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5.8. 관악산 산행 (금지샘)

2011.5.8. 관악산(冠岳山) 번개산행 (금지샘)

아베베1 2011. 5. 9. 11:04

 

금지샘 산악회 번개 산행을 사당역 6번 출구로 시작 하였다

집에서 전철로 이동하여 사당역에도착 하니  10시 6분  시간을 초과하였다 .. 전화를 한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행과의 시간 ...좋은 시간 이었다  사진은 몆장담지 못하였다 .

관악산에 대한 고전 자료를 정리해보기로 .. 관악산은 저개인적으로 금불암자락에 선조님의 산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고

이제는 개발로 이장을 하였지만...

 

중국에서 태산(泰山)·형산(衡山)·숭산(嵩山)·화산(華山)·항산(恒山)을 오악이라 하므로, 우리 나라에서도 백악산(白嶽山)을 중앙으로, 관악산(冠岳山)을 남악으로, 치악산(雉岳山)을 동악으로, 감악산(紺嶽山)을 북악으로, 송악산(松嶽山)을 서악으로 하여 사시로 제사하였음.

 

 

고려사절요 제16권

 고종 안효대왕 3(高宗安孝大王三)
신묘 18년(1231), 송 소정 4년. 금 정대 8년. 몽고 태종 3년

 


○ 여름 5월에 오랜 가뭄이 있었기 때문에 사면(赦免)을 내렸다.
○ 가을 7월에 최우의 아내 정씨(鄭氏)가 죽었다. 왕이 순덕왕후(順德王后)의 전례를 따라 장사지내라고 명하였다. 삼전(三殿)과 여러 왕씨ㆍ재ㆍ추ㆍ승선(承宣) 이하가 다투어 제(祭)를 지내니, 하루에도 예닐곱 차례나 되었다. 제수를 갖추는 데에 온갖 사치를 다하니, 시가(市價)가 이로 인해 폭등하였다. 장사지내게 되자, 백관(百官)이 회장하여 심지어 금은 비단으로 감실(龕室 종묘에 신주를 모시어 두는 장(欌))을 장식하고 좌우에 촉롱(燭籠)과 홍촉(紅燭)을 벌여 세운 것이 빈당(殯堂)에서부터 보정문(保定門)까지 뻗쳤고, 석실(石室)은 기교(奇巧)가 극에 달했다.
○ 송 나라 상인이 물소[水牛] 네 마리를 바쳤으므로, 최우가 인삼 50근과 광포(廣布) 300 필을 주었다. 8월에 최우가 수레[輦]를 바쳤는데 금은 비단으로 장식하고 오색 전(氈)으로 덮어 사치하고 화려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왕이 칭찬하여 마지 않았고, 제조를 감독한 대집성(大集成)에게 안장 갖춘 말ㆍ의복ㆍ홍정(紅鞓) 등을 하사하였다. 조금 뒤에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할 때에 물소에 수레를 매어 타고 가니, 도로에서 서로 다투어 가며 구경하였다.
○ 몽고 원수 살례탑(撒禮塔)이 군사를 거느리고 함신진(咸新鎭 평북 의주)을 에워싸고 말하기를, “나는 몽고 군사다. 너는 빨리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무찔러 하나도 남기지 아니 하리라." 하였다. 부사(副使) 전한(全僩)이 두려워서 방수장군(防守將軍) 조숙창(趙叔昌)과 함께 모의하기를, “만약 나가 항복하면 성중 백성이 그나마 죽음은 면할 것이다." 하니, 숙창이 옳게 여겨 드디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숙창이 몽고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조원수(趙元帥) 충(冲)의 아들이다. 나의 아버지가 일찍이 귀국 원수와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였다." 하고, 전한은 창고를 풀어 몽고 군사를 먹이었다. 숙창이 글을 써서 삭주(朔州) 선덕진(宣德鎭 함남 정평)에 부쳐 몽고 군사에게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고 타일렀다. 몽고 사람이 숙창에게 명하여 이르는 곳마다 먼저, “진짜 몽고 사람이니 마땅히 빨리 나와 항복하라." 라고 말하게 하였다. 철주성(鐵州城 평북 철산) 아래에 이르러, 포로로 잡은 서창 낭장(瑞昌郞將) 문대(文大)를 시켜 고을 사람을 불러, “진짜 몽고 군사가 왔으니 마땅히 빨리 나와 항복하라." 라고 타이르게 하였다. 문대(文大)가 이에, “가짜 몽고다. 그러니 항복하지 말아라." 하였다. 몽고 사람이 죽이려다가 다시 불러 타이르게 하였으나 역시 여전하였으므로 드디어 죽였다. 몽고 사람들이 공격을 더욱 급하게 하고, 성중에는 양식이 떨어져 능히 성을 지키지 못하고 함락하기에 이르렀다. 판관 이희적(李希勣)이 성중의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모아 창고에 넣고 불을 지르고, 장정들과 함께 자결하여 죽으니, 몽고 사람이 드디어 그 성을 도륙하였다.
○ 9월에 재상들이 최우의 집에 모여 삼군을 내어 몽고 군사를 막기를 의논하였다. 대장군 채송년(蔡松年)을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로 삼고, 또 여러 도(道)의 군사를 징집하였다.
○ 몽고 군사가 귀주(龜州)에 이르니, 병마사 박서(朴犀), 삭주 분도장군(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 정주(靜州 평북 의주 남쪽 25리) 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이 정주ㆍ삭주ㆍ위주(渭州 평북 영변)ㆍ태주(泰州 평북 태천)의 수령 등과 더불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귀주로 모였다. 박서가 중온(仲溫)의 군사로 성의 동서를 지키게 하고, 경손(慶孫)의 군사로 성의 남(南)을 지키게 하며, 도호별초(都護別抄)와 위주ㆍ태주 별초 2백 50여 명으로 삼면(三面)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몽고 대군이 이르렀으므로 남문에 있는 경손이 정주 아내(衙內)의 결사대 12명과 여러 성의 별초를 거느리고 성에 나와 싸우려고 하였다. 경손이 사졸의 앞에 나와서 영을 내리기를, “너희는 나라를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죽어도 물러나지 않을 자들이다." 하였더니, 우별초가 땅에 엎드리어 응하지 않았다. 경손이 다 성으로 들여 보내고, 몸소 몽고 군사의 선봉인 검은 기를 들고 말탄 자를 쏘았더니 곧 맞아 거꾸러져 죽었다. 결사대들이 이를 계기로 하여 분전(奮戰)하였다. 흐르는 화살[流矢]이 경손의 팔에 맞아 피가 흥건하게 흐르는데도 북치는 손을 그치지 않았다. 사오 합을 싸우다가 몽고 군사가 물러나 달아나므로 경손이 진용을 정제하고 쌍소금(雙小笒)을 불며 영(營)으로 돌아왔다. 박서가 맞아 절하고 울며 일을 다 그에게 위임하였다. 몽고 군사가 성을 몇 겹을 에워싸고 밤낮으로 서남북의 문을 공격하므로 관군이 돌격하였다. 몽고 군사가 위주 부사(渭州副使) 박문창(朴文昌)을 사로잡아 성에 들어가 항복하도록 타이르게 하였는데, 박서가 그를 죽였다. 몽고 군사가 정예 3백 기(騎)를 추려 북문을 공격하므로 박서가 쳐서 물리쳤다. 몽고 군사가 수레에 초목을 쌓고 이를 밀어 진격하므로 경손이 포차(砲車)로 쇠물을 녹여 쏟아 부어 그 쌓은 풀을 다 태우니 몽고 군사가 물러나 달아났다. 다시 누거(樓車)와 목상(木床)을 만들어 쇠가죽으로 싸고 무기를 그 속에 감추어 성 밑에 바짝 이르러 지도(地道)를 뚫으려 하므로, 박서가 성에 구멍을 내고 쇠물을 쏟아 부어 누거를 불사르고 땅을 무너뜨리니, 눌려 죽은 몽고 군사가 30여 명이었다. 또 썩은 풀을 태워 목상을 살라 버리니 몽고 군사가 놀라서 흩어졌다. 몽고 군사가 또 대포차(大砲車) 15대로 성 남쪽을 공격하여 매우 다급하게 되었으므로, 박서 역시 대(臺)를 쌓고 성 위에서 포차를 쏘아, 돌을 날려 물리쳤다. 몽고 군사가 또 나무에 사람 기름을 적시어 두껍게 쌓고 불을 놓아 성을 공격하므로 물을 부어 그것을 구하려 하였더니, 그 불이 더욱 성하였다. 박서가 진흙을 가져다 물에 타서 던지게 하였더니 이때에야 불이 꺼졌다. 몽고 군사가 또 수레에 풀을 싣고 불을 놓아 문루(門樓)로 공격하므로 박서가 미리 물을 누 위에 저장하였다가 내려 부으니 불이 곧 꺼졌다. 경손이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싸움을 독려하는데 포탄이 경손의 이마를 지나 뒤에 있는 호위병을 맞추어 몸이 가루가 되었다. 좌우가 호상을 옮길 것을 청하니 경손이 말하기를, “안 된다. 내가 움직이면 민심이 움직일 것이다." 하고, 신색(神色)이 자약하여 끝내 옮기지 않았다. 몽고 군사가 성을 에워싸기를 한 달이나 되어 갖은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박서가 번번이 임기응변하여 굳게 지키니, 몽고 군사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 몽고 군사가 서경성(西京城)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 마산(馬山) 초적(草賊)의 괴수 두 사람이 스스로 항복하고 와서 최우를 보고 말하기를, “정병 5천여 명으로 몽고 군사를 공격하는 데에 돕겠다." 하니, 우가 크게 기뻐하여 매우 후하게 상을 주었다.
○ 몽고 군사가 황주(黃州)ㆍ봉주(鳳州 황해 봉산)에 이르렀으므로 두 고을의 수령이 백성을 거느리고 철도(鐵島)로 들어갔다.
○ 최우가 사람을 보내어 광주(廣州) 관악산(冠岳山)의 초적(草賊)이 진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적의 괴수 5명과 정예 50명을 회유하여 후하게 상을 주고 우군에 충군(充軍)하였다.
○ 몽고 군사가 용주(龍州)를 에워싸니 성중에서 항복하기를 청하여 부사(副使) 위소(魏玿)가 사로잡혔다.
○ 삼군이 동선역(洞仙驛)에 둔을 쳤는데, 마침 해질 무렵에 첩자가 와서 적에게 변화가 없다고 보고하였다. 삼군이 그 말을 믿고 안장을 풀어놓고 쉬었는데,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 외치기를, “오랑캐 군사가 왔다." 하니, 군중이 크게 놀라 모두 흩어졌다. 몽고 군사 8천여 명이 돌연히 이르러, 상장군 이자성(李子晟)ㆍ장군 이승자(李承子)ㆍ노탄(盧坦) 등 5, 6명이 죽기로써 싸웠으나, 자성은 날아온 화살에 맞고, 노탄은 창에 찔려 겨우 죽기를 면하였다. 삼군이 비로소 모여 싸웠는데 몽고 군사가 약간 물러났다가 다시 와서 우리의 우군을 공격하므로, 산원(散員) 이지무(李之茂)ㆍ이인식(李仁式) 등 45명이 이를 막아냈다. 마산의 초적으로 있던 두 사람이 몽고 군사를 쏘아 시위소리와 함께 그들이 쓰러지니, 관군이 기세를 틈타 쳐서 물리쳤다.
○ 몽고 군사가 선주(宣州 평남 선천)와 곽주(郭州 평북 곽산) 두 고을을 함락하였다.
○ 겨울 10월에 몽고인 2명이 편지를 가지고 평주(平州)에 이르니 고을에서 곧 가두어 두고 조정에 알렸으므로 전중시어사 김효인(金孝印)을 보내어 가서 묻게 하였다. 그 편지에, “우리 군사가 처음으로 함신진(咸新鎭)에 이르렀을 때 맞아 항복하는 자는 다 죽이지 않았다. 너의 나라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끝내 돌아가지 않을 것이요, 항복하면 마땅히 동진(東眞)으로 향할 것이다." 하였다. 그 사람들을 잡아왔는데, 1명은 몽고 사람이고 1명은 여진 사람이었으므로 이로부터 비로소 몽고 군사인 것을 믿었다.
○ 함신진에서 보고하기를, “국가에서 만일 배를 보내 준다면 내가 마땅히 성을 지키는 몽고 사람 소미생(小尾生) 등을 모두 죽이고, 다음에 온 성에 있는 것을 거두어서 배를 타고 서울로 가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김영시(金永時) 등 30명에게 배를 갖추어 주어 보냈더니 과연 몽고 사람을 거의 다 죽였는데, 소미생은 먼저 알고 달아났으므로 부사 전간이 아전과 백성을 거느리고 보신도(保薪島)로 들어갔다. 뒤에 전간이 집안 사람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 임술에 지진이 있었다.
○ 몽고 군사가 귀주(龜州)를 공격하여 성랑(城廊) 2백여 간을 무너뜨렸다. 고을 사람들이 즉시 수축하여 지키었다. 몽고 군사가 여러 성의 항복한 군사를 거느리어 성을 에워싸고 신서문(新西門) 요지에 무려 28개소에다 포(砲)를 대놓고 공격하여 성랑 50간을 또 무너뜨리었다. 고을 사람이 죽기로 싸워 크게 이기고 삼군이 안북성(安北城)에 둔을 쳤다. 몽고 군사가 성 아래 이르러 도전하였으나 삼군이 출전하려 하지 않았다. 후군진주(後軍陣主) 대집성(大集成)이 강요하여 성 밖으로 출전하였는데, 진주와 지병마사는 다 나오지 않고 성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집성도 역시 성으로 돌아왔다. 삼군이 몽고 군사와 싸우는데, 몽고 군사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대(隊)로 나누어 줄을 지어 서고 기병(騎兵)이 우리 우군을 공격하니 화살이 비오듯 떨어졌다. 우군이 어지러워져서 중군이 그를 구원하려다가 역시 어지러워지므로 다투어 성으로 들어오는데, 몽고 군사가 승세를 타고 쫓아와서 사상자가 반이 넘었다. 장군 이언문(李彦文)ㆍ정웅(鄭雄)과 우군판관 채식(蔡識) 등이 죽었다.
○ 왕이 친히 중 3만 명에게 사흘 동안 밥을 먹였다.
○ 동진 군사가 화주(和州 함남 영흥)에 침입하여 선덕(宣德)ㆍ도령(都領)을 사로잡아 갔다.
○ 11월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이항(李抗)이 졸(卒)하였다.
○ 북계(北界)의 분대어사 민희(閔曦)가 돌아와 아뢰기를, “처음에 삼군에서 민희와 병마판관 최계년(崔桂年)을 보내어 몽고 군사에게 음식을 베풀어 주었는데, 원수 살례탑(撒禮塔)이 권황제(權皇帝)라 자칭하고 전(氈)으로 만든 집에 앉았는데 비단으로 장식을 하고, 좌우에 부인을 늘어 세우고,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항복하려면 항복하고 싸울 터이면 싸우기로 마땅히 속히 결정하라. 너의 직함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므로, 대답하기를, '분대관(分臺官)이요.' 하였더니, 살례탑이 말하기를, '너는 소관(小官)이다. 대관인(大官人)이 속히 와서 항복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 몽고에서 북계 여러 성의 군사를 몰아 귀주(龜州)를 공격하는데, 포차 30대를 줄지어 대 놓고 성랑 50칸을 격파하였다. 박서(朴犀)가 무너지는 대로 따라서 수축하고, 쇠고리줄로 얽어 놓았더니 몽고 군사가 다시는 공격하지 못하는데, 박서가 출전하여 크게 이겼다.
○ 오군의 병마를 더 징발하여 몽고 군사를 막았다.
○ 평주(平州)에서 몽고의 첩자를 가두었으므로 몽고 군사가 먼저 쳐서 멸하려고 성중으로 돌입하여 주관(州官)을 죽이고 그 성을 도륙하여 계견[가축]한 마리 남기지 않고 싹 쓸었다.
○ 몽고 군사가 선의문(宣義門) 밖에 와서 진을 쳤는데, 포도원수(浦桃元帥)는 금교(金郊)에 진치고, 적거원수(廸巨元帥)는 오산(吾山)에 진치고, 당고원수(唐古元帥)는 포리(蒲里)에 진을 쳤다. 전봉(前鋒)이 예성강에 이르러 집을 불지르고 인민을 죽이고 노략질한 것이 이루 셀 수 없었다. 경성이 흉흉하였으나 최우는 그 사위 대장군 김약선(金若先)과 더불어 가병으로 스스로 호위하고, 성을 지키는 자는 다 노약한 남녀 뿐이었다. 최우가 어사 민희와 내시낭중 송국첨(宋國瞻)을 보내어 몽고 군사에게 음식을 베풀어 주고 위로하였다.
○ 12월에 몽고 군사가 경성의 4문 밖에 나누어 진치고, 흥왕사(興王寺)를 공격하므로 다시 민희를 보내어 그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화친을 맺었다. 민희가 또 가서 몽고 사자와 함께 왔으므로, 지합문사(知閤門使) 최공(崔珙)에게 명하여 접반사를 삼아 접대하였다. 이 때에 살례탑이 안북도호부에 진을 치고, 사자를 보내 강화하자고 말하였다. 왕이 대관전(大觀殿)의 뜰로 내려가 북면하여 맞으려 하였으나, 몽고 사자가 말리므로 이에 남면하였다. 절한 다음에 잔치하여 위로하고, 금은 그릇과 비단ㆍ모시 등의 물건을 세 원수에게 보내주고, 또 사자에게도 모두 차등있게 주었다. 또 회안공(淮安公) 정(侹)을 보내어 토산물을 살례탑에게 주고, 또 사람을 보내어 당고(唐古)ㆍ적거(廸巨) 및 살례탑의 아들에게 은(銀) 각 5근, 모시 10필, 추포(麤布) 2천 필, 안첨(鞍韂)ㆍ마영(馬纓) 등의 물건을 보내었다. 정(侹)이 살례탑을 보고 멀리 뜰 아래에서 절하니 대답이 없었다. 정이 음식물을 바치니, 살례탑이 젖술[湩酪] 등으로 대접하였다. 정이 권하는 대로 마시고 먹으니, 살례탑이 크게 기뻐하였다.
○ 몽고 군사가 광주(廣州)ㆍ충주ㆍ청주 등지로 향하는데, 지나는 곳마다 잔멸(殘滅)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 몽고 사자 8명이 와서 매와 새매를 구하였다.
○ 승천부(昇天府) 부사 윤인(尹繗), 녹사(錄事) 박문의(朴文檥)가 몰래 가속(家屬)을 강화에 두고, 최우를 달래어 말하기를, “강화는 난을 피할 만합니다." 하였다. 최우가 그 말을 믿고 두 사람을 시켜 먼저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가는 길에서 몽고 군사에게 붙잡혔다.
○ 몽고 군사가 다시 큰 포차를 가지고 귀주(龜州)를 공격하므로, 박서(朴犀)가 또한 포차를 쏘아, 돌을 날려 수없이 쳐 죽이니, 몽고 군사가 물러나 진을 치고, 책(柵)을 세워 지키었다. 살례탑이 우리 나라 통사(通事) 지의심(池義深)과 학록(學錄) 강우창(姜遇昌)을 보내어 희안공 정(侹)의 편지를 주어 귀주에 항복하라고 타일렀으나, 박서가 듣지 않았다. 살례탑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그를 타일렀으나, 박서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몽고 군사가 운제(雲梯)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려 하므로 박서가 대우포(大于浦)로써 맞서 치니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어서 사다리를 가까이 댈 수가 없었다. 대우포란 것은 큰 날이 달린 무기였다. 나이가 거의 70 되는 몽고 장수 한 사람이 성 아래에 이르러서 성루와 기계를 둘러보고 탄식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종군하여 천하를 두루 다니면서, 성곽과 해자에서 공격하고 싸우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으나 일찍이 공격을 이처럼 되게 당하고도, 끝끝내 항복하지 않는 자는 처음 보았다. 성중의 제장(諸將)이 반드시 다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 하였다.
○ 살례탑이 그의 사자와 고려의 장군 조숙창(趙叔昌)을 보내어 이첩(移牒)하여 말하기를, “황제께서 신(臣 살례탑)에게 명하여, 고려에서 사신(使臣) 저고여(著古與)를 죽인 사고 등 몇 가지 일을 묻게 하였다." 하고 곧 말 2만 필과 처녀ㆍ총각 수천 명, 자라(紫羅) 1만 필, 수달피 1만 영(領)과 군사의 의복을 토색하므로 백관에게 명령하여 옷을 차등있게 추렴하도록 하였다.
○ 금은으로 만든 기물과 안장 갖춘 말 등을 당고(唐古)에게 보냈다.
○ 몽고 사자에게 국신(國贐 국가에서 외국의 사신에게 주는 노자(路資))으로 황금 70근, 백금 1천 3백 근, 유의(襦衣) 1천 벌, 말 1백 70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그리고 장군 조시저(曺時著)를 보내어 황금 19근, 백금 4백 60근, 은병 1백 16구, 비단옷, 안장 및 말 1백 50필, 명주옷 2천 벌, 수달피 75영(領)을 살례탑에게 주고, 또 황금 49근, 백금 1천 4백 20근, 은병 1백 20구, 모시ㆍ수달피ㆍ비단ㆍ유의ㆍ안장 갖춘 말 등의 물건을 휘하 장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조숙창(趙叔昌)에게 대장군에 가자하여 같이 가서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저고여들을 죽인 사건 등의 일을 해명하게 하였다.


 

[주D-001]북면 :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에는 반드시 북쪽을 향하는데, 이것을 북면이라 한다.

 

간이집 제8권

 환조록(還朝錄)

 

축(閦) 스님의 시권에 두 수를 지어 주다. 스님이 나에게 와서 시를 청하게 된 것은 이 수재(李秀才)의 소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수재의 사람됨을 믿고 있었고, 따라서 그가 스님을 함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의 청에 응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스님의 거처는 바로 관악산(冠岳山)의 묘덕사(妙德寺)였는데, 그는 거기에도 즐길 만한 일이 있는 만큼 구태여 깊숙한 곳으로 멀리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에 나도 뭔가 느낌이 들기에 이렇게 소감을 적어 보았다.


스님과 허물없는 것은 산이 좋기 때문인데 / 莫逆逢僧爲愛山
산에서 스님이 와서 내 시 받아야 간다네 / 僧來却苦要詩還
모를레라 내 시를 또 어디서 취해 온단 말가 / 不知我亦何從取
내 시는 그저 푸른 하늘 흰 구름 속에 있는걸 / 詩在白雲空翠間

관악의 명찰(名刹)을 누가 올라갈 줄 알까 / 冠岳名藍孰解登
공연히 행전(行纏) 차고 천리 길 허비할 뿐 / 枉從千里費行縢
도성의 속인과 붙어사는 흰머리 글쟁이도 / 文章白首依京輩
묘덕사의 스님처럼 적막을 한번 즐겨 볼까 / 寂寞甘同妙德僧


계곡선생집 제29권
 오언율(五言律) 148수
득지가 또 시 다섯 편을 거듭 지어 숫자를 부러 꿰어 맞추려고 하기에 이끌리다시피 하면서 억지로 수답하여 보내 주긴 하였으나, 이는 매워도 너무 맵다는 탄식이 절로 나올 일이니, 식자들이 보고서 과연 뭐라고 하겠는가[得之又疊五章 欲足成數 牽帥酬寄 殊有椒桂餘辛之歎 識者見之 其謂斯何]


말을 많이 하다 보면 군색한 결과를 초래할 뿐 / 言多秪取困
피곤하게 걸었으니 돌아가 쉬는 게 어떻겠소 / 行倦可無歸
취하기 싫어하면서 자꾸 술잔 들이밀고 / 惡醉仍添酒
더워서 죽겠는데 억지로 옷을 입히시오 / 嫌暄强進衣
티격태격하는 중에 얻는 게 혹 있더라도 / 枝梧雖或得
도시 의경은 그르쳐질 듯하오 / 意境恐都非
이제는 생화필 그만 던져 두고 / 擬閣生花筆
나작문(羅雀門)을 영원히 잠글 생각이오 / 長關羅雀扉

반평생 붓 들고 씨름한 끝에 / 半世攻文墨
이제 겨우 돌아갈 길 알았소이다 / 辛勤得路歸
맛깔진 고기 씹어 음미를 하고 / 薰腴咀作膳
향초 모아 조촐하게 옷으로 삼았나니 / 芳㓗集爲衣
깨닫고 난 뒤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끄덕끄덕 / 悟後頭頭是
길 잃고 헤맬 때는 형형색색(形形色色)이 언짢았소 / 迷時色色非
지음은 이제 경서(經書)에 의탁하고 / 知音託黃卷
한가한 문 닫고서 꼼짝 않을 작정이오 / 堅臥閉閑扉

시 속에 들어 있는 그대의 뜻 알고말고 / 詩裏知君意
돌아갈 귀자(歸字)의 뜻 전편(全篇)에 흘러 넘치나니 / 篇篇苦說歸
문득 부끄럽소, 미록과 같은 나의 성품 / 却慙糜鹿性
지하의 옷 홀로 입지를 못했으니 / 孤負芰荷衣
다생에 걸쳐 잘못 훈습(薰習)된 기질 / 習氣多生誤
세상과 맞지 않는 독특한 취향 / 酸醎觸處非
효표론의 혐의를 받을 수는 있겠소만 / 猶嫌孝標論
그래도 적공처럼 내걸지는 않으리다 / 不署翟公扉


남산을 뒤덮은 울창한 수목 / 樹擁終南隱
관악산 능선 따라 구름도 돌아가네 / 雲從冠岳歸
섬돌 틈새마다 가득 메운 푸른 이끼 / 莓苔塡砌縫
울타리엔 온통 담쟁이 덩굴 / 薛茘作墻衣
심심풀이 그저 바둑이나 두었을 뿐 / 遣寂棋枰在
양생(養生)하는 참된 수도 지금껏 못해 왔소 / 修眞鼎器非
거미도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 蛛蝥如解事
무작정 내 문간에 거미줄을 치오그려 / 結網强當扉

우스워라, 시에 빠져 정신이 없다 보니 / 自笑詩荒客
약상처럼 돌아갈 줄도 모르게 되었어라 / 都忘弱喪歸
경대(鏡臺) 위엔 먼지 가득 침침한 거울 / 鑒昏塵滿匣
칼집엔 푸릇푸릇 무늬 돋은 옛 검이라 / 劍古繡成衣
눈꺼풀 벗겨내 준 새로운 견해 / 刮膜開新見
그동안의 나의 잘못 명심하리니 / 銘心訟舊非
모쪼록 장난치는 동자들에게 / 須敎戱童子
입정(入定) 중인 스님 문을 열지 말게 해 주시라 / 莫啓定僧扉


 

[주D-001]의경(意境) : 문예 작품에 표현되어 나온 정조(情調)와 경계(境界)로, 명(明) 나라 주승작(朱承爵)의 《존여당시화(存餘堂詩話)》에 “作詩之妙 全在意境融徹 出音聲之外 乃得眞味”라는 말이 있다.
[주D-002]생화필(生花筆) : 걸출한 문학적 재능을 말한다. 오대(五代) 왕인유(王仁裕)의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천보 하(天寶下)에 “이태백(李太白)이 소싯적에 쓰던 붓 끝에서 꽃이 피어나는 꿈을 꾸었는데 뒤에 과연 천재성을 발휘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하였다.
[주D-003]나작문(羅雀門) : 참새 잡는 그물을 펼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문정(門庭)이 적막한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급정열전 논(汲鄭列傳論)에 나오는 적공(翟公)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로 적문(翟門)이라고도 한다.
[주D-004]미록 …… 성품 : 사슴처럼 초야(草野)에서 뛰놀고 싶어하는 성품을 말한다. 참고로 소동파(蘇東坡)의 ‘차운공문중추관견증(次韻孔文仲推官見贈)’에 “我本麋鹿性 諒非伏轅姿”라는 시구가 있다.
[주D-005]지하의 옷 : 마름과 연꽃 잎으로 만든 옷으로, 조촐하게 사는 은자(隱者)를 뜻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製芰荷以爲衣兮 集芙蓉以爲裳”이라 하였다.
[주D-006]효표론의 …… 않으리다 : 당신과는 이제 그만 인연을 끊고 싶은데 그렇더라도 야박한 표현을 써서 절교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효표(孝標)는 남조 양(南朝梁) 나라 유준(劉峻)의 자(字)로, 그가 지은 ‘광절교론(廣絶交論)’이 유명하다. 적공(翟公)은 서한(西漢) 때 사람으로, 정위(廷尉) 벼슬을 할 때에는 문전성시를 이루다가, 파직당하자 참새 그물을 쳐 놓을 정도로 문간이 한산하기만 하였는데, 다시 복직됨에 빈객들이 찾아가려 하자, 그 문에 큰 글씨로 써서 내걸기를[大署其門曰] “一死一生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態 一貴一賤 交情乃見”이라 하고 일체 거절하였다 한다. 《史記 汲鄭列傳 論》
[주D-007]약상(弱喪) : 어려서 집을 떠나 오래도록 타향에서 편안하게 살다 보니 마침내 고향에 돌아갈 줄도 모르게 된 경우를 말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삶만을 좋아하는 것이 미혹된 것이 아닌 줄 어찌 알랴. 그리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 역시 어려서 집을 떠나 돌아갈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으랴.[予惡乎知說生之非惑邪 予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라고 하였다.

 

 

목은시고 제35권
 금주음(衿州吟)
우거(寓居)하는 시골집에 제(題)하다.


위태하든 순탄하든 양쪽 모두 느긋하니 / 危途順境兩閑閑
조물도 나는 어쩔 수 없다며 웃고 말리라 / 造物依然笑我頑
귀에 들어온 싫은 소리 이미 잊어버렸는데 / 已忘惡聲初入耳
얼굴에 무안한 기색 재차 뜨게 할까 보냐 / 肯敎慚色再浮顔
서쪽 재엔 금주 길의 흰 구름 가로 걸리고 / 白橫西阪衿州路
동쪽 문엔 관악산의 푸른 산빛이 뚝뚝 듣네 / 翠滴東門冠岳山
보리밭과 벼 논에 새 비가 넉넉히 내렸으니 / 麥隴稻田新雨足
이제부터는 세상 속에서 달리길 원치 않노라 / 從今不願走塵間


목은시고 제35권
 금주음(衿州吟)
관악산 신방사(新房寺)의 주지(住持)는 무급(無及)의 도반(道伴)이다. 그가 삭방(朔方)에서 돌아와 이 절간에 머물면서 노숙(老宿) 아무 아무와 함께 먹을 것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먹여 주었다.

신도가 스님을 먹이는 것이 원래 정상인데 / 檀越齋僧是故常
산승이 속인을 먹이다니 놀라서 넘어질 만 / 山僧饗俗可驚惶
흰 눈처럼 쌓인 만두 푹 쪄낸 그 빛깔 하며 / 饅頭雪積蒸添色
기름이 엉긴 두부 지져서 익힌 그 향기라니 / 豆腐脂凝煮更香
다생의 인연이 많으리니 이 어찌 우연이리오 / 緣厚多生非偶値
한 그릇 밥의 은혜 어떻게 갚을 수 있을는지 / 恩深一飯恐難當
나의 이 말 새겨서 천고토록 전하고 싶어라 / 欲書此語傳千古
만 길도 넘게 하늘에 치솟은 저 석벽 위에다가 / 石壁天齊萬仞强


[주D-001]나의 …… 위에다가 : 당(唐)나라 원결(元結)의 〈대당중흥송(大唐中興頌)〉에 “하늘 높이 치솟은 저 석벽 위에다가 갈고 다듬어서 이 노래를 새기나니 어찌 천만년만 전할 뿐이겠는가.[石崖天齊 可磨可鐫 刊此頌焉 何千萬年]”라는 말이 나온다.

백사집 제1권
 시(詩)
강가의 누각에서 비를 구경하다.


구름 사이 햇살은 푸른 초원에 새어 비치고 / 雲間日脚漏靑蕪
구름 밖의 영주봉은 한 점이 우뚝한데 / 雲外靈珠一點孤
먼 봉우리에서 오는 바람 소리 들리더니 / 風自遠峯來有響
침침하게 비를 몰아서 평호를 지나가누나 / 朦朦吹雨過平湖
영주는 관악산(冠岳山)의 봉우리 이름이다.


사가시집 제14권
 시류(詩類)
한강루(漢江樓)의 망년회(忘年會) 석상(席上)에서


제천정 위에다 화려한 자리를 베푸니 / 濟川亭上綺筵開
열두 동년들이 말을 달려 모여들었네 / 十二同年走馬廻
관악산 높은 봉들은 눈썹먹처럼 푸르고 / 冠岳高攢靑似黛
새로 불은 한강 물은 포도주보다 파랗네 / 漢江新漲綠於醅
긴 바람 솔솔 불어라 비는 흥을 재촉하고 / 長風細細雨催興
지는 해 더디어라 봄은 술잔에 가득구려 / 落日遲遲春滿杯
성은에 실컷 배불러 기취를 노래하노니 / 飽得聖恩歌旣醉
술자리서 옥산이 무너짐을 애석해 마소 / 樽前莫惜玉山頹


[주D-001]성은(聖恩)에 …… 노래하노니 : 기취(旣醉)는 《시경》 대아(大雅)의 편명으로, 그 시에 “이미 술로써 취하고, 이미 은덕으로 배불렀으니, 군자께서는 만년토록, 당신의 큰 복을 크게 누리리로다.〔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곧 임금의 두터운 은의(恩義)를 입은 부로(父老)들이 그 은의에 답하여 노래한 것이다.
[주D-002]술자리서 …… 마소 :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의하면, 혜강(嵇康)의 사람됨은 마치 우뚝하게 빼어난 낙락장송(落落長松) 같아서, 그가 취했을 때는 또한 마치 옥산(玉山)이 곧 무너지려는 것과 같았다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옥산이 무너진다는 것은 술에 만취해 곧 넘어지려는 모습을 말한다.

 

성호전집 제1권
 시(詩)
습망재(習忘齋)에 차운하여 부치다


용졸로 자신 지키매 절로 온전하나니 / 用拙存身本自全
오늘에 살며 고도(古道) 흠모함은 집안 유래 있어라 / 居今慕古有由傳
청빈은 청산의 집에서 표출되고 / 淸貧表出靑山宅
지업은 백발의 나이에 증가하누나 / 志業增添白髮年
쇠미한 세상에 어찌 죽은 말 뼈 얘기함을 용납하랴 / 衰俗寧容談死骨
씩씩한 마음에 외려 산 돼지 어깨를 베려고 생각한다 / 壯心猶擬割生肩
숲속에서 캐고 캐어서 누구에게 줄거나 / 中林採採將誰贈
꿈속에도 그리움은
관악산 앞에 걸렸어라 / 夢想長懸冠岳前


 

[주C-001]습망재(習忘齋) : 주부(主簿) 벼슬에까지 오른 강세정(姜世貞)의 당명이다. 《성호전집(星湖全集)》 권3의 〈만강주부(挽姜主簿)〉와 권53의 〈습망재기(習忘齋記)〉 참조.
[주D-001]용졸(用拙) : 두보(杜甫)의 시 〈병적(屛跡)〉에 “소졸(疏拙)함으로써 우리 도 보존한다.〔用拙存吾道〕” 한 데서 온 말로, 생계나 세상살이에는 서툶으로써 본성을 보존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여기서는 은거하여 세상에 나아가지 않음을 뜻한다.
[주D-002]쇠미한……용납하랴 : 재주가 있어도 세상에 쓰이지 못함을 뜻한다. 소왕이 부국강병의 계책을 묻자 곽외(郭隗)가 인재의 등용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옛날 임금이 천금을 주어 사람을 시켜 천리마를 사오게 하였는데, 그 사람이 죽은 천리마의 뼈를 오백금을 주고 사왔습니다. 이에 임금이 대로하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죽은 말의 뼈도 오백금을 주고 사는데, 산 말이겠습니까. 지금 천리마가 오고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과연 일 년도 안 되어 천리마가 세 마리나 이르렀다 하였습니다. 이제 왕께서 인재를 등용코자 하시면, 먼저 저 곽외로부터 시작하십시오. 저 같은 자도 등용되는데 하물며 저보다 어진 이야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하였다. 《戰國策 燕策》
[주D-003]씩씩한……생각한다 : 연령은 많고 벼슬에 오르지 못했으나 씩씩한 기운이 여전함을 뜻한다. 송나라 육유(陸游)의 〈배민(排悶)〉에 “마흔 나이로 위수 가에서 종군했나니, 공명은 운수에 없으나 기운은 여전히 씩씩하다. 백발의 머리로 동오의 저자에서 흠뻑 술 취하여 스스로 긴 칼을 뽑아 돼지 어깨를 자른다.〔四十從軍渭水邊 功名無命氣猶全 白頭爛醉東吳市 自拔長刀割彘肩〕” 하였다.
[주D-004]숲속에서……걸렸어라 : 《시경》〈주남(周南) 권이(卷耳)〉에 “권이를 뜯고 뜯어도 기운 광주리에도 차지 못해, 아! 내 님을 그리워하여 저 큰길가에 버려두노라.〔采采卷耳 不盈頃筐 嗟我懷人 寘彼周行〕” 한 것을 차용하여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형용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백 척 높은 누대 푸른 물가 내려다 보는데, 견여(肩輿)로 성을 나가 함께 올라 구경하네. 먼 포구에 노을 밝으니 비단인양 얼기설기, 급한 여울에 석양 비치니 가늘게 금이 부서지네. 관악산이 푸른 빛 보내와서 자리 위에 들어오고, 양화(楊花)가 빛 물결 띄어 성 저쪽에 떨어진다. 함께 노는 여러 재상들 손님 대접 잘도 하네. 배 잇고 술 두루미 옮기니 흥 다시 깊어지누나.” 하였다.

완당전집 제5권
 서독(書牘)
기삼십육(其三十六)


중이 와서 초의의 서한을 전하고 또 다포도 전해주었네. 이곳의 샘맛은 바로 관악산(冠岳山) 한 맥에서 흘러나온 것인데 두륜산(頭輪山)에 비하면 갑을(甲乙)이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공덕(功德)의 삼사(三四)는 있겠기에 빨리 보내온 차를 시험해 보니 샘맛도 좋고 차맛도 좋아서 바로 한 조각 희환의 인연이었네.
이는 차가 그렇게 만든 것이요 편지로 그런 것은 아니니 그렇다면 차가 편지보다 낫단 말인가? 더구나 근일에는 일로향실(一爐香室)에 죽 머물러 있다니 무슨 좋은 인연이 있는 거요. 왜 갈등을 부숴버리고 한 막대를 멀리 날려 나와 이 차의 인연을 같이 아니하는 거요.
또한 근자에 자못 선열(禪悅)에 대하여 자경(蔗境)의 묘가 있는데 더불어 이 묘체(妙諦)를 함께 할 사람이 없으니 몹시도 사와 한 번 눈썹을 펴고 토론하고 싶은데 이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소.
약간의 졸서가 있어서 부쳐 보내니 거두어 들이기 바라오. 비오기 전의 잎은 얼마나 가려 놓았는지. 어느 때나 부쳐 보내 이 차의 굶주림을 진정시켜 주려는가 날로 바라며 불선.
향훈에게 가는 한 장의 편지는 행여 전달해 주기 바라네.


 

[주D-001]일로향실(一爐香室) : 초의(草衣)의 선실(禪室) 이름인데, 완당이 예서로 써준 액자가 지금도 보존되어 있음.

완당전집 제6권
 제발(題跋)
단전 관악산시에 제하다[題丹鄽冠嶽山詩]


관악산 시의 제사구(第四句)인 “몇 천 년을 한결같이 푸르렀도다[一碧幾千年]”는 극히 웅기(雄奇)하여 사람들이 이해하기도 쉽고 또 혹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이구의 “바위와 솔이 서로 엇물렸구려[巖松相鉤連]”에 이르러는 겉으로 보면 순필로 지나가서 심상하게 접속해 온 것 같은데 이는 가슴속에 오천 권(五千卷)이 들고 붓 밑에 금강저(金剛杵)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천연스럽게 맞추어져서 비록 작자라도 스스로 알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범식(凡識)과 속체(俗諦)로서 가능하고 가해(可解)할 수 있는 일이랴. 옛사람의 묘한 곳은 오로지 이 한 경지에 있으니 이 때문에 옛날의 작자는 지금 사람과 다른 것이다.
지금 네가 안력이 원만하고 익숙한 경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능히 이 한 경(境)을 터득했단 말이냐. 옛사람은 오히려 오천 권ㆍ금강저를 가지고도 인공(人工)으로써 이루는데 이는 자연히 흘러나와서 암암리에 옛사람과 합치되었으니 비하자면 조창(槽廠)의 노행자(盧行者)의 보리명경(菩提明鏡)의 게(偈)와 같다. 때문에 오조(五祖)가 마음이 수그러져 저도 모르게 굴순(屈)을 전해주게 된 것이다.


 

[주D-001]금강저(金剛杵) : 범어로 벌절라(伐折羅)로서 본디 인도의 병기(兵器)를 삼았는데 밀종(密宗)이 빌려서 견리(堅利)의 지(智)를 표(標)하여 번뇌를 끊고 악마를 굴복시키는 것으로 사용하였음. 《인왕경 상(仁王經上)》에 “手持金剛杵者 標起正智 猶如金剛”이라 하였음.
[주D-002]조창(槽廠)의 …… 게(揭) : 노행자는 선종(禪宗) 동토(東土) 제육조(第六祖) 혜능(慧能)을 이름. 8세에 부친을 여의고 장성하자 집은 더욱 가난하여 나무를 해다가 팔아 편모(偏母)를 봉양하였다. 하루는 저자에 들어가 어떤 사람이 《금강경(金剛經)》을 외우는 것을 듣고 그 얻은 곳을 물어서 기주(蘄州) 황매산(黃梅山)의 오조(五祖) 홍인선사(弘忍禪師)를 찾아갔다. 오조는 묻기를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영남(嶺南)에서 왔습니다.” 하였다. 조사(祖師)는 말하기를 “영남 사람은 불성(佛性)이 없다.” 하자. 혜능은 “사람은 곧 남북(南北)이 있지만 불성은 어찌 그렇겠습니까.” 하니, 사는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고서 대방(碓房)에 들어가 쌀을 찧으라 하고 인하여 노행자라 불렀다. 거기서 8개월을 지내자 오조가 부수(付授)할 때가 왔음을 알고 중도(衆徒)로 하여금 각기 득법(得法)의 게(偈)를 써 올리라 하자, 이때 상좌(上座) 신수(神秀)가 게를 쓰기를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慝塵埃”라 하니 , 혜능은 듣고서 “나의 소득(所得)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 하고 가만히 동자(童子)를 고용(雇傭)하여 밤에 벽 사이에다 한 게를 쓰기를 “菩提本非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慝塵埃”라 하였다. 오조는 그것을 알고서 남몰래 대방(碓房)에 들어가 묻기를 “쌀이 희냐?” 하니 “희지만 키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오조는 막대기로 대(碓)를 세 번 치면서 갔다. 혜능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그날 밤 삼경에 조상의 방에 들어가니 조사는 마침내 의법(衣法)을 주었다.
[주D-003]굴순(屈>) : 포백(布帛)의 이름인데 제일포(第一布)로서 대세포(大細布)를 말한다. 《의초육첩(義楚六帖)》 22에 “寶林傳云 唐言第一布 紡本棉花心爲之 卽達摩所傳之衣七條也 自師子尊者傳與”라 하였음.

 임하필기 제31권
 순일편(旬一編)
삼막(三幕)


관악산(冠岳山)은 시흥(始興)과 과천(果川)의 경계에 있다. 그곳에 삼막사(三幕寺)라는 절이 있는데, 삼한 시대에 지어진 고찰이다. 신라 승려 원효(元曉)는 성이 설(薛)이고, 의상(義湘)은 성이 아(牙)이고, 윤필(尹弼)은 성이 윤(尹)이니,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제이다. 관악산에서 나누어 살았는데 원효의 일막(一幕)은 지금 폐허가 되었고, 의상의 삼막(三幕)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윤필의 이막(二幕)은 염불암(念佛庵)이다. 이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이 삼성산(三聖山)이라고 한다.


 

추강집 제3권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함양(咸陽)으로 가는 건숙(健叔)을 보내며 6수


한강 남쪽 언덕에는 말이 자주 울어대고 / 漢江南畔馬頻嘶
관악산 앞에는 보리 잎 가지런히 자랐네 / 冠岳山前麥葉齊
고향 길 이번 행차는 흥겨운 놀이 아니니 / 鱸膾此行非玩興
사립문서 사면 소식이나 들었으면 좋겠소
/ 柴門要聽放金鷄



함양 땅 옛 무덤엔 시든 풀만 무성한데 / 咸陽故塚迷衰艸
어찌 인간 세상에 어진 아들 있음을 -원문 빠짐- / 那□人間有子賢
무덤 앞에서 지전 사를 때 얼굴 막 알고서 / 化楮墳前方識面
신령이 응당 울어 가을 하늘을 꿰뚫으리라 / 神靈應泣徹秋天



콩 열매 처음 익고 나무 그늘 짙은데 / 豆莢初黃老樹陰
물가 오두막엔 매미 울음 어지러우리라 / 衡門面水亂蟬吟
정과정 한 곡조는 춘풍 같은 솜씨이니 / 苽亭一曲春風手
‘春’이 어떤 본에는 ‘秋’로 되어 있다.
이 모두 왕손께서 임금 그리는 마음이리 / 盡是王孫戀主心



이별가 부르면서 새로 빚은 술을 드니 / 渭城唱裏提新釀
고양의 옛 주도를 전송하기 위함이라 / 爲送高陽舊酒徒
성세에는 한 인재도 버려짐이 없는 법 / 聖世一才無棄擲
왕손이여 귀한 몸 함부로 하지 마시라 / 王孫勿謾千金軀

다섯

깊은 가을 기러기는 남국으로 날아가니 / 高秋征雁賓南國
필마 타고 타향에서 세월을 보내겠소 / 匹馬他鄕度歲年
등불 끈 뒤 침상 바람이 취한 얼굴로 불면 / 燈落床風吹醉面
꿈 깨었을 때 두류산엔 달이 높이 솟으리라 / 夢醒月上頭流天

여섯

술업은 평생토록 백에 하나 못 이루니 / 術業平生百不成
앞길 막힌 오늘은 소리 삼키며 우노라 / 途窮今日泣呑聲
나 같은 서생이야 사방 떠돌 연분 있지만 / 書生有分飄南北
무슨 일로 왕손께서는 영남으로 가시는가 / 何事王孫嶺外征


 

[주D-001]고향……좋겠소 : 내 고향 부근으로 떠나는 이번 행차는 흥겨운 유람이 아니라 귀양 가는 길이므로, 금계(金鷄)를 놓아 사면하는 명령을 빨리 듣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노회(鱸膾)는 농어회로 고향을 그리는 뜻으로 쓰인다. 진(晉)나라 오군(吳郡) 출신 장한(張翰)이 혼란한 세상에 벼슬살이를 나갔다가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고향의 별미인 농어회와 순챗국을 그리워하며 말하기를, “인생이란 뜻에 맞음이 귀하거늘, 어찌 수천 리 밖에서 벼슬하여 이름과 작위를 구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晉書 卷92 張翰列傳》금계는 죄수를 사할 때에 걸었던 물건으로, 7장쯤 되는 대나무에 4척의 닭을 만들어 매달았다. 머리를 황금으로 꾸미기 때문에 금계라 한다. 《新唐書 卷48 百官志》
[주D-002]정과정(鄭瓜亭) : 고려 의종(毅宗) 때 정서(鄭敍)가 지은 노래이다. 유배지에서 자신의 외로운 신세를 접동새에 비기어 임금을 사모하는 간절한 심정을 읊었다. 고정(苽亭)은 과정(瓜亭)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주D-003]고양(高陽)의 옛 주도(酒徒) : 고양 땅의 옛 술꾼이란 말로, 술을 좋아하며 방탕하여 구속을 싫어하는 사람을 뜻한다. 역이기(酈食其)가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처음 만날 때 유방이 유생(儒生)을 싫어한다고 하자, “나는 고양의 술꾼이다.〔吾高陽酒徒也〕” 하였던 데서 유래한다. 《史記 卷97 酈生列傳》

해동역사 속집 제13권
 지리고(地理考) 13
산수(山水) 1 경내(境內)의 산(山)과 도서(島嶼)


○ 삼각산(三角山)ㆍ남산(南山)
《조선부(朝鮮賦)》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각산은 곧 왕경(王京)의 진산(鎭山)으로서 산세가 가장 높은데, 왕궁은 그 산의 산허리에 있다. 산마루를 바라보니 높은 산들이 마치 톱니처럼 생겼다. ○ 홍제원(弘濟院) 동쪽으로부터 반 리도 채 못 가서 하늘이 한 관문(關門)을 만들었는데, 북쪽으로는 삼각산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남산에 접하였으며, 그 사이로는 말 한 필만이 통과할 수 있어서 험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 ○ 동쪽으로 여러 산을 바라보면 모두 팔짱을 끼고서 둘러싸고 있는 형세이다. 삼각산에서 남산에 이르기까지 산빛은 모두 희면서도 약간 붉어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온 것 같다.
○ 백악(白岳) -혹은 북악(北岳)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북악산은 한성부(漢城府)의 경내에 있다. 본조(本朝) 초에 조선국의 왕이 이 산에 의지하여 도읍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북악산은 국성(國城)의 북쪽에 있다. 만력(萬曆) 연간에 왜적들이 왕성에 웅거해 있으면서 북악산을 등지고 한수(漢水)를 향해 있었는데, 이 산이 바로 그 산이다.
《유서찬요(類書纂要)》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경기에는 백악이 있다.
○ 용두봉(龍頭峯) -혹은 용산(龍山)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산은 조선국의 한강 동쪽에 있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중국 사신이 조선에 이르면 한강 가에서 잔치를 하고 양화도(楊花渡)에서 배를 띄워 용두봉에 올라가 강산의 승경(勝景)을 두루 구경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각산은 경도(京都)의 진산(鎭山)으로, 남쪽으로 문수봉(文殊峯)에 이르러 백악(白嶽), 응봉(鷹峯), 인왕산(仁王山)이 되는데, 왕궁(王宮)이 거기에 있다. 낙산(酪山)이 그 왼쪽에 솟아 있고, 무악(毋岳)이 그 오른쪽에 걸터 있으며, 목멱산(木覓山)이 앞에서 공읍(拱揖)하고 있고, 한강이 그 남쪽을 흐르니, 이곳은 참으로 만대토록 영원할 크나큰 터전이고 하늘이 만들어 낸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요새이다. 백악은 혹 북악(北岳)이라고도 하는데, 도성 안 정북쪽에 있다. 목멱산은 바로 동월(董越)의 《조선부》에서 말한 남산이다. 용두봉은 바로 잠두봉(蠶頭峯)으로, 혹 용산이라고도 하며, 양화도의 동쪽 강 언덕에 있다.
○ 백두산(白頭山) -혹은 불함산(不咸山), 개마산(蓋馬山),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백산(白山), 장백산(長白山),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옥저열전(東沃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개마는 현 이름으로 현도군(玄菟郡)에 속하며,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다. ○ 《대청일통지》에 이르기를, “개마대산은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를 보면, ‘현도군에 서개마현(西蓋馬縣)이 있다.’ 하였는바, 산을 인하여 현을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후한서》 주석의 잘못된 설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후위서(後魏書)》 물길열전(勿吉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물길국의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의 말로는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못하므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대소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간다.
《괄지지(括地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말갈국(靺鞨國)은 옛 숙신이다. 그 나라에는 백산(白山)이 있는데, 조수(鳥獸)와 초목이 모두 희다.
《금사(金史)》 고려열전(高麗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옛 숙신의 지역에 산다. 그곳에는 산이 있는데, 백산이라고 한다. 대개 장백산(長白山)은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
《행정록(行程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주(同州)에서 40일을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는데, 동쪽으로 대산(大山)이 바라보인다. 금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곳은 신라산(新羅山)이다. 그 산속에서는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가 산출되며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산은 바로 장백산이다.
섭융례(葉隆禮)의 《요지(遼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백의관음(白衣觀音)이 사는 곳이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한다. 옛날에는 속말하(粟末河)라고 불렀는데, 태종(太宗)이 진(晉)을 격파하고서 혼동강(混同江)으로 고쳤다. 그곳의 풍속에는 나무를 파내어서 배를 만드는데, 길이가 8척가량 되며, 모양이 베틀의 북[梭]과 같이 생겼으므로 사선(梭船)이라고 한다. 배 가장자리에 노를 하나 매달아 놓았는데, 단지 고기잡이를 하는 데 쓴다. 수레를 건넬 때에는 두 척의 배를 나란히 잇대거나 혹은 세 척의 배를 잇댄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길림(吉林) 오라성(烏喇城)의 동남쪽에 있으면서 1000여 리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동쪽으로 영고탑(寧古塔)에서 서쪽으로 봉천부(奉天府)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산이 모두 이 산에서 발맥(發脈)한다.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어서 압록강(鴨綠江), 혼동강(混同江), 토문강(土門江) 세 강이 발원한다. 옛 이름은 불함산이며, 또한 태백산이라고도 하고 백산이라고도 한다. 《산해경》에는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불함산이라고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하였으며, 《진서(晉書)》에는 “숙신씨는 불함산 북쪽에 있다.” 하였으며, 《후위서》에는 “물길국의 남쪽에는 도태산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태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못하므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대소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간다.” 하였다. 《금사》 세기(世紀)를 보면, “그 북쪽에는 혼동강과 장백산이 있다. 혼동강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부른다. 이른바 백산(白山)이니 흑수(黑水)니 하는 것은 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또 예지(禮志)를 보면, “대정(大定) 12년(1172)에 장백산신(長白山神)을 봉해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삼고는 그 산 북쪽 지역에 묘우(廟宇)를 세웠다. 명창(明昌) 4년(1193)에 다시 책봉하여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로 삼았다.” 하였다. 섭융례의 《요지》를 보면,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하였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옛 회령부(會寧府)에서 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1000리에 걸쳐서 길게 뻗어 있으며, 높이가 200리이다. 그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못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이고, 북쪽으로 흐르는 것이 혼동강이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阿也苦河)이다.” 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를 보면, “장백산은 바로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다.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건대, 서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압록강이고, 동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토문강이며, 북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혼동강으로, 아야고하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는바, 고금의 명칭이 다르게 변한 것이다. 금나라 때 세운 묘우는 무너졌으며, 조선조에서는 높여서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으로 삼았다. 사당은 길림성의 서남쪽에 있는 온덕항산(溫德恒山)에 있는데, 보름에 제사 지낸다. 강희(康煕) 17년(1678)에 황지(皇旨)를 받들어서 대신(大臣)인 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등을 파견하여 장백산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이들이 산에 올라가다가 산기슭 한 곳을 보니, 사방에 수풀이 빽빽하게 우거진 가운데 둥글고 평평한 지역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았다. 숲을 나와서 1리쯤 가자 향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황화(黃花)가 향기를 자욱하게 풍기고 있었는데, 산 중턱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위로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대신들이 꿇어앉아서 황지(皇旨)를 읽자, 구름과 안개가 확 걷히면서 산의 형세가 환하게 드러나, 작은 산길이 있어서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 중간에 섬돌 모양으로 된 석대(石臺)가 있었는데, 평탄하여서 사방을 둘러보기에 좋았다. 산꼭대기는 둥근 형세를 이루고 있었는데, 눈이 쌓여서 환하게 밝았다. 그 위에 올라가 보니 다섯 개의 봉우리가 부(府)처럼 빙 둘러 솟아 있었고, 남쪽에 있는 한 봉우리가 조금 낮아서 문(門)과 같았다. 그 가운데 있는 연못은 몹시 깊었는데, 절벽에서의 거리가 50장(丈)가량 되었으며, 둘레가 40여 리 정도 되었다. 산의 사방 주위에서는 수많은 샘물이 분출하였는데, 바로 세 개의 큰 강이 발원하는 곳이었다. 강희 23년(1684)에 다시 주방협령(駐防協領) 늑출(勒出) 등을 파견하여 다시금 주위를 돌면서 산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너비와 길이 및 길게 뻗은 것이 《대명일통지》에서 말한 것과 같았다. 산꼭대기에는 다른 나무는 자라지 못하였고, 풀들은 대부분이 흰 꽃이 피어 있었다. 남쪽 산기슭은 길게 뻗어 엉켰다가 두 줄기로 나뉘어졌다. 그 가운데 서남쪽을 향한 한 줄기의 동쪽 경계는 압록강이고, 서쪽 경계는 통가강(通加江)인데, 산기슭이 다한 곳에서 이 두 강이 모였다. 다른 한 줄기는 산의 서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수백 리를 뻗쳐 있는데, 여러 물이 나뉘어지는 곳이므로 구지(舊志)에서는 이를 통틀어 분수령(分水嶺)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서쪽으로 흥경(興京) 주변에 이르기까지 수목이 무성하고 빽빽하여 하늘의 해를 가리는데, 그 지방 토착민들은 이를 납록와집(納綠窩集) -삼가 살펴보건대, 와집(窩集)은 바로 수림(樹林)을 칭한다.- 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부터는 서쪽으로 흥경의 문(門)에 이르러서 마침내 개운산(開運山)이 된다. 납록와집에서부터 북쪽으로 뻗은 한 산등성이는 그 길이가 40여 리나 되는데, 토착민들은 이를 가이민주돈(歌爾民朱敦) -삼가 살펴보건대, 가이민주돈은 바로 장령(長嶺)의 칭호이다.- 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들어가서 마침내 천주산(天柱山)과 융업산(隆業山)이 되는데, 빙빙 돌면서 굽이져 뻗어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이 서린 것과 같다. 그 사이에는 땅을 인하여 이름을 지어 산(山)이 되고 영(嶺)이 된 것이 한두 곳이 아닌데, 그 모두가 장백산의 지맥(支脈)이다. 장백산의 신령스럽고 기이함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일컬어져 왔거니와, 신성(神聖)한 황조(皇朝)가 발상(發祥)하여 지금에 와서 흥성해졌는바, 억만년토록 영원할 크나큰 왕업은 이 산과 더불어 끝이 없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통지(通志)》에 이르기를,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니, 이 장백산은 실제로는 주(州)에서 동남쪽으로 600리 되는 곳에 있다.
《대청개국방략(大淸開國方略)》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높이가 200여 리이고, 1000여 리에 걸쳐서 뻗어 있다. 웅대한 모습으로 우뚝하니 높이 솟아 있어 영기(靈氣)가 모인 곳이다. 산 위에는 못[潭]이 있는데, 달문(闥門)이라고 한다. 못은 둘레가 80리이며, 근원이 깊고 흐름이 넓어 압록강, 혼동강, 애호강(愛滹江) 세 강의 물이 나온다. -삼가 살펴보건대, 애호강은 바로 아야고하(阿也苦河)의 음이 변한 것이다.
《강희기가격물론(康煕幾暇格物論)》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오라(烏喇)의 남쪽에 길게 뻗어 있다. 장백산의 사방 주위에는 수많은 샘물이 솟아나와 송화강(松花江), 압록강(鴨綠江), 토문강(土門江) 세 큰 강의 근원이 된다. 그 남쪽 산기슭은 두 개의 큰 줄기로 나눠지는데, 서남쪽으로 향한 한 줄기는 동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통가강에 이른다. 대개 고려의 여러 산들은 모두 그 지맥(支脈)이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북쪽 달단(韃靼)의 남쪽 경계에는 큰 산이 있는데, 이름이 백두산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두산은 회령부(會寧府)에서 서쪽으로 7, 8일 걸리는 곳에 있다. 옛날의 불함산으로, 중국 사람들은 장백산이라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광종(光宗) 10년(959)에 압록강 바깥쪽의 여진(女眞)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 살게 하였다.” 하였는데, 백두산이라는 칭호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후한서》에 이른 바 개마산(蓋馬山) 역시 백두산이다. 《대명일통지》와 《대청일통지》에는 평양의 서쪽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대청일통지》에는 또 지금의 개평현(蓋平縣)이 그곳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고려의 윤관(尹瓘)이 여진의 갈라전(曷懶甸)을 격파하고 9성(城)을 설치한 곳이 지금 함흥(咸興) 북쪽 지역인데,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를 보면,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에 끼어 있고,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에 접하고 있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개마가 백두산인 것이 분명하다.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은 일찍이 개마산을 백두산이라고 하면서, “참으로 개(蓋)의 초성(初聲)은 실로 해(奚)와 같은데, 우리나라의 음은 백(白)을 일러 해(奚)라고 하고, 마(馬)를 일러 말[摩尼]이라 하고, 두(頭)를 일러 역시 머리[摩尼]라 한다. 개마(蓋馬)란 것은 해마니(奚摩尼)이며, 해마니는 백두(白頭)이다.” 하였는데, 이 설이 그럴 듯하다.
○ 마천령(磨天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천령은 함흥부의 동북쪽에 있으며, 조선에서는 동북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마천령은 단천부(端川府)의 동쪽에 있다.
○ 극적혼산(克敵昏山)
《금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연골사호(烏延鶻沙虎)는 갈라로(曷懶路) 극적혼산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갈라로는 지금의 함흥부 북쪽 지역인바, 이 산은 마땅히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 영강산(永岡山)ㆍ올평산(兀平山)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영강산은 함흥 주변에 있다. 또 올평산이 함흥에서 북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두 산은 상고할 수가 없다.
○ 을리골령(乙離骨嶺)
《금사》 세기(世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연혁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철령(鐵嶺) -안변부(安邊府)의 남쪽에 있다.
《명사》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연혁 철령위조(鐵嶺衛條)에 나온다.
○ 소백산(小白山) -바로 백두산의 남쪽 봉우리로 압록강이 발원하는 곳이다-ㆍ충천령(沖天嶺) -삼수부(三水府)의 서쪽에 있다-ㆍ증산(甑山) -단천부(端川府)의 서쪽에 있다-ㆍ회산(檜山) -이원현(利原縣)의 서쪽에 있다-ㆍ성대산(聖代山) -북청부(北靑府)의 북쪽에 있다-ㆍ입원산(立元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도안산(道安山) -정평부(定平府)의 남쪽에 있다-ㆍ비백산(鼻白山) -정평부의 북쪽에 있다-ㆍ우선산(遇仙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대박산(大博山) -영흥부(永興府)의 서쪽에 있다-ㆍ반룡산(盤龍山) -문천군(文川郡)의 서남쪽에 있다-ㆍ검화산(劍華山) -바로 검봉산(劍峯山)의 잘못된 표기로, 안변부(安邊府)의 서남쪽에 있다.
《수도제강(水道提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백산 이하는 압록강조(鴨綠江條)에 나오고, 증산은 두만강조(豆滿江條)에 나오고, 회산 이하는 해조(海條)에 나온다.
○ 적유령(狄踰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삭주(朔州)의 서북쪽에 적유령이 있는데, 조선에서는 그것을 서북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적유령은 강계부(江界府)의 남쪽에 있다.
○ 소철산(小鐵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철산은 압록강의 동쪽 강 언덕, 의주(義州)의 경내에 있는데, 강을 건너는 곳이다. 또 서남쪽은 요동 경내의 승복도(僧福島)와 피도(皮島)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철산은 상고할 수가 없다.
○ 용골산(龍骨山) -어떤 데에는 용호산(龍虎山)으로 되어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골산은 용주성(龍州城)의 동쪽에 있다. 용주는 동녕로(東寧路)에 속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나라 때 동녕로를 평양에 설치하였다. 용주는 지금의 용천군(龍川郡)이며, 용골산은 용천군의 동쪽에 있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호산은 용천군의 진산(鎭山)이다.
○ 웅골산(熊骨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웅골산은 철산군(鐵山郡)의 진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웅골산은 철산군의 동쪽에 있다.
○ 장화산(長花山)ㆍ천성산(天聖山)ㆍ영산(靈山)ㆍ향산(香山)ㆍ웅화산(熊花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화산은 철주(鐵州)의 서남쪽에 있다. 철주는 정융진(定戎鎭)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철주는 지금의 철산군이며, 장화산은 철산군의 서남쪽에 있다.- 천성산은 은주(殷州)의 동북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은주는 지금의 은산현(殷山縣)이며, 천성산은 은주현의 동북쪽에 있다.- 영산은 선주(宣州)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주는 지금의 선천부(宣川府)이며, 영산은 선천부의 동남쪽에 있다.- 향산은 연주(延州)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연주는 지금의 영변부(寧邊府)이며, 향산은 영변부의 동쪽에 있는데, 어떤 데에는 묘향산(妙香山)이라고 하였다.- 웅화산은 곽주(郭州)의 동북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곽주는 지금의 곽산군(郭山郡)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여 곽산군의 능한산성(陵漢山城)을 웅화산에 해당시키는데, 옳은지의 여부는 모르겠다.- 이상의 주(州)는 모두 동녕로에 속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성산은 은주의 동북쪽에 있고, 영산은 선주의 서남쪽에 있고, 웅화산은 곽주군의 동북쪽에 있다. 또 육령산(育靈山)이 선주군의 동남쪽에 있으며, -삼가 살펴보건대, 육령산은 영산(靈山)인데 잘못하여 겹쳐 기록한 것인 듯하다.- 용골산(龍骨山)은 용천군(龍川郡) 성의 동쪽에 있다.
○ 굴암산(屈巖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굴암산은 정원부(定遠府) 성의 동쪽에 있는데, 바위 골짜기가 구불구불해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원부는 지금의 구성부(龜城府)이다. 《여지승람》에는 굴암산(窟菴山)으로 되어 있는데, 굴암산은 구성부의 동쪽에 있다.
○ 천마산(天馬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마산은 정주(定州)의 진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에는 마산(馬山)으로 되어 있다. 천마산은 옛 정주의 북쪽에 있다.
○ 능한산(凌漢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곽산군 성은 산꼭대기에 있는데, 지서(志書)에는 능한성(凌漢城)이라고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능한산은 곽산군의 동북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강(大定江) 서쪽 강 언덕에 능한산이 있다.
○ 봉두산(鳳頭山)ㆍ가산령(嘉山嶺)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두산은 바로 가산군의 진산이다.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가면 가산령이 가장 높은데, 그 꼭대기에는 ‘효성(曉星)’이라고 하고 ‘망해(望海)’라고 하는 곳이 있으니, 모두 사신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봉두산은 가산군 북쪽에 있다. 가산령이 《여지승람》에는 서문령(西門嶺)으로 되어 있는데, 가산군의 서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산령은 가산군의 서쪽에 있다. 가산군이라는 이름은 이로 인한 것이다.
○ 마두산(馬頭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두산은 영주(寧州)의 동쪽에 있다. 영주는 동녕로에 속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안주(安州)이며, 마두산은 안주의 남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두산은 영주(靈州)의 동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의주(義州)이다. 의주에서 남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역시 마두산이 있다. 《대청일통지》에서 이른 마두산과 《대명일통지》에서 이른 마두산은 바로 한 산이다. 영주는 영주(寧州)의 음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
○ 천보산(天寶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보산은 조선에 있는데, 산에는 사리(舍利)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천보산은 영유현(永柔縣)의 남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보산은 조선 국성(國城)의 서쪽 경계에 있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이여송(李如松)이 장수를 파견해 천보산에 주둔해 있으면서 왜적을 막게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 마읍산(馬邑山)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龍朔) 1년(661)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소정방(蘇定方)이 패강(浿江)에서 고구려를 격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아서 마침내 평양(平壤)을 포위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읍산은 평양성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마읍산을 빼앗고서 마침내 평양을 포위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여 마읍산이 평양부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 노양산(魯陽山) -혹은 용산(龍山),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한다-ㆍ금수산(錦繡山)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 동북쪽에 노양산이 있는데, 노성(魯城)이 그 위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노양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산은 일명 구룡산이라고도 하고 노양산이라고도 한다. 금수산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산꼭대기에는 99개의 못[池]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수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는데, 바로 평양의 진산(鎭山)이다.
○ 위산(葦山)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에서 서남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위산이 있는데,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산은 평양부의 서남쪽에 있다.
○ 모란봉(牧丹峯)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계사년(1593)에 대군(大軍)이 평양성에 다가가자 왜적들이 모란대(牡丹臺)를 지키면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모란봉은 금수산에 있다.
○ 토산(兔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기자묘(箕子墓)는 평양성 서북쪽 모퉁이의 토산에 있는데, 평양성과의 거리가 반 리도 채 안 되며, 산세가 몹시 높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다.
○ 건복산(乾伏山)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임진년(1592)에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왜적과 통하게 하였는데, 소서행장(小西行長)과 평양의 건복산 기슭에서 만났다.
○ 관문산(觀門山)ㆍ화산(花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관문산은 토산현(土山縣)의 북쪽에 있다. 토산현은 원나라 때에는 동녕로(東寧路)에 속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은 지금의 상원군(祥原郡)이다. 《여지승람》에는 관음산(觀音山)으로 되어 있다. 관문산은 상원군의 북쪽에 있다.- 화산은 토산현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화산은 상원군의 동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관문산은 토산현의 북쪽에 있고, 화산은 토산현의 동남쪽에 있는데, 모두 토산현 경계의 큰 산이다.
○ 금당산(金堂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당산은 황주(黃州) 삼화현(三和縣)의 서북쪽에 있다. 황주는 동녕로에 속하며, 안악현(安岳縣), 삼화현(三和縣), 용강현(龍岡縣), 함종현(咸從縣), 강서현(江西縣) 다섯 현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당산은 삼화부의 서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당산은 황주 삼화현의 서북쪽에 있다. 지(志)에 이르기를, “삼화는 황주에서 서남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 정방산(政方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방산은 황주의 경계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방산은 황주의 남쪽에 있다.
○ 자비령(慈悲嶺)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령은 평양성에서 동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령은 평양에서 동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송나라 순희(淳煕) 2년(1175)에 고려의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자비령에서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40여 성을 들어 금나라에 붙고자 하였으나, 금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조위총이 복주(伏誅)되었다. 원나라 지원(至元) 6년(1269)에 고려의 신하인 이연령(李延齡) 등이 서경(西京) 이하 60성을 들어 원나라에 귀부하자, 원나라에서는 이로 인하여 동녕로를 설치하고는 자비령을 경계로 하였다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자비령은 서흥부(瑞興府)에서 서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는데, 평양에서 경도(京都)로 통하는 옛길이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을 그어 국경으로 삼았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강역고(高麗疆域考)에 상세하게 나온다.- 일명 파령(巴嶺)이라고도 한다. 《중주집(中州集)》을 보면, 왕적(王寂)의 ‘송장중모사삼한시(送張仲謀使三韓詩)’에 이르기를, “압강에선 도엽이 아침에 건너는 걸 맞이하고, 파령에선 송화로 밤중에 탕 끓이리라.[鴨江桃葉朝迎渡 巴嶺松花夜煮湯]” 하였는바, 중국 사람들도 파령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산 이름 가운데에서 평안도 지역이 특별히 상세하여, 매번 이르기를, “주(州)는 동녕로에 속하였다.” 하였다. 이는 대개 원나라 때 절령(岊嶺) 북쪽 지역이 동녕로에 속하여 산천의 이름이 원나라의 판도(版圖)에 실려 있으므로 《대명일통지》를 찬수하는 자가 상세하게 실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개막산(蓋幕山) -삭주(朔州)의 북쪽에 있다-ㆍ수양산(首陽山) -해주(海州)의 동쪽에 있다-ㆍ구금산(駒芩山) -황주에 있는 구현(駒峴)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ㆍ악산(嶽山) -바로 약산(藥山)의 잘못된 표기로, 영변부의 서쪽에 있다-ㆍ이산(耳山) -영변부의 북쪽에 있다-ㆍ백벽산(白碧山) -운산군(雲山郡)의 서쪽에 있다-ㆍ태조산(太祖山) -안주(安州)의 동쪽에 있다-ㆍ대목산(大木山) -바로 대박산(大朴山)의 잘못된 표기로, 강동현(江東縣)의 북쪽에 있다-ㆍ무학산(舞鶴山) -강서현(江西縣)의 북쪽에 있다-ㆍ부석산(傅石山) -바로 박석산(縛石山)의 잘못된 표기로, 송화현(松禾縣)의 남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막산 이하는 해조(海條)에 나오고, 악산 이하는 청천강조(淸川江條)에 나오고, 백벽산은 대령강조(大寧江條)에 나오고, 태조산 이하는 대동강조(大東江條)에 나온다.
○ 성불령(成佛嶺)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불령은 북쪽으로는 산을 베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베고 있다. 산꼭대기를 바라보면 구름 위로 높이 솟아 있다. 그 북쪽은 곧 자비령으로, 원나라 때에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개는 평산부(平山府)의 서쪽에 있다.
○ 총수산(蔥秀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총수산은 벽처럼 우뚝 솟아 물가에 임해 있는데, 삐쭉 솟아 있어서 빼어나게 아름답다. 옛 이름은 총수산(聰秀山)인데, 내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면서 일찍이 기문(記文)을 지은 것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총수산은 평산부의 북쪽에 있다.
○ 노고달령(奴古達嶺)
《요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고려를 정벌할 적에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동주(銅州), 곽주(霍州), 귀주(貴州), 영주(寧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소배압(蕭排押)이 북도(北道)를 경유해 진격하여 노고달령에 이르러 적병을 만나 패주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요사》 소배압열전(蕭排押列傳)을 보면, “소배압이 북도를 경유해 진격하여 개경 서쪽의 고개에 이르러서 적병을 격파하였다.” 하였는바, 노고달령이 개성의 서쪽에 있음을 징험해 알 수가 있다.
○ 송악(松嶽) -혹은 숭산(崧山)이나 신숭산(神嵩山)이라고 하기도 한다.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성부는 북쪽으로 숭산에 의지해 있다.
《원사(元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대(五代) 시대 때 고려는 송산(松山)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송악은 개성부의 북쪽에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숭산은 개성부에 있는데, 일명 숭악(嵩岳)이라고도 한다. 후당(後唐) 때 왕건(王建)이 이 산에 의지하여 도읍을 세웠다.
○ 성거산(聖居山)ㆍ천마산(天磨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거(聖居), 송악(松嶽), 천마(天磨)는 모두 산 이름이다. 송악은 바로 개경의 진산(鎭山)이다. 성거산과 천마산은 동북쪽에서 뻗어나왔다.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하늘에 꽂힌 듯이 솟아 있다. 그 가운데 세 봉우리는 마치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 같은데, 가운데 한 봉우리는 더욱 높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조금 낮아서 마치 시자(侍者)의 모습과 같다. 산에는 항상 안개와 구름이 끼어 있어 보기에 매우 좋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성거산과 천마산은 모두 송악의 북쪽에 있다.
《삼재도회속집(三才圖會續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흥동(大興洞)은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천석(泉石)이 깨끗하다. 여름이면 녹음이 땅을 덮고 목련화(木蓮花)가 피어 맑은 향기가 골짜기에 가득하며, 가을이면 붉은 단풍과 누런 잎새가 물 밑까지 비쳐,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낸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오봉봉(五鳳峯)
《무몽원집(無夢園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지(志)를 보면, 오봉봉은 개성부에 있는데, 봉 아래에 감로사(甘露寺)라는 절이 있다.
○ 오관산(五冠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오관산은 경기 장단부(長湍府)에서 서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다. 산꼭대기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어 마치 관(冠)과 같이 둥글게 모여 있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역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평산령(平山嶺)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산령은 개성부에서 1리 되는 곳에 있는데, 흙 빛깔이 모두 붉다. -삼가 살펴보건대, 평산령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 도봉산(道峯山)
《전등록(傳燈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원(淸源) 아래 제9대인 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의 법사(法嗣)에 고려 도봉산(道峯山) 혜거국사(慧炬國師)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도봉산은 양주(楊州)의 남쪽에 있다.
○ 금강산(金剛山)
《화엄경(華嚴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북쪽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는데,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1만 2000보살과 더불어서 항상 《반야경(般若經)》을 설법한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강산은 조선의 강원도에 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과 그 이름이 같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이로부터 동방에 금강산이 있어 법희보살(法喜菩薩)이 불사(佛事)를 일으킨다.” 하였는데, 두 나라에서 모두 이로 인하여 금강산이라고 한 것이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폭동(萬瀑洞)은 금강산 안에 있다. 일백 곳에서 흘러나와 날리는 샘물이 골짜기 속으로 쏟아져 내려 그 형상이 하나가 아니므로 만폭동이라고 한 것이다. 골짜기 어귀에 산봉우리가 있어 오인봉(五人峯)이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푸른 학이 그 모퉁이에 살고 있다.” 한다. 깊고 큰 물이 하나 있는데, 관음담(觀音潭)이라고 한다. 관음담 가의 돌벼랑은 푸른 이끼로 덮여 있는 탓에 미끄러워서 사람들이 다 칡넝쿨을 부여잡고서야 지나갈 수 있으므로, 그 이름을 수건애(手巾崖)라고 한다. 돌 가운데가 방아 절구같이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관음보살이 빨래를 한 곳이다.” 한다.
보덕굴(普德窟) 앞에 이르면 빠른 여울물이 돌에 엉키면서 벼랑에 부딪치는데, 물방울이 눈처럼 휘날려 맑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하다. 돌바닥은 물이 깊어서 푸른 쪽빛과 같다. 또 두어 걸음 가면 성난 폭포가 구슬을 뿜고 눈을 흩날리면서 쏟아져 내리는데, 그 가운데 큰 것은 12층이고, 작은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므로 만폭동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 아래의 못을 주연(珠淵)이라고 한다. 또 돌이 하나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거북이 못 가운데에 엎드려 있는 것과 같아 귀담(龜潭)이라고 부른다. 또 한 못이 있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화룡담(火龍潭)이라고 한다. 그 위에 봉우리가 있는데, 사자암(獅子巖)이라고 한다.
만폭동 안에 보덕굴이 있는데, 절벽을 파서 판자를 걸치고 구리쇠 기둥을 바깥쪽에 세운 다음 작은 방 3칸을 그 위에다가 만들고는 관음각(觀音閣)이라고 하였다. 관음각을 쇠사슬로 묶어서 바윗돌에 못 박아 놓았는데, 공중에 떠 있어서 사람이 올라가면 흔들린다. 그 안에 부처를 모신 함을 안치하고 구슬과 옥으로 장식하였으며, 바깥쪽에는 철망(鐵網)을 둘러서 손으로 만질 수 없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아래에 나오는 《삼재도회속집》에서 인용한 세 조항은 모두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포구산(浦口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포구산은 강원도 고성군(高城郡)에서 동쪽으로 9리 되는 곳에 있다. 고성포(高城浦)에는 우뚝 솟은 바위가 계단과 같이 층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위에는 100여 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그 바위 북쪽에 또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모두 돌로 이루어졌다.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를 바라보면 5리쯤 되는 곳에 돌로 된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병풍을 둘러친 듯하다. 봉우리 아래에 돌이 있는데, 용이 끌어당기고 범이 움켜잡는 것 같은 기이한 모습이다. 또 돌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마치 사람이 함께 말하는 것 같은데, 돌의 빛깔은 모두 희어서 푸른 바다에 광채가 비쳐,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 한계산(寒溪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계산은 강원도 인제현(麟蹄縣)에서 동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있다. 산 위에는 성(城)이 있다. 냇물이 성안으로부터 흘러나와서 곧바로 폭포를 이루어 내려가는데, 수백 척이나 떨어져 내려 바라보면 마치 흰 무지개가 하늘에 드리워진 것 같다. 원통역(圓通驛)으로부터 동쪽은 왼쪽과 오른쪽이 모두 큰 산이어서 동부(洞府)는 깊숙하며, 계곡의 물은 이리저리로 흘러서 무려 36번이나 건너야만 한다. 나무들은 마치 갈대자리를 말아 세운 듯이 위로 하늘에 솟았고 곁에는 가로 뻗은 가지가 없는데,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욱 높아서 그 꼭대기를 볼 수가 없다. 또 그 남쪽에는 봉우리가 절벽을 이루었는데,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기괴하며, 너무 높아서 나는 새도 지나가지 못한다. 그 아래에는 맑은 샘물이 바위에 부딪쳐서 못을 이루었으며, 반석이 평평하여 둘러앉을 만하다. 또 동쪽의 몇 리는 동구(洞口)가 매우 좁으며, 가느다란 길이 벼랑에 걸려 있는데, 바위 구멍은 입을 벌리고 있고 봉우리들은 높이 솟아 있다. 이에 마치 용이 끌어당기고 범이 움켜잡을 것 같다. 층층다리를 겹쳐 놓은 것 같은 것이 수없이 많아서 그 좋은 경치는 영서(嶺西)에서 으뜸이다.
○ 분려산(分黎山)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 탄열현(呑列縣)에는 분려산이 있다. 분려산은 열수(列水)가 나오는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열수는 바로 한수(漢水)이다. 분려산은 한수의 근원이 있는 곳이니, 금강산이 아니면 바로 오대산(五臺山)이다.
○ 오대산(五臺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강의 근원은 금강산과 오대산에서 나온다.
《열조시집(列朝詩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릉(江陵)은 옛 명주(溟州)로, 오대산 아래에 있다. 삼한(三韓)에는 12동천(洞天)이 있는데, 이곳이 두 번째 동천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오대산은 강릉부의 서쪽에 있다.
단단대령(單單大嶺)
《후한서》 예열전(濊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단대령(單大嶺) 동쪽의 옥저, 예, 맥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예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단단대산(單單大山)의 고개 서쪽은 낙랑에 속하여 동부도위(東部都尉)가 통치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文獻備考)》를 보면, “함경도 검산(劍山)의 분수령(分水嶺)에서부터 철령, 금강산, 오대산에 이르기까지가 대관령인데, 1000여 리에 걸쳐 뻗쳐 있는바, 바로 단대령이다.” 하였다.
○ 황룡산(黃龍山) -흡곡현(歙谷縣)의 서쪽에 있다-ㆍ추지령(秋池嶺) -바로 추지령(楸池嶺)의 잘못된 표기로, 통천군(通川郡)의 서쪽에 있다-ㆍ두사산(頭蛇山) -바로 두타산(頭陀山)의 잘못된 표기로, 양구현(楊口縣)의 북쪽에 있다-ㆍ장산(張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오갑산(五甲山) -바로 오신산(五申山)의 잘못된 표기로, 김화현(金化縣)의 북쪽에 있다-ㆍ공작산(孔雀山) -홍천현(洪川縣)의 동쪽에 있다-ㆍ치악산(雉岳山) -원주(原州)의 동쪽에 있다-ㆍ우두산(牛頭山) -바로 용두산(龍頭山)의 잘못된 표기로, 제천현(堤川縣)의 북쪽에 있다-관악산(冠岳山) -과천현(果川縣)의 서쪽에 있다-ㆍ수리산(修理山) -안산군(安山郡)의 남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룡산 이하의 산들은 해조(海條)에 나오고, 오갑산 이하의 산들은 한강조(漢江條)에 나온다.
○ 임존산(任存山)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존성(任存城)은 백제 서부(西部)의 임존산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임존성은 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인바, 이 산은 마땅히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임야기산(任射岐山)으로 되어 있다.
○ 부용산(富用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용창산(富用倉山)은 바로 뱃사람들이 말하는 부용산(芙蓉山)이다. 그 산은 홍주(洪州)의 경내에 있으며, 산 위에는 창고가 있고, 또 쌓아 둔 곡식이 많은데, 변경(邊境)에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쓰기 위해 대비해 놓은 것이므로 부용(富用)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 홍주산(洪州山)ㆍ동원산(東源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주산은 자운섬(紫雲苫)의 동남쪽 수백 리 지점에 있는데, 고을이 그 아래에 이루어져 있다. 또 동쪽에는 금이 산출되는 산 하나가 범같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을 동원(東源)이라고 한다. 작은 산 수십 개가 성같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산 위에는 못[潭]이 하나 있는데, 맑기가 거울 같고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삼가 살펴보건대, 두 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주산은 충주(忠州)의 서쪽 경계인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홍주가 이 산 아래에 세워져 있으며, 조금 동쪽에 동원산이 있는데, 금이 산출된다.” 하였다.
○ 소석산(小石山)
《후위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왕이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신의 나라 서쪽 경계에 있는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의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폐하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오는 것을 긴 뱀처럼 흉악한 것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를 가리킨다.- 이 길을 막고 바다에 침몰시킨 것입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석산은 지금의 충청도 서해 바닷가에 있어야 한다.
○ 월악산(月嶽山)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나라 헌종(憲宗) 5년(1255)에 차라대(車羅大)가 고려를 정벌하면서 충주를 도륙하자, 사람들이 월악사(月嶽祠)로 올라가서 피란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월악산은 충주의 동쪽에 있다.
○ 속리산(俗離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속리산은 충청도 보국현(報國縣) -삼가 살펴보건대, 보은현(報恩縣)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쪽에 있다. 산봉우리 아홉 개가 뾰족하게 솟아 있기 때문에 구봉산(九峯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嶽)이라고 일컬었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꼭대기에는 문장대(文藏臺)가 있는데, 층층이 쌓인 돌이 천연적으로 이루어져 공중에 높게 솟았다. 그 높이는 몇 길인지조차 알 수가 없으며, 그 너비는 사람 3000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문장대 위에는 가마솥만 한 구덩이가 있어서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불어나지 않는다. 이 물이 세 줄기로 나누어져서 허공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洛東江)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錦江)이 되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흘러 달천(達川)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흘러 들어간다.
산 아래에는 팔교(八橋)와 구요(九遙)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산 양쪽 언덕이 넓어져서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면 멀고 멀어서 마치 땅 끝인 듯 의심스럽다가 거기까지 가서 보면 또다시 멀고 멀다. 이렇게 아홉 번을 구불어지다가 비로소 법주사(法住寺)에 닿기 때문에 구요라고 한 것이다. 구요 속에는 물 한 줄기가 돌고 돌아 굽이져서 흐르는데, 한 굽이마다 하나의 다리가 있어, 도합 여덟 개이기 때문에 팔교라고 한다. 첫 번째 다리는 수정교(水精橋)로, 다리 위에 비각(飛閣)이 있어 사람들이 그 각 속으로 다닌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갈령(葛嶺) -마땅히 부여현(扶餘縣)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백제 성읍조(百濟城邑條)에 나온다.
○ 차현산(車見山) -바로 차현(車峴)의 잘못된 표기로, 공주(公州)의 북쪽에 있다-ㆍ가야산(加耶山) -해미현(海美縣) 북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조(海條)에 나온다.
○ 조령(鳥嶺) -주흘산(主屹山)을 덧붙인다.
《광여기(廣輿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령은 충주에 있는데, 70여 리나 넓게 뻗어 있다. 가파른 벼랑이 깎아지른 듯하며, 그 사이로 길 하나가 실처럼 통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령은 경주(慶州)의 서북쪽 경계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상주(尙州)의 경계에 접해 있다. 70여 리나 넓게 뻗어 있는데, 가파른 벼랑이 깎아지른 듯하며, 그 사이로 길 하나가 실처럼 통해 있다. 관목(灌木)이 우거져 있어서 말을 타고 줄지어서 갈 수가 없다. 조선에서는 이를 남도(南道)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명나라 만력(萬曆) 21년(1593)에 왜적들이 왕경(王京)을 버리고 도망치자, 별장(別將) 유정(劉綎)이 상주에서 왜적들을 추격해 조령에 이르렀는데, 왜적들이 험고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별장 사대수(査大受)가 충주에서 괴산감(槐山監)으로 넘어가 조령의 뒤편으로 나아가자, 왜적들이 크게 놀라 부산포(釜山浦)로 옮겨 가 있으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계책을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조령은 문경현(聞慶縣)에서 서쪽으로 27리 되는 곳에 있다. 주흘산은 문경현 북쪽에 있으면서 문경현의 진산(鎭山)인데, 조령과는 서로 연이어져 있다. 《명시종(明詩綜)》을 보면, 조선 사람인 이효칙(李孝則)의 조령(鳥嶺) 시가 실려 있는바, 그 시에 이르기를, “갈바람에 누런 잎 우수수 떨어지고, 주흘산 높아 반쯤 구름 속에 잠겼네.[秋風黃葉落紛紛 主屹山高半沒雲]”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죽령(竹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죽령은 충주의 동쪽에 있는데, 구부러진 길이 빙빙 돌아서 자못 험준하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왕경을 버리고 죽령을 넘어서 경상도로 달아났는데, 거기가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죽령은 풍기군(豐基郡) 북쪽에 있다.
○ 노음산(露陰山)
《정지거시화》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사람 조운흘(趙云仡)은 상주의 노음산 아래로 물러나 살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노음산은 상주의 서쪽에 있다.
○ 빙산(氷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빙산은 경상도 의성현(義城縣)의 동남쪽 40리 되는 곳에 있다. 빙산의 큰 바위아래에 돌구멍[石穴]이 있는데, 구멍의 입구는 높이가 3척, 폭이 4척 8촌, 가로의 길이가 5척 1촌이다. 이것을 풍혈(風穴)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구멍이 바위 아래에서 곧장 밑으로 나 있는데, 너비가 한 길이며, 길이는 겨우 한 길까지만 잴 수 있으며, 그 아래로는 구부러져서 깊이를 잴 수가 없다. 입하(立夏)가 지난 뒤부터 얼음이 엉기기 시작하여 아주 더우면 얼음이 굳게 얼다가 장마가 들면 얼음이 풀린다. 봄가을로는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겨울에는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이것을 빙혈(氷穴)이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도산(島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도산은 울산군(蔚山郡) 남쪽에 있다. 명나라 만력 25년(1597)에 마귀(麻貴) 등이 울산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자, 왜적들이 모두 도산으로 달아나 산 앞에 연이어서 세 개의 성채(城寨)를 세우고 버티면서 지켰다. 도산은 울산성보다 높은 데다가 왜적들이 또 그 위에 새로 석성(石城)을 쌓아 몹시 견고하였다. 이에 중국 군사들이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얼마 뒤에는 패해 돌아왔다. -삼가 살펴보건대, 도산은 울산부(蔚山府)의 남쪽에 있다.
○ 백석산(白石山) -바로 백암산(白巖山)의 잘못된 표기로, 영양현(英陽縣)의 동쪽에 있다-ㆍ청량산(淸涼山) -영양현의 서쪽에 있다-ㆍ모자산(母子山) -영천현(永川縣)의 북쪽에 있다-ㆍ파음산(巴音山) -바로 웅이산(熊耳山)의 잘못된 표기로, 상주(尙州)의 서쪽에 있다-ㆍ적암산(赤巖山) -바로 적상산(赤裳山)의 잘못된 표기로, 무주부(茂州府)의 동쪽에 있다-ㆍ화악산(華岳山) -밀양부(密陽府)의 북쪽에 있다-ㆍ금오산(金鼇山) -경주(慶州)의 남쪽에 있다-ㆍ윤산(輪山) -동래부(東萊府)의 북쪽에 있다-ㆍ웅산(熊山) -웅천현(熊川縣)의 북쪽에 있다-ㆍ무계산(武溪山) -상고할 수가 없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낙동강조(洛東江條)에 나온다.
○ 지리산(智異山) -혹은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두시전주(杜詩箋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지(志)를 보면, 지리산은 남원부(南原府)에서 동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여진(女眞)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의 산맥이 뻗어 내려와서 이곳까지 이른다. 또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두보(杜甫) 시(詩)의 ‘방장삼한외(方丈三韓外)’에 대한 주석과 《통감집람(通鑑輯覽)》에서 모두 “방장은 대방군(帶方郡)에 있는데, 바로 남원의 남쪽이다.” 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글과 아래에 나오는 《삼재도회속집》에서 인용한 두 조항은 모두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학동(靑鶴洞)은 지리산 속에 있다. 길이 몹시 좁아서 겨우 한 줄로 통해 있다. 몸을 구부리고 올라가 몇 리쯤 가면 넓게 트인 지경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은 사방이 모두 기름진 옥토(沃土)라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靑鶴)이 그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청학동이라고 부른다. 대개 옛날에 속세를 피해 사는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세속(世俗)에 전하기를, 최치원(崔致遠)이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 구정봉(九井峯)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석(動石)은 월출산(月出山) 구정봉 아래에 있다. 세 개의 돌이 층암(層巖) 위에 튀어나와 있는데,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된다. 서쪽으로는 산꼭대기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는데, 그 무게는 비록 수백 명을 동원해도 움직일 수 없으나 한 사람이 흔들면 떨어질 듯하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석(靈石)이라고 칭하며, 군(郡)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구정봉은 영암현(靈巖縣) 월출산에 있다.
○ 황산(黃山)
《유서찬요》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충청도는 옛 마한(馬韓)의 영역으로, 황산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황산은 전라도 금구현(金溝縣)의 서쪽에 있는바, 충청도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모악산(母岳山) -태인현(泰仁縣) 동쪽에 있다-ㆍ무목산(無木山) -바로 무등산(無等山)의 잘못된 표기로, 광주(光州)의 동쪽에 있다-ㆍ송경산(松京山) -바로 송광산(松廣山)의 잘못된 표기로, 순천부(順天府)의 서쪽에 있다-ㆍ천관산(天冠山) -장흥부(長興府)의 남쪽에 있다-ㆍ용잠산(龍岑山) -바로 용천산(龍泉山)의 잘못된 표기로, 담양부(潭陽府)의 서쪽에 있다-ㆍ추월산(秋月山) -담양부의 서쪽에 있다-ㆍ한라산(漢拏山)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모악산은 금강조(錦江條)에 나오고, 무목산 이하의 산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라산은 제주(濟州)의 남쪽에 있다.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가 있다. 세속에서는 이 산을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운급서(雲笈書)》에 이르기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부라악(浮羅岳)에 내려왔다.” 하였고, 한유(韓愈)의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에, “해외의 여러 나라 가운데 탐부라(耽浮羅), 유구(琉球), 모인(毛人) 등의 나라는 동남쪽으로 천지(天池) 가에 있다.” 하였다. 탐부라는 지금의 제주이니, 부라악은 과연 한라산을 가리키는 것인가?
○ 서산(瑞山)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이르기를, “고려 목종(穆宗) 10년(1007)에 탐라(耽羅)의 바다 속 남쪽에서 산이 솟아올랐다. 그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솟아오를 때에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땅이 뒤흔들려서 우레가 치는 듯하였는데, 7일 밤낮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갰다. 산의 높이는 100여 길이나 되고 둘레는 40여 리이다. 초목이 없고 연기가 그 위를 덮고 있어서 바라보면 마치 석유황(石硫黃) 같다.’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태학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전공지가 그 산 아래에 가서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올렸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서산은 정의현(旌義縣)에 있다.

이상은 경내에 있는 산(山)이다.

○ 장자도(獐子島)
《초학집(初學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계(天啓) 정묘년(1627)에 적(敵)이 조선을 약탈하여 황해도(黃海道)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문욱(周文郁)이 수군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다가 배가 뒤집혔는데, 장자도(獐子島)에 신인(神人)이 있어서 그로 하여금 나뭇등걸을 타고 바다에 떠 있게 해 살아날 수 있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장자도는 지금의 신도(薪島)로, 용천부(龍川府)의 남쪽에 있다.
○ 석도(蓆島)ㆍ초도(椒島)ㆍ가도(椵島) -혹 피도(皮島)라고도 한다.
《원사(元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녕로(東寧路)의 선주(宣州)는 석도진(蓆島鎭)을 관할한다. ○ 맹주(孟州)는 초도진(椒島鎭)과 가도진(椵島鎭)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석도는 바로 석도(席島)인 듯한데, 은율현(殷栗縣) 서쪽에 있다. 초도는 풍천부(豐川府) 서쪽에 있고, 가도는 철산부(鐵山府) 남쪽에 있다.
《명사(明史)》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계(天啓) 1년(1621)에 모문룡(毛文龍)이 조선을 구원하러 갔다가 피도에 군진(軍鎭)을 설치하였다. 피도는 또한 동강(東江)이라고도 하는데,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대해(大海) 가운데에 있으며, 둘레가 80리이고,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북쪽 해안에서 바닷길로 80리를 가면 바로 청(淸)나라 경계이며, 그 동북쪽 바다 너머는 바로 조선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피도는 바로 가도이다.
○ 위도(葦島)
《명산장왕향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염주(鹽州)의 바다 가운데 위도(葦島)란 섬이 있는데, 10여 리쯤 되는 평탄한 개펄에 해조(海潮)가 넘나든다. 예전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방경(金方慶)이 백성들을 시켜 이곳에 제방을 쌓아 큰 못을 만들고는 개간하여 벼를 심었는데,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생활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염주는 지금의 연안부(延安府)이며, 위도는 정주(定州) 앞바다에 있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의 군사들이 여러 성을 공격해 오자 위도로 들어가서 지켰다. 김방경이 백성들에게 제방을 쌓고 종자를 뿌리게 하여, 백성들이 처음에는 몹시 괴롭게 여겼다. 가을이 되자 풍년이 들어 사람들이 이에 의지하여 살아났다.” 하였다.
○ 대청서(大靑嶼)ㆍ소청서(小靑嶼)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청서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숲이 진한 눈썹과 같으므로 고려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소청서는 대청서와 모양새가 같은데, 다만 그 산이 약간 작고 주위에 초석(礁石)이 많을 뿐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도와 소청도는 모두 장연현(長淵縣)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청도는 광주(廣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일명 대청서라고도 한다. 원나라 문종(文宗)이 그의 형의 아들인 타환첩목아(妥歡帖木兒)를 고려로 내쫓고서는 그로 하여금 대청도에 살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광서(廣西)의 정강(靜江)으로 옮겼는데, 바로 이곳이다. 대청도와 가까운 곳에 또 소청서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대청도 안에는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궁궐 터가 있어 부서진 기왓장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청요(靑瑤)이다.
○ 몽금도(夢金島) -장연현(長淵縣)의 서쪽에 있다-ㆍ정족도(鼎足島) -초도(椒島) 근처에 있다-ㆍ사야구미(沙也九味) -대청도 근처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백령도(白翎島) -대청도 서쪽에 있다-ㆍ교동도(喬桐島) -강화부(江華府)의 서쪽에 있다-ㆍ각화도(覺華島) -바로 강화도이다-ㆍ연자도(硯子島) -상고할 수가 없다-ㆍ대부도(大富島) -남양부(南陽府)의 서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합굴(蛤窟)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그 산이 그리 높거나 크지 않으며, 주민들도 많이 산다. 산등성이에 용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가면서는 반드시 제사를 드린다. 바닷물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급수문(急水門)과 비교해 볼 때 물빛이 황백색으로 변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합굴은 마땅히 예성강(禮成江)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개성부(開城府) 남쪽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등성이에 용을 모신 사당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광주(廣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이 그다지 높지 않으며, 사는 백성들도 매우 많다. 산등성이에는 용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바다를 오가는 자들은 모두 제사 지낸다.
○ 자연도(紫燕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연도는 바로 광주이다. 산에 기대어 관사(館舍)를 지었는데, 방(榜)에 ‘경원정(慶源亭)’이라고 쓰여 있다. 주민들이 사는 초가집도 많이 있다. 그 산의 동쪽 한 섬에 제비가 많이 살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자연도는 인천부(仁川府)의 서쪽에 있다.
○ 마전도(麻田島)ㆍ고사도(古寺島) -이들 두 섬은 마땅히 초도(椒島) 남쪽 지역에 있어야 한다-ㆍ득물도(得勿島) -어떤 데에는 덕물도(德勿島)로 되어 있으며, 남양부의 서쪽에 있다.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라 성읍조(新羅城邑條) 및 해조(海條)에 나온다.
○ 구두산(九頭山)ㆍ당인도(唐人島)ㆍ쌍녀초(雙女礁)ㆍ화상도(和尙島)ㆍ우심서(牛心嶼)ㆍ계심서(鷄心嶼)ㆍ섭공서(聶公嶼)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9일에 마도(馬島)를 출발하여 사각(巳刻)에 구두산을 지나갔다. 그 산에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그리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숲이 무성하여 맑고 윤기가 도는 것이 보기 좋았다. ○ 당인도(唐人島)는 그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으며, 산은 구두산과 가깝다. 이날 오각(午刻)에 배가 이 섬 아래를 지나갔다. ○ 쌍녀초는 그 산이 아주 커서 도서(島嶼)와 다름이 없다. 앞에 있는 산은 초목이 있기는 하나 그리 빽빽하지는 않았다. 뒤에 있는 산은 퍽 작고 중간이 끊어져 문이 되어 있으나, 아래에 암초가 있어 배가 지나가지는 못한다. 이날 사각(巳刻)에 배가 당인도에서 출발해 이어 이 쌍녀초를 지나갔다. ○ 화상도는 산세가 중첩되어 있고 골짜기가 깊고 숲이 무성하다. 산속에는 호랑이가 많이 산다. 옛날에 불도(佛道)를 배우는 사람이 거기에 살고 있었는데, 산짐승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지금의 엽로사(葉老寺)가 바로 그 유적(遺蹟)이다. 그러므로 고려 사람들이 그 섬을 화상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날 미각(未刻)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 우심서는 작은 바다 가운데에 있다. 한 봉우리가 유독 솟아나 있어 그 형상이 엎어 놓은 바리[盂]와 닮았는데, 가운데가 좀 뾰족하다. 고려 사람들은 그것을 ‘소의 염통[牛心]’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은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다. 또 형체가 이 산과 닮고 약간 작은 것을 계심서(鷄心嶼)라고 한다. 이날 미시(未時) 정각에 배가 이 섬을 지나갔다. ○ 섭공서는 성(姓)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몹시 뾰족한데 바짝 다가가서 보면 마치 담과 같다. 대개 그 형체가 납작해서 가로로 보는 것과 세로로 보는 것이 각각 다르다. 이날 미시 말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화상도는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그 위에는 엽로사(葉老寺)가 있다. ○ 당인도는 청주(淸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구두산과 서로 가깝다. ○ 쌍녀초는 《고려도경》을 보면 섬과 같다고 하였는데, 순전히 돌로 이루어진 섬을 초(礁)라고 한다.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구두산은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숲의 나무가 몹시 무성하게 자라 있다. ○ 우심서는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이곳과 서로 가까운 곳에 또 계심서가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원씨액정기(元氏掖庭記)》를 보면, 고려의 당인도에서는 만화초(滿花草)가 산출된다고 하였는데, 《고려도경》에서 이른 바 당인도는 바로 이곳이다. 이제 《고려도경》의 해도일록(海道日錄)을 근거해 보면, 8일에 해미현(海美縣)의 마도(馬島)에서 출발해 북쪽을 향해 가 9일에 구두산, 당인도, 쌍녀초, 화상도, 우심서, 섭공서 등 여러 섬을 지나고, 이날 인천부(仁川府)의 자연도에서 묵었다. 그런즉 이들 여러 섬은 모두 태안(泰安) 앞바다 북쪽에서 인천 앞바다 남쪽 지역에 있는 것이다.
○ 아자섬(鵶子苫)ㆍ마도(馬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자섬은 또한 알자섬(軋子苫)이라고도 한다. 고려 사람들은 삿갓[笠]을 알(軋)이라고 하는데, 그 산의 형태가 그것과 유사해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 마도는 대개 청주(淸州)의 경내이다. 샘물은 달고 풀은 무성한데, 나라 안의 관마(官馬)를 평상시에는 이곳에 방목(放牧)해서 기르므로 마도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객관(客館)이 있는데, 안흥정(安興亭)이라고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도는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나라 안의 방목지(放牧地)이다. 예전에는 객관이 있었는데, 안흥정이라고 하였다. 알자섬과 가깝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알자섬은 청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마도는 해미현의 서쪽에 있으며, 알자섬은 바로 태안군(泰安郡)의 갈도(葛島)이다. 《고려도경》에 이르기를, “고려 사람들은 삿갓을 알(軋)이라고 한다.” 하였고,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이르기를, “고려의 방언에 삿갓을 개(蓋)라고 한다.” 하였는데, 그 본주(本注)에 “개(蓋)의 음은 갈(渴)이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알(軋)과 갈(葛)은 같은 음임이 분명하다.
○ 용도(龍島) -태안군의 북쪽에 있다-ㆍ원산도(元山島)ㆍ오평도(烏平島) -이들 두 섬은 모두 태안군의 서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군산도(羣山島)ㆍ횡서(橫嶼)ㆍ자운섬(紫雲苫)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군산도(羣山島)는, 산의 열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둘러 있는 것이 마치 성과 같다. 군산정(羣山亭)이 있으며, 서쪽의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주민들의 집은 10여 호가 있다. ○ 횡서(橫嶼)는 군산도의 남쪽에 있는데, 한 산이 특히 크며, 안섬(案苫)이라고도 한다. 앞뒤에 작은 암초 수십 개가 돌 밑뿌리를 둘러 있다. 한 개의 동굴은 그 깊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높고 넓은 것으로 유명하며, 밀물이 들어와 물을 치면 그 소리가 우레와 같다. ○ 횡서에서 묵었다. 일찍 출발하였다. 남쪽으로 하나의 산이 보였는데, 그것을 자운섬(紫雲苫)이라고 하였다. 가로지른 봉우리가 들쭉날쭉 포개져 있었는데, 그 뒤쪽에 있는 두 산은 더욱 멀어 흡사 한 쌍의 눈썹에 푸른빛이 엉겨 있는 것 같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군산도는 만경현(萬頃縣) 서쪽에 있는데, 지금은 고군산도(古羣山島)라고 한다. 횡서와 자운섬은 마땅히 군산도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군산도는 전주(全州)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열두 개의 봉우리가 연이어져서 성(城)과 같다. 그 남쪽에는 횡서가 있는데, 역시 안섬이라고도 한다.
○ 궤섬(跪苫)ㆍ춘초섬(春草苫)ㆍ빈랑초(檳榔礁)ㆍ보살섬(菩薩苫)ㆍ죽도(竹島)ㆍ고섬섬(苦苫苫)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궤섬(跪苫)은 백의도(白衣島)의 동북쪽에 있는데, 그 산은 여러 섬들보다 훨씬 크다. 여러 개의 산이 잇닿아 있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부서진 암초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 춘초섬(春草苫)은 궤섬의 바깥쪽에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외서(外嶼)라고 부른다. 그 위에는 모두 소나무와 노송나무 등이 자라는데, 바라보면 울창하다. ○ 빈랑초(檳榔礁)는 형태가 빈랑나무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대체로 바다 가운데의 암초는 멀리서 바라보면 대부분 이런 형상을 하고 있지만, 오직 춘초섬과 가까운 것만을 가리켜서 뱃사람들이 빈랑초라고 한다. ○ 보살섬(菩薩苫)은 고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위에서 일찍이 기이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어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 죽도(竹島)는, 그 산은 여러 겹이고 숲의 나무들이 짙푸르게 무성하였으며, 그 위에는 역시 주민들이 살고 있고, 주민들 가운데에는 또한 장(長)이 있다. 산 앞에는 흰 돌로 된 암초가 수백 덩어리 있는데, 크기가 같지 않고 흡사 쌓아 놓은 옥과 같다. ○ 고섬섬(苦苫苫)은 죽도에서 그리 멀지 않으며, 그 산의 생김새가 비슷한데, 역시 주민이 살고 있다. 고려의 습속으로는 고슴도치의 털을 고섬섬이라고 한다. 이 산의 나무들은 무성하나 크지 않아 마치 고슴도치털 같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보살섬, 자운섬, 고섬섬, 춘초섬, 궤섬은, 《고려도경》을 보면 서(嶼)보다 작으면서 초목이 있는 것을 섬(苫)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섬들은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빈랑서(檳榔嶼)는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수서(隋書)》를 보면, “대업(大業) 4년(608)에 문림랑(文林郞)과 배세청(裴世淸)을 파견하여 왜국(倭國)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는데, 백제국을 건너 죽도(竹島)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바라보니, 탐라국(耽羅國)이 큰 바다 가운데 있었다.” 하였다. 지금 해미(海美), 태안(泰安), 남포(藍浦), 흥덕(興德) 등지에서 죽도라고 칭하는 섬이 한두 곳이 아닌바, 《고려도경》 및 《수서》에서 칭한 죽도가 어느 섬을 가리키는지는 상세하지가 않다. 고섬섬은 바로 부안현(扶安縣)의 위도(蝟島)이다. 그 밖의 다른 섬은 전라도 서해에 있는 섬들이다.
○ 월서(月嶼)ㆍ난산도(闌山島)ㆍ백의도(白衣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월서(月嶼)는 둘인데, 흑산(黑山)에서의 거리가 아주 멀다. 앞의 것을 대월서(大月嶼)라고 하는데, 달같이 둘러싸고 있다. 예전에 그 위에 양원사(養源寺)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뒤의 것을 소월서(小月嶼)라고 하는데, 문같이 대치하고 있어서 작은 배가 그 사이로 통행할 수가 있다. ○ 난산도(闌山島)는 천선도(天仙島)라고도 하는데, 그 산은 높고 험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벽같이 우뚝 서 있으며,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암초는 마치 거북과 자라의 형상 같다. ○ 백의도(白衣島)는 세 개의 산이 잇닿아 있고, 앞에는 작은 암초가 붙어 있는데, 비스듬히 자란 노송과 쌓여 있는 차조기는 푸르고 윤기가 있어 보기가 좋다. 또한 백갑섬(白甲苫)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의도와 난산도는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대월서와 소월서는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에서 말한 세 섬은 나주(羅州)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어야 한다.
○ 흑산도(黑山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산(黑山)은 백산(白山)의 동남쪽에 있는데, 서로 바라다보일 정도로 매우 가깝다. 처음에 바라보면 극히 높고 험준한데, 바짝 다가서면 산세가 중복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앞의 한 작은 봉우리는 가운데가 굴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가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속에다가 배를 감출 만하다. 옛날의 바닷길을 보면, 이곳 역시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라고 하였는바, 그 당시의 관사(館舍)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가는 길을 바꿨으므로 여기서 더 이상 정박하지 않는다. 섬 위에는 주민들이 사는 부락이 있는데, 나라의 대죄인(大罪人)으로서 죽음을 면한 자들이 흔히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항상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를 적마다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를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서 왕성까지 전달하는데, 봉화를 올리는 것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宋史)》를 보면, “명주(明州) 정해현(定海縣)에서 순풍을 타면 3일 만에 바다에 들어가고, 다시 5일 만에 고려의 흑산에 도착한다.” 하였고, 《원사》를 보면, “지원(至元) 5년(1268)에 일본의 정벌을 의논하면서 탈타아(脫朶兒) 등에게 명하여 흑산도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살펴보게 하였다.” 하였다. 이 섬은 송나라와 원나라 때 해도(海道)의 요충지로써, 고려에서는 흑산현(黑山縣)을 두었으며, 뒤에 나주에 속하였다. 나주에서의 거리가 뱃길로 900리이며, 둘레가 35리이다.
○ 백산(白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배도(排島)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보면 한 산이 보이는데, 아주 큰 것이 마치 성같이 잇닿아 늘어서 있으며, 햇빛이 쬐는 곳은 마치 옥같이 희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산과 흑산은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산은 전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바로 백수산(白水山)이다. 당나라 함형(咸亨) 3년(672)에 고간(高侃)이 고구려의 남은 백성들을 백수산에서 쳤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백산은 흑산의 서쪽에 있는 섬이다. 그런데 《대청일통지》에서는 압록강 서쪽에 있는 백수산을 끌어다 대었는바, 전혀 잘못된 것이다.
○ 구룡도(九龍島)ㆍ고금도(鼓金島)ㆍ가덕도(加德島)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6년(1598)에 진린(陳璘)이 해상을 전담하여 관할하면서 왜적들을 막았는데, 부총병(副摠兵) 진잠(陳蠶), 등자룡(鄧子龍) 등이 모두 그에게 소속되었다. 전함(戰艦) 수백 척을 모두 가덕도(加德島), 거제도(巨濟島), 고금도(鼓金島) 등 여러 섬에 정박시켜 두었다. 충청도에 구룡도란 섬이 있는데, 수족(水族)들이 신령스럽고 괴이스럽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절수영(浙水營)의 중군(中軍) 방일신(方一新)이 절병(浙兵) 3000명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에서 고금도에 주둔해 있는 등자룡에게 가다가 9월 29일에 이 섬에 도착하였다. 밤중에 시각을 알리는 총을 쏘아 수족들을 놀래키자, 태풍이 갑자기 일면서 파도가 솟구치는 바람에 누선(樓船)의 머리와 꼬리 부분이 모두 떨어져 나가 한꺼번에 뒤집어져서 몰사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금도는 바로 고금도(古今島)의 음이 변한 것으로, 고금도는 강진현(康津縣)의 남쪽에 있다. 가덕도는 웅천현(熊川縣)의 남쪽에 있고, 구룡도는 상고할 수가 없다.
○ 추자도(楸子島)
《대청회전(大淸會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륭(乾隆) 5년(1740)에 소전현(蕭田縣)의 백성이 바다로 나아가 무역을 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였는데, 조선국의 추자도에 이르러서 구원을 받아 살아났다. -삼가 살펴보건대, 추자도는 영암군(靈巖郡)의 남쪽에 있다.
○ 한산도(閒山島) -어떤 데에는 안산도(鴈山島)로 되어 있다-ㆍ칠산도(漆山島)
《명사》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1597) 7월에 왜적들이 양산(梁山)과 삼랑(三浪)을 빼앗고서 마침내 경주(慶州)로 들어가고 한산(閒山)을 침입하였다.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의 군사가 궤멸되어 드디어 한산도가 함락되었다. 한산도는 조선의 서해 입구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산도는 고성군(固城郡) 남쪽에 있다.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총병(摠兵) 마귀(麻貴)가 울산(蔚山)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계금(季金)과 우승은(于承恩)에게 남병(南兵)을 거느리고서 조선의 수병(水兵)과 함께 장기(長鬐), 진도(珍島)를 경유해 안산도(鴈山島)에 이르러서 의병(疑兵)을 펼쳐 방비하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산도는 한산도의 음이 와전된 것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산도는 경주의 서남쪽에 있는데, 조선의 서해 입구이다. 오른쪽으로는 전라도의 남원부(南原府)가 막고 있어서 전라도의 외번(外藩)이 된다. 이곳을 한번 잃으면 연해변에 방비가 없게 되어, 천진(天津)과 등주(登州), 내주(萊州)가 모두 돛을 한 번만 올리면 다다를 수 있게 된다. 한산도와 가까운 곳에 또 칠산도(漆山島)가 있다. 명나라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경주에 들어오고 한산도를 침입하면서 밤중에 칠산도를 습격하였는데, 관군이 궤멸되어 달아나 마침내 한산도를 잃었다. 이에 왜적들이 진격하여 남원을 포위해서 함락시켰다.
○ 죽도(竹島)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죽도는 경주의 서남쪽 바닷가에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부산에 배를 정박시키고는 죽도를 왕래하면서 점차 양산(梁山), 웅천(熊川)을 핍박하였다. 얼마 뒤에 양산을 빼앗고서 마침내 경주로 들어왔다. -삼가 살펴보건대, 죽도는 울산부의 남쪽에 있다.
○ 송도(松島)ㆍ우산도(于山島)ㆍ울릉도(鬱陵島)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송도, 울산, 부산에 나누어 주둔해 있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를 보면, “우산도는 바로 왜적들이 이른바 송도(松島)이다.” 하였고, 《여지승람》을 보면, “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디 한 섬으로, 사방 100리이다. 신라 지증왕(智證王) 때 그 나라를 토벌하여 정복하였다. 지금의 울진현(蔚珍縣)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하였고, 《수도제강》을 보면, “울진에서 동쪽으로 바다 건너편에 있는 섬을 천산도(千山島)라고 하는데, 완릉도(菀陵島)라고도 한다.” 하였다. 천산도는 바로 우산도의 잘못된 표기이며, 완릉도는 바로 울릉도이다. 《습유기(拾遺記)》를 보면, “봉래산(蓬萊山)은 그 높이가 2만 리인데, 울이국(鬱夷國)이 있다.” 하였고, 왕유(王維)의 ‘송일본조감서(送日本晁監序)’에, “부상(扶桑)은 냉이 같고 울도(鬱島)는 부평(浮萍) 같으리라.” 하였는데, 울이국이나 울도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듯하다.
○ 절영도(絶影島) -동래부의 남쪽에 있다-ㆍ국도(國島) -안변부(安邊府)의 동쪽에 있다-ㆍ저도(豬島)ㆍ웅도(熊島) -두 섬은 영흥부(永興府)의 동쪽에 있다-ㆍ묘도(卯島) -바로 난도(卵島)의 잘못된 표기로, 단천부(端川府)의 동쪽에 있다-ㆍ신도(薪島)ㆍ연도(連島) -두 섬은 덕원군(德源郡)의 동쪽에 있다-ㆍ화도(花島) -함흥부(咸興府)의 남쪽에 있다-ㆍ사도(沙島) -상고할 수가 없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이상은 도서(島嶼)이다.


 

[주D-001]대황(大荒) : 중국에서 아주 먼 지역을 말한다.
[주D-002]개마대산(蓋馬大山) : 현재의 백두산을 가리킨다는 설과 낭림산맥(狼林山脈) 일대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북한의 이지린은, “개마(蓋馬)는 ‘곰’으로 해석되며, 곰산[熊岳]이 요동에 있다.” 하였다. 《고조선연구 307쪽》
[주D-003]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 각라(覺羅)는 청나라 종실(宗室)의 성이다. 각라무목눌(覺羅武穆訥)로도 표기된다.
[주D-004]통지(通志) : 《성경통지》 권27에는 이 부분이 ‘舊志’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성경통지》에 나오는 안설(按說)을 《대청일통지》를 찬한 자가 자신의 안설(按說)로 만들면서 ‘通志’로 바꾼 것인 듯하다. 여기에서의 안설은 모두 《성경통지》의 안설이다.
[주D-005]영재(泠齋) : 원문에는 ‘冷齋’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두(頭)를 …… 한다 : 원문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7]철주는 정융진(定戎鎭)을 관할한다 : 원문에는 ‘州領定戎二鎭’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州領定戎一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봉두산은 …… 있다 : 원문에는 ‘鳳頭山在郡此’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鳳頭山在郡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도엽(桃葉) : 진(晉)나라 왕자경(王子敬)이 그의 첩(妾)인 도엽을 위하여 지은 악부(樂府)의 청상곡(淸商曲) 이름인데, 여기서는 가기(歌妓)를 가리킨다.
[주D-010]청원(淸源) : 청원 행사 선사(淸原行思禪師)의 별호(別號)로, 길주(吉州)의 청원산(靑原山)에 머물렀으므로 선서(禪書)에서는 흔히 청원(靑原)으로 표기한다.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문하에 청원과 남악(南岳) 두 제자가 있어 2대 법통(法統)이 나왔는데, 청원의 법은 조계(曹溪)로 흘렀고, 남악의 말류(末流)는 임제(臨濟)가 되었다.
[주D-011]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 : 문익(文益)을 가리킨다. 청량은 건당(建唐)에 있는 절 이름이며, 법안종(法眼宗)의 개조이다.
[주D-012]돌바닥은 …… 같다 : 원문에는 ‘石底水蔚始翠藍’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石底水蔚如翠藍’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그 형상이 …… 같아 : 원문에는 ‘形如龜狀潭中’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形如龜伏潭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바깥쪽에는 철망(鐵網)을 둘러서 : 원문에는 ‘外施銅鐵’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外施鐵網’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5]단단대령(單單大嶺) : 안정복은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 바로 그것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위지에서 이른 바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수령(分水嶺)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였으며,《韓國古代史硏究 192쪽》 북한의 이지린은 “단단대령이란 영은 요동반도를 좌우로 나누는 산맥의 최고산인 현 마천령이다.” 하였으며,《고조선연구 310쪽》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천산산(天山山) 줄기로 보고 있다.《조선전사 제2권, 113쪽》
[주D-016]단대령(單大嶺) : 원문에는 ‘單大領’으로 되어 있는데, 《후한서》 권115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17]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나, 마한(馬韓) 54국 가운데 하나인 소석색국(小石索國)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역주삼국사기 3책 676쪽》
[주D-018]길이 …… 있다 : 원문에는 ‘路其隘狹’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30에 의거하여 ‘路甚隘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9]무너진 …… 있다 : 원문에는 ‘頹垣壤塹’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30에 의거하여 ‘頹垣壞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0]배가 …… 지나갔다 : 원문에는 ‘舟過舟下’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8에 의거하여 ‘舟過其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만화초(滿花草) : 만화석(滿花席), 즉 여러 가지 꽃무늬를 수놓은 방석을 만드는 풀로, 골풀을 말한다. 골풀은 줄기는 원기둥형이고 1m 이상 자라는 풀로, 말린 줄기로 자리를 짠다. 등심초(燈心草), 석용추(石龍芻), 골속, 용수초(龍鬚草)라고도 한다.
[주D-022]우승은(于承恩) : 원문에는 ‘千承恩’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성현(成俔)

스님의 숙덕은 인천에 높아 / 上人宿德人天尊
가슴속이 물 거울, 맑아서 안 흐리네 / 胷中水鏡淸不渾
여여히 안 움직여 근원이 항상 맑으나 / 如如不動常澄源
부딪쳐 빛을 발하면 삼연히 번쩍번쩍 / 發光觸處森焞焞
아래로 탁세와 어울려도 세속 때를 벗어나니 / 下與濁世離垢氛
무한한 중생들이 선근을 의지하네 / 無限衆生依善根
관악산이 높아 대지를 짓누르고 / 冠岳山高壓厚坤
관악사는 낡은 절, 산을 문으로 삼았으니 / 冠岳寺古山爲門
산문이 울툭불툭 돌에 이끼가 감겼고 / 山門犖确縈苔痕
다래덩굴ㆍ겨우살이를 범인이 만지지 못하네 / 蘿蔦不許庸人捫
알씬한 나무들이 봄에 한창 무성하고 / 樹木葱蘢春正蕃
바윗돌은 우뚝우뚝 교룡이 쭈그린 듯 / 岩嶅突兀蛟龍蹲
영롱한 정계에 시끄럼이 없어 / 玲瓏淨界無塵喧
패엽을 항시 한가히 뒤적이더니 / 貝葉常向閑中翻
이 땅의 흙 먹는 몸, 임금의 은명 받자와 / 有身食土承君恩
석장을 안고 부득이 진세로 내려오니 / 抱錫未免塵寰奔
산이 비고 방이 고요, 거친 담도 비어 / 山窮室靜空荒垣
바위의 학이 울고 숲의 원숭이도 슬퍼했으나 / 呼號岩鶴悲林猿
산신령은 손뼉 치며 웃고 떠드는 말이 / 山靈拍手笑相誼
“왜 하필 옹색하게 우리[籠] 속에 갇혀 있으리” / 何用局促嬰籠樊
흥천사 큰 절이 지원과도 같은데 / 興天大刹如祗園
국리를 비는 큰 절, 시설도 장엄할싸 / 設利傑閣粧璵璠
향등이 늘어서고 동번이 즐비 / 篝燈列舍羅幢幡
경 논하며 글자 묻는 이 모두 다 명석 / 踏鐵問字皆名髡
성명 아래 훌륭한 제자도 많건마는 / 盛名之下多芳蓀
선심은 오히려 번루를 싫어했네 / 禪心却厭遭敲煩
가을 바람에 높은 날개가 치솟기만 생각하니 / 秋風逸翮思騰騫
번쩍이는 명성은 마음에도 없는 일 / 聲華燀赫非心存
몸을 던져 다시 본원으로 돌아가자 / 不如投身還本元
근심도 즐거움도 은원도 없는 데로 / 身無憂樂無恩冤
마음의 큰 지혜요 불도의 큰 원인 / 心之大智道大原
‘불이 무명언’으로 끝내 들어가니 / 竟入不二無名言
옛 선방의 송월은 그대로 아리땁고 / 舊房松月還嬋媛
나는 샘이 시원히 뿜어 내장을 씻어 주네 / 洗臟更快飛泉噴
산신령이 형제처럼 반가이 맞고 / 山靈邀迓如弟昆
원학이 동기처럼 흔들고 좇는구나 / 猿鶴掀啄諧箎塤
조용한 한 방에 아침 해가 떠오르니 / 翛然一室升朝暾
박산 향로에 연기도 맑고 따스할싸 / 博山煙縷淸而溫
진계를 굽어보니 시커먼 구름 둔쳤는 듯 / 下視塵界頑雲屯
나무들이 냉이마냥 마을을 둘러 있네 / 野樹如薺環孤村
산도 높고, 사람도 높고, 도도 두터우니 / 山高人高道亦敦
이 즐거움 영원히 잊지 않기 맹세하네 / 永矢此樂終不諼
부끄러워라, 내 신세는 미욱하고 어두워 / 愧我身世憨而惛
공리로 가는 곳마다 남모르게 속태우고 / 功利到處潛消魂
일생에 동으로 서로 날치고 다니면서 / 一生役役東西轅
탐전과 번뇌에 무찔리며 사니 / 貪嗔熱惱相屠呑
법문에 귀의하여 묘한 구원 바라나 / 歸依法門希妙援
메추리가 어찌 붕새 날개를 더위잡으리 / 尺鷃安得攀鵬鵾
선탑 선선한 바람에 귀밑머리를 흩날리며 / 鬢絲禪榻風掀掀
삼승 묘리를 토론하고 싶으나 / 三乘妙理要討論
홍진에 골몰한 몸 고의 속의 이인 양 / 汨沒紅塵虱處褌
몸 기울여 부질없이 강가만 바라보네 / 側身空望淸江濆
임술년 칠월 기망날 저녁에 / 壬戌七月旣望昏
격물제 난간 안에서 이 글을 써 보냄 / 書于格物齋中軒

硏經齋全集外集卷四十四
 地理類
東水經 a_277_254d


漢江,達川江,蟾江,新淵江,昭陽江,臨津江,大灘江。 大同江,沸流江,能成江,月唐江。 淸川江,大寧江。 鴨綠江,虗川江,長津江,禿魯江,佟家江,古津江。 豆滿江,龍興江,城川江,洛東江,琹湖江,黃芚江,晉江。 太和江,沙湖江,砥石江。 蟾江,洛水。 泗水,東津江,沙津浦,汭陽江,錦江,大津,頓串津,彌勒川,頓串津。 禮成江。

漢江
漢江者列水也。前漢書志曰。呑列縣分藜山。列水所出。按呑列縣。卽樂浪屬縣。考之地理。今嶺西江陵界277_255a也。分藜者。五臺之山也。列水之源。發自五臺西峯之下曰于筒。紺碧而味洌。山有五泉。中曰玉溪。東曰靑溪。北曰甘露。南曰聡明。而于筒最佳。由于筒而下。南流于月精峯下。爲金剛淵。盤石平鋪。瀑流滙焉。諺傳神龍所伏。春至。餘項之魚隊千百。逬流至淵。奮力而騰。或升或不升。又至珍富嶺之西折而東。爲紬州爲桐江。一名大陰江。環㫌善而西爲廣灘津。折而南流。經三仙之巖。經越東爲錦障江。端廟旣遜位而居之。江上有落花巖。巖可四十餘丈。端廟昇遐。侍女從巖上投江死。故名落花。後建愍忠祠祀之。江中有277_255b紫烟巖甚峭妙。又西折而爲金鳳淵。南流至于大華山。經龍穴赤壁古城之山。爲訥魚灘。經臺巖石門香山之遷。西南流入丹陽境。經隱舟巖。水渟而黝。巖勢截江之半。沿而下石門如闕。其傍竇有仙人田。三島特立江中甚奇。稱島潭。復爲上津下津。上津一稱馬津。絶壁削鐵。名曰栖鶻巖。過長淮村下爲龜潭。石峯浸水。形如龜故名。江之南岸。三石峯臨水峻拔。曰五老。曰玄鶴。曰彩雲。又四五石峯抽撥如筍者曰玉筍。又出丹邱之。折而北流。至淸風府爲北津。又過錦屛之陽。爲風水穴。風秋冬息。春夏噓。産石鍾乳。寒碧277_255c樓對之。又爲靑草湖。江分一派瀦爲湖。色如藍。又經嚴城遷。西南流爲惶恐灘。上下兩灘。石如門閾極險。下灘深黑。水底皆盤石而圬爲釜三數處也。由寒碧之下。通稱巴水。又爲黃江。寒水齋權文純先生書院在其上。又西流爲浦灘北津。北津一稱澶洄江。又爲琹休浦。上有彈琹臺。新羅于勒彈琴處也。又爲月落灘。至于金遷。達川自南來會。
由金灘以上大川五。安東太白山之竹峴川入紬川。橫城泰岐山之淸冷浦。順興馬兒嶺之義豊川入錦障渡。原州雉嶽山之高橋川入淸風277_255d渡。延豊鷄立嶺之月川入浦灘。小川八。江陵大關嶺之橫溪入紬川。㫌善大枝山之蠱川入桐江。花折峙之凈巖。斗滿山之平安川入錦障江。紫盖山之南川入古城之下。鵲城山之羽化川入于馬津之下。黛眉山之玉溪入玉筍之下。白雲山之滄川入于黃江。
達川江自文藏臺西流爲福泉。折而北爲屛淵。經靑山之酒城。淸州之楸洞。東流至于靑州爲鋤川。北流爲槐灘。灘上有孤山亭。柳西坰根別業也。左右蒼壁奇峭。白沙環繞如彎弓。昔李提督擊倭。倭據鳥嶺。不277_256a得過。循州源出松面路。屯尙州。又北至于忠州栗枝柳等之界。經團月之西。與漢江會。萬曆壬辰之亂。申廵邊砬敗于是。達川或名德川。又名獺川。容齋李荇能辨水味。以達水爲國中第一。
由達川以上大川五。聞慶靑華山之華陽川入靑川。槐山車衣峴之槐川。延豊伊火峴之川入槐灘。延豊雞立嶺之川。陰城迦葉山之閱雲川。忠州車儀山之夭桃川。幷入達水之上。
漢水之源。與達川江合。西流爲月落玉江之渡。又西北流爲木溪荷潭莫喜樂固有愁禹至之三灘。至興277_256b元倉下。蟾江自北來會。
蟾江以上大川一。忠州魯隱峙芙蓉山之普光川,巖正川入于荷潭。
蟾江源出橫城之德高山。西流至橫城縣。南流至觀魚臺爲月瀨。經安昌。有汶田岩翠屛之勝。入仰岩津。衆流旣灌。洲渚益廣。兩岸殆不辨牛馬。
仰巖以上大川二。雉嶽之南入于橫江縣西。雉嶽之花似川入于月瀨。
三江旣合。至白巖,丹巖。西流經驪州北。爲黎湖爲惡心灘。灘甚險故名。西心合之惡也。又爲大灘。有石橫277_256c截江中。波濤衝激甚險。又經月溪之遷。至簇尺之島。新淵江自北來會。
簇尺以上大川三。忠州小俗離之天民川入白巖。陽智定水山之福河川入梨湖。砥平不動山之新恩川入西心灘。
新淵江自萬瀑洞西南流爲鳴淵。至新院長楊。西流爲合串江。又南流至金城之松原。爲錢浦爲馬灘。至狼川爲暮日之江。又爲大利津。東南流至春川爲茅津。南滙爲白鷺洲。昭陽江東來會爲新淵。
新淵以上大川三。末暉嶺之新津源入合串江。277_256d法水峙之南川入錢浦。沙台洞之頭陀川入暮日渡。小川四。末暉嶺南之長北川。淮陽炭嶺之沙川入于合串。狼川大成山之龍頭川入大利津。春川之室雲史呑川入于白鷺洲。
昭陽江源出江陵五臺山之陰。西流經麒麟古縣。爲麟麒川。折而北流。經耳屯古縣。過楸洞川。至合江亭爲加奴津。經彌勒遷。西流至鳳皇臺爲蛛湫。折而北流至楊口水山爲南江。西流經富昌驛幾落之遷。爲昭陽江。北入白鷺洲。
由白鷺以上大川一。麟蹄檜田嶺之瑞和川入277_257a于合江亭南小川。金寶洞之川入蛛湫。
新淵下流至席坡嶺。又西南流至超然之遷。爲按板灘。南流至加注山。西折而北流。經烏揖山。至所也山。南流爲龍津。會于漢江。
由龍津以上大川二。江陵柏峙之洪川江入加注之下。加平懸燈山 卽雲嶽山 之朝宗川入于所也山之下。小川五。春川沙峴之大同川入于席坡之下。永平道成山之巨林川入于按板之灘。楊根高達山之迷原川入于烏山之下。楊州黔丹山之窟雲川入于所也山之下。
277_257b漢江之流。與衆水合於簇尺之島。西流經麻岾。經斗尾之遷,渼陰之渡。又西流爲廣津洗姑灘,松坡三田之渡。經禿島狎鷗亭爲漢江。經引慶之陽。爲銅雀露梁龍山之渡。又爲麻浦。經卧牛之陽。又西北流爲楊花渡。淸一統志云各道餽餉皆聚此。又爲北浦孔巖之津。又爲孤島江引寧渡。至掘浦始近海。水乃濁醎。西北流。經探嶽之陽。爲鶴塘浦。又西北流。至于鰲頭。臨津江自北來會。曰祖江。
鰲頭以上大川九。陽智定水山之昭川入于斗尾之東。抱川窟峙之王山川入于渼陰。龍仁石277_257c城山之炭川入于三田渡。果川冠嶽山之良才川。楊州弘福山之中梁川。山南之栗里川。三角山文殊峯之沙川。並入于漢江。水原光敎山之歧灘入于放鶴。三角山之鶯峯川入于孔巖。
臨津者帶水也。前漢書音義。含資縣帶水西至帶方入海。又東國文獻備考。申景濬曰。帶方卽帶水入海處也。帶方之地。在西海之沿。南與百濟隣。東與牛頭城。北與平壤。不甚相遠。帶水乃在漢山猪灘之間。今臨津江也。其源出安邊之老人峙。南流至永豊古縣。西南流。經伊川之防墻峙。至于板橋之南爲德津。經277_257d蛇島西流。經伊川之西。又西南流至安。爲祭堂淵,猪仇灘。至兔山爲北浦。東南流至朔寧。爲羽化津。至漣川。爲橫江爲澄波渡。上下江壁最奇。東岸皆白沙礫。江水由束炭而出。至是平遠。東會大灘爲鍾潭。江上石壁甚峭峻。古有巨鐘沈焉。每收潦水淸則鐘見。今久不見。壁北有麗王祠崇義殿。
鐘潭以上大川三。平康雪呑嶺之楡津川入古城渡。分水嶺之靜山灘入祭堂淵。霜峴之馬龍淵入羽化津。
大灘江源出淮陽雙嶺之松官里。南流爲末訖川爲277_258a唐灘。經赤賓院。爲高郞之勝。南爲平康之亭。淵橫大野之中。平岡紆迴。江岸石壁如屛風。有亭臺樹木之致。有橋曰武陵。入鐵原境爲砌川。有石橫兩岸。如階級之整故名。又爲孤石亭蓴潭。亭臨絶壁。緣而上。有小穴由之。歷巖罅而至臺。平鋪可坐。世傳新羅眞平王有碑。今亡矣。潭有蓴故名。其西厓曰聽澗亭。亭臨壁甚峻。其東厓曰閒栖亭極峭絶。亭寄巖底。欄逼臨削壁。水色紺碧慘黑。又南爲永平之禾積淵。石高起如堆稻幾十尺。上有甘潦至靜。傍有龍穴。云水旱輒禱之。淵淸澈如碧玉。衆巖出水如龜伏。左右多松林。277_258b又爲磨訶川。至楊州靑松里。西爲大灘。
大灘以上大川二。金化佛頂山之南川。楊州祝石嶺之白湖川。永平白雲山之川並入焉。
鐘潭之下流西由袈裟坪。爲淵津爲神直津爲戍灘。至積城縣爲銅浦。高麗林椿所居。其下南岸曰卦岩。高壁浸江。石如削。又爲梨浦津。一名匏盧河。其上鸕鷀岩。有古壘因江壁爲固。唐李謹行破新羅兵于河西。又唐咸平中。劉範卛兵絶河。攻其大鎭七里城者卽此地。至長湍。又爲庫硠赤壁。爲如意津。又爲頭耆津。兩岸靑石壁立數十里。高麗太祖所遊之地。民間277_258c尙傳歌曲。又爲長浦。栗谷李文成先生故亭曰花石在岸上。是爲臨津之渡。又南流爲亭子津,德津。又至交河縣北爲洛河。過鳳皇巖至鰲頭。與漢江會于祖江。
由祖江以上大川三。兎山秀龍山之沙彌川入戍灘。楊州蟹峴之廣灘入亭子津。松都聖居山之沙川入洛河。
漢水與帶水合。播爲燕尾之浦。又分爲二派。一入甲津之海。一入喬桐之海。漢書音義。分黎山洌水西至黏蟬入海。行八百二十里。史記索隱曰。朝鮮有濕水,277_258d洌水,汕水。三水合爲洌水。疑樂浪,朝鮮取名于此。山海經注。列水名今在帶方。帶方有洌口縣。 以漢水源流支派考之。粘蟬今豊德府。朝鮮今漢陽。帶方今長湍等地。列口疑通津府。自江陵至通津。可八百餘里。洌水有三派。源于于筒者。旣定爲洌。但濕與汕。當是文藏與俗離之流。未知何者爲濕爲汕。中國師行。若出遼東。必出一枝兵。越海擣腹心。史記。樓舡將軍伐右渠。以兵三萬從齊浮渤海。至列口者是也。今漢陽之江。往往得鐵索繫纜之物。意楊僕之遺也。

大同江
277_259a大同江一作大通江。又名浿水。史記漢元封三年。荀彘自遼東擊朝鮮。破其浿水上軍。乃至王險城下。漢地理志。樂浪郡有浿水縣。浿水西至增地縣入海。水經。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海。陏大業八年。伐高麗。來護兒卛江淮水軍。自東萊浮海。先進入自浿水。去平壤地六十里。尋爲高麗所敗。還屯海浦。唐龍朔元年。蘓定方伐高麗。敗其兵於浿水江。遂趨平壤。明萬曆二十一年。李如松援朝鮮至平壤。倭悉力拒守。如松度地形。東南幷臨江。西枕山陡立。惟迤北牡丹峯高聳最要害。如松乃遣將攻牡丹峯。277_259b督兵四面登城。遂克之。旣而如松駐開城。別將楊元軍平壤。扼大同江。以通餉饋是也。源出寧遠內樂林之白山。南流至樂倉。西南流至黑倉。爲黑淵江。經新倉西北流。爲仇非津。至古倉折而南流經長遷。至寧遠郡。西爲仇淵。又西南流至金城山。北流迤西爲凝江。經德川郡。南至大德山。南流爲三月江。洄爲龍島。折而西流爲狸岵淵。經無盡臺。南流爲靜戎江。經順川郡。東爲斜灘,城巖之津。又爲歧灘。又爲禹家淵。東流爲叉波河。東與沸流江會。
由叉河以上大川五。孟山安都里之瘼灘江入277_259c三灘。价川謁日嶺之矢梁川。順川彌勒嶺之古城川,順川江。西山之錦溪入三月渡。安州悟道山之金川入歧灘。小川五。寧遠釰山川,只幕山之川入黑淵。馬踰嶺之寧城川入仇非。廣城嶺之川入古倉。德川釰山之長林川入凝江。
沸流江源出德陽吳江山。南流環兎城鎭。西折而至新倉。南折而經降仙臺。至麻訖山之陰爲犬灘。西流經石倉。西南流至成川府北。環巫山而江山窈窕。素稻勝地。降仙樓在其上。北折而西入叉波。
大川來會者二。陽德三方嶺之草川入麻訖之277_259d陰。順川遠陰山之廣川入石倉前。小川一。孟山孔巖山之觀音川入新倉前。
二江旣合南流。經區地爲錢浦。經閱波亭。至古江之東城爲西江。西折爲馬灘。東與能成江會。爲王城灘。
小川來會者二。慈山草德山之蛇川入錢浦。成川九龍山之水晶川入西江。
能成江源出豆流山。南流經陽德縣。西南流至松山。經伊令買乙之界。爲鳴灘,烏淵,末訖灘。至文城鎭。西北流經鎭山。西南流經架山。至三登縣南。經赤壁爲鸚鵡洲,建達江。西北流爲於打灘。西與大同江會于277_260a馬灘。
大川來會者四。成川三道看嶺之大谷川入鳴灘。谷山牛嶺之堂底灘入末訖灘。遂安蔓嶺之防墻川入建達江。祥原幷雲山之文浦川入於打灘。小川二。陽德琵琶山之馬背川入松山下。成川九龍山之阿次川入鸚鵡洲。
三江合而由王城灘。西南流至龍塘。經衣巖酒巖。經綾羅島朝天石爲銀灘。至平壤之南。爲大同江。至狸巖羊角之島。爲九津弱水。經豆老豆丹之島。經鳳凰萬景之臺。至保山東南流。爲官津,梨津。由急水門南。277_260b與月塘江會。爲絶瀼海。
由急水門以上大川六。中和靈鷲山之燕浦川。慈山慈母山之發蘆川。江西舞鶴山狄橋川。幷入九津渡。咸從檢巖山之鶴川入保山渡。中和於郞山之觀仙川入朔氏津。遂安天子山之於草川入急水門。小川三。慈山熊草德山之合掌浦入酒巖。江西舞鶴山之鶴川入保山。安岳日出山之東川入口津。
月塘江淸一統志。作月不唐江。源出瑞興熊坡山之釜淵。南流至高項山。西折而北至屛岩。經瑞興縣。西277_260c流經德巖。西北流經仇山。環唐城古縣。爲唐城浦。至西倉。播爲吾里浦爲栗津。南與箭防川爲三支之江。艾津浦爲鐵和江。北與大同江會于急水門。
大川來會者三。平山滅惡山銀波川入唐城浦。海州首陽山之箭防川入三支江。海州達摩山之迎津。文化九月山之馬鳴川入艾浦。
四水合而至廣梁。西入于海。
大川三。安岳日出山之東川。安岳隱寂山之淸川。三和烏石山之南川入大津。

淸川江
277_260d淸川江大明一統志。在安州城東。亦名薩水。隋書隋大業八年。宇文述等擊高麗。渡鴨綠水。東濟薩水。去平壤城三十里。因山爲營。平壤險固不能拔。引還至薩水。軍半濟。爲高麗所擊。諸軍皆潰。將士奔還一日夜。至鴨綠水。行四百五十里。統志又云亦謂大寧江。平壤,黃州。西隔大寧江。東阻大通江。所謂兩江之中。今考輿地啚。經大寧江。自有其名。不可以淸川當之。且在平壤之西。則固可謂之西隔。至若大通則浿水之一名。黃州何甞居其西而謂之東隔乎。考之漢晉隋唐地志。則東方山川。未甞錯出。及乎元。而高麗之277_261a朝聘貢獻。無異一國。豈若四郡與三國時乎。然考据之踈甚多。明統志襲此而爲之。信乎古今人不相及也。又唐書。蛇水在平壤西境。龍朔初。龎孝恭等擊高麗。以嶺南兵壁蛇水。爲盖蘓文所攻。一軍盡沒。或謂之陀水。考之啚境。平壤西境。惟薩水爲近。蛇水疑薩水之一稱也。淸川之源。出江界之甲峴。西流經柔遠鎭鳳丹城。北爲龍釜淵。經立石。又西南流爲東江。經煕川郡南獐項。至月林山。爲月林江。南爲魚川。經杏亭東萊之院。南爲獐項之津,花遷之江。至無骨島爲薩水。經安州城。北至七佛島。播爲二水。合而西南流。277_261b至古城之鎭。爲古城江。至海望之隅爲老江。大寧江北來會入于海。
大川來會者八。江界狄踰嶺之川入龍釜淵。煕川栍川嶺之川入東江。江界狗峴煕川西川入東江。楚山棘城嶺之宋串浦八月林渡。寧邊開平洞之川入魚川。价川謁日嶺之釜淵入花遷江。雲山柳嶺之孔浦。水地境峴之城洞川。入于無骨島下。小川六。江界竹田嶺之川。寧遠只幕山之川。入于柔遠鎭前。寧邊白山之西川入獐項。妙香山之南川入魚川。安州馬頭山之新川。277_261c悟道山之文川。入古城鎭之下。
大寧江源出義州之天摩山。東流爲白呂子川。與五峯龍頭大小防墻界畔幕嶺之水會而南。復與靑龍釰隱之水會爲兄弟川。東南流爲院灘。至泰川之北。南折由烏知遷。經挾水臺。爲滄浪之水。經斗尾爲鎭江。經沙土里峴。爲博川江。至老江之海望隅東。與淸川江會于老江。
大川來會者二。碧潼九階嶺之昌城江入院灘。龜城八營嶺之龜城江入串津。小川三。泰川松林山之川入泰川之北。林川山之塔峴川。寧邊277_261d五峯山之撫州川入鎭江。

鴨綠江
鴨綠江一名馬訾水。漢書玄菟郡西盖馬縣注。馬訾水西南至安平入海。過郡二。行二千一百里。杜氏通典。馬訾水源出靺鞨白山。水色似鴨綠故名。去遼東五百里。高麗之中。此水最大。波瀾淸激。所經津濟。皆貯大船。其國恃此以爲天塹。水濶三百步。在平壤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大明一統志。在都司城東五百六十里。盛京通志。一名益州江。或呼靉江。長白山南諸泉南滙爲大江。淸統志。在吉林277_262a烏喇南九百七十七里。西北流。與朝鮮分界。 其源出白頭山之大澤。伏流南出爲惠山江。至惠山鎭。左會虗川江。
小川四。臨連自可飛釰吳氏之川。皆白頭之諸谷水也。
虗川江出北靑厚致嶺之觀音窟。北流經泥糓社。爲黃水坡川。經鷹嶺及甲山府虗鱗。至雲寵鎭。入惠山江。
小川一。北靑太白熊耳川入鷹嶺之下。鎭東同仁之川入于甲山府西。
277_262b二源合而西北折。經仁遮堡羅暖小農新舊茄坡之堡。左會長津江。羅暖疑金史所稱耶懶也。金始祖弟保活里居耶懶。辭勒罕轍孛得兄弟常冦耶懶。石土門漢耶懶路。完顔部人者是也。
大川來會者一。三水白階山之三水前川。入于仁遮堡前。
長津江源出咸興白亦黃草之嶺。北流由長津柵。經別害廟坡神方江口之堡。魚面自作至茄坡。北入鴨江。
大川來會者一。咸興赴戰嶺之川入江口之下。277_262c烏蔓嶺川入別害前。
三水合而經兔遷四松之坪。經茂昌古縣,閭延古縣。西折而南流。經虞芮古縣。又西南流。經滿浦代登高山之鎭。禿魯江自東來會。
大川來會者三。江界䓗田嶺之厚州江。入四松坪下。塞外之十二道溝。入茂昌古縣之左。江界茂城嶺之慈城江。入虞芮古縣之右。小川三。江界懷德嶺之羅信川入四松坪。茂昌之葡萄川。入茂昌古縣之左。中江湖芮川。入閭延古縣之右。
277_262d禿魯江東國輿地勝覽。江界府禿魯江在府西一里。其源有二。一出煕川狄踰嶺下。一出咸鏡道界咊乙岾下。至府南立石合流。爲禿魯江。經渭原郡境。入鴨綠江。全遼志。綠江由夾州城西南流。與禿魯江合流。 江源盖出於咸興之雪寒嶺。西流至平南鎭。爲杜茂川。經立石北流。經城干吾毛院。由江界府。南至石隅西北流。至時川舘。爲兩江津。與鴨江會。
大川來會者三。江界狄踰嶺之神光川入立石。火通嶺之麽麽海川入江界府南。麻田嶺之外怪川入時川舘下。
277_263a四江合而經吾老梁及炭嶺。由直洞茄軒。至山羊會。山羊會。疑金史所稱山耶悔。 會塞外之佟家江。
由佟家以上大川二。江界杜邑嶺之渭水。楚山薪嶺之南川。入渭原郡北。
佟家江一云婆猪。一云蒲州。卽塩灘水。漢書地理志。馬訾水西北入塩灘水。唐書高麗傳。鴨綠水西與塩灘水合。明統志。有大蟲江在都司城東南四百里。源出龍鳳山。南流入鴨綠江。而鳳凰城界內。不聞有大蟲江。疑卽佟家江也。盛京通志。佟家江在長白山之南。源出分水嶺。其南有三泉自谷中出。滙爲佟家江。277_263b西南流。受哈爾民等諸河。鴨綠江自東來會。南入於海。龍飛御天歌。高麗恭愍王以太祖爲東北面元帥。擊東寧府。自央土口子。北渡鴨綠婆豬二江。至兀喇山城。全遼志。綠江與禿魯江合流至艾州。與婆豬江同流入於海。淸統志。佟家江在吉林烏喇城南八百二里。亦名通加。
五水旣合。經阿耳之鎭廣坪大小坡兒。楸仇,碧團,大小吉號昌洲。於汀廟洞雲頭之鎭,昌城之府。經鵂巖,仇寧,淸城,方山,玉江之堡,水口之鎭。至義州府北於赤島。東分三派。一南流爲九龍淵。一西流爲西江。一277_263c從中流名小西江。至黔同島。復合爲一。至淸水梁。又分二派。一西流與狄江合。一南流爲大江。繞威化島。至暗林串。西流至彌。勒堂古津江自東來。同爲大総江。入于西海。
大川來會者三。楚山踰都幕嶺之童巾江。勿移山之板幕川。入阿耳之下。碧潼甫里嶺之川。入碧潼之西。小川三。昌城緩項嶺之自潺川。入昌洲之下。昌城小防墻之甲巖川。入鵂巖之下。義州天磨山之玉江川。入玉江堡之下。狄江在彼地。
277_263d古津江源出義州天摩之陽南流爲喜驛川。經安州倉。東折而復西流。由植松塞墻之阨爲臨川。至寧朔爲冬乙郞江。又西至楊下鎭。入大捴江。
大川來會者二。龜城蘆洞之川。入安州倉東。鐵山望日之良策川。入冬乙郞之江。

豆滿江
豆滿江源出白頭山之陽甲山天坪。東流爲魚潤江。經長坂石橋臨江臺古城。又經茂山之西梁永豊山零頭之堡。至會寧之北。折而北流。經高嶺之鎭,防垣之堡,鏡城之府,潼關之鎭。爲壓江灘。東流經穩城府277_264a北。又折而東流爲龜巖柳田漁汀之灘。經美錢堡。又折而南流至黃拓坡。爲立石灘。經訓戎之鎭。至古耳之島,慶源之府。東至安原堡。經龍堂古城。至乾原堡。環撫夷之鎭。至慶興府東。經赤地爲愁濱江。又東流經造山。至鹿屯島入于海。
大川來會者三。會寧茂山嶺之斡木河。入會寧之北。葛坡嶺之五龍川。全以尙嶺之中溪。溪入乾原堡之南。小川七。吉州圓山之西北川。入臨江臺古城下。長白山之城川。入茂山之西。彼地之土門江。入壓江灘。葛哈里河。入穩城府北。三277_264b漢川入美錢堡之下。後春江入安原堡之左。入池水入撫夷鎭之左。

龍興江
龍興江一名瑤樂池。我太宗朝。河崙與都廵問使姜淮伯。置酒中流曰。此江以發祥舊址。尙可無名乎。乃以龍興名。源出永興之鐵甕山。東流爲橫川。又東南流爲鐵水。經永興府北。爲濟仁浦。經黑石里。爲龍興江。經王生島。至長坪社。爲漕津浦。南至末應島入于海。
大川來會者三。永興平胡嶺之沸流川入橫川。277_264c高原載靈山之德灘。陽德豆流山之箭灘。並入漕津。

城川江
城川江源出寧遠郡及咸興西北界狼林山。東南流。經中嶺堡,草房嶺。東爲黑林川。至獨山爲岐川。東南由哈蘭洞。至咸興府西。播爲二江。一東南流。經萬歲橋本宮西擊毬亭下。爲石潭入于海。其一西流大野中。復岐爲二川。曰乾川曰西川。爲三坪而復合焉。至都連浦入于海。都連浦。高麗故北界也。
大川來會者一。咸興太白山之元川入獨山下。

洛東江
洛東江源出安東太白山之黃池。穿山而流故名穿川。南流爲買吐川。經淸凉山之丹砂。經天淵臺。爲濯纓潭爲洛水。經聾巖。爲汾江爲風月潭。西流經禮安縣爲浮津。西南流經鼻巖。爲蓼村灘。至安東府東。爲勿野灘。西折而爲犬項津。經檢巖山至花山。爲河回之勝。西爲大谷船倉脩正鵲灘之津。環龍飛山。爲無訖灘爲三灘。以沙川犬灘來會故也。折而南流爲河豊松羅津。經自天之臺。爲飛鸞竹巖。爲洛東津。東南流經鸕鷀巖。爲鯉淵,餘次,寶泉,月波,松鶴,飛山之277_265a津。經砥柱碑。南流爲㓒津東安所也之江。經河濱古縣。爲杏灘沙門之津。琴湖江自東來會。
大川來會者二十二。英陽釰磨山之小川入穿川。日月山之神漢川。靑松於火峴之南川。普賢山之琴召川。入勿野灘。義城黃山之禿川入犬項津。安東鶴駕山之花川入曲江。安東白屛山之沙川。順興小白山之臨川。豊基鳴鳳山之瀼川。醴泉鵲城山之省火川。聞慶鳥嶺之犬灘川。報恩俗離山之猪谷川。凡六大水入無訖灘。尙州熊耳山之伊水。善山淵嶽山之長川。入飛鸞277_265b津。義興花山之渭水。㓒谷公山之缶溪川。義城氷山之雙溪川。茅峴之長川。豆易峴之平安川。並入竹巖津。知禮大德山之甘川入寶泉灘。仁同巢鶴山之丈川入飛山津。星州斐旨山之伊川入所也江。小川三。白屛山之道美川。禮安淸凉山才山之川入買吐川。善山金烏山之蔚洲川入飛山津。
琴湖江源出靑松之普賢山。南流爲氷川。爲慈乙阿川。至屛巖經永川郡。至竹防山之陽。經河陽縣西。爲黃栗川。至盤鷄西流。至大邸府北。爲泗水箭灘。西流277_265c爲琴湖津。經河濱古縣。西與洛東江會于沙門津。
大川來會者二。興海六峴之永川南川入郡之南。慈仁簟山之烏沐川入黃栗川。小川八。新寧花山之西川入屛巖。永川四龍山之凡魚川。㓒谷公山之匙川。靈芝山之川。入竹防之陽。慶山馬鞍山之南川入黃栗川。淸道八助嶺之新川。公山之解顔川入琴湖。㓒谷加土山之八莒川。入河濱古縣。
二江合而經臺巖。爲開山之江甘勿畓谷牛山玄倉之津。西與黃芚江會爲仰津。
277_265d仰津以上大川一。陜川伽倻山之伽倻川。伽倻山南之龍潭川。入開山渡。小川一。玄風琵琶山之龜川入臺岩下。
黃芚江源出茂朱德裕山之佛影峯。南流爲龜淵爲渭水。至愁送臺南爲鶴潭。東至居昌府南爲瀯川。東至勸賓驛。爲父子淵。南流爲砧淵。黃溪之勝。經嶽堅之山。東北流爲芚德淵。至陜川郡南爲南江。東流經犬遷。爲黃芚津。至玄倉。與洛東江會。
大川來會者一。居昌三峯之阿月川入瀯川。小川二。居昌修道山之加祚川入父子淵。陜川馬277_266a峴之澄心川入南江。
三江旣合。爲朴津歧江。與晉江會。折而東流。爲松津蔑浦。
小川來會者一。宜寧闍窟山之世干川入仰津。
晉江源出茂朱德裕山之鳳皇峯。南流爲楸川龍游潭月淵。東至安義縣北。西南流爲灆溪。經沙斤古城南。至卧龍岩。爲牛灘鏡湖。東流環山淸縣。爲長善灘。東南至丹城經赤壁。爲新安津。南流爲召南津。至新豊西。爲菁川江。折而東流。經晉州矗石之南。爲南江。東北流爲雲堂黃流之津。至代如。爲尺堂津爲楓灘。277_266b至龍華山之北。與洛東江會于歧江。
大川來會者五。安義月峯之尋眞洞川。咸陽白雲山之㵢溪。幷入灆溪。南原智異山之瀶川入牛灘。三嘉花旨峴之梁川入新安津。智異天王峯之薩川入菁川渡。小川五。固城大芚山之永善川。入晉州之南江。晉州集賢山之禿川入黃柳津。咸安餘航山之班城川。宜寧闍窟山之黔井川。入于代如之下。餘航山之長安川入楓灘。
四江合而爲靈浦海陽三浪。萬曆壬辰。爲倭所據。又爲五友之津。經鵲川折而南流。爲伽倻東院月堂津。277_266c播爲三叉河。經七點山南入于海。
大川來會者二。玄風琵琶山之凝川。淸道雲門山之川。入于五友津。小川五。昌寧火旺山之桂城山川入靈浦津。㓒原西川來進川入海陽。昌寧簾山入鵲遷之下。梁山鷲栖山之狐浦入月堂津。

太和江
太和江源出慶州之斷石山。南流至所山。折而東南流。爲盤龜川。至立石爲堀火川。至蔚山南。爲太和江注津。至島山洄爲渚內浦。入于海。
277_266d大川來會者二。彦陽鷲栖山之南川入于立石下。慶州鵄述嶺之語連川入于島山。

沙湖江
沙湖江源出潭陽之秋月山。山壁削立。四圍如城。徒行者只得緣西北而上。其中有泉十三。而溪澗縈紆。東爲二石潭。潭下有巨巖。水由巖穴而瀉下。飛湍洒空。注爲大澤。是爲龍淵。諺傳岩穴龍所穿也。屈曲之迹猶在。南流爲原栗川。至府東。北折而西南流。爲竹綠川。又西南爲滄江。至昌平縣。爲㓒川爲碧津。由極樂之坪。爲極樂江。至王子臺。砥石江自東來會。
277_267a由王子臺以上大川二。長城白岩山之黃龍川。長城蘆嶺之可川入㓒川。小川五。潭陽滅峙之薪川。玉果之大橋川入竹綠川。光州無等山之三支川入㓒川。無等山之巾川。長城三聖山之九登川入碧川。
砥石江源出綾州之呂岾。西北流爲車衣川。環綾州州治。西北流經南平縣。爲城灘砥江。西北至王子臺。入沙湖江。
由王子臺以上大川二。光州無等山道川。入于綾州治前。南平德龍山之魚川。入于王子臺之277_267b下。
二江旣合。環羅州▣治。爲廣灘。折而西至鸕鷀巖。爲錦津爲滎江。西爲洄浦。至古幕院。爲沙湖津。西南爲曲江梨山夢灘駐龍之浦。經奄山爲木浦。西入于海。木浦者高麗莊和后吳氏浣紗而五色雲所見處。至今有浣絲泉。
大川來會者二。靈光高城山之鵲川入沙湖江。靈岩月出山之德津浦入駐龍浦。

蟾江
蟾江源出鎭安之馬耳中臺。及全州之熊峙。合而西277_267c南流。爲鎭安西川。至任實縣北。爲烏原川。西流經塞墻之陽雲南之山。南流爲葛潭。又東南流爲赤城江。又南流爲淵灘。又西南流經霽岩。東流至河泥島。爲鶉子江。東南流至于鴨綠津。洛水自南來會。
由洛水以上大川三。井邑內藏山之鮎巖川入葛潭。長水聖壽山之鶉川入花淵。長水六十峙之蓼川入鶉子渡。小川五。任實斗滿山之葛川入烏原川。白雲山之良發川入雲南山之下。任實白蓮山之九臯川入葛潭。淳昌武夷山之伊川入淵灘。玉果玉泉山之仙脚川入淵灘。
277_267d洛水源出長興南熊峙。及中條山。會于長澤古縣。東流至寶城郡北。南折而北爲亭子川。過赤壁江。經洛水驛。爲洛水津。東北經石谷院。至鴨綠院。爲大荒津。會于蟾江。
大川來會者一。潭陽萬德山之赤壁江。爲龍眼星巖之淵。會于洛水。
二水合爲潺水津。爲竹淵九淵。至花開洞。瀦爲龍淵。南流爲斗赤江。入于海。
大川來會者一。智異山香積峯之雙溪。入花開洞之龍淵。

泗水江
泗水江源出龍潭珠崒山。西流至高山。西南流爲鴈川良正浦。至參禮驛前爲橫灘。由回浦之界。經東倉至新倉院。爲新倉津。經立石進鳳吉串之北。經羣山浦。入于海。
大川來會者五。高山佛明山之川。雲梯山之川。入高山之東。全州礪峴之楸川入鴈川。參禮驛前之大也川入橫灘。益山龍花山之春浦入回浦。小川二。黃登洞之川入樂岩。利城之川。入于利城倉前。

東津江
東津江源出井邑內藏山。西流爲鴟川。經井邑縣。西北流爲茅川。經梨坪白山。至金堤之食浦爲東津。經扶安東界。西北入于海。
大川來會者二。泰仁象頭山之大角川入茅川。泰仁母嶽之大極浦入食浦。小川二。井邑笠巖山之木梯川。入于井邑縣前。古阜栗峙之訥堤川。入于白山下。

沙津浦
沙津浦源出高敞半登山。爲道山川。又爲蟹川。西流277_268c環逍遙水光之山。過格浦入于海。
大川來會者一。半登山之禪雲浦。入于水光之下。小川二。茂長鷲嶺山之竹川,黍橋川。入道山川。

汭陽江
汭陽江源出羅州之雙溪山。東南流。環長興府而西。爲汭陽江。至舍人巖。西流至康津縣南。爲九十浦。過舟橋川南。爲耽津入于海。
大川來會者一。靈岩月出山之鵲川。入舍人巖下。

錦江
錦江之源出於長水之水分峙。西流至龍巖爲松灘。北流至呑田爲伊浦。經銘峙。又西流爲達溪。經龍潭縣之東富利古縣。東折而至茂朱之西。爲召爾津。經㓒巖之阻。北洄爲廣石江。至虎溪之阨爲虎灘。東流爲高唐江深川津。西流爲赤登津。北爲車灘化仁之津。西至于沃川之北。經周岸鄕。爲末訖灘。西流爲荊角黔角新灘之津。又爲德津。西北流至龍塘北。爲灘里津瓦壁。緣江岸而有錦壁四松之亭。並可登臨。經孝浦至雙樹之陰。爲箭灘。拱北樓據其上。又西南流277_269a爲熊津。熊津者百濟之古城也。唐蘓定方自成山濟海。至仁川德積島。由公州破扶餘。其迹可按而攷也。劉仁願再破百濟。以其城爲都督府。江流從束中而去。至定山縣。爲王之津半灘石灘。灘上高麗李存吾所隱居也。經臯蘭之陰大野中。東南流爲白馬江。劉仁軌破倭處也。又至扶蘓山下。爲泗泚河。臯蘭寺在江上削壁。其傍有落花巖。百濟亡時。宮女投江處也。經浮山塲巖。爲古多津。經石城縣南至佛巖。爲浪淸津。經江景至黃山。西折爲菁浦。又西流經聖倉。爲南塘津西鎭浦。又爲茅浦龍塘津。西至舒川浦入于277_269b海。
大川來會者十七。長水長安山之南川入松灘。鎭安珠崒山之朱子川入于達溪之下。知禮大德山之赤川入召爾津。錦山月峯之濟原川入廣石渡。尙州九峯山之松川入高塘渡。知禮三道峯之長橋川入松川。報恩俗離山之龍川入赤登津。珍山縣萬仞山之西華川入化仁津。懷仁皮盤嶺之川入末訖灘。錦山松院峙之田川入新灘。忠州望夷山之東津江。公州雞龍山之豆麽川。入羅里津。溫陽角屹峙之銅川入熊津。277_269c定山七甲山之金剛川入白馬渡。鴻山月明山之九郞浦入白馬渡。鎭安珠崒山之市津入江景浦。公州雞龍山之草浦入市津。小川來會者六。永同天摩山之南川入虎灘。山之北川入高唐江。懷仁九龍山之沙灘入末訖灘。公州雙嶺之日新川入箭灘。扶餘烏山之大王浦。入于臯蘭之陰。礪山壺山之篤子川。入于黃山之下。

大津
大津之源出陽智之曲頓峴。西南流爲禪院川。西至于素沙之野。又西流爲多羅窩飛津。經平澤縣北。爲277_269d鵾池浦。至望海山。爲慶陽津。經魯山西南爲貢津浦。一名大迺山。津有倉。收湖西諸邑稅漕至京師。至行擔島之北頓串津。自南來會此浦。上下沿之西者稱內浦。往來內浦者。多由此渡。
由行擔島以上大川五。安城白雲山之川入禪院川。稷山慰禮山之牙州川入素沙川。水原光敎山之亢串浦。入多羅窩津。龍仁寶盖山之駒興川。龍仁聖倫山之長好川。幷入亢串浦。
頓串津一名戎津。自靑陽白月之北。北東流經黎陽古縣爲㴎川。東北流至大興郡東。又北流爲京結川。277_270a至禮山爲無限川狐頭浦。至王子山之北。爲靑池浦。三歧,犯斤,頓串之浦。又爲江門浦。至八堂坪。彌勒川自東南來會。
自八堂坪以上大川二。大興飛鳳山之達川入京結川。洪州烏栖山之金馬川入三歧津。
彌勒川自車嶺之北。東北流經德坪鄕。西北流至豊歲古縣。又西流爲布川烽川車輪灘犬浦。又西流爲曲橋川。合牙山之丹陽浦。合爲牛坪浦。至八堂之野。野周數百里。西與頓串津會。
由丹浦以上大川一。溫陽角屹峙之歧川入烽277_270b川。
頓串之津。旣與彌勒合北流。經新平古縣。入于行擔島之東南。與貢津會。至新平古縣北爲大津。經沔川唐津之北。過菜元浦。西入于海。
菜元以上大川二。沔川倉宅山之昇仙川入頓津。海美伽倻山菜元浦。

禮成江
禮成江源出遂安之彦眞山。南流至谷山之東。爲黑石灘,春灘,沙八灘。西南流至新溪西。又南流爲栗灘。經平山府北爲歧灘。經桃花谷將軍巖。爲箭灘,猪灘,277_270c馬灘。江流始大。馬灘李重老等戰賊适所敗處也。至牛峯縣。爲助邑浦。古稱歧平渡。至于開城府西。爲梨浦,錢浦,金谷浦。西南流至彌羅山之東南。爲禮成江。高麗朝宋。由此發船故曰禮成。又爲碧瀾波。入于海。宋史云自明州定海便三日入洋。又五日抵墨山入其境。自墨山過島嶼詰曲嶕石間。舟行甚駚。七日至禮成江。江居兩山間。束以石。湍激而下。所謂急水門。最險惡。又大明一統志。急水門在開城南海中。宛如巫峽。今考地志。急水者孫石項也。非禮成江也。漢水至通津。旣西南折爲甲串渡。又折而南至摩尼之277_270d後。石脉橫亘水中。如門之閾。其中少凹。三南稅船至此。候潮至得過。少有所遷延。船輒罥破。
大川七。伊川開蓮山之烏巢川入沙八川。平山滅惡山之䓗秀川。金川首龍山之源中川。並入歧灘。平山滅惡山之陽賜梅川入猪灘。松都天摩山之語早川入助邑浦。白川金山之星川入錢浦。松都松嶽山之東方浦入禮成江。小川一。新溪華盖山之迎新浦入栗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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