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4.24. 동창자녀 결혼 수원화성

2011.4.24. 수원 화성 전통무예 시범

아베베1 2011. 4. 24. 21:00

 

 

 

 

 

 

 

 

 

 

 

 

 

 

 

 

 

 

 

 

 

 

 

홍재전서 제7권
 시(詩) 3
좌상(左相)이 화성(華城)의 역사(役事)를 총괄하여 처리했는데, 해마다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할 때면 그의 나이가 많음을 고려하여 항상 먼저 갔다가 나중에 돌아오도록 했었다. 그런데 그가 돌아올 적마다 시를 지어서 축(軸)이 그득하므로, 그 축을 가져다 보고 그 가운데 양운(兩韻)을 뽑아 지어서 돌려보내다. 4수(四首)

고향에 서리 이슬은 몇 해나 내리었던고 / 霜露桑鄕歲幾飜         한 치 마음이 높은 은혜 보답할 곳이 없네 / 寸心無處答隆恩
경영한 건 우뚝해라 성 담장이 장엄하고 / 經營屹屹雉墉壯        겹겹으로 옹위해라 천연의 절벽 높다랗네 / 拱護重重象設尊
일만의 민호는 호우의 길에 가로로 임했고 / 萬戶橫臨湖右路     삼군의 기운은 진남의 문에 용솟음치누나 / 三軍氣湧鎭南門
이 땅의 인화를 어찌 내 힘으로 이뤘으랴 / 人和此地予何力       온천 행행 그때의 성덕이 아직도 전해진다오 / 盛德猶傳昔幸溫
위는 ‘장안문루(長安門樓)’의 시운에 화답한 것이다.

성의 망루가 우뚝하게 일어나니 / 樓櫓居然起
강과 산이 갑자기 새로워졌도다 / 山河頓與新
경의 총리한 노력 고맙기도 해라 / 多卿摠理力
날 위해 지휘를 신기하게 하였네 / 爲我指揮神
휘하엔 용맹 뛰어난 군사들이요 / 旗鼓超乘士
여염엔 본업 즐기는 백성들일세 / 閭閻樂業民
그 토지는 자고로 상지상등이니 / 厥田元上上
오는 봄엔 도랑 터서 물을 대야지 / 疏漑擬來春
위는 ‘영화정(迎華亭)에서 화성부(華城府)의 소재지를 바라보다’의 시운에 화답한 것이다.

이상은 갑인년 시축(詩軸)에서 뽑은 운이다.

놀라 허둥지둥하고 또다시 사모하여라 / 皇皇瞿瞿更依依
보인 듯 들린 듯하여 차마 못 돌아가겠네 / 若覿如聞未忍歸
우뚝하여라 높은 산은 하늘이 내린 집이요 / 岨矣高山天與宅
어슴푸레 원묘에선 달마다 의관을 내온 듯 / 怳然原廟月遊衣
화려한 경치 일천 산은 포홀이 늘어섰는 듯 / 烟花袍笏羅千嶂
금성탕지 요새는 경기 좌우의 으뜸이로다 / 鏁鑰金湯冠兩畿
패릉을 달려갔다 와서 또 뜻한 것이 있어 / 歷騁霸陵還有意
육마의 어가를 성황당에 잠시 멈추었노라 / 城隍少駐六龍飛
위는 ‘어가가 홍범(洪範), 봉조(鳳鳥) 등 여러 산을 순행하고 밤에 화성(華城)의 행궁(行宮)으로 돌아오다’의 시운에 화답한 것이다.

신풍루 아래는 길이 꼬불꼬불 더디어라 / 新豐樓下路逶遲             남녘서 북녘 바라보는 시를 외워나 보자 / 爲誦南來北望詩
장락궁 종소리가 멀지 않으니 / 長樂鐘聲知不遠                          머리 돌려 침원을 어이 하직한단 말인가 / 那堪回首寢園辭
위는 ‘환궁(還宮)하던 날’의 시운에 화답한 것이다.

이상은 병진년 시축에서 뽑은 운이다.


 

[주D-001]원묘(原廟)에선 …… 듯 : 원묘는 패궁(沛宮)에 세운 한 고제(漢高帝)의 별묘(別廟)를 가리키고, 의관(衣冠)을 내온다는 것은 매달 초하룻날마다 고제의 의관을 꺼내서 법가(法駕)에 싣고 능궁(陵宮)에서 고묘(高廟)로 옮기던 일을 가리킨다.
[주D-002]패릉(覇陵) : 한 문제(漢文帝)의 능호(陵號)인데, 전하여 능침(陵寢)을 가리킨다.

 

 

정조 대왕 행장(行狀)


아, 대행 대왕이 하늘로 떠나신 그 다음달 병술일에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께서 애지(哀旨)를 내려 삼공(三公)·구경(九卿)과 관각(館閣)·삼사(三司)의 신하들로 하여금 묘호(廟號)를 올리게 하여 정종(正宗)이라고 하고, 능호(陵號)를 올리게 하여 건릉(健陵)으로 하고, 시호(諡號)는 문성 무열 성인 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로 올렸다. 예에 이른바 위대한 공로가 있는 자는 위대한 영예를 받는다는 그것이다. 그리고 또 여러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행장·책문·비문·지문 등등을 지어올려 대례(大禮)를 충분히 돕고 동시에 그 훌륭한 아름다움을 천세 만세에 전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시기에 신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아뢰기를,
“우리 대행 대왕께서 재위 25년 동안에 그 성대한 덕과 깊은 사랑 그리고 굉장하고 위대한 사업들은 마치 천지 일월처럼 높고도 빛나서 사람들 뼛속 깊이 스며있고 귀와 눈에도 선하거니와 다만 춘저(春邸)에 드시기 이전의 탄생에서부터 자라나는 동안 궁곤(宮梱) 내에서의 한가로운 생활상은 외정(外廷)에서는 미처 보고 알지 못한 것들이 있는데 지금 그것까지도 모두 소상히 게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즉 대내에서 행록(行錄)을 내려주시는 일은 바로 우리 열성조가 옛부터 해오셨던 일이기에 신들이 감히 죽기 무릅쓰고 청하는 바이옵니다.”
했더니, 이에 따라 정순 대비(貞純大妃)가 팔측(八則)을 써서 내려주시고, 혜경궁(惠慶宮)이 십구측(十九則)을 써 내려주셨다. 이에 신 이만수(李晩秀)는 삼가 읽고 나서 날듯이 기쁜 마음으로 피눈물을 닦고 다음과 같이 행장을 올리는 바이다.
아, 대행 대왕의 성은 이씨요 휘는 산(祘)이며 자는 형운(亨運)으로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손자이며 장헌 세자(莊獻世子)의 아들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혜빈(惠嬪) 풍산 홍씨(豊山洪氏)로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따님이었다. 영종 명에 의하여 진종 대왕(眞宗大王)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그 모후(母后)는 효순 왕후(孝純王后)이고, 풍양 조씨(豊陽趙氏) 좌의정 풍릉 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따님이시다.
왕은 영종 28년(1752) 임신 9월 22일(기묘) 축시에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탄생했는데 그 곳은 바로 숙묘(肅廟)가 계시던 곳이었다. 신미년 겨울 장헌 세자 꿈에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상으로 들어왔었는데 꿈속에서 본 대로 그 용을 그려 벽에다 걸어두었더니 탄생하기 하루 전에 큰 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자욱해지더니만 몇 십 마리의 용이 굼틀굼틀 하늘로 올라갔고 그것을 본 도성의 인사들 모두는 이상하게 여겼었다. 급기야 왕이 탄생하자 우렁찬 소리가 마치 큰 쇠북소리와도 같아서 궁중이 다 놀랐으며 우뚝한 콧날에 용상의 얼굴과 위아래 눈자위가 펑퍼짐한 눈에 크고 깊숙한 입 등 의젓한 모습이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 영종이 거기 와 보시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혜경궁에게 이르기를,
“이제 이 아들을 낳았으니 종묘 사직에 대한 걱정은 없게 되었다.”
하고는, 손으로 이마를 만지면서, 꼭 나를 닮았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날로 원손(元孫)으로 호칭을 정하였다.
그후 백일(百日)이 채 안 되어 서고, 일년도 못 되어서 걸었으며 말도 배우기 전에 문자(文字)를 보면 금방 좋아라고 하고 또 효자도(孝子圖)·성적도(聖蹟圖) 같은 그림 보기를 좋아했으며 공자처럼 제물 차리는 시늉을 늘 했다. 의복은 화사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때가 묻고 솔기가 터진 것도 싫어하지 않았으며 노리개 같은 것은 아예 눈에 붙이지를 않았다. 첫돌이 돌아왔을 때 돌상에 차려진 수많은 노리갯감들은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저 다소곳이 앉아 책만 펴들고 읽었다는 것이다. 계유년 겨울 인원 성모(仁元聖母)에게 휘호(徽號)를 올릴 때에 왕은 유모의 부축없이도 포화(袍靴)를 갖추고 절하고 꿇어앉고 오르고 내리고 하는 예를 행하자 그를 본 왕비가 감탄하였다. 갑술년 8월에는 보양청(輔養廳)을 두었으며, 을해년 봄에 처음으로 주자가 쓴 《소학(小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영종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원손이 강을 마치고 나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지금 겨우 네 살인데도 얼굴 생김이나 그 기상이 보통 애들과는 크게 다르니 하늘이 혹시 우리에게 복을 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때부터 지혜와 생각하는 바가 날로 발전하였으며 날이 밝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빗고 독서에 들어갔으므로 혜경궁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염려되어 일찍 일어나지 말라고 타이르자 그때부터는 남이 모르게 등불을 가려두고 세수하였다.
정축년 봄에 인원(仁元)·정성(貞聖) 두 성모가 잇따라 한 달 사이에 승하하셨는데 그때 왕은 이제 겨우 한 자 정도의 옷을 입을 만큼 자라 궤전(饋典) 등의 예는 행할 수가 없었는데도 거처하는 곳이 빈전(殯殿)과 가까이 있어 아침 저녁 곡하는 소리를 듣고는 자기도 짚자리를 들고 망곡(望哭)을 하였다. 기묘년 2월 계해일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윤6월 경자일에 명정전(明政殿)에서 책립을 받았는데 거동 하나하나가 법도에 맞고 예를 행하는 모습이 본받을 만하였다. 영종이 전상으로 오르도록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옛날 주 무왕(周武王)이 면복[冕] 차림으로 태사인 상보(尙父)에게서 단서(丹書)7509) 를 받았듯이 오늘 이 책봉으로 하여 3백 년 종사(宗社)의 흥망이 너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너는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가깝고 쉬운 것부터 가르치기로 한다.”
그해에 정순 대비(貞純大妃)영종의 계비로 들어왔는데 왕은 그 대비를 혜경궁 섬기듯이 섬겼으며, 신사년 봄 영종의 거둥 때는 왕이 모시고 뒤를 따랐는데 운종(雲從) 거리에서 행차를 멈추고는 구경 나온 사민(士民)들로 하여금 세손(世孫)을 만나보게 하였다. 환궁한 후 묻기를,
“오늘 구경 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너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슨 일이더냐?”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신이 선(善)을 하기를 바랐었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선을 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더냐?”
하니, 대답하기를,
“예. 쉽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유선(諭善) 서지수(徐志修)가 아뢰기를,
“쉽다고 생각되어야지만 비로소 용감하게 전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영종이 매우 기뻐하였다. 2월 을미일에 자(字)를 정하고 3월 기유일 학궁에 들어가 선성(先聖)을 배알한 후 박사(博士)에게 수업을 청해 《소학》을 강하는데 왕이 질문하기를,
“명명(明命)이 내 몸에 있다는 것은 어느 경지를 가리킨 것이며, 그것이 혁연(赫然)하도록 하자면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박사는 대답을 못했고 다리 주변에 둘러서서 구경하던 수많은 관중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성인(聖人)이라고 축하들을 했었다.
그달 정사일에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를 행하고 임오년 2월 병인일에 청풍 김씨(淸風金氏) 증 영의정(贈領議政)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따님과 가례를 올렸는데 그가 바로 지금의 왕대비시다. 5월에 장헌 세자가 세상을 뜨자 왕은 슬픔으로 인한 손상이 너무 지나쳐 시자(侍者)들이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경희궁(慶熙宮)에서 영종을 모시고 있으면서 낮이면 언제나 어좌(御座) 좌우를 떠나지 않고 밤이면 영빈(暎嬪) 곁으로 가 같이 밥먹고 같이 자면서 갖가지로 위로했으며 그후 갑신년 영빈의 병이 위독했을 때는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고 급기야 상을 당해서는 임오년 상사 때 못지않게 슬퍼하였다. 그때 혜경궁창덕궁(昌德宮)에 있었는데 슬픔이 가슴에 맺혀 있어 자주 앓아누웠다. 왕은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자신도 곧 침식(寢食)을 폐했으며 날마다 새벽이면 수서(手書)를 올려 안녕하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수저를 들었는데 그렇게 하기를 하루에도 서너 번씩 하였다.
7월에 명나라에서 있었던 일처럼 세손을 동궁(東宮)으로 삼도록 명하고 세자궁에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을 두었다. 강하는 자리에서 빈대(賓對) 때나 또는 대소 신료들 입시 때면 왕을 명하여 자주 시좌(侍坐)하도록 하고 혹 경전의 뜻을 변론하기도 하고 혹은 국정을 참여하여 듣도록 하기도 하였다. 언젠가 빈대의 자리에서 묻기를,
“삼남(三南) 지역에 흉년이 들었다는데 백성들을 어떻게 구제해야 하겠느냐?”
하자, 왕이 대답하기를,
“곡식이 있어야 구제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곡식을 어디서 가져오겠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양혜왕(梁惠王)이 했던 것처럼 하면 될 것입니다.”
하니, 영종은 웃으면서 이르기를,
“좋은 대답이다. 오늘 빈대하는 자리에서의 문답에 대해 너도 일찍 그 내용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라.”
하였다.
계미년 봄에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을 불러 접견했는데 그때 《맹자》를 강하고 있을 때였다. 명흠《맹자》의 근본 취지가 뭐냐고 묻자, 왕이 말하기를,
“인욕(人欲)을 싹트지 못하도록 막고 천리(天理)를 존속시키는 일입니다.”
하였으며, 명흠이 입지(立志)에 대하여 또 묻자, 왕이 말하기를,
“원하는 바라면 요(堯)·순(舜)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명흠이 자리에서 물러나와 남들에게 말하기를,
“총명 영특하고 슬기로운 상지(上智)의 자질로서 이 나라의 복이다.”
하였다.
갑신년 2월 임인일 왕을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종통(宗統)을 이어받도록 명했는데 효장 세자는 바로 진종을 말한다. 하루는 강관(講官)이 삼남(三南)의 굶주린 백성들에 대해 아뢰면서 옷은 헐벗고 얼굴빛은 누렇게 떳다고 하자, 왕이 한참 동안이나 가여워하는 표정이더니 그날 저녁밥 때는 고기를 들지 않았다. 영종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오늘 강관이 굶주린 백성들에 대한 애기를 했는데 불쌍한 마음이 들어 젓가락이 차마 가질 않습니다.”
하였다.
을유년 봄 빈대(賓對)의 자리에서 모시고 있을 때 영종이 이르기를,
“옛날 한 광무(漢光武)하남(河南)·남양(南陽)에 관하여 말한 명제(明帝)의 대답을 기특하게 여겼었는데,7511) 지금 나도 충주(忠州)의 포리(逋吏) 문제를 너에게 묻겠다. 지금 제신들 주장은, 왕법(王法)을 굽혀서도 안 되고 국가의 저축을 축내서도 안 된다고들 하는데 그 주장이 옳은가 틀린가?”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열 명도 넘는 관리들에게 목숨을 부여하는 일이 바로 천지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큰 덕인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옛날 축낸 관곡을 받아 들이는 일에다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묻기를,
노나라 임금은 부세의 율을 올리려고 했는데, 공자 제자들은 오히려 견감하려고 했으니 그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답하기를,
“백성은 나라를 의지하여 살고 나라는 백성을 의지하여 존재하는데 백성들이 풍족하다면 임금이 부족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묻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백성들을 부유하게 할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이 어질고 백성들을 사랑한다면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쓸데없는 일을 하느라 농사때를 빼앗지 않으면 됩니다.”
하였는데, 영종은 참 좋은 말이라고 하고는 각도의 묵은 포흠을 모두 견감하도록 명하였다.
그해 겨울 왕이 큰 병을 앓았다. 영종은 너무 걱정이 되어 왕이 있는 집에서 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내면서 서연(書筵) 날이 되면 친히 소대(召對)를 하고 왕이 그 소리를 듣게 하고는 세손이 좋아하는지의 여부를 좌우에게 물었는데, 좌우에서 좋아한다고 대답하면 그 말을 들은 영종 역시 기뻐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세손이 마음가짐이 강해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신음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내 마음을 편케 해주고 있다.”
하였다. 병술년 봄에는 영종이 환후가 있어 여러 달을 위중한 상태에 있었는데 왕은 그때 큰 병을 앓고 난 후였으면서도 밤낮으로 시탕(侍湯)하면서 한발짝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앉고 눕고 하는 것을 모두 친히 부축했으며 한편으로는 조심하고 한편으로는 걱정하여 좌우의 사람들이 감격하였다. 그해에 환후가 말끔히 낫자 이를 일러 모두 왕의 효성의 소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해부터서는 모든 조신들 입시 때 왕이 꼭 곁에서 모셨었다. 정해년 봄 영종이 적전(籍田)에 밭갈 때 영종은 쟁기를 잡고 다섯 번 밀고 왕은 일곱 번을 밀었다. 신묘년 봄에 종신(宗臣)인 이인(李䄄)이진(李禛)이 죄가 있어 영종이 진노하고, 하교하기를,
“그 싹을 막아버리지 않으면 나라의 뿌리가 안전하지 못할 것이니 모두 탐라(耽羅)로 내쫓아버리라.”
하여, 얼마 후 은 적소(謫所)에서 죽었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은 너무 슬퍼하면서 사람을 보내, 돌볼 것을 돌보고 그 영구를 호송하여 돌아오도록 하였는데 그것을 두고 어느 척신(戚臣)이 말하는 자가 있자, 수찰(手札)로 답하기를,
“1만리 바다 밖에서 아우가 죽었다는 부음을 받고 부연 파도가 너무 넓고 멀어 널을 부둥켜 안고 통곡할 길은 없다 하더라도 옛날을 생각하고 오늘의 이 슬픔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프고 목이 메어 억누를 길이 없다. 이 세상에 얻기 어려운 것이 형제요 끊을 수 없는 것이 윤리(倫理)인데 그 윤리를 지상으로 알고 실천하는 이가 성인(聖人) 아니었던가. 그대가 비록 성상의 귀를 번거롭게 한대도 어찌 굽어살피심이 없겠는가.”
하였다.
임진년에 와서 영종의 연세가 날로 높아가자 뭇 신하들이 유양(揄揚)의 예를 거행할 것을 청했는데 영종은 겸양의 마음으로 이를 허락지 않았다. 이에 왕은 손수 간곡한 상소를 올려 영종의 마음을 돌리기에 정성을 다했는데, 급기야 영종이 하교하기를,
“이 한 모퉁이 작은 나라에서 할아비는 손자를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를 의지하고 있는데 너의 글월을 보고서야 내 어찌 감동을 않겠느냐.”
하고는, 본의를 굽히고 따라주었다. 이에 을유년 이후 술잔을 올려 만수 무강을 빌고 성대한 공로를 금옥에 새긴 일들은 모두 왕의 효성에 감동을 받아 이루어진 일들이었던 것이다. 병술년 이후로는 성상의 체후가 정섭(靜攝)을 요할 때가 많았는데, 왕이 낮이면 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 밤이 되어도 옷을 벗는 일이 없었으며 조금이라도 증세가 더하면 곧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면서 몸을 드러내놓고 신명(神明)께 기도하였다. 영종이 앉고 누울 때 좌우에서 혹 부축을 하면 곧 이르기를,
“동궁은 어디 있느냐. 내 몸에는 내 손자만큼 맞는 사람이 없다.”
하였다.
왕은 너덧 살 때부터 늘 꿇어앉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바지 무릎 닿은 곳이 먼저 떨어졌는데 여덟 아홉이 되자 더욱더 장중하고 별로 말이 없었으며 조급하게 말하거나 당황하여 얼굴빛이 변하는 일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설어(褻御)·환첩(宦妾) 따위와는 별로 상대하여 말하지도 않았다. 왕이 고요히 앉아있는 것을 영종이 보고는 이르기를,
“네 학문이 이제 자리가 잡혔나보다.”
하고,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세손의 성품이 보통과는 아주 달라 털끝만큼도 법도를 이탈하려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금원(禁苑)에 꽃이 필 때도 나를 따라서가 아니고는 한 번도 구경 나가는 일이 없고 날마다 독서가 일인데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영종 늘그막에는 허구한 날 시탕(侍湯)이었으나 병후가 조금이라도 덜하기만 하면 곧 서연(書筵)을 열었으며, 언제든지 성상이 깊이 잠들기를 기다려 파루가 너덧 번 쳐야 물러갔는데 가서는 또 촛불을 밝히고 책상 앞에서 글씨를 썼다. 그리고 닭이 울면 또 달려가 시탕을 하였던 것이다.
그때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아들 정후겸(鄭厚謙)은 성질이 비뚤어지고 조행이 없었는데 옹주만을 믿고 매우 방자하게 굴었으며, 홍봉한(洪鳳漢)의 아우 홍인한(洪麟漢)은 자기 형 세력을 깔고 재상이 되었는데 자기쪽 무리들과 야합하여 말을 퍼뜨리기를,
홍씨(洪氏)를 공격하면 이는 동궁(東宮)을 불리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면서 그것을 구실로 온 세상의 입을 막으며 위협을 가했다. 또 홍상간(洪相簡)·민항렬(閔恒烈) 등은 춘궁(春宮)을 드나들며 앞장서서 기사년 흉론(凶論)을 만들어냈으며, 상간의 겨레붙이 홍계능(洪啓能)은 이른바 유생(儒生)의 이름에 가탁하여 멀리서 조정의 권한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윤양후(尹養厚)·윤태연(尹泰淵) 등은 홍인한·정후겸을 위해 목숨을 건 무리들로서 번갈아가며 전임(銓任)과 융병(戎柄)을 잡고 있었다. 영종이 왕에게 국정을 이양할 뜻을 비치자 이들은 그 틈을 타서 저들끼리 서로 뭉치고 많은 당여(黨與)를 심어 국권을 농락하고 법을 무시하며 조정을 무너뜨리려고 했는데 왕이 워낙 천질이 영명하고 고금(古今)에 통달한데다 척리(戚里)들이 국정에 간여하는 폐습을 무엇보다 싫어했기 때문에 그 적(賊)들에 대하여 조금도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았었다. 이에 그 적들은 크게 두려움을 느끼고 들어가서는 상대의 속마음을 떠보는 방식으로 기회를 엿보고 나와서는 터무니없는 헛소문을 퍼뜨려 세손의 위치를 흔들어놓을 궁리만을 했고, 화완 옹주는 또 장기간 금중(禁中)에 있으면서 자기 자식을 위해 그 흉모를 온갖 방법을 다해 도왔다. 환첩이나 궁정의 하인들을 널리 조아(爪牙)로 포섭하고 왕의 동정만을 살폈지만 왕은 그를 미리 알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면서 흔들리지도 않고 표면에 내놓지도 않고 그저 아무일 없는 듯이 태연하기만 했다. 게다가 또 영종이 성명하여 위엄을 보이지 않아도 무서워했고 정순 왕비 역시 지성으로 도왔기 때문에 그 적들이 결국 농간을 피우지 못했었다. 을미년 봄에 와서 성상의 병환이 날이 갈수록 더하여 크고 작은 사전(祀典) 모두를 왕이 대신 행하도록 명했고, 10월 상참(常參) 때는 하교하기를,
“오늘 문을 나서보니 내 몸을 내가 잘 가누지 못하겠다. 어린것이 좀 숙성하여 이러한 때 기무(機務)를 대신 처리하는 솜씨를 직접 내게 보여주면 그 아니 빛나는 일이겠느냐.”
하니, 그로부터 적들은 더욱 두려움을 느끼고 성상의 병세를 숨김으로써 대리 청정을 못하게 막을 계책을 꾸몄던 것이다.
11월 계사일에 영종이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다 불러놓고 하교하기를,
“요즘 들어 정신도 기운도 더욱 쇠하여 공사(公事)를 수응할 수가 없는데 나라 일을 생각하면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그 어린것이 조론(朝論)을 아는지? 국사(國事)를 아는지? 이판(吏判)·병판(兵判)은 누가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지? 옛날에 우리 황형(皇兄)7512) 께서는 ‘세제(世弟)가 좋을까, 좌우(左右)가 좋을까?’ 하신 하교가 있었지만 지금으로 말하면 사정이 황형 시기와는 현격하게 다르지 않은가. 더구나 청정(聽政) 제도는 국조에서 예로부터 있어왔던 일 아닌가.”
하니, 홍인한이 앞으로 나와 대답하기를,
“동궁은 조론을 알 필요가 없고 전관(銓官)도 알 필요가 없으며 국사에 있어서는 더더구나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영종이 한숨을 쉬시며 이르기를,
“경들이 내 뜻을 모르는군. 차라리 내 손자로 하여금 내 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 편이 더 났겠다.”
하고는, 어제(御製) 《자성편(自省編)》《경세문답(警世問答)》동궁에게 진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그로부터 며칠 후 영종은 공사를 동궁에게로 들여가도록 명하여, 승지(承旨)가 받아쓰려고 하자 인한이 또 손을 내저으며 못하게 하였다. 이에 영종이 이르기를,
“순감군(巡監軍)에 표지 붙이는 일을 중관(中官) 손에다 맡겨서야 될 일인가.”
하니, 영의정 한익모(韓翼謩)가 아뢰기를,
“성명께서 위에 계시는데 그까짓 무리들을 걱정할게 뭐겠습니까.”
하였다. 영종은 성을 내시어 제신들을 다 물러가도록 명하고, 이어 순청 감군과 이조·병조의 비점(批點)을 동궁에게서 받도록 명했다. 이때 성상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대보(大寶)·계자(啓字) 등을 다 동궁으로 옮겨두고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하교를 내렸었지만 인한이 중간에서 말을 놀려 굳이 저지하는 바람에 성명(成命)이 오래도록 내려지지 못하고 사태는 위기일발의 상태로 치닫고 있어 무슨 변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상황이었으나 조정 내에는 감히 말 한마디 하는 자가 없었다.
12월 병오일 전 참판 서명선(徐命善)이 소를 올려, 대리 청정을 막아온 인한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고 이어 한익모가 환관에게 다짐의 말을 했던 것을 논했다. 소가 올라왔다는 소식을 들은 영종명선과 대신(大臣)·대신(臺臣)들을 빨리 입시하도록 명하고는 명선에게 소를 아뢰게 했다. 영종은 무릎을 치며 감탄과 치하를 하면서 제신들을 돌아보며 의견을 물었다. 이에 대신 송영중(宋瑩中)은 내용이 너무 과격하다고 했고 상신(相臣) 김상복(金相福)은 말의 근거를 캘 것을 청했는데, 영종인한·익모는 사적(仕籍)에서 삭제하고 상복은 파직, 영중은 사직하도록 명하고 명선은 특별히 발탁하여 도총관(都摠管)에 임명하였다.
그로부터 4일 후인 경술일에 왕을 명하여 모든 정사를 대리 청정하게 하자 왕이 세 번 소를 올렸는데, 비답을 내리기를,
“명분이 바르고 말도 사리에 맞고 이 나라가 안정을 찾는 길이니 나로서는 더할 수 없이 다행한 일이요 너로서는 어버이에게 영화를 바치는 일이다.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우리 삼백 년 종국(宗國)을 잘 이끌어가도록 하라.”
하고, 이어 청정의 의절(儀節)을 정유년7513) 에 했던 대로 하도록 명하였다. 그로부터 3일 후인 계축일 영종경현당(景賢堂)에 나아와 청정 하례를 받았는데 왕은 곤복(袞服) 차림으로 조참(朝參)을 행한 후 백관으로부터 하례를 받고 그날 진찬(進饌)에서 구작례(九爵禮)를 행하였다. 그리고 뭇 신하들은 다 천세(千歲)를 불렀으며, 영종은 그를 돌아보며 매우 즐거운 표정을 지으셨다.
청정을 시작한 왕은 진전(眞殿)과 태묘(太廟)를 배알하고 각 궁묘(宮廟)에 두루 절을 올렸으며 포고한 명령들이 모두 하늘의 법칙에 맞아 전부가 다 호응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실정이었지만 그래도 모든 일을 반드시 대조(大朝)에 품신하여 행하고 감히 전결하는 일이 없었다. 궁관(宮官)에게 말하기를,
“궁관이 비록 사관을 겸하고는 있지만 간격없이 왕을 계도하는 것이 맡은 바 직분일진대 서연(書筵)에서 필요한 규감이 되고 경종이 되는 글이라든지 또는 국사에 관계되는 정령(政令)의 득실에 대해 그때그때 의견을 개진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도우라.”
하였다.
심상운(沈翔雲)신축년7514) 역적의 손자로서 김상복(金相福)에게 부탁하여 자기 조계(祖系)를 고쳤으나 세상에서 인정해주지 않자, 정후겸(鄭厚謙)·홍낙임(洪樂任)에게 붙어 그들 심복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와서 서명선의 상소가 들어가고 대리 청정의 명령이 내려지자 흉도(凶徒)들이 크게 불만을 나타내고는 상운을 끌어들여, 온실에서 자란 나무라는 말을 인용 그 내용으로 상서하게 하여 이미 내려진 명령을 번복하기 위한 계책을 안팎으로 매우 주밀하게 짜놓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그 상소를 보고는 이르기를,
상운 문제는 충(忠)과 역(逆)이 뒤바뀌는 중대한 문제라서 주고 받고 하는 과정을 광명(光明)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고는, 영종께 그 사실을 아뢰니, 영종은 의금부에 명하여, 상운은 국문한 후 먼 섬으로 귀양보내라고 하고, 이어 찬배(竄配) 이하의 문제들은 왕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병신년 1월 영지(令旨)를 내려 14개 조항에 달하는 시폐(時弊)를 열거하면서 중외의 신서(臣庶)들을 타이르고, 또 영을 내리기를,
“각 궁가의 조세 감면 대상의 전결(田結)에 있어 궁속(宮屬)들이 그를 빙자하기 때문에 그 피해를 백성들이 받고 있다. 명례궁(明禮宮)은 동궁(東宮)에 소속된 궁이니 우선 근본부터 밝힌다는 뜻에서 그를 탁지(度支)에다 귀속시키고, 다른 각 궁가들도 앞으로 차례차례 그 예를 적용하도록 하라.”
했으며, 또 영(令)하기를,
“궁녀가 버젓이 줄 서 있는 관원 앞을 지나가고 지체 있는 관리가 여리(閭里)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으니 궁위(宮闈)의 기강이 어떻다는 것을 알 만하다. 게다가 환시(宦侍)나 추솔(騶率)들이 사부(士夫)인 양 행세를 하고 궁방(宮房) 관속들이 지방 고을에서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변괴가 아닐 수 없다. 중외(中外)로 하여금 낱낱이 아뢰게 하라.”
하였다.
어느 연신(筵臣)이 크고 작은 과거 때 면시(面試)를 실시할 것을 말하자, 왕이 이르기를,
“선비 대우는 예(禮)와 성(誠)으로 해야지 먼저 의심부터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다만 고관(考官)은 적임자를 골라 맡겨야 할 것이고 그리고 공도(公道)를 넓히고 행문(倖門)만 막아버리면 그뿐이지 선비들을 꼭 틀에 묶어두고 서둘러 구비하기를 바랄 것까지야 뭐 있겠는가. 예로부터 임금들이 잘 다스리는 방법을 찾기 위해 너무 서둘렀던 이들이 많은데, 나는 지금 대리 청정 이후 한두 가지 폐단을 바로잡아 보려고 하고 있지만 이 역시도 너무 빠른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된다.”
하였다.
2월에 수은묘(垂恩廟)를 배알했는데 수은묘경모궁(景慕宮)의 옛 이름이다. 환궁하여 영종께 상소하기를,
임오년7515) 에 내리신 처분에 대해 신으로서는 그것을 사시(四時)처럼 믿고 금석(金石)같이 지킬 것입니다. 가령 귀신 같은 못된 무리들이 감히 넘보는 마음을 먹고 추숭(追崇)의 논의를 내놓았을 때 신이 만약 그들의 종용을 받아 의리(義理)를 바꾸어놓는다고 하면 그는 천하에 대한 죄인이 되는 것은 물론 장차 종묘 사직에 대한 죄인이 될 것이며 동시에 만고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다만 《승정원일기》에 그 당시 사실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어 그를 보고 전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듣고 논의하는 자들도 있어 그 소문이 온 세상에 유포되어 사람들 귀와 눈이 그 이외는 듣도 보도 못하게 하고 있으니 신 개인으로서의 애통한 마음은 돌아갈 곳 없는 궁인(窮人)과도 같습니다. 시골 마을에 사는 필부와 서민이라도 비절한 인정이 있고 사리를 아는 자라면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가슴에 사무친 슬픔을 죽도록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무지하오나 역시 지워버릴 수 없는 그 마음만은 있는데, 지금 와서 높이 세자의 자리에 앉아 백료(百僚)들을 대할 때 어찌 마음이 애통하지 않겠으며 이마에 땀이 나지 않겠습 니까.
만약 신이 애통해 하는 것이 전하께서 하신 처분과 혹시 상치되는 점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전하가 하신 처분은 바로 공정한 천리(天理)에 의하여 하신 것이요 신이 애통해 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인정(人情)인 것으로 이른바 아울러 행하여도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또 《승정원일기》가 없을 경우 후일 그 처분에 대해 증빙자료가 없어진다고 한다면 그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국조(國朝)의 전례·고사들이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어 금궤(金匱)·석실(石室)에 담겨져 각 명산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천추 만대를 두고 이동을 하셔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데 어찌 꼭 일기가 필요할 게 뭐겠습니까.
아, 일기를 그대로 두고 안 두고는 오직 전하의 처분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지만 신 자신이 처할 바로는 다만 저위(儲位)를 사양하고 종신토록 숨어 지내면서 그저 하루 세 때 삼가 기거(起居)를 살피는 직분을 다할 뿐인 것입니다. 말을 여기까지 하고 나니 저도 모르게 창자가 끊기고 심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하늘에 호소할 길조차도 없습니다.”
하였는데, 왕은 이 상소를 직접 써서 궁관(宮官)을 시켜 승지에게 전하게 하고는 자신은 백포(白袍) 흑대(黑帶) 차림으로 존현각(尊賢閣) 앞뜰에 엎드려 처분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소가 들어가자 영종이 하교하기를,
“이 상소 내용을 들으니 슬프고 측은하게 느껴지는 내 마음을 무어라 말할 수가 없구나.”
하고는, 영종도 울고 제신들도 다 울었다. 그리고 이어 기거주(起居注) 기록 중 정축년 이후 임오년까지의 내용 중에 차마 듣지 못할 말들은 모두 실록(實錄)의 예에 따라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洗草)를 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왕을 명하여 수은묘(垂恩墓)에 가 배례를 올리도록 하였다.
처음으로 묘문(墓門)에 들어선 왕은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상설(象設) 앞에 엎드려 잔디를 쓰다듬으며 옷소매가 다 젖도록 목놓아 울다가 제신들이 교대로 아뢰는 바람에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그 다음날 영종이 하교하기를,
“종통(宗統)을 바로 세워 3백 년 종국(宗國)을 확고히 하고, 일기를 세초하여 만세를 두고 자식된 마음을 풀었다. 어제 묘소의 광경은 듣기만 했으나 눈으로 본 듯이 선하다. 어찌 콧날이 시큰할 뿐이겠는가. 내 나이 21세 때 유서(諭書)와 도상(圖像)을 받았었는데, 《내훈(內訓)》을 보았더니 태종께서 효부 은인(孝婦銀印)을 소헌 왕후(昭憲王后)7516) 에게 내린 일이 있었다. 지금 나도 그 고사(故事)를 따르겠다.”
하였다. 그날로 세초에 관한 진하(陳賀)를 집경당(集慶堂)에서 거행한 후 어제 유서와 친필로 쓴 효손(孝孫) 두 글자로 은인(銀印)을 주조하여 집경당 뜰에서 친히 주었는데 그때부터 유서와 은인을 언제나 대가 앞에다 진열하기를 산개(繖蓋)보다 앞에 하였다.
3월 병자일에 영종이 승하하였다. 성상의 병세가 심상찮을 때부터 왕은 끼니도 들지 않고 눈도 안 붙이고 어탑(御榻)을 떠나는 일이 없이 여러 대신들로 하여금 둘러서서 증후를 살피게 했으며, 급기야 위독했을 때는 수장(水漿)도 입에 넣지 않고 곡성이 그치질 않았다. 이미 상을 당하여는 빈렴(殯斂) 등의 의식 절차를 왕이 몸소 다 살피고 계속 곡을 하면서도 점검할 것은 꼭 다 하여서 비록 정신 못차리게 창황한 즈음이었으나 모든 일이 하나도 예에 어긋남이 없었다. 대신 이하 제신들이 사위(嗣位)할 것을 청하자 왕은 곡만 하고 승락을 하지 않아 여러 날을 두고 정청(庭請)을 했지만 그 일을 아뢰기만 하면 곡부터 하였다. 그러다가 성복일(成服日)에 와서야 비로소 마지못해 따르면서 이르기를,
“뭇사람들에게 부대껴 어쩔 수 없이 자리에는 올라야겠으나 그러나 면복(冕服) 차림으로 예를 거행한다는 것은 내 마음에 더욱 죄송함을 느끼게 한다. 그 예가 《서경》 강왕지고(康王之誥)에 나와있지만 그것이 예가 아니라고 평을 가한 소식(蘇軾)의 말이 집전(集傳)에 실려있다. 비록 양음(亮陰)의 제도는 못 행한다 하더라도 금방 최복(衰服)을 벗고 길복을 입는대서야 될 일인가.”
하였다. 그러나 제신들이 고례(古禮)와 국제(國制)가 그렇다는 것을 들어 강력히 청하니 왕은 울면서 따를 수밖에 없어 면복을 갖추고 유교(遺敎)와 대보(大寶)를 빈전(殯殿) 문 밖에서 받고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왕비를 왕대비(王大妃)로 혜빈(惠嬪)혜경궁(惠慶宮)으로 높이고 빈(嬪)을 왕비로 책봉하고는, 하교하기를,
“종통(宗統)과 계서(繼序)는 중대한 일이기에 비록 손(孫)이 조(祖)를 승계하고 제(弟)가 형(兄)을 승계했더라도 그 할아버지와 그 형은 당연히 아버지 자리가 되는 것이다. 오늘의 왕대비 칭호도 사실은 손이 조를 승계한 그 의의를 부여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영종의 유지(遺旨)에 따라 효장 세자(孝章世子)진종 대왕(眞宗大王)으로 추숭하고 효순빈(孝純嬪)효순 왕후로 추숭했으며, 효장 세자 묘는 영릉(永陵)이라고 했다. 그후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추숭 제도가 주나라 때 시작이 된 것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건국 초기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영릉 추숭도 그것이 선왕조 유지이기에 감히 거행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내 본의는 아니다.”
하였다. 면복을 벗고 다시 상복을 입은 다음 윤음을 내려 중외에 유시하기를,
“아, 과인(寡人)은 사도 세자 아들이다. 선왕이 종통을 중히 여겨 나로 하여금 효장 세자 뒤를 잇도록 명했던 것인데, 내가 전일 선왕께 올린 글월을 보면 불이본(不貳本)에 대한 내 뜻을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예(禮)를 비록 엄밀히 지키지 않으면 안 되지만 정(情) 역시 풀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니 제사 모시는 절차를 당연히 제이대부(祭以大夫)의 예7517) 대로 해야 할 것이나 태묘(太廟)의 예와는 달라야 하고, 혜경궁 역시 당연히 경외에서 공헌(貢獻)하는 바가 있어야 하나 대비와는 차등을 두어야 할 것이다. 해당 관아로 하여금 그 절차를 강정(講定)하여 아뢰게 하라. 그리고 만약 못된 귀신 같은 부정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追崇)의 논의를 할 경우는 여기 선왕의 유교(遺敎)가 있으므로 의당 거기에 맞는 법을 적용하여 선왕의 영령께 고할 것이다.”하였다. 사도 세자에게 존호(尊號)를 추상하여 장헌(莊獻)이라고 하고, 수은묘(垂恩墓)영우원(永祐園)이라고 봉했으며, 사당은 경모궁(景慕宮)이라고 하고, 각종 모시는 의식 절차는 송(宋)복왕(濮王)에게 하던 의식.7518) 을 따랐다. 그리고 축식(祝式)은 주자(朱子)가 정했던 대로 황숙부(皇叔父)라고 하고 종자(從子)라고 썼으며 오향(五享)7519) 때는 희생과 아악을 썼다. 그리고 사당이 비좁다 하여 넓게 확장하고는 세종(世宗)종묘에 북장문(北墻門)을 두었던 것처럼 궁(宮)의 서쪽과 원(苑)의 동편에다 일첨(日瞻)·월근(月覲)·유첨(逌瞻)·유근(逌覲) 등의 문을 두고 매월 간소한 행차로 가 살피곤 했으며 《궁원의(宮園儀)》를 책으로 만들어 궁 안에다 두기도 하였다.
왕이 춘저(春邸)에 있으면서 대종(大宗) 소종(小宗)의 논(論)을 저술하고 또 《상서(尙書)》에 있는 “마음은 예로 제어하고 일은 의리에 맞게 처리한다[以禮制心 以義制事]”라는 구절에 대해 강술한 바 있었는데, 지금 그 《궁원의》를 만든 것도 사실은 그것이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이광좌(李光佐)·조태억(趙泰億)·최석항(崔錫恒) 등의 관작을 추탈했는데, 광좌 등은 영종 을해년에 추탈했다가 그후 다시 복관(復官)된 자들로서 왕이 그때 와서 신축·임인 년간의 사건의 옳고 그름을 당연히 먼저 밝혀내야 한다고 하면서 을해년에 했던 처분대로 다시 하라고 명했던 것이다. 적신(賊臣) 김상로(金尙魯)영종 정축년7520) 부터 실권을 쥔 재상으로서 암암리에 궁녀 문(文)의 아우인 문성국(文聖國)과 결탁하여 영종과 세자와의 사이에 참화가 일어나도록 만든 자였는데, 이때 와서 하교하기를,
“정축년 12월 25일 대행 대왕이 공묵합(恭默閤)에 납시었을 때 상로가 감히 앞자리에서 망측하고 부도한 말로 답하니 선왕께서 그를 풍도(馮道)에다 비유하셨고, 언젠가 내게도 하교하시기를 ‘상로는 네 원수다. 임오년 일을 훗날 다시 들먹일 것은 비록 없겠지마는 임오년으로부터 5년 이전부터 5년 후인 임오년에 일어날 사건을 양성한 자는 바로 일개 상로뿐이다.’ 하시기에 내 그 말을 듣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뒤늦게나마 당연히 역률(逆律)로 다스려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바로잡아야 한다.”
하였다. 또 윤음(綸音)을 내려 문녀(文女)의 죄악상을 포고하고 그의 작호(爵號)도 삭탈했으며 성국에게도 노적(孥籍)의 법을 적용했다가 곧 선왕조의 금령(禁令) 때문에 두 적신에 대한 추탈과 노적은 집행을 보류하였는데 가을에 와서 문녀에게는 사사(賜死)를 했으니 그것은 인산(因山)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여름에는 이덕사(李德師)·조재한(趙載翰)·박상로(朴相老)·최재흥(崔載興) 등을 친국했는데, 이는 왕이 춘저에 있을 당시 재한 등이 임오년 일을 징토(懲討)한다는 핑계로 요사스런 환관 이흥록(李興祿)·김수현(金壽賢) 등과 비밀히 결탁한 후 왕에게 소문을 전했는데, 왕이 그때 어린 나이였지만 그들의 간악상을 알고는 마음속으로 미워했었다. 그런데 급기야 대상을 당하자, 시골 유생 이일화(李一和)를 시켜 상소하여 임오년 일을 다시 말하게 하고, 이덕사(李德師)의 상소문도 함께 올라왔는데 그 내용이 똑같았다. 이에 하교하기를,
“이는 선왕(先王)을 무함한 역적이다.”
하고는 재한·덕사 등을 친국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박상로는 부도한 말을 발설했던 관계로 드디어 사시(肆市)를 하였고, 덕사·재한·재흥 등은 모두 법대로 처형했으며, 그해 가을 영남 사람 이도현(李道顯)이 또 덕사와 똑같은 내용의 상소를 하여 그도 그날로 친국 끝에 목을 베었다.
그때 대신들과 삼사(三司)는 인한(麟漢)후겸(厚謙) 모자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했는데, 이에 대해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임금들이 자기 자신과 관계되는 사건이면 그것을 혐의롭게 여겨 불론에 부치는 것이 너그러운 도량인 것으로만 생각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의리(義理)가 흐리멍덩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명철한 임금들도 그러한 실수를 면하지 못했으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인한으로 말하면 그가 지은 죄가 대리 청정을 방해한 정도뿐이 아니지 않은가.”
하고, 인한·후겸은 귀양을 보내고, 후겸 어미는 성 밖으로 내쫓았으며, 신회(申晦)는 관직을 삭탈하고, 윤양후(尹養厚)·윤태연(尹泰淵)은 다 먼 곳으로 정배하였다. 태연의 족제(族弟) 윤약연(尹若淵)은 옥당(玉堂)의 관원으로서 투소(投疏)하여, 인한은 나라쪽 사람이라고 하고, 토역(討逆)의 논을 영합(迎合)이라고 주장했으므로, 왕이 그를 불러 다시 물었는데, 약연은 더욱 사리에 어긋난 말을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춘추(春秋)》의 법으로는 역적을 두둔하는 자도 역시 역적인 것이다.”
하고, 드디어 약연을 역적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정성을 쏟았다는 죄목으로 친국하였다.
홍지해(洪趾海) 부자와 형제 그리고 윤태연(尹泰淵)·민항렬(閔恒烈)·이상로(李商輅)·이선해(李善海)·이경빈(李敬彬) 등이 서로 짜고 모의를 해가며 암암리에 국가 전복을 도모해왔던 흉물스런 말과 문서가 비로소 모두 드러나 차례로 국문을 당했는데, 약연은 섬으로 정배되어 가다가 길에서 죽고, 항렬·선해는 복주(伏誅)되고, 상간(相簡)은 결안(結案)을 받고 지레 죽고, 상로 역시 지레 죽었으며, 지해·찬해(纘海)·경빈은 섬으로 정배되었다. 또 태연(泰淵)·상운(翔雲)·양후(養厚)를 국문했는데 상운낙임(樂任)·후겸(厚謙)의 사주를 받았던 죄목으로 사실을 고백하고 법에 의해 처형되고, 태연·양후는 사실 고백 후 지레 죽었다. 그리고 궁액[掖] 무리 70여 명을 색출하여 유사(有司)에게 회부했는데 그들은 모두 후겸·인한 등의 사인(私人)들로서 안에서 기회를 엿보고 밖에 나와 선동을 일삼던 자들이었다. 유생 이명휘(李明徽)가 상소하여, 화양 서원(華陽書院)에다 황묘(皇廟)를 세우고 받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가 친국 끝에 섬으로 정배되어 가기도 했다.
가을에 대고(大誥)를 내려 역적들의 역모 실상을 포고하면서 끝에다 이르기를,
“이번 역적들은 그 대다수가 고가 대족(故家大族)이었기 때문에 그들 인척이나 친구들 사이에도 그들의 기미(氣味)에 물들고 그들 논의에 현혹된 자들이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이나 그들 모두를 불문에 부쳐서 유신(維新)의 교화를 따르도록 한 것이다.”
하고, 대신들이 백관을 거느리고 인한·후겸의 12가지 큰 죄목을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빨리 목벨 것을 청했으나 왕은 허락지 않았다. 제신들이 면대를 요청하고 강력히 주장하자, 왕이 이르기를,
“아직까지 처분을 보류해 온 것은 자전의 마음이 불안하실까 염려스러워서였는데 오늘 자전의 하교에 사은(私恩)을 돌봐서는 안 되고 왕법(王法)을 굽혀서도 안 된다고 하셨기에 그 덕음(德音)을 듣고서는 내 마음에 결정을 내렸다.”
하고는 인한·후겸에게 사사(賜死)를 명했던 것이다. 역적들을 다 베고는 《천의소감(闡義昭鑑)》 모양으로 책을 편찬하기 위하여 개국(開局)을 하도록 명하고 이듬해에 그 책이 완성되자 이름하여 《명의록(明義錄)》이라 하였다. 삼사가 후겸·인한 두 역적에 대하여는 그들 처자까지 연좌시킬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법이란 온 천하에 공평해야 하는 것으로 비록 지존의 임금이라도 자기 사의(私意)에 의해 이랬다저랬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형을 결정해 집행하는 데 있어 죽기 전에 결안(結案)을 받고 죽은 후에는 반드시 율문(律文)에 준하는 것이 바로 아조(我朝) 4백 년 간의 변함없는 상전(常典)이다. 아, 상로(尙魯)·성국(聖國) 같은 원수와 상로(商輅)·상운(翔雲) 같은 역적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았었는데 후겸·인한 둘에게만 법을 그렇게 적용한다면 법이란 천하에 공평해야 한다고 하는 뜻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결안도 않고 역률(逆律)을 적용하는 일, 그 몸이 죽은 후에 처자 연좌를 추가 실시하는 일, 결안은 차률(次律)로 하고서 극율(極律)을 가하는 일은 모두 없애라.”
하였다. 삼사가 또, 안겸제(安兼濟)후겸을 위해 연희궁(燕禧宮) 터에다 집을 지어 계룡산(鷄龍山)에 관한 비결대로 하려고 했다 하여 그의 죄도 다스릴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계룡산에 관한 말은 그것이 일개 비결에 의한 말인데 예로부터 군자(君子)가 일찍이 그러한 일로 사람을 죄준 적은 없었다. 그런데 더구나 지존의 제왕(帝王)이겠는가. 그것이 바로 선유(先儒)들이 이른바 ‘채확(蔡確)7521) 을 공격하자면 공격할 말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거개정시(車蓋亭詩)로 죄안을 삼은 것은 원우(元祐) 시대의 현자들이 도리어 결과적으로 바른 것을 버린 격이 되고 말았다.’는 것과 같은 꼴인 것이다. 겸제후겸에게 붙었던 그것을 그의 죄로 삼으면 그에게 맞는 죄인 것이다.”
하고, 먼 변방으로 정배하였다.
인산(因山) 의례가 확정되고 조조(朝祖)의 예7522) 를 행하려고 할 때 하교하기를,
“혼상(魂箱)을 놓고 조조(朝祖)를 행하는 것이 《상례보편(喪禮補編)》에 기록되어 있으나 원래 상례(喪禮)란 전진이 있을 뿐 후퇴는 없는 법이다.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에 보면 부하(負夏) 지방 어느 상주가 조조를 마치고 널을 옮겨 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자유(子游)가 그것이 실례(失禮)인 것을 비난하자 증자(曾子)자유가 자기보다 더 잘 안다고 훌륭하게 여겼다. 한 뜰안에서 다시 옮겨 전에 있던 자리로 온 것도 예가 아니라고 비난했거늘 하물며 혼상을 모시고 나와 태묘(太廟)에 하직을 고하고서 다시 되돌려 빈전(殯殿)으로 모신다면 후퇴는 없다고 하는 예에 비추어 볼 때 현격한 차이가 있는 정도 뿐이 아니다. 또 ‘넋은 평소 거처하던 곳으로 돌아온다.[魂返室堂]’라는 것이 바로 선유(先儒)들 말이고 보면 조조를 하면서 재궁(梓宮)을 모시고 하지 않고 혼상을 모시고 하는 것 역시 예의 본의에 비추어 볼 때 또 어떻다고 하겠는가.
고례(古禮)를 따르자니 시대적으로 맞지 않음이 있고, 주부자(朱夫子)도 그에 관한 정론이 없어 우리 나라 선정(先正)들 역시 어떻게 해보려다 못하고 말았으니 그 문제는 함부로 논의할 성질이 아니다.”
하고, 대신들과 예관(禮官)이 논의하도록 명했다가 논의가 귀일이 안 되자 《오례의(五禮儀)》를 따르도록 명했다. 계빈(啓殯)을 하려 할 때도 하교하기를,
“세월이 흘러 인산(因山) 시기가 금방 닥쳤으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슬픔을 더더욱 가눌 길이 없구나. 내가 다소나마 정례(情禮)를 펼 수 있는 길이라고는 제전(祭奠) 그 일뿐이 아니겠는가.”
하고, 반우(返虞)에서부터 칠우(七虞), 졸곡(卒哭)에 이르기까지 모두 친히 제례를 행하였다. 왕은 계빈하는 날도 슬퍼하는 모습이 처음 상을 당했을 때와 같았고, 처음에는 발인 행렬도 친히 따라가려고 했다가 예로부텨 그러한 예는 없다는 강력한 만류로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하직절을 올렸던 것이다. 영가(靈駕)가 이미 멀어졌는데도 그때까지 노차(路次)에 우두커니 서서 슬픈 곡성이 공중에 메아리쳤으므로 그를 들은 백성들도 모두 따라 울었다.
그 다음달에 처음으로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이어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한 후 유사에게 명하여 각 전궁(殿宮)의 공선(貢膳) 규례를 정해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그게 비록 하찮은 일이지만 백성들의 고통을 고려한 뜻에서이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나라에 보탬이 되고 백성들에게 유익하다면 내 살갗인들 무엇을 아끼겠는가. 선왕께서 과인(寡人)에게 늘 말씀하셨던 일이 국가 용도가 바닥이 났다는 것과 백성들 생활이 옹색하다는 것이었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할 때 밤중에도 일어나 자리를 서성인다. 그리고 궁방(宮房)의 전결(田結)에 있어 지정량 이외에 더 받는 자가 있거나, 대(代)가 다됐는데도 회수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것은 국용(國用)에 큰 손실을 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해를 끼치는 일이니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하라.”
하고는, 이어 온빈(溫嬪) 이하 여러 궁방의 전결에 있어서도 대가 다한 것과 더 받아온 것들은 그 모두를 호조에 귀속시키도록 명하고, 내시(內侍)로서 녹(祿)을 받는 자는 월말에 가서 이조가 그 사실을 아뢰도록 했는데, 이는 《주례(周禮)》에, 천관 총재(天官冡宰)가 모든 것을 다 총괄하여 관리하던 제도를 모방하는 뜻에서였다.
이보다 앞서 각 궁방의 전세 납입에 있어 해마다 무뢰배들을 궁차(宮差)로 임용해 각도로 나누어 보내 저들 멋대로 끌고 당기고 농간을 부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너무나 괴로워했다. 왕이 일찍부터 그 폐단에 대해 들어왔기 때문에 하교하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잘 돌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이다. 궁방의 전세 납부 제도가 수백 년을 두고 백성들에게 해를 끼쳐왔던 것이 사실이다. 무뢰배들이 궁가를 빙자하고 각 고을을 횡행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혀왔기 때문에 기름진 땅들은 모두 궁장(宮庄)의 소유가 되고 힘없는 백성들의 목숨이 거의 궁가에서 보낸 원역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아내고 심지어 개와 닭까지 그 피해를 받고 있으니 저 불쌍한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금부터는 각 궁방의 전세 납입을 본읍(本邑)에서 곧바로 호조에다 납입하고 호조가 그것을 각 궁방에다 떼어주도록 할 것이며, 궁노(宮奴)·도장(導掌)을 내려보내 세액을 올리고 정해진 액수 이상을 거두어들이는 폐단은 일체를 혁파하도록 묘당(廟堂)의 신들이 그 절목(節目)을 만들어 각도에다 반포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신한부(信漢符)7523) 는 그것이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 기강이 해이하고 아무도 법을 무서워하지 않아 엄숙해야 할 궁금이 하나의 거리가 되어버렸다. 지금 즉위 초를 계기로 하여 옛 제도를 다시 살펴야 하겠으니 지금부터는 부신없이 무턱대고 들어오는 자는 병조로 하여금 살피고 단속하게 하라.”
하였다.
과거 제도의 폐단에 관해 윤음(綸音)을 내려, 삼대(三代)시절 빈흥(賓興)의 법7524) , 서한(西漢) 시대 현량(賢良) 선임 제도7525) , 황조(皇朝)의 격옥(隔屋) 제도7526) , 주자(朱子)공거의(貢擧議)7527) 등을 들어 정부(政府)·관각(館閣)의 신하들 의견을 두루 들었으나 결국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시행을 보류하고 말았다. 창경궁 내원(內苑)에다 규장각(奎章閣)을 세우고 영종 어제(英宗御製)의 편찬 인쇄가 끝나자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 관방(官方)이 송(宋)의 제도를 그대로 준용하고 있으면서 용도(龍圖)·천장(天章)7528) 의 제도 같이 어제(御製)를 모셔두는 곳은 없다. 광묘(光廟)규장각이라는 명칭은 있었으나 미처 건립을 못했고, 숙묘(肅廟) 때도 규장각 칭호는 있었지만 역시 건립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 그 열성조의 뜻을 이어 열성조 어제를 모두 모으고 후원에다 규장각을 지어 송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열성조 모훈(謨訓)을 그곳에다 모시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술한 것도 그를 편차(編次)하는 관(官)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선왕조 시대에는 그를 편차했던 사람이 설사 그 일만 하고 직함은 없었을지라도 지금 그 각을 건립한 이상 직관을 두고 맡아 지키게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편차인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 제학(提學)이 송(宋)으로 치면 바로 학사(學士)이고, 직제학(直提學)은 곧 의 직학사(直學士)이니 용도각(龍圖閣)의 학사·직학사처럼 규장각에도 제학·직제학을 두라. 그리고 또 직각(直閣)·대교(待敎)를 두어 의 직각(直閣)·대제(待制)를 둔 것 같이하면 그게 모두 근거있는 제도가 될 것이다.”
하였다. 이어 이조에 명하여 6명의 각신(閣臣)을 차출하도록 했는데, 제학은 일찍이 문형(文衡)이나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을 지냈던 사람으로 충용하도록 하고, 직제학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사람으로 직각은 응교(應敎) 또는 이조 낭관을 역임한 사람으로 대교는 한림 권점을 받은 사람으로 각각 충용했으며 직각·대교는 뒤에 모두 권점을 했는데 즉위 초기 성명(聲明)의 치효가 사실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전랑(銓郞) 임용에 있어 통청(通淸)의 법을 부활시켰다. 이보다 앞서 영종(英宗)이 전랑 선임에 있어 시끄럽게 다투는 폐단이 있다 하여 혁파한 지가 몇 년 되었는데 논의하는 자들이, 옛 제도를 부활시켜 격양(激揚)에 도움을 주자는 청이 있었기 때문에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가 기유년에 와서 도로 혁파하였다.
왕이 춘저(春邸)에 있을 때 척신(戚臣) 홍봉한(洪鳳漢)이 추숭(追崇)을 주장하면서 성상의 귀를 현혹시켰는데 영종 임진년에 와서 역시 척신인 김귀주(金龜柱)가 상소하여 그 죄를 성토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을 두고 지금 와서 왕이 하교하기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그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정신(廷臣)들도 다 알 것이다. 그 당시 봉조하(奉朝賀)의 주청에 대해 논자가 그를 성토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예로부터 제왕(帝王) 집이라면 신하로서는 존경하고 근신해야 하는 것인데 김귀주 처지로서 주연(胄筵)에서 주고 받던 말을 대조(大朝)에 상소로 올렸으니, 대조가 만약 그것을 나에게 물었다면 내가 무슨 말로 대답을 했겠는가. 그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하고, 귀주흑산도(黑山島)에 위리 안치하도록 했다가 갑진년에 와서 뭍으로 나오게 했다.
그해 겨울에 하교하기를,
“언로(言路)는 국가로 치면 혈맥(血脈)인데 요즘 와서는 조용하기만 하고 진언(進言)하는 자가 없으니 아마도 과인(寡人)이 과오를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자리를 물려받은 초기에 바른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위에 있는 사람이 통솔을 잘못하기 때문이기는 한 것이지만 말하는 것이 직분인 자들로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왜 죄가 아니겠는가. 양사의 제신들을 모두 파직시키라.”
하였다. 한후익(韓後翼)이 정언(正言)으로서 투소(投疏)하면서, 을미년7529) 에 정권을 주고 받은 것이 대의 명분으로 볼 때 정상적인 일이 아니고 정상적인 마음으로 한 일도 아니라고 하여, 제신들이 그를 국문할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그 상소 내용에 임금의 잘못을 신랄하게 열거했으니 무릇 문자(文字)에 있어 부분적으로 꼬투리를 잡는 것이 청명한 조정에서 할 일은 아닌 것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신상권(申尙權)이 군직에 있으며 올린 상소에 후익을 성토하면서 왕을 찬양하는 말이 많았는데, 이를 보고는 하교하기를,
상권의 상소문은 바로 한 장의 상덕문(狀德文)이다. 과인이 등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실질적인 정책이나 실질적인 효과가 조야(朝野)에 미쳐갔겠는가. 만약 상권의 말대로라면 임금 잘못이나 현재 정사에 대해 하나도 논의할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자를 죄주지 않으면 틀림없이 임금 자신이 높다랗게 앉아 스스로 성인인 양하는 폐단이 생길 것이다.”
하고는, 그 상소문은 다시 돌려주고 그의 직을 삭탈하도록 하였다.
윤음(綸音)을 위조한 자가 있어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내어 경기 지방을 비롯 호령(湖嶺) 사이에까지 유포를 시켰는데 무릇 7개 조항으로 된 것으로서 흉도(兇徒)들이 민심을 선동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변(上變)한 자가 있었기에 10여 명이나 체포하여 신문하였으나 모두가 시골에 살면서 잘못 전해들은 무리들이었다. 하교하기를,
“책할 것도 없다. 백성들을 자꾸 시끄럽게 하지 말라.”
하고, 정상을 참작하여 특명으로 방면하였다. 그리고 윤음을 내려 팔도 백성들을 일깨웠던 것이다. 원년(元年) 봄에 동북면에 기근이 들어 사신을 보내 북관(北關)의 진휼을 감독하게 하고, 두 도의 도신(道臣)·어사(御史)에게 유시를 내려 백성을 돌보고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정책을 강구하여 조목별로 들어 아뢰게 했으며, 각도로 하여금 도천(道薦)을 하게 하고, 또 경외를 막론하고 효행(孝行)과 절의(節義)가 특이한 자면 예조가 의정부와 논의하여 등급을 지어 아뢰도록 명하였다.
영릉(永陵)·홍릉(弘陵)을 배알하고, 3월에 친히 효명전(孝明殿) 연제(練祭)를 행한 후 하교하기를,
“옛날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하교하시기를 ‘해를 향해 고개 숙이는 해바라기라면 곁가지인들 무슨 상관이며, 충성을 바치고 싶은 신하라면 왜 꼭 정적(正嫡)이어야 한다던가.’ 했는데 그 얼마나 훌륭한 성인의 말씀인가. 그러나 우리 나라는 명분(名分)을 중히 여기고 지벌(地閥)을 숭상하는 풍토라서 신분이 낮은 자에게 요직은 맡겨도 청직은 맡기지 않는 것이 이미 옛분들의 정론이 되어 왔다. 몇 해 전 대각(臺閣)의 통청(通淸) 문제만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이 선왕의 고심 끝에 나온 제도였지만 결국 유명무실이 되고 말았는데, 필부(匹夫)가 억울함을 풀지 못하면 그도 천화(天和)에 손상을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그 많은 서류(庶流)들은 그 수가 결코 적은 수가 아닐텐데 그들 중에 어찌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재준(才俊)의 선비가 없을 것인가. 그런데 목덜미가 말라붙고 귀가 누렇게 뜬 상태로 모두 방안에서 죽어가고 만다면 그 서류들 역시 내 신자(臣子)가 아니던가. 그들이 제 하고 싶은 짓을 못하고 제 포부를 못펴게 한다면 그는 과인의 허물인 것이다. 두 전조의 신하들로 하여금 그들 길을 터주고 인재 선발하는 방법을 강구하여 대신과 논의를 거쳐 아뢰게 하라.”
하고, 이조에 명하여 그 절목(節目)을 만들라고 하였다.
여름이 가물어 지제교(知製敎)가 기우제문(祈雨祭文)을 지어 올리자, 하교하기를,
“책축(冊祝)에, 죄와 책임을 자신이 지는 뜻이 없어서야 될 일인가.”
하고, 다시 지으라고 명했다. 그후 얼마를 지나도 계속 비가 내리지 않자, 윤음을 내려 10가지 사항을 들어 자신을 꾸짖고 이어 구언(求言)을 하였는데, 승정원이 감선(減膳) 때는 다른 일 보는 것도 정지할 것을 여쭈니, 하교하기를,
“옛날 선묘(宣廟)가 정전을 떠나 있을 때 비현각(丕顯閣)이 비좁았던 관계로 법연(法筵)을 열지 못하자 선정신 율곡(栗谷)은 강원(講員) 수를 줄일지언정 법연을 정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었다. 더구나 감선은 피전(避殿)과는 또 다른데 강석을 여는 것이야 무슨 구애가 있겠는가. 수성(修省)하고 있을 때는 더욱 근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니 차후 감선이나 피전 때는 으레 강연을 열도록 여쭈라.”
하였다.
친히 사단(社壇)에 가 기우제를 행하고 돌아와서는 그 다음날 친히 소결(疏決)에 임하여, 서울 외지를 막론하고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시신을 발굴하여 검시하는 법을 두 조(朝)에서 교시한 대로 그대로 따를 것을 법제화하라고 하였다. 처음에 숙종(肅宗)은 각 지방 살인 사건에 있어 발굴 검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몇 십년을 두고 사건이 미결로 남아 옥중에서 말라 죽은 자도 있다 하여 《무원록(無冤錄)》 규정대로 발굴 검시를 하도록 명했고, 영종(英宗)은 “주(周)나라 제도도 해골은 묻도록 되어 있는데 백골을 검시한다는 것은 두 번 죽임을 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몰래 매장한 것은 발굴 검시를 하고, 이미 공식으로 매장이 된 무덤은 검시하지 말라.” 하고, 하교를 했던 것을 담당관들이 발굴 검시를 금한 것으로 잘못 알아듣고 서울과 지방에서 감히 발굴 검시를 못했기 때문에 조정 신료들이 누차 그에 대해 말해왔던 것이다. 이에 왕은 두 조정에서 받았던 수교(受敎)를 가져오게 하여 보고는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의 하교 중에, 이미 매장이 된 것은 검시하지 말라고 한 것은 발굴을 금한 뜻이 아니라 바로 백골 검시를 지적하신 것이다. 몰래 매장된 것은 검시를 하라는 것이 바로 숙조(肅祖) 수교인즉 새로 영갑(令甲)을 정할 것 없이 다만 두 조의 수교 그대로 준행하고 혹 해가 너무 오래된 것들은 함부로 발굴 검시를 말고 일단 계문(啓聞)하고 나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 을미년 증광시 정시(庭試) 때 신회(申晦)가 시관을 맡았는데 뇌물과 청탁이 판을 쳤기 때문에 합격자 발표 후에 물의가 크게 일었다. 흉도들은 저들이 지은 죄를 스스로 알고 또 왕이 그 사실을 알까 두려워하여, 서연(書筵)에서 과거 문제에 대해 수작한 일이 있었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는 정후겸·홍인한 무리가 좌우에서 협박과 제어를 가하여 동궁을 무함할 계책을 꾸몄었는데, 지금 와서 정신(廷臣)들이, 을미년의 방(榜)은 바로 그 역적들이 역모를 꾸미는 데 있어 중요한 계기로 이용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 방을 삭제해버릴 것을 누차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 원방(原榜)은 파하고 전시에 직부(直赴)할 자격을 은사받은 것으로 갑을을 매겨 홍패 방[紅榜]을 다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축년에는 방 전체를 구별을 두지 않고 삭제하면서 잘못 걸린 사람도 있었다 하여 윤익동(尹翊東) 등 8명에 대하여는 복과(復科)를 하기로 하였다. 하교하기를,
“금려(禁旅)는 옛날로 치면 호분(虎賁)이요 우림(羽林)이다. 각 궁전의 숙직과 호위를 맡고 대가를 곁에서 호위하는 직책이니 선임에 있어 신중을 기하고 재목도 적임자를 골라야 할 것인데 도리어 훈국(訓局)의 마병(馬兵)이나 금위(禁衛)의 기사(騎士) 대우만도 못한대서야 될 일인가.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 중의 일번(一番)은 선천(宣薦)으로 통하는 자리로 정하고 인재를 골라 늘 보충 임명하여 무인으로서 초사(初仕)하는 발판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병조를 맡고 있는 신하에게 명하여 장신(將臣)과 함께 그에 관한 절목(節目)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였다. 또 그후에는, 기사(騎士)는 서류(庶類)에서 뽑도록 하고 그들 초사(初仕)도 선천으로 통하는 금군(禁軍)과 같은 예를 적용하도록 하였다.
7월에 대내(大內)에 도둑이 들었다. 왕은 언제나 조회를 파하고는 존현각(尊賢閣)에 나아가 밤이 깊도록 책을 보시곤 했는데 그날 밤도 여느 때와 같이 촛불 아래서 책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데 보장문(寶章門) 동북 쪽에서 행랑채 지붕을 타고 오는 소리였다. 어좌(御座)가 있는 방의 지붕 중앙에 이르더니 기왓장을 던지고 자갈을 뿌리는 것이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왕은 도둑이 든 것을 알고 환시(宦侍)와 액예(掖隷)들을 불러 불을 밝히고 보게 했는데 도둑은 이미 달아나고 없고 지붕 중앙에는 기왓장 자갈 등이 그대로 널려 있었다. 이에 숙직하던 위사(衛士)와 삼영문(三營門)의 밤을 지키던 군대들을 동원하여 담 안팎을 지키게 하고 금중(禁中)을 샅샅이 뒤졌으나 잡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위장(衛將)이 하룻밤에 다섯 교대로 순찰하던 옛 제도를 부활시키고 액예 무리 중에 근본이 분명하지 못한 자들은 도태시키도록 명했다.
존현각 위치가 너무 노출되어 있어 간악한 무리들이 거침없이 들어오기 쉽다 하여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제신들이 청해서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소를 옮겼다. 그런데 그해 8월에 또 도둑이 창덕궁 경추문(景秋門) 담을 넘어 들어왔다가 수포군(守舖軍)에게 체포되어 그를 신문했더니 원동(苑洞) 동임(洞任)인 전흥문(田興文)이 지난날 밤에 호위 군관(扈衛軍官) 강용휘(姜龍輝)와 함께 존현각 지붕 위로 잠입하여 난을 꾸미려고 했다가 못하고 지금 두 번째로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흥문·용휘 두 역적을 친국했더니 실은 홍술해(洪述海)의 자식 상범(相範)이 시킨 것이었다.
과거에 상간(相簡)은 곤장 아래서 죽고, 지해(趾海)·찬해(纘海)는 섬으로 정배되고, 술해(述海) 역시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범한 장오죄로 사형에서 감제되어 섬으로 정배되어 갔으며, 계능(啓能)후겸·인한과 같은 무리였다는 이유로 역시 절도(絶島)로 귀양갔는데, 그 때문에 지해·술해의 자질(子姪) 처첩(妻妾)들이 밤낮으로 국가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여러 대 권귀(權貴) 집안이라서 문생(門生)과 고리(故吏)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궁인(宮人) 액예 무리들과 암암리에 결탁을 하고 상당 기간 불궤(不軌)를 도모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상범용휘와는 서로 이웃에 살면서 그가 날쌔고 힘이 센 것을 알고는 천금을 주고 결탁해왔는데 흥문이 사는 곳이 금원(禁垣)과 가깝다 하여 그와도 합류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용휘는 허리에 철편(鐵鞭)을 차고 흥문은 손에 칼을 들고 대궐에 들어가 만나는 사람이면 곧 죽이기로 하고 상범은 형세를 보아가며 접응하기로 약속을 하고는 그날 밤 용휘흥문이 함께 존현각으로 올라가 기와를 뜯고 모래를 뿌리며 도깨비 시늉을 하여 우선 사람들 귀와 눈을 현혹시킨 뒤 부도(不道)를 저지르려고 했던 것인데 갑자기 대궐 안이 발칵 뒤집힌 것을 보고는 그대로 달아났다가 급기야 거소를 옮기자 또 넘어 들어오다가 수포군에게 잡힌 것이다.
내응(內應)을 하기로 한 자들은 궁인(宮人)으로는 복빙(福氷)·수애(秀愛)·월혜(月惠)·금희(今喜)였고, 환관(宦官) 안국래(安國來), 액예 무리로는 강계창(姜繼昌)·김수대(金壽大)·김복상(金福尙)이었으며, 공모자로는 지해의 가객(家客)인 홍대섭(洪大燮)·홍필해(洪弼海)·홍신해(洪信海)였다. 상범을 국문한 결과 그들 역적 모의 내용이 흥문·용휘의 공초 내용과 똑같았고, 술해의 처 효임(孝任)은 무당과 결탁하여 흉물을 묻어두고 저주를 일삼았다. 그리고 홍계능(洪啓能)은 자기 아들 신해와 조카 홍이해(洪履海), 술해의 조카 홍상길(洪相吉)·홍상격(洪相格), 이택수(李澤遂)·민홍섭(閔弘燮) 등과 함께 밀실에서 음모를 꾸며 이윤태갑동궁(桐宮)에 내쳤던 일과 계해 반정(癸亥反正)의 일을 명분으로 삼아 지해·술해·찬해 세 역적이 귀양살이 가 있는 곳을 드나들었는데 이들이 추대하려고 했던 자는 종신(宗臣)인 이찬(李禶)이었다.
역적들이 이렇게 세 길로 역적 모의를 했던 사실이 이제 와서, 모두 탄로가 나 차례로 잡아다 국문하여 모두 복주(伏誅)되었고, 계능만은 국정(鞫庭)에서 발악을 하다가 제 죄를 자백하고 지레 죽었으며, 계희(啓禧)·홍섭(弘燮)은 그 관직을 추탈했다. 계능이 누구를 추대하려고 한다는 설이 처음에 상길의 공사에서 나왔을 때 대신과 기타 신하들이, 역당(逆黨)의 전모가 아직 다 밝혀지기도 전에 왕실의 지친(至親)인 찬(禶)의 이름이 그들 추대 대상 속에 거론되고 있다 하여 그를 체포하여 신문할 것을 일제히 청했는데 이때 왕은 불끈 일어나 소차(小次)로 들어간 다음 오랫동안 장전(帳殿)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제신들이 누차 면대를 요구했으나 되지 않아 부득이 궁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사세가 급박하고 나라 형세 또한 위태하다고 극언을 하고, 궁성을 호위할 것을 청했으며 또 을 체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왕은 끝까지 허락지 않았다. 급기야 상길 등이 법에 의해 처형되자, 대신 이하 삼사(三司)·종친(宗親)·문관·음관·무관 할 것 없이 하루에 예닐곱 차례씩이나 전정(殿庭)에 엎드려 을 처형할 것을 계청했고, 관학(館學)의 유생들은 파하고 떠났으며, 심지어 전직 군교(軍校)와 의관·역관 그리고 각 아문의 이서(吏胥)에서 오부(五部)에 거주하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번갈아가며 글월을 올리고 강력히 다투고 하였으나 왕은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차(啓箚)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오늘 일로 말하면 관숙(管叔)·채숙(蔡叔) 때와 같은 사실은 있으나 관숙·채숙과 같은 마음은 없었는데 관숙·채숙을 다스리던 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
했는가 하면, 또 이르기를,
“나의 심정을 말로 하자니 소리가 먼저 흐느껴지고, 글월로 쓰자니 눈물이 먼저 종이를 적신다.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겨우 살아남은 인생 나 같은 자가 어디 또 있으랴. 형제라고 오직 3명의 서제(庶弟)가 있을 뿐인데, 이진(李禛)은 풍로(風露)에 시달리다가 불행히 일찍 죽고, 이인(李䄄)은 나이 들수록 병이 떠나지 않고 있는데, 하나가 다행히 병이 없기에 그가 잘 성장하고 자손도 번창하여 우리 선부(先父)의 자손들이 다 우리 조정에 서서 낳아서 길러주신 은혜를 만분지일이나마 보답하게 되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는데 어쩌다가 흉악한 역적 무리가 일어나 그들이 추대한다는 속에 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아, 여인들 속에서 생장하고 나이 어려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추대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것인가. 나의 이 심정이야말로 옛 기록에서 찾아보아도 아마 둘도 없을 것이다. 은혜를 끊고 법을 집행한다는 것은 사실 차마 못할 일이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이 아픔을 무어라 말하랴.”
하였다.
친국이 끝나자, 대신들이 승여를 부여잡고 계속 청하니, 왕은 승여를 희정당(熙政堂)에다 멈춰두고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왕이 대내로 돌아가자, 대신들이 금오(金吾)와 여러 당상을 거느리고 왕부(王府)로 가 을 뜰에다 끌어다두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였는데 은 거역을 하고 따르지 않았다. 이에 대신들은 다시 대언(對言)을 청하고는, 그것만 보더라도 이미 신하로 자처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사사(賜死)를 청했으므로 왕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왕은 너무 슬퍼 오랫동안 정사도 살피지 않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부조를 하고 치상 절차를 돕게 했으며, 또 내수사에 명하여 예를 갖추어 안장하도록 하였다. 삼사(三司)가 그 명령을 취소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그대들이 어찌 차마 그러한 사은(私恩)을 조금 베푸는 것까지 또 쟁집(爭執)하려 드는가.”
하였다. 왕은 또 홍낙임(洪樂任)을 친국했다가 자전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전석(全釋)을 특명하고 정신들이 누차 쟁집하였지만 허락지 않았다. 《속명의록(續明義錄)》을 찬집하여 그해 역모 사건을 다스린 전말을 기록했는데 그 의례(義例)는 원편(原編) 체재를 그대로 따랐다.
제신들이 호위청(扈衛廳)을 혁파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거기 있는 군관(軍官) 1천여 명도 우리 백성들인데 어찌 역적 하나가 거기에서 나왔다 하여 3개 청(廳) 소속들을 싸잡아 의심할 것인가. 조정 정령(政令)이 다 옳으면 먼 지방의 장사(將士)들도 창을 던져버리는 것이고, 사방 민심이 해이해지면 한 배 안의 사람들도 적이 되는 것인데 일개 호위청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할 것이 뭐란 말인가. 지금의 3개 청도 원래 바꿀 수 없는 제도가 아니라 7개 청이 5개 청으로 되고 5개 청이 또 3개 청으로 된 것이니 그를 1개 청으로 통합하고 재예(才藝)가 우수한 자들을 정하게 뽑아 맡김으로써 옛 제도도 존속시키고, 용병(冗兵)도 없애고, 그들 마음도 위로가 되도록 하라.”
하고, 이어 호위 대장(扈衛大將)은 아무리 대신이라도 훈척(勳戚)이 아니면 겸임을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무녀(巫女)들의 성안 출입을 금했으며, 의소 세손(懿昭世孫)의 묘를 둘러보고 의사·열사의 묘를 두루 참배하였다.
겨울에 우레가 친 이변으로 하여 감선(減膳)을 하고 구언(求言)도 했으며, 2년 봄에는 《흠휼전칙(欽恤典則)》이 완성되었다. 그보다 앞서 하교하기를,
송(宋)태조는 일개 평범한 임금에 불과했지만 죄수들이 시달리다가 죽을까를 염려하여 개국(開國) 초기에 각주의 장리(長吏)들에게 죄수들을 잘 돌보도록 명했고 또 무더운 여름이면 옥리(獄吏)에게 조서를 내려 5일에 한 번씩 검사를 하고 옥사도 깨끗이 청소하며 수갑 형틀 등도 세척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먹을 것을, 병든 자에게는 약을 주게 했으며 죄가 경미한 자는 즉결로 처리하여 내보내게 하는 등 해마다 그를 되풀이했는데, 송나라 역사가 수백년 이어진 것도 그 원인이 그런 데에 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우리 열성조께서 인명을 존중하고 백성을 돌보신 훌륭한 덕화야말로 바로 우리 가문 전래의 심법(心法)인데 이 소자(小子)가 어찌 감히 그 전통을 삼가 이어받지 않을까 보냐.
지금 더위가 다가오고 있는데 옥에 갇혀 있는 사형수들이 누차 고문을 당하고 난 뒤인데도 칼을 씌우고 수갑을 채워 내버려두고 형을 집행할 자도 형 집행을 않고 당연히 죽여야 할 자를 지레 석방하기도 하고 있으니 이는 요행수를 바라는 문을 열어주는 결과밖에 안 되는 것으로서 무형(無刑)을 목표로 형을 시행하는 뜻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다. 송조(宋朝)가 했던 일을 그대로 모방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형구(刑具)에 있어서는 그것이 각기 일정한 규격이 있는데 요즘 들으면 서울이나 외지 할 것 없이 옥을 다스리는 곳에서 법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경우가 퍽 많다는데 법이란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이어서 비록 임금이라도 감히 마음대로 못하는 것인데 하물며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관리들이겠는가.”
하였다. 이어 형방 승지를 명하여 법부(法府)·법조(法曹)로 달려가서 법대로 되어 있지 않은 각종 형구들을 가져다가 규격에 맞게 바로잡게 하고, 또 각도 열읍(列邑)에도 유시를 내려 형구를 서울의 것에 준하도록 하게 했으며, 또 각영(各營)에도 명하여 곤장 규격을 바로잡게 하고, 또 《대명률(大明律)》·《대전(大典)》·《속대전(續大典)》을 참고 절충하여 따로 알맞은 법전을 만들라고 했었는데 이때 와서 그 책이 완성되어 인쇄 반포하였다. 그리고 또 유척(鍮尺)을 만들어 그 책과 함께 반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윤음(綸音)을 내려 여러 유신(儒臣)들을 정중히 불렀었다.
통어영(統禦營)을 강화부(江華府)로 통합하고 교동(喬桐)을 부사(府使)로 강등했는데 그는 강화도를 삼도(三道)의 요충 지대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후 조정 논의가 일치되지 않아 기유년에 와서 다시 옛날 제도대로 고쳤다.
대신(大臣)과 구경(九卿),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을 불러 접견하고 하교하기를,
“선왕의 부묘례(袝廟禮)를 거행할 날이 머지 않아 왕대비께도 책례를 올려야 할텐데 자궁(慈宮)에게만 유독 글자 한 자의 칭호도 올릴 수 없단 말인가. 아, 내가 대의(大義)라면 끝까지 지킨다는 것은 신료(臣僚)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가령 그 예를 거행하자면 이존(貳尊)의 혐의가 있고 혹 압존(壓尊)과 관계가 되는데도 대의를 거스르고 자기 사의만을 내세워 억지로 숭봉(崇奉)하려고 한다면 이른바 그 숭봉은 내가 말하는 숭봉이 아닌 것이다. 이 일로 말하면 이미 이존의 혐의도 없거니와 또 양명(揚名)하여 부모를 현양하는 뜻에도 맞는 일이다. 그전 역사를 보아도 황자나 공주에게 호(號)를 주는 규정이 있었고, 본조(本朝)로만 말하더라도 순강(順康), 소령(昭寧)으로 가호(加號)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내 마음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길을 찾아 그대들과 논의하여 실현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하여, 이에 혜경궁(惠慶宮)으로 호를 올리기로 정하였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내수사 노비들을 추쇄(推刷)할 때 추쇄를 맡은 관리들이 모조리 조사하여 찾아낸다고 핑계를 대고는 사속(私贖)을 하도록 농간을 뿌리고 백방으로 조종을 하면서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추쇄관이 간 곳이면 마을이 비어버렸고 영종이 공물을 감제해 주었던 혜택도 그 때문에 좋은 결실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에 와서 그 추쇄관 제도를 영원히 없애버리고 대신 각도의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선왕조 을해년 전세 총수입에 의거하여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고, 선두안(宣頭案)에 있어서는 승정원 계문에 의해 그 절목(節目)을 만들어 팔도에 반포하였다.
태학(太學)의 월강(月講) 제도를 거듭 천명하고 이어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였다. 하교하기를,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도 죽지 않고 여기 와 옛모습을 뵈오니 하늘이 다하고 땅이 다해도 이 설움 다할 길이 없고, 오늘 이 자리에 찬(禶) 마저도 없으니 슬픔이 가슴에 뒤엉켜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구나. 그의 아내야 무슨 죄이겠느냐. 특별히 석방하여 그의 제사를 받들게 하라.”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오랫동안 숨을 가누지 못했다. 효명전(孝明殿)에서 친히 대상(大祥)을 행하고는 하교하기를,
“선대왕 상기가 다해가고 담례(禫禮)가 곧 앞에 있는데 내 아무리 예가 정한 한계를 지키려 해도 지극한 슬픔을 억제할 길이 없으니 이 어인 까닭인가? 예(禮)에 이르기를 ‘대상 후에는 백색 생명주를 입고, 그달에 담제를 모시고, 한 달 넘어서는 풍악을 듣는다.’ 했고, 또 이르기를 ‘맹헌자(孟獻子)가 담제를 모시고 나서 악기를 매달아만 두고 울리지 않자 부자(夫子)께서, 남보다 한 단계 높다고 했다.’ 하였다. 나는 그것이 오늘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조 전례(國朝典禮)에는 담제 모시는 날 악기를 걸어두고 예에 정해진 대로 두들기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세월을 두고 슬퍼하던 끝에 그리운 생각이 더욱 간절한데 경쇠를 울리고 비단옷 입고 하는 것이 비록 예제(禮制)를 따르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종고(鍾鼓) 관약(管籥)의 소리를 어떻게 차마 바로 그달에 금방 들을 수야 있겠는가.”
하고, 대신 유신들과 많은 논의를 한 끝에 담월(禫月)에는 크고 작은 법악(法樂)을 달아만 두고 울리지는 말기로 규정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진종의 사친(私親) 정빈(靖嬪)7530) 의 묘를 봉하여 수길원(綏吉園)이라 하고 사당은 연우궁(延祐宮)이라 했으며, 제례(祭禮)는 육상궁(毓祥宮) 제례를 따르도록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병조 판서를 노부사(鹵簿使)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왕자(王者)의 백성은 너그럽고 여유가 있다.’ 하였다. 비록 옛날에 일찍이 없었던 흉역(凶逆)이라 하더라도 그 악인의 우두머리를 없앤다면 협박 때문에 따랐던 자들은 풀어주어 그들 스스로 새사람이 될 길을 열어주고 그 마음을 고쳐먹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의 변함없는 이 마음은 천지신명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와서 삼사(三司)가 징토(懲討)를 주장하며 아뢰어 온 것이 적어도 몇 십 차례가 되는데 그중에 어찌 협박으로 따랐던 무리들이 없겠는가. 한 사람이 징토를 받으면 근심하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그 너그럽고 여유있던 세상에 비해 어쩌면 그리도 심하게 상반되고 있는가? 죄상이 가벼운 자는 말끔히 씻어주고 중범자가 없도록 더욱 엄밀한 방어를 해야지만 의리(義理)가 굳어져서 징토를 해도 거기에 전념할 수 있고 인심이 안정되어 개과천선도 할 것이니 삼사의 신들에게 그렇게 경계하라.”
하였다.
5월에 효명전(孝明殿)에서 담제를 행하고 태묘(太廟)에 길제(吉祭)를 올린 후 영종 대왕(英宗大王)·진종 대왕(眞宗大王)을 올려모시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효종(孝宗) 묘정(廟庭)에다 배향하였다. 그리고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충정공(忠貞公) 최규서(崔奎瑞),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 문충공(文忠公) 조문명(趙文命), 충정공(忠靖公) 김재로(金在魯)영종(英宗) 묘정에 배향하였다. 그보다 앞서 병신년 여름에 하교하기를,
“옛날 효종 대왕 당시 선정신 송 문정공은 대왕과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고 기밀에 참여하여 국가 대계를 획책했으니 바로 춘추(春秋) 대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렇게 인정을 받았고 천재 일우로 만난 군신 사이였는데 지금까지 배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궐전(闕典)일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도 향기로운 덕의 향내가 오를 시기를 기다리고 계셨을지 누가 알겠는가. 혹자는 본조(本朝)에서는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으나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세종(世宗) 묘정에 배향된 것이라든지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인종(仁宗) 묘정에 배향된 것 같은 일은 실로 우리 나라에 있어 성헌(成憲)인 것이다.”
하고, 영종 부묘(袝廟) 때 그대로 거행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정부가 회권(會圈)하여 영종 묘정에 배향할 공신(功臣)으로 최규서·민진원·조문명·김재로 이 네 상신(相臣)을 선정하여 들여오니, 하교하기를,
“고 상신 김창집도 대의(大義)를 앞세워 국가 정책을 결정하였으니 나라 위해 몸을 바친 충절로 보아서는 묘정에 배향되어 마땅하다. 다만 미심쩍은 점이 있다면 선조(先朝)를 생전에 섬기지 못했던 그것인데, 고 중신(重臣) 민진후(閔鎭厚)도 그가 생전에 그 왕조를 섬기지 못했었지만 역시 배향된 바 있으니 그것이 우리가 참고할 만한 근례(近例)이고, 고사(故事)로는 송(宋)장준(張浚)효종(孝宗)의 정책 수립 때 공로가 있었는데 당시 논의하는 자들은 다른 왕조 때 있었던 일이라 하여 묘정 배향에 난색을 보였지만 양만리(楊萬里)가 단독으로, 당연히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 일이 우리가 원용할 만한 고사인 것이다.”
하여, 모든 신하들 의견이 일치되었으므로 이때 와서 함께 배향의 예를 올리게 된 것이었다. 그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들 하례를 받고 대사면령을 내린 후 하교하기를,
“부묘례가 잘 끝나고 하례 의식도 이미 거행되었다. 선왕의 자리에 앉아 선왕의 예를 행하자니 너무 조심스럽고 두렵구나. 선왕께서 50년을 두고 마음 쓰신 것이 모두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한다는 그것이었으므로 오늘 내가 계술(繼述)해야 할 일도 그보다 더한 것은 없는 것이다. 내 어찌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식 돌보듯이 하셨던 선왕의 그 성스러운 뜻을 따르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고, 팔도(八道)의 해묵은 적미(糴米) 10만 석을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자전(慈殿)·자궁(慈宮)에 존호를 올리고 황단(皇壇)을 배알했는데, 이때부터 삼황(三皇)의 휘신(諱辰)이면 반드시 망배례(望拜禮)를 올리고 그 예가 끝나면 명조(明朝) 사람으로서 척화(斥和)했던 신하들의 후손을 불러 접견한 후 위로도 하고 혹은 수록(收錄)도 했으며 혹은 유학이나 무술을 시험보여 시상도 하였다. 하교하기를,
“음악이 치도(治道)에 관계된 바가 큰데 나는 천성이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 일찍이 종률(鍾律)의 척도를 알아보지는 못했으나 지금의 음악이 옛 음악에서 유래된 것일진대 역시 성(聲)을 듣고 그 음(音)을 찾아보고 음의 뿌리는 마음에서 찾아야 하는 그 정도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만약 짧은 소리를 느슨하게 바꾸고 급한 소리를 여유있는 소리로 바꾼다면 쇠세(衰世)의 음을 면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이제 3년이 지난 뒤이니 이제부터는 사방에서 날마다 들을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강구하고 우리 모든 장악관(掌樂官)들은 늘 완만한 절주를 익히고 어지러운 가락은 연주하지 말 것이며 간성(奸聲)을 멀리하고 화음(和音)을 되찾아 후인들을 일깨우고 도우려 하시던 우리 영묘(英廟)의 뜻을 뒤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제주(濟州)라면 푸른 바다 저 밖인데 근래 흉년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부황이 들었다 한다. 지금 본주 목사의 장문(狀聞)을 보니 전복을 따느라 고생하는 모습들이 눈앞에 선하다. 차라리 어공(御供)을 줄일지언정 우리 백성들을 그렇게 힘들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연례(年例)로 전복을 바치는 일을 영원히 제감하라고 명하고는 이어 하교하기를,
“이는 선왕의 유의(遺意)인 것이다.”
하였다.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백관들 조참(朝參)을 받고 대고(大誥)를 선포했는데, 무릇 4개 조항으로서 민산(民産)·인재(人材)·융정(戎政)·재용(財用)에 관한 것이었다. 몇 천 마디에 달하는 누누한 설명을 하고 끝에 가서 실효를 거둘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뭇 신하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보다 앞서 정순 대비(貞純大妃)가 대신들에게 언문 교지를 내려 사족(士族) 중에서 빈어(嬪御)를 골라 두어서 널리 후사를 구할 것을 명했었는데, 이에 대해 대신(臺臣) 박재원(朴在源)이 자전 언교 내에 곤전(坤殿)의 병환이 심해 후사를 둘 희망이 없다는 하교가 있는데 훌륭한 의원들을 맞아다가 정성을 다해 치료해볼 것을 청한 상소를 하였다. 이때에 홍국영(洪國榮)의 누이동생이 빈어 간선에 응하고 있을 때라서 국영재원의 상소 내용에 화가 나서 공식 석상에서 욕설을 하는 등 꼭 중상을 하고야 말 기세였다. 그러나 왕은 그 충절을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원이 끝내 죄를 면할 수 있었고, 급기야 국영이 물리침을 당한 뒤에는 특별히 정경(正卿)을 주어 그 충절을 표창했었다.
대신들과 삼사(三司)가 정치달(鄭致達)의 처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청을 가지고 해를 넘겨가며 강력히 다투었는데, 왕은 제신들을 불러 인견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내가 윤허를 아끼는 것은 그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선왕의 사랑을 받던 사람이 큰 죄에 빠지게 될 경우 선왕이 그것을 모르셨다고 친다면 이는 선왕의 밝음에 손상을 주는 일이고, 선왕이 그것을 알고도 처리를 안 하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선왕의 덕에 누가 되는 일 아니겠는가. 옛날 성묘(成廟)께서는 ‘이 꽃이 다 피고 나면 다시는 꽃 없으니[此花開盡更無花]’ 하는 시구를 외우셨는데 그때 삼사는 그에 대해 그 이상 쟁집(爭執)을 못했었다. 지금 신하들은 어쩌면 그리도 옛 신하들 같지 않다는 말인가. 비록 대의(大義) 앞에서는 사사로운 친분은 무시된다고 하지마는 그의 뿌리를 생각한다면 선왕의 골육(骨肉)이요 왕실의 지친(至親) 아닌가. 그에게 차율(次律)을 적용하는 것이 내가 바로 선왕을 저버리지 않는 길인 것이다.”
하고, 그의 작호(爵號)를 삭탈하고 교동부(喬桐府)에다 안치하였었다.
가을에 공충도(公忠道) 도신이 밀계(密啓)하여, 서명완(徐命完) 등이 나라를 원망하고 흉언을 하고 다닌다고 말해 사신을 보내 사실을 조사했더니 그 흉언의 근원이 바로 한후익(韓後翼)·홍량해(洪量海)·심혁(沈) 등에게서 나온 것인데 후익은 바로 병신년7531) 에 흉소(凶疏)를 투소했던 자였다. 하교하기를,
후익 상소 내에 기사(機事)니 기심(機心)이니 한 말은 그것이 바로 상대를 욕하고 꾸짖는 말투였지만 그가 언론을 맡은 직책에 있는 자였기 때문에 특별히 참고 이해를 했던 것인데 그 역적이 그렇게까지 마음먹고 있었으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하고는, 후익을 친국했다. 양해도 역모를 했다는 승복을 받고 법에 의해 처형되었다.
노량진(露梁津)에서 대대적으로 군대 사열을 하면서 하교하기를,
“오위(五衛)의 법도 옛날 그대로 다시 살리지 못하고, 오영(五營) 제도도 개혁을 못해 그 근본이 바로잡혀지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기껏해야 결과는 말단적인 것이나 손질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더구나 지금 열성조에서 쓰던 법에 따라 열무(閱武)의 예식을 행하려고 하면서 병조 판서를 대중군(大中軍)이라고 부르고 대중군 위에 대장군(大將軍)으로 부를 사람은 더 없으며, 또 오영의 대장들도 각 영장(營將)이라고만 하고 각 영장 이외에 삼군(三軍)을 통솔할 사람이 없으니 교습(敎習)이라 해봐야 연병장에서 조련하는 식이다. 임시(臨視)한다는 것이 결국 자장(自將)하라는 뜻인데, 당당한 천승(千乘)의 지존이 몸에다 갑옷을 두르고 주장(主將)의 일을 대신 행하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조련을 하지 않을 때는 본영(本營)이 오영도 통솔하지 않고 있다가 조련을 임시하는 날에 와서야 오영으로 하여금 병조 판서 명령대로 움직이라고 한다는 것은 위 아래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일이다. 내 비록 군려(軍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일찍이 듣건대 조두(俎豆)의 예에 있어 대소(大小)가 서로 질서를 유지하고 존비(尊卑)가 서열이 분명해야지 결코 그렇게는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모든 근거없는 예와 내리 행하는 절차를 일체 혁파하고 의절(義節)을 다시 정하도록하라.”
하였다. 육신(六臣)과 사충(四忠) 및 문렬공(文烈公) 박태보(朴泰輔) 사당에다 사제(賜祭)하였는데 노량진 물가에 있는 사당들이었다. 그리고 명릉(明陵)·소령원(昭寧園)·수길원(綏吉園)을 배알하였다. 하교하기를,
녹수(錄囚)7532) 제도가 시작은 당(唐)에서 되고 완전히 갖추어지기는 송대(宋代)에 와서 되었으니 모두 5일에 한 번씩 녹수를 해왔는데, 우리 나라에서 10일에 한 번씩 기록하여 아뢰고 있는 것은 자못 옛날 제도와는 다른 것이다. 10일 동안에야 비록 잘못되는 죄수는 없다 치더라도 남모르는 억울함이 있을 경우 죄수 스스로 어디에다 말하겠는가. 이후로는 해조에서 옛날 제도 그대로 5일에 한 번씩 녹수를 하고 그리고 중들은 도성(都城) 출입을 못하도록 금하라.”
하였다.
겨울에 하교하기를,
“용도를 아끼는 일은 궁위(宮闈)에서부터 솔선해야 한다. 비록 태관(太官) 추인(酋人)7533) 이 필요로 하는 물자라도 쓸데없는 것들은 절약해야 하는데 더구나 궁위의 쓸데없는 비용이겠는가. 궁인들 공억(供億)부터 즉위 초기에 우선적으로 바로잡도록 하라. 지금 대전(大殿)에는 궁인이라는 명목이 없고 다만 오래전부터 있어온 궁인으로서 자전(慈殿)에 소속된 자들만은 아직 혁파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흉년이 들고 민생이 곤궁할 때 당연히 절약하고 줄일 방법이 있어야겠으니 호조에 물어 조치하라. 그것이 중인(中人) 1천 호(戶) 재산 정도는 될 것이다.”
하였다. 계유년7534) 에 소속이 옮겨진 궁인들 공억에 대해 그를 영원히 없애기로 하였고, 이보다 앞서 원년에는 대전에도 궁인 명목을 없앴었는데 지금 와서 또 이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하교하기를,
당(唐)나라 때부터 사형(死刑)을 결정할 때는 그 옥사의 내용을 충분히 갖추어서 그것을 기록하여 아뢰고, 또 결심 때는 상세하게 복심하였으며, 형 집행을 하는 날은 천자(天子)가 재계하는 마음으로 따로 있으면서 먹는 것도 소식을 하고 풍악도 울리지 않았다. 우리 나라도 해마다 섣달이면 사형 집행을 했는데 그보다 3개월 전에 상세한 복심을 거치고 복심도 반드시 3차에 걸쳐 실시했었다. 그런데 정부(政府)가 정무 처리를 직접하는 제도가 바뀌고부터는 그 권한이 형조로 이관되어 상세히 복심하는 제도가 대시(待時) 죄수에게만 적용되고 부대시(不待時) 죄수에게는 적용이 안 되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입법(立法)의 근본 취지이겠는가. 대체로 대역 부도(大逆不道)나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 자들은 차라리 대신이 직접 국문에 임하고 삼사(三司)가 옥사를 안찰하므로 그런대로 상세히 복심하는 뜻이 있지만 부대시(不待時) 죄수에 있어서는 대신·삼사는 그 사실조차 살필 수가 없고 다만 일개 율관(律官)의 소견으로 어느 법조문을 적용하여 안(案)을 꾸며서 옥관(獄官)에게 올리면 옥관은 붓을 놀려 자기 서명할 자리에 서명만 근엄히 하는 식이니, 어찌하여 대시 죄수에게는 그리도 신중을 기하면서 부대시 죄수는 그리도 소홀히 다루는 것인가. 지금부터 이후로는 꼭 구전(舊典)을 따라 일단 형조가 평의한 다음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부에서 다시 상세한 복심을 마친 후 비로소 등문(登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소를 밀도살한 종신(宗臣) 이인(李䄄)의 집 궁노(宮奴)를 법에 의해 엄중 처벌할 것을 형조가 청하자, 하교하기를,
“왕손(王孫)이 법을 어기며 소를 도살하고 금리(禁吏)를 구타한 짓들이 모두 내 낯부끄러운 일들이다. 밀도살에 대한 속전(贖錢)을 내수사로 하여금 물게 하고 왕손 집에서는 징수하지 말라.”
하였다.
3년 봄에 황단(皇壇)에서 망배례를 올렸는데 어떤 사람이 단향(壇享) 때의 악장(樂章)은 당연히 명조의 구묘영송신곡(九廟迎送神曲)을 써야 하고 일무(佾舞)도 명조의 친왕국(親王國)에서 인조묘(仁祖廟)에 제사 모실 때 쓰는 일무를 써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자 하교하기를,
명조 악장에는 ‘우리 성조(聖祖)를 오시게 하사’라는 가사가 있는가 하면, 또 ‘우리 자손을 도우사’라는 등의 구절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명(明)나라 천자(天子)의 제사를 모시면서 그러한 구절들을 써도 맞을런지 모르겠다. 그리고 인조묘 제의(祭儀)에는 등가(登歌)·헌가(軒架)7535) 가 없고 황단 제의에는 등가와 헌가를 단 위와 단 아래다 설치하는데 지금 일무만을 6줄에서 8줄로 늘리면 무(舞)는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악(樂)만 안 갖춰진 경우가 되니 예에 어긋난 악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안 쓰고 놔두는 게 허물이 더 적을 것이다.”
하였다.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그 국(局) 안에 있는 여러 능도 다 배알했다. 여름에는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교육은 오교(五敎)보다 더 큰 교육이 없는데 오교가 제대로 보급이 안 되고 있으니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할 것인가? 형조가 강상죄를 처리한다는 것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깜짝 놀라고 두려운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 강상에 관계된 죄인은 비록 죽을 죄 이하라도 반드시 사실을 샅샅이 조사하여 아무 의심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뒤에야 법률로써 단죄하여, 교육을 우선하고 형벌은 뒤로하는 내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투서(投書)한 죄인 이진후(李鎭厚)를 친국한 뒤에 하교하기를,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고 사람을 죽이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하는 일이니 친국·정국 때 비가 오거나 혹 날씨가 더우면 초둔(草芚)이라도 쳐서 그들로 하여금 그 속에서 숨도 좀 돌리고 기운도 가라앉혀 가면서 그들 속이 시원하도록 할 말을 다 하게 하라.”
하였다.
5월이 되자, 해마다 5월 13일에서 21일까지는 집무에 관한 사항을 여쭙지 말라고 명했다. 그것은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이날만 되면 혼자 따로 지내면서 마치 임오년에 일을 처음 당했을 때처럼 비통해 왔었는데 이해에 영조의 복제를 마치고 나서 비로소 이렇게 명령한 것이다.
가을에는 영릉(寧陵) 배알을 계획했는데, 이해가 성조(聖祖)7536) 가 승하한 지 일주갑(一周甲)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었다. 병조 판서와 훈련 대장을 불러 하교하기를,
“군사가 1백 리 밖 나들이를 하려면 그 군용(軍容)이 더욱더 질서 정연해야 할 것이다. 옛날 당 현종(唐玄宗)여산(驪山)에 가 강무(講武)를 하다가 군법(軍法)이 제대로 안 되어 있다 하여 병부 상서(兵部尙書) 곽원진(郭元振)을 법으로 처리한 일이 있었다. 지금 이 하교 역시 명장 서사(命將誓師)와 같은 뜻으로 한 것이니 각기 노력하라.”
하고, 대가 앞에 있는 신전(信箭)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대리 청정 초기에 선왕께서 저것을 내게 주시고 언제나 사행(師行) 때면 저 화살을 대가 앞에다 꼭 세워두게 하셨는데, 그것은 정벌(征伐)을 단독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하였다. 광나루에 이르러 용주(龍舟)를 타고는 하교하기를,
“임금은 이 배와 같고 백성은 저 물과 같은 것이다. 내가 지금 배를 타고 백성을 대하니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옛날에 성조께서 주수도(舟水圖)를 그리시고 사신(詞臣)을 불러 명(銘)을 지으라고 하신 것도 역시 그러한 뜻에서였을 것이다.”
하였다.
남한 산성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는 하교하기를,
“병자년 일이 완연히 어제와 같은데, 날은 저물고 갈길은 멀다고 하셨던 성조의 하교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는구나. 사람들은 그것을 점점 당연지사처럼 잊어가고 있고 대의(大義)에 대한 관심도 점점 희미해져 북녘 오랑캐를 피폐(皮幣)로 섬겼던 일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있으니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 아니 가슴 아픈 일인가. 이렇게 백성들의 힘이 쇠잔하고 경비가 모자라는 시기에 왜 꼭 먼 길을 가야만 하겠는가마는 또 이 기해년을 당하여 영릉(寧陵) 행차를 하지 않는다면야 그것이 어디 천리(天理)요 인정(人情)이겠는가.”
하였다.
경기도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여주(驪州)에 있는 문정공 송시열(宋時烈) 사당에 사액(賜額) 해줄 것을 청하니, 대로사(大老祠)로 사액을 하고 어제(御製)에 어필(御筆)로 된 비를 사정(祠庭)에다 세웠다. 대가가 이천(利川)을 지날 때 길 옆에 구경 나온 백성들이 산과 들에 널려있었으며, 어떤 머리 하얀 늙은이가 길을 막아서서, 우리 임금 좀 뵙기를 원한다고 아뢰자, 제신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 아직 백성들에게 혜택이 미쳐갈 만한 정사나 명령이 하나도 없었는데 백성들이 이렇게 천리를 멀다 않고 왔으니 나로서는 부끄럽고 두려울 뿐이다.”
하였다. 영릉(寧陵)영릉(英陵) 배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천에서 행차를 멈추고는 윤음(綸音)을 내려 광주·이천·여주 세 고을 부로(父老)들을 개유하고, 대가가 지나는 연도의 백성들에겐 1년치 조세를 감면하였다. 광주에서 행차를 멈추고는 하교하기를,
인묘(仁廟) 갑자년에 색다른 중 각성(覺性)이라는 자를 얻어 팔도 도총섭(八道都摠攝)이라 명하고 승군(僧軍)을 모집하여 각 사찰에 나누어 있게 했었는데 근년에 들어서는 그들이 조련도 잘 하려 들지 않고 힘든 역사가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니 일단 유사시 그들을 어떻게 믿겠는가.”
하고,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그 폐단을 없애도록 명했다. 서장대(西將臺)에 올라 성 안에서 하는 훈련과 야간에 하는 훈련을 실시하고 장사(將士)들에게 푸짐한 음식을 내렸으며, 성 안팎을 두루 둘러보고는 그곳 형편(形便)과 고적(古蹟)에 대해 낱낱이 물었다.
행행 8일 만에 비로소 환궁했는데 우레의 이변이 있어 감선(減膳)을 하고 자신을 책하는 하교를 내렸으며, 그로부터 10일 후 천둥이 또 크게 치자 감선 5일을 하고 하교하기를
“하늘이 사람과 멀리 있다던가. 바로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경(經)에도 이르기를, ‘하늘이 성내시면 마음가짐을 경건히 하고 감히 장난으로 실없이 여기지 말라.’ 하였다. 가령 과인이 통렬히 자기 자신을 극복 책망하고 한껏 노력하고 두려워한다면 이미 성난 하늘의 마음도 다시 즐겁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기껏 재앙을 겪고서도 다만 옛모양 그대로 지내면서 구습을 씻어버리고 유신(維新)을 도모해야 하는 일을 까맣게 서로 잊어버려 나랏사람들 전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흐리멍덩한 굴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상대국의 철검(鐵劒)이 예리한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도리어 광대놀음이나 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짚더미에 불을 붙여놓고 그 위에 앉아 편안하다고 하는 꼴인 것이다. 자기 자신을 꾸짖기에 급급하다 보면 미처 왕의 잘못에까지 눈 돌릴 겨를이 없겠지만 광필(匡弼)의 책임이 있는 우리 신하들은 나의 득실에 대해 바른말을 해달라.”
하였다.
처음에 홍국영(洪國榮)을미년7537) 이전부터 주연(胄筵)을 드나들며 특별한 총애와 신임을 받아 4년 동안에 벼슬이 재열(宰列)에 오르고 중한 병권도 두루 맡았으므로 제가 잘나 그리 된 것으로 알고 날이 갈수록 더욱 교만하고 방종하여 그 권세가 세상을 좌우할 만큼 조정 모양이 점점 문란해져 갔었다. 왕은 그의 간악상을 훤히 알고서도 은인 자중하느라 티를 내지 않았었다. 급기야 홍빈(洪嬪) 상을 당하자 국영이 스스로 세(勢)가 간 것을 알고는 이제 방향을 바꾸어 이국(移國)을 해보려고 앞장서서 주장하기를,
“저사(儲嗣)를 두기 위해 빈어(嬪御)를 또다시 맞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고는, 인(䄄)의 아들 이담(李湛)을 기화(奇貨)로 삼아 그의 군호(君號)를 완풍(完豊)으로 고치고는 우리 생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홍빈의 수빈관(守嬪官)이 되었을 때에 그의 말을 들은 자는 뼈가 시렸지만 그의 위세에 눌려 길거리에서도 눈짓만 할 뿐이었다.
역적 송덕상(宋德相)은 유자라는 명칭을 가탁한 자로서 홍국영의 부름을 받고 와 모든 언행을 오직 국영 시키는 대로만 해왔는데 이때 와서 저사에 관한 일로 투소(投疏)를 하면서 그 내용에 “무슨무슨 일은 아래 있는 자가 감히 지적해서 할 말은 못되지만 그러나 성상께서도 틀림없이 생각해보신 바 있을 것입니다. 신이 숙위 장신(宿衛將臣)을 대해서도 그 일이 제일가는 일이라고 했었습니다.” 한 대목이 있었다. 그가 말한 숙위 장신이란 바로 국영을 말한 것이고 그 일이란 에 관한 일을 말한 것이었다. 이에 적들의 모사가 날이 갈수록 긴박하여 화기(禍機)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왕도 이제는 단안을 내리기로 마음을 굳혔으나 그러나 그와의 관계를 끝까지 보전하고 싶었고 또 적도들의 수가 많아 그들의 흉모를 예측하기 어려운 점도 고려해서 짐짓 밖에다 선시(宣示)는 않고 조용히 앞으로 불러 그의 죄상을 세며 스스로 물러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국영은 감히 항명(抗命)을 못하고 부신을 반납하고 나갔는데 그에게 특별히 삼자함(三字啣)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을 이장할 때 숭품(崇品)의 종신(宗臣)에게 쓰는 예를 쓰도록 명하고 아름다운 시호도 내렸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시법(諡法)이란 지극히 중대한 제도이며 더구나 충(忠)자 같은 글자는 더더욱 함부로 쓸 수 없는 글자인 것이다. 지금 홍문관이 의정한 시호를 보면 단례(斷例)로 비추어볼 때 좀 분수에 넘친다 싶은 혐의가 있잖은가.”
하고, 옛 시법을 다시 수명(修明)하라고 명했다.
4년 1월에 인정문(仁政門)에서 조참(朝參)을 받고 홍낙순(洪樂純)을 삭출하였다. 낙순국영의 숙부였는데 국영이 물리침을 받고 물러난 뒤에도 낙순은 아직까지 상직(相職)을 거머쥐고 있으면서 그 여세를 빙자하여 나라의 실권을 움켜쥐려 하였고 국영은 또다시 들어올 기회를 넘보면서 문형(文衡)을 맡아 그것으로 최종 치사(致仕)의 발판을 삼으려고 했다. 그때는 서명선(徐命善)이 영의정이었고 그의 형 명응(命膺)이 문형을 맡고 있었는데 대신(臺臣) 이보행(李普行) 등이 번갈아가며 소장을 올려 탄핵하자, 하교하기를,
“내가 적임자가 아닌 자에게 일을 맡겼기 때문에 실권이 아랫사람에게로 옮겨져서 죽이고 살리고 위엄을 보이고 복을 주고 하는 권한이 장차 수습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가게 되었으니 어찌 차마 나라 망하는 꼴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그것을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일은 모두가 대신(大臣) 한 사람이 저지른 죄인 것이다.”
하고, 낙순은 삭출하고, 보행은 섬에다 안치하도록 명하였다.
명릉(明陵)을 배알했는데 승하한 지 일주갑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
이조 판서 김종수(金鍾秀)가 수차(袖箚)로 홍국영의 죄를 성토했는데, 저사(儲嗣)를 널리 구하는 방법을 막았다는 죄목이었고, 삼사에서도 번갈아가며 소장을 올려 강력히 청하였으므로 국영을 전리(田里)로 방출하도록 명하였다. 그때 대각(臺閣)에서 올린 탄핵문이 날마다 공거(公車)에 쌓였는데, 왕이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인재를 고르는 데 있어서는 상대가 중인(中人) 이하일 것으로 기대해야만 할 것이다. 《명의록(明義錄)》이 만들어졌을 때 그가 곧 의리(義理)를 아는 장본인이었고 그와 사귄 사람도 나라편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을미 병신년 이후로 세상이 자주 변하여 국맥(國脈)이 적지않게 손상되었는데 지금 그 병을 고치는 방법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서로 한마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아무 사심없이 서로 공경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피차 상대를 공격하기만을 일삼아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데 가령 한 사람이 다치게 되면 국맥도 그만큼 손상되는 것이니 그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후한 말엽에 명분론(名分論)이 준엄했던 까닭에 조조(曹操)가 비록 곁을 맴돌며 한(漢)을 넘보았지만 감히 스스로 손을 대지는 못하고 핑계가 천자(天子)를 보호한다는 명목이었기에 순문약(荀文若)7538) 같이 내노라 했던 자도 역시 몸바쳐 그를 섬기지 않았던가. 지난번에 있었던 일들이 그와 다를 게 뭐겠는가. 제신들이 만약 진정과 안정을 바라는 내 뜻을 이해하고 따라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조정은 텅 비고 말 것이다. 어디 그럴 수야 있는 일인가.”
하였다.
화빈(和嬪) 윤씨(尹氏)와 가례(嘉禮)를 올렸는데 판관(判官) 윤창윤(尹昌胤)의 딸이었다. 가을에는 영릉(永陵)을 배알하고, 겨울에는 천둥으로 인해 구언(求言)의 윤음을 내렸었다.
5년 1월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다른 능들도 두루 배알했는데, 그해가 신축년으로 바로 영조가 세자 책봉을 받은 지 일주갑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 사충사(四忠祠)7539) 에 제(祭)를 내리고, 증 참의(贈參議) 김성행(金省行)에게 가증(加贈)할 것과 고 학생(學生) 서덕수(徐德修)에게 집의(執義)를 추증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강제(講製)를 익힐 문신(文臣)을 뽑아 아뢰는 제도를 실시하도록 하고, 하교하기를,
“근래 나이 젊은 문관(文官)들이 겨우 과거에 급제만 하면 책이라고는 아예 덮어버리는 풍습이 점점 고질화되어 쉽게 바로잡혀지지 않기 때문에 비록 전경(專經)이니 월과(月課)니 하는 규정들이 있기는 해도 하다말다 해 일정한 법도가 없어 명실(名實)이 서로 맞지 않는다. 국가에서 권과(勸課)하는 방법이 이미 잘못되었으니 신진(新進)들이 태만한 것을 그들에게만 책임지울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지금 옛 교육제도를 모방하여 인재를 만들어내는 길을 마련하려고 하는데, 독서당만으로는 너무 단조롭고 지제교는 조금 취약한 점이 있으므로 만약 문신(文臣) 당하관들 중에서 나이를 제한해서 사람을 널리 뽑아 매월 경사(經史)를 강하게 하고 열흘마다 정문(程文) 시험을 보여 근만(勤慢)에 따라 상벌을 실시하면 문풍(文風)을 진작시키는 데 있어 일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고, 의정부에 명하여, 승문원의 문신들을 참상(參上)·참외(參外) 할 것 없이 나이 37세 이하인 자들을 뽑아 아뢰고 내각(內閣)이 강제에 관한 절목을 만들어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왕이 강제에 임한 문신들에 대한 권과와 그들을 인재로 만들어내는 방법에 있어 지극한 정성을 다하고 그들에 대한 은우(恩遇)도 각신(閣臣) 다음가는 수준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신축년 선임 이후 무릇 10차에 걸쳐 선임을 했는데 지금 공경 대부(公卿大夫)인 자들 태반이 다 강제에 임했던 문신들이다. 또 하교하기를,
“문강(文講)과 무강(武講), 문제(文製)와 무사(武射)는 마치 수레바퀴나 새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안 된다.”
하고, 선전관으로 하여금 무강·무사 시험을 문강·문제하는 문신들 예에 준하여 실시하도록 명했다.
창덕궁(昌德宮)의 도총부(都摠府)를 이문원(摛文院)으로 명명하고 어필로 편액을 썼는데, 그 원이 옛날에는 금원(禁苑)에 있던 것을 지대가 너무 깊숙하다 하여 영숙문(永肅門) 밖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이때 와서 간신들이 상차하여, 원을 옮기는 것이 편리하다고 아뢰어, 허락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규장각에 임어하여 새롭게 정무를 볼 때 전직 각신(閣臣)들이 시강관(侍講官)·강서관(講書官) 자격으로 모두 책을 끼고 당(堂)에 올라 경의(經義)를 강설하고 치도(治道)에 대해서도 각기 소견을 개진했으며 과인의 잘못과 정사의 득실까지도 모두 거론했었는데 그들이 비록 논사(論思)의 책임자들은 아니었지만 그날 그 자리는 응지(應旨)의 자리나 다를 바 없었다. 지금도 마음속에 쌓여 있는 것이 있으면 각기 다 털어놓도록 하라.”
하였다. 그런데 그날의 예수(禮數)와 의식 절차는 대략 학궁(學宮)에 임어할 때의 의식을 모방했고, 선왕조 때 임어하여 일 보시던 고사(故事)도 참고했으며 송(宋)나라 때 원(院)에 행행했던 사실들도 참작해서 아뢰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내로 돌아올 때는 홍문관도 들러 두루 임어했었는데 그것은 《논어》에서도 말했듯이 그 예를 아끼는 뜻에서였던 것이다.
3월 신축일에는 이문원에 행행하여 《근사록(近思錄)》의 도체편(道體篇)을 강했는데 그 때도 전임 각신들이 반을 나누어 당에 오르고 홍문관 영사(領事) 이하는 강(講)을 들었으며 강을 마치고는 음식을 내렸다. 그리고 이어 홍문관으로 행행하여 경연(經筵)의 신하들과 《심경(心經)》을 강했는데 내각과 홍문관의 신하들이 전(箋)을 올려 그 일을 축하했었다. 규장각이 건립된 지는 몇 해 되었으나 모든 제도가 제대로 마련이 되지 못했었는데 홍국영이 축출당한 후로는 조정 분위기가 깨끗해졌고 왕은 왕대로 치적을 높이기에 더욱 노력하였으므로 이제 온갖 제도가 모두 완비되었다. 그런데다 거듭 여러 각신으로 하여금 고금을 참작하여 하나하나 차근차근 수거(修擧)하도록 하여 각(閣)의 규모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갖출 것을 다 갖추었다. 이에 교서관(校書館)을 외각(外閣)으로 삼고 본각은 내각(內閣)에다 소속시켜 제학(提學) 이하는 겸직 제도를 두었다. 그리고 강화도 어고(御庫)에 봉안되어 있던 책보(冊寶)와 서적들은 다시 각을 지어 간직해 두고 그 각을 이름하여 외규장각(外奎藏閣)이라 하였다.
《팔자백선(八子百選)》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왕이 문장이 날이 갈수록 저하되는 것을 걱정하여 손수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에서 선발하여 간행한 것이다.
여름에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고 동쪽 적전(籍田)에서 보리 베는 것을 구경한 다음 노주례(勞酒禮)를 행했는데 이는 영종이 하던 고사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윤음을 내려 농정(農政)을 권면하였다. 왕은 언제나 정월이면 반드시 권농(勸農)의 윤음을 내려왔었는데 그날은 보리 수확 구경을 하고 노주례를 행했던 끝이었기에 거듭 독려를 한 것이다. 큰비가 내려 사문(四門)에다 영제(禜祭)를 행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나라를 둔 자로서는 가장 걱정거리가 장마와 가뭄 그리고 도둑이니 그런 일이 있을 때면 위에다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윗사람도 항상 두려움과 경계 속에서 감히 사치하고 안일한 생각을 갖지 못하는 것도 역시 그것들 때문인 것이다. 이 좋은 말은 바로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풍속이 되어 담당관이 등문(登聞)을 않고 있으니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아, 나라 전역에 있는 백성들이 모두 나의 자식들이다. 그러나 도성 안의 백성들이 겪는 고락은 관계된 바가 더욱 중하다. 혹시 도성 안에 고달픔을 한탄하는 소리가 있는데도 내가 들어 알지 못한다면 백성들의 임금된 의의가 어디 있겠는가.”
하고, 이어 한성부와 포도청에다 경계령을 내렸던 것이다.
8월에는 명릉(明陵)을 배알했는데, 이달이 영조가 세자로 책봉된 달인데다가 그날은 숙묘(肅廟)가 탄생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영조가 잠저(潛邸)에 있던 신축년 8월 보름날 소령원(昭寧園)을 배알하고 돌아오는 수레가 덕수천(德水川)에 당도했을 때 소를 몰고 지나가는 도둑이 있어 뒤 따르던 자가 그 사실을 알리자, 검암(黔巖)의 발장(撥將)을 명하여 소는 몰아다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고 도둑은 불문에 부쳤었는데 도성으로 돌아오자마자 후사로 세운다는 명령이 내렸었다. 그런데 이때 와서 왕이 그 날을 생각하고 느끼는 바 있어 능 배알을 마치고는 어제(御製)로 그 사실을 기록한 비(碑)를 파발의 관사 앞에다 세우고 어진(御眞)을 그려 규장각 주합루(宙合樓)에다 봉안하였다. 그리고 각신(閣臣)이 쉬는 날에도 숙직을 하면서 봉심하는 규정을 처음으로 두었는데 이는 멀리는 천장각(天章閣)에서 한 일을 모방한 것이고 가까이는 태령전(泰寧殿)의 의식을 취한 것이다.
호서(湖西) 사람 연덕윤(延德潤) 등이 송덕상(宋德相)의 억울함을 변호하려고 네 도에 통문을 보내 저들끼리 서로 선동을 일삼자, 도신(道臣)이 그 사실을 아뢰어왔고 제신들은 일제히 국청을 개설할 것을 청했다. 이에 왕은 왕부(王府)를 번거롭게 할 것까지 없다 하며 사신을 보내 사실을 조사하여 죄상에 따라 적절한 처리를 하도록 하고 덕상삼수(三水)로 귀양을 보냈다. 겨울에 하교하기를,
“서북(西北) 지방은 바로 국경 지대로서 곳에 따라 문(文)으로 다스리기도 하고 무(武)를 장려하기도 해야 하는데 근래 들어서는 습속이 점점 해이하여 무는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고 모두 유명(儒名)만을 좋아하기 때문에 풍기가 시들하고 연약하여 변경 방어가 염려스러울 정도로 허술하니 내 매우 걱정되는 바이다. 그런데 가만히 그 까닭을 찾아보자면 전적으로 용사(用舍)와 지휘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정부의 주의(注擬)를 벗어나지 않는데 있다. 대신(大臣)과 장신(將臣) 그리고 병조 판서는 서북 지방 무변(武弁)의 수용 정책에 대해 숙의하여 통합된 의견을 아뢰라.”
하였다.
단군(檀君)·기자(箕子)와 삼국(三國)·고려(高麗) 시조들의 왕릉(王陵)을 개수하였다. 왕은 지난 시대 왕조들에 대해 덕 있는 이를 숭배하고 어진 이를 본받는 일이면 더욱 그를 못잊어하여 수로왕(首露王)의 능을 비롯해서 신라 여러 왕의 능에다 잔을 올리고, 삼성사(三聖祠) 제례 의식을 다시 정했으며, 온조왕(溫祚王) 사당을 숭렬전(崇烈殿)이라 이름하고, 고려 사태사(四太師)7540) 사우(祠宇)에는 사액(賜額)을 하였다.
6년 봄에 홍릉(弘陵)을 배알하고 이어 여러 능도 배알했으며, 여름에는 영우원을 배알했다. 오랫동안 가물자 왕은 정전(正殿)을 피하고 친히 우사단(雩祀壇)에 가 기우제를 지냈는데 일산을 떼어버린 보여(步輿)를 타고 단에 이르러 직접 희생과 기물을 살펴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복 차림으로 노상에 앉았다가 예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운종가(雲從街)에 이르러 의금부와 형조의 경미한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환궁한 뒤에도 오히려 곤룡포를 벗지 않고 난간을 의지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윽고 과연 비가 내렸다.
가을에는 권홍징(權泓徵)·송덕상(宋德相)·송환억(宋煥億)·문인방(文仁邦)·백천식(白天湜)·이경래(李京來)를 친국하고 해서(海西)에 사신을 보내 신형하(申亨夏)·박서집(朴瑞集) 등을 조사하여 사실을 밝히게 했다. 권홍징은 흉서(凶書)를 투서한 자이고, 형하서집덕상을 두둔하면서 음흉하고 끔찍한 저의를 가지고 글을 써서 서로 돌리는 자들이었으며, 인방·천식·경래 등은 요사한 글과 말로 서로 붕당을 결성하고 유언을 만들어내면서 난리를 일으킬 음모를 꾸민 자들로서 그들끼리는 부서(部署)가 이미 정해진 상태였고 그들 모두는 덕상을 유일한 의지로 삼고 있었다. 차근차근 친국을 받고 사실을 토로한 다음 홍징·인방·천식·경래는 법에 의해 주륙을 당하고, 덕상은 지레 죽었으며 환억은 먼 섬에 위리 안치되고, 형하 등은 각기 정상을 참작하여 정배했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러한 옥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연루자도 점점 늘어났으며 각도에서 밀계(密啓)하는 글들이 길에 이어져 있었다. 왕은 이러한 일들이 결국 죄없는 백성들에게 화가 미치리라는 것을 깊이 우려한 나머지 윤음을 내려 국영·덕상 등의 범죄상을 포고하고 그 말미에다 이르기를,
“오늘 역옥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은 진정과 안정[鎭安] 두 글자이다. 그 무리들을 다 찾아내고 숨겨진 내용까지 다 들추어내어 모조리 죽여없애고야 말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바가 아니다. 요즘 병영이나 곤수들에게서 올라온 것들이 아뢰지 않아도 될 것을 아뢴 경우가 간혹 있는데 집에다 비결 따위를 간직해둘 경우 그에 따른 처벌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그것이 무슨 문서인지조차 모를 것은 이상할 게 없는 일 아니겠는가. 만약 그 켸켸묵은 종이 한 조각까지 요언(妖言)이요 불궤(不軌)로 규정을 한다면 그 얼마나 불쌍하고 동정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외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내 비록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으나 그러나 역졸(驛卒)들의 왕래가 많아 도로가 시끄럽고 추적이다 체포다 하여 마을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다 또 고을마다 돌면서 정탐(偵探)을 하고 우연한 말 한마디까지 적발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국가의 본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심이 흔들려 안정을 송두리째 잃을 염려도 있으니 너희 크고 작은 신료들은 반드시 상대를 깨우치는 방법과 용서하는 마음을 강구하고 갖도록 각자 명심하고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라. 비록 제방도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되지만 혹시라도 함정이 넓어지게 말 것이며 차라리 죄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오직 함께 새로워지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백성을 맡아 다스리기 6년이 되도록 정교가 확립되지 않아 악한 자가 선한 자로 변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죄에 걸리는 자만 날이 갈수록 많아져 감옥이 빌 만큼 교화가 이뤄질 희망은 안 보이고 수레에서 내려 울 일7541) 만 늘 있으니 내 거듭 부끄럽고 한탄스러운 바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근일에 역적들이 비결 쪽지를 가지고 백성을 현혹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정학(正學)이 밝지 아니한 소치이다.”
하였다. 이에 유술을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긴다[崇儒重道]는 윤음을 내려, 이조에서는 문학(問學)의 선비들을 골라 뽑게 하고, 각도의 방백(方伯)들에게는 경(經)에 밝고 행실이 얌전한 자들을 추천하도록 명했으며, 소현(紹賢)·화양(華陽) 두 서원에 사제(賜祭)하였다.
왕은 초기부터 유술 숭상을 급선무로 삼아 문묘(文廟)에 배향된 국조 제현(諸賢)들을 모두 표장(表章)하고 혹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도 했으며, 혹은 그들 유문(遺文)에 대해 친히 제(題)를 쓰기도 했고, 또 혹 그들 자손을 녹용(錄用)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 문하의 여러 유생들까지도 모두 은총을 베풀었다.
경기·호서·영남에 기근이 들자 윤음을 내려 백성들을 위로하고 타이르는 한편 구휼 정책을 강구하도록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도하 백성들 생활 방편이 오로지 기호(畿湖)에 달려 있는데 기호 지방이 흉년이라 하여 내 오래 전부터 도하 백성들 걱정을 해왔던 터이다. 우리 나라 발매(發賣) 제도는 바로 한(漢)나라 때 진대(振貸)와 같은 것이니 한성부 진휼청으로 하여금 미리 호구를 조사하여 쌀 발매 정책을 정확히 세워두게 하라.”
하였다.
9월에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탄생했는데 의빈(宜嬪) 성씨(成氏) 소생이었다. 영우원을 배알하고, 겨울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이 완성되었다. 당초 세조(世祖) 정축년7542) 에 대제학(大提學)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태조(太祖)·태종(太宗)·세종(世宗)·문종(文宗) 이상 4대의 보감을 찬술하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국조보감》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이후로 계속된 왕조가 이 4조의 뒤를 이어 속성(續成)을 시도했으나 미처 손을 못 대고 있다가 숙종(肅宗) 경신년7543) 에 와서야 공조 참판(工曹參判) 이단하(李端夏)《선묘보감(宣廟寶鑑)》을 편찬하고, 영조(英祖) 경술년7544) 에는 대제학 이덕수(李德壽)《숙묘보감(肅廟寶鑑)》을 편찬해 올렸었다. 그러나 여러 국조의 보감이 하나의 통일 체제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었는데 신축년 가을에 와서 《영종실록(英宗實錄)》이 완성되자, 왕이 대신·각신들에게 말하기를,
“선왕의 50년에 걸친 훌륭한 덕과 위대한 사업은 역사에도 이루 다 기록 못할 것들이지만 실록은 석실(石室) 금궤(金櫃)에 깊이깊이 비장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오직 이 보감이라는 것이 비사(秘史)와는 조금 성질이 다르니 체제는 비록 편년체(編年體)를 쓰더라도 되도록 유양(揄揚)하는 쪽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지금 실록이 편성되었으니 이제부터 보감을 엮는 일을 시작한다면 나 개인에 있어서도 선왕의 교훈을 빛내고 공업을 천양하는 도리에 있어 유감됨이 없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제신들이 같은 목소리로 찬성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세조 때 이루어진 보감 외에는 선조·숙종 두 국조의 보감이 있을 뿐 그 밖의 12국조는 아직까지 아무런 기록이 없으니 지금 그 모두를 함께 편집하여 이상 세 국조의 보감 및 영묘 보감(英廟寶鑑)을 합쳐 한 책으로 만들어서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각 국조 실록들을 강화도에서 모셔오게 하고, 또 12명의 사신(詞臣)을 차출하여 편찬을 각기 분담하도록 했으며, 또 전임 대제학 이복원(李福源)·서명응(徐命膺) 등에게는 교정을 맡겨 무릇 7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보감이 완성을 보았는데 총 68권으로 된 책을 활자로 인쇄하였다. 제신들이 전문(箋文)을 갖추어 올리자, 왕은 법전(法殿)에 나아가 친히 받고는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 고사(故事)에도 매 실(室)마다에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주(周)나라가 종묘에 보기(寶器)를 진열해둔 일, 또는 송(宋)나라가 궁전에다 옥첩(玉牒)을 간직했던 일들을 모방하여 입묘(入廟)할 때 반드시 그것들을 다 봉안해 왔었다. 이 보감도 그 내용이 선왕의 공덕을 들추어내 후손들에게 복을 물려준 내용인즉 사실 서서(西序)의 대훈(大訓)7545) 과 그 규모가 같다. 비록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완염(琬琰)이나 제도를 소명하는 새장(璽章) 같은 것으로도 오히려 그 소중함을 비유할 수 없는 물건이다. 다만 그동안 제도가 잘 갖추어지지 못하여 성대한 예를 행하는 데 부족한 바가 있었기에 3백여 년을 두고 아직 궐전(闕典)으로 남아있었던 것이지만 열조(列朝)의 보감이 찬란하게 다 이루어진 오늘에 있어서야 어찌 감히 그를 경건히 비궁(閟宮)에다 바치고 그것을 이 나라 고유의 예로 삼아 우리 자손 만세에까지 영원한 교훈으로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에 책보(冊寶) 올리는 의식 절차를 참고 모방하여 보감종묘(宗廟)영녕전(永寧殿)에다 친히 올리고 각 실에도 따로따로 두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윤음을 내려 대소 신료의 의견을 물어 영종(英宗)을 높여 세실(世室)로 삼고 원자(元子) 호칭을 정한 다음 백관들로부터 하례를 받고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견휼(蠲恤)의 정령을 내렸으며 이어 대사면령을 중외에 내려 죄수 3천여 명을 석방시켰다.
7년 1월 조참(朝參)을 앞두고 하교하기를,
“요즘 들어 공경 백집사(公卿百執事)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하나의 풍습이 되어버렸다. 한 해 벽두의 조참은 즉위한 맨 처음과 다를 바 없고 더구나 지금 보감도 올렸고 원자 호칭도 정해졌으니 위로 선왕의 뜻을 잘 계술(繼述)하는 방법에 있어서나 아래로 자손들에게 좋은 교훈을 남김에 있어서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대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다. 내일 문간에 들어설 때 대신(大臣) 삼사(三司)는 물론 서료(庶僚)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좋은 교훈 좋은 설계가 될 만한 의견들을 각기 개진하라.”
하였다. 제신들이 제각기 소회를 개진하자, 그를 다 받아들이고, 경기·호서·영남 3도의 도신(道臣)들에게 유시를 내렸으며, 또 내탕(內帑)의 전초(錢椒)를 내려 진자(賑資)에 보태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흉년을 당하여 기민을 진휼한 일이 옛부터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꼭 익주(益州)의 기근을 다스린 한기(韓琦)청주(靑州)의 수재를 구제한 부필(富弼)을 들먹인 까닭은 그들이 오직 하나의 ‘성(誠)’으로 철두철미하게 백성들을 돌봤기 때문이다. 우리도 있는 정성을 다해 송(宋)한기·부필만이 아름다운 이름을 독차지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각도에서 효열(孝烈)을 뽑아 아뢰자, 하교하기를,
“신하에 있어서는 충(忠)이요 자식에 있어서는 효(孝)이며 부인에 있어서는 열(烈)인데 그것은 시골 마을의 필부 서민들조차도 해내기 어려운 일인데 더구나 제왕(帝王)의 집안이겠는가. 우리 화순 귀주(和順貴主) 같은 사람은 탁월하다고 할 만하다. 옛부터 제왕의 집안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일인데 오직 우리 가문에 그러한 사람이 있으니 이는 이 나라 정신(貞信)을 대변하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 가범(家範)에 있어서도 얼마나 빛나는 일인가.”
하고, 이어 그 문(門)을 열녀문으로 정표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정순 대비(貞純大妃)·경모궁(景慕宮)·혜경궁(惠慶宮)에 존호를 더 올렸는데 그는 자손에게 많은 복을 주었다는 뜻를 표한 것이었다.
대신과 예관(禮官)이 입대를 요구하여 아뢰기를,
“우리 성상께서 자리에 오르신 지 7년이 되도록 공덕을 나타내는 존호 올리는 예를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여 온 나라 신민들이 답답하게 여기고 있으니 공경히 송축하기를 감히 청하는 바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그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배나 더 슬퍼지는구나. 경들이 자랑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나의 불효한 죄를 더 보태주는 결과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라를 맡고 있는 대신들에게 미쁨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뜻도 되어 내 매우 부끄럽다. 나의 지금 이 말은 사실 내 진심에서 나온 말이니 경들은 내 마음을 체득하고 이해해 주기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제신들이 누누이 청했지만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각신(閣臣) 정지검(鄭志儉)이 상차하여 청하기를,
송(宋)홍매(洪邁)가, 그날그날 보고 들은 성어(聖語)를 기록하여 수주관(修注官)에게로 보내게 하자고 했던 고사(故事)를 본따 경연(經筵)에 오를 때마다 성어를 유심히 들어뒀다가 물러나와서 기록하고 한 해가 끝날 무렵이면 그것을 다시 증정(證正)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주자어류(朱子語類)》의 예처럼 본각(本閣)에다 간직해 두는 것을 법제화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는데 그것이 바로 《일득록(日得錄)》이 되었다. 그후 내각에다 유시하기를,
《일득록》을 만든 이유는 대개 근래 기주관(記注官)의 기록이 틀린 데가 많기 때문에, 가령 경의 문답(經義問答) 내용이나 시정(時政)에 관한 의견 교환 같은 것은 근신(近臣)들이 신진(新進)들보다는 이해가 더 깊으므로 꼭 송나라 고사대로 본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관성(觀省)의 자료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만약 너무 지나치게 좋은 점만 강조하여 포장(鋪張)만 한다면 그 기록을 본 후인들이 지금을 두고 뭐라고 하겠는가? 그 점을 각신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여름에 날이 가물어 감선(減膳)을 하고 또 구언(求言)도 했다가 이튿날 비가 내려 예조가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약간 내린 것도 다행은 다행이나 한 자쯤 내려주길 바라는 마음이어서 금방 복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수성(修省)의 자세를 어찌 비가 좀 온다 하여 흐트러뜨릴 수 있겠는가. 도움을 바라던 나머지라서 좋은 말을 듣고 싶으니 제신들은 그 뜻에 부응하여 나의 마음을 펴낸 그 유시가 형식에 불과한 일개 공문서로 끝나버리지 말게 하라.”
하여, 경재(卿宰) 이하 그 뜻에 따라 소를 올린 사람이 40여 명이나 되었다.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고 가을에는 건원릉(健元陵)·원릉(元陵)을 배알했으며, 영희전(永禧殿)을 개수했다. 그에 즈음하여 하교하기를,
“옛날 선왕조 때는 종묘·궁전을 개수하게 되면 언제나 의관을 정제하고 이안청(移安廳) 앞에 나와 계시다가 다시 원위치에 봉안을 하고서야 비로소 소차(小次)로 들어가시곤 했는데 그는 이 소자(小子)가 그때마다 흠앙(欽仰)했던 바다. 그런데 지금 내가 어찌 감히 스스로 안일을 취하여 하시던 대로 계승할 생각을 안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곧 개수 장소로 나가 몸소 공역를 감독했으며 밤이 되기 전에 공사가 끝나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옥(獄)이라면 다 신중을 기하는 것이 제왕(帝王)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인데 나는 사리 판단을 원활히 못 해 한 죄안을 심의 결정할 때마다 전도 착란을 일으키기 일쑤다. 모든 관직 제수나 재정 출납 또는 강제(講製) 초록 발췌 등에 있어서도 모두 장부를 두어 기록하고 있는데 더구나 형옥(刑獄) 처리 관계에 있어 어찌 이미 끝난 사안이라 하여 다시 두고두고 연구 검토를 안 해서야 될 일인가. 지금 이후로는 의금부와 형조의 결옥안(決獄案) 중에서 긴요한 부분은 초록해 두었다가 그달 말에 가서 기록해 아뢰고 매년 계삭(季朔)에는 그것을 책자로 만들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언젠가 내원(內苑)의 와린평(臥麟坪)을 지나다가 한 토실(土室)을 가리키며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저것이 옛날 이른바 북사옥(北寺獄)이라는 것으로 궁중에서 죄지은 자들을 가두었고 저 옥에도 형구(刑具)가 있다. 나는 궁중과 부중(府中)이 일체라고 생각되어 죄인은 모두 유사(有司)에게 맡겨 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고 토실은 이용 않기로 했기에 지금은 저 터만 있는 것이다.”
하였다.
대사성 민종현(閔鍾顯)이 상소하여, 선비들을 선발 입재(入齋)시킬 것을 관·각·묘당의 신들과 논의할 것을 청하자, 비답하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후 과거(科擧) 문제에 대해 의견을 수렴한 결과, 대소과(大小科) 제도를 고치자는 것, 생획과(栍畫科) 정원을 늘리자는 것, 원점과(圓點科)를 부활시키자는 것 등이었는데 그 모두를 보류한 채 아직도 짤막한 비답 하나 내리지 않고 있는 까닭은 그럭저럭 지내면서 변통을 안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모든 폐단이 법 때문이 아니고 바로 인재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되어서이다. 법이야 현행의 법이 조종조에서 만든 금과 옥조가 아닌가. 인재만 얻어 맡긴다면야 유교(儒敎)가 진흥되지 않고 사풍(士風)이 진작되지 않는 것을 걱정할게 뭐겠는가. 구경재(九經齋)를 다시 설치할 것도 없고, 연영원(延英院)을 모방할 필요도 없으며, 성균관 유생이니 사학 유생이니를 따져 구별할 것도 없는 것이다. 오직 ‘득인(得人)’ 그 두 글자가 폐단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급선무이니 경들은 각별히 인재 찾기에 힘쓰라.”
하였다.
그해에 6개 도(道)가 기근이 들었는데 왕은 그것을 크게 걱정하여 날마다 담당 신하를 불러 접견하고 황정(荒政)을 강구하였다. 그때가 또 마침 탄신(誕辰)이었는데 왕은 하교하기를,
“오늘이 바로 내 생일인데 외지의 곤수(閫守)와 목백(牧伯)들이 모두 전문을 올려 축하를 표하고 있지만 내가 마음 조이고 있는 것이 우리 백성들 문제뿐이다. 백성들은 지금 신음 중에 있어 그 아픔이 바로 내 아픔과 같은데 축하는 무슨 축하란 말인가.”
하고, 각도에 윤음을 내려 도신들로 하여금 별도로 대비책을 강구하도록 경계하였다. 또 영동(嶺東)의 9개 군이 다른 곳에 비해 더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선유(宣諭)하는 한편 포항(浦項) 창고의 곡식을 옮겨다 구제하게 하기도 했으며, 향축(香祝)을 내려 바다 등지에 제사를 올리어 일이 잘 되도록 빌게 하기도 하였다. 겨울에 하교하기를,
“흉년이 들면 부황나고 의지할 곳 없는 우리 백성들 어느 누가 왕정(王政)의 구제 대상이 아니겠는가마는 그중에서도 가장 호소할 곳 없고 가장 불쌍한 것들이 어린것들이다. 심지어 길가에 버려진 것들을 거리에 그대로 방치해두어 죄 없이 죽고 마는데 그것이 어찌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이겠는가. 광제원(廣濟院)이니 육영사(育嬰社)니 하는 좋은 제도들이 있어도 예와 지금이라는 시대의 차이 때문에 하루아침에 그를 다 그대로 거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서울은 팔방(八方)의 표준이 되는 곳이니 우선 여기서부터 그 제도 비슷한 것을 시행함으로써 각 지방이 차근차근 본받도록 하는 것이 실로 인정(仁政)의 시작에 합당할 것이다.”
하고, 이어 자휼전칙(字恤典則)을 만들어 그를 인쇄해서 중외에 반포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매 월말이면, 몇 명씩이나 수양(收養)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실시하고 있는 곳이 있는지 없는지도 아울러 아뢰라고 하였다.
8년 1월 조참(朝參)을 앞두고 왕이 문신 중에서 선발되어 대직(臺職)을 맡은 자들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이 새로 대직을 맡았으니 언론이나 풍기 제재에 있어 틀림없이 볼 만한 것들이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뿐만 아니라 선발을 받은 문신이라면 남다른 은례(恩禮)와 청고한 지망(地望)이 경악(經幄)에 뒤질 것이 없으니 내 우선 그대들에게서 직언 당론(直言讜論)을 듣고 싶은 것이다. 간관(諫官)이란 직책은 마치 조양(朝陽)의 봉이요 전상(殿上)의 호랑이여서 백관들 모두가 다리를 떠는 바이니 그 직책에 있으면서 말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옛날부터 대각을 욕되게 한다는 벌이 있었다. 그대들이 추천 물망에 오르자마자 기회가 또 마침 연방(延訪) 시기이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각자 숨김없이 바른말을 하라.”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태학 유생들을 불러 강을 하게 하고는 식당(食堂)을 개설하고,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정자(程子)가 승사(僧舍)의 회식(會食) 광경을 보고는, 삼대(三代)의 위의(威儀)가 있다고 감탄한 일이 있는데 하물며 태학의 식당이겠는가. 질서 지켜 나오고 나이대로 앉아 있는 모습이 질서정연하여 참으로 볼 만하다. 내 그래서 제생(諸生)들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부추나물에 소금국이 비록 박하기는 해도 내주(內廚)의 진수 성찬보다 맛은 더 좋으니 경들도 각기 한번 배불리 먹어 보라.”
하였다. 원점(圓點)에 관한 법을 검토했으며, 묘당(廟堂)과 이조의 신하들로 하여금 초야에 묻혀 있는 뛰어난 인재들을 천거하도록 거듭 명하였다. 그리고 재앙을 입은 각도에 윤음을 내리고 별도의 진휼할 물자를 하사하기로 하였다.
지진이 일자, 하교하기를,
“지난달에는 혜성이 나타나더니 오늘 새벽에는 또 지진 소리가 들리니 이야말로 군신 상하가 모두 정신을 가다듬고 분발 노력하여 수성(修省)의 도를 다할 때가 아니겠는가. 아, 백천 가지 병폐는 다 언로(言路)가 막혀 있기 때문인데 구언(求言)의 기회를 간혹 마련해 봐도 입바른 말은 들을 수가 없고 다만 남의 비밀을 들춰내는 풍조만 일고 있으니 이는 구언이 오히려 말을 않은 것보다 더 심한 피해가 있는 것이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바로 나 자신의 허물이나 시정(時政)의 폐단에 관한 것이니 내일 빈연(賓筵)에서는 삼사(三司)가 각기 광구(匡救)에 관한 말을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건원릉·원릉을 배알하고, 오부(五部)의 기민들을 뽑아 값을 내려서 쌀을 지급해 주었는데 대체로 2만여 호(戶)에 달했다. 또 도하(都下)에 돈이 말랐던 관계로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빈대(賓對)를 실시할 때 공시(貢市)의 사람들을 직접 불러 여러 가지 폐단에 관해 물은 다음 하교하기를,
“작년에 6개 도가 흉년이 들었던 관계로 중외를 막론하고 먹고 살기 어려우리라는 것은 눈에 선하다. 더구나 왕도(王都)는 팔도의 본거지로서 자기 힘으로 씨부리고 수확하는 길도 없는데다 조적(糶糴)의 혜택마저도 없으니 이 흉년을 당해 모두가 곤경에 빠질 수밖에 또 있겠는가. 옛날 선왕조 때는 언제나 도하의 백성들을 진념하여 돌봐주시고 조세나 환곡을 정지하거나 감면해 주곤 했는데 그 후덕하신 뜻을 이 소자(小子) 평일에 늘 보고 느껴왔던 터이다. 지금 내가 문에 나와 묻고 있는 것도 그 뜻을 이어가기 위한 것이다.”
하고는, 각영(各營) 각사(各司)의 돈 15만 꿰미를 이자 없이 구전(口錢)도 떼지 말고 공시 백성들에게 대차해주도록 명했다.
대빈(大嬪)의 묘를 수리하고 하교하기를,
“선왕조에서는 대빈궁의 시사(時祀) 절사(節祀) 때 늘 경건하고 조심스럽게 묘를 수봉하곤 했는데 내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경옥(京獄)의 검험(檢驗) 규정이 지방 각도에 비해 소략한 점이 많다 하여 비변사에 명해 검험 규정을 다시 강정해서 형조와 한성부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가을에 역적 김하재(金夏材)가 소매 속에 흉서(凶書)를 넣고 입궐하여 전향 승지(傳香承旨)에게 보였는데 그 흉서 내용은 경몽(鏡夢)·운해(雲海)도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서 경연 신료들이 분해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을 정도로 치를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일제히 국청을 열어 사실을 밝힐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는데 급기야 하재(夏材)가 법에 의해 베임을 당하고 나자, 경연 신료들에게 하교하기를,
“세상에 무슨 하재가 둘씩이나 있겠는가? 그 자가 재열(宰列)에도 드나들었고 전임(銓任)도 맡은 때가 있었으니 그와 서신 왕래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이야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그 모두를 불태워버리라.”
하였다.
8월에 문효 세자(文孝世子)를 책봉하고 영릉 배알 길에 나섰다. 대가가 월산 대군(月山大君) 사당을 지날 때 하교하기를,
“듣자니 대군의 강사(江舍)가 그 자손들이 흩어져 사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팔리고 풍월정(風月亭) 현판만 아직 남아 있다는데 선릉(宣陵)과 지극히 우애했던 일이 지금까지도 전송되고 있는 터에 하사 집 하나도 대를 이어 지키지 못한대서야 그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호조가 값을 변상하고 되찾도록 하라.”
하였다. 진전(眞殿)을 배알하고 인정전에서 조참을 행하면서 뜰에 있는 제신들에게 유시하기를,
“금년 이날이 바로 우리 선왕께서 왕위에 오르신 회갑(回甲) 날이다. 이 문은 선왕께서 납시던 문이요, 이 조정은 선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조정이다. 이날 이 의식이 어찌 관첨(觀瞻)을 위한 것이겠는가. 이 공고한 기반과 영광스런 경사가 뿌리 있게 전래되었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지금 이 뜰에 나와 있는 제신들도 옛날 선왕을 섬기던 사람 아닌 자 누가 있겠는가. 혹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바로 그대 조부가 우리 선왕을 모시고 대대로 충정(忠貞)을 바쳐 그것을 자손인 그대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우리 어찌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면서 서로 도와 다스려나가야 되지 않겠는가. 선왕의 덕을 천양하고 업을 이어가며 길이 후손들을 복되게 하는 일은 내가 할 일이고, 서로 공경하고 협동하고 정백(精白)한 마음으로 왕실을 돕는 일은 신하들이 할 일이다. 아, 그대들이여, 각기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여 나 한 사람을 떳떳하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
하였다.
사대신(四大臣)과 삼장신(三將臣)·사절도(四節度) 그리고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齊), 증 판서(贈判書) 이정숙(李廷熽)에게 제를 내리고, 증 판서 조성복(趙聖復), 증 참판 김성행(金省行)은 정려(旌閭)를 했으며, 고 상신(故相臣) 정호(鄭澔)·민진원(閔鎭遠), 고 판서(故判書) 이만성(李晩成)의 손자를 임용하였다. 하교하기를,
학성군(鶴城君)은 그가 갑술생(甲戌生)인데 내 그를 볼 때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옛날 이날에는 시위(侍衛)로 참여했었는데 금년 오늘에는 또 보검(寶劒)으로 시위하고 있으니 어찌 그를 표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특별히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잔치와 풍악을 내렸다.
9월에 친히 태묘(太廟)에 제사를 올리고 영종 대왕(英宗大王)·정성 왕후(貞聖王后)·정순 대비(貞純大妃)·경모궁(景慕宮)·혜경궁(惠慶宮)에 존호를 올렸으며, 인정전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은 후 중외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였다.
천둥이 일자 하교하기를,
“밤에 번쩍번쩍 꽝꽝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비록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인자하신 하늘이 그렇게 분명한 경고의 뜻을 보이셨으니, 자신을 반성하고 살펴볼 때 그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옛날에도 10월에 천둥이 일면 감선을 했었다. 그런데 10월 절후(節候)가 26일에 이미 들어 있어 달은 9월이라도 9월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 3일을 감선했고 삼사(三司)의 신하들은 각기 교지에 응하여 글월을 올렸다.
겨울에, 각신(閣臣)들로 하여금 《일성록(日省錄)》을 편수하라고 명했다. 왕이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하룻동안 한 일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때 와서 기거주(起居注) 기록이 착오와 누락이 많다 하여 별도로 편수하도록 명하고 증자(曾子)의 일삼성(日三省) 뜻을 따 《일성록》 이라고 명명하였다.
9년 1월 사단(社壇)에다 기곡제(祈穀祭)를 올리고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 단향(壇享)은 옛날로 치면 바로 방구(方邱)7546) 이다. 질그릇 바가지를 쓰고 형기(鉶器)에 국을 담아 땅바닥을 쓸고 제사를 올리면 그 영령이 넓은 바다와 같아 어디고 없는 곳이 없으므로 주·부·군·현을 막론하고 사직(社稷)에 관한 책임은 다 있는 법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보면 여러 도의 사단이 황폐한 곳이 많아 단의 담들이 무너지고 살문[箭門]이 쓰러지고 했는데도 수재(守宰)들이 그를 성황당 등 다른 단들이나 똑같이 보아 정성들여 제사 모시는 막중한 곳을 나무하고 꼴 먹이는 장으로 묵혀버렸다고 하니 제사도 의식대로 모시지 않고 제물도 정결할 리 없으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수령이라면 그 직책 중에서 민사(民社)를 관리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 거기에 정성을 쏟지 않는다면 그 나머지야 볼게 뭐가 있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각읍에 경계의 공문을 보내 사단을 다시 수리하고 그곳을 지키는 교졸(校卒)을 둘 것이며, 표를 세워 경계를 정하여 잡인들이 못 드나들도록 각별히 금지하고, 매 월초 월말에 영문(營門)에다 그 현황을 보고하면 영문에서는 그것을 다시 예조에 보고하여 근만(勤慢)을 살피는 데 참고가 되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양호(兩湖)의 수운(水運)이 시간이 많이 걸려 기한을 넘기기 일쑤이고 걸핏하면 또 물에 잠기곤 하여 경비는 점점 바닥이 나가고 그 지방의 거주민에게 끼치는 폐단도 많았다. 왕은 그를 걱정하여 대신 이하 제신들 의견을 물어 한강의 배를 대오로 짜는 제도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하여 4개 진(鎭)의 별장(別將)들로 하여금 각기 관할을 정해 따로따로 맡아서 거리의 원근에 따라 소요되는 기일을 정하고, 안배된 물량을 다시 운반하여 각 창고에다 나누어 저장하게 함으로써 우선 어려운 인력 동원비를 줄이고 이어 호송에 관한 법규까지 정하게 하는 등 비변사로 하여금 그에 따른 세부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도에 명해 의승(義僧)들의 교구(矯捄) 방안을 각별 강구하여 시행하게도 하였다.
태릉(太陵)·강릉(康陵)을 배알하였다.
전 현감 김이용(金履容)이 상변하여 이율(李瑮)·양형(梁衡)·홍복영(洪福榮)·문양해(文洋海)·주형채(朱亨采)·김두공(金斗恭) 등을 친국했는데, 복영홍낙순(洪樂純)의 자식으로서 국영(國榮)·낙순의 죄가 탄로나자 복영이 국가에 대한 원한을 품고 불궤(不軌)를 저지를 생각으로 이율·양형·문양해 등과 짜고 비결에 가탁하여 거짓말을 퍼뜨리고 영남 하동(河東) 땅을 근거지로 돈을 모으고 집을 짓고서 불일간 거사를 하려고 모반 준비가 완료 상태에 있었다. 그들이 국청에서 신문을 당하게 되자 그들은 귀신을 끌어다 대고 성명도 없는 것들을 끌어대면서 그 옥사를 갈팡질팡하게 만들려고 하였고, 각도에서는 도신(道臣)·수신(帥臣)의 밀계(密啓)가 하루에 너댓 차례씩 올라왔는데 이때 상이 하교하기를,
“병신·정유년 이래로 난역(亂逆)이 늘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국가에 죄 지은 무리들이 난리가 일어나고 화환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터무니없는 말로 허풍을 치며 사람들 마음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요사스럽고 사리에 당치도 않은 허다한 말들이 각지에 전파되고 있으나 그들의 진짜 소굴은 지금도 그대로 있는 것이다. 지리산·묘향산이 그 둘레가 비록 넓고 멀다고 해도 만약에 진짜 문양해 공초대로 그 속에 선원(仙苑)이 있고 이인(異人)이 있다면 몇 개 읍의 교졸(校卒)을 동원해서 깊은 골짝에서 정상까지 빗질을 하다 싶이 뒤졌는데도 마을 하나 없고 사람 발자국 하나 없단 말인가. 부질없이 죄 없는 백성들만 겁을 먹고 떠들썩하게 되어 열 집 되는 마을에 일곱 여덟 집이 다 비게 만들었다. 설사 불량한 무리들이 혹 딴 뜻을 먹고 있다고 해도 그것쯤이야 소추(小醜)에 불과하지 평민들하고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내 비록 대궐 속에 깊이 앉아 있어 자세히 듣지는 못했으나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어찌 침식(寢食)을 달게 여길 수 있겠는가. 빨리 각도로 하여금 모든 수포(搜捕)와 규찰(糾察)에 관한 일은 그 일체를 정지하여 우리 백성들이 마음놓고 생업을 즐기면서 각기 윗사람을 친히 여기고 어른을 위해 죽을 마음이 있게 하라.”
하였다.
역적들이 다 법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김두공(金斗恭)김하재(金夏材) 조카로서 처음에는 상변한답시고 국정에서 하재의 흉서를 외우던 자였는데 결국 사실을 자백하고 복주되었다.
여름에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고 하교하기를,
“남쪽에는 관아를 두고, 북쪽에는 환시를 두어 그 한계가 대단히 엄하여 한 번이라도 그 한계를 넘어섰다 하면 그를 규제하는 국가의 법이 있었으니, 열성조에서 그들을 심하게 억제하여 수문(守門) 전령(傳令) 이외에는 조정(朝政)에 일체 간여하지 못하게 했었다. 우리 선왕조 때는 또 환시(宦寺)에 대해 더욱 엄한 규제를 했었는데 내가 즉위한 이후 꼭 그대로 할 생각이었다. 특히 궁중에 있으면서 가까이 좌우에서 모셔온 자들이 불순한 무리들과 온갖 방법으로 결탁하여 대내(大內)를 넘보기 위해 어두운 밤에 왕래하는가 하면 좋은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곤 했는데, 지금도 홍계희(洪啓禧)·김상로(金尙魯) 등 충절을 바친다는 무리들이 역적을 모의했던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머리털이 치솟는다. 그로부터 역옥(逆獄)이 한 번 일어나면 뒤이어 곧 환옥(宦獄)도 한 번 일어나곤 했는데 전후 그 국옥(鞫獄) 때마다 나는 되도록 너그럽게 처리하려고 했지만 그 사건에 환관이 관련되어 있으면 그는 조금도 용서치 않았었다. 더구나 무신인 경우 그 활동범위에 있어 엄한 한계를 두어야 할 것이 문신에 비해 훨씬 더한데, 요즘 들어보면 중일제(中日製) 시장(試場)이나 구궁(舊宮) 터에서 기율이 문란하기가 그보다 더할 수 없어 활 쏘다 말고 웃고 떠들고 한다 하니 그 몹쓸 습관이 그대로 점점 자라가게 내버려둬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병조의 장은 각청의 무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두고 상세하게 타일러서 깨닫고 무서워할 줄을 알게 하라.”
하였다.
7월 1일 일식이 있었는데 서울과 외방에 유시를 내려 구식(救食) 제도를 재정비하게 하였다. 그 전에는 각 관아에서 잘못된 전례만을 답습하여 그날 입직한 낭관만 구식에 참여해 왔었는데 지금 와서 옛 법을 다시 살려 장관(長官)이 행사하게 하였고 이어 구식 도구도 재정비하였던 것이다.
명릉(明陵)영우원(永祐園)을 배알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 경제(經制) 서적으로는 세종(世宗)《육전등록(六典謄錄)》을 시작으로 하여 세조(世祖) 때는 《육전》을 절충해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만들었고, 성종(成宗) 때는 《속록(續錄)》, 중종(中宗)《후속록(後續錄)》, 숙종(肅宗)《집록통고(輯錄通考)》, 영조(英祖) 때는 《속대전(續大典)》을 만들었는데 이때 와서 대신(臺臣)들 말이, 즉위 이후 받은 교령(敎令)으로서 장래 영식(令式)이 될 만한 것이면 그를 유별로 모아 책을 만들어서 시행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왕이 이에 이르기를,
《속대전》갑자년7547) 에 만들어진 것이고 선왕의 교령은 갑자년 이후 것도 많지만 어떻게 감히 근대 것만 전폭적으로 취하고 전대의 것은 소홀히 다룰 것인가. 그 뿐 아니라 원전(原典)·속전(續典)이 각기 따로따로 있으면 참고하기에도 불편한 점이 있으니 원전과 속전 및 옛 교령 지금 교령을 모두 합해 한 책으로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두서너 경재(卿宰)가 그 일을 맡아하고 대신(大臣)이 모두를 총괄하게 하였는데, 책이 완성되자 이름을 《대전통편》이라 하고 중외 각지에 나누어 보냈다. 그리고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대전통편》에 새로 더 넣은 조항은 나로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한 것으로 사율(死律)에 관한 사항은 감히 일개 조도 더 넣지 않았다.”
하였다.
진장각(珍藏閣)에 나아가 황조(皇朝)의 어필(御筆)과 어화(御畵) 그리고 열성조의 어제(御製)·어필·어화·고명(誥命) 두루마리들을 열람하다가 영종조에서 편찬한 《갱장록(羹墻錄)》을 발견하고는 하교하기를,
“열성조의 치법(治法) 정모(政謨)가 모두 이 속에 들어있다. 보감(寶鑑)은 체제가 편년체(編年體)이고 이 녹(錄)은 부류별로 모아놓은 것이어서 내용은 같은 내용이지만 열람하기 편리하기로는 녹이 더 긴요하니 이도 속성(續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고, 내각의 제신들에게 명하여 지문(誌文)·행장(行狀)·보감·실록(實錄) 및 정원일기(政院日記) 등에서 뽑아 부류 별로 편찬하여 장차 주연(胄筵)강의 때 참고 자료가 되도록 하게 하였다.
《병학통(兵學通)》이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 군제(軍制)는 오로지 《병학지남(兵學指南)》 만을 적용해 왔는데, 왕이 너무 소루한 것을 걱정하여 새로 조련에 관한 정식(程式) 등을 부류대로 모으고 또 강(綱)과 목(目)을 따로 세워 한 질의 책을 만들어 인쇄 반포하였다.
네 국조(國朝)의 어제·어필비를 서울 동남방에 위치한 관왕묘(關王廟) 안에다 세웠다.
10년 1월 1일 일식이 있어 감선·구언을 하고 인정문에 나아가 조참을 받았다. 그리고 경재(卿宰)와 시종(侍從)들은 앞으로 나와서 소견을 아뢰고 백관들은 써서 올리라고 명했는데 대신에서부터 위사(衛士)에 이르기까지 모두 3백 63명이 그에 응하자, 그를 다 친히 보고 비답까지 내렸었다.
조관(朝官)은 나이 80이상, 서민은 나이 90이상이면 매해 말에 서울의 경우 오부(五部)가 찾아내고, 지방인 경우는 그 지방관이 직접 방문한 후 한성부 또는 각 감영에 보고하여 알리게 하였고, 세초를 기해 가자(加資)에 관한 하비(下批)를 하면서 부인(夫人)의 봉작(封爵)도 그에 준해 하도록 하였는데, 일백 세 이상인 사람에게는 동지중추를 주고, 급제 연한이 일주갑을 넘긴 자는 대소과를 막론하고 자급 하나를 특가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했으며, 한성부에 명하여 서울과 지방의 임자 없는 해골을 모두 묻어주도록 했는데 모두 37만 9백 79곳이나 되었다.
효릉(孝陵)·희릉(禧陵)을 배알하고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에게 제(祭)를 내렸다. 그리고 언제나 능원(陵園) 행행 때면 각 조(朝)의 국구(國舅)와 왕자(王子)·공주(公主)·옹주(翁主) 그리고 당시에 등용되어 군신간 의기가 상합했던 명경(名卿)들 묘에도 두루 잔을 부어 추선(追先)의 감회를 표했었다. 영우원을 배알했다.
여름에 옹막리(甕幕里)에 화재가 발생하여 가옥 3백여 호가 연소되었는데 왕이 하교하기를,
“하내(河內)에 화재가 났을 때 급암(汲黯)이 국가 법령에 구애 받지 않고 자기 임의로 창고를 열어 이재민 구호를 했는데 한(漢) 무제(武帝)는 그를 오히려 가상히 여겼었다. 급암은 일개 사신(使臣)이었으면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직분을 다했었는데 하물며 윗사람이 되어 어찌 일부 일부(一夫一婦)인들 살 터전을 잃게 만들 수 있겠는가.”
하고,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대신과 비변사 당상관을 불러 외읍에 적용하는 휼전(恤典)을 모방하여 구제해주게 했다.
영우원 배알 때 전염병이 드세게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에 하교하기를,
“푸닥거리는 예부터 있어왔던 예이니 서둘러 실시해야 할 것이다.”
하고, 사방 교외에다 별려제(別厲祭)를 차리도록 명하고, 또 한성부에 명하여 관할 내의 방곡(坊曲)에 알려 양반 상사람 할 것 없이 자기 자력으로 약물을 준비할 수 없는 자들은 의사(醫司)가 의원을 지정하여 그로 하여금 진찰도 하고 약물도 공급하도록 하게 하고 그 결과를 아뢰게 하였다.
5월에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죽어 왕은 슬픈 생각에 겨를이 없는 처지였지만 그 와중에서도 날마다 유사(有司)들을 단속하여 민간의 유행병 치료에 전력하게 하였으므로 매우 많은 생명이 살아났다.
예조가 무신년 복제(服制)대로라면 자최 기년(齊衰朞年)이어야 하고, 《상례보편(喪禮補編)》대로라면 참최 삼년(斬衰三年)이어야 한다 하여 품지(稟旨)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상제(喪制)는 당연히 《상례보편》과 수교(受敎)를 따라야 하지만 ‘정(正)’과 ‘체(體)’ 그 두 글자에 매우 중대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체(體)이기는 하나 정(正)은 아니다.’라거나 반대로 ‘정이기는 하나 체가 아니다.’라고 하는 문제에 있어 오늘의 상황에서는 모두 혐의가 없지 않다. 따라서 오늘로서는 감히 수교대로 따라야 한다고 무작정 말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하고는, 자최 기년으로 정했던 것이다.
지난번에 군신들이 최복(衰服) 차림에 백화(白靴)를 착용하자, 하교하기를,
“그 가죽신이라는 것이 원래 고제(古制)가 아니어서 당(唐)이나 송(宋)이 인습하여 써오기는 했어도 이미 옛뜻은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 나라는 평상시 복장도 그들이 하는 대로 흉내내자면 그도 미처 못할 입장인데 더구나 최복이라면 그 얼마나 예를 갖추고 있는 옷인데 그 밑에 신발을 가죽신으로 착용해서 될 일인가?”
하고, 삼신으로 바꾸도록 명했었다.
문효 세자효창(孝昌) 묘원에다 장사하고, 사당은 문희(文禧)라고 하였다. 의열묘(義烈墓)·의소묘(懿昭墓)를 배알하고 효창에도 갔었다.
9월에는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죽었다. 정릉(貞陵)을 배알하였다.
겨울에 자전(慈殿)이 언문으로 된 교서를 내려, 암암리에 국권을 바꿀 계획을 꾸며온 국영(國榮)의 죄악상을 열거하고 이어 5월, 9월 연이어 상변(喪變)이 났는데도 제신들이 죄인 다스리는 일을 늦추고 있는 죄를 책하였다. 이에 시임 대신 원임 대신 모두가 경재(卿宰)를 거느리고 뵙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접빈청(接賓廳)에서는, 이담(李湛)에 대해서는 관작삭탈과 함께 적(籍)을 파버리고, 인(䄄)은 왕법(王法)으로 처단할 것을 계청했는데, 그 상소문을 불에 태워버리라고 하였고 제신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강력하게 청했으나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
그보다 앞서 김상철(金尙喆)의 자식 김우진(金宇鎭)이 근신(近臣)으로서 상께 죄 지은 일이 있었는데 뒤에 와서 병신년 봄에 있었던 옥사(獄事)를 핑계 삼아 왕을 현혹시키고 제 죄를 숨길 계책으로 유양(揄揚)의 논을 발론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의 정상을 미워하여 그 직을 삭탈하였고, 구선복(具善復)임오년7548) 에 죄 지은 일이 있었지만 오래도록 병권을 쥐고 있으면서 날이 갈수록 죄악이 익어가고 있었는데 이때 와서 양사(兩司)가 일어나, 우진이담을 위해 혼인을 권했다 하여 국문할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얼마 후 이담의 외삼촌 송낙휴(宋樂休)가 상변하면서, 이담 스스로 자기는 김상철과는 사생을 함께하는 처지이므로 우진이 만약 죄를 당하면 독약을 먹고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고, 또 선복은 자기 아들 구이겸(具以謙)을 시켜 에게 음식도 제공하고 안부도 묻고 한다고도 말하였다. 이에 우진·선복을 국문했는데 우진은 지난날 정리를 생각해서 그랬다고 실토하여 특별히 사형을 감하고 제주도에다 위리 안치하도록 명했고, 선복·과 서로 사통하고 지낸 전후 정상이 모두 탄로나서 법에 의해 복주되었으며, 선복의 조카 구명겸(具明謙)과 가까운 인척으로서 서로 얽혀있었다 하여 국문한 다음 법대로 처치하였다. 그리고 상철(尙喆)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삼사(三司)가 청했으나 왕은 그가 일찍이 원상(院相)을 지낸 바 있다 하여 극형을 가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또 을 법대로 처리할 것을 백관들이 정청(庭請)까지 하였으나 왕은 그때마다 차마 못 듣겠다는 하교만을 내리면서 나흘 동안이나 문을 닫고 수라를 물리치기까지 했는데 대신 이하가 합문에 엎드려 관을 벗고 청하자 을 감형하여 섬에다 안치할 것을 명했다. 그리하여 문관·음관·무관과 유생(儒生)에 시민(市民)들까지 번갈아가며 상소했지만 모두 따르지 않고 과 그 아들들을 모두 강화도에 안치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그래도 대신 이하가 잇따라 소를 올려 강력한 주장을 하자, 하교하기를,
“옛날에 양 효왕(梁孝王)의 옥사7549) 가 너무도 끔찍했는데 효경제(孝景帝)양 효왕 무(武)를 강력하게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은 전숙(田叔)의 충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석하게도 오늘의 조정 신료들은 그 전숙에 대한 죄인이 아닌가. 그리고 나를 왜 그리도 경제와 같이 대해 주지 않는 것인가. 여름 가을에 겪은 일들이 마치 백년이나 지나온 것 같다. 조정에 나와서나 사석에 들어가서나 남에게 꺼림한 얼굴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호소하는 소리들을 들으면서부터는 마음이 바람 앞의 깃발처럼 흔들려 새벽까지 잠도 못 이루고 끼니가 되어도 먹지 못해 나도 모르는 사이 흰머리가 하나하나 생겨나는 것이다. 만에 하나 내 뜻을 따라주지 않고 계속해서 소란을 피운다면 나도 나대로 미리 생각해 둔 바가 있다. 더구나 지금 섣달 그믐이 하루 이틀 밤밖에 남지 않았으니 명년 정초부터서는 번거롭고 시끄러운 것들은 싹 씻어버리고 좀 기쁘게 살 수 있도록 경들에게 거듭 바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도 두루 깨우쳐 모두 편안한 안식처를 갖게 하라.”
하였다.
11년 1월 자전(慈殿)께 존호를 더 올렸고, 종묘 사직이 다시 안정을 찾았다 하여 군신들이 공덕을 천양할 것을 청해오다가 이때 와서 책보(冊寶)를 올렸었다. 효창묘에 갔었고, 2월에는 건원릉·원릉을 배알했다. 경술일에 수빈(綏嬪) 박씨(朴氏)와 가례를 올렸는데 주부(主簿) 박준원(朴準源)의 딸이었고 궁호(宮號)는 가순(嘉順)으로 정했다. 지난해 겨울 자전이 언교(諺敎)를 내려 빈(嬪)을 간택하라고 했던 것인데 이때 와서 그 예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름에는 원주(原州) 사람 김동익(金東翼)·정진성(鄭鎭星)제천(堤川) 사람 유득겸(柳得謙) 등의 역모 사건이 발각되어 그들을 체포 국문하고 곧 사신을 원주 감영으로 보내 조사하게 하여 그 역적들 모두가 법에 의해 복주되었다. 그해 봄부터 기호(畿湖) 사이에 유언비어가 갑자기 떠돌아 촌민들이 모두 도망가 숨는 바람에 온 마을이 거의 비다시피 했다가 며칠 지나서야 안정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와서 상변한 자가 있어 알고 보니 바로 동익 등이 선동한 것이었다.
어제 비문을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에다 세웠는데 그곳은 바로 환조(桓祖)태조(太祖)가 살던 마을이고 정종(定宗)·태종(太宗)이 탄생했던 터로서 그해 정미년이 바로 탄생한 회갑(回甲)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 왕은 일단 생각이 선조들 공렬을 천양하는 데 있어 경흥(慶興)적지(赤池)적도(赤島), 덕원(德源)용주리(湧珠里) 등지에다도 모두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였다.
조시위(趙時偉)제주도에 위리 안치하도록 명했다. 시위가 경자년 이후로 척리(戚里)를 자칭하면서 조정 일을 제멋대로 좌지 우지하고 임인년 문효 세자의 탄생 때는 큰 소리로 말하기를 “호칭 정하는 일을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 하기도 하여 조정 신료들이 해를 넘겨가면서 그를 국문할 것을 청해왔었는데 그때 와서 그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가을에는 명릉(明陵)소령원(昭寧園)을 배알하고 기임각(祈稔閣)에 나아가 수확 광경을 구경한 다음 술을 내려 농부들 노고를 치하했다. 수길원(綏吉園)을 또 배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양(高陽)에 머물러 그곳 부로(父老)들을 불러 접견한 다음 양주(楊州)·고양 두 읍의 묵은 적곡을 특별 감면하였다. 규장각(奎章閣)이 어제(御製)를 편찬하여 올렸으며 어제 기(記)를 순안(順安)율원정(栗園亭)에다 걸었는데 인원 왕후(仁元王后)가 손수 심은 것이었다.
겨울에 천둥이 일어 감선·구언을 하고, 기곡제(祈穀祭)에 있어 섭행하는 의식과 기곡제도 대사(大祀)로 승격시킬 것인지의 여부를 제신들과 논의하였다. 하교하기를,
“선왕조 갑오년에 희생의 품등을 더 높이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성상의 그 뜻을 알 만하지 않은가. 그리고 단향 의식도 옛날에는 미비되었다가 지금 와서야 갖추어졌는데 그것은 본사(本祀) 의식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춘향·추향 그리고 섣달 대향(大享) 때도 서계(誓戒)에 있어 친림(親臨) 절차는 없었다. 선왕조에 와서야 비로소 중국의 옛 제도를 따랐던 것인데 시향(時享)에 있어서도 향사 의식을 그렇게 높였다면 더구나 기곡제 같은 대제(大祭)에 있어서야 말할 게 뭐 있겠는가. 내년 봄부터는 상신(上辛)의 기곡제는 춘향·추향 및 섣달 대향 때 의식을 그대로 준용하고 서열도 대사 서열로 승격시키라.”
하였다.
연행(燕行) 때의 문단(紋緞) 금령을 거듭 강조하였다.
《문원보불(文苑黼黻)》7550) 이 완성되었는데 바로 이 나라 문원(文苑)의 장정(章程)이었다.
12년 1월 하교하기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무신년 정월 을해일에 천자 위에 올라 즉위 원년 연호를 홍무(洪武)라고 했었는데 그해가 다시 돌아왔고 간지(干支)로 쳐서 이달에 마침 그날이 들었으니 어찌 그냥 넘기겠는가.”
하고, 그날 두 봉실(奉室)을 배알하였다.
3월에 하교하기를,
“이해 이달은 바로 우리 선대왕이 위무를 선양하여 병란을 평정하신 해요 달이다. 음모가 영남·호남에서 꾸며져 기전(畿甸)까지 곧바로 밀고 올라왔는데 실지(失志)한 무리들이 내응을 하고 밖에서는 부정한 도당들과 힘을 합하고 있었으므로 그때의 아슬아슬함이란 위태롭기 머리털 하나 사이였었다. 그 당시 만약 신명과 같으신 용단과 죽이지 않고도 상대를 굴복시킬 성무(聖武)로서 예의로 승리를 이끌고 그리하여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받은 그러한 입장이 아니었던들 어떻게 그 거세고 흉측한 무리들을 수습하고 교화하여 잠시잠깐 사이 이 나라를 태산 반석 위에다 올려놓았겠는가. 그때 그날은 돌아왔건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산이 높고 물은 맑은 것일 뿐이니 그때를 추억하며 느끼는 이 소자(小子)의 마음으로서 어찌 충성과 노고에 보답으로써 옛날 나라를 편케 하셨던 분들이 받은 아름다운 천명에 대해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책훈(策勳)되고 순절(殉節)한 신하들 그리고 고 상신(相臣) 최규서(崔奎瑞)에게는 제물을 내리고, 고 재신(宰臣) 홍경보(洪景輔)·오광운(吳光運)에게는 시호를 추증했으며, 고 영백(嶺伯) 황선(黃璿)의 후손을 찾아 기용했었다. 그리고 또 각도에 명하여 당시 정벌에 참여했던 장사로서 현재 살아있는 자와 의를 위해 싸우다 순절한 자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모두 포장(褒奬)하고 수록(收錄)하도록 했으며, 고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에게도 시호를 내리고 제주까지 내렸다.
왕은 임오년 이전의 자기 직분을 다했던 신하들을 추념하여 서지수(徐志修)·이이장(李彛章)·윤숙(尹塾)·임덕제(林德躋)·한광조(韓光肇)·조중회(趙重晦)·임성(任珹)·이원익(李元翼) 등을 모두 표장(表奬)하였다. 특히 이종성에 대하여는 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지킨 충성을 칭찬하면서 은례(恩禮)가 남달랐으며 한익모(韓翼謩)는 그 이름이 《명의록(明義錄)》에 올라 있었는데 그가 임오년에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하여 그의 충절을 인정하고 죄는 씻어버렸다.
여름에는 영우원을 배알했고, 가을에는 정릉(靖陵)선릉(宣陵)을 배알하기 위해 대가가 서빙고(西氷庫) 나루에 머물러 있었는데 밤 사이 강물이 불어 선창이 불완전했으므로 제신들이 수레를 돌릴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선창이라는 것이 별것 아니나 그를 맡아 관리하는 자가 따로 있고, 거가(車駕)는 이미 만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길을 떴는데 어찌 작은 물줄기 하나에 막혀서 어가를 그냥 돌릴 것인가.”
하였다. 여러 장신(將臣)과 호조·공조의 판서, 도신(道臣)·수령(守令)들을 명해 힘을 합하여 과천(果川)·광주(廣州)의 백성들을 독려하게 하였는데 거기에 대가 수행 군병(軍兵)과 좌우의 구경꾼들까지도 모두 앞을 다투어 부역을 한 바람에 날이 저물기 전 역사가 끝나 대가가 강을 건넜다. 능 배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대가가 선창에 이르자 과천·광주의 거민들을 불러놓고 하교하기를,
“어제 언덕 양편에서 구경하던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부역하는 것을 보니 민심을 알 만하다 향적(餉糴)의 첨가분을 특별히 감제해 주라.”
하였다.
온릉령(溫陵令) 최창국(崔昌國)이 상소하여 중묘(中廟)에 배향된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의 출향(黜享) 문제를 대신들과 논의할 것을 청하였는데, 하교하기를,
“그 세 사람의 죄는 숨기기 어려운 죄로서 역사에 기록되고 야사(野史)로도 전해지고 있으므로 그들을 아직까지 출향 않은 것을 가지고 궐전(闕典)이요 흠사(欠事)로 삼은 것은 사람 마음은 다 같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이며 공론이 어떻다는 것도 알 만한 일이다. 그러나 선왕조에서도 이르시기를 ‘복위(復位) 이후 그 세 신하는 정식(庭食)하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니 두려워하는 마음이야 그들 셋에게 높이높이 위에 계시는 선왕으로서야 무슨 두려움이 있을 것인가.’ 하셨듯이 도량 넓고 덕이 후하신 성후(聖后)로서야 어찌 자질구레하게 그따위 일에 마음 쓰시겠는가. 그리고 사왕(嗣王)의 도리로서도 오직 그 중흥(中興)의 업적을 중히 여기고 넓은 도량 후하신 덕을 그대로 본받는 것 그것이 계술(繼述) 아니겠는가. 바다같이 넓고도 깊은 성후의 가르치심이 분명히 기주(記注)로 남아 있으니 그 셋 출향 문제는 그대로 접어두라.”
하였다.
겨울에 우통례(右通禮) 우정규(禹禎圭)가 상소로 부인들 다리에 관한 폐단을 말하였으므로 대신 이하 제신들을 불러 그를 금지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물은 결과 제신들 모두가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윤음을 내리기를,
“선왕께서 왕위에 계시던 50년 동안 가장 큰 시정 목표로 삼으신 것이 다섯 가지 있는데 감필(減疋)·준천(濬川)·금주(禁洒)·호혼(互婚)·거체(去髢)이다. 이 가운데 위의 두 건은 벌써 시행되어 수십 년 동안 백성들이 사랑으로 돌봐주신 혜택도 입었고 물에 잠기는 걱정도 면할 수가 있었으나 아래 세 건은 잠시 시행하다가 금방 그만두었는데 그것이 물론 선왕의 본의는 아니었다. 그러나 술은 그것이 제사를 중히 여기는 뜻도 있고 백성들 생명을 중히 여기는 뜻도 있어 금하는 것도 성덕(聖德)이요 터놓은 것도 성덕이므로 감히 다시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호혼 제도는 그 이해(利害)를 감히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다리를 얹는 것으로 이는 꼭 고쳐야 하고 또 고쳐지기도 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 얹는 것을 금하는 일은 그것이 바로 선왕의 뜻을 밝히고 훌륭한 사업을 이어가는 일 중의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이 나라 부녀자들이 다리 얹는 일은 일체 고쳐야 할 것이다. 이 명령이 내려진 이상 오직 시행이 있을 뿐 다시 반복은 없을 것이며 금석(金石)은 부서질지언정 이 금령은 늦춰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조정에 있는 모든 신료(臣僚)들 그 누가 감히 다리 얹는 일을 다시 거론하여 듣기 번거롭게 하겠는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 집 가장(家長)이 벌을 받는 것으로 유사가 따로 있어 처리해나갈 것이다.”
하고, 사목(事目)을 만들어 팔도에 반포하도록 명했다.
관북(關北)에 기근이 들어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이어 북관(北關)의 기민정책을 감독하게 하였다. 의열궁(義烈宮) 묘호를 고쳐 선희(宣禧)라고 하였다.
13년 봄에 영릉(永陵)·순릉(順陵)·공릉(恭陵)을 배알하고 또 장릉(長陵)을 배알한 후 하교하기를,
“조상의 고향조차도 조심하고 존경하는 것인데 하물며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이겠는가. 선왕조 신해년에 본릉으로 옮겨 심은 것은 효묘(孝廟)가 손수 소나무와 삼나무를 심었던 고사를 따른 것으로서 지금 저렇게 푸른데 만약 표를 해두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하고, 영종이 손수 심은 잣나무를 구리로 에워싸게 하고서 ‘수식(手植)’ 두 글자를 새겨두었다.
그때 왕은 원침(園寢)을 옮길 뜻을 이미 결정하고 신해년에 있었던 일에 느끼는 바 있어 먼저 장릉(長陵)을 배알한 다음 홍릉(弘陵)·창릉(昌陵)·명릉(明陵)을 두루 배알했고 7월에는 영우원을 옮겨 모실 절차를 정하였다. 왕은 즉위 초부터 원침의 형국이 너무 좁고 자리도 좋지 않다 하여 계절 따라 살피러 올 때마다 근심 걱정에 싸였었고 언젠가는 또 지사(地師)를 명하여 선릉(先陵)의 표해둔 곳과 기호(畿湖)의 여러 산들을 답사하게 하였던 바 지난 기해년에 정해두었던 수원(水原)화산(花山)이 가장 좋은 자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와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여 대례(大禮)를 서둘러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왕은 대신(大臣)·각신(閣臣)·예관(禮官)·종친(宗親)·의빈(儀賓) 그리고 문관·음관·무관 2품 이상을 다 불러 그 상소문을 보이자 입을 모아 이르기를,
“도위(都尉)의 상소야말로 종묘 사직을 위한 한도 끝도 없는 대계(大計)이온데 감히 이의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은 울면서 하교하기를,
“산리(山理)가 있는지 없는지 그야 내가 어떻게 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선유(先儒)들도 저기가 좋겠다 여기가 좋겠다라고 한 말들이 있는 것을 보면 역시 그러한 이치가 없다고 할 수도 없겠으나 그러나 그 술인(術人)들 말만 믿고 경솔하게 영역(瑩域)을 옮긴다는 것은 필부·서인으로서도 그래서 안 될 일인데 더구나 국가의 지극히 중대한 일이겠는가. 다만 나에 있어서는 너무나 원통한 한이 수십 년을 두고 지금까지도 밤낮 마음에 맺혀 있어 부모의 장사를 제대로 치르지 못해 흙이 피부에 닿는다는[土親膚] 이 세 글자만 생각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싶은 것이다. 도위가 상소문 내에다 5개 조항을 열거했는데 그것은 도위 일개인의 말이 아닌 것이다. 지금 내 뜻이 먼저 정해져 있는데 다행히도 모두가 의견을 같이하고 있으니 옮겨 모시는 일을 서둘러야겠다. 그런데 옮겨 모시자면 수원화산만한 곳이 없다. 신해년의 의궤(儀軌)가 있고 옛분들의 문자에도 이미 정론이 있으니 이제야 숙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수원 그 한 곳을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 오늘까지 기다려주었으니 그것이 어디 사람 힘으로 될 일인가.”
하여, 제신들이 같은 목소리로 칭하하였다. 이에 대신과 예관 그리고 서운관·장작감의 제신들을 명하여 우선 영우원 봉심부터 하게 했는데 여러 사람들 의견이 도위의 상소 내용과 꼭 들어맞았고 또 새로 지정한 수원 땅도 봉심하게 했는데 모두가 하늘이 만들어둔 길지라고 하여 이에 화산계좌(癸坐)7551) 바닥에다 원침을 정하고 계축년 영릉(寧陵) 천장 때와 신해년에 장릉(長陵) 천장 때의 의궤를 참고 모방하여 행하기로 하였다. 원침을 정한 후에는 또 상설(象設) 일을 계획하도록 하면서 총호사(摠護使)에게 하교하기를,
“물자를 절약하기 위해 자기 어버이에게까지 절약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성인의 교훈일진대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는 다하여 되도록 최고로 아름답게 꾸며보고 싶다.”
하고, 병풍석(屛風石)과 와첨(瓦簷) 그리고 상석(裳石) 등을 설치하기로 했다. 또 하교하기를,
“내가 원침 상설에 있어 무엇이든지 최고를 쓰려고 한 것은 광릉(光陵)의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성조(聖祖)의 수교(受敎)도 있는데 만약 이 뒤의 사왕(嗣王)이 오늘의 이것을 보고서 혹시라도 제도에 벗어나는 일을 다시 한다면 그것은 나의 본의(本意)가 아니다.”
하였다.
8월 병진일에 구원(舊園)을 배알하고 원침을 열 공사를 계획했으며 경신일에는 신원(新園)의 원호를 ‘현륭(顯隆)’이라고 정하였다. 그리고 수원의 부치(府治)를 팔달산(八達山) 아래로 이전했는데 신원(新園) 역사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행궁(行宮)을 설치했으며 과천(果川)·시흥(始興)에다도 모두 행궁 설치를 하고 사근평(肆覲坪)에는 창사(倉舍)를, 안양참(安養站)에는 발사(撥舍)를, 노량(鷺梁)에다는 진정(鎭亭)을 각각 두어 원침 배알 때 연로(輦路)가 머물 곳을 마련하였다.
임술일 구원에 가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다음 원침을 열게 된 사유를 고하고 을축일에 원침을 열었는데 왕은 그때 면복(緬服)을 입고 수도각(隧道閣)에 있으면서 너무 슬퍼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가슴이 치밀어올라 곡도 제대로 못하다가 제신들이 강력하게 청한 뒤에야 비로소 수레를 돌렸다. 어떤 의논하는 자가 본생 부모에게는 예(禮)로 보아 면복이 없는 것이라고 하자, 왕이 듣고는 울면서 이르기를,
“내가 옛날 최마(衰麻)를 입어보지 못했기에 지금 추복(追服)한다는 뜻으로 이 원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보려는 것이니 예로 본들 무슨 큰 잘못이랴.”
하였다.
10월 갑인일 구원에 가 현궁(玄宮)을 꺼내고 길흉 간의 의장(儀仗)이 펼쳐진 가운데 찬궁(欑宮)에다 빈소를 꾸몄는데 현궁의 체백을 모시고 나올 때 왕은 허겁지겁 울부짖으면서 걸어서 영순(靈輴) 뒤를 따랐고 빈소가 차려진 뒤에는 엎드려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새벽까지도 곡성이 멈추질 않았다. 그리하여 성상의 체후가 갈수록 위태로운 상황이었지만 발인 행사 등 모든 일과 신원 역사 등을 지시하는 데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그날 왕이 울면서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옛 광중에 그렇게까지 갖가지 재해가 있었는데도 차마 28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현궁을 거기에다 모셔두었으니 나의 불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부터나 그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함이 다소라도 풀리려는지. 이제 제사 모시는 절차와 원침 주변에 갖출 것을 다 갖추어서라도 그것으로나마 작은 정성을 표해야겠다.”
하면서, 말 따라 눈물이 계속 흘렀던 것이다. 그리고 빈소가 차려진 후 각종 제사와 아침·낮·밤의 궤전(饋奠)에 있어서도 그를 모두 친히 행하고 제물 올리는 일만 대행시켰는데 대체로 양암(亮陰) 의식을 취한 것이고 또 우제(虞祭)가 아니면 목욕하지 않는다는 예(禮)의 뜻도 따른 것이었다.
정사일에 상여가 떠나면서 독진(纛津)으로 강을 건넜는데 그전에는 으레 용주(龍舟)를 써왔으나 그때 처음으로 부교(浮橋)를 이용하였다. 왕이 처음에는 발인 뒤를 따를 계획이었으나 자전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강어귀까지만 왔다가 환궁하였고 이튿날 새벽에야 뒤쫓아 출발하여 수원부(水原府)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때 상여는 이미 신원에 도착해 있었다.
기미일 신원에다 현궁을 내리고 그날 밤 원침 주변의 공역(工役) 과정을 친히 살펴본 다음 날이 밝아서 어가를 돌려 과천에서 저녁을 나고 그 이튿날 환궁했는데 빈소를 열었을 때부터 현궁을 내릴 때까지는 하늘이 맑고 겨울 날씨가 봄 같다가 대가가 돌아오자마자 큰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면서 날씨가 몹시 추워져 마치 하늘이 도운 것 같았다.
왕이 친히 지문(誌文)을 쓰고 제신들에게 하교하기를,
“지문이란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인데 차마 쓰지 못할 것을 쓰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도 말을 했다. 그 이유는 양궁(兩宮)7552) 의 사랑과 효성을 밝히고 그리하여 이 소자(小子)의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를 유궁(幽宮)에 간직하여 백세 후의 참고가 되게 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내탕전(內帑錢) 십만 꿰미를 내려 수원의 치소(治所)를 옮기고 집 짓고 하는 데 쓰도록 했으며, 이어 수원 백성들에게 유시하기를,
“이 화산은 그전부터 영기가 모여진 곳으로서 원침을 정하기로 결의하고 드디어 옮겨 모시는 일을 마쳤으니 이 고을은 바로 나의 묘가 있는 고을이며 너희들은 바로 이 고을 백성들이다. 나는 앞으로 너희들을 내 식구처럼 여기고 먹을 것도 넉넉하게 하고 가산도 풍족하게 해주어 너희들로 하여금 생활의 안정을 누리고 생업을 즐기도록 하여 내가 할 책임을 다하고 내 마음도 여유있게 가지리라. 보통 행차하는 연로가에도 은택이 베풀어지는 것인데 하물며 이 고을 이 백성들이겠느냐. 원침 부근의 면리(面里)와 그곳에서 옮겨간 백성들은 앞으로 십년 동안 복호(復戶)하고, 읍 전체의 면리는 일년 동안 복호할 것이며, 온천 행행의 행차를 두 번씩이나 본 부로(父老)들은 조관(朝官)인 경우 70세 이상, 사서인은 80세 이상이면 가자(加資)하고, 수원 관내의 유자와 무인에 대하여는 내년 봄 전성(展省) 때 과거시험을 보일 예정이니 너희들도 내가 너희들을 무마하려고 하는 이 충심과 지성을 이해하고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원침을 잘 보호하고 영원토록 변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왕이 원침 옮겨 모시는 일을 하려면서 내사(內司) 관원을 강화도로 보내 인(䄄)을 불러들여 남 모르게 성 안에까지 들어왔었는데 조정 신료들은 까맣게 모르는 사실이었다. 이윽고 자전(慈殿)이 누차에 걸쳐 언교(諺敎)를 내려 제신들을 책망했으므로 대신 이하가 청대를 했는데 만나는 것을 불허하였고 문을 밀치고 들어갔어도 접견을 하지 않았다. 자전은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을 그 배소로 다시 압송하도록 하였으며 여러 대신들이 금부의 당상관과 포도 대장으로 하여금 자전이 시킨 대로 받들어 거행하도록 했는데 왕은 그 즉시 수레를 챙기라 하여 돈화문(敦化門) 밖까지 이르렀다. 이에 재신들은 죽기를 작정하고 수레를 잡고 늘어졌기 때문에 수레가 더 이상 가지를 못하고 부득이 대내로 돌아왔다. 그해부터는 해마다 한 차례씩 제신들은 아무도 모르게 을 서울로 불러들이기도 하고 뜻밖에 대가가 친히 가서 그를 만나보기도 하면서 별영(別營)·태창(太倉) 남영(南營)·북영(北營) 등 여러 곳을 행행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일체 비밀에 부치고 군대를 시켜 호위했기 때문에 문을 밀치고 들어갈 수도 없었고 뜰에 가서 간하려 해도 전달이 되지 않았다. 왕은 원래 도량이 넓고 선(善)이라면 금방 따랐지만 유독 그 일에 있어서만은 일체 권도를 썼던 것이다. 그리고 늘 제신들에게 말하기를,
“그를 두고 이른바 주공(周公)의 과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공의 심정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면 내 마음도 이해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제신들이 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왕은 곧 화를 내고 꾸짖었으며 대성(臺省)에다 금방(禁榜)을 걸어두고 그 문제라면 말을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말할 책임이 있는 자에게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 어찌 치세(治世)의 일이겠는가. 나도 마지못해 하는 일이다. 시간을 두고 조정 분위기가 다소 안정이 되면 그때는 하나도 숨길 것 없이 문호를 활짝 열 것이니 그동안은 억지로 쟁집하지 말라.”
하였다.
양녕 대군(讓寧大君) 사당에 사액(賜額)을 내려 지덕(至德)이라고 하고, 효령 대군(孝寧大君)에게는 사제(賜祭)를 하였다. 왕은 언제나 국가 초기의 우수했던 일족들을 생각하여 진안 대군(鎭安大君) 무덤 앞에도 비를 세우고, 의안 대군(宜安大君) 묘에도 수호하는 사람을 두었으며, 단종(端宗) 때의 다섯 종신(宗臣)에게는 단(壇)을 쌓고 제사까지 지냈다.
14년 봄에 왕이 병석에 누워 한 달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원상회복이 되었는데 이때 제신들이 경하할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뜻밖의 재변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했다가 병이 들어 어버이에게 걱정을 끼쳐드렸으니 자신을 나무라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감히 무슨 하례를 받을 것인가.”
하였다.
동북(東北)면과 양서(兩西)에 기근이 들어 유민(流民)들이 서울까지 들어오자 왕은 조묘를 배알하고 연(輦)을 운종가(雲從街)에다 세워두고는 유민들을 불러 위로한 다음 식량과 옷가지를 내려주고 선전관(宣傳官)을 나누어 보내 각기 본도에 가서 죽은 자는 안장해주고 도신(道臣)과 수령들에게 죄를 내리도록 하고 이어 각도에 경계를 내려 안집(安集)시키고 무마하는 정책을 강구하게 하였다.
현륭원(顯隆園)을 배알하고 주위 산들을 두루 살펴본 다음 독성 산성(禿城山城)으로 가 경진년7553) 온천 행행 때 구경 나왔던 부로(父老)들을 불러 접견하고는 쌀을 내려주었다. 문묘(文廟)를 배알하고 이어 계성사(啓聖祠)에다 술잔을 올렸는데 그해가 공부자(孔夫子)주부자(朱夫子)가 태어났던 해였기 때문이었다.
황단(皇壇)에 망배(望拜)를 올리고 중국인 아병(牙兵)을 불러 접견한 다음 하교하기를,
“이 나라로 모시고 돌아왔던 중국 사람들에 대해 효종(孝宗)께서는 궁궐 밑에서 붙여 살게 했으며 왕위에 오르신 뒤에는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가구수대로 식량을 공급해주게 하고 뒤이어 곧 훈련원 아병으로 편입시켜 어업(漁業)에 종사하며 살아가게 했었는데 요즘 와서 풍습이 그전만 못하여 심지어는 열무장(閱武場) 안에서 가왜초(假倭哨) 노릇을 하게까지 하고 있으니 중국 천신(薦紳)의 후예들인 그들로서 어떻게 그리도 누추한 일들을 할 것인가. 너무 한심스럽고 애석한 일이다. 오늘이 바로 황단에 망배하는 날이어서 옛 성군에 대한 그리운 감회를 풀래야 풀 길이 없는데 바로잡았으면 좋을 일까지 날짜를 끌 이유가 뭐 있겠는가.”
하고, 중국인들에 대해 아병이라는 이름 대신에 용호영(龍虎營)의 금려(禁旅), 진무영(鎭撫營)의 의려(義旅)·장려(壯旅)들처럼 한려(漢旅)로 호칭을 고쳤다. 그리고 30명으로 인원수를 정해 제향 때 신탑(神榻)을 받드는 일 또는 제찬 차리고 걷고 하는 일을 맡게 하여 충의(忠義)가 하는 일을 대신하게 하고, 또 황단을 수직하는 관(官)도 중국인 자손들이 맡도록 정하여 한려끼리 돌아가며 하게끔 절목(節目)을 만들어 준행하게 하였다.
의소(懿昭)의 묘를 배알하였다.
6월 정묘일에 사자가 탄생하여 호칭을 원자(元子)로 정하고 백관들 하례를 받았는데, 중외의 신서(臣庶)들에게 유시하기를,
“지금 내가 하늘이 내리신 복을 받고 말없이 도우시는 조종(祖宗)의 덕분으로 경술년 계미월 정묘일에 원자가 탄생하였는데 이해는 바로 성현(聖賢)이 나시던 해이며, 이날은 또 자궁(慈宮)께 수(壽)를 비는 날이기도 하다. 게다가 궂은비마저도 활짝 개여 햇살이 그림 같고 오색 무지개가 종묘 우물에 뻗어 있으며 신비로운 빛이 궁궐 숲에 둘러 있으니 이 어찌 하늘이 주신 기쁨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원자 울음소리가 품안에서 나오자마자 어린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어깨가 부딪치고 발에 차이면서 뛰어나와 거리를 메워서 있는 그 좋아하는 빛이라든지 춤이라도 추는 모양이 자기 집안의 경사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정도이니 이는 사람들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에게는 하늘의 복을 누릴 만한 덕도 인심을 얻을 만한 선정도 없는데 나 한 사람의 기쁨에 대해 하늘이 기뻐해 주시고 사람들이 기뻐해주니 내 장차 무엇으로 하늘에 보답하고 사람들에게 보답하겠는가.
상제가 이 나라를 돌보사 우리에게 조윤(祚胤)을 주셨으니, 오늘로부터 국가 운명이 다시 계속될 것이며, 오늘로부터 조종의 공덕이 다시 유지될 것이며, 주(周)나라 본지(本支)의 시7554) 도 오늘을 시작으로 읊어질 것이며, 한(漢)나라 반석(磐石) 노래7555) 도 오늘을 시작으로 퍼질 것이다. 위로 자전과 자궁께서 애타게 바라시던 마음을 풀어드렸고, 아래로 신서(臣庶)들이 우러러 기다리던 숙원을 이루어준데다가 생년 생일까지 성인이 태어나신 해 또는 자궁의 수를 비는 경사스러운 날과 맞아떨어져 우리가 만년 억년 끝이 없으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준 셈이 되었으니, 난들 어찌 하늘에 보답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에게 보답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내 한 번만 베푸는 것이 아니고 자주 베풀 것이니 그를 담당하고 있는 신(臣)은 재용이 떨어져간다고 말하지 말라. 사람들 마음이 화합하면 하늘 마음도 화합하여 비올 때 비오고 볕날 때 볕나 만물이 풍성하고 시절도 풍년이 드는 법이다. 더구나 경술년이라면 예부터 풍년 든 해가 많지 않았던가.”
하고, 이어 대사(大赦)를 했는데 그때 풀려난 자가 모두 1천 1백 54명이었고, 서울 외지 할 것 없이 조관(朝官)은 나이 70세 이상, 사서(士庶)는 나이 80세 이상인 자에게는 모두 가자(加資)를 했는데 그 수가 2만 5천 8백 10명에 달했으며, 1백 세 노인에게는 쌀과 육류를 내리고 각도의 해묵은 적곡 중 병신년 봄 이전의 문부에 마감 정리된 양만큼 모두 줄이거나 면제해주는 일을 단행했으며, 결세(結稅)·어세(漁稅)·염세(鹽稅)·장세(場稅)·사세(寺稅) 등 당연히 조세 항목에 들어있는 것들도 그 수를 감제(減除)하였다.
그리고 경연 신료에게 하교하기를,
“자궁의 하교에 ‘내가 그전에는 생일이 돌아와도 반가운 생각이 없었는데 명년부터는 그날이면 음식 차려 잔치도 하고 즐기기도 해야겠다.’ 하셨다. 내가 40년간이나 자궁을 모셔오면서 한 가지도 자궁 마음을 기쁘게 해드린 일이 없었는데 이번에 하교를 받고 나니 이제 자궁 뵈올 면목이 조금 서는 듯하다.”
하였다.
가을에는 주교(舟橋) 제도를 정하였다. 왕이 원침을 옮겨 모시고는 해마다 한 차례씩 전성(展省)할 예정을 세우고 강을 건널 때 용주(龍舟)를 이용하는 것이 불편한 점이 많다 하여 주교로 바꿔보도록 묘당(廟堂)에 명하여 그에 관한 절목(節目)을 만들어 올리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상의 마음에 안 맞아서 상이 직접 생각을 짜내 《주교지남(舟橋指南)》을 만들고 그대로 실시했다.
그해에 큰 풍년이 들었는데, 감로(甘露)가 내렸다고 말하는 연신(筵臣)이 있자 왕이 이르기를,
“임금으로서는 풍년이 들면 그것이 최상의 상서이지 그 외의 다른 상서들은 바랄게 없는 것이다. 더구나 금년에는 큰 경사까지 겹치지 않았는가.”
하고, 도형(徒刑)·유형(流刑)에 처해진 자의 처첩(妻妾)이 유배지로 가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율문(律文)에 의해 허가해주도록 명했는데 그 역시 그해의 특별 은총이었다.
겨울에 건원릉(健元陵)목릉(穆陵) 원릉(元陵)을 배알했고, 《무예도보(武藝圖譜)》가 완성되었다. 경모궁(景慕宮) 대리 청정 당시 척계광(戚繼光)의 곤봉(棍棒) 등 6기(六技)에다 죽장창(竹長槍) 등 12기(十二技)를 더 보태 그것이 바로 18기(十八技)였는데, 왕이 거기에다 또 기창(騎槍) 등 4기(四技)를 더 늘리고 원도보(原圖譜)와 속도보(續圖譜)를 합쳐 인쇄하여 쓰도록 명했다.
15년 봄에 비변사에 명하여 원침 행행 때의 정례(定例)를 만들게 하고 정례 당상관을 차출하여 매 행행 때마다 그 일을 맡아 거행하게 하였다. 현륭원(顯隆園)을 배알하고, 각 궁방(宮房)이 도서(圖署)를 남발하여 외읍(外邑)을 야금야금 침탈하는 폐단을 금하게 하면서 하교하기를,
“임진년 이후로 토지와 토지 사이의 한계가 흐려져 주객(主客)을 구분하기 어려운 틈을 타 호우(豪右)들이 그를 독차지했기 때문에 공전(公田)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고 재상 유성룡(柳成龍)이 절수(折受) 제도를 창안했던 것이지만 그로부터 2백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토지 사이의 경계가 이미 그어져 있으니 절수라는 명칭을 아직도 그대로 쓰고 있는 그 자체가 이미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속세(屬稅)의 법과 함께 중간에 다 포기했어야 했는데 절수라는 이름만 붙이면 금방 면세(面稅)를 해왔던 그 제도에 대해 늘 개운찮은 생각이 있어왔던 터다. 지금 궁방들이 도서를 남발하는 그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그 나머지야 알 만한 일이 아닌가. 지금 새로 발족한 장영(壯營)이라고 거기에는 이익을 추구하는 무리도 없고 멋대로 팔아먹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지금부터서는 엄한 단속을 재삼 강조하여 궁방이고 영문(營門)이고 아문(衙門)·조신(朝臣) 할 것 없이 별도로 하사받은 토지라고 하더라도 그 절급(折給)한 공문서에 만약 재가 인장이 찍혀있지 않으면 수령이 순영(巡營)에 보고하여 그 즉시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왕은 항상 단종조 제신들에 대해 시대를 초월한 감회가 있어 어가가 노량(露梁)을 지날 때면 곧 육신사(六臣祠)에다 제물을 내리곤 하였다. 경기도 유생들이 상언(上言)하여,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도 그 충효와 절의가 육신들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면서 창절사(彰節祠)에다 추향(追享)할 것을 청해 왔는데, 이에 대해 하교하기를,
“일전에도 노량을 지나다가 육신사가 나오기에 수레를 멈추고 탄식도 하고 행전(行殿)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어나는 감회를 금할 길이 없어 촛불을 밝히게 하고 유제(侑祭)의 글월을 입으로 부르며 쓰게도 했었다. 육신이야 물론 더없이 훌륭하지만 금성(錦城)·화의 같은 이들도 종실 속에서 그와 같은 절의가 나왔다는 것 그 얼마나 더욱 장한가. 그 두 사람 외에도 사육신(死六臣) 못지않은 이들이 많으니 지금 추배(追配) 때 똑같이 시행하는 것이 사실 절의를 장려하고 충절을 포양하는 국가 정령에 부합되는 일이다.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다방면으로 고찰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그때 영월부(寧越府)에 화재가 있어 불탄 민가 사이에 자규루(子規樓) 옛 터가 발견되었는데 바로 단종이 기거하던 곳이었다. 도신이 그 사실을 알려오자, 왕이 이르기를,
“일이 마치 뭐가 느껴져서 그리된 것 같구나.”
하고, 이에 장릉 백성(柏城) 밖에다 단을 쌓아 당시 순의(殉義)한 제신들을 추배하고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도록 명했는데, 정단(正壇)에 32인, 별단(別壇)에 1백 98인, 사실이 분명치 않은 자 8인, 연좌당한 자 1백 90인이었고 이어 배식록(配食錄)을 만들었던 것이다.
빈연(賓筵)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즉위 초부터 마음에 늘 잊혀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균역(均役)에 관한 이해(利害) 문제와 사노(寺奴)에 관한 폐단인데, 균역에 있어서는 감포(減布)7556) 정책이 바로 만세까지 미칠 혜택인데도 그를 맡아 관리하는 신하가 왕의 의도대로 잘 집행을 못했던 것이다. 선왕(先王)께서는 늘 주장하시기를, 어염세(魚鹽稅)는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나 다름 없고 선무포(選武布)7557) 는 결과적으로 백성을 속이는 일이라고 하셨으므로 나도 선왕의 뒤를 이어 그것을 바로잡고 개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수요를 대체시킬 만한 재원이 없어 당장 논의는 못하고 있어도 내가 장영(壯營)을 신설한 것은 나대로의 뜻이 있어서 한 일로 단시일에 무슨 효과를 기대하기란 사실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사노 문제는 지금 백성들 뼈에 사무치는 폐단으로 노비에 관한 법보다 더한 것이 없어 선두안(宣頭案)을 볼 때마다 언제나 마치 내 몸에 병이 있는 듯이 느껴진다. 쇄관(刷官) 제도는 아주 없애서 폐단이 다소나마 바로잡혀지기를 바랐지만 그래도 각도에서는 찾아내는 일을 여전히 하고 있어 그 병은 고칠 약이 없다. 말하는 자들 중에 혹자는, 금년부터 시작하여 신해년에 제정한 법7558) 을 다소 수정해서 쓰는 것이 옳다고 하고, 혹자는 기한이 만료되기를 기다려 양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옳다고 하며, 혹자는 또 과거 응시의 길을 열어주어 스스로 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옳다고도 하고, 혹자는 보충대법(補充隊法)을 만드는 것이 옳다고 하며, 혹자는 그 읍에서 신공(身貢)을 받아 균역청(均役廳)으로 하여금 그 대신 값을 주고 사서 쓰게 하는 것이 옳다고도 하고 있는데, 그 모두가 다 미봉책에 불과한 말들이고 일단 그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그 이름을 없애버리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기자(箕子) 이래로 이미 정해진 명분을 하루아침에 싹 없앨 수도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천(私賤)들이 덩달아 너도나도 본받을 염려도 있다. 그렇다면 사노 폐단은 끝내 바로잡을 수 없는 문제란 말인가.”
하고, 이어 널리 각도에 자문을 구하라고 명했으나 결국 정론을 못 찾고 말았다.
여름에 홍수가 나서 한성부가 집들이 떠내려가고 물에 잠기고 했다고 아뢰자, 각신(閣臣)과 옥당·사관 등을 오부(五部)·사교(四郊)·팔강(八江) 등지로 나누어 보내 위로하게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그 일은 비변사 낭관들이 할 일이로되 특별히 그대들을 보내는 이유는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에서 잊지 않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하였다.
가을에 각도에 명하여 납육(臘肉)을 호서(湖西)의 예대로 경청(京廳)이 공물로 환산해서 바치도록 하였다. 과거에는 경영(京營)에 엽치군(獵稚軍)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옛날의 응사계(鷹師契)이다. 사냥을 나갈 때면 언제나 그 사냥꾼들이 열씩 백씩 무리를 지어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산으로 들로 쏘다니고 마을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하는 변고까지 있었으므로 왕은 그 폐단 때문에 꿩사냥을 하지 말고 대신 값으로 바치도록 명했던 것인데 이때 와서는 또 멧돼지나 노루사냥도 꿩사냥과 다를 바 없다 하여 그것 역시 공물로 환산하여 하도록 명했다.
궁인(宮人) 이씨(李氏)에게 수칙(守則)이라는 작첩과 정렬(貞烈)이라는 호를 내리고 그가 살고 있는 곳을 표하여 ‘수칙 이씨지가(守則李氏之家)’라고 하였다. 이씨는 그전에 경모궁(景慕宮)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여인으로서 늙어 머리가 희도록 초막집을 그대로 지키며 사람들과도 접촉을 하지 않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느끼는 바 있어 표이(表異)의 은전을 특별히 베풀었던 것이다.
사릉(思陵)을 배알하고 어진(御眞)을 베껴왔는데 선왕조 때부터 10년마다 한 번씩 베끼던 고사대로 한 것으로서 한 장은 주합루(宙合樓)에다 봉안하고 한 장은 경모궁망묘루(望廟樓)에다 봉안하고, 한 장은 현륭원 재실(齋室)에다 봉안하였으니, 아침 저녁 정성(定省)의 뜻을 담은 것이다. 뒤에 화령전(華寧殿)에다 봉안하고는 각신(閣臣)에게 이르기를,
“열성조가 다 휘호(徽號)가 있는데 영릉(英陵)효묘(孝廟) 두 조(朝)만은 휘호를 받지 않으셨다. 내 어찌 감히 두 조의 성절(盛節)을 뒤따를 수 있겠는가마는 신축년 표제(標題) 때부터 제신들이 많은 말들을 했었는데 이제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리고 또 연월(年月)만으로 표제한 일은 또 열성조에는 전례가 없었던 일이기도 하다.”
하였다.
겨울에 호남의 도신(道臣)이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자기 아비가 죽었는데 제사도 모시지 않고 사판(祠版)을 불태워버렸다고 아뢰었다. 그 당시 일종의 사도(邪徒)들이 서양(西洋)의 야소(耶蘇) 교리에 젖어들어 연경 책방에서 책을 구입하여 저들끼리 서로 가르치고 익히고 하였는데, 그는 하늘을 속이고 귀신을 홀대하고 임금도 어버이도 다 버리고 윤기(倫紀)를 송두리째 무시하고 명분(名分)이 뒤범벅된 교리로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하고 저들끼리 당여(黨與)를 결성하는 등 경기 지역과 양호(兩湖) 사이에서 나날이 번성 일로에 있었다. 그중의 이가환(李家煥)·정약용(丁若鏞)·이승훈(李承薰)·권일신(權日身) 등이 더욱 두드러진 자들이었으며 최필공(崔必恭)·이존창(李存昌)도 밑바닥 층에서는 가장 깊이 빠져있는 자들이었다. 유사가 그들을 잡아두고 아뢰자, 왕이 이르기를,
“형을 가하여 가지런하게 만드는 것은 덕으로 인도함만 못한 것이다. 내 장차 그 서적은 불태워버리고 그들은 다시 사람으로 만들겠다.”
하고는, 서울과 외지를 막론하고 집에 서양 서적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모두 관에 자수하도록 명하여 책은 모아 불태우고 가환·약용·승훈 등은 견책하여 저들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게 했으며 일신필공은 형조로 송치하고 존창은 호옥(湖獄)에다 가두는 등 형을 가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여 되도록 감화(感化)를 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왕이 그 도계(道啓)를 보고나서는 깜짝 놀라 이르기를,
“이렇게까지 패역 무도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지충·상연에게 모두 대벽(大辟)을 적용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영의 강한 기운이 쇠퇴하면 음의 재앙이 고개를 들듯이 사설(邪說)이 퍼지는 원인은 정학(正學)이 밝지 않아서인 것이다.”
하고, 묘당(廟堂)과 각도에 명하여 경(經)에 밝고 행실이 올바른 선비들을 각기 천거하도록 하였으며, 또 명(明)나라청(淸)나라 초기에 유행했던 패관 소설[稗官小品] 종류를 단속하고, 연경에 가서 서적 구입을 못하도록 금법을 거듭 엄히 했다. 그리고 영남 선비들이 사학에 물들지 않은 것은 바로 선정(先正)들의 유풍(遺風) 때문이라 하여 옥산(玉山)·도산(陶山) 등 서원(書院)에 제를 내리기도 하였다.
《악통(樂通)》이 완성되었다. 왕은 주자가 인정한 채원정(蔡元定)《율려신서(律呂新書)》가 미처 관현(管絃)에 올려지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여겨 그를 다시 손질해서 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장용영(壯勇營)을 신설하였다. 그보다 앞서 임인년 봄에 숙종조(肅宗朝) 고사를 본따 무예(武藝) 출신 및 일찍이 영의 교위를 지냈던 자 30명을 선발하여 번(番)을 나누어 명정전(明政殿) 남쪽 행랑채에 숙직하게 하고, 을사년에 와서 그를 장용위(壯勇衛)라 칭했으며, 또 척계광(戚繼光)의 남군(南軍) 제도를 모방하여 5개 사(司)에 25초(哨)를 두고 그해에 금려(禁旅)의 1번 50명을 감하여 장용위로 옮겼다. 그리고 액외 내금위(額外內禁衛) 규정을 준용하여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를 두고 10명은 사부(士夫)로 충원했으며, 또 선기대(善騎隊) 3초를 두어 훈련 도감의 경기 지역 승호군(陞戶軍)을 그것에 이속시켰다. 기마병·보병 합하여 경향(京鄕)의 군대가 3천 4백 50명이었는데 병조의 별부료 병방(別付料兵房) 규정을 준용하여 병방을 두고 군무(軍務)를 맡아보게 하고는 그를 이름하여 장용영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백성으로부터 많은 조세를 거두어들이던 내수사 장토(庄土)를 없애고 양서(兩西)에는 둔전(屯田)을 두었으며 내외를 막론하고 필요 이상의 경비와 필요 이상의 인원을 줄이고 내탕의 돈을 출자하여 곡식을 각도에다 쌓아두고 병영의 용도에 쓰도록 했다. 그리고 또 제조(提調)를 두어 일찍이 호혜당(戶惠堂)7559) 을 지낸 사람을 골라 임명하였다.
16년 1월에 현륭원을 배알하고 2월에는 영릉(永陵)을 배알했다. 규장각(奎章閣)에 대제학을 두어 문형(文衡) 권내의 사람 중에서 왕지(王旨)를 받아 내각에 추천 임명하도록 했으며, 현직 제학(提學)이 재상 제수를 받으면 자연 올라가 대제학이 되고, 과거 직각(直閣)을 지낸 사람이면 전형 없이 자리가 나는 대로 곧바로 추천이 가능하며 대교(待敎)를 지낸 사람은 역시 남상(南床)7560) 으로 곧바로 추천이 되도록 규정을 정했다.
여름에 윤구종(尹九宗)을 친국하였다. 구종혜릉(惠陵) 앞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 않았던 일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내가 선왕(先王)의 입장이라고 생각할 때 비록 재일(齋日)을 당했지만 친국을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그가 공초를 바쳤는데 진술 내용이 패역 무도하여 지레 죽고 말았었다.
영남 유생 이우(李瑀) 등이 막중한 일임을 빙자하여 의리(義理)를 구현한다는 구실로 임오년 일을 상소로 진술하였다. 왕은 그들을 불러 경(經)과 권(權)의 한계에 관해 개유하고 연본(筵本)을 가지고 돌아가 그 지방 인사들에게도 알리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영남 유생들 상소 이후로 장주(章奏)가 쉴새없이 올라오고 관학 유생들까지도 장주를 올려 기어이 관철하려고 하였으므로 왕이 대신 이하 제신들을 불러 준엄한 하교를 내려 제신들이 합문 밖에서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에 왕이 하교하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그 어느해 일에 대해서는 감히 한 번도 분명하고 속시원한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내가 과연 원수를 숨겨두고 원한을 잊어서 한 일이겠는가? 옛날 선왕께서 갑신년 2월 20일에 대신 이하 제신들을 진전(眞殿) 문 밖에다 부르시고 어필로 손수 쓰신 구주 문자(口奏文字)7561) 를 반포하시며 이르기를 ‘만약 아무해의 일을 들먹이는 자가 있으면 구(耉)·휘(輝)·경(鏡)·몽(夢)7562) 에게 적용했던 법으로 처단할 것이다.’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이렇게 해야지만 네가 드러내지 못한 죽은 네 아비의 뜻을 밝힐 수 있을 것이고, 원통하고 애석한 내 마음도 설명할 길이 있을 것이며, 세신(世臣)들도 너의 본심과 아울러 네 아비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하셨다. 그리고 대신 이하 제신들을 또 재전(齋殿)으로 불러 종통(宗統)을 바로잡는 일에 대한 윤음을 내리셨던 것이다. 그 당시 사실들은 모두 내가 병신년에 상소한 이후 세초(洗草)해 버렸지만 윤음과 진전에 올렸던 구주 문자(口奏文字)는 여전히 사고(史庫)와 《정원일기(政院日記)》에 남아 있다. 그리고 내가 그후 전석(前席)에서 다짐을 했었는데 만약 선왕이 승하하신 후 이제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하여 갑신년에 했던 대답을 모두 번복해버리면 그게 어디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있는 이 섬기듯 해야 하는 도리이겠는가. 뿐만 아니라 당시 하교 시의 ‘통석(慟惜)’ 그 두 글자는 바로 지난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뜻이니 내 그를 폐부에 새겨두었기에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억제하려 해도 억제할 수 없는 것이 그 슬픔이요 막아버리려 해도 막아지지 않는 것이 감정이라서 부자간 천륜으로 볼 때 그 원수가 저기 있어 앉으나 서나 눈에 걸리었다. 그리하여 우선 임시 권도로 을미년 주토(誅討) 때 내가 직접 그 일을 대신 맡았는데 이는 꼭 선왕이 자리에 계실 때 하려고 해서였던 것이고, 그 이듬해 병신년 봄에는 내가 대리 청정을 하면서 눈물 어린 진정소를 올려 천지간 망극한 은총을 받고 차마 볼 수 없는 당시 기록들을 모두 세초(洗草)해 버리라는 특명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 성상께서는 하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사자대(思子臺)·망자궁(望子宮)7563) 보다 훨씬 더 낫고 나도 이제 지하에 가면 볼 낯이 있겠다.’ 하시고, 이어 백관으로 하여금 하례를 올리도록 했으며 호(號)를 주신다는 윤음과 함께 어제의 유서(諭書)와 어필로 된 은인(銀印)을 내리셨다. 그리고 나에게 묘(墓)를 전성하도록 명하셨는데 이상이 대체적인 선왕의 본뜻이었던 것이다.
병신·정유 이후로 자주 일어난 역옥(逆獄)들이 따지고 보면 모두가 그해 그 사건 때문에 일어난 것들이지만 나의 집념은 바로 겉으로는 정사에서 형적(形迹)을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는 내 할 도리를 하면서 조용한 가운데 다스릴 자는 다스리고 하여 위로 성은(聖恩)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아래로 내 이마에 땀이나 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에 대해 북면(北面)을 하고 있는 조정 신료들로서 지금 이 시점에 나더러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내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는 을미년 이전 주토를 당한 자들처럼 난적(亂賊)이요 역신(逆臣)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0년 한 서린 마음으로 어떻게 차마 그 왕언(王言)을 말하며 그 장주(章奏)를 볼 것인가. 그러나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사실은 점점 묻혀져 결국 차마 들출 수 없다는 것 때문에 후생들이 그 막중한 사실을 전혀 모르게 될 듯하여 영남 유생들이 왔을 때 불러서 접견하고 비답도 내렸는데 그것은 우선 그들을 효유(曉諭)해야겠다는 급급한 생각에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뜻을 짐작하는 자는 그 비답을 보고 틀림없이 슬피 울었을 것이고 우매한 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는 두려워 떨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신자(臣子)들이 어찌 차마 그 사건을 놓고 그것을 개인적인 원한을 풀고 협잡질을 할 계기로 삼기 위해 은연중 임금이 원수를 숨겨주고 원한을 잊고 있는 것처럼 책임을 위에다 돌리면서 감히 그들을 징토(懲討)한다는 데 가탁하여 공석 사석을 가리지 않고 다반사처럼 지껄이고 다닐 것인가. 그렇게 되면 조선 천하에 이른바 임금이란 자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 그 사실을 어떻게 밝히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경들은 그 방법을 생각해보라.”
하여, 그 하교를 계기로 중외가 모두 왕의 의중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교하기를,
“지금의 남단(南壇)은 바로 옛날 하늘에 제사하던 환단(圜壇)이다. 이 땅에 이 나라를 단군(檀君)이 처음 세우셨는데 역사에 의하면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무더기를 쌓고 하늘에 제를 올렸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국(大國)으로부터 분봉(分封)을 받지 않았어도 참람된 데는 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원래 혐의가 있는 일이면 그를 분명히 하는 데 엄했기 때문에 광묘(光廟) 이후로 ‘환단’을 고쳐 ‘남단’으로 불러왔다. 대체로 군·국·주·현(郡國州縣)이 각기 풍사(風師)·우사(雨師)에 제 올리는 곳으로서 경건한 마음으로 조촐하게 모시는 정성이야 환단이거나 남단이거나 그 이름이 다르다 하여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다만 그것이 문헌상으로 빠져 있고 담당자들은 그들대로 인습에만 젖어왔기에 현재 행하고 있는 의식은 도리어 채소만으로 간단히 차리는 농잠(農蠶) 제사만도 못한 실정이니 그를 빨리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대신과 논의하여 올바르게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가을에 광릉(光陵)을 배알하고 조관(朝官)은 나이 70세, 사서인은 나이 80세로서 지난 병진년과 을해년 선왕의 행행 광경을 구경하고 지금의 행행까지 본 자에게는 모두 한 자급씩 더해주고 나이 1백 세가 된 자에게는 쌀과 고기를 더 얹어주었으며 백성들에게는 그해의 향곡(餉穀)과 적곡(糴穀)에 있어 모비(耗費)분을 특별히 견감하였다.
17년 정월 초하룻날 선원전(璿源殿)에 잔을 올렸다. 왕은 즉위한 이후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반드시 진전(眞殿) 배알을 해왔었는데, 그날은 영종의 나이 만 1백 세가 되는 날이라 하여 대신(大臣)·경재(卿宰)·시종(侍從) 모두 반열에 참여하도록 명하고 예를 마친 후에는 지난 병신년 이전에 본 품계에 있었던 아경(亞卿)·하대부(下大夫)에겐 모두 한 급씩 가자하고 경외(京外)의 백세 노인들에게는 가자와 함께 쌀과 비단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초하룻날 아침에 묘궁(廟宮) 배알을 하고 나니 나도 선왕과 똑같은 마음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행여 먹을 것을 대줄까 바라는 저 삼방(三方)의 백성들을 생각할 때 굶주려 구렁을 메우지나 않았는지? 밤낮으로 생각하는 마음 어느 때라고 간절하지 않겠는가마는 올해 배알 끝에 그날의 그 마음은 더욱 간절한 바 있다.”
하고, 홍화문(弘化門)에다 연(輦)을 멈추고 수계(隨計)의 관리를 불러 접견했는데 하나는 그 문이 바로 선왕조가 사민(四民)에게 쌀을 하사하던 문이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탕에서 내린 진휼한 물자를 우선 지방관들에게 배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어 내탕의 돈과 후추를 삼남(三南)으로 나누어 보내 진휼 물자에 보태게 하였다.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그전의 명인 석학들이 모두 내수사(內需司)를 없애야 한다고 말들 했는데 실지로 살펴보면 우리 나라 내수사는 당나라덕종(德宗)현종(玄宗)이 사용(私用)하던 경림고(瓊林庫)·대영고(大盈庫)와는 다르다. 궁중의 1년 치 씀씀이가 각기 일정한 수량이 정해져 있는데 지금 만약 내수사를 없애고 탁지부에다 맡긴다면 탁지부로서는 어떻게 운영해나갈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되도록 절약하여 1년 쓰고 난 나머지를 다른 창고 하나에다 별도로 저장하고 그 이름을 보민고(保民庫)라 하여 수재나 한해에 대비하게 하고 있는데 전후로 나간 진휼 물자도 다 거기에서 나간 것이다.”
하였다.
현륭원을 배알하고 수원부(水原府)화성(華城)이라 이름했으며, 부사(府使)를 승격시켜 유수 겸 장용 외사(留守兼壯勇外使)라고 하고, 판관(判官)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 장용영(壯勇營)의 병방(兵房)을 장용사(壯勇使)로 고치고, 문첩(文牒)에는 대장(大將)이라는 칭호를 써 마치 어영사(御營使)를 칭하여 어영 대장(御營大將)이라고 하듯 했으며, 또 도제조를 두어 마치 경리영(經理營) 도제조를 삼공(三公)이 으레 겸임하듯 하는 식으로 했다. 그리고 호위 대장(扈衛大將)도 같은 청(廳)으로 소속시켜서 내영 외영 제도를 비로소 완비하였다.
3월에 숙선 옹주(淑善翁主)가 태어났다. 내원(內苑)에서 꽃구경을 하면서 시임·원임의 각신(閣臣)과 각신의 자제들 그리고 승지·사관 등을 불러 39명 수를 채웠는데, 그것은 그해가 계축년이고 그달이 모춘(暮春)이었기 때문에 난정(蘭亭)의 계모임을 모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신들을 명해 내원의 볼 만한 곳을 마음껏 구경하게 하고 이어 술과 음식을 내려 각기 흐르는 물가에 와 마시고 읊게 했다가 밤이 되어서야 파했는데 그를 두고, 태평성대의 성대한 일이었다고 한때 전송하였었다.
그때는 경사가 거듭 겹치고 조야(朝野)가 안정된 시기였다. 왕은 화기를 불러들이고 국가 운명을 장구히 하자면 백성들의 답답증을 풀어주고 막혀있는 것을 터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고 이에 양전(兩銓)에 명령을 내려 일대 회탕(恢蕩) 정책을 펴도록 하고 혹은 중비(中批)를 내리기도 하였으므로 가끔은 몇 10년씩 묵혀 있다가 비로소 갓을 털고 일어선 자도 있었다.
가을에 빈연(賓筵)에 나아가 대신 이하 제신들에게 하교하기를,
“내 그 아무해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차마 말못할 것들이기에 감히 말하지도 않지마는 금등(金縢) 한 가지 일만은 경들에게 말 한마디 해두고 싶었는데 너무 슬프고 원통해서 아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선왕께서 언젠가 휘령전(徽寧殿)에 납시어 사관(史官)도 물리치고 어서(御書)로 된 문자 하나를 신위(神位) 밑 요 속에다 넣어두셨는데 병신년에 문녀(文女)의 죄악상을 세상에 알릴 때 비로소 꺼내보았었다. 경들도 한번 보라.”
하고는, 금등 등본(謄本) 두 구절을 꺼내보였는데, 영조경모궁(景慕宮)의 죽음을 뒤늦게 슬퍼하여 쓴 어제였었다. 이에 왕도 울었고 제신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그 지역 내의 여러 능들도 두루 배알했다.
겨울에 대신 이하 제신들이 자전(慈殿)과 자궁(慈宮) 그리고 경모궁에 대해 유양(揄揚)의 예를 거행할 것을 청하고 또 왕에게도 존호 올릴 것을 청하자, 자궁께 여쭈어보고 결정하겠다는 뜻으로 비답을 내리고 그 말미에 이르기를,
“내게도 존호를 올리겠다고 하니 경들이 임방(林放)만 못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존호 올리는 제도가 비록 삼대(三代) 이후에 비롯된 제도이나 그동안 명철한 임금들이 모두 그 일을 행하고 그 제도를 더 다듬고 손질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위로 하늘의 사랑에 보답하고 아래로 뭇 백성들 뜻을 따라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현상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방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대로의 전장(典章)이 있어 나도 일찍이 선왕께 정성을 다해 빌고 간청하자 그 겸손하신 선왕께서도 애써 당신 뜻을 굽히고 따라주신 일이 있었다. 나라고 어찌 감히 유별나게 많은 사람들 뜻을 어기고 물리치기야 하겠는가마는 내 말을 듣고도 내 뜻을 거스른다면 그는 결코 인인(仁人) 군자(君子)가 차마 할 일이 못 되는 것이다. 예(禮)가 원래 인정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의리에 의하여 예가 제재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숭봉(崇奉)은 내가 말하는 숭봉과는 다르다. 내 감히 최고의 의리를 부질없이 경전(經傳)에 그냥 기록되어 있게만 해서 앞으로 천년 이후에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자가 있다면 나를 이해하고 내 마음을 체득하여 나로 하여금 내 초지(初志)를 이루게 하리라. 나의 초지라면 오직 ‘장순(將順)’ 그 두 글자뿐이다.”
하였다.
18년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인정전에 나아가 자전의 오순(五旬)과 자궁의 육순(六順)을 축하하고 이어 조관은 70세 이상, 사서인은 80세 이상 자와 80이 못 되었어도 부부가 해로하고 있는 자는 모두 1계(階)씩 올려주도록 명했는데 도합 7만 5천 1백 45명이나 되었다.
현륭원을 배알하고 돌아와 또 경모궁을 배알했는데, 바로 장헌 세자(莊獻世子) 탄신이었다. 그해 그날은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궁(宮)과 원(園)을 연거푸 배알하고 도에 지나치도록 슬퍼했는데 제신들의 강력한 청에 의하여 그 이튿날에야 비로소 환궁했다.
삼경(三經)·사서(四書)를 새로 인쇄하여 관각(館閣)·사고(史庫)·태학(太學)에 각기 나누어 두게 하고 또 주합루(宙合樓)에다도 두도록 명하고는 각신에게 이르기를,
“잘 지키도록 하라. 옛날 영릉(寧陵)에다는 《심경(心經)》을 순장했었고 병신년 산릉(山陵) 때는 《소학(小學)》을 순장 했었는데 나도 장차 그대로 따르리라.”
하였다.
5월에 재거(齋居)하면서 윤음을 내리기를,
탕(湯)은 간하는 말이면 거스르지 않고 따르는 덕이 있었고, 순(舜)은 누구도 당할 수 없는 넓은 도량이 있어 천고를 두고 헤아려봐도 오직 그 두 성인(聖人)이 있었을 뿐이다. 아, 지금도 기억하거니와 몇 번이고 자꾸 하시던 그 말씀이 꼭 어젯밤에 들은 듯하다. 늘 말씀하시기를 ‘내가 허물이 있거나 없거나 남들이 다 보고 있는 것이다. 내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은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지나치게 들추어내더라도 나는 그를 개의치 않겠다.’ 하고는 그 말을 대전 벽에다 써 걸어두시고 문호를 활짝 열으셨으니 그 도량의 큼이야말로 바로 하늘과 땅 그것이었다. 그런데 조정 신료들은 나삼(羅蔘)에 관한 그 한 가지만을 가지고 그리도 크고 넓으신 도량에 대해 찬양을 하려고 하였으니 그는 표주박 하나로 바다를 헤아리려는 격이다.
아, 경진·신사 두 해에 있었던 일들을 어찌 차마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진신(縉紳)·장보(章甫)들이 바르고 극한적인 간언을 많이 하였으나 한 사람에게도 죄를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비답까지 하셨다. 경연 석상에서 무언가 아뢴 자가 있었을 때도 이르시기를 ‘남의 신하라면 당연히 서지수(徐志修) 같이 청대하여 면전에서 사실을 아뢰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고 그에게 전석(田錫)이 초고 불태운 것7564) 은 잘못이며 주창(周昌)처럼 대들면서 대답하기는7565) 어려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그가 최후에 한 말 한마디는 듣기 매우 거북한 망언이었지만 내 그에게 죄를 내리지 않았다.’ 하였다. 그때 그 연신(筵臣)은 황공한 마음에 땀을 흘리며 물러가 그 사실을 그의 가승(家乘)에다 기록해 두었는데 그후 선왕은 또 곧 구언(求言)의 성지를 내려 그로 하여금 할 말을 다 하도록 하였다. 나 소자(小子)가 어찌 감히 그것을 띠에다 쓰고 폐부에 새겨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재작년에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는 상소는 그 내용이 공적으로 공분(公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적으로 개인 감정을 풀어보자는 것이었는가? 거기에 만약 조금이라도 사(私)가 끼어 있었다면 그 짓을 차마 하는 자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깨끗이 맑은 하늘에 무지개를 드리우려고 하는 것은 그게 무슨 심통이란 말인가. 재계하는 마음으로 밤을 지새우고 앉아서 아침이 되도록까지 촛불을 밝히고 눈물을 섞어가며 여기에 내 속마음을 쏟아놓았는데 행여 이 기록이 아름다운 성덕을 드러내는 데 다소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 소자로서도 장차 지하에 돌아가 뵈올 면목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찌 내년 봄 옥책(玉冊)에다 빛나는 호를 올릴 때의 의문(儀文)에다 비할 것인가.”
하였다.
오래 가물어 기우제를 올리고 하교하기를,
“아래로 정사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항양(恒暘)7566) 의 허물이 되어 그 징험이 가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근래 언로(言路)가 막혀 있는 것이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극에 도달하면 다시 원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진대 무릇 논사(論思) 언책(言責)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말할 만한 일이 있으면 숨김없이 다 말하여 내 마음의 선한 단서를 확충시키도록 하라. 말이란 꼭 적절해야지만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가을에는 왕이 앓고 있는 부스럼이 오래도록 낫지 않고 게다가 또 가뭄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왕은 걱정이 되어 대신, 육경과 비변사 제신들을 묘당에 모이게 하여 가뭄에 대처할 방법을 강구하게 했으며 중외에 명하여 널리 직언(直言)을 구했고, 또 삼남(三南) 도신들에게 유시를 내려 숨어 있는 인재 발굴과 함께 억울한 사정이 있는가도 살피게 하였다.
명릉(明陵)을 배알했다. 《인서록(人瑞錄)》이 만들어졌다. 왕이 그해에 큰 경사가 있었다 하여 자전과 자궁에게 하례를 올리고 중외에 많은 은총을 내린 다음 육경(六卿) 이상의 기로신을 불러 그 의의와 범례를 지정해주고는 그에 따라 경외의 은총 입은 노인들을 차례로 엮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라고 하고 이름을 《인서록》이라 하여 오래오래 전해지도록 인쇄 반포하게 하였다.
겨울에는 화성(華城)의 성 쌓던 일을 정지시켰다. 계축년부터 쌓기 시작하여 공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는데 그때 와서 6도에 기근이 들자 왕은 누차 공사를 정지시키려 했으나 제신들 주장은, 성 쌓는 일이 재정을 축내는 일도 아니고 백성을 병들게 만드는 일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하교하기를,
“성을 쌓는 것도 소중함을 위해서이며 정지시키는 것도 역시 소중함을 위해서인 것이다. 지금 삼남과 경기 지역이 가을을 맞고서도 믿고 의지할 곳 없는 신세가 되었고 서북 지방 역시 어려운 실정이어서 자전과 자궁에 올리던 것들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처지인데 성 쌓는 일이 아무리 중하다지만 같은 중한 것이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는 법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것은 정지하면서 저것은 정지를 안 할 것인가. 한 나라의 재화(財貨)는 일정한 양이 있어서 농사지을 백성들의 해를 이어갈 양식 아니면 기민을 먹일 호구할 거리밖에 안 되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너희들 농사와 기민 먹이는 일 다 놔두고 우리 성 쌓는 일에만 종사하라.’ 한다면 그것이 사리에 닿을 일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흉년에 토목 공사를 하면 오히려 주휼(賙恤)까지 겸하는 일이 된다고 하면서 주자(朱子)남강(南康)에서 했던 일과 범희문(范希文)절서(浙西)에서 한 일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개 군이나 일개 진(鎭)에서 시행할 정책일 뿐이지 나야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나라 전체의 백성이 모두 내 적자(赤子)들인데 그 수많은 부황난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도 장사도 말고 오직 성 하나 쌓는 곳에 붙어서 일하고 먹으라고 한다면 살린대야 몇 사람이나 살리겠는가. 지금 해야 할 일로서는 모든 정신을 구황 정책 그 한 일에만 집중시켜야 한다.”
하고, 이어 화성부에 윤음을 내려 그 역사를 정지하게 하였다가 을묘년에 가서야 성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각 지방에 큰 기근이 들고 삼남(三南)은 더했는데 왕은 각신과 승지들을 나누어 보내 위로의 윤음을 내리고 배에다 곡식을 싣고 가 탐라(耽羅) 백성들을 먹이게 하였다. 왕은 탐라가 먼 바다 속에 있는 땅이라 하여 더욱 먼 곳을 회유하는 생각으로 흉년 소식만 들으면 언제나 다른 지방에 우선해서 진휼하였고 배가 갈 때는 반드시 제문(祭文)을 친히 지어 해신(海神)에 제사하도록 하였다.
《주서백선(朱書百選)》이 만들어졌다. 왕이 주자서(朱子書)를 가장 좋아하여 《어류(語類)》《대전(大全)》에서 뽑아 《선통(選統)》·《회영(會英)》·《회선(會選)》 등의 책을 만들고 또 서독(書牘)에서 뽑아 묶어 《백선(百選)》을 만들어 활자로 간행하였다.
19년 봄에 정순 대비·경모궁·혜경궁에 존호를 더 올리고 즉위 20년의 하례를 받았다. 문관은 시종(侍從) 이상, 무관은 곤수(閫帥) 이상, 음관은 준직(準職)이상으로 나이 61세인 사람에게는 모두 1급씩 가자(加資)했는데 그해의 은총을 나누기 위한 뜻인 동시에 작상(爵賞)이 너무 함부로 내려지는 것도 고려해서였다. 자전·자궁을 모시고 경모궁에 예를 행하면서 곤전(坤殿)도 함께 참여했는데 그날이 바로 장헌 세자의 환갑이었기 때문이다. 윤2월에는 자궁을 모시고 화성(華城)에 행행하여 현륭원을 배알한 다음 돌아오는 길에 화성에 들려 성 내의 군사 훈련과 야간 훈련을 사열하고 봉수당(奉壽堂)에 나아가 자궁께 찬(饌)을 올리면서 칠작례(七爵禮)를 행하고 이어 신풍루(新豊樓)로 옮겨 본부(本府)의 사민(四民)에게는 쌀을 내리고 기민들에겐 죽을 내렸다. 그리고 낙남헌(洛南軒)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는데 뭇 노인들이 잔을 올려 수를 빌었다. 그리고 원(園) 밑에 사는 백성들은 복호 2년, 화성 백성들은 복호 1년씩을 명하였다. 능원(陵園) 행행 때면 탁지부 신하가 정리사(整理使)가 되는 것이 옛날부터의 조례였는데 그 해부터는 원에 행행 때 안팎으로 정리사를 두어 모든 사무를 맡아 처리하게 하고 정리하고 남은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곡식을 사서 3백 주현(州縣)에다 나누어 보관해 두고 이름하여 정리곡(整理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거두거나 나누어주는 데는 일정한 규정이 있었으며 그것으로 또 제주도의 진휼할 물자로 보태기도 하여 사랑의 은총이 미치는 범위를 넓히기도 하였다. 화성의 성묘(聖廟)를 배알하고 교궁(校宮)에다 경서(經書)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정동준(鄭東浚)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동준이 시종관으로 있던 시절부터 상의 후한 사랑을 받아 벼슬이 이경(貳卿)에까지 이르렀는데 왕명을 사칭하고 성상을 속이면서 그의 마음과 하는 짓이 괴상 망측하였다. 그리하여 언자(言者)가, 그의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청했었는데 동준은 그후 곧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조참(朝參) 때 그의 고신(告身)을 거두어 불태워버리라고 명하고 이어 일대 출척(黜陟)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어필로 된 성적비(聖蹟碑)를 정주(定州)달천(㺚川)에다 세웠는데 태조(太祖)가 개선한 자리이고 선묘(宣廟)가 주필(駐蹕)했던 곳이다.
선희궁(宣禧宮)을 배알하고 세심대(洗心臺)에 나아가 제신들에게 술을 내렸다. 왕이 이르기를,
“해마다 이때면 내가 꼭 이 대에 오는 것은 여가를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경모궁(景慕宮)을 처음 세울 때 정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옛 을묘년 나라 경사 때 고 중신 박문수(朴文秀)가 여러 경재(卿宰)들과 필운대(弼雲臺)에 모여 기쁨과 축의를 표했었는데 그때 영성군(靈城君)의 시가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는 운대가 바로 이곳이다. 금년 역시 천재에 만나기 어려운 기회이니 경들도 전인(前人)들이 했던 것처럼 이 태평 연월을 한번 빛나게 장식해보게나.”
하였다.
내원(內苑)에서 꽃구경하고 고기 낚고 하다가 존덕정(尊德亭)으로 가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옛부터 내원 놀이에는 척리(戚里)가 아니고는 참여하지 못했었다. 외신(外臣)으로서 내연(內宴)에 참여한다는 것은 각별한 대우인 것이다. 옛날 인조가 계해년 반정 이후로 훈신(勳臣)들을 융숭히 대우하여 이러한 잔치에서 모시고 놀게 하면서 마치 한식구처럼 대했었는데, 효종은 즉위 초부터 훈귀(勳貴)의 폐단을 완전히 없애고 사림(士林)들을 초대해 두고는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여 마치 어수(魚水)요 천향(天香)이었으니, 지금까지도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등대(登對)했던 고사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또 조정에 분열이 생겨 숙종조부터 선왕조까지는 부득이 또 척리들과 밀착하지 않을 수 없어 금중 출입이 외조(外朝)에 비할 바 아니었는데 그것은 시기와 형편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현자를 가까이하고 척리는 멀리해야 하겠다는 것을 깊이 느꼈기 때문에 즉위 초기에 맨 먼저 내각(內閣)부터 세웠었는데 그것은 문치(文治)를 장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아침 저녁 좌우에다 두고 그들로부터 계옥(啓沃) 헌납(獻納)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였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좋은 벼슬을 주어 기반을 굳혀주고 남다른 예로 대우도 하며 심지어는 잔치에서 꽃구경 낚시놀이까지도 꼭 내각 신료들과 함께 해왔었다. 아울러 그들의 자질(子姪) 형제까지도 모두 자리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면서 번거로운 예는 생략하고 오직 사랑으로 대해 자리 전체가 즐거움에 싸여 해마다 거의 상례로 되풀이 해왔으니 임금 신하 사이의 간격없는 만남이라든지 그 영광 그 은총이야말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신하로서 그러한 기회를 얻기란 극히 어려웠으리라고 할 만도 한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근일에 와서 귀근(貴近)의 폐단이 극에 이르고 말았다. 전진이 있으면 후퇴가 있고 이완이 있으면 긴장이 있는 것이 이치이니 이 뒤를 이어 척리가 슬슬 나오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사대부(士大夫)를 친근히 하는 것이 바로 나의 타고난 성품이고 또 마음써 해온 터다. 몇 십 년 그래오던 것을 지금 중도에 폐지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이 자리에 오른 제신들은 모름지기 각자 자신을 깨우치는 마음으로 오늘의 내 이 말을 잊지 말라.”
하였다.
어제로 된 영괴대비(靈槐臺碑)를 온양(溫陽)의 행궁(行宮)에다 세웠는데 바로 경모궁(景慕宮)이 경진년 온천에 갔을 때 홰나무 세 그루를 직접 심어둔 곳이었다.
여름에 환조 대왕(桓祖大王)의혜 왕후(懿惠王后)영흥(永興) 본궁(本宮)에다 올려 모셨다. 그보다 앞서 그해가 환조(桓祖)의 탄생 팔회갑(八回甲)이라 하여 대신을 함흥(咸興)으로 보내 본궁에다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게 했는데 그를 계기로 함흥 유생들이 소를 올려, 영흥 본궁에 옛 전사청(典祀廳) 자리가 있으므로 당연히 제향(躋享)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느끼고 깨달은 바 있어 진전(眞殿)을 배알하고 이어 이문원(摛文院)에 나아가 대신 이하 제신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더니 모두가 정례(情禮)에 맞는 일이라고 대답하였으므로 대신과 예관을 보내 고례(古禮)에 따라 본궁에다 위판(位版)을 만들고 길일(吉日)을 정해 올려 모시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 풍패루(豊沛樓)에다 양로연(養老宴)을 베풀도록 명했다.
두 본궁의 의식(儀式)이 만들어졌다. 건국 초기에 경도(京都)에는 계성전(啓聖殿)이 있고 함흥·영흥에는 본궁이 있었는데 선왕(先王)·선후(先后)의 위판을 모셔둔 곳으로서 원묘(原廟) 제도를 써왔다. 그리고 종전에는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전사관을 별도로 차출하여 제사를 모시게 했던 것인데 예조 판서와 봉상시가 관리를 제대로 못하여 옛법을 어기고 잘못된 전례를 그대로 답습해 온 것이 많았으므로 왕이 그 의식 절차를 바로잡도록 특명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술독 술잔 등도 새것으로 바꾸고 해마다 의폐(衣幣) 향축(香祝)을 봉하여 반드시 하루 전부터 재계하고 직접 그 일에 임하게 해왔던 것인데 환조를 올려 모신 예를 마치고는 각신(閣臣)을 명하여 그 의식을 만들어 인쇄하여 본궁에다 두도록 하였다.
6월 정유일에 자궁에 찬을 올리고 조관(朝官)으로서 나이 61세인 자에게는 궁전 뜰에서 술을 내렸으며,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사민(四民)에게 쌀을 하사하고, 각도에 윤음을 내려 향음주례(鄕飮洒禮)를 실시하라 하였다.
가을에는 조적(糶糴)을 문제로 책문(策問)을 내어 태학생과 여러 음관으로 하여금 조목별로 대책을 쓰게 하였다. 연신에게 말하기를,
“조적은 바로 사창(社倉) 제도의 후신으로서 모곡(耗穀)이래야 쥐가 먹고 새가 먹어 축난 것에 불과한데 도신(道臣) 수령(守令)이 그 모곡을 받아 관용(官用)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 벌써 정당한 도리가 아니다. 더구나 조정에서 그걸 가져다 쓰면서 마치 정당한 법에 의한 것처럼 한다면 그 얼마나 구차한 일이겠는가. 더더구나 분류(分留)7568) 가 갈수록 정확하지 못하여 산간 연해 지방이 모두 병이 들고 경외의 각 아문에는 이것저것 문서만 많기 때문에 관리들은 그를 이용하여 농간을 뿌리니 피해받는 쪽은 백성들인 것이다. 지금 그것을 바로잡자면 우선 진분(盡分)이라는 이름부터 없애야 하는데 그리 하자면 걸리는 데가 많아 결행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겨울에 선희묘의소묘를 배알했다. 그해에는 경모궁의 오향제(五享祭)와 속절(俗節) 삭망(朔望) 때의 제사를 모두 친히 행했는데 어떤 때는 며칠씩 그냥 재전(齋殿)에 머물기도 하였으니, 그해가 회갑(回甲) 해였기 때문이었다.
수어 경청(守禦京廳)을 없애고 수어사(守禦使)는 남한산성을 진무하면서 광주 유수(廣州留守)를 겸하게 하였다.
《이충무전서(李忠武全書)》를 편찬하였다. 왕은 충절을 높이고 공로를 보답하는 길이라면 아끼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지만 유독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에 대해서는 그를 최고로 여겨 그들의 유문(遺文)과 유사(遺事)를 편집하고 충무공《전서(全書)》, 충민공《실기(實紀)》라 하여 인행(印行)하였다.
사옹원이 오지그릇을 정교하고 화사하게 굽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20년 봄에 사단(社壇)에 기곡제(祈穀祭)를 올리고 내탕의 돈 일만 꿰미를 내려 호남백(湖南伯)으로 하여금 곡식을 사 제주도 기민들을 구제하도록 명했다.
현륭원을 배알했다. 황단(皇壇)을 배알하고 대향(大享) 때의 희생과 기물을 살펴본 다음 하교하기를,
《대명집례(大明集禮)》에 의하면 정확(鼎鑊)을 살펴보는 일, 척개(滌漑)를 감시하는 일, 명수(明水)를 눈여겨보는 일, 이 모두를 친림(親臨)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단향 의식에는 다 섭행(攝行)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자못 상국을 상국으로 받드는 도리가 아니다. 내 마땅히 친림하여 살펴보리니 그렇게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희고 붉은 기운이 해를 꿰뚫는 이변이 있자, 하교하기를,
“부덕한 사람이 20년이나 자리에 있었으니 무슨 재이인들 부르지 않을까마는 희고 붉은 기운이 해를 꿰뚫는 이변은 금시 초유의 일이다. 자신이 두려워하고 자신을 책해야 할 모든 일에 있어 그 어찌 감히 예사로이 형식만 취할 것인가. 옛 선왕조에 관상감에서 희고 붉은 기운이 해를 꿰뚫었다는 보고가 있었을 때 시사(試士)에 있어서는 그것이 직언을 들을 수 있고 인재를 얻을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정지하지 않았었고 대향에 있어서는 섭행을 하도록 했었다. 하늘을 받들고 선조를 받드는 일이 두 길이 있을 수 없고 재계를 할 때는 무엇보다 마음이 전일해야 하는 것이다.”
하고, 여름 대향을 섭행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뜻으로 빈대(賓對)를 행했다.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문선왕(文宣王) 묘무(廟廡)에 종사(從祀)하였다. 그전부터 경외의 유생들이 누차에 걸쳐 배식(配食)을 청해왔었으나 정중을 기하기 위해 허락지 않고 있다가 그때 와서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가 선 이후로 앞장서서 성리(性理)를 천명하고 도의 근원을 훤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는 문정공 한 사람 뿐이다. 그의 시에 ‘하늘과 땅 그 사이에 두 사람이 있으니, 중니가 원기라면 자양7569) 은 진수이지.[天地中間有二人 仲尼元氣紫陽眞]’ 한 것을 보면 그의 학식이 다른 유자들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을 알 만한 것으로 문정은 우리 나라의 주돈이(周敦頤)이다. 두 정씨장횡거·주자가 다 성묘(聖廟)에 배식되었는데 주자(周子)만 누락이 되었다면 두 정씨장횡거·주자의 마음이 편할 이치가 있겠는가. 가령 오현(五賢)7570) 이하로 성묘에 종사된 그 유자들이 여기 있다면 틀림없이 문정공에게 앞자리를 양보할 것이다.”
하고, 그렇게 거행할 것을 명했으며 또 그 행검에 비해 시호가 만족하지 못하다 하여 ‘문정(文靖)’을 ‘문정(文正)’으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했다. 구리로 활자를 만든 것이 세종(世宗) 갑인년에 시작된 것인데 왕이 예각(藝閣)에 명하여 갑인자(甲寅字)를 기본으로 하여 글자를 주조하게 한 것이 전후 30만 자였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책을 인쇄하게 하고, 뒤에 또 정리자(整理字)를 주조하여 갑인년 겨울부터 창경궁 옛 홍문관(弘文館)에다가 인쇄소를 설치하고는 모든 어정(御定) 어명의 책들을 모두 거기에서 인쇄하고 편찬하게 하고서 이름하여 주자소라고 하였다.
《존주록(尊周錄)》을 편찬하도록 명했다. 왕이 존주의 의리에 대해 자나깨나 선왕의 뜻을 이어갈 생각으로 언제나 황단(皇壇)에 망배를 하고 관원을 보내 선무사(宣武祠)를 봉심하게 했으며, 영원사(寧遠祠)·무열사(武烈祠)에 제를 올리게 하고, 이 제독(李提督) 사당에 편액을 달고 해마다 제사를 모시게 했으며, 이 총병(李摠兵)·석 상서(石尙書)의 후손들을 찾았다. 삼학사(三學士)7571) 후예들을 발탁하여 등용하고 칠의사(七義士)7572) 들을 한꺼번에 제사지내고 용만(龍灣)에 있는 두 사당에 선액(宣額)하고 달천(㺚川)에 있는 묘에다는 어필의 비를 세웠다. 김응하 장군의 큰 절의를 장려하고, 이유길(李有吉)의 유손(遺孫)을 찾았으며, 임인관(林寅觀) 등 95명에 대하여는 박작(泊汋) 물가에다 단을 쌓고 한관(漢冠)을 끝까지 간직한 넋들을 위로했다. 의(義)를 지키고 척화(斥和)했던 신하들에 대해서는 모두들 표장(表奬)하고 기록으로 남겨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드러내 밝혔으며, 임진년에 공을 세우고 목숨을 바쳤던 신하들도 모두를 다 세상에 알렸다. 충신(忠臣)·의사(義士)의 단을 세웠으며 정충(旌忠)·상무(尙武)의 비문을 지었고, 홍의 장군(紅衣將軍) 곽재우, 익호 장군(翼虎將軍) 김덕령 등 여러 사람에 대해 다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제말(諸沫)·양대박(梁大樸) 자손들을 다 녹용(錄用)했는데 그때 와서 열조(列朝)에서 존주했던 사실들을 한데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겨울에는 정호인(鄭好仁)·성덕우(成德雨)를 친국한 후 다 귀양 보냈다. 호인은 병판(兵判)으로서 달력을 반사(頒賜)하는 단자를 뽑아 올리면서 홍낙임(洪樂任)을 빼버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덕우는 이조의 당상관으로서 홍수영(洪守榮)을 제관으로 차출했기 때문에 왕이 진노하여 그러한 처분이 있었던 것이다. 제신에게 하교하기를,
“만약 이 두 사람의 현재 드러난 죄만 가지고 논한다면 틀림없이 친국까지 하는 것을 지나치다고 할 것이나 지금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만인(萬人)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고 백세(百世)가 되도록 본받게 하고 싶어서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서경》에 이른바, 그 상형(祥刑)7573) 을 잘 살피라고 한 것으로 지금부터는 모두가 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나라의 법에 저촉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춘추(春秋)》가 만들어졌다. 삼전(三傳)7574) 이 똑같이 경(經)에 실려 있는데 그중의 좌씨전(左氏傳)이 역사서로서는 가장 자세하게 되어 있으나 다만 경과 전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학자들이 그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때문에 사신(詞臣)에게 명해 주자(朱子)《강목(綱目)》 범례를 따라 경을 강(綱)으로 하고 전(傳)은 목(目)으로 하여 인행하게 하였다. 선조 때에 일찍이 경전을 합해 강목이라고 했으나 미처 간행을 못했었고, 세종 병진년에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주해(註解)한 것은 바로 사정전(思政殿)에서 한 훈의(訓義)였는데 이번 그 책도 그 의례(義例)라든지 연갑(年甲)까지도 양조(兩朝)에서 했던 것과 꼭 같이 하여 그 역시 계술(繼述)의 뜻이 담겨져 있었다.
대신과 예조 당상이 청대하여 동궁(東宮) 책봉례를 거행할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경술년 원자가 태어난 이후로는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져 있고 신인(神人)이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 《서경》에도 이르기를 ‘비록 어려도 원자(元子)이시니’ 했듯이 성왕(成王)이 보위(寶位)에 이미 올랐는데도 주공(周公)은 그때까지도 원자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원자라는 명호가 정해진 바에 책봉의 시기야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리고 책봉례를 행하고 뒤이어 관례(冠禮)·가례(嘉禮)까지 함께 치르고자 하는데 《예기》에도 ’하나를 행하면 셋이 좋아진다.’7575) [一行三善]고 말한 것처럼 나도 그래서 천천히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 내년이면 사부에게 나아갈 나이이니 우선 사부(師傅)부터 정해두었다가 봄이 되면 개강(開講)을 하도록 하라.”
하고, 곧 강학청(講學廳)을 설치했다.
21년 봄에 각도에 윤음을 내려 늙은이를 쉬게 하고, 농부들 노고를 치하하고, 모든 일을 공경하고, 근본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이르기를,
《소학(小學)》이라는 책은 바로 학교에서 처음 가르치는 차제(次第)요 절목(節目)으로서 나같이 과매(寡昧)한 사람으로도 선왕께서 인도하시고 열어주신 그 은혜에 힘입어 동습(童習)의 나이에 날마다 배웠던 것이 다소의 힘이 되었음을 지금도 기억하거니와 요즘 와서는 배우는 방법도 변하고 가르치는 성의도 부족하여 그 책을 쌓아두기만 하고 보는 자가 없다. 내 그를 두려워하여 내각 신료를 명해 그 훈의(訓義)에 맞게 고증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삼강이륜행실(三綱二倫行實)》 같은 책도 그것이 치교에 도움을 주고 세상을 격려하는 도구 구실을 할 만한 책으로서 《소학》과 함께 없어서 안 될 책이니 그를 합해 한 책으로 만들고 이름을 《오륜행실(五倫行實)》이라고 하라. 그리고 또 하루만 실시해도 사방이 풍동(風動)할 수 있는 예로는 향음주례(鄕飮洒禮)가 그것인데 옛날 우리 세종조 때 처음으로 양로연(養老宴)을 베푸시고 《삼강행실(三綱行實)》의 반하(頒下)도 역시 그 무렵에 하셨던 것이다. 나 소자도 어찌 감히 그를 본받아 그 일을 계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향약(鄕約)도 그것이 백성을 순화시켜 좋은 풍속을 만드는 데 많은 힘이 되기 때문에 주부자(朱夫子)가 매 월초면 향약을 읽는 일을 하였던 것이고 나도 그래서 향약의 효과가 향음주례 못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도 익히고 밝히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 기무(機務) 여가에 향음주례에 관한 의식과 향약 조례 등을 분류 제정하도록 하라. 과연 그 제도가 법 뿐이요 말 뿐인 것이 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완악한 자라도 융통성을 보일 것이며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현명해질 것이다.”
하고, 내각에 명하여 《오륜행실(五倫行實)》《향례합편(鄕禮合編)》을 인쇄 배포하라고 했다.
원자 좌·우유선(左右諭善)을 두었다.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나도 춘저(春邸)에 있을 때 빈료(賓僚)들 도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원자는 현재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단정하고 바른 선비의 도움이 더욱 절실하다. 좌우에서 보익(輔翼)하는 이 중에 학식 행검이 훈도(薰陶)의 영향을 주기에 알맞은 자가 지금 세상이라고 왜 없으랴만 모름지기 생소한 야인으로서 세상 물정에 숙달되지 아니한 자라야 비로소 엄탄(嚴憚)의 효과가 있을 것이니 그 점을 참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였다.
호조가 조선(漕船)에 관한 사목(事目)을 올리자, 하교하기를,
“선박으로 운반하는 일은 사실 군사 정책과도 관계가 있어 옛 주관(周官) 제도에서부터 한(漢)·당(唐)·송(宋)·명(明)에 이르기까지 물자 운반선이 바로 전선(戰船)이기도 했는데 그 역시 병농(兵農)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는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다. 우리 나라는 조창(漕倉) 제도가 비록 군사 정책과 직접 상관은 없지마는 그 실제는 두 영(營)에서 대동미를 이리저리 옮겨주는 것이나 훈련 도감의 삼수량(三手粮)이라는 것이나 곡식이 필요할 때 그 필요한 양의 곡식을 대주는 점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그리고 무슨 사정이 달라졌을 때는 그 달라진 사정에 상응하는 정책이 필요한 것인데, 유독 조운 그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은 변통성 없이 옛날대로 고수할 것이 뭐 있겠는가. 전선으로도 이용한다는 뜻을 이미 말한 바도 있으니 선박 건조처의 영곤(營閫) 읍진(邑鎭) 들을 엄히 단속하여 견고하고 정밀하게 건조해서 조곡(漕穀) 운반에도 겸용할 수 있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현륭원을 배알했다. 화성(華城)의 성가퀴·망루 등을 두루 둘러보고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효묘(孝廟)가 후원에다 척뇌당(滌惱堂)을 지어두고 내구마(內廐馬)를 타고서 중관(中官)에게 고삐를 잡히고 날마다 그 당에 가셨었는데 그것이 사실은 힘든 일을 익히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말을 타고 힘든 것을 연습하는 것은 바로 우리 가법(家法)인 것이다. 나도 금원(禁苑)에서 군무 관계로 전좌(殿座)하게 되었을 때면 반드시 말을 타는데 그는 열성조 고사(故事)를 따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비록 온종일 말을 달려도 피로한 줄을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4월에 원자(元子)가 사부(師傅)·유선(諭善)과 상견례를 행했다. 왕이 사부와 유선을 불러 접견하고 하교하기를,
“오늘 이 예를 행하게 된 것은 하늘과 조종(祖宗)이 도와주신 것이다. 사부에게 나아가는 데도 절차가 있고 체모가 있기 마련인데 내 비록 배읍(拜揖)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으나 그 강독(講讀)하는 소리를 처음 듣고 마음으로 기쁨을 느꼈다. 경들이 잘 보도해주기 바란다.”
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원자가 강독을 마치고 여가만 있으면 언제나 곁에 앉도록 명하고 화려한 복장 기름진 음식은 몸과 입에 가까이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연 신료에게 말하기를,
“나도 어려서부터 독서할 때 반드시 과정(課程)을 두었었는데 요즘은 원자를 위해 여가 때의 공부를 더하고 있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도 기억하지만 옛 선왕께서는 농사를 아주 중히 여겨 밭 갈고 김맬 철이면 언제나 성남(城南) 들로 일찍 나가셔서 직접 살피곤 하셨으므로 지금까지도 그 곳 부로(父老)들이 성적(聖蹟)을 못잊어하고 성덕(聖德)을 칭송하면서 그곳에다 대(臺)를 세우고 이름하여 성경(省耕)이라고 하고 있다. 나도 어가를 모시고 누차 수행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고, 각신을 명하여 대호(臺號)를 써서 돌에 새겨 세우게 하고, 또 동쪽과 서쪽 두 교외에다 각기 대 하나씩을 더 세우라고 했다.
왕은 삼황(三皇) 그리고 열성(列聖)들 휘신(諱辰)를 당하면 언제나 소선(素膳)을 들이게 하였는데, 빈연(賓筵)의 제신들에게 말하기를,
“근고(近古) 이전에는 공공연한 자리에서 회반(會飯)을 할 때면 쇠고기를 먹지 않았었고, 국기(國忌)를 당하여 재계 때면 조정 신료들도 모두 이틀간 소사(蔬食)를 했었다. 그것은 선왕조 초기까지도 그랬었고 오직 대향(大享)의 태뢰(太牢)와 진연(進宴)의 대선(大膳)에서만 비로소 쇠고기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까닭 없이는 소를 잡지 않았던 고인들의 뜻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법은 간곳없고 각 궁방(宮房)들까지도 각기 딸린 푸줏간이 있다니 만약 법을 집행하는 유사(有司)들이 먼저 궁방부터 엄히 단속했더라면 그렇게 함부로 법을 어기고 금형을 범하는 폐단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가을에 장릉(章陵)을 배알하고 본군의 부로(父老)들 병고를 물었으며, 1년간 복호를 하고 갑인년 행차 때 그 행차 광경을 구경했던 나이 70, 80인 사람에게는 각기 1급씩 가자(加資)하였다. 그리고 이어 민회묘(愍懷墓)를 살피고 현륭원도 배알하였다.
22년 봄에 현륭원을 배알하고 화성부(華城府)에 묵으면서 이르기를,
“원침(園寢)을 모신 지 지금까지 10년이 되도록 아직 이 부와 이곳 백성들에게 혜택이 미친 적이 없었으니 그것이 어찌 내 본의이겠는가. 성지(城池)가 아무리 든든하다 해도 어찌 뭇 백성들 마음이 성이 되어주는 것만 하겠는가. 백성들 마음부터 든든해야 일심으로 가꾸고 보호할 것이다. 을묘년 정리곡(整理穀)을 각도에다 분산 배치한 것은 그것이 비록 사랑과 은혜를 널리 베풀자는 뜻이었으나 3백 개의 주군(州郡)을 상대로 주고 걷고 하는 과정에서 어찌 폐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름이 정리곡이라면 모곡은 더 받지 않아야 그 제도를 둔 본의에 맞는 것이니 그 정리곡을 모두 화성부에 소속시키고 모든 본부로부터 받는 곡(穀)에 대하여는 모곡 징수를 영원히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하교하기를,
“벌레가 벼와 원침의 나무들을 해치고 있다면 그를 잡아 없애지 않아서야 될 일인가. 주관(周官)서씨(庶氏)·전씨(剪氏)7576) 도 그 때문에 두었던 직(職)이었다. 구덩이를 파고 불에 태워 묻어버리는 것은 당(唐)요숭(姚崇)이 처음으로 했는데 그후 역대로 그렇게 시행해서 그것이 성헌(成憲)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근자에 원침의 나무들을 벌레가 해치고 있어 나무를 심었던 10개 읍을 시켜 잡아 없애라고는 하였으나 그 벌레라는 것이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生物)이기 때문에 늪지대로 몰아내버리는 것이 불에 태워 죽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리하면 생물을 살리는 덕도 그 속에 있는 것 아닌가. 듣기로는 벌레가 날아 바다로 들어가서 어하(魚蝦)로 변했다고 복파(伏波)무릉(武陵)을 다스릴 때의 생생한 증험7577) 이 아직도 전해오고 있지 않은가. 그 벌레들을 잡아 구포(鷗浦) 어귀에다 던져버리라.”
하였다.
경외의 사형수들을 관대하게 처리하고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소결(疏決)할 때에 전례대로 정전에 임어하지 않은 까닭은 내 마음에 저으기 말못할 슬픔이 있어서이다. 천하 만사가 모두 내 마음으로 남을 헤아리는 것인데 심도(沁都) 일을 생각하면 내 마음을 도려내는 듯하여 정전에 앉아 유배보내는 무리들을 놓고 가부를 평론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당상들만 해조에 모여서 사형수의 안(案)만을 여쭈라고 한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그때 가뭄이 너무 심해 모를 제때에 내지 못했으므로 각도에다 다른 곡물을 대신 심도록 권장했었다.
가을에는 경릉(敬陵)·창릉(昌陵)을 배알하고 그 구역 내에 있는 여러 능도 배알했다.
장용 외영(壯勇外營)에 오위(五衛) 제도를 창설했다. 국조의 군제(軍制)가 처음에는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를 두었다가 삼군부가 오위(五衛)로 바뀌면서 부(部)와 통(統)을 정하고 군대를 선출하는 법을 만들었으며, 민(民)과 병(兵)을 통합하여 군대를 농민에 붙이는 제도를 두었었다. 그러다가 그후 군문(軍門)을 설치하고 영사(營司)를 두면서 위(衛) 제도는 폐지되었다. 화성(華城)은 원래 경기 관내의 중진(重鎭)이기에 마병·보병의 군대 편제가 그 규모에 있어 훈련 도감과 비슷했었는데 계축년에 영(營)으로 승격된 후로는 국초에 함경도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했던 것처럼 친군위 3백 명을 두고 보군(步軍) 26개 초(哨)를 두었다가 뒤이어 용인(龍仁) 등 5개 읍의 속오군(束伍軍) 중에서 정예하고 건장한 자를 뽑아 12개 초를 더 둠으로써 규모를 일영 오사(一營五司)로 만들었다. 그리고 또 본부 및 본부에 소속된 읍의 민병들을 뽑아 서로 번갈아가면서 성을 지키게 하는 제도도 새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司)·초(哨)의 명칭을 바꿔 위(衛)·부(部)로 하고 1개 영을 5개 위로, 5개 위는 25개 부로 편성하여 내외 영군(營軍)이 총 5천 명으로 되어 있었다. 이상과 같은 절목을 비변사가 만들어 올리자, 왕은 여러 무장(武將)들에게 이르기를,
화성이 군대 편제에 있어 다른 곳보다 먼저 옛날의 부·위 제도를 채택했는데 그도 의리와 관계가 있는 일이다.”
하였다.
《오경백편(五經百篇)》을 완성했다.
《주역》·《서경》·《시경》·《춘추》·《예기》에서 99편을 취하고 《중용》·《대학》《예기》 속에다 그대로 두었으며 주자(朱子)의 장구서(章句序)를 그 끝에다 붙여 두었는데 이는 마치 《맹자》 맨 끝에다 명도(明道)의 묘표(墓表)를 붙여놓은 것과 같은 뜻7578) 으로 판을 새겨 간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근세에 와서 시율(詩律)이 점점 음절이 촉박해지고 의미도 건조하다 하여 두보(杜甫)·육유(陸游)의 시 전편을 운(韻)에 따라 분류하여 인쇄 반포하였는데 그 모두가 백성을 계도하고 풍속을 순화시키기 위한 깊은 뜻에서 나온 것이다.
10월 기축일에는 각도에 윤음을 내려 농정(農政)을 권장하고 농서(農書)를 구했는데 그것은 다음해인 기미(己未)년이 바로 영묘(英廟)가 적전(藉田)을 친히 갈았던 해인데다 그달의 월건(月建)이 축(丑)이었기 때문에 토우(土牛)7579) 로 풍년을 비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왕이 왕위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그럴수록 선진(先進)의 법을 따르기에 노력하여 명령이나 정교(政敎)를 오직 근본을 중시하고 사실을 추구하는 쪽으로 실시 선포하였기에 농서(農書)를 올려온 자도 경외를 막론 4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반궁(泮宮)에다는 선제(璿題)를 내려 일차 유생(日次儒生) 소외(召巍) 등에게 시험을 보이고 법온(法醞)을 내렸으며, 세종조(世宗朝)에서 화종(畵鍾)을 내리고 효종조(孝宗朝)에서 은배(銀盃)를 내렸던 것처럼 늘 쓰시던 은배를 특별히 내리면서 그 은배 복판에다 전서(篆書)로 ‘아유가빈(我有嘉賓)’이라고 새겨넣었는데 그 역시 손님에게 잔치를 베푸는 《시경》 녹명장(鹿鳴章)의 뜻으로 선비들을 예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 경연에 참여한 제신들과 응제한 제생들에게 명하여 그 사실을 시를 지어 읊도록 하고 또 친히 서문을 써 그 책 머리에다 싣게 하고 그것을 새겨 명륜당(明倫堂)에다도 걸어두게 했으며 또 그를 모아 책으로 만들어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 반포하게 하면서 이름하여 《태학은배시집(太學銀盃詩集)》이라고 하였다.
왕은 왕위에 오르고부터 많은 인재를 길러내고 올바르게 계도할 방법에 깊은 관심을 두고 월강(月講) 순시(旬試) 제도를 실시하여 혹 그 자리에 나가 친히 시험을 보이기도 하고, 혹은 시제를 나눠주고 각자 재능을 재보기도 했으며, 혹은 경의(經義)를 강론하게 하여 학문의 깊이를 두드려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왕은 그 시권을 직접 살펴보고 대책 내용도 친히 열람한 다음 혹자에게는 급제를 내리기도 하고 혹자에게는 벼슬을 주어 권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공령문(功令文)을 편집 인쇄까지 하기도 했으며 여러 하사품도 많이 내렸고 은총과 영광 또한 전대에 없을 정도였으므로 온 나라 전체가 모두 빈흥(賓興) 대상이 되어 신해년에는 《경림문희록(瓊林聞喜錄)》이 만들어지고 임자년에는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 계축년에는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 갑인년에는 《탐라빈흥록(眈羅賓興錄)》, 을묘년에는 《풍패빈흥록(豊沛賓興錄)》《정시문정(正始文程)》, 경신년에는 《관북관서빈흥록(關北關西賓興錄)》이 각각 있게 되었다.
대정(大政) 시행을 앞두고 하교하기를,
서한(西漢)에서 관리 선임을 중히 여겼던 것은 그게 바로 근본을 공고히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뜻에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 인재 등용에 있어 과거 시험으로 등용을 하고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는 자가 도리어 음관이나 무관만큼도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중앙에서 국가 조세도 맡아 관리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외지로 나가 자목(字牧)의 일도 맡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혹은 한미한 자리에서 갑자기 올라온 자로 하여금 묘당의 계획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하기 때문에 금곡(金穀)이나 갑병(甲兵)에 있어 깜깜하기가 마치 소경이 주판 만지는 격이니 그야말로 등용된 자가 이쪽에서 바라는 인물이 아닌 것이다. 지금 만약 새로 임용된 문신(文臣)들로 하여금 지방의 작은 고을에 가 그곳 관리의 일을 익히고 우장(郵障)의 일까지도 겸임하게 하여 민생의 질고(疾苦)를 잘 알도록 했다가 그가 일소(馹召)로 왔을 때에 꾸밈없는 말과 글로 폐단을 제거할 대책을 낱낱이 개진하게 한다면, 구중 궁궐이 아무리 깊다 해도 사방을 가까이서 보는 것 같아 백성과 나라에 도움되는 것이 일개 수의 어사를 보내는 것보다 월등히 나을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그 대양책을 각별히 강구해 보도록 하라.”
하고, 이어 문관·음관·무관을 서로 바꿔가며 임용하는 제도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23년 봄에 유행병이 만연하여 경외에 사망자가 12만 명이나 되었으므로 왕은 그것을 크게 우려하여 은휼(隱恤)의 은전을 광범위하게 시행하는 한편, 또 하교하기를,
“고사(故事)를 상고해 보면 비록 여기(厲氣)가 아니더라도 모든 이름 모를 병이 유행할 때는 모두 별도의 여제(厲祭)를 지내고 또 교외 광장에다 단을 쌓아 죽은자에게 위령제도 지냈는데 그는 주(周)나라 때 벽책(疈磔) 제도에서 비롯되어 후세에 남아온 것으로 역시 백성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예(禮)에 없는 것이라도 할 만한 일이면 다 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주공(周公)이 예서에다 기록해둔 것이고 우리 열성조에서도 다 해왔던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를 거행치 않는다면 그는 신인(神人) 사이를 좋게 만드는 도리가 아니니 북쪽 교외에 가 여제를 지내고 동·서·남의 교외에서는 위령제를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각도에 명하여 모두 벽고(疈辜)의 예를 거행하도록 했었다.
건륭(乾隆)의 부음을 전달할 칙사가 올 참이었다. 청(淸)나라에 대한 복제로 옹정(雍正) 을묘년에 쓴 구례7580) 가 있었는데 그에 대해 제신들 모두가 다 실례(失禮) 중에 또 실례이고 불이참(不貳斬)7581) 의 뜻에도 어긋난다고 말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제신들 복색(服色)은 바로 고인들이 말했던, 띠풀로 얽어매고 종이로 싸고 한다는 것으로 사실 체제가 맞지 않은 것들이다. 우리 나라 예제(禮制)가 비록 불완전한 점이 많지만 성조(聖祖) 때 《예기》증자문(曾子問)을 놓고 강론해가면서 비로소 군신들의 복제를 바로잡았고 선왕조 때 《상례보편(喪禮補編)》이 만들어지면서는 예전의 잘못되었던 점들을 깨끗이 씻을 수가 있었다. 다만 그 복제는 우리 국내에서 행하는 복제이고, 청국에 대한 복제는 을묘년 이전의 제도를 그냥 그대로 쓰자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 복제까지 고칠 필요가 뭐 있겠느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관이나 복색을 《상례보편》 그대로 따르자면 도리어 먼저 것보다 더 중복(重服)이 될 혐의가 있고 또 불이참(不貳斬)이라는 말도 바로 황조(皇朝)와 제후국의 분별을 지적해서 한 말인데 그렇게 말할 경우 대일통(大一統)이라는 의리로 볼 때 장애가 없겠는가? 어차피 그럴 바에야 그냥 옛날 그 복제대로 입고서 억울함과 아픔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심정이나 가지고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낫겠다.”
하였다.
《아송(雅誦)》이 만들어졌다. 왕은 시 3백 편 이후로 사무사(思無邪)의 근본 취지를 터득한 시로는 오직 주자(朱子)의 시가 그것이라고 여겨 손수 간추려서 인쇄 반포하고 경연(經筵)·주연(胄筵)의 강의 자료로 쓰게 했으며, 또 그를 존경각(尊經閣)에다 두고 유생들 월강(月講) 자료로도 삼게 했다.
경희궁(慶熙宮)에 행행하였다. 그때가 원릉(元陵) 휘신(諱辰)이었는데 정치달(鄭致達)의 처를 석방하도록 특명을 내리고 제신들이 강력히 반대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경모궁을 배알하고 윤음을 내려 여러 신료들에게 포고하기를,
“아, 그 옛날 그 친애하시던 마음씨가 어느 왕보다도 월등하셨다. 병자년 그 무렵 덕성각(德成閣)에서 《통감(通鑑)》을 강하다가 효문제기(孝文帝紀)회남왕(淮南王) 사건을 놓고는 일일이 분석을 하셨는데, 그때 눈물이 옷깃을 적신 연신(筵臣)도 있었었다. 지금 정씨의 처가 죽지 않고 늙고 병들어 있는데 그 옛날 하시던 그 말씀으로 미루어볼 때 임오년 이전 정씨의 처와의 지극했던 정리를 놓고 그때를 가만히 거슬러 생각해보면 그때는 비록 그를 공론에다 맡길 수밖에 없었으나 오늘 와서는 또 꼭 이렇게 해야 당연한 것이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옛날 좋았을 때와 같이 오가고 만나야 할 것이다. 만약 오늘 내가 선왕의 그 뜻을 받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감히 옛날의 그 뜻을 이어왔다고 할 것인가.
한(漢)·당(唐) 이후로는 옛 성인의 시대와 거리가 멀고 도(道)도 점점 빛을 잃어 온 세상이 하나같이 골육 상잔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자(朱子)가 ‘병들어 죽었는데 곡(哭)은 무슨 곡이냐.’라고 말을 남겨 후세에 경종을 울렸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난적(亂賊)은 죽여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임금이라면 다 듣기 좋아하는 말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현자나 어리석은 자나 용감한 자나 비겁한 자나 구별 없이 다 잘하는 말들이면서 특히 ‘전의친(全懿親)’ 이 세 글자에 대해서는 모두가 쉬쉬하고 지사(志士)도 함구를 하는 실정이다. 지금 옛날에 그렇게도 우애하시던 그 마음을 본받기 위해 정씨의 처가 그러한 죄를 지었는데도 오늘 와서 다 풀어줬다는 것을 국사(國史)에도 기록하고 야승(野乘)에도 기록하면서 이르기를 ‘그의 죄는 물론 용서할 수 없는 죄이나 옛날의 그 아름다운 뜻을 받들기 위하여 법을 굽히고 사랑을 편 것이다.’ 한다면 그것이 바로 명의(明義)에 있어서도 최고의 명의가 되는 것이며 우리 국가로서도 억만년 두고두고 받을 복록이 오늘부터 시작될 것이다.”
하였다.
5월에 하교하기를,
이해 이달 이날이 바로 우리 단경 성후(端敬聖后)7582) 가 복위(復位)되어 능(陵) 봉하는 일을 독려하던 제신들이 일을 마치고 복명하던 때와 간지(干支)가 같은 때이고 또 주량(舟梁)7583) 보갑(寶甲)도 그해에 있었으니 주구(珠邱)를 바라볼 때 슬픈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예관으로 하여금 날을 정하게 하고 대신을 보내 온릉(溫陵)에 가 잔 올리는 일을 대신 행하게 하라.”
하였다.
가을에 연경에 가는 사신에게 유시하기를,
“내가 주자서(朱子書)에 대해 마음을 써 외우고 익히면서 그 대전(大全)을 가지고 요약해서 《회영(會英)》을 만들고, 부류별로 모아 《선통(選統)》을 만들고, 가려 뽑아서 《백선(百選)》을 만들고, 개괄적으로 골라 《절약(節約)》을 만들고, 또 모아서 《회선(會選)》을 만들었으나 그밖에 또 《춘추(春秋)》의 뜻과 맞는 것으로 대일통(大一統)의 문자를 만들어보고 싶다. 그리고 《대전》·《어류(語類)》 또는 《유서(遺書)》와 이경(二經)·사서(四書)의 《전의(傳義)》·《장구(章句)》·《집주(集註)》·《혹문(或問)》 그리고 《계몽(啓蒙)》·《가례(家禮)》·《시괘고오(蓍卦考誤)》·《창려고이(昌黎考異)》에서 《위씨계(魏氏契)》·《초사(楚辭)》·《통서(通書)》·서명(西銘)·태극도(太極圖) 등에 대한 해설 같은 모든 저술을 한데 모아 전서(全書)를 만들고 그 편집이 끝나면 그것을 선성(先聖)의 사당에 고한 후 간행하여 주부자(朱夫子)장주(漳州)에서 했던 것7584) 처럼 해보고 싶다. 그리고 《춘추》를 먼저 간행하려는 것은 역시 대일통이 무엇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은미한 뜻이 있어서인 것이다.
다만 《어류》는 그 의례(義例)가 너무 뒤죽박죽이고 지록(池錄)과 요록(饒錄) 두 본7585) 이 비록 정밀하고 좋다고 해도 문숙공(文肅公) 황간(黃幹)이 그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 또 각 부문별로 분류된 것으로는 장경부(張敬夫)수사 언인(洙泗言仁)충정공(忠定公) 조여우(趙汝愚) 유송조 제신 주의(有宋朝諸臣奏議) 같은 것이 일찍이 고정(考亭) 선생으로부터 지적을 받기 전만해도 그 은미한 표현과 중대한 의리가 분명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한 곳이 있었는데 그 《어류》라고 어찌 주부자의 본뜻 그대로이겠는가. 그를 고정(考定)할 때 상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므로 모름지기 미(眉)·휘(徽)·건안(建安) 제본과 대조하여 진면목(眞面目)을 얻어내야지만 전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대전(大全)으로 말하더라도 태주(台州)의 주장(奏狀)이 민판(閩板)에는 수록이 안 되어 있고, 육왕첩(陸王帖)·매화부(梅花賦) 같은 것도 누락되고 실려 있지 않으니 사행(使行)이 연경을 가게 되면 《대전》의 진짜 본과 《어류》의 각본을 꼭 구매해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것을 빙자하여 다른 잡서가 경계 밖으로 나갔을 때는 왕부(王府)에 그것을 단속하는 법이 엄연히 있으니 누구도 감히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경봉각(敬奉閣)을 황단(皇壇) 곁으로 옮겨 지었다. 각이 옛날에는 동룡문(銅龍門) 왼편에 위치하고 있어 청(淸)나라 칙서를 소장해둔 곳과 서로 이웃해 있었는데 그때 와서 특별히 옮겨 짓도록 명하고 영종(英宗) 어필인 경봉(敬奉)·흠봉(欽奉)의 편액을 걸었으며, 태조(太祖)·신종(神宗)·의종(毅宗)황제의 어필 또는 어화(御畵)로 된 병풍과 홍무(洪武) 25년 이후의 고인(誥印)을 모셔두었다.
헌릉(獻陵)을 배알하고 이어 현륭원을 배알했다.
안으로 대신(大臣)과 전관(銓官), 밖으로 각도의 방백(方伯)들로 하여금 조정 관료나 유생 할 것 없이 주자서(朱子書)를 전공하는 자면 그를 각자 추천해 올리라고 명했다.
신덕 왕후(神德王后) 사제(私第)와 치마대(馳馬臺)에다 어필로 된 구기비(舊基碑)·성적비(聖蹟碑)를 곡산(谷山)에다 세웠다.
장헌 세자(莊獻世子) 저술의 세 책을 엮어 펴냈는데 수집·교정에서부터 지우고 고치고 오려붙이고 하는 일까지 모두 어수(御手)를 거쳤다. 나라 사람들이 애송할 정도로 학문의 깊이가 있었는데 왕은 손때가 묻어 있는 그것이 소중해서 내부(內府)에 간직해 두었다가 그때 와서 직접 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장차 열성(列聖)이 남겨놓은 교훈의 글과 함께 높이 모시고 오래 전하도록 하여 미처 못다한 효성을 거기에나마 표해보려는 뜻이었다.
《대학유의(大學類義)》가 만들어졌다. 진덕수(眞德秀)가 쓴 《대학연의(大學衍義)》구준(丘濬)이 쓴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에서 가장 긴요하고 더욱 감계(鑑戒)가 될 만한 것들을 추려 뽑아 손수 평점하고 채집한 것들이었다. 왕이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그 내용이 치도(治道)에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고 누차에 걸쳐 감정(勘定)을 가해오다가 이때 와서야 비로소 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처 간행까지는 못했었는데 규장각(奎章閣)이 어제로 편집하여 올렸다.
24년 1월 초하룻날 아침에 원자를 책봉하여 왕 세자로 삼았다. 그날로 경모궁(景慕宮)을 배알하고 돌아와 집복헌(集福軒) 바깥채에서 대신과 각신(閣臣)·예관(禮官)을 불러 인견한 후 하교하기를,
“원자의 금년 나이가 11세인데 책봉례를 지금까지 늦춰 잡은 것은 무언가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역(易)》에서는 쉽고 간단한 것을 귀히 여겼고, 《예기》에서도 삼선(三善)이 있으며 우리 현묘(顯廟)의 고사를 보더라도 관례·책봉례·가례 이 삼례(三禮)를 한 해에 모두 거행했었다. 천년 만년을 두고 자손에게 교훈을 주시고 편안한 복을 주신 것이니 그 어찌 오늘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어 관례·책봉례를 같이 거행하도록 명하고 또 이어 가례도 그 해에 치루었다.
현륭원을 배알했다. 책봉례가 정해지자 왕은 그 예를 맡아 거행할 제신들을 대할 때마다 늘 옛날 애기를 하면서 눈물로 옷깃을 적시곤 했는데 현륭원을 배알하고는 제신들에게 하교하기를,
“오늘이야 내가 어떻게 차마 이 원을 하직하고 돌아가겠는가.”
하고는 잔디 위의 한데에 엎드려서 목이 쉬도록 흐느껴 울었다. 제신들이 울며 청한 끝에 저녁 무렵에야 재전(齋殿)에 들어 머물다가 이튿날 환궁했다.
예조가 책봉례 의식 절차에 관해 아뢰자, 하교하기를,
“내가 오늘과 같은 유모(孺慕)의 마음으로 예(禮)대로 하기 위해 임전(臨殿)을 한다면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예도 인정(人情)에서 우러나는 것이기에 인정에 맞으면 천리(天理)에도 맞는 법이다. 더구나 공조(公朝)의 예가 사례(士禮)와는 비록 구별이 있다지만 며느리 맞이한 집에서도 사흘 동안은 풍악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였다. 옛날 우리 세종 대왕께서도, 그때의 수수(授受) 과정을 보면 우리 태종 대왕보평전(報平殿)에서 내신(內臣)에게 동궁을 모시고 오도록 명하여 대왕이 계시던 내전(內殿)에서 대보(大寶)를 넘겨주심으로써 그 길로 왕위에 오르셨던 것이다. 요(堯)가 명하고 순(舜)이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장(典章)이었겠는가마는 예가 그렇게도 간편하셨다. 그것이 이 소자가 일심으로 본받고 따라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 삼가례(三加禮)에 있어서도 명빈(命賓)·책저(冊儲)·전책(傳冊) 임전(臨殿) 등의 예들은 모두 생략하라. 그리고 예를 마친 후의 하의(賀儀)도 전(殿)·궁(宮)에 한꺼번에 하도록 하라. 그러면 내가 어찌 감히 받지 않겠는가. 그러나 임권은 못하겠으니 권정례(權停禮)로 하도록 하고 춘궁의 하례 의식도 현묘(顯廟) 시절에 했던 전례대로 역시 권정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을유일 왕세자가 관례와 책봉례를 집복헌 바깥채에서 거행했다. 예를 마친 후 왕은 왕세자와 함께 진전(眞殿)·태묘(太廟)와 경모궁(景慕宮)을 배알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제신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예를 마치고 나니 종묘 사직이 더욱 소중해지고 하늘에 계신 영령들께서도 틀림없이 기뻐하고 계실 것이지만 나의 마음을 더욱 무어라 말할 수가 없구나.”
하고, 원릉을 배알한 후 그 국내의 각능도 배알했다.
혜경궁(惠慶宮)이 부스럼으로 인하여 열흘이 넘게 편찮았는데 왕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근심에 쌓여 옷도 벗을 사이 없이 친히 약을 바르고 하느라 어수(御手)마저 부을 정도였다. 그때 와서 모든 증상이 쾌차되어 제신들이 하례를 거행할 것을 청했으나 왕은, 자궁 마음이 그리 거추장스럽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세자빈(世子嬪)을 처음 간택했는데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간선되었으니 전 참판 김조순(金祖淳)의 딸로서 바로 지금의 곤전(坤殿)이다. 처음 간택을 하려면서 연신(筵臣)들에게 이르기를,
“간택이라는 것이 옛 예가 아닌 것이다. 선정(先正)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일찍이 그에 대한 격언(格言)을 했었으나 국조(國朝)에서 해오던 일이라서 감히 안 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였다.
여름에 유신 김이재(金履載)가 상소하여 전관(銓官)을 논핵하자, 왕은 준엄한 하교를 내리고 그를 귀양보냈다. 즉위 이후 오늘까지 왕이 외곬으로 지켜왔던 대의(大義)와 인재의 용사(用舍)에 관한 근본 취지, 시속을 바로잡기 위해 고심했던 문제 등에 관한 여러 천백 마디 내용을 연신들에게 펴보이고 이어 그를 연본(筵本)으로 등사하여 조신(朝紳)들에게 반사하도록 명했었다.
왕이 그해에 와서 경사가 있을 때마다 오히려 마음에 병이 되어 자주 편찮을 때가 있었는데다 시탕(侍湯)하느라 또 피로가 겹쳐 6월 초부터 부스럼이 나기 시작하여 날이 갈수록 점점 더해갔다. 그러면서도 승지를 불러 하교하기를,
“농사는 때를 놓치면 안 된다. 내 병 때문에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28일에 이르러 병이 크게 악화되어 대신 이하 제신들이 와내(臥內)에 들어가 증후를 살펴보니 왕은 이미 말을 못하는 상태에서 들릴락말락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제신들이 귀기울여 들어보니 바로 수정전(壽靜殿) 세 글자를 들먹이고 있는 것으로 수정전은 곧 정순 대비(貞純大妃)가 있는 곳이었다. 왕의 생각은 아마 자성(慈聖)께 무언가 고해야 할 말이 있었던 듯한데 이미 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왕은 그날 유시(酉時)에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끝내 승하하고 말았는데 당시 춘추가 49세였고, 곁에 있던 이들은 대신과 각신·승지·사관(史官)들일 뿐 환시(宦侍)나 궁첩(宮妾)들은 한 사람도 가까이 없었다. 대상(大喪)의 그날 심산 궁곡의 농부에서부터 심지어 아낙과 어린애들까지도 마치 자기 부모를 여읜듯이 모두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11월 갑신일 자시(子時)를 기해 현륭원 동쪽 두 번째 산등성이에다 해좌(亥坐)로 장례를 모셨는데 거기가 바로 건릉(健陵)이다. 아, 원통하여라.
왕은 하늘에서 타고난 총명과 슬기에다 너그럽고 인자하고 검소한 마음씨를 지녔다. 육경(六經)을 기본으로 하여 천인(天人) 성명(性命)의 이치를 터득하고 삼고(三古)에 뿌리를 둔 예악(禮樂) 성명(聲明)의 치적을 남기었다. 도(道)는 우주(宇宙)를 요리할 만했고, 덕(德)은 당(唐)·우(虞) 시대를 재현시킬 만했으며, 공(功)은 만세를 위해 태평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할 만하여 무슨 덕 하나 혹은 행위 하나만을 들어 명명(命名)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삼가 시법(諡法)을 살펴보면 경천 위지(經天緯地)한 것을 일러 문(文), 예악(禮樂)이 다 잘 갖추어진 것을 일러 성(成), 대업을 그대로 유지하고 확실한 공로를 세운 것을 일러 무(武), 끊임없이 덕을 닦고 업을 개척하는 것을 일러 열(烈), 사물의 이치를 다 알고 천성대로 하는 것을 일러 성(聖),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하는 것을 일러 인(仁), 올바른 길을 걷고 화평을 지향하는 것을 일러 장(莊), 선왕의 뜻을 이어 그 일을 성사시키는 것을 일러 효(孝), 나의 정직으로 상대를 심복시키는 것을 일러 정(正)이라고 하였다.
왕은 15년간을 춘궁(春宮)에 있으면서 문침(問寢) 시선(視膳)의 일이 아니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경적(經籍) 연구에 몰두하여 분전구색(墳典邱索)7586) 수사낙민(洙泗洛閩)7587) 기타 구류(九流) 백가(百家)의 전적에서부터 우리 나라 선유(先儒)들의 저술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융회 관통하였고 또 성리(性理)의 원리와 학문하는 방법 그리고 옛 성인들이 서로 전수한 지결(旨訣)과 과거 현자들이 미처 말하지 못했던 심오한 이치도 역시 다 연구하고 찾아냈던 것이다. 급기야 왕위에 올라서는 하루에도 만 가지 일을 살펴야 하기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끼니도 제때에 대지 못하면서도 틈만 있으면 좌우에다 책을 두고서 밤을 낮삼아 사색에 잠기곤 하였다.
그 자신 수양의 방법에 있었서는 이르기를,
“극기(克己)는, 자기 성격이 그쪽으로 치우쳐 이겨내기가 어려운 것부터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너무 조급한 것이 병인데 ‘자신을 많이 책하고 남은 적게 책하라.’는 공자의 교훈을 읽고서 자기 기질을 변화시켰던 여백공(呂伯恭)에 대해 내 늘 그를 흠모하면서도 그대로 못하고 있다.”
했고, 또 이르기를,
“내가 무슨 학문으로 이룬 공부가 있겠는가. 다만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에 이해하고 참고하는 데서 다소 도움을 얻었던 것이다.”
했으며, 또 이르기를,
“선비라면 도량이 넓고 의지가 굳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래서 ‘홍의(弘毅)’ 이 두 글자에 대해 많은 음미를 해왔었다.”
하였다.
학문하는 법을 논하면서도 이르기를,
“직내 방외(直內方外), 그 공정을 터득해야 천덕(天德) 왕도(王道)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직내란 바로 경(敬)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뜻을 견지하는 것이고, 방외란 바로 의(義)를 말하는 것으로 가령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 같은 것이다. 사람이 성인이 되게 가르치고 현인이 되게 가르치는 성인의 말씀 천 마디 만 마디가 궁극적으로는 그를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이 모름지기 평상시에 마음을 잘 지키고 천성을 함양하여 그 마음이 언제나 내 속에 존재하고 의리가 항상 내 속에서 밝아야지만 비록 단사 표음(簞食瓢飮)으로 삭막한 고을에 있더라도 천지를 메우고도 남을 호연지기가 그대로 있는 것이고, 또 아무리 거록(鉅鹿) 진터에서 큰 전쟁을 구경하고 동정(洞庭) 넓은 들에서 아홉 마당의 주악을 하더라도 허명 정일(虛明靜一)한 내 마음은 변함없는 그대로 있어야 비로소 큰 군자(君子)가 될 수 있고 큰 사업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했으며, 또 말하기를,
“사람이 누구나 강력하게 실천을 못하는 까닭은 다만 그것을 참으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학문이 물격(物格) 지지(知至) 정도에 이르면 그는 이미 그 지위가 8, 9분(分) 위치에 올라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의(誠意) 이하의 공부는 다만 그 본령(本領)을 그대로 가지고서 적재 적소로 거기에 맞게 늘 써나가는 것뿐이다.”
하였다.
그리고 문장(文章)에 관해 논하면서는 이르기를,
“문장이라는게 도(道)가 있고 술(術)이 있는데 그 도는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되고, 술은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문장이라면 당연히 육경(六經)을 주축으로 삼고 자사(子史)를 보조역으로 하여 최고의 목표를 주자서(朱子書)에다 두어야지만 그 내용이 순정(醇正)하여 도와 술에도 거의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민간 전설 따위나 주워모은 자질구레한 작품들은 그것이 사람 심술을 제일 못쓰게 만드는 것들이므로 경술(經術)·문장에 뜻을 둔 선비라면 비록 상을 주더라도 그런 것들은 보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내가 처음에는 작가(作家)가 되려고도 해보았고 또 경학(經學)에도 종사해보았고 그리고 또 단정하게 공수하고 무릎 꿇는 것과 법도 있게 걷는 그 방면에도 공부를 해봤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들이 내 몸과 마음에 도움을 주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제왕(帝王)의 학문은 보통 선비와는 또 달라 그보다 더 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심성(心性)이니 이기(理氣)니 하는 것도 오히려 그것을 두고 세밀 또 세밀하게 분석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인데 더구나 문장짓고 쓰는 그러한 일에다 내 심력을 허비할 것이야 뭐가 있겠는가. 가령 은하수처럼 떠오른 그 상태를 가지고 말하자면 크고 둥근 옥돌 같은 것이 제왕의 문장 격식이요, 꾸밈없는 소박한 거문고가 태고의 가락인 것이며, 성문(聖門)의 말세는 좋은 구름 화창한 바람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신명불측의 변화를 일으켰을 때는 아무리 예원(藝苑)의 문장가라도 그것으로는 얘기 거리가 되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다 찾아 나열해 놓으면 아무리 전문지식이 있는 큰 선비라도 그렇게까지 해박할 수가 없을 만큼 끝도 없으면서도 모두가 절주에 맞아 《서경》전모(典謨), 《시경》아송(雅頌)과 서로 어울리는 것이다.”
하였다.
왕이 책으로 꾸며놓은 《존주휘편(尊周彙編)》은 의리를 밝히기 위해 만든 것이고, 《대학유의(大學類義)》는 옛것을 가져다 오늘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으며, 《오륜행실(五倫行實)》·《향례합편(鄕禮合編)》은 민속을 올바르게 계도하기 위함이었고, 《팔가선(八家選)》·《두륙집(杜陸什)》은 문장 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해 꾸민 것이며, 자양자(紫陽子)의 여러 책들은 과거를 계승하여 미래를 열기 위해 만든 책들이었다. 그리고 만년에 와서는 촌음을 아끼는 공정으로 복희(伏羲) 선천(先天)의 역(易)에 정력을 집중하였는데 그 책은 아직 여기 있건만 서언(緖言)을 들을 수는 없어 주(周) 문왕(文王)이 후세를 걱정했던 뜻인 공자가 십익(十翼)으로 발휘했던 내용들이 말학도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뭇 어리석은 자들을 계발하게도 못하고 말았으니 아, 이 도(道)가 막힐 징조가 아닌가.
그리고 왕이 50년 동안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통한, 아름다운 종묘(宗廟)와도 같고 수많은 백관(百官)과도 같은 저술을 신들이 명을 받아 편집 교열한 것으로는 삼집(三集)으로 된 《홍재전서(弘齋全書)》 1백 권이 있다. 그 책 머리에다 어서로 기록하기를,
“내가 세 살 때부터 수업하기 시작하여 군자(君子)의 대도(大道)에 대해 약간 들은 바 있으므로 애당초 나 자신이 수사(修辭)를 하려고는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모든 기무(機務)를 살피고 모든 일들을 경륜하는 동안 언어로 표현을 해야 하고 찬란한 공업들을 근사하게 그려내려고 하다 보니 자연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되었던 것이지 내 어찌 문장을 좋아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하였다.
학문은 추노(鄒魯)를 우두머리로 여기고, 치교(治敎)는 삼대(三代)의 것을 제일로 여겼으며, 덕(德)에 나아가는 계제로는 격물·치지·성의·정심[格致誠正]이었고, 풍속을 선도하는 법으로는 예의 염치(禮義廉恥)였으며, 문장은 의사만 전달되면 그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교(政敎)에 반영한 것으로는 규장각을 건립하여 집현(集賢)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최고의 우문(右文) 정책을 지향했고, 호당(湖堂) 제도를 모방하여 영선과[英選]를 설치함으로써 인재 양성의 지남(指南)으로 삼았던 것이다. 오교 삼물(五敎三物)7588) 을 장려하기 위해 많은 상서(庠序)를 세우고 정학(正學)을 밝히고 사술(邪術)을 물리쳤으며 경전을 존숭하고 패설류는 물리쳤다. 많은 선비들을 오게 하여 가빈(嘉賓)으로 대우하고 서로 연마하도록 격려하고 권장하여 한 조정에 모여 함께 가도록 길을 열어주었기에 당시 선비들은, 비록 작고 볼품없는 재주까지 위아래로 다 살피시는 왕의 덕화에 의해 고무되고 진작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1천 5백 년이나 뒤에 요(堯)·순(舜) 문(文)·무(武)의 전통을 이어 이 땅에 사도(師道)가 엄연히 위에 있었던 것이다. 경(經)에 이르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에 힘쓸 것을 생각하라.”
했고, 전(傳)에는 이르기를,
문왕(文王)이 이미 떠나고 없으니 이제 문(文)이 여기에 있지 않느냐.”
했듯이, 왕이 그래서 문(文)이 된 것이다.
왕은 세상에 보기 드문 자품으로 무언가 해보려는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백관들을 올바르게 감독 관리하고 명분과 실상을 종합 검토하여 일처리를 했다. 질(質)을 중시했던 은(殷)과 문(文)을 중시했던 주(周) 그리고 강(綱)을 앞세웠던 한(漢)과 목(目)에 치중했던 당(唐)의 제도들을 두루 알맞게 적용했었다. 그리하여 교화가 간 곳마다 이루어지고 정형(政刑)이 바람처럼 백성을 고무 진작시켜 얼마 있으면 온 나라가 한 덩어리가 되고 그로부터 다소의 세월만 더 걸리면 대성공이 있을 뻔했었다. 남단(南壇)의 제향 의식을 바로잡고, 기곡제[祈穀]를 대사(大祀)로 승격시켜 원구(圓邱) 방택(方澤)의 의의를 갖추었다. 늦은 봄이면 예복에 면류관 차림으로 황단을 배알했으며 경각(敬閣)을 세워 중국 조정에 대한 생각을 표시하고, 한려(漢旅) 제도를 두어 중국 유민의 후예들을 위로했다. 제사 빈객의 예를 친히 보살펴 옛부터 내려온 제도를 그대로 따랐으며, 환묘(桓廟) 올려 모시는 의식을 8회 서갑(瑞甲)의 해에 거행하고는 의폐(衣幣)와 책축(冊祝)을 해마다 꼭 직접 주었고 변두(籩豆) 올리는 일은 유사(有司)로 하여금 경건히 거행하게 하여 원묘(原廟)에 대한 예가 비로소 바르게 되었다. 황조(皇祖)를 세실(世室)에 올려 모심으로써 50년에 걸친 그의 치적을 천양하고 백세불천의 덕이 있음을 보였으며, 궁원(宮園)에서 행할 의식을 피눈물을 흘리며 제정했는데 모든 절차가 법도에 알맞고 인정으로 보나 예제로 보나 유감될 것이 없었다.
대현(大賢)을 성무(聖廡)에 모시게 하여 유술(儒術)이 흥성했고 화궁(華宮)에서 뭇 늙은이들을 대우하는 등 은총을 널리 베풀었다. 연사(燕射)의 예를 거행하여 군자(君子)다운 다툼을 구경하고 향음주례[鄕飮]를 익히게 하여 왕도(王道)가 어렵지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길·흉·군·빈(吉凶軍賓)의 대례에서부터 자질구레한 의문(儀文) 도수(度數)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경례와 곡례를 참작하지 않음이 없었고 고금을 통틀어 고증하여 인정에도 어긋남이 없고 천리에도 맞게 모든 예제가 찬란하게 갖추어졌으니 이는 예가 이루어진 것이다.
담월(禫月)에도 풍악을 연주하지 않았던 것은 헌자(獻子)의 남은 슬픔 그것이었고, 술잔 올리고 풍악 울림은 노래자(老萊子)의 봉양 잘하는 그것이었다. 아송(雅誦)을 편찬하여 시(詩) 교육을 널리 보급하고 《악통(樂通)》을 저술하여 음률의 원류를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악관(樂官)을 명하여 격조없는 가락을 지양하고 화평의 음을 되찾도록 했는데 그게 바로 일창삼탄(一唱三歎)의 유음(遺音)이라는 것이었다. 어찌 그뿐이랴. 금슬(琴瑟)과 생용(笙鏞)을 울려 빛나는 조종들을 오시게 하고, 종고(鍾鼓)와 관약(管籥)을 우리 백성들과 함께 즐겨 화기가 감돌고 소리도 아름다웠기에 하늘도 땅도 함께 호응하여 반수(泮水) 뜰에서는 해묵은 옥경[磬]이 나타났던 것이니 이는 모든 것이 찬란했던 영릉(英陵) 시절을 이 몸이 직접 보았던 것으로 그만하면 악(樂)도 이루어진 것이었다.
신한부(信漢符)를 만들어 궁성 안이 엄숙해졌으며, 노부사(鹵簿使)를 두어 의장 시위가 정연해졌다. 태상(太常) 제도를 바로 고쳐 범절이 명확하였고, 대정(大庭)에는 표(標)를 두어 조정이 보기에 숙연했다. 관부(官府) 군현(郡縣)에 기록없는 곳이 없고, 양형(量衡)·율도(律度)가 다 일정한 기준이 있었으며 정책 수립과 인재 등용, 국가 경제와 민생 문제 등 모든 분야에 다 정해진 법과 기율이 있어 하나의 대전(大典)이 성헌(成憲)으로 존재하고 있었기에 한 왕조의 체제가 질서 정연하게 갖추어져 있었으니 그만하면 법도(法度)도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백공(百工)들은 서로가 서로를 스승으로 삼고 모든 일들은 다 잘 되어갔다. 강기(綱紀)가 정연하여 조정 정사가 잘되었고, 예양(禮讓)이 흥행하여 민속이 순화했고, 기상이 맑고 깨끗하고 규모가 크고 원대하여 치도(治道)가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역(易)》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이 도(道)를 이탈없이 지키고 있기에 천하가 동화되어 만사가 이루어진다.”고 했듯이 왕도 그래서 공을 이루었던 것이다.
왕은 타고난 용지(勇智)에다 세상을 덮을 만큼 신무(神武)하여 비록 백 년 승평(昇平)을 유지하고 북소리 한 번 내지 않았었지만 일단 조정을 맡아 다스리게 되면서는 이 땅덩어리 전체를 한번 뒤흔들고 싶은 개연한 뜻이 있었던 것이다. 병신·정유년 이전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를 넘겼지만 그때마다 묵묵히 신기(神機)를 써서 뭇 흉물들을 소탕하고 국가 운명을 태산 반석 위에다 올려놓았으며 팔과 겨드랑 밑에서 권간(權奸)들이 재주를 뿌리기도 했으나 담소하면서 그들을 물리쳐 하루가 다 안 가서 조정이 깨끗해졌다. 왕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손에는 법의 칼을 들고서 사안에 따라 각기 적절한 조치를 취했는데 사람들은 감히 그 깊이를 엿볼 길이 없어 마치 비와 이슬이 내리다가도 바람이 일고 벼락이 떨어지고 하면서도 하늘 자체는 아무 동요없이 하늘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았었다.
조정 진신 중 혹 한 사람이라도 법을 범한 자가 있으면 비록 평소 존경하고 총애하고 예우했던 자라도 그것 때문에 법대로 처리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고 대의(大義)가 걸려있는 선악을 가리는 데는 더욱 엄하였다. 그리하여 궁(宮)과 부(府)가 일체가 되고 속과 겉이 다를 것이 없었으며 궁액(宮掖) 무리들도 감히 함부로 궁중 출입을 못해 안으로 조정의 신하들로부터 밖으로 먼 지방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가 마치 몸이 팔을 뿌리고 팔이 손가락을 뿌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데도 어느 사람이거나 마치 밝은 촛불이 눈앞을 훤히 비추고 있는 듯하여 국가 대계를 정하는 데 있어 발언하는 자들이 뜰을 메웠는데 왕은 그 중지를 다 받아들인 다음 한 마디로 독자적인 단안을 내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이 막힘없이 잘되었으며 무슨 일이든지 명령만 내리면 그대로 행할 정도로 뭇 신하들이 다 승복하고 오직 자기들 직무 수행에 분주했다.
국조의 군영(軍營) 제도가 잘못되어 있음을 병폐로 여겨 내외의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하고 다시 옛날과 같은 위부(衛府) 제도를 실시했으며 모든 무신은 모두 그 길을 통해 진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아무리 성질이 사납고 제멋대로 날뛰는 무리라도 모두 멍에와 채찍을 가해 통솔 범위 안에 있게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장용영을 신설한 것은 숙위(宿衛)를 엄히 하기 위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함도 아니다. 나대로의 깊은 뜻이 있어서인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선천 금려(宣薦禁旅)를 두어 무인들 발신의 길을 열어놓았고, 서북인들에게 무예를 장려하여 뛰어난 재목을 구하려고 했다. 전영(前營)을 없애 쓸모없는 병졸을 도태시키고, 양진(兩鎭)을 두어 묵어있는 국토를 넓혔으며, 남쪽 교외에서 대 사열을 하면서 노군(勞軍)의 예를 제정하고, 화성 초루에서 밤 조련을 시켜 성가퀴를 오르는 용감성을 연출시키기도 했다. 그전에 마음먹었던 일을 뒤쫓아 실현해보려고 《무예도(武藝圖)》를 증보하기도 했고 《병학통(兵學通)》을 편찬해서 척계광의 병법을 통달하려고도 했다. 황제(黃帝)·위료자(尉繚子)의 저술이나 팔진(八陣)·육화(六花)7589) 의 진법도 성명의 눈앞에서는 파죽지세여서 비록 전쟁 속에서 늙은 숙장(宿將)이라도 왕이 가끔 고문을 구하면 대답을 못했다. 그리고 또 활쏘는 것이라면 하늘에서 타고난 재주였다. 그러나 50발을 쏠 경우에 항상 그 하나는 남겨두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가득 차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틈만 있으면 내원(內苑)에 나아가 조련하고 진법을 익히게 하면서 앉고 서고 치고 찌르는 법을 구경하고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면 꿩고기 굽고 탁주를 두루 하사하여 장사들을 먹이면서 소무(昭武)의 악(樂)으로 여흥을 돋우기도 했는데 그건 바로 영릉(寧陵)의 철장(鐵杖) 목마(木馬)와도 같은 뜻이었다. 《역(易)》에 이르기를,
“사(師)는 대중이란 뜻이요, 정(貞)은 바르다는 뜻이니 대중을 바르게 지도한다면 왕(王)이 될 수 있으리라.”
했는데, 왕은 그래서 무(武)가 된 것이다.
왕은 왕도(王道)를 존중하고 패도(覇道)는 취하지 않는 것을 나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고, 현자를 신임하고 척리를 멀리하는 것을 인재 등용의 기본으로 삼았으며, 유학을 숭상하고 도(道)를 중히 여기는 것을 교육 지표로 삼고, 허례를 버리고 내실을 힘쓰는 것을 백성 교화의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순화시키는 것을 세상을 이끌어가는 권형(權衡)으로 삼았던 것이다. 넓은 도량은 태조(太祖)를 닮았고, 높고 빛난 문장은 세종(世宗)을 본받았으며, 영무(英武)하기는 광묘(光廟)와 같았고, 지행(至行)은 효릉(孝陵)을 닮았었다. 화란을 평정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일은 선조(宣祖)를 뒤따랐고, 자나깨나 국력 배양에 힘쓰고 대의(大義)를 만천하에 밝힌 것은 효묘(孝廟)와 짝할 만했으며, 현사(賢邪)를 가려 진퇴시키고 매사에 용단이 있었던 것은 숙조(肅祖)의 정치 솜씨였고, 만민이 지향할 표준을 세우고 우리 세신(世臣)들을 보호한 일은 영고(英考)의 마음씀 그것이었다.
봉모당(奉謨堂)을 건립하여 열성조의 신장(宸章) 보한(寶翰)을 모셔두고 19조(朝)의 《보감(寶鑑)》을 편찬하여 태실(太室)에다 두었다. 그리고 다시 《갱장록(羹墻錄)》을 꾸며 선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동시에 선세의 뜻을 뒤따라 실현했으며, 그밖에 적도(赤島)의 비(碑), 귀주(歸州)의 명(銘), 곡주(谷州)의 기(紀), 율원(栗園)의 편(扁), 검암(黔巖)의 갈(碣) 등등 무릇 성적(聖蹟)이 지나간 곳이나 왕실의 뿌리가 되는 고장이면 이렇듯 다 세상이 알게 표장(表章)하였다. 심지어 옛 동판을 모방해 활자를 주조하여 책들이 계속 전해지게 하였고, 남다른 총애의 표시로 술잔을 하사했던 일을 계승함으로써 출중한 선비들이 배출되었으며, 해마다 두 번 반시(泮試)를 시행하여 중엽(中葉)에 있었던 좋은 제도를 재현하고, 한 달이면 여섯 차례 빈대(賓對)하여 성조(聖祖)의 선정 구현에 몰두했던 일을 본받았다. 관예(觀刈)의 예를 거행하여 농삿일을 권하고 가체(加髢)의 습속을 금하여 사치 풍조를 없앴다.
그밖에도 범위를 가일층 확대하여 충절을 포장하고 공덕을 보답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황폐한 사당에 총광(寵光)을 내려 태백(泰伯)·중옹(仲雍)의 고상한 뜻을 표출하기도 하고, 단을 쌓아 방효유(方孝孺)연자령(練子寧)의 높은 절의를 세상에 알림으로써 풍성(風聲)을 수립하기도 했다. 곽(郭)·이(李)·순(巡)·원(遠)7590) 과 공로가 같은 이들을 나란히 실어 기울어진 국운을 다시 일으킨 공적들을 기록했고, 한(韓)·악(岳)·사(謝)·정(鄭)7591) 과 지조가 같은 이들을 똑같이 포상하여 나라 빼앗긴 억울한 마음으로 아픔을 참고 견딘 그들 뜻을 추모하기도 했다. 신축·임인년간에 순국(殉國)했던 자, 기사년의 항의(抗義)했던 자, 무신년의 종정(從征)했던 자, 임오년의 진절(盡節)했던 자들에 대하여도 혹은 즉석에서 감회를 일으키기도 하고 혹은 그날 그때를 추상도 해보면서 숨어있는 사실 하나하나를 다 찾아 내어 그에 맞는 은유(恩侑)와 총록(寵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국초 이래 유문(儒門)의 여러 현자들에 대해서도 그가 남긴 저술을 읽고는 마치 아침에 만나고 저녁에 만날 듯이 그를 사모하여 예에 맞게 조두(祖豆)와 분필(芬苾)을 마련하였다. 그야말로 왕은 조종(祖宗)의 자리를 지키고 조종이 하던 정사를 그대로 하면서 가까운 신하를 대하면 곧 조종의 교목(喬木)이라고 하고, 백성들을 어루만지면서는 조종의 적자(赤子)라고 했으며,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심지어 계획 하나 명령 하나까지도 그 모두를 조종의 것을 이어받아 그대로 실현하였다. 이렇듯 꼭 옛법만을 따랐기에 허물도 없었고 잊은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슨 제도 하나라도 고치려면 아주 조심조심 신중을 기하여 만년 억년을 두고 조종 유업을 후세 자손들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서경》에 이르기를 “대단하다 문왕(文王)이 남긴 교훈이여, 그를 잘 계승하였다 무왕(武王)의 열(烈)이여.” 하였듯이 왕도 그래서 열(烈)이 된 것이다.
왕은 생지(生知)의 슬기와 재주로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다. 크나큰 육합(六合)에서부터 머나먼 천세(千歲)와 삼교(三敎)의 같고 다른 점, 백대(百代)의 치세와 난세, 심지어 건문(乾文)·지지(地志)·갑병(甲兵)·전곡(錢穀)·의약(醫藥)·복서(卜筮)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으로 이해하면서, 이치는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일상의 말은 역시 《시(詩)》·《서(書)》·《예(禮)》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음양(陰陽) 운행의 묘리라든지 이기(二氣) 굴신의 오묘함 같은 것은 신들로서는 들어보지 못했었다.
왕은 남에게 총명(聰明)을 자랑한 적이 없었지만 매양 자리에 임하면 계독(啓牘)은 산처럼 쌓여 있고 그밖의 묘모(廟謨)·대장(臺章)·융정(戎政)·시사(試事)·형옥(刑獄)·재부(財賦) 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고 좌우에서 쉴새없이 주달해도 그를 대응하는 데 있어 늘 여유가 있었다. 왕은 말하기를,
“옛분들이 오관(五官)을 일시에 함께 썼던 것은 꼭 재주만 남달라서가 아니라 다만 분수(分數)에 밝았던 것이다.”
했는데, 이 세상 모든 이치가 왕에게는 다 득(得)이 되었던 것이다.
남의 좋은 점을 취하기를 마치 강하(江河)가 터지듯이 했다는 대순(大舜)과 같이 해서 한마디 말이라도 뜻에 맞으면 아무리 소원하고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도 반드시 화기에 찬 얼굴로 받아들였고, 뭇 신하들도 자리에 오르면 반드시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그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들었으며 말이 혹 성상 뜻에 거슬려도 위노(威怒)를 가한 적이 없었다. 사리에 닿는 말이면 그를 따르기를 구슬을 굴리듯 했으며 대각(臺閣)을 중히 여겨 언젠가 언자(言者)가 승여(乘輿)를 범한 일이 있었는데 정신(廷臣)이 그에게 죄 내릴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까마귀나 솔개의 새알을 깨뜨리면 봉황새가 오지 않는 법이다. 그가 임금 직무에 대해 말을 했으니 권장할 일이지 죄줄 일이 아니다.”
하였다. 구언(求言)의 하교를 자주 내리면서 언젠가 이르기를,
“선왕조에서는 성왕 만년(晩年)까지도 바른 말 격한 논쟁을 하는 자들이 많았었는데 근일에는 할 말을 과감하게 하는 자가 없으니 내가 간언을 하게 만드는 성의가 없어서인가?”
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선(善)이 다 왕의 것이었던 것이다.
현자를 목마르듯 찾아 경술(經術)로 발신한 자도 있고, 문학(文學)으로 한 자도 있고, 재유(才猷)로 두각을 내민 자도 있고, 세록(世祿)이나 훈구(勳舊)로 나온 자도 있었는데 혹은 그의 재능을 성숙시키기 위해 두고 기르기도 했고, 혹은 높이 선발하여 초천(招遷)하기도 했으며, 혹은 남들이 다 버린 속에서 추려내는가 하면 혹은 쌓인 죄를 탕척하고 쓰기도 하여 맛에 따라 모양에 따라 각기 그의 생김새대로 이동하고 말뚝감은 말뚝으로 쓰고 문설주감은 문설주로 썼다. 하늘이 사(私)가 없고 바다가 물을 가려 받지 않듯이 능력만 있으면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그 모두를 적재 적소에 썼던 것이다.
침전(寢殿)에다는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편액을 달고, ‘정구 팔황(庭衢八荒)’이라는 네 글자를 침전 벽에다 대서로 써서 걸었으며, 또 ‘만천 명월 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하여 그 서(序)를 썼는데, 서에 이르기를,
“달은 하나요 물의 흐름은 일만 개나 되는데 물은 이 세상 사람들이요 달은 태극(太極)이며 그 태극은 바로 나이다.”
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 갖가지 재주가 모두 왕의 쓰임이 됐던 것이다. 지학(志學)의 나이 때부터 그 조예가 벌써 상성(上聖)의 경지에 가 있었으나 도(道)를 바라보아도 보지 못한 듯이 하여 발분 망식을 하고 순서를 따라 가고 또 갔다. 경신년7592) 년에 와서까지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듯이 겸손하기만 하여 자신을, 나이 50에 49세 때의 잘못을 알았다는 거원(遽瑗)에다 비유했었으니 그것이 바로 성인 중에도 더욱 성인이었던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자기 천성을 다 찾아 그대로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게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하면 모든 물건에 대하여도 그리할 수 있고, 모든 물건에 대해 그리할 수 있으면 천지의 화육(化育)에 동참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였으니, 왕은 그래서 성(聖)이었던 것이다.
왕은 우애도 대단하여 언젠가 은신군(恩信君) 사당에 가서는 손수 술잔을 올리고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이어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풀고 친히 비문까지 써 세웠으며, 영묘(英廟)의 여러 귀주(貴主) 및 두 군주(君主)에 대해서도 빈틈없는 사랑의 뜻을 보이며 늘 이르기를,
“어버이 마음 그대로 따른 것이다.”
하였다. 화완 옹주(和緩翁主)가 하늘에 닿은 죄가 있었지만 법을 어겨가며 너그럽게 용서하고는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몹시 사랑했던 사람이다.”
했으며, 찬(禶)이 역적들의 기화(奇貨)가 되어 종묘 사직이 위태위태했었는데 뭇 신하들의 청에 못이겨 비록 사랑을 끊고 법으로 처치하기는 하였어도 오랜 세월을 두고두고 그를 생각하고 또 몹시 슬퍼했었다. 그리고 또 인(䄄)이 나라의 화근이 되어 자전이 누차 윤음을 내렸고 여론도 날이 갈수록 들끓었는데, 처음에는 그를 가까운 섬에다 안치하면서 처자식도 다 함께 있게 해주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도 다 대주다가 끝에 가서는 정신(庭臣)들의 강력한 항쟁도 아랑곳 않고 이르기를,
“척포 두속(尺布斗粟)의 비난을 한(漢) 문제(文帝)는 면치 못했었는데 오늘의 전은(全恩) 그 한 일이야 어찌 역사에 빛날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나의 처지를 말하면 동기간이라고는 그 한사람 뿐인데 제신들은 어떻게 차마 정유년에 있었던 일을 나더러 되풀이하라는 것인가?”
하였다.
조정 신료들에 대해서도 그들 사정을 속속들이 다 살펴 아무리 작은 사정이라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고 죽고 살고 하는 즈음에 있어서는 더더욱 보살핌이 지극했었다. 언젠가 봄이 되어 꽃구경을 하기로 했다가 하교하기를,
“상신(相臣)이 죽어 빈소에 있는데 어떻게 놀이를 할 것인가. 두궤(杜蕢)가 술잔을 올렸던 것7593) 은 그런 뜻에서였던 것이다.”
하였다.
백성을 사랑하여 마치 부상자 보듯 하였고 방백(方伯)·수재(守宰)를 면전에 불러 백성의 고통을 살피고 구제의 길을 개유하는가 하면 혹은 각도에 수의 어사(繡衣御史)를 보내 법을 범한 자를 응징하고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게도 했으며 혹은 조근하러 온 관원을 불러 백성들 질고(疾苦)를 묻기도 했다. 비 한번 내리고 볕 한번 나는 것까지도 신경쓰며 걱정하기를 마치 농부가 자기 농사 걱정하듯 했으며 측우(測雨)하는 그릇 점풍(占風)하는 장대 등을 설치하고 상신(上辛)날이면 사직에 제사지내 풍년의 경사가 있기를 빌고, 정월 초하룻날은 윤음을 내려 농기를 잃지 말도록 미리 권고했었다. 그리고 흉년을 당하면 그때마다 마치 불에 타는 사람을 구제하고 물에 빠진 자를 건져내듯이 오로지 제휼(濟恤)에만 전념하여 창고를 열어 진구하고, 곡식을 배로 실어다 먹이게도 했으며, 내탕의 것을 덜어내어 돕기도 하고, 곡식 환자를 정지시켜 백성들이 숨을 돌리기도 하였다. 막중한 공헌(貢獻)도 견감해 주고 정당한 왕세(王稅)도 수를 감하는 등 황정(荒政)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벽 위에다 표기해 두고 늘 눈을 돌려 점검했으며 날마다 낭묘(廊廟)의 신들을 접견하고 진구책을 강구했다. 위로와 독려가 어느 도이든 안 간 곳이 없었고 민정을 면밀히 파악하여 만리가 뜰 앞에 훤했으며 사랑이 미치는 곳에 어느 남정 하나 아낙 하나도 굶어 구렁에 굴러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시정(市井)의 백성들을 위해서는 내무(內貿)의 명칭을 없애고 궁노(宮奴)의 폐단을 단속했으며, 노비(奴婢)인 백성들을 위해서는 추쇄관(推刷官)을 혁파하고 선두안(宣頭案)을 바로잡았으며, 산골 백성들을 위해 엽군(獵軍)을 철폐하고 궁결(宮結)로 내게 하고, 바닷가 백성들을 위해 대선(隊船)을 창설하고 어수(魚鱐)로 정하였다. 전복 진공을 견감하여 제주도 백성들 어깨를 쉬게 하고, 산삼 진공 수를 감해 서도 백성들 힘이 풀리게 했으며, 사랑의 은전을 베풀어 갓난애들까지도 은택이 입혀졌고, 매장 정책을 실시하여 무덤에까지 사랑이 미쳤다. 한 마디로 어느 백성 하나 사랑을 입지 않은 자 없었고 그리하여 윤음이 한 번 내리기만 하면 백성들 모두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왕의 얼굴은 점점 옛날 안색이 아니었으니 그는 우근(憂勤)이 너무 지나친 까닭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병석에서의 마지막 음성까지도 누누이 강조한 것이 농사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으니 아,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왕은 형옥(刑獄)에 있어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오직 불쌍하고 가엾은 마음으로 단 한 명이라도 잘못된 억울함이 있을까를 염려한 나머지 각도의 녹안(錄案)을 친히 열람하느라 여러 자루 촛불을 다 태웠고, 언제나 몇 십 안건을 심리하거나 혹 판하(判下)할 때면 시신(侍臣)들이 받아쓰기에 해가 다 저물어도 왕은 일찍이 권태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왕은 이르기를,
“옥사 처리에 있어서는 어떠한 선입견도 내세워서는 안 된다. 나는 언제나 살릴 수 있는 자를 살리려고 하지 꼭 죽어야 할 자를 살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옥안(獄案)에 관련이 되어 있는 자의 성명은 잊어버리질 않는데 그것은 내가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성의로 하여 그리되는 것이다.”
했으며, 또 이르기를,
“형(刑)은 정치의 보조 도구이기 때문에 사람 목숨이 비록 중하다 해도 사건이 윤기(倫紀)나 교화(敎化)와 관련이 있으면 꼭 법에만 구애받을 것은 없는 것이다.”
하였다. 전후 여러 역도들이 저들 스스로 천헌(天憲)을 범했으나 그 우두머리만을 죽이는 데 그치고 추종자들은 다스리지 않았다. 칼과 창 등 시끄러움이 일어나는 것이 언제나 죄없는 자를 죽인 것이 원인이 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왕은 그가 일찍이 근밀(近密)에 있었던 자면 비록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했더라도 그를 극률(極律)로 처단하지는 않았고 중세 이후로는 그의 범행이 지극히 중한 자가 아니면 왕부(王府)의 나졸을 내보내지 않았었다. 왕은 이르기를,
“4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실(漢室)의 발판은 풍류 독후(風流篤厚) 금망 소활(禁網疏闊) 이 열덟 글자에 있었던 것이다. 나도 지금 그 자신이 악역(惡逆)을 범했거나 이름이 죄안에 꽉 박혀버린 자가 아니면 모두 소탕(疎蕩)해버리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조정에는 대죄에 걸린 사람이 없고 세상에는 애매하게 죄를 당한 집이 없다면 그 어찌 화기(和氣)를 불러 일으키고 국가 운명이 영원하기를 하늘에 비는 바로 그 길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에 두 《명의록(明義錄)》을 만들어 국가의 법과 기강을 정하고 또 흠휼(欽恤)의 법칙을 만들어 제도를 바로잡고 불평의 소지를 없앴다. 죄인을 처자까지 벌하지 못하게 하고 가족이 배소에 따라가려고 하면 허락했으며, 오래 숨겨졌던 억울함도 모두 왕의 수레 앞에서 호소할 길을 열어주고, 은혜는 저멀리 변방 수졸에게까지 미쳐갔었다. 그뿐 아니라 예경(禮經) 교훈에 따라 나무도 계절에 맞춰 벌채하게 하고, 황충을 바다에 버리게 하여 무릉(武陵)에서 했던 대로 하는 등 작고 꿈틀거리는 동물 식물 할 것 없이 모두가 함께 살자고 하는 큰 덕화 속에 있었으니 전(傳)에 이른바, 어버이를 사랑하고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고, 그리고 만물을 사랑한다
는 것으로 왕이 그래서 인(仁)이 된 것이다.
왕은 성학(聖學)이 하나에서 열까지가 다만 경(敬)이라는 글자 한 자에 있다고 생각하고 동정(動靜)을 통하여 그것을 기르고 내외(內外) 구별없이 그것을 닦아 정중한 자세로 남면(南面)을 하고서 언제나 전전긍긍 깊은 못가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였다. 하늘을 섬기는 데 있어서도 언제나 상제를 대하고 있는 듯이 무릇 햇볕이 비치는 곳이면 조금도 자세를 흐뜨리지 않고 옷매무새를 고치며 조용히 거닐었고 또 북신(北辰)이 있는 곳이라 하여 북을 향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질풍(疾風) 뇌우(雷雨)가 있으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밤을 세워 안절부절 못했으며, 친히 종묘(宗廟)에 제사 모시면서도 예를 갖춘 몸짓으로 문 밖을 나오면서는 조심조심 몸둘 바를 몰라 했고 오르내리며 술잔을 올릴 때는 민첩하기 새가 날듯했기에 제사를 돕는 백관들도 엄숙하고 화목했었다.
언젠가 겨울 제사에 초헌(初獻)을 마친 후 밤이 너무 추웠던 관계로 제신들이 소차(小次)로 드실 것을 청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예복 차림으로 끄덕않고 서 있었는데 제사가 끝났을 때는 하늘은 이미 동이 트고 예복 위에는 서리가 내려 있었다. 그리고 혹시 섭행을 명할 때는 꼭 근신(近臣)을 보내 가서 살피게 하고 재전(齋殿)에 납시어 촛불을 밝히고 기다리다가 제례가 끝난 다음 비로소 휴식을 취했다. 철마다 모시는 크고 작은 모든 제사에 있어서도 거의 꼭 재거(齋居)하기 때문에 1년이면 재거하는 날이 3분의 2가 되었다.
언젠가 몹시 더운날 빈연(賓筵)에 납시어 하교하기를,
“오늘은 더워서 경들로 하여금 일찍 물러가라고 할 생각이 문득 들었었는데 그것이 바로 들뜬 생각이었다.”
하고는, 하루 해를 다 보내고 파조(罷朝)하였다. 그리고는 잔치를 열어 가까이 대하면서 예수(禮數)를 줄이고 활짝 웃어보였는데 그 따스하기가 마치 한 가정의 부자(父子) 사이와도 같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법전(法殿)으로 나갈 때 군신들 모두가 엎드려 머리를 숙였는데 빈연에서 나왔을 때는 땀이 등에 젖어있었다.
왕은 비록 병석에 누워 있을 때라도 속옷바람으로 신료들을 접견한 적이 없었으며 일찍이 빈료(賓僚)나 양방(兩坊)의 관을 역임한 자이면 그가 비록 음관(蔭官)이라도 관직 명칭으로 부르고 이름을 바로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퇴조(退朝)하여 사석에 있을 때라도 척원(戚畹)들은 감히 조정(朝政)에 간여를 못했으며 궁중 측근 무리들도 공사(公事)가 아니면 감히 함부로 어전에 오지를 못했었다. 왕이 일찍이 이르기를,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견할 때가 많고 환관(宦官)·궁첩(宮妾)들을 접견할 때는 적다고 한 그 말에 대해서만은 내 별로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정사에 대해 한시도 생각을 놓지 않고 게으른 빛 없이 조참(朝參)·상참(常參)·윤대(輪對) 어느 것 하나 폐한 적이 없고 신하들의 장차(章箚)와 중외에서 들어온 주독(奏牘)도 체류된 것이 없었다. 하룻동안 전궁(殿宮) 문안이 끝나고 나면 곧 신하들을 접견하고 밤 깊은 줄을 모르는 때가 많았고 궐문이 열리기도 전에 명령이 내려지는 것이 날마다 보통이었다. 왕은 이르기를,
“수성(守成)의 임금은 정사에 부지런하고 백성들을 걱정하고 하여 자기 직분만 다하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
하였다. 절제와 검소를 몸소 실천하여 여러 번 세탁한 옷도 입었으며 곤복(袞服)이 아니고는 비단을 입지 않았다. 어선(御膳)도 하루 두 끼에 불과했고 음식 역시 서너 가지에 불과했으며 침전(寢殿)은 장식도 안 한데다 낮고 좁아 비가 오면 새는 곳이 있었다. 왕은 이르기를,
“도(道)에 뜻을 두고서 궂은 옷 궂은 음식을 부끄러워하면 그런 자와는 얘기할 것도 없다고하지 않았는가. 성인(聖人)이 소박한 옷 입고 낮은 궁실에서 살고 했기에 덕업(德業)이 날로 전진했던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위의(威儀)는 반드시 갖추어 언제나 거둥 때면 행차가 질서 정연하여 마치 먹줄로 그어놓은 듯했으며 반항(班行)과 의위(儀衛)도 제자리를 벗어남이 없었고 어좌(御座) 곁에는 도서(圖書) 궤안(几案)들이 각기 일정한 자리가 있었다. 왕은 이르기를,
“경재잠(敬齋箴)에 이르지 않았던가. 그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며 그 첨시(瞻視)를 존엄히 하라고. 그렇게 외모를 절제하는 것은 속 마음을 수양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아무렇게나 지내다가 집에 들어가 부형(父兄)을 섬기고 밖에 나와 군장(君長)을 섬기려고 하면 장차 무엇이 그 밑받침이 될 것인가. 횡거(橫渠)가 그래서 사람을 가르치면서 반드시 예(禮)부터 가르쳤던 것이다.”
하였다.
급기야 나라에 원량(元良)이 있자, 더욱 교육 방법을 솔선수범으로 하기 위하여 순서있게 유도하는 것이 규범이 있고 법칙이 있었으며, 자신의 소리와 자신의 몸이 바로 상대의 표준이 되고 법이 되어 말하지 않아도 자연 전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경신년 책봉을 받고 관례를 올릴 때 예를 갖춘 모습이 의젓하였는데 그것은 평상시 본 것이 몸에 배었기 때문인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정제하고 장중하고 정직하여 상대로 하여금 경의를 일으키게 한다.”
했듯이, 왕은 그래서 장(莊)이 된 것이다.
왕이 영종(英宗)을 섬기면서 하늘에서 타고난 지극한 성품으로 10년 동안 시탕(侍湯)을 하면서도 오직 조심조심으로 일관했었는데 효손(孝孫)이라는 칭호를 내린 일이 옛날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병신년 국상을 당한 후로 휘일(諱日)만 되면 재계하고 슬피 사모하기를 20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며 태묘(太廟) 배알 때도 13실(室)7594) 에 이르면 언제나 몸을 굽히고 단정히 서 마치 그 위(位)에서 무엇인가를 본 듯이 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반드시 진전(眞殿)을 배알하여 비바람 추위 더위에도 폐한 일이 없었고, 또 봄 가을이면 각능을 두루 배알하면서 계절 따라 갖는 감상이 가까운 조상이라 하여 더 후하게 하는 일은 없었으나 유독 원릉(元陵)에만은 한 해 걸러 한 번씩 행행하여 죽도록 사모하는 뜻을 표했었다.
자전(慈殿)·자궁(慈宮)을 섬기면서도 하루 세 번이라도 화한 얼굴 유순한 태도로 의중을 미리 알아 기쁘게 해드리고 물심양면으로 모자람이 없었기에 사랑과 효성이 한데 어우러져 궁위(宮闈) 사이에 화기가 가득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나라에 일이 있으면 큰일이거나 작은 일이거나 내 일찍이 자전께 여쭙지 않고 행한 일은 없었다.”
하였다. 자전 배알 때는 언제나 전문(殿門)을 바라보고는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 걸으면서, 우리 가법(家法)이 그렇다고 했고, 만수전(萬壽殿)을 수리하면서는 전문 밖에다 막차를 설치하고 공사를 직접 감독하다가 공사가 끝나서야 내전으로 돌아왔으며, 원릉(園陵) 행행 때는 비록 종일 힘들게 움직였어도 돌아오기만 하면 아무리 날이 저문 뒤에 입궐했더라도 맨 먼저 동조(東朝)로 갔는데 그것은 바로 나갈 때 고하고 돌아와서는 뵙는[出告反面] 뜻이었던 것이다.
을묘년에 술잔을 올리고는 왕이 기뻐하며 이르기를,
“일찍 아버지를 여읜 나로서 믿고 우러러 보는 곳이라고는 우리 자궁뿐인데 지금 이 고장에서 이 예를 거행하게 되어 지극한 소원이 대강 풀린 셈이다.”
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갑자년은 바로 자전의 육순(六旬)에다 자궁의 칠순(七旬)이 되는 해여서 그때 가서 경례(慶禮)를 다시 거행하기로 하고 뿔잔을 화궁(華宮)에 간직해 두게 하고서 좋은 그때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선어(仙馭)가 이미 떠나고 말았으니, 아, 원통하다.
비궁(閟宮)에 대해서는 지극한 슬픔이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어 일생을 두고 슬피 사모하였고, 정(程)·주(朱)의 예를 절충하여 축식(祝式)을 따로 정하고 춘추(春秋) 대의에 따라 주토(誅討)를 가하기도 했었다. 금등(金縢)의 글이 나타나 왕의 효성이 세상에 더욱 알려졌는가 하면 괴대(槐臺)를 세워 후세에 영원한 혜택을 남겼으며, 제사 의식과 기물을 다 갖추어 향사가 예에 어긋남이 없었고,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전성(展省)도 거르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이 즉위하던 그날 내린 그 윤음이야말로 바로 몇 십 가지 대의(大義) 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대의여서 우리 신들이 죽도록 높이높이 받들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하늘이 길택(吉宅)을 주어 면례(緬禮)를 잘 치루었는데 광지(壙誌)를 지어 숨겨진 빛을 드러내고 발인 의식을 성대히 하여 종사(終事)를 잘 마무리했으며, 원호(園號)를 높여 숭보(崇報)를 나타내고 상설(象設)을 갖추어 체제(體制)를 존엄하게 했다. 그리고 화성[陪京]에다 행궁(行宮)을 두어 원침을 수호하는 곳을 더 장엄하게 꾸미고, 어진(御眞)을 재전(齋殿)에 모셔 정성(定省)의 마음을 거기에다 썼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해마다 원침 배알 때면 지지대(遲遲臺)에다 행차를 멈추고 시간을 끌며 멀리 바라보면서 차마 금방 길을 뜨지 못했는데 그건 바로 공부자가 부모(父母)의 나라를 떠나면서는 머뭇머뭇했던 그 뜻이었던 것이다.
경신년 봄 행행 때 읊은 어시(御詩)에
밤을 새운 화성땅 돌아보면 멀기만 해
지지대 서서 자꾸 또 머뭇거리네
했었는데, 그 시를 쓰고는 왕의 행차가 그곳을 다시는 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 말고도 슬픔을 삼키고 아픔을 씹으며 임금 노릇하는 것도 좋은 줄을 몰랐기에 24년간 왕위에 있었으나 뭇 신하들이 감히 휘호 올릴 것을 청하지도 못했었고, 또 당(堂)을 노래당(老來堂)이라 이름하고 누(樓)를 신풍루(新豊樓)라고 이름한 것은 우리 신들로서는 차마 말못할 성상의 은미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서 그 모두가 성상의 효심에서 우러나온 것들인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요(堯)·순(舜)의 도는 효제(孝悌) 그것이다.”
했듯이, 왕이 그래서 효(孝)가 된 것이다.
왕은 광대(廣大)한 영역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고 그리고 더할 수 없는 정미(精微)를 기했으며, 최고 고명(高明)의 경지에 오르고 그리고 중용(中庸)의 도를 통달했는데 이는 도학(道學)의 바름이었고, 천지 사이에다 내놓아도 어긋남이 없고 백세 후에 다시 보아도 의혹될게 없었으니 이는 의리(義理)가 올바른 것이었으며, 마음을 바르게 하고 나서 조정(朝廷)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하고 나서 백관(百官)을 바르게 하고 백관을 바르게 하자 모든 백성, 모든 일이 바르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이는 다스리는 법과 규모가 바른 것이었다. 성조(聖祖)로부터 정일(精一)의 전통을 이어받고 성자(聖子)에게는 연익(燕翼)의 교훈을 물려주어 시작에서 끝까지가 완성되었으니 이는 왕자(王者)로서 크게 정상의 도리를 따른 것이었다. 전(傳)에 이르기를,
“대인(大人)이란 자기를 바르게 함으로써 모든 상대가 발라지는 것이다.”
했듯이, 왕이 그래서 정(正)이 된 것이다.
아, 주공(周公) 이전에는 성인(聖人)이 윗자리에 있었으나 주공 이후로는 성인이 아랫자리에 있었다. 윗자리에 있을 경우에는 그의 도(道)가 행해지지만 아래에 있으면 학(學)이 밝아지는 법이니 ·공자·주자가 환경은 비록 달랐으나 그 공로에 있어서는 똑같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왕은 공자·주자의 학으로써 ·의 도를 맡아 사문(斯文)을 크게 개척하셨으니, 5백 년을 주기로 한 분씩 세상에 나타나는 명세(命世)의 인물이 바로 왕이었는데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어 하늘이 그 수명을 제한했기에 성인과 성인이 주고 받던 전통을 이제 다시 찾을 길이 없게 된 것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도(道)가 행해지지 않고 학이 밝지 못한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했듯이 그 역시 기수(氣數)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아, 원통하여라.
신은 지식이래야 성인의 깊이를 알기에 부족하고 문장이래야 그 덕과 모든 아름다움을 그려내기에 부족하지만 그러나 10년을 유악(帷幄)에 있으면서 남다른 은총과 예우를 입었었고 또 대화가 오고 가는 법연에서도 모셔본 적이 있기에 감히 턱도 없는 한두 소견을 내세워 하늘의 태양을 묘사해보려고 한 것이다. 백세 이후에 이 참람된 행위를 용서하고 그 뜻을 슬프게 보아줄 자가 있을 것이다.【행 지중추부사 이만수(李晩秀)가 제술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7책 294면
【분류】 *왕실(王室) / *역사(歷史)




[註 7511]한 광무(漢光武)하남(河南)·남양(南陽)에 관하여 말한 명제(明帝)의 대답을 기특하게 여겼었는데, : 광무제 당시에 각 군현의 간전(墾田)·호구(戶口) 등 기록이 부실한 것들이 많아 그를 정확히 조사해 올리도록 했는데, 진류(陳留) 고을에서 하남(河南)·남양(南陽)은 조사할 수가 없다는 서간(書簡)을 올렸다. 그것을 본 광무가 성을 내 따져묻자 명제가 장막 뒤에 있다가 듣고서 말하기를 “하남은 제성(帝城)이기 때문에 근신(近臣)들이 많이 살고, 남양은 제향(帝鄕)이기 때문에 근친(近親)들이 많이 살고 있어 그 전택(田宅)들이 제도 이상으로 화려한 것이 많을 것이므로 어느 것을 어떻게 표준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였다. 《연감류함(淵鑑類函)》 제왕부(帝王部).










































































[註 7585]지록(池錄)과 요록(饒錄) 두 본 : 《어류(語類)》는 송(宋)의 여정덕(黎靖德)이 140권으로 편찬하기 이전에 이도전(李道傳)이 요덕명(廖德明) 등 32인이 기록해둔 43권에다 장흡록(張洽錄) 1권을 증보하여 지주(池州)에서 발간한 지록(池錄)이 있고, 도전의 아우 성전(性傳)이 황간(黃幹) 등 42인이 기록한 46권을 수집하여 요주(饒州)에서 발간한 요록(饒錄)이 있으며, 채항(蔡抗)이 양방(楊方) 등 32인이 기록한 것을 26권으로 편집해서 역시 요주에서 발간한 요후록(饒後錄)이 있다. 또 오견(吳堅)이 이상 3개 록(錄)에 수록된 것 이외의 29인과 또 아직 간행이 안 된 4인의 기록을 증보하여 건안(建安)에서 간행한 20권의 건록(建錄) 등이 있고 그것을 분류 편집한 것으로 황사의(黃士毅)가 미주(眉州)에서 발간한 미본(眉本) 또는 촉본(蜀本)과 왕필(王佖)이 휘주(徽州)에서 발간한 휘본(徽本) 등이 있음. 《사고전서(四庫全書)》 자부(子部) 유가류(儒家類).






[註 7591]한(韓)·악(岳)·사(謝)·정(鄭) : 송(宋)의 한세충(韓世忠)·악비(岳飛)·사방득(謝枋得)·정소남(鄭所南)을 말한다 한세충은 북송(北宋)이 망하자 수병(水兵)을 거느리고 적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결국 진회(秦檜)의 책략에 의해 병권(兵權)을 빼앗기고는 서호(西湖)에 숨어 살며 여생을 보냈고, 악비는 역시 금(金)과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우던 중 화의(和議)가 일어나 글르 반대하다가 진회의 참소로 천추의 한을 품고 옥중에서 죽었으며, 사방득은 의병을 일으켜 원(元)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그곳 수도로 압송되자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고, 정소남은 송나라가 망하자 일생을 원(元)에 대한 적개심으로 보내며 조송(趙宋)만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름도 소남·사초(思肖) 등으로 바꾸고 앉아도 꼭 남쪽을 향해 앉았다 한다. 《송사(宋史)》 권365·425.


[註 7593]두궤(杜蕢)가 술잔을 올렸던 것 : 진(晉)의 대부(大夫) 지도자(知悼子)가 죽어 장례를 치르기 전에 평공(平公)이 사광(師曠)·이조(李調)를 데리고 술을 마시며 풍악을 울리자 두궤(杜蕢)가 술잔을 들어 사광·이조에게 각각 한 잔씩을 먹이고 자신도 한 잔 마시고서 흉일(凶日)에는 원래 주악을 않는 것인데 지도자(知悼子)가 죽어 시신이 아직 집에 있으니 그런 흉일이 없는데도 사광이 태사(太師)로서 그것을 임금께 고하지 아니했으므로 그 벌주를 마셔야 했고, 이조는 측근의 신하로서 임금 잘못을 두고 보았으므로 마셔야 하고, 자기는 재부(宰夫)로서 자기 영역 이외의 일을 간섭한 죄로 벌주를 마셨다고 했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

 

홍재전서 제7권
 시(詩) 3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의 화성 시축(華城詩軸) 중의 삼운(三韻)에 화답하다 소서를 아울러 쓰다


매년 화성을 행행할 때마다 좌의정이 반드시 시를 지었고 나는 매양 여기에 화답을 했다. 그런데 올봄의 거둥에는 뜻밖의 경계할 질환이 있어 사흘 밤 동안 병을 조섭하고 비로소 그다음 날 아침에야 원(園)을 배알하였다. 그사이의 시일이 비록 많이 걸리지는 않았으나, 선침(仙寢)을 우러러 의지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한편 자위(慈闈)를 떠나온 슬픔 또한 겹쳤다. 그래서 시(詩)로써 그 뜻을 말하려 했으나, 병 때문에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개는 좌의정이 먼저 내 뜻을 계발해 주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환궁(還宮)할 때에 좌의정이 시를 보여 주므로, 마침내 거기에 화답하여 돌려보내는 바이다.

밤마다 병 조섭으로 온밤을 지새우고 / 調痾夜夜漏壺傾
새벽이면 허둥지둥 마음 가누지 못했네 / 明發瞿瞿不盡情
처음엔 하찮은 정성으로 원묘에 왔다가 / 始寓微誠園廟近
이내 기쁜 소식 가져 전궁에 바치도다 / 旋將喜報殿宮呈
남은 추위는 새벽 깃발 그림자에 들어오고 / 餘寒曉入旌旂影
화한 기운은 아침 검패 소리를 따라오네 / 協氣朝隨劒佩聲
인자한 덕 무량하여 온 부에 미치어라 / 慈德無量覃一府
아름다운 쌀알 끝없이 만년토록 나오리 / 生生嘉粒萬年更

근친하러 가는 다리 가의 길목에 / 逌覲橋邊路
꽃샘바람이 새벽 안장을 흔드네 / 花風曉拂鞍
농사일은 장차 대유가 될 것이고 / 農功將大有
봄빛은 장안으로부터 들어오도다 / 春色自長安
행궁도 오히려 안온함을 알겠어라 / 行殿猶知穩
융포가 도리어 춥지를 않네그려 / 戎袍却不寒
성과 해자가 이와 같이 좋으니 / 城池如此好
백성 기쁨 얻는 것이 급선무로세 / 先務得民歡
대유(大有)는 북둔평(北屯坪)의 이름이고, 장안(長安)은 북성문(北城門)의 이름인데, 평(坪)은 누풍(屢豐)의 의의를 부친 것이고, 문(門)은 경사(京師)로 통하는 길이므로 셋째와 넷째 구절에서 그것을 말하였다.

끝없는 창오의 구름 만 겹이나 깊어라 / 一望梧雲萬疊深
선왕께 어디에도 정성 바칠 곳이 없네 / 羹墻無處效誠忱
비 뒤에서 수반 들고 더디 출발하노니 / 碑陰水飯遲遲發
해마다 격식 낮춤은 소자의 마음이라오 / 降格年年小子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