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퇴계 이황 유편

퇴계이황의 유편 (학문 독서 )

아베베1 2011. 3. 10. 16:15

고봉집 제3권
 [비명(碑銘)]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이공(李公) 묘갈명(墓碣銘)


융경(隆慶) 3년(1569, 선조2) 여름에 퇴계 선생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셨는데, 그 글에 “나의 선부군(先府君)께서는 선형(先兄)의 벼슬이 높아짐으로 인하여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당시에 이미 묘 앞에 한 비갈(碑碣)을 세우고 관향(貫鄕)과 세계(世系)를 대략 새겨 넣었는데, 돌이 이지러지고 망가져서 다시 세우려고 하였으나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 고쳐 세우지 못하였다. 그 후 나로 인하여 여러 번 가증(加贈)을 받았으니 나 자신에 있어서는 실로 외람되어 감당할 수가 없으나, 이미 사양하여도 되지 못하여 절하고 받았다. 그리하여 또 마침내 선부군의 추증하는 예전을 받았으니, 묘도에 쓰는 것은 지금 추증한 것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데, 이전에 새긴 것은 사실(事實)이 기재되어 있지 않고 또 명문(銘文)도 없다. 내 엎드려 생각건대 선인께서는 훌륭한 뜻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쓰이지 못하였고 이름이 사첩(史牒)에 오르지 못했으니, 만일 다만 이대로 인몰(湮沒)된다면 이것은 더더욱 자식 된 마음에 무한한 서글픔이 될 것이다. 그대의 한마디 말을 얻어서 숨겨진 행적을 발양하여 후세에 보여 주기를 원한다. 이에 내가 엮은 행장 하나를 절하고 올리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나는 선생의 편지를 받고 부끄러워 글을 지을 수 없다고 사양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편 생각건대 선생께서는 나를 가르칠 수 없는 인물이라 여기지 않고 다행히 선대의 명문을 맡기시니, 의리상 진실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선생의 선고(先考)는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左贊成兼判義禁府事) 이공(李公)으로 휘는 식(埴)이요, 자는 기지(器之)이며, 그 선대는 진보현(眞寶縣) 사람이었다. 5대조인 석(碩)이 비로소 고을의 아전으로서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뒤에 밀직사(密直使)에 추증되었다. 고조의 휘는 자수(子修)로 고려 말기에 급제하여 벼슬이 통헌대부(通憲大夫)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에 이르렀으며, 정세운(鄭世雲)을 따라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해서 훌륭한 공을 세우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이분이 왜구를 피하여 안동(安東)에 거주하였다. 증조 운후(云侯)는 중훈대부(中訓大夫)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조의 휘는 정(禎)으로 비분강개하고 큰 뜻을 품고 있었다. 세종 때에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인 이만주(李滿住)가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자 조정에서는 영변(寧邊)에 큰 진(鎭)을 창설해서 형세를 제압하려 하였는데, 공을 판관으로 뽑아 부사(府使) 조비형(曺備衡)을 보좌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은 매사를 감독하고 다스리기를 합당하게 하였다. 그 후 다시 최윤덕(崔潤德)을 따라 모련위(毛憐衛)를 정벌하여 공을 세우고 관작 2계급을 하사받았으며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별세하였는데, 그 후 여러 번 추증되어 가선대부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선고의 휘는 계양(繼陽)으로 경태(景泰) 계유년(1453, 단종1) 진사시에 입격하였는데, 예안현(禮安縣)의 온계리(溫溪里)로 이거하였다. 일찍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산림에서 뜻을 즐기며 오로지 아들을 가르치고 책을 읽는 데 종사하였다. 여러 번 추증하여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이르렀다. 선비(先妣)는 영양 김씨(英陽金氏)로 부사직(副司直) 김유용(金有庸)의 따님인데,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천순(天順) 계미년(1463, 세조9) 9월 12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학문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뜻을 독실하게 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공부에 전력하여 마치 목마를 때에 물을 찾듯이, 굶주릴 때에 밥을 찾듯이 하였다. 문소 김씨(聞韶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장인인 예조 정랑 김한철(金漢哲)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집에는 서적이 매우 많았는데 장모인 공인(恭人) 남씨(南氏)는 일찍이 여러 아들들이 공부하지 않는 것을 한하던 중 공이 학문을 좋아함을 기뻐하고, 공에게 이르기를 “내 들으니 서적은 사사로운 물건이 아니요 공적인 기물이라 반드시 학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하니, 우리 여러 아이들은 이것을 소유할 수 없다.” 하고, 마침내 모두 공에게 넘겨주었다. 공은 이로 인하여 크게 옛것을 상고하는 데 힘을 쓰게 되어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연구하고 찾아보아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학업이 이루어지자 아우 우(堣)와 더불어 모두 당시 학자들에게 추앙받게 되었는데, 공은 특히 박학다식으로 알려졌다. 우는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공은 일찍이 아들을 훈계하기를 “나는 책에 대해서 밥을 먹을 때에도 함께 보고 잠을 잘 때에도 함께 꿈을 꾸며 앉을 때에도 같이 앉고 길을 걸을 때에도 함께 가지고 다녀서 일찍이 잠시라도 내 마음에 잊은 적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끝내 이처럼 세월을 허송한다면 어찌 성취할 가망이 있겠느냐.” 하였다.
공은 성품이 높아 세상을 따라 부앙(俯仰)하지 못하였고, 문장을 짓되 또 과거 공부의 형식을 따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과거를 볼 때마다 낙방하다가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7)에 비로소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거처하는 집 남쪽 가에 한 언덕이 있었으니, 바로 영지산(靈芝山) 뒤쪽 기슭으로 두 시냇물이 합류하는데, 구름과 산이 아득하여 머무를 만하였다. 공은 이곳을 가리키면서 친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일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면 마땅히 이곳에다가 집을 짓고 생도를 모아 가르칠 것이니, 또한 내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하였다.
다음 해인 임술년(1502) 6월 13일에 병에 걸려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은 겨우 40세였다. 집 뒤의 용두산(龍頭山) 남쪽 기슭 수곡(樹谷)에 있는 선영 곁에 안장하였다. 부인 김씨는 2남 1녀를 낳았고, 또 계실(繼室) 춘천 박씨(春川朴氏)는 사정(司正) 박치(朴緇)의 따님으로 5남을 낳았는데,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장남은 잠(潛)으로 충순위(忠順衛)이고, 둘째는 하(河)로 예천 훈도(醴泉訓導)이며, 셋째는 서린(瑞麟)으로 관례(冠禮)도 하기 전에 요절하였다. 넷째는 의(漪)로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다섯째는 해(瀣)로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23)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일찍이 대사헌이 되어 이기(李芑)가 재상이 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논하다가 뒤에 다른 일로 이기에게 모함을 받아 고문을 받고 유배되는 도중에 별세하였다. 다음은 징(澄)으로 제원 찰방(濟原察訪)이요, 막내는 바로 퇴계 선생이다. 딸은 신담(辛聃)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16인이니, 인(寅), 완(完), 굉(宏), 성(宬), 선(宣), 헌(憲), 재(宰), 복(宓), 영(甯), 교(㝯), 치(寘), 혜(寭), 주(宙), 건(騫), 준(寯), 채(寀)이다. 손녀는 12인이다. 외손은 남자가 1인, 여자가 1인이며, 내외 증손은 남자가 75인이다. 자손의 번성함이 세상에 드문 일이니, 남은 경사가 다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생각건대 공이 뜻을 높이 세우고 학문을 부지런히 연구한 것은 옛사람에게 뒤짐이 없을 것인데, 억제되어 뜻을 펴지 못하고 일찍 별세하여 끝내 한 세상에 조금도 시행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깊이 슬퍼하고 길이 탄식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남은 경사가 모여 이와 같이 자손이 번성하였으니, 어찌 숨겨진 덕의 보답으로 이루어짐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하늘이 공에게 누리게 한 복은 박하지 않고 후하다고 이를 만하다.
내가 거듭 생각건대 퇴계 선생의 편지에 “나는 팔자가 기구하고 하늘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태어난 지 한 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 여러 고아들이 사리를 분별하게 된 이래로는 점점 선인(先人)의 세대와 멀어져 당시의 친구 분들이 다 이미 별세하여 물어볼 곳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모든 언행과 사실이 대부분 유실되고 기술되지 못했다.” 하였고, 또 가장(家狀)에 “선군은 평소에 여러 번 탄식하기를 ‘우리 여러 아들 중에 내 뜻을 따라 내 학업을 계승하는 자가 있으면 내 비록 이 일을 끝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한이 없다.’ 하셨다. 선군이 별세하였을 때 백형(伯兄)은 겨우 장가들었고, 나머지 고아들은 모두 어려서 장차 문호를 유지하고 선업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는데, 선비께서는 과부로 40여 년 동안 사시며 온갖 고난을 겪고 자식들을 길러 제때에 혼인을 시켰으며, 더욱이 재정을 마련해 주어 멀고 가까운 곳에서 공부하도록 뒷받침해 주셔서 반드시 학업을 성취하여 의로운 길로 들어가게 하고자 하셨다. 숙부인 참판공께서는 또 양육하고 가르치기를 자기 자식과 같이 하셔서 세상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기를 기대하였는데, 그 후 여러 아들들은 가훈을 받들어 따랐으나 지하에 계신 부모님의 기대를 완전히 위로하고 부응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이 불초한 나로 말하면 선비의 식감(識鑑)으로 어리석고 막혀서 세상에 행세하기 어려움을 깊이 걱정하시고 작은 벼슬로 그칠 줄을 알라고 경계하셨는데, 나는 허명(虛名)에 몰려 전전해서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나의 본의가 아닌바 그 유훈을 실추함이 심하다. 다만 선인의 뜻과 행실을 한 가지도 전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나의 불효를 거듭하는 것이다. 이에 감히 세계와 행실을 엮어서 당세의 군자에게 글을 받아 묘도를 빛내어서 망극한 애통을 펴려 하는 것이다.” 하였다.
아, 선생의 말씀을 세 번 반복해 보니 그 뜻이 또한 애처롭다. 나는 이에 대해서 또 감회가 있다. 선생은 선친의 뜻을 추념하고 선비의 가르침에 깊이 복종하여 출사하신 이래로 여러 번 퇴각하시고는, 깊이 지방에 잠복해 있으면서 강학을 힘써서 그 문장과 가르친 말씀을 학자들이 모두 전하고 외고 있으며 한 세상 사람들이 또한 이미 들어 알고 있다. 그러나 선공(先公)의 지업(志業)과 선부인의 식감이 그 실마리를 크게 열어서 자손들의 마음을 인도함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알지는 못할 것이다.
또 공은 비록 당시에 일을 하지는 못했으나 후대에 영화롭고 표창됨이 또한 지극하니, 공은 또 무엇을 한하겠는가. 후세 사람으로서 퇴계 선생의 도를 추모하면서 그 소유래(所由來)를 미루어 본다면 반드시 공의 덕을 징험할 수가 있어서 덕을 많이 쌓아 개발한 공로 때문이요, 애당초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공의 뜻과 행실은 장차 전해지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어찌 쉽게 속인(俗人)과 말하겠는가. 아, 슬프다. 이어 명문을 붙인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망망한 천지의 조화는 / 茫茫元化
줄기와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고 / 苞幹相幷
흡벽(翕闢)이 공중에 가득하여 / 翕闢滿虛
만물이 태어나네 / 物由以生
태어날 때의 본성은 / 生之有性
사람이 똑같이 받았으나 / 人所均受
명은 만나는 환경에 따라 어그러져 / 命與遇舛
장수도 하고 요절도 하며 아름답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네 / 脩夭好醜
아 공이 세상에 태어나심은 / 嗟公生世
만나기는 어려웠고 지나기는 쉬웠네 / 値難過易
하늘은 어찌하여 큰 재주를 주시고도 / 胡畀之大
조금도 시험해 보지 못하게 하였나 / 而不少試
도는 굽혀졌다가 충만해지고 / 道詘而充
수는 가득하면 한계에 도달하네 / 數盈而局
중도에 서거하니 / 半塗以逝
쓸쓸하고 막혀 있네 / 寂寥鬱塞
독실하게 후손을 열어 놓아 / 篤啓嗣續
가문의 법도를 세웠네 / 惠于閫則
크게 유서를 발하여 / 濬發遺緖
문(文)의 극을 잡았으니 / 秉文之極
그 문은 무엇인가 / 其文伊何
실로 하늘에서 나왔네 / 實出於天
하늘이 공을 탄생시킴은 / 天之降公
또한 뜻이 있어서이니 / 其有意然
이미 현부를 열었고 / 旣闢玄符
또 그 후손을 번성하게 하였네 / 又昌厥後
훌륭한 자손이 많이 나와 / 詵詵毓慶
선조의 덕을 잘 계승하네 / 克以克有
용두산 남쪽에 신도비를 세우고 / 龍頭南麓
돌에 아름다운 사실을 기재하니 / 琢石載美
혁혁한 큰 업적은 / 光光大業
분명히 유래가 있어라 / 的有出自
덕을 상고하여 천리를 미루니 / 考德推天
신이 어찌 감히 속이겠는가 / 神豈敢誣
후세에 알리노니 / 用詔來者
내 말은 아첨한 것이 아니라네 / 匪我言諛


 

[주D-001]흡벽(翕闢) : 음흡양벽(陰翕陽闢)의 준말로, 음은 닫히고 양은 열려서 이 음양의 조화로 말미암아 우주의 만물이 생성된다는 역리(易理)에 근거한 말이다.
[주D-002]현부(玄符) : 현(玄)은 검정색으로 《주역》〈곤괘(坤卦) 문언(文言)〉의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天玄而地黃〕”는 말에 근거하여 하늘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며, 부(符)는 상서로운 조짐을 말한다.

 

 

 

언행록 1

 유편(類編)
학문(學問)


선생은 12세 때에 그의 숙부 송재(松齋) 선생 이름은 우(堣), 자는 명중(明仲) 에게 《논어》를 배웠다. 하루는 《논어》 가운데 이덕홍(李德弘)의 기록에는 자장편(子張篇)이라 되어 있다. 이(理) 자에 대해 묻기를,
“무릇 일의 옳은 것이 이(理)입니까?” 하였다. 송재 선생은 기뻐하면서, “네가 벌써 글 뜻을 아는구나.”
하였다. -이안도(李安道)-
선생께서,
“숙부 송재공은 학문을 권면하는 데 몹시 엄하셔서, 말이나 얼굴에 조금도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셨다. 내가 《논어》를 《집주(集註)》까지 외워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도 틀림이 없었으나 그래도 칭찬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으셨다. 내가 학문에 게으르지 않은 것은 다 숙부께서 가르치고 독려하신 힘이다.”
하였다. -김성일(金誠一)-
선생께서 젊었을 때 우연히 연곡(燕谷) 온계(溫溪)에 가까운 마을 이름에 놀러 간 일이 있었다. 연곡에는 조그마한 못이 있는데, 물이 매우 맑았다. 선생께서 시를 지었는데,
고운 풀 이슬에 젖어 물가를 둘렀는데 / 露草夭夭繞水涯
고요한 맑은 못에는 티끌도 없네 / 小塘淸活淨無沙
구름 날고 새 지나는 것이야 제맘대로이나 / 雲飛鳥過元相管
단지 때때로 제비가 물결 찰까 두려워라 / 只怕時時燕蹴波
하였다. 이것은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하는 데 혹시 인욕(人欲)이 낄까 두려워한 것이다. 김성일도 이 시를 기록하면서 “이것은 주자(朱子)의 〈관서유감(觀書有感)〉 시와 그 뜻이 같다.”라고 하였다. -김부륜(金富倫)-
선생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19세 때에 처음으로 《성리대전(性理大全)》 첫 권과 끝 권을 얻어 읽어 보았더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기쁘고 눈이 열리는 듯하여, 읽고 생각하기를 오래하니, 점점 그 의미를 알게 되어서 비로소 학문에 들어가는 길을 얻은 듯하였다.”
하였다. -이덕홍(李德弘)-
선생이 일찍이,
“내가 젊었을 때 이 학문에 뜻을 두어, 종일토록 쉬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도 않고 공부를 하다가 마침내 고질병을 얻어서 마침내 병들어 못쓰게 된 몸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배우는 자들은 모름지기 자기의 기력을 헤아려서, 잘 때는 자고 일어날 때는 일어나며, 때와 장소에 따라 자기 몸을 살피고 체험하여, 마음이 방종하여 빗나가지 않게 하면 될 것이다. 굳이 나처럼 하여 병까지 나게 할 필요야 있겠는가.”
하였다. -이덕홍-
선생이 일찍이,
“나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학문의 뜻을 깨우쳐 줄 만한 스승이나 벗이 없어서, 장장 수십 년 동안이나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헛되게 심사만 낭비하면서 탐구를 그만두지 않고 때로는 눕지도 않고 고요히 앉아서 밤을 새우기도 하다가 마침내 심병(心病)을 얻게 되어 여러 해 동안 학문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참된 스승이나 벗을 만나, 미로(迷路)에서 길을 지시받았더라면, 어찌 심력(心力)을 헛되이 써서 늙도록 아무 소득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겠는가.”
하였다. 이것은 겸손한 말이지만 그의 학문이 스승과 벗의 힘을 입지 않고 초연히 혼자서 터득한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김성일-
일찍이 선생이 학자들에게,
“내가 젊어서 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중간에 심병을 얻어 거의 공부를 폐하다시피 했다. 만년에 다시 깨달아 이 큰일을 마치려고 해 보았지만, 혈기는 이미 쇠하여졌고, 뜻과 생각은 이미 힘써 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하였다. -정유일(鄭惟一)-
선생은 일찍이 성균관에 유학(遊學)하였다. 그때는 처음으로 기묘사화를 겪은 때이라, 사람들은 모두 도학(道學)을 꺼리고 날마다 실없는 농담으로 시간을 보내는 습성이 있었다. 그러나 선생만은 홀로 점잖게 몸을 가져서 동정(動靜)이나 언행이 한결같이 예법을 따랐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선생이 사귀는 이는 오직 인후(麟厚) 김하서(金河西 자는 후지(厚之)) 한 사람뿐이었다.
선생이 일찍이 상사(上舍) 황씨(黃氏)를 찾아가 《심경부주(心經附註)》를 보았는데, 그 주석은 모두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어록(語錄)이어서 다른 이는 보고 구두점(句讀點)조차 떼지 못했다. 선생은 그것을 가지고 여러 달을 들어앉아서 침잠하여 반복한 결과 저절로 터득할 수 있게 되었다. 혹시 모르는 곳이 있더라도 억지로 알려고 하지 않고, 우선 한쪽에 미루어 두었다가 때때로 다시 들춰내어 마음을 비우고 반복하여 음미하다 보면 끝내는 통하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이덕홍-
선생은,
“나는 《심경(心經)》을 얻고나서, 비로소 심학(心學)의 근원과 심법(心法)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평생에 이 책을 신명(神明)처럼 믿었고, 이 책을 엄한 아버지처럼 공경하였다.”
하였다. -이덕홍-
선생은,
“내가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공부를 한 학문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현명한 스승이나 벗을 만나 어렵고 의혹되는 것을 질문하고 토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리에 대해서 확실한 소견을 가지지 못하였고, 학문이 성취되기도 전에 갑자기 벼슬길에 오르게 되자 더욱 학문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몇 해 전부터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읽고 조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어찌 감히 그 문장(門墻)의 깊고 그윽한 곳이야 엿볼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김부륜(金富倫)-
선생은,
“내 비록 늙고 아는 것이 없지만, 다만 젊어서부터 성현의 말씀을 독실히 믿어, 남들의 평가나 영욕(榮辱)에 구애되지 않았고, 또한 색다른 주장을 내세워, 사람들에게 괴상하게 보이게 하지도 않았다. 만일 학문을 하는 자가 남의 평가나 영욕을 두려워한다면 홀로 설 수가 없을 것이요, 또 안으로 공부한 것은 없이 색다른 주장을 내세워 사람들에게 괴상하게 보이게 한다면, 또한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확고하고 굳세어야 비로소 그에 근거하여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부륜-
선생의 학문은 한결같이 정자와 주자를 표준으로 삼았다. 경(敬)과 의(義)를 양쪽에 끼고 지(知)와 행(行)을 아울러 추진하며, 안팎이 하나 같고 본말(本末)을 겸비하여 큰 근원을 훤히 보고 큰 근본을 굳게 세웠으니, 만일 그 지극한 정도를 논한다면 우리 동방(東方)에 한 사람뿐일 것이다. -정유일(鄭惟一)-
선생은 연세가 점점 많아지고 병은 깊어 갔지만, 학문을 진전시키는 데에 더욱 힘쓰고, 도(道)를 지키기에 더욱 무거운 책임을 느꼈다. 엄숙하고 공경하며 본성을 배양하는 공부는 아무도 없이 혼자일 때일수록 더욱 엄격히 하였다. 평소에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갓을 쓰고 옷을 입고는 온종일 책을 보거나, 혹은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서 항상 그 마음 살피기를 해가 처음 솟아오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김성일-
신유년(1561, 명종16) 겨울에 선생은 도산(陶山) 완락재(玩樂齋)에서 거처하였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어떤 글을 한 차례 엄숙하게 외웠는데, 자세히 들어 봤더니, 《심경부주(心經附註)》였다. -김성일-
“잠언(箴言)이나 경구(警句)를 써서 자리 옆에 걸어 두고, 항상 그것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은
“옛날 사람은 대야나 식기, 책상이나 지팡이에 모두 명(銘)이 있었다. 그러나 다만 마음에서 경계하고 반성하는 실제가 없다면, 잠언을 써 벽에 가득하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학문을 하려면 장횡거(張橫渠 장재(張載))처럼 ‘낮에는 하는 일이 있고, 밤에는 터득하는 바가 있으며, 말에는 가르침이 있고, 행동에는 법도가 있으며, 눈 깜짝이는 사이에도 보존하는 바가 있고, 숨 쉬는 사이에도 배양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라는 말과 같이 한다면 이 마음을 항상 보존하여서 방일(放逸)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굳이 자리 옆에 써 걸어 둘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주자(朱子)는 항상 학자들에게 평이하고 명백한 곳에 힘쓰게 하였습니다. 이른바 평이하고 명백한 곳이란 곧 부모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것과 같이 날마다 보통 하는 일을 말한 것입니까?”
하고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은
“그렇다. 공자(孔子)가 번지(樊遲)에게 이르기를, ‘거처할 때는 공손히 하고, 일을 할 때는 공경히 하며, 사람을 대할 때에는 충실하게 하라.’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평이하고 명백한 곳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학자가 도(道)로 들어가는 문을 알고자 한다면, 《주자대전》 가운데서 찾으면 쉽게 힘쓸 곳을 찾을 것이다.”
하였다. -김부륜-
선생은 《심경(心經)》을 가장 사랑하여, 정황돈(程篁墩)의 글에다 후론(後論)을 붙이면서 허노재(許魯齋)의 신명(神明)부모의 비유도 인용하였다. 따라서 서산(西山) 이후로는 오직 선생만이 이 책의 의미를 깊이 알았다 할 것이요, 서산의 입장에서도 후세의 자운(子雲)을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정구(鄭逑)는 또 서사원(徐思遠)에게 답한 편지에서, “《심경질의(心經質疑)》는 처음에 선생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그때의 제자가 개인적으로 기록해서 세상에 전파된 것이므로, 필시 조금도 미진한 부분이 없이 형연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이제 글머리에 옮겨 적어 엄연히 올린다면 선생의 본의가 아닐까 두렵다.” 하였다. -정구-


 

[주D-001]집주(集註) : 《논어집주(論語集註)》는 주희(朱熹)가 《논어》를 주석한 것인데, 여러 사람의 해석을 모은 것이므로 집주라 한다.
[주D-002]문장(門墻) :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나의 문(門)과 담[墻]은 겨우 어깨에 미치는 정도라 들여다 볼 수 있지마는, 부자(夫子 공자)의 문장은 높이가 두어 길이라,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못하면 그 안의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하였다.《論語 子張》
[주D-003]정황돈(程篁墩) : 중국 명나라 때의 학자이다. 육구연(陸九淵)의 학파로, 이름은 민정(敏政)이고 황돈은 호이다.
[주D-004]허노재(許魯齋)의 …… 비유 : 노재는 원나라 때 학자인 허형(許衡)의 호이다. 허노재(許魯齋)가 《소학(小學)》을, “신명처럼 부모처럼 받든다.[信之如神明 奉之如父母]”라 하였다.
[주D-005]서산(西山) : 남송(南宋) 때의 학자인 진덕수(眞德秀)를 말하며, 성현들의 심론(心論)을 모아 《심경(心經)》을 지었다.
[주D-006]자운(子雲) : 전한(前漢) 때의 유학자인 양웅(揚雄)을 말한다. 공자의 《논어》를 본떠 《법언(法言)》을 지었고 《주역》을 본떠 《태현경(太玄經)》을 저술(著述)하였다. 혹자가 보고 말하기를, “자네가 힘들여 저술하여도 후에 볼 사람이 없고, 장독이나 덮을 것이다.” 하자, 양웅은 답하기를, “후세의 양자운(揚子雲)이 또 있을 것일세.” 하였으니, 곧 후세에 자기와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주D-007]서사원(徐思遠) : 호는 미락재(彌樂齋)ㆍ낙재(樂齋)이고, 정구의 문인이다.

 

언행록 1
 유편(類編)
독서(讀書)


선생은 일찍이,
“나는 12세 때에 숙부 송재(松齋) 선생에게 《논어》를 배웠다. 선생은 과정을 엄하게 세워서 조금도 유유하게 지낼 수 없게 하였다. 나는 그 가르침을 받들어 조심하고 힘써서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새로운 지식을 얻으면 반드시 옛것을 익히고, 일 권을 배워 마치면 그 일 권을 다 외우고, 이 권을 마친 뒤에도 이 권을 다 외었다.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하니, 차츰 처음 배울 때와 달라졌다. 그래서 삼 권, 사 권을 읽게 될 즈음에는 가끔 혼자서도 알아지는 데가 있었다.”
하였다. -이덕홍(李德弘)-
선생은 일찍이 서울에서 《주자전서》를 구하여 문을 닫고 들어앉아서 조용히 읽기를 시작하여 한여름 내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혹 누가 더위로 몸이 상할 염려가 있다고 경계하면, 선생은 말하기를,
“이 책을 읽으면 가슴속에서 문득 시원한 기운이 생기는 것을 깨닫게 되어 저절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어찌 병이 나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또 말하기를,
“이 책 《주자전서원주(朱子全書原註)》 을 읽는 사람은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요, 그 방법을 알게 되면 필시 또 감흥이 일어날 것이다. 이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오랫동안 익힌 뒤에 사서(四書)를 다시 보면, 선현의 말씀이 마디마디 맛이 있어서 비로소 자신에게 받아들여 쓸 곳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의 집에 매우 오래되고 글자의 획이 거의 희미해진 《주자전서》 사본 한 질이 있었는데, 선생이 읽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뒤에 사람들이 이 책을 많이 박아 내자, 선생은 새 책을 얻을 때마다 반드시 대조하여 고치고 표시하여 다시 한번 읽으므로 장(章)마다 환하고 글귀마다 익숙해져서, 그것을 몸과 마음에 수용(受用)하는 것이 마치 직접 손으로 잡고 발로 디디듯,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 있어서 말하고 침묵하며, 동(動)하고 정(靜)하며, 사양하고 받으며, 취하고 주며, 나아가 벼슬하며 물러나 조용히 사는 일 등에 대한 의리가 이 책의 그것과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혹 남이 어렵고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는 일이 있으면, 선생은 반드시 이 책에 의거해서 대답하였는데, 역시 사정(事情)과 도리(道理)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은 모두 자기가 몸소 깨닫고 실제로 믿어 마음과 정신에 녹아든 결과이니, 한갓 책에만 의지해서 귀로만 듣고 입으로만 말하는 것으로는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김성일-
“《소학》과 《근사록》과 《심경》 가운데서 어느 책이 가장 긴절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소학》은 체와 용을 함께 갖추었고,《근사록》은 의리(義理)가 정미(精微)하니 모두 읽지 않을 수 없으나 초학자가 처음 시작하는 데는 《심경》보다 긴절한 것이 없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 경우에는 《주서절요(朱書節要)》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친구들이나 제자들의 자질이나 병통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에, 그 자질에 따라 가르치고 증세에 따라 약을 썼으니, 그 많은 문답 가운데에 어찌 자연히 자신에게 맞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진실로 잠심(潜心)하고 음미(吟味)하여 마치 직접 얼굴을 뵙고 가르침을 받는 것같이 한다면, 자신을 수양하는 공부에 어찌 도움 됨이 적다 할 것인가.”
하였다. -김수(金睟)-
선생은 젊어서 《주서절요》에 비점(批點)을 찍었는데, 만년에 정본(定本)을 위하여 상당히 수정하였다. 그런데도 아직 완성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조목(趙穆)-
《주서절요》 정본의 주해는 선생이 직접 쓴 기록들 속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뒤에 새로 고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주서절요》 목록은 원본(元本)의 부록과 혹 맞지 않는 곳이 있는데, 미처 여쭈어 보지 못한 것이 한이다. -조목-
선생은 읽지 않은 책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성리학에 가장 마음을 쓰셨다. 그래서 장(章)마다 충분히 이해하고 글귀마다 자세히 알아서, 강론하실 때에는 정확하게 꼭꼭 들어맞았으니, 마치 자기의 말을 외는 듯하였다. 늘그막에는 오로지 《주서(朱書)》에 전념하였으니, 평생에 힘을 얻은 곳은 대개 이 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김성일-
선생은 성현을 높이고 사모해서, 그를 존경하기를 마치 신명이 머리 위에 있는 듯하였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그 이름을 피하고, 아무개[某]라고 일컬어 한번도 범(犯)한 적이 없었다. -김성일-
선생은 책을 읽을 때에는 단정히 앉아 엄숙하게 외었다. 글자에서는 그 새김을 찾고, 글귀에서는 그 뜻을 찾아서, 비록 한 자 한 획의 미세한 곳까지도 예사로 지나쳐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어(魚)를 노(魯)로 쓴다든가, 시(豕)를 해(亥)로 쓰는 것과 같은 잘못들도 반드시 분별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일찍이 한번도 기왕 있는 글자를 함부로 지우거나 고치지 않고, 그 글줄 위에다가 방주(旁註)를 내기를, “아무 글자는 마땅히 아무 글자로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했으니, 그 자세하고 삼가며 정밀함이 이와 같았다. 상사(上舍) 조목(趙穆)이 《심경부주(心經附註)》를 교정할 때에 글자 획이 잘못된 것은 바로 판각을 깎아 내서 바로잡고 주석을 부당하게 깎아 낸 것은 곧 보태어 고쳤더니 선생이 꾸짖기를, “선유들이 만든 책을 어찌 제 소견에만 의지해서 지우고 보태기를 이처럼 거침없이 할 수 있는가. 자네는 저 금은거(金銀車)의 조롱을 생각하지 못하는가.” 하였다. 한퇴지(韓退之)의 아들 창(昶)은 무식하고 용렬한 사람으로, 집현 교리(集賢校理)로 있었다. 사전(史傳)에 금근거(金根車)라는 문자가 있었는데, 창은 그것을 잘못이라 하여, 이내 근(根) 자를 은(銀) 자로 고쳤다. -김성일-
선생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역시 이 사람이요, 이 책을 읽고나서도 역시 이 사람이다.’라고 한 이 두 구절은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한다.”
하였다. -김성일-
독서하는 방법을 물었더니, 선생은 답하기를,
“그저 익숙하도록 읽는 것뿐이다. 책을 읽는 사람이, 비록 글의 뜻은 알았더라도, 만약 익숙하지 못하면 읽자마자 곧 잊어버리게 되어, 마음에 간직할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배우고 난 뒤에 또 복습하여 익숙해질 공부를 더해야, 비로소 마음에 간직할 수 있으며, 또 흠씬 젖어 드는 맛도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말하기를,
연평(延平)이 조용히 앉아 마음을 편안하고 맑게 해서, 하늘의 이치를 몸소 알아냈다는 말은, 학자가 책을 읽어서 이치를 연구하는 법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또 말하기를,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반드시 성현의 말과 행동을 마음에 본받아서, 조용히 찾고 묵묵히 완미한 뒤라야 비로소 학문으로 나가는 공(功)을 차차 길러 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대충대충 말하여 넘기고 그저 예사로 외우기만 할 뿐이라면, 이것은 다만 글자나 글귀를 들은 대로 말하는 나쁜 습관에 불과할 것이니, 비록 1000편(編)의 글을 외우고 머리가 희도록 경을 이야기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또 말하기를,
“낮에 읽은 것은 밤에 반드시 생각하고 따져 보아야 한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말하기를,
“성인의 글을 읽고 자기를 돌이켜 보아서 깨닫지 못할 곳이 있거든, 모름지기 성인이 내리신 가르침이란 반드시 사람이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하신 것임을 생각하라. 성현의 말씀과 나의 소견이 다르다면, 이것은 내가 노력한 것이 투철하지 못한 까닭이다. 성현이 어찌 알기 어렵고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나를 속이겠는가. 성현의 말을 더욱 믿어서 마음을 비우고 간절히 찾으면, 장차 깨달아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부륜-
선생은 말하기를,
“글을 읽을 때는 구태여 색다른 뜻을 깊이 구하려 할 것이 아니라, 다만 본문 위에 나타나 있는 뜻만을 구할 뿐이다.”
하였다. -김부륜-
“우성전(禹性傳)과 유성룡(柳成龍)은 주자(朱子)의 글이 《심경》보다 간절하고 요긴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 말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말하기를,
“다 읽어 보지도 않고서 대번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반드시 여러 해를 두고 마음을 가라앉혀서 익숙히 읽고 자세히 맛본 뒤라야 비로소 직접 그것의 요긴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간략한 것만 좋아하고 번거로운 것을 싫어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김사순(金士純)이 계몽서를 배우다가,
“이 책은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한 사람에게는 친절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니, 선생은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만일 이 책을 익숙히 읽고 자세히 맛보기를 오래오래 한다면 실체(實體)가 드러나서, 눈앞의 사물이 그것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니, 어떻게 친절하지 않다고 하는가.”
하였다. -이덕홍(李德弘)-
일찍이 이덕홍이 세주(細註)까지 다 읽는 것을 병통으로 여기면서 말하기를,
“골짜기에 피어오르는 안개와 같고, 파도에 씻기는 모래와 같은 설(說)들일 뿐이다. 그대는 생략하라.”
하였다. -이덕홍-
정사성(鄭士誠)이 협지(夾之), 훈지(壎之) 협지는 금응협(琴應夾), 훈지는 금응훈(琴應壎), 모두 선생의 제자봉원(逢原)과 함께 청량산(淸凉山) 절에서 글을 읽다가 돌아오는 길에 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말하기를,
“계몽서는 다 읽었는가? 책을 읽을 때는 범범하게 보아 넘겨서는 안된다. 조사경(趙士敬)을 안 보았는가. 책 읽기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비로소 얻는 바가 있느니라.”
하였다. -정사성(鄭士誠)-
무진년(1568, 선조1) 11월 3일에 선생은 석강(夕講)에 입시(入侍)하였다. 이때 선조(宣祖)가 갓 등극하였는데, 춘추가 17세였다.《소학》을 강하여 마치고 나아가 아뢰기를,
“《소학》은 이제 다 강하였습니다. 차례로 말씀드리면, 마땅히 먼저 《소학》을 강하고 그다음에《대학》을 강하는 것이 옳겠으나, 지금 반대로 먼저 《대학》을 강하고 그다음에《소학》을 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공부로 말하면, 《소학》과《대학》이 통하여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의 《대학혹문(大學或問)》첫머리에도, 《소학》을 《대학》의 근본으로 삼았고 통합해서 하나로 하는 공부는 또 경(敬)으로써 큰 근본을 삼았던 것입니다. 비록 《소학》을 어린아이가 배우는 학문이라고 하지만, 《대학》에 들어간 뒤에도 이것을 버리고 오로지 《대학》에만 전념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성인의 학문은 처음과 끝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학》은 처음을 이루는 것이고 《대학》은 끝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을 집짓는 데 비유하오면, 《소학》은 그 터를 닦고 재목을 준비하는 것이요, 《대학》은 큰 집 천만 칸을 그 터에 짓는 것입니다. 그 터만 닦고 집을 짓지 않으면 이것은 끝이 없는 것이요, 또 큰 집 천만 칸을 지으려고 하면서 그 터를 닦지 않으면 또한 집을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의 학문의 처음과 끝이 되는 것입니다. 《소학》의 제사(題辭)에도 또한 ‘그 뿌리를 북돋우고 그 가지를 뻗게 한다.’라고 했으니, 《소학》은 그 뿌리를 북돋우고 《대학》은 그 가지를 뻗게 하는 것입니다. 이 밖에 비록 다른 글을 배운다고 해도, 그 공부는 모두 큰 집 천만 칸을 꾸미고 장식하는 데 쓰이는 것일 뿐입니다. 전날에 강론한 글도 항상 스스로 본받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명륜(明倫)〉이나 〈경신(敬身)〉 같은 것은 심술(心術)의 요점을 밝히고 위의(威儀)의 법칙을 밝힌 것이니, 잠시라도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일상생활 속에서도 하늘의 이치가 스스로 행해져서 어느 것 하나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대학》의 규모는 이것들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 밖에 저 《논어》ㆍ《맹자》ㆍ《중용》이나 《시(詩)》ㆍ《서(書)》 같은 여러 책도 다 마땅히 대학의 규모에 들어가서 그 꾸밈이 되는 것이오니, 이제 강을 마쳤더라도 항상 유념하셔야 합니다. 옛말에도 ‘공부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다.’라고 하였으니, 이 ‘뒤로 물러난다.’라는 것은 뒤로 물러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날 배운 것을 항상 돌아보고 익혀서 잊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옛것을 익히는 공부가 지극하고 깊으면, 새것을 아는 공부도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성념(聖念)을 늦추지 않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주D-001]비점(批點) : 시나 문장 등의 요소(要所) 묘행(妙行)에 찍는 점이다.
[주D-002]연평(延平) : 중국 송나라의 학자로 주희(朱熹)의 스승이다. 나종언(羅從言)에게 수학하고, 정호(程顥)ㆍ정이(程頣) 사상의 정수를 주희에게 전수했다.
[주D-003]계몽서 :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말한다. 주희가 《주역》에 관하여 설명한 책으로, 4권으로 되어 있다.
[주D-004]봉원(逢原) : 선생의 손자인 이안도(李安道)의 자이다.

 

언행록 1
 유편(類編)
격치(格致)를 논함


선생이 계사(溪舍)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선생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의 〈팔진도(八陣圖)〉를 언급하였다. 선생은 이내 그 도설을 꺼내어 보이고 별본(別本)을 베끼게 하면서 말하기를,
“이것도 또한 격치 공부의 하나이니, 글을 읽는 여가에 유의하여 연구해 볼만하다.”
하였다. -문위세(文緯世)-
동짓날에 김취려(金就礪)가,
“오늘은 일양(一陽)이 처음으로 움직이는 날로서 곧 천지가 만물을 낳는 처음입니다. 모든 초목의 뿌리가 오늘 그 생기(生氣)가 움직이는 것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답하기를,
“바람과 서리에 꺾이고 시달린 뒤라, 비록 그 가지가 앙상하여 생기가 나타나지 않지만 그 싹이 터서 자랄 수 있는 이치는 오늘 이미 움직인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일양이 다시 돌아오면 하찮은 풀 한 포기도 다 생기를 머금는다 하는데,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어찌 홀로 오늘 피어오르는 기운이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말하기를,
“사람은 형기(形氣)의 구속을 받기 때문에, 비록 천지의 변화와 서로 관련되지 않는 듯이 보이지만, 감응(感應)과 소장(消長)의 이치는 실로 천지와 더불어 유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은 구일(姤日)이나 복일(復日)에 관문을 닫고 몸을 가리는 계율이 있었으니, 이것은 유도(柔道 음기)를 끊어서 미연에 막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으로서 어찌 홀로 이날에 피어오르는 단서가 없을 것인가. 또한 이뿐이 아니라 순식간에 선(善)의 싹이 움직이면 모두 양(陽)이 돌아오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만은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 선한 싹을 확충하는 공(功)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선한 싹이 겨우 싹트자마자 뭇 욕심에 도로 빠져서, 비로소 거기에서 천지의 조화와 서로 크게 단절되게 되는 것이니, 참으로 슬픈 일이라 하겠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여러 제자에게 투호(投壺)를 시켜서 그 덕(德)을 보고, 이덕홍(李德弘)에게 선기옥형(璿璣玉衡 오늘의 지구의(地球儀))을 만들게 하여 천상(天象)을 살폈다. 선기옥형은 지금 완락재(玩樂齋)에 있다. -이덕홍-
〈태극도설〉에 나오는 ‘오행은 하나의 음양(陰陽)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다.’의 뜻을 물으니, 선생은 답하기를,
“그 말은, 오행은 곧 음양이 작용하여 만들어진 것이요, 음양은 곧 태극이 작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음양이 바로 하나의 태극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였다. -김륭(金隆)-
“〈태극도해(太極圖解)〉에서 천지(天地)와 일월(日月) 위에 또 태극(太極), 양동(陽動), 음정(陰靜), 오행(五行)의 테두리를 더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답하기를,
“인극(人極)이 서면, 태극ㆍ음양(陰陽)ㆍ오행과 천지ㆍ일월ㆍ사시(四時)ㆍ귀신(鬼神)이 어기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김륭-
〈태극도해〉의 충기설(冲氣說)을 물으니 선생은 답하기를,
“충(冲)은 중(中)과 같은 뜻이다. 토(土)의 기운은 음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에도 치우치지 않아서, 그 기운이 중정(中正)하기 때문에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였다. -김륭-
“〈태극도해〉에서 말한 정조(精粗)와 본말(本末)은 무엇을 가지고 분별합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답하기를,
“정(精)과 본(本)은 태극이요, 조(粗)와 말(末)은 음양이다. 원래 이렇게 보기는 하지만, 무릇 천하의 사물은 마땅히 모두 통틀어 보아야 할 것이니, 정조와 본말이 모두 태극이 작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면, 결국 저것이니 이것이니 하는 구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하였다. -김륭-
“만물을 만들어 내는 재료인 일곱 가지(음양과 오행)가 서로 합할 때 좋은 시절이 있고 좋지 않은 시절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말하기를,
“시절로써 말할 것이 아니다. 대개 조물(造物)이 유행(流行)할 때, 그 기운이 원래 맑고, 탁하고, 순수하고, 잡된 차이가 있다. 마치 저 한 송이 꽃이 혹은 일되고 혹은 늦되며, 혹은 크고 혹은 작으며, 혹은 아주 예쁘고 혹은 약간 예뻐서, 그 분수가 한결같지 않다. 생각해 보면 기운이 한결같지 않은 것도 이 꽃과 같을 것이다. 대개 먼저 우리 인간이 빼어난 기운을 받아 태어난 뜻을 자세히 보고 완전히 익혀 안다면, 그 밖의 한결같지 않은 성품은 자연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저 〈복조부(鵩鳥賦)〉에, ‘천지를 풍로로 삼고 조화를 장인으로 삼으며, 음양을 숯으로 삼고 만물을 구리쇠로 삼는다.’라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이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만물을 만들어 내는 재료에 대한 설[生物材料說]은 〈도해(圖解)〉 제6판(板) 소주(小註)에 보인다. -김륭-
“〈도해〉 소주의 면재(勉齋)의 말에, ‘이른바 모든 이치의 집합체요, 모든 조화의 근본이다.’라는 말은 대개 태극을 가리켜서 한 말입니다. 이른바 ‘만물이 제각기 하나의 태극을 갖추고 있다.’라는 말 또한, ‘모든 이치의 집합체요 모든 조화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과연 모든 이치를 갖추었다 할 수 있지만, 사물은 제각기 자신에게 적용되는 한 가지만을 갖추었을 뿐인데, 어떻게 모든 이치를 갖출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말하기를,
“하나의 사물에 있는 것을 모든 이치의 총체적인 집합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이 부여받아 온 바가 곧 태극의 이치라면, 어찌 제각기 하나의 태극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없겠는가. 어찌 태극의 모든 이치가 모두 모인 중에서 한 가지 이치만 베어 내어, 한 사물에 붙여 주었겠는가. 마치 한 조각의 달빛이 두루 비치면, 비록 저 큰 강이든 바다든, 아무리 작은 술잔의 물이든 비치지 않은 곳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잔 속에 비친 달빛을 어찌 그 물이 적다 해서 달이 비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륭-
“《대학》을 읽다가 격물장(格物章)에 이르러 ‘자기의 아는 바를 인하여 더욱 탐구해서 그 지극한 데 이르기를 구한다.’라고 한 것을 읽고는 마치 터득한 바가 있는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탐구한다.[益窮]’라는 두 글자는 소자(小子)가 평생 가야할 학문하는 길입니다.”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자기가 이미 아는 것을 가지고 더욱 탐구하는 것으로 평생의 학문하는 길로 삼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오직 앎에 있어서만 그러할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데 있어서도 또한 마땅히 자기가 이미 행했던 것을 인하여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니, 이 두 가지를 아울러 나아가면, 그 학문하는 길이 점점 트여서 막힘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李國弼)-


 

[주D-001]구일(姤日)이나 복일(復日) : 《주역》 〈구괘(姤卦)〉에 해당하는 5월의 하지일(夏至日)을 말하는데, 이때부터 음기(陰氣)가 싹트기 시작한다. 복일은 〈복괘(復卦)〉에 해당하는 11월의 동지일(冬至日)을 말하는데, 이때부터 양기(陽氣)가 싹트기 시작한다.
[주D-002]투호(投壺) : 옛날 사대부들이 손님과 놀 때에 그 재주를 보는 놀이로, 일정한 거리에서 화살을 던져 병 속에 많이 넣는 수효로 승부를 가리는 놀이이다.
[주D-003]복조부(鵩鳥賦) : 한(漢)나라 때 가의(賈誼)가 장사(長沙)에 귀양 가서 지은 글이다.

 

언행록 1
 유편(類編)
존성(存省)


선생은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여럿이 있기를 좋아하지 않고, 혼자 방에 앉아 마음의 근본을 닦고 길렀다. 이덕홍이 말하기를,
“움직일 때에는 이 마음을 수습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고요를 주(主)로 해서 그 근본을 세우는 것만 한 것이 없다.”
하였다. 이덕홍이 묻기를,
“혹 가다가 마음속에서 번거(飜車)와 같은 적이 있는데,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선생은 답하기를,
“마음의 기운이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사념(邪念)이 없이 고요한 것이니, 만일 잘 안정시킬 수 있다면 어찌 이러한 어지러운 현상이 생기겠는가?”
하였다. -이덕홍-
이덕홍이, 안자(顔子)가 인(仁)을 어기지 않은 것에 대해 물으니 선생은 답하기를,
“안자의 마음은 천리(天理)와 하나가 되어 티끌이 앉지 않은 거울과 같고, 물결이 일지 않은 물과 같은 것이다. 공부는 석 달 동안이나 오래 계속하면서도 털끝만 한 사사로운 마음도 끼어든 적이 없었고, 한순간도 게으르고 소홀한 적이 없었다. 다만 아직 완전히 화(化)하지 못한 약간의 무엇이 남아 있어서, 석 달이 지나면 어쩌다가 한 번 중단되는 듯한 기미가 있게 된다. 그러나 중단되면 곧 다시 이를 깨달았으니, 이것은 아직 성인(聖人)에 미치지 못하여 조금 간격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이 묻기를,
“그러면 선생님은 공부가 끊어지는 적이 없으십니까?”
하니, 선생은 답하기를,
“어찌 감히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나도 고요한 가운데 엄숙하고 공경할 때에는 혹 함부로 마음이 날뛰는 것을 면할 수는 있지만, 술을 마시고 말을 주고받을 때에는 가끔 마음이 놓여 함부로 행하는 일이 있으니, 이것이 내가 평소에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
선생은 말하기를,
“화려하고 요란한 가운데에서 사람의 마음이 가장 쉽게 움직이게 된다. 나는 일찍부터 여기에 힘을 써서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한번은 의정부의 사인(舍人)이 되어 노래하는 기생이 눈앞에 가득했을 때, 문득 한 가닥 기쁜 마음이 생김을 깨달았다. 이 조짐[機]은 살고 죽는 갈림길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처음으로 벼슬에 올라 서울에 있을 때, 늘 사람들에게 끌려 날마다 술 마시고 놀았었다. 아랫사람을 벌줄 때에, 주식(酒食)을 내게 하여 여럿이 먹고 노는 것은 괴원(槐院)의 옛 규칙이다. 그러다가 한가한 날에는 문득 심심한 마음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고는 부끄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 -이덕홍-
선생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에 숙부 송재공(松齋公)을 따라 영가(永嘉 안동)에 가 있었다. 하루는 여러 사람들과 들에 사냥하러 나갔다가 술에 취하여 말에서 떨어졌다. 술이 깨자 통렬히 자신을 질책하였고, 그로부터 스스로 술을 경계하는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두려운 마음이 마치 어제 일 같다.”
하였다. -김성일-
또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금문원(琴聞遠 이름은 난수(蘭秀)이고 선생의 제자)의 집에 간 일이 있었는데, 산길이 몹시 험했다. 그래서 갈 때는 말고삐를 잔뜩 거머잡고 긴장하여 말을 몰았는데, 돌아올 때에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올 때의 길 험하던 것을 아주 잊어버리고, 마치 탄탄한 큰길을 가듯 하였으니, 마음을 잡고 놓음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 하겠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마음을 간직하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일찍이 직접 걸음을 걸으면서 시험해 보았는데, 한 걸음을 걷는 동안에도 마음이 한 걸음을 걷는 데 있기가 어려웠다.”
하였다. -김성일-
“저는 항상 조용히 혼자 있고 싶지, 남과 사귀기를 싫어하는데, 이것은 너무 치우치는 일이 아닙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은 답하기를,
“치우친 듯하기는 하다. 그러나 배우는 자의 경우에는 이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나도 처음에 이 병통이 있었는데 유익함이 없지 않았다.”
하였다. -이덕홍-
자기를 이기는 공부를 이야기하기를,
“사특한 생각이 일어날 때 한 번 반성하고 정신 차리면 곧 그 생각이 물러가는 때가 있고, 혹은 누르면 누를수록 더욱 제어하기 어려운 때가 있다. 그것은 대개 하루의 기(氣)에도 어둡고 밝음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우성전(禹性傳)-
선생은 일찍이 말하기를,
“처음으로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은 경성(警省)하는 일이다. 그것도 처음에는 중간에 그치는 때가 많기는 하지마는, 그러나 그 공부를 쉬지 않으면 점점 쉽게 되어, 오래 하면 심(心)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
이덕홍이 선생에게 묻기를,
“심(心)에 한 물(物)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비록 당연한 법칙이 있어도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은 답하기를,
“아니다. 우리 마음은 전부가 지극히 비고 고요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거울이 물을 비추는 것과 같아서 물이 오면 곧 응해 주나, 그 물이 붙지 않고 떠나면 전과 같이 비고 맑은 것이다. 만일 어떤 사물이 달라붙으면, 그것은 거울에 진흙이 묻는 것과 같아서, 도무지 비고 맑으며 고요하고 한결같은 기상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


 

[주D-001]번거(飜車) : 물을 퍼 올리는 수차(水車)로 하루 종일 스스로 회전한다. 상념이 끊임없이 시끄럽게 일어나는 것을 수차가 종일 저절로 움직이는 것에 표현한 것이다.

언행록 1
 유편(類編)
지경(持敬)을 논함


이덕홍에게 경(敬)에 대해 논하여 보낸 답서(答書)를 선생도 한 통 베껴서 벽에다 걸어 두었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일찍이 선생을 모시고 있다가,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니 선생은 답하기를,
“내 비록 남을 가르치기는 이렇게 했지마는, 내 몸을 돌이켜 살펴볼 때에는 아직 스스로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경(敬)을 논한 글은 문집에 보인다. -이덕홍-
일찍이 지경(持敬)에 대한 공부를 이야기할 때, 선생은,
“나와 같은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혹 정신이 맑고 기운이 안정되었을 때는 저절로 공경스럽고 엄숙하여 마음을 굳이 잡지 않아도 자연히 잡히고, 사지를 얽매지 않아도 자연히 공손해진다. 옛사람도 기상(氣象)이 좋은 때는 반드시 이러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나는 그것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다.”
하였다. -우성전-
이덕홍이 일찍이 암서헌(巖栖軒)에서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공부를 함에는 먼저 주재(主宰)를 세워야 한다.”
하니, 이덕홍이 묻기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먼저 그 주재를 세울 수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경(敬)으로써 그 주재를 세울 수 있다.”
하였다. 이덕홍이 묻기를,
“경(敬)에 대한 학설이 많은데, 어떻게 하면 잊어버리거나 조장(助長)하는 병통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학설이 많지만 정자(程子)ㆍ사양좌(謝良佐)ㆍ윤돈(尹焞)ㆍ주자(朱子)의 학설만큼 절실한 것은 없다. 다만 배우는 자로서 어떤 이는 정신을 성성(惺惺 마음의 지혜롭고 밝은 모양)한 상태로 유지하는 공부를 하려 하고, 어떤 이는 마음에 한 물(物)도 용납하지 않는 공부를 하고자 하지만, 먼저 무엇을 찾는 데 마음을 두거나 이리저리 안배하게 되면, 빨리 자라게 하려고 이삭을 뽑는 식의 병통이 생기지 않을 사람이 거의 드물 것이요, 조장하지 않으려고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으면, 농사를 버려두어 김을 매지 않는 병통에 이르지 않는 사람이 또한 드물 것이다. 처음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는 정제(整齊)하고 엄숙한 공부만 한 것이 없으니, 무엇을 찾으려 하지도 않고 이리저리 맞추려 하지도 않고, 다만 규구준승(規矩準繩)의 바탕하에, 남이 보지않는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도 경계하고 삼가서, 마음으로 하여금 조금도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하면, 오랜 뒤에는 자연히 성성하고, 자연히 마음 가운데 한 물도 용납하지 않게 되어서, 잊어버리거나 조장하는 병통이 없어질 것이다. 이천(伊川)은 일찍이 ‘뜻을 두는 것도 아니요, 뜻을 두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주자는 장경부(張敬夫)에게 답한 편지에서 ‘경(敬)으로써 주재를 삼으면, 안팎이 모두 엄숙해져서, 잊어버리지도 않고 조장하지도 않으며, 마음이 저절로 보존되는 것이요, 경(敬)으로써 주재를 삼지 않고 마음을 잡아 두고자 하면, 그것은 한마음을 가지고 다른 한마음을 잡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이니, 외면에서 아무 일도 있기 전에, 내면에서는 마음이 벌써 두 갈래 세 갈래가 되어, 이루 말할 수 없이 어지럽게 될 것이다. 설사 마음을 진실로 잡아 둘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 자체가 이미 큰 병통인데, 더구나 진실로 마음을 잡지도 못함에 있어서랴.’라고 하였다. 정자와 주자의 이 말은 간절하고 마땅하며, 또 분명하고 똑똑해서, 마땅히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선생은 말하기를,
“동(動)과 정(靜)을 아울러 가지고 안과 밖을 함께 갖춘 것은, 정자(程子)의 이른바, ‘의관(衣冠)을 바루고 생각을 하나로 해서, 단정하고 엄숙하며 속이지 않고 거만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가르침만 한 것이 없느니라. 이를 마음속에 깊이 새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덕홍-
이덕홍이 말하기를, “뜻을 세워서 그 근본을 정하고, 거경(居敬)하여 그 뜻을 가지라.” 라는 말의 뜻을 물었다. 선생은 주자의 가르침을 끌어 와서 말하기를,
“사람이 일을 하려면 반드시 뜻을 세움으로써 근본을 삼아야 하는 것이다. 뜻이 서지 않으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것이요, 또 비록 뜻을 세웠다 해도 진실로 거경(居敬)하여 이 마음을 유지시키지 못하면, 이 마음 또한 범연(泛然)히 주장이 없어져 아무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낼 것이니, 다만 실속 없는 말에 그치고 말 것이다. 뜻을 세우려면, 모름지기 사물을 초월하여 높이 나아가야 하지만, 거경하려면 항상 사물 가운데 있으면서 이 경(敬)과 사물이 서로 어긋나지 않게 하여야 한다. 말할 때도 경(敬)해야 할 것이요, 움직일 때도 경해야 할 것이며, 앉아 있을 때도 경해야 할 것이니 잠깐이라도 이 경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배우는 자들이 받아들여 실천하는 데 가장 절실한 것이니,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언행록 1
 유편(類編)
덕(德)의 완성


선생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동(動)ㆍ정(靜)ㆍ어(語)ㆍ묵(默)이 아주 쉽고 분명해서 지나치게 뜻이 높고 먼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모든 행동이 저절로 예절에 맞아서 사람이 따르지 못할 묘한 곳이 있었다. -김성일-
선생은 항상 겸허함을 덕으로 삼아서, 조금도 거만한 마음이 없었다. 도를 이미 분명히 보고서도 아직 보지 못한 것처럼 바라보았으며, 덕이 이미 높았지만 덕을 지니지 못한 것처럼 부족하게 여겨서 보다 더 향상되려는 마음은 시종일관 한결같았다. 그 마음가짐은, 차라리 성인(聖人)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만 잘함으로써 이름을 이루려 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 중에 제 힘을 너무 지나치게 믿는 자를 보면, 깊이 그것을 그르다 하고, 반드시 그 일을 들어 경계로 삼았다. -김성일-
선생은, 욕심을 이기고 심(心)을 기르는 공부가 이미 지극하여 어떤 일을 당해도 이미 여유작작해질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비록 급하고 갑작스러운 경우에도 정신은 한가롭고 뜻이 안정되어, 당황하고 서두는 기색이 없었다. -김성일-
우성전이 선생의 문하에 드나든 지가 오래되었는데, 혼자 조용히 계실 때나 혹 남과 더불어 이야기할 때에, 한 번도 일부러 자랑하는 것을 못 보았고, 그렇다고 또한 게으르고 거만한 모습도 본 일이 없었다. 언제나 한결같았다. -우성전-
정존(靜存 이담(李湛))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젊어서부터 퇴계를 보았는데, 그는 안팎이 단정하고 곧으며 겉과 속이 한결같아서 몸가짐과 일 처리에 있어서 털끝만큼도 의심스러운 곳이 없었다.”
하였다. 뒷날 정존이 야대(夜對)에 들어갔는데 승지가 선생의 사람됨을 물었을 때에도 또한 이렇게 답하였다. -우성전-
조월천(趙月川)이 이덕홍에게 말하기를,
“선생은 성현의 모습이 있다.”
하자, 이덕홍은 말하기를,
“선생은 까다롭지 않고 곧은 도리와 사심 없이 밝은 마음을 확실히 깨달으려는 마음씨가 있으니, 어찌 단지 모습뿐이겠는가.”
하였다. -이덕홍-
선생의 학문은, 사욕이 깨끗이 없어지고 천리(天理)가 해처럼 밝아서, 물(物)과 나 사이에서 피차의 구별을 볼 수 없었다. 그 마음은 바로 천지 만물과 더불어 위와 아래에서 함께 흘러서 각각 그 곳을 얻는 묘한 곳이 있었다. -김성일-
우성전이 화산(花山 안동(安東))에 오래 있었는데, 그 고장 사람들을 만나 보면, 비록 천한 사람들이라도 반드시 퇴계 선생을 일컬으면서, 모두 존경하고 우러러 받드는 뜻이 있었다. 촌사람으로서 비록 선생의 문하에 출입이 없는 사람들도, 두려워하고 또한 사모할 줄 알아서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다. 혹 옳지 못한 행동을 한 사람은 퇴계 선생이 알까 두려워했으니, 그의 교화가 남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이러했다. -우성전-
선생의 학문은 대개 주자로써 근본을 삼았으니, 공리(功利)에도 그 뜻을 빼앗기지 않았고, 이단(異端)에도 그 소견이 현혹되지 않았다. 널리 알면서도 잡되지 않았고, 간략하면서도 고루하지 않았다. 학문을 의논할 때는 반드시 성현에 근본 하면서 자기의 터득한 진실을 참작하였고, 남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인륜(人倫)을 주로 하면서 이치를 밝히는 공부를 우선으로 삼았다. 자신의 몸가짐은 정(正)으로써 지키면서도 구차스레 남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고, 예법을 의논할 때는 옛것을 끌어 오면서도 현재의 제도를 빠뜨리지 않았다. 자신을 수양하는 것을 급하게 여기고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고, 남의 장점을 따르는 데 용감하고 자기의 단점을 숨기지 않았다.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였으나 남이 절로 공경하였고, 아랫사람을 너그럽게 대하였으나 아랫사람이 절로 조심했다. 한 가지 절개와 한 가지 잘하는 것으로써 이름을 이루려 하지 않았으니, 그 학문이나 지킨 바의 정대함은 동방(東方)에서 구해 보아도 그와 겨룰 이가 없을 것이다. -우성전-
남명이 나에게 말하기를,
“지난해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 서울에 갔을 때, 내가 이항지(李恒之)를 그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갔다. 이항지가 내게 ‘경호(景浩 퇴계)가 문장을 통해 학문으로 들어갔으니, 그 학문은 그릇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곧 그 말을 받아 ‘그의 학문은 공이나 내가 알 수 없는 것이다. 공은 다만 궁각(弓角 무술)을 말할 뿐이요, 나는 다만 강경(講經)을 말할 뿐인데, 어떻게 경호의 학문의 깊이를 논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더니, 방 안에 가득했던 이항지의 제자들은 내 말을 좋지 않게 듣고 모두 불평하는 기색이었다.”
하였다. 대개 일재(一齋 이항(李恒))는 처음에 무예를 배우다가《대학》을 읽고는 이에 크게 깨달아 배우던 무예를 다 그만두고 글을 읽고 수행하였으며, 남명 선생은 처음에 문과(文科)의 초시에 입격해서 경서(經書)를 강독하여 외다가, 뒷날에는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서 숨어 살며 의리를 실천했다. 남명이 그전에 했던 공부를 두루 거론하여 말한 것은, 대개 선생의 학문에 대해 공경하고 탄복함이 이와 같았던 까닭이다. -김성일-


 

[주D-001]이항지(李恒之) : 항지는 이항(李恒)의 자이다. 호는 일재(一齋)이고, 박영(朴英)의 문인이다. 본래 무예를 닦다가 30세에 학문을 시작하여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발전시켰다.
언행록 1
 유편(類編)
교육
언행록 2
 유편(類編)
강론하여 분변함

선생은, 학자와 더불어 강론하다가 의심나는 곳에 이르면, 자기의 소견을 고집하지 않고, 반드시 널리 여러 사람의 의견을 취하였다. 그래서 비록 장구(章句)에 대한 비속한 선비의 말이라도 유의하여 듣고 마음을 비워 이해하였으며, 또 거듭거듭 참고하고 고쳐서 끝내 바른 곳으로 귀결된 뒤에야 그만두었다. 변론할 때에는 기운이 부드럽고 말은 온화하며, 이치가 밝고 뜻이 올바라서, 비록 여러 가지 의견이 다투어 일어나더라도 조금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이야기할 때에는, 반드시 상대방의 말이 끝난 다음에야 천천히 한마디로 조리를 따져 해석하였다. 그러나 꼭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하지 않고,
“내 소견은 이러한데 어떠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남과 변론할 때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면, 자기의 의견이 혹시 미흡하지나 않은가 하여 자기의 선입견을 고집하지 않았으며, 남과 자기 소견을 구별하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이리저리 따지되, 의리에 비추어 보고 옛 책을 참고하였다. 자기 말이 이치에 맞으나 이의가 있으면, 다시 변론해서 기어이 상대의 의혹을 풀어 주었고, 자기의 전일 소견에 혹 못마땅한 점이 있으면 자기의 견해를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복종하였다. -이덕홍-
선생이 이르기를,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를 줄 모르는 것이 학자의 큰 병폐이다. 천하의 의리란 한량이 없는데, 어떻게 자기는 옳고 남은 그르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성전-
혹 무엇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하찮고 쉬운 말이라도 한동안 생각한 뒤에 대답을 했으며, 그 즉시 대답한 적이 없었다. -김성일-
남과 논변할 때,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대번에
“옳지 않다.”
하지 않고, 다만
“아마 의리상으로 그렇지 않을 것 같다.”
할 뿐이었다. -우성전-
병인년(1566, 명종21) 봄에 성일(誠一)이 계남(溪南)의 서재에 있을 때 유지(有旨)로 임금의 부름을 받으셨다. 선생이 이르기를,
“너는 돌아가거라. 내가 지금 병으로 사양하고 있으면서 어찌 감히 남에게 강론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김성일-
황준량(黃俊良 호는 금계(錦溪), 자는 중거(仲擧), 선생의 제자)이 일찍이 말하기를,
“《성리군서(性理群書)》의 주에 잘못된 곳이 많이 있어서 선생에게 고쳐 주시기를 청했는데, 선생은 여가가 없다고 겸양해서 말씀하셨다.”
하였다. -김성일-
어느 날 ‘홍범(洪範)’과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해 물었더니, 선생이 이르기를,
“이런 것은 모름지기 고요한 중에 마음을 가라앉혀서 보아야 겨우 그 뜻을 알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부륜-
선생이 《논어》를 강의하다가 이덕홍에게 가르치시기를,
“사상채(謝上蔡)가 서죽 목림장(西竹木林場) 감독으로 있을 때, 주진(朱震) 자발(子發)이 태학(太學)으로부터 그 아우 자권(子權)과 함께 가서 뵈었다. 자리를 정해 앉은 뒤 자발이 나아가 ‘선생을 뵈옵고자 한 지가 오래이온데, 막상 와서 뵈오니 무엇을 여쭈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선생께서는 어떤 말씀으로 가르치려 하십니까?’ 하였다. 사(謝) 선생이 이르기를, ‘이렇게 훌륭한 분들과 만났으니 《논어》를 강하리라.’ 했다. 자발이 혼자 생각하기를, ‘해가 이렇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 강론을 친히 들을 수 있을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반주가 다섯 순배 돌 때까지 그저 다른 이야기만 하다가, 차를 다 마신 뒤에 수염을 나부끼면서 이르기를, ‘《논어》 1부(部)를 들어 보라.’ 하고는 먼저 ‘공자(孔子)가, 상복을 입은 자나 관(冠)을 쓰고 의복을 갖춘 자나 장님을 보면, 비록 젊더라도 반드시 일어나고, 그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종종걸음을 걸으셨다. 또 소경인 악사(樂師) 면(冕)이 찾아 뵈올 때에 섬돌에 이르자, 공자께서는 「뜰이다」하고, 자리에 오면 「자리다」하였으며, 다 앉고나면 「아무개는 여기 있고 아무개는 여기 있다.」라고 하셨다. 자장(子張)이 묻기를, 「악사와 더불어 말하는 도리가 이렇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이 진실로 악사를 돕는 도리이다.」하였다. 대개 성인의 도는 미현(微顯)도 없으며, 내외(內外)도 없고 집 안을 청소하고 어른 말씀에 응대하며 예절에 따라 진퇴하는 일상적인 일로부터, 위로는 하늘의 도까지 통달하여서 근본과 끝을 하나로 꿰는 것이다. 《논어》 1부를 다만 이렇게 볼 뿐이다. 이상은 상채(上蔡)의 말이다.’ 하였다. 이제 모름지기 이렇게 읽은 뒤에라야 비로소 《논어》의 뜻을 알고, 성인의 도(道)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이 가르침을 받들어 얻은 바가 있는 듯하여 더욱 가르침을 청했더니, 선생이 이르기를,
“향당편(鄕黨篇)은 다 위의 2장(章)과 같은 류이다. 성인의 길은 밝고 밝아서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니, 오직 이 책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경전(經傳)을 읽을 때는 모두 마땅히 이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
묻기를,
“《논어》에 사문(師門)의 언행이나 제자들의 문답은 다 기록하지 못하여 《가어(家語)》나 《예기》에 여기저기 보이는데 그 말이 때때로 서로 다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사문의 말이나 행동은 한 사람이 다 듣고 볼 수 없는 것이요, 제자의 문답도 또한 그러하다. 당시의 기록이 한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 어떻게 그것을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고 나무랄 수 있겠는가. 하물며 《가어》는 후세 사람이 지어내 당대의 것이라고 칭탁한 듯하고, 《예기》 역시 한유(漢儒)들에게서 나온 것이니, 어찌 서로 차이가 없기를 바랄 것인가.”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이것은 선생이 조카 이교(李㝯)의 물음에 대하여 풀이한 것이다.-
‘늙은이를 편안히 한다.[老者安之]’는 주(註)에, 정자(程子)가 말굴레와 말고삐로 비유한 의미에 대해 물었더니, 선생이 답하기를,
“말 머리의 형상은 스스로 굴레나 고삐를 받을 만한 이치를 갖추었기 때문에, 사람이 그 모양을 따라 굴레나 고삐를 만들어 씌우고 몰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늙은이는 스스로 편하게 모셔야 될 이치를 갖추었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그 이치를 따라 편안하게 모시는 것이고, 젊은이는 스스로 품어 주어야 될 이치를 갖추었기 때문에, 성인이 그 이치를 따라 품어 준다는 의미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온고지신(溫故知新)’에 대해서 《논어》와 《중용》의 주된 의미가 서로 다릅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중용》은 덕을 닦고 도를 이룸을 논하여, 마음을 보전함을 주로 하기 때문에 ‘온고(溫故)’에 중점을 두었고, 《논어》는 스승을 삼을 만한 것을 논하여, 도(道)를 아는 것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지신(知新)’에다 중점을 두었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삼가(三家 맹손ㆍ숙손ㆍ계손씨)가 옹(雍 천자의 묘정에 쓰는 노래)으로 제사를 물릴 때, 남용(南容)이 그 제사에 참예하면서도 왜 간(諫)하지 않았습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남용이 간하였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설사 간해서 말리지 못하더라도 그 제사에 참예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부형을 섬기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자기로써 물(物)에 미치는 것[以己及物]과 자기로 미루어 물(物)에 미치는 것[推己及物]이 어째서 인(仁)과 서(恕)의 구별이 됩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자기에게 본래 있는 것으로써 저절로 물에 미치기 때문에 인이 되는 것이요, 자기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미루어 남에게 미치고자 하기 때문에 서(恕)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학문에 뜻을 두는 것과 도에 뜻을 두는 것과 인에 뜻 두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어렵고 어느 것이 쉬우며, 어느 것이 얕고 어느 것이 깊습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학문에 뜻을 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나, 도에 뜻을 둔다는 것은 벌써 따를 바를 이미 선택한 것이요, 인에 뜻을 둔다는 것은 더 한층 친절한 것이다. 대개는 이와 같지만, 그러나 또한 그 사람의 공부하는 노력이 미치느냐 미치지 못하느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꼭 정해 놓고 어느 것은 어렵고 어느 것은 쉬우며, 어느 것은 깊고 어느 것은 얕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공자가 어떤 때는 ‘인에 뜻을 둔다.’라고 하고, 또 어떤 때는 ‘도에 뜻을 두고 인에 의지한다.’라고 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어느 말이든 각각 모두 타당한 바가 있는 것이니, 어떻게 저기서 ‘인에 뜻을 둔다.’라고 말하였다 해서 여기서 다시 ‘도에 뜻을 둔다.’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자꾸 되풀이하면 한없이 의심이 생길 것이니, 언제나 시원스럽게 탁 트여 깨닫게 되는 경지에 이르겠는가.”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백이(伯夷)ㆍ숙제(叔齊)를 임금으로 세워야 합니까, 세우지 않아야 합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주자는, 이천(伊川)이 숙제를 세우고자 한 것은 이치가 아니라고 했다. 마땅히 백이를 세워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또 스스로 말하기를, ‘두 사람을 세우는 것은 모두 편안치 않지만, 정리(正理)로 논한다면 백이가 좀 낫다.’ 하였으니, 이것은 주자도 역시 백이를 세우는 것을 꼭 옳다고 여기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딱 잘라서 누구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는가. 다만 두 사람이 양보한 것을 잘했다고 할 뿐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네 가지를 끊는다[絶四]는 그 넷 중에 어느 것이 가장 해로우며, 어찌해서 《대학》 성의장(誠意章)의 일을 《논어》 사물장(四勿章)과 합쳐서 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네 가지는 순환하여 서로 처음이 되고 끝이 되는 것이므로, 해로우면 모두가 해로운 것이니, 어찌 하나만 가리켜 가장 해롭다 하겠는가. 합쳐서 고찰하라고 한 것은, 성의장의 일은, 그 뜻에서 일어날 때 이를 끊을 수 있으면, 그 뜻을 참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또, 네 가지를 끊으면 자기를 이김이 되는 것이니, 자기를 이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네 가지를 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물장과 함께 마음을 가라앉히고 음미하면 그 뜻이 모두 정밀해질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회(回)가 ‘어떻게 감히 죽겠습니까.’ 하였는데, 공자가 살아 계신다면 비록 곤욕을 당하더라도 안회(顔回)는 죽을수 없습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공자가 살아 계셨다면 죽었을 리가 없다. 다만 살아서 죽음을 면하는 것과 위태함을 보고 목숨을 바친다는 것에 있어서, 또한 마땅히 그 삶[生]과 의리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하여 결정해 처리하여야 할 것이다. 공자가 비록 살아 계시더라도, 만일 저 광(匡) 땅의 사람들이 폭력과 모욕을 가하여 기어이 굴복시켜 그들의 난폭에 따르게 하였더라면, 반드시 삶을 탐내어 구차스럽게 죽기를 면하고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부(富)가 교육보다 앞선다고도 하고 믿음이 먹는 일보다 중하다고도 함은 무슨 뜻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부가 교육보다 앞선다는 것은 평시에 있어서 부와 교육의 선후관계를 말한 것이요, 믿음이 먹는 일보다 중하다는 것은 변란을 당하여 이에 대처하는 순서의 완급을 말한 것이다. 대개 부가 없으면 교육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부가 앞선다 했고, 믿음이 없으면 백성이 서지 않기 때문에 먹는 일을 버린 것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뜻이 있구나, 경쇠를 침이여.’라고 하였으니, 이 사람이 경쇠 소리를 듣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다고 느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공자가 경쇠를 치면서도 천하를 잊어버리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이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그 마음을 알았으니, 어진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둘 것이다.’라고 한 것도, 천하를 잊지 않는다는 그 점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뿐이다. 만약 경쇠 소리에 원망의 뜻이 있었다면 어떻게 공자가 될 것이며, 만일 원망이 없는데 이 사람이 원망이 있다고 들었다면 그는 일개 망녕된 사람일 뿐이니, 무엇 때문에 그 말을 적어 뒷세상에 전했겠느냐.”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공자가 진(陳)나라에 있을 때에 양식이 끊어졌었다는 일에 대해 물었더니, 선생이 이르기를,
“그 당시에 여러 나라에서는 유사(游士)를 대접하는 도가 있었고, 다른 나라의 나그네를 대접하는 차림이 있었으며, 경대부도 또한 외국의 나그네를 돌보아 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므로 허다한 제자들과 함께 천하를 두루 다니면서, 가고 머물기를 뜻대로 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모두 자기가 공급하고 자기가 운반해야 했을 터이니, 어떻게 계속 댈 수가 있었겠는가. 한(漢)나라 때의 조서(詔書)에 ‘공자가 일개 필부로서 능히 3천 제자를 길렀다.’라는 말이 있는데, 주자(朱子)는 이것을 망녕된 말이라 했으니, 이로써도 알 수 있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백성은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하고, 또 예를 모르면 설 수 없다고 하였으니, 믿음과 예 중 어느 것이 중합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어지러운 때에 임하여 백성과 더불어 나라를 지킬 때는 믿음이 중하고, 학문을 함에 있어서 몸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예가 중한 것이다. 믿음과 예는 중히 여기는 것이 경우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 서게 되는 까닭도 또한 다른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는 것은, 백성이 세상에서 서지 못하여 나라도 또한 설 수 없음을 말한 것이요, 예를 모르면 설 수 없다는 것은 이목(耳目)과 수족(手足)을 둘 곳이 없어서 몸이 설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논어강록(論語講錄)》-
묻기를,
“근세에 와서 《중용》의 첫머리 세 구절을 체용(體用)ㆍ중화(中和)ㆍ비은(費隱)과 지(智)ㆍ인(仁)ㆍ용(勇)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또 이 세 구절을 《대학》의 강령에 나누어 배정하기도 하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이 몇 학설을 지금 사람들은 모두 삼가 지켜서 다른 말이 없다. 그러나 성(性)을 체(體)ㆍ중(中)ㆍ은(隱)으로 삼고, 도(道)를 용(用)ㆍ화(和)ㆍ비(費)로 삼고, 교(敎)를 또한 용과 비로 삼는다면 그렇다 하겠다. 그러나 지ㆍ인ㆍ용은 덕행의 이름인데, 어떻게 억지로 여기에다 끌어 붙일 수 있겠는가. 성은 그 심(心)을 단속할 줄 모르고, 인(仁)은 수행(修行)에 속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인을 성에다 짝하는 것은 잘못이다. 주자는 ‘솔(率)이란 것은 사람이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물(物)이 제각기 자연의 성을 따른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지(智)는 지(知)에 속하는 것으로, 곧 중용의 일을 가린 것이니, 그렇다면 지를 도에 짝하는 것도 또한 잘못이다. 그리고 교(敎)를 지(智)라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비록 그것이 물(物)을 이루는 지(智)와 가깝기는 하지만, 그것(지(智))은 자기를 이루는 인[成己之仁]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이 뜻과는 같지 않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사람의 덕을 닦고 도를 행하는 뜻이 아닌데, 또 어떻게 쉬지 않는 것[不息]에 용(勇)이라는 뜻이 있다 하겠는가. 또 이 세 가지를 《대학》의 세 강령에 짝하는 것은 더욱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성(性)을 명덕(明德)으로 삼는 것은 비록 근사하기는 하나, 성(性)이란 사람이나 물(物)이 받은 바 다 같이 근본이 되는 그윽한 이치요, 명덕은 사람이 얻은 바 신령하고 밝은 것을 포함한 이름을 가리킨 것이니, 이치는 비록 본래부터 같지마는 이름을 얻은 경위로 보면 조금 다른 바가 없지 않다. ‘성을 따른다.[率性]’라는 것은 덕을 밝히는 공부가 있는 것이 아니요, ‘도를 닦는 교[修道之敎]’라는 것도 또한 새롭게 하는 뜻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성(性)ㆍ도(道)ㆍ교(敎)라는 이름을 얻은 까닭은 모두 일반적인 의리의 이름이니, ‘지선(至善)에 그친다.’라든가, 그 ‘극(極)한 것으로 쓰이지 않음이 없다.’라는 것과는 그 뜻이 또한 같지 않은 것이다.
또 존양(存養)을 인(仁)으로 삼고, 성찰(省察)을 지(智)로 삼고, 세 가지에 대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용(勇)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옳다. 그러나 자사(子思)의 본뜻은 여기에 있어서 세 가지 달덕(達德)의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개 의리는 같은 한 근원의 것이므로, 만일 그 어렴풋하게 근사한 것을 가지고 서로 합쳐서 하나라고 말한다면, 어느 것이 합치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 말을 세운 본뜻과 글 뜻의 취지는 제각기 마땅한 바가 있어서, 터럭만큼의 미세함에도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억지로 다른 것을 맞추어 같은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꼬치꼬치 캐면 캘수록 더욱 어긋나서, 도리어 큰 뜻을 잃게 되는 것이다. 또 그 첫머리의 세 구절을 하늘의 도리로 삼고,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을 사람의 도리로 삼는데, 여기에 있어서 하늘의 도리와 사람의 도리를 나누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중용석의(中庸釋義)-
심(心)ㆍ의(意)ㆍ지(志)의 세 가지를 물었더니, 선생이 이르기를,
“논하는 것이 모두 성기고 거칠어 합당하지 않다.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는 원래 한 가지 일을 주로 하여 발한 것임은 사실이나, 한 가지 일에 대해서 자세히 익히고 음미해 보면, 이 네 가지는 서로 바뀌어 용(用)이 되는 것이다. 만정순(萬正淳)이 이른바, ‘네 가지 덕은 서로 떠난 적이 없어서 일을 만나면 차례차례로 층층이 나타나는 것이니, 사람이 혼자 말없이 연구해 아는 데 달려 있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바라건대, 비언(棐彥 이국필(李國弼)의 자)은 거친 소견으로 바삐 주장만을 세워서 버티어 가려고 하지 말고, 우선 《성리대전》이나 정주(程朱) 여러 선생의 심(心)ㆍ의(意)ㆍ지(志)와 인ㆍ의ㆍ예ㆍ지에 대한 이론에 대해 잡념을 버리고 익히고, 몸소 정밀하게 체득하라. 오랜 세월이 흘러가면 참됨이 쌓이고 이치가 풀리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묻기를,
“가령 어려운 일을 만나면 심신이 아득하여, 취한 것도 같고 진흙 속에 빠진 것도 같아서, 옳고 그른 것이 한데 뒤섞입니다. 만일 있는 대로 힘을 써서 간절히 생각하면, 비록 혹 될 수도 있으나 마음은 도리어 걱정스럽고 불안하니, 이래서는 실로 스스로 얻은 것이 못 됩니다. 그럴 때는 그만 한쪽에 던져 두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그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너무 급박하게 생각해서 기어코 얻으려고 하면 병통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무진년(1568, 선조1) 10월 4일에 임금을 모시고 주강(晝講)에 입시하였다. 글에 임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맹자가 성인의 덕을 칭찬하기를, ‘그가 지나간 곳마다 사람들이 교화되고, 그가 마음속에 간직한 것은 신묘하다.’ 하였습니다. 성인의 덕은 그가 거치는 곳을 따라서 교화되지 않는 것이 없고, 마음속에 보전하여 주장삼는 것은 곧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이 장에 조씨(晁氏)의 주(註)가 있다. 조씨는 맹자를 비방한 사람인데, 지식은 부족하나 그 말은 취할 만하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범인(凡人)이 본성을 받아 태어날 때 분수(分數)가 부족하면, 비록 통하는 곳도 있지만 또한 막히는 곳도 있는 것입니다. 조씨로 말하자면 문장(文章)을 한 선비이고 성현의 학문은 모르기 때문에, 그가 맹자(孟子)를 비방한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다만 그가 논한 것 중에 옳은 것은 주자가 취해서 책에 실었으니, 이것은 사람 때문에 그 말을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또 소식(蘇軾)은 극력 정자(程子)를 비방하였고, 그 심술(心術)에 바르지 못한 곳이 많았기 때문에, 주자(朱子)는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여 곧 이단이라고 배척하였지만, 그 말 중에 옳은 것은 곧 집주(集註)에 취해 넣었으니, 대현(大賢)의 마음이 공평정대함은, 그 사람을 배척한다 하여 그 말 중에 좋은 것까지 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씨의 말을 취한 것은 바로 소씨의 말을 취한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하였다. -김성일-
륭(隆)이 묻기를,
“‘태극성정지묘(太極性情之妙)’에 어찌하여 ‘묘(妙)’라고 하였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묘(妙) 자는, 지극히 묘해서 형용하기 어렵고 이름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성(性)에도 이치가 있고 정(情)에도 또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태극성정지묘’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묻기를,
“미발(未發)은 성이요, 이발(已發)은 정입니까?”
하니, 이르기를,
“물에 비유한다면 괴어 있는 것은 성(性)이 되고, 흐르는 것은 정(情)이 된다. 괴어 있는 물이 나가서 흘러가고, 흘러간 것이 자연히 괴게 되니, 괴인 물과 흐르는 물이 어찌 둘이겠는가.”
하였다. -김륭(金隆)-
《통서(通書)》 ‘성지복(誠之復)’의 주(註)에 ‘자기에 간직한다.[藏於己]’는 뜻을 물었더니, 선생이 답하기를,
“건도(乾道)의 변화는 하늘을 주(主)로 해서 말한 것이니, 곧 ‘잇는 것이 선(善)이다.’라고 한 그것이요, ‘제각기 성명(性命)을 바로잡는다.’라는 것은 물(物)을 주로 해서 말한 것이니, 곧 ‘이루는 것이 성(性)이다.’라고 한 그것이다. 하늘이 물(物)에 주는 것을 주로 하여 말하기 때문에 물(物)이라 하고, 물이 하늘에서 받는 것을 주로 해서 말하기 때문에 ‘기(己)’라고 한 것이니, 기(己)는 곧 위에서 말한 바, ‘물이 두 물(物)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김륭-
묻기를,
“《통서》에 ‘소인(小人)은 날마다 걱정한다.’라고 하였는데, 소인은 스스로 속이는데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이 우(憂) 자는 평생을 걱정한다는 우 자가 아니다. 소인은 명성이 실제보다 지나쳐서 무엇이든 만족하게 여겨 자만하는 것이니, 그것이 곧 근심이다. ‘우’ 자를 ‘충연자득(充然自得)’이라는 글자와 비교해 보면, 그 뜻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괴롭다.[心勞]’라든가 ‘날마다 쾌활하지 못하다.[日拙]’ 등의 말과 같은 따위이다.”
하였다. -김륭-
묻기를,
“《통서》에 ‘본성대로 하고 편안히 하는 것을 성인(聖人)이라 한다.[性焉安焉之謂聖]’라고 하고, 그 해석에 ‘성(性)이란 것은 홀로 하늘에서 얻은 것이다.’라고 하니, 무슨 뜻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천성은 본래부터 사람이 다 같이 얻은 바이지만, 오직 성인은 맑고 밝으며 완전히 갖추어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으니, 그것이 곧 하늘에서 홀로 얻었다는 것이다.”
하였다. -김륭-
선생이 이르기를,
“의(意)라는 것은 사사로운 지혜가 가만히 행하여 일을 계획하면서 오락가락하는 그것이요, 지(志)라는 것은 한 길로 바르게 가는 그것이요, 여(慮)라는 것은 대동(對同)해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라고 한 회암(晦庵)의 이 세 학설은 가장 좋은 표현이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
묻기를,
“〈경재잠(敬齋箴)〉에 ‘이(貳)를 이(二)로 하지 말고, 삼(參)을 삼(三)으로 하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이(二)와 이(貳), 삼(參)과 삼(三)은 뜻이 어떻게 다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이(二)와 삼(三)은 이루어진 수요, 이(貳)와 삼(參)은 그 수를 이루어 주는 이름이다. 《주역》에는 ‘삼천양지(參天兩地)’라고 했고, 《예기》에는 ‘이좌이립(離坐離立)해서 삼(參)에 가지 말라.’라고 했고, 《논어》에는 ‘이과(貳過)를 하지 말라.’라고 했으니, 이 삼(參)과 이(貳)도 또한 이 뜻이다.”
하였다. -김성일-
이덕홍이 〈관서(觀書)〉란 시 한 수에 대해 물으니, 선생이 이르기를,
“‘반묘방당일감개(半畝方塘一鑑開)’는 마음 전체가 말갛게 비고 밝은 그 기상을 말한 것이요,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는 고요하면서도 사물에 감응하여 남김없이 물마다 다 비춘다는 뜻이다. ‘문거나득청여허(問渠那得淸如許)’는 어떻게 이렇게 맑은 본체를 가지게 되었는가를 말한 것이요,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는 천명(天命)의 본연(本然)을 밝힌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주D-001]네 …… 끊는다 : 《논어》에 “공자는 네 가지를 끊었는데, 급[意]함이 없고 필(必)함이 없으니, 고(固)함이 없고 아(我)가 없다.” 하였다. 《논어》에 “공자가 안연(顔淵)에게 가르치기를, ‘예가 아니거든 보지 말며,[非禮勿視] 예가 아니거든 듣지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거든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예가 아니거든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 하였다. 물(勿) 자가 넷이다.
[주D-002]유사(游士) :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며 군주를 만나 포부를 말하는 사람을 말한다.
[주D-003]세 구절 :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ㆍ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ㆍ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이다.
[주D-004]세 가지 달덕(達德) : 지(智), 인(仁), 용(勇)을 말한다.
[주D-005]만정순(萬正淳) : 정순(正淳)은 송나라 때의 학자 만인걸(萬人傑)의 자이다. 처음에 육구령(陸九齡)에게 배우다가 육구연(陸九淵)에게 종유하였으며, 나중에 주희를 만난 뒤 다시 주자학으로 바꾸었다.
 언행록 2
 유편(類編)
타고난 성질

선생은 젊어서부터 타고난 성질이 도에 가까워서, 깨끗하고 맑으며 온화하고 독실하며 순수하여서, 그 마음의 씀씀이나 일을 행하는 것이 모두 도의에서 나왔으며, 일찍이 한번도 혈기(血氣)에 의해 움직인 적이 없었다. -김성일-
선생은 타고난 성질이 매우 높고 수양을 쌓아 도가 있으며, 마음속의 생각하는 바가 깨끗하고 시원하여 운치가 맑고 심오하였다. 단정하고 성실해서 어두운 곳에 혼자 있어도 속이지 않았으며, 일상생활에 있어 몸가짐이 바르고 엄숙하여, 그 의젓한 모습은 범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온순하고도 공손하며 겸손해서 화락한 기운이 돌았고, 가슴을 열고 남과 이야기할 때에는 마음속을 환히 드러내었다. 또 겸허하게 남에게 묻기를 좋아하고, 자기 주장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를 줄 알았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선함이 있으면 자기의 것인 양 기뻐하고, 자기에게 조그마한 잘못이 있으면 비록 필부가 말해 주어도 고치기에 인색한 빛이 없었다. -정유일-
선생이 20세 되었을 때, 여러 친구와 함께 영천 의원(榮川醫院)에서 공부한 일이 있었다. 그때 상사(上舍) 박승건(朴承健)이 소년으로서 《소학(小學)》을 배우고 있었다. 그가 선생의 동정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자신이 읽는 글과 합치하므로, 묻기를,
“공은 《소학》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까?”
하였다. 선생은 웃으면서 답하기를,
“아니요.”
하였다. -이안도-
선생은 온화하고도 어질며, 공손하고도 삼가며, 단정하고도 자세하고, 조용하고도 무거워, 사납고 거만한 얼굴이나 성내고 거슬리는 기색은 일찍이 한번도 나타낸 일이 없었다. 그래서 바라보면 의젓해서 공경할 만한 거동의 위의가 있고, 사귀면 따스해서 사모할 만한 용모와 덕이 있었다. -이안도-
평이하고 명백한 것은 선생의 학문이요, 공명정대한 것은 선생의 도요,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상서로운 구름과 같은 것은 선생의 덕이요, 베나 명주처럼 질박하고, 콩이나 조처럼 담담한 것은 선생의 글이었다. 가슴속은 맑게 트이어 가을 달과 얼음을 담은 옥병처럼 밝고 결백하며, 기상은 온화하고 순수해서 정련한 금과 아름다운 옥과 같았다. 무겁기는 산악 같고 깊기는 못과 같아서, 바라보면 곧 덕을 이룬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김성일-
언행록 2
 유편(類編)
생활태도와 언어

거처는 반드시 조용하고 정돈되었으며, 책상은 반드시 말끔하고 깨끗했고, 벽에 가득한 책들은 항상 가지런히 순서대로 되어 있어서 어지럽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반드시 향불을 피우고 고요히 앉았고, 온종일 책을 읽어도 나태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김성일-
평상시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정돈하고,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바로하고는, 날마다 《소학》의 글대로 했다. 조금 자라서는 서당에 나갔는데, 비록 여러 사람들과 함께 쉴 때에도 반드시 얼굴빛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서, 옷매무새를 반드시 바르게 하였으며, 말이나 행동을 언제나 삼가서 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해서,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김성일-
평상시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서재에 나가 자세를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 조금도 어디에 기대는 일이 없이 온종일 책을 읽었다. 간혹 고요히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시(詩)를 읊조리기도 했으나, 세속 사람이 즐기는 바는 한 번도 그의 마음을 스쳐 가는 일이 없었다. -정유일-
평상시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방에 고요히 앉아 마음을 삼가고 사색하는 것이 마치 흙으로 빚어 만든 사람 같았다. 그러나 학자들이 와서 묻는 일이 있으면 샅샅이 파고 캐어 환히 깨우쳐 주었으므로, 비록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모두 깨달아 흥기하였다. -우성전-
선생은 한가히 있을 때에도 온종일 단정히 앉았고, 혹 기운이 피로하고 몸이 곤하더라도 어디에 기대거나 자세가 풀어지는 기색이 없었다. 정신이 아주 피곤할 때에는 잠깐 강대(江臺)에 나가 기분을 풀거나, 책상에 기대어 조금 쉬거나 할 뿐이었다. -이덕홍-
온종일 고요히 앉아 있어서, 혹 무릎을 포개어 앉을 때라도 반드시 단정하고 엄숙해서, 조금도 기대지 않았다. 가끔 몸이 피로해지면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우성전-
선생은 앉을 때는 반드시 단정하고 엄해서 손발을 움직이지 않았고, 제자들과 상대할 때에는 귀한 손님이 자리에 있는 듯이 하기 때문에, 제자들이 모시고 앉았어도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자를 앞에 앉히고 글을 가르칠 때에는 화한 기운이 풍기며, 가르쳐 깨우침은 다정하고도 친절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환해서 의심스럽고 모호한 데가 없었다. -정사성(鄭士誠)-
을축년(1565, 명종20) 가을에서 겨울에 걸쳐 성전이 계남서재(溪南書齋)에 있을 때였다. 선생은 항상 동재(東齋)에 계셨는데, 밤이 깊어서야 자리에 드시고, 날이 밝기도 전에 의관(衣冠)을 가다듬고 서재에 나오셨다. 이렇게 하기를 날마다 변함이 없었다. -우성전-
선생은 평소 집에 있을 때나 산(山)에 있을 때에, 학문을 강하고 친구를 접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주위에 아무도 없이 조용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혼자서 완락재(玩樂齋)에 잘 때인데, 한밤중에 일어나 창을 열고 앉았더니, 달은 밝고 별은 깨끗한데 강산이 괴괴하고 얼어붙은 듯이 고요하여, 마치 천지(天地)가 열리기 이전의 세계인 듯한 생각이 들었다.”
하였다. -이덕홍-
무진년(1568, 선조1) 7월 18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서울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광나루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큰 비바람을 만났다. 물결이 높이 일어나서 거의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르자, 배 안의 사람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선생은 홀로 신색에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이안도-
선생은 사람을 대할 때나 사물을 접할 때, 언행의 동작과 침묵에 반드시 절도(節度)가 있었다. 그래서 혹 사람이 묻지 않을 것을 묻거나, 말하지 않을 것을 말하거나 하면, 반드시 정색을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김성일-
선생은 여러 사람들과 말할 때에는 부드럽고 화목하여 다투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大夫)들과 말할 때에는 반드시 정색을 하고 끝까지 따져서 시비를 가려 내고야 말았다. -이국필(李國弼)-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지만, 혹 들리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불쌍히 여겨 애석해하는 뜻이 있었고, 당시의 정치의 잘못을 말하지 않지만, 혹 들리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걱정하는 얼굴빛을 하였다. -우성전-
묻기를,
“남의 착하지 못한 것을 보고 가엾게 여겨 성내지 않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것은 또한 천하를 공평하게 하는 마음이다. 마땅히 두 가지를 아울러 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국필-
선생은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의 말이 이치에 맞으면 기꺼이 따르되, 만일 그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곧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자연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거만하고 잡스러운 말이나 속되고 번거로운 말이 그의 귀에까지 들린 적이 없었다. -이덕홍-
무릇 사람들과 온종일 이야기할 때에는 간절하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갈수록 더하여 갔다. 혹 남의 말이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나 얼굴빛을 변하는 일이 없었고, 그렇다고 또한 거만하거나 희롱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도 없었다. -우성전-
평소에는 말을 잘 못하는 것 같지만, 학문을 논할 때는 그 말이 통쾌해서 의심스럽거나 걸리는 바가 없었고, 몸은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하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꿋꿋하여 흔들림이 없었다. -우성전-

언행록 2
 유편(類編)
자기 제어

선생은 21세 때 그 부인 허씨(許氏)를 맞이하여,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처럼 하였다. -오운(吳澐)-
과거를 보기 위해 군상(郡庠 군(郡)의 서재)에 있을 때였다. 의관은 반드시 가지런히 하고 언동은 반드시 삼가서 하였으며, 사람들과 사귈 때에는 남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범하기 어려운 기상이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아꼈다. -김성일-
선생은 젊을 때부터 사람들의 공경을 받았다. 온 고을의 유생들이 산사(山寺)에 모여 놀 때 두 다리를 뻗고 앉거나 비스듬히 누웠다가도, 선생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비록 선생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라도 모두 몸을 바르게 하고 기다렸으며, 아무도 그 곁에서 떠들거나 장난하지 못했다. -우성전-
젊어서부터 글씨를 쓸 때에는 반드시 정자를 썼다. 과문(科文)이나 잡서를 베낄 때에도 흘려 쓰는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남이 써 주기를 바라지 않았으니, 그것은 다른 사람의 어지러운 글씨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김성일-
도산(道山)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때 동료들은 모두 마음대로 놀며 거리낌이 없어서, 날마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일로 삼았다. 그러나 선생은 온종일 단정히 앉았거나, 혹은 문을 닫고서 책을 보았고, 가끔 동료들과 노닐 적에도 역시 방탕하기까지 이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동료들은 그 지조를 존경하였고 자기네들과 다르다고 하여 미워하지 않았다. -김성일-
선생이 사가독서하며 동호(東湖)에 있을 때였다. 임형수(林亨秀 자(字)는 사수(士遂), 호(號)는 금호(錦湖))와 여러 사람들은 날마다 노는 것으로만 일을 삼았다. 그러나 선생은 책상을 마주하고 조용히 앉아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그렇다고 굳이 남과 다른 태도를 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저들도 또한 선생에게 감히 농담을 건네지 못하였다. -우성전-
조정에 나가 벼슬할 때에는 고요히 스스로 자신을 지켜서, 비록 옛 친구 사이라도 자주 오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노는 사람은 모두 당시의 명망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가 가까이 접하는 사람은 반드시 학문을 지향하는 사람들이었다. -김성일-
과거에 오른 지 몇 달 안 되어 한림에 추천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권세가 있었는데 평소부터 선생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그 당(黨)의 언로(言路)에 있는 사람이 선생을 역적(逆賊)의 족속이라고 논핵해서 체직시켰다. 이는 김안로가 영천(榮川)에 있을 때, 선생도 그곳에 우거하고 있었는데, 그때 김안로가 선생이 자기를 방문해 주기를 원했으나, 선생이 끝내 가지 않았으므로, 김안로가 깊이 앙심을 먹게 된 때문이었다. 뒷날 선생이 권질(權礩)의 따님을 아내로 삼았는데, 권질은 곧 권진(權磌)의 형이었다. 권진은 중종 때 남곤(南袞)ㆍ심정(沈貞)을 죽이기를 꾀했다 해서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김안로는 이것으로 선생을 배척했던 것이다. -김성일-
서울에 있을 때에 윤원형(尹元衡)이 방회(榜會)를 열었으나, 선생은 병이라 핑계하고 가지 않았다. -김성일-
관서(關西)는 본래부터 번화한 곳으로 이름나, 선비 중에 타락한 사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선생이 일찍이 자문점마(咨文點馬)가 되어 말을 점검할 일로 한 달 동안 의주에 머물렀으나, 그런 곳에는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선생의 행차가 평양을 지날 때, 감사가 선생을 위해 이름나고 아름다운 기생을 천거했으나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김성일-
권동지(權同知) 응정(應挺)이 안동 부사로 있을 때, 한번은 기생과 풍악을 싣고 서당 앞을 지났는데, 선생이 시를 지어 핀잔을 주자, 권응정은 그 뒤로 감히 그런 짓을 하지 못하였다. -김성일-
집안 췌객(贅客 데릴사위)으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된 사람이 있어, 경사 잔치를 차리고 연극놀이로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본체만체하였다. -정유일-

[주D-001]방회(榜會) : 과거에서 같은 방(榜)에 입격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회합이다.
언행록 2
 유편(類編)
가정생활 검약(儉約) 을 붙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여,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고 뜻에 순종해서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의 뜻하는 바가 높고 깨끗해서 세상과 합하지 않는 것을 살피고, 일찍이 말하기를,
“너의 벼슬은 주(州)나 현(縣)이 마땅하니 높은 벼슬에 나아가지 말라. 세상이 너를 용납하지 않을까 두렵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이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궁하게 살았는데, 선생이 과거를 본 것도 사실은 그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한 생각에서였다. 그러다가 마침 장인의 죄로 말미암아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선생은 항상 〈육아(蓼莪)〉〈풍수(風樹)〉의 슬픔을 품고 있어서, 제자들의 이야기가 부모를 섬기는 일에 미치면 반드시 슬퍼하면서 자기를 죄인이라 일컬었다. -김성일-
벼슬이 6품에 오르면서부터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요청했으나, 김안로의 방해로 마침내 한 고을도 얻지 못했으니, 평생에 원통한 일이었다. -이안도-
선생은 생일날 아침을 만날 때면 자제들이 술잔 올리는 것을 못하게 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에 이렇게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차마 이것을 받겠느냐.”
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다섯째 형인 찰방공 이름은 징(澄) 이 술을 가지고 찾아와 자제들과 제자들이 그것을 빙자하여 간단히 술상을 차리면, 또한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김부륜-
가법은 매우 엄하고 집안은 화목하였다. 형을 섬기기를 아버지처럼 하고, 구차한 일가들을 구원하는 데 그 힘을 다했다. -정유일-
집안사람에게는 엄숙함으로써 다스리고 사랑으로써 기르며, 하인들에게는 은혜로써 어루만지고 위엄으로써 제어하며, 안팎과 위아래의 의복과 음식은 제각기 그 분에 맞도록 하였고, 자제들과 아이ㆍ어른을 가르치고 경계함은 제각기 그 자질에 따라 하였다. -이덕홍-
선생이 이르기를,
“세상에는 본처를 박대하는 사람이 있는데, 부부간의 정의가 어찌 이래서야 되겠는가. 모름지기 서로 도로써 대하여 부부의 예를 잃지 않는 것이 옳으니라.”
하였다. -김부륜-
아들 준(寯)에게 준 편지에 이르기를,
“아비와 자식 간에 밥솥이 달리한다는 것은 본래부터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아이들이 자라나 결혼함으로 말미암아 거처할 곳이 없으니, 부득이한 형편으로 이렇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옛날 사람은 아비와 자식 간에 비록 재물은 달리하지 않으나 한곳에서 같이 살 수 없기 때문에 동궁이니 서궁이니 남궁이니 북궁이니 하는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한곳에 살면서 재물을 달리하는 것보다는, 따로 살면서도 오히려 한 살림살이의 뜻을 잃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집안 편지-
종들을 함부로 꾸짖는 일을 보지 못했으니, 만일 그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가만히 타이르기를,
“이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
하고는, 말이나 기색을 변한 일이 없었다. -우성전-
묻기를,
“형제간에 잘못이 있으면 서로 말해 주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다만 내 성의를 다해서 상대를 감동하게 해야만 비로소 의리가 상함이 없을 것이다. 만일 성의가 미덥지 않고 한갓 말로만 바로 꾸짖으면, 대개는 그 사이가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말에 ‘형제간에 이이(怡怡 서로 온화하고 화기가 있는 모양)하라.’ 했으니, 진실로 이 때문일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혹시 찰방공이 집으로 찾아오면 문밖까지 나가 맞아들이면서 한자리에 차례를 따라 앉으며 부드럽고 조심하는 모양이 밖으로 풍기기 때문에,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효제(孝悌)의 마음이 생기게 하였다. -김성일-
찰방공이 문에 들어올 적에는 항상 선생에게 사양하였다. 선생은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몸을 굽히고 서서 말하기를,
“어찌 황송하게 이처럼 하십니까.”
하였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옛날 사람은 형을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여, 드나들 때에는 부축해 드리고, 거처에서 봉양하는 데는 자제의 도리를 다했는데, 이제 나는 오직 형님 한 분 계시는데 자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니 한심한 일이다.”
하였다. 선생의 다섯 형 중에서 잠(潜)ㆍ하(河)ㆍ의()ㆍ대헌공(大憲公) 해(瀣)는 세상을 떠나고, 오직 찰방공만이 있었기 때문에 형님 한 분이라고 한 것이다. -김성일-
선생의 넷째 형인 대헌공(大憲公)이 갑산(甲山)으로 귀양살이를 떠나는데, 성을 나서자 세상을 떠났다. 성전(性傳)의 생가(生家) 아버지가 금오랑(金吾郞)으로서 대헌공을 호위하고 간 일이 있었다. 을축년(1565, 명종20) 가을에 선생이 성전의 생가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제가 성주(城主 성전의 생가 아버지)에게 진작 감사드릴 일이 있었지만, 차마 말을 할 수 없어 이 때까지 입 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하고, 곧 흐느껴 울면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마치 갓 돌아가신 것처럼 슬퍼하였다. 우성전의 생가 아버지의 이름은 언겸(彥謙)이다. 경술년(1550)에 금부 도사가 되어 대헌공을 귀양지로 압송하다가, 공의 장(杖) 맞은 상처가 심한 것을 보고, 중도에서 멈추고 좀 쉬면서 회복하게 하였다. 아전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몇 번이나 간했으나 듣지 않아서, 거의 간사한 무리들의 해를 입을 뻔하였다. 그런데 마침 대헌공이 세상을 떠나 그 화를 면했는데, 그때 우성전의 생가 아버지는 안동 판관(安東判官)이었으며, 선생의 조상의 무덤이 안동에 있었기 때문에 성주라 일컬은 것이다. -우성전-
묻기를,
“처형(妻兄)이 과부가 되어 의탁할 곳이 없고, 또 따로 살 집이 없으면 한집에서 살아도 좋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그것은 의리상 편치 않은 일인 듯하다. 요새 사람들은 비록 처형이나 처제(妻弟)를 지친(至親)이라 해서 내외 구별이 없지만, 옛날에 구양공(歐陽公)은 설가(薛家)에 두 번 장가들었고, 여동래(呂東萊)는 한무구(韓無咎)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옛날의 예법이 이러했으니, 지금도 지친으로 대접하여 한집에서 산다는 것이 어찌 혐의를 분별하는 도리이겠는가. 만일 의탁할 곳이 없으면, 다만 집을 지어 살게 하고 생활을 돌봐 주어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고, 이어서 또 이르기를,
“만일 또 혐의를 받을 만한 일에는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구양공이 의탁할 곳이 없는 친척의 딸을 거두어 길렀다. 자라서 시집을 보냈는데 또 과부가 되었으므로 다시 한집에 데려다 먹여주었다. 그러자 공을 꺼리는 일가가 공을 ‘규방(閨房)을 다스리지 못했다.’라고 했고, 식자들도 모두 의심했기 때문에 공이 상소하여 사실이 아닌 것을 밝힌 뒤에야 비로소 혐의를 벗게 되었으니, 이것도 또한 혐의를 분별하지 못한 잘못인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검소한 것을 숭상하였다. 세수할 때는 도기(陶器)를 썼고, 앉는 데는 부들자리를 썼다. 베옷을 입고 실띠를 맸으며 짚신을 신고 대지팡이를 짚어서 담박하였다. 계상(溪上) 집은 겨우 십여가(十餘架)로서, 심한 추위나 더위나 비에 남들은 견딜 수 없었지만, 선생은 넉넉한 듯이 여겼다. 영천 군수 허시(許時)가 한번은 지나다가 선생을 뵙고는,
“이렇게 비좁고 누추한데 어떻게 견디십니까?”
하니, 선생은 천천히 말하기를,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 곤란한 것을 모릅니다.”
하였다. -김성일-
검약(儉約)
농사나 누에 치는 잔일에도 때를 놓친 적이 없으며, 수입을 따져 지출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집은 본래 가난해서 가끔 끼니를 잇지 못하고, 온 집안은 쓸쓸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기 때문에 남들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선생은 넉넉한 듯이 여겼다. -이덕홍-
이덕홍의 조부(祖父)가 살던 천사(川沙)의 집은 사랑이 한 칸이라 손님을 대접하기도 어려웠다. 지붕은 띠로 이었고, 광헌(廣軒)은 널빤지였다. 선생은 매양 이것을 볼 때마다 그 검소함에 탄복하여, 한서암(寒栖菴)과 암서헌(巖栖軒)은 모두 그것을 본받은 것이었고, 옛집도 또한 이와 같았으니, 그 순박하고 검소한 것을 숭상함이 이와 같았다. 암서헌의 추녀를 요새 와서 기와로 바꾸었지만, 이는 선생의 본의가 아니었다 한다. 이덕홍의 조부 이현우(李賢佑)는 농암(聾巖)의 아우로서 천사(川沙)에 살았다. 선생의 시에 “그윽한 천사에 이장(李丈)이 산다.”라고 하였다. -이덕홍-
완락재(玩樂齋)를 새로 짓고는, 선생이 이덕홍을 보고 이르기를,
“내가 생각한 것은 본래 나지막한 집이었는데, 내가 분암(墳庵)에 들어가 재올리는 동안에 목수가 제 마음대로 이렇게 높고 크게 지어서, 마음이 몹시 부끄럽고 한(恨)스럽다.”
하였다. 서재는 높이가 8척, 넓이도 8척이었다. -이덕홍-
암서헌의 양면에 서가(書架)를 만들었는데, 유독 서쪽 면만 반쪽을 막고 그 가운데를 비워두었다. 묻기를,
“이처럼 하신 것에는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여기는 내가 기거하고 잠잘 곳이다. 성인의 교훈을 뒤에 두고 등지고 앉는 것이 편안치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이 했을 뿐이다.”
하였다. -금난수(琴蘭秀)-
신사년(1521, 중종16)에 부인 허씨(許氏)를 맞이하였다. 부인의 집은 자못 넉넉하였다. 선생은 어머니를 봉양하는 여가에 가끔 오가고 했었는데, 항상 여윈 말을 타고 다녔다. 부인의 집에는 비록 살진 말이 있었지만 그 말을 탄 적이 없었다. -이안도-
선생이 서울에 계실 때 초헌(軺軒)을 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입시하러 대궐에 들어가는 때에는, 말이 없으면 남에게 빌어 타기는 하였으나, 초헌을 탄 적은 없었다. -우성전-
부인 허씨의 논밭이 영천군(榮川郡)에 자못 많이 있었다. 계상(溪上)에는 겨우 변변하지 못한 밭 몇 마지기가 있을 뿐이었으나, 끝내 부인의 전장(田莊)에 가서 살지는 않았다. -김성일-

[주D-001]육아(蓼莪) : 《시경(詩經)》에 육아편(蓼莪篇)이 있는데, 그것은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는 시(詩)다.
[주D-002]풍수(風樹) : 공자가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슬피 우는 것을 보고 물었더니, 답하기를, “객지에서 돌아오니 부모가 이미 돌아가셨다. 나무가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끊이지 않고, 자식이 보양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리지 아니하였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하였다.
[주D-003]설가(薛家)에 …… 장가들었고 : 송나라 구양수(歐陽脩)는 첫 부인 설씨(薛氏)가 죽은 뒤에, 다시 처제(妻弟)에게 장가들었다
언행록 2
 유편(類編)
조상 섬김

절사(節祀)나 시향(時享)에는, 아무리 춥고 더운 때라도 병이 없는 한 반드시 친히 독(櫝 신주의 함)을 받들고 가고 남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혹시 한 철에만 나는 물건이나 색다른 음식을 얻으면 말리거나 혹은 절여 두었다가, 절사나 시향 때 제사상에 올렸다. 대개 선생은 지자(支子 장남 이외의 아들)이므로 가묘에 천헌례(薦獻禮)를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같이 한 것이다. -김성일-
선생은 새로운 식물(食物)을 얻으면 반드시 종가(宗家)에 보내어 사당에 올리게 하였고, 만일 보낼 수 없으면 집에 간직해 두었다가 제사 지낼 수 있는 날을 기다려, 다만 지방만 붙이고 축문은 읽지 않으며, 또 메나 탕은 차리지 않고 오직 떡이나 국수만으로써 제사 지냈다. 이덕홍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선생이 이르기를,
“내가 사는 곳이 가묘에서 멀어 뜻대로 제사를 돕지 못할 뿐 아니라, 그렇다고 감히 제사를 주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주자의 문하에도 지자(支子)로서 타처에 사는 자가 이렇게 한 예가 있었다.”
하였다. -이덕홍-
형의 손자인 종도(宗道)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이덕홍이 내게 새로 난 송이버섯 5개를 부쳐 왔기 때문에 보낸다. 다만 이 물건만을 사당에 올리기는 불편할 것이니, 물에 담그거나 말리거나 해서 잘 간직해 두었다가, 뒷날 다른 물건을 올릴 때에 함께 올리든지, 제사 지낼 때에 제물로 써도 또한 좋을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선생은 속절(俗節)의 묘제(墓祭)는 예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역시 세속에 따라 묘에 가기는 하되, 일찍이 가묘에 제사 지낸 일은 없었다. 그것은 주자가 장경부(張敬夫)에게 답한 속절에 대한 뜻이 그래서였다. -김성일-
선생은 간혹 기제(忌祭)를 재궁(齋宮)에서 모시는 일이 있었다. 어떤 이가 그것이 예인지 묻자, 선생이 이르기를,
“사당에서 제사하는 것이 예이다. 그러나 종가에 혹시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재궁은 묘소와 같은 것이므로 불사(佛寺) 따위에 비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손들이 여기에 모여 제사하는 것도 무방한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제사를 마치고 상을 걷은 뒤에도 오랫동안 신위(神位)를 향하여 앉아 있었다. -이덕홍-
제사에 쓸 술을 빚을 때는 반드시 깨끗한 곳을 가려서 하였고, 과실이나 마른고기가 제사를 위해 간직된 것이면 감히 다른 용도에 쓰지 않았다. -이덕홍-
선생이 서울에 있을 때 제사가 있어 술을 빚거나 하면, 따뜻한 방이 없어 술독을 침실에 두었는데, 아무리 춥고 어두운 밤이라도 대소변은 반드시 밖에서 보았다. 이 한 가지는 선생에게는 실로 조그마한 일이다. 그러나 군자는 털끝만큼도 함부로 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므로 여기에 적는다. 본주(本註)이다. -우성전-
기일(忌日)에는 술상을 차리거나 고기를 받지 않았고, 비록 제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사랑에서 엄숙히 지내면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손 대접도 또한 그러했다. 하루는 손이 왔는데, 술상을 차리다가 그 사람에게 제사가 있음을 알고는, 술상을 치우고 오직 차만 내어 대접하였다. 이웃 부청(府廳)에서 노루 고기를 보내왔는데, 마침 그날이 제삿날이었기 때문에 곧 돌려보냈다. -김성일-
그 아들 준(寯)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신주(神主) 부인 권씨(權氏)의 신주인데, 그때는 아직 두 해가 못되었다. 를 아직은 온계리(溫溪里) 집의 바깥 방에 두고자 한다. 그리고 그 또 한 가지 생각이 있다. 내가 이미 한 고을을 맡고 있으니, 권도에 따라 선생은 지자(支子)이기 때문에 권도에 따른다고 함. 몇 자 빠짐 선인(先人)을 제사 지낸다면 너의 두 어미도 또한 마땅히 함께 제사 지내야 될 것이다. 그래서 두 신주를 모두 군재(郡齋 군(郡)의 수령(守令)이 거처하는 집)에 안치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마땅히 다시 생각하고 물어서 할 일이지 함부로 할 것은 아니다.”
하였다. -집안 편지-
선생의 가묘는 온계리에 있었다. 종가(宗家)가 자식이 없으므로 형의 아들 진사 완(完)이 당연히 이어받아 제사를 받들어야 할 것이나, 그는 이미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살림을 거두어 돌아오기가 어려웠다. 선생이 중한 의리로써 꾸짖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자, 완이 드디어 그 아들 종도(宗道)를 시켜 돌아가 살면서 종가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선생이 기쁘게 생각하여 재물을 내어 집안 살림을 돌봐 주었는데, 그들을 돌보고 사랑함이 끝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서 종가가 퇴락해져서 종도가 수리하고자 했으나, 집이 가난하고 재목이 없었다. 선생이 선산의 나무를 베어 쓰게 했더니, 어떤 사람이 선산의 나무를 베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자 선생이 이르기를,
“그것을 사사로이 쓴다면 의당 옳지 못한 일이지만, 선산의 나무를 베어서 선조의 묘궁(廟宮)을 지어 선조의 제사를 받든다면, 이것은 대를 이어가는데 중요한 것이니 옳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그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고산(孤山) 선생의 전모(前母) 김 부인 산소가 있는 곳 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박 봉사(朴奉事)를 만나 이제 처음으로 알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록 불을 껐다고 하나 산소의 영역이 온전한지 알 수 없구나. 설령 다행히 면했다 하더라도 그 주봉(主峯) 근처가 면하지 못하였다면, 어찌 자식으로서 급히 가보지 않고 멀리서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느냐. 지금은 온 나라가 가뭄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관리로서 외방으로 나가는 것을 금할지 모르겠다만, 이 일은 보통 일이 아니므로 마땅히 말미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무진년(1568, 선조1) 12월 25일 대정(大政) 때 나라에서 조선(祖先)을 추증하였다. 처음에 선생이 1품에 오른 지 1년이 되어도 추은(追恩)하지 않으므로, 그 자제들이 청하기를,
“왜 추은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니, 선생이 답하기를,
“내가 헛된 이름으로써 외람되이 이에 이르렀거늘, 어찌 감히 다시 추은을 청하겠느냐. 하물며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한 고을 현감 이상을 하지 말라.’라고 경계하셨는데, 그 가르침을 받들지 않고 이제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이제 다시 추은까지 하는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지위가 숭정대부에 올랐는데도 추증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 같다.”
하였기 때문에, 이에 비로소 추은한 것이다. -이안도-

[주D-001]천헌례(薦獻禮) : 일정한 제사를 지내는 외에, 철에 따라 새로 난 과일이나 어물을 가묘(家廟)에 드리는 것이다.

 

언행록 2
 유편(類編)
가훈(家訓)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책 읽는데 어찌 장소를 가릴 것이냐. 서울에 있으나 시골에 있으나 오직 어떻게 뜻을 세우느냐에 있을 뿐이다. 모름지기 충분히 힘써서 매일 부지런히 공부하여, 할 일 없이 세월만 헛되게 보내지 말아야 하느니라.”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너는 본래부터 공부에 뜻이 독실하지 못하다. 만일 집에 있으면서 그저 일없이 세월만 보내면 더욱 공부를 폐하게 될 것이니, 모름지기 빨리 조카 완(完)이나 혹 독실한 뜻을 가진 친구와 더불어 책을 짊어지고 절에 올라가서 한겨울 동안 부지런히 공부하여라. 지금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으면, 세월은 빨라 한번 가면 따르기 어려운 것이니, 천만번 마음에 새겨 소홀히 하지 말라, 소홀히 하지 말라.”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너는 혼자서 궤전(饋奠)을 받들고 학업을 닦으며 살림도 돌아보아야 하니, 마음이 흔들리고 흩어짐을 면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형편에 따라 순리대로 처리하고 본래의 뜻을 폐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만일 세상의 속된 일에 얽매여 공부할 뜻을 그만둔다면, 마침내는 시골의 쓸데없는 사람밖에 되지 않을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당시에 준이 권 부인의 심상(心喪)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궤전을 받든다고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의령(宜寧)의 일을 만일 잘 처리하지 않으면, 오직 너만 불의(不義)에 빠질 뿐만 아니라, 또한 내 수치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옳고 그른 것을 자세히 헤아려서 마땅함을 따르고 이치를 좇아서 공손한 태도로 처리하되, 그 물건 버리기를 초개(草芥)같이 하여서 자제의 도리를 잃지 않는 것이 지극히 옳은 일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가는 도중에서나, 또 거기 가서도 몸가짐과 일처리를 날마다 조심하고 삼가서 감히 게으르거나 소홀히 하지 말라. 문공(文公)의 〈훈자첩(訓子帖)〉의 말을 항상 생각하고 잊지 않으면 큰 잘못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은 평소에도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니, 하물며 상주의 몸으로서이겠느냐.”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전재(殿齋 참봉이 거처하는 집) 그때 준이 집경전(集慶殿)의 참봉이었다. 에서 일이 없거든, 책을 읽거나 글씨를 쓰는 것이 진실로 좋은 공부다. 회암(晦庵)의 책은 그냥 베끼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또한 모름지기 깊이 새겨서 궁구해야 할 것이니라. 혹 모르는 곳이 있으면 표를 해 두었다가 남에게 물어보거라.”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들으니, 몽아(蒙兒) 안도의 어릴 때의 이름이 아몽(阿蒙) 는 아직도 집 안에 박혀 있다는구나. 《예기》에 이르기를, ‘남자는 열 살이 되면 나가서 바깥의 스승에게 배우고 바깥에서 거처한다.’ 하였는데 이제 이 아이는 이미 열서너 살이나 되었으면서 아직도 바깥에 나가지 않아서 되겠느냐. 또 들으니, 무당이 자주 집을 드나든다는데, 이것은 우리의 가법(家法)을 매우 해치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 때부터 전혀 그것을 숭상하지 않았고, 또 나도 늘 그것을 금해서 그들이 드나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다만 옛 어른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것뿐이 아니라, 가법은 깰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어찌 이 뜻을 모르고 경솔히 고쳐서 될 일이겠느냐?”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요즘 오 찰방(吳察訪 오언의(吳彦毅))이, 그 아들 수영(守盈)이 학업에 전념하지 않고 호사스러운 치장에만 힘쓴다고 여겨, 크게 노하여 꾸짖어 금하였고, 수영의 종이돈을 가지고 와서 물건을 사려다가 사지 못하고 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대개 오형(吳兄)의 이런 뜻은 아주 좋은 것으로, 나는 지금까지 이처럼 엄하지 못해서 너로 하여금 세속의 외면적인 일만 좇아 익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너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무릇 선비는 마땅히 풍채가 소박하고 문장을 일삼으며 담담하게 욕심을 버리는 것으로 자처하면서, 여가에 생업에 종사한다면 해로울 것이 없겠지만, 문장을 하는 것이나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은 다 잊어버리고 살림살이나 옷치레하는 말단적인 일에만 파묻힌다면, 이것은 곧 시골의 속인(俗人)들이나 할 짓이지, 어찌 유자로서의 기풍이 있다고 하겠느냐?”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살림살이 등의 일도 사람으로서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아비인 나도, 평생 그 일을 비록 서툴게는 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전혀 하지 않을 수야 있었겠느냐. 다만 안으로는 문장을 오로지하면서 밖으로 혹시 살림살이를 해 가면 사풍(士風)을 떨어뜨리지 않아서 해로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문장을 완전히 저버리고 살림살이에만 정신을 팔면, 이것은 농부의 일이며 시골 속인(俗人)들이 할 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 말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지금 사람들이 학력(學力)은 없으면서도 큰 허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그 자질이 그다지 잡박(雜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 타고난 성품이 잡박한 데다 또 고치고 바로잡는 공부도 하지 않고 경솔하게 함부로 행동한다면, 그 허물이 쌓이고 쌓여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많아질 것이다. 나는 요새 네가 의리에 대해 그다지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너의 자질이 너무 편벽된 특징이므로 네가 몰라서는 안 될 일이다. 때문에 미리 경계하는 것이지, 네가 큰 허물에 빠져서 꾸짖는 것이 아니다. 일찍이 번수(樊須)가 성인의 문하에서 지낼 적에, 자신의 기질이 편벽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에 허물을 고치고 의혹을 분별하는 법을 물었으니, 이것은 잘 배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너는 부디 내 말이 너무 조급하다고 의아해하지 말고, 옛사람이 내실 있게 공부한 것을 생각한다면 내 뜻을 아는 것일 뿐 아니라 너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사람이 누군들 허물이 없을까마는, 허물을 능히 고칠 줄 안다면 그것은 곧 대선(大善)이 되는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가난과 궁핍은 선비의 다반사인데, 어찌 마음에 거리낄 것이 있겠느냐. 너의 아비도 평생 이로 인해 남의 비웃음을 받은 일이 많았다. 오직 꿋꿋이 참고 순리로 처세(處世)하여 자신을 수양하면서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너는 의탁할 곳이 없어 더부살이를 하고 있어 군색한 모양이구나. 너의 편지를 보고 나면 여러 날을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그러나 너 자신을 위해 스스로 처신해야 할 길은, 그럴수록 더욱 괴로움을 참고 꿋꿋하게 자신을 지켜 분수를 따라 천명을 기다릴 뿐이요, 갑자기 비탄하거나 원망하다가 잘못을 저질러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그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이제 들으니 유모로 부릴 여종이 3, 4개월밖에 안 되는 어린애를 버리고 서울로 올라온다고 하니, 이는 아이를 죽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근사록》에 이런 일에 대해 논하기를, ‘남의 자식을 죽여서 자기 자식을 살리는 짓은 아주 옳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이제 이 일도 꼭 그와 같은 것이니 어찌 하겠느냐. 서울 집에도 반드시 유모로 부릴 종이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5, 6개월 동안만 각자 서로 기르고 지내다가 8, 9개월이 되었을 때 올려보낸다면, 이 아이도 죽물로써 목숨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두 목숨이 다 사는 것이니, 아주 옳은 일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꼭 보내고자 하거든, 차라리 그 아이를 데리고 올라가서 두 아이를 함께 기르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바로 내버려 두게 하는 것은 어진 사람이 차마 하지 못할 일이요, 또 지극히 온당치 못한 일이기 때문에 미리 알리는 것이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라.”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김근공(金謹恭)은 학식이 정밀하고 상세하니 필시 훌륭한 선비일 것이다. 진작 찾아보았는지 모르겠구나. 반중(泮中 성균관 근처에 있는 동네)에서 지내기는 매우 어려운 일인데, 너에게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는 항상 겸손하고 삼가서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지 말라. 그리고 몸가짐을 굳게 가져서 나태하지도 거만하지도 말며, 말을 많이 하지 말라. 경계하고 경계할지니라.”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너는 모든 일에 마땅히 조심하고 삼가야 할 것인데, 이제 네가 이정(而精)에게 보낸 편지를 보건대, 큰 글자로 어지러운 초서(草書)를 썼으니, 이것은 무슨 뜻이냐. 부디 조심하여 거칠고 경망한 태도를 좋아하지 말라.”
하였다. -집안 편지-
형의 손자 종도(宗道)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너는 궁핍하게 살며 어려움이 많아 학업에 전념할 수 없으니 걱정스럽다. 그러나 그것도 부득이한 사정에서 나온 것이니,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느냐. 더욱 분발하여 마음을 가다듬어, 비록 집 안에 있더라도 실없는 일을 버리고 공부를 해야 할 것인데, 어찌 모든 것에 살림을 핑계하여 공부를 전폐해서야 되겠느냐.”
하였다. -집안 편지-
형의 손자 선도(善道)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이른바 학업은 너의 뜻이 독실한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뜻만 독실하다면 어찌 학업이 진보하지 않는다고 걱정할 것이냐. 그러나 독실하지 못하면 때때로 이러한 탄식을 한다 한들, 쓸데없는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자손을 가르치는 데는 반드시 《효경》과 《소학》 따위를 먼저 가르쳤고 글 뜻을 대강 알게 된 뒤에는 사서(四書)를 읽혔다. 이렇게 차례를 따랐으며 단계를 뛰어넘은 적이 없었다. 혹시 자손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과히 꾸짖지 않고 거듭 타이르고 훈계해서, 스스로 느껴서 깨닫게 하였다. 종들에게도 노하여 꾸짖은 적이 없었고, 가정 안팎이 화목하고 즐거워하여 얼굴을 찌푸리거나 고함을 치지 않아도 모든 일이 절로 잘 다스려졌다. -김성일-


[주D-001]번수(樊須) : 춘추 시대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이다. 자는 자지(子遲), 노둔(魯鈍) 하였으나 배우기를 좋아하여 스승이나 친구들에게 반복하여 질문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언행록 2
 유편(類編)
향리에서의 생활

선생은 시골에 있을 때 나라의 세금이나 부역이 있으면 반드시 평민보다 앞서서 바쳐 한번도 늦어진 일이 없었다. 마을의 아전들도 선생의 집이 고관의 집인 줄 몰랐다. 선생이 언젠가 시냇가에 나와 앉았을 때, 마을의 아전들이 와서 말하기를,
“금년 잣나무 숲 감독은 진사 댁에서 맡아야 합니다.”
하자, 선생이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잣나무 숲이 시내의 동쪽에 있어서 선생의 집으로 하여금 지키게 한 까닭이었다. -김성일-
곽황(郭趪)이 선성(宣城 예안(禮安))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일찍이 남에게 말하기를,
“이 고을의 세금이나 부역에 대해 나는 아무 걱정이 없다. 이 선생이 온 집안사람을 거느리고 남보다 먼저 바치니, 마을의 백성들이 선생의 의리를 두려워해서 서로 앞 다투어 바치면서 혹 뒤질까 두려워하므로, 한번도 독촉하지 않아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으니, 내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다. -우성전-
그 아들 준을 경계한 편지에 이르기를,
“사람의 자제 된 자는 마땅히 삼가고 조심해서 법을 두려워함으로써 의무를 삼을 것이다. 그 곡식이 이미 관가의 곡식이 되었는데 그때 선생의 영천(榮川) 전장(田庄)에서 난 곡식을 관가에서 사채(私債)로 봉(封)해서 구황(救荒)에 충당하려고 하였다. 그것을 임의로 취해서 쓴다면, 이 어찌 유교 가문의 자제로서 글을 읽어 의를 아는 사람의 일이라 하겠는가. 네가 만일 이 마음을 고치지 않으면, 뒷날 시골에서 행세할 때에 가는 곳마다 허물을 지을 것이니, 이 어찌 걱정이 아니겠는냐.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거듭 타일러 마지않는 이유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도산정사(陶山精舍) 밑에 어량(魚梁)이 있었는데 관가에서 고기잡는 것을 엄금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사사로이 잡지 못했다. 선생은 여름만 되면 반드시 계사(溪舍)에서 지냈으나 한번도 그 곳에 간 적이 없었다. 조남명(曺南冥)이 이 말을 듣고 비웃기를,
“어찌 그리 소심한가. 내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관가에서 금한다고 한들 무엇을 혐의쩍게 피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조남명이라면 그렇게 하겠지만, 나는 이렇게 할 것이다. 나의 불가(不可)함으로써 유하혜(柳下惠)의 가(可)할 것을 배우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하였다. -김성일-
선생의 누이의 아들 신홍조(辛弘祚)가 본현(本縣)에 송사를 건 일이 있었다. 선생은 그로 하여금 왕래도 하지 말고 편지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고을의 태수에게도 또한 그러하게 하였다. -이덕홍-
울타리 밑으로는 양민의 장정과 접촉하지 않았다. -이덕홍-
시냇물을 10리 밖에서 끌어오는데, 물은 적고 물 댈 곳은 넓어서, 먼 곳은 가물어도 적셔줄 수 없어 두 해 거듭 수확을 못했다. 선생은 이를 보고 이르기를,
“이것은 내 논이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밭이 말라도 먹고 살 수 있지만, 저들은 논이 적셔지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하고, 곧 그 논을 밭으로 만들었다. 그가 남의 사정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이덕홍-
그 고장에서 학업에 뜻을 가진 사람 가운데 품관(品官)의 반열에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선생이 이것을 보고 이르기를,
“향당(鄕黨)은 부형과 종족이 있는 곳인데, 반열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 무엇인가?”
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가문의 지체가 낮은 사람이 윗자리에 있으니, 실로 우후(牛後)의 부끄럼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선생은 이르기를,
“향당에서 귀히 여기는 것은 나이이거늘, 비록 아랫자리에 있다 한들 예나 의리에 안 될 게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김부필ㆍ김부의ㆍ김부륜과 금응협(琴應夾)ㆍ응훈(應壎)이 술병을 들고 와서 선생을 뵈었다. 선생은 고을 모임에서 귀천에 따라 나누는 잘못을 논하고, 다만 나이를 따라 좌석을 정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김부필이 말하기를,
“고금(古今)이 다르니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선생이 고금의 일을 끌어와서 날이 저물도록 변론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돌아가는 길에 시 한 수를 지어 선생에게 올렸는데,
선생은 상고를 논하는데 / 先生上古論
제자들은 말세를 말하네 / 弟子末世言
서원의 규모가 정해 있거늘 / 書院規模定
향회(鄕會)의 자리는 나누어 무엇하나 / 何須鄕坐分
하였다. -이덕홍-
선생이 이르기를,
“대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만일 다른 사람에게 얽매여 여러 사람의 의견을 어기기가 어려운 형편이 되거든, 그 이치에 그다지 해롭지 않은 것을 살펴 따를 수는 있다. 오직 안으로 더욱 공부하여야 할 것이니, 만일 안으로 공부가 없이 갑자기 격이 높은 일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서 비방하게 될 것이다. 대개 한집안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한 것이니, 이것이 사람이 처신하기 어려운 점이다.”
하였다. -김부륜-
묻기를,
“일찍이 어른을 위해서 똥 오줌 받는 것은 내 부형이나 종족이라면 할 수 있겠지만, 내 부형이 아니라면 구태여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는데 뒤에 생각해 보니, 비록 내 부형이 아니더라도 존경하는 예가 없을 수 없겠다 생각하였으니,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자네가 말한, 어른을 섬기는 예는 대체로 맞는 것이다. 무릇 군자는 내 부형에게 효제(孝悌)의 도리를 돈독히 해야 하는 것이니, 내 어버이를 높이어 남의 어버이에게까지 미치게 하고, 내 어른을 공경하여 남의 어른에게까지 미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나이가 배가 되면 어버이로서 섬기고, 열 살이 위이면 형으로 섬기고, 다섯 살이면 견수(肩隨)하는 것이니, 이것을 허례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내 어버이를 높이고 내 어른을 공경함으로써 그것으로 미루어 남에게 미치도록 하는 것이다. 다만 그 공경하는 예가 혹 그 사람에 따라 차별이 있을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서명(西銘)〉의 ‘아비는 하늘이요, 어미는 땅이요, 백성은 모두 내 동포다.’라는 뜻으로 말한다면, 천하는 한집이 되고 온 나라 백성은 한사람이 되는 것이니, 무릇 천하에 나이 많은 사람은 모두 내 한집의 어른인데, 내 어찌 형을 섬기는 마음으로 미루어 그를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국필-
묻기를,
“어른을 모시고 먹을 때에, 나중에 먹으려 하면 옛날의 예에 어긋나고, 먼저 먹으려면 남이 보고 해괴하다 할까 두려운데, 어떻게 하면 중용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제사 음식도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된다.’ 하니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어른보다 먼저 먹으면 속인들이 매우 해괴하다 할 것이니,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될 것이요, 만일 어른이 숟가락을 들기 전에 숟가락을 들었더라도 우선 안색을 보고 먼저 먹으면 거의 중용을 얻게 될 것이다. 제사 음식에 있어서는 더욱 온당치 않은 일이니,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매우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김수-
선생은 항상 조용하고 단정하게 지내면서 별로 바깥 출입이 없었지만, 만일 사문(斯文)들의 점잖은 술자리나 이사(里社 동리 사람들이 모여 동신제(洞神祭)를 지내는 것)에 모여 여는 잔치에는 가끔 가기도 하였다. 또 만일 친척 집에 길(吉)ㆍ흉(凶)이 있어서 경(慶)ㆍ조(弔)할 일이 생겼을 때 가까우면 반드시 몸소 가고, 멀면 반드시 사람을 시켜 예를 표하되, 늙을 때까지 폐하지 아니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고장 사람이 잔치에 청하는 일이 있으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반드시 갔고, 술잔이 한 번 돌면 반드시 주인에게 술잔을 돌려 답례를 하였다. 아무리 항렬이 낮은 사람이든지 젊은 사람에게라도, 부드러운 얼굴로 따뜻한 대화를 하고 그 즐거움을 다한 뒤에라야 돌아왔다. 술은 양이 없되 다만 흡족하게 마실 뿐이었다. -이덕홍-
“향교(鄕校)에서 석채례(釋菜禮)를 행한 뒤에 교생(校生)이 제사 고기를 드리면, 선생은 의관을 갖추고는 제사 고기를 당(堂)에 두고 뜰아래서 절하고 받았다. 그러고는 곧 당 위에서 제사 고기로 잔치를 베풀어, 교생이 술잔을 들고 꿇어앉으면 선생은 자리에 나와 꿇어앉아 마시고, 다 마시고는 다시 엎드려 물러났다. 혹 좌석에 다른 사람이 있어도 역시 이처럼 하게 하였는데. 선생이 잔을 잡고 꿇어앉으면 교생이 받아 마시기를 위와 같이 하였다.” -우성전-

[주D-001]나의 …… 것 : 노(魯)나라에 홀아비와 과부가 이웃에 살았는데, 하룻밤에 폭우가 와서 과부의 집이 무너졌으므로, 과부가 홀아비 집에 찾아가서 들어가기를 청하니, 홀아비가 거절하기를, “예(禮)에 남녀가 60이전에는 자리를 같이하지 않는 것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 하니, 과부가 말하기를, “당신은 유하혜(柳下惠)의 일을 듣지 않았는가?” 하였다. 그것은, 유하혜는 노국의 현인(賢人)으로 여자를 옆에 놓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홀아비가 답하기를, “유하혜는 가(可)하나 나는 불가(不可)하니, 나는 나의 불가함으로써 유하혜의 가함을 배우겠다.” 하였다. 공자(孔子)가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이야말로 유하혜를 잘 배우는 사람이로다.” 하였다.
[주D-002]우후(牛後) : 속담에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궁둥이가 되지 말라.[寧爲鷄口 無爲牛後]”라는 말이 있다.
[주D-003]견수(肩隨) : 나이가 많은 사람과 길을 갈 때, 어깨를 나란히 해서 가되 조금 뒤로 물러서서 가는 것을 말한다.
[주D-004]석채례(釋菜禮) : 봄가을에 문묘(文廟)에서 공자(孔子)를 제사하는 의식이다.

언행록 2
 유편(類編)
사양하고 받음

선생은 사양하고 받음에 있어서 아주 엄하여, 진실로 바른 도리가 아니면 비록 조그만 것이라도 남에게서 받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주ㆍ현의 관가에서 교제의 예로써 보내오는 것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그때 한 관리가 있었는데, 자못 염치가 없는 사람으로, 자주 찾아와 뵙고, 혹 때로는 물건을 보내기도 했는데 선생은 그것도 받았다. 제자 조목(趙穆)이 그것을 보고 매우 불쾌해하였다. 비록 내가 미처 물어보지는 못하였으나, 생각해 보면 선생은 구차히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맹자의 각지불공장(却之不恭章)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김성일-
선생은, 친한 방백 수령으로부터 혹 보내오는 선물이 있으면, 반드시 의로써 헤아려 받기도 하고 사양하기도 했지만, 박절하게 하지는 않았다. -김부륜-
주부(州府)에서 혹 보내오는 선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찰방공에게 보내고, 다음에 이웃이나 친척, 또 와서 배우는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한번도 집에 쌓아 두지는 않았다. 서울에 있을 때는 봉록으로 들어오는 것이 쓰기에 넉넉하기 때문에, 그 나머지는 모두 친구를 두루 돌봐 주되, 반드시 친소(親疎)와 빈부(貧富)를 헤아려서 한번도 정의(情宜)를 상한 적이 없었다. -김성일-
선생이 일찍이 월란사(月瀾寺)에 있을 때에 소어(樔魚)를 보내 준 사람이 있었다. 선생은 이웃 노인들에게 나누어 보낸 뒤에 비로소 맛을 보았다. -이덕홍-
그 자제들이 내의원(內醫院)에게 약을 구하려 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옳지 않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이것은 다른 물건과 다른데 구한들 무엇이 해롭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의리상 온당치 않다. 결코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국필-
을축년(1565, 명종20) 겨울에 윤복(尹復)이 안동 부사가 되어 와서 뵈올 때, 선생이 나가서 접대하였다. 윤복이 예단을 드렸는데, 선생이 별생각 없이 펴 보지 않았다. 윤복이 하직하고 간 뒤에 들어가 보니 그것은 노루 고기였다. 이날은 마침 선생 집에 제사가 있었으므로, 선생은 곧 편지와 함께 돌려보냈다. 제삿날에 고기를 받는다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12월 24일 (성종의 기일(忌日)) 에 조사경(趙士敬)이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왔지만, 역시 그 고기는 받지 않았다. -우성전-
묻기를,
“안동 부사가 보낸 어육(魚肉)을 선생님께서는 제삿날이라고 해서 받지 않았지만, 저희들 생각으로는, 그것을 받아 두시기가 미안하면 이웃 마을의 친구들이나 친척에게 나누어 주어서 선물 보낸 사람의 성의를 받아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어육의 선물이 마침 제삿날에 왔는데, 그것을 돌려보내는 것이 핑계에 가까운 듯하다고 공이 책망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때 부사는 내 집에 제사가 있는 줄 모르고 어육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성의를 베풀려고 했는데, 내가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제삿날이라 해서 사절하고, 그 어육만을 기일을 무릅쓰고 받는다면 옳겠는가. 받는 것이 이미 옳지 않다면 집에 두나 남에게 주나 다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렇게 처리한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묻기를,
“선생님께서는 의성(義城)에서 보내온 선물에서 마른고기는 물리치고 필묵(筆墨)은 받으셨습니다. 만일 그것이 의로운 것이라면 모두 받아야 할 것이요, 의롭지 않은 것이라면 모두 받지 않아야 할 것인데, 어째서 그 크고 작은 것을 가려서 받았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내 일찍이, 주자가 조자직(趙子直)의 선물에서 인삼과 부자(附子)는 받고 봉록을 쪼게 보낸 것은 물리쳤으며, 또 어떤 사람의 선물에서는 강게[江蟹]는 받고 베[布]는 물리친 것을 보았다. 이는 그 당시 조공(趙公)이나 어떤 사람은 다 잘못이 있었지만, 그 허물이 절교할 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에 가벼운 물건은 받아서 절교하지 않는 뜻을 보이고, 중한 물건은 물리쳐 그 사람의 잘못을 깨우친 것이다. 내가 사양하고 받은 것은 굳이 논할 것도 없지만, 그때 그렇게 한 것은 약간의 곡절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였다. -이국필-
한번은 내가 선생을 계상(溪上)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 이희(李憙) 이 선생에게 꿩을 보냈다. 그날은 마침 선생의 어머니의 제삿날이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뒷날 선생이 이르기를,
“전날 아무개의 꿩을 받지 않은 것은, 다만 제삿날에 그것을 받는 것이 마음에 편치 않아서만이 아니었다. 내가 항상 내 집의 제삿날이라 하여 손님에게 소찬(素饌)을 대접해서 마음이 늘 편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어육을 갖추어 대접하고자 하면 손님들이 미안해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제 그 사람이 가지고 온 물건은 비록 받아 둔다고 하나, 익히지도 않고 제물로 바치는 것은 더욱 마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히 받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김수-
병인년(1530, 중종25)에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가다가 예천에 이르러 병으로 사양하는 글을 올리고는 안동의 산사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부중(府中)에서 올리는 물건을 모두 물리쳐 받지 않았고, 다만 산승(山僧)에게 밥을 짓게 하였는데 쓸쓸하기가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그 아들 준이 그때 안기 찰방(安奇察訪)으로 있으면서, 가서 모실 적에도 역시 그 하인들을 물리쳤으니, 그것은 번거로움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우성전-
처음에 안동 부사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안동에 사는 어떤 사람이 혼인에 관련한 일 때문에 뵙고 하례 드린 뒤 겸하여 고기 선물을 선생에게 올렸다. 선생은 사양하다 마지못하여 두고 가라고 이르고는, 그 사람이 간 뒤에 곧 사람을 시켜 돌려보냈다. -김부륜-
선생이 처음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을 때, 조송강(趙松岡 조사수(趙士秀))이 비단옷 당상복(堂上服) 을 보내왔으나 선생은 받지 않았다. -김부륜-
무진년(1568, 선조1) 8월 10일에 성균관에서 석전(釋奠)을 지낸 뒤에 고기와 술을 보내왔다. 선생은 재상의 집에 으레 보내는 물건인 줄로 알았다가, 뒤에 들으니, 선생이 대제학 지춘추관사라 해서 보내온 것이었다. 그때 선생이 막 대제학을 물러났기 때문에 그것을 받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하여 받지 않았다. -이안도-
이덕홍이 묻기를,
“공자는 친구의 선물이라면 거마(車馬)까지도 사양하지 않았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그것은 의리로 주는 것이라 사양할 길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면 선생님은 어찌하여 김이정(金而精 김취려(金就礪))이 주는 노새를 받지 않았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옛날 사람은 부모가 계시면 남에게 선물로 거마(車馬)를 주지 않았으니, 그것은 백성들에게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그 사람에게 부모가 계시는데 내가 어떻게 그것을 받겠는가.”
하였다. -이덕홍-
여러 제자들이 한번은 선생을 모시고 계당(溪堂)에서 술상을 벌였다. 벽오공(碧梧公 이문량(李文樑))이 김이정에게 술잔을 권했더니, 이정이 굳이 사양하였다. 선생이 엄한 음성으로 이르기를,
“사양도 또한 도가 있는 것이다. 만일 친구 같으면 모르지만, 만일 손위 어른이라면 그 명령을 순순히 좇아 감히 굳이 사양하지 못하는 것이니, 오직 편치 않다는 뜻을 보이면 된다.”
하였다. 김이정이 서울에서 처음 왔기 때문에 벽오공이 양보한 것이다. 본주(本註)이다. -이덕홍-
묻기를,
“어떤 사람이 구청(求請)의 구(求) 자에는 악만 있고 선은 없다고 했으니 그렇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대체로 말하면 그 어떤 사람의 말이 대단히 좋은 말이다. 세상의 많은 불미한 일이 다 이 한 글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무릇 사람이 몸을 욕되게 하고 절개를 잃으며 과오를 범하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만일 선비로서 뜻을 유지하고 절개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이 어떤 사람의 말을 제1의 원칙으로 삼아서 항상 스스로 격려한다면, 거의 타락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와 나의 사이의 정의에 경중(輕重)과 후박(厚薄)이 있고, 또 구하는 일과 처해 있을 때에 있어서 의리와 곡절(曲折)이 또한 여러 갈래가 있을 것이니, 그런 상황에서는 오직 크게 정신을 가다듬어 의를 좇고 이(利)를 좇지 않는다면, 죄와 욕을 받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권공 질(權公礩)은 선생의 장인이다. 그 집이 서울 서소문 안에 있었다. 선생에게 물건을 보내고자 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뒷날에도 선생이 혹시 서울에 가더라도 항상 다른 곳에서 묵고 한번도 그 집에서는 지내지 않았다. -김성일-


[주D-001]각지불공장(却之不恭章) : 《맹자》 〈만장 하(萬章下)〉의 감문교제하심야장(敢問交際何心也章)을 말한다.
언행록 3
 유편(類編)
교제(交際)

선생은 사람을 대함이 매우 너그러워, 큰 허물이 없으면 끊어 버리지 않고 모두 용납하여 가르쳐서 그가 스스로 고쳐 새롭게 되기를 바랐다. -김성일(金誠一)-
선생은 사람을 대할 때 얼굴에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영천 군수 이명(李銘)은 본래 사납고 거만한 사람이었다. 일찍이 선생을 찾아뵐 때 방자하고 무례하여 재채기하고 가래침 뱉기를 태연스럽게 하며, 병풍의 서화를 손가락질해 가며 하나하나 평론하였으나, 선생은 그저 따라서 대답할 뿐이었다. 곁에서 모시고 앉은 사람들은 모두 불쾌한 빛을 띠었지만, 선생은 얼굴에 조금도 그런 눈치를 나타내지 않았다. -김성일-
녹사(錄事) 양성의(梁成義)란 사람이 본 고을의 현감이 되었는데, 선비들이 모두 그 사람됨을 천하게 여겼지만, 선생은 그를 백성의 주인이라 해서 예의를 다하였으며 오래갈수록 더욱 공경하였다. 그러나 양성의는 도리어 지방 수령이라는 지위를 빙자하여 으스대었다. 한번은 그가 어량(漁梁)에 와서 사환을 시켜 선생을 청했는데, 그 말이 매우 거만하였다. 선생이 병이라 사양하고 자제를 시켜 가 보게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괘씸히 여기고 분하게 여겼지만, 선생은 끝내 그 잘못을 말하지 않았다. -김성일-
감사 강사상(姜士尙)이 도산으로 선생을 찾아왔다가 떠나간 뒤에, 명일(明一) 등이 곧 들어가 뵈니, 그 자리에 고을원이 있었다. 술상을 차려 와서 술이 반쯤 되자 선생이 이르기를,
“내 오랫동안 손님 영접 하는 일은 그만두고자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면서, 시(詩) 한 수를 내어 보였는데,
깊은 산속에 쓸쓸히 살아가는 나 / 寒事幽居有底營
꽃 심고 대[竹] 길러 여윈 몸 보전하오 / 藏花護竹攝羸形
찾아온 손님께 은근히 한 말씀 드리오니 / 慇懃寄謝來尋客
한겨울 사람 접대 앞으론 끊을라오 / 欲向三冬斷送迎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 글은 내 뜻을 말한 시로서, 남들이 나를 너무 박정하다 할까 봐 남에게 차마 보이지 못한 것이었는데, 이제 내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박정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토로한 진정(眞情)이다.”
하였다. -김명일(金明一)-
선생이 일찍이 이르기를,
“사대부로서 서로 교제할 때 한 번 가면 한 번 오는 것은 예의로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징사(徵士 학문과 덕행이 높아 조정의 부름을 받은 선비) 같은 사람은 이 예의를 차릴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의 오여필(吳與弼) 호는 강재(康齋) 은 처사(處士 벼슬을 않고 민간에 있는 사람)로서 불리어 서울에 가서 살았는데, 사대부들이 찾아오면 반드시 찾아가서 답례를 했으므로, 하의려(賀醫閭) 이름은 흠(欽)이다. 는 이것을 매우 그르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禹性傳)-
손님에게 밥상을 차릴 때에는 반드시 집에 있고 없는 것에 맞춰서, 귀한 손님이라 해서 성찬을 차리지도 않고, 또 비천하고 어린 자라 해서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김성일-
손님이 오면 항상 술과 밥을 내어 오는데, 반드시 미리 집안사람에게 일러서 준비하게 하고, 한번도 손님 앞에서 말하지 않았다. -김성일-
문인이나 제자를 대접하기를 친구 대접하듯 하여, 비록 젊은 사람이라도 그를 가리켜 이름을 버리고 ‘너’라고 부르지 않았다. 맞이하고 보내며 주선할 때, 예절을 지켜 공경을 다하였고, 자리에 앉은 뒤에는 반드시 먼저 그 부형의 안부를 물었다. -김성일-
친구가 죽으면 아무리 멀어도 자제를 보내어 제문을 가지고 가서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김성일-
이덕홍이 묻기를,
“손님이 찾아오면 노소(老少)와 귀천(貴賤)을 가리지 말고 마땅히 다 공경해야 합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 다만 대접하는 데는 도리가 있다. 주자가 거만함에 대해 논한 말에 ‘거만함이 흉덕(凶德)이 되는 까닭은, 바로 거만한 마음을 먼저 가지고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다 거만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거만하게 대할 만한 사람이라서 거만하다면, 이것은 사람의 보편적인 정리(情理)상 그럴 수 있는 것이요, 또 사리상 당연한 것이다. 이제 여기에 어떤 사람이 그 친분이나 사귄 햇수가 친하여 사랑할 만하지 못하고, 그 지위와 덕이 두려워 공경할 만하지 못하며, 그 곤궁함이 불쌍히 여길 만하지 못하고, 그 악함이 천하게 여길 만하지 못하며, 그 말이 버리거나 취할 만한 것이 없고 그 행실이 시비할 만한 것이 없다면, 사람들은 그를 예사로 보아 길 가는 사람을 보듯 하고 말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대개 사람을 대접하는 도리는 각기 그 사람 자신에 달린 것이니, 어떻게 노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공경할 수 있겠는가. 다만 미리부터 업신여겨 거만한 마음을 가지는 것도 또한 옳지 않다. 황효공(黃孝恭)은 비록 비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대문 밖에 나가서 맞고 보냈는데, 그것은 또 지나친 짓이다.”
하였다. -이덕홍(李德弘)-
이덕홍이 묻기를,
“어떤 이가 말하기를, ‘집안 어른이 저를 시켜 밖에 나가 손님을 맞이하게 하면, 제가 나가서 손님에게 절하지 않고, 손님이 들어와 자리에 앉은 뒤에 절을 하는 것이 예(禮)이다.’ 하니 옳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어른을 대신해서 손님을 맞이하는데, 절을 하지 않은 것은 의(義)에 있어서 온당치 않은 일이다. 만일 어른이 직접 나가 맞이한다면, 우선 잠깐 피하여 절하지 않는 것은 옳다.”
하였다. -이덕홍-
이덕홍이 묻기를,
“공자의 말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친구로 삼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는 일절 사귀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보통 사람의 정(情)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기를 좋아하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는 벗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공자께서 이런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일절 벗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다. 만일 한결같이 착한 사람만 가려서 벗하고자 한다면 이 또한 편벽된 일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과 사귀다가 점점 그 속에 빠져들면 어찌합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선은 따르고 악은 고칠 것이니, 선과 악이 모두 다 내 스승이다. 만일 점차 악에 휩쓸려 빠져든다면, 학문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하였다. -이덕홍-
 언행록 3
 유편(類編)
음식과 의복 예절

선생은, 손님과 마주 앉아서 음식을 먹을 때에는 수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음식은 끼니마다 세 가지 반찬을 넘지 않았고, 여름에는 다만 건포 한 가지뿐이었다. 일찍이 도산에서 선생을 모시고 식사를 하였는데, 밥상에는 다만 가지잎과 무와 미역뿐이었다. -김성일-
손님이 왔을 때가 아니면, 제철이 아닌 반찬을 차리지 않았다. -이덕홍-
선생이 서울의 서성(西城) 안에 우거할 때, 당시의 좌의정 권공(權公) 이름은 철(轍) 이 찾아왔다. 선생이 식사를 대접했는데, 반찬이 없고 또 맛도 없어 먹을 수가 없었으나 선생은 마치 진미(珍味)나 먹는 듯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권공은 결국 젓가락을 대지도 못하고 물러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까지 입맛을 잘못 길러서 이렇게 되고 보니 매우 부끄럽다.”
하였다. -우성전-
선생은 술을 마셔도 취하는 데 이르지 않고, 약간 얼큰하면 그만두었다. 손님을 대접할 때도 주량에 따라 권하여, 친한 정도에 맞도록 할 뿐이었다. -김성일-
선생이 일찍이 이르기를,
“나는 참으로 박복한 사람이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체한 듯하여 속이 편하지 않고, 반드시 담박한 것을 먹어야 위장이 편하다.”
하였다. -김성일-
김취려(金就礪)가 복건(幅巾)심의(深衣)를 만들어 보내왔다. 선생이 이르기를,
“복건은 마치 승건(僧巾)과 같아서 제도가 틀렸다는 말이다. 쓰기에 마땅하지 않다.”
하고, 심의를 입고 정자관(程子冠)을 썼다. 말년에 재실에 있을 때는 이렇게 입다가, 손님이 오면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김성일-
경오년(1570, 선조3) 9월에 선생이 도산에서 계당(溪堂)으로 돌아가려 할 때, 정자관을 쓰고 심의 서울서 처음에 지어 왔다. 를 입고서 친히 사립문을 열고 이덕홍을 불러 이르기를,
“오늘은 옛사람의 의관을 시험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덕홍-

[주D-001]복건(幅巾) : 관(冠) 대신 쓰는 두건으로 주로 처사(處士)ㆍ은자(隱者)가 쓰는 것이다.
[주D-002]심의(深衣) : 저고리와 치마가 붙은 옷을 말한다.
언행록 3
 유편(類編)
산수를 즐김

무신년(1548, 명종3) 1월에 단양 군수(丹陽郡守)에 임명되었다. 선생이 외직을 청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거니와, 특히 이 고을 군수를 원한 것은 이 고을이 산수(山水)가 좋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의 구담(龜潭)ㆍ도담(島潭) 같은 곳은 경치가 가장 좋았으나, 그때는 마침 잇따른 흉년을 만나 기근을 구제하느라고 자주 그곳에 오가지 못했었다. 그러나 공무의 틈을 타서 간혹 가서 놀이하며 흥에 따라 시(詩)도 읊었다. -이안도(李安道)-
군(郡) 곧 풍기군. 그때 선생이 군수로 있었다. 에 소백산(小白山)이 있는데, 곧 남쪽의 명산(名山)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말을 타고 혼자 가서 그 봉우리에 오르기도 하다가 여러 날 만에야 돌아오곤 하였는데, 표연(飄然)히 남악(南嶽)의 흥(興)이 있었다. -김성일-
선생이 두 고을 단양(丹陽)ㆍ풍기(豊基) 에 재임할 때에는 맑은 바람이 씻어 간 듯이 조금도 사사로운 일에 개의치 않았다. 공무의 여가에는 오직 서사(書史)로써 스스로 즐겼고, 간혹 초연히 혼자 나가서 수석(水石) 사이를 거닐기도 하였는데, 들의 농부들이 바라보고 마치 신선같이 생각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나이 50이 되도록 아직 집이 없었다. 처음에는 하봉(霞峰)에 집을 지었다가 중간에 죽동(竹洞)으로 옮기고, 마침내는 퇴계에 아주 자리를 정했다. 집 서쪽 시냇가에 집을 지어 이름을 한서(寒栖)라 하고, 샘물을 끌어서 당(塘)을 만들어 이름을 광영(光影)이라 하였다. 매화와 버들을 심어 그 사이에 세 갈래 길을 내었다. 앞에는 탄금석(彈琴石)이 있고, 동쪽에는 고등암(古藤巖)이 있었는데, 시내와 산이 밝고 아름다워 완연히 하나의 별천지를 이루었다. 병진년(1556, 명종11)에 성일이 처음으로 이곳에서 전배(殿拜)하였는데, 좌우는 책으로 둘러싸이고, 향불을 피워 고요히 앉아 계신 모습이 마치 그렇게 일생을 마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선생이 관인(官人)인 줄도 몰랐다. -김성일-
경술년(1550, 명종5) 2월에 비로소 계상(溪上)에 집을 지었는데, 지금의 서쪽 집이 그것이다. 이보다 먼저 하명동(霞明洞) 자하봉(紫霞峯) 밑에 땅을 얻어 집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그 골이 낙천(洛川)에 가깝고, 낙천은 곧 관금(官禁)이 미치는 곳이어서 자손들이 살기에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에 죽동으로 옮겼으나, 죽동은 골이 좁을 뿐 아니라 또한 시냇물이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계상에 집을 지었으니, 곧 세 번 만에 자리를 잡은 셈이다. -이안도-
만년에 도산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책을 보관했다. 그 땅은 강가에 있었기 때문에 겨울에는 몹시 추워 지낼 수가 없었고, 봄ㆍ여름에는 언제나 그곳에 거처하였다. 간혹 꽃 피는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에는 혼자 쪽배를 타고 물굽이를 따라 오르내리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왔다. 경적을 마음속으로 음미하고 계산(溪山)에 흥을 붙여 퇴연(頹然)히 세상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정유일(鄭惟一)-
선생이 도산을 얻었으나 아직 정사(精舍)를 짓지 못했을 때에 늘 말하기를,
“산수(山水)가 맑고 기이하여 내가 구하는 바에 꼭 맞는다.”
하고, 자나 깨나 마음이 항상 그 가운데 있었다. -김부륜(金富倫)-
처음에 도산서당을 짓고는 종들을 시켜 지키려고 하다가, 그들의 깨끗하지 못함을 꺼려서 산승(山僧)을 시켜, 따로 농운정사(隴雲精舍)에 살면서 지키게 하였다. 그것은 마치 주자가 도사를 시켜 운곡(雲谷)을 지키게 한 뜻과 같은 것이다. -김성일-
신유년(1561, 명종16) 3월 그믐날에 선생이 시내 남쪽 서재를 나갈 제, 이복홍(李福弘)ㆍ덕홍 등을 데리고 도산으로 갔다. 무덤 위의 소나무 밑에서 쉬었는데, 그때 산꽃이 만발하고 안개 감도는 숲은 밝고 고왔다. 선생은,
소용돌이에서 목욕하는 백로는 무슨 심성인고 / 盤渦鷺浴底心性
외로운 나무에 핀 꽃이 저절로 환하구나 / 獨樹花發自分明
라는 두자미(杜子美)의 시 한 구절을 읊었다. 이덕홍이 묻기를,
“그 뜻은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자기를 위하는 군자는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 이 시의 의미에 들어맞는다. 학자는 모름지기 이를 체험하여 그 의(義)를 바르게 하고 그 이(利)를 꾀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 도를 밝히고 그 공을 헤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억지로 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하였다. 뒤에 이덕홍이 묻기를, “‘소용돌이에서 목욕하는 백로는 무슨 심성인고, 외로운 나무에 핀 꽃이 저절로 환하구나.’에서의 가르침을 받고 군자의 자기를 위하는 공부에 대하여 조금 알았습니다.”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자미(子美)의 뜻은 자기를 위하는 학문을 말한 것이 아닌데, 내가 그날 특히 그것을 빌려서 이 뜻을 밝혔을 뿐이다.” 하였다. 완락재(玩樂齋) 그때 처음 지었으나 아직 완성이 되지 못했다. 절우사(節友社) 매화나무 밑에 앉아 있을 때에, 어떤 중이 남명의 시를 드렸다. 선생은 몇 번 읊어 보고는,
“이 노인의 시는 대개 기발하고 준엄한데, 이것은 그렇지 않다.”
하면서, 그 운(韻)에 맞춰 한 수 지어 주고, 또 스스로 절구 한 수를 짓기를,
가파른 벼랑 꽃이 피어 봄날이 적적하고 / 花發巖崖春寂寂
시내 숲에 새가 울어 물소리 잔잔해라 / 鳥鳴澗樹水潺潺
우연히 산 뒤에서 제자들을 대동하고 / 偶從山後擕童冠
한가히 산 앞에서 고반(考槃)을 보네 / 閒到山前看考槃
하였다.
이덕홍(李德弘)이 묻기를,
“시(詩)에 기수(沂水)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일상생활의 평범함을 즐기되 위아래가 같이 유행(流行)하여 제각기 즐거움을 얻는 미묘한 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비록 그런 뜻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자네가 추측하여 말한 것이 너무 지나치게 고원(高遠)하네.”
하였다. -이덕홍-
신유년(1561, 명종16) 4월 15일에 선생이 그 형의 아들 교(㝯)와 손자 안도와 덕홍과 더불어 달밤에 탁영담(濯纓潭)에 배를 띄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반타석(盤陀石)에 배를 대고 역탄(櫟灘)에서 닻줄을 풀었다. 술이 세 순배가 돌자 선생이 옷깃을 바루고 단정히 앉아 〈전적벽부(前赤壁賦)〉를 읊고 이르기를,
소공(蘇公)이 비록 병통(病痛)은 있지만, 그 마음의 욕심이 적었던 것은, ‘진실로 나의 가진 바가 아니면 비록 털끝만 한 것도 취하지 않는다.’라고 한 이하의 구절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그는 일찍이 귀양 갈 때에 관(棺)을 싣고 갔으니, 그가 속세에 구속받지 않는 모습이 이러했다.”
하고는, 청(淸)ㆍ풍(風)ㆍ명(明)ㆍ월(月)로 분운(分韻)하여 명 자를 운으로 얻어 시를 짓기를,
푸른 물 달빛 아래 밤기운 맑은데 / 水月蒼蒼夜氣淸
바람이 쪽배 밀어 빈 강 거슬러 오르네 / 風吹一葉泝空明
박항아리 백주가 은잔에 오가고 / 匏樽白酒飜銀酌
삿대는 물결 저어 옥횡성(玉橫星)을 끌어올리네 / 桂棹流光掣玉橫
채석강(采石江)의 미친 짓은 뜻에 맞지 않으나 / 采石顚狂非得意
낙성루(落星樓)의 시 짓던 일이 가장 마음에 걸려라 / 落星占弄最關情
묻노니 황천길 백 세 뒤에 / 不知百世通泉後
뉘 다시 바른 소리 이을꼬 / 更有何人續正聲
하였다. 그의 산수에 대한 이해가 이와 같았다. -이덕홍-
임술년(1562, 명종17) 가을에 선생이 도산에 있을 때, 한번은 달밤에 사성(士誠)을 불러 천연대(天淵臺)에 올라 〈무이구곡(武夷九曲)〉 시를 외우게 하고는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는데,
한밤중 신선이 되어 노닐다가 꿈에서 깨어나 / 半夜游仙夢自回
그윽한 친구 불러 강대에 올랐도다 / 起呼幽伴上江臺
맑은 바람 뜻이 있어 소매품에 맞아 주고 / 淸風有意迎懷袖
밝은 달 정이 많아 술잔을 보내 주네 / 明月多情送酒杯
하고는, 곧 술 몇 잔을 나누었다. 때는 9월 17일이었다. -정사성(鄭士誠)-
만일 산수가 아름답거나 폭포가 쏟아지는 곳이 있으면, 간혹 몸을 빼어 홀로 가서 즐기며 시를 읊다가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덕홍-
경오년(1570, 선조3) 9월에 이덕홍이 한두 명의 동자를 데리고 이동(伊洞)에 먼저 가서 노닐다가 돌아오려 하는데, 하인이 와서 선생이 작은 수레를 타고 온다고 알렸다. 덕홍이 반가워 달려가니, 선생은 혼자 단풍나무 밑 시냇가 돌 옆에 앉아 있다가 웃으면서 맞이하기를,
“자네 벌써 돌아가려는가?”
하였다. 이튿날 시 두 수를 내게 주었는데,
말굽소리에 때때로 들국화 향기로운데 / 野菊時聞撲馬香
석양 무렵 그윽한 천석을 찾았네 / 幽尋泉石傍斜陽
그대 불러 함께 가 노닐렸더니 / 欲招君去同遊賞
그대는 먼저 선경(仙境)으로 갔다는구려 / 人道君先入杳茫
왕모성 앞 소유천에 / 王母城前小有天
이내 낀 푸른 시내에 붉은 단풍 어리었네 / 丹楓碧澗映寒煙
구태여 요지(瑤池) 물은 퍼내어 무엇하리 / 何當鑿出瑤池水
가득 심은 연꽃이 도리어 가엾네 / 滿種蓮花更可憐
하였다. -이덕홍-
한번은 선생을 모시고 산당(山堂)에 앉았는데, 길 앞에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산당을 지키는 중이 말하기를,
“그 사람 괴이하다. 진사(進士) 앞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 않다니.”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말 탄 사람이 마치 그림 속의 사람 같아 좋은 경치를 더해 주는데 허물할 것이 무엇인가?”
하였다. -이덕홍-

[주D-001]남악(南嶽)의 흥(興) : 남악은 중국 오악(五嶽)의 하나인 형산(衡山)을 말하는데,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남악에 올라 속세를 떠날 뜻을 읊은 일이 있다.
[주D-002]소공(蘇公)이 …… 있지만 : 소동파(蘇東坡)는 정이천(程伊川)과 사이가 좋지 못하고 학풍(學風)이 다르므로, 정주(程朱)를 숭배하는 퇴계는 그를 병통이 있다고 본 것이다.
[주D-003]무이구곡(武夷九曲) 시 : 주희(朱熹)가 무이산(武夷山)에 살았는데, 무이산에 흐르는 시내에 아홉 굽이가 있었으므로 주자가 〈무이구곡(武夷九曲)〉 시를 지었다.
언행록 3
 유편(類編)
출처(出處)

무자년(1528, 중종23) 봄에 사마(司馬) 복시(覆試)를 치르고는 출방(出榜)을 기다리지도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한강을 건너기 전에 합격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나, 남쪽을 향해 가면서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길을 떠났는 데다 혹 급히 돌아가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방을 기다리지 않은 것이다. -김성일-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용기 있게 결단해서, 명예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일면이 여기에서도 드러났다. 본주(本註)이다.
일찍이 이르기를,
“젊어서부터 병이 많아, 사마시에 합격한 뒤부터는 특히 벼슬에 나아가려는 뜻이 없고, 오직 부모를 받들고 몸을 보살필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중형(仲兄)의 간절한 권고 때문에, 다시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과거를 볼 계획을 세우고 여러 달을 힘써 보았으나, 걸리는 일이 많았고 시끄럽고 분주한 속에 지내자니 정신이 어지러워서, 밤중에 생각해 보면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과거에 합격되었으므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과거를 꾀했을 것이나, 견뎌내지 못했을 것임에 분명하였다.”
하였다. -김성일-
을사년(1545, 명종1)의 사화에 선생은 이미 죄인 명부에 들어 있었다. 이원록(李元祿) 이기(李芑)의 조카요, 이행(李荇)의 아들 이 구원해 내고자 극력 힘썼으므로, 이기가 도리어 죄를 청하면서 풀어 주었다. 선생은 그 행실이 단정하고 깨끗하여 아무 흠이 없었기 때문에, 소인들이 아무리 죄를 얽어 보려 하여도 할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하늘이 이분을 낸 것은 필시 우연이 아닐 것인데, 어떻게 중상하는 적(賊)들이 해칠 수 있었겠는가. -김성일- 정유일(鄭惟一)의 기록에 의하면, 을사사화에 선생이 이담(李湛) 등 네 사람과 함께 파직되었다. 세상 여론이 선생을 파직함은 옳지 못하다고 떠들었고 또한 이기에게 구원을 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기가 죄를 청하면서 임금께 아뢰기를, “이황은 죄가 없는데 신이 잘못 들었나이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복직을 명령하였다. 이로부터 선생은 더욱 벼슬에 뜻이 적어, 힘써 지방의 작은 벼슬을 구해서 단양 군수로 갔다가, 풍기로 옮겨 한 해가 지나서는 그것도 버리고 돌아왔다.
정미년(1547, 명종2) 가을에 선생은 병으로 물러 나와 고향에 있다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다.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다가 배가 양근(楊根)에 이르러, 비로소 양재(良才)의 벽서(壁書)의 변이 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성에 들어가기 전에 당리(堂吏)가 조보(朝報)를 가져와 보여 주었는데, 큰 화가 이미 일어나서 당시의 이름 난 사람들이 혹은 죽고 혹은 귀양 간다고 하였다. 선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힘써 맡은 일을 다 하면서 외직(外職)을 청하려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얼마 안 되어 또 봉성군(鳳城君)의 옥사가 일어났다. 선생은 그것을 구하지 못할 줄을 알고 얼마 후에 병을 핑계하고 곧 단양 군수로 나와 버렸다. -김성일- 광해군(光海君) 신해년(1611, 광해군3) 4월에, 정인홍(鄭仁弘)이 선생을 헐뜯으며 정미년(1547)에 봉성군을 죄주기를 청하는 논의에 동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등 여러 사람들이 정부에 있으면서 임금에게 차자를 올려 변명하기를, “신들이 듣건대 고(故) 원로 이황은, 정미년(1547)에 홍문관 응교로 임명되던 날, 삼사(三司)에서 갑자기 봉성을 죄주자는 의논을 꺼냈는데, 이황은 지방에서 처음으로 돌아왔으므로 논의의 경위를 알지 못했습니다. 동참한 뒤, 그 이튿날 임금의 자리 앞에서 대신 이하가 모두 자리를 떠나면서 봉성의 죄를 청할 때, 비록 곧은 신하 안명세(安名世) 같은 사람도 또한 감히 이의를 말하지 못했으나, 이황은 홀로 자리를 뜨지 않았고, 물러가서는 본직을 그만두게 된 것이옵니다. 아홉 번 죽고 길머리에서 쇠를 끊는 용기를 내어, 만마(萬馬)가 달리는 가운데서 능히 발길을 멈추는 힘을 가졌사옵니다. 이런 난처한 일에 처신하기란, 논의에 참여하지 않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온데, 이황은 그것을 능히 한 것이옵니다. 그러하온데 이제 정인홍은 이것으로써 흠을 잡으려고 하니 너무 심하지 않사옵니까.” 운운(云云)한 것이 병암(甁庵) 남책(南)의 잡부(雜裒)에 나온다.
임자년(1552, 명종7) 가을에 선생이 당상관으로 승진되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선생은 선비들의 버릇이 더욱 교활하여 교화하기 어려움을 보고 얼마 안 되어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을묘년(1555) 봄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허락도 받지 않고 대궐문을 나왔다. 항상 왕래하던 조정의 친구들도 아무도 몰랐다. -정유일-
무오년(1558)에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나아갔다.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한창이어서, 조정이 몹시 흐리고 어지러운 때였다. 어떤 사관(史官)은 선생의 출처(出處)를 나무랐으나, 그는 선생의 심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명종(明宗)의 부르심이 여러 번 내렸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은 것은, 나아갈 때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부르심은 더욱 엄해져서,
“나를 더불어 일하기에 부족한 사람으로 여긴다.”
운운하는 교서까지 나오게 되었다. 선생이 이 말씀을 듣고 송구스러워 억지로 대궐에 나아갔지만 그 본심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대사성에다 공조 참판의 벼슬을 내렸지만 직무를 수행할 생각을 한 적이 없었고, 도합 다섯 달을 서울에 있었으나 대부분 산질(散秩)에 있었다. -김성일-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겨우 내 앓아누워 있었으니, 파출을 안 당한 것만으로 족한데, 도리어 이렇게 분에 넘는 일이 생겼으니, 그 난처함을 입으로 다 말할 수가 없다. 다시 고쳐 바로잡아 주시기를 빌었으나, 모든 여론이 사은하기도 전에 사면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하여 할 수 없이 병을 참고 억지로 나아가 사은하였다. 또다시 사퇴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시니, 형세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고향 여러분이 염려하는 것도 마땅한 일이나, 나도 또한 번번이 사퇴하는 것이 옳지 못한 것을 알지만, 육조의 아경(亞卿 참판(參判))은 그 일이 가벼운 것이 아니니, 어떻게 나처럼 병을 앓는 사람이 있을 자리이겠느냐. 2월 중으로는 기필코 청하여 물러나고자 한다.”
하였다. -집안 편지-
기미년(1559, 명종14) 봄에 분황(焚黃)을 이유로 휴가를 얻어 돌아왔다. 다시 소명을 받았으나 끝내 나가지 않자, 체차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이로부터 갑자년(1564)까지 무려 6년 동안 동지의 직명을 띠고 있었다. 선생은 몇 번이나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선생에게 말하기를,
“왜 자꾸 청해서 기어코 허락을 얻고 말지 않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양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생각 밖의 칭찬하는 말씀을 들으니 감히 더 사양할 수 없다.”
하였다. 을축년(1565) 봄에 비로소 청한 대로 되니, 선생은 기뻐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이제 비로소 산인(山人)이 되었다.”
하였다. -정유일-
선생이 시골에 있으면서 조정의 벼슬을 가지고 있는 것을 편안치 않게 여겨, 글을 올려 여러 해 동안 사퇴해 왔었다. 그러다가 을축년(1565)에 명종(明宗)이 비로소 허락하시니, 선생은 임금의 은혜를 못내 기껍게 여기어 기쁜 빛을 얼굴에 나타내며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 이제야 비로소 하늘이 놓아준 몸이 되었다.”
하고, 시 8장을 지어 그 기쁨을 나타내었다. -김성일-
을축년(1565) 12월에 임금이 중추부사에 제수하였는데, 유지(有旨)에 이르기를,
“내 불민한 탓으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부족해서, 이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매번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하니, 내 마음이 매우 편하지 못하다. 경은 나의 이 지극한 마음을 알아주어 곧 올라오라.”
하였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도에 뜻을 두었고 늙어서는 더욱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살이를 즐기지 않아 예안(禮安)에 물러가 살았다. 당시 사람들은 선생을 마치 태산이나 북두성(北斗星)처럼 우러러보았다. 이때에 윤원형은 이미 죽었으므로 사람들은 좋은 정치와 교화를 바라던 참이었는데, 마침 선생을 부르는 소명이 내리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뛰며 기뻐하였다. -이이(李珥)-
병인년(1566, 명종21) 4월에 선생이 병으로 사퇴하고 돌아간 뒤 다시 오지 않았다. 임금이 그리워함이 매우 중하였고, 비록 소 먹이는 아이나 심부름꾼이라도 모두 그 이름을 사모하여 그 얼굴을 한번 보고자 했다. 그러나 선생이 끝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식자(識者)들은 모두 걱정하고 있었다. -이이-
나라에서 벼슬을 내리는 명령이 있을 때마다 선생은 으레 민망한 빛으로 배우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내 평생 헛된 이름에 얽매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내가 누구를 속이겠나, 하늘을 속이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정묘년(1567)에 선생이 여러 번 소명을 받아 부득이 길을 나섰다. 6월 13일에 용수사(龍壽寺)에서 묵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치사(致仕)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는 일인데 우리 동방에서는 으레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것은 신하로서 매우 난처한 일이다.”
하였다. 김부륜이 말하기를,
“임금이 일을 맡겨 오래 부리다가 갑자기 사퇴함을 들어준다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하지 못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 송(宋)나라 조정에서는 억지로 벼슬을 그만두게 했으니, 이도 또한 신하를 후하게 대접하는 길이 아닌가 합니다.”
하였더니, 선생은 다시 말하기를,
“박한 듯하나 반드시 치사하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대는 생각해 보라.”
하였다. -김부륜-
정묘년(1567, 명종22) 7월에 이 선생이 예조 판서가 되었다. 선생이 산야(山野)에서 도를 지키고 있을 때, 사람들의 우러러 바람이 날로 무거웠다. 명종(明宗)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말년에 이르러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벼슬로 부르니 비로소 조정에 나왔다. 미처 임명도 받기 전에 명종이 승하하였으므로 선생이 조정에 머물면서 명종의 행장(行狀)을 찬술하였다. 임금이 종백(宗伯 예조 판서)에 임명하자, 선생은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상(上)이 이르기를,
“내 그대의 어진 덕을 들은 지 오래이다. 이처럼 새로 정사를 하는 때에 그대가 만일 벼슬하지 않으면 어찌 내 마음에 편하겠는가.”
하였다. 이이(李珥)가 선생을 뵙고 말하기를,
“어린 임금이 처음으로 대위(大位)에 올라 나랏일에 어려움이 많으니, 선생은 물러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도리로서는 물러가서 안 되겠지만, 내 몸으로 볼 때는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몸이 원래 병이 많은 데다가 재주도 또한 감당할 수 없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만일 경연 석상에 계시기만 해도 매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벼슬이란 남을 위하는 것이지 어찌 자기를 위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벼슬하는 사람은 원래 남을 위하는 것이지만, 만일 남에게는 이롭게 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우환만 돌아온다면,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선생이 조정에 있으면서 설사 아무것도 하시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상께서 마음으로 의지하여 든든히 생각하고 사람들의 정이 즐거이 따른다면, 이 또한 이익이 남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으나, 선생은 벼슬하려 하지 않았다. -이이-
금상(今上) 곧 선조(宣祖) 초년에 선생은 예조 판서를 시키는 것을 사양하고는, 정고(呈告)하지도 않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것은, 기고봉(奇高峰 기대승(奇大升)) 등 여러 어진 사람들이 조정에 많이 모였는데 연석(筵席)에서, 선생의 도덕과 행의(行義)는 정자와 주자에 못지않으니 급히 불러 써서 도를 행하고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 극력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이 말을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는 문인이 와서 고하기를,
“고봉과 여러 사람의 생각은 모두 선생님이 정승으로 들어오셔야 우리의 도가 행해질 수 있다 하여, 임금에게 직접 면대를 청하고 글을 올려야겠다고 합니다.”
하였다. 선생이 놀라서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훌쩍 남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김성일-
무진년(1568, 선조1) 봄에 유응현(柳應見)이 이덕홍에게 말하기를,
“선생의 뜻은 원래 우리들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시사(時事)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이 없으니, 외부 사람들은 모두 물에 빠진 것을 보고도 건져 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새 임금이 새로 정치를 하는 때라, 무슨 일을 함직한 징조가 있음에 있어서랴. 자네는 나를 위해 이 뜻을 여쭈어 볼 수 없겠는가?”
하였다. 이덕홍이 이 말을 하였더니, 선생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나는 본래 일도 모르고 병폐한 사람일 뿐이니, 무슨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바로 대인(大人)의 할 일이지, 어찌 나로서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가령 대인의 재주와 덕이 있더라도, 만일 때를 헤아리지 않고 움직이면 국가에는 아무 이익도 없이 자기 분수에 손실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는 혹 말은 쓰이지 않고, 그저 높은 자리에만 등용되는 사람이 있으니, 이는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전에 회재(晦齋) 선생이 열 가지 조목의 글을 임금께 올림으로써 특히 가선대부에 올랐지만, 그 글 가운데의 한 가지 일도 채용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선생의 본의이었겠는가. 이것이 오늘날의 밝은 거울로 삼을 만한 일이다. 내 본래 고루하고 산야에 숨어 사는 사람이라, 취할 만한 조그만 선(善)도 없고 기록할 만한 한마디 말도 없는데, 도리어 헛된 이름 때문에 알려져서 벼슬의 임명이 잦았으니, 부끄럽고 두려움을 견딜 수 없다. 하물며 다시 말을 해서 잘못을 거듭할 수 있겠는가. 옛날 개자추(介子推)는 그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말이란 것은 몸의 문채입니다. 몸이 장차 숨으려는데 어찌 문채를 들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곧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깊은 맛이 있다.”
하였다. -이덕홍-
무진년(1568, 선조2) 7월 25일 사정전(思政殿)에서 조강(朝講)이 있었다. 이황(李滉)이 처음으로 경연(經筵)에 들어와 임금에게 아뢰기를,
“옛날부터 제 분수에 넘는 벼슬을 염치를 무릅쓰고 받은 사람도 혹 없지는 않았사옵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으면서 점점 벼슬이 올라가는 것은 사리에 무방하지만, 소신은 늙고 병들어 쓸 데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아 물러가려 하옵니다. 한 번 올려주는 관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물러가면, 그로 인하여 또 더 벼슬이 오르게 되었사옵니다. 선조(先祖) 때부터 힘써 사양하고 물러났는데, 오늘 또 이렇게 올려 주셨습니다. 옛날부터 은사(隱士)로서 헛된 이름을 가진 사람을 한때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잘못 쓴 일이 있기는 하나, 소신은 벼슬길에 나온 지 이미 10여 년이고, 벼슬은 3품에 이르렀습니다. 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신의 둔한 자질을 모르겠습니까. 신은 이미 자기를 알고 스스로 물러가던 것이며, 이제 갑자기 어진 사람으로 변해질 리도 만무합니다. 성주(聖主)께서 신의 청원을 들어 주시어 어리석은 분수에 맞추어 그 뜻을 행할 수 있게 하시고, 자급을 한 단계 낮추어 주시면, 이제 물러가려 하옵니다.”
하였다. 우상(右相) 홍섬(洪暹)이 아뢰기를,
“이황의 말은 한갓 겸양만이 아니오라, 실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다만 물러가는 것은 매우 사리에 타당하지 않으니, 성상의 유지에 이르신 바 ‘지극한 정성으로 서로 대하면 참소와 이간이 어디서 들어오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이 참으로 지당합니다.”
하였다. 이황은 다시 아뢰기를,
“과연 인재를 얻어 지성으로 대하시면 되겠지만, 소신과 같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옵니다. 헛된 이름이 잘못 전해져서, 어진 이를 좋아하시고 착한 일을 즐기시는 성상의 정성만 공허한 데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못내 황공스럽습니다. 이와 같은 성의를 더 적합한 사람에게 옮겨 쓰시면 종사(宗社)의 복이 어찌 이보다 더 크겠습니까.”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무진년(1568, 선조1) 8월에 판중추부사로서 경연(經筵)의 직명을 겸하였다. 고사(故事)에 지경연(知經筵)은 조강에만 참석하고 주강과 석강에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조정의 여론이, 경연에는 선생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여, 모두 참석하게 하였다. 선생은, 임금으로서 인(仁)의 본체를 모르면 자신의 몸 이외가 다 초(楚)나 월(越)처럼 먼먼 남남이라고 하여 김성일이 이에 대하여 또 기록하기를, “임금으로서 인의 체단(體段)을 모르기 때문에 천지 만물이 나와 아무 상관없게 되어 자신의 몸 이외가 모두 초나 월처럼 먼먼 남남이 된다.” 하였다. 〈서명(西銘)〉을 진강(進講)할 것을 청하고 육조소(六條疏)를 올리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김성일-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군액(軍額)이 많이 빠져나간 것을 걱정하여 장정들을 색출하여 군적(軍籍)을 고치려고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금년은 홍수와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어 죽게 되었사오니, 마땅히 조금 늦추었다가 풍년들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까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리면서 어찌 경의 말을 듣지 않겠는가.”
하고는, 곧 멈추었다. 당시에 대신 이준경(李浚慶)과 권철(權轍) 등이 그 의논을 힘껏 주장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선생의 아룀으로 중지되게 되니, 모두들 그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민기문(閔起文)이 그들의 뜻을 받아서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나랏일을 이미 대신들과 의논해 결정하여 놓았는데, 곧바로 그것을 한 사람의 말로 인해서 고치는 것은, 길 가에 집 짓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뒤에 권철이 또 아뢰기를,
“그 당시 만일 한 달만 중지하지 않으셨다면 그 일은 이미 시작되었을 것인데, 남의 말에 흔들려 못하게 되었사오니,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하였다. 문소전에 대한 의논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참에 태조의 신위(神位)가 동쪽을 향하도록 바로잡고 소(昭)와 목(穆)이 남북으로 마주 보도록 차례를 정하자고 하여, 도형을 그리고 설명을 붙여 올렸다. 임금이 특별히 소대(召對)를 명하였고, 이에 그것을 논의하게 하였으나 대신과 예관들이 불가하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김성일-
무진년(1568, 선조1) 겨울에 선생은 서울에 있었으나 돌아갈 뜻은 이미 정하였다. 성전이 여쭙기를,
“사군자(士君子)가 세상에 나서 어찌 다만 물러가는 한 가지 일만 지키고 있겠사옵니까. 오직 그때가 어떠함을 보아서 해야 할 것인데, 지금 주상께서는 잘 다스리고자 생각하고 있으니 떠나가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그대도 그런 말을 하는가? 나 같은 사람이 여기에 있어서 무엇한단 말인가. 서로 안다는 그대까지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 거취에 대해 확고하여 구차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우성전-
선생은 공명과 벼슬에 생각을 끊었었지만, 김안로(金安老)가 물러 나자,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중종(中宗) 말년에 말미를 얻어 하직하고 돌아가니, 그때부터 아주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명이 자주 내리자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장(狀)을 올리기도 하고, 소를 올리기도 하여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명분이 다하고 형세에 몰려 할 수 없이 조정에 나아갔다. -우성전-
선생이 무진년(1568)에 나가 벼슬한 것은, 전혀 그 뜻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때는 노련한 무리들이, 일에는 아무 마음이 없이 그저 세월만 보내고서 이록(利祿)만 탐내면서 꽉 차 있었다. 선생의 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 저들의 꺼리는 바라, 혹 의견을 아뢰어도 제지를 받아 행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지목을 해서 조그마한 것도 저들과 서로 충돌이 되어 한 가지도 시행할 수 없었으니, 일은 하지 않고 작록(爵祿)만 먹는 것이 어찌 선생의 마음이었겠는가. 선생이 남에게 준 편지에 말하기를,
“이곳에 있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일이 날로 삼실처럼 어지러워지니, 어떻게 돌아갈 계획을 급히 서두르지 않겠는가.”
한 것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우성전-
무진년(1568, 선조1) 겨울에 고봉(高峰)과 함께 선생을 모시고 있었다. 고봉이 성전에게 경계해 말하기를,
“학문을 하거든 반드시 성현이 되기를 기약하고, 벼슬을 하거든 반드시 직책을 다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고, 다시 이르기를,
“무릇 사람은 일을 피할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선생이 이르기를,
“이 말은 매우 좋은 말이니 마땅히 제각기 힘써야 할 것이다. 다만 ‘일을 피한다.’라는 말은 단정하여 할 말이 아니다. 내가 요사이 벼슬을 받으면 반드시 사양하고, 일을 만나면 반드시 움츠러드는 것이, 꼭 일을 피하려는 생각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재야에 있는 사람이 조정의 일을 알지 못하면서, 일을 피한다는 비방을 면하기 위해서 일마다 나서서 그것을 담당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그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뿐 아니라 반드시 함부로 일을 저지르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
기사년(1569, 선조2) 봄에 글을 올려 치사할 것을 청할 때 차자를 네 번이나 올리고도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붙들어 둘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편전에 불러서 하고 싶은 말을 묻고는 역마(驛馬)를 타고 가게 명하여 돌려보냈다. 사림들이 모두 선생이 떠나는 것을 아까워하여, 눈물을 흘려 슬퍼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우상(右相) 홍섬(洪暹)이,
넓은 물결 만 리 길에 날아가는 갈매기 / 白鷗波浩蕩
누가 저를 붙잡아 길들일 수 있을까 / 萬里誰能馴
라는 두보의 시구를 써 보냈더니, 선생은 같은 시의
아직도 종남산(終南山)을 그리워하여 / 尙憐終南山
머리 돌려 맑은 위수(渭水) 바라보네 / 回首淸渭濱
라는 시로 답하였다. 강가의 절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떠났다. -김성일-
기사년(1569, 선조2)에 벼슬에서 물러난 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서울 있을 때, 병은 갈수록 더하고 날씨는 몹시 추웠다. 그럴 때마다 전화은묵(田畫隱墨)의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다가 한질(寒疾)에 걸려 땀도 내지 못하고 닷새 만에 죽었다.’라는 말을 생각하고는, 항상 성 안에서 죽을까 걱정하여 하루도 편안히 잠자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서울 성문을 나서게 되자 ‘지금부터는 비록 길에서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는가.’ 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다.”
하였다. -이덕홍-
선생은 일찍이 이르기를,
“나의 진퇴(進退)가 그간 달랐던 것 같다. 전에는 임금의 명을 들으면 곧 달려갔는데 나중에는 부름이 있으면 반드시 사양하였고, 가더라도 구태여 머무르지 않았다. 이는 자리가 낮으면 책임이 가벼우므로 한번 나가 볼 수도 있지만, 벼슬이 높으면 책임이 크게 마련이어서이니, 어찌 가벼이 나아갈 수 있겠는가. 옛날 어떤 사람은 이름은 잊었다. 벼슬을 받으면 그때마다 가면서 ‘임금의 은혜가 지극히 중한데 어찌 물러가겠는가.’라고 하였다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만약 나아가고 물러나는 대의(大義)를 돌아보지 않고, 한갓 임금의 총애만을 중하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김을 예의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작록(爵祿)으로써 하는 것이니, 그래서 되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하루는 《논어》의 ‘위태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라는 장을 강의하다가, 소주(小註)에서 주자의 말에 ‘도가 있으면 반드시 완전히 태평해지기를 기다려서 나아갈 것이 아니요, 도가 없으면 또한 반드시 완전히 어지러워지기를 기다려서 숨을 것이 아니다. 도가 있다 함은 마치 하늘이 곧 새벽이 되려는 것과 같아서, 비록 아주 밝지는 않았어도 지금부터 밝음을 향해 가는 것이니,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도가 없다 함은 마치 하늘이 곧 밤이 되려는 것과 같아서, 비록 아주 어둡지는 않았어도 지금부터 어두움을 향해 가는 것이니, 모름지기 기미를 보아서 행동해야 한다.’라는 대목에 이르렀다. 성전이 묻기를,
“밝음으로 향하고 어두움을 향한다고 한 것은, 다만 임금이 어진지를 보아서 나아가고 물러난다는 뜻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생이 답하기를,
“그것은 오직 임금의 어짊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임금이 비록 어질더라도, 만일 그 나라를 맡은 대신들이 방해하고 어지럽히는 일이 있어서, 자신이 할 일을 행할 수 없다면, 벼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가 효종(孝宗)의 지우(知遇)를 받았을 때, 효종은 바탕이 아름다워 삼대 이후로 보기 드문 임금일 뿐 아니라, 매우 정성스러이 불렀으므로 섬길 만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뒤 재상들의 불평하는 말을 듣자 곧 버리고 물러갔던 것이다.”
하였다. 성전이 묻기를,
“그러면 임금은 비록 효종만 못하더라도 조정에 그러한 나쁜 사람만 없다면 벼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그렇다. 영종(寧宗)은 효종만 못하지만 그가 즉위한 처음에 주자가 그의 부름을 받고 나아갔다. 그러나 그 뒤 한탁주(韓侂冑)를 신임하게 되자 물러났던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 위의 한 절은 을축년(1565, 명종20)에 들은 것인데, 이 말에서 선생의 평소 출처(出處)에 대한 대강의 뜻을 볼 수 있다.
성전이 언젠가 선생에게 묻기를,
“만일 주자가 기묘년(1519, 중종14)에 임금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면 주자는 나아갔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반드시 나아갔으리라. 그러나 기묘년(1519) 사람들은 끝에 가서 너무 지나쳤다는 잘못을 했다. 정암(靜菴)이 그 잘못을 고치려 했으나 젊은 무리들이 따르지 않았다. 주자가 이런 때를 당하였다면, 틀림없이 하루도 조정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
묻기를,
“벼슬하는 사람이, 의리에 있어 마땅히 물러나야 할 경우에는 임금이 비록 만류하더라도 소장만 올리고는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떠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옛날 두범(杜範)이 이종(理宗) 때 참정(參政)이 되었는데, 자기 말을 써 주지 않는다고 해서 항의하는 소를 올리고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간절히 만류했으나 두범은 오히려 더욱 청하여 마지않자, 황제가 명령을 내려 성문을 닫아 두범이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두범이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또 범순인(范純仁)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도중에 휘종(徽宗)이 사신을 보내어 불렀다. 범순인은 늙고 병들었다 하여 사양하고 바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또 오징(吳澄)은 나라를 버리고 떠나가는 날, 청하지도 않고 바로 가 버리니,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좇았으나 미치지 못했다. 이를 본다면 옛날 사람도 또한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가 버리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이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치사(致仕)하는 예가 있게 된 것은 염치를 숭상하고 절의를 장려하기 위해서였다. 송(宋)나라 때에는, 비록 치사할 나이가 되지 않았어도 편안히 물러가기를 허락해서 그 뜻을 이루게 하였으니, 그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예절이 있었다 하겠다. 후세에 와서는 이 길이 막히어, 한번 명분의 굴레를 쓰게 되면 다시는 물러가는 허락을 받을 기회가 없으니, 너무나 한탄스럽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선비가 비록 가난 때문에 벼슬에 나간다 하더라도, 천거하는 사람이 바람직한 사람이 아니라면 벼슬하러 나가야 옳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나가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국필(李國弼)-

[주D-001]양재(良才)의 벽서(壁書)의 변 : 윤원형(尹元衡)ㆍ이기(李芑) 등이 대윤(大尹)의 잔당 등 반대파를 일소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정미년(1547, 명조2) 9월 18일 양재역에서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아래서 간신 이기가 농간을 부리니, 나라가 망할 때가 가까운 징조다.’라는 말이 적힌 벽서가 발견되어, 이를 구실로 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을 죽이고, 이언적(李彦迪)ㆍ노수신(盧守愼)ㆍ권벌(權橃) 등 10여 명을 귀양 보낸 뒤, 또다시 봉성군(鳳城君)을 죽였다. 이를 정미사화(丁未士禍)라 한다.
[주D-002]분황(焚黃) : 나라에서 죽은 이에게 증직(贈職)을 내리면, 그 자손들이 조정에서 내린 고명(誥命 임명장(任命狀))을 누른 종이에 베껴 써서 무덤에서 사르는 것을 말한다.
[주D-003]임금의 …… 일 : 맹자(孟子)의 말에, “대인(大人)은 그 임금의 그른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언행록 3
 유편(類編)
임금 섬김

선생은 공문(公門)에 들어갈 때, 반드시 양손을 모아잡고 종종걸음하여 한번도 느린 걸음을 하지 않았다. 일찍이 삼전(三殿 임금의 내외와 대비(大妃))에 숙배한 일이 있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공경하고 조심하여 피로나 권태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김성일-
군명(君命)이 집에 이르면 반드시 공경하고 두려워해서, 급히 관디(冠帶)를 갖추고 문에 나아가 공경스러이 받들어 정청(正廳)의 책상 위에 놓고, 뜰에 내려 네 번 절한 뒤에야 당에 올라 꿇어앉아 읽었으며 다시 뜰에 내려서 네 번 절했다. -김성일-
소명(召命)이 내릴 때마다 비록 병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였으나, 항상 앉아도 자리에 편안히 앉지 않았고, 밤낮으로 근심 걱정을 하면서 다음의 명령을 기다렸다. 만약 윤허를 얻지 못하면, 때로는 아픈 몸으로 길을 떠났으나, 길을 가면서도 사장(辭狀)을 올려 기어코 임금의 허락을 얻은 뒤에야 그만두었다. -김성일-
선생은 명종(明宗)의 상사를 만나 서울에 있는 동안에 여러 달을 소식(素食)을 하여 기운이 아주 쇠진해졌다. 제자와 자제들이 번갈아 들어가 뵙고 권도(權道)를 따르시기를 간하고 청했지만, 모두 듣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탱할 수가 없게 된 뒤에야 비로소 7, 8일 동안 권도를 행했다. 떠나서 집에 돌아온 뒤에는 다시 소식(素食)으로 졸곡(卒哭 삼우제(三虞祭) 후 사흘 만에 지내는 제사)까지 마쳤다. -우성전-
무진년(1568, 선조1)에 선생은 서울에 들어갔을 때, 곧 강릉(康陵)에 헌관(獻官)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우성전- 처음에 명종(明宗)의 인산(因山)이 가까워졌을 때, 선생은 병으로 고향에 돌아가 있었기 때문에, 곡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했었다. 그래 지금 와서 헌관으로 가기를 구한 것이다. -이안도-
국휼(임금의 상사) 3년 동안 삭망제(朔望祭)에 참여하였는데, 해가 지기 전에 부중(府中)에 들어가 그때 선생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있었다. 재계하였다. -우성전- 이 1절은, 그때에 행하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선생이 처음 행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기록하는 것이다. 본주(本註)이다.
명종이 승하하였을 때, 조정에서 선생에게 그 행장을 짓게 했다. 동료 관원들이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상고하여 자료를 뽑아냈다. 그 가운데에는 명종이 어진 이를 좋아한 일에 대해 적혀 있고, 명종이 선생을 부른 경위가 자세히 실려 있었다. 선생이 뒤적이다가 이것을 보자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나로서 감히 지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선왕을 기망(欺罔)한 것이 이미 지극해서 항상 두려운데, 더욱이 이를 찬술할 수는 없다.”
하고, 곧 일어나 나갔다. 대신들이 선생이 아니면 안 된다 하여 그 말을 삭제하고 짓도록 하였다. -우성전-
임금이 처음으로 왕위에 오르니 영명하고 슬기로워서, 사람들은 모두 그 거룩한 덕이 이루어질 것을 바랐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세상의 속된 말들이 날로 앞에서 시끄러웠다. 선생이 소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갔을 때, 임금은 비록 선생께 사랑과 공경의 예는 다하나, 공부에는 뜻이 없었다. 선생이 혹은 경연 석상에서 아뢰고 혹은 글을 올려 성인의 학문을 힘쓰시라고 권했지만, 임금은 그저 관대하게 대우할 뿐이었다. 선생은 본래 물러갈 것을 고집한 데다 또 자기의 말이 채용되지 않는 것을 보고 돌아갈 뜻을 더욱 굳게 했다. 이에 선현들이 그린 그림을 모으고 자기 뜻을 보태어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만들어 임금에게 올리고 말하기를,
“내가 나라의 은혜를 갚는 길은 이것뿐이다.”
하였다. -이이-
〈성학십도〉를 올리자, 임금이 그것을 병풍으로 만들라 하시고, 또 그것을 인출하여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번은 임금이 야대(夜對)에서 이 그림을 진강(進講)하라고 했으나, 경연에 모시고 있는 사람 중에 아무도 그 뜻을 밝히지 못하여 모두 모른다고 대답했기 때문에 끝내 강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은 모두 한스러워했다. -김성일-
비록 물러 나 한가히 지낸 지 오래였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늙을수록 더욱 두터웠다. 그래서 가끔 학자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다가 국사에 말이 미치면, 그때마다 탄식하고 통분해하였다. -정유일(鄭惟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나아가나 물러가나 한결같았다. 잘 된 정령(政令)을 들으면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나라의 조처가 못마땅하면 걱정이 얼굴에 나타났다. 항상 임금의 덕을 도와 기르고 선비들을 붙들어 보호하는 것으로써 제일의 의무로 삼았다. -김성일-
언행록 3
 유편(類編)
임금에게 아뢰어 경계함

경자년(1540, 중종35) 12월 8일에 정언(正言)으로서 조강(朝講)에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당나라의 현종(玄宗)은 사리에 밝고 통달한 군주로, 관작(官爵)으로써 공을 상주는 것이 그른 것임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사옵니다. 이전에 태평 세월로 지내던 때에 사치하여 절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고(府庫)가 모두 텅 비어서 어찌할 수가 없이 부득이 그런 일을 하였던 것이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부고가 비었으니 소비를 절약하여, 비록 어떤 사변을 만나더라도 큰 낭패에 이르지 않도록 하옵소서.”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정미년(1547, 명종2) 9월 아침에 응교(應敎)로 입시하여 《논어》를 강하였다. 글을 보다가 아뢰기를,
“성인이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 각각 그 사람의 재질을 따르는 것은, 그 타고난 재질에 가까운 것에 의해 성취시키려 해서입니다. 만일 공자로 하여금 지위를 얻어 도를 행하게 했다면, 그의 사람 쓰는 것도 또한 마땅히 그 재질을 따르고, 그 장기(長技)를 취해서 일을 맡겼을 것입니다. 임금은 군주와 스승의 책임을 겸하기 때문에, 인재를 기르는 데 있어서도 마땅히 이것을 법을 삼아야 할 것이며, 그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도 또한 이것으로써 법칙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이것에 대해 유념하소서.
전편(前篇)에 이르기를, ‘주(周)나라는 하(夏)나라와 은(殷)나라의 제도를 보고 절충하여 따랐으니 그 문화가 찬란하다. 나는 주나라의 제도를 따르겠다.’ 했고, 이편에서는 또한 ‘만일 예악을 쓴다면 나는 선배들의 것을 좇겠다.’라고 하였으니, 그 말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선배들은 예악에 있어서 형식과 자질이 마땅함을 얻었으니, 그것은 곧 하나라와 은나라의 것을 보고 절충하여 따랐기 때문에 좇고자 한 것입니다. 선배들을 좇는다는 것은 또한 주나라를 좇는다는 뜻입니다. 주나라 말년에 예가 무너지고 악(樂)도 또한 무너져, 형식이 지나쳐서 자질을 멸했기 때문에, 당시의 폐단을 구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옵니다.”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무진년(1568, 선조1) 9월 3일 석강(夕講)에서 아뢰기를,
“옛날부터 임금은 사사로운 뜻을 버리기에 힘썼사옵니다. 근래 내수사(內需寺) 이신(李紳)의 송사는 시원스럽게 공론을 좇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모의전(慕義殿)에 당번을 드는 종친이나 내관(內官)들에게 상주는 재물도 또한 사사로운 은혜에 관계되었던 것인데, 그것도 또한 간함에 따라 도로 거두어들였으니, 성상의 덕이 지극하옵니다. 만일 일이 모두 이렇게 된다면, 요순의 다스림도 얼마 멀지 않다고 백성들이 기뻐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다만 여기에 한 가지 아뢸 것이 있사옵니다. 석상궁(石尙宮)에 대해 논계(論啓)가 있었을 때, ‘대내(大內)에서 처리하겠다.’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이것은 궁궐 안의 잘잘못을 외정(外庭)에서 옳으니 그르니 할 수 없다는 뜻인 듯합니다. 그러나 전교하신 뜻은 온당치 못하여, 전날의 이신의 송사나 사사로운 은혜를 도로 거두어들인 일과는 아주 반대되는 것이옵니다. 옛날의 성군들은, 궁 안의 일을 외정에서 모두 참여하여 알게 하였고, 환관과 궁첩까지도 총재(冢宰)에게 영솔되지 않음이 없었사옵니다. 그러므로 제갈량은 후주(後主)에게 아뢰기를, ‘궁중과 부중(府中)은 모두 한몸이니, 착한 이를 올려주고, 악한 이를 벌주는 데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나쁜 짓을 하여 죄를 범하였거나, 충성되거나 착한 사람은,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맡겨 그 상과 벌을 의논하게 함으로써 폐하의 공평하고 밝은 다스림을 드러내야 하며, 편벽되거나 사사로이 안팎의 법을 다르게 해서는 옳지 않사옵니다.’ 한 것도 또한 이런 뜻이옵니다. 석상궁의 일은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미루어 앞일을 생각할 때에, 비록 국가에 관계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은 궁중의 일이라 핑계하여 외정에서 간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영합하여 점차 패망의 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겠사옵니까.”
하였다. 그러고는 써 가지고 온, 주자가 효종(孝宗)에게 올린 봉사를 소매 속에서 꺼내어 읽기를,
“옛날의 성군들은 조심조심 이 마음을 보존하여 지켜서, 비록 번화롭고 어지러운 속에 있거나 그윽하고 함부로 할 수 있는 곳에 있어도, 정성되고 한결같았으며, 사심을 이기고 이 마음을 회복하기를, 신명을 맞이한 듯, 못이나 골짜기에 다다른 듯해서, 잠깐 동안이라도 감히 게을리하지 아니하였고, 오직 그 은미한 중에 자신도 모르게 잘못을 저지르게 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師)나 보(保) 같은 벼슬을 두고 간관의 직책을 두었던 것입니다. 무릇 음식이나 술, 의복ㆍ기구ㆍ재물이나, 또 환관이나 궁첩의 일들이 어느 것 하나 재상의 관할에 매이지 아니한 것이 없었고, 그 좌우 전후에 있는 자들의 일동일정(一動一靜)으로 하여금 유사의 법에 제어되지 않는 것이 없게 하여, 지극히 그윽한 곳에서나 지극히 짧은 동안에 있어서도, 털끝만 한 사사로운 숨김이 없게 하였습니다. 대개 한 사람의 임금으로서 구중(九重)의 깊은 곳에 살면서도, 종묘나 조정 위에 서 있는 듯 두려워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선왕의 다스림이 안에서 바깥까지, 작은 것에서 드러난 것에 이르기까지 정(精)하고 순수하여 조그마한 가림도 없어서, 그 업적과 영향이 아직도 후세의 법이 되는 까닭이옵니다.” 신이 《주례(周禮)》를 보니 천관(天官)ㆍ총재(冢宰) 편이 바로 주공이 성왕(成王)을 돕고 인도해서 후세에 영향을 끼친 것이온데, 그 마음 쓴 것이 가장 깊고 간절하였습니다. 만일 삼대 때의 임금의 마음을 바루고 뜻을 정성스럽게 한 학문을 알고자 하신다면, 이것을 참고하오면 그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살피옵소서. 본주(本註)이다.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무진년(1568, 선조1) 9월 9일에 조강에 입시하여 《논어》를 강하고는 이어서 아뢰기를,
“주상의 학문이 날로 점점 고명(高明)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의 이치와 말의 뜻을 모르는 것이 없다 하여 스스로 만족하시지 마시옵소서. 그저 글자의 음이나 뜻이나 구두(句讀)만 알고, 스스로 터득하는 진실이 없으면 학문에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옵니다. 공자의 말에,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하였는데, 이것을 해석한 사람은 ‘그 마음에서 구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되어 소득이 없고, 그 일을 익히지 않기 때문에 위태로워 안정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배움은 마음에서 체험한 다음에야 자신이 터득하여 진실 되고 잡되지 않는 것이옵니다. 모든 경학을 다 알아도 그 마음으로 터득한 진실이 없으면 혼란되어 얻는 것이 없고, 마음에 생각해도 익히지 않으면 위태로워서 편하지 않는 것이옵니다. 연평(延平) 선생이 주자에게, ‘이 도리는 오로지 날로 행하는 데서 익혀지는 것이니, 일상의 동정ㆍ어묵(語默) 사이에 드러나는 것이 모두 하늘의 이치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보존하고 스스로를 살피어 그 일에 익은 뒤라야, 그 아는 바가 진실로 얻은 것이 되는 것이오니, 이것이 비로소 진실한 학문인 것이옵니다. 성현의 격언을 다만 아침이나 낮에만 볼 것이 아니라, 한밤중에 마음이 고요해진 때 하늘의 이치를 몸소 알고, 날마다 아침과 낮에 행동한 것을 자세히 살펴서 몸소 행해지는 것이 이미 익어지면 성상의 학문이 진실될 것이옵니다. 옛사람의 말에 ‘큰 의심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라고 했사오니, 생각지도 않고 행하지도 않으면 의심도 없고 깨달음도 없는 것이옵니다.”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10월 13일에 석강(夕講)에 입시하였다. 나아가 아뢰기를,
“근래에 있었던 일식은 큰 재변인데, 또 겨울에 우레가 생기는 변고가 있었사옵니다. 나라에서는 지난번에 사면령을 내리셨고, 또 현량과를 회복하게 하셨으니, 이것도 또한 재앙에 대한 삼가는 일로써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옵니다. 그러나 선왕들이 재앙을 만나면 두려워할 줄 알아서 몸가짐을 조심하고 덕을 닦던 일에 비한다면, 사면령이나 현량과의 회복 같은 것은 겉치레만을 갖추었을 뿐이요, 오직 안으로 덕을 닦는 것만이 그 근본이 되는 것이옵니다. 다만 겉치레만을 갖추고 안으로 덕을 닦는 데 소홀하다면, 그 하는 일이 모두 공허한 데로 돌아가서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을 것이옵니다. 항상 임금은 하늘을 공경하는 것과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늘을 섬기는 것의 이 세 가지 일에 능히 그 도리를 다해서 조금도 끊임이 없어야 하는 것이옵니다. 그래야만 재앙을 만나면 두려워할 줄 알아서 몸가짐을 조심하여 덕을 닦으며, 그 지극한 정성이 올라가 하늘을 감동시켜 재변(災變)을 복상(福祥)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시경》에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에 대해 말하기를, ‘공경하고 공경하라. 하늘은 오직 밝은 것이니, 그 명령은 쉬운 것이 아니니라. 높고 높게 위에 있다고 하지 말라. 오르고 내리시며 하는 일마다 날로 감시하며 여기에 있느니라.’ 한 것이옵니다. 대개 하늘의 이치는 널리 퍼져서 없는 곳이 없고, 없는 때도 없는 것이니, 날마다 하는 일이 하늘의 이치에 조금이라도 어긋나고 사람의 욕심으로 흘러들면, 그것은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또 《시경》에 ‘하늘의 노하는 것을 공경하여, 감히 장난치고 노닥거리지 말고, 하늘의 변화를 공경하여, 감히 날뛰지 말라. 하늘은 밝아 네가 나다니는 데까지 미치고, 하늘은 밝아 네가 노니는 데까지 미친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유왕(幽王)을 경계한 시로서, 유왕이 하늘을 공경할 줄 몰랐기 때문에 이 말로써 깨우친 것이옵니다. ‘하늘은 밝아 네가 노니는 데까지 미친다.’의 조(朝) 또한 밝음을 말한 것으로서, 임금이 노니는 곳에 하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내려다 봄은 밝고 밝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시경》에 또 말하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이에 보전하리라.’ 하였고, 또 ‘신(神)의 강림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싫어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도리가 이와 같은 것이옵니다. 맹자께서도 말하기를, ‘그 마음을 보존하고 그 성품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 된다.’ 하였으니,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오직 마음과 성품을 보존하고 기르는 데 있을 뿐입니다.
이 이치를 분명히 한 것은 곧 〈서명(西銘)〉이옵니다. 그 글에, 하늘과 땅은 곧 사람의 큰 부모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부모는 사람이 각각 가진 부모요, 하늘과 땅은 곧 천하 만물이 다 함께 가진 큰 부모이므로 사람은 다 내 동포요, 만물은 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니, 모두가 다 한몸이라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섬기는 도리에 의지하여 하늘을 섬기는 도리를 밝힌 것이 〈서명〉이옵니다. 그 글에 ‘이에 잘 보전함은 자식이 공경함이요.’ 한 것은, 곧 앞에 말한,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이에 보전하리라.’란 말을 인용하여, 자식이 어버이를 공경하는 일에 비유한 것이옵니다. ‘사람이 방 안의 어두운 구석에 혼자 있으면서도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욕됨이 없다.’라는 것은, 자식이 그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에 비유한 것이요,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르는 것이 게으르지 않은 것이다.’라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섬기기에 게으르지 아니한 데 비유한 것이옵니다. 이것은,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도리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말한 것이니 배우는 자로서 마땅히 깊이 생각하고 깨달아야 할 뿐만 아니라, 임금으로서 더욱 그것을 체득하여 절실하게 실천해야 할 것이옵니다. 임금이 하늘을 섬기는 도리는 실로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옵니다. 이제 《소학》이 끝나 가는데, 《대학》은 이미 강했사오니, 다음에는 마땅히 이 책을 강해야 할 것이옵니다. 오늘날 당장 해야 할 공부도 여기에 있고, 후일 성인의 지위에 들어갈 도리를 닦는 것도 또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기사년(1569, 선조2) 3월 4일에 임금은 야대청(夜對廳)에 납시어 선생을 불러 보시고 하유하기를,
“경이 아직 70이 못 되어 치사(致仕)할 때가 아닌데, 어째서 갑자기 귀향하고자 하는가?”
하고 달래어 이르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소신이 변변치 못하여 부득이 물러나야 할 일이 아주 많사오나, 그중 대략만 들어도 대여섯 가지나 됩니다. 신의 나이는 비록 70이 못 되었사오나, 이제 벌써 69세이옵니다. 황조(皇朝)의 설선(薛瑄)은 69세에 치사하였으니, 옛일을 보아도 치사할 수 있다는 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젊어서부터 앓은 고질병이 늙을수록 더욱 깊어지고, 그중에서도 심병(心病)이 더욱 심하여 조금만 조리를 잘못하면 죽음에 이르게 될 것 같사옵니다. 그러므로 죽기 전에 사직하고 물러가고자 하는 것이 둘째 이유이옵니다. 가선대부 이상이 되고부터는 조정에 나와서 한번도 경력을 밟아 올라간 일이 없사온데, 물러 나 있는 동안에 헛되이 숭록대부까지 올라서 하는 일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아무 공이 없이 녹만 먹고 있으니, 나라를 저버리고 은혜에 부끄러운 일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 이것이 하루도 염치없이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셋째 이유이옵니다. 노둔하고 실무에 어두워 남보다 훨씬 뒤떨어지는데도 헛된 이름을 얻어 세상을 속였고, 위로는 임금까지 속이게 되었사옵니다. 가끔 경연에서 ‘현실에 맞지 않고 실상이 없다.’라는 말로 소신을 가리켜 아뢰는 사람이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전교에 ‘하염없이 기다린다.’거나 ‘크게 의지한다.’라고 하신 뜻은 다만 소신 개인에 있어서 천만 번이나 황송하올 뿐 아니라, 나라 체면에 있어서도 더욱 큰 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욱 조정에 있을 수 없는 넷째 이유이옵니다. 재주도 없고 덕도 없는데 책임과 기대가 너무 무거워서 무슨 일을 조금 해 보려고 하면, 반드시 잘못 저질러 나랏일을 그르치게 되고, 만일 잘못을 저지르는 일을 피하고자 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반드시 위아래에 모두 죄를 짓게 됩니다. 이것이 물러가고자 하는 다섯째 이유이옵니다. 그리고 그 밖에 소소한 일은 다 아뢸 수 없사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이제 돌아가려고 하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없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소신은 평소에 학문의 역량도 없을 뿐 아니라 식견도 또한 밝지 못하온데, 무슨 아뢸 것이 있겠사옵니까. 다만 요즘의 전교를 보오니, 종묘에 부제(祔祭 후예(後裔)를 선조와 합제(合祭)함) 하실 때에 아직도 남은 슬픔을 잊지 못하시어 나례(儺禮 역귀(疫鬼)를 쫓는 예식)하는 노래와 산대(山臺) 같은 잡된 일을 모두 그만두게 명하셨으니, 효심으로 차마 하지 못하심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신은 진실로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사옵니다. 소신이 변변치 못하여 이러한 훌륭한 시대를 만나서 갑자기 물러가기를 청하게 되었으므로, 정으로는 서운하여 흐르는 눈물을 가눌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나 옛날 사람의 말에, ‘태평 세상을 걱정하고, 밝은 임금을 위태로이 여긴다.’라고 하였사옵니다. 대개 밝은 임금은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고, 태평한 세상에는 걱정할 만한 방비가 없게 마련입니다.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으면 혼자의 지혜로써 세상을 주무르며 여러 신하들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게 되고, 걱정할 만한 방비가 없으면 임금은 반드시 교만한 마음을 내게 되는 것이오니, 이것은 진실로 염려스러운 일이옵니다. 지금 세상도 태평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남쪽과 북쪽에는 분쟁의 조짐이 있고, 백성들은 살기에 쪼들리며 나라의 부고는 비어 있사오니, 나라가 나라 꼴이 못 되는 형편인데, 갑자기 어떤 사변이 있게 되면 토담처럼 무너지고 기왓장처럼 흩어질 형세가 없지 않사오니, 걱정을 하지 않을 만한 방비가 있다고 할 수 없사옵니다. 또 성상은 자질이 고명하시어 경연 자리에서 글 뜻에 정통하기 때문에, 신하들의 재주와 지혜가 성상의 뜻을 만족시킬 수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이치를 따질 때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신하들을 압도하고, 혼자의 지혜로써 세상을 주무르시려 하는 조짐이 없지 않사오니, 그것이 식자들이 미리 염려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소신이 전날에 그려 올린 〈건괘(乾卦)〉에, ‘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라고 한 것과, 또 ‘높이 오른 용은 후회함이 있다.’라는 말이 있었사옵니다. ‘나는 용이 하늘에 있다.’라는 것은, 곧 임금이 가장 높은 자리이온데 그 위에 또 한 층의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높은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높은 체하여서 신하와 더불어 마음과 덕을 같이하기를 즐기지 않으면, 어진 사람이 아랫자리에서 도울 수가 없게 되오니, 이것이 이른바, ‘높이 오른 용은 후회함이 있다.’라는 것이옵니다. 용이란 것은 구름을 만나 그 변화를 부려 혜택을 만물에게 입히는 것입니다. 만약 임금이 아랫사람과 함께 마음과 덕을 같이하기를 즐기지 않으면, 그것은 용이 구름을 만나지 못한 것과 같아서, 비록 그 변화를 부려 혜택을 만물에 입히고자 하나 그것이 되겠습니까. 태평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난리가 일어날 징조가 생기는 것이옵니다. 만일 오늘날 전쟁이 없다 하여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놓아 혹시 너무 높은 체하는 생각이 있거나, 혹 사사롭고 편벽되게 총애하면, 그것은 배를 끌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그만 손을 놓아 버리는 것과 같아서, 배는 문득 흘러내려 가다가 풍파를 만나 잠깐 사이에 곧 뒤집히게 될 것이오니, 어찌 큰 두려움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런데 진실로 학문 공부를 잠깐이라도 중단하지 않아야 이러한 사사로운 마음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옵니다.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는 공부는 성현들이 남긴 글에 밝혀져 있으니, 그것은 ‘자기를 이겨 예로 돌아간다.[克己復禮]’라는 가르침 따위가 그것이옵니다. 이것을 주로 하여 공부에 마음을 쓴다면 학문 공부가 날로 깊어져서, 혼자의 지혜로 세상을 어거하려는 병통이나 스스로 높은 체하는 마음이나 편벽되이 친근하는 마음은, 구태여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라지게 될 것이옵니다. 소신은 요행히 경연에 들어왔사오나 말솜씨가 없어, 주장을 세울 때에 늘 상세하게 아뢰지 못하였사옵니다. 그래서 지극히 외람하고 망녕된 줄을 알면서도 감히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린 것이 있사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신의 사사로운 뜻으로 지은 것은 아니옵고, 모두 옛날 현인들의 손에서 나온 것이 오며, 그중에서 한두 가지의 그림을 신이 보충했을 뿐이옵니다. 그러므로 항상 거기에 마음을 두시면, 곧 소신이 그동안 여러 해를 두고 강할 때에 아뢴 바가 모두 그 가운데 있는 것이옵니다. 〈소학도(小學圖)〉나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같은 것은 비록 이전에 없던 것이옵니다만, 그렇다고 소신이 처음으로 만든 것은 아니옵고, 다만 주자의 《소학》제목과 〈백록동규〉를 배열하여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써, 조금도 주자의 본뜻에서 벗어나거나 보태지는 않았사옵니다. 그리고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도 또한 소신이 만든 것이지만, 그것도 선현들이 지은 잠어(箴語)를 가지고 〈경재잠도(敬齋箴圖)〉를 본떠서 만든 것이옵니다. 그 공부는 전날에 차자로 올린 사(思) 자와 학(學) 자로 주요한 뜻을 삼은 것이온데, 여기에 힘을 기울이시면 그 가운데 있는 뜻과 이치를 반드시 스스로 깨달아 얻게 될 것이고, 오래오래 힘을 쓴다면 얻는 것이 더욱 깊은 곳에 이르고, 그래서 맑고 밝은 기운이 몸에 있어서 그것이 사업에 발휘될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이것이 바로 소신이 진실로 충심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간절한 정성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열 가지 그림 가운데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가 무려 셋인데, 중도(中圖)와 하도(下圖)는 그대가 만든 것인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예. 소신이 망녕되이 지은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상도(上圖)는 정복심(程復心)이 만든 것이온데, 이(理)와 기(氣)를 갈라서 말한 곳에 마땅하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에 그것은 버리고, 맹자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논한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써 중도와 하도로 갈라 만들었사옵니다. 본연의 성은 이(理)를 주로해서 말한 것이요, 기질의 성은 이(理)와 기(氣)를 겸해서 말한 것이옵니다. 정(情)으로써 말하오면 이(理)를 따라 나오는 것은 사단(四端)이 되고, 이와 기가 합해서 나오는 것은 칠정(七情)이 되는 것이옵니다. 맹자와 정자ㆍ주자는 다 갈라서 말했기 때문에, 중도는 본연지성을 써서 사단을 주로 하여 만들었고, 하도는 기질지성을 써서 칠정을 주로 해서 만든 것이옵니다. 이것은 비록 소신이 만든 것이오나 다 성현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써, 털끝만큼도 감히 소신의 망녕된 소견을 섞지 않은 것이옵니다. 만든 사람이 미미한 사람이라 해서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이것은 성현의 말씀이니 반드시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셔서, 잘 돌보아 살피시고 마음을 깊이 쓰시면, 참으로 알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 그 뜻과 맛이 날로 깊어져, 마치 고기반찬이 입에 맞는 것처럼 될 것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통성정(心統性情)이란 무슨 뜻인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서명(西銘)〉에 이르기를, ‘천지에 들어찬 것이 즉 나의 몸뚱이요, 천지를 거느리는 것이 즉 나의 성품이다.’ 하였사옵니다. 대개 기(氣)는 형체가 되고 이(理)는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이와 기가 합해져서 마음이 되어 한 몸의 주재가 되는 것이옵니다. 이른바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다는 이는 성(性)이요, 성에서 나와 작용하는 것은 정(情)이니, 그렇다면 이와 기가 합해서 한 몸의 주재가 된다는 것은, 성과 정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대개 이 성을 담아 간직하고 있는 것도 마음이요, 나아가서 작용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성과 정을 거느린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하였다. 뒷날에 선생은 경연에서 대답한 것이 미진하였다고 하여 그것을 고쳐 말하기를, “이와 기가 합해서 마음이 되면 자연히 허(虛)하고 영(靈)하고 지각하는 미묘함이 있는 것인데, 그 고요하여 뭇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은 성이요, 이 성을 빠짐없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마음이며, 움직여 만사에 응하는 것은 정이요, 이 정을 널리 펴고 나아가 작용하게 하는 것도 마음이다. 그러므로 심통성정이라 한다.” 하였다. 그래서 이 뜻을 기명언(奇明彦)에게 보내어 훗날 경연에서 다시 물으시면 이렇게 대답하라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허령(虛靈)은 위에 있고, 지각(知覺)은 아래에 있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허령은 마음의 본체요, 지각은 곧 사물을 응접(應接)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또 할말은 없는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우리 성조(聖朝)의 조종께서는 은택이 깊고 그 공덕이 높고도 높사옵니다. 다만 사림의 화가 중엽에 일어났으니, 폐조(癈朝) 때의 무오년(1498, 연산군4)과 갑자년(1504)의 일은 말할 것도 없사옵고, 중종(中宗)은 명성(明聖)하였사오나 불행히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당대의 현인과 군자들이 다 큰 죄를 입었사옵니다. 이로부터 사(邪)와 정(正)이 한데 섞이어 간악한 자들이 때를 만났으니, 이후 사사로운 원한을 갚을 때는 반드시 기묘년(1519, 중종14)의 여습(餘習)이라고 일컬었사옵니다. 사림의 화가 잇달아 일어났으니, 옛날부터 이 같은 때는 있은 적이 없었사옵니다. 또 명종(明宗)이 어린 나이로 등극하시자 권세 있는 간신들이 뜻을 얻어서, 한 사람이 패하면 또 한 사람이 일어나 서로 잇달아 난리를 일으켰기 때문에, 사림의 화는 차마 이루 말할 수 없었사옵니다. 신이 이미 지나간 일을 아뢰는 것은 장래에 큰 경계를 삼고자 하는 까닭이옵니다. 옛날부터 임금이 처음으로 정치를 시작할 때에는, 어진 이를 구하고 바른말을 받아들였으므로 바른 사람이 등용되어서 임금의 허물을 간하고 잘못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임금을 정도(正道)로 이끌어 갔었사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임금의 하고자 하는 것을, 일에 따라 고집하여 다투기 때문에, 임금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몹시 꺼리거나 또는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옵니다. 이때에 간사한 사람들이 그 틈을 타서 임금의 마음에 맞추어 받들기 때문에, 임금은 이 사람을 쓰면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드디어 소인과 합하게 되어 바른 사람과 군자는 손 붙일 곳이 없게 되는 것이옵니다. 그리되면 소인은 뜻을 얻어 그 패거리를 부르고 끌어들여서 못할 일이 없게 되는 것이옵니다. 지금은 처음 정치이므로 걱정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바른말 하는 신하의 말을 듣고, 뜻을 굽혀 좇아서 큰 허물은 없사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한때 애써서 힘쓰는 것이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간사한 신하가 틈을 타서 이간을 붙일 것이고 임금의 마음이 한 번 변하면 어떻게 지금과 같이 애쓴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렇게 되면 사(邪)와 정(正)이 당(黨)을 나누어서 간사한 자들이 이기게 될 것이니, 처음의 정치와 서로 반대되는 일이 많을 것이옵니다. 당나라의 현종(玄宗)으로 말하자면, 개원(開元) 때에는 요숭(姚崇)ㆍ송경(宋璟) 같은 어진 이가 조정에 가득 차서 태평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욕심이 많을 뿐 아니라, 또 여색을 탐했으므로, 군자들이 그것을 간했고, 이임보(李林甫)ㆍ양국충(楊國忠)의 무리들이 오로지 임금의 뜻에 영합하기를 일삼아 군자는 쫓아내고 소인을 써서 마침내 천보(天寶)의 난 안녹산의 난 을 초래하게 된 것이옵니다. 한 임금의 일이면서 마치 두 사람이 한 일과 같이 되었으니, 이는 처음에는 군자와 합하고, 나중에는 소인과 합한 까닭이옵니다. 임금께서도 이것을 큰 거울로 삼아서 착한 무리를 보호하시어, 소인들이 모함하지 못하게 하오면, 이것은 종사와 백성의 복이 될 것이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계한 말은 날마다 힘써 경계하겠노라. 그러면 지금 조정의 신하로서 추천할 만한 사람은 없는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오늘의 삼공들은 다 깨끗하고 조심성이 있으며, 육경은 또한 간사하고 음흉함이 없사오니, 조정이 이러하기는 진실로 쉬운 일이 아니옵니다. 만일 특별히 뛰어난 사람이 나온다면 혹 무슨 일을 하고자 할 수도 있겠으나, 아직은 이전부터 있던 사람을 부족하다 하여 가벼이 바꿔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지금의 수상(首相)으로 말하오면, 위태한 때를 당해서도 말이나 얼굴빛을 변하지 아니하고 나라의 형기를 태산같이 편안한 곳에 앉혀 놓았으니 진실로 국가의 기둥이요 주춧돌이라, 마땅히 믿고 의지해야 할 사람은 이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되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추천할 만한 사람이 없는가?”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말하기 어렵사옵니다. 지금 마음 가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옵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정자에게 묻기를, ‘제자들 중에서 누가 터득한 바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정자가 말하기를, ‘터득한 바가 있느냐고 말한다면 쉽게 말할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유작(游酢)ㆍ양시(楊時)ㆍ사양좌(謝良佐)ㆍ장역(張繹)ㆍ이유(李籲)ㆍ윤돈(尹焞) 같은 여러 사람이 그 문하에 있었지만, 터득한 바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신이 어찌 감히 아무개가 터득한 것이 있다고 하여 하늘과 같은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그중에서 기대승(奇大升) 같은 이는 문자를 많이 보았고 이학(理學)에도 소견이 가장 뛰어났으니, 곧 통달한 선비입니다. 다만 수렴(收斂 내성(內省)하는 뜻) 공부가 적으니, 그것이 부족한 점이옵니다. 소신도 항상 이에 특히 힘쓰라고 권면하오나, 아직도 절실하게 그런 공부에 힘쓰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나 그만 한 선비도 쉽게 얻을 수 없사옵니다.”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언행록 3
 유편(類編)
관직생활 붙임. 자제의 벼슬살이를 가르침

독서당 관원들은 비록 윤번(輪番)으로 교대하나, 으레 다른 관사의 관원이 당번하기 때문에, 그들은 맡은 일이 번거롭고 바빠서 총총히 드나들어서 오래 앉아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선생도 여기에 선발되었다. 언제나 금종(禁從)에 있으면서도 한가롭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성품이어서, 자기 차례가 돌아오면 항상 독서당에 있으면서 성 안에는 드나들지 않았고, 혹은 다른 사람의 당번을 대신해서 그대로 거기에 눌러 있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근세의 독서당 관리로서 잘 참고 오래 당에 거처한 사람으로는 반드시 선생을 지목했었다. -정유일-
성전이 한번은 단양(丹陽)을 지나다가 한 노인을 만나서 지금까지의 고을 태수 중에 누가 가장 정치를 잘했는지 물었다. 그는 황준량(黃俊良)이라고 대답했다. 성전이 다시 묻기를,
“그이가 제일 잘한 사람인가요?”
하니, 그가 답하기를,
“이(李) 아무개 퇴계를 가리킴 가 제일 잘했습니다.”
하였다. 성전이 묻기를,
“그런데 어째서 아까는 황준량이라고 했소?”
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황은 최근이요, 또 그는 나라에 글을 올려 부역을 면하게 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공은 이곳에 와서 오래 있지 않았고, 비록 나라에 건의한 일도 없었으나 그의 모든 행동은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켜,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를 사모해서 잊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우성전-
세상 형편이 일변하자, 선생은 도를 실행하는 데 뜻이 없어졌다. 그가 단양으로 내려온 것도 장차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에서였다. 공무의 여가에는 오직 서사(書史)를 즐겼고, 혹은 혼자 구담(龜潭)이나 석문(石門)에 가서 온종일 거닐다가 돌아왔다. 그가 단양을 떠나 돌아갈 때, 그의 행장에는 썰렁하니 다만 2개의 괴석(怪石)뿐이었다. 또 풍기 군수로 옮겼을 때에는 학교에 뜻을 두었다. 무릉(武陵) 주신재(周愼齋)가 백운동서원을 세웠으나 일이 아직 끝마무리가 되지 않았을 때, 선생이 그 도백에게 글을 올려 조정에 보내게 했으니, 그 사액(賜額)과 반서(頒書)는 선생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여가가 있을 때에는 그 서원에 나가 여러 학생과 더불어 학문을 강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언제나 옛 어른들의 위기(爲己)의 학문으로써 거듭 깨우쳐 주었다. -김성일-
선생은 단양을 떠나실 때 죽령(竹嶺)에 다다르자, 관졸들이 삼 다발을 지고 앞에 나와서 말하기를,
“이것은 아전(衙田 관청의 밭)에서 거둔 것이온데, 노자로 쓰기로 전례가 되었기에 바칩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명령한 것이 아닌데 왜 지고 왔느냐?”
하고, 이내 물리쳤다. -이덕홍-
풍기 군수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올 때 행장이 쓸쓸하여 오직 책 두어 짐뿐이었다. 그리고 그 책을 담았던 나무 상자들은 집에 온 다음 관졸들에게 되돌려 보냈다. -이안도-
고을 일을 다스릴 때에는 한결같이 간단하고 조용해서 시끄럽지 않은 것을 숭상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는 때에는 비록 가볍고 간략히 하더라도, 백성으로서 마땅히 바쳐야 할 일이라면 조금도 더하거나 덜해줌이 없어서, 도리를 어겨 명예를 구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선생이 주신재(周愼齋)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였는데, 대개 주신재는 정치를 할 때 술수를 많이 부려 백성들의 마음이 쏠리게 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그를 칭송해서였다. 그러나 선생은 오직 지성스러워 겉치레가 없이 한결같이 바르게 하였고, 부하나 백성들에게는 한결같이 정성과 믿음으로 대하여 그 간사함과 속임을 미리 억측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루의 계획은 부족하나 일 년 계획은 여유가 있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어떻게 선생의 경중을 논할 수 있겠는가. -김성일-
묻기를,
“아버지가, 형이 고을 원(員)이 되었을 때에 그 자제들이 따라가는 것은 의리에 있어서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나라의 법으로 따진다면 처자는 마땅히 데리고 가야 하지만, 이미 출가한 딸은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니, 자제는 따라가지 않는 것이 옳으리라. 그러나 다만 옛날 일을 살펴보면 이신보(李信甫)가 연산(沿山) 고을을 맡았을 때에 연평(延平) 선생이 자주 왕래하였고 때로는 그 부인과 함께 갔었으니, 아비가 자식을 따라가기도 하였는데 하물며 자제이겠느냐. 그러나 옛날과 지금은 시대가 다르고, 중국과 우리나라는 군현 제도에 크게 차이가 있다. 중국에서는 군현을 맡은 사람은 다 월급이 있어서, 웃어른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기르며 친척에까지 미쳐가더라도 오히려 해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월봉(月俸)의 제도가 없어서 관청의 물건을 사사로운 살림에 쓰게 되는데, 자제들을 많이 데리고 가면 관사(官舍)를 어지럽히고 시끄럽게 만들 것이니, 어찌 의에 맞겠느냐. 자제 된 사람이 비록 문안하려고 왕래하더라도, 여러 날을 머물러 폐를 끼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서울에서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면서부터 비로소 수령들의 월봉이 있게 되었고, 선생 때에는 월봉 제도가 없었다.
선생은 대사성이 되어 인재를 기르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 사학(四學)에 공문을 돌려 권면하며, 또 책문(策問)을 내 학문하는 방법으로 삼기도 하였으나, 그때는 사림의 습관이 이미 못쓰게 되어서, 그것을 도리어 현실에 동떨어졌다 하여 한 사람도 그 책문에 대책(對策)을 낸 사람이 없었다. -김성일-
성균관의 유생들은, 음식이 좋고 나쁜 데 따라 선비를 잘 양성하고 못 양성하는 것이라 여겨서, 음식이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비방하는 여론이 물 끓듯 하였다. 관원들 중에는 혹 일부러 명예를 얻기 위해서 음식 대접을 아주 풍부하고 맛나게 하여, 그로 인하여 국고의 재물이 탕진되어 전복(典僕)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선생은 이것을 아주 잘못되었다고 여겼다. 선생이 관관(館官)이 되자, 오직 예와 의로써 선비를 대접하고, 음식 대접에는 힘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성균관의 유생이 모두 이상해하여 불평이 많았다. 선생은 선비들의 버릇을 고칠 수 없는 것을 알고서 얼마 안 되어 병을 핑계하고 나가지 않았다. -김성일-
그 아들 준(寯)에게 준 편지에 이르기를,
“너의 편지를 보고, 잘 가서 집경전(集慶殿)에 부임한 것을 알았으니 마음이 놓인다. 모든 일에 천만 조심하고 삼가서 부끄럼이나 후회를 사지 않도록 하여라. 대개 냉관(冷官 봉급이 적고 지위가 낮은 벼슬)에 있으면서, 만일 깨끗하고 조용하며 또 고생스러움을 각오하지 않으면, 반드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될 경우가 있을 것이니, 더욱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하였다. -집안 편지- 그때 준은 집경전 참봉으로 있었다.
이하는 자제들의 벼슬살이를 가르친 것이다.
또 이르기를,
“보낸 여러 가지 물건에 대한 것이다. 너의 벼슬은 본래 낮고 봉급이 적은 것이어서, 혹 생활하고 남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많지 못할 것인데, 이렇게 물건을 사서 실어 보냈으니, 내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대개 소소한 먹을거리라면 큰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만일 억지로 힘써 도에 넘는다면, 그것은 벼슬하는 사람으로서 깨끗한 마음으로 일을 하는 도리가 아니다. 이런 일이 습관이 되면, 뒷날에 가서는 수습하기 어렵게 될까 걱정된다. 요사이 문음(門蔭)의 은택을 받은 사람부터 수령이 된 자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함부로 행동하여 오로지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남은 돌아보지 않는 것을 보면 사람을 답답하고 걱정스럽게 한다. 인심이란 지극히 위태로운 것이니, 진실로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은순(銀唇 물고기 이름)의 출처가 무방한 줄을 알고 받는다. 대개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다 하더라도, 만일 조금이라도 의리가 아닌 것을 구차하게 받은 것이면 불가하다.”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숯을 바치는 일에 대하여 종들의 의향을 살펴보건대, 너에게 의탁하여 경주에서 사서 실어 보내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매우 거북하게 될 터이므로 꾸짖어 보냈다. 너도 그 말을 들어주지 말아라. 이를 빙자해서 폐단을 일으킬까 두렵기 때문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또 이르기를,
“왜구 소식이 매우 나쁘다. 무릇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은 마땅히 충절에 힘쓸 것을 생각할 것이요, 회피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참봉은 임금의 화상을 보호하는 것을 직책으로 삼는 것이니, 만일 급한 경우가 되거든, 미리 아뢰고 형편을 판단하여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집경전에는 태조의 화상을 모셨기 때문에 한 말이다.
또 이르기를,
“요새 김생명(金生溟)을 만나보았다. 그가 지나온 역로에서 역노(驛奴)들의 말을 들으니, 모두 한결같이 ‘찰방이 비록 마음이 좋으나, 다만 늘 본댁에 있기 때문에 본역의 관리들이 그 틈을 타서 못살게 굴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겠다.’라고 한결같이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네가 너무 지나치게 아랫사람을 너그럽게 놓아 주어 무섭게 단속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냐? 부디 그 점에 마음을 두어 그들을 적발하여 매섭게 다스려 조금이라도 허물을 면하게 하라.”
하였다. -집안 편지- 그때 준(寯)이 안기 찰방(安奇察訪)으로 있었다.
또 이르기를,
“전해 들으니, 상부의 손님이 경계에 들어오기 전에, 너는 매사를 시간에 맞추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십분 조심하여, 일을 저질러서 늙은 아비의 부끄럼이 되지 않도록 하라. 대개 나라 사신을 대접하는 예는 아주 융숭해야 하거늘, 어찌 태만하고 소홀히 해서 때를 맞추지 못하는 허물이 있게 하느냐. 이는 사리와 체면에 매우 관계되는 일이기에 이렇게 일러두는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언행록 4
 유편(類編)
이기(理氣)를 논함

선생이 주자의 글을 인용하여 이덕홍을 가르치기를,
“마음이 비록 한 몸을 주관하고 있지만, 그 본체의 허령(虛靈)함은 넉넉히 천하의 이치를 주관하며, 이것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한 말이다. 이치는 비록 모든 사물에 흩어져 있지만 그 작용의 미묘함은 실로 한 사람의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물(物)로부터 시작한 말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안이니 밖이니, 정밀하니 거치니로 논할 것이 아니다. 주(註)에 ‘이치는 비록 물(物)에 있지만, 그의 작용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치를 연구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먼저 이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
이(理) 자의 뜻을 물었더니, 선생이 말하기를,
“만일 옛날 선비들의, ‘배를 만들어 물로 다니고, 수레를 만들어 육지로 다닌다.’라는 말을 좇아서 자세히 생각하면, 그 밖의 것은 다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대개 배는 물로 다녀야 하고, 수레는 육지로 다녀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치이다. 배이면서 육지로 다니고 수레이면서 물로 다닌다면, 이것은 그 이치가 아니다. 임금은 어질어야 하고 신하는 공경해야 하며, 아비는 사랑해야 하고 아들은 효도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이치이다. 임금이면서 어질지 않고 신하이면서 공경하지 않으며, 아비이면서 사랑하지 않고 자식이면서 효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이치가 아니다. 대개 천하에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 이치요, 마땅히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은 이치가 아니니, 이로써 미루어 나가면 이치의 참된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일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지만 이치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으니, 풀어놓아도 밖이 없는 것이 이 이치요, 거둬들여도 안이 없는 것도 이 이치이다. 방향도 없고 형체도 없으면서 가는 곳마다 충족하여, 각기 하나씩의 태극을 갖추고 있어 모자라고 남은 곳을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놋그릇은 물을 채우면 가라앉고 속이 비면 물에 뜹니다. 이것이 이(理)의 진실한 본체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다. 이것은 회암(晦菴)이 이른 바 ‘수레는 물로 다니지 못하고, 배는 육지로 다니지 못한다.’라는 말과 같은 얘기이니, 아주 좋은 물음이다.”
하였다. 또 이(理) 자의 뜻을 물으니 말하기를,
“주자의 말에 ‘모든 사물이 마땅히 그러하여 그만둘 수 없고, 본래 그러하여 바꿀 수 없는 것이 이치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라는 말은, 곧 임금은 마땅히 어질어야 하고 자식은 마땅히 효도해야 한다는 따위가 그것이요, ‘본래 그러한 것’이라는 것은, 곧 어진 까닭이나 효도하는 까닭을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묻기를,
“수레는 물로 다니지 못하고, 배는 육지로 다니지 못한다고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것은 심오한 뜻을 내포한 말이니, 그대는 이 말에 대하여 이리저리 자세히 연구하되, 배는 어째서 물로는 다니나 육지로는 다니지 못하며, 수레는 어째서 육지로는 다니나 물로는 다니지 못하는가를 생각하고 더욱 생각하라. 오래오래 생각해서 익어지면 스스로 깨달아 트일 때가 있을 것이니, 어떻게 말로써 형용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덕홍-
묻기를,
“솔개는 하늘로 날아 올라가고, 고기는 못에서 뛴다고 한 말 역시 수레는 물로 다니지 못하고, 배는 육지로 다니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거기에 그런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은 진실한 도의 미묘한 작용이 위와 아래에 밝게 드러나고 흘러 충만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는 ‘도가 천지 사이에 흘러 움직여 없는 곳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위에 있어서는 솔개가 날아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이 이것이고, 아래에 있어서는 고기가 못에서 뛴다는 것이 이것이며, 사람에 있어서는 날마다 활용하는 가운데나 인륜 관계에 있어서 부부가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일이나 성인으로서도 잘 알지 못하고 잘하지 못하는 일 같은 것도 이것이다. 그것이 퍼져 행해서 위와 아래에 나타나 보이는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만일 수레는 물로 다니지 못하고 배는 육지로 다니지 못하는 뜻을 미루어 본다면, 솔개는 양물(陽物)이라 하늘로 올라가나 물에는 잠기지 못하고, 고기는 음물(陰物)이라 못에서는 뛰면서도 날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그렇게 시킨 것인가? 이것은 자연의 묘한 이치로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요는 묵묵히 마음으로 생각하여 깨달아야 한다.”
하였다. 묻기를,
“그러면 ‘발발(潑潑)’을 동파(東坡)의 주에는, ‘달빛이 물에 비치어 떠서 움직이는 모양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렇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석씨(釋氏)도 이 말을 썼다. 그러나 불가(佛家)의 학문은 마음이 있는 줄만 알고, 이치가 있는 줄은 모르는 것이다. 동파의 그 주도 아마 석씨의 마음을 주로 하는 데서 나온 것으로서, 석씨의 말에, “마음에는 빛이 반짝반짝한 곳이 있다.”라고 하였다. 《중용》의 본뜻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일찍이 《운회(韻會)》를 참고해 보니, ‘발(潑)은 물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물을 버리면 사방으로 분산되어 땅에 젖어 드는 것인데, 이것을 두 번 말해 ‘발발’이라 하였으니, 그것은 이치가 모든 사물에 흩어져 스며드는데, 각각 구별이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서, 위로 하늘과 아래로 사물에 이르기까지 환히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는 뜻이다.”
하였다. 묻기를,
“어떤 이는 ‘발발’을 ‘하늘의 이치가 흘러 다녀도 걸리거나 멈추는 일이 없는 묘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렇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것은 ‘활(活)’ 자의 뜻이요, ‘발발’의 뜻은 아니다.”
하였다. 묻기를,
“그러면 이른바 ‘활발발지(活潑潑地)’라는 것은 석씨의 말이 아닙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주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다만 속인들이 보통 쓰는 말로서 석씨도 일찍이 말한 일이 있고, 나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이 비록 저들과 같더라도 그 형용한 뜻은 진실로 저들과 다른 것이다. 만일 내가 말한 뜻으로 말한다면, 대개 도의 본체와 작용은 원래 없는 곳이 없는 것이지만, 솔개는 반드시 하늘로 올라가고, 고기가 반드시 못에서 뛰는 것은, 이것이 바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서, 제각기 제자리에 머물러 뒤바꿀 수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석씨의 말대로 한다면, 솔개는 못에서 뛸 수도 있고 고기는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이니, 어떻게 같은 해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자사(子思)가 부부를 두고 말한 얘기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일이면서도 거기에 하늘의 이치가 있음을 밝힌 것인데, 이제 석씨는 이것(부부)을 모두 끊어버리고 있으니, 또 어떻게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주자의 이 말은 분명하고 확실한 말로서 깊이 음미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
묻기를,
“‘솔개는 날고 고기는 뛴다.’라는 뜻과 ‘일삼는 바가 있되, 미리 작정하지 말고 잊지도 말고 북돋우지도 말라.[勿正勿忘勿助]’라는 뜻이 같다 하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솔개가 날고 고기가 뛰는 것은 만물을 만들어 내고 기르는 작용의 흘러 다님이 아래위에 환히 나타나는 것을 형용한 것인데, 모두 이 이치의 작용이 아닌 것이 없다. 하늘은 오직 욕심이 없으므로 이(理)와 기(氣)가 흘러 다녀서, 자연히 한순간도 쉬지 않는다. 사람도 일삼는 바가 있되, 미리 작정하는 마음이나 아주 잊어버리거나 빨리 이루려는 마음의 병통만 없으면, 마음의 본체가 드러나고 묘한 작용이 드러나면서도 한순간도 쉬지 않을 것이니, 그 모양이 곧 저와 같다는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자사가 말한 ‘솔개는 날고 고기는 뛴다.’라는 뜻을 명도(明道)는 ‘일삼는 바가 있되 미리 작정하지 말라.’라는 뜻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를 알아야 천연(天淵)의 오묘함을 알 수 있다.”
하였다. -김수-
묻기를,
“사람들이 다 같이 일원지기(一元之氣)를 받았는데, 기질이 같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날 때 다 같이 일원지기를 받았다고 하나, 그 일원지기라는 것 또한 그 자체가 같지 않은 것이다. 그 일원(一元)에서 음과 양이 나뉘어지니, 그 기는 본래 청탁(淸濁)의 구분이 있었던 것이고, 음과 양이 다시 오행으로 나뉘어지니 그 기가 생(生)하기도 하고 극(克)하기도 하며, 순응하기도 하고 거스르기도 하며,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며, 혹은 갔다가 돌아오기도 하며,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며,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며, 왕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해서, 어지럽게 서로 부딪치면서 뒤집어지고 뒤섞여지며, 진하기도 묽기도 맑기도 탁하기도 하여 만 가지로 서로 같지 않은 것이다. 사람이 이러한 기를 받아 태어났으니 그 기질이 같지 않다는 것이 이상할 게 무엇인가. 옛날 선비들이 이른 바 ‘솟아오르고 가라앉고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음양오행이 같지 않음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다.”
하였다.
묻기를,
“《대학혹문(大學或問)》 경1장(經一章)의 소주(小註)에, 황씨(黃氏)가 ‘하늘의 도는 이(理)이요, 음양ㆍ오행은 기(氣)인데, 이것을 합하여 말하면, 기는 곧 이이니,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함을 도(道)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갈라서 말한 것은 그 뜻이 무엇이며, 합해서 말한 것은 그 뜻이 또한 무엇입니까? 그리고 선후(先後)를 나눠 말할 수는 없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주자의 말에 ‘천지 사이에는 이가 있고 기가 있으니, 이라는 것은 형이상(形而上)의 도리[道]요, 기라는 것은 형이하의 그릇[器]이다.’라고 하였다. 도리는 만물을 낳는 근본이요, 그릇은 모든 만물을 낳는 기구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물건이 생길 때에는 반드시 이 이를 받은 뒤에 성질이 있게 되고, 또 이 기를 받은 뒤에 형체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성질이나 형체가 비록 한몸을 벗어나지 않지만, 도리와 그릇의 사이에는 갈라짐이 매우 분명해서 뒤섞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채절재(蔡節齋 채연(蔡淵))의 말에 ‘먼저 이가 있고 뒤에 기가 있다는 것은 형이상과 형이하를 말한 것이요, 있으면 함께 있다는 말은 도리가 곧 그릇이라는 말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선후를 나눠 말하지 않으면, 이와 기가 분명하지 않을 것이요, 이와 기를 합하여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나뉘어 각각 두 물건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저 성(性)과 정(情)의 관계와 같아서, 발(發)하지 않은 때와 이미 발한 때는 선후가 있는 것이므로 성과 정이 동시에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나, 정의 근본은 사실 성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이 성이 있으면 곧 이 정이 있는 것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것이다. ‘있으면 함께 있다.’라는 말과 ‘도리는 곧 그릇이다.’라고 말한 것은 다 정자의 학설이다. 또 어떤 이가 주자에게 ‘반드시 이가 있은 뒤에 기가 있을 것이니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주자가 말하기를, ‘그것은 원래 선후를 가지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꼭 기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이가 먼저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라는 것이 하나의 다른 물건으로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곧 기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니 이 기가 없으면 이는 붙일 곳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제 이 세 가지 학설로써 미루어 본다면, 이와 기는 본래 서로 섞이지 않은 것이지만 또한 서로 떨어진 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을 나눠 말하지 않으면, 서로가 혼연히 한 물건으로 되어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인 줄을 모르게 될 것이요, 그것을 합해서 말하지 않으면 아주 별다른 두 물건이 되어 서로 떠나지 못하는 것인 줄을 모르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
묻기를,
“임금과 신하의 이치가 본래부터 내게 갖추어져 있습니다만, 초목의 이치 또한 다 나와 같다고 할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동(同) 자를 써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일 뿐이다. 만일 형체가 있는 물건이라면, 반드시 저와 내가 있겠지만, 이(理)는 본래 형체가 없는 물건인데, 어떻게 저와 나를 나눌 수 있겠는가. 자사는 《중용》에서 다만 천하의 큰 근본을 말했을 뿐이다. 대개 여기 모인 사람들 가운데서, 내게 큰 근본이 있으면 그대에게도 큰 근본이 있을 것이요, 이 밖에도 비록 천이면 천 사람, 만이면 만 사람이 모두 다 큰 근본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도 내게서 빌릴 것이 없을 것이요, 나도 저에게서 빌릴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형체가 있는 사물이라면, 저쪽이 많으면 이쪽이 모자랄 것이요, 내가 얻으면 그대는 얻지 못할 것이다. 이 형체가 없는 물건이 어찌 저것과 이것, 나와 너의 구별이 있겠는가. 다만 이것을 보존하면 잃지 않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잃을 것이다.”
하였다. 인하여 말하기를,
“주자는 이(理)를 물에 비유해서 ‘쏘가리[鱖]의 뱃속에 있는 물[水]도 물이요, 잉어 뱃속에 있는 물도 물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저것과 이것의 구별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이 비유를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고 본다. 대개 물은 형체가 있으나 이는 형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우성전-
언행록 4
 유편(類編)
예를 논함 관(冠)ㆍ혼(婚)ㆍ상(喪)ㆍ제(祭)

묻기를,
“《가례(家禮)》에 ‘하루 전에 숙빈(宿賓 그 기일에 앞서 공경함)한다.’라는 말을 《의례(儀禮)》의 주에서는 ‘숙(宿)은 진(進)이라는 뜻이니, 나아가서 그에게 관일(冠日)이 곧 옴을 알리는 것이다.’라고 하고, 보주(補註)에는 ‘그 기일에 앞서 재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어느 것을 좇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보주가 옳다.”
하였다. -김수-
이하는 관례(冠禮)를 말한 것이다.
묻기를,
“《가례》 주에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관례에 단술[醴]을 썼다.’ 했는데, 단술은 하룻밤을 지낸 전국술이고, 또 ‘요즘에는 사가(私家)에는 단술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 단술은 무슨 단술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것은 요새 말하는 단술이 아니라, 곧 오재(五齊)의 단술이다.”
하였다. -김수-
혼인의 예가 무너지고 없어져서 세상에 행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묘년(1567, 명종22)에 박려(朴欐 선생의 손자사위)가 올 때 비로소 옛날 예법을 본떠서 신랑ㆍ신부의 예견(禮見)하는 의식을 올렸다. 그러나 남들이 보거나 듣고서 너무 이상해할까 염려해서 옛날 예법대로 다 좇지 못하였다. 그 뒤로 몇 해가 안 되어 서울이나 시골의 사대부들이 혼인할 때에는 다만 이 예식을 쓸 뿐 아니라 가끔은 옛날 예법을 그대로 행하기도 하였는데, 그 까닭을 생각하면 모두 여기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안도-
이하는 혼례를 논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내 동생이 남의 양자가 되었는데, 우리 할머니의 초상을 당하여 아직 장례도 지내기 전입니다. 혼인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때에 양부가 혼례를 주관하는 것이 의리에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내게 묻지 않고 했으면 그만이지만 이미 물었으니, 내 어찌 예 아닌 것을 가르쳐 행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그 사람은 결국 혼인하지 않았다. -김부륜-
중종의 상사 때에 조정의 의논은 졸곡(卒哭) 뒤에는 검은 갓과 띠를 쓰기로 하였다. 그때 선생이 옥당에 계시면서 동료들과 헌의(獻議)하여 바로잡았다. -김성일-
이하는 상례를 논한 것이다.
명종의 상사 때에, 선생은 《오례의(五禮儀)》의 군신의 상제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여, 주자의 군신 복제 논의를 따라 참작하여 다시 정하고자 하여 이를 예조에 알렸으나, 예조의 당상이 어려워하여 그 의논이 중지되었다. -김성일-
선생이 말하기를,
“여러 학생들이 성균관에 나가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 태학생은 보우(普雨)를 논열하다 청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관(空館)하였다. 만일 관에 나아가지 않으면, 국장의 발인에 있어서 곡송(哭送)하는 예(禮)를 폐하게 될 것이니, 큰 예를 어찌 차마 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성전은 의심하여,
“성안의 선비들은 모두 임금의 신하이니 모두 교외에 나와 임금의 상사를 울면서 보내야 할 것이며, 모든 학생들도 길가에서 울면서 보내면 될 텐데, 구태여 성균관에 있을 때와 같이 반열(班列)을 만들기까지 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만일 반차(班次)가 없으면 가서 울어서는 안 되니, 이것은 정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라, 분수상 감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우성전-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상복 입는 제도는 옛날의 예법에 어그러져서 그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가벼이 여기고, 그 가볍게 여겨야 할 것은 중하게 여기니, 이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다. 의례를 말한다면, 조정에 있는 이는 임금을 위하여 다 참최(斬衰)를 입고, 경기 안에 사는 백성은 재최(齋衰)를 입었다가 석 달 뒤에 벗고, 경기 밖에 사는 백성은 복이 없다. 그런데 요새는 조정에 있는 사람이나 경기 밖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흰 옷에 흰 갓을 써서 구별이 없으니, 만일 이같이 먼 지방에서도 혹은 흰 옷이나 흰 갓을 쓰고 사냥을 하거나 고기를 잡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그 정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내 일찍이 듣건대 화담(花潭)이 중종의 상사를 만나 이 일을 글로써 논했으나, 정원에서는 인종이 상사의 일로 문제를 삼는다는 말을 얼핏이라도 들으면 필시 마음을 상하게 될 것이라 하여, 그 글을 봉해 버리고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들은 바로는 그 글에서 논한 것이 매우 의리가 있었다고 한다.”
하였다. -우성전-
묻기를,
“지금은 나라가 상중이므로 흰 옷을 입고 검은 띠를 두르는데, 만일 개장(改葬)이 있어서 복을 바꿀 때에는, 검은 띠를 벗고 상복의 띠를 두르는 것이 마땅합니까? 임금의 상과 어버이의 거상은 서로 일치할 수가 없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예로써 본다면 검은 띠를 벗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지금의 정으로 말한다면 벗지 않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또 묻기를,
“중한 복(나라의 상사)을 입고 있으면서 가벼운 상사(어버이 상사)를 만나면, 그 복을 입고도 조곡(弔哭)한다는 글이 있습니다. 이제 나라가 상중이면서도 어버이의 개장하는 복을 만나면, 검은 띠를 벗고 흰 띠를 두르는 것은 정이나 예에도 어긋남이 없을 듯한데, 예로서는 검은 띠를 벗지 못한다 하시고 정으로서는 안 벗기도 어렵다고 하시니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예(禮)에 ‘임금의 상사를 당해 복을 입었으면 감히 사사로운 상의 복은 입지 못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어버이의 상을 통틀어 가리킨 것이다. ‘아직 복을 입지 못한 사람은 감히 복을 입을 수 없고, 이미 입은 사람은 감히 벗지 못한다.’라고 한 말은 옛날의 의리이다. 요즘에 이제 흰 갓과 흰 옷과 검은 띠는 임금의 상인데, 이에 부모의 개장을 위해서 검은 띠를 벗고 삼베 띠를 띠는 것은 옛날의 예가 아니기 때문에 검은 띠를 벗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요새는 나라가 상중에 있으면서도 부모의 상사를 만나면 으레 거의 상복을 입으니, 오직 어버이의 개장에만 검은 띠를 벗고 삼베를 입지 않는다면, 세상이 괴이하게 여길 것이므로 요새 세상에서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구(逑)가 예전에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있을 때에, 마침 나라의 상사를 만났는데, 또 문상(問喪)이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기공(朞功)의 성복(成服)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이른바 성복은 세속의 베띠[布帶]였다. 묻기를,
“임금의 상사가 있으면, 비록 사대부라도 감히 기공복(朞功服)을 입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머리에는 임금의 상에 쓰는 흰 삿갓을 쓰고 허리에는 사상(私喪)의 복인 베띠를 띤다면, 한 몸으로써 공사의 복을 겸한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나는 비로소 나라의 상사가 있으면, 감히 기공의 사사로운 복은 입지 못하는 줄을 알았다. -정구-
무진년(1568, 선조1) 겨울에 중형(仲兄)이 양부인 청원공(淸原公)의 상사를 만나고, 또 생모 정부인(貞夫人)의 상사를 만났다. 천리 밖의 두 상사가 한꺼번에 한 사람에게 났으니, 참최복을 입기도 전에 재최(齋衰)의 부고가 이른 것이다. 참혹한 변고가 겹쳐서 닥쳤으니 예로써 처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때 우성전이 편지로 선생에게 물어서 아버지 성복례(成服禮)를 마친 뒤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들어 신위를 설치하고는 또 성복을 한 뒤에 양부의 상에서 하루를 머물다가, 비로소 생모의 상사에 달려가 곡을 하였으니, 이것은 선생의 명령이었다. 정구(鄭逑)가 지은 정곤수(鄭崑壽)의 행장에서 나온다.
묻기를,
“칠성판(七星板)에 북두성 모양으로 뚫어새기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남두성(南斗星)은 삶을 맡았고, 북두성(北斗星)은 죽음을 맡은 까닭이다.”
하였다. -김수-
묻기를,
“《가례》에, ‘성복(成服)할 때 요질(腰絰)은 석 자로 늘어뜨린다.’라고만 적혀 있고, 그 뒤에 어떻게 맨다는 말은 없으니, 그러면 늘어뜨린 채 3년을 마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3년 동안 늘어뜨린 채 둘 이치가 없다. 아마 그런 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일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예기》에 의하면, 소렴(小殮 송장을 옷과 이불로 쌈) 때에는 환질(環絰)에 산대(散帶)를 하고, 성복 때에는 요질(腰絰)에 산대를 하며, 졸곡(卒哭) 때에는 변질(弁絰)을 한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행함이 옳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예절에 관한 글이 너무 번거로워 다 좇을 수가 없을 것이다. 다만 《가례》에 의하여 소렴 때에는 머리털을 묶고 성복 때에는 요질을 두르는데 늘어뜨리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우성전-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그 아비가 죽고 조부모의 승중(承重)이 된 사람은, 그 어머니가 있으면 그 아내는 조부모를 위하여 다만 본복(本服)인 대공복(大功服)만 입을 뿐이요, 재최나 참최는 입지 못하는 법이니, 그것은 적(嫡)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우성전-
묻기를,
“서자는 적모ㆍ부모ㆍ형제ㆍ자매를 위하여 다 복이 있으니, 그것은 다 외복(畏服)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제도에는 그것이 없으니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김수-
묻기를,
“달을 바꾸는 제도[易月之制]에서는 비록 조부모나 형제의 거상이라도 정해진 달 이외에는 복을 계속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관리로 있는 사람은 모두 길관(吉冠 상을 벗은 뒤에 쓰는 갓)으로 사무를 보아 왔는데, 그 관습이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나랏일에서는 진실로 이러하지만, 만일 사관(四館)이 모두 나오는 잔치 같은 것은 사사로운 모임인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시왕(時王)의 제도에 준하여 강제로 잔치에 참여시키면 어떻게 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옛날 여자약(呂子約)은 그 아버지 여동래(呂東萊)의 상사를 위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복을 계속하려 하자 조정에서 그것을 허락하였는데 지금까지 군자들은 그것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복을 계속하려면 마땅히 이렇게 하여야만 비로소 자기 뜻대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니,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저 세상을 따를 수밖에 없다. 시왕의 제도에 있어서는 어떻다고 생각하는 것이 없다.”
하였다. -김성일-
또 말하기를,
“예는 둘 다 옳은 것이 없고, 일은 둘 다 편리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벼슬에 있는 사람이 만일 꼭 자기의 뜻대로 행하고자 한다면, 일에 장애가 많을 것이니 결국 좋은 줄을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일찍이 배우는 자에게 말하기를,
“우리 동방에는 상사의 기강이 허물어져서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세속의 예를 들면, 초상이나 장송(葬送)이나 제삿날에 상가에서 반드시 술과 음식을 내어 조문객을 대접하는데, 술에 취하거나 밤을 새우는 무지한 조문객도 있으니, 무어라고 할 말이 없다. 그대들은 이런 곳에서 처신하는 길을 강구하라.”
하였고 세상을 떠나는 날에 유언으로 경계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처첩(妻妾)의 복에 있어서는, 자신은 최복을 입는다는 예를 따라서 별처에서 근신하면서 3년 동안을 지내야 하는 것입니까? 졸곡까지면 좋다고 하는 이도 있고, 혹은 소상까지면 좋다고 하는 이도 있는데, 어느 것이 옳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예(禮)에 부인(婦人)은 부모상에 갔다가 연복(練服 소상복)을 입고 돌아온다고 하였다.”
하였다. -이국필-
그 아들 준(寯)에게 준 편지에,
“쇠하고 병든 내 몸으로 억지로 집상(執喪)하기는 어렵지만, 소식(素食)한다고 해서 고생이 더 될 걱정은 없으니, 어찌 감히 중복(重服)을 가볍게 감하겠느냐. 옛날 사람은 오복(五服)에 모두 성복(成服)하였는데, 지금은 기공(朞功) 이하로는 요질(腰絰) 띠로만 행하고 마니, 너무 간략하고 박정한 일이다. 거기에 또 소식마저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간략한 중에서 더 간략하고 박정한 중에서 더 박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 감히 가볍게 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이 때문에 병이 더해진다면, 어찌 내 목숨을 꾀하지 않고 구태여 고집하겠느냐.”
하였다. -집안 편지-
묻기를,
“초상에 상식(上食) 드릴 때, 아침저녁으로 제사드릴 때 올린 음식은 치우는 것입니까. 그대로 두어야 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거두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김부륜-
또 말하기를,
“예(禮)에 ‘장사하기 전의 제사에는 술을 한 잔만 올린다.’라고 하였으니, 거기다가 장사하기 전에 부모의 신위(神位)를 합해서 제사하는 것은 더욱 예가 아니다.”
하였다. -김부륜-
또 말하기를,
“예에 ‘장사하기 전에는 죽을 먹는다.’라는 말은 옛날에 사(士)는 한 달 만에 장사하고, 대부는 석 달 만에 장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지금 장사에 기일을 마치지 못하고, 때를 넘겨 장사하는 사람이 기운이 너무 지쳤다면, 구태여 예전의 예에 구애되어 병이 나게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부륜-
그 아들 준에게 준 편지에,
“상사는 슬픔을 주로 한다. 모든 일은 《가례》를 참고하고 동시에 세속에서 통상적으로 쓰는 관례를 물어 하되, 힘쓰고 조심해서 남의 비방을 받지 않는 것이 옳고 또 마땅한 것이다. 더구나 너희들은 모두 네 어미의 상을 입지 않았으니, 이번 상사를 곧 어미의 상사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혹 어떤 이는 친어머니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은 무지한 말로서, 사람을 의리가 아닌 데로 빠뜨리는 것이니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요새 서울 안의 사대부의 상례가 다 예에 맞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또한 볼만한 점도 많다. 너희들이 만일 옛날의 예대로 행하지도 못하고, 또 요새 사람의 비방을 받는다면 어떻게 체면을 세울 수 있겠는가. 다만 너무 기력을 써서 병이 나는 데 이르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병오년(1546, 명종1)에 준이 권 부인의 상사를 만났다.
고을 사람이 황장목(黃腸木)을 베어 관을 만들어 그 어버이를 장사했다.
선생이 말하기를,
“아무리 자신의 어버이를 후하게 장사 지내고 싶더라도, 어찌 나라에서 금하는 나무를 벨 수 있겠는가.”
하고, 이내 ‘휴고성부(虧姑成婦)’의 사실을 끌어와 나무랐다. 〈휴고성부〉의 사실은 《좌전(左傳)》에 있다. 처음에 제강(齊姜)의 시어미 목강(穆姜)은 사람을 시켜서 아름다운 수영나무를 골라서 자기가 죽은 뒤에 쓸 널을 만들게 하였다. 그 뒤에 제강이 죽자 계문자(季文子)는 그 관으로 제강을 장사했다. 군자가 이 말을 듣고 “그것은 예가 아니다. 시어미의 것을 헐어서 며느리를 이루어 주었으니, 이보다 더 예에 거슬리는 일은 없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시어미의 것을 헐어서 그 며느리의 관을 만들었다 해서 나무란 것이다. 선생의 생각도 그 황장목은 나라에서 쓰는 널재목인데 그것을 사사로이 자신의 어버이 장사에 썼으니, 휴고성부와 같은 류라는 것이다. -김성일-
묻기를,
“무덤 경계의 사방에 빙 둘러 담을 쌓아서 뜻밖의 일에 대비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것은 옛날의 예가 아니다. 담 쌓기를 그치지 않으면 장차 방[室]도 만들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여묘(廬墓)의 제도는 후세에서 시작된 것으로, 장사를 지낸 뒤에는 반혼(返魂)하는 것이 예이다. 다만 집안 안팎의 신분과 남녀의 구별을 아주 분명하게 하기 어렵다면, 상중이나 제사 때에 삼가고 엄숙하지 못하여 마음에 편치 못한 점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김취려(金就礪)가 묻기를,
“내상(內喪)에 사내종을 시켜 제사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것은 예가 아니다. 만일 여종을 시킨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대개 여소(廬所)에 종년을 둔다는 것도 미안한 일이다. 그러므로 자제들로 집사(執事)를 삼아 제사 때에 음식을 상에 차려 놓는 모든 일을 행하게 하는 것이 예에 맞을 것이다. 일찍이 종묘(宗廟)의 제사를 보니, 대축(大祝)은 임금의 주독(主櫝)을 열고 내관(內官)은 소군(小君)의 독(櫝)을 열었으니 이 또한 이런 까닭에서였다.”
하였다. -김성일-
일찍이 말하기를,
“요새 내상(內喪)에 조문하는 사람이 아무런 친척이 아닌데도 바로 영좌(靈座)에 절을 하는데, 이것은 예가 아니다. 살았을 때 집안끼리 드나든 친분이 없으면 내외의 예절은 분명한 것이니, 어지럽혀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그 아들 준(寯)에게 준 편지에 말하기를,
“너는 가볍지 않은 병이 있으니, 집상(執喪)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학질(瘧疾)은 본래 지라와 위장에 병이 들어서 된 것이다. 이제 마른 포(脯)를 두어 접 보내 권도(權道)로써 너의 소식(素食)을 그치게 하려는 것이니, 너는 나의 이 간절하고 염려하는 뜻을 어겨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부터라도 곧 고깃국을 먹어라. 이 사이에 두자가 빠졌다. 비록 소식을 그치더라도 질(絰) 띠를 그대로 띠는 것은 무방하다. 남과 대면하여 음식을 먹지 말 것이요, 혹은 여럿이 앉았다가 음식 먹을 일이 생기거든 곧 일어나 자리를 피하라. 이것은 거짓을 꾸미고 먹는 것을 숨기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곧 자기를 낮추어서 감히 사람 축에 들지 않는다는 뜻을 보이려는 것이다. 대개 병 때문에 소식을 그쳐서 부득이하게 권도를 좇기 때문인 것이다.”
하였다. -집안 편지-
또 말하기를,
“만일 네가 온다면 건(騫)도 소식을 하여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금군(琴君)이 또 있으니, 모두 소식할 형편이 아닌 즉, 밥 때에는 마땅히 딴 곳에서 먹고 고기 먹는 사람과 마주 앉아 먹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무신년(1548, 명종3) 봄에 준(寯)은 심상(心喪)을 하고 있었는데 단양(丹陽)에서 벼슬살이하는 선생을 모시기 위해 오려고 한 때였다. -집안 편지-
일찍이 말하기를,
“옛날 어떤 사람이 상중에 있으면서 병을 얻어 계집종을 시켜 약 시중을 들게 하였다가, 마침내 ‘근신하지 못하였다.’라는 이름을 얻게 되어 평생을 불우하게 지냈다. 혐의를 분별하는 일은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합장(合葬)에 대해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부부는 한 몸이라, 합장도 또한 옛날 예이다.”
하였다. 또 관을 같이 쓰는 것은 어떠냐고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한 널도 또한 좋다.”
하였다. 또 장사의 선후를 물으니, 말하기를,
“상이 같은 때에 났으면 가벼운 상을 먼저하고, 무거운 상을 나중에 하는 것이 예이다.”
하였다. -김부륜-
장사 지낸 뒤에 돌아가신 부모를 합해서 제사하는 일에 대해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상사에 선후가 있으면, 길흉에 차이가 있으니 이미 길한 신주를 끌어와서 합하여 제사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그런데 요새 세속에서는 장사 지낸 뒤에 반드시 합하여 제사를 지내니, 이런 예는 옛날에는 없던 것이다.”
하였다. -김부륜-
합장한 뒤의 우제(虞祭)의 축문(祝文)에 대해 물으니, 말하기를,
“무덤을 옮겨서 합장했다면 우제 때에는 반드시 두 개의 축문이 있는 것이 원래 옳다.”
하였다. -김부륜-
묻기를,
“개장(改葬)한 뒤에 시마복(緦麻服)을 3개월 동안 입는 것은 옛날의 예요, 7일 동안 입는 것은 지금의 제도입니다. 요새 부모를 개장하고 복을 입는 사람은 옛날과 지금의 어느 것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지금을 따르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이국필-
유중엄(柳仲淹)이 남의 양자가 되어, 본생모의 초상을 만났다. 기년이 지난 뒤에도 차마 최복(衰服)을 벗지 못하고 굳이 복을 마치고자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선왕께서 만든 예를 초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찌 정에 쏠려 곧장 행하려 하는가. 이미 남의 양자가 되었는데 또 사친(私親)을 돌보고자 하면 그것은 근본이 둘이 되는 것이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기사년(1569, 선조2) 2월에 선생이, 문소전(文昭殿)의 태조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려는 것과 소(昭)ㆍ목(穆)의 위치를 바로잡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따르지 않았다. 그때 인종(仁宗)ㆍ명종(明宗)을 문소전으로 옮겨서 선조(先祖)와 함께 모시려고 하였는데 문소전의 협향(祫享)하는 위치가 태조는 북에 있으면서 남을 향하고, 소(昭)와 목(穆)은 동서로 향해 있었다. 문소전은 남북이 짧고 동서가 길어서, 인종과 명종을 거기에 협향하려 하면 전(殿)이 좁아서 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들은 전을 헐어서 남쪽을 물러 내어 더 모실 자리를 만들려고 하였다.
선생이 생각하기를,
“옛날의 협향의 위치는 태조가 동향, 소ㆍ목이 남ㆍ북향이었는데, 우리나라 종묘에는 협향의 의식이 없고 오직 원묘(原廟 즉 문소전)에만 협향이 있을 뿐이고, 그 위치가 옛날의 것이 아니니 이 기회를 타서 태조는 동향으로, 소ㆍ목은 남ㆍ북으로 서로 마주 보게 하면, 집을 헐어 고치는 폐단도 없을 뿐 아니라, 세속에서도 옛날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일이 있겠다.”
하여, 드디어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붙여 나라에 올렸다. 임금이 대신들과 의논해 보니, 대신들은 원묘에는 옛날의 예를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이 위치를 정한 것이 벌써 140년이나 지났으니, 고칠 수가 없다 하여 선생의 의견은 행해지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임금으로서 조상을 받드는 데 있어서는 마땅히 종묘를 높여 중히 여기고, 원묘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문순(李文純 퇴계)은 지금에 와서 원묘를 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원묘에 나아가 옛날의 예를 행한다면 이 또한 변화에 대처하여 바른 것을 얻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임금이 이미 옛것을 좋아하지 않고 대신도 식견과 요량이 없어서 선비의 의견을 막아 버렸으니, 어진 이가 머물러 있지 않았던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이-

이하는 제례(祭禮)를 말한 것이다.

임금이 일찍이 소(昭)ㆍ목(穆)의 제도를 물었더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대개 종묘의 제도는, 태조는 동으로 향해 앉고 소(昭)는 북에서 남을 향하는데, 남은 그 밝음을 뜻함이며, 목(穆)은 남에서 북을 향하는데 북은 그윽하고 깊은 뜻을 취한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가장 높은 자리(태조)는 반드시 서에서 동을 향하고, 소ㆍ목은 좌우로 나누어 위치하여야 하는 것이옵니다.”
하였다. -이안도-
중국에서는 문묘(文廟 공자묘)를 추숭(追崇)한 호를 버리고, 선성(先聖)ㆍ선사(先師)라고 제호(題號)를 고쳤는데, 조정에서도 그 제도를 따르고자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성인의 덕은 봉증(封贈 벼슬이나 지위를 내려 줌)으로써 더하고 덜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 호로써 높여 온 것이 여러 세대로 이미 오래되었고, 정자나 주자와 같은 큰 선비들도 아무런 이의가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깎아 버리는 것은 참으로 온당치 못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번의 이 조치를 어찌 함부로 의논하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김부필이 묻기를,
“역동서원(易東書院)에 정자와 주자 두 선생을 모시어 제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두 선생은 다 역학(易學)에 공이 있는 분들이다. 이미 서원 이름을 역동(易東)이라 하였으니,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우 좨주(禹祭酒 우탁(禹倬))를 배향(配享)한다면 실로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그 서원의 모든 일이 초라하기 짝이 없어서 학전(學田)도 없을 뿐 아니라, 또 지키는 종들도 적은데, 갑자기 이렇게 중한 예(禮)를 벌였다가 결국에 태만하게 되면, 그것은 높이기를 구하다가 도리어 홀대하는 것이니, 우 좨주만 모시어 편리한 것만 못할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가례》에, 공경이나 대부나 선비를 막론하고 4대조까지 제사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나라의 제도에는 6품 이상은 3대, 7품 이하는 2대까지 제사하게 되어 있으니, 이런 예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라의 제도가 그러하니 감히 어기지는 못할 것이나, 효자나 자손(慈孫)이 옛날 예법을 따라 결연히 행한다면 어찌 안 될 게 있겠는가. 옛날에 소(昭)ㆍ목(穆)은 사당을 달리했기 때문에 월제(月祭)나 향상(享嘗) 때에도 제각기 그 제도가 있었으나, 뒷세상에서는 같은 집에 칸을 달리하는 제도가 되었고 고조(高祖)는 복이 있게 되었다. 만일 멀고 가까운 것으로 친하고 성긴 것을 삼아서 11월의 제사가 고조에게까지 미치지 못한다면 사람과 신에 대한 미안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자는 일찍이 그때의 재상들에게 보낸 글에 ‘이런 따위의 예는 가벼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조정의 신하들이 나라에 아뢰어 소ㆍ목의 옛날 제도를 회복하면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다시 무엇을 운운하겠는가.
나라 제도에 7품 이하는 2대까지 제사한다는 말은 더욱 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7품 이하에 있을 때에는 비록 2대까지 제사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벼슬이 6품으로 오르면 마땅히 3대까지 제사하여야 할 것인데, 그러면 그때에는 신주를 더 추가하여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또 6품 이상은 3대까지 제사할 수 있는데 혹 죄로 말미암아 벼슬이 깎이면 증조(曾祖)의 신주까지 아울러 헐어야 한단 말인가? 한 번 만들고 한 번 헐어 버리는 것이 자손들의 벼슬이 높고 낮은 데 달리게 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이 점이 특히 모를 일이다.”
하였다. -이국필-
묻기를,
“세속에서는 흔히 고조의 제사를 모시지 않을 뿐 아니라 기일(忌日)에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심하면 잔치놀이에까지 참여하는 일이 있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고조는 곧 유복친(有服親)인데, 어찌 감히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자나 주자도 이미 시행하였음은 예문을 참고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왕(時王)의 제도가 이러하니, 어찌 저들이 제사하지 않는 것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다만 자기 스스로 도리를 다할 뿐이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돌아가신 달이 윤달일 때는 그다음 돌아가신 윤달이 돌아와야 그 윤달에 제사 지내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윤달은 정상적인 달이 아니다. 사람이 제사를 지낼 때에는 항상 정상적인 달에 하는 것인데, 오직 그해에만 돌아가신 해의 달에 제사한다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듯하다. 제사는 보통 달에 지내야 할 것이고 돌아가신 날이 윤달이었다면 그날에는 재계하여 소식(素食)만 하고 제사는 지내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들은 제삿날에 항상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제사 지내지만, 그것은 매우 예가 아니다. 아버지의 제사에 어머니를 제사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어머니의 제사에 아버지를 함께 제사 지낸다면 어찌 감히 높은 이를 대접하는 의리가 있다고 하겠는가. 우리 문중에서도 늘 이렇게 하고 있으나, 내가 종자(宗子)가 아니기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고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내가 죽은 뒤에는 이런 풍속을 따르지 말게 할 따름이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제례에 있어서 《오례의(五禮儀)》를 참고해 보면 제찬(祭饌)의 그릇 수효는 공경ㆍ대부로부터 선비ㆍ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각 정해진 품수(品數)가 있는데, 그 품수를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제사 지내는 사람의 지위에도 분수가 있으니, 제사에도 그 지위를 따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만 《오례의》에는 따르기 어려운 것도 있으니, 음식에 마른고기[脯]ㆍ젓[醢]ㆍ과실은 가장 많고, 생선과 고기는 아주 적게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 집에서 생선이나 고기는 얻는 데 따라 그래도 준비하기가 쉽지만, 마른고기나 젓이나 과실은 어떻게 항상 많은 양을 마련해 둘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반드시 《오례의》를 따를 것이 아니라, 집에 있고 없는 것에 맞춰서 제사해도 무방할 것이며, 다만 분수에 넘지 않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 제기의 수효에 있어서도 너무 번거롭게 할 것이 아니니, 번거로우면 모독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정결하게 할 수도 없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주자는 일찍이 소ㆍ목의 예가 오랫동안 폐지된 것을 탄식하고 《가례》를 지었는데, 도리어 그때그때 세속의 예를 따른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어찌 시왕(時王)의 제도를 가벼이 고칠 수가 있겠는가. 또한 예라는 것은 천하에 두루 행해지는 것이니, 온 세상이 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빈 문자로서 만들어 놓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자가 그의 제자들에게 답한 편지에서 옛날 예가 다시 회복되지 못하는 것을 깊이 탄식하고, 결국 끝에 가서는 ‘나라에 의견을 올려 그 하나하나의 틀린 점을 고치는 것이 가장 빠른 것만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무진년(1568, 선조1) 7월에 선생은 소명을 받고 서울로 왔다. 그때 이암(頤菴 송인(宋寅))이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진사 성척(成惕)이 3대의 신주를 모시다가 뜻하지 않게 불이 나서 모두 태웠다. 내게 와서, ‘신주를 고쳐 쓰려면 어디서 써야 합니까?’라고 묻기에, 산소에 가서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답하였다. 그 뒤에 다시 생각하니 산소에 가서 써야 할 이치가 없을 듯하여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선생에게 물어보겠다.”
하였다. 내가 이것을 선생께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산이나 들에다 장사를 치르고 제주(題主)를 마치면 즉시 혼을 모시고 돌아오는 것은, 그 신이 평소에 거처하던 곳에 돌아와 편안히 계시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갑자기 불이 나서 신주가 타 버렸으니, 그 신혼(神魂)은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아 머무를 곳이 없을 것이니, 곧 전날 신주를 모셨던 곳에 빈자리를 만들어 위패를 고쳐 쓰고, 향을 피워 제사를 드려서, 그 흩어져 떠도는 신을 새 신주에 붙게 하면 된다. 전날에 이미 돌아온 혼을 어찌 다시 시체가 있는 곳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제 보니, 선생이 김이정(金而精)에게 대답한 것과 나에게 대답한 것이 같지 않다. 이정에게 대답한 것은 신유년(1561, 명종16)이요, 나에게 대답한 것은 무진년(1568, 선조1)이니, 선생의 만년의 정론(定論)임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선생이 이정에게 답한 편지는 이미 문집(文集)에 보인다. 거기에는 “신주가 불에 탔을 때, 사묘(祠廟)만 타고 집은 남았다면, 집에서 위패를 써야 하고, 만일 집마저 다 타버렸으면 차라리 권도(權道)를 좇아 산소에서 위패를 쓰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이제 조진에게 답한 것과 상반되기 때문에 운운한 것이다. -조진(趙辰)-
묻기를,
“제물을 오른쪽에서부터 차리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신도(神道)는 오른쪽을 높이는 까닭이다. 대개 왼쪽은 양이 되고 오른쪽은 음이 되는데, 오른쪽을 높이는 것은 신도는 음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김성일-
《가례》의 침묘(寢廟)와 정묘(正廟)의 뜻을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침묘는 소ㆍ목이 있는 곳이요, 정묘는 합제(合祭)하는 곳이다. 이것은 《문헌통고(文獻通考)》ㆍ《주자대전》ㆍ《중용혹문》 따위의 책에 보인다.”
하였다. -김수-
묻기를,
“제물을 올리고 술을 세 번 드린 뒤에 밥 뚜껑을 열고 삽시(扱匙)하니 겨울에는 찬이 모두 식어서 매우 미안합니다. 국수나 떡을 먼저 올리고 술을 세 번 드린 뒤에 찬을 올리는 것이 어떠합니까? 그리고 예문(禮文)에 뚜껑을 연다거나 뚜껑을 닫는다는 글이 없는데, 찬들의 기운이 가신 뒤에 비로소 뚜껑을 열게 되니 더욱 미안할 듯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신령(神靈)은 기운에 응감하는 것이니, 삽시가 비록 술을 세 번 드린 뒤에 있지만, 그전에 뚜껑을 열어서 찬의 기운을 같이 올라가게 해도 무방하다.”
하였다. -김부륜-
묻기를,
“지방(紙榜)으로 드리는 제사는, 신주로 드리는 제사와 다르니, 먼저 신을 청한[降神] 뒤에 신에게 보이는[參神] 것은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미 신위(神位)를 모셔 놓고 지방이 있으면 신도 여기 계시는 것이니, 먼저 신에게 보이고 뒤에 신을 청해도 무방하다. 우리 집에서도 이렇게 하고 있다.”
하였다. -김부륜-
묻기를,
“세상 사람 중에 남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는 사람의 부모의 기일에 그 집주인의 물건을 빌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어떠합니까? 또 여자가 시집에 있으면서, 친정 부모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남의 물건을 빌려 제사를 지낸다는 말을 나도 들었다. 요새 사람이 혹은 어떤 사명을 띠고 다른 고을에 가 있으면서, 부모의 기일을 당하여 이렇게 하는 자가 있으나, 이는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다만 이것도 한마디로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다. 제주(祭主)가 외지에 있는데도 집에서 직접 제사를 지내는 것은 원래 부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살림이 몹시 가난해서 남에게 얹혀살고 있으나 자기밖에는 달리 제사를 지낼 사람이 없다면 거기에 맞게 변통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말미암아 부모를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부인이 시집에 있으면서 친정 부모의 기일에 제사 지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일이다. 다만 세속이 습관으로 되어 갑자기 금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만일 정침(正寢)을 피해서 지낸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시부모가 살아 계시다면 더욱 편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묻기를,
“종자(宗子)가 그 가족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할 때, 그 제사 드리는 신주도 마땅히 받들고 가야겠으나, 만일 그 문장(門長)이 조상의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면 이내 본가(本家)에 머물러 두고 자기의 전택(田宅)에서 나온 소출로 제사를 받들게 하면서, 그 나머지 다른 신주만 모셔 가면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친(親)이 다하지 못한 신주를 문장에게 맡겨 두고 가서는 안 될 듯하다. 그것은 종자나 문장이 모두 잘못이다.”
하였다. -이국필-
묻기를,
“요새 세상에서는 기일이 되면 이틀 전부터 고기도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더라도 얼굴빛이 붉어지거나 입맛이 물리는 데까지 이르지 않으면 상관없을 것이요, 그렇다고 아주 그것을 안 먹고 안 마시는 것은 온당치 않은 듯합니다. 예(禮)를 따라 그날만 소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세속의 예를 따라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반드시 여러 사람과 다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 그대의 병통일세. 김이정도 이런 병통이 있는데 그래서 그대들은 남의 꺼림과 미움을 많이 받는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묻기를,
“예제(禰祭)를 지내고자 하는데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 제사는 나도 아직 지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대답할 수 없다.”
하였다. -이국필-
언젠가 선생 부인의 제삿날에 내가 선생을 모시고 음복한 일이 있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기일에 술과 밥을 차려 놓고 이웃을 모아 대접하고 있으나, 그것은 아주 예가 아니다. 오늘은 마침 그대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불러서 같이 먹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 부인의 제삿날에 마침 감사가 찾아와 뵈었다. 선생은 제삿날이란 말을 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술과 고기로 대접하였다. 다만 안주를 내오는데 손님 것과 주인의 것이 달랐다. 감사가 기미를 알고 같이 소식을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일가의 무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산소에 가서 성묘하려 할 때, 그 차례를 따라 제사를 모시고자 하면 여러 언덕을 오르내리기에 기운이 빠질 뿐 아니라 정성과 공경하는 마음이 풀릴 것이요, 또 제물도 새것과 남은 것이 한데 섞이고 차고 더운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산소에 나아가 술잔을 올리고 혼을 인도해 와서 재궁(齋宮)에서 지방(紙榜)으로 합제(合祭)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무방하다.”
하였다.
“그러면 재궁이 아니라 깨끗한 곳에 단(壇)을 만들고 합제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더욱 좋다. 대개 옛날 사람은 정성이 있는 곳을 신이 임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지금 사람은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산소에 가고자 하니, 이 예는 옛날 예가 아니다. 더구나 묘제(墓祭)는, 예(禮)에 1년에 한 번 지내기로 되어 있는데, 요새 사람은 사철을 따라 꼭꼭 지내니, 이것은 후세의 풍속이다.”
하였다. -김부륜-
또 말하기를,
“산신제에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제물을 마련하여 후하게 제사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김부륜-
묻기를,
“맏아들은 원래 처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지만 중자(衆子 맏아들 이외의 여러 아들)로서 그 사위가 되었으면 사당을 세워 제사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남의 맏아들로서 남의 외동딸의 사위가 되었으면, 거기에는 큰 장애가 있어서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 저쪽이 이미 후사가 없는 데다가 양자도 없으면 내가 마땅히 제사해야 할 것인데, 자신은 종사(宗祠)를 받드니, 둘 다 행할 수는 없다. 요새 사람 중에는 다 같이 한 사당에서 제사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근본이 둘인 것이니, 참으로 말할 거리도 못 된다. 따로 사당을 세운다 해도 근본이 둘인 잘못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대처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되면 처족(妻族) 중에 친분이 있는 자를 택해 노비를 나누어 주고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조주(祧主 먼 조상 사당의 신주)를 제일 긴 방에다 옮겨야 하는데, 혹은 형편이 그리 되지 못할 때는 어떻게 처리하여야 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우리 문중에도 그런 일이 있는데, 아직 때를 정하지 못하였으니, 감히 남의 일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하고는, 여러 번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성전-
묻기를,
“아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고, 또 그 뒤를 이을 양자도 없을 때에는 그 신주나 축문의 제사(題辭)를 어찌하여야 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 신주에는 ‘옛 아내 아무 봉 아무 씨[故室某封某氏]’라고 써야 한다. 주자의 제자가 일찍이 이에 대해 물었더니, 주 선생은 ‘죽은 아내[亡室]’라고 써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망(亡)’ 자는 너무 박절하여 죽은 이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이므로 ‘고(故)’ 자를 쓰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축문의 고사(告辭) 또한 그와 같은데, 다만 고하는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남편의 성명을 써야 할 것이나, 부(夫) 자는 굳이 쓸 것 없다. 또 ‘감소고(敢昭告)’도 고쳐서 ‘근고(謹告)’라고 하여 ‘감소(敢昭)’ 두 자는 버리는 것이 혹은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였다. -김성일-
성전이 일찍이 말하기를,
“신주에 방제(旁題)를 쓸 때에 신주의 왼쪽에 쓰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어째서 그런 줄 아느냐?”
하여, 말하기를,
“신도(神道)는 오른쪽을 높인다 하니, 왼쪽은 곧 하위이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나도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하였으나, 뒷날에 그것이 옳지 않은 줄을 깨달았다. 그것은 중앙을 높은 것으로 삼는다면 방제를 쓸 때 굳이 위아래를 구별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때 김이정이 그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같은 집에서 다른 칸으로 하는 제도로 말한다면 신주의 왼쪽에 쓰는 것은 본래 하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ㆍ목의 위치에 있어서는 도리어 상위에 있게 되기도 하니, 상하를 따질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 말도 옳다.”
하였다. 성전이 자기의 설을 강하게 주장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이정전서(二程全書)》나 《문공가례도(文公家禮圖)》로부터 《대명회전(大明會典)》이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이르기까지 옛날부터 전해 오는 책에는 다 신주의 오른쪽에 쓴다고 했고, 오직 하씨(何氏)의 〈소학도(小學圖)〉에만 신주의 왼쪽에 쓴다고 했다. 만일 의리에 해롭다면, 비록 옛날부터 전해 오는 말이라 하더라도 본래 꼭 따라야 할 것은 아니나, 조금도 의리에 해로움이 없는데도 옛날부터 전해 오는 주장을 버리고 어떤 이의 한 말만을 편협하게 주장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옛날에 한문공(韓文公)이 ‘심하다, 사람들이 괴이함을 좋아함이여.’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곧 괴이함을 좋아하는 것이다.”
하였다. 성전이 다시 말하기를,
“《가례》에 ‘그 아래 왼쪽’이라 하였으니, ‘그’ 자는 곧 주신(主身)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하자, 선생이 이내 《가례》를 내어 ‘입소석비(立小石碑)’ 밑의 소주에 있는 주자가 말한 조목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과 같다면 억지 주장을 세워서는 안 된다. 그대는 말해 보라. 그 왼쪽에 새겼다 했으니, 이 또한 비석의 왼쪽이냐? 만일 왼쪽이라 한다면 이것은 왼쪽에서부터 거꾸로 쓴 것이냐?”
하였다. 성전이 말하기를,
“이미 오른쪽을 상위로 삼았다면 비록 이렇게 쓰더라도 안 될 게 없지 않습니까?”
하자, 선생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그대는 무엇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가? 사람의 마음은 인판(印板) 같은데, 그대가 만일 모든 일에 자기 주장을 이같이 한다면 그것은 아주 마땅하지 못하다. 천만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

[주D-001]오재(五齊) : 오재는 옛날에 술을 만드는 법인데, 청탁(淸濁)을 가려서 다섯 등급으로 나누었다. 주례(周禮)에 “주정(酒正)이 오재의 이름을 분변하니 하나는 범재(泛齊)요, 둘은 예재(醴齊)요, 셋은 앙재(盎齊)요, 넷은 시재(緹齊)요, 다섯은 침재(沈齊)이다.”라고 하였다.
[주D-002]참최(斬衰) : 오복(五服)의 하나인데, 굵은 베로 짓되 아랫단을 꿰매지 않은 상복이다.
[주D-003]재최(齋衰) : 오복(五服)의 하나인데, 조금 굵은 삼베로 지은 상복이다.
[주D-004]기공(朞功) : 기(朞)는 1년 복, 공(功)에는 대소(大小)가 있는데, 대공(大功)은 9월 복, 소공(小功)은 3월 복이다.
[주D-005]승중(承重) : 장손으로 아버지ㆍ할아버지를 대신해서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것을 말한다.
[주D-006]외복(畏服) : 권위에 눌려서 입는 복인데, 적모(嫡母)가 입으므로 따라 입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주D-007]달을 바꾸는 제도 : 한 해 입을 복을 한 달로써 바꾸는 제도를 말한다.
[주D-008]여묘(廬墓) : 부모나 어른의 거상에 그의 인덕을 사모해서 그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사는 것을 말한다.
[주D-009]반혼(返魂) : 장사 뒤에 신주(神主)를 집으로 모셔 오는 것을 말한다.
[주D-010]여소(廬所) : 상주가 거처하는 무덤가에 있는 초가를 말한다.
[주D-011]추숭(追崇) :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이에게 죽은 뒤에 왕의 칭호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언행록 4
 유편(類編)
시사를 논함[論時]


선생이 말하기를,
“중국에서는 자식의 직품(職品)에 따라 그 아비에게 관직을 주는데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제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아서 자식이 비록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어 청현직에 올라도 2품관이 되지 못하면, 그 아비로서 관직이 없는 사람은 일개 선비를 면하지 못한다. 자식 된 마음으로 어떻게 편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부륜-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언로(言路)가 넓지 못한 것은 인원을 완비해야 하기 때문이요, 사관(史官)이 그 직분을 잃게 된 것은 조사(曹司)가 있기 때문이다. 간관(諫官)은 임금의 귀와 눈이 되어 마땅히 각기 듣고 본 바를 논계(論啓)해야 할 것인데, 반드시 인원을 완비해서 함께 논의한 뒤라야 비로소 임금에게 아뢰고, 만일 그 의견이 서로 맞지 않으면 아무리 바른 의논이라도 아뢸 수가 없으니 그 폐해가 어찌 크지 않겠는가. 옛날에는 저 밑의 여러 공장(工匠)들까지도 제각기 제 직분에 따라 간했는데, 그때에도 인원을 완비해야 함이 있었던가. 사관(史官)을 8명씩이나 많이 두는 것은 역사를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제각기 맡은 직분을 다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보면 여러 관원들은 모두 하는 일 없이 녹만 타 먹고 정작 모든 일은 하번(下番) 한 사람에게만 맡겨 두니, 본 바가 반드시 다 정확하지는 못할 뿐 아니라, 직필(直筆)했을 때에 혹 상급자와 뜻이 맞지 않으면 삭제되어 버리니 만세에 진실을 전할 글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일찍이 실록청에 들어가서 시정기(時政記)를 보았더니, 그 실상이 조보(朝報)와 다를 것이 거의 없었다.”
하였다. -김성일-
일찍이 말하기를,
“요새 사류(士類)들은 세조조(世祖朝)의 일을 드러내 놓고 말하여 꺼릴 줄을 모르니, 이것이 내가 매우 걱정하는 바이다. 일찍이 유응부(兪應孚)ㆍ권근(權近) 두 사람을 공공연히 거론하면서 같이 견주는 것을 보았는데,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의리로 말한다면 조종(朝宗)의 일을 바로 드러내 놓고 말해서는 안 되니, 공자가 소공(昭公)을 가리켜 ‘예를 안다.’ 하였으니 이것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
을사년(1545, 명종1) 가을에 조정에서는 삼포(三浦) 왜인들의 납관(納款)하려는 청을 거절하였다. 당시 국상이 잇달아 생기고, 백성의 생활이 보장되지 못하였는데, 또 왜와 틈까지 생긴다면 그것은 나라의 큰 걱정이었다. 그러나 조정에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사람이 없었다. 그때 마침 선생은 전한(典翰)으로 휴가 중이었는데 동료들에게 알려, 다시 차자를 올려서 그 이롭고 해로운 점을 들어가 아뢰게 하려 하였지만, 동료들이 좇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은 혼자서 힘을 다하여 상소하였다. -우성전-
선생이 윤임(尹任)의 일에 대하여 말하기를,
“대개 윤원로(尹元老)는 명종(明宗)의 외숙[舅]이요, 윤임은 인종(仁宗)의 외숙이다. 인종은 오랫동안 동궁(東宮)으로 있으면서 어질고 효도가 지성스러웠기 때문에 안팎의 마음이 모두 쏠렸고, 상하가 모두 모여들어 사군자(士君子)들이 기운을 떨쳐 일어났다. 윤원로의 무리들은 본래 흉하고 간사한 사람들로서, 아무리 시기해도 배척할 만한 구실이 없고, 아무리 모함하려 해도 틈을 탈 만한 기회가 없게 되자 권세에 빌붙고자 윤임에게 혼인을 청하였으나, 윤임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두 윤씨는 틈이 생겨 서로 뜬소문을 퍼뜨려서 대궐 안에서는 가끔 비상한 변고가 있었다. 윤임 또한 돈만 탐내는 무부(武夫)로서, 돌아다니면서 사대부들에게 선전하기를, ‘윤원로의 무리들이 동궁을 해치고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 한다.’ 하니, 당시의 바른 사람이나 군자는 모두 분에 못 이겨 팔을 걷어 올리면서 기어코 동궁을 돕기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결심하였다. 마침내 윤임을 병조 판서로 추대하여 동궁을 보좌하게 하니, 윤임도 스스로 보좌하기를 기약하자 사림들은 쏠려서 그를 좇았다. 윤원로의 무리들은 더욱 시기하여 윤임만 원수처럼 볼 뿐 아니라 윤임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하는 사람까지도 모두 주목하였다. 불행히도 인종은 즉위한 지 아홉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명종은 인종의 아우이니, 마땅히 문정왕후(인종의 모후)를 세워 수렴청정을 했어야 할 것이었는데, 윤임은 그런 사리를 모를 뿐 아니라, 오직 권세와 이익만 알았다. 그래서 그는 하루아침에 권세를 잃게 되면 다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또한 무엇인가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아서 끝내 과리(瓜李)의 혐의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에 윤원로는 이것을 핑계 삼아서 번갈아 공격하고 부풀려서, 임금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다는 것으로 뒤집어 씌워, 사림(士林)과 어진 이들을 마구 죽이니 그 화가 하늘에까지 퍼져 당고(黨錮)보다 비참했으니, 그 참상을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덕홍-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가 귀양살이하면서 일찍이 〈진수팔규(進修八規)〉를 초하여 나라에 올리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 서자인 전인(全仁)이 선친의 뜻을 이루려고 하였더니, 선생이 말하기를,
“대개 때에는 옳고 옳지 않음이 있고, 사리에는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이 있다. 지금의 형세로 보면 때도 사리도 다 마땅하지 않다. 혹 이로 인해 어떤 사단이 야기될지도 모르는 것이니, 책 상자 속에 깊이 감추어 두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대개 그 당시 윤원형이 나라의 권세를 잡고 있었고, 또 명종의 의심도 아직 풀리지 않았으니 비록 남겨 둔 그 글을 올린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잘못하면 뜻밖의 화를 가져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선생이 이렇게 힘써 말린 것이다. -김성일-
이공 몽필(李公夢弼)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인종 초기에 내가 이경호(李景浩 퇴계)와 더불어 옥당에 있었는데, 홍문관의 여러 사람들이, 이복고(李復古)는 정승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떠들었다. 그러나 경호만, ‘이공은 도량이 좁아서 정승 자리에 있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고, 나도 마음속으로 그 말을 의심하였다. 얼마 안 되어 사정이 크게 변하여 마침내 이공은 죄를 입었다. 그제서야 나는 경호의 말이 사실은 이공을 크게 구한 것임을 알았다. 대개 경호는 이때 이미 얼마 안 가서 반드시 사변이 있을 줄 알았으며, 이공이 정승이 되면 화를 더욱 크게 입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이 말로써 여러 사람의 의논을 바로잡았던 것이다. 거의 앞일을 내다보는 예지는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하였다. -정유일-
을축년(1565, 명종20) 여름에 문정왕후가 죽자, 성균관 유생들 중 보우(普雨)를 죽이기를 청하여, 성균관을 비우기까지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때 영남의 유생들은 온 도내에 통문(通文)하여 대궐에 나아가서 소를 올렸다. 선생이 말하기를,
“적을 치고 원수를 갚기 위하여 보우를 죽이는 것은 이미 그 죄에 마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온 도내에 통문하여 서로 이끌고 대궐에 나아가 소를 올리는 것도 온당한 일이 아니다. 대개 사람은 제각기 보는 바가 있는데 어찌 억지로 같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 일에 대하여는 사람들의 마음이 다 같이 그러하다면 통문을 기다리지 않고도 반드시 일제히 응했을 것이며, 만일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비록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달래더라도 응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제가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스스로 소를 올리는 것이 옳을 것인데, 어찌 한 도내를 통틀어 모아서 서로 이끌고 대궐로 나아간단 말인가.”
하였다. 이때에 선성(宣城 예안)ㆍ영가(永嘉 안동)의 선비들은 선생의 이 가르침을 듣고 유독 대궐에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은 또 말하기를,
“사방에 통문하여 상소하는 것은 유자(儒者)가 마땅히 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김성일-
관학생들이 보우의 죄를 주장하다가 윤허를 얻지 못하자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말자고 서로 약속하고 곧 관을 비워 버렸다.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이 일은 매우 온당치 못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분연히 나서서 자신의 뜻이 행해지지 않고 도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아주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괜찮다. 그러나 떼를 지어 서로 약속하는 것은 절대 안 되는 것이니, 군신의 의리로서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또 진실로 의리에 가까워야 그 말을 실천할 수 있다. 어찌 온 나라 선비가 모두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대간들이 사직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
태학생들이 보우의 죄를 논열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을 비우기까지 하였다가 얼마 후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상주(尙州) 유생들이 온 도내에 통문하여 모두 떼를 지어 대궐에 나아가서 요승(妖僧)을 죄주기를 다시 청하고, 또 태학관에 유생들이 다시 돌아간 잘못을 공격하였다. 그때에 예안(禮安)의 선비들은 그 거취를 한창 의논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그것을 말리면서 말하기를,
“태학생으로서 나라에 글을 올리는 것은 그래도 버려둘 수 있지만, 지방의 시골 선비들이 떼를 지어 대궐에 나아간다는 것은 분수로나 의리로나 아주 마땅하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그중 두세 사람이 말하기를,
“선생은 모든 일에 중도(中道)로써 자처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만, 시골의 뜻이 큰 유생들이 좀 과격한 듯하나 한번 가는 것이 무엇이 방해되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선비가 중도(中道)로써 자처해도 오히려 허물이 있을까 두려워할 것인데, 하물며 먼저 과격한 사람으로 자처하는가?”
하였다. 그 고을 사람들은 선생의 명령으로 마침내 가지 않았다. -우성전-
이해 10월에 나라에서 특별 과거의 명령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한창 그 거취를 의논하고 있을 때, 선생은 성전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처음부터 과거에 응시하지 말자고 약속한 것은 지나친 일이다. 그러나 이미 약속이 있었다면 응시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만일 약속한 선비들이 모두 응시하지 않는다면 그 약속에 들지 않은 사람도 혼자 응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온 나라가 모두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니, 시험 기일을 좀 물리든지 중 보우가 죽든지 하면 별로 거북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과연 좌상 이준경(李浚慶)이 글을 올려서 시험 기일을 물리었고 중 보우도 제주도에서 귀양 살다가 죽었다. -우성전-
묻기를,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는 것은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간할 직책에 있는 사람이 임금에게 간했다가 이루지 못하면 떠나는 것은 괜찮으나 벼슬하지 않는 선비는 원래 간할 책임이 없으므로, 글을 올려 주장을 떠벌리는 것은 그 직분이 아니다. 만일 종사의 존망이나 우리 도내의 성쇠에 관계되어 의리로써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면 글을 올려 논열할 수도 있겠으나, 들어주고 안 들어주는 것은 임금에게 달린 것이니, 어찌 청하는 바를 꼭 들어주어서 이루리라고 기약할 수 있겠는가. 지금 관학의 학생들은 일이 있기만 하면 꼭 글을 올리고, 만일 그 청이 통하지 않으면 서로 이끌어 관을 비우고, 관을 비워도 그래도 통하지 않으면 또 서로 이끌어 관으로 모여 든다. 관을 떠날 때에는 혹은 남보다 앞서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관에 모일 때에도 남에게 뒤질까 두려워한다. 떠나는 것도 이미 그 도리가 아니요, 모이는 것도 그 명분이 없으니, 이 무슨 도리인가. 옛날 군자들은 나라의 큰일을 만나면 떨치고 일어나 몸을 돌보지 않고 글을 올려서 항론(抗論)하다가, 끝내 임금이 써주지 않으면, 결연히 물러나 한평생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귀하다 할 만하지만 관을 비우는 것 같은 따위는 나로서는 모를 일이다.”
하였다. 묻기를,
“관을 비우는 일은 언제부터 비롯하였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역사에 나타난 것으로 말한다면 아마 송나라 때의 권당(捲堂)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관을 비우는 것은 임금을 협박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시골에 묻혀 있는 신하로서, 그 분수를 넘어 글을 올리고 거리낌 없이 직언하는 것은 특히 군자의 몸을 보존하는 길이 아닙니다만, 만일 소리를 낮추고 온순한 말로 간략히 아뢰되, 격분하여 화내지 않게 하는 것은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러한 일은 딱히 규정지어 말하기 어렵다.”
하였다. -이국필-
기사년(1569, 선조2)에 돌아와서 덕홍에게 말하기를,
“요새 효상(爻象 역(易)의 괘(卦), 곧 변화의 형상)이 매우 걱정스럽다.”
하였다. 덕홍이 말하기를,
“선생님은 이미 산림에 계시는데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내 한 몸이야 걱정할 게 없겠지만 만일 저 사람의 위태함이나 나라의 쇠잔함이라면 어쩌겠느냐?”
하였다. -이덕홍-


 

[주D-001]예를 안다 :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예절을 잘 알기로 이름이 있었으나, 동성(同姓)에게 장가드는 비례(非禮)를 저질렀다. 무마기(巫馬期)가 공자에게 묻기를, “소공이 예를 압니까?” 하니, 공자가 답하기를, “예를 안다.” 하였다. 무마기가 나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소공이 동성 혼인을 하였는데 그래도 예를 아는 것인가? 군자(공자를 가리킴)도 편당이 있구나.” 하였다. 이것은 소공이 공자에게 임금이 되기 때문에 그의 허물을 숨겼던 것이다. 《論語 述而》
[주D-002]과리(瓜李)의 혐의 : 외밭에서 신 끈을 매고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바르게 해서 남에게 의심을 받는 것을 말한다.
[주D-003]당고(黨錮) :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에 이응(李膺)ㆍ진번(陳番) 등 100여 명을 당인(黨人)이라 이름 붙여 금고(禁錮)한 일을 말한다.

고봉집 제3권
 [비명(碑銘)]
퇴계 선생 광명(壙銘)

아 선생은 / 嗚呼先生
벼슬이 높았으나 스스로 높다고 여기지 않았고 / 官雖高而不自以爲有
학문을 힘썼으나 스스로 학문을 많이 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네 / 學雖力而不自以爲厚
부지런히 힘쓰고 힘써 / 俛焉孶孶
허물이 없기를 기대하였으니 / 庶幾無咎
옛 선현들과 비교하건대 / 視古先民
누가 더 낫고 못할까 / 孰與先後
태산은 평평해질 수 있고 / 山可夷
돌은 닳아 없어질 수 있지만 / 石可朽
선생의 이름은 / 吾知先生之名
천지와 더불어 함께 영원할 것을 내 아노라 / 與天地而竝久
선생의 옷과 신이 / 維衣維履兮
이 산에 의탁해 있으니 / 託在玆阜
천 년 이후에도 / 千載而下兮
행여 이곳을 유린하지 말지어다 / 尙無躪蹂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