셨다. 그 뒤에 왕이 조용히 세자에게 이르기를 ‘접때 네 글에 답하여 도심을 공경히 지키라 하였는데, 네 능히 그 뜻을 아느냐. 이것은 상고(上古)에 서로 전한 심법(心法)이다.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희미하니 정순하고 전일해야 참으로 그 중도를 지킬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는 이 열여섯 자는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큰 요체를 담고 있으니, 너는 정순하고 전일한 도리를 강구하고 중도를 지키는 도리를 힘써 행하라.’ 하시니, 세자가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고 공경히 명을 받았다. 이것은 삼대(三代) 이후에 듣지 못한 일이거니와, 위로 요(堯)·순(舜)·우(禹)가 서로 전수한 심법을 이을 수 있으니, 아, 아름답다.
왕이 늘 이르기를 ‘은(殷)나라하(夏)나라에서 거울삼고 당(唐)나라수(隋)나라에서 거울삼았거니와, 지금 거울삼을 바는 어찌 혼조(昏朝)에 있지 않겠는가. 위아래가 서로 힘써 아첨하던 일을 본뜨지 말도록 하라.’ 하셨다. 또 세자에게 이르기를 ‘접때 밖에서는 외척과 권간(權奸), 안에서는 내시와 궁첩들이 뇌물을 자행하고 서로 의탁하여, 처음에는 사사로이 바쳐 먹여주고 나중에는 두터운 정을 맺어 형벌을 벗어나고 벼슬을 꾀하여 하고 싶은 대로 하였는데, 이는 다 탐욕이 끝이 없는 어둡고 약한 광해의 성품 때문으로, 마침내 필부가 되려 하여도 될 수 없었다. 내가 이것을 두려워하여 그 기미를 힘껏 막으니, 정사에 임하고 일을 처치하는 데에 다시는 얽매이고 끌리는 것이 없었고 심신(心神)도 편안함을 깨달았다. 이것은 네가 오늘날 친히 보는 것이거니와, 뒷날에도 이러해야 할 것이다.’ 하시니, 세자가 일어나 공경히 들었다. 왕이 또 일본은 죽이기를 좋아하고 은혜가 적으므로 명령이 관백의 입에서 한번 나오면 감히 그 그른 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따라서 종용하니 이것은 패망하는 길이라 하여, 세자에게 이르기를 ‘우(禹)는 훌륭한 말에 대하여 배사하고 문왕(文王)은 천한 사람의 말에서도 채택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재주가 미치지 못하거나 덕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겠는가. 전부터 일본의 전세(傳世)는 두 세대에 지나지 않았는데, 대개 창업한 자는 자못 그것이 어렵고 큰일임을 알기 때문에 겨우 자신 때에는 면하였으나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도리로 다스리지 않고 악한 일만을 더하여 중기(重器)가 근심스러운 줄 모르고 방탕한 대로 버려두었기 때문이다. 곧 망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하셨으니, 대개 풍자하여 깨우치신 것이다.
병술년2338) 에 폐빈(廢嬪) 강 서인(姜庶人)이 대역(大逆)으로 죽었다. 심양(瀋陽)에 있을 때부터 소행에 부도한 짓이 많고 몰래 역위(易位)를 꾀하였으며, 대궐에 돌아온 뒤에는 더욱 패악(悖惡)을 부려 흉한 것을 묻어 저주하고 요사를 부려 독을 두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가 반역의 정상이 드러나서 폐출(廢出)되어 사사(賜死)당했는데,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윤리를 밝혀 근심을 막는 데에 있다. 혹 죄가 의심스럽기만 한 것이라면 어찌 차마 단연히 법을 행하여 아이들이 날마다 울며 의지할 데가 없게 하겠는가. 옛말에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대모(大謀)를 어지럽히게 되고 법이 한번 흔들리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데에서 나온 것이고 참소를 믿고 죽이기를 좋아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죄는 무겁더라도 은례(恩禮)를 전혀 없앨 수 없으니, 예장(禮葬)하게 하고 3년 동안의 제물도 적당히 주게 하라.’ 하셨다. 왕법을 시행하되 천의(天意)가 또한 애연(藹然)하셨다.
이때 왕이 창경궁(昌慶宮)에 계셨는데 어침(御寢)·금정(禁庭)이 하나도 마르고 깨끗한 곳이 없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영안위(永安尉)의 집에 임시로 계시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근방의 민가가 많이 침점(侵占)당한다 하여 허락하지 않으셨다. 인경궁(仁慶宮)의 재목을 헐어서 창덕궁(昌德宮)의 옛터에 옮겨 짓기를 청하였는데, 공역에 드는 물건을 다 각사(各司)에서 취하여 두어 달 만에 낙성하니 원망하는 백성이 없었다. 정해년2339) 창덕궁에 이어(移御)하셨다. 기축년2340) 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원손(元孫) 휘(諱) 모(某)2341) 를 왕세손으로 책봉하셨다. 왕세손은 옥질(玉質)이 침착하고 신중하며 예용(禮容)이 점잖고 우아하므로 모든 신하가 서로 축하하였다.
왕은 전신을 기울여 밤낮으로 정사에 힘쓰셨다. 병환이 없을 때에는 문서를 출납하는 일을 밤이 되어도 쉬지 않으므로 은대(銀臺)2342) 의 금직(禁直)하는 신하가 감히 자지 못하였다. 왕의 병환은 임신년2343) 상중에 계실 때에 시작되어 피로하고 염려하는 가운데에 손상이 쌓여 17년 동안 낫지 않고 더하다 덜하다 하셨다. 무자년2344) 겨울 이후 6∼7개월 동안 자못 좋아지시어 때때로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천재(天災)가 번갈아 일어나는 것을 근심하고 시사(時事)가 어렵고 위태한 것을 염려하여 임금의 과실을 듣기를 바라시는 것이 처음에 비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4월에 또 인견하여 민사(民事)·병기(兵機)와 서환(西患)·남우(南憂)에 대하여 묻지 않으신 것이 없었을 때에 성지(城池)와 군사를 말한 자가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적을 막는 도리는 성과 군사에 달려 있지 않고 장수에 달려 있으니, 내 소견으로는 장수를 논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하겠다.’ 하시고, 강도(江都)의 목장을 백성이 경작하도록 허가하고 수륙(水陸)의 방비책에 대한 천어(天語)가 정녕하셨다. 며칠 안 되어 조금 더 나아지다 갑자기 위독해졌는데 내국(內局)2345) 이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나, 폐단이 있으므로 설치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이해 5월 8일 병인에 창덕궁의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셨는데, 임종 때에 대신과 근신이 모두 입시한 것은 마지막을 바르게 하는 예이다. 춘추는 55세이고 재위는 27년이었다. 이해 9월 20일에 왕비의 능 오른쪽에 장사하였는데, 왕의 명에 따른 것이다. 왕비의 장사 때에 모든 석역(石役)을 되도록 간략하게 힘쓰고 곡장(曲墻)·상설(象設)과 정자각(丁字閣)을 다 가운데에 두어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였는데, 뒷날에 백성의 힘이 거듭 괴로울 것을 염려한 것이다.
왕은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셨다. 늘 사치를 경계하고 성색(聲色)·진완(珍玩)을 즐기는 일을 마음이나 눈에 두신 적이 없으며, 하교하기를 ‘사치는 말세의 폐습이다. 이것이 어찌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숭상할 것이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조종께서 몸소 절검(節儉)을 행하여 위에서 모범을 보여 이끄시어 뭇 신하가 감화되어 돈박(敦朴)한 풍습이 수백 년 동안 유행하였는데, 근래 국운이 불행하여 혼조(昏朝)의 임금과 신하가 조종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을 저버리고 사치를 다투어 숭상하니 의복·음식과 거마·궁실이 모두 사치해졌다. 염치가 이 때문에 없어지고 백성이 이 때문에 몹시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내가 외람되게 큰 통서(統緖)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먼저 이 버릇을 없애려고 생각하나, 오염된 지 이미 오래 되어 갑자기 고치기 어렵다. 그러나 예전부터 백성을 바꾸어서 다스린 일은 없거니와,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하게 좋아하는 법이니, 오늘날 변화하지 않는 것이 어찌 모범이 되어 이끄는 도리가 미진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고요히 생각건대 스스로 뉘우치고 책망할 뿐이다. 모든 우리 종실과 공경 대부는 다 내 뜻을 본받아 혼인·빈객의 수요와 거마·의복의 제도에 대하여 검약을 힘쓰라. 폐습을 크게 고치면 어찌 보치(補治)하는 한 방도가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사치의 해독은 물불보다 심하다 하였거니와, 이 한 가지 말만 음미하여도 경계할 줄 알 것이니, 공경하라. 이것을 깊이 징계삼으라.’ 하셨다. 신하들을 대하면 번번이 사치한 버릇의 해독을 말하고 궁중에서 입는 것은 오로지 소박한 것을 숭상하고 법복(法服)이 아니면 무늬 있는 비단을 입지 않고 여름철에는 베옷을 입되 또한 고운 것을 취하지 않으셨다. 이 때에 이르러 염(斂)에 쓰인 것은 명주옷이 많았는데, 다 평소에 지어 둔 것이다.
승하하신 날에 대궐에 달려와 곡하는 서울 안의 인사가 길을 메웠는데 모두 부모를 잃은 듯하였고, 원근의 외방에서 와서 곡하는 사대부가 잇따랐고 먼 지방 벽촌의 어리석은 백성까지도 놀라 통곡하였다. 아, 왕은 뛰어난 자질로서 삼대(三代)를 만회할 뜻이 있었으므로 말에 나타나고 명령에 베푸는 것이 다 경전 가운데에서 나왔으니,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법을 사적에 이루 다 쓸 수 없다. 거의 풍속이 바뀌어 변화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많은 재해를 입은데다 질병까지 겹쳐서 정치가 하고자 하신 대로 되지 못하니 슬피 한탄하셨다. 그러나 윤리가 다시 밝아지고 종사가 다시 편안해졌으니 중흥(中興)의 위열(偉烈)은 조종보다 빛나고 성덕(盛德)과 지행(至行)은 후세에 길이 일컬어질 것이다. 백성을 인애하는 정사는 만년에 이르러 더욱 부지런했고 폐단을 없앨 뜻은 떨치지 않을 때에 더욱 도타웠으며 어진이를 가려서 국본(國本)을 정하고 도리를 중시하여 심법을 전수하신 것으로 말하면, 심원하신 그 지려(智慮)와 고명하신 학문은 또한 말세의 임금이 비슷하게라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아, 착하시다. 아, 애통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5책 351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仁祖別墅遺基碑
[前面]
御筆
仁祖大王龍潜之時別墅遺基碑
[後面]
御製
仁祖大王龍潜之時別墅遺基碑陰記
顯祿大夫東平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 臣杭 奉敎書
洪惟我
仁祖大王 龍潛之日 別墅在北部延曙驛村之後 漢都十里之內 不遠而邇也 盖茲地 靈氣攸鍾 佳祥鬱䓗 豈非惟天 惟祖宗陰騭 以玉成我聖祖也耶 是本我元宗大王 在龍潛時 嘗有以經營之也 䂓制草草 專尙朴素 我仁祖大王 克紹儉德 不會恢拓 時擧玉趾 消遣世憂 方是時也 光海昏亂已 極 宗社之危 迫在呼吸 我仁祖大王 應天順人 撥亂反正 明倫紀於旣斁 拯生民於塗炭 化家爲國 光復前烈 矧伊天啓 癸亥三月十一日乃
改玉之前一日也 爰與二三心膂之臣 駐憇于是亭 然則我聖祖中興之業 實基乎斯 可以與海州之芙蓉堂
媲美而匹休 於戯其盛矣 於戯其盛矣 不幸歲月寢久 亭榭蕩然 柱礎獨存 鞠爲茂草 使我聖祖再造之地 作一荒廢之所 豎豊碑而叙事蹟 尙今闕焉 予恐文獻無徵則 代愈遠而事愈泯 亟命內臣而董之 修其遺址 繚以周墻 托貞珉而紀實 傳盛烈於來後 庶乎其億萬斯年而無疆云爾
歲在乙亥之秋七月壬午 謹識
 

 

 

 

 
어필, 인조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별서 유기비

어제, 인조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별서 유기비 음기 현록대부 동평군 겸오위도총부도총관 신 항이 교서를 받들어 쓰다.

우리 인조대왕께서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 북쪽으로 연서역 마을 뒤에 별서를 두었는데 그곳은 서울에서 십리 안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 대개 이 지역은 영기가 모이고 상서로움이 많은 곳인데, 이는 오직 하늘과 조종이 은연중에 복을 내려 우리 성조께서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은 본래 우리 원종대왕께서 잠저에 계실 때에 경영하였으며 규모가 작아 오직 소박할 뿐이었다. 우리 인조대왕께서도 검소한 덕을 잘 이어받아 넓히지 아니하고 때때로 거둥하여 세상의 시름을 달래곤 하였다. 이때는 바야흐로 광해군이 왕위에 있던 때로서 혼란이 극에 달하여 종사의 위태로움이 눈앞에 닥쳐 있었다. 이에 우리 인조대왕은 하늘의 뜻에 응하고 백성들의 믿음을 얻어 어지러움을 바로잡아서, 이미 흐트러졌던 기강과 윤리를 밝게 하고 도탄에 빠졌던 백성들을 건지고 왕위에 올라 조종의 뜻을 회복하여 더욱 빛내었으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계시가 아니겠는가!
계해년 3월 11일은 인조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날이었다. 이 날 두세 명의 측근 신하와 함께 이 정자에 머물러 쉬었으니, 우리 성조 왕업의 중흥은 실제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곳은 해주의 부용당과 짝할 만큼 아름답다. 아! 그 성대함이여. 그러나 불행히도 세월이 많이 흘러 정자의 서까래는 모두 무너져 내렸고 기둥과 주춧돌만 남은 채 잡초만 무성하여 우리 성조께서 새롭게 일어났던 유적지가 한갓 황폐한 땅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아직까지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문헌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세대가 내려갈수록 옛 일이 더욱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급히 내신에게 명하여 주선하게 하였다. 이에 유지를 보수하고 사방에 담을 쌓고, 굳은 돌에 사실을 기록하여 그 성한 뜻을 후세에 전할 수 있게 하였으니 이제 억만년 끝없이 전해지리라.

을해년 가을 7월 임오일에 삼가 쓰다.
 
 
완당전집 제8권
 잡지(雜識)
잡지

일전(日躔)황도(黃道)를 한 바퀴 돌면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을 거쳐 네 철이 차례로 가름하여 일세(一歲)를 이루는 것이다. 일세는 삼백육십오 일로 영수(零數)가 있으니 이는 한 가지의 일이다. 이는 세실(歲實)이라 한다.
달은 백도(白道)를 걸쳐 한 바퀴 돌면 초하루ㆍ조금ㆍ보름ㆍ그믐을 지나 해를 추급(追及)하여 일삭(一朔)을 이룬다. 십이의 합삭(合朔)은 모두 삼백오십사 일로 영수(零數)가 있으니 이것이 또 한 가지의 일이다.
옛날 성인은 백성들이 절기(節氣)가 궁(宮)을 지나도 쉽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인하여 우선 합삭의 일주(一周)를 따라 한 달로 삼고 합삭의 십이주로 일 년을 삼았으니, 진실로 생명(生明)생백(生魄)은 고개만 쳐들면 보기가 쉽기 때문에 그 수시(授時)의 편의함을 취한 것이요 합삭의 십이주를 곧 세실이라 한 것은 아니다.
세실은 스스로 세실이 되고 합삭은 스스로 합삭이 되어 하늘에 있어서는 각자 운행하여 본래 한 궤도[一軌]가 아닌데 지금 이미 합삭을 빌려서 세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실은 모두 삼백육십오 일로 영수가 있어 십이의 합삭과 비교하면 열 하루의 약(弱)이 더 많으니 기영(氣盈)이란 것은 이 열 하루의 약이요, 십이의 합삭은 모두 삼백오십사 일로 영수가 있으니 세실에 비교하여 열 하루의 약이 적다. 삭허(朔虛)라는 것은 이 열 하루의 약이다.
이 년이 되면 이십일 일이 많고 영수가 있는데 동지(冬至)는 장차 제 십이월인 때문에 삼 년이면 반드시 윤(閏)을 둔다. 대개 세실은 삼주(三周)가 차면 이미 삼십칠 합삭을 지나서 영수가 있는 때문에 하나의 합삭이 많아서 그것이 윤이 된 것이다.
채주(蔡注)에는 이미 “일행(日行)의 수와 월행(月行)의 수”라 이르고서 또 이르기를 “삼백 육십이란 한 해의 상수(常數)이다.”라 하였으니, 일ㆍ월의 행도(行度)의 밖에 이는 또 무슨 수란 말인가. 전혀 두루뭉수리가 되어 분별이 없으니 강해(强解)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요, 또 “기영(氣盈)과 삭허(朔虛)를 합하여 윤(閏)이 생긴다. 해는 하늘과 더불어 모이기 때문에 오 일이 많고 달은 해와 더불어 모이기 때문에 오 일이 적다. 그러므로 한 해의 윤의 율(率)은 곧 십 일이다……” 하였으니 그 오 일이 많은 것은 계산에 들 수 있겠거니와 오 일이 적은 것은 또 어떻게 계산에 들어가서 십 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 또한 두루뭉수리가 되어 분별할 수가 없으니 강해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이다.
이십팔수(二十八宿)의 별은 비로소 《주례(周禮)》 빙상씨(馮相氏)에 나타났으나 그 명목은 자상하지 않다. 《이아(爾雅)》 석천(釋天)에는 별이 십칠수만 있고 여(女)ㆍ위(危)ㆍ위(胃)ㆍ자(觜)ㆍ삼(參)ㆍ정(井)ㆍ귀(鬼)ㆍ성(星)ㆍ장(張)ㆍ익(翼)ㆍ진(軫)은 없으며 월령(月令 《예기》편명)에는 겨우 이십육성(星)뿐인데, 대개 건(建)호(弧) 들어 있고 기(箕)ㆍ묘(昴)ㆍ귀(鬼)ㆍ장(張)은 없다.
《사기》역서(曆書)에 비로소 이십팔성의 호(號)가 자상히 갖추어졌는데 건(建)ㆍ벌(罰)ㆍ낭(狼)ㆍ호(弧)만 있고 두(斗)ㆍ자(觜)ㆍ정(井)ㆍ귀(鬼)는 없으며 또 필(畢)을 탁(濁)이라 이르고 묘를 유(留)라 이르고 유(柳)를 주(注)라 일러서 지금과는 같지 않으며, 지금 전하는 이십팔수의 명목은 비로소 《회남자(淮南子)》 시훈해(時訓解) 및 《한서》 역지(曆志)에 나타났다. 대략은 금성(金星)이 해와 사십 도의 거리에서 나타나므로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한 것이다. 옛날에는 추보(推步)가 없었고 지금은 윤(輪)의 교(交)를 측차(測次)하여 본천(本天)의 안에 들어가면 땅과 가까워 주현(晝見)의 경계를 얻는 것이며 다시 위도(緯度)로써 남북을 가감(加減)하여 주현의 시기를 정하는 것이다.

예(禮)는 태일(太一)에 근본한 것이다.
복희(伏羲)는 십언(十言)의 교(敎)를 지었는데 건(乾)ㆍ곤(坤)ㆍ진(震)ㆍ손(巽)ㆍ감(坎)ㆍ리(离)ㆍ간(艮)ㆍ태(兌)ㆍ소(消)ㆍ식(息)이다.
문자가 없는 것을 역(易)이라 이른다.
육 선공(陸宣公) 주의(奏議)의 균세(均稅)ㆍ휼백성(恤百姓) 육조(六條)에 이르기를 “대범 천지의 사이에 나서는 오재(五材)의 용(用)이 제일 급한 것이 되는데 오재란 것은 금ㆍ목ㆍ수ㆍ화ㆍ토(金木水火土)이다. 수ㆍ화는 작위(作爲)를 자뢰하지 않고 금ㆍ목은 스스로 산택(山澤)에 나며 오직 토만은 파식(播植)을 주로 하므로 힘이 아니면 이루지를 못한다.”라 하였다.
북두의 칠성은 이른바 “선(璇)으로 한 기(璣)와 옥(玉)으로 한 형(衡)으로 칠정(七政)을 제(齊)한다.”는 것이다. 표(杓)는 용각(龍角)을 연하고 형(衡)은 남두(南斗)의 은(殷)이요, 괴(魁)는 삼성(參星)의 머리를 베개한다. 황혼을 이용하여 중을 가리킨 것은 표(杓)이며, 두(斗)는 제거(帝車)가 되어 중앙에 운전하고 사방을 임제(臨制)하며 음양을 나누고 사시(四時)를 가리키고 오행(五行)을 고르게 하고 절도(節度)를 옮기고 모든 기(紀)를 정하는 것은 모두 두에 매였다. 두(斗)ㆍ괴(魁)는 대광(戴匡)의 육성(六星)인데 문창궁(文昌宮)이라 이르며 괴 아래 육성이 둘 둘로 배비(排比)된 것은 이름을 삼태(三能)라 한다.

《춘추》의 운두추(運斗樞)에 이르기를 “두(斗)의 제일은 천추(天樞)요, 제이는 선(璇)이요, 제삼은 기(璣)요, 제사는 권(權)이요, 제오는 형(衡)이요, 제육은 개양(開陽)이요, 제칠은 요광(搖光)이며, 제일에서 제사까지는 괴(魁)가 되고 제오에서 제칠까지는 표(標)가 되며 합하면 두가 된다.”고 하였다.
낭성(狼星)의 근지에 큰 별이 있어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이라고 하는데 그 노인성이 나타나면 정치가 편안하다고 했다. 노인성의 한 별은 호성(狐星)의 남쪽에 있는데 인주(人主)가 수명을 연장하는 조응(照應)이 된다. 그러므로 수창(壽昌)이라 하며 천하가 안녕하다. 항상 추분(秋分)의 새벽에는 경방(景方)에 나타나고 춘분의 저녁에는 정방(丁方)에 나타난다.

석씨찬(石氏贊)에 이르기를 “노인성이 밝으면 임금이 수하고 창성하다.”라 하였다.

별이란 금(金)의 산기(散氣)로서 그 본(本)은 화(火)이며 한(漢 하한(河漢)을 말함)도 금의 산기로서 그 본은 수(水)이다. 한에 별이 많으면 물이 많고 별이 적으면 가물다.

《건착도(乾鑿度)》에 이르기를 “세(歲)는 삼백육십오 일인데 일(日)을 사분(四分)한 하나를 괘(卦)로써 용사(用事)한다. 한 괘는 효(爻)가 여섯이요, 효는 하루로 치면 무릇 육 일이다. 칠분(七分)은 윤(閏)으로 돌아간다. 초효(初爻)가 용사하는 일일(一日)은 천왕제후에 해당되고 이일은 대부(大夫)에 해당되고 삼일은 경(卿)이요, 사일은 삼공(三公)이요, 오일은 벽(辟)이요, 육일은 종묘(宗廟)이다. 효사(爻辭)가 좋으면 좋고 흉하면 흉하다.” 하였고 정강성(鄭康成)의 주(注)에 이르기를 “벽(辟)은 천자이다. 천왕제후란 것은 제후를 말한 것이요 그 길흉을 받는 것은 오직 천자일 따름이다.”라 하였다.

대부(大夫) 이하는 주(主)가 없다는 것은 정(鄭)의 의(義)라 하겠지만 그러나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에 “축(祝)이 작(酌)을 씻어 국그릇의 남쪽에 전(奠)하면 주인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축은 왼편에 있다.” 하였으며 정주(鄭注)에 “축이 왼편에 있는 것은 마땅히 주인을 위하여 신에게 말을 풀이하기 위함이다.”라 하였은즉 역시 정(鄭)도 사(士)로서 주(主)가 있음을 삼은 것이다. 교특생(郊特牲)“직제(直祭)에는 주에 축(祝)한다.”라 했고, 정주에는 “천숙(薦熟)의 때를 이름이니 특생(特牲) 소뢰궤식(少牢饋食)을 하는 것과 같다.”라 했으며, 정의(正義)에는 “천숙하는 정제(正祭)의 때에 축관이 축사(祝詞)로써 주(主)에게 고(告)함을 말한 것이다.”라 하였으니, 정(鄭)도 또한 대부ㆍ사의 예에 의거하여 풀이한 것이다.

《의례(儀禮)》에 말하기를 “달을 간격하여 담(禫)한다. 이달에 길제(吉祭)하되 오히려 배(配)를 아니한다.”하였고, 특생(特牲)ㆍ궤식(饋食)의 명서(命筮)하는 사(詞)에도 조(祖)만 말하고 배(配)에 미치지 않았으니 정히 이와 더불어 합치된다. 그런데 제가(諸家)들은 이로 인해 담월(禫月)에 조고(祖考)를 합제(合祭)할 때에도 다만 조(祖)만 제하고 비(妣)로써 배하지는 않는다 하고 있으나 모(某)의 생각은, 《의례》의 말한 바 배(配)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개 담월에 조묘의 길제를 만나면 새로 죽은 이를 조에 배식(配食)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비가 조에 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특생은 바로 사(士)의 상제(常祭)이며 담월의 길제에만 그친 것이 아닌데 어찌 그 배를 말하지 아니했다 하여서 상제에도 역시 비(妣)를 배하지 않는다고 이른다면 되겠는가.

훈호처창(焄蒿悽愴)은 주ㆍ소(注疏)가 다 백물(百物)의 정(精)으로써 말했는데 후유(後儒)들이 마침내 조고(祖考)의 신령(神靈)으로써 해당하게 하였으니, 모르괘라 이것이 근거가 있는 것인지? 백물의 정이란 그 정(精) 자는 신(神) 자와 더불어 크게 다르니 “신의 나타남이다[神之著]”라는 신으로써 혼합하여 보아 넘겨서는 불가하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훈호처창은 그 윗대문에 보이는 소명(昭明)과 또 크게 다르니 정과 신의 차(差)와 인(人)과 물(物)의 별(別)과 음과 양의 계(界)가 대단(大段)은 통할 수가 없다. 훈호처창의 정에 속하는 것과 신의 저(著)를 연대어 보면 어떠하겠는가. 대개는 소명(昭明)의 아래와 신의 저의 위에 문득 이 “훈호처창은 백물의 정이다.”라는 한 구절을 꽂아 넣어 위로도 붙지 아니하고 아래로도 연하지 아니하고 중간에 고립하여 귀속된 바가 없으며 “물의 정을 인하여[因物之精]”라는 구절에 끌고 와서야 비로소 연합될 수 있다.
그러나 “신의 나타남”이라는 한 구절이 또 두 사이에 가로질러 있어 혹은 끊기고 혹은 연하며, 연했다 다시 끊기어 일기(一氣)로써 아래에 접속됨이 없으니 이는 절대 착안(着眼)해야 하며 놓아 넘길 곳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조고의 신으로써 훈호처창에 구한다면 한갖 의의(擬議)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백물의 정 한 구절의 백(百)이 또한 너무도 군더더기가 아니겠는가.
대개 중생(衆生)이란 두 글자는 인과 물을 아울러 끌어 백물의 정에 관철시킨 것 같은데 “이를 귀신이라 이른다[此之爲鬼]”라는 한 구절로써 보면 이미 분별지어 말하여 정연하게도 어그러지지 않으며 더구나 명명귀신(明命鬼神)이라는 것은 곧 물의 정을 인한 것으로서 마치 인과 물을 아우른 것같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물도 또한 귀라 칭할 수 있는 것이다. 모르괘라 어떻게 풀이해야 할 것인가. 이 한 절(節)이 가장 해석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소가(疏家)는 위에 나타난 백물의 정에 있어서는 분별지어 말하고 아래에 있는 인물지정(因物之精)에는 인과 물을 혼병하여 분별한 바 없으니 예로부터 읽기 어려움이 이와 같은 것이다.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은 정주(鄭主)에 “명명덕은 그 지덕(至德)을 현명(顯明)한다.” 일렀는데, 지금 급고각본(汲古閣本)에는 현(顯) 자가 재(在) 자로 와전되었다. 명명이란 것은 현명의 의이다. 《시》노송(魯頌)에 “공소(公所)에 있으면 명명하다.”라 했으며, 그 전(箋)에 역시 《대학》을 끌어 증거로 삼았다. 공소(孔疏)에는 몸에 명덕이 있는 것으로써 말을 했으나 정의 의는 아니다.
《맹자》에 나타난 “인(仁)이란 것은 인(人)이다.”와 《중용》에 나타난 “인(仁)은 인(人)이다.”와는 어의(語義)가 동일하지 않다. 《맹자》의 “인이란 것은 인이다.”는 곧 능히 인은(仁恩)을 행하는 자는 사람이라는 것이요, 《중용》의 인(人)이란 것은 정(鄭)은 읽기를 상인우(相人偶)의 인과 같이 했다. 상인우는 곧 사람이 서로 존문(存問)하는 의를 뜻한 것이다.

강백석(姜白石) 요장(堯章)은 이르기를 “세상에서 중니(仲尼)가 계찰(季札)의 묘(墓)에 표(表)하기를 이러이러 했다고 전한다.”라 하였으니, 백석같이 금석에 정박(精博)한 사람으로서 고서를 끌어 인증하지 아니하고 단지 “세상에서 전한다.” 일렀다면 고서에 나타나지 않은 것을 가히 소급해 알 수 있다.
또 구양공(歐陽公)은 이르기를 “중니의 각국 순방을 상고해 봐도 오(吳)에 이르렀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또 글자가 특별히 크니 옛 글자가 아니다.”라 했다. 더구나 구비(舊碑)를 살펴보니 글자 크기가 한자[一尺]가 넘을 뿐더러 묘에는 본시 제자(題字)가 없었는데 동한(東漢)에 와서야 비로소 있었고 춘추 이상(以上)에는 풍비(豐碑)나 환영(桓楹)에 명전(銘鐫)이 있단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이는 뒷사람이 의탁한 것이 너무도 적확하다. 고서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 나라 장종신(張從申)의 발(跋)에 이르기를 “현종(玄宗)이 일찍이 은중용(殷仲容)을 명하여 모탑(摹榻)했는데 대력(大曆) 연간에 윤주자사(潤州刺史) 소정(簫定)이 계자(季子)의 묘(廟)를 짓고 이 비에 중각(重刻)하여 지금까지 전해온다.” 하였으니, 그 최고로 증거할 수 있는 것은 당 나라 사람의 문자가 된다.

일본(日本) 문자의 연기(緣起)는 백제(百濟)의 왕인(王仁)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나라 글은 그 나라의 일컫는 바에 의하면 황비씨(黃備氏)가 제정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중국과 통하지 못하고 무릇 중국에 관계되는 서적은 모두 우리나라에 의뢰했다. 지금 족리대학(足利大學)에 보존된 고경(古經)은 바로 당 나라 이전의 구적(舊蹟)이다.
일찍이 《상서(尙書)》를 번조(翻雕)한 것을 얻어 보았는데 제ㆍ양(齊梁)의 금석(金石)과 더불어 글자의 체가 서로 동일하며 또 신라 진흥왕비의 글자와도 같으니 이는 필시 왕인 시대에 얻어갔던 것으로서 지금 천년이 지난 나머지에도 고스란히 수장되어 있다. 이는 진실로 천하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나 소길(蕭吉)의 《오행대의》같은 등의 서는 다 중국에도 하마 없어진 것인데 오히려 그쪽에는 보존되어 있으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조감(晁監) 주연(奝然)은 지금 상고할 수가 없고 서경(西京) 동도(東都)의 사이에 그들의 한다는 문은 감루(弇陋)하고 벽유(僻謬)할뿐더러 그 언어를 따라 곧장 나가며 문세(文勢)는 부앙(俯仰) 전절(轉折)과 상하(上下) 토납(吐納)의 의가 없다.
《무림전(武林傳)》같은 것은 구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백여 년 이래로 등수(藤樹)ㆍ 물부(物部)의 학이 크게 성함과 동시에 시ㆍ문(詩文)은 전혀 창명(滄溟)을 숭상하여 약간 속체(俗體)를 변해 갔다. 그러나 옛날의 물든 것이 하마 고질이 되어 졸지에 면모를 고치기는 어려웠다.
지금 동도(東都) 사람 조본렴(篠本廉)의 문자 세 편을 보니 감루하고 벽유한 버릇을 깨끗이 씻어 사채(詞采)가 환발(煥發)하며 또 창명의 문격(文格)을 쓰지 아니하여 중국의 작가로도 더할 수가 없었다.
아! 장기(長崎)의 선박이 날로 중국과 더불어 호흡이 서로 통하여 사동(絲銅)의 무역은 오히려 제이에 속하고 천하의 서적도 산과 바다로 실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옛날에는 우리에게 의뢰해야만 했는데 마침내는 우리보다 먼저 보는 것도 있으니 조본렴이 아무리 글을 잘 아니하고자 해도 아니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일만 보고서도 천하의 대세를 알 수 있다. 그 사람들이 사동(絲銅)이나 서적 이외에 중국에서 얻어가는 것이 또 있다는 사실을 어찌 알리오. 아!

고금의 시법(詩法)이 도정절(陶靖節)에 이르러 하나의 결혈(結穴)이 되고 당의 왕 우승(王右丞)ㆍ두 공부(杜工部)가 각기 하나의 결혈이 된다.
왕은 혼솔이 없는 천의(天衣)와도 같으며 또 천녀(天女)의 산화(散花)와도 같아 많건 적건 막론하고 세간의 범상한 꽃으로서는 비의(比擬)할 바가 아니며 두는 마치 토석(土石)과 와전(瓦塼)을 땅으로부터 쌓아 올려 오봉루(五鳳樓)의 재목이 그 경중을 재량하여 이루어진 것과 같다. 그리하여 하나는 바로 신리(神理)요 하나는 바로 실경(實境)으로서 인자(仁者)가 보면 인(仁)이라 이르고 지자(知者)가 보면 지(知)라 이를 것이며 백성은 날로 써도 알지 못한다. 마치 하나의 문호를 각기 한 것 같지만 그러나 우ㆍ직(禹稷)과 안회(顔回)는 그 법이 한 가지다. 분별과 동이를 논할 것 없이 능히 이 한 관문을 뚫고 난 연후라야 시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의산(李義山 이상은(李商隱))ㆍ두번천(杜樊川 두목(杜牧)) 같은 이는 다 공부(工部)의 적파(嫡派)이며 백향산(白香山 백거이(白居易))이 또 하나의 결혈이 되어 그 광대교화(廣大敎化)의 명목에 부끄럽지 않다.
송의 소ㆍ황(蘇黃 소식(蘇軾)과 황정견(黃庭堅))은 또 하나의 결혈이 되며 육무관(陸務觀 육 유(陸游))의 칠언근체(七言近體)는 고금을 통하여 능히 구율(彀率)을 다한 것이며 금(金)의 원유지(元裕之)와 원(元)의 우백생(虞伯生)이 또 하나의 결혈이 되는데 우(虞)로 말하면 성정(性情)과 학문이 합쳐져 일사(一事)로 되었다.
명 나라 삼백 년에 와서는 하나도 족히 칭할 것이 없다가 왕어양(王漁洋 왕사정(王士禎))에 이르러 역하(歷下)와 경릉(竟陵)의 퇴풍(頹風)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또 능히 하나의 결혈이 되었으니 부득불 추대하여 일대의 정종(正宗)으로 삼지 않을 수 없으며 주죽타(朱竹垞)는 어양(漁洋)과 더불어 태화산(太華山)의 쌍봉(雙峯)이 아울러 일어난 것과 같아 갑을(甲乙)할 수 있다. 이 밖에는 다 방문(旁門) 산성(散聖)일 뿐이다.

문체(文體)의 유(類)는 열세 가지인데 그 문이 되는 것은 여덟 가지로서 이른바 신ㆍ리(神理), 기ㆍ미(氣味), 격ㆍ율(格律), 성ㆍ색(聲色)이다. 신ㆍ리, 기ㆍ미는 문의 정(精)이요, 격ㆍ율 성ㆍ색이란 것은 문의 추(粗)이다. 그러나 진실로 그 추를 놓아버리면 정이란 것이 어디에 부치리오.
배우는 자가 옛사람에 대하여 반드시 처음에는 그 추를 만나고 중간에는 그 정을 만나고 종경(終竟)에는 그 정한 것만 쓰며 그 추한 것은 버려야 하는 법이다. 지금 그 추를 만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정을 만나서, 그 정을 쓰며 그 추를 버리는 데 이를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매양 문(文)을 소도(小道)라 하여 경홀히 여기고 있는데 이는 문을 유희(遊戲)로 삼는 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며 문이 아니면 도가 부칠 곳이 없게 된다. 그러니 문과 도는 서로 필수적이며 갈라서 둘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역(易)》의 문언(文言)이 문의 조(祖)가 된 것이며 그 말단에 길(吉)한 사람의 말과 조(躁)한 사람의 말을 결부하여 거듭거듭 말하였으니 문의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어찌하여 붓을 잡으면 쉬지 않고 재제(裁制)하는 바도 없이 길을 달려 마구 나가 글자와 글구를 쌓고 쌓음으로써 문을 삼을 수 있겠는가. 이는 더욱이 크게 경계할 바이다. 어느 겨를에 그 정을 만나고 그 추를 만나는 것을 논할 수 있겠는가.

동인(東人)의 병체(騈體)는 임진년 이후부터 갑자기 변하여 송ㆍ원(宋元) 이후의 풍기가 되어 마침내는 하나의 공령문(功令文)의 웅(雄)이 되었다. 이는 근자의 형세로 보아 면치 못할 바이지만 비록 문원(文苑)의 대수필(大手筆)도 대체로 이와 같다.
대저 우리나라의 임진년은 이 무슨 백육(百六)의 대운(大運)이기에 위로는 국가의 전장(典章)으로부터 아래로 여항의 풍속에 이르기까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 없어 지금까지 옛을 회복하지 못했으며 문장ㆍ서화 같은 소도(小道)도 역시 따라서 천사(遷謝)되어 마침내 만회된 것이 없어서 명종ㆍ선조 이상의 왕성한 대아(大雅)의 풍(風) 같은 것은 얻어볼 수 없다.

고문(古文)의 체는 기정(奇正)ㆍ농담(濃擔)ㆍ상략(詳略)에 대하여 본래 일정한 법은 없으나 그 글을 만드는 지의(旨義)를 요약하면 네 가지가 있으니 도를 밝히는 일, 세상을 다스리는 일, 깊숙한 것을 드러내는 일, 속(俗)을 바르게 하는 일들이다. 이 네 가지를 지닌 뒤에 법률로써 묶는 것이다. 무릇 이렇게 한 연후라야 경ㆍ사(經史)를 우익(羽翼)하여 천하 후세에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친척 고구(故舊)에 관한 취산(聚散)과 존몰(存沒)의 느낌에 이르러는 한때에 기억된 바 있어 글로써 선양하여 그 성명(姓名)을 문집 속에 부현(附見)하게 하는 것도 있다.
이는 그 사람의 사적이 원래 고거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일체를 빼버리고 싣지 않은 것이며 본시 기록할 만한 것이 있는데도 글을 만드는 의법(義法)을 위해 생략하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은 아니다.

혼ㆍ계(惲桂) 두 집(集)은 과연 바로 남천이우(南遷二友)라는 말에 비해 그다지 사양할 것이 없겠다.
혼집(惲集)은 십 년 전에 구득한 것인데 이제야 비로소 천풍(天風) 해도(海濤)의 속에서 쾌히 읽게 되니 역시 묵연(墨緣)이 속해 있는 것인가? 그 문은 근대 사람 중에 약간 백력(魄力)이 있어 비록 망계(望溪)의 파류(派流)는 아니지만 망계ㆍ해봉(海峯)ㆍ매애(梅厓)ㆍ석포(惜抱 요내(姚鼐)) 여러 사람들의 지키고 있는 정궤(正軌)를 잃지 않았다. 그러므로 망계로부터 석포에 이르기까지 각각 미사(微詞)가 있기는 하나 현저히 배척하기를 죽정(竹汀 전대흔(錢大昕))과 같이 아니하고 한결같이 정궤로 돌렸으니 역시 조금 공안(公眼)을 가졌으며 분박(噴薄) 규노(叫呶)의 버릇은 내보이지 않았다.
대개 그 인품이 항상(伉爽)하고 문 역시 그와 같아서 왕척보(王惕甫) 같이 초잡(稍雜)하고 원자재(袁子才)의 검색이 없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평심(平心)하여 논한다면 석포의 평아(平雅)와 한담(閒澹)은 끝내 미쳐가기 어려우니 다만 백력(魄力)만으로 뒤덮으려 해서는 안 되며, 석포의 성취한 것도 역시 철저한 곳이 있으니 그를 넘어서는 것은 쉽지 못한 것인데 또 하물며 망계를 올라섰다 할 수 있으랴. 진소현(秦小峴)조미신(趙味辛) 제가도 역시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계집(桂集)은 너무도 영성(零星)하나 역시 한두 가지 볼 만한 것이 있으며 성운(聲韻)을 전치(專治)하였고 고문의 궤칙(軌則)에 이르러는 소장(所長)이 아니다. 그 인품이 매우 높아서 담계(覃溪)ㆍ운대(芸臺)가 자주 칭도(稱道)하였으니 영성한 문자 사이에 있지 않은 모양이다.

의상이 이르러 가지 않는 곳에 / 意想不到處
봉만이 갑자기 절로 열려라 / 峯巒忽自開

산 경지(境地) 곳을 따라 아름다우니 / 山境隨處佳
잘못 찾아와도 역시 기쁘네 그려 / 誤到亦可喜

만약 이 경지를 터득하고 나면 낱낱이 다 도(道)요 일일이 걸림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증남풍(曾南豐)의 시에

흐르는 물 차가워라 더구나 맑고 / 流水寒更澹
비인 창은 깊어도 저절로 밝네 / 虛窓深自明

외길이라 솔 밑으로 들어가 보니 / 一逕入松下
두 봉우리 말 앞에 비끼었구려 / 兩峯橫馬前

호상으로 경구와 마주 앉아라 / 壺觴對京口
말 웃음이 양주에 떨어지누나 / 笑語落揚州

라는 글귀는 다 아름다워 자못 도ㆍ사(陶謝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의 가법을 얻었다 하겠으며, 서중거(徐仲車)진형중(陳瑩中)에게 부친 시는 웅쾌하고 통절하여 소아(小雅)의 항백(巷伯 장명(章名)임) 과 더불어 기풍을 함께 하였으니 이는 정(正)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직(直)으로 기를 기른 공력이다. 어찌 괴방(怪放)하다 하랴. 그는 일찍이 학자에게 이르기를 “문자를 하려거든 섬려(纖麗)는 배우지 말고 모름지기 혼혼(渾渾)하여 고기(古氣)가 있어야 한다.” 했는데, 이는 자기를 두고 말한 것이다. 맹동야(孟東野) 시에,
천지가 가슴속에 들어를 오니 / 天地入胸臆
갑자기 천둥치고 바람이 이네 / 吁嗟生風雷
문장은 그 미묘를 얻었다며는 / 文章得其微
물상은 나에게서 재량이 되네 / 物象由我裁
라 하였으니 시를 논하여 이 지경에 이르면 조화를 배태(胚胎)한 것이다. 또 이를테면,
남산이 천지를 채워 있으니 / 南山塞天地
해와 달이 돌 위에 돋아나누나 / 日月石上生
산중이라 사람이 절로 바르고 / 山中人自正
길은 험해도 마음 역시 평평하구나 / 路險心亦平
일본(一本)에는 이 아래에 “천태산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니, 걸핏하면 적성(赤城)의 놀이 밟히네”라는 열 글자가 있음.
신령한 지경이라 물마다 곧아 / 靈境物皆直
만 그루 솔 하나도 비스듬 없네 / 萬松無一斜
이 등의 글귀는 자못 심경이 공활(空濶)하여 온갖 인연이 물러가버림을 깨닫겠으니 어찌 한검(寒儉)하다고 지목할 수 있으랴.
무릇 시도(詩道)는 광대하여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어 웅혼(雄渾)도 있고 섬농(纖濃)도 있고 고고도 있고 청기(淸奇)도 있으므로 각기 그 성령의 가까운 바를 따르며 일단(一段)에만 매이고 엉겨서는 아니 되는 것인데, 시를 논하는 자들이 그 사람의 성정은 논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습숙(習熟)한 것만으로써 단정하여 웅혼을 치켜들고 섬농을 그르다 한다면 어찌 만상(萬象)을 혼함(渾函)하고 촌심(寸心)이 천고(千古)라는 의가 될 수 있으랴.
이 때문에 두(杜)가 있고 왕ㆍ맹(王孟)이 있고 백(白)이 있고 한(韓)이 있고 의산(義山)이 있고 번천(樊川)이 있고 또 장길(長吉 이하(李賀))ㆍ노동(盧仝)이 있는 것이다. 지금 특별히 증남풍ㆍ서중거를 들고 끝맺음에 맹동야를 든 것은 따로 한 길을 찾자는 것이 아니니 정상(頂上)에 눈이 있는 자는 마땅히 거울과 거울이 서로 비치리라 믿는다. 오당(悟堂) 이아(李雅)가 시상(詩想)이 매우 묘하여 나에게 와서 시도(詩道)를 묻고 또 감산(甘山)의 시를 보여주기에 이를 써서 답한다.
오강의 물일랑 마시지 마소 / 莫飮吳江水
가슴속에 파도가 일까 두렵네 / 胸中恐有波濤起
상강의 고길랑 먹지를 마소 / 莫食湘江魚
분통터져 슬픈 울음 나오게 하네 / 令人寃憤成悲呼
상강 대는 화살을 만들 만하고 / 湘江之竹可爲箭
오강 물은 칼을 갈기 매우 좋거든 / 吳江之水好淬劍
화살로는 소인놈의 심장을 뚫고 / 箭射讒夫心
칼로는 소인놈의 얼굴을 베서 / 劍硏讒夫面
소인놈 심장은 깨졌다 해도 / 讒夫心雖破
가슴속의 쓸개는 오히려 크고 / 胸中膽猶大
소인놈 얼굴은 깨졌다 해도 / 讒夫面雖破
입 안의 혀 상기도 남아 있는 걸 / 口中舌猶在
살아서는 사람의 근심이 되고 / 生能爲人患
죽어서는 귀신 되어 해를 끼치네 / 死能爲鬼害
근심되고 해 끼치니 장차 어쩌리 / 患兮害兮將奈何
두 잔의 막걸리에 긴 노랫가락 / 兩巵薄酒一長歌
바람 향해 뿌리고 물에 흘리어 / 灑向風煙付水波
서산이랑 멱라에 조문하세나 / 遣弔胥山共汨羅
유자산(庾子山)의 시는 대장(對仗)이 가장 공(工)하다. 마침내 육조(六朝) 이후에 오고(五古)를 돌려 오율(五律)을 만드는 시작이라 하겠다. 그는 글귀를 만들되 능히 새롭고 고사를 사용함에 흔적이 없어 하수부(何水部)에 비하면 보다 나을 것도 같다. 무릉(武陵) 진윤천(陳允倩)이 이르기를 “두소릉(杜小陵)은 남(藍)에서 청(靑)이 나오지 못하고 곧장 걸으면 걷고 달려가면 달려가곤 하는 식이다.”라 한 것은 또한 너무나 심한 말이다. 그 명구(名句)로는 보허사(步虛詞)에 이르기를,
한제는 복숭아씨를 바라고 / 漢帝看桃核
제후는 대추꽃을 묻네 / 齊侯問棗花
라 하였고, 산지(山池)에 이르기를,
연꽃바람 멱 감는 새를 놀래고 / 荷風驚浴鳥
교(橋) 그림자에 노는 고기 모여드네 / 橋影聚行魚
라와 우문 내사(宇文內史)에 화답하기를,
나무에는 앵두를 문 새가 잠자고 / 樹宿含櫻鳥
꽃에는 꿀을 캐는 벌이 앉았네 / 花留釀蜜蜂
라와, 군행(軍行)에 이르기를,
변새는 멀어 유엽이 번득이고 / 塞逈翻楡葉
관산은 차니 기러기 털이 떨어지누나 / 關寒落鴈毛
라와, 법연(法筵)에 이르기를,
부처의 영은 호인이 기록하고 / 佛影胡人記
경의 글은 한어로 번역되도다 / 經文漢語翻
라와, 설 문학(薛文學)에게 수답(酬答)하기를,
양장은 구절판을 연대어 잇고 / 羊腸連九阪
웅이는 쌍봉을 마주 대했네 / 熊耳對雙峯
라와, 사람에게 화답하기를,
이른 우뢰 칩호를 놀라게 하고 / 早雷驚蟄戶
날리는 눈 하원을 길게 하누나 / 流雪長河源
라와, 원정(園庭)에 이르기를,
초부 은사 언제나 길 함께 가고 / 樵隱恒同路
사람과 새 더러는 집 마주하네 / 人禽或對巢
라와, 맑은 새벽에 조수에 다다라 이르기를,
잔나비 파람하니 바람 급하고 / 猿嘯風還急
닭이 우니 조수가 밀어 닥치네 / 鷄鳴潮欲來
라와, 겨울사냥[冬狩]에 이르기를,
놀랜 꿩은 매를 쫓아 날아가고 / 驚雉逐鷹飛
뛰는 원숭이 화살을 보고 굴러가네 / 騰猿看箭轉
라와, 사람에게 화답하기를,
여치는 틀이 없이 베를 짜는데 / 絡緯無機織
나는 반디 불을 띠고도 추운가봐 / 流螢帶火寒
라와, 화병을 읊다[詠畫屛]에 이르기를,
돌 험하니 소나무는 가로 꽂히고 / 石險松橫植
바위 매달리니 시내 서서 흐르네 / 巖懸澗竪流
고요를 사랑하여 고기 뛰놀고 / 愛靜魚爭樂
사람에게 의지하니 새 품에 드네 / 依人鳥入懷
라와, 꿈에 당내에 들다[夢入堂內]에 이르기를,
햇빛 받자 비녀 색깔 어른거리고 / 日光釵焰動
창 그림자에 거울꽃이 흔들리누나 / 窓影鏡花搖
라는 등의 글귀는 소릉의 이른바 청신(淸新)이란 것이 자못 이를 두고 이름이라 하겠다.
산중의 재상이라 선골을 지녔으니 / 山中宰相有仙骨
잿마루에 나는 하얀 구름을 사랑하네 / 獨愛嶺頭生白雲
이 그림을 벽에 걸면 놀래 넘어질테니 / 壁張此畫定驚倒
먼저 사람을 불러 부축하라 요청하게 / 先請喚人扶着君
라와,
난산이라 깊은 곳에 아지랑이 노을들이 / 亂山深處是煙霞
자욱한 비 갠 볕에 아침 저녁 아름답네 / 雨暗晴暉日夕佳
알괘라 선생님은 일찍이 여기 와서 / 要識先生曾到此
일부러 희필 남겨 그대 집에 걸렸구려 / 故留戲筆在君家
라는 등은 미원휘(米元暉 미우인(米友仁))의 제화시(題畫詩)인데 너무나 아름다워 한점도 연화(煙火)의 기는 없다.

문장의 논이 정해지기란 고금을 통하여 어려운 일이다. 원자재(袁子才)는 왕완정(王阮亭)의 시를 일컬어 “재주와 힘이 박하다.” 하면서도 부득불 추앙하여 일대(一代)의 정종(正宗)으로 삼았으니 이는 끝내 그가 차지한 지위를 뒤덮어 아주 빼앗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가사 그가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 봐도 재력(才力)과 정종이 함께 의논에 미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장심여(蔣心餘)는 또 당인(唐人)이 임서한 진첩(晉帖)으로써 비교했으니 역시 미사(微詞)라 하겠으나 오늘날에 만약 당모(唐摹)의 한 글자만 얻는다면 그 보배롭고 중함이 또한 진적(眞跡)에 내리지 않을 것이니 어찌 송ㆍ원 이후의 안각(贋刻)과 더불어 논할 수 있겠는가. 매양 굉장한 이름을 가지면 사람들이 다 증오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 깊이 경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능히 그 실지에 부응되지도 못하면서 우뚝이 스스로 거만을 떠는 자에 이르러는 도적도 빼앗으려고 생각하고 있다. 원ㆍ장은 진실로 당시의 척안(隻眼)이나 오히려 도적을 자초함을 면치 못했거든 하물며 이보다 못한 자들이랴.
그러므로 소릉(少陵)의 시에 보이는 “문장은 천고의 일이라면 득실은 촌심이 아는 거로세[文章千古事 得失寸心知]”의 한 마디 말은 전혀 혼전(渾全)하여 고금을 궤뚫은 것이다.
우연히 시를 논한 제십(諸什)을 뒤져보고 부질없이 이렇게 말을 마구 한다. 기우(屺友 강자기(姜慈屺))와 더불어 서로 보고 한번 웃으며 한 통(通)의 해설을 하게 했다.

강엄(江淹)의 의혜휴시(擬惠休詩)에 이르기를,
해 저무니 파란 구름 어울리는데 / 日暮碧雲合
아름다운 사람 자못 오지를 않네 / 佳人殊未來
라 했는데 지금 사람들이 마침내 휴상인(休上人)의 시로 쓰고 있으니 고사가 이처럼 그르친 것은 당(唐)의 시대부터 이미 그러했다.
석양남애(夕陽嵐靄)는 당자화(唐子華)의,
반조는 시내 동쪽을 지나는데 / 返照過溪東
중은 돌아가네 파란 안개 속으로 / 僧歸嵐翠裏
늦은 매미 소리를 실컷 들으니 / 厭聽晩蟬聲
대숲의 동산이 삼사리로세 / 竹園三四里
라를 모방하였고, 나소화(羅小華)의 사경(寫經)의 묵(墨)으로써 운서노인(雲西老人)을 임(臨)했는데,
열 길이라 우담의 저 숲 속에 / 十丈優曇林
현담하자 향기가 얼굴에 붙네 / 玄譚香着面
나무 밑에 경을 외던 그 사람은 / 樹底誦經人
달 비끼니 찾아도 보이지 않네 / 月斜尋不見
라 하였고, 노련(老蓮)은 전주(篆籒)의 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고졸(古拙)한 품이 위ㆍ진(魏晉) 시대의 수필(手筆)과 같아서 마치 고대의 신선 사람을 만난 것 같다. 그 제시에,
적막한 산마을 울타리 안에 / 寂寞山籬下
가을 뽕나무 높이 몇 자일는고 / 秋桑幾尺高
숨은 선비 장 중위를 찾고자 하니 / 欲尋張仲蔚
삼경이 봉호 속에 묻히었구려 / 三徑沒蓬蒿
미숙(美叔)의 제화시(題畫詩)는 연화(煙火)를 먹지 않은 것 같다.
옛사람들은 한 시를 함께 지을 경우라도 반드시 운을 같이 짓지는 않았으며 곧 운을 같이 하더라도 역시 한 운 중에서 가려서 쓰며 반드시 글귀마다 차운(次韻)하지는 않았는데 원ㆍ백(元白 원진(元稹) 백거이(白居易))으로부터 창시되어 피일휴(皮日休)육구몽(陸龜蒙)이 창화(唱和)함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심해져서 운(韻)으로써 주장을 삼고 뜻으로써 서로 따르게 되니 속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얼른 통달하지 못했다.
근대에는 오로지 이로써 장점을 보이며 이름은 화운(和韻)이라고 하지만 실상인즉 운을 따르는 것이니 마땅히 그 혈맥이 가로 뻗히고 구연(句聯)의 뜻이 끊기게 된다. 뜻있는 선비는 마땅히 속상(俗尙)에 얽매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는 심귀우(沈歸愚)의 말이다.

심 진사(沈進士) 두영(斗永)이 기기(奇氣)가 천 길이어서 가어(駕馭)를 할 수 없으며 시(詩) 역시 그 인물과 같아서 평소에 자질구레한 말은 쓰지 않았다. 일찍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우모(羽旄)를 바라보며 지은 시구가 있는데,
산은 만마를 따라 맴돌며 내려오고 / 山隨萬馬逶迤下
구름은 떼 용을 끼고 나풀대며 다니누나 / 雲擁群龍綷行
라 한 것은 심히 기굴(奇崛)하며 금강산에 들어가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이생이 마휘령에 먼저 올라 하는 말이 / 李生先上摩暉語
팔월이라 높은 산에 하얀 눈이 쌓였다고 / 八月高山白雪長
옛날에 들은 것은 모두가 황홀할 뿐 / 昔者所聞都怳惚
갑자기 대하자니 지극히 황당하네 / 猝然相對極荒唐
멀리 보니 가을 일러 붉은 잎은 전혀 없고 / 遠看秋早無紅葉
가직이 오니 해 높아도 석양이 많다마다 / 近到日高多夕陽
쉬흔이라 네 해 동안 능사를 다 마치고 / 五十四年能事了
오늘에야 이 몸은 금강에 들었구려 마휘령(摩暉嶺) / 此身今日入金剛
또 그 아름다운 글귀로 이를테면,
각각으로 날아오르니 모두들 노한 듯도 / 落落飛騰如共怒
무리지어 끼고 읍하니 서로가 예쁜가봐 / 群群拱揖似相憐
만 이천봉 꼭대기에 마음 한번 풀어놓으니 / 放心萬二千峯上
오십 년이 지났어라 하계의 전생일레 헐성루(歇惺樓) / 下界前生五十年
또 이르기를,
바람 우레 아래서 이니 말 웃음이 평화롭고 / 風雷下作平談笑
하늘과 땅 중간이 비니 앉고 서기 자유롭네 / 天地中虛任起居
만리라 아득아득 동해의 갓이라면 / 萬里蒼蒼東海上
외로운 봉 우뚝이 선 석양의 처음일레 비로봉(毗盧峯) / 孤峯落落夕陽初
또는,
하늘에서 떨어져 서니 위태롭다 안정되고 / 從天落立危初定
바다 건너 날아오니 기세는 쉬지 않네 백운대(白雲臺) / 超海飛來勢未休
라는 등은 다 창해(滄海)를 거꾸로 뒤집고 은하를 구부려 쏟으려는 뜻이 들어 있다 하겠다.

서법이 변천함에 따라 유파(流波) 또한 혼란되었으니 그 근원을 거슬리지 않으면 어떻게 옛으로 돌려 놓을 수 있겠는가. 대개는 예(隸)의 글자가 변하여 정서(正書)가 되고 행초(行草)가 되었는데 그 전이(轉移)는 한말(漢末) 위ㆍ진(魏晉)의 사이에 있었으며 정서 행초가 남ㆍ북의 양파로 나누어진 것에 대해서는 동진(東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이 남파가 되고 조(趙)ㆍ연(燕)ㆍ위(魏)ㆍ제(齊)ㆍ주(周)ㆍ수(隋)는 북파가 된다.
남파는 종유(鍾繇)ㆍ위관(衛瓘)을 경유하여 왕희지ㆍ헌지ㆍ승건(僧虔)에 미쳐 지영(智永)ㆍ우세남(虞世南)에 이르렀으며, 북파는 종유ㆍ위관ㆍ색정(索靖)을 경유하여 최열(崔悅)노침(盧湛)고준(高遵)심복(沈馥)요원표(姚元標)조문심(趙文深)정도호(丁道護) 등에 미쳐 구양순(歐陽詢) 저수량(褚遂良)에 이르렀다.
남파는 수(隋)의 시대에는 드러나지 못하고 당 나라 정관(貞觀)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드러났다. 그러나 구ㆍ저 여러 인물들이 근본은 북파에서 나왔으며 영휘(永徽) 이후로 곧장 개성(開成)에 이르러는 비판(碑版)이나 석경(石經)이 오히려 북파의 여풍이 흘렀다. 남파는 바로 강좌(江左)의 풍류로서 소방(疏放)하고 연묘(姸妙)하여 계독(啓牘)에 장점을 가졌으나 필획을 감하여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전예(篆隸)의 유법(遺法)도 동진(東晉) 시대에 이미 고치고 변한 것이 많았으니 송ㆍ제는 논할 것도 없다.
북파는 바로 중원의 옛법으로서 구근(拘謹)하고 졸루(拙陋)하여 비(碑)와 방서(牓書)에 장점을 가졌으며 채옹(蔡邕)위탄(韋誕)한단순(邯鄲淳)위개(衛覬)장지(張芝)두도(杜度)의 전ㆍ예(篆隸)ㆍ팔분(八分)ㆍ초서에 대한 유법(遺法)은 수의 말기 당의 초엽에 이르러도 오히려 보존된 것이 있다.
두 파는 갈라짐이 강하(江河)와 같아서 남북의 세족(世族)이 서로 통하여 익히지 않았다.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것은 공통된 논이 아니다. 구양은청(歐陽銀靑)의 구성(九成) 화도(化度) 같은 것은 정호(精毫)가 아니면 불가능하며 추호(麤毫)를 가지고도 정필(精筆)처럼 쓸 따름이다. 삼묘(三泖)에서 윤생(尹生) 시영(始榮)에게 보이다.
“초미(貂尾)는 진재(珍材)로 붓을 만들어 쓸 수 있다.[貂尾珍材眞可筆]”는 것은 바로 황산곡(黃山谷)의 글귀이다. 박혜백(朴蕙百)이 자못 제필(製筆)에 공하여 청서(靑鼠)를 낭호(狼毫)의 상으로 삼으면서 스스로 그 묘리를 얻었다고 여기는 동시에 사람이 혹 그렇지 않다 해도 개의하지 않았다. 그는 급기야 초미를 보고서 크게 칭찬을 하며 품(品)이 낭호나 청서의 위라고 하는데 그 말이 진실로 빗나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밖에 또 초미나 낭호보다 더한 것이 있어 등수(等數)로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겠지만 호영(湖穎)의 여러 품종을 두루 보이어 그로 하여금 그 안목을 넓히게 할 수 없는 것이 한이다.
옛 선백(禪伯)이 이른바 “지붕 밖에 푸른 하늘이 있으니 다시 이를 보라.”는 말도 있거니와 동쪽 사람들이 원교(圓嶠)의 필에 묶여 있어 다시 왕허주(王虛舟)ㆍ진향천(陳香泉) 여러 거벽(巨擘)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필을 일컫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한번 웃음이 터진다. 천하의 일이란 견정(堅定)하고 주수(株守)하곤 할 수 없는 것이 마침내 이와 같음을 말해 둘 뿐이다.

황모필(黃毛筆)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숭상하는 바이나 살짝 거칠고 미끄러운 흠이 있다. 중국에서 뽑아낸 황영(黃穎) 같은 것은 또 동쪽에서 나와서 통행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와 같은 진재(珍材)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는 나지도 않으며 역상(譯商)들이 다니면서 파는 것은 또 하나의 하품ㆍ열품(劣品)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깨닫지 못한다. 초미는 이것이 중국의 자영(紫穎)과 같은데 중국 사람들은 또 황모(黃毛)를 초호(貂毫)라고 한다. 지금 통행하는 초호 소필은 다 초호라는 두 글자를 새겼는데 역시 우리나라에서 일컫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감히 초ㆍ황의 사이에 이름을 정하지 못하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컫는 청서(靑鼠)도 역시 중국 붓에서는 보지 못했으며 자영(紫穎)이 청서와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한데 자영은 본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컫는 초미요 청서는 아니다.

양호(羊毫)는 효자(孝子)나 순손(順孫)이 부조(父祖)의 뜻을 먼저 알아 받들어 순히 하는 것과 같으며 자영과 같은 일종(一種)은 너무 강하여 완력(腕力)이 약한 자는 거의 쓸 수가 없다.
일찍이 희헌유풍(羲獻流風)이라 새겨진 일종의 필을 보았는데 대나무 같이 강하고 딱딱했다. 유성현(柳誠懸)도 능히 희ㆍ헌의 유법(遺法)으로 된 붓을 쓰지 못한 것은 그것이 너무 강한 때문이었다. 지금 이 종의 붓은 과연 우군이 옛날 만들어 쓰던 그 유제(遺制)로 된 것인지는 모르나 희헌유풍의 위에는 다시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 필이 제일 상품이 되어 양호의 위에 있으니 이 묘법을 터득한 연후라야 필을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컫는 황모나 청서에 이르러는 어찌 대해(大海)의 구경에 참여할 수 있으랴. 곧 오봉루(五鳳樓)에의 옹유(甕牖)와 승추(繩樞)일 뿐이다.

결구(結搆)의 원만(圓滿)한 것은 전법(篆法)과 같고, 표양(飄颺)하고 쇄락(灑落)한 것은 장초(章艸)와 같고, 흉하고 험하여 두려워할 만한 것은 팔분(八分)과 같고, 요조(窈窕)하게 출입하는 것은 비백(飛白)과 같고, 경계(耿介)하여 우뚝이 선 것은 학의 머리와 같고, 울장(鬱杖)하고 종횡(縱橫)한 것은 고예(古隸)와 같으며, 점을 만들 때에는 반드시 붓을 거두는 데 있어 긴하고 중함을 귀히 여기며, 획을 만들 때는 반드시 늑(勒)으로 하는데 껄끄러우면서 더디고, 측(側)은 그 붓을 평평하게 해서는 안 되며, 늑은 그 붓을 뉘어서는 안 되며 모름지기 필봉이 먼저 가야 한다.
노(努)는 곧은 것만이 좋지 않으니 곧으면 힘을 상실하며, 적(趯)은 그 필봉을 보존하여 세(勢)를 얻어서 출봉(出鋒)해야 하며 봉을 끌고 내려가 세를 잡아 가슴을 내밀고 서며, 책(策)은 앙필(仰筆)로 나가 거두어야 하며, 약(掠)은 필봉이 왼편으로 나가되 예리해야 하며, 탁(啄)은 붓을 눕혀 빨리 나가 덮어야 하며, 책(磔)은 전필(戰筆)로서 출발하여 뜻을 얻어 서서히 출봉해야 한다.
무릇 점은 준각(峻角)을 요하여 원평(圓平)을 꺼리고 통변(通變)을 귀히 여기며, 합책(合策)하는 곳의 책은 년(年)의 글자가 그것이며, 합늑(合勒)하는 곳의 늑은 사(士)의 글자가 그것이다. 무릇 횡획(橫畫)이 모두 위는 앙획 아래는 부획(覆畫)으로 하는데 사(士)의 글자를 말한 것이며, 세 횡획이 어울리면 위는 평획(平畫) 중은 앙획(仰畫) 위는 부획(覆畫)으로 되는데 춘(春)ㆍ주(主)의 글자가 그것이다. 무릇 세 횡획에는 다 사용한다. 일설은 상은 앙획 중은 평획 하는 부획이라고 함. 측(側)은 그 붓을 측하여 내려가고 먹은 정(精)해야 하며, 늑은 그 붓을 뉘여서는 안되며 중은 높고 두 머리는 낮은데 필심(筆心)으로써 누른다.
단획(短畫)의 조(祖)로서 제일은 책의 법인데 앙필 역봉(䟐鋒)으로 가벼이 들고 나아가서 마치 편책(鞭策)의 세(勢)와 같이 한다. 두 머리는 높고 중은 낮다. 유종원(柳宗元)은 이르기를 “책은 앙필로 거두어 살짝 쳐든다.” 했다. 기(其)ㆍ천(天)ㆍ부(夫)ㆍ재(才)와 같은 유로써 무릇 단획은 다 책이 된다.
종파(從波)의 ⓐ은 오정(五停)인데 수(首) 일(一), 중(中) 삼(三), 미(尾) 일이요 횡파(橫波)의 ⓐ은 오정인데 수 일, 중 이, 미 이이다. 대체로 앙획을 만들 때에는 준(蹲)을 아니하고 봉으로써 겉으로 싸며, 준(蹲)은 삼면(三面)에 힘이 충만히 가서 순지(順指)로 비스듬히 내려가 힘이 가득차면 살짝 머물러 쳐들면서 삼과(三過)하여 출봉한다. 필획 중에는 또 삼과가 있어 수파(水波)가 기복(起伏)하는 것과 같다. 전(戰)은 전(顫)의 뜻인데 전동(顫動)하며 서서히 나간다는 뜻을 취한 것이며, 준(蹲)은 거(踞)의 뜻인데 돈주(頓駐)의 비유이며, 역(䟐)은 음이 역(歷)인데 가는 것이요, 석(趞)은 음이 석(昔)인데 측행(側行)하는 것이며, 억(抑)은 석행(趞行)하여 더디고 꺼끄럽게 나간다는 뜻이다. 서법에 또 수()가 있는데 수(竪)의 글자와 더불어 뜻이 같다. 수필(筆)이란 것은 짧은 노(努)를 말함이다. 이미 노의 법이 있는데 또 이 조목을 설치한 것은 진실로 췌문(贅文)이다. 각 본에는 또 오기(誤記)하여 수()로 되어 있는데 수()는 그 글자가 없다.
무릇 서를 공부하는 문(門)은 열 두 종의 은필(隱筆)의 법이 있으니 바로 지필(遲筆)ㆍ 질필(疾筆)ㆍ역필(逆筆)ㆍ순필(順筆)ㆍ도필(倒筆)ㆍ삽필(澀筆)ㆍ전필(轉筆)ㆍ와필(渦筆)ㆍ제필(提筆)ㆍ탁필(啄筆)ㆍ엄필(罨筆)ㆍ역필(䟐筆)이다.
무릇 용필(用筆)에 있어 생사(生死)의 법은 유은(幽隱)에 있고 지필의 법은 질((疾)에 있고 질필의 법은 지(遲)에 있다. 역입(逆入) 도출(倒出)하여 세를 취해 가감(加減)하고 때를 살펴 조정(調停)한다. 그 묘리를 믿기까지는 모름지기 공력(功力)이 깊어야 하며 쉽게 얻으려 들면 얻기 어려운 것이다.

붓의 가벼운 것은 양(陽)이 되고 무거운 것은 음(陰)이 된다. 무릇 글자 중에 두 개의 직획(直畫)이 있는 것은 왼편 획은 가늘고 바른편의 획은 굵어야 하며 글자 속의 주(柱)는 굵어야 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늘어야 한다. 이는 음양을 나눈 법이다.

정봉(正鋒) 편봉(偏鋒)의 설이 고본(古本)에는 없었는데 근래 사람들이 오로지 축경조(祝京兆 축윤명(祝允明))를 배우고자 하여 짐짓 이를 빌려 말한 것이다. 정(正)으로써 골(骨)을 세우고 편(偏)으로써 태(態)를 취하는 것은 자연 말자고 해도 말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서가 비록 장봉(藏鋒)을 귀히 여기지만 모호(糢糊)한 것으로써 장봉이라 할 수는 없으며 모름지기 붓을 쓰기를 태아검(太阿劍)이 자르고 베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대개 경리(勁利)로써 세를 취하고 허화(虛和)로써 운(韻)을 취하여 인(印)으로 인주를 찍는 것 같이 하며 송곳으로 모래를 긋는 것 같이 해야만 되는 것이다.

조문민(趙文敏 조맹부(趙孟頫)) 이 용필(用筆)을 잘 하는데 쓰는 붓이 완전(宛轉)하여 뜻과 같이 나가는 것이 있을 때는 그 붓을 선뜻 짜개어 그 정호(精毫)만을 가려서 따로 모은다. 그리하여 붓 세 자루의 정호((精毫)만을 합쳐 필공에게 주어 한 자루로 매게 하면 진서(眞書)ㆍ초서(草書)의 거세(巨細)를 막론하고 던지면 아니되는 것이 없으며 여러 해가 가도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서가(書家)가 이르기를 “진서(眞書)를 쓰면서 능히 전주(篆籒)의 법을 붙여 나가면 고금에 높다.”라 했다.

서법은 시품(詩品)ㆍ화수(畫髓)와 더불어 묘경(妙境)은 동일하다. 이를테면 서경(西京)의 고예(古隸)가 못[釘]을 베고 철(鐵)을 자른 것 같으며 흉하고 험하여 두렵게 뵈는 것은 곧 건(健)을 쌓아 웅(雄)이 되는 의(義)이며, 청춘(靑春)의 앵무(鸚鵡)는 꽃을 꽂은 무녀(舞女)가 거울을 당겨 봄에 웃는 의이며, 유천희해(遊天戲海)는 곧 앞으로 삼신(三辰)을 부르고 뒤로 봉황을 끄는 의로 시와 더불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상(象)의 밖에 초월하여 그 환중(環中)을 얻는다는 한마디 말에 벗어나지 않는다. 능히 이십사품(二十四品)의 묘오(妙悟)가 있다면 서경(書境)이 곧 시경(詩境)인 것이다. 이를테면 뿔을 떼어 놓은 영양(羚羊)과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는 저절로 신해(神解)가 들어 있으니 신(神)으로써 밝혀 나가는 것은 또 종적으로는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필은 은술(隱術)로 십수 가지 법이 있으니 지(遲)ㆍ질(疾)ㆍ순(順)ㆍ역(逆)ㆍ도(倒)ㆍ삽(澀)ㆍ전(轉)ㆍ와(渦)ㆍ엄(罨)ㆍ탁(啄)ㆍ제(提)ㆍ역(䟐) 등의 법을 들고 있으니 발등(撥鐙)의 예행(例行)하는 통법(通法)으로써 제한하는 것은 불가하다. 이는 나이 젊어 완숙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자는 엽등(躐等)하여 나갈 수는 없는 것이며, 삼십 년의 노련한 공력이 있지 아니하면 절대로 망행(妄行)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한예(漢隸)의 한 글자가 해행(楷行)의 열 글자를 당할 만한데 요즘 사람들이 익히는 것은 다 동경(東京) 말에 만들어진 것이며 서경(西京)에 이르러서는 손을 댈 수가 없으니 능히 진예(晉隸)를 만들 수 있는 것만도 역시 다행이다.

예리하고 가지런하고 건강하고 둥근 것은 필의 네 가지 덕이다.

난곡(蘭谷)의 서법은 너무도 해숭위(海嵩尉)의 필의(筆意)를 지녔으니 어찌 그 연원이었던가? 창울(蒼鬱)하고 돈좌(頓挫)하여 속본(俗本)과는 매우 틀린다. 필은 봉(鋒)이 가지런하고 허리가 강한 것을 요하며 벼루는 윤택함과 껄끄러움이 서로 겸하여 거품이 뜨고 먹이 빛나는 것을 취한다.

백양산인(白陽山人)의 서법은 손건례(孫虔禮)양소사(楊少師)의 규도(規度)가 있으니 바로 초법(草法)의 정종(正宗)이다. 초법이 손ㆍ양을 말미암지 않으면 다 진택부(鎭宅符 집 지키는 부적)를 만들 뿐인데 동인(東人)은 더욱 심하여 악찰(惡札)이 아닌 것이 없다.

소재(蘇齋 옹방강의 호)는 원조(元朝)에 참깨 하나에다 천하태평(天下太平)의 네 글자를 썼는데 이때 소제의 나이 칠십팔 세였다. 글자가 승두(蠅頭)와 같은데도 역시 안경도 쓰지 않았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또 원조로부터 금경(金經)을 쓰기 시작하여 종이 한 장을 일과로 삼아 그믐날에 끝마쳐 법원사(法源寺)에 시주했다. 그리고 또 내가 공양하는 대사(大士)의 소정(小幀)에 제자(題字)한 글씨는 몹시 가는데 다 동시의 일이다.

육조(六朝)의 비로서 무평(武平)의 제석(諸石)과 조준(刁遵)ㆍ진사왕비(陳思王碑) 같은 것은 다 극적(劇迹)이며 정도소(鄭道昭)의 비는 곧장 초산명(焦山銘)과 더불어 갑을을 다툴 만하다. 이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비궤(棐几 우군(右軍)을 이름)의 풍류(風流)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랴.

옛사람이 글씨를 쓴 것은 바로 우연히 쓰고 싶어서 쓴 것이다. 글씨 쓸 만한 때는 이를테면 왕자유(王子猷)의 산음설도(山陰雪棹)가 흥을 타고 갔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오는 그 기분인 것이다. 때문에 행지(行止)가 뜻에 따라 조금도 걸릴 것이 없으며 서취(書趣)도 역시 천마(天馬)가 공중에 행하는 것 같다.
지금 글씨를 청하는 자들은 산음에 눈이 오고 안 오고를 헤아리지 않고 또 왕자유를 강요하여 곧장 대안도(戴安道)의 집으로 향해 가는 식이니 어찌 크게 답답하지 않겠는가. 지금 서극(西極)의 용매(龍媒)로 하여금 어노(圉奴)의 기적(羈靮)을 받아 준판(峻阪)에 올라가게 한다면 어떻게 섭운(籋雲)의 걸음을 펼 수 있겠는가. 필을 놓고 한번 웃는다.

홍보명(洪寶銘)은 역시 아름답다. 비록 시평(始平) 무평(武平)에 미치지는 못하나 오히려 북조(北朝)의 고격(古格)을 증명할 수 있다.
용용용필(用筆)의 법은 다섯 손가락을 사면에 성글게 벌리며 붓대를 식지 가운데 마디의 끝에 세워 잡아당겨 안으로 향하고, 엄지손가락의 나문(螺紋) 있는 곳으로써 눌러 밖으로 향하며 가운데손가락으로 그 양(陽)을 걸고 무평지와 새끼손가락으로 그 음(陰)을 받치면 손가락은 실하고 손바닥은 비어 운전하기가 편하고 빠르며, 운전하는 법에 있어서는 식지의 뼈는 반드시 가로 대어 필세(筆勢)로 하여금 왼편으로 향하게 하고 엄지손가락의 뼈는 반드시 밖으로 튀어나 필세로 하여금 바른편으로 향하게 해야만 만호(萬毫)가 힘을 가지런히 하고 필봉이 마침내 중으로 가게 된다. 만약 단단히 잡기만 하고 돌리지 않으면 힘은 붓대에만 있고 호(毫)에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구양영숙(歐陽永叔)의 이른바 “손가락으로 하여금 운용하여 완(腕)은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며, 동파(東坡)의 이른바 “비고 너그럽게 한다.”는 것이다. 가로 다붙이는 기(機)는 무명지의 손톱과 육(肉)의 사이에 있으며 밖으로 튀어나는 묘는 가운데손가락의 강하고 부드러운 그 사이에 있는 것이며, 또 “무명지의 손톱과 육의 사이로써 붓대를 떠받아 위로 향하게 한다.”는 말도 있다.

측(側)을 점(點)이라 하지 않고 굳이 측이라 한 것은 측으로 비스듬히 쏟아 점을 만드는 형세가 있음으로 해서이다. 면(宀)의 윗점 같은 것에 이르러는 역시 측이라 불러서는 불가하니 파(波)를 날(捺)이라 하고 별(撇)을 불(拂)이라 하는 호칭(互稱)과는 같지 않다.

“호를 편다[伸毫]”는 것은 바로 고금 서가의 들어보지 못하던 말이다. 필봉은 항상 필획의 안에 있어야 하며 한 획의 속에서도 기복이 봉초(鋒抄)에서 변하며 한 점의 속에서도 육좌(衄挫)가 호망(毫芒)으로 달라진다 하였는데 이는 본시 종유ㆍ 색정 이래의 진결(眞訣)로서 고금을 통하여 바꾸지 못하는 것이며 인(印)과 인처럼 서로 전하는 것이다. 근일에 동인의 이른바 호를 펴는 한 법은 곧 바람벽을 향하여 허위조작한 것으로 전혀 낙착(落着)이 없다. 만약 별(撇)의 말필(末筆)을 만난다면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는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후학들이 다 이의 그르침을 입어 점점 귀굴(鬼窟)로 들어간 것이다.

법은 사람마다 전수받을 수 있지만 정신과 흥회(興會)는 사람마다 스스로 이룩하는 것이다. 정신이 없는 것은 서법이 아무리 볼 만하다 해도 능히 오래두고 완색하지 못하며 흥회가 없는 것은 자체(字體)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기껏해야 자장(字匠)이란 말 밖에 못 듣는다. 가슴속에 잠재한 기세(氣勢)가 글자 속과 줄 사이에 유로(流露)되어 혹은 웅장하고 혹은 우여(紆餘)하여 막자도 막아낼 수 없는 것인데 만약 겨우 점ㆍ획의 면에서 기세를 논한다면 오히려 한 층이 가로막힌 것이다.

박군 혜백(蕙百)이 글씨를 나에게 물으며 서의 원류(源流)를 터득하는 방법을 청하므로 나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글씨에 뜻을 두었었다. 이십사 세 적에 중국 연경(燕京)에 들어가 여러 명석(名碩)들을 만나보고 그 서론(緖論)을 들어본 바 발등법(撥鐙法)이 머리를 세우는 제일의 의가 되며 지법(指法)ㆍ필법(筆法)ㆍ묵법(墨法)으로부터 분항(分行)ㆍ포백(布白)ㆍ과파(戈波)ㆍ점획(點畫)의 법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익히는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한ㆍ위(漢魏) 이하 금석(金石)의 문자가 수천 종이 되어 종ㆍ색(鍾索) 이상을 소급하고자 하면 반드시 북비(北碑)를 많이 보아야만 비로소 그 조계(祖系)의 원류의 소자출(所自出)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악의론(樂毅論)은 당의 시대부터 이미 진본은 없어졌고 황정경은 육조 시대 사람이 쓴 것이며 유교경(遺敎經)은 당 나라 경생(經生)의 글씨이며, 동방삭찬(東方朔贊)ㆍ조아비(曹娥碑) 등의 글씨도 전혀 내력이 없으며, 각첩(閣帖)은 왕저(王著)가 번모(飜摹)한 것으로써 더욱 오류(誤謬)가 되어 이미 당시에 미원장(米元章)ㆍ황백사(黃伯思)ㆍ동광천(董廣川 동기창(董其昌) 같은 이가 일일이 박정(駁正)한 바 있으니 중국의 유식자들은 악의ㆍ황정 등의 서로부터 각첩(閣帖)에 이르러는 다 말하기조차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대개 악의ㆍ황정 등의 서는 만약 근거될 만한 진본이었다면 당의 구ㆍ저ㆍ우(虞 우세남(虞世南))ㆍ설(薛 설직(薛稷),ㆍ안(顔 안진경(顔眞卿))ㆍ유(柳 유공권(柳公權))ㆍ손(孫 손건례(孫虔禮))ㆍ양(楊 양응식(楊凝式))ㆍ서(徐 서계해(徐季海))ㆍ이(李 이옹(李邕)) 여러 사람들의 쓴 글씨가 하나도 황정ㆍ 악의와 같은 것이 없으니 그 황정ㆍ 악의로부터 입문하지 않은 것을 입증할 만하며 다만 여러 북비와는 인과 인이 서로 합할 뿐만 아니라 방경(方勁)하고 고졸(古拙)하여 모릉(模綾)이 원숙한 것은 없다.
근일에 우리나라에서 일컫는 서가의 이른바 진체(晉體)니 촉체(蜀體)니 하는 것은 다 이런 것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며 곧 중국에서 이미 울 밖에 버려진 것들을 가져다가 신물(神物)과 같이 보고 규얼(圭臬)과 같이 받들며 썩은 쥐를 가지고서 봉새를 쪼으려 든다[腐鼠嚇鳳]는 격이니 어찌 가소롭지 아니한가.
혜백은 말하기를 “이 추사의 하는 말을 들어보면 전일에 정(鄭)ㆍ이(李) 여러 사람에게 익히 들었던 것은 모두 남원(南轅)에 북철(北轍)인 격이 아니겠소?" 하므로 나는 또 아래와 같이 말했다.
이것은 정ㆍ이 여러 사람들의 허물이 아니다. 정ㆍ이 여러 사람들은 다 천분(天分)은 지녔지만 궁려(窮廬)에 묻혀 있어 옛사람의 선본(善本)을 보지 못했으며 또 유도(有道)의 대방가(大方家)들에게 취정(取正)하지 못하고 모두 옹유 승추(甕牖繩樞)로서 많이 보고 많이 들은 것은 없으나 그 학을 하는 고심(苦心)에 있어서는 무시하지 못할 점이 있다. 그래서 어렴풋이 그림자만 찾고 황홀하게 소리만 어루만져서 내심으로 생각하기를 “천상(天上) 옥경(玉京)의 경루(瓊樓) 금궐(金闕)도 반드시 응당 이렇고 이러리라.” 하며 능히 눈으로 보고 발로 가지는 못했으니 어떻게 경루ㆍ금궐의 실상을 증명할 수 있으랴.
옛날 동파(東坡)가 나한복호(羅漢伏虎)를 찬한 글귀에,
일념의 차로써 / 一念之差
비이에 떨어졌네 / 墮此髬髵
도사가 비민히 여겨 / 導師悲憫
너를 위해 빈탄하도다 / 爲汝嚬歎
너 같은 맹렬로서 / 以爾猛烈
본성 찾기 어렵잖네 / 復性不難
라 하였으니, 제군들도 다 일념의 차로써 타락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맹렬한 것도 역시 본성을 되찾기가 어렵지 않은데 특히 도사의 비민을 만나지 못한 탓이다 하고서 서로 크게 웃었다. 그 실상을 헤아려 보면 실로 정ㆍ이의 허물이 아니니 이는 책비(責備)만 해서는 옳지 않은 것이다.
원교(圓嶠)의 필결에 이르러는 가장 가르침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터럭을 편다는 법이라 하겠는데 이것이 더욱더 틀려나가서 그른 것이 쌓여 옳은 것을 이길 작정으로 구ㆍ저 여러 사람들을 다 무시하고 위로 종ㆍ왕(鍾王)에 접속하려 드니 이는 문 앞길도 거치지 아니하고 곧장 방 아랫목을 밟겠다는 격이라, 그것이 되겠는가.
조자고(趙子固)는 말하기를 “진(晉)을 배우려면서 당 나라 사람을 거치지 않는 것은 너무도 요량없는 것을 내보일 뿐이다. 해서(楷書)에 들어가는 길이 셋이 있으니 화도(化度)ㆍ구성(九成)ㆍ묘당(廟堂)의 세 비(碑)일 따름이다.”라 했으니, 자고(子固)의 때에 어찌 악의ㆍ황정이 없어서 이 세 비를 들어 말했겠는가. 때문에 악의ㆍ황정은 유식자로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황정은 오히려 육조 사람이 쓴 진본이 있어 사람이 다 볼 수 있으니 만약 이를 임서하고 싶으면 바로 우연히 한번 희묵(戲墨)으로 시험하는 데 불과할 따름이며 이 어찌 법을 세우는 정종이라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황정의 진본은 필세가 가볍게 드날려 근일에 행세하는 묵각(墨刻)과는 특별히 다르기만 할 뿐 아니라 빙탄(氷炭)과 훈유(薰蕕)가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은데 이를 어찌하여 진체(晉體)라 일러 집집마다 떠받드는지 모를 일이다.

안평원(顔平原)의 글씨는 순전히 신으로써 나가 이는 곧 저법(褚法)으로부터 왔으나 저와는 일호도 서로 근사한 것이 없다. 황산곡(黃山谷)은 바로 진인(晉人)의 신수(神髓)라 했는데 사람들은 혹 우군의 과파(戈波)가 없다 하여 미사(微詞)가 있으니 다 그 변한 곳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논한 것이다.
근일의 유석암(劉石庵) 같은 이는 동파(東坡)의 서로부터 들어가 곧장 산음(山陰)의 문정(門庭)에 이르렀는데 지금 파서(坡書)의 형상을 가지고서 석암을 가책(苛責)한다면 되겠는가. 고예(古隸)도 역시 이와 같아서 한비(漢碑)를 보면 허화(虛和)하고 졸박(拙朴)하고 흉험가외(凶險可畏)의 상이 있는데 근세 사람들의 천량(淺量)과 소견(小見)으로는 오히려 문형산(文衡山)ㆍ동향광(董香光)의 한 획조차 능히 만들지 못하니, 어떻게 해서 동경(東京)의 한 파(波)인들 만들며 또 어떻게 해서 서경(西京)의 한 횡(橫)인들 만들 수 있으리오.
지금 한비로 현재 보존된 것은 겨우 사십 종류이며 또 잔금영전(殘金零塼)으로도 모추(摹追)할 만한 것이 있는데 촉천(蜀川)과 서로 통하는 곡부(曲阜) 제령(濟寧)의 밖에는 형언할 수 없이 괴괴기기(怪怪畸畸)하여 마치 공양(公羊)의 비상하고 가괴(可怪)한 것은 좌씨(左氏)에만 익숙한 자로는 규측(窺測)할 바 못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의심하여 심한 사람은 혹 묶어 저장해 놓고만 있으니 이 비록 하나의 소도(小道)이나 그 어려움이 이와 같아서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이원교(李圓嶠)가 황산곡의 글씨를 여지없이 논척(論斥)한 것을 보았는데 이는 곧 조미숙(晁美叔)의 말을 주워 모은 것에 불과하며 미숙의 이 말이 이미 산곡에게 감파(勘破)되었다는 것은 몰랐던 모양이다.
대개 논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디고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尊大)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원교마냥 곧장 당ㆍ송ㆍ육조를 뛰어넘어 지레 산음의 비궤(棐几)를 침범하려 드는 것은 바로 지붕 밖에 푸른 하늘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격이다.
원교는 십가(十駕)로도 안평(安平)ㆍ석봉(石峯)에게 미치지 못하고 또 안평ㆍ석봉은 십가로도 동현재(董玄宰)에게 미치지 못하고 현재는 또 십가로도 동파(東坡)와 산곡에게 미치지 못할 터인데 그런 처지로서 어떻게 함부로 산곡을 논한단 말인가. 원교의 글씨는 어찌 일찍이 산곡의 파절(波折)의 법만이라도 지녔던가. 만약 원교가 파절을 모른다 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크게 놀랄 터이지만 실상은 파절의 오정(五停)하는 고법을 모른다.

조자고는 말하기를 “진(晉)을 어찌 쉽게 배울 수 있으랴. 당(唐)을 배우면 오히려 규구(規矩)는 잃지 않는다. 진을 배운다면서 당 나라 사람을 따르지 않는 것은 너무도 요량 모르는 것을 내보일 뿐이다. 해서(楷書)에 들어가는 것이 겨우 세 가지가 있으니 화도(化度)ㆍ구성(九成)ㆍ묘당(廟堂)이다.”라 했다. 지금 조자고의 시대를 들어 말하자면 이미 육칠백 년이 지났으니 지금 통행하는 황정ㆍ악의ㆍ유교 등의 법서 같은 것은 어찌 자고가 이를 보지 못했겠는가. 그렇지만 반드시 이 세 비만을 뽑아든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황정은 산음(山陰)의 글씨가 아니며 악의론은 이미 그때에 선본(善本)이 없어져서 표준으로 삼을 수 없으며 유교는 곧 당의 시대 경생(經生)의 글씨라 부득불 이 세 비에서 구할 수밖에 없으며 비록 석본(石本)이라 할지라도 원석이 상기 보존되어 있으니 진적(眞跡)에 비하여 한 등급이 낮지만 후세 석각(石刻)의 자꾸자꾸 서로 번모(飜摸)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서법은 신라 고려 두 시대에 오로지 구체(歐體)만을 익혀서 지금 남아 있는 구비(舊碑)로써 오히려 그 한두 가지를 거슬러 얻을 수 있는데 본조부터 이래로는 다 송설(松雪)의 한 길로만 쏠리었다. 그러나 신장(申檣)ㆍ성임(成任) 같은 여러 분들이 쓴 문방(門榜)의 액(額)은 웅기(雄奇)하고 고아하여 대단히도 옛법을 지녔으며 석봉에 이르러도 비록 송설의 기미는 있으나 역시 정성껏 옛법을 따랐던 것이다.
뒤에 와서 스스로 힘을 다하여 고법을 만회한다고 여기는 자들이 걸핏하면 다 황정ㆍ악의의 진체(晉體)를 말하고 있는데 모르괘라 황정ㆍ악의는 과연 이것이 무슨 본이었던가.
마침내 원교에 이르러는 또 예로부터 내려온 유규(遺規)를 다 말살하고 한 법을 억조(臆造)하여 붓 잡는 법에 있어서도 현비(懸臂)와 발등(撥鐙)을 익히지 아니하고 결자(結字)에 있어서는 “왼편은 위를 가지런히 하고 바른편은 아래를 가지런히 한다.”는 등의 법으로 예로부터 감히 바꾸지 못한 것을 알지도 못하며 온 세상이 육침(陸沈)이 되어 거의 돌이켜 깨닫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서가의 하나의 큰 변이라 하겠다.

글씨를 배우는 자가 진을 쉽게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당 나라 사람을 경유하여 진에 들어가는 지름길을 삼는다면 거의 그릇됨이 없을 것이다.
고현(古賢)이 글자를 만듦에 있어 공중에 올려 곧장 내림으로써 능히 신품(神品)에 들어가지 않는 자가 없는데 이는 현비(懸臂)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현비를 하면 공제(空際)에서 선전(旋轉)하여 가는 곳에 따라 살찌건 여위건 간에 다 묘취(妙趣)를 이룬다. 그러므로 장득천(張得天) 사구(司寇)는 글씨를 배움에 있어 먼저 현비를 하고서 원권(圓圈)을 그려 삼개월이 지나 그 권자(圈子)가 둥글고 깨끗하며 순숙(純熟)할 때를 기다려서 붓을 쓰면 자연히 주경(遒勁)하고 원전(圓轉)하여 여유가 작작하며 붓을 눌러 글자를 만들면 스스로 편봉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다만 권자만으로는 다 되지 못하며 지운(指運)으로써 참(參)해야 한다.

종정(鍾鼎)의 고문자는 다 예법(隸法)이 이로부터 나오게 된 것이니 예를 배우는 자가 이를 알지 못하면 바로 흐름을 거스르고 근원은 잊어버린 격이다.

우리들이 한예(漢隸)의 글자를 배웠다지만 모두 결국 당예(唐隸)를 쓰게 되고 만다. 그러나 당예도 미쳐가기 어렵다. 당예는 하나의 명황(明皇) 효경(孝經)에만 그치고 말 따름이 아니다. 한비(漢碑)에 없는 글자는 함부로 만들어 내서는 안 되며 만약 당비(唐碑)에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 모양에 의해 만들 수도 있으니 전체(篆體)와 같이 지극히 엄하지는 않다. 전자(篆字)는 결코 당으로 흘러가서는 안 되니 비록 이소온(李少溫)의 전(篆)이라도 단연코 따라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강백석(姜白石 강기(姜虁))이 수장한 정무난정(定武蘭亭)은 바로 조자고(趙子固)의 낙수본(落水本)이다. 소미재(蘇米齋 옹방강(翁方綱)의 재호임)가 손수 모(摹)하여 호리(毫釐)의 차와(差訛)도 없다. 또 강개양(姜開陽)이 산음(山陰)에서 각을 했으니 난정이 강씨에게 있어 크나큰 묵연(墨緣)이라 하겠다.

서가(書家)는 반드시 우군의 부자(父子)를 들어 준칙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왕(二王)의 서는 세상에 전본(傳本)이 없으며 진적으로 상기 보존된 것은 쾌설시청(快雪時晴)과 대령(大令)의 송리첩(送梨帖) 뿐이어서 모두 계산해도 백자(百字)를 넘어가지 않으니 천재(千載)의 아래에 있어 비궤(棐几)의 가풍을 추소(追溯)할 것은 이에 그칠 뿐이다. 이 역시 내부(內府)로 들어가서 외인으로는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모(劉摹)나 장각(章刻) 같은 것은 오히려 한번 번모(飜摹)한 것으로서 모법(摹法)이나 각법(刻法)이 하마 송ㆍ원 시대에 미치지 못하는데 또 어찌 양모(梁摹) 당각(唐刻)을 상대하여 논할 수 있으랴.
육조(六朝)의 비판(碑版)은 자못 전본(傳本)이 있어 구ㆍ저가 모두 이에서 나왔다. 그러나 송ㆍ원(宋元)의 여러 분들이 그다지 칭도(稱道)함이 없는 것은 그 이왕(二王)의 진적이 지금과 같이 다 없어지지는 않은 때문이다.
지금 사람들은 마땅히 북비(北碑)로부터 하수(下手)해야만 제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초산명(焦山銘)ㆍ예학명(瘞鶴銘)은 곧 육조 사람의 글씨이며 또 정도소(鄭道昭)의 여러 석각 같은 것도 다 볼 만하다. 황산곡 같은 이는 자주 초산(焦山)은 언급했지만 정(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역시 이상한 일이다.

형방비(衡方碑)ㆍ하승비(夏承碑)를 올려 보내는데 하승비의 원석(原石)은 이미 있지 않으며 이는 다 중각(重刻)한 통행본이다.

윤백하(尹白下)의 글씨는 문형산(文衡山)에게서 나왔는데 세상이 다 알지 못하며 우선 백하(白下) 자신도 또한 말하지 않았다. 문(文)의 글씨로서 소해(小楷) 적벽부 묵탑본(墨塌本)이 우리나라로 건너온 것이 있는데 백하가 전심하여 이것을 배웠다. 그 짧은 수획(竪畫)의 위는 풍성하고 아래는 빤 것은 바로 문(文)에게서 얻어온 법인데 문의 서는 청완(淸婉)하고 경리(勁利)한 반면 백하는 살짝 둔하고 조금 살찌며 우선 문의 결구는 다 구ㆍ저(歐褚) 안ㆍ유(顔柳)의 서로 전하는 옛 식에 들어 맞는데 백하는 다 되는 대로 썼으며 한 글자의 안에서 그 횡(橫)ㆍ수(竪)ㆍ점(點)ㆍ날(捺)에 따라 늘어놓기만 했다. 그러나 그 천품이 매우 특이한데다 인공마저 더하여 끝내 하나의 가수(家數)를 이룬 것은 형산을 비근하다 여기지 아니하고 머리를 숙여 배우고 익히곤 하여 먼 데로 치달려 스스로 대단한 척하기를 근래의 종ㆍ왕을 망칭(妄稱)하는 사람같이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해(大楷)의 금석비판(金石碑版) 전면(前面) 글자는 오로지 파공(坡公)의 표충비(表忠碑)를 법받았으며 그 반초(半艸)는 미남궁(米南宮)을 귀숙(歸宿)으로 삼아서 모두가 송인(宋人)의 권자(圈子) 밖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곧 그 식력(識力)이 크게 상량(商量)을 가진 곳이다.
그 문하에서 진수를 얻은 사람으로는 원교를 제일로 삼거니와 원교의 초년에 쓴 해자는 곧 사문(師門)과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어 한 솜씨와 같았다. 실상 모를 일은 단지 사문의 써낸 것에서만 배우고 일찍이 한번도 사문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는 더듬어 보지 않은 점이니 이는 또 웬일이며 사문 역시 자기의 나온 바를 일러주지 않은 것은 또 웬일인가.
다시 생각하면 사도(師道)가 너무도 엄하여 감히 함부로 묻지 못했던 것이었던가. 사문이 일러주지 않은 것도 또한 박(璞)을 보여주지 않은 의에서였던가.
백하는 양호필(羊毫筆)을 썼던 모양이다. 서단양(徐丹陽)은 일찍이 말하기를 “사문의 쓰는 붓을 보니 중국의 대호로써 희기가 눈 같은데 끝내 무슨 붓이 되는지를 알지 못했고 또한 끝내 청해 묻지도 못했다.”고 했다. 대개 옛사람은 사도(師道)가 엄하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서ㆍ이(徐李)는 모두 그 고족(高足)이며 이(李)는 또 그 필법마저 물려받았으나 모두 양호인지는 알지 못했으며 비록 알았다 해도 백하는 능히 부려 쓸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필성(筆性)으로 보아 맞지 않을 것이다.

강표암(姜豹庵) 글씨는 바로 저하남(褚河南)에서 나왔으나 역시 어디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백하와 같으니 옛사람들은 이와 같은 곳이 많았다.

미남궁(米南宮 미불(米芾))의 글씨는 나양(羅讓)에게서 나왔는데 세상은 다만 미(米)를 알 뿐이요, 나(羅)가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난정(蘭亭)은 하나는 구(歐)의 모본(摹本)이요, 하나는 저(褚)의 임본(臨本)으로서 구는 구의 체가 있고 저는 저의 체가 있는데 세상에서는 다만 산음(山陰)의 것인 줄만 알고 도리어 이것은 구, 이것은 저임을 알지 못하며 만약 구ㆍ저의 서(書)를 들어 말을 하면 비록 구성(九成)ㆍ화도(化度)ㆍ삼감(三龕)ㆍ성교(聖敎 저(褚)의 안탑성교(雁塔聖敎)를 말함)라도 모두가 경홀히 여긴다. 중국 사람들은 일찍이 이와 같지 않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말살하려 든다. 이를테면 송ㆍ원의 여러 사람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침폄(鍼砭)하려 들며 서경(西京)ㆍ동경(東京)으로 곧장 뛰어넘어 올라가려 하나 그 실상인즉 화도ㆍ삼감을 보지도 못하고서 공연스레 허세와 공갈로만 오만을 부리는 것이다.
미남궁은 저임(褚臨)을 들어 천하의 제일로 삼았는데 그 당시에는 정무본(定武本)이 적지는 않았으나 반드시 저(褚)를 중히 여겼으니 남궁의 감식(鑑識)은 의당 참증한 바 있어 뒷사람의 천량(淺量)으로는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황 산곡(黃山谷) 같은 이는 또 정무본은 추켜들었으며 강백석(姜白石)ㆍ조이재(趙彝齋)가 다 정무를 진(眞)으로 삼았으니 후세 사람들이 정무를 일컫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상세창(桑世昌)유송(兪松) 여러 감상가들은 오로지 정무를 제일로 삼지 아니하고 아울러 저본(褚本)을 들었다.

악의론(樂毅論)의 양모ㆍ당각(梁摹唐刻)은 이미 북송(北宋) 시대부터 대단히 드물었으며 근세에 유행하는 속본(俗本)은 바로 왕저(王著)의 글씨이다. 동쪽 사람들은 더욱이 감별이 없어서 비궤(棐几)의 진영(眞影)으로 인식하고 아이 때부터 머리가 하얗토록 익혀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마치 채구봉(蔡九峯 채 침(蔡沈))이 전(傳)을 한 서경(書經)의 고문(古文)은 다 매색(梅賾)의 위본(僞本)임을 모르는 것과 같다.
서와 화(畫)는 도가 한 가지이다. 화가가 반드시 위로 조불흥(曹不興)장승유(張僧繇)만 찾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만약 왕우승(王右丞 왕유(王維))의 강간설재(江干雪霽) 전본(傳本)이나 오도현(吳道玄)의 보살천왕(菩薩天王) 모필(摹筆)을 얻는다면 받들기를 천구(天球)와 홍벽(弘璧)같이 한다. 송의 연문귀(燕文貴)역원길(易元吉)의 것 같은 것도 세상에 드문 보배로 삼으며 원의 사대가(四大家) 조송설(趙松雪) 예운림(倪雲林) 황대치(黃大痴) 왕몽(王蒙)를 말하더라도 역시 그 진본은 얻기 어렵다. 비록 명의 심석전(沈石田)ㆍ유완암(劉完庵)ㆍ문형산ㆍ동향광 같은 지극히 가까운 시대 사람들의 작품도 보기를 금과 옥조(金科玉條)처럼 하는데 글씨만은 그렇지 아니하여 반드시 종ㆍ왕을 준칙으로 삼으며 이것이 아니면 선뜻 다 경홀히 여긴다.
무릇 구ㆍ저 같은 이는 다 진인(晉人)의 신수(神髓)인데도 이원교는 방판(方板)이라 칭하여 하찮게 여기며 “우군은 이렇게 쓰지 않았다.” 하고 있으나 그 평생을 두고 익힌 것은 바로 왕저가 쓴 악의론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동향광은 바로 서가로서 하나의 큰 결국(結局)인데도 마구 말살하여 넘어뜨리고 있지만 중국 사람들은 동이 임서한 난정시(蘭亭詩)를 난정의 팔주첩(八柱帖) 안에 꽂아넣어 적파(嫡派) 진맥(眞脈)이 서로 전하는 것과 같이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목이 훨씬 중국의 감상가들보다 나아서 그렇단 말인가. 너무도 요량 없음을 보여줄 뿐이다.
만약 원교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고 창정(暢整) 경객(敬客)의 글씨로 향하여 배우고 익혔더라면 그만한 천품으로써 구ㆍ저를 거슬러 가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니 또한 반드시 깊이 가책(苛責)을 가할 것도 아니다.
이왕(二王)의 진적으로 지금도 오히려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우군(右軍)의 쾌설시청(快雪時晴) 원생(袁生) 등의 첩(帖)과 대령(大令)의 송리첩(送梨帖) 같은 것인데 이런 것도 그들은 다 심상(尋常)히 거쳐 가고 심상히 모습(摹習)하는 터이며 또 우모난정(虞摹蘭亭)ㆍ저본난정(褚本蘭亭)ㆍ풍(馮)의 난정ㆍ육(陸)의 난정ㆍ
개황난정(開皇蘭亭) 같은 것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찌 꿈엔들 이에 미쳤으랴. 이러한 도리를 알지 못하고 한결같이 미오(迷誤)되어 돌아오지 못하며 삼전(三錢)의 계모필(鷄毛筆)을 견집하여 걸핏하면 진체(晉體)라 칭하고 있으나 그들의 말하는 진체는 과연 무슨 본인고 하면 왕저의 악의론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아니하랴.
우연히 손과정(孫過庭 손건례 (孫虔禮))의 사자부(獅子賦)ㆍ임조(林藻)의 심위첩(深慰帖)을 펴보고 저도 몰래 신이 나서 한번 써 보았는데 손ㆍ임은 곧 진인(晉人)의 규칙이다. 초법(草法)을 배우고자 하면서 손의 문경(門逕)을 말미암지 않으면 또 촌구석 가게에나 술집 바람벽에 붙이는 하나의 진택부(鎭宅符)의 악찰(惡札)이 되고 마는 것이다.

가슴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 서품(書品)이나 화품(畫品)이 다 한 등급을 뛰어나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다 속장(俗匠) 마계(魔界)일 따름이다.
구(歐)의 서는 기화(奇花)가 갓 맺은 것 같아서 함축하고 드러내지 않는다. 옹사탑명(邕師塔銘)은 그 신(神)이 행하고 환(幻)이 나타난 곳으로서 사람들이 그 그림자나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저의 삼감(三龕)ㆍ맹법사(孟法師)ㆍ성교(聖敎) 등의 서는 해[歲]가 새로워짐을 보는 것 같고 꽃이 벌어지는 것을 만난 것 같아 유행하고 변형(變形)하여 헤아릴 수 없지 않는 것이 없다. 화엄누각(華嚴樓閣)이 한 손가락으로 탄개(彈開)하는 것은 미륵이 아니고서는 이를 판출(辦出)할 수 없고 선재(善財)가 아니면 이에 들어갈 수 없어 바라볼 수는 있어도 나아가지는 못한다.

서(書)는 현완(懸腕)ㆍ발등(撥鐙)ㆍ포백(布白) 등의 법과 부앙(俯仰)ㆍ향배(向背)ㆍ상하(上下)ㆍ조응(照應)에 여러 묘(妙)가 있으며 점과 획이 청초(淸楚)하고 장법(章法)이 구비해야 되는 것이다. 우선 종ㆍ색(鍾索) 이래로 능히 바꾸지 못하는 한 법식이 있으니 좌우의 글자 이것이다. 우가 짧으면 아래를 가지런히 하고 좌가 짧으면 우를 가지런히 하며 간가(間架) 결구(結搆)의 팔십여 격(格)도 이로부터 들어가지 아니하고서 함부로 한 획을 긋고 맹목적으로 한 파(波)를 뽑기를 근일의 속장(俗匠)과 같이 전도(顚倒)하고 창광(猖狂)하면 모두 다 이 악찰(惡札)일 뿐이다.
영정본(穎井本)ㆍ왕문혜본(王文惠本)은 소재(蘇齋)가 그다지 허여하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소재의 정법안(正法眼)만이 심정(審定)할 바이며 얕은 사람으로는 또 망령되이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상구진씨(商邱陳氏)의 송탁구본(宋拓舊本)은 운대(芸臺)가 이것을 정무(定武)의 원석(原石)이라 하였고 소재(蘇齋)는 송의 번본(飜本)이라 했으니 소재의 정확은 마땅히 특식(特識)을 갖추어 범안(凡眼)으로는 능히 뚫고 갈 바가 아니다.
운대는 고목난원본(古木蘭院本)을 두 돌에 각하여 하나는 고목난원에 두고 하나는 문선루(文選樓)의 가숙(家塾)에 두었으며 전매계(錢梅溪) 영(泳)은 조오흥(趙吳興 조맹부(趙孟頫))의 십삼발(十三跋)을 각했는데 이는 불에 타지 않은 이전의 완본이다.
조자고의 낙수본은 장씨(蔣氏)의 집 물건이 되었는데 소재가 빌려다 재중(齋中)에 두고 평소에 공력들인 것이 이에 있었다. 근자에 들으니 역시 내부(內府)로 들어갔다 한다. 조오흥(趙吳興) 십삼발의 이미 타다 남은 것은 현재 영후재(英煦齋)에 소장되어 있는데 역시 소재의 품정(品定)을 거친 것이다.

난정첩(蘭亭帖)은 다 당 태종(唐太宗) 때에 비로소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수(隋) 나라 개황(開皇) 연대에 이미 각본(刻本)이 있었다. 그 “변재(辨才)가 단단히 감춰둔 것을 소익(蕭翼)이 속여서 내왔다.”라는 말을 준신하여서는 아니될 것 같다. 지금 통행하는 정무본은 바로 구모(歐摹)요, 신룡본(神龍本)은 저임(褚臨)인데 구는 구의 체가 있고 저는 저의 체가 있으니 모르괘라 이 두 본 중에 어느 것이 과연 산음의 진영(眞影)이었던가?
미남궁은 저본을 평생의 진완(珍玩)으로 삼았고 황산곡은 정무본을 가장 칭찬했다. 그래서 송ㆍ원 이래로 정무본이 마침내 세상에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감상가들은 또 많이 저본을 주장하여 정무와 더불어 서로 갑을(甲乙)하였다.
회인(懷仁)이 성교서를 집자(集字)할 때에 혹은 구본의 글자를 취하기도 하고 혹은 저본의 글자를 취하기도 했다. 그때에 궁중에 수장된 것도 역시 각각 두 본이 있어 아울러 취한 것이니 다 진(眞)을 모하는 데에 해로움이 없어서 그랬던 것인가? 탕(湯)ㆍ풍(馮) 같은 여러 모본에 이르러는 또 어느 곳에 유장(留藏)되었던 것인가? 지금 중국 내부(內府)에 수장된 것은 백 수십 본이어서 그 사이에는 기체(奇體)도 많아 또 지금 통행본과는 크게 다르다고 한다. 그렇다면 단지 지금 통행하는 양 본을 난정의 진면으로 삼는다면 또 하나의 각주구검(刻舟求劍)에 불과하다 하겠다.
소릉(昭陵)에서 발굴한 이래 옥갑(玉匣)의 진본이 다시 나와 장사꾼의 손으로 들어가서 정강(靖康 송휘종(宋徽宗)의 연호) 연간에 직녀(織女)의 지기석(支機石)과 더불어 서울에 팔러온 것을 가사도(賈似道)가 직접 목도하였는데 이윽고 휘종(徽宗) 흠종(欽宗)이 북으로 가게 되어 마침내 그 물건이 간 곳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신물(神物)은 반드시 연운(煙雲)과 더불어 환멸(幻滅)할 리는 없고 마땅히 인간에 있을 텐데 특별히 사람들이 묵륜(墨輪)의 윤전(輪轉)할 때를 만나지를 못하고 있으니 오직 가섭(迦葉)의 출정(出定)한 해를 기다려야만 다시 제본(諸本)을 감험(勘驗)할 수 있을 것이다.

진(晉)ㆍ송(宋)의 사이에는 세상이 헌지(獻之)의 서를 중히 여기고 우군의 서는 도리어 중히 여기지 않았다. 양흔(羊欣)이 자경(子敬)의 정ㆍ예(正隸) 서를 중히 여겨 세상이 모두 존중하였던 것이다.
양(梁) 나라가 망한 이후로 비각(祕閣)에 수장된 이왕(二王)의 서가 처음으로 북조(北朝)에 들어가서 진위(眞僞)가 혼잡되어 당시에도 이미 분변하기 어려웠다.
도 은거(陶隱居)가 양 무제(梁武帝)에게 답한 계(啓)에 이르기를 “희지(羲之)가 선령(先靈)에 고하고 벼슬하지 않은 이후로는 대략 자수(自手)로 쓰지 아니하고 대서(代書)하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세상이 얼른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그 느리고 다른 점을 보면 만년의 글씨라서 이렇다고만 했으나 그 실은 우군의 진서가 아니다. 자경이 나이 십칠팔 세에 전혀 이 사람의 글씨를 모방했다.”고 했다.
지금 이왕(二王)의 글씨는 일단 이와 같이 분별하기 어려운데 나아가서 경서를 읽으며 낡은 것만 고수하고 빠진 것을 안아서 끊어지지 않음이 실낱과 같은 것이 또 어찌 하나의 서가와 대비해 논할 수 있는 정도랴. 이는 학자로서 열백 번 신중히 생각해야 할 곳이다.
성저(成邸 성친왕(成親王))의 글씨는 송설(松雪)로부터 들어갔는데 늦게는 구의 화도비ㆍ송탁구본을 얻어 차츰 변하여 깊이 그 당오(堂奧)에 들었으며 초서의 법은 더욱 손건례(孫虔禮)의 구법(舊法)에 특장(特長)이 있어 악찰의 진택부(鎭宅符)의 속습을 깨끗이 씻어냈으니 족히 뒷사람의 법식이 될 만하다.
이 권은 대개 조(趙)의 필의가 많지만 그러나 한 체로 이름짓지 않고 종왕의 여러 법이 각각 그 묘를 나타냈다. 고순첩(苦荀帖)은 그가 수장한 것이며 내부(內府)에 비장한 진ㆍ당 이래의 극적(劇迹)은 다 그가 익숙히 익혀 침자(枕藉)하던 것이니 아무리 잘 쓰고 싶지 않지만 되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내력도 알지 못하는 각첩(閣帖)ㆍ난정ㆍ악의를 가지고서 곧장 산음의 정맥을 거스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삼가촌락의 동홍(冬烘) 선생이 고두강장(高頭講章)으로서 소릉(召陵) 북해(北海)에게 버티고자 하는 것이다.

일찍이 법원사(法源寺)에서 성친왕이 쓴 찰나문(刹那門)이라는 삼대자(三大字)를 보았는데 금시(金翅)가 바다를 가르고 향상(香象)이 바다를 건너가는 기세가 있어, 우리나라의 석봉으로는 열이라도 당해낼 수 없거니와 만약 다시 석암(石庵)ㆍ담계(覃溪)의 웅강(雄强)이라면 또 어떤 구경거리를 만들었을는지, 자신도 모르게 망연자실이 된다.

지영선사(智永禪師)는 철문한(鐵門限)을 만들고서 그 선조 우군의 가법을 독실히 익혀 횡획은 반드시 여위고 직획은 반드시 살찌니 이는 필세(筆勢)의 자연으로 말자도 말지 못하는 곳이다.
우군의 글씨도 역시 이와 같아서 혹은 은봉(隱鋒)하여 쓴 것도 있는데 그 절각(節角)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흔연한 일색(一色)으로 되어 비ㆍ수(肥瘦) 대ㆍ소(大小)의 구분이 없으나 자세히 보면 역시 차등이 있다. 이는 서가(書家)가 모를 깎아 원을 만드는 하나의 전변(轉變)인 것으로서 마치 양한(兩漢)의 문체가 종경에는 글귀를 단련하고 글자를 조탁하며 누런 것을 뽑아 흰 것과 대하여 문선(文選)의 이(理)로 된 것과 같다. 지금의 글씨 쓰는 자는 이러한 원류를 알지 못하고 걸핏하면 글씨란 크로 작은 획이 없다 하여 드디어 그 음양ㆍ향배ㆍ추세(麤細)ㆍ비수(肥瘦)로써 예로부터 일정하여 감히 바꾸지 못하는 체식(體式)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하나의 산자(算子)를 만드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종ㆍ색(鍾索) 이하의 서가는 다 전하는 비결이 없고 오직 입과 입으로 서로 주고받고 할 뿐이었는데 지영(智永)에게 와서 비로소 영자팔법(永字八法)을 글로 만들어 놓았으며 또 야(也)의 글자의 한 법이 있었으나 오로지 과구(窠臼)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팔법이 차츰 변하여 칠십여 칙(則)이 되었으며 또 은술(隱術)로 십여의 필이 있어 언어와 문자로는 형용할 바 아니니 신(神)으로써 밝혀나가야 할 것이다.

백정(白丁)은 운남(雲南)의 중인데 난초를 잘 그렸다. 매양 문을 닫고 혼자서 그리며 물로써 그 지면에 뿜어 먹빛이 나를듯이 피어나는데 아무도 그 법을 터득한 자 없고 오직 정판교(鄭板橋)만이 그것을 배웠다. 백정(白丁)의 난정에 제함.

이는 봉안(鳳眼)과 상안(象眼)으로 통행하는 법인데 이것이 아니면 난을 만들 수 없다. 비록 이것이 소도(小道)지만 법이 아니면 이루지 못하는데 하물며 나아가 이보다 큰 것에 있어서랴.
그렇기 때문에 잎 하나 꼭지 하나도 스스로 속이지 못하거니와 또 남을 속여서도 안 된다. 열 눈이 보는 바요 열 손이 가리키는 것이니 얼마나 무서운가. 이 때문에 난(蘭) 그림에 손을 대고자 한다면 마땅히 스스로 속임이 없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자고(趙子固)가 그린 난은 한 획 한 획이 좌로 향했다. 소재노인(蘇齋老人)이 자주 칭했다.

원 나라 사람이 그린 그림은 고묵(枯墨)으로써 시작하여 차츰차츰 먹을 쌓아 나가므로 끝마치지 못한 나무와 탑용(闒茸)한 산도 다 천기(天機)를 따라 얻어냈다. 대치(大痴)는 대치의 준(皴)이 있고 운림(雲林)은 운림의 준이 있으니 인력을 빌려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오(靜悟)는 청록(靑綠)을 연구한 삼십 년에 원인(元人)의 필로써 당인(唐人)의 기운을 운전하고 송인(宋人)의 구학(邱壑)을 만들었는데 붓끝에는 금강저(金剛杵)가 있어 천마(天馬)가 공중을 다니는 것도 같고 천의(天衣)가 꿰맴이 없는 것도 같고 신룡(神龍)이 머리만 나타내고 꼬리를 보이지 않는 것도 같았다.

백목단(白牧丹)을 두고 지은 시에 이르기를,
신선의 무리 속에 풍류롭긴 쉽지마는 / 神仙隊裏風流易
부귀의 마당 안에 본색 갖긴 어렵구려 / 富貴場中本色難
라 했고, 백도화(白桃花) 시에 이르기를,
후정의 노래 멎자 술기운이 다 깨고 / 後庭歌罷酲初醒
전에 간 사람 오자 귀밑 하마 하얗도다 / 前度人來鬢已華
라와, 또,
식국을 망하기는 홍분의 누로써요 / 亡息國因紅粉累
진인을 피한 것은 바로 백의의 존자로세 / 避秦人是白衣尊
라 한 것이 있으니, 시란 이(理)를 말하지 아니해도 참으로 이를 말한 것이 있다. 이를테면 당 나라 사람이 바둑을 두고 읊기를,
인심이 헤아릴 수 없는 곳엔 / 人心無算處
국수도 지고 말 때가 있구려 / 國手有輸時
와 돛을 두고 읊기를,
하마 몸이 머문 줄만 알았는데 / 恰認己身住
도리어 저 언덕으로 옮겨가는가 / 飜疑彼岸移
와, 눈을 두고 지은 시에,
무슨 수로 백성들의 따뜻함을 얻어볼꼬 / 何由更得齊民煖
숙맥에 하 많이 못 내린 것 한이로세 / 恨不偏於宿麥深
와, 구름을 두고 지은 시에,
한없는 가뭄벼가 말라져 다 죽는데 / 無限旱苗枯欲盡
한가하다 유유히 기봉만 만들다니 / 悠悠閒處作奇峯
라 하였다. 태제(台濟)에게 보임.
동정귤(洞庭橘)ㆍ당금귤(唐金橘)ㆍ소귤(小橘)ㆍ금귤(金橘) 네 종(種)이 상(上)이 되며 별귤(別橘)은 품종이 가장 귀하나 종자가 몹시 드물어서 능히 공납에 충당을 못한다. 산귤(山橘)은 가장 많으나 가장 하질이며 청귤(靑橘)ㆍ석금귤(石金橘)은 다 맛이 좋지 못하며 대귤(大橘)은 보지 못했으며, 감자(柑子)ㆍ등자(橙子)는 다 중국이나 일본산만 같지 못하다. 유감(乳柑)은 조금 시원하나 산미(酸味)가 많으며 당유자(唐柚子)는 농창하게 익어 봄을 지낸 것이라야 달고 시원하다. 감자는 향이 없으며 지각(枳殼)은 청귤과 함께 약에 들어간다.

동정귤은 고성(高姓)의 집 사원(私園)에 단지 두 그루가 있고 관원(官園)에는 단 한 그루뿐이며 당금귤(唐金橘)은 관원(官園)에 한 그루가 있을 뿐이다.
건초척(建初尺)은 성척(省尺)의 칠촌 오푼과 절척(浙尺)의 팔촌 사푼에 해당된다.
《원사(元史)》의 태조본기(太祖本紀) 및 야율초재전(耶律楚材傳)에 의거하면 “제(帝)가 동인도에 이르러 철문(鐵門)에 머물렀는데 각단(角端)이 나타나서 회군하게 되었다.”라 했는데 이것은 대개 송자정(宋子貞)이 지은 초재(楚材)의 신도비(神道碑)를 근본으로 삼은 것이며 태조의 군사가 설산(雪山)을 넘어서 북인도에 그쳤다는 것을 몰라서였다. 북인도에까지 왔었는데 무슨 까닭으로 갑자기 빈해(瀕海)의 동인도에 이르렀겠는가. 철문 같은 데는 가지 못했으며, 설산은 북인도와 거리가 상기도 멀다. 《담연집(湛然集)》을 상고해 보면 초재(楚材)가 서역에 있던 십 년 동안에 심사간성(尋思干城)에 머물렀으니 우연히 철문에 이르렀더라도 인도까지 갔을 리는 없다. 신도비를 짓는 사람이 공을 초재에게 돌리려고 했기 때문에 인도의 일을 철문에 옮겨 써서 부회(傅會)한 것이나 여러 가지가 서로 맞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몽고원류(蒙古源流)》에 이르기를 “성길사한(成吉思汗)이 장차 액납특아극(額納特阿克)을 정벌하기 위하여 곧장 제탑납능령(齊塔納凌嶺)의 산등성이에 당도하자 하나의 외뿔 돋은 짐승을 만났는데 제 이름은 새노(賽魯)라 이르며 한(汗)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니 한은 말하기를 ‘저 액납특아극은 바로 대성인이 강생(降生)한 곳인데 지금 기이한 짐승이 앞에 왔으니 자못 하느님이 뜻을 보인 것이다.’ 하고 회군하여 처소로 돌아왔다.”라 하였다. 이는 분명히 짐승을 만난 곳은 바로 설산에서이고 철문도 아니요 동인도도 아니요 또 초재의 간언(諫言) 때문도 아님을 말한 것이다.
대개 초재는 서역에 있은 십여 년에 머물러 심사간성을 지켰는데 곧 새마 이한성(賽馬爾罕城)이다. 종신토록 인도 북의 대설산에 가지 못했는데 뒷사람이 야율(耶律)의 신도비를 지으면서 반드시 공을 초재에게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설산의 일을 철문에 옮기어 천취(遷就)한 것이나 천리의 어긋남을 모른 것이다. 그런데 《원사》도 인습하고 《명사(明史)》도 인습하였다.

원 태조의 군사가 설산을 넘었으니 단실(端實)을 추산(追算)하면 북인도에 이르러 그쳤으며 중인도까지 친히 가지는 못하였다. 장춘서행기(長春西行記)가 있어 입증이 된다. 만약 겨우 철문에 그쳤다면 북인도도 오히려 가지 못했는데 하물며 중인도를 넘어 빈해(瀕海)의 동인도에까지 갔겠는가. 이는 만리(萬里)의 오류(誤謬)이지만 역시 야율의 신도비에서 비롯되어 《원사》가 인습하고 《명사》가 인습한 것이다.
오인도(五印度)의 강역(疆域)은 남인도는 큰 바다로써 한계하고 서인도는 홍해(紅海)ㆍ지중해(地中海)가 있어 한계하여 예나 이제나 절연(截然)하여 어긋나지 않으며 오직 동ㆍ북의 두 인도는 육지의 경계가 각국과 들쑥날쑥하다. 그러나 동인도는 항해(航海)가 서로 통하여 상이(商夷)가 모두 익히 내왕하며 북인도는 총령(蔥嶺)의 서쪽이 간격이 되어 내왕하지를 못한다. 또 원ㆍ명 이후에는 나라 이름이나 땅의 이름이 당 나라 이전과는 서로 일관되지 못하며 다행한 것은 극십미이(克什彌爾)가 당ㆍ송의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이 되어 천여 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대설산이 있어 그 북을 경계했는데 그를 근거로 하여 북인도의 계빈(罽賓)이 되었다.

《원사》에서 철문을 들어 동인도로 삼았고 《명사》에는 새마이한을 들어 고 계빈(古罽賓)을 삼아서, 중중첩첩(重重疊疊)으로 빗나간 것이 이로부터 일어났으니 이를 가려놓지 않으면 인도 북경(北境)은 끝내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한 나라 시대에 대월씨(大月氏)가 점령한 대하(大夏)의 지역은 바로 새마이한의 지역이며 겸하여 지금의 오한포합이(敖罕布哈爾)ㆍ애오한(愛烏罕) 여러 부(部)의 지역이다. 가정(嘉靖) 이후로부터 입공(入貢)하였는데 한 나라에서 왕이라 칭하는 자가 오십여 명이었으니 이미 사분오열(四分五裂)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총령 서쪽에는 다시 새마이한의 이름이 없으며 서역의 그림 그리는 자들도 그 구국(舊國)을 열거하여 총령 제부(蔥嶺諸部)를 총괄하였으며 곤여(坤輿)ㆍ직방(職方)의 제도(諸圖)나 해국문견록(海國聞見錄)ㆍ장씨지구도(莊氏地球圖)도 아울러 그러하다. 자못 실지를 고사하여 이제를 따르는 의가 아니기 때문에 상세히 분별하는 것이다.

[주D-001]일전(日躔) : 해의 운행하는 전차(躔次)임. 《방언(方言)》에 “日運爲躔”이라 하였고, 《원사(元史)》 역지(曆志)에는 “非日躔 無以交其列舍”라 하였음.
[주D-002]황도(黃道) : 천문학 용어임. 천구(天球) 상의 한 대권(大圈)이 1년 내에 지구상에서 보이는 태양이 지나가는 길이 되어 곧 지구 궤도의 평면이 천구와 서로 어울리는 선(線)이다. 지구 궤도의 평면을 황도면이라 하고, 적도면과 비스듬히 어울려 23도 27분의 각(角)을 이루면 황적대거(黃赤大距)라 하고, 또 천구의 중심을 통과하여 황도면의 직선과 수직이 되면 황도축(黃道軸)이라 하고, 이 축이 천구의 점(點)과 어울리면 황도의 극(極)이라 하는데 생략하여 황극이라 칭함.
[주D-003]백도(白道) : 달이 다니는 길로서 황적도와 더불어 비스듬히 어울리는데 오직 춘분ㆍ추분 절서에는 적도와 교점(交點)을 이룸.
[주D-004]궁(宮) : 역법(曆法)에 30도를 궁으로 삼는데 곧 원주(圓周) 12분의 1임.
[주D-005]생명(生明) : 재생명(哉生明)인데 초사흘의 달을 말함. 《서경(書經)》 무성(武成)에 “厥四月 哉生明”이 있음.
[주D-006]생백(生魄) : 재생백(哉生魄)인데 16일로서 이른바 달의 기망(旣望)을 말함. 재는 시(始)의 뜻임.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公以八月哉生魄庚子”가 있음.
[주D-007]수시(授時) : 옛날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책력을 만들어 민간에 반포하여 농시(農時)를 알려 주었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乃命羲和 欽若昊天 曆象日月星辰 敬授人時”라 하였음.
[주D-008]삭허(朔虛) : 《서경(書經)》 요전(堯典) 기삼백(期三百)의 채전(蔡傳)에 나와 있음.
[주D-009]이십팔수(二十八宿) : 고대의 천문학에는 주천(周天)의 성(星)을 나누어 이십팔수를 만들어 사방에 각기 칠수(七宿)가 있으니, 동방은 각(角)ㆍ항(亢)ㆍ저(氐)ㆍ방(房)ㆍ심(心)ㆍ미(尾)ㆍ기(箕), 북방은 두(斗)ㆍ우(牛)ㆍ여(女)ㆍ허(虛)ㆍ위(危)ㆍ실(室)ㆍ벽(壁), 서방은 규(奎)ㆍ누(婁)ㆍ위(胃)ㆍ묘(昴)ㆍ필(畢)ㆍ자(觜)ㆍ삼(參), 남방는 정(井)ㆍ귀(鬼)ㆍ유(柳)ㆍ성(星)ㆍ장(張)ㆍ익(翼)ㆍ진(軫)으로 되었음.
[주D-010]빙상씨(憑相氏) : 관명(官名)인데 《주례》춘관(春官)의 속(屬)임. 《주례(周禮)》 춘관(春官)빙상씨의 주에 “빙은 승(乘)이요, 상은 시(視)인데 대대로 고대(高臺)에 올라 천문의 차서를 살펴본다.” 하였음.
[주D-011]건(建) : 두성(斗星)에 가까이 위치한 별자리임.
[주D-012]호(弧) : 별 이름인데 낭성(狼星)의 동부에 있어 하늘의 활이라 이름.
[주D-013]벌(罰)ㆍ낭(狼) : 벌은 벌삼성(罰三星)을 말함이요, 낭은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其東有大星曰狼”이라 하였음.
[주D-014]추보(推步) : 일월(日月) 오성(五星)의 도(度)와 혼단(昏旦) 절기(節氣)의 차(差)를 추측함을 이름. 《後漢書 注》. 지금은 의기(儀器) 및 산술을 이용하여 천상(天象)을 고측(考測)하는 것을 추보라 이름.
[주D-015]태일(太一) : 《예(禮)》 예운(禮運)에 “夫禮必本於太一”이라는 대문이 있고, 그 소(疏)에 “천지가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의 혼돈의 원기를 이름이다. 극히 큰 것을 천(天)이라 하고 나누어지지 않은 것을 일(一)이라 하는데 그 기(氣)가 극히 크면서도 나누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태일이라 이른다.” 하였음.
[주D-016]육 선공(陸宣公) : 육지(陸贄)는 당 가흥인(嘉興人)으로 자는 경여(敬輿), 시호는 선공이다. 덕종(德宗) 때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조정에 있어 논간(論諫)함에 말이 개절(剴切)하여 그 주의(奏議)가 후세에서 존봉(尊奉)하는 바 되었음.
[주D-017]용각(龍角)을 연하고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杓携龍角”이란 말이 있고 그 집해(集解)에 “맹강(孟康)은 말하기를 ‘표(杓)는 북두의 표요, 용각은 동방의 별이며, 휴(携)는 연한다는 말이다.” 하였음.
[주D-018]은(殷) :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집해(集解)에 “형(衡)은 남두(南斗)의 중앙이요, 은(殷)은 중(中)의 뜻이다.” 하였음.
[주D-019]대광(戴匡) : 광(匡)은 해갑(蟹甲)인데 형상이 광(匡)과 같아서 대광이라 함.
[주D-020]삼태(三能) : 능(能)은 태(台)와 통하므로 여기서는 능을 태로 읽음.
[주D-021]경방(景方) : 경은 본디 병(丙)인데 당시대에 어휘(御諱)로서 글자를 바꾸어 경이 되었음.
[주D-022]《건착도(乾鑿度)》 : 서명인데 역위(易緯) 8종의 제이(第二)이다. 구본(舊本)에는 정강성(鄭康成)의 주라고 칭했는데 당(唐) 이전에는 설경 제가(說經諸家)가 항상 서로 인용하였음. 그 태을행구궁법(太乙行九宮法)은 바로 후세의 낙서(洛書)가 이로부터 나온 것이다.
[주D-023]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 : 《의례(儀禮)》의 편명인데 특생은 큰 제사 때 쓰는 소 온 마리와 돼지 온 마리를 말함.
[주D-024]교특생(郊特牲) : 《예기》의 편명인데 교는 제천(祭天)의 이름이며 제천에 있어서는 붉은 송아지 온 마리를 쓴다. 그러므로 특생이라 한 것임.
[주D-025]직제(直祭)에는……축(祝)한다 :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보이는 대문으로 정주(鄭注)에 “직제의 직(直)은 정(正)인데 제(祭)는 숙(熟)을 정(正)으로 삼는다.” 하였음.
[주D-026]훈호처창(焄蒿悽愴) : 《예(禮)》 제의(祭儀)에 나오는데 그 주(注)에 “훈(焄)은 향취이고 호는 기(氣)가 증출(蒸出)하는 모양을 이름이다.” 하였으며, 소(疏)에는 “이 향취가 뭉게뭉게 위로 솟아서 그 기운이 호연(蒿然)함을 이름이다.” 하였음.
[주D-027]소명(昭明) : 《예(禮)》 제의(祭儀)에 나타난 훈호처창(焄蒿悽愴)의 윗 대문에 “其氣發揚于上爲昭明”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 주에 “發揚于上 爲昭明者 言此升上 爲神靈光明也”라 하였음.
[주D-028]강백석(姜白石) : 이름은 기(夔), 자는 요장(堯章)인데 송(宋) 파양인(鄱陽人)으로 무강(武康)에 우거(寓居)하여 백석동천(白石洞天)과 더불어 이웃을 하였으므로 호를 백석도인(白石道人)이라 하였음. 그 시는 풍격이 고수(高秀)하며 사(詞)는 더욱 정심화묘(精深華妙)하여 음절문채(音節文采)가 다 한때에 으뜸이었다.
[주D-029]계찰(季札)의 묘(墓) : 계찰은 오(吳) 계찰을 이름인데 춘추 시대 오 나라의 공자(公子)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므로 연릉(延陵)에 봉하였다. 그러므로 연릉계자(延陵季子)라 칭하였다. 그는 상국(上國)에 빙(聘)하여 당시의 현대사부(賢士大夫)를 두루 교제하였으며, 노(魯) 나라에 들러 악(樂)을 관찰하고 열국(列國)의 치란 흥쇠(治亂興衰)를 알았다. 춘추 시대의 현자(賢者)임. 세상에서 전하기를 중니(仲尼)가 계찰의 묘에 표하기를 “有吳延陵季子之墓”라 했다고 하여 그 글씨가 중니의 수필(手筆)이라 하는데 고증가들에 의하여 위작임이 판명되었음.
[주D-030]환영(桓楹) : 목비(木碑)임. 제7권 주 153) 참조.
[주D-031]장종신(張從申) : 당 나라 오군인(吳郡人)인데 진사제(進士第)에 뽑혀 관은 대리사직(大理寺直)에 이르고 글씨를 잘 써서 세상이 독보라 칭하였음.
[주D-032]은중용(殷仲容) : 당 나라 사람인데 무후(武后) 때에 비서승(祕書丞)으로 신주자사(申州刺使)를 지냈으며 인물ㆍ화조(花鳥)를 잘 그리고 전예(篆隷)를 잘 썼음.
[주D-033]천녀(天女)의 산화(散花) : 《유마경(維摩經)》에 “천녀산화의 꽃은 사리불등(舍利佛等)의 몸에 붙으면 떼어버리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하였음. 《심지관경 1(心地觀經 一)》에 “六欲諸天來供養 天花亂墜徧虛空”이라 하였음.
[주D-034]광대교화(廣大敎化) : 광대교화주(廣大敎化主)의 약칭임. 당(唐) 장위(張爲)가 주객도(主客圖)를 찬(撰)하면서 시가(詩家) 6인을 세워 주(主)를 만들고 나머지는 입실(入室)ㆍ승당(升堂)ㆍ급문(及門)으로 나누어 객(客)을 삼았다. 백거이(白居易)는 광대교화주, 맹운경(孟雲卿)은 고고오일주(高古奧逸主), 이익(李益)은 청기아정주(淸奇雅正主), 맹교(孟郊)는 청기벽고주(淸奇僻古主), 포용(鮑溶)은 박용굉발주(博容宏拔主), 무원형(武元衡)은 괴기미려주(瓌奇美麗主)라 하였다.
[주D-035]구율(彀率) : 활을 당기는 법을 이름. 《맹자(孟子)》 진심(盡心)에 “羿不爲拙射變其彀率”이란 대문이 보임. “率"은 “律"과 통용함.
[주D-036]원유지(元裕之) : 금(金)의 수용인(秀容人)으로 이름은 호문(好問), 자는 유지, 호는 유산(遺山)인데 7세에 능시(能詩)하여 관(官)은 상서성 좌사원외랑(尙書省左司員外郞)에 이르렀으며, 금(金)이 망하자 벼슬하지 아니하였음. 학술이 침심(沈深)하고 재기(才氣)가 탁월하여 금ㆍ원(金元) 시대의 문학하는 자로는 호문이 가장 드러났음. 《유산집》40권이 있음.
[주D-037]우백생(虞伯生) : 원(元) 인수인(仁壽人)으로 이름은 집(集), 자는 백생, 호는 도원(道園)인데, 홍재박식(弘才博識)하여 시용(施用)하면 적의치 않은 곳이 없었다. 관은 규장각 시서학사(奎章閣侍書學士)에 이르렀으며 일시의 대전책(大典冊)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저술로는 《도원학고록(道園學古錄)》 50권이 있음.
[주D-038]경릉(竟陵) : 명(明) 종성(鍾惺)의 자는 백경(伯敬)이요, 경릉인인데 원굉도(袁宏道)가 왕세정(王世貞)ㆍ이반룡(李攀龍) 시의 폐단을 교(矯)하여 청진(淸眞)을 외쳐서 공안파(公安派)를 이루었는데 종성이 다시 그 폐단을 교하여 변해서 유심고초(幽深古峭)를 만들었다. 그래서 동리(同里) 사람 담원춘(譚元春)과 함께 당인(唐人)의 시를 평선(評選)하여《고시귀(古詩歸)》를 만들었다. 그래서 종ㆍ담의 이름이 천하에 가득했으며 이를 경릉체라 이름함.
[주D-039]주죽타(朱竹坨) : 청 수수인(秀水人)으로 이름은 이준(彝尊), 자는 석창(錫鬯), 호는 죽타인데 강희(康熙) 시에 박학굉사(博學宏詞)에 시(試)하여 검토(檢討)에 제수되었으며, 고학(古學)에 사력(肆力)하여 글이라면 안 본 것이 없었으며 시문(詩文)이 승(勝)하고 금석 고증의 학(學)도 겸하였다. 8만 권의 서(書)를 저술하였으며 《폭서정전집(曝書亭全集)》이 있음.
[주D-040]산성(散聖) : 지위가 없이 세상에 떠돌며 사람의 존경을 받는 것을 이름인데 말하자면 출가한 포대화상(布袋和尙)과도 같음.
[주D-041]병체(騈體) : 사륙(四六) 대우(對偶)의 문(文)을 이름.
[주D-042]혼ㆍ계(惲桂) : 혼은 청 무진인(武進人)으로 이름은 경(敬), 자는 자거(子居), 호는 간당(簡堂)이며 고문을 전치(專治)하여 소순(蘇洵)과 더불어 서로 상하(上下)하며 법가(法家)의 언(言)에 가까웠다. 세상에서 양호파(陽湖派)라 칭함. 계는 계복(桂馥)인데 청 곡부인(曲阜人)으로 자는 동훼(冬卉), 호는 미곡(未谷)이요, 건륭 진사로 운남(雲南) 영평지현(永平知縣)에 데두되었다. 소학(小學) 및 금석, 전각에 정(精)했으며 일찍이 《설문(說文)》과 제경(諸經)의 의(義)를 취해 서로 소증(疏證)하여《설문해자의증(說文解字義證)》을 찬집(撰輯)하였음.
[주D-043]남천이우(南遷二友) : 송 소식(蘇軾)이 영해(寧海) 간에 귀양가 있던 시절에 도연명(陶淵明)ㆍ유 자후(柳子厚) 두 집(集)을 가장 좋아하여 남천이우라 일렀음. 《老學菴筆記 9》
[주D-044]해봉(海峯) : 유대괴(劉大槐)인데 청 동성인(桐城人)으로, 자는 경남(耕南), 호는 해봉, 고문(古文)은 장자(莊子)를 희학(喜學)하고 더욱 창려(昌黎)를 역추(力追)하였음. 요희전(姚姬傳)이 그를 종유하여 드디어 동성파의 지목이 있었음.
[주D-045]왕척보(王惕甫) : 청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기손(芑孫), 자는 염풍(念豐), 호는 척보이며 또 호는 능가산인(楞伽山人)이다. 공시(工詩) 선서(善書)하여 《연아당시문집(淵雅堂時文集)》의 저술을 남겼음.
[주D-046]원자재(袁子才) : 청 전당인(錢塘人)인데 이름은 매(枚), 자는 자재, 호는 간재(簡齋)요, 건륭 진사로 강녕(江寧)에 출재(出宰)하다가 소년(少年)으로 기관(棄官)하고 강녕성 서쪽에 수원(隨園)을 복축(卜築)하여 음영 저작(吟詠著作)으로 낙을 삼았다. 저술로는 《소창산방시문집(小倉山房詩文集)》 및 필기(筆記) 등이 있음.
[주D-047]진소현(秦小峴) : 청 무석인(無錫人)으로 이름은 영(瀛), 자는 능창(凌滄), 일자는 소현이며, 건륭 거인(擧人)으로 가경(嘉慶) 때에 관은 형부 우시랑(刑部右侍郞)에 이르렀다. 시와 고문이 다 고인의 품격을 역추(力追)하여 능히 자득(自得)한 바 있었으며 저술로는 《소현산인시문집(小峴山人詩文集)》이 있음.
[주D-048]조미신(趙味辛) : 청 무진인(武進人)인데 이름은 회옥(懷玉), 자는 억손(億孫), 일자는 미신이며 건륭 거인으로 관은 등주지부(登州知府)이다. 호학 심사(好學深思)하고 공시(工詩)하여 동리(同里)의 손성연(孫星衍)ㆍ홍양길(洪良吉)ㆍ황경인(黃景仁)과 더불어 손홍황조(孫洪黃趙)라 병칭(並稱) 되었으며, 저술로는 《역유생재집(亦有生齋集)》이 있음.
[주D-049]증남풍(曾南豐) : 송 남풍인(南豐人)으로 이름은 공(鞏), 자는 자고(子固)임. 가우(嘉祐) 진사로 중서사인(中書舍人)에 발탁되었다. 경술(經術)에 깊고 문장에 공(工)하여 저술로는 《원풍유고(元豐類稿)》가 있음. 당송팔가(唐宋八家)의 한 사람임. 또한 《전국책(戰國策)》에 주(注)하고 고문전각(古文篆刻)을 모아 《금석록(金石錄)》을 만든 바 있음.
[주D-050]서중거(徐仲車) : 송 산양인(山陽人)으로 이름은 적(積), 자는 중거임. 3세에 부친이 죽었는데 부친의 이름이 석(石)이었으므로 종신토록 석기(石器)를 쓰지 아니하였으며, 길을 걷다가도 돌을 만나면 밟지 않았다. 정화(政和) 중에 시(諡)를 내려 절효처사(節孝處士)라 하였으며 그의 한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절효어록(節孝語錄)》과 《절효집》이 있음.
[주D-051]진형중(陳瑩中) : 송인(宋人)인데 이름은 관(瓘), 자는 형중, 호는 요옹(了翁)임. 학문이 있어 진사 갑과(進士甲科)에 올랐다. 간관(諫官)이 되었을 때 채경(蔡京)을 써서는 안된다고 극언(極言)하였으므로 채경이 깊이 유감을 품어 누차 귀양을 갔었는데 사면을 받아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학자가 요재선생(了齋先生)이라 칭했다. 저술로는 《요옹역설(了翁易說)》ㆍ《존요집(尊堯集)》이 있음.
[주D-052]맹동야(孟東野) : 당 호주인(湖州人)인데 이름은 교(郊), 자는 동야이며 숭산(嵩山)에 은거하였다. 천성이 경개(耿介)하여 해합(諧合)이 적었는데 한유(韓愈)는 한번 보고 망형(忘形)의 벗이 되었음. 나이 50에 진사제(進士第)를 얻어 평양현(平陽縣)에 조용(調用)되었음. 시체(詩體)는 철마(鐵馬)를 깊이 몰아 층빙(層氷)을 밟아 깨뜨리는 것 같았고 문체(文體)는 춘산(春山)의 고죽(孤竹)에 두우(杜宇)가 피를 흘리며 우는 것 같았음.
[주D-053]촌심(寸心)이 천고(千古) : 두보의 시에 “ 文章千古事 得失寸心知”라는 글귀가 있음.
[주D-054]노동(盧仝) : 당인(唐人)으로 누거 부중(累擧不中)하여 동도(東都)에 살면서 스스로 옥천자(玉川子)라 하였다. 한유가 하남윤(河南尹)이 되어 그의 시를 사랑하여 후례(厚禮)를 올리고 시를 지어 보냈음.
[주D-055]정상(頂上)에……자 : 불가어로서 정문상유안(頂門上有眼)의 약칭임. 마해수라천(摩醯首羅天)에 삼목(三目)이 있는데 그 수(竪)의 한 척안(隻眼)은 정문안이라 이르며 그 눈은 가장 상안(常眼)보다 뛰어나다. 《벽암(碧巖)》 35칙 수시(垂示)에 若不是頂門上有眼 肘臂下有符往往當頭蹉過”라 하였음.
[주D-056]서산 : 오자서(伍子胥)는 춘추시대 초인(楚人)인데 이름은 원(員)이다.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섬겨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무너뜨리고 패업(霸業)을 이루었는데 뒤에 태재(太宰) 비(嚭)의 참소를 듣고 자서에게 칼을 내려 자결하게 하였다. 서산은 자서의 묘(廟)가 있는 곳임.
[주D-057]멱라 : 초 나라 굴원(屈原)이 처음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참소를 입고 상강(湘江)으로 귀양가서 이소(離騷)ㆍ구가(九歌)를 지어 임금의 회오(悔悟)를 기다렸으나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음.
[주D-058]유자산(庾子山) : 남북조(南北朝) 신야인(新野人)으로 이름은 신(信), 자는 자산이며, 군서(群書)를 박람하고 문장의 이조(摛藻)가 염려(艶麗)하여 서릉(徐陵)과 더불어 제명(齊名)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서유체(徐庾體)라 일컬었음. 양 원제(梁元帝) 때에 우위장군(右衛將軍)을 지냈으며 누천(累遷)하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ㆍ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으므로 세상에서는 유개부(庾開府)라 칭한다. 유신은 직위가 비록 현달했지만 행상 향관(鄕關)의 생각이 있어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지었다. 그 병우(騈偶)의 문(文)은 실로 육조(六朝)의 집대성이었음.
[주D-059]하수부(何水部) : 남조(南朝) 양(梁) 동해(東海) 섬인(郯人)으로 이름은 손(遜), 자는 중언(仲言)임. 8세에 능히 시를 지었으며 약관(弱冠)에 범운(范雲)과 더불어 망년(忘年)의 교호(交好)를 맺었다. 관(官)은 상서수부랑(尙書水部郞)에 이르고 문(文)은 유효작(劉孝綽)과 더불어 제명하여 당시에 하류(何劉)라 칭하였음.
[주D-060]진윤천(陳允倩) : 청 전당인(錢塘人)으로 이름은 조명(祚明), 자는 윤천임. 박학하여 속문(屬文)을 잘 하였음. 생활이 가난하여 경사(京師)에서 용서(傭書)하다가 객관(客館)에서 죽었으며 저술로는 《계류산인집(稽留山人集)》이 있는데 《폐추집(敝帚集)》이라고도 함.
[주D-061]산중의 재상 : 도홍경(陶弘景)은 남북조 때 말릉인(秣陵人)으로 자는 통명(通明)인데 제고제(齊高帝) 때에 일찍이 제왕(諸王)의 시독(侍讀)이 되었다가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숨어 화양은거(華陽隱居)라 자호(自號)하고 늦게는 화양진일(華陽眞逸), 또는 화양진인(華陽眞人)이라 호하였다. 국가에서 매양 큰 일이 있으면 찾아와서 자문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산중 재상이라 불렀다. 그는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 比中何所有 嶺上多白雲 只可自怡悅 不堪持贈君”이라 하였음.
[주D-062]장심여(蔣心餘) : 청 연산인(鉛山人)으로 이름은 사전(士銓), 자는 심여인데, 건륭 진사로 관은 편수(編修)이며 시와 고문사(古文辭)에 공(工)하여 성명(盛名)을 짊어졌다. 그가 찬(撰)한 구종곡(九種曲)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음.
[주D-063]미사(微詞) : 《공양전(公羊傳)》 정공(定公) 원년(元年)에 “定哀多微詞”라는 대문이 있는데 이는 존자(尊者)를 위하여 휘(諱)하며 그 과실을 현저하게 드러내고자 아니하여 살짝 그 뜻만 보인 것임.
[주D-064]강엄(江淹) : 남조(南朝) 양(梁) 고성인(考城人)으로 자는 문통(文通)이요, 관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다. 젊어서 문장으로써 이름이 났는데 말년에는 재사(才思)가 미퇴(微退)하여 시문(詩文)에 가구(佳句)가 없으니 시인(時人)이 재진(才盡)이라 일렀음.
[주D-065]노련(老蓮) : 진홍수(陳洪綬)의 별호인데 명말(明末) 제기인(諸曁人)으로 자는 장후(章侯)임. 명경(明經)으로써 등제(登第)하였으나 벼슬하지 않다가 숭정(崇禎) 간에 불러들여 공봉(供奉)을 삼았다. 산수(山水)ㆍ인물을 잘 그려 용면(龍眠)ㆍ오흥(吳興)의 묘를 겸했고 설색(設色)은 도자(道子)를 배워 역량과 기국이 구영(仇英)ㆍ당인(唐寅)의 위에 있었으며 당시에 삼백 년 내에는 이런 필묵이 없다고 일렀다.
[주D-066]피일휴(皮日休) : 당 양양인(襄陽人)으로 자는 습미(襲美)요, 문장에 능하여 진사에 올랐으며 맹호연(孟浩然)과 더불어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여 스스로 취사(醉士)라 호하였고 또 주민(酒民)이라 하였다. 육구몽(陸龜蒙)과 벗이 되어 《송릉창화시집(松陵唱和詩集)》 이 있음
[주D-067]육구몽(陸龜蒙) : 당 장흥인(長興人)으로 자는 노망(魯望)이요, 젊어서부터 고방(高放)하여 송강(松江) 보리(甫里)에 살면서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자호(自號)하며 혹은 보리 선생(甫里先生)이라 하였다. 뒤에 고사(高士)로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음.
[주D-068]심귀우(沈歸愚) : 청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덕잠(德潛), 호는 귀우이며, 건륭 진사로서 늦게 예부 시랑에 발탁되었는데 연력(年力)이 쇠약하므로 고귀(告歸)를 허락하고 원함(原銜)으로 녹을 받게 하였다. 졸년(卒年)이 97이며 시호는 문각(文慤)임.
[주D-069]심 진사(沈進士) 두영(斗永) : 청송인(靑松人)인데 전남 옥과(玉果) 출신으로 시(詩)에 공(工)하여 일세(一世)의 교유(交遊)가 모두 현사대부(賢士大夫)였었고, 특히 김이양(金履陽)과는 망형(忘形)의 교분이었음.
[주D-070]위관(衛瓘) : 진(晉) 안읍인(安邑人)으로 자는 백옥(伯玉), 관은 상서령(尙書令)이며 상서랑(尙書郞) 색정(索靖)과 더불어 때를 같이하여 초서를 잘 쓰니 시인(時人)이 이름하여 일대이묘(一臺二妙)라 하였음.
[주D-071]지영(智永) : 남북조 진(陳)의 영흔사(永欣寺) 승(僧)으로 속성(俗姓)은 왕(王)이요, 회계인(會稽人)인데 호는 영선사(永禪師)라 했다. 선서(善書)하여 능히 제체(諸體)를 겸했고 초서는 더욱 승(勝)하여 임서(臨書)한 30년에 진초 천문(眞草千文) 8백여 본을 만들었음.
[주D-072]최열(崔悅) : 후조(後趙) 동무성인(東武城人)으로 자는 도유(道儒)인데 석호(石虎)에게 벼슬하여 벼슬은 사도우장사(司徒右長史)이며 재학(才學)으로 일컬음을 받고 글씨를 잘 써 범양(范陽) 노침(盧湛)과 더불어 제명(齊名)하였는데 침(湛)은 종유(鍾繇)을 본받고 열(悅)은 위관(衛瓘)을 본받았음.
[주D-073]노침(盧湛) : 제8권 주 72) 참조.
[주D-074]고준(高遵) : 후위(後魏) 수인(蓨人)으로 자는 세례(世禮)요, 문사(文史)를 섭렵하여 자못 필찰(筆札)에 공(工)했으며 제주자사(濟州刺史)에 올랐음.
[주D-075]심복(沈馥) : 북위 선무제(宣武帝) 때 사람으로 서(書)에 공했다. 후위(後魏) 경명(景明) 3년에 일찍이 정정비(定鼎碑)를 정서하였는데 일명은 어사비(御射碑)라고도 함.
[주D-076]요원표(姚元標) : 북조 제(齊) 위군인(魏郡人)으로 관은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이르렀으며 공서(工書)로써 이름이 당시에 알려졌음.
[주D-077]조문심(趙文深) : 북주(北周) 완인(宛人)으로 자는 덕본(德本)임. 어려서 예해(隷楷)를 배워 11세 때에 글씨를 위제(魏帝)에게 올렸는데 자못 종ㆍ왕(鍾王)의 법칙이 있었음.
[주D-078]정도호(丁道護) : 수인(隋人)으로 관은 양주제주종사(襄州祭酒從事)에 이르렀으며 정서(正書)를 잘 써 후위(後魏)의 유법을 겸했다. 수ㆍ당(隋唐)의 즈음에 선서(善書)하는 자가 많았으나 다 한 법에서 나왔는데 도호의 얻은 바가 가장 많았다. 그가 쓴 양양(襄陽) 계법흥국사비(啓法興國寺碑)가 가장 정(精)하여 우세남(虞世南) ㆍ 구양순(歐陽詢)의 소자출(所自出)이 되었음.
[주D-079]채옹(蔡邕) : 동한 진류인(陳留人)으로 자는 백개(伯喈)이며, 영제(靈帝) 때에 낭중(郞中)에 제수되어 양사(楊賜) 등과 더불어 육경(六經)의 문자를 주정(奏定)하여 비(碑)를 태학문(太學門) 밖에 세웠는데 이윽고 사건이 생겨 면관(免官)되었다. 동탁(董卓)이 불러 좨주(祭酒)를 삼아 누천(累遷)하여 중랑장(中郞將)에 이르렀는데 뒤에 탁당(卓黨)으로 지목되어 옥중에서 죽었음.
[주D-080]위탄(韋誕) : 삼국 시대 위(魏) 경조인(京兆人)으로 자는 중장(仲將)인데 문재(文才)가 있어 사장(辭章)을 잘 하고 또 선서(善書)로 이름났다. 태화(太和) 중에 능서(能書)로써 시중(侍中)에 보직되어 관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마쳤으며 위씨(魏氏)의 보기 명제(寶器銘題)는 다 그가 쓴 것임.
[주D-081]한단순(邯鄲淳) : 삼국 시대 위(魏) 영천인(穎川人)으로 자는 자숙(子叔)이요, 박학유재(博學有才)하여 창아충전(蒼雅蟲篆)을 잘 썼음.
[주D-082]위개(衛凱) : 삼국 위 안읍인(安邑人)으로 자는 백유(伯儒)요. 젊어서부터 재학(才學)으로써 칭도(稱道)되었다. 한말(漢末)에 사공연(司空掾)이 되어 상서(尙書)에 이르렀으며 위국(魏國)이 건립되어서는 시중(侍中)에 제수되어 왕찬(王粲)과 더불어 제도(制度)를 맡았다. 그는 문장으로 현달하여 고문을 좋아하며 조전예초(鳥篆隷草)를 잘 하지 못한 것이 없었음.
[주D-083]장지(張芝) : 후한 서가(書家)인데 주천인(酒泉人)으로 자는 백영(伯英)이요, 초서를 잘 썼다. 임지학서(臨池學書)하자 못물이 다 검어졌으며 세상에서 초성(草聖)이라 일컬음.
[주D-084]두도(杜度) : 후한 사람으로 자는 백도(伯度)임. 초서에 공하였고 그 법을 최원(崔瑗)ㆍ최 실(崔實) 부자가 이어받았음.
[주D-085]왕허주(王虛舟) : 청 금단인(金壇人)으로 자는 약림(若霖), 호는 허주, 또는 양상산인(良常山人)이라 한다. 강희 진사로 관은 이부 원외랑(吏部員外郞)에 이르고 서화에 공하였음. 저술로는 《우공보(禹貢譜)》ㆍ《학용본의(學庸本義)》ㆍ《정주격물법(程朱格物法)》ㆍ《순화각첩고정(淳化閣帖考正)》 등이 있음.
[주D-086]오봉루(五鳳樓) : 《명의고(名義考)》에 “양 태조(梁太祖)가 오봉루를 건립했는데 주한(周翰)이 이른바. 땅에서 백 길을 솟아 하늘의 반공(半空)에 있어 다섯 봉이 날개를 쳐든다는 것과 같다.” 하였음.
[주D-087]옹유(甕牖)와 승추(繩樞) : 깨진 항아리 입으로 문을 만들고 노끈으로 돌조구를 동인다는 것으로 극히 가난한 집을 이름.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에 “陳涉甕牖繩樞之子”라는 대문이 보임.
[주D-088]환중(環中) : 공허를 비유한 말임.《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이라는 대문이 있고, 그 주(注)에 “시비가 반복하여 서로 다함이 없으므로 환(環)이라 이른다. 환중은 공(空)이니 지금 시비로써 고리를 삼아 그 중(中)을 얻은 자는 시도 없고 비도 없다.” 하였음.
[주D-089]손건례(孫虔禮) : 당 진류인(陳留人)으로 이름은 과정(過庭), 관은 솔부녹사참군(率府錄事參軍)에 이르렀으며 서(書)에 공하여 일찍이 서론(書論)을 저술했는데 절묘하여 그 지취(旨趣)를 다했으니, 곧 서보(書譜)이다. 원서(原書)는 6편인데 지금 전하는 진적(眞蹟)은 겨우 그 총서(總序)의 문(文)만 있고 전서(全書)는 이미 없어졌음.
[주D-090]양소사(楊少師) : 오대(五代) 주(周)의 화음인(華陰人)으로 이름은 응식(凝式), 자는 경도(景度)임. 외모는 못생겼으나 정신이 영오(穎悟)하여 문조(文藻)가 부유함으로 당시 사람들이 중히 여겼다. 후한(後漢)에서 소부(少傅)ㆍ소사(少師)를 지냈으므로 세상이 양 소사라 칭한다. 시가(詩歌)에 장(長)하고 더욱 필찰(筆札)을 잘 하였으며 서법은 안진경(顔眞卿) 이후로는 따라갈 자가 없었다. 황정견(黃庭堅)은 그 서(書)가 산승입성(散僧入聖)과 같다고 일렀으며, 조맹부(趙孟頫)는 그 서가 견지(見知)의 밖에 벗어났다고 일렀다. 구화첩(韭花帖) 일종은 더욱 유명함.
[주D-091]정도소(鄭道昭) : 북위(北魏) 형양인(滎陽人)으로 출사(出仕)하여 광주자사(光州刺史)가 되었으며 스스로 중악 선생(中岳先生)이라 칭하였음. 서(書)에 공하여 처음에는 심히 드러나지 않았는데 청(淸) 가ㆍ도(嘉道) 간에 이르러 운봉산(雲峯山)의 여러 석각(石刻)이 발견됨에 따라 포세신(包世臣)ㆍ장기(張琦)ㆍ오희재(吳熙載) 등이 극히 추중(推重)하여 마침내 북비(北碑)를 익히는 자의 종(宗)하는 바가 되었음.
[주D-092]초산명(焦山銘) : 초산정명(焦山鼎銘)을 이름.
[주D-093]왕자유(王子猷) : 진인(晉人)으로 이름은 휘지(徽之), 자는 자유이며, 희지(羲之)의 아들이다. 산음(山陰)에 살면서 하루는 밤눈이 개자 달빛을 타고 대안도(戴安道)를 찾아가 그 문앞에 당도하여 들어가지 아니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흥을 타고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가는데 어찌 꼭 만나보아야 하느냐.”고 대답하였다.
[주D-094]용매(龍媒) : 준마(駿馬)의 이칭임. 한 무제(漢武帝)의 천마가(天馬歌)에 “天馬徠兮龍之媒”라 하였음. 당(唐)에는 비황(飛黃)ㆍ길량(吉良)ㆍ용매ㆍ도여(騊駼)ㆍ쾌재(駃騠)ㆍ천원(天苑) 등 육한(六閑)이 있는데 모두 천자의 말을 기르는 곳임.
[주D-095]섭운(籋雲) : 섭(籋)은 섭(躡)과 같음. 사장(謝莊)의 무마부(舞馬賦)에 “蘊籋雲之銳景 戢追電之逸足”이라 하였음.
[주D-096]육좌(衄挫) : 육(衄)은 절(折)로서 꺾는다는 뜻이고 좌(挫)도 같은 뜻임. 서법의 술어임.
[주D-097]발등법(撥鐙法) : 제7권 주 328) 참조.
[주D-098]분항(分行)ㆍ포백(布白) : 서법에 관한 말인데 분항은 줄을 나누는 것이요, 포백은 곧 그 공백처와 착묵처(着墨處)를 포치(布置)하여 소밀(疏密)이 상간(相間)하게 하는 것임.
[주D-099]황백사(黃伯思) : 송인(宋人)으로 자는 장예(長睿), 별자는 소빈(宵賓)이며, 운림자(雲林子)라 자호하였다. 원부(元符) 진사로 비서랑(祕書郞)에 제수되었으며 책부(冊府)의 장서를 종관(縱觀)하여 침식까지 잊을 정도였다. 천성이 고문 기자(古文奇字)를 좋아하여 이기관지(彝器款識)를 모두 능히 변증하였으며, 육경(六經) 및 자사 백가(子史百家)를 정구(精究)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시문에도 공(工)했다. 글씨로는 전(篆)ㆍ예(隷)ㆍ행(行)ㆍ초(草)ㆍ비백(飛白)이 다 묘절(妙絶)했다. 저술로는《동관여론(東觀餘論)》 및 문집이 있음.
[주D-100]부서혁봉(腐鼠嚇鳳) : 《莊子》에서 나온 말인데 위에 자세히 보임.
[주D-101]비이 : 범이 성을 내어 갈기털이 꼿꼿하게 서는 모양을 말한 것임.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 “孟毅髬髴"의 구가 있음.
[주D-102]책비(責備) : 책현자비(責賢者備)의 준말로서 어진 자에게는 항상 구비하기를 책한다는 뜻임. 춘추(春秋)의 법은 항상 현자에게 책비하였으므로 나온 말임.
[주D-103]훈유(薰蕕) : 《좌전(左傳)》 희공(僖公) 4년에 “一薰一蕕 十年尙猶有臭”라는 대문이 있는데, 훈은 향초요 유는 취초(臭草)로서 두 가지를 한 곳에 모아 두면 아무리 십 년이 가도 오히려 취기가 있다. 그러니 선(善)은 소멸되기 쉽고 악은 제거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가어(家語)》 치사(致思)에 “薰蕕不同器而藏”이라 하였음.
[주D-104]조미숙(晁美叔) : 송인으로 이름은 단언(端彦), 자는 미숙이며 장돈(章惇)과 더불어 동생(同生)하여 동방급제(同榜及第)이고 또 관(館)의 직을 함께 지냈다. 그래서 항상 서로 삼동(三同)이라 불렀다. 소성(紹聖) 초에 장돈이 입상(入相)하자 단언이 그의 소위를 보고 힘써 간하다가 쫓겨나서 협수(陜守)가 되었다. 문장과 서법이 조야(朝野)의 종상(宗尙)하는 바 되었음.
[주D-105]이소온(李少溫) : 당 조군인(趙郡人)으로 이름은 양빙(陽氷), 자는 소온이며 건원(乾元)간에 진운령(縉雲令)이 되었다가 뒤에 당도령(當塗令)으로 옮겼는데 전서를 잘 썼음. 서원여(舒元輿)는 그 전서를 이사(李斯)에게 내리지 않는다고 일렀다. 지금도 그 유적이 전해 옴.
[주D-106]윤백하(尹白下) : 이름은 순(淳), 자는 중화(仲和), 호는 백하인데 해평인(海平人)으로 이조 판서 유(游)의 제(弟)이다. 숙종(肅宗) 계사년에 문과에 올라 관은 이조 판서에 이르고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경신년에 평안 감사로 임소(任所)에서 졸했다. 선서(善書)하여 절예(絶藝)를 이루었으며 후학을 계발한 공이 석봉(石峯)ㆍ안평(安平)에 비할 바 아니었음. 원교(圓嶠)가 그 문하로서 사문(師門)의 진수를 얻었다 함.
[주D-107]박(璞)을……였던가 :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에 “마원이 유소시(幼少時)에 큰 뜻이 있어 일찍이 제시(齊詩)를 배우면서도 능히 장구(章句)에 뜻이 가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형 황(況)을 하직하고 변군(邊郡)으로 나가서 목축(牧畜)을 하고자 하니, 황은 말하기를 ‘너는 대재(大才)라 마땅히 만성(晩成)할 것이니 양장(良匠)은 사람에게 박(璞)으로써 보이지 않는다. 너의 소호(所好)를 따르라.’ 했다.” 하였음.
[주D-108]고족(高足) : 품학(品學)이 넉넉한 문인(門人)을 이름.《세설(世說)》 문학(文學)에 “鄭玄在馬融門下 三年不得相見 高足弟子傳授而已”라 하였음.
[주D-109]강표암(姜豹庵) : 이름은 세황(世晃),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이요, 진주인(晉州人)으로 일찍이 부사(副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갔었는데 청조(淸朝) 사람들이 세황의 서화(書畫)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청하는 자가 구름처럼 모였다. 세황은 소기(小技)를 자랑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마지못해 몇 사람에게만 응하고 말았다. 일강관(日講官) 석암(石菴) 유용(劉鏞)ㆍ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이 글씨로 천하에 유명하였는데 세황의 글씨를 보고 천골개장(天骨開張)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음.
[주D-110]상세창(桑世昌) : 송 회해인(淮海人)으로 천태(天台)에 세거(世居)하였으며 육유(陸游)의 생(甥)이다. 저술로는《난정고(蘭亭考)》가 있으며《회문유취(回文類聚)》를 편집하였음.
[주D-111]유송(兪松) : 송 전당인(錢塘人)으로 자는 수옹(壽翁), 호는 오산(吳山)이며, 관은 승의랑(承議郞)이다. 저술로《난정속고(蘭亭續考)》가 있음.
[주D-112]조불흥(曹不興) : 삼국 시대 오(吳)의 오흥인(吳興人)인데 황무간(黃武間)에 화명(畫名)으로써 일시에 관절(冠絶)하였음. 이때 오 나라에 팔절(八絶)이 있었는데 불흥이 그 중 하나에 참여했으며, 그 화룡(畫龍)이 더욱 묘하다고 함.
[주D-113]장승유(張僧繇) : 남북조 양(梁)의 화가인데 오인(吳人)으로 관은 우군장군(右軍將軍)ㆍ오흥태수(吳興太守)에 이르렀으며, 산수와 불상을 잘 그렸다. 또 일찍이 네 용을 그리고 점정(點睛)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굳이 점정하기를 청하여 점정하자 점 찍힌 두 마리 용은 벽을 부수고 날아가고 점 찍지 않은 것은 그대로 있었다 함.
[주D-114]오도현(吳道玄) : 오도자(吳道子)인데 당 양적인(陽翟人)으로 회사(繪事)를 잘하여 필법이 초묘(超妙)하니 당시에 화성(畫聖)이라 칭하였다. 현종(玄宗) 때에 불러들여 공봉(供奉)이 되었으며, 또 불상을 잘 그렸음.
[주D-115]연문귀(燕文貴) : 송 오흥인(吳興人)으로 도화원(圖畫院)에 들어왔는데 인물ㆍ산수를 잘하여 세쇄 청윤(細碎淸潤)하여 일가(一家)를 자성(自成)하였음.
[주D-116]역원길(易元吉) : 송 장사인(長沙人)으로 자는 경지(慶之), 사생(寫生)을 잘하여 집 후원에 원포(園圃)를 쌓고 물새와 산 짐승을 순양(馴養)하여 그 동정을 엿보아 화사(畫思)의 바탕을 삼았다. 더욱이 노루와 원숭이를 잘 그려 식자(識者)는 서희(徐熙) 이후 일인이라 일렀음.
[주D-117]심석전(沈石田) : 명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주(周), 자는 계남(啓南), 호는 석전이며,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문(文)은 좌씨(左氏)를 배우고 시는 백거이ㆍ소식을 배우고 글씨는 황정견을 배웠다. 더욱이 화(畫)에 공하여 당인(唐寅)ㆍ문징명(文徵明)ㆍ구영(仇英)과 더불어 병칭하여 명의 사가(四家)가 되었음.
[주D-118]임조(林藻) : 당인으로 피(披)의 아들인데 자는 위건(緯乾)임. 소싯적부터 기지(奇志)를 품어 농(農)이 되기를 부끄럽게 여겼다. 구양첨(歐陽詹)과 더불어 문학에 각의(刻意)하여 굉사과(宏詞科)에 탁제(擢第)하였음. 관은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임.
[주D-119]소릉(昭陵)에서……옥갑(玉匣) : 소릉은 당 태종(唐太宗)의 능임. 태종이 평소에 왕희지의 진적(眞跡)을 몹시 아껴 차마 손에서 놓지 못했는데, 그 뒤 고종(高宗)이 그것을 옥갑에 넣어 소릉에 저장하였음.
[주D-120]가사도(賈似道) : 송 태주인(台州人)인데 이종(理宗) 때에 자기 누나가 귀비(貴妃)로 되는 바람에 누진(累進)하여 관은 좌승상(左丞相)에 이르렀으며 추밀사(樞密使)를 겸했다. 원병(元兵)이 건강(建康)에 육박하자 송군(宋軍)이 자주 패하니, 진의중(陳宜中) 등이 사도의 죄를 탄핵하여 내쳤는데 도중에서 피살되고 말았음.
[주D-121]양흔(羊欣) : 진(晉) 남성인(南城人)으로 유소시(幼少時)부터 정묵(靖黙)하여 용지(容止)가 아름답고 언소(言笑)를 잘 하였으며, 경적을 박람하고 더욱 예서(隷書)에 장(長)하였음. 흔의 나이 12세 때에 왕헌지(王獻之)가 오흥태수(吳興太守)가 되어 몹시 지애(知愛)하였다. 그 서법은 더욱 당송인(唐宋人)의 일컫는 바가 되었음.
[주D-122]도 은거(陶隱居) : 도홍경(陶弘景)을 말함. 제8권 주 61) 참조.
[주D-123]건초척(建初尺) : 건초는 한 장제(漢章帝) 연호인데 그 당시 통용하던 동척(銅尺)을 말함. 완당이 옹성원(翁星源)으로부터 건초척 탁본을 기증받은 바 있음.
[주D-124]야율초재전(耶律楚材傳) : 원(元)의 명신으로 자는 진경(晉卿)이요, 요동단왕(遼東丹王) 돌욕(突欲)의 후손인데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원 세조는 군국(軍國)의 대사를 맡길 만하다고 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중서령(中書令)이 되어 몽고의 누풍(陋風)을 다 개혁하였으며, 원 나라의 입국 규모(立國規模)는 다 초재의 소정(所定)이었음.
[주D-125]각단(角端) : 짐승 이름임.《송서(宋書)》 부서지(符瑞志)에 “각단은 하루 1만 8천 리를 가며 또 사예(四裔)의 언어를 이해한다.” 하였고,《원사(元史)》에는 “원 태조(元太祖)가 동인도(東印度)에 이르러 각단이 능히 말하는 것을 보았다.” 하였음.
[주D-126]《담연집(湛然集)》 : 야율초재가 저술한 문집임.

 

 

완당전집 제6권
 제발(題跋)
난정의 뒤에 쓰다[書蘭亭後]


난정 백이십 종은 이미 내부(內府)로 들어와 수장되었으며 유왕(裕王)의 저중(邸中)에서 일찍이 한번 빌려나온 일이 있었는데 자획(字畫)이 엉뚱하게 달라서 사람의 의사 밖에 뛰어난 것이 있었으나 바깥 사람은 그를 볼 길이 없었다. 인간에는 오히려 조자고의 낙수본ㆍ조오흥의 십삼발신여잔본(十三跋燼餘殘本)ㆍ고목난원본(古木蘭院本)ㆍ국학천사암본(國學天師庵本)ㆍ왕문혜본(王文惠本)ㆍ상구진씨 송탁구본(商邱陳氏宋拓舊本)ㆍ영정본(穎井本)ㆍ왕추평신룡구탁본(王秋坪神龍舊拓本)들이 있어 모두 다 산음의 진영(眞影)을 찾아 거슬러볼 만한 것들이다.
위강(僞絳)의 제1ㆍ제2본과 비각속첩(祕閣續帖)의 유무언(劉無言)이 모한 신룡본(神龍本)과 손퇴곡(孫退谷)의 지지각본(知止閣本)ㆍ진각장진궐삼항본(陳刻藏眞闕三行本)ㆍ희홍(戲鴻)ㆍ추벽(秋碧)ㆍ쾌설(快雪) 여러 본은 비록 각각 전번(轉翻)하여 진ㆍ와(眞訛)가 서로 섞였으나 역시 다 조본(祖本)과 계류(系流)를 찾아 볼 만한 것들이다.
이 때문에 백석(白石)의 편방고(扁旁攷) 밖에 구자손(九字損)ㆍ오자손(五字損)ㆍ군(群) 자에 대한 정무의 측하(側下)와 저무의 평정(平頂)과 차각(杈脚)이 있고 없는 것의 혹은 3층 2층이며 숭(崇) 자에 대한 산하(山下)의 세작은 점이 혹은 보이고 혹은 안 보이는 곳, 천(遷) 자의 입이 벌어지고 입이 안 벌어지고 등이 서로 대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전하는 난정모본은 정무에서 나왔다고는 이르지만 정무의 여러 증거와 하나도 합하는 것이 없으니 필경 이것은 무슨 본인지 모르며 비해당(匪懈堂)의 제한 바로 미루어 보면 하나의 선본을 얻은 것도 같은데 지금 추구할 길이 없다.
예전에 소재(蘇齋)ㆍ운대(芸臺) 여러 명석(名碩)들을 추종하여 그 서여(緖餘)를 들었고 또 여러 본에 대하여 자못 눈으로 본 것도 있기 때문에 거듭 전몽(前夢)을 거슬러 대략 여기에 기록하는 바이다.


 

[주D-001]위강(僞絳) : 위본(僞本)의 강첩(絳帖)을 이름. 강첩은 송 상서랑(尙書郞) 반사단(潘師旦)이 관첩(官帖)을 집에서 모각(摸刻)하여 석본(石本)으로 만들었는데 세상에서 이것을 반부마첩(潘駙馬帖)이라 일컫는다. 무릇 20권이다. 선병문(單炳文)이 이르기를 “순화첩(淳化帖)은 흔히 보지 못하며 그 다음은 강첩이 가장 아름다운데 구본(舊本)은 역시 얻기 어렵다. 반씨의 아들이 분산(分産)하여 살면서 법첩도 나누어져서 둘이 되었다.”라 하였음. 《輟耕錄》 강요장(姜堯章)이 《강첩평(絳帖評)》10권을 저술하여 세상에 유행한다고 함. 《齊東野語》
[주D-002]손퇴곡(孫退谷) : 청 익도인(益都人)으로 이름은 승택(承澤)이고 호는 퇴곡이다. 명 숭정(崇禎) 진사로 관은 급사중(給事中)이며 이자성(李自成)이 참위(僭位)하자 사천 방어사(四川防禦使)가 되었으며 청에 들어와 벼슬하여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수장(收藏)이 심히 풍부하였으며 저술로는 《경자소하기(庚子銷夏記)》 및 《상서집해(尙書集解)》 등이 있음.
[주D-003]백석(白石)의 편방고(扁旁攷) : 강 백석(姜白石) 《난정편방고(蘭亭扁旁攷)》를 말함. 백석은 송 반양인(鄱陽人)으로 이름은 기(夔), 자는 요장(堯章)인데 무강(武康)에 우거(寓居)하여 백석동천(白石洞天)과 더불어 이웃이 되었으므로 호를 백석도인(白石道人)이라 하였다. 그는 일찍이 난정(蘭亭) 자체(字體)에 대하여 정무본(定武本)을 주로 삼아 《편방고》 1권을 저술하였는데 뒤에 난정의 진위(眞僞)를 가리는 지침이 되었음.
[주D-004]비해당(匪懈堂) :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호인데 서법이 기절(奇絶)하여 천하 제일이라 칭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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