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샘 산악회 번개 산행을 사당역 6번 출구로 시작 하였다
집에서 전철로 이동하여 사당역에도착 하니 10시 6분 시간을 초과하였다 .. 전화를 한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행과의 시간 ...좋은 시간 이었다 사진은 몆장담지 못하였다 .
관악산에 대한 고전 자료를 정리해보기로 .. 관악산은 저개인적으로 금불암자락에 선조님의 산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고
이제는 개발로 이장을 하였지만...
○ 여름 5월에 오랜 가뭄이 있었기 때문에 사면(赦免)을 내렸다. ○ 가을 7월에 최우의 아내 정씨(鄭氏)가 죽었다. 왕이 순덕왕후(順德王后)의 전례를 따라 장사지내라고 명하였다. 삼전(三殿)과 여러 왕씨ㆍ재ㆍ추ㆍ승선(承宣) 이하가 다투어 제(祭)를 지내니, 하루에도 예닐곱 차례나 되었다. 제수를 갖추는 데에 온갖 사치를 다하니, 시가(市價)가 이로 인해 폭등하였다. 장사지내게 되자, 백관(百官)이 회장하여 심지어 금은 비단으로 감실(龕室 종묘에 신주를 모시어 두는 장(欌))을 장식하고 좌우에 촉롱(燭籠)과 홍촉(紅燭)을 벌여 세운 것이 빈당(殯堂)에서부터 보정문(保定門)까지 뻗쳤고, 석실(石室)은 기교(奇巧)가 극에 달했다. ○ 송 나라 상인이 물소[水牛] 네 마리를 바쳤으므로, 최우가 인삼 50근과 광포(廣布) 300 필을 주었다. 8월에 최우가 수레[輦]를 바쳤는데 금은 비단으로 장식하고 오색 전(氈)으로 덮어 사치하고 화려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왕이 칭찬하여 마지 않았고, 제조를 감독한 대집성(大集成)에게 안장 갖춘 말ㆍ의복ㆍ홍정(紅鞓) 등을 하사하였다. 조금 뒤에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할 때에 물소에 수레를 매어 타고 가니, 도로에서 서로 다투어 가며 구경하였다. ○ 몽고 원수 살례탑(撒禮塔)이 군사를 거느리고 함신진(咸新鎭 평북 의주)을 에워싸고 말하기를, “나는 몽고 군사다. 너는 빨리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무찔러 하나도 남기지 아니 하리라." 하였다. 부사(副使) 전한(全僩)이 두려워서 방수장군(防守將軍) 조숙창(趙叔昌)과 함께 모의하기를, “만약 나가 항복하면 성중 백성이 그나마 죽음은 면할 것이다." 하니, 숙창이 옳게 여겨 드디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숙창이 몽고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조원수(趙元帥) 충(冲)의 아들이다. 나의 아버지가 일찍이 귀국 원수와 형제가 되기를 약속하였다." 하고, 전한은 창고를 풀어 몽고 군사를 먹이었다. 숙창이 글을 써서 삭주(朔州) 선덕진(宣德鎭 함남 정평)에 부쳐 몽고 군사에게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라고 타일렀다. 몽고 사람이 숙창에게 명하여 이르는 곳마다 먼저, “진짜 몽고 사람이니 마땅히 빨리 나와 항복하라." 라고 말하게 하였다. 철주성(鐵州城 평북 철산) 아래에 이르러, 포로로 잡은 서창 낭장(瑞昌郞將) 문대(文大)를 시켜 고을 사람을 불러, “진짜 몽고 군사가 왔으니 마땅히 빨리 나와 항복하라." 라고 타이르게 하였다. 문대(文大)가 이에, “가짜 몽고다. 그러니 항복하지 말아라." 하였다. 몽고 사람이 죽이려다가 다시 불러 타이르게 하였으나 역시 여전하였으므로 드디어 죽였다. 몽고 사람들이 공격을 더욱 급하게 하고, 성중에는 양식이 떨어져 능히 성을 지키지 못하고 함락하기에 이르렀다. 판관 이희적(李希勣)이 성중의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모아 창고에 넣고 불을 지르고, 장정들과 함께 자결하여 죽으니, 몽고 사람이 드디어 그 성을 도륙하였다. ○ 9월에 재상들이 최우의 집에 모여 삼군을 내어 몽고 군사를 막기를 의논하였다. 대장군 채송년(蔡松年)을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로 삼고, 또 여러 도(道)의 군사를 징집하였다. ○ 몽고 군사가 귀주(龜州)에 이르니, 병마사 박서(朴犀), 삭주 분도장군(分道將軍) 김중온(金仲溫), 정주(靜州 평북 의주 남쪽 25리) 분도장군 김경손(金慶孫)이 정주ㆍ삭주ㆍ위주(渭州 평북 영변)ㆍ태주(泰州 평북 태천)의 수령 등과 더불어 각각 군사를 거느리고 귀주로 모였다. 박서가 중온(仲溫)의 군사로 성의 동서를 지키게 하고, 경손(慶孫)의 군사로 성의 남(南)을 지키게 하며, 도호별초(都護別抄)와 위주ㆍ태주 별초 2백 50여 명으로 삼면(三面)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몽고 대군이 이르렀으므로 남문에 있는 경손이 정주 아내(衙內)의 결사대 12명과 여러 성의 별초를 거느리고 성에 나와 싸우려고 하였다. 경손이 사졸의 앞에 나와서 영을 내리기를, “너희는 나라를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죽어도 물러나지 않을 자들이다." 하였더니, 우별초가 땅에 엎드리어 응하지 않았다. 경손이 다 성으로 들여 보내고, 몸소 몽고 군사의 선봉인 검은 기를 들고 말탄 자를 쏘았더니 곧 맞아 거꾸러져 죽었다. 결사대들이 이를 계기로 하여 분전(奮戰)하였다. 흐르는 화살[流矢]이 경손의 팔에 맞아 피가 흥건하게 흐르는데도 북치는 손을 그치지 않았다. 사오 합을 싸우다가 몽고 군사가 물러나 달아나므로 경손이 진용을 정제하고 쌍소금(雙小笒)을 불며 영(營)으로 돌아왔다. 박서가 맞아 절하고 울며 일을 다 그에게 위임하였다. 몽고 군사가 성을 몇 겹을 에워싸고 밤낮으로 서남북의 문을 공격하므로 관군이 돌격하였다. 몽고 군사가 위주 부사(渭州副使) 박문창(朴文昌)을 사로잡아 성에 들어가 항복하도록 타이르게 하였는데, 박서가 그를 죽였다. 몽고 군사가 정예 3백 기(騎)를 추려 북문을 공격하므로 박서가 쳐서 물리쳤다. 몽고 군사가 수레에 초목을 쌓고 이를 밀어 진격하므로 경손이 포차(砲車)로 쇠물을 녹여 쏟아 부어 그 쌓은 풀을 다 태우니 몽고 군사가 물러나 달아났다. 다시 누거(樓車)와 목상(木床)을 만들어 쇠가죽으로 싸고 무기를 그 속에 감추어 성 밑에 바짝 이르러 지도(地道)를 뚫으려 하므로, 박서가 성에 구멍을 내고 쇠물을 쏟아 부어 누거를 불사르고 땅을 무너뜨리니, 눌려 죽은 몽고 군사가 30여 명이었다. 또 썩은 풀을 태워 목상을 살라 버리니 몽고 군사가 놀라서 흩어졌다. 몽고 군사가 또 대포차(大砲車) 15대로 성 남쪽을 공격하여 매우 다급하게 되었으므로, 박서 역시 대(臺)를 쌓고 성 위에서 포차를 쏘아, 돌을 날려 물리쳤다. 몽고 군사가 또 나무에 사람 기름을 적시어 두껍게 쌓고 불을 놓아 성을 공격하므로 물을 부어 그것을 구하려 하였더니, 그 불이 더욱 성하였다. 박서가 진흙을 가져다 물에 타서 던지게 하였더니 이때에야 불이 꺼졌다. 몽고 군사가 또 수레에 풀을 싣고 불을 놓아 문루(門樓)로 공격하므로 박서가 미리 물을 누 위에 저장하였다가 내려 부으니 불이 곧 꺼졌다. 경손이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싸움을 독려하는데 포탄이 경손의 이마를 지나 뒤에 있는 호위병을 맞추어 몸이 가루가 되었다. 좌우가 호상을 옮길 것을 청하니 경손이 말하기를, “안 된다. 내가 움직이면 민심이 움직일 것이다." 하고, 신색(神色)이 자약하여 끝내 옮기지 않았다. 몽고 군사가 성을 에워싸기를 한 달이나 되어 갖은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박서가 번번이 임기응변하여 굳게 지키니, 몽고 군사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 몽고 군사가 서경성(西京城)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 마산(馬山) 초적(草賊)의 괴수 두 사람이 스스로 항복하고 와서 최우를 보고 말하기를, “정병 5천여 명으로 몽고 군사를 공격하는 데에 돕겠다." 하니, 우가 크게 기뻐하여 매우 후하게 상을 주었다. ○ 몽고 군사가 황주(黃州)ㆍ봉주(鳳州 황해 봉산)에 이르렀으므로 두 고을의 수령이 백성을 거느리고 철도(鐵島)로 들어갔다. ○ 최우가 사람을 보내어 광주(廣州) 관악산(冠岳山)의 초적(草賊)이 진치고 있는 곳으로 들어가 적의 괴수 5명과 정예 50명을 회유하여 후하게 상을 주고 우군에 충군(充軍)하였다. ○ 몽고 군사가 용주(龍州)를 에워싸니 성중에서 항복하기를 청하여 부사(副使) 위소(魏玿)가 사로잡혔다. ○ 삼군이 동선역(洞仙驛)에 둔을 쳤는데, 마침 해질 무렵에 첩자가 와서 적에게 변화가 없다고 보고하였다. 삼군이 그 말을 믿고 안장을 풀어놓고 쉬었는데,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 외치기를, “오랑캐 군사가 왔다." 하니, 군중이 크게 놀라 모두 흩어졌다. 몽고 군사 8천여 명이 돌연히 이르러, 상장군 이자성(李子晟)ㆍ장군 이승자(李承子)ㆍ노탄(盧坦) 등 5, 6명이 죽기로써 싸웠으나, 자성은 날아온 화살에 맞고, 노탄은 창에 찔려 겨우 죽기를 면하였다. 삼군이 비로소 모여 싸웠는데 몽고 군사가 약간 물러났다가 다시 와서 우리의 우군을 공격하므로, 산원(散員) 이지무(李之茂)ㆍ이인식(李仁式) 등 45명이 이를 막아냈다. 마산의 초적으로 있던 두 사람이 몽고 군사를 쏘아 시위소리와 함께 그들이 쓰러지니, 관군이 기세를 틈타 쳐서 물리쳤다. ○ 몽고 군사가 선주(宣州 평남 선천)와 곽주(郭州 평북 곽산) 두 고을을 함락하였다. ○ 겨울 10월에 몽고인 2명이 편지를 가지고 평주(平州)에 이르니 고을에서 곧 가두어 두고 조정에 알렸으므로 전중시어사 김효인(金孝印)을 보내어 가서 묻게 하였다. 그 편지에, “우리 군사가 처음으로 함신진(咸新鎭)에 이르렀을 때 맞아 항복하는 자는 다 죽이지 않았다. 너의 나라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끝내 돌아가지 않을 것이요, 항복하면 마땅히 동진(東眞)으로 향할 것이다." 하였다. 그 사람들을 잡아왔는데, 1명은 몽고 사람이고 1명은 여진 사람이었으므로 이로부터 비로소 몽고 군사인 것을 믿었다. ○ 함신진에서 보고하기를, “국가에서 만일 배를 보내 준다면 내가 마땅히 성을 지키는 몽고 사람 소미생(小尾生) 등을 모두 죽이고, 다음에 온 성에 있는 것을 거두어서 배를 타고 서울로 가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김영시(金永時) 등 30명에게 배를 갖추어 주어 보냈더니 과연 몽고 사람을 거의 다 죽였는데, 소미생은 먼저 알고 달아났으므로 부사 전간이 아전과 백성을 거느리고 보신도(保薪島)로 들어갔다. 뒤에 전간이 집안 사람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 임술에 지진이 있었다. ○ 몽고 군사가 귀주(龜州)를 공격하여 성랑(城廊) 2백여 간을 무너뜨렸다. 고을 사람들이 즉시 수축하여 지키었다. 몽고 군사가 여러 성의 항복한 군사를 거느리어 성을 에워싸고 신서문(新西門) 요지에 무려 28개소에다 포(砲)를 대놓고 공격하여 성랑 50간을 또 무너뜨리었다. 고을 사람이 죽기로 싸워 크게 이기고 삼군이 안북성(安北城)에 둔을 쳤다. 몽고 군사가 성 아래 이르러 도전하였으나 삼군이 출전하려 하지 않았다. 후군진주(後軍陣主) 대집성(大集成)이 강요하여 성 밖으로 출전하였는데, 진주와 지병마사는 다 나오지 않고 성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집성도 역시 성으로 돌아왔다. 삼군이 몽고 군사와 싸우는데, 몽고 군사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대(隊)로 나누어 줄을 지어 서고 기병(騎兵)이 우리 우군을 공격하니 화살이 비오듯 떨어졌다. 우군이 어지러워져서 중군이 그를 구원하려다가 역시 어지러워지므로 다투어 성으로 들어오는데, 몽고 군사가 승세를 타고 쫓아와서 사상자가 반이 넘었다. 장군 이언문(李彦文)ㆍ정웅(鄭雄)과 우군판관 채식(蔡識) 등이 죽었다. ○ 왕이 친히 중 3만 명에게 사흘 동안 밥을 먹였다. ○ 동진 군사가 화주(和州 함남 영흥)에 침입하여 선덕(宣德)ㆍ도령(都領)을 사로잡아 갔다. ○ 11월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이항(李抗)이 졸(卒)하였다. ○ 북계(北界)의 분대어사 민희(閔曦)가 돌아와 아뢰기를, “처음에 삼군에서 민희와 병마판관 최계년(崔桂年)을 보내어 몽고 군사에게 음식을 베풀어 주었는데, 원수 살례탑(撒禮塔)이 권황제(權皇帝)라 자칭하고 전(氈)으로 만든 집에 앉았는데 비단으로 장식을 하고, 좌우에 부인을 늘어 세우고,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항복하려면 항복하고 싸울 터이면 싸우기로 마땅히 속히 결정하라. 너의 직함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므로, 대답하기를, '분대관(分臺官)이요.' 하였더니, 살례탑이 말하기를, '너는 소관(小官)이다. 대관인(大官人)이 속히 와서 항복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 몽고에서 북계 여러 성의 군사를 몰아 귀주(龜州)를 공격하는데, 포차 30대를 줄지어 대 놓고 성랑 50칸을 격파하였다. 박서(朴犀)가 무너지는 대로 따라서 수축하고, 쇠고리줄로 얽어 놓았더니 몽고 군사가 다시는 공격하지 못하는데, 박서가 출전하여 크게 이겼다. ○ 오군의 병마를 더 징발하여 몽고 군사를 막았다. ○ 평주(平州)에서 몽고의 첩자를 가두었으므로 몽고 군사가 먼저 쳐서 멸하려고 성중으로 돌입하여 주관(州官)을 죽이고 그 성을 도륙하여 계견[가축]한 마리 남기지 않고 싹 쓸었다. ○ 몽고 군사가 선의문(宣義門) 밖에 와서 진을 쳤는데, 포도원수(浦桃元帥)는 금교(金郊)에 진치고, 적거원수(廸巨元帥)는 오산(吾山)에 진치고, 당고원수(唐古元帥)는 포리(蒲里)에 진을 쳤다. 전봉(前鋒)이 예성강에 이르러 집을 불지르고 인민을 죽이고 노략질한 것이 이루 셀 수 없었다. 경성이 흉흉하였으나 최우는 그 사위 대장군 김약선(金若先)과 더불어 가병으로 스스로 호위하고, 성을 지키는 자는 다 노약한 남녀 뿐이었다. 최우가 어사 민희와 내시낭중 송국첨(宋國瞻)을 보내어 몽고 군사에게 음식을 베풀어 주고 위로하였다. ○ 12월에 몽고 군사가 경성의 4문 밖에 나누어 진치고, 흥왕사(興王寺)를 공격하므로 다시 민희를 보내어 그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고 화친을 맺었다. 민희가 또 가서 몽고 사자와 함께 왔으므로, 지합문사(知閤門使) 최공(崔珙)에게 명하여 접반사를 삼아 접대하였다. 이 때에 살례탑이 안북도호부에 진을 치고, 사자를 보내 강화하자고 말하였다. 왕이 대관전(大觀殿)의 뜰로 내려가 북면하여 맞으려 하였으나, 몽고 사자가 말리므로 이에 남면하였다. 절한 다음에 잔치하여 위로하고, 금은 그릇과 비단ㆍ모시 등의 물건을 세 원수에게 보내주고, 또 사자에게도 모두 차등있게 주었다. 또 회안공(淮安公) 정(侹)을 보내어 토산물을 살례탑에게 주고, 또 사람을 보내어 당고(唐古)ㆍ적거(廸巨) 및 살례탑의 아들에게 은(銀) 각 5근, 모시 10필, 추포(麤布) 2천 필, 안첨(鞍韂)ㆍ마영(馬纓) 등의 물건을 보내었다. 정(侹)이 살례탑을 보고 멀리 뜰 아래에서 절하니 대답이 없었다. 정이 음식물을 바치니, 살례탑이 젖술[湩酪] 등으로 대접하였다. 정이 권하는 대로 마시고 먹으니, 살례탑이 크게 기뻐하였다. ○ 몽고 군사가 광주(廣州)ㆍ충주ㆍ청주 등지로 향하는데, 지나는 곳마다 잔멸(殘滅)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 몽고 사자 8명이 와서 매와 새매를 구하였다. ○ 승천부(昇天府) 부사 윤인(尹繗), 녹사(錄事) 박문의(朴文檥)가 몰래 가속(家屬)을 강화에 두고, 최우를 달래어 말하기를, “강화는 난을 피할 만합니다." 하였다. 최우가 그 말을 믿고 두 사람을 시켜 먼저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가는 길에서 몽고 군사에게 붙잡혔다. ○ 몽고 군사가 다시 큰 포차를 가지고 귀주(龜州)를 공격하므로, 박서(朴犀)가 또한 포차를 쏘아, 돌을 날려 수없이 쳐 죽이니, 몽고 군사가 물러나 진을 치고, 책(柵)을 세워 지키었다. 살례탑이 우리 나라 통사(通事) 지의심(池義深)과 학록(學錄) 강우창(姜遇昌)을 보내어 희안공 정(侹)의 편지를 주어 귀주에 항복하라고 타일렀으나, 박서가 듣지 않았다. 살례탑이 다시 사람을 보내어 그를 타일렀으나, 박서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몽고 군사가 운제(雲梯)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려 하므로 박서가 대우포(大于浦)로써 맞서 치니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어서 사다리를 가까이 댈 수가 없었다. 대우포란 것은 큰 날이 달린 무기였다. 나이가 거의 70 되는 몽고 장수 한 사람이 성 아래에 이르러서 성루와 기계를 둘러보고 탄식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종군하여 천하를 두루 다니면서, 성곽과 해자에서 공격하고 싸우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으나 일찍이 공격을 이처럼 되게 당하고도, 끝끝내 항복하지 않는 자는 처음 보았다. 성중의 제장(諸將)이 반드시 다 장상(將相)이 될 것이다." 하였다. ○ 살례탑이 그의 사자와 고려의 장군 조숙창(趙叔昌)을 보내어 이첩(移牒)하여 말하기를, “황제께서 신(臣 살례탑)에게 명하여, 고려에서 사신(使臣) 저고여(著古與)를 죽인 사고 등 몇 가지 일을 묻게 하였다." 하고 곧 말 2만 필과 처녀ㆍ총각 수천 명, 자라(紫羅) 1만 필, 수달피 1만 영(領)과 군사의 의복을 토색하므로 백관에게 명령하여 옷을 차등있게 추렴하도록 하였다. ○ 금은으로 만든 기물과 안장 갖춘 말 등을 당고(唐古)에게 보냈다. ○ 몽고 사자에게 국신(國贐 국가에서 외국의 사신에게 주는 노자(路資))으로 황금 70근, 백금 1천 3백 근, 유의(襦衣) 1천 벌, 말 1백 70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그리고 장군 조시저(曺時著)를 보내어 황금 19근, 백금 4백 60근, 은병 1백 16구, 비단옷, 안장 및 말 1백 50필, 명주옷 2천 벌, 수달피 75영(領)을 살례탑에게 주고, 또 황금 49근, 백금 1천 4백 20근, 은병 1백 20구, 모시ㆍ수달피ㆍ비단ㆍ유의ㆍ안장 갖춘 말 등의 물건을 휘하 장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조숙창(趙叔昌)에게 대장군에 가자하여 같이 가서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저고여들을 죽인 사건 등의 일을 해명하게 하였다.
|
간이집 제8권
축(閦) 스님의 시권에 두 수를 지어 주다. 스님이 나에게 와서 시를 청하게 된 것은 이 수재(李秀才)의 소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수재의 사람됨을 믿고 있었고, 따라서 그가 스님을 함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그의 청에 응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스님의 거처는 바로 관악산(冠岳山)의 묘덕사(妙德寺)였는데, 그는 거기에도 즐길 만한 일이 있는 만큼 구태여 깊숙한 곳으로 멀리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에 나도 뭔가 느낌이 들기에 이렇게 소감을 적어 보았다. |
스님과 허물없는 것은 산이 좋기 때문인데 / 莫逆逢僧爲愛山
산에서 스님이 와서 내 시 받아야 간다네 / 僧來却苦要詩還
모를레라 내 시를 또 어디서 취해 온단 말가 / 不知我亦何從取
내 시는 그저 푸른 하늘 흰 구름 속에 있는걸 / 詩在白雲空翠間
관악의 명찰(名刹)을 누가 올라갈 줄 알까 / 冠岳名藍孰解登
공연히 행전(行纏) 차고 천리 길 허비할 뿐 / 枉從千里費行縢
도성의 속인과 붙어사는 흰머리 글쟁이도 / 文章白首依京輩
묘덕사의 스님처럼 적막을 한번 즐겨 볼까 / 寂寞甘同妙德僧
| ||||
오언율(五言律) 148수 | ||||
득지가 또 시 다섯 편을 거듭 지어 숫자를 부러 꿰어 맞추려고 하기에 이끌리다시피 하면서 억지로 수답하여 보내 주긴 하였으나, 이는 매워도 너무 맵다는 탄식이 절로 나올 일이니, 식자들이 보고서 과연 뭐라고 하겠는가[得之又疊五章 欲足成數 牽帥酬寄 殊有椒桂餘辛之歎 識者見之 其謂斯何] |
말을 많이 하다 보면 군색한 결과를 초래할 뿐 / 言多秪取困
피곤하게 걸었으니 돌아가 쉬는 게 어떻겠소 / 行倦可無歸
취하기 싫어하면서 자꾸 술잔 들이밀고 / 惡醉仍添酒
더워서 죽겠는데 억지로 옷을 입히시오 / 嫌暄强進衣
티격태격하는 중에 얻는 게 혹 있더라도 / 枝梧雖或得
도시 의경은 그르쳐질 듯하오 / 意境恐都非
이제는 생화필 그만 던져 두고 / 擬閣生花筆
나작문(羅雀門)을 영원히 잠글 생각이오 / 長關羅雀扉
반평생 붓 들고 씨름한 끝에 / 半世攻文墨
이제 겨우 돌아갈 길 알았소이다 / 辛勤得路歸
맛깔진 고기 씹어 음미를 하고 / 薰腴咀作膳
향초 모아 조촐하게 옷으로 삼았나니 / 芳㓗集爲衣
깨닫고 난 뒤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끄덕끄덕 / 悟後頭頭是
길 잃고 헤맬 때는 형형색색(形形色色)이 언짢았소 / 迷時色色非
지음은 이제 경서(經書)에 의탁하고 / 知音託黃卷
한가한 문 닫고서 꼼짝 않을 작정이오 / 堅臥閉閑扉
시 속에 들어 있는 그대의 뜻 알고말고 / 詩裏知君意
돌아갈 귀자(歸字)의 뜻 전편(全篇)에 흘러 넘치나니 / 篇篇苦說歸
문득 부끄럽소, 미록과 같은 나의 성품 / 却慙糜鹿性
지하의 옷 홀로 입지를 못했으니 / 孤負芰荷衣
다생에 걸쳐 잘못 훈습(薰習)된 기질 / 習氣多生誤
세상과 맞지 않는 독특한 취향 / 酸醎觸處非
효표론의 혐의를 받을 수는 있겠소만 / 猶嫌孝標論
그래도 적공처럼 내걸지는 않으리다 / 不署翟公扉
남산을 뒤덮은 울창한 수목 / 樹擁終南隱
관악산 능선 따라 구름도 돌아가네 / 雲從冠岳歸
섬돌 틈새마다 가득 메운 푸른 이끼 / 莓苔塡砌縫
울타리엔 온통 담쟁이 덩굴 / 薛茘作墻衣
심심풀이 그저 바둑이나 두었을 뿐 / 遣寂棋枰在
양생(養生)하는 참된 수도 지금껏 못해 왔소 / 修眞鼎器非
거미도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 蛛蝥如解事
무작정 내 문간에 거미줄을 치오그려 / 結網强當扉
우스워라, 시에 빠져 정신이 없다 보니 / 自笑詩荒客
약상처럼 돌아갈 줄도 모르게 되었어라 / 都忘弱喪歸
경대(鏡臺) 위엔 먼지 가득 침침한 거울 / 鑒昏塵滿匣
칼집엔 푸릇푸릇 무늬 돋은 옛 검이라 / 劍古繡成衣
눈꺼풀 벗겨내 준 새로운 견해 / 刮膜開新見
그동안의 나의 잘못 명심하리니 / 銘心訟舊非
모쪼록 장난치는 동자들에게 / 須敎戱童子
입정(入定) 중인 스님 문을 열지 말게 해 주시라 / 莫啓定僧扉
[주D-002]생화필(生花筆) : 걸출한 문학적 재능을 말한다. 오대(五代) 왕인유(王仁裕)의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천보 하(天寶下)에 “이태백(李太白)이 소싯적에 쓰던 붓 끝에서 꽃이 피어나는 꿈을 꾸었는데 뒤에 과연 천재성을 발휘하여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하였다.
[주D-003]나작문(羅雀門) : 참새 잡는 그물을 펼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문정(門庭)이 적막한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급정열전 논(汲鄭列傳論)에 나오는 적공(翟公)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로 적문(翟門)이라고도 한다.
[주D-004]미록 …… 성품 : 사슴처럼 초야(草野)에서 뛰놀고 싶어하는 성품을 말한다. 참고로 소동파(蘇東坡)의 ‘차운공문중추관견증(次韻孔文仲推官見贈)’에 “我本麋鹿性 諒非伏轅姿”라는 시구가 있다.
[주D-005]지하의 옷 : 마름과 연꽃 잎으로 만든 옷으로, 조촐하게 사는 은자(隱者)를 뜻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製芰荷以爲衣兮 集芙蓉以爲裳”이라 하였다.
[주D-006]효표론의 …… 않으리다 : 당신과는 이제 그만 인연을 끊고 싶은데 그렇더라도 야박한 표현을 써서 절교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다. 효표(孝標)는 남조 양(南朝梁) 나라 유준(劉峻)의 자(字)로, 그가 지은 ‘광절교론(廣絶交論)’이 유명하다. 적공(翟公)은 서한(西漢) 때 사람으로, 정위(廷尉) 벼슬을 할 때에는 문전성시를 이루다가, 파직당하자 참새 그물을 쳐 놓을 정도로 문간이 한산하기만 하였는데, 다시 복직됨에 빈객들이 찾아가려 하자, 그 문에 큰 글씨로 써서 내걸기를[大署其門曰] “一死一生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態 一貴一賤 交情乃見”이라 하고 일체 거절하였다 한다. 《史記 汲鄭列傳 論》
[주D-007]약상(弱喪) : 어려서 집을 떠나 오래도록 타향에서 편안하게 살다 보니 마침내 고향에 돌아갈 줄도 모르게 된 경우를 말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삶만을 좋아하는 것이 미혹된 것이 아닌 줄 어찌 알랴. 그리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 역시 어려서 집을 떠나 돌아갈 줄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으랴.[予惡乎知說生之非惑邪 予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라고 하였다.
| ||||
금주음(衿州吟) | ||||
우거(寓居)하는 시골집에 제(題)하다. |
위태하든 순탄하든 양쪽 모두 느긋하니 / 危途順境兩閑閑
조물도 나는 어쩔 수 없다며 웃고 말리라 / 造物依然笑我頑
귀에 들어온 싫은 소리 이미 잊어버렸는데 / 已忘惡聲初入耳
얼굴에 무안한 기색 재차 뜨게 할까 보냐 / 肯敎慚色再浮顔
서쪽 재엔 금주 길의 흰 구름 가로 걸리고 / 白橫西阪衿州路
동쪽 문엔 관악산의 푸른 산빛이 뚝뚝 듣네 / 翠滴東門冠岳山
보리밭과 벼 논에 새 비가 넉넉히 내렸으니 / 麥隴稻田新雨足
이제부터는 세상 속에서 달리길 원치 않노라 / 從今不願走塵間
| ||||
금주음(衿州吟) | ||||
관악산 신방사(新房寺)의 주지(住持)는 무급(無及)의 도반(道伴)이다. 그가 삭방(朔方)에서 돌아와 이 절간에 머물면서 노숙(老宿) 아무 아무와 함께 먹을 것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먹여 주었다. |
신도가 스님을 먹이는 것이 원래 정상인데 / 檀越齋僧是故常
산승이 속인을 먹이다니 놀라서 넘어질 만 / 山僧饗俗可驚惶
흰 눈처럼 쌓인 만두 푹 쪄낸 그 빛깔 하며 / 饅頭雪積蒸添色
기름이 엉긴 두부 지져서 익힌 그 향기라니 / 豆腐脂凝煮更香
다생의 인연이 많으리니 이 어찌 우연이리오 / 緣厚多生非偶値
한 그릇 밥의 은혜 어떻게 갚을 수 있을는지 / 恩深一飯恐難當
나의 이 말 새겨서 천고토록 전하고 싶어라 / 欲書此語傳千古
만 길도 넘게 하늘에 치솟은 저 석벽 위에다가 / 石壁天齊萬仞强
| ||||
시(詩) | ||||
강가의 누각에서 비를 구경하다. |
구름 사이 햇살은 푸른 초원에 새어 비치고 / 雲間日脚漏靑蕪
구름 밖의 영주봉은 한 점이 우뚝한데 / 雲外靈珠一點孤
먼 봉우리에서 오는 바람 소리 들리더니 / 風自遠峯來有響
침침하게 비를 몰아서 평호를 지나가누나 / 朦朦吹雨過平湖
영주는 관악산(冠岳山)의 봉우리 이름이다.
| ||||
시류(詩類) | ||||
한강루(漢江樓)의 망년회(忘年會) 석상(席上)에서 |
제천정 위에다 화려한 자리를 베푸니 / 濟川亭上綺筵開
열두 동년들이 말을 달려 모여들었네 / 十二同年走馬廻
관악산 높은 봉들은 눈썹먹처럼 푸르고 / 冠岳高攢靑似黛
새로 불은 한강 물은 포도주보다 파랗네 / 漢江新漲綠於醅
긴 바람 솔솔 불어라 비는 흥을 재촉하고 / 長風細細雨催興
지는 해 더디어라 봄은 술잔에 가득구려 / 落日遲遲春滿杯
성은에 실컷 배불러 기취를 노래하노니 / 飽得聖恩歌旣醉
술자리서 옥산이 무너짐을 애석해 마소 / 樽前莫惜玉山頹
[주D-002]술자리서 …… 마소 : 《세설신어(世說新語)》에 의하면, 혜강(嵇康)의 사람됨은 마치 우뚝하게 빼어난 낙락장송(落落長松) 같아서, 그가 취했을 때는 또한 마치 옥산(玉山)이 곧 무너지려는 것과 같았다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옥산이 무너진다는 것은 술에 만취해 곧 넘어지려는 모습을 말한다.
| ||||
시(詩) | ||||
습망재(習忘齋)에 차운하여 부치다 |
용졸로 자신 지키매 절로 온전하나니 / 用拙存身本自全
오늘에 살며 고도(古道) 흠모함은 집안 유래 있어라 / 居今慕古有由傳
청빈은 청산의 집에서 표출되고 / 淸貧表出靑山宅
지업은 백발의 나이에 증가하누나 / 志業增添白髮年
쇠미한 세상에 어찌 죽은 말 뼈 얘기함을 용납하랴 / 衰俗寧容談死骨
씩씩한 마음에 외려 산 돼지 어깨를 베려고 생각한다 / 壯心猶擬割生肩
숲속에서 캐고 캐어서 누구에게 줄거나 / 中林採採將誰贈
꿈속에도 그리움은 관악산 앞에 걸렸어라 / 夢想長懸冠岳前
[주D-001]용졸(用拙) : 두보(杜甫)의 시 〈병적(屛跡)〉에 “소졸(疏拙)함으로써 우리 도 보존한다.〔用拙存吾道〕” 한 데서 온 말로, 생계나 세상살이에는 서툶으로써 본성을 보존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여기서는 은거하여 세상에 나아가지 않음을 뜻한다.
[주D-002]쇠미한……용납하랴 : 재주가 있어도 세상에 쓰이지 못함을 뜻한다. 소왕이 부국강병의 계책을 묻자 곽외(郭隗)가 인재의 등용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옛날 임금이 천금을 주어 사람을 시켜 천리마를 사오게 하였는데, 그 사람이 죽은 천리마의 뼈를 오백금을 주고 사왔습니다. 이에 임금이 대로하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죽은 말의 뼈도 오백금을 주고 사는데, 산 말이겠습니까. 지금 천리마가 오고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과연 일 년도 안 되어 천리마가 세 마리나 이르렀다 하였습니다. 이제 왕께서 인재를 등용코자 하시면, 먼저 저 곽외로부터 시작하십시오. 저 같은 자도 등용되는데 하물며 저보다 어진 이야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하였다. 《戰國策 燕策》
[주D-003]씩씩한……생각한다 : 연령은 많고 벼슬에 오르지 못했으나 씩씩한 기운이 여전함을 뜻한다. 송나라 육유(陸游)의 〈배민(排悶)〉에 “마흔 나이로 위수 가에서 종군했나니, 공명은 운수에 없으나 기운은 여전히 씩씩하다. 백발의 머리로 동오의 저자에서 흠뻑 술 취하여 스스로 긴 칼을 뽑아 돼지 어깨를 자른다.〔四十從軍渭水邊 功名無命氣猶全 白頭爛醉東吳市 自拔長刀割彘肩〕” 하였다.
[주D-004]숲속에서……걸렸어라 : 《시경》〈주남(周南) 권이(卷耳)〉에 “권이를 뜯고 뜯어도 기운 광주리에도 차지 못해, 아! 내 님을 그리워하여 저 큰길가에 버려두노라.〔采采卷耳 不盈頃筐 嗟我懷人 寘彼周行〕” 한 것을 차용하여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형용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백 척 높은 누대 푸른 물가 내려다 보는데, 견여(肩輿)로 성을 나가 함께 올라 구경하네. 먼 포구에 노을 밝으니 비단인양 얼기설기, 급한 여울에 석양 비치니 가늘게 금이 부서지네. 관악산이 푸른 빛 보내와서 자리 위에 들어오고, 양화(楊花)가 빛 물결 띄어 성 저쪽에 떨어진다. 함께 노는 여러 재상들 손님 대접 잘도 하네. 배 잇고 술 두루미 옮기니 흥 다시 깊어지누나.” 하였다.
| ||||
서독(書牘) | ||||
기삼십육(其三十六) |
중이 와서 초의의 서한을 전하고 또 다포도 전해주었네. 이곳의 샘맛은 바로 관악산(冠岳山) 한 맥에서 흘러나온 것인데 두륜산(頭輪山)에 비하면 갑을(甲乙)이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공덕(功德)의 삼사(三四)는 있겠기에 빨리 보내온 차를 시험해 보니 샘맛도 좋고 차맛도 좋아서 바로 한 조각 희환의 인연이었네.
이는 차가 그렇게 만든 것이요 편지로 그런 것은 아니니 그렇다면 차가 편지보다 낫단 말인가? 더구나 근일에는 일로향실(一爐香室)에 죽 머물러 있다니 무슨 좋은 인연이 있는 거요. 왜 갈등을 부숴버리고 한 막대를 멀리 날려 나와 이 차의 인연을 같이 아니하는 거요.
또한 근자에 자못 선열(禪悅)에 대하여 자경(蔗境)의 묘가 있는데 더불어 이 묘체(妙諦)를 함께 할 사람이 없으니 몹시도 사와 한 번 눈썹을 펴고 토론하고 싶은데 이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소.
약간의 졸서가 있어서 부쳐 보내니 거두어 들이기 바라오. 비오기 전의 잎은 얼마나 가려 놓았는지. 어느 때나 부쳐 보내 이 차의 굶주림을 진정시켜 주려는가 날로 바라며 불선.
향훈에게 가는 한 장의 편지는 행여 전달해 주기 바라네.
| ||||
제발(題跋) | ||||
단전 관악산시에 제하다[題丹鄽冠嶽山詩] |
관악산 시의 제사구(第四句)인 “몇 천 년을 한결같이 푸르렀도다[一碧幾千年]”는 극히 웅기(雄奇)하여 사람들이 이해하기도 쉽고 또 혹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이구의 “바위와 솔이 서로 엇물렸구려[巖松相鉤連]”에 이르러는 겉으로 보면 순필로 지나가서 심상하게 접속해 온 것 같은데 이는 가슴속에 오천 권(五千卷)이 들고 붓 밑에 금강저(金剛杵)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천연스럽게 맞추어져서 비록 작자라도 스스로 알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범식(凡識)과 속체(俗諦)로서 가능하고 가해(可解)할 수 있는 일이랴. 옛사람의 묘한 곳은 오로지 이 한 경지에 있으니 이 때문에 옛날의 작자는 지금 사람과 다른 것이다.
지금 네가 안력이 원만하고 익숙한 경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능히 이 한 경(境)을 터득했단 말이냐. 옛사람은 오히려 오천 권ㆍ금강저를 가지고도 인공(人工)으로써 이루는데 이는 자연히 흘러나와서 암암리에 옛사람과 합치되었으니 비하자면 조창(槽廠)의 노행자(盧行者)의 보리명경(菩提明鏡)의 게(偈)와 같다. 때문에 오조(五祖)가 마음이 수그러져 저도 모르게 굴순(屈)을 전해주게 된 것이다.
[주D-002]조창(槽廠)의 …… 게(揭) : 노행자는 선종(禪宗) 동토(東土) 제육조(第六祖) 혜능(慧能)을 이름. 8세에 부친을 여의고 장성하자 집은 더욱 가난하여 나무를 해다가 팔아 편모(偏母)를 봉양하였다. 하루는 저자에 들어가 어떤 사람이 《금강경(金剛經)》을 외우는 것을 듣고 그 얻은 곳을 물어서 기주(蘄州) 황매산(黃梅山)의 오조(五祖) 홍인선사(弘忍禪師)를 찾아갔다. 오조는 묻기를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영남(嶺南)에서 왔습니다.” 하였다. 조사(祖師)는 말하기를 “영남 사람은 불성(佛性)이 없다.” 하자. 혜능은 “사람은 곧 남북(南北)이 있지만 불성은 어찌 그렇겠습니까.” 하니, 사는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고서 대방(碓房)에 들어가 쌀을 찧으라 하고 인하여 노행자라 불렀다. 거기서 8개월을 지내자 오조가 부수(付授)할 때가 왔음을 알고 중도(衆徒)로 하여금 각기 득법(得法)의 게(偈)를 써 올리라 하자, 이때 상좌(上座) 신수(神秀)가 게를 쓰기를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慝塵埃”라 하니 , 혜능은 듣고서 “나의 소득(所得)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 하고 가만히 동자(童子)를 고용(雇傭)하여 밤에 벽 사이에다 한 게를 쓰기를 “菩提本非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慝塵埃”라 하였다. 오조는 그것을 알고서 남몰래 대방(碓房)에 들어가 묻기를 “쌀이 희냐?” 하니 “희지만 키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오조는 막대기로 대(碓)를 세 번 치면서 갔다. 혜능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그날 밤 삼경에 조상의 방에 들어가니 조사는 마침내 의법(衣法)을 주었다.
[주D-003]굴순(屈>) : 포백(布帛)의 이름인데 제일포(第一布)로서 대세포(大細布)를 말한다. 《의초육첩(義楚六帖)》 22에 “寶林傳云 唐言第一布 紡本棉花心爲之 卽達摩所傳之衣七條也 自師子尊者傳與”라 하였음.
| ||||
순일편(旬一編) | ||||
삼막(三幕) |
관악산(冠岳山)은 시흥(始興)과 과천(果川)의 경계에 있다. 그곳에 삼막사(三幕寺)라는 절이 있는데, 삼한 시대에 지어진 고찰이다. 신라 승려 원효(元曉)는 성이 설(薛)이고, 의상(義湘)은 성이 아(牙)이고, 윤필(尹弼)은 성이 윤(尹)이니,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제이다. 관악산에서 나누어 살았는데 원효의 일막(一幕)은 지금 폐허가 되었고, 의상의 삼막(三幕)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윤필의 이막(二幕)은 염불암(念佛庵)이다. 이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이 삼성산(三聖山)이라고 한다.
| ||||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 ||||
함양(咸陽)으로 가는 건숙(健叔)을 보내며 6수 |
한강 남쪽 언덕에는 말이 자주 울어대고 / 漢江南畔馬頻嘶
관악산 앞에는 보리 잎 가지런히 자랐네 / 冠岳山前麥葉齊
고향 길 이번 행차는 흥겨운 놀이 아니니 / 鱸膾此行非玩興
사립문서 사면 소식이나 들었으면 좋겠소 / 柴門要聽放金鷄
둘
함양 땅 옛 무덤엔 시든 풀만 무성한데 / 咸陽故塚迷衰艸
어찌 인간 세상에 어진 아들 있음을 -원문 빠짐- / 那□人間有子賢
무덤 앞에서 지전 사를 때 얼굴 막 알고서 / 化楮墳前方識面
신령이 응당 울어 가을 하늘을 꿰뚫으리라 / 神靈應泣徹秋天
셋
콩 열매 처음 익고 나무 그늘 짙은데 / 豆莢初黃老樹陰
물가 오두막엔 매미 울음 어지러우리라 / 衡門面水亂蟬吟
정과정 한 곡조는 춘풍 같은 솜씨이니 / 苽亭一曲春風手
넷
이별가 부르면서 새로 빚은 술을 드니 / 渭城唱裏提新釀
고양의 옛 주도를 전송하기 위함이라 / 爲送高陽舊酒徒
성세에는 한 인재도 버려짐이 없는 법 / 聖世一才無棄擲
왕손이여 귀한 몸 함부로 하지 마시라 / 王孫勿謾千金軀
다섯
깊은 가을 기러기는 남국으로 날아가니 / 高秋征雁賓南國
필마 타고 타향에서 세월을 보내겠소 / 匹馬他鄕度歲年
등불 끈 뒤 침상 바람이 취한 얼굴로 불면 / 燈落床風吹醉面
꿈 깨었을 때 두류산엔 달이 높이 솟으리라 / 夢醒月上頭流天
여섯
술업은 평생토록 백에 하나 못 이루니 / 術業平生百不成
앞길 막힌 오늘은 소리 삼키며 우노라 / 途窮今日泣呑聲
나 같은 서생이야 사방 떠돌 연분 있지만 / 書生有分飄南北
무슨 일로 왕손께서는 영남으로 가시는가 / 何事王孫嶺外征
[주D-002]정과정(鄭瓜亭) : 고려 의종(毅宗) 때 정서(鄭敍)가 지은 노래이다. 유배지에서 자신의 외로운 신세를 접동새에 비기어 임금을 사모하는 간절한 심정을 읊었다. 고정(苽亭)은 과정(瓜亭)의 오기(誤記)인 듯하다.
[주D-003]고양(高陽)의 옛 주도(酒徒) : 고양 땅의 옛 술꾼이란 말로, 술을 좋아하며 방탕하여 구속을 싫어하는 사람을 뜻한다. 역이기(酈食其)가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처음 만날 때 유방이 유생(儒生)을 싫어한다고 하자, “나는 고양의 술꾼이다.〔吾高陽酒徒也〕” 하였던 데서 유래한다. 《史記 卷97 酈生列傳》
| ||||
지리고(地理考) 13 | ||||
산수(山水) 1 경내(境內)의 산(山)과 도서(島嶼) |
○ 삼각산(三角山)ㆍ남산(南山)
○ 장자도(獐子島)
[주D-002]개마대산(蓋馬大山) : 현재의 백두산을 가리킨다는 설과 낭림산맥(狼林山脈) 일대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북한의 이지린은, “개마(蓋馬)는 ‘곰’으로 해석되며, 곰산[熊岳]이 요동에 있다.” 하였다. 《고조선연구 307쪽》
[주D-003]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 각라(覺羅)는 청나라 종실(宗室)의 성이다. 각라무목눌(覺羅武穆訥)로도 표기된다.
[주D-004]통지(通志) : 《성경통지》 권27에는 이 부분이 ‘舊志’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성경통지》에 나오는 안설(按說)을 《대청일통지》를 찬한 자가 자신의 안설(按說)로 만들면서 ‘通志’로 바꾼 것인 듯하다. 여기에서의 안설은 모두 《성경통지》의 안설이다.
[주D-005]영재(泠齋) : 원문에는 ‘冷齋’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두(頭)를 …… 한다 : 원문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7]철주는 정융진(定戎鎭)을 관할한다 : 원문에는 ‘州領定戎二鎭’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州領定戎一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봉두산은 …… 있다 : 원문에는 ‘鳳頭山在郡此’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鳳頭山在郡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도엽(桃葉) : 진(晉)나라 왕자경(王子敬)이 그의 첩(妾)인 도엽을 위하여 지은 악부(樂府)의 청상곡(淸商曲) 이름인데, 여기서는 가기(歌妓)를 가리킨다.
[주D-010]청원(淸源) : 청원 행사 선사(淸原行思禪師)의 별호(別號)로, 길주(吉州)의 청원산(靑原山)에 머물렀으므로 선서(禪書)에서는 흔히 청원(靑原)으로 표기한다.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문하에 청원과 남악(南岳) 두 제자가 있어 2대 법통(法統)이 나왔는데, 청원의 법은 조계(曹溪)로 흘렀고, 남악의 말류(末流)는 임제(臨濟)가 되었다.
[주D-011]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 : 문익(文益)을 가리킨다. 청량은 건당(建唐)에 있는 절 이름이며, 법안종(法眼宗)의 개조이다.
[주D-012]돌바닥은 …… 같다 : 원문에는 ‘石底水蔚始翠藍’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石底水蔚如翠藍’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그 형상이 …… 같아 : 원문에는 ‘形如龜狀潭中’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形如龜伏潭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바깥쪽에는 철망(鐵網)을 둘러서 : 원문에는 ‘外施銅鐵’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外施鐵網’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5]단단대령(單單大嶺) : 안정복은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 바로 그것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위지에서 이른 바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수령(分水嶺)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였으며,《韓國古代史硏究 192쪽》 북한의 이지린은 “단단대령이란 영은 요동반도를 좌우로 나누는 산맥의 최고산인 현 마천령이다.” 하였으며,《고조선연구 310쪽》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천산산(天山山) 줄기로 보고 있다.《조선전사 제2권, 113쪽》
[주D-016]단대령(單大嶺) : 원문에는 ‘單大領’으로 되어 있는데, 《후한서》 권115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17]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나, 마한(馬韓) 54국 가운데 하나인 소석색국(小石索國)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역주삼국사기 3책 676쪽》
[주D-018]길이 …… 있다 : 원문에는 ‘路其隘狹’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30에 의거하여 ‘路甚隘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9]무너진 …… 있다 : 원문에는 ‘頹垣壤塹’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30에 의거하여 ‘頹垣壞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0]배가 …… 지나갔다 : 원문에는 ‘舟過舟下’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8에 의거하여 ‘舟過其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만화초(滿花草) : 만화석(滿花席), 즉 여러 가지 꽃무늬를 수놓은 방석을 만드는 풀로, 골풀을 말한다. 골풀은 줄기는 원기둥형이고 1m 이상 자라는 풀로, 말린 줄기로 자리를 짠다. 등심초(燈心草), 석용추(石龍芻), 골속, 용수초(龍鬚草)라고도 한다.
[주D-022]우승은(于承恩) : 원문에는 ‘千承恩’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성현(成俔)
스님의 숙덕은 인천에 높아 / 上人宿德人天尊
가슴속이 물 거울, 맑아서 안 흐리네 / 胷中水鏡淸不渾
여여히 안 움직여 근원이 항상 맑으나 / 如如不動常澄源
부딪쳐 빛을 발하면 삼연히 번쩍번쩍 / 發光觸處森焞焞
아래로 탁세와 어울려도 세속 때를 벗어나니 / 下與濁世離垢氛
무한한 중생들이 선근을 의지하네 / 無限衆生依善根
관악산이 높아 대지를 짓누르고 / 冠岳山高壓厚坤
관악사는 낡은 절, 산을 문으로 삼았으니 / 冠岳寺古山爲門
산문이 울툭불툭 돌에 이끼가 감겼고 / 山門犖确縈苔痕
다래덩굴ㆍ겨우살이를 범인이 만지지 못하네 / 蘿蔦不許庸人捫
알씬한 나무들이 봄에 한창 무성하고 / 樹木葱蘢春正蕃
바윗돌은 우뚝우뚝 교룡이 쭈그린 듯 / 岩嶅突兀蛟龍蹲
영롱한 정계에 시끄럼이 없어 / 玲瓏淨界無塵喧
패엽을 항시 한가히 뒤적이더니 / 貝葉常向閑中翻
이 땅의 흙 먹는 몸, 임금의 은명 받자와 / 有身食土承君恩
석장을 안고 부득이 진세로 내려오니 / 抱錫未免塵寰奔
산이 비고 방이 고요, 거친 담도 비어 / 山窮室靜空荒垣
바위의 학이 울고 숲의 원숭이도 슬퍼했으나 / 呼號岩鶴悲林猿
산신령은 손뼉 치며 웃고 떠드는 말이 / 山靈拍手笑相誼
“왜 하필 옹색하게 우리[籠] 속에 갇혀 있으리” / 何用局促嬰籠樊
흥천사 큰 절이 지원과도 같은데 / 興天大刹如祗園
국리를 비는 큰 절, 시설도 장엄할싸 / 設利傑閣粧璵璠
향등이 늘어서고 동번이 즐비 / 篝燈列舍羅幢幡
경 논하며 글자 묻는 이 모두 다 명석 / 踏鐵問字皆名髡
성명 아래 훌륭한 제자도 많건마는 / 盛名之下多芳蓀
선심은 오히려 번루를 싫어했네 / 禪心却厭遭敲煩
가을 바람에 높은 날개가 치솟기만 생각하니 / 秋風逸翮思騰騫
번쩍이는 명성은 마음에도 없는 일 / 聲華燀赫非心存
몸을 던져 다시 본원으로 돌아가자 / 不如投身還本元
근심도 즐거움도 은원도 없는 데로 / 身無憂樂無恩冤
마음의 큰 지혜요 불도의 큰 원인 / 心之大智道大原
‘불이 무명언’으로 끝내 들어가니 / 竟入不二無名言
옛 선방의 송월은 그대로 아리땁고 / 舊房松月還嬋媛
나는 샘이 시원히 뿜어 내장을 씻어 주네 / 洗臟更快飛泉噴
산신령이 형제처럼 반가이 맞고 / 山靈邀迓如弟昆
원학이 동기처럼 흔들고 좇는구나 / 猿鶴掀啄諧箎塤
조용한 한 방에 아침 해가 떠오르니 / 翛然一室升朝暾
박산 향로에 연기도 맑고 따스할싸 / 博山煙縷淸而溫
진계를 굽어보니 시커먼 구름 둔쳤는 듯 / 下視塵界頑雲屯
나무들이 냉이마냥 마을을 둘러 있네 / 野樹如薺環孤村
산도 높고, 사람도 높고, 도도 두터우니 / 山高人高道亦敦
이 즐거움 영원히 잊지 않기 맹세하네 / 永矢此樂終不諼
부끄러워라, 내 신세는 미욱하고 어두워 / 愧我身世憨而惛
공리로 가는 곳마다 남모르게 속태우고 / 功利到處潛消魂
일생에 동으로 서로 날치고 다니면서 / 一生役役東西轅
탐전과 번뇌에 무찔리며 사니 / 貪嗔熱惱相屠呑
법문에 귀의하여 묘한 구원 바라나 / 歸依法門希妙援
메추리가 어찌 붕새 날개를 더위잡으리 / 尺鷃安得攀鵬鵾
선탑 선선한 바람에 귀밑머리를 흩날리며 / 鬢絲禪榻風掀掀
삼승 묘리를 토론하고 싶으나 / 三乘妙理要討論
홍진에 골몰한 몸 고의 속의 이인 양 / 汨沒紅塵虱處褌
몸 기울여 부질없이 강가만 바라보네 / 側身空望淸江濆
임술년 칠월 기망날 저녁에 / 壬戌七月旣望昏
격물제 난간 안에서 이 글을 써 보냄 / 書于格物齋中軒
| ||||
地理類 | ||||
|
漢江
漢江者列水也。前漢書志曰。呑列縣分藜山。列水所出。按呑列縣。卽樂浪屬縣。考之地理。今嶺西江陵界也。分藜者。五臺之山也。列水之源。發自五臺西峯之下曰于筒。紺碧而味洌。山有五泉。中曰玉溪。東曰靑溪。北曰甘露。南曰聡明。而于筒最佳。由于筒而下。南流于月精峯下。爲金剛淵。盤石平鋪。瀑流滙焉。諺傳神龍所伏。春至。餘項之魚隊千百。逬流至淵。奮力而騰。或升或不升。又至珍富嶺之西折而東。爲紬州爲桐江。一名大陰江。環㫌善而西爲廣灘津。折而南流。經三仙之巖。經越東爲錦障江。端廟旣遜位而居之。江上有落花巖。巖可四十餘丈。端廟昇遐。侍女從巖上投江死。故名落花。後建愍忠祠祀之。江中有紫烟巖甚峭妙。又西折而爲金鳳淵。南流至于大華山。經龍穴赤壁古城之山。爲訥魚灘。經臺巖石門香山之遷。西南流入丹陽境。經隱舟巖。水渟而黝。巖勢截江之半。沿而下石門如闕。其傍竇有仙人田。三島特立江中甚奇。稱島潭。復爲上津下津。上津一稱馬津。絶壁削鐵。名曰栖鶻巖。過長淮村下爲龜潭。石峯浸水。形如龜故名。江之南岸。三石峯臨水峻拔。曰五老。曰玄鶴。曰彩雲。又四五石峯抽撥如筍者曰玉筍。又出丹邱之。折而北流。至淸風府爲北津。又過錦屛之陽。爲風水穴。風秋冬息。春夏噓。産石鍾乳。寒碧樓對之。又爲靑草湖。江分一派瀦爲湖。色如藍。又經嚴城遷。西南流爲惶恐灘。上下兩灘。石如門閾極險。下灘深黑。水底皆盤石而圬爲釜三數處也。由寒碧之下。通稱巴水。又爲黃江。寒水齋權文純先生書院在其上。又西流爲浦灘北津。北津一稱澶洄江。又爲琹休浦。上有彈琹臺。新羅于勒彈琴處也。又爲月落灘。至于金遷。達川自南來會。
大同江
大同江一作大通江。又名浿水。史記漢元封三年。荀彘自遼東擊朝鮮。破其浿水上軍。乃至王險城下。漢地理志。樂浪郡有浿水縣。浿水西至增地縣入海。水經。浿水出樂浪鏤方縣。東南過臨浿縣。東入海。陏大業八年。伐高麗。來護兒卛江淮水軍。自東萊浮海。先進入自浿水。去平壤地六十里。尋爲高麗所敗。還屯海浦。唐龍朔元年。蘓定方伐高麗。敗其兵於浿水江。遂趨平壤。明萬曆二十一年。李如松援朝鮮至平壤。倭悉力拒守。如松度地形。東南幷臨江。西枕山陡立。惟迤北牡丹峯高聳最要害。如松乃遣將攻牡丹峯。督兵四面登城。遂克之。旣而如松駐開城。別將楊元軍平壤。扼大同江。以通餉饋是也。源出寧遠內樂林之白山。南流至樂倉。西南流至黑倉。爲黑淵江。經新倉西北流。爲仇非津。至古倉折而南流經長遷。至寧遠郡。西爲仇淵。又西南流至金城山。北流迤西爲凝江。經德川郡。南至大德山。南流爲三月江。洄爲龍島。折而西流爲狸岵淵。經無盡臺。南流爲靜戎江。經順川郡。東爲斜灘,城巖之津。又爲歧灘。又爲禹家淵。東流爲叉波河。東與沸流江會。
淸川江
淸川江大明一統志。在安州城東。亦名薩水。隋書隋大業八年。宇文述等擊高麗。渡鴨綠水。東濟薩水。去平壤城三十里。因山爲營。平壤險固不能拔。引還至薩水。軍半濟。爲高麗所擊。諸軍皆潰。將士奔還一日夜。至鴨綠水。行四百五十里。統志又云亦謂大寧江。平壤,黃州。西隔大寧江。東阻大通江。所謂兩江之中。今考輿地啚。經大寧江。自有其名。不可以淸川當之。且在平壤之西。則固可謂之西隔。至若大通則浿水之一名。黃州何甞居其西而謂之東隔乎。考之漢晉隋唐地志。則東方山川。未甞錯出。及乎元。而高麗之朝聘貢獻。無異一國。豈若四郡與三國時乎。然考据之踈甚多。明統志襲此而爲之。信乎古今人不相及也。又唐書。蛇水在平壤西境。龍朔初。龎孝恭等擊高麗。以嶺南兵壁蛇水。爲盖蘓文所攻。一軍盡沒。或謂之陀水。考之啚境。平壤西境。惟薩水爲近。蛇水疑薩水之一稱也。淸川之源。出江界之甲峴。西流經柔遠鎭鳳丹城。北爲龍釜淵。經立石。又西南流爲東江。經煕川郡南獐項。至月林山。爲月林江。南爲魚川。經杏亭東萊之院。南爲獐項之津,花遷之江。至無骨島爲薩水。經安州城。北至七佛島。播爲二水。合而西南流。至古城之鎭。爲古城江。至海望之隅爲老江。大寧江北來會入于海。
鴨綠江
鴨綠江一名馬訾水。漢書玄菟郡西盖馬縣注。馬訾水西南至安平入海。過郡二。行二千一百里。杜氏通典。馬訾水源出靺鞨白山。水色似鴨綠故名。去遼東五百里。高麗之中。此水最大。波瀾淸激。所經津濟。皆貯大船。其國恃此以爲天塹。水濶三百步。在平壤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大明一統志。在都司城東五百六十里。盛京通志。一名益州江。或呼靉江。長白山南諸泉南滙爲大江。淸統志。在吉林烏喇南九百七十七里。西北流。與朝鮮分界。止 其源出白頭山之大澤。伏流南出爲惠山江。至惠山鎭。左會虗川江。
五水旣合。經阿耳之鎭廣坪大小坡兒。楸仇,碧團,大小吉號昌洲。於汀廟洞雲頭之鎭,昌城之府。經鵂巖,仇寧,淸城,方山,玉江之堡,水口之鎭。至義州府北於赤島。東分三派。一南流爲九龍淵。一西流爲西江。一從中流名小西江。至黔同島。復合爲一。至淸水梁。又分二派。一西流與狄江合。一南流爲大江。繞威化島。至暗林串。西流至彌。勒堂古津江自東來。同爲大総江。入于西海。
豆滿江
豆滿江源出白頭山之陽甲山天坪。東流爲魚潤江。經長坂石橋臨江臺古城。又經茂山之西梁永豊山零頭之堡。至會寧之北。折而北流。經高嶺之鎭,防垣之堡,鏡城之府,潼關之鎭。爲壓江灘。東流經穩城府北。又折而東流爲龜巖柳田漁汀之灘。經美錢堡。又折而南流至黃拓坡。爲立石灘。經訓戎之鎭。至古耳之島,慶源之府。東至安原堡。經龍堂古城。至乾原堡。環撫夷之鎭。至慶興府東。經赤地爲愁濱江。又東流經造山。至鹿屯島入于海。
龍興江
龍興江一名瑤樂池。我太宗朝。河崙與都廵問使姜淮伯。置酒中流曰。此江以發祥舊址。尙可無名乎。乃以龍興名。源出永興之鐵甕山。東流爲橫川。又東南流爲鐵水。經永興府北。爲濟仁浦。經黑石里。爲龍興江。經王生島。至長坪社。爲漕津浦。南至末應島入于海。
城川江
城川江源出寧遠郡及咸興西北界狼林山。東南流。經中嶺堡,草房嶺。東爲黑林川。至獨山爲岐川。東南由哈蘭洞。至咸興府西。播爲二江。一東南流。經萬歲橋本宮西擊毬亭下。爲石潭入于海。其一西流大野中。復岐爲二川。曰乾川曰西川。爲三坪而復合焉。至都連浦入于海。都連浦。高麗故北界也。
洛東江
洛東江源出安東太白山之黃池。穿山而流故名穿川。南流爲買吐川。經淸凉山之丹砂。經天淵臺。爲濯纓潭爲洛水。經聾巖。爲汾江爲風月潭。西流經禮安縣爲浮津。西南流經鼻巖。爲蓼村灘。至安東府東。爲勿野灘。西折而爲犬項津。經檢巖山至花山。爲河回之勝。西爲大谷船倉脩正鵲灘之津。環龍飛山。爲無訖灘爲三灘。以沙川犬灘來會故也。折而南流爲河豊松羅津。經自天之臺。爲飛鸞竹巖。爲洛東津。東南流經鸕鷀巖。爲鯉淵,餘次,寶泉,月波,松鶴,飛山之津。經砥柱碑。南流爲㓒津東安所也之江。經河濱古縣。爲杏灘沙門之津。琴湖江自東來會。
太和江
太和江源出慶州之斷石山。南流至所山。折而東南流。爲盤龜川。至立石爲堀火川。至蔚山南。爲太和江注津。至島山洄爲渚內浦。入于海。
沙湖江
沙湖江源出潭陽之秋月山。山壁削立。四圍如城。徒行者只得緣西北而上。其中有泉十三。而溪澗縈紆。東爲二石潭。潭下有巨巖。水由巖穴而瀉下。飛湍洒空。注爲大澤。是爲龍淵。諺傳岩穴龍所穿也。屈曲之迹猶在。南流爲原栗川。至府東。北折而西南流。爲竹綠川。又西南爲滄江。至昌平縣。爲㓒川爲碧津。由極樂之坪。爲極樂江。至王子臺。砥石江自東來會。
蟾江
蟾江源出鎭安之馬耳中臺。及全州之熊峙。合而西南流。爲鎭安西川。至任實縣北。爲烏原川。西流經塞墻之陽雲南之山。南流爲葛潭。又東南流爲赤城江。又南流爲淵灘。又西南流經霽岩。東流至河泥島。爲鶉子江。東南流至于鴨綠津。洛水自南來會。
泗水江
泗水江源出龍潭珠崒山。西流至高山。西南流爲鴈川良正浦。至參禮驛前爲橫灘。由回浦之界。經東倉至新倉院。爲新倉津。經立石進鳳吉串之北。經羣山浦。入于海。
東津江
東津江源出井邑內藏山。西流爲鴟川。經井邑縣。西北流爲茅川。經梨坪白山。至金堤之食浦爲東津。經扶安東界。西北入于海。
沙津浦
沙津浦源出高敞半登山。爲道山川。又爲蟹川。西流環逍遙水光之山。過格浦入于海。
汭陽江
汭陽江源出羅州之雙溪山。東南流。環長興府而西。爲汭陽江。至舍人巖。西流至康津縣南。爲九十浦。過舟橋川南。爲耽津入于海。
錦江
錦江之源出於長水之水分峙。西流至龍巖爲松灘。北流至呑田爲伊浦。經銘峙。又西流爲達溪。經龍潭縣之東富利古縣。東折而至茂朱之西。爲召爾津。經㓒巖之阻。北洄爲廣石江。至虎溪之阨爲虎灘。東流爲高唐江深川津。西流爲赤登津。北爲車灘化仁之津。西至于沃川之北。經周岸鄕。爲末訖灘。西流爲荊角黔角新灘之津。又爲德津。西北流至龍塘北。爲灘里津瓦壁。緣江岸而有錦壁四松之亭。並可登臨。經孝浦至雙樹之陰。爲箭灘。拱北樓據其上。又西南流爲熊津。熊津者百濟之古城也。唐蘓定方自成山濟海。至仁川德積島。由公州破扶餘。其迹可按而攷也。劉仁願再破百濟。以其城爲都督府。江流從束中而去。至定山縣。爲王之津半灘石灘。灘上高麗李存吾所隱居也。經臯蘭之陰大野中。東南流爲白馬江。劉仁軌破倭處也。又至扶蘓山下。爲泗泚河。臯蘭寺在江上削壁。其傍有落花巖。百濟亡時。宮女投江處也。經浮山塲巖。爲古多津。經石城縣南至佛巖。爲浪淸津。經江景至黃山。西折爲菁浦。又西流經聖倉。爲南塘津西鎭浦。又爲茅浦龍塘津。西至舒川浦入于海。
大津
大津之源出陽智之曲頓峴。西南流爲禪院川。西至于素沙之野。又西流爲多羅窩飛津。經平澤縣北。爲鵾池浦。至望海山。爲慶陽津。經魯山西南爲貢津浦。一名大迺山。津有倉。收湖西諸邑稅漕至京師。至行擔島之北頓串津。自南來會此浦。上下沿之西者稱內浦。往來內浦者。多由此渡。
禮成江
禮成江源出遂安之彦眞山。南流至谷山之東。爲黑石灘,春灘,沙八灘。西南流至新溪西。又南流爲栗灘。經平山府北爲歧灘。經桃花谷將軍巖。爲箭灘,猪灘,馬灘。江流始大。馬灘李重老等戰賊适所敗處也。至牛峯縣。爲助邑浦。古稱歧平渡。至于開城府西。爲梨浦,錢浦,金谷浦。西南流至彌羅山之東南。爲禮成江。高麗朝宋。由此發船故曰禮成。又爲碧瀾波。入于海。宋史云自明州定海便三日入洋。又五日抵墨山入其境。自墨山過島嶼詰曲嶕石間。舟行甚駚。七日至禮成江。江居兩山間。束以石。湍激而下。所謂急水門。最險惡。又大明一統志。急水門在開城南海中。宛如巫峽。今考地志。急水者孫石項也。非禮成江也。漢水至通津。旣西南折爲甲串渡。又折而南至摩尼之後。石脉橫亘水中。如門之閾。其中少凹。三南稅船至此。候潮至得過。少有所遷延。船輒罥破。
이후 스크랩
'2011년 신묘년 산행 > 2011.5.8. 관악산 산행 (금지샘)'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5.8. 관악산 산행 금지샘 산악회 게시글 (0) | 2011.05.1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