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3.3. 북악산 백사계곡

2011.3.3. 북악산 백사계곡 창의문 북악터널 여래사 평창동

아베베1 2011. 3. 5. 20:29

 

 

 

 

 

 

 

 

 

 

 

 

 

필원잡기 제1권
필원잡기 제1권


서거정(徐居正) 저(著)

○ 일찍이 상고하건대, 당요(唐堯) 원년(元年) 갑진년 으로부터 홍무(洪武 명 태조 연호) 원년 무신년까지가 총 3천 7백 85년이며, 단군(檀君) 원년 무진년으로부터 우리 태조(太祖) 원년 임신년까지가 역시 3천 7백 85년이니, 우리나라 역년(歷年)의 수가 대개 중국과 서로 같다. 제요(帝堯)가 일어나자 단군이 일어났고, 주 무왕(周武王)이 나라를 세우자 기자가 봉해졌으며, 한(漢) 나라가 천하를 평정하자, 위만(衛滿)이 평양으로 왔고, 송 태조(宋太祖)가 장차 일어날 때에 고려 태조가 이미 일어났으며, 우리 태조가 개국(開國)한 것도 명 태조 고황제(明太祖高皇帝)와 같은 시대이다.
○ 옛 기록에 이르기를, “단군이 요(堯)와 같은 날에 즉위하여 우(虞) 나라와 하(夏) 나라를 지나 상(商) 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이르러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신(神)이 되었는데, 향년(享年)이 1천 48세이다.” 하였다. 당시의 문적(文籍)이 전하지 않아서 그 참과 거짓을 상고할 수 없으나 지금까지 그대로 전하여서 옛 기록을 적은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요의 시대에는 인류 문화가 밝게 선양(宣揚)되었는데, 하(夏)ㆍ상(商)에 이르러 세상이 점점 나빠져서 임금이 왕위(王位)에 있음이 장구한 자도 40~50년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사람의 수명이 상수(上壽)는 백 년, 중수(中壽)는 60~70년, 하수(下壽)는 40~50년인데, 어찌 단군만이 1천 백 년에 가까운 수를 갖고 한 나라의 왕위에 있었으리오. 그 말이 거짓임을 알겠다.
또 이르기를, “단군이 아들 부루(扶婁)를 낳았으니, 이가 동부여왕(東扶餘王)이 되었다. 우(禹)임금이 제후(諸侯)들을 도산(塗山)에 모을 때에 이르러 단군이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하였으나, 그 말은 근거가 없다. 만약 단군이 오래도록 왕위에 있었고 부루가 도산의 모임에 갔었다면, 비록 우리나라의 문적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국의 글에 어찌 한마디 말도 이를 기록한 것이 없었을까.
단씨(檀氏)가 서로 대를 전하여 나라를 이은 햇수가 1천 48년인 것은 의심이 없다.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의 시에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천지가 아득한 날에 / 聞說鴻荒日
단군이 박달 나무가에 내려왔다 하네 / 檀君降樹邊
몇 대를 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 世傳不知幾
지내온 햇수는 천 년이 넘네 / 歷年曾過千
하였으니, 이는 그 대를 전함과 역년(歷年)이 오래 되었음을 이른 것이다.
○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한 것이 주 무왕(周武王) 기묘년이었으며, 뒤에 임금 준(準)에 이르러, 한고조(漢高祖) 병오년에 위만(衛滿)이 침입하여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하였는데, 기씨(箕氏)가 평양에서 도읍한 것이 8백 78년이다. 기준(箕準)이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하여 이를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한사군(漢四郡)과 이도독부(二都督府)의 시대를 지나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26년 무진년에 망하였으니, 이것이 또 1백 40여 년이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왕이 마한을 습격해서 점령한 것만을 기록하였고, 기씨의 세계(世系)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으니, 당시에도 필시 상고할 만한 것이 없어서일 것이다.
○ 《천운소통(天運紹統)》을 상고해 보니, 함허자(涵虛子)가 말하기를, “조선은 안동국(安東國) 동쪽에 있는데 옛 숙신씨(肅愼氏)의 땅이다. 무왕이 기자를 봉하여 제후를 삼아서 은(殷)은 뒤를 이어 중국의 번방(藩邦 속국)을 삼았는데, 주(周)가 망함으로부터 후한(後漢)까지 천여 년을 지나서 공손강(公孫康)에게 찬탈당하여 기자의 전통이 끊어졌다.” 하였다.
또, “기자가 중국의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갈 때에,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의(醫)ㆍ무(巫)ㆍ음양복서(陰陽卜筮) 등속과 온갖 공인(工人)과 기예(技藝)들이 모두 따라갔기 때문에, 반만(半萬)의 은인(殷人)들이 요수(遼水)를 건넜다 한 것이 이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건대, 공손강의 찬탈이란 것은 근거가 없고, 5천의 은나라 사람들이 요수를 건너갔다는 것은 어느 글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 함허자(涵虛子)가 또 말하기를, “기자가 조선에 이르니, 말이 통하지 아니하여 통역으로 말을 알았고, 시서(詩書)를 가르쳐서 중국의 제도를 알게 하였다. 그 결과 부자와 군신의 도리가 비로소 행해지고, 오상(五常)의 예의가 비로소 갖추어졌으며, 백공의 기예를 가르쳐서 의원ㆍ무당ㆍ음양복서의 술법이 비로소 있게 되었다. 예의와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로써 여덟 가지 법을 제정해서 백성을 교화하니, 한 해가 지나자 백성이 스스로 교화되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재물로써 속죄(贖罪)하고, 상해(傷害)한 자는 곡식으로 속죄하며,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노예가 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니, 3년이 못 되어 사람들이 모두 교화되었다. 그리하여, 신의(信儀)를 숭상하고 유학(儒學)을 독실히 하여 중국의 풍속을 이룩하였으니, 성인의 교화라 이를 만하다. 병기(兵器)로써 싸우지 말기를 가르치기를, ‘하루의 난리는 10년이 지나도 안정되지 못하여 생민이 도탄(塗炭)에 빠져서 생업을 편안히 할 수 없다.’ 하였다. 이리하여 덕으로써 강포(强暴)함을 감복시키니, 이웃 나라에서 그 의(義)를 사모하고 서로 친하였으며 중국의 번방(藩邦)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역대(歷代)로 중국을 친히 하고 신임하여 봉작(封爵)을 받고 조공(朝貢)을 끊이지 아니하였으며, 예의의 도(道)가 없어지지 않아서 의관과 제도가 모두 중국 각대(各代)의 제도와 같기 때문에, 시서예악(詩書禮樂)의 나라요, 인의(仁義)의 나라라 말하게 된 것은 기자가 창시한 것이다.” 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함허자의 논술이 《한서(漢書)》와 대략 같은데 우리 동국의 풍속에 세밀하였다. 역대의 여러 역사서와 국조의 《혼일지(渾一誌)》에 논술한 바는 그릇되고 근거가 없으니, 모두 잘못 들은 데에서 나온 것이다.
○ 우리나라의 분야(分野)는 옛 사람은 연도(燕都 북경)에 비겼었는데, 기사 연간에 혜성(彗星)이 연경의 분야에서 나오니, 일관(日官 천문을 보는 관리)이 아뢰기를, “이는 우리나라와 관계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세종께서 깊이 근심하여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연경과 분야가 같은데 어찌 관계가 없겠는가.” 하더니, 기사년 가을에 정통황제(正統皇帝)가 북정(北庭)에서 함몰되었고, 우리 세종대왕이 승하(昇遐)하였으니 연경과 분야가 같다는 말이 일리가 있을 듯하다.
○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서 살 만한 땅을 살펴보고,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도읍하였고,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옮겼으니,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며, 또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옮겼으니 곧 지금의 한양(漢陽)인데, 그 중 명당(明堂) 터는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겠다. 한양이 이씨(李氏)의 도읍 터가 된다는 것은 도선(道詵)의 도참(圖讖)에서 나타났는데, 이 때문에 고려에서 한양에 남경(南京)을 세우고 오얏나무[李]를 심었으며, 이성(李姓)을 가려서 부윤(府尹)을 삼고 왕도 해마다 한 번씩 순행하여 용봉장(龍鳳帳)을 묻어서 그 지기를 눌렀었다.
내 일찍이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건대, 한양 명당(漢陽明堂)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의 자리라고 한 것만 쓰여 있고 그 땅은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창덕궁(昌德宮)과 경복궁(景福宮) 두 궁궐의 정전(正殿)을 살펴보면 다 임좌병향이니, 억측하건대 고려에서 잡은 곳도 이 두 궁터에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근래에 술사(術士) 최양선(崔揚善)이라는 이가 있어 승문원(承文院)의 옛 터가 바로 명당자리라 하고, 혹자는 또 종묘 낙천정(宗廟樂天亭) 자리가 대지(大地)라고 한 것은 다 식견이 얕고 근거가 없는 말이다.
○ 도선은 백제(百濟) 사람이다. 일찍이 도선의 어머니가 처녀로서 냇가에 놀다가 아름답고 큰 오이[瓜]를 얻어서 먹었는데 갑자기 아이 밴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낳으니 부모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냇가에 버렸더니 바야흐로 추울 때인데, 갈매기 떼 수천 마리가 날아와서 위아래로 싸고 덮어서 십여 일이 되어도 죽지 않으므로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서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출가하여 입산수도하였는데, 하늘의 신선이 하강하여 천문ㆍ지리ㆍ음양의 비법을 전수하였다. 또 당(唐)에 들어가서 승려인 일행(一行)의 술법을 배웠으니, 세상에 전하는 도참은 모두 도선이 지은 것이다.
근간에 당본(唐本)인 《성요(星曜)》 한 질(秩)을 얻었는데, 그 책에 고려국사부(高麗國師賦)라 한 것이 있으니, 의논이 정미(精微)하여 도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의논한 야율초재(耶律楚財)와는 시대의 거리가 너무 떨어지니, 이는 의심스러울 만하다. 어쩌면 고려국사라는 이가 도선의 술법을 비밀히 전하여 동방에는 전해 주지 아니하고 중국에 전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영암현 도갑사(靈巖縣道岬寺)에 도선의 비(碑)가 있고 또 구림(鷗林 갈매기가 모였던 숲)이 있다.
○ 우리 동국의 필법(筆法)은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요학사 극일(姚學士克一)과 중 탄연(坦然)ㆍ영업(靈業)이 둘째가 되는데 모두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다. 이규보(李奎報)가 일찍이 평론하기를, 최충헌(崔忠獻)을 신품제일(神品第一)로 삼고, 탄연을 둘째로 삼고, 유신(柳紳)을 셋째로 삼았으니, 이는 권세가에게 아부한 것이요, 공정한 평론은 아니다.
원(元)으로부터 내려오면서 글씨를 배우는 이는 다 조맹부(趙孟頫)의 법을 세웠다. 선생(조맹부)의 수적(手跡)이 온 세상에 퍼져서 그 동국에 유전한 것을 내가 본 것만도 수백 본이 되었는데, 묵적(墨跡)이 새 것 같다. 그 보지 못한 것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온 세상에 흩어진 것이 또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고, 조맹부로부터 지금까지의 시대가 오히려 멀며, 우리 동국은 한쪽 구석에 있으나 조맹부의 필적을 오히려 많이 얻어 볼 수 있었다. 당(唐)으로부터 진(晉)까지의 시대는 서로 멀지 않은데도 당의 문황(文皇)은 천자의 큰 힘으로써, 왕희지의 진적(眞跡)을 구할 때에 소이(蕭異)를 보내어 많은 고난을 겪은 뒤에 얻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기사년 간에 학사인 예겸(倪謙)이 사신으로 와서 말하기를, “조공(趙公)의 필법을 중국에서는 보기 드물다.” 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에 많이 있는 것을 감탄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날마다 당시의 명유(名儒) 6~7명과 더불어 조용히 논담(論談)하였으니, 조공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나라 문유(文儒)로 이제현(李齊賢) 선생 같은 분도 그와 또한 많이 시종했다. 왕이 동으로 돌아올 때에 문적과 서화 만 첨(萬籤)을 싣고 왔으니, 조맹부의 수적이 동국에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 동국에서 조공의 필법과 정신을 얻은 이는 행촌(杏村) 이암(李嵒) 한 사람뿐이다.
○ 김생은 신라 원성왕(元聖王) 때 사람인데, 글씨를 잘쓰기로 유명하였다. 송(宋) 나라 숭녕(崇寧) 때에 고려의 학사 홍관(洪瓘)이 송나라에 들어갔었더니, 한림 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칙명을 받고 족자에 글씨를 쓰는데, 홍관이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 권을 보여주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오늘에 왕우군의 진적(眞跡)을 얻어 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였다. 홍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라 사람 김생의 글씨이다.”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왕우군을 빼놓고 어찌 이 같은 신묘한 필적이 있으리오.” 하였다. 관이 항변하였지만 끝내 듣지 않았었다.
근간에 조학사 자앙(趙學士子昻 조맹부)의 창림사비 발문(昌林寺碑跋文)을 보니 이르기를, “위의 글씨는 당 나라 때 신라의 승려 김생이 쓴 신라국의 창림사비인데 자획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 나라 사람의 유명한 각본(刻本)이라도 이보다 크게 낫지 못할 것이다. 옛 말에, ‘어느 땅엔들 나무가 나지 않으리오.’ 하였으니, 과연 옳다.” 하였으니, 조학사의 이 발문을 보면 김생의 필법이 고금에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당 나라에 들어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黃巢)를 토벌하였다. 그 격문(檄文 편지)에 이르기를, “천하의 사람이 모두 드러내어 죽이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은밀히 죽일 것을 의논한다.” 하니, 황소가 격서를 읽다가 이 대문에 이르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평상에서 내려왔으니, 이로 인하여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지금 그 《계원필경(桂苑筆耕)》은 이해하지 못할 곳이 많으니, 당시의 기습(氣習)이 이 같은 것인지, 아니면 동방의 문체가 옛 법식과 같지 못해서인지 의심스럽다. 신라의 글이 지금에 전하는 것은 전혀 없고 다만 원효와 설총이 지은 한두 편이 있을 뿐이다. 내가 일찍이 신라에서 당 나라에 바친, 비단에 수놓은 오언고시(五言古詩)와 고려 을지문덕의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오언사구(五言四句)를 보니, 다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당시에 글이 능한 선비가 적지 않았으나 지금 만분의 일도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하도다.
○ 당 나라 학사 고운(顧雲)이 지은 최치원의 고향에 돌아감을 송별하는 시에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 十二乘舟渡海來
문장으로 중화에 이름을 떨쳤다 / 文章感動中華國
한 것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준 글에,
무협 중봉의 나이(12세)에 베옷으로 중화에 들어갔다가 / 巫峽重峯之歲絲入中華
은화 열수의 나이(28세)에 비단옷으로 동국에 돌아갔다 / 銀河列宿之年錦還東國
한 것이 있으니, 이는 12살에 당에 들어갔다가 28세에 동국에 돌아갔다는 것이다.
동국에 돌아온 뒤의 이력과 행적은 상고할 바가 없다. 혹은 말하기를, “그때 마침 세상이 어지러워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중들과 한가롭게 놀았다.” 하였다. 공이 쌓은 영주(瀛洲) 등 삼산(三山)과 홍류동 봉하석(紅流洞鳳下石)에 그가 쓴 유적이 지금도 완연하나, 그의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하겠으며, 세상에서는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고 한다. 상고해 보면 당(唐) 희종(僖宗) 12년 을사년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11년인데, 최치원이 당 나라에서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돌아왔고, 10년이 지난 갑인년 진성왕(眞聖王) 8년에 시무(時務) 10여 조항을 올렸는데 왕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이때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지가 이미 3년이 되는 해이다. 25년을 지나서 무인년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웠고, 또 10년을 지나 정해년에 견훤이 신라에 들어가서 임금을 시해하였는데, 최치원의 나이 그때 70이 되어 크게 노쇠하지 않았을 것인데도 그 거취(去就)를 상고할 바가 없으니, 의심할 만한 일이다.
○ 사대(事大)의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은 모름지기 정밀하고 간절하여야 한다. 고려 때에 요인(遼人)들이 압록강을 넘어 국경 삼으려 하니,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이 진정표(陳情表)를 지었는데, 이론과 실지가 명백 간절하였으므로 요제(遼帝)가 그 의논을 정지하였다.
명 태조(明太祖) 29년 하정(賀正)할 때에, 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이 표문을 지었고,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이 전을 지었으며, 서성군(西城君)정총(鄭摠)과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윤색하였는데, 황제가 보고 표문과 전문의 말이 모멸에 가깝다고 노여워하여 정총ㆍ김약항ㆍ권근 등을 불러 문책하였는데, 권근은 용서를 받아 돌아왔으나, 정총 등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고려의 지제고(知制誥) 최보순(崔甫淳)이 금 나라 황제의 등극(登極)을 하례하는 표문에 이르기를, “오마(五馬)가 강을 건너 진제(晉帝)가 새 임금이 됨을 나타내었고, 육룡(六龍)이 등극하니 주역(周易)의 대인(大人)을 봄과 부합한다.” 하였는데, 그때 금나라 군주는 형제가 나라를 다투었었으므로, 이러한 사실에 저촉된 것을 미워하여 그 칙명에, “진(晉) 원제(元帝)의 일을 인용한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최보순은 이로 인하여 견책을 당하였으니, 최보순의 표사(表辭)가 묘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요의 노여움을 일으킨 것은, 일을 인용함이 적절하지 못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 세상에 전하기를, “김부식(金富軾)이 정지상(鄭知常)의 재능(才能)을 질투하여 살해하였다.” 하나, 지금 《고려사》를 상고해 보니, 정지상이 묘청(妙淸)의 술책에 빠져서 그 우익(羽翼)이 다 제거되어 스스로 온전하기는 실로 어려웠으므로, 김부식이 사사로이 용서할 바도 아니었다. 또 본전(本傳) 및 여러 책에 한 마디도 억울하게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바가 이와 같음은 무슨 까닭인가. 근래에 김태현(金台鉉)의 《동국문감(東國文鑑)》을 상고해 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김과 정이 문자(文字) 사이에 감정이 쌓여 있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당시에 이미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이다.
○ 김부식이 송나라에 들어가서 우신관(祐神館)에 가보니, 한 당(堂)에 여선상(女仙像)을 놓았는데, 관반(館伴 사신을 접대하는 사람) 왕보(王黼)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의 신(神)인데 공 등은 아는가?” 하고 말하기를, “옛날 황제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이 없이 아이를 배어서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다. 이에 바다를 건너가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첫 임금이 되고, 그녀는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仙桃山)에서 영생(永生)하는데, 이것이 그 여신상이다.” 하였다. 지금 상고하건대, 신라ㆍ고구려ㆍ백제의 시초에는 이런 황제의 딸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다만 동명왕(東明王)의 출생에 유화(柳花)의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중국에서 잘못 알고 이런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 고려 말기에 인심이 다 우리 태조께 돌아왔으나, 목은 이색(李穡) 선생은 조금 다른 형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환왕(桓王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子春) 환조로 추존됨)의 비문을 지은 것이 태조의 잠저(潛邸 왕이 되기 전) 때였는데, “주(周) 나라가 비롯 옛 나라이나, 천명이 새롭도다.”는 말을 인용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도통(都統) 최영(崔瑩)이 죽을 때에, “이광평(李廣平 이인임(李仁任)의 봉호)이 항상 말하기를 ‘판삼사(判三司 태조)가 마땅히 나라의 주인이 되리라.’하더라.” 하였으니, 광평과 도통은 다 나라를 담당한 대신으로서 오히려 이런 말이 있었으니, 천명과 인심이 우리 태조에게 돌아간 것은 무진년(태조가 등극한 해)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우리 태종이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 문황제(文皇帝)가 연왕(燕王)으로 있었는데 태종이 찾아가 방문하자 문황제가 말을 해보고 크게 기뻐하여 총애와 대우가 지극하였다. 태종이 환국함에 미쳐 우리 조정 사대부들이 태종께 묻기를, “천하가 크게 평정되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때는 고황제(高皇帝 태조)가 정무를 사퇴하고 건문제(建文帝)가 태자로 있을 때이다. 태종이 대답하기를, “내가 연왕을 보니 하늘의 태양 같은 의표와 용봉(龍鳳)의 자품이며 넓고 큰 도량이니, 번왕(藩王)으로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더라. 천하가 안정될 것은 알 수 없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문황제가 연왕으로서 천자가 되니, 사람들이 모두 태종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 문황이 천자의 위에 오른 뒤에 우리 태종을 특별히 생각하고 매양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너희 나라의 임금을 보니 참으로 하늘이 낸 인물이더라.” 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명나라에 진공(進貢)하는 말을 태종이 친히 뽑아 고르는데 하열(下列)에 있는 말을 제 일등으로 하기를 명하니, 마부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는데, 말을 진상하자 문황이 보고 말하기를, “조선 국왕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맨 먼저 올린 말이 참 좋은 말이다.” 하였다. 그런 뒤에야 성신(聖神)의 보는 바가 거의 같다는 것을 알았다. 태종이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준마(駿馬)를 고르는 것과 인재를 분별하는 것은 내가 옛 사람에게 양보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 세종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합문(閤門)을 나가기 전에, 언제나 글을 반드시 백 번씩 읽으며, 《좌전(左傳)》과 《초사(楚詞)》는 다시 백 번을 더하였다. 일찍이 몸이 편치 못하면서도 글 읽기를 폐하지 아니하여 병이 점점 심해지니, 태종이 내시에게 명하여 갑자기 그 처소에 가서 책을 모두 거두어 오게 하였다. 이때 오직 구양수(歐陽脩)와 소동파(蘇東坡)가 손수 쓴 간찰문 한 권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세종은 천 백 번을 읽었다. 왕위에 오르자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가서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니, 밝고 부지런한 공이 백왕(百王)에서 뛰어나셨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글을 읽는 것은 유익한 일이나 글씨 쓰고 글 짓는 것과 같은 일은 임금으로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만년에 노쇠하여 정무는 보지 않으면서도, 문학에 대한 일에는 더욱 마음을 두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부서를 나누어 여러 책을 편찬하게 하였으니, 《고려사(高麗史)》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병요(兵要)》ㆍ《언문(諺文)》ㆍ《운서(韻書)》ㆍ《오례의(五禮儀)》ㆍ《사서오경음해(四書五經音解)》 등이 동시에 편찬되었는데, 다 왕의 재결을 거쳐서 이룩되었으며 하루 동안에 열람한 것이 수십 권에 이르렀으니, 가히 하늘의 운행과 같이 정성이 쉬지 않는다 하겠다.
○ 세종이 처음 아악(雅樂)을 제정함에 중추(中樞) 박연(朴煗)이 도와서 이룩하였다. 박연은 앉으나 누우나 매양 가슴에 손을 얹고 악기 치는 시늉을 하며, 입으로는 휘파람을 불어 음률(音律)의 소리를 내어가며 10여 년의 공을 쌓아 비로소 이룩하니, 세종이 매우 중하게 여겼다. 세종은 또 자격루(自擊漏)ㆍ간의대(簡儀臺)ㆍ흠경각(欽敬閣)ㆍ앙부일구(仰釜日晷) 등을 제작하였는데, 만든 것이 극히 정치(精緻)하였으며, 모두가 왕의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여러 공장(工匠)들이 있었으나 임금의 뜻을 맞추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이 임금의 지혜를 받들어 기묘한 솜씨를 다하여 부합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우 소중히 여겼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박연과 장영실은 모두 우리 세종의 훌륭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해서 태어난 인물이다.” 하였다.
○ 세종이 일찍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유의하였는데, 그 주석이 정밀하지 못하고 구두가 명백하지 못함을 근심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해서 많은 책을 널리 채집하여 일에 따라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간주(間註)를 달아서 열람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에 호삼성(胡三省)의 《음주(音注)》와 《원위(源委)》, 《석문(釋文)》, 《집람(集覽)》 등의 책을 의거해서 깎고 보태었으며, 미진한 곳은 다른 책을 상고하여 보충하였다. 혹 글이 이해하기 곤란한 곳은 본사(本史)의 전구(全句)를 주해하고, 혹은 글 구(句) 밑에 구자(句字)를 써서 구두에 편리하게 하였으며, 글자의 해석과 번음(飜音)에 이르러서도 상세하게 갖추어 있지 않음이 없으니, 모두가 왕의 재량으로 이룩한 것인데, 이를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 이름 하였다. 《강목통감(綱目通鑑)》도 그렇게 하였으니, 그 훈의(訓義)의 정밀함은 고금에 없는 바이다.
근래에 명나라에서 편찬한 《강목통감집람(綱目通鑑集覽)》을 보니, 엉성하고 빠진 부분이 자못 많고, 또 주해를 글 구(句) 밑에 넣지 아니하고 매권(每卷)의 끝에 붙여서 열람하기에 불편하였다.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마땅히 우리나라의 《훈의》를 제일로 쳐야 할 듯하다. 또 《훈의》가 이룩된 것은 정통(正統) 병진년 이었고, 《집람》이 이룩된 것은 근일의 일이니, 중국에서 《집람》을 편찬할 때에 우리나라의 《훈의》를 보았더라면 반드시 탄상하여 마지않았을 것이다.
○ 태종이 일찍이 주자(鑄字)를 만들었는데, 모양이 썩 좋지는 못하였다. 경자년에 세종이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중국의 좋은 글자 모양으로 고쳤는데, 이전 것에 비해서 더욱 정교하였으며 이를 경자자(庚子字)라 한다. 갑인년에 세종이 명하여 좋은 음양자(陰陽字)의 모양으로 다시 주조하였는데, 극히 정교하였으며 이를 갑인자(甲寅字)라 한다. 경자자는 작고 갑인자는 컸는데 인쇄한 서책이 매우 아름답다. 세종 말년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쓴 글자 모양과 강희안(姜希顔)의 쓴 글자 모양으로 다시 주조하였는데, 인쇄한 서책이 점차 예전만 못하여졌다. 지금에 동자(銅字)는 다 공장(工匠)들이 훔쳐갔기 때문에 목활자(木活字)를 겸하여 사용하므로 글자의 크고 작은 것과, 새 것과 헌 것이 같지 아니하며 글줄이 고르지 못하니, 옛날 인쇄한 책에 비하여 크게 뒤떨어진다.
○ 세종은 문치(文治)에 힘씀이 만고에 뛰어나서 경자년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문사(文士) 열 사람을 뽑아서 채웠으며, 뒤에 30명으로 증원하였다가, 또 20명으로 고쳐서 열 사람은 경연(經筵)의 일을 맡고, 열 사람은 서연(書筵)을 겸직하였다.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서, 고금의 일을 토론하고 아침저녁으로 연구하니, 문장 하는 선비가 성대히 배출되어 인재를 많이 얻게 되었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기사년과 경오년 사이에 흰 까치가 와서 집을 지었는데 새끼가 모두 흰 색이었다. 수년 사이에 요직에 있는 이는 모두 집현전에서 나왔다. 영상 정인지(鄭麟趾), 좌상 이사철(李思哲), 영상 정창손(鄭昌孫),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ㆍ안지(安止), 판서 김조(金銚), 참판 김돈(金墩), 판중추부사 김균(金鈞)ㆍ김말(金末), 영상 신숙주(申叔舟), 좌상 권람(權擥), 참찬 박중손(朴仲孫), 영상 최항(崔恒), 판서 김담(金淡), 판중추부사 이석형(李石亨), 의정 윤자운(尹子雲),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 참판 노숙동(盧叔仝), 판서 양성지(梁誠之)ㆍ성임(成任)ㆍ이극감(李克堪), 부윤 이명겸(李鳴謙), 판서 김예몽(金禮蒙), 영중추부사 노사신(盧思愼), 서평군(西平君) 한계희(韓繼禧), 찬성 홍응(洪應), 참찬 이승소(李承召), 참판 이파(李坡), 판서 이병(李苪), 부윤 조근(趙瑾)ㆍ강희안(姜希顔), 판서 강희맹(姜希孟), 부윤 최선복(崔善復), 참판 박첩(朴捷) 등이며, 불초하지만 나 또한 그 사이에 참여하였다. 또 박중림(朴仲林)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 등과 같은 이는 한때 현달하였는데, 계유년과 갑술년에 버드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으므로 어떤 이가 유성원에게 농담하기를, “화(禍)가 반드시 유(柳)로부터 시작할 것이라.” 하였는데, 유성원이 실패하였으니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고 집현전도 얼마 후 없어지고 말았다.
○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를 모아서 수십 년 동안을 양성하여 인재가 많이 나왔으나, 오히려 아침에는 관청에 나가고 저녁에는 숙직하여 공부에 전념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나이가 젊고 재주와 덕행(德行)이 있는 몇 사람을 뽑아서 휴가를 주어 산에 들어가 글을 읽게 하고, 관청에서 그 비용을 공급하여 경사(經史)와 백가(百家),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의약(醫藥)과 복서(卜筮) 등을 마음껏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함으로써 장차 크게 쓰일 기초가 되게 하였다. 앞에는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 승지 권채(權採), 직전(直殿) 남수문(南秀文)이 있었고, 뒤에는 문충공 신숙주가 있었으며, 그 밖의 사람도 모두 명사(名士)들이었다. 문종조(文宗朝)에는 남양군(南陽君) 홍응(洪應)과 한산군(韓山君) 이파(李坡)가 있었고, 보잘것없는 나도 여기에 선발되었으니, 참으로 일세의 거룩한 일이었다.
○ 문종이 세자가 되었을 적에, 희우정(喜雨亭)에 행차하여 동정귤(洞庭橘) 한 소반을 근신(近臣)에게 하사하고 손수 소반 위에 쓰기를
향기로운 향나무는 코에만 좋고 / 旃檀便宜鼻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맞는데 / 脂膏偏宜口
귀여울사 동정귤은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달도다 / 香鼻又甘口
하였는데, 자획이 용사(龍蛇)가 꿈툴 거리는 듯하고 광채가 빛났다. 내가 일찍이 그 글자를 임서(臨書)하여 간직하였는데 참으로 천하의 지보(至寶)이다.
○ 문종은 지혜가 밝고 정밀하였다. 집현전에서 일찍이 극성제문(棘城祭文 해주에 여귀(癘鬼)가 심하여 제사한 글)을 지어서 올렸더니, 문종이 보고 주묵(朱墨)으로 고치고 몇 마디 말을 썼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정(精)이 없는 것을 음양(陰陽)이라 이르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이른다. 정이 없는 것은 더불어 말할 수 없으나, 정이 있는 것이면 이치로써 깨우칠 수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물과 불은 사람을 기르는 것이나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있으며, 귀신은 사람을 살리는 일도 있지마는 때로는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하여, 글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문장 하는 신하와 선비들이 미칠 바 아니었다.
○ 송(宋) 나라 인종(仁宗)이 죽으매, 영종황제(英宗皇帝)가 슬퍼하고 사모하니, 어떤 망녕된 자가 말하기를, “능히 신술(神術)을 부려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다.” 하므로 영종이 그 신술을 시험하기를 명하였으니, 효험이 없자 그 자가 말하기를, “태종이 인종과 함께 한가롭게 백옥루(白玉樓) 난간에 다다라서 모란꽃을 감상하시느라 인간에 다시 올 뜻이 없으십니다.” 하니, 영종이 그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임을 알고서도 크게 죄를 주지 않았다. 우리 세종의 초상(初喪) 때에 요망한 중이 와서 이런 술책을 아뢰므로 다른 시체에 시험하였으나 효험이 없었으니, 이치에 없는 거짓말이므로, 문종도 죄를 주지 아니하였다.
○ 세조(世祖)는 천성이 호매(豪邁)하여 평시에 의논이 개연(慨然)히 당 태종(唐太宗)을 흠모하고 한 고조(漢高祖)를 하찮게 여겼는데, 하루는 세조가 조용히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와 더불어 고금의 제왕(帝王)을 의논하다가, 당 태종에게는 미칠 수 없다고 하니, 양녕이 대답하기를, “전하는 당 태종보다 크게 뛰어납니다.” 하니, 임금이 얼굴을 고쳐 말하기를, “아! 이 무슨 말씀입니까. 숙부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하므로, 양녕이 말하기를, “당 태종은 한 조그만 일로 장온고(張薀古)를 죽였는데, 전하는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전하의 가법(家法)이 바른 것은 당 태종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세조가 빙긋 웃었다. 또 포주강(蒲州江)의 야인(野人)을 정벌하는 일을 언급하자 양녕이 말하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천균(千鈞)의 활[弩 쇠뇌]은 작은 쥐를 보고 발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는 유의하옵소서.” 하였으니, 양녕의 소견이 역시 기이하였다.
○ 세조가 일찍이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유자(儒者)이니 예로부터 임금이 부처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그대는 숨김 없이 말하라.”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옛날 송 태조(宋太祖)가 상국사(相國寺)에 갔을 적에 불상 앞에서 향을 태우면서 마땅히 절을 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물었더니, 중 찬녕(贊寧)이 대답하기를, ‘현재 부처에게는 절하고 과거의 부처에게는 절을 아니 하는 것입니다.’ 하므로, 태조가 웃고 절을 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임금이 부처에게 절을 하지 않음은 정도(正道)이고, 절을 하는 것은 권도(權道)라 생각합니다.” 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내가 또 아뢰기를, “태종조(太宗朝)에 중국 환관 황엄(黃儼)이 제주에서 동불(銅佛)을 가져 왔는데, 그가 태종께 먼저 부처에게 절을 하고 뒤에 예를 행하게 하니, 태종께서 절을 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하륜(河崙) 등이 청하기를, ‘황엄은 마음이 흉험(凶險)하여 트집하기를 좋아하니 권도를 좇아 부처에게 먼저 절을 하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하니, 태종께서 이르기를, ‘저 부처가 만약 중국에서 왔다면 마땅히 황제의 명을 공경하여 절을 할 것이나, 지금 이 부처는 우리나라 제주에서 왔으니 어찌 절할 것이 있겠는가. 여러 신하들은 이를 말하는 사람이 없지만 내 생각에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고, 끝내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황엄이 굴복하고 드디어 예를 행하였으니, 거룩한 임금의 소견은 각기 같은 것입니다.” 하니, 세조가 또 웃었다.
○ 세조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였다. 내가 일찍이 내전(內殿)에 들어가 보니, 감색(紺色) 무명에 범을 그린 갖옷을 입고 푸른 짚신을 신었으며, 갓끈은 순 무명으로 하였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으니, 비록 한 문제(漢文帝)가 옷을 빨아서 입었다는 일도 이와 같이 검소하지는 못할 것이다.
○ 고령군(高靈君) 신숙주는 영의정으로 있었고,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은 새로 우의정이 되었는데, 세조가 두 정승을 급히 내전으로 불러들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오늘 내가 경들에게 물을 것이 있으니 대답을 잘하면 그만이겠지만,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인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고.” 하니, 두 정승이 공손히 대답하기를, “삼가 힘을 다하여 벌을 받지 않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세조가, “신 정승” 하고 불렀다. 신숙주가 곧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신 정승(新政丞)을 부른 것인데, 그대는 대답을 잘못하였다.” 하고, 큰 술잔으로 벌주(罰酒) 한 잔을 주었다. 또 “구 정승” 하고 부르자, 구치관이 대답하였더니, 세조가 말하기를, “나는 구(舊)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벌주 한 잔을 주었다. 임금이 또 부르기를, “구 정승” 하니, 신숙주가 대답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구(具)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또 부르기를 “신 정승” 하니, 구치관이 대답하므로 말하기를, “내가 신(申)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다음에는 “신 정승” 하고 불렀더니, 신과 구가 다 대답하지 않았다. 또“구 정승” 하고 불러도 구와 신이 다 대답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종일 이와 같이 하여 두 정승이 벌주를 먹고 극도로 취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이 입술이 두터웠는데, 세조가 일찍이 희롱하기를, “어효첨은 순후(淳厚 순후(唇厚)와 음이 같다)하다.” 하였는데, 의정 윤사분(尹士芬)은 볼에 험이 있었기 때문에 문헌(文獻) 박원형(朴元亨)이 대답하기를, “윤사분은 시험(猜險 시험(腮險)과 음이 같다)합니다.” 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 세조는 음양지리의 글에도 모두 널리 통하여 그 옳고 그름을 밝게 보고 판단하였다.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녹명서(祿命書 사주책)는 유학자가 궁리(窮理)하는 하나의 일인데 그대는 아는가.”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대강 보았습니다.” 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그대가 가령서(假令書 사주책 풀이) 한 편을 지어보라.” 하므로, 내가 물러 나와서 여러 책을 모아 그 대요(大要)를 뽑아서 분류해 모으되, 범례(凡例)를 먼저하고 길흉신살(吉凶神殺)을 다음으로 하고 길흉론단(吉凶論斷)을 끝으로 하여 바쳤더니, 세조가 이르기를, “내가 녹명서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가령서를 지어서 궁중 사람으로 하여금 가르쳐주는 수고가 없이 책을 펴보면 스스로 밝게 알도록 하고자 함이다.” 하였다.
또 나에게 이르기를, “경의 뜻에는 녹명이 어떠한가.”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갑년(甲年)과 기년(己年)의 정월은 병인(丙寅)이요, 갑일과 기일의 생시(生時)는 갑자(甲子)이니, 육십갑자를 가지고 추산하면 그 수(數)가 7백 20이 되니, 7백 20년을 가지고 7백 20일과 시(時)에 곱하면 사람의 사주(四柱)는 51만 8천 4백에서 다하고 다시 더할 수 없습니다. 천하의 인구가 성할 때에는 1천 5백~6백만에 이르니, 억조 중생이 어찌 51만 8천 4백에만 그치리이까. 지금 항간에서 사주는 꼭 같아도 화복(禍福)은 전연 같지 않은 자가 있으니, 직접 보고 들은 것으로 일찍이 한두 명이 있는데, 직접 보고 듣지 못한 자가 어찌 천백 명뿐이겠습니까. 또 거리가 천 리가 되면 풍(風)이 같지 아니하고 백 리가 되면 속(俗)이 같지 않은데, 사주는 중국과 사해(四海) 민족이 다름이 없으며, 중국은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ㆍ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ㆍ이서(吏胥)ㆍ서인(庶人)의 구분이 있어서 작위와 품계의 높고 낮음을 일일이 다 구별할 수 있으나, 사해 민족의 풍속은 혹 금수와 같아서 귀천의 분별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51만 8천 4백 명의 녹명(祿命)에 매어서 그 같지 않음이 이같이 분분하겠습니까. 녹명의 글을 족히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혹은 말하기를, ‘이순풍(李淳風)ㆍ이허중(李虛中)ㆍ소요부(邵堯夫)ㆍ서자평(徐子平) 등은 백발백중으로 맞았는데, 어찌 그 모두가 그르다 할 수 있겠는가.’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밝은 거울이 여기 있어서 물건이 와서 비추면 좋고 나쁜 것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이순풍ㆍ소요부의 무리는 마음이 본래 허령(虛靈)해서 밝기가 거울과 같기 때문에, 사물(事物)이 그 앞에 이르면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저절로 나타나 속이지 못하니, 후세 술사들이 한갓 옛 사람의 글로써만 51만 8천 4백 명의 명수로써 천하 억조의 인명을 판단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신은 녹명서는 믿을 수 없다 하겠습니다.” 하니, 세조가 웃고 이르기를, “자네 말이 옳다.” 하였다.
○ 예종(睿宗)이 처음 집정하여 대단한 각오로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려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옥체(玉體)가 점점 위태하였다. 일찍이 손수 책 등에 쓰기를, 모두 예종이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죽어서 이 시호(諡號)를 얻으면 만족하겠다.” 하였는데, 몇 달이 못 되어서 승하하니, 군신들이 시호를 예종으로 올려 과연 성상의 뜻에 부합하였다. 아! 슬프도다.
○ 국재(菊齋) 문정공(文正公) 권부(權溥)는 임술년 임자월 기미일 기사시에 났는데, 점(占)을 치는 이가 보고, “수명이 길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 아버지 문청공(文淸公) 탄(坦)이 말하기를, “만약 덕을 쌓으면 조금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의 중에게 들었는데, 덕을 쌓는 조목이 세 가지가 있는바, 길 가운데로 다니지 말고, 흘러가는 물에 목욕하지 말고, 음식을 먹을 때 좋은 것을 가리지 않는다 하니, 너는 마땅히 힘쓸지어다.” 하였다. 국재가 종신토록 이 일에 명심하고 힘써서 잠시 동안이라도 어기지 않았는데 마침내 85세의 수(壽)를 누렸고, 지위가 일품에 이르렀으며, 한 가문(家門)에서 봉군(封君)한 이가 아홉 사람이나 되어, 복록(福祿)의 융성함이 고금에 거의 없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덕을 쌓은 효험이다.” 하였다. 그러나 익재(益齋) 선생이 지은 국재의 비문(碑文)을 보니, “무자(戊子)와 기미(己未)가 임사(壬巳)의 녹(祿)과 만나 서로 맞아 발복하였으니, 이는 천지조화의 묘함이다.” 하였으니, 점치는 이가 수명이 길지 못하다 한 것은 또한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다.
○ 포은(圃隱) 정문충공(鄭文忠公)은 평생에 지절(志節)이 있고 남을 이간(離間)하는 말이 없었는데, 어떤 이가 농담하기를, “자네는 세 가지 과실이 있는데 알겠는가.” 하였다. 문충공이 대답하기를, “말을 해 보라.” 하니, 말하기를, “남이 말하기를, ‘자네 친구들과 모여서 술을 먹을 적에 남보다 먼저 들어가서 맨 나중에 자리를 파하니, 술 마시는 것을 너무 오래한다.’ 하더라.” 했다. 문충공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그런 일이 있다. 젊어서 시골에 있을 적에 한 동이 술을 얻으면 친척과 친구들과 더불어 한 번 실컷 마시고 즐기고 싶었는데, 지금은 부귀(富貴)하여 자리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술통에는 술이 떨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어찌 조급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자네가 여색에 있어 담담하지 못하다고 남이 말을 하더라.” 하니, 문충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여색을 좋아함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공자께서도 말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라.’ 하셨으니, 공자도 여색이 좋음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자네가 중국산 물건을 무역(貿易)하는 데에 무심하지 못하다고 남이 말을 하더라.” 하니, 문충공이 낯빛을 변하여 말하기를, “내가 집이 가난하고 자녀가 많은데, 혼인의 예식에 으레 중국의 물건을 사용하니, 나도 시속을 면할 수 없다. 하물며 있고 없는 것을 교역함은 성인의 제도인데, 내가 무엇을 혐의하겠는가.” 하니, 그가 말하기를, “앞에 한 말은 농담일세.” 하였다.
○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 일찍이 경사(京師 남경)에 갔었는데, 길에서 비를 만나 역리(驛吏)의 삿갓을 빌렸다가 돌려주었는데도, 돌려주지 않았다고 트집하고 그 값을 요구하므로, 공이 다투지 아니하고 값을 주었다. 뒤에 어떤 역리가 전삼(氈衫)을 잃은 것을 공에게 씌워서 그 값을 요구하니, 공이 또 주려고 하였는데, 사신(使臣) 발라(孛羅)가 그 속임을 알고 우리를 국문하였다. 그제야 말하기를, “이분이 전에 다투지 아니하고 값을 주었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한 것이요, 잃은 것이 아닙니다.” 하여, 발라가 그에게 벌을 주었다.
○ 권문충공이 일찍이 충주에 귀양가 있었는데, 계유년 봄에 태조가 계룡산에 행차하였을 적에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밖에 나갔을 때 임시로 머무는 곳)로 불려서 나갔었다. 하루는 태조가 호종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은쟁반 하나를 주고 활을 쏘아 내기를 하게 하였다. 무신(武臣)들은 차례로 쏘았으나 모두 과녘을 명중시키지 못하였는데, 문충공은 평생에 한 번도 활을 잡아 보지 않았으나, 이날에는 한 화살에 명중시켜 은쟁반을 차지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활 쏘는 법으로써 그 덕(德)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이른 것이다.” 하였다.
○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일찍이 새벽에 관아(官衙)에 나갔는데, 한 짝은 희고 한 짝은 검은 신을 신었다. 공석에 앉자 서리(胥吏)가 이를 고하였는데, 공이 내려다보며 한 번 웃고는 끝내 바꾸어 신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말을 타고 갈 적에 웃으며 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 신이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말아라. 왼쪽에서는 흰 것만 볼 것이요, 검은 것은 보지 못할 것이며, 오른쪽에서는 검은 것만 볼 것이고 흰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니, 또한 어찌 해가 있겠느냐.” 하였으니, 그가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불러 보고 이르기를, “그대의 한어(漢語)는 나합출(納哈出)과 같구나.” 하였고, 이색의 외모가 훤출하지 못하다고 황제가 이르기를, “이 늙은이는 그림 그릴 만하구나.” 하였다. 색이 환국하게 되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황제는 속에 주장이 없는 사람이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색의 말을 실언이라 하였다. 지금 대명(大明)이 천하를 통치한 지 백여 년인데 여러 군주가 대(代)를 이어 나라를 지켜서 고황제가 남긴 제도를 한결같이 따르고 변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규모와 제도가 한(漢)ㆍ당(唐)보다 크게 뛰어나니, 어찌 속이 없는 임금이라 할 것인가. 그러나 이색은 큰 유학자이니, 고황제의 큰 인물됨을 알지 못하였으면 어찌 지혜롭다 할 것인가.
억측하건대, 고황제는 처음 천하를 평정하고 영웅들을 통어하며 변강(邊疆)을 개척하여 대업(大業)을 창조하는 데에 정신을 두었으니, 그가 이색 같은 늙은 선비 보기를, 어린애가 곁에서 울고 웃는 것 같이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이며, 이색을 뜻도 고황제가 천자가 된 지 오래되지 않아 세상일을 알 수 없는데 외국 사람대접하기를 이와 같이 거만하고 업신여기는가 하여 이러한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한 광무(漢光武)가 마원(馬援)을 대접하듯 고황제가 이색을 대접하였다면, 반드시 이런 말이 없었을 것이다.
○ 문정공 조용(趙庸)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20여 년을 있었는데,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여 인재 양성에 공이 있었다. 대개 문장은 종이를 잡고 즉시 글을 썼는데 문장과 논리가 정밀하고 지극하였으며, 성품이 총민(聰敏)하여 한 번 보면 곧 기억하였다. 젊을 때에 한 서생(書生)이 원 나라의 책문(策問) 가려 뽑은 것을 구해 비장(祕藏)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문정공이 보기를 청하였으나, 서생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날 다시 가서 청하니 서생이 사흘 동안만 빌려주었는데, 문정공이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하고는 약속한 날짜에 돌려주었다. 하루는 문정공이 그 서생과 같이 글방에 있으면서 책문(策問) 서너 편을 외웠는데 한 자의 착오도 없으니, 서생이 이를 우연히 익힌 것이라 하고, 여려 책문을 닥치는 대로 뽑아서 외우게 하여도 역시 이와 같이 하니, 서생이 말하기를, “공과 같은 분은 비록 장순(張巡)이라도 미칠 수 없다.” 하였다.
○ 문정공 맹사성(孟思誠)은 성품이 청백하고 소탈하며 단정하고 중후하여 의정부에 있으면서 대체(大體)를 지켰다. 공은 경자생(庚子生)인데 일찍이 장난으로 계묘계(癸卯契)에 들었었다. 어느 날 임금 앞에 있을 적에 임금이 공의 나이 몇인가를 물으므로 문정공이 경자생 이라고 대답하였더니, 조정에서 물러나오자 계중(契中)에서 동갑이 아니라고 제명되어 한때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공이 천성으로 음률을 깨쳐서 항상 피리를 잡고 날마다 서너 곡조를 불고 문을 닫고 손님을 맞이하지 않았다. 공사(公事)를 아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사람을 시켜 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있고 겨울에는 방 안 부들자리에 앉아 있었으며 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다. 일을 아뢰는 이가 가면 곧 문을 닫았다. 일을 아뢰러 오는 이들은 동구에 이르러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 문순공(文順公) 권홍(權弘)은 일찍이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드러났었고, 더욱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묘하였으며, 지위는 일품에 이르고 향년은 87세이다. 일찍이 남산 모퉁이에 집을 정하고 두개의 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었는데, 복건(幅巾) 쓰고 여장(藜杖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을 끌며 한가롭게 거니는 모양은 깨끗하여 신선과 같았다. 그가 해서로 쓴 헌릉비(獻陵碑)와 전서로 쓴 성균관 비의 글씨는 매우 좋다. 일찍이 세종조(世宗朝)에 상서하여 기자(箕子)의 사당에 비를 세우기를 청하였으니, 말이 자못 대체(大體)를 얻었다.
○ 정숙공(貞肅公) 박안신(朴安信)은 기국이 크고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일찍이 문정공 맹사성과 대간(臺諫)에서 같이 일을 의논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문정공은 낯빛이 흙빛이 되고 경황이 없이 어쩔 줄을 몰라 하였으나, 정숙공은 낯빛이 태연자약하였다.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우리 임금이 간관을 죽인 이름을 얻을까 두렵 도다 / 恐君留殺諫臣名
하였다. 이 시를 종이와 붓이 없어서 사금파리로 땅에 그어서 글자를 쓰고, 눈을 부릅뜨며 옥리(獄吏)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이 시를 상감께 아뢰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여귀(癘鬼)가 되어 너희들을 씨가 없게 할 것이다.” 하였더니, 태종이 듣고 노여움을 풀고 석방하였다.
그 뒤에 공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적에 해적을 만났는데, 해적이 칼을 빼어 들고 배 위로 뛰어들어서 행구(行具)를 약탈하니, 사람들은 손도 놀리지 못하였으나, 공은 걸상에 걸터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찬찬히 지휘하니, 해적이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일행은 이에 힘입어 안전하였다.
○ 문정공 유관(柳寬)은 공정하고 청렴하여 비록 최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초가집 한 칸에 베옷과 짚신으로 생애가 담박하였다. 공무를 마친 여가에는 후생을 가르치기에 부지런하니,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와서 뵈려는 이가 있으면 고개만 끄덕일 뿐이요 성명은 묻지 않았다.
공의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는데, 그때 사국(史局)을 금륜사(金輪寺)에 개설하였으니, 그 절은 성 안에 있었다. 공이 역사를 편수하는 책임자가 되었는데, 일찍이 연모(軟帽)에 지팡이와 신을 갖추고 걸어서 다니며 수레와 말을 타지 아니하였다. 어떤 때는 청소년들을 데리고 시를 읊으며 오고가니, 사람들이 그 아량(雅量)에 탄복하였다. 그 절이 지금은 없어졌다. 일찍이 달이 넘도록 장마가 졌는데, 삼대처럼 집에 비가 줄줄 새었다. 공은 우산을 잡고 비를 가리며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 하니, 부인이 대꾸하기를, “우산 없는 집에는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껄껄 웃었다.
○ 문경공(文敬公) 성석린(成石磷)은 젊어서부터 뜻이 드높아 큰 절개가 있었다. 일찍이 양백안(楊伯顔)의 막하(幕下)가 되어 왜적을 방어하다가 군율(軍律)을 어기어 형(刑)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공이 졸고 있었는데 꿈결에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공은 쑥대 관[蒿冠]을 쓸 것이니 근심할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이 스스로 풀이하기를, “쑥대 관은 쑥으로 머리를 싼다는 것이니 매우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하였는데, 죽음을 면하고 제명(除名)되는 데 그쳤다. 그 뒤에 수상(首相)이 되어서 말하기를, “내 꿈에 호관(蒿冠)은 고관(高官)의 뜻이다.” 하였다.
소년 시절 4~5명의 동료들과 더불어 정방(政房)에 있었는데, 신돈(辛旽)이 뒷짐을 지고 곁에서 보다가 공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중에 반드시 크게 현달할 것이니, 그 복록은 제군들이 미칠 바 아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았으니, 늙은 역적(신돈을 가리킴)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갖추었다 하겠다.
공의 나이가 60이었을 적에 그 어머니는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병이 위독하여 눈을 감고 말을 못한 지가 며칠이 되었고, 약도 효험이 없어서 공이 향을 태우고 기도하며 슬피 부르짖다가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조금 뒤 어머니가 깨어나 말하기를, “이게 무슨 소리냐.” 하니, 모시고 있던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며 대답하기를, “기도하는 소립니다.” 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하늘에서 사람을 보내어 궤장(几杖 안석과 지팡이)을 주며 말하기를, ‘아들의 정성이 이같이 지극하니, 이것을 붙들고 일어나라.’고 하더라.” 하고는 병이 곧 나으니, 사람들이 문경공의 효성이 지극함을 감탄하였다.
○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은 본관이 진주다. 그 어머니가 꿈에 자라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그를 낳았으므로 어릴 때 이름이 왕팔(王八)이었다. 어려서부터 기운이 남보다 뛰어났었고, 갑사(甲士)로 숙위(宿衛)에 보임되어 궁문에 숙직하였는데 때마침 동짓날이었다. 상림원(上林苑 비원) 온실에서 가꾼 매화 몇 분(盆)을 궁문 곁에 옮겨 두려 할 적에, 공이 긴 가지 하나를 꺾어서 투구 위에 꽂았다. 이 책임을 맡은 이가 크게 놀라 꾸짖자, 공이 말하기를, “우리 집 울타리 가에 마소[馬牛]를 매는 것이 이 나무요, 꺾어서 땔나무도 하는 것인데 무엇이 귀할 게 있으리오.” 하고, 조금도 굽히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거칠고 사나움을 비웃으면서도 그의 기개를 훌륭하게 여겼다. 무(武)에 능함으로써 발탁(拔擢)되어 크게 현달하였다. 일찍이 동북면(東北面)을 지킬 적에 야인(野人)이 3백 근이나 되는 강력한 활을 공에게 당겨보도록 청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그들을 위하여 술상을 놓고 즐겁게 마시면서 또 말하기를, “이 활은 매우 잘 만들었다.” 하고는, 급히 궁수(弓手)를 불러서 그 모양과 같이 만들게 한 다음 몰래 사람을 시켜서 그 활을 불에 구워 힘이 조금 풀어지게 한 뒤에, 여유만만하게 활을 가득히 당기니, 야인들이 탄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뜰 아래로 내려가 절하였다.
○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은 고집스런 성품이었다. 선덕(宣德) 연간에 흰 꿩을 하례하는 표(表)에 ‘유자백치(惟玆白雉)’라는 어구가 있었는데, 문숙공이 말하기를, “자(玆)는 중행(中行 글자를 가운데 줄에 씀)으로 써야 한다.” 하니, 제공(諸公)들은, “성상(聖上)에 속(屬)한 것이 아닌데, 왜 중행이라 이르는가.” 하였으나, 문숙공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였다. 제공들은 취품(取稟 임금에게 문의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세종(世宗)께서는 제공(諸公)들의 의견을 옳다고 하니, 공이 다시 아뢰기를, “농사짓는 일은 남종[奴]에게 물을 것이요, 길쌈하는 일은 여종[婢]에게 물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일이라면 문효종(文孝宗)의 무리에게 묻는 것이 마땅하오나, 사명(詞命)에 이르러서는 노신(老臣)에게 위임하는 것이 마땅하오니,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가볍게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여, 세종이 부득이 그의 의견을 좇았다.
○ 정렬공 최윤덕(崔潤德)은 태어나자 곧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 운해(雲海)는 변방(邊方)을 지켰기 때문에 그를 양육할 수 없었으므로 이웃에 있는 양수척(楊水尺)의 집에 부탁하여 키우게 하였다. 조금 장성하자 기운이 남보다 뛰어나고 굳센 활을 당겨서 단단한 물건을 쏘아 맞추었으며, 때로는 양수척을 따라 사냥하러 나가서 짐승을 많이 잡아오곤 하였다. 하루는 산중에서 가축을 먹이는데 큰 범이 별안간 숲 속에서 나와서 여러 짐승들이 놀라 달아났다. 공은 급히 말을 타고 활을 쏘아 한 발에 죽이고, 집에 와서 양수척에게 알리기를, “어떤 짐승이 무늬가 얼룩지고 그 크기가 엄청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미 쏘아 죽였습니다.” 하였다. 양수척이 가보니, 한 마리의 큰 범이었다. 이에 양수척은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가군(家君 필자인 사가(四佳)의 아버지 곧 서미성(徐彌性))께서 합포(合浦)를 지킬 적에 양수척이 최 공을 데리고 가서 뵙고 공을 칭찬해 마지않으니, 가군께서 이르기를, “마땅히 시험해 보겠다.” 하고, 같이 사냥하여 재주를 시험하니, 공이 좌우로 달리며 쏘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보는 이가 못내 칭찬하였으나, 가군께서는 웃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솜씨가 비록 빠르나 아직 무예(武藝)의 법을 알지 못한다. 지금 하는 것은 곧 사냥꾼의 기술이요, 무예의 좋은 재주라고는 할 수 없다.” 하시고, 곧 활을 쏘고 적을 막는 방법을 가르쳐서 마침내 명장이 되었다.
○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는 도량이 넓고 커서 대신의 체통이 있었다. 정승의 자리에 30년이나 있었고, 향년(享年)이 90이었다. 국사(國事)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데는 관대(寬大)하기에 힘쓰고, 평상시에 마음이 담박하여 비록 아들, 손자, 종의 자식들이 좌우에 늘어서서 울부짖고 장난을 하고 떠들어도 조금도 꾸짖어 금하지를 아니하며, 어떤 때는 수염을 잡아 뽑고 뺨을 쳐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일찍이 보좌관을 불러 일을 의논하면서 막 책에 글씨를 쓰려 하였는데, 종의 아이가 그 위에 오줌을 누었으나, 공이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이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으니, 그 덕스러운 도량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남원(南原)에서 7년 동안을 귀양살이 하였는데,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손에는 운서(韻書 자전(字典)) 한 질(秩)을 갖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볼 뿐이었다. 그 뒤에 비록 나이가 많았으나, 자서(字書)의 음과 뜻, 편방(偏傍)과 점획(點劃)에 대해서 백에 하나라도 틀리는 것이 없었다.
○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 한가히 있을 적에는 항상 오사모(烏紗帽)에 뿔을 뺀 것을 쓰고,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서 종일토록 시를 읊었는데, 시품(詩品)이 기이하고 궁벽하여 고시(古詩)에 가까웠으며, 필법(筆法)이 굳세어 서법에 부합하였다. 소년 때 춘방(春坊)에 있으면서 시를 지어서 손수 썼더니, 하호정(河浩亭 하륜(河崙))이 감탄하기를, “하문학(河文學 하연을 가리킴)이 시를 짓고 하문학이 직접 쓰니, 역시 한 세상의 보배이다.” 하였다. 문효공이 경상도안찰사(按察使)로 있을 때, 정승 남지(南智)가 아사(亞使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공은 매우 중히 여겨 보좌관이라 하여 낮게 대우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진주(晉州)에 가서, 문효공이 산천과 경물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니, 공의 본관이 진주였기 때문이다. 이에 남공(南公)이 낯빛을 변하며 말하기를, “산수는 비록 좋지마는, 품관(品官 안찰사를 가리킴)은 매우 못났다.” 하였으나, 문효공이 크게 웃으니, 사람들이 그 아량(雅量)에 탄복하였다. 뒤에 남공과 같이 정승에 올랐다.
○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엄숙하고 방정하며 청렴하고 근신하여 언제나 성현(聖賢)을 사모하였다. 매일 닭이 울 때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갓과 띠를 갖추고 단정히 앉아서, 날이 다하도록 게으른 빛이 보이지 않았으며, 항상 나라 일을 근심하고 사사로운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국정(國政)을 논의할 적에는 자기의 신념을 스스로 지키고 남을 쫓아서 이리저리 아니하니, 당시 사람들은 어진 재상이라 칭찬하였다. 가법(家法)은 역시 엄하여 자제들에게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祠堂)에 고하고 벌을 주며, 노비(奴婢)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다스렸다. 공이 어려서부터 몸이 야위어 비쩍 말랐으며 어깨와 등이 굽었다. 일찍이 예조 판서가 되어 상하(上下)의 복색(服色) 제도를 정하여 엄격하게 구별하니, 시정의 경박한 무리들이 심히 미워하여 이름 하기를 수응(瘦鷹 여윈 매라는 뜻) 재상이라 하였는데, 이는 매는 살찌면 날아가고 여위면 새 잡기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 효양공(孝襄公) 김효성(金孝誠)은 장양공(莊襄公) 남수(南秀)의 아들이다. 장양은 그 아내 길(吉)씨와 따로 살고 있었는데, 효양공의 나이 4ㆍ5세 때에 종이 안고 뽕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한 쌍의 비둘기가 날아와서 함께 앉는 것을 공이 보고 말하기를, “저 비둘기를 보니 쌍쌍이 짝을 지어 다니는데, 우리 부모는 동서(東西)에 따로 떨어져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하고, 슬피 우니 종이 기이하게 여겨 길씨에게 아뢰니 이 말을 들은 길씨도 눈물을 흘렸으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고 공의 나이가 57세에 어머니 길씨가 죽자 시묘 살이를 하고 상례와 제례를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니, 칭찬하는 말이 많았다.
○ 대민공(戴敏公) 강석덕(姜碩德)은 성품이 예스러움을 좋아하여, 풍류(風流)와 문아(文雅)함은 근대에 비길 데가 없으며, 시품(詩品)이 매우 고고(高古)하고 서화도 절묘하였으니, 그 시호(諡號)를 민(敏)으로 한 것은 적당한 칭호라 할 것이다. 시법(諡法)에, “옛 것을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음을 민(敏)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원 나라 학사 조문민(趙文敏)의 민(敏)과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이 공이 과거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그를 가볍게 여김은 아주 잘못이다. 아들 부윤(府尹) 희안(希顔)의 자(字)는 경우(景愚)인데, 그림ㆍ시ㆍ글씨 세 가지에 절묘하여 당대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시는 위응물(韋應物)ㆍ유종원(柳宗元)과 같고 그림은 유송로(劉松老)ㆍ곽희(郭熙)와 같으며 글씨는 왕희지ㆍ조맹부를 겸하여 재주와 덕을 구비하였으니, 참으로 대인군자(大人君子)이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쓰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판중추부사 조오(趙吾)가 합천(陜川) 수령이 되었을 적에, 여름에 농어가 많이 쌓여서 썩는 일이 있어도, 자기 집에는 조금도 맛보지 못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그것을 썩혀서 땅에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집에서 조금이라도 먹게 하는 것이 낫겠는데, 이런 데서까지 청렴함을 더럽히지 않으려 하는구나.” 하였다. 조공의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그가 예조 정랑이 되었을 적에 이리저리 셋집을 전전하였으며 양식과 땔나무를 이어가지 못하였는데, 동료(同僚) 중에 쌀 3말을 주는 이가 있어도 받지 아니하였고, 뒤에 공석(公席)에서 이 일을 자랑하니, 사람들이 그 자랑하는 것을 기롱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평상시에 남의 청탁을 일체 들어주지 않았으며, 뒤에 늙어서 시골집에 물러 나와서도 살림살이가 아무것도 없었으나,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요구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청렴하고 독실한 군자라 할 것이다.
○ 안숙공(安肅公) 권준(權蹲)은 총명(聰明)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관리의 체통을 잘 알았다. 일찍이 형조의 관리가 되어 옥사를 귀신같이 판결하였다. 어떤 두 강도가 한 가족 세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심증은 다소 있었으나 물증이 분명하지 못하여 전후(前後) 관리가 의심하고 결단하지 못한 것이 거의 4ㆍ5년이었다. 하루는 안숙공이 두 도둑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강도짓을 한 증거가 분명한데 감히 불복하느냐. 내가 한 마디 할 터이니 너희들은 숨기지 말아라. 너희들이 처음 일을 의논할 때는 이러이러하게 했고, 중간에 일을 꾸미기는 이러이러하게 한 것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경위가 이러이러한 것인데, 너희가 감히 숨기겠느냐.” 하니, 도둑이 서로 돌아보고 혀를 빼물며 말하기를, “이분이 일찍이 도둑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어떻게 우리가 한 일을 이같이 자세히 아는가.” 하고, 마침내 자복하였다.
○ 갑오년 봄에, 문경공(文景公) 권제(權踶), 판서 조극관(趙克寬), 참판 권극화(權克和), 참판 김돈(金墩) 등이 모두 문과에 실패하고 수원(水原) 연정(蓮亭)에 이르렀다. 문경공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실의에 빠져 번뇌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후일에 성공한다면 이슬비 자욱하고, 함박눈 펄펄 내리며, 밝은 달빛은 주렴으로 들어오고 연꽃 향기는 자리에 가득할 적에, 그대들과 더불어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면 족히 오늘의 일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제공들이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비가 자욱하다면 눈이 펄펄 내리지 못할 것이고, 눈이 펄펄 내린다면 달이 밝지 못할 것이며, 또 연꽃 향기를 어찌 눈 가운데서 얻을 수 있으리오. 어찌 말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가.” 하였더니, 문경공은 응답이 없었다. 그해 가을 과거에 문경공은 장원이 되고, 제공들도 연달아 과거에 뽑혔다. 임자년에 문경공이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자 제공들이 모여서 전별(餞別)하는데, 조(趙) 판서가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수원 눈 속의 연꽃을 이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문경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들과 함께 보려고 하였네.” 하였다. 몇 달이 안 되어 조공이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을 때, 문경공이 그 고을에 순행하니, 조공이 예를 행하고 자리에 나갔는데 때마침 연꽃이 한창 이었으므로 서로 보고 웃었다. 문경공이 시를 지었는데,
비와 눈 흩날리는데 달빛은 밝고 / 雨雪霏霏月政明
연꽃의 맑은 향기 정자에 가득하네 / 荷香荏苒滿亭淸
당시의 이런 말 신비로워라 / 當時此說神應秘
20년 전에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도다 / 二十年前事已成
하였다.
○ 문장공(文長公) 김균(金鈞), 문장공 김말(金末), 대사성(大司成) 김반(金泮)은 모두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더욱 성리학(性理學)에 연구가 깊어서 동시에 성균관에 제수되어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인재양성에 공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삼김(三金)이라 일컬었는데, 김반은 먼저 죽었고, 남은 두 김공은 모두 80이 넘도록 살아 벼슬은 1품에 올랐으며, 시호(諡號)를 모두 문장(文長)이라 하였다. 시호를 짓는 법에,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함을 장(長)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시호를 받음이 마땅하다. 제학(提學) 윤상(尹祥)이 그때 성균관의 대사성이 되었는데, 학문이 더욱 정밀하여 제생(諸生)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가 물으니, 공이 문리(文理)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며 종일토록 쉬지 아니하고 지칠 줄을 몰랐다. 지금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공의 제자이니, 국조 이래로 사범(師範)의 으뜸이다.
○ 문장공 김말(金末)은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들으니, ‘천 사람의 눈[眼 지식을 이름]을 열어주는 이는 음덕의 보답을 받는다.’ 하였는데, 내가 벼슬한 뒤로부터 50여 년간 학관(學館)의 직책을 맡아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도 마침내 자식이 없으니, 이는 나의 학문이 거칠고 거짓되어 남에게 은덕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죽을 무렵에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홀(笏)을 잡고 단정하게 앉았는데, 가족들이 통곡하니 공이 울음을 그치게 하고는 “내가 벼슬이 1품에 이르렀으니 벼슬이 부족함이 없고,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수(壽)가 높지 않음이 아니다. 나고 죽는 것은 사람의 상리(常理)이니 바름을 얻고 죽으면 어찌 다행하지 않는가.” 하고, 곧 죽었다.
○ 최만리(崔萬理) 선생이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나서 글을 올려, 환관(宦官)들의 연각건(軟脚巾)을 쓰고 오사모(烏紗帽)를 씀이 옛 제도에 맞지 않으니, 중국의 예(例)에 의해 일반 관을 쓰게 할 것을 극론하였다. 그 말에, “예로부터 역대 임금이 환관을 사랑하고 신임하여, 그 권세가 천하를 기울이는 자가 심히 많았으나, 그 갓을 바꾸지 않은 것은 환관의 무리를 사대부들과 혼동하여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으니, 말은 매우 적절하였으나, 여러 환관들이 눈을 흘겼기 때문에 의논이 드디어 정지되었다.
○ 유의손(柳義孫) 선생, 권채(權採) 선생,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와 남수문(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南) 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초고는 대부분 남선생의 손에서 나왔다. 제공(諸公)들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기건(奇虔)공이 일찍이 연안부(延安府)에 부임하였는데, 그 고을에는 붕어가 많이 나서 공사(公私)로 청탁이 많아 폐단이 백성에게도 미쳤다. 그 전에 김씨 성을 가진 부사가 있었는데 붕어 먹기를 좋아하므로, 고을 사람들이 조롱하여 관사(館舍)의 벽에 크게 쓰기를,
6년 동안 무슨 사업을 하였는가 / 六年何事業
한 못의 고기만 다 먹었도다 / 喫盡一池魚
하였다. 기공(奇公)이 이런 평을 면하려고 6년 동안 붕어를 먹지 않았고, 또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나가서는 제주의 복어(鰒魚)가 연안의 붕어와 같이 많았으나 3년을 역시 먹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 고집은 탄복하였으나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 판서 김조(金銚)는 일찍이 문학으로 유명하였다. 세종(世宗)께서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하였는데 모두가 술이 취하였다. 세종께서, “오늘 제군(諸君)들은 각기 평소의 소원을 말하라.” 하니, 김조가 아뢰기를, “신의 소원은 백 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搨 임금의 자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해바라기꽃인데, 신하의 자리를 뜻함) 밑에서 진퇴부복(進退俯伏)하는 것뿐입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신등의 소원도 김조와 같습니다.” 하여, 임금이 웃었다.
○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은 성품이 온아(溫雅)하고 담박 하며 소탈하여, 기뻐하고 노여워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아니하였으나, 도둑을 잘 다스렸다. 일찍이 충주(忠州)ㆍ안동(安東)ㆍ경주(慶州) 세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도둑질한 죄를 범한 증거가 있으면, 조금 의심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으니, 도둑이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여 백성들이 편안하였으나, 잘못 죽인 자도 많아서 공의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였으니, 남에게 형벌을 베푸는 것은 참으로 두려울 만한 일이다.
○ 문안공(文安公) 이사철(李思哲)은 몸집이 커서 음식을 남보다 유달리 많이 먹었는데, 항상 큰 그릇의 밥 한 그릇과 찐 닭 두 마리와 술 한 병을 먹었다. 등에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의원이 불고기와 독주(毒酒)를 금해야 한다고 말하니, 공이 말하기를, “먹지 아니하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먹고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면서 여전히 술을 마시고 불고기를 먹어도 마침내 병이 나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귀를 누리는 사람은 음식 먹는 것도 보통사람과 다르다.” 하였다.
공이 젊어서 여러 벗들과 삼각산의 절에서 놀 때에 각각 술 한 병씩을 가졌으나 술잔이 없었다. 그때 권지(權枝) 선생이 새로 만든 말 가죽신을 신었었는데, 문안공이 먼저 그 신에 술을 따라 마시니 제공(諸公)들도 차례로 마셨는데, 서로 보며 크게 웃고 말하기를, “가죽신을 술잔으로 삼은 것이 우리들로부터 고사(故事)가 되었으니, 이 또한 좋지 않은가.” 하였다. 뒤에 문안공이 귀하게 되어 권지에게 말하기를, “오늘 금 술잔의 술맛이 산놀이 할 때의 가죽신 술잔보다 못하구려.” 하였다.
○ 정절공(貞節公) 정갑손(鄭甲孫)은 성품이 청렴하고 정직하며 엄준하여, 자제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간청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함길도(咸吉道) 감사가 되었을 적에,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방(榜 시험 발표)이 나왔기에 보니, 그 아들 오(烏)도 합격되었다. 공은 수염을 꼿꼿이 세우고 성을 내어 시관(試官)을 꾸짓기를, “늙은 놈이 감히 내게 여우같이 아첨하는가. 우리 아이 오(烏)는 학업이 아직 정밀하지 못한데, 어찌 요행으로 임금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결국 시관을 내쫓았다.
정절공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자 탁한 것은 물리치고 맑은 것은 드날리게 하여 조정의 기강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너그럽고 후하여 대체는 잃지 않았다. 전례(前例)에 공청(公廳)에서 모일 적이면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이 반드시 함께 막차(幕次)를 연접시키고, 혹 술을 마실 적에는 장막을 걷고 이름을 권장음(捲帳飮)이라 서로 붙였다. 만약 금주령(禁酒令)이 있을 적에는 대관(臺官)들은 법을 철저히 지켜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간원(諫院)에서는 술 마시기를 예사로 하였다. 하루는 간관(諫官)이 술을 잔에 가득히 부어 가지고 장난으로 장막 틈으로 대장(臺長 사헌부의 장령과 지평)에게 보이니, 대장도 장난으로 소매로 뿌리쳤는데 술잔이 장막 틈으로 떨어져서, 대사헌인 정절공의 책상 앞에 굴러갔었다. 여러 대장(臺長)들은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대리(臺吏)들도 서로 바라만 볼 뿐 감히 그 술잔을 치우지 못하여 이 술잔이 종일토록 대사헌의 앞에 있었다. 사헌부에서는 일이 날까 두려워하였는데, 사무를 마칠 적에 정절공이 관리에게 말하기를, “저기 거위 알 같은 것은 무엇인가. 수정(水精) 구슬이 몇 알이나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니, 아전들이 대답하기를, “백 개는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절공이 이르기를, “굴러 나온 틈으로 던져주라.” 하니,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모두 그 아량에 탄복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해 오는 술잔의 모양이 거위 알 같은 것이 있었는데, 수정 구슬이 한 되 가량 들어갈 만하였으니, 이는 금주령을 당하면 술잔을 숨기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 문도공(文度公) 윤회(尹淮)와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남수문(南秀文)은 모두 문장에 능하였는데, 술을 좋아하여 항상 정도에 지나쳤다. 세종께서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마실 적에 석 잔을 넘지 못하도록 명하였더니, 그 뒤로부터 두 공(公)은 반드시 큰 그릇으로 석 잔을 마시니, 이름은 비록 석 잔이라도 실은 다른 사람보다 곱을 마신 것이다. 세종께서 듣고 웃기를, “내가 술을 조심시킨 것이 도리어 술을 많이 먹도록 권한 것이 되고 말았구나.” 하였다.
○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는 천성이 호매 하고 마음이 활달하였다. 일찍이 술이 취하여 옛 사람을 평론하여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만약 공자의 문하에서 놀았으면, 순수한 안자(顔子)나 독실한 증자(曾子) 같은 분에게는 진실로 미칠 수 없으나, 자유(子游)와 자하(子夏) 같은 무리와는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다.
경오년에 한림 시강(翰林侍講) 예겸(倪謙)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었는데, 문성공이 접대관이 되어서 일을 주선하고 교제하여 빈사(儐使)의 체모를 지켰으며, 또 같이 고금을 의논하고 시를 서로 주고받았으니, 예겸이 매우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어느 날 밤에 같이 앉아서 시강(侍講)이 말하기를, “달이 어느 분야(分野)에 있는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동정(東井)에 있습니다.” 하자, 시강이 탄복하였다. 작별할 적에 시강이 말하기를, “밤이 깊은데 어떻게 갈 것인가.” 하니, 공이 “이금오(李金吾)가 두렵소.” 하자, 예겸은, “왕옥여(王玉汝) 는 만나지 마시오.” 하고는, 서로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대구(對句) 없는 것이 없다.” 하였다.
병인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종비 김씨) 장례 때에 큰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 재궁(梓宮 임금이나 왕비의 관)을 건널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낙천정(樂天亭)에 임시로 모셔두었는데, 혹은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고, 혹은 북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여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문성공이 뒤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예문(禮文)에, 빈소(殯所)에서 남쪽으로 머리 두는 것은 그 어버이를 죽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뜻이며, 광중(壙中)에서 북쪽으로 머리 두는 것은 죽은 것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시 빈궁(殯宮)이니 남쪽으로 머리를 두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제공(諸公)들이 말하기를, “재상은 마땅히 독서한 사람을 써야 한다.” 하였다.
○ 시종신(侍從臣)으로서 상소하는 것은 문열공(文烈公)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비로소 성행하였다. 문열공이 집현전에 있을 적에 여러 번 상소하여 정사를 논하려 하니, 동렬(同列)로서 벼슬이 문열공의 위에 있는 한두 사람이 매양 말리기를, “예로부터 정사를 논하기 좋아하는 이는 마침내 화를 받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 시종들은 덕의(德義)를 강론하여 임금의 마음을 밝히고 도울 뿐이요, 간쟁(諫諍)하는 일은 그 직책이 아니니 그대는 일 만들기를 좋아하지 말게.” 하였다. 문열공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각각 다름이 있으니, 국사를 논하다가 실패하는 영광이 침묵하다가 당하는 수치만 못하다.” 하고, 마침내 하관(下官)들을 거느리고 글을 올려 극간(極諫)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상관이 끝내 여기에 서명하지 아니하였으니, 여론이 그 상관을 기롱하였다. 상소를 올릴 적마다 세종(世宗)께서 이르기를, “계전(季甸)의 상소가 또 왔구나.” 하고, 마침내 크게 쓸 뜻을 두어 곧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뽑았다.
○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은 어려서 큰 뜻을 두었고 책을 널리 보고 많이 기억하여 재주와 명성이 남보다 크게 뛰어났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고도 태연히 처하여 가슴속에 연연하지 않았다. 내가 맹교(孟郊)의 시에,
문 밖을 나가면 곧 막힘이 있으니 / 出門卽有礙
그 누가 천지를 넓다고 했던가 / 誰謂天地寬
한 것을 외우며, “맹교가 낙방하여 슬퍼하고 곤궁한 것은 그 몸을 용납할 곳이 없어서였는데, 지금 자네가 그렇지 않은가.” 하였더니, 익평공은 웃으며, “과거에 급제하고 급제하지 못함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내가 큰 그릇이 될 것을 알았는데, 뒤에 익평공이 35세에 선비로서 장원에 뽑히고, 46세에 정승에 올라 한때 원훈(元勳)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대개 과거에 실패하면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이 선비의 상정(常情)인데, 공의 큰 도량이 이와 같으니, 맹교의 불우(不遇)함은 어찌 국량(局量)이 작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 문충공 신숙주가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데, 우리 국경에 몇 리(里) 남짓하게 왔을 때, 홀연 폭풍을 만나 배를 미처 언덕에 대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으나 공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자약하여 말씀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사방에 유람하여 흉금을 넓혀야 한다. 지금 큰 물결을 건너서 해 뜨는 나라를 보았으니, 족히 장관(壯觀)이 될 만하다. 만약 이 바람을 타고 금릉(金陵 남경)에 닿게 되어 산하(山河)의 아름다운 경치를 실컷 본다면 이 또한 하나의 장쾌한 일이다.” 하였다.
그때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백성을 데리고 오는 중인데 임산부가 배 안에 있었다.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임산부는 예로부터 뱃길에는 크게 금기시하는 바이니, 마땅히 바다에 던져서 액을 막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람을 죽여서 살기를 구함은 덕(德)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하고, 굳이 만류하였는데 잠시 후에 바람이 진정되었다.
문충공이 처음 과거에 올라 집현전에 뽑혔는데, 하루는 당직이 되어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삼경이 지났다. 세종(世宗)께서 낮은 환관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더니,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고 있었으며, 사경이 되었을 때 또 보내어 엿보게 하였는데, 이와 같이 하고 있었다. 이에 어의(御衣)를 주어서 장려하였다.
○ 충렬공(忠烈公) 구치관(具致寬)은 성품이 엄격하고 공정하였다. 일찍이 이조 판서가 되어 뇌물이나 청탁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그 전에는 이조 판서가 되면 관리를 제수할 적에 으레 친히 선발하는 명부를 잡고 자기 멋대로 행하였고, 참판 이하는 팔짱만 끼고 옆에서 볼 뿐이었는데, 공이 이를 분하게 여기고 그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대체로 사람을 올리고 내리는 데는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취하였고, 비록 작고 낮은 관직이라도 단독으로 추천하지 않았고, 사사 은혜로써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남이 청탁하는 것을 미워하여 혹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올릴 것도 올려주지 않았다. 그때 내가 참의(參議)가 되어 하루는 정방(政房)에 있다가 마침 술이 취하여 잠이 들었는데, 공이 거친 목소리로, “참의는 내가 인물 등용을 마음대로 행한다 하여 참견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후일에 사람을 잘못 쓴 일이 있으면, 참의는 집에 있어서 알지 못하였다고 할 것인가.” 하였다.
일찍이 이름이 알려진 한 문사(文士)를 추천하여 대관(臺官)으로 삼으려 하니, 반박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익살이 심하니 불가하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만약 그러면 한 무제(漢武帝)는 어찌 동방삭(東方朔) 을 취하여 썼겠는가.” 하고, 마침내 대관으로 추천하였다. 또 한 문사가 외군 교관(外郡敎官)으로 있으면서 10년 동안 승진하지 못하였다. 공이 현감(縣監)으로 추천하려 하니, 반대하는 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실정에 어두워서 불가하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천도(天道)도 10년이면 변하는 법인데, 어찌 사람을 이와 같이 오래도록 굽혀둘 것인가.” 하고, 마침내 현감으로 천거하였는데, 그는 과연 훌륭한 치적이 있었다. 공이 사람을 쓰고 버릴 적에 한결같이 공정하게 함이 이와 같았다.
○ 문정공(文靖公) 최항(崔恒)은 성품이 겸손하고 단정하고 간결하여 겉치레를 아니 하며, 평생토록 남과 말할 적에는 먼저 양보함을 보이고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또 별다른 이론(異論)을 세우지 않았다. 글을 짓는 데에도 옛 사람의 규범을 따르지 아니하고 스스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크게 펼쳐놓으니, 웅장하고 풍부함이 장강대하(長江大河)와 같이 물결이 뛰고 넘치고 솟구치고 구비 치듯 형세가 그치지 않았으며, 더욱 변려문(騈驪文)에 공교하여 무릇 조정에서 중국에 올리는 표문(表文)과 전문(牋文)이 다 그 손에서 나왔었다. 중국 사람이 매양 우리나라 표문(表文)이 정밀하고 적절하다고 칭찬한 것은 모두 공이 지은 것이다. 평상시에는 비록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라도 의관을 정제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빠른 말이나 급한 표정을 하지 않았으니, 천성이 그러하였다.
○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어음(語音)이 바르지 못하고, 구두(句讀)가 분명치 못하며, 비록 선유(先儒)인 권근(權近)ㆍ정몽주(鄭夢周) 등의 구결(口訣 한문의 토)이 있으나 아직도 오류가 많은데 진부한 세속의 선비들이 오류를 그대로 이어받음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숙한 신하와 경험 있는 유학자에게 명하여 사서 오경(四書五經)을 …… 주어 고금(古今)의 책을 고증(考證)하여 구결을 정하였고, 또 글하는 선비를 모아서 같고 다름을 강론(講論)하게하고 상감이 직접 결정하였다. 이때 문정공(최항)이 항상 좌우에 있으면서 매양 질문을 받으면 정밀하게 분석하여 민첩하게 응대하니, 상감이 듣고 싫증을 내지 않았다.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영성(寧城 최항이 뒤에 영성부원군이 됨)이 참으로 천재이다.” 하였다.
○ 문헌공(文憲公) 박원형(朴元亨)은 사체(事體)에 통달하고 전고(典故)에 익숙하였다. 중국 사신 진감(陳鑑)ㆍ고윤(高閏)ㆍ장녕(張寧)ㆍ진가유(陳嘉猶) 등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공이 매번 빈관(儐官 접대관)이 되어 주선하고 교제하기를 모두 마땅하게 하였다. 사신 장녕이 일찍이 문헌공에게 말하기를, “그대 같은 재주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났으면 마땅히 진(晉) 나라 숙향(叔向)이나 정(鄭) 나라 자산(子産)의 밑에는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 문헌공(文憲公) 윤자운(尹子雲)이 함길도(咸吉道)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안변(安邊)에 이르렀을 적에, 이시애(李施愛)가 절도사(節度使) 강효문(康孝文)과 길주 목사(吉州牧使) 설정신(薛丁新)을 죽이고는 그 고을을 점거하고 반역을 일으켜서 여러 고을에 심복을 보내어 수령들을 거의 다 죽이니 흉한 무리들이 간 곳마다 서로 합세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공은 밤낮으로 빨리 달려 함흥(咸興)에 이르니, 그날 밤에 역적들이 또 난을 일으켜서 감사 신면(申㴐)을 죽이고는 병력을 이동하여 공의 처소에 이르러 문을 박차고 칼을 뽑아 들고 뜰에 담같이 둘러섰으나, 공은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서 웃으며 말하기를 태연하게 하니 도적들이 두려워서 물러갔다. 도적의 무리들이 제 마음대로 날뛰고 간사함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공이 7일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었지만 태연하게 대처하고 마음을 동요하지 않으니, 도적들 중에 혹 뉘우쳐서 공을 위하여 주선하고 돕는 자가 있어 마침내 무사히 돌아왔다.
○ 동원공(東原公) 함우치(咸禹治)가 일찍이 전라도 감사가 되었는데, 어떤 양반의 집 형제가 서로 큰 가마솥을 가지려고 관청에 소송하는 자가 있었다. 함공이 노하여 아전에게 명하여 급히 크고 작은 두 가마솥을 가져오게 하고 말하기를, “마땅히 깨뜨려서 고르게 …… 주겠다.” 하니, 두 형제가 복종하고 분쟁을 마침내 중지하였다.
○ 지중추(知中樞) 홍일동(洪逸童)은 인격이 우뚝하게 뛰어나고 성품이 천진(天眞)하며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였다 사부(詞賦)에 능하고 술을 많이 마셨는데 정신없이 취하면 풀잎으로 피리 소리를 내었는데, 소리가 비장(悲壯)하고 위엄이 있었다. 평상시에 혼자 오래된 거문고를 어루만졌는데, 줄은 있어도 악보(樂譜)는 없었다. 말하기를, “나의 거문고는 천고(千古)에 전하지 않는 도연명(陶淵明)의 지취(志趣)를 얻었다. 옛날에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자 오직 종자기(鍾子期)만이 그 뜻을 알았는데, 나의 거문고는 도연명이 나오지 않으면 세상에서 알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천지간의 기이한 남자라 할 것이다. 일찍이 상감 앞에서, 부처의 일을 논박하자 세조(世祖)가 거짓으로 성내기를, “이놈을 죽여서 부처에게 사례하겠다.” 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에게 명하여 칼을 가져오라 하여도 홍일동은 태연하게 변론했으며, 좌우가 거짓으로 칼로 정수리를 두 번이나 문질렀지만 돌아보지 아니하고 두려운 빛이 없었다. 세조가 장하게 여겨, “네가 술을 먹겠느냐.” 하니, 일동이 대답하기를, “번쾌(樊噲)는 한(漢) 나라 무사(武士)이며, 항왕(項王 항우)은 다른 나라의 군주였는데도 항왕이 주는 한 동이 술과 돼지다리 하나를 사양치 않았는데, 하물며 성상께서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은 항아리에 술을 가득히 담아 내려주었는데 그는 힘차게 마셨다. 상감이 이르기를,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하니, 홍일동이 대답하기를, “죽는 것이 마땅하면 죽고, 사는 것이 마땅하면 사는 것인데, 감히 죽고 사는 것으로써 그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하니, 상감이 기뻐하여 초구(貂裘) 한 벌을 주어서 위로하였다.
홍일동이 일찍이 진관사(眞寬寺)에서 놀 적에, 떡 한 그릇, 국수 세 주발, 밥 세 바릿대, 두부 국 아홉 주발을 먹었는데, 산 밑에 이르니 대접하는 이가 있어, 또 찐 닭 두 마리, 물고기국 세 주발, 생선회 한 쟁반, 술 마흔 잔을 먹으니, 보는 이들이 대단하게 여겼다. 세조(世祖)가 듣고 홍일동을 불러 묻기를, “참으로 이와 같이 먹었느냐.” 하니, 홍일동이 그렇다고 사과하자, 상감은 장사(壯士)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평상시 출입할 적에는 다만 미숫가루와 전술[醇酒]을 먹을 뿐이요, 밥을 먹지 않았다. 뒤에 홍주(洪州)에 가서 폭음(暴飮)을 하고 곧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배가 터져 죽은 것이라 의심하였다. 뜻이 있어도 시행치 못하였고 벼슬이 그 능력에 차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당(唐) 나라 말기에 정곡(鄭谷)이 시를 잘 지어 세상에서 유명하였는데 그때 사람이 그 관직에 따라 정도관(鄭都官)이라 하였다. 송(宋) 나라 매성유(梅聖兪)가 만년(晩年)에 도관(都官)이 되었다. 어느 날 구양영숙(毆陽永叔)의 집에 모였는데, 유원보(劉元父)가 농담하기를, “매성유의 벼슬이 반드시 여기에 그칠 것이다. 예전에는 정도관(鄭都官)이 있었고 지금은 매도관(梅都官)이 있다.” 하였다. 자리에 있는 손님들이 다 놀라고 매성유도 기뻐하지 않았는데 얼마 아니 되어 매성유가 병들어 죽었다. 내가 젊어서 윤서(尹恕)와 같이 유학하였는데, 윤서가 일찍이 말하기를, “만일 과거에 올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만 되면, 반드시 벼슬을 그만 두겠다. 남자가 명정(銘旌 상여 앞에 들고 가는 기) 위에 정언(正言) 두 글자를 쓰면 만족하다. 제군(諸君)들은 의심치 말라.” 하였는데, 윤서와 내가 갑자년 과거에 올라서 경오년과 신미년 사이에 비로소 정언에 임명되었다. 내가 농담하기를, “벼슬을 그만 둘만하다.” 하니, 윤서가 웃으며, “두고 보라.” 하더니, 얼마 안 되어 병들어 죽었다. 유원보가 매성유에게 농담한 것과 윤서가 스스로 기약한 말이 과연 그대로 부합하였으니, 이는 무슨 이치인가.
○ 문충공(文忠公) 권양촌(權陽村)이 일찍이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는데,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주자(朱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의 말에 의거하여 〈천인심성합일도(天人心性合一圖)〉를 만들었는데, 이는 내용이 광대하여 모든 이치를 포함하였으며, 정묘하고 심오하여 옛 성인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확충하여 후학(後學)에게 무궁한 이치를 열어주었다. ‘군자는 마음을 닦으므로 길하고 소인은 이치를 거스르므로 흉(凶)하다.’ 한 말은, 그 대강만 들어서 배우는 사람에게 보인 것인데 그 뜻이 깊다. 그 조카인 권채(權採) 선생이 또 이 《입학도설》과 주자(朱子)의 《중용장구》와 《대학장구》 및 《혹문(或問)》의 해설에 의거하여, 천리가 유행발육(流行發育)하는 형상과, 학자(學者)가 기질을 변화하여 성인이 되는 방법을 서술하였는데, 그 덕으로 나아가는 선후의 조목은, 공자ㆍ증자ㆍ자사(子思)ㆍ맹자 등의 말을 인용하였고, 그 공부하는 방법의 깊고 얕은 의미는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논설로써 단정하였으며, 그 천인심성(天人心性)의 논설은 양촌(陽村)의 뜻을 발명하여 작성도(作聖圖)를 지었다.
근세에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만든 성불도(成佛圖)가 있고, 종정도(從政圖)가 있는데, 모두 투자(骰子 주사위)를 사용한다. 권채(權採) 선생이 작성도를 만들었는데, 그 종목이 열세 가지가 있으니, 도상론(圖象論)ㆍ성리론(性理論)ㆍ음양론(陰陽論)ㆍ조화론(造化論)ㆍ기질론(氣質論)ㆍ성경론(誠敬論)ㆍ자질론(資質論)ㆍ공부천심론(功夫淺深論)ㆍ용공작철론(用工作輟論)ㆍ현지론(賢智論)ㆍ우불초론(愚不肖論)ㆍ진덕선후론(進德先後論)ㆍ총론(總論) 등인데, 13논(論) 중에 또 다소의 절목(節目)이 있으며, 역시 주사위를 사용한다. 주사위 6면(面)에 성(誠)ㆍ경(敬)ㆍ사(肆)ㆍ위(僞) 4자를 썼는데, 성ㆍ경은 두 번씩 썼으며, 그 글자는 다 수(數)로 나누어서, 주사위를 던지면 그 수로써 나아가는 순서를 삼는다.
무릇 사람의 성품은 학문하기는 싫어하고 놀음하기를 좋아하니, 성불도(成佛圖)와 종정도(從政圖)와 같은 것은 역시 장기와 바둑의 한 종류이다. 한갓 시일만 허비하고 마음 쓸 바는 없는데, 선생이 이 도(圖)를 만든 것은 당초에 놀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이가 그것을 즐겨 하여 그 지혜의 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이는 주사위 쓰는 것을 장기나 바둑에 가깝다 하여 그 뜻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니, 생각지 못함이 심하다. 무릇 주사위를 쓰는 것은 뜻이 주사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ㆍ경ㆍ사ㆍ위의 등분을 보이기 때문이다. 성ㆍ경ㆍ사ㆍ위는 곧 학자의 마음 쓰는 경지이다. 주사위로 인하여, 처음 배우는 이에게 도(道)를 지시함이 더욱 친절한 것이다. 이 도(圖)로써 성인의 도(道)를 구하면 비록 어리석고 어린이들이라도 방향을 알게 할 수 있으며, 덕에 나아가는 순서가 조리가 있고 문란하지 않아서, 성현(聖賢)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도(圖)가 세상에 행하여지지 못하고 선생이 죽었으니, 지금 아는 이는 대개 드물다. 선생의 문장은 중부(仲父) 양촌의 풍모가 있다.
○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은 일찍이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가지고 번거로운 것을 깎고 간략한 것을 취하고, 《고려사(高麗史)》에서 권선징악이 될 만한 것을 더 넣어서 책을 만들어 이름을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이라 하고, 경연(經筵)에 진강(進講)하기를 청하니, 상감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공의 뜻은, ‘경서(經書)는 바야흐로 진강하는 중이요, 고려의 일은 전해들은 것이므로 거울삼아 경계하기에 가장 간절하다.’고 여긴 것이었다. 그러므로 삭제하기도 하고 요약하기도 하고 첨가하기도 하였으니, 보기에 유익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를 평하는 이는 이르기를, “경서는 도(道)를 실은 것이니 전부 성인의 말씀이다. 진덕수의 편찬이 모두 구차한 것이 아닌데, 지금 다 깎아버리면 의리에 온당치 못하니, 옛 《대학연의》에 《고려사》를 보태 넣으면 근사할 것이다.” 하였다.
○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예부 상서(禮部尙書) 정유산(鄭惟産)이 과거에 이름을 봉하고 선비를 뽑는 법을 세웠다. 응시하는 여러 선비들이 시권(試券 시험지) 머리에 성명ㆍ본관ㆍ부ㆍ조ㆍ증조ㆍ외조의 이름을 써서 풀로 봉하고 시험 보기 며칠 전에 시원(試院)에 올리도록 하였다. 과장(科場)을 개시하는 하루 전날 오후에, 주문관(主文官 시관(試官))이 글의 제목 몇 개를 적어 가지고 궁궐 문에 나아가 봉하여 올리면, 임금이 친히 뜯어보고 각각 글제 위에 낙점(落點)하고는 봉하여 도장을 찍어서 내어주면, 주문관이 받아서 시원(試院)에 가지고 간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봉함을 뜯고 글제를 내면 당직한 승선(承宣)이 금인(金印 어보(御寶))을 받들어 시원에 가서 주문관과 같이 앉아서 거자(擧子 과거 보는 사람)의 권봉(券封)에 하나하나 도장을 찍는다. 임금이 또 내시(內侍) 두 사람을 보내어 술과 과일을 주고 주문관 또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한다.
하루가 지난 다음 당직한 승지가 시원에 이르러 권봉을 뜯고 급제자를 발표한다. 제2장(第二場)도 이와 같다. 제3장(第三場)에서는 이경(二更)에 이르러서 글제를 내고 다른 것은 같다. 이틀 사이를 두고 주문관이 각각 합격된 시권(試券)의 표면에다가 등급의 차례를 적은 황지(黃紙)를 붙이고 함에 봉하여 궁궐로 올린다. 임금이 편전(便殿)에 앉고 승선(承宣) 두 사람이 그 함을 받들어 임금 앞에서 봉함을 뜯고 문신(文臣)과 승선이 그 과거의 등급을 읽되, 상하의 등급은 모두 주문의 의망에 의하여 방(榜)을 붙인다. 그 에도 대개 이와 같이 해 왔었다.
국조(國朝)에 이르러 과거의 법이 점점 갖추어졌는데, 시권에 이름을 봉하는 것은 고려와 같고 나머지는 모두 같지 않다. 그 수권관(收卷官)ㆍ봉미관(封䌤官)ㆍ사동관(査同官)ㆍ지동관(枝同官)ㆍ역서(易書) 등의 일은 다 원(元)의 제도를 따랐고, 양쪽에 시장(試場)을 설치함은 세종조(世宗朝)에서 시작되었는데, 혹은 강경(講經)으로, 혹은 제술(製述)로 하여 때에 따라 달랐다.
○ 예전에는 무과(武科)가 없었는데, 태종조(太宗朝)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고사(故事)에 문무과(文武科)의 방(榜)을 내는 날에는 홍패(紅牌)를 하사하고 어사화(御史花)와 어사주(御史酒)를 내렸으며 문무과 1등 3명에게는 별도로 검은 일산[皁盖]을 주었으니, 당시에 큰 영광으로 여겼다. 세조(世祖) 때에 문과는 일산을 주고 무과는 기(旗)를 주어, 유가(遊街)하는 날에는 어린아이와 어리석은 아낙네들도 모두 문과와 무과의 구별을 알게 되니, 무반(武班)들이 자못 기뻐하지 않으므로, 곧 파하고 예전 제도를 회복하였다.
○ 구례(舊例)에는, 벼슬이 정3품에 이르면 문과 시험에 나가지 아니하였고, 6품에 이르면 생원(生員) 진사과(進士科)에 나가지 않았는데, 당상관으로서 문과에 응시한 것은 화산군(花山君) 권반(權攀)에서 시작되었고, 종친(宗親)의 극품(極品 정일품)으로서 시험에 나간 것은 영순군(永順君)에서 시작되었으며, 부마(駙馬) 극품으로서 시험에 나간 것은 세조 때에 시작되었으나 이내 없어졌다.
○ 근일에 과장(科場)에서 부의 제목을 내었는데, 해동청(海東靑 매(鷹))이라 한 것이 있었다. 《운부군옥(韻府群玉)》의 주(註)에 보면 옛 사람의 시구(詩句) 중에
아름다운 글귀는 천하의 이백보다 묘하고 / 麗句妙於天下白
높은 재주는 뛰어남이 해동청과 같도다 / 高才駿似海東靑
한 것이 있는데, 어떤 과거에 온 선비가 잘못 해석하기를, “아름다운 글귀가 천하에 묘한 이는 오직 백고(白高) 한 사람이니, 그 재주의 뛰어남이 해동청과 같도다.” 하였다. 이에 온 과장이 덩달아 따라서 백고(白高)를 부(賦)의 제목으로 삼아 심지어 시를 짓기를
해동청의 보라매여 / 繫海東之爲靑
백고의 높은 재주와 같도다 / 同白高之駿才
하였는데, 시관도 이것을 모르고 선발하여 과거에 오른 이가 많았으니, 이 말을 듣는 이는 심히 목을 움츠리고 웃었다.
○ 국조 이래로 과장(科場)의 문체가 평온하였는데, 계유년과 갑술년 이후로 한두 사람의 문사(文士)가 괴이하고 까다로운 문장으로 과거에 장원으로 뽑히니, 4, 5 ,6년 사이에 문체가 모두 변하여 서곤(西崑 오대(五代) 및 송초(宋初)의 시풍)의 문체가 되고 말았다. 지금 국학(國學 성균관)과 과장에서는 구양공(歐陽公)이 유기(劉幾)를 내친 고사(故事)를 들어서, 그 중에 심한 자를 내치니, 문체가 조금씩 예전과 같아지나 완전히 변하지는 못하였다. 근래 전시 책문(殿試策文)의 기두(起頭)에 한 유생은
모래를 헤치고 금을 가려내니 큰 대장장이의 정밀함이 있고 / 披沙揀金有太冶之精
채찍을 잡고 말에 임하니 백락(말을 잘 아는 사람)의 밝음이 있도다 / 執策臨馬有伯樂之明
하였고, 한 유생은
하늘은 자시에 열리고 / 天開於子
땅은 축시에 열리고 / 地闢於丑
사람은 인시에 열린다 / 人生於寅
하였으니, 그것은 부화(浮華)하여 절실하지 못함이 이와 같다.
○ 구례(舊例)에는 여러 과거의 회시(會試)에는 매번 삼장(三場 초장ㆍ중장ㆍ종장의 세 시험)을 보는 날에 예조에서 잔치를 베풀고, 또 별도로 궁내에서 술과 과일을 내려서 여러 시관(試官)들이 즐겁게 마시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제생(諸生)들에게도 묽은 죽과 청주(淸酒) 수십 동이를 주어 목마름을 풀어주었는데, 식례(式例)가 나오면서 모두 폐지되었다. 근래에 시원(試院)에서 한 참시관(參試官)이 희롱으로 한 구(句)를 지었는데
좌주(시관)는 약주 한 잔도 안 먹었는데 / 座主下飮香醪一盞
어찌하여 얼굴이 붉어지는가 / 何烘其頭
제생들은 먹물 몇 되를 달게 마시니 / 諸生甘吸墨水數升
모두 그 입술이 검어졌도다 / 皆黔其吻
하였다. 나도 한 구를 남겼는데
차주발은 오늘로부터 비로소 커지고 / 茶椀始從今日大
술잔은 지난해에 가득하였음을 기억한다 / 酒杯仍憶去年深
하였더니,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는 갑오년 초시(初試)에서 장원하였고, 정미년 복시(覆試)에서도 장원하였으니, 국조 이후로 한 사람뿐이다.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은 신유년에 생원진사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세 번째로 급제하였으니, 삼한(三韓) 이후로 듣지 못한 일이다. 사성(司成) 남계영(南季英)은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두 번째로 급제하였으니, 역시 그 다음이다.
○ 아버지와 아들이 연달아 장원한 이는 문경공(文景公) 권제(權踶)와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이고, 형과 동생이 연달아 장원한 이는 정언(正言) 유자빈(柳自濱)과 교리(校理) 유자한(柳自漢)이다.
○ 아버지와 아들이 잇달아 정승에 오른 이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성렬공(成烈公) 황수신(黃守身)과 영의정 심온(沈溫)과 좌의정 심회(沈澮)이다.
○ 조선조에 장원으로서 정승에 오른 이는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ㆍ길창(吉昌)부원군 권람(權擥)ㆍ영성(寧城)부원군 최항(崔恒)ㆍ남양(南陽)부원군 홍응(洪應)이며, 고려에 장원하고 조선조에 정승이 된 이는 유량(柳亮)과 맹사성(孟思誠)이다.
○ 갑인년 별시(別試)에 영성부원군 최항은 장원이 되었고, 창녕(昌寧)부원군 조석문(曺錫文)은 방안(榜眼 2등)이 되었고, 연성부원군 박원형(朴元亨)은 탐화(探花 3등)가 되었으며, 능성(綾城)부원군 구치관(具致寬)은 병과(兵科 3등)가 되었는데, 세조(世祖) 때에 네 사람이 잇달아 정승으로 올랐으니, 고금에 없던 일이다.
○ 갑오년(1414) 가을 친시(親試 임금이 직접 과장에 나와서 보이는 과거) 때에 독권관(讀券官) 하륜(河崙) 등이 과거 본 세 사람의 시권(試券)을 뽑아서 올리니, 태종(太宗)께서 이르기를, “마땅히 향을 피우고 기도하며 장원을 뽑던 옛 일을 따를 것이다.” 하고, 손가는 대로 뽑아보니, 곧 문경공(文景公) 권도(權蹈)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도(蹈)의 아버지 근(近)이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였더니, 지금 그 아들이 장원이 되었으니 적이 위안이 된다.” 하고, 하륜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번 과거는 나의 문생(門生)이니, 경등은 자기 문생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므로, 하륜 등이 끝내 좌주(座主)의 예(禮)를 받지 않았다. 경오년 전시(殿試) 때에 독권관이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을 제4등으로 추천하였다. 방이 나오자 문종(文宗)께서 이르기를, “권람은 몇 째가 되었는고.” 하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넷째입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로 하여금 시권을 읽어보게 하시고는 네 번 째에 이르러 “이 글이 진실로 장원이라.” 하고, 친히 제1등으로 뽑았다. 도(蹈)는 뒤에 이름을 제(踶)로 바꾸었는데, 제(踶)의 부자가 장원이 된 것은 모두 임금이 내린 것이다.


 

[주D-001]이금오(李金吾) : 당 나라 두보가 이금오(李金吾)와 함께 술을 먹으며 지은 시에, “취하여 돌아갈 때 통행금지에 걸리지 않겠느냐.” 하니, 금오가, “두렵다.” 했다. 금오는 지금의 검찰청장의 직이므로 이렇게 희롱한 것이다.
[주D-002]왕옥여(王玉汝) : 왕옥여(王玉汝)는 아마도 한옥여(韓玉汝)의 잘못인 듯하다. 송나라 한진(韓縝)의 자가 옥여인데 법을 엄하게 다스리므로 당시 사람들이, “차라리 호랑이를 만날지언정 한옥여를 만나지 말라.” 한 말이 있다.
[주D-003]동방삭(東方朔) : 한(漢)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조정에 미관으로 있으면서 재담과 농담을 잘하였으며 임금 앞에서 괴이한 행동을 하기로 유명하였다.

태종 13년 계사(1413,영락 11)
 6월19일 (병인)
서전문(西箭門)을 열다

서전문(西箭門)을 열었다. 풍수 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楊善)이 상서하였다.
“지리(地理)로 고찰한다면 국도(國都) 장의동(藏義洞) 문과 관광방(觀光坊) 동쪽 고갯길은 바로 경복궁(景福宮)의 좌우 팔입니다. 빌건대, 길을 열지 말아서 지맥(地脈)을 온전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부에 명하여 신문(新門)을 성(城)의 서쪽에 열어서 왕래에 편하게 하였다. 정부에서 이를 상지(相地)하는데, 혹자가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藩)의 집 앞에 옛길이 있으니 적당하다고 말하니, 이숙번이 인덕궁(仁德宮) 앞에 소동(小洞)이 있으므로 길을 열고 문(門)을 세울 만하다고 말하매, 정부에서 그대로 따랐으니, 이숙번을 꺼려한 것이었다. 각사 종으로써 장의동(藏義洞)에서 소나무를 심으라고 명하였다.
【원전】 1 집 674 면
【분류】 *건설-건축(建築) / *왕실-종사(宗社) / *농업-임업(林業)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주D-001]인덕궁(仁德宮) : 정종(定宗).

 

 

세종 15년 계축(1433,선덕 8)
 7월3일 (갑인)
임금이 지신사 안숭선에게 창덕궁을 옮기는 것에 대해 말하다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지신사 안숭선(安崇善)을 인견하고 말하기를,
최양선(崔揚善)이 아뢰기를, ‘경복궁의 북쪽 산이 주산(主山)이 아니라, 목멱산(木覓山)에 올라서 바라보면 향교동(鄕校洞)의 연한 줄기, 지금 승문원(承文院)의 자리가 실로 주산이 되는데, 도읍을 정할 때에 어째서 거기다가 궁궐을 짓지 아니하고 북악산 아래에다 하였을까요. 지리서(地理書)에 이르기를, 「개인의 집이 주산의 혈(穴) 자리에 있으면 자손이 쇠잔해진다.」 하였사오니, 만약 창덕궁을 승문원 자리로 옮기면 만대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하는데, 양선은 미치고 망령된 사람이라 실로 믿을 것이 못되나, 그러나 무식한 나뭇꾼의 말도 성인이 가려 듣는다 하는데, 나무꾼보다는 양선이 나을 것이기에, 곧 전 판청주목사(判淸州牧使)이었던 이진(李秦)을 시켜 양선과 함께 목멱산에 올라가서 바라보게 하였더니, 진(秦)도 역시 양선의 말이 옳다고 한다. 대체로 지리서(地理書)란 것은 속이 깊고 멀어서 다 알기 어렵지마는, 높은 데 올라서 보면 주산의 혈맥은 볼 수 있을 것이니, 청명한 날을 가려서 영의정 황희와 예조 판서 신상(申商)과 함께 이진·이양달(李陽達)·고중안(高仲安)·최양선·정앙(鄭秧) 등을 데리고 목멱산에 올라가서 주산의 혈맥을 바라보아서, 과연 잘못 되었으면 창덕궁은 진실로 옮기기 어려우니, 한 백여 간 되는 것을 지어서 별궁을 삼는 것이 가할 것이다. 근래에 흔히 토목 역사를 일으키는 일이 있지만 놀고 구경하기 위함은 아닌 것이다.”
하니, 숭선이 아뢰기를,
“일이 중대하여 오늘로 결정할 것이 아니오니 황희와 함께 올라가서 바라본 연후에 다시 아뢰겠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원전】 3 집 487 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종사(宗社)


세종 15년 계축(1433,선덕 8)
 7월17일 (무진)
명당에 관한 의논이 분분하니, 임금이 친히 보고 가부를 결정하리라 하다

황희·김자지·하연·정인지·안숭선 등이 이양달 등을 데리고 백악산(白岳山)에 올라 살펴보고, 또 봉황암(鳳凰巖)에 올라가 살펴 바라보았는데, 이진·신효창·최양선 등은 말하기를,
“보현봉(普賢峯)의 바른 줄기가 직접 승문원 터로 들어왔으니 바로 현무(玄武)가 머리를 숙인 땅으로서 나라의 명당이 이만한 데가 없다.”
하고, 이양달·고중안·정앙 등은 말하기를,
“보현봉의 바른 봉우리가 직접 백악봉으로 내려왔다.”
하여, 두 의논이 분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 내가 친히 백악의 내맥 들어온 곳에 올라가 보고 그 가부를 결정하리라.”
하였다.
【원전】 3 집 492 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세종 12년 경술(1430,선덕 5)
 7월7일 (을사)
최양선이 헌릉의 산맥 배양하는 일에 대해 글을 올리다

전 서운 장루(書雲掌漏) 최양선(崔揚善)이 글을 올리기를,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헌릉(獻陵)의 산맥을 배양(培養)하는 일이 심중(心中)에 간절하와 잠시도 늦출 수 없는 일이옵기에 삼가 신의 소견을 써서 아래에 조열(條列)하나이다.
1. 착맥부(捉脈賦)의 주(註)에 이르기를, ‘용호선찰(龍湖禪刹)의 후룡(後龍)은 두 곳이나 끊겨 무력(無力)한 데가 있으니, 그 흥쇠를 징험해 알 수 있고, 구양 태수묘(歐陽太守廟)의 후룡은 병풍을 둘러치듯이 큰 산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어 그의 응험(應驗)이 억만년을 내려가도 변동하지 않으리라.’ 하였으니, 신의 생각에는 본시 한 개의 산이라 할지라도 그 흥폐의 다름이 있는 것은 그 후룡이 끊기고 안 끊긴 데 있다고 여겨지나이다.
1. 곤감가(坤鑑歌)에 이르기를, ‘산을 끊어 가로 길을 내면, 그 기운을 연(連)하기 어려우나, 만약 봉요(蜂腰)로 된 것이라면 도리어 자연스럽다.’ 하였으니, 신의 생각은 조종(祖宗)의 맥(脈)이 들어온 곳에 다시 큰 길을 내어 이를 횡단한다면 그 봉요에 주는 손상을 어찌 자연스럽다고 이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 문정(門庭)에 이르기를, ‘무릇 봉요(蜂腰)와 학슬(鶴膝)을 발견한 뒤에는 따로 입신(立身)을 쓰나니, 입신이 일어나지 않은 곳은 장원(長遠)하지 못하다.’ 하였는데, 신의 생각은 입신(立身)이란 조종(祖宗)을 말한 것이니, 조종의 입맥(立脈)이 끊겼다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사소한 말절(末節)로만 보아 넘길 일이오리까.
1. 입향편(立向篇)에 이르기를, ‘입신(立身)이 조종이 되고, 입수(入首)가 주(主)가 된다.’ 하였으니, 신의 생각은 큰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선 것을 입신이라 이르고, 처음 머리가 들어온 그 마디가 곧 주산(主山)이 되는 것이온데, 그 근저(根底)가 되는 봉요(蜂腰)를 큰 길이 가로 끊은 것은, 이는 지리(地理)에 밝은 자들의 꺼려하는 바라 하겠습니다.
1. 귀겁편(鬼刼篇)에 이르기를, ‘한 마디[一節]의 주장하는 바가 12년이다.’ 하였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만약 이와 같다면 길을 끊어 놓은 것이 그 마디에 있어 손실이 적지 않은 것이니, 어찌 심상히 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 경(經)에 말하기를, ‘기운이 형상에 인하여 오나니 끊긴 산에는 장례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자꾸만 밟아 뭉개면 반드시 형상의 휴손(虧損)을 가져올 것이니, 그 원기가 어디로부터 오겠습니까.
1. 사형편(砂刑篇)에 이르기를, ‘산이 파상(破傷)을 입는 것을 사람이 슬퍼한다.’ 하였습니다. 대저 산에 파상이 있어도 오히려 슬퍼하고 한탄하옵거든, 하물며 주산(主山) 뒤와 봉요(蜂腰)를 이룬 곳에 큰 길의 절단이 가중되는 것이겠습니까.
1. 《보감(寶鑑)》에 이르기를, ‘해[年]는 72후(候)를 넘어서야 세공(歲功)을 이루고, 산도 72후가 있어야만 진룡(眞龍)을 이루나니, 만약 그 수효에 미치지 못한 자는 그 후(候)에 응(應)함도 또한 박하다.’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후룡(後龍)에 길이 있어 이를 끊어버렸다면 어찌 수효에 도달하며, 진룡(眞龍)을 이루었다 이르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음으로도 그윽이 생각하건대, 옛 사람의 풍수(風水)의 학(學)으로 본다면 사실 그러하오나, 당시에 사세(事勢)를 논한다면 또한 불가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도로를 상고하여 보건대 그 동서(東西)로 왕래하는 멀고 가까운 거리의 차이가 일찍이 없고 보니, 만약 동쪽 길을 한번 개통해 놓는다면 길손들은 서로 뒤를 따라 이 길로 달릴 것이니, 그 누가 길을 멀리 돌아다닌다는 원성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순편(順便)한〉 사세가 있는데도 풍수라 호칭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고집을 버리지 않고 있으니 〈무슨 심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신의 좁은 소견이 이와 같아서 차마 입만 다물고 있을 수 없어 자나깨나 잊지 못하고 있사오니, 엎디어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재단(裁斷)하여 시행하옵소서.”
하니, 명하여 이를 예조에 내렸다.
【원전】 3 집 244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세종 12년 경술(1430,선덕 5)
 7월7일 (을사)
고중안이 최양선이 올린 글의 내용을 반박하는 글을 올리다

행 부사직(行副司直) 고중안(高仲安)이 상서(上書)하기를,
“신이 엎드려 최양선(崔揚善)의 상서를 보오니, 용호선찰(龍湖禪刹)과 구양 태수(歐陽太守) 묘비(廟碑)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 헌릉(獻陵)의 봉요(蜂腰)의 길을 막으려고 하기 때문에, 신이 감히 묵과(默過)하지 못하겠사옵기에 삼가 관견(管見)을 가지고 우러러 천총(天聰)을 번독(煩瀆)하는 바입니다. 신은 듣건대, ‘한번 음(陰)하고, 한번 양(陽)하는 것을 곧 도(道)라 이른다.’ 하였으니, 이는 대개 하늘과 땅 사이에 무릇 형체와 기운을 가진 자는 모두 이 도체(道體)의 흐름 속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천(山川)의 형체와 기운이 높은 산악으로부터 일어나서, 그 천 개의 근원과 만 개의 지파(支派)가 혹은 순(順)하기도 하고 혹은 역(逆)하기도 하면서, 한번 일어나 양(陽)이 되고 한번 엎드려 음(陰)이 되어, 음·양의 도를 행하여 수륙(水陸)의 천파(穿破)를 관통하고 절목(節目)의 다소(多少)를 나누어서 크고 작은 형국(形局)을 이루는 것이니, 이것이 곧 지리(地理)의 줄거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라의 도성(都城)으로부터 주(州)·부(府)·군(郡)·현(縣)에 이르기까지 그 봉요(蜂腰)를 길이 끊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는 곧 음·양의 절목인 것입니다. 또 전조(前朝)의 태조(太祖)와 조종(祖宗)의 사당이 예성강(禮成江) 가에 있사온데, 주산(主山)으로 들어온 맥이 길에 의해 끊긴 곳이 많으며, 또 현릉(顯陵) 주산의 뒷맥도 큰 길이 단절하였으니, 또한 모두 한 음(陰)의 절목입니다. 옛날 유추밀(劉樞密)의 할아버지의 분묘(墳墓)는 그 물이 명당(明堂) 앞에서 흘러 나와 주산 뒷맥에 이르러 이를 단절하였고, 또 소단명(蘇端明)의 할아버지의 분묘는 주산 뒷 맥을 큰 길이 단절하였으며, 또 채태사(蔡太師)의 할아버지의 분묘는 주산의 회룡(回龍)이 조종(祖宗)을 돌아보고, 명당(明堂) 앞으로 들어온 맥이 한번 착파(鑿破)되고 이어 끊겼으나, 그 자손들이 혹은 벼슬이 추밀(樞密)에 이르고 혹은 태사(太師) 삼공(三公)에 이르렀으며, 혹은 단명 학사(端明學士)에 이르러 지금까지도 그 산형(山形)을 그려 만대에 유전해 오고 있은즉, 옛 사람들의 자리를 택하는 법이 물과 길에 의해 뚫리고 파헤쳐진 것을 실로 가리지 않은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남시(指南詩)에 이르기를, ‘길이 용 뒤를 끊어도 모두 해로울 것이 없고, 활같이 앞 줄을 품은 것은 더욱 좋으며, 냇물 제당(堤塘)도 동일한 유(類)라. 혈(穴) 앞이 단정하면 세(勢)가 따라 돌아간다.’ 하였고, 《지리문정》에 이르기를, ‘주산이 길에 의해 끊긴 것은 음(陰)의 절목이요, 앞에 교량(橋梁)이 마주 있는 것은 양(陽)의 절목이니, 사람이 왕래한 자취의 다소를 가지고서 흥폐(興廢)의 대소(大小)를 점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 땅에 사람의 자취가 많은 자는 성(盛)한 것이 되고, 적은 자는 쇠(衰)한 것이 된다.’ 하였으며, 《명산보감(明山寶鑑)》에 논하여 이르기를, ‘그 맥(脈)에 밝지 못하다면 어찌 족히 더불어 말하리오. 연면(連綿)하게 멀리 유전할 대지(大地)란 언제나 귀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지리신서(地理新書)》에 이르기를, ‘무릇 지맥(地脈)을 살펴볼때, 도로 같은 것은 비록 깊이 파이고 또 붕괴하였더라도 그 맥은 서로 이어간다.’ 하였으니, 고인(古人)들의 땅을 점쳐 가리던 법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산의 봉요(蜂腰)란 본시 가늘고 작은 것이어늘 어찌 이를 밟아서 손상하랴.’ 하였으니 신은 생각하건대, 산천의 기운이 하늘과 사람을 융회(融會) 관통하고 있어 한번 일어서면 그 기운이 지극히 강(剛)하여 반드시 준수하게 뽑아 극히 높은 데까지 이르나니, 이는 양(陽)의 극(極)이요, 한번 엎드리면 그 기운이 지극히 유순하여 반드시 오목하게 내려가 극히 깊은 데까지 이르나니, 이는 음(陰)의 극(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요의 맥이란 그 오목하게 내려간 것이 그 극에 미칠 수 없는 것이며, 그 골맥(骨脈)이 밖으로 노출하기를 마치 벌의 허리처럼 되어 있다면, 이에 많은 사람들의 발자취를 가하여 그 음양(陰陽)의 성함을 돕게 합니다. 이는 곧 음양을 각기 극한에 이르게 하여 그 절목(節目)의 분별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밤과 낮에 비유한다면 오정(午正)이 아니면 양(陽)의 극(極)이 아니며, 자정(子正)이 아니면 음(陰)의 극이 아닌 것입니다. 사시(四時)에 이르러서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봉요의 맥이라면 반드시 사람의 발자취가 많은 것으로서 융성함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헌릉(獻陵)으로 들어온 산의 맥은 뭇 용(龍)과 허다한 지맥들이 모두 속리산(俗利山)으로부터 오면서 절목을 나누어 각기 주현(州縣)을 이루며 꿈틀꿈틀 내려오다가 갑자기 정돈(停頓)하기도 하고, 다시 달려 능실(陵室) 앞 안산(案山)에 이르러 다시 봉요를 이루고, 길이 또 끊어 놓았으니, 이도 음의 절목입니다. 또 이로부터 수개의 봉우리가 솟아 오르고 주위에 다시 산이 일어나 봉우리를 이루어 건·해방(乾亥方)이 주산(主山)이 되고 있사온데, 조종(祖宗)과 명당(明堂)의 너그러움과 주위의 큰 것 등이 열두 번을 바뀌면서 용을 이루었기 때문에, 용루·보전(龍樓寶殿)과 문관·무고(文官武庫)가 동서로 서 있고, 모든 상서(祥瑞)가 아울러 모였으니, 그 형세의 아름다움과 기운의 온전함이 이와 같이 지극하였습니다. 비록 간혹 작은 시내가 뚫고 끊은 것이 있사오나, 산천의 골맥(骨脈)이 스스로 융회 관통하여 본시 아무런 해가 없는 것이며, 하물며 이 물길이 평원(平原)으로 흘러 내려 그 봉요를 이룬 곳에 다시 역류(逆流)하거나 천단(穿斷)하는 사리가 없는데 어찌하겠습니까. 이를 어찌 용호선찰(龍湖禪刹)의 단절된 뒷 용에 비유하오리까. 또 더욱이 선찰은 부처님의 궁전이라 본시 자손들이 그 대를 잇는 사리가 없으니, 산천의 신령한 기운이 장차 어느 누구에게 화를 주고 복을 준단 말씀입니까. 금세(今世)에 비추어 이를 고찰한다면, 서울의 연복사(演福寺)는 불과 수년에 그 혁파를 보았는데, 이에 반해 유후사(留後司)의 연복사(演福寺)는 거의 5백 년의 장구한 세월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산천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그 3대만에 사찰이 융성하고 5대에 이르러 쇠하며, 쇠한 지 3대에 다시 성한다고 말한 것은 승려들의 모아들고 흩어지는 것이 무상(無常)함을 이른 것입니다. 과연 무슨 자손이 있어 성하고 쇠한다는 것입니까. 이런 까닭에 옛날에 사찰을 설치하기를 반드시 외로운 산, 사람의 종적이 없는 곳이나 또는 많은 산이 나열하고 급한 물이 쏟는 곳을 택한 것이 어찌 그 까닭이 없겠습니까. 또 구양묘비(歐陽廟碑)에 이르기를, ‘이 뒤 80년에 응당 후(侯)에 봉해질 것이요, 또 40년이면 공(公)에 봉해질 것이며, 공이 된 지 30년이면 왕(王)에 봉해지고, 왕이 된 지 50년이면 온 집안이 후에 봉해질 것이니, 그 정한 징험과 효력이 역역히 나타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하오나 구양 태수(歐陽太守)는 수(隨)나라 말기의 사람입니다. 범인(范麟)이 오계(五季)보다도 수백 년 뒤에 태어났사온즉, 구양 자손 중에 왕·공(王公)이 없음을 족히 알았을 것인데 어찌 사실에 없는 말을 가지고 지리의 법술을 증명하였겠습니까. 더욱이 착맥부(捉脈賦)의 글은 범인의 주석본(註釋本)이온데, 1본에는 용호(龍湖)의 말이 있고, 1본에는 이 말이 없습니다. 또 끌어낸 사증(事證)이 이같이 무실(無實)하기 때문에 신은 의심하건대, 1본은 범인의 주해이오나 용호의 일을 끌어 말한 것은 범인의 주해가 아니요, 이는 곧 후세의 일 좋아하는 자들이 덧붙인 말이 아닌가 합니다. 엎드려 성상의 재택(裁擇)을 바라옵니다.”
하니, 명하여 이를 예조에 내리었다. 예조에서 상정소(詳定所)와 더불어 논의해 아뢰기를,
“옛 글을 상고하오니, ‘들어온 산맥의 봉요를 길이 횡단한 것은 본래 해가 되는 것이 없고, 오히려 사람의 자취가 많은 것으로서 귀히 여긴다.’ 하였으니, 헌릉의 산길은 전대로 막지 않는 것이 온당하옵고, 봉요에 시냇물 같은 것은 길을 잃을 형세가 있사오니 즉시 예방하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원전】 3 집 244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출판-서책(書冊)


세종 12년 경술(1430,선덕 5)
 8월21일 (기축)
의정부와 육조에 최양선이 상서한 헌릉에 뚫린 고갯길을 막는 데 대한 가부를 논의하도록 명하다

조참을 받았다.
의정부와 육조에 최양선(崔楊善)이 상서(上書)한 헌릉(獻陵)에 뚫린 고갯길을 막는 데 대한 가부(可否)를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정부와 육조에서 이양달(李陽達)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으니, 양달이 말하기를,
“이 맥(脈)에는 사람의 발자취가 있는 것이 더욱 좋으므로, 막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정부와 육조에서 이양달의 말을 그대로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선은 본래 성질이 거칠고 광혹(狂惑)한 자라서 얻을 것이 없는 자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도〉 혹시 얻을 것이 있나 해서 이를 의논해 보라고 한 것이다. 양달은 지리(地理)에 정통하여 양선에게 견줄 바 아니다. 그러나 본래 길이 없었다면 길을 개통하라는 말을 꼭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헌릉은 깊은 산골이 아니고, 민가(民家)가 상당히 많아서 사람들의 발자취가 끊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지리서(地理書)에는 길이 있어도 해가 없다는 명문이 없을 뿐만 아니라, 길이 없으면 반드시 열어 주어야 한다는 문구도 역시 없으니, 나의 생각으로는 막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
하니, 예조 판서 신상(申商)은,
“신이 지리서(地理書)는 모르오나, 이직(李稷)에게 물으니, ‘산의 형상은 기복(起伏)이 있는 것이라야 좋은 것이 되기 때문에, 벌의 허리처럼 잘록한 산맥을 지리가(地理家)들은 귀중하게 안다.’고 합니다. 벌의 허리로 되면 반드시 길이 있게 마련이온데, 길이 있어서 해로울 게 무엇이 있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논의가 정해지지 않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앞으로 내가 직접 양달과 양선의 말을 들어보고 처리하겠다.”
하였다. 양선은 본래 지리(地理)에 통달하지 못한 자였다.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고 동류(同類)들을 배척하며, 저만 못하다고 말하는 등, 언어와 행동이 극히 좋지 않았다.
【원전】 3 집 255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세종 14년 임자(1432,선덕 7)
 1월15일 (을해)
풍수술 술객 고중안 등에게 원묘의 터를 의논하게 하다

풍수술(風水術)의 술객(術客)인 고중안(高仲安)·최양선(崔楊善) 등이 아뢰기를,
“지금 원묘를 영건(營建)할 터를 살펴보오니, 〈궁궐 뒤의〉 용맥(龍脈)을 파괴하게 되어서 음양술(陰陽術)에서는 꺼리는 바이며, 신(神)의 앞과 불(佛)의 뒤편에는 옛 사람들도 쓰지 않는 것입니다. 또 궁궐을 굽어보며 누르는 형세이니 마땅히 다른 곳에 터를 잡아야 하겠습니다.”
하고, 안숭선이 아뢰기를,
“신은 이만한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양달을 불러서 중안·양선과 더불어 토론하게 하라.”
하였다. 양달이 말하기를,
“이 땅은 정용맥(正龍脈)이 아니니 용맥을 손상할 이치(理致)가 없고, 신의 앞이니, 불의 뒤편이니 하는 것은 사신(邪神)을 말하는 것이지, 어찌 종묘의 신과 같은 신을 말한 것이겠는가. 더군다나 백악(白岳)의 신은 바로 궁궐에 임하고 있으니, 이것은 신의 앞이 아닌가. 만약 신전이기 때문에 좋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백악의 신도 옮겨야 하겠다.”
하니, 중안이 말하기를,
“이 땅은 다만 궁궐을 굽어보며 누르는 형세일 뿐 아니라 주산의 내맥(來脈)을 파괴 손상하는 것이니, 비록 한 간의 초가를 짓더라도 오히려 좋지 못한 것인데, 하물며 깊고 넓은 큰 집이겠는가. 특히 궁금(宮禁)에 임박하여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집을 짓는다면 밟아서 용맥을 파괴하지 않겠는가. 또 더군다나 묘제에 이르기를, ‘당을 정침(正寢)의 동쪽에 세운다.’고 하였는데, 이 터는 바로 궁궐의 북쪽에 있으니 옛 제도에 어긋남이 있다. 만약 성내에 터를 정한다면 옛 한양 객사(漢陽客舍)의 터가 좋고, 성밖에 터를 정한다면 동북쪽 구석에 영조(營造)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양선(楊善)의 논의는 중안(仲安)의 의견과 거의 같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 아침 조계(朝啓) 때에 내가 친히 하교(下敎)하겠다.”
하였다.
【원전】 3 집 368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세종 15년 계축(1433,선덕 8)
 7월3일 (갑인)
임금이 지신사 안숭선에게 창덕궁을 옮기는 것에 대해 말하다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지신사 안숭선(安崇善)을 인견하고 말하기를,
최양선(崔揚善)이 아뢰기를, ‘경복궁의 북쪽 산이 주산(主山)이 아니라, 목멱산(木覓山)에 올라서 바라보면 향교동(鄕校洞)의 연한 줄기, 지금 승문원(承文院)의 자리가 실로 주산이 되는데, 도읍을 정할 때에 어째서 거기다가 궁궐을 짓지 아니하고 북악산 아래에다 하였을까요. 지리서(地理書)에 이르기를, 「개인의 집이 주산의 혈(穴) 자리에 있으면 자손이 쇠잔해진다.」 하였사오니, 만약 창덕궁을 승문원 자리로 옮기면 만대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하는데, 양선은 미치고 망령된 사람이라 실로 믿을 것이 못되나, 그러나 무식한 나뭇꾼의 말도 성인이 가려 듣는다 하는데, 나무꾼보다는 양선이 나을 것이기에, 곧 전 판청주목사(判淸州牧使)이었던 이진(李秦)을 시켜 양선과 함께 목멱산에 올라가서 바라보게 하였더니, 진(秦)도 역시 양선의 말이 옳다고 한다. 대체로 지리서(地理書)란 것은 속이 깊고 멀어서 다 알기 어렵지마는, 높은 데 올라서 보면 주산의 혈맥은 볼 수 있을 것이니, 청명한 날을 가려서 영의정 황희와 예조 판서 신상(申商)과 함께 이진·이양달(李陽達)·고중안(高仲安)·최양선·정앙(鄭秧) 등을 데리고 목멱산에 올라가서 주산의 혈맥을 바라보아서, 과연 잘못 되었으면 창덕궁은 진실로 옮기기 어려우니, 한 백여 간 되는 것을 지어서 별궁을 삼는 것이 가할 것이다. 근래에 흔히 토목 역사를 일으키는 일이 있지만 놀고 구경하기 위함은 아닌 것이다.”
하니, 숭선이 아뢰기를,
“일이 중대하여 오늘로 결정할 것이 아니오니 황희와 함께 올라가서 바라본 연후에 다시 아뢰겠나이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원전】 3 집 487 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종사(宗社)

세종 15년 계축(1433,선덕 8)
 7월7일 (무오)
승정원에 지리에 밝은 자를 널리 선택하여 보고하게 하라고 전지하다

승정원에 전지하기를,
“역대의 거룩한 임금을 보건대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천문 지리까지도 이치를 모르는 것이 없었고, 그만 못한 임금으로서 천문 지리의 이치를 몸소 알지는 못하더라도 아래에서 그 직무를 받들어서 한 자가 세대마다 각기 인재가 있었으니, 진(晉)나라의 곽박(郭璞)과 원(元) 나라의 순신(舜臣)이 그러했고, 우리 나라의 일로 말하더라도 도읍을 건설하고 능 자리를 정하는 데에 모두 술수 전문가의 말을 채용해 왔는데, 지금 헌릉(獻陵) 내맥(來脈)의 길 막는 일에 있어서 이양달(李陽達)과 최양선(崔揚善) 등이 각기 제가 옳다고 고집하여 분분하게 굴어 정하지 못하고, 나도 역시 그런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옳고 그름을 결단하지 못하겠는지라, 장차 집현전의 유신들을 데리고 양달과 함께 날마다 그 이치를 강론하겠으니, 지리에 밝은 자를 널리 선택하여서 보고하게 하라.”
하니, 지신사 안숭선(安崇善) 등이 아뢰기를,
“경연(經延)은 오로지 성현의 학문을 강론하고 구명하여 정치 실시의 근원을 밝히는 곳이온데, 풍수학(風水學)이란 것은 그것이 잡된 술수 중에서도 가장 황당하고 난잡한 것이오니, 강론에 참예시킴이 옳지 못하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그러하더라도 그 근원을 캐 보아야 하겠다.”
하니, 숭선 등이 다시 아뢰기를,
“전부터 이미 경전의 학문만을 한결같이 해 왔는데, 이제 만일 잡된 학문을 강론한다면 오랜 적공이 한번 실수로 헛되이 될까[功虧一簣] 실로 두렵습니다. 하물며 한(漢) 나라의 무제(武帝)는 육경(六經)을 높이 장려하고 백가(百家)를 물리쳐 내었사온데, 그러면 우리 전하의 성스러운 학문이 도리어 한 무제만 못하다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 학문도 역시 국가를 위하는 한 가지 소용되는 것이오라 폐해 버릴 수는 없사오니, 원컨대 경학에 밝은 신하를 선택하여 강습하게 하시되, 제조(提調)를 두어서 그 부지런하고 태만함을 조사하며, 그 잘하고 못함을 살피게 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집현전 부교리 이명겸(李鳴謙)·유의손(柳義孫)·박사 이사철(李思哲)·저작랑 김예몽(金禮蒙)으로 학관(學官)을 삼고, 예문 제학 정인지(鄭麟趾)로 제조를 삼았다.
【원전】 3 집 489 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 *교육-기술교육(技術敎育) / *인사-임면(任免)

세종 15년 계축(1433,선덕 8)
 7월9일 (경신)
황희·신상 등에게 명하여 풍수학하는 자들을 시켜 최양선의 말을 변론하게 하다

영의정 황희·예조 판서 신상·지신사 안숭선 등에게 명하여, 목멱산에 올라서 산수(山水)의 내맥을 탐지해 보고 풍수학하는 이들을 시켜 최양선의 말을 서로 변론하게 하니, 이양달·고중안·정앙(鄭秧)은 백악(白岳)으로 현무(玄武)라 하여 경복궁의 터로서 명당이 된다 하고, 이진·신효창의 말은 양선과 같은지라, 황희 등이 화공을 시키어 삼각산의 지형을 그림으로 만들어 올리게 하고, 풍수학하는 이들을 시켜 각기 소견을 써서 올리게 하여 곧 집현전으로 내려 보냈다. 당시 사람들이 진(秦)과 효창(孝昌) 등이 가만히 양선을 사주하여 지리의 요망한 학설을 가지고 승진되는 계제를 삼으려 한다고 비평하였다. 그 이양달·고중안·정앙 등의 말에는,
“백악은 삼각산 봉우리에서 내려와 보현봉(普賢峰)이 되고, 보현봉에서 내려와 평평한 언덕 두어 마장이 되었다가 우뚝 솟아 일어난 높은 봉우리가 곧 백악인데, 그 아래에 명당을 이루어 널찍하게 바둑판 같이 되어서 1만 명의 군사가 들어설 만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명당이고, 여기가 곧 명당 앞뒤로의 한복판 되는 땅이며, 주산(主山)의 북쪽 바깥 협곡은 삼각산에서 서남쪽으로 둘러서 한 가지[大枝]가 되어 나암사(羅岩寺)의 남쪽 끝으로 돌아 닿고, 그 갈림가지 하나가 역시 서남으로 돌아서 무악재의 서편 가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명당 서북 언덕의 여러 갈래 물줄기가 돌아 흐르는 대략이며, 또 주산의 동북쪽은 그 하나의 큰 가지가 청량동(淸涼洞) 물근원 등처로부터 동북으로 둘러 동남쪽으로 돌아서 큰 들에 이르러 멈추고, 한 가지는 청량동의 물근원으로부터 동남으로 둘러서 벽돌가마[甓瓦窯] 아래 큰 들에 이르러서 그치고, 그 갈림가지 하나가 사한동(沙閑洞) 물근원으로부터 둘러서 그치고, 또 한 가지가 사한동 근원으로부터 남동쪽으로 돌아서 동대문(東大門)에 이르러 그쳤으니, 이것은 명당 동남 언덕 여러갈래 물줄기의 대략이며, 백악 명당의 좌우로써 말하면 왼편 팔[臂]은 주산의 서쪽 가에서 나와서 서남으로 둘러서 동대문 수구(水口)에 이르렀고, 그 오른편 팔은 역시 동남으로 둘러 가지고 역시 동대문 수구에 이르렀다. 그런즉 명당의 전후 좌우가 균제하고 방정하여 불평한 것이 없다. 또 주산의 정통되는 큰 내맥이 남방으로 직행하여 그 기운이 힘차게 왕성하기 때문에, 백악(白嶽)과 인왕(仁王)·무악(毋嶽)·남산(南山)이 모두 우뚝 솟아서 봉우리를 이룬 것이다. 이제 말하는 자들이 내맥이라 하는 것은 그 기운이 작아서 단지 정업원(淨業院) 뒤에 한 작은 봉우리가 일어나서 오직 종묘의 자리를 이루었을 뿐이요, 다른 혈자리를 이루지 못했으니, 만약 이 봉우리가 아니었으면 종묘의 자리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며, 이 봉우리 밖에는 다시는 왕성한 기운이 없기 때문에 종묘 자리가 되고서는 다시 일어난 봉우리가 더 없는 것이다. 곁갈래 맥과 정통의 맥으로서 본다면 종묘는 그것이 곁갈래 맥에서의 정통맥이요, 지금 말하는 자들의 말은 실로 곁갈래 맥에서의 곁갈래 맥인 것이다. 옛사람은 산맥의 크고 작고 왕성하고 쇠약한 것을 초목의 가지와 줄기의 크고 작고 성하고 마른 데에 비하는 것이다.”
하고, 이진·최양선 등의 말에는,
“삼각산의 내맥이 보현봉(普賢峯)이 되고, 보현봉이 우람하게 높고 낮은 언덕땅으로 퍼져 가지고 거기서 양편으로 갈라져서, 왼편 가닥[峽]은 울툭불툭 길게 내려가다가, 이것도 좁은 목을 이루어 안암(安庵) 땅에 이르고, 오른편 가닥은 반 마장쯤 내려오다가 우뚝한 봉우리가 되었으니, 이것이 백악(白嶽)이고, 백악에서 반 마장쯤 내려와서 한 산줄기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인왕산(仁王山)이고, 인왕산에서 2마장쯤 내려오다가 남쪽으로 회돌아서 주산에 절을 하고 섰으니, 이것은 가위 조회 인사하는 정식이라 할 만하여, 가운데에 바른 백이 머리를 동남간으로 들이밀어 2마장쯤 가다가 남쪽으로 회돌아서 주산에 절하고 썼으니 조회 인사의 정식이라 할 만하며, 가운데에 바른 맥이 머리를 동남간으로 들이밀어 2마장을 가서는 언덕을 이루었으니 주산이 된 것이다. 주산의 떨어진 맥이 마치 달아맨 실이 다시 일어나고 벌의 허리가 끊어진듯 이어진 기이한 형상과 같은 것이 이른바 현무(玄武)가 머리숙인 형이란 것이다. 왼편 팔이 구붓하게 혈자리 앞으로 돌아 닿고, 오른편 팔이 활과 같이 명당에 절을 하며 세 겹으로 가지와 잎들처럼 좌우로 감싸안고, 산과 물이 정이 있게 천지를 배포하여 하늘의 관문이 되고 땅의 중축이 되는 곳에 두 편이 가운데를 맞아서 명당이 된 것이니, 바로 존귀한 형국 가운데 모든 물흐름도 하늘 뜻에 합치되니, 이것이 가위 기운의 모인 곳이라 귀하기가 더 말할 수 없다. 경문(經文)에 이르기를, ‘두 물이 껴있는 곳이 곧 명당이다.’고 하였는데, 가지와 잎새가 중앙을 둘러 회돌아 있는 것이 그것이다.”
하였다.
【원전】 3 집 490 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과학-지학(地學) / *왕실-종사(宗社)

세종 15년 계축(1433,선덕 8)
 7월17일 (무진)
명당에 관한 의논이 분분하니, 임금이 친히 보고 가부를 결정하리라 하다

황희·김자지·하연·정인지·안숭선 등이 이양달 등을 데리고 백악산(白岳山)에 올라 살펴보고, 또 봉황암(鳳凰巖)에 올라가 살펴 바라보았는데, 이진·신효창·최양선 등은 말하기를,
“보현봉(普賢峯)의 바른 줄기가 직접 승문원 터로 들어왔으니 바로 현무(玄武)가 머리를 숙인 땅으로서 나라의 명당이 이만한 데가 없다.”
하고, 이양달·고중안·정앙 등은 말하기를,
“보현봉의 바른 봉우리가 직접 백악봉으로 내려왔다.”
하여, 두 의논이 분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일 내가 친히 백악의 내맥 들어온 곳에 올라가 보고 그 가부를 결정하리라.”
하였다.
【원전】 3 집 492 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세종 15년 계축(1433,선덕 8)
 7월18일 (기사)
삼각산 내맥과 승문원 산맥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다

임금이 백악산 중봉에 올라서 삼각산 내맥을 살펴보고, 봉황암으로 내려와서 승문원 산맥의 형세를 살펴보았는데, 이양달·고중안·정앙 및 최양선 등이 각각 이롭고 해로운 점을 설명해 아뢰었다.
【원전】 3 집 493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동국여지승람의자료
무계정사(武溪精舍)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에 있다.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源)에서 놀고 이윽고 이 집을 지었다. ○ 이식(李埴)의 기문이 있다.


단종 1년 계유(1453,경태 4)
 5월19일 (을해)
혜빈이 안평 대군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일을 꾀함을 아뢰다

혜빈(惠嬪)이 밀계(密啓)하기를,
이용(李瑢)이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여 여러 무뢰배를 모으고, 이현로(李賢老)의 말을 듣고서 무계 정사(武溪精舍)를 방룡 소흥(旁龍所興)의 땅에 지었으니, 마땅히 미리 막아야 합니다.”
하였다.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종 김보명(金寶明)이 풍수의 설(說)을 거짓으로 꾸며서 용(瑢)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보현봉(普賢峯) 아래에 집을 지으면, 이것은 《비기(秘記)》에 이른바, ‘명당(明堂)이 장손(長孫)에 이롭고 만대(萬代)에 왕이 일어난다.’는 땅입니다.”
하였으므로, 용(瑢)이 무계 정사(武溪精舍)를 짓고서 핑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산수를 좋아하고 홍진(紅塵)을 좋아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뒤에 김보명(金寶明)이 죽자, 용(瑢)의 계집종 약비(若非)가 자성 왕비(慈聖王妃)에게 아뢰기를,
“잘 죽었다. 살았으면 매우 큰 죄를 지었을 것이다.”
하였다. 백악산(白岳山)이 뒤에 왕이 일어날 땅이라 하고 장손(長孫)에 이롭다고 일컬었는데, 여러 사람들의 듣는 것을 속이었지만 실은 의춘군(宜春君)을 가리킨 것이었다. 용(瑢)이 널리 조사(朝士)와 결탁하려고 ‘시가(詩家)’라고 칭탁하니, 이현로(李賢老)·이승윤(李承胤)·이개(李塏)·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등이 교결(交結)하여 마음으로 굳게 맹세하고 ‘문하(門下)’라고 칭하고, 모두 도서(圖書)의 헌호(軒號)를 지어서 서로 한때의 문사임을 자랑하였으나, 모두 농락(籠絡)당한 것이었다. 이현로 등이 용(瑢)을 칭하여 ‘사백(詞伯)’이라 하고, 또 ‘동평(東平)’이라고도 칭하였다. 김종서(金宗瑞)가 매양 용(瑢)에게 글을 보낼 때 ‘맹말(盟末)’·‘맹로(盟老)’라고 자칭하고 동료로써 대하니, 용(瑢)의 거짓된 명예가 이미 넘쳐서 임금의 자리[神器]를 엿보게 되었다. 이에 권세 있고 부유한 것을 가지고 사람을 멸시함이 아주 많았고, 참람(僭濫)한 물건을 많이 만들어 착용하였으며, 계(契)의 모임에서 시문을 지어서 등급을 매기고, 큰 인장(印章)을 만들어 찍었다. 일이 많이 이와 같았고, 또 마음대로 역마(驛馬)를 사용하기에 이르러, 한때 용(瑢)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용(瑢)에게 글을 보내는 데 한결같이 계서(啓書)와 같이 하여, ‘용비(龍飛)’·‘봉상(鳳翔)’·‘번린(攀鱗)’·‘부익(附翼)’·‘계운(啓運)’·‘개치(開治)’ 등과 같은 용어를 쓰고도 의혹하지 않았으며, 혹은 신이라 칭하는 자도 있었다. 정난(靖難)한 뒤에 많이 얼굴을 바꾸고 꼬리를 흔들었으나, 세조는 모두 묻지 않았다.
【원전】 6 집 593 면
【분류】 *변란(變亂) / *사법-치안(治安)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주D-001]이용(李瑢) : 안평 대군(安平大君).
[주D-002]홍진(紅塵) : 번거롭고 속된 세상.
[주D-003]의춘군(宜春君) :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아들 이우직(李友直).
[주D-004]헌호(軒號) : 당호(堂號).
[주D-005]맹말(盟末) : 맹세한 사람 가운데 끝자리 사람.
[주D-006]맹로(盟老) : 맹세한 사람 가운데 늙은 사람.
[주D-007]정난(靖難) : 계유 정난(癸酉靖難).

단종 1년 계유(1453,경태 4)
 9월5일 (무오)
창덕궁 역부(役夫)로 길에서 굶어 죽는 자가 생기다

창덕궁(昌德宮) 역부(役夫)로 길에서 굶어 죽은 자가 있었다. 처음에 문종이 승하하자, 환시(宦寺)와 대신들은, 노산군(魯山君)이 어린 까닭으로 구궁(舊宮)에 그대로 있는 것이 마땅하지 못하다고 하여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가 창의(倡議)하여 창덕궁을 중수한다는 명분(名分)으로 크게 공사를 일으켰으나, 실상은 자기들의 사저(私邸)를 영조(營造)하였다. 창덕궁의 동우(棟宇)가 아직 튼튼한데도 공사를 장황하게 하여 그치지 않아서 해를 지나도 이루지 못하고 근도(近道)의 선군(船軍)까지 부역시켰다. 선공 부정(繕工副正) 이명민(李命敏)이 그 일을 맡았는데 여러 석공(石工)과 목공(木工)이 모두 거기에 속(屬)하였다. 이명민이 아첨하는 뜻으로 정부(丁夫)를 함부로 부려서 성급히 밤에 낮일을 계속하여 심한 추위에도 폐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이 그 괴로음을 견디지 못하여 굶어서 죽는 것이 연달았다. 병조 판서 정인지(鄭麟趾)가 분하게 여겨, 영선(營繕)을 정지하고 민력(民力)을 덜기를 청하였으나, 황보인이 따르지 아니하므로, 정인지가 고집하여 더욱 청하니, 황보인이 노하여 곧 그 심복(心腹)인 조극관(趙克寬)으로 정인지를 대신하게 하였다. 하루는 한명회(韓明澮)가 이명민을 역소(役所)에서 보았는데, 마침 세조(世祖)가 사람을 지켜 재인(梓人)을 청하니, 이명민이 답하기를,
“공역(工役)이 바야흐로 많아서 감히 명령을 듣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한명회가 희롱하기를,
“네가 안평 대군(安平大君)을 위하여 무계 정사(武溪精舍)를 세웠고, 또 담담정(淡淡亭)을 용산강(龍山江) 위에 지었으며, 또 김정승을 위하여 별실(別室)을 짓는 데에 재목과 기와를 운반해 주고, 집을 얽고 담을 바르는 일을 일찍이 어렵지 않게 하였는데, 같은 왕자인데 홀로 수양 대군(首陽大君)에게는 어찌하여 한 장인(匠人)을 아까와하는가?”
하니, 이명민이 조금 있다가 말하기를,
“네가 어찌 알겠느냐? 안평 대군은 일국에서 우러러보는 바인데,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양 대군 같은 이는 비록 명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지라도 내게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명민은 본디 달리 능함이 없고 나이가 40이 넘어서 비로소 선공 직장(繕工直長)에 제수되었는데, 그 사위의 아비 민신(閔伸)이 선공 제조(繕工提調)가 되어, 그 늙은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숭례문(崇禮門) 역사(役事)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까다롭고 사납고 능간(能幹)함으로써 소문이 나서 이로부터 모든 영선(營繕)은 다 이명민에게 맡게 하였다. 그 공인(工人) 재와(材瓦)와 쓰이는 잡물(雜物)은 그 관할(關轄)을 경유하지 아니하고 바로 제조(提調)에게 품(稟)하여 모두 현장의 역처(役處)로 운반하였으나, 해사(該司)의 관리들이 감히 반대하지 못하여 본감(本監)에 저장한 것이 다 없어졌다. 무릇 제사(諸司)에 이첩(移帖)할 때에 그 끝에 자서(自署)하기를, ‘도청(都廳)’이라고 써서 스스로 구별하니, 역부(役夫)들이 지목하기를, ‘이도청(李都廳)’이라고 하였다. 이때 권귀(權貴)들이 사사로이 집을 짓는 자가 구하는 것이 있으면 문득 응낙해 주니,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모두 덕을 보았다고 하여 조정에서 칭찬하였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차례로 지냈고, 한 역사(役事)를 마치자마자 문득 1급(級)을 더하여 몇 해 사이에 갑자기 부정(副正)에 이르니, 벼슬에 나아가기를 꾀하는 무리들이 그 하는 바를 다투어 부러워하였다.
【원전】 6 집 612 면
【분류】 *군사-관방(關防) / *변란-정변(政變) / *인물(人物) / *건설-건축(建築)


[주D-001]동우(棟宇) : 집의 마룻대와 추녀 끝.
[주D-002]재인(梓人) : 목수.
[주D-003]본감(本監) : 선공감(繕工監).

단종 1년 계유(1453,경태 4)
 10월10일 (계사)
김종서의 가족이 그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다

김종서(金宗瑞)가 죽으니, 손녀가 있어 악한 말을 하기를,
“적(賊)이 항상 이와 같은 일을 꾀하리라고 매양 저물면 무거운 갑옷을 입고 동산을 오르내리시더니……”
하고, 김승규(金承珪)의 처가 또한 악한 말을 하기를,
“매양 담을 넘는 것을 시험하더니, 이제 이와 같이 되었구나!”
하고, 김종서의 늙은 첩이 또한 말하기를,
“부자가 홀로 더불어 꾀하고 의논하기를 7, 8일을 하더니, 죽음을 당하였구나!”
하였다. 황보인(皇甫仁)이 부름을 당하여 올 때에 종묘(宗廟) 창덕궁(昌德宮) 동구에 이르니, 모두가 초헌을 내리지 않고 말하기를,
“지금에 이르러 초헌에서 내려서 무엇하겠습니까? 지체하고자 하다가 부득이하여 왔습니다.”
하고, 지인(知印)이 김종서의 죽음을 고하니, 황보인이 사인 이예장(李禮長)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나의 후사(後事)를 보호하여 주게.”
하였다. 민신(閔伸)이 일찍이 이명민(李命敏)에게 말하기를,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무계 정사(武溪精舍)를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용이 일어날[興龍] 땅이라 하는데, 모의(謀議)가 누설된 것이 아닌가?”
하니, 이명민이 말하기를,
“이현로(李賢老)가 이르기를, ‘큰용[旁龍]이 일어날 땅이라.’ 하였다. 이미 황보인·김종서와 더불어 의논하여 정하고 하는 일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
하였다. 민신이 매양 이용(李瑢)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취하여 돌아오면 문득 스스로 탄식하기를,
“국가에서 나의 죄를 알지 못하고 살려 둔다.”
하였다. 민신이 비석소(碑石所)에 있어 감독하는데, 하루는 술이 취하여 크게 울었다. 이날 저물녘에 서조(徐遭)가 가서 불러내니, 민신이 나오지 않고 말하기를,
“무슨 일로 나를 부르는가?”
하였다. 서조가 나오기를 독촉하니, 그제서야 나와서 형(刑)에 임하여 말하기를,
“내 죄를 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민신이 역소(役所)에 있어 꿈을 꾸었는데, 쇠 부처[鐵佛]가 목구멍에서 나와서 어깨 위에 앉았다가 공중으로 날라 사라졌다. 깊이 괴이하게 여기어 서울에 들어와 어머니를 뵙고 하직하고 돌아갔는데, 수일이 못 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원전】 6 집 624 면
【분류】 *변란-정변(政變) / *인물(人物)


단종 1년 계유(1453,경태 4)
 10월12일 (을미)
정양이 이용의 부자를 벨 것과 불당을 헐 것을 청하다

대간(臺諫)에서 합사(合司)하여 대궐에 나와 정양(鄭穰)이 아뢰기를,
“지금 간당(奸黨)이 비록 주형(誅刑)을 당하였으나, 이용(李瑢)의 부자가 수악(首惡)으로서 오히려 보전하고 있습니다. 신 등이 어제 소(疏)를 갖추어 베이기를 청하였으나, 아직도 천형(天刑)을 지체하시니, 통민(痛憫)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옛적에 주공(周公)이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베이고 우리 조정에서도 또한 방간(芳幹) 부자를 베었으니, 모두 사은으로 공의를 폐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고, 권준(權蹲)은 아뢰기를,
“어제 신이 승정원(承政院)에 있어 이미 주상의 뜻을 알고 신이 간청하고자 하였으나, 다만 법사에서 그때에 마침 다투어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못하였을 따름입니다. 신 등의 말을 좇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정양이 또 아뢰기를,
“불당(佛堂)이 꺼리는 방위에 있는데, 황보인(皇甫仁) 등이 고집하여 차마 못한다 하였습니다. 처음에 신 등이 생각하기를, 경중(輕重)을 알지 못한다 하였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면 소위 차마 못한다는 말은 해(害)가 있게 하고자 할 뿐이었으니, 간사(姦詐)하고 속인 것이 실로 깊습니다. 청컨대 꼭 헐으소서.”
하고, 권준이 또 아뢰기를,
“처음에 주상께서 경복궁(景福宮)에 환어(還御)하시고자 하니, 황보인 등이 불가하다 하고 창덕궁(昌德宮)에 옮기어 새 별실(別室)에서 조계(朝啓)를 받고 종친(宗親)을 접하는 것이 좋다고 청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별실은 쓸쓸하고 외로운데 무슨 까닭으로 이어(移御)하시기를 청하는가 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이것도 또한 뜻이 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법사의 말을 따라 불당을 헐으소서.”
하고, 김길통(金吉通)은 아뢰기를,
“간당을 모두 베었는데 정분(鄭苯) 등은 홀로 안치(安置)하였으니, 청컨대 모두 베소서.”
하고, 정식(鄭軾)은 아뢰기를,
“주형(誅刑)을 당한 사람의 자손은 16세 이상이면 율(律)에 모두 교형(絞刑)을 처하여야 하는데, 지금 혹은 죽이고 혹은 안치(安置)하였으며 이용(李瑢)이 지은 무계 정사(武溪精舍)는 신 등이 처음에도 또한 지을 장소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청컨대 꼭 철거하소서.”
하니, 정부(政府)에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원전】 6 집 626 면
【분류】 *변란-정변(政變) / *사법-재판(裁判) / *사상-불교(佛敎) / *왕실-행행(行幸)


[주D-001]합사(合司) : 나라의 중대한 일을 처리하거나 의논할 때 두 개 이상의 관사(官司)가 서로 합하여 일을 보던 것을 말함.
[주D-002]무계 정사(武溪精舍) :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여러 문사(文士)들과 교유하던 정자. 백악(白岳)의 북쪽에 있었음.

 

단종 1년 계유(1453,경태 4)
 10월25일 (무신)
이용이 반역 모의한 정상을 조목을 열거하여 효유한 내용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이용(李瑢)의 모역(謀逆)한 정상을 대소 인민이 혹 알지 못하니, 청컨대 조목(條目)을 자세히 열거하여 중외에 효유(曉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 용(瑢)의 역모는 하루 아침 하루 저녁이 아니라, 세종(世宗)·문종(文宗) 때에 있어, 맹인(盲人) 지화(池華)가 용의 운수(運數)를 보고 망령되게 군왕의 운수라고 말하였고, 이현로(李賢老)가 또한 말하기를, 귀(貴)하기가 말할 수 없어서 국군(國君)의 팔자(八字)라 하고, 또 참서(讖書)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하원 갑자(下元甲子)에, ‘성인(聖人)이 나와서 목멱정(木覓井)의 물을 마신다.’운운(云云)하였는데, 백악(白岳) 북쪽이 바로 그 곳이어서 참으로 왕업을 일으킬 땅이니, 그 곳에 살면 복을 받을 수 있다 하였다. 용(瑢)이 그것을 믿어 그 곳에 집을 짓고 무계 정사(武溪精舍)라고 칭호하여 부참(符讖)에 응하려고 하였으며, 또 여러 번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끝내 대군만 되고 말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1. 지화(池和)가 주상의 성산(聖算)과 의춘군(宜春君) 이우직(李友直)의 팔자를 비교하여 점을 쳤다.
1. 용(瑢)이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후사(後嗣)가 되어, 성녕의 부인 성씨(成氏)를 간통하였고, 또 세종 때에 궁의 담을 넘어 출입하여 두어 계집종[婢]을 간음하였고, 또 세종 2년 안에 여러 소인들과 더불어 미복(微服) 차림으로 마을에 나가 간음하여 남의 아내와 첩을 빼앗은 것이 그 수를 알 수 없고 상피(相避)도 가리지 않아서 꺼리는 바가 없었다.
1. 용(瑢)이 가만히 국내의 대소(大小)의 조사(朝士)와 불령(不逞)한 무리에게 후하게 베풀어 인심을 거두어 후일의 지반을 만드니, 불령(不逞)한 소인들이 구름처럼 붙어다니었다.
1. 용(瑢)이 이미 집정 대신과 결탁하고, 또 근시하는 환관 김연(金衍) 등과 결탁하여 내외(內外)로 상응하여 화(禍)가 예측할 수 없는 데에 있었다.
1. 용(瑢)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밤을 틈타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정분(鄭笨)·이양(李穰)·민신(閔伸) 등과 자주 연회하고 마시면서 종적(踪迹)을 심히 비밀로 하였다.
1. 황보인·김종서·정분·이양·민신 등에게 지시하여 심복(心腹)인 조극관(趙克寬)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고, 조충손(趙衷孫)을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삼아 병권(兵權)을 맡게 하고, 윤처공(尹處恭)을 군기 판사(軍器判事)로 삼고, 조번(趙藩)을 군기 녹사(軍器錄事)로 삼아 병기를 맡게 하였다.
1. 군기 판사(軍器判事) 윤처공(尹處恭)·녹사(錄事) 조번(趙藩)·지부(知部) 김승규(金承珪)·진무(鎭撫) 원구(元矩) 등이 밤낮으로 서로 용(瑢)의 집에 모여서 심복이 되고, 윤처공·조번은 무고(武庫)와 병장(兵仗)을 맡아 응원을 도모함으로써 날을 기약하여 거사하려 하였다.
1. 김종서(金宗瑞)의 집이 성(城)의 서문 밖에 있었는데 용(瑢)이 김종서의 계책을 써서 언제나 마포(麻浦) 별장에서 서로 모이기를 편하게 하여, 서로 내왕하면서 마포에서 모여 자지 않으면 반드시 김종서의 집에 모여 잤다.
1. 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은 본래 용(瑢)의 당인데, 조수량이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어, 용의 마포 별장에 모여서 정자 위에서 마시고 또 배가운데서 마시어 사람을 물리치고 비밀히 심사를 말하였으며, 금대(金帶) 같은 물건을 바치었고, 용은 또 아내를 장사(葬事)하는 일로 여흥(驪興)에 이르러,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안완경(安完慶)을 청하여 맞아서 연회하여 마시고, 친히 먹을 것을 주고 비밀한 말로 약속하였다.
1. 용(瑢)이 정분(鄭笨)에게 후하게 뇌물(賂物)을 주고 밤을 타서 서로 모였으며, 정분도 또한 선공감(繕工監)의 공장(工匠)과 재목·기와를 나누어 용에게 헤아릴 수 없이 주었으며, 또 이명민(李命敏)을 시켜 용의 청을 모조리 들어 못하는 것이 없었다.
1. 용(瑢)이 항상 사냥을 빙자하여 말탄 군사 1백여를 이끌고 때없이 출입하여 나라 사람의 이목에 익혔으며, 이르는 주군(州郡)마다 분주하게 지응(支應)하는 것이 거가(車駕)와 같았다. 당원(黨援)이 나라에 가득하고 또 서로 결탁한 조사(朝士)들이 밤을 범하여 내왕하여 마포의 길이 탄탄대로가 되었다.
1. 용(瑢)이 해주(海州)에 갈 때에 사냥을 칭탁하고 배천(白川)으로부터 해주(海州)에 이르기까지 군사를 발하여 크게 사냥하여, 쓸 수 있는가의 여부(與否)를 시험하여 열흘에 이르렀다.
1. 제수(除授)의 권세가 모두 용(瑢)의 뜻에서 나와, 승직(僧職)·제수(除授)의 여탈(與奪)을 오로지 임의로 하여 스스로 위복(威福)을 지어서 인심을 거두고, 무릇 간청하는 것을 황보인과 김종서가 따르지 않음이 없었다.
1. 이현로(李賢老)가 가만히 역사(力士) 수십 인을 길러 자칭 휘하(麾下)라 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를, ‘내 휘하는 모두 장용(壯勇)한 사람이다.’ 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남아(男兒)의 공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이 내 재주를 내었으니 반드시 쓸 데가 있을 것이다.’ 하고, 또 사람에게 말하기를, ‘멀지 않아 반드시 난(亂)이 일어날 것이다. 내가 안평(安平)에게 권하여 「힘써 인심을 수습하라.」고 하였다.’ 하였다.
1. 황보인·김종서·이양 등이 용(瑢)의 중한 뇌물을 받고 지난해 가을에 함길도(咸吉道)로 하여금 군사를 발하게 하고 자기들은 내응하여서 용을 추대하고자 하여, 경성(鏡城)의 병기를 배로 안변(安邊)에 실어오도록 하였으나, 마침내 간 곳이 없었다. 또 도모하기를, 함길도(咸吉道)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변방의 급한 것을 보고하면 김종서가 먼저 가서 방어하고 회군하여 이르면, 이양이 경중(京中)으로부터 김종서를 맞아서 물리친다고 성언(聖言)하고는 양쪽 군사가 합세하여 서울로 돌아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하였고, 또 달달(韃靼)의 성식(聲息)을 칭탁하여 말하여 황해도(黃海道)·충청도(忠淸道) 두 도(道) 연해(沿海) 여러 고을의 군기를 배로 실어 마포(麻浦)에 이르면, 용(瑢)이 스스로 거느려 일어나고, 이명민(李命敏)은 따로 역도(役徒) 중의 장용(壯勇)한 자를 뽑아서 경중으로부터 응하면, 또한 뜻을 이룰 수 있다 하여, 그리 하고자 하였다.
1. 지난해 가을에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이현로(李賢老)가 망령되게 화복(禍福)을 말하여 용(瑢)을 꾀이어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하기를 도모하는 것을 알고 용(瑢) 및 황보인·김종서와 더불어 한곳에 모인 자리에서 이현로를 때리어 짐짓 사단(事端)을 발하여 장차 법에 처치하려 하였으나, 황보인·김종서 등이 용에게 아부하여 끝내 내버려두고 묻지 않았다.
1. 용(瑢)이 해주(海州)에서 목욕한다 칭탁하여 평양(平壤) 기생 박비(朴妃)를 실어 오고, 또 군사를 발하여 사냥하였는데, 뒤에 헌사(憲司)에서 추핵(推劾)하니, 황보인·김종서 등이 중간에서 저지하여 묻지 않았다.
1. 주상(主上)께서 처음 즉위하여 내린 교서(敎書) 안에 오직 당상 이상 및 연변(沿邊) 수령·대성(臺省)·정조(政曹) 등의 벼슬은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검찰(檢察)하여 제수하라 하였는데, 황보인·김종서 등이 주상을 어리다고 무시하고 문무관(文武官)의 제수를 대소 할 것 없이 모두 다 잡고 권세를 오로지하여 황표(黃標)를 붙여서 주상으로 하여금 손을 놀릴 수 없게 하고, 탐욕을 자행하여 공공연하게 뇌물을 받아, 주군(州郡)에서 뇌물로 올리는 것이 공물(貢物) 바치는 것보다 배나 되었으며, 조정(朝政)을 탁란(濁亂)하여 매관(賣官)하고 옥(獄)을 파는 것이 이르지 않음이 없었다. 마음에 화심(禍心)을 간직하여 용(瑢)에게 아부하여 용의 복심으로 하여금 중외에 포열(布列)하여 권세 있는 요직을 나누어 차지하였다.
1. 집의(執義) 하위지(河緯地)가 여러번 면대(面對)하기를 청하니, 주상이 인견(引見)하고자 하였는데, 황보인·김종서 등이 억제하고 막아서 언로(言路)를 막았고, 또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이 경연(經筵)에서 황보인·김종서 등의 권세를 오로지하고 불법한 일을 극력 진달하니, 주상이 모두 의윤(依允)하였는데 황보인·김종서 등이 친 자식의 관직을 더하는 것을 피하지 않고, 천총(天聰)을 속이는 것이 모두 다 옛과 같았으며, 유성원이 직언(直言)을 꺼려서 다른 벼슬로 고쳐 제수하고, 부드럽고 나약한 자나 자기에게 부동(附同)하는 자를 끌어들여 대간(臺諫)에 포열(布列)하여, 방자하게 행동하기가 기탄(忌憚)이 없었으며, 또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예전 예에 의하여 내종친(內宗親)을 접견하기를 아뢰어 청하니, 황보인 등이 자기의 잘못을 말할까 꺼려서 또한 저지시켰다.
1. 황보인·민신 등이 용(瑢)의 심복 이명민으로 하여금 많이 역도(役徒)를 맡아서 응원에 대비하고, 용(瑢)은 이명민에게 의복·안마(鞍馬)를 후하게 주었으며, 무릇 영선(營繕)에 있어, 크면 재목·기와·철·돌 같은 물건과 작으면 단청(丹靑) 같은 모든 필요한 것을 자기 물건 쓰듯 하였다.
1. 김종서가 김연(金衍)과 결탁하려 주상의 동정(動靜)을 엿보아 말하고 웃는 미미한 것까지 알지 못함이 없었다.
1. 허후(許詡)가 용(瑢)의 집에 자주 왕래하고, 황보인·김종서에게 여우처럼 아첨하여 황보인과 김종서의 아들·사위를 발탁하여 통현(通顯)한 자리에 두고, 매양 전주(銓注)를 당하면 황보인과 김종서의 뜻에 맞추기를 바랐다.
1. 이징옥(李澄玉)은 한 방면의 대장으로서, 경성 부사(鏡城府使) 이경유(李耕㽥)가 황보인·김종서의 역모를 받아 군기(軍器)를 도둑질하여 실어 낸 것을 알고도 끝내 내버려두고 묻지 않았다.
1. 조순생(趙順生)·이석정(李石貞)·지정(池淨) 등은 함께 무관으로서 용(瑢)에게 아부하여 밤낮으로 왕래하여 함께 당원(黨援)이 되었다.”
하였다.
【원전】 6 집 632 면
【분류】 *변란-정변(政變) / *사법-행형(行刑) / *인물(人物)
朴先生遺稿
 
次武溪酬唱詩韻 五首 a_009_456b


境幽四面環靑山。廻旣紛囂塵土間。流水桃花迷晉客。紫芝白石眞商顏。更無世事留感夢。惟有閑雲來鎖關。試向此中終作主。鬼神安得能相慳。

春風淡蕩開松扉。盡日往來輪鞅稀。雨歇花臺晴藹藹。煙深蘭畹風猗猗。高遊雲水䴢鹿友。下視塵土蠛蠓飛。淸懽自是樂幽討。倘許他年分隱芝。

山深草樹掩蒙籠。隱約雲嵐時見宮。擾擾人間困炎熱。泠泠天上多淸風。流軒脩竹凝碧翠。隔葉幽花時白紅。高臥北窓有餘興。夢魂無復塵埃鬆。

009_456c秋來落葉滿山深。惻惻郍禁徂歲心。露冷階梧摧碧玉。霜繁野菊開黃金。樽前獨舞衝星釰。月下長彈流水琴。早識漢陰機事息。只應猿鶴來相尋。

靈仙窟宅謝紛喧。蘭若隔雲爲我隣。竹葉醲薰窓外雪。梅花漏洩山中春。也知詩藻多閑趣。寧有笑談沾俗塵。我獨一身在泥滓。浮名只足勞心神。


附元韻幷序
余於丁卯四月。有桃源之夢。去年九月。偶乘遊覽。見菊花之泛流。遂攀挽藤石。始得此地。於是。校其夢覩。則草樹參差之狀。川原窈窕009_456d之態。稍可髣髴。乃至今年。結構數間。取武溪之意。扁其戶曰武溪精舍。實怡神樓隱之地也。仍成雜詠五章。以備來訪之所問。
他年夜夢歷春山。訪入桃源莽蒼間。投紱有懷常在臆。誅茅今日始怡顏。地偏爲樂饒休暇。路阻無人肯扣關。應是前生我泉石。時人莫笑盜天慳。

偸閑無事掩柴扉。塵世親朋到者稀。細逐春敷紅灼灼。不隨霜謝綠猗猗。黃鸝上樹間關語。玄烏巡簷慣習飛。誰說市朝金帛貴。靑山亦有紫莖芝。

兩山松櫟鬱蔥龍。中有軒楹似梵宮。濯足坐從斜009_457a水石。披襟臥受度溪風。垂門楊柳嚬眉翠。滿沼荷花靦面紅。頗覺年來機事息。樹陰深處鬢髼鬆。

幽居勝事在秋深。滿眼寒光適我心。霜染丹楓林燒火。露團黃菊月翻金。懸厓有軸長生畫。流水無聲太古琴。溪北溪南梨栗熟。閑隨猿狖也相尋。

閉門終日斥囂喧。兀坐蒲團儘絶隣。滿地雪花爭入句。上階梅影已傳春。逃禪縱有招人謗。養拙還同避世塵。永夜寥寥何事足。一爐香火長精神。

景泰二年辛未秋七月二十有一日。泉主人琅玕居士淸之。書。
 硏經齋全集外集卷三十七
 傳記類
東學寺魂記釋 a_277_098d


東學寺。一作東鶴寺。在公州鷄龍山。不知何代所刱。相傳世祖幸焉。駐三朔。仍定爲願堂。祀我端廟及麗王。與夫麗末本朝寃死人。後寺火。獨冥府殿五間存。而今亦頹圮。有老僧數人寄寓於隣近天藏菴。賜印一顆魂記一㢧。277_099a移藏岬寺。舊則每歲四名節及月朔望。緇徒具袈裟齊會。誦魂記一通。設醮如供佛。名節盛設。朔望只蔬果。近因寺殘闕之。賜印卽天順年間所鑄朱文佛法僧寶。魂記凡十三葉。葉皆烏絲欄。上格書麗王及麗末人。下格書端廟諱及本朝人。人皆類附。名皆橫列。左向葉際。皆署官印。印文漫然。若禮曹之印四字。册長八寸許。廣六寸許。
天順元年九月日。
天順元年。卽世祖三年丁丑也。是歲六月。端277_099b廟降號魯山君。十月二十四日。昇遐于寧越。魂記成於九月。端廟時未昇遐。而徑設醮祀無是理。且奉石柱,崔潤孫等。皆靖難功臣。後以搆亂誅。康純,南性。國史無南性死者。卽怡之訛。 至睿宗朝。因柳子光所搆誅。距天順又遠。此記恐非一時所錄。然編簡斷缺。有不可考。
朝鮮國王記付。
記付者。文簿句語。如判付到付分付之類是也。
高麗世祖王隆。
初諱龍。後改隆。字文明。生太祖。太祖卽位。追謚世277_099c祖。葬昌陵。
太祖王建。
字若天。唐乾符四年丁酉。生於松嶽南第。仕弓裔歷侍中。屢立戰功。弓裔暴虐喜誅殺。國人叛之。後梁末帝貞明四年。洪儒,裵玄慶等。詣太祖言推戴意。擁而出。弓裔從北門亡去。遂卽位。改元天授。國號高麗。降金傅虜甄萱。巡北鄙定西京。改官名設學校。在位二十六年薨。壽六十七。葬顯陵。
惠宗武。
字承乾。太祖長子。母莊和王后吳氏。后嘗夢浦龍277_099d入腹。未幾太祖以水軍將軍。出鎭羅州。泊舟木浦。望見川上有五色雲氣。至則后浣布。召幸之有娠。生惠宗。太祖恐母微不得嗣。以故笥盛柘黃袍賜后。后示大匡朴述煕。述煕請立爲正胤。太祖薨。奉遺詔卽位二年薨。壽三十四。葬順陵。
定宗高。麗史高作堯。
字天儀。太祖第二子。母神明順聖王太后劉氏。惠宗薨。羣臣奉王卽位四年。禪于母弟昭。移御帝釋院薨。葬安陵。
光宗昭。
277_100a字日華。定宗母弟。受定宗內禪。在位二十六年薨。壽五十一。葬憲陵。
敬宗哲。麗史敬作景。哲作伷。
字長民。光宗長子。母太穆王后皇甫氏。光宗薨。卽位六年薨。壽三十七。葬榮陵。
成宗治。
字溫古。太祖孫。戴宗子也。母宣義太后柳氏。初封開寧君。受敬宗內禪。在位十八年薨。壽三十八。葬康陵。
穆宗誦。
277_100b字孝伸。景宗長子。母獻哀太后皇甫氏。受成宗內禪。卽位十二年。爲西京巡檢康兆所廢。爲讓國公。王奉太后向忠州。行至積城縣。兆遣人弑之。壽三十。顯宗三年。葬義陵。
顯宗詢。
字安世。安宗子。母孝肅王后皇甫氏。后夢登鵠嶺而旋。流溢國中。盡成銀海。卜之。曰生子王有一國。時安宗邸與后第近。因往來通有娠。后嘗宿安宗邸。成宗知之。乃流安宗。后慚恨還其第。纔及門胎動。攀門前柳枝娩而卒。成宗擇母養之。封大良院277_100c君。年十二。千秋太后忌之逼。祝髮㝢三角神穴寺。穆宗遇弑。羣臣迎王卽位二十二年薨。壽四十。葬宣陵。
德宗敬。麗史敬作欽。
字元良。顯宗長子。母元城太后金氏。初封延慶君。顯宗薨。卽位三年。禪于弟亨。尋薨。壽十九。葬肅陵。
靖宗露現。麗史露現作亨。
字申炤。德宗母弟。初封平壤君。受德宗內禪。在位十二年。禪于弟徽。尋薨。壽二十九。葬周陵。
文宗美。麗史美作徽。
277_100d字燭幽。初諱緖顯。靖宗母弟。初封樂浪君。受靖宗內禪。在位三十七年薨。壽六十。葬景陵。
順宗熏。麗史熏作勳
字義恭。初諱杰。文宗長子。母仁睿順德太后李氏。文宗薨。卽位尋薨。在位四月。壽三十七。葬成陵。
宣宗運。
字繼天。初諱蒸。又諱祈。順宗母弟。初封國原公。順宗薨。奉遺詔卽位十一年薨。壽四十六。葬仁陵。
獻宗昱。麗史獻作憲。
宣宗長子。母思肅太后李氏。宣宗薨。卽位一年薨。277_101a壽十四。葬隱陵。
肅宗顒。
字天常。初諱煕。避遼末帝名。改今諱。順宗母弟。初封雞林公。受獻宗內禪。卽位十年薨。壽五十二。葬英陵。
睿宗俁。
字世民。肅宗長子。母明懿太后柳氏。肅宗薨。卽位十七年薨。壽四十四。葬裕陵。
仁宗禧。麗史편001作楷。
字仁表。初諱搆。睿宗長子。母順德王后李氏。睿宗277_101b薨。卽位二十四年。禪于太子睍。尋薨。壽三十八。葬長陵。
毅宗睍。
字日升。初諱徹。仁宗子。母恭睿太后任氏。受仁宗內禪。在位二十四年。鄭仲夫遷王軍器監。尋放于巨濟縣。明年。金甫當逼王出居鷄林。十月。李義旼弑王于坤元寺北淵上。在位二十五年。壽四十七。葬禧陵。
明宗皓。
字之旦。初諱昕。毅宗母弟。封翼陽公。鄭仲夫逐毅277_101c宗。迎王卽位二十七年。崔忠獻逼王幽昌樂宮。神宗五年薨。壽七十二。葬智陵。
神宗晫。
字至華。初諱旼。避金太祖名。改今諱。明宗母弟。封平凉公。爲崔忠獻所立。在位七年。禪于太子韺。尋薨。壽六十一。葬陽陵。
煕宗僕。麗史僕作韺。
字不陂。初諱悳。神宗長子。母宣靖太后金氏。受神宗內禪。卽位七年。崔忠獻廢王放紫燕島。高宗二十四年。薨于法天精舍。壽五十七。葬碩陵。
277_101d康宗僖。麗史僖作祦。
字大椉。一字法柱。初諱檮。明宗長子。母光靖太后金氏。初封漢南公。爲崔忠獻所立。在位二年薨。壽六十二。葬厚陵。
高宗㬚。
字大明。一字天祐。初諱。又諱晊。康宗長子。母元德太后柳氏。康宗薨。卽位四十六年薨。壽六十八。葬弘陵。
元宗禃。
字日新。初諱晪。高宗長子。母安惠太后柳氏。高宗277_102a薨。卽位十五年薨。壽五十六。葬韶陵。
戴宗旭。
太祖第四子。母神靜王太后皇甫氏。光宗十二年卒。子成宗卽位。追謚戴宗。葬泰陵。
安宗郁。
太祖第五子。母神成王太后金氏。王嘗蒸景宗妃皇甫氏有身。事覺流泗水縣。竟卒貶所。皇甫氏生子。是爲顯宗。顯宗卽位。追尊安宗。葬乾陵。
忠烈王
諱諶改昛。初諱暙。元宗長子。母順敬太后金氏。高277_102b宗薨。元宗以太子入覲于元。王時爲太孫。受遺詔監國事。元宗還。冊爲太子。元宗薨。卽位二十四年。元詔王傳位于世子謜。退居德慈宮。元尋徵新王入朝。詔王復位。在位三十四年薨。壽七十三。葬慶陵。
忠宣王。
諱謜。初諱璋。字仲昂。又改卍。蒙古諱益智普化。忠烈王長子。母齊國大長公主。以元詔受禪忠烈。尋復位。王如元宿衛凡十年。武宗卽位。王有定策功。封瀋陽王。忠烈薨。卽位五年。禪于世子暠。元召王277_102c下禮部。旣而祝髮。置石佛寺。尋流于吐蕃撒思吉地。泰定帝立。赦還薨于燕邸。壽五十一。葬德陵。
忠肅王。
諱燾。小字宜孝。蒙古諱阿剌訥忒失里。忠宣王第二子。母濮妃。初封江陵大君。受忠宣內禪十七年。元策世子禎爲王。尋又命王復位。二十五年薨。壽四十六。葬毅陵。
忠惠王。
諱禎。蒙古諱普失里。忠肅王長子。母明德太后洪氏。初王以世子入覲于元。丞相燕帖木兒悅之。277_102d因忠肅辭位。奏錫王命。太保伯顔惡燕帖木兒。待王甚薄。忠肅尋復位。燕帖木兒已死。王在燕邸。與燕帖木兒子弟縱飮爲謔。又狎回骨婦人。或不上宿衛。伯顔益惡之。目曰撥皮。奏送國。使敎義方。忠肅薨。以遺命卽位四年。李芸,曹益淸,奇轍等。在元上都。極言王貪淫無道。請立省以安百姓。元遣大卿朶泰等縛王去。流揭陽縣。至岳陽而薨。在位六年。壽三十。葬永陵。
忠穆王。
諱昕。蒙古諱八思麻朶兒只。忠惠王長子。母德寧277_103a公主。忠惠被執。元命王襲位。四年薨。壽十一。葬明陵。
忠定王。
諱㫝。蒙古諱迷思監朶兒。忠惠王庶子。母僖妃尹氏。初封慶昌府院君。忠穆薨無嗣。元命王襲位三年。元以江陵大君祺爲國王。王遜于江華。遇鴆薨。壽十四。葬聰陵。
恭愍王。
諱顓。初諱祺。蒙古諱伯顔帖木兒。忠惠王母弟。初封江陵大君。忠穆卽位。進封江陵府院大君。忠定277_103b遜位。元封王爲國王。二十三年。爲子弟衛洪倫等所弑。壽四十。葬玄陵。
牟尼奴。
辛耦小字牟尼奴。辛旽婢妾般若之出也。恭愍養以爲子。恭愍被弑。宰相李仁任議立禑。十四年。皇明將置鐵嶺衛。禑遂興師攻遼。及我太祖回軍。誅崔瑩諸將等。請禑如江華。移江陵。恭讓元年被誅。
石伊嬰兒。
辛禑之後恭讓之前。惟辛昌僭位。此記遍祀麗代277_103c諸王。以及辛禑。昌不應見漏。然有石伊而無昌。石伊疑昌小字。辛禑之以牟尼奴書者。又可徵也。嬰兒者不可考。豈禑,昌之際。以王氏宗英被死者歟。昌禑子。大明洪武二十三年。禑旣放。諸將立昌爲王。翌年。以恭愍王妃安氏敎。放于江華。恭讓立。被誅。時年十歲。
按此記世祖太祖具書姓諱。自惠宗至安宗。只書諱。不書姓。自忠烈至恭愍。並姓諱而闕之。辛禑辛昌書小字。至恭讓又書諱。且戴宗成宗之父。安宗顯宗之父。而次元宗下年紀懸絶。昭穆277_103d又舛。豈以未踐祚故然歟。義例不一。不可意斷。
三陟官。
按我太祖甲戌。恭讓薨於三陟。而王瑀等九人次恭讓下。當與恭讓同死者。然王珇至太祖丁丑。襲封歸義君。甲戌距丁丑。已三年矣。其非同死者亦明矣。然則其死也雖不同時。抑或同地歟。三陟者地名。而混錄於是。疑於諸人姓名。加匡以別之。下巨濟島江華亦倣此。
恭讓王瑤。
神宗七世孫。父定原府院君釣。母卞韓國大妃王277_104a氏。初封定昌府院君。以恭愍妃安氏敎卽位四年。遜于原州。尋移杆城。封恭讓君。後三年甲戌。薨于三陟府。壽五十。我太祖丙申。追封恭讓王。葬高陽。
歸義君瑀。
恭讓王弟也。恭讓元年。追尊四親。以瑀主其祀。三年。領門下府事。至本朝。封麻田郡歸義君。卒謚景禧。我太祖六年丁丑。命有司以禮葬之。賜祭于柩前。以其子上將軍珇。襲封歸義君。奉王氏後。
277_104b王珇。
瑀長子。初封定康君。至本朝。襲封歸義君。
王琯。
瑀子。歷官元尹。
王得命,王承寶,王鬲。
得命,承寶未詳。鬲顯宗十九世孫。順安君昉子。初封永福君。恭讓四年。嘗與贊成事權仲和。如京師謝恩。
按國朝寶鑑。太祖三年甲戌。㙜諫請徙王康,康見下 王承寶,王承貴,承貴見下 王鬲于海島曰。此輩277_104c雖待之厚。必不懷恩。且康智謀過人。承寶,承貴勇力無敵。若在京師。必煽變。上不許。諭承寶等勿驚懼。承寶等時未死也。是歲恭讓薨。因諸臣策。遂幷承寶等不得全矣。
觀音奴,彌陁奴,加羅將。
右三人未詳。
巨濟島。
按國朝寶鑑。太祖二年癸酉。敎曰。王者定業。恐前朝苗裔爲患。必欲翦除。予則不然。天命寡躳。以爲一國主。凡在境內。皆吾赤子。一視同277_104d仁。以答天意已。將恭讓君從便安住。妻子僮僕。完聚如故。獨其族屬入處海島。生理艱苦。予甚愍焉。劃日出陸。各於州郡安置。有才幹者選擇以聞。於是王氏族之在巨濟者。皆分處於完山,尙州,寧州。翌年甲戌。王氏族滅於巨濟。豈未及出島歟。抑還置島中歟。今未可詳。王珪等一百十三人。次巨濟下。並死是島者也。
王珪。
顯宗十三代孫。襄陽君瑄子。初封壽延君。
王平,金毛,知伊,無量,同良,王瑱,王玫。
277_105a王平等五人未詳。瑱神宗八世孫。益原府院君玿子。初封永原君。玟瑱弟。
龍屯,同良,只朴,王珽。
龍屯等三人未詳。珽神宗八世孫。永昌府院君瑜子。初封順城君。
普賢,佛子,法子,藥師,上佐,雅陽,貴子,自在,吾未,善射,釋子,王英,王璟。
普賢等十二人未詳。璟神宗九世孫。平安府院君鉦子。保定君璯弟。歷官元尹。
王承變,原之豆,汝羅豆,王潘,王편002麗史㻁作回。 277_105b王玽。
承變等四人未詳。㻁顯宗二十世孫。永福君鬲子。歷官元尹。玽神宗九世孫。平安府院君鉦子。亦官元尹。
王承祐,王承道,小兒,王思義,藥老,帝釋老,王興寶,王敦逸,家奴,王承貴,金山,福山,德重,寶原,王叙。
承祐等十四人未詳。叙顯宗十八世孫。益城府院君諝子也。一名緝。封益山君。尙恭讓王女肅寧宮主。恭讓四年。流遠地。
277_105c王昪,王康。
昪未詳。康王氏䟽屬。恭愍二十年。賜同進士第。恭讓朝。拜禮曹判書。陞密直副使。兼楊廣全羅慶尙道水軍都體察使。鹽鐵轉漕招討營同繕城事。屢運三道軍稅。國人賴之。康議楊廣道泰安瑞州之境。有炭浦從南至興仁橋百八十餘里。倉浦自北流至蓴堤城下七十里。二浦間。古有浚渠跡可十餘里。未者可七里。若畢之。使通海水。則每歲漕運。可避安興梁之險。於是發丁夫浚之。石在水底。且海潮往來。隨隨塞。事竟無成。康與金澍奉277_105d使上國。麗亡而還。與諸王氏俱族。
王氏,王琦。
王氏未詳。琦顯宗十八世孫。昌寧君詗子。封寧原君。恭讓四年。流遠地。
富明,勝明,王同,福萬,德萬,同良,王祥,王珊。
富明等七人未詳。珊神宗八世孫。永興君環子。封順平君。
王環。
神宗七世孫。寶城君煕子。封永興君。婦弟辛珣附277_106a辛旽誅。環坐流武陵島。不知存沒者十九年。妻辛聞環飄至日本。私備金銀。令家奴物色求之。辛昌元年。奴以環來。形容不類。辛從弟克恭等曰。非環也。辛自京山府來見喜曰是。遂訟憲府。克恭坐流遠地。
王會。麗史會作璯。
神宗九世孫。平安府院君鉦子。慶平君琮弟。封保定君
王琮。
保定君璯兄也。封慶平君。
277_106b王彜,多乃,僧統,王聃子,王璟子,旵守。麗史守作髓。
王彜等五人未詳。旵守永興君環兄。爲僧者也。
省珍,釋能,覺看,王加勿,王沙顔,王福奇,王陽貴,王宮吉,王阿令,王承繼,王寶君,王仁富,王承寶,王梅子,非羅豆,釋奴。王慶,王休,王上佐,王綏,石奴。
右二十一人未詳。
王緝。
王叙一名緝。重出。
277_106c王珍。
神宗九世孫。定安君諟子。歷官元尹。
王諟。
神宗八世孫。福安君愼子。封定君。
王釣。
神宗七世孫。淳化侯瑈子。封定原府院君。是生恭讓王。恭讓二年。追謚釣三韓國仁孝大公。
按麗朝宗英與是祭者。多是鼎革之際授命者也。然定原已卒於恭讓踐祚前。而亦次王諟下。未詳何故。
277_106d王譜。
神宗八世孫。福安君愼子。初封福昌君。
王瑾。
神宗八世孫。永興君環子。元尹珩弟。歷官正尹。
王珩。
正尹瑾兄。歷官元尹。
王聃。
顯宗十九世孫。順安君昉子。恭讓三年。坐謗國被鞠。削屬籍。竄見州四年。復流遠地。
命都只,王福。
277_107a命都只未詳。福顯宗十三世孫。壽興君瓊子。初封保寧君。恭讓四年。流遠地。
貴尊,王美,王良斤,乃斤乃,仇之乃,福成王興寶子,春伊,吾珍,聖代,王珪子,阿之奴,德方,普奴,今磨,王琚。
貴尊等十五人未詳。琚神宗八世孫。鶴城府院君珦子。南平君和弟。初封寧平君。
王廉,福康君,世同,王氏小兒,王似良,王和。
王廉等四人未詳。福康君名璇。神宗九世孫。安定277_107b君諟子。和神宗八世孫。鶴城府院君珦子。封南平君。恭讓四年。流遠地。
沙顔頭,王萬老,貴子,波時老。
並未詳。
江華。
案恭讓薨於三陟。而係三陟下。辛昌死於江華。而不係江華下。其義例未詳。南孝溫秋江冷話。麗亡。放諸王海島中。功臣等議不誅必有後患。具舟誘之曰。敎出島爲庶人。諸王喜甚爭登舟。舟離岸。拔船底板沈之。有僧與王氏善者在277_107c呼之。王氏有能詩者口占一聯曰。一聲柔櫓滄溟外。縱有山僧奈爾何。僧痛哭而返。今其所沈處。泥沙墳起。爲海中大島。所謂貞州海也。在步輦江下。
懷原君,王承露,鶴城君。
懷原君等二人未詳。鶴城君名珦。神宗七世孫。淳化侯瑈子。初封鶴城侯。後封鶴城府院君。恭愍十年。如元賀正。道梗不果行。王避紅賊幸福州。珦謁行在。辛禑三年。宦者金壽萬妻。與珦爭田民。謀害之。乃與宦者金元老妻。誣告珦將不利上。禑命巡277_107d軍守珦家。鞫壽萬元老妻。服誣妄。禑竟不治。勅有司禁宗室擅出入。
順安君王昉。
顯宗十八世孫。樂浪君琇子。恭讓元年。與同知密直司事趙胖。如京師告卽位。
平安君。
名鉦。神宗八世孫。淳化侯瑈子。封平安府院君。
永安君王璡,益原君王昭。
璡未詳。昭淳化侯瑈子。鶴城府院君珦弟。封益原府院君。
277_108a益成君。麗史成作城。
名諝。顯宗十七世孫。淮安大君珣子。封益城府院君。
仲家奴,韓山,正善,王曼之,普利,雙生王氏小兒,白同。
右七人未詳。
按王氏諸人。或書以小字。或有未字而只書某子者童子也。或書以小字者嬰孩也。或書以僧號者。宗室之出家也。或只書氏如婦人。或只書爵稱某君者。並脫誤也。同良有三。石伊,王承寶有二。疑同名也。或277_108b父次於子下。兄係於弟末。義例參差。然不可考。
又按權陽村集水陸儀文曰。主上殿下仁厚之澤。結人心而洽幽明。不刑一人。朝野乂安。王氏宗族。必欲保全。分遣于外。俾獲安宅。至拔其賢者。以致于朝。將期永世與國咸休。而王氏爲天所廢。自就覆亡。越三年甲戌春。有敢議以謀變者。羣臣請罪以除後患。殿下不獲已從之。隱痛之念。常切于懷。欲修冥資以慰魂魄。其秋。金書妙法蓮華經三部。特於內殿親臨轉讀。又印水陸儀文三七本。命設無遮平等大會于三277_108c所。各置蓮經一本儀文七本。永藏其地。俾以擧行。其一則在天磨山之觀音窟。爲薦王氏之處江華者。其一則在某州某山。爲處三陟者也。其一則在某州某山。爲處巨濟者也。國初循麗俗。死者多薦福。甲戌之祭。只祭三陟巨濟江華所死者。而其追祭麗朝諸王。未詳在何時。豈在世祖朝祀端廟時並擧歟。
瑢。
世宗第三子字淸之。號琅玕居士。世宗嘗賜堂扁匪懈。又號匪懈堂。封安平大君。長於詩。以書畵277_108d名。好名士博奕絲竹。日夜不絶。端宗初卽位。人心危惧。瑢獨忠於王室。顧智術淺短。不能有爲。癸酉。大臣金宗瑞等被誅。政府奏盲人池和,朝士李賢老言瑢貴不可言。又據讖言。下元甲子聖人出。飮木覔井水。白岳之北。眞興王之地。居之可以受福。瑢卽建第。號武溪精舍。欲應之。且言我不止爲大君。指授皇甫仁等以腹心。趙克寬爲兵曹判書。趙衷孫爲兵曹正郞。掌兵權。尹處恭爲軍器判事。趙藩爲軍器錄事。掌器仗。趙順生,李石貞,池凈等爲黨援。刻日擧事。瑢當誅。竄江華。移喬桐。兩司又277_109a啓瑢首惡請誅之。遂遣義禁鎭撫李淳伯。賜瑢死。英宗丁卯復官。己卯謚章昭。
瑜。
世宗第六子。封錦城大君。少從世祖受易。世祖常愛之。瑜性豪家富。素與安平密。安平敗。欝欝不自得。與和義君瓔謀。陰結楊嬪。又贈金帶于寧陽尉鄭悰婢子。于尙宮朴氏。廣樹黨援于中外。密招武士。數射獵。好施與。韓明澮勸世祖除之。乙亥。世祖與右議政韓確等言瑜謀亂。於是合司啓請正罪。遂竄朔寧。尋移廣州。丙子。成三問等死。277_109b安置順興。天順元年丁丑。端廟遜于寧越。瑜與府使李甫欽謀復上王。事覺。世祖遣使鞫之。禁府啓瑜賂記官仲才,品官安順孫,安處強等。謀起兵。遺甫欽金頂子珊瑚笠纓。甫欽不受。瑜謾言乳母小非蹴子兀。亡幾死。邀甫欽,仲才請訊之。因謂曰。主辱臣死。請公聚兵。與我直攻榮川。榮川不應。軍法從事。卽向安東。發吾家僮。可得二三千人。以此號令。誰敢不從。遂拔劒劫甫欽。令吹角打皷。仲才發牌聚軍誓曰。姧臣用事。社稷顚覆。同心匡救。如有二心。皇天后土社稷宗廟之神。寔277_109c監之。與甫欽,仲才同署盟。遺甫欽段子衣。議遣豐基郡事于竹嶺。聞慶縣監于艸岾截其路。嶺南從宦者顧戀妻子。靡然而來。仍擧義事不難矣。甫欽常假稱鎭穰。遣盲人石敬等說瑜曰。麗朝王子。多爲僧免禍。又問僧懶夫曰。瑜終於此乎。將還京也。懶夫答曰。有虗蒙相。甫欽以語瑜。瑜曰。汝昔與瑢相知。亦可畏也。今時不問罪。並坐之。瑜與甫欽謀逆明甚。請論如法。從之。賜瑜死。順興人坐死者甚衆。竹溪水盡赤。瑜繫安東獄。一日裸而跳府中。大索不得。有頃自外至。笑曰我眞逃矣。汝等寧詎執277_109d乎。臨刑。整衣冠。北向寧越。痛哭四拜就縊。衆莫不憐之。世祖命削瑜名璿籍。尋還復籍。英宗戊午。復官謚貞愍。府使李命煕築成仁壇於順興以祀之。慶尙觀察使沈聖希聞于朝。置守壇戶。立碑記其事。又享永川松谷書院。
端宗諱。
莊陵之事。所不敢言。亦不忍詳。然此記序次。亦足以觀世變。姑仍之以備掌故之一助云爾。
友直。
安平大君長子。封宜春君。癸酉。竄江華移喬桐。又277_110a移珍島。甲戌賜死。妻沒爲婢。
鄭悰。
海平人。參判忠敬子。尙敬惠公主。端廟初卽位。常依之。移御其第。乙亥。坐錦城黨。竄寧越移楊根。丙子。安置光州。丁丑錦城敗。宗室大臣請誅悰。命嚴其禁高欄墻。設鹿角鎖外門。計朝夕食物。十日一繼。墻內掘井以自給。外人往來或贈遺。以黨不忠論。辛巳。悰竟坐死。子年七歲。隨公主入大內。世祖惻然曰。文宗子孫。惟汝一人爾。置之膝。噓唏流涕。賜名眉壽。命侍成宗邸。眉壽歷官左贊277_110b成。策中廟靖國勳。英宗己卯。謚悰獻愍。
皇甫仁,皇甫錫,仁子。 加亇耳,實錄加亇耳作加麽。 京斤,並錫子。 皇甫欽。仁子。
仁字四兼。一字春卿。號芝峯。永川人。知中樞院事琳子也。太宗甲午文科。文宗壬申。拜領議政。與左議政金宗瑞等。受顧命輔幼主。癸酉。世祖與權擥等計事。擥曰。仁聞公欲擧事。貽書宗瑞謀甚密。奈何。世祖默然良久曰。彼雖知之。經營約束。可費八九日。無傷也。及宗瑞誅時。端廟御寧陽尉鄭悰第。內禁衛奉石柱等。具介冑。列立南277_110c門。備非常。又發諸所別侍衛甲士。銃筒衛環之。部署巡旅截前後衕。世祖自將數百人。屯南門外嘉會坊石橋東西。分左右翼。又以馬步兵作三重門。召諸宰。韓明澮持生殺簿。坐第二門內。仁入椎殺之。英宗丙寅復官。戊寅謚忠定。享永川,臨臯書院,鍾城行營祠。錫歷官參判。欽歷官直長。難作。逃匿鐵原寶盖山中義相菴。捕殺之。加亇耳,京斤。甲戌絞死。
金宗瑞,金承璧,金承珪,石㙜,並宗瑞子。 祖同,萬同。並承珪子。
277_110d宗瑞字國卿。號節齋。順天人。太宗乙酉文科。多智畧。時人目爲大虎。世宗丁巳。爲咸吉道節制使。設六鎭。文宗末。以左議政受顧命。癸酉十月。世祖召權擥韓明澮等。邀武士後園松亭。酒酣。議誅宗瑞未决。世祖援弓起曰。從者從留者留。吾不汝強。卛家僮林云等數騎。至宗瑞家衕。望見武士三人持兵耳語。又有騎者三十餘人。夾路而馳。有頃皆散去。承珪與辛思勉,尹匡殷坐語。見世祖迎謁。世祖要宗瑞出。承珪入良久。宗瑞乃徐步至門立不前。請世祖入。世祖固辭。宗瑞277_111a不得已出拜。世祖失帽翅。請借宗瑞。宗瑞急抽進之。於是林云進。世祖叱之退。宗瑞仰天良久不言。匡殷等侍左右。世祖却之。堅坐不肯退。世祖謂宗瑞曰。有柬當進。召從者曰。亦有一柬進知部。知部指承珪也。宗瑞受柬。照月而視。世祖促之。林云卽奮椎擊宗瑞仆地。承珪奔救伏其上。楊汀拔劒斬之。是日宗瑞犒力士整兵器。聞世祖至。使人從垣上覘之曰。少則延之。多則射。覘者曰少。宗瑞猶設備乃出。翌日宗瑞甦。使元矩告敦義門守者曰。夜被傷幾死。告安平大君。啓送內禁277_111b衛。吾欲捕傷吾者。守者不應。宗瑞衣婦人衣。乘轎到敦義昭義崇禮等門。不得入。還匿承璧婦家。世祖遣義禁鎭撫李興商。跡宗瑞曳出之。宗瑞曰。我大臣也。不可以步。將我軺軒來。遂斬之。梟首于市。英宗丙寅復官。戊寅謚忠翌。乙酉贖宗瑞舊第。還其後孫。承璧歷官直長。難作匿水原。捕得殺之。石臺俱死。祖同,萬同。甲戌俱死。
按國乘。有壽同而無萬同。壽與萬未知孰誤。而要之一人之名互異。
李穰,李承胤,穰子。 繼祖,紹祖,將軍,承胤子。277_111c承老。穰從子。
穰。義安大君和孫也。以武進官至判中樞院事。癸酉。與皇甫仁等被椎死。承胤字長之。歷官獻納。承老歷官部令。甲戌。與繼祖等死。
閔伸,閔甫昌,閔甫諧。並伸子。
伸驪興人。文宗末。爲兵曹判書。改吏曹。世祖嘗朝京師。請伸爲副。伸托疾不行。癸酉。監顯陵碑役。難作。斬于役所。甫昌,甫釋等並坐。今上辛丑復伸官。壬寅謚忠貞。
宋絃守,絃守誤。當作玹壽。 閔甫釋,石伊。
277_111d玹壽礪山人。端宗甲戌。冊玹壽女爲妃。拜玄壽爲知敦寧府事。丙子六臣事發。世祖置酒。出內人設樂。令玹壽進酒。執手謂曰。朝廷疑卿與聞。屢請罪。予不許。卿予之故人也。玹壽叩頭謝。丁丑。男子金正水告玹壽與敦寧府判官權完謀逆。遂下禁府鞫之絞死。降封上王爲魯山君。遜于寧越。肅宗己卯。贈領敦寧府事礪良府院君。今上辛亥。謚貞愍。
按閔甫釋,石伊伸子。當列甫諧下。脫誤在此。從原本。姑不釐正。
277_112a趙克寬。
楊州人。靖平公啓生子。太宗甲子文科。歷官兵曹判書。癸酉。與皇甫仁等死。英宗丁丑復官。
尹處恭,尹涇,尹渭,尹濯,尹湜,㖋同,孝同。並處恭子。
處恭歷官軍器錄事。癸酉。坐安平黨死。涇,渭,濯,湜同死。㖋同,孝同。甲戌絞死。
李命敏。
歷官繕工副正。嘗監建仁政殿。癸酉。金宗瑞誅。以命敏黨安平搆亂誅。
277_112b乾金,乾玉,乾哲。哲一作鐵。並李賢老子。
乾金等以李賢老子。甲戌死。
按諸書。以乾金,乾玉,乾鐵。作李命敏子。今據國椉改正。
李耕㽥,勿金,耕㽥子。 秀同。
耕㽥歷官鏡城府使。癸酉。金宗瑞旣誅。以宗瑞連結耕㽥及咸吉道節制使李澄玉,平安▣▣▣편003使趙遂良,忠淸道觀察使安完慶。謀危宗社。遣人耕㽥任所。勿金甲戌死。
按端宗癸酉。命李秀同等子年十六歲以277_112c上。永屬巨濟南海等官奴。十五歲以下。隨母長養。成丁後屬官奴。旣有所坐。可知其死。且秀同與勿金列耕㽥下。似其子若弟。然未有的據。姑從闕疑。
元矩。
安平壯士。歷官鎭撫。癸酉。與李命敏等俱死。
趙藩,季同,莫同。並藩子
藩克寬從弟。歷官軍器錄事。癸酉坐死。季同等甲戌死。
按端宗癸酉。水原鄕吏卜來捕趙藩子貴同。277_112d以告禁府。請賞緜布五十疋。季同旣與其禍。而貴同之獨生無是理。然此記有莫同而無貴同。莫貴之訛歟。
金衍,大丁。
衍宦也。與安平昵。癸酉被誅。大丁難作。匿誠寧大君家。誠寧夫人成氏。使衣婦人服。伏寢屛後。捕斬之。
按魯陵志。指大丁爲衍子。然無的據確證。慵齋叢話云世宗朝。伶人金大丁善皷琴。早歲被誅。意其人也。
277_113a池信和。實錄作池和。
盲也。癸酉。妄言安平命。斬死。
河碩。實錄碩作石。
癸酉。坐安平黨。購之急。碩逃永同。爲鎭撫崔德紹所捕斬。安平將謫江華。至楊花渡。呼其奴永奇曰。事若不濟。河石必先誅。汝須收骨來。使我見之。
李澄玉,李滋源,李潤源,鐵同,成同。並澄玉子。
澄玉梁山人。素驍悍。嘗守富居柵。威振野人。咸吉道節制使金宗瑞將還。薦以自代。及宗瑞誅。世祖密遣朴好問。馳驛召澄玉還。澄玉行一日。忽自277_113b疑曰。朝廷約非有大事。不召我。今無故召我何也。衷甲還趍營。襲殺好問。部勒軍馬。移書野人。自稱大金皇帝。將定都五國城。野人皆從之至鍾城。鍾城節制使鄭種,判官鄭圃。斬澄玉以獻。滋源等俱坐死。
案澄玉叛者也。不當與莊陵諸臣並列。然死因金宗瑞黨。且原本序次。不可以換定。姑存之。
許詡。
河陽人。領議政稠子也。端宗初嗣位。詡每進講多發明。上嘉納之。世祖嘗朝京師。請閔伸爲277_113c副。伸不行。改辟詡。詡陰囑金宗瑞。以修撰實錄免。世祖旣誅宗瑞。諸功臣入賀。酒行樂作。詡泫然流涕曰。朝廷元老同日盡死。詡生亦足矣。忍食肉乎。時議梟宗瑞等首。誅其孥。詡曰。此何罪也。又欲停靖難賀禮。授贊成。固辭不受。世祖怒甚。猶惜其才。欲活之。李季甸勸世祖竄巨濟。與趙遂良等同死。及丙子六臣事發。世祖曰。許편004若在。六臣爲七。英宗丁卯復官。丙子謚貞簡。享槐山花巖書院。
趙遂良,安完慶,池淨。
277_113d遂良克寬從弟。世宗庚子文科。歷官平安觀察使。完慶廣州人。觀察使處善子也。世宗癸卯文科。歷官忠淸觀察使。淨歷官忠淸節制使。癸酉靖亂。以遂良,完慶與安平密謀。淨爲安平黨援。並安置邊郡。尋絞死。完慶子哲孫。孫從道俱死。而此記則不載。豈遺落歟。
李保仁,李諧,李諶,三問,三問一作沙門。 住令,李謨,並保仁子。 李義山,保仁從弟。 友敬。義山子。
保仁穰從弟。安岳郡事黃義軒其妹婿也。癸酉。與義山俱竄邊郡。尋賜死。諧歷官護軍。甲戌。與諶等277_114a絞死。
金末生,珊瑚,末生子。 金晶,㖋同,晶子。 朴以寧,朴夏,李差,崔老,金尙忠,得千,卜千。尙忠子。
並坐安平黨死。甲戌收其孥。夏歷官高陽縣監。喜詼諧落拓。不爲人齒。嘗過闕西門。安平適見之。與語極昵之。安平嘗生朝。設宴麻浦江亭。夏賫酒肉往。朝士李賢老,李義山,趙藩,李石貞,金晶等三十餘人皆會。世祖使人覘之。安平驚駭送瓜謝。仍覘之。
韓崧。
277_114b宦也。癸酉。與朴以寧等同誅。
梁玉,趙石岡,黃貴存,安莫同,敬孫,長孫。敬孫,長孫並黃貴存子。
並坐安平黨死。石岡竄巨濟。貴存歷官司謁。竄江界。尋並絞死。敬孫,長孫。甲戌被誅。
案倪謙朝鮮記事。有義州兵馬節制使趙石岡,安州牧使朴以寧。以寧見上 此其人也。敬孫,長孫黃貴存子。今脫誤在安莫同下。
鄭苯。
字子。號愛日。晉州人。贊成以吾子也。太宗丙277_114c申文科。端廟初。拜右議政。癸酉竄安樂。尋安置邊郡。甲戌賜死。苯將赴謫。奉其先祠板以行。一日令從者精具飯祭已。焚祠版。已而使至。莅刑。苯歎曰。我死必有異。果驟雨至白虹見。英宗丙寅復官。戊寅謚忠莊。享永川臨臯書院,長興忠烈祠。
李石貞,趙完珪,趙順生,佛連。
石貞歷官僉知中樞院事。癸酉。坐安平黨。竄延日移南海。完珪,順生善博奕。常出入安平第。癸酉。亦安置邊郡。甲戌同被誅。
案佛連失其姓。端宗癸酉。與金晶,金末生等。277_114d永屬邊郡。奴晶等後皆死。佛連則不見。豈或同誅而見漏歟。
高德穪,黃義軒,石同,義軒子。 植培,貴珍,仲銀。銀一作恩。
德穪高陽縣監。義軒安岳郡事。植培姓李。貴珍,仲恩失其姓。並高陽記官。甲戌。安岳副司正李苞陰告義軒有密謀。遣知通禮門事柳䂓。鞫辭連人。逮囚義軒。禁府啓義軒與瑢密。癸酉十月。託射獵聚軍九百七十四名。點軍器。約聞令而會。及瑢死。遣記官楊榮京師以探詗。植培數隨瑢打獵。又飼瑢277_115a馬于家。受紬一疋。德穪及兵房記官仲銀詐稱聲息。下帖揔牌整軍馬。又多收民戶軍器。罪應誅。並棄市。義軒子石同並死。植培妻自縊死。
案貴珍次植培下仲銀上。疑與植培等同死者。姓氏及事實不可考。
金有德。
案端宗甲戌。禁府以鄭孝全伴人金有德知孝全謀而不啓。請誅而不賜批。又按世祖丁丑。收有德妻妹。賜功臣家爲婢。律至收孥。固其死也。然日月不可考。
277_115b金竹,金信禮,劉世,姜莫同。
右四人未詳。
鄭孝全,鄭元碩,孝全子。 鄭孝康,孝全兄。 鄭白池。孝康子。
孝全延日人。尙貞淑翁主。封日城尉。進秩崇德大夫。行兵曹判書兼八道都鎭撫使。癸酉靖難。孝全家在時座所衛內。不詣闕侍衛。翌日又稱病在家。端宗甲戌。斬棺籍其家。元碩屬南海爲奴。孝康安平妻黨。歷官參議。甲戌。與元碩等俱死。
朴季愚。
277_115c密陽人。大提學堧子也。世宗朝文科。選入集賢殿。甲戌。與鄭孝康等同死。堧安置。今上辛亥。特贈季愚吏曹參判。
李塏,李公澮。塏子。
塏字淸甫。又字伯高。號白玉。韓山人。高麗侍中穡曾孫。世宗丙辰文科。丁卯重試。選湖堂。歷官集賢殿校理。世祖在首陽邸。塏叔父季甸預密議。塏嘗戒之。丙子。與成三問等謀復上王。事覺車裂。公澮亦死。肅宗辛未復官。英宗戊寅。贈吏曹判書謚忠簡。享寧越彰節祠,露梁愍節祠,義城277_115d忠烈,韓山文獻書院,洪州綠雲書院,大丘洛濱書院。
河緯地,池璉,池班。並緯地子。
緯地字仲章。又字天章。號丹溪。晉州人。世宗乙卯生員。戊午魁文科選湖堂。及金宗瑞誅。賣朝衣。退居善山。上書請強公室嚴內治。杜權門絶朋附。世祖白上。以左司諫徵之。辭不就。乙亥。拜禮曹參判。緯地乃起。然恥之不食祿。丙子。與成三問謀。事發同日誅死。璉,班俱坐。肅宗辛未復官。英宗戊寅。贈吏曹判書謚忠烈。享彰節,愍節,忠烈等277_116a祠及善山月巖書院,綠雲洛濱等書院。
案此記河緯地下。次璉班。又李墍松窩雜記。河緯地有二子。長曰琥次曰珀。無或璉班一名琥珀歟。珀被收。年弱冠。無惧色。顧謂義禁都事。請與母訣。都事許之。珀入門跪告母曰。父被死。子不可獨全。念妹將笄。雖沒爲婢。婦人之義。猶當從一而終。遂再拜出就死。人謂緯地有子。至今上辛亥。特贈司憲府持平。
朴仲林,朴永年。仲林子。
仲林號閒碩堂。順天人。牧使安生子也。世宗癸277_116b卯文科。丁酉重試。世祖丙子。以刑曹判書。偕子彭年等死。仲林幼而性孝。母病。血指禱天。及長精通經籍。成三問,河緯地皆其門人也。英宗己未復官。今上甲辰。贈左贊成。丙午謚文愍。
朴彭年,仲林子。 朴憲,朴詢,朴奮,占同,乞同,波彔大,欣山,今年生,幷彭年子。 朴引年,朴耆年,朴大年。並彭年弟。
彭年字仁叟。世宗甲寅文科。丁卯重試選湖堂。文宗嘗不豫。夜召集賢學士。置世子膝下。拊其背曰。予以此兒付卿等。仍降榻親酌以勸。彭年及277_116c成三問,申叔舟皆醉仆。命中官撤門扇。舁卧直廳。上手引貂裘覆之。是夜大雪。諸臣醒。聞異香滿室。相與感激流涕。丙子。與三問等謀復上王事被收。世祖愛其才。密諭曰。汝諱初謀。當活汝。彭年笑而不答。稱上輒曰進賜。世祖令築其口曰。汝臣我。敢乃爾。彭年曰。我豈爲進賜臣。前爲監司。狀牘亦未嘗稱臣。校之皆巨字。死獄中。戮其屍。世祖敎曰。彭年等當世之亂臣。後世之忠臣。妻沒爲婢全節。子生員憲,進士珣,奮等八人並死。珣婦李氏有身。生子當坐。婢適有産女者。易而子277_116d之。肅宗辛未復官。英宗戊寅。贈吏曹判書謚忠正。乙未。㫌其閭。享彰節,愍節等祠。懷德靖節書院,連山忠谷書院及綠雲洛濱等書院。引年字龜叟。號景春軒。耆年字松叟。號東齋。文宗辛未。並文科。引年歷官校理。耆年歷官修撰。大年字喬叟。世祖丙子文科。歷官博士。丙子。並論死。
成勝。
昌寧人。寶文閣大提學石瑢孫。登武科。歷官都揔管。乙亥光廟受內禪。勝直都捴府。送奴往政院。數問三問。三問不答起如廁。仰天太息曰事畢矣。277_117a奴還白勝。勝亦泣下。趣馬歸。卽告病卧一室。家人亦不得見。唯三問至。辟人語。丙子。帝遣太監尹鳳。賜世祖冠服。六月初一日。讌于昌德宮廣延樓。勝與兪應孚,朴崝等爲雲劒。將擧事謀已定。世祖以殿窄除雲劒。三問曰。不可除。世祖不從。勝佩劒入。韓明澮曰。有旨勿入。勝退欲擊殺明澮。三問止之。事覺棄市。肅宗壬申復官。湖西儒生蔡振南等言勝墓洪州魯恩洞。連山縣有成氏田民。其臧獲至今招魂設祭。乞還其田民。俾禁樵牧。上許之。今上甲辰。贈左贊成。卒亥謚忠肅。享綠277_117b雲書院別祠。
成三問,勝子 成三聘,三問弟。 孟瞻,孟平,孟終,成憲,成澤,無名,今年生,並三問子。 成三省,成三顧。並三問弟。
三問字謹甫。號梅竹軒。都捴管勝子也。世宗戊午文科。丁卯魁重試選湖堂。始文宗在東宮。每月明人靜。手一編。步至集賢直廬。與三問問難。三問夜不敢輒解冠帶。一日夜旣深。脫衣欲卧。忽問戶外履聲槖槖。呼謹甫而至。三問顚倒迎拜。其恩遇如此。至癸酉端宗新卽位。三問啓曰。主277_117c上幼冲。深居宮中。羣臣不得以時接見。恐人心未有定也。請月以初一十六日。白衣御勤政門。受朝參。使羣臣得以瞻望。乙亥內禪。三問以承旨當傳寶。失聲哭。世祖方俯伏固辭。遽睨之。是日朴彭年欲投慶會樓池。三問止之。相與謀復上王。及金礩上變。世祖令武士捽三問詰之。三問笑曰皆是也。世祖曰。若等何故叛我。三問抗聲曰。欲復故主。何謂叛耶。進賜平日動引周公。周公亦有此否。世祖叱曰。汝食我祿而背我爲。三問曰。上王在。進賜何以臣我。我不食進賜祿。籍其家。乙277_117d亥後祿俸。別儲一室。署曰某年某月之祿。與孟瞻等同死。妻沒爲婢全節。肅宗辛未復官。英宗戊寅。贈吏曹判書謚忠文。享彰節,愍節,忠烈等祠。綠雲,洛濱書院及昌寧勿溪書院。
朴崝,崇文 崝子,季男,則同。
崝丙子。與六臣謀事覺。世祖鞫朴彭年問黨與。彭年對成勝,朴崝,兪應孚爲別雲劒。有密謀宴詔使日。因地窄未果發。待後日觀稼時。於路上圖之。於是轘崝。崇文亦坐。今上辛亥。特贈崝兵曹判書謚忠剛。
277_118a按季男則同列崇文下。似其子若孫。然於史不著。姑從闕疑。
宋石仝,實錄仝作童 宋昌,宋寧,宋安,太山。並石仝子。
石仝鎭川人。丙子。坐六臣黨車裂。昌,寧等坐死。其頒敎文曰。瑢黨援寔多。遺孽未盡。其徒李塏倡謀作亂。成三問,朴彭年,河緯地,朴仲林,金文起,沈愼陰謀。將臣成勝,兪應孚,朴崝,宋石仝等爲羽翼。連結權自愼,尹令孫。潛進宮禁。內外相應。宜加族誅。
按宋子大全六臣祠記。有曰爲一壇於祠傍。滚薦權自愼,宋石童等。則事尤完備。當時立殣之277_118b烈。不止石童。而先正特與自愼俱稱。豈石童亦莊陵戚臣歟。
權自愼,仇之。自愼子。
自愼顯德王后弟。端宗元舅。安東人也。歷官禮曹判書。丙子。以朴彭年等謀。告其母花山夫人崔氏。通于上王。事發。母子並戮。追廢其父專爲庶人。仇之亦死。肅宗己卯。並復官。己丑。謚自愼忠莊。
金文起,金玄錫。文起子。
文起初名孝。號白村。金海人。有至性。丁父憂。墓距277_118c家十里。而日往哭。人稱其居曰孝子洞。世宗丙午文科。歷官吏曹判書。丙子。與成三問等同日棄市。玄錫歷官縣監。亦坐死。肅宗朝。命復文起官。今上戊戌。謚忠毅。享康翎忠烈祠。
兪應孚,兪思守。應孚子。
應孚字善長。杞溪人也。登武科。歷官至正二品。丙子。與成勝,朴崝爲別雲劒。事發。世祖鞫之。應孚曰。吾欲復故主。不幸爲奸人所發。復何爲哉。足下第速殺我。仍謂成三問等曰。人言書生不可與圖事。果然。不服而死。應孚性剛烈。初定謀。卽衆中277_118d奮拳曰。誅權擥,韓明澮。此拳足矣。何用大劒。思守亦坐。肅宗辛未復官。英宗戊寅。贈兵曹判書謚忠穆。享彰節,愍節等祠。綠雲,洛濱等書院及康翎忠烈祠。
柳誠源,貴連,松連。並誠源子。
誠源字太初。文化人也。世宗甲子文科。丁卯重試選湖堂。癸酉。誅金宗瑞等。百官請褒世祖功比周公。誠源在集賢殿。迫艸敎。其文畧曰。叔父有周公之材之美。又兼周公之大勳。寡躬有成王之年之幼。又値成王之多難。寡躬以成王之責周公277_119a者責叔父。叔父亦以周公之輔成王者輔寡躬。艸已。悲憤不自勝。丙子。與成三問等謀。事覺。誠源時以司藝直館。諸生具以告。卽趣駕還。令妻酌酒飮之。衣朝衣入家廟。久不出。妻往視之。已引刀自刎。俄而吏來取尸磔之。貴連,松連並收。肅宗辛未復官。英宗戊寅。贈吏曹判書謚忠景。享彰節,愍節,忠烈等祠。綠雲,洛濱等書院。
尹鈴孫。實錄鈴作令。
歷官刑曹正郞。丙子。與成三問等同日棄市。方三問等會議集賢殿。約諸人分主所殺。鈴孫當殺申277_119b叔舟。宴詔使日。罷雲劒。遂寢其謀。鈴孫不之知。瞰叔舟就便房。按劒欲前。三問目止之。乃退。
許慥,詡子。 延令,九令,並慥子。
慥妻李塏妹也。歷官集賢殿副修撰。丙子。預六臣謀。事覺自縊死。戮其屍。延令,九令並誅。
權著,金堪,金漢之,李裕基,銀山,沈愼,吾乙未,李智英,李思怡,金仇知,李義英,智英兄。 李末生,義英弟。 李禎祥,鄭冠,崔致地,閏石,季同,莫同,石同,哲同,哲山,崔得地,致地兄。 崔斯友,李昊,盛孫,茂孫,李午,乃斤277_119c乃,鐵金,小同,張貴南,張冲。
裕基塏從弟。都鎭撫。愼吏曹佐郞。智英中樞院錄事。義英兪應孚女婿。別侍衛。祥,孫。愼隣人。亦別侍衛。冠末生妻同産也。丙子。坐六臣黨俱戮。收其孥。愼被鞫。言與朴彭䄵隣比。招聚智英,禎祥輩。又嘗會射於正言柳桂芬家。桂芬誠源兄子也。遂論死。午妻端宗姨母奉保夫人李氏婢也。宴詔使日謀亂。內廂庫刀。密授別監乭中。付權自愼觀變。及事發。鞫宮女月蟲介曰。誰知此謀。對曰。阿加之呼我輩曰。汝等來聽吾言。外人將復立我王。今日宴277_119d所。當擧事。婢等驚恐曰。上將必加職帶金矣。上將指午也。於是轘午。
按金漢之次金堪下。銀山次李裕基下。吾乙味次沈愼下。李思怡次李智英下。閏石,李同,莫同,石同,哲同,哲山次崔致地下。盛孫,敬孫次李昊下。乃斤乃,鐵金次李午下。意其子若孫也。然今未可詳。
羅乫豆。
盲也。丙子成三問等獄起。世祖問羅乫豆何人問卜。對曰。頃者奉保夫人。使人問鵂鶹鳴闕北何277_120a也。答曰安樂。曰上王安不。答曰上王當復位。遂與李午等同死。
奉汝諧,奉紐,黃善寶,金善之,趙淸老,榮緖,淸老子 李徽,沈上佐,崔沔,崔始昌。
汝諧河陰人。判書楫子。朴仲林女婿。歷官司饔別坐。淸老高麗忠臣狷孫。花山府院君權專女壻。官司僕少尹。徽李塏妹婿。歷官工曹參議。丙子廷鞫。朴耆年言汝諧預謀。自言直闕中。拔佩刀。有拒者輒刺之。徽初與六臣謀。聞事覺。詣政院上變。與汝諧等同誅。善寶死獄中。戮其屍。
277_120b李守禎。
丙子。禁府啓李守禎,朴遂良,任進誠,朴良諴常蓄異志。爲不道語。李祥孫同議立藁。守禎潤色之。並罪當誅。從之。
阿加之。
李午妻。同午轘死。
阿只。
書雲副正崔女。顯德王后母也。封海寧府夫人。丙子車裂。
佛德,內隱德,德非,龍眼。
277_120c佛德宮婢。內隱德,德非,龍眼並巫也。丙子。禁府啓龍眼因阿加之,佛德卜命。說上王今年復位。有喜事。罪應凌遲。於是與羅加乙豆等死。
朴遂良,朴良諴,任進誠,李祥孫。
與李守禎同死。
權完。
定順王后之媵之父。歷官敦寧府判官。丁丑。坐與宋玹壽謀。棄市。女賜功臣家爲婢。甲申宥之。
嚴自治,李貴,金忠,印平,柳臺,實錄臺作垈。 尹奇,朴閏,金得祥,吉由善,崔璨,實錄璨作粲。277_120d煕,徐盛代。實錄作徐盛。
並宦也。乙亥。賓廳啓自治等干預國政。盜用內府物。擅敺諸司官吏。奇瓔黨。粲小宦。侮橫朝廷。不宜置宮中。請黜之。悉收下禁府。奇等尋並賜死。自治屬濟州官奴。道死。
金玉謙,崔泳孫,許遂,洪九成,洪玉峯,洪適,李聞,陳有蕃,崔自滌,趙由禮。
九成,玉峯。並安平壯士。由禮歷官同知中樞院事。乙亥。右議政韓確等言楊嬪及尙宮朴氏,錦城大君瑜,漢南君,永豊君瑔。與由禮,成文治等謀亂。277_121a收由禮告身。竄光陽賜死。玉謙等亦坐錦城黨同死。
睦孝智。
典農寺奴也。乙亥。與趙由禮同死。
成文治,李禮崇,申敬之,申孟之,申仲之,申謹之。並敬之弟。
文治歷官護軍。乙亥。與禮崇等同死。
今上十五年辛亥正月。上幸顯隆園。駕過露梁。遣承旨卽六臣祠賜祭。時京畿儒生黃默等上言乞以和義君瓔追配彰節祠。上曰。六臣固277_121b赫赫卓卓。塗人耳目。如錦城,和義等節義。出於宗英。尤豈不奇且壯哉。和義之追配是祠。神理人情。可謂俱當。且當時節義不下於死六臣。而不與是祠者亦多矣。其令內閣弘文舘博考以聞。內閣以錦城大君瑜,漢南君,和義君瓔,永豊君瑔,處士金時習,進士南孝溫,正言李孟專,進士趙旅,直提學元昊,進士成聃壽,左參贊許詡,判書權自愼及宋石仝,府使李甫欽,校理權節,監察鄭保,副提學曹尙治等禀旨。弘文館益之以安平大君瑢,領議政皇甫仁,左議政金宗瑞,右議政鄭苯,判書朴仲277_121c林,都捴管成勝,判書金文起,礪良府院君宋玹壽,寧陽尉鄭悰,校理成熺。其說相參差。乃遣史官往沁都。考端宗世祖實錄。比還得其詳。身殲而名湮者。又若干人。敎曰。六臣之事。所不敢詳。光廟有敎若曰。後世之忠臣。又論寧陽家事若曰。不可以亂臣論。大哉訓謨。有以仰達權扶經之聖人微旨也。其闡揚發輝之者。豈不在於予後人歟。往在肅廟戊寅。追復莊陵也。廷臣以六臣祠太近於丁閣爲言。引杜甫詩武侯祠屋長隣近之句。命勿毁。因岐貳之論。竟未免移搆。是豈非闕277_121d典乎。記寃之祭。取之鶴寺。設壝之制。倣乎㺚川。以當時盡節人。合造一祠版。就本陵紅門。除地爲場。每年寒食。從與享之。仍命大臣之曾任閣臣者。議配食人當否。判府事李福源曰。曠絶之恩。以簡爲貴。竭忠殉節爲上。㓗身守義次之。收司並命又次之。簡之則逾見光明。廣之則或欠謹嚴。至若餘人之別祭一壇。義同表章。恩出憫惻。旣與配食有異。多少不必爲拘。於是以跡之尤著者安平大君瑢等三十一人。序於正壇。事未詳者平安監司趙遂良等十二人。坐收司者宜春君友直等二百▣277_122a▣人。列之別壇。贈參判嚴興道。雖未殉節。拚死奮義。戮力於終事之地。不可以不腏。援引金文正公宋文正公追躋廟庭例。俾與三十一之次。
按和義君忠景公瓔。坐錦城黨竄死。漢南君貞悼公,永豊君貞烈公瑔,楊嬪子瑔。又朴彭年女壻。難後並死。德陽正友諒。以安平子死。金木㙜癸酉以宗瑞子死。李漢山甲戌以耕㽥子死。兵使趙崇文及其子哲山。丙子坐六臣黨死。學諭河紀地,生員河紹地。丙子以緯地弟死。宦者金得誠。以得祥兄死。宮女者介。卽尙宮朴氏也。乙277_122b亥與楊嬪同死。權署丙子與其弟著同死。別監乭中。丙子以與李午謀死。贈吏曹判書順興府使忠壯公李甫欽,觀察使庾龜山,龜山弟鰲山。順興品官安順孫,金由性,安處強,安孝友,仲才,仲才子好仁。錦城宮奴鄭有才,凡三石,丁石,仇之,凡伊。豊山官奴李同。順興軍士黃緻,辛克長。丁丑坐錦城獄死。學生沈希括,朴守明。戊寅以亂言死。考之國椉。徧及諸史。並與於壇食。而此記則闕焉。其醮祀之際。亦多散佚不收者矣。
奉石柱,崔潤,金處義,奉戒孫,崔致務,李277_122c施愛, 缺三字 崔潤孫,康純,南性,性當作怡。 閔叙,柳季良,姜行興,文致彬,李賢老,朴好文,徐剛,金震智,姜右文,姜安重。
石柱,潤,處義。世祖乙酉。以搆亂誅。施愛世祖丁亥。擧兵叛北關誅。潤孫附施愛叛誅。純,怡,叙。睿宗朝。因柳子光搆誣誅。震智,安重。世祖甲申溫幸時。以犯禁誅。餘未詳。右十八人。大抵皆以罪誅。獨李賢老死於癸酉。而列於文致彬下。苟非脫誤。恐是追附。賢老江興人。世宗戊午文科。歷官集賢殿校理。癸酉。爲顯陵都監掌務。以附安平277_122d說禍福死。

[편-001]作 :
[편-002]洄 :
[편-003]▣▣▣ : 道觀察
[편-004]翊 :



[주D-001]하원 갑자(下元甲子) : 음력 4월 15일의 갑자일을 말함.
[주D-002]목멱정(木覓井) : 남산에 있는 우물.
[주D-003]부참(符讖) : 길흉 화복(吉凶禍福)이나 흥망(興亡)을 미리 예언한 말이나 글을 말함.
[주D-004]성산(聖算) : 임금의 나이.
[주D-005]세종 2년 : 1420년.
[주D-006]거가(車駕) : 임금의 행차.
[주D-007]위복(威福) : 형벌을 주고 복을 주는 임금의 권력.
[주D-008]휘하(麾下) : 주장의 지휘아래 딸린 사졸(士卒).
[주D-009]황표(黃標) : 3망(三望)을 임금에게 천거할 때 정부에서 먼저 적당한 인물의 아래에다 달던 누런 꼬리 표(標). 임금이 어렸기 때문에 취해진 것임.
[주D-010]내종친(內宗親) : 종실(宗室) 출신의 부녀자(婦女子)를 말함.
[주D-011]통현(通顯) : 지위가 높아 세상에 널리 알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