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3.17. 중랑천-양주라이딩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양주관아지 자전거 역사 탐방

아베베1 2011. 3. 18. 10:10

孤雲先生事蹟
 [事蹟]
[東國通鑑] a_001_137d


東國通鑑。新羅憲康王乙巳十一年 唐光啓元年 春三月。崔致遠奉帝詔還自唐。致遠沙梁部人。精敏好學。年十二。隨海舶入唐求學。其父謂曰。十年不第。非吾子也。致遠至唐。尋師力學。十八。登第。調宣州漂水縣尉。遷侍御史,內供奉。時黃巢反。高騈爲兵馬都統以討之。辟致遠爲從事。以委書記之任。其表狀書啓。多出001_138a其手。其檄黃巢。有不惟天下之人皆思顯戮。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之語。巢不覺下牀。由是名振天下。又上大師侍中狀云。伏聞東海之外有三國。其名馬韓,弁韓,辰韓。馬韓則高句麗。弁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句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御。由於征遼。貞觀中。我太宗皇帝親統六軍。渡海恭行天討。高句麗畏威請和。文皇受降回蹕。我武烈大王請以犬馬之誠。助定一方之難。入唐朝謁。自此而始。後以高句麗,百濟踵前造惡。武烈入朝。請爲鄕導。至高宗皇帝顯慶001_138b五年。勑蘇定方統十道强兵樓船萬隻。大破百濟。乃於其地。置扶餘都督府。招輯遺氓。以漢官。以臭味不同。屢聞離叛。遂徙其人於河南。摠章元年。命英公李勣破高句麗。置安東都督府。至儀鳳三年。徙其人於河南隴右。高句麗殘孽類聚。北依太白山下。國號爲渤海。開元二十年。怨恨天朝。將兵掩襲登州。殺刺史韋俊。於是帝大怒。命內史高品,何行成。太僕郞金思蘭發兵。過海攻討。仍就加我王金某爲正太尉。持節充寧海郡事,鷄林州大都督。以冬深雪厚。蕃漢苦寒勑命回軍。至今三百餘年。一方無事。滄海晏然。此001_138c乃我武烈大王之功也。今致遠儒門末學。海外凡材。謬奉表章。來朝樂土。凡有誠懇。禮合披陳。伏見元和十二年。本國王子金張廉飄風至明州下岸。浙東某官。發送入京。中和二年。入朝使金直諒爲叛臣作亂。道路不通。遂於楚州下岸。邐迤至楊州。得知聖駕幸蜀。高太尉差都頭張儉監押。送至西川。已前事例分明。伏乞太師侍中俯降台恩。特賜水陸券牒。令所在供給舟船熟食及長行驢馬草料。並差軍將監。送至駕前。幸甚。及還。王留爲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致遠自以西學多所得。欲展所蘊。而001_138d衰季多疑忌不能容。出爲太山郡太守。


 

圃隱先生文集卷之一 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五衛都揔府都揔管臣柳成龍奉敎校正
 [詩]
楊州 a_005_572d


經過楚地山川。想像隋家宮闕。往時興廢誰嗟。此日繁華可悅。仙花杳杳難尋。官柳依依堪折。晚來偶泊蘭舟。二十四橋明月。


[詩]
楊州竹西亭。懷松京諸友。 a_005_573a


大王堂壓石流淸。煬帝堤連草色靑。月夜故人松下路。春風孤客竹西亭。遠遊自識爲心苦。臨老欣逢至治馨。寄語諸君莫相憶。梯航來往接東溟。


 

태조 4년 을해(1395,홍무 28)
 6월6일 (무진)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치다

한양부(漢陽府)를 고쳐서 한성부(漢城府)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고쳤다.
【원전】 1 집 79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태조 6년 정축(1397,홍무 30)
 1월24일 (정축)
양주군을 승격시켜 부로 만들다

양주군(楊州郡)을 승격시켜 부(府)로 만들었다.
【원전】 1 집 100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태조 6년 정축(1397,홍무 30)
 12월15일 (계사)
양주 목장에서 강무하다

양주 목장(楊州牧場)에서 강무(講武)하였다.
【원전】 1 집 112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군사-병법(兵法)



 

 

 

 양주관아터 뒷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맞배지붕을 한 비각 안에 안치 보호하고 있다.

 정조 16년 (1792년)9월 정조대왕이 광릉 (세조의 늘)에 행차할때 북쪽길을 택하였다가 귀환하는 길에 이곳에 행차하여 3일간 머물며 민정을 살피고 잔치를

 베풀었다 자니츨 배풀면서 활을 쏜것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양주목사 이민채가 비문을 써서 기념비를 건립한것이다.  

   과녁판

  동헌의 뒷모습

  동헌의 편액 모습

   동헌의 전면의모습

 양주관아지 설명 표석  

   양주관아지 유 허비

  옛 관아터에 중앙에 동헌을 복원하여 신축하고 여러곳에 흩어져있던 전임 양주목사 들의 송덕비를  모아놓은곳이다

  가장오래된 목사 백인걸 선정비는 선조1년 1567년에 세워졌고 나중것인 군수 홍태운 불망비는 광무 8년 1904년 에 세워졌다

  모두 18기로 17기는 송덕비이고 1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89년 10원에 새운 유허비이다

  유허비에는 관아지의 유래와 관청의 위치와 업무등을 기록해 놓았다. 

 양주목사  조규년 불망비

 

철종 7년 병진(1856,함풍 6)
 11월20일 (갑술)
좌의정 김도희가 전최를 엄하게 신칙하고 탐묵을 경계할 것을 청하다

희정당(熙政堂)에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도희(金道喜)가 아뢰기를,
“수령(守令)을 신중히 가리고 전최(殿最)를 엄하게 밝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공사(公私)와 이해(利害)를 분명히 알아내어 차제(差除)하고 출척(黜陟)하는 것을 어찌 문구(文具)에만 돌리겠는가? 묘당(廟堂)에서는 전조(銓曹)와 도신(道臣)에게 각별히 신칙(申飭)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탐묵(貪墨)을 징계(懲戒)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자신이 부정(不正)한 일이 있고서 남을 바로잡는 사람은 없으니, 청렴 결백하고 탐욕(貪慾)이 많은 것은 모두 나로부터 사물(事物)에게 미치는 것이다. 은택(恩澤)을 받아서 덕화(德化)를 베풀면 하읍(下邑)이 따라오게 되니, 장부(臧否)를 출척하는 데에 어찌 친척(親戚)과 강어(强禦)를 용납하겠는가? 경(卿)의 말이 바로 나의 뜻과 합하니 마땅히 더욱 유심(留心)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정(正) 조규년(趙奎年)·조규순(趙奎淳)과 황주 목사(黃州牧使) 이시민(李時敏)은 이미 정식의 의망(擬望)을 통과했습니다. 비록 아직 심사(審査)를 거치지는 못했으나, 한두 가지의 가까운 예(例)에 의거하여 좌이(佐貳)와 승지(承旨)를 똑같이 검의(檢擬)하는 뜻으로, 청컨대 전조(銓曹)에 분부(分付)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원전】 48 집 608 면
【분류】 *인사(人事)


[주D-001]전최(殿最) : 조선조 때 관리들의 근무 성적을 상·하로 평정하던 법. 상이면 최(最), 하이면 전(殿)이라 한 데에서 나온 말로, 경관(京官)은 각 관사의 당상관(堂上官)·제조(提調)가, 외관(外官)은 관찰사(觀察使)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 두 차례에 걸쳐 등제(等第)를 매겨 계문(啓聞)하였음.
[주D-002]차제(差除) : 벼슬에 임명함.
[주D-003]출척(黜陟) : 등용과 축출.
[주D-004]장부(臧否) : 선악(善惡).
[주D-005]강어(强禦) : 억세어 남의 충고를 듣지 않는 사람.
[주D-006]좌이(佐貳) : 육조(六曹)의 참판(參判)과 참의(參議).

 

 

증정교린지 제4권
 지(志)
휼전(恤典) 왜인으로서 왜관에 있다가 죽은 자와 도중에 물에 빠져 죽은 자 및 관우(館宇)의 실화(失火) 등의 일은 조정에서 그때마다 경중을 구별하여 자급해 준 물품이 있었는데 이것을 휼전이라 한다.


광해군 2년 경술(1610) - 동래 부사 조존성(趙存性)의 장계에 의하여, 왜인들에게 땔나무와 숯을 지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죽은 왜인을 화장하게 하였다. -
4년 임자(1612) - 동래 부사 성진선(成晋善)의 장계에 의하여, 세견제17선의 격왜 1명이 죽었으므로 왜관의 뒷산에 묻어 안치하게 하였다. -
5년 계축(1613) - 동래 부사 이창정(李昌庭)의 장계에 의하여, 특송선 격왜 1명이 죽었으므로 화장에 쓰이는 나무를 지급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화장하게 하였다. -
효종 4년 계사(1653) - 동래 부사 임의백(任義伯)의 장계에 의하여, 차왜 귤성정(橘成正)이 죽었으므로 쌀섬[米石], 장백지(壯白紙), 유둔(油芚)을 지급하였다. -
현종 원년 경자(1660) - 동래 부사 정태제(鄭泰齊)의 장계에 의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불이 났으므로 쌀 300섬을 주어서 위문하였다. -
8년 정미(1667) - 동래 부사 이지익(李之翼)의 장계에 의하여, 왜관에 불이 났으므로 조정에서 역관을 보내어 관수왜(館守倭)를 위문하고 쌀 100섬을 내려주었다. -
11년 경술(1670) - 동래 부사 정석(鄭晳)의 장계에 의하여, 관수왜가 승선한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부서져 두왜(頭倭) 1명이 물에 빠져 죽고 그 나머지 왜인들도 벌거벗은 몸으로 왔으므로 조정에서 경상 감영(慶尙監營)으로 하여금 공목(公木) 1동을 지급해 주도록 하였다. -
12년 신해(1671) - 차왜 평성태(平成太)가 왜관의 이전을 청하려고 와서 동래부에 함부로 들어왔다가 왜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목판(木板) 3립(立), 방주(方紬 명주) 1필, 소금 1섬은 동래부에서 지급해 주고, 저포(苧布) 2필, 유둔(油芚) 2부는 사예단(私禮單) 중에서 취하여 지급하였고, 쌀 10섬, 백목면(白木綿) 15필, 백면주(白綿紬) 5필, 유둔 3부, 꿀[淸蜜], 참기름, 호두, 잣[栢子], 곶감[乾柿]은 경상도로 하여금 갖추어 지급하도록 하였고, 부용향(芙蓉香), 납촉(蠟燭)은 서울로부터 내려 보내어 접위관으로 하여금 별도의 예단을 작성하여 지급하게 하였다. - 왜관 실화(倭館失火) - 조정에서 역관을 보내어 관수왜(館守倭)를 문위하고, 쌀 200섬, 공목(公木) 10동을 관왜(館倭)에게 지급하였고, 면주(綿紬), 저포(苧布), 백목면(白木綿), 황모필(黃毛筆), 참먹[眞墨], 화석(花席), 유둔(油芚)을 왜관에 있던 차왜와 관수왜에게 제급하였다. -
13년 임자(1672) - 동래 부사 이하(李夏)의 장계에 의하여, 왜관에 불이 났으므로 관수왜 등에게 쌀 200섬, 공목 5동을 지급하고 예조에서 내려보낸 예단(禮單)을 문위관으로 하여금 주도록 하고, 금도왜(禁徒倭) 등에게는 쌀 50섬, 공목 3동을 제급하였다. -
15년 갑인(1674) - 동래 부사 이하(李夏)의 장계에 의하여, 왜관에 불이 났으므로 쌀 100섬, 공목 5동을 제급하였다. -
숙종 3년 정사(1677) - 동래 부사 이복(李馥)의 장계에 의하여, 옛 왜관 동쪽 행랑 13칸과 육물고(陸物庫) 7칸이 모두 불타버렸으므로 쌀 200섬을 관수왜에게 제급하여 그로 하여금 관왜(館倭)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
6년 경신(1680) - 동래 부사 이서우(李瑞雨)의 장계에 의하여, 두왜 원성중(源成重)이 그의 아버지가 대관(代官)으로 왔다가 죽어 옛 왜관 근처에 매장하였는데 이제 새 왜관 근처에 옮겨 매장하여 참배하고 묘 관리하는 데 편하게 해 달라고 하므로 허락하였다. - 관수왜가(館守倭家)의 실화(失火)- 동래 부사 조세환(趙世煥)의 장계에 의하여 조정이 특별히 공목 3동과 쌀 50섬을 하사하였다. -
9년 계해(1683) - 동래 부사 소두산(蘇斗山)의 장계에 의하여, 두왜가 말하기를 “종전에 관우에서 불이 났을 때 수역(首譯)을 내려보내 문위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해 강호(江戶)에서 불이 나 도주의 집과 보물과 재화가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비록 대마도에 문위하지 않더라도 한 명의 역관을 보내어 관수에게 위문을 하고 도주에게 이를 보고하게 하면 아마도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라고 하므로 장차 역관을 내려 보내려고 할 때 관백(關白)의 사군(嗣君)이 죽었다는 부음이 왔으므로 조위할 때에 아울러 문위하도록 하였다. -
34년 무자(1708) - 동래 부사 한배하(韓配夏)의 장계에 의하여, 왜관 서쪽 행랑 56칸에 불이 났으므로 경신년(1680, 숙종6)의 예에 의하여 공목 3동과 쌀 50섬을 제급하였다. -
39년 계사(1713) - 동래 부사 이명준(李明俊)의 장계에 의하여, 왜관의 두부를 만드는 긴행랑 90칸에 불이 났으므로 공목 2동, 쌀 30섬을 제급하였다. -
45년 기해(1719) - 동래 부사 서명연(徐命淵)의 장계에 의하여, 왜선 2척이 표류하다가 지세포(知世浦)에 이르러 파손되어 왜인 1명이 물에 빠져 죽었으므로 옷감을 제급하였다. -
경종 4년 갑진(1724) - 동래 부사 조석명(趙錫命)의 장계에 의하여, 재판왜(裁判倭) 등방창(藤方昌)이 죽었으므로 부물(賻物)로 사군목(射軍木) 15필과 왜료(倭料)로 사용하고 남은 쌀 7섬, 장지(壯紙) 10속, 유둔 2부를 임관(任官)으로 하여금 봉진압물(封進押物) 등에게 지급하도록 하였다. -
영조 28년 임신(1752) - 동래 부사 신위(申暐)의 장계에 의하여, 재판차왜평여친(平如親)이 죽었으므로 경종 갑진년(1724, 경종4)의 예에 의하여 부물(賻物)을 제급하였다. -
30년 갑술(1754) - 동래 부사 임상원(林象元)의 장계에 의하여, 왜선이 몰운대(沒雲臺)에서 부서져 왜인 1명이 물에 빠져 죽고, 생존한 10명에게는 각각 회목(會木) 1필, 왜료(倭料)로 사용하고 남은 쌀 1섬을 지급하고, 빠져 죽은 왜의 시신은 다대진(多大鎭)에서 베를 지급하여 이불을 만들어 그것으로 시신을 싸게 하고 이어 배에 실어 관왜(館倭)에게 운반하여 왜관의 뒷산에 매장하도록 하였다. -
41년 을유(1765) - 동래 부사강필리(姜必履)의 장계에 의하여, 되돌아가던 왜선이 경상 우도(慶尙右道)에 표류하여 정박하였는데 중금도왜(中禁徒倭) 1인이 병사하였으므로 관으로 쓸 판자와 못을 표박한 곳에서 원하는 대로 제급하였다. -
52년 병신(1776) - 동래 부사 김제행(金悌行)의 장계에 의하여, 강화의 표류민을 데리고 온 도두금도왜(都頭禁徒倭)의 배가 기장(機張) 원앙대(鴛鴦臺) 앞바다에 이르러 부서졌고 표류민의 배는 동래부 선신암(仙神巖) 앞바다에 이르러서 부서졌다. 왜인과 우리나라 사람 모두 살아 작은 배에 옮겨 탔고, 파선한 두 배에 타고 있었던 왜인 33명은 갑술년(1754, 영조30)의 예에 따라 회목(會木) 각 1필, 왜료(倭料)로 사용하고 남은 쌀 각 1섬을 지급하였다. 파선한 배에 타고 있던 왜인을 들여보낸다는 뜻을 서계로 만들어 금군(禁軍)으로 하여금 가지고 내려가게 하였다. -
정조 4년 경자(1780) - 동래 부사윤사국(尹師國)의 장계에 의하여, 무술(1778, 정조2)조의 1특송사왜를 동대청에 머무르게 하고 접대하였는데, 이곳의 서쪽 행랑이 불에 탔으므로숙종조 경신년(1680, 숙종6)의 예에 의하여 공목 3동, 쌀 50섬을 제급하였다. -
10년 병오(1786) - 동래 부사 홍문영(洪文泳)의 장계에 의하여, 왜관의 개시대청 공1대관왜가(公一代官倭家)와 공대관왜 회계가(公代官倭會計家)가 모두 불타 버려 묘당에서 공목 2동, 쌀 30섬을 관수왜에게 제급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삼가 조심하지 못하고 불을 내어 죄송하온데 특별히 휼전을 내리시니 황감히 송축합니다.”라고 하였다. -
16년 임자(1792) - 동래 부사 윤필병(尹弼秉)의 장계에 의하여, 왜인 3명이 옛 영등포구(永登浦口)에서 빠져 죽었으므로 죽은 왜에게는 사군목(射軍木) 10필, 왜료(倭料)로 사용하고 남은 쌀 5섬, 장지(壯紙) 5속, 유둔(油芚) 2부를 제급하고, 생존한 왜인 17명에게는 별회목(別會木) 1필과 왜료(倭料)로 사용하고 남은 쌀 1섬을 각각 제급(題給)하였다. -
17년 계축(1793) - 1특송사 정관왜(正官倭) 평구관(平矩寬)이 다례(茶禮)를 행한 후에 죽었으므로 영조 임신년(1752, 영조28) 재판차왜가 죽었을 때의 예에 의하여 사군목(射軍木) 15필, 왜료(倭料)로 사용하고 남은 쌀 7섬, 장지(壯紙) 10속, 유둔(油芚) 2부를 경상도로 하여금 제급하게 하였다. -
21년 정사(1797) - 동래 부사 정상우(鄭尙愚)의 장계에 의하여, 되돌아가던 왜비선(倭飛船) 1척이 표류하여 기장(機張) 비옥포(飛玉浦)에 이르러 여러 조각으로 부서진 까닭에 사람과 짐은 우리 배에 옮겨 싣고, 왜인 7명에게는 전례에 따라 각각 왜료미(倭料米) 1섬, 별회목(別會木) 1필을 경상도에 알려서 제급하도록 하였다. -
순조 6년 병인(1806) - 동래 부사 오한원(吳翰源)의 장계에 의하여, 왜대선(倭大船) 1척에 왜인 37명이 공작미(公作米) 500섬을 싣고 순풍을 기다리고 있다가 풍우에 휩쓸려 왜관 남쪽 복병막 앞바다에 이르러 이내 배가 파선되었으므로 동왜(同倭) 등에게 각각 왜료미 1섬과 별회목 1필씩을 제급하였다. -
23년 계미(1823) - 동래 부사 이규현(李奎鉉)의 장계에 의하여, 대마도의 민가 3천여 호가 모두 불탔는 바 백성을 구제할 길이 없어서 관수왜(館守倭)가 청하여 말하기를 “금년 공작미로 준비해 둔 수량을 지급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판부(判付)내에 “전에 대마도에 불이 났을 때에 별도의 휼전을 베푼 예가 있다. 또 공작미는 이미 당연히 지급했어야 할 물건이니 형편을 잘 헤아려 지급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
헌종 6년 경자(1840) - 동래 부사 이명적(李明迪)의 장계에 의하여, 제4선송사 정관 등신년(藤信年)이 다례를 행한 후에 죽었으므로 부물(賻物)을 정조 17년 계축(1793)에 1특송사가 죽은 예에 따라 경상도로 하여금 제급하게 하였고, 하선연(下船宴)은 정지하였고, 진상물건(進上物件)은 훈도(訓導)로 하여금 받들고 나가게 하였다. -
10년 갑진(1844) - 동래 부사 임영수(林永洙)의 장계에 의하여, 통신강사차왜(通信講事差倭) 평질명(平質明)이 죽었으므로 부물(賻物)은 진실로 전례를 살펴보아 합당하게 제급하여야 하는데, 규정 이외의 차왜가 접대를 허락받기도 전에 죽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교대하여 도래한 차왜에 대해서도 이미 접대를 허락하였으므로 규정 이외의 여부는 지금 가히 논할 수 없다. 죽은 차왜에게 주는 부물은 경종 갑진년(1724, 경종4)의 연한재판왜가 죽은 예에 의하여 경상도로 하여금 제급하게 하였다. -
철종 원년 경술(1850) - 동래 부사 이의익(李宜翼)의 장계에 의하여, 공작미연한청퇴 재판차왜(公作米年限請退裁判差倭) 등장명(藤章明)이 죽었으므로 부물은 경종 갑진년(1724, 경종4)의 예에 의하여 경상도로 하여금 제급하게 하였다. -
12년 신유(1861) - 동래 부사 박신규(朴臣圭)의 장계에 의하여, 가배량(加背梁) 근구미(芹仇味) 앞바다에서 파선한 왜인 32명에게 각각 왜료미(倭料米) 1섬과 별회목(別會木) 1필을 가경(嘉慶) 정사(1797, 정조21), 병인(1806, 순조6)의 예에 의하여 제급하였다. -
같은 해(1861) - 동래 부사 조규년(趙奎年)의 장계에 의하여, 양산(梁山)의 표류민을 데리고 오던 왜인 2명이 바다 가운데서 파선하여, 파선한 배의 나무에 실려 떠다니다가 울산(蔚山) 경계에 정박하였으므로 우리 배에 옮겨 태워 거느리고 와서 왜관에 머무르게 하고 각각 왜료미(倭料米) 1섬과 별회목(別會木) 1필을 경상도로 하여금 제급하게 하였다. -


 

[주D-001]세견제17선 : 《변례집요(邊例集要)》 권10 휼전(恤典)에는 세견제20선으로 되어 있다.
[주D-002]장백지(壯白紙) : 《변례집요(邊例集要)》 권10 휼전(恤典)에는 백지(白紙), 장지(壯紙)로 되어 있다.
[주D-003]대마도(對馬島)에 불이 났으므로 : 《춘관지(春官志)》 권3 부 마도ㆍ강호실화(附馬島江戶失火)에 의하면 이 화재로 100여 호(戶)가 불에 탔다고 한다.
[주D-004]쌀 …… 위문하였다 : 대마도주 종의진(宗義眞)의 환도(還島)를 문위하기 위해 파견된 역관 김근행(金謹行)과 한상국(韓相國) 편에 보냈다. 이외에도 현종 2년(1661) 12월에는 대마도에 화재가 발생해서 사찰과 민가 2천여 채가 불에 타 왜인들이 물품을 보내주기를 요청하였으나 동래 부사 이원정(李元禎)이 우리나라 역시 기근이 심하여 돌볼 겨를이 없다 하여 거절하였다. 《顯宗實錄 2年 12月 己巳》
[주D-005]쌀 100섬을 내려주었다 : 처음에는 쌀 100섬과 공목(公木) 5동(同)을 지급하기로 하였으나 그 수가 너무 많다는 비변사의 지적에 따라 공목은 지급하지 않았다. 《邊例集要 卷10 恤典》
[주D-006]동래 부사 …… 하였다 : 관수(館守) 및 종왜(從倭), 격왜 등 48명에게 옷을 만들 재료로 공목 1동(同)을 지급하였다. 《邊例集要 卷10 恤典》
[주D-007]꿀[淸蜜] …… 곶감[乾柿] : 《변례집요(邊例集要)》 권10 휼전(恤典)에 의하면 꿀 5말, 참기름 5말, 호두 7말, 잣 7말, 곶감 7첩이다.
[주D-008]부용향(芙蓉香), 납촉(蠟燭) : 《변례집요(邊例集要)》 권10 휼전(恤典)에 의하면 부용향은 10자루이고 납촉은 10쌍이다.
[주D-009]면주(綿紬) …… 제급하였다 : 《변례집요(邊例集要)》 권10 휼전(恤典)에는 면주ㆍ양색저포(兩色苧布) 각 5필, 백목면 10필, 황모필 20자루, 화석 5장, 유둔 2부, 참먹 20개를 차왜 평성태(平成太)와 부관(副官) 평성지(平成之) 및 관수왜 등에게 나누어 지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D-010]쌀 200섬 : 《변례집요(邊例集要)》 권10 휼전(恤典)에는 100섬으로 되어 있다.
[주D-011]동래 부사 …… 제급하였다 : 당하역관(堂下譯官)을 내려 보내 문위하였다. 《邊例集要 卷10 恤典》
[주D-012]관수왜가(館守倭家)의 실화(失火) : 숙종 6년(1680) 6월에 관수왜가 48칸이 전소되었다. 《春官志 卷3 附失火改造》 복원 공사는 숙종 10년(1684)에 시작되어 16년(1690)에 완공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수리 외에 공목(公木) 3동, 쌀 50섬을 내려주어 위로하였다.
[주D-013]동래 부사 …… 제급하였다 : 《춘관지(春官志)》 권3 부 실화개조(附失火改造)에는 서관 동대청과 서쪽행랑 56칸이 연소되었으며, 문위관(問慰官)은 보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복원 공사는 숙종 40년(1714)에 시작하여 다음해에 마쳤다. 《邊例集要 卷11 館宇》
[주D-014]왜관의 …… 났으므로 : 《춘관지(春官志)》 권3 부 실화개조(附失火改造)에는 하금도왜(下禁徒倭)와 격왜(格倭) 등이 거처하는 집을 포함하여 도합 90칸이 연소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D-015]공목 2동 …… 제급하였다 : 다른 사례보다 공목이나 쌀의 수량이 줄어든 것은 연소된 건물이 조선에서 짓고 관리하는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위관도 파견되지 않았다. 《邊例集要 卷10 恤典》
[주D-016]동래 부사 …… 제급하였다 : 격왜 1명이 익사하였고, 살아남은 왜인 30명에게는 각각 별회목(別會木) 1필과 왜료(倭料)로 쓰고 남은 쌀 1섬을 지급하였다. 《邊例集要 卷10 恤典》
[주D-017]임관(任官) : 훈도(訓導)와 별차(別差)를 가리킨다.
[주D-018]이곳의 …… 탔으므로 : 이때 행랑 56칸과 5칸의 문간이 전소되었으며, 복원 공사는 정조 10년(1786) 6월에 시작되어 이듬해 3월에 끝났다. 《邊例集要 卷11 館宇》
[주D-019]왜관의 …… 불타 버려 : 이때 개시대청 39칸, 공일대관왜가 90칸, 공대관왜의 회계가 30칸, 별대관왜의 회계가 15칸 등이 전소되었다. 정조 15년(1791)에 재건하였다. 《邊例集要 卷11 館宇》
[주D-020]동래 부사 …… 제급하고 : 《변례집요(邊例集要)》 권10 휼전(恤典)에 의하면 처음에는 갑진년(1724, 경종4)과 임신년(1752, 영조28)의 예에 따라 사군목(射軍木) 15필, 왜료로 사용하고 남은 쌀 7섬, 장지 10속, 유둔 2번(番)을 지급하기로 하였으나 서계를 분실하였고 재판차왜와 차이를 두지 않을 수 없으므로 줄여서 지급하였다.

 

중종 28년 계사(1533,가정 12)
 1월28일 (신미)
동지사 윤은필의 장계와 예조의 공사를 내리고 전교하다

동지사(冬至使) 윤은필(尹殷弼)의 장계와 예조의 공사(公事)를 내리고 인하여 전교하였다.
“관압사(管押使)가 군령을 엄하게 하지 않아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중국인에게 피살 되었고 관무역의 물건도 도둑을 맞게 하였으니 이것은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에게도 잘못이 있다. 단련사(團練使)와 한후장(捍後將)을 조옥(詔獄)에 잡아들여 군령을 엄하게 하지 않은 죄를 다스리고 동지사의 서장관정대년(鄭大年)임.】 등도 조옥에서 추고하게 하라.”
【원전】 17 집 390 면
【분류】 *외교-명(明)

 

墓誌銘
成均進士潘南朴君墓誌銘 幷序 a_298_437a


君諱宗喬。字孟執。潘南人。上祖文正公諱尙衷。高麗右文館直提學。有罔僕之節。生諱訔。本朝左議政諡平度公。數世有諱承任。副提學。師事退陶先生。學298_437b者稱嘯臯先生。四世諱文燁。進士。於君爲高祖。曾祖諱鼎九。祖諱師豹。僉樞。考諱時源。司諫。號逸圃。妣安東權氏。士人相虎女。正廟己酉。君生。五歲。屬字。未十歲。已曉文義。丁卯權氏疾病。君夙夜焦憂。禱天斷指。及遭故。誠禮俱摯。葬在二十里。每五日哀省。甲戌。陞上庠。居泮齋屢年。不一跡泮橋外。晩塢李公。嘗語先公曰。胤君恬雅。非科臼中人。終必爲吾黨之望。壬寅。遭憂。式禮不懈。三年之內。居不當先公之座。收拾先稿。手自淨寫。每下廁。必盥手以致敬。服旣闋。必晨謁。祭則躳滌器。具衣冠。肅然如將見之。餕席餘敬僾298_437c然。丙辰疾終。從葬先公于月湖負艮之原。配昌原黃氏。士人義漢女。息庵後。仁同張氏。士人象矩女。五男庚壽,亨壽,明壽。二幼。三女金輝京,權忠夏,李中呂。庚壽三男。齊喆,齊兢。一幼。亨壽四男幼。女李中鼎。金輝京男碩奎。女姜有馨趙奎年。權忠夏二男▣淵。一幼。一女亦幼。君性狷介而喜平恕。柔巽而好檢束。不病於簡亢。不滯於膠固。雖在衆論紛紜之際。而所守確然。晩而絶意進取。留心經禮。嘗書座右曰。切己用力。當如謝上蔡之去箇矜字。日用盡誠。當如劉元城之自不妄語始。變化氣質。當如呂伯恭之躳自厚而薄298_437d責於人。可以見其志矣。君嘗辱與過從。百里躳駕。或在神疲氣倦之日。又聞將見訪。中路感疾。歸遂不起。爲之惕然以悲。迺者。賢仲氏又嗣而委尋。且屬一言。義有不可辭者。謹摭其狀而爲誌。而系之以銘曰。
質之淳者。不隨俗弛。覺之晩者。不與老委。吾讀君座右之戒。尤恨年壽之不俟。

性齋先生文集卷之二十
 墓誌銘
成均進士太初堂許公墓誌銘 a_308_405c


公諱恁字敬翁號太初堂。金海許氏。首露王之後。高麗時有諱琰。三重大匡封駕洛君。至諱增仕本朝吏曹參判。子彥龍禮曹判書選淸白。六傳至禎。生進俱中。師事趙靜庵。北門禍作。同太學生守闕號哭。子世節參奉無子。取兄世敦子景胤子之。遺逸薦授禮賓寺直長。丙子之亂。倡義旅。至中道聞已講和而歸。號竹庵。四世而有諱孚號杏窩。生二子。長頊次璞。璞無子。以兄子暾爲子。生員。是爲公皇考也。俱隱德不仕。妣鐵城李氏垕陽女。松巖魯之後。有賢婦人行。公生而秀穎。七歲授書。已曉大義。不煩提敎。十308_405d一歲讀書僧舍。夜如廁。有虎至。堅坐不動。僧問何不走避。答曰人動則虎必隨動。故靜以俟虎去。十三文詞已就。又名善書。十四母病大腫。公吮其膿三月而瘳。公從兄默庵公受業於鄭立齋宗魯。造詣甚高。公就學焉。時年十七。欲專意學問。爲親在兼治功令。三十二登國子上庠。乙亥荐遭內外艱。泣血幾滅性。送終以禮。隣里咸稱孝子之喪親也。戊寅嶺南章甫訟樊巖蔡相國寃。公與焉。甲寅冬疾病。戒子孫喪祭寧儉無僭。葬地勿爲靑烏家禍福說所惑。語婦女以奉先待賓之節。以乙卯正月四日終。距生年壬寅七十有四。葬開寧。後改葬仁同梧里負丑原。公姿性純308_406a厚。儀像俊偉。擧止凝重。自始加元服。一不露髻。不設箕踞怠慢之容。無疾言遽色。持身不矜而嚴。接人不流而和。其內行則祭日必致愛愨。及其羸癃不堪跪奠。則具祭服伏於位。使子孫替拜。生朝禁絶酒饌曰劬勞之日。當倍悲痛。友于弟。產業器用。分析極均。弟亦事之如嚴父。晨夕問寢。竟日相對。夜分而退。有妹貧甚。亦給田宅。同里而居。子姪雖鍾愛。亦不出於規繩之外。每致意於睦婣任恤。待而擧火者甚多。嫁娶喪葬。助其不給者。藏獲有過。必警譬於無人之地曰爾亦人子。不欲使汝過聞於人。其寬仁如此。盖公志氣卓犖。胷襟灑落。早襲家庭之義方。長由儒門之正308_406b路。不喜雜書。案上惟心經近思錄,朱子書,退陶集。每晨興謁廟。退而開卷。晩年築家塾以待學者。有朝望之講。有鄕約之契。常曰初學立志爲先。入道惟敬爲主。又寡其慾。以復天性。每以洋術之害正爲憂。作書斥之。所著太極動靜之說。心性理氣之辨。庸學通論。禮經辨錄。皆足以羽翼斯文。有草稿十卷。其詩若文。不事雕刻。惟取理順辭達而已。若其麗澤之習則講通書而柳鶴棲台佐稱其博洽。論無極而申處士宅京服其精微。讀敬齋箴而柳江臯尋春善其分析。李古溪彙寧行飮禮。迎以爲賓。張新齋錫愚續旅軒集。與之同修。其餘文人之偲切觀磨者。常常滿座。人謂308_406c山林之高士。一鄕之模楷。故屢登薦剡。知府趙奎年曰靑山古宅。白首竆經。按使權敦仁曰經學有餘才。行兼備繡衣。金基纘曰文識淹博。行檢修飭。選部注擬於寢郞者五而竟未得一命。命矣夫。然何損於公。曾有一時宰聞公名欲媒致之。公辭曰士之處身。無異處子。何可自售。此可見平日操守也。配豊山柳氏。文忠公西厓先生之后履祚女。墓在大丘法化。後配玉山張氏。文康公旅軒先生之後。五衛將復之女。無育。以弟長子爲子早夭。以第二子祚長子薰爲后。年幼。取第三子禧爲攝祀子。此無於禮之禮而重宗之義云。銘曰。
308_406d重厚多質敦乎仁。孝友且慈親其親。篤志好學希天民。遯世无悶其樂眞。銘此玄石詔後人

 

 

 군수  홍태윤 불망비

고종 39년 임인(1902, 광무 6)
  11월21일 (정축, 양력 12월 20일)
 경기 관찰사 이근명 등과 함께 홍릉의 능 위를 도로 봉축할 때 나아가겠다는 의정부찬정 내부대신 김주현의 계
○ 의정부찬정 내부대신 김주현(金疇鉉)이 삼가 아뢰기를,
“오늘 음력 11월 21일 병시(丙時)에 홍릉의 능 위를 도로 봉축할 때에 신이 경기 관찰사 이근명(李根命)과 양주 군수(楊州郡守) 홍태윤(洪泰潤)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삼가 상주합니다.”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받들었다.
고종 40년 계묘(1903, 광무 7)
  11월29일 (기유, 양력 1월 16일)
 12월 2일 산릉에 봉표할 때 경기 관찰사 주석면 등과 함께 나아가겠다는 내부 대신 이헌영의 계
○ 내부 대신 이헌영(李永)이 삼가 아뢰기를,
“이번 음력 12월 2일 진시(辰時) 산릉에 봉표할 때에 신이 경기 관찰사 주석면(朱錫冕), 양주 군수(楊州郡守) 홍태윤(洪泰潤)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삼가 상주합니다.”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받들었다

고종 41년 갑진(1904, 광무 8)
  8월12일 (무오, 양력 9월 21일)
 육군 참령에 육군 정위 정인환 등을 임용하였다
○ 육군 정위 정인환(鄭寅煥)ㆍ이해원(李海元)ㆍ이희승(李煕昇)ㆍ유진형(兪鎭瀅), 전 영관(領官) 홍태윤(洪泰潤)을 육군 참령(陸軍參領)에 임용하였다.
고종 43년 병오(1906, 광무 10)
  4월21일 (무오, 양력 5월 14일)
 동구릉 주룡을 보축할 때의 별단에 대해, 양주 군수 홍태윤 등에게 시상하라는 조령
○ 비에 무너져 내린 동구릉(東九陵) 주룡(主龍)을 보축(補築)할 때의 별단과 관련하여 조령을 내리기를,
“감동(監董)인 양주 군수(楊州郡守) 홍태윤(洪泰潤)에게 아마(兒馬) 1필을 사급(賜給)하라.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 이규동(李揆同)과 현릉 참봉(顯陵參奉) 이응렬(李應烈)은 모두 승륙(陞六)하라. 태릉 참봉(泰陵參奉) 이재광(李載光)에게 아마 1필을 사급하라. 강릉 참봉(康陵參奉) 서병돈(徐丙敦)과 목릉 참봉(穆陵參奉) 최영직(崔永稷)은 모두 승륙하라. 휘릉 참봉(徽陵參奉) 한익원(韓翼源)과 숭릉 참봉(崇陵參奉) 구돈서(具敦書)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혜릉 참봉(惠陵參奉) 홍순익(洪淳翼)은 승륙하라. 원릉 참봉(元陵參奉) 신현갑(申鉉甲), 수릉 참봉(綏陵參奉) 이태응(李台應), 경릉 참봉(景陵參奉) 이은필(李殷弼)에게 각각 아마 1필을 사급하라. 9품 김승민(金升旼)은 승륙하라. 6품 오석영(吳錫泳)은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고종 43년 병오(1906, 광무 10)
  6월21일 (병술, 양력 8월 10일)
 수원 군수 이완용 등에 대해 감봉하였다
○ 수원 군수(水原郡守) 이완용(李完鎔), 양주 군수(楊州郡守) 홍태윤(洪泰潤), 전(前) 여주 군수(驪州郡守)인 무안 군수(務安郡守) 이준규(李峻奎), 양근 군수(楊根郡守) 양재익(梁在翼), 포천 군수(抱川郡守) 이해성(李海盛), 영평 군수(永平郡守) 서상붕(徐相鵬), 남양 군수(南陽郡守) 방한덕(方漢德), 청주 군수(淸州郡守) 민영은(閔泳殷), 영동 군수(永同郡守) 서회보(徐晦輔), 전 임천 군수(林川郡守)인 공주 군수(公州郡守) 김갑순(金甲淳)에 대해서 모두 2주일 감봉하였다.
고종 42년 을사(1905, 광무 9)
  12월29일 (정묘, 양력 1월 23일)
 양주 풍양의 비각을 증건하고 비석을 수립할 때의 별단에 대해, 양주 군수 홍태윤 등에게 시상하라는 조령
○ 양주(楊州) 풍양(豐壤)의 비각을 증건하고 비석을 수립할 때의 별단과 관련하여 조령을 내리기를,
“감동(監董)인 양주 군수(楊州郡守) 홍태윤(洪泰潤)에게 아마(兒馬) 1필을 사급(賜給)하라. 6품 유기세(柳基世)ㆍ조동원(趙東元)ㆍ이천응(李天應)ㆍ구연태(具然泰)ㆍ김기동(金箕東)ㆍ이희돈(李喜敦)ㆍ오승근(吳承根)ㆍ김영훈(金永薰)ㆍ이시우(李時雨)ㆍ황종석(黃鍾石)ㆍ이상연(李相淵), 5품 임정상(林廷相)ㆍ안우묵(安佑默), 종2품 김사준(金思濬)ㆍ박이병(朴彝秉)ㆍ이근홍(李根洪), 정3품 정건용(鄭建鎔)ㆍ정환덕(鄭煥悳)ㆍ백원규(白元圭)ㆍ민영채(閔泳采)ㆍ김영호(金榮灝)ㆍ구본순(具本淳)ㆍ이기표(李基豹)ㆍ이소영(李紹榮)ㆍ조경구(趙經九)ㆍ박병숙(朴炳淑)ㆍ정응설(鄭應說)ㆍ임병항(林炳恒)ㆍ이인학(李寅學)ㆍ김명욱(金明旭), 6품 조상우(曺相雨)ㆍ이학의(李鶴儀)ㆍ양주겸(梁柱謙)ㆍ이태연(李泰淵)ㆍ장도(張燾)ㆍ김재익(金在翊)ㆍ이용석(李用錫)ㆍ최한주(崔漢柱)ㆍ이종성(李鍾聲)ㆍ이재봉(李在鳳)ㆍ오주영(吳胄泳)ㆍ이완종(李完鍾)ㆍ서정철(徐廷喆)ㆍ정일섭(丁日燮)ㆍ유황렬(劉晃烈)ㆍ이영범(李瑛範)ㆍ양시혁(梁時赫)ㆍ박기순(朴基順)ㆍ이희상(李喜相)ㆍ김동수(金東洙), 4품 오익영(吳翊泳)ㆍ조재오(趙載五), 6품 신규식(申圭植), 정3품 박종선(朴悰善), 6품 황두연(黃斗淵)ㆍ이호진(李浩鎭)ㆍ정태로(鄭泰魯)ㆍ장세기(張世基)ㆍ신태형(申泰衡)ㆍ유원로(柳元魯)ㆍ서하순(徐夏淳)ㆍ현동헌(玄東憲)ㆍ방승헌(方承憲)ㆍ이영균(李泳均)ㆍ손기덕(孫基悳)ㆍ현제복(玄濟復)ㆍ허현(許炫)ㆍ김봉선(金鳳善)ㆍ정하영(鄭河永)ㆍ김정진(金定鎭)ㆍ정해로(鄭海魯)는 모두 가자(加資)하라. 9품 이성필(李誠弼)ㆍ오시연(吳時淵)ㆍ김정륜(金正倫)ㆍ김응표(金應杓)ㆍ권동한(權東漢)ㆍ김홍규(金鴻圭)ㆍ민병훈(閔丙薰)ㆍ이병두(李秉斗)ㆍ김완제(金完濟)ㆍ한귀현(韓龜鉉)ㆍ이민설(李敏卨)ㆍ이중삼(李重三)ㆍ이종숙(李鍾淑)ㆍ안순환(安淳煥)ㆍ김형찬(金亨燦)ㆍ정일섭(鄭壹燮)ㆍ허매(許邁)ㆍ이윤화(李允和)ㆍ김규수(金圭秀)ㆍ임재양(林在陽)ㆍ김치홍(金致弘)ㆍ정지석(鄭芝錫)ㆍ강필문(康弼文)ㆍ이규상(李圭尙)ㆍ이철신(李喆信)ㆍ심흥택(沈興澤)ㆍ원직상(元稷常)ㆍ이규신(李圭信)ㆍ이정봉(李楨鳳)ㆍ김재준(金在濬)ㆍ박증호(朴曾虎)ㆍ왕태근(王台根)ㆍ박지규(朴智珪)ㆍ설인석(薛寅錫)ㆍ김안세(金安世)ㆍ이정일(李廷一)ㆍ박명규(朴命圭)ㆍ전일완(全日完)ㆍ노관용(盧寬容)ㆍ홍병유(洪昺裕)ㆍ홍승필(洪承弼)ㆍ남정현(南廷賢)ㆍ남중섭(南重燮)ㆍ김지형(金枝瀅)ㆍ임용대(林容大)ㆍ윤명섭(尹明燮)ㆍ심영지(沈永之)ㆍ노상준(盧尙俊)ㆍ박춘길(朴春吉)ㆍ최상의(崔相宜)ㆍ김교익(金敎翼)ㆍ박기호(朴基鎬)ㆍ오철영(吳喆永)ㆍ김현갑(金顯甲)ㆍ김영채(金永采)ㆍ정양선(鄭亮善)ㆍ김명집(金明集)ㆍ최재도(崔在道)ㆍ박도상(朴道常)ㆍ신목균(申牧均)ㆍ김용성(金用聲)ㆍ윤희천(尹喜天)ㆍ변덕영(邊德永)ㆍ김희진(金煕鎭)은 모두 승륙(陞六)하라. 5품 이사범(李思範), 6품 황철주(黃轍周)ㆍ강홍두(康洪斗)ㆍ이익배(李益培)ㆍ유철영(柳哲永)ㆍ임병조(林炳祚)ㆍ신석휴(申奭休)ㆍ최식렬(崔式烈)ㆍ박치룡(朴致龍)ㆍ김관현(金寬鉉)ㆍ이항구(李恒九)ㆍ이갑(李甲)ㆍ김성원(金聖元)ㆍ고정후(高定厚)ㆍ장윤두(張潤斗)ㆍ왕원식(王瑗植)ㆍ김창석(金昌錫)ㆍ김봉현(金鳳鉉)은 모두 가자하라. 9품 채영석(蔡永錫)ㆍ신석영(申奭永)ㆍ이면화(李冕和)ㆍ홍순우(洪淳瑀)ㆍ신순관(申順寬)ㆍ설상호(薛相浩)ㆍ이만홍(李晩弘)ㆍ천석순(千錫淳)ㆍ오응묵(吳膺默)ㆍ홍순모(洪淳模)ㆍ윤완영(尹完榮)ㆍ박제설(朴齊說)ㆍ이학모(李學謨)ㆍ박맹채(朴采)ㆍ조현균(趙賢均)ㆍ김응환(金應煥)ㆍ김준식(金俊植)ㆍ이희태(李煕台)ㆍ조중관(趙重觀)ㆍ정상교(鄭庠敎)ㆍ김택준(金宅濬)ㆍ오원동(吳元東)은 모두 승륙하라.”
하였다.

 

 목사 정대년

 

 정대년(鄭大年)

 

조선 중종(中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동래(東萊)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정전(鄭荃)의 아들. 1532년(중종 27)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지냄.

중종 27년 임진(1532,가정 11)
 2월11일 (경인)
생원 정대년 등에게 문과 급제 출신을 내리다

생원 정대년(鄭大年) 등 5인에게 문과 급제 출신(文科及第出身)을 내렸다.
【원전】 17 집 355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국조보감 제26권
 선조조 3
8년(을해, 1575

○ 10월. 상이 직접 전주(銓注)를 보았다. 특명으로 김효원(金孝元)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제수하고 이르기를,
“이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서 조정을 편안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당연히 변방의 관리로 보임시켜야 한다.”
하였다. 이조 판서 정대년(鄭大年)과 병조 판서 김귀영(金貴榮) 등이 아뢰기를,
“경흥은 바로 극지의 변방으로 오랑캐 지역과 가까이 접하고 있으므로 서생(書生)이 지키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아뢰자, 이에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바꾸게 하였다. 또 특별히 심의겸을 개성 유수로 제수하였다. 이때 두 사람이 대립하고 있다는 말이 분분해 마지않았는데, 상의 뜻에는 효원이 먼저 틀어져서 스스로 당(黨)을 만들어 편안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주 먼 변방으로 내쫓아 지키게 하여 견책하는 뜻을 보인 것이고, 의겸은 선후(先后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지친(至親)으로서 가장 오랫동안 존중을 받았기 때문에 배도(陪都)로 내보낸 것이다.
○ 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이이가 《대학연의(大學衍義)》의 극기복례장(克己復禮章)을 강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안자(顔子)는 본디 이치를 훤히 궁구하며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에 대하여 흑백처럼 분명히 깨달았으므로 곧바로 극기복례의 네 글자에 종사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자는 단지 분명히 알았을 뿐만 아니라 실로 용기도 있었기 때문에 진취하기를 그치지 않은 것이다. 이를테면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한 말이 바로 용기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후세 사람들이 이 학문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뜻이 도탑지 못한 때문입니다. 상께서 이러한 점을 이미 아셨으니 뜻을 도탑게 하여 용감히 해 나가신다면 어느 경진들 이르지 못하겠습니까. 요즈음 상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는 분부를 내리실 적마다 여러 사람들이 감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있고 그러한 정치가 없으면 백성들은 혜택을 입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백성들의 삶이 지난날에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권간(權奸)이 국정을 담당했을 때에 비하면 각박한 것은 줄어든 듯합니다. 다만 세금과 부역의 법규가 사리에 매우 어긋나는데 만일 이 법을 고치지 않으면 날마다 백성을 걱정하는 전교를 내린다 하더라도 유익함이 없을 듯싶습니다.”
하였다.
○ 상이 경연에 나아갔는데 이이가 입시하였다. 글뜻을 강하다가 아뢰기를,
“옛날에는 학문이라는 명칭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행하는 떳떳한 도리가 모든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서 따로 표적으로 내세운 명목이 없었고 군자가 오직 당연히 해야 할 바를 실행했을 뿐이었는데, 후세에는 이 도리가 밝지 못하자, 이에 당연히 행해야 할 바를 행하는 사람을 학문하는 선비로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명칭이 성립되자 도리어 세상 사람에게 지목을 받아 작은 허물이라도 찾아내려 하고, 위선(僞善)으로 지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선을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적을 감추고 겉으로 합하여 학문한다는 이름을 피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후세의 큰 병폐입니다. 임금은 모름지기 학문을 주장하여 속류들이 비방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학문이란 어찌 별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날마다 행하는 사이에 옳은 도리를 구하여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추위가 심하구나. 나는 넓은 집ㆍ고운 모피(毛皮) 위에 있으니 어찌 견디지 못하겠는가마는, 염려되는 것은 변방의 수졸(戍卒)들이 밤을 지새며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성상의 뜻이 여기에 미치니 백성들의 복입니다. 수졸만이 아니라 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사람도 반드시 염려해주셔야 합니다.”
하였다.
○ 11월. 상이 야대(夜對)하였는데 시신(侍臣)이 글을 강론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은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는 것이니 두 가지가 애초부터 두 일이 아닙니다. 인심(人心)이 발하지 않은 때에는 혼연(渾然)한 천리 그대로 있지만 움직일 때마다 선과 악이 나누어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움직이는 것은 기(氣)로 인하는 것인데 기에는 청탁(淸濁)이 있기 때문에 선과 악으로 나누어지는 것이고 천리와 인욕이 애초부터 마음속에 대립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상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다만 이미 나뉜 뒤에는 한계가 매우 분명하여 천리가 아니면 인욕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행이 아무리 선할지라도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천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마음으로는 명예를 구하려고 하면서 꾸며서 선을 하면 이 역시 인욕인 것입니다.”
하니, 승지 정언지(鄭彦智)가 아뢰기를,
“이 말이 그렇기는 합니다. 그러나 삼대(三代) 이후 사람을 구할 적에 명예를 좋아하지 않을까 걱정하였으니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을 몹시 나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그들이 중지하지 않고 계속 해나간다면 군자가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처음에는 명예를 좋아하다가 후일에 마음을 고쳐 실지를 힘쓰면 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처음부터 끝까지 명예를 좋아하면 그 기본이 없는데 어찌 군자가 되겠습니까. 언지의 말은 이유가 있어서 한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사람들은 마음놓고 악을 하는 자를 실지를 힘쓴다고 여겨 심히 배척하지 않는 반면, 선을 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거짓이라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미워하고 이익을 좋아하는 것은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언지의 말은 시속(時俗)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입니다. 학자의 심술(心術)로 논하면 명예를 좋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를 담을 뚫고 도둑질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부끄러워 해야 하고, 임금이 사람을 등용하는 것으로 논하면 이익을 좋아하는 자는 쓸 수 없고, 명예를 좋아하는 자는 버릴 수 없으나 다만 중요하게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천승(千乘)의 나라는 사양하면서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국을 차지하지 못하면 낯빛에 나타내니, 그 근본이 없는 것이 이와 같다. 그리고 이익을 좋아하는 사람은 남을 속이지 못하는데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남을 잘 속이니 그 폐단이 크다. 옛 사람이 이른바 ‘삼대 이후 사람을 구할 적에 명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가 걱정한다.’는 말은 이유가 있어서 한 말이겠지만 온당한 말인지 모르겠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상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다만 선을 하는 사람과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을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만일 선을 하는 사람을 보고서 명예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의심하면 선을 좋아하는 실지가 없는 것이니 이를 몰라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시신들이 물러갈 무렵에 상이 고금의 사변(事變)에 대해 한동안 반복하여 강론하다가 당 태종(唐太宗)이 형을 죽인 대목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천하가 자기 일신 외의 물건인 줄을 몰랐기 때문에 형을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불쌍하기만 하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상의 말씀이 지극하십니다. 성인은 진실로 천하를 딴 물건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인은 천하의 일을 걱정하기를 자신의 일을 걱정하는 것보다 더 걱정하므로 딴 물건이라고 하여 살피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 12월. 이해에 사은사 홍성민(洪聖民)을 명(明) 나라에 파견하면서 종계(宗系)와 시역(弑逆)이 잘못으로 밝혀진 사정을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새 책에 넣어줄 것을 아울러 요청하게 하였는데 예부 상서(禮部尙書) 만사화(萬士和) 등이 쓴 답에, “조선 국왕이 그 조상(祖上)이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을 애통하게 여겨 글을 올려 세 번이나 변론하였다. 다만 전에 이미 천자의 명을 받았으니, 임금의 말은 한번 나오면 우주에 밝게 게시(揭示)되어 마치 사시(四時)와 같이 확실하다. 그런데 누가 감히 더 넣거나 빼겠는가. 조선에서 전후 주달한 말을 실록(實錄)에 편찬해 넣고, 《회전》을 편찬할 때를 기다려서 기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는데 황제의 허락을 받았었다. 예부가 이 뜻으로 칙지(勅旨)를 내려 선유(宣諭)하기를 청하여 이를 사신 편에 부치려 하였는데, 성민이 말을 듣고는 이어 예부에 사양하기를 "일이 완료되지 않았는데 먼저 유지(諭旨)를 받들고 돌아가는 것은 사신으로서 감히 하지 못하겠다.”고 하니, 예부가 따랐다.

연려실기술 제13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동서(東西) 당론(黨論)이 나누어지다

○ 계유년(1573) 8월에 심의겸(沈義謙)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정언(正言) 정희적(鄭熙績)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특지(特旨)를 외척에게 쓰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상이 화난 목소리로 이르기를, “오직 그 사람이 어진가 아닌가에 달렸을 뿐이다. 외가 친척이라 해서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하였다. 이에 집의(執義) 신응시(辛應時)가 아뢰기를, “정희적의 말이 공론이니,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꺾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석담일기(石潭日記)》 ○ 을해년(1575)에 서인(西人)이 희적을 외관(外官)으로 보냈다.
○ 을해년(1575) 7월에 대사간 허엽(許曄)이 아뢰기를, “우의정 박순(朴淳)이 옥사(獄事)를 처리할 때 체모를 잃었으니, 그 허물을 추고(推考)하소서.” 하였다.
○ 일찍이 명종조 때에 심의겸이 사인(舍人)으로서 공적인 일로 영의정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갔었는데,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李肇敏) 홍간(弘幹)의 손자이다. 이 심의겸과 아는 사이였으므로 서재로 데리고 들어갔다. 심의겸이 침구가 많은 것을 보고, “누구의 침구인가?” 하고 차례로 물었는데, 그중의 하나는 김효원의(金孝元)의 이부자리였다. 하담(荷潭)이 말하기를, “효원이 젊어서 이름이 났었는데, 원형의 사위 안모(安某)와 사귀었다.일찍이 안모를 찾아 원형의 집으로 가 어울리다가 의겸과 만났다.” 하였다. 김효원은 이때 아직 과거에 오르지 아니하였으나 문장으로 이름이 났었는데, 심의겸이 마음속으로 비루하게 여기면서 “어찌 문학하는 선비로서, 권세 있는 집의 무식한 자제들과 함께 거처할 수 있단 말인가. 결코 절개 있는 선비가 아니다.” 하였다. 그 후 김효원은 과거에 장원하여 재능 있는 선비로 이름이 점점 높아졌고 몸가짐이 청렴하여 곤궁을 견뎌내었으며 관직을 담당하여서는 직임을 다하니 조정의 선비들이 앞다투어 추천하고 칭찬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오건(吳健)이 더욱 힘써 추천하였다.심의겸은 전일 선비들을 보호한 일이 있으므로 선배인 사류들이 대부분 그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심의겸이 당시 요직을 담당하여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건이 김효원을 전랑(銓郞)으로 삼으려 할 때마다 의겸이 번번이 방해하여, 낭관(郞官)으로 있은 지 6, 7년 만에야 전랑이 되었다. 김효원은 즐겨 청렴한 선비들을 진출시키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바른 대로 행할 뿐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후배인 선비들 대부분이 추앙하여 존중하였다. 김효원은 속으로 심의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항상 말하기를, “심(沈)은 생각은 미련하고 성질은 거치니 크게 써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석담일기(石潭日記)》
○ 심의겸이 이조 참의로 있을 때, 예전의 과실을 끌어대면서 김효원이 전랑으로 되는 것을 막았는데, 그 뒤 마침내 김효원이 전랑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을 전랑에 천거하자, 김효원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조의 관직이 어째서 외척 집안의 물건인가. 심씨 문중에서 반드시 차지해야 한단 말이냐.” 하였다. 《하담록(荷潭錄)》
○ 이때에 심의겸을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김효원이 심의겸에게 원한을 품고 보복하려는 뜻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소인이라고 지목하는 자까지 있었다. 반면에 김효원을 따르는 사람들은 역시 모두 심의겸이 바른 사람(김효원)을 해치는 사람이라며 미워하였다. 이 때문에 사림의 선후배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니, 당파가 나뉘어질 징조가 이에 이르렀다. 을해년 7월 김효원이 사간이었고 허엽은 대사간이었는데, 허엽이 선배이면서도 김효원을 추대하니, 나이가 젊은 선비들이 허엽을 높여 그들의 영수(領袖)로 삼았다.그런데 우의정 박순(朴淳)이 청렴하다는 명성과 두터운 기대를 받고 있었는데, “선배가 옳다” 하니, 어떤 이는 박순이 심의겸의 당파라고 지목하였다. 허엽이, “박순이 옥사를 처리할 때 체모를 잃었다.” 하여 재령현(載寧縣)에서 종이 주인을 죽인 옥사 추고를 청하자, 박순이 곧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이에 선비들은 김효원이 박순을 공격하여 심의겸의 세력을 고립시키려 한다고 더욱 의심하여 매우 옳지 않게 여겼다.신응시(辛應時)ㆍ정철(鄭澈)이 부제학(副提學) 이이(李珥)에게 말하기를, “사간원이 대신을 추고하도록 청하여 크게 일의 체통을 잃었는데 어째서 탄핵하여 체직시키지 않으시오.” 하였으나, 이이가 듣지 않았다. 또 정종영(鄭宗榮)이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평소 인망이 없는 데다가 김효원과 가깝게 지냈다는 비난이 있었으므로 정철이 이이에게 정종영을 논핵하여 체직시키라고 말하였으나, 또한 듣지 않았다.정철이 시를 지어,

군자는 정승 자리 물러나고 / 君子辭黃閣
소인이 이조를 차지하누나 / 小人秉東銓
군자와 소인이 들고 나는데 / 賢邪進退際
부제학은 마음이 담담하네 / 副學心恬然

하였으나, 이이는 싱긋 웃을 뿐이었다. 《석담일기》. 종이 주인을 죽인 옥사는 옥사 전고에 자세하다.
○ 이때 재령에서 종이 주인을 죽인 변고가 일어났는데 시체 검증이 잘못되어서 죽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이때 삼성(三省)이 번갈아 국문(鞫問)하였는데, 의금부 지사(義禁府知事) 홍담(洪曇)이 그 옥사의 원통함을 힘써 논변하였으나 역시 분명한 증거가 없었다. 위관(委官) 박순이 말하기를,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큰 옥사인데 어찌 경솔하게 놓아 줄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홍담이 박순을 말로 능멸하면서 기어이 놓아 주려 하니 박순이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어서 마침내 그 시체를 다시 검증하자고 청하였는데, 이때에 시체를 검증하는 지방관들이 윗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죽게 된 원인을 적지 않기도 하고 혹은 병이 나서 죽은 것으로 기록하기도 하였다.이에 박순은 마침내 널리 조정의 의논을 거두어 보자고 청하였는데 조정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은 경솔하게 놓아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말하였고, 상은, “시체 검증문서가 서로 틀리니 옥사를 처단할 근거가 없다.” 하면서 이내 놓아 주라고 명하였다. 사헌부는 다시 가두고 국문하기를 청하였으나, 사간원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정언 김응남(金應南)만은 다시 국문하기를 아뢰려 하였는데 대사간 유희춘(柳希春)은 동료를 거느리고 아뢰기를, “왕옥(王獄 조옥(詔獄)과 같다)을 두 번 일으키는 것은 일의 체면에 거리껴서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이니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홍문관이 상차(上箚)하기를, “종이 주인을 죽인 것은 강상의 큰 변고이니 이것을 가리고 옥사를 일으킨다면 반드시 십분 끝까지 캐어서 무죄 사실을 분명히 안 다음에 놓아 주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옥사는 시체 검증서가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 하여 아직 끝까지 알아보지도 않고 갑자기 놓아 주도록 명하셨으니, 물의(物議)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목(耳目 대간은 임금의 귀와 눈의 역할을 하기 때문)의 책임을 맡은 자들이 힘써 간쟁하여야 할 일인데 사간원은 다시 국문하면 뒷날에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만 하니, 만약 그에게 죄가 없다면 다시 국문해서는 안 되겠지만 죄가 있다면 비록 열 번 왕옥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강상죄를 범한 적을 놓아 주어 악을 행하는 자를 도와 준다면 어찌 후일의 폐단이 없겠습니까. 사간원 김응남 이외에는 모두 체직시키고 사헌부는 체직시켜선 안 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허엽이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허엽은 살해당한 주인과 친족이 되는 사이로서 항상 옥사가 성립되지 않은 것을 분하게 여기던 터에, 대사간에 배수되자 곧 옥사를 처리하는 데에 체모를 잃었다고 하여 박순을 추고하고 의금부 당상을 파직하도록 계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석담일기》
○ 7월에 대사헌 김계휘(金繼輝) 등이, 이조 판서 정종영은 인망에 흡족하지 못하다고 탄핵하였는데, 상이 비록 윤허하지는 않았으나 종영이 병을 빙자하고 스스로 사직하였다.
○ 8월에 정언 조원(趙瑗)이 아뢰기를, “추고라는 것은 태형(笞刑)ㆍ장형(杖刑)의 법률을 가지고 조율하는 것이니, 이것을 대신에게 시행해서는 안 됩니다. ……” 하였고, 대사헌 김계휘는 논하기를, “대사간 허엽은 죽은 사람과 가까운 친족으로서 그쪽 말만을 믿고 주장이 지나쳐서 대신을 추고하자고 청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 하여서, 양사(兩司)가 모두 피혐하고 나오지 않으니, 옥당이 장차 처치하게 되었다. 이이가 말하기를, “지금 만일 조원(趙瑗)을 탄핵한다면 이것은 좌상(박순)을 겹문 안에 가두는 격이다.” 하고, 상차하여 양사를 모두 체직시키고 조원만 나와서 근무하게 하니, 효원의 제배들이 마음속으로 불쾌하게 생각하였으며 허엽은 더욱 불평하였다. 이성중(李誠中)이 허엽에게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좌상을 추고하자고 청한 것은 잘못입니다.” 하니, 허엽이 화난 목소리로, “내가 처음에 파직시키자고 청하려 하였으나 동료들이 굳이 만류하여 추고를 청하는 데에 그쳤으니, 내가 약하고 용렬한 탓이다. 그런데다가 옥당의 대간에 대한 처치가 매우 잘못되었다. 숙헌(叔獻)같이 일을 모르는 젊은이가 이내 옥당의 장관이 되었으니 나랏일이 그릇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예전에 간흉들을 추죄(追罪)하고 그 관작을 삭탈하며 자손들을 금고(禁錮)시킬 때 의겸의 공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성혼(成渾)ㆍ이이와 서로 사귀었으며 한수(韓脩)ㆍ남언경(南彦經)ㆍ기대승(奇大升)ㆍ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김계휘 등이 친구가 되었다. 의겸이 사인(舍人)이었을 때에 공무를 품(稟)하러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간 일이 있었다. 그 집에 다다르자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데 구슬이 구르는 듯 낭랑하여 들을 만하기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김효원이었다. 마음속으로 불만스럽게 여기며 돌아왔다.대개 김효원의 장인이 원형의 가까운 친척이므로 효원을 데려다가 아들과 함께 공부하게 하였는데, 김효원이 아직 20세도 못 되어 철이 없어 그리하였던 것이다. 뒤에 김효원이 김근공(金謹恭) 척암(惕菴) 의 학문이 고명하다는 말을 듣고 가서 스승으로 섬겼는데 오래지 않아, 알성과에 장원을 하여 이름이 크게 알려지자 김계휘가 심의겸에게 말하기를, “김효원을 천거하여 전랑으로 삼으려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 하니, 심의겸이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재차 물으니, 심의겸이 윤원형의 집에 효원이 문객으로 있던 일을 들어 언급하였다.그러자 김계휘가 손을 내저으며, “아예 입 밖에 내지 마시오. 소년 때의 일이 아니오.” 하니, 의겸 역시 그렇게 여기면서 다시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 친한 사람들은 이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심충겸(沈忠謙)이 장원 급제를 하자 전랑으로 천거하려 하였는데 김효원이, “외척은 등용해선 안 된다.” 하며 막으니, 심의겸이 이내, “외척이 원흉의 문객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으냐.” 하였다. 이에 김효원의 편을 드는 사람들은 “김효원의 말은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심의겸이 사사로운 혐의로 좋은 선비를 배척하니 매우 옳지 못하다.” 하였고, 심의겸의 편을 드는 사람들은, “심의겸은 스스로 지어낸 말이 아니고 그 실상을 말한 것인데, 김효원이 묵은 원한을 품어서 겉으로는 외척이라 하여 전랑으로 삼는 것을 막았지만, 속으로 중상하여 해치려는 계책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여, 이를 가지고 집안의 벗들이 각기 다른 소견을 내세우며 서로 배척하여 동인ㆍ서인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하였으니, 대개 김효원의 집이 동쪽인건천동(乾川洞)에 있고 심의겸의 집은 정릉동(貞陵洞)에 있기 때문이었다.동인은 모두 나이가 젊어 총명하고 민첩하며, 대부분 학행이 있고 명예와 절개로 스스로를 다듬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서인은 비록 어진 사대부도 있었지만 이익을 탐내는 무리들이 그 가운데 섞여 있었다. 그중에 박순(朴淳)ㆍ김계휘(金繼輝)ㆍ홍성민(洪聖民)ㆍ이해수(李海壽)ㆍ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이산보(李山甫) 등 몇몇 사람은 나랏일을 같이 할 만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동인의 생각으로는, 예전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일은 멀리 있지 않은 법이니 외척은 결코 등용해서는 안 된다 여겼고, 서인은, 의겸이 공로가 많고 또한 선비인데 어찌 앞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여 버티고 따르지 않았는데, 이때 한수ㆍ남언경 무리는 서인에 들고 성혼도 역시 피하지 못하였다.이이는 두 편 다 온전히 보전할 생각을 하여 제일 먼저 조정설(調停說)을 내었지만, 동인은 도리어 구차한 짓이라고 공격하며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붕당의 논쟁이 날로 심하여져서 이미 소굴을 이루어 깨뜨릴 수 없을 만치 굳어졌다. 서인의 자제는 모두 우계(牛溪)ㆍ율곡(栗谷)의 문하생이었고, 또 송익필(宋翼弼)ㆍ송한필(宋翰弼) 형제 기묘년(1579)에 고변(告變)한 사련(祀連)의 아들이다. 가 있어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당대에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렸는데 서인의 막빈(幕賓)이 되어 간사한 논의가 다 그들의 말에서 나왔다. 《괘일록(掛一錄)》
○ 허엽의 아들 허봉(許葑)이 이조 낭청이 되었다. 이조 참의 박근원(朴謹元)이 명류(名流)들의 뜻을 맞추려고 김계휘를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내보내고 또 특별히 이후백(李後白)을 함경 감사(咸鏡監司)에 임명하니, 이들은 모두 인망이 있으나 심의겸의 당파로 지목된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이 외방으로 나가자 효원은 더욱 심한 비난을 받았다.이때 심ㆍ김의 대립이 날로 심하여져서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자, 대사간 정지연(鄭芝衍)이 말하기를, “의논이 심히 어지러우니 장차 어찌 처리하려 하시오?” 하니, 이이가, “이는 이조(吏曹)에 사람이 없기 때문이오. 다만 조용히 진정시킬 것이요, 공박해서는 안 되니 오직 박근원만을 체직해야 하오.” 하니, 지연이 매우 옳게 여겼으나 동료의 의논이 모두 전관(銓官) 이조 관직(吏曹官職) 들을 공격하여 모두 체직시키니, 전관인 이조 낭청 이성중(李誠中)ㆍ허봉(許篈)이 모두 효원의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젊은 선비(동인)들이 많이 의심하고 원망하였다.
○ 이이가 우의정 노수신을 보고 말하기를, “심ㆍ김 두 사람은 모두 학문하는 선비들이니, 흑ㆍ백과 사(邪)ㆍ정(正)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진정으로 틈이 벌어져서 기필코 서로 해치려는 것도 아니오. 다만 말세의 풍속이 시끄럽고 말이 많아 이로 인해 조금 사이가 벌어지고 근거 없는 말들이 오가느라 어지러워서 조정이 조용하지 못하니, 두 사람을 다 외직(外職)으로 내보내어서 쓸데없는 논의를 진정시켜야 하겠는데, 대신이 경연에서 그 사유를 아뢰어야 하겠소.” 하니, 수신이, “만일 경연에서 아뢰면 더욱 소란하게 될지 어찌 알겠소.” 하였다.그 후 사간원이 이조를 탄핵하여 체직시키자, 노수신이 의겸의 세력만이 성할까 의심하여 곧 상께 아뢰기를, “요사이 심의겸ㆍ김효원 두 사람이 서로 헐뜯어 이로 인해 사람들의 말이 소란스러우니 사림이 불안할 조짐이 있을 듯합니다. 두 사람 모두 외직으로 보임하여야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이 서로 말하는 것은 무슨 일들인가?” 하였다. 수신이 아뢰기를, “서로 지난날의 허물을 말할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조정에 있는 선비로서 화합하여야 할 터인데, 서로 헐뜯는 것은 매우 옳지 못하다.두 사람 모두 외직에 보임하여야 하겠다.”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이 두 사람이 반드시 깊게 틈이 벌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인심이 경망하고 조급하며, 말세의 풍속이 소란스러워 두 사람의 친척과 벗들이 제각기 듣는 대로 말을 전하여 마침내 시끄러워진 것이니, 대신이 진정시켜야 하므로 두 사람을 외방으로 내보내어 쓸데없는 말들의 근원을 없애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아셔야 할 일은, 지금은 비록 조정에 분명하게 드러난 간인(奸人)이 없으나, 또한 어찌 반드시 소인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소인이 있어서, 이것을 붕당(朋黨)이라고 지목하여 두 편을 다 퇴치할 모략을 한다면 반드시 사림의 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다.홍문관 정자(正字) 김수(金睟)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계시고 두 사람의 재주가 모두 쓸 만하니, 반드시 외직으로 보임시키지 않더라도 저절로 풀려 화합하게 될 것입니다.”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그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실지로 원수가 되어 서로 해치려 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얄팍한 시속이 안정되지 못하여 뜬소문을 지어내는 것이니, 만일 두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 반드시 뜬소리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외직으로 보임시켜서 뿌리를 끊어야 합니다.” 하였다.승지(承旨) 이헌국(李憲國)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두 사람을 부르시어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을 모두 풀게 한다면, 서로 용납하여 같이 조정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임금이 친히 정사를 보이게 하였으니 특지(特旨)로 효원을 경흥 부사(慶興府使)로 제수하면서 이르기를, “이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 조정이 조용하지 않으니, 먼 고을에 보임시켜야 하겠다.” 하자, 이조 판서 정대년(鄭大年)과 병조 판서 김귀영(金貴榮)이 같이 아뢰기를, “경흥은 먼 국경 지대로서 오지(奧地)의 호인(胡人)과 접근하여 있으니,서생이 진정시키고 다스릴 곳이 아닙니다.” 하고 여러 번 아뢰어 마침내 부령(富寧)으로 제수하였고, 심의겸은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임명하니, 이에 젊은 선비들이 더욱 심하게 두려워하고 의심하였는데, 이이가 중간에 서서 장차 이들을 무마하여 안정시키려 하니 양편의 사림들이 모두 의지하고 기대하였다. 수신이 효원을 외직으로 내보내자 허엽이 수신에게 경솔하게 발언한 것을 나무랐더니, 수신이 선비들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편당에 가담하는 마음이 없었음을 해명하면서 재삼 맹서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웃었다.
○ 김효원(金孝元)이 이미 부령 부사(富寧府使)에 배수되자, 사류들이 두려워하여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또 효원은 병이 중하여 국경 지대로 부임할 수 없었다. 이이가 아뢰기를, “김효원을 외직에 보임시켜야 한다는 말은 대신의 뜻이며 신의 생각과 같을 뿐만 아니라, 실로 사림의 공론입니다. 전하께서 육진(六鎭)을 무인의 손에만 맡기는 것을 염려하시어 명망 있는 문사를 보내어 조용히 다스리게 하려 하시니, 성상의 뜻은 실로 우연한 바가 아닙니다. 만일 효원에게 병이 없다면 이는 참으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좋은 기회일 것입니다.다만 효원은 몸이 허약하고 병이 중하여 추운 지방에서 허덕이게 되면 목숨을 이어가기조차 어려울 것이니 무엇을 계획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효원을 외방으로 보내려는 대신의 의사는 조정을 진정시키려는 데에 있을 뿐, 효원이 죄가 있다고 하여 내쫓으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청컨대 내지(內地)의 궁벽한 고을을 효원에게 제수하시면, 안으로 군신간의 의리를 온전히 하고 밖으로는 효원 외에 병 없는 다른 사람을 보내어 국경의 방비를 굳건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이가 효원을 편드는 것으로 여기고, 그가 사사로운 감정을 따랐다고 노하여 책망하였으나 뒤에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 이이가 성묘를 하고 돌아와서 입시하여 아뢰기를, “신이 전에 김효원의 일을 아뢰었는데, 말이 제대로 뜻을 전하지 못하여 전하의 비답에 언짢게 생각하시는 말씀이 많으시게 하였으니, 지금껏 황공하여 마지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김효원에게 병이 있는 줄을 모르고 변방 고을을 제수하였는데, 부제학의 말이 내 의사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으므로 그렇게 말하였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효원을 다른 고을로 바꿔 임명해야겠다.” 하였다. 수일 후에 김효원을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고쳐 제수하였다.
○ 심의겸을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고쳐 임명하였다. 이때 동과 서가 처음으로 당파를 나누어 서로 칭찬하고 들추기를 비롯하니 조정이 편안하지 못하자, 이이가 두 사람을 모두 외직에 내보내자는 의논을 힘써 주장하니, 심(沈)은 개성 유수로 삼고 김(金)은 부령 부사로 삼았는데 이이가 얼마 후에 또 상소하기를, “원근(遠近) 심은 가까운 지역에 제수하고 김은 먼 지역에 제수한 것 이 같지 않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을 감복시키기 어렵습니다.” 하므로, 김을 삼척으로 옮기고 심을 전주로 내보내었다. 이이가 처음에는 두 사이를 조정하려 하였지만 되지 않았고 마침내는 자신이 서인의 영수가 됨을 면하지 못하였다. 《하담록》
○ 이때 노수신이 그 편당 사이에 참여하지 않고서, 시사(時事)가 위태로워 장차 사화가 일어날 것을 알고, 탑전(榻前)에서 먼저 동ㆍ서의 편당의 폐해를 말하고, “그 근본을 제거한 다음에야 인심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심ㆍ김이 외직에 보임된 후에 수신이 또 아뢰기를, “효원은 나이든 어미가 있으니 멀리 내보내선 안 됩니다.” 하여 삼척으로 고쳐 차임하니, 서인들은 도리어 수신을 동인이라고 지목하였다. 이로부터 동인들이 조정에 편히 있지 못하고, 외직으로 나가거나 벼슬에서 물러나니 서인들이 권세를 잡기 시작하였다.
○ 이보다 앞서 김효원이 즐겨 명사들을 천거하여 이끌어들이니 나이 젊은 선비들이 따르고 추앙하였다. 세력이 매우 성하여지자, 선배인 사류들이 그를 미워하였지만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이는 그것이 조정 불화의 조짐이 될까 걱정이 되어 세력을 꺾고자, 외직에 보임시키자는 의견을 주장하였으니, 진정시키려 한 것일 뿐이며 깊이 추궁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효원을 내보낸 다음 조정 의논이 갑자기 격화하여 효원을 깊이 추궁하려 하니 이이가 온 힘을 다해 중지시켰다. 또 동인 이발(李潑)을 끌어들여 전랑(銓郞)으로 삼았다.당시 무리들이 윤현(尹晛)을 전랑으로 삼으려 하니, 이이가 마음속으로 윤현이 전랑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임을 알고는 이발이 전조에 있으면 반드시 그(윤현)가 사정(私情)을 행사하는 것을 제지할 수 있으므로 감히 말리지 않았다. 이발이 마침 상피(相避) 관계가 있어 전랑에서 체직되어 비로소 윤현이 세력을 잡자 조원(趙瑗)을 천거하여 이조의 낭관(郞官)을 삼으려 하였다. 이이가 말리며 말하기를, “백옥(伯玉) 조원의 자(字) 은 쓸 만한 인재가 아니다. 만일 사람이 어떠한지 따져보지도 않고 인백(仁伯) 효원의 자 을 미워하는 자를 쓰려고만 한다면 반드시 그대들이 패할 것이다.” 하였으나, 윤현이 따르지 않았다.이이가 힘써 양쪽을 조정(調停)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당시의 의논은 도리어 이이를 모호하여 입장이 분명하지 않다고 여겼다. 이해수(李海壽)가 말하기를, “김효원은 반드시 일을 그르칠 소인인데 그대는 그가 마음 쓰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경연에서 시비를 가리지 않고 모호하게 아뢰었으니 지극히 부당하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나는 인백을 명예를 좋아하는 선비로 볼 따름이지, 그대들과 같이 소인으로 보지는 않소.” 하였다. 정철(鄭澈)ㆍ구봉령(具鳳齡)ㆍ신응시(辛應時) 등이 모두 효원을 소인이라고 하여 몹시 배척하고자 하여, 정철이 장차 남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이이에게 효원을 배척하라고 권하였다.이이가 말하기를, “저 사람은 죄상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비들이 중히 여기는 사람이니, 만일 배척하게 되면 반드시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대단히 어지러워지고 조정이 손상될 것이다.” 하면서 끝내 듣지 않자, 정철이 마침내 시를 짓기를,

그대의 뜻이 산과 같아서 끝내 움직이지 않는데 / 君意如山終不動
내 가는 길은 물과 같으니 언제나 돌아올꼬 / 我行如水幾時回

하였다. 선배들은 이처럼 효원을 미워하였고, 후배들은 또 이이가 잘못하여 효원을 내보냈다고 여겼다. 어떤 이가 이이에게 말하기를, “세상에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은 없소.공이 요사이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시비를 알지 못하고 양쪽 모두 온전히 하려고만 하니 인심이 불만스럽게 여기오.” 하자, 이이가 말하기를, “세상에는 진실로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이 있으니,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서로 왕위를 사양한 것과, 무왕(武王)과 백이ㆍ숙제가 서로 합하지 않은 것은 곧 둘 다 옳은 것이요, ‘춘축 전국 시대에는 의로운 싸움이 없었다.’ (맹자(孟子)의 말)는 것은 둘 다 그른 것이오. 요사이 심ㆍ김의 일은 국가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데 마침내 그들 사이의 알력으로 조정이 불안하기까지 이르렀으니, 참으로 둘 다 그른 것이오.그러나 비록 둘 다 그르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같은 선비이니, 다만 화해하고 융합시켜야 옳을 것이오.” 하였다. 이에 선배들은 이이가 효원을 공격하지 않음을 탓하고, 후배들은 이이가 효원을 쓰지 않는다고 허물하여 조정의 의논이 매우 서로 어그러졌다. 대사간 홍성민(洪聖民)이 이이에게 말하기를, “이성중(李誠中)이 지평(持平)이 되자 여론이 탄핵하여 체직시키려고 하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그것이 무슨 말이오. 성중은 허물이 없을 뿐더러 남달리 모난 사람도 아니니, 다만 인백과 깊이 사귄 것 뿐이오. 인백도 오히려 공격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그의 친구라 하여 공격할 수 있겠소.” 하였으나, 성민이 마침내 성중을 탄핵하니 선비들이 더욱 놀라고 불안해하였다.이이가 더욱 물러갈 뜻을 결정하고, 한수(韓脩)ㆍ남언경(南彦經) 등과 시사를 의논하며 말하기를, “요사이 여론이 조급히 억지로 옳고 그름을 정하려고 하는데, 어찌 한때의 기세를 가지고 강제로 정할 수 있겠소.당초에는 효원을 억제하는 것이 실로 공론이었는데 지금은 논의가 과격하여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이러한 상태에서 그치지 않는다면 도리어 효원을 편드는 자들의 의논을 공의로 만드는 것이오.” 하니, 언경이 말하기를, “만일 인백 한 사람만을 억제하여 외직에 보임하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 청반(淸班)에 있게 한다면 사림이 편안하고 일이 없을 것이오. 그러니 이렇게 소란한 때에 공이 물러가서는 안 되오.” 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그렇지 않소. 상하(上下)의 신임을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하겠소.” 하였다.
○ 김우옹(金宇顒)이, 이이가 자못 효원을 애석해하는 마음이 있다고 보자, 이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인백을 보는 데는 네 등급이 있소. 한 등급의 의논은 인백을 못쓸 소인이라고 여기는 것인데, 이는 계함(季涵) 정철의 자 의 무리요, 또 한 등급은 명예를 좋아하는 선비라고 여기는 것이니, 이것은 나요, 또 한 등급은 명예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의 마음은 선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니 이것은 그대의 무리요, 또 한 등급은 티없는 군자라고 여기는 것이니 이는 그의 동료들이오. 한 사람으로서 네 가지 등급의 의논을 가졌으니 사람마다 각기 자기의 의견을 옳다고 하여 허다한 분쟁을 지어내오.나라의 기강과 백성의 고통은 내버려두고, 조급히 옳고 그름만을 가리고자 힘써 조정이 날로 문란해지니, 이 역시 천수(天數)요.” 하였다. 우옹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찌하여 이런 소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인백이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나랏일을 하려 하면서, 또 심의겸을 공격하는 것이 사사로운 감정이라는 혐의를 피하지 않고서 선배를 배척하고 억제하였는데, 선배들은 모두 기를 품고서도 세력이 두려워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기 때문이오.인백의 행동이 나중의 폐단이 없지 않겠으므로 내가 제재하자는 의논을 내었던 것인데, 처음에는 선배들이 나에게 기대어 내 말이라면 다 따랐는데, 인백에게 손을 대어 처리한 뒤에는 그만 나의 말을 쓰지 않아, 마치 고기를 잡고 나서 통발[筌]을 잊어버린 것과 같으니, 우스운 일이오. 대개 이 일은 제재하는 것은 옳지만 지나치게 공격하는 것은 잘못이니, 그것은 드러난 죄가 없기 때문이오. 내 말이 중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계함의 소견이 지나치게 중히 여겨지기 때문이오. 계함의 청렴함을 세상이 중히 여기므로 그 친구들이 계함에게 비교하여 말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오.” 하였다.우옹이 말하기를, “장차 어떻게 구할 수 있겠소?”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이현(而見) 유성룡(柳成龍)의 자 과 숙부(肅夫) 김우옹의 자ㆍ경함(景涵) 이발의 자 이 중요한 자리에 모이면 구할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우옹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경연에서 통절하게 진술하지 않소?”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이 일은 말하기가 대단히 곤란한 일이니, 반드시 임금과 신하가 서로 믿어야만 다 말할 수 있는 것이오. 지금은 상께서 여러 신하들의 마음을 모르시니, 만일 사실대로 아뢴다면 반드시 조정이 붕당을 나누어 다른 소인들로 하여금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게 할 것이오.” 하였다. 《괘일록》
○ 허엽이 이이를 보고 말하기를, “요사이 사세가 참으로 한심하오. 백 년 이래로 외척이 항상 국권을 잡아 사람들의 귀와 눈에 익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었는데, 하루 아침에 나이 젊은 선비가 외척을 배제하고 억압하려 하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는 것이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공의 말은 옳은 것 같지만 실은 잘못되었소. 오늘날 인백을 그르게 여기는 것이 어찌 방숙(方叔) 의겸의 자 을 위하여서겠는가.” 하였다.허엽이 말하기를, “화숙(和叔) 박순의 자ㆍ계진(季眞) 이후백의 자ㆍ중회(重晦) 김계휘의 자 가 비록 명망은 있지만, 식자들은 반드시 그들을 방숙의 문객이라고 여길 것이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공의 말은 잘못되었소. 이 세 사람은 모두 사림이 추앙하는 바이니, 어찌 방숙을 의지하여 출세한 사람들이겠소.” 하였다. 이이가 한수ㆍ남언경에게 말하기를, “허태휘(許太輝 허엽의 자)의 소견은 매우 잘못되었으니 뒷날 시사를 그르칠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오.” 하였다.
○ 이이가 구봉령(具鳳齡)을 보고 말하기를, “사림이 어그러져 벌어지고 인심이 흉흉한데, 사람들이 공이 의논을 주장하는 것이라 하니 과연 그러하오?” 하자, 봉령이 말하기를, “내가 병들어 한 구석에 엎디어 있는데 어찌 의논을 주장할 수 있겠소.만일 오늘날 다시 처분하는 일이 있으면 시사는 잘못될 것이니, 마땅히 조용히 진정시켜야 하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이것이 곧 내 뜻이오.” 하였다.
○ 이이가 박순에게 말하기를, “시사가 나아질 방법이 없으니 화패(禍敗)나 면하면 족하겠소. 조정이 화목하지 못하여 젊은 선비들의 의구심이 매우 심하니, 모름지기 안정시켜야 되겠소.” 하니, 박순이 말하기를, “장차 어찌하면 좋겠소?”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유성룡ㆍ김성일(金誠一)이 고향으로 돌아가 오지 않고 있는데, 생각건대 반드시 이간하는 말에 동요된 것인 듯하니, 이 사람들을 상께 아뢰어 특명으로 불러와야 하오.그리고 김우옹이 요사이 주상전하께 소원한 대우를 받고 있으니, 역시 상께 아뢰어 경연으로 끌어들여 이발의 무리와 함께 여론을 바로잡게 하고, 계함도 오지 않고 있으니 역시 특명으로 불러들이도록 청하여 인재를 모아서, 사람을 쓸 때에 저울[權衡]처럼 공평하고 바르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제멋대로 의논하지 않도록 해서, 조화하고 진정시키는 데 힘쓰고, 이와 같이 1, 2년 지나면 조정이 평안하여질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속된 의논이 승(勝)하고 청의(淸議)는 쇠하여 장차 조정이 혼탁하여지고, 청명(淸名)은 모두 효원의 무리들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선배들은 크게 인심을 잃어서 끝내 조정되는 날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오.” 하니 박순이 말하기를, “그 말이 참으로 옳소. 한스러운 것은 이 일을 맡을 사람이 없는 것이오.” 하고, 이어 매우 간절하게 이이에게 머물도록 권하였으나, 이이가 듣지 않았다. 사류들이 이이가 이미 물러갈 결심을 한 것을 알고, 이발ㆍ송대립(宋大立)ㆍ어운해(魚雲海)ㆍ허상(許鏛)ㆍ안민학(安敏學) 등이 가서 송별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지금 정론(定論)을 하려 하니 공들은 들어 보시오.권세를 잡은 간신들이 조정을 흐리고 어지럽게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그것을 꺾고 숙청하여 선비들의 공론을 펴게 한 것은 방숙(方叔) 등의 공이 아니겠소. 인백이 나랏일을 하려면 마땅히 거실(巨室)의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인데, 인백이 선배들을 배척하고 억제하여 선배들이 분한 마음을 가지게 하여 사림이 날로 서로 대립하게 되었으니, 이는 인백의 죄요. 이미 이러하였기 때문에 공론이 인백을 제재하여 외직으로 나가게 하였으니, 이만하면 적당하였소.그런데 오히려 그를 너무 심하게 미워하고 매우 가혹하게 공격하였으니, 이것은 선배의 죄요. 이렇게 논단(論斷)하여야 그 사정(事情)을 옳게 볼 수 있는 것이오. 지금부터는 서로 의심하여 간격을 두지 말고, 마음을 터놓고 처리해 나간다면 다시 무슨 일이 있겠소. 그렇지 않으면 조정의 근심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오.” 하였는데, 이이가 고향으로 돌아간 다음 여론이 더욱 분열되어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상은《석담일기》
○ 이이가 정철에게 보낸 편지에 “형은 이 사람(효원)을 형편없는 소인으로 여겨 반드시 국가를 어지럽히고 사림을 해칠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만일 공론이 효원을 밀어준다면 그로 인해 세력을 얻어서 능히 그 충성을 나타낼 것이요, 공론이 저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다른 길을 찾아 억지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오. 만일 효원이 권력을 쥔다면 일을 그르치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쓰이게 되면 그 재주가 역시 취할 만하니, 너무 심하게 미워하고 너무 급히 배척한다면 반드시 사류들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오.형은 매양 그가 뒷날 화를 일으키리라고 염려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소. 만일 그의 사람됨이 모두 형의 말과 같고 조금도 틀림이 없어서, 그가 뒷날 요직을 얻었을 때 조그만 원한까지 반드시 보복하여 사림을 살육한다면 그때에 형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자랑으로 웃으며 죽을 것이요, 나는 그를 옹호한 죄로 간악하다는 이름을 얻어서 영원토록 씻지 못하게 될 것이니, 후환은 나에게 있고 형에게 있지 않는 것인데, 형은 어찌하여 그토록 근심하시오.대저 김모(효원)는 명예를 좋아하고 권세를 좋아하여 한 세상의 어진 선비들과 거의 다 사귀었으니, 그 거조로 본다면 다만 명예를 보전하고 겸하여 세력과 지위를 굳건히 하려는 것뿐이지, 제멋대로 끝없이 이익과 벼슬만 탐내는 형편없는 소인 같지는 않소.” 하였다. <문집(文集)>
○ 이때 구봉령ㆍ김우옹 같은 명사들은 모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홍혼(洪渾)도 벼슬을 버리면서 말하기를, “사(邪)와 정(正)이 정하여지지 않았는데, 나의 거취가 무슨 상관이랴.” 하였으니, 이것은 효원이 제재당함을 분히 여기고 한 말이다. 《석담일기》
○ 병자년(1576) 10월에 이순인(李純仁)이 일찍이, 효원이 권세를 탐한다고 탄핵한 일이 있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윤현(尹晛) 등이 그를 끌어다 전랑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순인이 요로에 선 뒤로 공론이 윤현을 지지하지 않는 것을 알고는 도리어 효원의 무리에게 붙으니 그의 제배(儕輩) 정철 등이 매우 미워하였다. 《석담일기》
○ 좌상 박순은 젊었을 때 허엽과 동문(同門 둘 다 서화담(徐花潭)의 제자임) 친구로서 매우 친밀히 지냈다. 이때에 와서 허엽이 젊은 사람들의 영수가 되어 의논이 자못 치우치니 박순과의 교분이 서먹해졌다. 박순은 사류들이 어그러지고 벌어져 자기의 힘으로는 진정시킬 수 없음을 보고는 병을 빙자하여 사직하였다. 《석담일기》
○ 이때 심ㆍ김의 분당설(分黨說)이 더욱 성하여지니, 조정에 있는 선비 중에서 우뚝이 서서 홀로 고상한 행동을 하는 자 및 녹록하여 이름 없는 자가 아니면 모두 동인ㆍ서인으로 지목하는 가운데에 들었다. 무인년(1578) 5월에 지평 홍가신(洪可臣)이 이조 낭관 조원(趙瑗)을 탄핵하여 체직시켰다. 조원은 경박하고 조급하여 인망이 없으므로 가신이 먼저 원에게 말하기를, “공적인 일을 할 때에는 사사로움을 돌보지 않는 것이다.그대는 실수가 많으니, 나는 사사로운 감정을 따를 수 없다.” 하고 이내 논박하여 체직시키니, 공론이 통쾌하게 여겼다. 그러나 가신은 동인이며 조원은 서인이었으므로, 말을 지어내는 사람들은, “동인과 서인이 화협하지 않기 때문에 정철의 무리를 공격한 것이니 또한 공평할 수 없다.” 하였다. 《석담일기》
조원은, 갑자년(1564)에 진사과에 장원을 하여 일찍부터 재주 있는 사람으로 이름이 났었다. 일찍이 민순(閔純) 습정(習靜) 을 찾아가 보고 동인이 편당을 지은 잘못과 서인이 지극히 공정하며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을 극력으로 말하자, 민순이 한참 있다가 답하기를, “동ㆍ서의 옳고 그름이라면 나는 모르겠네만, 공이 오늘날 하는 일이 공도(公道)에 합하는가 합하지 않는가를 한번 살펴보라.” 하니, 조원이 부끄러워서 물러갔다.조원은 전랑으로 있으면서 인물을 등용하고 물리치는 데에서 인망을 많이 잃었고 행신하는 것이 부끄러운 줄도 몰랐으니, 밤중에 기생집에 갔다가 협객(俠客)을 만나서 볼기를 맞은 일까지 있었다. 이에 지평 홍가신이 탄핵하여 체직시켰다. 《괘일록》
○ 이때 사류가 둘로 나뉘었는데, 소위 동인이라는 자는 청렴하다는 명망이 있는 후진이 많고, 소위 서인이라는 자는 다만 선배 몇 사람일 뿐이었으며 그에 붙좇는 자는 모두 당시 인망이 없는 이들이었다. 이에 사류들은 동인이 성하고 서인이 쇠할 것을 알았던 데다가, 서인은 효원을 내보낸 뒤로는 거조가 정당하지 못하여 공론이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때에 출세하려는 자는 다 동인에게 좇아 들어가 모두 팔을 걷어 부치고 동인이 옳고 서인이 그르다고 하였다. 김계휘는 서인으로 불렸지만 역시 젊은이들에게 존중을 받았으므로, 젊은이들이 더러 와서 계휘에게 지시를 받기도 하였다.윤현은 김성일과 같이 전랑이 되었으나 의논이 서로 맞지 않아 마침내 틈이 벌어졌다. 윤현의 숙부 두수(斗壽)와 계부 근수(根壽)가 모두 요직에 있으면서 매양 서인을 편들고 동인을 억제하는 주장을 내니 동인들이 매우 미워하였는데, 두수는 사생활이 깨끗하지도 삼가지도 못하여 자못 뇌물을 받는다는 말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계휘에게 말하기를, “두수를 탄핵해야 할 것이오.” 하자, 계휘가 말하기를, “바야흐로 선비들의 의논이 분열되어 있으니 힘써 진정시켜야 될 것이다. 공격하여서는 안 된다.” 하니, 젊은 무리들이 이 때문에 계휘를 불쾌하게 여겼다.수찬 강서(姜緖)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사류가 동과 서로 나뉘었는데 다 쓸 만한 사람들이니, 한편을 버리고 한편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이에 상이 이미 동인ㆍ서인의 이야기를 알았다. 이발은 동인에게 치우쳐 주장하고 정철은 서인에게 치우쳐서 주장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인망이 두터우며 나라를 근심하고 공사에 충실함이 당시에 으뜸이었다. 그러므로 이이가 매양 두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대들 두 사람이 의논을 화합하고 한마음으로 조정한다면 사림이 무사할 수 있을 것이오” 하자, 정철이 조금 소견을 돌려 이발과 교분을 맺어 함께 공평한 의논을 하였다.그런데 동인 중에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끝내 서인 중의 좋지 못한 자를 공격함으로써 후환을 방지하려 하였으니, 모두 윤두수의 삼부자를 사악(邪惡)의 괴수라고 하며 제거할 것을 결심하였으나, 유성룡과 이발만은 따르지 않았다. 이때 무안 현감(務安縣監) 전응정(田應禎)이 권력 있는 대관에게 뇌물을 준 일이 발각되어 옥에 가두고 국문(鞫問)하였는데, 이때는 조정의 의논이 바야흐로 뇌물죄를 경계로 삼고 있었다.김성일이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수(李銖)가 쌀을 실어다 두수 형제 및 윤현의 집에 뇌물로 바쳤다는 말을 듣고 매우 노하여 경연에서 아뢰기를, “전응정이 죄를 받았다고 하지만 그 후에도 쌀을 실어다 뇌물로 바친 자가 있으니, 뇌물을 주는 분위기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자, 상이 갑자기 묻기를, “누구인가?” 하니, 성일이 대번에 대답하기를, “이수입니다.” 하였다. 이에 대간이 이수를 죄주도록 청하니 상이 명하여 이수를 조옥(詔獄) 의금부 에 가두고 국문하게 하였다.이수는 두수와 사촌간이었다. 성일이 이수가 쌀 수백 석을 실어다 세 윤씨 집에 주려고 장차 경강(京江)에 배를 댄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관속을 보내어 종적을 알아내고는, 드디어 삼윤(三尹)의 죄를 논하고 이수와 그 아우 이치(李錙)를 옥에 가두고 심문하였는데, 이수가 승복하지 않아 옥사가 성립되지 못하자 일부의 의논이 대부분 성일이 공론을 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하담록》
○ 상이 이르기를, “뇌물 준 자만을 다스리고 받은 자는 다스리지 않는 것이 옳은가.” 하자, 부제학 허엽이 말하기를, “대간이 뇌물받은 자를 탄핵하지 않은 것은 올바른 의사가 아니니, 대간다운 풍채가 없습니다” 하니, 대간이 비로소 윤씨 집 삼부자의 이름을 들어서 뇌물받은 자라 하고 자기네들이 미리 말하지 않은 죄로 스스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새 대간이 삼윤을 파직하여 뇌물이 오가는 풍습을 징계하도록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계휘가 고향에서 그 말을 듣고 동인ㆍ서인이 접전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고 대단히 의심스러워하면서, “나이 젊은 사류가 공정하게 마음을 쓰지 않으니, 함께 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 내가 죄를 받고 물러나리라.” 하였다. 이내 서울로 들어와서 아뢰기를, “삼윤은 모두 어진 선비로 등용되어 별로 큰 과실이 없었습니다. 지금 그가 뇌물을 받았는지의 사실을 알 수 없는데, 어찌 그 말이 모략하는 자가 지어낸 말이 아닌지 알겠습니까. 천천히 옥사가 성립되기를 기다려서 삼윤을 치죄하여도 늦지 않을 것인데, 먼저 세 사람의 이름을 집어내어서 막연하게 치죄하기를 청하니, 이는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사류(삼윤)가 나아오고 물러나는 일은 가벼이 처리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였으니, 말이 과격하고 중도(中道)를 지나친 것이 많았다. 이에 사류가 모두 노하여,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말이라고 지목하였고 대간이 피혐하여 물러나니, 옥당이 계휘를 탄핵하여 체직시켰다. 이에 대사헌 박대립(朴大立)ㆍ대사간 이산해(李山海)ㆍ장령 이발이 삼윤 집안의 숨은 허물을 낱낱이 들추어 사실인지를 구명하지도 않고 헐뜯으며 못하는 말이 없었다.상은, 이미 동인이 서인을 공격하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고 계휘가 서인의 편을 드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사류들이 계휘를 전라 감사로 내보내고 모두 불길한 사람으로 지목하였고, 정철과 이발은 의논이 크게 어그러졌는데, 동인이 정철을 소인이라고 드러내어 배척하니 동인ㆍ서인이 다시는 서로 화합할 가망이 없게 되었다. 《석담일기》
○ 이때 김성일이 아뢰기를, “어떤 사람이 배에 곡식을 가득히 실어다 요직에 있는 자에게 주었습니다.” 하니, 교리 강서(姜緖)가, “성일이 두서 없는 말을 하니 자못 간관의 기풍이 없습니다.” 하였다. 성일이 땅에 엎드려 대죄하기를, “곡식을 받은 자는 윤두수ㆍ근수 및 그 조카 윤현이요, 준 자는 진도 군수 이수입니다.” 하였다. 이때 두수가 역시 도승지로서 자리에 참여하였다가 피하여 엎드리면서, “이수는 신의 사촌입니다.신에게 늙은 어미가 있으므로 어물(魚物)을 보내왔으니, 다른 것은 신도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장령 이발이 수일 동안이나 논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강서는 삼윤과 사이가 좋았는데, 실로 윤씨 집을 가리키는지 몰라서 성일을 공격하여 말썽이 되게 하였으니, 후회한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윤씨 집에서는 강서가 성일과 서로 약속하고 말하였다 여겨 두 집의 교분이 마침내 끊어졌다. 《괘일록》
○ 옹진 현감(甕津縣監) 이신로(李信老) 역시 뇌물을 쓴 죄로 같이 옥에 갇혔는데, 뇌물을 받은 자는 막연하게 조정 귀인이라 하고 또 우의정 노수신을 지목하니 대간이 감히 들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선비들의 의논이 명색은 탐관오리를 규탄하고 적발한다 하지만 실은 삼윤을 죄주려는 것이니, 이수는 ‘고래 싸움에 새우가 죽는다’는 격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이수의 옥사는 기어이 성사시키려 하면서 이신로에게는 상세하게 심문하지 않는가.” 하고, 혹은 또 말하기를, “이수의 옥사는 모함하는 데서 생긴 것이지, 실제 사실이 아니다.” 하였다.이에 선비들이 듣기에 민망스러워하는 한편 옥사가 성립되지 않으면 도리어 서인의 공격을 받을까 염려하여, 심각히 추궁하며 온갖 방법을 다하였다. 사헌부가 이수의 쌀을 시장(市場) 사람 장세량(張世良)의 집에 받아 두었다는 말을 듣고, 다른 사건을 빙자하여 세량을 잡아서 금부로 이송하였다. 또 이수의 옥사만을 깊이 캘 수 없어 신로의 증인을 잡아다가 깊이 추궁하였는데, 처음 발언한 자를 물었던 바 유생 정여충(鄭汝忠)이 우연히 그 일을 말하였기 때문에 여충도 함께 잡아 두었다.이때 의금부 당상 박계현(朴啓賢)이 역시 뇌물을 받았다는 소리가 있자, 여충이 말을 꺼낸 것을 깊이 원망하여 매를 치며 매우 혹독하게 심문을 하여 여충이 거의 죽게 되니, 여론이 더욱 불평하여 혹은 말하기를, “금일 사류들이 법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각박하게 하는 것이 김안로(金安老)나 다름이 없다.” 하였다. 사헌부가 아뢰어 여충을 방면하니, 신로의 옥사는 성립되지 않았다. 진도의 아전[吏屬] 중에 이수와 원한을 맺은 자가 있어 말하기를, “내가 만일 옥에 들어가면 반드시 옥사가 성립될 것이다.” 하니, 사헌부가 듣고 곧 아뢰어 그 아전을 가두었다.이에 옥에 갇힌 자가 모두 한결같이 진술하기를, “이수가 쌀 백 석을 실어 장세량의 집에 대두었다가 이어 삼윤의 집으로 나누어 보냈다.” 하였는데, 세량만은 승복하지 않았다. 상은 아전이 이미 자복하였다고 여겨 양사(兩司)의 청에 따라 삼윤을 파면하였다. 《석담일기》
○ 김계휘가 이미 사류들에게 거슬리자 사람들이 그것을 나무라니, 계휘가 말하기를, “내가 이미 사류들에게 인심을 잃었으니 반드시 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뒷날 만일 사류를 공격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은 반드시 소인일 것이니, 그들이 비록 나를 등용한다 하더라도 나는 응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 죽은 뒤 명정(銘旌)은 사헌부 대사헌에 지나지 못할 따름이다” 하였다. 《석담일기》
○ 심의겸이 전라 감사에서 체직되어 물러나 파주(坡州)로 돌아갔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 벼슬하니 식자들이 웃었다. 《석담일기》
○ 12월 세말(歲末) 은전(恩典)에 의하여 윤두수ㆍ근수 및 윤현을 모두 서용하자, 간관이 모두, “이수의 옥사가 아직 결말이 안 난 지금, 뇌물을 준 자는 바야흐로 국문을 받고 있는데 뇌물을 받은 자를 복직시키는 것은 정사의 체모가 아니다.” 하였는데, 대사간 정철이 홀로 이수의 옥사를 원통한 것이라고 여겨 논계하려 하지 않다가 동료들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니, 이에 동인들이 더욱 정철을 사당(邪黨)이라고 욕하였다. 《석담일기》
○ 기묘년(1579) 봄에 홍섬(洪暹)이 병으로 사직하고 박순은 영의정이 되었다.
○ 3월에 흰 무지개가 두 번이나 해를 꿰뚫었다. 이때 사헌부가 구언(求言)에 응하는 상소에, 심의겸을 소인이라 하고 김계휘ㆍ정철을 간악한 당[奸黨]이라 하여 배척하였다. 이때에 동인이 매우 성하여 명예를 구하는 자가 따르고, 벼슬을 바라는 자가 붙좇았으며, 속[流俗]된 재상으로서 전일 서인에게 배척을 당하였던 자들까지 모두 시세를 타고 앞다투어 동인에게 아첨하여 많이 중직에 쓰여졌다. 대사헌 이식(李栻)ㆍ집의 홍혼(洪渾)ㆍ장령 정희적(鄭熙績) 등이 의겸과 그 제배들을 극심히 헐뜯어 서인이 다시 들어올 길을 막았다. 《석담일기》
○ 이발ㆍ김우옹(金宇顒)이 사헌부의 상소가 지나치다고 하여 차자를 올려 희적 등을 논박하였다.
○ 4월에 이수의 옥사가 오래도록 성립되지 않았다. 장세량은 20여 차나 형장을 받아 거의 죽게 되었지만 끝내 불복하였다. 어떤 이가 깨우쳐 주면서 말하기를, “네 죄는 중하지 않으니, 받아 두었다고 고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어렵게 형벌을 참아내는가.” 하니, 세량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불복하면 죽고 자복하면 산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이 없는데 어찌 내가 살기를 탐하여 남을 죽을 곳에 빠뜨리겠는가.” 하였다. 이때 사류가 이수의 옥사를, 반드시 성립시키려고 하여 이수와 세량이 옥중에서 억울함을 하소연한 글을 모두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의금부 판사 정유길(鄭惟吉)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장세량은 죄가 가벼운 사람인데도 20여 차나 매질을 하여 기어이 실토하게 하려 하니, 이것은 법의 규례(規例)가 아니다. 내가 이 사실을 아뢰려 하나 사람들의 말이 무서워서 감히 하지 못한다. 또 세량은 의사(義士)가 아니면 결단코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니, 무엇 때문에 이수를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는가.” 하였다. 상이, 세량이 불복하는 것을 보고 이수의 옥사가 사실인지 여부를 의심하여 삼공(三公)에게 물었는데, 삼공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자, 상이 이내 석방하도록 명하였다.승정원이 아뢰기를, “뇌물 수수는 죄가 중하니 가볍게 석방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간쟁하여 네 번이나 다투어 아뢰었다. 그러자 상이 노하여 입직 승지 김우굉(金宇宏)ㆍ송응개(宋應漑)를 파직하고 도승지 이산해 이하를 다 체직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의 위엄이 크게 진동하자, 양사와 옥당이 간쟁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어 이수와 세량이 마침내 풀려나게 되었다. 《석담일기》
○ 5월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여 당시의 폐단을 진술하면서 동인ㆍ서인이 분당(分黨)을 한 상태를 자세히 말하고 고르게 진정시키도록 청하자 상이 칭찬하여 답하였는데, 사류는 그 상소가 동인을 편들고 서인을 억제하지 않았음을 보고 노하였다. 이에 삼사와 승정원이 모두 상소하여 그 말의 잘못을 논하고 백인걸이 늙어서 노망하여 정신이 착란된 것이라고 지목하였다. 《석담일기》
○ 대사간 이이가 병으로 사직하여 나오지 않고, 상소를 올려 동인이 서인을 너무 심하게 공격하여 억지로 시비를 정하려 하는 데에 대해 논하고, 동인ㆍ서인을 타파하여 사류를 화합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말이 매우 과격하고 간절하였다. 상이 상소의 말이 적당하지 않다고 하여 체직하라고 명하니, 이에 옥당과 양사가 어지러이 논박하였다. 《석담일기》
○ 이이가 이발에게 보낸 편지에,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한두 사람의 우열(優劣)로써 온 사림이 혈전을 하는 일이 있었는가. 이런 일은 천하 후세 사람들에게 들려 주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지금은 또 무고하게 드러내 놓고 심(沈)을 배척하여 소인이라 하고 서인을 사당이라 하니, 한 마디 한 마디가 점점 더 깊어진다. 참으로 이는 사람을 잡는 수단이다. 심이야 아깝지 않다 하더라도 서인 모두를 아깝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과연 그대들의 본의인가. 인백은 내가 처음에는 자세히 알지 못하였으나 점차 그 하는 것을 보고 차차 믿을 만한 사람에게 들어서 비로소 그가 쓸 만함을 알았다.심은 본래 서로 아는 사이이니, 다만 외척 중에 좀 나은 사람일 뿐이다. 비록 이 사람이 없더라도 지금 시국에 손실이 없을 것이며, 이미 사류들과 서로 어그러졌으니 비록 쓸 수는 없지만 소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백이 혐의를 피하지 않은 것을 그대는 옳다고 하니, 이것은 깊이 생각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심을 크게 쓸 수는 없다 하더라도 별로 현저한 죄과가 없으니, 만일 지금 정치를 담당하고 있는 경대부(卿大夫)들에게 비한다면 심이 그보다 나을지언정 미치지 못할 것은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 중에 요직에 있으면서 심만 못한 자가 허다하다.그런데 인백이 그들은 비방하지 않고 이쪽만을 비방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일으키기에 이르렀고 그것이 화근이 되어 지금까지 막혀 있으니, 인백이 혐의를 피하지 않는 것이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인지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일 인백이 남을 비방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지켜 사류가 점점 성하여져서 당파가 나뉘는 우환이 없었다면 청론(淸論)이 크게 펼쳐져서 심은 저절로 권력을 잡는 데 이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니, 어찌 국가의 복이 아니겠는가. 연전에 계함(季涵)이 서인을 위주로 하는 의논을 치우치게 고집하면서 도리어 나를 의심하였는데, 내가 그대와 함께 조용조용하고 간절하게 이야기하여 있는 힘을 다해 돌려 놓았었다.그때 그대는 계함을 어떻다고 하였는가. 오늘 그대가 동인을 위주로 하는 것은 역시 계함이 서인을 위주로 하던 것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하여 계함을 책망하던 것으로 도리어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가. 을해년(1575)의 서인의 잘못은 거조가 정당하지 못한 데에 있었는데, 오늘날 사람들의 거조가 과연 을해년보다 낫다고 하겠는가. 서인을 모두 사당으로 배척하는 것이 을해년에 서인들이 공저(公著 이성중(李成中)의 자)만을 배척하던 것과 비교할 때 어떠한가. 서인 중의 어진 자를 청요직(淸要職)에 천거하지 않는 것이 을해년에 중숙(重叔)을 전랑에 천거하지 않은 것과 어떠한가.을해년에 조원(趙瑗)이 표상을 받은 것이 참으로 여러 사람의 마음에 만족스럽지 않았는데, 오늘날 시세를 따라서 팔을 휘두르고 큰소리를 치면서 스스로 득의하였음을 과시하니 조원인지도 모르겠다. 유식한 이들의 근심과 탄식이 을해년보다 심한데 바야흐로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동이 옳고 서가 그르다’ 하니, 이 말은 다만 그의 동류 중에 벼슬에 나아가기를 구하는 사람이나 믿지 다른 사람이야 누가 믿을 것인가. 이미 서인이 저지른 잘못을 자신들도 그대로 본받으면서 또 스스로 옳다 하니 이러하다면 명색이 군자라고 하는 사람은 비록 함부로 행동하고 거꾸로 일을 하여도 역시 군자임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가만히 생각하면 인백은 깨우친 사람이며 이제 변고를 겪어 소견이 반드시 나아졌을 것이니, 만일 그로 하여금 의논을 주장하게 한다면 반드시 오늘날의 분열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의당 의논을 주장하여 말하기를, ‘심을 다시 요직에 있게 하여서는 안 되며, 삼윤을 다시 청요직에 참여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 나머지 서인은 재능에 따라 관직을 주고 동인 중에 의논이 지나치게 과격한 자는 제재하며, 시세를 타고 붙은 자는 배척하자.’ 해야 할 것이다. 그대와 숙부(肅夫)ㆍ이현(而見)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친다면 혹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듣건대 이현의 의사가 과격한 자들과 같다고 하니 그렇다면 바랄 바가 못 된다.심은 외척 중에 약간 두각을 나타낸 자일 뿐이니 진실로 말할 것이 못 되며, 김도 도량이 가볍고 그릇이 얕은데 학술이 또한 짧아, 다만 사류 중에 낄 수 있을 뿐 유림의 종장(宗匠)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 이 사람의 옳고 그름이 어찌 국운의 성쇠가 될 만하겠는가. 눈을 바로 가진 사람이 본다면, 한바탕 웃음거리도 안 되는 일이다. 을해년에 서인들이 팔을 휘두르며 시비를 정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내가 매우 웃으면서 놀라거나 탄식하지 않은 것은, 서인 중에 비록 착한 선비가 있지만 모두 학문하는 선비가 아니니 그 식견이 밝지 못함을 깊이 괴이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고 여겨서였다.사암(思菴 박순)ㆍ중휘(重輝) 같은 이들 또한 다 나와 함께 가만히 웃었다. 그런데 지난해에 형같은 이도 역시 눈을 부릅뜨고 거리낌없이 반드시 시비를 가리려고 하였으니, 나는 실망하였다. 어찌 깊이 슬퍼하고 길게 탄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내가 종전에 고립되어 동인ㆍ서인 모두에게 좋게 보일 수 없었던 것은, 진실로 두 사이를 화합하게 하여 조정을 평안하게 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일 나로 하여금 서인에게 붙어서 동인을 공격하라 한다면 차라리 동인에게 붙어서 서인을 쳤을 것이다. 뒷날 심ㆍ윤의 당이라 하여 깨끗한 선비의 명예를 잃고 좋은 벼슬을 얻는 것보다는, 오늘날 형에게 붙어서 맑은 이름과 좋은 벼슬 둘 다를 얻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또 형은 내가 형에게만 권고하여 말하고 서인에게는 훈계하지 않는다고 의심하는데, 이것은 내가 그렇지 않으니 내가 형에게 고하는 말이 있을 때에는 서인이 듣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서인을 경계시키는 말을 형이 어찌 듣겠는가. 대개 사람의 싸움을 중지시키려면 마땅히 이기는 편을 말려야 하는 것이다. 이기지 못하는 편은 당장 싸움을 그만두기를 원할 것이니, 어찌 듣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을해년에는 서인이 조금 이기고 동인이 패하였기 때문에, 그때 나는 다만 서인을 향하여 논쟁하던 참인데 어찌 동인에게 권고하는 말을 하겠는가. 지금은 서인이 여지없이 패배하였고 동인이 한창 크게 이기고 있으니, 어찌 동인을 향하여 논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서인도 잘못 생각하는 이가 많으므로 때로 서인에게 권고 경계하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조정하는 방책은 동인에게 있는 것이다.” 하였다. 《율곡집(栗谷集)》
○ 이이가 성혼(成渾)에게 보낸 글에, “지금 우열(優劣)로 말한다면 김이 진실로 심(沈)보다 낫다. 그러나 그 소위 동인이라는 자들이 어찌 모두 서인보다 나을 것인가. 그중에는 때를 타고 세력으로 몰리는 경솔하고 부정한 자도 있는 것이니 어찌 한두 사람의 우열을 가리고 문득 시비와 사정(邪正)을 정하여 국론으로 단정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우자(優者)가 반드시 열자(劣者)를 공격하여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제갈량(諸葛亮)은 방사원(龐士元)을 공격하였을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만일 시비로써 말한다면 시와 비는 원래 일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요, 일에 따라 나타나는 것이다. 당초에는 같은 사류로서 나랏일을 하려고 한 것이니, 진실로 둘 다 옳았다. 그러나 틈이 벌어져 서로 배척하며 사삿일을 도모하는 데 이른 것은 둘 다 그르다고 할 것이다. 그 일로 말하면 모두 시와 비가 있고, 그 사람으로 말하면 모두 사류이니, 어찌 하필 서인의 잘못만을 배척하여 소인으로 지목할 것인가.만일 그 사람됨에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있다면 비록 그 의논이 같더라도 반드시 군자를 쓰고 소인을 버려야 할 것이요, 그 일에 시와 비가 있는데 그 사람이 같은 사류이면 그 의논은 비록 다르더라도 다만 그 일을 바로잡고 나서 그 사람을 용납하여야 한다. 지금 있는 힘을 다해 다투는 자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아마도 하늘이 시키는 것이니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내가 말한 ‘둘 다 옳고 둘 다 그르다’는 의논이 바야흐로 사류의 훼방과 배척을 받는 것은, 옛적에 당파로 갈라졌던 당(唐) 나라의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나, 혹은 송(宋) 나라의 여러 당파나, 한기(韓琦)ㆍ부필(富弼) 두 사람 중에 반드시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한 후라야만 나랏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함인가. 만일 마음이 공명(公明)하다면 그들을 똑같이 보고서 그중에서 특별히 우수한 자를 등용하고 또 열등한 자를 용납함으로써 같이 태화(太和)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만일 형의 소견에 맞지 않는다면, 자세하게 말해 주어 나의 미혹(迷惑)을 버리게 할 것이요, 만일 내 말이 해롭지 않은 것이라 여겨지면, 모름지기 숙부(肅夫)ㆍ경함(景涵) 두 분에게 반복하여 설명해서 그들로 하여금 의견이 일치되게 한다면 다행이겠다.‘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의논하지 않는다.’ 한 성인의 교훈이 있기는 하지만 들은 대로 고하는 일도 간혹 있는 것이다. 하물며 경함은 편견이 매우 심하니 빨리 구해 내는 것은 역시 우리들의 책임이다. 나의 말은 혹 그가 믿지 않을지도 모르나 노형의 말이야 그가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하였다. 또 글을 보내기를, “형은, 심이 외척으로서 김에게 굽히지 않는다 하여 심을 그르다 하지만, 이것은 사세(事勢)이니 어찌 옳고 그른 것의 문제점이 되겠는가. 출생한 지벌(地閥)은 그 사람(심의겸)의 죄가 아니다. 송 나라 촉당(蜀黨)이 진실로 그르지만 가령 정자(程子) 낙당의 수령이며 촉당의 반대자 가 정치를 한다면 장차 촉당을 들어서 다 배척할 것인가, 아니면 그중에 복종시켜 사용할 수 없는 자만을 다스릴 것인가. 나의 생각으로는, 소동파(蘇東坡 촉당의 수령)는 쓸 수 없지만 그 밖에도 군자가 많은데 어찌 모두 버려서야 되겠는가. 우ㆍ이(牛李)는 인물로 말하면 이가 우보다 낫지만 틈이 생긴 시초에는 잘못이 이덕유에게 있었다. 우승유ㆍ이종민(李宗閔)이 대책(對策)을 낼 때에 집정(執政)을 헐뜯었는데, 집정은 덕유의 아버지 길보(吉甫)였다. 길보는 군자가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책은 공론이었는데도 덕유가 먼저 미움과 원망을 품었으니, 어찌 잘못이 이덕유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물로 말하면 이덕유에게 쓸 만한 재주가 있고, 우승유는 다만 이럭저럭하는 인물로서 쓸 만하지 못하였는데, 오늘의 일이 이와 방불하다. 사류가 방종하고 나라가 장차 나라 구실을 못 하겠기에 나의 상소는 그 병을 다스리려고 한 것이다. 어찌 구구하게 심의겸 한 사람을 위하여서이겠는가. 당 나라 배도(裵度 당 헌종(唐憲宗) 때의 어진 정승)가 붕당(朋黨)을 진정시키지 못한 것은, 그때 임금이 밝지 못하므로 배도가 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말하자면, 배도의 충성 역시 극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것을 취하여 법으로 삼을 것인가. 만일 숙부의 말과 같다면, 배도가 사림을 조화시키는 글을 올린 것이 바로 우승유의 당을 힘써 구원한 것이 된단 말인가. 대저 사류의 싸움에는, 마땅히 기울어지는 편을 보아서 붙들어야 할 것이다. 을해년에 인백이 장차 먼 지방으로 귀양 가게 되었을 때, 내가 홀로 아뢰어 구한 것이 어찌 인백 한 사람을 위하여서였겠는가. 지금 심을 소인이라 하고 서인을 사당이라 하는 것은, 인백을 귀양 보내는 것보다 심한 것이다. 나의 상소는 다만 심이 소인이 아니요, 서인이 사당이 아니라는 것을 밝힐 따름이다. 어찌 심을 군자라 여겨 쓸 만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 기묘년(1579) 7월 초에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여 시사를 논하고, 아울러 동인과 서인을 화합시키는 계책을 드리려고 하였으나, 글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이에게 보내어 파주에 있었다. 수정하고 다듬어 주도록 하니, 이이가 그 말에 따라 대략 몇 줄의 문자를 만들어 보내었다. 인걸은 성질이 소탈하여 사람을 향하여 숨기지 아니하였으므로 허엽(許曄)과 이문형(李文馨)이 이 말을 인걸에게서 들었다. 이에 사류가 떠들썩하니 전하면서 그가 동인을 나무란 데에 노하였다.정언(正言) 송응형(宋應泂)이 방정맞고 성미가 급하여 속마음이 흉하여 몰래 이이가 사류에게 미움받는 것을 틈타서, 먼저 말을 내어 이이를 탄핵하여 동인과 굳게 결탁하고자 이내 동료들에게 의논하였지만, 대사간 권덕여(權德輿) 등은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응형이 피혐하면서 말하기를, “이이는 경연의 옛 신하로 젊어서부터 유학자라는 명망을 가졌음에도 감히 자취를 감추고 은연히 남을 대신하여 상소를 지었으므로, 신이 그 잘못을 논하여 신하로서 속이고 숨기는 정직하지 못한 과실을 바로잡으려 하다가 동료들에게 저지되었습니다. ……” 하였다.권덕여 역시 동료들을 데리고 피혐하고, 대사헌 이식(李栻) 등 역시 함부로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 일에 묵묵히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이유로 피혐하니, 홍문관이 처치하게 되었다. 교리 김우옹(金宇顒)이 말하기를, “송응형은 분명히 소인으로서, 이 기회를 타서 군자를 모함하려는 것이니, 탄핵하여 사헌부와 응형을 체직하고 대사간 이하만을 남겨 두어야 옳다.” 하였으나 동료들이 따르지 않았다. 우옹이 말하기를, “잘못 처치하면 우리들 또한 소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니, 어찌 송응형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소인의 지경에 빠져서야 되겠는가.” 하였다.부제학 이산해와 응교(應敎) 이발은, 양쪽 사이에서 우물쭈물해서 마침내 둘 다 온전히 하려는 생각을 하고는, 차자를 올려 모두 출사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마침내 이문형을 불러 물으니 문형이 아뢰기를, “신이 우연히 인걸에게 물었더니, 인걸이, ‘이이가 보냈다.’ 하였고, 이 밖에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사헌부가 출사한 뒤에 응형을 내보내고 덕여를 체직하였으며 장차 이이를 탄핵하려 하자, 의논이 매우 떠들썩하였는데 지평 기대정(奇大鼎)이 더욱 팔을 휘두르며 크게 욕설을 하였다.
○ 인걸이 그것을 듣고 이내 상소하여 아뢰기를, “이이가 과연 신의 상소를 수정하였습니다. 삼가 들으니, 송 나라 정이는 팽사영(彭思永)을 대신하여 복왕(濮王)의 전례(典禮)에 관한 상소를 지었고, 부필을 대신하여 영소릉(永昭陵)을 논하는 상소를 지었으며, 여공저(呂公著)를 대신하여 임금의 부름에 응하는 상소를 지었으니, 이런 일들은 예전 선비들도 일찍이 한 일이라고 하였으므로, 신은 이이의 글을 사용하고서도 혐의를 삼지 않고 사람들에게 숨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전하는 자들이 모두 이이가 신을 꼬여서 상소하였다고 하는데, 신이 비록 못났긴 하나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 신의 본의가 아닌 것으로 이런 상소를 올렸겠습니까.신이 늙어 죽을 때가 되었는데 감히 거짓을 꾸며서 전하를 기망(欺罔)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에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옥당이 마침내 상차하여 아뢰기를, “송응형이 경솔하게 들은 말을 믿고서 조정이 편안치 못할 우환을 아뢰려 하였고, 이식(李栻) 등은 처치가 정당치 못하여 크게 화평하게 하는 의사가 아니었으니, 모두 체직하소서.” 하였다. 새로 임명된 대사헌 이산해 등이 역시 이이를 헐뜯기 그지없었고, 집의(執義) 홍혼(洪渾)은 더욱 분개하여, “어찌 응형을 체직시켜 언로(言路)를 막아서야 되겠는가.” 하면서 상소를 올려 다투려고까지 하였는데, 유성룡(柳成龍)ㆍ이발(李潑)이 힘써 말려 중지시켰다.
김우옹이 듣고서 말하기를, “만일 사헌부의 상소가 올라갔다면 나도 역시 상소하여 그들이 어진 이를 해치는 죄를 배척하고 나도 물러갈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노수신은, “사헌부가 과연 이이를 공격하였다면, 우리들도 마땅히 그들의 잘못을 아뢸 것이다.” 하였다.수신이 동몽훈도(童蒙訓導) 박형(朴泂)에게 말하기를, “송응형이 이이를 공격하였다는데 바깥 의논이 어떤가?” 하니, 박형이 말하기를, “현재 의론이 비록 이공(李公 이이)을 헐뜯고는 있지만 이공은 훼방할 수 없습니다. 어린 학도로서 내 문하에서 배우는 이들이 3, 4백 명인데 내가 그들의 의사를 시험삼아 묻기를, ‘이공이 어떤 사람이냐?’ 하니, 이이가 군자라고 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뒷날의 사림입니다.” 하였다.
○ 후에 경연에서 박순과 수신이 모두 극력으로 이이가 혹 데면데면한 과실은 있다 하더라도 나라를 근심하는 데서 나온 것이니 흠잡을 수 없음을 진술하였다. 이때 동인 중에 경박한 자들이 기필코 이이를 논박하고자 온갖 괴상한 의논을 내었으나, 박순ㆍ수신ㆍ우옹이 낯빛을 엄정히 하고 그들을 꺾었으므로 끝내 해치지 못하였다.정철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요새 의논이 숙헌(叔獻) 이이의 자 을 공격하기까지 하니, 오히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였다. 김우옹ㆍ이발이 인하여 조정하는 의논을 내어서 차츰 경박한 의논을 억제하니 거의 화평의 희망이 생겼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이의 상소가 비록 저지와 억제를 당하였지만 국사에 도움이 없지는 않았다.” 하였다. 《석담일기》
○ 집의(執義) 허진(許晋)이 이이를 배제하고자, 사류들의 마음을 결집하여 아뢰기를, “이이의 상소는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입니다. 상소 중에 심의겸ㆍ한수ㆍ정철을 구하려 하였는데, 의겸과 한수는 그의 겨레붙이요, 정철은 친한 벗이니, 그 말이 어찌 공심(公心)에서 나왔다 하겠습니까. 또 그가 올라오지 않고 거만하게 상소를 올렸으니 또한 신하의 예가 아닙니다.” 하였다.상이 바야흐로 이이가 올라오지 않는다 하여 매우 불평하던 터였으므로 허진의 말을 듣고 자못 옳게 여겼다. 얼마 안 되어 허진이 승지에 임명되자, 사헌부는 그가 세상에 아첨하여 바른 것을 해친다고 탄핵하였고, 여론이 모두, “허진은 옛 친구를 해쳐서 출세하였다. 만일 숙헌이 조정에 있었다면 허진이 말 채찍을 가지고 따라다니기에도 바빴을 것인데, 이이가 우물에 빠진 기회를 타서 이내 감히 돌을 던졌다.” 하였다.
○ 기묘년(1579) 8월, 사류들이 이미 이이를 잃고, 성혼(成渾)을 그 당에 끌어들이고자 하여 상에게 여러 번 권하여 특별히 부르게 하였지만, 성혼이 끝내 명에 응하지 않았다. 어떤 선비가 성혼을 보고 이이의 단점을 들어 헐뜯자 성혼이 천천히 말하기를, “나와 숙현은 마땅히 살아서는 죄를 같이하고, 죽어서는 전기(傳記)를 같이할 것이다.” 하니, 그 사람은 얼굴빛이 변해서 갔다.
○ 경진년(1580)에 허엽이 일찍이 이이와 더불어 서로 교분이 두터웠는데, 동인과 서인이 다른 주장을 내세우게 된 뒤 허엽이 동인의 종주가 되어 의논이 괴팍하고 편벽되어 심지어는 사주하여 이이를 공격하기까지 하니, 사람들이 허엽을 묘지(卯地)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묘지가 정동(正東)이므로 허엽이 동인의 종주임을 기롱한 것이다.
○ 이때 서인은 청관(淸官)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속된 무리들이 높은 벼슬자리에 그득하였다. 정종영(鄭宗榮)이 우찬성(右贊成)이 되자, 사헌부와 사간원이 탄핵하여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여러 날을 두고 논란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영은 삼정승에도 마땅하다.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권신(權臣)에게 아첨하지 않았고 나를 섬김에도 잘 도와 유익하게 한 점이 적지 않았다. 다만 지금 사람처럼 과격하지 못할 뿐이다.” 하였다. 《석담일기》
○ 사헌부가 수원 현감(水原縣監) 우성전(禹性傳)을 탄핵하였다. 성전은 젊어서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약간의 명망을 얻었는데, 재기(才氣)를 믿고 궤변(詭辯)을 주장하여 사류를 능가하였으며, 스스로 재주가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그 행실에 흠이 많았다. 그 친구인 홍혼(洪渾)ㆍ성락(成洛)의 무리는 망녕되이 서로 높여서, “성전이 뜻을 얻으면 만물이 모두 그 삶을 이루게 된다.”고까지 하였다.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은 성전이 다시 시종(侍從)의 반열에 들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내 그를 탄핵하여 파면하고자, 성전이 임지(任地)에서 일을 보지 않고, 근친(覲親)을 칭탁하고 오래도록 서울에 있으며, 또 많은 전곡(錢穀)을 서울 집으로 실어다가 술과 고기를 장만하여 제멋대로 술 마시며 놀고, 장황한 기세로 망녕되이 스스로 잘난 체하는 모양을 지적하였다. 대사헌 이양원(李陽元)이 그 나이 어린 사람들과 혐의를 짓기를 꺼려서 따르려 하지 않자 인홍이 혼자 아뢰려고까지 하므로 양원이 마지못하여 따르면서 약간 그 논핵하는 말을 고쳤다. 이에 성전의 무리가 모두 불평을 품게 되었다. 《석담일기》
○ 정인홍이 또 이조 좌랑 이경중(李敬中)을 논핵하였다. 경중은 원래 학식이 없으며 성질이 또 고집스러워 남의 착한 것을 따르는 것이 부족하였다. 전랑으로 있은 지 매우 오래되었는데 자못 제 마음대로 하는 버릇이 있으므로 정인홍이 탄핵하려 하였지만 대사헌 정탁(鄭琢)이 따르지 않으니 마침내 각기 제 소견대로 아뢰고 피혐하며 물러갔다.사간원이 아뢰어 정탁을 체직하고 인홍을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드디어 경중을 탄핵하여 파면시켰다. 이에 그 무리들이 모두 의심과 두려움을 품었으며, 근거 없는 의논이 시끄러웠고 유성룡도 좋아하지 않았다. 이이가 말하기를, “정덕원(鄭德遠)은 시골 출신의 외로운 처지로서 충성을 다하여 공무를 받들고 있다. 논박한 바가 비록 지나친 듯하더라도 실은 이것이 공론이니 어찌 그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하였다.
○ 신사년(1581) 5월에 윤의중(尹毅中)이 형조 판서가 되었다. 의중은 자못 재물을 탐내어 비루하므로 청의(淸議)의 버림을 받았다. 이때 형조 판서에 빈자리가 있었는데 상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서 형조 판서로 승진시킬 만한 사람을 천거하도록 명하니, 영의정 박순은 김계휘(金繼輝)ㆍ정지연(鄭芝衍)을 천거하고, 좌의정 노수신과 우의정 강사상(姜士尙)은 윤의중ㆍ박근원(朴謹元)을 천거하였다. 이조 참판 정탁은 영상이 천거한 사람을 첫째로 의망(擬望)하려 하였는데, 정랑(正郞) 이순인(李純仁)은 두 정승이 함께 천거한 것이 더 중하다고 굳이 다투어 마침내 의중을 첫째로 의망하고 근원ㆍ계휘ㆍ지연을 다음으로 하여 사망(四望)으로 하였다.의중은 벌써부터 탐하다는 소문이 있었고, 근원 역시 경솔하고 약아서 사류가 매우 천히 여겼다. 또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상사 때에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는데 처첩을 생각하다가 장병이 발생하여 체직되기에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병은 꾀병이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승진 발탁의 물망에 참여하였는데 의중이 임금의 낙점(落點)을 받자, 이에 물의가 떠들썩하였고 대사간 이이가 장차 탄핵하려 하였다.의중은 이발의 외숙이므로 성혼이 이이에게 말하기를, “형이 이발과 매우 친밀하니 마땅히 장차 탄핵하려는 사유를 말하여야 할 것이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어찌 생질을 대하여 외숙의 과실을 말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아뢰기를, “윤의중은 청렴하지 못하게 부를 이루어 평소 청의가 비루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만일 이 사람을 승진시키면 온 세상을 인도하여 이익만을 쫓게 하는 것이니 개정하소서. 또 박근원은 일찍이 병을 핑계하여 법을 이용해 수릉관을 피하였으니, 마음 씀씀이가 형편없는데 이조가 연달아 청요직에 의망하고 승진시켜 발탁하려고까지 하는 것은 옳지 않으니 이조 관원을 추고하소서.” 하였다.대사헌 정지연의 계청도 함께 나왔으나 겨우 평범한 말들뿐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이이가 주장이 되어 의중을 공격한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조 참판에 결원이 있었는데, 좌랑 김첨(金瞻)이 김우옹에게 글을 보내기를, “이조 참판의 비삼망(備三望)에 적절한 사람이 없소. 박(근원)은 비록 선비들의 인망은 없지만 역시 큰 허물은 없으니 말망(末望)에라도 채우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대사간 이이에게 물어 보기 바라오.” 하였다. 유몽학(柳夢鶴)이 힘써 우옹에게 권하여 글로 이이에게 물으면서, 근원이 쓸 만하다고 많이 말하였다.이이는 전관(銓官)이 아니면서 남의 진출을 막는 것을 혐의스럽게 생각하여, 마침내 답하기를, “만일 편지에서 말한 바와 같다면 망에 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하였다. 김첨이 그 말을 듣고 박근원을 청요직에 거듭 의망하니, 사람들이 더러 이이를 탓하기도 하였다. 이때에 와서 이이가 여러 사람이 노여워함에 따라 논평하여 바로잡았는데, 김첨이 매우 불평하여 말하기를, “대사간은 자신이 천거하고서 이내 자신이 공박하는가.” 하였다.이때 이발이 중망(重望)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시속의 무리 중에 이발에게 붙으려고 하는 자가 많았는데, 의중을 힘껏 논박하지 않았다. 이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경함(景涵)을 꺼려서 윤(尹)을 힘써 공격하지 못하는 자는 경함을 아는 자가 아니다.” 하였다. 정언(正言) 송언신(宋言愼)은 이발의 천거로 등용되었으므로 더욱 의중을 덮어서 옹호하려 하여 아뢰기를, “의중이 조정에 벼슬한 지 30여 년 동안이나 청반(淸班)에 있었고 별로 오점이 없었으니, 이는 그가 악착스럽게 욕심을 채우려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뜻이 게을러져서 재득(在得)의 경계에 어두운 점은 혹 있었으니, 명하여 개정하소서.” 하였다. 이이가 그를 만나 웃으며 말하기를, “이는 바로 천거하는 글이지 논핵(論劾)이 아니다. 이렇게 진술하고서 상께서 뜻을 돌리기를 바랄 것인가.” 하였다. 언신에게 글을 보내기를, “그대가 윤을 논한 글에 칭찬하는 말이 있으므로 사론(士論)이 그르다 하며 비웃으니, 대간의 체모로서 반드시 자처(自處)하여야 할 것이다.” 하니, 언신이 노하여 이내 피혐하였는데, 매우 어그러진 말이 많았다.순전히 의중을 구하고 양사를 저지하고 억제하고자, 몰래 지적하여 근거 없는 말을 만들고 자기네 당파가 아닌 사람을 배척한다고까지 하니, 이에 양사가 아뢰어 언신을 파직시켰다. 이때 유속의 지위 높은 자들이 스스로 동인에게 붙어서 이이를 가리켜 속으로 서인을 돕는다고 지목하였으므로, 언신이 동인에게 붙고자 이런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 이조가 김효원(金孝元)을 대사간에 의망하였더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을 편안치 못하게 한 것은 다 이 사람의 죄이다. 김효원은 다만 일반 관직 낭료(郞僚)에 충당하면 족하다. 어찌 대사간에 의망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니, 이에 사류가 많이들 불안해하였다. 이발이 이이에게 묻기를, “옥당이 상차하여 이 일을 논쟁하려 하는데 어떠하겠소?”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이 일은 다만 대신이 아뢰어야 할 것이요, 나아가 젊은 사류가 경솔하게 말을 하여 더욱 전하의 의심을 일으켜서는 안 되오.” 하였다.이이가 박순을 만나 말하기를, “지금은 마땅히 동인ㆍ서인의 혐의를 씻어 버리고 다만 재주와 그릇이 어떠한가를 보아 등용하는 것이 옳은데, 전하께서 김효원을 청망(淸望)에 올리려고 하지 않으시니 마땅히 대신이 아뢰어야 할 것이오.” 하였다. 수일 후에 박순이 나아가 아뢰기를, “동ㆍ서의 이야기는 여항 간의 잡담인데, 어찌 이것으로 쓸 만한 사람을 폐하여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김효원은 재주와 그릇이 아깝습니다.” 하니, 상이, “비록 효원을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쓸 만한 사람이 없겠느냐.” 하였다.이이가 아뢰기를, “한 사람을 쓰고 버림이 큰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나, 다만 동과 서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으면 사류가 서로 의심하고 꺼리게 됩니다. 지금 효원의 재주가 쓸 만한데도 동인ㆍ서인의 설에 견제되어서 쓰지 않는다면 심히 사류가 불안해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하였으며, 유성룡ㆍ한효순(韓孝純)이 역시 반복하여 아뢰었으나, 상의 마음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 신사년(1581) 6월에 이이를 대사헌에 특배(特拜)하였다. 이보다 앞서 정인홍이 우성전(禹性傳)ㆍ이경중(李敬中)을 논핵한 후로 시속의 무리들이, “이이가 의논을 주동하여 동인을 억제하고 서인을 돕는다.” 하며 의심하고 불평하는 자가 많았다. 시속의 무리 중에는 이이를 알지 못하는 자가 많았으나, 이발과 김우옹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때 유행하던 소문에, “심의겸이 금상께서 상중에 계실 때 은밀히 누나인 대비를 통하여 기복(起復)하기를 희망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잡으려 하였다.” 하였다.그 말이 사리에 가깝지 않은데도 사류가 격분하였으며, 이발은 평소 의겸을 미워하던 터라 반드시 죄를 성토하여 쫓아 버리려 하였고, 정인홍은 더욱 분개하여, “의리상 이놈과 같이 조정에 있을 수 없다.” 하였다. 이이와 성혼은, “이것은 믿을 수 있는 말이 아니요, 의겸이 오늘 대비가 죽은 후에 세력이 없어서 외로운 새 새끼나 썩은 쥐와 다름이 없으니, 한 쪽에 두고도 나랏일을 할 수 있는데, 지금 만일 논핵한다면 인심이 의혹하여 편안치 못한 발단을 일으킬 것이다. 어찌 하필 무사한 가운데 일을 낼 것인가.” 하니 이발은 마음이 불쾌하였으나 이내 인홍을 보고서 그 결정에 찬동하였다.인홍이 우옹에게 의논하자 우옹이 힘써 말렸으나 인홍이 듣지 않고 정철까지 아울러 논핵하려 하였다. 이발이 힘써 말리며 말하기를, “만일 계함을 논핵하면 대사헌(이이)이 반드시 따르지 않고 대립할 것이오.” 하였다. 인홍이 이이를 만나 의겸을 논핵하도록 힘써 권하였으나 이이가 따르지 않자, 인홍이 강개하여 마지않으면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려 하였다. 이발이 이이를 보고 말하기를, “시속의 무리들이 공을 깊이 믿지 않는 것은, 공이 인정에 끌려 의겸을 버리지 않을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오.공이 지금 이 사람을 끊어 버린다면 한 시대의 사류가 다 공의 마음을 믿고 복종하게 될 것이니, 그러면 서인 쪽의 어진 선비들을 점차로 수용하여 보합(保合 지금의 화해라는 말과 같음)할 가망이 생길 것이다. 또 이 사람을 논핵하지 않으면 덕원이 장차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소.” 하였다. 이이가 성혼에게 말하기를, “이제 아무 까닭 없이 의겸을 논핵하려 하니 매우 사리에 마땅하지 않다. 그러나 시속의 무리들이 원래부터 나를 서인에게 편당이 되는가 의심하여 왔는데, 지금 정덕원이 이 일 때문에 뜻이 맞지 않는다 하여 벼슬을 버리고 간다면 시속의 무리들은 반드시 이것을 가지고 구실을 삼아, 드러내놓고 나(이이)를 공격할 것이다.내가 가고 사류가 다 흩어지면 국사가 더욱 무너질 것이니, 오늘날 형편으로는 중의(衆議)를 따라야 하겠다.” 하니, 성혼이 탄식하면서, “경함이 있지 않으면 누가 이 의논을 주장하며, 덕원이 있지 않으면 누가 이 의논을 결정하리오. 평지에 풍파를 일으키는 것이라 하겠다.” 하였다. 사헌부에 일제히 모였을 때에 인홍이 의겸의 일을 발론(發論)하자, 이이가 말하기를, “상차하여 그 사람됨을 논란하는 것이 어떠하오?” 하니, 인홍이 말하기를, “공명정대하게 논핵하여 파직하는 것만 못하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이 일은 반드시 아뢰는 말이 적당하다. 만일 조금 과격하면 사건이 번질 염려가 있소.또 기복(起復)하려 하였다는 것은 마땅히 반은 믿고 반은 의심스러운 정도에 둘 것이요, 계사 가운데 넣어서는 안 되오.” 하였다. 이이가 마침내 계사를 부르기를, “청양군(靑陽君) 심의겸은 일찍이 외척으로서 오랫동안 국론(國論)을 잡았으며, 권세를 탐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좋아하여 사류의 마음을 잃어왔습니다. 요 몇 년 이후로 조정의 의논이 흩어져서 보합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이 사람 때문에 빚어진 일입니다. 날이 갈수록 공론의 불평이 더욱 심해지는데, 지금까지는 뚜렷한 배척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 분명하지 못하여 인심이 의혹하고 있으니, 파직하도록 명하시어 좋아함과 미워함을 분명히 하여 인심을 진정시키소서.” 하였다.또 인홍에게 말하기를, “뒷날의 계사는 반드시 이 말대로 할 것이요, 문구를 덧붙여서 사람들의 의혹을 일으켜서는 안 되오.” 하니, 인홍이 입으로는 응낙하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다음날 사간원 또한 발론하고, 옥당이 상차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석담일기》
○ 8월, 예전에 이이가 의겸을 논핵할 때에 동료들과 약속하여 번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는데, 이튿날 인홍의 계사가 좀 과격하였던 데다가, “사류를 끌어 붙여서 명성과 위세를 조정한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상이 묻기를, “의겸과 붙은 사류란 누구인가?” 하였다. 인홍이 동료에게 의논하여 아뢰겠다고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계사를 썼으니 스스로 알고 있을 것이다. 속히 회계(回啓)하라.” 하였다. 인홍이 갑자기 대답하기를, “소위 사류란 의겸과 윤두수ㆍ윤근수ㆍ정철 등 여러 사람이며 서로 결탁하여 명성과 위세를 짓고 조정의 권세를 엿보고 있습니다. ……” 하였다.이이가 인홍에게 말하기를, “정계함(鄭季涵)은 의겸의 당이 아니다. 연전에 의겸에게 대한 사류의 의논이 과격하자, 계함이 과연 불평하는 말을 하였지만 이것은 의겸을 위하여서가 아니다. 계함은 절개 있는 선비인데, 만일 의겸과 결탁하여 명성과 위세를 조성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억울한 일이다. 또 내(이이)가 연전에 상소하면서 정철의 사람됨을 칭찬하였는데, 이제 사헌부에 있으면서 정철을 의겸의 당이라고 배척한다면 나는 마침내 이랬다저랬다 하는 형편없는 사람이 된다. 그대가 모름지기 피혐하고, 정철을 위하여 변명한 뒤에야 내가 일을 볼 수 있으니, 그러지 않는다면 내가 마땅히 사피(辭避)할 것이다.” 하였다.인홍이 매우 어렵게 여겨 서로 오랜 시간 다투다가 뜻을 굽혀 이이의 말에 따라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정철은 비록 의겸과 정분이 매우 두텁기는 하지만 두수 등과 같이 사사로이 의겸과 결탁하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는데, 신이 이내 정철을 의겸의 사당(私黨)이라 하였으니 사실과 매우 맞지 않았습니다.” 하였다.이에 사헌부가 처치하게 되었는데, 이이가 말하기를, “정철과 의겸이 비록 정은 두텁다 하지만 그 기미(氣味)와 심사(心事)는 판연하게 다른데, 인홍이 다만 갑작스럽게 회계하느라 사실과 틀렸을 뿐, 사의(私意)가 있는 것은 아니니 마땅히 이러한 이유를 가지고 출사하게 하도록 청하여야 한다.” 하니, 장령 권극지(權克智)와 지평 홍여순(洪汝諄)이 말하기를, “의겸이 실각하자 정철이 항상 분개한 마음을 가지고 불평하는 말을 여러 번 하였으니, 어찌 기미와 심사가 같지 않다고 하겠는가.” 하였으며, 지평 유몽정(柳夢井)은, “나는 정철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의 말을 들었을 뿐이다. 믿을 수 있는 이로 누가 영공(이이)만 하겠는가.나는 마땅히 영공을 따르겠다.” 하였다. 이에 극지와 여순이 피혐하면서 아뢰기를, “신들은 정철과 일찍이 서로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 마음 씀씀이의 은미한 곳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철은 평소 의겸과 교분이 두터웠고, 의겸이 실각한 뒤로는 항상 불평을 품고 말씨가 분하여 격동하였으니, 그들이 서로 친밀한 것은 이에 근거하여서도 알 수 있습니다. 장령 정인홍은 다만 들은 대로 전하의 하문에 답하였으니, 애당초 크게 실수한 바가 없으므로 이 뜻으로 출사하게 하도록 계청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료가 인홍이 아뢴 바가 사실과 틀렸다고 하면서도 도리어 그를 출사하게 하도록 청하였는데 출사를 청하는 것은 같으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 하였다.이이와 유몽정이 역시 피혐하며 아뢰기를, “정철과 심의겸이 비록 정은 투텁다 하지만 정철은 개결 강직한 선비로서 그 기미(氣味)와 심사가 전혀 같지 않으니 원래 사당(私黨)이 아닙니다. 다만 정철의 사람됨이 도량이 좁아서 사람들과 잘 맞지 않고, 구차하게 중의(衆議)를 따르려 하지도 않으니, 사류가 심의겸을 공격할 때에 정철은 그 말이 과격하다고 의심하여 여러 번 불평을 말한 것이지, 실로 심의겸을 위하여서는 아니었습니다. 사류가 이러한 정철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드러난 부분을 보고서 의심하는 것도 인정상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정인홍이 깊이 살피지 못하고 갑자기 회계(回啓)하였으니, 말은 비록 사실을 지나쳐서 바로 들은 바에 의거한 것이지, 그 속에 조금도 사의(私意)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때문에 출사하게 하도록 계청하였던 것인데, 권극지(權克智)와 홍여순(洪汝諄)이 정철의 심사에 알 수 없는 것이 있다고 고집하면서 신들의 의논을 따르지 않습니다. ……” 하였다. 이에 상이 답하기를, “정철(鄭澈)이 만일 결탁하였다면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신하로서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는가.” 하였다. 사간원이 처치할 때에도 그 의논이 일정하지 않아서 모두 피혐하였다.
시배(時輩)들이 정철을 매우 미워하였는데 이이(李珥)가 정철을 요로(要路)에 끌어들일까 두려워서 이이를 공격해서 제거하려 하자, 정언 윤승훈(尹承勳)이 그들의 뜻에 맞추어 이이ㆍ유몽정(柳夢井)ㆍ남언경(南彦經)을 논핵하여 체직하고자 하였으나 동료가 따르지 않았다. 이에 윤승훈이 마침내 피혐(避嫌)하여 아뢰기를, “사람이 친구를 가지는 데는 반드시 뜻이 같고 마음이 합한 후에야 친밀하게 되는 것입니다.이미 정이 두텁다고 하니, 그 기미와 심사가 어찌 판이하게 같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정철을 구하여 주려 하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남언경이 시비를 가리지 않고 모호하게 양쪽을 다 옳다 합니다. ……” 하였다. 이이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정철을 논한 한 가지 일로 하여 크게 윤승훈의 욕설과 배척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정이 두터우면 심사가 반드시 같다는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 옛날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의 사이와, 사마광(司馬光)과 왕안석(王安石)의 사이와, 소식(蘇軾)과 장돈(章惇 송(宋) 나라 간신(奸臣))의 사이는 정이 두터웠던 점으로 말하자면 형제나 다름없었지만, 그 심사를 논한다면 연(燕)ㆍ월(越)의 사이와 같은 점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정철은 고집이 세고 절개가 굳어서 뜻이 맞는 사람이 적은 선비이니, 심의겸과 정이 친밀한 것도 위에 말한 옛사람들만 못합니다. 한창 심의겸이 득세하였을 때에도 원래 당파를 같이한 자취가 없었으며, 심의겸이 세력을 잃은 후에 정철이 불평한 것은 사류들이 과격하여 심의겸의 친구까지 아울러 의심하였기 때문이니, 어찌 구구하게 심의겸 한 사람을 위하였겠습니까. 근래에 인물을 논핵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 친구까지 파급하므로 한 사람을 논핵할 때마다 온 조정이 떠들썩하여 자못 충후하고 안정된 기상이 부족하니, 이것은 성대한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신 등이 논핵한 대상은 심의겸 한 사람에 그쳤을 뿐이며, 정철(鄭澈)의 심사를 논하는 것은 비록 혹 의견이 같지 않더라도 그리 큰 관계가 없어 조금도 대립할 이치가 없는데, 의논이 이렇게 시끄러우니, 이것은 신들의 평소 언행이 미덥게 보여지지 못한 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 하였다. 이때에 시배(時輩)들이 정철을 깊이 미워하였는데, 만일 윤승훈을 체직하면 정철이 무죄가 될까 두려워서, 옥당은 다만 윤승훈만 남기고 양사(兩司)를 다 체직하고자, 전한(典翰) 이발(李潑)과 응교(應敎) 김우옹(金宇顒)이 역시 어물거리며 명백히 하지 않았다.그러자 옥당이 차자를 올려 시끄러워질 것만 염려하고 시비를 가리지 않으면서 다 같이 출사하게 하도록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모호하다는 말은 바로 이 차자에 대해서 써야 하겠다. 윤승훈은 체직하여야 하니, 출사하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러나 우선 그대로 하게 하라.” 하였다. 이이가 남들에게 말하기를, “시론(時論)의 치우침을 내 힘으로 바로잡지 못하고 시배가 나를 윤승훈과 마찬가지로 보니, 내가 어찌 나랏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윤승훈이 또 아뢰기를, “정철에 대한 의논은 보통 의논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옳다 그르다 하는 데에서 어진지 아닌지가 판가름됩니다.다투는 바는 비록 작지만 관계된 바가 매우 커서, 이이 등의 말이 옳으면 정인홍(鄭仁弘)의 말이 그른 것이니, 어찌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아 국론(國論)이 정해지지 않게 하십니까. ……” 하였다. 이이 등이 또 피혐하여 아뢰기를, “사류가 정철을 의심하는 것이 더욱 심해지고, 또 말을 만들고 일 내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두 사이를 이간질하여 점점 더 사이가 벌어지게 하였으니, 정철은 본래 옳지 못하지만 정철을 가리켜 심의겸의 편당이 되었다고 하는 것도 역시 공정한 의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윤승훈이 무슨 식견을 가졌습니까. 사류의 뜻을 맞추어서 따라가 붙으려 한 것에 불과합니다. ……” 하였다.사간원은 피혐하면서 이이(李珥) 등이 정철(鄭澈)을 구하려고 해명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 하고, 옥당은 모두 출사시키기를 청하면서 윤승훈(尹承勳)과 이이 등만 체직시키자고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윤승훈은 전후의 계사(啓辭)에서 생각을 바로 아뢰고 말이 매우 간절하여 일에 대해 말하는 체모를 잃지 않았는데, 이이 등은 이미 그 논핵을 받았으니 마땅히 허물을 자책하면서 물러가 여론을 기다려야 할 것인데, 감히 사피(辭避)할 때에 도리어 윤승훈을 헐뜯어서 ‘뜻을 맞추어 따라가 붙으려 한다’고까지 말하니 그들이 언관을 업신여김이 심합니다.아울러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승훈의 마음은 처음 피혐하여 아뢴 말에 드러났는데도 내가 노여워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넓은 도량에서였지마는, 대관(臺官)으로 있으면서 어찌 공격하여 논란하지 못하였던가. 옥당이 올린 바 모두 출사하게 하자는 차자도 모호하여 말이 되지 않는다. 유생이 모여서 의논하는 것이 감히 이와 같으니 이것은 국가의 수치이다. 어제 또 충직한 신하를 체직하려 하는 데는 깜짝 놀랐다. 내가 어찌 스스로 시비를 가리지 않고, 출사와 체직을 명하는 데에 다만 머리만을 끄덕여서 서생들의 농담거리가 될 것인가.” 하였다.옥당이 대죄(待罪)하여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윤승훈만을 체직하여 진정시키는 방법으로 삼는다면 저 윤승훈 또한 임금의 도량에 포용되어 그 마음을 깨우치고 반성할 것이니 뒷날 반드시 충실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은 없다. 무엇 때문에 이이 등을 아울러 체직하여 나랏일을 할 수 없게 하겠는가. 이이 등을 체직한다고 다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비록 나의 의심을 일으키지 않고자 한다 해도 그럴 수 있겠는가.” 하였다.사헌부가 또 이이를 체직하도록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정철의 깊이를 논하는 것은 우선 그만두는 것이 옳을 것인데, 감히 자기 의견만을 옳다고 하여 이이 등을 공격하고 제거하려 하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심사인가. 충직한 신하가 경솔하고 조급한 자에게 공격을 받고 제거를 당하는데, 내가 만일 그 마음속을 다 털어서 분명히 타일러 책망하지 않고 턱만 끄덕일 뿐이라면 이야말로 혼군(昏君)인 것이니 이는 또한 그대들이 원하는 바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이(李珥)를 출사시켜 함께 공경하는 것이 실로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나의 의심을 일으켜서 장차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니 조심하라.” 하였다.사헌부가 또 아뢰기를, “대간(臺諫)이 논핵을 당하여 직책에 있을 수 없는 형편이니 다시 거듭 생각하여 곧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이 등을 체직하고 특별히 명하여 윤승훈(尹承勳)을 신창 현감(新昌縣監)으로 삼았다. 이이가 체직되고 나서 안민학(安敏學)이 크게 말하기를, “윤승훈이 얼마나 하찮은 인물인데 감히 사류를 공격하느냐.” 하였다. 이이가 동료들을 만나 보니 모두 식견이 없어 매우 답답하고 마음이 언짢아하였으며, 김우옹(金宇顒)ㆍ이발(李潑)이 모두 부끄러워 이이에게 사죄하였다.이이가 성혼(成渾)에게 말하기를, “바로 처리하자는 뜻으로 말하였는데 시배(時輩)들은 나를 윤승훈 등과 마찬가지로 보니 물러가야 하겠소.” 하니, 성혼이 말하기를, “시배들이 모두 부끄러워 사죄하였으며, 실은 형을 공격할 생각이 없는데 어찌 가볍게 물러갈 것이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동과 서의 분쟁이 지금껏 종식되지 않았으므로 내 생각은 동ㆍ서를 타파하여 사류를 보합(保合)하려 하였는데, 시배들은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하며 차라리 국사를 그르칠지언정 반드시 이기려고 하오. 숙부(肅夫)와 경함(景涵)은 그 사이에서 어물어물하며, 시배에게도 거슬리지 않고, 또 나도 저버리지 않으려고 하니 수고롭다 할 것이오.우리들이 물러가면 시배들이 더욱 무너져 내릴 것이므로 속으로 참으며 가지 않는 것이오.” 하였다 유몽학(柳夢鶴)이 이이에게 말하기를, “윤승훈이 시배에게 달라붙는 심정은 알 수 없으니, 공의 말은 지나친 것이오. 또 저편에서 공을 치자 공도 역시 지탄하였으니, 피혐하지 않은 것이오.” 하였다. 이영(李嶸)이, “윤승훈이 따라가 붙은 모양은 회심멸지(灰心滅智 마음이 재같이 되고 지각이 없어진다는 불교 용어)한 사람이면 보지 못하겠지마는, 만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어찌 보지 못하겠는가. 이렇게 아부하고 추종하는 사람을 사류가 그르다 하지 않고, 도리어 그 기세를 도와서 군자를 공격하게 하니 이 어찌된 도리오.” 하였다.이이가 말하기를, “만일 삼사(三司)에 그 그른 것을 말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말하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지금 삼사가 다 윤승훈을 칭찬하니 이것은 온 나라에 공론(公論)이 없는 것이오. 나도 언관(言官)이니, 어찌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있겠소. 또 나랏일을 하면서 피혐(避嫌)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오. 예전에 윤색(尹穡)이 한창 장준(張浚)을 공격하자, 장준이 윤색을 지목하여 간사하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장준도 그른 인물이었단 말이오.” 하니, 김우옹(金宇顒)이 부끄러워 말하지 못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국사에 관계된다고 말이 이토록 분분하오.” 하니, 김우옹이 말하기를, “시배(時輩)들은 이것을 나랏일로 여기오.” 하였다.박순(朴淳)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이 어린 무리이니 식견이 높지 못하다. 숙헌(叔獻) 같은 이는 유림의 종장(宗匠)이 될 만하니, 시배들은 마땅히 청명(聽命)하여야 할 것인데, 관계 없는 일을 가지고 이토록 쟁론하고 나랏일은 내버려두고 생각지도 않는다. 속담에, ‘사슴을 쫓으면서 태산(泰山)을 보지 못한다.’ 한 격이다.” 하였다. 박순이 안민학(安敏學)을 만나 정인홍(鄭仁弘)을 저지하여 다시 논란하여 아뢰지 않게 하려고 하였는데, 안민학이 말하기를, “나는 덕원(德遠)을 산림 학자로 알았는데 지금 보니 괴상한 귀신의 무리이다.” 하고는 마침내 가서 만나지 않았다. 《석담일기(石潭日記)》
○ 시배가 장세량(張世良)의 옥사를 일으킨 후로 정철(鄭澈)은 마음으로 항상 불평하여 여러 번 말과 기색에도 나타났다. 또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는데, 취한 뒤에는 말이 항상 시배들이 잘못한다고 하였으므로 시배들이 더욱 의심하였다. 하루는 이발(李潑)과 더불어 취중에 서로 욕하고 꾸짖다가 드디어는 교제가 끊어졌다. 이에 시배들이 정철을 나무라고 배척하였으므로 이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이이가 강가에서 전송하면서, “조심하여 수양하고 술을 끊으라.” 하고 권하였다.정철이 이발의 마음은 믿을 수 없다고 극언하니, 이이가, “그대의 소견이 편벽되오. 경함(景涵)이 식견은 밝지 못하지만 그 마음은 참으로 착하오.” 하였다. 정철이 말하기를, “아니 아니야, 정덕원(鄭德遠)같은 이는 그 마음이 공정하오. 비록 나를 멀리 귀양 보내자고 논핵하여도 만약 길에서 만나면 나는 술 한 잔 부어서 같이 마시겠소.” 하였다. 이이가 매양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계함(季涵)은 강결(剛潔)하고 충의로운 선비이다. 그의 흠은 편협한 데에 있을 뿐이니 그 사람은 도저히 버릴 수 없다.” 하였는데 시배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석담일기》
○ 정인홍은 기개는 곧지만 용납하는 아량이 없었으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 꼼꼼하지 못하였다. 안민학(安敏學)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 동인이 국론(國論)을 주장하면서 인물이 바른지 어진지는 묻지 않고, 심의겸(沈義謙)을 그르다고 배척하면 군자라 하고 조금이라도 심의겸을 구원하려는 자는 소인이라 한다.그러므로 시세를 타고 붙어서 의지하려는 자가 앞다투어 일어나는데, 이러한 때에 정덕원(鄭德遠)이 산림의 선비로서 급급히 힘을 내어 동인의 세력을 도우니 동인에게 공(功)이 크고, 그가 은일(隱逸)에게 수치를 끼친 것이 크다. 덕원은 참으로 아깝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덕원은 강직하고 계획과 생각은 주밀하지 못하며 학식이 밝지 못하니, 용병(用兵)하는 데에 비유하면 돌격하는 장수라고 할 수 있겠다.” 하였다.
○ 심청양(沈靑陽)은 또 사람마다 아는 인물은 아니었다. 대개 선조(宣祖)가 처음 임금이 되었을 때에 나이가 겨우 16세였는데 청양이 인순왕후(仁順王后)에게 아뢰기를, “지금 성체(聖體)가 바야흐로 어려 지혜와 생각이 자라지 않았으니, 좋아하거나 즐기는 욕심을 제재하여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복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니, 왕후는 원래 엄하고 법도가 있었으므로 엄격히 금지를 하였다. 이에 선조는 오락 등의 일에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욕하기를, “내가 하성군(河城君)의 녹을 먹어도 오히려 부귀인(富貴人)이 될 것인데, 무엇 때문에 여기 있으면서 촌놈의 제재를 받는가.” 하니, 이는 대개 청양을 가리킨 것이었다.이로부터 선조는 청양을 매우 미워하였는데, 동인의 한 패가 은밀히 상의 마음을 알아채고 드디어는 청양을 배척하고 제거할 계획을 하였다. 정송강(鄭松江)ㆍ김황강(金黃崗) 두어 사람이 그 기미를 알았으므로, 바로 동인을 배척하여 소인이라 하였는데, 율곡(栗谷)은 그 일까지는 알지 못하고, 다만 동과 서가 당을 나누는 것만을 보았으므로, 양쪽 모두 치우친 의논이라 하면서도 이전에는 서인이 준엄하고 과격한 것을 그르게 여겼다.어떤 이가, “송강ㆍ황강이 어찌하여 그 사실을 율곡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송강ㆍ황강이 율곡에게 고할 줄을 모른 것이 아니다. 다만 율곡은 원래 이익을 계산하거나 공(功)을 도모하지 않으니, 만일 그 말을 들으면 반드시 대궐로 들어가서 직간(直諫)하여 거북한 사태가 생기면 될까 염려하였으므로, 끝내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강상문답(江上問答)》
○ 9월에 지평 최영경(崔永慶)이 사직하고 올라오지 않았는데, 그 상소의 대략에, “지금 국시(國是)가 정하여지지 않고 공론(公論)이 행해지지 못하여 붕당(朋黨)이 풍습화하고 기강이 날로 떨어지고 있으니, 분명하게 기미를 밝히고 위엄 있게 진압하여 편을 가르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 치우친 생각을 마음대로 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 책임이 대간(臺諫)에게 있습니다.비록 옛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 있게 하더라도 오히려 혹 어려울텐데, 하물며 신과 같이 우둔하고 무식한 자에게 어찌 담당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는데 사람들은 최영경이 누구를 가리켜 붕당이라고 한 것인지 모두 그 향하고 있는 대상을 몰랐다. 이때 최영경의 친구 기대정(奇大鼎)이 학식이 없고 객기(客氣)를 숭상하여 의논이 자못 치우쳤는데, 최영경이 그의 말을 믿은 것이었다.
성혼(成渾)이 이이(李珥)에게 말하기를, “최효원(崔孝元)의 상소가 어떠한가. 그 사람이 올라오면 시국에 보탬이 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이가 웃으면서, “행실 높은 기대정 한 사람을 더 보태는 데에 불과할 것이다.” 하였다.
○ 9월에 이이를 호조 판서로 임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상이 대신에게 묻기를, “호조에 적당한 사람을 얻지 못하였는데, 윤현(尹鉉)처럼 직책을 다할 사람이 있으면 관작의 품계를 불문하고 천거하여 올리도록 하라.” 하였더니, 대신(大臣)이 이이를 수망(首望)으로 추천하여 이윽고 호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이헌국(李憲國)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숙헌(叔獻)의 관질이 오른 것은 축하할 만하지만, 상께서는 윤현같은 자를 얻으려고 하는데 대신이 이내 숙헌을 추천하였으니, 후세에서 반드시 숙헌의 인품이 낮은가 의심할 것이다.” 하자, 듣는 사람들이 웃었다. 윤현은 변변치 못한 작은 그릇이므로, 이헌국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 동과 서의 틈은 심의겸과 김효원에서 시작되었다. 심의겸이 김효원을 배척하면서 말하기를, “권신(權臣)의 사위(윤원형(尹元衡)의 사위인 이조민(李肇敏))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은 본래 사실이었다. 김효원은 심의겸을 배척하면서 말하기를, “외척(外戚)으로서 정치에 간여한다.” 하였으니, 이것도 역시 사실이었다. 김효원이 처음에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후에는 절조를 닦았으니 옛사람도 이런 것을 허여한 바이며, 심의겸은 행적은 비록 척리(戚里)이지만 사류(士類)에게 공(功)이 있으니, 역시 군자가 막을 바가 아니다.그런데 전배(前輩)는 심의겸의 편을 들면서 김효원을 가리켜 안으로 사사로운 유감을 품었다 하고, 후배는 김효원의 편을 들면서 심의겸을 가리켜 궁중의 세력에 의탁한다 하였으나 두 사람 모두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이이의 ‘둘다 옳고 둘다 그르다.’는 의논이 나오게 된 근거이다.오직 심의겸은 붕당이 적고 김효원은 돕는 이가 많았는데, 조급하게 나아가는 무리들이 간혹 그 실정을 생각하지 않고 앞다투어 실정보다 지나친 의논을 하여 당시에 영합해서 전배 중에 청렴하다는 이름이 있는 이들이 모두 용납되지 못하니, 이이가 힘써 시속의 의논을 구제하여 반복하고 논란하여 마침내 그 한편으로 치우치는 형세를 조화(調和)하여 함께 화합하는 지경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하였다. 한 조각 충성이 단연코 이것 외에 다른 것이 없는데 도리어 시배(時輩)들에게 의심을 받아, 이리저리 서로 공격하여 마침내 ‘이름을 팔고 나라를 그르친다.’ 는 등의 말로 죄목을 만들어 함께 일어나서 공격하였다. 《지천집(遲川集)》
○ 동과 서의 당론(黨論)이 있은 이래로 초연하게 홀로 서서 붕당에 물들지 않은 이는 오직 이이 한 사람일 뿐이었다. 동과 서가 다투면 양쪽을 화해시키고, 형세가 서인 쪽으로 치우치면 동인을 구원하고 서인을 억제하며, 형세가 동인 쪽으로 치우치면 서인을 구원하고 동인을 억제하였다.이를 비유하면 저울대에 있는 추(錘)가 밀어 옮기고 나아갔다 물러갔다 하면서 한결같이 평형을 향하는 것과 같았으니, 그 마음씀이 공평 정대하고 지성 측달(惻怛)하여 참으로 세상의 도의를 바로잡을 만하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시기하고 해치며 경솔하고 조급한 사람들이 그 사이에서 나와 본마음은 아랑곳없이 대번에 그 자취만을 의심하여, 동과 서가 서로 공격하며 싸우기를 그치지 않았고, 나중에는 허봉(許篈)ㆍ송응개(宋應漑)의 상소가 나와서 드디어 수습하지 못하게 되었다. 《정재집(定齋集)》
○ 9월에 정유길(鄭惟吉)을 우의정으로 삼았는데 양사(兩司)가 탄핵하여 체직하였다. 이에 앞서 정유길은 이량(李樑)이 권세를 잡고 있을 때에 바르게 버티지 못하고 자못 이럭저럭 따라간 과실이 있었으므로, 사론(士論)이 매우 가볍게 보았다. 이때에 이르러 좌우상(左右相)에 결원이 있어 정유길을 정승 후보로 뽑았는데, 동인측에서는 이문형(李文馨)ㆍ박소립(朴素立)을 정승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이(李珥)가 박순(朴淳)에게 말하기를, “이문형의 사특함과 박소립의 어리석음을 가지고 만일 정승감으로 뽑힌다면, 상공(相公)이 어찌 후세의 비난을 면하겠소.정임당(鄭林塘 정유길)같은 이는 비록 흠은 있다 하지만 재주와 풍도가 있으니, 시배(時輩)들이 미는 자(이문형ㆍ박소립)보다 낫소. 그러니 임당을 추천하는 것만 못하오. 그 다음 후보는 김귀영(金貴榮)이오.” 하니, 박순도 그렇게 여겼다. 정유길이 마침내 정승에 임명되자, 사헌부가 발론하여, “정유길이 권문(權門)에 아첨하여 붙었다.”고 헐뜯으며 추한 말을 거리낌없이 하고는, 체직하도록 청하였다. 사간원도 따라서 발론하려 하였으나 대사간 이이가 따르지 않았는데 동료들이 고집하자, 이이가 계사(啓辭)를 초하여, “정유길은 지난날에 실로 씻기 어려운 과실을 범하였으니 여러 사람이 다 우러러보는 정승의 지위에 오르기에는 합당하지 않음을 누가 모르겠습니까.그러나 4대 조정의 옛 신하로서 좋은 재주와 풍도가 있으니, 신들은 그를 아껴 감히 가볍게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일 이렇게 발론을 하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지만 지금 이미 공의(公議)가 일어났고 물정(物情)이 한창 과격한데 삼공(三公)은 자리만 채우는 벼슬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했으니 그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공론(公論)을 따르소서.” 하였다. 이에 시배가 떠들썩하면서, “장계의 말이 둘러싸고 옹호해서, 바로 끊어 말하지 않았다.” 하니, 사간원이 드디어 피혐하였다.옥당이 사간원을 체직하도록 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이렇게 사람이 모자라는 때에 새 우상(右相)같은 이를 어찌 쉽게 얻을 것인가. ‘사람만은 묵은 사람을 구한다.’ 한 옛말은 우상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사간원이 아뢴 것은 곧 충후한 장자의 말인데, 도리어 옹호한다고 지목하는구나. 그러나 이미 논핵을 당했으니 우상을 체직하도록 윤허한다.” 하였다. 《석담일기(石潭日記)》

[주D-001]양사(兩司)가 모두 …… 처치하게 되었다 : 삼사(三司)의 제도에, 사헌부가 피혐하여 사직하면 임금이 그 처치를 사간원에 맡겨 사직을 수리하거나 반환하고, 또는 몇 사람은 유임시키거나 몇 사람만 사임시킨다. 사간원이 피혐하면 사헌부가 처치하고, 양사가 모두 피혐하면 옥당이 처치한다.
[주D-002]방사원(龐士元) : 유현덕(劉玄德)의 신하인데 재주와 지혜가 제갈량 다음 가는 사람이다.
[주D-003]한기(韓琦)ㆍ부필(富弼) 두 사람 : 한기와 부필은 다 같이 송 나라 때의 어진 대신인데, 뒷날 서로 틈이 생겨 한기가 죽은 뒤에도 부필이 조상하지 않았다. 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고 있을 때, 한기가 태후와 정무를 의논하다가 태후가 황제가 장성하였으니 수렴청정을 그만두었으면 한다고 하자, 한기가 급히 발[簾]을 떼어버렸다. 이것은 한기의 처사가 현명한 것이었으나 부필은 같은 대신으로서 자기에게 상의하지 않았다 하여 서로 틈이 생겼다 한다.
[주D-004]촉당(蜀黨) : 송 나라 때 낙당(洛黨)ㆍ촉당ㆍ삭당(朔黨)이 있었는데, 낙당의 영수는 정이(程頤)이며, 촉당의 영수는 소식(蘇軾)이요, 삭당의 영수는 유지(劉摯)이다.
[주D-005]대책(對策) : 국가에서 선비에게 시험을 보일 때 시사나 학술에 관한 논제를 내는 것을 책문(策問)이라 하고 답안을 대책이라 하는데, 율곡 이이가 바친 천도책(天道策)이 유명하다.
[주D-006]나이가 들고 …… 어두운 점 : 논어의 ‘혈기가 이미 쇠하였으면 얻으려는 욕심을 경계하여야 한다.[血氣旣衰 戒之在得]’는 말을 인용한 것으로 재물을 탐내어 ‘계지재득(戒之在得)’이란 교훈을 망각하고 범하였다는 말이다.
[주D-007]연(燕)ㆍ월(越)의 …… 같은 점 : 중국의 극북(極北)은 연 나라이고 극남(極南)은 월 나라이니, 서로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주D-008]행실 높은 기대정 : 기대정이 고집 세고 사리를 모르는 조관(朝官)이었으니, 최영경이 행실만 기대정보다 높을 뿐 고집이 센 것 등은 같다는 것이다

 정대년(鄭大年) 붙임

연려실기술 제18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선조조의 상신(相臣


정대년은, 자는 경로(景老)이며, 호는 사암(思庵)이고, 본관은 동래(東來)이다. 신묘년(153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중종 임진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고 기사(耆社)에 들어갔으며, 임신년(1572)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탄핵을 받아 체직되고 죽었다.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 승지가 되었을 때에 윤원형(尹元衡)의 첩을 부인으로 봉하라는 전지가 있었는데, 대년이 분개해서 일부러 지연시키자 동료들이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시행해 버렸다. 평안 감사로 있을 때에 그 도의 수령이 배[船]를 원형에게 뇌물로 바쳤다. 원형이 정대년에게 그 사람을 잘 봐달라고 부탁하니, 대년이 마침내 그 수령을 쫓아버렸다.
○ 비록 약간의 청백하고 검소한 행실이 있었으나 배우지 못하여 아는 것이 없고 속된 데다가 또 선비[儒]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망이 돌아가지 않았다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황박 전(黃博傳)

황박의 자는 중약(仲約)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인데, 무자년에 진사가 되고 임진년 정시(庭試)에서 을과(乙科) 제1인이 되었다. 당초에 정시에서 공이 최상에 있었는데, 고시관(考試官) 이기가 본래 공을 꺼려서 이름을 떼어보고 놀라며, 이 글은 장원에 합당하지 못하다 말하고, 드디어 자기 마음대로 2등인 정대년(鄭大年)을 장원으로 해서 방을 내었는데, 정대년이 은명(恩命)으로 새로 정언(正言)이 되어, 곧 이기의 간사함을 탄핵하니, 이기가 탄식하기를, “나는 그 사람이 이럴 줄은 몰랐다. 차라리 황모(黃某)를 장원으로 삼을 것을…….” 하였다. 공은 기량이 굳세고 방정하며,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는데, 사귀어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진취(進取 벼슬과 권세를 탐하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악한 일을 지나치게 미워하여서, 일찍이 이기의 허물을 말하여 이기가 앙심을 깊이 품었다. 최보한(崔輔漢)이 능 지키는 관원이 되기 싫어해서 말하기를, “일찍이 어버이 상에도 상주 노릇을 못하였다.” 하였는데, 공이 여러 사람 가운데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는 불충(不忠)이며 불효다.” 하니, 최보한이 이를 듣고 원망을 가졌었다. 정미년 가을 양재역 벽서의 화에 수안(遂安)으로 귀양갔다가 신해년에 순회세자(順懷世子) 탄생으로 은사를 입어 석방되어 돌아왔다. 한가로이 20년을 있으면서, 날마다 선비를 가르치는 일로써 업을 삼았으므로, 과거에 오르고 높은 벼슬에 오른 이가 한둘이 아니며, 이름 있는 정승과 판서들도 그 문하에서 나왔다.
포저집 제3권
 소(疏) 11수(十一首)
시조(始祖)의 분묘(墳墓)를 복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한 소

삼가 아룁니다. 신등의 시조(始祖)인 조맹(趙孟)은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관직이 상주국(上柱國)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으며, 공훈을 인정받아 통합삼한 벽상 개국 공신(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는데, 묘소가 풍양현(豐壤縣)에 있습니다. 이는 대개 시조가 본래 풍양 출신이었기 때문인데, 그 뒤로 자손들이 풍양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조조(宣祖朝)에 공빈(恭嬪)이 갑자기 서거하자, 묘산(墓山)을 찾은 끝에 시조의 묘소 뒤쪽의 같은 기슭에다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 당시에 제용감 정(濟用監正) 정창서(鄭昌瑞)가 왕명을 받들고 가서 장례에 대한 일을 살펴보던 중에 신등의 시조인 조맹의 무덤 앞 표석(標石)이 땅에 넘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관함(官銜)과 성명을 확인한 뒤에 돌아와 아뢰었더니, 선조(宣祖)께서 “조맹은 나에게도 외조(外祖)가 되는 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들이 삼가 듣건대, 공빈의 선조 역시 풍양 조씨(豐壤趙氏)의 외손과 관련이 있다고 하였는데, 대개 풍양 조씨가 조맹 이래로 지금까지 7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의관(衣冠)의 가문으로 전해 내려온 만큼, 나라 안의 세족(世族) 가운데 풍양 조씨의 외손과 관계를 맺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고도 하겠습니다.
이 산이 일단 공빈의 묘산이 된 뒤에 조맹의 분묘를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논이 일어났는데, 선신(先臣)인 사예(司藝) 조정추(趙廷樞)가 당시에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로 재직하면서 상소하여 진달을 하자, 선조(宣祖)께서 그 묘소를 봉분(封墳)한 그대로 놔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광해(光海) 때에 이르러 공빈을 추존(追尊)하여 그 묘소를 능(陵)으로 승격시켰는데, 당시에 봉릉도감(封陵都監)이 능 안의 분묘는 관례상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고 아뢰자, 광해가 지관(地官)인 이의신(李懿信)과 신의(申誼) 등에게 물으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그대로 놔두어도 해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시조의 분묘를 평평하게 만들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론이 일어나자, 광해가 다시 대신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에게 의론하도록 하였는데, 이덕형이 의론을 올리기를 “외간에서 혹 이야기하는 말을 들어 보면, 조맹은 바로 고려 초기의 재상으로서 나라 안의 귀한 문벌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대수(代數)는 비록 멀다 할지라도 그의 외손이 되는 자들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당초에 현궁(玄宮)을 봉안(奉安)할 적에도 그 계파(系派)가 멀리 조맹과 관계된다는 이유로 피혐(避嫌)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말의 진위(眞僞) 여부를 알 수는 없지만 과연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평평하게 만든 묘소를 꼭 파낼 것까지는 없고, 단지 나무를 심어서 산의 형세를 꾸미게만 해도 무방할 듯하다.”라고 하였으므로, 조맹의 분묘가 파헤쳐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평시에는 보첩(譜牒)이 모두 있었는데 난리를 당한 뒤로 흩어져 없어졌고, 다행히 남아 있는 것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외손들이 얼마나 번창했는지를 상고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유독 신들이 가지고 있는 보첩에, 조계령(趙季鴒)의 아들이 염휘(炎暉)이고, 염휘(炎暉)의 사위가 원의(元顗)이고, 원의의 사위가 변안열(邊安烈)이라는 기록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원씨(元氏)와 변씨(邊氏)의 족보(族譜)를 구해서 찾아보았더니, 대체로 세 가문의 족보가 서로 부합되었는데, 조염휘는 정순대부(正順大夫)로서 우부대언 겸 좌상시(右副代言兼左常侍)였고, 원의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서 판추밀원(判樞密院) 상호군(上護軍)이었고, 변안열은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영삼사사(領三司事)요 또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봉해졌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변안열의 묘소도 풍양에 있는데, 평시에 자손이 세운 그 비석의 음기(陰記)에 내외손의 명단이 완전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그 음기를 가져다가 확인해 보니, 바로 만력(萬曆) 경진년(1580, 선조 13)에 세운 것으로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기재된 후손들을 보건대 부사(府使) 변영청(邊永淸)과 병사(兵使) 변협(邊協) 등 30여 인이 있었고, 외손으로는 영의정 홍섬(洪暹), 부원군(府院君) 박응순(朴應順), 광천군(廣川君) 수기(壽麒), 하원군(河原君) 정(鋥), 좌찬성(左贊成) 정대년(鄭大年), 하릉군(河陵君) 인(鏻),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예조 판서(禮曹判書) 홍담(洪曇), 동지돈녕(同知敦寧) 심봉원(沈逢源), 대사헌(大司憲) 백인걸(白仁傑), 대사헌 박응남(朴應男), 유수(留守) 심의겸(沈義謙) 및 이원익(李元翼), 한효윤(韓孝胤) 등 200여 인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조염휘의 손서(孫壻)인 변안열 일파(一派)의 자손만 해도 이처럼 번성하였으니, 만약 보첩이 완전히 보존되어 조맹 이하 대대의 자손들을 모두 상고해 볼 수 있다면, 나라 안의 명족(名族) 중에 그의 외손이 아닌 경우는 필시 드물 것이요, 그 후손이 된 것이 중첩되는 경우도 필시 많을 것입니다.
지금은 공빈(恭嬪)의 분묘가 국가의 능이 아니게 되었으니, 조맹의 분묘도 평평하게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이기에, 신들이 상의해서 그 분묘의 형태를 원상으로 복구하려고 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이 산이 예전에 국가의 능이었던 만큼 지금 능이 취소되었다 하더라도 이 분묘를 복구하면서 위에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여겨졌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신들의 시조 조맹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천세(千歲)의 대공(大功)을 세우고서 700여 년 동안 국가의 대족(大族)의 중조(衆祖)가 된 것과, 선왕(先王)께서 그 분묘를 봉분한 상태 그대로 놔두도록 예전에 명하셨던 일과, 지금은 또 국가의 능이라는 혐의 때문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게 된 점 등을 굽어 살펴 주소서. 그리하여 흙을 쌓아 봉분하는 일을 특별히 허락하시어 후세에 길이 알아볼 수 있게 해 주신다면, 더 이상의 다행이 없겠습니다. 신들은 지극히 격동되고 황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주D-001]공빈(恭嬪) : 광해군(光海君)의 생모로 성은 김씨(金氏)인데, 선조(宣祖) 10년에 죽어서, 풍양현 적성동(赤城洞)에 있는 조맹의 무덤 뒤쪽 30보쯤 되는 곳에 장지를 정하였다. 그 뒤 광해군 2년에 공빈을 추숭(追崇)하여 공성왕후(恭聖王后)라 하고 그 무덤을 성릉(成陵)이라고 칭하였는데,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 그 휘호(徽號)가 취소되었으므로, 포저가 시조의 묘소를 원상 복구할 목적으로 이 소를 올린 것이다.
혼정편록 2(混定編錄二)
혼정편록 2(混定編錄二)


계미년(癸未年) 6월 17일.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북쪽 변경에는 호란(胡亂)이 있었는데, 이이가 병조의 장관으로서 대응하는 정책을 건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백성에게 말[馬] 헌납을 모집하여 전사(戰士)들에게 공급하며, 서얼들에게 벼슬길을 열어주는 조건으로 양곡을 헌납케 하여 변방의 군량을 충실하게 한 것들이 모두 당시에 행한 시책이었다.
일찍이 부름을 받아 대궐로 들어가는데 대궐문에 못 미쳐서 이이가 평소 지병인 현기증이 별안간 일어나서 내병조(內兵曹)로 들어가서 병이 낫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삼사가 번갈아 글을 올려 국가의 권력을 마음대로 하고 교만하여 임금을 무시한다는 등의 말로 논계(論啓)하자, 이이가 사퇴하였다. 얼마 안 되어 또 다시 부름을 받았는데,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보잘것없는 어리석은 신하지만 제 자신을 아는 데는 오히려 밝습니다. 외람되이 병권을 맡게 되었으나, 일이 잘못될 것을 미리 생각하여 간절한 마음을 아뢰어 사양한 것이 여러 차례였습니다. 미천한 저의 정성이 전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끝내 윤허하지 않으시어 모기에게 산을 젊어지라고 맡기시므로 성패는 헤아리지 않았더니, 마침 변방의 화란을 당하여 대응하는 시책이 엉성하고 잘못되어, 탄핵하는 글이 나오기 전에 물의가 이미 비등(沸騰)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혼매(昏昧)하오나 또한 충분히 헤아려보고서 지난번에 탑전(榻前)에서 미리 다른 인재를 선택하여 쓰시도록 청하였던 것인데, 천감(天鑑)이 통촉하지 못하여 종전과 같이 잘못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허물이 더욱더 쌓이자 이에 공론이 격분하여 양사(兩司)가 합사(合辭)하여 모두들 처벌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비록 동료가 있으나 죄를 저지른 우두머리는 신입니다. 설사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신이 감히 스스로 숨길 수 있겠으며, 천은(天恩)이 아무리 무겁다 한들 어찌 사정으로 두둔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본래 병약한 몸으로 질병을 무릅쓰고 종사(從仕)하다가 오래되자 몸이 손상되어 현기증으로 일을 폐하게 되어 명을 받들고도 나아가지 못하여 죄가 가중되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문병하는 말씀을 내리시고 의원을 보내고 약을 하사하셨습니다. 우러러 넓은 은혜를 생각하면 하늘과 같이 그지없으니, 분골쇄신(粉骨碎身)하여도 은혜에 보답하기 어려워 다만 더욱 감읍(感泣)할 따름입니다.
아! 권병(權柄)을 제 마음대로 하는 것과 교만 방자하여 임금을 무시하는 것과 군명(君命)을 함부로 버리는 것 등은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용서할 수 없는 사죄(死罪)여서 사적(史籍)에서만 보아도 오히려 한심한 일인데, 어찌 오늘날 이런 것들을 몸소 다 범하리라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런데도 논핵(論劾)이 파직하자는 데에 그치니, 진실로 한숨이 나옵니다.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고 망령되나 군신의 의리는 대강 알고 있습니다. 다만 지모가 천박함으로 인해 이러한 큰 죄악에 빠졌으니, 법에 따라 죄를 받는 것을 신은 실로 마음 달게 여기는 것이요, 요행으로 구차스럽게 모면하는 것은 신의 본의가 아닙니다. 죄가 있는데도 다스리지 아니하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공론에 힘입어 날로 엄한 견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사정(私情)으로 비호(庇護)해 주시는 은혜로 끝내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은 진실로 가슴이 내려앉아 죽으려 하여도 죽을 땅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의 강단(剛斷)으로 특별히 결단을 내리시어 신의 죄를 바로잡아 조정의 기강을 떨쳐서 단속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시면 그지없이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놀랍고 황공함을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卿)의 상소는 잘 보았소. 언관(言官)들의 일시적인 의론을 어찌 족히 계교하겠소. 경은 의당 남들의 말을 상관하지 말고 다시 더욱 국사에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재차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진실로 우직하여 생각되는 대로 행하고 전후를 돌아보지 못하여 망령되이 헌장(憲章)에 저촉하였으므로 공론이 분연히 일어났으나 끝내 변명하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미련하고 노둔하나 오히려 저의 죄를 잘 알고 있사오니, 정해진 형벌 받을 것을 청한 것은 부득이한 사세였습니다. 성상(聖上)의 도량이 하늘과 같이 넓어서 도리어 온화하신 말씀을 내리시어 타일러 위로하고 권면해 주시니 은혜가 말씀에 넘치셨습니다. 신이 목석(木石)이 아닌데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다만 타당하지 못한 바가 있어서 감히 성교(聖敎)를 받들지 못하고, 이에 감히 우러러 슬피 호소하는 것이니, 삼가 굽어 채택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국가가 귀와 눈이 되는 언관(言官)을 설치한 것은 일에 따라 살피고 적발하여 간사한 것을 바로잡으려는 것입니다. 만약 죄를 짊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논핵을 계교할 것이 없고 그 말을 상관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여 방자히 행동하여 기탄함이 없게 한다면, 이는 공론을 아이들의 장난이 되게 하고 대간(臺諫)을 허위(虛位)가 되게 하는 것이니, 그 대관을 설치한 본의에서 본다면 어떠하겠습니까.
맹자에 이르되, ‘스스로 반성해 보아 정직하지 못하다면 비록 갈관박(褐寬博)이라도 내 두려워 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제 신의 짊어진 죄가 다만 정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며, 양사가 어찌 갈부(褐夫)에게 견줄 것이겠습니까. 신은 부끄럽고 두려워 또 다시 감히 조정 반열에 끼지 못할 것은 천리(天理)와 인정의 필연적인 귀추로서 터럭만큼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변방의 환란이 급박한데 재변마저 거듭 이르러서 국세가 위급하여 이부(嫠婦)도 근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만약 신의 범한 것이 대단치 않은 미세한 죄라면, 신이 곧 그것을 상관할 겨를도 없이 국사를 위하여 급히 나아감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신의 악이 임금을 무시하는데 이르러 죄가 용서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공론을 외면하고 버젓이 도로에서 벽제(辟除)를 부르고 다닌다면 비록 등관(鄧綰)이 다른 사람의 비웃음과 매도(罵倒)는 남이 하는 대로 버려둔다는 것이라 하여도 여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니, 먼저 그 몸의 절조를 잃고서야 어떻게 군왕을 섬기겠습니까. 다만 신이 믿고서 충성을 다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 하나뿐이었는데, 이제 악이 쌓여 죄를 얻어 거듭 두렵고 곤란한 처지를 당하니, 마음이 겁나고 흔들려 정상(正常)을 잃었습니다. 비록 마음을 국가에 다하려 하여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후일에 일을 그르침이 장차 오늘날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방황하며 울면서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천지 부모이신지라. 봄과 여름에 펴주시고 가을과 겨울에 엄숙하게 하여 주시는 것[陽舒陰慘]이 어느 것이고 모두 만물을 생성(生成)하시는 은택 아님이 없습니다. 소신을 내치시어 나라의 형정(刑政)을 바로잡으시고, 신으로 하여금 문을 닫고 마음속으로 자책하여 천선개과(遷善改過)하게 하시면 후일에 성취가 있음을 혹시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격절하고 황공하고 민망하기 그지없어 우러러 간절히 원합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은 식견이 민첩하고 재주가 고매하며 충성으로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오. 현재 변경에 일이 많으므로 경의 지모(知謀)와 계책에 힘입어 북방을 어루만져 진정시키고 병사와 백성을 편안하게 거두어 들여서 나의 근심을 풀려 하는 것이니, 의심하거나 핑계대지 말고 나와서 나의 바람을 저버리지 마오.”
하였다.
세 번째 상소하기를,
“삼가 성교(聖敎)를 받들어 보니, 하늘처럼 인자(仁慈)하게 덮어주시고 아랫사람을 불쌍히 여기시어, 말씀의 간절하심과 기대와 소망의 중하심은 결코 보잘것없는 미신(微臣)이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삼가 읽어보니, 몸이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듯하여 감격의 눈물이 물이 쏟아지듯 합니다. 아! 전하(殿下)의 이 전교를 신에게 내신 것은 잘못이지만 선비를 우대하는 예절로서는 참으로 제왕(帝王)의 거룩하신 덕입니다. 가령 신의 허물이 미세하여 깨끗이 씻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어찌 감히 잘못된 견해를 고집하여 전하의 마음을 거스리겠습니까.
진실로 생각하건대, 국권을 제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무시한 것은 죽어도 속죄할 수 없을 것이니, 비록 얼굴을 들고 다시 맑은 조정에 서고자 하나 감히 하지 못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진정을 들어 전하께 우러러 호소하여 불쌍히 여겨 살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전(傳)에 이르되, ‘예의 염치(禮義廉恥)를 사유(四維)라 하는데, 사유가 베풀어지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 하였으니, 병조 판서는 없을 수 있지만 사유는 없을 수가 없습니다.
신은 본래 경솔하고 엉성하며 오활(迀濶)하고 졸렬하여 세간의 소용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스스로 인재가 아님을 알고 초야에 묻혀 늙는 것을 달게 여겼는데, 다행히 밝으신 성상께서 관괴(菅蒯)도 버리지 않으시고 당치 않은 은명(恩命)이 여러 번 내리시니 감히 끝내 은둔하지 못하고, 한 번 영총(榮寵)에 매인 이후로 아득하여 돌아갈 줄을 알지 못하며 사물을 식별하고 계책을 내는 것이 걸핏하면 마땅함을 잃었습니다. 분수를 헤아려 보고 의리를 따져 보건대 마땅히 처음대로 돌아가야 하겠으나, 다만 국가에 일이 많았고 새로 조사(詔使)가 다녀간 뒤이며, 또 호변(胡變)을 만나서 물러갈 틈이 없었으므로 마지못해 머뭇거려 밝은 정치에 오점을 남겼으니, 저 자신의 그림자를 돌아보고 스스로 부끄러워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하물며 이제 일을 그르쳐 공론에 죄를 얻어 여러 사람의 분노를 범하기 어려움이 수화(水火)와 같은데도 은혜를 탐하고 영총에 애착을 가져 외람하게 자리를 차지하여 그만두지 않는다면 예의와 염치를 심히 버리는 것이니, 우신(愚臣)의 보잘것없음은 말할 것이 없지만 맑은 조정의 사풍(士風)을 무너뜨리는 데는 어찌하겠습니까.
옛날 명 나라 조정의 병부 상서(兵部尙書) 유대하(劉大夏)가 사소한 일로 황제의 뜻에 거슬려서, 효종 황제(孝宗皇帝)가 매우 책망하려고 하였으나, 유대하가 장차 직책을 이행하지 못한다 하여 굳이 사임한다면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그만 중지하고 책하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육경(六卿)으로서 질책을 당하면 비록 유대하와 같은 현재(賢才)라 할지라도 사세가 직위에 있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찮은 소신은 조정에 있으나 없으나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 어찌 구우일모(九牛一毛)와 다르겠습니까. 게다가 죄를 범한 것이 심중하여 공론이 격분하였으니, 작은 일로 인하여 질책을 당하는데 비교할 정도가 아닙니다. 어찌 감히 그대로 중임(重任)을 무릅쓰고 있으면서 사방의 비방과 모욕을 독차지하여 인심을 더욱 해이하게 하고 기강을 더욱 무너뜨리게 하겠습니까.
두루 옛적의 신하들을 살펴보건대, 공론을 배제하고 대중의 분노를 범하면서 군상(君上)에게 총애를 얻은 자는 영행(佞幸)과 폐신(嬖臣)이 아니면 반드시 벼슬을 탐하여 그것을 잃을까 걱정하는 비부(鄙夫)입니다.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고 비루하나 스스로 몸을 지켜 실로 감히 폐신이나 비부로 자처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이 때문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는 것이니, 신의 죄가 이에 더욱 중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 깊이 의리를 생각하시고 힘써 강기를 진작(振作)하시어 속히 신에게 폄척(貶斥)을 명하시고 인재를 선택하여 고쳐 제수하시어 위로 조정의 법을 시행하고 아래로 필부의 뜻을 이루어 주신다면, 신이 감격하여 보답하기를 도모함이 비록 살아서는 목숨을 바치고 죽은 뒤에는 결초보은하는 것도 족히 말할 것이 못 될 것입니다. 작은 잘못을 징벌함으로써 큰 잘못에 이르지 않도록 깨우쳐 주시어 후일에 큰 허물이 없게 해 주시면 죽기 전에 어찌 충성을 바칠 때가 없겠습니까. 신은 지극히 조심하고 두려우며 민망하고 박절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은 근일의 일을 개의치 말고 속히 나와서 직무를 수행하라. 만일 한때의 중도(中道)에 지나친 의논으로 인하여 스스로 저상(沮喪)되어 물러나 위축된다면 예로부터 인군이 어진 선비를 등용하여 공업(功業)을 이룰 때가 없었을 것이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네 번째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더러운 천신(賤臣)이 존엄하신 성상을 모독하여 스스로 그칠 줄을 모르니, 그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하거늘, 윤음(綸音)으로 온화하게 타이르시고 훈계하는 말씀이 더욱 중하시니, 감격한 나머지 황송하고 민망함이 더욱 심합니다.
아! 가령 신이 성덕(聖德)을 우러러 돕고 공업(功業)을 도와서 이룰 수 있다면 이는 곧 현사(賢士)입니다. 밝은 시대의 맑은 의론이 어찌 현사를 용납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제 신이 몸소 용서하지 못할 죄를 짊어지고서 어찌 감히 공론을 중도에 지나친 것이라 핑계하여 태연하게 직무를 행하여 임금의 은총을 탐하겠습니까. 보잘것없는 신을 온 나라가 모두 빈정거리고 있는데도 전하께서 우연히 깊이 통촉하지 못하시어 견책(譴責)을 내리시지 않고 은혜로 대우하심이 도리어 융숭하니, 이것이 신이 몸을 돌아보며 분수를 헤아려 더욱 위태롭고 송구함을 품는 이유입니다. 당당한 성조(盛朝)에 선비들이 많으니, 여러 사람의 촉망을 받는 이가 어찌 그럴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병마(兵馬)를 주관하는 것은 중요한 자리이니, 썩은 선비가 오랫동안 외람되이 차지할 자리가 아닙니다.
아! 전하께서는 신을 소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군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소인이라 생각하신다면 마땅히 지체없이 쫓아내야 할 것이니, 어찌 남의 말을 기다리겠으며, 만일 군자라 생각하신다면 고금 천하에 어찌 죄를 짊어지고 탄핵을 참아가며 나오기는 쉽고 물러가기는 어렵게 여기는 군자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세가 그대로 자리를 욕되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물며 지금 변방의 소식이 날로 급하고 시사(時事)가 위태로운데, 병조 판서의 직책이란 사방을 통제하는 것이니, 단 하루만 직위를 비워도 걱정이 적지 않습니다. 이미 감히 직무에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고 밝으신 성상께서 또 사직을 허락하는 비답이 없으시니, 시일을 지체하여 일을 그르치시면 신의 죄는 날로 무거워져서 반드시 몸이 부서지고 나라가 병들고야 말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근심하고 민망하여 먹는 것이 목에 내려가지 않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위로는 국법을 어지럽히기 어려움을 생각하시고 아래로 신의 뜻을 빼앗기 어려움을 생각하시어 속히 폄출(貶黜)을 명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잘못하고 실패한 것을 수습하여 보통 사람에 끼일 수 있게 하여 주시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떨리고 황공함이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상소는 보았소. 나의 뜻은 이미 일렀소. 요사이 경이 직무를 보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중요한 정무가 폐지되고 있으니, 마땅히 앞서 내린 전지(傳旨)에 따라 속히 나와 직무를 수행하고 사퇴의 뜻을 고집하지 말아서 나의 위임한 뜻에 따라주오.”
하였다.
다섯 번째 상소하기를,
“삼가 성교를 받들어 보니 소신을 불쌍히 생각하시고 병무(兵務)를 걱정하시어 온화한 전지(傳旨)가 간곡하시어 위임하는 뜻으로 타이르시니, 신이 진실로 감격하여 눈물과 콧물이 섞여 턱에 흐릅니다.
아! 신이 성지(聖旨)를 이어 받들어 조금이라도 시사(時事)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어찌 시종 고집하여 성은(聖恩)을 저버리겠습니까.
신이 크게 번민하면서도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이제 엄명이 날로 절박하시니, 품고 있는 생각을 다 드러내어 우러러 군부(君父)께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본래 어리석고 미련하여 물정에 밝지 못하므로 스스로 세상과 더불어 합하지 못할 것을 알고서 전야(田野)에 물러가 있었는데, 은명(恩命)이 여러 번 내리시어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감히 몸을 나라에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뒤로부터 다만 위로 군부가 계심을 알 뿐이요, 다른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일을 당하여 곧장 앞으로 나아가고 좌우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의논에 있어서 더욱 시속을 따라 낮추었다 높였다 하지 못하여 시론에 거슬린 것이 하루아침의 일이 아님은 전하께서도 반드시 굽어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이에 종적이 외롭고 위태로워 마치 잡된 가라지가 곡식싹 사이에 끼어 있는 것 같아서, 한 계책을 내자마자 여러 사람들이 번갈아 비방하여 모순되고 제지되어 실패는 많고 성사는 적었으니, 신이 밝은 시대에 죄를 얻은 것이 실로 자초한 것입니다. 누구를 원망하며 허물하겠습니까. 끝내 공론이 거듭 발하여 임금을 무시한 죄로 견주기에 이르렀으니, 신이 무슨 얼굴로 다시 맑은 조정에 서겠습니까.
예로부터 신하로서 이 세상에서 훌륭한 일을 하는 자는 반드시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얻고 아래로는 당시의 물망에 합한 뒤에야 맑은 의론을 주장하면 대소 신하들이 호응하여 일을 만들고 공을 세우는 데에 조금의 방해도 받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어찌 여러 사람과 서로 어긋나고 고립되어 움직이기만 하면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신이 바르다고 하더라도 사세가 구차히 용납되기 어려운데, 하물며 이제 잘못이 신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 이러므로 위로는 검은 사모(紗帽)가 부끄럽고 아래로는 붉은 인끈이 부끄러워서, 잠을 잘 때에는 자리가 편안하지 못하고 음식을 먹을 때엔 맛이 달지 못하니, 폄출(貶黜)을 바라는 것 이외에는 다시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아! 옛말에 이르기를,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당하여야 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제 국가가 불행하여 변방에 난이 생기어 임금이 부지런히 정사에 애를 쓰시고 염려하심은 신하로서 지극히 통분한 일입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신이 어찌 감히 사퇴할 생각을 하겠습니까만 다만 병조 판서의 중임을 결코 그대로 눌러 있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聖上)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충분히 헤아려서 국법으로 결단하여 신의 죄를 다스린 후에 신에게 북도의 종군(從軍)을 허락하시어 스스로 속죄할 수 있게 해주소서. 비록 적군의 날랜 칼날을 꺾고 견고한 진(陣)을 함락시키는 공은 없다 할지라도 죄를 지고 자책하는 마음은 풀릴 수 있을 것이니, 비록 선진(先軫)과 내제(來濟)와 더불어 짝이 되더라도 신은 달게 여기겠습니다. 신은 황공민망하고 절박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심사는 내가 이미 알았소. 여러 사람이 떠드는 것은 더불어 비교할 것이 못 되오. 다만 마땅히 다른 것은 돌아볼 것 없이 내 국사만을 다스릴 뿐이니, 굳이 사양하지 마오. 병무(兵務)가 오랫동안 비어있었으니, 하루가 급함을 경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하였다.
여섯 번째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임금은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여러 의견을 겸하여 듣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한쪽만 편벽되게 믿는 것을 경계하며, 신하는 충성을 바침에 있어서 힘쓰는 것이 모든 선(善)을 집합하는 데에 있고 독주(獨走)하는 것을 꺼리는 것입니다.
이제 신이 일을 그르쳐서 여러 사람과 어긋났으니, 폄척(貶斥)을 당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이에 몸에 반성하고 행동을 고쳐 만년(晩年)의 절조를 온전히 하려고 하기 때문에 누차에 걸쳐 진정을 진달하여 모독하여 마지않는 것은 진실로 내심으로 자책하여 죄를 받기로 기약한 데서 나온 것이요, 처음부터 형식을 위하여 말을 꾸며 책임이나 메꾸자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 성교(聖敎)를 받들어보니, 뜻밖의 것이어서 삼가 읽고서 황송하고 민망하여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오직 우신(愚臣)에게만 맡기시고 물의(物議)를 여러 사람이 떠드는 것으로 여기신다면, 신이 공론에 죄를 얻음이 더욱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신이 참으로 어질지 못하다면 전하께서 비록 국사를 맡기고자 하시나 ‘질 사람이 타서 도둑을 부를 것[負乘致寇]’이니 장차 어디에 쓸 것이며, 신이 참으로 어질다면 어찌 공론을 어기고 중인의 분노를 범하면서 홀로 군부(君父)에게 아첨하여 구차히 작록(爵祿)을 보전하는 현인(賢人)이 있겠습니까.
아! 비록 주공(周公) 같은 재주와 아름다움이 있더라도 가령 교만하고 또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족히 보잘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필부(匹夫)에게 교만하여도 허물이 오히려 큰데, 군부(君父)에게 교만하였다면 그 죄가 어떠하겠습니까? 마을 이름이 승모(勝母)라 하여 증자(曾子)가 들어가지 않았으니, 옛 사람은 그 이름도 오히려 피하였는데, 이제 신은 그 실지를 밟아서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하고 임금에게 교만하였으니, 이것이 어떠한 죄상입니까? 어찌 공론을 무함(誣陷)이라 하여 감히 조정 반열에서 면목을 들겠습니까. 신의 의리에 있어서는 다만 마땅히 물러가서 자신을 반성하여 한결같이 부끄러워하고 움츠려야 할 따름이요, 다시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병무(兵務)가 오랫동안 비어 있어서 진실로 급박하게 되었으나, 신의 직책을 대신할 만한 적당한 사람이 어찌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다시 깊이 생각하시어 신의 관직을 파면하여 조금이나마 여러 사람들의 심정을 쾌하게 하신 후에 혹은 북도에 종군시키어 융막(戎幕) 아래에서 계책을 돕게 하시거나, 혹은 백의(白衣)로 수행하여 모신(謀臣)의 말석에 참여하게 하시어 어리석은 이의 일득(一得)한 소견을 바쳐 약간이라도 종전의 충성하기 원하는 뜻을 이루게 하여주소서. 그리하면 전하께서는 신의 죄를 다스리는 것과 신의 계책을 쓰는 데에 두 가지 모두 알맞은 방도를 얻게 되어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말은 다 하였고 심정은 절박하여 뭐라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두렵고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예로부터 현신(賢臣)이 자신의 뜻을 행하고자 할 적에는 사람들의 훼방하는 말은 진실로 보통 있는 일이니, 본래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소. 그러므로 아득한 천 년 동안에 군신(君臣)이 서로 만나서 공업(功業)을 성취한 것이 전혀 없어서 겨우 있다 할 정도이오. 경은 지난 번의 전교를 친히 듣지 않았소? 내가 물러갈 것을 명한 뒤에 물러가라고 한 간곡한 한 마디 말은 귀신도 알고 있는데, 경은 어찌 차마 오늘날 사퇴하여 가고자 하오? 마땅히 다시 사퇴하지 마오.
그리고 내가 걱정스럽게 여기는 것은 근래 경이 나와 일을 보지 않음으로 인하여 병무만이 폐할 뿐만 아니라,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오. 지난봄에 있었던 북방 장사(將士)들의 공은 지금까지 시상하지 못하였으니, 포상은 때를 지체하지 않는다는 도리에 매우 어긋났소. 참으로 장사들의 마음이 이것으로 인하여 해이해질까 두렵소. 경은 속히 나의 뜻을 알아주어 힘써 직무에 나오도록 하오.
또 내가 경을 만나 보고서 일을 의논하려 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더구나 날마다 궐하에 나오므로 인견(引見)하여 친히 타이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다만 근일에 나의 몸이 불쾌할 뿐만 아니라, 경박한 무리들이 반드시 장차 대신은 접견하지 않고 오직 병조 판서만을 만나 본다고 떠들어댈 것이므로 실행하지 못하였소. 경은 아울러 알고 있으시오.”
하였다.
여섯 번의 소를 진달한 뒤에 아뢰기를,
“보잘것없는 소인이 죄를 지은 것이 이미 무겁고 병마저 깊어서 자리 위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하루 보내기가 마치 한 해와 같습니다. 우러러 성상의 말씀이 쟁쟁하게 귀에 가득하여 감격하고 송구하여 눈물이 물 쏟아지듯 합니다. 천한 질병이 비록 회복되지 않았으나 감히 물러가 사실(私室)에 있지 못하고 부축받아 대궐에 나와 또 다시 어리석은 신의 생각을 진달하오니, 삼가 임금의 깊은 통찰을 바랍니다.
제가 들으니 예로부터 유자(儒者)는 나아가고 물러가기를 구차하게 하지 않아서, 예(禮)로써 나아가고 의(義)로써 물러갈 뿐이요, 일찍이 죄를 짊어지고 수치를 안고서 작록(爵祿)에 애착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신은 지극히 어리석고 비루하여 진실로 감히 유자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그러나 평일에 자처하기는 또한 사(士)가 되기를 목표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사(士)로서 염치가 없다면 어찌 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요즘 대간(臺諫)이 이미 신을,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하였다.’는 것과 ‘교만하여 임금을 무시하였다.’는 것으로써 죄목을 삼았으니, 이것은 바로 죽을 죄입니다. 대신이 신을 위하여 변명하고 나오도록 재촉하면서도 감히 탄핵한 글을 너무 지나친 것이라고 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젊어진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징험이 되었습니다.
만약 대간이 다만 신의 결점만을 배척한 것이라면, 비록 지극히 중대한 것이라도 신이 진실로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여서 감히 더불어 교계(較計)하지 않겠으나, 이것은 임금을 무시한 것으로 죄를 삼은 것인데, 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나아가서 일을 본다면 실로 신하의 도리가 아닙니다. 신이 비록 지극히 미련하오나, 어찌 국법의 두려움과 공론의 무서움을 알지 못하고 처신하기를 죄없는 사람같이 하겠습니까. 전하의 타이르심이 이미 지극히 은근하고 간절하며 국사가 날로 더욱 어려운데, 신이 조금이라도 견디어 참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어찌 감히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려서 위로 성의(聖意)를 순종하지 않고 아래로 중인의 마음을 거슬리겠습니까.
전하께서 홀로 신을 무죄하다 하여 시비를 따져 밝히지 않으시고 매양 공론을 뭇사람의 떠드는 것이라느니 훼방이라느니 하시니, 신은 진실로 감히 받들 수 없거니와, 대간(臺諫)이 들으면 어찌 마음에 편안하겠습니까. 대간이 정계(停啓)한 것은 오래되도록 전하의 윤허를 얻지 못하였으며, 또 신이 전연 수치심이 없는 자가 아니어서 반드시 자처(自處)할 바를 아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우선 정계한 것뿐이요, 신의 죄가 가벼워서 용서할 만하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신이 만약 자처할 줄을 알지 못하고 전하의 관대히 용서하시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어 버젓이 나가 정무를 본다면 이제까지 여러 번 상소한 것이 다만 은총을 굳히는 계교일 뿐이어서 심히 예의(禮義)가 없습니다. 먼저 제 자신의 지조를 잃고서 어떻게 임금을 섬기겠습니까. 또 대간이 이미 신이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무시한다고 하였으니, 신이 비록 명을 받들고 나가 일을 보더라도 대간이 어찌 임금을 업신여긴 사람으로 하여금 마침내 정경(正卿)의 자리에 앉게 하겠습니까. 평민의 한 남자 한 여자도 유죄 무죄를 또한 마땅히 분석해서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밝히 알게 한 뒤에 용서할 만하면 용서하고 주벌할 만하면 주벌하여야 유감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여러 사람에게 버림을 당하였지만, 높은 관직에 있었으므로 염치에 관계되는 바이니, 신의 죄의 허실을 어찌 응당 버려두고 불문에 붙여 끝내 죄를 짊어진 얼굴로 뻔뻔하게 맑은 조정에 낯을 들겠습니까. 나라의 정경(正卿)이 되어 죄를 짊어지고도 탄핵을 참는다면 조정의 큰 수치가 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하물며 이제 교화가 밝지 못하여 윤리 기강이 무너져서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뒷전으로 여기며 이욕(利欲)이 넘쳐 흐르는데, 지금 신으로 하여금 임금을 업신여긴 죄를 짊어지고서도 그대로 외람되이 주병 장관(主兵長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장사(將士)를 호령하게 한다면, 사방에서 듣고서 반드시 장차 권력을 제 마음대로하고 임금에게 교만한 것을 자꾸 허물로 여길 것이니, 단지 풍속을 해치는 걱정이 될 뿐만이 아닐 것이니, 말류의 폐단을 점점 자라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밝게 의리를 살피시고 힘써 뭇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키어, 신의 죄를 들어서 좌우 신하들에게 자문하시고, 이에 모든 대부에게까지 물으시어 경중을 잘 헤아려서 만일 용서할 만하다고 하면 신이 비록 타당하지는 않으나, 감히 힘써 반렬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만일 실제로 범죄가 된다고 한다면 비록 귀양보내고 죽인다 하여도 신은 실로 마음 달게 받겠습니다.
이제 우러러 호소하는 말이 신이 진실로 감히 말할 바가 아니며, 또한 신의 입장에서 응당 말할 바도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의리가 없는데 간곡한 임금의 말씀이 귀신도 감동할 만하니, 신이 비록 종일토록 눈물 흘리며 밤새도록 벽을 둘러 돌아도 처신할 바를 알지 못하여 감히 이에 무릅쓰고 진달하는 것입니다. 심정은 절박한데 언사가 군색하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부복하여 대죄하는 지극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황공하게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자처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비록 당연히 이와 같을 것이나, 내가 만약 좌우 신하들에게 물어 의논한다면 이는 털끝만큼이라도 경을 의심하는 뜻이 있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내 어찌 이런 일을 하겠소? 지난날의 대간의 말은 본래 근사하지도 않은 것이니, 족히 변명할 것도 못 되오. 경은 안심하고 직무를 보살피고 다시 개의치 마오.”
하였다.
19일. 대사간 송응개(宋應漑), 헌납 유영경(柳永慶), 정언 정숙남(鄭淑男) 등이 아뢰기를,
“삼가 아룁니다. 병조 판서 이이는 갑자기 높은 지위에 올라 나라의 중임을 담당하였으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직임을 수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날 말[馬]을 바치는 군사에 방수(防戍)를 면하게 한 일은 군정(軍政)에 관한 것인데도 위에 여쭙지 않고 제 마음대로 시행하였으며, 잘못을 깨달은 뒤에도 대궐에 나와 대죄하지 않고 범범히 황공하다는 한 마디 말로 공사(公事) 가운데에 기입하여 낭청(郞廳)을 보내어 아뢰었으며, 변방의 보고가 들어왔을 때 대응할 계책이 시급하여 병조 판서를 부르셨는데 시종 병을 칭탁하고 내병조(內兵曹)에까지만 들어오고 끝내 명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범한 바가 분명히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하고 임금에게 만홀히 한 죄상이 있습니다.
대간은 간관(諫官)의 직책이니, 일에 의거하여 논핵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입니다. 이이의 입장에서는 자신에 돌이켜보아 허물을 반성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먼저 스스로 의심하고 시기하여 깊이 분노를 품어 여러 날을 두고 소(疏)를 진달하여 언사가 불평스러웠습니다. 성상께서 온화하신 말씀으로 위로하고 타이르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오히려 감격하여 성상의 뜻을 받들지 않고 반드시 대간의 논핵을 허망하게 날조한 것으로 돌리고야 말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대신이 대간을 배척하지 않은 것을 그르다 하고, 또 모든 좌우 신하와 모든 대부에게 물어서 경중을 헤아려 마치 승부를 결정하려는 것같이 하였으니, 이는 말하는 사람을 물리쳐 버리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려는 데에 불과한 것이니, 옛 역사에서 찾아보아도 실로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한기(韓琦)가 압반(押班)에 나오지 않은 것을 제멋대로 날뛴다라고 하였고, 문언박(文彦博)이 요좌(堯佐)를 천거한 것을 궁중에 통한 것[內交]이라고 지척(指斥)하였으니, 그 사람들이 어찌 실정에 지나친 혐의가 없었겠습니까마는, 감히 말한 자와 더불어 변론하지 않은 것은 바로 공론을 두려워하고 조정을 중하게 여기는 때문입니다. 전폐(殿陛)의 밑에 서서 천자와 더불어 옳고 그른 것을 다투는 자는 대간입니다. 지위는 낮고 형세는 외롭지만, 오직 믿는 것을 공론뿐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만승(萬乘)의 존귀함으로도 오히려 몸을 굽혀 관대하게 용납하여 그들로 하여금 말을 다하여 감추는 것이 없게 합니다. 그런데 어찌 신하로서 스스로 관직이 높다고 해서 남으로 하여금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게 하려는 자가 있겠습니까. 이이는 어떤 사람이기에 자기의 잘못을 합리화하려 하고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며 탄핵하는 글이 한 번 나올 때마다 기뻐하지 않는 기색을 보이고, 심지어 언관(言官)과 더불어 시비곡직을 송사하니, 대간을 무시하고 공론을 멸시한 죄가 큽니다. 이러한데도 그의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후일의 폐해를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명하여 파척(罷斥)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대사헌 이기(李墍), 집의 홍여순(洪汝諄), 장령 이징(李徵), 지평 조인후(趙仁厚)와 이경률(李景慄) 등이 아뢰기를,
“병조 판서 이이는 군정(軍政)의 중한 일을 제 마음대로 먼저 시행하고 뒤에 아뢰었으며, 이미 내병조까지 들어오고서도 끝내 명을 받지 않았으니, 그의 거만하고 제 마음대로 한 형적이 이미 언관의 탄핵한 말에 드러났습니다. 이이의 처지로서는 마땅히 자신에 돌이켜 허물을 반성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대간의 말을 옳지 않다 하여 계사(啓辭) 가운데의 몇 마디 말을 따다가 그것을 빙자하여 스스로 해명하는 계책을 삼아서 여러 날을 두고 호소하여 불평한 말이 많이 있었으며, 매번 스스로 물러날 것을 말하였습니다. 성상께서 간곡하게 위로하여 타이르신 것이 이르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대신이 또 이이를 위하여 대궐에 나와서 말씀을 진달하여 그를 힘써 나오도록 간청하여 명패(命牌)를 내리기를 청하였는데도 오히려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추고(推考)받는 중에 있으면서도 감히 사직하는 글을 올렸으니, 이미 그릇되었는데도 일전의 계사(啓辭)에서는 대신이 언관(言官)을 억제하지 않은 것으로써 혐의를 삼았고, 또 좌우 신하에게 물어 경중을 헤아릴 것을 청하기에 이르러서는 마치 서로 송사하여 스스로 해명하려는 듯이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근고(近古)에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설사 대간이 혹 중도를 지나쳤거나 사실이 아닌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스스로 다른 공론이 있을 것이니, 만약 논핵을 당한 사람이라면 어찌 스스로 허물이 없다 하여 쟁변(爭辨)하여 마지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국가의 중신은 마땅히 마음을 평탄하게 하고 자신을 겸허(謙虛)하게 하여 남의 말을 싫어하지 않고 다만 서로 가타부타로 서로 돕는 것으로써 선무(先務)를 삼은 후에야 화평의 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연년(嚴延年)이 무도하다는 말로 곽광(霍光)을 배척하였고, 왕도(王陶)가 제멋대로 날뛴다라는 말로 한기(韓琦)를 지목하였으며, 당개(唐介)는 농금(籠錦)을 바친 일로써 문언박(文彦博)을 탄핵하였으나 일찍이 곽광의 무리 세 사람이 이것으로써 말한 자에게 노여움을 가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조(我朝)의 황희(黃喜)와 정광필(鄭光弼)은 혹은 초야의 사람에게 면대하여 헐뜯음을 당하였고, 혹은 근시(近侍)에게 드러내어 지척함을 당했으나, 이 두 사람은 다만 스스로 피하여 사과하고 가상하게 권장하였을 뿐이요, 또한 더불어 다투고 변명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이이는 스스로 국사를 담당하여 일을 꾀한다고 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남이 하는 말이 있으면 좋아하지 않으니, 이것이 과연 옛사람이 공정(국사 國事)만 알 뿐이라는 뜻이겠습니까? 하물며 대간은 언론으로 직책을 삼는 것이어서 공정한 말을 임금도 오히려 용납하는데, 신하의 반열에 몸을 둔 자가 허물을 듣기 싫어하여 스스로 옳게 여기고 억지로 변명하여 언관을 협박 억제해서 다시 입을 열지 못하게 하니, 대간을 가볍게 보고 공론을 멸시함이 심합니다. 이런데도 그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후일의 폐해를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명하여 파직시키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부제학 권덕여(權德輿)와 직제학(直提學) 허봉(許篈) 등이 아뢰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 등이 보건대, 병조 판서 이이가 문필로 발신(發身)하여 엽등(躐等)해서 높은 벼슬에 올랐는데도 의리를 다하고 충성을 바쳐 우러러 비상한 은우(恩遇)에 보답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끈질기게 자기 고집대로 하여 모획(謀劃)하는 것이 인심에 거슬려 공론에 죄를 얻었으니, 공론이 일어남을 어찌 말 수 있겠습니까.
우선 근일의 일로 말하면 대소사를 품명(稟命)하는 것은 신하의 직분인데, 대궐 뜰이 지척인데도 납마(納馬)하는 영(令)을 먼저 시행하고 뒤에 아뢰었으니, 이는 국권을 제 마음대로 한 것에 가깝습니다. 출입하는 것이 여전하여 심한 질병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임금의 명령에 거만을 피워 내병조(內兵曹)에까지 이르고서도 승정원에 나오지 않았으니, 이는 군부(君父)를 만홀히 한 것에 가깝습니다. 대저 이와 같으니 대간이 그의 관직 파면하기를 청한 것은 진실로 마땅한 것입니다.
이이의 처지로는 마땅히 죄를 인책하며 허물을 반성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터이데, 자신의 거취(去就)를 걸고 쟁변하여 붓대와 혀끝을 놀려서 힘을 다하여 공론과 싸워서, 첫째는 ‘시론(時論)에 오랫동안 거슬렸다.’ 하였고, 둘째는 ‘좌우에게 물으시라.’ 하여, 슬픈 말과 괴로운 말로 성청(聖聽)을 움직여 반드시 죄를 대간에게 돌리고서야 그만두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세에 인재가 없는 것으로 보고 대간을 손아귀에 넣고 희롱하는 것이니, 그 얼마나 공론을 멸시하는 것입니까? 공론이 있는 곳에는 비록 만승 천자의 존귀함으로도 몸을 굽혀 따르는 것인데, 일찍이 재상의 반열에 있던 사람으로서 공론을 멸시하고 꺼림이 없기가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런 습성을 길러주고 그만두지 않게 한다면 끝에 가서 그 폐단이 장차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분주히 그 밑에서 명령을 받아서 오직 그의 말로만 하고 거역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범수(范睢)가 말한 바 ‘아랫사람을 막고 윗사람으로 가리워 제 사사로움을 이룬다는 데에 거의 가까우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대저 대간이란 임금의 귀와 눈이 되어 당시의 공론을 주장하는 것이니, 공론의 토하고 막힘에 국가의 치란(治亂)이 따르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역사를 연구하여 보시고 전대의 득실(得失)을 널리 관찰하셨으니, 어찌 일찍이 몸이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대간을 꺾어 욕되게 하고서 국가가 안전할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말하는 사람들이 혹 이이를 왕안석(王安石)에게 견주는데, 왕안석의 문장과 절행(節行)을 어찌 이이와 비교할 바입니까? 그러나 안석이 교만하여 임금을 무시하는 것을 이이도 그러한 점이 있고, 왕안석이 말하는 사람을 물리쳐 쫓는다는 것을 이이도 가졌습니다. 전하의 성명(聖明)하심으로 어찌 통찰하시 못하시고 도리어 한 사람만을 두둔하고 대간을 꺾으시니, 신 등은 후일의 화단이 이루 다 말하지 못함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등이 애당초 어찌 이이의 방자함이 이같이 심할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오직 그 한 생각이 한쪽에 치우쳐서 해(害)됨이 점점 심하여 대간을 제재하고 온 나라를 몰아 억제하여 못하는 짓이 없으니, 이이의 죄가 이에 더욱 큽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편벽되게 한쪽 말만 들으면 간사함이 생기고, 한 사람에게만 맡기면 난(亂)을 이룬다.’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공론에 따르고 이쪽 저쪽을 아울러 보실 생각을 가지시어 한 사람에게만 맡기는 것과 편벽되게 듣는 것을 경계로 삼아, 이이는 충신(忠信)한 신하요 대간은 헤아릴 것도 없다고 하지 마소서.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사림(士林)을 붙들어 유지하시고, 한편으로는 이이의 처음과 끝을 보존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함을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이 진달한 소장의 뜻은 잘 알았노라.”
하였다.
20일. 비망기에 이르기를,
“요사이 병조 판서 이이가 했던 말로 인하여 대간이 서로 격렬하게 논쟁하여 이리저리 얽혀서 심지어 옥당(玉堂)까지 상차(上箚)하여 이이를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에게 견주니, 이것은 우연히 했던 말에서 발단이 된 것은 아니다. 대개 이이가 종전부터 신진의 선비들을 재제하여 그들이 시세를 좇고 당으로 부화(附和)하는 것을 미워해서 누차 의논을 진달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시론에 미움을 받은 지가 오래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가 잘못한 바로 인하여 기회를 타고 틈을 기다려 반드시 탄핵하여 내쫓은 뒤에야 그만두려고 한다.
무릇 공경 대부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오지 않은 자가 많았으나 임금을 만홀히 하였다는 것으로 논한 것은 듣지 못하였는데, 어째서 대간의 말이 이이에 대하여서만 명백한가. 납마(納馬)하는 것에 대해 여쭙지 않은 것은 또한 허다한 사무를 보다가 미처 여쭙지 못하였을 뿐이다.
대개 국권을 제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만홀히 여기는 것은 신하로서는 더 없는 죄명이니, 명하여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임금이 평민에게 대해서도 오히려 사실 이외의 죄명을 경솔하게 그 몸에 씌우지 못하는 것인데, 더구나 재상이겠는가? 이미 국권을 제 마음대로 하고 임금을 만홀히 여겼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그 죄를 밝게 드러내어 유사(有司)로 하여금 국법으로 조율하여 만세의 신하된 자를 경계할 것을 청하지 않고 이에 감히 파직하는 것으로만 청하기를, 마치 을사년(인종 1. 명종 즉위년 1545)간신들이 반역으로 지목하여 놓고서 겨우 체직시키는 것으로 죄주자는 것과 같이 하는가? 이것이 이이가 심복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안고 불안하여 여러 번 사직하여 마지않는 까닭이다. 이이가 말을 만들 때 과연 변명에 가까운 것이 있기는 하나 또한 어찌 언관(言官)에게 시새워 이기려 하고 분한 마음이 있었겠는가.
대간을 중하게 여기는 까닭은 신분이 공론을 담당하기 때문인데, 만약 남몰래 사사로움을 행하기 위하여 남을 배척하고 모함하는 계책을 한다면 대간된 도리가 어디 있는가? 경 등이 만일 이이를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밝게 분변해서 물리쳐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공격한 사람이 소인이니, 어찌 임금의 소인을 써서 나라를 다스릴 이치가 있겠는가. 시비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오늘날에 있지 않은가? 경 등은 어물어물하여 분변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대저 조정이 편당을 나누어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가는데도 대신이 능히 분변하지 못하니, 장차 국사를 어느 지경에 두려는 것인가?”
하고, 전교하기를,
“지금 이후로 이조 낭관은 낭관의 천망(薦望)하는 규식(規式)을 혁파하라.”
하였다.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이 아뢰기를,
“이조 낭관의 천망을 혁파하는 일로 전교하셨는데, 이것은 법전에는 실려 있지 않았으나 예로부터 규례(規例)로 만들어서 시행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이조의 낭관은 사람마다 함부로 차지할 수 없고 반드시 한때 청류(淸流)에 속한 자를 엄선하여 추천하여야 하는데, 신진 청류는 함께 나온 제배(儕輩)가 아니면 사세가 일을 같이할 수 없는 것이니, 자기네들끼리 천거하게 한 그 뜻이 진실로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만약 천망하는 규식을 폐지하고 당상(堂上)이 하게 한다면 반드시 그 인물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하여 혼동하여 나오고 섞어 쓰는 폐단이 많아서, 당시의 청론(淸論)이 완전히 없어질 것입니다. 하물며 이조 판서되는 이는 모두 연세가 높은 선배들이니 신진을 선출해서 대각(臺閣)에 배치할 때에 만약 낭관(郞官)에게 의뢰하여 가부(可否)를 상의하여 협조하지 않으면 채용하고 물리치는 것이 자연히 부당하게 되어 권간(權奸)한 사람이 나라 일을 담당하더라도 족히 한 나라를 그르칠 것이니 해됨이 어찌 작겠습니까. 청의(淸議)가 낭관에게서 많이 나오므로 진실로 편중하다는 비방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폐해를 바로잡으려 하여 마침내 천거하는 규식을 폐지한다면 후일의 걱정이 도리어 이보다 큰 것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 등이 외람되게 근밀(近密)한 관직에 있으면서 왕명의 출납을 맡은 직책이므로 진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하지 못할 일을 왜 아뢰느냐?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옥당 전원의 피혐(避嫌)하며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생각하건대, 편당을 만들어 서로 공격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이며, 때를 타고 틈을 기다리는 것은 막대한 악입니다. 이러한 죄가 하나라도 있으면 나라에는 정해진 형벌이 있습니다. 신 등이 성은(聖恩)을 입어 경악(經幄)에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오직 군부가 계신 것만 알고 재상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여 망령된 말로 논핵하다가 스스로 소인이 되는 데에 빠졌습니다. 성상의 도량이 하늘같이 크시어 비록 즉시 중죄로 처단하지 않으시나 신등이 어찌 감히 하루인들 근밀한 자리에 무릅쓰고 있으면서 거듭 국가의 치욕이 되게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속히 응징해 다스릴 것을 명하여 신하로서 임금 섬기기를 무례하게 하는 자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이이가 이미 소인이 되었으니, 소인을 논죄한 사람이 어찌 소인이 되겠는가. 또 그중에 권덕여(權德輿)와 홍진(洪進)은 일찍이 이이의 충직함을 내 앞에서 칭찬하였으니, 소인을 칭찬한 그 자신은 어떠한 사람이 될지 모르겠다. 홍진 따위의 국량이 좁은 자는 진실로 책망할 것도 없지만, 권덕여는 늙은 사람으로서 신진 선비들에게 빌붙어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제 이이를 소인으로 지목하였으니, 이야말로 전후로 이랬다 저랬다하는 사람이 아닌가. 서얼(庶孼)의 통청(通淸)을 허락하자는 것은 김첨(金瞻)이 전일에 경연에서 아뢴 것이니, 지금 만약 ‘기성의 법도를 변란했다.’[變亂成憲]는 율(律)로 다스린다면 김첨은 괴수가 되고 이이는 수행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어찌 김첨의 입장으로 이이를 논의할 수 있는가.”
하였다.
7월 15일. 대호군(大護軍) 성혼(成渾)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이름을 도적질하고 성상을 기망하여 앉아서 높은 벼슬을 받았으니, 이미 평소의 마음에 어긋나 속으로 대단히 황공하여 바야흐로 장차 구학(溝壑)에 돌아가 죽으려 하여 감히 오랫동안 서울에 머물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근일에 삼사(三司)가 전 병조 판서 이이를 들어 탄핵하여 인군을 무시하고 나라를 그르친 죄를 씌워서 이이로 하여금 용납할 곳 없이 물러가게 하였으니, 형정(刑政)의 실책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신이 성조(聖朝)의 망극한 은혜를 받으면서 날로 눈으로 시사(時事)의 잘못을 보고서도 말하지 않으면, 이것은 신이 조정의 과실을 알면서도 화(禍)를 두려워하여 말하지 않아서 전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신은 청컨대, 죽음을 무릅쓰고 말하겠습니다.
신이 가만히 이이의 사람됨을 보건대, 소통(疏通)하고 명민(明敏)하며 타고난 자질이 대단히 높습니다. 소년시절에 도(道)를 추구할 뜻이 있어 개연(慨然)히 학문을 스스로 힘써 모든 이치에 대하여 비록 능히 두루 연구하지는 못하였으나 의리의 큰 근원에는 본 것이 없다고 할 수가 없으니, 편협한 유자(儒者)나 굽은 선비가 앉아서 장구(章句)만 지키는 무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그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함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와서, 오직 나라가 있음만 알고 자기 몸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며, 시대를 구제하는 데만 급하고 한몸의 따뜻하고 배부른 것으로 관심을 삼지 않는 것이 바로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기질(氣質)의 성취된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병통이 또한 있습니다. 오직 소통(疏通)하기 때문에 솔직하고 쉽게 하는 병통이 있어서 침착하고 치밀한 기상이 적으며, 성품이 명백하고 정직하고, 오활(迀濶)하고 순실하기 때문에 전연 외모를 꾸미거나 인정에 조화(調和)하여 맞추는 태도가 없으며, 뜻이 커서 세미(細微)한 데는 소활하고 자신을 믿고 시속에 따르지 아니합니다. 이러므로 그들 사랑하는 사람은 아주 적고 비웃는 사람은 많으며, 걱정해 주는 사람은 진실로 적고 미워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또 시론(時論)과 맞지 않아서 여러 번 소장을 진달하여 깊이 당시의 폐단을 논의하였는데, 사실대로 밝혔으므로 더욱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으며, 또 정철(鄭澈)을 쓸 만한 사람이라고 논하여 천거하였으므로 더욱 많은 사람의 심정에 맞지 않았습니다. 이이는 오래 조정에 있지 못할 것을 알고 있지만 전하의 매우 특별한 대우를 입었으므로 몸을 바쳐 힘 자라는 데까지 다하여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고 생각하여, 두어 해 동안을 머뭇거리며 떠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논핵하는 가운데에 납마 면방(納馬免防 말을 바치게 하여 방수(防戍)를 면제시켜 줌)에 대한 한 가지 일은, 이이가 일찍이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싸움에 나가는 군사들이 도중(都中)에서 말을 약탈하여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로하여 변란(變亂)의 계제가 될까 깊이 걱정하여, 처음에 계청(啓請)하려고 하였으나 또 납마(納馬)하는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를 알지 못하여 감히 청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말[馬]이 모여지자 떠나는 군사에게 즉시 주고 곧바로 아뢰었으니, 황급한 중에 경솔한 실수로 인하여 이러한 죄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임금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백성에게 영(令)을 내린 것은 진실로 이이의 죄이나, 그렇다고 해서 국권을 제 마음대로 천단(擅斷)하였다고 한다면 적당한 죄목이 아닙니다.
정원(政院)에 나오지 못한 것은 현기증이 중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니, 이것을 가지고 교만하여 임금을 무시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정이 아닙니다. 이러한 말이 한 대간(臺諫)에게서 발설되면서 여러 대간이 따라서 화답하였고, 대신이 이이를 위하여 출사(出仕)하기를 청하면서도 감히 대간의 말이 중도에 지나친 것이라고 하지 못하였습니다. 아! 대간의 과격한 말은 그 실수가 작고, 이이의 임금을 업신여긴 죄는 그 악이 큰데, 지극히 작은 실수는 옹호하려고 하면서 지극히 큰 죄는 씻어주지 않고서 무리하게 출사시키려고 하니, 이는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문을 닫는 것입니다.
다만 성상의 말씀이 지성(至誠)으로 간곡하시어 이이에게 직임을 수행하라고 타이르심으로 인하여, 이이가 이때에 민망하고 박절함을 이기지 못해 부득이 계사를 올려 그 죄의 경중을 헤아려 주실 것을 청하였으니, 그 뜻이 어찌 감히 대간과 승부를 다투는 데 있겠습니까. 다만 출사할 길을 열어서 주상의 명을 받들고자 한 것뿐입니다. 만일 논핵을 입어 물러갈 것 뿐이요, 출사라는 한 절목이 없다면 이이가 어찌 감히 계사를 올렸겠습니까. 이이가 감히 쉽게 나오지 못하는 것은 바로 공론을 두려워하고 대간을 존중하는 것인데, 도리어 이것을 가지고 대간을 가볍게 여기고 공론을 멸시하는 것이라 하니,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송 나라의 구양수(歐陽脩)와 유지(劉摯)는 탄핵을 당하고서 모두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어도 반드시 소인의 되지는 않았는데, 하물며 이이의 말은 출사하는 데에 있고 스스로 변명하는 데에 있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삼사의 의논이 크게 일어나서 또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라느니 방자하고 기탄이 없다느니 하는 등의 죄목을 씌웁니다. 처음에는 미세한 죄로 인하여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그르쳤다는 이름까지 더해졌고, 또 이러한 죄명으로 인하여 장차 법에 의거하여 죄주기를, 청하려 하니, 이것은 반드시 죽을 땅에 몰아넣고서야 그만두려는 것입니다.
아! 지금 말하는 자가 스스로 공론이라고 하지만 그 말의 불공평함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키겠습니까? 만약 이이가 진정 소인이라면 마땅히 곧바로 그의 심술을 공격하기를, 여회(呂誨)가 왕안석(王安石)에게 하듯 하면 될 것인데, 어찌 하나의 과실로 인하여 곧 심각한 법문(法問)으로 협제(脅制)하고 준엄한 법률도 빠뜨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속내와 의태(意態)를 밖에 노출시켜 다시 사람마다 간파(看破)할 것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니, 또한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대부는 마땅히 공평 정대한 것으로 마음을 가지고 사욕을 버리는 것으로 일을 삼아야 합니다. 비록 소인을 공격하다가 형세가 이기지 못하여 가게 되더라도 오직 마땅히 그 바른 것을 잃지 않아서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옳은 것입니다. 이제 오활한 이이(李珥) 한 사람을 공격하면서 권모 술책을 펴서 다시 사대부의 명절(名節)을 보고 아껴 주지 않으니, 지금 당사자들이 스스로 자기 마음속을 돌아본다면 과연 마음에 부족한 점이 없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오늘날의 조정 의논이 어찌 모두 고의로 이이를 죄주려고 하여 여기에 이른 것이겠습니까. 부회(府會)하는 자가 시기를 타서 빨리 공격하여 힘써 이 이이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묵은 원한을 품고 있는 자가 또 그 수단을 부려서 여기까지 이른 데에 불과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대신에게 자문하시어 국가가 장차 망하려 하여 충성과 간사가 분변이 없다고 말씀 하셨는데, 대신들은 그들의 기염(氣焰)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마디의 말도 분변하려 하지 않으므로 전하의 마음이 답답하여 방향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니, 신이 듣고 지극히 통탄(痛嘆)하게 여겼습니다. 군신의 의리가 어찌 여기에 그칠 따름이겠습니까. 천하의 충신 의사도 이것을 들으면 오히려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하물며 부르심을 받아 서울에 이르러 오히려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신이겠습니까? 신이 그러므로 침묵하는 것을 명철(明哲)하다 여기지 않고 말씀을 진달하는 것으로 의리를 삼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소장을 공경(公卿)에게 내리시어 반드시 충사(忠邪)를 분별하고 잘잘못을 의론하게 하시어, 떼지어 참소하여 교묘하게 중상하는 화(禍)가 오늘날에 일어나지 않게 하신다면 이는 종묘사직의 복입니다.
또 대간은 말하는 것을 책무로 삼으니, 공론이 붙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사곡(邪曲)과 정직함에 따라 말이 옳고 그름의 차이 있습니다. 지금 대간은 지적하여 의논할 수 없고, 말하는 자는 비난할 수 없다고 한다면 저 장상영(張商英)이 사마광(司馬光)을 공격한 것과 윤색(尹穡)이 장준(張俊)을 공격한 것도 장차 언론의 길이 막힐 것을 염려하여 그르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지금 말하기를, 옥당이라야 대간의 잘못을 말할 수 있다 하여 타인이 대간이 말하는 것은 흉악하고 간사하다는 죄로 덮어씌운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한 그 말이 부정한가 바른가를 캐내는 데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옛적에 한(漢) 나라의 공승흥(公乘興)이 말하기를, ‘어사(御使)가 말을 꾸며서 깊이 비방하여 무고한 죄를 참소한다.’ 하였고, 송(宋) 나라 인종(仁宗)이 이르기를, ‘어사가 애매한 말로 대신을 중상하니, 이러한 기풍은 기를 수 없다.’ 하였으니, 오늘날의 일이 어찌 이것과 다르겠습니까. 한 번 주창하여 이이를 공격하자, 온 조정이 바람에 휩쓸리듯 동조하여 감히 그 사이에서 공평함을 가지는 사람이 없으니, 또 한 나라ㆍ송 나라에도 없던 일입니다.
지금 밖으로 경계하고 안으로 근심할 때를 당하여 천재 시변이 일시에 아울러 일어나 국세가 위태위태하여 위망(危亡)한 형상이 있는데도 신하된 자가 이것을 걱정하지 않고 서로 더불어 단점을 지적하여, 충성을 다하고 목숨을 나라에 바치는 신하로 하여금 용납할 곳이 없어 떠나게 하니, 다만 용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장차 그 죄를 꾸미고 공격하여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그르친다는 죄과(罪科)에 넣으려 하니, 일찍이 성명(聖明)의 세상에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전하께서 시비를 규명하시고 충사(忠邪)를 분별하시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지 않으시고 둘 다 옳다고 포용하는 것으로 일을 삼으시면 신은 두렵거니와, 선(善)을 선하게 여겨도 권면(勸勉)되는 자가 없고 약을 미워하여도 두려워하는 자가 없어서, 장차 간사함을 품은 무리들로 하여금 성의(聖意)가 있는 곳을 엿보아 추측하여 기탄하는 것이 없고, 편당을 심고 권세를 독단하여 항상 다수의 세력을 가지고 충성스럽고 현명한 사람을 공격하여 제거하게 될 것이니, 충신이나 현사의 화를 인해 당시의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잡아들여도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찌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스스로 작게 생각하시지 말고 권세와 기강을 친히 잡으시어, 먼저 시비(是非)의 의리를 바루시고 충사(忠邪)의 취향(趣向)을 분별하시고 깊이 기미(幾微)를 살피시어 그 근원을 막으시며, 전하의 선을 좋게 여기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성대하게 강하(江河)의 물을 터놓은 듯이 하시면 국가가 대단히 다행일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근심이 어찌 한 사람의 진퇴에 있겠습니까. 선을 좋게 여기되 능히 쓰지 못하고 악을 미워하되 능히 제거하지 못하면, 이것은 진실로 제 환공(齊桓公)이 곽공(郭公)이 망할 것에 대해 징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이이가 다른 마음이 없음을 아시고, 또 언자(言者)의 참소와 질투를 아시고도 양편을 모두 덮어두고 따지지 않으시니 장차 어떻게 중외(中外)의 의혹을 풀겠습니까? 이제 온 조정에 한 사람도 말하는 자가 없는데, 신이 한낱 외롭고 천한 몸으로 나와 말하여 한 손으로 홍수(洪水)를 막으려 하니, 또한 어리석고 망령된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의 말이 행해지지 않더라도 시론(時論)이 이로 말미암아 공평하여지고, 사림(士林)이 이로 말미암아 화합하여지고 국사가 이로 말미암아 잘 되어진다면 신이 비록 죄를 얻더라도 전혀 유감이 없겠습니다. 그렇지 못하여 서로 과격하고 서로 겨루어 다만 자기의 기세의 극한(極限)까지 다하려고 할 뿐이라면 신의 일신은 진실로 아까울 것이 없지만, 나라 일이 귀착될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하가 나라를 위하여 일을 담당하다가 원망이 한몸에 모이게 되면 화패(禍敗)가 즉시 닥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시세따라 부침(浮沈)하여 몸만 보전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녹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이가 몸을 잊고 원망을 혼자 도맡아 신하로서의 힘을 다하다가 하루아침에 이러한 중상 모략을 받아서 장차 여생을 보전하지 못한다면, 후일에 국사가 급박할 때에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일을 담당하려고 하겠습니까? 이제부터 벼슬의 자리만 채운 신하가 지위만 보전하여 크고 작은 벼슬아치가 서로 따르기만 하면서 조금도 그 뜻을 거스리지 아니하고 한가하게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어 날마다 해가 지기를 기다릴 뿐이라면, 전하께서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잘하려는 뜻이 또한 베풀 곳이 없어 나태한 마음이 생기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가만히 오늘의 일을 살펴보건대,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조정이라는 것은 사방의 근본인데, 근본이 이처럼 다스려지지 않았으니, 신이 어느 겨를에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구양수(歐陽脩)가 한기(韓琦)와 부필(富弼)의 죄없음을 변명하였으니, 공론이 중함에는 친구간이라는 혐의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이이의 벗입니다. 신이 비록 옛사람에게 미치지는 못하나, 또한 감히 아랫사람에게 붙어서 윗사람을 속여 전하를 저버리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서울에 와서 벼슬이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 마침 당시의 폐단이 치란안위(治亂安危)에 관계되는 중대한 것을 보고서 근심하고 놀라고 탄식하여 오랫동안 말하려 했으나 병들어 쇠약하여 대궐에 나오지 못하였으므로, 이제서야 말씀 드리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또 생각하건대, 신의 질병이 이미 깊으니, 만약 서울에서 죽는다면 객지에서 관(棺)이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신을 놓아 주어 전리로 돌려보내어 서쪽으로 국문(國門)을 나가 죽게 해주소서. 이것이 신의 큰 소원입니다. 존엄(尊嚴)을 범하오니, 신은 지극히 두렵고 황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의 상소를 보니, 충분(忠憤)이 격렬하여 만약 간사한 무리들이 듣는다면 족히 간담(肝膽)이 무너지겠다. 참으로 군자의 한 마디 말이 나라의 경중(輕重)이 되겠도다. 그리고 이미 와서 서울에 있으니, 질병을 잘 조리하여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덕이 적고 어두운 나를 잘 열어 일깨워주고 사퇴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과 좌의정에게 전교하기를,
“내가 덕이 적고 암매하고 무식하며, 용렬하고 불민하여 충성한 사람과 간사한 사람을 알지 못하고 옳고 그른 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지난번에 경 등에게 충사(忠邪)와 시비(是非)를 물었더니, 경 등이 감히 얼버무려 분명치 않은 대답을 하였소. 내가 이미 경 등의 마음을 환히 알아서 차차로 처리하겠다는 말을 이미 경 등에게 일렀었소. 지금 성혼의 상소를 보니, 대신의 임금 섬기는 도리가 과연 이와 같구나. 당초에 이이를 배척한 것은 누가 한 짓이며, 간특한 당파의 무리들은 또 누구인가? 그것을 변별하여 아뢰고 다시는 얼버무려서 국가의 수치를 끼치지 마오.”
하였다.
회계(回啓)하여 면대할 것을 청하니, 따라 주었다.
16일. 비망기에 이르기를,
“임금이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대신이다. 그러므로 편안하고 위태로움이 대신에게 달려 있어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정승을 생각하는 것이다. 어제 내가 충사를 알지 못하고 시비를 깨닫지 못하여 대신에게 물었더니, 좌상 김귀영(金貴榮)이 갑은 그르고 을은 옳다고 하기를 꺼려서 감히 아부하여 구차스럽게 자기 몸이나 용납받으려는 태도를 하였다. 일찍이 예로부터 대신 가운데 이러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았는가? 몸이 이미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 무릇 현사(賢邪)를 변별하여 인물을 천거하는 것이 바로 그의 소임이다. 만약 어질고 사특함을 알지 못한다면 이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요, 알고도 사실대로 아뢰지 않는다면 이것은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니, 어떻게 모두 우러러보는 정승의 자리에 앉아 있겠는가? 이러한 뜻을 정원(政院)은 잘 알라.”
하였다.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친히 아뢸 일이 있어서 면대(面對)하기를 청하니, 어떻겠습니까.”
하니,
서계(書啓)하라고 전교하였다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하교하신 말씀을 보고 서로 돌아보며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일찍이 성명(聖明)의 세상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좌의정 김귀영이 마음속으로 사림이 다른 뜻이 없어 죄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힘써 옹호하여 밝으신 성상께서 한 번 깨달으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의 말이 비록 명쾌하지 못하나 주장하는 뜻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전하의 뜻이 이와 다르기 때문에 그 말이 도리어 귀에 거슬리는 결과가 되어 아부하여 구차히 자기 몸이나 용납 받으려는 것으로 보시게 된 것입니다.
근자에 전하의 노여움이 바야흐로 험하시니, 사류(士類)가 외롭고 위태로워 조석을 보전하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김귀영이 만일 아부하고 구차히 자기 몸을 용납받으려는 것으로 마음먹었다면 장차 전하의 뜻을 받들기에 여념이 없을 것인데, 외롭고 위태로운 사류에서 아부하여 용납함을 받으려 하겠습니까. 성상께서 그 실정을 살피지 못하시고 대번에 박절한 하교를 내리시어 용납할 곳이 없게 하시니, 대신은 평소에 임금이 의지하고 중하게 여기는 사람인데, 한 마디의 말이 뜻을 거스렸다고 하여 엄한 견책(譴責)이 여기에 이르시니, 다만 성덕을 잃게 될 뿐 아니라, 나라의 일이 앞으로 이로부터 잘못될 것입니다. 상께서 조금 노여움을 진정하시고 마음을 화평하게 하시어 살피시면 거의 석연(釋然)하실 것입니다.
또 삼사는 공론이 있는 곳이므로 국가가 믿어서 원기(元氣)로 삼는 것입니다. 권간(權奸)이 국사를 담당하며 삼사를 사주하여 한 것이 아닌 바에는 드러난 논의가 서로 모의하지 않고도 같아졌으니, 그렇다면 그것을 공론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혼의 상소 가운데에 허다한 말이 다만 주장된 뜻이 한쪽에 치우쳤을 뿐만 아니라, 혹은 원혐(怨嫌)을 끼고 있다 하고, 혹은 부회(附會)했다 하고, 혹은 떼지어 참소하여 교묘하게 중상한다 하고, 혹은 권모술책을 썼다는 등의 말로 현란하고 미혹시키고, 심지어 죄를 언관(言官)에게 씌워 온 조정을 사(邪)로 지목하기에 이르렀으니, 나라를 비게 하는 화가 장차 며칠이 못 되어 일어날 것입니다. ‘한 마디 말로 나라를 망친다.[一言喪邦]’는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또한 참혹하지 않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마음을 비우고 사리를 관찰하시어 천천히 시비의 근원을 구명(究明)하신다면 그지없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계사를 살펴보니 동을 가리키는데 서를 대답하는 것이라 하겠다. 지난번 내가 이이의 현사(賢邪)에 대해 물었더니, 좌상이 이르기를, ‘신은 알지 못하겠다……’ 하고, 마침내는, ‘사람을 알아보면 명철하다.’는 말을 인용하여 꾸며댔다. 이런 그의 마음을 길가는 사람도 알 수 있는데, 내가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대개 시비(是非)를 분간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천성(天性)에 근원하여 절로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임금이 묻는데 대신으로서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으니, 아! 임금이 정승을 둔 것이 어찌 다만 ‘알지 못한다.[不知]’는 두 글자로 평소 정승의 사업으로 삼고서 그만두게 하려는 것이냐. ‘알지 못한다.’는 두어 말로 스스로 만족하여 높은 기풍 굳센 절개로 삼을 수 있는 것이냐? ‘알지 못한다.’는 말이 어떻게 천하의 인심을 복종시키겠는가? 예로부터 임금이 신하의 현사(賢邪)함에 대해 대신에게 물었을 때에 대신이 ‘알지 못한다.’는 말로 대답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임금이 스스로 자기의 총명(聰明)에만 맡겨도 족할 것이니, 저 정승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대개 대신을 의지하고 중하게 여기는 것은 진실로 인군의 본심인데, 의지하고 중하게 여기는 까닭은 조저의 현(賢)과 사(邪)를 분변하기 때문이요, 국가의 시비를 결단하기 때문이다. 이제 임금 앞에 들어와 대답하는데, 첫 번에도, ‘알지 못한다.’ 하고 두 번째에도 ‘알지 못한다.’ 하니, 슬프다! 암매한 임금으로서 알지 못하는 정승을 만났으니, 이것은 소경으로서 소경의 시력(視力)을 빌려 천하의 위태로움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과 같아서, 장차 서로 거느리고 엎어져서 구제할 수 없어 죽고 마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대저 덕이 적고 우매한 자질을 가지고 외람되어 크나큰 기업(基業)을 맡고 있으면서, 마음으로 상신(相臣)의 그릇됨과 국사의 잘못됨을 알고서도 그저 포용해 주는 작은 사랑에 만족하여 능히 한 번 발언하여 후세의 신하된 사람들을 경계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한 사람의 대신을 위하여 조종(祖宗)의 종묘 사직을 잃는 것이니, 경중(輕重)을 헤아리는 것을 잃는 것에 가깝지 않겠는가. 진실로 차마 말하지 않아서 조종을 저버리지는 못하겠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찌 내가 원하는 바이겠는가. 부득이해서이다.”
하였다.
대사간 송응개(宋應漑)가사직하여 아뢰기를,
“보잘것없는 소신이 외람되이 간장(諫長)의 자리에 있으면서 지난번에 이이의 행사에 대한 잘못을 논함에 있어서 철저하게 추궁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진실로 큽니다. 또 삼가 성혼이 상소한 내용을 보고, 또다시 어제 경연(經筵)의 의논을 듣건대, 영상 박순(朴淳)이 성혼의 장두(藏頭 일의 전말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막연히 지목하면서 그 숨은 뜻이 있는 것)하여 한 말로 인하여 허봉(許篈)과 신을 지적하여 배척하였다 합니다.
이것은 언책(言責)을 맡은 관원으로서 오랜 원한을 품고 시기를 타서 어진 사람을 제거하기를 도모한 것이니, 만 번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진실로 직분을 다하고 물러가서 거적을 깔고 주벌을 기다려야겠지만, 신이 생각하건대, 가세(家世) 6대를 계속하여 과거에 올라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밝으신 성상께서 한쪽 말을 편벽되게 들어서 간사한 것을 생기게 하여 장차 화(禍)의 징조를 이루게 됨을 눈으로 직접 보셨으니, 차라리 한마디 말을 하고 죽을지언정 차마 말하지 않아서 구차히 모면하여 전하를 저버리지 못하겠습니다.
이이는 한 장삼 입고 머리 깎은 중이었습니다. 임금과 어버이를 버리어 인륜에 죄를 얻었다가 몸을 변하여 환속(還俗)하여서 권문(權門 심씨 즉 심의겸의 집안을 가리킴)에 의해 자라서 당대의 맑은 의론이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상사(上舍)로 선발되어 알성(謁聖)할 때에 성균관의 많은 선비들이 함께 동렬이 됨을 부끄러워하여 선성(先聖)에게 뵙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심통원(沈通源)이 그의 아들 화(鏵)를 보내어 분주히 왕복한 것에 힘입어서야 참알(參謁)할 수 있었습니다. 출신(出身)한 뒤에는 심의겸(沈義謙)의 천거를 받아 청현(淸顯)한 벼슬을 두루 맡게 되자 결탁하여 심복이 되어 사생(死生)으로 따랐으니, 평소의 마음가짐을 대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는 학문을 한다고 자칭하고 사장(詞章)으로 꾸며 당시의 소위 사류(士類)라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빌붙어서 영상 박순의 무리들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하는 친구가 되어 은밀히 폐부(肺腑)와 결탁하여 당시의 의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심의겸은 외척의 권세를 빙자하고 왕ㆍ양(王梁)의 세력을 빌려 입에는 천헌(天憲)을 머금었고 손에는 국명(國命)을 쥐었습니다. 이준경(李浚慶)은 선왕(先王)의 유명(遺命)을 받은 신하인데 심의겸이 자신을 재제하고 누르는 것을 분하게 여겨 몰래 비방하고 배척하여 자리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였으며, 정대년(鄭大年)은 선조(先朝)의 묵은 노신(老臣)이요, 김난상(金鸞祥)은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유직(遺直)인데 심의겸에게 붙지 않았으므로 모두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만일 자기와 친한 사람이면 일개 낭관(郞官)이 외임으로 나가도 온 조정이 유임하도록 청하여 붕당을 만들어 사사로이 후원하여 못하는 짓이 없어서, 조정의 명이 조정에서 나오지 않고 심의겸과 박순에게서 나왔습니다. 그 때에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 들어오신 지가 오래되지 않았으니, 비록 식견 있는 사람의 통분이 있었으나 누가 감히 그 세력의 불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하께 진달하겠습니까.
이이로 말하면, 비록 재야(在野) 사람으로 자처하나 사실은 모주(謀主)가 되어 표리(表裏)로 서로 도왔으니, 이것은 심의겸은 이이에 대하여 성취시켜 준 잊기 어려운 은혜가 있고, 이이는 심의겸에 대하여 명성과 세력으로 서로 원조해 준 힘이 있는 것으로, 이것은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다만 이이가 감히 소탈하고 소박한 태도로 초야에서 나와서 나오기를 어려워하는 듯함이 있으므로 명예가 헛되이 융성하여져서 사람들이 많이 믿고 혹합니다. 이이는 이에 출처(出處)ㆍ진퇴(進退)함에 있어서 매양 선현(先賢)을 인증하여 스스로 당세에 우뚝 서서 시비의 밖에 초연한 선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심의겸이 청의(淸議)에서 버림을 받게 되자, 이이가 비록 답답하고 억울한 뜻을 품었지만 서로 관계가 없는 것같이 하고 우선 전야(田野)에 물러가서 시세를 관망하다가, 마침내는 팔을 걷어붙이고 의론을 주창하여, 조제 보합(調劑保合)하고 동심협공(同心協恭)한다는 말로 당대을 현혹하였습니다. 또 소(疏)를 올려서 심의겸의 단점을 말하고 아울러 김효원(金孝元)의 장점을 들어서 지극히 공평하다는 이름을 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이가 아래로 당세를 속였으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위로 전하를 기망하였으되 전하께서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아! 자신의 마음은 속일 수 있어도 여러 사람의 마음을 속이기는 어렵고, 전하는 속일 수 있어도 귀신을 속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이이의 심사(心事)가 한 번 나타나자 나라 사람들은 벌서 그 폐간(肺肝)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전자에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심의겸을 탄핵할 적에 이이가 장관으로써 사적으로 정인홍을 만나보고 힘을 다하여 옹호하였으나, 정인홍이 그의 말을 듣지 않자, 할 수 없이 뜻을 굽혀 억지로 따라서 마치 처음부터 심의겸의 죄상을 알지 못하는 듯이 하였습니다. 정인홍의 정철(鄭澈)을 심의겸에게 아부하였다 아울러 논핵하게 되어서는, 이이가 또 말하기를, ‘정철이 심의겸과 정분은 비록 깊으나 기미(氣味)와 심사는 전연 같지 않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철의 죄를 벗겨주려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자신을 해명한 것입니다.
공론이 이미 드러나자, 이이가 비록 감히 현저하게 다시 심의겸을 두둔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영위(營爲)하는 것은 심의겸을 위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비록 성상께서 힘써 진정시키심에 힘입어서 동ㆍ서의 설(說)이 겨우 가라앉기는 하였으나, 이이가 감히 드러내놓고 배척하여 심지어 상소의 내용에까지 나타내어, 겉으로는 조제(調劑)한다는 말을 칭탁하고 사실은 모함하려는 꾀를 행하였으니, 그 계획한 것이 또한 간휼합니다. 처음에는 양쪽이 다 그르다는 말을 주창하였고, 다음에는 심의겸을 위하여 변명하여 다만 심의겸은 착한 것을 따르고 별로 죄악이 없다고만 말하였고, 끝에 가서도 심의겸은 정철과 전연 같지 않다고 하여, 이이가 전후로 심의겸을 논한 것에 있어 세 번 자신의 말을 바꾸었으니,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뿐만 아닙니다. 이이가 향리에 있을 적에도 일찍이 염치로 자신을 지키지 못하여 여러 고을의 뇌물이 그의 문에 밀려들었고, 이익을 취하고 재물을 다투어 극히 작은 이익도 빠뜨리지 않아서 비록 해택(海澤)의 이권(利權)과 관선(官船)의 세금 같은 것도 차지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구도(舊都 개성을 가리킴)의 공청(公廳)까지도 이름을 대신하여 받아냈으며, 첨지(僉知) 봉흔(奉訢)이 대대로 경작하는 토지를 터무니없이 빼앗았고, 그의 형이 봉흔의 종을 때려 죽였어도 관가에서 문초하지도 못하였습니다. 대사간이 되어 부르심에 나올 때에도 공공연히 곡식 백 석을 지나오는 고을에서 받아 본가로 수송하였습니다. 무릇 이익이 있는 것이라면 오직 놓칠까 두려워하여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원근의 사람들이 전하여 비웃고 침뱉아 꾸짖는 것이 길에 가득 찼으니, 법을 무시하고 스스로 방자하여 몸가짐을 형편없이 하여 한결같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박순은 바야흐로 이구동성으로 칭찬하여 전하를 속이니, 그의 뜻을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이의 본심이 오직 이와 같기 때문에 몸이 총애하여 등용함을 입어 벼슬이 높은 반열에 올랐어도 보답하기를, 도모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시기하여 이기기를 좋아하고 저만 옳다고 하며, 임금을 속이고 사욕을 행하여 못하는 짓이 없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정무에 반드시 사사로운 지혜를 휘두르고 시행할 때에는 매사가 인심을 거슬리어 국사를 담당한 지 반 년 만에 백성이 원망하였으며, 이조 판서가 된 지 1년에 벼슬길을 어지럽혔으니, 참으로 매국간신(賣國奸臣)입니다. 혹자가 왕안석(王安石)에게 견주나 왕안석이 어찌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아! 삼공(三公)은 전하께서 의지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자입니다. 영상 박순이 한결같이 이이를 붙들어 옹호하는 것은 진실로 괴이할 것은 없지만 천위(天威)의 지척 앞에서 반복하여 칭찬해서 거듭 전하를 속이어 비변사에서 같이 일을 한 후에 비로소 자세히 그 마음을 알았다고까지 말하여, 마치 그 말이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입에서 나온 것처럼 하였으니, 이런 짓을 차마 한다면 무엇인들 차마 못하겠습니까?
신이 지난번 이 말을 듣고서 분하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여 박순마저 아울러 논핵하려 하여 동료 중에서 발론까지 하였고, 또 혹은 사람을 대하여 말하기도 하였으나, 다만 밝으신 성상께서 통촉하지 않으심이 없어 시종 진정시키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소요스러울까 하여 참고 발설하지 않았으니, 신의 나약하고 무력함은 죽어도 죄를 갚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탑전(榻前)에서 신의 성명을 들어, ‘피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니, 신은 이이에 대하여 당초부터 은혜도 원망도 없습니다. 또한 이이가 신의 허물을 말했다는 것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드러내서 지척을 당한 것은 아마도 혹 신이 박순을 함께 논핵하려고 한다는 말이 박순의 귀에 들어간 것인 듯합니다. 신은 실로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본래 배우지 못하고 어리석어 비록 요행히 과거에 올라 여러 번 외람되어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었지만, 망부(亡父) 선신(先臣) 기수(麒壽)가 신의 어리석고 옹졸함을 알고 항상, ‘절대로 시론(時論)에 부회(附會)하지 말라.’는 것으로 경계하였기 때문에 비록 어려서부터 같이 배운 자와도 일찍이 서로 조용하게 지킬 것으로 권면하였고, 제배(儕輩)가 혹 심의겸이나 이이의 무리를 뒤따르는 자가 있으면 신이 실로 외척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더러 기롱하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이이가 이 때문에 신을 미워하여 일찍이 신의 허물을 말하였을 텐데 신이 우연히 듣지 못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혼의 경우는, 박순 등에 의해 천거된 사람으로서 실로 심의겸과 대대로 친분이 두터우며, 또 박순과 교분이 대단히 친밀하고 이이와는 정의가 골육지친(骨肉之親)보다도 더한 처지입니다. 성혼은 다만 이 세 사람이 있는 것만 알고 공론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무릇 이이 등의 의론이라면 성혼이 반드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것도 없이 모두 옳게 여기어, 그의 평소의 의론이 한 입에서 나온 것 같았습니다. 지난번 상소 가운데에서 낱낱이 경상(卿相)을 헐뜯어 모두 속된 무리라 하여 한 사람에 맡기고자 한 것은 그 뜻이 대개 박순과 이이에 있는 것입니다. 서로 칭찬하고 서로 성세(聲勢)를 삼아, 만약 심의겸의 죄를 논핵하면 이이가 나와서 옹호하고 만약 이이의 잘못을 지적하면 박순과 성혼이 또 서로 옹호하여 서로 끌고 발양(發揚)하여 임금을 속이고 가리워 감히 삼사가 논핵한 것을 불공평하다 하니, 성혼의 마음은 과연 공평한 데서 나온 것입니까?
지난번 본원(本院)의 관원이 전하의 전교에, ‘이이의 죄가 이와 같은데도 다만 파직만 청한 것은 을사년(乙巳年)의 간신들의 소행과 다를 것이 없다.’는 말씀이 계시므로 미안함을 이기지 못하여, 법에 의거하여 죄를 청하지 못한 것으로 피혐(避嫌)하는 말을 하였을 따름이고, 처음에 어찌 참으로 이이에게 죄를 가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성혼이 대간의 과당하게 논한 죄를 다스리고자 하여 스스로 가혹한 법문으로 협지(脅持)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 신과 같이 쓸모없는 사람이 또한 이 자리를 차지하여 묵은 원혐을 품고 대부(大夫) 현인(賢人)을 배척하여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죄가 진실로 반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삼사의 경우는 곧 전하의 자문에 대비하고 귀와 눈과 같은 소임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역대 조종(祖宗) 수백 년 이래로 당시의 인재를 사랑하고 아끼어 예(禮)로써 우대하고 높이고 장려하여 국가의 명맥을 삼는 것입니다. 성혼은 어떤 사람이기에, 스스로 재야라는 이름을 자부하고서 감히 붕당을 만드는 모계를 행하여 삼사를 장상영(張商英)ㆍ윤색(尹穡)에게 비교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하의 온 조정의 신하를 모두 소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좌의정 김귀영이 분변하여 아뢰고자 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감히 이이를 군자라 하지 못하는 것은 뜻한 바가 있어서인데, 도리어 대신에게 준엄한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대신에게도 이와 같이 하시니, 산처럼 미천하고 소원(疎遠)한 자야 말을 하면 화가 이를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일신의 이해는 근심할 것도 못 된다 하더라도 종묘사직은 어찌하겠습니까.
경안령 요(慶安令瑤)가 면대(面對)한 일은 외부에서 전하는 소문이 모두 이이 등의 사주(使嗾)로 이뤄진 것이라고 합니다. 대저 이 무리들이 서로 결탁한 지가 이미 오래되고 뿌리가 이미 깊어져서 다만 붕당을 만들 마음만 알고 다시 전하가 계신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감히 아뢰어 임금을 속이고 사욕을 행하는 것이 이러한 극단에 이르러서 다시 기탄함이 없는 것입니다. 상천(上天)이 굽어 살피시니, 신은 실로 통탄합니다.
용렬하고 완악한 신이 언관(言官)의 자리에 외람히 있으면서 사람들의 지척을 받아 명기(名器)를 욕되게 함이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으니, 잠시라도 그대로 있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마침 시관(試官)으로서 복명(復命)하러 궐하(闕下)에 나왔다가 미처 문에 나가지 못하고 감히 이에 밤을 무릅쓰고 아뢰오니, 신의 죄가 이에 더욱 큽니다. 속히 명하시어 파면하여 내치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의 말이 설사 모두 옳다 하여도 지금에야 말하니, 이것은 불충이다. 본직을 체차하라.”
하였다.
도승지 박근원 등이 아뢰기를,
“대간의 사직은 으레 공론이 처치하기를 기다리는 것인데, 이제 대사간 송응개를 특명으로 체차하시니, 전에 없던 일로 매우 온당치 못하니,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정청(政廳)에 전교하기를,
“허봉을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송응개를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차하(差下)하라.”
하였다.
우의정 정지연(鄭芝衍)이 아뢰기를,
“신이 이달 초부터 습창(濕瘡)을 앓아 온몸에 퍼졌는데, 근일에 이르러 어깨와 등 사이에 그대로 종기가 되어 피고름을 파종(破腫)한 후 여통(餘痛)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달 15일에 삼가 부르시는 명을 받고서도 궐하(闕下)에 달려가지 못하였으니 신은 죄가 커서 그지없이 황공합니다.
신이 삼가 비망기를 보니, 성혼의 상소로 인하여 충사(忠邪)의 분변을 듣고자 하셨으니, 인물을 분별하여 어진사람을 등용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물리치는 것은 실로 국가의 안위(安危)와 치란(治亂)이 관계되는 바이니, 밝으신 성상께서 걱정하시는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이 보잘것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대신의 반열에 있으니 어찌 그릇되고 망령된 의견이 성지(聖旨)에 맞지 않으리라고 해서 먼저 스스로 돌아보고 염려하여 끝내 침묵하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불행히도 근일에 조정이 편안하지 못한 것은 그 연유를 따져보면 양편이 모두 서로 잘못이 있는데, 반복하여 서로 격렬해져서 여기까지 이른 것입니다. 대개 시비를 논하면 피차에 똑같이 있으며, 또한 분수(分數)의 다소도 없지 않습니다. 만약 충사(忠邪)를 분별하고자 하면 모두 사류(士類)이니, 아마 경솔하게 그 이름을 씌우지 못할 것이요, 이름을 붙인다면 편벽되니 어찌 해로운 바가 없겠습니까.
또 이이의 사람됨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 뜻은 크고 그 재주는 민첩하며, 그 마음은 또한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품이 경솔하고 소활하며 편벽되게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고 일을 변경하기를 좋아하니, 만약 독단으로 맡기면 일을 그르칠 염려가 있음을 면치 못함은 식견 있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모두 이이와 더불어 묵은 원망이 있어 당시의 대간들이 당을 지어 공격에 전력하는 것이겠습니까.
요사이 양사와 옥당이 이이의 일을 논하는데 있어서 그 말이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언론의 책임을 가진 자리에 있는 자가 잘못된 일을 보면 탄핵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말이 과격하여 중도를 얻지 못하는 경우는 고금의 언관(言官)에 항상 있는 일입니다. 옛적에 송 나라의 신하 문언박(文彦博)은 당대의 어진 정승이었는데, 당개(唐介)가 문언박을, ‘권세를 독점하고 당(黨)을 만들며 궁중과 결탁한다.’ 하여 매우 논핵하였습니다. 인종(仁宗)이 크게 노하여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헤아릴 수 없게 되었는데, 문언박이 나와 아뢰기를, ‘어사는 일을 말하는 직책이니, 원컨대 죄를 주지 마소서.’ 하였고, 그 뒤에 또 말씀 올리기를, ‘당개가 말한 것이 바로 신의 병통에 맞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인종이 문언박의 말을 써서 당개를 불러 마침내 크게 등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시에 문언박을 장자(長者)라 칭찬하여 전고의 미담(美談)이 되었습니다. 문언박 같은 어진 사람이 어찌 권세를 독점하고 당파를 부식하는 등의 일이 있었겠습니까만, 문억박이 능히 당개의 말을 받아들였고, 당개는 본래 문언박과 혐의가 있었던 것이 아닌데, 탄핵하여 논박할 즈음에 말이 과격하여 중도를 얻지 못함이 이와 같았으니,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습니까?
상께서 대간의 말이 과격하여 중도에 맞지 못하다고 생각하시면, 다만 마땅히 참작해서 그 말을 쓰지 않으시면 될 뿐입니다. 이이의 입장에서 자처하기를 또한 문언박이 한 것처럼 했다면 피차가 서로 풀어져서 의심하고 막혔던 것이 변하여 화평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어찌 한 개인의 다행일 뿐이겠습니까. 실로 조정과 사림(士林)의 복입니다. 만약 이이를 논핵한 것이 중도(中道)에 지나쳤다고 해서 언론의 관원들을 을사년 간흉(奸兇)들에 견주어 장차 중한 견책을 가하게 된다면, 인심이 더욱 과격해져서 중인들의 분노를 다스리기 어려울 것이니, 예로부터 언론의 관원을 죄주고서 능히 인심을 복종시키고 능히 국가를 편안히 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일이 여기에 이르면 다만 전하의 성덕에 누(累)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이도 장차 스스로 세상에 설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신이 전일에 이이를 위하여 착한 이름을 보전하게 하려 한다고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이와 같은 인재로서 맑은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은 또한 아까운 일입니다. 이이가 능히 자신의 허물을 듣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사람들의 말이 중도에 지나친 것을 싫어하지 말고, 자신에게 반성하여 통렬히 스스로 책하여 자신의 기질(氣質)을 변화시키고 자신의 덕기(德器)를 성취한다면 오늘날의 많은 비난이 도리어 일생의 약석(藥石)이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다시 서로 더불어 혐의를 풀어버리고 공손하게 임금을 섬기고 화합하여 다같이 국사(國事)를 이루는 것은 한 조정에 있는 신하로서 함께 힘쓸 일입니다.
다만 근일에 시종(侍從) 대간이 연달아 체임되고 심지어 경연(經筵)의 옛 유신(儒臣)까지 그 재능에 적당한 것이 아닌데도 특별히 변방의 소임을 받아 마치 소외하여 멀리하는 것처럼 되었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또한 의심하고 불안하여 분분하게 자퇴할 뜻이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길조가 아닙니다. 또 장차 언론의 관원들을 모조리 다 내쫓고 조금도 용서가 없습니다.
오늘의 형세를 보건대, 온 나라의 선비를 다 몰아내어 밝으신 성상께서 함께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없게 되면 반드시 장차 다시 한쪽 사람을 진출시켜 조정에 배치하실 것이니, 이후로의 국가의 안위와 치란은 신이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대대로 국은(國恩)을 받아 신의 선조부(先祖父)로부터 공평하고 충성하고 당비(黨比)하지 않는 것으로 조정에서는 가법(家法)으로 삼았으니, 신이 비록 천박하고 용렬하나 선조의 교훈을 이어 받들어 거의 욕되게 함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 신의 평소의 뜻입니다. 다만 기국(器局)이 용렬하며 식견이 혼암하고 그릇되어, 평소에 이미 조정을 잘 조화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또 사정(邪正)을 변별하지 못하여 위로 성심(聖心)의 의혹을 가져오고 아래로 중의(衆議)의 시끄러움을 초래하였으니, 백성이 모두 쳐다보는 대신의 자리에 그대로 무릅쓰고 있으면서 거듭 조정의 명기(名器)를 욕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근년 이래로 노쇠가 너무나 심하고 본래 앓던 눈병이 날로 더 심해져서 정신이 소모되고 생각이 전도됩니다. 만약에 후일 조정에 닥칠 일이 또 이보다 더 큰 것이 있다면 논의와 처치가 반드시 큰 과오를 저지를 것이니, 이때 와서 비록 형별을 내리더라도 신은 달게 여기겠지만, 국가에는 어찌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민망하고 절박한 정상을 곡진히 살피시어 속히 물리쳐 내치는 명을 내리시어 미천한 신의 분수를 편안하게 하시고 성상의 천지 같은 은혜를 시종 온전히 하신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비망기에 이르기를,
“이 계사를 보니 황잡하고 조치가 없어 볼 것이 없다. 하물며 벌써 기초(起草)를 하였으면 어찌하여 그 즉시 아뢰지 않고 죽은 지 수십일 뒤에야 아뢰는가? 그 사이의 일을 다 알기 어려움이 있으니, 아직 내버려두라.”
하였다.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하기를,
“영의정 박순은 본래 보잘것없는 조그만 기량(器量)으로 문필의 잔재주가 겹쳐서 마음쓰는 것이 간사하고 처신하는 것이 교활하며 이해득실에 급급하고 염치는 돌아보지 않습니다. 일찍이 심의겸(沈義謙)과 결탁하여 심복이 되어 무릇 조정의 시행 조치와 인물의 진퇴(進退)를 한결같이 심의겸의 지시를 따라 국권(國權)을 제멋대로 희롱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이와 성혼도 심의겸의 문객이고 친밀한 벗입니다. 그러므로 박순이 이 사람들과 결탁하여 사생(死生)을 같이하는 사이가 되어 서로 표리(表裏)가 되었습니다. 박순과 이이는 성혼을 산야(山野)의 높은 선비라고 찬양하고, 성혼은 박순과 이이를 당대의 현신(賢臣)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안으로는 외척에 의지하고 밖으로는 헛된 명예를 빙자하여 서로서로 밀어주고 당겨주어, 그 기세가 굉장하여 당대의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겨보나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이준경(李浚慶)ㆍ김난상(金鸞祥)이, 박순과 심의겸의 권세가 날로 성대하여 장차 국사(國事)를 그르칠 것을 보고 마음으로 항상 걱정하고 분하게 여겼습니다.
이준경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심의겸이 비록 힘을 다하여 박순을 천거하여 급속히 승진시키고 있으나, 박순은 작은 그릇이니, 만약 경상(卿相)의 지위에 두면 끝내는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이다.’ 하였습니다. 박순이 이것 때문에 원한을 품어 억울하게 비방과 배척을 가하여 그로 하여금 뜻을 품고 죽게 하였고, 김난상의 경우는 간관(諫官)으로 있을 때에 생사를 같이하는 박순의 친구를 논핵하려다가 또한 박순의 모함을 받아 불우하게 죽었습니다. 이준경은 여러 조정의 이름난 정승이요, 김난상은 선왕조의 곧은 신하인데도 오히려 배척을 당하였으니, 그 외에 모함하고 배척한 것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벼슬길을 어지럽히고 나라의 명맥을 손상시킨 것이 이미 심하였는데, 다행히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 계시어 간당(奸黨)의 괴수가 뜻을 잃게 되었습니다. 박순이 이로부터 항상 불평을 품어, 한갓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대로, 해로움이 제 몸에 절실한 것만 알고 공론의 두려운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이에 이이의 무리와 더불어 매양 어두운 밤에 평복 차림으로 상종하며, 사림을 모함하고 심의겸을 회복시키려고 못하는 짓이 없었으나, 다만 밝으신 성상께서 시종일관하게 진정시키심을 힘입었기 때문에 그 심중의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성총(聖聰)을 현란시키는 것으로 계책을 삼아 성상께서 신진 사류들의 경솔하고 날랜 것을 싫어하시는 것을 탐지하고서는 바로 사류를 경박하고 날뛰며 편당을 짓는다고 지척하였으며, 남들이 그런 말을 불공평하다고 할 것을 염려하여 사람을 사주하여 면대(面對)하게 하고, 또 사람을 시켜 상소를 진달하게 하여, 드디어 성심(聖心)으로 하여금 점차 젖어들어 마침내 능히 의심이 없지 못하게 한 후에 또 근일의 일로 인하여 상의 노하심이 바야흐로 준엄하여지심을 다행으로 삼아, 그 틈을 타서 모함하는 계책을 이루고자 탑전에서 아뢴 전후의 말이 지극히 음흉하고 간교하였습니다. 말하기를, ‘이이와 더불어 처음에는 서로 알지 못하였다가 비변사에서 함께 일하게 된 뒤에 비로소 그 사람됨을 알았다.’ 하였습니다.
박순이 이이와 더불어 본디 굳게 맺어 정의가 골육지친보다 더하였음은 실로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어서 가릴 수 없는 것인데도 천위(天威)의 지척 앞에서 이렇게까지 기망하였으니, 그밖에 성상을 속이고 사욕을 행한 것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언책(言責)의 관원을 죄주고자 하고 이조 낭관이 천거하는 일을 파하기를, 청하였으며, 심지어 차문(箚文)을 지은 사람까지 죄로 다스리려고 한 것이 모두 사람의 입을 협박하여 제재하고 붕당(朋黨)을 부식(扶植)하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려는 것뿐이었습니다.
성상의 위엄이 조금 풀려서 간사할 꾀를 이룰 수 없게 되자 또 성혼을 사주하여 장두(藏頭)의 말을 진달하게 하여 음흉하고 참독한 모계를 극도로 부렸습니다. 성혼은 대신을 불러 자문해 볼 것을 청하였고, 박순은 성혼의 상소를 지당한 의론이라 하여, 이에 탑전에서 다시 전일에 못다 진달한 간사한 모계를 진달하였습니다. 송응개가 일찍이 자기를 논핵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은근히 이이에게 혐의가 있다는 말로 무고하여 지목하였으며, 또 허봉(許篈)의 아비 허엽(許曄)이 일찍이 박순과 더불어 틈이 있었는데, 이제 허봉이 차자(箚子)를 지었다는 것을 듣고 또한 이이에게 혐의가 있다고 하여 스스로 묵은 원혐(怨嫌)을 보복하는 계책을 이루었습니다.
전후의 계사는 권모술책이 매우 음험하여 온 당대의 선비들을 모조리 구덩이에 빠뜨리려 하였습니다. 이이와 심의겸을 위한 것은 지극하다고 하겠으나, 다만 군부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또 박순과 성혼이 힘을 다하여 이이를 돕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이이의 마음씀과 일 행하는 것은 이미 지나날 옥당의 차자와 전 대사간 송응개가 아뢴데에 이미 나타나 있어서 밝으신 성상께서 이미 통찰하셨을 것이니, 이제 반드시 다시 진달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가 평소에 심통원(沈通源)의 집에서 자랐고 심의겸의 문하에서 발신한 것을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후의를 받은 곳을 잊지 못하지마는, 밖으로는 공론을 두려워하여 감히 드러내놓고 사의(私意)를 행하지는 못하고, 동서를 조정 화합한다는 말을 빌려서 공(公)을 핑계하여 사(私)를 이루려는 계책을 삼았으며, 말한 것도 전후로 반복함을 면하지 못하여 세 번이나 말을 변경하였습니다.
정인홍(鄭仁弘)이 장령이 되어 심의겸을 논핵하려고 할 때에 이이가 대사헌으로 있었는데, 몰래 구원하려다가 하지 못하고는 공론에 부대끼어 비록 할 수 없이 따르기는 하였지만, 사류들을 배척하고 모함하는 계획은 이로부터 더욱 결단된 것입니다. 작위(爵位)가 이미 높아진 후에는 더욱 기탄하는 것이 없어 위로 성상의 총애를 믿고 아래로 공론을 무시하였으며, 옛 제도를 변경하여 어지럽히고 스스로의 저의 편견을 옳게 여겼으며, 제 과실은 듣기 싫어하고 말하는 자를 배척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서 청탁을 멋대로 행하고, 뇌물을 많이 받고 남의 전토를 약탈하며, 공해(公廨)를 속여 점거하였고, 심지어 관물(官物)을 방납(防納)하고 장사하여 이익을 취하는 일까지 공공연히 하면서 다시 부끄러워함이 없었습니다. 매우 품행이 없는 사람입니다.
매양 오직 의리대로 할 뿐이라는 말로 전후에 진달하였는데, 지난번에 사람들의 논핵을 당하자, 거짓 물러가려는 척하고 몰래 머무르기를 청하는 뜻으로 아뢰어 달라고 남에게 부탁하였으니, 그 총애를 굳히고 임금을 이용하여 속이고 간사하며 바르지 못함이 극에 달했습니다. 이이의 사람됨이 대체로 이와 같았는데도 신 등이 처음에 감히 극단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은, 다만 힘써 화평하고 진정하자는 계획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이이가 일찍이 당대의 일을 담당하는 것으로 자처하여, 그의 말을 들어보면 대단한 일을 할 듯이 하였고, 또 이와 같은 성명(聖明)의 세상을 당하여 반드시 그의 사사로운 계획을 펴지 못하고 혹 한 사람의 유능한 신하가 될까 하였기 때문에, 우선 말을 하지 않고 시험삼아 행하는 일이 어떠한가를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병조 판서가 되어 국가의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대부분 망령된 것이 많았으므로 중외가 소요스러워 조석을 보전할 수 없었으니, 외적이 오기도 전에 나라의 근본이 이미 흔들렸습니다. 언론의 책임을 맡은 자가 일에 따라서 살피고 바로잡는 것은 일상적인 직분의 일인데, 이이가 먼저 제 스스로 의심하고 꺼리어 많은 말들을 허비하여 성상의 마음을 격동하였습니다.
박순이 이때에 한갓 이이를 옹호하는 것이 급한 줄만 알고 국사가 이미 잘못된 것은 생각지도 않아서, 이미 나타난 그의 실책은 가리고 있지도 않은 훌륭한 점을 찬양하였으니, 박순이 천총(天聰)을 기망한 것이 심합니다. 성혼 같은 자는 산야(山野) 사람이라고 자칭하며, 몸에 중한 명망을 지고 성상의 은총을 입은 것이 천고에 뛰어났으니, 성혼으로서는 마땅히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정지하며, 충성을 극진히 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것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변경에는 전쟁이 있어서 상의 근심이 바야흐로 깊으신데, 일찍이 한 계책을 바치고 한 기묘한 꾀를 드러내어 성상께서 부지런히 정사에 애써서 북방을 돌아보는 근심을 풀어드리지 못하고 도리어 한 친구가 탄핵을 입은 것만을 한으로 여겨 주야로 경영하여 옹호할 것을 꾀하여 감히 협원(挾怨)이니 붕참기중(朋讒奇中)이니 하는 말을 억지로 끌어대어 성상의 총명을 현혹시켜 장차 당대의 선비를 일망 타진하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두루 전고(前古)의 역사를 보시건대 또한 일찍이 이런 따위의 징사(徵士)가 있었습니까?
지난해에 심의겸이 탄핵을 당하였을 때에 성혼의 구제하려는 노력이 매우 지극하였는데, 정인홍이 말하기를, ‘이이와 심의겸은 같은 조정에서 벼슬한 친분이 있었으니, 옹호하는 것도 혹 마땅하지만, 너는 산림(山林)에서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권력을 가진 척리(戚里)와 서로 좋아하는가?’ 하니, 성혼이 말문이 막혔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심의겸과 시종 서로 친분이 두려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혼은 몸이 산야에 처해 있는데도 서신으로 서울과 계속해서 연락이 이어져 조정의 정령(政令)과 인물의 진퇴를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부박(浮薄)하고 난잡한 무리들을 모아 놓고 시사를 평론하고 경상(卿相)을 낱낱이 비방하며, 당대의 사람들을 멸시하여 시속의 무리라고 지목하였으니, 그가 찬양하는 사람이라고는 박순의 무리 한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성상의 부름심이 비록 간절하여도 반드시 박순이 무리의 시간을 기다려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왔으니, 그의 거취(去就)가 과연 군부(君父)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오늘날 서울에 온 것도 다만 박순과 이이를 위한 것이니, 소(疏)를 진달하여 구하려고 주선 하리라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하나 성혼의 사람됨은 진실로 크게 책망할 것이 없고, 박순은 바야흐로 수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국가를 위한 화평한 계책은 하지 않고, 오직 사당(私黨)을 옹호하는 것으로 급무를 삼아 온 나라를 공허하게 하는 화단(禍端)을 열어 놓아 장차 종묘 사직으로 하여금 전복되게 하려 하니, 이러한 사람은 하루도 백성이 모두 우러러 쳐다보는 대신의 자리에 있게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영의정 박순을 파직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20일. 대사성 김우옹(金宇顒)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근일에 삼사가 병조 판서 이이를 공격하여 내쫓았습니다. 이이는 일찍이 당시의 명망을 졌고 죄명은 밝히지 못하였으므로, 위로는 전하의 노함이 진엄하여 소인의 배척과 모함을 당한 것으로 의심하시고, 아래로는 인심이 복종하지 않다가 성혼의 상소가 있기에 이르자, 뇌정(雷霆) 아래에 온 조정이 진동하여 두려워합니다.
신의 지극한 어리석음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또한 항상 방안에 누워 남몰래 탄식하며 그렇게 된 까닭을 따져 보았습니다. 만약 직책을 넘는 것을 혐의하여 우매한 소견이나마 한 번 전하께 진달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신만을 아끼어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니 감히 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삼가 보건대, 이이가 민첩한 학문과 해박한 지식으로 밝은 시대를 만났습니다. 전하께서 진심으로 믿고 맡기어 더불어 함께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려 하시고, 이이도 도(道)로써 자임하여 물고기와 물이 서로 만난 것처럼 되어, 계책을 내면 행하여지고 말하면 들어주십니다. 진실로 천년에 한 번 얻은 비상한 제우(際遇)였습니다.
애석하게도 그의 뜻은 크고 재주는 소활하며, 도량은 얕고 뜻은 편벽되며, 친한 사람에게 가리워지고 자기가 가진 전일의 소견에 막히어 능히 일국의 공론을 통합하여 천하의 사업을 이루지 못하고 한갓 일 개인의 의견을 가지고 온 나라의 인심을 거슬리어 사류의 마음을 잃을 대로 잃었으나 오히려 뉘우칠 줄을 모르고 소(疏)를 빈번히 올리어 강변(强辯)하여 이기기를 구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정무(政務)의 시행에는 경솔하고 조망(躁妄)하여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였으니, 이에 이르러서 사류의 마음이 비로소 이이에 대하여 실망을 갖게 된 것이고 또한 한 사람의 사사로운 의론이 아닙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이의 본심이야 어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요컨대 다만 조정을 안정시키고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려고 도모한 것뿐입니다. 다만 그 의견이 한 번 편벽된 데가 있어서 그 해가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사류들의 마음도 대개 이이의 본심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의견의 편벽됨을 걱정하여 오히려 가부(可否)로 서로 조화하여 마침내 화합하고 일치되는 데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요, 애초에 갑자기 공격할 뜻을 둔 적은 없었습니다.
삼사의 의론이 격렬하게 어긋나고 거슬리게 되어 탄핵하는 글이 준엄하고 심각하여 자못 듣기에 해괴하였습니다. 대개 당초에 이이의 실수와 과오이고 본심은 그렇지 않은 일로 인하여, ‘임금을 무시하고 권세를 마음대로 한다.’는 죄목으로 지척하였습니다. 이이의 자처하는 언사가 불복함에 미쳐 또다시 삼사가 그를, ‘총애를 굳히고 임금에게 강요하며 공론을 배척한다.’는 죄명으로 추가하여, 심지어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으로 지목하여 추잡하게 헐뜯고 방자하게 지척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아! 이것이 어찌 이이의 본심이며 이렇게 하는 것으로 어찌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근래 이이와 사류 사이에 자못 서로 화합하지 못하게 되자 괴이한 의론이 어지럽게 그 사이에 섞여 나왔습니다. 지난번에 경안부령요(慶安副令瑤)을 면대할 때의 말에, 문득 유성룡(柳成龍) 등 네 사람을 전권(專權)한다고 지척하여 멀리 내쫓으라고 하였습니다. 유성룡 등은 모두 청렴한 명망과 훌륭한 인망으로 사림의 중망을 받으니 실로 유악(帷幄)의 현신입니다. 요(瑤)가 한 번 말을 하자 사류들이 스스로 편치 못하여 유성룡 등은 모두 위축되어 허물을 반성하면서 감히 국론에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사류들이 이이를 의심함이 더욱 깊어졌고, 부박하고 조급하여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또 이 일로 인해 함께 일어나서 비로소 공격할 뜻을 갖게 된 것이니, 지금의 이러한 일이 또한 어찌 사류의 보심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처음에 부박 조급하여 일 만들기 좋아하는 한두 사람의 발단(發端)에서 연유한 것인데, 사류들의 마음이 모두 이이를 그르다고 여겼으므로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이고, 또한 유성룡 등이 이미 떠났으므로 대각(臺閣)에 다시 중망을 가지고 물정을 진압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 내키는 대로 배격하여 여기까지 이른 것입니다.
성혼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이이의 본심을 미루어 말하고 삼사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하였으면 그것으로 가한데, 온 조정을 모두 붕당과 간당들이 교묘하게 중상모략한다고 하여 사류들의 본심을 구명해 보지 않고, 이이가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위하는데도 사람들의 중상을 받았다고만 하여 인심의 유래를 캐어보지 않았으니, 또한 한쪽으로만 치우친 것이어서 더욱 다투어 논변하는 실마리를 증가시켰고, 중인의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송응개의 피혐하는 소사(疏辭)가 나오자 더욱 어그러져서, 성혼을 심의겸의 교우라 하여 결당 아부한다는 말까지 끌어내었습니다. 아! 이것이 어찌 그러하겠습니까.
산양에 처해 있는 사람이 혹 조정 의론의 곡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한갓 세상을 분하게 여기는 마음만을 품어 언사가 지나친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며, 또 이이와 더불어 아주 무간한 교우이므로 선을 선하게 여기는 장점만 알고 그의 단점을 알지 못하여서 이에 이른 것입니다. 말은 진실로 중도를 잃었지만 그 심정이야 또한 어찌 깊이 허물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에 깊이 유의하시고 성의(聖意)를 공평하게 처치하시어, 이이에 대해서는 그의 본심을 양찰하시되 소활하고 그릇된 병통을 아시고, 삼사에 대하여서는 그들의 부박하고 조급함을 억제하시되 사류들의 본심을 살피셔서, 성심으로 깨닫게 해 주시고 마음을 평탄히 가지시어 막힘이 없어서 저해하지도 않고 좌절하지도 아니하여 차분히 그 날카로운 칼끝을 소멸시키심이 아마 좋을 듯합니다.
대개 이이가 진실로 경솔하고 소탈하여 크게 물정(物情)을 잃어서 여러 사람이 분노하고 떼지어 비난하여 여기에 이른 것이니, 이제 만약 처리하심이 정도에 지나쳐서 중론으로 하여금 억울하게 하신다면 더욱 조정을 안정시키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무릇 이러한 곡절을 모름지기 십분 생각하시어서 투철하게 비치시어 일의 진상을 정밀하게 살피시고, 큰 바다와 같이 포용하시어 편벽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게 하시면 격렬한 사론(士論)도 장차 스스로 성상(聖上)이 세우신 중도의 표준 아래에 감화되어 화평한 복을 점차 이루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소서.
신이 또 들으니, 대신이 건의하여 전조(銓曹) 낭관의 천거를 혁파하여 동류를 끌어들이고 당파를 심는 조짐을 끊으려 하였다고 하니, 어리석은 신의 소견으로는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중엽 이래로 권간(權奸)이 계속하여 나와서 벼슬을 팔고 사욕을 행하여 조정을 흐리고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맑은 의론이 아래에 있게 되어 낭료(郞僚)의 천거가 비로소 중하게 되었습니다. 체통으로 헤아려 본다면 비록 잘된이라고 하지 못하겠지만, 쇠퇴한 세대에 있어서 청의(淸議)를 부지(扶持)하여 소멸하기에 이르지 않은 것은 대부분 낭료의 의론에 힘입은 것입니다.
오늘날 경대부들은 편벽됨이 많아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더욱 마땅히 이 규례(規例)를 준수하여 청렴한 명망이 있는 사람을 삼가 가려서 낭관의 자리를 채워 공의(公議)를 지탱하여도 오히려 극복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어지 그 규례마저 아울러 폐하겠습니까. 지금 이이를 공격한 일이 또한 어찌 전랑(銓郞)이 동류를 끌어들여 배치해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사론(士論)이 격렬하게 발하여 이 지경에 이른 것에 불과합니다. 실정을 구명하지도 않고 전랑에게 허물을 돌리는 것이 옳겠습니까? 설사 전관(銓官)이 실로 동류를 끌어들여 배치하여 화(禍)의 조짐을 만든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을 지적해서 배척하는 것이 옳습니다. 누구를 꺼려서 하지 못하고 한갓 가벼이 옛 규례를 변경하여 후세의 권신이 국권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화를 열어 놓고자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또 신이 이에 몰래 걱정하고 깊이 애석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영명(英明)하심이 고금에 으뜸이시고 잘하려는 데에 뜻이 있으시나, 신하 중에 능히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뜻을 억제하고 상례(常例)를 따라서 가벼이 일을 벌이기를 즐겨하시지 않았는데, 근자에 이이를 등용하여 신임하심이 자못 융숭하시어 사업을 일으켜서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려고 생각하셨으니, 이는 실로 삼왕(三王)이 성대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이가 이미 재주가 가볍고 학문이 소활하여 큰 임무를 감당치 못하였는데, 거기에다가 조정의 의론이 뒤틀려 성주(聖主)를 부지런히 정사에 임하시도록 걱정을 더한 것은 어찌합니까?
신의 지극히 어리석음으로는 전하의 전일의 성대한 뜻이 이루어지지 못함을 애석해 하고, 미리 근심하는 것은 전하의 뜻이 마침내 작위(作爲)하는 데에 게을러져서 용렬한 사람의 말이 날로 나오고, 그른 것에 습관된 의논이 날로 우세하여, 무릇 치도(治道)를 흥기하고 밝은 정사를 세우는 계책이 있으면 으레 부산스럽게 변경하여 일을 내는 자라 지목하여, 점점 혼미하고 그릇되어 천하의 일이 드디어 참으로 해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를까 하는 것입니다. 어찌 거듭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 번 식체(食滯)한 것 때문에 음식을 폐하지 마시고 더욱 성지(聖志)를 가다듬어 충성하고 어진 사람에게 맡기기를 도모하시고 사림을 화합시키고 널리 암혈(岩穴)에 숨어 있는 선비를 초빙하여 당대의 인재를 망라하여 천하의 사업을 달성하실 것이요, 옛 관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해이하여 국사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돌릴 것이 아닙니다. 시사가 바야흐로 많고 국세가 어려우며, 조종(祖宗)이 전하에게 전한 것이 지극히 무겁고 백성들이 바라는 것이 바야흐로 깊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소서.
신은 본래 전야(田野)의 오활하고 썩은 선비로서, 지나치게 잘못된 은혜를 입어 대부의 반열에 서서 외람되게 교육의 직책을 맡았는데, 사람은 미약하고 책임은 무거워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한갓 책임을 다할 것을 마음 먹을 뿐, 조그마한 보답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다가 천한 질병이 갑자기 중하여져서 전에 앓던 담증(痰證)이 이제는 고질이 되어 기침 가래에 피가 나오고 밤새워 헐떡거리며, 비위가 대단히 약하여 매양 음식을 먹기만 하면 토하고 몸의 기혈이 조화되지 않아 한열(寒熱)이 번갈아 일어나서 정신과 기력이 가물가물하여 끊어지려 합니다. 그러니 비록 애써 노력하여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하나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은혜를 품고 날짜가 지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우러러 쳐다보고 잊지 못하여 머뭇거리다가 마침 시사가 시끄럽고 천위(天威)가 바야흐로 엄하신 때를 만나 사사로 근심하고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을 이기지 못하여 병든 몸을 끌고 대궐에 나와 어리석은 신의 회포를 남김없이 진달합니다. 그러나 질병이 발작하매 마음이 혼미하여 언어가 조리가 없습니다. 또한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진정을 살펴주소서.
신은 간절한 정성을 어쩔 수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의 상소한 말을 보고 너의 뜻을 잘 알았다.”
하였다.
21일. 양사가 합계하기를,
“영의정 박순은 본래 조그마한 그릇으로서 문필의 작은 재주를 더하고 있으며, 몸가짐이 간사하고 염치를 돌아보지 않으니, 참으로 이른바 부귀와 관직을 잃을까 걱정하는 비부(鄙夫)입니다. 명종조(明宗朝) 때에 심의겸이 외척의 지친으로, 왕씨ㆍ양씨[王梁] 같은 세력을 끼고서 남을 영화롭게 하거나 욕되게 하고 주고 빼앗는 것이 그의 손아귀에 달려 있었는데, 박순이 이에 심의겸에게 붙어서 결탁하여 심복이 되어 모든 조정의 일 처리와 인물의 진퇴를 오직 심의겸의 지시대로 하였습니다.
이이와 성혼(成渾)도 심의겸의 문객이고 친밀한 벗이었으므로 박순이 또 이들과 생사를 같이 하는 사이가 되어 서로서로 칭찬하고 세력을 서로 의지하여 기염(氣焰)이 뜨거웠습니다. 이준경과 김난상이, 그들이 마침내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것을 걱정하다가 끝내는 헐뜯고 물리침을 당하였으니, 기타 모함과 배척받은 사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 계심에 힘입어 간당의 괴수가 세력을 잃었으므로 박순이 항상 불평하여 이이의 무리들과 더불어 밤낮으로 도모하여 사림을 배척하고 모함하며, 심의겸의 세력을 부식(扶植)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 혹은 사람을 사주하여 면대하게 하고, 혹은 사람을 시켜 상소하게 하는 등 성총(聖聰)을 현란하고 성심(聖心)을 물이 점점 젖어들 듯 익숙하게 하여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지난날에는 천위(天威)가 바야흐로 엄하심을 다행으로 여겨, 틈을 타서 그 모함하는 계책을 실행하여 전후의 계사가 지극히 음흉하고 간교하여 평소에 서로 편당이 된 사람을 도리어 범범히 서로 아는 사이라고 하였으며, 삼사의 신하를 모조리 제거하고 다시 한쪽 사람을 불러들여 조정에 배열하려 하여 말하기를, ‘언책(言責)의 관원을 체직해야 한다. 전조 낭관(銓曹郞官)의 천거를 혁파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언사(言事)한 관원과 차자를 지은 사람을 원혐을 품었다고 지목하여 반드시 중상하고자 하고, 성혼이 바야흐로 성상의 은총을 받고 있으므로 성혼을 시켜 소장을 올리게 하고 자기는 이것을 평론하였습니다. 성혼은 대신을 불러 자문할 것을 청하고, 박순은 성혼의 말을 지당한 말이라고 하여, 피차가 서로 화답하고 호응하여 권모술책을 행한 것이 대단히 치밀하였으니, 마음을 쓰고 생각을 낸 것이 참혹하다고 하겠습니다. 천위(天威)의 지척 앞에서 기망함을 꺼리지 않고 오직 개인적인 원한을 보복하고 사당(私黨)을 부식하려고 하니, 대신의 임금 섬기는 도리가 과연 이와 같습니까? 화평하고 진정(鎭定)하는 것으로 군상(君上)을 인도하지 않고 오직 사류(士類)를 배척 모함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서 나라를 공허하게 하는 화란을 열어 놓아 장차 종묘 사직을 전복시키려 하니, 이런 사람은 하루도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 보는 정승의 자리에 앉아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영의정 박순을 명하여 파직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22일. 양사(兩司)가 박순의 열 가지 죄를 조목별로 나열하여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홍문관 응교 홍적(洪迪) 등이 상차(上箚)하기를,
“임금의 한 마음은 온갖 일의 근본이요 온갖 조화(造化)의 근원입니다. 반드시 거울이 비고 밝은 후에야 물건이 와서 비추어 봄에 곱고 추한 것이 저절로 보이는 것과 같고, 저울이 공평하고 바른 후에야 물건이 가볍고 무거운 것이 저절로 분별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거울이 밝지 못하고 저울이 공평하지 못하면, 고운 것이 도리어 추하게 보이고 추한 것이 도리어 곱게 보이며, 가벼운 것이 혹 무겁게 되고 무거운 것이 혹 가볍게 되어, 끝내는 그 실상을 분변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근일에 삼사와 대신에게 내린 하교를 보니, 곱고 추하고 가볍고 무거운 것이 대부분 그 중도를 잃었습니다. 삼가 전하의 저울과 거울이 만분의 일이라도 비고 밝고 공평하고 바른 것을 다하지 못함이 있어서 그런 듯합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성혼의 상소로 인하여 삼공(三公)을 명소(命召)하여 이이에 대하여 물으시자, 영상 박순이 일을 말한 두 사람을 지척하였는데, 상께서는 크게 노하시어 일을 말한 두 사람을 곧 외임으로 멀리 보낼 것을 명하셨습니다. 아! 박순은 지위가 정승이요 성혼은 산야에서 왔으니, 전하의 마음에 생각하시기를, ‘이 두 사람은 반드시 동서 양쪽에 참여하지 않아서 그 말이 지극히 공정할 것이니, 여기에 의거하여 당대의 충사(忠邪)를 분별할 수 있고 천하의 시비를 정할 수 있다.’ 하여, 도리어 사의(私意)를 낀 의논에 그릇된 줄을 알지 못하신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는 어느 날에 전하의 참다운 시비를 정하시렵니까?
대저 박순과 성혼ㆍ이이는 교분이 본래 친밀하니, 무릇 논의해야 할 크고 작은 일을 어찌 일찍이 서로 더불어 함께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이가 곧 성혼이요, 성혼이 곧 박순이어서, 딴사람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이이는 본래 서인의 영수인데, 성혼이 그를 사랑하여 그의 나쁜 것을 알지 못하며, 또 이이의 옳은 것만 보고 이이의 죄는 보지 못하여 자신이 스스로 한쪽에 빠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고, 박순은 그 말이 어찌 바른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친한 사람에게 사정(私情)을 두어 음으로 양으로 도와서 성혼ㆍ이이와 더불어 세력을 만들어 그 마음에 반드시 생각하기를, ‘나는 대신이요 나는 산인(山人)이니, 한 사람이 상소를 올리고 한 사람이 이름을 지적하면, 전하께서 반드시 공정한 말로 여겨서 믿게 되리라.’ 한 것입니다. 이것은 대신과 산인의 세력을 끼고 자신의 사사로움을 행한 것이니 또한 심하지 않습니까? 이이가 행사(行事)하는 사이에 잘못된 것은 다만 여러 사람이 볼 뿐만 아니라, 전하가 또한 통촉한 것이어서 가리울 수가 없는데, 성혼이 이이를 흰 옥에 티가 없는 데에 견주었으니, 여기에서 또한 사사로이 옹호하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당대의 사대부를 가리켜 모두 간사하다고 하였는데, 어찌 천만인이 모두 간사할 리가 있겠습니까. 아! 또한 박합니다. 이런 말이 어찌 인인 군자(仁人君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온 세상 사람을 모두 간사한 사람이라 하여 쓰지 않는다면 전하께서는 앞으로 다만 두세 사람과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렵니까? 아! 충과 사를 분별하니 지혜는 밝고, 혐의를 피하지 않아도 형적은 공정한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전하께서는 자고로 어진 대신과 은군자(隱君子)가 또한 사당(私黨)을 옹호하여 사림을 모함하고 해치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좌상 김귀영은 능히 소견을 지키고 돌이키지 않아 조정을 편안히 하려고 하였으니, 비록 전하의 위엄이 두려워서 분명히 그 어떠한 것은 말하지 못하였으나 그 뜻은 다소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다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아부하여 구차스럽게 제 몸만 용납받으려 한다고 지척하여 몸둘 곳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만일 김귀영이 실지로 아부하여 구차스럽게 제 몸만 용납받으려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박순의 의론에 덮어놓고 따르고 붙어서 주상의 뜻을 맞추지 않고 도리어 외롭고 위태한 사류에게 아부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종전에는 대신에 대한 예우를 지극하게 하셨는데, 하루아침에 한마디 말이 부당하다고 하여 엄하게 견책을 내리셨으니, 삼가 이로부터 영합하여 비위를 맞추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나라 일이 날로 잘못될까 염려됩니다.
전 대사간 송응개는 대신의 지척으로 사퇴까지 하였지만, 진달한 말은 또한 대부분 근거가 있습니다. 상께서 불충하다고 지목하시어 마침내 체직을 명하시고, 얼마되지 않아 또 외임으로 내보냈습니다. 대저 대간이 사피하여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면, 공론에 붙여 나올 만하면 나오고 체임할 만하면 체임하는 것이 천하의 시비를 공정하게 하는 것이니, 임금이 그 사이에 사(私)를 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편벽되고 사사로운 말을 믿어서 근고(近古)에 없었던 거조가 있었으니, 어찌 대단히 온당치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번에 옥당에서 차자를 올렸을 때에 전하께서 이이를 왕안석에게 견준 것을 미워하여 전후에 반복한다고 칭탁하여 세 사람을 배척하여 버렸으니, 아! 이이 한 사람 때문에 전후에 배척하여 버린 자가 무릇 몇 사람입니까?
이 사람들이 이이가 성질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글을 읽어 도를 추구하여 항상 원대하게 성취할 희망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일찍이 탑전에서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뒤에 이이가 분함을 머금고 사심을 품어 공론을 배척하여 못하는 짓이 없고, 나라의 중책을 담당하여 무릇 시행하는 것이 가볍고 망령되고 자기 마음대로 하여 나라를 그르치는 수단이 분명하여 가릴 수 없는 것을 본 후에는, 공공(公共)한 의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에는 칭찬했다가 뒤에는 논핵하는 것이 사리(事理)와 사세가 곧 그러했던 것이니, 어찌 이것이 반복한 것이겠습니까.
‘서얼(庶孼)을 허통(許通)하자.’는 내용에 있어서는 이이의 뜻을 논하면 진실로 이 일을 전적으로 주장하지 않았으나, 소위 허통이라는 것도 같지 않습니다. ‘어진 사람을 쓰는데 부류를 따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범범히 허통한다면 오히려 괜찮지만, ‘변방 군사를 위하여 곡식을 바치게 하고 허통하자.’는 것은, 크게 왕정(王政)의 체모가 아닙니다. 어찌 대단히 구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첨(金瞻)이 말한 뜻은 이이와는 크게 서로 같지 않은데, 전하께서 지적하여 죄를 삼아 윽박질러 물러가게 하고, 한 번 사직하자 모두 체임시켜 조금도 돌아보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았으니, 어찌 밝으신 성상께 큰 누(累)가 아니겠습니까.
삼가 보건대, 지난날 대간이 이이의 말을 논할 때에, 이이의 본심이 편벽된 것은 말하지 않고 다만 그가 행한 일의 미세한 잘못만을 들었는데, 그 말은 너무 지나쳤습니다. 어찌 위로 전하의 의심을 사고 아래로 기회를 엿보는 자들의 구실거리를 초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대간의 뜻은 다만 일을 인하여 논핵하여 바루고자 한 것이요, 말이 중도에 지나친 것은 다만 또한 말을 하던 중 우연한 일입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다른 뜻이 그 사이에 있겠습니까.
당초 동ㆍ서의 설이 있을 때에는 진실로 사정(邪正)과 시비가 그 사이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대부의 공론이 모두, ‘동이 바르고 서가 간사하다.’ 하였는데, 이이가 편벽되고 사사로움에 빠져서 서인을 붙들어 주고 동인을 억제할 마음을 일찍이 하루도 잊지 아니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이른바, ‘나라의 정치가 부질없는 의론에 어지러워진다.’는 말은 당대를 통틀어 부질없는 의론으로 돌리어 상의 들으심을 의혹하게 한 것입니다. 지난날에 이른바, ‘제재하고 물리쳐 멀리한다.’는 말은 제재하고 물리쳐야 한다는 것으로써 하나의 함정을 만들어서 사류를 몰아 빠뜨린 것입니다. 그 마음가짐이 이와 같으니 많은 사람들이 어찌 울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이를 논하는 자가 만일 이때에 명백하게 논계하여 그 죄를 바로잡았더라면 비록 사정을 끼고 편벽되게 비호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장차 무슨 틈을 타서 시비를 현란시키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이의 편사(偏私)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알지 못하시고 다만 민첩하여 재주가 많은 것만을 사랑하여, ‘더불어 지극한 다스림을 일으킬 수 있다.’ 하였으니, ‘사람을 알아보면 명철한지라, 요임금도 그것을 어렵게 여겼다.’는 것이 참말입니다. 아! 전에는 이이가 상소를 내자 경안군 요(慶安君瑤)가 누구누구의 이름을 지적하였고, 뒤에는 성혼이 상소를 내었는데, 박순이 누구누구의 이름을 지적하여 사림의 화를 도발하였으니, 전후의 수단이 어찌 그리도 같습니까.
신등이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으면서 시사를 목격하고도 일찍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니,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지금 대각(臺閣)ㆍ시종(侍從)의 관원이 외임으로 나가는 자가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보고 조정에 있는 신하가 모두 불안하여 물러갈 뜻을 두어 기상이 근심스럽고 위망(危亡)의 조짐이 보이니, 차마 말하지 않아서 전하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우러러 호소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기운을 화평하게 하시어 먼저 한 마음의 저울과 거울을 바루시어, 곱고 추하고 가볍고 무거운 것으로 하여금 모두 마땅함을 얻게 하소서. 그리하여 종사(宗社)와 국가에 있어서 매우 다행이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계미년, 8월 5일 왕자 사부(師傅) 하낙(河洛)이 상소하기를,
“삼가 들으니, 삼사가 같은 말로 있는 힘을 다하여 전 병조 판서 이이를 논박 공격하자, 이이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 미련 없이 돌아갔다 하니, 이것은 이이에게는 다행이지만 실로 조정에는 큰 불행입니다.
대저 이이의 사람됨이 어떠한지를 신이 진실로 알지 못하니, 일찍이 벗들이 서로 전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됨이 성현의 글 읽기를, 좋아하고 뜻을 독실히 하여 힘써 행하고 몸을 지키고 마음을 단속하여 매양 옛사람을 사모한다 합니다. 그가 세상에 쓰여지자 성상께서 마음을 기울이고 백성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기대하매,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위로는 임금을 돕고 아래로는 백성을 구제하기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시행하는 모든 것들이 오직 국가의 폐단 없애기를 힘쓰고 시속에 거슬리는 것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수고로운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고 묵은 관습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마침 북쪽 변방이 위급함을 당하자, 몸소 하관(夏官)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군마(軍馬)의 조발(調發)과 군량의 운수를 동시에 아울러 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변방을 튼튼히 하고 오랑캐 군사를 제어하고자 해서입니다. 이것은 이이가 자기가 배운 것을 행하고 밝으신 성상의 알아주심을 보답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사이에 비록 소루(踈漏)와 과오가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본심을 캐어보면 어찌 고의로 질서 없이 변경하고 어지럽혀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언관(言官)들이 글을 번갈아 올려서 논핵하여, 처음에는 그 잘못을 조금 거론하다가 나중에는 그 말을 점점 보태어 날로 더욱 중해져서 옥당의 차자(箚子)와 간원의 계사에 이르러서는, 간사하고 흉한 정상을 극도로 말하고, 속이고 간교한 태도를 다 드러내어 천언만어(千言萬語)와 횡설수설이 분노하고 미워하는 말 아님이 없었습니다.
아! 삼사라는 것은 인군의 이목(耳目)이요 공론이 있는 곳입니다. 삼사로써 인군의 이목과 공론으로 삼았으니, 그 책임이 돌아보건대 크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감히 남의 마음을 추측하여 주워대고 날조하여 큰 죄악을 남에게 씌우고자 하였으니, 그 소견이 또한 그릇되지 않겠습니까. 그중에, 다투어 송사를 일으켜 사람을 죽였다.’는 것과 ‘뇌물 백 석을 받았다.’는 등의 일은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중하여 더욱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이가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면 마땅히 그 죄를 밝혀 처단하여 왕법(王法)을 보여야 하고, 심상하게 보고서 묻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여항(閭巷)사람들도 장로(長老)에게 말하려면 반드시 마음을 화평하게 하고 얼굴빛을 단정하게 하여 속이지 않고 사실대로 고하여 시비의 소재를 분명히 알게 하여야 하는데, 하물며 군신(君臣) 부자(父子) 사이에 어찌 사실과 근거가 없는 부질없는 말로써 사람들의 보고 듣는 것을 현혹하기에 힘쓰겠습니까. 인심이 울분하고 여항 의론이 전파됨에 시론(時論)을 두려워하는 부형이 간혹 그의 자제를 경계하나, 공통된 마음에 스스로 마지못하고 절로 드러내어 금하지 못함이 흔히 있습니다. 그리하여 군인 무부(武夫)에 이르러서도 대궐에 부르짖어 그 심정을 호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 이른바 삼사의 공론 아래에 반드시 다른 하나의 공론이 생기는 것이 없다고 보증하기 어렵습니다. 아! 이이가 당시에 홀로 서서 도우는 이가 적은데, 안으로 정치를 닦고 밖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는 공을 이루고자 하였으니, 그 뜻은 충성스러우나 그 계책은 엉성하였습니다. 또 성혼은 산림에 은둔한 자로서 고상하게 숨어서 도를 품고 스스로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조금도 바깥의 영화를 사모하는 생각이 없고 한평생을 전일하고 고요하게 자신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어, 실덕(實德)이 안에 쌓이자 명성이 밖으로 들려 마침내 임금께서 부르시는 글이 빛나게 내려지자 일어나지 아니할 수 없었으니, 대개 그의 거취(去就)를 보아서 세사의 성쇠(盛衰)를 점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일찍이 이이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친구가 되어 천인(天人)의 학문과 의리(義利)의 분변을 서로 더불어 강론(講論)하여 그 뜻을 깊이 알고 그 요점을 통하였으니, 마음이 같고 덕이 같다고 하여도 가합니다.
지난번에 성혼이 도성에 있을 때에 삼사가 이이를 논핵하여 공격하는 글이 날로 점점 더 중하여졌으니, 성혼의 마음이 만일 이이를 그르게 여겼다면 비록 서로 두터운 정이 있더라도 어찌 감히 사직하는 소를 거짓 꾸미어 대궐뜰에 절룩거리고 나와서 그 죄악을 가리고 덮어서 전하의 총명을 속이겠습니까. 산인(山人)의 마음쓰는 것이 과연 이러하겠습니까? 삼척동자라도 결단코 이런 이치가 없음을 알 것입니다. 말하는 자가 갑방(甲方)에서 노한 것을 을방(乙方)에 옮기어, 성혼을 당파를 만들어 밤낮으로 궁리하여 전하의 귀를 현혹시켜 사류를 일망타진하려 한다는 말로써 씌웠으니, 아! 산인을 대접하는 것이 박하지 않습니까?
한 고조(漢高祖)가 선비를 가볍게 여기어 거만하게 욕하는 사람인데도 상산 사호(常山四皓)를 보고는 예로 대접하고 태자를 보호(保護)하여 달라고 청하였고, 한 광무(漢光武)가 암혈(岩穴)을 물색하여 양구(羊裘)를 입은 낚시질하는 늙은이를 얻으매 곧 침실에 함께 누워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으니, 모두 부드럽고 겸손하고 너그러운 예로 임학(林壑)에 물러가 숨어있는 사람에게 베풀었고, 일찍이 조금이라도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기는 뜻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통일(한 고조의 사업)을 이루었고, 중흥의 공(한 광무제의 사업)을 이루었습니다. 원(元) 나라의 조굉위(趙宏偉) 같은 사람은 오랑캐의 장수로서 오히려 금화처사(金華處士) 허겸(許謙)을 맞아올 줄을 알아서 그 요속(僚屬)으로 하여금 본받을 바가 있게 하였고, 명 나라의 왕진(王振)은 혼조(昏朝)의 권당(權黨)으로서 당대의 명현 설선(薛瑄)을 끌어 써서 의뢰하여 유지하려 하였으니, 저 두 사람이 비록 진심으로 좋아하지는 못하였으나 오히려 그 이름은 사모할 줄을 알았습니다. 어째서 당당한 성명(聖明)의 때에 이렇게 심장과 이목이 놀라게 하는 일이 있습니까?
성혼은 몸이 산야(山野)에 있으면서 서찰이 도성에 계속 이어져 조정의 정령(政令)과 인물의 진퇴에 참여하여 알지 못함이 없고, 자신의 거취도 군부(君父)의 명에 있지 않고 친한 친구의 편지에 있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혼은 다만 산림을 빙자하여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하여 공명을 이롭게 여기고 당파를 심는 한 추솔(麤率)하고 비루하고 형편없는 사람이니 그 전후의 벼슬을 사양하고 조용히 물러가서 전원에서 스스로 즐긴 것이 다만 한낱 출세를 요구하는 첩경(捷徑)으로 한 것이 되고 맙니다. 성혼 같은 어진 이로서 이런 일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의심스럽습니다. 여기에 이르러서 인심이 더욱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실망하여 모두 동해의 물에 빠질지언정 조정에 있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영상 박순의 사람됨은 신이 더욱 감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가 맑고 신중하고 아담하고 고결하며[清愼雅潔],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자신을 낮춘다[愛人下士]는 것을 들었습니다. 과연 능히 이 여덟 글자를 지녔다면 비록 어진 정승이라고 말하여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탑전에서 아뢴 말이 어찌 소견이 없겠으며, 어찌 일찍이 얽어서 모함하고 해할 마음이 있어서이겠습니까. 이제 그에게 열 가지 죄목을 일일이 열거하여 더할 수 없이 헐뜯고 배척하여, 윤원형(尹元衡)ㆍ기(李芑)의 간사와 다를 것이 없게 만들었으니, 아! 성명의 세상에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박순ㆍ이이ㆍ성혼 세 사람이 서로 표리가 되어 당을 심고 세력을 굳힌다.’고 한 데에 이르러서는, 더욱 인심을 복종시킬 수 없습니다. 탄핵하는 소장(疏章) 아래에서 저들이 어찌 감히 구차스럽게 머물러 있겠습니까? 오늘 이이가 가고 다음날 박순이 가서 2~3일 동안에 원로(元老)가 들로 도망하고 산인이 도성을 떠나 서로 잇따라 같은 뜻을 품고 가버렸으니, 기상이 매우 서글퍼서 일마다 슬픈 마음이 생깁니다. 성상(聖上)께서 고립되었는데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으니, 전일에 언관의 계사에 말한, ‘일망타진하여 남의 나라를 비게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대저 언관의 직책이란 말하는 것으로 책임을 삼아서, 항상 자기의 임금을 요순(堯舜) 같은 성군으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허물이 있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잡으려는 것이요, 또 자신의 신하를 직ㆍ설(稷契) 같은 어진 신하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기를 기다리지 않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잘못되는 일이 없고 아래로는 실제 효과가 있어서 치평(治平)의 지경에 함께 이르나니, 이것은 공정한 마음과 곧은 도리로 나라를 위하고 집을 잊어서 순일(純一)하여 두 마음이 없는 자가 하는 일입니다. 지금의 언관은 모두 이러한 책임이 있고 모두 이러한 충성이 있으니, 어찌 그 직책을 충실히 하여 우리 임금을 요순 같은 성군으로 만들고 우리 정승을 직ㆍ설 같은 어진 신하로 만들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이에 한둘 과감한 사람이 없지 않아서 그 언사와 거동이 혹 전도(顚倒)되어 중도를 잃음을 면치 못하여, 남의 허물을 낱낱이 찾아내고[洗垢覔瘢] 허물이 없는 데에서 허물을 찾나니, 아! 옛말에 이른바 ‘말을 한 번 내면 사람들이 믿고 복종하는 군자’는 아마 이렇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보잘것없고 우매한 사람으로서 오래 외람하게 차지해서는 안 될 자리에 있으면서 저 자신에게 진실된 행실이 없는데 어찌 남의 행실을 책할 수 있었겠으며, 저 자신에게 실학이 없는데 어찌 남에게 학문할 것을 권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하여 어린이를 능히 가르치지 못하고 의혹을 열어주지 못하여[蒙未養而惑未開] 임해군(臨海君)은 사책(史冊) 읽는 것이 거의 끝나게 되었으나 그 강령(綱領)을 알지 못하였고, 광해군(光海君)은 소학(小學)을 이미 마쳤으나 그 기본을 배양하지 못하여, 한갓 강설(講說)의 말단만 일삼고 실지의 공효는 거두지 못하면서 봉급만 허비하고 창고만 소모하였으니, 신의 첫 번째 죄입니다. 지위를 벗어나고 분수를 범하여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하여 망령되게 시비를 논하여 기휘(忌諱)에 저촉하여 옛사람의 이른바, ‘이 나라에 살면 그 대부를 비방하지 않는다.’는 교훈에 크게 어긋났으니, 신의 두 번째 죄입니다. 몸이 두 가지 죄를 범하고 행실은 한 가지 장점도 없으니, 의리상 떠나가야 하겠으나 여전히 억지로 염치없이 그만둘 줄 모르는 것은, 다만 왕자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왕자도 오히려 저버리려고 하지 않는데, 하물며 전하를 저버리겠습니까?
시사(時事)의 위급을 눈으로 보고 충의의 담(膽)이 저절로 커져서, 입을 닫으려고 하나 닫아지지 않고 혀를 다물려고 하나 다물어지지가 않아서, 말이 나오면 화가 따르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여 눈물을 거두고 어리석은 충정을 무릎 꿇어 진달하옵니다.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유의하여 살피시면 종사와 조정의 다행이요, 사류의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지극히 떨리고 황송하기 그지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소사(疏辭)를 보고, 네 뜻을 잘 알았다.”
하였다.
도승지 박근원 등이 아뢰기를,
“신등이 삼가 하낙의 상소를 보고 지극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낙이 본래 이이ㆍ성혼과 더불어 서로 가장 친하고 성품이 출세하기를 좋아하여 안정(安靜)을 꺼립니다. 또 간사하고 편벽되고 말을 만들어 내는 사람과 함께 밤낮으로 상종하는데, 이제 감히 친구 사귀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느니, 이이의 사람됨을 알지 못하였다느니 하여 말하는 것이 지극히 공정한 데서 나온 것같이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을 어찌 가릴 수 있겠습니까.
근일에 삼사가 다투어 논핵하는 것이 모두 공공(公共)한 것인데, 하낙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여 도리어 말하는 자를 현혹하고 속인다고 배척하고, 박순ㆍ이이와 성혼을 칭찬하고 인정하되 극히 말을 잘 꾸며서 교묘하게 상의 뜻을 맞춥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 보기를 심중을 꿰뚫어 보듯이 하는 것을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하낙의 발신(發身)이 실로 이이ㆍ성혼의 추켜주고 밀어준 힘인 것은 또한 길가는 사람도 아는 사실입니다. 시골에 있으면서 이(利)를 꾀하고 의(義)에 어그러져서 고을 군수를 협박하고, 또 사류를 질시하고 해쳐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겨보니, 왕자 교도의 책임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마다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당파에 결탁된 것이 이미 오래기 때문에 그 기염(氣焰)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공론이 이미 드러나서 용납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감히 혼란(昏亂)한 때를 틈타 음참한 태도를 다하여 여러 사람을 쫓아내어 나라를 비게 하려는 계책이 거리낌 없기가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신 등은 더욱 한심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은 다만 개인적인 교분을 옹호하고 사림을 무함하는 것뿐 아니라, 실상은 자신을 위하여 도모하는 것이어서 손과 발이 다 드러난 것입니다.
또 그 상소에 끝에 또한 지나치고 무례한 말이 많았으니, 그 음험하게 속이고 아첨하는 정상이 더욱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상께서 만일 필부(匹夫)의 말이라 하여 족히 교계할 것이 없다 하시고 그 간사한 정상의 곡절을 혹 통촉하여 밝게 분변하지 못하신다면 시비가 어느 때에 정해지겠습니까? 사사로이 서로 지목하고 사주하는 것이 이것을 이어서 일어난다면 장차 그 시끄러움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윤희경(尹希慶)의 상소가, 화를 낼 마음을 품어서 뒤집어 씌운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듣기에 분하게 합니다. 망령되게 세 사람(박순ㆍ이이ㆍ성혼)의 거취를 분하게 여김에 이르러서, 그 중에 김귀영을 논한 한 조목에, 직책을 감당하지 못하니 마땅히 물러가야 한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으니, 이것도 전하의 마음을 더듬어 시험한 것입니다. 신등이 외람되이 근밀(近密)한 직책에 있으면서 나라를 망치는 화가 조석에 다가와 있음을 눈으로 보기 때문에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계사를 어떤 승지가 기초하였느냐?”
하였다. 도승지 박근원 등이 회계하기를,
“이 계사를 입계(入啓)할 때에 동료가 함께 앉아서 의논하여 아뢴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계사는 여러 승지가 일시에 집필하여 기초한 것이냐?”
하였다. 도승지 박근원이 회계 하기를,
“사간원에서 서로 의논하여 집필하여 비록 붓을 잡은 사람은 있으나 그 사람의 의견으로 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붓을 잡는 사람을 물으시니, 신 등이 지극히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계사를 보았다. 너희들이 사람의 말을 막아서 내 총명을 가리고자 하는 것이냐? 이렇게 하여 끝내는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이냐? 내가 비록 어둡고 용렬하나 어찌 너희들의 가르침을 받을 사람이냐? 내가 너희들을 죄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느냐? 대저 공론이 인간에 있는 것은 물이 땅속에 있는 것과 같다. 대간(臺諫)이라고 하여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고, 꼴베는 천한 사람이라고 하여 반드시 그른 것은 아니다. 오직 그 사람이 공정하면 그 말이 공정한 것이다.
예로부터 대간ㆍ시종(侍從)의 명칭이 어느 시대인들 없으랴마는, 공론이 조정에 있은 때가 드물었다. 대저 공론이 조정에 있으면 다스려지고 조정에 있지 않으면 어지러워지는 것이니, 이것이 백대에 훌륭한 정치가 없었던 까닭이다. 지금 이 대간의 말에 대해 인심이 복종하지 않으니, 의사(義士)가 소매를 걷어올려 장차 사면에서 일어나게 되면, 너희들이 비록 힘을 다하여 미봉하더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성균관 진사 유공신(柳拱辰) 등 4백 62인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천하에 엄폐하기 어려운 것은 공론이요, 국가가 의뢰하여 유지하는 것은 사기(士氣)입니다. 공론이 혹 없어지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올바름을 잃어서 시비가 밝아지지 않고, 사기가 한 번 꺾이면, 그럭저럭 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추향(趨向)할 방향을 모르게 되니 이러하고서 국가가 위태하고 망하는 데에 이르지 않는 경우는 드뭅니다.
신 등이 보건대, 성혼이 도학(道學)에 뜻을 두어 몸을 닦는 것으로 학문을 하여, 성현의 글에 잠심(潜心)하고 의리의 심오한 뜻을 강구하고 밝혀 궁하게 시골에 사는 것을 달게 여기고 산림(山林)에 뜻을 두어 처음부터 시론(時論) 시비 가운데의 사람이 아닙니다.
다행히 주상 전하께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성의가 있고, 어진 이 구하기를 목마른 것같이 하여 역마로 부르는 예우(禮遇)가 융숭하고 나아가 접견하는 은총이 넓고 두터움을 만났기 때문에, 병을 안고 서울에 와서 정성스럽게 머뭇거렸는데, 뜻이 같고 도가 합하는 사람은 오직 이이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널리 배워 아는 것이 많고 도학의 대의를 깨쳤는데, 오직 그 시행할 즈음에 소루하고 실정에 맞지 않은 잘못이 없지 않았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옛사람에 비교하여 참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시론이 떠들어서 방자한 의논이 바야흐로 성하고 참소하는 말이 번갈아 어지럽혀 국시(國是)가 정하여지지 못하여 마침내 충성을 다하는 신하로 하여금 용납할 수가 없어서 떠나가게 되니, 이때에 만일 성혼의 상소가 아니었다면 시비가 정해질 길이 없었을 것이고, 사정(邪正)이 분별될 때가 없었을 것입니다. 탄핵하여 논하는 신하가 개인적인 유감을 가지고 유언비어를 만들어서 충성스럽고 곧은 의논을 도리어 나라를 망치는 말로 여기고 정직한 선비를 지척하여 척리(戚里)의 문객으로 만들어서, 다투어 서로 어지럽히고 공갈하여 못하는 짓이 없어서 성혼으로 하여금 아주 멀리 피하여 도성 아래에서 자취를 끊게 하였습니다. 아! 어찌 칼과 톱으로 죽인 뒤에야 그 화가 참혹하다 하겠습니까. 또 친구가 먼 곳에서 와서 날마다 서로 강학(講學)하는 것이 또한 무슨 죄가 있기에, 무리로 모여 부박하고 추잡하다 하여 경상(卿相)을 일일이 헐뜯으니, 사우(師友)의 도가 폐하고 사기(士氣)가 꺾이는 것이 반드시 오늘에 비롯되지 않는다고 못할 것입니다.
아! 성혼의 어짊과 이이(李珥)의 충성으로도 시론(時論)에 무함을 당하여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이 심하니, 지금의 사기는 거의 지칠 것이고 지금의 공론은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 사기가 이미 지치면 국맥(國脈)을 어떻게 유지하며 공론이 한 번 없어지면 인심이 어찌 격동하지 않겠습니까. 국맥이 날로 소멸되고 스러지고 인심이 날로 격동하면 전하의 국사가 어찌 위태하지 않겠습니까?
아! 온 조정의 경사(卿士)가 어찌 모두 어진 이를 질투하고 능한 이를 미워하는 사람이겠습니까. 한두 부박(浮薄)한 무리가 질투하고 미워하는 의논을 고취시키자, 당시 붙어다니는 자가 휩쓸리어 따르지 않음이 없어서 스스로 한 나라의 공론으로 여기어,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여항(閭巷)의 의론이 격하게 하니, 이것이 어찌 사류의 본심이겠습니까.
대저 임금의 덕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밝히고 시비를 정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밝지 않으면 어질고 어질지 않은 사람을 분변하기 어렵고, 시비가 정하여지지 않으면 충성과 간사가 명백해 질 수 없어서, 사기가 꺾겨 떨치지 못하고 공론이 막혀 행해지지 못하게 될 것이니, 나라가 위태하고 망하는 것을 당장에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 당고(黨錮)의 화가 일어나자 한(漢) 나라 운수가 마침내 쇠하였고, 위학(僞學)을 금하자 송 나라 운수가 드디어 끊어졌으니, 어째서 말세의 쇠하고 어지러운 풍기(風氣)가 다시 성명의 세상에 일어납니까? 말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참으로 통곡하여 눈물을 흘릴 일입니다.
배우지 못하고 보잘것없는 신 등이 외람되이 수선(首善)의 자리에 있으면서 여럿이 함께 거처하며 학문을 강론하고 문묘(文廟)를 호위하는 것이 할 일이지, 조정의 시비 득실에 대해서는 말할 바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이 유림(儒林)에 관계되고 해(害)가 나라에 미치므로 감히 속에 있는 간절한 정성을 헤쳐내어 초야(草野)의 의론을 진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유념 반복하여 신의 말을 자세히 살피시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밝히고 시비를 정하여 한편으로는 공론을 신장시키고 한편으로는 사기를 부지(扶持)하신다면 국가의 다행이요 사림(士林)의 다행이겠습니다. 신 등이 지극히 송구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가 덕이 적고 우매하면서 왕업(王業)을 외람히 지키어, 지혜는 현사(賢邪)를 분변하지 못하고 재주는 국가를 다스리지 못하여,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고 시비가 혼란하게 되었으니, 책임이 내게 있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지금 소사(疏辭)를 보니, 충성스럽고 곧고 격려되었다. 너희들의 의기(意氣)가 이와 같으니 내가 어찌 국사를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6일. 양사(兩司)가 아뢰기를,
“신 등이 어제 정원(政院)의 비망기를 삼가보고 지극히 미안함을 이루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론이 국가의 원기(元氣)이나 때에 따라 일정하게 있지 않아 진실로 대간(臺諫)과 꼴베는 사람의 구별이 없고, 그 사람이 공정하면 그 말이 공정하다.’ 하신 것은 상의 말씀은 지당(至當)합니다. 다만 이른바, ‘공론이라는 것은 이미 형상이 없어서 쟁변(爭辨)하고 진언(進言)하는 즈음에 사람마다 각각 자기가 시비를 분변하고 공론을 정한다.’ 하니, 오직 임금이 마음을 공평하게 하여 이치를 살피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만일 혹시 선입지견(先入之見)이 주장이 되어 점점 의심하여 뜻에 순하게 하는 말을 반드시 바른 것으로 여기고 귀에 거슬리는 의논을 반드시 부정한 것으로 여기면, 끝내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정당함을 잃고, 옳고 그른 것이 전도되는 것을 면치 못하여, 공론이 비로소 공론이 되지 못하고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이 판단될 것입니다.
신 등이 모두 용렬한 자질로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화가 장차 불측하게 되어, 인심이 함께 근심하고 공론이 격동하여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신 등이 한 나라의 공공한 의론을 가지고 만 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 합문(閤門)에 부르짖고 조정에서 간쟁한 지 지금 이미 반달이 되었습니다. 논핵을 당한 자의 친당(親黨)과 문도(門徒) 이외에는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말로 모두 바꿀 수 없는 곧은 의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 등이 정성이 적어서 아직까지 전하의 뜻을 돌이키지 못하여 민망하고 박절한 즈음에, ‘지금 공론이 조정에 있지 않고 대간(臺諫)의 말에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것은 실로 신 등이 봉직을 변변찮게 하여 밝으신 성상께 믿음을 받지 못한 결과이니, 그대로 중한 자리에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명하여 신 등의 직책을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희 양사가 논계한 뒤로부터 내가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은, 내가 말더듬는 자가 아니니 어찌 한마디 할 만한 말이 없으며, 한 번 내릴 만한 위엄이 없어서이겠느냐. 군신(君臣)간에 의리를 해치는 바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가 어렵고 생민이 도탄(塗炭)에 빠진 때를 당하여, 너희 양사가 누군들 이씨(李氏)의 신하가 아니겠는가마는, 대신과 공경(公卿)이 모두 당시에 어깨를 겨누고 형제 같은 사람들인데, 어찌하여 공(公)을 먼저 하고 사(私)를 뒤로 하여, 자기 의견을 깨끗이 버리고 얼음 풀리듯, 한 마음으로 화합하여 왕실(王室)에 힘을 다하지 못하는가? 너희 양사는 당장 논계를 정지하여 한바탕 시끄러웠던 것을 하나의 웃음거리에 붙이고 다시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나의 다행일 뿐 아니라, 실로 양사의 이익일 것이다. 군신간은 부자 사이와 같기 때문에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다. 만일 고집하고 깨닫지 못하여 논핵하기를 마지않으면 내가 어찌 다만 침묵만 지키겠느냐. 반드시 장차 부득이한 거조가 있어, 다른 것은 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때 가서 후회가 없겠느냐? 나는 두 번 말하지 않겠노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가 두 번째 아뢰기를,
“신 등이 이미 직임에 있는 것이 타당치 못한 뜻으로 천청(天聽)에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진달하였으니, 물러가 사실(私室)에 엎드려서 견책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성상의 비답이 간곡하게 타이르시어 심지어 정이 부자 같다고 말씀하셨으니, 신 등은 감읍(感泣)하여 마지않습니다.
신 등의 조그마한 정성을 또한 어찌 감히 어전(御前)의 지척에서 다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조종조(祖宗朝)의 세신(世臣)의 자손으로서 전하께서 17년 양육하신 혜택을 입어서 의리와 은혜가 무겁고 깊어 항상 만 번 죽음을 아끼지 않고 조금이라도 갚으려 합니다. 하물며 지금 국가가 어렵고 생민이 도탄에 빠진 때에 동료와 함께 공경히 임금을 섬기고 마음을 합하여 같이 국사를 이루는 것이 신 등의 평소의 큰 소원입니다. 신 등이 실성(失性)한 병이 든 자가 아닌데, 어찌 까닭없이 감히 대신을 공격하는 일을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마음을 화평하게 하여 근일의 일을 굽어 살피신다면, 신 등이 부득이하여 항론(抗論)하는 뜻을 또한 반드시 통촉하실 것입니다. 병조 판서가 그 직책을 잘못 수행하면 유사(有司)가 따라서 규탄하는 것은 직분에 마땅히 할 일이요, 또한 성세(聖世)에서는 듣기를 즐겨하는 것입니다. 정승이 화평하게 진정시키어 조정을 편안히 하여 간난의 구제에 힘쓰지 않고, 도리어 기회를 타고 사정을 끼고서 나고 들며 계획하는 것이 사류를 밀어 함정에 빠뜨리고 당파를 다시 심는 계교가 아님이 없으니, 나라를 텅비게 만드는 화가 조만간에 닥칠 것입니다. 신 등이 외람되이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어찌 감히 자신은 돌아보고 나라는 잊은 채 침묵하고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모두 전하께서 통촉하신 것인데 오히려, ‘어찌하여 공사를 먼저 하고 사사를 뒤로 하여 자기 의견을 깨끗이 버리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등이 이미 간하는 것으로 책임을 삼았으니, 장차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얼음이 풀리듯, 한 마음으로 화합하여 왕실에 힘을 다하라 하신 것은 신 등이 감히 성의(聖意)를 받들어 거행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국시가 오늘에 정해지지 않으면 앞으로 반드시 닥칠 화를 아마도 전하께서 능히 막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 등을 생각하시어 간곡하게 부자간의 정을 보이시고, 또 고집하여 깨닫지 못한다고 책하시니, 신 등은 더욱 감격하고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만일 언관이 한 번 내릴 위엄을 겁내어 성상의 뜻에 순종하여 그날로 논계를 정지한다면 진실로 신 등 한 몸의 이익이기는 하나, 어찌 국가 사직의 복이겠습니까. 신 등이 만일 다만 일신의 이익만 계산한다면 근일에 전하께서 바야흐로 크게 성내시어 대신이 견척(譴斥)되고 간쟁하는 신하와 경연(經筵)의 신하가 서로 잇달아 밖으로 쫓겨나가고, 심지어 이제는 후설(喉舌)의 관사(官司)를 일시에 물리치셨으니, 신 등이 눈으로 이 거조를 보고 이해가 몸에 절박한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오히려 다시 구구하게 감히 말하여 마지않은 것은, 실로 전하의 위임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고 국사를 만분의 일이라도 수습하고자 하는 데에 있습니다.
전하께서 미천한 정성을 살피지 못하시고 도리어 신 등이 사사로움이 있는가 의심하시니, 신 등이 어찌 감히 버젓이 그대로 무릅쓰고 있으면서 관직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청컨대, 속히 신 등의 직을 파면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 계사를 보고 그 뜻을 잘 알았다. 경 등이 저 사람들에게 무슨 개인적인 원망이 있겠으며, 저들도 무슨 개인적 원망이 경 등에게 있겠는가? 똑같은 왕신(王臣)으로 한 당(堂)에 있으면서 얘기하고 웃고 서로 인정하던 사람들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언사가 점점 서로 격동하여 대립하기에 이르러, 진(秦)과 월(越)처럼 되었으니, 경등이 만일 돌이켜 생각한다면 실로 한바탕 웃을 일이다.
이왕의 일을 경 등도 추후하여 분변할 것이 없고, 저들도 어찌 개의(介意)할 것이 있겠는가? 만일 개의한다면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다. 경 등은 모두 나의 시종(侍從)의 신하이고, 더러는 여러 해 시강(侍講)한 자도 있으니, 내가 실로 애석하게 여긴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우연한 생각에서가 아니니, 속히 내 뜻을 알아준다면 장래에 어찌 화가 생긴 이치가 있겠는가? 의심하지 말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도승지 박근원ㆍ우승지 김제갑(金悌甲)ㆍ우부승지 이원익(李元翼)ㆍ동부승지 성낙(成洛)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중한 견책을 졌으니 마땅히 숨을 죽이고서 처분을 기다리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것이나. 다만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하루 벼슬에 있으면 마땅히 하루의 책임을 다하여야 하니, 진실로 소회(所懷)가 있다면 어찌 차마 끝내 침묵하여 성명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제 유생이 상소한 말은 신 등이 족히 깊이 변명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전부터 관학(館學)에서 소(疏)를 진달하려면 으레 반드시 조용히 모여 의논하여 가부를 상의하여 정한 후에 하는 것입니다. 이번 이 거조는 그렇지 않아서 사사로이 서로 지시하고 사주하여 그릇된 의논을 고취시키어 혹은 달래고 혹은 위협하나 오지 않은 자가 심히 많았고, 와서도 따르지 않는 자가 또한 많았는데, 모두 유식한 사람이었습니다. 의론을 주창하는 무리가 자기와 다른 것을 분하게 여기어, 높은 소리로 꾸짖어 구박하고 쫓고 소매를 잡아 끌며 떠들고 혼잡하여서 명륜당(明倫堂)이 하나의 전쟁터가 되었고, 종시 따르지 않는 자는 혹 손도(損徒 오륜에 벗어난 행동을 한 사람을 내쫓는 것)를 시키거나 혹 삭적(削籍)하고야 말았습니다. 선비의 풍습이 어그러지고 어지럽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보고 듣는 사람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예로부터 선비의 풍습이 이와 같고서 그 나라가 위태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태를 상께서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그들의 소에 비답(批答)하신 말씀이 도리어 표창과 권장을 하시어 충직(忠直)과 의기라고 허여(許與)하기까지 하셨으니, 신 등은 삼가, 선비의 풍기가 더욱 무너져서 제 마음대로 함부로 행하여 끝내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유의하여 살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사진(仕進)한 승지를 모두 내보내고, 입직한 위장(衛將) 정복시(鄭復始)와 권벽(權擘)을 가승지(假承旨)로 명초(命招)하라.”
하고, 가승지에게 전교하기를,
“승지가 모두 체임되었으니, 당일에 정사(政事 인사)를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도승지 박근원ㆍ우승지 김제갑ㆍ우부승지 이원익ㆍ동부승지 성낙을 체차할 것을 이조에 내리라.”
하고, 이비(吏批)에 전교하기를
“오늘 송서(送西)한 사람 박근원ㆍ김제갑ㆍ이원익ㆍ성낙 등은 벼슬을 빨리 제수하지 말고 내가 다시 전교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후일에 하라.”
하였다. 옥당의 차자는 대개, 어제 정원(政院)에 내린 비답과 승지를 체차한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것이었는데, 알았다고 답하였다.
8일. 대사헌 이기(李墍)ㆍ집의 홍여순ㆍ장령 윤승길(尹承吉)과 이징(李徵)ㆍ지평 이경률(李景慄)과 허감(許鑑)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국시가 정해지지 못하자 공론이 날로 격하여 삼사(三司)가 소장(疏章)을 번갈아 올려 복합(伏閤)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전하께서 머뭇거리고 결정하지 아니하여 참소하고 해치는 말이 날마다 이릅니다. 전하께서는 그 정상을 통촉하지 못하시고 도리어 가상하게 여기고 권장하시니, 이것이 참으로 나라 사람이 함께 근심하고 답답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정원이 지척에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차마 침묵하지 못하고 낱낱이 진달하여 숨김이 없었는데, 전하께서 다만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갑자기 엄한 위엄을 내려 쫓아내셨습니다. 그들이 창황하게 사방으로 나가 민간으로 달아나 숨자, 길 가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고 실색하여 기상이 매우 비참하고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니, 성명(聖明)의 세상에 이런 거조가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국가에서 출납을 오직 성실하게 하는 임무로서 후설(喉舌)의 신하에게 맡겼으니, 진술하여 아뢰고 틀린 말씀은 고쳐서 진달하고 가한 것은 아뢰고 불가한 것은 거부하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이 직책에 있는 자가 어찌 일을 만나도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다만 영화로운 총애를 보전할 생각만 할 뿐이겠습니까? 아니면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여 직분상 마땅히 할 일을 다하여야 하겠습니까?
박근원 등이, 참소하는 말이 번갈아 어지럽히고 선비의 풍습이 무너져가는 것을 보고, 시사를 근심하고 충성을 바쳐 할 말을 다하여 숨기지 않았으니, 구구한 정성이 다만 밝으신 성상께서 위임하고 부탁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고자 한 것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한 번 전하의 비위에 거슬리자 문득 벼락 같은 위엄을 내리시어 몸을 용납할 곳이 없게 하시니, 이것이 어찌 신 등이 평소에 전하께 바라던 것이겠습니까. 아 임금이 간언을 따라주는 도리는 비록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받아들이더라도 오히려 할 말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인데, 하물며 크게 노하여 꾸짖고 무서운 위엄으로 임하시는 데이겠습니까?
근래에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대간(臺諫)ㆍ옥당[帷幄] 관원에 이르기까지 말을 하다가 죄를 얻어서 서로 잇달아 조정을 떠나니, 성덕(聖德)에 누(累)됨이 이미 많은데도, 전하께서 오히려 살펴 깨닫지 못하시고 또 이 거조가 계십니다. 삼가, 사기가 저상하고 언로(言路)가 막혀서 비록 위태하고 망하는 화가 조석에 다가와 있더라도 전하께서 듣지 못하실까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능히 한쪽에 치우치는 사(私)를 버리시고 마음을 비워서 받아들이는 도량을 넓히시어, 뜻에 순종한다고 옳게 여기지 마시고 귀에 거슬린다고 그르게 여기지 마시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공정하게 하신다면 이후 다 말할 수 없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대사간 박승임(朴承任)ㆍ사간 이희득(李希得)ㆍ헌납 권협(權悏)ㆍ정언 심대(沈岱)와 이주(李澍) 등의 차자도 헌부(憲府)의 차자와 같았다.
양사(兩司)에 답하기를,
“옛날 송(宋) 나라 때에, ‘6적(六賊)이 조정을 차지하매 이강(李綱)이 나라를 떠나자, 태학생(太學生) 진동(陳東) 등이 상소하여 극력 논하였으니, 천년 뒤에 그 풍절(風節)을 듣는데도 오히려 나 자신도 모르게 분발하여 흥기하게 된다.
지금 이 관학 유생들이 조정 의론이 사리에 어긋나고 국사가 날로 잘못되는 것을 보고 의리를 주창하여 서로 거느리어 대궐문을 두드리고 소(疏)를 올렸는데, 그 상소를 읽어 보니 그 충간(忠肝)과 의담(義膽)이 늠름(凜凜)하여 범하지 못할 것이 있었다. 참으로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도 꿋꿋이 지조를 지키는 학자라고 하겠다.
대저 태학(太學)은 수선(首善)이 되는 곳이요 공론이 있는 곳이다. 조정의 시비는 혹 한대 어지러울 수도 있지만, 태학의 공론이야 어떻게 폐할 수 있는가? 내가 즉위한 이래 여러 유생이 소를 올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그 사이에 어찌 남의 일을 꼬집어 내어 곧은 체하고 귀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으랴마는, 내가 일찍이 한 번도 좋아하지 않은 안색을 보이지 않고 반드시 온화하고 순한 말로 위로하고 타일러 보낸 것은 참으로 국가의 기운이 여기에 있어, 조정 신하는 죄줄 수 있어도 여러 유생의 기운은 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설사 미친 유생이 혹 과중(過重)한 짓을 하더라도 오히려 좋지 않게 대접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정직한 기운이 푸른 소나무보다 훨씬 절개가 빼어난 자이겠는가? 내가 천승(千乘)의 임금으로도 오히려 몸을 굽혀 대접하는데, 저 조그마한 두어 신하가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으면서 방자하게 편당을 하여 사람들의 말을 막고 나의 총명을 가리어, 감히 여러 유생을 패란(悖亂)하다고 지목하였으니, 이것은 황잠선(黃潜善)이 한 짓을 뒤따르고자 하는 것이니, 참으로 소인으로서 기탄이 없는 자이다. 내가 곧 유방 찬극(流放竄殛)의 법을 행하지 않으면, 장차 도깨비같은 무리로 하여금 어두운 밤에 달리게 하여 심히 형벌을 빠뜨린 것이 되고, 마침내는 박근원과 같이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인데, 양사(兩司)가 도리어 변명하는가? 차사(箚辭)는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9일 성균 생원(成均生員) 이정우(李廷友)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삼가 진사(進士) 유공신(柳拱辰) 등이 성혼ㆍ이이를 위하여 변명한 소를 보니, 그 심적(心迹)의 과격함과 사설(辭說)의 허탄함은 신 등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 심중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우선 공론이 허여하지 않는 실지를 말하면, 무릇 관학에서 소를 올릴 때에 반드시 통문을 내어 고하고 당(堂)에 올라 의론하여 좌우에 널리 의견을 물어서 가부를 자세히 토의하여 의론이 모두 같아서 반대되는 것이 없은 후에 이에 거사(擧事)하여 임금께 진달하는 것이 시비를 공정하게 하고 여러 사람의 뜻을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한 사람이 사의(私意)로 말을 내면 한 사람이 사의로 화답하여 오직 이 한두 사람이 사심으로 사사로이 의논을 주장하여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고, 또 따라서 지극히 공정한 자리임을 핑계하여 지극히 공정한 이름을 구하여 마치 지극히 공정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같이 하여, 방자하게 상소하여 천청(天聽)을 현란시켰습니다. 우리 조종께서 2 백 년 배양하신 나머지에 도리어 이런 거조가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 등은 삼가 생각하건대, 성혼의 사람됨이 몸이 산야(山野)에 있으면서 오래토록 중한 명망을 지고 당대 선비들의 추중(推重)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편벽되어서 발언하기를 너무 심하게 하여 온 조정을 간악한 당을 만들었다하여 말하는 사람에게 죄를 주려고 하였으니, 비록 한 마디 말이 나라를 잃게 한다[一言喪邦]고 말하더라도 가합니다. 이이의 경우는 나라의 정치를 맡아서 시행한 것이 전도되고 어그러진 것은 신 등이 논할 필요도 없이 형적이 드러났고, 이름과 실상이 맞지 않아서 사림(士林)이 실망한 지가 오랩니다. 신 등의 본 바가 이와 같기 때문에, 당초에 유공신 등이 의논을 시작할 때에 조정의 의논이 비록 과한 것은 있으나 두 사람의 잘못이 현저하여 가리기 어렵고, 또 족히 말하는 자의 비방을 초래(招來)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조가(朝家)의 시비로써 생각하여 지레 우리의 자중하는 의리를 잃지 않을 거라고 한 것이 신 등의 뜻이었습니다. 사론(士論)이 통일되지 않아서 그 계교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자, 벗을 부르고 동류를 끌어와서 세력을 합하여 떼지어 일어나서 미친 듯이 달리며 부르짖고 한데 몰려 부산스럽게 하였습니다. 그 의론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이론(異論)으로 지목하여, 추하게 헐뜯기를 갖가지로 하여 구박하고 위협하고 욕하고 혹은 손도(損徒)시키고 혹은 배척하여 물리쳐 버리기를 생각하여 극도로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마침내는 한 좌중으로 하여금 다른 의논이 있지 못하게 만든 후에 드디어 그 계교를 이루었습니다. 소(疏)를 올릴 즈음에 허위로 명록(名錄)을 떠벌리어 대궐문에 뻔뻔스럽게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태학의 공론이 되겠습니까?
이미 태학생의 이름으로 소(疏)를 봉하여 바쳐서 성총(聖聰)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전하께서 보시면 반드시 초야의 공론으로 여기시어 참으로 그 사이에 의심이 없으실 것입니다. 의론을 시작한 무리가 혹은 두 집(이이와 성혼을 가리킴)의 문생(門生)이고, 혹은 친구의 자제여서 이리저리 서로 인하여 편벽된 일을 만들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임을 어찌 알겠습니까.
아! 신 등은 또한 태학의 선비입니다. 제사의 예(禮)를 함께 익히고 청아(菁莪)의 화육(化育)을 입었으니, 어진 이를 좋아하고 착한 것을 좋아하는 뜻이 어찌 피차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다만 사람의 양성(良性)에는 각각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기는 것이 있으니, 뜻을 굽히고 그른 일을 하는 것은 마음에 차마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당(堂) 안에서 이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신 등이 또한 그것이 불행인 것을 알면서도 휩쓸리어 구차히 영합하였으니, 또한 신 등이 깊이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먼저 들어온 말을 받아들이시어 조금이라도 한편에 치우침이 있으시면, 아부하는 비루한 습관이 이로부터 점점 자라서 두흠(杜欽)과 곡영(谷永)의 무리가 후대에 잇대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아! 대신은 임금의 팔다리와 같은 신하인데 이이ㆍ성혼을 편벽되게 비호(庇護)하여 전하의 의심을 일으키고, 선비는 국가의 원기인데 공론을 핑계하여 사욕을 이루어 전하의 의혹을 더하여, 시비가 혼란하고 공론이 울분하니, 일국의 공론을 전하께서는 어디에서 들으시겠습니까?
아! 함께 모여 거처하며 강론(講論)하여 덕업(德業)으로 서로 권면하는 것이 선비의 직분입니다. 조정의 득실과 대부(大夫)의 현사(賢邪)를 어찌 신 등이 변론할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신 등이 깊이 애통해하고 아깝게 여기는 것은, 수선(首善)의 자리를 빙자하고 공공의 의론을 가탁(假托)하여 위로는 전하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사풍(士風)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신 등이 같은 날에 함께 소(疏)를 올리어 곧 간절한 정성을 진달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날짜가 상정(上丁 매월 첫째 정(丁)이 든 날. 2월 첫째 정(丁)의 날에 공자의 제사를 지냈음)에 가까워 석전(釋奠)에 참여하였다가, 이제 비로소 대궐 밑에 엎드려 감히 천위(天威)를 범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맑게 하여 이 소를 살펴보아 주소서. 신 등은 지극히 격절(激切)하고 황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의 상소를 보니, 시비가 모호하고 의논을 주장한 것이 바르지 못하다. 그대들은 사류에게 배척당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변명한데 불과하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뜻이 있으니 상소를 하는 것도 무방하지만, 다만 그대들이 상호간에 다투어 논쟁하며, 늘어서서 헐뜯고 배척하여 많은 말을 늘어놓으니, 덕업에 무슨 도움이 있겠느냐? 다만 원하노니, 그대들은 힘써 배우고 반성하여 양지(良知)를 밝히면 시비의 천리(天理)가 저절로 가슴 가운데에 분명해질 것이다.”
하였다.
11일. 유학(幼學) 신급(申礏)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전 병조 판서 이이는 본래 동서(東西) 분당(分黨) 가운데의 사람이 아닙니다. 바야흐로 심의겸(沈義謙)이 세력을 얻었을 때에 병을 핑계하여 벼슬을 쉬고 물러가 산야(山野)에 있었으니, 그 심적(心跡)을 캐어보면 이것이 어찌 척리(戚里)와 결탁한 자이겠습니까. 동인(東人)이 나라를 독단한 뒤에 서인을 억제하는 것이 너무 심하여, 자기에게 붙는 자는 드러내고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하기 때문에 신진(新進)의 부박(浮薄)하고 조급한 자들이 기로(岐路)에서 관망(觀望)하여 형세의 경중을 살피어 향배(向背)로 삼아서 때를 타서 이익을 취하며 공격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서, 어진 사람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이이와 백인걸(白仁傑)이 동시에 소를 올려 그 폐단을 극력 진달하였으니, 이이의 본심은 모두 공정하게 화합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동인이 한을 품어서 모래를 머금고 그림자를 엿본 지가 오랩니다. 이이가 한 번 병조(兵曹)의 장관(長官)으로 있을 때 마침 변방에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아는 대로는 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규획(規劃)하는 즈음에 비록 한두 가지 엉성하고 실정에 약간 맞지 않는 잘못이 있더라도 이것이 어찌 임금에게 교만하고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하여 나라를 그르치는 죄이겠습니까.
말하는 자가 틈을 기다려 대악(大惡)의 죄명을 씌워서 장차 불측한 죄에 빠뜨리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처사(處士) 성혼(成渾)이 나라를 망치는 징조를 눈으로 보고, 장차 군자(君子)가 물러나고 소인이 진출하는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간절한 정성으로 소를 올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갔습니다. 그의 말은 곧고 의리가 바르고 지극히 공정하여 사(私)가 없습니다. 그런데 말하는 자가 얽어 날조하여 조금도 기탄없이 혹은 귀역(鬼蜮)으로 지목하고, 혹은 음참(陰慘)으로 지척하여 패금(貝錦)을 이루어 죄를 꾸며서 죽을 땅에 몰아넎고자 합니다. 어찌 이 같은 음흉한 사람이 전하의 조정에 끼어 있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아! 이이ㆍ성혼은 사림의 영수(領袖)요 유학의 근본입니다. 우리 도학이 크게 힘입어 떨어지지 않고 배우는 자가 그에 기대어 무거움으로 삼는데, 하루아침에 무함을 당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니,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여러 사람의 분함이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태학의 유생이 분발하여 일어나서 강개(慷慨)하게 소를 진달한 자가 수백여 명이 되었으니, 이것이 실로 한 나라의 공론이요 사기를 크게 떨치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가상하다고 받아들여 매우 칭찬하는 것을 보이시니 전하를 엿보는 간사한 무리가 생각하기를, ‘전하가 깊이 유자(儒者)의 말을 받아들인다.’ 하여 유관(儒冠)을 쓴 저의 자제 친구에게 몰래 부탁하여 소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이에 시속(時俗)을 따르고 세력에 붙는 무리가 어두운 밤에 분주히 다니며 이(利)로 꾀어 그 도당을 많이 모아 따로 대립되는 의논을 세워 일망타진의 계책을 실행하고자 하니, 그 음험하고 간사하고 속이는 정상이 또한 이미 교묘합니다. 만일 그 말이 행해져서 사갈(蛇蝎)이 독을 뿜는다면 형곡(硎谷)의 참혹함과 당고(黨錮)의 화가 진(秦) 나라 한(漢) 나라에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 어진 사람이 나라를 떠나자 나라 일이 이미 잘못되어 북쪽 오랑캐는 침입할 기회를 타고 간신은 사류의 화를 일으키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누가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안에서는 박근원이 승정원에 있으면서 소장(疏章)을 받아들이지 않아 임금의 총명을 가리우고, 밖에서는 김응남(金應南)ㆍ우성전(禹性傳)ㆍ홍혼(洪渾)ㆍ김첨(金瞻)ㆍ김수(金晬)의 무리가 권세를 마음대로 하여 사사로이 당파를 만들어 서로 결탁하기를 뱀과 지렁이가 서로 얽힌 것같이 하고, 지시하여 부리기를 매와 사냥개같이 하는 자가 얼마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군부(君父) 위협하기를, 어린아이같이 하여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 하는 형세가 이미 이루어져서 전하는 위에서 고립되었으니, 오늘날의 국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이 본래 썩은 선비로서 학문에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오직 과거(科擧)를 일삼았는데, 늙도록 성취하지 못하고 게으른 것이 버릇이 되어 한가하고 고요함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권문세가에만 가지 않을 뿐 아니라, 학문을 가지고 서로 논란하는 집에도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이와 성혼의 얼굴을 신이 실상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공심(公心)은 또한 하나의 천리(天理)입니다. 비록 서로 아는 교분이 있지 않더라도 어찌 시비의 분변이 없겠습니까? 이미 그 사람의 충성과 어짊을 알면서 그가 참소에 걸리는 화를 눈으로 보니, 신이 실로 뼈에 사무치도록 애통합니다.
신은 들으니, ‘여우같이 의심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참소하고 해치는 입을 열어주는 것이요, 결단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여러 간사한 사람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전하의 병통을 바로 맞춘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머뭇거리거나 의심하지 마시고 충심(衷心)에서 결단하시어 다른날에 배꼽을 물어뜯는 후회[噬臍之悔]가 되지 말게 하소서. 전하께서 만일 이이와 성혼이 죄가 있고 신의 말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청컨대 신의 머리를 베어 기망한 죄를 처단하소서. 신이 차라리 이이ㆍ성혼과 함께 죄를 받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너의 상소를 보니 참으로 지극히 충성스럽다. 곧도다, 이 사람이여! 지금 사기가 이와 같으니, 실로 조종조께서 배양하신 것이 있구나. 조정과 변방은 근심할 것이 아니다. 네 아우 신입(申砬)은 충성을 다하여 나를 돕고 몸이 변방을 지키니, 오랑캐가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여 예전 훌륭한 장수의 기풍이 있다. 네가 또 분발하여 몸을 돌아보지 않고 소를 올려 간사한 것을 배척하는 이런 기특한 절개가 있구나. 어째서 너의 한 집안에 충의를 아울러 내어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고? 내가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노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근일에 너희 삼사(三司)가 재상을 논핵하는 것이 심의겸(沈義謙)과 결탁한 것으로 주장을 삼으니, 대저 심의겸은 참으로 간사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은 심의겸을 가지고 한 나라에 함정을 삼아서, 무릇 자기와 다른 당시의 명신 현사(名臣賢士)를 반드시 그 가운데에 빠뜨려서 그 당파라고 성토(聲討)하자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대개 그들이 생각하기를, ‘한 번 이 이름을 씌우면 다른 사람들은 감히 구제하지 못하고 임금이 의심하게 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세의 이목(耳目)을 농락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나의 위세(威勢) 아래에 휩쓸리어 굽실대게 할 수 없다. 이렇게 하면 내 세력을 얻을 수 있고 내 뜻을 이룰 수 있다.’ 한 것이다. 그러나, 군자가 보면 그 폐간(肺肝)을 보듯 꿰뚫고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니, 어찌 족히 내 마음을 움직이고 내 뜻을 의혹하게 할 수 있겠는가.
대저 시비라는 것은 양심(良心)의 밝은 데에 근원하여 여러 사람들이 편히 여기는 마음에서 발로된다. 조정이라 하여 중한 것도 아니고 초야(草野)라 하여 경한 것도 아니다. 말이 진실로 그르다면 천만 사람이 말하여도 부족하고, 말이 진실로 옳다면 한 사람이 말하여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대간(臺諫)의 말로 억지로 정할 수도 없고 여러 사람의 세력으로 억지로 부합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편당의 의론을 선동하면 당대에 시비를 어지럽게 할 수 있으나 군자의 식견만은 반드시 백대에 공론을 기다린다.
아! 자고로 대간과 시종이 그 임금에게 진언(進言)할 때에 누가 스스로 공론이라고 생각하여 그 임금을 전환(轉圜)의 아름다움으로 꾀이지 않겠는가?
오직 당시의 임금들이 지혜가 그 간사한 것을 족히 분변하고 밝음이 그 거짓을 통촉하였지만, 그럴듯하게 속이는 방법에 속아 넘어가고 여럿이 떠드는 가운데에 희롱을 당하였다. 뒤집힌 수레 자국이 서로 이어지듯 계속 모두가 그러하다. 밝은 임금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용렬하고 어둡기가 나와 같은 자이겠느냐? 그러나 영대(靈臺)가 멸하지 않고 방촌(方寸)이 오히려 밝다. 다만 영상(領相)의 사람됨을 보건대, 송죽(松竹) 같은 절조요 수월(水月) 같은 정신이다. 충성하고 용감한 기개는 온아(溫雅)함을 겹쳐서 성품을 이루었고 맑고 삼가는 덕은 백옥보다도 더 광채를 떨친다. 비록 그러나 만일 그를 경륜(經綸)의 재주가 있고 간괴(奸魁) 심의겸 보기를 장차 자기의 몸을 더럽힐 것같이 한다고 말한다면 나도 또한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하겠다.
지금 너희들 삼사가 전부터 분하고 미워하는 뜻을 품어서 터무니없는 말을 날조하여 헐뜯고 모함하는 것을 방자히 하여 못하는 짓이 없으니, 천하 후세에 너희 무리를 어떠한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비록 10년을 논계하더라도 어찌 따를 리가 있겠느냐? 속히 정계(停啓)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경기전 참봉(慶基殿叅奉) 변사정(邊士貞)이 상소하기를,
“신이 남주(南州)에 있으면서 이이가 당시 사람들의 의론에 중하게 걸렸음을 듣고,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놀란 지가 여러 날이었습니다. 성혼이 또 이이를 옹호한 것 때문에 망극한 참소를 만나 발을 싸매고 산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연이어 듣고, 신이 믿기도 하고 의심하기도 하여 침식(寢食)을 모두 폐하였습니다. 사사로이 혼자 말하기를, ‘지금 태양이 바야흐로 중천에 떠 있어 도깨비가 도망하여 숨었는데, 어떤 소인이 충량(忠良)한 사람을 해쳐서 성상(聖上)의 현인 구하기를 목마른 것같이 하는 정성으로 하여금 빈 땅에 떨어지게 하는가?’ 하여, 근심하는 마음 지극하여 술취한 듯 혼매한 지경이 되어 하루저녁에 아홉 번 자리를 옮겼습니다. 행장을 싸가지고 북쪽으로 오면서 도로에서 들으니, 길가는 나그네ㆍ품팔이ㆍ걸인(乞人)ㆍ지극히 어리석고 지극히 천한 무리들이 서로 더불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모두 이 일 때문이었습니다.
한 번 국문(國門)에 들어서자, 삼사(三司)가 두 사람을 심히 위급하게 공격하는 것을 보았는데, 형편없는 소인이라 지목하고 스스로는 일국의 공론으로 생각하니 의당 그 사이에 이론이 없을 듯한데,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이 있는 자라면 팔뚝을 걷어붙이며 분격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아! 이이와 성혼이 참으로 이른바 소인이라면 어떻게 이 소리를 양(梁) 나라 초(楚) 나라 사이에서 듣겠습니까. 두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은 것과 무함을 당한 허실(虛實)은 하늘의 굽어보심이 매우 밝으니 많이 분변할 것이 없고, 삼가 밝으신 성상께서 다 통촉하시지 못한 소인의 정상을 가지고 전하를 위하여 폭로하겠습니다.
대저 삼사와 정원(政院)은 전하가 의지하여 중하게 여기는 바인데, 지금 간사한 자들의 소굴이 되어 당파를 맺어 숫놈이 부르고 암놈이 화답하여 많은 사람의 힘으로 군부(君父)를 위협하려 하고, 피투성이 싸움으로 반드시 이겨서 사분(私憤)을 통쾌하게 할 줄만 알고, 종사(宗社)의 안위(安危)는 다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엄한 법문(法文)으로 죄를 얽어서 간교한 것이 수만 가지나 되고, 흉한 혓바닥을 놀려서 기망하기를 방자히 합니다.
한두 가지 현저한 것으로 말하겠습니다. 공론이 혹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막아 끊으려 할 적에는, 대간이 비밀히 자질(子侄)과 친구를 보내어 선비들을 위협하여 상소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는 두세 서리(書吏)를 시켜 명륜당(明倫堂)에 가서 주론(主論)하는 유생을 살피어 성명을 적어 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도 여러 입을 막지 못하자, 혹은 승지를 사주하여 들어온 소를 숨겨서 아뢰지 않고, 혹은 병조를 통하여 장차 소를 드리려는 금위(禁衛)의 군사를 위협 공갈하였고, 소장(疏章)이 다투어 올라와서 곧은 말이 조정에 가득하자, 기술이 궁하고 힘이 다하여 말하려 해도 할 말이 없으므로 매양 말하기를, ‘상소하는 자들이 이이ㆍ성혼의 문생과 친구이고 공론이 아니라.’ 하여 성총(聖聰)을 현혹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공론이 날로 격렬하여 소문이 자자하게 되어서는 계교를 베풀 데가 없고 분을 풀 데가 없어서 작은 허물로 핑계잡아 주론한 유생 수십 명을 정거(停擧)시켰으니, 이것은 실로 을사 간흉(乙巳奸凶 대윤(大尹)이 소윤(小尹)에게 화를 당한 을사사화를 가리킴)들에게도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아! 가령 한 나라의 서생(書生)이 모두 일어나 소를 올린다면, 모두 이이ㆍ성혼의 문생이라 하여 공론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떻게 일일이 정거시켜 언로(言路)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마음을 미루어 본다면 갱유(坑儒)의 거조를 이 무리들도 차마 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으로 말한다면 이이와 성혼을 내쫓은 것은 그 죄악이 작은 것이요, 전하의 총명을 막아 가린 것은 그 죄가 큰 것입니다. 만일 그 대죄를 죄주지 않으면 임금을 속이는 무리가 연달아 일어나서 언제 국가가 망할지 모를 일입니다. 천하의 시비는 본래 양쪽이 다 옳은 이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만일 이이와 성혼이 군자이고 이 무리가 소인인 것을 아신다면 무슨 까닭으로 쾌하게 결단하여 밝게 법을 시행하지 않고, 흉한 무리가 날로 치성(熾盛)하고 간사한 의논이 날로 방자하며 국사가 날로 잘못되게 하십니까? 예로부터 인군이 반드시 인(仁)ㆍ명(明)ㆍ무(武)의 덕이 있은 후에야 어진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사람을 물리쳐 다스림을 이루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인(仁)과 명(明)은 충분하지만 무(武)가 부족하시어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나 쓰지 못하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기나 버리지 못하시니, 이것은 곽공(郭公)이 마침내 멸망에 이른 까닭입니다. 선유(先儒) 중에 이것을 논한 자가 말하기를, ‘악한 것을 악하다 하면서 버리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것만도 못하다.’ 하였습니다. 이는 소인의 간사한 정상이 이미 드러나면 임금에게 원망을 쌓고 사림(士林)에다 독을 품어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망극한 화가 어두운 가운데에 잠복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아! 허무한 말을 교묘하게 날조하여 어진 사람을 일망타진하고 언로(言路)를 협박 견제하고 막아서 임금을 마음대로 속이니, 이런 간흉으로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답답하고 울음이 나와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에 뒤집어진 앞 수레의 자국을 깊이 경계하시고 발끈 한 번 노하시며 마음에 결단하시어, 삼사의 장관을 친히 가려 뽑으시고, 또 공평 정직하여 시의(時議)에 붙지 않는 자를 사이사이 중한 자리에 임용하고, 간당(奸黨) 가운데에 방자하게 속여서 그 죄가 매우 드러난 자는 경중을 나누어 죄주고, 또 이이ㆍ성혼을 급히 불러 그 벼슬을 회복하게 하면 거의 망하게 된 형세가 변하여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버티고 있으면서 시일을 끌고 머뭇거려 결단하지 못하면 사당(邪黨)의 결탁이 더욱 깊어지고 사론(邪論)이 사면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때에 가서 비록 계획을 고쳐서 크게 용단을 내리고자 하여도 시비가 현란하여 화가 이미 하늘에 닿았을 것이니,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어도 전하를 위하여 계획을 낼 바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이이와 성혼을 소환하지 못하고, 지금 이른바 삼사의 간당(奸黨)된 자를 임용하여 한두 해 만에 조정이 크게 다스려지고 오랑캐가 멀리 도망하고 국가가 편안하고 조용하여진다면, 신이 청컨대, 죽음으로 기망(欺罔)한 죄를 사례하겠으니, 전하께서 비록 신을 용서하고자 하나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먼 지방의 한미한 선비로써 이이와 성혼의 면목을 알지 못하니, 비록 간당들의 교묘한 말과 참소하는 말로도 감히 신을 이이와 성혼의 친구라 하여 당파로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신이 말을 내면 화가 미치고 계책을 행하면 몸이 죽을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구구한 충분(忠憤)을 끝내 스스로 억제할 수가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유의하여 채납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 상소의 내용을 보니, 예전의 곧은 선비라도 더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내 모르겠지만 그대는 어떻게 생겼기에 능히 이러한가? 나의 허물을 지척하여 말한 데에 이르러서는 그 말이 더욱 절실하여, 내 병통을 바로 맞추었다. 나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으니, 깊이 가상하게 여기노라.”
하였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 등이 삼가 비답을 보니, 신 등을 ‘전부터 분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품어 터무니없는 것을 무함하고 날조하여, 헐뜯고 속이는 것을 방자히 하여 못하는 짓이 없다. 천하 후세 사람들이 너희들을 어떠한 사람이라 하겠느냐?’ 하였습니다.
대저 분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품고 터무니없는 것을 날조하는 것은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는 일 가운데 심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이것으로 신 등을 판단하시었다면 어찌하여 형벌을 내려서 후세를 경계하지 않으십니까? 대저 조정 사대부가 어찌 모두 박순(朴淳)에게 개인적인 유감 있는 자여서 분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품겠습니까. 또 ‘시비는 양심(良心)의 밝은 것에 근원하고 여러 사람들이 편히 여기는 마음에서 발로 된다.’ 하셨는데, 과연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전하께서는 일찍이 신 등이 얽어 날조한 것이 무슨 일인지 보셨습니까? 병관(兵官)이 일을 그르치자 말감(末減)하여 죄주기를 청하고, 대신이 모함하자 몸을 잊고 항쟁하여 논한 것은 부득이해서 입니다. 전하가 분하고 질투한다는 말로 지목하시니, 아! 시비의 천성이 없어지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은 후에야 분하고 질투한다는 이름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교(聖敎)에 이르시기를, ‘심의겸을 가지고 한 나라에 함정을 만들어서 명유(名儒)와 현사(賢士)를 그 가운데에 밀어 빠뜨린다.’ 하셨는데, 신 등이 밀치어 빠뜨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박순이 탄핵을 당한 것은 실로 그가 자초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성교(聖敎)에 또 말씀하기를, ‘간괴(奸魁) 심의겸 보기를 장차 자기의 몸이 더럽혀질 듯이 하였다 …… 한다면 나도 또한 감히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척리(戚里)와 결탁한 정상을 밝으신 성상께서도 이미 다 여지없이 통촉하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신등이 함정을 만들어 빠뜨리는 일입니까?
또 성교(聖敎)에, ‘조정이라고 하여 중한 것이 아니고 초야라 하여 경한 것이 아니다. 말이 진실로 잘못되면 천만 사람이라도 믿게 할 수가 없고, 말이 진실로 옳으면 한 사람이라도 충분하다.’ 하셨으니, 훌륭한 말씀입니다. 대저 말의 시비는 조정이나 초야의 구별에 있지 않고 요컨대 임금이 잘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조정 의론이 공공한 데서 나오고 초야의 의론이 실로 모두 억지로 끌어댄 것이라면, 천하 후세의 시비를 책함이 스스로 정한 의론이 있을 것입니다. 전하의 마음이 한 번만 한쪽에 치우친 것이 있으면, 먼저 들어온 말이 주장이 되어서 그 뜻이 먼저 동하고 먼저 의혹하지 않을 수 없는데, 동하지 아니해야 할 데에 동하고 동해야 할 데에 동하지 않는 것은 다만 사의(私意)가 가리고 막힌 것입니다. 어찌 성왕(聖王)의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밝은 견해이겠습니다.
지금 필부(匹夫)로서 이이ㆍ박순에게 사정(私情)이 있는 자가, 혹은 태학생을 의탁하고 혹은 초야를 의탁하여 조신(朝臣)을 논척(論斥)하여 극력 헐뜯고 욕하는데, 전하께서 받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또 따라서 가상히 여기고 장려하시니, 이에 전하의 뜻을 엿보고 시세에 붙는 자가 후일을 위할 것을 도모하여 앞을 다투어 서로 본받아서, 이름을 들어 지목하여 거리낌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예전 사기를 훑어보시건대, 또한 오늘과 같은 경우가 있었습니까? 또 송죽[松筠]ㆍ수월(水月)ㆍ충용(忠勇)ㆍ청신(淸愼) 등의 말씀으로 박순을 칭찬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듣기에도 이상합니다. 예로부터 소인치고 재주 없는 자가 있지 않습니다. 박순은 말을 잘 꾸미고 안색을 좋게 해서 보기에는 온화하고 아담한 것 같으나, 당파를 맺어 모함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귀역(鬼蜮)이 모래를 머금고 사람의 그림자를 엿보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함과 같으니, 이것은 진실로 소인의 태도가 그런 것입니다.
또 속히 논계를 정지하고 화평에 협력할 것을 말씀하셨는데, 아! 화평은 진실로 신 등이 원하는 바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동ㆍ서(東西) 두 글자가 있은 이래로 이 무리가 밖으로는 조정하는 의론을 주장하나 마음은 실로 초와 월의 관계와 다름없습니다. 예로부터 조정이 어찌 사람마다 각자 다른 마음을 가지고서 끝내 화평을 보전한 일이 있었습니까? 오늘날의 사세가 마치 훈(薰)과 유(蕕)ㆍ얼음과 숯이 결코 한 그릇에 담길 수 없는 것과 같은데, 전하께서 오히려 화평을 시키려 하니,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천하의 일이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이치가 없으니, 같이 서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박순을 현(賢)이라 하고 삼사(三司)를 사(邪)라 하시면서 또 함께 공경하고 협력하여 왕실에 힘을 다하게 하려 하시니, 이것은 현과 사를 아울러 쓰고자 하는 뜻입니다. 전하께서 어찌 음양(陰陽)이 소장(消長)하는 기틀을 살피지 못하십니까.
신등이 항쟁하여 논한 지가 한달이 넘었으나 임금께서 무시하여 말하여도 소용이 없으니, 진실로 이미 그쳐야 할 것을 알지만, 그래도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으니, 진실로 천하 후세가 오늘을 어떤 시대라고 하겠습니까? 구구한 저의 정성이, 차마 우리 임금은 불가능하다 하여 저버리고 물러갈 수는 없으니, 신 등의 정상이 또한 슬픕니다. 아! 혹은 하늘이 빼앗아가고 혹은 임금께서 배척하고 혹은 시대가 버려서 전하의 묘당(廟堂)이 비었고, 혹은 미움을 받아서 멀리 추방되고 혹은 지목을 받아서 자퇴하여 전하의 조정이 이미 거의 비었습니다. 전하께서 당대의 인재를 손가락을 꼽아보건대, 더불어 함께 국사를 다스릴 만한 자가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말이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되니, 저 자신도 모르게 목이 메입니다. 신 등이 모두 형편없는 사람인지라 직책이 유악(帷幄)에 있으면서도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하여 전하의 뜻에 거슬려서 스스로 엄한 견책을 초래하였으니, 신 등의 죄가 이에 이르러 크다 하겠습니다. 청컨대, 명하여 신 등의 직책을 파멸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 국가가 어렵고 근심스러워, 밖으로는 북쪽 오랑캐가 침략하고 안으로는 민생이 도탄에 빠졌으니, 이것이 어떤 때이겠는가? 국사에 힘을 다 할 것을 생각지 않고 오직 붕당을 만들어 다른 당을 공격하는 것만 알고 있으니, 참으로 염파(廉頗)ㆍ인상여(藺相如)의 부끄러워하던 바이다. 사직하지 말라. 비록 날마다 세 번 논계하더라도 소용이 없으니, 속히 논계를 정지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20일. 전라도 생원 서태수(徐台壽) 등 52인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삼가 보건대, 근일에 여러 간인(奸人)이 결탁하여 전하를 기망하고 충현(忠賢)을 모함하여 장차 화가 헤아릴 수가 없는데, 전하께서 진실로 이미 그 정상을 통촉하고도 오히려 크게 용단을 쾌히 내리지 못하시어 간사한 소인의 무리로 하여금 요직을 차지하게 하고 있으면서 날마다 흉한 꾀를 방자히 하여 뭇사람의 마음이 근심하고 답답하며 국세가 위태하고 급박하니, 신 등은 실로 성심(聖心)의 소재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가 착한 것을 의당 좋아하고 악한 것을 의당 미워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렇다고 한다면 전하께서 이미 누구는 어질고 누구는 간사하다는 것을 아시었고, 전하께서 실지로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할 줄을 알면서 그렇다고 한다면 어진 자를 멀리해서는 안 되는데도 멀리한 것이고 간사한 자는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데도 가까이 하신 것이니, 전하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전하께서 깊이 구중궁궐(九重宮闕)에 계시면서 위에서 고립되어 혹 간사한 정상이 밝게 나타남이 이 지경에 이른 줄을 알지 못하시어 그런 듯합니다. 신 등이 그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서 할 말을 다하겠습니다.
아! 동ㆍ서(東西)의 설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고, 그 시초는 원인이 있습니다. 당초에 김효원(金孝元)이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으로서 심의겸이 자기를 배척한 것에 원한을 품고 조정이 안정되지 못할 발단을 만든 것입니다. 대개 심의겸은 한 외척의 무식한 자에 불과한데, 스스로 사류에 붙어 권간(權奸 이양(李樑)을 가리킴)을 제거하고 이것으로 인하여 갑자기 승진하여 마침내 국론(國論)을 잡았으니, 이것은 진실로 국가의 수치요 사람의 불행입니다. 이에 신진(新進)의 선비가 다만 외척이 미운 것만 알고 김효원의 다투는 것이 사감인 것을 돌아보지 않고 드디어 동인이 바르고 서인은 부정하다는 것으로 시비를 정하여, 인물이 어떤지는 따지지 않고 다만 의론의 같고 다른 것으로써 취하고 버리는 표준을 삼아서 점점 아부하는 무리를 모아 오늘의 변을 점차 이루게 한 것입니다.
아! 예로부터 조관(朝官)으로 명사(名士)가 된 자는, 혹은 덕행(德行)으로 혹은 학식으로 혹은 재화(才華)로 되었고, 그 실상이 없이 그 이름을 얻은 자는 적습니다. 지금 이른바 명 나라는 것은 그 재주도 따져보지 않고 그 덕행도 캐어보지 않으며 그 학식도 묻지 않고, 다만 입으로 ‘동정서사’(東正西邪)라는 네 글자만 얘기하면 곧 명사가 됩니다. 이에 당대의 선비들이 글도 읽지 않고 행실도 닦지 않으면서 다만 시론(時論)을 견강부회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니, 선비의 풍습은 날로 무너지고 조정은 날로 탁란해졌습니다. 이이가 이것을 조심하여 조정(調停)하는 의논을 힘써 주장하여 여러 번 전하께 진달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여 항상 공격하여 제거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탈 만한 틈을 얻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한 가지 작은 과실로 인하여 이리저리 얽어 짜서, 나라를 그르치고 임금을 무시하였다고 지목하여 용납되지 못하고 떠나가게 하였으니, 그 마음이 간사하고 그 계교가 교묘합니다.
급기야 성혼이 충분(忠憤)에 격동되어 혈성(血誠)으로 전하께 호소하였는데, 그때 대신이 바른 것에 의거하고 의리에 따라서 크게 시비를 밝히지 못하여, 주상으로 하여금 고립되어 능히 홀로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러 간인들이 사론(邪論)을 방자히 하여 거리끼는 것이 없어, 이이 등을 심의겸의 당이라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아! 이이의 사람됨은 학문은 성현이 되기를 바라고 마음은 경륜(經綸)을 지내고 있으며, 몸으로는 세도(世道)의 책임을 맡고 시속에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성혼의 사람됨은 산림에 은둔하고 실천이 매우 독실하여 탁월하게 의리의 심오한 것을 알았고, 거취의 올바름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당대의 유종(儒宗)이요 한 나라의 중한 명망을 지고 있어, 사림이 높이고 우러러 보기를 태산(太山)과 북두(北斗)와 같이 할 뿐만 아닌데, 일찍이 두 사람의 어짊으로써 외척에게 의지하고 빌붙어서 벼슬을 매개(媒介)로 삼는 일을 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삼척동자라도 이런 터무니없는 말로 속일 수는 없는데, 이것으로 군부를 속이고자 하니 전하를 가볍게 여기고 무시한 것이 심하다 하겠습니다.
대저 임금의 덕이 세 가지가 있으니, 인(仁)ㆍ명(明)ㆍ무(武)뿐입니다. 전하께서 간사한 정상을 대체로 이미 통촉하시고도 위엄을 베풀지 아니하시는 것은 인(仁)과 명(明)에는 넉넉하지만, 무(武)에는 부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시 전하께서 위엄을 베풀고자 하나 어떤 사람이 간당의 괴수인 것을 똑바로 알지 못하시어 이럭저럭 지금에 이르신 것입니까?
아! 대신은 자리만 채우고 있고 정사는 낭료(郞僚)에게 있은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한 번 간인(奸人)이 전랑(銓郞)이 되자 널리 그 당을 심어서 모함하는 것이 풍습이 되었으니, 화가 참혹합니다. 대저 권간(權奸)은 작위의 높고 낮음에 달려 있지 않으며 시론(時論)을 주장하여 인물을 진퇴시키는 것이 공의를 따르지 않고 제 마음대로 방자히 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지금 현명한 관리의 벼슬을 올려주고 어리석은 자의 관직을 내치는 형벌과 정사가 군부에게 있지 않고, 또한 대신에게도 있지 않고 낭료에게 달려 있으니, 비록 오늘의 낭료를 권간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그 권간이 되는 정상을 숨기겠습니까?
당당한 성조(盛朝)에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 계신데, 나라의 권력을 나이 젊은 경박한 자의 손에 위임하여 온 조정이 그의 비위를 받들어 맞추어 혹시 미치지 못할까 두려우니, 이것은 천하 후세에 알려져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지금의 사당(邪黨)은 그 무리들이 번성하여져서 삼사(三司)와 후설(喉舌)의 신하가 뭉쳐 한 당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따르며, 견고하여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그 중에 주론하는 자는 성부(城府)가 매우 심밀하여 은미한 것을 보기가 어려운데, 악한 짓을 한 지가 이미 오래되자 수족이 이미 드러나서 여항(閭巷) 사람들까지도 분연히 욕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혹은 6간(奸)이라 하고 혹은 10간(奸)이라 합니다. 성상의 영명(英明)하심으로써 어찌 통촉하여 깊이 살피지 못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 매양 빈 말씀만 내리고 실지 위엄을 베풀지 않고 다만 외임으로 주현(州縣)에 전보(轉補)하는 것으로 엄한 견책을 삼으시니, 과연 이것으로 조정을 탁란시키고 어진 사람을 해치고 나라를 병들게 한 죄를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간사한 무리가 전하의 뜻을 추측하고 탐지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빌붙는 자가 더욱 많아서 장차는 온 조정이 모두 간당(奸黨)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전하는 족히 두려울 것이 없고 간당이 두렵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만일 마침내 온 조정이 모두 사당(邪黨)에 들게 되어 남는 이가 없다면 전하께서 비록 삼사(三司)를 숙청(肅淸)하고자 하나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옛말에, ‘결단해야 될 때에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그 난(亂)을 받는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삼사(三司)를 일시에 체임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저 삼사는 빈 자리입니다. 바른 사람이 삼사에 있으면 말하는 것이 바른 의론이 되고, 간사한 사람이 삼사에 있으면 말하는 것이 간사한 의론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삼사의 말이 간사함을 전하께서 이미 아셨습니다. 간사한 의론은 하루도 조정에 행해져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여러 달이겠습니까.
착한 것을 알고도 쓰지 못하고 악한 것을 알고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곽공(郭公)이 망한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이것을 전감(前鑑)으로 삼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위엄은 펴서는 안 될 것이 있고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곧은 말로 임금의 위엄에 항쟁한다면, 비록 갈관박(褐寬博)이라도 두려울 것이니, 이것은 위엄을 펴서는 안 될 것이오. 어떤 사람이 세력을 써서 임금을 위협한다면 비록 대신ㆍ대각ㆍ시종의 신하에게라도 급히 위엄을 베풀어 뒷사람을 징계하여야 하니, 이것은 위엄을 펴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삼사와 후설의 신하가 도당이 많은 세력을 믿고 군부를 우롱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전하께서 그 간사한 것을 환히 보시고도 머뭇거리고 참아서 날로 협박을 당하시니, 전하의 뜻이 계신 곳을 헤아릴 수 없고, 아랫사람들은 모두 여러 간인의 힘이 군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권력 있는 이를 추종하여 따르는 자가 날로 많아지고 정도를 지키는 자는 날로 적어지며 전하의 고립되고 위태로움은 날로 심하니, 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통곡하고 통곡합니다.
지금 조정의 혼란이 전장(戰場)보다 심하여 바깥 도적이 크게 성하고 안 도적이 점점 붙어나니,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사태가 곧 닥칠 것입니다. 이이와 성혼이 이미 나라를 떠났고, 충성 청렴하고 공평 정직한 박순까지도 두 어진 이를 옹호한 까닭으로 무함을 당하여 물러갔으니, 전하께서 의지하고 믿을 자가 한 사람도 조정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찌 욕을 참고 더러운 것을 용납하여 위태하고 망하는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할 때입니까. 아! 군자는 나오기는 어려우나 물러가기는 쉽고, 소인은 나오기는 쉽고 물러가기는 어려우니, 이것으로도 그 사정(邪正)을 알 수 있습니다.
근자에 삼사의 신하가, 위로는 도깨비라 하신 말씀을 들었고, 아래로는 사당(邪黨)이라는 지목을 받아서 비록 소치는 아이나 말 모는 군졸이라도 손가락질하고 침뱉아 더럽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태연히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날로 간사한 꾀를 부려 오직 반드시 이기기를 힘쓰고 수오(羞惡)와 염치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합니다. 이들은 어떤 인물입니까? 신 등의 생각으로는, 만일 이때에 우심한 간괴(奸魁) 약간 명을 추려내어 임금을 속이고 어진 사람을 해친 죄를 밝게 처단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이 무리들이 매양 나라가 텅비게 될 것이라는 말로 천청(天聽)을 두렵게 하였는데,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어진 사람을 믿지 않으면 나라가 공허하여진다.’ 하였습니다. 가령 물리친 자가 실지로 군자라면 비록 한두 사람이 떠나가더라도 나라가 텅비게 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고, 가령 물리친 자가 실지로 소인이라면 비록 천만 사람이 떠나가더라도 나라를 텅비게 하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소인을 이미 물려쳐서 군자가 한꺼번에 무리로 나오는 좋은 일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대저 삼사와 정원(政院)은 지금 간인의 소굴이 되었으며, 삼사와 정원의 근본은 또 이조에 달려 있는데, 전하께서 이조의 관원을 선택하지 않고 조정의 청명(淸明)함을 이루고자 한다면, 비록 삼사와 정원의 관원을 백 번 바꾸더라도 잇는 자가 모두 간당일 것입니다. 오늘 간신을 내치고 다음날 간신을 등용하면 사론(邪論)이 일어나게 됨은 물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아서, 끝내 종식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조를 먼저 선택하고 다음에 삼사를 선택하여, 사론(邪論)이 저절로 사라지고 조정이 저절로 청명해지게 하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 매양 화평함으로 처리하려 하시어 다만 북쪽 오랑캐만을 근심하십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계손씨(季孫氏)의 걱정은 전유(顓臾)에 있지 않고 소장(蕭墻) 안에 있다.’ 하였습니다. 신 등은 저하의 걱정이 북쪽 오랑캐에 있지 않고 조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급히 이이ㆍ성혼ㆍ박순의 무리를 부르시어 그 지위를 돌려주시어 자신들의 직책을 수행하게 하고, 간사하고 날조하는 무리로 하여금 끝내 조정에 자취를 붙이지 못하게 하신다면, 종사(宗社)가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지난번에 태학생이 소를 올리고자 할 때에 정언(正言) 이주(李澍)가 그 아들 광정(光庭)으로 하여금 태학관에서 소리쳐 말하게 하기를, ‘오늘 유생 중에 이 의론을 주장하는 자가 있으면 마침내는 멸족의 화를 당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사림(士林)을 제재하고자 도모하여 거리끼는 바가 없음이 또한 심하지 않습니까. 공론이 격발(激發)하게 되어서는 끝내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생원 유공신 등이 소를 올려 진달하자 간신 송응개의 생질 박사(博士) 한인(韓戭)이 다른 일로 청탁하여 동렬(同列)에게 의론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정거(停擧)시킨 것이 많게는 백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상소했다는 이유로 임의로 정거시키어 개인적인 분함을 풀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죄주지 않는다면 신 등은 동한(東漢)의 당고(黨錮)의 화가 정차 오늘날에 다시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이것 뿐만 아니라, 저 사론(邪論)을 주장하는 무리가 공론이 이미 격발(激發)하여 정상이 드러나면, 전하께서 환히 아시고 견책이 이를 것을 깊이 생각하고는, 밤낮으로 분주하여 몰래 친구에게 부탁하고 또 자제를 보내어 간사하고 망령된 무뢰한(無賴漢)의 무리를 꾀어내고 위협하여 말을 꾸며서 상소를 올려 천청(天聽)을 현혹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들이 상소를 가지고 대궐에 나아가는 때를 당해서는, 비록 시정(市井) 사람이라도 해괴하게 여기어 웃으며 삼사 자제의 상소라고 지목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인심을 속일 수 없는 것이 과연 이와 같습니다.
아! 조정 의사가 서로 반목함이 있음은 예전에도 혹 그러한 일이 있었지만, 선비의 의론이 각각 대립되는 것은 지금에 비로소 봅니다. 곧은 상소가 올라오자마자 간사한 말이 잇달아 들어오니, 이것은 참으로 종사(宗社)의 망조(亡兆)이고 사림의 화태(禍胎)입니다. 신은 실로 애통하고 민망히 여깁니다. 아! 근래에 간신이 나라를 그르친 것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을사사화가 심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을사사화 때에는 명종(明宗)께서 어려서 외척이 권세를 마음대로 농락하였으니, 간신이 세력을 얻는 것도 혹 그럴듯한 일이지만, 지금은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 계시어 해가 중천에 있는 것과 같은데도, 간당이 사특한 짓을 하는 것이 을사사화 때와 같습니다. 전하께서 이러한 때에 만일 일찍 계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사(邪)와 정(正)을 분별할 수 없고, 떠밀고 배척하는 것이 날로 심하여 화(禍)를 빚게 되어, 오랠수록 더욱더 화가 깊어져서 참혹한 변이 비록 성조(盛朝)에서는 일어나지 않더라도 자손에게 근심을 끼치게 됨을 면치 못할까 염려됩니다.
옛날 송이종(宋理宗)이 금(金) 나라의 침입을 당한 뒤에 쇠한 것을 진흥시키기에 뜻을 집중하여 주자(朱子)와 시대를 같이하지 못할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그러나 진덕수(眞德秀)ㆍ위요옹(魏了翁) 같은 어진 이를 하루도 조정 위에 편안하게 있도록 하지 못하였으니, 지금까지 식자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도 일찍이 조정에 인재가 없는 것을 한하셨는데, 도리어 이 두어 어진 이에게는 간사한 의론에 핍박되어 전야(田野)로 돌아가는 것을 그대로 들어주니, 전하께서 하시는 일이 거의 이종(理宗)과 같은 결과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신 등이 초야에 머물러 있으면서 일찍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서울에 오니 충분(忠憤)이 저절로 격동되어 마음을 열어 혈성(血誠)으로 말을 다하여 거리끼거나 숨기는 것을 피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말을 입에 내면 화가 닥칠 것을 아나, 신 등의 뜻은 차라리 곧은 말을 하다가 죽고자 하는 것이지 침묵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상소를 보건대, 너희들 유생의 말이 나올수록 더욱 기특하니, 깊이 가상히 여기고 감탄한다. 내가 비록 어둡고 나약하나 어찌 간사한 신하 두어 무리를 두려워하여 죄를 주지 않겠느냐? 다만 임금이 백성들을 거느리는 도량은 자연 필부(匹夫)가 발끈발끈 성내는 것과는 같지 않다. 만일 일시적인 데서 쾌함을 취하면 끝내는 후일에 화를 끼치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조용히 동요하지 않게 처리하는 데에 달려 있다. 하물며 지혜 있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면 어리석은 자가 본받고, 어진 자가 법을 세우면 불초한 자가 본받는 것이니, 내가 염려스러운 것이 많다.
너희들이 의기(義氣)가 분발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할 말을 다하여, 무(武)가 부족하다고 지척하고, 심지어 곽공(郭公)과 송이종(宋理宗)에게 비하기까지 하였으니, 내가 참으로 받아들이기를 사양하지 않겠다. 내 몸도 오히려 지척하고 기롱하는데, 하물며 신료(臣僚)이겠느냐. 지금 학자들의 풍절(風節)이 한(漢) 나라 송(宋) 나라보다도 월등하구나.”
하였다.
비망기에 이르기를,
“박사(博士) 한인이 관학 유생이 상소한 것을 분하게 여겨 진사(進士) 유공신 등 다수를 정거(停擧)시켰으니, 이것은 전에 없던 변고이다. 간사함을 품고 사의(私意)를 부려서 임금을 무시하고 무도한 죄상이 극히 해괴하고 놀랍다. 금부(禁府)에 회부하여 국문하라. 대사헌 이기(李墍)ㆍ대사간 박승임(朴承任)ㆍ집의 김관(金瓘)ㆍ사간 이희득(李希得)ㆍ장령 윤승길(尹承吉)ㆍ지평 허감(許鑑)ㆍ헌납 권협(權挾)ㆍ정언 이주(李澍)와 심대(沈岱)는 본직을 체차하라.”
하였다.
유학(幼學) 하항(河沆)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정치하는 방법은 오직 명(明)과 성(誠)에 달려 있으니, 대개 명(明)하지 않으면 시비를 분변할 수 없고 성(誠)하지 않으면 사무를 총괄할 수 없으니,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두 글자면 충분합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도 한 사람도 대궐에 엎드려 진변(陳辯)하는 자가 없으므로, 신이 차마 그대로 보지 못하고 분수를 넘게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는 노여움을 거두시고 마음을 비게 하여 깊이 충곡(衷曲)을 살피소서.
신이 궁벽하게 남쪽 변두리에 있으면서 동ㆍ서(東西)가 있음을 듣고 항상 말하기를, ‘좋은 소식이 아니다.’ 하였는데, 지금 과연 폭발하여 마침내 한 번 잠복한 것이 크게 진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하의 인애(仁愛)로 진정시킴에 힘입어서 만 번 죽을 것을 면하였으니, 비록 초야의 백성도 감읍(感泣)할 만합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권덕여(權德與)ㆍ홍진(洪進) 등이 변방의 소란으로 인하여 전하께서 정사에 부지런히 애쓰는 때를 당하여 갑자기 의지하고 신임하는 대신을 논핵하였으니, 전하의 노여움이 진동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 마음은 사분(私憤)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조금 과격한 말을 한 것뿐입니다. 하물며 가의(賈誼)가 문제(文帝) 때에 통곡하였고, 주운(朱雲)이 성제(成帝) 때에 난간을 꺾었고, 진(秦) 나라 때에도 곧은 말로 과감하게 간하는 자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삼가 보건대, 이이가 박문강기(博聞强記)하기는 하나 실지로 존심양성(存心養性)의 공부는 없으니, 이것은 소견이 시무(時務)로 잘못 들어간 것입니다. 신이 그 까닭을 말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이제신(李濟臣)을 옹호한 것이요, 둘째는 조세(租稅)를 더하고자 한 것이요, 셋째는 전적(田籍)을 측량하고자 한 것이요, 넷째는 송한필(宋翰弼)의 신주(神主)를 쓴 것이요, 다섯째는 그 과실을 드러내 밝힌 것이요, 기타 벼슬을 팔고 옥(獄)을 팔고 서얼(庶孼)을 쓴 폐단에 그가 부동(符同)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의심을 일으키고 논박을 당한 까닭입니다.
오랑캐가 불화를 일으킨 것은 실로 이제신이 제어를 잘못한 데에 연유하였습니다. 일이 급하면 비록 양귀비(楊貴妃)의 오라비 국충(國忠)도 주륙(誅戮) 당함을 면치 못하였고, 법을 범하면 한 문제(漢文帝)의 외삼촌 박소(薄昭)도 자살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제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인산진(麟山鎭)에 물러가 있으면서 다른 나라의 일을 듣는 듯이 하였습니까? 인심이 모두 죽이고자 하는데 이이가 홀로 옹호하였으니, 이것은 소견이 잘못 들어간 것입니다. 백성이 도탄에 빠져서 부세(賦稅)에 응하기가 어려운 형편인데도 이이가 부세를 증가시키고자 하였으니, 이것도 소견이 잘못 들어간 것입니다. 기강(紀綱)이 서지 않아서 백성들이 도적으로 변하는데도 그 근본을 바로잡지 않고 지레 전군적(田軍籍)을 측량하고자 하였으니, 이것도 시무에 어두운 것입니다.
송한필은 사련(祀連)의 자식이요, 그 아비가 사류를 멸하였는데, 이이가 그 집에 갔으니, 이것도 소견이 그릇 들어간 것입니다. 횡역(橫逆)이 오면 달게 받고 갚지 말아야 할 것인데 한 번 자신의 그 과실을 듣고 성냄을 품고 반성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존심양성의 공부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교외에 물러가 있으니 이것은 이른바, ‘너를 옥같이 만든다. [玉汝于成], 는 것이니, 산림에 있어 글이나 읽어 병통을 소멸시켜 없애고 기질을 변화하면 장마비에 주즙(舟楫)이 되는 것 은 전하께서 하시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한, ‘사람을 죽일 때 나라 사람에게 물으라.’ 한 것은 공정하게 하기 위함이요, 속담에, ‘바둑을 두는 데는 옆에서 보면 잘 보이는데 두는 사람은 잘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의 말이 지극히 공정한 데서 나왔고, 신의 본 것이 옆에서 잘 살펴본 데서 나왔습니다. 서생(書生)은 진실로 소견이 없으니, 이해에 무슨 관계가 있다고, 조정 의론에 붙어서 전하를 감쪽같이 속이겠습니까?
지금 들으니, 삼공(三公)이 모두 비고, 양사(兩司)의 상소가 한창 시끄러운데, 전하께서 아직도 시비를 통촉하지 못하시니, 비록 온 나라에 충신이 없다 하더라도 가합니다. 시비가 전도됨에 흥망이 달려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정신을 차리시어 참으로 아소서.
또 듣건대, 천거로 벼슬한 자를 전하께서 음관(蔭官)으로 지목하시고 아랫사람이 또한 이 글자로 이름하였다 하니, 이것은 음(蔭) 자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신이 그 내용을 변론하여 설명해 보겠습니다. 대개 음(蔭)이라는 것은 그 대대의 훈로(勳勞)를 승습(承襲)하고 그 가문의 공적에 의지하여 처음으로 입사(入仕)하는 자입니다. 지금 천거로 벼슬에 나온 자가 비록 용렬하기는 하나 역시 품행이 있는 무리입니다. 그 일하는 것이 혹 생소하기는 하나 또한 능히 이름을 돌아보고 분수를 알아서 결코 백성들에게 가렴주구하는 무리는 되지 않습니다.
저 과거(科擧)로 등용된 자는 젊어서부터 기송(記誦)ㆍ사장(詞章)에 빠지고 이욕에 뜻을 빼앗겨 양심(良心)을 보전한 사람이 드뭅니다. 하루아침에 과거에 합격하면 뜻을 얻었다 하여 앉아서 전하를 고주(孤主)로 여기어 벼슬을 도둑질하고 녹을 구차히 탐하여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째서 오래 이 무리와 함께 다스리기를 도모하면서 아직까지 태평한 정치에 이르지 못하였습니까? 임금이 한 번 편향(偏向)하는 곳이 있으면 아랫사람이 엿보아 응하기를 귀신같이 합니다. 전하께서 이미 음관(蔭官)으로 지척(指斥)하였으니, 아랫사람이 눈을 흘기며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漢) 나라 때에 진번(陳蕃) 등이 끝내 당고(黨錮)의 화에 빠지자 나라도 얼마 뒤에 멸망하였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러한 폐단에 대해 깊이 살피소서. 이 한 절목(節目)은 관계되는 바가 심히 중한데, 이이가 그것은 변론하지 않고 매양 청대(請對)함에 있어 긴절하지 않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니, 이것은 학술이 정하지 못하여 경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형편없고 참람함을 용서하시고 굽어 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상소를 보니, 공사(公私)간의 현저한 일이 실정에 잘못된 것이 많고, 심지어 이이가 음(蔭) 자를 변석(辨釋)하지 못한 것으로써 죄를 삼으니, 국가의 급무가 관연 음 자를 주석(註釋)하는 데에 있으며, 음 자의 주석이 안으로 정치를 닦고 밖으로 적을 물리칠 계책이 되는가? 쓸모없는 선비의 말이 우습다. 우선 내버려두라.”
하였다.
비망기에 이르기를,
“장흥 부사(長興府使) 송응개ㆍ창원 부사(昌原俯使) 허봉ㆍ전 도승지 박근원 등이 간사하고 음험한 성질로 보잘것없는 재주를 가지고 경박한 무리와 결탁하여 편당을 만들어 서로 끌어 올리어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혹은 후설(喉舌)의 자리를 더럽히고 혹은 대간과 시종의 벼슬을 차지하여, 형세를 떠벌리고 사설(邪說)을 선동하며, 전형(銓衡)을 제 마음대로 희롱하고 조정을 협박하고 견제하며, 대신을 모함하여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배척한다. 편당의 형적이 이미 나타났는데 오히려 공론이라 일컫고, 사감을 낀 자취가 다 드러났는데도 스스로 방정(方正)하다고 이른다. 일마다 모두 속이고 가리우는 것이요, 말마다 모두 무함하는 것이다. 충량(忠良)한 사람을 억눌러 탁란한 죄악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고, 여러 소인이 뜻을 얻었으니 나라를 그르친 죄를 면하기 어렵다. 원근이 모두 알고 조야가 함께 분하게 여긴다. 오히려 저자에서 베일 형벌은 용서하고 죄가 의심될 때에는 가볍게 한다는 법을 베풀었다.
아! 굽은 자를 버리고 곧은 자를 쓰는 것은 정치를 하는 요법이요, 착한 것을 권면하고 악한 것을 징계하는 것은 정치를 하는 방도이다. 노할 만한 죄가 저들에게 있으니, 내가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느냐? 모두 관직을 삭탈하고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라.”
하였다.
비망기에 이르기를,
“종성(鍾城)에는 바야흐로 적의 변란이 있으니, 그가 가서 있어도 방어하는 일에 이익됨이 없을 것이고, 폐단을 끼치는 것이 없지 않을 것이다. 허봉은 갑산(甲山)으로 유배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장흥(長興)ㆍ창원(昌原) 부사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장흥 부사(長興府使)에는 이기(李墍)를, 창원 부사에는 박승임(朴承任)을 차하하라.”
하였아.
9월 2일. 대사간 김우옹(金宇顒)ㆍ사간 황섬(黃暹)ㆍ헌납 홍인서(洪仁恕)ㆍ정언 박홍로(朴弘老) 등이 아뢰기를,
“임금이 사람을 기용(起用)함에는 마땅히 각각 그 그릇에 맞게 하여야 합니다. 유악(帷幄)에서 임금께 간언하는 재주와 변방에서 힘껏 외적을 막는 책임에 서로 통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새로 제수한 제주 목사(濟州牧使) 김응남(金鷹南)은 오래 경연(經筵)에서 모시면서 많이 임금의 학문을 계발(啓發)하였고, 승선이 되자 부지런히 충성을 다하였으니, 전하께서 일찍이 의지하고 신임하고 사랑하시던 자입니다. 하루아침에 내보내서 바다 바깥 관방(關防)의 땅을 지키게 하니, 안으로는 간언하는 신하를 잃었고, 밖으로는 적을 막을 재주가 아니어서 한 번 거조에 두 가지를 잃었으니, 사람을 그릇대로 부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물며 김응남이 간 것은 실로 견책으로 내리신 엄명이니, 신하의 분수에 마땅히 명을 듣고 달려가서 생사를 걸고 직책을 다해야하나, 신 등이 생각하건대, 김응남이 10년을 시종(侍從)하면서 한 당(堂)에서 도(都)라 유(兪)라 하였으니, 군신의 정의가 또한 얕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죄명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차츰차츰 스며드는 참소만 편벽되게 믿고 도깨비가 사는 땅에 던져 버릴 수 있겠습니까?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군자가 참소하는 말을 믿는 것이 혹 권하는 술잔을 받아 마시듯 하며, 군자가 사랑하지 않는지라 서서히 살피지 아니하도다.’ 하였습니다. 어찌 성명(聖明)의 세상에 참소하는 말이 횡행하기가 이 지경에 이를 것을 생각하였겠습니까.
대저 김응남의 사람됨이 평소의 마음 씀과 일 행하는 것이 비록 반드시 유속(流俗)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근신하여 스스로 지키고 세력과 이익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그의 장점이니, 이것은 사대부가 아는 사실입니다. 신하를 알기로는 임금만한 이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익히 이 사람을 보셨으니, 과연 결탁하고 권력을 제 마음대로 할 자입니까? 전하께서 만일 조금 위엄과 노여움을 그치시어 먼저 들어온 말을 주장하지 마시고,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화평하게 하여 시험 삼아 사람의 평소의 마음 쓴 것을 가지고 일한 자취를 고찰하여 본다면, 사람들의 말의 허실이 저절로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그 평소를 생각하지 않으며 그 심사(心事)를 살피지 않고 한 번 남의 말이 있으면 갑자기 의심하고 추방하여 초개(草芥)만도 못하게 보니, 이런 등의 거조는 전하께서 평일에 신하를 사랑하시던 뜻과는 매우 같지 않습니다.
신등은 사감을 품고 일 만들기 좋아하는 무리가 전하의 생각이 있는 곳을 엿보아서 때를 타서 헐뜯고 배척하여 제 뜻대로 하여서, 조정 위에 온전한 사람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배척과 추방이 연달아서 명류(名流)가 거의 다 없어지고, 참소하는 입이 틈을 타서 대성(臺省)이 온통 비어서 백료(百僚)가 간담이 서늘하고 충직(忠直)한 사람이 좌절되었으니, 크게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신 등이 시사(時事)가 이미 그릇되어 위태하고 망하는 화가 조석에 다가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 차라리 말하고 함께 떠나갈지언정 차마 말하지 못하여 전하를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충분히 생각을 하시어 김응남을 제주로 내보내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신 등이 어제의 비망기를 보니, 장흥 부사 송응개ㆍ창원 부사 허봉ㆍ전 도승지 박근원을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면서 견책하는 말씀이 극히 중하여, 음험하게 결탁하고 임의로 권세를 희롱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로 조율(照律)하셨습니다. 대저 이 사람들이 진실로 죄가 있기는 하나 조급하고 망령된 것이 지나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만일 중한 죄로 다스린다면 형벌이 맞지 않고 인심이 편치 못할 것이니, 참으로 국가를 위한 훌륭한 계책은 아닙니다.
생각건대, 당초에 이이가 나라의 중임을 맡아서 재주는 엉성하고 뜻은 편벽되어 언론과 처지가 걸핏하면 물정에 어그러졌으니, 언책(言責)을 맡은 관원이 일에 따라 논박하여 바로잡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나, 송응개ㆍ허봉 등이 조급하고 경솔하여 언론을 재량(裁量)하여 물정에 맞게 하지 못하고 다만 이이의 옳지 않은 곳만 보고 탄핵하는 말이 너무 제목에 맞지 않았습니다. 또 송응개가 이미 배척을 받자, 피혐(避嫌)하는 말이 스스로 인책(引責)을 하지 않고, 박순ㆍ이이ㆍ성혼을 논하여 맞지 않는 말을 하였습니다. 박순의 잘못은 저절로 다른 공론이 있는데도 떠들썩하게 공격하여 논쟁의 발단을 열어놓았으니, 역시 경박하고 조급한 생각입니다.
유생이 올린 소는 의논이 편벽되니, 후설(喉舌)의 신하는 자세히 설명하여 진달하는 것이 또한 그 직책인데, 박근원 등이 식견이 어둡고 게다가 사리를 분석하여 임금을 개도(開導)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번잡한 말을 많이 전달하여 전하의 의혹을 일으켰으니, 이는 진실로 모두 죄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의 실정을 추구하여 그 잘못을 천천히 살핀다면, 다만 위로 밝으신 성상을 믿고 소회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데서 나온 것으로서, 자신도 모르게 지나쳤을 뿐입니다. 어찌 깊이 죄줄 수 있겠습니까. 만일 편당을 짓고 임금의 총명을 가려서 간계를 부리려고 한다면, 여러 대신과 나라 사람이 그 억울함을 알게 될 것이니 어째서 대부와 국인(國人)의 공통된 생각을 살피지 않고, 불평으로 원한을 품고 때를 타서 무함하는 자의 한마디 말에 결정을 지으려 하십니까.
대저 상과 벌을 주는 것이 각각 그 법칙에 맞은 뒤에 인심이 저절로 복종하고 조정이 저절로 맑아지는 것인데, 지금 편중한 의론을 믿고 과중한 벌을 행하여 이것으로써 여러 가지의 말을 진정하고 복종시키려 하니, 삼가 사람의 입을 막아서 인심이 더욱 울분하여져서 다만 사기(士氣)만 꺾고 국맥(國脈)만 손상시켜, 장차 닥칠 화가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충분히 생각을 하시어 송응개 등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은 그들을 옹호할 생각을 하지 말라. 저들의 몸에 도움됨이 없고 도리어 해로울 것이다. 징계를 받게 하는 것이 옳다. 나라가 망할지언정 이 세 간신들은 단연코 용서할 수 없다. 내 두 번 말하지 않겠노라. 김응남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비록 일찍이 유악(帷幄)에서 시종(侍從)하였으나 입시(入侍)한 적이 많지 않기 때문에 내가 실은 그 인물을 알지 못하는데, 승지가 되어 병무(兵務)를 위임한 뒤에 내가 과연 그가 부지런하고 근신하며 진실한 것을 사랑하여 믿어 의심하지 않았고, 경안령(慶安令)이 면대(面對)에서 지척하였으나 또한 의심하지 않았다.
그 뒤에 조회에 임하여 내가 우연히 하교하기를, ‘김응남이 능히 직사를 잘 살핀다……’ 하였더니, 송응개가 극구 칭찬하였다. 지금에 와서 보면 송응개는 간사한 사람의 괴수인데, 김응남이 이 적(賊)의 칭찬을 받았으니, 그가 결탁하여 당파를 지은 것이 심히 분명하다. 그런데 근자에 경안령이 청대(請對)한 것을 이이가 시킨 것이라 하였다. 이런 무도한 말은 반드시 김응남의 무리가 경안령이 제 이름을 직접 든 것을 분하게 여겨 부정한 말을 지어내어 무함한 것이다. 죄상이 이미 나타났으니, 내가 실로 통분하게 여기나 곧 그 죄를 처단하지 않고 제주 목사를 제수하였으니, 나라에서는 형벌을 빠뜨린 것이 되나 그 몸에는 다행이겠다. 김응남은 그곳으로 가고 사양하지 말라. 만일 능히 마음을 고쳐 새로워지기를 도모하면 다른 날에 반드시 친애하고 총애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조 좌랑 김홍민(金弘敏)이 상소하기를,
“당초에 이익 산야(山野)에 물러가 있으면서 자못 나오기를 어렵게 여기는 지조가 있었고, 또 학문에 종사하는 것으로 이름을 삼았으므로 신이 일찍이 그 사람됨을 사모하였습니다. 신이 충청도 고을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이이가 특별한 부름을 받아 전하의 돌보심이 보통과 다름을 듣고 조금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여 세도(世道)를 부지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윤승훈(尹承勳)이 정언(正言)이 되어 정철(鄭澈)을 논하다가 그대로 이이에게 이르자, 이이가 얼굴을 붉히며 지척하기를, ‘윤승훈이 무슨 지식이 있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듣고 크게 해괴하게 여기어 말하기를, ‘윤승훈의 말의 곡직(曲直)을 논할 것 없이 다만 이미 자기를 공격하는 말이 있었으니, 스스로 마땅히 공론에 붙일 것이요,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신이 외람되이 경연에 들어와서 그 언론을 들어보니, 성품이 실로 경솔하여 자신(自信)에 과감하며 재주는 실용에 적합한 것이 아닌데 제도를 변경하기를 힘쓰니, 그 뜻은 크나 어찌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헛된 명예가 실지보다 지나치고, 실지로 일을 하는 때가 말만 하는 때와 같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그의 장점은 또한 가리울 수 없으나 만일 그가 하는 대로 맡겨 두면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화가 있을 것이니, 유식자의 남모르는 근심이 어찌 다만 그러할 뿐이겠습니까. 이이가 선비의 물망이 자기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공론이 허여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면 마땅히 반성하여 허물을 살피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감히 먼저 의심하고 분한 것을 품고, 부질없는 의론이 정치를 어지럽힌다.’는 말을 주장하여 공론을 저지하고, 신진(新進)을 억제한다는 이름으로 거짓 핑계대어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려 하고, 자신은 스스로 당이 되었으면서 시비에 물들지 않았다 칭하며, 또 사사로운 친구를 옹호하여 물의가 어떠한지를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아! 이것이 어찌 이이에게 바라던 것이겠습니까.
하물며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마침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일을 시행하는 것이 걸핏하면 시의(時宜)에 어그러져서 떠들썩하게 고치고 소요하는 폐단이 있었습니다. 언관(言官)이 일에 따라 규정(糾正)하여 옳고 옳지 않은 것을 서로 바루려고 하는 것은 또한 직분이 당연한 것입니다. 부름을 받고 나오지 않은 데 대해서는 갑자기 병이 생겼다고 이미 말하였으니 미리 추측할 수 없지만, 말[馬]을 헌납하게 하고도 위에 아뢰지 않은 것은 현저하게 제 마음대로 할 조짐이 있는데, 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여 그것을 논하는 자와 적이 되려 하고 심지어 경중을 저울질하겠다는 말까지 있었으니, 아! 대간(臺諫)은 공론이 붙어 있는 곳이어서 승여(乘輿)를 언급하면 천자(天子)도 얼굴빛을 고치는 것인데, 하물며 재상이겠습니까? 인심이 울분해 하고 공론이 격렬히 일어나는 것은 진실로 부득이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이를 거만하고 제 마음대로 한다고 지칙한 대간(臺諫)의 말에 노하여 을사(乙巳) 간흉의 한 짓에 비교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옛날 한기(漢琦)가 조회(朝會)하는 반열에 서지 않았는데, 여도(呂陶)가 무례하고 제 마음대로 날뛴다고 탄핵하였으니, 대저 반열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신하의 작은 잘못이요 무례하고 제 마음대로 날뛰는 것은 천하의 큰 죄인데, 큰 죄를 작은 잘못에 씌웠어도 영종(英宗)이 지나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지금 이른바 권력을 오로지하고 임금을 무시한다는 것은 또한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유추(類推)한 지극한 의론이요 진실로 윗사람을 범한 죄와 나라를 파는 간교가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갑자기 노하시어 잇달아 추방하시니, 아마 전하의 마음에 편벽된 것이 있어서 그런가 합니다.
전하의 뜻이 반드시 이이가 외로이 서서 당이 없고 경박하고 조급한 것을 진정시키고자 하다가 후진에게 미움을 받고, 국사를 담당하고자 하다가 유속(流俗)에게 계속 미움을 당한 것이요, 삼사가 논하는 것은 다만 틈을 엿보고 일어나 사감을 끼고 서로 공격하는 것이라 생각하시었기 때문에 일국의 공론을 무함하는 것이라 하여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이의 잘못이 이미 밝게 드러났는데도,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한마디 말도 못하게 하려 하시니, 공론을 어기는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이가 한 일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삼사에 있는 자가 때를 틈타서 교묘하게 중상하려 한다면 이것은 소인 중에도 심한 자입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엄하게 견책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마는, 명분과 의리는 지극히 중하고 귀신은 속이기 어려운데, 이이 한 사람을 공격하기 위하여 온 세상 사람이 소인이 되는 것을 달게 여기는 것이 어찌 사람들의 진정이겠습니까.
성혼의 경우는 자기의 소견에만 가려져서 한갓 이이를 옹호할 줄만 알고 이이의 잘못은 알지 못하여, 대간(臺諫)을 중상(中傷)한다고 지척하고 또 간당(奸黨)으로 조율하고자 하여 그 폐단이 말하는 자를 추방하기까지 하였으며, 앞으로 사림에게 화를 끼치게 될 것이니,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순은 몸이 대신이 지위에 있으면서 조정(調停)하고 화합시켜서 종사(宗社)의 무한한 복을 만들어내지 않고 간사한 꾀를 부려 감히 일망 타진할 계획을 시도하였습니다. 박순의 사람됨은 딴 일을 논할 것도 없이 다만 어전(御前)에서 아뢴 것만으로도 족히 나라를 망칠 수 있습니다. 사림을 무함하고 해친 것이 어찌 참혹하지 않습니까?
아! 예전에 붕당(朋黨)을 미워하여 없애고자 한 자가 반드시 남의 나라를 망치는 데에 이르렀는데, 지금 전하께서 이이를 논핵하는 자를 한당으로 지척하여 반드시 다 없애고자 하시니, 예전에 이른바 조정이 거의 비었다는 것을 불행하게도 오늘에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대신을 높혀 예우(禮遇)하고 대간과 시종을 총애하여 죄 아닌 것을 함부로 처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한 번도 만홀 한 말로 지척하지 않아서 시비와 진퇴를 한결같이 공의(共議)에 맡겼으며, 사류들이 스스로 천재 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고 믿었습니다. 삼가 근일의 일을 보건대, 전연 전하의 평소의 거조와 같지 않아서 한마디 말이 뜻에 거슬리면 비록 높은 대신이라도 거만하게 꾸짖기를 노예와 같이 하고 한 차자(箚子)가 비위에 거슬리면 비록 경악(經幄)의 가까운 신하라도 내던지기를 초개(草芥)같이 하고, 조정을 가리켜 6적(賊)이라 하고 후설(喉舌)의 신하를 도깨비에 비합니다. 만일 이대로 거듭하여 마지않는다면 반드시 장차 이보다 더 심함이 있을 것이니, 송(宋) 나라 신하가 말한 ‘손이 미끄럽다.[手滑]’ 는 것을 실로 근심합니다.
또 신급(申礏)의 상소는 신이 보지 못하였으니, 그 말이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나, 지척한 사람을 들어보면 모두 여러 해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던 자입니다. 전하께서 신급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시면서 한 번 교묘하게 중상하는 말을 들으시고 부정한 자를 배척한 것이라고 극진한 말로 포창하고 장려하셨으니, 사람이 이미 부정한 자라는 이름이 있으면 어떻게 세상에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가령 신급이 말이 혹시 옳더라도 임금의 발언이 진실로 이렇게 박절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 무리는 맑은 명망이 평소에 드러났는데, 갑자기 악한 이름으로 씌우시니, 신이 실로 안타깝게 여깁니다.
아! 이이가 임금에게 신임을 얻은 것이 독차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능히 자신을 바르게 하여 사물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공평하게 하여 일을 처리하였다면, 사람들이 장차 이이에게 규정(糾正)함을 받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인데, 어찌 감히 이이를 규정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이이가 이미 그렇지 못하고 박순이 또 풀무질을 하여 마침내 오늘의 시끄러움이 있게 되었으니, 일찍이 지붕만 쳐다보고 탄식하여 천운(天運)에 돌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이와는 본래 조금도 개인적인 원망이 없었으니, 감히 그의 만점을 모함하여 배척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요 또한 감히 시의(時議)에 붙어서 군부(君父)를 감쪽같이 속이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한 사람의 이이가 논핵을 당한 까닭으로 전하의 마음이 의심하여 장차 사림의 화가 일어나게 되었으므로 비분(悲憤)이 가슴에 막혀 간곡하게 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 선입견(先入見)으로 막힌 것을 완전히 버리시고 비근한 말을 살피는 도량을 더욱 넓히시어 진정시키는 계책을 힘써 화평의 복을 기르신다면 실로 국가 만대의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상소를 보니, 삼사의 계사를 옮겨 놓은 것뿐이다. 김홍민(金弘敏) 역시 낭료 사당(邪黨)의 부류이니, 이와 같은 그의 말이 괴이할 것이 없다. 심지어 이이를 편당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로 내 뜻을 움직일 수 있겠느냐? 아! 진실로 군자라면 편당함을 근심할 것이 없고, 오직 그 당이 소인들임을 근심할 것이다. 나도 또한 주희(朱熹)의 말을 본받아서 이이ㆍ성혼의 당에 들기를 원하노라.
지금 이후로는 너희들은 나를 이이ㆍ성혼의 당이라고 하라. 너희들이 그래도 다시 말을 하겠느냐? 다만 이이와 성혼을 헐뜯고 배척하면 반드시 죄주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비록 어둡고 용렬하나 이 썩은 선비 하나를 용서하지 못하겠느냐? 우선 내버려두고 책하지 아니할 것이니, 사직한 본직은 체직시키노라.”
하였다.
대사간 김우옹ㆍ사간 황섬ㆍ헌납 홍인서ㆍ정언 박홍로 등이 아뢰기를,
“김응남의 일은 비답을 받들어 보건대, 곡절을 일깨워 주시니, 신 등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럽습니다. 대저 김응남이 부지런하고 근신하며 성실한 것을 밝으신 성상께서 이미 환히 아시니, 이른바 신하 알기로는 임금 같은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경안령(慶安令)의 훼방이 이미 전하의 뜻을 만분의 일도 움직이지 못하였으니, 송응개의 거조가 어찌 족히 전하의 의혹을 일으키겠습니까.
김응남은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으면서 부지런한 실상이 제배(儕輩)의 추중을 받았기 때문에 송응개가 전하의 말씀을 받아서 찬양한 것이니, 또한 사람의 상정(常情)입니다. 어찌 반드시 결탁하여 편당을 지은 후에 이와 같겠습니까? 송응개 자신은 비록 죄가 있으나 송응개의 칭찬을 받은 사람이야 또한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만일 반드시 이와 같다면, 이이가 일찍이 권덕여(權德與)ㆍ홍진(洪進)의 칭찬을 받았으니, 그 또한 결탁하여 편당한 것이겠습니까? 족히 의심둘 것이 못 됨이 분명합니다.
대간이 올린 계사의 경우는, 비록 지나친 말이 있었으나 어찌 반드시 김응남이 지어낸 것이겠습니까. 김응남이 본디 근신하고 일을 두려워하므로 제배들 중에 혹은 나약한 것을 비웃은 자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자기에게 관계되는 일은 그가 반드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인데, 어찌 근거 없는 뜬말을 지어냈겠습니까. 이것도 역시 반드시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근일에 전하의 위엄 아래에 사류가 목을 움츠리자 여러 완악한 사람의 참소가 틈을 타서 번갈아 날뛰어, 뜻을 맞추어 기색을 살펴 무함하는 꾀가 많이 있습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살피시어 편벽되게 한쪽 말만 들으면 간사한 자가 생긴다는 옛사람의 경계한 바에 잘못되지 않으시면 어찌 김응남의 다행과 국가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청컨대 충분히 생각을 하시어 김응남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보내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신 등이 삼가 비답의 엄한 말씀을 보건대, 신 등에게 김응남을 옹호한다 하시고, ‘나라는 망할지언정 이 세 간신들은 단연코 용서할 수 없다.’ 하셨으니, 신 등이 서로 돌아보고 황공하고 놀라서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 등이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조정의 거조가 지나치고 형벌이 중도(中道)를 잃어서 장차 사림의 화가 생길 것을 눈으로 보고, 차마 말하지 않아서 전하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에 벼락 같은 위엄을 무릅쓰고 한 번 말한 것입니다.
신 등이 세 사람을 위하여 애석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류를 위하여 애석해 하는 것이요, 조정을 위하여 애석해 하는 것입니다. 대개 세 사람이 참으로 방자하게 제멋대로 행동하여 스스로 죄를 초래한 것이니, 비록 애석할 것은 없으나, 그 본심을 따져 보면 다만 조급하고 망령되게 격발(激發)함으로 인한 것이요, 간사한 실상이 있는 데에 이르지은 않는 것입니다. 지금 만일 간인으로 지목하고 편당이라고 죄준다면 형정(刑政)이 마땅함을 잃을 뿐만 아니라, 온 조정의 사류가 마침내 소인으로 돌아감을 면치 못하여 모조리 일망타진 속에 들어서 그 형세가 반드시 장차 한쪽 사람만을 배포(排布)하여 조정을 다 변혁하게 될 것이니, 이후로의 안위(安危)는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신 등은 또한 전하의 뜻이 화평에 힘써 모든 신하의 협력하는 아름다움을 만들어서 유신(維新)의 정치를 이루고자 하심을 압니다. 전하의 오늘의 거조가 어찌 전하의 본심이겠습니까.
대저 국사를 말하다가 죄를 얻는 것은 쇠한 세상에서도 부끄러운 일이니, 성명의 아래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만일 위엄과 형벌을 베푸는 것만이 여러 사람의 입을 막고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백관(百官)이 두려워하고 인심이 더욱 울분해 할 것이니, 이것은 난(亂)으로써 난(亂)을 그치게 하는 것과 같아서, 조정이 안정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거듭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체(事體)와 기관(機關)이 지극히 커서 근심스럽기 때문에 신 등의 생각으로는, 차라리 세 사람의 죄를 가볍게 하여 조정을 안정시키고 이로써 사림을 온전히 하는 것이 반드시 국가를 위한 원대한 생각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신 등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어찌 감히 세 사람을 옹호하려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천위(天威)를 다소 누그러뜨리시고 마음을 공평하게 하여 이치를 살피시어 박근원 등 세 사람을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 등(卿等)이 어찌 세 사람을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겠느냐. 다만 혹시 만연(蔓延)되는 화가 있을까 지나치게 염려함으로 인하여 부득이하여 번거롭게 아뢰는 것이리라. 이것이 어찌 내 마음을 아는 것이냐? 나의 언어와 거조는 모두 차서가 있다. 당초에 삼사(三司)의 계사를 내가 분명히 무함인 것을 알았지마는, 갑자기 위엄과 노여움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해칠까 두려워하여, 곡진하게 가르치고 경계하여, 첫째는 말하기를 ‘얼음 풀리듯 하라.’ 하였고, 둘째는, ‘협동 화합하여 힘을 다하라.’ 하였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차 부득이한 거조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토록 자주 가르치고 타일렀으나 미혹한 소견을 고집하기에, 혹은 위태한 말로 두렵게 하고, 혹은 온순한 말로 타일렀으나, 도리어 내 말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꺼리로 삼았다. 그 하는 말은 나올수록 더욱 과격하여 시비도 따지지 않고, 스스로 반성하지도 않고, 붓만 놀려 힘껏 싸워서 이기기만 하면 이것으로 나라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다 하는 것이다.
아! 내 뜻은 은근하면서 박절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데, 오늘의 거조가 어찌 내가 원하는 것이겠느냐. 대개 저들이 자초한 것이다. 오직 세 사람 이외에는 다시 다른 염려가 없다. 무릇 지금 직위에 있는 신하는 각각 그 마음을 편안히 하고 혹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말고 다만 직사에 마음을 다하여야 한다.
간원(諫院)에서는 다시 아뢸 필요가 없다. 죄 있는 자로 하여금 죄를 받게 할 뿐이다. 김응남의 경우는 내가 실로 그 사람됨을 잊지 못한다. 오늘에 친히 만나보고 따뜻한 말로 타이르면 김응남도 반드시 내 뜻을 알 것이다. 우선 부임하는 것이 무방하다. 대체로 내가 어찌 좋아하는 자에게만 편벽되게 하겠느냐. 영상(領相)과 이이의 잘못도 밝게 타이르겠다.”
하였다.
판돈녕(判敦寧) 이이 물러가 해주(海州)에 있으면서 사직하여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보잘것없는 어리석은 신이 본디 세상에 쓰일 만한 그릇이 아닌데 외람되게 발탁되는 은총을 입어서 분수 넘치게 높은 반열에 오르고 잘못 중한 직임을 받았으니, 마치 모기가 태산을 짊어진 것 같아서 복이 지나치니 재앙이 생기고, 짐을 지고 있어야 할 사람이 말을 타니 도적을 불러서 죄가 무더기로 쌓이고 여러 원망이 폭발하였습니다. 그래서 낭패하여 쥐처럼 숨어서 감히 사직을 고하지도 못하고 물러가 기전(畿甸)에 엎드려 있은 지가 두 달 남짓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엄한 견책이 내려지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처분은 없고 이미 형벌을 용서 받고서 오히려 직명(職名)을 보전하고 있으니, 나라에 있어서는 형벌을 빠뜨린 것이 되고 신에게 있어서는 구차히 면한 것이 됩니다. 천지(天地)에 조심스럽고 두려워서 몸 둘 곳이 없으니, 신이 어찌 우러러 호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실무가 없는 높은 벼슬도 이미 차지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경악(經幄)의 중한 자리와 문형(文衡)의 요직은 더욱 더럽힐 수 없으며, 각사(各司)의 제조(提調)도 오래 직무를 비우기가 어렵습니다.
또 삼가 생각하건대, 밝으신 성상의 부르심이 우연히 신에게 잘못 내려져서 해마다 제수하고 달마다 옮겨져 갑자기 이공(二公 좌ㆍ우찬성(左右贊成)을 말함)에 승진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밝으신 성상께서 사사로운 은혜로 소신을 비호한 것이겠습니까. 실로 닭 울고 개 짖는 도움 을 구하신 것인데, 지금 신은 나라를 저버리고 은혜를 저버려서 온갖 일이 기왓장 깨어지듯 하였으니, 다만 직책에 맞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수 받은 관직을 도리상 그대로 더럽히기가 어렵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지나간 잘못을 깊이 징계하시고 물의를 참작하시어 신의 벼슬과 겸직(兼職)을 해임시키고 신이 외람하게 받은 전후의 중한 벼슬을 모두 삭제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농촌에 돌아가서 여생을 온전히 하게 하신다면 생성(生成)의 은택을 죽어도 갚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신은 지극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았소. 아! 하늘이 우리 나라를 태평하게 다스리려고 하지 않는가? 어째서 경의 사람됨으로써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는가? 아마도, 하늘이 경으로 하여금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강인하게 하여 능하지 못한 것을 더 보충하여, 후일 가뭄에 장마비와 강을 건너는 데 주즙(舟楫)의 책임을 맡게 하려는 것이니, 하늘이 경에 대하여 곡진히 이루어주어 옥같이 만들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소. 오늘의 일은 하늘이 다만 경에게 후하게 하는 것이요 경에게 무슨 손해가 있겠소.
대저 사람들의 말이 시끄러운 것은 한 번 웃음거리도 되지 않소. 경이 어찌 개의할 것이 있는가. 어째서 문득 사직하는 말을 내는가? 아! 세상이 이미 예와 다르고 시속이 이미 박하여졌소. 정 나라의 음탕 한 음악이 아악(雅樂)를 어지럽히고 기울어뜨리고 알력하는 것이 습성이 되었소. 사람을 죽였다는 헛말이 또한 증삼(曾參)에게 미쳤으니, 그 어머니가 베를 짜다가 북을 던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오. 경은 빨리 와서 나를 만나보고 겸하여 소회를 진달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이 한 번의 걸음에 있으니, 경은 사양하지 말고 급히 역마를 타고 올라오시오.”
하였다.
12일 전교하기를,
“근자에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여 인심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니, 그것을 조화(調和)시키고 진정하는 계책을 지금 놓쳐 버리고 도모하지 않으면 신하들끼리 함께 공경하여 협력하는 아름다움을 끝에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전일 양사(兩司)가 다시 병조 판서의 잘못을 논핵한 것은 다만 그 일에 논박하여 바로잡고자 한 것이요, 처음부터 공격할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조 정랑(禮曹正郞) 이경률(李景慄)은 본래 부박하고 망령된 사람으로 서 전에 지평(持平)으로 있을 적에 계사를 올릴 때를 당하여 동료에게 의논하지 않고 자기 소견으로, 이이가 임금에게 거만하다느니 제 마음대로 하였다느니 하는 등의 말을 보태 넣어 실정이 아닌 일을 함부로 말하여 다툼의 꼬투리를 열어 놓았다. 직강(直講) 이징(李徵)은 전에 장령으로 있을 적에 또 피혐하는 말 가운데에 또한 재량(裁量)하지 못하고 용어(用語)가 지나쳤다. 이 두 사람은 식견이 어두워 일을 논하는 것이 어긋나서 일을 낭패하는 데에 이르게 하여 현저하게 잘못한 것이 있는데도, 오히려 견책하고 벌줌이 없었으니, 민심이 대단히 온당치 못하게 여긴다. 모두 파직하여 그 잘못을 징계하도록 이조(吏曹)에 내리라.”
하였다.
부제학 홍성민(洪聖民)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8~9년 이래로 사류가 정상(正常)을 잃어서 동ㆍ서(東西) 두 글자가 비로소 여항(閭巷)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으니, 유식한 사람이 귀로는 들을지언정 차마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에 형적이 드러나서 달로 더하고 해로 더하여 점점 듣고 보는 데에 익어져서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조금만 깊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누가 국가를 위하여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인심이 똑같이 않아서 간혹 경박하고 조급한 사람이 있어 화평하려는 의논을 도리어 불편하게 여기어 반드시 승부를 결단하고야 말려고 하여 한두 사람이 주창하매, 나머지는 항거하지 못하여 부산스럽고 시끄러워 오늘날 안정되지 못한 조정의 화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피차간에 의심이 쌓여 서로 틈이 나서 정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것은 어찌할 수 없지만 앞으로 올 일은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때의 인재는 마땅히 아껴야 하고, 조정에서 힘쓸 것은 화평한 것이 제일입니다. 모든 일은 중도가 아니면 안 되는데, 지난번에 북쪽에 귀양보내어 위엄을 보인 거조는 중도를 지나친 데서 나왔으니, 다만 길을 열어놓는 것이 온당치 못할 뿐만 아니라, 이후로부터 사람이 위태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의심하는 생각이 또다시 생겨나 뜬말이 가고 오기에 이르렀으니, 심히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대저 조정은 한 조정이니, 애초에 어찌 피차의 구분이 있었습니까. 지금에 있어 조정이 신하를 위한 계책으로는 오직 전일에 생각을 버리고 새롭기를 도모하여 의심하는 생각을 녹이고 막힌 것을 풀어서 함께 공경하고 협력하여 모두 성상께서 교화시키는 아름다움에 돌아가면, 여러 사람의 뜻이 정하여지고 국맥(國脈)이 견고하여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의심하는 자는 더욱 의심하고 거짓말은 날로 일어나서 편안하고 조용할 기약이 없을 것이니, 심히 사림을 사랑하고 국가를 위하는 계책이 아닙니다. 이때를 당하여 반드시 공평하고 밝고 생각이 원대하고 명망이 중하여 인심을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을 골라서 공론을 부지할 책임을 준 후에야 말이 나오면 사람들이 믿고 복종하여 절로 조화(調和)되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소신과 같이 용렬하고 어리석고 약하고 재주가 없는 자는, 여러 신하 중에서 견줄 이가 없는데, 감히 이 은명(恩命)을 버젓이 받겠습니까? 게다가 온갖 병이 몸에 집중되어 형체가 겨우 남아 있고 정신이 혼망(昏茫)하여 열 가지 일 중에 아홉은 어긋나니, 근력이 미친다 해도 오히려 견디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다른 것이겠습니까? 청컨대, 신의 직책을 체임하여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황해도 유생 유대춘(柳帶春)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듣건대, 삼사가 함께 탄핵을 내어 이이로 하여금 몸을 이끌고 물러가고 성혼으로 하여금 미련 없이 돌아가게 하였다 하니, 이는 실로 국가의 큰 근심이요 존망의 기틀입니다. 신 등은 초야의 사람이니. 조정의 시비와 인물의 현사(賢邪)를 진실로 일찍이 참여하여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귀로 들은 것과 눈으로 본 것으로 진달하겠습니다.
삼가 보건대, 이이가 물러가 산림에 있으면서 몸소 수양하고 자신의 지조를 지켜 성현의 글에 잠심(潛心)하여 의리의 근원을 깊이 터득하여 사문(斯文)을 부식하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고 인재를 교육하는 것으로 자기의 일을 삼았으니, 참으로 사림의 영수입니다. 다행히 밝으신 성상께서 사랑하고 기대하심이 융숭하고 깊음을 만나서 배운 도를 펴고 매우 특별한 대우를 갚기를 기약하여,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계책을 건의하지 않음이 없고, 훌륭한 사람과 어진 선비를 천거하여 나오지 않음이 없게 하고, 옛도가 지금에 마땅한 것은 행하려 생각하고, 지금의 법이 백성에게 해되는 것은 없애기를 생각하였습니다. 마침 군사의 급한 때를 당하여 몸이 병조의 장관이 되어 무릇 기획하고 처치할 때에, 비록 혹 엉성하고 실정에 맞지 않는 잘못이 있었으나, 그 마음을 추구하여 보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 아님이 없었습니다. 나라 근본(백성들)이 불행하고 시론(時論)이 어그러져서, 간신이 틈을 타서 탄핵하는 글이 번갈아 나와서 나라를 그르쳤다고 지척하고 제 마음대로 독단하였다고 지목하였으니, 얽어 무함하는 계교가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만일 밝으신 성상께서 간흉한 자들의 심중을 환히 아시지 못했더라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조만간에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송응개의 계사를 보니, 이른바 뇌물이 사방에서 들어왔다느니, 곡식 백 석을 받았다느니, 공서(公署)에서 대신 내었다느니, 해택(海澤) 선세(船稅)를 점유(占有)하였다느니, 송사로 사람을 죽였다느니 하는 등의 일이었으니, 어찌 이럴 이치가 있겠습니까. 참소하는 사람이 망극하여 교묘한 혓바닥으로 떠들어대니 죄를 씌우고자 하면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까?
아! 이이가 시골에 있으면서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주는 것이 의리에 합하지 않는 것이 없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도 재물을 구차히 얻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일찍이 한 권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 이름이 격몽요결(擊蒙要訣)입니다. 무릇 몸을 경계하고 사람을 대하는 요점을 갖추어 싣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 한 조목에 이르기를 ‘선비가 되어서 수령(守令)이 주는 것을 받으면 이것은 법을 범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람을 권면하면서 어찌 자기는 힘쓰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뇌물이 사방에서 왔다는 말은 심히 말은 심히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또 이이의 집 옆에 정사(精舍)가 있는데, 학도들이 재물을 모아서 세운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으면서 수업하는데 공궤(供饋)할 꺼리가 없으므로 당시 감사(監司)가 영선(營船)과 어렴(魚鹽)을 주어서 그것으로 조석의 공궤를 삼았습니다. 이것은 풍기(豐基) 백운동(白雲洞 소수서원(紹修書院)을 가리킴)의 규례를 모방한 것이니, 어찌 선비를 기르는 물자를 가지고 이이가 스스로 점유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선세(船稅)를 속여서 차지하였다는 말도 속인 데서 나온 것입니다.
또 정도에 맞지 않게 빼앗았다는 것은 이이의 형 이번(李璠)이 백천(白川)에서 해택(海澤)의 공한지(空閑地)를 얻어서 이미 입안(立案)을 받았다가, 봉흔(奉訢)에게 빼앗겨 이번이 송사하여 이겼는데, 봉흔이 이것을 원망하고 욕하기 때문에 이이가 형에게 버리도록 권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밭두둑을 사양한 아름다운 뜻 인데, 도리어 빼앗았다는 이름으로 씌운단 말입니까? 하물며 형이 한 일을 이이에게 돌리니, 참소하는 자의 교묘한 꾀입니다.
공서에서 대신 내었다는 것은 개성부(開城府) 혜민국(惠民局) 밖에 빈터가 있어, 이이의 형 이번이 일찍이 입진(入陳) 문자를 호조(戶曹)에 바쳐 떼어 받으려 하였는데, 호조에서 허락하지 않아서 이번이 또한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이에게 관계되는 것이 아닌데, 이름을 대신하여 받아냈다고 하는 것은 더욱 무리한 말입니다.
곡식 백 석을 받고 그의 형이 살인을 하고 해택(海澤)의 이익을 점령하였다는 말에 있어서는 더욱 증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송응개가 조작한 말에 불과합니다. 공론이 있으면 허실이 저절로 분별될 것입니다.
송응개의 말이 과연 그 실상이 없다면 임금을 기망한 죄는 저절로 정한 형벌이 있는데, 어찌 한 간신을 용서하여 어진 사람을 방해하는 화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들으니, 송응개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이이가 일찍이 말하기를, ‘송응개의 사람됨이 대대로 악한 짓을 계승하여 백성의 집을 헐고 그 아비를 장사지냈다.’ 하였는데, 송응개가 이 때문에 이이를 더욱 깊이 원망하여 모래를 머금고 틈을 엿보아 사감으로 보복을 도모하여 참소하는 말을 방자하게 행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험한 심술이 반드시 이이를 죽을 땅에 몰아넣은 뒤에 그만두려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성혼은 한 사람의 처사(處士)일 뿐입니다. 산림에 은거하면서 명예를 구하지 않았으니, 본래 동ㆍ서 편당 가운데의 사람이 아닌데, 간사한 의론이 바야흐로 성한 것을 보고 어진 사람이 직위에서 떠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정성을 쏟아서 글을 올려 현사(賢邪)를 극력 분변하였으니, 공평 정대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어찌 조금이라도 사의(私意)가 그 사이에 있겠습니까? 송응개가 감히 성혼이 이이와 서로 옹호하여 임금의 총명을 속인다고 지목하여 일망타진하려는 계교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인심이 더욱 분해하고 공론이 더욱 격발(激發)하며 눈물을 흘리며 크게 탄식하고 팔뚝을 걷어붙이지 않는 자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 이이와 성혼의 진퇴가 실로 국가의 안위(安危)와 도학(道學)의 성쇠에 관계되는데, 간사한 사람에게 무함을 당하여 세상에 용납될 수가 없으니, 나라가 비게 된다는 탄식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교만한 오랑캐의 침략이 급박하고 백성들의 시달림이 심하니, 이야말로 바로 신하가 군사를 조련하고 백성을 구휼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하는데, 일찍이 한 계책을 세우고 한 꾀를 기획하여 시국의 어려운 것을 구제하지 않고 오히려 사갈(蛇蝎)의 독기를 품어 감히 바른 사람 해칠 꾀를 방자히 행하여 성주(聖主)로 하여금 고립되게 하니, 국사가 매우 위태합니다,
아! 동서 붕당(朋黨)의 시작이 일조 일석의 일이 아니어서,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당초 조짐이 일어나던 날에는 형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을 억제하는 뜻을 보여 진정시키는 계책을 삼는 것이 마땅하였지만, 지금은 충량(忠良)한 사람을 해치는 정상이 다 드러났으니, 쾌하게 왕법(王法)을 시행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간사한 사람을 버리는 것이 다만 외임으로 보내는 견책에 그치시니, 이것이 어찌 임금이 소인을 처단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아! 우순(虞舜) 같은 지극한 어짊으로도 반드시 사흉(四凶)을 죄주었고, 공자의 큰 덕으로도 반드시 소정 묘(召正卯)를 베었으니, 이는 진실로 군자와 소인은 같은 조정(朝廷)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송응개가 어떻다고 보십니까? 어진 이를 투기하는 죄악이 정사를 어지럽히는 것[亂政]보다 못하지 않고, 무함하는 죄는 실로 명령을 어기는 것[方命]보다 더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현사(賢邪)의 분별을 살피시고 소인을 내치고 군자를 올리는 법을 엄하게 하신다면 사기(士氣)가 이것으로 인하여 진작될 수 있고 국맥(國脈)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부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시속을 따르고 세력에 붙어서 탄핵을 주장하는 자가 어찌 다만 송응개 한 사람뿐이겠습니까마는, 신 등이 송응개만을 말하는 것은 그 계사(啓辭)를 보니, 근거 없는 말을 날조하여 정상과 태도가 극히 간사하므로 끝까지 논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복하여 자세히 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소장을 보니, 충의가 분발하고 말이 당당하여 죽지 않은 간신이 뼈가 이미 차가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그대 같은 무리를 얻어서 조정에 두겠느냐? 내가 깊이 가상히 여기고 감탄한다. 송응개는 이미 형벌을 감하여 견책과 벌을 시행하였으니, 그대들은 그리 알라.”
하였다.
부제학 홍성민(洪聖民)ㆍ부수찬 백유함(白惟咸)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국가가 불행하여 사류가 서로 의심하고 막히어 피차를 구분하여 조정이 안정되지 못한 걱정을 가져왔습니다. 옛 역사를 두루 보건대, 국세가 이와 같고서 능히 장구하게 보전한 일이 있었습니까? 사류를 위한 계책으로는 반드시 묵은 잘못을 버리고 새롭기를 도모하여 의심을 없애고 간격이 있던 것을 화합한 후에야 조정이 통일되고 국맥(國脈)이 견고하여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의심하는 자가 더욱 의심하고 막힌 자가 더욱 막히어 이리저리 서로 인습하여 나라를 곧 망칠 것이니 깊이 통탄할 일입니다.
대저 사림은 하나의 사람일 뿐인데, 처음에 미세한 일로 인하여 점점 어긋나고 막히게 되어 동ㆍ서(東西) 두 글자가 표방(標榜)이 되었으니, 식자는 이미 이것으로 인하여 난(亂)의 징조가 될 것을 근심하였습니다. 이때에 이조 판서 이이가 힘써 화평의 의론을 주장하여 전하께 상달할 것도 이 때문이요, 사류에게 전하여 타이른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나라를 위한 것이지 다른 것을 위함이 아닌데, 도리어 서인을 두둔하고 동인을 억제하는 것으로 의심을 받아 이런 시끄러움을 가져와서 나라가 흔들리게 되었으니, 만일 화평의 의론을 당시에 행하게 하였던들 어찌 오늘의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이를 배척하는 무리들이 처음에 어찌 감히 공격하려고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오래 의심을 쌓아 한두 사람이 주장하자 나머지는 항거하지 못한 것입니다. 송응개 등 세 사람이 진실로 죄가 없지 않으나 북쪽에 귀양보내는 것은 과중합니다. 이 길에 가시밭이 막힌 지가 거의 20년인데, 하루아침에 틔워 놓는 것은 매우 맑은 조정에 흠이 되는 일이니, 신 등은 조정의 의심이 또한 이것으로 인하여 그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조정에 그동안의 병통은 모두 의심이라는 한 글자에 있었습니다. 무릇 사람이 남과 나 사이에 지극히 공평하고 밝은 자가 아니면, 의심하면 어그러지고 어그러지면 막히어 말을 능히 다하지 못하고 정을 능히 통하지 못하여 다만 남의 그른 것만 보고 옳은 것은 보지 못하여 점점 자신도 모르게 모함하는 지경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부터의 공통된 근심인데, 지금에는 더욱 심합니다. 만일 이 병통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끝내 어떻게 피차를 합하고 사림을 일치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간원(諫院)에서 올린 차자가 비록 진정시키려는 계책에서 나왔으나 오히려 지나치게 염려한 것을 면치 못하여 뜻이 편벽되고 말이 어긋났으니, 심히 괴이합니다. 대저 항간의 근거없는 말은 사대부된 자가 귀로 들을 수는 있어도 입으로 차마 말할 수는 없는 것인데, 말하기를, 아무개는 아무개의 처제(妻弟)이고 아무개는 아무개와 사돈간이니 아무개가 논하는 것은 공론이 아니고 아무개의 말은 아무개의 무리에게서 나온 것이고, 아무개는 아무개의 친구이고 아무 곳 유생은 아무개의 문객이니, 상소 가운데에 논한 것이 간교하고 익숙하여 먼 지방 한미한 선비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면서, 근거없는 일을 가지고 하나하나 의심을 하여 감히 말을 만들어서 대번에 남에게 악한 이름을 씌우니, 그 일이 애매하지 않습니까?
이 꼬투리가 한 번 생기면 신 등은 삼가, 혹은 저쪽 혹은 이쪽에서 근거없는 말이 서로 일어나 의심하고 막히는 것이 날로 더하여 편안하고 조용할 기약이 없을까 염려되는데, 하물며 화평의 복을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국가의 위태한 증세가 하나가 아니어서, 밖으로는 변방의 일이 매우 급하고, 안으로는 나라 근본이 이미 병들었으며 기강이 풀리고 흩어져서 수합할 수가 없어서 급급한 형세가 아침저녁을 보전할 수가 없으니, 이것이 군신(君臣) 상하가 협력하여 함께 구제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무릇 신하된 사람이 서로 경계하여 의심하고 막힌 것을 활짝 풀어 버리고 모두 태화(太和)의 지경으로 돌아가서 각각 그 직책을 수행하여 오직 국사에 힘쓰는 것이 또한 가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유념하여 살피소서. 재결을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극하다, 말이여! 내게 이와 같은 신하가 있으니, 국사를 다시 근심할 것이 없다. 차자의 뜻은 마땅히 다시 살펴 유념하겠다.”
하였다.
21일 부제학 홍성민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홍인서 등이 현저하게 비방을 당하였다 하여, 피혐(避嫌)하여 사퇴하였는데, 장령 송승희(宋承禧) 등이 언관(言官)은 가볍게 체임시킬 수 없다 하여 출사(出仕)시키기를 계청(啓請)할 때에 동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자 피하여 물러갔고, 대사헌 이우직(李友直)은 의론을 억지로 같이할 수 없고 동료가 사피하였다 하여 피혐하였습니다. 그 진달한 뜻이 모두 조정(調停)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서로 모순되는 것은 의견이 일치하지 못한 데에 불과한 것이니, 무슨 해로운 것이 있겠습니까.
사류가 대립한 뒤로부터 혹 피차 항간(巷間)의 말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는데, 이것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모두 억측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근거없는 것으로 의심을 하여 말을 만들면 피차에 근거없는 말이 서로 비등(沸騰)하니, 어찌 종식될 때가 있겠습니까. 이때를 당하여 만일 진정시키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양쪽을 조정시켜 서로 어긋남이 없게 하려고 한다면 이 길을 단연코 열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각각 들은 것으로 인하여 과감하게 말하고 숨기지 않는 것이 진실로 언관(言官)의 직책이지만, 애매하여 근거없는 일을 어찌 언관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언관은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말썽이 있으면 직책에 있지 못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신 등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경악(經幄)에 있으니 또한 하나의 논사(論思)하는 신하입니다. 언관이 된 자가 어찌 논사(論思)하는 자의 말썽을 당하고서 감히 출사할 리가 있겠습니까. 장령 송승희 등이 그들의 출사를 계청(啓請)한 뜻이 구차스러운 잘못이 없지 않고 대사헌 이우직은 동료와 더불어 의론이 서로 합하지 않았으나 별로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청컨대, 대사간 김우옹ㆍ사간 황섬ㆍ헌납 홍인서ㆍ정언 박홍로ㆍ장령 송승희ㆍ지평 정윤우(鄭允祐)와 성돈(成惇) 등을 아울러 체차하도록 명하시고 대사헌 이우직은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조 판서 이이가 물러가 해주(海州)에 있으면서 사직하여 상소하기를,
“삼가 비답을 받들어 보니, 말 뜻이 진실하고 위로하여 타이르심이 간곡하여 백대(百代) 뒤에도 귀신을 울릴 만한데, 하물며 신이 친히 받았으니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받들어 채 반도 읽기 전에 눈물이 턱에 흘러 내리니 전하께서 신하를 대우하시는 정이 아! 지극하십니다. 한스러운 것은 신이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우러러 성의(聖意)에 부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새로 제수하신 것은 백관(白官)의 우두머리인데, 신이 바야흐로 죄를 지고 자책하고 있으니, 어찌 무릅쓰고 자리를 차지할 도리가 있겠습니까. 떨리고 황송하기가 전날보다 심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근일의 일은 조정 신하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점점 서로 과격해져서 마침내 서로 보합(保合)하지 못하니, 참으로 처음에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공격이 비록 지나쳤으나 신이 실로 하자(瑕疵)가 많고, 과실이 양쪽에 고루 있으니 죄를 마땅히 나누어 받아야 합니다.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홀로 견책과 벌을 면하고 도리어 총애와 은택을 받겠습니까?
아!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성군을 만남이 천년에 한 번 있는 행운이니, 함께 공경하고 협력하여 정상을 다하고 몸을 바치어 태평한 다스림을 도모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것이 바로 오늘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일이 크게 어그러져서 어지럽고 간격이 생겨 오직 승부만 다투고 시비는 돌아보지 않고, 심지어는 같은 배에 탄 사람이 변하여 적국(敵國)이 되고 친구끼리 칼을 둘러메고 서로 노려보며, 아래로 사림(士林)에 이르기까지 또한 만촉(蠻觸) 의 싸움을 가져와서 조정과 항간(巷間)이 갈라져 둘이 되었습니다. 이 쟁단(爭端)을 끌어 화태(禍胎)를 깊이 양성하면 후일의 근심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은 참으로 천고에 없는 변고로, 마침내 지존(至尊)으로 하여금 홀로 사직(社稷)을 근심하게 하였으니, 아! 슬픕니다. 고요히 그 허물을 생각하면 곧 신 때문이니, 머리털을 뽑고 몸이 가루가 되어도 우러러 군부에게 사죄할 수가 없습니다. 의리상 마땅히 문을 막고 거적을 깔고 마음으로 자책하고 고쳐 도모하여 만년의 효과[桑楡]를 거두어 이전의 허물을 덮어야 할 터인데, 어떻게 감히 얼굴을 들고 염치도 없이 재차 밝은 조정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바야흐로 생겨나는 말이 날로 새로워지고 번갈아 날뛰어 자못 안정되고 종식될 기약이 없고 여러 사람의 의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뭇사람의 노함이 오히려 풀리지 않았으니, 반드시 마음이 공정하고 식견이 밝아서 여러 사람의 물망이 심복하는 사람을 얻어서 나라의 전형(銓衡)을 잡아서 경박하고 조급한 사람을 억제하여 물리치고, 안정하고 조용한 사람은 권장하여 등용시켜 과격한 의논을 진정시킨 후에 결렬된 사태를 거의 수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총재(冢宰)의 중임을 죄가 드러난 어리석은 신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위로 국사를 생각하시고 아래로 신의 충곡(衷曲)을 살피시어 신에게 새로 제수된 직책을 해임하시고 겸대(兼帶)한 직책도 모두 회수하시어 적임자를 가려서 주소서. 그리하여 신의 평소 소원을 허락하여 조심하고 반성하여 보통 사람의 반열에 끼일 수 있게 해주신다면 하늘이 진실로 신을 옥같이 만드는 것이고 전하께서 성취시켜 주시는 것이니, 천지 부모이신 성상의 은혜를 장차 어떻게 갚겠습니까?
아! 천안(天顔)을 우러러보는 것이 신의 지극한 정리인데, 사랑하는 은혜가 비록 간절하나 의리를 헤아리면 나오기가 어려워서 여러 날을 두고 깊이 생각하니 머리털이 세고 마음이 문드러지도록 머뭇거리다가 끝내 사면하는 글을 올립니다. 지면을 대하니 오열을 억제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상소는 보았소. 근일의 일은 내가 감히 다시 번거롭게 타이르지 않겠소. 다만 경은 조정의 중신(重臣)으로 좋고 나쁜 것을 나라와 함께 하는 자이니, 산림(山林)에서 은둔하는 선비에 비교될 바가 아니오. 경의 진퇴는 또한 임의로 할 수 없는데, 애초에 내 앞에서 하직하지 않고 도망하는 것같이 하였으니, 의리에 온당치 못할 것 같소. 하물며 지금 이조의 장관은 경이 아니면 안 되오. 내가 현재 경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주리고 목마를 뿐만이 아니오. 경은 부디 다시 사양하지 말고 속히 역마를 타고 올라오시오. 설혹 사직을 하더라도 반드시 내 앞에서 친히 사직하는 것이 예(禮)에 맞을 것이오.”
하였다.
예조 판서 정철이 사직하여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임금이 신하에 대해 보전하게 하여 주는 것이 가장 제일입니다. 신이 본래 작은 그릇이나 박(薄)하고 용렬한데, 지나치게 잘못된 은혜를 입어 짐을 져야 할 사람이 말을 타서 도적을 초래하는 형상이 되어 위로 큰 은혜를 저버렸으니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파면을 시키지 않으시고 물러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것은 신의 죄를 중하게 하고 공론을 더욱 격하게 하는 것이지, 보전하게 하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종실(宗室 경안령(慶安令을 가리킴)이 어전(御前)에 면대하여 말씀을 드린 것과 유생이 상소한 것에 대해서도 모두 신이 시킨 것이라 의심하여 중하게 헐뜯고 배척함을 당하는 것이 이토록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신이 평소의 몸가짐이 형편없어 사람들에게 믿음을 받지 못함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이 의심하는 것입니다.
비록 미관 말직이라도 조금만 사람들이 말썽이 있으면 명절(名節)을 아껴 몸을 이끌고 물러가지 않음이 없는데, 하물며 경대부의 반열에 있으면서 몸이 중한 죄를 지고 맑은 의논에 용납되지 못하는데, 어찌 염치없이 얼굴을 들고 조정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몸이 만분의 일이라도 밝은 세상에 도움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감히 염치의 절조를 허물어뜨리고 사류(士類)에 수치를 끼칠 수는 없는데, 하물며 신이 조정에 있으면 조정이 이로 인해 안정되지 못하고 사풍(士風)이 이로 인해 크게 무너져서, 위로는 맑은 조정의 욕이 되고 아래로는 조정 선비들의 의심이 쌓이게 될 것이니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으나 어찌 감히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신이 두루 보건대, 예로부터 지금까지 몸이 중한 논박을 당하고서 외람되게 관직에 있는 것은 결코 이런 이치가 없습니다. 다만 선비된 자가 스스로 그 몸을 아낄 뿐만 아니라, 임금도 신하를 예(禮)로서 부려 그 뜻을 굽히지 않게 하기 때문에 군신 상하 양쪽이 다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하는 것입니다. 만일 혹시 은총과 영화를 탐하여 남들이 비웃고 욕하는 대로 내버려 둔다면, 이것은 염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아! 염치가 없는 사람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지금 신이 이 같은 죄악을 지고 이 같은 중한 논박을 입었으니, 하루도 조정에 서서 명기(名器)를 욕되게 할 수 없습니다. 또 신은 병이 날로 깊어져서 정신이 혼미하여 조석을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은 천지 부모이시니, 신의 벼슬을 삭탈하시고 시골에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여 잘못을 반성하고 허물을 고쳐 여생을 보전하게 해 주신다면 국가에서 선비의 대우하는 예(禮)가 거의 시종(始終)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니, 다만 어리석은 신 한 사람의 다행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별로 잘못한 것이 없으니, 한때 언관의 말은 족히 개의할 것이 없소. 경은 사직하지 말고 빨리 나와 직임을 수행하시오.”
하였다.
영상 박순이 사직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조금도 재주와 장정이 없는데 잘못 은총의 발탁을 입어서 정승의 자리를 더럽힌 지가 지금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경상(經常)을 지키고 고집하는 어리석음만 있고 임기 응변하고 때에 맞출 만한 쓸모가 없어서 몸을 보전하는 지혜가 부족하니, 어찌 나라를 위하는 계책을 품었겠습니까. 안으로 반성하기를 자못 자세히 하고 익숙히 하여, 비록 밝은 세상에 애착을 가지고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특수한 은총을 입어 조그마한 마음에 감격하여 썩고 둔한 자질을 갈고 닦아서 구구한 정성을 다하고자 하나 얕은 계책이 이미 다 되어 더할 수 없고, 근력이 이미 쇠하여 강작할 수가 없습니다. 노둔한 말이 평소에 노력을 다하는 것은 오히려 힘쓸 만하지마는, 불행히 힘이 지쳐서 재앙이 생기면 오직 마땅히 고삐와 굴레를 벗어야 혹시라도 보존할 수 있는데, 만일 채찍을 가지고 임하여 멀리 달리자고 책한다면 감당하지 못하고 넘어져 죽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입니다.
신이 재주와 기량이 얕고 짧은데, 이미 못난 것을 시험하였고, 게다가 병이 항상 침노하여 곤하고 쇠한 것이 점점 중하여 고질이 되어 오랫동안 끌고 있고 온갖 병이 번갈아 달려들어 의약이 효과가 없어 골짜기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간고(艱苦)하고 민망하고 박절한 정상을 일찍이 성상께 모두 다 아뢰었으니 감히 다시 번거롭게 진달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정승의 자리는 사방이 함께 우러러 는 자리이므로 조정의 중함이 됩니다. 만일 명가 빛나고 재목과 역량이 걸 맞는 자가 차지하고 있으면 한 몸의 영화뿐 아니라, 실로 조정의 영광이 되는 것이지만, 혹 병들고 꺾이고 쇠잔하며 어둡고 용렬하고 무능력한 자가 차지하고 있으면 한 개인의 수치가 될 뿐만 아니라, 한결같이 조정의 욕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 계심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것 같아서, 널리 온갖 일을 밝게 비추어 항상 경(經)과 권(權)에 부합하니, 옛날 임금들을 헤아려 볼 때 어찌 훨씬 뛰어날 뿐이겠습니까. 거룩한 덕을 받들고 슬기로운 계책을 돕는 것은 용렬한 하등 인물에 달려 있지 않으며, 또 북쪽 변방이 불안하여 중외(中外)가 소요하여 전하로 하여금 홀로 근심하시게 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많은 신하들의 죄입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능히 시무(時務)를 잘 처리하여 세상에서 중망을 받는 사람을 뽑아서 군국(軍國)의 일을 책임지워 전철(前轍)을 바꾸어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할 것이요, 늙고 병든 물건을 그대로 두어서 다시 후회와 부끄러움을 남길 것이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맑고 근신하고 아담한 지조로 사람을 사랑하고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고 안색을 단정히 하고 조정에 서니, 참으로 만물을 진압하는 큰 멧부리요, 충성과 부지런함을 나라에 바치니 진실로 내를 건너는 데의 배와 노와 같은 훌륭한 신하이시오. 바야흐로 의지하고 맡길 뜻이 간절하니, 어찌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가 쉬려는 뜻을 용납하겠소. 하물며 지금 나라 안에 일이 많고 백성이 편안하지 못하니, 경은 속히 나와 정무를 처리하고 굳이 사양하지 마오.”
하였다.
24일. 대사간 이해수(李海壽)가 숙배(肅拜)한 뒤에 아뢰기를,
“신이 식견이 고루(固陋)하면서 외람하게 청직(淸職)의 반열에 올랐으나 일찍이 성덕(聖德)의 만분의 일도 도운 것이 없는데 뜻밖에 이번에 잘못된 은혜가 또 인망(人望)의 밖에서 나왔으니, 명을 듣고 황공하여 몸 둘 곳이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체통이 문란하여 조정의 기강이 서지 못하고, 사림이 분열되어 국가가 파괴되었으니, 성심(聖心)이 진정시키고자 하나 거조가 중도를 잃었고, 여러 의론이 화평하고자 하나 의심하고 막힌 것이 다 풀어지지 못하여 군신(君臣) 사이에 정의가 믿어지지 못하고, 조정 선비의 의론이 일치되지 못하여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므로 조정(調停)될 기약이 없게 되었으니, 무릇 이 몇 가지가 위태하고 망할 조짐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변방 걱정이 심히 급하고 나라 근본이 날로 병들어서 천시(天時)와 인사가 근심스럽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물정(物情)을 진압하고 쓰러지는 것을 부지하는 것이 상신(相臣)의 책임 아닌 것이 없지만, 임금의 잘못을 보충하고 바로잡는 직책이 그 책임 또한 어찌 작다하겠습니까. 비록 공평하고 충성하고 정직하여 당세의 중한 명망을 진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 있게 하더라도 오히려 혹 바로잡고 보합(保合)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신같이 형편없어 사람들의 비방과 멸시를 받는 자이겠습니까? 신이 비록 벼슬을 탐하여 무릅쓰고 나와서 한 몸의 영화를 삼는다 하더라도, 명기(名器)를 욕되게 하고 국사를 그르치는 데에야 어찌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속히 신의 직책을 체임하여 적임자에게 주소서.”
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0월 20일. 행 이조 판서 이이가 해주로부터 서울에 돌아와서 숙배한 뒤에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어리석은 신이 임금을 섬기는 것을 형편없이 하여 죄과(罪過)를 초래하였으니, 스스로 지은 재앙은 피할 수 없는 것인데, 천은(天恩)이 특별히 덮어 주시어 현륙(顯戮)을 면하고 작록을 그대로 보존하였으니, 죽은 것을 살리고 백골에 살을 입혀주신 은혜는 우러러 갚을 길이 없습니다. 신 같은 자가 만일 나라에 이로울 것이 있다면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사양하지 않겠지만, 다만 생각하건대, 책임은 크고 힘은 미약하여 끝내는 일을 낭패하여 위로는 성상(聖上)께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신의 몸을 버리게 될 것이므로 감히 대궐에 호소하여 어리석은 정성을 다 여쭙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 신의 작은 공로를 잊지 않아 유(帷)ㆍ개(蓋)를 주는 데에 견주어 목숨을 보전하게 하시는 것은 오히려 신이 핑계하고 받을 수 있지마는, 그대로 두지 않고 반드시 신을 총재(冢宰)의 자리에 두어 전형(銓衡)을 맡기시는 것은 신을 써서 국사를 하고자 하심이니, 밝으신 성상께서 우연히 잘못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까?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으나 스스로를 아는 것은 밝습니다. 신이 무릅쓰고 중임을 맡아서는 안 될 이유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청하옵건대, 엄한 벌이 내릴 것을 무릅쓰고 다 세어 보겠으니, 삼가 바라건대 헤아려 주소서. 신은 타고 난 기질이 경망하고 학문은 엉성하며, 재주는 오소(迃疎)한데 뜻은 넓으며, 지식은 얕은데 말은 커서 그 계책을 들어보면 정성스러운 것 같으나 일을 시행하는 것은 실상 엉성합니다. 이 때문에 여러 사람의 마음이 복종하지 않아서 뭇 비방이 집중되는 것이니, 오늘에 신을 흠잡는 자가 어찌 모두 원수와 원망이겠습니까. 실로 공론에 의해 비방을 받을 것이니, 신이 중임을 맡는 것이 불가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세도(世道)가 이미 퇴폐하고 인심이 이미 무너져서, 묵은 것을 답습하는 자는 계책이 없고 바로잡고 개혁하려는 자는 비방에 걸리니, 지금 속수무책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위태하고 망하는 것이 반드시 닥칠 것이고, 건의(建議)하여 법도를 고치고자 하면 여러 사람의 노여움이 불같이 뜨거우니, 비록 호걸의 선비의 충량(忠良)한 재상으로도 또한 손을 대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신같이 엉성하고 박잡(駁雜)한 자가 고독하고 불안한 처지에 감히 무슨 일을 하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불가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신은 본래 어리석고 조심스러우며 형세를 살피는 데에 부족하여 여러 번 소장을 올렸는데 곧 시휘(時諱)에 저촉되어 사림의 마음이 따르지 않아서 고립하여 인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 한 번의 소요는 신이 제배에게 믿음을 받지 못한 소치이니, 어찌 반드시 신을 죄에 빠뜨리고 무함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벗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고서 능히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는다는 것은 예전에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신이 염치없는 얼굴을 들고 전형(銓衡)을 잡아서 인물을 등용시킨다면 누가 믿고 복종하겠습니까? 이것이 불가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
신이 젊어서부터 질병이 많았는데 쇠하게 되자 더욱 심하여 혈기가 소모되고 정신이 감소되어 잠깐만 괴롭게 움직이면 곧 현기증이 납니다. 지금 지혜와 생각을 다하여 임금의 직책을 돕자니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힘을 내어 반열에 나와서 작은 공로를 바치자니 근력이 미치지 못합니다. 불가한 네 번째 이유입니다.
신이 처음 마음을 변하여 구차하게 작위(爵位)를 보존하고 먹는 것만 일삼고자 한다면 진실로 배운 것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니, 차마 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만일 재주와 힘을 헤아려서 억지로 시의(時議)에 따르고자 한다면, 이 네 가지 불가함을 지니고는 끝내 걸음을 옮길 땅이 없습니다. 신이 무슨 마음으로 분수 넘게 백관의 우두머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전하의 국사가 하루하루 위태하여져서 백성은 도탄에 빠져 구제할 길이 없고, 선비의 기풍은 흐리고 경박하여 교육할 희망이 없고, 조정 의론은 흐트러져서 수습할 수 없고, 백관은 직무를 태만히 하여 진작할 길이 없으니, 지혜 있는 자는 손을 움츠리고 어진 자는 멀리 물러가서 조정 보기를 위기(危機)나 불구덩이같이 여겨 모두 화가 장차 자신의 몸에 미칠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충신이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마땅히 시세를 잘 관찰하여 재주와 정성이 구비하여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을 잘 골라서 넘어지는 것을 부지하고 위태한 것을 유지하는 책임으로 맡기신다면 혹시 거의 망하게 된 형세를 만회할 수 있지만, 신같이 번번히 실패한 외로운 종적은 한 번 그르친 것도 이미 심한데, 어찌 두 번 그르치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신이 지금 아무리 생각하여도 결코 직임을 수행할 도리가 없습니다. 신하를 알기로는 임금만한 이가 없습니다. 신이 지금 사직을 청하는 것은 진정에서 우러나왔으니, 밝으신 성상께서 어찌 굽어 살피시지 않습니까. 신이 대궐에 나온 것은 참으로 임금에 대한 연모(戀慕)가 간절하여 천안(天顔)을 우러러보고자 한 것뿐이요, 시사를 담당하는 것은 실로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인애(仁愛)로 덮어주시고 아랫사람을 불쌍히 여기시어, 곡진하게 은혜를 베푸시어 만일 벼슬을 그만두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전리(田里)에 물러가서 선비들과 더불어 학문을 닦아 성군(聖君)의 은택을 노래하고 칭송할 것입니다. 이는 신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만일 성상께서 보잘것없는 사람들도 버리지 않아서 인재를 다 쓰고자 하신다면 신의 총재(冢宰)와 문형(文衡)의 직책을 체임시키시고 한산(閑散)한 관청에 두어서 경악(經幄)에 출입하여 임금의 잘못을 보충하고 바로잡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의논하는 신하의 말석에 참여하여 어리석은 충성을 바치게 하신다면 사람을 쓰는 것이 적합하여 공사(公私)간에 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곡진하게 채납해 주소서. 신이 도중에 병이 생겨 전하의 부름에 달려오는 것이 늦어졌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중합니다.”
하니, 인견(引見)하겠다고 전교하였다.
비망기에 이르기를,
“성혼이 이미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서 한 번도 입대(入對)하지 않고, 어찌하여 내게 하직도 하지 않고 지레 스스로 시골에 돌아가기를 도망하는 것같이 하였는가? 이것은 참으로 그대를 대우하기를 정성스럽게 하지 못하여 사람의 말썽이 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나의 허물이 크다. 지금 그대를 이조 참의로 삼을 것이니, 그대는 잡된 말에 개의하지 말고 속히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
하였다.
이조 참의 성혼이 파주(坡州)에 있으면서 사직하여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본래 고질이 있는 폐인(廢人)입니다. 천거되어 벼슬을 얻은 지가 지금까지 15년이 되어, 크고 작은 벼슬에 제수된 것이 무려 50~60번이 되었지만, 신이 하루도 직임을 수행한 일이 없는 것은 진실로 병들어 기운이 지쳐서 감히 벼슬에 나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금년 봄에 거듭 천은(天恩)을 입어 발탁하여 당상관(堂上官)을 제수하셨는데, 고질병으로 폐인이 된 신의 입장을 헤아려보건대, 어찌 직임을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천서(天書)를 여러 번 내려 말씀이 융숭하고 정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낱 어리석고 천한 신은 집에 굳게 누워서,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위에서 근로하시게 하고 신하는 아래에 편안히 있는 것이 자못 신하된 자로서 감히 스스로 편안히 여길 바가 아니기에, 죽음을 참고 출발하여 부축을 받아서 서울에 이르렀으니, 다만 몸소 궐하에 나와 공손히 사퇴의 뜻을 진달하고자 한 것뿐입니다.
서울에 이르러 여러 번 사퇴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여, 받은 직명(職名)이 반드시 이르고야 말 사세이므로, 마침내 본래의 뜻을 변하여 외람하게 주자(朱紫)를 입고 천문에 숙배사은(肅拜謝恩)하였으니, 몸에는 영광이고 다행입니다만 신의 마음이 실로 부끄러워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더욱 깊어 오직 물러갈 길만을 생각하였습니다. 오직 한 번 경악(經幄)에 들어가서 일월(日月) 같은 성상을 우러러보는 것이 신의 지극한 정리이니, 구학(溝壑)에 돌아가 죽더라도 참으로 한이 없겠으므로 달포를 객지에 있으면서 병이 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언관(言官)이 일을 말하는 신하를 공격 하였는데, 일이 치란(治亂)에 관계되는데도 한 사람도 득실(得失)을 말하는 자가 없음을 보고 신이 문득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소장을 올려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시의(時議)가 크게 격발(激發)하여 정원(政院)과 삼사(三司)가 신이 사림을 일망타진하려 한다고 논죄하였습니다. 신이 대궐에 나아가 물러가기를 청하자니 논핵을 당한 사람의 도리로 보아 스스로 핑계대기 어렵고, 머물러서 일이 정하여지기를 기다리자니 죄안(罪案)이 깊고 중하여 하루도 서울에 용납되기가 어려워서, 부득이 새벽에 도망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전리(田里)에서 대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번에 임금의 은혜가 편벽되게 덮어 주시어 죄로 때묻은 것을 씻어 주고 특별히 천관(天官)의 추이(樞貳 참의(參議))를 제수하시고, 또 간절하고 정성스러운 윤음을 내리시어, ‘그대를 대우하기를 성의로 하지 못하였다.’는 말씀과 ‘불러 초빙하기를 가까운 데로부터 한다.’는 말씀이 계셨으니, 어리석고 보잘것없는 신이 어떻게 이러한 대우를 전하께 받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은혜로운 전교를 받들어 보니, 감격이 지극하고 슬퍼서 눈물이 얼굴을 적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하건대, 자고로 부름을 받은 선비가 간사하다는 이름을 얻은 자가 적은 것은 명망과 실상이 본디 진실하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이 도리에 맞기 때문입니다.
신은 이미 방정(方正)한 사람이 아니어서 망령된 말로 화를 격발시켜 조정이 크게 소요하여 나라 근본이 흔들리고 사(邪)와 정(正)이 서로 싸워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하게 된 것이니, 모두 신의 한 마디 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신의 죄를 따진다면 만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습니다. 대간(臺諫)이 신의 간사함을 지척(指斥)한 데 이르러서는 실로 신이 스스로 편당이 들어가서 즐겁게 많은 구설을 취한 것이니, 어찌 일호라도 원망하고 허물함이 있겠습니까.
신이 벼슬하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어찌 오늘날 죄를 입고 거듭 탄핵을 당함으로 인하여 물러가 원수와 원망을 피하는 계교를 삼겠습니까.
지금 신의 병이 더욱 심하여 마르고 야위어 위급하기가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인데, 날씨가 이미 추워져서 칩거(蟄居)하기에도 바야흐로 급해서 멀리 대궐에 달려오는 것도 진실로 스스로 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밤낮으로 공관에 있으면서 대부의 뒤를 따르기를 바라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어리석은 신이 끝내 쓸 만한 물건이 아님을 살피시고 신의 병이 전혀 벼슬에 종사할 도리가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신을 부르는 명을 끊으시고 신의 벼슬을 삭탈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성은(聖恩)에 젖어서 여생을 시골에서 보전하게 해 주신다면 족합니다. 신이 지금 스스로 호소하는 말은 모두 신이 이미 징험한 어리석은 짓이니,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정성을 반드시 전하께서는 믿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전과 같이 여러 번 불러 그치지 않고, 게다가 신의 병이 중하여 나오지 못하게 되면 신의 죄가 더욱 깊어져서 몸 둘 곳이 없게 될 것이고, 큰 소리로 호소하여 임금에게 변명하려 해도 어찌 용납되겠습니까. 신이 실로 크게 두려워서 엄한 위엄을 범하니 떨려 땀이 흐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니, 내가 심히 실망된다. 그대가 만일 오지 않는다면 지금 국사를 다시 손댈 수가 없을 것이다. 대저 군자가 세상에 처하면서 가해지는 횡역(橫逆)과 떠들어대는 여러 입을 진실로 면하기 어렵기는 하나, 만일 스스로 돌이켜 보다 곧다면 어찌 족히 마음을 움직이고 덕에 손상될 것이 있겠느냐?
지난 여름에 그대가 도하(都下)에 왔다가 어지러운 간사한 말로 인하여 그대가 도망하여 돌아가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그대를 대우하는 것과 그대가 나를 섬기는 것이 모두 처음은 있고 끝은 없는 것이니, 의리를 잃게 될까 두렵다. 이것은 비록 내가 변변치 못한 소치이나, 그대 마음에도 미안함이 없지 못할 것이다. 설사 벼슬에 종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마땅히 다시 와서 내 얼굴을 한 번 보고난 뒤에 소를 올려 사면하는 것이 예(禮)에 맞을 것이다. 내가 바야흐로 자리를 비워 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그대는 마땅히 애써 출발하여 속히 역마를 타로 올라오라.”
하였다.
성혼이 다시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혈성(血誠)으로 소를 올려 감히 충곡(衷曲)을 진달하고 삼가 비음(批音)을 기다려서 행여 조그마한 소원을 이룰까 하였습니다. 그런데 천서(天書)를 거듭 내려 사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온화한 유시(諭示)가 간절하여 진심(眞心)을 신의 마음에 넣어 주기를 집안사람과 부자간처럼 정성스럽게 가르쳐 주시고 임금을 섬기는 종시(終始)의 의리로 신을 가르쳐 주시며, 대궐에 들어와 뵙는 예(禮)를 신에게 타이르셨으니, 신이 받들어 읽기를 두세 번 하니 심정이 두렵고 황송하여 감격의 눈물이 저절로 떨어집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지(聖旨)가 간곡하여 자주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응당 다시 사피(辭避)하여 전하의 장려하심을 저버리겠습니까만, 신이 지극히 어리석어서 되풀이해 생각하여도 끝내 대단히 민망하여 그만두지 못할 것이 있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진심을 다 토로하여 재차 성상의 위엄을 번거롭게 함을 면치 못하니, 돌아보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이 지치고 병폐한 형상이 여러 사람의 눈에 나타나 있고, 죄를 진 실상이 나라 사람의 말에 넘치어, 애초에 한 가지 장점과 작은 선행이 관괴(菅蒯)의 쓰임에 이바지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지금 국운(國運)이 어려워져서 인재의 수요(需要)가 급한데 융숭하고 중한 명으로 한 어리석은 신을 불러들이신다면 사방에서 듣고 실망하여 맥에 풀려서 사람마다 속으로 비웃는 것이 신의 몸에만 돌아올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신은 혼미(昏迷)한 사람으로서 야위고 지치어 전도 착란한 것이 80~90세 늙은 몸과 같습니다. 무릅쓰고 나아가더라도 엎어지고 넘어져서 영원히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임무를 모두 폐하여 한 계책도 베풀지 못하고 헛되에 성은(聖恩)만 낭비하면서 시일만 넘긴다면 이것은 신이 연전에 도하(都下)에서 이미 시험한 바이니, 신이 말한 ‘알지 못하고 잘못 등용되었다.’는 것을 신이 이미 전에 징험했던 것입니다. 여러 번 나왔다가 물러간 것은 결국은 벼슬하지 않은 것과 같으니, 이미 물러갔는데 다시 나온다 하더라도 억지로 종사(從仕)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뿐만 아니라, 논핵을 당한 신하는 반드시 문을 닫고 반성하여 감히 출사(出仕)하지 않아야 요즘 사대부의 미풍(美風)인 것입니다
신이 당세에 죄를 얻어 다스릴 죄라 극히 중한데, 다행히 전하께서 지극한 현명함과 지극한 사랑으로 신을 매우 불쌍히 여기시어 시종 보전하여 주심을 힘입어서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 신이 만일 임금의 은총을 탐하여 갓을 털고 갓끈을 매어 진출할 생각을 한다면 염치의 풍도가 신으로 말미암아 더욱 무너질 것입니다. 신이 감히 도성에 들어갈 뜻을 내지 못하는 것은 오늘의 사세가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조정에 있는 대소 신하가 누군들 신이 다시 오지 못하리라고 생각지 않겠습니까?
신이 또 생각하건대, 자고로 초야에 있는 신하가 또한 대궐에 달려가 조회(朝會)하여 뵙고 돌아간 자가 있는데, 이것은 태평한 세상에 방외(方外) 선비를 대접하는 예(禮)입니다. 후세에는 군신의 분수가 정하여져서 각각 그 직무를 가지고 임금에게 뵙는 것인데, 어찌 감히 대궐에 나아갔다가 즉시 돌아가는 자가 있겠습니까. 지금 신으로 하여금 한 번 반열에 들어가서 천안(天顔)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초야(草野) 신하의 정이 이에 지극히 간절하나 신은 병들어서 직임을 수행하지 못하는 신하인데, 한갓 작은 정성을 품고 하루에 세 번 인견(引見)하는 총애를 희망한다면 이것은 임금을 연모(戀慕)하는 상정(常情)을 가지고 임금께서 알아 주는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지, 어찌 전하께서 신에게 명하는 뜻이겠습니까. 어리석고 미천한 신이 시종 나라를 저버리니, 임금 섬기는 시종의 의리에 있어 극히 결여(缺如)된 것을 아나, 재분(才分)이 미치지 못하고 큰 병이 얽히어 있어 신이 비록 생각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밤낮으로 서둘더라도 끝내는 조금도 개미 같은 미세한 신의 정성을 펼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아파서 뜨거운 불이 마음을 태우는 것 같고 뭇 화살이 몸에 집중되는 것 같습니다. 날씨가 이미 추워지고 묵은 병이 더 중하여지니, 분토(糞土)의 남은 생명이 아침 이슬보다 먼저 사라지려 하고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신의 번거로운 말을 살피시고 신의 절박한 뜻을 불쌍히 여기시어, 특별히 새로 내리신 명을 거두시고 관직을 삭탈하여 신으로 하여금 여생을 오막살이 집에서 보전하게 하신다면 종래 성세(聖世)에 천한 신에게 매양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는 은혜를 입힌 것이 이에 다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도리가 절박하고 사세가 극도에 달하여 슬피 고하고 비는 말이 다하지 않음이 없으니. 부르짖고 날뛰고 참람하여 재제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께서는 불쌍히 여기어 용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비록 불민하나 어찌 감히 그대의 뜻을 굽혀 직무로써 책임지우겠느냐. 장차 나의 마음을 열어주는 가르침을 들어서 시국의 어려운 것을 함께 구제하고자 함이다. 근일 간사한 신하의 귀역(鬼蜮) 같은 말은 치아(齒牙) 사이에 둘 것도 없다. 그대의 숙덕(宿德)으로 어찌 이것을 혐의하랴 ! 사양하지 말고 조리하여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
하였다.
세 번째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들으니,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있어 임금이 명하여 부르면 수레에 멍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출발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억지로 행하는 예(禮)가 아니라, 인정에 저절로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다만 이것을 가지고 제도를 만든 것뿐입니다. 오직 신은 그렇지 못하여 평상시에 제수하는 것과 예(例)에 따라 부름에 있어 생각을 움직이지 않는 듯이 하고, 반드시 은례(恩禮)가 분수에 넘고 온화한 유시가 두세 번에 이른 후에 바야흐로 우선 천천히 행하고, 서울에 와서도 직임을 수행하려 하지 않았으니, 군신간의 큰 질서가 신으로 말미암아 서지 않고 몸을 바치는 의리가 신으로 말미암아 더욱 민멸되었습니다.
신이 임금 섬기는 떳떳한 예절을 잃고 국법의 큰 죄를 범한 것을 스스로 알아서 송구하여 편안치 못한 지 또한 이미 오랩니다. 그러나 신이 어찌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하겠습니까. 사세가 불가능한 것이 있고 힘이 강작할 수 없는 것이 있어서이니, 이것은 나라 사람도 아는 것이요, 전하께서 통촉하신 바입니다.
지난날 6일에 신이 은혜를 입어 특별히 천관(天官)의 직임을 제수받았는데, 지금 50여 일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네 번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훈계하신 말씀이 융숭하고 정중하시니 신이 더욱더 황공하여 머뭇거리고 위축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천한 신하 때문에 전하의 심려에 근심을 끼쳤습니다. 신이 만일 병석에 누워 있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다면 어찌 감히 밖에 있으면서 다시 사양하겠습니까. 그래서 지치고 병든 몸을 부축하고 와서 궐하에 엎드려서 거듭 사면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니, 삼가 원하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신의 말이 진심에서 나온 것임을 살피시어 신의 직책을 해임하여 구학(溝壑)에 돌아가 죽게 하여 주소서. 이는 신의 큰 소원입니다.
신이 성은(聖恩)에 감격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나라에 보답하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매양 한 번 생각이 이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다만 마르고 야위고 혼미하고 전도되어, 비록 몸을 바쳐 종사(從仕)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나 또한 충성을 다할 길이 없습니다. 아! 하늘이 실로 폐하시니 어찌하겠습니까. 전조(銓曹)는 바로 사람을 선택하여야 하므로 여름에 신이 이미 굳이 사양하여 천은(天恩)을 입었사오니, 어찌 전에 감당하지 못한 것을 지금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관직의 임기가 이미 찼으니 법에 의거하여 응당 면하여야 합니다. 신이 일찍 궐하에 사면하지 못하여 관직을 오래 비워 두게 하였으니, 신의 죄가 이에 더욱 큽니다.”
하였다.

[주D-001]이부(嫠婦)도 근심 : 《좌전(左傳)》에, “과부[嫠婦]가 자기의 베씨[緯]가 모자라는 것을 걱정하지 아니하고 주(周) 나라 왕실의 망하는 것을 걱정함은 화가 장차 자기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음.
[주D-002]등관(鄧綰)이 …… 버려둔다 : 송 나라 등관(鄧綰)이 말하기를, “나를 비웃고 욕하는 것은 그들의 하는 대로 맡겨두고 좋은 벼슬은 내가 스스로 하겠다.” 하였음.
[주D-003]관괴(菅蒯) : 《시경(詩經)》에, “비록 실과 삼이 있으나 관괴(菅蒯)를 버리지 말라.” 하였다. 관(菅)은 비를 만드는 풀이요, 괴(蒯)는 자리를 짜는 풀임. 별로 쓸모없는 인재를 뜻함.
[주D-004]벼슬을 …… 비부(鄙夫) : 《논어》에 “비부(鄙夫)는 벼슬을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얻으려고 걱정하다가 벼슬을 얻고나서는 그것을 잃을까 걱정한다.” 하였음.
[주D-005]선진(先軫)과 내제(來濟) : 선진(先軫)은 춘추시대 진(晉) 나라 장수인데, 임금의 잘못에 분개하여 돌아보지 아니하고 침을 뱉았는데, 뒤에 다른 나라와 전쟁할 때에, “나는 임금에게 무례하였으니 죽어야 한다.” 하고 투구를 벗고 적진에 들어가 죽었다 함. 내제(來濟)는 당 나라 신하로서 무씨(武氏)를 황후로 삼는 것을 반대하다가 정주(庭州)로 좌천되었는데, 돌궐(突厥)의 군사가 침입할 때에 투구와 갑옷을 벗고 적진에 달려가 죽었다 함.
[주D-006]질 사람 …… 부를 것 : 《주역》에 “짐을 질 사람이 수레를 타니 도적을 부른다.” 하였는데, 분수에 맞지 않는 짓을 하면 실패한다는 뜻.
[주D-007]한기(韓琦)가 …… 통한 것 : 한기(韓琦)가 대신(大臣)으로서 마침 조회에 압반(押班)을 하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간관(諫官)이 그를 눈앞에 임금이 보이지 않고 통발을 뛰어 나오는[跋扈] 물고기와 같다고 탄핵하였다. 압반(押班)이란 것은 백관의 반열의 머리에 서서 통솔하는 것. 내교(內交)란 것은 진요좌(陳堯佐)와 교분(交分)을 맺기 위하여 부당한 추천을 하였다는 것.
[주D-008]엄연년(嚴延年) …… 배척 : 한(漢) 나라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을 폐위시키고 새로 임금을 세우려 할 때에 엄연년(嚴延年)이 “곽광이 제 마음대로 임금을 폐하고 세우니 신하의 예(禮)가 없다.” 하였음.
[주D-009]당개(唐介) …… 탄핵 : 문언박이 비단 촉롱(燭籠)을 바치자, 당개가, “궁중 귀비(貴妃)에게 아첨하는 것이다.”라고 탄핵하였음.
[주D-010]범수(范睢)가 …… 이룬다 : 범수(范睢)가 진왕(秦王)에게 당시의 집권자이며 태후의 동생인 양후(穰侯)의 죄를 말한 것.
[주D-011]□□ : 본문에 두 자 결하였음.
[주D-012]이조의 …… 것 : 원문에 몇 군데 결자가 되었는데 역자가 원문에는 그대로 두고 역문에는 적당히 말을 만들어 넣었음.
[주D-013]여회(呂誨)가 …… 하면 될 것 : 송 나라 여회(呂誨)가 왕안석(王安石)의 심술이 부정하여 나라를 그르칠 것이라고 탄핵하였음.
[주D-014]사람을 …… 명철하다 : 《서경(書經)》에, “사람을 잘 알아 보는 것은 지(智)의 일인데 요(堯)도 어렵게 여겼다.” 하였음.
[주D-015]폐부(肺腑) : 임금의 외척의 신하를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심의겸(沈義謙)을 가리킨 것임.
[주D-016]왕ㆍ양(王梁) : 한 나라 때에 가장 발호(跋扈)한 외척인 왕봉(王鳳)ㆍ양기(梁冀)를 가리킴.
[주D-017]상산 사호(常山四皓) …… 하였고 : 한(漢) 나라 때, 상락(商雒)에 숨어 있던 네 노인이 여후(呂后)의 간절한 청을 받고 와서 태자(太子)를 따랐더니, 고조(高祖)가 그들을 보고는 태자를 잘 보호하기를 부탁하였다 함.
[주D-018]한 광무(漢光武) …… 어루만졌으니 :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전일에 동학하던 엄자릉(嚴子陵)을 사방으로 찾았더니 제국(齊國)에서, “양구(羊裘)를 입고 고기 낚는 첨지가 있다.” 하므로, 찾으니 과연 엄자릉이었다. 예로 청하여 왔으나 벼슬은 받지 아니하였다. 이에 광무제가 그의 숙소에 가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함.
[주D-019]어린이를 …… 못하여 : 어릴 적에 잘 가르치는 것을 몽양(蒙養)이라 함. 한유(韓愈)의 〈사설(師說)〉에, “스승이란 도를 전하고 의혹된 것을 열어 주는 것이다.” 하였음.
[주D-020]당고(黨錮)의 화 : 한 환제(漢桓帝) 때 환관이 기절 있는 진번(陳蕃)ㆍ이응(李膺) 등을 미워하여 당인(黨人)이라 지목하여 종신금고(終身禁錮)시킨 일.
[주D-021]위학(僞學)을 금하자 : 남송(南宋)에 한탁주(韓侂冑)가 집권하였을 때에 주자(朱子)의 학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금하였음.
[주D-022]수선(首善) : 태학(太學)을 수선(首善)이라 함.
[주D-023]진(秦)과 월(越) : 진(秦) 나라 사람이 월(越) 나라 사람의 살찌고 여윈 것을 보듯 한다는 말이 있는데, 상관이 없다는 뜻.
[주D-024]황잠선(黃潜善) : 송 나라 간신(奸臣)으로 태학생 진동(陳東)을 참소하여 죽였음.
[주D-025]한마디 …… 잃게 한다. : 《논어》에 “나라를 일으킬 한 마디 말도 있고 한 마디로 나라를 망치는 말도 있다.” 하였음.
[주D-026]청아(菁莪)의 화육(化育) : 청아(菁莪)는 《시경》의 편명인데, 국가에서 인재를 교육하는 즐거움을 읊은 것.
[주D-027]두흠(杜欽)과 곡영(谷永) : 한 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로서 외척 왕씨(王氏)에게 아부한 자들임.
[주D-028]동인 …… 엿본 지 : 물여우[蜮]가 모래를 머금고 가만히 사람의 그림자를 쏘면 사람이 병이 들어 죽는다 한다. 즉 남을 모해하는 것의 비유.
[주D-029]패금(貝錦) : 《시경》에 나온 말인데, 소인이 군자를 중상할 때 비단 무늬를 짜듯 교묘하게 말을 꾸밈을 이름.
[주D-030]형곡(硎谷)의 참혹함 : 진 시황(秦始皇)이 유학자(儒學者)를 모조리 죽이려고, 형곡에 사람 죽일 기계와 함정을 설치해 두고, 겨울에 오이 꽃이 피었으니 보러 가자 하여 한꺼번에 다 죽였다 함.
[주D-031]사슴 …… 말[馬] : 진(秦) 나라 조고(趙高)가 임금을 우롱(愚弄)하여 사슴 한 마리를 몰고 가서 임금에게 보이며, “이것이 말[馬]입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믿지 않고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혹은 바로 말하고 혹은 조고를 두려워하여 말이라 한 자가 많았다. 그러자 조고가 바로 말한 사람을 중상하여 죽였음.
[주D-032]배꼽을 물어뜯는 후회[噬臍之悔] : 사향 노루가 사람에게 잡히게 될 궁지에 이르면 제 배꼽을 물어 뜯는다. 그것은 배꼽에 사향(麝香)이 들어 있기 때문에 제가 사람에게 잡힌다고 후회하는 것이다. 일이 잘못된 뒤에는 후회하여도 이미 소용이 없다는 뜻.
[주D-033]전환(轉圜) : 한 고제(漢高帝)가 신하의 옳은 말 잘 듣기를 둥근 것 굴리듯 쉽게 하였다 함.
[주D-034]영대 …… 밝다 : 영대(靈臺)는 마음이 영명(靈明)한 것. 방촌(方寸)은 마음이 사방 한 치가 되는 장부(贓腑)라는 뜻.
[주D-035]어떻게 …… 듣겠습니까 : 한 나라 계포(季布)ㆍ계심(季心)의 형제가 신의 있기로 양국(梁國)ㆍ초국(楚國)의 사이에 칭찬이 있었음.
[주D-036]우리 …… 불가능하다 : 《맹자》에, “우리 임금은 능히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신하는 적(賊)이다.” 하였음.
[주D-037]염파(廉頗) …… 부끄러워하던 바 : 전국시대에 조(趙) 나라 염파(廉頗)가 인상여(藺相如)의 직위가 갑자기 자기의 위에 오른 것을 보고, 만나기만 하면 욕을 보이겠다 하니, 인상여는 항상 피하였다. 좌우의 사람들이 비겁하다고 말하니, 인상여는 “내가 어찌 염 장군을 겁내리오마는, 두 범이 싸우면 공존(共存)할 수는 없을 것이니, 국가의 급함을 먼저 하고 사사로운 원수를 뒤로 하는 것이다.” 하였다. 염파가 듣고 매를 가지고 가서 자기를 쳐 달라고 사과하고, 드디어 사생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었다 함.
[주D-038]성부(城府) …… 어려운데 : 속이 성지(城池)와 부고(府庫)처럼 굳게 잠겨서 남들이 그 속을 알 수 없다는 뜻.
[주D-039]공자(孔子) …… 있다 : 계손씨(季孫氏)가 전유(顓臾)라는 약한 나라를 치려 한다는 말을 듣고서 공자께서, “나는 계손의 걱정거리가 전유에 있지 않고 자기의 집안에 있을까 염려된다.” 하였는데, 과연 가신(家臣)의 반란이 있었다 함.
[주D-040]가의(賈誼) …… 꺾었고 : 가의(賈誼)는 한 문제(漢文帝)에게 글을 올려, “오늘날 사세가 통곡할 만한 것이 있다.” 하였음. 한 나라 성제(成帝) 때에 주운(朱雲)은 임금 앞에 앉아 있는 안창후(安昌候) 장우(張禹)를 가리켜 아첨한 신하의 머리를 베겠으니, 말[馬]을 베는 칼을 달라고 청하였다. 성제는 노하여 주운을 베려고 어사(御史)를 시켜 끌어내리자, 주운이 끌려 가지 않으려고 난간을 붙잡아 난간이 꺾어졌음.
[주D-041]너를 …… 만든다[玉汝于成] : 장재(張載) 서명(西銘)에, “하늘이 빈천과 걱정을 주는 것은 너를 옥처럼 갈고 연마하여 완성시키는 것이다.” 하였음.
[주D-042]장마비에 주즙(舟楫) : 《서경(書經)》에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삼으면서 말하기를, “만약 큰 가뭄이 드는 해이면 너를 장마비로 삼겠고, 큰 내를 건넌다면 너로써 배와 노를 삼겠노라.” 하였음.
[주D-043]박홍로(朴弘老) : 박홍로(朴弘老)는 미상. 박홍구(朴弘耈)나 이홍로(李弘老)인 듯.
[주D-044]손이 미끄럽다[手滑] : 송 나라 때에 지방관 조중약(晁仲約)이 죄가 있었는데, 여러 대신이 의론할 때에 부필(富弼)이 그를 죽여야 한다고 하니, 범중엄(范仲淹)은 “우리 국가에서 신하를 잘 죽이지 않았는데 임금이 신하를 죽이는 손이 미끄러워지면 다른 날 우린들 어찌 보장할 수 있겠는가?” 하였음.
[주D-045]실로 …… 도움 : 집안에 닭이 울어 새벽을 알리고 개가 짖어 도적을 방지하는 조그만한 도움을 말한 것
[주D-046]밭두둑을 …… 뜻 : 주 문왕(周文王)의 백성들은 농부들이 밭고랑을 서로 사양하였다 함.
[주D-047]입진(入陳) 문자 : 진황지(陳荒地)의 개간을 청구하는 서류.
[주D-048]어진이 …… 못하지 않고 : 공자가 노국(魯國)에서 정치를 할 때에 난정대부(亂政大夫) 소정 묘(少正卯)를 베어 죽였음.
[주D-049]무함 …… 더합니다 : 순(舜) 때에 곤(鯀)이 명령을 거역하므로 순이 귀양보냈음.
[주D-050]이 길에 …… 20년인데 : 송 나라 원우(元祐) 연간에 채확(蔡確)이 지은 시가 선인태후(宣仁太后)를 비방하여 멀리 영남(嶺南)으로 귀양을 보내려 하니, 소식(蘇軾)이, “이 길이 가시밭 된 지 20년인데, 다시 틔워서는 안 된다.” 하였음.
[주D-051]만촉(蠻觸) : 《장자(莊子)》에, “달팽이[蝸]의 두 뿔에 나라가 있는데, 하나는 만국(蠻國)이요 하나는 촉국(觸國)이다. 두 나라가 서로 싸워 송장은 백만을 엎쳤고 피를 천 리에 흘렸다.” 하였음.
[주D-052]유(帷) …… 주는 데에 : 공자의 말에, “떨어진 헌 휘장[帷]을 버리지 않고 두는 것은 말[馬]이 죽으면 그것으로 싸서 묻으려는 것이요, 낡은 덮개[蓋]는 죽은 개를 묻기 위하여 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은혜를 받음을 이름.
[주D-053]하루에 …… 총애 : 주역 진괘(晉卦)에서 나온 말. 임금이 신하를 우대하여 하루 낮에 세 번이나 접견한다는 것.
浦渚先生集卷之三
 疏 十一首
請復始祖墳疏 a_085_067a


085_067b伏以臣等始祖趙孟。佐高麗太祖。官至上柱國,三重大匡,門下侍中,平章事。賜勳爲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而墓在豐壤縣。蓋本豐壤人。而子孫因以豐壤爲本。宣祖朝恭嬪卒逝。擇山得其墓後同麓葬焉。其時濟用監正鄭昌瑞承命往視葬事。得臣等始祖孟墓前標石仆在地。見其官銜姓名。還以啓。宣祖謂趙孟於我亦外祖也。臣等竊聞恭嬪之先。亦係豐壤外裔云。蓋豐壤之趙。自趙孟以來至今七百餘年爲衣冠族。國中世族。鮮有不爲其外裔者也。此山旣爲恭嬪墓山。趙孟墓有夷之之議。先臣司藝趙廷085_067c樞其時爲承文博士。上疏陳之。宣祖命封其墓。至光海時。追尊恭嬪。陞墓爲陵。其時封陵都監啓陵內墳墓。例當遷移。光海問于地官。李懿信,申誼等對以於地理存之無害。遂平其墳。又議于大臣領議政李德馨。議云。外間或云趙孟乃麗初宰相。國中貴閥。代係雖遠。多是其外裔。當初玄宮奉安時。亦以其干係遠派而不避云。此言未知眞贗。果若此言。不必發已夷之土。而但種樹木以飾山形。亦恐不妨。以是趙孟墓得不拔。平時譜牒具在。亂後散失。幸而存者亦不全。其外裔之蕃。無從而考。而獨臣等所有譜。載趙季085_067d鴒子炎暉。炎暉女壻元顗。顗女壻邊安烈。臣等求得元氏,邊氏族譜。蓋三譜相符。而趙炎暉。正順大夫,右副代言兼左常侍。元顗。銀靑光祿大夫,判樞密院,上護軍。邊安烈。三重大匡,門下贊成事,領三司事,原川府院君云。而邊安烈墓亦在豐壤。平時子孫爲立碑。內外孫備錄於其陰記。臣等取見其陰記。乃萬曆庚辰年所立。距今五十年矣。其所載姓孫。府使邊永淸,兵使邊協等三十餘人。外孫則領議致洪暹,府院君朴應順,廣川君壽麒,河原君鋥,左贊成鄭大年,河陵君鏻,礪城君宋寅,禮曹判書洪曇,同知敦寧沈逢源,085_068a大司憲白仁傑,大司憲朴應男,留守沈義謙及李元翼,韓孝胤等二百餘人云。趙炎暉孫壻邊安烈一派。子孫之盛乃如是。若譜牒具存。使備考趙孟以下世世子孫。則國中名族。其不爲外孫者必少。而其爲後裔重疊者亦必多矣。今者恭嬪墓不爲國陵。趙孟墓無夷之之理。臣等相議欲復其墳形。第念此山曾爲國陵。今陵雖罷。復此墓。不可不上聞。伏願聖明俯察臣等始祖孟有統合三韓千歲之大功。而爲七百餘年國中大族之衆祖。先王嘗命封其墓。而今又無壓於國陵之嫌。特許封植之。使後世有所識焉。085_068b不勝幸甚。臣等無任激切屛營之至。

石潭日記卷之上
隆慶六年壬申

上五年正月。處士曺植卒。植字楗仲。性耿介。少業科擧。而非其所樂。一日於漢都訪成守琛。守琛構屋白岳峰下。謝絶世故。植樂之。遂歸鄕不仕。居智異山下。自號南溟。取與不苟。少許可。常危坐一室。遇睡思則按釼不寐。釼首有銘曰。內明者敬。外斷者義。閒居旣久澄汰欲念。有壁立氣像。聞人之善好之。聞人之惡久嫉之。鄕人之不善者視若浼然。故鄕人不敢干謁。只有學徒從遊皆心服焉。明廟朝。與成守琛同徵。拜丹城縣監。時權奸當國。詿誤文定王后。使士林喪氣。雖托公論薦用遺逸。只是虛文而無實故植無意於仕宦。因上疏辭職。兼陳時弊。有曰。慈殿塞淵。只是深宮之一寡婦。殿下幼沖不過先王之一孤嗣。又曰。音哀服素。亡象已著。明廟不悅。以爲辱及慈殿。猶待以逸士不可罪。明廟末。命薦經明行修之士。植與李恒成運韓修等同被徵。拜六品官。因見問以治道。植竟辭官而歸。恒拜林川郡守赴任。植戱之曰。李措大一朝做郡守。焉知不爲禍階乎。植歸鄕淸名益播。今上朝。屢拜官。皆不就。只上疏陳時政得失而已。臨終謂其學徒曰。後人以我爲處士則可矣。若目以儒者則非其實也。門人有請益者。植曰敬義二字。如日月。不可廢一。其妾泣請入訣。竟不許而卒。訃聞。臺諫朝臣請易名以示褒奬。上以無舊例不許。只命賜賻物。門人多介士。而金宇顒鄭仁弘鄭逑最著。
謹按。曺植遯世獨立。志行峻潔。眞是一代之逸民也。第見其所論著。則於學問無實見。所上疏章亦非經濟之策。雖使行乎世。有所施設。未可必能成治道也。門人推重。至謂植道學君子。則誠過其實矣。雖然。近代所謂處士者。終始完節。壁立千仞。如植比無幾。星官南師古會語人曰。今歲處士星無光。不久而植沒。植可謂應世非常之士哉。
二月辛亥。親耕籍田。還宮大赦。受百官賀。○閏二月。吏曹正郞吳健棄官歸鄕。健少好學。從曺植遊。晩以科第發身。非門閥故。仕不顯。名士多知其賢薦以史官。史官例試才。健不就試。人問其故。健曰。我何故自入千古是非叢中乎。旣陞六品。乃踐淸要。作銓郞。務恢公道。爲人淳實果敢。遇事直前無所回撓。人多怨者。盧禛與健有舊。責之曰。汝從草茅發迹。致身淸要。於汝過分。當韜晦小心以副人望。何故妄執所見。自取怨怒乎。健猶不改。衆怨益甚。且上意厭士類。而流俗之勢日盛。健度不能有爲。乃棄官而歸。○三月乙未。中殿親蠶。○四月。朴淳謝病遞贊成。以鄭大年拜右贊成。奇大升以大司諫承召入京。大升與大臣不協。退歸。至是還朝。
旱凡三月而始雨。○五月。副提學柳希春進六經附錄。上嘉奬之。希春多讀古書成誦。而實無眞知。且於世務。茫然無識。所上附錄。亦非要切之言。只可資於考閱而已。○有蟲食禾苗。以特旨拜朴淳爲左贊成。淳自春辭大提學。至夏不止。章累上。上終不許。時淳以淸望爲士林之首。而被上眷如此。士林恃以爲安。○六月右議政李鐸以病免官。鐸居相位。別無建白。而常懷扶護士林之志。故人望重之。時以旱災及太白晝見。避正殿。大臣以暑月。請復正殿。上答曰。太白未伏。方懷危懼。安可遽復正殿乎。大臣復啓曰。自上危懼未復正殿。修德弭災之方。可謂無所不至矣。但應天以實不以文。畏日如爍。露坐簷楹。恐傷聖軆。願亟復正殿。上乃許之。是時東風大吹傷禾苗。
謹按。因災避殿。固是文具末節。大臣旣知其爲文具。何故面謾以爲盡修德弭災之方乎。如以避殿爲盡弭災之方。則災異未息。而遽請復殿何哉。且曰。應天以實不以文。此言則是矣。今者旣廢其文矣。其所爲實者何不啓沃而應天乎。雖曰暑月。御座豈恒處於畏日之中乎。苟爲媚上之語。而進退無據。如此大臣。將焉用哉。嗚呼其時大臣乃權轍洪暹也。自上旣無求治敬天之志。則雖肅曺姚宋尙不能救時。況庸碌如轍暹者乎。於轍暹也何誅。
鄭大年爲議政府右議政。兩司駁攻之。大年雖粗有淸儉之行。而不學無識。所存凡俗且不喜者。故人望不歸。○七月領中樞府事李浚慶卒。浚慶字元吉。自少磊磈不群。儀貌雄偉。有名多士間。立朝淸嚴自持。與兄潤慶同有時望。但潤慶外和而內立。浚慶外毅而內怯。仁廟末。潤慶之子中悅。與李輝有私語犯時忌。及乙巳難作。中悅欲以輝言告變自明。稟于潤慶。潤慶曰。身死雖可懼。朋友豈可背乎。中悅問于浚慶。浚慶曰。不可爲朋友自就死地也。中悅乃自告于朝。而亦不免死。乙卯倭變。潤慶尹全州。浚慶以都元帥鎭于錦山。貽書于潤慶曰。賊鋒甚銳。願兄勿進前少避。潤慶答曰。吾受國厚恩。當以死報。遂以兵赴靈岩助戰得捷。浚慶則頗有逗撓之狀。顯被人譏。於是知弟劣於兄矣。方權奸用事也。浚慶不敢崖異。而心護士類。故時望不衰。元衡旣敗。乃得當國。今上之初。士林顒望有爲。而浚慶無經濟之才。性又高亢。不能下士。且以膠守舊轍。導上因循架漏。無相業可觀。於是士林短之。奇大升尤發侵語。浚慶聞而銜之。遂與士類不協。疾病。上箚論朝臣。有朋黨之私請。破之。上驚問大臣曰。若有朋黨則朝廷亂矣。大臣和解之。而語甚模糊。上亦不窮問。無事。由是士林指浚慶爲醜正之人。不能全其名望。
謹按。浚慶以四朝老臣。淸以律身。毅以治事。屛黜權奸。翊戴聖君。孰不曰賢相乎。惟其矯亢自高。不能下士。積成釁隙。卒之誤君上以喪邦之言。遂失令名。嗚呼惜哉。
以盧守愼爲吏曹判書。守愼起自謫中。不久秉銓。朝野皆賀得人。但守愼懲於禍患。氣節消縮。其爲政事。一遵流俗模樣。無擧措之得宜。士林失望。○以朴淳爲議政府右議政。守愼秉銓。而淳居相位。誠協物望。淳持身淸約。雖在台司。門庭泠淡。如無位者。○壬辰皇帝訃音至。以五月二十六日庚戌帝崩矣。自上率百官服斬衰。三日而除。蓋以日易年也。○八月奇大升棄官而歸。大升氣高一世。眼無强禦。意謂可以聳動一世。皆從指嗾。而在朝言多不合。自上無眷重之意。大臣亦不推重。乃決意歸鄕。○王子鎭國生。淑儀金氏出也。○遣右議政朴淳如京師。賀登極。○撤毀宮城底民家。上一欲遵用大典。而大典載宮城底限百尺。勿許人構屋。法典雖如此而實不行。故自祖宗朝亦不禁。宮城咫尺之地。民居櫛比。多有百年舊屋。上一日見有壓宮城造屋者。甚怒。乃命考法典。撤毀百尺內民家。都人驚懼洶洶。羣臣多以爲言。且以爲詔使臨境。不可撓民情。姑待他年。上怒其。方命亟令撤。猶減尺數。限以三十尺。臺諫交章請止。上尤怒。嚴督益甚。民多號泣者。○平安道節度使李大伸使虞侯李鵬伐穀于西海坪。還時軍亂。大伸及鵬皆抵罪。鵬領五衛軍。往西海坪。伐穀焚廬。還時我軍有中胡箭者驚叫。一軍驚動。莫測胡兵多少。皆棄兵亂走。鵬已前路聞亂。還檢後軍。而後衛將江界李善源馳馬。馬倒而墮。我軍尤驚。幾大敗。審視胡兵。單弱不過十餘人。衆心稍定。有我軍射胡。胡中箭走匿。鵬乃收軍馳到本衛。日已曛矣。鵬令軍中結陳露宿。待朝回軍。李善源固執。必欲夜行。二人相爭。一軍莫適所從。或去或留。擾亂罔制。有一人大呼曰。李善源可斬也。鵬乃執善源將斬之。善源乃聽命駐軍。明日還師。京城傳聞兵敗。拿大伸鵬善源等鞫之。以不能成軍。皆奪爵爲卒伍。
謹按。是時軍令解弛。上下不能相管。以全師侵小醜。而衆心尙懷危懼。一胡發矢。而三軍驚北。一人大呼。而軍令始行。若以此軍遇胡騎百餘。則必敗無疑。況遇勍敵者乎。嗚呼殆哉。
九月。承政院都承旨朴應男卒。應男戇直敢言。外若不曉是非。而內有權衡。累主風憲。駁擊無顧忌。人多怨者。第以好善故。善類推許。而且以中殿叔父被上眷重。士林是賴。及卒。士類惜之。○十月大司諫許曄請設鄕約。上以爲迂闊駭俗。不聽。○客星見於策星之側。大如金星。○前司諫院大司諫奇大升卒。大升字明彥。少以文學名世。博覽强記。氣槩豪俊談論能伏一座人。旣登第。淸名大著。李樑用事。忌之落其職。樑敗。仕益顯。士類推重。以爲領袖。大升亦以經綸。一時自負。而其學只務辨博宏肆而已。實無操存踐履之功。且有好勝之病。悅人順已。故介士不合。而阿諂者多趨焉。其持論亦務循常。而不喜矯革。識者尤不取之。少時曺植見之曰。此人得志。必誤時事。大升亦以植爲非儒者。兩不相許。大升言植過失。故植之學徒惡之。其爲大司成也。命薄諸生之供。且以食無求飽爲題。使作箴以諷諸生。諸生不悅。多不就館者。庚午年。方論僞勳。大升聞之獨曰。乙巳之勳非僞。且先王已定。今不可削。邪黨以大升言爲主。識者頗不韙。大升旣與流俗不合。又爲識者所不取。自上亦待以尋常。鬱鬱不得志。棄官而去。路得臀腫。行至古阜村舍。竟不起。人多惜其才調。蓋大升雖非實才。而英特過人。其與李滉爭辨四端七情之同異。累數千言。論議發越。學者是之。
謹按。士有幸不幸。孰不以遇爲幸以不遇爲不幸也哉。雖然。或有遇而不幸不遇而幸者。何可一槩之哉。柳子厚貶死荒裔。而文學辭章炳炳傳後。是不遇之幸也。王介甫當國施設。而群小附會。卒僨其國。是遇之不幸也。大升以英才博學。氣蓋一世。而自信太過。不喜爭友。若使得志而行其所學。則未知其遇爲幸耶爲不幸耶。嘗聞客於崔永慶之座。吊大升所親曰。斯文不幸斯人遽沒。永慶怫然變色曰。奇明彥少有才學。大有病痛。以乙巳群奸爲有功。以南溟爲擾亂朝廷。以此偏見。若得施設。必害於政。此人之死。豈足爲斯文之不幸乎。永慶之言雖過。而識者或不深非云。
十一月癸未。詔使翰林院檢討韓世能給事中陳三謨入王京。今皇帝卽位頒詔也。大行皇帝謚曰莊廟號曰穆宗云。世能等多求物貨。文士之有求請。近代所無也。辛卯詔使。發自王京向京師。路中華人多攘取鋪陳器皿。而詔使不禁。或疑自取云。○鏡城有羆。害人甚衆。我國無羆。而忽有之。人多驚怪。○十二月朝京使臣還言。皇帝年十一歲。而母后不臨朝。政自己出。英明拔萃矣。金繼輝曰。三代以後。寧有十一歲聖天子乎。此不近理。必虛傳也。○以鄭惟一爲同副承旨。
국조보감 제26권
 선조조 3
8년(을해, 1575)

○ 1월. 2일(임인) 의성왕대비(懿聖王大妃)가 승하하였다. 인순왕후(仁順王后)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왕후는 방정하고 근엄하게 예를 지켜 부덕이 매우 단정하였고, 지금의 상이 막 즉위하였을 때 보필하고 인도하는 공이 많았다. 상도 지성스런 효도로 받들어 한번도 뜻을 거스르지 않았는데, 승하하자 몹시 슬퍼하며 예를 극진히 하였으므로 중외가 감동하였다.
○ 2월. 상이 상차(喪次)에 있으면서 몸이 여위고 지쳐 지탱할 수 없었으므로 삼공(三公)이 백관을 거느리고 우선 권도에 따라 고기를 드실 것을 청하였으나 여러 날 윤허하지 않았다.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조정의 청을 따르도록 권하자 상이 허락하였으나 여전히 고기 반찬을 들지 않았다.
○ 3월. 대비(大妃)의 발인(發引) 날짜를 잡았다. 상이 상여를 따라 가려고 하자, 삼공이 "상은 여위고 지쳐 상여를 따를 수 없다.”며 여러 날 간쟁하고, 공의대비도 간청하자 따랐다.
○ 새로 작성한 군적(軍籍)을 반포하였다.
○ 홍문관 부제학 이이(李珥)가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이는 병으로 황해 감사에서 체차되고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마침 이이는 병이 있어 서울에 와서 치료하게 되었는데 여러 차례 사직 단자를 올렸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은하고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경연의 장관은 그 직책이 임금의 덕(德)을 보필하고 공론을 유지하는 데 있으니 어떤 한 관직이나 한 언관(言官)의 직책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성상께서는 큰일에 정성을 다하여 슬픔과 예절이 모두 지극하니, 효성의 실행이 조정과 재야를 감동시켰습니다. 이는 바로 전하께서 선(善)을 확충시켜 덕에 나아가고 업(業)을 닦을 수 있는 일대의 기회입니다. 따라서 뜻을 받들고 도와서 진실한 덕을 성취토록 하는 책임은 경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제일가는 사람을 가려서 선(善)을 말하고 그른 것을 바루어 훈도(薰陶)의 유익함이 있기를 바라야 하는데, 이는 어리석은 신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차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여러 번 휴가를 준 것이 어찌 뜻이 없어서였겠는가. 그대가 지금 출사하고 있으므로 나의 마음은 진실로 위안이 된다. 선을 말하고 그른 것을 바루는 것은 내가 기대하는 것이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 인순왕후의 상(喪)을 발인하였다. 상이 예관(禮官)에게 이르기를,
“하관할 때에 내가 백관들을 거느리고 능을 바라보며 곡(哭)하려고 한다. 대신과 옥당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라.”
하니, 부제학 이이 등이 아뢰기를,
“예란 상례(常禮)와 변례(變禮)가 있는데 몸소 산릉(山陵)에 가시는 것은 상례이고, 병이 있어서 남에게 대신 행하게 하는 것은 변례입니다. 《오례의》에는 상례만을 말했기 때문에 섭행시키는 의절(儀節)은 없는데, 대궐 밖에서 송별하는 의절은 모두 변례인 것입니다. 하관할 때에 이르러 전혀 아무런 행사가 없게 한 것은 예를 의논하는 신하가 미처 건의하지 못한 것입니다. 상의 무궁한 효성으로 큰일을 당하셨는데 하교하신 뜻은 진실로 예의의 본의에 부합하므로 의심할 것 없이 후세에 전하여 법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망곡(望哭)할 때 예관이 멈추기를 아뢰었으나 상이 그치지 않고 곡하자, 정원과 대신이 번갈아 들어가서 간하니 얼마쯤 지나서 그쳤는데, 좌우의 시위(侍衛)들이 비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28일(병신) 강릉(康陵 명종(明宗)의 능)에 부장(祔葬)하였다. 이날 반우(返虞)하니 상이 광정문(光政門) 밖에서 맞아 우주(虞主)를 경모전(敬慕殿)에 봉안(奉安)하였다. 상이 재실(齋室)로 돌아왔다.
○ 5월. 상이 하교하기를,
“인순왕후는 일찍이 조정에 나와 정사를 처리하였으니 신하들이 삼년상(三年喪)을 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대신과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니, 이에 대사간 김계휘(金繼輝)가 대사헌 유희춘(柳希春)에게 말하기를,
“이 일을 잘못 결정하게 되면 간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니 처음에 극력 간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곧 양사를 거느리고 궐문 앞에 엎드려 아뢰기를,
“왕후의 초상에는 원래 정해진 법례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다시 의논해서는 안 됩니다.”
하며, 정원이 미리 아뢰지 않은 것에 대해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아울러 추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다시 의논하지 말라. 단, 자공(子貢)이 3년으로 정해진 법을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혼자 6년의 상을 행하였으니, 사람의 견해는 혹 같지 않을 수 있다. 이 일을 양사가 대궐문 앞에 엎드려 청할 것까지 있겠으며 또 정원을 추고하자고 청할 것까지야 있겠는가.”
하자, 양사가 물러갔다. 이이가 듣고 말하기를,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초상에도 이런 의논이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나 삼년상을 행하자고 의논을 드린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더구나 오늘날이겠는가. 대신이 어질면 스스로 예를 삼갈 것이고, 어질지 못하면 절로 삼년상 행하기를 꺼릴 것이다. 이와 같은 의논은 전혀 걱정할 것이 없는데도 양사가 경솔하게 합계하여 간하기까지 하였으니, 상의 하교가 합당하다고 하겠다.”
하였다.
○ 사헌부 지평 민순(閔純)이, 졸곡(卒哭) 뒤에 송 효종(宋孝宗)의 예(例)에 따라 흰 의관(衣冠)의 차림으로 정사를 볼 것을 청하자, 상이 예관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권철(權轍)과 영부사 홍섬(洪暹)은 "졸곡 뒤 정사를 볼 적에 현관(玄冠)ㆍ소의(素衣)ㆍ오대(烏帶)를 착용하는 것은 《오례의》에 기록되어 있으니 가볍게 변경할 수 없다.” 하고, 좌의정 박순(朴淳),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은 "흰 의관이 예의 본의에 합치되지만 변경하는 일에 관계되므로 아랫사람으로서 감히 마음대로 결단을 내릴 수 없으니 성상께서 결단함에 달려 있다.” 하였다. 상이 다시 하교하기를,
“나는 좌상과 우상의 의논을 따르려고 하니 예관은 2공(公)과 함께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이에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흰 의관의 제도를 따를 것을 청하니, 상이 고례(古禮)를 널리 참고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대체로 상은 상사에 예를 다하려고 하였으므로 민순의 말을 깊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정의 구신(舊臣)들은 대부분 좋아하지 않았다. 박순과 노수신이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장관이 조정에 모여 의논하기를 청하자, 상이 따랐다. 홍문관이 고사(古事)를 낱낱이 참고하여 아뢰고 또 의논을 드렸는데, 그 대략에,
“반드시 선왕의 예에 모두 합하게 하려면 애당초 상하가 최질(衰絰)을 《의례(儀禮)》의 제도처럼 갖추고, 따로 포모(布帽)ㆍ포단령(布團領)ㆍ포대(布帶)를 만들어 정사를 볼 때 입는 옷으로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미 지난 일이어서 소급해서 회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차라리 송 효종의 제도를 따라 흰 옷과 관대(冠帶)로 시사하는 것이 고례에 가까울 듯합니다. 그리고 현관ㆍ오대의 제도로 하는 것은 인정이나 예문으로 비추어보건대 미안할 듯싶습니다. 송 고종(宋高宗) 때 나점(羅點)이 이 제도를 건의하였는데, 이때에는 상례의 기강이 무너져서 상복을 벗은 뒤에 순전히 길복(吉服)을 착용하였기 때문에 나점의 이 의논은 그만두는 것보다는 나았던 것입니다. 주자(朱子)가 군신복의(君臣服議)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변론하였는데, 어찌 주자의 의논을 따르지 않고 나점의 의논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오례의》를 찬정(撰定)할 때 참찬 허조(許稠)는 단지 나점의 말을 근거로 이 제도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유신(儒臣)들이 선왕을 올바른 예로 인도하지 못하였으므로 지금까지 뜻 있는 선비는 개탄하고 있습니다. 어찌 오늘날 재차 과오를 답습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조정에 모여 의논한 2품 이상들은 모두 "조종 때에 찬정하여 벌써 오랫동안 시행하였으니 뒤의 왕이 변경할 바가 아니다.” 하고, 삼사의 장관 중 대사간 김계휘, 부제학 이이는 변통(變通)의 논의를 힘껏 주장하였는데, 대사헌 유희춘(柳希春)은 여러 사람의 의논이 옳다고 하였다. 상은 여러 사람의 의논을 보고 마음에 불쾌하게 여겨 좌상과 우상에게 전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논은 모두 변경할 수 없다고 말하니 내가 독단하기 어렵다. 경들은 선처하라.”
하였는데, 박순과 노수신이 아뢰기를,
“《오례의》에는 대개 모두 백색을 따랐는데 현관(玄冠)과 오대(烏帶)만은 예가 아닙니다. 이제 크게 변경하지 않고 단지 검정색의 관대(冠帶)를 백색으로 고치는 것뿐입니다. 신들의 의논은 백색 관대를 따르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뜻이 나의 마음과 매우 합한다.”
하고, 따랐다. 이 당시 유자(儒子)의 의논은 여전히 옛 습속에 빠져 있었는데 민순이 발의하자, 따른 사람은 단지 두 대신과 이이ㆍ김계휘 두 사람뿐이었다. 상의 마음이 굳게 예를 따르려고 했기 때문에 끝내 유신(儒臣)의 의논을 따른 것이다.
○ 11일(무신) 상이 몸소 졸곡제(卒哭祭)를 지냈다. 제사를 지낸 뒤에 백립ㆍ백대ㆍ백화(白靴)를 착용하고 환궁하니 군신들의 복색도 모두 동일하여 잘못된 법을 말끔히 씻어버렸다. 그 뒤 상사가 있을 적에 사람들이 감히 다시 의논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 하여 규식으로 삼았다. - 무신년(1608)ㆍ임신년(1632) 상사에 유신들이 이이의 의논을 소급해서 거론하여 고례(古禮)를 모두 회복시켰는데, 민순이 이 의논을 터놓은 것이다. -
○ 이후백(李後白)을 형조 판서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이보다 앞서 상이 박순(朴淳)에게 하문하기를,
“형조의 장관에 알맞은 사람을 얻지 못해 언제나 걱정하였다. 경은 직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감당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라. 낭관(郞官)의 지위에 있더라도 발탁하여 임용할 수 있다.”
하니, 박순이 대답하기를,
“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니 못내 감격스럽습니다. 물러가서 동료들과 상의하여 이름을 아뢰겠습니다.”
하고, 곧 후백을 천거하면서 아뢰기를,
“후백이 청백(淸白)한 지조로 공사(公事)에 봉사하고 있으니 이 임무에 적합합니다.”
하였으므로, 특별히 명하여 승진시켜 제수한 것이다.
○ 상이 졸곡 뒤에도 평소처럼 수라를 들지 않자 삼공(三公)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연일 청하였다. 상이, 시종과 대간을 편전에서 인견하였다. 대신 박순ㆍ노수신, 대사헌 윤의중(尹毅中), 대사간 김계휘(金繼輝)가 입시하여 속히 평상시처럼 수라를 들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잠시 놔두고 다만 정치의 득실과 생민의 이해를 논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여러 사람이 아뢰기를,
“반드시 상의 몸이 편안하셔야 큰일을 할 수 있는데, 지금 상께서 오랫동안 평상시처럼 수라를 들지 않으시어 큰 병이 생기게 되었으므로 조정 신하들이 허둥대고 있습니다. 어느 겨를에 여기까지 생각하겠습니까.”
하였다. 부제학 이이가 나아가 아뢰기를,
“요즈음 상께서 예를 다하여 거상(居喪)하고 있으므로 효도하는 실상이 중외(中外)를 감동시켰습니다. 신은 한편으로 열복(悅服)하며 한편으로 걱정됩니다. 열복하는 것은 상의 효성스런 덕이 이와 같으니 이를 미루어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린다면 어느 것이나 극진히 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태평을 이루는 바탕이 될 수 있다고 여겨서이고, 걱정된다는 것은 상의 원기(元氣)가 완전치 못하여 비위(脾胃)가 허약한데 오랫동안 평상시처럼 수라를 들지 않으면 중병이 생기게 될까 여겨서입니다. 지금 공경(公卿)과 백관(百官)들이 직무를 폐지한 채 대궐문 밖에 엎드려 있는데 이는 위령(威令)으로 그만두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상께서 참작하여 윤허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직무가 폐기될 것입니다.”
하였다. 신하들이 물러가려 하자, 상이 이이를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 이르기를,
“전에 향리(鄕里)로 돌아갔다가 그대로 감사(監司)에 제수되어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하고, 이어 황해도 백성들의 어려움을 묻고는 자리를 파하였다. 이이가 또 《서전(書傳)》의 긍구긍당(肯構肯堂)의 구절을 강하면서 아뢰기를,
“지금 사람들은 단지 전규(前規)를 고수하는 것으로써 긍당(肯堂)의 뜻으로 여기는데 이는 옳지 않습니다. 경문(經文)을 살펴보면, 아비가 터를 정하여 놓으면 그 아들이 집을 지어야만 아비의 사업을 훌륭히 계승한 것이 됩니다. 국가로 비교하자면, 조종(祖宗)이 창업한 것에 미비한 것이 많이 있거나 혹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하여 고쳐서 바로잡을 것이 많이 있으면, 알맞게 기획하여 의리에 맞도록 하는 것이 곧 뜻을 계승하여 사업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만일 조종의 법만을 지켜서 변통할 줄을 모르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여 퇴폐해지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뜻을 계승하여 사업을 이루어나가는 것이라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이가 이어 상에게 묻기를,
“전에 듣건대, 전하께서 시신(侍臣)에게 ‘나는 학문을 하고 싶으나 일이 많기 때문에 겨를이 없다.’고 하셨다 하는데, 참으로 이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신은 이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뻤고 한편으로는 걱정되었습니다. 기뻤던 것은 성상께서 학문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고, 걱정스러웠던 것은 상께서 학문의 이치를 살피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학문이란 혼자 단정히 앉아서 온종일 독서만 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날마다 처리하는 일을 도리에 맞도록 하는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치에 맞는지의 여부를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독서하여 그 도리를 구하는 것인데 만일 독서하는 것을 학문으로 여기면 잘못입니다. 날마다 행하는 사이에 일마다 도리에 맞도록 하기를 구하여 한 가지 정사(政事)나 한번의 명령이 모두 정도(正道)에서 나오도록 하는 것이 곧 성상의 학문인 것입니다. 상께서는 자질이 아름답고 욕심이 적으니 학문을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즉위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진기(振起)하는 기세가 없으므로 신민(臣民)들이 실망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효성의 덕행이 원근에 드러났으니,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참으로 날로 새롭게 하는 자는 반드시 날로 새롭게 하기를 중지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효심(孝心)을 확충한 다음에야 신민들이 다시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 고(故) 처사(處士) 서경덕(徐敬德)을 의정부 우의정에 증직하였다. 경덕은 개성(開城) 사람인데 가세(家世)가 외롭고 한미하였으며 농사를 생업으로 하였는데 몹시 가난하였다. 경덕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였고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였다. 일찍이 어버이의 명령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進士)에 올랐으나, 곧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화담(花潭) 곁에 집을 짓고 도의(道義) 공부에 마음을 쏟았는데, 그의 학문은 오로지 궁리(窮理)ㆍ격물(格物)을 일삼아서 혹은 여러 날 묵묵히 앉아 있기도 하였다. 그가 궁리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하늘의 이치를 궁구하려면 천(天) 자를 벽에 써놓고서 연구하였고 이미 궁구한 뒤에는 다시 다른 글자를 써놓고 차분히 생각하고 힘써 연구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여러 해를 이와 같이 하여 자신도 모르게 환히 꿰뚫은 뒤에 독서하여 터득한 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스승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공부하는 데에 많은 공력을 들였다. 그러나 후세 사람이 나의 말을 따르면 나와 같은 수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의 학설은 대부분 횡거(橫渠)의 학설을 주장하여 정자(程子)ㆍ주자(朱子)와는 약간 달랐으나 마음에 자득(自得)하여 만족스럽게 스스로 즐기며 세상의 시비(是非)ㆍ득실(得失)ㆍ영욕(榮辱)에는 털끝만큼도 개의하지 않았으며 집에 먹을 것이 자주 떨어졌으나 태연스럽게 지냈다. 어느 날 그의 문인(門人) 강문우(姜文佑)가 찾아왔었는데 경덕이 못가에 앉아 있었다. 시간은 이미 정오가 되었으나, 함께 학문을 토론하면서 전혀 피곤한 모습이 없었다. 문우가 부엌에 들어가 집안 사람에게 물었더니 전날부터 양식이 떨어져 밥을 짓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중묘조(中廟朝) 때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명묘조(明廟朝) 때 호조 좌랑에 증직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정 의논이 증직을 더 높여 표창하려고 하였다. 박순(朴淳)과 허엽(許曄)은 그의 문인이었으므로 매우 강력히 주장하였다. 상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경덕의 저술(著述)을 보니 기수(氣數)에 대하여 논한 것이 많고 수신(修身)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으니 이는 수학(數學 상수학(象數學))인 듯하다. 그의 공부가 의심스러운 곳이 많은데 무엇 때문인가?”
하니, 박순이 아뢰기를,
“경덕이 항상 말하기를, ‘학자들이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사선생(四先生)을 거쳤으므로 말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이기설(理氣說)만은 미진한 점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의 공부는 끝내 의심스러우나 지금 사람들이 그에 대해 칭찬하고 미워하는 것이 모두 공평함을 잃었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그의 공부는 학자들이 법으로 삼을 바가 못 됩니다. 그의 학문은 대체로 횡거에게서 나왔는데, 신은 그가 저술한 것이 성현(聖賢)의 설과 꼭 들어맞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세상의 이른바 학자라는 자들은 성현의 말만을 모방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얻는 것이 거의 없지만 경덕은 깊이 사색하고 독자적인 조예를 가져 스스로 터득한 묘리가 많으므로 언어나 문자만을 힘쓰는 학문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 말을 따랐으므로 이 증직이 있었다.
○ 6월. 상이 경복궁에 나아가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에게 문안하였다. 왕대비가 하교하기를,
“곧바로 주상에게 육식(肉食)을 들도록 권유하려 하였으나 굳이 고집한 채 따르지 않으니 삼공(三公)이 청하기를 바란다.”
하였다. 이에 세 대신과 시종하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의전(懿殿)의 권유를 따르기를 청하고, 의전도 잇따라 간청하자 상이 비로소 따랐다. 의전이 호종(扈從)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술과 고기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그러나 상이 의전의 청을 애써 따르기는 하였지만 옛날처럼 고기 반찬이 없이 수라를 들었다.
○ 상이 조강에 나아갔다.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사서집주(四書集註)에 온당하지 못한 곳이 많이 있다. 약간 삭제하여, 보는 데 편리하게 하고 싶으니 홍문관이 이 일을 맡아야 되겠다.”
하니, 부제학 이이가 아뢰기를,
“이는 신이 혼자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학문한 선비일 경우 출신(出身) 여부를 논하지 말고 홍문관에 참여하여 같이 삭제하는 것을 의논하게 하면 아마도 잘 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 대신이 나에게 성혼(成渾)을 불러보라고 하였는데 나도 만나보려고 하였다. 다만 우리나라의 규례에 출신인이 아닌 사람은 경연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어진 사람을 부르더라도 단지 한번 만나보고 말 뿐이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진실로 무슨 일을 하려고 한다면 전례가 없더라도 변통하여 규모를 넓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학문한 선비를 한직(閑職)에 두어 돌아가며 경연에 입시시키면 덕을 도와 이루는 데에 크게 유익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상이 부제학 이이, 수찬 김우옹 등을 소대하였다.
이이가 또 아뢰기를,
민순이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습니다. 어진이가 조정을 버리고 떠났으니 이 점에 대해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놀라면서 이르기를,
나는 듣지 못하였다. 무엇 때문에 갔는가?”
하였다. 우옹이 아뢰기를,
그 사람은 진실되고 학문이 있으니 참으로 어진 사람입니다.”
하고, 이이가 아뢰기를,
세상 풍습이 돌이킬 수 없이 흘러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바르게 가지는 자가 있으면 모두 괴이하게 여기고 꾸짖어 용납되지 못하게 하는데 이 때문에 민순이 떠난 것입니다. 지금의 시속(時俗)으로는 결코 해볼 희망이 없으니 만일 상께서 주장하지 않으면 어진이가 어디에 의뢰하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지성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 지극히 적은데, 국가의 일은 바로 임금의 걱정입니다. 임금이 혼자서 그 걱정을 다 맡을 수 없으니 어진이를 얻어 함께 걱정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제(喪制)의 의관(衣冠)에 대한 일은 많은 사람들이 그르게 여긴다는 것을 들었다. 인심이 이와 같으니 해볼 수가 없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비단 이 한 가지 일뿐만 아닙니다. 인심과 습속이 좋지 않은 지 오래되어 전하께서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하면 반드시 기뻐하지 않고 저지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상께서 마음을 굳게 정하시는 데 달려 있으니, 그렇게 하면 어찌 이룩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오늘날의 급선무는 학문에 힘써서 정치하는 근본으로 삼고 반드시 어진 선비를 얻어서 아침 저녁으로 보필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일찍이 출신이 아닌 사람을 경연에 입시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상께서 어렵게 여기셨는데, 이 일은 반드시 대신에게 다시 물어서 처리하소서. 또 승지가 직접 입계(入啓)하는 일은 중종(中宗) 때에 이미 시행했던 것입니다. 성종조(成宗朝)에서는 홍문관의 숙직 관원을 불시로 소견(召見)하였는데 이를 독대(獨對)라고 하였으니 이 예(禮)도 회복할 만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직접 아뢰는 것은 시행하기 어려울 듯하다. 홍문관의 관원에 있어서는 무시로 불러볼 것이니, 반드시 책을 가지고 강독할 것이 아니라 단지 의리를 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근래의 규정에는 조강에 대신을 접견하는 때가 없는데 나의 뜻은 자주 소견하려고 한다.”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이 일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친정(親政)하려 하는데 대신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친정은 곧 훌륭한 일이니 대신이 의당 순순히 받들어야 합니다. 이는 성상께서 더위에 저촉될까 걱정해서인데 말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상이 만일 친정하시면 발탁하여 쓰고 직책을 오래 위임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명(明) 나라 나흠순(羅欽順)이 이 법을 쓰자고 청하였으나 중국에서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세종(世宗)께서 이 법으로 사람을 등용하였으므로 여러 업적이 모두 빛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관작(官爵)은 조석으로 변경하여 어린 아이의 장난과 같기에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였다.
○ 대신ㆍ시종ㆍ대간이 입대하여 임시 방편을 따라 평상시처럼 수라를 들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영의정 홍섬(洪暹)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인묘(仁廟)를 모시고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는데, 그때 인묘의 손이 매우 수척하고 까맣게 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거상(居喪)으로 인하여 이처럼 몸이 야위었으니 아마도 지탱하기 어렵겠다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인묘께서 병이 생겨 승하하시고 말았으므로 신이 지금 상께서 예를 지켜 거상하는 것을 보고 더욱 간절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고, 이이는 아뢰기를,
“신은 들으니 성묘(成廟)께서 처음에 예절에 따라 거상하고자 소식(素食)을 오랫동안 들었는데 스스로 야윈 것을 깨닫고는, 신하들에게 ‘소식은 과연 어려우니 나는 오직 여색(女色)만 가까이하지 않겠다.’ 하고 고기를 드시고서 3년 동안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합니다. 이는 효성이 부족하여서가 아니고 사세상 그러한 것입니다. 거상하는 예가 이미 폐지되고 임금이 모든 기무(機務)를 총괄하는데 만일 소식을 하다가 병이 나면 기무는 어떤 사람에게 부탁할 것입니까.”
하였다.
○ 상이 처음으로 직접 전주(銓注)를 보았는데 이는 함경도의 백성들이 생업을 잃게 된 것은 적당한 감사를 얻지 못한 탓이라 해서였다. 이에 관찰사 박대립(朴大立)을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때 이후백(李後白)이 어떤 일 때문에 벼슬을 사면하고 집에 있었는데, 후백을 관찰사로 특별히 임명하였다.
○ 상이 전주를 보았다. 이조에 이르기를,
“과격한 사람을 쓰지 말고 순후한 사람을 쓰도록 힘쓰라.”
하였는데, 김계휘가 듣고 말하기를,
“상의 이 전교가 옳은 것이지만 임금이 지나치게 이 뜻을 주장하면 아첨하는 사람은 순후한 이름을 얻게 되고 강직한 사람은 과격하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니 그 해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부제학 이이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바치고 이어 차자를 올려 학문과 정치하는 방법을 자세히 논하였고 끝에 또 별도로 기질을 변화시키는 공부와 성심으로 어진이를 쓰는 실상을 아뢰면서 상의 과실(過失)을 지적하여 진술하였는데, 적절하고 간곡하였으며 수천 마디나 되었다. 상이 답하기를,
“바친 《성학집요》는 정치하는 방법에 도움이 있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였다. 다음날 상이 경연에 나아가 이이에게 이르기를,
“그 글이 매우 긴요하니 이는 부제학의 말이 아니라 곧 성현의 말씀이다. 다만 나는 불민하여 아마 행하지 못할 듯싶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상께서 언제나 이런 분부를 하셨기 때문에 신하들이 걱정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자질이 탁월하니 학문에 있어서 하지 않는 것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송 신종(宋神宗)이 명도(明道)의 말을 듣고서 ‘이는 요순(堯舜)의 일인데 내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하자, 명도가 슬픈 낯빛으로 말하기를 ‘폐하의 이 말씀은 종사와 신민의 복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의 말씀이 이에 근사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이가 계유년(1573, 선조 6)에 조정에 들어오고서부터 책을 편집하여 규범을 바치고자 경(經)ㆍ전(傳)ㆍ자(子)ㆍ사(史)에서 널리 채집하여 3년 만에 책을 완성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바친 것이다.
○ 삼공과 백관들이 다시 상에게 임시 방편을 따르라고 청하여 하루에 서너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직접 상의 앞에 나아가 종일 간청하자 상이 비로소 억지로 따랐다. 대비가 이어 하교하기를,
“주상이 요사이 침수(寢睡)가 편치 못하고 또 구토증이 있어서 수라를 들지 못하기에 내가 종일 간청하자 주상이 부득이하여 따랐으니 감격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다.”
하니, 군신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물러갔다.
○ 10월. 상이 직접 전주(銓注)를 보았다. 특명으로 김효원(金孝元)을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제수하고 이르기를,
“이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서 조정을 편안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당연히 변방의 관리로 보임시켜야 한다.”
하였다. 이조 판서 정대년(鄭大年)과 병조 판서 김귀영(金貴榮) 등이 아뢰기를,
“경흥은 바로 극지의 변방으로 오랑캐 지역과 가까이 접하고 있으므로 서생(書生)이 지키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아뢰자, 이에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바꾸게 하였다. 또 특별히 심의겸을 개성 유수로 제수하였다. 이때 두 사람이 대립하고 있다는 말이 분분해 마지않았는데, 상의 뜻에는 효원이 먼저 틀어져서 스스로 당(黨)을 만들어 편안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주 먼 변방으로 내쫓아 지키게 하여 견책하는 뜻을 보인 것이고, 의겸은 선후(先后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지친(至親)으로서 가장 오랫동안 존중을 받았기 때문에 배도(陪都)로 내보낸 것이다.
○ 상이 경연에 나아갔다. 이이가 《대학연의(大學衍義)》의 극기복례장(克己復禮章)을 강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안자(顔子)는 본디 이치를 훤히 궁구하며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에 대하여 흑백처럼 분명히 깨달았으므로 곧바로 극기복례의 네 글자에 종사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자는 단지 분명히 알았을 뿐만 아니라 실로 용기도 있었기 때문에 진취하기를 그치지 않은 것이다. 이를테면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한 말이 바로 용기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후세 사람들이 이 학문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뜻이 도탑지 못한 때문입니다. 상께서 이러한 점을 이미 아셨으니 뜻을 도탑게 하여 용감히 해 나가신다면 어느 경진들 이르지 못하겠습니까. 요즈음 상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는 분부를 내리실 적마다 여러 사람들이 감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있고 그러한 정치가 없으면 백성들은 혜택을 입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백성들의 삶이 지난날에 비교하여 어떠한가?”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권간(權奸)이 국정을 담당했을 때에 비하면 각박한 것은 줄어든 듯합니다. 다만 세금과 부역의 법규가 사리에 매우 어긋나는데 만일 이 법을 고치지 않으면 날마다 백성을 걱정하는 전교를 내린다 하더라도 유익함이 없을 듯싶습니다.”
하였다.
○ 상이 경연에 나아갔는데 이이가 입시하였다. 글뜻을 강하다가 아뢰기를,
“옛날에는 학문이라는 명칭이 없었습니다. 날마다 행하는 떳떳한 도리가 모든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서 따로 표적으로 내세운 명목이 없었고 군자가 오직 당연히 해야 할 바를 실행했을 뿐이었는데, 후세에는 이 도리가 밝지 못하자, 이에 당연히 행해야 할 바를 행하는 사람을 학문하는 선비로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명칭이 성립되자 도리어 세상 사람에게 지목을 받아 작은 허물이라도 찾아내려 하고, 위선(僞善)으로 지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선을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적을 감추고 겉으로 합하여 학문한다는 이름을 피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후세의 큰 병폐입니다. 임금은 모름지기 학문을 주장하여 속류들이 비방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학문이란 어찌 별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날마다 행하는 사이에 옳은 도리를 구하여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추위가 심하구나. 나는 넓은 집ㆍ고운 모피(毛皮) 위에 있으니 어찌 견디지 못하겠는가마는, 염려되는 것은 변방의 수졸(戍卒)들이 밤을 지새며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성상의 뜻이 여기에 미치니 백성들의 복입니다. 수졸만이 아니라 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사람도 반드시 염려해주셔야 합니다.”
하였다.
○ 11월. 상이 야대(夜對)하였는데 시신(侍臣)이 글을 강론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은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는 것이니 두 가지가 애초부터 두 일이 아닙니다. 인심(人心)이 발하지 않은 때에는 혼연(渾然)한 천리 그대로 있지만 움직일 때마다 선과 악이 나누어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움직이는 것은 기(氣)로 인하는 것인데 기에는 청탁(淸濁)이 있기 때문에 선과 악으로 나누어지는 것이고 천리와 인욕이 애초부터 마음속에 대립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상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다만 이미 나뉜 뒤에는 한계가 매우 분명하여 천리가 아니면 인욕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행이 아무리 선할지라도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천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마음으로는 명예를 구하려고 하면서 꾸며서 선을 하면 이 역시 인욕인 것입니다.”
하니, 승지 정언지(鄭彦智)가 아뢰기를,
“이 말이 그렇기는 합니다. 그러나 삼대(三代) 이후 사람을 구할 적에 명예를 좋아하지 않을까 걱정하였으니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을 몹시 나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 그들이 중지하지 않고 계속 해나간다면 군자가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자, 이이가 아뢰기를,
“처음에는 명예를 좋아하다가 후일에 마음을 고쳐 실지를 힘쓰면 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처음부터 끝까지 명예를 좋아하면 그 기본이 없는데 어찌 군자가 되겠습니까. 언지의 말은 이유가 있어서 한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사람들은 마음놓고 악을 하는 자를 실지를 힘쓴다고 여겨 심히 배척하지 않는 반면, 선을 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거짓이라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미워하고 이익을 좋아하는 것은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언지의 말은 시속(時俗)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입니다. 학자의 심술(心術)로 논하면 명예를 좋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를 담을 뚫고 도둑질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부끄러워 해야 하고, 임금이 사람을 등용하는 것으로 논하면 이익을 좋아하는 자는 쓸 수 없고, 명예를 좋아하는 자는 버릴 수 없으나 다만 중요하게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천승(千乘)의 나라는 사양하면서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국을 차지하지 못하면 낯빛에 나타내니, 그 근본이 없는 것이 이와 같다. 그리고 이익을 좋아하는 사람은 남을 속이지 못하는데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남을 잘 속이니 그 폐단이 크다. 옛 사람이 이른바 ‘삼대 이후 사람을 구할 적에 명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가 걱정한다.’는 말은 이유가 있어서 한 말이겠지만 온당한 말인지 모르겠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상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다만 선을 하는 사람과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을 분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만일 선을 하는 사람을 보고서 명예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의심하면 선을 좋아하는 실지가 없는 것이니 이를 몰라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시신들이 물러갈 무렵에 상이 고금의 사변(事變)에 대해 한동안 반복하여 강론하다가 당 태종(唐太宗)이 형을 죽인 대목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천하가 자기 일신 외의 물건인 줄을 몰랐기 때문에 형을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불쌍하기만 하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상의 말씀이 지극하십니다. 성인은 진실로 천하를 딴 물건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인은 천하의 일을 걱정하기를 자신의 일을 걱정하는 것보다 더 걱정하므로 딴 물건이라고 하여 살피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 12월. 이해에 사은사 홍성민(洪聖民)을 명(明) 나라에 파견하면서 종계(宗系)와 시역(弑逆)이 잘못으로 밝혀진 사정을 《대명회전(大明會典)》의 새 책에 넣어줄 것을 아울러 요청하게 하였는데 예부 상서(禮部尙書) 만사화(萬士和) 등이 쓴 답에, “조선 국왕이 그 조상(祖上)이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을 애통하게 여겨 글을 올려 세 번이나 변론하였다. 다만 전에 이미 천자의 명을 받았으니, 임금의 말은 한번 나오면 우주에 밝게 게시(揭示)되어 마치 사시(四時)와 같이 확실하다. 그런데 누가 감히 더 넣거나 빼겠는가. 조선에서 전후 주달한 말을 실록(實錄)에 편찬해 넣고, 《회전》을 편찬할 때를 기다려서 기재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는데 황제의 허락을 받았었다. 예부가 이 뜻으로 칙지(勅旨)를 내려 선유(宣諭)하기를 청하여 이를 사신 편에 부치려 하였는데, 성민이 말을 듣고는 이어 예부에 사양하기를 "일이 완료되지 않았는데 먼저 유지(諭旨)를 받들고 돌아가는 것은 사신으로서 감히 하지 못하겠다.”고 하니, 예부가 따랐다.


 

  목사 백인걸 선정비

조선 중기의 유학자. 선조 때 직제학·이조참판·대사간·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으로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했다. 대사헌이 되어 권신(權臣) 등의 비위를 논핵(論劾)하다가 사임하였다. 청백리(淸白吏)로 뽑혀 기록되었다.

 

 

  파주(坡州)의 유학(幼學) 조중길(趙重吉) 등이 상소하여 성수종(成守琮)의 서원(書院) 배향(配享)을 회복해 주기를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고(故) 증 직제학 성수종은 서원에 배향되었었는데 중간에 뒤섞여 훼철된 사건은 참으로 사문(斯文)의 흠사이고 사림의 탄식과 울분을 자아낼 일인 만큼, 어찌 감히 성상께 진달하여 이미 베풀었던 은전(恩典)을 다시 회복하셔서 문명의 교화를 더욱 빛나게 해 주시기를 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수종은 바로 선정(先正) 문정공(文貞公) 성수침(成守琛)의 아우입니다. 일찍부터 그 형과 함께 선정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에게 사사하여 성리(性理)의 근원을 깊이 체득하고 멀리 염락(濂洛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의 학통을 이었습니다. 조광조가 당세의 선비들을 평할 때마다 맨 먼저 성수종의 학문을 일컬었습니다. 그는 실천이 독실하고 학문의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당세에 이들을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 형제에 비겼습니다. 이 때문에 《명현록(名賢錄)》의 후집에서 그의 학문과 덕행을 성대하게 말했습니다. 선정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이 지은 그의 묘문(墓文)에도 ‘탁월한 덕행은 하늘에서 받았고 대도(大道)의 요체는 현사(賢師)에게 들었다. 어려서는 생지(生知)라는 칭송이 있었고 자라서는 천인(天人)의 학문을 익혔다.’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한 시대의 숭앙과 여러 명현들의 정평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의 순효(純孝)한 근성으로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예를 다하여 당시의 사람이 감탄하여 시를 짓기를, ‘성씨(成氏) 가문에 두 아들 있어, 효행은 아버지를 이었네. 죽을 마시는 정성 해를 가로막고, 분향(焚香)하고 곡(哭)하는 소리 구름에 사무쳤네. 아침저녁으로 신주(神主)에게 상식(上食)을 올리고, 새벽에도 저녁에도 산소에 배알하네.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제도 본받는다는 말, 오늘날 여기에서 처음 들어 보았네.’ 하였으니, 여기에서도 탁월한 행실이 밝게 드러남을 볼 수 있습니다.
경학에 밝고 행실이 바르다는 이유로 관리로 추천받았으며 또 현량과(賢良科)에 뽑혔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뭇 간신들이 번갈아 무함하여 그의 방명(榜名)을 삭탈하고, 게다가 당인(黨人)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러나 성수종은 이연(怡然)히 마음에 개의하지 아니하고 드디어 그의 형 성수침과 함께 파산(坡山)에 은거하여 밤낮으로 도학(道學)을 강명(講明)하며 더욱 정미(精微)한 경지로 나아갔습니다. 애석하게도 천명이 길지 못하여 그 뜻을 마치지 못하였으나 성취한 바가 탁연하여 우러러볼 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안국이 그 묘문에 쓰기를 ‘절효선생(節孝先生)’이라 했으니, 이는 대체로 송(宋)나라 명현인 정호(程顥)가 죽었을 때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이 그 묘문에 ‘명도선생(明道先生)’이라고 쓴 전례를 본뜬 것입니다.
선정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앞장서서 문정공 성수침의 서원을 세울 때에 재신(宰臣) 이제신(李濟臣)이 성수침의 아들 선정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에게 글을 보내기를, ‘당신 선친의 덕업과 행의(行誼)와 학문은 당신 숙부 절효선생과 참으로 난형난제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서원을 건립하는 날을 맞아 두 선생을 함께 배향한다면 하남(河南)의 두 명현이 동국(東國)에서 다시 빛나는 것이니, 율곡(栗谷) 학사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운운(云云)하였습니다. 율곡은 바로 이이의 호입니다. 그 뒤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가 또 승지 신응구(申應榘)에게 준 글에, ‘절효선생의 고상한 풍격과 뛰어난 덕행에 대해서는 《청송부집(聽松附集)》과 모재(慕齋)의 지문(誌文)에서 다 말하였습니다. 청송을 배향하는 사원(祠院)을 세우는 데 있어서 절효선생을 함께 배향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흠전이라 하겠습니다.’ 운운하였습니다. 그가 말하는 청송은 바로 문정공 성수침의 호이고, 모재는 바로 문경공 김안국의 호입니다.
한 시대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성수종이 함께 배향되지 못하는 일을 한스러워한 지 오래여서 영묘조(英廟朝) 경신년(1740, 영조16)에 원근의 유생(儒生)들이 선배들이 이미 정해 놓은 논의에 의거하여 사문에서 오랫동안 빠뜨렸던 제의(祭儀)를 행하였으며, 한결같이 고 참찬 백인걸(白仁傑)을 추향(追享)했을 때 먼저 추향하고 나서 뒤에 등문(登聞)하였던 규례를 따라 성수종을 청송서원(聽松書院)에 배향하는 문제를 그 다음해 신유년(1741, 영조17) 봄에 여러 유생이 봉장(封章)으로 위에 보고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는 하교를 받았습니다. 예판 민응수(閔應洙)는 회계(回啓)에서, ‘성수종의 순후하고 독실한 덕행과 정밀하고 깊은 학문은 진실로 사림이 존앙(尊仰)하는 대상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배향할 곳이 없다는 것은 실로 흠전(欠典)입니다. 상소의 내용대로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합니다.’ 운운하여, 상께서 특별히 윤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도 연석에서, ‘성수종은 참으로 명현이며 지조와 행실이 고결합니다. 그리고 또 잘못 삭탈되었던 과명(科名)도 죽은 뒤에 회복시켜 주었으니, 옥당의 높은 벼슬에 증직(贈職)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아뢰어, 또 특별히 직제학에 증직하는 명을 받았습니다. 예관(禮官)과 대신(大臣)은 이미 성수종의 뛰어난 덕행과 독실한 학문에 대해 다 아뢰었습니다. 아, 우리 영묘조의 증직시키고 배향을 허락하신 명은 실로 명현을 높이고 권장하는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수종을 이 서원에 추향하는 것은 바로 윤허를 받은 배향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유년 가을에 조정에서 갑오년(1714, 숙종40) 이후의 사사로운 배향을 훼철하라는 영(令)이 있어서, 그 당시 예조 당상과 그 고을의 수령이 사사로운 배향으로 오인하고 철훼하는 대상에 섞어 넣었습니다. 아마도 조정의 명령이 갑작스럽게 나와서 서원의 유생이 미처 사리를 가려 변명하지 못하여 이러한 잘못 철훼되는 일이 있게 된 것 같으니, 여러 선비들의 한탄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별도로 서원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또한 윤허받은 배향이면 먼저 배향하고 뒤에 보고하는 것은 이미 선조(先朝)의 오래된 전례가 있으며, 훼철하는 대상에 잘못 섞였다가 바로 회복된 것은 또한 다른 서원의 근거할 만한 사례도 있습니다. 저 성암서원(聖巖書院)은 바로 여조(麗朝)의 문희공(文僖公) 유숙(柳淑)을 존봉하는 곳이면서 아조(我朝)의 문정공(文貞公) 김홍욱(金弘郁)을 추향하는 서원인데, 성수종의 배향이 훼철될 때 역시 훼철하는 대상에 섞여 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김홍욱의 경우는 즉시 건의하여 곧바로 배향이 회복되었는데, 성수종의 경우는 미처 등문하지 못하여 아직도 배향이 회복되는 은전을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추후에 배향하는 것이면서 하나는 훼철되고 하나는 회복된 것은 실로 사문의 잘못된 의례입니다. 공의가 억울하게 여기고 사림이 개탄스러워함이 갈수록 더욱 심해집니다.
다행히 우리 전하께서 선현을 존숭하시고 궐전(闕典)을 모두 바로잡으시는 때를 맞이하였으니, 공의를 펴는 것은 바로 이때일 것입니다. 신들이 감히 짧은 상소로 외람되이 번거롭게 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굽어살피셔서 선왕 영묘조의 뜻을 따라 특별히 유도(儒道)를 존숭하려는 생각을 넓히시어 한결같이 김홍욱의 배향을 회복하도록 한 전례대로 속히 성수종을 파산서원(坡山書院)에 다시 배향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그러면 문덕으로 인한 교화가 더욱 드러나 유도가 다시 빛날 것입니다.”
하여, 비답하기를,
“상소한 내용은 해조에 내려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입직 직제학 박우원(朴祐源)
[주D-001]즉시 …… 것이면서 : 이 부분은 앞뒤의 문맥이 통하지 않아 《승정원일기》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登時建白 旋卽復享 守琮則未及登聞 尙未蒙復享之典 均是追享 而”

 

 

己卯錄補遺卷[下]
白仁傑

白仁傑丁巳生。字士偉。辛卯生員。丁酉及第。乙巳爲獻納。是時大司諫金光準大司憲閔濟仁。受尹元衡李芑陰嗾。而托承懿旨。搆陷柳灌等於無形之罪。臺議不同。翌日兩司詣闕。辭以不得相容。及退。公仍留獨啓曰。夫臺諫者。博採衆議。處之以光明正大。故謂之公論。有或不可云。則非公論也。光準濟仁聞有密旨。奔走於諸宰家。有同傳令軍卒。請罷之。尹李大怒。下公詔獄鞫問。賴鄭順朋記公護已之恩。只竄安邊。他臺諫亦皆貶謫。或杖而殞命者。未幾放歸田里。乙丑復敍。今上朝。官至參贊。嘗封事請配享趙靜庵于夫子廟庭。以厲士氣。於是太學生等上書言。一蠹寒暄靜庵晦齋退溪五先生。皆欲從祀。公倡言於朝曰。一蠹寒暄中廟贈官。而致祭於家廟。今不可更議也。或謂晦齋退溪皆有立言垂後。而靜庵則未也。若靜庵之春賦一篇。足以觀一元之理氣。達萬化於無窮。苟非窮理格致之學。則能若是乎。其立言垂後云者。收拾前賢往行之糟粕。非踐實獨得之妙者也。論三子修齊之方。則晦齋之昵狎倡妓。與靜庵之若將況已而不近女色。孰優孰劣。退溪之獨善其身。與靜庵之倡導而人皆感化。孰得孰失。至於一蠹。有性理之學。寒暄有啓迪之功。若比於靜庵之爲▣▣一年。市井小民事其父母。生養以誠。死葬以哀。縗麻三年。軍卒賤隷。亦爲居廬。祭用木主。墓必立石。今北邙阡隴標石羅列者。皆非設敎而督責。遐邇感化。人知爲善。俗尙孝悌。乃自然而爲之。若使行政數年。則習與性成。移風易俗。彝倫之丕變。亦可想已。古之人有躬行治化者。有空言治道者。行治化與言治道。雖其功夫有難易。致效有遲速。其爲化行則一也。然以身敎人。聳動感發而速化。如靜庵者。三代以下有幾人哉。乃上疏言。光祖之賢。人無間然。而群兇指爲曲學詭行。其嘉言善行與敎化之迹。將泯滅而無傳焉。此臣之所以不敢以從祀再瀆。而只陳事功而已云云。詳在伸冤疏章。子惟諴。擢文科。今爲吏曹郞。
大東野乘卷之十終


 


  목사 이완청 영세불망비

 

 

 

 

 목사 남용익 비

 

  남용익(南龍翼)

 

조선 인조(仁祖)-숙종(肅宗)의 문신·문인. 본관은 의령(宜寧).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내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문명을 떨쳤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에 연루되어 명천(明川)에 유배되어 죽음.

 

 

○ 10월. 대제학 채유후에게 명해 조사(朝士)로서 문장에 능한 김수항(金壽恒)ㆍ남용익(南龍翼)ㆍ이은상(李殷相)ㆍ홍위(洪葳)ㆍ이단상(李端相)ㆍ안후설(安後說) 등 6명을 선발하게 하여 휴가를 주고 호당(湖堂)에서 독서하도록 하였다.
상이, 옛날 호당에서 있었던 일들에 관해 유후에게 물었는데, 유후가 국조(國朝) 이래 응제(應製)의 서(序)와 기(記) 그리고 호당을 두게 된 절목들을 한데 모아 올리고 또, 호당이 지금은 퇴폐하여 사가독서를 시키려 해도 시킬 곳이 없다고 말하자, 상이 대신들과 논의하여, 1개월 동안에 10일 간은 직무에 임하고 10일 간은 강제(講製)를 하게 하여 그렇게 정과(程課)를 삼으라고 명하였던 것이다.

龜亭先生遺稿上
 附錄
宜春世寶跋 十一代孫龍翼撰 a_006_646c


古人以王家氈,魏公笏爲傳家寶。子孫追遠之誠當006_646d如是也。今觀先祖忠景公曁旁祖忠簡公相府告身二道。尤有以起後嗣之感也。夫祖孫作相者蓋寡。而至若祖佐聖祖創大業。孫佑神孫致太平。功德流傳。子支蕃衍。則實是前史所罕有者。況歷年久遠。喬木凋零之後。恩麻二紙飄落所不知。終爲雲仍所得。筆跡寶畫。宛然如昨。則豈非事之尤奇。而有數存於其間耶。藥泉亦繼箕裘之業。先爲跋。又屬龍翼續之。仍送宗孫磐家。使之永世寶藏云爾。

龜亭遺稿跋
 
龜亭先生遺稿跋[南龍翼] a_006_653b


惟我宜寧之南。自羅麗簪組相承。至忠景公龜亭相公。佐太祖創大業。歷事太宗世宗。位極上台。年垂大帙。形圖雲閣。食綴廟庭。哀榮至矣。壽福備矣。只緣世代緬邈。文獻無徵。其嘉謨雄略善行格言。幾於湮沒。後生無以考信。乃者主祀孫齋郞磐幼安裒輯其三代記聞。名之曰翠微。卽公所居之堂額。而006_653c基址尙存。宗家世守焉。是編也先之以詩篇。次之以世系事實。又錄後裔之爲公爲鄕顯官及忠孝節行著聞者之名。其下略附公之孫忠簡,直學兄弟故蹟。合爲一卷。支孫藥泉相公之胤鶴鳴子聞考校釐正。仍將刊行。屬龍翼爲之跋。龍翼敬受而讀之。則公之平生。槩可想知。亦可爲佩服之家訓也。蓋尊慕冶隱。投詩造廬。則師尙父之重義人也。首長憲府。進言革弊。則魏文貞之贊新化也。自請燕行。勤護聖躬。則願忠之志切矣。遠避政權。不與家亂。則先見之明著矣。是用閱三朝而恩眷彌隆。緜屢代而子孫尙熾。006_653d古所云五百年名世者。非公而誰。詩亦不事繪飾。忠厚和遠。所載雖至尠。嘗臠可以知鼎。豈雕篆小子所敢測其涯涘哉。至若忠簡公之宏才偉度。業繼箕裘。進不由科。黑頭升公。直學公之淸操介性。玉立邇班。年雖未永。華聞壓世。可謂難爲弟也。吁其可敬也已。其可傳也已。磐與鶴鳴。卽忠簡公之派。龍翼卽直學公之派。則分自同氣。睦宜俱敦。旣嘉其廣加採撰之積功。又領其急欲印布之美意。以同般追遠之誠。安敢欲諱蕪拙之詞。不相斯役乎。玆綴卷中可記者書于末。凡我同宗諸君子。繼此而張大之。以壽其傳可006_654a也。歲舍己巳首春上浣。十一代孫輔國崇祿大夫,行知中樞府事兼吏曹判書,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龍翼。再拜謹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