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별 족보 서문, 가전 등/진주정씨 족보서

題晉州鄭氏墓誌後

아베베1 2011. 4. 4. 12:10

 모친께서 진양정씨 이기에 자료를 찾아서 정리하여 보았다 어릴적 외갓댁에 자주로 가던 시절과 모친에 대한 생각이 나고 이번기회에

알아볼 사항을 자료를 찾아서 ....

  

진양정씨(晉陽鄭氏)

[요약정보]

본관명 진양(晉陽)
성씨명 정씨(鄭氏)
본관소재지 경상남도(慶尙南道) 진주시(晉州市)
본관이칭 진주정씨(晉州鄭氏)
시조명 정예(鄭藝)정자우(鄭子友)정장(鄭莊)정헌(鄭櫶)

[상세내용]

본관 연혁

진양(晉陽)은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삼한시대에 소국인 고순시국(古淳是國)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었고, 신라 문무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렸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강주(康州)로 환원되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진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었다. 1931년에 진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시조 지백호(智伯虎)는 삼한시대 진한(辰韓) 사로(斯盧) 6촌장의 하나인 진지부(珍支部) 촌장으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개국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32년(유리왕 9)에 진지부가 본피부(本彼部)로 개칭되면서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지면서 정씨라는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8정(鄭)을 편의상 크게 나눠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을 시조로 하는 4계통으로 크게 구분하는 것이 통설이다.
예계(藝系)의 시조 정예(鄭藝)는 고려통합벽상삼한공신(高麗統合壁上三韓功臣) 광록대부(光祿大夫)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기세조(起世祖)인 제학공(提學公) 정시양(鄭時陽)은 고려 문종 때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다.
자우계(子友系)의 시조 정자우(鄭子友)는 호장(戶長)을 지냈다. 그 후 6세손이며 고려 현종 때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에 봉해진 정신열(鄭臣烈)을 중조(中祖)로 하는 파(派)와 7세손 정중공(鄭仲恭)을 중조로 하는파와 8세손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보경(鄭普卿)을 중조로 하는 파로 나뉘어진다고 한다.
장계(莊系)의 시조 정장(鄭莊)은 고려 말엽에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4세손 정척(鄭陟)은 조선 태종 때 판윤(判尹)을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파도 있다고 한다.
헌계(櫶系)의 시조 정헌(鄭櫶)은 고려 말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둘째 아들 정택(鄭澤)은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파도 있다고 한다.

분적종 및 분파

진주8정(晉州八鄭)으로 불리워졌던 진주정씨(晉州鄭氏)는 동성동본이면서도 세계를 달리하는 8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繼代)를 이어왔다. 원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신라 6촌장 중 하나인 지백호(智伯虎)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그의 후대에 와서 진주(晉州: 晉陽) 정씨의 본관과 분파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믿을만한 문헌은 없다.
파명(派名)과 시조를 살펴보면,
충장공파(忠莊公派) 시조 정예(鄭藝)는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첨정공파(僉正公派) 시조 정중공(鄭仲恭)은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 시조 정자우(鄭子友)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냈다.
우곡공파(愚谷公派) 시조 정온(鄭溫)은 고려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어사공파(御史公派) 시조 정탁(鄭澤)은 고려 때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공대공파(恭戴公派) 시조 정장(鄭莊)은 고려 때 첨추(僉樞)를 지냈다.
지후공파(祗侯公派) 시조 정신(鄭侁)은 고려 때 지후(祗侯)를 지냈다.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 중조 정안교(鄭安校)는 고려 때 판내부사(判內府事)를 지냈다.
이렇듯 충장공파(忠莊公派)의 정예(鄭藝)는 다른 이들보다 앞선 시대에 나왔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진주 8정이 모두 그의 후손이라 주장하지만, 아직까지 정예(鄭藝)의 후손이 8파로 나누어졌다는 문헌(文獻) 등 자료가 없어 아직 합보가 실현이 못되고, 같은 선조라는 인식도 없는 상태이다.

주요 세거지

강원도 홍천군 서면 고곡리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반곡리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    경상남도 남해군 서면 정포리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가봉리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마성리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권리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고곡리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덕임리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금이리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서유리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 용정리   전라남도 영광군 군서면 덕산리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신대리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문덕리
충청남도 서산시 온석동            평안북도 영변군 봉산면 망일동
평안남도 강동군 봉진면 용연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진양정씨는 74,777가구 총 238,50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晉州鄭氏墓誌後


噫觀此誌者自不覺始而慰中而悲終焉而感也之 誌也不徒誌狂奴子之事而乃考忠莊公遺蹟皆載

▼원문보기30b  처음으로

於此其赫舃世德今而詳知則所以爲公而慰也死生 以之從容就命則所以爲公而悲也今我

聖上復爵贈諡則所以爲公而感也黃閣錄中與金節齋同死癸酉及搜聞瑣錄有器局在謫奉主
只爲寂寥數語而其貞忠大節之久而未著者仍此石而始著於數百年之後則此非可貴者耶倘
無此石之發終無以知冠山居派之爲公子孫文定公所謂吾家與國家同厄而賴此孫不墜者亦可謂
前知而承旨公殉國雙忠府使公炳世淸節宜爲賢

▼원문보기31a  처음으로

祖之孫也系曰景泰年間忠莊竄死胤子狂奴藏名有意遺風餘韻幾年沈沒貤典纔下埋碣繼出兩
公徽蹟一朝始炳前後祖孫一脈井井人力豈爲神明所使石見人知朱說眞是文獻可徵聖訓有契誌
後題跋勉忠公裔


   崇禎三丁亥四月日咸陽朴新克謹誌

 

 

晉州鄭氏


01鄭藝 三量;大匡     02鄭時陽 提學     03鄭侍中      04鄭均 給事     05鄭仲紹 簷事
06鄭洪朝                07鄭安社 密直     08鄭需 佐郞     09鄭守珪 內府令    10鄭椽 副使
11鄭乙輔 大提學     12鄭天貴 左尹     13鄭澤 牧使      14(四世)鄭蕃    15鄭繼咸 訓導
16鄭銀成               17鄭汝寬             01鄭汝寬          02鄭經世 文衡;吏判;愚伏;李海女
03鄭柲 進;檢□(閔) 04鄭道應 逸議   05鄭錫僑 縣監   06鄭胄源 參奉
07鄭仁模 逸持平;立齋  08鄭宗魯 逸掌令   09鄭象晉 參奉   10鄭允愚 都事
11鄭東奎 校理   11鄭東基 進   09鄭象升

▼원문보기39a  처음으로

[주:晉鄭]09鄭象觀
07鄭義模    08鄭翼魯    08鄭泰魯  08鄭明魯  07鄭禮模    08鄭成魯   07鄭智模  08鄭榮魯
06鄭達源    07鄭博模 李萬欽女     08鄭英魯  08鄭秉魯   09鄭象樞  03鄭㰒   02鄭興世 壬辰殉;贈主夫
01鄭莊        02鄭子淳   03鄭舌      04鄭陟    01鄭陟 文衡;淸白     02鄭誠謹 承旨;甲子秋;忠旌
03鄭舟臣 博士;孝旌     04鄭元麟 參奉;孝旌;生梅臣
05鄭孝成 監司;江都殉;忠旌  06鄭百昌 監司;玄谷;韓□(佐)謙;烈旌;書烈旌
07鄭善興 僉正;尹女;權女;烈旌  08鄭祖甲 郡守    09鄭應斗 □(洪)重鉉女
10鄭師先 蔡宏胤女  11鄭極老  12鄭鉐   13鄭龍河  14鄭謙植 三司

▼원문보기39b  처음으로

11鄭山老    12鄭鎜          09鄭應箕    10鄭師卨   07鄭善弘     08鄭世甲
09鄭應井     10鄭師稷     11鄭鶴老  12鄭鏄        13鄭龜河
10鄭師說     10鄭師奭     09鄭應軫      06鄭百亨 翰林;江都殉旌;妾烈旌;□(廣)□(魯)百;崇江都;夫婦俱殉
03鄭梅臣 判官;淸白        04鄭元麒 參奉;孝旌     03鄭麯臣      04鄭元祥     05鄭好仁      06鄭百順
07鄭善鶴      08鄭周甲     09鄭應台      10鄭師億    11鄭綺老      10鄭師伋     05鄭好禮 郡守
06鄭百禧      07鄭善膺    08鄭之甲      09鄭應壽 洪重績女     10鄭師玄 沈秉良女
11鄭鳳老

▼원문보기40a  처음으로

[주:慶鄭]

 
진주정씨충효록(晉州鄭氏忠孝錄)

해제작성 김덕수(金德秀)
작성일 2005-1021
내용시대
언어
간행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록 忠莊公 鄭분(?~1454)과 狂奴子 鄭遠(1425~?), 獨谷公 鄭名世(1550~1592)에 관한 자료를 수습하여 1819년(純祖 19)에 初刊한 것을 1855년(高宗 22)에 兩世事蹟과 回啓文狀을 추가하여 重刊한 문헌.

【정의】

忠莊公 鄭苯(?~1454)과 狂奴子 鄭遠(1425~?), 獨谷公 鄭名世(1550~1592)에 관한 자료를 수습하여 1819년(純祖 19)에 初刊한 것을 1855년(高宗 22)에 兩世事蹟과 回啓文狀을 추가하여 重刊한 문헌.

【서지사항】

3권 3책 분량의 목활자본으로 반곽의 크기는 24×16.8cm이고, 책의 크기는 30.8×20.3cm이다. 四周單邊이고, 반엽은 10행 21자의 형태다. 주석은 雙行이고, 판심에는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와 上下內向三葉花紋魚尾가 함께 보인다. 표제와 권수제, 판심제는 모두 『晉州鄭氏忠孝錄』이고, 판심제 하단에는 張次가 표시되어 있다. 卷頭에 首陽(黃海道 海州의 古名) 吳羽常(1766~?)이 제작한 서문이 실려 있을 뿐, 목록이나 발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藏書閣圖書韓國版總目錄』에서는 吳羽常의 서문이 제작된 ‘己卯’年을 1879년(高宗 16)으로 비정한 후, 간행 시기를 1879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司馬榜目』에 의하면 吳羽常은 본관이 海州로 1804년 式年生員試에 2등으로 入格한 인물인데, 生年이 1766년(英祖 42)이다. 그리고 서문의 내용 중에 ‘狂奴公旣葬之二百有七十年’이라는 기술이 보인다. 狂奴子 鄭遠의 生年은 1425(世宗 7)이나 沒年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몰년을 1500년 전후로 가정한다면 서문을 제작한 ‘己卯’年은 1879년(高宗 16)이 될 수 없거니와, 吳羽常의 生年과 生員試 入格年을 함께 고려한다면 서문이 제작되고 『晉州鄭氏忠孝錄』이 初刊된 시기는 1819년(純祖 19)인 듯하다.

【체제 및 내용】

吳羽常의 「三世事蹟序」와 鄭斗欽의 「事蹟跋」에 의하면 『晉州鄭氏忠孝錄』은 후손 鄭仁學의 주도로 忠莊公 鄭苯과 狂奴子 鄭遠, 獨谷公 鄭名世에 관한 자료를 수습하여 1819년(純祖 19)에 初刊했다가 1855년(高宗 22)에 兩世事蹟과 回啓文狀을 추가하여 重刊한 것이다. 鄭仁學은 實錄에서부터 각종 碑誌類, 行狀, 記文, 序跋文에 이르기까지 累代의 文獻을 두루 수집한 후 이를 간행하였고, 吳羽常에게 序文을 촉탁한 바 있다. 『晉州鄭氏忠孝錄』 3권 3책의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보겠다. 天冊에는 「三世事蹟」이 실려 있는데, 「三世事蹟」은 「忠莊公事蹟」과 「狂奴子事蹟」, 「獨谷公事蹟」 으로 구성된다. 忠莊公 鄭苯은 호가 愛日堂이고, 시호는 忠莊이다. 判中樞府事 以吾의 아들로 1416년(太宗 16) 親試文科에 급제했고, 吏曹佐郞, 吏曹參判, 右贊成 등을 역임했으며, 1452년(단종 즉위년) 金宗瑞의 천거로 右議政에 올랐다. 癸酉靖難에 文宗의 遺命을 받아 端宗을 보필하던 皇甫仁과 金宗瑞 등이 주살되자 그도 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告身을 추탈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고, 1454년에 賜死되었다. 1746년(英祖 22) 김종서, 황보인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1786년(正祖 10) 長興의 忠烈祠에 배향되었고, 1791년 莊陵 忠臣壇에 配食되었다. 1804년(純祖 4)에는 旌閭門을 세웠고, 1808년에는 新昌 進士 李基善 등의 상소로 不祧之典을 하사받았다. 狂奴公은 鄭遠으로 字는 器之이고, 號는 狂奴子이다. 부친의 화를 목도하고는 ‘狂奴’로서 자칭하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며 이름과 자취를 숨겨 제사 지낼 자손을 보존했다. 獨谷公은 鄭名世로 字는 伯時이고, 號는 獨谷이며, 鄭苯의 5대손이다. 1579년(宣祖 12) 식년문과에 급제했고,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海美縣監으로 趙憲의 휘하로 晉州城을 사수하다가 전사하였다. 「忠莊公事蹟」에는 「忠莊公事蹟」과 「莊陵誌謄抄」, 「三相臣伸寃事實」, 「賜諡敎旨」, 「賜諡致祭諸執事」, 「宣諡賜祭文」, 「宣諡致祭諸執事」, 「右相公文科榜目」, 「愛日堂詩集」, 「船上卽景」, 「次凝石寺影堂板上韻」, 李甫欽의 「巨濟邑城記」, 「墓表」, 「躋享忠烈祠時事略」, 「禮曹回啓」, 知製敎 申耆의 「合享賜祭文」, 「奉安祭文」, 吏曹判書 金鍾秀의 「春秋丁日祝文」, 「獨谷位告由文」, 「淸安位告由文」, 「莊陵壇配食事略」, 「配食錄」, 「莊陵寒食祭獻官諸執事」, 「壇享獻官諸執事」, 「旌閭時事略」, 「禮曹關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次凝石寺影堂板上韻」 아래에는 玩易齋 姜碩德의 元韻과 金宗瑞, 皇甫仁의 次韻作 또한 함께 실려 있다. 그리고 ‘狂奴子事蹟’에는 鄭變韶의 「墓誌」(1496년, 燕山君 2), 「旌閭史略」, 趙萬永의 「繡衣題辭」, 「禮曹關文」, 「忠烈祠己丑合享時史略」, 金相翊의 「道伯題辭」, 「奉安祭文」, 「春秋享祀祝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墓誌」에 실린 주석에 의하면, 1765년(英祖 41) 訟事로 인해 땅을 팠는데 鄭遠의 墓誌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刓缺이 심했으므로 「墓誌」의 글자를 색깔로 구분하여 열람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즉 흑색 글자는 분명한 내용이고, 朱色 글자는 마멸되었으나 고증할 수 있는 내용이며, 청색 글자는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흑색 권점을 친 부분은 글자 모양이 흐릿해 억지로 해석할 수 없는 내용이다. 「獨谷公事蹟」에는 「獨谷公事蹟」, 「宣廟中興志抄」, 張晩의 「全羅道方伯啓」, 趙鎭宅의 「慶尙道方伯狀啓」 등이 수록되어 있다. 地冊의 卷頭에는 鄭遠의 8대손 鄭國彦이 1777년(正祖 1)에 찬술한 「書八代祖墓誌事蹟後」가 가장 먼저 실려 있다. 그리고 黃仁煐과 兪拓基(1691~1767), 徐志修(1714~1768), 李泰和, 鄭曮, 韓必壽, 申光洙(1712~1775), 丁範祖(1723~1801), 李重海, 李毅敬, 李希夔, 金必泰, 吳鉉冑, 申光河, 李希晉, 金履陽(1755~1845), 柳鼎養(1767~?)이 제작한 「書墓誌後」, 「墓誌跋」, 「墓誌後敍」, 「書墓誌事」, 「墓誌序」, 「書墓誌文後」, 「墓誌後跋」, 「誌文後跋」, 「誌石跋」이 이어지고, 李敏輔(1720~1799)가 찬술한 「忠莊公墓誌銘」과 鄭遠의 10대손 鄭仁學이 1844년(憲宗 10)에 지은 「狂奴子墓碣銘」, 趙鎭寬(1739~1808)이 1800년(正祖 24)에 지은 「穩城公墓碑文」, 趙鍾永(1871~1929)이 1804년(純祖 4)에 지은 「忠莊公旌閭記」, 李光文(1778~1838)이 1819년(純祖 19)에 지은 「狂奴子旌閭記」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黃基天의 「旌閭韻」과 玄命直의 「墓誌後感詩」, 朴弼琦의 「忠莊公復官後感詩元韻」, 鄭遠의 「狂奴子遺詩」가 차제되어 있고, 申光洙·趙冀永·金箕協·鄭奎東·金在魯·李希夔 등의 次韻 詩가 함께 실려 있다. 이어 吳淵常(1765~1821)의 「獨谷公旌閭重建記文」과 黃景源(1707~1787), 李輪祥의 「鄭遠傳」, 吳羽常의 「狂奴子傳」, 洪奭周의 「狂奴子鄭公行狀」, 趙明鼎의 「題三世事蹟後」, 金忠翼의 「事蹟跋」, 鄭欽天의 「題先世文跋後」, 1855년(高宗 22)에 지어진 鄭斗欽(1832~1910)의 「事蹟跋」이 수록되어 있다. 人冊의 전반부에는 「淸安公遺事」, 「穩城公事蹟」, 「翠竹堂事實」, 「東庵公事實」, 「忘憂堂事實」, 「無爲窩事實」이 수록되어 있다. 「淸安公遺事」, 「穩城公事蹟」, 「翠竹堂事實」은 각각 鄭苯의 5대손 鄭名遠, 鄭名振, 鄭見龍의 생평을 기술한 것이고, 「東庵公事實」는 鄭苯의 현손 鄭賢輔를, 「忘憂堂事實」은 鄭賢輔의 5대손 鄭胤晉을, 「無爲窩事實」은 鄭胤晉의 증손 鄭仁謙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兩世文狀」과 함께 권3이 시작되는데, 수많은 「呈禮曹單子」, 「禮曹題辭」, 「擧條」, 「國朝寶鑑謄抄」, 「刑曹啓辭」, 「呈禮曹單子」, 「禮曹回啓」, 「嶺營題辭」 등이 수록되어 있다. 英祖가 皇甫仁과 金宗瑞, 鄭苯을 復官하고 그 자손을 敍用하라는 下敎를 내렸을 때, 長興에 거주하는 鄭氏와 馬哥 사이에 山訟이 벌어졌는데, 송사 과정에서 鄭遠의 묘지가 발견되었다. 이 때 鄭苯의 직계 후손을 변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문서가 제작되었는데, 위의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晉州 鄭氏의 인물 정보를 상당량 확보할 수 있고, 조선 후기에 설행된 端宗朝 忠臣에 대한 褒典과 그 과정에서 비롯된 자손의 진위를 가리는 訟事 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소장 현황 및 영인관계】

이와 동일한 문헌은 보이지 않는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純祖實錄』. 『增補文獻備考』. 『譯註經國大典』(韓㳓劤 외,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6). 『藏書閣圖書韓國版總目錄』(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72).


 

 


 
 


 

 

진양정씨(晉陽鄭氏)

[요약정보]

본관명 진양(晉陽)
성씨명 정씨(鄭氏)
본관소재지 경상남도(慶尙南道) 진주시(晉州市)
본관이칭 진주정씨(晉州鄭氏)
시조명 정예(鄭藝)‧정자우(鄭子友)‧정장(鄭莊)‧정헌(鄭櫶)

[상세내용]

본관 연혁

진양(晉陽)은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삼한시대에 소국인 고순시국(古淳是國)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었고, 신라 문무왕 때 신라의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 불렸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9주 5소경제(九州五小京制)의 실시와 함께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강주(康州)로 환원되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진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었다. 1931년에 진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시조 지백호(智伯虎)는 삼한시대 진한(辰韓) 사로(斯盧) 6촌장의 하나인 진지부(珍支部) 촌장으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개국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32년(유리왕 9)에 진지부가 본피부(本彼部)로 개칭되면서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지면서 정씨라는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8정(鄭)을 편의상 크게 나눠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을 시조로 하는 4계통으로 크게 구분하는 것이 통설이다.
예계(藝系)의 시조 정예(鄭藝)는 고려통합벽상삼한공신(高麗統合壁上三韓功臣) 광록대부(光祿大夫)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기세조(起世祖)인 제학공(提學公) 정시양(鄭時陽)은 고려 문종 때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다.
자우계(子友系)의 시조 정자우(鄭子友)는 호장(戶長)을 지냈다. 그 후 6세손이며 고려 현종 때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에 봉해진 정신열(鄭臣烈)을 중조(中祖)로 하는 파(派)와 7세손 정중공(鄭仲恭)을 중조로 하는파와 8세손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보경(鄭普卿)을 중조로 하는 파로 나뉘어진다고 한다.
장계(莊系)의 시조 정장(鄭莊)은 고려 말엽에 통정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4세손 정척(鄭陟)은 조선 태종 때 판윤(判尹)을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파도 있다고 한다.
헌계(櫶系)의 시조 정헌(鄭櫶)은 고려 말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둘째 아들 정택(鄭澤)은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으며 그를 중조로 하는 파도 있다고 한다.

분적종 및 분파

진주8정(晉州八鄭)으로 불리워졌던 진주정씨(晉州鄭氏)는 동성동본이면서도 세계를 달리하는 8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繼代)를 이어왔다. 원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신라 6촌장 중 하나인 지백호(智伯虎)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그의 후대에 와서 진주(晉州: 晉陽) 정씨의 본관과 분파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믿을만한 문헌은 없다.
파명(派名)과 시조를 살펴보면,
충장공파(忠莊公派) 시조 정예(鄭藝)는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첨정공파(僉正公派) 시조 정중공(鄭仲恭)은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 시조 정자우(鄭子友)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냈다.
우곡공파(愚谷公派) 시조 정온(鄭溫)은 고려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어사공파(御史公派) 시조 정탁(鄭澤)은 고려 때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공대공파(恭戴公派) 시조 정장(鄭莊)은 고려 때 첨추(僉樞)를 지냈다.
지후공파(祗侯公派) 시조 정신(鄭侁)은 고려 때 지후(祗侯)를 지냈다.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 중조 정안교(鄭安校)는 고려 때 판내부사(判內府事)를 지냈다.
이렇듯 충장공파(忠莊公派)의 정예(鄭藝)는 다른 이들보다 앞선 시대에 나왔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진주 8정이 모두 그의 후손이라 주장하지만, 아직까지 정예(鄭藝)의 후손이 8파로 나누어졌다는 문헌(文獻) 등 자료가 없어 아직 합보가 실현이 못되고, 같은 선조라는 인식도 없는 상태이다.

주요 세거지

강원도 홍천군 서면 고곡리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반곡리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
경상남도 남해군 서면 정포리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가봉리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마성리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권리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고곡리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덕임리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군유리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
전라남도 광양시 진상면 금이리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서유리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 용정리
전라남도 영광군 군서면 덕산리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신대리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문덕리
충청남도 서산시 온석동
평안북도 영변군 봉산면 망일동
평안남도 강동군 봉진면 용연리

[참고문헌]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집필자]

양성주

[진양정씨(晉陽鄭氏)의 인물들]

정감(鄭瑊) 정겸식(鄭謙植) 정경득(鄭慶得) 정경세(鄭經世) 정경식(鄭慶植)
정곡(鄭谷) 정관원(鄭官源) 정국성(鄭國成) 정귀세(鄭貴世) 정규영(鄭奎榮)
정근영(鄭根永) 정기태(鄭期泰) 정대명(鄭大鳴) 정도응(鄭道應) 정돈균(鄭敦均)
정동철(鄭東轍) 정두(鄭斗) 정두흠(鄭斗欽) 정매신(鄭梅臣) 정면규(鄭冕奎)
정명세(鄭名世) 정명원(鄭明源) 정몽석(鄭夢錫) 정민병(鄭民秉) 정밀(鄭密)
정방의(鄭方義) 정백창(鄭百昌) 정백형(鄭百亨) 정분(鄭苯) 정사량(鄭思亮)
정사제(鄭思悌) 정사현(鄭師賢) 정사현(鄭思顯) 정상관(鄭象觀) 정상리(鄭象履)
정상진(鄭象晉) 정석윤(鄭錫胤) 정선명(鄭善鳴) 정성근(鄭誠謹) 정승서(鄭承緒)
정승훈(鄭承勳) 정시해(鄭時海) 정양(鄭穰){1} 정온(鄭溫) 정용(鄭庸)
정유(鄭愈){1} 정윤좌(鄭允佐) 정은(鄭垠) 정을병(鄭乙炳) 정을보(鄭乙輔)
정이심(鄭以諶) 정이오(鄭以吾) 정일형(鄭一亨) 정재성(鄭載星) 정제생(鄭悌生)
정종로(鄭宗魯) 정종옥(鄭鍾玉) 정종화(鄭鐘和) 정주신(鄭舟臣) 정준일(鄭遵一)
정지산(鄭之産) 정지원(鄭知源) 정척(鄭陟){1} 정천익(鄭天益) 정필달(鄭必達)
정해영(鄭海榮) 정헌태(鄭憲泰) 정현보(鄭賢輔) 정회찬(鄭悔燦) 정효성(鄭孝成)
정흘(鄭屹)

[진양정씨(晉陽鄭氏)의 과거 및 취재 합격자]

고려문과
정이오(鄭以吾) 정지원(鄭知源)
고려사마
정을보(鄭乙輔) 정천익(鄭天益)
무과
정계장(鄭繼長) 정계증(鄭繼曾) 정곤수(鄭崑秀) 정광빈(鄭光賓) 정광좌(鄭光佐)
정광주(鄭光周) 정구용(鄭九容) 정구일(鄭求逸) 정국상(鄭國祥) 정국태(鄭國泰)
정극진(鄭極珍) 정기발(鄭起發) 정기상(鄭起尙) 정기제(鄭期悌) 정내옥(鄭來鈺)
정대기(鄭大機) 정대득(鄭大得) 정대용(鄭大用) 정대즙(鄭大楫) 정덕리(鄭德履)
정덕윤(鄭德潤) 정덕징(鄭德澄) 정동설(鄭東卨) 정명기(鄭命基) 정명원(鄭名遠)
정명진(鄭名振) 정명호(鄭鳴鎬) 정몽재(鄭夢才) 정몽진(鄭夢辰) 정문보(鄭文輔)
정보세(鄭輔世) 정사검(鄭思儉) 정사남(鄭士男) 정사보(鄭士卜) 정사선(鄭士善)
정사정(鄭士貞) 정사정(鄭士貞) 정사한(鄭士漢) 정상례(鄭尙禮) 정석정(鄭碩鼎)
정석필(鄭錫弼) 정세웅(鄭世雄) 정시망(鄭時望) 정시발(鄭時發) 정시준(鄭時俊)
정시택(鄭時澤) 정신립(鄭信立) 정양복(鄭陽復) 정언길(鄭彦吉) 정예봉(鄭禮奉)
정완길(鄭完吉) 정우(鄭瑀) 정운성(鄭運晟) 정운익(鄭雲翼) 정운태(鄭運泰)
정원길(鄭元吉) 정위(鄭偉) 정의록(鄭義祿) 정이언(鄭二彦) 정이철(鄭履喆)
정익신(鄭翼臣) 정익창(鄭益昌) 정익한(鄭翼漢) 정익훈(鄭益勛) 정인갑(鄭麟甲)
정인관(鄭仁寬) 정일(鄭溢) 정잣쇠(鄭㗯金) 정종정(鄭宗正) 정종주(鄭宗周)
정종헌(鄭宗憲) 정주석(鄭周碩) 정주천(鄭胄天) 정준의(鄭遵義) 정중희(鄭仲希)
정즙(鄭濈) 정지은(鄭之殷) 정지협(鄭之俠) 정진(鄭進) 정진영(鄭晉英)
정찬규(鄭贊奎) 정창성(鄭昌成) 정춘엽(鄭春曄) 정충헌(鄭忠憲) 정탁립(鄭倬立)
정탄(鄭坦) 정필재(鄭弼載) 정필한(鄭弼漢) 정황(鄭璜) 정후선(鄭後善)
정희남(鄭希男)
무관
정명원(鄭明源) 정문성(鄭文星) 정성우(鄭成佑) 정인식(鄭仁植)
문과
정건주(鄭建周) 정겸식(鄭謙植) 정겸제(鄭兼濟) 정경세(鄭經世) 정계충(鄭繼忠)
정광원(鄭廣元) 정광원(鄭廣元) 정기태(鄭期泰) 정덕수(鄭德洙) 정동규(鄭東奎)
정동망(鄭東望) 정동한(鄭東翰) 정두흠(鄭斗欽) 정명세(鄭名世) 정몽해(鄭夢海)
정민헌(鄭民獻) 정밀(鄭密) 정백창(鄭百昌) 정백창(鄭百昌) 정백형(鄭百亨)
정분(鄭苯) 정사량(鄭思亮) 정사제(鄭思悌) 정사현(鄭思顯) 정상추(鄭象樞)
정석오(鄭錫五) 정석유(鄭錫瑜) 정선명(鄭善鳴) 정성(鄭晟) 정성근(鄭誠謹)
정성일(鄭誠一) 정수(鄭璲) 정심(鄭杺) 정양(鄭穰) 정우묵(鄭佑默)
정우병(鄭遇炳) 정유(鄭濡) 정유산(鄭惟産) 정윤(鄭潤) 정윤중(鄭允中)
정은(鄭垠) 정의묵(鄭宜默) 정재감(鄭在鑑) 정재춘(鄭再春) 정종학(鄭鍾學)
정종학(鄭鍾學) 정주생(鄭周生) 정주신(鄭舟臣) 정중록(鄭重祿) 정징최(鄭徵最)
정척(鄭陟) 정침(鄭沈) 정태주(鄭泰周) 정태형(鄭泰亨) 정택신(鄭宅臣)
정필달(鄭必達) 정하묵(鄭夏默) 정형신(鄭衡臣) 정휘진(鄭彙晉) 정흔(鄭昕)
정희동(鄭熙東)
생원시
정갑원(鄭甲源) 정경소(鄭慶韶)  정기조(鄭期造)  정기태(鄭期泰) 정기형(鄭基炯)
정대균(鄭大鈞) 정덕휴(鄭德休) 정돈(鄭墩) 정동망(鄭東望) 정동신(鄭東臣)
정동현(鄭東賢) 정두(鄭斗) 정두태(鄭斗泰) 정만재(鄭萬載) 정명우(鄭明遇)
정명홍(鄭名弘) 정목(鄭穆) 정몽해(鄭夢海) 정문규(鄭汶奎) 정민첨(鄭民瞻)
정백선(鄭伯善) 정백순(鄭百順) 정백창(鄭百昌) 정사열(鄭斯悅) 정사제(鄭思悌)
정사현(鄭思顯) 정사회(鄭思晦) 정산휘(鄭山彙) 정상일(鄭相一) 정상주(鄭相周)
정석호(鄭錫瑚) 정세구(鄭世球) 정세집(鄭世輯) 정세휘(鄭世翬) 정수(鄭銖)
정수규(鄭守奎) 정승훈(鄭承勳) 정시복(鄭始復) 정심(鄭杺) 정안(鄭安)
정약우(鄭若愚) 정양달(鄭養達) 정양석(鄭良錫) 정양인(鄭養仁) 정양조(鄭養祚)
정여경(鄭餘慶) 정여신(鄭礪臣) 정염(鄭琰) 정영세(鄭榮世) 정영신(鄭英臣)
정운(鄭橒) 정운룡(鄭雲龍) 정윤좌(鄭允佐) 정은(鄭誾) 정의(鄭顗)
정이룡(鄭而龍) 정인서(鄭寅瑞) 정인후(鄭仁厚) 정일지(鄭日知) 정전(鄭㙉)
정좌묵(鄭佐默) 정주관(鄭胄寬) 정주신(鄭舟臣) 정중석(鄭重錫) 정지모(鄭智模)
정지호(鄭之濩) 정창(鄭敞) 정창서(鄭昌緖) 정창식(鄭昌植) 정필달(鄭必達)
정해갑(鄭海甲) 정행언(鄭行彦) 정흔(鄭昕) 정희채(鄭熙采)
음관
정동규(鄭東奎) 정문성(鄭文星) 정민수(鄭民秀) 정상진(鄭象晉) 정상진(鄭象晉)
정상추(鄭象樞) 정성일(鄭誠一) 정순묵(鄭順默) 정윤우(鄭允愚) 정윤우(鄭允愚)
정인묵(鄭寅默) 정종학(鄭鍾學)
음양과
정경손(鄭敬孫)
진사시
정경(鄭烱) 정경세(鄭經世) 정관원(鄭官源) 정국균(鄭國鈞) 정권(鄭權)
정규환(鄭奎煥) 정근(鄭謹) 정기(鄭磯) 정기우(鄭期遇) 정기태(鄭期泰)
정기필(鄭基駜) 정대함(鄭大咸) 정대호(鄭大濩) 정덕수(鄭德洙) 정도극(鄭道極)
정동교(鄭東僑) 정동기(鄭東箕) 정동두(鄭東斗) 정동룡(鄭東龍) 정동준(鄭東駿)
정만우(鄭萬愚) 정명세(鄭名世) 정밀(鄭密) 정백선(鄭伯善) 정백창(鄭百昌)
정백형(鄭百亨) 정보인(鄭輔仁) 정사윤(鄭師尹) 정사제(鄭思悌) 정석형(鄭碩亨)
정선명(鄭善鳴) 정성(鄭晟) 정세갑(鄭世甲) 정소(鄭韶) 정수묵(鄭守默)
정승윤(鄭承尹) 정시복(鄭始復) 정심(鄭杺) 정안(鄭安) 정여신(鄭礪臣)
정여우(鄭汝雨) 정여홍(鄭汝弘) 정용묵(鄭容默) 정용서(鄭龍瑞) 정원린(鄭元麟)
정유(鄭濡) 정유량(鄭有良) 정윤붕(鄭允弸) 정응신(鄭應辰) 정의묵(鄭宜默)
정인덕(鄭麟德) 정인묵(鄭寅默) 정인보(鄭仁普) 정인환(鄭麟煥) 정인후(鄭麟厚)
정임(鄭任) 정장견(鄭長堅) 정절팔(鄭晢八) 정제생(鄭悌生) 정조갑(鄭祖甲)
정주흡(鄭周洽) 정찬(鄭撰) 정천경(鄭天卿) 정철우(鄭喆愚) 정첨(鄭䪜)
정충량(鄭忠亮) 정충복(鄭忠復) 정치(鄭穉) 정태동(鄭泰東) 정태윤(鄭太允)
정함(鄭咸) 정헌(鄭櫶) 정헌세(鄭憲世) 정현(鄭晛) 정환규(鄭煥奎)
정효성(鄭孝成) 정후묵(鄭厚默) 정휴풍(鄭休豊) 정희득(鄭希得)
취재
정인서(鄭麟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