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 정랑공 휘 탁2/(贈)靑巖察訪 최군(崔경)

증(贈) 청암 찰방(靑巖察訪) 최군(崔君) 행장 갑인년(1674, 현종15)

아베베1 2011. 4. 27. 22:20

전주최공  문성공

              중랑장공

              연촌공

              의령공

명재유고 제44권
 행장(行狀)

증(贈) 청암 찰방(靑巖察訪) 최군(崔君) 행장 갑인년(1674, 현종15)


군의 휘는 경(璥)이고 자는 중윤(仲潤)이다. 그 선조는 전주인(全州人)으로 고려(高麗) 때 시중을 지낸 문성공(文成公) 아(阿)의 후예이다. 7세조는 덕지(德之)이니 집현전 직제학을 지냈으며, 문장이 있고 덕이 높다고 알려졌다. 우리 문묘조(文廟朝) 때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조정에서 만류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상이 공의 상(像)을 그리라고 명하여 내려 주었다. 그 당시에 명망 있는 인사인 성근보(成謹甫) 같은 제현들이 모두 시를 지어 주며 이별하였으니, 소 태부(疏太傅)에 비견할 만하였다. 후에 향인(鄕人)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
증조는 언청(彦淸)이니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를 지냈으며, 일두(一蠹) 정 선생(鄭先生)의 외손이다. 조부는 기수(耆壽)이다. 충암(冲庵) 김 문간공(金文簡公)의 손녀에게 장가들어 휘 응생(應生)을 낳았으니, 바로 군의 선고이다. 선비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선무랑(宣務郞) 석창(錫昌)의 딸이다.
군은 천계(天啓) 병인년(1626, 인조4) 3월 22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지극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 대추나 밤을 얻으면 반드시 먼저 부모에게 올렸다. 조금 자라서는 부모의 뜻을 따르고 받들었으며 일찍이 어긴 적이 없었으나,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간하였다.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지극히 화락하게 지냈다.
13세에 김씨에게 장가들었다. 김씨의 집안은 자못 부유하였으므로 의식이 조금 나았는데 군은 번번이 입지 않고 먹지 않으며 말하기를,
“부모는 변변치 못한 음식도 계속 드시지 못하고 몸에 걸칠 온전한 의복이 없는데, 자식이 무슨 마음으로 홀로 이것을 누리겠는가.”
하니, 김씨 집안에서 그 말에 감동하여 매번 군의 부모에게 재물을 주고 도와주었다.
군의 부친이 병이 심해지자 군이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면서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사정이 급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드렸다.
상을 당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 물품을 마련할 수 없어서, 무릇 7일 만에 빈소를 차리고 7개월 만에 장사 지냈다. 빈소를 차리지 못했을 때는 낟알도 입에 넣지 않았으며 소리 내어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장사 지내기 전에는 밤낮으로 빈소 곁을 지키며 조석으로 곡하며 제물을 올리면서 하나의 예라도 태만히 하지 않았다. 장사 지내고 나서는 거친 밥을 먹고 누추한 집에 살며, 몹시 춥더라도 방을 따뜻하게 하지 않고 심한 더위에도 문을 열지 않고 시원한 곳에 나가지 않았다. 상복을 벗지 않고 단정히 앉아 종일 예경(禮經)을 읽었는데 일찍이 소리 내어 읽지 않고 다만 글자를 따라 손가락으로 집어 가며 살펴볼 뿐이었다.
산소가 집과 20리 거리에 있었는데 초하루와 보름에는 걸어가서 살펴보았으며 춥거나 덥다고 해서 폐하지 않았다. 연제(練祭)가 지나면 예(禮)에 나물과 과일을 먹어도 된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맛이 좋은 것이라 하며 차마 먹지 못하였다. 처가 일찍이 병이 위독했는데 사람을 보내 물어보고 끝내 들어가서 얼굴을 보지 않았다. 상기가 끝나고 나서도 날마다 반드시 새벽에 사당을 배알했다. 손톱을 깎거나 머리를 자르면 부모의 유체라고 하며 땅에 버린 적이 없었다.
그 이듬해 병을 얻었는데 오랫동안 낫지 않다가, 끝내 경인년(1650, 효종1) 9월 21일에 졸하니 나이 겨우 25세였다. 군을 아는 사람은 그의 요절을 애석해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군은 학문에 뜻을 두는 나이인 15세부터 독서에 진력하여, 그 뜻을 끝까지 탐구하고 의심나거나 분명치 않은 것이 있으면, 종이로 표시하였다가 자기보다 나은 벗을 굳이 기다리지 않고 만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물어보았다. 질병이 있지 않으면 낮에 누워 있거나 의관을 벗고 지낸 적이 없었다. 본디 술을 잘 마셨으나 나중에는 절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사람됨이 공손하여 일찍이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를 가르칠 때는 집안사람에게 속임수를 보여 주지 말라 하며 말하기를,
어린이를 교육할 때는 단정하지 않으면 안 되니 옛날부터의 방법이 그러하였다.”
하였다. 상스러운 말로 노복을 질타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꾸짖으며 금지하였으니, 여기에서 또한 군의 다른 행실을 볼 수 있다. 군은 병이 위독하여 능히 일어나 앉을 수가 없는데도 서책을 벽 위에 붙여 놓고 읽었다.
아, 군은 자질이 아름답고 행실이 독실한 데다가 또 능히 이와 같이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러니 하늘이 그에게 수명을 더 주었다면 성취한 바가 여기에서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어버이의 상을 당해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몸을 상해 세상을 떴으니, 애처로울 뿐이다.
유인(孺人) 김씨(金氏)는 고령인(高靈人)으로 명립(名立)의 딸이니, 또한 사대부가의 덕행이 있었다. 시부모를 섬기며 봉양하는 도구를 아끼는 바가 없이 군의 효심을 따라 했다. 부모에게는 후사가 없고 오직 유인만 있었다. 부모의 상에 유인이 몸소 궤전(饋奠)을 받들었는데 한결같이 남자처럼 행하였다.
과부가 되자 무릇 자신을 봉양하는 것은 일체 포기하고 의식과 거처가 추운지 더운지를 살피지 않으며 말하기를,
“죽지 못한 사람이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오직 고아가 된 어린아이만 몹시 마음 아프게 생각하며 농상(農桑)에 힘써 예전의 산업을 잃지 않게 했다. 아이가 조금 자라자 매우 독실하게 학문에 힘쓰라고 하며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훈계이다.”
하였다. 허물이 있으면 엄한 말로 엄숙하게 경계하였으며 때로는 식음을 전폐하고 슬피 울었다. 이 때문에 아들들이 아버지처럼 어려워하였다. 비복을 대할 때는 은혜로우면서도 위엄 있게 하였다. 아들들의 손님이 오면 비록 군핍하더라도 반드시 정성을 다해 대접하며 말하기를,
“사람 집에 손님이 없는 것은 박하게 대접했기 때문이다. 사람 집에 사람이 오는데 어떻게 마음을 다해 대접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제사를 받들 때는 매우 삼갔으며 찬을 갖추되 반드시 정결하게 하였으며 사람들이 먼저 먹지 못하게 했다. 제사를 지내고 나서는 종족과 이웃에게 제사 음식을 나눠 주었는데 아래로 종에게까지 모두 두루 미쳤다. 새로 난 물품이 있으면 반드시 즉시 사서 천신했다. 시부모의 기일에는 반드시 제수를 갖추어 보내 도와드렸다.
병이 들자 의원과 약을 굳게 거부하고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고, 또 내가 죽지 못한 것은 너희가 어렸기 때문이다. 지금 너희들이 장성했으니 내가 죽는다 해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
하였다. 또 돌아보고 경계하며 말하기를,
“오직 너희 두 사람이 화락하게 지낸다면 지하에서도 유감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유인은 갑자년(1624, 인조2) 2월에 태어나서 정미년(1667, 현종8) 1월에 세상을 떴다.
처음에 군을 이산(尼山) 월곡(月谷)에 장사 지냈는데, 갑진년(1664) 3월 공주(公州)의 남쪽 구동(九洞) 신향(辛向)의 언덕으로 개장하였으며 유인을 그 왼쪽에 부장하였다.
무신년(1668)에 군이 살던 회덕(懷德)의 향인들이 군의 사실과 행적을 열거하여 조정에 아뢰기를,
“최경(崔璥)의 효성은 옛사람에게도 드문 것이어서 사대부와 백성들이 칭송해 마지않습니다.”
하니, 모두 이 사람을 민몰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상이 유사에게 명하여 군에게 무공랑(務功郞) 청암도 찰방(靑巖道察訪)을 추증하게 하였다.
탄옹(炭翁) 권 선생(權先生)이 그의 묘표에 제하기를 ‘효자와 어진 아내의 묘[孝子令妻之墓]’라 하였으니 아, 사람들에게 선인이 되라고 권할 수 있는 것이다.
군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으니, 기만(基萬)과 기억(基億)이다. 기만은 탄옹에게 배웠는데 그 어미가 졸하였을 때 상례(喪禮)를 잘 지켰다고 칭해졌다. 나의 선군자(先君子)가 일찍이 그 집을 지나면서 병을 무릅쓰고 나아가 조문하며 효자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기만이 나에게 그에 대한 행장을 청하였다. 아, 선군자가 허여하시고 탄옹도 묘갈명을 지어 주셨고, 성스러운 조정에서도 포양(褒揚)한 바인데 글재주가 부족한 내가 무어 덧붙일 말이 있겠는가. 드디어 가장(家狀)을 가지고 그 요점만 차례대로 기술하여 돌려준다.


 

[주D-001]성근보(成謹甫) : 근보는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자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다른 자는 눌옹(訥翁)이고,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
[주D-002]소 태부(疏太傅) : 한 선제(漢宣帝) 때 태자태부(太子太傅)였던 소광(疏廣)을 말하는데, 동해(東海) 난릉(蘭陵) 사람으로 자는 중옹(仲翁)이다. 선제 때 박사(博士)가 되고, 지절(地節) 연간에는 태자태부가 되었다. 조카 소수(疏受)에게 이르기를, “‘족한 줄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라고 하였다. 관직과 명망이 드러났으나 더 있게 되면 후회할 일이 있을 것이다.” 하고, 사직하고 낙향(落鄕)하였다. 낙향한 뒤 황제와 태자로부터 받은 수많은 보화를 자기 집안의 치부에는 쓰지 않고 이웃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혹 누가 자손을 위하여 치산(治産)하라 권하면, “자손이 어질면서 재물이 많으면 그 뜻을 손상하게 되고, 자손이 어질지 않으면서 재산이 많으면 허물만 더할 뿐이다.” 하면서 개의치 않았다. 《漢書 卷71 疏廣傳》
[주D-003]일두(一蠹) :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호이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이고,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저서로는 《일두집(一蠧集)》이 있다.
[주D-004]충암(冲庵) : 김정(金淨, 1486~1521)의 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다른 호는 고봉(孤峯)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저서로는 《충암집(冲庵集)》이 있다.
[주D-005]천계(天啓) …… 태어났다 : 대본에는 ‘天啓丙寅生’이라고 되어 있는데, 《탄옹집(炭翁集)》 권12 〈최효자묘갈명개산정(崔孝子墓碣銘改刪定)〉에 ‘生天啓丙寅 三月卄二日’이라 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6]경인년 …… 졸하니 : 대본에는 ‘庚寅九月終’으로 되어 있는데, 《탄옹집》 권12 〈최효자묘갈명개산정〉에 ‘卒庚寅 九月卄一日’이라 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7]처음에 …… 3월 : ‘君初葬尼山月谷 ▨▨三月’로 되어 있는데, 《탄옹집》 권12 〈최효자묘갈명개산정〉에 ‘君初葬尼山月谷 甲辰三月’이라 한 것에 의거하여 ‘甲辰’으로 번역하였다.
[주D-008]탄옹(炭翁) : 권시(權諰, 1604~1672)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이다.

 

炭翁先生集卷之十二
 墓碣銘
崔孝子墓碣銘改刪定 a_104_473c


104_473d君諱璥。字仲潤。生長懷德宋村。懷乃鄒魯之鄕。鄕人狀其行。轉聞于朝曰。崔璥誠孝。得之天性。其制行古人所罕。士夫庶氓。莫不歎誦。謂斯人不可使泯沒。己酉四月。贈務功郞靑巖道察訪。君本全州人。高麗平章事阿之後。七世祖德之。直提學。名德丕顯。文廟禮遇之。年滿退居靈巖。一時諸賢如六臣。皆贈詩以別之。全州靈巖人。立祠享之。曾祖彥淸。濟用奉事。一蠹鄭先生之外孫。祖耆壽。考應生。沖庵金先生之外曾孫。妣恩津宋氏。錫昌之女。大族世有聞人。君稟美質。篤志力行。勤學好問。不幸短命。生天啓丙寅104_474a三月廿二日。卒庚寅九月廿一日。先生長者皆惜其早夭。金氏世居尼山。高麗高陽府院君南得之後。祖水軍虞候潔。考奉直郞名立。妣丹陽禹氏。學生忠男之女。孝於親。父病臨死。血其指進之。旣嫁。順承內助爲賢婦。旣寡。養孤游學以有成。生甲子二月廿七日。卒丁未正月廿九日。君初葬尼山月谷。甲辰三月。改葬公州南大谷辛向之山。金氏祔葬。男基萬。娶學生慶州崔淨女。基億。娶驪興閔光熠女。基萬要余墓表。銘孝子令妻之云。非余妄也。樂道人善者。其傳以揚之。銘曰。
104_474b孝子令妻。餘慶不匱。子孫保之。永錫爾類


 

 

 

 

 

 

 

寒水齋先生文集卷之三十一

 墓表
翊贊李公 惟彥 墓表 a_151_089a


公諱惟彥字美哉。慶州人。上祖新羅開國元勳謁平。其後有曰携。入我朝判漢城府事。歷一世有諱龜禎別提。諱䲖萬戶。諱良國禁府都事。是公之高曾祖也。別提之弟郡守龜瑞。龜瑞生司議鯽。鯽生奉事大邦。大邦生僉知晫。僉知出後於都事公。聘將仕郞耆壽女。以萬曆辛亥正月十五日生公。文才邁倫。十餘歲便能詩賦。乙未筮仕爲童蒙敎官。學徒甚盛。後多通顯。己亥遷司僕主簿。尋以金吾郞出宰狼川縣。甲辰解歸廣陵之三田浦。辛亥爲翊贊。丁巳六月151_089b廿九日。以疾終。葬廣州可樂洞辛向之原。公寬厚宏深。不事生產。以書史自娛。環堵蕭然。不以爲意。築小亭於湖上。扁以觀魚。是都事公舊基傍也。都事公昔與栗谷,思菴相與唱酬於斯亭。遺迹尙存。公能肯堂。每與高朋佳友。觴詠自適。跌宕江湖。世念都灰。朝論嘉之。有桂坊之除。公雖僶勉應命。公退卽出湖上。不屑屑於宦情。所與遊皆當世大人君子。如同春,尤菴,老峯兄弟。最其相厚者也。初娶東萊鄭氏。主簿慶彰女無后。再娶固城李氏。忠義衛循古女。有一女適洪箕勖。三娶文化柳氏。學生時華女。擧四男,願,顤,預。151_089c一女適宋廷采。側出男䪿。女金慶星。孫男端弼,端佐,端龍,權世衡妻。長房出也。男端輔,女鄭衡周生員,申憲,尹命周妻。次房出也。男端玄,女宋載顯,任聖弼妻。三房出也。洪壻男懷,女李堥。宋壻男國賓生員。余公之戚屬也。自少拜公頗款。竊仰其有古長者風懿。今端弼兄弟來乞墓文。義不敢辭。遂略記如右。俾刻于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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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유고 제3권
 시(詩)
최주일(崔主一) 기만(基萬) 에 대한 만사 3수


명현의 후예이자 선인의 집안에서 / 名賢之後善人家
효자가 뒤를 이어 총전을 받았었지 / 孝子仍蒙寵典加
그대는 또 한평생 행실이 도타웠는데 / 君又平生惇行義
어이하여 명이 짧아 탄식하게 하느뇨 / 如何無命使人嗟
주일(主一)은 최연촌 덕지(崔煙村德之)의 후예이자 일두(一蠹) 선생의 외손(外孫)이다. 그의 선고(先考)인 최경(崔璥)도 효행(孝行)으로써 포증(褒贈)을 입었다.

탄방에서 당시에 성(誠)에 대해 가르치니 / 炭坊當日敎人誠
한 글자가 종신토록 행할 만하였었네 / 一字終身儘可行
사문으로 향한 정이 줄곧 지극하였으니 / 終始師門情獨至

이 마음 이익과 명예 위한 게 아니었지 / 此心非爲利兼名
상제에 쏟은 마음 세상에서 드물었고 / 盡心喪祭世猶稀
유정함을 지키는 삶 도(道)에 거의 가까웠지 / 靜守幽貞又庶幾
과거 급제 못 한 것을 다들 아쉬워하나 / 文未成名皆爲惜
욕됨이 없어야 온전히 돌아가는 것이라네 / 不知無辱是全歸


[주D-001]탄방(炭坊)에서 …… 가르치니 : 탄방은 최기만(崔基萬)의 스승인 탄옹(炭翁) 권시(權諰)를 가리키는 듯하다. 《탄옹집(炭翁集)》 권12에 최기만의 아버지 최경(崔璥)의 묘갈명이 ‘최효자묘갈명개산정(崔孝子墓碣銘改刪定)’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명재유고 제18권
 서(書)
최주일(崔主一) 기만(基萬) 에게 답함 기유년(1669, 현종10) 4월 30일


삼가 선부군(先府君)께서 포증(褒贈)의 은전은 입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선부군의 지극한 행실의 실상과 여러 애시(哀侍)들의 어버이를 현양(顯揚)하는 정성이 성조(聖朝)께 밝게 아뢰어졌으니, 여러 애시들의 효심에 슬픔과 광영이 망극하리라 생각되니 감동스런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말씀하신 증(贈) 자를 넣느냐 넣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비루한 제가 어찌 감히 함부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지성스럽게 물어주시니, 감히 억측으로라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로 조정에서 그 지아비에게 증직을 하면 그 처는 응당 봉(封)하는 교지를 함께 받는 것인데, 이런 경우에는 증 자를 쓰는 데 대해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그렇지 않아서 달리 봉증(封贈)한 일이 없었고 단지 지아비의 직위에 따라서 해당 품계의 봉호(封號)를 얻었을 뿐이니, 이 뜻으로만 고하고 제주(題主)를 고쳐 쓸 때 증 자를 쓰지 않는 것이 이름과 실제에 어긋나지 않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정신이 혼란스러워 제대로 살피지 못했으니 막중한 예를 잘못 결정할까 두렵습니다. 다시 널리 물어서 처리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주C-001]최주일(崔主一) : 최기만(崔基萬)으로, 주일은 자이다. 최경(崔璥)의 아들이며, 탄옹(炭翁) 권시(權諰)의 문인이다.

 

 

홍재전서 제119권
 경사강의(經史講義) 56 ○ 강목(綱目) 10
[후량 태조(後梁太祖)]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을 잘하는 자는 임금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아 교묘하게 맞춘다. 그러므로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번번이 받들어 따르고 혹시 조금이라도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는 것이 소인(小人)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촉인(蜀人) 장격(張格)은 영합하는 것을 일삼고 자기보다 나은 자를 배척하여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른 자이다. 당시에 자신의 눈을 파내서 왕에게 바친 승려가 있자, 촉왕(蜀王) 왕건(王建)이 승려 1만 명에게 공양을 베풀어 보답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장격은 “소인이 아무 까닭 없이 스스로를 해쳤으니 죄를 용서해 준 것만도 다행입니다. 이런 짓을 높이어 장려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승려들에게 공양을 베풀고자 한 것은 임금의 뜻인데 능히 받들어 따르지 않고 거역하였으니, 영합을 잘하는 자가 의당 이와 같은가?
[생원(生員) 구충원(具忠元)이 대답하였다.]
자신의 눈을 파내어 바친 것은 인정(人情)이 아닙니다. 촉왕이 비록 승려들에게 공양을 베풀어 보답하고자 하였으나, 그 마음속으로는 반드시 그것이 잔인한 행동임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격이 그 마음을 엿보고 감히 강직하다는 기풍에 붙어 명예를 낚으려고 하였으니, 소인이 교묘히 임금의 뜻을 맞추는 것이 참으로 심합니다.

사람을 씀에 있어서 큰일을 가지고 시험해 보고자 한다면, 큰일은 시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홀히 여기는 바에서 살펴보고 매우 은미한 데서 관찰하여, 천거해 등용하되 한두 명도 놓치지 않는 것은 그 일이 지극히 어렵다. 구계(臼季)는 극결(郤缺)이 들밥을 먹는 것을 보고 등용하였고, 곽임종(郭林宗)은 맹민(孟敏)이 솥을 떨어뜨린 것에서 인물을 알아보았으며, 백종(伯宗)은 수레에 짐을 실은 자에게 전복된 짐수레를 비키게 하면서 양산(梁山)이 무너진 것에 관해 물어보았으니, 이는 반드시 사람을 알아보는 특별한 방도가 있을 것이다. 전류(錢鏐)는 임원(林園)의 병졸이 나무 심는 것을 보고 지혜가 있음을 알고 기억해 두었다가 결국에는 그를 등용하여 힘을 얻었다. 일이란 이것에는 통해도 저것에는 막히기도 하는 법인데, 나무 심는 지혜가 나라를 정탐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전류가 의심하지 않고 바로 등용하여 끝내 공을 이루었으니, 또한 그러한 방법이 있는가?
[유학 이원규(李遠揆)가 대답하였다.]
포정(庖丁)의 오묘한 기술을 양생(養生)에 옮겨 쓰고, 칼춤 추는 솜씨를 글씨 쓰는 데 미루어 쓰며, 육인장(陸仁章)의 나무 심는 기술을 적국을 정탐하는 데 썼으니, 지혜가 한 분야에 밝으면 다른 곳에도 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류는 노련한 장수입니다. 그를 농장에서 발탁하여 정탐의 일을 맡겼을 때에는 그에게 반드시 호미질하고 곡괭이를 휘두르는 즈음에 남보다 뛰어난 지혜가 있음을 보아서일 터인데, 안타깝게도 사관이 미처 쓰지 못하여 그 상세한 점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장군 구언경(寇彦卿)이 길에서 사람을 벽제(辟除)하다가 사람이 죽었는데, 후량주(後梁主)는 과실로 논하고자 하였으나 어사(御史) 최기(崔沂)가 사령(使令)을 수범(首犯)으로 하고 하인들을 종범(從犯)으로 하여 사형에 처하기를 청하였다. 저 후량(後梁)은 바로 한때 황제를 참칭(僭稱)한 나라인데도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이라는 법을 잘 지켰으니, 비록 고관대작이라도 이처럼 용서해 주지 않았고, 임금이 융통을 부리고자 하는데도 어사가 간쟁하였다. 그러니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한(漢) 나라 때는 곽해(郭解)라는 유협(遊俠)의 무리들이 공공연히 살인을 행하였는데 유사(有司)가 도리어 그를 비호하고 덮어 주었으니, 그때의 법령을 후량에 비교해 보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또 한 나라의 유사라는 신하들이 도리어 최기만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후당(後唐) 명종(明宗) 때에 전직(殿直) 마연(馬延)이 실수로 안중회(安重誨)의 전도(前導)와 부딪치자 안중회가 그를 말 앞에서 죽여 버렸으니, 구언경에 비하면 그의 죄가 열 배나 된다. 구언경이 죽인 것은 백성이고 안중회가 죽인 것은 조정의 신하이며, 구언경의 경우는 종자(從者)들이 밀어 죽였고 안중회는 직접 베어 죽였으되, 후당의 어사 이기(李琪)는 단지 그 일을 위에 보고만 하고 감히 그 죄를 청하지 않았다. 명종은 오계(五季)의 임금들 중에 그래도 조금 잘 다스렸던 임금으로 후량주보다 훨씬 뛰어났는데도 구언경처럼 안중회를 처벌하지 못한 것은 또한 어째서인가?
[유학 이형회(李亨會)가 대답하였다.]
치세(治世)의 일이라고 반드시 다 옳은 것은 아니며, 난세(亂世)의 신하라고 반드시 모두 어질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후량의 어사는 구언경의 죄를 청하였고 한 나라의 유사는 도리어 곽해의 죄를 비호하였으니, 한 나라의 일이 도리어 후량보다 못한 점이 있습니다. 안중회가 곧장 조정의 신하를 베어 죽인 것은 구언경의 일에 비교하면 그 죄가 더욱 큰데도, 이기는 그 죄를 청하지 않았고 명종은 주벌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융성한 서한(西漢)의 밝은 법률로도 더러 후량에 부족한 점이 있었으니, 하물며 명종이나 이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열국(列國)의 유사(遊士)들은 계책을 들어주지 않거나 뜻이 맞지 않으면 돌아보고 다른 나라로 가 버렸으니, 예컨대 소진(蘇秦)이 제(齊) 나라에 대해서, 장의(張儀)가 진(秦) 나라에 대해서, 악의(樂毅)가 조(趙) 나라에 대해서, 염파(廉頗)가 위(魏) 나라에 대해서, 오기(吳起)가 초(楚) 나라에 대해서의 처세가 이러하였다. 주자(朱子)가 비록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혹은 합종(合從)하고 혹은 연횡(連橫)하며 혹은 강하고 혹은 약한 가운데 한 사람의 거취가 매우 미미하나 한 나라의 안위가 매여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당 나라 말기 번진이 혼란할 때에, 이른바 모신(謀臣)과 장사(將士) 들 중에 아침에는 후량(後梁)을 섬기다가 저녁에는 후진(後晉)을 섬기고 어제는 오(吳)의 신하였다가 오늘은 촉(蜀)의 신하가 되는 자들을 이루 다 손꼽을 수 없었는데 모두 《강목》에 쓰지 않고, 유독 유주 참군(幽州參軍) 풍도(馮道)가 후진으로 도망간 것에 대해서만 쓴 것은 어째서인가? 그 직위로 보자면 참군은 높은 작위가 아니며 그 사람으로 보자면 당세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득실과 이해에 관계가 없는 듯하다. 그런데도 반드시 집어내어 특별히 쓴 것은, 풍도가 삼강(三綱)을 내버리고 오대(五代)의 왕조를 차례차례 섬기면서 대체로 보통으로 여기고 부끄러워할 줄 모른 것이 후진으로 도망간 일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 뜻이 당 나라 왕실의 부흥에 있고 의를 주장하여 적을 토벌하려는 진왕(晉王)은 유수광(劉守光)에 비하면 자연 역순(逆順)의 구별이 있으니, 풍도가 유수광을 버리고 진왕을 섬긴 것은 충분히 거취의 분별을 안 것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쓴 것인가? 구양공(歐陽公)이 풍도전(馮道傳) 말미에 ‘열부(烈婦) 이씨(李氏)가 어깨를 자른 한 가지 일’을 써서 풍도가 절개를 잃은 부끄러움을 보여 주었으니, 주자가 풍도의 처음 거취에 대해 기필코 특별히 쓴 것은 역시 심하게 책망하고 통렬히 미워하는 뜻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유학 이한교(李漢敎)가 대답하였다.]
당시에 아침에는 후량을 섬기다가 저녁에는 후진을 섬기고 어제는 오의 신하였다가 오늘은 촉의 신하가 되는 자들은 이루 다 손꼽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강상(綱常)을 버리고 명절(名節)을 파괴하여 네 성(姓)의 임금 열 명을 차례로 섬긴 자로 말하자면 풍도만 한 이가 없기 때문에, 대서특필하여 “유주 참군 풍도가 진(晉)으로 도망가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의미는 “당(唐) 태사(太師) 풍도가 진으로 도망가다.”라거나 “진 태위(太尉) 풍도가 한(漢)으로 도망가다.”라거나 “한 태부(太傅) 풍도가 주(周)로 도망가다.”라고 말한 것과 같으니, 그의 죄를 책망하여 성토한 법이 참으로 엄한 것입니다.

후량(後梁)과 후진(後晉)은 똑같이 당 나라 왕실의 적이지만, 후량은 당 나라를 대신하여 선 나라이다. 《강목》에서 이것을 쓰면서 이극용(李克用)을 칭할 때에는 ‘진왕(晉王)’이라 하고, 후진이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벌(伐)’이라고 하여 마치 의(義)로써 난적을 징토하는 예처럼 한 것은 어째서인가? 혹자는 “이극용이 그 명분과 의리를 바로잡아 당 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진왕’이라고 쓰고 ‘벌’이라고 쓴 것이다.”라고 한다. 이극용의 이 거병이 과연 정의로운 것이며 정말로 당 나라를 위한 것이었는가? 만일 당 나라를 위한 것이고 정의로운 것이라면 ‘토(討)’라고 쓰지 않고 단지 ‘벌’이라고만 한 것은 어째서인가?
[유학 남윤일(南允一)이 대답하였다.]
만일 적(賊)을 징토하고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바로 주인 쪽의 사람이라는 것이 곧 주자의 설입니다. 당 나라 왕실의 적으로는 주전충(朱全忠)만 한 이가 없고, 이극용은 곧 그를 징토하고 잡아야 한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강목》에서 ‘진왕’이니 ‘벌’이니 칭한 것은 이극용이 당 나라 왕실 쪽 사람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다만 ‘토(討)’ 자를 쓰지 않은 것은 그의 거병이 늦고 토벌이 성실하지 못하였음을 책망한 것입니다.

이상은 후량 태조(後梁太祖)이다.


[주D-001]구계(臼季)는 …… 등용하였고 : 춘추 시대 때 진(晉) 나라의 구계가 기(冀) 땅을 지날 때에 극결(郤缺)이 밭을 갈고 그 부인이 들밥을 내오는데 서로 공경하기를 마치 손님처럼 하는 것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돌아와 등용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33年》
[주D-002]곽임종(郭林宗)은 …… 떨어뜨린 것 : 후한(後漢) 때에 곽태(郭太)가 길을 가다가 솥을 지고 가던 맹민(孟敏)이 솥이 떨어져 깨졌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가는 것을 보고, 불러 이유를 묻고는 그의 자질을 훌륭하게 여겨 학문을 권하니 10년 만에 이름이 크게 알려졌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주D-003]백종(伯宗)은 …… 물어보았으니 : 진(晉)의 양산(梁山)이 무너지자 대부 백종이 소명을 받고 들어가던 도중에 무거운 짐을 실은 자를 만났는데, 그가 현인임을 알아보고는 양산이 무너진 데 대한 대책을 물었다. 《春秋左氏傳 成公5年》

 

 

 명재유고 제18권
 서(書)
최주일에게 답함 갑인년(1674, 현종15) 7월 14일


근자에 퇴옹(退翁)이 편찬한 《이학통록(理學通錄)》을 읽었는데 스승과 제자, 그리고 붕우 간에 문답한 것이 심신에 절실한 위기지학(爲己之學) 아닌 것이 없었으니, 천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가다듬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가하게 왕래하는 편지와 비교하면 어찌 천양지차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근래에 스스로 반성한 것이 자못 깊어 한 번 말씀드렸는데, 벗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명재유고 제18권
 서(書)
최주일에게 답함 갑인년(1674, 현종15) 7월 14일


근자에 퇴옹(退翁)이 편찬한 《이학통록(理學通錄)》을 읽었는데 스승과 제자, 그리고 붕우 간에 문답한 것이 심신에 절실한 위기지학(爲己之學) 아닌 것이 없었으니, 천년이 지난 뒤에도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가다듬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가하게 왕래하는 편지와 비교하면 어찌 천양지차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근래에 스스로 반성한 것이 자못 깊어 한 번 말씀드렸는데, 벗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炭翁先生集卷之二

 
崔基萬母夫人金氏挽 a_104_283b


猗歟孟母賢。嘗以敎子知。令郞也才俊。能忘乃孃慈。益篤追孝志。立揚胡福基。遙感求誄意。破戒寫哀詞。
炭翁先生集卷之二

艮齋先生文集前編卷之四
 
答安▣▣ 鍾根崔基萬 丁未 a_332_179b


拜下一事耳。萬世而後。見聖人之行。而綱常得不墜地。今日士子兩圓袂一撮髻。自流俗觀之。奚啻微瑣。擧天下皆削髮夷服之日。乃有區區幾人。不顧時輩332_179c詬罵。倂不畏裔戎銃劒。儼然自持。冀先聖遺制。不遂滅熄。噫。其心誠亦悲且苦矣。伊川先生嘗言。時事雖變。某安敢變。晦菴先生亦言。世亂思君子。不改其度也。嗚呼。二先生之心。卽聖人扶世之心。天地生物之心。吾黨之士。其欽念而謹守之哉。

艮齋先生文集前編續卷之四
 雜著
崔基萬 丙午 a_333_455d


崔生基萬。學於蒙隱。蒙隱將南見臼山翁。生之祖父。名鳳兆 告其孫曰。汝師欲見師。而爲水陸二千餘里之333_456a行。汝可陪往。時生年十七。揆以老祖慈情。與兵戈風濤之虞。人莫不沮之。生之祖父。且命之遣。何其難也。生不以年少路遠辭。敬諾而欣然從之。又何其勇也。翁見生。旣稟得甚生氣質。又內而有賢祖父。外而得善師友。此眞作聖之具也。遂授以作聖之道曰。只敬受師敎。而誠事祖父。以無負天生好人之至意也。易乾言誠。坤言敬。生其勖哉。


고종 31년 갑오(1894, 광서 20)
  5월17일 (계사)
 병비의 관원 현황
○ 병비에, 행 판서 이승오(李承五)는 나왔고, 참판 서병정(徐丙鼎)은 병이고, 참의 송주현(宋冑顯)은 입직이고, 참지 조중필(趙重弼)은 병이고, 우부승지 이최영(李㝡榮)은 나왔다.
서공순(徐公淳)ㆍ서정규(徐廷圭)ㆍ편용기(片龍基)ㆍ권백규(權白圭)를 동지중추부사로, 백낙륜(白樂倫)을 동지훈련원사로, 노태우(盧台愚)를 첨지중추부사로, 이교원(李敎元)을 훈련원 도정으로, 심인택(沈寅澤)을 겸 훈련원도정으로, 윤석원(尹錫元)ㆍ윤용선(尹庸善)을 선전관으로, 정건식(鄭健植)ㆍ유정원(兪廷源)을 내금위장으로, 이인복(李寅復)을 겸사복장으로, 우유하(禹有廈)ㆍ김완실(金完實)ㆍ장덕근(張德根)ㆍ임행준(任行準)ㆍ안세명(安世明)을 오위장으로, 이원태(李源泰)ㆍ이상회(李相晦)를 충장위장으로, 이이권(李以權)ㆍ허탁(許倬)ㆍ진병주(晉秉周)를 경복궁 위장으로, 정태현(鄭泰鉉)ㆍ장영급(張英汲)을 경희궁 위장으로, 조명호(趙明鎬)를 훈련원 첨정으로, 김한규(金漢奎)를 주부로, 윤철배(尹喆培)ㆍ고의상(高儀相)을 문신겸선전관으로, 이규하(李奎夏)를 수문장으로, 이종연(李鍾淵)을 선전관으로, 장기홍(張基弘)을 춘천 중군(春川中軍)으로, 한택리(韓澤履)를 홍천 영장(洪川營將)으로, 이민제(李敏濟)를 경상좌도 병마우후(慶尙左道兵馬虞候)로, 이희근(李禧根)을 훈융 첨사(訓戎僉使)로, 최기만(崔基萬)을 유원 첨사(柔遠僉使)로, 장춘경(張春慶)을 인산 첨사(麟山僉使)로, 이종로(李宗魯)를 제포 만호(薺浦萬戶)로, 정창모(鄭昌模)를 문산 만호(文山萬戶)로, 이연수(李連秀)를 소이 만호(所已萬戶)로 삼았다. 동지중추부사에 김홍진(金弘鎭)을 단부하였다. 대호군에 성이호(成彝鎬)ㆍ원우상(元禹常), 호군에 김완수(金完秀)ㆍ이원일(李源逸)ㆍ조희겸(趙羲謙)ㆍ이희중(李熙重)ㆍ박승완(朴承完), 부호군에 남숙희(南肅熙)ㆍ송휘인(宋彙仁)ㆍ정한모(鄭翰謨)ㆍ심상열(沈相說)ㆍ조필영(趙弼永)ㆍ안학선(安鶴善)ㆍ김하경(金夏卿)ㆍ김중현(金中鉉)ㆍ노병직(盧炳稷)ㆍ한창교(韓昌敎)ㆍ장태수(張泰秀), 부사직에 한국보(韓國輔)ㆍ이채(李寀)ㆍ이종률(李鍾律)ㆍ정승현(鄭承鉉)ㆍ이병관(李炳觀)ㆍ신정균(申政均)ㆍ김희국(金熙國)ㆍ왕용주(王用周)ㆍ송재빈(宋在賓)ㆍ이인창(李寅昌)ㆍ변종헌(卞鍾獻)ㆍ김중환(金重煥)ㆍ이재현(李載現)ㆍ김규행(金奎行)ㆍ김덕흥(金德興)ㆍ조영구(趙寧九)ㆍ이병위(李秉緯)ㆍ김인섭(金麟燮), 부사과에 심계택(沈啓澤)ㆍ이세응(李世應)ㆍ김재건(金在建)ㆍ이조익(李祖益)ㆍ박승억(朴勝億)ㆍ송정섭(宋廷燮)을 단부하였다. 새로 급제한 신영균(申永均)을 - 원문 빠짐 - 에 단부하였는데, 무과(武科) 갑과(甲科) 제1인이다. 부사과에 오정환(吳正煥)을 단부하였는데, 무과 갑과 제2인이다. - 원문 빠짐 - 에 이장하(李章夏)를 단부하였는데, 무과 갑과 제3인이다.
고종 31년 갑오(1894, 광서 20)
  10월14일 (정사)
 유원 첨사 최기만 등을 개차하고 후임에 대한 단망을 후록하여 들인다는 군무아문의 계
○ 또 군무아문의 말로 아뢰기를,
“유원 첨사(柔遠僉使) 최기만(崔基萬), 남도포 만호(南桃浦萬戶) 이석유(李錫有), 섬진 별장(蟾津別將) 김태종(金泰鍾)을 모두 개차하고 그 대임에 대한 단망을 후록하여 삼가 어람하시도록 올립니다.”
하니, 유원진병마첨절제사 겸 독수장(柔遠鎭兵馬僉節制使兼獨守將)의 망에 대해 최기만 대신 좌별(左別) 김성하(金成河)를, 진도진관 남도포수군만호(珍島鎭管南桃浦水軍萬戶)의 망에 대해 이석유 대신 한량(閑良) 김갑수(金甲洙)를, 섬진 소모별장(蟾津召募別將)의 망에 대해 김태종 대신 한량 송의준(宋儀焌)을 단부하고 계자인을 찍었다.

명재 윤 선생 세계도
명재 윤 선생 세계도(明齋尹先生世系圖)





1세
윤신달(尹莘達) - 파평현(坡平縣) 사람이다. 고려 태조(太祖)를 보좌하였다. 벽상삼한익찬 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 태사(太師) 삼중대광(三重大匡)이다. -

2세
선지(先之) - 벽상공신(壁上功臣)이다. -

3세
금강(金剛) - 상서성 좌복야(尙書省左僕射)이다. -

4세
집형(執衡) -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이다. 상서성 우복야에 추증(追贈)되었다. -

5세
관(瓘) - 자(字)는 동현(同玄)이다. 등제(登第)하였다.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 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수 태사(守太師)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 상주국 영평현개국백(上柱國鈴平縣開國伯)이다. 시호는 문숙(文肅)이고, 예종(睿宗)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부인은 인천 이씨(仁川李氏)이다. -

6세
언이(彦頤) - 등제하였다.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정당문학 판형부사(政堂文學判刑部事)이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부인은 광주 김씨(光州金氏)로, 평장사(平章事) 약온(若溫)의 따님이다. -

7세
돈신(惇信) - 등제하였다. 중봉대부(中奉大夫) 상서이부시랑(尙書吏部侍郞)이다.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으며, 동궁내시강학사(東宮內侍講學士)가 되었다. -

8세
상계(商季) - 자는 수익(受益)이다. 서경 부유수(西京副留守)이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부인은 강릉 김씨(江陵金氏)로, 감찰 어사(監察御使) 각(殼)의 따님이다. -

9세
복원(復元) - 등제하였다. 태상부 녹사(太常府錄事)이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좌복야 한림학사(尙書左僕射翰林學士)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인천 이씨로, 남부 녹사(南部錄事) 유온(維溫)의 따님이다. -

10세
순(純) - 등제하였다. 감찰 어사이며,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위 문하시랑평장사 판형부사(太尉門下侍郞平章事判刑部事)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홍주 이씨(洪州李氏)로, 예빈 소윤(禮賓少尹) 균(昀)의 따님이다. -

11세
보(珤) - 등제하였다. 삼중대광(三重大匡) 수 첨의정승(守僉議政丞)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이며, 치사(致仕)하고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현(文顯)이다. 부인은 군부인(郡夫人) 울산 박씨(蔚山朴氏)로, 판서 보(保)의 따님이다. -

12세
안숙(安淑) - 추성좌리 공신(推誠佐理功臣) 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이다.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부인은 군부인 교하 노씨(交河盧氏)로, 전서(典書) 승서(承緖)의 따님이다. -

13세
척(陟) - 순성익대보리 공신(純誠翊戴輔理功臣) 삼중대광 영평군(鈴平君)이다. 부인은 현부인(縣夫人)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판소부사(判少府事) 광기(光起)의 따님이다. -

14세
승순(承順) - 수충양절보리 공신(輸忠亮節輔理功臣) 문하평리(門下評理) 영평군(鈴平君)이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부인은 단양 이씨(丹陽李氏)로, 판도판서(版圖判書) 거경(居敬)의 따님이다. -

15세
곤(坤) - 본조(本朝)의 추충익대 좌명 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이조 판서 파평군(坡平君)이다.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부인은 순정택주(順靖宅主)인 고흥 유씨(高興柳氏)로, 시중(侍中) 충정공(忠正公) 탁(濯)의 따님이다. 후부인(後夫人)은 근순택주(謹順宅主)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문열공(文烈公) 상질(尙質)의 따님이다. -

16세
희제(希齊) - 정헌대부(正憲大夫)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이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남양 홍씨(南陽洪氏)로, 참찬(參贊) 잠(潛)의 따님이다. -

17세
배(培) - 등제하였다. 통덕랑(通德郞)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이며,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평양 조씨(平壤趙氏)로, 인진 부사(引進副使) 아(雅)의 따님이다. -

18세
사은(師殷) - 자는 은경(殷卿)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곡성 현감(谷城縣監)이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운봉 박씨(雲峯朴氏)로, 부원군(府院君) 성렬공(成烈公) 종우(從愚)의 따님이다. -

19세
탁(倬) - 자는 언명(彦明)이다. 등제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좌윤 동지성균관사(漢城府左尹同知成均館事)이다. 부인은 청주 한씨로, 삼등 현령(三登縣令) 사신(士信)의 따님이다. 후부인은 고성 이씨(固城李氏)로, 대사헌 맥(陌)의 따님이다. -

20세
선지(先智) - 자는 여회(汝晦)이고, 무과(武科)에 등제하였다. 가선대부 충청도 병마절도사이다.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 광희(匡禧)의 따님이다. 후부인은 평산 신씨로, 포(抱)의 따님이다. -

21세
돈(暾) - 자는 광원(光遠)이다.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첨지 연(淵)의 따님이다. -

22세
창세(昌世) - 자는 흥백(興伯)이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청주 경씨(淸州慶氏)로, 부제학 혼(渾)의 따님이다. -

23세
황(煌) - 자는 덕휘(德輝)이고, 호는 팔송(八松)이다. 등제하였다. 가선대부 행 사간원대사간(行司諫院大司諫)이며, 특례(特例)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부인은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우계(牛溪) 선생 혼(渾)의 따님이다. -

24세
선거(宣擧) - 자는 길보(吉甫)이고, 호는 노서(魯西)이다. 생원(生員)이다. 관직은 집의(執義)이다. 유일(遺逸)로 여러 차례 징소(徵召)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특례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부인은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생원 장백(長白)의 따님이다. -

25세
증(拯) - 자는 자인(子仁)이니, 바로 선생이다. 연보(年譜)와 가장(家狀)이 있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탄촌(炭村) 시(諰)의 따님이다. -

26세
행교(行敎) - 자는 장문(長文)이다. 등제하였다. 사헌부 대사헌이다. 부인은 반남 박씨(潘南朴氏)로, 도사(都事) 태소(泰素)의 따님이다. 후부인은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장령 기후(基厚)의 따님이다. -
충교(忠敎) - 자는 소문(少文)이다. 세제익위사 부솔(世弟翊衛司副率)이다. 부인은 청주 한씨로, 성량(聖亮)의 따님이다. -

27세
동원(東源) - 자는 사정(士正)이다. 유일(遺逸)로 여러 차례 징소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사헌부집의 겸 세자시강원진선(司憲府執義兼世子侍講院進善)이다. 부인은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목사(牧使) 복선(復先)의 따님이다. -
동준(東浚) - 등제하였다. 전임 대사간이다. -
동함(東涵) - 지금 정읍 현감(井邑縣監)이다. -
동렴(東濂) - 전임 흡곡 현령(歙谷縣令)이다. -
동엄(東淹)

28세
광집(光緝)
광현(光絢)
광재(光縡)
광진(光縝)
광도(光衟)
광우(光佑) - 출후(出後)하였다. -
광형(光衡)
광우(光佑)

29세
홍기(弘基) - 광집(光緝)의 아들이다. -

명재연보 제1권
[연보]



명(明)나라 의종황제(毅宗皇帝) 숭정(崇禎) 2년(1629) 본조(本朝) 인조대왕(仁祖大王) 7년 기사
○ 5월 28일 임자 - 술시(戌時) - 에 선생이 한성부(漢城府) 정선방(貞善坊) 대묘동(大廟洞)의 집 - 선생의 외갓집이다. - 에서 태어났다.

3년(1630, 인조8) 경오

4년(1631, 인조9) 신미

5년(1632, 인조10) 임신

6년(1633, 인조11) 계유

7년(1634, 인조12) 갑술

8년(1635, 인조13) 을해
이때 집안에 존장(尊長)이 마침 없었으므로 조모 성씨(成氏) 부인이 여러 손자들에게 가묘(家廟)의 참례(參禮)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참신(參神)이 끝나자마자 여러 아이들이 갑자기 떼 지어 웃어 댔으나, 선생은 혼자 단정히 두 손을 마주 잡고 용모를 바르게 한 채 조금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성씨 부인이 팔송공(八松公)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특별한 아이입니다.”
하였다.
○ 한번은 다른 집에서 기르던 사슴이 달아나서 선생의 집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집안사람들이 모두 몰려들어 구경하였다. 이때 선생은 책을 읽던 중이었는데, 중지하지 않고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묻기를,
“사슴은 어디 있습니까?”
하므로, 성씨 부인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사슴이 어찌 너를 기다리고 있겠느냐.”
하였다. 팔송공이 이 말을 듣고 기특하게 여겼다.

9년(1636, 인조14) 병자
○ 12월에 호란(胡亂)이 발생하여 부친인 노서(魯西) 선생을 따라 강도(江都)로 피난하였다.

10년(1637, 인조15) 정축
○ 1월에 강도가 함락되었는데, 모부인(母夫人) 이씨(李氏)가 순절(殉節)하였다.
22일에 오랑캐 병력이 강을 건너자 성안이 와해되었다. 이때 노선생(老先生)은 사우(士友)들과 모여서 대처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었는데, 이씨 부인이 일이 급하다는 것을 알고 여종을 보내어 노선생을 모셔 오게 하였다. 노선생이 집에 이르자,
“적의 손에 죽느니 일찌감치 자결하는 것이 낫겠기에 한번 뵙고 영결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하므로, 노선생이 차마 볼 수 없어서 사우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부인이 어린아이들을 종들에게 맡겨 잘 보호하게 하고 뒷일을 조처한 다음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바로 23일 아침이었다. 이때 선생의 나이가 9세이고 자씨(姊氏)는 겨우 10세였는데, 여종 동절(冬節) 등을 이끌고 시신을 거두어 의복을 반듯하게 겹쳐 입힌 뒤 판상(板商)의 집에서 관(棺)을 얻어 입관(入棺)하였다. 이어 거처하는 집의 대청 아래에 가매장하고, 흙을 모아 수북하게 덮은 뒤 돌덩이 8개를 사방 모퉁이에 묻고 가운데에는 숯가루를 뿌려서 표시하였다. 그런 다음 곡하며 작별을 고하고 떠났으니, 차분하게 정(情)을 다한 것이 어른과도 같았다. 어지러운 군중(軍中)에 들어가게 되자, 허리에 차고 있던 수건을 풀어서 족보를 기록한 소첩(小帖)을 꺼내 자씨에게 주며 말하기를,
“누이는 여자이니, 불행하게 서로 헤어지게 되면 이것으로 징표를 삼으시오.”
하였다. 오랑캐 진영으로 나가게 되면서 마침내 서로 헤어졌는데, 누이가 과연 우리나라 사람을 만날 때마다 보첩을 펼쳐 보이며 하소연하니, 의주(義州)에 이르렀을 때 참판 이시매(李時楳)가 알아보고 속환(贖還)하였다. 선생이 어린 나이였는데도 긴급한 상황에 처하여 변고를 우려한 것이 이토록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 이씨 부인이 순절했을 때 모시 적삼으로 초혼(招魂)을 하고 선생이 그 적삼을 등에 지고 갔는데, 비록 난리 중에 있었으나 한 달이 다 되도록 끝내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돌아와서 이 적삼으로 혼백(魂帛)을 세우는 예(禮)를 행했다고 한다.
○ 26일에 적병(賊兵)이 성안 사람들을 몰아내어 선생이 동생ㆍ누이와 함께 그 난리를 당하였는데 여종 동절이 업고서 길을 떠났다. 갑진(甲津)을 건너서 김포(金浦)의 적진에서 거의 15, 6일을 머물렀는데, 참판 박황(朴潢)이 적장(賊將)과 함께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부터 와서 강도에서 사로잡혀 온 사람 1500명을 풀어서 돌려보냈다. 그래서 선생이 위기를 면하고 다시 강도로 들어갔다고 한다.
○ 3월에 이씨 부인을 가매장했다가 이듬해 2월 교하(交河) 법흥향(法興鄕) 발송리(鉢松里) 좌묘(坐卯)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 3월에 영동(永同)으로 팔송(八松) 선생을 따라갔다.
이때 팔송공이 오랑캐와의 화의(和議)를 앞장서서 반대한 일로 영동에 유배되었는데, 노선생이 선생을 거느리고 따라갔다. 나이가 어려 상차(喪次)에 있지 못하는 것을 지극한 통한으로 여겨 아침저녁 밥을 먹을 때마다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팔송공이 타이르기를,
“어른 옆에서는 감정을 다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어찌 울음소리를 내어 내 마음을 슬프게 하느냐.”
하니, 그 후로는 초하루와 보름에만 슬피 곡하고 매일 조석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소리 죽여 울기를 3년이 다하도록 하였다. 기년(期年)이 지났는데도 소식(素食)을 하고, 부형이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면,
“자식의 심사(心事)는 남들과는 다른데 고기를 어찌 차마 먹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며 오열을 주체하지 못하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끝내 억지로 권하지 못하였다.
○ 10월에 팔송공이 유배에서 풀려나 금산(錦山)에 우거하였는데, 노선생이 따라가서 그곳에 정착하였다가 이듬해 가을에 이산(尼山)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선생이 매번 따라갔다.
○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을 갖추어 단정하면서도 무게 있고 장엄하면서도 온화하였다. 도량을 천성적으로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공부도 빨리 시작하여 가르치고 독촉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팔송공이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항상 데리고 다니며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11년(1638, 인조16) 무인
○ 3월에 상제(喪制)를 마쳤다.
심상(心喪)을 행하며 소식(疏食)하다가 이듬해 1월이 되어서야 평상으로 돌아왔다.

12년(1639, 인조17) 기묘
○ 6월에 팔송 선생의 상을 당하였다.

13년(1640, 인조18) 경진
일찍이 〈거미를 읊다[詠蜘蛛]〉라는 제목의 시를 짓기를,
거미가 매달려서 거미줄 치니 / 蜘蛛結網罟
가로지른 다음엔 위로 아래로 / 橫截下與上
잠자리야 너에게 부탁하노니 / 寄語蜻蜓子
조심하여 처마 밑엔 가지 말거라 / 愼勿簷前向
하였는데, 포저(浦渚) 조공(趙公)이 듣고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그 뜻을 채워 나가면 인(仁)을 미처 다 쓰지 못할 것이다.”
옷을 벗고 들창 아래 편안히 누워 / 裸體窓間臥
밝은 달빛 아래서 오만 부리며 / 偃蹇明月下
어지러운 세상사 모두 잊으니 / 超然忘世紛
나는 대체 무얼 하는 사람이런가 / 我是何爲者
하였다. 시남(市南)이 뒤에 보고 웃으면서 노선생에게 말하기를,
“이 시의 뜻으로 봐서는 형이 삼생(三牲)의 봉양을 받지 못할 듯하네.”
하였으니, 어려서부터 그 지취(志趣)와 기상이 이와 같았다.
○ 이 두 편의 시는 모두 선생이 어렸을 때 지은 시인데, 연조(年條)를 알 수 없으므로 우선 여기에 붙여 둔다.

14년(1641, 인조19) 신사
○ 노서(魯西) 선생이 금산의 새집으로 돌아갔으므로 선생이 가정에서 시학(侍學)하였다.
노선생이 상제를 마치고 다시 금협(錦峽)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생을 마치고자 하였으므로 선생이 따라갔다.

15년(1642, 인조20) 임오
○ 시남 유 선생(兪先生)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하였다.
공의 휘는 계(棨)이고 자는 무중(武仲)이다. 일찍부터 노선생과 매우 친밀하게 교유하였다. 화의(和議)를 배척한 일로 임천(林川)으로 귀양 갔다가 그대로 정착하여 자연 속에 자취를 감춘 채 강학(講學)에만 마음을 쏟았다. 이때에 이르러 벗과 함께 강학하는 유익함을 취하고자 가솔들을 이끌고 금산으로 옮겨 왔는데, 노선생이 시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 함께 서실(書室)을 지어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학문을 연마하였다. 선생은 동생 농와공(農窩公) 추(推)와 함께 시남에게 나아가 수업하였고, 시남의 아들 명윤(命胤) 형제는 또 노선생에게 수업하니, 두 집안의 자제들이 같은 서당에서 함께 배워 정의(情誼)가 매우 돈독하였다.
○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이미 뛰어난 데다 유년(幼年) 시절부터 부친과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한가롭게 지낼 때나 밥을 먹거나 쉬는 때라도 경전(經典)의 가르침을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훈도(薰陶)가 몸에 배어들어 덕기(德器)가 날로 성취되었으며, 또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고 문사(文辭)도 매우 풍부하고 아름다웠다. 때문에 노선생은 원대한 성취를 기대하였고, 시남도 매우 아끼고 중하게 여겼다.
○ 시남이 일찍이 책제(策題)를 내어 기화(氣化)와 인사(人事)에 대해서 물었는데, 선생이 쓴 대책(對策)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양한(兩漢)의 문장과 정주(程朱)의 의논이다.”
하였다. 이 글이 당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니, 더러 과거에 응시하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선생은 끝내 달가워하지 않았다.

16년(1643, 인조21) 계미
선생의 나이 15세였다. 이때 경서를 두루 읽고 《사기(史記)》, 《한서(漢書)》와 같은 여러 책도 모두 읽기를 마쳤으며, 한유(韓愈)의 문장도 거의 다 읽었다. 그리고 여러 시인들의 시에까지 미쳤는데, 시 중에서는 특히 한유와 두보(杜甫)의 시를 익숙히 읽었다. 오직 《역경(易經)》만은 18세가 되어서 비로소 읽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13세에 《시경(詩經)》을 매우 익숙히 읽었고, 15세에는 《서경(書經)》을 읽어 매일 밤마다 모두 100여 번씩을 외웠다. 그랬더니 나중에 모두 종신토록 잊어버리지 않게 되었다.”
하였다.

17년(1644, 인조22) 갑신
이해에 명나라가 망했다. 연도 표기는 숭정(崇禎)의 기원(紀元)을 따랐다.

18년(1645, 인조23) 을유
○ 4월에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이달에 성씨 부인의 생신을 인하여 이산에서 관례를 행하였다. 종조숙부(從祖叔父) 용서공(龍西公)이 빈(賓)이 되었다.
○ 용서공은 휘가 원거(元擧)이고 자는 백분(伯奮)이다.

19년(1646, 인조24) 병술
○ 3월에 양호(兩湖)에 놀라운 사건이 발생하여 이산으로 돌아왔다.
이때 노선생이 마침 기산(圻山)에 가셨는데 양호에 황지(潢池)의 변이 발생하였다. 선생이 유공 명윤(兪公命胤)과 함께 시남의 부인을 모시고 걸어서 금협을 나왔다. 노선생은 그대로 옛 거처로 돌아가고, 시남도 임천(林川)으로 돌아갔다.

20년(1647, 인조25) 정해
○ 10월에 부인 권씨(權氏)를 맞이하였다.
탄촌(炭村) 선생 시(諰)의 따님이다. 탄촌이 병자년(1636, 인조14)ㆍ정축년(1637) 이후로 세상에 나오지 않고 들어앉아 강학하며 영남의 문경현(聞慶縣)에서 우거(寓居)하였다. 노선생이 서신을 보내어 혼례의 절차를 논하고 가관(假館)의 예(禮)를 강정(講定)하여 거행하였다. 이로부터 선생이 왕래하며 학업을 묻고, 또한 스승의 예로 섬겼다. 이때 〈남유기문(南遊記聞)〉과 〈영현잡록(穎玄雜錄)〉을 지었다.
걷잡을 길 없는 망상 수시로 일어나니 / 浮思叵耐無時動
마음 써서 잘 이끌어 주시는 줄 안답니다 / 善誘深知用意勤
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마음을 다잡는 덴 항상 조급하지만 / 操處規模常促促
방심할 땐 사려가 너무 풀어진답니다 / 放時思慮太悠悠
하였으니, 선생의 심학(心學)이 이처럼 정밀하고 절실하였다.

21년(1648, 인조26) 무자
○ 8월에 교산(交山)에 성묘하였다.
고향 산 성묘 길에 해는 저물고 / 落日故山道
가을바람 나그네의 옷을 날린다 / 秋風遊子衣
묻노니 인간 세상 어떠하던가 / 人間問何世
돌아가지 말고 그냥 머물고 싶어 / 長往欲無歸
하였다.
○ 9월에 성씨(成氏) 부인의 상을 당했다.

22년(1649, 인조27) 기축
나에게 먼지 덮인 거울 있으니 / 我有一塵鏡
내면에 천연의 빛 머금었어라 / 內含天然光
정의가 간곡하신 도산 노인이 / 慇懃陶山叟
그 거울 닦는 방법 말씀하셨지 / 爲述重磨方
늙은이건 젊은이건 상관이 없고 / 不繫年老少
힘이 세고 약한 것도 따질 것 없이 / 何論力弱强
진실로 힘써서 닦기만 하면 / 苟能勉修治
특달함이 규장과 같아진다네 / 特達如圭璋
하였다. 선생이 젊어서부터 도(道)로써 자임(自任)하였던 뜻을 여기에서 대략 볼 수 있다.

23년(1650) 효종대왕 원년 경인
○ 봄에 시남 선생의 편지에 답하였다.
선생은 마음에 지극한 슬픔이 있어 세상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 평생토록 은거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다 효묘(孝廟)께서 복수의 뜻을 가다듬는 때를 만나 사류(士類)들이 흥기하자 비로소 뜻을 굽혀 과거 공부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곧이어 ‘이미 유자우(劉子羽)만 한 재주와 도량이 없을 바에는 차라리 병산(屛山)이 뜻을 지켰던 것을 배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세상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시남이 편지를 보내, 과거에 응시하여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내면으로 지키는 방도를 삼으라고 권면하니, 선생이 답장을 보내 애통하고 괴로운 사정(私情)을 자세히 설명하여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였다.
○ 11월에 귀양 가는 시남 선생을 전송하였다.
이때 시남이 인묘(仁廟)의 시호를 논의한 일 때문에 온성(穩城)으로 귀양 갔는데, 선생이 이인(利仁) 역로(驛路)에 나가 전송하였다. 율시 2수를 올렸는데,
세상이 어지러워 어진 이 멀리 가니 / 世方喪亂賢人遠
험난함을 겪는 데서 학문의 힘 알겠지요 / 身歷艱危學力知
라는 구절이 있었다. 시남이 이것을 보고 머리를 끄덕였다.
○ 12월에 교산에 성묘하였다.

24년(1651, 효종2) 신묘
○ 5월에 임리(林里)에서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金先生)을 배알하였다.
선생의 휘는 집(集)이고 자는 사강(士剛)이니, 사계(沙溪) 선생의 사자(嗣子)로 연산(連山)에서 살았다. 노선생이 스승으로 섬기며 존신(尊信)하였는데, 선생 또한 약관(弱冠) 때부터 문하에 출입하며 스승의 예로 섬겼다.
○ 10월에 정사(淨寺)에서 회합을 가졌다.
암자는 선영(先塋) 앞쪽 산기슭에 있는데, 선생이 항상 여러 형제들과 모여서 암자에서 책을 읽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하였다. 나중에는 사우들도 많이 와서 모여 도를 강마(講磨)하는 한 장소가 되었다.

25년(1652, 효종3) 임진
○ 1월에 회덕(懷德)에서 동춘(同春) 송 선생(宋先生)을 배알하였다.
공의 휘는 준길(浚吉)이고 자는 명보(明甫)이다. 노선생과 도의(道義)의 교제를 맺었으므로 선생이 가서 알현하였다. 절구 1수를 지어 바쳤는데,
난실에 봄이 짙어 향기가 옷에 배고 / 蘭室春濃香襲衣
먼지 하나 없는 곳에 천기가 드러나네 / 一塵無處見天機
오늘 밤의 이러한 뜻 누가 알고 취하여 / 誰人會取今宵意
음풍농월 마음껏 하고 돌아가는가 / 贏得吟風弄月歸
하였다.
○ 《사우간독첩(師友簡牘帖)》의 발문을 썼다.
선생이 독실한 뜻으로 학문에 힘쓰며 사우들과 종유하였으므로 한 시대의 제공(諸公)들이 모두 추중(推重)하였다. 사우들과 주고받은 서찰이 많았는데, 선생이 그 가운데 권장하고 독려하고 충고하는 내용이 담긴 것들을 모아서 적어 한 책으로 만들고 때때로 읽곤 하였다. 발문에 쓰기를,
“삼가 옛사람이 그릇이나 궤장(几杖) 등에 명(銘)을 썼던 것에 견주고자 하니, 이를 통해 덕을 관찰하고 게으름을 경각시키는 두 가지 일에 모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3월에 당북(堂北)에서 여러 유생들과 모여 향음주의(鄕飮酒儀), 향사의(鄕射儀) 등의 의식을 강행(講行)하였다.
당북은 바로 노선생의 세거지(世居地)이다. 그곳에 향숙(鄕塾)이 있는데, 여러 유생들이 모여들어 가르침을 청하였다. 노선생이 선생에게 명하여 때때로 유생들과 함께 옛 의식을 강습하게 하니, 선생이 절목(節目)을 재정(裁定)하여 여쭙고 행례(行禮)하는 일을 주선하였다.
○ 4월에 덕유산(德裕山)을 유람하였다.

26년(1653, 효종4) 계사

27년(1654, 효종5) 갑오
○ 8월에 교산에 성묘하였다.
절사(節祀)를 행하였다. 파산(坡山)으로 방향을 돌려 청송(聽松) 선생과 우계 선생의 묘소와 서원을 참배하고, 또 율곡 선생의 자운서원(紫雲書院)을 참배하였다.
○ 구포(鷗浦)에서 포저(浦渚) 조 선생(趙先生)을 배알하였다.
공의 휘는 익(翼)이고 자는 비경(飛卿)이다. 덕과 학문, 행의(行誼)로 근세의 명유(名儒)가 되었으므로 노선생이 일찍이 존경하고 사모하였는데, 선생이 이때에 들러서 배알하고 돌아왔다.

28년(1655, 효종6) 을미
○ 9월에 노서 선생을 따라 석강(石江)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때 계부(季父) 석호(石湖) 선생이 석성(石城)에 우거(寓居)하고 있었는데, 시남이 임천(林川)으로부터 이르자 선생이 노선생을 따라가서 만났다. 인하여 《한천록(寒泉錄)》을 강(講)하고, 또 미촌(美村)으로 자리를 옮겨서 강을 마치고 모임을 끝냈으니, 모임을 가진 날이 모두 7일이었다.

29년(1656, 효종7) 병신
○ 윤5월에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金先生)을 곡하였다.
부음이 이르자 선생이 달려가 곡하고 가마(加麻)하였으며, 장사 지낼 때에 또 가서 참석하였다. 만사와 제문이 있다.
○ 이후로 기일(忌日)에는 항상 소식(素食)하고, 무고(無故)하면 반드시 가서 참석하였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비록 직접 가지는 못했지만 반드시 해마다 제사를 도왔으며, 후손이 매우 영락(零落)한 것을 골육(骨肉)처럼 안타까워하고 염려하였다.
○ 시남이나 탄옹과 같은 사문(師門)의 기신(忌辰)에도 모두 고기를 먹지 않았다.
○ 10월에 당북에서 제생(諸生)들과 만나서 향약(鄕約)의 위차(位次)를 강행(講行)하였다.
이에 앞서 노선생이 율곡 선생의 향약을 취하여 마을에 시행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명을 받들어 제생들과 그 위차를 강구하여 시행하였다.

30년(1657, 효종8) 정유
○ 3월에 회천(懷川) - 송상 시열(宋相時烈) - 에게 《주자서(朱子書)》를 배웠다.
처음에 노선생이 회천과 도의(道義)의 교제를 맺어 정의가 매우 두터웠으므로 선생이 젊어서부터 이미 사문(斯文)의 장로로 대접하고 왕래하며 문안을 여쭈었다. 《주자서》를 읽게 되면서 간간이 의심스러운 점들을 신재(愼齋) 선생에게 물었는데, 신재 선생이 말하기를,
“우리들 중에서 영보(英甫)가 이 책을 가장 많이 읽었으니, 자네는 그에게 가서 묻는 것이 좋겠네.”
하였다. 선생이 돌아와서 노선생에게 여쭈자 노선생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였다. 이때에 드디어 교산(橋山)의 묘사(墓舍)로 가서 몇 개월 동안 강문(講問)하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스승의 예로써 섬겼다.
○ 노선생이 말씀하기를,
“우옹(尤翁)은 특출한 점에 있어서는 따라가기 어려운 사람이다. 너는 그의 좋은 점을 본받되 병통 또한 몰라서는 안 된다.”
하고, 또 말씀하기를,
“우옹은 선(善)을 수용하는 도량이 넓지 못하니, 너는 모쪼록 《주자서》를 가지고 일마다 절차탁마(切磋琢磨)하기를 옛사람이 삼백편(三百篇)으로 간(諫)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
하였다.
○ 5월에 노서 선생을 따라 임리(林里)의 회합에 참석하였다.
이때는 신재 선생의 연제(練祭)였다. 노선생과 용서(龍西), 시남 및 초려(草廬) 이공 유태(李公惟泰)가 모두 모였다. 제사 지낸 뒤에 돈암서원(遯巖書院)에 머물며 주자(朱子)의 주장(奏狀)을 강하였는데, 선생이 시중을 들었다.
○ 8월에 교산에 성묘하였다.

31년(1658, 효종9) 무술
○ 7월에 중부(仲父) 동토(童土) 선생을 금구현(金溝縣) 관아로 찾아뵈었다.
처음에 수은(睡隱) 강공 항(姜公沆)이 문장과 절행(節行)이 있어 외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졌는데, 동토공이 젊어서 그에게 시를 배웠다. 이때에 그 문집을 간행하려고 선생을 불러 교감하는 일을 맡겼다.
○ 9월에 신재 선생을 서원에 배향(配享)하는 예에 참석하였다.
돈암서원은 연산(連山)에 있으니, 바로 사계(沙溪) 선생의 위패(位牌)를 모신 곳이다. 이때 신재 선생을 배향하였는데, 선생이 노선생을 따라 가서 참석하였다. 배향하는 의식을 마친 뒤 여수(旅酬)의 예를 행하였다.
○ 노서 선생을 모시고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수정하였다.
《가례원류》는 노선생이 금협(錦峽)에 있을 때 시남과 함께 엮은 책이다. 노선생이 아직 수정하고 윤색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하여 내용을 첨가하고 삭제하여 완성본을 만들었는데, 선생이 그 일에 참여하였다. 편지로 시남에게 여쭈니, 답하기를,
“바라건대 대편(大編)을 완성하여 죽기 전에 볼 수 있도록 해 주게.”
하였다.
○ 현석(玄石) 박화숙(朴和叔) - 세채(世采) - 의 편지에 답하였다.
현석은 일찍부터 학문에 독실히 힘써 사우(師友) 간에 명망이 있었다. 편지로 《춘추(春秋)》와 《예기(禮記)》에 나오는 복수의 의리에 대해서 논하였으므로 선생이 누차 그와 더불어 강론(講論)하고 논변(論辨)하였다. 또 조신(朝臣)이 북수(北讐)를 피하는 문제기해년(1659, 효종10)의 전례(典禮) 문제로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다. 모두 《유고(遺稿)》에 보인다.
○ 뒷날 신축년(1661, 현종2) 봄에 석담(石潭)으로 갔을 때 비로소 서로 만나 교분을 정하였다.
○ 12월에 서울로 돌아가는 명촌(明村) 나현도(羅顯道) - 양좌(良佐) - 를 전송하였다.
명촌이 노선생의 문하에 와서 수학하며 뜻을 가다듬어 학문에 힘썼으므로, 선생이 그와 더불어 함께 공부하면서 서로를 매우 중히 여겼다. 이별할 때에 시를 지어 주어 권면하였다.
○ 조정 대신의 천거를 받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남모르는 슬픔이 가슴속에 있어 과거(科擧)에 대한 생각을 일찌감치 버렸고, 독실한 학문과 실천으로 크게 명성을 얻어 한 시대 사류(士類)들의 추종과 신복(信服)을 받았다. 이때 조정에서 학행(學行)의 선비를 천거하라는 명이 내리자 여러 재신(宰臣)들 중에 선생을 천거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 후에 연달아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의망(擬望)되었다. 노선생이 나이 아직 젊은데 이름이 너무 일찍 알려지는 것을 깊이 우려하여 시남 등 여러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류하였다.

32년(1659, 효종10) 기해
○ 1월에 황산서원(黃山書院)의 원재(院齋)에서 《주자서(朱子書)》를 강하였다.
황산서원은 여산(礪山)에 있는데, 선생이 사우들과 모여 여러 달 동안 강학한 뒤에 파하였다. 차의(箚疑)가 있다.
○ 송상(宋相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냈다.
송상이 몸소 대의(大義)를 자임하여 나가서 세도(世道)를 담당하였으나, 이미 실심(實心)과 실공(實功)이 없고 또 남의 말을 수용하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선생이 염려하여 일찍이 무후(武侯)의 일을 인용하여 경계하였고, 노선생도 자주 충고와 질책을 가하여 그 잘못을 바로잡았으나 송상은 그다지 수긍하지 않았다. 선생이 또 편지를 보내어 거듭 충고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난번 편지에서 말씀드렸던 무후의 의리에 대해서는 극도로 장려하고 찬탄하셨으나, 부친께서 전후로 입이 아프게 충고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집사(執事)께서 생각이 같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대의로써 출사하여 세도를 담당하셨으니 일을 행할 때에 보이는 일상적인 것들이 모두가 이 일로서, 말단적인 언어에 비하면 더욱 깊고 절실하며 밝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꼭 날마다 대의를 입으로 외워야만 진정한 대의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엄친(嚴親)께서 하신 말씀을 곧장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의심하신다면, 충심을 다해 도모하고 원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감히 그 말을 다하지 못하고 경박하고 식견 얕은 자들이 다투어 큰소리로 이익을 취하려고 할 것입니다.
무후의 말에 ‘국가를 위해 충심을 다해 염려하는 사람은 단지 나의 잘못을 힘껏 공격하라.’ 하였으니, 이것은 또 문공(文公)이 일찍이 드러내어 칭송했던 바입니다. 지금 이 말로써 어리석은 저의 정성을 바치고자 합니다. 필부라도 잘못을 충고하는 친구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경대부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만, 집사께서 의지하는 사람 가운데 부지런히 경계하고 충고하기를 최주평(崔州平)ㆍ서원직(徐元直)처럼 하고 때때로 잘못을 바로잡아 주기를 장경부(張敬夫)ㆍ여백공(呂伯恭)처럼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는 삼가 이런 사람을 지금 서둘러 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소회(所懷)가 있기에 또한 감히 숨기지 않고 말씀드립니다.”
하였다.

33년(1660) 현종대왕 원년 경자
○ 4월에 탄촌(炭村), 시남(市南), 초려(草廬) 등 여러 공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처음에 효묘(孝廟)의 상(喪)이 났을 때 장렬대비(莊烈大妃)의 복제(服制)를 양송(兩宋) 등 여러 사람들은 기년(期年)으로 주장하고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은 3년으로 주장하여, 서로 쟁변(爭辨)하다가 예송(禮訟)으로 확대되었다. 윤휴가 또 ‘군주를 비하하고 종통을 두 갈래로 나눈다.[卑主貳宗]’는 주장을 창도하였는데 말뜻이 매우 위험하였고, 윤선도(尹善道)는 상소하여 예(禮)를 논하는 것을 가탁하여 송상을 무함하였다. 이에 조정의 논의가 윤선도를 극률(極律)로 처벌하고자 하였는데, 탄옹(炭翁)이 상소하여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논하니, 이로 인하여 사류(士類)가 분열되고 조정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선생은 일이 사우들에게 관계되는 것을 깊이 염려하여, 마침내 탄옹에게 편지를 보내어 상소하여 윤선도를 신구(伸救)한 잘못을 극렬하게 말하고, 또 시남과 초려에게 편지를 보내어 탄옹의 본심을 깊이 해명하였으니, 요컨대 양쪽을 화합시킬 수 있는 방도로 삼고자 함이었다. 편지는 모두 《유고》에 보인다.

34년(1661, 현종2) 신축
○ 2월에 우계 선생을 서원에 배향하는 예에 참석하였다.
석담서원(石潭書院)은 해주(海州)에 있으니, 주자(朱子)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서 율곡(栗谷)을 배향하였다. 이때에 와서 사림이 또 우계를 함께 배향하였으므로 선생이 가서 참석하였다. 선비들이 집례(執禮)로 추대하므로 선생이 배향하는 의식 절차를 강정(講定)한 다음 위차(位次)에 차례대로 서게 하였다.
○ 이 여행길에 교산에 성묘하였다.
○ 5월에 아들 행교(行敎)가 태어났다.

35년(1662, 현종3) 임인
○ 3월에 동쪽으로 유람 길에 올랐다.
이때 동토공(童土公 윤순거(尹舜擧))이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풍악(楓嶽)을 유람하기에 앞서 편지로 불렀으므로 선생이 간 것이다.
정만창(鄭晩昌) - 보연(普衍) - 의 묘소에 곡하였다.
공은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증손으로 뛰어난 풍도(風度)와 기상이 있었다. 뜻을 가다듬어 학문에 힘썼으나 불행하게 일찍 죽었고, 선생에게 고아를 의탁하였다. 선생이 슬퍼하고 애석해하였는데, 이때에 그 묘소가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으므로 제문(祭文)을 지어 곡하였다.
○ 4월에 풍악에 들어갔다.
유점사(楡店寺)에 도착하여 동토공을 뵙고 내외의 산을 두루 구경하였다.
○ 이 유람 길에 영월에 도착하여 노릉(魯陵)을 참배하였다. 강릉에 들러 공자(孔子)의 구산서원(丘山書院)을 참배하고 퇴도(退陶 이황(李滉))의 시에 차운하였으며, 율곡(栗谷)의 송담서원(松潭書院)을 참배하고 동토공의 시에 차운하였다.
○ 5월에 영월로 돌아왔다. 7월에 구담(龜潭)과 도담(島潭)을 거쳐서 돌아왔다.
이 유람 길에 팔경(八景)을 두루 구경하느라 단양 골짜기에 들러 이름난 명승지를 빠짐없이 다 찾아보았다. 이때 지은 시가 100여 수에 가깝고, 또 기행록(紀行錄)이 있다.
○ 8월에 종형 수찬공(修撰公) - 절(晢) - 을 곡하였다.
공은 일찍이 조정에서 재주를 드러내어 아름다운 명망을 크게 떨쳤으므로 부형과 사우들이 원대한 앞날을 기대했는데, 불행히 왕명을 받들고 동래(東萊)로 갔다가 여관에서 죽었다. 선생이 제문을 지어 곡하기를,
“이러한 자질에다 이러한 뜻을 품고 이러한 학식을 갖추었는데도 수명이 여기에 그쳤구려.”
하였다. 나중에 또 묘명(墓銘)을 지었다.

36년(1663, 현종4) 계묘
○ 다시 조정 대신의 천거를 받았다.
이때 선생의 명망과 실질이 더욱 높아지자 시남(市南)이 사마군실(司馬君實)이 유기지(劉器之)를 천거한 고사를 본떠서 선생을 천거하였고, 여러 재상들도 선생의 학행을 천거하였다.

37년(1664, 현종5) 갑진
○ 3월에 시남에게 편지를 올렸다.
이에 앞서 상(上)이 유공(兪公)을 의지하고 신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유공에게 기대를 걸었는데, 조정이 다스려지지 않고 사류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유공도 물러나 돌아갈 뜻을 가졌다. 그러나 성상의 지우에 감격하여 머뭇거리며 결정짓지 못했으므로 선생이 우려하여 일찍이 편지를 보내 결단을 내려 귀향하도록 권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또 편지로 거듭 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제가 도로에서 들은 말을 참고해 보건대, ‘시속을 좇는다[徇俗]’라는 두 글자가 실로 문하의 병통입니다. 이 때문에 몸을 검속하는 규모가 요약되지 못하고 하는 일이 잘못된 예로 빠져드는 때가 많아 총명은 가려지고 물정(物情)은 승복하지 않으니,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는 내심 우려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자는 마구 헐뜯습니다. 만약 한 번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짓지 않는다면 종당에는 회옹(晦翁)이 ‘주자충(周子充)과 같은 지위에 도달해야 한다.’라고 한 말이 매우 두려워질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문하께서 차마 결단을 내려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문하 자신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 그런 것일 뿐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이 몸을 붙들어 수립하여 강대(剛大)한 곳에 우뚝 서야만 바야흐로 공업(功業)을 수립하여 위아래로 운용하여 국가를 이롭게 하고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스스로 풍랑 속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어떻게 안정된 자세로 손을 쓰는 형세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다면 몸을 위하고 국가를 위하는 두 가지 일이 모두 불가능할 것입니다. 옛사람이 나아가고 물러가는 문제를 그토록 신중히 했던 것이 어찌 국가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없어서 그랬겠습니까. 진실로 사소한 일에 자신의 소신을 굽히면 끝내 더 큰일을 정도(正道)대로 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참람되지만 소회가 있기에 끝내 감히 말씀드리지 않고 스스로 그만둠으로써 가르쳐 주신 뜻을 저버리지 못합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만년(晩年)의 처신이 가장 어렵다.’라는 말이 진실로 문하께서 경성(警省)해야 할 바입니다.”
하였다.
○ 선생은 평소 사문(師門)에 대해서 지성을 다하고 숨김이 없어 잘못된 점을 보게 될 경우에는 비록 남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이라도 반드시 다 말하고야 말았다. 탄옹, 시남 및 두 송상(宋相)과 주고받은 여러 편지를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 시남 유 선생(兪先生)을 곡하였다.
서울 집에서 초상(初喪)이 났는데, 부음이 이르자 선생이 곡위(哭位)를 만들어 곡하고 가마(加麻)하였다.
○ 4월에 중로(中路)에서 상여를 맞이하고 글을 지어 곡하였으며, 상여를 따라 임천(林川)에 이르렀다. 장사 지낼 때에 다시 가서 참석하였다. 제문이 있으며, 뒤에 또 묘지명을 지었다.
○ 6월에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정신(廷臣)이 또 선생의 학행(學行)을 천거하였다. 이조가 전후의 별천(別薦)을 가지고 대신(大臣)에게 의논한 뒤 등급을 나누어 초계(抄啓)하고, 선생을 곧바로 6품으로 올리기를 청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이 제수가 있었다.
○ 7월에 교산에 성묘하였다.
○ 10월에 아들 충교(忠敎)가 태어났다.

38년(1665, 현종6) 을사
○ 7월에 6품으로 초서(超敍)하고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8월에 교산에 성묘하였다.
우계(牛溪) 쪽으로 길을 돌려 사원(祠院)과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구포(鷗浦)에 들러 포저(浦渚)의 서원을 참배하였다.

39년(1666, 현종7) 병오
○ 12월에 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40년(1667, 현종8) 정미
○ 1월에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를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8월에 교산에 성묘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용인(龍仁)을 경유하여 정암(靜庵)의 심곡서원(深谷書院)을 참배하였다.
○ 창강(滄江) 조공(趙公)을 배알하였다.
공의 휘는 속(涑)이다. 고상한 품격과 뛰어난 절조가 있었으며, 동토(童土) 및 노선생과 교의(交誼)가 매우 돈독하였다. 이때에 한양에 들어가서 찾아뵙고 돌아왔다.

41년(1668, 현종9) 무신
○ 7월에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였는데, 정장(呈狀)하여 체직되었다.
유지(有旨)로 징소(徵召)하였는데, 종[奴]의 이름으로 정장하여 사양하였다.
○ 간간이 조정에서 부르는 교지가 내릴 때면 종의 이름으로 대신 아뢰어 상달(上達)하는 것이 편치 않다고 여겨서 곧바로 성명(姓名)을 썼는데, 또 관함(官銜)을 써서 현읍(縣邑)에 바치는 것이 일의 체모에 방해되는 점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종의 이름을 썼다. 나중에는 퇴옹(退翁)이 이름을 써서 정원(政院)에 전달하여 바치게 했던 전례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 징소하는 교지가 내릴 때면 당(堂) 위에 탁자를 설치한 다음 그곳에 올려놓고, 직령포(直領袍)를 입고 가죽신을 신고서 뜰에 내려가 사배(四拜)하였으며, 교지를 뜯어본 뒤에 또 사배하였다.
○ 9월에 또 지평을 제수하였는데, 정장하여 체직되었다.
○ 12월에 중부(仲父) 동토 선생의 상을 당했다.
서울 집에서 초상이 났는데, 선생이 노선생을 따라가 중로(中路)에서 상여를 맞이하였다. 뒤에 행장(行狀)과 묘비명을 지었다.

42년(1669, 현종10) 기유
○ 1월에 별유(別諭)로 징소하였다. 상소하여 정세를 진달하고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입조(入朝)하여 징소된 신하들을 예(禮)로써 부르기를 차자(箚子)로 청하였는데, 노선생과 용서공(龍西公), 석호공(石湖公)이 모두 특별히 부름을 받았고, 선생도 그 속에 들었다. 상소하여 정세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몸에 재앙이 쌓인 탓으로 어린 나이에 혹독한 화란을 당하여 지난 정축년(1637, 인조15) 난리에 신의 어미가 강도(江都)에서 죽었습니다. 신은, 자식이 불효하여 비명에 어미를 잃고서도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하여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며 남들처럼 말하고 웃고 먹고 옷을 입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통탄스럽게 생각합니다. 매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것만 같았습니다.
옛날에 송나라 유겹(劉韐)이 정강(靖康)의 난에 죽자 그 아들 자휘(子翬)가 무덤 아래에서 은거하며 병을 이유로 종신토록 세상에 나가지 않았으니, 고인이 변란을 만났을 때에 자처함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이에 사환(仕宦)의 뜻을 버리고 시골에서 칩거하며 평생을 보내기로 스스로 맹세하였습니다. 오직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은 황천(皇天)이 우리 성주(聖主)를 보우하시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 대업(大業)을 크게 일으켜 사해(四海)에 아름다운 명성을 널리 떨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필부의 가슴에 품은 사사로운 슬픔도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니, 그날 바로 죽는다 하더라도 지하에서 원통해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 지극한 소원은 단지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처럼 처신한 탓으로 소문이 과장되어 안으로는 허명(虛名)을 훔쳤다는 수치를 안고 밖으로는 인륜을 어지럽히는 전철을 밟게 되었습니다.
아! 만약 신이 실제로 재주와 학식이 있어서 사령(使令)을 맡을 만하다면 국가에 충성하고 집안에서 효도하는 것은 본래 두 가지 일이 아니니, 벼슬길에 나가 조정에 몸을 바치고 일마다 힘을 다함으로써 위로 성상의 큰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 남모르는 원통함을 푸는 것이 어찌 또한 신자(臣子)의 분수 밖의 일이겠습니까. 고인 중에서도 이를 행한 사람이 있으니, 자휘(子翬)의 형 자우(子羽) 부자가 이런 경우입니다.
신은 그렇지 않아서 타고난 기질이 이미 남만 못한 데다 변화시키려는 노력마저 하지 않아 인순하는 것이 습성으로 굳어졌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경술(經術)을 밝게 익혀 제왕(帝王)의 학문에 도움을 주고 세무(世務)에 환히 통달하여 국가의 일에 보탬이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스스로의 역량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한갓 은총과 영광에 감격하여 마침내 원통함을 머금고 슬픔을 참고자 했던 초심(初心)을 바꾸어 단지 갓끈을 드날리고 인끈을 묶고서 벼슬살이하는 데로 귀결되게 할 뿐이라면, 조정에 나아가서는 이루는 바가 없고 물러나서는 지키는 바가 없어 참으로 유씨(劉氏)의 죄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 3월에 상이 온천에 행행(行幸)하면서 또 별유(別諭)로 징소하였는데, 정장하여 사양하였다.
○ 4월에 노서 선생의 상을 당했다.
선생은 노선생이 평소 직함을 쓴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감히 유의(遺意)를 어기지 못하고 명정(銘旌)을 생원(生員)으로 썼으며, 상례(喪禮)는 모두 사례(士禮)를 따랐다. 동춘(同春)이 아뢴 바에 따라 특별히 이조 참의를 추증하고, 본도에서 장례 물품을 넉넉히 지급하도록 명하였으며, 또 별도의 부의(賻儀)를 보내왔다. 선생이 소(疏)를 지어 장차 모두 사양하고자 하다가, 상중에 연이어 진소(陳疏)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고 여겨서 올리지 않았다.
○ 선생은 거상(居喪)하는 데 예를 다하였고, 슬픔에서 우러난 곡을 소상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으며, 상복의 소매가 눈물에 절어서 모두 삭았다. 1년이 되어서야 죽을 먹었고, 3년 동안 소식(疏食)을 하며 나물국도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 8월에 노서 선생을 장사 지냈다.
이씨 부인의 묘소가 멀리 교하(交河)에 있는데, 여름철 장마 때문에 영구를 옮기기가 어려워서 삼월장(三月葬)의 기한에 맞추지 못하였다. 이달에 이르러서 비로소 합장하고 죽리(竹里)에 반곡(返哭)하였으니, 농와(農窩 윤추(尹推))의 거처로서 노선생이 돌아가신 곳이다.
○ 12월에 교산의 묘려(墓廬)로 가서 머물렀다.
선생이 처음에는 그대로 묘소 아래에서 살고자 하였으나, 석호공(石湖公 윤문거(尹文擧))이 연로하여 차마 멀리 떠나갈 수가 없었다. 선생이 마침내 반곡하고서 농와와 번갈아 묘려로 가서 시묘(侍墓)하였는데, 매일 새벽과 저녁에 묘소로 올라가서 절하고 곡하며 슬픔을 다하였다.

43년(1670, 현종11) 경술
○ 2월에 교산에서 돌아왔다.
○ 4월에 다시 교산으로 갔다.
한 달 남짓 머물다 돌아왔고, 8월에 다시 가서 한 달 남짓 머물렀다. 전후로 시묘할 때면 경기와 서울의 선비들이 많이 찾아와서 학업을 청하였는데, 선생이 주자(朱子)가 한천(寒泉)에서 시묘하던 때의 고사에 따라 더불어 강의하였다.

44년(1671, 현종12) 신해
○ 6월에 상제(喪制)가 끝났다.
이달에 궤연(几筵)을 받들고 미촌(美村)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 선생 집안의 제례(祭禮)는 사중월(四仲月)에 정제(正祭)를 행하고 계추(季秋)에 예제(禰祭)를 행하였으며, 제의(祭儀)와 제찬(祭饌)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따르되 고(考)와 비(妣)의 제물을 각각의 탁자에 따로 차렸다. 묘제(墓祭)도 《격몽요결》을 따라 행하였다.
○ 선생의 외조인 생원 이공(李公)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선생이 그 제사를 받들되 정성을 지극히 하고 제물(祭物)도 매우 후하게 차렸으며, 별도의 사당을 세우고 사시(四時)에 따로 날을 정해서 가묘(家廟)의 제사에 앞서 제사를 행하였다.
○ 교산에 성묘하였다.
○ 송자문(宋子文) - 두장(斗章) - 을 곡하였다.
송공은 젊어서부터 노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성품이 곧으면서도 자애롭고 신실하였으며 학문에 부지런하였으므로 선생은 그와 매우 돈독한 교의를 맺었다. 세상을 떠나자 한없이 애통해하며 가마(加麻)하고 몸소 그 장례를 주선하였다. 만사와 제문이 있으며, 뒤에 또 행장을 지었다.
○ 노서 선생의 연보를 편차(編次)하였다.
또 유사(遺事)를 지었다.
○ 세자시강원 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제수하였다. 7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상소에서 부친상에 대한 은졸(隱卒)의 은전에 사은(謝恩)하고, 인하여 직명을 사양하였다. 8월에 또 정장하여 체직되었다.
○ 8월에 사헌부 장령을 제수하였는데, 9월에 정장하여 체차되었다.
○ 교산에 성묘하였다.
○ 송곡(松谷) 조공(趙公)의 묘소에 곡하였다.
공의 휘는 복양(復陽)으로 포저(浦渚 조익(趙翼))의 아들이다. 노선생과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고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있었으므로 선생이 일찍이 존경하여 섬겼다. 이때에 그 묘소에 들러 술을 올렸다. 자세한 내용은 제문에 보인다.
○ 10월에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에게 노서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 12월에 또 진선(進善)을 제수하였는데 정장하여 체차되었다.
○ 정사(淨寺)에 모여서 동토 선생의 유고(遺稿)를 교정하였다.
종제(從弟) 덕포공(德浦公) 진(搢) 및 농와와 모여서 10여 일 동안 머물렀다. 감회를 기술한 시에,
유편은 영원토록 남을 터이나 / 遺編宜不朽
실추된 유업 이미 잇기 어렵네 / 墜緖已難尋
평생토록 《시경》의 〈소완〉 구절을 / 平生小宛句
새벽에 홀로 앉아 슬피 읊노라 / 明發獨悲吟
라는 구절이 있다.

45년(1672, 현종13) 임자
○ 1월에 탄촌(炭村) 권 선생(權先生)을 곡하였다.
제문이 있다. 뒤에 또 행장과 묘지를 지었다.
○ 3월에 분암(墳庵)에서 종인(宗人)들과 만나 종약(宗約)의 효학(斅學) 규정을 거듭 밝혔다.
이에 앞서 동토공(童土公)과 노선생이 종약을 의논해서 정하고 봄가을로 모여 ‘친친을 돈독히 하는 것[惇親親]’으로 학규(學規)를 삼아 자제들을 가르쳤으니, 종약 중의 ‘효학’ 한 조항이 이것이다. 노선생은 특히 몸소 이 일을 담당하여 후진을 가르치고 면려하였는데, 선생이 노선생의 별세 이후에 종약을 가다듬어 밝히되 특히 여기에 정성을 쏟고, 종인들을 이끌어 가르쳐서 인재로 만드는 것이 선친의 뜻을 계승하는 큰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침내 분암에 일제히 모여 매달 과제를 내주고 매달 강(講)을 하는 학규를 거듭 밝히고, 스승과 존장(尊長)을 세워 학업을 공경하고 학예를 흥기시킴으로써 인재를 길러내는 효과가 있기를 기약하였다. 이어 시를 지어 여러 종인들을 권면하였는데,
선대의 일 잇는 것이 효도임을 잘 알지만 / 深知述事能爲孝
정성이 남들보다 못할까 걱정이네 / 只恐微誠未及人
라는 구절이 있다. 이로부터 선생이 매달 몸소 가서 과강(課講)을 행하였다.
○ 7월에 종조숙부(從祖叔父) 용서(龍西 윤원거(尹元擧)) 선생을 곡하였다.
제문이 있으며, 행장을 지었다.
○ 윤7월에 《상례비요(喪禮備要)》를 감정(勘訂)하였다.
이 책이 이미 간행된 뒤에 간간이 내용을 보태거나 윤색한 곳이 많았다. 이때 중간(重刊)하려 하므로 선생이 다시 정정(訂正)하여 인쇄한 것이다.
○ 9월에 교산에 성묘하였다.
이때에 길을 파산(坡山)으로 돌려 우계서실(牛溪書室)에서 명촌(明村 나양좌(羅良佐))을 만났다. 또 현석(玄石)과 만나서 며칠 동안 강론한 뒤에 헤어졌다.
○ 사헌부 집의를 제수하였는데 정장하여 체차되었다.
○ 10월에 계부(季父) 석호(石湖) 선생의 상을 당했다.
제문이 있다. 뒤에 또 묘표(墓表)를 지었다.
○ 12월에 동춘(同春) 송 선생(宋先生)을 곡하였다.
부음이 이르자 곡위(哭位)를 만들어 곡하였다. 만사와 제문이 있다.

46년(1673, 현종14) 계축
○ 3월에 진선(進善)을 제수하였는데 두 차례 정장하여 체차되었다.
○ 7월에 또 진선을 제수하였는데 정장하여 사직하였다. 집의로 옮겨 제수하였으나 또 정장하여 체차되었다.
○ 8월에 또 집의를 제수하였다. 9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천릉(遷陵)할 때의 만사를 지으라는 명도 겸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소가 올라가기 전에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체차되었다.
○ 〈우계서실중수기(牛溪書室重修記)〉를 지었다.
우계서실은 바로 우계 선생이 도(道)를 강론한 장소인데, 임진년(1592, 선조25)과 병자년(1636, 인조14)의 병화(兵火)에도 화를 면하였다. 우계 선생의 증손 희주(熙胄)가 서실을 중수하고 선생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선생이 우계의 유훈(遺訓)을 하나하나 기술하여 면려하고 경계한 뒤, 마지막 부분에,
백 년 동안 학문이 실추되지 않았으니 / 百年文不墜
나는 이 언덕에서 늙고 싶구나 / 吾欲老斯丘
라는 노선생의 시구를 인용하여 감회를 부쳤다.
○ 11월에 송상(宋相)에게 노서 선생의 묘갈명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선생이 묘문(墓文)을 부탁하려고 할 때에 덕포(德浦 윤진(尹搢))와 농와(農窩)가 모두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다른 사람을 너무 지나치게 걱정해 주다가 도리어 원망을 사곤 하였으니, 후대에 전할 문자를 함부로 부탁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선생은,
“평소에 비록 의견이 다 맞지는 않았어도 선인(先人)의 마음은 시종 간격이 없으셨다. 또 선인의 집우(執友)로는 오직 이 어른이 계실 뿐이니, 이 어른을 두고 다른 곳에 청해서는 안 된다.”
하고, 마침내 행장과 연보를 가지고 가서 청하였다.
○ 처음에 노선생은 송상이 선(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심(私心)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큰 병통으로 여겼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재차 조정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편지로 경계하고자 하여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고 언로(言路)를 열라.’는 뜻으로 극언(極言)한 것이 모두 수백 글자였는데, 반복해서 책려(責勵)하고 진정으로 충고하고 면려하여 기휘(忌諱)를 지적한 것이 많았다. - 〈후록(後錄)〉의 나양좌(羅良佐)의 상소에 보인다. - 그러나 편지를 이미 완성한 뒤에 곧 그가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보내지 않았다. 선생은 선인이 간절하게 책선(責善)한 유의(遺意)를 끝내 민멸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아울러 가지고 가서 보였다.
○ 율곡 선생의 연보를 감정(勘訂)하였다.
현석(玄石)이 연보를 개편(改編)한 뒤 편지로 정정(訂定)해 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선생이 교감한 것이다. 주고받은 편지가 있다.
○ 《소학중편(小學重編)》을 감수하였다.
한공 교(韓公嶠)가 일찍이 주자(朱子)의 언행을 엮어서 이 책을 만들었는데, 사계(沙溪)가 매우 칭찬하였다. 선생은 그 내용이 지나치게 번잡하다고 여겨 다듬고 줄여서 정본을 만들었다.
○ 12월에 교산에 성묘하였다.

47년(1674, 현종15) 갑인
○ 1월에 장단(長湍)의 선영에 성묘하였다.
선생의 5대 이상의 묘소가 모두 파주(坡州)와 장단에 있는데, 이때에 교산에서 길을 돌려서 두루 참배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한양을 경유하여 유란동(幽蘭洞)에 있는 청송당(聽松堂)의 옛터를 찾아보았다. 현석이 우거(寓居)하는 곳에서 잤는데, 한양의 유생들이 많이 찾아와서 강론하고 질문하였다.
○ 집의를 제수하였는데 정장하여 체차되었다.
○ 2월 무오(23일)에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승하하였다. 현조(縣朝)에 들어가서 곡림(哭臨)하고 성복(成服)하였다.
선생은 국휼(國恤)을 만날 경우 장례 전에는 산속 암자로 거처를 옮기고 음식을 평소와 달리하였으며, 공제(公除) 기간이 끝나기 전까지는 글을 짓고 강론하는 것을 중지하였다.
○ 송상(宋相)에게 편지를 보냈다.
묘갈명을 청한 뒤에 송상이 연보와 행장을 보고서 현석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자네가 지은 행장은 다시 상량(商量)해야 할 곳이 무척 많네. 을사년(1665, 현종6) 무렵 길보(吉甫 윤선거(尹宣擧))와 산사(山寺)에서 만났는데,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도 그 자리에 왔었네. 내가 길보에게 ‘요사이 여윤(驪尹)에 대한 형의 생각이 어떠한가?’ 하였더니, 그가 문득, ‘그는 흑(黑)이고 음(陰)이며 소인(小人)이네.’라고 답하였네. 그래서 내가 ‘그렇다면 형은 그와의 교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였더니, ‘어찌 흑이고 음이고 소인이라고 여기면서 절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므로, 내가 ‘형은 이제 깨끗해졌네.’라고 하였네. 그런데 그 뒤에 초려가 나에게 말하기를, ‘길보는 겉으로는 엄정(嚴正)해 보이지만 내면은 실제로 허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니, 그날 한 말은 믿을 수 없을 듯하네.’ 하므로, 내가 나무라기를, ‘어찌 길보가 그렇겠는가. 형이 잘못 안 것일세.’ 하였네. 그가 죽고 난 뒤에 믿을 만한 선비 하나가 그의 문하로부터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여윤에 대한 윤장(尹丈)의 교제는 시종 변함이 없었으니, 절교하였다는 말은 모쪼록 믿지 마십시오.’ 하였으므로, 내가 비록 깊이 믿지는 않았지만 또한 의심이 없지는 않아 초려의 말을 생각해 볼 만하다고 여겼네. 그래서 마침내 그의 첫 번째 기일에 대략 몇 마디 말을 엮어서 여윤에 대한 취사(取捨) 문제를 슬쩍 내비쳤던 것이네.
지금 그 집에서 지은 연보를 보니 곧바로 허목(許穆)과 윤휴(尹鑴)를 쓸 만하다고 허여하였고, 또 듣건대 그의 영구가 성서(城西)를 지날 때 여윤이 그 아들을 보내어 제문을 가지고 가서 제전(祭奠)을 올리게 했다고 하니, 여윤이 이미 절교를 당하고도 죽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한 것이 이미 매우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절교한 집에서 오히려 안면과 정분에 구애되어 거절하지 못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네.
그 뒤에 초려가 와서 말하기를, ‘여윤이 절교당했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성을 내면서 「강도(江都)의 일에 대해서 내가 먼저 이미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애써 참고 종유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네.’ 했으니, 혹 그 집에서 이 점을 염려하여 미봉하고 보합하려 했던 것이 아닐지 모르겠네. 이미 절교한 뒤에 그 사람이 개과천선한 실질을 보지도 못하고서 구차스럽게 붙좇아 도리어 마치 서로 절교하지 않은 사람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점이네.”
하였는데, 편지에 ‘강도의 일에 대해서[於江都事]’라는 4자를 썼다가 도로 지우되 지운 글자를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현석이 그 편지를 베껴 보내면서 4자를 도로 지우되 알아볼 수 있게 한 형적을 아울러 상세히 말해 주었으니, 또한 그의 의도를 엿본 것이었다. 선생이 마침내 송상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대략에,
“제전을 받은 일에 대해서 누차 꾸지람을 받았으나, 마음 씀씀이를 이 정도로 깊이 의심받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모인(某人)이 성나서 욕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거니와, 설사 들었다 하더라도 이른바 ‘구차하게 붙좇으려는 계책’이라는 것은 감히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전혀 듣지 못한 말인 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초려 어른이 운운했다는 것은 비방하고 욕보인 말로서 전혀 선인의 심사(心事)를 알지 못하는 사람 같은데, 지금 조금도 거르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여 곧장 정말 그렇게 여기는 듯이 하시니, 이 점에 대해서는 진실로 개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개 이 일은 선인의 논의가 설사 문하(門下)와 조금 다르다고 하더라도 완급과 경중의 차이에 불과하니, 문하의 견해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면 선인의 견해가 미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가령 선인이 그 사람됨을 간파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명도(明道)가 형서(邢恕)를 알지 못하고 문정(文定)이 진회(秦檜)를 알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백세(百世)의 평론에 맡기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어찌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전후로 문하께서는 반드시 한두 구절의 말을 끄집어내어 서로를 곤란한 지경에 빠뜨리고자 힘을 쓴 것입니까. - 예컨대 일전에 윤보(胤甫)의 말을 전한 것과 같은 유입니다. - 어리석은 저의 식견으로는 실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쓰신 유찰(遺札)은 실로 문하를 위해서 정성을 다한 선인의 유의가 담긴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뒤늦게나마 감히 그 뜻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지금 또 이것을 하나의 화두로 삼아 세상 사람들에게 두루 퍼뜨림으로써 선인으로 하여금 또 사후에 시끄러운 비난을 받게 하였으니, 이 어찌 불초한 제가 문하를 감히 남 보듯이 하지 못한 뜻이겠습니까.”
하고, 또 이르기를,
“연보의 초본(草本)은 본래가 초본이었습니다. 선인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물러나서 지내셨기에 단지 여러 함장(函丈)들과 논의를 주고받은 것으로써 행사(行事)에 나타난 행적을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연보에 갖추어 실었던 것이니, 비록 피차의 쟁변이 서로 다 합치되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강마하는 실적(實跡)이 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주평(州平)과 원직(元直)이 부지런히 잘못을 지적했던 것도 공명(孔明)에게 반드시 영광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고 여겼으므로 구구한 제 생각에 다시 의심하거나 혐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인(某人)에 대해서 언급한 앞뒤의 단락으로 말씀드리자면, 단지 평소 그를 취했던 뜻과 만년에 버린 이유를 서술하되 감히 의도적으로 보태거나 줄이지 않은 것이니, 비록 식견이 짧고 문자가 엉성하지만 마음만은 맹세코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송상은 답서에서 산사(山寺)에서 주고받은 말과 제전을 받은 일을 거듭 언급하며 의심하고 다그치기를 그만두지 않았고, 끝에 가서는
“자네 편지의 뜻은 내가 기유년(1669, 현종10)의 유찰 때문에 감정이 격해져서 오늘날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여긴 듯한데, 그것은 그렇지 않네. 나는 매양 스스로 못난 몸으로 도를 갖춘 군자에게 비루하게 보이지 않아 누차 질정과 충고를 받게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고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네. 어찌 감히 감정이 격해져서 화두로 삼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원한을 품고 성을 내고 미워하는 뜻이 말에 드러난 것이 이와 같았다. 상세한 내용은 〈별집(別集)〉에 보인다.
○ 처음에 노선생과 윤휴, 송상이 서로 사이가 좋았는데, 기해년(1659, 효종10)ㆍ경자년(1660, 현종1)의 예송(禮訟) 이후에는 송상이 곧바로 윤휴에게 화심(禍心)이 있다고 배척하였다. 노선생은 상문(相門)에 투합하여 평소의 소신을 다 잃어버렸다며 윤휴를 나무랐으나, 충고하여도 고치지 않자 마침내 그와 절교하였다. 또 송상이 너무 심하게 배척하다가 화란을 부르게 될까 우려하여, 그로 하여금 처사가 공평하고 바른 데로 귀결되도록 힘쓰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송상은 노선생이 자신에게 다른 마음을 가진 것으로 의심하였고, 또 항상 따끔하게 충고하고 지적하는 것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다. 묘갈(墓碣)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러서는 연보에 충고하고 경계했던 말이 갖추 실리고 행장에 도학(道學)의 실질을 기술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서 질투하고 성내는 마음을 품었고, 기유년에 쓴 노선생의 편지 내용이 또 감정을 격발시켰다. 이에 현석에게 편지를 보내 다 지나간 윤휴의 일과 강도(江都)의 일을 새삼스럽게 제기하여 흠집을 내는 단서로 삼고자 한 것이다.
기유년 노선생의 상례(喪禮) 때에 상여가 도성 서쪽을 지나게 되었는데, 윤휴가 그 아들을 보내어 제문을 가지고 와서 제전을 올리게 하였다. 덕포와 문하의 여러 사람들이
“선생과는 평소의 교의가 이미 끊어졌으니 지금 제전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선생은
“선인께서는 그가 처신을 바르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버리고 배척한 것이지 원수로 보고 원한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가 선인의 별세를 슬퍼하고 옛정을 생각하는 뜻으로 와서 조문하려는 것이니, 평소에 안부를 묻는 일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니 상가(喪家)의 의리로 볼 때 거절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고 마침내 받았던 것이다. 송상이 듣고서 여러 차례 의심하고 노여워하였고, 이 일을 가지고 말로만 절교하고 실제로는 절교하지 않은 증거로 삼았다고 한다. 상세한 내용은 〈후록〉의 여러 상소에 보인다.
○ 4월에 송상에게 편지를 보내고, 묘갈명을 처음 보냈다.
이때에 송상에게서 묘갈명이 왔다. 그 글에 생년(生年)과 졸년(卒年), 관력(官歷)을 기술하고, 총론(總論) 대목에 이르러서는
“나는 공에게 비교하면 뽕나무벌레와 고니 이상으로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사람이어서 그 내면의 깊은 부분을 엿보기에 부족하다. 더구나 덕을 형상(形狀)하는 글을 쓰려 하니 더욱 망연(茫然)하여 어떻게 말을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라고 하였다. 인하여 현석의 행장 내용을 전부 그대로 사용하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이것은 진심으로 좋아하고 성실로 신복(信服)한 화숙(和叔 박세채(朴世采))의 말인데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자에게 아부했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공은 여기에 뜻을 뒀건만 / 公志于此
하늘이 그 수명을 멈추게 했네 / 天閼其年
진실한 현석이 / 允矣玄石
극도로 잘 선양하였기에 / 極其揄揚
나는 따로 짓지 않고 그대로 따라 / 我述不作
이렇게 묘갈명을 게시하노라 / 揭此銘章
라고 하여 소원하게 여기고 기롱하고 폄하하는 뜻을 드러냈으며, 그 밖의 구절에도 은근히 조롱하고 암암리에 풍자하는 내용이 많았다. - 글은 〈후록〉에 보인다. -
선생이 편지를 보내기를,
“삼가 이 문자를 보니 전적으로 총론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선인께서 문하와 강마(講磨)하는 의리에 의탁한 것이 40년이었으니, 평생의 본말을 서로 모르는 게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알지 못하는데 박모(朴某)의 말이 이와 같다.’고 하시니, 어찌 인정(人情)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인은 평소의 의논과 출처가 문하와 맞지 않은 점이 많이 있었으니, 지금 그 실상을 덮어버리지 않고자 한다면 ‘어떤 일과 어떤 일은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고 하면 유명(幽明) 간의 정의(情義)에 도리어 방해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뽕나무벌레와 고니 이상으로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사람이어서 그 내면의 깊은 부분을 엿보기에 부족하다.’는 등의 말로써 도외시하고 소원히 하시니, 불초한 제가 묘갈명을 부탁드린 뜻이 끝내 쓸쓸해질 뿐만 아니라, 혹 후세로 하여금 문하의 인품을 의논하게 하지는 않을까 염려되니, 또한 어찌 작은 일이라 하겠습니까.
삼가 남의 말을 인용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혹 죽은 사람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말하는 자가 믿을 만하면 그것을 근거로 해서 실증하는 예가 있고, 혹 후인(後人)이 감히 제멋대로 단정하지 못하는데 선배나 어른의 말이 있으면 그것을 빌려서 신빙성을 더하는 예가 있습니다. 지금 평생토록 교제한 친구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스스로 그 뜻을 보이지 않고 도리어 후학의 말을 기술함으로써 애당초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하셨으니, 이렇게 하고 말 것이었다면 박우(朴友 박세채(朴世采))의 행장으로 충분했을 텐데 다시 무엇하러 굳이 문하에게 은혜를 청하였겠습니까.”
하였다. 그러고는 원본에다 대략 찌를 붙여 표시하고, 또 총론을 다시 더 개정(改定)해 주기를 청하였다. 송상이 답서를 보내왔는데, 그 대략에,
“지금 이 행장은 실로 박화숙이 힘을 다해 형용한 것으로서 실로 다른 사람의 말은 그에 미칠 수 없는 점이 있네. 그러니 어리석은 내가 어찌 감히 그 사이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산정(刪定)하고 조절할 수가 있겠는가. 또 나는 나 스스로가 매우 불만스러우나 화숙을 존경하고 우러르는 마음은 실로 태산과 같네. 그러므로 내가 화숙에게 의지하여 글의 무게를 더하더라도 후세에 그다지 비루하게 평가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네. 지금 서문에서 이미 ‘아부했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정하였고, 명문(銘文)에 이르러서는 《중용》의 도(道)를 논하여 말한 다음 ‘공이 여기에 뜻을 두었다.’라고 하였으니, 당시에 대단히 심혈을 기울여서 고심 끝에 이렇게 쓴 것이었네. 또 화숙의 논찬(論撰)은 혹 다시 수정해야 할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화숙은 단지 회옹(晦翁)이 위공(魏公)의 행장을 지을 때 경부(敬夫)의 문자를 한 번 썼던 것처럼 했을 뿐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감히 바꾸지 않았던 것이네.”
하였다. 선생이 답서를 보내기를,
“불초한 제가 비록 무식하지만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이 욕되게 하는 일인 줄은 압니다. 다만 선인께서는 평소 문하와 교분을 맺어 반드시 충신(忠信)으로써 서로 허여하고 도의(道義)로써 서로 기약하였습니다. 비록 문하가 매번 소소한 논의가 합치되지 않는 일로 간혹 의심하고 도외시하기도 하였으나, 선인의 간절한 정성은 신명에게 질정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느낌이 있으면 반드시 응하는 것이 천리(天理)의 당연함인데, 지금 이 문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뜻이 실로 범범하기만 하니, 옆에서 보기에 도무지 정의(情義)가 없는 사람 같습니다. 이것이 제가 탄식하고 한스러워하는 점입니다.”
하였다. 오래 지나서 송상이 다시 묘갈명을 보내왔는데, 약간 수정을 가한 것이었다. 편지에 쓰기를,
“총론은 혹 식견이 조금 나아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어리석은 힘을 다하게 한다면 참으로 좋겠네.”
하였다. 이에 선생이 마침내 다시 청하지 않았다. 모두 〈별집〉 및 〈후록〉에 보인다.
○ 종형 처사공(處士公) - 단(摶) - 을 곡하였다.
공은 뜻이 독실하고 박학(博學)하여 부형과 사우들의 기대와 인정을 받았는데, 불행히 중년에 별세하였으므로 선생이 슬퍼하고 애석해하였다. 제문에서 “깊은 학식과 확고한 지조와 잘 드러나지 않는 실질을 겸비하였소.”라고 칭송하였다.
○ 8월 기유(18일)에 현종대왕이 승하하셨다. 현조(縣朝)에 들어가서 곡림(哭臨)하고 성복(成服)하였다.
○ 9월에 집의를 제수하였는데 정장하여 체차되었다.
○ 12월에 또 집의를 제수하였다.

48년(1675) 숙종대왕 원년 을묘
○ 1월에 상소하여 진정(陳情)하고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장하여 체직되었다.
상소의 대략에,
“신은 마음속에 지극한 아픔이 있는 몸으로서 헛된 이름은 분수에 맞지 않기에 일찍이 선조(先朝)에 한 번 신의 사정을 아뢰었습니다. 지금 새로운 정사를 펼치는 때에 신이 만약 스스로 호소하지 않는다면 성상께서 어떻게 헤아려 살피시겠습니까. 신은 불효한 탓으로 재앙이 몸에 쌓여 일찍이 혹독한 화란을 당하여 정축년(1637, 인조15)의 난리에 어미를 비명에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슬픔을 머금고 고통을 참으며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한 채 시골에서 평생을 지내기로 맹세하였으니, 이것이 실로 미천한 신이 반평생을 지켜 온 마음가짐입니다. 아비를 잃은 이후로는 더욱 세상을 살아갈 마음이 없어져서 문을 닫아걸고 칩거하며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매번 잘못된 은총을 입어 단지 은명(恩命)을 어기는 죄만 더 커지니, 이것이 신이 평소에 항상 위축되어 몸 둘 바를 모르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 뒤에 문인들이 상소 원고를 보기를 청하였는데, 선생이 을유년(1645, 인조23)과 기유년(1669, 현종10)의 두 상소를 손수 표시하여 보여 주면서,
“이것이 내가 선조 및 금상(今上)이 처음 즉위하셨을 때 평소의 뜻을 아뢰어 호소한 것이다. 만약 나의 출처(出處)를 알고자 한다면 이 두 상소만 보아도 충분할 것이다.”
하였다.
○ 3월에 노강서원(魯岡書院) 재규(齋規)를 정하였다.
이때 호서(湖西) 사림들이 이산(尼山)의 노강(魯岡)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팔송(八松) 선생과 노서(魯西) 선생을 제사 지내고, 이로써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삼았다. 선생이 이들을 위하여 재규 5조(條)를 정하고, 또 율곡이 정한 석담서원(石潭書院) 재규와 퇴계(退溪)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써서 걸어 두고 가르쳤다.
○ 4월에 노강서원 원재(院齋)에서 제생들과 만났다.
선생이 원재에 왕래하며 제생들과 만나 강학하니 원근의 인사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경서(經書)를 가지고 문난(問難)하다가 한 달 남짓 되어서 파하였다. 이후로도 누차 이와 같은 모임이 있었다.
○ 6월에 송상에게 편지를 보냈다.
송상이 죄를 입어 귀양 가면서부터 글이나 말에 성내고 원망하는 뜻을 많이 드러냈으므로 선생이 우려하여 편지로 충고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지난겨울 이래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편지 내용과 시구에 불평을 드러낸 경우가 많았습니다. 종전부터 사소한 일이 쌓여 재앙이 빚어지는 것은 매번 이러한 곳에 있었으니, 기품(氣稟)과 학문의 작은 결점이라고 여겨 점검하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인하여 진중하고 침착한 기상에 힘쓰기를 권면하였는데, 송상이 보낸 답서에 언짢게 여기는 말이 많았다. 상세한 내용은 〈별집〉에 보인다.
○ 8월에 서울로 돌아가는 생질 박태보(朴泰輔)를 전송하였다.
박공(朴公)은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을 좋아했기 때문에 선생이 평소 중하게 여기고 인정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에게 와서 《심경(心經)》과 사서(四書)의 의의(疑義)를 강하였다. 그가 돌아갈 때에 시를 주어 이별하였는데,
글 보는 데 어려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 看書已無難
주석 또한 철저히 분석할 줄 아는 수준 / 箋註能爬櫛
간간이 진서산(眞西山)의 《심경》을 논할 때엔 / 間論西山經
황돈의 무릎을 꿇리고자 하는구나 / 欲屈篁墩膝
라는 구절이 있다.
○ 10월에 기자량(奇子亮) - 정익(珽翼) - 의 편지에 답하여 기수(氣數)의 설을 논하였다.
기자량은 호남의 선비인데, 편지에서 기수를 논하되 갈라서 두 가지로 보며 말하기를,
“기(氣)는 유행(流行)하는 것이고 수(數)는 고정된 것이니, 유행하는 것은 본래 변통할 수 있지만 고정된 것은 옮기거나 바꾸기 어렵습니다. 맑고 탁하고 순수하고 잡박한 것은 기에 의한 것이므로 변화시킬 수 있지만, 길고 짧고 통하고 막힌 것은 수가 정해진 것이므로 바꿀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선생이 답서를 보내어 변론하기를,
“고명(高明)께서는 오로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만을 위주로 하여 이통기국(理通氣局)의 논의에 동조하고자 하였습니다. 대개 이(理)는 하나일 뿐이지만 기(氣)는 만 가지로 다름이 있습니다. 이른바 ‘유행하는 것’이라느니 ‘고정된 것’이라느니 ‘변통할 수 있다’느니 ‘바꾸기 어렵다’느니 하는 것은 모두가 기입니다. 부여받은 기가 맑으면서도 짧은 사람은 사람됨이 어질되 요절하고, 부여받은 기가 탁하면서도 긴 사람은 사람됨이 불초하되 장수하는 것이니, 또한 모두 기입니다. 혹은 짧고 혹은 길며 혹은 통하고 혹은 국한된 것이 모두 기에 의한 것이지만 수가 그 속에 갖추어져 있으니, 어찌 갈라서 두 가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번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 논란하였다. 모두 《유고》에 보인다.

49년(1676, 숙종2) 병진
○ 1월에 유봉(酉峯)에 새집을 지었다.
석호공의 상을 치른 후에 선생이 교산(交山)으로 거처를 옮겨 처음의 계획을 이루려 하였으나, 갑인년(1674, 현종15) 이후로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였고 또 근기(近畿)에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농와(農窩)가 이때 죽리(竹里)에 살고 있었으므로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며 늘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고자 미촌(美村)에서 유봉으로 집을 옮겼다. 토신(土神)에게 제사 지낸 제문(祭文)이 있다.
○ 선생은 집안 살림이 매우 가난하여 거처하는 곳이 비바람만 겨우 막아 줄 정도였고 나물 반찬과 거친 밥도 떨어질 때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거의 견디지 못했을 것이나 선생은 태연하게 받아들였고, 날마다 학도(學徒)들과 강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학도들이 재사(齋舍) 옆에다 서실을 지어 거처하였는데, 선생이 이를 숙야재(夙夜齋)라고 이름 붙였으니,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원근의 학자들이 더욱 많이 찾아오니, 선생이 그 타고난 재주에 따라 차근차근 가르쳐 인도하였다. 가르치는 법은 율곡의 《격몽요결》과 우계의 《위학지방(爲學之方)》으로 초학자(初學者)의 문정(門庭)을 삼되 또 반드시 입지(立志)와 무실(務實)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이는 선생의 집안에 전해 온 지결(旨訣)이었다.
○ 2월에 정산(定山)에서 현석(玄石)을 만났다.
이때 현석이 내포(內浦)에 갈 일이 있었으므로 여관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선생이 농와와 함께 가서 하룻밤을 묵고 이별하였다. 선생이 현석에게 말하기를,
“나중에 그대는 나가서 세상일을 담당해야 할 것이지만, 나는 물러나서 내 뜻을 지킬 것이네.”
라고 하였다. 또 시를 지어 전송하였는데,
이 시대에 그대 능히 도를 담당할 터이나 / 當世子能堪任道
지금부터 나는 더욱 자취를 감추리라 / 自今吾欲益藏蹤
라는 구절이 있으니, 대개 그 뜻을 거듭 드러낸 것이었다.
○ 장기(長鬐)에서 송상(宋相)을 만났다.
당시에 송상이 덕원(德源)에서 장기로 이배(移配)되어 있었는데, 선생이 찾아가서 만나 보고 4일 동안 머문 뒤 돌아왔다.
○ 경주(慶州)를 지나다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참배하였다. 이곳에서 지은 시가 있다.
○ 3월에 송상에게 편지를 보냈다.
처음에 갑인년(1674, 현종15) 가을에 초려(草廬)가 예설(禮說)을 써서 송상에게 보내면서 수정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송상이 답서에다 직접 8, 9십자를 더 써넣어 돌려보냈다. 선생이 장기에 갔을 때 송상이 말하기를,
“근래 초려의 예설을 보았는데, 갑인년 가을에 지은 것으로서 한 번 구경할 만한 문자(文字)였으니, 그 대지(大旨)가 대략 저들이 말한 바와 같았네. 송상민(宋尙敏)이 초려의 조카에게서 얻어 보고 크게 놀라서 가져와 보여 주었는데, 젊은이들은 모두 ‘예설을 변개하여 화를 면하고자 했다.’라고 하였지만 나는 ‘한 번 웃을 만한 일이다.’라고 하였네.”
하였다. 그리고 그 손자 주석(疇錫)을 돌아보며 가져오라고 하였으나, 주석이 찾지 못하고
“송 진사(宋進士)가 가지고 간 듯합니다.”
라고 하니, 송상이 말하기를,
“자네가 송생(宋生)에게 보여 달라고 하게.”
하였다. 그래서 소제(蘇堤)에 들러서 송상민을 만나 보여 달라고 하였는데, 예설에는 별달리 변개한 곳이 없었으므로, 선생은 송상에게 편지를 보내어 초려가 예설을 변개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초려가 예설을 변개했다는 비난이 크게 일어나자, 그 조카 이구(李)가 와서 갑인년(1674, 현종15)에 우암과 초려 사이에 오고 간 편지 및 예설의 초본(草本)을 보여 주었는데, 바로 송생이 보여 주었던 본이었다. 선생이 매우 의아하게 여겨 또 송상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가 견해를 바꾼 것이 아니고 또 사사로이 한 말도 아님을 거듭 말한 다음 마음을 풀고 화해하는 도리로써 권하였다. 송상이 답하기를,
“이 형(兄)이 지은 예설이 이전의 견해와 완전히 달라졌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자네더러 새 예설을 보여 달라고 하게 한 것이었네. ‘갑인년 가을에 예설을 주고받았다.’라고 한 말은 실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간간이 내 생각대로 보태거나 삭제한 부분이 있었네.”
라고 하여, 그 말뜻이 주고받았던 예설과 이번에 들은 새 예설이 별개의 건인 듯하였다. 선생이 더욱 의심스럽게 생각하여 또 편지를 보내기를,
“당초에 문하(門下)가 주석을 시켜서 찾아오게 했다가 찾지 못하자 저더러 돌아가는 길에 들러서 보여 달라고 하게 한 것이 바로 송상민이 얻은 본이었고, 송생(宋生)이 얻은 본은 바로 갑인년 가을에 주고받았던 본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송생은 놀랍다고 여기고 문하는 가소롭다고 여겼던 그것입니다. 지금 보내신 편지에서 ‘갑인년 가을에 예설을 주고받았다는 말은 실로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하셨는데, 만약 당초에 송생이 놀라서 그 예설을 가져와 올렸을 때에 즉시 이렇게 답하셨다면 오늘과 같은 시끄러운 사단은 없었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미 예설을 왕복한 일을 말씀하지 않으셨고 또 ‘한 번 웃을 일이다.’라고 평을 하셨으니, 젊은 사람들이 분분히 떠들어 대는 것은 본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은 오직 문하에게 달렸습니다.”
하였는데, 송상은 답서에서 말을 매우 모호하게 하면서,
“만약 실제로 힘을 써야 할 곳이 있다면 이 일은 참으로 한가로운 한담(閑談)이 될 것이네.”
라고 하였다. 이때 초려도 송상이 자신을 비방하는 것에 격동되어 편지로 서로 욕하고 탓하였으며, 또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예설의 본말을 밝혔는데 원망하고 미워하는 말이 많았다. 선생은 서로 분열되는 것을 우려하여 다시 편지를 보내어, 스스로를 돌이켜 봄으로써 후세에 웃음거리를 남기지 말도록 권면하였다. 또 ‘이번의 시비는 우옹이 끝내 막혀서 두려울 듯하다.’고 여겨 다시 충고의 말씀을 올려 잘 해결하게 하려 했으나, 저쪽에서 도리어 의심하고 노여워하면서 초려의 일을 꼬투리 삼아 회천(懷川)을 흠잡으려 한다고 생각했고, 덕포(德浦) 등 여러 공들도
“이름은 비록 사생(師生) 관계지만 성신(誠信)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말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라고 하므로, 선생이 마침내 개탄하며 그만두었다. 상세한 내용은 〈별집〉에 보인다.
○ 4월에 묘갈명을 두 번째로 보내고, 또 송상의 편지에 답하였다.
선생이 장기의 유배지로 찾아갔을 때 윤휴와 절교한 일을 설명하고 그 본실(本實)을 밝혔는데, 송상이 오해를 풀고 마음이 누그러져서 화평한 말투와 표정으로 대해 주었다. 또 스스로 먼저 묘갈문에 대해 언급하면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말하기를, ‘최동고(崔東皐 최립(崔岦))는 「비갈(碑碣)이 이미 완성된 뒤에 그 자손이 고쳐 달라고 청하여 내 글을 원래대로 보존하지 못하게 될 경우에는 묘도문자를 배운 데 대해 깊이 후회하곤 한다.」 하였으나, 나는 고치고 또 고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참으로 후학이 마땅히 본받아야 할 점이네. 지금 이 묘갈문은 병을 앓던 중에 대략 정한 것으로 진정한 정본(定本)은 아니네. 만약 행장의 글을 인용한 것을 온당하지 않게 여긴다면 응당 고칠 것이니, 다시 온당한 글자와 온당한 말로 정확히 가르쳐 준다면 비록 열 번을 반복하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는가.”
라고 하였는데 말이 자못 자상하였다. 그래서 선생이 또 믿고 현석과 함께 다시 묘갈문의 의심나는 부분에 찌를 붙인 뒤 편지를 보내 고쳐 주기를 청하였다. 그 뒤에 송상이 또 편지를 보내왔는데, 동학사(東鶴寺)에서 했던 말과 제전(祭奠)을 받은 일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말을 뒤집는 뜻을 보였으니, 그전에 만났을 때와는 말투가 완전히 달랐다. 선생이 답서를 보냈는데, 그 대략에,
“지난번 뵈었을 때 감히 논설이 있었는데, 삼가 말씀과 표정에서 마음이 풀리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 오늘에 와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실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문하께서는 동학사에서 주고받은 말과 제전을 받은 일을 가지고 앞뒤가 어긋난 한 가지 큰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전의 말씀에는 반드시 ‘이미 절교했다가 다시 교제했다.’라고 하여 마치 말과 행동을 이랬다저랬다 한 듯이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신 말씀의 뜻은 또 반드시 ‘말로는 절교한다고 해 놓고 절교하지 않았다.’라고 하여 안팎이 다른 사람으로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선인의 마음을 믿지 못하고 의심한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대개 선인께서는 그 일이 있은 이후로 본디 그를 음(陰)이며 흑(黑)이라고 여겼으며, 본디 그가 처신을 바르게 하지 못했다고 여겼으며, 본디 그를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 왕래를 끊었으니, 이것이 바로 절교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본디 다시 그를 양(陽)으로 여기고 백(白)으로 여긴 적이 없으며, 본디 다시 그가 처신을 바르게 하지 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본디 다시 더불어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다시 교제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절교라는 것 또한 한 가지로만 말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문하께서 말씀하시는 절교는 여지없이 철저히 끊는 것이고, 선인께서 말한 절교는 오히려 여지를 남겨 두는 것입니다. 여지를 남겨 두었기 때문에 저쪽에서 상을 조문하고 제전과 제문을 보내오는 정을 보였고 이쪽에서도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전을 받은 일은 불초한 제게 실로 그 책임이 있으니, 감히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지금 만약 철저히 끊지 않은 것을 허물로 삼는다면 모르겠지만, 반드시 이것으로 다시 교제한 증거를 삼아 전후의 행동이 달라진 것으로 의심한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명문(銘文)으로 말씀드리자면 당초에 감히 지나치게 미화하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으니, 만약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신명이 저를 죽일 것입니다. 대개 서로 간에 의리가 중한 자는 그 정이 깊습니다. 그러므로 살아서는 자상하게 면려하는 간곡한 말을 하게 되고, 죽으면 애석해하고 가슴 아파하는 사사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니, 이는 겉으로 꾸미고 노력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문하와 교유한 사람들 중에서 성심을 다해 충고하고 잘 이끌어 주는 책임을 다한 사람이 오직 선인뿐이었다는 것은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만약 공명(孔明)이 원직(元直)과 주평(州平)을 잊지 않고 회옹(晦翁)이 경부(敬夫)와 백공(伯恭)을 돌이켜 생각했듯이 한다면 선인에게 영광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문하의 성덕(盛德) 또한 빛을 발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 구절도 이러한 말이 없고 도리어 평소 서로 알지 못하는 자처럼 범연하게 하셨습니다.
처음에 감히 동지(同志)들에게 의논하지 않고 곧바로 다시 헤아려 주시기를 청했던 것은 애당초 그러한 흔적을 없애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떠도는 말이 이미 우리 당(黨)에 파다하게 전해지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송상이 답서에서 선생의 편지 가운데 ‘더불어 말할 수가 없어서 그와의 왕래를 끊었다.’고 한 말과 제전을 받았던 것을 자책한 말을 보고 윤휴와의 관계에 대한 의심이 풀렸다고 하였으나, 간간이 말을 분명하지 않게 한 대목이 많았다. 끝에 가서는 또 청음의 일을 끌어다가 명문을 고치겠다는 뜻을 보였으니, 대개 애매한 태도를 조금 유지하여 지난번 만났을 때의 말을 미봉하고자 함이었다. 상세한 내용은 〈별집〉에 보인다.
○ 현석이 송상에게 편지를 보내어, 묘갈문에 본인은 손도 대지 않으려 하면서 비꼬아 조롱한 뜻이 있다는 것을 낱낱이 말하고, 또
“문하의 글은 한 군데는 ‘덕을 형상(形狀)하는 글을 쓰려 하니 더욱 망연(茫然)하여 어떻게 말을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하고, 한 군데는 ‘이것은 진심으로 좋아하고 성심으로 신복(信服)한 화숙(和叔)의 말인데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바에 아부했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할 때에 가서는 ‘나는 화숙을 태산 교악(泰山喬嶽)처럼 여긴다.’라고 하였습니다. 내리누르고 추어올리고 이랬다저랬다 말을 뒤집는 즈음에 그 설(說)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승복하지 않으니, 말로 해명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50년(1677, 숙종3) 정사
○ 1월에 송상의 편지에 답하였다.
송상이 묘갈문의 개정본을 보내오면서
“우선 화숙이 찌를 붙인 것에 따랐네.”
하고, 또 자신이 현석에게 답한 편지를 적어 보냈다. 그 대략에,
“지적해 준 것이 이와 같으므로 감히 고치지 않을 수 없네. 약한 사람이 본디 강한 사람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은 또한 이치와 형세가 그러하네. ‘태산 교악처럼 여긴다.’라는 말은, 집사(執事)가 이미 써야 할 자리에 썼으므로 나도 그 말을 빌려서 쓴 것이니, 큰 죄가 되는 줄은 모르겠네.”
하였으니, “써야 할 자리에 썼다.”는 것은 행장 가운데 ‘태산 교악’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썼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을 둘러대며 비웃고 조롱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거니와, 이른바 개정본이라는 것도 처음과 끝 부분의 몇 글자만 간략히 고친 것일 뿐이었다. 선생이 답서에서
“편지에서 하신 말씀은 ‘성실해야 한다.’고 하셨던 이전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점이 있습니다.”
라고만 하고 다시는 묘갈명의 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상세한 내용은 〈별집〉에 보인다.
○ 현석의 편지에 답하였다.
이때 송상이 현석에게 보낸 편지에,
라는 말이 있었다. 현석이 이것을 편지로 알리면서
“‘아비와 스승의 경중[父師輕重]’이라는 것은, 실로 그 도가 본디 달라서 드러내 놓고 서로 공격하여 양립하기 어려운 형세일 경우 마땅히 거취(去取)를 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평소의 정의에는 어그러짐이 없고 단지 후사(後事) 한 가지에서 틀어진 것일 뿐입니다. 동학사에서 주고받은 말을 거론하고 ‘태산과 같다.’는 구절을 쓴 것은 모두 모순되고 위태로우니, 자제와 문생들의 마음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이 말을 들은 원근의 사우들도 반드시 타당하다고 여기며 의문을 품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가(自家)의 말뜻이 조금 빗나간 것일 뿐이니, 이 때문에 끝내 존형(尊兄)이 의귀(依歸)하고 존경하는 정성을 실추하여 스스로 평소와 다른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였다. 선생이 답서를 보냈는데, 그 대략에,
“‘송나라의 제현’ 운운한 것은 당초의 말은 본래 이렇지 않았습니다. 연전에 내게 답한 편지에 비로소 이 말을 썼으니, 처음에 반드시 이것을 큰 잘못으로 삼으려 했던 때와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태산 교악[山岳]’이라는 말은, 함장(函丈)의 뜻이 본래 화평하고 공정한 데서 나왔다면 문자를 경중에 맞게 고치는 것에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만약 그 말이 맹자(孟子)와 주자(朱子)에게 사용한 말이므로 가볍게 써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고치게 한 것이라면, 비록 나에게 직접 말하더라도 혐의할 바가 없습니다. 지금은 속으로는 불평을 품고서도 겉으로는 드러내어 말하지 않고 은어로써 조롱하기를 이렇게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기상이란 말입니까. 문자에 관한 일이 있은 이후로 함장이 언어로써 속내를 보인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으니, 이는 아마도 본원(本源)이 공평무사함을 얻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 말뜻의 작은 차이에 그치는 것이 아닐 듯합니다.”
하였다.
○ 또 편지에 이르기를,
“‘아비와 스승의 경중’ 운운한 것은 일개 후사로 인해서 문득 경중을 나눈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사생(師生)의 사이에 정의가 결여된 탓으로 말을 감히 다하지 못하고 의심나는 것을 감히 묻지 못하여 정성을 미처 쏟기도 전에 의심과 비방이 먼저 모여드니, 비록 옛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했다 하더라도 물러나 엎드려서 스스로의 소신을 지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어서 생각건대, 선인의 학문은 실질[實]을 위주로 하였기에 내면에 힘을 써서 자신의 덕을 닦았고, 사문(師門)의 학문은 이름[名]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남들의 평가에 무게를 두어 겉으로 드러난 명성을 추구하였으니, 이는 들어간 곳이 본디 이미 달랐던 것입니다. 사문은 주장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스스로 허심탄회하게 남의 장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을 너무 높게 내세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의심스러운 점을 들어 논란하지를 못합니다. 또 굳세고 준절(峻截)한 쪽으로만 치우쳐서 남을 맹렬히 꾸짖는 것을 굳세다고 여기고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을 굳세다고 여기니, 항상 못을 기울이고 바다를 뒤집을 듯한 의사는 있지만 봄기운이 만물을 길러 주는 듯한 기상은 없고, 단지 남을 공격하고 남을 이기려는 화두(話頭)만 들리지 널리 사랑하고 선을 이루어 주는 진실과 성실함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그 학문의 치우침이며 기질의 병통이니, 그 장점으로 인하여 도리어 병통이 만들어져서 득실(得失)의 결과가 이러한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나는 진실로 이와 같다는 것을 알지만, 이미 의심을 받은 몸이므로 거듭 죄를 얻게 될까 두려워서 이렇듯 간절한 마음을 품고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영원히 사생의 의리를 저버린 자가 된 것입니다.”
하였다.
○ 또 편지에 이르기를,
“현도(顯道)가 형의 말씀을 전하였는데, 선인에게 구차하게 영합하려는 뜻이 있었다고 의심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선인은 함장(函丈)에 대해서 정의(情義)가 실로 얕지 않았습니다. 무술년(1658, 효종9)ㆍ기해년(1659) 이후로 점차 의견과 언어가 합치하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간혹 ‘자주 충고하면 서로 멀어지게 된다.’고 주의를 주는 사람이 있었으나, 선인께서는 ‘사림(士林)은 한집안이나 마찬가지이니, 비록 출처는 같지 않지만 끝내는 함께 죄를 입고 똑같이 평가될 것이다.’라고 하며 반드시 잘못이 없는 데로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 우옹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주장이 너무 지나친 데에 이유가 있고 말투가 과격한 것은 또 단지 기질의 병통일 뿐이라고 여기시어, 일절 용납하고 따지지 않으며 오직 본원에만 마음을 쓰셨습니다. 또 논의가 분열되어 혹 문호(門戶)가 각립(各立)하는 근심거리가 생겨 후학에게 폐단을 끼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규각(圭角)을 모조리 버리고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간혹 너무 자신을 굽혀서 그를 따라 주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지만, 선인의 마음은 구차하게 한때의 통쾌함을 취하려 들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아! 함장께서는 스스로 주장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덕이 끝내 외로워져서 학문의 힘이 마침내 기질의 작용을 이기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문호가 갈기갈기 분열된 것은 논할 필요도 없이, 같은 방에서 창을 서로 겨누고 집안사람끼리 유언비어를 서로 퍼뜨려, 4, 5십 년간 형제와 다름없이 지내며 나란히 학문을 연마했던 사이를 하루아침에 도요새와 조개가 서로 버티고 아주 사소한 일을 놓고 죽자고 다투는 싸움터로 변하게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만사가 다 허사가 되어 뭇사람의 비웃음을 받게 되었으니, 하늘이 실로 한 일인데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지난번에 ‘문을 닫아건 채 사람들의 얼굴을 대하지 않고 죽겠다.’라고 말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모두 〈별집〉에 보인다.
○ 8월에 교산에 성묘하였다.
○ 11월에 조카 윤가교(尹可敎)를 곡하였다.
가교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질이 순수하였으며, 자라서는 배우기를 좋아하고 행하는 데 힘써 학문에 나아가고 덕을 연마하기를 마지않았다. 선생이 집안에 전해 온 가학(家學)을 맡기고자 하여 크게 기대하고 중히 여겼는데, 불행히 요절하였으므로 선생이 깊이 애통해하였다. 제문이 있다.

51년(1678, 숙종4) 무오
○ 여름에 《가례원류(家禮源流)》와 《계갑록(癸甲錄)》을 교정하였다.
《계갑록》도 노선생(老先生)이 엮은 책으로, 동서(東西) 당화(黨禍)의 원인과 곡절을 기록한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두 책을 윤색, 교정하고 정사(淨寫)하였다.
○ 7월에 맏며느리 박씨(朴氏)를 교산에 장사 지냈다.
선생이 교산에 장지를 마련하여 장사 지낸 후에 그대로 머물러 절사(節祀)를 행하고, 광진(廣津)에 있는 현석을 방문한 후에 돌아왔다.
○ 9월에 공주(公州)의 청림(靑林)으로 이사하였다.
○ 송상의 편지에 답하고, 묘갈명을 세 번째로 보냈다.
묘갈명에 대한 일을 정사년(1677, 숙종3)에 서신을 주고받은 이후로 선생이 덮어 두고 다시 논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와서 송상이 갑자기 고치겠다는 뜻을 사람을 통해서 여러 번 보이고, 또 현석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문자는 득실(得失)에 맞게 하는 것이 도리이니, 만약 저쪽에서 다시 의견을 개진한다면 나로서는 본래 고집할 뜻이 없네.”
라는 말이 있었다. 현석이 이 편지를 받고서 또한 좋은 뜻으로 오인하여 편지로 알리고, 또 말하기를,
“사람들과 더불어 이 일을 말할 때도 그 이 대부분 이러하다고 하니, 우리가 개정본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만 보고서 조용히 다시 여쭙는 도리를 다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고는 다시 보내기를 권하였다. 선생이 어쩔 수 없이 편지로 거듭 송상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또 선인의 묘갈명을 보내겠다는 뜻을 언급하였다. 송상이 답서에서 또 청음(淸陰)의 말을 인용하고,
“지금 선명(先銘)의 초본(草本)을 가져다가 다시 상량하고 정정하여 고쳐 쓸 온당한 글자와 온당한 단어를 분명히 말해 준다면 또한 감히 초본을 고집하지 않겠네.”
하였다. 선생은 그가 청음의 말을 인용한 것이 지금 세 번이나 되었지만 달리 개정한 실질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고, 혹 아무 보탬도 없이 뜻밖의 사태만 만들지 않을까 염려하여 보내지 못하였다. 그러다 광진(廣津)에서 만났을 때 현석이 또 권하면서,
“우리들 쪽에서 먼저 어른과의 관계를 끊어서는 안 되네. 더구나 ‘감히 초본을 고집할 뜻이 없다.’는 말이 간곡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이를 계기로 반복하여 말씀드릴 만하네.”
라고 하므로, 선생이 마음을 바꾸지 않을 수 없어서 마침내 함께 상의하여 찌를 붙인 뒤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듬해 여름에 비로소 답서를 보내왔는데,
“선명을 삼가 자네의 뜻대로 고쳤네.”
하였으나, 또 달리 고친 부분이 없었으므로 서신 왕래를 마침내 그만두었다. 상세한 내용은 〈별집〉에 보인다.
○ 10월에 분암(墳庵)에서 종회(宗會)를 열었다.
바로 종약(宗約)에 규정한 봄가을의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서 선생이 말하기를,
“후손들이 날로 소원해지니 진실로 점차 길거리의 사람처럼 멀어지게 될까 두렵다. 만약 이름자를 가지고 묶어 둔다면 비록 위로는 조천(祖遷)하고 아래로는 종역(宗易)하더라도 소목(昭穆)의 계통을 잃지 않을 것이니, 모두 이산(尼山)에서 나온 줄을 알아서 어른을 높이고 친척을 친하게 여기는 마음이 뭉클 솟아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오행(五行)의 상생(相生)의 차례에 따라 10자(字)를 정하여 이름을 짓도록 하였다. 그러고는 글을 지어 책으로 드러냈다.
○ 12월에 청림사(靑林寺)에서 제생들을 만났다.
청림사는 거처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선생이 절 안으로 강석(講席)을 옮겼다. 감회를 읊은 절구 3수가 있다.

52년(1679, 숙종5) 기미
○ 1월에 부여(扶餘)에서 박태한(朴泰漢) - 교백(喬伯) - 의 관례(冠禮)를 주관하였다.
교백은 구당(久堂) 장원(長遠)의 손자로서 뛰어난 자질과 아름다운 뜻이 있었다. 관례를 치를 때가 되자 스스로 말하기를,
“반드시 명재(明齋)를 빈(賓)으로 모셔야만 관례를 치를 것이다.”
하였다. 계빈(戒賓)하기에 이르러 선생이 처음에는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그의 뜻을 듣고는 감탄하여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나아가서 관을 씌워 주고 자(字)를 지어 주었으며, 또 글을 지어 권면하였다. 뒤에 또 편지를 보내어 장려하기를 매우 지극히 하였다.
○ 2월에 홍주(洪州)의 용계(龍溪)로 이사하였다.
이때 선생이 청림에 우거(寓居)하고 있었으나 정착할 곳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문인 한배하(韓配夏), 이번(李燔) 등이, 가까운 곳에 있는 용계는 산수의 정취가 자못 넉넉하고 또 예전에 서고청(徐孤靑 서기(徐起))이 살았던 곳이라고 하여 그리로 옮겨 가서 살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그리로 이사한 것이다.
○ 경승재(敬勝齋) 재규(齋規)를 만들어 제생들에게 보였다.
이때 배우는 자들이 많이 모여서 함께 서실을 세워 학업을 연마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선생이 이곳을 경승재라고 명명하였다. 〈백록동규(白鹿洞規)〉 및 주자의 십훈(十訓), 퇴계의 육조(六條), 율곡의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 〈우계서실의(牛溪書室儀)〉를 써서 벽에 걸고 설(說)을 지었다. 또 재규 5, 6조를 만들어 가르치고 이끌었다.
○ 선생은 평소 겸양하여 사도(師道)로써 자처하지 않았고, 와서 가르침을 청하는 자는 모두 붕우로 대하였다. 갑자년(1684, 숙종10) 이후로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강의를 중지하였는데, 간혹 정성스러운 뜻으로 청해 옴에 따라 가르치고 일러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부귀한 집안의 자제는 문득 완강하게 거절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싶지 않다.”
하였다.
○ 9월에 박태보(朴泰輔)의 편지에 답하였다. 《역의(易義)》와 언결(諺訣)에 대해 논하였다.
이때 박공이 《역의》 4책을 짓고 또 언결의 잘못된 부분을 정정(訂定)하였다. 그러고는 편지로 강론하고 질정하였는데, 선생이 정밀하고 상세한 점을 극도로 칭찬하고 조목조목 답하여 보냈다. 내용은 《유고》에 보인다.

53년(1680, 숙종6) 경신
○ 1월에 현석(玄石)의 편지에 답하였다. 《심학지결(心學旨訣)》에 대해 논하였다.
현석이 경전(經傳) 및 선유(先儒)의 경(敬)에 대한 설(說)을 뽑아 모아서 그 조목을 나누고 《심학지결》이라 이름하였다. 편지로 감수를 부탁하였므로 선생이 그를 위해서 조목조목 분석하였다. 편지에 이르기를,
“이것은 바로 남헌(南軒)이 인(仁)에 대한 말들을 유별(類別)로 모았던 뜻입니다. 강(綱)과 목(目)이 잘 정돈되었으니, 단지 침잠하여 연구하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용은 《유고》에 보인다.
○ 4월에 추포(秋浦) 황공(黃公)의 연보를 편차(編次)하였다.
황공은 이름이 신(愼)으로, 우계(牛溪) 선생의 고제(高弟)이다. 선생이 그를 위해 연보를 편정(編訂)하고, 또 후지(後識)를 지었다.
○ 5월에 집의를 제수하고 별유(別諭)로 징소(徵召)하였다. 6월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조정 분위기가 일신(一新)되었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선생을 천거하기를,
“본래 가학(家學)을 전수받은 데다 성실한 마음으로 실천하여 크게 사론(士論)의 추앙을 받고 있으니, 더욱 적극적으로 불러들여 경연에 출입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이 직책을 제수하고 또 별유로 불렀다. 선생이 상소하여 사정을 아뢰고 사양하였는데, 비답에 이르기를,
“학문의 고명(高明)함에 대해서 들은 지 오래이다. 사양하지 말고 조속히 올라오라.”
하였다.
○ 7월에 정장(呈狀)하여 체차되었다.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을 제수하였다.
단망(單望)으로 재가받았다. 정장하여 사직하였다.
○ 또 별유(別諭) 로 징소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다음 달에 또 정장하여 사직하였다.
○ 10월 신해(26일)에 인경왕비(仁敬王妃)가 승하하였다. 현조(縣朝)에 들어가서 곡림(哭臨)하고 성복(成服)하였다.
○ 회천(懷川)으로 가서 송상(宋相)을 만났다.
송상이 유배지에서 돌아왔으므로 선생이 가서 뵈었다.
○ 또 집의를 제수하였는데 12월에 정장하여 체차되었다. 또 사업(司業)을 제수하였다.
○ 유봉(酉峯)의 옛집으로 돌아갔다.
이때 농와(農窩)가 유봉에 있었는데 비증(痞症)으로 거의 목숨이 위태로웠으므로 선생이 황급히 달려가서 구완하였다. 그리고는 형제가 노년에 떨어져 지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옛집으로 돌아갔다.
○ 〈국휼중사례사의(國恤中四禮私議)〉를 지었다.
선생이 국휼 중 사가(私家)의 사례(四禮)에 변절(變節)이 많다고 여겨, 마침내 현석과 글을 주고받으며 강론하여 바로잡고, 〈사례사의〉로 이름을 붙였다. 내용은 《유고》에 보인다.

54년(1681, 숙종7) 신유
○ 1월에 별유로 징소하였다. 2월에 두 차례 정장하여 거듭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대신(大臣)이 또 선생을 돈소(敦召)하여 경연 석상에 출입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상이 부른 것이다.
○ 이 뒤로는 사장(辭狀)에 곧바로 성명을 썼다.
○ 4월에 또 별유로 징소하고 집의를 제수하였는데, 두 차례 정장하여 거듭 사직하였다.
○ 5월에 지진의 이변이 있자 별유로 구언(求言)하였다. 상소하여 사양하고 이어 사직하였으나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또 정장하여 체차되었다.
이때 두 차례 지진이 발생하였으므로 상이 전지를 내려 구언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사양의 뜻을 진달하고, 실심(實心)과 실공(實功)으로 하늘에 영원한 명(命)을 비는 방도를 덧붙여 진달하였다. 상소는 《유고》에 보인다.
○ 6월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인경왕후 상에 연제(練祭)와 담제(禫祭)가 있어야 하는지 없어야 하는지를 물었는데,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후로 수의(收議)가 있을 때마다 선생은 유신(儒臣)이라는 이름을 감당할 수 없어서 모두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간혹 성상의 곡진한 하문이 있거나 정성을 억제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완곡하게 뜻을 드러냈다.
○ 송상에게 보내려고 편지를 썼다.
이에 앞서 송상이 세도(世道)를 자임(自任)하였으나 자신의 처신과 일 처리는 사사로운 뜻에서 나올 때가 많았다. 노선생이 평소 매번 기질의 병통으로 여겨 누차 편지로 충고하였으니, 기유년(1669, 현종10)의 편지가 바로 그중의 하나이다. 갑인년(1674) 이후로 선생이 비로소 본원(本源)에 대한 의심을 품었고, 또 초려(草廬)의 예설(禮說)을 통해서 더욱 깊이 간파하였다. 그래서 지난날 기질(氣質)의 문제로 평가했던 것을 모두 심술(心術)의 병통으로 귀결시켜 한번 충언(忠言)을 올리고자 하는 생각을 가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곤액(困厄)을 당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헐뜯고 해치는 말의 빌미가 될까 염려하여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경신년(1680, 숙종6)에 다시 조정에 들어가게 되어서는 또다시 명의(名義)를 뒤엎고 사류들을 억눌러 평생에 걸쳐 수립한 공업(功業)과 명망을 모두 잃게 되었으므로 선생이 더욱 근심하였다. 이에
“두 대에 걸쳐 사우(師友) 관계를 맺은 사람으로서 의리상 끝내 침묵할 수 없다.”
하고 마침내 편지를 썼다. 그 대략에,
“제가 외람되게 오랫동안 문하에 출입하였기에 내면에 간직하신 성품과 밖으로 드러난 행위를 삼가 엿볼 수 있었는데, 어쩌면 주 부자(朱夫子)가 경계한 ‘왕도와 패술을 함께 행하고 의리와 사리를 아울러 쓴다.[王覇竝用義利雙行]’는 설(說)을 면하지 못할 듯합니다. 근년 이래로 마음속의 의심이 날로 더욱 커지기에 감히 한 번 생각을 다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른바 ‘왕도와 패술을 함께 행하고 의리와 사리를 아울러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하께서는 도학(道學)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회옹(晦翁 주희(朱熹))을 종주로 삼고 사업은 오로지 대의(大義)에 뜻을 두었습니다. 처음에는 본디 순수하게 모두 천리(天理)로써 스스로 기약하려 하였으니, 어찌 패술과 사리를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회옹의 도로써 자임하고 대의라는 이름을 스스로 세우려는 과정에서 주장이 너무 지나치게 되었기 때문에 허심탄회하게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또 스스로를 너무 높이려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점을 말씀드리고 논란을 제기하지 못합니다. 이에 떠받들며 동조하는 자는 친하게 대하고, 가부(可否)를 따져 의견을 개진하는 자는 소원하게 대하며, 잘못을 바로잡거나 뜻을 거스르는 자는 후환이 미치고, 고분고분 순종하는 자는 재앙이 없으니, 이것이 큰 명성이 세상을 압도하는데도 내면의 실덕(實德)은 병든 이유입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처신에서 드러난 문제점입니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퇴도(退陶)의 학문은 한결같이 회옹을 본보기로 삼았지만 강의 준절(剛毅峻截)한 점은 끝내 부족했던 듯하다.’ 하셨으니, 대개 이 점을 퇴도의 병통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처신은 또 강의 준절 쪽으로만 치우쳤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십니다. 자신을 이기는 데 용감한 것이 강(剛)인데 지금은 남을 맹렬하게 꾸짖는 것을 강으로 여기고, 이성[理]이 욕망[慾]을 이기는 것이 강인데 지금은 힘으로 남을 굴복시키는 것을 강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수작(酬酌)하는 사이에 드러난 모습을 보면, 사욕을 이기고 몸소 행하는 등 실제 힘을 쏟아야 할 곳에는 거의 미치지 못하고, 조롱과 질책으로 사람을 누르고 추어올리며 주고 빼앗으려는 의도가 말과 글로 표출되는 것이 통절하고도 심각하여, 남을 공격하고 남을 이기려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를 않습니다. 심지어는 한 마디 말의 동이(同異)와 한 가지 일의 어긋남을 자로 재어서 취사(取捨)하느라 이리저리 나누고 쪼개어 평생토록 맺어 온 정의(情義)조차 내팽개치듯이 버리니, 이것은 또 은혜가 적었던 신불해(申不害)ㆍ한비(韓非)와 유사합니다. 이것은 사람을 접하는 데서 드러난 문제점입니다.
오직 이와 같기 때문에 문하에 노니는 자들이 모두 눈치를 살펴 부회(附會)하는 것을 어진 이 높이는 일로 여기고, 남의 잘못을 샅샅이 들추어내고 각박하고 편협하게 행동하는 것을 악을 미워하는 일로 여기니, 수준이 높은 자는 명예를 사모하고 수준이 낮은 자는 그 이익을 탐하여 한결같이 담론(談論)만을 배울 뿐 성정(性情)과 심신(心身), 날로 쓰는 이륜(彝倫)은 전혀 염두에 없습니다.
주현(州縣)의 궤급(饋給)과 문안이 과도하고 사림의 떠받듦이 지나친 것에 이르면, 사람들이 그 위엄을 두려워하되 그 덕에 감복하지는 않으니, 완연히 하나의 부귀한 문정(門庭)을 이루어 더 이상 선비 집안의 기상이 없습니다. 마침내는 평생의 친구들 중에 끝까지 정의(情誼)를 유지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 6, 7십 년간 형제처럼 함께 강학(講學)하였던 곳을 하루아침에 도요새와 조개가 서로 버티고 아주 사소한 일을 놓고 죽자고 다투는 싸움터로 변하게 함으로써 장차 후세의 비웃음을 면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또 한집안에서 형제끼리 싸우는 변고와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조짐이 들어맞는 데서 드러난 문제점입니다.
문장과 언론에 이르면 회옹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 회옹의 말이 없이는 그 설을 믿을 수 없는 듯이 여깁니다. 그러나 차분히 그 실질을 고찰해 보면 간혹 명목은 맞아도 그 뜻은 꼭 서로 비슷하지는 않은 것이 있고, 간혹 먼저 자신의 뜻을 세워 놓고 회옹의 말을 끌어대어 무게를 더하고자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겉으로는 거역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승복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문장으로 드러난 것이 이와 같습니다.
평생에 걸쳐 수립한 업적이 실로 대의를 창도(唱導)하여 밝힌 것에 있으나, 이른바 대의라는 것은 언어만으로 갖추어지고 승낙만으로 기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본디 사람의 마음을 각성시키고 보고 듣는 사람들을 용동(聳動)시키는 효과가 있었지만, 조금 지나면서부터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안으로 나라를 굳건히 다스리고 밖으로 힘을 키우며, 백성을 안정시키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여 복수하기를 도모한다.’는 것이 탁월하게 볼만한 내실은 없고,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많은 녹봉과 높은 지위, 사방에 가득한 명성뿐이니, 일로 드러나는 것이 또 이와 같습니다.
이처럼 밖으로 드러난 것을 가지고 헤아려 본다면 한두 가지 내면의 문제점 또한 엿보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그것을 말씀드린다면 하나는 기질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학문을 성실하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기질을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하는 것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율곡 선생이 말씀하기를, ‘기질을 바로잡는 법은 사욕을 이기는 데 있으니, 사욕을 이기지 못한다면 기질을 바로잡지 못한다.’ 하였고, 주자는 ‘사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성질의 편벽됨이 첫 번째이고,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욕망이 두 번째이고, 피아(彼我)를 구분하여 남을 미워하고 이기려는 사심(私心)이 세 번째이다.’ 하였습니다. 또 율곡은 ‘이기기 어려운 사욕은 오직 분노와 욕망이다.’ 하였고, 사씨(謝氏)는 ‘굳셈[剛]과 욕망은 정반대이다. 물욕(物慾)을 이기는 것을 굳세다고 하니, 물욕을 이기므로 항상 만물의 위에서 펴지게 되고, 물욕에 가리는 것을 욕망이라고 하니, 물욕에 가리므로 항상 만물의 아래에 굽히게 된다.’ 하였습니다. 분노하고 남을 미워하여 이기려는 마음은 굳센 듯이 보이지만 굳센 것이 아니니, 다름이 아니라 모두 인욕(人慾)이기 때문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하의 기질은 강덕(剛德)은 많지만 그 쓰임이 천리(天理)에 순수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이 덕의 병통이 되니, 참으로 이른바 ‘사욕의 이기기 어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사욕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 병통을 바로잡아 그 덕을 온전히 하지 못하니, 그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모두 이 병통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학문이 성실하지 못하다고 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자(孔子)가 ‘충신에 주안점을 둔다.[主忠信]’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는 해석하기를, ‘사람이 충신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진실하지 못하여 악을 하기는 쉽고 선을 하기는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충(忠)은 실심(實心)이고 신(信)은 실사(實事)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율곡 선생이 이것을 인용하여 거듭 말하기를, ‘사람에게 실심이 없으면 천리에 어그러지게 된다. 한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면 만사가 모두 거짓되고, 한 마음이 진실하면 만사가 모두 진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가 「성실함은 성인의 근본이다.」라고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기질의 병통이 이와 같은데도 바로잡지 못하니, 실심으로 학문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를 통해 점칠 수 있습니다.
대저 의리는 천리이고 사리는 인욕이며, 천리에 순수한 것은 왕도(王道)이고 인욕이 섞인 것은 패술(覇術)입니다. 내면에 간직한 성품과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아 순수하게 모두 천리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으니, 어찌 왕도와 패술을 함께 행하고 의리와 사리를 아울러 쓴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우리 문하의 총명하고 굳센 자질, 확고하고 치밀한 학문, 평생토록 수립한 우뚝한 공업으로도 하나의 성실함이 확립되지 못하고 하나의 사욕을 이기지 못함으로써 결국은 득실(得失)의 나뉨이 여기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춘추(春秋)》의 대의(大義), 회옹의 법문(法門), 벼슬아치와 선비들의 종장(宗匠)이 모두 문하의 한 몸에 의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차 참으로 천하 후세에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실질이 없게 되었으니, 어찌 너무도 슬프고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진정 문하의 본래 강한 기질과 평생 쌓은 학문으로 하루아침에 분발하여 냄새를 씻어내고 껍질을 벗겨낸다면, 하나의 성실이 확립됨과 동시에 모든 뜻이 다 바르게 되어 내면으로부터 밖으로 표출되고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러서 무엇 하나 천리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현(前賢)의 통서(統緖)를 이어 후세에 가르침을 남겨 처음에 스스로 기약하였던 뜻을 이루는 일이 진정 문지도리를 한 번 돌리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하고, 끝에 또 선공(宣公)과 퇴도(退陶)의 논의를 인용해서 거듭 경계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별집〉에 보인다.
○ 선생의 이 편지는 그 대의(大意)가 노선생이 기유년(1669, 현종10) 편지에서 충고하고 경계한 뜻을 거듭한 것으로서 원인을 기질의 병통으로 보느냐 본원적인 문제로 보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얼굴을 대 놓고 극간해도 안 되지만 그 잘못을 숨겨서도 안 된다.[無犯無隱]”는 의리를 일찍부터 강구하고 평소에 행하였으나, 송상이 선(善)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점점 더 낭패하였기 때문에 한 번 통절히 말해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써 척연히 느껴 깨닫고 두려워하며 뉘우쳐 고치게 하려 하였으니, 이것은 세도(世道)를 위하고 국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선친의 뜻을 매듭짓고 자신의 의리를 다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편지를 쓰고 나서는 또 서로의 정리가 소원해진 상황에서 혹 보탬은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망설이며 보내지 않았다. 이듬해 감로사(甘露寺)에서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을 만나 상의하기를,
하니, 현석이 왕촉(王蠋)이 물러가 농사지은 뜻을 끌어대며 만류하기를,
“편지의 뜻은 실로 좋지만 이 어른이 이미 말을 받아들일 도량이 없고 근래 양쪽의 분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만약 이 편지를 보낸다면 바로잡는 유익함은 기필할 수 없고 장차 분열만 더욱 초래할 것이네. 또 형은 세상에 나가지 않아 규방에 들어앉은 처자나 다름이 없는데, 만약 이로 인해서 세도에 누를 끼친다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네.”
하였다. 선생이 비록 매우 안타깝고 답답하였으나 세도에 누를 끼친다는 말에 공감하여 마침내 그만두었다.
○ 보내지 않기로 한 뒤에는 그 편지를 깊이 감추어 두고 자손이라 할지라도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 8월에 이씨(李氏) 부인에게 정려(旌閭)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때 연신(筵臣) 이민서(李敏敍)가 이씨 부인의 절행(節行)이 우뚝하게 드러났다는 것을 진달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정려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다. 사유를 갖추어 사당에 고하였다.
○ 별유로 징소하였는데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9월에 또 정장하여 거듭 사양하였다.
별유의 대략에,
《중용》 구경(九經)의 의리는 반드시 어진 이 높이는 것이 근본이 되니, 어진 이를 임용하지 못하면서 그 나라를 잘 다스린 자에 대해서는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다. 유현(儒賢)을 초빙하여 조석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실로 오늘의 급선무인데, 경연에서 교도하고 보좌하는 책임을 그대에게 깊이 바라는 바이다. 모쪼록 목마른 듯이 기다리는 내 뜻을 헤아려서 평생 벼슬길에 나오지 않으려는 뜻을 속히 돌리라.”
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사양하고, 이어 모부인에게 정려를 내린 은혜에 사은하였다.
○ 11월에 또 별유로 징소하였는데 정장하여 사양하였다.
○ 또 집의를 제수하였는데 두 차례 정장하여 거듭 사양하였다.

55년(1682, 숙종8) 임술
○ 1월에 정장하여 사직하고, 별유로 징소하였으므로 상소하여 사양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2월에 또 정장하여 체직되었다.
○ 4월에 교산(交山)에 성묘하였다.
단오를 지낸 뒤에 방향을 돌려 우계(牛溪)로 갔다. 이때 우계, 율곡 두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였으므로 인하여 가묘(家廟)에 사제(賜祭)하라는 명이 있었다. 선생이 제사 지내는 날까지 머물렀다가 제사에 참석한 다음 화석정(花石亭)에서 묵고 돌아왔다.
○ 뒤에 서공 봉령(徐公鳳翎)에게 보낸 편지에,
“지난여름 화석정에서 하룻밤을 묵고 돌아왔습니다. 임진(臨津) 관로(官路)를 내려다보며 지난날 조사(詔使) 황공(黃公)과 왕공(王公)을 성대하게 빈접(儐接)하던 때를 상상하였는데, 한(漢)나라 관원의 위의를 다시 볼 길이 없어 큰길에서 눈물 흘리는 비통한 감회를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화석정의 중건이 마침 우계서실의 중건과 동시에 이루어져서 두 선생이 왕래한 발자취가 깃든 울창한 숲 속 오솔길은 완연하기가 그날과 같은데, 그분들의 학문과 도는 한 가닥 실처럼 위태롭게 명맥만 유지되고 있으니,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저녁 내내 감회에 젖어서 탄식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 5월에 송도(松都) 감로사(甘露寺)에서 현석을 만났다.
이때 성묘 길에 현석과 약속을 하고 만나 3일 동안 강론하고 파하였다.
조공 득중(趙公得重)에게 보낸 편지에,
“지난번에 화숙과 만나 3일 동안 편안히 토론하였는데, 의견을 하나하나 맞추어 본 결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드물었으므로 돌아올 때는 소득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하였다.
○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제수하였다.
이때 대신(大臣)이 연석에서 선생의 덕과 학문에 대해서 아뢰고 더욱 장려하여 발탁하기를 청하였다.
○ 또 집의를 제수하였는데 정장하여 체직되었다. 다시 사업(司業)을 제수하였다.
○ 7월에 재이(災異)로 인하여 별유로 징소하고, 또 집의를 제수하였다. 8월에 상소하여 사양하고, 겸하여 경계하는 말을 덧붙여 아뢰었다.
별유의 대략에,
“그대가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고결한 지조를 간직하겠다는 뜻을 고수하니, 나의 서운함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더구나 이렇게 허물을 꾸짖는 여러 가지 징조가 출현하여 근심거리가 곳곳에 넘치는 때에 큰 덕과 중후한 명망으로 사림의 본보기 역할을 하는 그대가 아니라면 누가 경연에 출입하며 과덕(寡德)하고 우매(愚昧)한 나를 인도하고 보필하겠는가. 속히 올라와서 어려운 시국을 해결하라.”
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사양하고, 성학(聖學)에 정진하여 뜻을 확립하고 마음을 정성스럽게 하여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도를 덧붙여 진달하였다. 비답의 대략에,
“상소 말미에 진계(陳戒)한 것은 걱정하고 사랑하는 뜻이 말속에 넘치니,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어찌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소는 《유고》에 보인다.
○ 선생은 지성으로 시국을 안타까워하고 나라를 걱정하여, 매번 저보(邸報)에 수재(水災)나 한재(旱災), 재이(災異)의 변고가 있는 것을 볼 때면 한없이 우려하고 탄식하였다. 일찍이 ‘뜻을 세워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고 정성을 보존해야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후로 긴요한 뜻을 덧붙여 진달할 때에는 항상 여기에 정성을 다하였다.
○ 특지(特旨)를 내려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 참의로 승진시켰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이때 상이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도모하고 예(禮)를 다해 산림(山林)을 맞이하였는데, 선생에 대한 은총이 점점 융숭해져서 품계를 건너뛰어 승진시키고 돈소(敦召)하였다. 선생이 처음에 상소하여 간곡히 사양하고, 9월에 두 번째로 정장하였으며, 10월에 세 번째로 정장하여 거듭 사직하였는데,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 11월에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체차를 허락하고, 거듭 징소하는 교지를 내렸다.
이때 현석이 조정에 들어가서 선생을 초치하여 나랏일을 함께 도모하기를 청하였고, 부제학 조지겸(趙持謙)도 반드시 초치해야 한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상이 이에 체직을 허락하고, 이어 교지를 내려 체직을 허락한다는 뜻과 돈소하는 명으로 유시하였다.
○ 《대학언해(大學諺解)》를 개정(改訂)하였다.
율곡 선생이 일찍이 사서 언해(四書諺解)를 개정하였으나 《대학언해》는 미처 하지 못했는데, 현석이 누차 선생이 빠트린 《대학언해》를 채워서 후학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할 것을 부탁하였다. 선생이 분수에 벗어난다고 혐의하여 즉시 시작하지 않았다가, 이때에 이르러 한 본(本)을 초벌로 정한 뒤 현석과 함께 토론하며 정정하였다.
○ 현석의 편지에 답하였다.
신유년(1681, 숙종7) 이후로 송상의 거조(擧措)가 더욱 사람들을 실망시키자 선생이 편지를 써 놓고도 결국 보내지 않았으나, 개탄하며 평소 사우(師友)로서의 의리를 생각하고는 바로잡아 줄 길이 없는 것을 마음 아파하며 줄곧 답답하게 여겼다. 하루는 처조카 권생 이정(權生以鋌)이 찾아왔는데 그는 바로 송상의 외손이다. 선생에게 말하기를,
“제 외조부의 만절(晩節)이 점점 더 수습하기 어려워지는데 왜 한 마디 바로잡아 주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하므로, 선생이 마침내 편지를 쓰고도 보내지 않은 뜻을 말하고, 대략 대지(大旨)를 언급하여 조용히 잘 말씀드리게 하였다. 송상이 듣고서 성내는 말을 하니, 이로 인하여 양쪽 사이에 분분한 말들이 크게 퍼졌다. 현석과 명촌(明村)이 모두 들은 말을 편지로 써 보내면서 그 곡절을 묻고, 또 말하기를,
“반드시 해명하고 사과하는 조처가 있어야 후환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선생이 답서를 보냈는데, 그 대략에,
“정월 보름 무렵 권생(權生)이 찾아왔는데, 그 당시 새로 목천(木川)의 일이 터진 때였으므로 내가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또 ‘왕도(王道)와 패술(覇術)을 함께 행하고 의리(義理)와 사리(私利)를 아울러 쓰는 것은 《대학》의 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학문과 같지 않으니, 동춘(同春)이 이른 바 「모두가 기관이다.[都是機關]」는 말초려(草廬)가 이른 바 「오로지 권모술수만 쓴다.[專用權數]」는 말이 아마도 함장(函丈)의 실제 병통일 듯하네. 내가 한번 의심나는 바를 질정하고자 한 지 오래지만, 정의(情義)가 이미 막혀 감히 말하지 못하므로 항상 답답한 심정이었네. 지금은 이 목천의 일로 또 거듭 죄를 얻었으니, 앞으로 끝내 말씀드리지 못할 듯하네.’ 하였으니, 권생이 함장에게 말씀드린 것이 바로 이 말입니다. 그런데 함장이 갑자기 ‘만약 그 선인의 일로 나를 끊는다면 모르겠지만 초려의 말을 믿고 나를 공격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으니, 대개 함장의 말씀에 대답하지 못하고 의문점을 질정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끊었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른바 ‘서로의 관계를 끊었다.’는 말과 ‘초려와 뜻을 맞추었다.’는 말은 아마도 이로 인하여 나왔을 듯합니다.
‘묘갈명에 미화하는 말을 잔뜩 쓰지 않았기 때문에 감정을 품은 것이다.’라는 말은 함장이 당초에 하신 말씀인데, 내게 이런 마음이 없었던 것은 고명(高明)도 알 것입니다. 보내 준 편지에서 ‘편지를 써서 사죄해야 한다.’라고 한 말에 대해서는 나는 의혹을 떨칠 수 없습니다.
함장이 선인을 폄하하려 한 것이 묘갈명 이후로 실로 한 가지 일, 한 마디 말만이 아니다가 목천의 일에 이르러서 극에 달하였으니, 자식 된 마음에 어찌 예전처럼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정리(情理)가 전과는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함장에게 실로 본원과 언행에 대한 의심을 떨치지 못한 것이 지난번에 논했던 바와 같은데도 감히 질정하지 못하니, 옛사람이 말한 ‘사생(師生)’ 사이의 의리는 실로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의리도 전과는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과 의리가 모두 전과 같지 못하지만 스스로 잘못된 점을 알지 못하겠으니, 비록 사죄하고자 한들 어떻게 말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만약 심상하게 안부를 여쭙는 예라면 비록 전처럼 자주는 아니더라도 본디 감히 폐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를 이해해 주느냐, 나를 탓할 것이냐 하는 것이 단지 여기에 달렸습니다.”
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별집〉에 보인다.
○ 처음에 송상이 유배지에서 돌아왔을 때 이상(李翔)에게 말하기를,
“갑인년(1674, 현종15)에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을 서원에 제향할 때에 목천 사람이 ‘강도부노불합향사(江都俘奴不合享祀)’라는 여덟 글자를 여러 고을에 보내는 통문(通文)에다 썼다고 하네.”
하였다. 이상이 돌아와서 목천의 유생에게 묻자 목천 유생들이 크게 놀라 노강서원(魯岡書院)에 통문을 보내어 당시의 통문을 꺼내 조사하였는데, 본래 그렇게 쓴 곳이 없었다. 이는 대개 송상이 공연히 날조해 내어 사사로운 원한을 갚고자 함이었다. 상세한 내용은 갑자년(1684, 숙종10)의 편지 및 〈후록〉에 실린 이세덕(李世德)의 상소에 보인다.
○ 〈초학획일도(初學畫一圖)〉를 만들어 제생들에게 보였다.
이때 선생이 노강서원의 원재(院齋)로 가서 머물렀는데 학업을 청하는 유생들이 매우 많았다. 선생이 그들의 위해 학규(學規)를 정하되, 숙흥(夙興), 일용(日用), 야매(夜寐)로 총도(總圖)를 삼고, 일용 중에서 또 지신(持身), 독서, 응사(應事), 접물(接物)로 각각 소도(小圖)를 만들고 이를 〈초학획일도〉라고 이름하였다. 이를 제생들에게 보여 주며 이르기를,
“배우는 자들이 아침부터 저녁 사이에 날마다 해야 할 일은 이 네 가지뿐이다. 만약 진정으로 그 이치를 알아서 실천한다면 높게는 성인이나 현인이 될 수 있고, 낮게 잡더라도 몸을 깨끗이 수양하는 길사(吉士)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또 해설을 붙여 힘쓰게 하였다. 그 도식은 규모가 상세하게 갖추어져 있고 공부하는 절차가 절실하고 치밀하여 후세 학자들의 본보기가 된다고 한다.
○ 《율곡선생별집(栗谷先生別集)》을 정정(訂正)하였다.
현석이 편집한 뒤 선생에게 감정(勘正)을 부탁하였다.

56년(1683, 숙종9) 계해
○ 1월에 정장하여 거듭 소명을 사양하였다.
○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별유로 돈소(敦召)하고 함께 오라고 명하였는데, 사양하였다.
이때 상이 반드시 선생을 초치하고자 사관을 보내 별유로 돈소하였다. 그 대략에,
“지금 국가의 형세가 어렵고 근심스러우며 민생이 굶주리고 곤궁한 것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호랑이 꼬리를 밟고 봄철의 얼음 위를 걷는다는 말도 그 위태로움을 비유하기에 부족하다. 더구나 지금은 유신(儒臣)들이 무리 지어 나와서 함께 시국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있는데, 그대 역시 기쁨과 슬픔을 함께해 온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어찌 홀로 근심하고 사랑하는 정성이 없겠는가. 그런데도 고결한 지조를 간직하겠다는 뜻을 고수하여 아득히 마음을 돌릴 기약이 없으니, 실로 평소 그대에게 바란 바가 아니다. 모쪼록 목이 타는 듯이 기다리는 내 뜻을 헤아려서 평생 벼슬길에 나오지 않으려는 마음을 빨리 돌려 조속히 함께 올라오라.”
하였으니, 대개 대신(大臣) 및 숭품(崇品)의 유신이 아닌데도 사관을 보내는 것은 특별한 은수(恩數)였다. 선생이 너무도 황공하고 두려워서 사관을 통해 부주(附奏)하여 간곡히 사양하였는데, 그 대략에,
“천만뜻밖에 또 사관을 내려 보내어 성지(聖旨)를 전유(傳諭)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아, 이 얼마나 특별한 은수이고 이 얼마나 성대한 예절입니까. 신이 초야의 미천한 몸으로 땅속으로 숨지도 못하고 태연히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 외람됨을 이루 다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 이 뒤로 별유나 상소에 대한 비답을 사관이 와서 전할 때면 선생이 직령(直領)에 가죽신[靴]을 신고 뜰아래로 내려가 전후(前後)로 사배(四拜)한 뒤 공경히 성지를 받았다. 왕명(王命)을 받들고 온 신하를 맞이하여 남쪽을 향해서 설치한 자리로 오르게 하고, 북쪽을 향해 몸을 구부린 채 엄숙하게 앉아 숨소리도 내면 안 될 듯이 하면서, 먼저 성후(聖候)를 묻고 다음으로 먼 길을 온 데 대한 노고에 사례하고 다음으로 황공하고 곤궁한 사정을 언급하였는데, 온화한 말씨와 겸손한 용모가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다.
○ 2월에 상소하여 정세를 진달하고 거듭 소명을 사양하였다.
○ 또 사관을 보내어 별유로 돈소하였으나 사양하였다.
별유의 대략에,
“전후로 징소할 때마다 사정의 절박함을 나오기 어려운 첫 번째 이유로 들었는데, 이것은 절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아! 지금이 어떠한 때인가. 국가의 형세가 위태롭고 재이(災異)가 거듭 나타나서 상하가 근심하며 허둥대느라 편안히 먹고 자지도 못한다. 이러한 때에 그대가 세록의 인사로서 한 가지 절개만을 지키며 향촌으로 물러가 누웠으니, 나랏일을 어찌 그리도 줄곧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것인가. 벼슬길에 나오지 않으려는 마음을 빨리 돌리고 조속히 함께 올라오라.”
하였는데, 선생이 부주하여 사양하였다. 그 대략에,
“이렇게 큰 은혜와 특별한 예수(禮數)는 아랫사람이 누구나 차지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윗사람 역시 아무에게나 내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이미 그릇된 조처인데 오히려 두 번씩이나 내려서야 되겠습니까. 근시(近侍)를 보내 함께 오라고 하교하는 일은 하나의 근례(近例)가 되어 버렸습니다. 마땅히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는 선비에게 이 예(例)를 시행하여 속히 나오게 한다면 옳겠지만, 만약 진정으로 무릅쓰고 나오기 어려운 정세가 있거나 질병으로 억지로 하기 어려운 자에게까지 일체 이 전례(典例)를 적용한다면, 끌리고 쫓겨서 달려 나간다고 하더라도 신하들로 하여금 어떻게 스스로 의리를 다하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전교하기를,
“과인의 성신(誠信)이 미덥지 못하여 사양하는 말이 더욱 간절해졌으니, 내가 더불어 일을 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할 말을 다하고 뜻을 다 전했기에 진실로 뭐라고 유시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 〈우계선생연보보유(牛溪先生年譜補遺)〉를 편차하였다.
선생이 우계 선생의 언행(言行) 및 다른 사람의 기록에 섞여 나오는 관련 사항들을 모은 뒤 덕행(德行), 출처(出處), 답문(答問)으로 목(目)을 나누어 총 94조항으로 만들고 〈연보보유〉라고 이름 붙였다. 노선생이 기술한 〈연보후설(年譜後說)〉과 합해서 하나의 권질로 만들어 《우계연보》 뒤에 붙여 간행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하였다.
○ 3월에 또 사관을 보내어 별유로 돈소하였으나 사양하였다. 4월 병자(4일)에 두 번째 사양하였는데, 너그러운 내용의 비답을 내려 거듭 징소하였다.
상이 초치하려는 뜻을 더욱 독실히 하여 또 사관을 보내 별유로 돈소하였다. 그 대략에,
“지금 국가의 형세가 나날이 위태로워지고 하늘이 보이는 경고가 갈수록 다급해지고 있으므로 밤낮없이 근심하고 허둥대느라 편안히 먹고 자지 못한다. 예로부터 재변을 그치게 하는 방도로는, 그 요지가 단지 널리 인재를 구하여 위임하고 의심하지 않는 데 있었다.
이어서 생각건대, 그대는 평생 경전을 연구한 세록의 신하로서 본래 몸을 깨끗이 간직한 채 은거하는 선비가 아니니, 시국을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어찌 남들보다 못하겠는가. 그런데도 누차 징소를 받고도 아직까지 마음을 돌리지 않는 것이 본디 어떤 생각 때문인지는 알지만, 지금의 시세는 결코 작은 절개만을 지키며 줄곧 나랏일을 우습게 여길 때가 아니다. 다시 사관을 보내어 거듭 지극한 뜻을 고하는 바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사관에게 머물러 기다렸다가 반드시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사관이 오랫동안 머물며 돌아가지 않자 선생이 또 부주하여 정세를 진달하고 간곡히 사양하였다. 전교하기를,
“아, 그대의 정세를 내가 어찌 몰라서 줄곧 억지로 다그치기를 몰아대고 협박하듯이 하겠는가. 진실로 지금 국가의 위태로운 형세가 이미 극에 달했기 때문이니, 기쁨과 근심을 함께해야 하는 의리로 볼 때 끝내 한 가지 절개만을 고수함으로써 애타게 기다리는 나의 지극한 뜻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전에 내린 교지의 내용대로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 정축(5일)에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거두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재촉하여 징소하였다. 경자(28일)에 나아가 대죄(待罪)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사관이 한 달 가까이 옆에서 지키고 있고 성상의 유시가 갈수록 더욱 융숭하고 정중해져서 매번 반드시 초치하겠다는 뜻을 거듭 전하며 함께 오라는 명을 거두지 않았다. 선생이 부주하여 세 번 사양하였으나 징소하는 교지가 더욱 간곡해졌으므로 열흘 남짓 석고대죄(席藁待罪)하다가 정세가 곤궁하고 황공하여 어쩔 수 없이 또 부주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미천한 분수를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끝내 성상의 극진한 명을 받들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땅을 파고 들어가 숨을 수도 없고 담장을 넘어 달아날 수도 없으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신의 분의(分義)로 볼 때 또한 어찌 감히 집에서 편안히 지내며 끝내 고집을 부림으로써 성조(聖朝)의 은총과 예우를 오래도록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열흘 이내에 병세가 혹 거동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삼가 몸을 수레에 싣고 올라가서 교외(郊外)에서 대죄하겠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지금 가주서(假注書) 이두악(李斗岳)의 장계(狀啓)를 보니, 전 참의 윤증이 병세가 조금 차도가 보이기를 기다려서 교외로 나오려 한다는 말이 있었다.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어찌 다 비유하겠는가. 올라올 때에 역마를 지급하라고 하유하라.”
하였다. 선생이 마침내 길을 떠났다.
○ 5월 갑진(3일)에 과천(果川)에 도착하였다. 병오(5일)에 상소하여 대죄하였는데, 상소가 미처 올라가기도 전에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선유(宣諭)하고 이어 데리고 오라고 명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또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재촉하여 징소하였다.
과천에 도착하여 명촌(明村)의 집에 머물며 상소하여 대죄하였다. 정원이 근기(近圻)에 도착했다고 아뢰자, 상이 즉시 승지 윤이도(尹以道)를 보내어 하유하기를,
“사관이 돌아온 이후로 조정에 나올 날을 밤낮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정원이 진달한 것을 인해서 비로소 나를 아주 버리지 않고 이미 근기에 도착했음을 알았으니,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다 말하겠는가. 이에 근시를 보내어 목이 타는 듯한 내 뜻을 하유하는 바이니, 빨리 이러한 뜻을 헤아려서 조속히 함께 대궐로 들어와 경연에 출입하며 나의 부족한 점을 보필하라.”
하였다. 선생이 부주하여 사양하기를,
“신이 이번에 올라온 것은 감히 외람되이 은혜로운 징소를 받아들이고자 함이 아니고, 집에서 태연히 지내며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이 신하 된 마음에 너무도 근심스럽고 황송하므로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와서 대죄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죄를 주지 않고 도리어 융숭한 은총과 특별한 예우를 베푸셨습니다. 신이 시종 명을 어기는 것은 감히 명을 받들 수 없기 때문이요, 감히 서울 가까이 이르렀다고 해서 태도를 바꾼 것이 아닙니다.
아! 선비라도 모두 같지는 않고 국가에서 대우하는 방법도 한 가지만이 아닙니다. 정자(程子)의 《역전(易傳)》 이래로 이미 그 단계를 몇 층으로 나누어 설명함으로써 선비 된 자로 하여금 법 삼는 바가 있게 하였고, 윗사람 또한 이를 인하여 선비에게 베푸는 예를 그에 맞게 하였으니, 획일적으로 걸맞지 않은 은수를 가하여 위에서는 거조를 그르치고 아랫사람은 분의를 잃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신은 이미 나가서 군주를 섬길 만한 재주와 학식이 없는데, 밖으로는 위명(威命)에 쫓기고 안으로는 본심을 잃어 중도에 뜻을 꺾고 진퇴(進退)에 근거함이 없어 거듭 사방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면,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성조에 수치와 욕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미천한 신의 분의로는 오직 여기에서 그치고 다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으니, 바라건대 속히 형벌을 내려 주소서.”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비답하기를,
“지극한 내 뜻을 방금 근시가 전유한 비답에 하유하였으니, 어찌 다시 많은 말을 하겠는가. 다른 이야기들은 경연에서 만나 하유할 것이다. 마음을 편히 갖고 대죄하지 말고, 조속히 함께 와서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 정미(6일)에 승지가 또 성유(聖諭)를 전하였는데, 상소를 남겨 두고 그날로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하유하기를,
“아! 그대가 산림에서 덕을 쌓아 온 선비로서 이렇게 어려움이 많은 때에 오랫동안 초야에 숨어 지내며 줄곧 나랏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 과인이 서운하게 생각하고 사림이 실망한 지가 본디 오래이다. 얼마 전 부지런하고 간곡한 별유를 내렸고, 또 시세의 위태로움을 염려하는 정성이 있은 덕분에 척연히 생각을 바꾸어 상경하였으니, 내 마음이 기쁘고 다행스러울 뿐만 아니라 당면한 나랏일 또한 가망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서계(書啓)를 보건대 겸양하는 말이 더욱 간절해졌고, 이어서 또 귀향(歸鄕)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니, 이것은 모두 평소 나의 성신(誠信)이 미덥지 못해서 비롯된 일이다. 그저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라 차라리 입을 다물고만 싶다. 어찌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함께 해결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는가. 이때에 그대를 기다리는 심정은 큰 가뭄에 비를 고대하는 정도만이 아니니, 속히 목이 타는 듯이 기다리는 나의 뜻을 헤아려서 빨리 들어오라.”
하였다. 선생은, ‘이번 걸음은 본래 근시가 집으로 와서 지키고 있어서 분의(分義)가 더할 수 없이 곤궁하기 때문에 이렇게 나아와 대명(待命)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근기에 도착한 뒤에는 또 한없이 큰 은수를 입게 되니 더욱 감당할 수가 없다.’라고 생각하고 즉시 상소를 남겨 두고 물러나 귀향길에 올랐다. 상소의 대략에,
“이번에 신은 감히 소명(召命)을 받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죄하기 위해서 올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조(聖朝)에서 관대하게도 죄를 주지 않으셨으니, 이는 신이 비록 소명을 어기는 죄를 지었지만 자신의 소신을 지키다가 죽겠다는 간절한 뜻이 오히려 불쌍하게 여길 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의 분의는 마땅히 쓸모없는 몸을 거두어서 속히 초라한 시골집으로 돌아가 성상의 은택에 무젖은 채 전야(田野)에서 의리를 다 마쳐야 할 뿐입니다.
근시를 보내 데리고 오도록 하는 예(例)에 대해서는 신이 근일의 상소에서 대략 그 단서를 드러내었지만, 황공하여 다 말씀드리지 못했으므로 지금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호소하고자 합니다. 무릇 윗사람에게는 징소하는 예절이 있지만 아랫사람에게는 진퇴의 의리가 있습니다. 진실로 의리상 나아갈 만하다면 어찌 지키고자 해도 위에서 놔두지 않은 뒤에야 나아가겠습니까. 신처럼 미천한 자는 본디 말할 것이 못 되지만, 만약 절대로 나아가기 어려운 선비에 대해서조차 그 의리의 가부(可否)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얽매어 초치하기만을 급하게 여긴다면, 윗사람은 속박하여 달려오게 하는 혐의가 있고 아랫사람은 끌리고 쫓겨서 허둥대는 근심이 있을 것이니, 예절이 있고 의리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조정 신하들 가운데 국가를 위해서 이 같은 사체(事體)를 애석하게 여겨 혹 한 번 성상께 진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아직까지 그런 말이 들리지 않으니 신은 감히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선비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으니, 세상에 나가느냐 마느냐 하는 두 가지 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미혹한 신의 생각으로는 이미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이상 물러나는 길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 이날 선생을 데리러 갔던 승지가 선생이 상소를 남겨 두고 물러나 돌아갔다고 아뢰자, 전교하기를,
“비록 길을 떠났더라도 승지가 중로(中路)에서 도착한 곳으로 뒤쫓아 가서 다시 전유하고 함께 오도록 하라.”
하였다. 선생이 한천(寒泉) 점사(店舍)에 이르렀을 때 승지가 뒤쫓아 와서 유지(諭旨)를 선포하니, 선생이 부주하여 사양하였다.
○ 무신(7일)에 수원(水原)에 도착하였는데, 사관이 뒤쫓아 와서 남겨 놓고 온 상소에 대한 비답을 전하였으므로 길을 멈추고 대명(待命)하였다.
비답의 대략에,
“상소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경악하고 말았다. 아!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이 귀한 법인데, 나의 정성과 예가 독실하지 못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으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초치한 유신으로 하여금 상소를 남겨 놓고 지레 돌아가게 만들었으니, 어찌 내 마음이 서운하고 부끄러울 뿐이겠는가. 실로 국가와 사림의 불행이기도 하다. 모쪼록 간곡한 뜻을 헤아려서 조속히 올라와, 기다리는 내 마음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이날 선생이 감히 길을 떠나지 못하고 우선 멈추어 대명하였는데, 승지가 또 와서 전유하기를,
“목이 타듯 간절한 내 뜻을 전후의 비답에서 이미 다 유시하였다. 그러나 정성이 미덥지 못하고 예가 미진한 탓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은 매우 바쁘고 조정으로 나올 기약은 아득하니, 말을 다하고 뜻을 다 전했기에 뭐라고 유시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전에 교지에서 말한 대로 떠나려는 마음을 속히 돌리도록 하라.”
하였다. 선생이 어쩔 수 없이 부주하여, 우선 여유를 좀 주어 집으로 돌아가서 조섭한 뒤에 다시 올라와 성상의 처분을 따르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 기유(8일)에 승지가 두 번째 와서 전유하고 거듭 징소하였다.
유시의 대략에,
“지금 장계를 보니, ‘집으로 돌아가 조섭한 뒤에 다시 올라오고자 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나의 실망이 배나 더 커졌다. 이렇게 유신들이 무리 지어 나와 왕실을 돕고 보필하는 때에 나왔다가 곧바로 물러가 고상한 절개를 고집하며 나랏일을 우습게 보는 사람처럼 행동하니, 이것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바로서, 거듭 그대를 위해서 이런 행동을 크게 애석하게 여긴다. 겸양하는 말이 비록 간절하나, 오직 정성과 예를 더욱 다하여 기필코 떠나려는 마음을 돌리고야 말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또 부주하여 간곡히 사양하였다.
○ 경술(9일)에 소명을 거두었으므로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승지가 회계(回啓)한 뒤에 전교하기를,
“전후의 별유가 정녕할 뿐만이 아니었으나, 정성과 예가 독실하지 못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으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단지 스스로 부끄러울 뿐이다. 계속해서 억지로 다그치는 것도 예우하는 도리가 아니니, 데리러 간 승지에게 우선 올라오라고 하유하라.”
하였다. 선생이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 이 행차 때 현석이 서울에서 명촌(明村)으로 와서 하룻밤을 묵으며 조정으로 나와 함께 나랏일을 도모하기를 힘껏 권하였다. 선생이 개인적인 정세 외에 또 나갈 수 없는 의리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우리들이 오늘날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나간다면 제대로 해야 할 것이네. 만약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우암(尤庵)의 세도(世道)를 변화시키지 않아서는 안 되고,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원한 관계를 풀지 않아서는 안 되고, 삼척(三戚)의 문호(門戶)를 닫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인데, 우리들의 역량으로 이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것도 하지 못하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속으로는 절대로 하지 못할 줄을 알면서 무턱대고 나가는 것을 나는 할 수가 없네.”
하였다. 현석이 정법(正法)과 상리(常理)로써 권면하고 반복해서 비유하여 일깨우면서 한 가지 소신만을 기꺼이 지키려는 것을 나무랐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 재주와 시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갓 분의만을 중시한다면, 예로부터 어찌 한 번 얼굴이나 내미는 출처가 있었겠는가.”
하니, 현석이 끝내 강요하지 못하였다.
○ 선생이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화숙(和叔 박세채(朴世采))이 기미를 보지 못하니 조정에 오래 있지 못할 듯하다.”
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과연 송상(宋相)과 의견이 맞지 않아 조정을 떠났다.
○ 6월에 이조 참의를 제수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윤6월에 두 번째 정장하고 7월에 세 번째 정장하여 거듭 사직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 이후로는 사장(辭狀)을 다시 종의 이름으로 대신 바쳤다.
○ 7월에 특지(特旨)를 내려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우윤으로 올려 제수하였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비답의 대략에,
“이번에 품계를 뛰어넘어 발탁한 것은 결정이 내 판단에서 나왔고 또 진실로 공의(公議)에도 부합한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겸양을 하는가. 더구나 지금은 서늘한 기운이 새로 생겨나 강석(講席)을 자주 열게 되었으니, 이때에 계도하고 보필하는 역할을 경이 아니고는 할 만한 사람이 없다. 마음을 편히 갖고 사직하지 말고, 얼른 마음을 돌려 길에 오르라.”
하였다.
○ 또 정장하여 사직하였다. 8월에 두 번째 정장하고, 9월에 세 번째 정장하여 체차되었다.
○ 10월에 상이 두질(痘疾)을 앓으신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公州) 옥수암(玉樹庵)으로 가서 머물렀다.
옥수암은 감영(監營) 가까이 있어서 성후(聖候)에 관한 소식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마침내 덕포(德浦)와 함께 가서 열흘 남짓 머물다가 성상의 체후가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돌아왔다.
○ 12월 임인(5일)에 명성대비(明聖大妃)가 승하하였다. 현조(縣朝)에 들어가 곡림(哭臨)하고 성복(成服)하였다.
인산(因山) 전까지 정사(淨寺)에 머물렀다.
○ 창랑(滄浪) 성 선생(成先生)의 문집을 교정(校訂)하였다.
공의 휘는 문준(文濬)이다.

57년(1684, 숙종10) 갑자
○ 1월에 사헌부 대사헌을 제수하였다. 상소하여 개정(改正)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또 정장하여 사직하였다. 2월에 두 번째로 정장하였는데, 유지(有旨)로 체직한다는 뜻을 특별히 유시하고, 올라오라고 거듭 명하였다.
○ 2월에 송상의 편지에 답하였다.
편지에 이르기를,
“수년 이래로 문하의 동정(動靜)과 언행에 대해 듣지 못한 지 오래입니다. 진실로 정성을 미처 보이기도 전에 의심과 비방이 먼저 몰려들어 의심나는 점을 질정하여 의혹을 푸는 데는 보탬이 없이 한가로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빌미만 제공하게 될 것이 두려워서 편지를 썼다가 도리어 찢어 버린 것이 두세 번이나 됩니다.”
하였다.
○ 현석의 편지에 답하였다.
선생이 이미 송상과 정의가 어그러진 뒤에는 단지 문을 닫고 조용히 지내는 것을 의리로 삼았는데, 현석이 편지로 변고에 대처하는 도리를 논하였다. 선생이 답서를 보내기를,
“형이 이른바 ‘군신은 의로써 합하는 관계이므로 뜻이 맞지 않으면 물러갈 뿐이다.’라는 말은 본래가 떳떳한 도리이니, 사생(師生)의 의리 또한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단지 옛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 변고를 만난 것일 뿐입니다. 선인은 불초(不肖)에게 부친인 동시에 스승이었습니다. 지금 부자 관계를 논하지 않고 사도(師道)만으로 논한다 해도 스승인 우옹(尤翁)과 비교했을 때 그 은혜와 의리의 경중이 현격할 뿐만이 아닙니다. 두 스승의 도(道)가 같지 않다면 한 분을 취하고 한 분을 버리는 것은 당연한 형세이니, 내가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뜻이 오직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 5월에 회령인(會寧人) 최신(崔愼)이 상소하여 선생을 무고하고 헐뜯었으므로 현석 박공(朴公)이 상소하여 변론하였다.
임술년(1682, 숙종8) 겨울 선생이 현석에게 보낸 답서에서 송상의 본원에 대해 논했던 편지를 이때 송상의 손자 순석(淳錫)이 훔쳐 갔는데, 송상이 편지를 보고 무척 성을 냈고 그 문도(門徒) 최신의 상소가 나왔다. 최신은 선생의 편지가 사감(私憾)에서 나왔다고 하며 끝도 없이 헐뜯어 욕을 하고, 화살이 노선생에게까지 미쳐 강도(江都)의 일, 윤휴(尹鑴)의 일, 묘갈명의 일, 목천(木川)의 일을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송상이 날조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였으므로 국론이 크게 놀라워하였다. 현석이 상소하여 편지를 주고받은 곡절을 밝혀 그 무고를 변론하니, 시배(時輩)들이 또 시끄럽게 아울러 공격하였다. 현석의 상소는 최신의 상소와 함께 〈후록〉에 보인다.
○ 상신 민정중(閔鼎重) 등이 예대(禮待)하지 말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좌의정 민정중이 아뢰기를,
“근래 최신이 상소한 일로 논의가 분분하니, 이 일의 시비를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윤증의 편지에서 논한 바가 이미 지극히 부당하니 최신이 상소한 것을 전적으로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고, 박세채가 상소에서 인용한 고사(古事)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증 참의 윤선거는 젊은 시절부터 기절(氣節)이 뛰어났고 처음에는 스스로 진동(陳東)과 북지왕(北地王) 심(諶)으로써 기약하였으니, 강도의 일은 대개 미진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난을 겪은 후에는 옛사람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심전력하여 그 성취한 바가 사림의 인정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윤휴의 일로 말씀드리면 윤선거가 윤휴와 가장 절친하였는데, 윤휴가 《중용》의 주(註)를 고친 후에 송시열은 준엄하게 꾸짖고 그와 절교하였고, 예송(禮訟)이 벌어지던 날에는 윤휴가 ‘임금을 낮추고 종통을 둘로 나누었다.[卑主貳宗]’는 주장을 내세웠으므로 송준길도 그와 절교하였으나 윤선거는 즉시 절교하지 못했습니다. 윤휴와 빨리 절교했는가 늦게 절교했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의논할 만한 일이 없을 듯하나, 사람을 알아보는 군자의 밝은 안목에는 적지 않은 흠이 될 듯합니다. 최신이 상소에서 한 말도 근거 없이 만들어 낸 헛소리는 아니지만, 어휘를 구사한 것이 망녕되고 잘못되었으니 잘못이 없다 할 수는 없습니다.
윤증의 일에 이르면 당초 사제(師弟) 사이가 본래 범상하지 않았는데,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하여 욕하고 헐뜯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실로 매우 옳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다시 평소 현사(賢士)로 대접하던 예로써 대접해서는 안 될 것이니, 과실을 뉘우치고 처신을 제대로 하는지를 지켜봐서 천천히 처치하는 방도를 논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최신의 상소 중에는 어휘 구사가 비록 더러 적절하지 않은 곳이 있지만, 대의(大意)는 스승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너그럽게 답하였다. 윤증은 이전부터 예대(禮待)해 왔으나, 지금 이 일로 보면 이상하게 여길 만하다.”
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윤증의 일은 애당초 개인적인 편지를 주고받은 것에 불과하니 본래 조정에서 간여할 바가 아니지만, 지금에 와서는 최신과 박세채가 이 일로 상소한 만큼 개인적인 편지라는 이유로 방치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윤증의 말이 옳다면 조정에서 몇 대에 걸쳐 송시열을 예우해 온 뜻이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니, 결단코 모호한 태도를 보이거나 구차하게 인순하며 판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윤증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대우하는 도리를 예전처럼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윤선거는 강도의 일에 비록 미진한 점이 있었지만, 그 뒤 자신의 허물을 이유로 출사하지 않은 채 학문에 힘을 쏟았으니, 지행(志行)의 독실함과 확고함은 말학(末學)이 함부로 논의할 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최신이 논한 바는 본디 망녕되고 경솔한 것입니다. 신은 비록 윤증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의 자질이 매우 뛰어나 일찍부터 큰 명성을 얻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일이 생겼으니, 이는 필시 식견이 명철하지 못하기 때문에 옳지 못한 곳으로 흘러들어가는 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고 이르기를,
“근래 세도가 크게 무너졌다. 앞으로 만약 윤증을 신구(伸救)하는 자가 나온다면 필시 대로(大老)가 불안해하여 조정에 한바탕 분란의 단서가 생길 것이니, 염려가 적지 않다.”
하였다.
○ 그 뒤 무진년(1688, 숙종14)에 상국(相國) 이상진(李尙眞)이 연석에 나가 선생의 일을 진달하고, 선생이 스승을 배반한 것이 아님을 극력 밝혔다. 또 아뢰기를,
“윤증 부자는 유학(儒學)을 집안에서 전수하고 진실된 행실이 순정(純正)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두 악명(惡名)을 입었으니 세도가 실로 지극히 개탄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말은 일리가 있다.”
하였다. 연신 최석정(崔錫鼎)과 유득일(兪得一)이 또 선생에게 죄가 없음을 진달하였다. 이공(李公)이 연석에서 물러난 뒤에 또 차자(箚子)를 올려 무함을 입은 본말을 거듭 아뢰고 처음처럼 예대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조용히 선처하겠다고 답하였다.
○ 갑술년(1694) 이후에 상이 김수항과 민정중의 말을 쉽게 받아들였던 것을 깊이 후회하여 연교(筵敎)와 비지(批旨)에서 누차 언급하였다.
○ 현석의 편지에 답하였다.
현석이, 송순석이 편지를 베껴 간 일을 계기로 의서(擬書)를 지금이라도 보내라며 편지로 권하였다. 선생 답서의 대략에,
“이제 와서 뒤늦게 보내는 것은 성의 없는 행동이니, 사람들이 보고서 책임을 때우려 든다고 의심하지 않으면 필시 곧장 더욱 멋대로 비방하고 헐뜯는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차라리 소신을 지키며 조용히 기다리고자 할 뿐입니다. 방금 북인(北人)의 상소를 보았는데, 이것이 어찌 북인이 스스로 한 일이겠습니까. 불초자식이 선친에게 욕을 끼친 죄는 더 말할 것이 없지만, 그 아들에 대한 노여움으로 그 아비까지 욕보인 것은 참으로 너무도 심한 처사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오직 이른바 ‘문을 걸어 잠근 채 들어앉아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죽는다.’는 것을 최선의 법으로 삼을 뿐입니다.”
하였다.
○ 이때 박공 태보(朴公泰輔)가 또 의서를 보내기를 권하였는데, 답하기를,
“반드시 따라 주지 않을 줄 알면서 일부러 굳이 보내는 것은 좌계(左契)를 잡고자 하는 것이네. 그렇다면 이 마음이 절로 성실하지 못한 것이니, 비록 혹 감동시킬 만한 이치가 있다 한들 어떻게 감동시킬 수가 있겠는가. 그 편지를 썼던 것은 만에 하나라도 의견이 합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네. 어찌 스스로를 위한 계책으로 썼겠는가.”
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모두 〈별집〉에 보인다.
○ 명촌(明村)에게 편지를 보냈다.
명촌이 성공 지선(成公至善), 조공 득중(趙公得重)과 함께 상소하여 최신이 상소에서 무고한 것에 대해 변론하고자 하였고, 현석도 이를 권하였다. 선생이 편지로 만류하기를,
“상대가 나를 범하여도 따지지 않고 피아(彼我)의 간격을 두지 않는 것이 바로 선인의 평소의 마음가짐이었는데, 어찌 형은 이 점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천지가 밝게 펼쳐지고 귀신이 빽빽하게 늘어섰으니 어찌 끝내 성명(聖明)을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조용히 기다리면 될 일입니다. 양산(楊山)이 ‘그만둘 수 없다.’고 한 말도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별집〉에 보인다.
○ 송상의 편지에 답하였다.
송상이 송순석이 베껴 간 편지를 보고 선생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대략에,
“자네가 지적한 것은 모두가 나의 실제 병통이거니와, ‘의리와 사리를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술을 겸하여 쓴다.[義利雙行 王覇竝用]’는 대목은 더욱 지나치게 허여하고 관대하게 말한 것임을 알겠네. 그러나 편지를 읽은 이후로 마치 침으로 몸을 찌르는 것만 같네. 비유하자면 환자가 고질병이 악화되어 죽으려 할 때 갑자기 양의(良醫)가 신단(神丹)의 묘약을 처방해 주어 살 길을 찾게 된 것과 같으니, 비록 양의의 본심이 과연 환자를 사랑하는 뜻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은혜는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아! 이미 큰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보답하려는 뜻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이놈이 과연 글을 잘못 지어서 자네의 선장(先丈)에게 죄를 얻었는데도 끝내 나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 줄 수가 없다면, 자네의 도리로는 마땅히 주 부자(朱夫子)의 말씀처럼 의리에 입각하여 절교를 통고했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했다면 처신이 어찌 밝고도 깨끗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이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얽어매고 연루시키면서 항상 불평한 뜻을 가슴에 쌓아 두었다가 사안마다 촉발하되 간혹 절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군자의 처신이 과연 이런 것인지 모르겠네. 묘갈명의 초본을 지은 이후로 자네가 고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따라 주었고 끝내 자네가 그만두고 나서야 그만두었으니, 내가 죄를 얻은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
목천(木川)의 일은 자네가 크게 노여워하는 바이네. 그러나 그 말의 허실을 논할 것 없이 대개 타우(打愚)로 하여금 호향(互鄕) 사람을 상종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이는 선장을 존경하고 숭상하는 뜻이었네. 불행하게도 최신이라는 자가 나왔는데 그는 북방의 무식한 사람이네. 갑자기 상소하여 윤리도 없고 이치에도 어긋난 말을 한도 끝도 없이 하는 바람에 사람을 매우 당황스럽고 부끄럽게 만들었네. 비록 편지로 질책하고 배척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 더 이상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하겠는가.
지금 한 말들이 만약 진심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하늘이 나를 미워할 것이네. 사람이 죽음을 앞두면 그 말이 선해지는 법이니,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아울러 헤아려 주게.”
하였다. 선생이 그 편지에 답하여 마음에 담아 두었던 생각들을 조목조목 아뢰었으니, 곧은 사리와 진실된 말로 송상의 화를 풀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 대략에,
“참람된 논의를 권생(權生 권이정(權以鋌))을 통해 전하게 한 뒤로 항상 황송한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다가 저의 의서(擬書)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전해졌다는 말을 듣고는 비록 황송한 심정은 더욱 깊어졌지만, 몇 년 동안 머뭇거리며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듣고 보게 되신 것을 또 내심 다행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북인의 상소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는 또 마음이 슬퍼져서 어찌할 줄을 모른 채 문하를 위해 애석해하기를 마지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뜻밖에 하나하나 용서하시고 이렇게 편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더구나 선한 뜻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하늘이 미워할 것이다.’라고 스스로 맹세하셨으며, ‘인륜도 없고 이치에도 어긋났다.’라는 말로 북인을 꾸짖고 배척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아! 문하의 말씀이 이러한데도 스스로 감정의 벽을 쌓고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아 끝내 스스로 어른과의 관계를 끊는다면, 이는 문하는 저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제가 실로 문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에 하교하신 말씀을 가지고 하나하나 답변드리고자 합니다.
하교에 ‘자네가 지적한 것은 모두가 나의 실질적인 병통이네.’라고 하셨으니, 저의 망녕된 견해가 혹 마음을 깨우친 점이 없지 않은 듯합니다. 아! 저의 망녕된 견해와 망녕된 논의는 여기에만 그치지 않으니, 상세한 것은 실로 신유년(1681, 숙종7) 여름에 올리려고 했던 장서(長書)에 들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장서를 올리지 못한 것은 실로 성의가 부족한 저의 죄입니다. 예전에 선인(先人)은 문하에 대해서 실로 지극한 정성이 있었는데, 의심스러운 점을 보면 모두 기질의 병통으로 돌리고 본원에 대해서는 일찍이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망녕된 견해는 본원에 대한 의심을 떨치지 못하여, 기질의 병통을 고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키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참람하게 이처럼 함부로 논하는 까닭입니다. 몇 해 전 봉산(蓬山 장기(長鬐))으로 찾아뵈었을 때 문하의 꾸지람과 가르침을 받았는데, ‘자네의 선장(先丈)은 붕우에게 반드시 정성을 다해서 충고해 주었는데, 자네는 그렇지 않으니 선친의 법도를 잃었다고 하겠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삼가 절하고 받아들인 후 마음속에 항상 간직하여 지금까지 감히 잊지 못하고 있으나, 갖추어 쓴 편지 한 통을 오히려 몸을 도사린 채 걱정하고 두려워하느라 감히 즉시 드러내지 못함으로써 선친의 규범을 실추하였으니, 이것이 또 큰 죄입니다.
하교에 ‘이놈이 글을 잘못 지어서 자네의 선장에게 죄를 얻었다면, 자네로서는 마땅히 의리에 입각하여 관계를 끊겠다고 통고했어야 할 것이네.’라고 하셨습니다. 아! 관계를 끊겠다고 통고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범 충선공(范忠宣公)이 구양공(歐陽公)에게 하지 못했던 일인데 더구나 못난 제가 문하에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화숙(和叔)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 있는 말을 불평한 마음이 촉발되어 나온 것으로 생각하신다면 이는 실로 저의 본심이 아닙니다. 불평한 마음은 사정(私情)이고 학문을 논하는 것은 공의(公議)입니다. 제가 비록 못났지만 어찌 천하 후세의 공의가 필부(匹夫)의 사정을 용인하지 않을 줄을 모르고 사사로운 감정에 가려서 감히 이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저의 망녕된 견해가 잘못 들어간 것일 뿐입니다. 만약 불평한 뜻이 있기 때문에 불평한 감정에 가려서 소견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저도 감히 스스로 옳다고 우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교에 ‘묘갈명의 초본을 지은 이후로 자네가 고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따랐네.’라고 하셨습니다. 묘갈명을 고쳐 주기를 청한 것은 모두 세 번이었습니다. 처음에 고쳐 주기를 청했을 때에는 고쳐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실제로 감히 재차 청할 생각을 못하였고, 그다음에 고치는 것을 허락하셨을 때도 또 다소간의 서신의 왕래가 있었으니, 어찌 감히 세 번째로 청할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마지막에는 편지를 보내 다시 초본을 보내라고 하셨으나, 저는 이미 경험한 바가 있었기에 감히 즉시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화숙이 ‘개정본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스스로 먼저 어른의 뜻을 막아서는 안 되네.’라고 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보냈는데, 그 후에 과연 약간의 글자만을 고쳐 주셨으므로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만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묘갈명에 관한 일만이 아니라, 문하께서는 저희 집에 대해서 한 가지 미세한 일과 한 마디 미덥지 않은 말이라도 선인에게 해가 될 만한 것이기만 하면 후생(後生)들에게 폭로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사사로운 마음에 늘 매우 괴이하게 생각하며 탄식하였습니다. 또 가슴이 미어지듯이 아파서 일찍이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한 한 가지 말이 있는데, 지금 어쩔 수 없이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문하께서 일찍이 고(故) 김 상서(金尙書)의 말을 인용하여 선인을 ‘잔인한 사람[忍人]’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말까지도 허실(虛實)을 가리지 않고 쉽게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으니, 자식 된 마음에 어찌 통한이 사무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의 구구한 정리가 전과 같을 수 없는 것이니, 죄를 피할 길이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의리가 예전과 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또 별건의 일입니다. 스승은 도(道)가 있는 바이기 때문에 얼굴을 대 놓고 극간(極諫)해서도 안 되지만 그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숨겨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할 말이 있어도 감히 다하지 못하고 의심나는 점이 있어도 감히 질정하지 못하여 정성을 다 쏟기도 전에 의심과 비방이 먼저 쌓이니, 예로부터 스승과 제자 사이에 실로 이런 의리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연래로 스스로 걱정스러워 했던 것은, 밖으로는 스승을 신뢰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제 마음을 믿지 못하며, 마음으로는 의심이 없지 않으면서도 입으로는 말하지 못하여, 겉과 안이 모순되고 마음과 입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차라리 입을 다물고 스스로를 지켜, 오직 말로(末路)에 시끄러운 단서를 더 보태어 세도에 거듭 누를 끼치지 않게 함으로써 그나마 죄를 줄이는 방편을 삼고자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곤경에 빠져 장차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교에 ‘목천의 일은 선장을 존경하고 숭상하는 뜻이었네.’라고 하셨습니다. 대개 선인의 당시 일에 대해서는 그 득실과 시비(是非)를 후세 사람들이 평가할 것입니다. 또 사람은 제각각 의견이 있는 법이니, 만약 처신의 당부(當否)를 논하여 공정하게 시비를 정한다면 자손이라 할지라도 감히 그에 대해서 사사로운 감정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은 그렇지가 않아서 갑인년(1674, 현종15)부터 신유년(1681, 숙종7)까지 8년 사이에 이곳과 목천 인근에서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문하로부터 말이 전해졌습니다. 저로서는 문하에게 고한 자가 선인을 헐뜯으려는 생각을 몰래 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의탁하여 그 말을 전파하여 시끄럽게 변론하고 다투느라 한바탕 욕하고 싸우게 만든 것으로 여길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진실로 통탄스러운 심정을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초에 문하를 의심했던 데는 진실로 까닭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문하가 화숙에게 보낸 편지에 모인(某人)이 성내며 욕했던 말을 끌어대며 옆에다 ‘어강도사(於江都事)’라는 네 글자를 썼다가 도로 지웠습니다. 이것이 만약 그의 말이라면 이미 썼다가 도로 지운 것은 무엇 때문이며, 지우되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또 듣건대 문하에 출입하는 자들이 자주 이 일로 선인을 흠잡는 구실을 삼고 왕왕 멋대로 말하면서 조금도 삼가고 조심하는 바가 없다고 하니, 이와 같다면 설사 그 말이 목천 사람에게서 나왔더라도 문하의 뜻에 영합한 여론(餘論)일 뿐입니다. 그 뒤에 타우(打愚 이상(李翔))가 여쭈었을 때는 그 말이 유수방(柳壽芳)에게 나온 것처럼 말씀하셨고, 목천 사람이 여쭈었을 때는 문득 말을 스스로 만든 것으로 자처하셨으며, 제가 편지를 보냈을 때는 허황(許璜)에게 물어보라고 하셨으나, 최후에 태중(泰仲)이 여쭈었을 때는 초려(草廬)에게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다면 미혹한 마음에 의심이 없고자 하더라도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감히 그렇게 말했던 까닭입니다.”
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별집〉에 보인다.
○ 7월에 또 송상의 편지에 답하였다.
송상의 답서의 대략에,
“지난번에 보낸 편지에 이미 ‘선장의 일에 대해서 폭로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고, 또 ‘가슴이 미어지듯이 아프고 통한이 사무친다.’ 하였으니, 이는 나를 부형의 원수로 보는 것이네. 그러면서도 내 잘못을 지적하고 헐뜯은 말이 애석해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니, 이미 가슴이 미어지듯이 아프고 통한이 사무친다면 애석해하는 마음이 어디로부터 생겨난단 말인가. 자네는 혹시라도 자네가 지적한 말이 전적으로 원망하고 노여워하는 사심(私心)에서 나왔다고 사람들이 의심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애석하게 여긴다는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의심을 풀려고 한 것이 아닌가. 오늘의 ‘가슴이 미어지듯이 아프고 통한이 사무친다.’는 말은 비록 《춘추(春秋)》와 《예기》에서 이른바 ‘반드시 복수한다.’는 말과는 차이가 있지만, 의리에 입각하여 관계를 끊겠다고 고하는 것은 결코 그만둘 수 없을 것이네.
이른바 ‘김 상서’ 운운한 것은, 자네가 어찌 차마 이 말을 제기한단 말인가. 당시에 김 상서가 매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한 것이 ‘잔인한 사람’이라는 것만이 아니었으니, 대개 그 동기(同氣)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던 것이 선장(先丈)의 창도(唱導)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여 그 말을 절제할 줄 몰랐던 것이네.
평소 선장에게 죄를 지은 것으로 말하자면 모두 윤휴의 일 때문이었는데, 대개 그 독에 중독되었던 사람으로 말하자면 이놈이 가장 먼저였네. 그가 주자(朱子)를 배척하고 자신의 학설을 세워 천하를 바꾸려고 하기에 이르러서는 내가 나름대로 사설(邪說)을 물리치고 피행(詖行)을 막는 의리에 의탁하여 극력 배척하였으니, 이것이 선장에게 좌우로 검을 차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네. 윤휴가 흉패(凶悖)함을 일삼다가 사사(賜死)된 후에는 자네가 선장을 위해서 유원규(庾元規)가 소준(蘇峻)에게 했던 일처럼 하리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들은 말로는 자네가 오히려 타우(打愚)의 음양론(陰陽論)을 배척하였다고 하니, 비호하는 뜻이 아직 남아 있는데 다시 무엇을 바랄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송상이 병진년(1676, 숙종2) 이후에는 스스로 윤휴와의 관계에 대한 의심이 풀렸다고 말했었는데, 갑자기 다시 이 일을 끌어다가 함정을 만들어 무함하는 제목으로 삼았다.
선생의 답서의 대략에,
“‘가슴이 미어지듯이 아프고 통한이 사무친다.’라고 한 것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절박한 심정을 말했던 것이니, 이러하기 때문에 정의가 예전과 같지 못하다는 말이었을 뿐입니다. 원수로 여기는 뜻이 있다고 하여 《춘추》와 《예기》를 끌어다가 말씀하기까지 한 데 대해서는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가슴이 미어지듯이 아프고 통한이 사무치는 심정이 이와 같다면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어디로부터 생겨나겠는가.’라고 하신 말씀은 또 문하가 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인 듯합니다. 평생 존경해 온 스승에게 이렇게 망녕된 생각을 가진 것으로 의심을 받았으니, 설령 말씀하신 대로 의리에 입각하여 관계를 끊겠다고 통보한다 하더라도 어찌 개탄하고 애석해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한 번 망녕된 생각을 말씀드려 만에 하나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천리(天理)와 인정에 있어서 그만둘 수 없는 일일 듯합니다. 마지막에 감히 한 번 더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은 혹 정의가 전과 같지 못하기 때문에 애석해하는 마음이 지극하지 못해서 그랬을 듯하니, 이것으로 죄를 삼으신다면 기꺼이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자네가 지적한 말이 전적으로 원망하고 노여워하는 사심(私心)에서 나왔다고 사람들이 의심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애석하게 여긴다는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의심을 풀려고 한 것이 아닌가.’라는 말씀은 또한 저의 정리가 아닙니다. 이 일이 있은 이래로 사람들이 모두 사감(私憾)이라는 이유로 저를 배척하지만, 저는 스스로 망녕된 견해가 잘못 들어간 것이 혹시라도 사의(私意)에 가려서 그런 것일까 봐 염려하였기 때문에 모두 기꺼이 받아들이고 조금도 스스로 해명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감히 지난번 보낸 답서에서 ‘사감’이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 곧이곧대로 모두 다 말씀드리고, 기피하거나 숨기지 않음으로써 꼬투리를 잡아 죄를 덮어씌우려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저의 행동이 모두 사감에서 나온 것으로 더욱 믿게 했겠습니까.
윤휴의 일에 대해서는 문하가 병진년(1676, 숙종2)에 보낸 편지에서 ‘이미 의심이 풀렸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한 가지 일은 주고받은 편지에서 피차간에 할 말을 다하였고 마침내는 문하의 의심이 풀렸습니다. 더구나 그가 죄를 입어 사사된 마당에 무얼 다시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유량(庾亮)의 죄’라는 것은 반복해서 생각해 봐도 과연 선인에게 해당되는 것인지 끝내 알 수 없으며, ‘비호했다’는 말 또한 귀신을 잔뜩 실은 수레와 마찬가지일 듯합니다.
이른바 ‘타우의 음양론’은 실로 기억이 나지 않기에 얼마 전에 서신으로 물어보았는데, 꾸짖는 말은 단지 북소(北疏)의 뜻을 인습한 것이었고, 이른바 음양론에 대해서는 전혀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배척했다는 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더욱 괴이한 일입니다. 저는 남은 생을 숨어 살면서 궁벽한 골짜기에서 분수를 지키고자 하는데, 단지 타우의 잘못 전한 말과 문하의 지나친 의심으로 인해서 끝내 죄인을 비호한 죄율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김 상서’ 운운한 것은, 김장(金丈)이 선인에 대해서 참으로 ‘잔인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할 정도가 아니었다면 이는 깊이 원망한 것이고 심하게 배척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직접 선인을 조정에 천거하여 우리 임금을 속이고, 때때로 안부를 물어 그 마음을 속일 리가 있겠습니까. 전에는 단지 문하가 경솔하게 말을 전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었는데, 지금 이 하교는 그의 말을 가지고 그 일을 사실로 만들려는 뜻이 있으니, 자식 된 자의 안타깝고 절박한 심정이 여기에서 더욱더 커집니다.
화변(禍變)을 당한 일은 가슴이 내려앉고 머리가 떨어지는 듯하여 말을 하고자 해도 차마 할 수 없는 것이 실로 하교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마당에는 또한 피투성이 얼굴로 눈물을 삼키며 하늘에까지 사무치는 원통한 심정을 한 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애통합니다. 불초한 제 나이가 당시에 이미 아홉 살이었습니다. 비록 미혹하고 어리석어 다른 식견은 없었지만 선비(先妣)께서 자결하시던 때는 오히려 기억하고 있는데, 당시에 선인은 집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어제 일처럼 또렷한데, 자식으로서 이런 일을 당하고도 지금껏 인간 세상에 살아 있으니 어찌 모진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김장이 살아 있다 하더라도 필시 자신이 목격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전해 들은 말을 몸소 입증하려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김장이 죽은 지 몇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무단히 그 말을 끌어다 퍼뜨려서 비방하는 구실을 삼으니, 불초자식의 심정이 지극히 원통할 뿐만 아니라 문하의 성덕(盛德)에도 적지 않은 손상이 될 듯합니다.
선비의 명명백백했던 처신은 지금까지도 제 마음과 눈에 또렷이 남아 있어 한밤중에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의심스러운 단서가 있다면 비록 부모를 위하는 자식의 지극한 정이라 할지라도 어찌 감히 이렇게 거짓말을 하여 천지와 귀신을 기만하겠습니까. 아! 불초자식이 못나서 선인에게 누를 끼친 것만도 말을 할 수가 없는데, 또 명백하게 처신하셨던 선비의 절개까지도 인멸하고 말았습니다. 저승에 계신 부모님께 지은 죄는 만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으니, 어진 군자(君子)는 또한 반드시 여기에 대해 애통해하고 가슴 아파할 것입니다.”
하였다.
송상이 보내온 답서의 대략에,
“‘잔인한 사람’이라는 말은 당초 김 상서의 심사를 대략 말한 것일 뿐이네. 김 상서의 전후 견해가 달라진 것은 또한 내가 감히 알 바가 아니니, 물가에 물어보면 될 것이네. 어쩌면 또 오(吳)나라의 아몽(阿蒙)과 같은 뜻이 아닐지 모르겠네.
‘비호했다’는 말은 자네가 잘못을 숨기려고 무척 애쓰는 부분이지만 그런 사실이 있었네. 예전에 동학사(東鶴寺)에서 만났을 때 선장이 분명히 흑백(黑白)과 음양(陰陽)으로 나누어 말을 했었는데, 나중에 가서는 ‘한 가지 일을 지적한 것이고 전체를 가리킨 말이 아니다.’라고 하여 나로 하여금 이(李)에게 사과하는 일이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비호가 아니고 무엇인가. 저 윤휴가 감히 주자(朱子)를 헐뜯고 모욕하였으니, 이것은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여 대인(大人)을 무시하고 성언(聖言)을 멸시한 것으로서, 흉악한 짓을 자행하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터럭 하나,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가 모두 죄역(罪逆)에 해당되는 것이었네. 그러므로 매번 어리석은 뜻을 선장에게 말했으나 큰 죄만 입고 말았네. 그러나 이것은 전혀 한스러울 것이 없네. 자네 편지에 ‘죄인을 비호한 죄율’이라고 한 말은, 이것으로 사람을 억누르는 밑천을 삼으려는 것인가? 나는 본래 다른 사람에게 화를 끼치려는 마음이 없는데, 이른바 그 사람에게 익숙해진 탓으로 다른 사람도 모두 이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선비’ 운운한 것은 성효(誠孝)로 볼 때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일전에 김사보(金士輔)에게 들으니 자네가 ‘어머니의 죽음이 분명하지 않다.’는 취지로 손자 주석(疇錫)을 압박한다고 하므로, 내심 자네가 자신의 입장을 미루어 다른 사람을 생각해 주지 않는 것에 개탄하였네. 내가 비록 못났지만 어찌 차마 남을 허물하면서 그대로 본받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시종일관 도리에 어그러지게 욕하는 말은 인륜의 도리가 다하여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 현석이 송상에게 편지를 보내 책망하였는데,
“일거에 남의 양친(兩親)을 여지없이 헐뜯어 평생 쌓아 온 붕우 간의 정의를 어그러뜨리고 효자의 망극한 정을 손상하였습니다. 그로 하여 인심이 승복하지 않고 국론(國論)이 펴지지 않아 화란의 싹이 끝이 없을 지경이니, 이 점을 살피지 않는다면 세도(世道)에 해가 없겠습니까?”
라는 말이 있었다.
○ 선생은 그래도 송상의 마음을 깊이 모르고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이때에 와서 지하에 계신 두 존친(尊親)에게 망극한 모욕이 미치자 마침내 다시는 서신을 보내지 않고 스스로 관계를 끊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회천(懷川)과의 일에 대해서 자경(子敬 윤진(尹搢))과 자서(子恕 윤추(尹推))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무척 후회한다.”
하였으니, 대개 덕포(德浦)와 농와(農窩) 두 공이 이미 그 술수를 간파하고 처음부터 누차 서신 왕래를 만류했기 때문이었다. 또 일찍이 이르기를,
“나도 회천과의 일에 잘못한 점이 없지 않으니, 사람들이 나더러 한 가지도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도 편파적인 논의이다. 후세에 은혜와 원망이 모두 잊힌 다음에도 반드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의가 있겠지만, 다만 반드시 나를 두고 스승을 배반했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혹 내가 겪었던 일을 교훈으로 삼아 사제(師弟)라는 이름을 싫어하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면 이것은 내가 후세에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갑자년(1684, 숙종10)에 서신을 주고받은 뒤로 사생(師生)의 의리는 이미 끊겼지만, 그래도 옛 의리를 고려하여 사람들과 대화할 때 ‘우재(尤齋)’라고 일컬었다. 정묘년(1687)에 상소한 이후로는 옛 의리마저 고려할 여지가 없었으므로 단지 ‘회천(懷川)’이라고 칭하고, 문하생들에게 회천의 일을 말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 12월에 민이승(閔以升) - 언휘(彦暉) - 의 편지에 답하고, 인하여 《중용(中庸)》에 대한 시운에 차운하여 보였다.
민언휘가 편지로 〈초학획일도(初學畫一圖)〉와 《주역》 괘설(卦說)의 여러 뜻을 물었으므로 선생이 답서에서 변론하였다. 또 그가 보낸 《중용(中庸)》에 대한 시 2수에 지나치게 고원(高遠)한 의사가 있다고 여기고 그 운에 차운(次韻)하여 경계하기를,
생기는 한순간도 침체되는 때가 없어 / 生意無容一息沈
조그맣던 나무 자라 숲에 우뚝 빼어나지 / 方看拱把秀穹林
종래로 성현들이 이치를 다 말했건만 / 從來說理無幽蘊
단지 지금 사람들 실심 적어 근심이네 / 只患今人少實心
라고 하고, 또
이 학문은 본래부터 근본이 있는지라 / 此學元來有本根
공부 진정 쌓인다면 근원을 만나는 법 / 工夫眞積自逢源
여우를 좋지 않게 말했던 주자 편지 / 晦翁未善如愚句
그것으로 말을 쉽게 하는 그댈 타이르네 / 欲向吾賢戒易言
하였다.
○ 김성대(金盛大) 등이 통문(通文)을 내어 무함하고 욕하였다.
이보다 먼저 신유년(1681, 숙종7)에 김상 수항(金相壽恒), 이선(李選), 이사명(李師命) 등 여러 사람이 선왕의 실록(實錄)을 감수하였는데, 이사명이 명촌(明村)에게 말하기를,
“국사(國史) 중에 미촌(美村)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두 군데 있는데, 한 군데는 그를 극도로 칭찬한 내용이고, 한 군데는 강도(江都)의 일을 논한 것으로 간간이 헐뜯어 의논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사국(史局) 사람들이 모두 상세한 내막을 알고자 하여 편지로 이산(尼山)에 알려야 되겠다고 합니다.”
하였다. 명촌이 이런 뜻을 편지로 물었는데, 선생이 답하기를,
“선인의 강도 일은 다른 곡절이 없습니다. 성이 함락되던 날 선인이 미복(微服) 차림으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남한산성으로 가는 진원군(珍原君)의 행차를 따라 강을 건넜는데, 대개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이미 적병의 칼날을 면하였으니, 미복으로 난을 피한 것은 본디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 당시 권공(權公 권순장(權順長))과 김공(金公 김익겸(金益兼))은 남문(南門)에 배속되었기 때문에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같이 분신하게 되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또한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선인은 단지 돌아가서 노친을 뵙고 함께 남한산성에서 죽고자 했던 것인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끝내 죽음을 면한 것은 하늘의 뜻이었으니, 빈틈없는 의리로 따지더라도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선인 스스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였다.’라고 하며 통절하게 스스로 각박하게 자책했던 것입니다. 지금 간혹 강도의 일을 가지고 선인을 헐뜯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어찌 율곡(栗谷)의 ‘망녕된 것으로써 슬픔을 잊으려 했다.[以妄塞悲]’는 상소를 가리켜 ‘스스로 다 말했다.[自道盡]’고 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율곡은 오히려 정말 입산한 잘못이라도 있었지만 선인이 강도에서 죽지 않은 것은 애당초 죽어야 할 의리가 없었으니, 효종대왕의 비답에 이른바 ‘진동(陳東)이 끝내 윤곡(尹穀)의 죽음을 불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라는 것은 의리에 정밀한 성인의 말씀으로, 진정 백세가 지나서도 의혹되지 않을 만한 것입니다.”
하였다. 명촌이 그 편지를 김상(金相)에게 보였는데, 뒤에 이사명이 보고 소매에 넣어 사국으로 들어감으로써 이선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송상의 무리가 취모멱자(吹毛覓疵)하여 밑도 끝도 없이 감정 풀이를 하고, 또 그 편지 속의 ‘율곡은 정말 입산한 잘못이 있었다.’라는 한 마디를 끄집어내어 선현을 모함하고 욕했다고 하며 학유(學儒) 김성대 등을 사주하여 중외(中外)에 통문을 내어 낭자하게 욕을 하였으며, 한쪽 편 사람들이 또 터무니없는 말을 퍼뜨렸다. 봉교(奉敎) 김홍복(金洪福), 대교(待敎) 유상재(柳尙載), 반임(泮任) 송징은(宋徵殷) 등이 교묘하게 무고하는 것을 애통하게 여겨 통문을 내어 김성대 등을 벌하니, 향유(鄕儒) 이진안(李震顔)이 또 상소하여 선생을 욕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 이진안의 상소 내용을 보건대, 윤증(尹拯)이 오래전에 개인적으로 쓴 편지 중의 한 구절을 들추어내어 선현(先賢)을 무함하였다는 죄를 멋대로 덮어씌웠는데, 은연중에 날조하여 현란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인심의 투박함과 사습(士習)의 불미(不美)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를 줄은 참으로 짐작하지 못했다. 만약 이런 무리들의 위험스러운 말이 세상에 행해지도록 한다면 말류(末流)의 폐단은 장차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하는 데까지 이르고 말 것이니, 어찌 대단히 한심하지 않겠는가.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여 사습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이진안을 정거(停擧)하고, 이 상소는 도로 내 주도록 하라.”
하였는데, 김상이 연석(筵席)에 나가 신구(伸救)하고, 이진안의 정거를 풀어 주고 김홍복 등을 파직하기를 청하였다. 부제학 최석정(崔錫鼎)이 상소하여 이진안과 김성대의 무고를 변론하고 대신(大臣)의 실책을 공격하였다. 그 대략에,
“윤증은 곧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외손입니다. 성혼과 이이(李珥)는 덕을 갖춘 동지로서 뜻을 함께함으로써 서로를 더욱 빛내 나란히 백세의 종사(宗師)가 되었는데, 윤증이 두 현인을 존경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이이를 무함하고 욕하였다는 것이 과연 이치에 닿는 일이겠습니까. 더구나 그 편지는 친구가 서찰로 물어온 일로 인하여 그 아비의 일에 대한 전말을 밝힌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지금 강도의 일로 선인을 헐뜯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어찌 율곡(栗谷)의 「망녕된 것으로써 슬픔을 잊으려 했다.」라는 상소를 가리켜 「스스로 다 말했다.」라고 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그러나 율곡은 오히려 정말 입산한 잘못이라도 있었지만 선인이 강도에서 죽지 않은 것은 애당초 죽어야 할 의리가 없었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망녕된 것으로써 슬픔을 잊으려 했다.’라는 말은 바로 이이의 상소에 나오는 말로, 과도하게 스스로 허물을 인정한 데서 군자의 겸손한 덕을 볼 수 있는데, 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일종의 무리가 도리어 이것을 끌어다가 욕하고 헐뜯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윤증의 아비인 고 집의 윤선거 역시 강도의 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스스로 인혐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간혹 이로 인해서 윤선거가 죽지 않은 것에 대한 의심을 불렀으니, 그 일이 율곡과 유사합니다. 그러므로 그 답서가 이와 같았던 것이니, 이것은 선현의 일을 끌어다가 그 아비의 일을 증명한 것일 뿐입니다. 여기에 어찌 조금이라도 날조한 자들의 말과 유사한 점이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대신을 흔들어 댔다는 이유로 견책하였다.
이로부터 시배(時輩)들이 분주하게 번갈아 상소하여 무고하고 헐뜯으니, 삼사(三司)의 이돈(李墪), 최규서(崔奎瑞), 최석항(崔錫恒), 홍수주(洪受疇) 등도 연이어 상소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하였다가 대부분 견책을 당했다. 송상이 마지막에 또 직접 상소하여 율곡에 대한 무고를 밝힌다는 명목으로 선생을 공격하고, 또 편지에 들어 있는 ‘권공(權公)과 김공(金公)이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는 없었다.’라는 말로 절의(節義)를 지킨 사람들을 배척한 죄안을 얽어 만드니, 사론이 분통해하고 나라 사람들의 말이 더욱 격앙되었다. 뒤에 상국(相國) 이상진(李尙眞)이 차자를 올려 또 선생의 억울함을 변론하였다.
○ 선생이 조공 득중(趙公得重)에게 답한 편지에,
“율곡 선생이 입산했던 일을 들어 스스로 허물하였는데 채진후(蔡振後)의 상소에 ‘스스로 다 말하였다.’라고 하였고, 선인이 강도의 일로 스스로 허물하였는데 지금 이로써 비방하니, 일이 마침 유사하기 때문에 끌어다 증거로 삼은 것입니다. 그 아래에 운운한 것맹자(孟子)가 실제로 매장하고 장사하는 놀이를 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단지 선인을 비방하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근거 없는 것임을 밝히고자 했을 뿐인데, 저들이 우열을 논하는 말로 뒤섞어 버릴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권공과 김공 두 분의 일을 논한 부분은, 내 생각으로는 두 공이 남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선원(仙源)이 분신한 곳이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에 함께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고, 만약 마침 그곳에 있지 않았다면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는 없는 것이 또한 선인과 마찬가지일 수 있다고 여긴 것일 뿐이지, 감히 두 공의 죽음에 대해 논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죄를 논하는 말이 나온 뒤에 다시 곰곰이 살펴보니 편지의 말투가 참으로 망녕되고 경솔하며 참으로 거만하였기에 스스로 탓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주D-001]팔송공(八松公) : 명재의 조부 윤황(尹煌:1571~1639)이다.
[주D-002]노선생(老先生) : 명재의 부친 윤선거(尹宣擧:1610~1669)를 가리킨다.
[주D-003]포저(浦渚) 조공(趙公) : 조익(趙翼:1579~1665)으로,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비경(飛卿)이다.
[주D-004]또 시를 짓기를 : 원제(原題)는 〈월야(月夜)〉로, 한국문집총간 135집에 수록된 《명재유고》 권1에 실려 있다.
[주D-005]시남(市南) : 유계(兪棨:1607~1664)로, 본관은 기계(紀溪), 자는 무중(武仲)이다.
[주D-006]삼생(三牲)의 봉양 : 매일 소, 양, 돼지 세 가지 고기를 갖추어 풍요롭게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7]숭정(崇禎)의 기원(紀元)을 따랐다 :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연호로 1628년부터 1644년까지이다. 명나라는 의종황제를 마지막으로 1644년에 멸망하였지만, 연보의 연도 표기는 숭정 연호를 그대로 이어서 사용한다는 말이다.
[주D-008]기산(圻山) : 파주(坡州), 장단(長湍) 일대에 있는 선영(先塋)을 가리킨다.
[주D-009]황지(潢池)의 변 : 황지농병(潢池弄兵)과 같은 말로 역모 사건을 뜻한다. 1646년(인조24) 3월에 충청도 이산(尼山)의 유탁(柳濯) 등이 반역을 모의하고 병력을 모아 거사하려 하였는데, 명재의 중부(仲父) 윤문거(尹文擧)가 마을 사람을 통해 알고 관청에 고하게 하였다. 《仁祖實錄 24年 3月 28日》 《石湖遺稿 附錄上, 韓國文集叢刊 105輯》
[주D-010]탄촌(炭村) 선생 시(諰) : 권시(權諰:1604~1672)로, 본관은 안동, 자는 사성(思誠)이며, 탄옹(炭翁)으로도 불렸다.
[주D-011]가관(假館)의 예(禮) : 주희(朱熹)의 《가례(家禮)》에 나오는 혼례 의식이다. 친영(親迎)할 때 신랑이 처가에서 신부를 맞이하여 본가로 가서 예를 행해야 하지만, 양가의 집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처가에서 가까운 곳에 집을 하나 빌리게 한 뒤, 신랑이 처가에서 신부를 맞이해 가서 그곳에서 예를 행하는 것이다. 《家禮 婚禮 親迎》 《炭翁集 卷10 與尹美村論婚禮, 韓國文集叢刊 104輯》 《魯西遺稿 卷11 與權思誠書, 韓國文集叢刊 120輯》
[주D-012]탄촌의 …… 2수 : 원제는 〈화빙군운(和聘君韻)〉으로, 《명재유고》 권1에 실려 있다.
[주D-013]교산(交山) : 교하(交河)에 있는 명재 어머니의 묘소를 가리킨다.
[주D-014]이때 지은 시 : 원제는 〈교하도중(交河道中)〉으로, 《명재유고》 권1에 실려 있다.
[주D-015]성씨(成氏) 부인 :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계녀(季女)인데 명재의 조모로, 팔송(八松) 윤황(尹煌)의 부인이다.
[주D-016]퇴계 …… 차운하기를 : 원제는 〈경차퇴도선생고경운(敬次退陶先生古鏡韻)〉으로, 《명재유고》 권1에 실려 있다. 이황(李滉)의 시는 한국문집총간 31집에 수록된 《퇴계집(退溪集)》 〈속집(續集)〉 권2에 실려 있는 〈제고경중마방(題古鏡重磨方)〉이다.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은 고금의 잠명(箴銘) 및 심신의 수양에 절실한 글들을 모은 것이라 한다.
[주D-017]특달(特達)함이 규장(圭璋)과 같아진다네 : 규장은 고대 조빙(朝聘)에 사용하던 옥으로 만든 귀중한 예기(禮器)이다. 옛날에 조빙할 때 규장을 가진 이는 덕을 갖춘 사람이라 하여 다른 폐백을 갖추지 않더라도 곧바로 천자를 뵐 수 있었는데, 이것을 ‘규장특달(珪璋特達)’이라 하였다. 《禮記 聘義》 여기서는 사람의 덕과 인품이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특출해진다는 뜻이다.
[주D-018]이미 …… 낫다 : 유자우(劉子羽)는 송나라 사람이다. 1127년 금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수도 변경(卞京)이 함락되고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이 포로로 끌려간 정강(靖康)의 난리에 부친 유겹(劉韐)이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는데, 상을 치른 뒤 출사(出仕)하여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촉(蜀) 지방을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병산(屛山)은 유자우의 동생 유자휘(劉子翬)의 호이다. 유자휘는 부친의 죽음을 애통해하다가 벼슬에 대한 생각을 끊고 무이산(武夷山)으로 들어가 평생 강학에만 힘을 쏟았으며, 계모(繼母)와 형을 정성을 다해 섬겼다. 송대의 학자 주희(朱熹)가 이들 형제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마침내 대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宋史 卷129 劉子羽列傳, 卷193 劉子翬列傳》 《宋元學案 卷43 劉胡諸儒學案》
[주D-019]인묘(仁廟)의 …… 일 : 인조의 서거 후 묘호(廟號)를 정할 때 홍문관 부수찬으로 있던 유계가 ‘인조(仁祖)’라는 묘호가 적절하지 않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던 일을 말한다. 유계는 ‘인(仁)’ 자는 인종(仁宗)이 이미 있으므로 중복해서 써서는 안 되고, ‘조(祖)’보다 ‘종(宗)’을 쓰는 것이 합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묘호에서는 일반적으로 창업(創業)을 했거나 중단되었던 국통(國統)을 이은 왕에게는 조(祖)를 쓰고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에게는 종(宗)을 썼는데, 이 때문에 ‘종’보다 ‘조’가 격이 더 높다는 인식을 낳게 되었다. 따라서 인조의 묘호에 ‘종’을 써야 한다는 주장은 반정(反正)을 통해 즉위한 인조의 왕업과 위상을 부정하려는 주장으로 인식되어 사왕(嗣王)인 효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孝宗實錄 卽位年 5月 23日, 1年 4月 3日》
[주D-020]정사(淨寺) : 선영(先塋) 근처에 지어 놓은 정수암(淨水庵)을 가리킨다.
[주D-021]정사는 …… 백록동(白鹿洞)이다 : 백록동은 중국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에 있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으로, 본래 당나라 이발(李渤)이 형 이섭(李涉)과 함께 은거하여 독서했던 곳인데, 송나라 때 주희(朱熹)가 남강군 지사(南康軍知事)로 부임하여 이곳에서 강학(講學)하였다. 《宋史 卷429 朱熹列傳》 《廬山通志》 즉 명재 자신에게 정사는 이발 형제와 주희가 독서하고 강학했던 백록동서원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주D-022]절구 1수 : 원제는 〈정청좌당(呈淸坐堂)〉으로, 《명재유고》 권1에 실려 있다. 청좌당(淸坐堂)은 송준길(宋浚吉)이 거처하는 당의 이름이다.
[주D-023]기행 고시(紀行古詩) : 원제는 〈유여산행(遊廬山行)〉으로, 《명재유고》 권1에 실려 있다.
[주D-024]석호(石湖) 선생 : 윤선거의 넷째 형 윤문거(尹文擧:1606~1672)이다.
[주D-025]신재(愼齋) 선생 :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다.
[주D-026]교산(橋山)의 묘사(墓舍) : 교산은 회덕(懷德) 판교리(板橋里)이다. 이때 송시열이 모친상을 당하여 이곳에서 시묘하고 있었다. 《宋子大全 附錄 卷2 年譜1, 韓國文集叢刊 115輯》
[주D-027]옛사람이 …… 것 : 삼백편은 《시경(詩經)》을 가리킨다. 한나라 소제(昭帝)가 붕어한 뒤에 창읍왕(昌邑王)이 대통을 이었다가 음란한 행동을 일삼아 폐위되었는데, 이때 창읍왕의 사(師)로 있던 왕식(王式)도 여러 신하들과 함께 감옥에 갇혀 죽게 되었다. 사건을 다스리던 사자(使者)가 왕식에게 “사(師)라는 자가 어찌 간하는 글을 올리지 않았는가?”라고 하자, 왕식이 대답하기를, “저는 《시경》 305편을 조석으로 왕에게 가르쳤습니다. 충신과 효자를 다룬 시는 왕을 위해서 반복하여 외웠고, 위망(危亡)에 이르고 도를 잃은 임금에 관련된 시는 눈물을 흘리며 왕을 위해 진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간하는 글이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자가 왕식을 감사(減死)하는 것으로 논죄하였다. 《漢書 卷86 王式傳》
[주D-028]동토(童土) 선생 : 윤선거의 둘째 형 윤순거(尹舜擧:1596~1668)이다.
[주D-029]여수(旅酬)의 예 : 제사를 마친 뒤 참석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시며 서로 술을 권하는 의식이다. 《中庸章句 第19章》
[주D-030]조신(朝臣)이 …… 문제 : 북수(北讐)는 청나라 사신을 가리킨다. 1654년(효종5)에 김익희(金益熙)가 도승지에 제수되었는데, 자신은 어머니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사신의 봉인(奉引) 역할을 할 수 없다며 체직(遞職)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를 체직하였고, 또 1656년에는 김익희를 양관(兩館)의 대제학에 임명하면서 청나라에 보내는 문서의 작성은 특별히 다른 관원이 대신하도록 조처해 주었다. 《滄洲遺稿 卷11 辭都承旨疏, 卷17 附錄 行狀, 韓國文集叢刊 119輯》 그러나 이 문제는 김익희만이 아니라 조정 관원들의 거취와 관련해서 거론되는 일이 번다하였으므로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쪽과 사적인 의리보다 공의(公義)가 우선이라는 쪽으로 조정 여론이 갈려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鄭萬祚, 朝鮮 顯宗朝의 私義ㆍ公義 論爭, 韓國學論叢 14집, 國民大學校 韓國學硏究所, 1991》
[주D-031]기해년의 전례(典禮) 문제 : 기해년은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한 해이다. 효종 사후에 인조의 계비(繼妃)인 조 대비(趙大妃)의 복상 기간을 3년으로 할 것인지 기년(期年)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벌어졌던 논쟁이다.
[주D-032]유고(遺稿) : 《명재유고》를 가리킨다. 후손이 편찬한 《연보》의 성격을 감안하여 완칭으로 표기하지 않고 원문대로 표기하였다. 〈별집(別集)〉은 《명재유고》의 〈별집〉이다.
[주D-033]석담(石潭) : 해주(海州) 석담서원(石潭書院)을 가리킨다.
[주D-034]차의(箚疑) : 뒤에 송시열이 편찬한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가리키는 듯하다. 송시열은 이 책을 김수항(金壽恒) 형제, 박세채(朴世采), 윤증 등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토론을 거쳐 엮었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황산서원에 모여 《주자서》를 강론한 것도 《주자대전차의》 편찬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宋子大全 卷25 假注書趙儀徵傳諭後書啓, 韓國文集叢刊 108輯》
[주D-035]무후(武侯)의 일 : 무후는 삼국 시대 촉(蜀)의 제갈량(諸葛亮)이다. 명재가 송시열에게 먼저 보냈던 편지는 문집에 보이지 않지만, 뒤에 나오는 내용으로 보면 제갈량이 최주평(崔州平)과 서원직(徐元直)의 충고를 기꺼이 수용하였던 고사를 인용하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도록 송시열에게 충고한 것으로 짐작된다.
[주D-036]문공(文公)이 …… 바입니다 : 문공은 주희(朱熹)의 시호이다. 주희가 장표(張杓)에게 준 편지에서, 경외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최주평(崔州平), 서원직(徐元直)이 공명(孔明)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의 잘못을 부지런히 지적하게 한다면 천하의 일을 거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던 것을 말한다. 《晦庵集 卷29 答張定叟書》
[주D-037]부지런히 …… 하고 : 최주평과 서원직은 제갈량이 초야에서 지낼 때의 절친한 친구들이다. 제갈량이 훗날 재상이 되었을 때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최주평과 사귀었는데 누차 나의 잘잘못을 말해 주었고, 뒤에 서원직과 사귀었을 때는 힘껏 충고와 가르침을 주었다.” 하였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卷39 董和傳》
[주D-038]때때로 …… 사람 : 장경부(張敬夫)는 장식(張栻), 여백공(呂伯恭)은 여조겸(呂祖謙)으로 모두 주희의 절친한 친구였다. 주희가 유청지(劉淸之)에게 준 편지에, “예전에는 그래도 경부(敬夫)와 백공(伯恭)이 때때로 잘못을 바로잡아 준 덕분에 반성할 수가 있었으나, 지금은 두 벗이 모두 죽어 충고하는 말이 전혀 귀에 들려오지 않네.”라고 한 것을 말한다. 《晦庵集 卷35 答劉子澄書》
[주D-039]양송(兩宋) : 송시열과 송준길을 가리킨다.
[주D-040]정만창(鄭晩昌) : 정보연(鄭普衍:1637~1660)으로,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만창, 부친은 간성 군수(杆城郡守)를 지낸 정양(鄭瀁)이다. 송시열에게 수학하였다. 이 당시 정보연의 묘는 봉화(奉化) 사천리(沙川里)에 있었다. 이로부터 7년 뒤에 제천(堤川)으로 이장하였다. 《宋子大全 卷186 處士鄭君墓誌銘, 韓國文集叢刊 114輯》
[주D-041]노릉(魯陵) :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의 능이다. 단종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로 유배되었고, 다시 서인으로 강등된 채로 죽어서 능호가 없었기 때문에 노릉으로 지칭한 것이다. 1681년(숙종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으며, 1698년에 복위(復位)되어 능호를 장릉(莊陵)으로 정하였다.
[주D-042]사마군실(司馬君實)이 …… 고사 : 스승이 자신의 제자를 천거한 고사이다. 사마군실은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이고, 유기지(劉器之)는 그의 제자 유안세(劉安世)인데, 사마광이 재상이 되어 그를 천거하여 비서성 정자로 삼았던 고사가 있다. 유안세는 매우 강직하여 직언(直言)을 잘하였기 때문에 ‘전상호(殿上虎)’라고 불리었으며, 장돈(章惇) 등 간신의 모함을 받아 영외(嶺外)로 축출되기도 하였으나, 심지(心志)가 매우 확고하여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의 위협에 흔들리지 않았던 인물이다. 《宋史 卷344 劉安世列傳》 《宋元學案 卷20 元城學案》
[주D-043]회옹(晦翁)이 …… 것입니다 : 제때에 물러날 줄 알아야 한다는 주자(朱子)의 가르침에 위배될까 두렵다는 말이다. 주자충(周子充)은 남송(南宋)의 주필대(周必大)로,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으며 일 처리가 분명했던 사람이다. 좌승상으로 있다가 소보(少保)로 승진하고 익국공(益國公)에 봉해졌다. 광종(光宗) 때 그를 미워하는 사람의 탄핵을 입어 좌천되자 사직하고 물러났는데, 주희(朱熹)는 그의 이러한 처사를 높이 평가하고, 동지(同志)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주자충과 같은 수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격려한 바 있다. 《宋史 卷391 周必大列傳》 《朱熹集 卷33 答呂伯恭, 卷35 與劉子澄》
[주D-044]송나라 …… 않았으니 : 유자휘는 송나라 사람이다. 1127년 금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수도 변경(卞京)이 함락되고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이 포로로 끌려간 정강(靖康)의 난리에 부친 유겹이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는데, 유자휘는 부친의 죽음을 애통해하다가 벼슬에 대한 생각을 끊고 무이산(武夷山)으로 들어가 평생 강학에만 힘을 쏟았으며, 계모(繼母)와 형 유자우(劉子羽)를 정성을 다해 섬겼다. 송대의 학자 주희(朱熹)가 이들 형제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마침내 대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宋史 卷193 劉子翬列傳》 《宋元學案 卷43 劉胡諸儒學案》
[주D-045]유씨(劉氏)의 죄인 : 유씨는 유자우(劉子羽)ㆍ유자휘(劉子翬) 형제를 가리킨다. 세상에 나가 능력을 다해 국가를 위해 일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지도 못한다면 동일한 처지에서 바르게 처신했던 유씨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
[주D-046]은졸(隱卒)의 은전 : 임금이 신하의 죽음에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으로, 부친 윤선거에게 내린 은전이다.
[주D-047]제문(祭文) : 원제(原題)는 〈제송곡조상서묘문(祭松谷趙尙書墓文)〉으로, 한국문집총간 136집에 수록된 《명재유고》 권33에 실려 있다.
[주D-048]감회를 기술한 시 : 원제는 〈여자경자서회정수암……(與子敬子恕會淨水庵……)〉으로, 한국문집총간 135집에 수록된 《명재유고》 권2에 실려 있다.
[주D-049]시경(詩經)의 소완(小宛) 구절 :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형제간에 서로 화(禍)를 면하도록 경계하고, 그로 인해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느라 날이 밝도록 잠들지 못하는 내용이 담긴 시이다. 《詩經 小雅 小宛》 중부(仲父) 윤순거(尹舜擧)의 문집을 형제들이 모여 교정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 시를 인용한 것이다.
[주D-050]탄촌(炭村) 권 선생(權先生) : 명재의 장인인 권시(權諰:1604~1672)이다.
[주D-051]분암(墳庵) : 선영(先塋) 근처에 지은 암자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선영 아래의 병사(丙舍)가 아니라 선영을 마주 보는 산기슭에 자리 잡은 정수암(淨水庵)을 가리킨다. 《素谷遺稿 卷3 淨水庵重修記, 韓國文集叢刊 223輯》
[주D-052]매달 과제를 내주고 : 대본에는 ‘日課’로 되어 있으나, 《명재유고》 권31의 〈종중통문(宗中通文)〉에 “10세 이상은 매달 과제를 내주고 30세 이상은 매달 강을 하게 한다.[十歲以上月課 三十以上月講]”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月課’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3]시를 …… 권면하였는데 : 원제는 〈종회우정사(宗會于淨寺)〉로, 《명재유고》 권2에 실려 있다.
[주D-054]상례비요(喪禮備要)를 감정(勘訂)하였다 : 《상례비요》는 본래 신의경(申義慶)이 찬술한 상례에 관련된 초보적인 지침서인데, 뒤에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이 증보(增補)하고 교정한 바 있다. 이때에 와서 명재가 이를 다시 교감하고 정정하여 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D-055]노선생의 시구 : 원제는 〈도파산계상유감(到坡山溪上有感)〉으로, 《노서유고(魯西遺稿)》 권1에 실려 있다.
[주D-056]기휘(忌諱)를 지적한 것 : 예송(禮訟)과 관련하여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 등에 대한 송시열의 처사가 과도했다는 것을 극언(極言)한 부분이다.
[주D-057]후록(後錄) : 《명재연보》의 〈후록〉으로, 중요 사건에 관련된 다른 사람의 상소 등을 모아 놓은 것이다. 모두 2권이다.
[주D-058]한공 교(韓公嶠) : 1556~1627.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앙(士昻), 호는 동담(東潭)이다.
[주D-059]청송당(聽松堂)의 옛터 : 청송당은 성수침(成守琛:1493~1564)이 거처했던 집으로 서울의 백악(白岳) 아래에 있었다. 성수침은 본관이 창녕(昌寧), 자는 중옥(仲玉)이며,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부친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 후에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명재의 조부 윤황(尹煌)이 성혼의 사위가 되므로, 명재에게는 외가 쪽으로 혈연관계가 있다. 청송당은 성혼 이후로 버려진 채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갔던 것을 1668년(현종9) 증손인 성직(成稷), 외손인 윤선거, 윤순거 등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명재는 중수된 청송당을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宋子大全 卷141 聽松堂記, 韓國文集叢刊 113輯》
[주D-060]현조(縣朝) : 현청(縣廳)과 같은 말로, 해당 지방의 관아를 가리킨다.
[주D-061]을사년 …… 만났는데 : 산사(山寺)는 공주(公州) 동학사(東鶴寺)를 가리킨다. 이때 송시열, 이유태, 윤선거 세 사람이 이곳에 모여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연보를 교감하였다. 《宋子大全 附錄 卷5 年譜4, 韓國文集叢刊 115輯》
[주D-062]요사이 …… 어떠한가 : 여윤(驪尹)은 윤휴(尹鑴)를 지칭하는 말로, 윤휴가 젊은 시절 여주(驪州)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송시열은 처음에 윤휴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고 그와 절친하게 교유하였으나, 기해예송(己亥禮訟)에서 윤휴가 서인(西人)의 기년설(期年說)을 반대하고 삼년설을 주장한 이후로 극심하게 반목하여 원수지간이 되었다. 윤선거도 윤휴와 절친한 교분을 맺었는데, 예송 이후에 윤휴가 남인(南人)으로 활약하게 되면서 그와의 관계를 끊었으나 송시열만큼 극단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동학사에서 송시열이 이렇게 물은 것은 윤휴를 소인이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보는 자신의 주장에 윤선거가 전폭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데 대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D-063]첫 번째 …… 것이네 : 송시열이 윤선거의 연제(練祭) 때 지은 제문에, “오직 강설에 대해서는, 생각이 서로 조금 달랐으니, 형이 만약 해에게도, 아울러 관대했다면, 내 마음의 의심이, 한두 마디 말만으로 즉시 풀렸을 게요.[惟是江說 少有未契 兄若於海 竝加原貸 我之疑晦 片言卽解]”라고 쓴 것을 가리킨다. 강(江)은 여강(驪江), 즉 여주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윤휴를, 해(海)는 해남(海南)의 윤선도(尹善道)를 지칭하는 은어이다. 이것은 윤선거가 윤선도를 공격하면서 윤휴는 옹호한 것을 비판한 구절로, 윤휴와 윤선도를 달리 볼 수는 없으므로 윤휴를 용서할 바에는 윤선도도 용서하라는 강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다. 《宋子大全 附錄 卷6 年譜5, 隨箚11》
[주D-064]명도(明道)가 …… 못하고 : 명도는 송나라 정호(程顥)이다. 형서(邢恕)는 본래 정호의 제자로서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 등의 문하에 출입하여 명성이 자자했으나, 뒤에 장돈(章惇) 등 소인과 손잡고 사마광, 여공저 등 원우(元祐) 구신(舊臣)들을 모함하여 궁지에 빠뜨렸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宋史 卷471 姦臣列傳 邢恕》
[주D-065]문정(文定)이 …… 것 : 문정은 송나라 호안국(胡安國)의 시호이고, 진회(秦檜)는 북송 말부터 남송 초기에 걸쳐 28년간 권력을 독점했던 인물이다. 처음에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나라로 끌려갈 때 진회가 따라갔었는데, 몇 년 뒤에 돌아와서 자신을 감시하던 금나라 군사들을 다 죽이고 배를 타고 도망 왔다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명성을 떨치고 재상 자리에 올랐다. 호안국은 평소 진회와 사이가 좋았으므로 그의 이러한 행동을 매우 훌륭하게 여겨 크게 칭찬했는데, 호안국이 죽고 난 뒤 진회가 도리어 금나라와의 관계를 이용해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화의(和議)를 주장하고 악비(岳飛)와 같은 명장을 죽이는 등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宋史 卷473 姦臣列傳 秦檜》 《宋名臣言行錄 別集 卷10 范如圭》
[주D-066]윤보(胤甫)의 …… 것 : 윤보는 시남 유계(兪棨)의 아들 유명윤(兪命胤:1629~1669)의 자(字)이다. 《명재유고》 〈별집〉 권1에 실린 송시열의 편지에 명재의 이 말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유명윤이 송시열을 뵈러 와서, “아무개는 실로 남곤(南袞), 심정(沈貞)과 같은 사람이네. 그의 헌의(獻議)는 비록 짧지만 윤선도의 긴 상소보다 심한 것이었네.”라고 한 윤선거의 말을 전하자, 송시열이 “세상에 정암(靜庵)이 없는데 어찌 남곤, 심정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에게 살심(殺心)이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네. 다행히 주상께서 어질고 명철하셔서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씨도 남지 않았을 것이네.……”라고 응수하였다. 그 뒤에 송시열이 윤선거를 만나서 그 말을 하자, 윤선거가 “내가 어찌 곧장 아무개를 남곤, 심정으로 여겼겠는가. 단지 남곤, 심정의 효시가 되었다는 것일 뿐이었네. 그의 헌의가 윤선도보다 심하였다는 말은 내가 과연 하였네.”라고 하였다. 송시열이 “형의 말은 서로 모순되는 듯하네. 그 말이 이미 윤선도보다 심하였다면 남곤, 심정과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이네.”라고 하여 서로 설전을 벌였다. 뒤에 송시열이 유명윤에게 윤선도와 주고받은 말을 하자, 유명윤이 무안해하면서 “당시에 어른의 말씀이 분명 그러했는데 지금 이렇게 말씀했다고 하니 제가 어떻게 강변하겠습니까.” 하였다. 명재는 송시열이 당시 유명윤이 전했던 말을 사람들에게 퍼뜨림으로써 윤선거의 입장을 곤란하게 했다고 본 것으로 생각된다.
[주D-067]주평(州平)과 …… 없다 : 최주평(崔州平)과 서원직(徐元直)은 제갈량(諸葛亮)이 초야에서 지낼 때의 절친한 친구들이다. 제갈량이 훗날 재상이 되었을 때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최주평과 사귀었는데 누차 나의 잘잘못을 말해 주었고, 뒤에 서원직과 사귀었을 때는 힘껏 충고와 가르침을 주었다.” 하였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卷39 董和傳》
[주D-068]별집(別集) : 《명재유고》의 〈별집〉이다.
[주D-069]상문(相門) : 남인(南人)으로 예송(禮訟)에서 삼년설을 주장하였던 허적(許積)을 가리킨다. 허적은 1664년(현종5) 우의정으로 발탁된 이후 현종조와 숙종 초반에 걸쳐 상신(相臣)으로 재직하였다.
[주D-070]중용(中庸)의 …… 뒤에 : 《중용》의 삼덕(三德)은 지(智), 인(仁), 용(勇)을 가리킨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천하의 달도가 다섯 가지인데 이를 행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군신간, 부자간, 부부간, 형제간, 붕우간의 사귐 이 다섯 가지는 천하의 달도요, 지, 인, 용 이 세 가지는 천하의 달덕이니, 이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天下之達道五 所以行之者三 曰君臣也 父子也 夫婦也 昆弟也 朋友之敎也五者 天下之達道也 智仁勇三者 天下之達德也 所以行之者一也]”라고 하였다. 송시열이 쓴 명(銘)의 앞 단락은, “세상을 등지고도 후회 않는 것, 여기에 깊은 뜻 담겨 있으니, 성인께서 이르기를, 성인만이 능히 할 수 있다 하였네. 성인이 그렇게 일컬은 뜻은, 중용에 의지하여 행한다는 것, 그래서 예로부터 능한 이 적었으니, 그 공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직 지와 인과 용이 있을 뿐이니, 이것이 이름하여 삼덕이라오. 만약 여길 말미암지 않는다 하면, 어떻게 그 경지에 들어가리오. 박학(博學)ㆍ심문(審問)ㆍ신사(愼思)ㆍ명변(明辯), 이것을 지라 하고, 독실히 행하며 놓지 않는 것, 이것이 인이며 용일 뿐이네. 여기에 종사하면, 쏠리지 않고 기울지 않는다네.[遯世不悔 蓋多有茲 聖人而曰 惟聖能之 伊聖所稱 依乎中庸 故民鮮久 何以用功 惟知仁勇 是曰三德 苟不由此 其何能入 學問思辨 是之謂知 篤行不措 仁勇是耳 從事於斯 不流不倚]”라는 내용이다. 《宋子大全 卷179 尹吉甫墓碣銘, 韓國文集叢刊 114輯》
[주D-071]화숙은 …… 뿐이다 : 위공(魏公)은 송나라 장식(張栻)의 아버지 장준(張浚)이다. 고종(高宗) 때 천섬경서제로선무사(川陝京西諸路宣撫使)가 되어 금나라와 맞서 싸웠으나 진회(秦檜)가 화의(和議)를 주장함에 따라 좌천되었고, 효종(孝宗) 때 추밀사(樞密使), 도독강회군사(都督江淮軍事)에 제수되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장군 곡단(曲端)을 등용했다가 뒤에 역심(逆心)을 품었다고 의심하여 옥관(獄官)에게 넘겼는데, 옥관이 가혹하게 다루어 옥사하게 만든 일이 있었으므로 좋지 않은 평을 들었으나, 주희가 지은 그의 행장(行狀)에는 곡단에게 역심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라며 그의 입장을 변론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뒤에 주희는 “예전에 위공의 행장을 지을 때 단지 경부가 베껴 온 사실에만 의거하여 글을 지었는데, 나중에 실록(實錄)을 보니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라며 행장의 내용에 대해서 후회하는 듯한 말을 하였다. 《宋史 卷361 張浚列傳》 《晦庵集 卷95 少師保信軍節度使魏國公致仕贈太保張公行狀》 《朱子語類 卷131》 송시열은, 박세채가 윤선거의 행장을 지을 때 명재가 지은 연보를 토대로 했기 때문에 훌륭한 인물로 극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명재가 부친 윤선거를 지나치게 미화했다고 조롱한 것이다.
[주D-072]송상이 …… 가면서부터 : 송시열이 1674년(현종15)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에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제를 대공복(大功服)으로 주장한 일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던 일을 말한다.
[주D-073]시를 주어 이별하였는데 : 원제는 〈증별박생사원(贈別朴甥士元)〉으로, 《명재유고》 권2에 실려 있다.
[주D-074]진서산(眞西山) : 송대의 학자 진덕수(眞德秀)로, 《심경(心經)》의 편저자이다.
[주D-075]황돈(篁墩) : 명나라 정민정(程敏政)으로, 진덕수(眞德秀)가 편찬한 《심경》에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발췌하고 보완하여 《심경부주(心經附註)》를 편찬하였다.
[주D-076]기자량(奇子亮) : 기정익(奇珽翼:1627~1690)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자량, 호는 송암(松巖)이며, 부친은 진사 진탁(鎭鐸)이다. 기대승(奇大升)의 5대손이며, 제릉 참봉(齊陵參奉), 효릉 참봉(孝陵參奉) 등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호남의 장성(長城), 영광(靈光)에서 평생을 보냈다. 《遜齋集 卷8 松巖奇公行狀, 韓國文集叢刊 171輯》
[주D-077]이통기국(理通氣局)의 논의 : 이(理)는 하나로 통해 있지만 기(氣)는 국한되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이기일원론적 학설이다.
[주D-078]갑인년 …… 변하였고 : 1674년(현종15)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면서 숙종 즉위 후 남인(南人) 정국이 들어선 것을 가리킨다.
[주D-079]토신(土神)에게 …… 있다 : 원제는 〈유봉신거제토신문(酉峯新居祭土神文)〉으로, 《명재유고》 권33에 실려 있다.
[주D-080]시를 지어 전송하였는데 : 원제는 〈정산역려별박화숙(定山逆旅別朴和叔)〉으로, 《명재유고》 권2에 실려 있다.
[주D-081]예설(禮說) : 〈갑인설(甲寅說)〉을 가리킨다. 이유태는 본래 1차 복제(服制) 논의에서 송시열과 같이 기년복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갑인년(1674, 현종15)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이유태가 〈갑인설〉을 지어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당시 이유태는 이것을 송시열에게 보여 주면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 달라고 청하였고, 송시열은 내용 가운데 일부를 수정하여 돌려주었다. 그 뒤에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고 송시열이 귀양을 가기에 이르렀는데, 송시열로부터 예론에 대한 종래의 견해를 뒤집어 화를 모면하려 했다는 지목을 받고 절교당하기에 이르렀다. 명재의 이 편지는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草廬集 卷7 甲寅說, 年譜 卷3, 韓國文集叢刊 118輯》 《宋子大全 附錄 卷7 年譜6, 韓國文集叢刊 115輯》
[주D-082]저들이 말한 바 : 1차 예송에서 삼년복을, 2차 예송에서 기년복을 주장한 윤휴 등의 주장을 가리킨다.
[주D-083]이번의 …… 듯하다 : 양자 간의 시비에서 송시열이 불리할 듯하다는 말로, 송시열에게 잘못이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주역(周易)》 〈송괘(訟卦) 괘사(卦辭)〉에, “송은 성실함이 있으나 막혀서 두려우니, 중도(中道)에 맞으면 길하고 끝까지 함은 흉하다.[訟 有孚窒惕 中吉終凶]”라고 한 데서 나온 것이다.
[주D-084]공명(孔明)이 …… 않고 : 최주평(崔州平)과 서원직(徐元直)은 제갈량(諸葛亮)이 초야에서 지낼 때의 절친한 친구들이다. 제갈량이 훗날 재상이 되었을 때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최주평과 사귀었는데 누차 나의 잘잘못을 말해 주었고, 뒤에 서원직과 사귀었을 때는 힘껏 충고와 가르침을 주었다.” 하였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卷39 董和傳》
[주D-085]회옹(晦翁)이 …… 생각했듯이 : 경부(敬夫)는 장식(張栻), 백공(伯恭)은 여조겸(呂祖謙)으로 모두 주희(朱熹)의 절친한 친구였다. 주희가 유청지(劉淸之)에게 준 편지에, “예전에는 그래도 경부와 백공이 때때로 잘못을 바로잡아 준 덕분에 반성할 수가 있었으나, 지금은 두 벗이 모두 죽어 충고하는 말이 전혀 귀에 들려오지 않네.”라고 하였다. 《晦庵集 卷35 答劉子澄書》
[주D-086]집사(執事)가 …… 썼으므로 : 박세채가 쓴 윤선거의 행장에, “용모가 장엄하여 털끝만큼도 태만한 기색이 없었으니, 바라보면 너무도 높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태산 교악과 같은 기상을 알 수 있었다.[容貌莊毅 無一毫惰慢之色 望之輒知爲巖巖喬岳底氣象]”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魯西遺稿 附錄下 成均生員贈通政大夫吏曹參議魯西先生尹公行狀》
[주D-087]송나라의 …… 있었으니 : 송나라의 제현(諸賢)은 정호(程顥)와 호안국(胡安國)을 가리킨다. 송대의 명상으로 꼽히는 호안국(胡安國)은 평소 진회(秦檜)와 사이가 매우 친밀했을 뿐만 아니라 진회가 집정(執政)하면 크게 볼만할 것이라고 칭찬하기까지 했었으므로 한 말이다. 《宋史 卷473 姦臣列傳 秦檜》 이 밖에도 정자(程子)의 문인인 양시(楊時), 윤돈(尹焞) 등도 채경(蔡京)과 진회가 권력을 잡았을 때 벼슬한 일이 있었다.
[주D-088]오늘의 이 일 : 윤선거가 윤휴의 인품과 학식을 인정하고 그와 교제했던 일을 말한다.
[주D-089]자가(自家) : 송시열을 가리킨다.
[주D-090]맹자(孟子)와 …… 말 : 박세채가 윤선거의 행장에 ‘태산 교악’이라는 글자를 쓴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송나라 정이(程頤)가 맹자를 “태산처럼 드높은 기상을 지닌 분이었다.[泰山巖巖之氣象也]”라고 평하고, 육구연(陸九淵)이 주희(朱熹)를 “태산 교악과 같은 사람이다.[如泰山喬嶽]”라고 평한 것을 가리킨다. 《二程遺書 卷5》 《心經 後論》
[주D-091]도요새와 …… 버티고 : 쌍방이 양보하지 않고 버티다가 제삼자가 이득을 얻게 만든다는 어부지리(漁夫之利)의 고사로, 여기서는 서인(西人)끼리 다툼으로써 남인(南人)들에게 이득이 돌아가게 만든다는 말이다. 대본에는 ‘’로 되어 있으나, 문맥이 통하지 않으므로 《명재유고》 〈별집(別集)〉 권1에 실린 원 편지에 의거하여 ‘鷸’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92]윤가교(尹可敎) : 1654~1677. 명재의 동생 윤추(尹推)의 둘째 아들로, 명촌(明村) 나양좌(羅良佐)의 사위이다.
[주D-093] : 대본에는 ‘指’로 되어 있으나, 박세채의 원 편지에 의거하여 ‘旨’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明齋遺稿 別集 卷1 與懷川書, 韓國文集叢刊 136輯》 《南溪集 外集 卷2 答尹子仁書, 韓國文集叢刊 141輯》
[주D-094]선명(先銘) : 윤선거의 묘갈명을 말한다.
[주D-095]위로는 …… 종역(宗易)하더라도 : 소종(小宗)의 집안에서는 시조로부터 5대를 넘기면 종가(宗家)로서의 지위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위로 집안의 시조가 되는 사람이 바뀌는 것이 조천(祖遷)이고, 아래로 종족 구성원이 바뀌는 것이 종역이다. 《禮記 喪服小記》
[주D-096]글을 …… 드러냈다 : 원제는 〈종중완의(宗中完議)〉로, 《명재유고》 권31에 실려 있다.
[주D-097]감회를 …… 있다 : 원제는 〈청림소사제생래회……(靑林蕭寺諸生來會……)〉로, 《명재유고》 권3에 실려 있다.
[주D-098]계빈(戒賓) : 관례를 행할 때 예를 주관하는 빈(賓)이 되어 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또 친지들에게 관례에 참석해 주기를 널리 청하는 의미도 있다. 《儀禮 士冠禮》 《家禮 冠禮》
[주D-099]글을 지어 권면하였다 : 원제는 〈박태한자교백설(朴泰漢字喬伯說)〉로, 《명재유고》 권31에 실려 있다.
[주D-100]갑자년 : 송시열의 제자 최신(崔愼)이 상소하여 배사론(背師論)을 제기한 해이다. 자세한 내용은 숭정 57년 조에 자세히 보인다.
[주D-101]언결(諺訣) : 박태보가 명재에게 보낸 편지의 별지(別紙)에서 《주역언해(周易諺解)》의 오류를 들고 이렇게 고치는 것이 옳을 듯하다며 자신의 견해를 개진한 뒤 명재의 견해를 물은 것으로 볼 때, 《주역언해》를 가리키는 듯하다. 《定齋集 卷9 上舅氏明齋先生書, 韓國文集叢刊 168輯》
[주D-102]남헌(南軒)이 …… 뜻 : 남헌은 송나라 장식(張栻)이다. 장식이 《논어》와 《맹자》에서 인(仁)에 대해 말한 내용들을 뽑아서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을 지었던 것을 말한다. 《南軒集 卷14 洙泗言仁序》
[주D-103]조정 분위기가 일신(一新)되었다 :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축출되고 서인(西人)이 정권을 잡은 것을 말한다.
[주D-104]곤액(困厄)을 …… 때였으므로 : 현종 말에 발생한 2차 예송(禮訟)에서 서인(西人)이 패배하면서 송시열이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장기(長鬐)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다시 거제도(巨濟島)로 이배(移配)되는 등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던 것을 말한다.
[주D-105]경신년에 …… 되어서는 : 1680년(숙종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하고, 송시열이 유배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로 다시 조정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
[주D-106]주 부자(朱夫子)가 …… 설(說) : 사공(事功)을 이루기 위해서 왕도(王道)와 패술(覇術)을 겸하여 쓰고 의리(義理)와 사리(私利)를 함께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송나라 진량(陳亮)이 이학(理學)의 공리공담을 반대하고 사공과 실질적인 효용을 중시한 것에 대해서, 주희(朱熹)가 “이것은 사공을 위해서는 원칙을 무시한 채 왕도와 패술을 겸하여 쓰고 의리와 사리를 함께 행해야 한다는 말이다.”라고 비판하였던 말이다. 《晦庵集 卷36 與陳同甫書》 명재는 송시열이 정치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적한 것이다.
[주D-107]은혜가 …… 한비(韓非) : 신불해(申不害)와 한비는 전국 시대 사람으로 법가(法家)에 속하는 인물이다. 법가는 법률을 숭상하고 형벌을 엄하게 하여 법치(法治)를 통한 부국강병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유가(儒家) 쪽에서는 각박하고 은혜가 적은 정치로 평가한다.
[주D-108]도요새와 …… 버티고 : 쌍방이 양보하지 않고 버티다가 제삼자가 이득을 얻게 만든다는 어부지리(漁夫之利)의 고사로, 여기서는 서인(西人)끼리 다툼으로써 남인(南人)들에게 이득이 돌아가게 만든다는 말이다. 대본에는 ‘’로 되어 있으나, 문맥이 통하지 않으므로 《명재유고》 〈별집(別集)〉 권1에 실린 원 편지에 의거하여 ‘鷸’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109]선공(宣公) : 당(唐)나라 육지(陸贄)의 시호이다.
[주D-110]얼굴을 …… 의리 : 스승을 섬기는 도리로서, 스승에게 잘못이 있을 때 얼굴을 대 놓고 극간(極諫)을 해도 안 되지만 그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숨겨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반면 부모를 섬기는 데는 그 허물을 숨기는 일이 있을지언정 대 놓고 극간해서는 안 되고, 임금을 섬기는 데는 대 놓고 극간하는 일이 있을지언정 그 허물을 덮어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
[주D-111]비간(比干)이 …… 일 : 죽음을 각오하고 간언하겠다는 말이다. 비간은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의 숙부이다. 주가 음란무도한 행동을 일삼자 미자(微子)는 떠나가고 기자(箕子)는 미치광이처럼 행동했는데, 비간은 “신하가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지 않을 수는 없다.”며 간하였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史記 卷3 殷本紀》 《論語 微子》
[주D-112]왕촉(王蠋)이 …… 뜻 : 왕촉은 전국(戰國) 시대 제(齊)나라의 현인(賢人)으로, 왕에게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러나 농사지으며 살았다. 연(燕)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쳐서 함락할 때 왕촉이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장수로 삼고 만가(萬家)의 고을을 봉해 주겠다.”라고 제의했으나, 왕촉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녀(貞女)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며 거절하고 목매어 죽었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주D-113]중용(中庸) 구경(九經) : 나라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떳떳한 법칙으로, 몸을 닦는 것[修身], 현인을 높이는 것[尊賢], 친척을 친히 하는 것[親親],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여러 신하들의 마음을 헤아려 살피는 것[體群臣],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子庶民], 백공들을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 지방 사람을 회유하는 것[柔遠人], 제후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懷諸侯]이 그것이다. 《中庸章句 第20章》
[주D-114]서공 봉령(徐公鳳翎) : 자는 중거(仲擧), 호는 경휘(景翬)이다. 호남 사람이며, 전라도 남평(南平)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윤선거, 김수항(金壽恒), 박세채 등과도 교유하였으나 인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주D-115]조사(詔使) 황공(黃公)과 왕공(王公) : 1582년(선조15) 황자(皇子)의 탄생을 알리는 조서를 반포하러 왔던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 황홍헌(黃洪憲)과 공과 우급사중(工科右給事中) 왕경민(王敬民)이다. 《宣祖實錄 15年 9月 7日》
[주D-116]한(漢)나라 …… 없어 : 한나라 관원의 위의는 한나라 관리의 복식과 전례 제도(典禮制度) 등을 뜻한다. 《後漢書 卷1 光武帝紀下》 여기서는 명나라가 멸망하여 성대한 명나라 사행(使行)의 위의를 다시 볼 수 없게 된 것을 한탄한 말이다.
[주D-117]조공 득중(趙公得重) : 1637~1711.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사위(士威)이며, 조부는 지중추부사 조위한(趙緯韓), 부친은 군수 조억(趙億)이다. 윤선거의 문인으로, 1687년(숙종13) 송시열이 상소하여 윤선거를 공척(攻斥)하였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신구(伸救)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明齋遺稿 卷36 翊衛司翊贊趙公墓表, 韓國文集叢刊 136輯》
[주D-118]품계를 건너뛰어 승진시키고 : 종3품인 집의(執義)에서 정3품 당하(堂下)를 건너뛰어 정3품 당상(堂上)인 통정대부 호조 참의로 특진된 것을 말한다.
[주D-119]처조카 권생 이정(權生以鋌) : 명재의 장인 권시(權諰)의 손자이자 권시의 둘째 아들 유(惟)의 아들이다. 명재의 부인은 권유(權惟)의 동생으로, 권이정에게는 고모가 된다.
[주D-120]목천(木川)의 일 : 윤선거를 목천의 서원에 배향할 때, 목천의 유생들이 “강도(江都)에서 청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었던 윤선거를 서원에 배향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의 통문을 돌렸다는 말이 송시열에게서 나왔던 사건이다. 다음 조항에 설명이 나온다.
[주D-121]동춘(同春)이 …… 말 : 기관(機關)은 권모술수와 같은 말이다. “모두가 기관이다.[都是機關]”라는 말에 대해서는 송시열과 명재 쪽의 주장이 다르다. 명재 후손들의 주장은, 당시 이유태가 송시열에게 준 장문 편지에서, 송준길이 송시열과 이유태 두 사람을 두고 “모두가 기관이다.”라고 하면서 특히 송시열이 더 심하다고 지목했다는 것이다. 한편 송시열 쪽에서는, 1669년(현종10) 동춘당 송준길과 민정중(閔鼎重)의 손자가 같은 해 사마시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는 잔치 석상에서 송준길이 송시열에게 “언제 행장을 재촉하겠는가?”라고 묻자, 송시열이 “내가 어찌 행장을 재촉할 일이 있겠는가.” 하였고, 송준길은 “모두가 기관이구먼.”이라 하여 둘이 함께 웃었다고 한다. 즉 송시열이 귀향하려는 것을 알아챈 송준길이 언제 떠날 것인지를 물었는데, 송시열이 날짜를 미리 정하면 국왕으로부터 관학(館學) 유생들까지 모두 만류하고 나설 것을 염려하여 날짜를 미리 정하지 않고 기회를 보아 떠나기로 작정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농담을 했다는 것이다. 송준길의 이 말을 놓고 송시열과 명재의 사후에까지 양쪽 문인과 후손들 사이에서 공방이 펼쳐졌다. 《宋子大全 隨箚 卷6, 韓國文集叢刊 116輯》 《芝村集 卷3 上東宮辭大司憲仍爲師門辨誣書, 韓國文集叢刊 170輯》 《素谷遺稿 卷14 黃江問答辨》
[주D-122]초려(草廬)가 …… 말 : 이유태가 〈갑인설(甲寅說)〉 문제로 송시열과 소원해진 뒤에 송시열을 비판한 말인 듯하나, 이유태의 말이나 글이 《명재유고》와 《초려집(草廬集)》에 모두 보이지 않아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다.
[주D-123]함장의 …… 못하고 : 갑인년(1674, 현종15)에 목천 유생들이 통문을 보냈다는 말이 송시열과 그 문하에서 나오자 명재가 말의 출처를 캐물었는데, 송시열이 자신이 한 말이라고 하며 알려주지 않다가 또 허황(許璜)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라고 하였으나, 명재는 송시열의 뜻을 알 수 없어서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明齋遺稿 別集 卷3 答朴和叔兼示羅顯道書, 韓國文集叢刊 136輯》 그런데 이 사건은 명재 쪽과 송시열 쪽의 주장이 다르다. 명재 쪽의 주장을 보면, 송시열은 통문에 관한 말의 출처를 이상(李翔)이 물었을 때는 유수방(柳壽芳)에게 들었다고 하고, 목천 사람들이 물었을 때는 자신이 한 말이라고 하고, 명재가 물었을 때는 허황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라고 하고, 아들 송기태(宋基泰)가 물었을 때는 이유태에게 들었다고 하는 등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고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명재 쪽에서는 이 때문에 송시열이 윤선거를 폄하하기 위해서 말을 조작했다는 의심을 했던 듯하다. 한편 송시열 쪽의 주장을 보면, 당시 이 통문 사건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상이 목천의 서원장으로 있었으므로 송시열이 이 일을 들어 목천의 좋지 않은 사습(士習)을 지적하고 우려를 표했을 뿐이라고 한다. 서원은 목천의 도동서원(道東書院)인 듯하다. 《明齋年譜 後錄 卷2 前持平李世德疏》 《遜齋集 卷7 打遇問答》
[주D-124]의문점을 …… 일 : 명재가 권이정에게 송시열의 병통을 말하고, “내가 함장에게 한 번 질정하고자 한 지 오래지만 정의가 이미 막혀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라고 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125]강도부노불합향사(江都俘奴不合享祀) : ‘강도의 포로는 서원에 향사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격하하는 말이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될 때 윤선거가 순절하지 않고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며 서원 향사를 반대했다는 것이다.
[주D-126]숭품(崇品) : 종1품의 품계를 말한다.
[주D-127]정자(程子)의 …… 설명함으로써 : 《주역》 〈고괘(蠱卦) 상구(上九)〉에 “왕후를 섬기지 않고 그 일을 고상히 한다.[不事王侯 高尙其事]”라고 하였는데,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선비가 세상에 나가 임금을 섬기지 않고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는 경우를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즉, 도덕을 갖추고도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고결하게 스스로를 지키는 경우, 만족한 데서 그치는 도리를 알고 물러나서 스스로를 보존하는 경우, 자신의 능력과 분수를 헤아리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는 경우, 청렴함과 고결함으로 스스로를 지켜 천하의 일을 좋게 여기지 않고 홀로 그 몸을 깨끗이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정이는 또 “이들은 비록 처한 바의 대소(大小)와 득실(得失)은 있어도 모두 진퇴(進退)가 도(道)에 부합하는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주D-128]삼척(三戚)의 …… 것 : 삼척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삼척은 세 외척으로, 현종의 장인인 청풍 김씨(淸風金氏) 가문, 숙종의 장인인 광산 김씨(光山金氏)와 여흥 민씨(驪興閔氏) 가문을 가리킨다.
[주D-129]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 우윤 : 종2품에 해당하는 품계와 관직이다.
[주D-130]변고에 대처하는 도리 : 송시열에 대한 사제지간의 의리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박세채는 “임금이 신하의 진언(進言)을 받아들이지 않고 죄를 주거나 관직에서 내친다고 해도 신하 된 자는 군신 간의 의리를 폐해서는 안 되고, 스승이 제자의 질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거나 멀리한다 해도 제자 된 자는 사제 간의 의리를 폐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명재에게 송시열에 대한 사제 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南溪集 卷29 與尹子仁書, 韓國文集叢刊 139輯》
[주D-131]최신(崔愼) : 1642~1708. 본관은 회령(會寧), 자는 자경(子敬), 호는 학암(鶴菴)이며, 송시열의 문인이다. 송시열이 갑인년(1674, 숙종 즉위년)의 제2차 예송(禮訟)에서 패하고 유배되었을 때 올린 유필명(柳弼明)의 상소를 작성한 죄로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풀려나와 준원전 참봉(濬源殿參奉), 사옹원 봉사, 사옹원 직장 등을 역임하고, 1689년 기사환국으로 광양에 유배되었다가 1694년에 풀려나와 광주(廣州)에 은거하였다.
[주D-132]송상의 …… 갔는데 :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宋淳錫)은 박세채의 사위이다. 그가 이 편지를 몰래 베껴서 송시열에게 보였으므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D-133]박세채가 …… 고사(古事) : 박세채가 명재를 변호하면서, 제자가 스승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거나 의심을 품었던 일은 예전에도 있었고, 또 그것이 큰 잘못은 아니라는 취지로 든 고사이다. 박세채는 정치를 하게 되면 명분부터 바로잡겠다는 공자(孔子)의 말에 대해서 자로(子路)가 우활하다고 탄식했던 일, 정이(程頤)의 〈역전서(易傳序)〉에 “역은 변하는 것이니, 때에 따라 변하여 도를 따르는 것이다.[易變易 隨時變易以從道也]”라고 한 것을 두고 그 제자 곽충효(郭忠孝)가 “역이 바로 도인데 또 어떻게 도를 따르겠는가.”라고 했던 일, 김굉필(金宏弼)이 스승 김종직(金宗直)에 대해서 약간의 의구심을 보였던 일 등을 예로 들었다. 《明齋年譜 後錄 卷1 護軍朴世采疏》
[주D-134]진동(陳東)과 …… 기약하였으니 : 윤선거가 청(淸)나라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목숨을 바치기로 기약했다는 말이다. 진동은 송(宋)나라 사람으로, 흠종(欽宗) 때 금(金)나라의 침략에 대항하여 척화론(斥和論)을 주창한 이강(李綱)이 파직당하자 유생 수만 명을 이끌고 글을 올려 복직하게 하였으며, 고종(高宗) 때 이강이 조정에서 떠나게 되자 또 글을 올려 유임(留任)시키기를 청하였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당했다. 《宋史 卷455 陳東列傳》 북지왕(北地王) 심(諶)은 북지왕에 봉해졌던 촉한(蜀漢) 후주(後主)의 아들 유심(劉諶)으로, 후주가 위(魏)나라에 항복하자 유심이 먼저 처자(妻子)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三國志 卷33 蜀書3 後主列傳》 윤선거가 1636년(인조14) 태학(太學)의 소두(疏頭)가 되어 후금(後金)의 사신을 목 베고 화의(和議)를 배척할 것을 상소한 일이 있었는데, 뒤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을 때 올린 상소에서 “처음에는 망녕되이 진동처럼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또 병자호란 때 강도(江都)에서 동지들과 성을 지키다가 섬이 함락되기에 이르자 북지왕 심처럼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다짐했었다고 한다. 《魯西遺稿 卷3 辭進善疏, 卷4 太學請斬虜使疏, 附錄 年譜》 《宋子大全 附錄 卷19 記述雜錄, 韓國文集叢刊 115輯》
[주D-135]임금을 …… 나누었다 : 효종의 사후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제 문제로 벌어진 예송에서, 윤휴가 삼년복을 주장하며 기년복(期年服)을 주장한 송시열의 사종설(四種說)을 공격한 말이다.
[주D-136]대로(大老) : 송시열을 지칭한 말이다.
[주D-137]의서(擬書) : 1681년(숙종7)에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썼다가 보내지 않은 편지를 지칭한다.
[주D-138]북인(北人)의 상소 : 최신(崔愼)의 상소로, 최신의 본관이 회령(會寧)이기 때문에 북인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주D-139]좌계(左契)를 …… 것 : 좌계는 둘로 나눈 부신(符信) 가운데 왼쪽의 것으로 좌권(左券)과 같은 뜻인데, 여기에서는 명확한 증거를 뜻한다. 즉 자신이 송시열에게 성심을 다해 충고를 해도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기 위해서 편지를 보낸다는 말이다.
[주D-140]양산(楊山) : 박세채를 가리킨다. 그가 살고 있던 지명에서 나온 말이다.
[주D-141]주 부자(朱夫子)의 …… 것이니 :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은 직간으로 여러 차례 좌천을 당했던 사람으로, 승상 여이간(呂夷簡)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번은 황제 앞에서 여이간과 서로 공박하다가 두 사람 모두 좌천되었는데, 나중에 여이간이 다시 재상이 된 뒤 범중엄을 발탁하였고 범중엄도 그를 받아들여 힘을 합해 국사를 해결해 나갔다. 범중엄이 죽은 뒤 구양수(歐陽脩)가 그의 비문에 두 사람이 만년에 원한을 풀었다고 썼는데, 그 아들 범순인(范純仁)은 자신의 아버지가 여이간과 화해한 적이 없는데 이렇게 쓴 것은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비문에서 그 구절을 빼 버렸다. 주희(朱熹)는 이에 대해서, 범순인은 구양수에게 부친의 진심을 자세히 아뢰고 그 처분을 따라야 했고, 만약 끝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경우에는 의리에 입각하여 구양수와의 관계를 끊었어야 옳다는 견해를 밝혔다. 《晦庵集 卷38 答周益公書》
[주D-142]타우(打愚)로 …… 것 : 타우는 이상(李翔:1620~1688)의 호로,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운거(雲擧)이다. 호향(互鄕)은 풍속이 좋지 않아 함께 선(善)을 말하기 어려웠던 중국의 고을 이름이다. 《論語 述而》 송시열은 목천(木川)을 호향에 견주어, 이상이 목천의 서원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목천의 습속이 좋지 않은 것을 우려하여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목천의 일은 윤선거를 목천의 서원에 배향할 때, 목천의 유생들이 “강도(江都)에서 청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었던 윤선거를 서원에 배향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의 통문을 돌렸다는 말이 송시열에게서 나왔던 사건이다. 《명재연보》 권1 숭정 55년 조에 보인다.
[주D-143]범 충선공(范忠宣公)이 …… 일 : 범 충선공은 송나라 범순인(范純仁)이고, 구양공은 범순인의 아버지 범중엄(范仲淹)과 절친했던 구양수(歐陽脩)이다. 범 충선공이 구양공에게 하지 못했던 일은 관계를 끊겠다고 통보하는 일이다. 범중엄은 직간으로 여러 차례 좌천을 당했던 사람으로, 승상 여이간(呂夷簡)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번은 황제 앞에서 여이간과 서로 공박하다가 두 사람 모두 좌천되었는데, 나중에 여이간이 다시 재상이 된 뒤 범중엄을 발탁하였고 범중엄도 그를 받아들여 힘을 합해 국사를 해결해 나갔다. 범중엄이 죽은 뒤 구양수가 그의 비문에 두 사람이 만년에 원한을 풀었다고 썼는데, 그 아들 범순인은 자신의 아버지가 여이간과 화해한 적이 없는데 이렇게 쓴 것은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비문에서 그 구절을 빼 버렸다. 주희(朱熹)는 이에 대해서, 범순인은 구양수에게 부친의 진심을 자세히 아뢰고 그 처분을 따라야 했고, 만약 끝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경우에는 의리에 입각하여 구양수와의 관계를 끊었어야 옳다는 견해를 밝혔다. 《晦庵集 卷38 答周益公書》 여기에서는 송시열에게 절교를 통보하는 것을 말한다.
[주D-144]고(故) 김 상서(金尙書)의 …… 지적하였는데 : 김 상서는 이조 판서를 지낸 김익희(金益熙:1610~1656)이다. 김익희의 동생 김익겸(金益兼)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될 때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있다가 분신자살하였는데, 김익겸의 분신이 윤선거의 선동에 의한 것이었으며, 또 윤선거가 그 아내를 다그쳐서 자살하게 만들었다 해서 그를 ‘잔인한 사람[忍人]’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송시열이 이희조(李喜朝)에게 준 편지에서 김익희의 이 말을 거론하였기 때문에 명재는 송시열이 악의적으로 근거 없는 말을 퍼뜨렸다고 의심한 것이다. 《宋子大全 卷111 隨箚10, 附錄 卷10 年譜9》 《明齋遺稿 別集 卷4 答懷川書, 韓國文集叢刊 136輯》 ‘인인(忍人)’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년 조에 나오는 말인데, 《주소(注疏)》에는 “능히 불의(不義)를 참고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주D-145]모인(某人)이 …… 말 : 모인은 윤휴이다. 윤휴가, 자신이 윤선거에게 절교당했다는 말을 듣고 버럭 성을 내면서 “강도(江都)의 일에 대해서 내가 먼저 이미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애써 종유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숭정 47년 조에 보인다.
[주D-146]태중(泰仲) : 송시열의 양자 송기태(宋基泰)의 초자(初字)이다.
[주D-147]춘추(春秋)와 …… 말 : 부모의 원수를 반드시 갚는다는 말이다.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아버지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는다.[父之讎 弗與共戴天]” 하였고, 《춘추》에도 부모의 원수를 반드시 갚는 것을 정도로 삼았다.
[주D-148]동기(同氣)가 …… 생각하여 :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될 때 자신의 아내를 자살하게 만들었는데, 김익희의 처남이 그 여동생을 종용하여 자진하게 한 것은 윤선거의 행동을 보고 난리 중에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宋子大全 卷111 隨箚10, 附錄 卷10 年譜9》
[주D-149]사설(邪說)을 …… 의리 : 바르지 못한 학설을 물리치고 편벽된 행실을 막아 성인의 도를 보호하려는 뜻이다. 맹자가 “인심을 바로잡아 사설을 종식하고 편벽된 행실을 막고 음탕한 말을 추방하여 세 성인을 계승하려 한다.”라고 하였는데, 양웅(揚雄)은 “옛날에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 정도(正道)를 막았는데, 맹자가 말하여 물리쳐서 훤하게 열어 놓았다.”라고 평가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孟子集註 序說》
[주D-150]선장에게 …… 까닭이네 : 송나라 때 왕안석(王安石)이 〈잔국(殘菊)〉이라는 시에서 국화가 땅에 가득 떨어진 것으로 묘사하였는데, 구양수(歐陽脩)가 장난스럽게 국화는 봄꽃과 달라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이 일로 두 사람 사이에 논쟁이 붙었던 것을 두고 “좌우로 검을 차고 피차가 서로 웃는다.[左右佩劍 彼此相笑]”고 하여 사물에 대한 견해 차이로 악의 없는 토론을 펼쳤던 것을 표현하였다. 《古今事文類聚 後集 卷29 夏月佛頂菊》 송시열 자신과 윤선거가 윤휴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대립했음을 드러낸 말이다.
[주D-151]윤휴가 …… 후에는 : 1680년(숙종6) 경신환국으로 서인 정권이 들어선 뒤에 윤휴가 자전(慈殿)을 조관(照管)하라고 말했다는 것, 체부(體府)의 설치를 청했다는 것, 허견(許堅)ㆍ복창군(福昌君)과 친했다는 것 등의 이유로 국문을 받고 사사되었다. 《肅宗實錄 6年 5月 15日》
[주D-152]유원규(庾元規)가 …… 일 : 유원규는 진(晉)나라 명목황후(明穆皇后)의 오빠 유량(庾亮)으로, 원규는 그의 자이다. 유량은 본래 소준(蘇峻)과 사이가 좋고 도간(陶侃)과는 소원하였는데, 성제(成帝) 때 소준이 반역을 모의하자 도간에게 도움을 구하여 소준을 토벌하였다. 《晉書 卷73 庾亮列傳》 여기에서는 송시열이, 유량이 역적 소준을 토벌할 때 도간의 도움을 청했던 것처럼, 명재가 윤휴의 죄를 드러내어 밝히고 송시열 자신에게 승복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주D-153]타우(打愚)의 음양론(陰陽論) : 이상(李翔)의 상소에서 군자와 소인을 양(陽)과 음(陰)에 비유하고, 윤휴, 허목(許穆) 등을 소인으로, 명재 등을 이들의 여당(餘黨)으로 암시하였던 것을 말한다. 《打愚遺稿 卷3 進言疏, 續集 卷4 事蹟, 韓國文集叢刊 124輯》
[주D-154]비호하는 뜻 : 윤휴를 감싸 주려는 뜻을 말한다.
[주D-155]병진년 : 명재가 장기(長鬐)에 유배되어 있는 송시열을 찾아가 만난 해이다.
[주D-156]귀신을 잔뜩 실은 수레 :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없는 잘못을 있는 것처럼 본다는 뜻으로, 근거 없이 만들어 낸 허황된 말을 의미한다. 《周易 睽卦》
[주D-157]북소(北疏) : 최신(崔愼)의 상소로, 최신의 본관이 회령(會寧)이기 때문에 북소라고 지칭한 것이다.
[주D-158]화변(禍變)을 당한 일 : 명재의 모친 이씨(李氏)가 강화(江華)에서 자결한 일을 말한다.
[주D-159]물가에 …… 것이네 : 송시열 자신은 알 바 아니라는 말이다. 물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물가를 한수(漢水)로 보는 것이다. 춘추 시대에 제후(齊侯)가 초(楚)나라를 토벌하자 초나라에서 제나라 군중(軍中)으로 사자를 보내어 무엇 때문에 침략했는지를 물었다. 제나라의 관중(管仲)이 “초나라에서 포모(包茅)를 바치지 않으므로 술을 거를 수 없어 천왕(天王)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옛날에 소왕(昭王)이 남방을 순수(巡狩)하다가 돌아오지 못하였다.”라고 하며, 두 가지 죄를 묻기 위해서 왔다고 하자, 초나라 사자가 “공물을 바치지 않은 것은 우리 임금의 죄이니 감히 바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나 소왕이 돌아가지 못한 것은 물가에 가서 물어보시오.”라고 하였다. 즉 공물을 바치지 않은 데 대한 문책은 받아들이겠지만, 소왕이 돌아가지 못한 것은 당시 한수가 초나라의 땅이 아니었으므로 문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春秋左氏傳 僖公4年》 두 번째는 물가를 김익희로 보는 것으로, 김익희의 호가 ‘푸른 물가’라는 뜻의 ‘창주(滄洲)’인 데서 나온 말이다. 즉 그 문제는 김익희 집안에 물어봐야 할 문제이지 자신은 알 바 아니라는 것이다.
[주D-160]오(吳)나라의 …… 뜻 : 아몽(阿蒙)은 삼국 시대 여몽(呂蒙)을 친근하게 부른 말이다. 손권(孫權)이 여몽에게 “그대는 지금 중요한 일을 관장하고 있으니 응당 학문에 힘써서 식견을 넓혀야 할 것이다.”라고 충고하였는데, 여몽이 그때부터 부지런히 독서하여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 후에 노숙(魯肅)이 여몽을 찾아가서 담론하였는데 번번이 여몽에게 굴복을 당하자, 노숙이 여몽의 등을 두드리면서 “나는 그대가 일개 무골(武骨)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학식도 뛰어나서 이미 예전의 오나라의 아몽이 아닐세그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몽이 “선비는 이별한 지 3일이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합니다.” 하였다. 《三國志 卷54 吳書 呂蒙列傳》 여기에서 송시열은, 윤선거를 ‘잔인한 사람’이라고 평했던 김익희의 식견이 괄목할 만큼 달라졌던 모양이라고 비꼬아 말한 것이다.
[주D-161]나로 …… 하였으니 : 이(李)는 이유태인데, 송시열이 이유태와 숙종 초부터 불화하였기 때문에 성(姓)만을 써서 비하시킨 것이다. 동학사에서의 토론은 1674년에 있었던 것으로, 앞의 숭정 47년 조에 대략적인 내용이 보인다. 이때 동학사의 토론에 참석했던 이유태가 윤선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자, 송시열이 그럴 리가 없다며 이유태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 뒤 윤선거가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어 “흑백론으로 윤휴를 평한 것은 그의 논의(論議)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었네. 인품을 감별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니, 한 가지로만 단정할 수는 없을 듯하네.”라고 하였으므로, 송시열이 무척 놀라서 이유태에게 “지혜가 있고 없는 차이가 30리 이상은 되겠네.”라며 사과했다는 것이다. 《宋子大全 附錄 卷5 年譜4, 韓國文集叢刊 115輯》
[주D-162]김사보(金士輔) : 김비(金棐:1613~?)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서자(庶子)이다. 1651년(효종2)에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주D-163]어머니의 …… 하므로 : 어머니의 죽음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은, 송주석의 계모가 몇 해 전에 정신병을 앓다가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 경위가 분명하지 않다는 말이다. 송주석이 1683년(숙종9) 문과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는데, 계모의 사망 경위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므로 청망(淸望)에 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명재가 제기했다고 의심한 것이다. 《宋子大全 拾遺 卷5 擬答尹拯書, 韓國文集叢刊 116輯》 《明齋遺稿 別集 卷4 答懷川書, 韓國文集叢刊 136輯》
[주D-164]갑자년 : 송시열의 제자 최신(崔愼)이 상소하여 명재가 스승 송시열을 배반했다는 배사론(背師論)을 제기한 해이다.
[주D-165]정묘년 : 송시열이 직접 상소하여 명재 부자를 공격한 해이다.
[주D-166]민이승(閔以升) : 1649~1698.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언휘(彦暉), 호는 성재(誠齋)이다. 명재의 문인이었으나 명재는 그를 학문의 지기(知己)로 대했다고 한다. 《歸鹿集 卷15 誠齋閔公誌銘, 韓國文集叢刊 212輯》
[주D-167]여우(如愚)를 …… 편지 : 《논어》에 공자가 증자(曾子)에게 “우리 도는 한 가지 이치가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느니라.[吾道一以貫之]”라고 한 데 대해서 증자가 “예.[唯]”라고 답한 일과, 공자가 안연(顔淵)을 두고 “내가 회와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하여도 내 말을 어기지 않아 어리석은 사람 같았는데, 물러간 뒤에 그의 사생활을 살펴보니 충분히 발명하였으니, 회는 어리석지 않구나![吾與回言終日 不違如愚 退而省其事 亦足以發 回也不愚]”라고 한 말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증자와 안연 두 사람의 학문적 경지를 잘 표현한 일화로 흔히 인용된다. 즉 증자는 공자가 말을 해 주자 금방 알아듣고 “예.”라고 대답을 하였고, 안연은 대답할 것도 없이 그 즉시 마음으로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겨 학문의 수준이 증자보다 훨씬 더 높았다는 것이다. 주희의 제자 서소연(徐昭然)이 “애석하다 증삼이여 무엇 하러 ‘예’라 했나, 어리석은 사람 같던 안회만 못했어라.[可惜曾參多一唯 不如回也只如愚]”라는 시를 보고 좋아하자, 주희가 “증자의 ‘일유(一唯)’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 위의 단계를 향하려 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자신의 수준을 생각하지 않고 안연의 높은 경지를 좋아하는 병통을 나무랐다. 주자는 서소연이 증자와 같이 독실한 학문에 뜻을 두지 않고, 고원한 것을 좋아하여 아성(亞聖)인 안연의 경지를 흠모하는 점을 좋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朱子書節要 卷16 答徐子融書》
[주D-168]율곡(栗谷)의 …… 것 : 율곡 이이(李珥)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서 불도(佛徒)가 되었다가 20세에 다시 내려와 유학에 정진한 일이 있었다. 1568년(선조1)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을 때 사직 상소에서 말하기를, “제가 일찍이 자모(慈母)를 여의고는 망녕된 것으로써 슬픔을 잊고자 불교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본심이 어두워져 드디어 깊은 산으로 달려가서 거의 1년이 되도록 선문(禪門)에 종사하였습니다.”라고 자책하였는데, 뒤에 이이의 문묘 종사(從祀)가 논의될 때 관학 유생(館學儒生) 채진후(蔡振後) 등이 이를 반대하면서 “이이의 출처는 그가 스스로 다 말한 바 있습니다.”라고 했던 것을 가리킨 말이다. 《宣祖修正實錄 1年 5月 6日》 《仁祖實錄 13年 5月 11日》 즉 이이가 스스로 인혐(引嫌)한 말일 뿐인데 반대파들은 이를 기정사실화하여 처신에 큰 결점이 있었던 것으로 부각한 일을 말한다.
[주D-169]효종대왕의 …… 것 : 진동(陳東)은 송(宋)나라 사람으로, 흠종(欽宗) 때 금(金)나라의 침략에 대항하여 척화론(斥和論)을 주창한 이강(李綱)이 파직당하자 유생 수만 명을 이끌고 글을 올려 복직하게 하였으며, 고종(高宗) 때 이강이 조정에서 떠나게 되자 또 글을 올려 유임(留任)시키기를 청하였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당했다. 《宋史 卷455 陳東列傳》 윤곡(尹穀) 역시 송나라 사람으로, 원나라의 침입 때 담주(潭州)를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온 가족을 이끌고 분신자살하였다. 《宋史 卷450 尹穀列傳》 윤선거는 1636년(인조14) 태학(太學)의 소두(疏頭)가 되어 후금(後金)의 사신을 목 베고 화의(和議)를 배척할 것을 상소한 일이 있었으나, 이듬해 강도가 함락될 때 동지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성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효종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진선(進善)에 제수되자 자신이 관로(官路)에 나갈 수 없는 이유를 들면서, “처음에는 망녕되이 진동처럼 척화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끝내는 외적의 침입에 목숨을 바쳤던 윤곡의 죄인이 되었습니다.”라고 하니, 효종이 두 사람은 처한 상황이 달랐던 만큼 척화를 주장했다고 해서 반드시 목숨을 바쳐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이렇게 비답을 내렸다. 《魯西遺稿 卷3 辭進善疏, 卷4 太學請斬虜使疏, 附錄 年譜》
[주D-170]김성대 등을 벌하니 : 김성대(金盛大) 등에게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하는 정거(停擧)의 벌을 내린 것을 말한다. 《肅宗實錄 11年 2月 4日》
[주D-171]대신(大臣) :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을 가리킨다.
[주D-172]그 아래에 …… 것 : 나양좌(羅良佐)에게 준 편지 가운데 “율곡은 오히려 참으로 입산한 잘못을 면하지 못하였지만, 선인이 강도에서 죽지 않은 것으로 말하자면 애당초 죽어야 할 의리가 없었다.”라고 한 구절을 가리킨다.
[주D-173]맹자(孟子)가 …… 같으니 :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에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고사가 실려 있는데, 무덤 근처에 집을 정하자 맹자가 매장하는 놀이를 하고, 시장 가까이 집을 정하자 맹자가 장사하는 놀이를 했으므로 결국 학교 가까이로 이사를 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명재는 자신이 “율곡이 젊은 시절에 입산했었다.”라고 말한 것은 “맹자가 어린 시절에 매장하는 놀이와 장사하는 놀이를 했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성격으로, 비방하고 헐뜯으려는 의도가 담긴 것도 아니고 그것이 율곡에게 흠이 될 일도 아니라는 말이다.

명재연보 제2권
[연보]



58년(1685, 숙종11) 을축
○ 2월에 조사위(趙士威) - 득중(得重) - 의 편지에 답하였다.
최신(崔愼)의 상소 후에 김엽(金曄), 조정만(趙正萬), 이상(李翔) 무리가 연이어 상소하여 날조하고 무함하여 속이기를 끝도 없이 하였으므로, 조공(趙公)과 명촌(明村 나양좌(羅良佐)) 등 여러 공이 또 상소하여 신구하고자 편지를 보내어 의논하였다. 선생이 답서를 보내어 힘껏 만류하였는데, 그 대략에,
“일에는 대소(大小)가 있고 의리에는 경중(輕重)이 있으니, 시끄럽게 맞서서 일어나는 것이 따지지 않고 변론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변론하지 않으면 저절로 일어났다가 제 풀에 수그러들어 단지 한쪽 편의 한 가지 일로 끝나겠지만, 맞서서 일어나면 서로 다투고 서로 격화시켜 점차 양쪽의 혈전(血戰)이 될 것이고, 양쪽의 혈전은 필경 국가에 화를 끼치고 말 것이니, 작은 일을 변론하려다가 큰 손상을 입어 거의 경중의 차례를 잃고 말지 않겠습니까. 돌이켜 보면 선인께서는 평소에 끝내 다른 사람의 의견에 구차하게 동조하지 못하셨으나 또한 피차(彼此)와 물아(物我)의 문호(門戶)를 표방하는 것을 지극히 근심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불초자식이 경망한 탓으로 갑자기 선인께서 지극히 근심하셨던 잘못을 범하여 세도와 인심을 단번에 이 지경에 이르게 하고 말았습니다. 역량과 분수가 미치지 못하는 일이어서 어떻게 할 수는 없더라도, 차마 또 따라서 분란을 더 보태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 10월에 현석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에 앞서 계해년(1683, 숙종9)에 현석이 조정에 나갔다가 송상과 의견이 맞지 않아 두 사람이 연이어 도성을 떠났는데, 젊은 사류(士類)들 가운데 상당수가 송상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또 양쪽으로 갈라져서 현석을 종주(宗主)로 삼았으므로 선배(先輩)ㆍ후배(後輩)라는 지목(指目)이 생겼다. 갑자년(1684, 숙종10) 이후에 송상의 무리가 선생을 공척(攻斥)하였는데, 율옹(栗翁)을 무함하여 욕했다는 죄목을 덮어씌운 것에 이르러서는 거짓 날조가 더욱 극에 달하였다. 그러므로 사류들이 더욱 신복(信服)하지 않고 시비를 다투며 분열하니, 현석이 송상의 본원적인 병폐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양쪽을 화합시키고자 양비론(兩非論)을 제기하여 도리어 전일(前日)의 사류를 공격하였다. 선생이 우려하여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본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논하고, 애매모호한 태도로 구차하게 영합하고 용납하여 사나운 범의 노한 기세를 누그러뜨리려 하는 것을 나무라고, 정학(正學)을 주장하고 선류(善類)를 부지(扶持)하여 세도의 고질병을 구제하라고 권면하였다. 편지는 《유고》에 보인다.
○ 현석의 편지에 답하였다.
선생이 이미 송상과의 서신 왕래를 중단하였는데, 현석이
“일이 있을 때 서신으로 묻는 예를 다시 회복하여 시종 후대하는 도리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므로, 선생이 편지로 답하기를,
“전일의 망녕된 견해를 갑자기 바꿀 수가 없습니다. 비록 사사로운 연고가 없더라도 이미 억지로 부화뇌동할 길이 없는데, 더구나 지금 못난 내가 망언을 한 탓으로 돌아가신 부모님께 이렇게까지 욕을 끼쳤으니, 무슨 얼굴로 다시 화합하려는 바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설사 내가 우옹을 잘못 의심하였고 우옹은 끝내 정주(程朱)가 되는 데 결격 사유가 없었다 하더라도, 불초의 사사로운 의리로는 결단코 어버이에 대한 모욕을 참으며 그와 화합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른 바 ‘눈물을 거두고 관계를 끊겠다고 고한다.’라는 말이 또한 슬프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 또 편지에 이르기를,
“사위(士威 조득중(趙得重))의 말에 따르면 형은 내가 우옹(尤翁)을 지나치게 의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는데, 이것은 피차가 격물궁리(格物窮理)의 공부를 더욱 정밀하게 한 후에 어떠한지를 판단해야 할 뿐입니다. 성현이 말씀한 ‘학문’에 종사하여 우러러 중정(中正)함을 얻어 태어난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하나의 심(心)을 대본(大本)으로 삼지 않겠습니까. 대본이 한 번 어긋나면 비록 관중(管仲)과 같이 인자(仁者)의 공(功)을 넉넉히 갖춘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내는 패술(覇術)과 사리(私利)로 귀결되고 말 뿐입니다. 지금 나는 지난날의 망녕된 견해를 바꾸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일 저런 일을 두루 겪고 난 뒤에는 망녕된 견해가 오히려 미진했음을 더욱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일조차도 모두가 한 판에서 찍어 낸 듯하다는 것을 절절이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비록 억지로 의심하지 않으려 해도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유고》에 보인다.
○ 또 편지에 이르기를,
편지에서 후회[悔]에 대해서 물었는데, 내게 만약 학문의 힘이 있었다면 의롭게 대처하여 잘못이 없었을 것이고, 만약 성의가 있었다면 남을 감동시켜 신뢰받았을 것이니, 그랬다면 자연히 이런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체(大體)에 대한 후회이고, 절목(節目)을 가지고 말하자면 후회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말할 만하면 말하고 말해서 안 될 만하면 입을 다무는 것이 이치의 마땅함인데, 이미 말을 하지도 못했으면서 또 입을 다물지도 못하여 권이정(權以鋌)에게 개인적으로 말한 것이 첫 번째 후회스러운 일입니다. 형이 물었을 때에 조만간 만나서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지레 편지로 털어놓아 소란을 일으키는 단서를 만든 것이 두 번째 후회스러운 일입니다. 우옹의 편지에 답하던 때에 새로 북소(北疏)의 모욕이 선인에게 미친 것을 보고는 마음의 평정을 잃어 말이 저돌적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이나 한 마디 말도 폭로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는 등의 말까지 하여 아이들이 따지고 드는 말투와 다름없이 했던 것이 세 번째 후회스러운 일입니다. 몇 번이나 겪어 보고도 우옹의 마음을 다 알아차리지 못하여 오히려 만에 하나라도 받아들여 주기를 바랐고, 그 후에 또 재차 서신을 왕래하였다가 끝내 돌아가신 선친에게 더할 수 없는 욕을 끼치고 나서야 만 것이 네 번째 후회스러운 일입니다. 현도(顯道 나양좌(羅良佐))에게 준 편지에서 율옹 및 권공(權公 권순장(權順長))과 김공(金公 김익겸(金益兼))의 일을 언급하였는데, 말에 공경하고 조심하는 뜻이 부족하고 문리가 창달(暢達)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망극한 비난을 초래한 것이 다섯 번째 후회스러운 일입니다. 후회하는 것은 이와 같고, 다른 것은 단지 그 불행을 스스로 슬퍼할 뿐입니다.”
하였다.

59년(1686, 숙종12) 병인
○ 1월에 도 정절(陶靖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차운(次韻)하였다.
인일(人日)에 선생이 우연히 시남(市南)의 〈차귀거래사(次歸去來辭)〉를 읽고서 감회가 일어 마침내 그 운으로 시를 지어 근래의 일을 스스로 서술하였다. 또 소서(小序)를 쓰기를,
“나는 칩거하는 미천한 몸으로 산골짝에서 평생 지내는 것을 분수에 달게 여기는데, 너무 드러나는 곳에 몸을 내놓았다가 외람되게 헛된 명예를 훔치게 되었으므로 안팎으로 부끄럽고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망녕된 말로 세상에 죄를 얻고 말았으니, 회옹(晦翁)이 이른 바, ‘근래의 일로 말하자면 폐척(廢斥)을 당한 것이지만, 처음 먹었던 마음으로 말하자면 이제 내 자리를 찾은 것이다.’라는 것이 바로 오늘의 나를 두고 한 말씀 같다.
나는 오늘의 일에 대해서 두 가지 다행스럽게 여기는 점이 있다. 헛된 이름으로 윗사람을 속여 양조(兩朝)로부터 절차를 뛰어넘은 은총과 예우를 받으면서도 빠져나올 길이 없었으니, 만약 우옹과 문곡(文谷)ㆍ노봉(老峯) 두 재상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내가 장차 어떻게 헛된 이름을 거둘 수 있었겠는가. 비록 국가의 은총을 저버리고 충효(忠孝)를 다하려던 마음도 저버리게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끌리고 쫓기는 일 없이 편안히 죽을 날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 가지 다행이다. 젊은 시절부터 우옹을 스승으로 섬겨 왔으나 피차간에 정의(情意)가 막힌 지도 오래이다. 마음과 입이 서로 어긋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처신할 방법을 모르던 차에 갑자기 이 지경까지 이르러 다시는 여지가 없게 되었다. 비록 가만히 평생을 생각하며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슬퍼하지만, 이제부터는 마음에 갈등을 느끼지 않고 내 소신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또 한 가지 다행이다.
회옹이 또 말하기를, ‘세상일은 세월이 오래 지나고 난 뒤라야 시비의 실제를 알 수 있으니, 이것이 군자가 말을 하고 행동을 함에 있어 일시적인 비난이나 칭찬에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기 마음에 부끄럽거나 후회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까닭이다.’ 하였는데, 나는 마음에 부끄럽거나 후회되는 바가 없다면 일시적인 비난이나 칭찬은 말할 것도 없고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에까지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혐의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사(辭)의 대략에,
돌아가자꾸나 / 歸去來兮
또다시 무엇 하러 교유를 일삼으랴 / 又何事乎交遊
지난날 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 囊余志之不量
성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 謂聖域焉可求
스승을 찾아가서 질정(質正) 받으며 / 爰尋師而就正
가야 할 길 먼 것만을 걱정했었지 / 惟道悠之是憂
하루아침에 반성하며 스스로 의심하니 / 一朝反省而自疑
도리어 벗들에게 부끄럽구나 / 乃顧慙乎朋疇
쇠붙이를 금인 줄로 알고 있었고 / 認鐵作金
노도 없이 배를 저어 가려 했으니 / 無楫操舟
태질을 치료하기 어려운 걸 걱정하고 / 愍胎疾之難醫
궤우가 많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노라 / 羞詭遇之若丘
길을 함께 가면서도 생각이 다르니 / 旣同行而異情
근원이 다른 물이 어찌 같이 흐르랴 / 寧異源而同流
구차하게 화합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 知不可乎苟合
탄식하며 돌아가서 쉬기로 하였노라 / 悵太息而歸休
하였다. 《유고》에 보인다.
○ 6월에 이군보(李君輔) - 세필(世弼) - 가 보낸 《심경석의(心經釋疑)》와 《대학(大學)》의 의심나는 부분을 정정(訂正)하였다.
이공(李公)이 송상과 《심경석의》 및 《대학》의 의심나는 부분을 논변하고 이를 적어서 편지로 질정하였는데, 선생이 의리(義理)의 핵심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칭찬한 뒤 그를 위해서 평정(評訂)하고 조목조목 풀이하여 돌려주었다. 《유고》에 보인다.

60년(1687, 숙종13) 정묘
○ 2월에 송상(宋相)이 상소하여 노서(魯西) 선생을 무함하니, 문인 나양좌(羅良佐) 등이 맞서서 상소하여 변론하였다.
갑자년(1684, 숙종10) 이후로 송상이 기필코 선생에게 죄를 입히고자 하여, 전후로 윤휴를 비호했다는 것, 스승을 배반했다는 것, 율곡을 무함했다는 것, 절의를 지킨 사람들을 배척했다는 것으로 죄를 덮어씌우려 하였으나 끝내 그 계책을 성공시키지 못하였다. 북인(北人) 이하의 여러 무함하는 상소가 연달아 나와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송상이 시킨 것이라고 말하였다. 덕포공(德浦公 윤진(尹搢))이 일찍이 말하기를,
“회상(懷相 송시열)이 필시 머지않아 다시 말을 지어내어 스스로 전면에 나설 것이다.”
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과연 직접 상소하여 노선생(老先生)을 무함하고 욕하였다. 윤휴와 편당을 지어 주자(朱子)를 배반하였다며 곧장 사설(邪說)로 세상에 해를 끼친 죄로 몰아가되, 없는 일을 날조하고 본말을 전도시켜 마구 욕하고 분풀이하기를 밑도 끝도 없이 하였다. - 상소는 〈후록〉에 보인다. - 선생이 명촌(明村)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대략에,
“회천(懷川)이 선인에게 끝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참으로 윤휴 때문이 아니라 윤휴의 일을 가지고 흠집을 내는 재료로 삼으려는 것일 뿐입니다. 대개 선인이 평소 충심을 다해 충고하고 책선(責善)했던 말들이 숨기고자 하는 부분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었으므로 윤휴의 일을 이용해서 선인을 배척하고 억눌러 선인의 말을 전부 근거 없는 것으로 귀결시키고 스스로를 과실 없는 사람으로 만들려 한 것이니, 이것이 그 사의(私意)의 근저(根底)입니다. 갑자년(1684, 숙종10)에 편지를 주고받을 때 ‘비호한다’는 두 글자로 하나의 제목을 삼더니, 곧장 오늘에 이르러서는 공안(公案)으로 정하여 전후의 사실들을 다 빼 버리고 자신의 의도만으로 날조하고 끼워 맞추었습니다. 요컨대 이로써 백세의 시비를 현란시키고자 함이요, 단지 한때 우연히 드러낸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 송상이 상소한 후에 현석이 말하기를,
“문생의 의리로서 한번 변론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고, 명촌도 성지선(成至善), 조득중(趙得重) 등 공들과 변론하는 상소를 올리려 하였는데, 선생이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어 만류하였다. 그 대략에,
“변론하는 상소를 올리겠다는 논의에 대해서 나는 전처럼 변론하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선인의 일 두 가지 가운데 강도(江都)의 일은 이미 선인의 상소에서 자세히 아뢰었던 것이므로 모르는 사람이 없고, 윤휴의 일도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니, 세상에 어찌 윤휴와 편당을 지어 주자를 배반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선인께서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동자(童子)도 아는 일인데 어떻게 한 세상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내버려 두고 공의(公議)가 저절로 안정되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으로 국가의 앞날이 염려되고 백성들이 곤궁한 때에 맞서서 무익한 변론을 했다가는 저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니, 식자들의 비판이 장차 우리에게로 돌아와 저들을 탓할 겨를도 없을 것입니다.
아! 강도의 일은 해명할 필요가 없거니와, 이른바 ‘윤휴에게 중독되어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해서 세도에 해를 끼쳤다.’는 말은, 여(驪)를 빌려서 함정을 만들어 사람을 빠뜨리려는 심보이니, 진실로 공정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군들 모르겠으며, 또한 어찌 밝은 저 하늘의 해를 속이겠습니까. 그저 사림의 공의에 맡겨 놓아야 할 뿐이요, 한 세상에 공의가 없다면 후세의 공의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문생과 자제들은 배운 것을 높이고 아는 것을 행하되 죽음으로써 지키고 소신껏 행해야 할 뿐입니다. 매번 선인께서 이르신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비록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차마 무익한 편론(偏論)을 만들어 거듭 만세의 죄책을 당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씀을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형 또한 어찌 이러한 뜻을 깊이 헤아리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별집〉에 보인다.
○ 선생이 이미 누차 편지를 보내 해명하겠다는 논의를 간곡히 말렸으나, 명촌 등 여러 공들이 강개함을 참지 못하고 끝내 상소하여 송상이 거짓 날조한 정상을 통절히 진술하였다. - 상소는 〈후록〉에 보인다. -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이단하(李端夏)가 송상의 편에 서서, 상소가 올라가 성상의 마음을 깨우치게 될 것을 염려하여 무위로 끝나게 할 계책을 강구하였다. 그래서 등대(登對)하여 상소 내용을 공격하면서 봉입(捧入)하지 못하게 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상소가 승정원에 도착한 뒤에 퇴짜를 맞았다. 그러고는 또 봉입하여 죄를 주기를 청하니, 명촌이 소두(疏頭)로서 영변(寧邊)으로 귀양 가고, 성공(成公)과 조공(趙公) 두 분은 모두 사판(仕版)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벌을 받았으며, 승지 오도일(吳道一)과 삼사(三司) 최석정(崔錫鼎), 이돈(李墪), 이익수(李益壽), 최규서(崔奎瑞) 등 제신(諸臣)이 연이어 신구하였다가 모두 죄를 입었다.
○ 선생이 박공 태보(朴公泰輔)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선인이 윤휴와 처음에 교제했던 것은 회천(懷川)의 상소에서 이른 바 ‘그가 유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이 기뻐서 처음에는 매우 친애하였다.’라는 것에 불과하였네. 회천이 이단(異端)으로 배척할 때에 만류했던 것은 윤휴를 위해서가 아니라 실로 사림에 공연히 일이 생길 것을 우려해서였고, 예송(禮訟)이 벌어진 뒤에 ‘화심(禍心)을 가졌다.’고 배척할 때에 규간(規諫)했던 것 역시 윤휴를 위해서가 아니라 실로 너무 심하게 의심하고 배척하는 것이 군자의 공평하고 너그러운 도에 해가 되기 때문이었네.
한편 윤휴에게는 그 학문에 대해서 매번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는 병통을 경계하였고, 도성으로 이사했을 때는 조용한 생활을 접고 번잡한 도성으로 옮긴 잘못을 나무랐으며, 예송이 발생한 뒤에는 곧장 ‘평소의 몸가짐을 다 잃었다.’고 하며 실신(失身)으로 배척하였네. 윤휴에 대한 선인의 처신은 이와 같았을 뿐이니, 무슨 일을 가지고 그에게 중독되었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네.
윤휴가 《중용장구(中庸章句)》의 절(節)을 고친 것이 임진년(1652, 효종3) 이전에 있었기 때문에 이단이라는 논쟁은 이미 임진년 가을 황산(黃山)의 모임에서 있었고, 윤휴가 진선(進善)과 지평(持平)이 된 것은 무술년(1658)ㆍ기해년(1659) 연간에 있었으니, 기해년 이전의 윤휴는 본디 경자년(1660, 현종1) 예송 이후의 윤휴가 아니고 갑인년(1674) 이후의 윤휴는 또 경자년 이후의 윤휴가 아니었네. 그런데 지금 전후의 말을 끼워 맞추어 실제로 평소 강론하고 충고했던 본말을 생각하지 않고서 곧장 ‘중독되었다.’고 하고 곧장 ‘편당이 되어 도왔다.’고 하며 사실을 전도시키고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키니, 이것이 과연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후록〉의 여러 상소에 보인다.
○ 11월에 명촌(明村)의 편지에 답하여 교학(敎學)의 방법에 대해 논하였다.
명촌이 귀양 가 있는 곳에 배우려는 자들이 많이 찾아와서 학업을 청하자 명촌이 편지를 보내 가르치는 방법을 물었다. 선생 답서의 대략에,
“입지(立志)와 무실(務實)이 무엇보다 학문하는 자의 급선무이고, 그 나머지는 책에 다 적혀 있을 뿐입니다. 《격몽요결(擊蒙要訣)》이 학문하는 사람에게 가장 요긴하고 《주문지결(朱門旨訣)》이 그다음인데, 《주문지결》은 지경(持敬) 공부를 논한 것이 《격몽요결》보다 꽤 정미(精微)하기 때문에 자못 보기 어려우니, 모쪼록 《격몽요결》을 숙독해서 터득함이 있은 뒤라야 《주문지결》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책을 투철하게 읽고 나면 《근사록(近思錄)》을 읽는 데도 어려움이 없고 《주서절요(朱書節要)》를 읽는 데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니, 이 두 책으로 문호(門戶)를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 12월에 교산(交山)에 성묘하였다.

61년(1688, 숙종14) 무진
○ 1월에 파주(坡州)에 갔던 길에 서계(西溪) 박공(朴公) - 세당(世堂) - 및 현석(玄石)을 만났다.
박공 태보(朴公泰輔)는 서계의 아들로서 자씨(姊氏)의 양자가 되었는데 이때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있었고, 현석도 새로 파주 경내로 이사하였다. 선생이 교산에서 파주 관아로 가서 자씨를 찾아뵙고, 인하여 서계, 현석 두 공과 만나 이틀 밤을 묵으며 강론하고 파하였다.
○ 이에 앞서서 현석이 송상에 대해서는 매번 후대해야 한다는 논의를 주장하였는데, 송상이 직접 상소한 이후에는 의견이 또한 변하였다. 그리하여 이 모임에서는 다시는 회천의 일을 언급하지 말라고만 하였다.
○ 2월에 시남(市南) 선생의 문집을 편집ㆍ정정하고, 인하여 발문(跋文)을 지었다.
○ 8월 병인(26일)에 장렬대비(莊烈大妃)가 승하하였다. 현조(縣朝)에 들어가 곡림(哭臨)하고 성복(成服)하였다.
인산(因山) 전까지 정사(淨寺)에 머물렀다.

62년(1689, 숙종15) 기사
○ 2월에 처음처럼 예대(禮待)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연석(筵席)에서 하교하기를,
“윤증의 일은 극히 미세한 것이었는데 끝내 이토록 시끄럽게 되고 말았으니, 이전에 ‘처음처럼 대우하지 말라.’고 했던 하교를 도로 거두어야겠다.”
하고, 이어서 사소한 일을 위에 떠넘겼다는 이유로 김상 수항(金相壽恒)을 파직하였다.
○ 5월에 박태보(朴泰輔)를 곡하였다.
공의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정재(定齋)이다. 문학과 재식(才識)으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므로 선생이 후일을 위임하려 하였다. 이때 곤위(壼位)를 폐하려고 하므로 벼슬아치들이 상소하여 간쟁하였는데, 공이 상소를 지은 일로 대질심문을 받을 적에 절실한 어조로 말하며 굽히지 않다가 고문을 받고 죽었다. 선생이 지극히 슬퍼하고 애석해하여 제문을 지어 곡하기를,
“그 기량을 채워 나가면 선현의 학문을 이을 만했고, 그 뜻을 행하면 막중한 세도를 담당할 만하였다.”
하였다. 뒤에 또 묘표(墓表)를 지었다.
○ 일찍이 서계(西溪)에게 시를 부치기를,
큰아들은 직언하다 목숨을 잃고 / 大兒死於直
작은아들 충언으로 목숨 잃으니 / 小兒死於忠
천추에 이름 길이 남을 두 학사 / 千秋兩學士
바른 기개 하늘까지 찌를 듯했소 / 正氣摩蒼穹
사람이 우주에서 살아간대야 / 人生宇宙內
회오리바람처럼 한순간인 것 / 百年如旋風
잠깐 사이 모조리 썩어 버리니 / 轉眄盡腐滅
풀숲 사이 벌레와 다름없다오 / 何異草間蟲
아름다운 그 이름 역사에 남아 / 芳名垂簡策
매운 기상 영원히 변치 않으리 / 烈烈無時窮
슬픈 생각 들기에 이 말을 적어 / 悲來寫此語
멀리서 서계옹을 위로한다오 / 遠慰西溪翁
하였다.

63년(1690, 숙종16) 경오
○ 2월에 부인 권씨(權氏)가 별세하였다.
4월에 이산(尼山) 두사촌(杜寺村) 좌오(坐午)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 4월에 현석의 편지에 답하였다.
이에 앞서 선생이 현석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대략에,
탐라(耽羅)의 행차 - 송상(宋相)을 가리킨다. - 가 반도 못 와서 갑자기 후명(後命)을 받았으니, 옛 정의에 있어 참담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정묘년(1687, 숙종13) 봄 이전에는 정의가 비록 끊겼어도 내가 남을 저버리지는 않겠다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각박하게 처신하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급기야 송상이 직접 상소한 후에는 이런 생각이 모조리 사라졌으나, 현도(顯道)의 상소에서 이른 ‘온갖 것들을 다 끌어 모아 공격하고 물어뜯은 것이 원수보다 더 심하였다.’라는 말은 그래도 너무 심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이희조(李喜朝)와 문답한 글이 나왔는데, 참으로 원수보다 더 심하게 여긴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가 남쪽으로 귀양 갈 때에 혹 가서 영결하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고 그의 영구가 돌아올 적에는 또 한 차례 곡하기를 바라는 자가 있었으나, 끝내 내 마음을 억지로 굽혀 구차하게 행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현석의 답서에,
“이 일에 대해서 처음에는 혼자 중얼거리기를, ‘온 세상이 비록 다 「아비와 스승 중에 누가 더 중하겠는가.」라고 하지만, 원한과 덕을 갚는 데는 의당 또한 참작함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른의 상소가 뜻밖에 나왔고, 이질(李姪)과 문답한 내용도 대부분 형편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도 예전의 견해만을 고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상여가 돌아올 때에 단지 큰 화를 입은 옛 스승을 위해서 망곡(望哭)하는 것이라면 혹 그다지 구애될 것도 없었을 듯합니다.”
하고, 또 제문 한 편을 지어 묘소 앞에 고한다면 거의 유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또 답서를 보냈는데,
“제문을 지으라는 말은 납득이 되지 않고, 편지 가운데 ‘나(羅)ㆍ한(韓)이 병립했다.[羅韓竝立]’라는 말은 너무도 분별이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한 부류의 사람들이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선생과 현석 사이를 이간질하였는데, 마침 현석이 편지를 보고 답하기를,
“서울 소식을 들어 보니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대해서 말들이 분분하다고 합니다. 마음에 매우 괴이하고 의아하게 생각되지만 그저 숨을 죽이고 기다릴 뿐입니다.”
하고, 끝 부분에 가서
“머리가 허옇게 세도록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낭패를 당하였고, 또 이랬다저랬다 하여 문하(門下) - 회천(懷川)의 일을 가리킨다. - 에도 계합(契合)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답서를 보내 비유하여 깨우쳐 주기를,
“지금 강마(講磨)하려는 것은 또한 하나의 의리일 뿐입니다. 비유하자면 물건을 달 때에 저울추를 앞뒤로 옮겨 가며 어떻게든 저울의 수평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 저울이 수평이 되기 전에는 저울추를 당기거나 미는 것이 수평을 맞추는 데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저울로 물건을 다는 것은 사람이 쉽게 볼 수 있는 바이므로 당겨야 할지 밀어야 할지를 다투지 않고도 분명히 알 수 있지만, 의리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지나친 자는 너무 지나치면서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고 미치지 못하는 자는 미치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지나칠까 염려하므로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다툼은 다름이 아니라 오직 의리의 정당함을 얻고자 하는 것일 뿐이니, 이 점에 있어서는 양쪽이 같습니다. 그러니 비록 서로 버티며 결정을 보지 못하더라도 그 뜻이 동일하다는 것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하루아침에 정당함을 얻게 되면 지나친 자는 절제하고 미치지 못한 자는 끌어올려서 모두 바라던 바를 얻게 되고, 그간 다투었던 문제가 모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질 것입니다. 가령 사람의 식견에 한계가 있어서 끝내 귀결점을 찾지 못하더라도 그 뜻이 동일하다는 것은 전과 마찬가지일 것이니, 무슨 이랬다저랬다 한다는 걱정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내 생각에는 매우 온당치 않게 여겨집니다.
지금의 이 시끄러움은 단지 중간에서 교란하는 말일 뿐이니, 오직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일이 없다면 저들의 말은 절로 수그러들 것입니다. 어찌 근본이 없는데 지엽(枝葉)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나를 문하와 등지게 해서 한편의 의논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으니, 가지가지 헐뜯는 말을 교묘하게 꾸며 대리라는 것을 대략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과 내가 이러한 내막을 알고 대응한다면 사람들의 말이 어떻게 먹혀들겠습니까.”
하니, 현석이 답서에 이르기를,
“저울의 비유로 다투는 자의 공적인 의리를 도출한 것이 친절하고도 타당하니, 이는 전인(前人)이 드러내지 못한 뜻을 드러낸 것입니다. ‘어찌 근본이 없는데 지엽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라는 것도 나를 도외시하지 않은 말이므로 기쁘고 다행한 마음을 실로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 9월에 대사헌을 제수하였는데, 상소하여 스스로 논핵(論劾)하자 엄한 전지를 내려 도로 돌려주게 하고, 대신(臺臣) 김일기(金一夔) 등이 삭직(削職)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이에 앞서 송상이 윤휴를 비호하고 율곡을 침범하여 무함했다고 선생을 무고하였기 때문에 기사년의 당인들이 그 말을 끌어다가 윤휴를 신구하고 율곡을 출향(黜享)하는 증거로 삼고, 또 일부러 사헌부 직책을 제수해서 모멸하려 하였다. 선생이 마침내 상소하여 스스로 논핵하였는데, 그 대략에,
“어리석은 신은 어려서부터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글을 외우고 익혔고, 성현이 전수한 학문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여 평생 연마하고 흠앙할 대상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두 공(公)이 사람들의 무고를 입고 헐뜯음을 당해서 문묘(文廟)의 종향(從享) 반열에서 내쳐지고 말았으니, 이는 연원이 끊어진 것이고 근본이 뽑힌 것입니다. 그러니 신의 종적이 어찌 다시 당세에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 중에는 사도(師道)가 무고를 입은 일로 인혐하여 물러난 사람이 있었는데, 신은 감히 함부로 이를 끌어다 말을 하지는 못하지만 그 정세의 위축됨은 더 심한 점이 있습니다.
이어서 생각건대, 신의 갑자년(1684, 숙종10) 이후 일은 실로 두 가지 죄를 진 것이므로 스스로 논핵하여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송시열을 젊어서부터 스승으로 섬겼는데, 불행하게도 정의(情義)를 끝까지 보전하지 못하고 마침내 서찰에 관련된 일로 뜻밖에 시끄러운 단서를 만들어 수년간의 분쟁을 초래하였습니다. 신이 망언으로 죄를 초래하고 모욕이 부모에게까지 미친 것에 대해서는 말할 겨를도 없으나, 성명(聖明)께서 매번 조정의 논의가 분열되고 갈라지는 것을 근심하고 탄식하시어 전후의 비답(批答)에 드러낸 것이 매우 절실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두 신하의 출향을 윤허하는 비답에서도 이 일을 언급하시어 두 신하에게 죄를 돌리는 듯이 하셨습니다. 이것은 수년 동안 조정을 시끄럽게 하고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괴리시켜 끝내는 위로 성상의 하교에 흠이 있게 하고 전현(前賢)에게까지 뒤미처 누를 끼친 것이니, 곰곰이 그 허물을 생각해 보면 모두가 신으로 인해서 비롯된 일입니다. 이것이 신의 한 가지 죄입니다.
윤휴 역시 선신(先臣)이 일찍이 친하게 지냈던 자인데, 예송(禮訟)이 처음 일어났을 때 선신은 이미 그의 잘못된 처신을 배척했으나 충고해도 따르지 않았으므로 끝내 서로 절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에 드러난 그의 무상(無狀)함에 대해서는 더욱 다시 논할 것이 없는데, 접때 한 무리의 상소에서 매번 천신(賤臣)이 윤휴를 비호하였다고 하였으니, 억지로 끌어다 붙인 그들의 주장에는 없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간에 연신(筵臣)이 윤휴를 신구(伸救)하면서 드디어 신을 거론하여 증거로 삼았으니, 비록 전에는 죄를 주려고 했고 뒤에는 끌어대어 이용하고자 한 것이지만 그것이 신의 실정이 아닌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선신이 이미 그 사람을 배척하여 절교했으니 비호했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며, 또 신은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한 적이 없으니 억울하다고 했다는 것은 망녕된 말입니다. 신이 전에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숨을 죽인 채 죄를 기다렸고, 뒤에는 또 감히 주제넘게 글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본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대로 침묵을 지켜 바르지 못한 사람을 보증한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신의 두 번째 죄입니다.
아! 신이 두 조정의 은혜를 입은 몸으로 조금도 보답을 하지 못하고 한갓 당론(黨論) 가운데 또 당론이 생기게 하여 국가에 우환을 끼쳤으니, 이것이 신이 안으로 선신의 가르침을 실추하고 밖으로 공의(公議)의 비난과 책망을 저버림으로써 당시에 죄를 짓고 후세에 비웃음거리를 남겨 죽음으로도 스스로 속죄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기는 까닭입니다.
보잘것없는 천신의 나이가 이미 60이 넘었습니다. 쇠병(衰病)이 떠날 날이 없으니 죽을 날도 머지않은 데다, 박태보(朴泰輔)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후로는 놀라움에 넋이 나가 살고자 하는 의욕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박태보는 신의 생질입니다. 당초에는 비통한 나머지 성상을 향한 간절한 정성으로도 북받치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성명의 세대에 이런 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였고, 시일이 좀 지난 뒤에도 침식(寢食)이 모두 줄고 매사에 의욕을 잃어 마치 실성한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초야에 묻혀 있는 하찮은 몸이 감히 주제넘게 나설 수 없어 한마디 말씀을 올려 충성을 조금이나마 바치지도 못했으니, 신하 된 직분이 어그러지고 사람의 윤리가 끊어졌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전교하기를,
“지금 대사헌 윤증의 상소를 보건대, 상소 중의 말뜻이 바르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한 태도가 많으니, 매우 놀랍다. 상소를 도로 내주라.”
하였다.
○ 10월에 집의 김일기, 장령 성관(成瓘), 지평 조식(趙湜)ㆍ홍돈(洪墪)이 관직을 삭탈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이르기를,
“윤증이 훗날을 위해 기치를 세우기에 급급하여 앞장서서 상소하여 말을 뒤집어 가며 교무(矯誣)한 정상은 실로 가슴 아파할 만하니, 관직을 삭탈하는 벌로도 죄가 다 감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이때 성상의 비답이 이미 엄했을 뿐 아니라 시론(時論)도 준엄하여 죄를 가하려다 곧 중지하였으므로 선생은 행장을 꾸려 놓고 대기하였다. 서울의 유생 신상화(申尙華), 이선좌(李宣佐) 등이 상소하여 신구하고 변론하였다.

64년(1691, 숙종17) 신미
○ 3월에 자씨(姊氏)의 상을 당했다.
자씨는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양자로 삼은 박태보가 비명에 죽었고 그에게도 아들이 없었다. 선생이 더욱 애통하게 여겨 고모나 자매에게 남편과 아들이 없을 때 기년복을 입어 주는 예에 따라 마침내 본복(本服)을 입었다.
○ 4월에 양주(楊州)로 달려가 곡하였다. 석림사(石林寺)에 머물다가 단오에 교산으로 가서 절사(節祀)를 행한 다음 다시 석림사로 돌아갔다. 장사가 끝난 뒤에 돌아왔다.
○ 6월에 서계(西溪)에게 편지를 보내 《대학》과 《논어》의 의의(疑義)를 논하였다.
서계가 평소 사서(四書)를 읽을 때 의문점을 기록해 두었던 것을 책으로 만들었는데, 선생이 석림사에 머물고 계실 때 이것을 가지고 와서 질정하였으나 선생이 비통하고 황망한 와중이라 상세히 보지 못하였다. 돌아온 후에 《대학》 격치장(格致章)과 《논어》 정유인장(井有仁章)에 대해서 논한 의의를 집어내어, 글을 너무 국한되고 너무 얕게 보는 병통이 있다는 것을 누차 편지로 변증하였다. 《유고》에 보인다.
○ 7월에 현석에게 답한 편지에서 포저(浦渚)의 유서(遺書)에 대해 논하고, 인하여 발문을 썼다.
포저가 일찍이 《중용곤득(中庸困得)》, 《대학곤득(大學困得)》, 《논어천설(論語淺說)》, 《맹자천설(孟子淺說)》 등의 책을 지었으니, 대개 장구(章句)를 상세히 해석하고 간간이 의문점을 기록하여 참고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노선생이 일찍이 말씀하기를,
“그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정리하고 긴요한 내용만 남겨 둔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 책을 간행하려고 하였는데, 현석이 매 장(章)마다 붙인 해설이 간혹 원주(原註)와 다른 것을 의심하여, 서찰로 선생에게 발문을 부탁하고 자신은 담당하지 않고자 하였다. 선생이 답서에서 쌍봉 요씨(雙峯饒氏 요로(饒魯))와 신안 진씨(新安陳氏 진력(陳櫪))의 주설(註說)을 끌어다가 포저의 본의(本意)를 드러내어 그 의문을 풀어 주었다. 또 그 책의 뜻으로 발문을 지어 변증하고, 끝에 가서 또 노선생의 구설(舊說)을 인용하여 자신의 뜻을 보였다.

65년(1692, 숙종18) 임신
○ 5월에 노강서원(魯岡書院)에서 제생(諸生)들을 만났다.
이때 민언휘(閔彦暉) 등 여러 사람이 노강서원 원재(院齋)에서 독서하면서 강학(講學)하고 문난(問難)하기를 두어 달 가까이 하였다. 선생이 절구(絶句) 2수를 지어 권면하였는데, 그 첫 번째 시에 이르기를,
문과 담장 쓸쓸하고 뜰엔 풀이 자라는데 / 門墻廖寂草生庭
벽장에는 부질없이 옛 성인의 책이 가득 / 壁裏空藏古聖經
기쁘게도 그대들이 오늘 와서 들춰 보니 / 今日喜君來秉拂
사람들을 일으켜 깨울 수 있으리라 / 可能提喚衆人醒
하였다.
○ 현석에게 답한 편지에서 《위학지방(爲學之方)》에 대하여 논하였다.
현석이 우계(牛溪) 선생이 초록한 《위학지방》을 거경(居敬)과 궁리(窮理) 두 단락에 분속(分屬)하고 편지로 질정하였는데, 선생이 편지를 보내 정정하기를,
수지(受之)와 응중(應仲) 두 단락은 단지 처음 공부할 때의 공정(功程)이고, ‘창주가 또 일렀다.[滄洲又諭]’에서부터 《어록(語錄)》의 여러 단락에 이르기까지는 단지 입지(立志)와 무실(務實) 등의 일을 말한 것인데, 지금 ‘거경궁리(居敬窮理)’ 네 글자로만 배정하였으니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였다. 《유고》에 보인다.

66년(1693, 숙종19) 계유
○ 1월에 노서(魯西) 선생의 묘지(墓誌)를 지었다.
○ 5월에 박태한(朴泰漢)의 편지에 답하였다.
교백(喬伯)이 과거 응시를 준비하라는 부친의 명을 받고 편지로 여쭈었는데, 답하기를,
“선비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으니, 출사(出仕)하는 것과 은거하는 것뿐이네. 출사하는 사람에게는 출사하는 사람의 사업이 있고 은거하는 사람에게는 은거하는 사람의 공부가 있으니, 만약 우리 벗이 이미 출사하려는 생각을 끊어버리지 못했다면 크게는 도를 행하고 작게는 녹사(祿仕)하는 것이 오직 자신의 재능과 역량에 달려 있네. 그렇지 않다면 일체 다 놓아버리고 학문에 전념해야 할 것이니, 힘을 이미 분산하지 않는다면 학문적인 발전을 이루 다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네. 퇴옹(退翁)이 고봉(高峯)에게 답한 편지에서 말한 ‘출사하기 전에 뜻을 미리 정하라.’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네.”
하였다. 뒤에 또 격물(格物)과 인심(人心)ㆍ도심(道心) 등의 설로써 질정하였는데, 선생이 그 뜻이 매우 정밀하여 범범히 읽고 외우는 자가 미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칭찬하고, 원대한 학업에 힘쓰기를 더욱 권면하였다.
○ 9월에 시를 지어 덕포(德浦)와 농와(農窩)를 권면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자네들 《논어》 중의 옹야문인장을 보게 / 君看雍也問仁章
경과 서가 원망을 적게 하는 방법이지 / 敬恕眞爲寡怨方
일용의 공부란 건 마음에 달렸으니 / 日用工夫在心上
이욕으로 존망을 증험해 보시게나 / 惟將理慾驗存亡
하였는데, 자주(自註)에 이르기를,
“이름을 돌아보고 의리를 생각한다는 뜻을 인하여 두 군의 자(字)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니, 실로 인욕(人慾)을 막고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심법(心法)이다.”
하였다.
○ 선생이 두 공과 형제간의 지기(知己)가 되어 이웃한 동네에 살면서 늘 왕래하고, 때때로 또 정사(淨寺)에서 만나 10여 일씩 머물며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고 시를 주고받았다.
○ 11월에 성여중(成汝中) - 지선(至善) - 을 곡하였다.
성공(成公)은 우계 선생의 현손(玄孫)으로, 일찍이 노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선생에게서 학업을 마쳤다. 행의(行義)가 방정하고 절조를 굳게 지켜 가학(家學)을 실추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자 선생이 곡위(哭位)를 만들어 곡하고 가마(加麻)하였다. 만사(輓詞)가 있다.

67년(1694, 숙종20) 갑술
○ 4월에 특명으로 서용(敍用)하였다.
이때 상이 뉘우치고 깨달아 곤의(坤儀)가 거듭 바르게 되니, 특별히 선생을 서용하도록 명하고 부호군(副護軍)에 부직(付職)하였다.
○ 이조 참판에 제수하였으므로 정장하여 사직하였으나,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 5월에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정장하여 사직하였다.
윤5월에 두 번째 상소하고 또 정장하였으며, 6월에 또 두 번째 정장하였는데, 너그러운 비답으로 마음을 열어 보였다. 이르기를,
“기다리는 내 뜻이 지극한데도 사면을 청하는 경의 상소가 갈수록 더 간곡해지니, 지난날의 일로 불안하게 여기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스스로 깊이 뉘우쳐 예전처럼 관직에 임용하고 처음처럼 예대(禮待)하도록 하였다. 반드시 경을 초치하여 나랏일을 함께 하고자 함은 실로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경이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세록(世祿)의 의리로서 줄곧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야 되겠는가. 나는 여러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니 고사하지 말라.”
하였다.
○ 선생이 박대숙 심(朴大叔鐔)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내 상소는 처음에는 ‘식견이 혼매하고 처신이 형편없어 초야에 숨어 지내는 몸으로 세도에 해를 끼쳤으니, 스스로 지은 죄는 죽더라도 속죄할 길이 없습니다.’라고 하고, 두 번째는 ‘스스로 지은 죄가 거듭 당세에 누를 끼쳤습니다. 지난번 성상의 하교가 비록 잘못을 씻어 주려는 거룩한 뜻에서 나왔지만, 신에게는 공의(公議)를 해소할 만큼 스스로 속죄한 실상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네. 내가 전날 겪은 일은 실로 심상한 것이 아니어서 선인이 입은 무고가 한정이 없었네. 그런데도 이를 감히 다시 제기하지 못한 것은 실로 나로 말미암아 시끄러운 일이 발생하여 다시 세도에 누를 끼치게 된다면 이는 선인의 뜻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네.”
하였다.
○ 성균관 유생 최석필(崔錫弼) 등이 상소하여 정성을 다하고 예를 다해 선생을 초치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7월에 여덟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사관(史官)을 보내어 비답을 전하고 돈소(敦召)하였다.
선생이 다시 소를 올려 스스로 인책(引責)하기를,
“지난날의 일은 사리에 밝지 못하고 처신이 적절하지 못하여 선신(先臣)에게 수치를 끼치고 성조에 누를 입힌 것이니, 충효(忠孝)를 모두 상실하여 죽은 뒤에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의 대략에,
“전후의 비답에 간절히 기다리는 내 정성과 뉘우치는 뜻을 이미 다 말하였다. 경은 본래 세록의 신하로서 고상한 뜻을 품고 은거하는 선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어려움이 많은 날에 어찌 기꺼이 조정에 나와서 역량을 다 펼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가. 더구나 군신지간에 얼굴도 알지 못하는데, 지난번에 징소(徵召)하는 명에 응하여 근기(近畿) 지역까지 왔다가 겨우 한 장의 상소를 남기고 돌아가 버렸으니, 한스럽고 서운한 마음이 언제나 풀릴 수 있겠는가. 경이 이렇듯 지극한 뜻을 헤아려서 조속히 올라온다면 사림(士林)의 다행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국가에도 다행일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부주(附奏)로 사양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렇게 어려움이 많을 때를 당하여 어찌 역량을 다 펼치려 하지 않는가.’라고 하교하시니, 너무도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큰 근심거리는 성왕(聖王)의 마음을 계도(啓導)하고 많은 어려움은 나라를 흥기시킨다.’는 것은 옛사람의 격언입니다. 성명(聖明)께서 즉위하신 이래 안으로 궁궐에서부터 밖으로 조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고가 발생한 것은 이전 세상에서도 흔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중궁(中宮)의 위의가 거듭 바로잡혀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기뻐 경축하는데, 성상께서는 두려워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잘 다스릴 방도를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지난 일을 교훈 삼아 앞날을 경계하고 옛날의 잘못된 점을 고쳐 쇄신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안정을 이룩하여 하늘에 영원한 명을 비는 방도로 삼으려는 뜻에는 지극한 정성이 아련히 배어 있습니다. 만약 보잘것없는 신에게 과연 역량이 있다면 몸을 바쳐 역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신하 된 자의 직분일 터인데, 어찌 성상의 하교가 이렇게 간곡하도록 기다리겠습니까. 실제로 역량이 없어서 명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신이 매번 소명(召命)이 내릴 때마다 더욱 부끄럽고 두려워서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군신지간에 얼굴도 알지 못한다.’는 하교는, 성상의 하교가 여기까지 이른 데 대해서 저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흐릅니다.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 있는데 또한 어찌 한 번 천안(天顔)을 우러러 뵙고 싶어 하는 지극한 바람이 없겠습니까. 단지 한 번 나가 뵙는 것으로는 큰 은혜에 보답할 수가 없는데, 하잘것없는 정성만으로 징소하는 거룩한 예에 답하는 것은 분의(分義)로 볼 때 절대 할 수 없습니다.
또 이렇게 사관이 비답을 전하는 한 가지 일은 대신(大臣)에게나 베푸는 것이니, 실로 사람마다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신이 외람되게도 일찍이 계해년(1683, 숙종9) 봄에 이 특별한 은수(恩數)를 입었는데, 죽음을 앞둔 노년에 또다시 분수에 넘치는 은혜를 입어 초라하고 누추한 집에서 편히 지내며 앉은 채로 왕인(王人)을 맞이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성조(聖朝)의 은례(恩禮)를 전혀 재량하고 참작함 없이 이렇게 함부로 베푸신다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사방에 보이고 후세에 드리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현석의 편지에 답하였다.
현석이 정승으로 임명된 뒤에 편지로 진퇴(進退)의 의리를 물었다. 선생이 보낸 답서의 대략에,
“정승으로 임명된 것을 사림이 모두 경사로 여기지만, 어리석은 이 사람의 근심은 그래도 여전하니, 삼가 ‘헤아린 뒤에 들어가라.[量而後入]’는 네 글자를 우러러 바치고자 합니다. 지금 주신 편지에서 ‘죽음으로 지키고 출사하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라고 하였으니, 뜻이 정밀하여 쓰임을 지극히 할 수 있고 말을 미리 정하여 차질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 의리이고 이것이 바로 몸을 빼내는 길인데 다시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세도(世道)가 거세게 흔들려 그 끝이 보이지 않으니, 노형이 비록 끝내 출사하지 않더라도 실제로 풍지(風地) 상구(上九)의 책임을 담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끝내 백성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는 데 더욱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현석이 조정에 나간 뒤에 또 편지를 보내 시행한 대개(大槪)에 대해 논하기를,
하였는데, 선생이 별지(別紙)로 답하기를,
“4건의 차자에서 논한 바는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병을 치료하려는 자는 반드시 근본 원인을 찾아내야 하는 법인데, 고명은 오늘날 세도가 이 지경에 이른 근본 원인이 과연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강구해야 할 일은 이 병의 근원을 찾아내어 한 번 그 막을 벗겨 내는 것이니, 그렇게 하고 나서야 바른 도가 확립되고 공의(公議)가 행해져서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당론의 소멸도 거의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구차하게 어정쩡한 태도로 미봉하여 잘못을 감추려 든다면, 또한 장차 물이 더욱 깊어지고 불이 더욱 뜨거워지는 것과 같아 함께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의 당론을 교서 한 장으로 소멸시킬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야말로 우활하기 그지없는 일이니, 이 어찌 결승(結繩)의 정치를 가지고 어지러운 진(秦)나라를 다스리려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과연 이렇게 한다면 반드시 모두들 비웃을 것이니, 그만두고 실질적인 데에 종사하는 것만 못할 듯합니다.
끝 부분에 논한 ‘약한 쪽을 부지(扶持)하고 강한 쪽을 억제했다가 함께 지목(指目)을 입었다.’는 말은 내 마음에 매우 석연치 않습니다. 지난날의 일은 형이 회로(懷老 송시열)와 거취(去就)와 논의가 맞지 않은 뒤에 지목이 생겨났던 것이니, 당시에 사류(士類) 조광보(趙光甫 조지겸(趙持謙)) 같은 자도 단지 집사(執事)의 뒤를 따랐을 뿐입니다. 지금에 와서 병통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초연히 스스로 벗어나고자 한다면 당시에 형을 따랐던 사류의 마음을 납득시킬 수 없을 듯합니다. 갑자년(1684, 숙종10) 이후로는 내가 실제로 담당하게 되었으니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떠넘길 생각은 없으나, 실로 집사의 이 마음이 바로 어정쩡한 태도로 미봉하여 잘못을 감추려는 뜻에서 나온 것일까 염려스럽습니다. 이것이 바로 병의 근원일 듯하므로 감히 혐의를 피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니, 맹성(猛省)하기 바랍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유자(儒者)가 지위를 얻은 것이 근세보다 더 성한 적은 없었으나 실패한 것 또한 그에 맞먹으니, 앞 수레의 전복은 뒤따라가는 수레가 경계로 삼을 바입니다. 자신을 바르게 한 뒤라야 임금을 바로잡을 수 있고, 사심이 없은 뒤라야 남을 승복시킬 수 있으며, 남의 말을 받아들인 뒤라야 자신의 잘못을 알 수 있으니, 이렇게 하면서 지성으로 행한다면 그래도 혹 가능할 것입니다. 지난 일을 교훈 삼아 앞날을 경계하고 예전의 잘못된 점을 크게 쇄신해야 할 것이니, 허위를 버리고 충실(忠實)에 힘쓰며 먼저 의(義)를 행하고 담론(談論)을 뒤로 돌려 위태로운 풍속을 고쳐 평안한 세도를 정착시켜야만 하늘에 영원한 명을 비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편지를 이미 썼으나, 곧이어 교서가 이미 반포되어 회론(懷論)이 한창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미 말할 때를 놓쳤고 또 칩거하는 자가 간여할 바가 아니었으므로 마침내 그만두고, 아울러 이러한 뜻을 현석에게 언급하였다.
○ 신독재(愼獨齋) 선생의 《속의례문해(續疑禮問解)》를 감정(勘訂)하고, 인하여 발문을 지었다.
노선생이 일찍이 신독재 선생의 《의례문답(疑禮問答)》을 편차(編次)하여 《속의례문해》를 간행하려다가 미처 하지 못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다시 교감하고 정리한 뒤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의 〈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를 첨부하여 1책으로 만들어 인쇄하였다.
○ 8월에 네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포의(布衣)로서 나와 만나기를 명하였으나 사양하였다.
비답의 대략에,
“조정에서 유신(儒臣)을 대우하는 도리에 비추어 보면 직사(職事)로써 묶어 둘 필요가 없다. 만약 본직(本職)을 해임한다면 송조(宋朝)의 고사를 조금 모방하여 포의로서 나와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진심에서 나온 말이니 경은 깊이 헤아려서 속히 마음을 돌리도록 하라.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선생이 사관을 통해서 부주(附奏)하여 사양하였는데, 그 대략에,
“예로부터 선비의 자처하는 도리는 실로 한 가지가 아니었고, 국가가 인물의 대소 고하에 따라서 대우하는 방도도 한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조정으로 초치하여 천직(天職)을 함께하는 것이 본디 선비를 대우하는 방도이지만, 그 뜻을 꺾지 않고 그의 분수를 지키도록 허락하는 것도 선비를 대우하는 방도이니, 《주역》 〈고괘(蠱卦) 상구(上九)〉의 정전(程傳)으로부터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어 올린 《성학집요(聖學輯要)》의 〈용현(用賢)〉 조항까지에서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신의 보잘것없는 분수로 ‘유신’이라는 이름을 감당하지는 못하지만, ‘직사로 묶어 둘 필요가 없다.’는 하교는 실로 제왕이 선비를 대우한 거룩한 예절입니다. 그렇지만 포의로 나와 만나라는 하교는 또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신은 세록(世祿)의 후예로서 본래 산림의 유일(遺逸)이 아니고, 용렬하고 보잘것없는 물건인지라 또한 고인처럼 훌륭한 행실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내세울 것이 있다고 곧장 이렇게 상례(常例)를 크게 뛰어넘고 세상에 드물게 있는 거룩한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선신(先臣)은 효종대왕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입었습니다. 일찍이 ‘선비 복장으로 인견하는 자리에 나오라.’는 명이 내렸으나 선신이 사양하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는데, 결국은 너그러이 용납해 주시는 성은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불초하고 미천한 신이 또 성조(聖朝)에서 이 같은 총명(寵命)을 성상께 입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이수옹(李壽翁) - 세귀(世龜) - 의 《심경구결(心經口訣)》을 교정하였다.
○ 9월에 정장하여 사직하였다. 10월에 두 번째 정장하여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 현석의 편지에 답하였다.
현석이 편지를 보내
“성상의 비답 가운데 ‘아직 얼굴을 알지 못한다.’는 하교와 ‘포의로 입대(入對)하라.’는 하교는 이전에 직사로 징소했을 때 오히려 버틸 수 있었던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라고 하고, 상리(常理)와 정법(正法)을 힘써 따르고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는 바가 없게 하라고 권면하였다. 선생이 답서를 보내기를,
“상리와 정법이야말로 바로 유자의 출처(出處)인데, 나의 사사로운 정리는 이미 상리로써 자처하지 못하고, 보잘것없는 분수는 또 함부로 정법을 무릅쓰지 못하니, 일부러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집사와 같은 평생의 지기가 바야흐로 정승의 지위에 올라 성상을 보필하고 있으니, 만약 한 번 ‘아무개의 신념은 상하가 모두 아는 바이므로 억지로 다그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차라리 분수를 지키며 생을 마치도록 허락하신다면 또한 성조(聖朝)에서 만물을 이루어 주는 한 가지 방도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해 준다면, 말이 공정하고 의리에 맞는데 성주(聖主)께서 어찌 윤허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집사가 우리 아이더러 ‘한 번 나와 등대(登對)하여 정세를 아뢰고 사퇴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는데, 세상에 어찌 한 번 얼굴만 내미는 출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유고》에 보인다.

68년(1695, 숙종21) 을해
○ 2월에 현석 박공(朴公)을 곡하였다.
부음이 이르자 곡위(哭位)를 만들어 곡하고 가마(加麻)하였다. 장사 지낼 때에 제문을 지어 조상(弔喪)하기를,
“내가 형을 안 지 어언 30여 년이 되었구려. 나는 본디 형을 존경하였지만 형 또한 나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고 문득 고인(古人)의 의리로써 허여하였으니, 두 마음이 통하는 바에 터놓고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논의하지 않은 일이 없었소. 함께 성학(聖學)의 정로(正路)를 따라 정진하여 내면의 덕을 쌓고 행하여 업적을 이룩하면서 곧장 죽은 뒤에야 그만두기로 기약했었소.”
하였다.
○ 3월에 세자시강원 찬선(世子侍講院贊善)을 제수하였다.
이조 판서 윤지선(尹趾善)이 계청하기를,
“왕세자의 관례(冠禮) 날짜가 이미 임박했으니 찬선을 단망(單望)으로 차출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고 마침내 선생으로 재가하였다.
○ 진사 이정설(李廷說) 등이 상소하여, 정성과 예를 더욱 독실히 하여 선생을 초치하기를 청하였다.
○ 4월에 사관(史官)을 보내어 별유(別諭)로 징소하였다. 상소하여 사양하였는데,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별유의 대략에,
“막 유상(儒相)의 초상을 당하였으니, 이때에 경을 기다리는 마음은 큰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를 기다리는 것 이상이다. 찬선의 직임은 춘궁(春宮)을 보도(輔導)하는 것이라서 책임이 더욱 중요하고, 관례를 치를 날짜도 머지않았다. 그러니 줄곧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사양하였는데, 비답의 대략에,
“경은 본래 세록(世祿)의 신하이니, 이렇게 어려움이 많은 때를 당하여 힘을 다해 왕실을 돕는 것은 그 의리가 분명할 뿐만이 아니다. 더구나 포의로 입대(入對)하는 일은 본래 고사(古事)가 있는데 유독 오늘날에만 행하지 못하겠는가. 그대에게로 향하는 내 마음이 갈수록 더욱 간절해지니, 나를 그리워하는 경의 마음은 필시 나보다 배는 더 크리라 생각된다. 결단코 끝끝내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또 정장하여 사양하였다.
○ 이조 참판을 제수하였는데, 5월에 두 차례 정장하여 거듭 사직하였다.
○ 우상 신숙필(申叔弼) - 익상(翼相) - 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대략에,
“예로부터 선비의 자처하는 도리는 층급(層級)이 같지 않았고, 국가에서 대우하는 방법도 한 가지 예(例)가 아니었습니다. 어찌 한번 선비라는 이름이 붙기만 하면 그 대소와 경중을 묻지 않고 한 가지 예로 똑같이 대우하였겠습니까.
제 경우에는 안으로는 개인적인 슬픔을 가슴에 품어 이미 산골에서 평생을 살기로 스스로 맹세하였고, 밖으로는 헛된 이름을 도둑질하였으나 이미 실제적인 쓰임에 맞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아니, 나아가면 조정에 보탬이 되지 못하지만 물러나 있으면 오히려 사사로운 분수를 지킬 수 있습니다. 징소를 받은 이래로 시종일관 한계를 정해 놓고 감히 출두할 생각을 하지 않은 지가 지금 30여 년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쇠병(衰病)으로 죽을 날이 가까워져 모든 뜻이 재처럼 차갑게 식고 말았으니, 오직 깊은 골짜기에서 생을 마치고 슬픔을 안은 채 땅속으로 들어갈 날만 기다릴 뿐입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조정의 도리로 본다면 그대로 허락하고 그 뜻을 꺾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지키려는 절개를 이루게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또한 혹 옛날 제왕들이 선비를 대우했던 한 가지 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공경 대신(公卿大臣)이 국가를 위해서 일의 체모를 애석히 여겨 ‘아무개가 평생 자처한 신념은 상하가 모두 아는 바이니 억지로 다그치는 것은 옳지 않다. 차라리 자신의 뜻을 지키며 생을 마치도록 한다면 또한 성조에서 만물을 이루어 주는 한 가지 방도가 될 것이다.’라고 여겨, 정무(政務)를 논하는 때에 한 번 성상께 우러러 진달하여 은혜로운 명을 거두고 다시는 뽑아서 관직을 제수하지 않게 한다면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신공(申公)이 편지를 보고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윤증은 자처하는 바가 남들과 다르므로 일시적인 은례(恩禮)로 은거하려는 마음을 돌리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이조 참판 자리를 오래 비워 두는 것은 허례(虛禮)에 가까우니, 그 직임을 체차하고 조정 대신들에게 물으시어 관(官)에서 월름(月廩)을 보내 주는 것이 현인을 대우하는 도리에 맞을 듯합니다.”
하였다.
○ 6월에 상소하여 주급(周急)의 명을 사양하였다.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윤증은 이미 지키려는 절개가 있고 본래 세상에 나올 뜻이 없으니, 우상(右相)의 차자 내용대로 본직을 체차하고 정사를 물어 은거하고자 하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유현을 대우하는 도리에 맞을 듯합니다. 다만 조정에서 한창 초치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서 체직한다면 혹 예우하는 도리에 혐의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생각건대 정국(政局)이 바뀐 이후로 육경(六卿) 직책을 맡길 사람이 부족한데, 윤증은 사림이 우러르는 바이고 성상이 예우하는 바인 만큼 본디 승진시켜 발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전부터 조정에서 유일(遺逸)의 선비에 대해서는 반드시 위에서 직접 그 사람을 만나 본 뒤에 직접 간택을 하였고, 아래에서는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앞으로 성상의 뜻으로 결단하여 초탁(超擢)한다면 이조에 매인 직임은 자연히 풀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제수하는 명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오지 않는다고 체차한다면 일의 체모가 온당하지 않을 것이다. 형세를 보아 조처하겠다.”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듣건대 그 사람이 본디 곤궁하여 조석 끼니를 잇지 못한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임금이 유일의 선비에 대해 본디 주급하는 도리가 있었으나, 희름(餼廩)을 보내는 규정은 들어 보지 못했고 선비도 반드시 받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달이 늠료(廩料)를 보내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전규(前規)가 없는데, 주급은 그러한 의리가 있다.”
하고, 마침내 주급을 명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공경히 받아서 종족(宗族)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뒤에 쌀, 콩, 포백(布帛) 등의 하사가 있을 때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 특지(特旨)로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 참판에 올려 제수하였다. 상소하여 개정(改正)을 청하였으나 온화한 유시(諭示)를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선생이 상소하여 사직할 때 으레 직함(職銜)을 썼으나, 이때에 와서는 ‘초망신(草莽臣)’이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상소 말미에 이르기를,
“신이 이전에 입은 은례(恩禮)는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분수 밖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후의 상소문에 단지 조정에서 명한 직책에 의거하여 스스로 이름하되, 또한 감히 자급(資級)의 규식을 갖추어 쓰지 않음으로써 개인적으로 감히 편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구구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나타내려 했을 뿐입니다. 지금은 반열(班列)이 더욱 높아져서 외람됨이 더욱 심하니, 한결같이 무릅쓰고 차지하는 것은 또 절대로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재야(在野) 선비의 본래 칭호를 따름으로써 미천한 분의의 편안함을 구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 7월에 두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상소 말미에 덧붙여서 가난을 구제해 준 은혜에 사례하였다. 또 서책과 절선(節扇)을 하사한 은전을 사양하였는데, 비답에서 윤허하지 않는다고 하고 다시 징소하였다. 8월에 두 번째 정장하고, 9월에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모두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 선생은 반사(頒賜)하거나 하사한 물건이 있을 때면 모두 대청 위에 탁자를 설치하고 그 위에 받들어 올려놓은 다음 뜰로 내려와서 사배(四拜)하고 공경히 받았다. 어물(魚物)이나 과일 종류는 반드시 가묘(家廟)에 올린 다음에 종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서책은 탁자 위에 받들어 올려놓고서 공경히 끝까지 다 읽고 나서야 책을 덮으며,
“감히 임금님이 하사하신 뜻을 헛되이 할 수 없다.”
하였다.
○ 9월에 의정부 우참찬으로 옮겨 제수하였다. 10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11월에 정장하고, 12월에 두 번째 상소하여 거듭 사직하였다.

69년(1696, 숙종22) 병자
평피가 왕복함이 고리와도 같으니 / 平陂往復若環然
숭정 기년(紀年)으로부터 어느덧 육십구 년 / 周甲崇禎又九年
사해에 일개 충신 없을 리는 없을 텐데 / 四海不應無一箇
아득한 푸른 하늘 어디에 물어볼까 / 悠悠何處問蒼天
하였다.
○ 2월에 정장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3월에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를 겸임하게 하였다.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주급의 명을 사양하였다.
이조 참판 오도일(吳道一)이 성균관 좨주를 단망(單望)으로 차출하기를 계청하니, 상이 윤허하고 마침내 선생으로 재가하였다. 이때 대사성 최규서(崔奎瑞)가, 선생의 집이 본래 가난한 데다 흉년을 만나 살림이 더욱 어렵다고 하며 주급의 은혜를 내려 주기를 청하니, 상이 또한 윤허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주급하도록 한 물자를 환수하여 기민을 구제하는 데 보태기를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올라오라고 거듭 명하였다. 4월에 두 번째 상소하여 거듭 사직하였다.
○ 5월에 별유(別諭)로 징소하였다. 6월에 상소하여 사양하고 이어 사직하였는데, 우참찬 직책만 체차하였다.
이때 문학(文學) 박태항(朴泰恒)이 상소하여 선생을 징소하여 조정에 나오게 하기를 청하였다.
○ 8월에 또 상소하여 겸직(兼職)을 사직하였다.
○ 다시 우참찬에 제수하였는데, 9월에 정장하여 사직하였다.
10월에 또 정장하여 거듭 사직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 두 차례 예관(禮官)을 보내어 세자빈이 영소전(永昭殿)에 전알(展謁)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물었는데, 사양하였다.
헌의(獻議)의 대략에,
“더구나 이 예절은 사서인(士庶人)의 집안에는 있으니, 《가례(家禮)》 〈혼례(婚禮)〉에 신부가 사당(祠堂)에 알현하는 의식이 있으므로 응당 행해야 하고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예에 대해서는 초야의 천하고 비루한 몸이라서 실로 배운 바가 없는데 어찌 감히 함부로 아뢸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대로 거행하라고 명하니, 마침내 전알하는 예를 정하였다.
○ 12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우참찬 직책만 체차하였다.
비답의 대략에,
“경이 겸임한 찬선은 본래 가벼운 직책이 아니다. 주연(胄筵)에 출입하며 훈도(薰陶)하고 성취시키는 중임을 경처럼 산림에서 덕을 쌓아 세상의 본보기가 된 사람이 아니고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직책을 전적으로 경에게 책임 지우고자 하는 것이니, 경이 어찌 지극한 뜻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본직(本職)은 지금 우선 애써 경의 뜻을 받아들임으로써 경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겠다. 경은 마음을 돌려서 올라와 간절한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70년(1697, 숙종23) 정축
○ 1월에 사관을 보내어 선소(宣召)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 2월에 명촌(明村)이 내방(來訪)하였는데,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명촌이 멀리서 찾아왔으므로 선생이 덕포(德浦) 등 여러 공과 만나서 열흘 남짓 강론하였다. 돌아갈 때에 절구(絶句) 2수를 주었는데, 그중 한 수에 이르기를,
근래에 노쇠해져 문밖 출입 않으니 / 衰病年來不出門
가련케도 마음 거울 날로 흐려지누나 / 自憐心鑑日昏昏
남산에 올라가서 송별할 힘이 없어 / 南山送別無筋力
유편 외워 학문에 힘쓰자고 권면하네 / 爲誦遺篇勉共敦
하였다.
○ 3월에 이조 판서를 제수하였다.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성균관 유생 이명준(李明浚) 등이 상소하여, 정성과 예를 더욱 독실히 하여 반드시 선생을 초치하기를 청하였다.
○ 윤3월에 사관을 보내어 별유로 징소하였는데, 두 차례 상소하여 간곡히 사양하였다.
황해도 유생 홍진원(洪振源) 등과 성균관 유생 홍우현(洪禹賢) 등이 또 상소하여 선생을 초치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연달아 근시(近侍)를 보냈는데 유지의 내용이 도탑고 정중하였으므로 선생이 몹시 황공해하였다. 또 세 번째 상소하여 거듭 사양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 4월에 정장하여 사직하였다. 5월에 두 번째 사직하였는데, 이조 판서 직책만 체차하였다.
성여강(成如剛) - 지화(至和) - 의 편지에 답하였다.
이에 앞서 송상(宋相)이 이미 선생에게 노하였고, 또 성공 지선(成公至善)이 정묘년(1687, 숙종13)의 상소에 동참한 것에 성이 나서 우계 선생을 능욕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사림들이 해명 상소를 올리려고 의논하였으나 선생이 성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중지시켰다. 이때에 와서 또 송상이 구(久)에게 보낸 편지에 우계를 지나치게 배척한 말이 들어 있는 것을 알고 많은 선비들이 격분하여 변론해야 한다는 논의가 매우 준엄하였다. 여강이 편지를 보내 여쭈었는데, 선생이 답서를 보내 힘써 만류하기를,
“선현의 처신에 대해서는 단지 후세의 주자(朱子)를 기다려야 할 뿐이요, 원래 회천(懷川)의 말이 능히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지금 개인적인 편지를 찾아내어 변무(辨誣)한다는 명목으로 사림이 항변 상소를 올린다면, 이것은 회천에게 죄를 주자는 것이지 선현을 위해 변무하는 것이 아니네. 이미 선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는 회천을 공격하는 편론(偏論)일 뿐 도(道)를 호위하는 바른 논의가 아니네.”
하였다. 누차 편지를 주고받으며 만류하니 논의가 마침내 중지되었다. 《유고》에 보인다.
○ 박태한(朴泰漢)을 곡하였다.
교백(喬伯)은 성품이 깨끗하고 순수하며 학문에 힘을 쏟았으므로 선생이 원대한 앞날을 기대하였는데, 이때 거상(居喪)하느라고 몸을 과도하게 손상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곡위(哭位)를 만들어 곡하고 한없이 애석해하였다. 이공 세귀(李公世龜)에게 준 편지에 이르기를,
“지극한 행실에 대한 보답이 없어 영재(英才)가 단명(短命)하게 가 버렸으니, 누가 그의 지업(志業)이 여기에 그칠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하였다.
○ 6월에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주급(周急)의 명을 사양하였는데,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좌의정 윤지선(尹趾善)이, 선생의 집이 본래 가난한 데다 흉년까지 만났으니 가엾게 여겨 돌보아 주는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고 계청하니, 상이 주급하라고 명하였다. 호서(湖西) 유생 정사빈(鄭師賓) 등이 독실한 정성으로 초치하기를 청하고, 또 한영휘(韓永徽)가 일찍이 도봉서원(道峯書院)의 원임(院任)으로 있으면서 선생의 이름자를 지운 죄를 논하였는데, 상이 유사(攸司)로 하여금 조사하고 처리하여 징계하도록 하였다. 선생은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소란을 일으키는 것이 무리 지어 상대를 공격하는 행위와 마찬가지임을 황공하게 여겨, 사직소에 덧붙여 진달하고 스스로를 인책(引責)하였다. 비답의 대략에,
“주급하라는 명은 우연한 뜻이 아니었다. 유현을 모독한 죄는 그냥 둘 수 없는 것인데, 경이 ‘세도에 누를 끼쳤다.’고 스스로 인책하기까지 한 것은 전혀 예상 밖이라서 매우 놀랍다.”
하였다.
○ 8월에 대사헌을 제수하였다. 9월에 정장하여 사직하였다.
10월에 두 번째 정장하고, 또 상소하여 거듭 사직하였다. 이때 성균관 유생 이즙(李楫) 등이 상소하여, 선생을 징소하여 조정으로 나오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마침내 연달아 근시(近侍)를 보내 온화한 유시로 돈소(敦召)하였다. 11월에 두 번째 상소하였는데, 비답의 대략에,
“사관이 헛되이 돌아오니 부끄러움을 어찌 주체하겠는가. 기억하건대 지난 계해년(1683, 숙종9)에 경이 나를 버리지 않고 곧바로 올라왔었기에 마음이 절로 기쁘고 위로되었는데, 도성 문을 지척에 두고 곧장 돌아갈 줄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 생각해도 서운함과 실망스러움이 다 가시지 않는다. 내 마음이 이와 같은데 경이 어찌 나를 잊었겠는가. 포의(布衣) 차림으로 입대하라는 하교 또한 끝내 저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기황(饑荒)에다 재앙까지 겹쳤으니, 이때에 경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고, 주연(胄筵)에 나와 춘궁(春宮)을 교도(敎導)하는 책임을 경에게 더욱 기대한다. 어찌 차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나오려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니 경은 잘 헤아려야 할 것이다.”
하였다. 12월에 세 번째 상소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 12월에 민이승(閔以升)을 곡하였다.
언휘(彦暉)는 학식이 깊고 넓어 동문(同門)의 선비들 가운데 그에 미칠 만한 사람이 드물었으므로 선생이 매우 추중(推重)하고 허여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곡위를 만들어 곡하고 가마(加麻)하였다. 제문을 지어 조문하기를,
“우리 당의 선비들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멀리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을 든다면 자네가 그에 가까울 것이네. 예전에 이미 우리 사원(士元 박태보(朴泰輔))을 잃었고 지난여름 교백(喬伯 박태한(朴泰漢))을 곡했는데, 지금 또 자네를 곡하게 되었네. 뒷날을 의탁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눈앞에서 요절하니, 이 또한 나의 운명인 모양이네.”
하였으니, 세 사람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지극했던 것이다. 뒤에 그의 무덤에 들러 시를 짓기를,
평생의 지업 이미 먼지로 변하였고 / 平生志業已成埃
시든 풀 짙은 연무 보이는 게 모두 슬퍼 / 衰草荒烟滿目哀
무덤가를 서성이며 차마 발길 못 돌리니 / 三遶孤墳不忍去
정령은 옛 친구가 찾아온 줄 알 터이지 / 精靈應識故人來
하였다.

71년(1698, 숙종24) 무인
○ 1월에 정장하여 사직하였는데, 대사헌 직책만 체차하였다.
○ 2월에 좌참찬(左參贊)을 제수하였는데, 정장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에 두 번째 정장하고, 5월에 세 번째 정장하고, 7월에 네 번째 정장하여 연달아 사직하였다.
○ 3월에 종제(從弟) 덕포공(德浦公)을 곡하였다.
덕포공은 일찌감치 은퇴를 결행하고 물러나서 자연 속에서 생활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그의 맑은 기풍과 엄준한 절개, 높고 원대한 식견을 칭찬하였으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의견을 묻곤 하였는데, 세상을 뜨자 매우 애석해하였다. 만사와 제문이 있고, 뒤에 또 묘표(墓表)를 지었다.
○ 8월에 사관을 보내어 별유로 징소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사관이 다시 와서 징소하는 유지를 전하였는데, 9월에 상소하여 거듭 소명(召命)을 사양하고 이어 사직하였으며, 10월에 또 정장하여 사직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10월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노산군(魯山君)과 신비(愼妃)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는 문제에 대하여 물었다.
이때 현감 신규(申奎)가 상소하여 노산군과 신비의 위호를 추복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논의하라고 명하였다. 선생이 전후의 수의(收議)에 대해서는 감히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으나, 이때 와서는 ‘이 일은 온 나라의 신민들이 지금까지도 남몰래 애통해하는 바이니, 만약 이를 거행한다면 성덕(聖德)을 빛나게 하고 만세에 할 말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구구한 정성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겠다.’고 여기고는 마침내 예관 편에 헌의(獻議)를 부쳐 보내기를,
“두 건의 논의는 실로 더할 수 없이 중대한 일로서, 200년간 원통하게 억눌려 있던 기운이 장차 오늘에 와서 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밝으신 열성(列聖)의 영령이 위에 오르내리시는데 성상의 일념이 위로 천지와 통하니, 성덕(盛德)의 비상한 조처는 실로 성상의 결단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였다.
○ 동토공(童土公 윤순거(尹舜擧))이 일찍이 《노릉지(魯陵誌)》를 편찬하고 기문(記文)을 지었는데 ‘위호를 복위하기를 명나라 경태(景泰) 황제처럼 한다면’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이것이 선생 가문의 논의라고 한다.
○ 11월에 특별히 사관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선소(宣召)하였다.
이때 사간 정호(鄭澔)가 상소하여 선생이 스승을 배반했다고 욕하면서 갑자년(1684, 숙종10)의 일까지 언급하였다. 상이 엄히 배척하기를,
“몇 년 전에 좨주(祭酒)가 겪었던 일은 이미 공가(公家)의 문자가 아니었으니, 그 당시 대신이 사안의 처리를 조정으로 떠밀어 올린 것은 크게 잘못된 처사였다. 내가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윤허하여 무단히 평지에 거센 풍파를 일으켰으니, 나는 지금까지도 이것을 뉘우치고 한스럽게 생각한다. 지금 만약 갑자기 입장을 바꾼다면 이는 줏대 없는 행동이니, 나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였다. 부응교 김진규(金鎭圭), 수찬 권상유(權尙游), 호조 판서 민진장(閔鎭長) 등이 또 상소하여 무함하고 욕하였으나 상이 모두 배척하였다. 집의 이정겸(李廷謙), 지평 이언경(李彦經)이 정호를 파직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대신(臺臣)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통해서 하교하기를,
“일찍이 논하건대, 몇 해 전에 대로(大老 송시열)가 비난하고 배척한 사람은 바로 윤선거인데, 윤선거는 좨주의 부친이다. 그러니 아들 된 자가 어떻게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입을 다문 채 변론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아! 사생(師生)과 부자(父子)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가볍고 어느 것이 더 중하겠는가. 지난번에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윤허하였다.’고 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두 집안의 다툼은 조정에서 알 바가 아니니, 이른바 ‘대신이 사안의 처리를 조정으로 떠밀어 올린 것은 크게 잘못된 처사였다.’라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좨주는 산림에서 덕을 수양하여 세상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절대로 일개 정호가 감히 흔들어 댈 대상이 아니다.”
하였다. 성균관 유생 조의상(趙儀祥), 호서 유생 이봉서(李鳳瑞) 등이 상소하여 변무(辨誣)하니, 상이 모두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인하여 사관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기를,
“경이 산림의 기덕(耆德)으로 세상의 대유(大儒)가 되었으니, 과인의 존신(尊信)과 사림(士林)의 존경이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이번에 정호가 기회를 틈타 상소하여 제멋대로 모욕하였으니, 세도(世道)를 생각하면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내가 이미 경의 심사를 통찰하여 명백히 드러내 보이고, 정호의 정상과 태도를 깊이 미워하여 통쾌하게 견책하는 뜻을 보였으니, 경이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불안해할 것이 있겠는가. 이에 사관을 보내어 거듭 나의 뜻을 고하는 바이다. 경은 멀리 은거하려는 마음을 빨리 돌려 하루속히 길에 오름으로써 간절히 기다리는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는데, 선생이 부주(附奏)하여 사양하고, 초야에 숨어 지내는 몸으로 세도에 해를 끼친 죄를 심도 깊게 진달하였다.
○ 상의 하교 이후에 ‘부사경중(父師輕重)’의 의리가 사류(士類)의 정론(定論)이 되었다. 선생이 일찍이 이르기를,
“이와 같다면 ‘한결같이 섬기고 목숨을 바친다.[一事致死]’는 말이 헛된 의리가 되니, 극히 온당하지 않다.”
하였다. 뒤에 아들 행교(行敎)에게 준 편지에,
“스승이라도 천심(淺深)과 경중의 구별이 있다. 예컨대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에게 있어서 공자(孔子)는 군부(君父)와 동일하지만, 그 아래는 현격한 차등이 있는 것이다. 지금 만약 사생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일체 모두 부자와 군신 관계와 대등하다고 여긴다면 이는 본디 불가하다. 그러나 ‘부친이 중하고 스승이 가볍다.’는 것으로 하나의 설을 정한다면 이 또한 불가하다. 성상께서 단지 부친과 스승의 경중만으로 단안을 내렸기 때문에 저들의 마음을 승복시키지 못한 것이니, 만약 ‘스승도 여러 등급이 있으므로 일체 다 군부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고 하셨다면 저들도 반드시 마음속으로 승복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유고》에 보인다.
○ 이때 선생을 징소하도록 청하는 성균관 유생의 상소가 이어졌고, 또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자에 대한 벌삭(罰削)도 빈번하였다. 문인 한배주(韓配周)가 그때 서울에 있었는데, 선생이 편지를 보내 진정시키지 못하는 것을 나무랐다. 그 대략에,
“보잘것없는 이 몸이 감히 세상에 나가지 못하는 것은 이미 스스로 작정한 일인데, 무단히 직명과 지위가 이렇게까지 높아지는 바람에 밤낮없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차라리 죽기를 빌어 보지만 그것도 되지를 않네. 이러한 때에 나와 친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나를 위해서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위축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도리어 빈말을 거창하게 늘어놓으며 군부에게 요구하고 있는 대로 기세를 부리며 다른 사람을 능멸하고 제압함으로써 장차 나를 예측할 수 없는 궁지에 빠지게 하고야 말려 하니, 이것이 과연 무슨 일인가.
여러 사람들이 매번 사론(士論)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이른바 사론이라는 것은 의리의 바름에서 나오는 것이니, 지금과 같은 일은 단지 편론(偏論)일 뿐이네. 이렇게 세도(世道)가 괴리되어 곳곳에 구멍이 생기고 상처가 낭자한 때에 은미한 일을 들추어내어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공격하되 대체(大體)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사사로운 뜻만 만족시키려 드니, 이러한데도 오히려 사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접때의 일도 꼭 이와 같았으니, 세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거기에 원인이 있네. 그렇다면 지금은 일체 그와 상반되게 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탓하면서 본받아서야 되겠는가.
지금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은 다른 게 없네. 선비 된 자가 의(義)를 먼저 행하고 논의는 뒤로 미루며, 충신(忠信)을 숭상하고 거짓됨을 경계하며, 공정함을 견지하고 사사로움과 치우침을 버리며, 화평함을 힘쓰고 음험(陰險)함과 사특함을 배척하여, 어떤 일이건 어떤 상황에서건, 크건 작건 간에 반드시 천리의 순수함을 구하여서 따르고 털끝만큼이라도 이해를 계산하고 따지는 사사로움이 섞여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네. 이렇게 하면 내 몸에 좋을 뿐만 아니라 당류(黨類)에도 좋고, 당류에 좋을 뿐만 아니라 세도에도 좋게 될 것이네. 그렇지 않다면 앞서 전복된 수레와 가는 길이 다르더라도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니, 맹성(猛省)하기를 천만번 간절히 바라네.”
하였다.
○ 대사헌으로 옮겨 제수하였는데, 12월에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정장하여 사직하였다.

72년(1699, 숙종25) 기묘
○ 1월에 자급(資級)을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올렸다. 2월에 상소하여 새 자급을 깎아 주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시임(時任) 재신(宰臣) 가운데 은례(恩例)를 청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은택이 선생에게까지 미쳐 숭정의 품계로 올렸으니, 맏아들 행교(行敎)가 삼사(三司)의 직책에 제수되었기 때문에 시종신(侍從臣)에게 추은(推恩)하는 예를 원용하였으나 실제로 구전(舊典)은 아니었다. 선생이 지극히 황공해하며 상소하여 간곡히 사양하였다.
○ 품계가 1품이 되었다는 이유로 대사헌은 체차하였다.
○ 명촌(明村)에게 준 편지에 이르기를,
“자급을 올리는 은전이 내리니 몸 둘 곳이 없습니다. 덕 있는 사람에게 주는 국가의 명기(名器)를 이렇게 참람되게 베풀고 버리듯이 함부로 주는 이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은택을 간청하는 것이 요행의 문로(門路)와 같아 조정이 높여지지 않고 명기가 날로 가벼워지니, 누가 능히 이런 전례를 한번 깨부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로부터 고쳐서 바로잡는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 9월에 특별히 액례(掖隷)를 보내어 식물(食物)을 하사하였는데, 상소하여 사례하고 이어 사직하였다.

73년(1700, 숙종26) 경진
○ 8월 신유(1일)에 교산(交山)에 성묘하였다.
선생이 오래전부터 선영(先塋)에 가서 성묘하고 영결(永訣)하고자 하였으나, 오랫동안 직명(職名)을 벗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근기(近畿)에 왕래하지 못한 채 몇 해를 끌어 왔다. 이때에 소명(召命)이 조금 뜸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서쪽으로 길을 떠났는데, 손자 동원(東源)이 따랐다. 명촌과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두 공의 서재(書齋)에 들러 묵으며 회포를 풀고, 신미(11일)에 교산에 도착하였다.
○ 좌참찬을 제수하였다.
○ 계유(13일)에 사관을 보내어 별유로 징소하였다. 사양하였지만 온화하게 하유하고 돈소(敦召)하였다.
선생이 교하(交河)에 이르렀다는 것을 정원(政院)이 아뢰었고, 보덕(輔德) 이진수(李震壽)가 또 상소하여 정성을 다해 초치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즉시 사관을 보내어 별유하기를,
“지금 들으니 경이 교하 선산에 와 있다고 한다. 오매불망 생각하던 끝에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서 성묘를 끝낸 뒤에 얼른 마음을 돌려 조정에 나옴으로써 간절히 기다리는 나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선생이 부주(附奏)하여 사양하니, 전교하기를,
“경이 선산에 성묘하기 위해 근기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몹시 기뻐서 무언가를 얻은 것만 같았다. 뜻밖에 사관이 소득 없이 돌아오고 경이 조정에 나올 날은 아득하기만 하니, 정리의 미덥지 못함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인가. 마음이 무척이나 놀랍다. 더구나 경은 현재 찬선(贊善)의 직임을 띠고 있는데, 이때에 춘궁(春宮)을 보호하는 역할을 경처럼 숙덕(宿德)과 중망(重望)을 갖춘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하겠는가. 경이 오기를 바라는 내 마음은 큰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를 애타게 기대하는 심정 이상이다. 모쪼록 지극한 뜻을 헤아려 마음을 돌려 속히 길에 오르도록 하라.”
하였다.
○ 병자(16일)에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추석에 절사(節祀)를 행하고 글을 지어 선영에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이튿날 교하현에 상소를 바치고 곧바로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무인(18일)에 미륵점(彌勒店)에 이르러 상의 체후(體候)가 미령하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멈춘 채 대기하다가 경진(20일)에 상의 체후가 쾌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길을 떠났다. 진위(振威)에 이르렀을 때 사관이 뒤쫓아 와서 유시하여 부르는 비답을 전하였다. 그 대략에,
“전후로 돈독히 권면한 말은 실로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내 정성이 얕은 탓에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여 ‘문득 귀로를 향한다.’는 말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나도 모르게 놀라 좌우의 손을 잃은 것만 같다. 경은 간절히 생각하는 내 뜻을 헤아려서 마음을 돌려 길에 오르라.”
하였다. 선생이 부주하여 사양하고 갑신(24일)에 집에 도착하였다. 9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이때 생원 이사윤(李師尹) 등이 상소하여 독실히 예우하여 초치하기를 청하였다.
○ 10월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계성묘(啓聖廟)를 창건하는 일에 대하여 물었으나 사양하였다.
두 번째 헌의(獻議)의 대략에,
“이 일은 명나라에서 이미 행하였던 바이고 선유(先儒)가 일찍이 논하였던 바이니, 비록 사사로운 마음에 하찮은 의문점이 있더라도 어찌 감히 경솔히 논단하여 불위(不韙)의 죄를 거듭 범하겠습니까.”
하였다. 뒤에 명촌에게 답한 편지에서 계성묘 설치에 관련된 의문점을 논하였다. 《유고》에 보인다.
○ 11월에 정장하여 사직하였다.
12월에 또 정장하여 거듭 사직하였다.

74년(1701, 숙종27) 신사
○ 1월에 정장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에 두 번째 정장하고 4월에 세 번째 정장하여 연달아 사직하였다.
○ 3월에 김재해(金載海) - 숙함(叔涵) - 의 편지에 답하였다.
숙함은 현석(玄石)의 문인으로 학문이 정밀하였다. 일찍이 찾아와서 뵙고 강문(講問)하였으며, 또 편지로 이기(理氣)와 정심(正心) 등에 대해서 질정하였다. 선생이 답서에서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 유소(有所)와 부재(不在)에 대한 그의 견해에 내포된 병통을 변증하되, 수천 글자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명백히 분석하여 그 뜻을 다 드러내었다. 《유고》에 보인다.
○ 나중에 숙함이 또 칠언사운(七言四韻)을 보내어 그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질정하였는데, 여전히 이기호발(理氣互發)의 뜻에 마음을 두었으니, 이는 대개 현석의 뜻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선생이 잘못된 곳에 찌를 붙여 정정하고, 또 그의 시에 차운하기를,
율곡 노인 당시에 큰 근원을 통찰하여 / 栗老當時洞大源
위아래로 곧바로 겹겹의 문 열었었지
/ 從頭直下闢重門
연구하면 무궁한 묘리가 들었는데 / 鑽硏自有無窮妙
무엇 하러 쓸데없이 다시 말을 낭비하랴 / 豈合床床更費言

두 마음에 나아가서 일원을 보아야지 / 好就二心看一源
사단칠정 무엇 하러 나눌 것이 있겠는가 / 端情那可更分門
선사께서 가리킨 뜻 비록 이와 같았어도 / 先師所指雖如是
단지 잘 간직하고 다시 말을 말아야지
/ 只合存之更勿言

한 조각의 마음이 바로 본원으로서 / 一片靈臺是本源
주인옹이 객을 인해 비로소 문을 열지 / 主翁因客始開門
문을 열고 문 닫을 뿐 다른 길이 없으니 / 門開門閉無他逕
묘용에 어찌 달리 말 붙일 게 있으리오 / 妙用何須別着言
하였다.
○ 6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 두 차례 예관을 보내어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하는 문제에 대해 물었는데, 사양하였다.
헌의의 대략에,
“지금 이 선정(先正)의 덕과 학문, 행실과 업적은 본디 사림이 숭앙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사전(祀典)은 실로 미천한 분수와 어리석은 식견으로 감히 함부로 논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 7월에 의정부좌찬성 겸 세자시강원이사(議政府左贊成兼世子侍講院貳師)를 제수하고 별유로 징소하였는데, 상소하여 개정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아뢰기를,
“춘궁(春宮)이 강학(講學)하는 날을 당하여 좌우 빈료(賓僚)는 의당 인원을 갖추어 보도(輔導)해야 합니다. 좌참찬 윤증이 현재 찬선(贊善)으로 있는데, 1품 관원이 3품 직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체례(體例)에 방해되는 점이 있습니다. 해당 품계의 이사(貳師) 자리가 비어 있은 지 오래이니, 이 직책으로 옮겨 제수하여 그 직임을 중히 하소서.”
하였으므로 마침내 이 명이 있었다. 교지를 내려 돈소하기를,
“경은 유림의 숙덕(宿德)으로서 나라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으니, 내가 우대하고 의지하는 것이 융숭하고 정중할 뿐만이 아니다. 반드시 좌우에 초치하여 보도에 힘입고 세도를 만회하고자 전후의 징소 전지에서 성심을 다 보였었다. 그러나 나의 정성이 부족한 탓으로 초야에 은거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서운함과 부끄러움이 어찌 한이 있겠는가.
이번에 경을 발탁하여 이공(貳公)의 직책을 제수하고, 춘궁의 빈사(賓師) 직임을 겸하게 하였다. 지금 춘궁이 강연(講筵)을 연속해서 열어 학업이 날로 향상되고 있으니, 보도하여 성취시키는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 시급한 시점이다. 경처럼 기덕(耆德)과 중망(重望)을 겸비한 사람이 아니라면 또한 누가 그 책임을 맡겠는가. 경은 좌불안석 기다리는 나의 정성을 헤아려서 얼른 길에 올라 나의 부족한 점을 보필하고 춘궁을 보도하라.”
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숭자(崇資)는 자신에게 과분하고 명기(名器)가 가볍게 된다는 것을 다시 진달하고 모두 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거듭 징소하였다.
○ 8월 기사(14일)에 인현왕비(仁顯王妃)가 승하하였으므로 현조(縣朝)에 들어가 곡림(哭臨)하고 성복(成服)하였다.
○ 두 번째 상소하여 대죄(待罪)하고 사직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국상(國喪)을 조위(弔慰)하고, 분곡(奔哭)하지 못하고 누차 소명을 어겼다 하여 ‘대죄신(待罪臣)’이라고 칭하였다. 이 뒤로 올린 사직 상소에서도 그렇게 칭하였다.
○ 9월에 영의정 최여화(崔汝和) - 석정(錫鼎) - 의 편지에 답하였다.
최공(崔公)이, 선생이 지은 〈사례사의(四禮私議)〉를 보고서 국휼(國恤)을 인하여 사가(私家)의 연제(練祭)와 대상(大祥)에 대한 일을 아뢰고, 또 편지로 질의하였으므로 선생이 답한 것이다.
○ 10월에 율곡 선생의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를 정정(訂正)ㆍ보완하고, 또 발문(跋文)을 썼다.
선생은 율곡의 〈위학지방도〉가 실제로는 우계와 함께 정정한 것으로서 간략하고 요약되고 절실하여 초학자들이 수용하기에 가장 좋다고 여겼다. 그래서 마침내 그 도를 드러내되, 문학(問學)을 거꾸로 쓴 것은 끝내 안배(按排)한 듯한 점이 있다고 여겨서 바로잡고, 입지(立志)와 무실(務實)이 학문의 종시(終始)가 된다고 여겨 아래에 첨가하였다. 또 그 도(圖)의 근본이 된 여러 설들을 모아서 그 뜻을 드러내어 밝히고 발문을 썼다.
○ 선생은 일찍이 〈위학지방도〉와 〈초학획일도(初學畫一圖)〉가 학문의 문로(門路)가 된다고 여겨 배우는 자들에게 가리켜 보이곤 하셨다.
○ 11월에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동궁을 보호하는 의리에 대해 진달하였다.
이때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사사(賜死)되었다. 선생은 춘궁이 어린 나이에 이 같은 변고를 만난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깊은 근심을 억제하지 못하였으므로 사직 상소를 올리는 참에 동궁을 보호하는 의리에 대하여 진달하였다. 그 대략에,
“예로부터 국가가 패망하려 할 때는 변고가 한번 생겨나서 화란(禍亂)이 끊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고금의 물정(物情)과 세변(世變)을 통찰하시니 무엇인들 비추어 살피지 못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세자 저하께서 아직 어린 연령에 이렇게 큰 어려움을 당했으니, 우러러 믿을 분은 오직 지존(至尊)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질병을 걱정하고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며 다각도로 보살펴 돌보아 주는 것에 실제로 성상께서 관심을 기울이셔야 할 것입니다. 성인(聖人)의 자애로움에 그치는 지극한 정에다 사직의 중요함을 거듭 생각하시어 은근하게 거듭거듭 돌아보며 보호하고 안정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속으로 다 판단하고 계실 것이나, 신민들의 남모르는 근심과 지나친 우려 또한 어디엔들 이르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지금 이 상소에서 진달한 내용은 춘궁을 보호하려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은 전에 내린 교지 내용대로 마음을 편히 갖고 사직하지 말고, 속히 조정으로 나와 간절히 기다리는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상소는 《유고》에 보인다.

75년(1702, 숙종28) 임오
○ 1월에 정장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5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국상의 연제(練祭)에 나아가지 못하여 신하 된 분의(分義)를 잃었다는 것으로 대죄(待罪)하였다.
○ 7월에 사관을 보내어 별유로 징소하였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거듭 징소하였다.
전교하기를,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렸을 때 배우는 것은 장성하여 행하고자 함이다. 세상을 잊는 데 과감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자신의 역량을 펴고자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전후로 부지런하고 정성스럽게 돈소(敦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시골에서 은거하겠다는 뜻을 굳게 지킨 채 마음을 돌려 일어나려 하지 않으니, 이는 실로 치의(緇衣)의 정성이 처음과 같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일이다. 서운하고 부끄러운 심정을 어찌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린 적이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재변이 자주 발생하여 국가의 형세가 위태로우니, 자나 깨나 현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이때에 더욱 간절하다.
아! 과인을 성심껏 보좌하고 춘궁을 보익(輔翼)하는 일은 임무가 크고 책임이 중하니, 오늘날 산림에서 덕을 쌓아 일찍부터 중망을 받아 온 사람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모쪼록 목이 타듯이 기다리는 나의 뜻을 헤아려서 자신의 몸이 더럽혀질 것처럼 여기는 마음을 속히 돌려 곧바로 조정으로 나옴으로써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도록 힘쓰라.”
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다시 돈소하였다. 8월에 두 번째 상소하여 거듭 사양하였다.
○ 《근사후록(近思後錄)》을 편차하였다.
노선생이 일찍이 ‘우리 동방의 도학(道學)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에서 비롯되어 정암(靜庵)과 퇴계(退溪)에게서 번창하고 우계(牛溪)와 율곡(栗谷)에게서 밝아졌으니, 그분들의 격언(格言)과 지론(至論)은 염락(濂洛)과 짝할 만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칠현(七賢)의 문자를 취하여 《근사록(近思錄)》의 문목(門目)에 따라 유별(類別)로 편차하여 초록한 뒤 《근사후록》이라고 이름 붙여 수용(受用)할 자료로 삼고자 하였으나, 미처 착수하지 못하였다. 선생이 매번 뒤를 이어 편집하여 책을 완성시키고자 하였으나, 찬술(纂述)로 자처하는 것을 혐의하여 조심하느라 하지 못하였다. 간간이 현석(玄石)과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 창계(滄溪) 임영(林泳) 등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했지만 끝내 책을 완성시킨 사람이 없었다. 만년에 비로소 뽑아 모아서 거의 두서가 잡혔으나 또한 편찬 작업을 마치지 못하였다.
○ 문인이 일찍이
“선생님은 저술을 하여 후학에게 혜택을 베푸셔야 합니다.”
하였는데, 선생이 말씀하기를,
“책을 저술하여 입언(立言)하는 것을 어찌 후학이 감히 할 바이겠는가. 옛사람의 저술은 반드시 농기구를 만들고 질그릇을 굽는 것과 같이 빠뜨릴 수 없는 경우에 한 것이었다. 지금은 경전(經傳)으로부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책에 이르기까지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본디 저술을 일삼을 필요가 없다. 배우는 자들은 단지 여기에 나아가서 익숙히 읽고 정밀히 생각하여 진정으로 알고 실제로 행하면 될 뿐이다. 만약 여기에 힘쓰지 않고 저술만 일삼아 전현(前賢)들보다 나아지기를 구한다면 이는 무실(務實)의 학문이 아니다.”
하였다. 이는 대개 선생의 겸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평소 내실에 힘을 기울였던 것을 또한 볼 수 있다.
○ 12월에 《정재집(定齋集)》을 감정(勘訂)하였다.

76년(1703, 숙종29) 계미
○ 1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 8월에 서계(西溪) 박공(朴公)을 곡하였다.
서계는 박학한 학문과 높은 식견을 지닌 분으로서 일찌감치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생활하였는데, 선생이 약관(弱冠)부터 교제하여 정의가 매우 돈독하였다. 부음이 이르자 곡위(哭位)를 만들어 곡하고 가마(加麻)하였다. 만사와 제문이 있다. 제문에 이르기를,
사람들이 일찍이 공에게 기대하길 / 人嘗期公
나라의 동량(棟梁) 역할 맡으리라 했었는데 / 可當棟隆
소명(召命)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사람으론 / 招麾不動
금세에 오직 우리 공 한 사람뿐이리라 / 今世惟公
어이하여 조정의 고위직을 마다하고 / 曷不廊廟
시골집에 파묻혀서 생애를 마쳤던고 / 而沒蒿蓬
탐욕스런 사람들 청렴하게 만든 절개 / 廉頑一節
그 어찌 크나큰 공 아니라 하겠는가 / 抑豈非功
하였다. 나중에 또 비명(碑銘)을 지었다.

77년(1704, 숙종30) 갑신
○ 1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 2월에 두 차례 예관(禮官)을 보내어 신종황제(神宗皇帝)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대해 물었으나 사양하였다.
1월에 상이 신종황제의 사당을 세워 강한(江漢)의 생각을 부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예관을 보내어 하문하니, 선생은, 이렇게 인심이 투박하고 나태하며 천리(天理)가 어둡고 꽉 막힌 날에 성상께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신 것은 신인(神人)을 감동시킬 만한 일이니, 변변찮은 정성을 조금이나마 보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마침내 예관에게 부쳐 헌의(獻議)하기를,
“신종황제의 망극한 은혜는 실로 우리 동방 신민이 만세(萬世)토록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명나라를 종주로 삼는 의리를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는데, 성상께서 이런 생각을 하셨으니 귀신을 감읍(感泣)시킬 만합니다. 그러나 사당을 세우는 논의는 실로 국가의 막중한 사전(祀典)입니다. 신은 아무 쓸모없는 미천한 분의로 죽을 날이 머지않았고 아는 것도 없으니, 실로 감히 문득 입을 열어 참람되고 주제넘게 행동하는 죄를 거듭 범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명촌(明村)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사당을 세우는 일은 의심할 게 없을 듯합니다. 우리 동방은 실로 망극한 은혜를 입어 만세가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사당을 세워 덕을 추모하고 은혜에 보답하는 곳으로 삼아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생각을 부치고자 함은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으로 바로 천리가 있는 바입니다. 더구나 올해는 명나라가 망한 갑신년으로서 갑자(甲子)가 벌써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성상의 생각이 여기에 미친 것은 사람을 감읍하게 하니, 만약 이를 인하여 확충하여 실질적인 뜻을 세우고 실질적인 공을 이룬다면 진실로 천하의 대업(大業)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모두 《유고》에 보인다.
○ 이때 조정의 의논이 끝내 사당을 세우는 것은 구애되는 점이 있다고 여겨, 마침내 후원(後苑)에 단(壇)을 세우고 대보단(大報壇)이라 이름 붙인 뒤에 상이 친히 제사 지냈다. 어제(御製) 율시 한 수가 있는데 선생이 공경히 그 시에 차운하기를,
선왕의 성대한 덕 현친해야 마땅하고 / 先王盛德固賢親
신종황제 크신 은혜 만세토록 영원할 터 / 聖帝隆恩亘萬春
의분하여 존왕양이(尊王攘夷) 유지를 남겼는데 / 義奮尊攘遺志在
단 쌓아 성대하게 제사 올려 보답하네 / 壇崇報祀縟儀陳
특별히 쓰신 어제 밝기가 해 같으니 / 宸章特揭昭如日
괜스레 눈물 흘러 수건을 적시누나 / 感淚空流濕滿巾
가슴속에 서린 원한 죽어야만 잊으리니 / 忍痛含冤死後已
여러 공들 일심으로 따르지 않을쏜가 / 群公可不一心遵
하였다.

78년(1705, 숙종31) 을유
○ 1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3월에 분암(墳庵)에서 종회(宗會)를 열었다.
시를 지어 여러 종족들을 권면하기를,
문호는 성하거나 쇠함이 있고 / 門戶有盛衰
종족은 가깝거나 멂이 있지만 / 族屬有遠近
다행히도 종회가 유지된 덕에 / 幸有此會存
함께 모여 선훈을 강마(講磨)하누나 / 相與講先訓
종족들이 소원하면 친목 다지고 / 族疏加惇睦
문호가 쇠해지면 일으킬지니 / 門衰思振奮
어찌 달리 특별한 방법 있으랴 / 其道豈有他
오직 하나 학문에 힘쓰는 길뿐 / 只可勉學問
학문은 일상생활 속에 있는 것 / 學問在日用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리 / 事事求盡分
무엇보다 경과 서에 힘써 나가면 / 敬恕最要切
집이건 나라건 원망이 없지
/ 家邦無怨忿
부귀는 부러워할 일이 못 되고 / 富貴不足慕
빈천은 성낼 만한 것이 아니니 / 貧賤非所慍
곤궁하고 영달(榮達)함은 너의 명이고 / 窮達乃爾命
탄식할 건 아름다운 명성 없는 것 / 所嗟少令聞
각자가 노력하고 스스로 아껴 / 努力各自愛
수립하여 가문을 빛내야 하리 / 樹立光家運
하였다.
○ 4월에 정생(鄭生) - 만양(萬陽)ㆍ규양(葵陽) - 의 편지에 답하였다.
정생은 영남의 선비이다. 형제가 두문불출하며 강학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편지로 문생(門生)의 예를 갖추고 학업을 청하였다.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심(心)ㆍ성(性)ㆍ이(理)ㆍ기(氣)의 깊은 뜻과 능소(能所)의 체용(體用)을 분변하는 것에 대해서 논하였는데, 자못 그 대체를 잃지 않았다. 선생께서는 그 견해가 세속의 식견 얕은 선비들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칭찬하며 더불어 논변하였다. 편지는 《유고》에 보인다.
○ 11월에 상소하여 선위(禪位)하겠다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고 이어 사직하였는데, 상소가 위에 올라가지는 않았다.
이때 상이 동궁에게 선위하겠다고 명하였다가 신하들의 쟁집(爭執)으로 인하여 명을 도로 거두었다. 선생이 이 명을 처음 듣고 즉시 상소하여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니, 그 대략에,
“하늘과 조종(祖宗)이 맡기신 막중한 보위를 가벼이 놓아서는 안 되며, 수많은 신민(臣民)들의 친애하여 떠받들려는 바람을 가벼이 끊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지극한 성품과 독실한 효성을 지니신 우리 춘궁 저하가 갑자기 이 명을 받게 되었으니, 두렵고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은 삼가 성상께서 다시 헤아리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덕을 공경히 하고 백성들의 일을 살피는 데 힘써서 하늘에 영원한 명을 빌기를 도모함으로써 위로는 하늘과 조종이 맡기신 막중한 직임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가운데로는 춘궁 저하의 독실한 효성을 위로하시며, 아래로는 수많은 신민들의 친애하여 떠받들고자 하는 바람에 답해야 할 것이요, 절대로 갑작스럽게 단행하셔서는 안 됩니다. 초야의 미천한 몸이라서 진실로 감히 국가의 대사를 함부로 논하지는 못하지만, 초야에 있는 몸이므로 또한 감히 초야 백성의 심정을 우러러 아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미 현도(縣道)에 상소를 바쳤으나, 선위의 명을 거두었기 때문에 도로 내려 보냈다.

79년(1706, 숙종32) 병술
○ 1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3월에 인재를 천거하라는 명이 있었다.
선생은 초야의 미천한 신분으로 자처하여 감히 명에 응하지 않았다.
○ 4월에 제생(諸生)들과 만나서 이기설(理氣說)에 대해서 강론하였다.
이때 김숙함(金叔涵)이 서울에서 와서 선생을 뵈었는데, 양득중 택부(梁得中擇夫)와 종손(從孫) 동수(東洙)가 함께 와서 모였다. 이기설과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강론하고 며칠 만에 파하였다.
○ 5월에 양득중의 편지에 답하여 사단칠정설을 논하였다.
택부(擇夫)가 현석(玄石)의 이기설과 사단칠정설, 그리고 자신의 논설(論說)을 가지고 편지로 선생에게 질정하였다. 답서의 대략에,
“심(心)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은 한 가지일 뿐이니,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모두 허령지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네. 율곡이 논한 ‘기발이승(氣發理乘)’ 4자는 이미 바뀔 수 없는 정론이 되었고, ‘이통기국(理通氣局)’ 4자는 또 조리가 분명하고 뜻이 잘 통하여 막힘이 없으니, 명리(名理)의 설이 여기에 이르면 거의 완벽하여 더 논할 바가 없네. 그러나 이 도리(道理)의 극히 정미한 곳은 선현의 설명이 모두 공력을 쌓고 실제로 본 속에서 나와 모두 근거한 바가 있으니, 우리들이 비록 율옹(栗翁)의 설을 종주로 삼아 정론으로 여기더라도 여러 설의 동이(同異)와 득실(得失)에 대해서는 또한 쉽게 단정을 내리지 말아야 하네. 후학은 단지 각각 그 설에 나아가서 각각 그 뜻을 연구해야 할 뿐이니, 깊이 연구하고 음미하다 보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연히 진정으로 이해할 때가 있을 것이네.”
하였다. 《유고》에 보인다.
○ 6월에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임부(林溥)가 상소한 일에 대해서 언급하였는데, 온화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이때 임부라는 자가 상소하여 한쪽 편 사람들이 동궁을 장차 불리하게 하려 한다고 배척하고, 이어 선생을 초치하기를 청하면서 선생이 나오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상이 그의 간악한 정상을 통촉하고 귀양 보내도록 명하였는데, 문인들이 장차 상소하여 임부의 무함을 해명하려 하였다. 선생이 듣고서 놀라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해명할 일이겠는가. 더구나 내가 있는데 남이 하도록 하다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이 같은 일은 모두가 직명(職名)을 지니고 있어서 생긴 것이다.”
하고 마침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처음에는 실로 슬프고 괴로운 사사로운 정리 때문에 스스로 죽을 때까지 시골에서 살기로 맹세하였고, 끝에는 또 실상도 없이 헛된 이름만 알려졌기 때문에 외람되이 징소에 응할 수 없었으니, 이 두 가지가 신의 실정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른 사람이 멋대로 헤아리고 억지로 끌어대기를 이렇게까지 하니, 놀랍고도 괴이하여 그 까닭을 짐작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에 이르기를,
“얼마 전에 있었던 임부의 상소는 벼슬아치들을 궁지에 빠뜨리려는 속셈을 품고 겉으로 존현(尊賢)에 의탁하였던 것이니, 어찌 애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괴상망측한 무리들의 헤아릴 수 없는 주장을 또한 어찌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이공(貳公)은 교화를 넓히는 임무와 춘궁을 보도하는 책임을 맡는 자리이니, 유림(儒林)의 중망을 받는 경을 놔두고 누가 담당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윤허할 수 없으니, 모쪼록 지극한 뜻을 헤아려서 겸양을 고집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길에 올라 나의 부족한 점을 보필하라.”
하였다.
○ 7월에 태의(太醫)를 보내어 간병하였다. 상소하여 사은(謝恩)하고 이어 사직하였다.
이때 선생이 이질(痢疾)을 앓았는데 증세가 가볍지 않았다. 전유(傳諭)하러 온 사관이 정원(政院)에 말하여 상에게 아뢰자 약물(藥物)을 가지고 간병하라는 명이 있었다.
○ 8월에 오로시(五老詩)에 차운하여 명촌(明村) 등 여러 공에게 부쳤다.
농와(農窩)가 명촌의 편지 가운데 “우리들이 벌써 이렇게 나이를 먹어서 명재는 78세, 우리 형은 75세, 사위(士威)는 70세, 나와 문옥(文玉)은 69세가 되었습니다.”라고 한 것을 보고 ‘오로시’를 읊어서 선생에게 바쳤다. 선생이 그 시에 차운하였는데,
자신을 경계했던 고의를 들었건만 / 箴警固嘗聞古義
게을러서 남은 인생 저버리니 어찌하랴 / 頹慵其奈負餘年
바라는 건 내면의 덕 쌓는 데 힘 쏟으며 / 願言心上加工地
하늘의 운행처럼 쉼 없고자 함이라네 / 常若天行不息然
라고 하여 위 무공(衛武公)의 억계(抑戒)의 뜻을 부쳤다. 명촌 등 여러 공들도 모두 차운하여 하나의 시첩(詩帖)을 만들었다.
○ 12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이때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하사하였는데, 모두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0년(1707, 숙종33) 정해
○ 1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에 두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 시강원(侍講院) 관원을 보내 왕세자가 이어서 진강(進講)할 책에 대해 물었는데, 사양하였다.
이때 설서(說書) 이세덕(李世德)이 명을 받들고 와서 물었는데 선생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세덕이 개인적으로 묻기를 청하자 써서 보이기를,
“주자(朱子)의 주차(奏箚)에 ‘학문을 하는 방도로는 궁리(窮理)보다 더 우선할 것이 없는데, 궁리의 요점은 반드시 독서하는 데 있으며, 독서하는 법은 순서를 따라 정밀함에 이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정밀함에 이르는 근본은 또 몸가짐을 공경히 하고 뜻을 확고히 갖는 데 있습니다.’라고 하고, 그 아래에 단락을 나누어 설명한 내용이 명백하고도 매우 절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계(牛溪) 선생은 ‘군신(君臣)이 있은 이래로 임금을 바로잡는 말이 이처럼 명확하고도 완비된 것은 없었으니, 실로 천지간의 일대(一大) 의논입니다. 의당 한 통을 베껴 써서 자리 가까이에 두고 늘 읽으며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요, 잠시라도 행여 어겨서는 안 됩니다.’ 하였습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성현의 경전(經傳)은 읽어야 할 책이 아닌 것이 없지만, 초야의 미천한 신이 한 번도 서연(書筵)에 입시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제대로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주제넘게 망녕되이 대답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근사록》과 《성학집요(聖學輯要)》가 가장 요긴하고 절실한 책일 듯하므로 감히 사사로이 귀하에게 말해 주어 시강하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분외(分外)의 일이므로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이세덕이 이 내용을 덧붙여 아뢰니, 마침내 《근사록》을 이어 진강하라고 명하였다.
○ 9월에 특별히 액례(掖隷)를 보내어 식물(食物)을 하사하였는데, 상소하여 사은(謝恩)하고 이어 사직하였다.
○ 11월에 동생 농와공(農窩公)을 곡하였다.
제문이 있으며, 유사(遺事)와 묘표(墓表)를 기술하였다. 재주가 높고 식견이 원대하며 성품이 고결하고 담박하여 홀로 도를 행하였던 옛 군자와 거의 같았다고 일컬었다.
○ 12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선생이 오래도록 직명을 띠고 있으면서 항상 번독스럽게 만들까 봐 두려워하였고, 또 상소나 정장이 올라갈 때마다 사관(史官)을 번거롭게 한다는 이유로 더욱 황공해하였다. 그래서 매번 세말(歲末)이나 세초(歲初)에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81년(1708, 숙종34) 무자
○ 8월에 백문옥(白文玉) - 광서(光瑞) - 이 찾아와서 《근사록》을 강론하였다.
백공(白公)은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의 후손으로 노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고상하며 자상하고 참되었으며 늙어서도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때때로 다시 선생에게 학문을 토론하고 질의하여 정의(情誼)가 더욱 돈독하였다. 이때에 찾아와서 한 달 가까이 머물렀는데, 선생이 《근사록》과 《통서(通書)》를 가지고 마주 앉아 토론한 뒤에 파하였다.
○ 12월에 영의정 최여화(崔汝和 최석정(崔錫鼎))의 편지에 답하였다.
답한 편지의 대략에,
“분수에 넘치는 직명이 아직도 몸에 있어 10년간을 줄곧 얽어맴으로써 공사(公私)가 다 병들었으니, 이는 실로 고금에 없었던 일입니다. 선비를 대접하는 도리로 말하더라도, 《주역》 〈고괘(蠱卦) 상구(上九)〉에 대한 정자(程子)의 전(傳)으로부터 《성학집요》 〈용현(用賢)〉에 이르기까지 이미 몇 단계를 나누어 두어 설명하였으니, 그칠 곳을 알고 분수를 헤아리는 선비에 대해서 그 뜻을 억지로 꺾지 않고 분수를 지키도록 허락하는 것도 한 가지 의리인 것입니다. 또 나이가 70에 이르면 치사(致仕)하게 한 것도 옛날 선왕들이 예(禮)로써 신하를 부렸던 훌륭한 전례(典例) 중의 하나였습니다. 조정에서 항상 벼슬하는 자에게도 이러한 의리가 있는데, 지금 나는 초야에서 평생을 지냈고 나이가 80이나 되었는데도 길이 사적(士籍)에 매어 두니 이것이 어찌 도리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연석(筵席)에 나가 정무(政務)를 논의하는 때에 이 문제를 한 마디 언급함으로써 윗사람은 천직(天職)을 아무렇게나 버리고 한갓 겉치레만 차린다는 비난을 받지 않게 하고, 아랫사람은 진퇴유곡의 처지에 몰려 분수를 범하고 의리를 잃는 죄를 짓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최공(崔公)이 평소 선생을 존경하여 누차 선비의 바른 법도를 지키도록 권면하였기 때문에 답서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82년(1709, 숙종35) 기축
○ 1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을 제수하고, 사관이 와서 성지(聖旨)를 전하였다. 상소하여 개정을 청하였으나 융숭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최석정이 선생으로 매복(枚卜)하고자 하였는데, 논자들이 간혹 주상께서 만나 본 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의문을 표하였으나 최공은 “재상으로 임명할 사람이니 오직 그의 덕망을 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매복하여 우의정을 제수하니, 선생이 지극히 황공해하며 상소하여 간곡히 개정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미천하기 이를 데 없는 몸으로 수록(收錄)해 주는 국가의 은혜를 입어 이름이 사적(士籍)에 오른 지 이미 46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실제로 슬프고 괴로운 개인적인 정리 때문에 초야에서 생을 마치겠다고 스스로 맹세하고 감히 세상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소명이 자주 내리고 격외(格外)의 직명에 처하게 되어서는 신이 또 재주 없는 자신을 돌아보며 근심과 두려움에 감히 헛된 이름으로 실질적인 쓰임에 응하지 못하고 더더욱 피하여 물러날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은혜에 한 번도 사은하지 못하고 소명에 한 번도 응하지 못하였으니, 오직 조정에서 그 심사가 차마 스스로를 보통 사람처럼 생각하지 못하는 점을 가련히 여기고 그 본실(本實)이 원래 징소 대상에 넣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살펴서 물러나 분수를 지키도록 허락함으로써 처음 정한 뜻을 지킬 수 있게 해 주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진실로 제수와 발탁이 점점 더 높아지고 은총과 예우를 점점 더하여, 올라가고 또 올라가다가 마침내 숭품(崇品)에까지 이르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신은 더욱 두려워서 몸 둘 곳이 없어 곧장 담장을 따라 달아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습니다. 신은 이에 어쩔 수 없이 우인(虞人)이 죽어도 감히 가지 못했던 의리를 죽음으로 지키기로 스스로 한계를 그었습니다.
이번에 새로 내리신 명은 실로 천만뜻밖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종신토록 은거하며 깊은 골짝에서 나가지 않았는데도 여러 직책에 요행으로 제수되었다가 삼공(三公)의 반열에 오르고 말았으니, 이것은 고금에 없던 일입니다. 신은, 성상께서 시험해 보지도 않았고 쓸모도 없는 일개 미천한 신에게서 어떤 점을 취하여 이렇게까지 지나친 은총을 내리시는지 감히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경은 산림(山林)에서 덕을 길러 일찍부터 중망이 있었으니, 과인이 존경하고 신뢰하며 사림(士林)이 본보기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지금 이 매복은 또한 늦었다고 하겠다.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일을 경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서 겸양을 고집하지 말고 속히 마음을 돌려 조정으로 나와 조야(朝野)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2월에 두 번째 상소하였으나 융숭한 비답을 내려 돈소(敦召)하였다. 세 번째 상소에 대한 비답의 대략에,
“이번의 우의정 임명은 내 뜻에서 나온 것이니, 기대하는 바가 어찌 얕다고 하겠는가. 그리고 경의 진퇴(進退)에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 것이 자연히 지난날과는 같지 않은데, 어찌 차마 나를 버리듯이 하고 수수방관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내 평생 경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경을 생각하는 일념(一念)이 잠시도 느슨해진 적이 없다. 그런데 경에게 어찌 유독 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여러 해 전에 누차 예를 갖추어 징소하였을 때 다행히 은거하려는 마음을 돌려 강교(江郊)에 이르렀으나,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실로 내 성의가 미덥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진다.
아! 국가의 형세와 조정의 기상이 무엇 하나 믿을 수가 없으니, 이러한 때에 부지(扶持)하고 조제(調劑)하는 책임을 경과 같은 산림의 숙덕(宿德)이 아니면 누가 맡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더욱 정성과 예를 독실히 하여 반드시 초치하고야 말려는 까닭이다.”
라고 하여, 말뜻이 간곡하고 지성스러우며 융숭하고 정중하였으므로 선생이 더욱 황공하고 감격스러워하였다. 3월에 다시 네 번째 상소하여 성상의 비답에서 언급한 내용을 들어 나아가기 어려운 의리를 조목조목 진달하니,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 4월에 다섯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도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또 여섯 번째 상소하였는데, 비답의 대략에,
“세 차례 상소한 데 대해서 돈독히 권면한 말은 실로 내 진심이었고, 두 차례 승지를 보낸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 정성이 미덥지 못하고 예가 극진하지 못한 탓으로 은거하겠다는 뜻을 고수한 채 마음을 돌려 나올 기약이 없으니, 나의 실망이 어떠하겠는가. 아! 경은 연령이 높아질수록 덕이 더욱 밝아지니, 이렇게 어려움이 극에 달한 때에 다스림을 보필하는 재상의 직임을 경이 아니면 누가 맡겠는가.”
하였다. 5월에 또 일곱 번째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6월에 여덟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또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또 아홉 번째 상소하였는데, 비답의 대략에,
“경은 연령이 비록 높지만 아직 정력이 왕성하다. 더구나 내가 유상(儒相)에게 기대하는 것은 근력(筋力)으로 분주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번번이 질병을 이유로 사양하니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였다. 7월에 열 번째 상소하였는데, 비답의 대략에,
“아! 나는 도덕을 겸비한 경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므로 밤낮없이 생각하고 상상하기를 조금도 느슨히 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나라를 걱정하고 나를 사랑하는 경의 정성이 노년에 이르러 더욱 독실해졌으니, 어찌 차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끝내 나의 지극한 뜻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 8월에 열한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또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부주(附奏)로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여러 해 전 강교(江郊)로 나갔을 때의 일을 성상께서 번번이 하교하시니, 신은 실로 감격의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시에 박세채(朴世采)가 실제로 찾아와 권면하면서 대궐로 들어가 사은하기를 간곡히 권하였으나, 신은 분수를 돌아보고 의리가 두려워서 끝내 감히 따르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신도 스스로 한스럽게 생각됩니다. 만약 그때 한 번 대궐로 들어가 용안(龍顔)을 우러러 뵙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죽음을 맞이했다면 다시 유감이 없었을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 9월에 경연관(經筵官)을 보내어 이어서 진강(進講)할 책에 대해서 물었으나 사양하였다.
이때 수찬 심수현(沈壽賢)이 명을 받들고 와서 물었다. 선생이 대답한 대략에,
“삼가 강관(講官)의 말을 들으니 사서오경(四書五經)으로부터 《성학집요》에 이르기까지를 이미 두루 다 진강하였다고 합니다. 성현의 책 중에 무엇을 여기에 더 보태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성상께서 이미 진강한 책을 다시 정밀하고 익숙하게 공부하시는 데 달렸으니, 이렇게 하면 밝게 빛나는 경지에 도달하는 데에 반드시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주자(朱子)의 주차(奏箚)에서 논한 독서법이 실로 절실하고 지극한데, 삼가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을 것으로 생각되니 멀리 초야의 미천한 신에게 하문하실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심수현이 개인적으로 물은 데 대해 글로 써서 보이기를,
“삼가 생각건대, 책은 충분히 읽고 정밀하게 연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예전에 배운 내용을 거듭 익혀 새로운 내용을 터득하는 것이 옛사람의 독서법이었습니다. 제왕의 학문은 비록 선비와는 다르지만 공부를 하는 요점은 다름이 없을 듯합니다. 이미 진강한 책 가운데 요지가 되는 것을 택해서 다시 깊이 연구하고 토론한다면 다른 책을 데면데면 보는 것보다는 실효가 있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근사록》과 《대학혹문(大學或問)》은 가장 요지가 되는 책인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진강한 대상 속에 들어 있지 않습니까. 이미 사사로이 질문을 받았기에 감히 개인적인 견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으나, 이 또한 분수를 어기는 일이기에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심수현이 이로써 덧붙여 아뢰니, 마침내 《근사록》을 이어 진강하라고 명하였다.
○ 열두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융숭한 비답을 내려 간곡하게 징소하였다.
비답에 이르기를,
“아! 존현(尊賢)은 구경(九經) 중의 하나이니, 국가를 경영하는 방도가 용현(用賢)보다 더 큰 것이 없음을 참으로 알 수 있다. 전 시대를 두루 살펴보면 비록 명철한 군주라 할지라도 반드시 현인을 구하여 스승으로 삼았는데, 더구나 나처럼 어둡고 어리석은 자질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비록 치평(治平)한 세상이라도 반드시 현인을 얻어서 함께 다스렸는데, 더구나 지금처럼 어려움이 많은 때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경은 덕행이 높고 학문이 발라 지금 조정에서 경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 발탁하여 재상으로 삼은 것은 실로 경을 깊이 사모하고 경에게 크게 기대하는 마음에서 나왔으니, 경이 즉시 명에 응하여 경연에 출입하며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고 많은 어려움을 해결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지나고 계절이 네 번 바뀌었는데도 은거하려는 마음을 돌리지 않고 더욱 완강히 사양하니, 이것이 어찌 내가 유상(儒相)에게 기대한 뜻이겠는가.
내가 멀리서 고사(古事)를 끌어 올 필요도 없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70의 나이로 끝내 소명에 응했었으니, 이는 진실로 우리 성조(聖祖)의 극진한 정성 덕분이었다. 경의 높은 연령과 밝은 덕이 선정(先正)에게 부끄럽지 않은데, 단지 나의 정성이 얕고 예가 박한 탓으로 조정에 나올 날이 아직까지 지연되고 있으니, 나는 실로 부끄럽고 답답하여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난번 승지의 서계(書啓)를 보니, 경이 여러 해 전에 강교에서 수레를 돌렸던 일로 자못 후회하는 뜻이 들어 있었다. 여기에서 더욱 경의 정성을 볼 수 있었거니와, 경을 생각하는 내 마음도 여기에 이르러 배나 더 간절해졌다. 지금 날씨가 매우 춥지는 않으니, 어찌 이때에 맞춰 은거하려는 뜻을 속히 돌려 좌불안석 기다리는 내 정성에 부응하지 않겠는가. 마음은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안타깝고 기다림은 대한(大旱)에 구름과 무지개를 바라는 것처럼 간절하다. 경은 현인을 존경하는 과인의 뜻을 헤아리고 위태로운 시국을 생각하여 속히 마음을 돌려 길에 오름으로써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선생이 부주하여 거듭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의 용렬하고 비루하고 텅 비고 엉성한 실상은 신이 스스로 아는 바입니다. 게다가 이렇게까지 노쇠하여 형체와 정신이 이미 분리되고 상성(常性)이 이미 혼미하여 말라 죽은 나무나 싸늘하게 식은 재와 같을 뿐입니다. 신의 실상은 단지 이와 같은데, 성상의 비답에서 유시하신 내용은 모두 도덕을 구비한 진정한 현자(賢者)에게나 시행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문순공 이황의 진퇴에 어찌 보잘것없는 후학이 감히 견주겠습니까. 막중한 교지(敎旨)는 원근의 사람들이 전송(傳誦)하는 것인데 이렇게 조금도 재량하고 참작하지 않았으니, 실로 사방에서 몰래 논의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얼마 전에 근시(近侍)의 회계(回啓) 내용 중에 진달하였던 여러 해 전의 일은, 성상의 하교에 언급하신 것을 인해서 ‘그 당시 성상을 향한 하찮은 정성을 한 번 펴지 못하는 바람에 죽을 날이 머지않은 지금에 와서는 다시 미칠 바가 없게 되었음을 삼가 한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하교가 또 여기에 미쳤으니, 신은 감읍을 주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 11월에 열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비답의 대략에,
“추위가 점점 심해지고 있으니 이때에 길을 떠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경은 모쪼록 나의 뜻을 헤아려서 마음을 편히 갖고 사직하지 말고, 천천히 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얼른 마음을 돌려 길에 오르도록 하라.”
하였다. 12월에 열네 번째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국가에 70세가 되면 치사(致仕)하는 법을 둔 것은 실로 옛날 제왕(帝王)이 예(禮)로써 신하를 부리고 예로써 사람을 물러가게 했던 하나의 훌륭한 전례(典例)입니다. 70세면 이미 치사하는 큰 기준이 되는데 더구나 또 70을 10년이나 넘긴 사람이겠습니까. 조정에서 항상 벼슬한 사람에게도 이러한 의리가 있는데 더구나 본래 초야에서 살아온 미물이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유생의 상소에 또 신이 거론되었는데 말이 이를 데 없이 허탄하고 망녕되다고 합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서 저도 모르게 놀라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대개 이렇게 유생이 상소하는 한 가지 일은 옛날에 없었던 일이니, 아마도 근세의 당론(黨論)에서 나온 풍조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신이 성상의 큰 은혜를 잘못 입었기 때문에 저들이 표방하는 당론의 우두머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아첨하여 잘 보이려고 하는 사람이 나와 사습(士習)이 무너지기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신이 다 초라한 시골집에 엎드려 있는 몸으로 세도(世道)에 해를 끼친 한 가지 죄입니다.”
하였다. 이때 성균관 유생이 또 상소하여 독실한 정성으로 선생을 초치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상소에서 언급한 것이다.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83년(1710, 숙종36) 경인
○ 1월에 상의 체후(體候)가 미령(靡寧)한 지 오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처를 현문(縣門)으로 옮겼다. 열다섯 번째 상소하여 대죄(待罪)하였다.
선생이 상의 체후가 오랫동안 미령하다는 것을 듣고도 달려가 문후하지 못하고, 앉아서 엄한 소명을 어긴 지도 1년이 다 되어 간다는 것으로 지극히 황공해하였다. 마침내 옛사람이 현옥(縣獄)에서 대명한 전례에 의거하여 거처를 현문으로 옮기고, 상소하여 대죄하고 또 사직하였다. 또 열여섯 번째 상소를 올렸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2월에 열일곱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상소의 대략에,
“신은 듣건대 사물의 이치가 극에 달하면 변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허명(虛名)이 이미 극에 달하였고, 직위를 훔친 것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며, 성상의 은례(恩禮)가 이미 극에 달하였고, 지은 죄가 이미 극에 달하였습니다. 한 몸에 있는 만 가지 일이 극에 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신이 이미 마음을 바꿔 명에 응할 길이 없다면 단지 죽음으로 나아가야 할 뿐입니다. 1년 넘게 부르짖고 호소하면서 근심과 두려움 속에 지내다 보니 가슴은 타고 기운은 고갈되어 죽을 날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지금 혜택이 널리 미치고 큰 교화가 두루 젖어들어 만물이 기뻐하며 모두 제 살 곳을 얻었는데, 신은 홀로 천지 사이에서 두려워하고 조심하느라고 몸 둘 곳을 찾지 못해 촌로들과 함께 여유롭게 생을 영위하지도 못합니다. 이에 신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며 내심 스스로 슬퍼합니다.”
하였다.
○ 명촌(明村) 나공(羅公)을 곡하였다.
부음이 이르자 곡위를 만들어 곡하고 가마(加麻)하였다. 만사와 제문이 있다. 제문에 이르기를,
학문하는 법식은 / 問學之程
충신을 주로 했고 / 忠信是主
마음과 몸 단속엔 / 存心檢身
삼가 법을 지켰었소 / 謹守規矩
우리 집 두 형제는 / 嗟吾兄弟
젊을 때나 늙어서나 / 自少至老
의지하고 사모하길 / 相資相慕
도의로써 했었다오 / 以義以道
하였다. 나중에 또 묘지명을 지었다.
○ 3월에 열여덟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자 비로소 체직을 허락하였다.
비답에 이르기를,
“내가 정성을 다해서 돈독히 권면한 지 이미 1년이 넘었다. 그러나 완강히 겸양하여 조정에 나올 날이 더욱 까마득하니, 지극히 놀라운 심정을 비유할 길이 없다. 정성과 예를 더욱 독실히 하여 기필코 마음을 돌리게 해야겠지만, 줄곧 돈유하고 다그치는 것은 예우하는 도리에 혐의가 있을 듯하다. 그래서 본직(本職)은 어쩔 수 없이 지금 우선 경의 뜻에 따라 주기로 하였으니, 내 마음이 이를 데 없이 서운하다.”
하였다.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옮겨 제수하고, 사관이 와서 성지(聖旨)를 전하였다.
○ 현문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상의 체후가 회복된 뒤에도 직명이 체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시 거처하던 현문에 그대로 머물다가 이때에 비로소 돌아왔다.
○ 4월에 팔송(八松) 선생과 노서(魯西) 선생을 증직(贈職)하는 은명(恩命)을 가묘(家廟)에 고하였다.
기축년(1709, 숙종35) 5월에 연신(筵臣) 이세근(李世瑾)이 아뢰기를,
“고(故) 척화신(斥和臣) 윤황(尹煌)과 선정신(先正臣) 윤선거(尹宣擧)는 현재 우의정 윤증의 할아비와 아비입니다. 당사자가 감히 명에 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추은(推恩)의 예전(例典)을 아직 거행하지 않았으니, 사림이 실망할 뿐만 아니라 실로 조정의 흠전(欠典)이기도 합니다. 지금 추은의 전례를 쓸 필요 없이 특별히 직책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도록 명한다면 실로 충절을 높이고 현인을 기리는 방도에 부합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윤허하였다. 이해 1월에 양세(兩世)를 의정(議政)에 증직하는 은전을 재가하였는데, 선생이 현문에서 대명(待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 비로소 가묘에 고하였다.
○ 사관을 보내어 별유로 징소하였는데, 사양하고 이어 월름(月廩)을 사양하였다.
이때 상의 체후가 회복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진연(進宴)으로 인하여 지방에 있는 대신(大臣)을 돈소(敦召)하라는 명이 있었다. 선생이 부주(附奏)하여 사양하고, 또 월름을 사양하였다.
○ 이에 앞서 호조가 전례(前例)대로 월름을 실어 보냈는데, 선생이 감히 상소하여 번독스럽게 할 수가 없어서 단지 “감히 무릅쓰고 받지 못하겠습니다.”라는 뜻을 써서 현리(縣吏)에게 주어 현감이 감영(監營)에 보고하면 감사가 다시 조정에 아뢰도록 하였다. 상이 다시 실어 보내라고 명하니, 선생이 또한 번독스럽게 하는 것이 두려워서 단지 본관(本官)에 말하여 실어 보내지 말게 하였다.
○ 7월에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하사하였다. 상소하여 사은하고, 이어 직명과 월름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진연 후에 기로(耆老) 대신에게 은혜를 미루어 의자와 식물을 사급(賜給)하라는 명이 있었다. 선생은 ‘대신이라는 이름은 감히 무릅쓰고 차지하지 못하지만, 이번에는 은혜를 미루어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이 서민 노인들에게까지 미쳤으니, 하사한 것이 조금 후하다고 해서 번독스럽게 사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공경히 받은 뒤 상소하여 사은하였다.
○ 윤7월에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위유(慰諭)하였다.
이때 상국(相國) 최석정(崔錫鼎)이 《예기(禮記)》를 유별(類別)로 편집하였는데 《중용(中庸)》과 《대학(大學)》도 구경(舊經)으로서 유별 분류에 편입시켰다. 또 책의 끝 부분에 일찍이 강확(講確)한 사람과 참정(參訂)한 사람을 기록하였는데, 선생의 이름도 강확한 명단에 들어 있었다. 한쪽 편 사람들이 경전을 훼손하고 성현을 업신여긴 죄로 최공(崔公)을 얽어 넣었는데, 홍주형(洪胄亨)이라는 자가 상소하여 선생까지 아울러 헐뜯었다. 성균관 유생 박필기(朴弼琦) 등이 상소하여 무함한 것에 대해 변론하니, 상이 홍주형을 정거(停擧)하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정호(鄭澔)가 명을 거두어들이기를 계청(啓請)하였고, 또 곽경두(郭景斗)라는 자가 뒤를 이어서 무함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유생 이태우(李泰宇) 등이 또 상소하여 거듭 변론하고 겸하여 정호 등의 죄상을 폭로하니, 상이 홍주형과 곽경두를 정배(定配)하고 정호를 삭출(削黜)하라고 명하였다. 교리 홍우서(洪禹瑞), 이교악(李喬岳), 이택(李澤) 등이 청대(請對)하여 신구(伸救)하니, 상이 엄한 교지를 내려 홍주형, 곽경두 및 정호 등 4인을 멀리 귀양 보냈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향유(鄕儒)가, 강확하였다는 것을 핑계로 유현(儒賢)을 무함하고 욕보인 것은 극히 가슴 아픈 일이다. 지금은 처분이 이미 정해졌으니 의당 위안하는 조처가 있어야 하겠다. 승지를 보내어 윤 판부사(尹判府事)를 돈유(敦諭)하라.”
하였다. 돈유한 후에 선생이 부주하여 스스로 인책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불초한 몸으로 세도(世道)의 한 가지 누가 되어 번번이 조정에 소란을 일으켜 국가에 수치와 욕을 끼쳤습니다. 끝내는 신 때문에 성상께서 크게 진노하시어 엄중한 처분을 내리심으로써 중외(中外)가 황공하고 의아해하며 원근(遠近)이 놀라고 두려워하기에 이르렀으니, 신은 실로 부끄럽고 두렵고 황공하여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이번에 나온 유생의 상소는 애당초 무단히 침범하고 공척한 것이 아니라 모두 신이 스스로 죄를 지어 빠져나갈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편파적으로 덮어 주시고 유벌(儒罰)을 또 거듭 내리셨으니, 대신(臺臣)의 상소가 뒤를 이어 일어나고 유생의 상소가 재차 나오는 것은 형세가 본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공평한 마음으로 사물에 대처하는 대성인(大聖人)의 도리에 있어서 득실(得失)을 굽어 헤아리고 경중을 참작하여 조용히 가르쳐 변화시킬 일에 불과합니다. 어찌 성상의 음성과 기색에 노여움을 드러낼 만한 것이겠습니까.
유현이라는 호칭으로 말씀드리자면 더욱 어찌 미천한 신에게 견줄 바이겠습니까. 그런데 성상의 하교가 매번 여기에 미치니, 이것이 또 신이 내심 근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항상 귀신에게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설령 참으로 유현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어떻게 비난하는 다른 사람의 말을 금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 번 그 잘못을 말했다고 해서 즉시 유현을 업신여긴 죄로 벌을 주었으니, 아랫사람을 놓고 말한다면 말세(末世)에 자신의 단점을 비호하여 남의 말을 막는 사사로움이요, 옛날의 군자가 자신의 잘못을 즐거이 듣던 공평 정대한 마음이 아닙니다. 또 윗사람을 놓고 말하더라도 남의 입을 막는 데에 가까운 행동이요, 사람의 마음을 승복시킬 만한 처사가 아닙니다.”
하였다.
○ 8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거듭 돈유하였다.
상소에서 또 얼마 전의 처분이 과중(過中)했음을 진달하고, 초야에서 지내는 미천한 몸이 스스로 쟁단(爭端)에 걸려든 것을 인책하였으며, 말미에 뇌우(雷雨)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의리를 덧붙였다. 비답의 대략에,
“며칠 전 별유(別諭)에서 이미 내 뜻을 다 말하였다. 정호 등이 유현을 침범하고 모욕한 것은 극히 놀라운 일이었으니, 조정의 처분이 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에게는 조금도 불안해할 단서가 없으니, 모쪼록 부지런하고 간곡한 내 뜻을 헤아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 9월에 권구(權絿) - 여유(汝柔) - 의 〈지경도(持敬圖)〉에 대한 후설(後說)을 썼다.
여유는 영동(嶺東) 사람이다. 뜻을 독실히 하고 힘써 행하였으며 예학(禮學)에 특히 익숙하였으므로 선생이 장려하고 권면하였다. 일찍이 〈지경도〉를 만들어 정정(訂定)을 청하였는데, 선생이 그 뒤에 쓰기를,
“선현의 말씀이 책에 다 실려 있으니, 베껴서 도식화(圖式化)하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체득하여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만약 체득하여 행하는 실질이 없다면 도식은 도식이고 나는 나일 뿐 전혀 연관이 없을 것인데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주 부자(朱夫子)가 또 말씀하기를, ‘사람들은 「경(敬)」 자를 끌어다 말로 떠들기나 할 뿐이지 실제로 해 나가지를 않는다.’ 하였으니, 이 뜻을 몰라서는 안 된다. 아! 나도 20세부터 이미 이 설(說)을 알았지만 80이 넘은 지금까지도 아직 완전히 익히지 못하였으니, 장차 이 상태로 죽고 말 것이다. 여유가 이것을 거울삼는다면 또한 힘쓸 줄을 알지 않겠는가.”
하였다.
○ 10월에 사관을 보내어 별유로 징소하였으나 사양하였다.
“대신(大臣)이 물러나 전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평시라도 안 될 일인데, 더구나 이렇게 변방에 큰 걱정이 있는 날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국가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해야 하는 경의 의리로 보더라도 등한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쪼록 지극한 뜻을 헤아려서 속히 길에 오르라.”
하였는데, 선생이 부주(附奏)하여, 미천한 분의(分義)에 목숨도 얼마 남지 않아 몸을 바칠 길이 없다는 것을 갖추 진달하였다.
○ 문인(門人) 조태징(趙泰徵)이 묻기를,
“국가에 만약 사변(事變)이 생긴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자처(自處)하시겠습니까?”
하였는데, 선생이 답하기를,
“송(宋)나라 정강(靖康)의 난리에 양구산(楊龜山 양시(楊時)), 윤화정(尹和靖 윤돈(尹焞)), 호 문정(胡文定 호안국(胡安國))이 모두 달려가지 않았고, 우계(牛溪) 선생도 삼현(三賢)의 일을 인용하여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에 달려 나가지 않는 것으로 미리 뜻을 정했었다. 더구나 나는 초야의 미천한 신분이므로 골짝에서 죽는 것이 본디 나의 의리이다. 그렇더라도 시세에 순응하는 의리가 있으니, 나는 응당 우리 왕을 따르겠다.”
하였다. 또 묻기를,
“난리가 발생하면 세상에 나가는 것이 의리가 아닙니까?”
하자, 선생이 말씀하기를,
“나는 본래 재략(才略)이 없기 때문에 평생 그럴 생각이 없었으니, 오직 한 번 죽을 뿐이다.”
하였으니, 평소 정한 뜻을 명백히 드러낸 것이 이와 같았다.

84년(1711, 숙종37) 신묘
○ 1월에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2월에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연신(筵臣) 이세근(李世瑾)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늘 노인을 우대하는 정치를 숭상하는데, 판부사(判府事) 윤증은 지금 나이가 83세입니다. 유현을 예대(禮待)하자면 더욱 별도의 우대하는 조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자와 식물을 각별히 후하게 실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는데, 사관 편에 부주하여 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감사가 장계(狀啓)로 보고하자 다시 실어 보내라고 명하였으므로, 감히 끝끝내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공경히 받았다.
○ 3월에 조사위(趙士威 조득중(趙得重))를 곡하였다.
부음이 이르자 곡위(哭位)를 설치하여 곡하고 가마(加麻)하였다. 만사와 제문이 있으며, 뒤에 또 묘표(墓表)를 지었다.
○ 5월에 제생(諸生)들과 모여 향음주(鄕飮酒) 의식을 거행하였다.
○ 11월에 팔송(八松) 선생과 노서(魯西) 선생의 영시례(迎諡禮)를 행하고, 상소하여 사은하였다.
5월에 양세(兩世)의 시호를 비로소 문정(文正)과 문경(文敬)으로 재가하여 내렸다. 선생이 문하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영시례 의절(儀節)을 강정(講定)하였는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빈(賓)을 접대하는 의식(儀式)의 절목(節目)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의례(儀禮)》 〈사상견례(士相見禮)〉에 실린 상빈(上賓)을 접대하는 의식을 참고하여 행하였다. 이때에 와서 참석한 원근의 인사가 600여 인이었다. 선생이 조고(祖考) 양대에 시호를 내린 은전을 사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서 마침내 상소하고, 이어 직명을 사직하였다.

85년(1712, 숙종38) 임진
○ 1월에 상소하여 대죄(待罪)하고 이어 사직하였는데, 위유(慰諭)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중전(中殿)이 마마[痘疾]를 앓다가 회복된 일로 진하(陳賀)하였는데, 선생이 나아가 문후하지 못하였으므로 상소하여 대죄한 것이다.
○ 2월에 조천(祧遷)한 선조를 사당에 제향하는 예(禮)를 강정하였다.
이때 선생의 고조 증 승지 부군(贈承旨府君)과 증조 증 참판 부군(贈參判府君) 양세가 친진(親盡)되었으므로 예법에 따라 조천해야 했는데, 선생은 제방(諸房)이 가난하여 제사를 받들 수 없고 또 돌아가면서 제사 지내는 일도 본래 정례(正禮)가 아니라는 점을 염려하였다. 마침내 종인(宗人)들과 모여 의논하여 묘(墓) 아래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받들기로 하고, 곡물(穀物)을 모아 제전(祭田)을 마련한 뒤 종계(宗契)의 유사에게 맡겨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대개 이보다 먼저 동토공(童土公)이 종계를 설치하고 유사를 세워 묘도(墓道)의 여러 가지 일을 주관하게 했었기 때문에 인하여 제사 지내는 일을 겸하여 주관하게 하고, 이를 영구히 준행하게 하였다. 마침내 돌아가며 신주(神主)를 받들고 돌아가며 제사 지내는 절목을 폐지하였다.
○ 5월에 《노서선생유고(魯西先生遺稿)》를 편찬, 간행하였다.
선생은 유문(遺文)을 일찍 내었다가 혹 사람들에게 취모멱자(吹毛覓疵) 당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간행을 수십 년 뒤로 조금 늦추고자 하였는데, 손자 동원(東源)이
“사람 일은 기필하기 어려운데 어찌 뜻밖의 일을 미리 염려하여 시일을 기다리겠습니까. 설혹 그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난날에 있었던 것과 같은 하나의 횡역(橫逆)에 불과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선생이 마침내 동원에게 그 일을 주관하라고 명하였다. 노강서원(魯岡書院)에서 인쇄하였다.

86년(1713, 숙종39) 계사
○ 1월에 액례를 보내어 식물을 하사하였다. 상소하여 사은하고 이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비답의 대략에,
“보내 준 약간의 주찬(酒饌)으로 어찌 유현을 대우하는 예를 다했다고 하겠는가. 경은 연령이 비록 높지만 정력이 아직 왕성하니, 모쪼록 간곡히 기다리는 내 정성을 헤아려서 조용히 길에 오르도록 하라.”
하였다.
○ 윤5월에 유상기(兪相基)의 편지에 답하여 《가례원류(家禮源流)》에 대한 일을 논하였다.
《가례원류》를 함께 엮은 일은 앞에 보인다. 처음에 시남(市南 유계(兪棨))이 무안 현감(務安縣監)이 되었을 때 한 본을 베껴 놓고 초본(初本)을 노선생에게 돌려주었다. 그 뒤에 노선생이 다듬고 윤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치고 내용을 첨가하여 모두 7책으로 만들었는데, 시남은 벼슬살이를 하느라고 힘을 쏟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시남이 노선생에게 준 편지에
“《가례원류》 편집을 그곳에서는 계속 하고 있는지요? 나는 거의 손을 놓은 상태입니다.”
라고 하였던 것이니, 이것을 통해서 초본은 같이 엮었지만 개정본은 노선생이 혼자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노선생이 첨가한 내용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여 선생으로 하여금 추려서 정리하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시남의 손자 유상기가 그 집에 보관되어 있던, 무안에서 베낀 본을 가지고 시상(時相)에게 부탁하면서, 시남이 혼자 엮어서 회천(懷川 송시열)과 강론하여 교정하였다고 말하여, 노선생과 함께 엮은 사실을 완전히 매몰해 버렸다. 시상이 이것을 진달하자 상이 호남에서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유상기가 서울에서 내려와 이 일을 전하되, 연석에서 아뢴 말은 숨긴 채 나중에 수정한 본을 간행하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처음에는 허락하려고 하였으나, 나중에 연석에서 아뢴 말을 듣고는 ‘연석에서는 함께 엮은 초본으로 아뢰어 놓고 간행은 사사로이 나중의 수정본으로 하는 것은 의리상 감히 하지 못할 점이 있고, 또 사람들의 말을 듣게 될 것도 염려스럽다. 초본은 수미(首尾)가 완전히 갖추어져서 또한 후세에 남길 만하다.’고 여겨 속히 간행하여 명을 받들게 하였다. 그러자 유상기가 갑자기 의심과 노여움을 품고서 편지를 보내왔는데, 노선생은 초본을 엮는 데 일부 참여한 단서가 있다고 하고, 또 시남이 선생에게 보유(補遺)를 부탁했었는데 지금 부탁한 말을 저버리고 그 책을 독차지하려 한다고 하며 말을 패만하게 하였다. 선생이 답서를 보내 함께 책을 엮은 실상을 밝히고 나서
“함께 엮었다고 한들 선생의 책이 되는 데 무슨 해가 있겠는가.”
라고 하고, 또 보유를 부탁받은 일은 애당초 없는데 유상기가 잘못 안 것이라며 여러 차례 편지로 말해 주고 지성껏 타일렀다. 그러나 유상기가 끝끝내 멋대로 패만하게 욕을 하다가 절교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이 옛 정의를 생각하고는 슬퍼하면서,
“시남의 자손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실로 가련하게 생각할 일이지 노여워해서는 안 된다.”
하고, 집안의 자제들이 유상기를 탓하고 나무라지 못하게 하였다. 또 원근의 사림 중에 죄를 성토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자 선생이 힘껏 만류하면서
“이것은 골육(骨肉)이 서로 괴리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니, 나와 서로 친한 사람들이 갑자기 이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였다. 전후로 주고받은 편지는 《유고》에 상세하게 보인다.
○ 선생이 별세한 뒤 을미년(1715, 숙종41) 겨울에 유상기가 《가례원류》를 인쇄하여 올렸는데, 정호(鄭澔)와 권상하(權尙夏)가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을 쓰면서 선생을 헐뜯었다. 상이 보고 놀라서 마침내 그 글을 불태우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윤 판부사는 훌륭한 덕을 갖춘 유현으로서 사림의 중망을 받아 왔는바, 내가 평소 존경하고 믿은 것이 어떠했는가. 그런데 부제학 정호가 감히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고서 침모(侵侮)한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으니 그것만도 이미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지은 《가례원류》 발문 중에는 헐뜯는 말이 낭자하니, 이것이 실로 무슨 마음인가. 더구나 발문을 지은 것이 유현이 별세한 뒤라는 점은 더욱 놀랍다. 정호를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 것이며, 이 발문은 사용하지 말라.”
하였다. 이어 어제(御製) 절구 2수를 내려 유현을 애도하고 참언(讒言)을 미워하는 뜻을 보이기를,
유림은 도덕을 숭상하였고 / 儒林尊道德
소자 또한 일찍이 흠앙했었소 / 小子亦甞欽
평생 한 번 만나 보지 못했었기에 / 平生不識面
사후에 한이 더욱 깊어진다오 / 沒後恨彌深

살게 해 준 세 분 은혜 똑같다지만 / 生三雖事一
본래부터 경중의 차이 있는 법 / 自有重輕殊
우습구나 논사의 장관으로서 / 可笑論思長
제멋대로 대로를 무함했으니 / 甘心大老誣
하였다. 이때 호남 유생 유규(柳奎) 등이 상소하여 《가례원류》를 함께 엮은 사실과 정호와 권상하가 선생을 무함한 정상을 아뢰었는데, - 상소는 〈후록〉에 보인다. - 비답의 대략에,
“《가례원류》를 양가(兩家)에서 함께 정리한 곡절을 비로소 상세히 알았으니, 유상기가 실상을 전부 숨긴 것은 무척 형편없는 행동이다. 대사헌 - 권상하 - 이 지은 서문을 추후에 보았는데, 이른바 ‘서서후문(書序後文)’이라는 것은 쓰지 않았어야 한다. 대저 발문은 내가 이미 친히 보고서 유현을 무고하여 욕한 죄를 통쾌하게 시행했으니, 일종의 신구(伸救)하는 논의는 대부분 구차하고 말이 되지 않는 것들이다.”
하였다. 이때 정인(正人)을 미워하는 경외(京外)의 무리 및 권상하,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연달아 상소하여 무함하고 욕하였으나 상이 모두 엄히 배척하였다. 유상기가 또 무함하는 상소를 올리자, 서울의 유생 유태원(柳太垣), 이진수(李眞洙) 등이 상소하여 통절히 변론하였다. 병신년(1716, 숙종42) 봄에 상이 유상기를 멀리 귀양 보내도록 명하고, 또 정인을 미워한 무리들을 정거(停擧)하라고 명하였다. 문생인 전(前) 세마(洗馬) 최석문(崔錫文) 등이 또 상소하여, 선생이 전후로 무함을 입은 사유와 의롭게 처신한 실상을 진달하였는데, 비답의 대략에,
“선정(先正)이 의롭게 처신한 본말을 더욱 상세히 알게 되었는데, 예전에 하교한 ‘어찌 욕이 그 아비에게 미치는데 아들 된 자가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라는 등의 말은 대의(大意)가 과연 크게 어긋나지 않은 것이었다.”
하였다.
그 뒤 7월에 당인(黨人)이 뜻을 얻게 되자 더욱 멋대로 얽어 무고하였는데, 상의 뜻이 마침내 변하여 끝내 선생을 무함한 서문을 도로 보존하게 하였다. 이것이 《가례원류》에 대한 전말이므로 덧붙여 기록해 둔다.
○ 7월에 학질(瘧疾)을 앓았다.
갑자(19일)에 선생의 기체(氣體)가 매우 좋지 않더니 그대로 학질이 되어 버렸다. 선생이 이르기를,
“이것은 나의 마지막 병이다. 인사(人事)가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죽고 사는 것은 말할 것이 못 된다.”
하였다. 그리고는 약물(藥物)을 물리치며 말하기를,
“나의 이 병이 어찌 약물로 효험을 볼 수 있는 것이겠느냐.”
하였다.
○ 8월에 태의(太醫)를 보내어 간병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선생의 병이 위중하다는 것을 아뢰자,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 간병하고 계속해서 서계(書啓)하게 하라고 명하고, 또 그대로 머물러 간병하라고 명하였다.
○ 9월에 약재(藥材)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어의가 약은 구선왕도고(九仙王道糕)를 써야 한다고 서계하니, 상이 약재를 보내라고 명하고, 또 인삼 1근을 보냈다. 선생이 천은(天恩)을 저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약을 드셨다.
○ 특별히 액례(掖隷)를 보내어 병세를 묻고 식물을 하사하였다.
○ 11월에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이 서추(西樞 중추부(中樞府))의 높은 직함을 끝내 사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병상에서 성상의 옥체가 미령하신 지 두 달이나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놀랍고 걱정스러워서 타는 듯한 심정을 어찌 다 말씀드리겠습니까. 지난번에 입은 남다른 은수(恩數)는 전고(前古)에 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미 어의를 보내 간병하라고 명하시고 내부(內府)의 진귀한 약재를 계속해서 내려 보내도록 명하셨으며, 또 액정(掖庭)의 하인을 보내어 신의 생사(生死)를 물으셨습니다. 신은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른 채 그저 밤낮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신자(臣子)에게 병이 있다고 군부(君父)께서 돌아보고 염려하기를 이렇게 극진히 하셨건만, 군부께서 미령하신 때에 신자는 도리어 정성을 보일 수도 없어 그저 들창 아래에 누워서 해를 향해 기도만 드릴 뿐입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신은 타고난 명이 이미 다했건만 늙어서도 죽지를 않으니, 마음이 항상 살얼음을 밟고 선 것처럼 두렵습니다. 지금 숨이 곧 끊어질 듯한 위태로운 목숨이 어찌 약을 복용해서 연명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 온 것은 모두 성상의 은혜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분수에 넘치는 직명을 여전히 지니고 있으니, 이제 곧 죽을 몸이 어찌 그대로 시일을 끌다가 참람하게 직명을 도둑질한 채로 죽어서 조정의 수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 한 가닥 목숨이 붙어 있을 때 감히 보잘것없는 충심(衷心)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신의 사직은 여기에서 끝날 것입니다. 평생 동안 받은 은혜는 하늘처럼 끝이 없고, 은혜를 저버린 죄는 만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정신이 아득하여 무어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얼마 전에 경의 병세가 가볍지 않다는 보고를 듣고 매우 걱정하였다. 신명의 보살핌으로 점차 나아지고 있다니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다 표현하겠는가. 경은 모쪼록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서 마음을 편히 갖고 사양하지 말고, 더욱 잘 조섭하라.”
하였다.
○ 예관(禮官)을 보내어 방상 복제(方喪服制)에 대해 물었는데, 사양하였다.
헌의(獻議)의 대략에,
“신은 병석에 쓰러져 신음하며 단지 천고(千古)의 군주들 가운데서도 탁월하신 성학(聖學)을 우러러 흠앙할 뿐입니다.”
하였다.
○ 12월에 시를 지어 손자 동원(東源)을 권면하였다.
동원이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으로 학문에 힘썼으므로 선생이 매우 기대하고 사랑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이 손자가 끝내 가업을 보전하고 지킬 것이다.” 하였다. 선생의 병이 깊어진 뒤로는 밤낮없이 옆을 떠나지 않았는데, 선생께서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그 시에,
밤낮으로 걱정하며 할아비 곁 지키느라 / 日夜憂心守病翁
삼여의 학업을 또 허탕 치고 말았구나 / 三餘學業又成空
독서에도 진정 명이 있다는 걸 알겠으니 / 始覺讀書眞有命
손자야, 신독재(愼獨齋)의 공부에 힘쓰거라 / 阿孫須用愼齋功
하였다. 외손 임사경(任思敬)에게 붓을 잡으라고 명하고 소서(小序)를 부르기를,
“젊은 시절에 신독재가 ‘독서에도 명이 있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듣고 그에 대해서 설명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말씀하기를, ‘내가 젊어서부터 독서하려고……’”
하시고는 기력이 없어서 말을 마치지 못하였다. 시 가운데 신독재의 공부로써 면려하신 것을 통해 선생이 부탁하신 깊은 뜻을 볼 수 있다고 하겠다.
○ 신독재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젊어서부터 독서하려고 해도 항상 선인(先人) 곁에서 시중드느라 한가할 때가 없어서 끝내 뜻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을 통해 독서에도 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분란스러운 중이라도 어디에서건 독서하며 감히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젊은 사람들이 반드시 고요한 곳과 편한 때를 골라서 독서하려고 하는데, 이는 실로 얻기 어렵다.”
하였는데, 선생이 평소에도 자주 이 말로 후생들을 면려하였다.

87년(1714, 숙종40) 갑오
○ 1월에 동원에게 명하여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관한 유서(遺書)를 쓰게 하였다.
선생은 병이 드신 지 10개월이나 되었는데도 몸져눕지 않으시고, 오히려 날마다 세수하고 머리를 빗었으며 새벽 참배도 중단하지 않았다. 11월 20일 이후로 병세가 점점 더 위중해졌는데, 문인이 길흉(吉凶)을 점쳐서 택화(澤火)의 상(象)을 얻었다. 선생이 보고 말하기를,
하였다. 설날 이후에 병이 더욱 위중해지자 마침내 동원에게 명하여 상례와 제례에 관한 유서를 쓰게 했으니, 각각 다섯 조항씩이다. 제례 유서 가운데 한 조항에,
“선비(先妣)께서 천수(天壽)를 다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은 백세(百世) 뒤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점점 태만히 하고 소홀히 하는 듯한데, 기일(忌日)의 곡(哭)은 친진(親盡)되기 전에는 폐지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임술(20일)에 영결하는 글을 써서 서제(庶弟) 졸(拙)에게 보냈다.
이른 아침에 동원에게 명하여 붓을 잡게 하고 불러 주었는데, 지면(紙面)의 ‘결적성서(訣積城書)’ 4자 및 편지 끝의 수결(手決)은 친필로 쓰셨다.
○ 낮에 자손들을 불러서 영결하고 뒷일을 조처하였다.
내외 자손들을 모두 불러 영결하고, 각각 가르치고 경계하는 말을 남기셨다. 사례(士禮)로써 상을 치르고 ‘중국 물건[唐物]’을 몸에 붙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동원이 여쭙기를,
“중국 물건을 쓰지 말라는 것은 청나라 물건이기 때문입니까, 화려하고 사치한 것을 혐의해서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청나라 물건이기 때문이니, 그로써 내 본뜻을 보이려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동수(東洙)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매사를 네가 예제(禮制)에 따라서 행하고, 혹시라도 어기거나 빠뜨림이 없게 해야 한다.”
하였다. 또 아들 행교(行敎)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 조정에서 만약 예장(禮葬) 등 분수에 넘치는 은혜를 내리거든 너는 반드시 나의 유의(遺意)로써 상소하여 진정(陳情)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내가 천리 밖에 부모님을 장사 지내고 묘소 곁에 의지하여 살며 지키지 못했으므로 마음에 항상 통한이 되었다. 그래서 늘 나를 선영에 묻으라고 말하였고 너희들이 그곳에 와서 살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이것은 잘못된 계획이다. 지금의 편파적인 의논은 장차 나라까지 망하게 할 것이니, 살육(殺戮)으로도 부족해서 반드시 창칼을 겨누고야 말 것이다. 오늘날의 사대부가 비록 이런 폐단을 고치지는 못할지라도 어찌 무익한 편파적인 의논을 거듭하여 국가에 화를 끼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이 분잡하고 시끄러운 경기 지역에 살게 되면 반드시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니, 모쪼록 나를 깊숙하고 정결한 곳에 묻고 그곳에 살도록 하여라.”
하였다.
○ 병세가 위독해졌을 때 선생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간혹 재호(齋號)로 명정(銘旌)을 쓰는데, 나는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선생’이라는 글자도 좋지 않다. 우계 선생의 묘표(墓表)에는 ‘창녕성모지묘(昌寧成某之墓)’라는 여섯 글자만 썼는데, 바로 선생의 유교이다. 이것이 법 삼을 만하니, 내가 죽은 뒤에 명정과 묘표는 모두 여기에 따르도록 하여라. 다만 내가 일생 동안 징소(徵召)의 은혜를 입었으니 ‘모인(某人)’ 위에 ‘징사(徵士)’라는 두 글자를 쓰고, 신주를 쓸 때도 이에 따르도록 하여라.”
하였다. 문인이 그것이 옳지 않을 듯하다고 의심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관함(官銜)을 쓰지 않는 것은 나의 보잘것없는 의리를 보이고자 함이요, 징사라고 쓰는 것은 내가 국가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이것은 내가 일시적으로 정한 게 아니고 평소에 오랫동안 익숙히 강구해 온 것이다.”
하였다.
○ 제생(諸生)들을 만났다.
문인들을 불러서 영결하고, 서로 더불어 학업에 힘쓰는 의리로써 권면하였다. 동수에게 명하기를,
“네가 여러 벗들과 더불어 깨우쳐 인도하고 권면하여 나와 네 할아비가 기대한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거라.”
하였다. 이때 백공 광서(白公光瑞)가 와서 병세를 살폈는데, 선생이, 우계 선생이 이동은(李峒隱)과 영결한 시를 몇 글자 고쳐서 주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
그대 한 번 보고픈 생각 간절했었는데 / 思君一見意凄凄
저승으로 돌아가면 만상이 다 공허하리 / 去入無窮萬象虛
상상컨대 유봉에는 산 달이 아름다워 / 惟有酉峯山月好
맑은 빛 영원토록 숲과 내를 비추리라 / 淸光終古照林溪
하였다.
○ 을축(23일)에 모부인의 기신(忌辰)을 곡하였다.
23일이 이씨 부인의 기일(忌日)이다. 정월 보름 이후부터 선생이 날마다 묻기를,
“너희들은 내 병이 심하다고 해서 그날을 숨겨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병중에 정신이 혼미하여 혹시라도 잊을까 염려한 것이었다. 기일이 되어 동원이 ‘23일’이라는 글자를 써서 고하니, 숨이 곧 넘어갈 듯이 위급한 중에도 한참 동안 거애(擧哀)하였다. 이때 아침 해가 창으로 들어오자 선생이 말하기를,
“선비(先妣)께서 목숨을 버리신 것이 바로 이때이다.”
하고 한참 동안 흐느꼈다. 그리고는 마침내 크게 악화되어 기식(氣息)이 혼혼(昏昏)하였다. 저녁나절에 입 안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서 시중들던 사람이 가만히 들어보니,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한다.[如臨深淵 如履薄氷]”, “군자는 ‘마친다’고 하고 소인은 ‘죽는다’고 한다.[君子曰終 小人曰死]”,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정직함이니,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생존하는 것은 요행으로 죽음을 면한 것이다.[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 “바른 도리를 얻고서 죽으면 그뿐이다.[得正而斃 斯已矣]”는 등 몇 구절이었다.
○ 병인(24일)에 유봉정사(酉峯精舍)에서 운명하였다.
24일 아침에 부녀자들을 물러가게 하라고 명하고, 누운 자리를 옮기게 하여 자리를 반듯하게 하고 머리를 동쪽으로 놓고 누워 편안하게 돌아가셨으니, 때는 신시(申時)이고 향년은 86세였다. 그보다 며칠 전에 현(縣)의 진산(鎭山)인 노성산(魯城山)이 3일 동안 울려 바람이 불고 우레가 치는 듯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 상제(喪制)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유교(遺敎)를 준행하여 사례(士禮)로 치렀는데, 가마(加麻)한 자가 100여 인이었다.
○ 무진(26일)에 부음(訃音)을 듣고서 상이 상례를 돕도록 명하고, 관원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기를 예(禮)대로 하였다. 왕세자도 궁관(宮官)을 보내어 조제하였다.
감사가 부음을 치계(馳啓)하니, 상이 놀라고 슬퍼하며 하교하기를,
“윤 판부사는 산림에서 덕을 쌓아 일찍부터 중망이 있었으니, 과인이 존신(尊信)하고 사림이 본보기로 삼는 것이 어떠하였는가. 우의정에 제수되기에 이르러서는 돈소(敦召)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으나, 단지 내 정성이 부족해서 은거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기에 서운해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을 조금도 느슨히 한 적이 없었다. 어찌 한 병으로 시일을 끌다가 부고가 갑자기 이르게 될 줄 알았겠는가. 너무도 놀랍고 슬픈 마음을 비유할 길이 없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예장(禮葬) 등의 일을 속히 거행하게 하되, 제수(祭需)를 넉넉히 지급하고, 널을 만들 판자 1부(部)를 각별히 골라서 보내도록 하라. 그리고 월름(月廩)을 본도에서 3년간 그대로 지급하게 하여 나의 뜻을 표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승지 유명응(兪命凝)을 보내어 치조(致弔)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동궁도 궁관을 보내어 치조하고 치제하기를 모두 사부(師傅)에 대한 예로써 하였다. - 제문은 모두 〈부록〉에 보인다. -
○ 아들 행교가 선생의 유지(遺志)로 상소하여 예장 등 은전을 사양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비답에 이르기를,
“아! 선경(先卿)이 한 병을 오랫동안 앓다가 갑자기 별세하고 말았으니, 놀랍고 슬픈 심정을 어찌 다 비유하겠는가. 선경의 평소 뜻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대가 지금 상소하여 제수 이외의 은전을 모두 환수하기를 청하였는데, 이것은 본디 자식으로서 부친의 유지를 이어받고자 하는 뜻에서 나왔을 것이다. 다만 생각건대, 선경이 평소에 비록 겸양이 간절했어도 대신(大臣)으로 대접하는 예를 쓰지 않은 적은 없으니, 별세한 뒤라고 어찌 대신의 예를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의 체모로 보아서 윤허할 수 없다.”
하였다.
○ 서울의 사림들이 선생의 부음을 듣고 일제히 청송당(聽松堂)에 모여 곡림(哭臨)하였으니, 청송당은 선생이 들러서 머문 적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 3월 경신(庚申) - 19일 진시(辰時) - 에 공주(公州) 향지산(香芝山) 백운동(白雲洞) 좌묘(坐卯)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와서 모인 원근의 인사가 1300여 인이었으며, 서울의 유생들도 제문을 지어 가지고 와서 조문하였다.
○ 장사 지낸 뒤에 도신(道臣)이, 선생이 평일에 월름을 받지 않아 본읍(本邑)에 쌓아 두었다는 뜻으로 장계(狀啓)하여 아뢰니, 상이 그대로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아들 행교가 대궐에 나아가서 상소하여 도로 바치기를 청하고, 아울러 3년간 월름을 그대로 지급하라는 명도 거두어 주기를 청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았으나, 다시 연석에서 하교하기를,
“평소에 받지 않았던 월름을 지금에 와서 그 아들이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은 정리로 봐서 당연하다. 내렸던 명을 도로 거두어 그 뜻을 따라 주되, 3년간의 월름은 그대로 지급하여 제수로 사용하게 하라.”
하였다.
○ 9월에 호유(湖儒) 심익래(沈益來) 등이 상소하여 선생에게 시호(諡號)를 내릴 것을 청하고 또 용계(龍溪)의 옛 거처에 서원(書院)을 건립하기를 청하였다. 비지(批旨)에서 유현을 사모하는 정성을 칭찬하고, 해조로 하여금 복주(覆奏)하게 한 뒤에 이를 윤허하였다.

90년(1717, 숙종43) 정유
○ 5월에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부친과 스승은 경중(輕重)이 있다.”라는 하교를 성상이 굳게 견지하여 사론(士論)이 이미 정해졌는데, 병신년(1716) 7월에 당인(黨人)이 권력을 쥐게 되자 다시 ‘스승을 배반했다.[背師]’는 것으로 무함하였다. 묘문(墓文)에는 욕될 만한 구절이 없었는데 이것을 이유로 송상(宋相)과의 관계를 끊었고, 의서(擬書)로 견제하고 협박하여 이로써 사감(私憾)을 풀려 하였다면서 사실을 변환(變幻)하여 교묘하게 참소하고 욕하자, 상이 두 편의 글을 써 들이라고 명하였다. 두 편의 글을 보고 나서는
“묘문에는 본래 욕한 말이 없었고 의서에는 과연 견제하고 협박한 말이 많았다.”
라고 하교하여 시비를 완전히 뒤집으니, 성균관 유생 오명윤(吳命尹) 등이 상소하여 변론하였다가 유배당했다. 이에 시배(時輩)들이 기회를 이용해서 반드시 화란을 만들고자 하여, 이희조(李喜朝), 김창흡(金昌翕) 무리가 밤낮없이 모여서 모의하고 그들 무리인 신구(申球)라는 자를 사주하여 무함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노선생의 유고(遺稿) 가운데 두세 구절의 말을 끄집어내어 효묘(孝廟)를 무함하고 헐뜯었다고 하며 앞뒤 말을 잘라내고 교묘하게 주를 내어 얽어 넣었다. - 상소는 〈후록〉에 보인다. -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문집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는데, 8일 만에 정원에 내렸으나 처분이 없었으니, 대개 이미 그것이 무함임을 통촉한 것이었다. 예조 참판 오명준(吳命峻)이 앞장서서 상소하여 유현(儒賢)을 얽어 무고한 신구의 죄를 아뢰었는데, - 상소는 〈후록〉에 보인다. - 비답하기를,
“윤선거의 문집을 가져다 보았더니 유소(儒疏)에서 말한 바와 같지 않았다. 내가 이미 가벼이 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였다. 수찬 엄경수(嚴慶遂)가 또 상소하여 그가 유자광(柳子光)의 일을 끌어다가 사화(士禍)를 만들려 한 정상을 진달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본문 중 상하(上下) 문리를 내가 상세히 열람하였으나 유소와 근사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어찌 무함하여 헐뜯었다고 지목하여 곧바로 망측한 죄로 몰아갈 수 있겠는가. 사습(士習)이 이와 같은 것은 매우 놀랍고 답답한 일이다.”
하였다. 서울 유생 이홍제(李弘躋) 등이 또 상소하여 변무하였다. 삼사(三司)의 직임을 차지하고 있던 시배들도 애당초 감히 효묘를 무함하여 헐뜯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모두 신구를 망녕되고 음험하다고 배척하였다.
김창집(金昌集)이 이때 좌의정이 되었는데, 효묘를 무함하여 헐뜯었다는 명목으로는 성상의 마음을 흔들고 현혹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여러 차례 상소하여 과장된 말로 교묘하게 얽어서 무함하여 헐뜯었다는 말을 배척하는 것처럼 하되, 효묘를 압박했다고 하면서 문집의 판본(板本)을 헐기를 청하였다. 또 이홍제를 멀리 귀양 보내기를 청하고, 변론하는 상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랐다. 이에 조정의 벼슬아치와 유사(儒士)들의 변무 상소가 모두 저지당하고 올라가지 못하였다. 문생인 전 현감 조태징(趙泰徵) 등과 서울 유생 권필형(權弼衡) 등이 소장(疏章)을 가지고 대궐 밖에 엎드렸는데, 시배들이 또 어패(御牌)를 막았다는 것으로 죄를 얽어 두 명의 소두(疏頭)를 감옥에 가두었다. 상소에 동참한 유생 이세경(李世庚), 윤심(尹審) 등 6, 7인이 함께 처벌을 받겠다고 청하며 스스로 의금부에 갇혔다가 모두 멀리 유배되니, 화란의 기미가 날로 확대되고 사림의 기상이 저상되었다. 판부사 서종태(徐宗泰)ㆍ조상우(趙相愚), 전 판서 이선부(李善溥), 참판 이대성(李大成)ㆍ이동암(李東馣)ㆍ이광좌(李光佐)ㆍ이태좌(李台佐), 대간(大諫) 이세면(李世勉) 등이 모두 상소하여 그 억울함을 신구하고 판본을 헐지 말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고 판본을 끝내 헐었다.
이로부터 추악하게 무고하는 상소가 날마다 쌓이니, 이해 1월 성균관 유생의 상소로 인하여 선생의 서원을 건립하고 선생에게 시호를 하사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고, 선정(先正)이라는 칭호를 금지하였다. 예조 참의 조태억(趙泰億)이 상소하여 변론하였으나 따르지 않았고, 문생 민이정(閔以鼎) 등, 서울 유생 조선(趙銑) 등, 호유(湖儒) 이여수(李汝秀) 등, 남유(南儒) 백시만(白時萬) 등, 경기 유생 박태문(朴泰文) 등이 모두 상소하여 신구하고 변론하였으나 봉입(捧入)하지 않았다. 5월에 김보택(金普澤)이 상소하여 임금을 무함하고 스승을 배반한 죄로 노선생 및 선생의 관작을 추탈하기를 청하니, 상이 또한 따랐다. 서종태, 조상우 두 상신이 또 상차하고, 수찬 심공(沈珙)이 재차 상소하여 변론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서울 유생 서종손(徐宗遜) 등이 변론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봉입하지 않았다.
○ 문생인 전 지평 이세덕(李世德)이 상소하였다가 퇴각당하자 격고(擊鼓)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하여 전후의 무함과 억울함을 시원스럽고 명백하게 모두 진달하였는데, 동궁이 청정(聽政)한 뒤에 절도(絶島)에 정배하게 하였다. - 원 상소는 〈후록〉에 보인다. -
○ 뒤에 정호(鄭澔)가 또 노선생의 서원을 헐기를 청하자 끝내 서원의 현판을 철거하였다.

95년(1722) 경종대왕 2년 임인
○ 8월에 관작(官爵)을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7월에 양호(兩湖) 유생 김수귀(金壽龜) 등과 성균관 유생 황욱(黃昱) 등이 상소하여 두 선생이 무함받은 원통함을 신구하고 변론하니, 상이 묘당과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묘당의 회계(回啓)의 대략에,
“유생들이, 몇 해 전 고(故) 유신(儒臣) 윤선거와 윤증이 혹독하게 중상모략을 당하여 관작이 추탈되고 제향하는 서원이 철거되고 문집의 판본이 헐리고 선정이라는 호칭을 금지당하기까지 한 것을 사림의 지극한 통한으로 여겨, 연이어 한목소리로 밝게 씻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신들은 삼가 생각건대, 두 현신(賢臣)의 도덕과 학문, 행실과 지절(志節)은 실로 여러 선조(先朝)에서 존경하고 예우했던 바이며 한 시대가 종주로 삼고 우러른 바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왕께서 수십 년 동안 ‘부친과 스승은 경중의 차이가 있다.’는 하교를 시종 굳게 견지하면서 흔들리거나 동요됨이 없었던 것은 지극히 훌륭한 처사였습니다. 예컨대 옥당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유소와 근사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으니, 어찌 무고하고 헐뜯었다고 지목하여 곧바로 망측한 죄로 몰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신 하교는 밝게 게시한 것이 해와 별과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내린 처분이 우리 선왕의 본뜻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와 성혼(成渾)은 모두 간사하다는 무함을 입어 중묘(中廟)와 선묘(宣廟) 때에 오히려 후명(後命)의 참화추탈의 원통함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효릉(孝陵 인종(仁宗))과 장릉(長陵 인조(仁祖))이 억울함을 씻어 주고 복관하되 일찍이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된다는 것으로 망설이거나 어렵게 여기지 않고 흔쾌히 공의(公議)를 따랐습니다. 오늘날 마땅히 법으로 삼아야 할 바는 오직 두 성조(聖朝)에서 이미 행한 아름다운 전례이니, 경외(京外) 유생들의 요청을 그대로 따라서 고 유신 윤선거와 윤증 모두 관작과 시호를 회복하고, 서원에 다시 사액(賜額)하고, 문집 간행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6년(1723, 경종3) 계묘
○ 1월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신설(伸雪)한 후에 상이 특별히 우승지 박희진(朴熙晉)을 보내어 노선생 및 선생의 가묘(家廟)에 치제하였다. - 제문은 〈부록〉에 보인다. - 이때 성균관 유생이 또 와서 제사 지냈다.
○ 8월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때 연신(筵臣)이, 선생의 도덕과 덕행은 사람들의 귀와 눈에 환히 드러난 것인 만큼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고사와 같이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아름다운 시호를 내릴 것을 건의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태상(太常 봉상시(奉常寺))이 시호를 ‘문성’으로 의논하여 정하였으니, ‘도덕이 널리 알려진 것[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예악이 밝게 갖추어진 것[禮樂明具]’을 성(成)이라고 한다. 이듬해 3월에 연시례(延諡禮)를 행하였다.
○ 처음에 선생이 젊었을 때에 동토(童土) 선생이 손수 ‘명재(明齋)’라는 두 글자를 써서 주었는데, 배우는 자들이 인하여 호칭으로 삼았다. 만년에는 유봉(酉峯)에서 살았으므로 모든 문자에 ‘유봉노인(酉峯老人)’이라고 자칭하였다. 이것이 선생 칭호의 본말이므로 여기에 덧붙여 기록해 둔다.
○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종향(從享)하였다.
서원은 영광(靈光)에 있다. 이에 앞서 호남 유사(儒士)들이 팔송(八松 윤황(尹煌)) 선생과 노서(魯西) 선생을 봉향(奉享)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선생을 종향하였다.
○ 10월에 노강서원(魯岡書院)에 종향하였다.
서원은 바로 팔송,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 노서 세 선생을 봉향한 곳이다. 이때에 이르러 제생(諸生)들이 조정에 아뢰고 또 선생을 종향하였다.
○ 신묘년(1711, 숙종37) 여름에 문하의 사람들이 선생의 영정(影幀)을 만들고자 하여 진영(眞影)을 그리겠다는 뜻을 여쭈었으나, 선생이 엄한 말로 물리쳤으므로 어쩔 수 없이 화사(畫師)로 하여금 밖에서 사사로이 2본을 모사하게 하였는데, 보는 사람들이 옆모습이 더욱 핍진(逼眞)하다고 하였다. 나중에 이것을 선생이 거처하셨던 유봉정사에 봉안하고 영당(影堂)으로 삼았다.
○ 뒤에 갑자년(1744, 영조20) 여름에 영정의 색이 바래자 사림이 통문(通文)으로 의논하여 정면 모습 1본과 측면 모습 2본을 다시 모사하였다.

97년(1724, 경종4) 갑진
○ 2월에 용계서원(龍溪書院) 사우(祠宇)가 완성되어 봉안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서원은 홍주(洪州)에 있으니, 바로 선생이 일찍이 우거(寓居)하였던 곳이다. 이때에 서원이 완공되어 위패(位牌)를 봉안하였다.
○ 8월에 구성서원(九成書院)에 종향하였다.
서원은 금구(金溝)에 있다. 이에 앞서 호남 유사가 동토 선생을 봉향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선생을 종향하였다.

104년(1731, 영조7) 신해 금상(今上) 7년
○ 9월에 유고를 편찬, 간행하였다.
이해에 종손 동수(東洙)와 손자 동원(東源)이 《유고》 50권을 편차(編次)하여 활자로 간행하였다.
○ 계해년(1743, 영조19)에 예서(禮書) 8권을 편차하고, 이해 여름에 간행하였다.

119년(1746, 영조22) 병인
○ 윤3월 기유(己酉) - 13일 오시(午時) - 에 이산(尼山) 두사촌(杜寺村) 좌자(坐子)의 언덕에 개장(改葬)하였다.
이에 앞서 택조(宅兆)가 편안하지 않아 오랫동안 이장(移葬)을 도모하다가 이때 비로소 이장할 장소를 정하여 행하였다. 3월 20일에 개분(開墳)하니 과연 천장(泉漳)의 재변이 있었다. 관을 열고 염(殮)하기를 예대로 한 다음 두사촌에 장사 지냈으니, 부인의 묘소로부터 2리 떨어진 곳이다. 와서 참석한 경외의 인사가 600여 인이었고, 서울의 유생도 제문을 지어 가지고 와서 조문하였다.
○ 이때 연신(筵臣) 유언호(兪彦好)가 선생을 개장하는 일을 아뢰었는데, 상이 특별히 예조에 명하여 장례 물자를 지급하였다.


[주D-001]계해년에 …… 생겼다 : 서인(西人)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기된 사건을 말한다. 임술년(1682, 숙종8)에 척신 김익훈(金益勳) 등이 남인(南人)을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역모 사건을 조작하였는데, 송시열이 김익훈을 옹호하고 나서면서 박세채와 의견 대립을 보이고, 소장 세력들의 불만을 사서 노소(老少)의 분기(分岐)로 발전되었던 일을 말한다. 《燃藜室記述 肅宗朝故事本末 壬戌三告變之獄 老少論議之始分》
[주D-002]갑자년 : 송시열의 제자 최신(崔愼)이 상소하여 명재가 스승 송시열을 배반하였다고 공격한 해이다.
[주D-003]전일(前日)의 사류 : 박세채를 추종하였던 서인의 소장 세력, 즉 소론을 지칭한다.
[주D-004]옛사람이 …… 말 : 옛사람은 후한(後漢)의 장홍(臧洪)이다. 효렴(孝廉)에 천거되었으며, 태수 장초(張超)가 불러서 공조(功曹)로 삼자 장초를 설득하여 여러 고을과 연합하여 동탁(董卓)을 토벌하였다. 나중에 원소(袁紹)의 휘하에서 청주 자사(靑州刺史)를 지냈으나, 원소가 그의 능력을 꺼려서 동군 태수(東郡太守)로 좌천시켰다. 이때 조조(曹操)가 옹구(雍丘)에서 장초를 포위하였으므로 장홍이 원소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원소가 허락하지 않아 결국 옹구가 조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장홍이 원소와의 관계를 끊고 성문을 닫아걸자 원소가 성을 포위하고 이유를 물었는데, 장홍은 장초를 위해 구원병을 지원하지 않은 원소의 행위를 거론하고, “이 때문에 슬픔을 참으며 창을 휘두르고, 눈물을 거두고서 관계를 끊겠다고 고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8 臧洪列傳》
[주D-005]중정(中正)함을 …… 책임 : 만물 가운데 사람으로 태어난 책임을 말한다. 성리학에서는 사람이 천지의 중(中), 즉 바름을 얻어서 태어났다고 보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四書或問 卷2 大學》
[주D-006]관중(管仲)과 …… 뿐입니다 : 관중은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재상으로 이름은 이오(夷吾)이다. 환공(桓公)을 도와 부국강병에 힘썼고, 제후(諸侯)를 규합하여 환공을 오패(五覇)의 으뜸이 되게 하였다. 공자(孔子)는 관중이 무력을 쓰지 않고 제후를 규합하여 백성들이 혜택을 받았다고 하여 그를 인자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관중의 행위는 정도(正道)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세한 힘으로 제후를 제압하고 이익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맹자(孟子)가 이를 비판한 바 있다. 《論語 憲問》 《孟子 公孫丑上》
[주D-007]편지에서 …… 물었는데 : 박세채의 편지에, “조득중(趙得重)과 조지렴(趙之濂)에게 들으니, 자네 편지에 후회하는 뜻이 곡진했다고 하였네.”라고 하면서 명재의 의도를 물었는데, 이것은 명재가 송시열과의 관계에 대해서 후회하고 있는지를 물어 양쪽을 화해시키고자 함이었다. 《南溪集 外集 卷5 與尹子仁書, 韓國文集叢刊 141輯》
[주D-008]북소(北疏) : 1684년(숙종10) 회령인(會寧人) 최신(崔愼)이 올린 상소를 가리킨다.
[주D-009]회옹(晦翁)이 …… 것 : 주희(朱熹)가 관직에서 물러나 무이산(武夷山)으로 돌아온 뒤 진량(陳亮)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심회를 표현한 말이다. 《晦庵集 卷36 答陳同甫書》
[주D-010]우옹과 …… 아니었다면 : 문곡(文谷)은 김수항(金壽恒), 노봉(老峯)은 민정중(閔鼎重)이다. 1684년(숙종10)에 우암 송시열과의 갈등이 배사(背師) 문제로 확대되면서 김수항과 민정중이 숙종에게 명재를 예우하지 말도록 청했는데, 명재는 자신이 평소 소신대로 벼슬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들이 도와주었다고 역설적으로 말한 것이다.
[주D-011]태질(胎疾)을 …… 걱정하고 : 《명재유고》 권1에 실린 원시(原詩)에는 “태질이란 기질적인 병통을 변화시키기 어려운 것을 비유하는 말로,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보인다.”라는 소주(小註)가 달려 있다. 이 구절은 송시열의 본원적인 병통을 고치기 어렵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주D-012]궤우(詭遇)가 …… 여기노라 : 궤우는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내용으로, 사냥할 때 수레를 정도로 몰지 않고 짐승을 속여서 모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권모술수를 가리키는데, 역시 송시열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13]송상(宋相)이 …… 무함하니 : 원제는 〈논대의잉진윤증사소(論大義仍陳尹拯事疏)〉로, 한국문집총간 108집에 수록된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9에 실려 있다.
[주D-014]북인(北人) : 본관이 회령(會寧)인 최신을 가리킨다.
[주D-015]여(驪) : 윤휴(尹鑴)를 지칭하는 은어로, 윤휴가 젊은 시절 여주(驪州)에서 살았던 데서 나온 말이다. 여윤(驪尹)이라고도 지칭하였다.
[주D-016]회천(懷川)의 …… 친애하였다 : 송시열의 상소에서 처음에 자신이 윤휴와 사우(師友) 관계로 교유했었다고 말하였는데, 명재는 부친이 처음에 윤휴와 교유했던 것도 송시열과 같은 동기였다고 말한 것이다. 《宋子大全 卷19 論大義仍陳尹鑴事疏, 韓國文集叢刊 108輯》
[주D-017]도성으로 이사했을 때 : 윤휴가 여주(驪州) 백호(白湖)에서 살다가 1662년(현종3) 쌍계동(雙溪洞)으로 이사한 때를 말한다.
[주D-018]선인은 …… 하셨네 : 윤휴가 예송(禮訟)에서 삼년설을 주장하여 송시열과 갈등이 빚어진 뒤에 윤선거가 윤휴를 지지하는 사돈 권시(權諰)에게 준 편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윤선거는 “우암은 처음에 윤휴를 백이(伯夷)와 같은 사람으로 추어올리고, 중간에는 육구연(陸九淵)처럼 의심하였으며, 끝내는 남곤(南袞)ㆍ심정(沈貞)으로 배척하였으니, 세 가지 모두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나는 처음에는 윤휴를 경개(耿介)하다고 생각했고, 중간에는 지나치다고 생각했으며, 마지막에는 경박하다[輕脫]고 생각했습니다. 저 스스로 윤휴의 마음을 깊이 안다고 여기지만, 세변은 무궁하고 인심은 보장하기 어려우니, 경박한 자가 혹 다른 사람의 조종을 받게 된다면 그다음 일은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魯西遺稿 卷6 與權思誠書, 韓國文集叢刊 120輯》
[주D-019]곤위(壼位)를 폐하려고 하므로 :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하려 한 일을 말한다.
[주D-020]큰아들은 …… 잃고 : 박세당의 큰아들은 박태유(朴泰維:1648~1686)이다. 1683년(숙종9) 지평으로서 남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역모를 조작한 김익훈(金益勳)을 탄핵하였다가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는데, 직책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남병사(南兵使), 관찰사 등을 탄핵하는 등 기개가 꺾이지 않았다. 그러나 고산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여 병을 얻어 사직하고 돌아왔지만 결국 병사하고 말았다.
[주D-021]작은아들 …… 잃으니 : 박태보가 서계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22]탐라(耽羅)의 …… 받았으니 : 후명(後命)은 귀양 간 죄인에게 다시 사약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1689년(숙종15) 1월 송시열이 원자(元子) 책봉이 너무 빠르다고 상소한 일로 제주(濟州)로 귀양 갔는데, 4월 나국(拿鞫)의 명이 내려 상경하다가 6월 8일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宋子大全 附錄 卷11 年譜10, 韓國文集叢刊 115輯》
[주D-023]이희조(李喜朝)와 문답한 글 : 1687년(숙종13) 나양좌(羅良佐) 등의 상소 이후 윤선거의 강도사(江都事)에 대해서 이희조와 송시열이 문답한 편지이다. 여기에는 강도가 함락될 당시 윤선거가 청나라 군사들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는 등 극도로 치욕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宋子大全 卷96 答李同甫書, 韓國文集叢刊 111輯》
[주D-024]이질(李姪) : 이희조를 가리킨다. 박세채가 이희조의 부친 이단상(李端相)에게 내제(內弟), 즉 처남뻘이 되므로 박세채가 ‘생질’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靜觀齋集 卷15 附錄上 行狀, 韓國文集叢刊 130輯》
[주D-025]나(羅)ㆍ한(韓)이 병립했다 : 나ㆍ한은 나양좌(羅良佐)와 한성보(韓聖輔)이다. 1687년(숙종13) 송시열이 상소하여 명재 부자를 여지없이 격하하자 윤선거의 문인 나양좌가 맞서서 상소하였는데, 이에 대응하여 송시열의 문인 전임 부사(府使) 한성보가 상소하여 나양좌를 공격하였다. 《肅宗實錄 13年 3月 17日, 4月 14日》 박세채는 이렇게 양쪽이 서로 대립한 일을 “병립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주D-026]기사년의 …… 삼고 : 기사년은 1689년(숙종15)으로 기사환국이 있었던 해이다. 따라서 기사년의 당인은 남인(南人)을 가리킨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한 뒤에 윤휴에 대한 복관을 청하면서 명재가 그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겼다는 등의 말을 하였고, 이이와 성혼을 문묘(文廟)에서 출향하기를 청하면서는 명재가 1681년 나양좌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했던 “율곡은 실로 입산한 잘못이 있었다.”는 등의 구절을 끌어다 썼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承政院日記 肅宗 15年 2月 26日》 《肅宗實錄 15年 3月 19日》
[주D-027]서찰에 관련된 일 : 명재가 1681년(숙종7)에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썼다가 보내지 않은 의서(擬書)를 1684년에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宋淳錫)이 박세채의 집에서 몰래 베껴 가 송시열에게 보임으로써 양쪽의 갈등이 극화된 일을 말한다. 《명재연보》 권1의 숭정(崇禎) 54년, 57년 조에 보인다.
[주D-028]한 무리 : 송시열과 그 문인들을 가리킨다.
[주D-029]담장 : 대본에는 ‘庭’으로 되어 있으나, 《명재연보》 권3에 실린 원시에 의거하여 ‘墻’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원제는 〈졸구를 적어서 원재의 문회에 바치다[拙句錄呈院齋文會]〉이다.
[주D-030]수지(受之)와 …… 단락 : 수지는 주희(朱熹)의 장남 주숙(朱塾)이고, 응중(應仲)은 주희와 교유하였던 간재(艮齋) 위섬지(魏掞之)의 아들 위응중(魏應仲)으로 주희에게 수학하였다. 성혼의 《위학지방》과 명재에게 보낸 박세채의 글이 현재 《우계집(牛溪集)》 및 《남계집(南溪集)》 등에 실려 있지 않아서 명재가 말한 두 단락을 확인할 길은 없으나, 주희는 장남 수지에게 초학자의 학문하는 자세를 자세하게 말해 주었고, 응중에게도 매일 어떤 책을 몇 글자씩 읽으라고 할 정도로 공부하는 방법을 자세히 일러 준 바 있다. 이로 볼 때 성혼이 이것을 발췌하여 《위학지방》에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晦庵集 續集 卷4 與長子受之書, 卷39 與魏應仲書》
[주D-031]창주(滄洲) : 주희의 스승인 연평(延平) 이동(李侗)이다.
[주D-032]퇴옹(退翁)이 …… 것 : 고봉(高峯)은 기대승(奇大升)이다. 인용한 구절은 한국문집총간 29집에 수록된 《퇴계집(退溪集)》 권16 〈답기명언서(答奇明彦書)〉에 실려 있는 말이다.
[주D-033]논어(論語) 중의 옹야문인장(雍也問仁章) : 옹(雍)은 공자의 제자 염옹(冉雍)으로 자는 중궁(仲弓)이다. 중궁이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문을 나갔을 때는 큰 손님을 뵌 듯이 하고, 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는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하며, 자신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야 하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고 집안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주희는 자신의 몸가짐을 경(敬)으로써 하고 남에게 서(恕)로써 미루어 가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論語集註 顔淵》
[주D-034]두 군의 …… 언급하였으니 : 덕포 윤진(尹搢)은 자가 자경(子敬)이고 농와 윤추(尹推)는 자가 자서(子恕)이다. 두 번째 구절에서 경(敬)과 서(恕)를 언급한 이유가 두 사람의 자에 이 글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D-035]성여중(成汝中) : 성지선(成至善)으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현손이다. 부친은 성직(成稷)이며, 성지화(成至和)의 형이다.
[주D-036]곤의(坤儀)가 …… 되니 :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복위(復位)된 것을 말한다. 인현왕후는 기사환국으로 남인 정권이 들어선 1689년(숙종15)에 폐위되었다가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재차 정권을 장악한 1694년에 복위되었다.
[주D-037]현석이 …… 뒤에 : 박세채가 1694년(숙종20) 4월 좌의정에 제수된 것을 말한다.
[주D-038]뜻이 …… 있고 :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의리를 정밀히 하여 신묘한 경지에 들어감은 씀을 지극히 하기 위해서요, 씀을 이롭게 하여 몸을 편안히 함은 덕을 높이기 위해서이다.[精義入神 以致用也 利用安身 以崇德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39]말을 …… 것입니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모든 일은 미리 정하면 성립되고 미리 하지 않으면 엉망이 되고 만다. 말을 미리 정하면 차질이 없고, 일을 미리 정하면 곤궁하지 않으며, 행동을 미리 정하면 결함이 없고, 도를 미리 정하면 궁하지 않게 된다.[凡事 豫則立 不豫則廢 言前定則不跲 事前定則不困 行前定則不疚 道前定則不窮]”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40]풍지(風地) 상구(上九)의 책임 : 풍지는 《주역》 〈관괘(觀卦)〉이다. 〈관괘 상구(上九)〉에, “그 내는 것을 관찰하되 군자다우면 허물이 없으리라.[觀其生 君子 无咎]” 하였는데, 이것은 현인(賢人)과 군자(君子)가 높은 지위에 있지 않으면서도 도덕을 갖추어 천하의 추앙을 받는 상이라고 한다.
[주D-041]4본(本)의 …… 하였습니다 : 박세채가 1694년(숙종20) 6월에 군주의 덕(德)을 넓힐 것, 국가의 체모를 높일 것, 인심을 따를 것, 당론(黨論)을 소멸시킬 것을 청하는 4건의 별단 계차(別單啓箚)를 올리고, 7월에는 붕당(朋黨)을 경계하는 교서(敎書)를 지어 올렸던 것을 말한다. 《肅宗實錄 20年 6月 4日, 7月 19日》
[주D-042]결승(結繩)의 정치 : 거짓이 없고 순박하였던 상고(上古) 시대의 정치를 말한다. 상고 시대에는 문자가 없었으므로 노끈을 묶어 일을 기록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周易 繫辭傳下》
[주D-043]약한 …… 말 : 박세채가 네 번째 차자에서 당론의 타파에 대해 논하면서, 자신이 계해년(1683, 숙종9)에 올렸던 3건의 차자 가운데 두 번째 차자 및 만언소(萬言疏)에서 당론의 폐단에 대해서 논했으나, 노론과 소론의 분쟁에 대해서는 힘이 약한 소론 쪽을 편드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여 소론이라는 지목을 함께 받았다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南溪集 續集 卷3 進別單啓箚四本箚, 韓國文集叢刊 142輯》
[주D-044]갑자년 …… 되었으니 : 1684년 명재가 송시열과 절교한 뒤에 소론의 영수로 활약하게 된 것을 말한다.
[주D-045]회론(懷論) : 노론, 즉 송시열 계열의 논의로, 여기에서는 당론(黨論)을 없애야 한다는 박세채의 주장에 반대하는 주장을 가리킨다. 박세채의 차자와 만언소 이후 송상기(宋相琦), 이건명(李健命) 등이 보합(保合)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肅宗實錄 20年 10月 16日》
[주D-046]기축년의 고금상례이동의(古今喪禮異同議) : 기축년은 인조가 서거하고 효종이 즉위한 1649년이다. 〈고금상례이동의〉는 이해에 김집(金集)이 소명(召命)을 받고 올라와서 지어 올린 글로, 인조 서거에 따른 상례(喪禮) 절차를 고경(古經)을 고찰하여 60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愼獨齋遺稿 卷13, 韓國文集叢刊 82輯》
[주D-047]송조(宋朝)의 고사 : 유현(儒賢)을 우대하기 위하여 관직을 제수하지 않고 임금이 접견했던 전례(前例)로, 정이(程頤)도 관직을 제수받기 전에 포의로서 황제를 접견한 바 있다. 《二程遺書 附錄》
[주D-048]주역 …… 정전(程傳)으로부터 : 《주역》 〈고괘(蠱卦) 상구(上九)〉에 “왕후를 섬기지 않고 그 일을 고상히 한다.[不事王侯 高尙其事]”라고 하였는데,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선비가 세상에 나가 임금을 섬기지 않고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는 경우를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즉, 도덕을 갖추고도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고결하게 스스로를 지키는 경우, 만족한 데서 그치는 도리를 알고 물러나서 스스로를 보존하는 경우, 자신의 능력과 분수를 헤아리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는 경우, 청렴함과 고결함으로 스스로를 지켜 천하의 일을 좋게 여기지 않고 홀로 그 몸을 깨끗이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주D-049]이수옹(李壽翁) : 이세귀(李世龜:1646~1700)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수옹, 호는 양와(養窩)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증손이며, 박장원(朴長遠)의 사위이다.
[주D-050]유상(儒相) : 유현(儒賢)으로서 삼공(三公)의 직책에 오른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여기에서는 박세채를 가리킨다.
[주D-051]월름(月廩) : 원래는 유현(儒賢)이나 빈사(賓師)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다달이 식량을 보내 주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대신(大臣)이 시골에서 지내며 녹을 받지 않는 경우에 지방관으로 하여금 다달이 관에서 곡식을 지급하게 하는 것을 월름이라고 일컬었으며, 이때 녹봉을 월름과 함께 지급하는 사례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월름은 유현, 빈사, 관직을 사양하며 나오지 않는 대신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다달이 관에서 곡식을 지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白湖全書 卷8 擬乞遞職致仕疏》 《萬機要覽 財用編2 料祿 祿制雜規》
[주D-052]주급(周急) : 아주 다급한 처지를 구제한다는 뜻으로, 유현이나 빈사, 대신 등이 살림살이가 궁핍하여 곤경에 처했을 때 식량 등을 보내 주는 것이다.
[주D-053]정국(政局)이 바뀐 이후 : 1694년(숙종20)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남인이 축출되고 소론 정국이 들어선 것을 말한다.
[주D-054]초망신(草莽臣) : 초야(草野), 즉 민간에 있는 신하라는 뜻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서울에 있는 사람을 ‘시정지신(市井之臣)’이라 하고 초야에 있는 사람을 ‘초망지신(草莽之臣)’이라 하는데, 이들을 모두 서인(庶人)이라 한다. 서인은 폐백을 올려 신하가 되지 않으면 감히 제후(諸侯)를 만나 보지 않는 것이 예이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55]원일(元日)에 …… 쓰기를 : 원제는 〈병자원일(丙子元日)〉로 《명재유고》 권3에 실려 있다. 인용된 시는 2수 가운데 첫 번째 시이다. 이 시는 1636년(인조14)에 있었던 병자호란을 회상하고 명나라 멸망에 대한 서글픈 감회를 적은 것이다.
[주D-056]평피(平陂)가 왕복함 : 평피는 평평한 것과 기울어진 것으로 음양(陰陽)의 순환을 의미한다. 《주역》 〈태괘(泰卦) 구삼(九三)〉에 “평평하기만 하고 기울지 않는 것은 없으며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다.[无平不陂 无往不復]”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인데, 여기에서는 병자호란이 있었던 병자년이 다시 돌아온 것을 천도(天道)의 순환으로 표현한 것이다.
[주D-057]사해(四海)에 …… 텐데 : 명나라가 비록 멸망했지만 명나라에 대한 충절(忠節)을 지닌 사람이 없을 리 없다는 말이다. 송나라 진량(陳亮)의 〈수조가두(水調歌頭)〉에, “요 임금의 도읍지요, 순 임금의 영토요, 우 임금이 봉해진 곳이니, 개중에 응당 외로운 충절 지닌 사람 조금은 있으리라.[堯之都 舜之壤 禹之封 於中應有一箇半箇仗孤忠]” 하였다. 《龍川集 卷17》 대본에는 ‘能’으로 되어 있으나, 《명재유고》 권3에 실린 원시에 의거하여 ‘應’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8]영소전(永昭殿) : 숙종의 정비(正妃) 인경왕후(仁敬王后)의 혼전(魂殿)으로, 지금의 경희궁(慶熙宮)인 경덕궁(慶德宮)에 있었다. 인경왕후는 1680년(숙종6) 천연두로 사망하였는데, 1696년 세자의 가례(嘉禮) 후 세자빈 심씨(沈氏)의 묘현례(廟見禮)를 거행하면서 영소전에 전알하는 것이 예법에 맞는지를 논의하였던 것이다. 《肅宗實錄 22年 8月 26日, 10月 19日》
[주D-059]절구(絶句) 2수 : 원제는 〈송별현도서귀(送別顯道西歸)〉로, 《명재유고》 권4에 실려 있다. 인용된 시는 두 번째 시이다.
[주D-060]남산(南山)에 …… 없어 : 기력이 없어서 절친한 벗을 송별하러 나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주희(朱熹)가 장식(張栻)과 이별할 때 지은 시에, “그대가 수고롭게 옥 같은 걸음 떼어, 가는 이 몸 전송하러 남산에 올랐구려.[勞君步玉趾 送我登南山]”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晦庵集 卷5 二詩奉酬敬夫贈言竝以爲別》
[주D-061]유편(遺篇) …… 권면하네 : 유편은 위의 주에서 언급한 주희의 시로, “우리 함께 싫증 내지 말도록 힘쓰세나, 이 말은 우리 둘 다 힘쓰고자 함이라네.[勉哉共無斁 此語期相敦]”라고 하여 학문을 권면하는 구절이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62]성여강(成如剛) : 성지화(成至和)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현손이다. 부친은 성직(成稷)이며, 성지선(成至善)의 동생이다.
[주D-063]정묘년의 상소 : 1687년(숙종13) 송시열이 윤선거 부자를 공척하였을 때 문인 나양좌(羅良佐) 등이 이에 맞서서 올렸던 변론 상소를 말한다.
[주D-064]우계 …… 이르렀다 : 송시열이 1689년 원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와 함께 성혼(成渾)을 비방하는 말에 대한 변론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도리어 성혼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보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즉 성혼이 기축옥사(己丑獄事)에 관련되었던 것과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의 주장에 동조하여 일본과의 강화(講和)에 찬성했던 사실을 언급한 대목이 그것이다. 《肅宗實錄 15年 2月 1日》 《宋子大全 卷20 辨訾毀牛溪之謗仍白先誣疏, 韓國文集叢刊 108輯》
[주D-065]구(久)에게 …… 것 : 구는 구지(久之)로 김수항(金壽恒)의 자(字)인데, 여기에서는 은어로 한 글자만 쓴 것이다. 이때 이단하(李端夏)가 송시열에게 정곡(鄭㷤)의 부친 정종영(鄭宗榮)의 묘지명 교정을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이와 관련하여 김수항에게 편지를 보내 정곡이 ‘소취도당(嘯聚徒黨)’이라는 말로 우계를 폄하했다는 것을 거론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宋子大全 卷55 與金久之書, 韓國文集叢刊 110輯》 ‘소취도당’은 ‘휘파람을 불어 무리들을 불러모으다.’라는 뜻으로, 도적 떼에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계를 극단적으로 혹평한 말을 송시열이 굳이 들추어낸 것 자체가 우계를 폄하하려는 의도였다고 본 것이다.
[주D-066]보답 : 대본에는 ‘福’으로 되어 있으나, 《명재유고》 권23에 실린 원 편지에 근거하여 ‘報’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67]한영휘(韓永徽)가 …… 죄 : 한영휘가 도봉서원의 직장(直長)으로 있으면서 명재의 이름을 《청금록(靑衿錄)》에서 지웠던 일을 말한다. 《肅宗實錄 23年 6月 13日, 7月 7日》
[주D-068]민이승(閔以升) : 1649~1698.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언휘(彦暉), 호는 성재(誠齋)이다. 명재의 문인이었으나 명재는 그를 학문의 지기(知己)로 대했다고 한다. 《歸鹿集 卷15 誠齋閔公誌銘, 韓國文集叢刊 212輯》
[주D-069]뒤에 …… 짓기를 : 원제는 〈과언휘묘(過彦暉墓)〉로, 《명재유고》 권4에 실려 있다.
[주D-070]노산군(魯山君)과 …… 문제 : 노산군은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이다.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있다가 복위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고,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어 죽었다. 1681년(숙종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는데, 이때 와서 복위하기로 결정하고 묘호(廟號)를 단종으로 정하였다. 신비(愼妃)는 중종(中宗)의 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를 가리킨다. 진성대군(晉城大君), 즉 중종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왕후가 되었으나,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로서 반정에 반대했던 신수근(愼守勤)이라는 이유로 공신들의 압력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 뒤 복위하는 문제가 몇 차례 거론되었으나 무산되다가 1739년(영조15)에 가서야 복위되었다.
[주D-071]기문(記文)을 지었는데 : 기문은 〈노릉지덕암중건기(魯陵旨德庵重建記)〉로, 한국문집총간 100집에 수록된 《동토집(童土集)》 권5에 실려 있다.
[주D-072]위호를 …… 한다면 : 경태제는 명나라 제7대 황제 경제(景帝)이다. 형 영종(英宗)이 그를 성왕(郕王)으로 봉했는데, 영종이 토목(土木)의 변(變)으로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혀가자 대신 즉위하여 연호를 경태(景泰)로 정하고 국정의 안정을 꾀하였다. 1년 뒤 영종이 돌아왔으나 황제로 복위시키지 않은 채 영종을 상왕(上王)으로 추대하고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였는데, 경태제가 병이 난 틈을 이용하여 측근들이 영종을 다시 황제로 영입하는 탈문(奪門)의 변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영종은 8년 만에 다시 황제로 즉위하고 경태제는 폐위되었는데, 영종의 아들 헌종(憲宗) 때에 이르러 황제 위호를 추복(追復)하였다. 《明史 卷10 英宗前紀, 卷11 景帝本紀, 卷12 英宗後紀, 卷13 憲宗本紀》 단종을 경태제에 비유한 것에 대해서는 적절하지 않다는 논란이 일부 있었지만, 윤순거는 단종을 복위시키는 방법을 나름대로 제시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주D-073]한결같이 …… 말 : 자신을 낳아 준 아비,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 준 스승, 먹고살 수 있게 해 준 임금을 똑같이 섬기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다. 《小學集註 卷2 明倫》
[주D-074]접때의 일 : 이에 앞서 송시열이 명재와 윤선거를 공격하고 배척했던 일을 가리킨다.
[주D-075]앞서 …… 것이니 : 앞서 전복된 수레는 송시열을 위시한 노론 세력을 가리킨다. 송시열과 그 문인들이 윤선거 부자를 공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였으나, 이 무렵에 와서는 숙종이 당시의 조처에 회의를 품고 명재를 예우하는 등 노론 쪽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는 처분을 내렸기 때문에 한 말이다. 이때 명재를 공격한 정호(鄭澔)를 파직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즉, 편파적인 시각으로 정치적 보복을 하려 들다가는 노론과 마찬가지로 곤경을 겪게 될 것이라고 소론 인사들에게 경고한 말이다.
[주D-076]추은(推恩) : 시종(侍從) 또는 병사(兵使), 수사(水使) 등의 아버지로서 70세가 넘은 사람에게 가자(加資)하던 규례를 말한다.
[주D-077]계성묘(啓聖廟) : 공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 등의 생부를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문묘(文廟) 안에 있다. 현종 때부터 건립 논의가 있었으나, 1699년(숙종25)에 착공을 결정하고 2년 뒤 완공하였다. 《肅宗實錄 25年 閏7月 10日ㆍ10月 4日, 27年 4月 23日》
[주D-078]불위(不韙)의 죄 : ‘불위’는 옳지 않다는 뜻인데, 여기에서는 자신의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죄를 가리킨다. 춘추 시대 식(息)나라 군주가 정(鄭)나라를 쳤다가 싸움에 대패하고 돌아갔는데, 군자가 “자신의 덕을 헤아리지 않았고,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았고, 친척을 친하게 대하지 않았고, 말의 진위(眞僞)를 따져 보지 않았고, 누구에게 죄가 있는지 살피지 않았다.”라고 하고, “‘다섯 가지 옳지 못함[五不韙]’을 범하였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隱公11年》
[주D-079]유소(有所)와 부재(不在) : 《대학장구(大學章句)》 전(傳) 7장에 “마음에 노여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근심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心有所忿懥則不得其正 有所恐懼則不得其正 有所好樂則不得其正 有所憂患則不得其正]”라고 하고,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라고 한 것을 말한다.
[주D-080]이기호발(理氣互發)의 뜻 :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하는데 기(氣)가 이에 따르는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하는데 이(理)가 타는 것이라는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가리킨다.
[주D-081]그의 시에 차운하기를 : 《명재유고》 권4에 실린 원시의 제목은 〈김숙함시기여현석수답운요여정화(金叔涵示其與玄石酬答韻要予訂和)〉이다. 첫 번째 시에는 ‘총괄적으로 답하다[總答]’, 두 번째 시에는 ‘현석에게 답하다[答玄石]’, 세 번째 시에는 ‘숙함에게 답하다[答叔涵]’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으며, 뒤에 박세채의 원시를 첨부하였다. 특히 두 번째 시는 박세채의 원시 내용과 밀접하게 연관되므로 이해를 위해서는 원시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주D-082]율곡 …… 열었었지 : 율곡 이이가 1572년(선조5) 우계 성혼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이기 심성(理氣心性)에 대해서 논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우계와 율곡의 편지는 한국문집총간 44집에 수록된 《율곡전서(栗谷全書)》 권9와 권10에 실려 있다.
[주D-083]두 마음 :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가리킨다.
[주D-084]선사(先師)께서 …… 말아야지 : 선사는 율곡 이이를 가리킨다. 김숙함이 동봉해 보낸 박세채의 시에 “성이 발해 정이 됨은 하나의 근원인데, 무엇 하러 사단 칠정 나누어 말을 하랴. 선사께서 천추에 남겨 놓은 어록의 뜻, 도리어 중간에서 주(主)하여 말씀했네.[性發爲情共一源 如何四七更分門 千秋語錄先師意 却向中間以主言]”라고 하였다. “주하여 말씀했다.”는 것은 이이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부정하면서 “사단은 오로지 이를 말한 것이고, 칠정은 기를 겸하여 말한 것이다.[四端專言理 七情兼言氣]”라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던 것을 가리킨다. 《栗谷全書 卷20 聖學輯要2》 박세채는 이이가 이기호발설을 부정하면서 근거로 들었던 이 말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견해를 은밀히 드러낸 것인데, 명재는 율곡의 말씀이 설사 그렇더라도 깊이 따지지 말고 마음속에 간직하기만 해야 한다고 충고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박세채의 견해는 한국문집총간 140집에 수록된 《남계집(南溪集)》 권55 〈사단이발칠정기발설(四端理發七情氣發說)〉에 자세히 보인다.
[주D-085]이공(貳公) : 의정부 찬성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주D-086]숭자(崇資) : 숭품(崇品)과 같은 말로 종1품 관계(官階)를 지칭한다. 좌찬성이 종1품이므로 말한 것이다.
[주D-087]사례사의(四禮私議) : 〈국휼중관혼상제례사의(國恤中冠昏喪祭禮私議)〉로, 《명재유고》 권30에 실려 있다.
[주D-088]문학(問學)을 …… 것 : 율곡 이이의 〈위학지방도〉에 ‘도문학(道問學)’ 세 글자를 거꾸로 써서 ‘존덕성(尊德性)’과 대비시켜 놓았던 것을 말한다. 《明齋遺稿 卷30 題爲學之方圖》
[주D-089]성인(聖人)의 …… 정 : 《대학장구》 전(傳) 3장에서 문왕(文王)의 덕을 칭송하기를,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그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에 그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그치고, 아비가 되어서는 자애로움에 그치고, 국인과 더불어 사귀는 데는 신의에 그쳤다.[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 爲人父 止於慈 與國人交 止於信]”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90]세상을 …… 사람 : 위(衛)나라의 은자(隱者)가 공자(孔子)의 경쇠[磬] 소리를 듣고서 ‘시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천하에 마음을 두었다.’는 뜻으로 비난하자, 공자가 “과감하구나! 그렇게 한다면 어려울 것이 없겠구나.[果哉 末之難矣]”라고 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論語 憲問》
[주D-091]치의(緇衣)의 정성 : 치의는 검은색 비단으로 만든 조복(朝服)으로 경대부(卿大夫)가 입는 옷인데, 여기에서는 현자(賢者)를 지칭한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치의〉는 주(周)나라 사도(司徒)로서 그 직책을 잘 수행하였던 정(鄭)나라 환공(桓公)과 무공(武公)의 덕을 찬미하고 그들을 좋아하는 정성을 드러낸 시인데, 《예기(禮記)》 〈치의〉에 “어진 이 좋아하기를 《시경》 〈정풍 치의〉처럼 한다.”라고 하였다.
[주D-092]염락(濂洛) : 송대의 대표적 이학자(理學者)인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를 가리킨다.
[주D-093]칠현(七賢) : 앞에서 언급한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정암 조광조(趙光祖), 퇴계 이황(李滉), 우계 성혼(成渾), 율곡 이이(李珥),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가리킨다. 《魯西遺稿 附錄 年譜》
[주D-094]정재집(定齋集) :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의 문집이다.
[주D-095]강한(江漢)의 생각 : 강한은 본래 《시경》 〈대아(大雅)〉의 편명(篇名)으로,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소공(召公)을 보내어 회남(淮南)의 오랑캐를 평정하게 한 공을 찬미한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명나라 신종황제가 임진왜란 때 원병(援兵)을 보내 준 은혜를 생각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주D-096]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생각 : 비풍은 《시경》 〈회풍(檜風)〉의 편명(篇名)이고 하천은 〈조풍(曹風)〉의 편명인데, 주대(周代)의 현인(賢人)이 쇠약해진 왕실을 걱정하고 슬퍼하여 지은 시들이다. 여기에서는 명나라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주D-097]공경히 …… 차운하기를 : 원제는 〈경차대보단어제운(敬次大報壇御製韻)〉으로, 《명재유고》 권4에 실려 있다.
[주D-098]선왕(先王)의 …… 마땅하고 : 선왕은 북벌을 추진했던 효종을 가리키고, 현친(賢親)은 그 훌륭한 덕을 잊지 못하는 마음이다. 《대학장구》 전 3장에 “《시경》에 ‘아! 전왕(前王)을 잊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군자(君子)는 그 어짊을 어질게 여기고 그분이 친히 했던 사람을 친히 여기며, 소인(小人)은 즐겁게 해 준 것을 즐거워하고 이롭게 해 준 것을 이롭게 여기니, 이 때문에 세상에 없어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여기에서는 대보단 설립과 관련하여 효종이 추진했던 북벌 정책을 계승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 말이다.
[주D-099]경(敬)과 …… 없지 : 공자(孔子)의 제자 중궁(仲弓)이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문을 나갔을 때는 큰 손님을 뵌 듯이 하고, 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는 큰 제사를 받들 듯이 하며, 자신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야 하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고 집안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주희는 자신의 몸가짐을 경(敬)으로써 단속하고 남에게 서(恕)로써 미루어 가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論語集註 顔淵》
[주D-100]능소(能所)의 …… 것 : ‘능소’는 불가(佛家)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인데, ‘능(能)’은 사람이 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소(所)’는 소능(所能)과 같은 말로 행위의 대상을 가리킨다. 예컨대 존심양성(存心養性)에서는 존(存)과 양(養)이 능이 되고 심(心)과 성(性)이 소능이 되며, 박문약례(博文約禮)에서는 박(博)과 약(約)이 능이 되고 문(文)과 예(禮)가 소능이 된다. 정생(鄭生) 형제는 능소의 체용에 대한 일반 학설과는 다른 자신들의 견해를 명재에게 질정한 것으로 보인다. 《明齋遺稿 卷25 答鄭萬陽葵陽書》
[주D-101]기발이승(氣發理乘) :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모두 기(氣)가 발하는데 이(理)가 이에 타는 것이라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道說)을 말한다.
[주D-102]이통기국(理通氣局) : 기는 유형(有形)이고 유한(有限)하여 개체에 국한되지만 그 근본이 하나인 것은 이가 통하기 때문이고, 이는 무형(無形)이고 무한(無限)하여 만물에 내재하지만 만 가지로 나뉘는 것은 기가 국한되기 때문이라는 학설이다.
[주D-103]한쪽 편 …… 배척하고 : 한쪽 편은 노론(老論)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때 충청도 유생 임부(林溥) 등이 상소하여 김춘택(金春澤)이 동궁을 모해하려 했다고 주장하였던 사건을 가리킨다. 《肅宗實錄 32年 5月 29日》 《燃藜室記述 肅宗朝故事本末 林溥李潛之獄》
[주D-104]오로시(五老詩) : 명재의 동생 윤추(尹推)의 시 〈명촌저서칭오배향년이다……(明邨抵書稱吾輩享年已多……)〉로, 한국문집총간 143집에 수록된 《농은유고(農隱遺稿)》 권2에 실려 있다. 윤추가 시의 원주(原註)에서 명재는 78세, 자신은 75세, 사위(士威) 조득중(趙得重)은 70세, 명촌 나양좌(羅良佐)와 문옥(文玉) 백광서(白光瑞)는 69세가 되었다고 하고, “오로(五老)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오로시’라고 말한 것이다.
[주D-105]자신을 …… 들었건만 : 춘추 시대 위 무공(衛武公)이 95세의 나이가 되어서도 위의(威儀)를 경계하는 시를 지어서 날마다 곁에서 외우도록 함으로써 늘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려고 노력했던 일을 말한다. 《詩經 大雅 抑》 대본에는 ‘箴警固當聞古義’로 되어 있으나, 《명재유고》 권4에 실린 원시에 의거하여 ‘當’을 ‘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106]하늘의 …… 함이라네 : 자강불식(自彊不息)하는 도리를 말한다. 《주역》 〈건괘(乾卦) 상(象)〉에 “하늘의 운행이 굳세니, 군자가 이를 보고서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다.[天行健 君子以 自彊不息]”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107]위 무공(衛武公)의 억계(抑戒) : 춘추 시대 위 무공(衛武公)이 95세의 나이가 되어서도 위의(威儀)를 경계하는 시를 지어서 날마다 곁에서 외우도록 함으로써 늘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려고 노력했던 일을 말한다. 《詩經 大雅 抑》
[주D-108]이세덕(李世德) : 1662~?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백소(伯邵)이며, 부친은 두악(斗岳)이다. 명재에게 수학하였다.
[주D-109]주역 …… 전(傳) : 《주역》 〈고괘(蠱卦) 상구(上九)〉에 “왕후를 섬기지 않고 그 일을 고상히 한다.[不事王侯 高尙其事]”라고 하였는데,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선비가 세상에 나가 임금을 섬기지 않고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는 경우를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즉, 도덕을 갖추고도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고결하게 스스로를 지키는 경우, 만족한 데서 그치는 도리를 알고 물러나서 스스로를 보존하는 경우, 자신의 능력과 분수를 헤아리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는 경우, 청렴함과 고결함으로 스스로를 지켜 천하의 일을 좋게 여기지 않고 홀로 그 몸을 깨끗이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주D-110]매복(枚卜) : 의정(議政) 중에 결원이 생겼을 때 시임(時任) 의정이 왕에게 후보자를 입계(入啓)하는 일을 가리킨다.
[주D-111]우인(虞人)이 …… 의리 :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분수에 넘치는 부름에는 응하는 않는 의리를 가리킨다. 옛날에 원유(苑囿)의 관리인인 우인은 정(旌)을 사용해서 부르게 되어 있었는데,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대부를 부를 때 쓰는 피관(皮冠)으로 그를 부르자 죽음을 무릅쓰고 가지 않았으므로 맹자가 크게 칭찬하였던 고사가 있다. 《孟子 滕文公下》
[주D-112]주자(朱子)의 …… 독서법 : 주희(朱熹)가 〈행궁편전주차(行宮便殿奏箚) 2〉에서 논한 독서법을 말한다. 주희는 “학문을 하는 방도로는 궁리(窮理)보다 더 우선할 것이 없는데, 궁리의 요점은 반드시 독서하는 데 있으며, 독서하는 법은 순서를 따라서 정밀함에 이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정밀함에 이르는 근본은 또 몸가짐을 공경히 하고 뜻을 견지하는 데 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명재는 이것을 정해년(1707, 숙종33)에 이세덕(李世德)이 왕명을 받들고 와서 왕세자의 진강 책자를 물을 때도 언급한 바 있다. 《晦庵集 卷14》
[주D-113]구경(九經) : 나라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떳떳한 법칙으로, 몸을 닦는 것[修身], 현인을 높이는 것[尊賢], 친척을 친히 하는 것[親親],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여러 신하들의 마음을 헤아려 살피는 것[體群臣],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子庶民], 백공들을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 지방 사람을 회유하는 것[柔遠人], 제후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懷諸侯]이 그것이다. 《中庸章句 第20章》
[주D-114]은혜로운 …… 수 : 원제는 〈대배후사소지십팔……(大拜後辭疏至十八……)〉로, 《명재유고》 권4에 실려 있다.
[주D-115]중용(中庸)과 …… 편입시켰다 : 《중용》과 《대학》은 본래 《예기》의 편명(篇名)이었다. 송나라 때 주희(朱熹)가 이를 별도로 독립시켜 《중용장구》와 《대학장구》로 편찬하였는데, 최석정이 《예기유편(禮記類編)》을 편찬하면서 이 두 편을 본래대로 《예기》에 포함시켜 분류하였던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해 최석정은 노론 쪽으로부터 주자(朱子)의 학설을 무시하고 경전의 편목 등을 달리했다는 호된 공격을 받아 은퇴하기에 이르렀다.
[주D-116]강확(講確)한 …… 기록하였는데 : 강확은 강론하여 확정하는 것이고, 참정(參訂)은 대조하여 정정하는 것이다. 《예기유편》 권14 부록에 강확한 사람 7명과 참정한 사람 14명의 이름이 실려 있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117]한쪽 편 사람들 : 노론을 지칭한다.
[주D-118]뇌우(雷雨)가 …… 의리 : 왕이 죄 있는 사람을 관대하게 용서하는 것을 뜻한다. 《주역》 〈해괘(解卦) 상(象)〉에, “뇌우가 일어남이 해(解)이니, 군자가 보고서 과실을 저지른 자를 사면하고 죄 있는 자를 관대하게 처분한다.[雷雨作 解 君子以 赦過宥罪]”라고 하였다. 명재는 원 상소에서 “바람과 벼락은 하루 종일 위엄을 보이는 일이 없고, 우레와 비는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은택이 있습니다.[風霆無竟日之威 雷雨有作解之澤]”라고 하며 자신을 비난했다가 처벌받은 신하들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다. 《明齋遺稿 卷8 辭召命待罪疏, 韓國文集叢刊 135輯》
[주D-119]사람들은 …… 않는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2 〈지수(持守)〉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D-120]서쪽 …… 우려 : 청나라에서 해적 소탕에 나섰는데, 관병에게 살해되고 남은 적도들이 배를 타고 도주하자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뜻으로 조선에 자문(咨文)을 보내 방어에 유의하라고 통지하였으므로 조정에서 대비책을 강구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肅宗實錄 36年 9月 28日》
[주D-121]정강(靖康)의 난리 : 송나라 정강 2년(1127)에 금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수도 변경(卞京)이 함락되고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이 포로로 끌려간 변고를 가리킨다. 이 난리로 북송(北宋)이 멸망하고, 송나라 고종(高宗)이 남천(南遷)하여 즉위함으로써 남송(南宋) 시대를 맞게 된다.
[주D-122]조천(祧遷) : 제사를 받드는 대수(代數)가 다 된 조상, 즉 친진(親盡)된 조상을 가묘(家廟)에서 모셔 내는 것을 말한다.
[주D-123]가례원류를 …… 보인다 : 유계(兪棨)와 윤선거가 《가례원류》를 함께 편찬한 일로, 앞의 숭정(崇禎) 31년 조에 보인다.
[주D-124]시상(時相)에게 부탁하면서 : 시상은 당시 좌의정으로 있던 이이명(李頤命)이다. 부탁한 내용은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간행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肅宗實錄 39年 5月 20日》
[주D-125]어제(御製) 절구 2수 : 원제(原題)는 〈을미동추유선정신윤증작(乙未冬追惟先正臣尹拯作)〉이며, 《열성어제(列聖御製)》 권12에 실려 있다.
[주D-126]살게 …… 똑같다지만 :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니 섬기기를 똑같이 해야 한다. [民生於三 事之如一]”라는 말에서 나온 구절이다. 세 분은 자신을 낳아 준 아비,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 준 스승, 먹고살 수 있게 해 준 임금을 말한다. 《小學集註 卷2 明倫》
[주D-127]논사(論思)의 장관 : 당시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정호(鄭澔)를 가리킨다.
[주D-128]대로(大老) : 명재를 가리킨다. 학문, 도덕 등을 겸비한 국가의 원로대신이나 유현(儒賢)에 대한 극존칭으로, 숙종 대에는 거의 송시열(宋時烈)에게만 사용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명재가 우의정에 제수된 1709년(숙종35) 무렵 그를 조정으로 초치하라는 유림의 상소에 대한 비답 등에 숙종이 명재를 ‘대로’로 지칭한 사례가 보인다. 《承政院日記 肅宗 35年 3月 12日, 4月 11日》 《肅宗實錄 42年 閏3月 18日》
[주D-129]서서후문(書序後文) : 권상하가 쓴 《가례원류》 서문의 끝에 덧붙여 쓴 글을 말한다. 권상하는 여기에서 《가례원류》가 유계의 저작이며 윤선거는 다른 사우(師友)들과 함께 다소간 보조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이것을 부정하는 명재를 극단적인 말로 폄하하였다. 《寒水齋集 卷22 家禮源流序, 韓國文集叢刊 150輯》
[주D-130]당인(黨人)이 …… 되자 : 노론 김창집(金昌集)이 좌의정이 된 것을 가리킨다. 이후에 숙종이 윤증과 송시열 간의 회니시비(懷尼是非)에 대해서 송시열 쪽이 옳다는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리고, 그와 함께 노론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주D-131]방상 복제(方喪服制) : 방상은 임금상의 복제를 부모상과 같이 3년으로 하는 고제(古制)로,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때 숙종이 군신의 복제를 고례(古禮)대로 회복하는 문제를 검토하도록 지시하였기 때문에 조정 신료와 유신들의 의견을 수합한 것이다. 《肅宗實錄 39年 11月 16日》
[주D-132]삼여(三餘)의 학업 : 틈틈이 학업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겨울, 밤, 비 오는 날이 독서하기에 좋은 여가 시간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다. 《三國志 卷13 魏書 王肅傳》
[주D-133]택화(澤火)의 상(象) : 변혁을 의미하는 《주역》의 〈혁괘(革卦)〉를 가리킨다. 혁괘의 상이 못[澤]을 상징하는 태(兌)와 불[火]을 상징하는 이(離)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134]하루가 …… 괴롭겠구나 : 인용된 구절은 《주역》 〈혁괘 육이(六二)〉의 내용이다. 명재는 ‘혁(革)’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였고, 당시가 12월이므로 하루를 해가 바뀌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그때까지는 병세가 위중하여 고달프겠다고 말한 것이다.
[주D-135]결적성서(訣積城書) : 이때 윤졸(尹拙)이 적성 현감(積城縣監)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쓴 것이다. 《承政院日記 肅宗 38年 8月 8日》
[주D-136]동수(東洙) : 윤동수(尹東洙:1674~1739)이다. 명재의 동생 윤추(尹推)의 손자로, 부친은 자교(自敎)이다. 자는 사달(士達) 또는 대원(大源)이며, 호는 경암(敬庵)이다.
[주D-137]우계 …… 시 : 동은(峒隱)은 이의건(李義健:1533~1621)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 호는 의중(宜仲)이며, 세종의 5자 광평대군(光平大君) 이여(李璵)의 5대손이다. 이 시의 원제(原題)는 〈동은이공래문질이시위결(峒隱李公來問疾以詩爲訣)〉이며, 우계의 절필시(絶筆詩)로 한국문집총간 43집에 수록된 《우계집(牛溪集)》 권1에 실려 있다. 시는 다음과 같다. “그대 한 번 보고픈 생각 간절했었는데, 저승으로 돌아가면 만상이 다 공허하리. 상상컨대 해마다 산 달은 아름다워, 맑은 빛 변함없이 우계를 비추리라.[思君一見意凄凄 去入無窮萬象虛 惟想年年山月好 淸光依舊照牛溪]”
[주D-138]청송당(聽松堂) : 성수침(成守琛:1493~1564)의 당호(堂號)로 건물은 한성부 유란동(幽蘭洞)에 있었다. 성수침은 본관이 창녕(昌寧), 자는 중옥(仲玉)이며,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부친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기묘사화 후에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명재의 조부 윤황(尹煌)이 성혼의 사위가 되므로, 명재에게는 외가 쪽으로 혈연관계가 있다. 청송당은 성혼 이후로 버려진 채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갔던 것을 1668년(현종9) 증손인 성직(成稷), 외손인 윤선거, 윤순거 등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宋子大全 卷141 聽松堂記, 韓國文集叢刊 113輯》 명재는 46세 되던 1674년(현종15)에 이곳을 찾아갔었다.
[주D-139]호유(湖儒) 심익래(沈益來) : 대본에는 ‘胡’로 되어 있으나, 오자(誤字)로 판단되어 ‘湖’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심익래가 충청도 유생인지 전라도 유생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D-140]용계(龍溪)의 옛 거처 : 충청도 홍주(洪州)로, 명재가 51세 되던 1679년(숙종5)부터 2년 가까이 살았던 곳이다.
[주D-141]노선생의 …… 얽어 넣었다 : 효종이 윤선거를 징소하였을 때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동지들이 다 죽었는데도 혼자 섬을 탈출하여 목숨을 부지했던 자신의 과실을 들어 벼슬길에 나갈 수 없다고 사양한 적이 있었다. 윤선거의 문집에는 병자호란 당시 대군(大君)으로서 강화도에 피난해 있었던 효종에게 윤선거가 강화도의 일을 들어 자책하는 것이 혐의가 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지인들과 주고받은 말들이 실려 있다. 신구(申球)는 이런 기록들을 낱낱이 들어, 윤선거가 병자호란 당시 효종의 처신 또한 옳지 않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강도의 일을 거론한 것이 결국 효종을 크게 무함한 행위라며 극단적인 말로 공격한 것이다.
[주D-142]유소(儒疏) : 신구 등이 올린 상소를 가리킨다.
[주D-143]유자광(柳子光)의 …… 진달하였는데 : 유자광은 연산군 때 김일손(金日孫)이 사초(史草)에 기록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것이라며 연산군을 선동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엄경수(嚴慶遂)는 윤선거의 문집 속의 글을 끄집어내어 효종을 무함했다고 숙종에게 아뢴 신구(申球)의 행위가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의 의도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肅宗實錄 42年 8月 3日》
[주D-144]후명(後命)의 참화 : 후명은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시 사사(賜死)의 명을 내리는 것이다. 조광조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능주(綾州)에 유배되었다가 곧이어 사사의 명을 받았던 것을 말한다.
[주D-145]추탈의 원통함 : 성혼이 사후에 기축옥사(己丑獄事)와 관련되어 관작이 추탈되었던 것을 말한다.
[주D-146]예서(禮書) 8권 : 《의례문답(疑禮問答)》으로, 《명재연보》의 간행인인 명재의 족증손(族曾孫) 윤광소(尹光紹)가 편차하였다.
[주D-147]천장(泉漳)의 재변 : 무덤 안에 물이 고이는 재변을 말한다. 천장은 중국 복건성(福建省)의 천주(泉州)와 장주(漳州)인데, 이 지방은 남쪽의 바다 연안이어서 봉분을 쓸 때 땅을 조금만 깊이 파도 물이 흥건하였던 데서 나온 말이다. 《家禮 卷5 喪禮》




炭翁先生集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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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基萬母夫人金氏挽 a_104_28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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猗歟孟母賢。嘗以敎子知。令郞也才俊。能忘乃孃慈。益篤追孝志。立揚胡福基。遙感求誄意。破戒寫哀詞。
炭翁先生集卷之二



炭翁先生集卷之十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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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墓碣銘
崔孝子墓碣銘改刪定 a_104_47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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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_473d君諱璥。字仲潤。生長懷德宋村。懷乃鄒魯之鄕。鄕人狀其行。轉聞于朝曰。崔璥誠孝。得之天性。其制行古人所罕。士夫庶氓。莫不歎誦。謂斯人不可使泯沒。己酉四月。贈務功郞靑巖道察訪。君本全州人。高麗平章事阿之後。七世祖德之。直提學。名德丕顯。文廟禮遇之。年滿退居靈巖。一時諸賢如六臣。皆贈詩以別之。全州靈巖人。立祠享之。曾祖彥淸。濟用奉事。一蠹鄭先生之外孫。祖耆壽。考應生。沖庵金先生之外曾孫。妣恩津宋氏。錫昌之女。大族世有聞人。君稟美質。篤志力行。勤學好問。不幸短命。生天啓丙寅104_474a三月廿二日。卒庚寅九月廿一日。先生長者皆惜其早夭。金氏世居尼山。高麗高陽府院君南得之後。祖水軍虞候潔。考奉直郞名立。妣丹陽禹氏。學生忠男之女。孝於親。父病臨死。血其指進之。旣嫁。順承內助爲賢婦。旣寡。養孤游學以有成。生甲子二月廿七日。卒丁未正月廿九日。君初葬尼山月谷。甲辰三月。改葬公州南大谷辛向之山。金氏祔葬。男基萬。娶學生慶州崔淨女。基億。娶驪興閔光熠女。基萬要余墓表。銘孝子令妻之云。非余妄也。樂道人善者。其傳以揚之。銘曰。
104_474b孝子令妻。餘慶不匱。子孫保之。永錫爾類。



 
 역천집(櫟泉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櫟泉先生文集
판심제 櫟泉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805年刊
권책 19권 10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0.9×15.4(㎝)
어미 上白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한46-가1616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21
 저자
성명 송명흠(宋明欽)
생년 1705년(숙종 31)
몰년 1768년(영조 44)
 晦可
 櫟泉
본관 恩津
시호 文元
특기사항 李縡의 門人. 宋浚吉의 玄孫
 가계도
 宋光栻
 
 宋炳遠
 都事
 宋堯佐  
 郡守
 坡平尹氏
 尹扶의 女
 宋明欽
 
 淸風金氏
 金道洽의 女
 宋時淵  
 
 申韶의 女
 
 側室
 
 宋希淵
 
 宋躍淵
 
 宋履淵
 
 女
 
 趙成逵
 
 女
 
 金希柱
 
 宋文欽
 한정당집(閒靜堂集)
 靑松沈氏
 沈聖希의 女
 宋致淵
 
 申思迪의 女
 
 宋時淵  
 
 女
 
 金寧
 
 女
 
 金光默
 
 女
 
 黃仁燾
 
 女
 
 洪相吉
 
 女
 
 尹得敬
 
 女
 
 閔克烈
 
 女
 
 金濟謙
 
 女
 
 李眞偉
 
 宋炳翼
 牧使
 宋堯臣
 
 宋堯佐  
 
 宋堯輔
 
 宋堯弼
 
 宋堯協
 

기사전거 : 墓誌銘(任聖周 撰, 鹿門集 卷24), 宋堯佐墓誌(李縡 撰, 陶菴集 卷43), 宋堯佐妻墓追誌ㆍ宋堯佐家狀(宋明欽 撰), 宋炳遠 墓表(權尙夏 撰, 寒水齋集 권32) 등에 의함
 행력
왕력서기간지연호연령기사
숙종311705을유康熙44110월 21일, 漢城 濟生洞에서 태어나다.
숙종441718무술康熙5714生祖父인 牧使公 宋炳翼의 喪을 당하여 懷德의 宋村으로 돌아오다.
숙종461720경자康熙5916金道洽의 딸 淸風金氏와 혼인하다.
경종21722임인康熙61181월, 부친이 해직되어 沃川 同安里로 돌아가다. ○ 4월, 塗谷(龍湖)으로 거처를 옮기다. 이후 擧業을 폐하고 性理學에 전념하다.
경종31723계묘雍正11910월, 부친상을 당하다. ○ 12월, 부친을 塗谷에 장사 지내다. 「閨鑑」을 편찬하다.
영조11725을사雍正3214월, 祖母 李夫人의 상을 당하여 長孫으로 承重하다. ○ 7월, 懷德 宋村으로 거처를 옮기다.
영조31727정미雍正5233월, 〈自警語〉를 쓰다. ○ 8월, 金聖采와 함께 關西를 유람하다. ○ 花田에 가서 陶菴 李縡를 뵙고, 이후 계속 왕래하며 질의하다.
영조41728무신雍正6249월, 부친이 독서하던 장소인 聞慶의 瓶泉으로 갔다가 俗離山을 유람하다. ○ 동생 宋文欽과 佳山寺에서 독서하다.
영조51729기유雍正725부친의 家狀을 찬하고, 陶菴 李縡에게 墓誌를 청하다. ○ 겨울, 「煌煌集」을 편찬하다.
영조71731신해雍正927제생들과 講會를 행하다.
영조81732임자雍正102810월, 淸州에서 閔鎭遠을 만나다.
영조91733계축雍正1129瓶泉亭舍를 중수하다.
영조101734갑인雍正12302월, 坡州를 유람하다. 紫雲書院, 花石亭, 來蘇亭을 돌아보다. ○ 3월, 陶菴 李縡가 내방하다. ○ 4월, 豆溪로 陶菴을 찾아 뵙고 「玄繩錄」을 질의하다. ○ 5월, 飛來庵 玉溜閣에서 宋能相과 함께 독서하다.
영조111735을묘雍正13311월, 〈自警箴〉을 짓다.
영조121736병진乾隆1321월, 豆溪로 가서 陶菴을 찾아 뵙고 같이 鳳林洞을 유람하다. ○ 2월, 尙州 興巖으로 가서 洛東江을 舟遊하다.
영조141738무오乾隆3343월, 동생 宋文欽과 함께 華陽洞을 유람하다. ○ 11월, 光州 無等山을 유람하다.
영조151739기미乾隆4352월, 黃山을 유람하다. ○ 6월, 恭陵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 12월, 閔遇洙와 함께 俗離山을 유람하고 太極圖說을 강론하다.
영조161740경신乾隆536道峯書院을 찾아가다. ○ 金元行을 방문하다.
영조171741신유乾隆6371월, 「同春先生年譜」를 중간하다. ○ 3월, 申韶와 함께 太極圖說을 강하다.
영조211745을축乾隆104111월, 寒泉에 가서 陶菴을 뵙고 栗谷全集稟目을 적어 올리다.
영조221746병인乾隆114210월, 金聖梓와 俗離山을 유람하다. ○ 陶菴 李縡를 곡하다. ○ 侍講院 諮議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영조231747정묘乾隆12434월, 寒泉에 가서 陶菴의 靈筵에 곡하다. ○ 東宮의 賜扇과 賜曆을 받다.
영조241748무진乾隆1344봄, 楸谷에 正寢을 짓고 櫟泉이라 개명하다. ○ 大報壇에 毅宗皇帝를 追享할 것을 건의하다.
영조261750경오乾隆15465월, 衛率에 제수되다. ○ 7월, 宗簿寺 主簿에 제수되다. ○ 9월, 상이 온천으로 행행하며 召命하자 상소하여 사직하다. ○ 10월, 忠淸 都事에 제수되다. ○ 12월, 持平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영조271751신미乾隆1647聖廟位號를 釐正하기를 건의하다.
영조281752임신乾隆17482월, 掌令에 제수되었으나 上書하여 사직하다. ○ 10월, 宋文欽의 둘째 아들 宋時淵을 후사로 삼다. ○ 12월, 동생 閒靜堂 宋文欽을 곡하다.
영조291753계유乾隆18491월, 軍資監 正에 제수되다.
영조301754갑술乾隆19502월, 특별히 書筵官에 제수되고 別諭가 내렸으나 上書하여 사직하다.
영조311755을해乾隆20512월, 申韶의 부음을 듣고 곡하다. ○ 7월, 玉果 縣監에 제수되다. ○ 8월, 왕세자의 소견에 응하여 「大學」을 강하고 勉戒를 올리다.
영조321756병자乾隆2152봄, 진휼을 행하다. ○ 2월, 小朝가 下諭하자 上書하여 饑民救濟策을 아뢰고, 金麟厚와 柳彭老 등의 賜額을 청하다. 鄕校를 옮겨 세우고 尤庵, 同春을 追享하다. 詠歸書院祭儀를 개정하다. ○ 9월, 모친상을 당하다. ○ 11월, 櫟泉으로 돌아오다.
영조351759기묘乾隆24552월, 世孫講書院 右勸讀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 4월, 華陽洞을 거쳐 瓶泉으로 돌아가다. ○ 10월, 執義에 제수되고 勸讀을 겸하였으나 사직하다.
영조361760경진乾隆25562월, 方山書堂에서 강학하다. ○ 通政大夫로 자급이 오르고 禮曹 參議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영조371761신사乾隆26573월, 동부승지, 예조 참의가 되었으나 사직하다. ○ 8월, 講書院 諭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영조381762임오乾隆27582월, 沁都로 姑母를 찾아 뵙고 花石亭에 오르다. ○ 崇賢書院의 유생이 山長이 되기를 청하다. ○ 4월, 再從姪 宋志淵과 華陽洞에 갔다가 俗離山을 유람하다. ○ 8월, 世孫 贊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 12월, 사관을 통해 잇달아 別諭가 내렸으나 啓辭를 올려 사양하다.
영조391763계미乾隆28592월, 景賢堂에 입시하여 「中庸」을 강하다. ○ 경연중 金時粲, 尹蓍東 등을 구원하여 엄한 하교를 받다. 상소 내용 중 赤芾의 비유가 외척과 근신의 중용과 탕평책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여져 엄한 하교를 받고 田里로 방축되다.
영조401764갑신乾隆29609월, 金元行과 함께 俗離山을 유람하다. ○ 10월, 伽倻山을 유람하다. ○ 12월, 지난번 상소로 인해 당론을 했다는 이유로 庶人이 되어 전리로 방축되다.
영조431767정해乾隆3263崇賢書院에서 講會하다.
영조441768무자乾隆3364竹林書院의 유생이 山長으로 청했으나 사양하다. ○ 4월, 瓶泉에서 「同春先生文集」을 수정하고, 興巖으로 가서 「同春先生文集」 刊役을 지휘하다. ○ 5월, 同春舊堂에서 여러 아우, 조카들과 講學하다. ○ 7월 13일, 塗谷에서 졸하다. ○ 8월, 復官의 명이 내리다. ○ 9월, 錦山 川內里에 장사 지내다.
영조481772임진乾隆37-官爵을 追奪하고 아들 宋時淵은 제주로 원찬되다.
영조501774갑오乾隆39-復官되다.
정조161792임자乾隆57-燕岐 葛山으로 이장하다.
순조51805을축嘉慶10-1월, ‘文元’으로 시호를 내리다. ○ 文集이 간행되다.(宋時淵의 識)

기사전거 : 年譜, 墓誌銘(任聖周 撰, 鹿門集 卷24),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同春 宋浚吉의 후손으로 忠淸 山林을 대표하여 중망을 받아왔으나 계미년(1763)의 상소로 인해 사후에도 관작의 복관과 추탈이 반복되는 등 곡절을 겪었다. 저자의 시문은 아들 宋時淵이 쓴 跋文에 의하면, 저자가 저술을 좋아하지 않아 애초 남긴 원고가 많지 않았고, 또 산일된 것이 많았다고 한다. 사후에 宋時淵과 門下生이 수습하여 편차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저자의 동문이자 인척 관계였던 鹿門 任聖周, 渼湖 金元行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金元行(1702~1772)이 宋致淵에게 보낸 편지(與宋姪致淵, 渼湖集 卷8)에, 저자의 연보에 실려 있는 晝講 기사와 經筵日記의 내용이 중복되니 「栗谷全書」의 예에 따라 연보에 그 내용을 자세히 실어서 문집과 같이 출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 내용이 나온다. 또 1778년 任聖周의 편지(答舍弟穉共, 鹿門集 卷11)를 보면, 櫟泉의 遺稿를 수정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오며 家狀을 속히 修改해야 한다고 했는데, 1786년에 任聖周가 찬한 저자의 墓誌銘에는 文集이 家藏되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묘지명이 지어질 즈음에는 문집의 수집과 편차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듯하다. 1788년에는 저자의 동생 宋文欽의 「閒靜堂集」이 간행되었고 또 저자의 문집에 관여해 왔던 任聖周가 졸하였다. 그 후 1805년 저자에게 諡號가 내리고 아들인 宋時淵이 星州 牧使로 부임하면서 그동안 정리해 왔던 문집과 연보 도합 10책을 목판으로 간행하게 되었다.《초간본》 현재 이 초간본은 규장각(奎4850), 장서각(4-6274),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616),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711) 등에 소장되어 있다.
宋時淵의 識에서, 저자가 졸한 지 38년 만에 간행하였는데 西南의 여러 郡에서 경비를 보태어 수백 본을 찍어 친지들에게 배포했다는 기사로 보아, 당시 충청도 산림과 서원에서 경제적인 지원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저자가 생전에 각지의 書院 山長을 요청받아 왔던 것과 관련지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冊板이 文義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으로 보아 간행 역시 충청도 지역에서 행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집 외에 저자의 저술로는 「宋櫟泉疏末條陳」 이란 題名으로 1763년 經筵官으로 있을 때 王世子를 위하여 故事를 進說한 上疏 1책이 필사본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글은 본집에 실려 있지 않다.
본서의 저본은 1805년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識(宋時淵 撰), 墓誌銘(任聖周 撰, 鹿門集 卷24)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19권 10책으로 18권 9책은 저자의 시문이고, 1책은 부록으로 저자의 연보이다. 序文은 없고, 권말에 저자의 아들 宋時淵이 지은 識가 있다. 卷首에 總目이 있고, 권마다 각각 目錄이 있다.
권1~3은 詩(379)이다. 1721년에 先祖의 韻을 次韻해 지은 〈飛來水閣敬次先祖韻〉을 시작으로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권1은 1734년까지, 권2는 1735~1746년까지, 권3은 1747년부터 말년까지의 작품이 실려 있다. 저자가 관직 생활을 거의 한 적이 없으므로 시를 수창한 대상도 대부분 일가 친척이나 함께 공부하던 이들이고, 시의 내용 또한 저자가 유람한 지역이나 배알한 서원들, 독서하며 공부하던 곳의 풍치를 읊은 것이 많다. 주로 宋堯濟, 金聖梓, 金元行, 金道澤, 閔鎭遠 등과 次韻한 詩가 많고, 특히 동생 宋文欽과 차운하고 화답한 시가 많다. 〈余於窮病…〉은 워낙 우애가 두터웠던 저자가 동생 宋文欽이 翊贊으로 경성에 있을 때 杜子의 同谷七歌를 읽고 아우에게 화답을 구하며 지은 시인데, 이 시를 받고 宋文欽이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한다.
권4는 疏(14), 書啓(8), 獻議(6)이다. 疏는 1746년 11월에 諮議를 사직하는 疏를 시작으로 諭善, 禮曹 參議, 贊善 등 대부분 관직을 사직하는 소이고, 1763년 召命을 받고 廣津에 도착하여 自劾한 소 등이다. 특히 1763년에 올린 〈出城後更陳筵對未畢之懷疏〉에서, “近習에 정을 두거나 姻戚을 사사로이 좋아한다면 관직이 모두 私人에게 돌아가 赤芾을 한 자가 삼백 명일 것입니다.”라고 한 말로 임금의 노여움을 사 탄핵 상소가 빗발치고 결국에는 관직이 삭탈되고 庶人이 되어 전리로 방축되었다가 1774년에야 완전 복관되었다.
書啓는 1762년 2월에 黑石 村舍에 머물 때 사관이 와서 傳諭한 뒤에 올린 〈黑石村舍史官傳諭後書啓〉, 12월에 瓶泉에 있으면서 別諭를 받들고 올린 〈在瓶泉承別諭後書啓〉, 1763년에 상경하면서 올린 〈興仁門外承手書後書啓〉 등이다.
獻議는 大報壇에 毅宗皇帝를 追享할 것을 청한 〈大報壇追享毅宗皇帝議〉, 宋의 文天祥과 陸秀夫의 사당을 세울 것을 건의한 〈宋文天祥陸秀夫二忠臣建祠當否議〉, 孝章世子嬪인 賢嬪 趙氏의 喪에 大妃殿의 服制에 대한 〈賢嬪喪大妃殿服制議〉 등이다.
권5~11은 書(296)이다. 권5는 1721년 부친에게 「小學」에 대해 질문한 글을 시작으로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從伯父, 再從弟 宋益欽, 舍弟 宋文欽, 再從姪 宋在淵, 아들 宋時淵 등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로 대부분 안부와 근황을 묻는 것이고, 동생과 주고받은 것 중에는 太極圖說, 生之理 등 성리학에 대한 문답이 있다. 권6은 스승인 陶菴 李縡, 蟾村 閔遇洙, 渼湖 金元行 등과 주고받은 것이다. 陶菴 李縡에게는 墓制, 喪服, 祭器 陳列 등에 대해 문의하였고, 金元行과는 禫祀나 吉祭 등에 대해 문답하였다. 권7은 宋能相(士能), 任聖周(仲思), 申韶(成甫) 등과 주고받은 것인데, 〈答任仲思〉에서는 스승의 문집인 「陶菴集」에 대한 의논이 실려 있다. 권8은 金鎭商, 金聖梓, 金相戊, 李敏輔 등과의 편지인데 性理學에 대한 논의가 자세히 실려 있다. 권9는 金寧(遠之), 任靖周(穉共) 등과 주고받은 것인데, 〈答金遠之〉는 敬以直內, 存心養性, 鵲巢章 등에 대해 답한 것이고, 〈答李士深洪載〉는 禰位, 出嫁女練後服色, 喪中忌祭 등 여러 의절에 대한 물음에 답한 것이다. 권10은 宋必健(順汝), 宋堯濟(仁甫), 金霽行(季通) 등과 주고받은 것인데, 喪禮, 祭禮 등에 대한 물음에 조목조목 답하였다. 권11은 許權(乃衡), 尹禧炅(士晦), 房錫弼(汝良) 등과 주고받은 것이다.
권12~13 앞부분은 雜著(25)이다. 1736년 任聖周, 宋文欽, 宋能相과 「大學」의 道, 知止, 明德, 性과 知覺, 自欺, 新民 등에 대한 문답을 기록한 〈玉溜講錄〉, 警句를 이것저것 모아 놓은 〈雜識〉, 花田에서 李縡와 성리학에 대해 문답한 〈花田記聞〉, 스스로 지켜야 할 警句를 모아 놓은 〈自警語〉, 집안에서 지켜야 할 것을 모아 놓은 〈家儀〉, 1768년 「同春集」을 중간하면서 제정한 〈同春先生文集改正凡例〉, 〈書室儀〉, 戊申亂에 陜川 郡守로서 적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金鼎運에 대한 呈文 등이다.
권13 뒷부분~14 앞부분은 序(5), 記(8), 題跋(5), 論(1), 箴銘(2), 上樑文(3), 祝文(17)이다. 序는 저자가 지은 閨門 안에서 지켜야 할 법도를 적은「閨鑑」, 古人들의 遜言 篤行 등을 기록한「煌煌集」, 「丹陽禹氏族譜」, 塾翁 柳興龍의 遺稿, 蔡五峯遺蹟에 대한 서이다. 記는 저자가 寓居하던 塗谷의 경치를 쓴 〈龍湖山水記〉, 辛巳年 꿈을 기록한 〈辛巳記夢〉, 閔普光의 처 鄭氏의 행실을 기록한 〈烈婦鄭氏旌閭記〉 등이다. 題跋은 〈同春先生年譜小識〉, 金相戊가 찬한 退陶의 禮說跋에 대한 題後, 〈宋氏忠孝錄跋〉 등이다. 또 齊 襄王 때의 사람인 貫珠者에 대한 인물평인 〈貫珠者論〉, 1735년 元日에 스스로 지켜야 할 것을 지은 〈自警箴〉, 金相戊가 지은 困菴銘에 和韻하여 지은 〈困菴銘〉이 있으며, 上樑文은 玉果鄕校, 長城 筆巖書院의 廓然樓, 尙州 西山書院을 重修할 때의 上樑文이다. 祝文은 同春先生의 年譜를 開刊할 때 家廟에 고한 문, 櫟泉 田舍의 터를 닦을 때의 축문, 玉果縣의 社稷에 대한 祈雨文, 田里로 放歸된 후 가묘에 고한 문 등이다.
권14 뒷부분~15는 祭文(31), 碑(3)이다. 祭文은 從叔父, 從伯父, 外舅, 亡弟 宋文欽, 尤庵 遷葬時, 閔鎭虞 등에 대한 것이고, 碑는 冶隱 吉再의 遺墟碑와 〈百世淸風碑追記〉, 寒圃齋 李健命이 귀양살이 했던 곳의 遺墟碑이다.
권16~18은 墓碣銘(6), 墓表(6), 墓誌銘(15), 行狀(4), 遺事(7), 傳(2)이다. 茂朱 府使 金述魯, 內弟 尹東旭 등의 墓碣銘과 祖父 宋炳遠, 持平 李道吾, 金聖應 등의 墓表와 부친 宋堯佐, 先妣尹氏, 再從弟 宋益欽, 任適, 外舅 金道洽 등의 墓誌銘이고, 부친의 家狀, 從姑母인 李思勗 妻 宋氏, 金錫衍, 申圾의 行狀과 祖妣, 父親, 장인 金道洽, 閔鎭遠의 遺事와 청렴 강직하게 살다간 崔基億, 타고난 효자인 成再의 傳이다.
권19는 年譜이다. 1805년 諡號를 받고 延諡禮를 행한 일까지 기록하였는데, 1763년에 입시하여 「中庸」을 강한 내용과 동궁을 모시고 「孟子」를 강하고 晝講에 입시한 일을 자세히 실었다. 이는 본래 경연일기를 따로 편차했다가 연보에 합쳤기 때문이다.
맨 뒤에 아들 宋時淵이 찬한 識가 실려 있다.

필자 : 金恩庭
 
 
櫟泉先生文集卷之十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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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皇考默翁府君家狀 己酉 a_221_35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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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貫忠淸道恩津縣。
曾祖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成均舘祭酒,世子贊善贈議政府領議政文正公諱浚221_352d吉。
妣晉州鄭氏。贈貞敬夫人。
祖中訓大夫行工曹正郞贈承政院左承旨諱光栻。
妣白川趙氏。淑夫人。
考中直大夫義禁府都事諱炳遠。
妣完山李氏端人。
公諱堯佐。字道能。我宋始自諱天翊。麗朝有諱大原。官判院事。三傳而爲持平諱明誼。爲圃隱諸賢所推服。始家懷德。有孫曰雙淸堂諱愉。有峻節淸德。生諱221_353a繼祀。尙州判官贈持平。五傳而爲郡守贈吏曹判書淸坐窩諱爾昌。是生文正公。文正公以道德名世。處孝顯兩朝賓師之位。有四孫。都事公。於序居三。季曰尙州牧使諱炳翼。娶郡守贈吏曹判書林川趙公諱景望女。以肅廟戊午十一月乙巳朔二十日申時。生公于宋村之居第。牧使公夢神人遺一株梅。卽受而獻諸都事公。後竟出后都事公。公生有異質。方頤明眸。容體儼然。不妄言笑。不與羣兒嬉戲。父母甚奇愛之。五歲。患痘。牧使公嘗夜與趙夫人秉燭臨診。燭淚累墜腹上。而不少變。牧使公故遲遲221_353b以試之。旣反坐。乃徐曰。燭淚熱矣。聞者異之。稍長。勵志讀書。亦不離長者之側。雖諠譁博戲。雜陳於前。而冥然若不見。嘗揉竹木爲璣衡。以驗運轉之妙。又手畫張公藝同居圖。以致慕豔意。伯母李氏。打愚公翔之女也。取以詑其諸姪云。比成童。文詞擧止。蔚然老成。博聞強記。貫徹古今。又善楷書。雅則遒健。仲父守迂公。風裁峻潔。寡許可。獨甚愛重。公每稱家業有歸。至於筆翰之末。亦必珍玩。謂可傳後。辛未三月。丁趙夫人憂。執喪如成人。牧使公家素貧窶。至是屢絶饔飧。而嘗歎公之獨無憂色。時都事公新棄世。李夫人221_353c申以遺意。壬申冬。入京都。侍李夫人。李夫人素多病。往往眩厥不知人。輒彌月。公不解衣帶。竟夜候寢外。寒暑不變。徒步尋醫。不計遠近。藥餌烹煎。細務必親。與二妹友愛篤至。人無間言。自撰墓表。竪殤兄墓。李夫人有兄女。蚤寡無依。公爲割地營宅。缺垣以便往來。其所以順悅親心。委曲如此。亦甚畏愼曰。父不在。當以事父者事母。常以小學,擊蒙書自撿。出入周旋。不違尺寸。洞中子弟及外親年相當者。多折節受業焉。辛巳。仁顯王后昇遐。以公補敬寧殿參奉。公時年少。試下位。而人皆想望其去就。嘗於哭班。有人221_353d相謂曰。君料宋某當出否。或應曰。必不出。盖不知公在其旁也。其一時見期如此。顧父兄長老。皆謂此官。分所不敢辭。遂黽勉出肅。然進供監捧。悉推同僚。居數月。竟呈病遞。甲申九月。中進士解第六。翌年三月。擧會試丙科。公爲擧子業。淸逸䧺渾。大爲識者所賞。而不事程式。久屈有司。榮覲懷鄕。宗叔大學士相琦。戲以麗朝故事。且令於四進退之頃。就近體七律一篇。公隨韻輒應。至今鄕中傳爲勝談。歸置酒。爲李夫人壽。公進請曰。今玆一科。庶以慰悅慈心。願自今廢擧。李夫人乘喜許之。後頗悔恨。強使一二赴試。然221_354a終亦遂初志。丙戌。除翊衛司侍直。丁亥。陞副率。每入直。講院諸公。多來問難。戊子。移冰庫別提。得餘米百許石。悉歸之官。己丑。除工曹佐郞。尋移戶曹。以親嫌遞。庚寅二月。除宗簿主簿。翌月。調義城縣令。地大俗頑。素號難治。公區繁剸劇。常有餘裕。目視簿。耳聽訟。題判撿覆。不以吏代。遠近書疏。手自裁答。緘裹之細。亦不畀人。長子明欽。在傍讀書。一字詿繆。輒加勘訂。見者謂公口耳手眼。一時分使。常洞開重閽。客歸如家。後至小邑。亦然。人或疑其太苦。而公固油油如也。應接不倦。有土豪二家。共占某地大村後。各挾勢援。221_354b埋標相軋。監司守宰。難於向背。獄久不决。公一朝馳按。卽曰。毋論甲乙。誰敢作禍于數百戶居民。遂聞于監司。刻期掘標。村民以安。邑舊有補役廳。供官百須。貪守擧爲己利。逮公至則已廢矣。公捐俸經紀。朞年而成。比舊加倍。時適季妹李氏婦新寡。李夫人悲念不置。公遂移疾西行。時壬辰四月也。至丹丘。挐舟而歸。囊篋蕭然。不載南方一物。方伯雅重公。力勸還任。八月始獲請。自是五年家食。丙申。除司宰主簿。尋以覲暇踰限遞。丁酉。授燕岐縣監。邑素殘。歲且大歉。有司所移粟已乾沒於前令時。吏以虛簿告。公區畫有221_354c方。闔境全活。隣民歸之。戶口增多。仍取羨餘。補前令逋欠。不使人知。懷鄕宗族故舊。多竆餓無賴。公乃傾俸米換麥取優。逐月稍送。待以擧火者數十家。躳御麤糲。以及家衆。克己爲義。人皆感歎。四月。肅廟幸溫宮。列邑聚營分司。皆以巧侈相尙。民不堪命。公惻然曰。是誠何辜。自以錢數千。就行在。市材立屋。極其儉陋。衆皆嗤點。愛公者憂其生事。然朝廷素知公愛民。不咎也。時策應如麻。而公從容措辦。不徵一絲。小民不知有行幸云。有寡婦洪。訟其夫弟奪己田。屢訟屢獲。至是。又抱券庭訴。公取其券。當日所射一221_354d視而斥去洪。翌日復至。三而不止。公責曰。吾所以燭汝奸。而不罪者。爲汝良家女也。乃敢屢瀆。命官婢笞之。洪慙悔泣服曰。是果妾之弟改券。使之訟爾。自是不敢復出。又有訴其從祖弟攘其財者。公曰。律云訟其從祖兄弟者。杖二十。杖之。旣命與弟來辨。其人大媿。不願訟。居朞月。治化大著。民愛之如父母。趙夫人墓在邑中。公嘗伐石於藍浦。舟至東津。民私相戒。具繂索以俟。至則悉調大小官隷。不役一民。民咸奮曰。不于此少報公德。而待何日。相與逐官隷。曳致山中。他日。立石都事公墓。墓距燕境不遠。燕民又不期而221_355a會者千餘人。戊戌五月。丁牧使公憂。邑人援舊例致賻。却不受。時大疫肆行。牧使公旣歿於是疾。家人鮮克免。公守殯不移。出入視弟妹病。如是者久。而卒無恙。時稱孝感。屢卜葬地不利。公銜恤遑遑。方蒸炎烈。日奔走跋涉於草樹霧雨之間。凡四月。嘗獨行過公州之台山。覺山氣秀異。遂登覽穴。集輿師雜議。莫不驚歎。葬之日。夢仙人遺桃一金盤。公以詢輿師。皆曰。此所謂金盤獻桃形也。殆天相公孝乎。公仍廬墓下。寒不坏戶。暑不揮翣。日晨昏詣墓攀號。每深冬。雪埋衣背。冰溜垂睫。而哭音不衰。觀者歎息。爲之流涕。221_355b公少有胃病。不耐食素。至是未葬歠粥。疏糲終三年。寒水權文純公。屢以書開諭。而不能從。尤嚴於內外之防。乳女病且死。終不入見。旣免喪。過時不復寢。庚子三月。入京都。印行文正公年譜。年譜草本。盖出於諸門人之手。而尤菴先生略起凡例。後屬農巖金文簡公修校。纔數板而卒。牧使公以命公。公夙夜劬心。旁搜廣摭。反覆考訂。罔有爽忒。積十餘年。易累十本。而書始成。寒水先生及閔文忠公兄弟。實往復焉。諸長德前輩。咸謂是書出。而先生之道益光云。時公哀毁成疾。精力已耗。而札行制度。字畫紕繆。無不親自221_355c辨裁。其聰睿之厚。追遠之誠。皆此類也。辛丑五月。除平康縣監。纔肅謝。移錦山郡守。李相國宜顯。嘗按嶺南。察公爲政。常語人曰。宋某眞奇才也。後當爲廊廟器。至是。李公掌銓。愍公病甚。欲使優閒數年而進之云。時湖南數郡有盜。用旨差遣武倅。改以蔭選。自公始。始至。有客商訴。夜宿驛店。盡失販貨。乞行推索。公問曰。主人在否。曰。有老翁主店。曰。主翁不被盜乎。曰。主翁牛亦亡。曰。盜竊汝馬乎。曰。否。公笑曰。盜旣得貨。惟恐不疾走。曷爲捨馬取牛。卽捕店翁訊之。翁初抵賴不服。已而。有人告云。某晨行某野。得逸牛。請221_355d立旨。公令驗之。果店翁牛也。翁卽服罪。盡還其貨。一境稱神明。盜賊且息。公寬簡爲治。峽民安之。冬。士禍作。公知事將不測。卽乞罷。方伯勸且觀勢。公託以要路。有世嫌。冒寒舁歸。寓居沃川之龍湖。作茅屋三間。扁曰玩樂齋。竹牕木樞。左右圖書。疏飯菜羹。處之晏如。識者多慕之。然禍機日急。妹婿金公濟謙。三代爲戮。妹亦收孥。公慨念公私。悲憤增疾。又連哭本宗弟妹。益失調護。竟以癸卯十月丁未朔二十日卯時。卒于村舍。享年四十有六。疾革。神精不亂。倉卒服藥。未嘗不整冠。長者臨視。必扶起爲禮。時少子文欽。娶婦221_356a關東。數日當歸。公每屈指曰。計吾未及見。然無悽黯之色。手爲書慰其遠念。辭筆如常。前一日。猶以詩語諧謔。盥櫛剔爪。臨終。痰壅不能言。但以手再擊地曰。惜乎惜乎。正席。恬然而逝。是日。大風拔屋。雪驟下。旣屬纊而開霽。及葬有彩虹植墓。傍篋無留衣。率皆稱貸。五日而斂。斂以深衣鶴氅。從雅意也。越十二月丙午朔十二日巳時。窆于玩樂齋後向卯之原。公嘗結廬淸華山下甁泉之上。藏書累千卷。名其堂曰淸隱。故賓客誌于壙曰淸隱堂宋公之墓。嗚呼。公性至孝。痛蚤失所恃。而家貧薄於喪。終身不衣華采。生日。不221_356b置酒食。悲涕終夕。聞人呼母。輒泫然曰。我獨何辜。乃無此樂。事伯姊如事趙夫人。時節必制送衣裳。歲覲于牧使公。或再三。不避風雨寒暑。一肴羞之美。未嘗不先饋于牧使公。戊戌以後。每語及先親。血泣纚纚。人不覺其去喪之久也。竭力以營二墓之儀。如恐不及。牀臺柱碣。咸極偉麗。至疾革。猶諄諄於台山阡刻之未完者。公歿之後。得篋中詩云。一別嚴顔五閱年。猶能夜夜侍牀前。如何數日還無夢。自痛精誠有斷連。其沒身孺慕。如一日矣。公素淸羸。自少疲於憂病。鞍馬之勞。積成痼祟。終以居喪盡禮。未期而病。遂及221_356c大故。嗚呼。毁至傷生。豈公之志。而盖有不能自勝者焉。明欽尙忍言之哉。公禀質旣高。幼服習家訓。德器天成。不假矜飭。方嚴沈靜。簡重弘恕。辭厲而氣和。貌儼而禮恭。嗇於言而敏於事。忽於私而勤於公。薄於自養。而厚於奉先。盖其凝之也純。發之也果。立心制行。未嘗眩於義利本末之辨焉。家法肅整。閨門閴無人聲。而衆事自理。子弟雖甚幼。非束帶。不敢見。尼巫雜流。不近門屛。居官。僮僕不敢與官屬交語。市貨交易。不通于內。視世之病公利己者。欲唾其面。故家人亦不忍以一毫累公德。居常終日。正色危坐。肩背竪221_356d直。未嘗攲側。子弟吏隷。莫敢仰視。必稍假顔色。然後乃敢禀事。喜怒不形。威令不繁。而頤指目使。疾於雷霆。人以比烈日嚴霜。然及在親側。共諸弟妹。娛戲談笑。藹然春噓也。接人未嘗輒與慇勤。然遇宗族故舊。忠篤懇至。凡所求。有可不可。無不滿願。賙貧卹急。若病在己。其有不善。至誠誡飭。故無智愚貴賤。咸愛而畏之。待後生甚嚴。不輕交一言。然臨文講說。諄複演迤。辭氣溫溫。其爲敎必本乎愛親忠君。先行後言。游公之門者。皆耳熟焉。盖公自十四五時。卽有意體用之學。脫然以古人自期。以爲一理不究。便非盡分。故221_357a於書無所不讀。如文章禮樂錢穀甲兵之制。山川道里草木禽獸之類。皆比物明義。該貫練達。以至陰陽術數老莊雜氏之書。亦必涉其源流。辨其同異。每人士叩質。竆日夜不盡。聽者若得蓍龜。然其意甚病。世儒馳騖。口耳之習。嘗謂一毫向外。便不是學。內而不出。莫若吾祖。故常閉戶。靜坐讀書。不滯箋註。專玩心於義理之微。有時瞑目竟日。或秉燭達朝。有以充然自樂。而未嘗語人。人亦莫測其所存。獨時與正齋李公顯益語。鉤玄闡奧。無所不至。李公輒歎曰。公之學。殆得之天資。李公卽公內兄子而同庚也。甚敬服公。221_357b書牘稱先生。公固止之。公自爲布衣。不喜交游。雖素所親厚。後至貴顯。不造其門。客至無不見。亦不往謝。其異趣不正之類。則甚鄙而遠之。宗親宦寺。莫有識公面者。當官。未嘗饋問。時宰,監司,節度,按部。或非其人。輒謝病不出。故不知公者。多詆其傲。及屢經世禍。而公獨超然。無所玷累。然後世方服公之謹嚴。公亦嘗擧而戒諸子弟。公仕無厚薄。必盡其職。未嘗自伐。愛民以誠。不務小惠。必默斡心機。使民被澤於不知之中。而吏不得窺其所爲。故在則民樂之。去後。民益思之。然猾吏豪族。多不便公法者。公澹於外累。重以221_357c廉潔自持。平生無一長物。惟喜蓄書。不問家有無。雅好佳山水。圻關湖嶺。杖屨殆遍。嘗論水石奇處。以甁泉爲第一。分華山之北以處。李公曰。仙游。每匹馬期會。徜徉忘反。垂三十年。實無田畝可食。內舅觀察趙公。牧尙州。欲爲之發民開荒。公竟不可。觀察公口刺其迂。而心歎其高。公識慮深遠。鑑裁如神。凡論人竆達終始。及事後當成敗。初若落落難合。後鮮不中。在官。雖老奸宿猾。不敢欺誣。惴惴若臨其上。人或謂公有術。然從弟嘗言。三淵翁前知死期。甚可怪。公曰。是無他。寡欲而已。余自念於科宦貨利。凡世味。一切淡221_357d泊。故有時料事。亦或屢中。於此可以見公之術矣。嗚呼。都事公有高行達識。蚤爲文正公所重。聲望冠一世。如老峯文谷諸公。皆期以己位。不幸中逝。公以通才邃學。續聞趾美。雖深自韜晦。若無所能。而光輝之發。有不可揜者。衆方洽然。以望先考者望之。年未五十。蹇屯以歿。善人之類。莫不傷之。謂關國運。公旣與世寡合。一二同志。亦皆先公亡逝。不肖明欽。生晩且騃。於公潛德隱行。無得以詳焉。若其學問始終。尤不敢窺測。然記文欽東行。公爲書。有若無。實若虛。犯而不校一段語以畀之。嗚呼。此豈非公一生所拳拳從221_358a事而垂裕後人者歟。公於詩文。非有事不徒作。亦無留藁。今收拾散佚。僅若干篇。又有默翁筆記若干卷。藏于家。以俟知者。公娶坡平尹氏。郡守諱扶之女。生二男。卽明欽,文欽。二女。長適進士尹得敬。次適閔克烈。尹得敬一子幼。今公葬地。術人謂有災。固知非久計。然墓不可一日無誌。謹敢銜哀茹痛。略述平日事行之著人耳目者。以告於下執事。伏惟庶垂聽而擇焉。

 
 櫟泉先生文集卷之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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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附錄
年譜 a_221_38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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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諱明欽。字晦可。姓宋氏。系出恩津。
乙酉皇明毅宗皇帝崇禎紀元後七十八年。國朝肅宗大王三十一年。
十月丁亥 二十一日 丑時。先生生于漢城之濟生洞第。
時皇考默翁公。仕宦在京第。○先生容貌敦重。神氣粹瑩。生六月而能言。聰穎絶人。故老之親炙於同春堂文正公者。皆謂之酷肖焉。
221_381b丙戌先生二歲。
丁亥先生三歲。
戊子先生四歲。
己丑先生五歲。
庚寅先生六歲。
先生受學於家庭。甫周歲。默翁公置膝上。口授文字。一聞輒不忘。因以經傳句授之。日以爲常。漸加至一節一章。如是五六年。已略通四書二經。領其大義。雖不甚勸督。而自知勵志篤學焉。
三月。隨往默翁公義城任所。
221_381c在途不廢課學。亦於祖母李夫人板輿中。置丌讀書。路上過者。皆聞而異之。
辛卯先生七歲。
壬辰先生八歲。
四月。默翁公解官。隨歸京第。
癸巳先生九歲。
是時。先生已再讀四書二經。一日作北伐疏曰。臣雖九歲小兒。願得十萬兵。橫行匈奴中。再從叔父知事公見之。奪而扯之。默翁公所與遊。皆一代名雋。莫不嗟異之。曰。是必繼先業者。見必與之討論221_381d經史。待之如畏友。默翁公不在家。客至。接待如成人。酬酢言動。曲有法度。
甲午先生十歲。
乙未先生十一歲。
丙申先生十二歲。
丁酉先生十三歲。
在默翁公燕歧任所。
戊戌先生十四歲。
五月。默翁公丁生考牧使公憂。隨歸宋村。
宋村在懷德。卽先生十一代祖雙淸堂公以後世221_382a居也。
己亥先生十五歲。
先生自幼。不作遊嬉。不妄言笑。坐必端拱。步履必安詳。比成童卓然。以古人爲己之學。自任。盖其天資近道。不待矯揉而醇如也。未弱冠。已負士林重望。
庚子先生十六歲。
正月。聘淸風金氏。
監正道洽之女。潛谷文貞公之玄孫。
六月。肅宗大王昇遐。入縣庭擧哀。
221_382b後往甥館。主家設寢具于內舍。先生使之移設於外。聞者頗譏議。竟皆歎服。
辛丑 景宗大王元年 先生十七歲。
秋。在默翁公錦山任所。
庚子辛丑。再度應擧。此時遇雨。擧子皆以身蔽試券。而先生獨以試券蔽身。曳白而退。不知的在何年。姑附于此。
壬寅先生十八歲。
正月。默翁公解官。隨歸沃川寓所。
時士禍大作。默翁公棄官。歸沃川之同安里。
二月。讀書郡後書齋。
221_382c四月。移寓塗谷。
塗谷。卽龍湖也。默翁公愛其山高水深。世氛不到。仍卜居焉。○先生家貧親老。嘗以學問之暇。治公車業。文章典雅贍敏。筆法亦爛燁。如洪學士啓迪,李學士德壽。必欲置之高第。而先生固倦於進取。至是遂廢擧業。專心性理之學。斗屋蔬糲。人所不堪。而處之逌然也。
五月。聞外兄金公 省行 訃。
六月。往留台山。看董石役。
台山。在公州。卽牧使公墓。而默翁公竭力。營石儀。221_382d使先生往看。
十月。省姑母于錦山謫所。
姑母。卽金公省行母夫人也。時配錦山。先生先之配所。整理雜細。以迎接焉。
癸卯先生十九歲。
十月。丁默翁公憂。
默翁公自遭牧使公憂。積年沈疾。先生左右調護。夜不解帶。晝不離側。藥餌必親執。憂形於色。終始如一日。及至大故。執喪如禮。
十二月。塟默翁公于塗谷家後。
221_383a日晨昏。詣墓攀號。不避風雨寒暑。
編閨鑑。
先生嘗以近世婦女。全無敎誨爲憂。編古人嘉言善行。名之曰閨鑑。飜以諺解。使婦女服習。世多謄傳。
甲辰先生二十歲。
四月。避癘。移寓增驛村。
書揭居室儀。
先生雖在哀疚奔避之中。課業益篤。取牛溪,栗谷兩先生格言。貼之座隅。刻苦用工。未嘗一刻少懈。
221_383b八月。景宗大王昇遐。上後園擧哀。
以蔽陽子麻帶。成服。
乙巳 英宗大王元年 先生二十一歲。
四月。丁祖母李夫人憂。以長孫承重。
六月。塟李夫人于公州鹿洞。
遷都事公墓。合窆。
七月。移寓宋村。
先生孤居深峽。荐罹凶禍。就諸父兄。相依焉。
十月。行默翁公祥事。
以蔽陽子,白布網巾,白布直領,白布帶。行事。
221_383c丙午先生二十二歲。
答南平儒生書。
牧使公嘗宰南平。有遺愛。而又有興學之功。儒生金漢龜持邑士宋旻錫等書來。言方建興學堂。將以妥靈。從叔父庶尹公。命先生作答書止之。
三月。移寓京江龍山。
母尹夫人久未歸寧。戀慕不置。先生借沈氏江亭。移寓。以便往來省侍。
丁未先生二十三歲。
三月。書自警語。
221_383d八月。與金公聖采。遊覽關西諸勝。
歷松都,平壤。遍覽妙香山。有遊山諸詩。
往見陶庵李先生  于花田。
此後源源往拜而煩不錄。
十一月。自至日。以四省設課。
戊申先生二十四歲。
三月。避兵豐壤。
時麟佐,天永諸賊起兵。陷淸州城。中外震驚。已而討平。
五月。歸宋村。
221_384a兵革之餘。不樂京華。又不堪丘墓之思。遂歸。
七月。搬入塗谷。
羣從兄弟。皆來會。湛樂累日。舟游長湖。有唱酬諸詩。○自是。遠近從學者日進。
九月。入甁泉。仍遊俗離山。
甁泉。在聞慶淸華山中。默翁公往來讀書之所也。有亭舍。藏書數百卷。先生與再從弟寤宿齋益欽,季弟閒靜堂文欽。偕往遊賞。遂倘佯俗離而歸。
十一月。孝章世子薨。入郡庭擧哀。
與閒靜堂。讀書佳山寺。
221_384b己酉先生二十五歲。
二月。作正寢及巖棲軒。
軒制八面。中一間爲室。西北爲夾室。東南爲軒。軒前有好巖。故仍以爲名。後燬於辛巳。
撰默翁公家狀。
狀成。請撰墓誌於陶庵先生。
冬。讀書甁泉。
先生自少。多在甁泉。或山寺。俯讀仰思。夜以繼日。有雜念則不釋筭。有新得則必箚錄。有時瞑目端坐。以驗未發時體段焉。○編煌煌集。未及成書
221_384c庚戌先生二十六歲。
六月。宣懿王后昇遐。出野次。擧哀。
日參哭班于郡庭。以至成服。
辛亥先生二十七歲。
十月。自京如驪州。訪外兄渼湖金公 元行。不遇。
登淸心樓。觀神勒寺東㙜而還。
作書室儀。
自是年。與諸生。行朔望講會。月以爲常。
壬子先生二十八歲。
十月。見丹巖閔相公 鎭遠 于淸州。
221_384d丹巖時以華陽院長。會諸生。講春秋。先生病未赴會。其歸路。迎拜於淸州。與蟾村閔公 遇洙 同宿。
癸丑先生二十九歲。
春。重修甁泉亭舍。
亭成歲久。傾橈難支。故坼而新之。別構小庵。名硯雨。以處緇流。使守之。
甲寅先生三十歲。
移寓宋村。
二月。遊坡州。
尋紫雲書院。拜栗谷李先生墓。登花石亭。舟游。來221_385a蘇亭。拜成聽松,牛溪二先生墓。及竹陰趙公 希逸 墓。
三月。陶庵先生來訪。
陶庵留二日。與先生共入塗谷。遊賞甚樂。陶庵因舟下黃山閒靜堂。從之。○四月。陶庵在豆溪。先生又往拜。講質玄繩錄。遂陪遊大芚山。
五月。讀書飛來庵玉溜閣。
飛來庵。乃兩文正先生講道之所。而在宋村後數里許。先生與雲坪宋公 能相 約會讀孟子兼看朱書。八月。罷還。
十月。遷祖考妣墓于錦山壽塘里。
221_385b依朱子說。不虞。塟畢。奠而歸。
十二月。讀書塗谷。
與姨弟鹿門任公 聖周 及雲坪宋公。會讀。
乙卯先生三十一歲。
正月朔日。作自警箴。
二月。立祠堂及正寢。
以塗谷土田磽确。艱於生理。有奠居宋村之意。
閏四月。渼湖金公來訪。
丙辰先生三十二歲。
正月。見陶庵先生于豆溪。
221_385c同遊鳳林洞仍往省同春先生墓。歷拜尤庵先生祠堂。
二月。往興巖。仍舟游洛東江。
興巖。在尙州。同春先生獨享。而御筆賜額之祠也。時陶庵先生。與其從弟維及蟾村閔公,山水軒權公震應。邂逅相會。先生謁書院。與山水軒。先往登沿江名亭。尋諸賢書院。至金烏山下。訪吉冶隱遺墟。遍拜祠墓。讀砥柱碑。過藥哥旌閭。到藍山。聞陶庵,蟾村與尙善諸儒。同舟而來。先生亦以扁舟。泝流而上。至月波亭下。二舟相望。陶庵爲賦蒹葭詩221_385d以迎之。南中人士。至今傳以爲勝遊。
四月。讀書華陽洞巖棲齋。
與鹿門任公會讀。閒靜堂適至。先生與之步入仙遊洞。訪正庵李公 顯益 遺躅。
六月。讀書玉溜閣。
八月。退漁子金公 鎭商 來訪。
同遊飛來庵。宿玉溜閣。
十二月。讀書玉溜閣。
與寤宿齋閒靜堂及雲坪,鹿門諸公。會讀大學。有玉溜講錄。
221_386a丁巳先生三十三歲。
春。入甁泉。
歷尋象賢書院。
冬。搬入塗谷。
戊午先生三十四歲。
三月。與閒靜堂。遊華陽洞。
渼湖金公。與先生兄弟及金公聖梓,洪公梓約遊。故赴會。數日團歡而歸。
十一月。遊光州無等山。
歷登笠巖山城。尋筆巖書院。拜金河西,高霽峯二221_386b先生墓。遂至赤壁勿染亭,環碧堂,息影亭。
十二月。與諸生讀書佳山寺。
己未先生三十五歲。
二月。遊黃山。
尋竹林書院登八卦亭。觀落照。
三月。入甁泉。
聞陶庵來住鶴泉。往拜之。
六月。除恭陵參奉。不就。
大臣薦先生學行。故有是命。
十一月。讀書甁泉。
221_386c蟾村閔公。約與讀書於甁泉。先生往會。畢論語。始周易。是會講討甚樂。又有唱和詩。
十二月。與蟾村閔公。遊俗離山。
講論太極圖說。
庚申先生三十六歲。
三月。作壽塘墳庵。
九月。尋道峯書院。歷訪渼湖金公。
辛酉先生三十七歲。
正月。重刊同春先生年譜。
從叔父庶尹公判全州。權公爀爲方伯。故先生往221_386d議重刊。
遊金溝金山寺。觀龍湫。
與兪公彥肅。同遊。
三月。與申處士韶。講太極圖說。
壬戌先生三十八歲。
二月。移寓楸谷。
去宋村隔一嶺。而有若干莊業。
癸亥先生三十九歲。
十月。還入塗谷。
改建天稽亭。
221_387a默翁公有詩云。三峯秀色隱長湖。蕩漾淸波影不孤。地僻千年無識者。天敎今日許稽吾。先生取詩意。命名天稽。而作小茅亭於江。正對仙人峯。屢建屢毁。今有其址。
甲子先生四十歲。
作龍塘精舍。
在塗谷上游。募僧守之。以爲講學之所。
乙丑先生四十一歲。
四月。往佳山。訪重峯趙先生遺墟。
與寤宿齋,閒靜堂及金公聖梓,金公相戊。同遊。
221_387b五月。與閒靜堂。游黔潭。
黔潭在文義。卽同春先生遊息之所。而有保晩亭。後仍建祠。專享先生。乘舟而下。與諸儒焚香。瞻拜行相揖禮。封鎖保晩亭。
十一月之寒泉。見陶庵先生。
書呈栗谷全書稟目。
丙寅先生四十二歲。
二月。與諸生。讀書龍塘。
十月。與金公聖梓。遊俗離山。
先生與金公。交分最密。金公來守沃川郡。遊從甚221_387c樂。至是。陞淸風。故先生與之同遊送別。
聞陶庵先生訃。爲位而哭。
加麻三月。
除侍講院諮議。下諭召。
十一月。出宿龍塘。拜送辭疏。
時家內不淨。
丁卯先生四十三歲。
四月。之寒泉。哭陶庵先生靈筵。
與閒靜堂。遊四郡。
過黃江。訪寒水權先生遺蹟。與金公聖梓。同遊龜221_387d潭,島潭,三仙巖,舍人巖。放棹下寒碧樓。宿凝淸閣。
五月。祇受賜扇。
又祇受東宮賜扇。
十一月。祇受東宮賜曆。
此後每年。夏賜扇。冬賜曆。而煩不盡錄。
戊辰先生四十四歲。
春。作正寢于楸谷。
楸谷改名櫟泉。後人因以爲先生號。
獻大報壇。追享毅宗皇帝議。
獻神宗毅宗二皇帝位次議。
221_388a己巳先生四十五歲。
二月。東宮下別諭召。上書辭。
是歲正月。東宮代理。至是諭曰。書筵勸講。爲任甚重。祖宗朝增置宮僚。以待儒賢者。其意甚盛。其法甚美。惟余受聖上付托之命。攝軍國機務之重。所以愛惜分陰。日新學業者。比之前時。當加百千。而其薰陶成就之效。宜專責於山林讀書之士。爾其斯速上來。出入講筵。
庚午先生四十六歲。
五月。除衛率。
221_388b大臣筵白。以久次陞六。
獻宋文天祥,陸秀夫建祠議。
七月。除宗簿寺主簿。
九月。上幸溫泉。有召命。上疏辭。
批曰。省疏具悉爾懇。因凉德。莫能召致道內讀書之士。心甚歉然。爾須副我特諭之意。其卽登途。輔我元良。
作別廟節目。
十月。除忠淸都事。
十二月。除司憲府持平。下諭召。上疏辭。
221_388c辛未先生四十七歲。
正月。褫付副司直。
獻聖廟位號釐正議。
禮郞再來。問賢嬪喪服制。病未獻議。
壬申先生四十八歲。
二月。除司憲府掌令。下諭召。上書辭。
三月。懿昭世孫薨。入縣庭擧哀。
五月。送辭狀于本縣。傳諭勿辭。
十月。以閒靜堂第二子時淵。爲後。
以時淵爲後嗣計。自幼率育於家。
221_388d十二月。哭閒靜堂喪。
閒靜堂經學文章。爲一世所推重。先生以爲同氣間知己。自經傳奧旨。以至一行一事。每與相議。未嘗少離。少離輒思想不能堪。閒靜堂從宦在京。先生和杜子同谷歌以貽之。閒靜堂卽日棄官歸。築室於方山。晨夕湛樂。及歿。尹夫人方疾篤。不敢以訃聞。先生悲毁如不欲生。入則和顔侍側。出則撫柩悲痛。又患痰喘。凜凜若不能支。見者莫不悲之。
癸酉先生四十九歲。
正月。除軍資監正。
221_389a二月。塟閒靜堂于公州長洞里。
申處士韶,李凌壺麟祥。來會。
九月。移寓宋村松月堂。
喪禍之餘。尹夫人疾漸㞃。先生病又沈綿。自以孤居無醫藥。借小宗外舍以就。宗族相依焉。
甲戌先生五十歲。
二月。特授書筵官。下別諭召。
諭曰。士幼而學。壯而行。爾身雖在於林下。實世祿之臣也。輔導元良。莫如山林讀書之士。况代理以後。事體尤重。今以爾爲書筵官。一則爲國家。一則221_389b爲元良。爾其卽日上來。輔我元良。以副予暮年勤懇之至意。
三月。小朝又下別諭召。上書辭。
諭曰。余惟爲學之道。必資宿德之士。朝夕講劘。而矧今大朝飭敎甚切。尤豈敢少怠。雖與僚屬日再開筵。不過誦讀而止。年逾邁而學不加進。余甚懼焉。惟爾以世祿之臣。讀書林下。大朝特授爾書筵官。繼下別諭。爾須體大朝勤懇之至意。幡然上來。出入兩筵。以開廣余寡聞。輔導余不逮。○批曰。覽書具悉爾懇。以余不敏。忝叨貳位。夙夜221_389c憂懼。臨筵講讀。古聖賢微辭奧旨。未能洞知。而山林宿德之言。亦未聞於朝夕。寔余誠淺。忸怩于中。今當盛壯之年。時亦不可失也。體大朝之至意。顧小子日夕之望。毋執撝謙。俟母病少間。卽日就途。
乙亥先生五十一歲。
二月。聞申處士韶訃。爲位而哭。
加麻三月。
三月。搬還櫟泉。
五月。下諭召。上書辭。
221_389d七月。除玉果縣監。
八月。方伯以年饑馳啓趣之任。
辛亥。發西行。
尹夫人年高病深。日益危綴。至是謂先生曰。汝弟則已矣。汝今意外作宰。若見汝榮養。可以少慰老懷乎。先生痛泣。不敢違。黽勉就職。
己未。入京肅命。
小朝連送春坊。敦召入侍書筵。
弼善李基敬,說書尹蓍東。稟于東宮曰。卽者書筵官宋明欽。新除玉果縣監。自鄕上來。肅單纔入221_390a矣。宋明欽以大朝禮遇之臣。邸下亦嘗別諭敦召。必致之誠。屢形於批旨。今當靜攝。雖不得開筵。或許別爲召對。俾令同入。使之開陳。善言。虛心聽納。則其於禮賢懋學之道。可謂兩盡其宜矣。東宮遣宮官。諭令入侍。先生對曰。臣之進見。有兩款私義之萬萬難强者。以守令則入對旣無前例。以書筵官則從前力辭之職。決難冐當。下令雖如此。不得承膺。謹當退而陳章待罪矣。東宮連遣上下番。敦召不已。先生不得已承令。東宮坐德成閤。別召對。先生進伏。東宮曰。屢年221_390b敦召。而誠意淺薄。未回遐心。常自耿結。今因外拜入來。得以一見。於心幸矣。對曰。臣實非山林之士。而前後濫叨。心常懔怵。今以外方官。忽被敦迫。有此入對。獲瞻耿光。私分幸矣。上番奏曰。依下令。持大學以入。講讀節次。何以爲之乎。答曰。初見書筵官。事面自別。吾雖病憊。當爲之先讀。因讀自子程子止在止於至善。東宮曰。我旣强氣先讀。書筵官繼讀一段可也。先生起而對曰。臣本世祿常調。生長京輦。而適丁世禍。且身嬰疾病。廢科鄕居。以致輾轉推遷。久叨誤恩。今以八耋病母221_390c不免饑寒。黽勉赴任。兼欲爲粗供民社之職。以效塵刹之報。而今此登筵。尤出夢寐之外。雖被再三敦迫。不敢不奉令。而若開卷講讀。便是講官之職。決不敢奉承。東宮曰。如是強迫。其於禮賢之道。亦似如何。然而以平日願見之誠。及旣覯止。切欲一聞其講讀。且此非書筵之體。如是固辭。似太過矣。先生又力辭曰。使春坊讀訖。臣從傍陳達。其餘義。恐或無妨。至於開卷講讀。則便成冐受講職。臣之傷廉害義。固無足言。而亦豈邸下體下之道耶。乞垂睿念。東宮又再三勸讀。先生221_390d乃讀自知止止能得訖。上下番。又分讀。東宮問曰。明明德註。所得乎天。爲何義。其下三句。何者爲心。何者爲性。先生對曰。所得乎天。是統說。其下三句。當分屬心性情。虛靈不昧。是心。具衆理。是性。應萬事。是情。自所得乎天止者也。合而言之爲明德之訓。東宮曰。辨說明備。聞之有所覺得矣。又問明明德新民止至善。何者爲工夫。何者爲功效。對曰。此則不可分屬。明明德也有工夫功效。新民也有工夫功效。止至善包在其中矣。曰。願聞其義。對曰。以八條目言之。修身以上。明明德之事。而格221_391a物致知誠意正心修身。卽工夫也。物格知至意誠心正身修。則功效也。齊家以下。新民之事。而齊家治國平天下。卽工夫也。家齊國治天下平。則功效也。曰。願聞至善包在之義。對曰。八條目逐條。皆有止至善。而明明德而至於身無不修。則亦可謂明明德之止至善也。新民而至於天下平。則亦可謂新民之止至善也。又曰。因其所發而遂明之之意。終不分曉矣。對曰。道之浩浩。何處下手。必得端緖。而推廣之。以究其極。如孟子所謂見孺子入井而有怵惕惻隱之心者。卽所發之一端也。東221_391b宮曰。常以明明德。看作工夫。新民看作功效。今聞所論豁如發蒙。且下段引孟子語。尤明白矣。又曰。氣稟所拘。人欲所蔽。兩下說去。未詳其義。對曰。氣質之淸濁粹駁。本於有生之初。嗜欲之多寡淺深。發於已生之後。交相拘蔽。迭爲心害。東宮曰。誠然。又曰。願聞摠論大學工夫入頭處。對曰。序所謂因小學之成功云者。是謂涵養本原之功。先從小學。涵養旣深。乃以是心。而爲大學格致之功。程子所謂涵養須用敬。進學在致知者。卽此意也。進學之序。則知爲先而行爲後。苟不先明乎善惡邪正221_391c之分。則其於心之發處。安能務決去。而求必得以至快足耶。帝王之學。異於匹庶。一念之善。其應甚大。緝煕之要。專在於謹獨二字。程子所謂有天德。便可語王道。其要只在謹獨者。是也。東宮曰。所論的確。而謹獨二字。最緊要矣。又問獨者。只謂身所獨居之地耶。抑指心之初萌處。人所不知。己所獨知者耶。對曰。粗言之。則小人閒居是也。切言之。則所謂止水中間一點動處。卽一念初動之幾。而人所未及知者也。此一幾字。原於大易。濂溪極加發揮。謹獨之功。正在於一幾字。邸下誠能反求221_391d默察於此。則其於誠意。思過半矣。曰。然則謹獨工夫。言其下手處。則心所獨之地。尤切於身所獨之處耶。對曰。誠然。東宮曰。所論幾字。尤當著念。我雖不敏。敢不銘心服膺。又曰。願聞正心誠意之義。對曰。情經而意緯。情公而意私。情之不善。意之罪也。故須於意之好善惡惡處。審察其實與不實之幾。必自慊而毋自欺也。至於正心之功。則只密察此心之存否而已。此誠意之所以先於正心。而誠意之要。又在於毋自欺三字。所謂毋自欺者。如九分肯底意。有一分不肯底意。則便是自欺。朱子221_392a所謂容著在這裏者。是也。東宮曰。所論誠然。而拈出毋自欺爲言者。尤切至當。銘念體行矣。又曰。願聞敬字之義。對曰。先儒解說。有數義。有曰常惺惺法者。有曰整齊嚴肅者。有曰主一無適者。其言雖殊。而其意則終歸於主一無適。只此一部大學。方講第一段。而心在乎第二段。則便是不能主一無適也。又問。氣質旣拘於有生之初。則駁濁者。顧何以變化得歟。對曰。苟不能變化氣質。則不足謂之學也。中庸雖愚必明。雖柔必强註。呂氏說。甚痛切。願取而熟玩焉。東宮曰。固當取看。而欲先221_392b聞其略。對曰。今人以鹵莽滅裂之學。求變其不美之質。及不能變則曰。天質不美。非學所能變。是果於自棄。其爲不仁甚矣。此其所以爲痛切處也。東宮曰。呂氏說甚好。當更熟看。又曰。願聞八條目工夫切要處。對曰。正心誠意之說。臣已陳之矣。至於齊家治國平天下。只以修身爲本。修身之目。無大於孝弟慈。故家國天下。皆以此推去。所異者只節目度數之有大小詳略耳。又曰。慈者。只慈愛而已乎。對曰。慈孝只是一理。子以諭父母於道。爲孝之至。父亦以敎子義方。爲慈之至也。東宮曰。221_392c願益聞誠意正心之義。先生起而對曰。誠意正心之說。宋帝之所厭聞。而邸下申問不已。此可見睿學有實用心處。誠宗社臣民之福也。欲誠其意。當先明乎善。知不明則心之所發。必不能一於善矣。先儒以格致爲夢覺關。誠意爲人鬼關。苟使有一毫不明不實。猶是夢境也。猶是鬼道也。朱子以第五第六章爲切要。卽此意也。東宮曰。然。讀此書二度。而不能精熟。凡此發問。不能盡其所當問。所問之外。更爲陳說可也。先生進曰。物格知至之意。邸下已分曉耶。答曰。何能分明。先生曰。221_392d先正臣李珥有善喩。如冊在架上。衣在桁上。而昏黑則無所見。燭以照之。則本體呈露。此所謂物格知至也。東宮曰。冊在架上。衣在桁上。固爲物格之喩。而何以爲知至也。對曰。自物之發見呈露而言。則物格也。自人之所見明盡而言。則知至也。物格知至。只是一事。故經文。特言致知在格物。東宮曰。余學問淺薄。凡於義理上。未有工夫。所論物格知至。分界極爲明備。余心豁然。有所覺悟矣。又曰。如有餘意。更爲陳說。亦欲聞勉戒之言。先生起而對曰。臣力疾奔走之餘。倉卒登對。精神昏眩。言221_393a語拙澁。所達文義。亦不能詳悉。已負邸下引接之盛意。至於陳戒之諭。臣來自下土。時政得失。睿學淺深。無所聞知。臣不敢强其所不知。無已則請以目下事陳達可乎。君臣之間。不患不嚴。而患不親。書所謂臣哉隣哉。可見矣。自宋朝伊川以來。至我朝先正。皆以坐講爲請者。欲其擺脫尊君抑臣之外面體貌。使情志流通也。今此講筵。竊恐太嚴。東宮曰。余意固然矣。先生曰。臣頃於辭章之末。猥及立志典學之意。臣請因是而畢其說。昔在孝廟朝。臣之先祖文正公臣浚吉。請繼先221_393b王之志事。孝廟曰。雖然。心欲追三代之治。如使孝廟。無實見得。豈有此敎。朱子有言曰。堯舜三代。自堯舜三代。漢祖唐宗。自漢祖唐宗。在學與不學之間耳。伏望邸下卓然以堯舜自期。此志旣立。學無間斷。則進修之效。必不可量。此書所謂務時敏。厥修乃來者也。東宮曰。先正有書進格言屛風。以立志誠意爲先。今此所言。儘出於家訓。余當銘心而不忘矣。又曰。書筵官之言。皆出誠悃。余當開誠盡言之。余雖年纔二十餘。而節宣失宜。病恒不離於身。此不可專以陳根腐草責效。抑有他可221_393c治之術歟。先生對曰。養心調病。元非二致。古語云。萬方補養皆虛僞。只有操心是要規。邸下誠能淸心寡欲。以忘生徇慾。爲深耻。一部心經。朝夕觀覽焉。則其爲效似勝於陳根腐草。更願深加體念焉。東宮曰。當惕念。而願聞淸心之旨。對曰。心體本自虛明。故孟子以夜氣平朝之氣。爲本體。邸下於此。默驗而澄省焉。是亦因其所發而遂明之之意也。東宮曰。寡欲當如何。對曰。爲學當思氣質偏處嗜慾深者。而先下手。臣未敢知邸下嗜慾之何在。而人情不甚相遠。邸下試反省而默221_393d識。先克其難克者。寡而又寡。以至於無。則是所謂寡欲之工也。東宮曰。余不謾書筵官矣。有時自驗。豈無善端之發見。而旋又失去。如何則可守此心。對曰。此所謂石火電光底消息。不足據以爲根本者也。惟在密察加工。涵養持守。習之旣久。則自當至悠久之域矣。又曰。願益聞勉戒之言。先生起而對曰。臣所學滅裂。何足以進陳善言乎。第觀書筵久廢。每以睿候爲辭。臣未知邸下之心。對宦官宮妾之時與引接宮僚之時。果何如。東宮曰。自驗果有些不同矣。先生曰。未知邸下此221_394a言出於泛應耶。果出於密察耶。東宮曰。偶然說去。辭不達意矣。豈止於有些而已。實有懸異者。此乃眞情說出。非依樣於先賢之說也。對曰。邸下旣知其然矣。伏望益加體認。使其分數消長。日有可見者。則進德可驗也。東宮曰。余學問淺薄。每願與山林宿德。講問奧義。今聞儒賢所奏一章之內。已有一二處怳然覺悟者。且文義之外。反復陳勉。無非切實。余可不夙宵不忘而體行乎。先生曰。臣才識寡陋。本不足以備顧問。今荷邸下虛心開懷。使之盡言。誠人臣難得之會。而素有痰喘。忙221_394b遽入對。氣息甚促。晷刻之間。不能仰陳所懷之萬一。且其所陳。亦甚膚淺。而邸下如是奬許。臣誠惶愧靡措。至於儒賢二字。尤是萬萬不襯。此則恐未免爲辭令之失當。東宮問書筵官。年歲幾何。對曰。五十一歲矣。先生又起伏曰。微末外官。再陳私懇。極知惶猥。而臣有區區所懷。敢此畢陳。臣有一弟。不幸早死。無以奉養老母。今番冐出。不過爲便養之計。而但所帶書筵官。本屬濫猥。况以遠方守令。尤不可兼帶者。伏望稟達減下。以安私分。且伏念創設此職。本欲責其實效。非在野難進之221_394c人所宜虛帶。臣意不如移差在朝經學博聞之臣。使之朝夕左右。方有實效也。東宮曰。朝臣豈無文學之士。而但恐實行宿德。不侔於山林矣。又問。書筵官。母年歲幾何。對曰。臣母今年七十有七歲矣。弟則誰也。對曰。故縣令宋文欽也。春坊繼曰。宋文欽。久仕桂坊。以侍直副率,翊贊。屢侍講筵矣。東宮曰。吾豈不記乎。其爲人極精詳。講說極明。切未知死於何時。對曰。死於壬申冬矣。東宮曰。不勝愴然。仍令進前。先生進伏。諭曰。今此相見。不勝欣幸。雖以私情切迫。不能挽住。而今旣見面。此221_394d後有召。不辭更來則幸矣。此非出於文具。書筵官亦宜以誠心聽受也。先生起而對曰。臣母日迫西山。臣亦衰病如此。再登離筵。此生難期。且雖上來。如臣蔑學。豈有補益。今世固多有勝於臣者。盡誠招延。使之輔導。實爲幸甚。又起而請曰。臣誠猥越意外得蒙昵侍。而再來恐未易。敢請一番瞻望。東宮曰。瞻望可也。先生擧頭瞻望訖。卽退伏。仍請曰。睿候未寧。恐或因臣而失攝。極爲不安。遂退出。東宮召春坊曰。今日講說。與他時有異。一本錄入。以爲朝夕觀覽之資可也。
221_395a辛未。赴任。
以道臣催趣。給馬下送。路出公州。距懷德九十里。先生不堪思親。以私馬歷入省覲。
九月。受暇省墓。
行榮掃于壽塘及塗谷。歸家。行姪女黃氏婦親事。遂奉板輿赴衙。歷入台山及鉢峴。並行榮掃。
丙子先生五十二歲。
春。設賑救饑。
時値大饑。塗殣相望。飢口抄出。殆至三千。營門劃穀。太半不足。先生捐俸鳩財。竭力營辦以接濟之。221_395b又設粥以救其顑頷者。鄰邑流丏。亦一視均賑。俾不塡壑。及歸。計其遠近而資送之。以故。闔境按堵。道無餓殍。
二月。小朝下諭召。上書辭。仍陳饑民救濟之策。
優批採納。一道貢賦。並命待秋。
諭曰。噫。余之前後敦召。凡幾遭矣。今玆抄選之人。俱以世祿之臣。講學求道。非如高蹈隱遯者流。則亦豈邁邁於余哉。以余不敏。臨筵講讀。輒患蒙昧。苟非讀書丘園。養德山林之士。左右開誨。朝夕輔導。則將何望啓發薰陶之益乎。余之日夕企望。不221_395c啻如飢渴。而諫官旣請禮召。大臣又勸敦諭。此可見上下顒望之情。而以余淺誠。尙不得亟回遐心。勉致講筵。只自憂愧。不知所諭。每有一番敦召。輒煩一番辭巽。上之所召。下之所應。便同循例。實心求助之意。無以自㬥。誠心願忠之義。顧亦安在。以此自顧多恧。無以爲辭。豈忍終孤此望。不思回心。須體余心腹之諭。卽日登途。○批曰。昨年筵席暫見。今已踰歲。以余誠淺。不能致之。其切悶矣。今覽辭章。憂愛之勉。字字是切。言言是懇。讀之三復。尤覺余誠之淺。愧恧曷諭。所陳民事。令廟堂稟處。221_395d噫。一登筵席之後。眼前森然。道學之正明。德行之純粹。固已深知。其欲講究經義。輔養德性。捨爾而誰。爾其念我心曲之諭。勿復固辭。
移建鄕校。追享尤庵,同春兩先生。
是歲。上許兩先生從祀文廟。列邑當待秋菜躋享。而本縣鄕校。聖殿狹隘。更無餘地。基址偪側。又難展拓。先生遂以移建之意。論報營門。屢度爭辨。始克上聞。時詘擧贏。百事艱窘。而方便調役。擾不及民。
改正詠歸書院祭儀。
221_396a詠歸。卽河西金先生俎豆之所也。依滄洲釋菜儀。略加刪補。
六月。小朝下諭召。上書辭。
諭曰。噫。余惟學問之進益。德性之成就。必資鴻儒開導之力。此書筵官之所以設也。顧余不敏。蒙昧寡聞。未嘗不留心於經傳。而微辭奧旨。莫能闡發。未嘗不求助於賓僚。而嘉言良誨。猶未浸灌。是庸夙夜憂悶。思致山林養德之人。寤寐渴想。誠心招徠。前後別諭之語。辭書之批。庶可以少諒余心矣。然誠淺未孚。遐志莫回。幾遭敦召。徒爲應文之歸。221_396b每臨講席。茫然自失。靜念厥故。得非余求賢之實未篤而然歟。愧懼交中。不知所諭。余方講鄒書。竊有感於師臣友臣之義。益切思賢之誠。必欲致宿德宏儒。期底磨礱薰陶之效。言出心曲。須體至意。幡然改圖。卽日登途。以副余虛佇之望。
八月。行子時淵冠禮。
鹿門任公。時以任實宰。來爲賓。
九月。丁尹夫人憂。引歸鎭岑先塋下。
先生早孤。事大夫人。有至性。大夫人晩年。常寢疾。先生色憂。藥餌滋補。焦心竭力。扶護抑搔。細事必221_396c親。至於衣被蚤虱。亦手除之。每侍側怡愉。有嬰兒色。凡事皆委曲承奉。猶恐有傷。故屈身伸情。以奉榮養。而纔周一歲。奄遭大慽。時先生年衰且病。而號哭執禮。一如前喪。
十一月。塟尹夫人于公州藍谷。
遷默翁公墓合窆。臨塟遇石。權厝于左岡。
奉几筵。還櫟泉。
丁丑先生五十三歲。
作書室儀。又作堂約。
二月。貞聖王后昇遐。入縣庭擧哀。
221_396d先生自以身有重哀。日就縣庭大門外別處哭臨。以至成服。
三月。仁元王大妃昇遐。入縣庭擧哀。
禮與二月同。
五月。竪壽塘祖考妣墓石儀。
墓表。寒水先生所撰。而閒靜堂臨石書之。刻置已久。至是始竪望柱。採諸賢誄文中好句語。以李凌壺篆刻之。又以穴處平夷。不無後慮。床石。用全石極厚者。而大書深刻。以爲久遠之圖。
十一月。哭寤宿齋喪。
221_397a寤宿齋。經術行義。儕流中素所推服。而與閒靜堂爲同堂知己。先生自哭閒靜堂。相依若親兄弟。至是。聞其喪出於淸州旅次。悲慟益甚。久而未已。
戊寅先生五十四歲。
三月。立祠堂。
移寓草創未遑。至是始立。
四月。渼湖金公來吊。
聞雲坪宋公訃。爲位而哭。
十一月丁亥。行禫祭。乙巳。冬至日 行吉祭。
作鄕約節目。
221_397b己卯先生五十五歲。
正月。有祠堂告文。
先生嘗以世人不知廟墓輕重之別。必行四時盛祭於墓。而時祭無行之者。甚以爲非。至是。與宗族相議。墓祭。依要訣以寒食,秋夕。具盛饌。正朝,端午。只以酒果省掃。祠堂則四時皆行正祭。永爲家法。
二月。除世孫講書院右勸讀。下別諭召。上書辭。
諭曰。噫。今之抄選。非漢嚴光周黨也。皆喬木之後。若干尺之元孫。今爲世孫。吁嗟三宗血脉。卽此也。以喬木之臣。其所輔導。豈待敦勉。昨冬之後。心221_397c氣俱耗。而悠悠此心。只在輔導世孫。况今職名無一毫過重。雖在山野。旣有受學之人必也。勸讀。勸讀之名。决非過矣。受諭之日。卽爲上來。來時乘馹。○批曰。覽書具悉爾懇。日月流邁。徽寧殿再期倐過。孝昭殿祥事。只隔旬日。哀慕之痛。一倍罔極。且今聖上特創官名。至誠敦召。藹然懇惻之意。逈出尋常萬萬。爾以世祿之臣。豈不感動。目今輔敎世孫。不責山林宿德之士。而更望於誰乎。須仰惟聖上慇懃之盛心。念余日夕之冀。勿復固辭。卽速上來。輔敎世孫。
221_397d四月。由華陽洞入甁泉。
與山水軒權公及金公聖梓。共入華陽洞。歷拜尤庵先生墓。宿巖棲齋。仍向甁泉。歸路。尋表忠祠。
五月。遊月城。
丙子之亂。同春先生。自沙寒里。轉入安陰月城。愛其山深水潔。淹留歲餘。旣歸而不能忘。其後士林立星川書院。以奉俎豆。是歲。先生往遊。謁書院。與愼敎官守彝。會講諸生。歷尋浣溪。由雪川而歸。
十月。除執義。仍兼勸讀。下諭召。上書辭。
批曰。屢次別諭。招致漠然。心實忸怩。今覽爾書。尤221_398a愧余誠之淺。况爾以山林宿德之士。兼世祿之臣。今當招致儒賢之時。捨爾而誰。况勸讀之任。緊且重矣。爾其思余日夕佇立之企。其勿固辭。卽速上來。補我不逮。
與諸生。講感興詩。
庚辰先生五十六歲。
正月。與諸生講大學。
二月。尋寒泉書院。
與諸生。講學于方山書堂。
方山。在櫟泉前。卽閒靜堂舊宅也。有溪澗巖壁之221_398b勝。故爲諸生肄業之所。而有時講學焉。
四月。行講會于興巖。
講小學。會者數十人。轉至檢湖。拜愚伏鄭文莊公墓。
五月。講學于甁泉。
講小學。歸路歷尋華陽洞。
十月。遷先考妣墓于文義薪洞。
自藍谷權厝。銜恤靡至。遍求名山。夢有人告曰。北六十里薪字村名。是也。至是。果得薪洞。自櫟泉北去六十里也。○考妣墓。皆有先生所撰小誌。
221_398c十二月。特命陞通政。拜禮曹參議。下諭召。上疏辭。
時新有禁令。不得上疏。政院以違格還送。
命遞付副護軍。又下別諭敦召。
諭曰。頃者陞擢。意蓋深矣。今因相臣所奏。許解本職。以開進途。噫。若此而不致爾。白首暮年。將爲文具之科。爾亦復無動意。是豈讀聖賢之書。誠實自期之道。予雖誠淺。思爾祖。欲見爾之心。專由衷曲。令該曹。不待政。卽付軍職。須體此意。卽日登途。
辛巳先生五十七歲。
221_398d正月。命陞付司直。下別諭敦召。上書辭。
諭曰。陞擢軍銜。非爲爾也。思爾祖也。非爲文也。其爲質也。爾須體此意。卽爲上來。
二月。與諸生會講。
獻王世孫繼講冊子議。
三月。除承政院同副承旨。尋遞爲禮曹參議。下諭召。上疏辭。又上書辭。
上疏。道伯以違格還送。故不得已又上書。
六月。遞付副司直。下別諭敦召。上書辭。仍陳戒。
諭曰。噫。今日國事人心。其惟倚恃讀書之士。予之221_399a眷眷。豈徒爲爾。意盖深矣。更欲一諭。今聞相臣所奏。爾祖先正文正公。曾於此任。終不承命。今爾固辭。不無所執。如此相持。非徒欠於致誠。亦近閉門。故本職特爲許遞。以開進身之道。噫。白首暮年。爲宗國焦心之中。一欲見之意。寔由方寸。而若今日之望雨。爾祖昔日。旣承召。體爾祖之意。豈不欲一見予乎。欽體此意。卽日登途。○批曰。覽書具悉爾懇。聖上敦召辭旨。可泣豚魚。爾以世祿之臣。豈忍恬然怡然乎。所勉切矣。可不體念。依所陳原書留中。爾其思大朝慇懃之盛意。勿復控辭。幡然221_399b登途。補我不逮。
八月。往興巖。遂舟游自天㙜。
與山水軒權公同游。順流而下。歷尋道南書院。觀南江。至鸕鷀亭。
上命加設抄選諭善。特旨除授。下別諭敦召。上書辭。
諭曰。我國抄選。非比往牒。忘世之士。卽世祿之臣也。豈一張紅紙有無而然乎。噫。予雖否德。暮年自强。心許民國。此日欲致山野之士。其心切乎否乎。其若飾外。誠負陟降。亦欺彼蒼。其雖不學。決不221_399c爲此。欲見爾之心。非徒恒日。夢裏亦聞來。噫。非徒慕爾。寔慕爾祖。若思爾祖昔年立朝。豈忍邁邁。今日悠悠萬事。惟在講書輔導。雖不顧予。獨不思乃祖乎。况當今年。予心一倍。爾心若何。今者特除。其名非過。體予心曲之諭。卽日登途。輔我世孫。乘馹上來。○批曰。覽書具悉爾懇。今此諭善之任。聖意出尋常萬萬。爾以世祿之臣。豈不惕然感動乎。所勉當體念。勿復固辭。卽日登途。
十二月。玉堂洪檍來問太廟出主儀節。病未獻議。
壬午先生五十八歲。
221_399d二月。省姑母于沁都。省伯姊于長湍。
沁都,長湍。皆近京都。先生以往來不便。久未進候。思念不能已。至是往省。
登花石亭。訪主人。尹甥文東從之。
歸路。宿黑石。上遣史官召之。修啓辭。
先生有孀妹及諸姪女在京。要一宿江上。與之相見。故借宿黑石尹氏亭。玉堂聞而陳達。上驚問。卽遣史官召之。修啓辭。史官再至。諭以臨待便殿之意。先生以爲君臣相遇。不可以過去路爲之。又修啓辭。以疾。卽日發行。
221_400a還家後。史官追到。宣手書。使之偕來。又修啓辭。崇賢儒生。請山長。
三月。上疏辭。
待命縣獄。
時以史官遲滯。有拿命。又以當日久御寒殿。上候不寧。日三進藥。先生不勝惶恐。遂就縣獄。待命。用陶庵故事也。
禮郞以大報壇追配三皇大臣事來問。病未獻議。疏批下。又有勿待命之敎。
批曰。省爾之章。咫尺都城。誠淺莫致。手書以諭。徑221_400b尋鄕路。士幼而學。壯而行。以喬木之臣。一何過乎。予雖誠淺。輔導望深。其須幡然。宜體乃祖。
四月。哭送姪女。金氏婦靈筵。
閒靜堂長女爲金公相。戊子。婦不幸早世。時金公從宦在京。歸塟連山。靈筵獨寄空舍。先生悲憐之。迎置方山。下室之饋。必令潔精。至是。金公出宰嶺外。來取筵几。先生哭而送之。有告文。
行講會于崇賢。
講小學。會者六十餘人。
與再從姪志淵。入華陽洞。仍遊俗離山。
221_400c沈公鏞,金公聖休來會。
有諭崇賢諸生文。
攜眷入塗谷。
閏五月。行講會于崇賢。
會者。五十餘人。
莊獻世子薨。出野次。擧哀。
八月。除世孫贊善。下諭召。上疏辭。
上命依皇朝故事。以世孫正位東宮。有是除。○批曰。省疏具悉爾懇。頃者來京。緣予誠淺。徑尋鄕道。心猶忸焉。噫。今日輔導春宮。捨爾誰先。莫曰221_400d予之誠淺。深思一國主鬯。幡然上來。入侍胄筵。輔我元良。
十月。往哭從姑母大祥于驪州梨湖。
從姑母。卽洪公益彬母夫人也。有祭文。
十一月。行崇賢講會于飛來庵。
時雨雪。會者二十餘人。
十二月。入甁泉。史官金煊來傳別諭敦召。修啓辭。
諭曰。雖在調攝。自强奚弛。其欲自强。宜望求助。其望求助。捨山林讀書之士而何。頃者來京。亦不致焉。一則誠淺。二則誠淺。噫。予雖衰耗。心猶不衰。况221_401a今悠悠萬事。惟在元良。今因都憲批答。不耐于心。特遣史官。諭予慇懃之意。噫。慕爾高祖。頃年見筆跡。今若見焉。以先正之孫。雖布衣來見。豈不欲一見白首鳩杖之君乎。須體此意。卽爲上來。以紓予幾年思爾抑鬱之懷。
還櫟泉。
甲辰。史官林正誼來傳別諭敦召。以偕來仍留。修啓辭。
史官書啓入達後。更命史官傳諭。仍令偕來。諭曰。今覽書啓。若見爾焉。史官傳諭。有布衣二字。221_401b旣許布衣。何拘職名。况爾本非布衣。旣經蔭官。自有帽帶團領。亦何辭焉。以世祿之餘。旣非高蹈。則何不思七旬只隔數旬之君乎。且旣往嶺南。何難登途。噫。忠孝本無二致。以拜先廟之心。何忍邁邁乎白首其君乎。此時廚傳。予豈不顧。而待抄選。何拘常例。明年見予。不若今歲。卽席呼寫。更命傳諭。爾須體慇懃之至意。思君親之無間。遙望西郊。卽日登途。
戊申。又上疏辭。
乙卯。承啓批又修啓辭。
221_401c批曰。特遣偕來。企待幡然。今覽書啓。不覺愕然。白首暮年。豈爲觀瞻。今欲招致。非徒爲爾。乃思爾祖昔年。蒙聖渥。官至貳相。予雖否德。其豈不思爾祖而一見白首七旬之君乎。將欲陳章云。旣命偕來。遲待爾章。誠無異於醴酒不設。故竟夕酬應。夜已深焉。不憚其憊。復盡由中之意。聞爾登途。然後心可弛而寢可便矣。噫。欲見爾之心。此心決非文具。爾何不諒。爾何不諒。三冬已盡。三陽將回。幡然上來。聽予面諭。○下批翼日。再從姪溥淵。以知禮縣監入侍。上曰。汝與贊善。爲幾寸親。對曰。爲五221_401d寸親矣。上曰。予今七旬。日以爲病者。惟汝叔不來之故。予雖誠淺。於汝叔。側席虛佇之心。皆由于中。汝必聞之。汝叔亦能知此耶。汝當過懷德。予欲附言於汝。汝須往傳汝叔也。七旬老君。如是苦待。而尙無動靜。山野之人。雖有異焉。汝叔旣是喬木世臣。則豈忍邁邁。向於玉果時。恨不召見耳。予於先正。景仰深矣。汝須詳傳此意。必使上來也。昨見書啓。不無身恙。若未發行。往卽傳之也。
丁巳。祇承手書及疏批。修啓辭。
手書曰。宜思爾祖。遙望象設。七旬其君之企待。221_402a惟在湖西旬餘。東宮之輔導。亦在山林。强起手書。文不盡意。惟有一諭。必欲見三字。諒此予意。諒此予意。○批曰。三陽回泰。萬品將春。吁嗟此心。惟在追慕。顧三南饑饉之民。心實難耐。其雖此時。思爾冞切。爾之辭章適到。見其文。若見爾焉。噫。予雖不學。粗聞于昔。白首暮年。豈爲觀瞻。爾上來之後。此心可紓。因爾用心。爾何不諒。此時廚傳。予豈不思。而所重招賢。若思其君之用心。又悶廚傳之有弊。則一辭二辭。若是相持乎。今則春陽已開。日寒稍弛。體此慇懃之誠。用副日夕之望。噫。爾誰之孫。思221_402b七旬其君。顧干尺東宮。豈忍若此。豈忍若此。噫。一見爾然後。當以拜奏。呼寫及此。涕沾于衫。仍以手書兼付。須諒須諒。○以廚傳有弊。令政院書吏齎往。使偕來史官傳諭。
癸未先生五十九歲。
正月丁卯。又上疏辭。
壬申。承啓批。又修啓辭。
批曰。諭書之後。覽爾之章。且批答而兼付手書。今覽史官書啓。予望冞切。此猶若此。若見手書。爾卽世祿之臣。思爾祖先正。豈不欲一見七旬之君乎。221_402c遲待書啓。亦非禮儒臣之道。更付予意。卽爲幡然事。更爲傳諭。期於偕來。○書啓入後。上曰。此書啓。似是未見手書前所爲也。始欲無批。旣而敎曰。見書啓而不答。則必曰王之心怠矣。仍呼寫批答。是日。東宮侍坐講孟子。睿對稱旨。上甚喜。仍敎曰。此時宋明欽若來。則豈不好耶。
癸未。承啓批。又修啓辭。
批曰。手書特諭。待爾登途。覽史官書啓。猶違所料。噫。若謂予文具則已。不然。莫聞登途。先召史官。豈誠也哉。書啓中。若曰今方就途。當先召於其前。雖221_402d至夏相守。決不召矣。今則非徒辭已渴意已竆。誠欲諭先靦。東宮晝講時問之。對曰。其若致誠。何不來乎。近見朝報。連爲敦勉。宜乎來也。非徒予望。卽元良所望。爾雖不諒于予。獨不思東宮此對乎。何待其章。更欲敦諭。其日夜深。因他酬應。而未覺至于今日。此予誠淺。心自恧焉。旣思之後。又何踰日。忍恧呼寫。更爲傳諭。今則春晷已長。昔恙幾瘳。不負東宮之對。卽日偕來。其若尋裝。爾先上來。不然。仍留。期於偕來。○前日筵中。上謂東宮曰。商山四皓。亦以太子之賢來矣。汝能勤學好賢。則儒221_403a賢豈不來耶。東宮曰。近見朝報。聖敎勤勤。彼應起來矣。上曰。能善對矣。
乙酉。承疏批。又修啓。辭職名。且請先召還偕來史官。
批曰。昨又敦諭。今覽爾章。何情志之不孚一至此哉。將答爾章之際。又見史官書啓。因此而予有一言。噫。七旬其君。欲致山野之人。往牒幾有。予雖誠淺。爾若思祖先正。豈不欲一見七十杖君乎。雖以職名爲辭。今爲東宮欲致。卽此職也。近者無行公之人。此職雖爲山野人文具之名。而究其本。則不221_403b過東宮一僚屬。許解此職。令爾上來。其果誠乎。駐輦呼寫之際。乃聞是職。昔年爲兩先正設。爾之高祖。卽兩先正中一也。今予暮年。爲東宮必欲致焉。是豈偶哉。使爾祖有知。七十之君。因此費心。爾祖之心。安乎否乎。爾須思乃祖之心。體寡躳之意。受批之日。卽爲登途。庸副企望。仍傳曰。此批答。使偕來史官傳諭。期於偕來。
戊子。承啓批許解職名。遞付副護軍。
批曰。頃者爾章所辭。誤知兼職。以許解本職賜答。更聞此乃實職。故更爲下答。今覽史官書啓。以此221_403c意在固執。官名覊縻。亦非誠實底道。本職姑爲許解。令該曹。卽付軍職。今予曲循。亦成爾志。予已若此。爾復何辭。今則春晷向和。卽日登途。用副日夕之望事。更爲傳諭。期於偕來。噫。昔之成湯,文王,蜀漢昭烈。不過三聘。今予敦勉其幾遭。且爾世祿之臣。非莘野,渭水,隆中不識其君之比。而若是不致。此亦誠淺。而爾亦思先祖。豈忍一向邁邁。悶予暮年如渴之心事。一體傳諭軍職官敎。今日安寶同爲下送。
二月庚寅。承啓批。又修啓。申請先召還史官。
221_403d批曰。姑解職名。以開登途。亦誠實底道。故昨於史官宣諭之批。已示予意。兼付軍銜。今覽書啓。若見爾焉。噫。予雖誠淺。其所敦勉。今已十次。待儒臣之道。無異大僚。奚異於古之臨軒十使。爾須體予此意。卽日登途。○先生以爲赴召與仕進。本自有間。雖遯跡如嚴陳諸逸。未有召而不至者。伊川則曰。召而不來。邦有常刑。君命若是懇迫。而不思變動。則實非臣分所安。於是因書啓。言俟病少間。一謝恩命之意。且請召還史官。使得擔舁寸進。
丁酉。發行。宿黔潭。
221_404a謁書院。有告文。
庚子。宿安城智谷。
黃公榏時居智谷。先生歷入阻雨。
壬寅。抵陽城地。史官來傳啓批。又修啓自劾。
史官以先生發行之期馳啓。批曰。覽史官之書啓。知贊善之登途。其入侍指日以待。欲致之意。由慕先正。將見於春和之月。亦符於與物同春之懷。其豈偶然。史官隨來。更思之。信初敎之意。安儒賢之心。先爲上來事。分付偕來史官。
甲辰。過寒泉。拜陶庵先生墓及遺像。
221_404b有感懷詩。
丙午。到廣津。上疏待罪。
夕往渼湖。訪金公留宿。史官鄭夢弼。來宣別諭。修上書啓。
諭曰。聞爾登道。若見爾焉。爾祖同春之號。心常欽羡。方當三陽之候。其將見爾。亦豈偶然。咫尺近畿。其何遲滯。今予思爾。若旱雲霓。想必到江郊。晝講有命。爾須卽爲入來。予當與東宮見爾。
丁未。進至興仁門外。宿村舍。史官來宣手書及疏批。修上書啓。
221_404c手書曰。整衣以待。將欲面諭。○批曰。史官傳諭而來。知爾到江北。若見爾焉。因風日氣苶。卧酬萬幾。爾章適到。憊氣頓爽。蹶然而起。尋冠而坐。命讀一篇。旨意深可欽服。親書八字同傳。召元良以待。前批不云。布衣入侍乎。布衣猶許。况前銜付軍職乎。須以前日所著之服。其卽入來。
史官。又來傳諭趣入。修啓辭。
諭曰。才命史官。更鼓已下。意或偕來。遙望東門。未聞偕來。書啓到焉。大違所料。愕然之極。良欲無語。况郊外陋舍。使爾經宿。何心便寢。不聞入城之報。221_404d雖漏徹難以交睫。旣到城外。何惜前進。更爲傳諭。期於偕來。
史官又來。傳諭而去。
承旨讀書啓。至顚倒衣裳語。上曰。其言是矣是矣。筵臣曰。儒賢之不欲以深夜入來者。誠得體矣。上以肅拜與否下詢。筵臣對曰。先正臣權尙夏溫宮登對。亦不以軍職肅拜。今雖付護軍。旣以前縣監自處。則似以肅拜爲難矣。承旨曰。若不肅拜。則當直以來待仰稟。上曰。無妨。仍傳諭曰。更鼓已過夜分。莫知就寢。猶俟入城之報。又覽書啓深221_405a歎。進身有據。旣有所執。予何不克成美意。晝講進。定朝講。以袞衣。與元良當待之意傳諭。前贊善旣以承命爲對。當安其心。爾則先爲入來。詣待漏廳。隨贊善以入。
戊申。早詣闕下。入侍景賢堂。講中庸。
上命史官。以口傳諭曰。今聞來。坐於都監直房。欲見之心渴急。何不思予之心。而不卽入來耶。以儒生進見之例。勿爲謝恩。卽速詣閤。與朝講諸臣。同爲入侍之意。往傳而偕來也。諸臣皆入侍。先生以前縣監服色。進伏。上曰。贊善旣入經筵。開卷221_405b可也。先生起伏曰。臣非講官。何敢開卷。上又勸諭。先生不得已開卷。上曰。見開卷可貴也。上讀中庸致曲章。玉堂繼讀新受音。訖。上命先生先陳文義。先生起伏曰。如臣空疎賤微。雖迫於嚴命。冒沒登筵。而陳達文義。實涉猥越。上曰。追念昔事。豈可固辭。先生曰。使儒臣先陳文義。然後小臣陳其餘意何如。上曰。豈可强其所不欲。儒臣先陳可也。玉堂略陳文義。仍曰。今日儒賢之來。亦可謂國家之禎祥。上曰。堯舜禹文。雖有禎祥。不自以爲禎祥。今世道學之士。皆是世祿之臣。221_405c而有職名者。旣不能盡致。僅能致一儒賢。豈可謂之禎祥乎。予心自愧矣。又曰。予若爲觀瞻。招來儒賢以爲自足。則豈誠心乎哉。予今七十。復讀中庸。是與始受學同也。儒賢其悉陳之。先生曰。臣疏亦已陳之。儒賢之稱。萬萬不稱。不敢當。上曰。在安其心之道。稱以經筵官。亦好矣。先生曰。中庸一書。千古帝王相傳之心法。臣祖之所嘗講於聖祖者。亦此書。而今臣猥與侍講。所講適在此書。臣不勝感愴。今聖學已臻高明。非臣所敢仰贊。第未知中庸之義。殿下認得如何。上曰。第言之。221_405d先生曰。未發而不偏於喜怒哀樂。已發而喜怒哀樂皆無過不及者。中也。此又非高遠異常之事。只是人倫日用當行之道。故曰庸也。然帝王之學。異於匹庶。一念之善惡。而所及者廣。厥惟艱哉。以此章至誠之道言之。誠非可躐致也。只當誠心著力。終始惟一。乃至於至誠。殿下如能無一毫自聖之心。而以衛武公九十五歲自警爲法。聖而益聖。豈不休哉。上曰。所陳約而盡。不覺欽歎。予之工夫。雖未篤實。乃其所知者。則自謂不至於昏闒。然幾次講中庸。書自書。我自我。心甚自忸。至誠之人。221_406a固無可論。祥桑雊雉之災。側身修行。變災爲祥。其餘人君。雖能知之。而不能側身修行。何哉。先生曰。臣極知猥越。而聖上旣以災祥之幾。眷眷下問。敢不仰陳乎。蓋妖孽。非生於將亡之國。生於可爲之世。故宋景一言。熒惑退舍。卽今天災時變。不止一二。天心之仁愛我殿下。可謂至矣。殿下誠能以實應天。警惕修省。則人力可以奪造化。其轉移之機。惟在殿下之一心也。上曰。然矣。近者豈無災。災者。天所以玉成人君。固當警惕矣。先生曰。自格致至誠正修。乃爲學之序。此書所謂明善。221_406b乃格致也。誠身。乃誠正修也。其云自明誠者。乃學者之循序用功也。其云明則誠者。學者之至於成功而與聖人生知一也。聖學雖已高明。臣恐猶未及於古聖王之眞知矣。蓋殿下臨御四十載。尙未見至治。是由出治之本。未能至乎誠正。誠正之未至。亦由於最初格致之未至也。聖上旣以所知不昏闒爲敎。臣之此言。誠有罪也。上曰。予之所知。豈曰眞知。經筵官之言。可謂頂門一針。向者已諭於東宮矣。齊宣王之時。孟子朝梁暮齊。而猶且三宿出晝。可見其眷眷有意於斯世。况世祿221_406c之臣乎。暮年復講。一見經筵官。如得明燭。予方覺今是而昨非。以喜聞過爲三字符。經筵官必須頻頻入侍。隨事匡救。豈非幸耶。先生曰。聖敎至勤。期責太重。臣何敢當。上曰。頃於玉堂。猶稱以少年朋。况於經筵官乎。經筵官若過謙。則是負予心矣。幼而學之。將壯而行之。若老死巖下。則豈壯行之義乎。先生曰。臣無學而有疾。徒久留無爲。何敢奉承聖敎之萬一乎。又曰。俄以禎祥妖孽。反復下詢。殿下果以何者爲禎祥。何者爲妖孽乎。臣願聞之。上曰。漢之時。以鶡爲鳳。今雖鳳儀此庭。221_406d人獻河圖。亦非禎祥也。若朝廷寅協。生民乂安。旱不爲災。則可謂禎祥。雲觀之報災。亦非妖孽也。世道之汚下。人心之浮囂。是爲妖孽。經筵官之質問。必有意焉。悉陳可也。先生曰。聖敎固當。臣亦有一說。讜言嘉謨。日陳於前。言路大開。羣策畢集。爲禎祥。言路塞而城門閉。爲妖孽。如果盡釋前後以言獲罪之臣。使言路大開。方可爲轉災爲祥之道。上曰。是予不足處。暮年果得一師矣。俄者下敎。覺今是而昨非者。亦謂是也。初登筵席。首陳此言。予豈不欲悉從其言。一並宥釋。而四十年苦心。有難221_407a猝變。且於大學仁人。能好人能惡人之義。有所自守。經筵官曾於此章。看得如何。雖非中庸文義。常時所疑。故問及矣。對曰。聖敎所謂苦心者。臣未敢知何事。上曰。今日朝著。三分五裂。予欲使之同寅協恭。偕之大道矣。先生曰。臣俄聞喜聞過之聖敎。不勝欽感。子路。匹夫也。猶以喜聞過。爲百世之師。况以萬乘之君。盡心於三字符。則德成於上。功施於下。又何可勝言耶。仁人能好惡者。當於仁字能字上著眼看。仁者。純然天理。無一毫私意之謂也。能者。至公無私。好惡中理之謂也。其心若不221_407b能如鑑空衡平。其發爲好惡者。亦不能粹然一出於天理之公。而或有一毫私意之雜。則豈可謂之能好惡乎。草野賤臣。一登筵席。猥陳蕘說。極知僭越。而今年異於常年。亟擧曠蕩之典。前後言事諸臣。盡爲寬假。俾有以洗濯自新。是臣所願也。上曰。自新二字好矣。不以爲全然無罪矣。又曰。予之工夫。豈能到公好惡地位耶。蓋好惡不能公明。則將寘之混淪耶。對曰。格致之工不至。則其於邪正是非。有貿觀易施之患。如能眞知善之可好惡之可惡。則其好惡之心。自然發而中節。不待勉强221_407c矣如諸臣之犯顔强諫者。自當愛奬。阿諛順旨者。自當深惡。此正所謂能好惡也。殿下以一部中庸。潛心著力。毋以文字泛看。自戒懼謹獨。以至參天地贊化育。則豈不美哉。臣之望殿下。不在於漢唐中主。必以唐虞三代爲期。三代聽言之道。可用則用之。不可用則不用而已。何嘗斥而罪之耶。臣初登筵席。如是進陳。固似急遽。而旣發言端。故敢此仰達。上曰。經筵官。將欲一番登對而去。故其意以爲非今日。則無可言之時也。從當講究爲之。經筵官。似異於言不用道不合則去者矣。旣221_407d登講筵。商確文義可也。時措之義未詳。願聞之。對曰。此卽時中之義。大學所謂至善。易所謂太極。此書所謂中所謂宜。皆指一箇十分是處。字異而意同也。上曰。然矣。費隱二字。何義。對曰。此形容道之體用也。天理流動。充塞天地。朱子所謂踢著脚指頭。便是仁義禮智四箇字。蓋自一草一木一動一靜之微。至於聖人天地之所不能。無非此理之用。其廣如此。故謂之費。其所以然之理。各在裏面。隱而莫之見。故謂之隱。
東宮侍坐。講孟子。
221_408a上問東宮曰。汝於儒賢。可敬可尊。此後能不忘乎。對曰。豈敢忘之。上曰。經筵官進前。密侍東宮。講文義可也。先生屢辭其無名。上曰。於我。爲經筵官。於東宮。爲書筵官。何謂無名。先生又再三固辭而後進伏。上謂東宮曰。今日予猶學之。則汝小子。尤宜銘心聽之也。又曰。汝見經筵官。能無動心乎。對曰。心異於前矣。何爲而然耶。對曰。其道德高故也。汝能學之耶。對曰。豈有不可學之理乎。上曰。言之太易矣。講孟子。自王者之迹熄止竊取之矣。先生進曰。乘。取記載之義。檮杌。惡獸名。取記惡221_408b之義。春秋。取記年之義。人君處崇高之位。恣其嗜欲。自謂人莫敢非議。而書之史冊。垂之萬世。豈不可畏乎。東宮曰。然矣。先生仰問曰。詩亡然後春秋作。是時平王自在。而何謂王迹熄耶。東遷之後。詩固多矣。何謂詩亡耶。東宮曰。其時禮樂征伐。不能自天子出。故曰王迹熄。詩之正風亡。故曰詩亡矣。又問。禮樂征伐。自諸侯出者。何歟。東宮曰。諸侯强故也。先生曰。天子弱而諸侯强。固有所以致之者。幽王不能禁嗜欲。惑於豔妻。畢竟身死犬戎。平王又爲申侯所立。不能復讎討賊。聽命於諸221_408c侯。此其所以王迹熄而詩亡也。上曰。文義甚好。更爲陳戒可也。先生曰。臣初侍東宮。何所見而敢爲陳戒耶。但願邸下勿爲過自修飾。使宮僚。得其隙而獻䂓也。上曰。切中其病。汝宜敬謝也。東宮曰。謹當服膺。上命先生起立。遂握手曰。予於丁酉溫宮。有所仰覩。可勿訝也。經筵官旣來。何可倐然而去耶。對曰。臣學術空疎。雖使留在。少無裨益。一瞻耿光。歸保晩節。於賤分足矣。上曰。予暮政。求助之意甚切。若干尺東宮。輔導甚急。商山四皓。尙羽翼太子。經筵官。旣是世祿之臣。何221_408d忍不念予而有歸意耶。須善爲輔導也。因嗚咽久之曰。須聞久留之言。然後可放手也。對曰。當退而思量。以定行止。上曰。思量二字。殊常明言之。昔年權相。仰諾於聖考。而翼日遁去。山林之言。亦不可信矣。對曰。聖眷至此。臣敢不思所以仰承耶。上笑曰。今則諾之矣。乃捨手。先生旣退。上謂筵臣曰。元良與儒賢。相見時禮數。何以爲之。對曰。如諭善相見禮。以單拜相拜。則似好矣。上曰。在儒賢自重之道。似無不當之理。仍下敎曰。今已面諭。明日胄筵。前贊善先入侍於東宮。仍留闕221_409a中。晝講同爲入侍。
己酉。遣史官傳諭。命入參晝講。以疾辭。
以承傳色口傳下敎曰。前贊善似拘於書筵拜禮。亦不入於晝講。俄已下敎。入侍時。更當講定晝講。先爲入侍。先生適有疾。不得承命。
遣內醫。看病。命該曹。輸送食物。
庚戌。上疏待罪。仍辭食物。優批不許。
批曰。省疏具悉爾懇。今日復欲見爾。因恙未果。心用缺然。其命停筵。非爲爾不來。予亦欲調息而然矣。其何引咎。食物柴炭。今雖節用之時。豈可使來221_409b京儒賢。無食無柴乎。勿辭而受焉。命醫看審。亦由禮待。何辭之有哉。從容調理。俟少間入參。
癸丑。遣史官。傳諭。
諭曰。頃者。已諭一番晝講。當行此閤。今聞明日欲參胄筵。而以禮拜持難。待儒賢之道。何拘職名有無。况魯論云。不重則不威。學則不固。若干尺元良。當先示禮貌。依前定式行之。聞度支所奏。食物柴炭。尙今不受。此待儒賢之例節。何辭之有。安心領受。
甲寅。入侍書筵。
221_409c是日。東宮問于春坊曰。欲請來宋贊善。未知何如。對曰。古亦有是例。行之好矣。乃令弼善鄭述祚往諭。先生旣至留桂坊。相見禮。自大朝。定以單拜。先生曰。先祖以當品贊善。定以相揖。力辭不獲而後承命。今明欽以前縣監。不得已冒入書筵。雖使借用贊善之禮。揖已過矣。况於拜乎。須據此更稟大朝。待下敎可入矣。乃使春坊一員。往政院微稟。久無答敎。而東宮再遣宮僚。下令曰。今此初見儒賢之日。須行拜禮。然後小子之心可安。旣已議定。願卽相見。對曰。此有大段難堪之221_409d端。俄已更稟大朝。邸下亦不宜自專。伏望少待下敎。又下令曰。大朝意下。亦已仰探。禮數不可改。幸卽入來。諸僚皆詣習講廳。大朝始下敎曰。此是當稟于東宮者。政院可謂多事矣。先生謂賓客黃仁儉曰。拜禮終無前據。須稟定以揖禮。賓客諾而先入。旣詣閤外。以次入侍。先生進立。東宮先行拜禮。先生不得已答拜。與賓客對坐。開講。東宮誦前受音孟子自君子所以異於人止此物奚宜至哉。賓客告純通。輔德尹勉憲。讀新受音。自其自反而仁止君子不患矣。陳說文義。賓客221_410a又略陳訖。請令前贊善。並陳一章文義。先生辭謝而後。對曰。存心者。非存養之存。乃入乎耳存乎心之存。君子能以仁禮存於心而不忘。則有愛人敬人之施。能愛人敬人。則有人恒愛人恒敬之效。此則當然而然。順理之事也。其或有人待我以強㬥。則是逆理之事也。故於此能善應。方可謂君子。如顔子之犯而不校是也。然不及顔子地位。則須用此三度自反之工。然後乃能不校也。東宮曰。然矣。先生又曰。此則據學者而言。若帝王之地位崇高。羣下承奉。則有何橫逆之可言。而雖於宴私之221_410b間。小小不如意事。亦莫非橫逆之類。此等處。須以躳自厚薄責人爲心。然後乃可以順應。蓋人情易發而難制者。惟怒爲甚。制怒之方。惟在遽忘其怒。而觀理之是非而已。與怒相對者。慾又最難。故易曰。懲忿窒慾。窒慾之方。又當反求乎義與非義。則慾可得以消也。東宮曰。然矣。先生仰問曰。君子有終身之憂。無一朝之患。憂與患。何爲有別乎。東宮曰。憂者。深長之慮也。患者。意外之患也。先生曰。然則邸下亦有如此之憂耶。東宮未卽答。先生曰。凡有問答。須隨問響應。自然流出。然後可221_410c見眞情。若經營修飾而發。則皆歸虛文矣。東宮欣然答曰。雖余。豈無如舜之憂乎。先生曰。旣有如舜之憂。則須有如舜之事。可以如舜矣。邸下如欲如舜。則須言舜之言。行舜之行。服舜之服。事事如舜。則是亦舜也。此須立志卓然。然後庶或不至於退轉。東宮曰。切實矣。仍問曰。古之聖帝亦多矣。何獨於舜而稱其爲法於天下。可傳於後世耶。先生對曰。堯如天之無爲。無可名狀。惟舜歷變最多。其於人倫之際。尤多可法。故必稱舜也。東宮曰。然矣。先生又曰。凡所謂孝悌之道。亦有本有末。221_410d深愛婉容爲本。服勞奉養爲末。邸下之於孝。苟能用力乎其本。則舜之大孝。亦可學矣。推之百行。無不如是。然而若不先明乎善惡是非之分。則又或無知而妄作。故大學以格致。先於誠正。邸下冲年。雖未及乎古者大學之時。而大學之書。亦已進講。何可不知其義乎。東宮曰。當服膺矣。東宮於受讀新受音時。誤讀一字。讀畢。先生徐進曰。邸下誤讀一字矣。東宮曰。何字。春坊曰。俄讀無爲之爲。爲以字矣。先生曰。今於對宮僚法講之時。猶不免誤讀。宴居私讀之際。其不能致精必矣。所221_411a謂敬者。主一之謂。而無處不在者也。當讀書則一於讀書爲敬。邸下之誤讀。爲讀書時不敬。伏望因是而惕念焉。東宮欣然謝曰。當銘念矣。尹勉憲曰。昔在孝廟朝。先正臣宋浚吉侍講孝廟。誤闕一章。先正進戒。如今日儒賢之言。孝廟瞿然稱善。儒賢卽先正之孫。而今日事。偶合於昔年事。心甚感歎。邸下亦宜如聖祖之瞿然聽受。東宮曰。當如是矣。
入侍晝講。
書筵纔罷。上御思賢閤引見。命注書傳冊于221_411b先生。上讀中庸二十七八章。玉堂陳文義。訖。上命先生陳文義曰。觀此閤所扁乎。先生曰。未見。上曰。有所揭四字。退出時見之可也。對曰。禮遇賤臣。至於如此。多士觀瞻則好矣。但臣非其人。豈不可愧乎。仍進曰。此道流動充滿。其大無外。其小無內。三千三百。無非道也。然非聖人。無以行之。故曰。苟不至德。至道不凝焉。尊德性道問學。爲大綱說。而致廣大極高明。溫故敦厚。皆屬存心。盡精微道。中庸知新崇禮。皆屬致知。由此而爲至德。則不驕不倍矣。玉堂曰。明哲保身。非謂含默取容。當言而221_411c言。雖如比干殺身。亦可謂明哲。小註。有此言也。先生曰。此則可備一說。若其本意。謂治世則君子昌言正論。足以興起在位。亂世則遜言愼默。以免於禍耳。爲人上而使士容默保身。則國之危亡。可立而待。其默與不默。皆係於在上者之好惡也。上曰。此與前日禎祥之意同也。予亦以直言極諫爲禎祥。阿諛苟容爲妖孽。此意如何。先生曰。聖敎正得臣言之意。上曰。前日疏中。耆宿云者。指前都憲耶。身帶講職者。誰也。先生曰。耆宿謂尹鳳九。身帶講職謂金元行也。臣本無似。今此被召。誰221_411d不笑之。然若使諸賢彙進。則臣亦可以隨後進退。臣以以人事君之義。有所云云。上曰。金元行於贊善。爲何戚耶。對曰。外兄也。祁奚內擧不避親。明道薦伊川,橫渠。故臣疏中。亦擧金元行矣。上曰。灑然矣。特進官尹鳳五曰。今使贊善。於文義外。更陳爲學次第。則當有所補。上曰。好矣。先生曰。爲學次第。臣無所得。請略陳。此章文義。尊德性道問學者。卽程子所謂涵養須用敬。進學在致知也。雖若與大學次序不類。而大學格致。實因小學涵養之成功。則致知在敬之義。未嘗不同。此所謂庸學221_412a相表裏也。朱子於中庸或問備言之。論先後則知先而行後。論輕重則行重而知輕。陸學專以尊德性爲主。則乃有體無用之學。朱子所謂如車兩輪如鳥兩翼。不可偏廢者至矣。上曰。予於中庸。講之多矣。尙未了然。今當問之。仍問人參三才之義。先生曰。人以眇然之身。與天地參爲三才者。以此心之廣大高明。與天地同體也。如或爲一毫私意私欲之所蔽累。則大者狹。明者昏。便與天地不相似。安能贊助化育。與天地相參乎。上曰。此章言文王。不及堯舜何也。對曰。文王非賢於堯舜。而天221_412b命不已。文王德純。襯貼於至誠無息之義。故引用也。上曰。然矣。純亦不已。何謂也。對曰。文王之純。亦天命之不已云爾。筵臣曰。俄者。經筵官所言容默非盛世事者。甚好。在上者。如使君子。皆以默容。則世道無可言也。上曰。殷監不遠矣。仍問今日書筵。東宮問何文義。先生曰。有所下問。臣粗有所對。春坊當有日記。上曰。東宮所問何如。對曰。所問文義。多出人意表。德性才分過人。今則專在導率如何耳。上曰。曾子以魯得一貫之道。聰明亦有反不如鈍者矣。先生曰。臣陳立志。東宮有舜221_412c何予何之意。上曰。東宮以克己復禮等事。易言之。是可憂慮也。先生曰。程子。以宋神宗堯舜事朕何當之語。爲非社稷之福。東宮所言。豈不好耶。此後進學。都在聖上身敎。而聖上勤政課學。臣意猶以爲過勞也。不但政學一言一動一行一事。皆以中庸二字導之何如。上曰。中庸豈不好。第予無可以身敎者。仍問曰。儒賢初不爲擧業耶。抑中間廢棄耶。對曰。嘗治擧業。再度應擧。上曰。何年也。對曰。庚子辛丑年間。出入場屋。伊後連經草土。遂嬰奇疾。不復應擧。上曰。辛丑廢科。似有221_412d意也。先生曰。今日猶難登筵。而迫於嚴命。強疾入來矣。上命進前。先生稍前進伏曰。溫宮握手。蓋由不得已。而其後遂成故例。臣則嘗以爲未安。頃者初對。倉卒失措。黽勉奉承。今則决不敢進前。只於此。可以祇承聖敎矣。筵臣曰。昔顔歜。有歜前王前之語。此則戰國之時。君臣之分未定故也。今則似異於戰國之時。特進官曰。雖異於顔歜時。而亦豈無義理。上曰。予以趨士之義。欲推案而前矣。仍命前來。先生進前。上握手曰。豈不念乃祖乎。若干尺東宮。其可不念乎。中庸講畢。將221_413a講魯論。須留看而去好矣。先生曰。遣史官偕來。實是迫隘之過禮。而握手勉留。尤豈不過乎。莫非臣不肖之過。上曰。此後若更召。則其果上來乎。對曰。若不以職名召之。又無身病。亦豈無可來之時乎。上放手曰。然則贊善先退。安心調理。先生將退曰。臣竊有所欲奏者。敢此更陳。進用賢才。實爲當今急務。諸賢所當禮招。而前諭善朴聖源之於東宮。輔導之功甚多。今乃寘而不用。若拘於官職。則豈無別設一窠之道。亦豈惜一資級乎。上曰。朴事。係是官制變通。豈不留念。諸儒賢。亦當敦召221_413b矣。先生曰。臣來自草野。朝政國計。固皆茫昧。而凶荒之餘。公私匱竭。若又洊凶。民將無遺。今日危急之勢。不啻痛哭流涕而已。若不及今圖之。一朝土崩。雖有智者。不及爲謀矣。今年蒙聖上先期軫念。民之死亡。差少於乙亥。而麥秋之前。死亡必多。賑救之策。不可少緩。惟在聖上亟招大臣有司。講而行之也。上曰。是矣。節用安民。爲先務矣。先生曰。臣方欲言。而聖上先言。臣當繼陳之。非節用。則雖欲愛民。無實效矣。且聞戶部經費。常患不足。節用。裕財之道。須從頭理會。而亦先自上供221_413c節省可也。上曰。所奏誠好。當與大臣講究。仍命召大臣戶判惠堂入侍。先生曰。欲有所陳。而神昏氣乏。當待後日。遂退出。
尹參判鳳五,鄭賓客宲,鄭弼善述祚。皆上疏請留。
乙卯。上疏辭經筵官之名。仍論書筵事。賜批優答。
批曰。省疏具悉爾懇。今日法講。意謂同參。因恙未果。心竊悵然。所陳者。言甚剴切。別錄朱夫子封事。諸先正及爾祖獻規。若今親聞。不覺起敬。令玉堂春坊書進。予與東宮。寘諸座側。予則以此益勉飭勵。亦令元良。朝夕觀省而服膺。爾其勿辭。從容善221_413d攝。若愈。不待敎。同參法講。或先或後。亦入胄筵坐講。頃聞此規。已下敎而猶不承者。以此更飭館院。
丙辰。始講論語。命入參。病未進。
三月己未。往拜栗谷先生祠堂。
栗谷先生祠版。自海州來。奉於淸楓溪舊廟。故往拜。
庚申。承命。入侍晝講。
先生進伏。上曰。何不挾冊。對曰。臣不敢以經筵官自居也。命史官。出取論語寘前。仍命開卷。上讀前受音並章下註。玉堂上番讀新受音。略陳221_414a文義訖。上命先生。並陳前後受音諸章文義。先生起伏曰。經書皆有宗旨。此書宗旨。卽仁字也。蓋君道主仁。文王五止。亦曰。爲人君。止於仁。所謂仁者。卽渾然天理。無一毫私欲之謂也。諸章所言雖各異。而其歸趣。皆欲成就一仁字。學者且然。况人君代天理物。其可頃刻而忘此義乎。上曰。然矣。學而時習章。先生曰。此學字。兼知行而言也。註云。必效先覺之所爲者。可見其不專指講討一邊也。上曰。是矣。先生曰。有朋自遠方來而樂者。以信我者衆。爲可樂。此則順而易。人不知而不慍。則在我221_414b者足以見知於人。而人或不知。如是而能不慍者。爲逆而難。喜譽惡毁。卽人之常情也。爲人君上者。每悅於順旨。惡聞逆耳。其處順逆難易之間。尤不可放過。果能於逆耳之言。無一毫慍怒之意。則豈非成德君子乎。上曰。切實矣。巧言令色章。先生曰。此章須以剛毅木訥近仁章對看。則其意可見。而其於邪正忠佞之辨。亦可以此而得之也。上曰。文義好矣。道千乘章。先生曰。治國當以敬爲本。以信爲主。以節用爲要。朱子所謂五者。反復相因。當深察而體行焉。上曰。汎愛衆之義。當作何解。221_414c對曰。四海之內。皆吾同胞。誠心相與嘉善而矜不能。是爲汎愛。賢賢友仁。是爲親仁。上曰。然。上問。事父母。言竭力。事君。言致身。豈事君事父母。有異義耶。抑當互看耶。先生曰。子之於父母。雖鄙賤之事。無所不盡其力。所謂左右就養無方也。臣之於君。則各有分職。如以趨走承奉躳親鄙事爲忠。則是婦寺之忠。其義自別。然致身之義。則可以通看。所謂民生於三。事之如一。惟其所在。則致死焉者也。上曰。然。又問。子夏雖曰未學之義。朱子所解深得。子夏本意。而游,吳二說。皆以子夏之言。爲221_414d抑揚有弊。予意常疑其錯解。而不敢自信。經筵官以爲何如。對曰。聖敎極精。無容改評。蓋子夏是文學之士。其言必不抹摋學問。須若朱子之解。然後爲得其本意也。上曰。今聞許可。予甚爲幸。至無友不如己。上曰。此段之義。吾甚未瑩。欲聞經筵官之言。人皆不友不如己。則彼勝己者之取友。豈不難乎。對曰。此是平說取友之道當如是。若自勝己者言之。又豈有矜己上人之意。見賢思齊。見不賢而內自省。莫非我師也。上曰。是則然矣。以舜言之。當時諸臣。無可及舜者。然則舜終不得友221_415a勝己者耶。對曰。禹,稷,臯,夔。固皆不及舜。然如使大舜。有一毫自聖之心。而謂禹,稷以下。皆不若己。則其好問取人。必不如彼其沛然。惟其不自聖而取人爲善。故卒爲大聖。如孔子所謂君子道者三。某未能一。若使心實自聖。而姑爲是退託之辭。豈得爲孔子乎。故朱子解之曰。某未能一者。聖人所不能。是直據聖人之心而言之也。願聖上於此等處。深察而體念之。無好臣其所敎而不恥下問。則聖德之成就。豈不如大舜孔子乎。上曰。說得甚好。大臣曰。經筵官。五十年沉潛讀書。其所陳文義。221_415b皆親切有味。上曰。更陳其下文義。可也。對曰。學者。旣以威重爲質。忠信爲主。而有輔仁之友。則可謂無所不備矣。然若自家吝於改過。則朋友不能樂告以善道。雖有勝友。亦無如之何。此所謂事君數斯辱。朋友數斯疏矣。殿下旣敎以喜聞過。臣誠感歎。然如或喜聞而不能速改。則臣何敢數進忠言耶。此最體念處。上曰。當銘念矣。先生曰。夫子以溫良恭儉讓之德。使諸侯能欽仰愛慕。問之以政者。自然之良心也。然而終不能共天位治天職。則恐有所妨奪於自家嗜慾而然爾。賢者之不221_415c遇於世。而三代以後。無復有善治者。實由於此。豈不可惜乎。上曰。然矣。上曰。三年無改。朱子註。只言三年不可改之意。尹氏游氏。則言不待三年。何其相與矛盾。而並取之也。對曰。朱子則直解本文正意。故只言不可改。而若只如此言。將使孝子。膠守而不知變。雖大段害道者。皆不敢改於三年之內。家國之禍。將不可勝言。故特附二說於下。蓋如是而後。其義始備。眞德秀之言曰。當變通而變通。則變通爲孝。當繼述而繼述。則繼述爲孝。正與此義相發也。上曰。是矣。講未畢。先生進曰。昔在221_415d列聖朝。筵臣因文。進說於軍國大事。袞闕民隱。無所不言。而近見開講之時。不敢參以他說。豈或有禁令耶。上曰。未曾設禁。如有所欲言。可悉陳也。對曰。坐講之制。臣頃以書筵事宜。有所疏陳。聖敎並許。經筵變通。此實盛德事。不勝感激。上曰。但眼昏者難辨細字矣。對曰。若設書案。則無此患。此非敬待講官。乃所以尊閣聖經也。上曰。此則舊例所無。似難輕議也。先生仍進曰。春秋之義。不講久矣。聖祖所與一二同德之臣。奮發講劘者。今則蕩然。無復忍痛含寃之意。實爲慨惋。今涒221_416a灘再回。亡胡之歲。亦豈無期。而我國陰雨之備。又不可忽。文簡公臣金昌協文集。有審敵篇。論此義甚好。上曰。所陳約而盡。心甚感歎。審敵篇。當覓覽矣。先生起伏曰。臣於是。又別有所悽感者。神州之陸沈。百有二十年。於赫皇靈。睠顧而降假者。必在我東。而聖上又至誠追慕。皇壇儀物。無所不備。至於誓戒肄儀。無不親臨。凡在瞻聆。孰不感歎。第有一事不能無憾。夫祭祀之禮。最重灌鬯。其氣臭交感。有難言之妙。而一自大禁以後。此禮久廢。已有如不祭之歎。况壇墠之祭。尤屬怳惚。221_416b其不可度思之義。有倍他祀。且以藩邦而祭天子。卽載籍所未有之盛典。其可以外國禁條。上施於天子之祭乎。揆以事體。極爲未安。臣意斷自今番。還復灌鬯。而太廟文廟。次第擧行。恐不可已也。至於禁令。臣非敢欲弛也。不若除去殺字。只依祖宗朝舊典。申明私釀會飮之禁。照律必罰。則民始信法而不敢犯矣。不然。徒懸嚴法。而犯者日衆。欲盡致之法。則不可勝誅。以爲不可勝誅而掩寘乎。則是上下相蒙。紀綱大壞。臣以爲不愆不忘。率由舊章。遵先王之法而過者。未之有也。上221_416c曰。此言實有所見。而予有苦心。猝難變改。且上古用玄酒。中古用醴酒。見於儀禮。予意用醴。少無所慊。至於鬱鬯。亦以芳烈之物。煎於醴酒。足以格神矣。對曰。儀禮五齊。豈盡醴酒乎。朱子有曰。神已安之久矣。不可改也。今去三百年所安之物。而改用所不識何狀之物。豈所以安神耶。上曰。甘酒亦日用所常有。豈至於不識何狀。先生曰。殺人刑人。不可不欽卹。而殿下於加律申禁之日。旣立三令五申之法。而使未及聞令之人。先伏大辟。豈不近於枉殺不辜乎。此所以法不信於民也。上曰。221_416d經筵官之言誤矣。予旣用法。何可謂之枉殺乎。九淵罪狀甚重。何論令之前後。雖在大臣。决不容貸矣。先生曰。臣言妄率。不勝皇恐。仍進曰。權極以殺人要寵。徐有元之言。不可無也。臣以爲徐有元旣蒙宥。則權極不可不罪。上曰。徐有元爲建德報仇也。此言亦過矣。先生曰。頃以臣言。上躳奉御之物。先爲減省。臣實感歎。然節用裕財。自有本末。今不從頭理會。而只議其末。則終非量入爲出之道也。聞折受免稅之數。至與地部歲入田總相等。州縣之凋弊。財用之耗蹙。職由於此。先正臣宋時221_417a烈。與臣祖臣浚吉。所嘗力請於聖祖者。每以是爲先務。至蒙允許。今之爲弊。又倍於其時。臣何敢不言乎。上顧大臣曰。近日似無新折受矣。大臣皆曰。然矣。先生曰。先正所陳。止於顯廟朝。今若自肅廟以後。推筭攷實。可知其多少也。上曰。當體念矣。先生曰。言事諸臣。頃多放釋。恐或出於採用臣言。而六人尙未蒙宥。未敢知聖意之所在。上曰。金時粲則所重有在。不可輕釋。先生曰。金時粲。卽文忠公尙容之孫。夫豈不忠於國。而故爲闕禮耶。如是推原。則是不過薄物細故。而棄221_417b國之藎臣。豈不爲聖德之累乎。且年少人才。廢錮許久。豈不可惜乎。上曰。年少者誰耶。對曰。徐迥修,尹蓍東等也。上嗚咽曰。事關陟降。而若復忘忽。豈得爲孝乎。金時粲則有所重。不可輕議矣。時上每於聖意所存。輒用口奏。一經口奏。羣下莫敢復言。金時粲亦入於口奏。故謂之有所重也。先生曰。聖敎每云所重。未知所重何在。臣實聽瑩。上厲聲曰。經筵官之言多過矣。欲其止之。則亦可止矣。往年溫幸時。前都憲尹鳳九。以予舊時師傅來謁。予甚欣慰。而一言之失。221_417c予有處分。回鑾時。承旨告其祇送路次。而予不少顧。故執義韓元震。亦嘗語犯皇朝。予卽嚴處。到今追思。亦涉太過。今於經筵官。予特寬假。以示優待之意。須知予此心。勿復過言。使上下俱好可也。玉堂朴師海曰。草野之人。所陳雖或狂率。聖上宜優容也。承旨曰。玉堂失言矣。儒賢之言。何可目之以狂率。請推考。左相曰。不可推考。而止請罷職。上曰。如是則必益紛囂寘之。玉堂曰。小臣失言。罪當甘受。上曰。渠已受罪好矣。先生進伏曰。人臣進言。各效其忠。惟在君上揀擇取舍而已。今221_417d臣所言。如有一毫挾雜。殿下宜罪之矣。如以爲出於忠悃而無他腸。殿下宜恕之矣。罪之恕之。惟在殿下。談笑而處之。何至激惱聖心耶。臣實慨然。上忽擊案曰。此言甚好矣。大臣以下。齊聲贊颺以爲儒賢之言。出於公平。聖上又復優容。實光盛德云云。上命先生進前。先生累辭不敢當。上曰。吾欲親爲開釋。須進來。先生進前。上命起立。握手諭曰。予旣釋然。經筵官。亦勿介懷。更爲入來。見我而去可也。對曰。病若無添。敢不如敎。臣於去就。本無固必矣。上曰。眞賢者之221_418a言也。乃退。蓋於是日筵中陳文義時。天顔溫粹。酬酢如響。及請大報壇用酒以後。漸不喜聞。中間玉色甚厲。嚴敎荐下。筵臣無不惴惴。而先生擧止如常。奏語益徐緩詳密。旣退。入侍諸人。莫不嘖嘖稱歎以爲不可及。先生聞之曰。山野之人。初入前席。不知天威之可畏而然爾。
入侍書筵。
弼善鄭述祚曰。今此別召對。出於接見儒賢之意。前受音文義。臣等昨已仰陳。別無他語。宜令儒賢。更陳文義。東宮顧先生曰。願聞之。先生曰。石221_418b顯威權日盛。何爲而致然耶。東宮曰。此輩只可供灑掃之役。而元帝寵幸太過故如此。漢之亡。不在於王莽。而已在於任用恭顯之時也。先生曰。宦官之害皆如此。明太祖嘗立鐵碑。禁宦官之干預朝政。其後王振魏忠賢輩。相繼用事。以至於亡。蓋其昵近親密。顔情稔熟。一或失御。則馴致此弊矣。唐之宦者仇士良。老而致仕。其徒送至其家。士良曰。爾曹欲長守富貴。當令人主。勿讀古書。又勿令頻接賢士大夫。讀古書。則覽歷代治亂之跡。而必有覺悟之端。與賢士接。則規諫之言日陳。而汝221_418c曹危矣。莫如使人主常以燕樂玩好爲事。無暇及他事。此輩只爲目前固寵之計。不知國亡而其身亦隨而亡。豈不迷惑乎。東宮曰。誠然。嫁送王嬙事如何。先生曰。平城之圍。以美人計得解。自是之後。以此爲和戎之妙策。然聖王服夷之道。當以德敎。漢之此事。亦不足法也。弼善曰。儒賢入侍。誠難得之會。今此文義。雖有一二可戒。而別無大段關涉於睿德者。宜令儒賢。更陳格語恐好。東宮曰。願聞之。先生曰。邸下頃者。以舜自期爲敎。故臣已告於大朝。大朝敎以易言可慮。當日之言。221_418d或出於一時率易乎。抑眞欲以舜自期。而前頭果能著身踐言耶。臣未知邸下之意果何如也。東宮曰。舜何人。予何人之意。何可無乎。先生曰。此在立志之如何。願益自勉焉。東宮曰。當體念矣。先生曰。史記則備載治亂之蹟。經書。乃是聖謨賢訓。未知何者爲好耶。古人云。史記熱閙。經書冷淡。邸下則所尙何如。東宮曰。方讀孟子。孟子問答論說。旨義甚好。便同史記矣。先生曰。邸下已知其味。將於孟子。得文理也。弼善曰。聞宋贊善將有歸意。故臣以勸留之意。有所疏陳。大朝有大略221_419a書入東宮之敎。而未及書進矣。東宮曰。願勿遽歸。先生曰。臣本多病。明將告歸。然若聞邸下睿學將就。德性純粹。雖在田野。抃祝之心。自異他人。何敢一日而忘哉。東宮曰。何當更來。先生曰。臣猥蒙眷遇。如無疾病。則豈無更來之期乎。東宮曰。望必復來也。先生曰。臣以朴聖源差出講官事。已稟于大朝而蒙允。如使朴諭善入參書筵。則其所輔益必多。臣雖不在。亦何異於臣身之留也。且夫學問之工。當以孟子勿忘勿助長爲法。固不可放忽。亦不可急速。徐起之言曰。有物在手。221_419b握之則破。不握則亡。蓋以雞卵。喩治心之法。而握與不握。乃是勿忘勿助之意也。臣以涵養性情。不可迫促之意。稟于大朝。而邸下則亦不可過於遊戲時。或寫字時。或緩步以舒暢。亦養性之一方也。東宮曰。當服膺矣。弼善曰。儒賢雖去。邸下當勿忘此言。常如儒賢之在側。而留心體念焉。東宮曰。當體念矣。先生曰。戒駕在卽不敢長語。乃退出。
辛酉。出宿王十里村舍。上遣史官傳諭。修啓辭謝。
大臣以先生出城奏達。上驚問。仍遣史官。傳諭221_419c曰。昨於晝講。旣對復入侍。信爾之言若金石焉。今聞大臣所奏。其果尋鄕云。無信不立。爾豈不陳而其行忙忙。一何至此。此由誠淺。深恧何諭。旣登之路。雖難復回。思賢閤更來之奏。其若信守。今予之恧。庶可少紓。須諒須諒。
上疏。陳筵對未畢之懷。
初上之召先生也。雖十使翩繁。恩禮曠絶。蓋將以爲暮年貽燕之地。實未嘗有聽其言行其道之意。而一種浮議。皆以爲際遇之盛如此。宜知無不言。或謂大訓不可不言。或謂時宰誤國之罪。不可221_419d不言。先生笑曰。交淺言深。古人所戒。且當積吾誠意。先格君心。何必不度於義。而驟言人所難言。無益於事。而徒取聲名耶。先生之意。雖如此。朝著之間。流言日播。事機忽變。而眷遇衰矣。先生欲一極論君德而歸。顧以口陳之說。有所未盡。逆耳之言。難以畢達。將具箚子一通。袖進而陛辭。再對之日。有論語始講後退去之敎。而數日之內。中庸已畢。再趣入侍。則先生之行。不可復留。而箚亦未及就矣。不得已擬於前席。略㬥衷悃。又因聖心激惱。未畢而退。餘懷耿結。夜不能寐。翼221_420a日出次城外。史官傳諭。旣修啓。因愀然有不豫色。顧謂侍者曰。吾旣以言忤旨。狼狽去國。何敢復有論說。以傷語默之義。但受國厚恩。竊有區區願忠之誠。而筵奏草草。旣不能盡。又違更對之命。而昧然遁去。則不惟孤負吾君。將何以見先祖於地下乎。乃草疏以進。而其實。非先生本意也。
壬戌。如廣州其子山。省先墓。
先生七代祖妣完山李氏。雲山君恭昭公誡女。無嗣早歿。墓在恭昭公墓西北數里許。
221_420b癸亥。至龍仁葛川。拜外氏諸墓。
戊辰。始承疏批。胥命於文義縣。
批曰。省疏具悉。若干登筵。徑尋鄕路。不承權輿。自恧誠淺。疏中所陳。昔年盛事。不覺欽誦。一倍追慕。寡躳闕遺。頂門一針。今方自强。益加勉旃。噫。君臣之義。無所逃於霄壤。心雖在於赤芾。何不顧乎本事。此則只云天經地義者。沈一鎭事。豈徒敦婣所重在矣。此不過一事。但今予心竊駭世者。角立拂鬱。百計伺釁者。今得一爾。恐動逞志。此非頃爾入侍時所講國將亡而見孽之徵乎。噫。莫云天人之221_420c窅遠。感通則一理。伊日拔木之風。乃可驗於今日。是豈爾過囂世之由。旣處忘世。其何累乎。爲爾惜之。爲世憤焉。雖然。四十年苦心。白首如一。予則當固守此心。將奏陟降。吁嗟萬物俱春之時。宜思爾祖之號。○又聞批旨之外。多有嚴敎。先生不敢歸家。至文義縣胥命。
庚辰。聞有勿待命之敎。還歸櫟泉。
筵臣以先生中路待命奏達。上卽下勿待命之敎。軍職廳書員。至是始送擧條。故還家。
玉堂陳箚伸救。
221_420d箚略曰。前贊善宋明欽。以林下讀書之士。感聖上不世之遇。據古人先格之義。有所條列。亶出無隱。夫豈有他。殿下看之太深。疑之太過。至於所引詩章。屢下責敎。辭旨截嚴。抉摘文字。是殿下所嘗戒者。而今者以此爲咎。則此豈我殿下垂訓之本意哉。章牘之引用經史。不拘於世代之治亂。時君之賢否者。前古何限。而未聞以此爲罪。雖以近世言之。亦有以赤芾三百之句。登諸陳戒之箚。於此益驗。其引喩之無間於聖世也。噫。雖以災祥感應之理論之。賢士之出世。每在亨嘉之會。221_421a謂之祥也則宜。豈可以言之不合。歸之於召災之端耶。臣等竊爲殿下惜此擧也。臣等又有所慨然者。惟彼儒賢。半生杜門。講明義理。其於出處之義。語默之節。自有定見。何待乎人。而自前辭敎。有若被人恐動。不自主張者然。何殿下待儒賢。若是其薄耶。俗士之稍有知識者。尙不可以此加之。豈可以十使招徠之賢。一言不槪。而遽以此疑之乎。王言一出。四方傳誦。其可以不愼也哉。○後數日。講官尹勉憲進曰。向日前贊善宋明欽之疏。極陳君德。而三百赤芾等語。不過斷章取義。殿221_421b下抉摘文字。看作有意。至有下詢之事。伊後屢下嚴敎。臣在外雖未能詳知。其爲聖德之累。豈有大於此者乎。臣願前後所下嚴敎。一並還寢焉。上沉吟良久曰。頃日下詢。予豈樂爲。宋明欽之疏。終涉未穩。歷詢之擧。欲使知天經地義矣。予之四十年苦心。專在於欲保世臣。赤芾之喩。其豈襯著乎。尹勉憲曰。殿下之始招前贊善也。恩禮曠絶。至有臨軒十使之敎。其時不但搢紳章甫動色相賀。雖至無知下隷。莫不聳動。儒賢亦感恩數。筵奏疏陳。盡言無諱。殿下正宜嘉奬之不221_421c暇。而乃反厭薄之。恩禮頓衰。至有不敢聞之敎。雖於尋常㙜言。殿下亦曾拜昌。而草野之言。未蒙優容。臣竊惜焉。方其入來也。臣適入直春坊。目見搢紳上下莫不歡欣。曾未幾何。歡欣者便爲憂歎。不但搢紳如此。四方多士。擧皆失望愁沮。此豈盛世之事乎。大臣則以地處有別。不能力陳。諸臣亦有畏忌之心。囁嚅不敢發。只增聖德之累。寧不慨然乎。殿下不以臣不肖。畀以輔導東宮之任。臣三年侍講。所仰勉者。惟是列聖朝崇儒重道之事。及至近日。以殿下所以禮遇儒賢者。221_421d日陳於書筵矣。一自贊善逬出之後。雖入書筵。而儒賢一事。或恐有妄發。寘之不敢擧論之地。便若隱諱者然。上下之間。情志阻隔。臣實痛心焉。且以閭閻家言之。子弟不學父兄之長處。而易學其短處。殿下每事。方思身敎。近日之擧。實非貽燕之道也。殿下何不念及於此乎。上默然久無答語。尹勉憲曰。臣縷縷陳達。極知惶悚。而臣方待罪經幄。他餘過中之擧。尙欲匡救。况玆事。關係甚重。臣不得請則不敢退也。上曰。儒臣誠苦心矣。誠意可貴矣。命書傳敎。還收前後下敎。
221_422a太學諸生上疏。請召還。
疏略曰。前贊善宋明欽。以溫潤之資。精粹之學。感激殊遇。首先造朝。三登筵席。屢陳嘉猷。虛心之誠。握手之眷。禮旣摯矣。國其庶矣。不意乃者。未展所蘊。徑尋鄕路。我聖上禮之待之者。未克有終。豈非有歉於聖德乎。伏願亟降溫諭。益盡禮招。使之克回遐心。賁然復來。以卒我殿下禮遇之隆。以輔我邸下溫文之資。則豈不休哉。豈不盛哉。
四月。魯峯儒生。請山長。辭之。
221_422b五月。行講會于興巖。
會者二十餘人。
搬入甁泉。
十一月。講學于方山。
講論語。
甲申先生六十歲。
正月。還授贊善。
大臣筵請。故有是命。
五月。命罷職。尋還收。
上於朴相世采調停之論。有曠世之感。思欲尊禮221_422c其人。聳動觀聽。特命陞祀文廟。不參頒敎蔭官。並罷職。又以抄選亦蔭官。命一體罷職。旋以一邊尊先正而一邊罷儒臣。爲有損事體。命置之。
八月。竪薪洞先考妣墓石儀。
九月。游茂朱前島。
偕渼湖金公。遊俗離山。
十月。遊伽倻山。遂至月城。
自俗離。轉向伽倻。遍尋孤雲遺蹟。遊安義三洞。謁星川書院。將遊智異山。至龍游潭日暮。宿君子寺。221_422d讀荒山碑。見劉都督題名。至南原。聞外姑黃氏訃。徑往任實衙中哭之。
孫啓榦生。
十二月。命削逸。
申參議暻陳疏。爲朴相辨誣。天威大震。下敎曰。向若嚴處宋明欽。申暻焉敢乃爾。因命諸山林。一並削逸。
後數日。又命免爲庶人。放歸田里。
遂下御製書名黨籍。以先生及金副學時粲,申參議暻,朴執義致隆爲同黨。而推以及於寒水,尤221_423a庵二先生。名之曰嚴隄防裕後昆錄。卽命刊板。藏之史庫。
借沃川放谷村舍。盡室搬入。
先生以草野之臣。歸田之律。雖無可施。晏然在家。則有不安於心者。借峽屋移居。改方爲放。以寓惶恐之義。讀大學論語。久而後。還櫟泉。
乙酉先生六十一歲。
四月。入甁泉。
歸路。訪渼湖金公于三山衙中。
九月。與沈公鏞。遊甘露寺。
221_423b丙戌先生六十二歲。
五月。入甁泉。
過禮安。遂作觀海之遊。
時再從姪在淵宰禮安。先生往參牧使公忌祀。仍與在淵東遊。至寧海登觀魚㙜。宿平海越松亭村舍。登窟峯觀日出。登望洋亭。次肅廟御製韻。歸至眞寶玉流亭。本縣宰金公善材,義興宰金公相戊。皆來會。書沙溪書院開來門額。
六月。還甁泉。
溫習論語,周易。
221_423c十一月。修宗稧于同春舊堂。
有立議。
丁亥。先生六十三歲。
正月。命釋。免爲庶人。
因筵臣奏。下詢大臣及奉常提調。命自來月朔日。太廟及文廟告辭。用酒。士夫家自寒食。用酒。遂下宥命。
三月。入月城。營葺草堂。
同春先生所居草堂。年久而毁。其址爲他人所有。先生累度往尋而經營之。至是買取其址。立草堂221_423d三間。爲士子講學之所。索得舊時竹牖及牧丹而移之。歸路尋浣溪,滄洲二書院。
四月。行講會于崇賢。
阻雨。會者二十餘人。
與從子致淵。乘舟下黃山。
時再從姪溥淵。宰臨陂。轉至衙中。謁宗家祠宇。
五月。行講會于崇賢。
畢小學。
入甁泉。改修同春先生文集。
閏七月。有題曆辭。
221_424a八月。還櫟泉。
九月。遊滄丘。
滄丘。卽冲庵金先生遊息之所也。重陽日。先生率冠童往遊。
十月。哭子婦申氏喪。
戊子先生六十四歲。
正月旣望。與金公聖休。舟遊龍湖。
二月。行講會于崇賢。
會者五十餘人。
三月。搬入塗谷。
221_424b竹林儒生。請山長。辭之。
星谷及從容堂儒生。請山長。
四月。入甁泉又修同春先生文集。
象賢儒生。請山長。辭之。
莘巷儒生。請山長。辭之。
興巖儒生。請山長。
往興巖。指揮同春先生文集刊役。
草定文集。改正凡例。
德峯儒生。請山長。
五月。與諸弟姪。講學于同春舊堂。
221_424c長者。講中庸。童子。講大學。
七月。戊戌 十三日 戌時。終于塗谷之正寢。
先生嘗於夏秋之交。多有腫患。是年。又發甚重。藥皆不效。○自先生疾病。遠近士子。鄕里親知。皆來問候。盈門溢巷。及喪。上自朝廷士大夫。下至山谷婦孺。莫不齎咨涕洟。太學儒生。亦設位擧哀。○明於象緯者言。是日。有星隕之異。
八月。命復官爵。
正言李祉承上疏曰。臣聞故贊善宋明欽逝單上聞。而尙無隱卒之音。至於該曹應行之典。亦不擧221_424d焉。臣實慨然也。昔在顯廟朝。明欽之先祖先正臣宋浚吉。嘗因事忤旨。而天怒未解。及其訃聞。特降悼惜之敎。亟擧吊祭之典。官爲庀塟。恩禮罔愆。幽明無憾。此豈非殿下今日之所當法者乎。明欽之向來恩譴。雖因一言之未槪。而其爲招徠之慇懃。契合之昭融。實同符於聖祖盛際。及今其人云亡。萬事已冷之後。豈可無一言之恩澤。以慰多士之望。而保全終始之義耶。夫天道。舒慘以時。而變化無常。疾風雷雨。雖若可畏於暫時。而卿星慶雲。旋復開霽於一日。此天之所以廣大高221_425a明。生萬物而成造化者也。今殿下亦一天也。臣之所以望殿下者。亦豈不以天道期之乎。伏乞殿下深留聖意焉。答曰。宋明欽事。爾言其公。聞甚慘焉。其人已故。予復介意。致賻等事。令該曹卽爲擧行。
九月丙申。塟于錦山川內里乙坐之原。
四方觀禮者。五百餘人。門人加麻者。四十餘人。館學及遠近書院儒生。皆致奠會塟。
壬辰九月。追奪官爵。
上因事激怒。忽及癸未疏事。初命免爲庶人。繼221_425b又追奪官爵。嗣子時淵。遠竄耽羅。又命發極律啓。㙜臣不卽奉承。多被重鞫。大諫尹勉升都憲韓必壽。傳啓十餘次而停。十一月因大臣所奏。時淵蒙宥。
甲午六月。命復官爵。
靑平第動駕時。上曰。宋明欽以沈一鎭人倫間事言之矣。安兼濟其時停啓難矣。右相元仁孫曰。然矣。上曰。可謂直矣。安兼濟賢矣。右相曰。俄者。以安兼濟賢矣爲敎。而宋明欽則尙未給牒矣。上曰。宋明欽已作故乎。右相曰。然矣。上曰。卿賢矣。命書傳敎曰。右相所奏。深歎匡救。宋明欽特221_425c爲給牒。
丙申正宗大王御極初。命藏裕昆錄板於元陵退壙。
甲申以後。玉堂諫官。多陳疏請去裕昆錄。而至於被罪。又有儒疏。而或至竄配。及是。自上特命藏板於退壙中。
丙午 正宗大王十年 墓誌成。
姨弟鹿門任公撰。
壬子十二月。改窆于燕歧葛山艮坐之原。
以川內宅兆不利。嘗營遷奉。九月二十日。淑夫人221_425d金氏別世。改卜於葛山。在薪洞北一里許。以夫人祔左。
丙辰十二月。因孫啓榦除職。命賜祭于家廟。
孫啓榦因大臣薦。以儒生承召入侍。命付童蒙敎官。傳曰。昔在癸未。故贊善之上來也。予請以賓禮見。贊善辭巽。力言而後肯之。及其登筵。多陳資益之謨。事若隔晨。今見乃孫於三十四年之後。不待叩其所存。接其貌。便識爲吉士。爲先正家甚幸。以予念舊之心。當有示意之擧。故贊善宋明欽家。遣官致祭。○祭文曰。寧陵之世。曰有文正。同221_426a德一心。大義是秉。危微之講。復雪之計。灑落君臣。千載盛際。風聲云邈。典刑斯存。金精玉潤。大賢有孫。淵源旣正。造詣亦深。疇不心醉。令德韶音。和平溫厚。中蘊剛大。允蹈先榘。怳如親炙。覃思經旨。毫縷剖析。而守其約。循循繩尺。雖則含章。朝野翹跂。皇祖在宥。旌招禮摯。初筵晉講。誠正其說。頂針明燭。聖褒曠絶。以對以疏。款款衷曲。載遂其初。婆娑塗谷。記予冲齡。請以賓見。巽辭屢至。昃日移殿。爰覿粹容。一團春和。侃侃嘉誨。資益良多。餘三十年。德儀森然。何由得來。儒化是宣。召汝遺221_426b孫。念舊之思。詩書故宅。遣官酹巵。○後日筵中。屢次下敎曰。近世儒者。予皆見之。而宋贊善之風儀氣象。最爲可敬。其他則遠不及矣。儒者造朝。目下可言之事。有難盡言。而宋贊善。則能盡言。其中又多難言之事矣。盖癸未登對筵話甚秘。外人多未聞焉。而正廟時在春邸。詳聞而記。存於淵衷。年久之後。縷縷下敎。至於如此。故入侍諸臣。仰聆而始知之也。
癸亥 當宁三年 命贈職賜諡。
九月。前都憲李直輔疏。請先生及渼湖金公,止庵221_426c金公褒奬事。大臣回啓。依所請施行。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成均舘祭酒,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又命不待狀議諡。賜諡文元。道德博聞曰文。主義行德曰元。○前月。經筵進講詩曹風。筵臣陳戒曰。我英考倦勤之時。朝象淆亂。故贊善宋某以三百赤芾。陳疏勉戒。故媢嫉者多。危機甚迫。倘非英考則哲之明。則故贊善幾不免矣。其言終未見用。馴致乙未丙申之變恠。一人之言。用不用。而治道之汚隆係焉。此等處。伏望深加省察焉。
221_426d乙丑八月。行延諡禮。
吏郞李惟采來宣。會者五百餘人。
櫟泉先生文集卷之十九


 
 
 
 
 
 













한수재선생문집 제3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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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표(墓表)
익찬(翊贊) 이공(李公) 유언(惟彦) 묘표

공은 휘가 유언(惟彦)이요 자는 미재(美哉)로서 경주인(慶州人)인데, 시조는 신라(新羅) 개국의 원훈(元勳) 알평(謁平)이다. 그 뒤에 휴(攜)라는 이가 아조에 와서 판한성 부사(判漢城府事)를 지냈으며, 1세를 건너 휘 귀정(龜禎)이 별제(別提), 휘 주(䲖)는 만호(萬戶), 휘 양국(良國)은 금부 도사(禁府都事)였는데, 이상이 공의 고조ㆍ증조ㆍ조부이다. 별제의 아우는 군수 귀서(龜瑞)인데, 귀서가 사의(司議) 즉(鯽)을 낳고, 즉은 봉사(奉事) 대방(大邦)을 낳고, 대방은 첨지(僉知) 탁(啅)을 낳았다. 첨지가 도사공의 양자로 가서 장사랑(將仕郞) 최기수(崔耆壽)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만력(萬曆) 신해년 1월 15일 공을 낳았다.
공은 문재(文才)가 뛰어나 10여 세 때부터 시부(詩賦)를 잘 지었고 을미년에 벼슬길에 올라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는데, 학도가 매우 많아 뒤에 통현(通顯)한 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기해년에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 옮겼다가 곧 금오랑(金吾郞)으로 낭천현(狼川縣)을 맡아 나갔다. 갑진년에 해직되어 광릉(廣陵)의 삼전포(三田浦)로 돌아왔다가 신해년에 익찬(翊贊)이 되었고, 정사년 6월 29일 병으로 세상을 마쳐 광주(廣州) 가락동(可樂洞) 신향(辛向)의 둔덕에 장사 지내었다.
공은 성품이 관후하고 마음이 깊었으며 생산(生産)을 일삼지 않고 서사(書史)를 즐겼는데, 집 안이 썰렁하게 가난한 것도 개의하지 않았다. 호수 위에 작은 정자를 지어 ‘관어(觀魚)’라 이름하였는데, 도사공이 살던 터의 곁에 위치하였다. 옛날 도사공이 율곡(栗谷)ㆍ사암(思菴 박순(朴淳))과 그 정자에서 서로 시를 읊고 함께 놀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공이 할아버지 뒤를 이어 다시 정자를 세우고 고명한 벗 좋은 친구들과 항상 시 읊고 술 마시는 것으로 스스로 만족하면서 강호(江湖)에 흠뻑 취한 채 세상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공의 그러한 점을 가상히 여겨 계방(桂坊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을 제수한 일이 있었는데 공이 마지 못해 응하긴 했으나 물러 나오는 즉시로 호상(湖上)에 달려가 벼슬에 연연하는 생각이 없었다. 함께 노닐던 이들은 모두 당대의 대인(大人)ㆍ군자(君子)들로서 예를 들면 동춘(同春)ㆍ우암(尤菴)ㆍ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형제와 같은 이들이 가장 서로 가까운 사이였다.
처음에 동래 정씨(東萊鄭氏) 주부 경창(慶彰)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자녀가 없었고, 두 번째로 고성 이씨(固城李氏) 충의위(忠義衛) 순고(循古)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두었다가 홍기욱(洪箕勗)에게 시집보냈으며, 세 번째로 문화 유씨(文化柳氏) 학생(學生) 시화(時華)의 딸을 맞아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옹()ㆍ원(願)ㆍ효(顤)ㆍ예(預)이고 딸은 송정채(宋廷采)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측출(側出)로 아들 신(䪿)과 사위 김경성(金慶星)이 있다. 손자 단필(端弼)ㆍ단좌(端佐)ㆍ단룡(端龍)과 권세형(權世衡)의 아내가 된 손녀는 맏아들 소생이며, 손자 단보(端輔)와 생원 정형주(鄭衡周)ㆍ신헌(申憲)ㆍ윤명주(尹命周)의 아내가 된 손녀들은 둘째 아들의 소생이고, 손자 단현(端玄)과 송재현(宋載顯)ㆍ임성필(任聖弼)의 아내가 된 손녀들은 셋째 아들의 소생이다. 그리고 사위 홍씨는 아들 회(懷)를 두고 딸은 이무(李堥)에게 시집보냈으며, 사위 송씨의 아들 국빈(國賓)은 생원이다.
나는 공과 척속(戚屬)으로서 소년 시절부터 공을 자주 찾아 뵙고 그에게서 옛날 장자(長者)의 기풍이 있는 것을 적이 우러러보아왔던 터인데, 지금 단필 형제가 찾아와 묘도문을 부탁하는 것을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대략 이상과 같이 적어 비에다 새기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