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율곡 이이 어록

율곡 이이 선생님의 어록 (스크랩)

아베베1 2011. 5. 15. 23:47

 

 

 

율곡선생전서 제31권
 어록(語錄)
어록(語錄) 상(上)


남녀가 정기(精氣)를 합할 때 유기(游氣 떠도는 기(氣))가 거기에 합해진 다음에, 사람이 태어납니다. 순(舜) 임금이 태어날 때 아버지 고수(瞽叟)의 기는 비록 탁(濁)하였으나, 지극히 맑은 유기를 받았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된 것입니까?
그렇다. 대체로 부모의 기(氣)는 분수(分數)가 적고 천지의 기는 분수가 많다. 그러므로 고수의 탁한 기가 천지의 맑은 기를 당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순 임금이 성인이 된 까닭이다. 비유하자면, 한 잔의 매운 물을 한 독의 꿀물 속에 부으면 매운맛이 섞여 단맛으로 변하는 것과 같다. -이하는 문인(門人) 김진강(金振綱) 자장(子長)이 기록한 것이다. ○ 처음에는 제목을 이기심성정문답(理氣心性情問答)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선생이 손수 교열을 하였고 우계(牛溪) 선생이 그 끝에 제서(題書)하였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마음의 기(氣)이고, 진원(眞元)의 기는 몸의 기입니다. 비록 강한 마음의 기를 받았더라도 몸의 기가 강하지 못한 이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천지 사이의 허다한 유기(游氣)에는 맑고 부드러운 것도 있고, 맑고 단단한 것도 있다. 비록 마음에 호연지기가 있더라도 몸의 기(氣)는 강하지 못한 자가 있다. 안회(顔回) 같은 이는 맑은 기의 부드러운 것을 타고난 자였기에 단명(短命)하여 죽은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목기(木氣)를 많이 타고난 사람은 유(柔)하고, 금기(金氣)를 많이 타고난 사람은 강하니, 진원(眞元)의 기가 강하고 약한 것도 이 때문입니까?
소위 금기를 많이 받은 사람은 심기(心氣)가 강하니, 이것은 중을 지나친 것이고, 목기를 많이 받은 사람은 심기가 유하니, 이것은 중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진원의 기는 오로지 몸의 기만을 가리킨 것이고, 마음의 강하고 유한 것을 논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기를 타고나는 것이 수만 가지로 같지 않아서 한쪽은 맑고 한쪽은 탁하기도 하니, 이러한 자는 어떠한 사람이 됩니까?
사람이 혹 어버이에게 효도하면서도 형제에게는 불화(不和)한 자가 있다.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은 한쪽의 맑은 기에서 연유한 것이고, 형제에게 불화한 것은 한쪽의 탁한 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새나 짐승이 태어날 때에도 오행(五行)의 기를 모두 받습니다. 그러나 그 기가 깊게 가려지고 두텁게 막혀졌기 때문에, 제 몸의 운동이나 지각(知覺)에 있어서는 현명하지만, 남에게 미루어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사람의 남녀(男女)가 형체(形體)가 교접하고 기(氣)가 감응(感應)할 때, 반드시 사람이 될 유기(游氣)를 감응한 뒤에 사람이 되고 만일 이것이 물(物)이 될 유기이면 감응할 수 없는 것입니까?
그 이치는 그렇다. 그러나 옛날 어떤 사람은 범을 낳기도 하고 뱀을 낳기도 하여 이 이치와는 어긋나니 알 수 없다.

범인(凡人)의 기는 비록 탁하지만 통하므로 열릴 수 있고, 금수(禽獸)의 기는 채워지고 막혔기 때문에 열릴 수 없습니다. 통하고 막히는 것의 구분을 듣고 싶습니다.
범인의 기는 탁한 물과 같아서 맑게 할 수 있으나, 금수의 기는 진흙 속의 물과 같아서 맑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음양(陰陽)이 순환하여 계속되는 가운데 유기(游氣)가 출현(出現)합니다. 음양의 기는 본래 맑은 것인데, 유기가 생긴 뒤에 비로소 청탁(淸濁)으로 나누어집니까?
음양과 유기는 두 가지의 다른 기가 아니다. 만물이 끊임없이 생기는 것으로 말하면 유기라고 하고, 쉬지 않고 연속해서 도는 것으로 말하면 음양이라고 한다.

오행(五行) 가운데 목(木)ㆍ금(金)은 생수(生數)의 발용이고, 수(水)ㆍ화(火)는 성수(成數)의 발용입니까?
목ㆍ금은 음양의 위치가 고정되어 변하지 않고, 수(水)ㆍ화(火)는 서로 음이 되기도 하고 양이 되기도 한다.

동지(冬至)에 일양(一陽)이 생기고 하지(夏至)에 일음(一陰)이 생기는 것도, 음양이 서로 그 근본이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목기(木氣)는 양(陽)인데 강(剛)이라고 하지 않고 유(柔)라고 하며, 금기(金氣)는 음(陰)인데 유라고 하지 않고 강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음은 체(體)는 강하지만 용(用)은 유하며, 양은 체는 유하지만 용은 강하기 때문이다.

천지간의 유기가 합하여 바탕을 이룰 때, 어떤 것은 목기로 되고 어떤 것은 금기(金氣)로 바탕을 이루는데, 사람은 언제나 수기(水氣)와 합하여 끝없이 생기는 것입니까?
하늘과 사람은 다 수기와 합하여 바탕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수(水)는 생수(生數)가 감응하여 남자를 낳고, 성수(成數)가 감응하여 여자를 낳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 대체로 수기(水氣)에는 음도 있고 양도 있다. 양기가 먼저 감응하면 남자를 낳고, 음기가 먼저 감응하면 여자를 낳는다.

기(氣)는 맑은 데 질(質)이 순수하지 않은 사람은, 알기는 하면서 행하지 못합니다. 어찌하여서 기가 맑기도 하고 질이 불순하기도 한 것입니까?
맑은 양기를 타고났기 때문에 기가 맑고, 탁한 음기를 타고났기 때문에 질이 불순한 것이다.

수(水)와 목(木)은 체(體)는 유(柔)하나 용(用)은 강(剛)하고, 화와 금은 체는 강하나 용은 유합니까?
그렇다. 다만 수와 화는 서로 강이 되기도 하고 유가 되기도 한다.

수기를 많이 타고난 사람은 총명합니까?
화기를 많이 타고난 사람이 총명하고, 수기를 많이 타고난 사람은 침착하고 지혜가 있다.

금(金)은 안은 음(陰)이고 밖은 양인데, 수(水)의 내명(內明)한 것만 못합니까?
금은 음기의 맑은 것을 얻어서 질(質)이 되었기 때문에, 금과 수를 똑같이 내명(內明)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물의 안[內]이 양이면서 밝은 것만은 못하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평평(平平)한 유기를 타고난 자는 부모의 기가 주도하는 것입니까?
유기가 지극히 맑은 것과 지극히 탁한 것은 부모의 기가 관여할 수 없으나, 중등 이하의 사람은 기를 받은 것이 맑지도 탁하지도 않기 때문에, 부모의 기가 마침내 주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음양과 동정(動靜)은 어느 물건이든 없는 데가 없으니, 그것을 심(心)의 동과 정에도 음양을 분속(分屬)할 수 있습니까?
미발(未發)의 성(性)은 음이고, 이발(已發)의 정(情)은 양이다.

심(心)의 본체(本體)는 비록 기(氣)에 구애되고 물욕에 가려짐을 면치 못하지만 그 구애되고 가려지는 것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사물에 감동되어 움직일 때, 가려진 데서 발(發)하면 불선(不善)한 정(情)이 되고, 가려지지 않은 데서 발하면 선(善)한 정이 됩니까?
그렇다. 대체로 사람의 마음이 가려진 곳의 분수(分數)가 많고, 가려지지 않은 곳의 분수가 작으면 선정(善情)은 항상 적게 나오고, 악(惡)한 것은 항상 많다.

본연(本然)의 성(性)은 비유하면 물이고, 기질(氣質)의 성은 비유하면 그릇이니 물욕은 그릇 안의 찌꺼기입니까?
물욕은 흔들리는 그릇 안의 물이다. 흔들림이 그치면 그 물은 차츰 맑아져서 처음처럼 된다.

사물이 마음에 감동될 때, 먼저 기(氣)에 감동되고 이(理)가 뒤따라 타는 것입니까?
이(理)와 기(氣)를 어찌 선후(先後)로 구분할 수 있겠느냐.

이것을 물과 그릇에 비유하면, 그릇이 먼저 움직이고 물이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까?
그릇이 움직이는 것과 물이 흔들리는 것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니 선후를 구분할 수 없다.

태극도(太極圖)의 주(註)에, “동(動)과 정(靜)이라는 것은 타는 틀이다.” 하였는데, 저의 의견에는, 기(氣)가 발(發)하면 이(理)가 올라탄다고 한 말은, 기가 움직일 때는 원래 당연히 탄다는 글자를 쓸 수 있지만, 그것이 정지할 때는 탄다고 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理)와 기는 원래 서로 떠날 수 없는 것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람과 말[馬]에 비유하면, 말을 타고 가는 것을 탔다고 말하고, 말은 탔으나 가지 않는 것도 또한 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본연의 이(理)는 순선(純善)하여 악함이 없지만, 그것이 기(氣)를 타게 된 뒤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습니까. 물에 비유하면, 본래 맑은 물을 더러운 땅에 버리면 물도 더러워지지만 이것을 깨끗한 그릇에 담으면, 물은 마침내 본래의 맑은 성(性)을 잃지 않는 것과 같습니까?
이치는 한가지이지만 현상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만물(萬物)의 제각기 다른 체(體)를 관찰하면 이치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선유(先儒)는 항상, “그 성(性)을 회복하라.”고 말하고, 그 기를 되찾으라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무슨 까닭입니까?
본연의 성(性)은 비록 물욕에 가려지고 기에 구애되었더라도, 그 근본을 추구하면, 순선(純善)하고 악이 없다. 그런 까닭에 그 성을 회복하라고 말한 것이다. 기(氣)는 탁하기도 하고 불순하기도 하여 이미 처음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기를 되찾으라고 말하지 않고, 기질(氣質)을 바로잡으라고 말한 것이다.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은 하늘의 성(性)이고,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는 사람의 성입니다. 하늘과 사람의 성은 한가지인데, 그것이 발(發)하면 사람에게는 인심(人心)ㆍ도심(道心)의 구분이 있으나 하늘에는 인심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늘에는 혈육(血肉)의 기(氣)가 없기 때문에 도심(道心)이 있을 뿐이지만, 사람은 혈육의 형체가 있으므로 인심을 발하는 것이다.

사단(四端)을 오로지 이(理)라고 말하는데, 저의 생각에는 사단의 정(情) 또한 기(氣)가 아니면 발(發)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 기는 버리고 오직 이만을 가리킵니까?
사단의 정은 맑은 기를 타고 발하여, 형기에서 나오는 사욕에 가려지지 않고 곧 본연(本然)의 성(性)을 수행(遂行)한다. 그러므로 이(理)를 주(主)로 하여 말한 것이다.

본연의 성을 가리어지게 한 것은 기(氣)인데, 회복되게 하는 것도 기입니까?
이(理)는 하는 것이 없고 기(氣)는 하는 것이 있으니 그대의 말도 옳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처음에는 도의(道義)가 이것을 이루지만 이미 이루어진 뒤에는 기(氣)가 도리어 도의에 배합(配合)되어 이것을 돕는 것입니까?
호연지기는 도의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도의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다.

선정(善情)이 발하자마자 악념(惡念)이 곁에서 생겨나는데 이 악념이 선정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의(意)는 이 정(情)으로 인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한 것이 이(理)를 좇으면 선정이 곧 이루어져 악념이 생겨날 수가 없고 생각한 것이 합당하지 못하면 악념이 곁에 생기는 것이다.

자제(子弟)가 오늘 부형(父兄)을 보면, 효제(孝悌)의 마음이 매우 절실하고 지극하다가, 내일이 되어 그들을 보면 효제의 마음이 도리어 미약해지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게으른 마음이 가리어져서 효제의 마음이 한결같지 못한 것이다.

저의 의견으로는, 마음의 본체(本體)가 완전하지 못하여 가리어진 데도 있고 가리어지지 않은 데도 있는 까닭에, 가리어진 데부터 발하면 느끼는 바가 얕기 때문에 효제의 마음이 미약하고, 가리어지지 않은 데로부터 발하면 느끼는 바가 깊기 때문에 효제의 마음이 절실하고 지극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도 옳다.

칠정(七情) 가운데서 희(喜)와 낙(樂)은 비록 제각기 한 개의 정(情)이라고 하나 간혹 희로 말미암아 낙에 이르기도 합니다. 어떻게 희와 낙을 분별합니까?
상정(常情)을 논한다면, 남이 어떤 때 물건을 선사하면 희(喜)의 정이 나오지만 낙(樂)에 이르지는 않으며, 종고(鐘鼓)의 소리를 들으면 낙의 정이 바로 나오는 것이다.

계신(戒愼)ㆍ공구(恐懼)의 네 글자는 비록 함양(涵養)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노력하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정(靜)할 때의 경(敬)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의도적으로 무겁게 짓눌러서는 안 된다.

처음으로 배우는 자는 함양(涵養)은 할 수 없으나 성찰(省察)하는 일에는 공부할 수 있습니까?
이것을 주(主)와 종(從)에 비유하면 반드시 함양을 주로 하고 성찰을 종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 뒤에 학자의 공부가 비로소 진보되니 만약 함양을 가볍게 여긴다면 잘못이다.

천리와 인욕의 정(情)이 동시에 함께 나올 수 없는데, 서로 싸운다고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악념(惡念)이 처음 일어나면 뜻으로 헤아려서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려 할 때에 실지로 그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선과 악이 서로 싸우게 되는 것이다.

심(心)이 미발(未發)할 때에 이발(已發)의 이(理)가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 또한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미발을 태극의 체(體)라 생각하고, 이발을 태극의 용(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경(敬)은 함양과 성찰을 겸한 것이지만, 의(義)는 오로지 성찰만을 가리킨 것입니까?
그렇다.

그러한 까닭은 이(理)의 체(體)이고,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은 이의 용(用)입니다. 기(氣)의 체와 용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기의 체와 용은 음과 양이다.

음은 정(靜)하므로 체가 되고 양은 동(動)하므로 용(用)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

사단(四端) 가운데 측은(惻隱)과 수오(羞惡)의 두 가지 정(情)이 가장 많이 발용(發用)됩니까?
그렇다.

인심(人心)은 형기(形氣)의 사적인 데서 생기고, 도심(道心)은 성명(性命)의 정당함에 근원함은 무슨 뜻입니까?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따위는 도심이고, 주리면 먹고 싶고 추우면 입고 싶은 따위는 인심이다. 대개 인심은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절제하는 것을 귀중히 여기며, 도심은 보양(保養)해야 하므로 미루어 넓히는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

증자(曾子)가 분수(分殊)만 알고 이(理)가 하나임을 몰랐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증자는 다만 아버지가 되면 자애하고, 아들이 되면 효도하며, 형이 되어서는 우애(友愛)하고, 아우가 되어서는 공순해야 한다는 것을 알 뿐이고, 자애니, 효도니, 우애니, 공순이니 하는 것이 하나의 이(理)에서 같이 나왔다는 것을 몰랐는데, 참으로 알고 힘써 행하기를 오래하고 나서, 부자(夫子)의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한다.”라는 가르침을 들은 뒤에 얼음이 녹는 것처럼 의혹이 풀어졌다.

사람이 죽으면 형기(形氣)가 다 없어져 버리는데, 자손이 제사를 지내면 흠향한다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자손의 기(氣)는 부모의 유체(遺體)이기 때문에 지성으로 제사를 지내면 조상의 영혼이 감응하여 흠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상의 영(靈)이 명명(冥冥)한 가운데 있습니까?
지성으로 제사 지내면 잠깐 사이에 영혼이 와서 흠향하는데 어찌 항상 명명한 가운데 있겠느냐, 이것을 꽃에 비유한다면, 겨울철에 사람이 토실(土室)을 만들어 사방의 바람구멍을 없애고 따뜻한 기운을 만들어 놓으면 꽃이 자연히 피는 것과 같다. 지성으로 조상의 영혼을 모시는 것이 토실을 만들어서 겨울철에 꽃피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냐하시고 선생이 이로 인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읽고 체득(體得)한 데가 있냐고 물으시어 논심성정(論心性情)을 논한 곳에서는 경험하여 얻은 것이 있는 듯 합니다.

일성혼연(一性渾然)이라고 하는 것은 성의 본체가 완전히 갖추어서 흠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미발(未發)인 때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형적을 볼 수 없고 오성(五性)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있는 것이다.

행동함에 경(敬)을 돈독히 하라는 것은 움직일 때의 경이니 임금을 섬기는 데도 경을 돈독히 하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도 경을 돈독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성학집요(聖學輯要)》에 이르기를, “신독(愼獨)은 성의(誠意)에 속한 것이고, 계구(戒懼)는 정심(正心)의 등속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정심은 함양과 성찰을 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계구를 정심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합니까?
그렇다. 이런 까닭에 계구를 전적으로 정심이라고 가리키지 않고 정심의 등속이라고 말한 것이다.

오성(五性)은 각각 간살이 있어서 만일 어떤 물욕이 의(義)의 간살을 가리면 수오(羞惡)의 정(情)은 발(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때때로 나타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뜬구름이 달을 가려도 달빛이 어떤 때에는 돌연히 구름 사이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의(義)의 간살이 비록 물욕의 가림이 있더라도 수오의 정이 때때로 나타나는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타고난 기품(氣稟)이 앞에서 구애되고 물욕(物欲)이 뒤에서 가리어지니, 학자(學者)의 공부가 구애된 곳에서는 어렵고, 가리어진 데에서는 쉬운 것입니까?
가리어진 물욕을 이겨서 제거해 버리면 타고난 기품의 구애도 동시에 사라지는 것이다. 공부하는 데 어찌 두 가지의 이치가 있겠느냐.

성무위(誠無爲)라고 하는 성(誠)은 성(性)의 본체(本體)를 가리킨 것이고, 불성무물(不誠無物)이라고 하는 성(誠)은 노력의 뜻이 있는 것입니까?
성(誠)이라는 것은 실리(實理)이다. 실리가 없으면 사물이 없다. 이른바 성이라는 것에 어찌 차이가 있겠느냐.

‘불성무물(不誠無物)’이라고 한 성(誠)에 대해 주자(朱子)가 해석하기를, “보는 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사물을 볼 수 없고, 똑똑하게 듣지 않으면 사물을 들을 수 없다.[視不明則不能見是物 聽不聰則不能聞是物]”고 하였으니, 이 성은 무위의 성[無爲之誠]과는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하였기 때문에 노력하는 뜻이 있는 것이고 대체를 논한다면 무위의 성과 무물의 성[無物之誠]은 하나이고 둘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 색욕(色欲)에 대하여 발(發)하는 것이 바를 수 있다면, 이 일에 있어서 마음의 허물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발한 것이 모두 불선(不善)함이 없어야만 마음의 허물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기미는 선악이다.[幾善惡]는 주(註)에, “천리(天理)는 본래 당연히 드러나 보이는 것이지마는, 사람의 욕심이 이미 그 사이에 싹트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 사이라는 글자의 뜻이 자세하지 않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여기에 대하여 어떤 이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서, 정(情)이 처음 발할 때에는 불선(不善)이 없다가 나중에 악(惡)이 된다고 하는 이가 있다. 이런 견해는 매우 미혹된 것이다. 이 사이라는 것은 바로 천리는 본래 드러나는 것이지만 사람의 욕심도 그 사이에서 싹튼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사욕(私欲)이 깨끗하게 없어지면,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하여 인(仁)을 이루 다 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은 생리(生理)이므로 이루 다 쓸 수 없는 것입니까?
인(仁)은 다만 생리(生理)일 뿐 아니라 곧 천하의 정리(正理)이다. 사욕을 제거하여 마음이 발하는 것이 다 천리이면 정리를 이루 다 쓸 수 없는 것이다.

사욕(私欲)의 생각은 막아도 다시 생기기도 하고 다시 생기지 않는 것도 있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을 잡초(雜草)를 제거하는 데 비유하면, 그 뿌리를 뽑아 버리면 다시 나지 않고 흙으로 덮어 두기만 하면 곧 뿌리가 다시 나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주자(周子)가 정자(程子)의 사냥에 대한 말에 답하기를, “이 마음이 잠재할 때는 발하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싹이 터서 움직이면 다시 처음과 같아진다.” 하였다.

오행(五行)의 화(火)는 즉 오성(五性)의 예(禮)와 같은 것입니다. 화의 광명(光明)함과 예의 찬연(粲然)하게 빛남이 서로 비슷합니다. 그러나 불은 불꽃 위에 발동하는 물질이고 예는 겸손하게 물러서고 사양하고 자제(自制)하여 법도에 좇는 도리로서 그 기상이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예(禮)의 쓰임은 크다. 만일 이것을 종묘와 조정에 사용하면 그 엄숙하고 정제(整齊)함이 또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오직 예가 겸손하게 물러서고 사양하며 엄숙하기 때문에, 찬연하게 밝고 성대한 기상이 있는 것이다.

종성령(鐘城令)의 이기론(理氣論)은 어떠합니까?
종성(鐘城)이 말하기를, “모든 물(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때에는 이것을 이(理)라고 하고, 이미 이루어진 뒤에는 이것을 기(氣)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이에는 기가 없고, 기에는 이가 없다는 뜻으로 선유(先儒)가 말한, “이와 기는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논으로 보면 이것은 가공된 헛말이 된다. 어찌 큰 착오가 아니겠느냐.

허성보(許晟甫)가, “인심(人心)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는데, 도심(道心)은 순선(純善)하여 악이 없다. 인심의 선도 도심인가.”라고 물으니, 김진강(金振綱)이, “인심의 선한 것도 도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것은 도심의 등속으로서 성명(性命)의 바름에서 근원한 것이고, 굶주리면 먹고 싶고 추우면 입고 싶은 것은 인심의 등속으로서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기는 것이다. 인심과 도심은 각각 이것을 주장하는 바가 있어서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인심의 선(善)을 오로지 도심이라고 말한다면 성인(聖人)에게는 도심만이 있을 뿐이니, 주자(朱子)가 어째서 상지(上智)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다고 말하였겠는가?” 하니, 선생이 옳다고 하였다.
박순경(朴舜卿)이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욕(欲)은 어떤 성(性)에서 일어나는가.”고 묻자 김경일(金敬一)이, “지(智)에서 발한다.”고 하고, 김진강(金振綱)은 대답하기를, “소리와 빛과 냄새와 맛의 욕을 아는 것은 지의 이치이고, 소리와 빛과 냄새와 맛의 욕을 생기게 하는 것은 인(仁)의 이치이다.”고 하였다. 박순경이, “인에서 생긴다는 것은 범설(汎說)이다. 칠정(七情) 중에 욕(欲)이라는 글자는 인에 속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이목구비의 욕 또한 반드시 인의 간살에 있는 것이다.” 하니, 선생이 “이 말이 그럴 듯하다.”고 하였다.
박순경(朴舜卿)이 “‘천지는 정성(定性)이 있어서 변함이 없다.’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라고 물었는데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추후(追後)에 생각하여, 선생에게 질문하기를, “사람이란 것은 기품(氣稟)이 맑기도 하고 탁하기도 하여 반드시 수행하는 공부를 쌓은 뒤라야 그 본래 착한 성(性)을 회복하지만, 천지의 기(氣)는 지극히 맑고 지극히 통하여서 수행을 하지 않아도 이(理)는 본래 순일(純一)하기 때문에, 천지에는 정성(定性)이 있어서 변함이 없다고 합니까?” 하니, 선생이 옳다고 하였다.
김경일(金敬一)이, “하나이기 때문에 신묘하고 둘이기 때문에 변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음양의 기(氣)가 한결같지 않으면 순환할 수 없어 중단되게 될 것이며, 둘이 아니면 홀로 운용할 수 없어서 생성(生成)의 공이 없을 것이다. 둘이기 때문에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만물이 화생(化生)되고, 한결같기 때문에 물(物)이 체(體)되어 빠뜨리지 않고 묘한 작용이 무한한 것이다. 대저 신(神)이라는 글자의 뜻은 자취를 볼 수 없고, 화(化)라는 글자의 뜻은 자취를 볼 수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니, 이에 선생도 “그렇다.”고 하였다.

원(元)은 사덕(四德)을 포괄하고, 인(仁)은 오상(五常)을 포괄하는데, 목(木)은 오행(五行)을 포괄하지 못합니다. 저의 의견으로는,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은 하늘에 있는 이(理)이고,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는 사람에게 있는 이입니다. 대체로 이는 혼연일체(渾然一體)일 뿐이므로, 원(元)은 사덕을 포괄하고 인은 오상을 포괄하지만, 오행은 생성(生成)한 질(質)이 각각 하나의 기(氣)이므로, 목(木)은 오행을 포괄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공용(功用)으로는 귀신(鬼神)이라고 이르고, 묘용(妙用)으로는 신(神)이라고 하니, 귀신의 신은 펴는 것이며 오는 것이고, 묘용의 신(神)은 다만 신묘하다는 뜻을 가리킨 것입니까?
그렇다.

인(仁)과 성(性)은 다릅니까?
성(性)이란 것은 오상(五常)의 총칭이고, 인(仁)이란 것은 한 가지 성만을 일방적으로 말한 것이다.

인(仁)만을 말한다면, 인이라는 것은 천하의 정리(正理)로서 이것이 바로 본연(本然)의 성(性)입니까?
전체의 인(仁)은 바로 성(性)이니, 인과 성은 다른 것이 아니다.

마음에 있는 것은 성(性)이므로 허령(虛靈)합니다. 만일 성이 없다면 마음은 빈 그릇이 되어서 생(生)의 이(理)가 끊어집니까?
마음이 허령한 것은 다만 성(性)이 있어서 그런 것뿐만이 아니다. 지통지정(至通至正)한 기(氣)가 엉기어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허령(虛靈)한 것이다.

하늘에도 미발(未發)한 것이 있습니까?
사시(四時)로 말하면 가을ㆍ겨울은 미발(未發)이고, 봄ㆍ여름은 이발(已發)이다.

음양의 기는 가득 차면 반드시 이지러지고 이지러지면 반드시 차게 됩니다. 차고 이지러질 때에, 두 기가 각각 독자적으로 서로 교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한 기(氣)로써 차기도 하고 이지러지기도 하지만 이(理)는 순환하는 기를 탈 뿐, 한 번 차고 한 번 이지러지는 변화가 없습니까?
기(氣)는 비록 소멸과 성장이 있으나 이(理)에는 소멸과 성장이 없다.

나무는 생기(生氣)가 다하면 고사(枯死)합니다. 선생께서 우계(牛溪)에게 회답한 글에서, “마른나무는 마른나무의 기가 있다.”고 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마른나무는 비록 생기는 없으나 말라진 기(氣)는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생기가 유산(游散)하면 죽습니다. 이미 죽은 뒤에 무슨 기가 있습니까?
시체를 불에 넣으면 냄새가 있다. 만일 기(氣)가 없다고 한다면 어찌 냄새가 있겠느냐.

불의 열기(熱氣)가 사라져 없어지면 재가 됩니다. 이미 재가 된 뒤에 무슨 기가 있겠습니까?
“재 가루를 눈에 뿌리면 쑤시고 아프다. 만일 기가 없다면 어떻게 쑤시고 아프겠느냐.” 하고, 인하여 책상을 가리키면서, “이 책상에 기가 없으면 또한 해소(解消)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상은 기묘년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안자(顔子)의 호학론(好學論)에,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본성을 기른다.’고 하였으니, 심(心)과 성(性)은 하나인데, 어찌 이것을 나누어 말하는가?” 하니, 김진강(金振綱)이 “성이란 것은 심의 이(理)이고, 심이란 것은 성의 기(器)이다. 정(情)이 마음속에서 움직여서 흔들리고 빼앗기게 되면, 마음속에 있는 성도 보양(保養)할 수 없어 마침내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본성을 기른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정(情)이 성(性)에서 나왔는데 도리어 그 성을 해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정(情)의 불선(不善)한 것은 비록 성(性)에 근본 하였으나 이미 형기(形氣)에 가리어진 바 되었기 때문에 도리어 그 성을 해치는 것이다.

성에서 발한 정이 어째서 형기(形氣)에 가리어지는가?
본연의 성(性)은 비록 불선(不善)이 없으나 기품(氣稟)이 이것을 구속하고, 물욕이 이것을 가리어서 성이 그 본질(本質)을 보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情)이 발할 때 형기에 가려져 악(惡)이 되기도 한다. 이에 선생이 “이 말이 옳다.”고 하였다.

서재(書齋)에서 여러 벗들이 서로 강론하기를, “천지의 기는 지극히 통하고 지극히 맑은 데, 유기(游氣)는 어떤 것은 탁하고 어떤 것은 맑으며 어떤 것은 잡되고 어떤 것은 순수하니,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천지의 기가 본래는 맑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순환하는 동안에 많은 변화가 생긴다. 그런 까닭에 역시 맑기도 하고 탁하기도 한 것이다.

본체의 기가 이미 맑은 데, 그 속에서 나온 기가 맑기도 하고 탁하기도 하여 고르지 않은 까닭을 모르겠다.
비유하면 본래 맑은 물이라도 흔들려 그치지 않으면, 작은 찌꺼기가 저절로 생기는 것과 같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맑은 유기(游氣)를 타고난 자는 그 이(理)가 또한 맑고, 탁한 유기를 타고난 자는 그 이도 탁한가?
그 본체(本體)의 이(理)로 미루어 보면, 맑은 기와 탁한 기의 이가 선(善)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기를 올라타는 이로 이것을 논하면 맑은 기의 이는 맑고 탁한 기의 이는 탁하다. 비유하면 본래부터 맑은 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으면 물도 맑고 흐린 그릇에 담으면 물도 탁하다. 비록 그렇지만 탁한 물속에는 맑은 것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실로 맑게 다스린다면 본래의 맑은 성(性)을 회복할 것이다. 이에 선생도 “이 논의가 옳다.”고 말하였다.

매우 탁한 유기(游氣)를 받은 것이 새가 되고 짐승이 되는 것인데, 새는 탁한 기 가운데 가볍고 맑은 양기(陽氣)를 받았고, 짐승은 탁한 기 가운데 두텁고 무거운 음기를 받은 것입니까?
그렇다. 봉황(鳳凰)은 나는 새 중에서 우수한 기(氣)를 타고난 것이고, 물고기는 음기 가운데서도 지극히 음한 기를 타고난 것이다.

허극심(許克諶)이 묻기를, “함양(涵養)은 동(動)과 정(靜)을 겸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하였다.
함양과 성찰을 대를 든다면 함양은 오로지 정(靜)한 데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고 함양만을 들어 말한다면 동과 정을 겸한 것이다.

“성인(聖人)의 도(道)가 귀에 들어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배우는 자가 귀로 성인(聖人)의 도를 들은 뒤라야 비로소 마음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안과 밖을 합하고 나와 남을 평등하게 대한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안과 밖을 합한다.”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안과 밖을 합한다.”는 것은 또한, “나와 남을 평등하게 대한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주(註)에 말하기를, “안과 밖을 합한다는 것은 표리(表裏)가 일치되는 것으로 자기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고 하였는데,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석해도 무방하다.

이기(理氣)에 대한 학설을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는데 빈 병[空瓶]의 좋은 비유를 듣게 된 뒤에야 상상할 수 있는 듯합니다. 천지간(天地間)이란 하나의 커다란 공중(空中)이니, 병(瓶)에 있으면 병 속의 공(空)이 되고, 독에 있으면 독 안의 공이 되어, 그 그릇의 크고 작음에 따라 각각 공이 됩니다. 그러나 그릇 안의 공이 비록 많더라도 그 대공(大空)을 덜어 내지 않고, 그릇 안의 공이 비록 깨어지더라도 대공에 보태어지지 않습니다. 비유하면, 본체(本體)의 이(理)가 사람에게 있으면, 사람의 도리가 되고, 사물에 있으면, 사물의 도리가 됩니다. 사람이나 사물의 성(性)이 비록 다르나 처음부터 그 본체의 이를 해치지 않고 사람과 사물의 성이 비록 없어지더라도 그 본체의 이에 보태어지지 못합니다. 대체로 병과 독이 깨지면 공이 의지해서 붙을 그릇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릇은 비록 없더라도 그 공(空)이 된 것은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과 사물이 없어지면 이(理)는 이것을 받을 형체(形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체가 없더라도 그 이가 된 것도 항상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미루어 논하면 기(氣)는 비록 소멸하고 성장하더라도 그 본체의 이는 고금(古今)에 걸쳐 항상 변함이 없어 조금도 부족한 때가 없었습니다.
이 논의(論議)가 옳다.

성(性)이 움직이고자 하는 것은 물이 흐르고자 함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릇 가운데의 물이 비록 더렵혀졌더라도 기울여 쏟으면 흘러나오지 않음이 없고, 본연(本然)의 성이 비록 어둡게 가리어졌더라도 감촉하면, 움직이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물이 본래의 맑은 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비록 흘러나오더라도 그 흐름이 탁하고, 성이 본래의 선(善)한 체(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비록 발(發)했더라도 그 정(情)이 악한 것입니까?
편지에서 한 말이 옳다.

칠조개(漆雕開)는 이미 대의(大意)를 보았다.”고 하였는데, 대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도(聖道)의 대강(大綱)을 보았다는 것이다. 대개 도(道)는 넓고 넓어서 잠깐 동안에 다 깨닫기 어려운 것이다. 배우는 자가 도의 대의를 보면 스스로 안다고 하지 않지만, 도의 한쪽만 본 자는 스스로 안다고 한다. 비유하면 크고 넓은 중원(中原)을 본 사람은 작은 나라를 보고 크다고 하지 않지만, 작은 나라만 본 자는 반드시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뜻이 작고 기(氣)가 가벼운 것이 두 가지의 병이라고 해도 두 가지는 서로 뿌리가 되는 것입니까?
어떤 이는 뜻은 작으나 기(氣)는 가볍지 않은 자가 있고, 어떤 이는 기는 가볍지만 뜻은 작지 않은 자가 있다.

뜻이 작은 자는 스스로 만족하기가 쉬워서 소성(小成)을 가지고 대성(大成)이라고 하고, 소지(小知)를 가지고 대지(大知)라고 하니, 기(氣)도 따라서 가볍습니다. 어찌 서로 뿌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도 하다.

의리(義理)에 대한 소견이 훤하게 꿰뚫게 된 뒤에야 사생(死生)과 수요(壽夭)에 마음이 망동(妄動)하지 않습니까?
그렇다. 그렇지만 옛날 송(宋)나라 유원성(劉元城)은 전운사(轉運使)가 자기를 죽이러 온다는 말을 듣고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코고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고 한다. 이 사람은 비록 깊이 도체(道體)를 본 자는 아니지만 그의 국량(局量)이 크고 마음이 굳게 정해졌기 때문에 죽음에 임박해서도 망동하지 아니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지(知)와 예(禮)가 성(性)을 이루어 도의(道義)가 나온다.’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니,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기를,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 천지의 이(理)를 받아 성이 되었는데 어찌 반드시 지와 예로써 성을 이루겠는가. 다만 기(氣)가 구애되고 물욕에 가리어서 그 성을 상실하게 되면, 반드시 지로써 밝히고, 예로써 지킨 뒤에야 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성이 있은 뒤에야 부자(父子)에게는 부자 된 도의가 나오고, 군신(君臣)에게는 군신 된 도의가 나온다. 대개 천지가 자리를 이루어 음양 변역(變易)하는 도(道)가 천지 사이에서 유행하고, 지와 예가 성을 이루어, 허다한 도의가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말씀하기를, “편지에서 한 말이 옳다.”고 하였다.
이천(伊川) 선생이,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성현이 지니고 있는 치란(治亂)의 기틀[聖賢所存治亂之機]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 여덟 글자의 문의(文意)를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이 여덟 글자를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아직 덮어 두는 것이 좋겠다. 퇴계(退溪)도 존(存) 자는 미상(未詳)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인(仁)과 서(恕)를 물었다.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기를, “인은 자연적이고, 서는 인위적이다.” 하였다.
선후(先後)를 구분할 수 있는가?
물에 비유하면, 인(仁)은 물의 근원이고 서(恕)는 물의 흐름이다. 선생이 말씀하기를, “서라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인을 미루어 가는 것이다.” 하였다.

안자(顔子) 호학론(好學論)의 주(註)에, “사람이란 그 정(精)하고 또 뛰어난 것을 얻은 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기(氣)가 정하나 뛰어나지 못하면 사람이 될 수 없습니까?
옥(玉)이 부여받은 기가 어찌 정하지 않겠는가마는 다만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완물(頑物)이 되고 만다. 사람은 오행(五行) 가운데서 그 정하고도 뛰어난 것을 얻었기 때문에 그 마음이 허령(虛靈)하여 성인(聖人)도 될 수 있고 현인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옛날 사람이 말씀하기를, “귀천(貴賤)과 수요(壽夭)는 명(命)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사람이 날 때에 기를 강하게 타고난 사람은 오래 살고, 기(氣)를 약하게 타고난 사람은 일찍 죽는다고 하니, 이것은 이른바 명이지만, 귀한 자와 천한 자의 타고난 기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귀하게 되고 천하게 되는 것은 기의 청탁과 강약에 있지 않으나, 또한 귀하게 하고 천하게 하는 기(氣)가 있다. 옛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가 망탕산(芒碭山)에 숨어 살 때에, 어떤 사람이 그의 기를 바라보고 천자(天子)가 될 것을 알았었다.

그렇다면 공자(孔子)의 타고난 기품은 지극히 통(通)하고 지극히 맑아서 그 이상 더할 수가 없었는데도 궁하여 아랫자리에 있었으니, 지극히 통하고 지극히 맑은 기(氣) 밖에 또 귀하게 될 수 있는 기가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기를 맑게 타고나서 귀하게 된 자가 있고, 어떤 사람은 기를 탁하게 타고나서도 귀하게 된 자가 있다. 공자는 비록 천지의 지극히 맑은 기(氣)를 받았으나 부귀의 기는 오히려 받지 못했다.

요순(堯舜)은 부귀의 기(氣)를 겸하여 받았습니까?
그렇다.

천지는 생길 때 본래 원기(元氣) 중의 한 기(氣)를 받은 것입니다. 천지의 기는 유한(有限)하여 다하여 없어질 때가 있지만, 원기(元氣)는 무한하여 다하여 없어질 때가 없는 것입니까?
그렇다. 천지가 비록 크지만 원기 가운데 있는 한 사물에 지나지 않으니, 천지 안에 있는 사물도 큰 사물 안의 작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배우는 자가 이 이치를 안다면 천하의 사물이 어찌 내 마음을 더럽히겠는가?

원기의 분수(分數)는 비록 가감(加感)이 없지만 항상 생생(生生)하는 새로운 기(氣)입니다. 비유하면, 못물이 비록 불어나고 줄어드는 일이 없으나 흘러간 물은 지나가 버리고, 흘러오는 물은 연속되어 날마다 항상 새로운 물이고 묵은 물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다만 그 불어나고 줄어듦이 없는 것만 보고 일정하여 바뀌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것은 이(理)이고 기는 아닙니다. 대개 원기는 끊임없이 생기기 때문에 이 천지가 끝이 나더라도 후천지(後天地)가 또한 이 원기에서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옳다.

후천지(後天地)의 도수(度數)는 이 천지와 꼭 맞아서 틀리는 데가 없습니까?
기(氣)가 똑같지 않은 것은 사물(事物)의 실정이다. 이 천지의 도수는 본래 365도 4분의 1이지만, 후천지의 도수에 대하여 그것이 이것과 하나하나 꼭 들어맞아서 차이(差異)가 없다는 것을 어찌 보장하겠는가?

서재(書齋)의 벗들이 서로 강론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날 때 비록 탁한 유기(游氣)를 받았더라도 그 마음이 허령(虛靈)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기를, “사람은 오행(五行)의 뛰어난 기를 받고 태어나므로 그 탁한 기(氣) 속에는 맑은 기가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엉겨서 심(心)이 된 것이다.” 하였다.
기품의 구애됨과 물욕의 가리어짐이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구애된 곳의 분수(分數)는 적고 가리어진 곳의 분수는 반드시 많다.

어떻게 아는가?
우선 자기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어릴 때에는 사려(思慮)가 없어서 별로 대단한 욕심이 없다가 성장하면 재화(財貨)의 이욕에 마음을 두기도 하고, 성색(聲色)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니, 물욕에 가린 곳이 이미 많지 않은가.

기품에 구애되고 물욕에 가리어져 성(性)이 본체(本體)를 잃으면 선정(善情)이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데, 때때로 나타나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마음의 본체는 완전히 가리어질 수 없으므로 정(情)의 움직임이 가리어진 곳으로부터 발출하면 악정(惡情)이 되고, 가리어지지 않은 곳으로부터 발출하면 선정(善情)인 것이다.

선유(先儒)들은 다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였다. 거울은 밝은 곳도 있고, 어두운 곳도 있어서, 물건이 밝은 곳에 비치면 곱고 추한 것이 나타나고 어두운 곳에 비치면 곱고 추한 것이 나타나지 않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아 비록 가리어진 곳이라도 사물에 감응하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 것은, 밝은 곳만 취하였을 뿐이다. 대저 성(性)은 움직이고자 하기 때문에 비록 가리어지고 구애되더라도 사물에 감응하면 발출하지 않는 것이 없다.

성(性)의 본체(本體)는 정정당당해서 한 개의 정리(正理)만 있을 뿐인데 이른바 하고자 함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성(性)은 생(生)하는 이치인데 어찌 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생하는 이치가 없다면 목석(木石)과 같아서 젖먹이 어린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도 측은(惻隱)한 마음이 없을 것이며, 의(義) 아닌 것을 보고도 수오(羞惡)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다. 이에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좌우(左右)에서 취하여 씀에 그 근원을 만난다.”는 말은 덕을 이룬 군자(君子)는 좌우 가까이에서 그 도(道)의 근원을 만난다는 것입니까?
근원이란 것은 《대학(大學)》에서 말한 지선(至善)과 같은 것으로 심상한 일상생활에도 도(道)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 임금을 섬기면 충(忠)을 거기에서 만나고, 어버이를 섬기면 효(孝)를 거기에서 만나 어디를 가나 도가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을 좌우 가까이에서 그 근원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다.

이천(伊川) 선생이 말씀하기를, “마음으로써 마음을 부리면 좋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공경하는 마음을 보존해서 항상 일신(一身)의 주재(主宰)를 삼아 사물(事物)이 올 때에 이 마음으로 접응하면, 마음이 제멋대로 하지 않아 망동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곧 마음으로써 마음을 부리는 것입니까?
본체(本體)의 마음으로써 이미 발출한 마음을 제어하면, 이것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부리는 것이다.

형화숙(邢和叔)이 말하기를, “항상 정력(精力)을 아끼어 길러야 한다. 정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곧 게을러진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정력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력이라는 것은 정신의 기력(氣力)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만약 술에 곯거나 여색(女色)에 상하면 정력이 피로하여 소모되어서 일에 임하면 반드시 게을러진다. 다른 일로 정력을 소모시키는 것도 다 이와 같다.

횡거(橫渠) 선생이 말하기를, “공손하되 예(禮)가 없으면 수고롭다고 할 때의 공손은 형식적으로 하는 공손이고, 예는 형체가 없는 예이다.”라고 하였으니, 형체가 없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오로지 자연적인 이(理)를 가리킨 것이고, 용체(容體)와 위의(威儀)의 예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

“맑고 전일한 것은 기(氣)의 근본이고, 공격하여 취하는 것은 기의 성향이다.”라는 것에 대해 저는, 지극히 통하고 지극히 맑은 기가 엉기어 마음이 되니, 마음의 본체(本體)는 이와 같이 맑고 전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식(食)ㆍ색(色)의 성(性)이 있기 때문에 공격하여 취하려는 성향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심기(心氣)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천지의 기(氣)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천지의 기(氣)와 원기(元氣)는 두 가지가 있는가?” 하였다.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기를, “그 근본을 추구하면 한 가지 기일 뿐이다. 다만 생성하는 기로써 논한다면, 천지란 것은 원기(元氣) 가운데서 나온 기이니, 원기는 천지의 기의 근본이다. 이런 까닭에 천지의 품기(稟氣)가 사라져 다 없어지면 천지는 비록 끝이 나지만 원기는 진실로 항상 변함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지가 종말(終末)이 되면 원기(元氣)가 어디에 붙어서 변함이 없을 것인가?
천지 속의 사람과 만물은 죽더라도 천지는 변함이 없다. 이것으로써 미루어 본다면, 원기(元氣) 속의 천지는 끝나더라도 원기는 또한 일찍이 쉰 적이 없다. 만약 천지가 종말이 되었을 때, 원기도 따라서 유산되어 버리면, 후천지(後天地)의 기(氣)는 어느 기에 근원하여 나오겠는가?

그렇다면 천지는 다할 때가 있을 수 있으나, 원기는 일찍이 사라지거나 쉬는 일이 없고 일정하여 바뀌지 아니하는가?
일정하여 바뀌지 않는 것은 이(理)이고 기(氣)는 아니다. 원기의 분수(分數)가 비록 차고 줄어드는 일은 없으나, 실은 바로 항상 생생(生生)하는 새로운 기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천지는 천지로서 서로 잇따라 무궁(無窮)한 것이다. 선생이, “이 단락의 논의가 근사하다.” 하였다.

“덕(德)이 기(氣)를 이기지 못한다.”의 주(註)에, “의리가 기질과 서로 소장(消長)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理)가 기질(氣質) 가운데 있어서 성(性)이 되는 것이니, 의리와 기질은 원래 서로 의지하여 떠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의리가 물욕과 서로 소장한다고 한다면 논리를 세우는 데 병통(病痛)이 없을 듯합니다.
이 기(氣)라는 글자는 다만 기질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동명(東銘)의 주(註)에, “지(智)를 주로 하면 예(禮)는 그 가운데 있다.” 하였습니다. 저의 생각에는, 농담은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그 허물을 자기의 실없는 장난으로 돌리고, 잘못된 행동은 진심이 아닌데 스스로 속여서 자기의 진심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곧 지가 아닙니다. 배우는 자가 이것으로써 살피고 깨달아서 학자가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으면, 이것이 지를 주로 하여 예가 그 가운데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보아도 무방하다.

《대학(大學)》 소주(小註)에 말하기를, “여러 이(理)를 갖춘 것이 성(性)이다.” 하였습니다. 저는, 여러 이가 마음에 갖추어 있는 것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어째서 성(性)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 이(理)를 갖췄다는 것은 마음을 가리켜 말한 것인데 곧 성(性)이라고 지적한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사람과 사물이 받은 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한 몸에 주가 되는 것을 심(心)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곧 명덕(明德)입니다. 그런데 또 말하기를, “하늘에서 얻어 광명정대(光明正大)한 것을 명덕이라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심ㆍ성ㆍ명덕(明德)을 셋으로 나누어서 말한 것이어서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심(心)과 성(性)을 합하여 통틀어 말한 것이다.

부모를 향하면 효가 나오고 임금을 향하면 충(忠)이 나오는 것은 곧 성(性)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情)인데 어째서 성이라고 하였습니까?
글을 잘못 쓴 것 같다.

지선(至善)은 이(理)가 사물(事物)에 나타난 것을 말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나타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지선(至善)이 사물마다 다 나타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명덕(明德) 가운데 지선(至善)이 있고, 신민(新民) 가운데 지선이 있다고 함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명덕(明德)이 완전히 극진한 곳에 이르고, 신민(新民)이 완전히 극진한 곳에 이르면 명덕과 신민이 지선에 머문다.”고 하였다. 또, “장구(章句)에서 지선을 해석하기를, ‘사리 당연(事理當然)의 극치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오로지 사물에 있는 이(理)를 가리킨 것이고 나에게 있는 이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고 하므로, 내가 “천명(天命)에서 본다면 나와 사물은 모두 사리 가운데 있는 것이다.”고 하니, 선생이 옳다고 말씀하였다.
정(情)의 발(發)함이 비록 절도에 맞지 않더라도, 만약 선(善)을 위하여 발하면 또한 선정(善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 선과 악의 구별은 다만 중(中)과 과불급(過不及)에 있을 뿐이다. 조금이라도 중(中)에서 벗어나면 다 불선(不善)한 정(情)이라고 한다.

선정(善情)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얕은 것은 비록 중(中)에는 미치지 못하나 선(善)한 쪽의 정(情)인데 그것까지 불선한 정이라고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情)이 발할 때에 얕아야 할 때에는 얕고 깊어야 할 때는 깊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절도에 알맞은 정이다. 후하게 해야 할 때는 10분(分)의 정을 쏟아야 되는데 만약 5, 6분만 쏟는다면, 이것은 불급(不及)한 정이라고 한다. 박하게 해야 할 때는 5, 6분의 정을 쏟아야 할 것인데, 만약 10분을 쏟는다면 이것도 중(中)을 지나친 정으로서, 이것은 다 불선한 정이다. 만약 젖먹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서 미친 듯이 달려가 손으로 잡는 것이 곧 절도에 맞는 정인데, 다만 서서 보기만 하고 가엾다고만 한다면, 비록 냉담한 자보다는 낫지만 역시 불선한 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은 경진년이다.-

우레가 백 리를 놀라게 하나 비창(匕鬯)을 떨어뜨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제사 지낼 때에 경(敬)이 마음 가운데 주(主)가 되어 있으므로 비록 우레가 진동하여도 놀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옛날에 하후현(夏侯玄)은 기둥에 의지하여 책을 읽고 있을 때 벼락이 기둥을 쳤으나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진실로 안정된 정신력이 없으면 이렇게 될 수 없는 것이다.

“용모(容貌)를 움직이고 사려(思慮)를 정돈한다.”의 주(註)에, “밖으로 용모를 정숙하게 하고, 안으로 사려를 정제한다.”고 하였습니다. 움직인다는 글자에는 밖으로 정숙하게 한다는 뜻이 없는 것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해석하였습니까?
동용모(動容貌)의 세 글자는 《논어(論語)》 본문(本文)에서 이미 사납고 거만함을 멀리한다는 뜻까지 겸하여 말한 것이니, 역시 밖으로 정숙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 글 뜻이 잘못되지 않았다.

“인심(人心)이 많으면 광명(光明)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인심이란 것은 사려(思慮)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그렇다.

“자제(子弟)를 모두 금지시키거나 부릴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제의 의지를 금지할 수 없고, 자제의 신체를 부릴 수 없다는 뜻이다.

“화(和)라는 것은 화가 하는 것이다.”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위에 있는 화(和) 자는 즐거움의 화고, 아래에 있는 화 자는 기(氣)의 화이다. 즐거움의 화는 기의 화가 그렇게 한 것이다.

“생(生)하면 한꺼번에 생긴다.”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理)와 기(氣)가 한꺼번에 생기는 것이다.

문세(文勢)로써 보면 사람과 사물이 한꺼번에 생기는 것입니까?
사람과 물이 어찌 한꺼번에 생길 수 있는가. 학자(學者)들의 소견이 더러 이와 같은 자도 있는데 다 잘못이다.

“천지가 처음 갈라질 때에 수기(水氣)가 우주(宇宙)에 충만하였다가 날마다 점점 엉기어서 목(木)이 되고 굳어져서 금(金)이 되었으니, 금과 목의 이루어짐이 다 수(水)에 말미암은 것인데, 이른바 천(天)은 삼(三)으로 목을 생(生)하고, 지(地)는 사(四)로 금을 생하였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금(金)ㆍ목(木)의 형상을 이룬 것은 비록 수(水)에 말미암았으나, 그 기(氣)의 근본은 천지에서 생긴 것이다.

태극(太極)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고, 정(靜)하여 음(陰)을 낳으니, 양(陽)이 먼저이고 음이 뒤입니다. 다만 태극이 아직 움직이지 않았을 때는 음이니, 음이 먼저고 양이 뒤입니까?
음양은 순환하여 끝이 없다. 어찌 앞뒤를 나눌 수 있겠는가?

태극이 동하여서 양(陽)을 낳는 것이 곧 천일생수(天一生水)의 때라면, 정(靜)하여 음을 낳는 것은 지이생화(地二生火)의 때입니까?
그렇게 국한하여 정할 수 없다.

양이면서 양을 낳고, 음이면서 음을 낳는 것은 이치가 원래 그런 것인데, 양인 천일(天一)은 수(水) 즉 음(陰)을 낳고, 음인 지이(地二)는 화(火) 즉 양(陽)을 낳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음양이 서로 낳는 것은 그 이치가 본래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양은 음을 낳고 음은 양을 낳는다.

사람이 인(寅)에서 태어났다 하는데, 이때에는 사람과 만물이 함께 생겼습니까. 애초에 기화(氣化)할 때에는 두 명의 남녀(男女)만을 출생시켰다가 점차로 낳고 또 낳아서 끝이 없게 되었습니까?
사람과 만물이 함께 태어났는데, 남녀만 어찌 두 명에 그쳤겠는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전의 천지(天地)가 소진(消盡)하고 지금의 천지(天地)가 아직 생기기 전에는 무극(無極)의 이(理)가 있었을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저의 생각에는, 그때에 어찌 이만이 홀로 있고 기(氣)는 전혀 없었겠습니까. 선천지(先天地)가 끝나자마자 후천지(後天地)가 이미 원기(元氣) 가운데에 뿌리를 박고 있다가 자반(子半)에 이르러 그 기가 불어나 발동(發動)하고 자말(子末)에 이르러서는 충만(充滿)하고 성대(盛大)해져서 천지의 형체가 된 것입니다. 만약 천지가 성립하기 전에 기가 없었다고 한다면, 태극의 이가 무슨 기에 붙었겠습니까?
천지가 사라져 없어진 뒤에는 전부가 음의 기이니 기(氣)가 없다고 한다면 의리(義理)를 이루지 못한다.

전일에 선생께서 김진강(金振綱)에게 말하기를, “순(舜) 임금이 날 때에 고수(瞽叟)의 탁한 기(氣)는 분수(分數)가 작고 천지의 맑은 기는 분수가 많았기 때문에 성인(聖人)이 되었다. 그것은 고수의 탁한 기가 천지의 맑은 기를 당하지 못한 것이다. 비유하면, 매운 물 한 잔을 한 독의 꿀물에 부으면 섞여서 단물로 변화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후생(後生)한 사람이 이 말을 듣고, “부모와 천지는 하나의 기일 뿐인데, 매운 물과 꿀물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 고수(瞽叟)같이 어질지 못한 자로서 순 임금 같은 대성인을 낳은 것은, 척박한 밭의 벼나 기장이 풍작(豊作)이 되기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근본을 미루어 구하면 부모의 기와 천지의 기는 하나일 뿐이나, 그것이 사물에 부여된 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천지와 부모는 각각 한 개의 기(氣)인 것이다. 부모의 기가 없으면 천지의 기는 붙을 곳이 없어서 형화(形化)하는 이치가 끊어질 것이다. 저 척박한 밭에 풍작이 있는 것은 우로(雨露)의 기에 힘입기도 하고, 인력으로 토양을 가꾸어 기름지게 한 것에 힘입기도 해서 그런 것이다. 다만 척박한 밭만 있고 다른 기의 도움이 없다면 본래 조금도 풍작이 들 이치가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천지의 기를 논하고서 부모의 기를 논하지 아니하면 완비(完備)하지 못한 것이다.

기(幾)는 동(動)의 기미(幾微)인데 선유(先儒)들이, “기는 동과 정(靜) 사이에 있는 것이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저는 기란 것은 안에서 겨우 움직이고 아직 밖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므로, 이것을 동이라고 말한다면 형상으로 나타난 형적이 없고, 정이라고 말한다면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것에 해당하기 때문에, “기는 동과 정 사이에 있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이라고 말한 것은 그 움직임이 지극히 은미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성학집요(聖學輯要)》의 존덕성도문학장(尊德性道問學章)의 하(下)의 통론(通論)에 말하기를, “거경(居敬)ㆍ궁리(窮理)ㆍ역행(力行) 이 세 가지를 이 장(章)에서 대략 그 단서를 발표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존덕성(尊德性)은 거경(居敬)과 역행을 겸한 것이고, 도문학(道問學)은 다만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역행은 존덕성 가운데 겸하였고, 궁리(窮理)는 도문학(道問學)에만 속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천리(天理)는 형상(形象)이 없고, 인성(人性)은 형영(形影)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는가?” 하였다.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기를, “천리를 보고 싶으면 먼저 천명(天命)이 유행하는 곳을 보아야 하고, 성선(性善)을 보고 싶으면 먼저 사단(四端)이 발현하는 곳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명(命)은 이치이니, 명에서도 또한 볼 수 없는 것이다.
명이란 것은 이치의 작용이니, 오직 작용이 유행하는 곳에서 그 기(氣) 속에 있는 이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성(性)도 이러한가?
정(情)이라는 것은 성(性)에서 발(發)한 것이다. 오직 사단(四端)이 발현한 곳에서는 그 성의 본선(本善)을 알 수 있다. 물의 흐름이 맑은 것을 보고 그 근원이 반드시 맑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불선(不善)한 정(情)에서도 성(性)을 알 수 있는가?
불선한 정은 비록 성에서 발했더라도 이미 본연(本然)의 선을 잃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성의 선한 점은 볼 수 없다. 이에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원(元)은 사덕(四德)의 어른에 해당하니, 원이 아니면 사덕이 질서를 이룰 수 없는가?” 하였다.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기를, “그렇다. 다만 천지의 조화가 화합하여 모이지 않으면 발산할 수 없어 원은 원에서 나오지 않고 정(貞)에서 나오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 원(元)이 어른이 아니고 정(貞)이 도리어 우두머리에 있게 되는가?
사시(四時)의 순서로 말하면, 원(元)이 우두머리이지만 처음과 끝을 이루는 것으로써 말하면, 원은 정에서 시작하여 정에서 끝나기 때문에 순환하여 끝이 없는 것이다. 이에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우생(友生)이 말하기를, “수기(水氣)가 엉겨 금(金)과 목(木)이 되었으니 소위 천삼생목(天三生木)과 지사생금(地四生金)이란 것을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하겠다.” 하니, 김진강(金振綱)이, “금기(金氣)와 목기(木氣)는 천지에서 생겨났으나, 그것이 형상을 이루는 것은 모두 수기(水氣)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오곡(五穀)의 생성(生成)은 우로(雨露)의 기(氣)에 힘입지만 오곡도 각기 하나의 기이므로 서속[粟]은 서속이고 피[稷]는 피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말씀하기를, “대개 이치에 거의 맞지만 분명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인의(仁義)를 말하면서 예지(禮智)를 말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기를, “인은 예를 포함하고, 의는 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춘추(春秋)라고 말하면서 하동(夏冬)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것도 그러한 것이다. 추위와 더위를 가지고 말한다면, 여름의 더위는 봄의 따뜻함에 시작하였고 겨울의 추위는 가을의 서늘함에 비롯한 것이다. 생성(生成)하는 것으로써 말하면, 만물이 봄에 나서 여름이 그것을 성장시키고, 만물이 가을에 성숙하고 겨울이 이것을 견실하게 한다. 그러니 봄은 여름을 포함하고 가을은 겨울을 포함한다는 것을 이를 통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춘추(春秋)는 만물이 생성하는 시초이고, 하동(夏冬)은 만물이 생성하는 종말인가?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인(仁)과 의(義)는 부드럽고 연한 것이며, 예(禮)와 지(智)는 견실한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 뜻도 대개 이와 같은 것이다. 이에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혼(魂)과 백(魄)의 동정(動靜)을 물었다.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기를, “혼은 양(陽)으로서 동(動)을 주관하고, 백은 음으로서 정(靜)을 주관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혼이 하는 것이고, 보는 것을 밝게 하고 듣는 것을 총명하게 하며 잘 기억하는 것은 백이 하는 것이다. 대체로 혼은 양의 신(神)으로서 지각의 밝음이 밖에 나타나는 것이고, 백은 음의 신으로서 지각의 신령함이 안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물과 불에 비유한다면, 백은 물속이 밝음과 같고, 혼은 불의 밖이 밝음과 같은 것이다.”고 하니, 선생이 말씀하기를, “대개는 옳다. 다만 보고 듣는 것은 백이고, 생각하는 것은 혼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혼이라고 한 것은 그른 듯싶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양기(陽氣)는 가볍고 맑아서 올라가서는 내려오지 않고, 음기(陰氣)는 무겁고 탁해서 내려와서는 올라가지 않는가?” 하였다.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기를, “오행(五行)의 바탕은 땅에 갖추어 있고 기(氣)는 하늘에서 유행한다. 대저 음기가 올라가서 양기를 만나면 치솟아 구름이 되고, 양기(陽氣)가 내려오다가 음기를 만나면 압축되어 비가 되니, 음양이 서로 올라가고 내려오는 것을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다.”고 하였다.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만물이 생성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사람과 만물이 생겨날 때, 양은 기(氣)가 되고, 음은 바탕이 된다. 그런 까닭에 음양이 서로 의지하여 만물이 태어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 줄 아는가?
기라는 것은 형상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양(陽)은 분명해서 사람과 만물의 혈기가 되는 것이며, 바탕은 형체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음은 탁하여 사람과 만물의 형체가 되는 것이다. 대개 양기의 가볍고 맑은 것은, 음기의 무겁고 탁한 것을 터전으로 한 뒤라야 형체가 있는 물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물에 비유하면, 물은 반드시 찌꺼기인 곡식 가루와 합해진 뒤에 떡을 만들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혈(血)은 음이고 기(氣)는 양인데 혈기를 양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이 말이 이치에 거의 맞으나 역시 분명하지 못하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사람과 만물이 나는 것은 모두 수기(水氣)에 말미암은 것인데, 이른바 목기(木氣)를 많이 타고난 자는 부드럽고, 금기(金氣)를 많이 타고난 자는 강하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기를, “금기나 목기가 수기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고, 수기가 스스로 금기나 목기가 된 것은 아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금(金)의 강함과 목(木)의 부드러움은 물에 힘입은 것은 아닌가?
강하고 부드러운 것은 비록 금(金)과 목(木)의 본래 기라고 해도 그 기에 따라서 강하게 하고 부드럽게 하는 것은 수기(水氣)가 그렇게 한 것이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수기가 강하게 만들거나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아니고, 금기(金氣)는 본래 강하고 목기는 본래 부드러운 것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보통 사람은 기를 받은 것이 매우 탁한데 그 마음이 허령(虛靈)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사람은 오행(五行)의 뛰어난 기를 타고났기 때문에 그 기(氣)가 매우 탁하더라도 그 가운데 맑은 분수도 있으므로 엉겨서 마음의 허령함이 된 것이다.” 하였더니, 선생이 말하기를, “옳다. 다만 허령에도 우열(優劣)이 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하늘과 사람은 일리(一理)이다. 그런데 천지에는 혈기(血氣)가 없고, 사람에게는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하늘과 땅의 기운이 합하여 어린 가운데서 만물이 화생(化生)하여 각각 그 형상을 이룬다. 대개 혈육을 가진 사물은 각각 일기(一氣)가 있기 때문에 소는 소를 낳고, 말은 말을 낳을 뿐이다. 천지가 다만 혈육 있는 일물(一物)이 된다면 만물을 만들어 낼 수 없어서 조화(造化)의 공용(功用)이 그치고 말 것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하늘은 지각하는 마음이 없는가?
혈기의 몸이 있고 나서 지각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천지는 하나의 커다란 그릇으로서 허다한 만물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혈기나 지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공평하게 하늘은 덮고 땅은 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천지 이것은 또한 한 가지의 물건일 뿐이니 어찌 허다한 것을 포용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재주는 기(氣)에서 나오는 것이니 재주와 기는 같은 것으로 다름이 없는 것인가?” 하였다.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기를, “기가 맑으면 재주도 맑고 기가 탁하면 재주도 탁하기 때문에 재주는 기의 작용이고 기는 재주의 본체이다.” 하였다.
그러면 재주와 기는 나눌 수 있는가?
이것을 나누면 나눌 수 있다. 기는 감위적(敢爲的)이고 재주는 능위적(能爲的)이다.

사람이 받은 기가 비록 탁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정사(政事)에 대한 재주가 있고, 어떤 사람은 문예(文藝)에 대한 재주가 있기도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탁한 기 가운데도 맑은 분수(分數)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제각기 한 가지의 재능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부분의 재주이고, 이른바 국한되지 않고 어디에나 능할 수 있는 재주는 아니다.

오행(五行)으로 말하면, 무슨 기를 받아서 문예와 정사에 대한 재주가 있는 것인가?
화기(火氣)를 많이 받은 자는 총명하여 문예에 대한 재주가 있고, 금기(金氣)를 많이 받은 자는 판단과 결단력이 있어서 정사에 대한 재주가 있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대체를 말한 것이니 정론으로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이(理)가 비록 형체도 없고 작위(作爲)함도 없지만 형체가 있기라도 한다면 볼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이는 기(氣) 밖에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형체가 있는 물건으로 인하여 그 이의 광대한 곳을 볼 수 있다.” 하였다.
기(氣)가 비록 형체가 있고 작위(作爲)함도 있으나, 형체가 없어 볼 수 없을 경우도 있는가?
복괘(復卦)로써 이것을 말한다면, 일양(一陽)이 아직 생기기 전에는 쌓인 분수(分數)의 기가 비록 땅속에 있더라도 이것을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에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천지는 비록 끝이 나더라도 원기(元氣)는 없어진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어떤 뜻인가?”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천지가 마지막으로 끝날 때에 원기도 따라서 소진한다면, 후천지(後天地)의 기(氣)는 어떤 기에 근원하여 나오겠는가. 비유하면, 나뭇잎이 말라 떨어지더라도 근본이 되는 기는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내년 봄의 잎을 생기게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천지의 기와 원기는 서로 합해져 있지 않는가?
천지의 기는 원기 속에 붙어 있다. 나무의 지엽이 그 뿌리를 떠나서 혼자 살 수 있겠는가. 이에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사람이 인(仁)을 행할 때에 어떤 사람은 그 한 부분만을 체득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전체를 체득하기도 한다. 인의 지위와 차등이 이와 같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인이란 것은 마음의 온전한 덕으로서 본래 크고 작은 차별이 없는 것인데 사람의 조예(造詣)가 얕고 깊음이 있기 때문에 인(仁)에 치우치고 온전함의 차이가 있다. 또 인을 행하는 것은 태산에 오르는 것과 같아서 어떤 사람은 산꼭대기에 머물고, 어떤 사람은 산기슭에 머문다. 산기슭에 선 자가 태산을 낮다고 한다면 이것은 인을 모르는 자이다.” 하였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한 부분만을 가지고 말하면 한 가지 일이고, 전체를 들어 말한다면 네 가지를 포함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분리하여 말하면 오상(五常 인ㆍ의ㆍ예ㆍ지ㆍ신) 중의 한 가지 일이고, 종합하여 말하면 오상의 통합체이다. 만일 한 가지 인을 떠나서 따로 네 가지를 포함한 인을 찾고자 한다면 사리가 성립되지 못한다.

백이는 인을 구하여 인을 체득하였고, 안회(顔回)는 3개월 동안 인을 어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 전체를 체득하기는 어렵고 일부의 인을 체득하기는 쉽다. 그러므로 안자(顔子)는 전체의 인을 구하여 숙달하는 데 이르지 못하였고, 백이는 일부의 인을 구하여 자기 몸에 체득한 것이다. 이에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수(水)는 음(陰)으로서 양(陽) 속에 뿌리를 박고, 화(火)는 양으로서 음 속에 뿌리를 박는다는 것은 양 이전에는 음이어서 양이 처음 동(動)할지라도 음만이 오로지 용사(用事)하기 때문에 수음(水陰)이 여기에서 생기는 것이고, 음 이전에는 양이어서 음이 비록 처음 생기더라도 양이 오로지 용사한다. 그러므로 화양(火陽)이 여기서 생기는 것이다.” 하니,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수가 생기는 것은 오로지 음에 있고 양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며, 화가 생기는 것은 오로지 양에 있고 음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니, 이것은 곧 음으로서 음을 낳고, 양으로서 양을 낳는 것이다. 나는 일음(一陰)이 성양(盛陽) 가운데 뿌리를 박아서 화를 낳고, 일양(一陽)이 성음(盛陰) 가운데 움직여서 수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음은 양을 낳고 양은 음을 낳는다. 대개 수는 양이 음을 질(質)로 삼은 것이고, 화는 음이 양을 질로 삼은 것이다. 이에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본체의 기(氣)를 물었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사람과 만물의 입장에서 천지를 보면 천지의 기는 본체가 되며, 천지의 입장에서 원기(元氣)를 보면 원기는 본체가 된다.” 하였다.
본체의 기는 그러하다면, 본체의 이(理)에 대해 듣고자 한다.
이와 기는 원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 그 본체의 기를 말하면 본체의 이도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사람과 만물도 각각 원기(元氣)가 있는가?
천지는 품부받은 기로 원기를 삼아 음양의 굴신(屈伸) 그 속에 뿌리를 두고, 사람은 품부받은 기로써 원기를 삼아 호흡의 왕래(往來)가 그 가운데서 생생(生生)한다. 비록 그렇지만 품부받은 기가 사라져 버리면 천지의 수명도 끝이 나서 소멸된다. 그러나 통체의 원기는 분수(分數)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아서 고금에 걸쳐 소멸된 적이 없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대개는 이치에 거의 맞다. 다만 기는 근본과 종말이 있으나 이는 본말(本末)이 없고 다만 기에 붙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서로 같지 않는 것이 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주자(朱子)가, 물의 성질은 차고, 불의 성질은 뜨겁다고 한 것은 어째서 그러한가?”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물이란 것은 양은 안에 있고 음으로 바탕을 삼기 때문에 성질이 차고, 불이란 것은 음이 안에 있고 양으로 바탕을 삼기 때문에 성질이 뜨겁다.”고 하니,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주자(朱子)는 공용(功用)을 기라고 하고, 묘용(妙用)을 이라고 하였다. 대개 묘용이란 것은 비록 볼 수 있는 형적은 없더라도 발용(發用)에 속해야 하는 것이니, 이른바 형체도 없고 인위적으로 하는 것도 없는 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기를 타고 유행하는 이를 가리킨 것이다.”고 하니,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사덕(四德)을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이라고 말하고, 오상(五常)을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사덕은 그 유행하는 순서를 말한 것이고, 오상은 그 대대(對待)의 체(體)를 말한 것이다.”고 하였더니, 선생이 옳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복괘(復卦)의 아래에서 양효(陽爻) 하나가 생기기 전에는 순전히 곤괘(坤卦)인데, 그 사이에 시작이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복괘의 양효 하나가 아직 생기기 전에 그 기는 은밀하게 옮겨져서 쉼이 없는 것이다. 대개 괘(卦)의 효(爻)는 점차 생겨나는 것으로 30분(分)이 쌓여 양효 하나가 생기고, 30분이 사라져서 음효 하나가 생긴다. 그러므로 괘효(卦爻)가 30분에 차기 전에는 효는 비록 이루어지지 못하더라도, 쌓인 분수의 기(氣)는 휴식을 용납할 사이가 없다.”고 하니, 선생이 말씀하기를, “옳다. 또 이른바 끝과 처음이 없다는 것은 음양의 두 기가 순환하여 끝과 처음이 없기 때문에 한 말이지 양은 처음이 없고 음은 시작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감응할 때에는 마음이 사물 위에 있는가?”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마음의 체(體)는 항상 안에서 주재(主宰)하고 있으나 그 용(用)은 밖으로 나간다.” 하였다.
사물에 접촉할 때에 체는 안에 있고 용은 밖에 있다면 마음은 두 개의 마음인가?
허령한 본체(本體)의 마음이 안에서 주재하고 있다가 사물이 닥쳐오는 데 따라 감응하여 조응(照應)할 뿐이다. 비유하면 거울이 물건을 비출 때 물건이 오기 때문에 거울이 비추는 것이지 거울이 물건을 따라가서 비추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허령의 체가 안에 있으므로 조응하는 용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인가?
그렇다. 이에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정자(程子)가 실리(實理) 가운데 본래 완급(緩急)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理)에도 완급이 있는가?”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완급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리 가운데 본래 공부의 완급이 있는 것이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늦출 수도 있고 급하게 할 수도 있으니 이것도 이치가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학자(學者)가 인체(仁體)를 알아 참으로 자기에게 간직하여 다만 의리로 북돋워 주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고 하였다. 나는, 먼저 의리로 북돋워 준 뒤라야 인(仁)의 전체가 자기에게 간직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인이란 것은 마음의 전체이다. 먼저 자기에게 있는 인을 안 뒤라야 북돋워 주는 공력을 거기에 의거하여 시행할 수 있다.” 하니,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동자(董子)가 말하기를, ‘그 의(義)를 바르게 하고 그 도(道)를 밝게 한다.’ 하였다. 의(義)와 도(道)에 경중(輕重)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도는 의라는 글자를 포함하지만, 의는 도라는 글자를 포함할 수 없으니 구분이 있는 것 같다.”고 하니,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안으로 충신을 쌓는다는 것과, 말을 충신하게 한다는 것이 다름이 없는가.”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안으로 충신을 쌓는다는 것은 한 가지 생각이라도 허위(虛僞)가 없다는 것이고, 말을 충신하게 한다는 것은 한마디의 말도 속이거나 허탄함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고 하니,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만물을 보고 자신을 살핀다.’라는 주(註)에, 섭씨(葉氏)가, ‘이(理)가 만물에 흩어져 있지만 실은 나의 마음에 모여 있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나에게 있는 지혜로써 물건에 있는 이를 밝히기 때문에 내 마음이 만물의 통체(統體)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만물의 이는 곧 일심(一心)의 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모여 있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마음은 뱃속에 있어야 한다. 다만 외면(外面)에 조그만 틈만 있으면 바로 이 틈으로 달아난다고 하였는데, 이 틈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물욕이 밖에서 유혹하면 마음이 바로 달아나니, 이것을 외면에 조그마한 빈틈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빈틈이란 것은 외물이 욕심을 끌어당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통서(通書)》의 성립명통(誠立明通)에 대해 물었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성립(誠立)은 마음의 실체(實體)가 안정되고 확고함을 말한 것이고, 명통(明通)은 마음의 실용(實用)이 유행하는 것을 말한다. 대저 물욕이 깨끗이 없어지면 마음의 본체(本體)는 자연히 완전 확고해져서 밝은 예지의 비침에 따라 천하의 이(理)를 통할 수 있는 것이다.” 하니,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의 두 가지 일은 다 장애가 있습니다. 오로지 궁리에만 힘을 쓰면 억지로 사색하고 힘써 탐구하여 이 마음을 편안히 놓을 수가 없게 되고, 오로지 존양(存養)에만 힘을 쓰면 쓸데없는 생각이 갑자기 일어나서 심경이 깨끗하지 못합니다.
공부하는 데 그 요령을 알지 못하면 진실로 이런 근심이 있는 것이다.

‘은미한 곳을 드러내도 볼 수 없다.[發微不可見]’고 한 글에서 이 미(微)라는 글자는, 마음이 처음으로 동할 때의 은미한 것을 가리킨 것이 아니요, 곧 성인의 마음의 발한 것이 미묘하여 볼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 것입니까?
이것은 곧 도심은 오직 미묘(微妙)하다는 미(微)와 같은 것이니, 의리의 발이 미묘하여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성인의 오묘한 작용인 것이다.

만물은 봄과 여름에 발생하는데, 우리 사람에게는 일정한 시기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대저 만물이 생겨남에 정(情)이 없는 것은 일정한 시기가 있지만, 정이 있는 것은 정해진 때가 없는 것이 많다. 우리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경(敬)과 의(義)를 함께 힘쓰면 곧 위로 천덕(天德)에 도달하는 것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천덕에 도달한다는 것은 지식만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지식과 행동을 모두 겸하여 말한 것이다.

지식이 하늘처럼 높다고 한 것은 학자가 격물치지(格物致知)하여 지식이 높아지면 그 지식의 높음이 곧 하늘의 고명(高明)함과 같음을 말한 것입니까?
그렇다.

사현도(謝顯道)가 말하기를, “백순(伯淳)이 시(詩)를 말할 적에 때로는 한두 글자에 대해 이리저리 점철(點掇)하여 생각해 본다.”고 하였는데, 이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점철이란 말은 그 요점을 고른다는 말과 같은 것이니, 한두 글자로써 마음에 든 곳의 요점을 골라서 읊는다는 것이다.

횡거(橫渠) 선생이 말하기를, “착하기만 한 것이 반드시 다 의(義)가 아니며 옳기만 한 것이 반드시 다 인(仁)이 아니다. 인을 좋아하고 불인(不仁)을 미워해야만 인의(仁義)의 도(道)를 다한다.”고 하였는데, 불인을 미워하는 것이 한갓 옳기만 한 것[徒是]이라는 뜻입니까? 알지 못하겠습니다.
불인을 미워하는 것은 도시(徒是)가 아니다. 인을 좋아하면서 불인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곧 도선(徒善)이며 도시이다.

명도(明道) 선생이 말하기를, “공경만 하고 자연의 도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스럽지 못하다.”고 하였으니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것은 쾌활(快活)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역(易)을 볼 때, 만일 생각함이 익숙하지 못하다면”이라는 말과, “일덕(一德)을 더하여도 많아짐을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 덕(德)이란 글자는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덕(德)이라고 한 것은 괘덕(卦德)과 효덕(爻德)을 말한 것으로 원형이정(元亨利貞) 따위와 같은 것이다.

“태어남을 성(性)이라고 한다. 사람이 태어나 정(靜) 이전에는 성을 말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 정이란 글자는 어느 때를 가리킨 것입니까?
정이란 미발(未發)한 때이다.

“계승(繼承)하는 것이 선(善)이고, 성취하는 것이 성(性)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면, 음양(陰陽)의 순환은 본래 선후(先後)가 없는데, 사람과 만물의 태어남에 있어서는 양(陽)이 먼저고 음(陰)이 뒤인 것 같습니다.
대개 이치에 거의 맞다. 다만 양의 이전에는 또 음(陰)인 것이다. 한 개의 물건이 태어나는 것을 가지고 말하면 양이 먼저고 음이 뒤이다.

태극도(太極圖)의 주(註)에, “음양이 상(象)을 이루는 것은 천도(天道)가 성립하는 까닭이고, 강유(剛柔)가 질(質)을 이루는 것은 지도(地道)가 성립하는 까닭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하늘은 양(陽)인데 양 가운데 또 음양이 있고, 땅은 음(陰)인데 음 가운데 또 음양이 있습니다. 대개 음양은, 기(氣)는 하늘에서 운행되고 질(質)은 땅에서 갖추어졌기 때문에, 하늘에는 음양의 상(象)이 있고 땅에는 강유의 질이 있습니다. 대저 양 가운데의 음양은 해와 달과 추위와 더위의 기에서 볼 수 있으나, 음 가운데의 음양은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겨울철일지라도 어찌 볕이 없겠는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인자(仁者)가 보면 인(仁)이라고 하고, 지자(知者)가 보면 지(知)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저는, 양(陽)의 동(動)을 타고난 것은 인(仁)이 되기 때문에 인자는 발동하는 것을 보면 바로 인이라고 하고, 음(陰)의 정(靜)을 타고난 것은 지(知)가 되기 때문에 지자(知者)는 정정(貞靜)할 것을 보면 바로 지(知)라 한다고 봅니다.
대개 그러하다.

서재(書齋)의 여러 벗들이 서로 강론(講論)하기를, “애초 기(氣)가 화(化)할 때에는 만물이 음양 이기(陰陽二氣)의 기운이 융합해서 만들어졌으나, 그것이 형체로 변한 뒤에는 만물이 제각기 하나의 기를 갖게 되어 소는 소를 낳고 말은 말을 낳아 천지의 기는 거기에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기를, “음양 두 기가 천지 사이에 가득 차 있어서 사람의 동(動)과 정(靜)과 말하고 일하는 것이 모두 이 기의 속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남녀(男女)가 정(精)을 교합할 때에 유기(游氣)가 거기에 합하여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선유(先儒)가, ‘사람이 천지의 기 속에 사는 것은 물고기가 물속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면 천지의 기와 부모의 기는 하나로서 다름이 없는가?
그 근본을 추구하면 일기(一氣)일 뿐이지만 그것이 기에 국한된 것으로써 논하면 부모와 천지는 각각 그 일기를 가지고 있다. 대저 부모의 기가 없으면 천지의 기는 붙을 곳이 없어서 형체로 변하는 이(理)가 끊어질 것이다.

처음 부여받을 때에 천지의 기와 부모의 기는 분수의 많고 적은 차이가 없는가?
천지의 기는 분수가 많고, 부모의 기는 분수가 적다.

천지의 기는 지극히 맑고 부모의 기는 극히 탁(濁)하니 어느 기가 주(主)가 되는가?
적은 것이 많은 것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천지의 기가 주가 된다.

천지의 기가 주가 된다면 부모의 기로써 천지의 기를 바로잡을 수 없는가?
그렇다.

《소학(小學)》에서 말하는 태교(胎敎)라는 것은 무엇인가?
받은 기(氣)가 평평(平平)한 경우는 태교로써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극히 탁한 경우는 태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부여받은 기가 같지 않아서 강하면서 착한 자가 있고, 유(柔)하면서 착한 사람도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금기(金氣)의 맑은 것을 받은 사람은 강하면서 선한 사람이 되고 목기(木氣)의 맑은 것을 받은 자는 유하면서 선한 사람이 된다.

강하지도 않고 유하지도 않아 마음가짐과 일을 행하는 것이 다 희미한 사람은 어째서 그런가?
맑지도 않고 탁하지도 않은 기를 타고난 자는 그러하다.

사람이 혹 청렴하고 개결(介潔)하지만 그 도량이 작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맑은 기를 적게 받은 자는 그 마음은 비록 맑으나 그 도량은 매우 얕은 것이다.

음양을 일기(一氣)라고도 하고 이기(二氣)라고도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순환하는 것을 가지고 말하면 일기(一氣)라 하고, 상대하는 것으로 말하면 이기(二氣)인 것이다.

음양과 오행을 마주 세워 놓고 본다면 서로 다른 것이 있는가?
음양은 기이고, 오행은 질이다.

목(木)은 인이고, 금(金)은 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목기(木氣)는 발달하는 것을 주재하니 그 신(神)은 인이며, 금기(金氣)는 강강(剛强)한 것을 주재하니 그 신(神)은 의(義)이다.

가을과 겨울은 모두 음인데, 수음(水陰)이 가을에 생기지 않고 겨울에 생기며, 봄과 여름은 다 양(陽)인데 화양(火陽)이 봄에 생기지 않고 여름에 생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水)와 화(火)는 추위와 더위가 시작할 때 생기지 않고 추위와 더위가 극성할 때 생기기 때문에 극음(極陰) 가운데서 일양(一陽)이 동(動)하여 수가 생기고, 극양(極陽) 가운데서 일음(一陰)이 뿌리를 박아 화가 생긴다. 그러나 그 근본을 추구하면, 겨울의 추위는 서늘한 가을에서 시작되고, 여름의 더위는 따뜻한 봄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금(金)은 수를 낳고 목(木)은 화를 낳는다.

음 가운데서 양이 동하면 수가 생기고 양 가운데서 음이 생기면 화(火)가 나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일양(一陽)이 여러 음 가운데서 동(動)하면 음기가 융화하여 수(水)가 생기고, 일음이 여러 양 가운데 뿌리를 박으면 양기가 격동되어 화(火)가 생긴다.

태극이 처음 동하였을 때에 수(水)가 생긴 것도 이런 뜻인가?
태극이 동하기 전에는 완전히 순음(純陰)이었는데, 순음 가운데 일양(一陽)이 비로소 동(動)하면, 음은 단독으로 이루지 못하고 양이 반드시 도와준 뒤라야 발하여 나오게 된다. 그러니 수(水)는 전음(全陰)이지만 전양(全陽)은 아니다. 이런 까닭에 수는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을 때에 성대하게 유행하다가 극심한 추위가 이르면 엉기어 얼음이 되고 극심한 무더위에는 말라서 고갈된다.

음양오행에 대한 논의는 우선 놓아두고 심(心)ㆍ성(性)ㆍ정(情)을 논하여도 되겠는가. 심의 지각은 기(氣)인가 이(理)인가?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기이고, 알게 되는 것과 깨닫게 되는 것은 이(理)이다.

지각은 지(智)의 간살에 속하는가?
지각은 곧 마음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다 싣고 있으므로 사단(四端)의 정(情)이 소속에 따라 나타난다. 이것이 마음의 지각인 것이다. 만일 지각을 지의 간살에만 소속시킨다면 인의(仁義)는 쓸데가 없게 될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다만 한 종류의 유기(游氣)를 받을 뿐인데 이것이 나누어져 심기(心氣)도 되고 신기(身氣)도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람의 형체는 기(氣)로 형성되는 것인데 그 속에서 통하고 또 맑은 것이 엉기어 마음이 된다.

범인(凡人)의 기(氣)를 논(論)한다면, 탁한 기 속에서 맑고 또 통한 것은 그래도 인심(人心)의 허령한 것이 되지만, 성인(聖人)의 기는 순전히 맑은 기인데 어느 것이 심기(心氣)가 되고 어느 것이 신기(身氣)가 되는가?
성인(聖人)도 역시 맑은 기 가운데서도 정상(精爽)한 기가 엉기어 마음이 된다.

심기(心氣)와 신기(身氣)는 서로 표리(表裏)가 되는가?
그 기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심기는 신기 가운데 포함되어 있고, 신기는 심기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안에 심기의 허령한 것이 없으면 몸의 아픈 것도 가려운 것도 알 도리가 없어서 사석(砂石)의 완물(頑物)과 같을 것이다.

사람과 만물이 태어날 때에 양(陽)은 기가 되고, 음은 질이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양기는 가볍고 맑으며 음기는 무겁고 탁하므로 양은 반드시 음으로 터전을 삼은 뒤라야 형체를 가진 물건을 이룰 수 있다.

하늘에 있는 이(理)와 사람에게 있는 성(性)은 동일하고 다른 것이 없는가?
이것을 물에 비유하면, 천리는 물의 원천이고, 인성은 그릇에 있는 물이다. 원천의 물은 맑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것을 흰 그릇 안에 담으면 그릇과 함께 같은 색이 되고, 이것을 푸른 그릇 안에 담으면 또 푸른 그릇과 같은 색이 된다. 이에 선생이 말하기를, “이 부분의 논의(論議)도 대체로 옳다. 다만 음양을 기라 하고 오행을 질이라 한 것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총괄적으로 말하면 음양이고 나누어 말하면 오행(五行)이다. 오행에는 기도 있고 질(質)도 있다.” 하였다. -이상은 신사년이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동(動)하여 양(陽)을 낳고, 정(靜)하여 음을 낳을 때에 천지의 이름도 형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것을 천일생수(天一生水), 지이생화(地二生火)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 하였다.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기를, “여기에서 천지라고 한 것은 음양의 상수(象數)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하니,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천지의 맨 처음에 사람과 물건이 생겨날 때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뒤인가.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만물(萬物)이 있고 난 다음에 남녀(男女)가 있었다.’ 하였는데, 이것으로 보면 남녀가 생긴 것은 만물보다 뒤이고, 태극도(太極圖)에서는 이르기를, ‘건도(乾道)는 남자를 만들고, 곤도(坤道)는 여자를 만들어 두 기가 서로 감응하여 만물을 화생(化生)하였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만물이 생긴 것이 남녀보다 뒤이다.” 하였다. 김진강이 대답하기를, “《주역》에서 ‘만물이 있은 뒤에 남녀가 있다.’ 한 것은 사람과 물건이 생긴 뒤라야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고 만물의 생겨남이 반드시 사람보다 먼저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태극도에서 ‘건도는 남자를 만들고, 곤도는 여자를 만들어 만물을 화생한다.’고 한 것은, 양은 굳세고, 음은 순하므로 남녀의 도(道)가 이루어짐을 말한 것이고, 사람이 반드시 만물보다 먼저 생겼다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대개 사람과 만물을 대립시켜 말하면 사람은 사람이고 만물은 만물이지만 만물을 총괄하여 말하면 사람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주역》에서 ‘만물이 있다.’고 말한 것과 태극도에서, ‘만물을 화생한다.’고 한 것은 사람과 만물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만물(萬物)은 오로지 초목(草木)과 금수(禽獸)만을 가리키고, 남녀라는 것은 오로지 우리 사람만을 가리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설에 대해 저것이 먼저이다, 이것이 뒤이다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였다.
천지의 맨 처음에 초목이 먼저 생기고 금수가 그다음에 생긴 연후에 사람이 생겼는가?
이 말을 믿는다면 애초에 천지의 기가 먼저 탁한 기를 만들어 내어 초목과 금수를 만든 뒤에 비로소 맑은 기를 만들어 내 사람을 만들었다고 할 것이니, 너무나 생각이 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초목은 오행의 목(木)에 속하니, 이것은 사람보다 먼저 생겼다고 할 수 있지만, 혈육이 있는 종류들은 우리 사람과 함께 생겨났을 것이다. 이에 선생이 옳다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물이 불을 이기는 일은 항상 많지만, 불이 물을 이기는 일이 항상 적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김진강(金振綱)이 대답하기를, “물과 불이 가까이 있으면 물이 항상 이기지만, 멀리 있으면 불이 항상 이긴다. 불이 물을 이기는 것은 본래 한두 번만은 아니지만 우선 그 한 가지 사례만을 들어 말하겠다. 물이 솥 안에 있고 그 밑에 불을 때면 물이 말라서 저절로 없어진다. 또 크게 가문 날에는 양기(陽氣)에 촉발되어 천맥(川脈)도 고갈되니, 이것 또한 불이 물을 이기는 것이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월식(月蝕)하는 것도 불이 물을 이기는 것이다.” 하였다.
횡거(橫渠) 선생이 말하기를, “신(神)을 궁(窮)하고 화(化)를 아는 것은 덕의 성대함이다.[窮神知化 德之盛也]” 하였습니다. 이 궁이란 글자는 궁구(窮究)한다는 뜻의 궁 자가 아니고, 바로 통하고 밝아서 궁극에 도달하였다는 뜻입니까?
그렇다.

이천(伊川)은 세 번 사양한 뒤에 임금의 부름에 나아갔는데, 우계(牛溪)는 어째서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이천은 당시에 임금이 그를 등용할 뜻이 있어서 불렀기 때문에 나아갔지만, 우계는 임금이 그다지 그를 등용할 뜻이 없이 그냥 부르러 온 것이기 때문에 나아가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서울에 들어가다가 도착하기 전에 병이 들어서 돌아왔으니, 끝까지 나아가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이하는 문인(門人) 박순경(朴舜卿)ㆍ박여룡(朴汝龍)이 기록한 것이다.-

최학원(崔學源)이 이덕홍(李德弘)의 말을 전하기를,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거기에 따르는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가 발하여 이가 그것을 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퇴계(退溪)는 스스로, ‘이 말을 잘하였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니, 이는 각각 자기가 중하게 여기는 한쪽만을 좇아 말한 것입니까?
그러면 사단은 본래 이(理)의 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칠정의 바른 것은 유독 이의 발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대개 나는 칠정 밖에 또 별다른 정(情)이 없고 사단도 칠정 속에 있다고 본다. 맹자(孟子)는 다만 칠정 가운데서 선(善)한 것만 뽑아서 사단이라고 한 것이니 칠정과 사단을 대립시켜 말한다면 이물(二物)인 것 같지만 그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

대공(大功) 이하는 강학(講學)할 수 있고 소공(小功) 이하면 타인(他人)의 상(喪)에 가서 조문(弔問)할 수 있다. 소공 이상의 상이면 장례(葬禮)를 지내기 전에 타인을 조문할 수 없는 것은 그 극심한 슬픔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선생이 국상(國喪)을 만나 최복(衰服) 중에 있었으므로, 이장(李丈)의 상사(喪事)에 만서(挽書)를 쓰지 못했고, 또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의택소안(義擇所安)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의(義)에 온당한 것을 택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상 무인년이다.-

위첩(衞輒)이 나라를 차지하고 아버지를 막아 낸 일을, 주자(朱子)는, “만일 첩(輒)이 어질어서 나라의 백성들이 그가 왕위를 버리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군신과 부자 사이에 반드시 조처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도주(逃走)할 뿐이다.” 하였는데, 이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첩(輒)이 성현(聖賢)의 덕이 있어서 나라 사람들이 그가 왕위를 버리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괴외(蒯聵)를 높여 후세의 태상황(太上皇)처럼 해야 한다.

그를 태상황같이 높이면 나라 사람들에게서 혐오감이 없겠습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거역할 도리가 없고 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그 아들을 임금으로 섬기려 한다면 그들은 부득이 그 아들이 아버지를 높이는 것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나 첩이 반드시 성현의 덕이 있고서야 이렇게 할 수 있으므로 첩의 도리로는 도주할 수밖에 없다.

왕근사(王近思)가 주자(朱子)에게 묻기를, “안자(顔子)가 빈민촌에 살 때에 안로(顔路)에게 맛 좋은 음식을 대접하지 못하였으니 아들로서 근심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하니, 주자가 말하기를, “이것이 중하면 저것은 가벼운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안자(顔子)는 도의로써 안로(顔路)를 봉양하니, 맛 좋은 음식이 없더라도 안자는 그것으로 근심을 삼지 않았고 안로도 불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연평(李延平)이 말하기를, “장량(張良)의 조용함이 제갈무후(諸葛武侯)보다 낫다.” 하였는데, 어느 점이 조용한 것입니까?
일에 앞서서 작위(作爲)하지 않고 반드시 일이 오기를 기다린 후에 대응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조용한 점이다.

무후가 한(漢)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은 것은 정당하나 장량(張良)이 한(韓)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은 것은 속임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韓)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으면서도 종신토록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속인 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자(儒者)의 기상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한신(韓信)과 같은 부류는 가왕(假王)을 삼아 줄 것을 청하거나 땅을 떼어 주기를 요구하기도 하였지만 장량은 원수를 갚는 것만으로 뜻을 삼고 요구하는 것이 없었으며, 봉공(封功)하는 날에 3만 호(戶)를 사양하고 유(留) 땅을 청한 것은 욕심이 적어서 그러한 것이다. 욕심이 적은 것은 바로 유자의 기상이다.

무후(武侯)와 같이 정대(正大)하려면 장량은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한성(韓成)과 같은 자를 보필해서 진(秦)을 멸망시킬 수는 없었고 성(成)이 항우(項羽)에게 피살되었으니, 항우도 장량(張良)의 원수였다. 그래서 한 고조(漢高祖)가 아니면 함께 원수를 갚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한 고조를 섬기면서 그가 한(韓)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고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사세(事勢) 역시 어려웠을 것이다.

이윤(伊尹)과 태공(太公)은 도(道)에 통달하여 도를 천하에 행할 수 있을 만한 뒤에 벼슬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만일 한(漢)과 당(唐)나라 때에 태어났으면 그들 역시 과거를 보러 다녔겠습니까?
만일 그들이 나이가 젊고 도덕도 성취되지 않은 때라면 그들도 과거를 보지 않았을지 어찌 알겠느냐. 그러나 도(道)가 밝아지고 덕이 서게 되었으면 반드시 과거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정자와 주자가 과거에 응시한 것도 젊었을 때였다. 만일 만년(晩年)이었다면 그들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함양은 경(敬)을 힘써야 하고, 진학(進學)은 치지(致知)하는 데 있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치지하면서 경에 있지 않음은 없다.” 하였는데,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경은 지(知)와 행(行)의 사이를 관통(貫通)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양과 치지를 하기 위해서는 경을 힘써야 하는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안연(顔淵)이 죽었을 때, 공자(孔子)에게 재물(財物)이 있었다면 반드시 주어서 곽(槨)을 만들게 하였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가난하면서 후장(厚葬)하는 것은 순리(順理)가 아닌데 재화를 주어 곽을 만들게 하였다면 어찌 순리라고 하겠습니까?
이른바 후장(厚葬)이란 것은 일마다 더할 수 없이 아름답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안연이 가난하였는데 모든 것을 아름답게 했다면 이것은 순리가 아니다. 다만 곽만을 만들었을 뿐이라면 후장(厚葬)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혹 부의(賻儀)를 하는 사람이 많아서 저절로 곽을 만들 만한 여유가 있었다면 곽을 만들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물며 안연과 공자 사이는 부자(父子)와 같아서 공자가 가진 재화는 바로 안연이 가진 재화나 마찬가지였으니 그가 곽을 만들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찌 순리가 아닐 리가 있겠는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지자(支子)가 스스로 주재하는 제사는 반드시 종자(宗子)를 따라서 옮길 필요가 없다.” 하였는데, 그 뜻을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별로 지자(支子)가 스스로 주재하는 제사가 없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많이들 종족과 함께 동거하여 지자가 각각 사당(祠堂)을 세워 그 부모를 제사 지내었다. 이른바 반드시 종자를 따라서 옮길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 아닌가 한다.

신독(愼獨)이란 것은 이미 발하고도 아직 사물을 접촉하지 않은 경우 입니까, 이미 사물을 접촉한 경우입니까?
이미 발하여 신중히 하는 것이 있으면 비록 몸과 사물은 접촉한 것이 아니더라도 마음과 사물은 접촉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증자(曾子)가 역책(易簀)하였는데, 당초에 살평상이 왔을 때에 그것을 어째서 받았습니까?
옛날에는 대부(大夫)가 선비[士]에게 반드시 선물을 주는 예(禮)가 있었으므로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대부(大夫)라야 쓰는 살평상이고, 선비가 쓰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미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병중에 사용하여 그럭저럭 과감하게 치우지 못하였으나 동자(童子)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결단을 내려 바로 바꾸도록 명한 것이다.

동자(童子)도 그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말한 것입니까?
동자는 증자(曾子)가 항상 예에 맞게 처신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선비로서 대부의 살평상에 누워 있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대전(大全)》에, “천명(天命)은 물건에 둘러싸이지 않고 선에 둘러싸이지 않는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이 뜻을 모르겠습니다.
천명은 이(理)를 말한 것이다. 대개, 이가 물건에 둘러싸여서 나오지 않는다면 이것은 천명이 불순한 것이 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진실로 타당하지만 이는 본래 불선(不善)한 것이 없는 것이니 어찌 선(善)에 감싸여 있지 않다는 이론이 있겠느냐고 한 것이다.

문생(門生)들이 청계당(聽溪堂)에 모여, 정사(精舍)에 들어갈 일을 의논하기 위해 자리를 정돈해 앉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학자(學者)가 다 학문을 한다는 이름은 있으나 도리어 학문의 열매가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욕심이 있는 것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나는 스스로 단속하는 공부를 배로 노력하겠다. 제군들도 십분 착실한 공부를 하여 물러서는 뜻이 없게 함으로써 외인(外人)들의 비웃음을 사는 일이 없게 하라.” 하고 깊이 경계하였다.
전일에 함양(涵養)은 정(靜)할 때의 공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자(朱子)는 《소학(小學)》을 함양의 공부로 하였으니, 실천(實踐)하는 일이 다 함양하는 일이고, 정할 때만의 공부는 아닙니다.
모든 심신(心身)을 수양하는 것은 다 함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동(動)이나 정(靜)을 막론하고 다 함양은 실천에 있다고 말한 것이니 실천 가운데에 함양이 있는 것이다.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택한다.”는 대목을 강의하다가 선생이 묻기를, “어떤 사람이 10일 동안을 굶어서 금방 죽게 되었는데 어떤 강도(强盜)가 쌀을 주어 죽음에서 구제해 주려는 자가 있다면, 이것을 받으면 살고 안 받으면 죽게 되는데 그것을 받아야 하느냐?” 하였다. 모두가 입만 우물거리며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말하기를, “열흘 동안이나 굶고 있는데도 돌봐 구제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이것은 하늘이 이미 나를 죽게 한 것이다. 그런데 억지로 구차하게 살 계책을 생각하여 마침내 사람을 죽여 법을 범한 물건을 받는다면 이것은 하늘을 거역하는 것이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하늘을 거역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성(誠)ㆍ경(敬)ㆍ과욕(寡慾)에 대해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성은 실리(實理)를 이르는 것이고, 경은 하나를 주로 함을 이르는 것이니, 경에 종사하면 욕심이 적어 성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경(恭敬)하지 않음이 없으면 상제(上帝)와 대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대한다는 것은 상대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상제는 터럭만큼도 사사로움이나 허위(虛僞)가 없으므로 경하지 않음이 없으면 또한 터럭만큼의 사사로움이나 허위가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상제와 더불어 상대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린(私吝)한 마음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며, 겨울에는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베옷을 입는 것은 하늘에 순응하는 일이지만, 터럭만큼이라도 분수에 넘는 욕구가 있으면 이것은 사린한 마음이다.

정(情)과 의(意)와 지(志)는 다 마음이 발한 것인데, 유독 마음은 성(性)과 정을 통괄한다고만 말하고, 의와 지를 말하지 않은 것은 의와 지는 다 정이 나온 뒤에 작용하는 것이므로 정을 말하면 의와 지 두 가지는 또한 그 가운데 포함되는 까닭입니까?
그렇다. 서울의 유자(儒者)들은 많이들 성(性)이 발하여 정이 되고 심(心)이 발하여 의가 된다 하면서 나누어서 논(論)하는데 이것은 한탄할 노릇이다. 견문(見聞)만 있고 마음속의 공부가 전연 없는 까닭에 이러한 것이다.

박여룡(朴汝龍)이 인하여 묻기를, “유 충정공(劉忠定公)은 닥쳐올 일을 미리 알고도 조금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 그러하였습니까?”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원성(元城)이 유배지에 있을 때, 장돈(章惇)이 원성을 죽일 만한 자 한 사람을 불러다 전운사(轉運使)로 임명하니 원성의 일가(一家)는 흉흉(洶洶)하였다. 전운사가 경내(境內)에 도착하게 되자 집안사람들이 모두 울고 있었으나 원성은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누워 자면서 코 고는 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밤중에 성중(城中)에서 북소리가 나므로 집안사람들은 다 공(公)을 죽이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의심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전운사가 갑자기 죽어 여러 사람에게 알리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아조(我朝)의 정광필(鄭光弼)은 학문이 높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역시 취할 만한 일이 있다. 유배지에 있을 때에 서울에 있는 종이 갑자기 도착하여 문밖에 쓰러진 채 숨이 급하여 말을 하지 못하여 집안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서 임금이 사약(死藥)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하인이 숨이 안정된 뒤에 물으니, 김안로(金安老)가 이미 폄출(貶黜)되었다고 하였다. 온 집안은 두려움이 도리어 기쁨이 되었다. 그때 광필은 잠을 자고 있었으므로 깨는 것을 엿보아 알렸으나 대답하고는 다시 자면서 별로 기뻐하는 빛도 없었다. 그가 폐조(廢朝 연산군(燕山君)) 때, 서울에서 죽이려고 형틀에 결박되어 역정(驛亭)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반정(反正)을 알려 주자 바로 울면서 말하기를, ‘아래에서 그를 바르게 인도하여 주는 자가 없어서 드디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슬프다.’ 하였다.” 이러한 사람도 또한 얻기가 쉽지 않다고 하였다.

계헌(季獻)의 거문고 타는 것으로 인하여 고악(古樂)을 논(論)하여 말하기를, “옛사람은 음악으로써 마음을 다스렸으므로 음악을 배우는 것과 학문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또 묻기를, “송(宋)나라 때의 여러 선생들도 역시 음악을 좋아한 분이 있었습니까?” 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고악은 이미 끊어졌었다. 정자(程子)는 그가 스스로 음악을 하였다는 것은 볼 수 없고, 회암(晦菴)은 시를 지어, “홀로 요금(瑤琴)을 안고 옥계(玉溪)를 지나간다.” 하였으니, “어찌 음악을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였겠느냐.” 하고, 이어서 좌석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비록 함께 거문고 소리를 듣더라도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분별이 있다. 제군은 이 거문고를 듣고 마음이 깨끗해질 수 있겠느냐, 아니면 조금 사특하고 더러운 생각이 있는가?” 하였다. 모두가 대답하기를, “마음이 거문고 소리에 전일(專一)하여 별로 사악(邪惡)한 생각이 없습니다.” 하니, 그러면 좋다고 말하고 이어서 고시(古詩)를 읊기를, “사람의 마음이 다 이와 같으면 천하가 저절로 화평하리라.” 하였는데, “어찌 아름답지 않느냐.” 하였다. 폐회할 무렵에 오효원(吳孝元)이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린 일을 큰 소리로 이야기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무릇 말은 경계될 만한 것과 본받을 만한 것을 제외하고는 일체 하지말아야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또 퍼져 지루하게 된다면 어찌 해가 있지 않겠느냐.” 하였다.

김퇴부(金退夫)와 김공직(金公直)이 술을 가지고 정사(精舍)에 왔다. 선생도 가서 좌정(坐定)하였는데, 박여룡(朴汝龍)이 묻기를, “주자(朱子)가 ‘사람이 귀에 들리는 게 없고 눈에 보이는 게 없을 때가 없다.’고 하였지만 사람은 스스로 미발(未發)인 때가 있는데 어찌 듣는 것이 없고 보는 것이 없는 때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마음은 비록 미발하였을 때라도 이목(耳目)은 스스로 보고 듣는 것이 있는 것이다. 만약 보고 듣는 것이 없는 것을 미발이라고 한다면 사람은 듣지 않고 보지 않는 때가 없는 것이니, 성인(聖人)이라도 역시 미발인 때가 없게 될 것이다. 주자도 힘껏 공부하여 어리석고 흐리멍덩한 인간을 길러 놓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성인(聖人)은 생각하지 않고 얻는다고 하니 의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선생이 말하기를, “성인의 마음은 비록 보통 사람과 다르지만 어찌 전연 의사가 없다고 하겠느냐.” 하였다. 계헌이 말하기를, “성현(聖賢)이 만일 의사가 없었다면 공자가 어찌 공산불요(公山弗擾)의 부름에 가고자 했겠는가.”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불요(弗擾)의 부름에는 가려다가 중지하였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뜻에 맞는 제후(諸侯)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수레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녔으니 어찌 의사가 없는 것이겠느냐.” 하였다.
이날 좌석에 있던 20명이 다 같이 노래를 부르고 선생도 이에 화답하였다. 이어서 제생(諸生)에게 경계하기를, “초학자(初學者)의 공부는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릴 뿐이다. 오늘 자리에 있는 제군이 다른 날 모두 선을 하고 악함이 없는 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것이니 제군은 힘쓰라.” 하였다.
백성을 부리는 것을 큰 제사를 받드는 것처럼 하는 것을 어째서 경(敬)으로써 몸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대인(大人)을 본 듯이 하고 큰 제사를 받드는 것처럼 하는 것이 다 나의 경을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의심나는 곳에 대해 질문합니다.
‘담각 담이각지(擔閣 擔而閣之)’라고 한 각(閣)은 각필(閣筆)한다는 각을 말한 것이고, ‘살수(撒水)’는 행보(行步)할 때에 팔을 움직이는 것이며, ‘삽시(霎時)’는 잠시라는 뜻이다.

어떻게 하면 정제(整齊)와 엄숙(嚴肅)을 배울 수 있습니까?
구용(九容)에 종사(從事)하면 정제하고 엄숙할 수 있다. 안장(安丈)이 묻기를, “구용에 종사하는 사람에 대하여 지위의 고하(高下)를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여 대답하기를,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규범(規範)에 맞으면, 몸가짐의 태도와 동작이 예의에 맞는다고 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할 수 있는 자라면 성인(聖人)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좌(端坐)ㆍ정좌(靜坐)ㆍ위좌(危坐)에 대하여 구분을 모르겠습니다. 이천(伊川)은 종일토록 단좌하였고, 여여숙(呂與叔)은 6개월에 정좌하였으며, 이 선생(李先生)은 사람들에게 정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박여룡(朴汝龍)은 의심하기를, 선현(先賢)들은 반드시 위좌(危坐)하면서 단좌나 정좌라 하였으니 단좌나 정좌도 그 위좌를 가리킨 것으로 여겨집니다.
위좌라는 것은 바로 그 궤좌(跪坐)를 가리킨 것이고, 단좌나 정좌는 위좌가 아니더라도 단정하게 앉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좌라고 하거나 정좌라고 하는 것이다. 이천이 절에 갔는데 의자가 부처의 정면에 마주 놓여 있자 이천이 의자를 돌려놓게 하였다. 비록 의자에 앉더라도 몸이 동요하지 않으면 단좌라고도 말할 수 있다. 대개 위좌는 단좌라고도 하고 정좌(靜坐)라고도 통칭할 수 있으나 단좌와 정좌가 반드시 모두 위좌는 아닌 것이다.

조계진(趙季珍)이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의 구분에 대해 물었다.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사단도 칠정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중 선(善)의 단서(端緖)인 것만을 가리켜 말할 때는 사단이라고 하고, 선악(善惡)을 겸하여 가리켜 말할 때에는 칠정이라고 한다. 퇴계(退溪)가 사단과 칠정을 구분하여 말하였기 때문에 기대승(奇大升)과 함께 변론(辨論)한 것이 한 권의 책이 될 만큼 되었다. 그러나 누가 능히 퇴계를 그르다 하고 기공(奇公)을 옳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그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한 자의 견해가 다 이와 같은 것이다.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는, ‘사단은 이(理)가 발하면 기(氣)가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면 이가 그것을 올라타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퇴계는 사단 칠정을 두 가지로 구분한 것이 매우 분명하다. 대체로 이와 기는 원래 두 가지 물건이 제각기 한 곳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선유(先儒)의 설에도 이러한 것은 없다.” 하였다.
안장(安丈)이 묻기를 “정(情)에 선악이 있습니까?”
서울의 박형(朴泂)과 같은 사람은 다 정에는 선악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와 같은 사람은 반드시 기미(幾微)를 살필 줄 모르며 바로잡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다. 만약 그 정(情)을 바로잡아 반성한다면 그 발하는 정이 어찌 다 선할 수 있겠는가. 비록 안자라도 뜻은 이미 선하지만 정은 불선하게 움직임이 있었다. 그래서 “겨우 막 잘못을 했는가 하면 바로 다시는 움터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육당(陸棠)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일찍이 구산(龜山)의 문하(門下)에서 배운 일이 있다. 어깨와 등이 높고 곧으며 용모가 단정하고 엄숙하였다. 구산이 그를 기특하게 여겨 자기 사위를 삼았는데 뒤에 건적(建賊) 범여위(范汝爲)에게 잡혀 이로 인하여 그의 수석 모사(謀士)가 되었다가 마침내 적에게 죽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경(敬)의 적(賊)이라고 말하였다.

“지성(至誠)스럽다. 측달(惻怛)하다.”는 것은 사람을 가지고 말한 것이고, “정미(精微)하다. 황홀(恍惚)하다.”는 것은 신(神)을 가지고 말한 것이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였다. -지성측달(至誠惻怛) 위에 궐문(闕文)이 있는 것 같다.-
선생이 임진(臨津)으로 가려고 야두촌(野頭村)에서 숙박하였을 때, 박여룡(朴汝龍)이 나아가 뵙고 인하여 신주(神主)를 묻을 때의 축문(祝文)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선생이 말씀하기를, “지난번에 요구하는 사람이 있어서 지어 주었다.” 하고 바로 외우기를, “‘선왕(先王)이 만든 예(禮)에 추원(追遠)하는 일에 제한이 있어 이제 영원히 천주(遷主)하려 하니 슬픈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한 이것은 천주하려 할 때 사당에 고유하는 축문이고 ‘이제 깨끗한 땅에 나아가 선주(先主)를 봉안(奉安)하고 영원히 결별하니 슬픈 마음 이길 수 없습니다. 감히 맑은 술잔으로 삼가 고합니다.’ 한 이것은 신주를 묻을 때 고유하는 축문이다.” 하였다.
얼마 전 선생께서, “안자(顔子)의 의성(意誠)함이 성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그렇다.

제 생각에는 안자는 의(意)에 있어서는 이미 허물이 없고, 마음에는 조금의 잘못이 있으니 의성은 성인과 차이가 없으나 심정(心正)함은 성인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그 지극함을 다하면 행실도 그 지극함을 다하게 된다. 격물(格物)과 치지(致知)가 그 극치를 다하면 의(意)의 정성스러움과 마음의 바름 또한 그 극치를 다할 것이다. 대체로 안자의 격물과 치지의 깊이는 조금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의성(意誠)함도 심정(心正)함도 다 이와 같이 성인(聖人)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박여룡(朴汝龍)이 묻기를 “작년 가을에 선생께서 서호(西湖 황해도)에 계실 때, 조정의 관리 중에 ‘시사(時事)가 지금 급박하므로 거취와 진퇴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말한 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누군가 이런 논의를 한 사람이 있었다.

때가 급박하여 벼슬에 나아간다면 이것도 나아가야 할 때인데 어째서 그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까?
이것은 유자(儒者)의 논의가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말한 것은 비록 도(道)를 행할 때는 아니더라도 서울에 왔으니 조정에 나아가 다만 조금이라도 구제해야 함을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제이의(第二義)이고 제일의(第一義)는 아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소가 같은 산기슭에 있어 할아버지의 묘소에 배례할 때 아버지의 묘소가 뒤에 있으면 마음에 미안할 것 같습니다.
사세가 그러하면 다른 묘실(墓室)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방친(傍親)의 묘소가 같은 산에 함께 있으면 묘제(墓祭) 때에는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간혹 술을 드리지 않고 그냥 절만 하여도 좋습니까?
비록 사시(四時)마다 반드시 다 배례하지는 않더라도 1년에 한 번은 폐할 수 없다.

백부(伯父)나 숙부(叔父) 같은 방친(傍親) 등의 기일(忌日)에는 비록 제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고기를 먹거나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합니까?
그렇다.

백부(伯父)나 숙부(叔父)가 낳은 종형제의 제사에도 또한 참례하는 것이 좋습니까?
참례하는 것이 좋다.

복(服)을 입고 있는 사람은 비록 풍악이 없더라도 모여서 술 마시는 데는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우연히 그런 자리를 만나게 되면 술을 마셔도 좋다. 그러나 서로 약속하고 회합하여 함께 앉아서 술잔을 주고받는 연회에는 참여할 수 없다.

《주자대전》의 의심나는 곳을 질문하겠습니다. 재상(宰相)의 지위에 있거나 원수(元帥)의 임무를 총괄하거나 초가집에 편히 누워 있는 것이 이치는 하나라고 하였는데 그 뜻을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빈궁ㆍ달달ㆍ영광ㆍ곤욕이 다르지만 내가 스스로 즐거워하는 뜻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자기에게 편리하지 않은 것을 알았으면 한 걸음 물러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의 마음에 편리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바로 그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한 걸음 물러선다는 것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함이다.

사람이 부모가 안 계시면 자기의 생일(生日)에는 비통함이 갑절은 더할 것이니, 이것은 예(禮)로써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부모의 생신에 그 어버이에게 잔치를 베푸는 것은 비례(非禮)로써 그 어버이를 섬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모가 평소보다 배나 비통한 마음인 줄 알고, 잔치하는 것을 금지하면 안하는 것이 좋다. 만약 부모가 금하지 않으면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성(性)이 도(道)의 형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도는 비록 만사에 흩어져 있지만 성(性)은 통체(統體)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性)은 도의 형체라고 한다.

여러 벗들이 술병을 가지고 정사(精舍)에 모여 선생을 모시고 꽃구경을 하였는데, 술이 반쯤 취하였을 때에 선생이 말하기를, “옛사람들은 조금만 떨어져 있다가 그 뒤에 만나면 반드시 공부한 것이 많은지 적은지 물었다. 제군들은 요사이 무슨 공부를 하였는가.” 하였다. 박여룡(朴汝龍)이 대답하기를, “일상적으로 하는 일을 점검해 보면 다만 한 자만큼 퇴보한 것은 알겠는데, 한 치만큼도 진보된 것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조금은 조신(操身)하는 공부가 있었기 때문에 그 한 자만큼 퇴보한 것을 아는 것이다. 만약 온전히 방심하고 지나간다면 어찌 공부가 진보하였는지 퇴보하였는지를 알겠느냐.” 하였다. 오효원(吳孝元)이 말하기를, “요사이 여러 벗들이 모두 과오를 적게 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였다.
어제 들으니, “안자의 격물과 치지는 다 성인(聖人)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하셨는데 이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격물ㆍ치지ㆍ의성(意誠)은 이미 성인에 이르렀고 심정(心正)이 아직 성인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안자의 격물ㆍ치지ㆍ의성이 이미 성인에게 이르렀다면 성인의 격물ㆍ치지ㆍ의성은 뱀을 그리고 발을 덧붙인 것과 같은 불필요한 것이 된다. 대개 안자의 지위를 가지고도 오히려 생각하지 않고 깨닫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그의 격물치지의 공부가 어찌 이미 성인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입지(立志)에 대하여 선현(先賢)들은 많이 범연하게 논하였는데, 선생은 글을 써서 의견을 말할 때에는 언제나 첫머리에 이것을 말씀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뜻이 서지 않으면 만사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뜻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합니까?
성(誠)하면 뜻이 저절로 서고, 경(敬)으로 이것을 지속하면 된다.

공자(孔子)께서 “이(利)를 말하는 일이 드물었다.” 하였으니, 이(利)를 말씀하실 때도 있었습니까?
옛날에는 이(利)와 의(義)가 동일한 것이었는데 후세에 와서는 이와 의가 나누어졌다. 이를 꾀하면 의를 해친다고 하는 것도 후세의 말이다. 그리고 옛날에는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화를 입었다. 그러므로 옛날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를 즐겨 하였고 악을 행하기를 즐겨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이와 의가 하나인 것이고, 후세에는 악을 행하는 사람은 이롭고, 선을 행하는 사람은 이롭지 않았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기를 즐겨 하고 선을 행하기를 즐겨 하지 않아 이와 의가 나누어진 것이다.

과거(科擧)의 법이 다 변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과거 공부를 통해 발신(發身)하였다면 자중(自重)하는 선비가 아니고 스스로 자신을 판 것이 된다. 그러나 그 조(祖)와 부(父)를 위하여 봉시(封諡)를 구하는 것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느냐. 만일 과거로 출신하고도 조와 부의 봉시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자신을 위하는 일을 중하게 여기고 조와 부를 위하는 일은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대개 이천(伊川)은 처사(處士)로서 벼슬에 나아갔는데, 그 일 자체가 자연히 다르기 때문에 말하기가 어렵다.

섭미도(葉味道)가 묻기를, “삼년상(三年喪)에는 길제(吉祭)를 지낸 뒤에 복침(復寢)하고, 기년상(朞年喪)에는 상기(喪期)가 끝나도록 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생존했을 때의 어머니를 위한 복(服)과 처(妻)를 위한 복을 입었을 때에만 그렇게 하고 대공(大功)에는 3개월 동안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고, 소공(小功)과 시마(緦麻)에는 명문(明文)이 없습니다. 주 선생(朱先生)이, “명문이 없는 것은 곧 평상시대로 하라는 것이니 복(服)이 경(輕)한 까닭이다.” 하였는데, 이 뜻은 어떠한 것입니까?
비록 소공(小功)과 시마(緦麻)라도 바로 안에 들어가는 것은 미안한 듯하다.

들으니, “붕우(朋友)의 상(喪)에는 7일이나 5일 동안 육식(肉食)을 하지 않는다.” 하니 백의(白衣)를 입고 밖에서 자야 합니까?
그렇다.

즐거운 뜻과 싱그러운 향기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고시(古詩)에, “즐거운 뜻 서로 이어지니 새와 대화를 주고받고, 싱그러운 향기 끊어지지 않아 나무와 꽃이 섞여 있구나.[樂意相關禽對語 生香不斷樹交花]”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연비어약(鳶飛魚躍)의 뜻처럼 제각기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이다.

교분이 깊은 사람이 상중(喪中)에 있으면 비록 죽은 사람을 모르더라도 조문하고 곡(哭)을 하여도 좋습니까?
자하(子夏)가 실명(失明)하였을 때에 증자(曾子)가 곡(哭)하였다. 만약 그가 상중에 있는 것이 슬프게 여겨져 곡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오면 곡을 해도 무방하다.

만일 일이 있어서 상경(上京)할 때에 주관(州官)이 노자(路資)를 주면, 그것을 받아도 좋습니까?
명목(名目)이 노자이니 받아도 될 듯하지만, 국법(國法)으로 말하면 받아서는 안 된다. 이어 말하시기를, “받지 않기는 쉽지만 주지 않기는 어렵다.” 하였다. 이성보(李誠甫)가 말하기를, “최영경(崔永慶)과 같은 사람이 수령이 되었다면 반드시 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그렇다고 하였다.

소종(小宗)은 있고 대종(大宗)은 없는 것을 강의하는데, 박여룡이 질의(質疑)하기를, “임금의 별자(別子)를 차적(次嫡)이라 하여 대종(大宗)이 되면 그 나머지의 측실자(側室子)와 같은 이들은 대종(大宗)의 불천(不遷)의 위(位)가 될 수 없습니까?” 하니, 그렇다고 하였다.
“주인은 조계(阼階)를 경유한다.”는 것이 있는데, 서쪽은 높은 위치인데 주부(主婦)와 집사(執事)가 경유하고, 동쪽은 높은 위치가 아닌데 주인이 경유한다고 한 것은 그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동(東)은 주위(主位)로서 주인이 조계를 경유하므로 주부 이하는 서계(西階)를 경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 높이기 위한 것은 아니다.

사미(四味)는 어떤 것입니까?
떡과 국수와 생선과 고기를 말한 것인데 탕(湯)은 여기에 없다. 나는 제사에 탕(湯)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격몽요결(擊蒙要訣)》에는 이것을 쓰라고 가르쳤다.

대제(大祭)에 서쪽을 향하여 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옛날에는 묘(廟)는 남쪽을 향하고 위패(位牌)는 동쪽을 향하였으므로 절하는 자는 서쪽을 향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그냥 답습하고 폐지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는 신위(神位)가 남쪽을 향하고 있으니 북쪽을 향하여 절하는 것이 옳다.

《대전(大全)》의 의심나는 곳을 질의하기를, 신(神)은 이(理)의 발용으로 기(氣)를 타고 출입하는 것입니까?
신(神)에는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구별이 있다. 이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理)의 한쪽만을 주로 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仁)이란 것은 목(木)의 신(神)이라고 말한 것이다.

“어찌 그 근본을 택하지 않고, 그 말단만을 도모하는 폐단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대학혹문(大學或問)》에는 각각 그 사물의 이치를 극진히 연구하여 각각 그 지식을 극진히 한다고 말하지는 아니하였다.

이면에 있는 중리(衆理)의 체용(體用)이란 어떤 것입니까?
비록 의리의 만선(萬善)이 본래 갖추어져 있고 본래 밝음을 알더라도 그 기의 이면에 있는 체용을 알아야 각각 스스로 깨달아진다는 뜻이다.

고조(高祖)의 제사를 막 마치고 바로 고조에게 부(祔)한 분에게 술잔을 올리게 되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먼저 정위(正位)에 술잔을 올리고 다음에 부위(祔位)에 하라.”고 합니다. 대개(大蓋) 고조의 제사를 마치고 바로 부위(祔位)에 제사 지내면 고조에게 부(祔)한 분은 바로 증조(曾祖)의 아들입니다. 아들을 아버지보다 먼저 제사하는 것이 옳습니까?
축(祝)의 내용에 부식(祔食)이라 하였으니, 이른바 아버지보다 먼저 흠향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남을 시켜서 제사를 지낼 경우에는 더욱 다르다.

자공(子貢)은 돌아와서 공자의 묘역에 집을 지었다고 하니, 옛날에도 여묘(廬墓)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대저 제자(弟子)가 스승을 위하여 삼년상을 행하는 것은 차마 떠나지 못하여 신주(神主)가 있는 곁에서 모시고 3년을 마치는 것이다. 자공(子貢) 역시 차마 떠나가지 못하여 다시 묘소 곁에 집을 짓고 3년을 거처한 뒤에 떠나갔었다.

김공직(金公直)이 묻기를, “스승의 상(喪)에, 혹은 3월ㆍ5월ㆍ9월ㆍ기년ㆍ3년을 거상(居喪)하는데, 육식(肉食)도 않고 연회에도 참여하지 않으며 흰옷에 검정 띠를 띠는 것입니까?”
그렇다.

박여룡이 묻기를 “어찌하여 심상(心喪)이라고 합니까?” 하였다.
안으로는 슬픈 마음이 있고, 밖으로는 최마(衰麻)에 대한 복제(服制)가 없기 때문에 심상(心喪)이라고 한다.

스승을 위한 상(喪)에 대해 성인(聖人)이 복(服)을 정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은혜와 의리에 정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일정한 복(服)을 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 뜻에 대한 말은 어디에 있습니까?
정자(程子)의 설이 있다.

시사(時師)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속(俗)에 이르기를, 경사(經師)라고 하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매연귀갑(昧然歸匣)이란 어떤 것입니까?
제사로 고유(告由)하지 않고 사판(祠版)을 옮기기 때문에 매연(昧然)이라고 한다.

초혼장(招魂葬)이란 어떤 것입니까?
군(軍)에 가서 죽거나 물에 빠져 죽어서 시체를 찾지 못하면, 의복(衣服)으로 혼(魂)을 불러 그 의복을 장사한다. 대개 이런 것을 초혼장이라고 하는데 예(禮)가 아니다.

관례(冠禮)할 때에 장자(長子)는 서쪽을 향하고 중자(衆子)는 남쪽을 향합니다. 남쪽을 향하면 주벽(主壁)인데 어째서 장자는 서쪽을 향하고 중자는 남쪽을 향합니까?
동쪽은 주위(主位)이므로 장자는 서쪽을 향한다. 남쪽을 향하는 것은 비록 주벽의 위치지만 실은 빈 곳인 것이다. 그러나 관자(冠者)가 남쪽을 향하는 것은 그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선인(先人)의 예(禮)에 있습니까?
이 혼례(婚禮)는 선인들의 시대부터 행해 온 예이다.

효사(斅師 교사(敎師))가 남에게 의탁하여 먹고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옛날에 이러한 일이 있었다. 간혹 생도를 모아 가르치면 제자들이 힘을 모아 스승에게 식사를 제공하였다.

윤문백(尹文伯)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일로 인하여, 선생이 말하기를, “옛사람들은 발인(發引)하는 것을 낮에 하고 밤에는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혹 일식(日食)이 있어 별을 보게 되면 곧 영구(靈柩)를 멈추고 가지 않았었다. 지금 사람들은 가까운 곳이라도 반드시 밤에 발인을 하니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윤문백(尹文伯)의 어머니 장사에 갔다가 편지로 선생에게 묻기를, “처(妻)의 상(喪)에 남편이 주상(主喪)이 되면 신주(神主)는 어떻게 쓰며, 축사(祝詞)에는 어떻게 호칭(呼稱)해야 합니까?” 하였다.
신주는 고실모향모씨(故室某鄕某氏)라고 써야 하고 방주(旁註)는 없어야 한다. 축(祝)에는 부모 고우고실모향 모씨(夫某告于故室某鄕某氏)라고 일컬어야 한다. 다만 제주축(題主祝)은 복유존령(伏惟尊靈)이라는 서식(書式)을 유령(惟靈)이라고 고쳐 써야 한다.

《대전(大全)》에 의심나는 곳이 있는데, 송(宋)ㆍ위(魏) 이래로 한쪽은 남국(南國)이고 한쪽은 북국(北國)인데, 서로 군신(君臣) 간이 된 일이 없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송(宋)ㆍ위(魏)의 임금의 공덕(功德)이 서로 우열(優劣)이 없었기 때문에, 저쪽이 감히 이쪽을 신하로 삼지 못하고, 이쪽이 저쪽을 임금으로 섬길 수 없었던 것이다.

선생이 제사 음식으로 박여룡(朴汝龍)과 안장(安丈)을 초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漢)나라 원묘(原廟)의 제도를 물었다.
원(原)은 둘째라는 뜻이다. 이미 종묘(宗廟)가 있는데 또 묘(廟)가 있으므로 원묘(原廟)라고 한 것이니 오늘날의 문소전(文昭殿)과 같은 것이다. 다만 한나라의 원묘는 각각 묘로 되어 있었다. 그 제도는 혜제(惠帝) 때 숙손통(叔孫通)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 유생(儒生)이 저자에서 억울하게 죽은 숙손통의 일을 물었다.
이것은 분하여 꾸짖는 말이니 숙손통은 본래 억울하게 죽은 일이 없다.

김자장(金子張)의 형제가 뵈러 왔다가 묻기를, “서삼촌[庶叔] 모씨(某氏)를 이미 장사 지냈습니다. 그러나 복이 매우 중요하니 육식(肉食)을 하지 않는 기한을 어떻게 정하여야 되겠습니까?”
달이 넘어서 장사 지내는 것이 예(禮)이다. 비록 한 달 안에 장사를 지냈더라도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은 이것을 기한으로 하도록 하라.

오효원(吳孝元)ㆍ유숙부(兪淑夫)ㆍ김자장(金子張) 등 7명과 같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배우다가, 강의(講義)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는 대문에 이르러, 선생이 말하기를, “천명(天命)과 솔성(率性)은 인위적인 것이 허락되지 않고 수도(修道)에 이르러서는 공부가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횡으로도 말하고 종으로도 말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말하여, 체(體)와 용(用)을 포괄하는 것이 곧 횡설(橫說)이고, 여러 말을 하여도 일단(一端)만을 논하는 것이 곧 수설(竪說)이다.

“성(性)의 덕이 마음에 갖추어 있다고 한 것은 다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명(性命)을 근본으로 하여 말하자면 그 근원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제1절에서는 사람과 만물을 아울러 말했다. 대개 이 글은 본래 사람을 위하여 지은 것이기 때문에 ‘도야자(道也者)’ 이하는 다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계구(戒懼)로부터 단속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계구가 미발(未發)인데 미발 가운데에 또 지정(至靜)이 있습니까?
계구는 다만 함양의 뜻일 뿐이니 배우는 자의 입장으로 말하면, 처음에는 치중(致中)에 반드시 도달하지 못한 것이 많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속하여 지정(至靜)에 도달하게 한다고 말한 것이지, 정(靜) 가운데 또 지정이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단연(斷然)한 조치를 내리는 것은 스스로 쉽다.”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송(宋)나라 때 강도들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을 납치하여 두목을 삼으려고 꾀한 일이 있었다. 온공(溫公)의 친구가 온공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강도들이 공을 납치해 가려고 꾀한다고 하니 매우 근심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온공이 대답하기를, “이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죽으면 그뿐인데 무슨 어려운 일이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이것은 온공(溫公)이 단연히 조치하는 것을 스스로 쉽게 여긴 것이다.

횡양(橫陽)의 명(命)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한성(韓成)이 처음에 횡양군(橫陽君)이 되었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또 정귀(鼎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홀귀(忽貴)를 말한 것이다.

호부(胡部)는 무엇입니까?
자세히 모르겠다. 오랑캐의 음악을 뜻한 듯하다.

또 ‘상림치의(上林侈矣)’는 무슨 뜻입니까?
치(侈)는 부유하고 풍성함을 말한 것이다.

또 대필(懟筆)은 무슨 뜻입니까?
분필(憤筆)을 말한 것이다.

《춘추(春秋)》를 폐기한다는 것과 “스스로 북면(北面)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왕안석(王安石)이 춘추삼전(春秋三傳)의 번거로움을 싫어하여 드디어 《춘추(春秋)》의 공부를 그만두고, 스승을 높인다는 뜻을 미루어 임금은 스스로 북면(北面)의 자세로 그 신하를 섬길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대개 다 그의 병통을 말한 것이다.

정사(靜舍)에 가서 여러 벗들과 함께 나란히 선생님을 뵈었다. 박여룡(朴汝龍)이 묻기를 “역에 태극이 있다고 할 때의 역(易) 자는 이(理)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기(氣)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하였다.
기(氣)의 변역(變易)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여기서도 이와 기는 분리 할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해석은 “음양이 변역하는 가운데에 태극의 이(理)가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는다.”라고 해야 한다.

“귀신(鬼神)과 그 길흉(吉兇)을 합친다.”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점을 쳐서 길흉을 귀신에게 묻는 법인데, 성인(聖人)이 길흉을 아는 것이 귀신과 합치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미 음과 양, 유(柔)와 강(剛)이라고 하였으니, 의(義)와 인(仁)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어째서 인과 의라고 말하였습니까?
이것은 통괄하여 말한 것이다.

사단(四端)에 신(信)을 말하지 않은 것을 강의하다가 말하기를, “선현(先賢)의 글은 경솔하게 보태서는 안 된다. 임은 정씨(林隱程氏)가 말하기를, ‘성실한 마음은 신(信)의 단서이다.’라고 하였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마음은 이미 성실한 이(理)이니 바로 이른바 신(信)인데, 어찌 따로 성실한 마음이 있겠느냐. 맹자(孟子)가 성실한 마음은 신의 단서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는 것이다. 퇴계(退溪)가 임은(林隱)의 이 말을 가져다가 《성학십도(聖學十圖)》에 실었는데 옳지 않은 것 같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남을 사랑할 줄 모르다가 이것을 확충시키면 죽이기를 좋아하기에 이른다.”라는 것을 강의하다가 인하여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에 나막신을 신고 진흙땅을 걸어갔는데, 처음에는 마음가짐을 매우 조심하여 오히려 진흙이 발을 더럽힐까 두려워하였지만, 한 번 미끄러져 진흙에 빠진 뒤에는 진흙 밟는 것이 스스로 편안해졌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 또한 이러할 것이니, 처음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하고, 도심(道心)은 미묘하다.”라는 것을 강의하다가 인하여 말하기를, “생(生)과 원(原) 두 글자를 배우는 사람들이 매양 잘못 본다.”고 하고, 인하여 우계(牛溪)와 문답한 이기논변(理氣論辨) 한 권을 꺼내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박여룡(朴汝龍)이 말씀드리고 그것을 베껴 가지고 왔다.
보명진송(保明津送)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보명은 지금의 보단자(保單子)와 같은 것이고, 진송은 사람을 시켜서 인솔해 가게 하는 것이다.

또 기분(幾分)은 무슨 뜻입니까?
지금 강경(講經)하고 점수를 매기는 것과 같은 뜻이다.

단류이위인(斷流而爲忍)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부자(父子)와 부부(夫婦) 사이에 대부분 인정이 끊기어 끝내 차마 못할 데에 이르는 것과 같다.

또 ‘선으로 가는 것도 악으로 가는 것도 다 지(志)라는 설’이 무슨 뜻입니까?
지(志)라는 것은 마음이 가는 것이다. 비록 악한 일을 하더라도 그 마음이 반드시 가는 데가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말하면 역시 지(志)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공천하(公天下)의 일을 사의(私意)를 가지고 한다면’이라는 말을 강의하다가 말하기를, “제 환공(齊桓公)과 진 문공(晉文公)의 일과 같은 것은 본래 천하를 위하여 하였으니, 이것이 공천하의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그 마음을 미루어 보면 다 사의에서 나온 것이고,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이 정신을 가다듬고 정치에 힘써서 태평한 세상을 이룩한 것도 다 사의임을 면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신선설(神仙說)에 관한 말을 하다가, 박여룡(朴汝龍)이 묻기를, “주 선생(朱先生)이 참동계(參同契 선리(禪理)의 근원을 논한 책)를 발휘(發揮)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였다.
굴원(屈原)이 당시의 세태에 상심(傷心)하여 〈이소경(離騷經)〉의 말장(末章)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이야기를 실었고, 주자(朱子)도 만년(晩年)에 위학(僞學)의 화(禍)를 만나 이러한 의사(意思)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제자의 말에도 이런 뜻이 보인다.

그러면 어째서 그 뜻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의 세상에 살면서 지금 시대를 상심하는 데 대한 말을 분명하게 할 수는 없다. 《초사(楚辭)》에 주(註)를 낸 것도 이런 뜻이다. 다만 《참동계》의 서문에, “공동도사(空同道士) 추소(鄒訴)는 이 뜻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모(某)처럼 많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不用某許多功夫]’이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
성인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력(功力)이 이미 지극하다. 그러므로 “성현처럼 많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역시 성현의 일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니, “성현의 뜻을 볼 수 없다.”고 한 것과 같은 말이다. 주자(朱子)는 일평생 《대학(大學)》을 지극히 공부하였다. 다른 서적은 비록 그렇게 공부하지 않았어도 도리어 의의(疑意)가 없었는데 《대학》은 고치고 또 고치어 임종(臨終)에 이르러서야 그쳤다. 그러므로 “모(某)처럼 많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또한 모(某)의 것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면, 이(理) 또한 부여된다는 뜻을 모르겠습니다.
별로 다른 뜻이 없다. 다만 그 이와 기가 서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을 뿐이다.

《성학집요》에서 논(論)한 거경(居敬)ㆍ궁리(窮理)ㆍ역행(力行)의 세 가지가 명백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덕성(德性)을 존중하는 것이 거경(居敬)이고, 문(文)에 박학(博學)하는 것이 궁리(窮理)이고, 예(禮)로써 단속하면 이것이 역행(力行)인 것이다. 그런데 다만 역행(力行)에서 예(禮)에 맞도록 단속한다는 것은 뜻이 미흡(未洽)한 것 같다.

일정팔회(一貞八悔)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내괘(內卦)를 정(貞)이라 하고, 외괘(外卦)를 회(悔)라고 한다. 내괘는 건(乾)이고 외괘는 변하여 팔(八)이 되므로, 일괘(一卦)는 다 지금의 팔괘(八卦)이다. 이러므로 64괘가 된다.

“누귀(僂句)가 거짓을 이룬다.[僂句成欺]”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누귀(僂句)는 보배스러운 거북의 이름이니, 본래 거북이 나는 산지(産地)로써 이름을 붙인 것이다. 《좌전(左傳)》에, “장소백(臧昭伯)이 진(晉)나라에 갔다가 장회(臧會)가 그의 보귀(寶龜)인 누귀(僂句)를 훔쳐다가 신의를 지킬 것인가 참월(僭越)할 것인가 점치니, 참하는 것이 길(吉)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후일에 계평자(季平子)가 장회를 장씨의 후계자로 세우니, 회(會)가 말하기를, ‘누귀가 나를 속이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것을 인용한 것은 대개 술수(術數)의 그릇된 점을 말하는 것이다.

‘칠분(七分)의 모습’이란 것은 어떤 것입니까?
정자(程子)가 역전(易傳)을 짓고 말하기를, “이것은 칠분의 글이다.”라고 하였다. 10분 내에서 말한 것은 7분뿐이니 그 나머지 3분은 각 사람이 스스로 깨달아 얻으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문인(門人) 장역(張繹)이 제문(祭文)을 지어 말하기를, “선생의 말씀이 문자에 나타난 것은 7분의 마음이 있고, 단청(丹靑)에 그린 것은 7분의 의용(儀容)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정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7분의 모습이라고 한 것은 정자의 체모(體貌)가 유약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것은 지극히 강하였기 때문에 그 마음 모습의 7분도 나타내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나가 매양 둘을 낳는데, 조금도 지력(智力)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일 지력(智力)으로 말한다면 반드시 자기의 뜻으로 안배(安排)할 것이다. 이 괘(卦)는 자연히 미루어 올라가서 스스로 머물 수 없는 것이다.

또 계사(繫辭)는 무엇으로 인하여 이루어졌습니까?
그 상(象)으로 인하여 이루어졌다.

상(象)은 보고 알지만 그 처음에 어떻게 그 이(理)를 알고 이것을 이(理)라고 이름 지었습니까?
성인(聖人)은 음양의 동(動)과 정(靜)이 이미 저러하니 반드시 주재(主宰)하는 자가 있어서 그렇게 시키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칠정(七情)을 각각 사덕(四德)에 분속(分屬)시키는 것은 서로 합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희(喜)ㆍ애(哀)와 낙(樂)ㆍ욕(欲)을 인(仁)에 분속시키고, 노(怒)ㆍ오(惡)ㆍ구(懼)를 의(義)에 분속시키는 것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사덕(四德)에 분속시키면 옳지 않다. 대개 인의(仁義)는 바로 사덕의 강령(綱領)이고, 예지(禮智)는 인의 위에 대한 절문(節文)이며 시비(是非)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의 도(道)를 세워 인과 의라고 말하고 맹자(孟子)는, “인의일 뿐이다.”고 말하였다. 선유(先儒)가 애(愛)를 예(禮)에 분속시키고, 욕(欲)을 지(智)에 분속시킨 자가 있어서 애(哀)와 구(懼)는 버렸는데 잘못인 것 같다.

오행(五行)은 질(質)이 먼저 생겼습니까, 기(氣)가 먼저 생겼습니까?
기(氣)는 양의(兩儀)가 아직 이루어지기 전에 생겼고, 질은 천지가 이미 나누어진 뒤에 이루어졌다.

김자장(金子張)이 묻기를, 인심(人心)이 선에 감동(感動)되는 것은 얕고 악에 감동되는 것은 깊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보통 사람의 마음은 그 기품과 물욕의 찌꺼기가 이면에 있어서 서로 감응되기 때문에 악에 감응됨이 깊은 것이다.

오중로(吳仲老)가 묻기를, 형과 같이 살고 있는데 형이 새벽에 가묘(家廟)에 배알(拜謁)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아우가 혼자서 가 뵈어도 됩니까?
이치상 간곡하게 말씀드려야 한다. 그래도 형이 끝내 가지 않으면 혼자도 가서는 안 된다. 삭망(朔望)에는 혼자 가서 뵈어도 괜찮다.

예중(瘞重)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중(重)이라는 것은 옛날에 나무를 파서 만든 것으로서 지금의 혼백(魂帛)과 같은 것이다. ‘거듭한다’라고 말한 것은 영구(靈柩)가 있고 이 나무를 파서 만든 것도 있기 때문이다.

송(宋)나라의 고종(高宗)은 어째서 흠종(欽宗)의 재궁(梓宮)을 청(請)하지 않았습니까?
금(金)나라 사람들이 변(汴) 이북(以北)에 흠종을 세우고자 하였으므로, 흠종의 생존 시에도 고종(高宗)은 이를 싫어하여 청(請)하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뒤에도 그럭저럭 넘겨 버린 것이다. 인하여 말하기를, “춘추(春秋)의 의리는 한 가지 일이라도 오랑캐의 도(道)가 있으면 오랑캐로 대우한다. 고종과 같은 자는 이미 오랑캐에게 신(臣)이라고 일컬었으니, 어찌 정통(正統)으로 인정할 수 있겠느냐. 황 목사(黃牧使)가 편견을 고집하고 내 말을 믿지 않으니 그 뜻을 모르겠다.”고 하였다.

또 교주(繳奏)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조서(詔書)가 내렸으나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 아뢰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선생이 회재(晦齋)의 《대학혹문보유(大學或問補遺)》 한 권을 가져다 보게 하면서 말하기를, “옛글을 널리 인용하였으나, 도무지 경서(經書)의 글 뜻을 바르게 해석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심성(心性) 이용(二用)이란 어떤 것입니까?
대개 심성(心性)은 이용(二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은 처음으로 퇴계에서 나왔습니까?
황면재(黃勉齋)도 이런 말을 한 것이 있다.

이것은 선현(先賢)이 반드시 보는 바가 있어서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理)가 발(發)한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말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선왕(宣王)이 뜻이 있어서 공화(共和)가 파(罷)하여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왕(厲王)이 체(彘) 땅으로 달아나고 두 재상인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함께 정치를 대행(代行)한 것을 공화(共和)라고 하는데 선왕이 즉위하여 정치에 뜻을 두게 되자 공화를 폐지하였다.

진원(眞元)의 기와 호연(浩然)의 기는 어떤 것입니까?
진원과 호연은 본래 두 가지의 기(氣)가 아니다. 도의로써 기르면 호연(浩然)의 기가 되고 혈기만을 보양하면 진원의 기가 된다. 그런 까닭에 《성학집요(聖學輯要)》의 양기장(養氣章)에서는 오로지 인의(仁義)의 마음을 잘 보양(保養)할 것을 논하고, 호연의 기를 기르는 것으로써 결론을 지었다. 대개 도의로써 인의의 마음을 잘 기르면 호연의 기는 저절로 생기게 되고 진원의 보양도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인의의 마음을 잘 기르는 사람은 진원의 기도 겸하여 기르게 되지만, 진원의 기만을 기르는 사람은 반드시 인의의 마음을 잘 기르지 못한다.

선생께서는 매양, “송(宋)나라의 고종(高宗)은 정통(正統)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 선생(朱先生)은 불천지위(不遷之位)로써 말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내가 말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공론이고, 주자(朱子)가 말한 것은 한때의 공론이다. 한나라의 견지에서 말한다면 비록 완전하게 오랑캐가 된 사람일지라도 공(功)이 있는 사람은 조(祖)로 삼고 덕이 있는 사람은 종(宗)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만세에 걸친 공론으로써 말한다면, 춘추 시대에 있어서는 비록 중국(中國)의 한 임금일지라도 한 번 오랑캐의 예(禮)를 행하면 오랑캐로 대우하였다. 하물며 고종은 중국의 천자(天子)로서 오랑캐에게 자신을 신(臣)이라고 일컬었으니, 어찌 오랑캐의 신하로서 만고에 걸친 제왕의 정통에 주(主)가 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이, “고종이 신이라 일컬은 것은 거짓이고 참이 아니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옳지 않다. 임금과 신하의 사이라는 것은 거짓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는, “반드시 명분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믿게 되지 못할 것이다. 요사이 신보(申普)와 김경일(金璥一)은 한 번 말해 주자 깨달았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의 혼례(婚禮)에, 사위를 맞이할 때 신부 편의 존장(尊長)이 나가 맞는다고 한 것이 있습니다. 글 뜻이 반드시 신부의 아버지만 말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부의 아버지가 아니고 주혼자(主婚者)가 있으면 그 주혼자가 하는 것이 좋다. 이미 주혼자가 없고 신부의 아버지가 존장을 겸하였으면 아버지가 하는 것이 옳다. 이른바 그 신부의 존장이라고 말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어서 말한 것 같다.

복(服)을 입은 사람이 백립(白笠)을 쓰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옛사람은 비록 조문할 때라도 검정 갓을 쓰지 않았는데, 하물며 복(服)이 있는 사람이겠느냐. 얼마 전에 중국인(中國人)이 백건(白巾)을 쓰고 육식(肉食)하는 것을 보고 물어보았더니, 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오늘 만호(萬戶) 홍준(洪俊)이 대공복(大功服)으로서 백립을 쓰고 온 것을 보았는데 해괴(駭怪)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만일 관습이 이루어진다면 백립을 쓰더라도 무슨 해로움이 있겠느냐.

관직(官職)이 있는 자는 온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기 집에 있을 때 쓰면 무슨 해로운 것이 있겠느냐. 이어서 말하기를, “노상(盧相)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의복을 금지한 일이 있었다. 나는 노상이 업적이 성대하지 못하면서 입제(笠制)와 옷의 소매 문제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한 지 오래되었음을 안다. 그것이 시정(時政)에 무슨 관계가 있어서 금지하였단 말인가.” 하였다.

허공(許公) 엽(曄)은 자기 스스로 학문을 담당한다고 생각합니까?
스스로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김자장(金子張)이, 조계진(趙季珍)이 허공 앞에 가서 《논어》 옹야편(雍也篇)에 나오는 “공사(公事)가 아니면 일찍이 언(偃)의 방에 온 일이 없다.”는 것을 묻고 나서 말하기를, “만약 절친한 사람이 관부(官府)에 와서 수령을 오도록 청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니, 허공(許公)이, “가서 만나 보는 것도 공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어떠합니까?
보는 바가 이러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이 저러한 것이다.

박여룡(朴汝龍)이 “그의 학문은 원류(源流)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화담(花潭)은 물건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비록 마땅하지 못한 공궤(供饋)라도 받고, 주는 자가 없으면 여러 날을 굶고 앉았더라도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이것은 선도(禪道)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허엽이 배워 온 바이다.

정자(程子)가 상원 주부(上元主簿)가 되었을 때, 용(龍)을 포(脯)로 만들어 먹은 일이 있습니까?
용(龍) 한 마리가 괴이한 일을 하므로 정자가 잡아서 포를 만들었다.

신룡(神龍)을 사람이 잡을 수 있습니까?
그 용은 신룡이 아니었다. 신룡이었다면 어찌 잡을 수 있겠느냐.

“형이하(形而下)인 것으로써 말하면, 사물(事物)은 체(體)가 되고, 그 이(理)가 발현된 것은 용(用)이 된다.”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선생이 책상 위에 있는 책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책을 두고 말한다면, 이 책은 곧 체이고 책 속에 있는 허다한 성현의 말은 용이다.” 하였다.

“형이상(形而上)인 것으로써 말한다면 공허하고 아득한 것이 체(體)가 되고 사물에 발현된 것이 용(用)이 된다.”고 하였으나, 형이상인 것은 공허하고 아득히 멀기만 할 뿐인데 어떻게 다시 사물에 발현되어 용이 된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까?
효도로써 말한다면 반드시 밤낮이 다하도록 줄곧 어버이 섬기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버이를 섬기기 전에는 효도가 공허하다가 어버이를 섬길 때라야 사물에 나타나는 것이다.

우계(牛溪)의 동서 분당(東西分黨)에 대한 논의는 선생님의 의견과 서로 꼭 맞습니까?
대체로는 보는 것이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당초의 발단에 대한 시비(是非)는 나와 같지 않다. 나는 동인을 그르다고 하고 우계는 서인을 그르다고 한다.

감히 우계의 견해는 어떤 것입니까?
우계는 심의겸이 김효원의 청현(淸顯)을 억제한 것은 곧 사심(私心)이라고 여겼다. 윤원형(尹元衡)이나 이량(李樑)과 같은 무리는 본래 혐의를 피하여 그냥 지나쳐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심의겸은 비록 청렴하고 단정한 무리는 아니지만 역시 한 사람의 평범한 한 인간이니 내버려 두고 따지지 않는 것이 옳다. 그런데 김효원은 곧 혐의를 피하지 않고 심의겸을 끊임없이 공격하여 마침내는 사림의 불화(不和)와 국가 체면의 손상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것이 동인의 허물이 아니겠느냐. 을해 연간에 나는 조정에서, “애초에는 그 허물이 동인에게 있었고, 금년에는 서인의 허물이다.” 하였더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내 말을 옳다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당초에는 동인이 그르다고 한 대목의 말은 숨기고 말하지 않으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우계로 하여금 동서 분당을 처리하게 한다면 반드시 나와 합치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번에 등용한 인물들은 다 전배(前輩)가 버렸던 자들로서 도리어 전배만도 못한 사람들이니, 어찌 인심을 감복시킬 수 있겠느냐.

“상현(上弦)과 하현(下弦)이 되면 태양과 달은 일(一)에 가까워지고 삼(三)쯤 멀어진다.”고 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1분이 가깝고 3분이 멀어짐을 말한 것이다.

김자장(金子張)이, “욕심이 마음속에서 싹트는 것을 알고 막아 버렸는데 뒤에 다시 싹이 나오는 것이 있고 싹터 나오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욕심에 가볍고 무거운 분수(分數)의 차이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다.
비유하면 풀을 뽑는 것과 같다. 막아 버리면 다시는 싹트지 않는 것은 그 뿌리를 뽑아 버렸기 때문이고, 막아도 다시 나오는 것은 흙으로만 덮어 놓았기 때문이다. 흙으로 덮은 것은 우선은 제거된 것 같지만 머지않아서 다시 싹이 나오는 것이다. 안자(顔子)가 허물을 두 번 거듭하지 않은 것은 그 뿌리를 뽑아 버렸기 때문이다. 유원성(劉元城)은 비록 안자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귀양 가게 되었을 때에, 부모의 유체(遺體)를 가지고 여색을 범하지 않고 돌아오겠다고 맹세하였다. 그 뒤 30년을 귀양살이 하였으나 여색에 대한 마음이 다시 싹트지 않았다고 한다.

도학(道學)이라는 명칭이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습니까?
송(宋)나라 때에 시작되었다. 도학은 본래 인륜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륜에서 그 도리를 극진하게 하면 이것이 곧 도학이다. 다만 도리를 알지 못하면서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도리에 합치하는 사람은 익히면서도 살피지 못하는 것이다. 대개 도를 안 뒤라야 신하가 되면 충성을 다하고, 아들이 되면 효도를 다할 수 있으니 도를 알지 못하면 비록 일단의 충효가 있더라도 어찌 행하는 것이 모두 도에 합치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학문은 또한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습니까?
전조(前朝 고려(高麗)) 말엽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권근(權近)의 《입학도(入學圖)》는 모순된 것 같고, 정포은(鄭圃隱)은 이학(理學)의 원조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는 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한 신하이지 유자(儒者)는 아니다. 그러니 도학(道學)은 조정암(趙靜菴)에서부터 일어나고 퇴도(退陶) 선생에 이르러서야 유자의 모습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퇴도는 성현의 말씀을 준수하고 실행하는 사람 같고, 그가 스스로 발견한 곳이 있음을 볼 수 없다. 서화담(徐花潭)은 자기의 견해는 있으나 한 구석만 본 자이다.

나흠순(羅欽順)ㆍ설선(薛瑄)ㆍ왕수인(王守仁)의 학문은 어떠합니까?
나흠순은 뛰어난 인물이지만 보는 바가 조금 틀렸고, 설선은 비록 스스로 발견한 곳은 없지만 현자(賢者)라고 말할 수 있으며, 왕수인은 “주자의 해독이 홍수나 맹수의 화(禍)보다도 심하다.”고 말하였으니 그의 학문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의 조정에서는 마침내 그를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하였다고 하니 중국의 도학을 알 수 있다.

양(陽)이 아직 생기기 전에 양의 이(理)가 이미 갖추어졌다고 하니, 양기가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에 양의 이가 어떻게 갖추어졌습니까?
“아직 감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먼저가 아니고, 이미 감응하였다고 하여 뒤가 아니다.” 벼룻집을 보이며 말하기를, “이 벼룻집은 만들기 전에도 벼룻집이 될 이가 없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뒤에 즉시 이 이(理)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천지는 일정한 성(性)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의 성(性)은 닦는 사람은 현인도 되고 성인도 되며, 어지럽히는 자는 어리석은 자도 되고 불초(不肖)한 자도 되지만 천지의 초목은 그 성(性)을 밀어 옮길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한 성이 있는 것이다.

추위와 더위가 제때를 잃고 재상(災傷)이 바르지 못한 것으로써 보면 천지도 일정한 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추위와 더위가 제때를 잃고 재해와 손상이 바르지 못한 것은 곧 기수(氣數)와 인위(人爲)의 탓이니, 어찌 천지의 본성이겠느냐.

음식ㆍ여색(女色)ㆍ냄새ㆍ맛에 대한 욕심도 천성(天性)이니, 음식ㆍ여색ㆍ냄새ㆍ맛에 대한 욕심은 무슨 성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칠정(七情) 중의 애(愛)와 욕(欲)은 인(仁)의 성에서 나온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것과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뜻이 같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생각하고 또 생각한 뒤에 묻는 것이 좋다.

이것은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잊지 말라고 하였으니 어찌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만 되겠느냐.

복괘(復卦)에서 천지의 마음을 보는 것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봄과 여름에는 만물이 발양(發養)하니, 무엇에 의거하여 천지의 마음을 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발동하는 시초에 바로 천지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비유하면, 사람의 어진 마음은 처음 발할 때에는 볼 수 있으나 그것이 널리 베풀어져 뭇사람을 구제하는 때에 이르면 그 인(仁)이 진실로 성대해져서 도리어 보기 어려운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주린다.[無是餒也]”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이 없으면’의 이것은 호연(浩然)의 기(氣)를 가리킨 것이고, ‘주린다’라고 한 것은 일신의 기가 몸에 충족하지 않은 것을 가리킨 것이다. 만약 호연의 기가 없으면 비록 도의(道義)를 행하고자 하더라도 일신에 기(氣)가 없어서 주리고 결핍된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도의라면 이것은 본래 있는 물건인데 어찌 주리거나 결핍하는 때가 있겠느냐.

한(漢)나라 때는 사람을 등용하는 데 반드시 군현(郡縣)에서 등용해 본 뒤에 그중의 현량(賢良)한 자와 유능한 자를 조정에 승진시켰는데,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를 가지고 살펴보면, 이재(吏才)가 있는 사람이 경관직(京官職)의 임무를 감당할 능력이 부족하고, 경관직에서 유명한 사람이 고을을 다스리는 능력에는 부족하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한나라 때의 군현은 지금 우리나라의 군현과 같지 않아 한 도(道)와 같은 것이다. 대개 인품(人品)은 각각 달라서 장완(蔣琬) 같은 사람은 촉(蜀)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데는 유능하였으나 한 고을을 다스리는 데는 능하지 못하였다. 지금의 사례(事例)에서 본다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때는 남과 다름이 없었는데 한 도(道)나 한 고을을 맡기면 도리어 남만 못하며, 또 한 도ㆍ한 읍의 수령(守令)으로서는 유능하나 대각(臺閣)에서는 제구실을 못하는 자가 있으니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다.

전일에 선생이 말하기를, “솔개와 물고기가 날고 뛰는 것과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는 것은 같은 뜻이다.”고 하였습니다. 여룡(汝龍)은 생각해 보아도 끝내 그 뜻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감히 가르침을 청합니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것은 천리가 유행하는 것이다.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면 천리가 또한 유행하는 것이다. -이상은 기묘년이다.-


 

[주C-001]상(上) :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에는, “김진강(金振綱)과 박여룡(朴汝龍)이 기록하여 이것을 편집하였는데, 송우암(宋尤菴)은 일찍이 말하기를, ‘박여룡의 기록이 비록 친히 선생에게서 들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을 기록할 무렵에 본뜻을 많이 잃기도 하고 분명치 않기도 하여 해(害)됨이 적지 않다. 또 두어 문단을 지적하여 그릇됨을 정정(訂正)한 것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약간 수정하였으니, 열람자(閱覽者)는 살펴볼 것이다.”라는 원주(原註)가 있다.
[주D-001]성무위(誠無爲) : 주염계(周濂溪)가 《통서(通書)》에서 “성(誠)은 작위가 없고 기미에는 선과 악이 있다.[誠無爲 幾善惡]”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기미라는 것은 처음 발동할 때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선과 악이 이로부터 나누어진다.[幾者動之微 善惡之所由分也]”고 풀이하였다.
[주D-002]불성무물(不誠無物)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5장에 “성실함은 사물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것이니 성실하지 못하면 사물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성실함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誠者物之始終 不誠無物 是故君子誠之爲貴]” 하였다.
[주D-003]기미는 선악이다 : 주염계(周濂溪)의 《통서(通書)》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종성령(鐘城令) : 이구(李球 : ?~1573)이다. 효령대군의 종손으로 종성령에 봉해졌다. 서경덕의 문인이다.
[주D-005]정성(定性) : 천리(天理) 즉 성(性)에 입각하여 외물에 끌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D-006]성인(聖人)의 …… 들어온다 : 원 구절은 “聖人立道入乎耳 入乎耳而存乎心”이다.
[주D-007]칠조개(漆雕開)는 …… 보았다 : 칠조개는 공자의 제자이다. 이 말은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주(註)에 보인다.
[주D-008]형화숙(邢和叔) : 송(宋)나라 양무(陽武) 사람으로, 정자(程子)의 문인(門人)인데 나중에 스승을 모함하는 배신을 하였다.
[주D-009]동명(東銘) : 장재(張載)가 지은 글이다. 당초에 장재가 서재의 동서 양쪽 창문 위에 폄우(砭愚)와 정완(訂頑) 두 개의 명(銘)을 걸어 놓고서 제생(諸生)을 경계시켰는데, 뒤에 논쟁을 야기할 소지가 있다는 정자(程子)의 말에 따라 폄우를 동명으로, 정완을 서명(西銘)으로 개칭하였다. 《伊洛淵源錄》
[주D-010]우레가 …… 않는다 : 《주역(周易)》 진괘(震卦)에 나오는 말인데, 비창은 종묘(宗廟)의 제사에 쓰는 숟가락과 울창주를 가리킨다.
[주D-011]네 가지 :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이다.
[주D-012]통서(通書) : 송(宋)나라 주돈이(周敦頤)가 지었다. 처음에는 《역통(易通)》으로 이름했다가 나중에 고쳤다. 〈태극도설(大極圖說)〉과 서로 표리가 되는 글로서 〈태극도설〉은 이론에 대해 설명하고 《통서》는 응용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주D-013]사현도(謝顯道) : 북송(北宋)의 유학자 사양좌(謝良佐)를 가리킨다. 현도는 그의 자(字)이다. 정문(程門)의 고제(高弟)로서 상채학파(上蔡學派)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주D-014]백순(伯淳) : 송(宋)나라 정호(程顥)의 자(字)이다.
[주D-015]괘덕(卦德)과 효덕(爻德) : 괘덕은 괘의 길흉화복의 이치이고 효덕은 효의 길흉화복의 이치를 말한다.
[주D-016]대공(大功) : 오복(五服)의 하나로서 대공친(大功親)의 상사(喪事)에 9개월 동안 상복(喪服)을 입는다.
[주D-017]소공(小功) : 오복의 하나로서 소공친(小功親)의 상사에 5개월 상복을 입는다.
[주D-018]최복(衰服) : 참최(斬衰)나 재최(齊衰) 때 입는 상복이다.
[주D-019]위첩(衞輒) :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태자(太子)인 괴외(蒯聵)의 아들이다. 괴외가 음행(淫行)이 있는 어머니 남자(南子)를 죽이려다가 실패하여 진(晉)나라로 망명하였는데 첩(輒)이 손자로서 왕위에 올라 그의 아버지인 괴외의 입국을 거부하였다.
[주D-020]한성(韓成) : 장량이 모신 한(韓)나라의 왕이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021]역책(易簀) : 증자가 죽을 무렵 자기가 누운 자리가 선비의 자리가 아니고 대부(大夫)의 자리라 하여 바꾸어 깔으라고 명하였다.
[주D-022]대전(大全) : 《성리대전(性理大全)》의 약칭이다. 명(明)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칙명을 받들어 호광(胡廣) 등이 송(宋)나라 유학자 120명의 학설을 모아 편집하였다.
[주D-023]청계당(聽溪堂) : 율곡(栗谷)이 41세에 지은 당으로 황해도 해주(海州) 석담(石潭)에 있다.
[주D-024]유 충정공(劉忠定公) : 송(宋)나라 유안세(劉安世)를 가리킨다. 원성(元城)에 살았기 때문에 원성이라고도 한다.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여러 차례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어 일을 논함이 강직하니, 당시에 전상호(殿上虎)라고 불렸다. 《宋史 卷345 劉安世傳》
[주D-025]계헌(季獻) : 이이(李珥)의 아우 이우(李瑀)의 자(字)이다.
[주D-026]오효원(吳孝元) : 이이(李珥)의 문인인 오희순(吳希舜)을 가리킨다. 효원은 그의 자(字)이다.
[주D-027]김공직(金公直) : 이이의 문인인 김의정(金義貞)을 가리킨다. 공직은 그의 자이다. 이이가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창건할 때 그가 유사(有司)가 되어 일을 주관하였다.
[주D-028]공산불요(公山弗擾) :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계씨(季氏)의 가신(家臣)으로서 비재(費宰)가 되었으나 계씨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주D-029]이 선생(李先生) : 주자(朱子)의 스승인 이동(李侗)을 가리킨다.
[주D-030]구산(龜山) : 송(宋)나라 양시(楊時)의 호이다. 정자(程子)의 문인이다.
[주D-031]섭미도(葉味道) : 주자(朱子)의 문인으로 《주자어록(朱子語錄)》을 편집하였다. 서산(西山) 선생으로 불린다.
[주D-032]복침(復寢) : 부모의 삼년상을 마친 뒤에 안방으로 들어가 부부간에 다시 동침하는 것을 말한다.
[주D-033]대제(大祭) : 나라의 종묘(宗廟) 제사를 말한다.
[주D-034]제주축(題主祝) : 장사 지내면서 신주에 글자를 쓴 뒤에 고유(告由)하는 축문이다.
[주D-035]문소전(文昭殿) : 조선 태조(太祖) 및 신의왕후(神懿王后)의 혼전(魂殿)이다.
[주D-036]춘추삼전(春秋三傳) : 《춘추》의 세 가지 주석서로 《좌씨전(左氏傳)》,《곡량전(穀梁傳)》,《공양전(公羊傳)》을 가리킨다.
[주D-037]제 환공(齊桓公)과 진 문공(晉文公) : 환공과 문공은 모두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패도(霸道)로 나라를 정복한 사람이다.
[주D-038]굴원(屈原) : 초(楚)나라의 대부(大夫)이다.
[주D-039]장소백(臧昭伯)이 …… 않았다 : 《춘추좌전》 소공(昭公) 25년 조에 이 사실이 보인다.
[주D-040]혼백(魂帛) : 초상을 당하여 신주를 만들기 전에 명주 조각을 양쪽에서 둥글게 만 다음 실로 중앙을 가위지게 세 번 엇걸어 묶어서 임시로 사용하는 신위(神位)를 말한다.
[주D-041]재궁(梓宮) : 임금의 관(棺)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관을 가래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D-042]황면재(黃勉齋) : 송(宋)나라 황간(黃榦)을 가리킨다. 자(字)는 직경(直卿)이며 면재는 그의 호이다. 주자의 문인이자 사위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주D-043]선왕(宣王) : 주(周)나라 임금이다. 아버지 여왕(厲王)이 죽자 주공과 소공에 의해 즉위하여 문왕과 무왕의 유법(遺法)을 본받아서 정치를 잘하여 중흥(中興)의 영주(英主)가 되었다. 《史記 卷4 周本記》
[주D-044]허공(許公) 엽(曄) : 선조(宣祖) 때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인(東人)의 중진이 된 사람이다.
[주D-045]화담(花潭) : 서경덕(徐敬德)의 호이다.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 이기론(理氣論)의 본질을 연구하여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주장하였다.
[주D-046]동서 분당(東西分黨) : 신진사류인 김효원(金孝元)과 척신(戚臣)인 심의겸(沈義謙)의 반목으로 기인하여 결국에는 조정의 관리와 전국의 선비들이 동서로 나뉘게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 낙산(駱山) 밑 건천동(乾川洞)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 정동(貞洞)에 있었기 때문에 서인이라 하였다.
[주D-047]입학도(入學圖) : 고려 공민왕 2년에 지은 것이다. 천(天)ㆍ인(人)ㆍ심(心)ㆍ성(性)의 합일을 다룬 도설(圖說)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도설이다.
[주D-048]나흠순 : 명(明)나라 태화(泰和) 사람이다. 실행으로써 선비들을 가르치고 격물치지의 학문에 전심하여 변석(辨析)이 정밀하였다.
[주D-049]설선 : 명나라 하진(河津) 사람이다. 정자와 주자의 학문을 종주(宗主)로 삼아 이치를 밝혀 본성을 되찾는 데 주력하였으며 더욱이 궁행실천(躬行實踐)을 소중하게 여겼다.
[주D-050]왕수인 : 명나라 여요(餘姚) 사람이다. 심즉리(心卽理)의 학설과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 등을 주창하여 세상에서 요강학파(姚江學派)라고 부른다.

 

 

율곡선생전서 제32권
 어록(語錄)
어록(語錄) 하(下)


선생이 하신 말씀이 여러 사람들의 글에 흩어져 있는 것을 수집하여 이 편을 만들었다. ○ 김우옹(金宇顒)의 《경연강의(經筵講義)》에 선생이 상(上)에게 아뢴 말이 많이 실려 있다. 비록 이른바 말이 지나치게 통쾌하고 강력했으며 건의나 조처를 함에 성급하였다는 등의 말로 선생을 흠잡은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 문제자(門弟子)들이 미처 몰랐던 선생의 치택(治澤)의 뜻과 충간(忠諫)의 정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씨외서(程氏外書)》에 공문중(孔文仲)의 상소를 실은 예에 의거하여 그 몇 가지 조항을 채택하여 끝에 부록으로 붙였다.

10년 전에 율곡이 나를 찾아왔다가 계려(溪廬)에서 잤다. 때마침 중추(仲秋)라서 창밖에 귀뚜라미 소리가 요란하였는데, 열 마리인지 백 마리인지 무리 지어 다투어 울고 서로 노래하여 잠시도 쉬지 않았다. 새벽종이 칠 때가 되니 그 소리가 더욱 요란하여 제 낙을 제가 즐겨 수고와 고생을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내가 탄식하기를, “미물도 오히려 제 직분 다하기를 이렇게까지 한다.” 하니, 율곡도 탄식하기를, “지각이 많은 자는 이해에 대해 생각을 깊이 하여 이익을 택하고 편안함을 취하여 게으르게 그날 그날을 보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고난 천성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저 천기(天機)가 자연히 움직여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도 타고난 직분을 다하는 것을 미물에서 보았다.”고 하였다. 내가 그 탁월한 소견을 기뻐하여 잊은 적이 없다. -《우계집(牛溪集)》에서 나왔다.-
숙헌(叔獻 율곡의 자)이 이르기를, “선유(先儒)가 《춘추(春秋)》에 기린을 얻은 것은, 지(志)가 한결같아 기(氣)를 움직인 것이요, 또 질병이 오는 데는 성현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병이 나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 것은 기가 지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설명이 잘된 것 같다. 대저 지를 움직이고 기를 움직이는 것은 모두 선과 악을 겸해 말해야 되는 것이다. 맹자의 말은 평범한 사례를 범범하게 말한 것뿐이니, 어찌 병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것인가.” 하였다.
숙헌이 평일에 내게 말하기를, “여식(汝式)이 몸소 실천하고 힘써 행하는 것을 위주로 하지만 소견은 장점이 아니다. 그러나 일을 논하기를 좋아하고 일을 보는 눈이 소루함을 생각하지 않으니 이래서 염려된다.”고 하였다.
이경진(李景震)이, 색욕(色慾)이 자주 발동하여 억제하기 어려우니, 어떻게 하면 이 생각을 없앨 수 있겠는가 물으니, 율곡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별다른 공부가 없다. 다만 마음이 일정한 주견이 있어서 글을 읽으면 이치를 연구하는 데에 전심하고, 일에 당하면 실천하는 데에 전심하며, 일이 없을 때에는 고요한 가운데에 수양을 쌓아 항상 이 마음으로 잊을 때가 없게 한다면, 색념(色念)이 자연 발동하지 못하게 되며 발동하더라도 반드시 살펴 깨닫게 될 것이니, 살펴 깨닫는다면 색념은 자연 물러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마음을 놓아 소홀히 하고서 색념과 싸우려 한다면 힘을 많이 들이더라도 흙으로 풀을 덮는 것 같아서 덮을수록 더 나오게 될 것이다.” 하였다. -우계일기(牛溪日記) 이하 같다.-
숙헌이 말하기를, 조형(趙兄) 대남(大男)이 착한 종을 얻기 어려움을 탄식하자 토정(土亭)이 말하기를, “착한 선비도 쉽게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종들이야 말할 것 있는가. 착한 종을 얻는 집은 만에 하나나 있을 수 있는 다행일 것이다. 반드시 착한 종을 구하려고 한다면 마음만 수고롭고 소용이 없을 것이다. 착하게 부리는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지 착한 종을 구해서는 안 된다. 종이 착한 주인의 종이 되게 할 것이니, 어찌 반드시 착한 종의 주인이 되려고 할 것인가.” 하였다. 이 말이 매우 좋으니 자신을 책망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의사가 있다.
율곡이 우계 선생에게 묻기를, “국상(國喪)의 졸곡(卒哭) 전에 초하루 보름 참배하는 것은 제례(祭禮)가 아니니, 평상시대로 행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평상시대로 찬을 갖추는 것도 미안할 것 같으니, 대략 술과 과실을 갖추고 참알(參謁)을 행할 따름이니, 내 소견은 이렇소.” 하였다. -우계언행록(牛溪言行錄)에서 나왔다.-
기사년(1569, 선조2) 7월 28일 석강(夕講)에 《근사록(近思錄)》을 강(講)하였다. 이이(李珥)가 “경전을 해석하는 것이 같지 않아도 해가 없다.”는 것을 가지고 말하기를, “대개 국사를 의논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제 조강(朝講)에서 말한 청대(請對)를 해야 할 것인가 하지 않아야 할 것인가 하는 말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다만 임금을 요순에 이르게 하고, 세상을 당우(唐虞) 삼대(三代)로 만들려 한다는 것이 정론(正論)이고 옛날의 높은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사설(邪說)입니다.”고 하였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의 일록(日錄)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갑술년(1574) 1월 21일, 비현합(丕顯閤)에서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희춘(希春)이, 변언(辯言)이 옛 정사를 어지럽게 하였다는 대목을 강론하면서 상앙(商鞅)ㆍ장탕(張湯)ㆍ조우(趙禹)ㆍ채경(蔡京) 등의 사실을 들어가며 설명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왕안석(王安石)은 옳은 것 같으면서도 그른 말로 신종(神宗)을 현혹시켜 법을 변경하여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이것이 이른바 변언으로 정사를 어지럽힌 것입니다. 기타 소인의 말이야 어찌 변언으로 정사를 어지럽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희춘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변언으로 정사를 어지럽힌다는 것은 부정한 사람이 임금의 나쁜 짓에 대해서 아첨하여 예전의 법을 변란하는 것을 범범하게 말한 것이지 반드시 왕안석 같은 사람만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2월 1일, 주강이 있었다. 이어 역대 제왕의 사적을 논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호치당(胡致堂)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을 조조(曹操)에 비견하였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희춘도, “조조의 성질은 음흉하고 험악하여 어질고 유능한 이를 시기하였으니, 결코 태종처럼 어진 이에게 맡기고, 유능한 사람을 써서 정관(貞觀)의 정치를 이룰 수 없다.” 하였는데, 주상께서 이르기를, “나는 호씨의 의논이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태종이 형제를 죽이고 그 자손까지 멸족하며 제수를 아내로 삼아 천륜을 어지럽힌 것을 보고는 그만 통분하여 책을 덮고 차마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신 등이 말하기를, “태종이 저지른 인륜상의 잘못은 참으로 성상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구양수(歐陽脩)가 태종을 찬양하여, ‘수(隋)나라의 어지러움을 제거한 것은 그 행적이 탕(湯)ㆍ무(武)에 비견되며, 정치의 아름다움을 이룩한 것은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에 가깝다. 한(漢)나라 이래로 공과 덕이 함께 높은 것이 태종 이전에 일찍이 없었다.’ 하였는데, 주자(朱子)는, ‘이 두 가지는 모두 공이지 덕이 아니다. 이것은 구양공 무리들이 근본이 되는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대개 태종은 재주가 많았지만 덕이 부족하였고 공은 있었지만 덕이 없는 사람이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신이 또 말하기를, “한 문제(漢文帝)와 금 세종(金世宗)이 가장 어집니다.” 하니, 주상께서 이르기를, “삼대(三代) 이하로는 한 문제 같은 이가 없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금 세종은 어질고 조용하며 절약하고 검소하면서 어진 이를 좋아하고 간하는 말을 받아들였으니 어찌 문제보다 못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이이가 말하기를, “금 세종이 어질기는 하지만, 항상 자제들에게 여진(女眞)의 옛 풍속을 고치지 말라고 주의시켰으니 이것은 그 뜻이 원대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태종에게서 취할 것이 없다 하셨으니 그렇다면 한 문제에게서도 본받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삼대의 성왕(聖王)으로 본보기를 삼아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강론을 마친 다음 이이가 말하기를, “먼저, 백성을 구제하고 폐단을 개혁하는 정치를 시행한 후에 향약(鄕約)을 시행하소서.” 하니, 주상께서 이르기를, “나는 애초 어렵다고 생각하니 대신들에게 물어보아야 하겠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백성들의 시급한 폐단을 구제하려면 옛 법을 경장(更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개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공통된 걱정거리입니다. 더구나 공안(貢案)은 폐왕조(廢王朝 연산군(燕山君))에 제정된 것이니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7)에 법도를 지키지 않고 포학하게 취하던 임금이 한 짓이라 참으로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옛 법규를 그대로 지키고 경장하려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좋은 정치를 할 희망이 없습니다.” 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사람은 자신을 알지는 못한다. 그대가 나를 보건대 좋은 정치를 할 것 같은가 그렇지 않는가.” 하니, 이이가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영명(英明)하시니 어찌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희춘이 나아가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청명하고 바르시니 참으로 일을 크게 하실 수 있는 자질입니다. 다만 성질이 고집스러워 탁 트이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김희원(金希元)이 묻기를, “도심(道心)은 은미하다는 데에 대하여 주자가 말하기를, ‘미묘하여 보기 어려운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니, 율곡이 이르기를, “오직 이(理)는 소리나 냄새가 있다고 말할 수 없어 은미하여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은미하다고 한 것이다. 비유하여 말하면, 여기 먼 산이 있는데, 원래는 은미하여 보기 어렵다. 그런데 눈이 어두운 사람이 보면 은미한 것이 더욱 은미하지만, 눈이 밝은 이가 보면 은미한 것이 뚜렷해지는 것과 같다.” 하였다. -구봉간첩(龜峰簡帖)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김희원이 또 묻기를, “‘도심과 인심 두 가지가 한마음 가운데에 섞여 있다.’ 하였는데,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혹은 형기(形氣)로 인하여 발생할 때가 있으며 혹은 성명(性命)으로 인하여 발생할 때가 있는데 어느 것이나 발생하는 것은 모두 마음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섞인다고 하는가 봅니다.” 하니, 율곡이 이르기를, “인심이나 도심은 모두 활용하는 것을 가리켜 하는 말인데, 위의 말대로 한다면 아직 발생하기 전의 경지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된다. 두 가지의 발생하는 것이 모두 한 가지 일에 있으니, 인심에서 발생하여 도심이 되는 경우도 있으며 도심에서 발생하여 인심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였다.
상중의 묘제(墓祭)에 대해, 여성(礪城)과 숙헌은 “한 잔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성 적성(成積城)과 김 이정(金而精)은, “시속을 따라 석 잔을 드리는 것이 정리에 흡족할 것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묘제는 새로 상사를 당한 동안의 일을 말하는 것 같다. ○ 송강 정철(鄭澈)의 일기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적성(積城)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삭망(朔望) 참례(參禮)에 대하여 상사를 만났을 경우를 두고서 숙헌과 의논하여 결정하였는데, 신주를 내어 모시고 먼저 참신(參神)하고서 술을 부어 놓고 재배하며 사신(辭神)하고 재배하여, 사당에서의 참례와 다르게 하였다.” 하였다. 숙헌이 말하기를, “내 어버이가 당상에 있는데 어찌 참례하지 않고 먼저 강신(降神)을 하겠는가.” 하였다.
적성의 서신에, “손위 누님이 와서 궤연(几筵)에 인사를 드렸는데, 신혼(晨昏)에 곡배(哭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상제(祥祭) 때에는 주부(主婦)가 없다면 한 분 만으로 배제(陪祭)하는 것은 미안한 것 같다.”고 하였는데, 숙헌의 말도 그러하였다.
연제(練祭) 후의 심의(深衣)와 띠에 대해, 숙헌이 말하기를, “역시 대략 강등(降等)이 있어야 할 것이요 옛날 것을 그대로 입을 수는 없다.” 하였다.
적성이 여러 가지 말을 하는 중에 또 이 정랑(李正郞) 숙헌이 송사련(宋祀連 송익필(宋翼弼) 아버지)을 회장(會葬)한 것이 온당치 않다는 의견으로 말하였다. 일찍이 숙헌에게 묻기를, “송가 집의 신주를 쓴 사람이 누구냐.”고 하니,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상인들이 초토(草土)에서 호읍(號泣)하는 중에 부탁을 매우 간절히 하였기 때문에 내가 매우 난처하여 부득이 썼다.” 하였다.
이 정랑 숙헌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방심(放心)을 거둬들이는 것으로는 《소학(小學)》만 한 책이 없다. 《심경(心經)》같은 책들도 수신에 절실한 점은 있지만 《소학》처럼 구비하지는 못하였다. 글을 읽는 데는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만일 기억하여 외우는 데에 유의한다면 오래지 않아서 싫어지고 또 의미가 없어질 것이니, 잘 생각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연구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송군(宋君)이 이른바 궤연(几筵)에 참신(參神)이 없다는 말이 옳은 것 같다. 또 연제 후에는 이미 공최(功衰)를 한다 하였으니 다시 참최(斬衰) 제도를 쓰는 것은 부당한 것 같고, 삼띠에 베를 사용한다[絞帶用布]는 말도 불가한 것 같다. 포혜[脯醢] 3품이라 한 것은 포혜 중의 세 가지라는 뜻이지 포 세 가지, 혜 세 가지로 모두 여섯 가지를 말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갑자기, 자강(子强)이 논박을 입게 될 일을 말하다가 매우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럭저럭 이렇게 날만 보내고 있으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만약 어진 사람이 대신이 된다면 화패(禍敗)가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였다.
연제 후에 상식(上食)에 곡하는 일에 대하여, 송운장(宋雲長 송익필(宋翼弼))의 형제가 “만일 상식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시속을 따라 상식을 드린다면 역시 곡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하자 성(成)ㆍ이(李) 두 친구도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숙헌(叔獻)이 파평(坡平)에서 와서, 근래의 일들을 물으므로, 사실대로 대답하니, 놀라는 모습으로 한참 있다가 강남(江南)으로 떠나면서 “담제사는 서자(庶子)가 있으니 거행할 수 있다.” 하였다.
숙헌이 두 번째 지나면서 백립(白粒) 서 말을 두고 갔다. 군수가 자신이 가져오기가 어려워 숙헌을 통하여 전달하려 한 것이었다. 물리치고 서과(西苽 수박)만을 두었더니 숙헌이 후에 서신 중에서, “군수가 보낸 것을 일체 받지 않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 하였다.
진일(辰日) 제사에 대하여 의논이 같지 않아서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와 이암(頤菴 송인(宋寅)) 같은 이들은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다. 후에 와서 이숙헌에게 의논하니 이숙헌이, “삭망에도 두루 전을 드리는데, 이것 또한 무엇이 도리에 해롭겠느냐.”고 하였기 때문에 여러 신위에 편전(遍奠)을 드렸다. 지금 호원(浩源)의 말을 들으니, “예법(禮法)을 따를 수 없다면 차라리 중국 별제(別祭)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협제(祫祭) 드리기 전에 삭망에 두루 전(奠)을 드리는 데에 대해 숙헌이 말하기를, “만일 아직 협제를 드리지 않았다고 하여 미안히 여긴다면 다 폐지하는 것만 못하고 처음 상례(祥禮) 후에 삭제(朔祭)를 거행했다면 협제 전이라 하더라도 두루 전을 드리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 다른 곳에서 별제를 드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하였다.
허봉(許篈)이 율곡을 논죄하여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그의 뜻이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하였다. 그 후에 이발(李潑)이 심의겸(沈義謙)의 당파에 누락되었다고 하여 이이ㆍ성혼(成渾)을 더 넣어서 왕께 아뢰었다. 평시에 율곡이 구봉(龜峰)에게 이르기를, “지금 내가 죄를 입으면 저 무리들이 공신이 되고자 할 것이다.” 하였는데, 구봉이, “어떻게 알았소.”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그 형적(形跡)이 벌써 나타났다. 반드시 이준경(李浚慶)으로 원두(原頭)를 삼으려 하는 모양인데, 그 의논하는 말에서 기축(機軸)이 환히 드러났으니 속일 수 없다.” 하였다. -송강유사(松江遺事)에서 나왔다.-
정송강(鄭松江)이 말하기를, “구용(九容)은 이(理)요 기(氣)가 아니다.” 하니, 율곡이, “구용은 이가 아니다. 발동하는 것이니 바로 기이다.” 하여 변론이 한참 계속되었으나 결론을 보지 못하였다. 율곡과 송강의 설이 각각 주견이 있다고 생각하니 융통성 있게 보아야 한다. -《소학(小學)》 글귀에 대한 것이다. ○ 문인(門人)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경서변의(經書辨疑)》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습관이 천성과 함께 이루어지면 성현이 된다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습관이 성품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은 오래도록 쌓인 습관이 성공하면 천성에서 나오는 것 같은 것이다. 이른바 소년 시절의 습성이 천성처럼 되어 습관이 자연처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성(天性)은 당초에 타고난 기질(氣質)의 성품을 말함이요, 본연(本然)의 착한 성품을 말함이 아니다.” 하였는데, 송구봉이 말하기를, “습관이 성품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성(性)은 바로 본연의 성품이다.” 하고, 주자가 “횡거(橫渠)가 말한 예를 알면 성품을 이룬다.”는 것을 논하기를, “습관이 성품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性)이라는 것은 내가 하늘에서 얻은 도의이니,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따라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율곡이 답하기를, “그 글이 나온 곳을 찾아보아야 한다. 이천(伊川)의 이 말은 실은 이윤(伊尹)의 이른바 ‘이 불의(不義)는 습관이 천성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글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도 본연의 성품이라고 할 것인가.” 하였다.
‘함양(涵養)하는 것이 심생(甚生)한 기질을 이룬다.’는 것에 대해 집설(集說)에서는 “함양이 이루어지면 좋은 기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고, 《근사록(近思錄)》의 섭씨(葉氏)의 주석에서는, “심생은 비상(非常)이라는 말과 같다.” 하였는데, 율곡은 섭씨의 설명이 옳다고 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대학집주(大學集註)》의 이른바 ‘지(志)가 정향(定向)이 있다.’는 것은, 시비(是非)를 명백히 하여 선을 향하고 악을 등진다는 뜻이다. ‘정(靜)은 마음이 망녕되이 움직이지 않음을 말함이다.’는 것은 옳고 그름이 이미 정해져서 다른 갈림길에 동요되지 않고 마음이 항상 안정된다는 뜻이다. ‘안(安)은 어느 곳에서나 편안함이다.’는 것은 나의 저울을 바르게 하여 사물을 응접하므로 어느 때나 어느 곳이나 태연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여(慮)는 일을 처리하는 데에 정밀하고 자세하다.’는 것은 사물이 닥쳐올 때에 다시 그 기미를 연구하여 살펴 처리한다는 뜻이요 ‘득(得)은 그 그칠 바를 아는 것’은 실행하는 데에 있어서 지극한 선(善)에 그친다는 뜻이다.” 하였다. -《대학(大學)》-
일찍이 율곡 선생에게 묻기를, “물격(物格)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극처(極處)에 이르는 것입니까. 나의 지식이 극처에 이르는 것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사물의 이치가 극처에 이르는 것이다. 만일 나의 지식이 극처에 이르는 것이라면 이것은 지식이 이르는 것이지 사물의 이치가 이르는 것이 아니다. 물격과 지지(知至)는 다만 한 가지의 일인데 사물의 이치로 말한다면 물격이라 하고 내 마음으로 말한다면 지지라 하는 것이니, 실은 두 가지 일이 아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사물의 이치는 원래 극처에 있는 것인데, 어찌 반드시 사람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한 후에야 극처에 이르는 것입니까.” 하니, 말하기를, “이 물음은 당연하다. 비유하자면, 어두운 방 안에서 책은 시렁 위에 있고 옷은 횃대 위에 있으며 상자는 벽 아래 있는데 어둠 때문에 물건을 볼 수 없으면 책이나 옷, 상자가 어느 곳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 비추어 보면 책ㆍ옷ㆍ상자가 각기 그곳에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런 후에야 책은 시렁에 있고 옷은 횃대에 있으며 상자는 벽 아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치는 원래 극처에 있으니 격물을 기다려야만 극처에 이르는 것이 아니며, 이치가 스스로 이해되어 극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지식이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함이 있기 때문에 이치가 이르고 이르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격물의 격은 궁리한다는 의미가 많고, 물격의 격은 이른다는 의미가 많다.” 하였다.
수신(修身) 이상은 명덕을 밝히는 일이요, 제가(齊家) 이하는 신민(新民)하는 일이다. 이것은, 옛날에, ‘명덕을 밝히려고 하면’이라는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그 본절(本節) 중의 문자를 써서 수신이니 제가니 한 것이다. “사물이 격(格)하고 지식이 이른다면 그칠 바를 알게 되고 의성(意誠) 이하는 모두 그칠 바를 얻는 순서이다.”고 한 이 말은 사물이 격한 후에 지식이 이른다는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그 본절 중의 문자를 써서 물격이니 지지니 의성이니 한 것이다. 율곡이 말하기를, “이것은 상하의 두 구절을 서로 통하여 연결한 것이니 반드시 조목을 나누어 해석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구봉(龜峰)의 의사도 그러하였다.
전(傳) 5장 소주(小註)에서, 옥계 노씨(玉溪盧氏)가 말하기를, “표(表)와 추[粗]는 이치의 용(用)이요, 이(裏)와 정(精)은 이치의 체(體)이다.”고 하였는데, 선생이 반박하여 말하기를, “금수와 분양(糞壤)의 이치라면 표가 추[粗]도 되고, 이가 추도 되지만 모든 물건을 표ㆍ리ㆍ정ㆍ추로 체와 용을 나누어 둘로 할 수는 없다.” 하였다.
율곡 선생에게 묻기를,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 무엇이 다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성의라는 것은 참으로 선을 행하고 실지로 악을 제거함을 이름이요, 정심이라는 것은 마음이 치우치거나 기대하거나 정체(停滯)하는 일이 없으며, 또 부질없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함이다. 그중에서도 정심이 제일 어려우니, 사마온공(司馬溫公)과 같은 이도 성의는 하였지만 언제나 생각은 흔들렸으니 이것은 정심이 되지 못한 까닭이다. 비록 그렇지만 참으로 성의를 한다면 정심과의 거리가 멀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참으로 성의를 한다는 것은 격물치지를 하여 이치가 밝고 마음이 열려서 그 뜻을 진실하게 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온공은 치지 공부가 정밀하지 못하여 참다운 성의의 경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일찍이 《화담행록(花潭行錄)》을 보니, 제자가 ‘선생의 공부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습니까?’ 하고 물으니 화담이 말하기를, ‘성의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화담이 참다운 성의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스스로 ‘지식이 십분 극진한 곳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참으로 알지 못한 것이다. 만일 참으로 알았다면 도리가 무궁한 것인데 어찌 자신의 지식이 십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처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알지 못하면 참다운 성의에 이르기가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욕(欲)이 동하고 정(情)이 이겨 그 용(用)의 행함이 혹 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제 생각으로는, 용이 동하고 정이 이기면 그 행함이 바름을 잃을 것이 분명한데 주(註)에 혹(或)이라는 글자를 쓴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니, 율곡 선생 역시 말하기를, “혹 자는 과연 의심스럽다.” 하였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心不在焉]’이라는 주에 ‘반드시 이것을 살펴야 한다[必察乎此]’라고 하였는데, 퇴계(退溪)는, “차(此) 자는 마음이 있지 않은 병통처를 가리킨 것이다.” 하였고, 율곡은, “차 자는 마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하였다.
‘갓난아이처럼 보호해야 한다[如保赤子]’에 대한 소주(小註)의 여러 설명 중에서 율곡은 신안 진씨(新案陳氏)의 설명이 옳다고 하였다.
‘몸에 간직한 바가 용서하지 않는다[所藏乎身不恕]’라는 대목에 대하여, 선생이 말하기를, “여기의 서(恕) 자는 실은 충(忠) 자를 가리킨 것이니, 이것은 서(恕)가 몸에 간직된 것으로써 서 자를 빌어서 충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이것을 치국(治國)이라 한다’는 소주의 인산 김씨(仁山金氏) 설명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인산의 미루어 변화한다는 설명이 역시 근사하다. 다만 주자가 이 장(章)을 논하여 말하기를, ‘또 다만 동화(動化)가 근본이 되는 것만을 설명하고 미루어 올라가는 것까지는 설명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렇다면 10장은 미루어 나가는 것을 설명한 것이요, 9장은 다만 몸소 실현하여 아랫사람을 감화시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하였다.
‘반드시 그 동일한 것을 따라야 한다’는 대목에 대해 율곡이 말하기를, “동일한 것은 마음이니 이것이, 곧 법이다.” 하였다.
‘재물이 있으면 이에 용(用)이 있다[有財此有用]’는 대목에 대하여,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은, “용은 기용(器用)이다.”라고 하였는데 율곡은, “그 말은 옳지 않다.” 하였다.
《혹문(或問)》에 보이는 반명(盤銘) 조(條)의 ‘성경(聖敬)이 날로 진취된다’는 대목에 대한 주에, “성인이 그 덕을 공경하여 날로 높고 밝은 데로 올라가는 것이다.” 한 것에 대하여 물으니, 율곡이 말하기를, “이 성(聖) 자는 성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다. 성은 통명(通明)과 같은 것이니, 성경(聖敬)의 덕이 날마다 높고 밝은 데로 진취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 인(仁)을 행하는 근본[其爲仁之本]’이라는 주에, “어찌 일찍이 효제(孝悌)가 있을 것인가.[曷嘗有孝悌來]”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래(來) 자는 어조사이다. 《장자(莊子)》의 유이어아래(有以語我來)라는 것과 같다.” 하였다. -《논어(論語)》이다.-
“병이 없을 것인데 운명인가 보다[亡之命矣夫]의 망(亡)은 사망한다는 망이다. 대개 이 사람에게 이 병이 있을 수 없다는 일단(一段)은 이것이 명의부(命矣夫)를 해설한 것이요, 망지(亡之) 두 글자를 해석한 것이 아니다.” 하니, 율곡 선생도 역시 존망(存亡)의 망으로 보았다.
‘여는 3년의 사랑이 부모에게 있었느냐[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은 삼년상(三年喪)이라는 뜻으로 말하였으나, 지금 직해(直解)를 상고하니, “3년의 사랑은 품어 기른 기간을 말한 것이라.” 하여 나의 소견과 서로 맞는데 아직 옳은지 그른지를 모르겠다.
‘벌벌 떨면서 죄 없이 죽을 곳으로 나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은 곡속약(觳觫若)으로 구절을 띄었다. -《맹자(孟子)》이다.-
‘수세(數歲)의 중을 비교한다[校數歲之中]’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은 수년간을 비교하여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닌 중년(中年)이라고 해석하였는데, 나의 생각에는, 수년간에 걸친 수확한 수량을 통계하여 그것으로 일정한 규정을 삼는 것이라 하겠다.
‘다 넓혀 채울 줄 안다[知皆擴而充之]’는 대목에 대해 퇴계는, “알아서 확충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생각하면, 지(知) 자는 충지(充之) 아래에서 해석해야 한다. 율곡이 이르기를, “퇴계의 해석은 그른 것 같다. 이것은 아는 것뿐이요, 때가 아직 확충되지 않은 것이다. 알기만 한다면 불이 처음 피어오르는 것 같고, 샘이 처음 나오는 것 같으니 그 아래에 이르러 참으로 확충한 연후에야 비로소 확충한 때인 것이다. 만약 퇴계의 설명 같다면 이것은 이미 확충된 것이니, 불이 처음 피어오르고, 샘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다.” 하였다.
《맹자(孟子)》 7편 중에 공명의(公明儀)가 네 번 보이는데 첫째는, ‘문왕(文王)은 나의 스승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3개월 동안 임금이 없으면 위문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푸줏간에 살찐 고기가 있다.’는 것이며, 넷째는, ‘마땅히 죄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율곡이 말하기를, “공명의는 옛날 어진 사람으로, 맹자와 동시대 사람이 아니었다. 이른바 마땅히 죄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은 역시 옛날 공명의의 말을 맹자가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공명의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맹자와 동시대 사람일 것이다.” 하였다.
순(舜)ㆍ우(禹)ㆍ익(益)이 서로 거리가 구원(久遠)하였다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원(遠)은 속(速) 자의 잘못인 것 같다.” 하였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율곡의 의사가 순과 우 사이의 거리는 멀고, 우와 익 사이의 거리는 가깝다고 여긴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뜻이 매우 평탄하고 순순하다.
학문하는 길은 다른 것이 없다. 그 방심(放心)을 구제할 뿐이라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그 방심을 구하는 것은 바로 배우는 자의 공부의 궁극처이다.” 하였다.
독법(讀法)의 주에서 서산 진씨(西山眞氏)가 말하기를, “반드시 독실하고 공손한 후에라야 무성무취(無聲無臭)한 경지에 나갈 수 있다.” 하였다. 생각건대, 원주에서는 무성무취로 독실하고 온공한 묘(妙)를 형용하였는데, 지금 여기서는, “독실하고 공손한 연후에야 무성무취한 경지에 나갈 수 있다.” 하였으니, 원주의 뜻을 상실한 것 같다. 율곡도 일찍이 여기에 대하여 의심하였다. -《중용(中庸)》이다.-
수장(首章) 소주(小註)에서, 운봉 호씨(雲峰胡氏)가 말하기를, “일음 일양(一陰一陽)이 도라 하였는데, 이 도(道) 자는 한 태극(太極)을 모두 가진 것이요,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 하였는데, 이 도(道) 자는 각기 한 태극을 갖춘 것이다.” 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일음 일양의 도가 곧 성을 따르는 도로서 두 도(道) 자는 하나인 것이다. 호씨가 이것을 나누어 둘로 하였는데 옳지 않다. 율곡 선생도 나의 소견을 옳다고 하였다. 대개 일음 일양을 도라 하는 것은, 선(善)을 이어 천성을 이룬다는 것과 상대하여 선후의 분별이 있는 것이지만, 통체(統體)의 태극은 각기 갖춘 것과는 선후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군자의 도는 비(費)하고 은(隱)하다는 대목에 대하여, 비는 기(氣)요, 은은 이(理)냐고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옛날에도 그대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소주(小註)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형이하(形而下)라는 것이 비가 되고, 형이상(形而上)이라는 것이 은이 된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형이하의 것은 매우 넓은데 형이상의 것이 사실 그 사이에 행하여 물건마다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며 가는 데마다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비라 하는 것이요, 그 가운데서 형이상이라는 것이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은이라 한다.’ 하였다. 주자의 설명이 이렇게 십분 분명한데, 전일에 허공(許公) 엽(曄)이 역시 비가 기(氣)라는 설을 주장하므로, 퇴계와 율곡이 반복하여 논변하였지만 끝내 고치지 않았다.” 하였다.
촬(撮) 자는 《운회(韻會)》에서, “두 손가락으로 집는 것이다.” 하였는데, 율곡은 “한 손으로 움키는 것이다.” 하였다.
‘개왈문왕지소이위문야순역불이(蓋曰文王之所以爲文也純亦不已)’에 대하여 율곡은 왈(曰) 자를 불이(不已) 아래에서 해석하였는데, 나는 문야(文也) 아래서 해석하고자 한다. 율곡은 이미 순수하고 또 쉬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는데, 나는 역(亦) 자는 문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늘이 쉬지 않으니 문왕도 쉬지 않는 것이라 여겨진다.
순전(舜典)의 ‘내언저가적(乃言底可績)’ 주에서, “행동이 미더운 데에 이르면 공적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율곡은, “네 말이 장차 공적이 있는 데에 이를 것이다.”고 해석하여, 채씨(蔡氏)의 주와 같지 않다. 그러나 율곡의 해석은 본경(本經)에 있어서 문리가 매우 순하니 옳을 것 같다. -《서전(書傳)》이다.-
‘중정인의(中正仁義)로 정한다’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중전인의는 스스로 동정(動靜)이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중정인의를 말한 것으로 태극도의 주(註)와는 같지 않다. -사계(沙溪)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에 나온다. 이하 같다.-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한다[與天地合其德]’는 대목에 대하여 묻기를, “이 글 중에 네 개의 기(其) 자가 있는데, 그것은 성인을 가리킨 것입니까, 천지ㆍ일월ㆍ사시ㆍ귀신을 가리킨 것입니까?” 하니, 율곡이 대답하기를, “성인이 천지와 합한다면 글 뜻이 순하고, 천지가 성인과 합한다면 글 뜻이 순하지 못하다.” 하였다.
제비(除非)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시비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하였는데, 구봉(龜峰)은, “주자의 시의, ‘제시인간 별유천(除是人間別有天)’이라 한 것이 역시 이런 뜻이다.” 하였다.
채절재(蔡節齋)가 ‘역에 태극(太極)이 있다’고 한 것을, 무극(無極)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는 것과 비하여 같이 본 것은 좀 온당하지 않다. 율곡도 일찍이 절재의 견해를 그르게 여겼다.
‘심향상거(尋向上去)’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향상은 어느 곳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율곡이 또 이르기를, “상중(喪中)의 조석 제사 때가 여름철이라면 청주가 맛이 변하니 소주가 매우 좋다.” 하였다. -사계의 《의례문해(疑禮問解)》에 나온다. 이하 같다.-
율곡이 말하기를, “아버지 사당에 제사 드리는 것은 친근함에 지나칠까 염려된다.” 하였다.
기일에 부모를 함께 제사 드리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선현들이 일찍부터 행하였는데, 율곡 역시 말하기를, “양위(兩位)에게 제사 드리는 것이 마음에 편안하다.” 하였다.
물격(物格)에 대한 설명은 율곡의 의논이 제일 훤하게 꿰뚫고 깨끗하다. 율곡의 말에 “물격이라고 한 것은, 사물의 이치가 모두 밝아서 더 남은 것이 없는 것이니, 이것은 사물의 이치가 극처(極處)에 이른 것으로, 사물을 위주로 하여 말한 것이다. 지지(知至)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모두 밝아서 나머지가 없는 후에야 나의 지식도 극처에 이르는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지식을 위주로 말한 것이다. 어떻게 주자의 설명에 근거한 것인 줄 알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보망장(補亡章)에 이르기를, ‘모든 물건의 표리와 정추[精粗]가 이르지 않음이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사물을 가지고 말한 것이며 또 말하기를, ‘내 마음의 전체와 대용(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지식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혹문(或問)》에는, “이치가 사물에 있는 것이 이미 그 극치에 이르러 나머지가 없다면 내게 있는 지식도, 그 나가는 데에 따라 다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계어록(沙溪語錄)》에 나온다. 이하 같다.-
율곡이 항상 말하기를, “내가 다행히도 주자 후에 태어나서, 학문이 틀리지 않게 되었다.” 하였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대목에 대해서, 율곡의 해석이 제일 분명한데 그 의견은, 비록 그 극은 없지만 실은 큰 극이 있다고 말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정(情)이라는 것은 부지불각 중에 저절로 발동하여 나오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평일에 함양(涵養)한 공부가 지극하면 정이 발동하여 나오는 것이 자연 사특함과 잘못이 없게 될 것이다. 의(意)라 하면 이것은 정이 발동하여 나옴으로써 계교(計較)하는 것이며, 지(志)라면 이것은 한 곳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쫓아가는 것이니, 의는 음(陰)이요 지는 양(陽)이다. 그렇다면 성(性)과 정은 심(心)에 통솔되고 지와 의는 또 정에 통솔되는 것이다.” 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점철(點掇)은 원주에서, ‘첨철(拈掇)ㆍ첨철(沾綴)이라는 것 같다.’고 말하였는데, 첨철(拈綴)은 손가락으로 물건을 가져다가 여기저기에 놓는다는 뜻이고 첨철(沾掇)은 물방울을 땅 위에 적신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정명도(程明道)가 웅치(雄雉) 시를 설명하면서, ‘저 해와 달을 쳐다보니 나의 그리움 한이 없네. 길이 하도 멀다 하니 언제나 돌아오리.[瞻彼日月 悠悠我思 道之云遠 曷云能來]’라는 그 구절 아래에서 바로 ‘그리움이 간절한 것이다.’ 하였으며, ‘모든 군자들이여 덕행을 알지 못하네. 사납지 않고 탐하지 않으면 무엇을 한들 착하지 않겠는가.[百爾君子 不知德行 不忮不求 何用不臧]’라는 그 구절 아래에서는 바로 ‘바른 데로 돌아간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자기의 소견으로 간간히 본문 중의 의사에 대하여 말을 해 본 것이다.” 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허노재(許魯齋)가 원(元)나라에 벼슬한 데 대하여 사람들이 많이 비방한다. 그러나 이것은 몸을 잃은 것이지 절개를 잃은 것은 아니다. 대개 노재는 원나라에 벼슬하는 것이 마땅하지는 않지만 원래 북방에서 생장하였으니 저 송나라 유민(遺民)들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축색(蓄色)한 일과 을사년(乙巳年) 일에 있어서 회재(晦齋)와 퇴계(退溪)가 같이 과실이 있었는데, 선생이 회재만을 허물하기에 무슨 까닭인가 물으니, 율곡이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대저 사람을 보는 도리는 덕을 이룬 뒤와 인격이 아직 덕을 이루기 전을 구별해야 한다. 퇴계의 실수는 연소한 시기에 있었지만 회재는 이미 늙고서 이 실수가 있었으니 이래서 구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청풍(淸風) 김권(金權)과 함께 율곡 선생의 문하에 있었다. 청풍이 그 할아버지 김대성(金大成)의 비문을 청하였는데, 선생이 대답하지 않으니, 청풍이 실망하는 모습으로 물러나와 나에게 가만히 말하기를, “허락하지 않는 이유를 선생께 물어보려 하였지만, 엄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으니 그대가 틈을 타서 물어 주오.” 하였다. 내가 그 말대로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죽을 때를 당하여 처리한 의리가 매우 온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내가 그대로 청풍하게 말하니 후에는 끝내 다시 청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선생에게 묻기를, “선생께서는 어떤 일에나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장수(將帥)의 소임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군대를 거느리는 일을 맡는 것이라면 감히 자신하지 못하겠지만 장수의 스승은 될 수 있겠다.” 하였다.
“선생께서 국사를 담당하여 만일 매우 어려운 처지에 이르게 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물으니, 율곡이 말하기를, “죽을 때까지 해 볼 뿐이다. 학문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성공하느냐 성공하지 못하느냐는 아직 의논할 것이 아니고, 마땅히 몸과 마음을 다해 나랏일에 이바지하여 죽은 후에야 그만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선생이 풍악(楓岳)에 계실 때에 일찍이 형용을 변하지 않았습니까?” 물으니, 율곡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미 산에 들어갔으니 형용을 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그 마음이 빠진 데에 도움이 되겠는가. 이 일에 대해서는 물어볼 것이 없다.” 하였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말하기를,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동이요, 사단(四端)은 이(理)의 발동이다.” 하였는데, 퇴계(退溪)가 평생 두고 주장하는 바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이가 발동하면 기가 따른다는 말을 하였다. 율곡은 “사단도 원래는 기를 따라 발동하는 것이지만 기에 가린 바가 되지 않고 바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의 발동이라 하는 것이며, 칠정도 원래는 이가 타서 되는 것이지만, 간혹 기에 가리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기의 발동이라 하는 것이니 융통성 있게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칠정 중에도 이를 위주로 하여 말할 것이 있으니 순(舜)의 기뻐함과 문왕(文王)의 노함은 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단 중에도 기를 위주로 하여 말한 것이 있으니 주자의 이른바, ‘사단 중의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한 것이 이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박문(博文)과 약례(約禮) 두 가지는 성인 문하의 학문에 있어서 수레의 두 바퀴 같고, 새의 두 날개와 같다고 하였는데, 율곡은 언제나 이것을 외워 가르쳤다.
율곡 선생이 일찍이 격치(格致)의 뜻을 논하기를, “정자와 주자 모두 격(格)은 지(至)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격물(格物)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 극진한 곳에 이르게 하는 것이요, 물격(物格)이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이미 극진한 곳에 이르러서 다시 더 연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 설명이 훤하게 꿰뚫고 깨끗하여 십분 명백하다. 그런데 후에 분분한 설이 매우 많아 “사물의 이치가 와서 내 마음에 이르는 것이다.”는 설까지 있게 되었으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다[五行一陰陽]’의 주에, “정(精)ㆍ조(粗)ㆍ본(本)ㆍ말(末)이 피차가 없다.” 하였는데, 사계(沙溪)가 말하기를, “웅씨(熊氏)의 주에, ‘태극이 정이 되고 음양이 조가 되며 태극이 본이 되고 음양이 말이 된다.’ 하였는데, 이 주가 잘못된 것 같다.” 하였으며, 율곡은 일찍이, “정ㆍ조ㆍ본ㆍ말은 기(氣)를 가지고 말한 것이고 하나의 이치는 정도 없고 조도 없으며 본말과 피차도 없는 사이에 통하는 것이다.” 하였다. 후에 와서 주자의 글을 읽어 보니, “기의 정ㆍ조를 막론하고 이 이치를 가지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다. 율곡의 설명이 사실 여기서 나온 것이니 웅씨의 설명을 좇을 수 없는 것이다. -문인 수몽(守夢) 정엽(鄭曄)의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천지와 그 덕이 합한다.’는 말에서 ‘그 길흉이 합한다.’는 말까지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원문 가운데 네 개의 기(其) 자는 천지ㆍ일월ㆍ사시ㆍ귀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귀신과 그 길흉을 합한다는 것은 성인이 일의 길흉 알기를 귀신의 밝음과 같이 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이와 기를 합하여 기질(氣質)을 이룬다.’는 말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이와 기를 합한다는 이 말이 온당하지 않다. 기를 말하면 이는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매일수구다소위익 지소망 개득소불선(每日須求多少爲益 知所亡 改得少不善)’에 대하여, 퇴계가 율곡에게 회답하기를, “이 부분의 글 뜻이 과연 명백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 대의는 다만 섭씨(葉氏) 주의 설명과 같다. 주에서는 부지(不知) 두 글자를 소무(所無) 자에 붙였는데, 이것은 《논어》의, ‘날마다 그 없는 바를 안다.’는 의미이다. ‘개득소불선’은 적은 불선이라도 바로 고치는 것을 말함이요, 다(多) 자 한 자가 빠진 것은 아니다.” 하였다. 율곡은 구(求) 자를 선(善) 자 아래에 붙여 해석하여 퇴계의 해석과 같지 않다.
‘불해심질(不害心疾)’에 대하여 퇴계가 말하기를, “심질의 해하는 바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해는 아마도 환(患) 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습여성성(習與性成)’의 성(性)에 대하여 섭씨의 주에서는 ‘성(性)을 본연의 성이다.’ 하였고, 신안 진씨(新安陳氏)는 ‘《서전(書傳)》의 이것이 바로 불의이니 습관이 천성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들어 기질의 성이다.’고 하였는데, 어느 것을 바르다고 할 것입니까.”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진씨의 설명이 낫다.”고 하였다.
선생이 이성춘(李成春)에게 이르기를, “너의 문리가 아직도 통달하지 못하였으니, 아직 《집요(輯要)》는 놓아두고, 《통감(通鑑)》을 읽는 것이 좋겠다.” 하자 대답하기를, “소생의 나이 30이 되는데 조금도 성취한 것이 없으니 지금부터 성리학(性理學)의 서적을 읽어도 따라가지 못할 듯한데 언제 다른 글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너의 말도 옳다. 그러나 학문을 하는 방도는 반드시 먼저 문리에 통달해야 하는 것이니 그런 뒤에 나의 지식이 날로 늘어나고 소견이 날로 밝아진다. 그래서 공부하기는 쉽고 소득도 반드시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글 뜻에 통달하지 못하고 먼저 도를 구하려 한다면 마음속이 꽉 막혀 식견이 어두워 도를 구하려 해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학문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종신 사업이니 어찌 그렇게 급급히 서둘 것이 있겠느냐. 공자께서, ‘속히 하려 하면 통달하지 못한다.’ 하였으며, 맹자는, ‘나가는 것이 빠른 사람은 물러가는 것도 빠르다.’ 하였다. 성현의 교훈이 분명하게 경전(經傳)에 있는데 네가 그것을 배우지 않았느냐.” 하였다. -《직월기(直月記)》에 나온다. 이하 같다.-
여러 학생이 모시고 앉았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여러 학생이 모여 있으면서 종일토록 마음을 쓰는 데가 없다면, 산당(山堂)에 고요히 앉아 그 마음을 기르는 것만 못하다.” 하면서 이어 훈계하기를, “요즈음 보면 여러 학생들이 그냥 놀기만 하면서 학업에 근면하지 않으니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 내가 여러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나 여러 학생들이 나에게 배우는 것이 그 의미가 어찌 이와 같은 것이겠는가. 유념하고 또 유념해서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이유경(李有慶)이 묻기를, “초목(草木)과 금석에도 오행의 기(氣)가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있다. 구멍을 마찰시켜 불을 내는 것이 나무가 아닌가. 물로 인하여 자라나는 것이 나무가 아닌가. 부딪쳐서 불을 내는 것이 돌이요, 적시고 불려 물을 내는 것이 돌이다. 금도 역시 기가 있기 때문에 태양에 비치면 불이 나오고 달에 비치면 물이 나온다. 이것은 그 대계가 그렇다는 것이고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다.” 하였다.
선생이 이성춘(李成春)에게 이르기를, “네가 근자에 술에 취하여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데 그러하냐.” 하니, “감히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술이 곤하여 음성이 길었기 때문에 곁에서 보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노래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이미 긴 음성으로 불렀다면 노래라고 해도 옳지 않으냐. 또 네가 잘못하였다. 내가 들으니 전일에 너의 숙부가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는데 네가 노래 부르지 않았고, 나도 노래를 하라고 하였는데 네가 역시 노래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술의 위엄이 도리어 어른의 명보다 중한 것이냐.”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정오산(鄭鰲山)에게서 들으니, ‘만일 노래를 잘 못한다면 부모의 명이 있더라도 감히 노래를 부를 수 없다.’ 하였다는데 그러하냐?” 하니, 대답하기를, “오산의 말이, ‘부모가 은근히 말한다면 그런대로 노래를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감히 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오산의 말이 이상하구나. 옛사람이 나이 70에도 때때옷을 입고 춤추며 어린아이의 놀이를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느냐. 진심으로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이다. 이렇기 때문에 효자는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있어 반드시 즐거운 얼굴빛을 가지며, 즐거운 얼굴빛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온화한 기색을 가진다. 그러므로 설령 옳지 않은 명령이 있더라도 힘써 순종하며, 수고로운 일에 종사하더라도 감히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노래 부르는 것은 그 본의가 원래 해가 없고 몸에 수고로울 것도 없으니,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라도 그 의사에 앞서 받들어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어찌 노래를 잘하고 못하는 것을 따질 것이 있겠는가. 아, 부모가 이미 돌아가셨다면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도 누구를 위해 기쁘게 해 드리겠는가. 부모가 계신데도 그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밤에 여러 학생들이 모두 절하고 물러가려 하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로 있으라. 내가 말할 것이 있다. 여러 학생이 정사(精舍)에 함께 있으면서 글을 읽으며 사색(思索)하기도 하고 조용히 앉아서 마음을 수양하기도 했는데 전일에 비하여 달라진 것이 있는가.” 하니 김의정(金義貞)이 대답하기를, “비록 용감하게 나아가는 공부는 없지만 어찌 전일보다 좀 다른 점이야 없겠습니까.” 하고 허극성(許克城)은, “소생은 근래 잡념이 더 커져서 글을 읽어도 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자려 해도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어찌하여 그러하냐?” 하니, 허극성이 말하기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양친이 집에 계신데 집안 형편이 궁곤하기 이를 데 없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하니, “생각하여 잘 처리할 방도가 생긴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정신만 괴롭혀서 도리어 공부하는 데에 방해가 될 것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였다. 오결(吳潔)은 대답하기를, “서재나 집안에 있으면 스승과 친구, 부형이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일찍이 방심할 일이 없는데, 밖에 나가게 된다면 농지거리도 하고 웃어대기도 하여 자연 해이하게 됩니다. 때로 근심스러워서 생각해 보면 온몸이 오싹 떨려서 진정할 수 없게 됩니다.” 하니,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학문을 하는 길은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하였다. 이유경(李有慶)은 대답하기를, “소자가 전번에 집에 돌아가 부모님을 뵈었는데 부모님의 마음은 소자가 오랫동안 선생님을 모셨으니 큰 소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성인(成人)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이런 부모님의 심정을 생각한다면 마음이 항상 조심스럽고 송구스러워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너의 마음이 착하구나. 이런 마음이 있다면 학문을 할 수 있으니 이 마음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하였다. 오결(吳潔)이 묻기를, “가령 날이 저문 산길을 도보로 가다가 갑자기 다리를 삐어 걸음을 걸을 수 없어 바위 밑으로 가려 했는데 또 호랑이와 표범이 많아 방황하여 답답할 때에, 마침 전에 알던 도적패가 말을 몰고 지나 가다가 그 죽게 된 형편을 동정하여 간곡히 말을 타고 가기를 청한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모두 하늘에 달린 것이니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그 말을 타고 간다 해도 어찌 죽지 않을 줄 알겠는가. 내가 죽을 운명이 아니라면 노숙(露宿)을 한다 하여 어찌 살아나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그 말을 타지 않는 것은 의(義)요 타는 것은 이(利)이다. 그 의를 생각지 않고 이만 취하려고 한다면 어찌 군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유경이 자리를 피하면서 말하기를, “소생의 의견으로는 저 사람이 도적이 되기는 했지만 이미 나와 아는 사이고, 또 다른 의사가 없는 것이라면 내가 우선 옷을 벗어 주고 말을 타고 가도 될 것 같은데 이 생각이 어떻습니까?” 하니, “이런 것은 반드시 그때 가서 형편을 보아서 처신할 것이지 미리 작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군자가 평일에 마음을 가지는 것은 반드시 의(義)로 이(利)를 삼아야만 천하의 일을 처리하는 데에 실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허극성(許克城)이 묻기를 “형제가 동거(同居)하는 것은 후한 인륜의 일입니다. 지금 여기에 형제 세 사람이 있는데, 한 형의 뜻은 나와 같고 한 형의 뜻은 나와 같지 않다면 뜻이 같은 형하고만 동거해도 됩니까?” 하니, 말하기를, “그렇게 하여도 된다. 그러나 뜻이 같지 않은 형도 반드시 감동시켜서 끝내는 동거하는 것이 더 좋다.” 하였다.
또 묻기를, “지금 여기에 한 선비가 있는데 전에는 빈천하여 그 부모를 박장(薄葬)하였으나 후에 부귀해져서 개장(改葬)하려는데 어떻습니까? 만일 개장하지 않으면 관곽(棺槨)이 썩고 백골이 드러나게 될 것이니 사람의 자식으로서 그지없는 슬픔을 어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빈천해서 박장한 것은 부득이한 형세였지만, 잘살게 되어서도 개장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자식으로서의 정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맹자는 후상(後喪)인 어머니 상을 전상(前喪)인 아버지 상보다 후하게 지냈으나 전상 때의 박장(薄葬)을 개장하지 않았다. 개장할 수 있는 예법이 있다면, 맹자 같은 현자(賢者)가 어찌 정리가 부족해서 개장하지 않았겠는가. 참으로 개장하는 예법이 없어서였다. 성현의 사실이 분명히 경전에 있는데, 그대는 그것을 아직도 보지 못하였는가. 다만 한 가지 일이 있으니 그것은 그 무덤의 흙을 보축하고 사초(莎草)를 무성하게 하며,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삼가 지낸다면 나의 정리는 다한 것이다. 억지로 개장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미욱한 짓이지 예법이 아니다.” 하였다.
이유경이 묻기를, “지금 여기 한 사람이 있는데 오래도록 같은 문하에서 놀면서 서로 교제를 하다가 어느 날 과실로 하여 친구들에게 쫓겨나게 되었다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하여 전과 같이 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범범하게 대하여 그와 더 이상 교제하지 않아야 합니까?” 하니, 말하기를, “정말 그 사람에게서 크게 형편없는 일이 보인다면 이전의 친분이 있었더라도 그와 다시 교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때의 과실이 있다고 하여 동문(同門)의 친구를 끊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조용히 만나 간절하게 책망하여 허물이 없게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친구의 도리이다.” 하였다.
이유경이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의 사생(死生) 득실에 대하여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관중이 산 것은 권도(權道)요, 소홀이 죽은 것은 정직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옳다. 그러나 적자(嫡子)를 세우는 명분은 이것이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상법(常法)이니 그렇다면 관중의 한 일이 역시 소홀의 죽음보다 좀 낫지 않겠는가. 후에 신하로서 만일 이런 변고를 만난다면, 굳이 관중이나 소홀을 좇을 것이 아니라 먼저 큰 의리를 보고 처리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였다.
이유경이 묻기를, “양화(陽貨)는 대부가 아닌데 대부로 자처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돼지를 보낸 것은 참람한 일인데도 성인이 가서 그 문에 절한 것은 어쩐 일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양화는 대부는 아니지만 당시의 정권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갔으니 그의 소임은 곧 대부의 소임이었다. 때문에 부자(夫子)께서도 대부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양화와 불요(弗擾)가 다 같은 반역자인데 부자께서 양화에게는 거절하면서 불요에게는 가려 하였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만일 천하에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어찌 양화만이 변화시킬 수 없는 자가 되겠습니까? 또 불요가 끝내 부자를 등용하였다면 부자께서는 과연 불요에게 가서 그를 따라 주(周)나라의 도를 일으켰겠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양화는 전연 착한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부자께서 이미 알았기 때문에 보려 하지 않은 것이다. 불요의 경우에는 그가 비(費)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반역의 무리들을 부르지 않고 공자를 불렀으니 그 의사가 앞으로 선을 행하고 과오를 뉘우치려고 한 것이니, 부자의 천지 만물을 생성시키는 마음으로 어찌 가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그가 과오를 고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역시 끝내 가지 않은 것이니, 그것이 양화를 대접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 불요가 부자를 등용하더라도 부자께서 어찌 이 사람과 함께 지극한 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그로 하여금 선을 행하고 과오를 고쳐 계씨(季氏)에게 순종하게 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인으로서 별도로 조치하는 일이 있었을지는 알 수 없는 점이 있다.” 하였다.
또 묻기를, “길을 가다가 충ㆍ효의 정문(旌門)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지나가야 합니까?” 하니, 말하기를, “만일 조상의 정문이라면 내려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만 식(式)에 기대고 공경만 할 뿐이니 나는 식에 기대고 공경만 하고 내리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또 묻기를, “소자가 전일 서울로 올라올 때에 서인(庶人)으로서 노직(老職) 당상관 세 사람이 우연히 길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을 탄 채로 지나려 하니 마음이 불안하기에 내려서 지나갔는데 이 생각이 어떠합니까?” 하니, 말하기를, “이미 그 연령이 있고 그 직위도 있으니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네가 내리기 잘하였다.” 하였다.
봉성민(奉聖民)이 묻기를, “선생이나 어른이 밖에서 들어오면 제자 된 사람은 뜰 가운데서 차례로 서서 맞아들이고 배알(拜謁)하는 것이 예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피하여 갔다가 선생이 당상으로 들어온 다음에 배알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거기에 대한 예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리로 본다면 맞아들여서 배알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선생이 이성춘(李成春)에게 이르기를, “요즘 들으니, 네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잘하라는 책망을 듣고 많이 수긍하지 않는 기색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냐. 나를 책망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자신에 돌이켜 반성하여 나에게 참으로 책망할 만한 소행이 있다면 그 사람의 책망이 지나쳤더라도 마음속으로 책망하여 과오를 고치는 것을 꺼리지 않아야 할 것이니 어찌 나를 책망하는 사람을 그르다고 할 것인가.” 하니, 이성춘이 일어나 자리를 피하면서, “감히 가르침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무오년(1558, 명종13)에 도산(陶山)에 가서 보았을 때에 퇴계 선생이 선군자(先君子)에게 주일무적 수작만변(主一無適酬酢萬變)의 뜻을 물었으며, 또 말하기를, “주자는 다리 살을 베어 어버이의 병을 치료하는 일을 중(中)에 지나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버이의 병환이 중하게 되면 사람의 자식으로서 급하고 간절한 마음에 못할 일이 없게 된다. 혹 다리 살을 베어 어버이 병을 치료하여 병이 낫게 된다면 이것은 이른바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다. 이야말로 자식으로서 어버이에 대한 지극히 선한 마음이니 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 살을 벨 때에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생각이 있다면 이것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자는 이런 것을 분간하여 말하지 않고 다만 ‘중에 지나친다.’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는데, 선군자께서 대답하기를, “이것이 비록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이 감동할 때도 있지만, 사리로 따진다면 사실은 천하의 상도(常道)는 아닙니다. 더구나 다리 살을 벨 때에 그 사람의 마음속을 다른 사람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것이 과연 지극히 선한 중도가 된다면 증자 같은 효성으로도 어찌 다리 살을 베지 않았겠습니까. 부득이 그렇게 보자면 이런 경우가 있겠습니다. 세상에서 화타(華陀) 같은 신통한 의원이 나와서 말하기를, ‘이 병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피를 취하여 보조해야만 나을 수 있다.’ 하여 그 아들이 곧 자기 살을 베어 피를 내어서 어버이의 피를 보조하고 낫게 되었다면 이것은 중을 얻은 것일 것 같습니다.” 하니, 퇴계 선생이 무릎을 치며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선생의 아들 이경림(李景臨)의 연보 초고(年譜草稾)에 나온다.-
우계 선생과 이기(理氣)를 논란하여 아홉 번이나 서신을 왕복하였는데, 우계가 선생의 설을 많이 좇았기 때문에 우계가 선생에 대한 제문(祭文)에 스승으로 섬기려 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이 다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의리상(義理上)에 있어서 깨달아 아는 것은 우계보다 나아서 우계가 많이 내 설을 좇았지만 나는 성질이 해이하고 느려 알면서도 실천을 못하는데, 우계는 알면 곧바로 하나하나씩 실천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니, 이것이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하였다. -《사실기(事實記)》에 나온다.-
내가 일찍이 우계정사(牛溪精舍)에 있었는데 우계 선생이 말하기를, “소인 한거장(小人閑居章)의 여견기폐간(如見其肺肝)이라는 말을 율곡공이 자네에게 가르쳐 무엇이라 하던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남이 나를 보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숙헌(叔獻)이 평생에 식견이 매우 높아 남보다 뛰어난 의사가 있어 언제나 문자 중에서는 특별한 이론을 만들어 내서 옛날 성인의 말한 본뜻을 크게 상실하였다. 이미, ‘남이 나 보기를 그 폐간을 보는 것같이 한다.’ 하였다면 이것은 소인의 몸을 가리킨 것으로 사람이 소인을 보는 것은 그 겉의 거짓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폐간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뜻이 이러하고 그 밖의 다른 의미는 없다.” 하였다. 때마침 이 선생이 대사간으로 있다가 하직하고 화석정(花石亭)으로 돌아와서 석담(石潭)으로 이사하려 할 때 와서 선생을 뵙고 작별하였다. 선생이 전에 나에게 했던 말을 하니 이 선생이 말하기를, “존형의 이론이 크게 들어맞지 않습니다. 대개 몰래 불선한 일을 하는 자는 비록 그 불선을 가리려고 해도 남들이 나의 불선 보기를 마치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폐간을 보는 것같이 할 것이니, 그렇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의가 이 같아야 글이 순하고 이치가 바른 것입니다. 잘못 본 세속 학자들이 전의 말만 따라가 돌아올 줄 모르니 안타까운 일인데, 존형의 생각 역시 막힌 병통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여 반복해 가며 서로 논쟁하였으나 끝내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최후에 선생이 이 선생에게 이르기를, “형이 스스로 고명한 것을 믿고 남은 자기만 못하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깨우치는 날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니, 이 선생이 말하기를, “많이 말해 봐야 소득이 없으니, 아직은 각자의 소견을 가지고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한음(漢陰) 이 상국(李相國)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 다음, 율곡 선생을 뵙고 문장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마음이 도에 통한 후에야만 자연 문장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문장의 기운이 유창하지 못하는 것이니, 대개 도를 배우기를 반드시 문장을 배우는 것보다 앞서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신분(申濆)이 부평(富平) 여금산(餘金山)에 집을 짓고 살면서, 여러 명사에게 시를 구하였다. 시인 윤기리(尹紀理)의 시에 이르기를, “형문(荊門)에 날이 따스하니 복사꽃 잘도 피었구나. 무수한 벌 떼들 들락날락 날아드네. 낮잠을 깨자마자 동자가 하는 말이, 광주리에 가득 살찐 고사리 꺾어 왔어요.[荊門日暖桃花淨 無數晴蜂上下飛 午睡初醒童子語 折來山蕨滿筐肥]” 하니, 여러 사람이 더 쓰지 못하였다. 율곡이 그 시를 보고 감탄하기를, “이것이 어찌 보고 들은 소감만을 그린 것이겠느냐. 이야말로 저절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서포(西浦) 곽열(郭說)의 일록(日錄)에서 나왔다.-
율곡이 옛날 석담(石潭)에 있을 때 하루는 찾아가서 문안드렸는데 황혁(黃赫)에게 이르기를, “옛날 옥당(玉堂)의 글 친구 중에 신군망(辛郡望)은 앉아서도 글을 안 읽어 재주가 날마다 줄었는데, 주공(主公)은 외곬으로 학문을 즐겨 재주가 배나 증가하여 문장을 당할 수 없었다.” 하였다. 시인 백광훈(白光勲)과 국조(國朝) 이래의 시가(詩家)를 평가하면서 말하기를, “황 아무공의 시는 경술(經術)에서 출발하여 마음의 자득(自得)으로 이루어지니 의리의 글이다. 점필재(佔畢齋)와 더불어 이름을 떨친 것이요,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나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은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황혁(黃赫)이 지은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의 행장에서 나왔다.-
상께서 대신을 연방(延訪)하였을 때, 박순(朴淳)은 “이조(吏曹)에 연소한 사람을 등용해서 안 된다.” 하였으며, 대사헌 구봉령(具鳳鹷)은 “오늘날 유생들은 글 읽기를 일삼지 않고 고담(高談)과 대언(大言)만 한다.”고 하였다. 이때 율곡이 입시(入侍)하였다가 나아가 말하기를, “이조의 관원은 인재만을 택해야 하니, 나이가 젊더라도 쓸 만한 재주가 있다면 임용해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또 선비의 습관이 바르지 않으면 조정에서 어진 스승을 가려서 배치하여 교화를 밝혀서 중정(中正)한 데에도 돌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동계(東溪) 우복룡(禹伏龍)의 잡록(雜錄)에서 나왔다.-
율곡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서얼(庶孼)을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전번에 김 훈도(金訓導)나 이 훈도 같은 이가 있어도 쓰이지 못하고 죽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상께 아뢰기를, “옛날부터 선비는 시속의 관리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선비들이 ‘당우(唐虞)의 정치를 당장 이룰 수 있다.’ 하는데 시속 관리들은 ‘옛날의 도는 반드시 행하기 어렵다.’ 합니다. 그래서 시속 관리는 유학자(儒學者)를 비난하고 유학자는 또 시속 관리를 비난하는데, 공평하게 말한다면 양쪽 말이 모두 그른 것입니다. 정치를 하는 데는 삼대(三代)를 본받아야 하지만 일은 모름지기 점차 진취시켜야 합니다. 신이 삼대를 말하는 것은 한 발걸음에 바로 도달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한 가지 선한 정사를 하고 내일에도 한 가지 선한 정사를 시행하여 점차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자는 것입니다.” 하였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잡록(雜錄)에 나온다. 이하 같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맑은 물의 연꽃[淸水芙蓉]이요, 맑은 바람에 갠 달[光風霽月]이다. 벼슬하고 은거함의 바른 것을 공과 함께 비견할 사람이 없다. 율곡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였다.
우계 선생이 말하기를, “율곡이 생전에 항상 말하기를, ‘대개 사람은 3, 40전에는 비록 광대나 배우의 놀이를 하더라도 해가 될 것이 없다.’ 하였다.” 이것은 그의 친구가 만년에 지조를 근신하지 않음을 미워해서 말한 것이다. 그때는 나도 그것이 세상을 분개해서 하는 과격한 말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와서는 율로(栗老)의 말이 과격한 것이 아니고 사실 우리 측 친구들의 거울로 삼아 주의해야 할 일인 줄 절실히 알았다. -《우산언행록(牛山言行錄)》에 나온다.-
윤월정(尹月汀)이 조용히 말하다가 하서 선생에 이르러서는 일어나서 말하기를, “숙헌이 생시에 매양 하서의 출처가 바른 것은 우리나라에서 그와 비할 이가 없다고 칭찬하였다.” 하였다. -오희길(吳希吉)이 기록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행적(行蹟)에 나온다.-
율곡 선생이 화담(花潭)을 논평하기를, “기(氣)를 이(理)로 인정하는 병통은 있었지만 《대학》 소주(小註)에 나오는 진북계(陳北溪)의 설에 대한 말에 대해서는 반박하여 말하기를, ‘이와 기가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나 혼합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였다. 또 들으니 일찍이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의논하면서 ‘묘하게 합쳐져 엉긴다[妙合而凝]’는 말이 주자의 ‘한데 뭉쳐서 틈이 없다[渾融無閒]’는 말만 못하다. 후세에는 반드시 그 해석을 알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기암(畸菴) 정홍명(鄭弘溟)의 잡록(雜錄)에 나온다.-
이숙헌을 방문하였는데 숙헌이 먼저 시사에 대하여 말하면서 탄식하고, 그다음에 이와 기는 일본(一本)이라는 것, 마음이 성정(性情)을 통솔한다는 것, 명덕(明德)은 본심이고 양지(良知)는 천리(天理)가 아니라는 것 및 《곤지기(困知記)》를 가볍게 볼 수 없다는 등의 설명을 하였는데 매우 온당하고 흡족하였다. -허봉(許篈)의 《조천록(朝天錄)》에 나온다.-
계유년(1573, 선조6) 9월 21일에 이이가 직제학으로 부름을 받아 입시하였다가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의 병으로 오랫동안 물러가 있다가 오늘 옥음(玉音)을 엎드려 들으니 음성이 매우 잘 통하지 못하니 어찌하여 그러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들으니 전하께서 여색을 경계하라는 말을 잘 들으려 하시지 않는다 하는데, 이러시는 성상의 생각이 계신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각건대 반드시 성상께서 자질이 원래 청명하고 욕심이 적어 다른 사람이 말해 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남들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바로 알지 못하고 망녕된 말을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인가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없다면 더욱 힘써야 되고 그런 말을 듣기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上)께서 이르기를, “그대가 일찍이 상소할 때에도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말소리란 본래 서로 같지 않은 것으로 나의 말소리는 원래 이러하니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에 신이 일찍이 모셨는데 그때는 옥음(玉音)이 낭랑하여 일찍이 이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이 감히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가 보통 계사(啓辭)할 때에는 성상의 말씨가 매우 쾌활하고 정직하였는데 이때는 왕의 안색이 상당히 거슬리는 것으로 보였다. -김우옹(金宇顒)의 《경연강의(經筵講義)》에 나온다. 이하 같다.-
하루는 이이가 정제엄숙(整齊嚴肅)의 뜻을 논함으로 인하여 정사(政事)의 잘잘못에 대한 일을 아뢰기를, “경(敬)을 하여 안을 곧게 하고, 또 의(義)를 하여 밖의 행동을 방정하게 하여야 한다.” 하니, 김우옹(金宇顒)이 말하기를, “참으로 경을 하여 안을 바르게 한다면 의를 하여 밖의 행동을 방정하게 하는 것은 그 가운데 있다.” 하였다. 이이가 또 말하기를, “기묘년의 일은 여러 사람이 근본된 일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형식적인 말단에만 종사하였기 때문에 실패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일을 하는 데에 급하여 모든 아뢰는 것이 대부분 일을 가지고 왕을 위해서 부연하여 주달하였으므로, 김우옹이 이이에게 말하기를, “사람에 비유한다면 어찌 음식이 신체와 생명에 관계됨을 알지 못하겠는가만, 비위(脾胃)가 상하고 약하여 음식을 목으로 넘기지 못하는 것과 같소. 그런데 지금 비위에 대하여 약을 써서 원기를 도와 음식이 생각나도록 하지 않고, 다만 밥이나 고기를 가져다 강권한다면 사리에 통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소.”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참으로 약을 써서 먼저 비위를 치료하는 것이 마땅하오. 그러나 음식이 신체와 생명에 관계되는 것을 전혀 모른다면 또한 약을 먹어 병을 치료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요.” 하였다.
10월 26일 조강(朝講)에 입시하여 유윤궁선견(惟尹躬先見)에서부터 사씨지언 충신유종지설(史氏之言忠信有終之說)까지 진강(進講)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옛날에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충과 신으로 서로 함께 하여 인정과 뜻이 서로 믿음직했기 때문에 나중까지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노수신(盧守愼)이 말하기를, “이이의 말은 별다른 해석이요, 《서경(書經)》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였다. 김우옹이 말하기를, “충(忠)과 신(信)이라는 것은 성(誠)입니다. 간직한 것이 다만 한 개의 성실한 마음이기 때문에 일마다 끝마침이 있는 것인데 그 중요한 것은 방구석에 혼자 있을 때 본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이의 말과 같이 군신이 서로 주고받는 충과 신 역시 이 가운데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요 두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태갑(太甲)이 이윤(伊尹)을 믿고 마음대로 방종하였기 때문에 이윤이 이렇게 말한 것이니 그것은 태갑의 몸을 바루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태갑이 이윤을 믿고 마음대로 방종한 것은 원래 좋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윤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알았으니, 역시 사람을 알아보는 밝은 식견이 있었고 그 밝은 식견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허물을 고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노진(盧稹)과 김성일(金誠一)이 이황(李滉)에게 시호를 하사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이이가 말하기를, “정몽주(鄭夢周)가 유학을 주창한 후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 같은 이가 도학(道學)의 인물이지만 역시 그 용공(用功)의 자세한 것을 몰랐으며, 그 밖에는 학문한다고 하는 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모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황 같은 이는, 그 언론의 풍지(風旨)를 들으면 참으로 옛사람의 학문을 아는 이로서 진실로 그에 비할 이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천품과 정신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한 것 같으나 전하께서는 이것으로 하여 작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학문의 공부가 그 기질을 변화시키는 데에 이르고 옛사람의 학문에 마음을 기울여 시종 한결같이 공부를 꾸준히 계속하여 조예가 날로 깊어졌으니 그 점을 작게 여길 수 없을까 합니다.” 하였다. 김우옹이 군액(軍額)이 부족한 폐단에 대해 언급하자, 이이가 말하기를, “군액을 감하여 백성의 괴로움을 풀어 준다면 백성이 생업에 안정하여 번성할 길이 있을 것이오니, 백성이 점차 생업을 회복한 연후에 점점 다시 옛날 군액수를 회복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때 군사를 소집하는 사자들이 위의 눈치를 살피고 뜻을 맞추어 각박하고 급속히 일을 진행하기에 힘쓰므로, 과장이 많아 지방이 소란하였기 때문에 언급하였다.- 이이 등이 계속하여 말하기를, “나라에서 사천(私賤)에 대하여 법을 만들 때에 유독 치우치게 하여,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고 또 아버지를 따르게 하니, 거기에 따르는 폐단으로 양민이 모두 사가(私家)에 들어가게 되고, 군인이 날로 적어졌습니다.”고 하니 상께서 이르기를, “이 법은 참으로 온당치 않으니 변통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였다. 노수신이, 천재지변이 있음으로 인하여 관직을 해임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께서 이르기를, “경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오늘날 여러 신하 중에서 경보다 나은 이가 없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천재지변으로 삼정승을 해임시키는 것은 이치에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임금이 재변을 만나면 죄를 자신에 돌려 책망하고 몸가짐을 조심하여 행실을 닦아야 합니다. 어찌 죄를 대신에게 돌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갑술년(1574, 선조7) 1월 27일 주강(晝講)에 김우옹이 말하기를, “크게 도가 없는 세상에는 재변이 없다고 한 것은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항상 그렇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그 후 승지 이이가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여기에 대하여 또 물으니 이이가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 사이에는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음란한 사람에게 재앙을 주는 이치가 있을 뿐입니다. 크게 도가 없는 세상에는 재변이 없다는 것은 그 설이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2월 1일 주강에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이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한 것은 물격 지지(物格知至)하였기 때문이요. ‘한결같다, 왕의 마음이여’한 것은 뜻이 성실하고 마음이 바르기 때문입니다.” 하니 김우옹이 이이와 함께 아뢰기를, “이 말이 옳지 않습니다. 격치 성정(格致誠正)의 공부가 있기 때문에 그 말이 크고, 그 말이 크기 때문에 그 마음의 한결같음을 아는 것이니, 말과 마음을 나누어 둘로 할 수 없습니다. 말은 마음의 소리로 마음이 한결같으면 말이 큰 것은 형상과 그림자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말에서 얻지 못하면 마음에 구하지 말라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것은 말에서 깨닫지 못함이 있는 것은 바로 마음에 밝지 못한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우옹에게 이르기를, “나 같은 사람도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성상의 자질(資質)이 고명하고 초월하시니 마음먹고 뜻을 독실히 하신다면 어찌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이이가 아뢰기를, “우옹의 말이 사실이지만 말이 너무 지나칩니다. 전하께서 변함없이 덕을 지니고 계시니 훌륭한 정치를 할 만 한 자질이 있습니다. 만일 더욱 힘쓰신다면 어찌 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을해년(1575) 6월 24일 소대(召對) 때에 이이가 아뢰기를, “근래 대간(臺諫)이 말하는 것을 따르지 않으시니 인심이 상당히 풀어집니다.” 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불민하기 때문이다. 다만 당우(唐虞) 시대에도 신하의 말을 어기는 일이 있었으니 어찌 모두 응낙만 하겠는가.”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이것은 원래 그렇습니다. 다만 따를 만한 일이라면 빨리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간의 말도 그릇된 것이 있다면 또한 반박하여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황해도에 있을 때 대간이 최세해(崔世瀣)를 논박하여 여러 말을 한 것에 대해 말하고서 대간의 말이 언제나 그렇다고 하여 믿지 못할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이가 또 아뢰기를, “지평 민순(閔純)이 벼슬을 내놓고 전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진 이가 나라를 버리고 가니 이것은 주의하고 반성하여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상께서 놀라며 이르기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하는 일이다. 어째서 갔느냐.”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세상 풍습이 도도(滔滔)하여 좀 처신을 곧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괴상한 무리들이 모여 욕질하여 그 몸을 용납받지 못하게 하니 이래서 민순이 떠나간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시속으로는 무엇을 해 볼 희망이 결코 없으니, 만일 전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여 하지 않는다면 어진 사람이 누구를 믿겠습니까. 또 지금 시속에 지성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이 극히 적으니 나라의 일은 곧 임금의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 혼자만 그 근심을 도맡아 할 수 없는 일이니, 어진 이를 얻어서 함께 근심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흰 베로 의복과 갓을 만들어 착용한 일 또한 많은 이가 그릇된 일이라 말한다고 하니, 인심이 이러하니 무엇을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이 한 가지 일만이 아니라 인심과 세상 풍습이 좋지 않은 지 오랩니다. 전하께서 만일 일을 하려고 한다면 인심이 반드시 기뻐하지 않고 저해하려는 자가 있을 것이니, 오직 상의 마음이 굳게 정해져 변하지 않는다면 어찌 성사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유능한 인물에 대한 초천(超遷)과 구임(久任)하는 법에 대해 아뢰고 또 말하기를, “지금 민생이 초췌하고 고혈(膏血)이 이미 고갈하였습니다. 조정에서 구원하려 해도 은택이 아래에 미치지 않고 항간에서 근심하는 소리가 전과 다름이 없으며, 서민들은 조정의 청명함을 알지 못합니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위해서인데, 민생이 이러하니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인심이 바르지 못하고 관리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법령이 행해지지 않으니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상께서, 성심으로 백성을 위하여 근본부터 바로잡아 기강을 세운 후에야만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우옹이 아뢰기를, “상께서 오직 왕도에 마음을 두고 백성을 생각한다면,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 보좌하고 성덕(聖德)이 높아져서 기강을 세울 수 있고, 큰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이가 아뢰기를, “밝은 임금이 좋은 정치를 하려면, 당시의 제일가는 인사들을 근본되는 곳에 모으고, 평상시 규정에 구애할 것 없이 과거 출신이 아닌 민순(閔純) 같은 이들도 모두 한관(閒官)으로 경연관(經筵官)을 겸대하여 출입하여 논란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또 경연만이 아니라 수시로 불러 보아, 임금과 신하 사이를 집안사람이나 부자간처럼 되게 하여 정의가 서로 접해져야만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경연의 직임을 겸대하게 하는 데에 대하여는, 혹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없는 일이라 하여 어렵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비변사(備邊司)와 특진관(特進官)도 모두 《대전》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께서, “경연 이외에 어찌하면 자주 여러 신하들을 만나 볼 수 있겠는가?” 하시니, 이이가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승지는 항상 들어와 일을 아뢰었으며, 시종하는 관원도 무시로 독대(獨對)하여 의심나는 일을 논란하였습니다. 성종조와 중종조에서 모두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대신과 옥당으로 입직하는 경우라면 내가 자주 불러 보겠지만, 승지가 일을 아뢰는 일은 어려울 것 같다.” 하였다. 상께서 이이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무슨 글을 읽었으며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슨 글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과거를 준비할 때에 읽은 것은 안 읽은 것이나 같습니다. 학문에 뜻을 두면서 《소학》부터 읽어 《대학》ㆍ《논어》ㆍ《맹자》에 이르렀는데, 아직 《중용》까지는 못 읽었습니다. 다 읽고서 다시 시작하여 반복하였으나 아직도 통달하여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육경(六經)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사서(四書) 중에 무슨 글을 제일 좋아하는가?” 하시니, 이이가 아뢰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습니다. 여가가 있으면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 등의 글도 읽었습니다. 다만 질병과 공무로 인하여 많이는 전심하여 읽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소싯적에 글짓기도 연습하였는가. 그대의 문장을 보니 매우 좋은데 역시 일찍이 배웠던 것인가?”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신이 소싯적부터 문장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 소싯적에는 선학(禪學)을 상당히 좋아하여 여러 불경을 보았는데 착실한 곳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 우리 유학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것도 문장을 하기 위하여 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문장을 짓는 데에 대강 문리를 이룬 것 역시 특별히 공부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찍이 한문(韓文)과 《고문진보(古文眞寶)》 및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의 대문(大文)을 읽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신사년(1581) 2월 10일 조강에 《춘추(春秋)》의 양공(襄公)이 함께 제(齊)나라를 포위한 대목부터 《좌전(左傳)》의 숙사위(夙沙衞)가 곽최(郭最)를 함몰시킨 대목까지 강하였다. 신이 말하기를, “위(衞)가 작은 원한으로 큰일을 그르쳤으니 참으로 소인입니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소인의 마음은 다만 사사로운 자기 몸만 있는 줄 알고, 국가가 있음을 알지 못하니 이래서 소인은 쓸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초나라 자경(子庚)이 정(鄭)나라를 친 대목에 이르러 이이가 말하기를, “공자 오(公子午)가 정나라를 치는 것이 불가함을 알고서도 애써 그 임금의 뜻을 좇아서 함부로 군사를 일으켜 많은 군사들을 죽였습니다. 대신으로서 이러하였으니 역시 나라를 저버린 것이 아닙니까?”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오(午)가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편안함만 생각한다는 혐의를 피하려고 군사를 출동하여 시험하였으니 이것은 자기 몸만을 생각하고 나라에 불충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가 뒤이어 나아가 아뢰기를, “임금은 반드시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어 사람들에게 나아갈 바를 알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요순이 천하 사람을 인(仁)으로 거느리자 백성이 좇아갔으며, 걸주(桀紂)가 천하 사람을 포학함으로써 거느리자 백성이 좇아갔습니다. 지금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아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상의 뜻이 향하는 바를 모르게 하여 요순이 될지 걸주가 될지를 모르니, 이래서 정치의 효과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므로 신이 아뢰기를, “옛날에 이르기를, 선하여도 상 주지 않고, 악하여도 벌을 주지 않는다면 요순의 덕이 있더라도 천하를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솔하고 천박하여 겨우 일을 할 만하게 되면 바로 분분하게 경장(更張)하자는 의논을 일으키니 상의 생각에 소요(騷擾)가 있지 않을까 염려하여 일을 해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정치를 잘해 보려는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일 전하께서 사헌부에 대답하신 말씀이 잘못되어 아랫사람들이 모두 낙심하여 일을 해 보려던 마음이 다 달아났다고들 하기에 신이 웃으면서 ‘말이라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심이 이러하니 발언을 삼가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하시니, 이이가 아뢰기를, “박민헌(朴民獻)에 대하여 논계(論啓)할 때 상교(上敎)에, ‘대신의 비밀스런 사사로운 일을 파헤치겠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어찌 그대들이 오랫동안 논란한다고 하여 그만 고칠 줄 아느냐.’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이미 온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수령(守令)에 관한 일을 말하게 되자 김수(金睟)가 아뢰기를, “암행어사는 선문(先文)이 없으면 사체(事體)에 손상이 될까 합니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수는 외방(外方)의 일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어사가 선문을 발송하고 순행한다면 불법을 살필 이치가 만무하니, 반드시 미행(微行)으로 민간에 출입해야 합니다.” 하였다.


 

[주D-001]공문중(孔文仲) : 촉당(蜀黨)의 한 사람으로 정자(程子)를 지적하여 위학(僞學)을 하는 간사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희령(熙寧) 초에 왕안석(王安石)의 이재(理財)와 훈병(訓兵) 법에 대하여 논하다가 파직당하였다.
[주D-002]여식(汝式) : 조헌(趙憲)의 자이다. 율곡 문하생인데,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다가 금산(錦山)에서 전사했다.
[주D-003]상앙(商鞅) …… 채경(蔡京) : 상앙은 전국 시대 위(衛)나라 사람으로, 형명학(刑名學)을 좋아하여 진 효공(秦孝公)을 도와 법령을 고쳐 정전법(井田法)을 없애고 부세법(賦稅法)을 개혁하였다. 장탕은 한(漢)나라 사람으로 무제(武帝) 때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모든 율령(律令)을 제정하였다. 조우도 한나라 사람으로, 무제 때 도필리(刀筆吏)에서 어사대부가 되어 장탕과 함께 율령을 논정하였다. 채경은 송(宋)나라 사람으로, 휘종(徽宗) 때 염철법(鹽鐵法)을 고쳤으며 원우제신(元祐諸臣)을 몰아내고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부활시켰다.
[주D-004]호치당(胡致堂) : 송나라 학자인 호인(胡寅)을 가리킨다. 양시(楊時)에게 종학(從學)하였다. 《宋史 卷435 胡寅傳》
[주D-005]홍치(弘治) :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이다.
[주D-006]여성(礪城) : 송익필(宋翼弼)을 가리킨다. 그의 본관이 여산인데 여성으로도 쓰기 때문에 그렇게 지칭한다.
[주D-007]성 적성(成積城)과 김 이정(金而精) : 성 적성은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지낸 성혼(成渾)이고, 이정은 퇴계의 문인인 김취려(金就礪)를 가리킨다.
[주D-008]궤연(几筵) : 죽은 사람의 영위(靈位)를 모시어 놓는 자리로 옛날의 제석(祭席)이다.
[주D-009]연제(練祭) : 소상(小祥)을 말한다. 소상에 상복을 빨아 입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D-010]초토(草土) : 거적자리와 흙 베개라는 뜻으로 거상(居喪) 중임을 이르는 말이다.
[주D-011]사실 : 백인걸(白仁傑)의 탄핵을 입은 일을 말한다.
[주D-012]허봉(許篈) : 선조(宣祖) 8년(1575)에 동서 분당이 생기자 동인(東人)의 선봉이 되었으며 뒤에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주D-013]이발(李潑) : 선조(宣祖) 때 동인(東人)의 거두로서 이이(李珥)를 좋지 않게 보았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장살(杖殺)당하였다.
[주D-014]운회(韻會) : 《고금운회(古今韻會)》의 약칭이다. 송나라 황공소(黃公紹)가 편찬하였다.
[주D-015]채절재(蔡節齋) : 송나라 학자인 채연(蔡淵)을 가리킨다. 몸소 농사지으면서 벼슬하지 않았으며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宋元學案 卷62》
[주D-016]보망장(補亡章) : 《대학(大學)》에 ‘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이 없어졌다고 하여 주자가 보충하여 넣은 장(章)을 말한다.
[주D-017]웅치(雄雉) : 《시경(詩經)》 패풍(邶風)의 웅치장을 말한다. 그 내용은 부인이 부역에 나간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작품이다.
[주D-018]허노재(許魯齋) : 원나라 학자인 허형(許衡)을 가리킨다. 주자학자(朱子學者)로서 오징(吳澄)과 함께 원나라 시대의 이대가(二大家)로 손꼽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송시열(宋時烈)이 그가 호족(胡族)인 원나라에서 벼슬하였다고 하여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시켰다.
[주D-019]축색(蓄色) : 여색을 좋아하여 첩을 두는 것을 말한다.
[주D-020]을사년(乙巳年) 일 : 인종(仁宗)의 외숙인 대윤(大尹) 윤임 일파가 제거되고, 명종의 외숙인 소윤(小尹) 윤원형 일파가 득세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명종(明宗) 즉위 초에 회재 이언적(李彥迪)은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國事)를 관장한 공으로 위사 공신(衛社功臣)에 올랐고, 퇴계는 사옹원 정(司饔院正),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 등을 역임하였다. 성현의 출처 의리로 보면 이언적이나 이황의 출처가 모두 중용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주D-021]소인 한거장(小人閑居章) : 《대학(大學)》 성의장(誠意章)을 가리킨다. 성의장 중에 소인한거(小人閑居)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D-022]주공(主公) :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로, 여기서는 황혁(黃赫)의 아버지 황정욱(黃廷彧)을 가리킨다.
[주D-023]곤지기(困知記) : 명나라 나흠순(羅欽順)이 지은 4권(卷)의 책으로, 그 내용은 대체적으로 주자학(朱子學)을 따르고 선학(禪學)을 배격하였으나 일원기론(一元氣論)을 주장하였다.
[주D-024]유윤궁선견(惟尹躬先見)에서부터 사씨지언 충신유종지설(史氏之言忠信有終之說) : 《서경(書經)》 태갑(太甲)에 나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