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맞이하여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부분을 연구하기 위하여 도봉산 무수골 주변에 산재해있는 집안의 묘지를 탑방하여 보았다
자전거를 이용하여 몇 곳을 탐방하였다 역시 좋은 곳에 점지를 한 곳을 보니 훌륭하신 분들이 잠들어 계신다는 내용을 알수가 있다
자전거로 이용하여 여기 저기 를 다니다가 본 산소를 촬영하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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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집 제3권
종실(宗室) 중의대부(中義大夫) 원천군(原川君)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의 묘갈명 |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능히 하늘의 보우를 누리어 많은 아들을 보유하였는데, 그 중에 휘 당(瑭)이란 분이 처음으로 영해군(寧海君)에 봉해졌고, 그 후 삼세(三世) 동안 복을 길러 철인(哲人)을 낳았으니, 그가 실로 우리 원천군(原川君)인데, 원천군이 마침내 그 기반을 창성하게 하였다. 당이 의(義)를 낳았는데 의는 길안도정(吉安都正)에 추증되었고, 의가 말숙(末叔)을 낳았는데 말숙은 은계군(銀溪君)에 추증되었으니, 모두 공이 귀(貴)하게 된 때문이었다. 은계군이 부사맹(副司猛) 최윤덕(崔潤德)의 딸에게 장가들어 계사년 11월 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막 나서부터 영명하고 순수하여 경(經)을 공부해서 예과(藝科)에 응시한 결과 두 번이나 장원(壯元)하여 정의(正義)의 품계에 뛰어올랐다. 은계공은 호협한 기개를 좋아하고 즐겁게 노니는 것을 숭상하여, 별일만 없으면 일찍이 하루도 악기를 타지 않은 적이 없었고, 손님이 오면 반드시 관현악을 울리고 노래 부르고 시가를 읊으며 날을 마치었으며, 아무리 끼닛거리가 자주 떨어지곤 하여도 즐거운 표정으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가세(家勢)가 점점 쇠락해졌으나, 공이 마음을 다하여 힘써 경영해서 조석으로 맛있고 보드라운 음식을 준비하여 기쁘게 해 드렸고, 오직 온갖 수단 방법을 통해서라도 어버이를 편안하게 해 드리기에 힘썼다. 그리고 어버이에게 응대하는 즈음에는 언제나 하루같이 용모를 유순하게 하였고 일찍이 군색한 빛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군자가 그 일을 어렵게 여겼다. 어버이가 병으로 막 자리에 누움에 미쳐서는 공이 똥을 맛보아 병세를 증험하였고, 병을 어찌할 수 없게 되어서는 밤마다 반드시 목욕하고 하늘에 기도하였으며, 끝내 하늘의 보우를 얻지 못해 상사를 당해서는 죽(粥)만 마시며 여묘살이를 하면서 3년 동안을 마치 어린애가 부모를 사모하듯 하였다. 명묘(明廟)가 승하했을 때는 명묘를 오랫동안 섬겼다는 이유에서 소식(蔬食)으로 상을 마쳤으니, 그 충성으로 옮긴 것 또한 그 효성과 같았다.
임진년에 변란이 일어나자, 상이 특명으로 공에게 도총부 부총관을 겸직시켰다. 그 후 경성(京城)이 함락됨에 미쳐서는 공이 처자 권속을 거느리고 연천(漣川), 삭녕(朔寧) 사이에 있다가, 동궁(東宮)이 이천(伊川)에서 군대를 위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미투리[麻鞋]를 신은 채로 올라가 뵈었다. 이때 상(上)은 의주(義州)에 있었는데, 황제(皇帝)가 조서를 내려 상을 위무하였다.
이때 옛 전례(典禮)가 모두 흩어져 유실되어 조정의 의례가 워낙 초초하였으므로, 조정에서 공이 고사(故事)에 익숙하다 하여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로 차임하였다. 그리하여 부름을 받고 행재소에 가서는 영조의(迎詔儀)를 강론하고, 인하여 두 번이나 상소하여 시무(時務)를 논하자, 조정의 의논이 공의 처사를 훌륭하게 여기어 중의(中義)의 품계를 더해서 돌려보내니, 공이 그대로 동궁을 호종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천자(天子)가 대군(大軍)을 보내어 삼경(三京)을 수복하였는데, 조정에서 처음으로 적화(賊禍)가 정릉(靖陵)에 미쳤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을 조릉사(朝陵使)로 삼아 여러 능(陵)을 배알하고 인하여 정릉의 대전관(代奠官)을 행하게 하였다. 이해 9월에는 광녕(廣寧)에 달려가서 고군문(顧軍門)에 급함을 알리고, 갑오년 봄에 복명(復命)하였다.
이때 병화(兵火)를 겪은 터에 기근(飢饉)까지 겹쳐 굴러다니는 시체가 성(城) 안에 그득하였으므로, 매양 밥상을 대할 때마다 슬퍼서 차마 밥을 삼키지 못하며 말하기를,
공의 휘는 휘(徽)이고 자는 사미(士美)이다. 감찰(監察) 여세평(呂世平)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았는데 사헌부 대사헌 황신(黃愼)에게 시집갔고, 측실에서 2남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경침(景沈)이고 그 다음은 경연(景淵)이다. 황신은 1녀를 낳아서 해운 판관(海運判官) 심광세(沈光世)에게 시집갔고, 심광세의 3남 2녀는 모두 어리다.
공은 공경하고도 온화하고 문아했으며, 친척에게는 더욱 후하여 친소(親疎)를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화목하게 지내면서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남을 대접하는 데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모든 어려운 처지를 구해 주고 분란한 일을 해결해 주는 데 있어 오직 자신의 힘대로 했을 뿐이었고, 뒤에 비록 은혜를 저버린 자가 있더라도 또한 개의치 않았다.
공이 집에 있을 적에는 경적(經籍)으로써 스스로 즐기었는데, 그 중에도《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소학(小學)》등의 글을 존상(尊尙)하여, 항상 효제(孝悌)와 성경(誠敬)으로써 후생(後生)들을 인도하여 진취시키는 데 있어 정성스럽게 하였다. 그리고 난리를 당한 이후로는 시사(時事)에 언급이 될 때마다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비분강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 충정에 감복하였다.
아, 공의 효성과 충성이 그 누구만 못했으랴만, 종실의 근친이기에 재능을 두고도 제한을 받아 펴지 못하여, 공훈은 나라에 세우지 못했고 은택은 백성들에게 두루 입혀지지 못했으니, 하늘이 인재를 내림이 어찌 이렇게 구애된단 말인가. 개탄스러울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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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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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室贈銀溪君墓誌銘 a_036_167b |
有美金枝。維實其猗。慈良寬裕。粵乃天資。事母曁兄。堂室熙熙。行喪致祭。禮罔有虧。接物誠信。置懷坦夷。雖遭困厄。中則恬怡。好讀善射。才蔑不宜。聲律之妙。匪待傳師。少嬰家禍。譴謫分離。賜環復爵。恩渥不遲。性耽山水。詩酒爲嬉。婆娑郊墅。老興益彌。亦旣享壽。復有令兒。維壻及孫。佳且繁而。樂志考終。人鮮如斯。矧乎餘慶。又夥厥貽。奚卜宅兆。祖考是隨。道峯東麓。允協稽龜。我銘公德。埋此片甆。百世在下。庸詔告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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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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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일 (임술) | ||||
이이가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다루면서, 어떤 사람에게 한 가지 착한 점이 있으면 마치 자기가 가진 것처럼 여겼고, 자기의 과실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서슴없이 청환·요직에 앉혔습니다. 유성룡·김응남·이발 같은 이들이 어찌 일찍이 청망(淸望)에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심중을 훤히 알고 나서 다시는 추천을 하지 않으니 갑자기 반기를 들고 항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살았을 때에는 배척하기를 도모하고 죽은 뒤에는 온갖 험담으로 헐뜯었는데 지금에는 그 뿌리가 더욱 커져 이이의 얼굴을 아는 자는 모두 외지로 쫓아내고 성혼의 이름을 아는 자는 한결같이 관직에서 쫓겨나 초야에 있게 하여, 위로는 경상(卿相)에서부터 아래로 위포(韋布)에 이르기까지 창황분주하여 몸둘 곳이 없게 합니다. 어찌 일찍이 군자가 정치를 하면서 한 시대의 충현(忠賢)들을 공격하여 모두 제자리를 잃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박순은 훈구(勳舊)로서 가장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었지만 혼탁한 세상을 당하여 폐기된 자들의 원망을 받을 것이 뻔하였으므로 유정(留正)처럼 초야로 돌아간 지 해가 넘었습니다. 다만 이 몇 년 사이에 사도(仕途)가 혼탁해져 덕을 숭상하는 풍조는 날로 쇠퇴해지고 이욕을 추구하는 무리들만 날로 진출함으로써 재해를 불러 자택(資澤)이 이미 오래전에 끊겼습니다. 그런데 설거주(薛居州) 같은 한 사람의 착한 선비도 왕의 곁에 있지 않아 임금이 백성들의 고통을 걱정하더라도 유사(有司)로서 고해주는 자가 없으니, 한 사람의 신하를 폐함으로 인하여 국사가 어찌 되었습니까. 정철의 강직한 성미가 한 번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은 까닭으로 점점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 끝내 모함하여 초야에서 굶주리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간혹 말하기를 ‘정철이 너무 심하게 악을 미워하였으므로 패함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신은 보건대 그가 이발 형제를 아껴 백방으로 충고하여 미혹에서 돌아오기를 바랐는데도 이발은 뉘우치지 않고 더욱 공격하여 해치려 하였으니, 송나라 때 정위(丁謂)가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기필코 구준(寇準)을 쫓아낸 일과 같습니다. 한나라 급암(汲黯)의 강직함이 없었더라면 누가 회남왕(淮南王)의 역모를 제어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팔을 걷어붙이고 분개하면서 길게 탄식하는 바입니다. 성윤해(成允諧)를 논하자면 그는 당대 일민(逸民)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입니다. 언론과 풍지(風旨)가 고고(孤高)하여 감히 자신의 결백한 지조를 바꾸지 못하였는데, 시론(時論)의 변란을 듣고 강개하다가 병이 중하여졌으니, 살아서 신공(申公)을 초치하는 명을 받지 못하고 죽어서는 왕관(王官)의 대열에 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수(韓脩)·민순(閔純)은 모두 노성(老成)한 선비로서 세인의 존중을 받았으나, 다만 시의(時議)에 붙쫓지 않았기 때문에 시골에서 시들어 죽었고, 이준민(李俊民)·안자유(安自裕)는 헌걸차고 기위(奇偉)한 선비로서 조금도 사심(邪心)이 없는 사람인데 한번 이이를 어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모두 사가에서 두문불출하였으며, 김계휘(金繼輝)는 청렴 정직하고 편당하는 마음이 적어 선조(先祖) 이래 평소 고충(孤忠)이라 일컬었고 재능과 지혜를 겸비하였는데 이이에게 허여받은 것 때문에 살아서는 숭품(崇品)의 반열에서 폐출(廢黜)되고 죽어서는 악명을 썼습니다. 구봉령(具鳳齡)은 청렴하고 공정하며 위엄이 있어 호서(湖西)의 백성들이 모두 선정(善政)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일찍이 남평(南平)을 지나면서 한 번 이발을 찾아보지 않자 심의겸의 당이라고 배척하여 죽게까지 하였고, 홍성민(洪聖民)은 정직한 자세를 취하여 아부하지 않았으므로 서울의 선비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라 일컬었는데 신응시가 죽었을 때 만사를 지어 조문하면서 아울러 이이까지 언급하니, 외지로 내쫓아 마치 송나라 때 소식(蘇軾)처럼 연좌시켰고, 이산보는 의지할 만한 충신(忠臣)을 가진 자로서 온 조정에 짝할 자가 없었는데 이이·정철에 관한 하문(下問)을 받고 자신의 견해대로 정직하게 아뢰었고 시론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았다 하여 김홍민(金弘敏)의 말 한 마디에 이광(李光)처럼 쫓겨났습니다. 더구나 윤근수(尹根壽)·박점(朴漸) 같은 무리는 바른 것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 전일의 공적이 현저하고, 충직한 자를 허여하며 간사한 자를 배척하여 훗날의 효험이 분명히 기대되는데도 오히려 모두 방붕방무(邦朋邦誣)로 지목하였습니다. 이해수(李海壽)·백유함(白惟咸)의 청백한 명성과 곧은 기개는 모두 부친의 기풍을 이어받았는데, 이해수는 이이를 깊이 알아 김우옹(金宇顒)의 횡의(橫議)를 듣지 않았고 백유함은 성혼을 독실히 믿어 백유양(白惟讓)의 부침하는 의견을 따르지 않자 모두 탁란(濁亂)이란 명목으로 공박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응명(辛應命)은 영변 판관(寧邊判官)으로, 유공신(柳拱辰)는 평사(評事)로 좌천되고, 윤순(尹淳)·김권(金權)·김서생(金瑞生)·이항복(李恒福)·홍인상(洪麟祥)·윤섬(尹暹)의 무리들이 이이는 훌륭하고 성혼은 올바르다는 말을 한 번 하자 모두 배척하였습니다. 현달한 관직에 있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백발의 기로(耆老)들까지도 모두 폐하였고, 신진 인사들의 간택은 한결같이 이발과 허봉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한 시대의 우수한 인재들을 불효·불충의 지경에 몰아놓는 것이니 신은 탄식하는 바입니다. 양사기(楊士奇) 같은 사람은 청렴하고 근신하여 우국충정을 가진 자입니다. 20년 동안 백성을 다스린 공로가 있고 변방에 관한 원대한 계략은 성상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이의 착한 점에 대해 심복하여 여러 차례 말로 표현하자, 두 번이나 통정(通政)의 가자(加資)를 박탈함으로써 한을 품은 채 죽게 하였습니다. 윤기(尹祁)는 장흥(長興)에서 칼을 잡고 김주(金澍)가 겁에 질려 퇴각하려는 것을 중지시켜 영암성(靈巖城)의 방비를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젊어서 군부의 위급한 처지에 달려갈 줄을 아는 자는 장년에 반드시 충의의 기개를 높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남의 과실을 바르게 말하여 정철의 인정을 받을까 염려하여서 일생을 궁벽진 고을로 보내어 간관(諫官)이 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민각(李民覺)은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높아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 으레 백성들이 사모하였습니다. 일찍이 선산(善山)의 원이 되었을 때 허봉이 제 아비의 병에 급히 달려가지 않는 것을 알자, 허봉은 그가 이우(李瑀)에게 말을 전하여 이이가 알게 되면 사간의 의망(擬望)을 저지당할까 의심하고 진산 목사(晉山牧使)에게 몰래 사주하여 드러내어 공박하게 함으로써 이우의 선한 점까지 매몰시키게 하였습니다. 안민학(安敏學)은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어버이를 봉양하고 형을 섬기는 데 있어서 사람들이 행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다만 강직하여 악을 미워하는 천성을 타고나 남의 과실을 보면 정색을 하고 충고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달갑잖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허봉이 상주(尙州)에 이르러 상사(喪事)에 임해서 슬퍼하지 않고서는 하낙(河洛)이 민학에게 그 말을 전하여 이이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청요(淸要)의 관직에 오르지 못할까 의심한 나머지 청렴 검소하여 백성들이 감복하는 대흥 감무(大興監務)를 불효·불우하다고 탄핵하고 아울러 하낙의 정직한 것까지 폐하였습니다. 서익(徐益)이 사명을 받고 육진(六鎭)으로 나갈때 이이가 직접 여섯 조목의 질문을 받고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에서도 조리 정연하게 말하여 마치 변방의 산천을 직접 보는 듯하였으므로 크게 장사(將士)들이 감복하여 더욱 이이의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소하여 유(柳)와【성룡(成龍).】 정(鄭)을【여립(汝立).】 논박한 것이 비록 적중하지는 못한 듯하나 실로 군부를 속이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는데, 다만 과감이 말한 것을 미워하여 관리의 재능까지 폐하였습니다. 김천일(金千鎰)은 이항(李恒)의 문인으로서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고, 덕을 숭상하는 타고난 천성을 가장 온전히 가진 자인데, 마음속으로 이이의 착한 점을 알고 한 번도 시예(時譽)에 사색(辭色)을 굽히지 않자 담양(潭陽) 백성들이 구순(寇恂)의 경우처럼 머물게 해달라는 청원을 하였는데 대관을 사주하여 저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의건(李義健)·이희삼(李希參)·변사정(邊士貞)·정운룡(鄭雲龍)과 같이 공론의 지지를 받는 사람들도 이발 때에 폐기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주현(州縣)의 말단 관직에 있는 자들도 이이에게 관련된 자는 허물을 들추어 내어 교묘하게 중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신이 이름을 아는 자가 이 정도이니 신이 모르는 자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송익필(宋翼弼)은 비록 사련(祀連)의 아들이지만, 노년에도 독서에 힘써 학문이 깊고 경서에 밝았으며 언행이 바르고 곧아 제 아비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이이·성혼도 모두 외우(畏友)로 여겨 늘 제갈양(諸葛亮)이 법정(法正)에게 했던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사람들의 의사를 잘 유도하여 스스로 감동하고 분발하여 자립하게 하였으므로 생원·진사에 오른 자가 적잖이 있었는데 그 중에 김장생(金長生)·허우(許雨) 같은 자는 의를 행하는 행실이 경외(京外)에 저명하였고, 강찬(姜燦)·정엽(鄭曄) 같은 자도 모두 뛰어난 재주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조종의 전례(典禮)로 말하면 사람을 가르쳐 성취시킨 일이 있으면 으레 관직을 상으로 주는 법이 있고, 중국의 제도로 말하면 어진이를 쓰는 데는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 고금을 통하여 변함없는 원칙입니다. 이이가 서얼(庶孽)의 허통(許通)을 주장한 의도는 다만 훌륭한 인물을 구하여 임금을 보필하자는 것일 뿐, 일개 익필에게 사심을 둔 것은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이의 과실로 돌립니다. 이산해는 익필에게 말하기를 ‘김응남(金應南)이 제주 목사가 된 것을 사람들은 그대가 청탁한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대가 만약 이이가 죽고 난 뒤 곧 절교하였더라면 이러한 환란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발·이길·백유양은 또 그의 형제가 정철과 평소 교분이 두터운 것을 미워하고, 또 자기들의 단점을 의논할까 의심하여 몰래 해당 관리를 사주하여 사조(四朝)의 양적(良籍)을 모두 없애고 불법으로 환천(還賤)시킨 다음 곤장을 안겨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 70여 명도 모두 안씨(安氏)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가업을 파산(破産)하고 도망가 돌아갈 곳이 없게 되었는데, 혹은 ‘경외(京外)에 흩어져 걸인이 되었다.’ 하고 혹은 ‘배를 타고 섬으로 갔다.’ 합니다 흩어져 걸인이 되었다면 70여 명 모두가 머지 않아 구렁텅이의 해골이 될 것이고 배를 타고 섬으로 갔다면 70여 명이 장차 수적(水賊)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 성은은 하늘과 같아서 생장(生長)시키지 않는 것이 없어 사형의 죄에 해당되는 자라도 또한 삼복(三覆)을 시행하여 형벌이 조금이라고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으면 반드시 널리 공의(公議)를 거두어 살리는 길을 찾습니다. 심지어 송아지가 슬프게 울어도 성려(聖慮)를 다하고, 타락(駝酪)의 진상을 감함에 동산속의 초목이 모두 생기를 띠게 되는 법인데, 유독 이 70여 명의 목숨은 죽음의 경지에 닥쳤는데도 누구 하나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동해에 한 원부(怨婦)가 있자 3년 동안 큰 가뭄이 들었다 하는데 금년 봄의 가뭄과 우박도 이 일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데 어찌 군사를 잃은 일개 서예원(徐禮元)을 잡아 가두기만 한 일로 되겠습니까. 【원전】 25 집 547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교육(敎育) / *역사(歷史) / *군사(軍事) / *사상-유학(儒學) / *변란-정변(政變) [주D-001]위포(韋布) : 벼슬하지 않은 선비. [주D-002]유정(留正) : 송 철종 때의 좌승상. 효종(孝宗)이 죽자 광종(光宗)이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국상을 주관하도록 태자를 세우자고 유정이 요청하였고 들어주지 않자 병을 핑계하고 시골로 도망갔다. 《송사(宋史)》 권391 유정전(留正傳). [주D-003]정철의 강직한 성미가 한 번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은 까닭 : 이발은 평소 정철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출세하고부터는 능멸하였다. 정철이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하루는 이발이 술에 취하여 정철의 수염을 뽑았다 이에 정철이 시를 지어 읊기를 “몇몇 긴 수염을 뽑아가니 노부(老夫)의 풍채가 문득 초라하구나.” 하였다. 그뒤에 함께 회식하는 자리에서 못된 말을 하므로 정철이 일어나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중봉집(重峯集)》 권7 소주(疏注). [주D-004]정위(丁謂)가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기필코 구준(寇準)을 쫓아낸 일 : 송 진종(宋眞宗) 때 구준(寇準)은 정승이었고 정위는 참정이었다. 정위가 평소 구준에게 심히 아첨하였는데, 하루는 중서성의 회식에서 구준의 수염에 국물이 묻자 정위가 일어나 닦아주었다. 이에 구준이 말하기를 “참정은 나라의 대신인데 장관을 위하여 수염을 닦아주니……” 하였다. 정위는 매우 부끄러워하였고 뒤에 구준을 참소하여 쫓아내었다. 《송사기사본말(宋史紀事本末)》 권23 정위지간(丁謂之姦). [주D-005]급암(汲黯)의 강직함이 없었더라면 누가 회남왕(淮南王)의 역모를 제어할 수 있었겠습니까. : 전한 무제 때 급암은 강직하기로 유명하였다. 회남왕 안(淮南王安)이 오피(伍被)를 꾀어 모반하였는데 그의 말이 “한나라 조정에서 급암만이 직간을 좋아하고 절개를 지켜 의에 죽는 인물이어서 그른 것으로 속이기 어렵다. 승상 공손홍(公孫弘)쯤은 아주 간단하다.” 하였다. 결국 모반이 탄로나 회남왕은 자살하였다. 《한서(漢書)》 권50 급암전(汲黯傳). [주D-006]신공(申公)을 초치하는 명 : 국가의 원로를 초치하여 기용하는 것. 한 무제 때 신공이 80세에 초치되어 태중 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한서(漢書)》 권88 유림전(儒林傳). [주D-007]신응시가 죽었을 때 만사를 지어 조문하면서 아울러 이이까지 언급하니, : 홍성민이 신응시가 죽자 만사를 지어 “지하에서 율곡을 만나거든 시사가 날로 틀어진다고 말하게[地下如逢要谷老 爲言時事日乖離].”라고 하였다. 《중봉집(重峯集)》 권7 소주(疏注). [주D-008]소식(蘇軾)처럼 연좌시켰고, : 왕규(王珪)가 소식의 ‘회(檜)’ 시를 들어 불신(不臣)의 뜻이 있다고 탄핵하여 아우 철(轍)·사마광 등과 함께 출척(黜斥)되었다. 《십팔사략(十八史略)》 권6. [주D-009]이광(李光)처럼 쫓겨났습니다. : 이광은 송 고종(宋高宗) 때 사람으로 당시 사대부들이 권세가들에게 아부하는 풍속을 강직하게 탄핵하였는데, 결국 왕보(王黼)에게 미움을 받아 양삭현(陽朔縣)에 좌천되었고 진회(秦繪)의 뜻을 거슬러 파직당했다. 여기서는 이산보가 이광처럼 직언하다가 파직되었다는 뜻임. 《송사(宋史)》 권363 이광전(李光傳). [주D-010]대흥 감무(大興監務) : 하낙이 대흥 현감을 지냈음. [주D-011]구순(寇恂)의 경우처럼 머물게 해달라는 청원 : 한 광무제 때 구순이 영천(穎川)의 난을 평정하고 향교를 열어 생도들을 가르쳤는데 그뒤 집금오(執金吾)가 되었을 때 당시 영천에 난리가 일어나자 광무제는 구순과 함께 평정하니 도적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이 광무제의 길을 막고 구순을 1년 만 머물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구순을 머므르게 하니 얼마 안 되어 그 지방이 모두 안정되었다. 《후한서(後漢書)》 권60 구순전(寇恂傳). [주D-012]제갈양(諸葛亮)이 법정(法正)에게 했던 것 : 법정이 촉군태수(蜀郡太守)가 되어 지나치게 굴자 어떤 자가 제갈양에게 “법정이 촉군에서 제멋대로 행하니 주공(主公:유비를 지칭함)에게 알려 억제토록 하십시오.” 하니 제갈양은 “왜 금지하여 그의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제갈양은 법정과 숭상하는 것이 서로 같지 않았지만 공적인 대의로써 서로 취하였다. 《삼국지(三國志)》, 권38 촉서(蜀書)7 법정전(法正傳). [주D-013]삼복(三覆) : 세 차례의 복심. [주D-014]타락(駝酪) : 우유. [주D-015]어찌 군사를 잃은 일개 서예원(徐禮元)을 잡아 가두기만 한 일로 되겠습니까. : 선조 17년(1854)에 서예원이 회령(會寧)의 볼하진 첨절제사(乶下鎭僉節制使)로서 기병 80명을 거느리고 오랑캐를 정탐하러 갔다가 패배하고 도망하여 그 죄로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는데, 서예원 한 사람을 처발한 것으로는 하늘에 사무친 수많은 사람의 원한을 풀 수 없다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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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에 두었던 정칠품(正七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영사(領事: 正一品)가 1원으로 영의정(領議政)이 예겸하며, 대제학(大提學: 正二品), 제학(提學: 從二品), 부제학(副提學: 正三品 堂上), 직제학(直提學: 正三品 堂下), 전한(典翰: 從三品), 응교(應敎: 正四品), 부응교(副應敎: 從四品) 각 1원, 교리(校理: 正五品), 부교리(副校理: 從五品), 수찬(修撰: 正六品), 부수찬(副修撰: 從六品) 각 2원이 있고, 아래로 저작(著作: 正八品) 1원, 정자(正字: 正九品) 2원이 있다.
홍문관박사는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 正八品) 1원이 겸임했다. 재직(在職) 기간 90일이 지나면 승륙(陞六) 하였다
신응명(辛應命)
성명(姓名) |
신응명(辛應命) |
본관(本貫) |
영월(寧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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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時代) |
1551 ~ ? |
자(字) |
군우(君祐) |
호(號) |
금빈(錦濱) |
이력(履歷) |
신응명(辛應命) 부원군파(府院君派) 18세 자(字) 군우(君佑) 호(號) 금빈(錦濱) 관(官) 명종(明宗) 신해(辛亥)생 1551년, 선조(宣祖) 병자(丙子)에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合格) 계미(癸未)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갑신(甲申) 승(陞) 홍문관(弘文館) 박사(博士) 겸(兼) 경연사경(經筵司經) 춘추관 기사관 거(居) 황해도(黃海道) 배천(白川)
사마방목(司馬榜目) 신응명(辛應命) 【시험년도】선조(宣祖) 9년 (157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합격등위】3등(三等) 10위 【본인 자】군우(君佑) 【본인생년】신해(辛亥) 1551 합격연령 26 【본인본관】영월(寧越) 【본인거주】경(京) 【본인전력】유학(幼學) 【본인과거】선조(宣祖) 16년(1583) 계미(癸未) 알성시(謁聖試) 【본인양시】양시(兩試) 【부친성명】신보상(辛輔商) 【부친관직】행서흥도호부사(行瑞興都護府使) 【부친관직】통훈대부(通訓大夫) 【부친구존】자시하(慈侍下) 【안항(형)】신응종(辛應宗) 신응기(辛應基) 신응시(辛應時) 신응세(辛應世) 신응운(辛應運) 신응회(辛應會) 신응성(辛應性)
사마방목(司馬榜目) 신응명(辛應命) 【시험년도】선조(宣祖) 9년 (157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합격등위】2등(二等) 13위 【본인 자】군우(君佑) 【본인생년】신해(辛亥) 1551 합격연령 26 【본인본관】영월(寧越) 【본인거주】경(京) 【본인전력】유학(幼學) 【본인과거】선조(宣祖) 16년(1583) 계미(癸未) 알성시(謁聖試) 【본인양시】양시(兩試) 【부친성명】신보상(辛輔商) 【부친관직】행서흥도호부사(行瑞興都護府使) 【부친관직】통훈대부(通訓大夫) 【부친구존】자시하(慈侍下) 【안항(형)】신응종(辛應宗) 신응기(辛應基) 신응시(辛應時) 신응세(辛應世) 신응운(辛應運) 신응회(辛應會) 신응성(辛應性)
<국조 문과 방목> 신응명(辛應命) 선조(宣祖)16년(1583년), 알성시(謁聖試) 병과9(丙科9)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51년, 신해 자(字) 군우(君祐) 호(號) 본관(本貫) 영월(寧越)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신보상(辛輔商) 생부(生父) 조부(祖父) 신윤형(辛尹衡) 증조부(曾祖父) 신석(辛奭) 외조부(外祖父) 민거(閔<거0x545F>) 처부(妻父) 용성수 이열(龍城守 李悅) 형(兄) 신응시(辛應時)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76(병자) 생원시/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관직(官職) 판관&(判官&),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
조선왕조실록 《선수 020 19/10/01(임술) / 주학 제독관으로 제수된 조헌이 붕당의 시비와 학정의 폐단을 논한 상소문② 》 이이가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다루면서, 어떤 사람에게 한 가지 착한 점이 있으면 마치 자기가 가진 것처럼 여겼고, 자기의 과실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서슴없이 청환·요직에 앉혔습니다. 유성룡·김응남·이발 같은 이들이 어찌 일찍이 청망(淸望)에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심중을 훤히 알고 나서 다시는 추천을 하지 않으니 갑자기 반기를 들고 항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살았을 때에는 배척하기를 도모하고 죽은 뒤에는 온갖 험담으로 헐뜯었는데 지금에는 그 뿌리가 더욱 커져 이이의 얼굴을 아는 자는 모두 외지로 쫓아내고 성혼의 이름을 아는 자는 한결같이 관직에서 쫓겨나 초야에 있게 하여, 위로는 경상(卿相)에서부터 아래로 위포(韋布)에 이르기까지 창황분주하여 몸둘 곳이 없게 합니다. 어찌 일찍이 군자가 정치를 하면서 한 시대의 충현(忠賢)들을 공격하여 모두 제자리를 잃게 한 적이 있었습니까. 박순은 훈구(勳舊)로서 가장 오랫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었지만 혼탁한 세상을 당하여 폐기된 자들의 원망을 받을 것이 뻔하였으므로 유정(留正)처럼 초야로 돌아간 지 해가 넘었습니다. 다만 이 몇 년 사이에 사도(仕途)가 혼탁해져 덕을 숭상하는 풍조는 날로 쇠퇴해지고 이욕을 추구하는 무리들만 날로 진출함으로써 재해를 불러 자택(資澤)이 이미 오래전에 끊겼습니다. 그런데 설거주(薛居州) 같은 한 사람의 착한 선비도 왕의 곁에 있지 않아 임금이 백성들의 고통을 걱정하더라도 유사(有司)로서 고해주는 자가 없으니, 한 사람의 신하를 폐함으로 인하여 국사가 어찌 되었습니까. 정철의 강직한 성미가 한 번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은 까닭으로 점점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 끝내 모함하여 초야에서 굶주리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간혹 말하기를 ‘정철이 너무 심하게 악을 미워하였으므로 패함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신은 보건대 그가 이발 형제를 아껴 백방으로 충고하여 미혹에서 돌아오기를 바랐는데도 이발은 뉘우치지 않고 더욱 공격하여 해치려 하였으니, 송나라 때 정위(丁謂)가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기필코 구준(寇準)을 쫓아낸 일과 같습니다. 한나라 급암(汲촒)의 강직함이 없었더라면 누가 회남왕(淮南王)의 역모를 제어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팔을 걷어부치고 분개하면서 길게 탄식하는 바입니다. 성윤해(成允諧)를 논하자면 그는 당대 일민(逸民)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입니다. 언론과 풍지(風旨)가 고고(孤高)하여 감히 자신의 결백한 지조를 바꾸지 못하였는데, 시론(時論)의 변란을 듣고 강개하다가 병이 중하여졌으니, 살아서 신공(申公)을 초치하는 명을 받지 못하고 죽어서는 왕관(王官)의 대열에 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수(韓脩)·민순(閔純)은 모두 노성(老成)한 선비로서 세인의 존중을 받았으나, 다만 시의(時議)에 붙쫓지 않았기 때문에 시골에서 시들어 죽었고, 이준민(李俊民)·안자유(安自裕)는 헌걸차고 기위(奇偉)한 선비로서 조금도 사심(邪心)이 없는 사람인데 한번 이이를 어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모두 사가에서 두문불출하였으며, 김계휘(金繼輝)는 청렴 정직하고 편당하는 마음이 적어 선조(先祖) 이래 평소 고충(孤忠)이라 일컬었고 재능과 지혜를 겸비하였는데 이이에게 허여받은 것 때문에 살아서는 숭품(崇品)의 반열에서 폐출(廢黜)되고 죽어서는 악명을 썼습니다. 구봉령(具鳳齡)은 청렴하고 공정하며 위엄이 있어 호서(湖西)의 백성들이 모두 선정(善政)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일찍이 남평(南平)을 지나면서 한 번 이발을 찾아보지 않자 심의겸의 당이라고 배척하여 죽게까지 하였고, 홍성민(洪聖民)은 정직한 자세를 취하여 아부하지 않았으므로 서울의 선비들이 모두 좋은 사람이라 일컬었는데 신응시가 죽었을 때 만사를 지어 조문하면서 아울러 이이까지 언급하니, 외지로 내쫓아 마치 송나라 때 소식(蘇軾)처럼 연좌시켰고, 이산보는 의지할 만한 충신(忠臣)을 가진 자로서 온 조정에 짝할 자가 없었는데 이이·정철에 관한 하문(下問)을 받고 자신의 견해대로 정직하게 아뢰었고 시론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았다 하여 김홍민(金弘敏)의 말 한 마디에 이광(李光)처럼 쫓겨났습니다. 더구나 윤근수(尹根壽)·박점(朴漸) 같은 무리는 바른 것을 지키고 아부하지 않아 전일의 공적이 현저하고, 충직한 자를 허여하며 간사한 자를 배척하여 훗날의 효험이 분명히 기대되는데도 오히려 모두 방붕방무(邦朋邦誣)로 지목하였습니다. 이해수(李海壽)·백유함(白惟咸)의 청백한 명성과 곧은 기개는 모두 부친의 기풍을 이어받았는데, 이해수는 이이를 깊이 알아 김우옹(金宇춳)의 횡의(橫議)를 듣지 않았고 백유함은 성혼을 독실히 믿어 백유양(白惟讓)의 부침하는 의견을 따르지 않자 모두 탁란(濁亂)이란 명목으로 공박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응명(辛應命)은 영변 판관(寧邊判官)으로, 유공신(柳拱辰)는 평사(評事)로 좌천되고, 윤순(尹淳)·김권(金權)·김서생(金瑞生)·이항복(李恒福)·홍인상(洪麟祥)·윤섬(尹暹)의 무리들이 이이는 훌륭하고 성혼은 올바르다는 말을 한 번 하자 모두 배척하였습니다. 현달한 관직에 있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백발의 기로(耆老)들까지도 모두 폐하였고, 신진 인사들의 간택은 한결같이 이발과 허봉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한 시대의 우수한 인재들을 불효·불충의 지경에 몰아놓는 것이니 신은 탄식하는 바입니다. 양사기(楊士奇) 같은 사람은 청렴하고 근신하여 우국충정을 가진 자입니다. 20년 동안 백성을 다스린 공로가 있고 변방에 관한 원대한 계략은 성상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이의 착한 점에 대해 심복하여 여러 차례 말로 표현하자, 두 번이나 통정(通政)의 가자(加資)를 박탈함으로써 한을 품은 채 죽게 하였습니다. 윤기(尹祁)는 장흥(長興)에서 칼을 잡고 김주(金澍)가 겁에 질려 퇴각하려는 것을 중지시켜 영암성(靈巖城)의 방비를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젊어서 군부의 위급한 처지에 달려갈 줄을 아는 자는 장년에 반드시 충의의 기개를 높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남의 과실을 바르게 말하여 정철의 인정을 받을까 염려하여서 일생을 궁벽진 고을로 보내어 간관(諫官)이 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민각(李民覺)은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높아 임기를 마치고 떠나면 으레 백성들이 사모하였습니다. 일찍이 선산(善山)의 원이 되었을 때 허봉이 제 아비의 병에 급히 달려가지 않는 것을 알자, 허봉은 그가 이우(李瑀)에게 말을 전하여 이이가 알게 되면 사간의 의망(擬望)을 저지당할까 의심하고 진산 목사(晉山牧使)에게 몰래 사주하여 드러내어 공박하게 함으로써 이우의 선한 점까지 매몰시키게 하였습니다. 안민학(安敏學)은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어버이를 봉양하고 형을 섬기는 데 있어서 사람들이 행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다만 강직하여 악을 미워하는 천성을 타고나 남의 과실을 보면 정색을 하고 충고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달갑잖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허봉이 상주(尙州)에 이르러 상사(喪事)에 임해서 슬퍼하지 않고서는 하낙(河洛)이 민학에게 그 말을 전하여 이이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청요(淸要)의 관직에 오르지 못할까 의심한 나머지 청렴 검소하여 백성들이 감복하는 대흥 감무(大興監務)를 불효·불우하다고 탄핵하고 아울러 하낙의 정직한 것까지 폐하였습니다. 서익(徐益)이 사명을 받고 육진(六鎭)으로 나갈때 이이가 직접 여섯 조목의 질문을 받고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에서도 조리 정연하게 말하여 마치 변방의 산천을 직접 보는 듯하였으므로 크게 장사(將士)들이 감복하여 더욱 이이의 죽음을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소하여 유(柳)와【성룡(成龍).】 정(鄭)을【여립(汝立).】 논박한 것이 비록 적중하지는 못한 듯하나 실로 군부를 속이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는데, 다만 과감이 말한 것을 미워하여 관리의 재능까지 폐하였습니다. 김천일(金千鎰)은 이항(李恒)의 문인으로서 몸을 닦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고, 덕을 숭상하는 타고난 천성을 가장 온전히 가진 자인데, 마음속으로 이이의 착한 점을 알고 한 번도 시예(時譽)에 사색(辭色)을 굽히지 않자 담양(潭陽) 백성들이 구순(寇恂)의 경우처럼 머물게 해달라는 청원을 하였는데 대관을 사주하여 저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의건(李義健)·이희삼(李希參)·변사정(邊士貞)·정운룡(鄭雲龍)과 같이 공론의 지지를 받는 사람들도 이발 때에 폐기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주현(州縣)의 말단 관직에 있는 자들도 이이에게 관련된 자는 허물을 들추어 내어 교묘하게 중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신이 이름을 아는 자가 이 정도이니 신이 모르는 자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송익필(宋翼弼)은 비록 사련(祀連)의 아들이지만, 노년에도 독서에 힘써 학문이 깊고 경서에 밝았으며 언행이 바르고 곧아 제 아비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이이·성혼도 모두 외우(畏友)로 여겨 늘 제갈양(諸葛亮)이 법정(法正)에게 했던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사람들의 의사를 잘 유도하여 스스로 감동하고 분발하여 자립하게 하였으므로 생원·진사에 오른 자가 적잖이 있었는데 그 중에 김장생(金長生)·허우(許雨) 같은 자는 의를 행하는 행실이 경외(京外)에 저명하였고, 강찬(姜燦)·정엽(鄭曄) 같은 자도 모두 뛰어난 재주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조종의 전례(典禮)로 말하면 사람을 가르쳐 성취시킨 일이 있으면 으레 관직을 상으로 주는 법이 있고, 중국의 제도로 말하면 어진이를 쓰는 데는 출신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 고금을 통하여 변함없는 원칙입니다. 이이가 서얼(庶孼)의 허통(許通)을 주장한 의도는 다만 훌륭한 인물을 구하여 임금을 보필하자는 것일 뿐, 일개 익필에게 사심을 둔 것은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이의 과실로 돌립니다. 이산해는 익필에게 말하기를 ‘김응남(金應南)이 제주 목사가 된 것을 사람들은 그대가 청탁한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대가 만약 이이가 죽고 난 뒤 곧 절교하였더라면 이러한 환란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발·이길·백유양은 또 그의 형제가 정철과 평소 교분이 두터운 것을 미워하고, 또 자기들의 단점을 의논할까 의심하여 몰래 해당 관리를 사주하여 사조(四朝)의 양적(良籍)을 모두 없애고 불법으로 환천(還賤)시킨 다음 곤장을 안겨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 70여 명도 모두 안씨(安氏)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가업을 파산(破産)하고 도망가 돌아갈 곳이 없게 되었는데, 혹은 ‘경외(京外)에 흩어져 걸인이 되었다.’ 하고 혹은 ‘배를 타고 섬으로 갔다.’ 합니다 흩어져 걸인이 되었다면 70여 명 모두가 머지 않아 구렁텅이의 해골이 될 것이고 배를 타고 섬으로 갔다면 70여 명이 장차 수적(水賊)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 성은은 하늘과 같아서 생장(生長)시키지 않는 것이 없어 사형의 죄에 해당되는 자라도 또한 삼복(三覆)을 시행하여 형벌이 조금이라고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으면 반드시 널리 공의(公議)를 거두어 살리는 길을 찾습니다. 심지어 송아지가 슬프게 울어도 성려(聖慮)를 다하고, 타락(駝酪)의 진상을 감함에 동산속의 초목이 모두 생기를 띠게 되는 법인데, 유독 이 70여 명의 목숨은 죽음의 경지에 닥쳤는데도 누구 하나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동해에 한 원부(怨婦)가 있자 3년 동안 큰 가뭄이 들었다 하는데 금년 봄의 가뭄과 우박도 이 일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데 어찌 군사를 잃은 일개 서예원(徐禮元)을 잡아 가두기만 한 일로 되겠습니까. 【원전】 25 집 547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교육(敎育) / *역사(歷史) / *군사(軍事) / *사상-유학(儒學) / *변란-정변(政變) | ||||
묘(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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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父) |
신보상(辛輔商) 자(字) 은경(殷卿) 관(官) 사마(司馬) 통훈대부(通訓大夫), 서흥(瑞興) 도호부사(都護府使), 황주(黃州)진관(鎭管)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 | ||||
모(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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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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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子) |
신경철(辛慶鐵) 자(字) 여강(汝剛) 관(官) 생원(生員)
사마방목(司馬榜目) 신경철(辛慶鐵) 【시험년도】선조(宣祖) 39년 (1606) 병오(丙午)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합격등위】2등(二等) 25위 【본인 자】여강(汝剛) 【본인생년】기묘(己卯) 1579 합격연령 28 【본인본관】영월(寧越) 【본인거주】경(京) 【본인전력】유학(幼學) 【부친성명】신응명(辛應命) 【부친관직】행홍문관박사(行弘文館博士) 【부친관직】봉훈랑(奉訓郞) 【부친구존】자시하(慈侍下) | ||||
녀(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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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兄弟) |
형(兄) 신응종(辛應宗) 자(字) 계백(繼伯) 관(官) 선교랑(善敎郞) | ||||
형제(兄弟) |
형(兄) 신응기(辛應基) 관(官) 무과(武科) 칠도(七道) 병사(兵使) 역임(歷任), 병자(丙子) 청주(淸州)진관(鎭管)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기묘(己卯)에 나주(羅州)진관(鎭管) 병마(兵馬)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무자(戊子)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진주(晋州)진관(鎭管) 병마(兵馬)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
형제(兄弟) |
형(兄) 신응시(辛應時) 생몰년 : 1532(중종 37)∼1585(선조 18) 정의 : 조선 선조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생 애 자는 군망(君望)이고, 호는 백록(白麓)이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본관은 영월(寧越)로 신보상(辛輔商)의 아들이며, 백인걸(白仁傑)의 문인이다. 1559년 과거에 급제, 설서(說書)·정언(正言)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좌랑·교리(校理) 등을 거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그 후 대사간·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모친상을 당하고는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예(禮)에 관한 부분을 발취하여 『주문문례(朱門問禮)』를 간행하였다 | ||||
형제(兄弟) |
형(兄) 신응세(辛應世) 자(字) 군행(君行) 관(官) 음(蔭) 감역(監役), 통훈대부(通訓大夫) 예산(禮山)현감(縣監) | ||||
형제(兄弟) |
형(兄) 신응운(辛應運) 자(字) 군정(君廷) 관(官) 진사(進士), 금부도사(禁府都事), 증(贈) 보조공신(補祚功臣)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영평군(寧平君) | ||||
형제(兄弟) |
형(兄) 신응회(辛應會) 자(字) 군형(君亨) 호(號) 풍담(楓潭) 관(官) 진사(進士), 직장(直長) | ||||
형제(兄弟) |
형(兄) 신응성(辛應性) 자(字) 군복(君復) 관(官) 선교랑(善敎郞),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 ||||
문헌(文獻) |
1. 辛氏 大同譜 부원군공파 18세 1-130
2.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신응시(辛應時) 1532년(중종 37) 1585년(선조 18) 조선(朝鮮) 중기(中期)의 문신(文臣). 본관(本貫)은 영월(寧越). 자(子)는 군망(君望), 호(號)는 백록(白麓). 시호(諡號)는 문장(文莊)이며 아버지는 부사(府使) 신보상(辛輔商)이고 조부(祖父)는 찰방(察訪) 신윤형(辛尹衡)이며 증조부(曾祖父)는 수의부위(修義副尉) 신석(辛奭), 외조부(外祖父) 여흥민씨(驪興閔氏) 부위(副尉) 민거(閔거), 처부(妻父) 무령정씨(武靈丁氏) 별제(別提) 정기(丁琦)와 은진송씨(恩津宋氏) 군수(郡守) 송응서(宋應瑞), 자(子)는 신경진(辛慶晉) 자는 용석(用錫) 호는 아호(Y湖) 관(官)은 참판(參判)이며, 여(女)는 윤흔(尹昕) 본(本) 해평(海平) 자는 시회(時晦) 호는 도재(陶齋) 청강(晴江) 영의정 두수(斗壽)의 아들 시호는 정민(靖敏)에게 출가(出家)했고, 형(兄) 선교랑(善敎郞) 신응종(辛應宗), 병사(兵史) 신응기(辛應基), 제(弟) 현감(縣監) 신응세(辛應世), 금부도사(禁府都事) 신응운(辛應運), 직장(直長) 신응회(辛應會), 선교랑(善敎郞) 신응성(辛應性), 판관(判官) 신응명(辛應命), 여자(女子)형제(兄弟)는 이성(李惺<구성수(龜城守>) 전주(全州) 자는 경중(敬仲). 창선대부(彰善大夫)이며,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의 문인(門人)이다. 중종(中宗) 27년 1532 임진(壬辰) 가정(嘉靖) 21년 11월 1일 탄생(誕生)하였고, 천자(天姿)가 수혜(秀慧)하고 동작(動作)이 작숙(作夙)하며 어구경인(語句驚人)으로 명종(明宗) 2년 1547 정미(丁未) 16세에 알성(謁聖) 치시 제소에 입격(入格)함으로써 고관(시관) 안국현(安國玹)이 왈(曰)「이는 국서(國瑞)라 소년(少年)으로 등과(登科)함은 일(一) 불행(不幸)함이라고」하니 공(公)이 이말을 듯고 기꺼이 왈(曰) 안공(安公)이 나를 사랑함이라고 했다. 명종(明宗) 7년 1552 임자(壬子) 21세 진사시(進士試) 2등에 합격(合格)하고 명종 9년 갑인(甲寅 1554) 6월 6일 23세때 아들 아호(Y湖) 신경진(辛慶晉)이 출생(出生)하였다. 명종 14년 1559 기미(己未) 28세 14년 정시(庭試) 병과1(丙科1) 문과(文科)에 합격(合格)하여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명종 18년 1563 계해(癸亥) 32세 설서(設書)를 거쳐 8월에 정언(正言)이 되고 12월에 홍문록(弘文錄)에 든 자와 피초문신(被抄文臣)을 궁궐(宮闕) 뜰에서 시험(試驗)보였는데 수석(首席)을 하였으며. 사가독서(賜暇讀書) 인원(人員)에 선발되었다. 예조(禮曹) 좌랑(佐郞)을 거쳐 명종 19년 1564 갑자(甲子) 33세 병조(兵曹) 좌랑(佐郞)에 올랐다. 〈유회고성처사수침삼십운有懷故成處士守琛三十韻〉은 1564년(명종 19) 호당(湖當)에 있을 때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이 졸(卒)하자 안빈수도(安貧守道)를 읊은 것으로서 왕(王)이 즉시 집의(執義)를 추증(追贈)하라고 명하였다는 시(詩)가 있다. 명종 20년 1565 을축(乙丑) 34세 6월에 수찬(修撰)과 지제교를 겸(兼)하고 명종 21년 1566 병인(丙寅) 35세 1월에 지평(持平)이 되고 부수찬이 되었다. 3월에 다시 수찬(修撰), 5월에 지평(持平)이 되고, 6월에 수찬(修撰)이 되었고 그해 중시(重試) 병과2(丙科2) 특별시(特別試) 문과(文科)에 2번이나 급제(及第)하였다, 명종 22년 1567 정묘(丁卯) 융경(隆慶) 1년 36세 1월에 시(詩)를 지었는데〈화담유감花潭有感〉은 1567년(명종 22) 호당(湖當)에 있을 때 서경덕(徐敬德)을 추모(追慕)하여 지은 것으로서 왕(王)이 보고 호조(戶曹) 좌랑(佐郞)을 추증(追贈)하도록 명(命)하였다. 2월에 지평(持平)이 되고 이후 수찬(修撰), 헌납(獻納), 예조(禮曹) 좌랑(佐郞), 교리(校理)를 역임(歷任)하다. 선조(宣祖) 1년 1568 무진(戊辰) 37세 8월에 실록청(實錄廳) 낭청(郞廳)이 되고 10월에 지평이 되고 또한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에 취임(就任)하고 선조 2년 1569 기사(己巳) 38세 이조(吏曹) 정랑(正郞)이 되었다. 선조 3년 1570 경오(庚午) 39세 영남(嶺南)에 큰 기근(饑饉)이 들어 어사(御使)의 명(命)을 받고 가서 백성(百姓)의 질고(疾苦)를 살피고 돌아와서 그해 겨울 모친상(母親喪)을 입고 있을때 「주자대전朱子大全」에서 예(禮)를 논(論)한 언설(言說)을 모아 「주문문예朱門問禮」라 명명(命名)하여 간행(刊行)하다. 선조 5년 1572 임신(壬申) 41세 이조(吏曹) 정랑(正郞)과 비변사 낭청(郎廳)을 겸하였다. 어사(御使)로서 호남(湖南)에 내려 갔는데 각읍(各邑) 방백(方伯)과 수령이 공(公)의 풍모(風貌)를 보고 진섭하였고 호남(湖南)에 가서 순무(巡撫)하다. 선조 6년 1573 계유(癸酉) 만력(萬曆) 1년 42세 부교리(副校理), 이조(吏曹) 정랑(正郞), 집의(執義), 응교(應敎), 사인(舍人) 등을 역임(歷任)하고, 12월에 전한(典翰)이 되고 선조 7년 1574 갑술(甲戌) 43세 1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써 상(上)이 황랍(黃蠟) 수백 근을 들이라고 명하였는데 대사간(大司諫)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함께 힘써 간쟁(諫爭)하여 마침내 상(上)이 마음을 돌려 철회하다. 다시 우부승지가 되고 8월에 시사(時事)를 말한 것 때문에 파직(罷職)되었으나 10월에 특별히 서용되었다. 선조 8년 1575 을해(乙亥) 44세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관찰사 재직(在職)중에 염능(廉能)을 장려(奬勵)했고 탐두를 출(出)하며 풍속(風俗)을 돈화(敦化)하고 은질(隱疾)을 휼(恤)함을 선무(先務)로 하자 일도(一道)가 흡연(翕然)하였다고 한다. 선조 9년 1576 병자(丙子) 45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선조 10년 1577 정축(丁丑) 46세 연안(延安)부사(府使)가 되었는데 그 정치(政治)를 함에 있어 백성(百姓)에 임(臨)하여 탐사를 어(御)함을 엄중(嚴重)히 했다. 관아(官衙)에 좌정(坐定)할 시(時)에 모든 이속(吏屬)으로 하여금 각부(各簿)을 가지고 식립(植立)했으며 종일 수소함에 즉결(卽決)하며 정독함이 없게 하였고 혹(惑)은 법(法)의 폐(弊)있는자 단(但) 그심함을 제거(除去)하며 다사(多事)가 득의(得意)하고 민익 흠복(欽服)했으며, 또 교사(敎士)하는데 유의(留意)하여 보인재(輔仁齋)를 학궁(學宮)의 옆에 창립(創立)하고 그 우수(優秀)한 자(者)를 택(擇)하여 강습(講習)시켜 궁리(窮理)수행(修行)함을 본(本)으로 하고 쓸데없이 문사를 불상함으로써 사풍(士風) 크게 변(變)하였다. 그해 대사성(大司成)이 취임(就任)하고, 선조 13년 1580 경진(庚辰) 49세 광주(光州) 목사(牧使)가 되고 선조 15년 1582 임오(壬午) 51세 조사(詔使) 황홍헌(黃洪憲)과 왕경민(王敬民)이 중국(中國)에서 나오게 되자 의주(義州) 연위사(延慰使) 지낼 때 지은 풍경(風景)을 읊은 시(詩)와 승(僧)에게 선사한 시(詩), 송별시(送別詩) 등이 전하며 맡은 업무(業務)를 잘 수행하였다 그때 . 예조(禮曹)참의(參議)·병조(兵曹)참지(參知)를 거쳐 다시 대사성(大司成)이 되다. 선조 17년 1584 갑신(甲申) 53세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가을에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에 올랐다. 선조 18년 1585 을유(乙酉) 54세 1월 16일에 졸(卒)하고 백천군(白川郡) 비봉산(飛鳳山)에 장사(葬事) 지내다. 공(公)이 경연(經筵)에 임할 때면 고금(古今)의 사례들을 적절히 인용(引用)하여 막힘이 없었으며, 지방(地方)수령(首領)으로 재직(在職)시에는 풍속(風俗)을 바로잡고 교육(敎育)을 진흥(振興)시켰으며, 사사로운 일에는 청렴(淸廉)하여 집안에 가재도구가 거의 없었다. 우계 성혼(成渾), 율곡 이이(李珥) 이현(二賢)과 교제(交際)하여 우의(友誼)가 특(特)히 돈독(敦篤)하였고 후(後)에 문장(文莊)이라 시호(諡號)했으며 시집(詩集) 한권을 자작(自作)하였으니, 유명(有名)한 백록유고(白麓遺稿)다. 처음에 송시열(宋時烈)(1660)의 서(序)가 있고, 백록유고(白麓遺稿)의 시(詩) 237수 오언절구(五言絶句)(12), 칠언절구(七言絶句)(89), 오언율(五言律)(42), 칠언율(七言律)(70), 오언배율(五言排律)(2), 칠언배율(七言排律)(3)이 순서대로 실려 있으며, 습유(拾遺)에 부(賦)(1), 과문(科文)(2), 시(詩)(13)가 실려 있다. 이중 시적으로 심화한 성리학(性理學)의 영향이 맑고 풍격이 높으며, 특히하고 예의(禮義)를 준중하는 내용이 광산교방가요(光山敎坊歌謠)는 미색에 초연했던 전라도관찰사 이증(李增)의 인품을 찬미한 내용이며 〈해당화하두견제海棠花下杜鵑啼〉, 〈남훈해南薰解〉 등의 응제문자(應製文字)도 실려 있다. 습유(拾遺)의 〈한도부漢都賦〉는 17세에 지은 작품으로, 조선왕조가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여 태평세월을 누리고 있음과 제왕은 지리(地利)보다는 인화(人和)를 중시하여 덕(德)을 닦아야 함을 읊은 글이다. 습유 가운데 〈서증시후書贈詩後〉 이하는 추각할 때 첨가(添加)된 작품(作品)들이다. 선조 23년 1590 경인(庚寅)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으로 추록(追錄)되어 대사헌(大司憲)에 추증(追贈)되고, 선조 37년 1604 갑진(甲辰)에 아들 신경진(辛慶晉)이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어 공(公)이 이조(吏曹) 판서(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현종(顯宗) 1년 1660 경자(庚子) 순치(順治) 17년 손자(孫子) 신희계(辛喜季)가 유고(遺稿)를 간행(刊行)하고, 숙종(肅宗) 12년 1686 병인(丙寅) 강희(康熙) 25년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행장(行狀)을 찬(撰)하였다. 영조(英祖) 17년 1741 신유(辛酉) 건융(乾隆) 6년 후손(後孫) 신치복(辛致復)이 백록속집(白麓續集)을 간행(刊行)하다. 공(公)의 시문(詩文)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는 와중에 대부분 유실(遺失)되었고, 남은 유고(遺稿)를 아들 신경진(辛慶晉)이 수습하였으나 간행(刊行)은 하지 못하였다. 이후 1659년 9월 신경진(辛慶晉)의 아들 신희계(辛喜季)가 전남(全南) 영암(靈巖) 군수(郡守)로 나간 뒤 선친(先親)의 유지를 받들어 유고(遺稿)를 편차(編次)하고 다음 해인 1660년 8월경 불분권 1책의 목판(木板)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5-가175)에 소장되어 있다. 같은 해 10월에는 신희계(辛喜季)가 다시 저자(著者)의 시문(詩文) 권미에 있는 습유(拾遺) 일부를 더 추각하고, 부친(父親) 아호(Y湖) 신경진(辛慶晉)의 시문을 수습하여 「아호습고 湖拾稿」라 이름하고 저자(著者)의 문집(文集) 뒤에 부집(附集)하였다. 그리고 송시열(宋時烈)에게 초간본을 보여 주고 부탁한 서문(序文)과 자신이 지은 후지(後識)를 붙여 추각하였다. 《추각본》 읍지(邑誌)에 의하면 신희계(辛喜季)는 이해 11월 체차되었으니, 곧 체차되기 전에 서둘러 추각과 부집(附集)까지 마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후손 신치복(辛致復)이 저자의 유문(遺文)과 행장(行狀), 신도비명(神道碑銘), 제문(祭文), 유사(遺事)등의 부록문자(附錄文字)와 신경진(辛慶晉)의 행장(行狀), 신도비명(神道碑銘), 유사(遺事)등의 부록문자를 수습하여 1741년에 「백록白麓 아호속집 湖續集」을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박필주(朴弼周)의 발문(跋文)이 실려 있다. | ||||
기타(其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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