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 정랑공 휘 탁2/(贈)靑巖察訪 최군(崔경)

국조인물고에 기록된 전주최공 문성공 12세손 13대 조고 묘갈명 (펌)

아베베1 2015. 10. 10. 05:16

 

 

원본글 출처 최탁의 묘갈명()
저자 송시열()
이명 : 사정()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31 문관()

나의 종형 야은공() 송시영()은 꼿꼿함을 지키며, 오직 최탁()공 자() 사정()과 사귀었다. 매양 관무()의 여가에는 단정히 앉아 상대하며 종일 차마 떠나지 못했다. 야은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사정은 그 재능과 품격ㆍ문벌()로 보아 명예 있는 지위를 넘보았다면 무슨 벼슬인들 해내지 못할까만 스스로 믿고 의심치 않으며 그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사람이 알아주는 바가 되지 않았음은 이러해서였으나 또한 이러함으로 해서 알아주는 이가 있었다. 그 후 공의 행적은 더욱 기구하여 퇴고()와 첨삭()에 고심하며 어정거리다가 세상을 마쳤으며 야은공은 순절()하여 사망하였다. 아, 세상 사람은 끝내 공을 모르고 있으나 공을 아는 자는 오직 군자인()일 뿐이다. 어()에 이르기를,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 다만 그 벗을 보라.” 하였으니, 이는 실제의 말이다.

공은 전주() 사람이다. 상조() 문성공() 최아()가 고려()에 벼슬하여 관작이 시중()에 이르렀다. 본조()의 최덕지()는 맑은 명성과 곧은 도로써 권람()ㆍ한명회() 때를 맞이하여 낌새를 보고 늙음을 들어 물러났고, 증조 최언청()은 벼슬이 봉사()요 어진 행실이 있었으며 여러 대가 한 집에 살았다. 조부 최희수()는 내리 일곱 고을을 맡았고 안동 판관()이 되어 관장()이 나이 적음을 보고 허리를 굽힐 수 없다 하여 돌아갔는데 세상에서 고고()하다 하였다. 아버지 최응화()는 현감()을 지냈는데, 장자()의 기풍이 있다고 사계() 노선생()이 칭찬하였다. 어머니 윤씨()는 사직() 윤경우()의 딸이다.

공은 젊어서부터 농을 좋아하지 않았고 경사()에 통달하였다. 나이 20세에 생원()에 입격하였는데, 광해군() 때 혼란하자 과장()을 사절하여 나아가려 아니하였고 동료들과 상소하여 이이첨()의 간사함을 논하였다. 이어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은 지 10여 년이었는데, 인묘()가 즉위하자 문과()에 급제하였다. 동방()에 꺼리는 자가 있어 그 연유로 승문원()의 선발을 저지하였고 성균관() 학유()ㆍ박사()를 지내면서 봉상시 봉사()를 겸하였다. 혹 가주서()가 되었다가 형조 좌랑()에 승진하였고, 춘추관 기사관()을 겸했다가 외직에 나가 황간 현감()이 되자, 조정의 관원들이 떠남을 애석히 여겼는데, 공이 말하기를, “평탄하고 험한 일을 가리지 않음은 신하의 직분이다.” 하였다.

공의 나이 40세 때에 현감공()이 몰하였다. 공은 모부인()을 받들고 고을로 나아가 한 마음으로 봉공()하였으나, 상관에 아첨하지 않다가 마침내 파직되어 돌아왔다. 그 뒤 형조 정랑을 거쳐 인제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어버이 병환으로 나아가지 못해 체직되었고 마침내 상()을 당하였는데, 공은 이때 늙기 시작하였으나 복제()의 수행에 게으름이 없었다. 복을 마치자 전적()ㆍ호조 좌랑을 거쳐 또 나가 보령 현감()이 되었는데, 백성을 해하는 토호()를 형벌로 매를 쳐 죽였다가 이로 하여 파직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당로자()가 그 굳세고 과감함에 감복하여 곧바로 병조 정랑에 직배()하니, 대체로 청선()에 두려는 것이었으나 또 시기하는 자가 저지하였다. 영광()은 사람이 많고 업무가 많았으나 본래 암읍(, 산으로 둘러 싸인 고을)이라 일컬었는데, 공은 또 이에 차출되어 보내졌으나 얼마 아니되어 병으로 사양하고 돌아왔으며, 지난 일의 죄가 논해져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두어 달만에 풀리어 돌아왔다.

임진년(, 1652년 효종 3년) 정월 2일 졸하니 나이는 66세였다. 공은 어버이 섬김에 효성스러웠고 모부인을 모시게 한 종에게는 더 두터이 대우하였으며, 제사는 정결을 주로 하였다. 검소한 몸가짐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가족들은 크고 작은 일에 늘 부지런하고 힘을 다하여 자급자족하였다. 그러므로 남에게 구차스러운 일이 없었고 세상의 영리에 내닫는 자를 보면 자신이 더럽혀 질 것처럼 하였다.

영인() 채씨()는 선교랑() 채충익()의 딸이요, 고옥() 정작()공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도서() 보기를 좋아하였는데, 고옥이 사랑하여 교육하며 말하기를, “네가 남자가 아닌 것이 한이다.” 하였다. 고옥이 몰(歿)하자 영인은 3년을 소식()하며 끝까지 전()을 올렸고 출가하게 되자 극히 부도()를 행하였으며, 제사에 더욱 삼갔고 시향() 때에 더욱 정결히 하여 제물()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종일 즐거워하지 않았다. 매양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인조 대왕()의 행장()을 읽었고, 그 기일()을 당해서는 반드시 눈물을 흘렸으니 어찌 마음에 감동한 바가 있지 않고서이겠는가? 인조ㆍ효묘()가 승하하자 오래도록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자녀들이 연로함을 들어 강권하면 말하기를, “여자는 유독 신자()가 아니란 말이냐?” 하였다. 만년에 우리말로 번역된 ≪여계()≫를 손수 써 자손에게 주어 길이 가훈()으로 삼게 하였다. 나이 78세에 졸()하니 숭정() 을사년(, 1665년 현종 6년)이었고, 양주() 양정리()에 부장()하였다.

아들 최세영()은 음직()으로 벼슬에 나아갔고, 다음 생원() 최세장()은 재능이 있었으나 나이가 짧았다. 손자에 최방언()ㆍ최방신()ㆍ최방현()과 딸로 송이석()ㆍ허평()의 처가 된 이는 맏이가 낳았고, 최방준()ㆍ최방식()과 딸로 이중욱()ㆍ김우화()의 처가 된 이는 둘째가 낳았다. 증손은 모두 약간이다.

내가 야은공()을 따랐으므로 공을 안 지 오래이다. 병자년ㆍ정축년의 난 뒤에 나는 황간()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밤낮으로 붙쫓으며 세상의 변화를 말하고 의분()에 북받쳐 탄식하였는데, 하루는 벽에 쓴 글을 가리키며, “이는 선원(, 김상용()의 호) 상국()이 의()를 택할 때의 말이다.” 하였다. 그 내용에 ‘날 저문 강 입구에 신의 힘 어쩔 수 없습니다.[ ]’라고 되어 있었다. 공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인신()의 의리는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 현재 천지는 뒤집혀 윤상()이 없어졌다. 우리들은 인간 세상에 스스로 설 수 없다.” 하였다. 이어 야은공에게 미쳐 말하기를, “당시에 자신을 지키는 것을 보고 그 수양()이 있음을 알았다.” 하였다. 아, 공과 야은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지기()라 하겠다. 지금 40년이 지나 세상의 도의는 더욱 추락하여 상국의 사당()에 오랑캐의 연호로 제를 올리게 되었으나 그 사람은 크게 한 때의 존중하는 바 되었으니, 공이 있었더라면 다시 무어라 하겠는가? 구원()은 일으킬 수 없으니 아, 슬픈 일이다. 최방언은 학문과 덕행이 있는데 어버이 명으로 와서 나에게 명()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저들은 빨리 달리는데 나는 중지하였으니, 그러므로 자신은 뒤에 있고 남은 앞섰네. 행적은 비록 곤궁하였으나 마음은 형통하였으니, 이점이 바로 현명함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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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 최탁

국조인물고 최탁

[네이버 지식백과]최탁 [崔琢]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