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3.20. 도봉산 묘지탐방

2011.3.20. 도봉 무수골 주변 역사탐방 (자전거로 역사탐방)

아베베1 2011. 3. 20. 21:20

 함열남궁 선산   함열남궁 [상세내용]

본관 연혁

함열(咸悅)은 전라북도 익산시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백제 때에는 감물아현(甘勿阿縣)이라 불렸다. 신라가 점령하여 잠시 노산(魯山)이라 하다가 757년(경덕왕 16)에 함열현(咸悅縣)으로 고쳐서 임피군(臨陂郡: 군산시 옥구읍 일대)에 속하게 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전주(全州)의 관할로 들었다가, 1176년(명종 6)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409년(태종 9) 용안현(龍安縣)과 병합하여 안열현(安悅縣)으로 고쳤고, 1416년에 다시 분리하여 각각 현감을 두었다. 함라(咸羅)라고도 불렸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주부 함열군이 되었다가 1896년 전라북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익산군에 폐합되면서 함열면이 되었다. 1979년 함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성씨의 역사

시조 남궁원청(南宮元淸)은 고려시대에 감물아현(甘勿阿縣: 감물아는 함열의 옛지명) 사람으로, 비서랑(秘書郞)을 역임하였다. 김행성(金行成) 등과 함께 송(宋)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 후 991년(성종 10)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여진을 백두산(白頭山) 북방까지 몰아내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임명되고 감물아백(甘勿阿伯)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함열(咸悅)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함열남궁씨는 5,666가구 총 18,703명이 있는

 

知守齋集卷之十五
 
咸悅南宮氏族譜序 a_213_575c


南宮氏複姓也。謹按族姓書云。南宮姬姓。周文王四友南宮子之後。春秋時。顯於魯宋者六人。而敬叔最著。自是以降。歷漢唐而未有聞焉。至宋復始有登第者四人。而訖于皇明。又寥寥也。獨我東著籍于咸悅者。自麗之大將軍元淸始焉。而流傳其先從箕子東來。豈或如唐城洪氏之以才子來敎。延安李氏之213_575d以中郞留仕。而乘牒佚闕。盖不可攷。在麗代。冠冕固相承蟬連。而至我朝。以文科進。旣過十數。又多歷淸顯而登宰列焉。唯譜牒之成。至今未遑。盖曾有佐郞埞,縣監欽及宗孫瑗,奉事鏡諸公。前後修輯而不及刊也。今者判官㯖竭誠鳩財。將以印行于世。而奉事公之孫馝。以不佞亦係彌甥。要以一言敍其事。余謂是譜也閱幾世經營。今始有就。則諸君之盡心於斯。誠亦善矣。在昔儒先至以厚風俗。管攝天下人心。歸之於明譜系。又有以無位而可以化天下。推之於修譜。若是乎譜系之修不修。不啻係一家事。亦可謂213_576a關天下治化。而獨恠夫近世諸家譜牒。日修而月成。幾乎家家有譜。則是宜風漸厚俗漸醇。而求其實。非徒不能然。而又或不如前何也。無亦前之未遑不及修。雖若少文。固自有愨質者存乎內。而近之切切於唯譜是急。或流於文勝而徇外否乎。是亦宜修譜者之不可不加之意也。吾家譜。前亦屢修。旣以是自警。且以之奉勉爾。

 

((州郡) 咸悅)


咸悅百濟甘勿阿縣新羅改咸悅太宗己丑合龍安尋復舊○咸羅○[주:九面距京四百六十六里

 

(咸悅南宮氏文科篇)     ○咸悅南宮氏文科篇[주:合科十六]

[주:江伯][주:監司][주:咸伯璨子][주:□□淑侄] [주:戶參淑侄][주:司正忱兄][주:主簿憘弟][주:寺正] [주:郡守憘子][주:舍人忱從孫][주:佐郞忱孫][주:郡守芷孫]
[주:學諭活曾孫][주:寺正鏶弟][주:直講]


咸悅南宮氏


01南宮元淸 大將軍   02南宮用材 將軍     03(後孫)南宮壽    04南宮柱 郞中   05南宮奭 將軍   06(後孫)南宮得禧    07南宮伯

 郞將   08南宮璟 判書   09南宮贊 府使         10南宮祐               01南宮祐 少尹         02南宮啓 兵使
03南宮致 蔭郡守      04南宮順 進           05南宮燦 文副學;申自繩女   06南宮淑 文承旨      06南宮翼 蔭判官    07南宮忱 文戶參
08南宮健                09南宮楷 文博士     07南宮憘 文府使     08南宮活 文郡守      09南宮構              10南宮烇
11南宮培 文學諭      07南宮愷               08南宮渡                09南宮㯳 文舍人     06南宮弼               07南宮孝    

07南宮厚                08南宮芷               09南宮嵂                10南宮鏶 文正        11南宮任                12南宮誼

▼원문보기84a  처음으로

12南宮謐    11南宮億 逸縣監;醒溪;眉門人   12南宮謙        10南宮鈺 文府使

 

(中宗朝二)南宮孝      字思宗咸悅人父縣監弼娶副提學崔敬止女生孝甲午進士文科正字[주:國朝榜目]

(明宗朝)南宮斗

咸悅人乙卯進士嘗以大信不約賦魁泮解人皆誦之年八十三鸞瞳綠髮翛然如瘦 鶴數日絶食不寐誦參同黃庭輒曰毋行險毋曰無鬼神行善積德絶慾煉念上仙可立致飮啖食息如平人曰吾初擬飛昇而欲速不果成吾師許以地上仙勤修則八百可期矣近日山中頗若閑寂下就人寰無一個親知到處年少輕其老醜了無人間興味人之欲久視者原爲 樂事而悄然無樂何用久爲以是不禁煙火抱子弄孫以度餘年乘化歸盡以順天所賦也


 [상세내용]

남궁계(南宮啓)에 대하여
미상∼1446년(세종 2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함열(咸悅).
아버지는 우(祐)이다. 문음(門蔭)으로 등용되어 사과(司果)를 역임하고, 1401년(태종 1)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13년 대호군에 재직중 순관(巡官)이 되어 신병을 칭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은 점과 또 순찰 뒤에도 병조에 보고하지 않고 사제(私第)로 바로 돌아갔으며, 행순(行巡) 때 갑사(甲士)를 대행시켰다고 병조로부터 치죄되어 파직되었다.  그뒤 1426년(세종 8) 정주목사(定州牧使) 재직중 김도련(金道鍊)의 노비를 남수(濫受)한 사건으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그해 12월 판의주목사(判義州牧使)에 복직되었으나, 1430년 동지총제사헌부로부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에 아첨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또 다시 파직되었다.
1435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고 이듬해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1439년 전라도병마도절제사로 나갔다가 그해 12월 경주부윤으로 체직되었고, 1423년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韓國人의 族譜(日新閣, 1977)

 세종 85권, 21년(1439 기미 / 명 정통(正統) 4년) 5월 21일(기사) 1번째기사 이진·남궁계 그리고 90세 이상 노인에게 벼슬을 제수하다

 

이진(李蓁)호조 참판으로, 남궁계(南宮啓)전라도 병마 절제사(兵馬節制使)로 삼았다. 나이가 90세 이상 노인 1백여 명에게 모두 산직(散職)을 제수하였는데, 비록 90세가 차지 아니한 자라도 나이를 올려서 벼슬을 받은 자가 심히 많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책 215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윤리(倫理)

 

병마절제사

① 조선 초기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에 두었던 서반 무관직(武官職)이다.

② 조선시대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 서반 무관 외관직(外官職)이다.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는 처음에 전주(全州)와 경주(慶州)에만 두었다가 후에 광주(廣州)와 의주(義州)에도 두고 부윤(府尹: 從二品)이 겸임하였다.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는 실제로는 없었고 다만 제주(濟州)에 병마수군절제사를 목사(牧使: 正三品)가 겸임하였다.

조선시대는 진관체제(鎭管體制)의 설치와 함께 절도사 아래에 절제사 또는 첨절제사(僉節制使)가 생겨 전국에 걸쳐 중요한 군사거점에 설치된 거진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거진은 육군의 경우 양계(兩界)에 31개소, 6도(六道)에는 24개소가 있었다. 수군은 영안도(永安道)를 제외한 7도에 12개소가 있었다.

이들 거진은 절도사가 주재한 주진(主鎭)의 명령을 받아 자기 관할 하에 있던 제진(諸鎭)에 대해 군사상의 명령과 감독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양계의 경우에는 제진이 없는 독진(獨鎭)도 있었으며 육군의 경우 이 독진을 제외하고 모두 부윤(府尹)·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목사(牧使)·도호부사의 수령(守令)들이 절제사를 겸임했으며, 수군의 경우는 대부분이 전임직이었다.

 

태종 26권, 13년(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8월 23일(기사) 3번째기사 순관의 직무를 소홀히 한 대호군 남궁계를 파직시키다

 

 

대호군 남궁계(南宮啓)의 직을 파하였다. 병조에서 아뢰었다.“남궁계가 별로 재덕(才德)이 없으면서 성상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지위가 3품에 이르렀으니, 조심하여 봉공(奉公)함이 그 직분일 것입니다. 이것을 돌아보지 않고 이에 순관(巡官)이 되어 함부로 신병(身病)이라 일컬었으니, 그 죄가 첫째입니다. 점순(點巡)2700) 한 뒤에 본조(本曹)에 고하지 않고 사제(私第)로 물러가 잤으니, 그 죄를 둘째입니다. 행순(行巡)하였을 때에 자기가 할 일을 친히 하지 않고 갑사(甲士)를 대신시켰으니, 그 죄가 세째입니다. 청컨대, 유사(攸司)에 내려 군정(軍政)을 엄하게 하소서.”
다른 일을 면제하고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으니, 원종 공신(元從功臣)이기 때문이었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68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세종 72권, 18년(1436 병진 / 명 정통(正統) 1년) 5월 6일(신미) 2번째기사 이숙묘·남궁계·이선·변치후·이길배·김맹헌·이인손·이맹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숙묘(李叔畝)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남궁계(南宮啓)한성부 윤을, 이선(李宣)으로 예조 참판을, 변처후(邊處厚)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이상(李湘)으로 중추원 부사를, 이길배(李吉培)사헌 집의(司憲執義)를, 김맹헌(金孟獻)으로 우헌납(右獻納)을, 이인손(李仁孫)으로 사헌 지평(司憲持平)을, 이맹전(李孟專)으로 우정언(右正言)을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책 673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세종 111권, 28년(1446 병인 / 명 정통(正統) 11년) 1월 22일(경인) 6번째기사 전 중추원 부사 남궁계가 졸하니 부의를 내리다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남궁계(南宮啓)가 졸(卒)하니, 부의(賻儀)를 내리고 조문(弔問)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책 652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世宗 111卷, 28年(1446 丙寅 / 명 정통(正統) 11年) 1月 22日(庚寅) 6번째기사  전 중추원 부사 남궁계가 졸하니 부의를 내리다

○前中樞院副使南宮啓卒, 致賻致弔。

【태백산사고본】 35책 111권 9장 A면

【영인본】 4책 652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於于集後集卷之五
 墓道文
務功郞南宮公 墓表銘 a_063_573c


南宮。中國大姓。未知自何代渡海而東。重世家。頗有晉唐風。無聞替隆。非羅麗舊族不齒。如咸悅南宮。源泒出麗朝。務功郞構字成叔。鼻祖。元淸麗門下侍中。實丞相也。入我朝。有副提學璨。臨陂縣令贈吏曹參判翼。卽郞高曾。大父憘。司贍正兼春秋。考活。淸風郡兼春秋。淸風娶禮曹參判李英賢之女。生郞。資至孝。親癠。日衣帶徹晨。及喪。過瘠成痼。坐此學不卒。累捷不第。雖靡弓㫌之招。居靜怡如也。贅驪州牧使金友臯氏。生四男三女。㸌,烇,熻。幼學。贄禽皆盛063_573d閥。焞幼未聘。女一適徐駙馬景霱弟景霦。一適文科正尹明善孫珩。一適學生閔岌。亦三韓胄也。內外孫幼。萬曆四十五年。寢疾。裁半百加八。忽諸。四月壬寅也。撰六月庚寅。藏楊州樓院無愁里。依先兆原。以北亥南巳面勢。四十八年四月壬申。金氏卒。涓八月壬申。祔竁。夢寅少時與南宮游。聞郞介兄柅弟格有聞。適未與驩。及今姻丈進士申樸少同郞學。遣其甥南宮森。引㸌來乞墓銘。猶衰麻在身。吁。世交也。敢以始面辭。銘曰。
蟬聯翕赤褐未釋。行源淵淵澤不川。於乎務功。天不可諶。


 

 

 

 

 

 

 

 

 

 

 

 

   2000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和順金氏는 504가구 1,570명이 살고있는것으로 나온다

 

  명당에 점지를 한듯 항상 저곳을 수많은 분들이 쉬었다가 가는 자리로 늘 산행인이 붐비는 곳

  당대 명필인 일중 김충현 선생이 글을 쓰고 월탄 박종화 선생이 글을 짓고  화순김씨 고 김재현 비석

    문인인 월탄 박종화 선생이 선하고 일중 김충현 선생님의 글씨 1963년 계묘년 4월 내년 이맘 때문 만 50년   저곳에는 늘 장기 바둑을 두시는 분이

  고인께서 1921년 출생 평양숭인상고를 수석졸업하시고 여러가지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50년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비석의 글씨와 표면은 변함이 없다

 

 

화순김씨(和順金氏)

 
▣ 유래
 

시조 : 김익구김익구는신라경순왕의셋째아들 영분공 김명종의후손인 김충한의현손이며 김두문의 아들로 자는 사겸이며 조선숙종1년에 문과에급제 통정대부,결성현감,춘추관기사관을 지냈다고합니다 후손들이 화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선조와 후손에 대해는 알 수가 없다.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김정재(金鼎載, 1839 己亥生) : 문과(文科) 고종24년(1887) 별시3 병과(丙科)
김익구(金益九, 1645 乙酉生) : 문과(文科) 숙종1년(1675) 식년시 병과(丙科)
김세구(金世耉, 1671 辛亥生) : 무과(武科) 숙종21년(1695) 별시 병과(丙科)
김후영(金後榮, 1647 丁亥生) : 무과(武科) 숙종4년(1678) 증광시 병과(丙科)
김철화(金哲華, 1860 庚申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19년(1882) 증광시 삼등(三等)
김적조(金迪祖, 1760 庚辰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7년(1807) 식년시 삼등(三等)
김상정(金祥廷, 1766 丙戌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5년(1805) 증광시 삼등(三等)
김재범(金載範, 1857 丁巳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19년(1882) 증광시 삼등(三等)
김응렴(金應濂, 1824 甲申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19년(1882) 증광시 이등(二等)
김달희(金達禧, 1761 辛巳生) : 사마시(司馬試) 순조5년(1805) 증광시 이등(二等)
* 모두 10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2명, 무과 2명, 사마시 6명)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화순김씨는
1985년에는 총 388가구 1,723명,
2000년에는 총 504가구 1,570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네이버 백과 자료  참으로  인구가 얼마되지않은 본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