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의 의병활동/觀察使訒齋先生崔公墓碣銘

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 (휘 최현)

아베베1 2011. 5. 20. 16:45

 

 

 

 

 

 전주최공 문성공파 안렴사공파 (인제공 휘 현)

 관련자료 연구

 

인재집 ( 訒齋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訒齋先生文集
판심제  訒齋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78年刊
권책  原集 13卷, 別集 2卷, 拾遺, 年譜, 附錄 합 9책
행자  10행 21자
규격  22×16.2(㎝)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原集ㆍ別集 : 서울대학교 규장각, 年譜ㆍ附錄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규장각 : 古3428-682, 국립중앙도서관 : 한46-가1149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67
 저자
성명  최현(崔晛)
생년  1563년(명종 18)
몰년  1640년(인조 18)
 季昇
 訒齋
본관  全州
시호  定簡
특기사항  金誠一, 鄭逑의 門人. 李潤雨, 盧景任과 교유
 가계도
 崔致雲
 參奉
 崔深
 
 東萊鄭氏
 鄭熙佐의 女
 德陽奇氏
 敎導 奇遇의 女
 星山李氏
 秉節校尉 李智源의 女
 崔昕
 
 崔晛
 
 義城金氏
 府使 金復一의 女
 崔山輝
 府使
 朱應邦의 女
 
 昌寧曺氏
 
 載寧李氏
 
 女
 
 李景祿
 忠義衛

기사전거 : 行狀(李象靖 撰), 崔深墓碣銘(張顯光 撰, 旅軒集 卷12), 崔深言行錄(崔晛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명종 18 1563 계해 嘉靖 42 1 6월 10일, 善山府 海平縣 松山 私第에서 태어나다.
선조 3 1570 경오 隆慶 4 8 杜谷 高應陟에게 수업하다.
선조 4 1571 신미 隆慶 5 9 8월, 모친상을 당하다.
선조 8 1575 을해 萬曆 3 13 金烏書院에서 공부하다.
선조 14 1581 신사 萬曆 9 19 봄, 臨河에서 鶴峯 金誠一을 뵙고 수업을 청하다. ○ 7월, 義城金氏와 혼인하다.
선조 20 1587 정해 萬曆 15 25 2월, 부인 金氏의 상을 당하다.
선조 21 1588 무자 萬曆 16 26 3월, 生員試에 합격하다. ○ 昌寧曺氏와 혼인하다.
선조 22 1589 기축 萬曆 17 27 6월, 부친상을 당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30 봄, 金吾郞에 추천되다. ○ 여름, 왜란이 일어나자 義兵을 일으켜 盧景任을 義兵將으로 삼고 자신은 掌書가 되다. ○ 8월, 義城으로 피난하다. ○ 9월, 右巡察 鶴峯先生에게 편지를 올려 방어책을 논하다. ○ 12월, 부인 曺氏의 상을 당하다.
선조 26 1593 계사 萬曆 21 31 1월, 金谷에서 지내다. ○ 載寧李氏와 혼인하다. ○ 鶴峯先生을 곡하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32 1월, 巡察 韓孝純에게 글을 올려 善山에 屯田을 설치하도록 청하다. ○ 〈琴生異聞錄〉이 완성되다.
선조 28 1595 을미 萬曆 23 33 〈友愛箴〉을 짓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34 1월, 體察使 李元翼에게 편지를 올려 三綱九目을 진달하다.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35 1월, 體府 從事官 金涌에게 편지를 보내 山城에 木柵을 설치할 계책을 논하다. ○ 健齋 朴遂一을 哭하고 先妣 李氏를 上林에 改葬하다.
선조 31 1598 무술 萬曆 26 36 2월, 健元陵 參奉이 되다. ○ 王子師傅에 擬望되다. ○ 南還하여 九條疏를 올리다. ○ 9월, 典牲署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선조 33 1600 경자 萬曆 28 38 1월, 郭再祐에게 편지하여 방어책을 논하다.
선조 36 1603 계묘 萬曆 31 41 4월, 朝命으로 「亂中雜錄」을 撰輯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42 李彥迪을 伸辨하는 疏를 올리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44 9월, 文科에 丙科로 합격하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45 3월, 薦擧로 藝文館 檢閱에 제수되다. ○ 7월,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다. ○ 10월, 「杜谷先生遺集」을 찬수하다.
선조 41 1608 무신 萬曆 36 46 2월, 待敎가 되다. ○ 3월, 說書가 되다. ○ 5월, 정언이 되다. ○ 〈九知銘〉을 짓다. ○ 8월, 冬至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가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47 5월, 張顯光을 찾아 뵙고 「周易」과 「太極圖說」을 강하다. ○ 10월,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길에서 呈狀하여 체차되다. ○ 12월, 不知巖에서 泗水로 가서 寒岡先生을 뵙고 書院入享事와 喪禮諸條를 논하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48 2월, 지평이 되다. ○ 실록청 겸춘추가 되다. ○ 4월, 弘文錄에 들다. ○ 5월, 평안도 암행어사로 나가다. ○ 10월, 體府 從事官이 되다. ○ 12월, 舟師勾管司 從事官에 차임되다.
광해군 3 1611 신해 萬曆 39 49 2월, 辭朝하고 南下하다. ○ 洗兵館에서 統制使 李慶濬과 兵事를 논하다. ○ 6월, 玉山에 이르러 晦齋先生 사당을 배알하다. ○ 11월, 鏡城 判官에 제수되었으나 곧 체직되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50 2월, 실록청 겸춘추가 되다. ○ 3월, 舟師 從事官으로서 兩南 巡撫御史를 겸하다. ○ 10월, 수찬이 되다. ○ 11월, 鳥嶺 主屹山城 巡審御史가 되어 聞慶에 내려가 山城의 형세를 살피다. ○ 부교리가 되다. 비변사의 鳥銃廳 都廳을 겸하다.
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51 3월, 시강원 문학이 되다. ○ 4월, 정언이 되다. ○ 5월, 피혐하고 그날로 富平에 우거하다. ○ 7월, 고향으로 돌아오다. ○ 12월, 金溪에 있으면서 「鶴峯先生言行錄」을 찬집하다.
광해군 6 1614 갑인 萬曆 42 52 1월, 金溪에 머물면서 「鶴峯先生遺集」을 校讎하다. ○ 11월, 「冶隱先生行錄」 및 「杜谷先生遺集」을 校讎하다.
광해군 7 1615 을묘 萬曆 43 53 9월, 부인 李氏의 상을 당하다.
광해군 8 1616 병진 萬曆 44 54 1월, 尋源에 가서 머물다. ○ 9월, 還鄕하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56 〈一善誌〉를 완성하다.
광해군 11 1619 기미 萬曆 47 57 4월, 寒岡을 뵙고 鶴峯 行狀을 考訂하다. ○ 7월, 靑松 椒井에서 無語坪으로 돌아오다.
광해군 12 1620 경신 泰昌 1 58 1월, 寒岡을 哭하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61 3월, 反正이 일어난 뒤 수찬이 되다. ○ 8월, 응교가 되다. 이후 司藝, 사도시 정, 사인, 집의, 응교, 사성, 보덕을 역임하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62 1월, 體府 從事官이 되다. ○ 지제교, 춘추관 편수관이 되다. ○ 사인이 되다. ○ 督戰御史가 되다. ○ 7월, 병조 참지를 거쳐 동부승지가 되다. ○ 10월, 대사간이 되다. ○ 11월, 병조 참지가 되다. ○ 12월, 呈辭하고 還鄕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63 봄, 형조 참의를 거쳐 예조 참의, 대사성, 부제학이 되다. 八務箚를 條陳하다. ○ 대사성 겸 승문원 부제조가 되다.
인조 4 1626 병인 天啓 6 64 2월,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가 되다. ○ 延慰使가 되어 定州에 가다. ○ 8월, 강원도 관찰사가 되다.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65 오랑캐가 平山에 들어오자 漢江을 防守하고 道內에 檄文을 띄워 義兵을 일으키다. ○ 龍骨山城의 義兵將 鄭鳳壽에게 軍需를 보내어 돕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66 會寧에 유배되었다가 특명으로 放還되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68 겨울, 무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으나, 곧 특명으로 석방되다.
인조 10 1632 임신 崇禎 5 70 「東國通鑑」을 저술하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74 12월, 淸兵이 쳐들어오자 고향에서 義兵을 일으키다.
인조 15 1637 정축 崇禎 10 75 1월, 軍旅를 정돈하여 聞慶 杜谷에 진을 치다. ○ 3월, 아들 崔山輝를 哭하다. 張顯光을 곡하다.
인조 18 1640 경진 崇禎 13 78 6월 4일, 金山 鳳溪의 別墅에서 卒하다. ○ 8월, 예조 판서에 贈職되다. ○ 9월, 善山 默語坪으로 返葬되다.
숙종 33 1707 정해 康熙 46 - 4월, 鄕人이 松山에 社를 세워 位版을 봉안하다.
영조 52 1776 병신 乾隆 41 - 9월, 松山社를 昌林洞으로 移建하다. ○ 李象靖이 行狀을 짓다.
정조 2 1778 무술 乾隆 43 - 6대손 崔光璧이 三治堂에서 문집을 간행하다. (崔光璧의 後識)
정조 9 1785 을사 乾隆 50 - 6대손 崔光璧이 續集을 간행하다. (李獻慶의 續集序)

기사전거 : 年譜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이 편찬, 간행된 경위는 6대손 崔光璧이 적은 後識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유고는 家禍로 散佚되고 또 몇 권의 手稿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에 族孫 崔象乾ㆍ崔斗南이 代를 이어 遺稿를 모았으나 책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 후 5대손 崔壽頤 등이 여러 일가에 소장되어 있던 유고를 모아 비로소 草稿를 만들어 成編하고, 權斗寅과 權斗經의 校正을 받았다. 이어 권두인에게 墓碣銘을, 권두경에게 跋文을 받았으나 서문이 없어 간행하지 못하였다. 그 시기는 權斗經의 跋文이 지어진 1718년(숙종 44)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6代孫 崔光璧을 비롯한 族人들이 재차 간행을 도모하여 財源을 마련하고, 이미 만들어진 定稿本을 바탕으로 淨寫하여 李象靖, 蔡濟恭, 丁範祖에게 질정을 받는가 하면 李象靖에게 行狀을, 蔡濟恭에게 神道碑銘과 序文을, 丁範祖에게 墓誌銘과 序文을 부탁하여 받았다. 또한 여러 族人의 집안에서 찾아낸 手本日記 등을 바탕으로 經筵講義 및 年譜를 만들고, 關西錄 1권, 逸稿 2권과 함께 李象靖과 朴孫慶에게 질정을 받았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편차를 마쳐 原集 13권, 別集 2권, 拾遺 1권, 年譜 1권, 附錄 1권 합 18권으로 만들어 1778년(정조 2)에 三治堂에서 목판으로 開刊하고 고을 士林들의 도움을 받아 4개월 만에 완성하였다. 《초간본》 「鏤板考」에 의하면 본집의 판목이 善山의 松山書院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문집 간행이 저자의 세거지인 善山의 族人들에 의해 완료된 뒤 저자가 배향된 松山書院에 판목이 보관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규장각(古3428-682),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149)에 소장되어 있는데, 규장각장본에는 年譜와 附錄이 빠져 있다.
7년 뒤인 1785년(정조 9)에는 또 崔光璧에 의해 續集이 간행되었는데, 朝天錄과 初刊에 누락되었던 詩文을 모아 7권 3책으로 만들어졌고 李獻慶이 序文을 썼다. 《속집》 권1~5는 朝天錄이고, 권6은 朝天 때의 呈文, 狀啓, 中原禁物, 書冊禁物, 中原物價, 所經路呈이며, 권7은 拾遺로 詩, 書, 序, 雜著, 祭文과 附錄이다. 이 속집은 현재 誠庵古書博物館(4-898), 계명대학교 중앙도서관(오811. 081)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78년 간행된 초간본으로, 원집과 별집은 규장각장본이고 연보와 부록은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丁範祖, 蔡濟恭 撰), 跋(權斗經 撰), 後識(崔光璧 撰), 續集序(李獻慶 撰)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原集 13권, 別集 2권 拾遺, 年譜, 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原集은 권수에 1775년에 쓴 丁範祖의 序와 1778년에 쓴 蔡濟恭의 序가 실려 있고, 이어 目錄이 있다.권1은 詩 128題와 敎文 4편이다. 詩는 크게 오언시(28), 칠언시(52), 만시(48)의 차례로 편차되어 있고, 각기 절구, 율시, 고시의 순으로 실려 있다. 여러 곳에 자세한 自序가 실려 있고, 編者註도 달려 있다. 맨 앞에 晦齋先生의 遺宅을 지나며 지은 〈澄心臺〉(1594)와 不知巖에 들러 旅軒先生을 만나 지은 〈次張旅軒韻〉(1617)을 실어 尊師의 의미를 두었다. 1608년 冬至使 書狀官 때 지은 〈過首陽山有感〉과 〈山海亭詠懷〉, 1611년 舟師 從事官으로 全州를 지나며 지은 〈威鳳寺有感〉, 1620년 西厓先生의 꿈을 꾸고 지은 〈記夢見西厓先生〉 등이 있고, 輓詩는 鄭宗溟, 鄭經世, 張顯光, 鄭逑 등에 대한 것이다. 敎文은 1610년 知製敎, 1623년 舍人, 1624년 兵曹 參知로서 지어 올린 교문들이다.권2~5는 疏, 箚子, 啓, 書啓, 狀啓이다. 疏는 1598년 고향에 물러나 있으면서 올린 〈陳時務九條疏〉 이하 15편이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맨 끝에 1624년에 逆賊의 供招에서 이름이 나왔다 하여 올린 〈兵曹參知時原情疏〉가 있다. 箚子는 交河 遷都를 반대하며 올린 4편의 玉堂箚가 앞쪽에 있고, 그 뒤로 玉堂과 司諫院 시절 올린 차가 5편이 있다. 啓는 1613년 正言 시절 올린 避嫌啓부터 1626년 承旨로서 올린 계사까지 8편이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書啓는 1608년 冬至使 書狀官으로 중국에 갔을 때 別單으로 올린 1편이다. 狀啓는 1627년 江原 監司 시절 丁卯胡亂을 당하여 올린 4편이다.권6~7 앞부분은 講義이다. 1608년(선조 41) 4월부터 5월 사이에 행한 書筵講義와 1623년(인조 1) 4월, 5월, 6월, 10월과 1624년 7월부터 9월 사이에 행한 經筵講義에 대한 일기 형식의 글이다. 이는 후손 崔光璧이 手本日記 등을 찾아 정리한 부분이다.권7~9 앞부분은 書 28편이다. 대표적인 서찰로 1592년 9월에 右巡察使 鶴峯 金誠一에게 보낸 편지와 1600년 兵使 郭再祐에게 보낸 편지가 맨 앞쪽에 편차되어 있고, 그 뒤로 다시 왜란 기간 중 金誠一, 朴晉, 韓孝純, 李元翼 등에게 보낸 편지와 1596년 이후 曺友仁, 鄭仁弘, 尹文擧, 朴惺, 金長生, 鄭經世 등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권9~13은 雜著(18), 序(4), 記(7), 跋(5), 箴(1), 銘(1), 箋(2), 祝文(2), 祭文(26), 墓碣(4), 墓誌(6), 行錄(4)이다. 雜著는 앞쪽에 1603년 亂後 事蹟을 찬집할 때 道內에 通文한 글과 1604년 善山의 月巖書院 건립을 위해 一鄕에 통문한 글, 왜란 때 開寧의 義兵을 일으키며 지은 통문이 실려 있고, 檄文, 書, 論, 呈文, 遺書 등 다양한 글이 있다. 跋은 「寒岡集」, 「杜谷集」에 대한 跋 등이며, 祭文은 丹山과 月巖書院 奉安文과 金誠一, 鄭逑, 高應陟 등에 대한 제문이다. 行錄은 先考, 杜谷 高應陟, 鶴峯 金誠一의 言行錄 등이다.別集은 2권으로, 앞에 目錄이 있다.권1은 關西錄이다. 1610년(광해군 2) 平安道 暗行御史 시절 지은 狀啓, 書啓 등을 모아 놓은 것이다. 권2는 書啓와 狀啓이다. 원집에서 누락되었던 3편을 실어 놓았는데, 1612년 巡審御史로서 赤裳山城을 살피고 나서 올린 書啓, 1608년 冬至使 書狀官으로 갔을 때와 1624년 李适의 난을 평정하고 올린 狀啓이다.拾遺는 원집과 별집에 빠진 글들을 다시 모은 것인데, 앞에 目錄이 달려 있고 詩 3수, 書 2편, 事蹟이 실려 있다. 〈嘲鄭仁弘〉 詩와 〈答鄭仁弘書〉 등 鄭仁弘을 배척하였음을 나타내는 글과 〈三仁事蹟〉으로 籠巖 金澍, 丹溪 河緯地, 耕隱 李孟專 등 月巖書院에 봉안된 세 선생의 事蹟이다.끝에 1718년 權斗經이 지은 跋과 1778년 崔光璧이 初刊 때 지은 後識가 있다.그 뒤에 年譜와 附錄으로 李象靖이 지은 行狀(1776), 權斗寅이 지은 墓碣銘(1716), 蔡濟恭이 지은 神道碑銘(1778), 丁範祖가 지은 墓誌銘(1775), 기타 仁祖의 賜祭文, 祭文, 挽詞가 실려 있다.

필자 : 金圻彬

 

 

 

訒齋先生文集年譜
 [年譜]
訒齋先生年譜 a_067_495a


皇明世宗皇帝嘉靖四十二年 明宗大王十八年 癸亥六月初十日丙辰。 子時 先生生于善山府海平縣之松山第。 在縣南二里○先生之先。全州人也。高祖承旨公以比安縣監。聘海平金氏。仍家焉。
四十三年甲子 先生二歲
四十四年乙丑 先生三歲
四十五年丙寅 先生四歲
穆宗皇帝隆慶元年丁卯 先生五歲
二年 宣祖大王元年 戊辰 先生六歲
三年己巳 先生七歲
067_495b四年庚午 先生八歲
受業於杜谷高先生 力學不倦。嘗以雨夜明燈命題。先生應聲對曰。燈前堯舜日。窓外戰國風。杜谷先生大奇之。稱以遠到。
五年辛未 先生九歲
八月。丁內艱。 執喪如成人。參贊公尤加愛重曰。吾家其不替矣。
六年壬申 先生十歲
神宗皇帝萬曆元年癸酉 先生十一歲
二年甲戌 先生十二歲
三年乙亥 先生十三歲
肄業於金烏書院 方伯發策。問以性理。先生一揮而篇已就。及課次。先生居首。
067_495c四年丙子 先生十四歲
五年丁丑 先生十五歲
六年戊寅 先生十六歲
七年己卯 先生十七歲
八年庚辰 先生十八歲
九年辛巳 先生十九歲
春。拜鶴峯金先生于臨河。仍請受業。 先生謂從姪眞寶公山立曰。居是邦。事其賢大夫。禮也。鶴峯先生。今之賢大夫。同道而不得見。可愧也。白公見龍適在座曰。汝欲見金某乎。此我同門友也。目今居廬于花山之臨河縣。士子之負笈往從者。皆閉門而拒之。先生曰。奈何。白公曰。第躡我後。先生共白公至臨河。投拜于廬所。敷衽而前曰。蒙學小生。無所依歸。獲拜先生。願承敎誨。鶴峯067_495d先生曰。南州賢士。不爲不多。子苟誠矣。何患無師。哀疚草土。非講學討論之時。先生曰。嚴不敢更請。願在別齋隨子弟學焉。鶴峯先生曰。癡劣輩不可爲益友。齋舍隘陋。難留遠人。奈何。伯氏藥峯先生曰。此人雖少。以是心來。姑留以答其意可也。遂處齋舍。與子弟朝夕侍見數月。益聞所不聞。乃知先生之學踐履克治。鞭辟近裏。問人不問其才而問其行。勸人不先其文而先其實。嘗謂先生曰。資質旣美。前程又遠。子勉哉。先生對曰。質鈍才短。恐朽木之難雕也。鶴峯先生曰。人患立志不誠。何患才不足乎。有才不免爲小人。無才不妨爲君子。在所學之爲己爲人耳。又曰。善必積而後成。有一善自足。則是驕其善也。惡雖小而可懼。有一惡自恕。則是長其惡也。又曰。涵養克治之功不力。而欲一蹴以到者。學者之通患也。比如養苗者慇懃培植。成熟然後可以供粢盛。去草者朝暮鋤治。翦除根條。然後不得害我嘉禾。忘其田而不耘。與助之長而揠苗者其心雖異。而爲害則一也。又曰。毋自欺三字。須終身佩服爲善。去惡一有不誠。則皆自欺也。曰。善惡何以實見得。曰。義利公私之分。不可不嚴。毫忽之微。遠於千里。在學而明之耳。曰。學則何先。曰。067_496a善哉問。學不在章句文詞之間。只向日用事物上求之。所謂事上學也。其本在於主忠信先孝悌。而其要只在收放心。自灑掃應對。至修齊治平。其節目次第工夫先後。如示諸掌。在乎循序漸進。深玩實體而已。七月。聘夫人義城金氏。 府使復一女。鶴峯先生姪女。時夫人從內舅草澗權公文海于公州任所。
十年壬午 先生二十歲
哭伯氏學生公
十一年癸未 先生二十一歲
十二年甲申 先生二十二歲
十三年乙酉 先生二十三歲
八月。子山輝生。
067_496b十四年丙戌 先生二十四歲
十五年丁亥 先生二十五歲
二月。哭夫人金氏。○秋。赴榮川試發解。○十二月。讀書于桐華寺。 寺在公山。時草澗權公莅大丘府。先生往拜。仍留棲。
十六年戊子 先生二十六歲
三月。中生員一等第二人。 先生居第一。考官以爲鄕人。置第二。聘昌寧曹氏。 年月無可據。而今按草澗權公日記。語及參贊公襄禮。以爲初卜於己丑冬。以內室遘癘。不克葬云。內室。指曹夫人而言也。據此。聘禮在先生丁憂前。故第附于此。
十七年己丑 先生二十七歲
六月。丁參贊公憂。
067_496c十八年庚寅 先生二十八歲
三月四日。行參贊公襄禮。 以癘退行故也○旅軒張先生銘其墓。
十九年辛卯 先生二十九歲
二十年壬辰 先生三十歲
春。被金吾郞薦。 西厓柳先生時在相位。抵書于吏曹參議曰。金吾郞有闕云。崔生晛。政合薦擬。可一言於判相云云。而書中無年月可考。未知薦在何時。然先生筮仕在癸巳。恐是薦在亂前。未及擧行。而始擬於翌年爾。夏。島夷入寇。連陷三都。大駕播遷龍灣。先生與一鄕同志倡起義旅。推盧公景任爲義兵將。朴公遂一爲副將。先生爲掌書。 有鄕兵約束文及通開寧義兵文 八月。避亂寓義城申姨兄仡家。○與兵使朴晉書。請067_496d先討豐山賊。○九月。上右巡察鶴峯先生書。論禦敵。○十月。爲善山鄕兵。呈左巡察韓孝純書。乞軍器。○十二月。與韓巡察書。論軍機。○哭曹夫人
二十一年癸巳 先生三十一歲
正月。在金谷。上鶴峯先生書。論軍機。○聘夫人載寧李氏。 設紙榜告由 三月。除軍資監參奉。不就。○四月。哭鶴峯先生。 有祭文 自義城轉寓寧海。
二十二年甲午 先生三十二歲
正月。呈韓巡察書。請設善山屯田。 是時先生在上枝。與金錫良同呈。
二月。還海平故里。祭先考妣墓。○琴生異聞錄成 此乃067_497a先生寓言。而發揮鄕賢事蹟者也。作於辛卯。失於亂中。甲午。因健齋朴公得本草。乃更輯成。蒼石李公跋。
二十三年乙未 先生三十三歲
著友愛箴 時在寧海。有人兄弟爭訟大鬩。病中書此示之。其人戚然心動。歸而相責。遂止其訟。
二十四年丙申 先生三十四歲
正月。上都體察使完平李相公九目書。 書見本集。李公答書有曰。處野憂國。陳書屢百言。極可奬嘆。二月。著論山城形勢郡縣合幷之宜。○四月。浴平海溫泉。 調理于白巖寺。時久旱。太守尹悅求文於先生以祭。翌日大雨。
二十五年丁酉 先生三十五歲
正月。與體府從事官金雲川涌書。論山城設柵便民之策。○自寧海還海平見諸族。訪朴健齋遂一及張旅軒。067_497b因論避亂之策。○二月。奠梧洞先妣墓。因向靑松。○訪朴大菴惺于大穴。因登周王山。歷覽形勝。○來寓寧海東面內甲谷。 從事農畝。日以爲常。十月。哭朴健齋。 有祭文 改葬先妣李氏于上林。○移寓眞寶論谷。
二十六年戊戌 先生三十六歲
二月。除健元陵參奉。肅命。 西厓先生送人勞問 拜東岡金先生于旅邸。○擬入王子師傅望。 按日記。金參議昌遠言政事時。上問有學識否。人物何如。對曰。李德馨爲判書時所薦。故擬望矣。八月。南還。上九條疏。○九月。除典牲署參奉。不就。○十一月。觀望洋亭。訪忘憂堂郭公寓居。
067_497c二十七年己亥 先生三十七歲
正月。送別忘憂堂。 聞郭公挈家還鄕。要路相敍。
二十八年庚子 先生三十八歲
正月。與郭兵使再祐書。論禦敵。○四月。改題廟主。 兵亂中遺失廟主。至是還故里。改題有祝文。
二十九年辛丑 先生三十九歲
三十年壬寅 先生四十歲
三十一年癸卯 先生四十一歲
四月。以朝命撰輯亂中雜錄。 時完平李公以亂後事蹟撰輯事。陳于榻前。道伯因朝令差出左右道都廳及列邑有司。先生爲右道都廳。宋進士遠器爲左道都廳。
067_497d三十二年甲辰 先生四十二歲
四月。哭東岡金先生。 先生與旅軒張先生約遊伽倻山。入哭東岡先生。轉拜寒岡鄭先生。五月。以撰輯事。通告道內。○六月。哭從姪山立。○上伸辨晦齋李先生疏。
三十三年乙巳 先生四十三歲
酬詩諷鄭仁弘。 先生始與仁弘相從。見其名譽日盛。作此以諷之。詩曰。世事升沈古到今。春榮秋索理相尋。靑山獨立雲來往。莫把浮名攪此心。○按先生答仁弘丁未書。有曰。三四年來。賤跡絶不近門屛。蓋自甲辰乙巳年間。斷絶尋問。而此詩有規諷戒切之意。則已於是時。見其心術之微。而仍與之漸相疏絶也。此詩之作。不出兩年。兹附于此。
三十四年丙午 先生四十四歲
067_498a七月。中增廣,東堂,鄕解 三場。居首 九月。中文科丙科第四人。
三十五年丁未 先生四十五歲
二月。以翰苑指揮。取才于議政府 講左傳 。三月。薦授藝文館檢閱。○四月。署經入直。○內賜生薑一封。感恩作詩。 詩曰。黃金芽嫩犀角長。去穢通神孔所嘗。謾嚼天香薰入骨。顧何才德荷龍光。答書鄭仁弘辨斥誣賢事。 先生嘗與人語及南冥先生。而仁弘聞之。以爲詆毀南冥。先自抵書。張皇辭說。侵逼退溪先生。故先生據理辨斥。而極言各尊所聞之意以答之。七月。上疏南還。 時首相柳永慶當國用事。先生入史院。直書時事。有一臺官言于首相。欲擊去之。首相曰。雖欲攻之。史草宣泄之罪。誰使當之。言者遂止。又有一名官言于吏判崔天健。亦如之。崔曰。此人與我有同年相識之分。自吾入東銓。同在藥房。而未嘗私相求見。與人言。直擧過失。其心之公正可知。新進067_498b之人見聞未廣。褒貶之際。未盡其實則或有之。至於黨南而攻北。必無是理。銓郞成俊耇亦語其儕類曰。吾輩之薦此人。乃公論。非有私於彼也。彼之直書不諱。是亦公道也。且公等誤矣。若以直書而去史官。則何處盡得曲筆之史官乎。自是一隊紛紜者少止。然其猜嫌未釋也。先生不欲苟容。卽呈辭棄歸。八月旣望。會張旅軒泛舟于鯉埋淵。○往崇巖修史○有旨催促還仕。 還家祗受 九月。修葺松岡書亭。○又上桃李寺修史○十月。又有旨促還。 還家祗受 撰修杜谷先生遺集。○十二月。內賜椒丹木新曆三物。 在家祗受
三十六年戊申 先生四十六歲
正月。遞檢閱。 以不趁還朝論遞 二月初一日。宣祖大王昇遐。赴哭闕下。○光海卽位。除藝文館待敎。○三月。067_498c拜侍講院說書。 自四月初五日至五月二十五日。連入書筵。有講義。五月。除司諫院正言。○作九知銘○八月。以冬至使書狀官赴京。○九月初八日壬辰。到義州。以銀禁變通事封啓。○癸巳。渡鴨江。○十月十六日庚午。到山海關。 有詩二律 甲戌。過首陽山。謁夷齊廟。 有感詠二律曰。孤竹千年廟。荒城古渡濱。天長名不朽。地老像猶新。大曜輝黃道。淸霜映碧旻。誰能繪日月。鐫刻莫頻頻。一律載原集。癸未。入玉河館。○十一月初四日丁亥。詣闕行朝見禮。○己亥。詣闕。隨參冬至賀禮。○十二月十九日壬申。詣闕祗受冬至頒賞。 衣一表裏。靑絹二段。紅絹二段。黃紗二段。纁紗二段。戊寅。受勑旨辭朝。
067_498d三十七年 光海元年 己酉 先生四十七歲
正月十八日辛丑。留玉河館。謁文廟。○癸卯。皇帝特賜銀子,大學衍義,昭代典則。是日發行向通川。○二月初一日癸丑。到永平。望哭大行大王初朞。○戊辰。登十三山。 有詩一律 辛巳。到三流河。 有詩一律 三月二十日辛丑。復命。旋被拿推。卽蒙宥。 以勑書中權署國事未及改正事有臺論。與上副使同被拿推原情後蒙放。四月。還鄕。○五月。往拜張旅軒于院堂。講周易太極圖說。○又會旅軒于崇巖講易○九月。游金烏山。○十月。拜司諫院正言。在道呈遞。○十二月。自不知巖轉往泗水。拜寒岡先生。論書院入067_499a享事及喪禮諸條。 日記略曰。陪話至夜。見朝報數三條。因問曰。移御新宮。臺諫必至於啓請。何如。先生微哂曰。臺論如是。草野何敢議朝廷事乎。余因稟吾鄕書院事曰。初建冶隱書院于金烏山下。今以地勢不便。移卜洛江之濱。請額之際。瞢然啓達。以金烏賜額書院。爲冶隱刱建。而以佔畢齋,新堂,松堂幷祀。或言冶隱自稱金烏山人。院號金烏無妨。此議如何。先生曰。今旣移設洛濱。號以金烏。未穩。且幷祀三賢。而獨稱冶隱之號。亦未安。聞善山有十賢之號。可得聞耶。對曰。前者四先生外。以忠節稱者有金判書澍,李正言孟專,河參判緯地。以學問稱者有金司藝淑滋,金眞樂堂就成,朴龍巖雲耳。先生曰。多乎哉。善山之忠賢也。余曰。或以爲鄕賢宜幷入書院。或以爲四先生旣入書院。其他鄕賢。宜別立廟。何說爲是。先生曰。旣無聞見之詳。又乏可考之事。吾豈敢議爲。必有行狀碑碣等可記者。願見其書。余曰。從當書進。夜深退宿。翌朝入謁。問喪禮數條。日晩辭出。
三十八年庚戌 先生四十八歲
067_499b正月。赴宣祖大王再朞哭班。○二月。拜司憲府持平。○三月。拜實錄廳兼春秋。○製京畿監司尹昉敎書○四月。製中宮殿賀文。○參試增廣,東堂會試。 取金搢等三十三人 入弘文錄。○五月。以持平參世子冠禮。因上疏極陳輔養講學之方。○十八日。以平安道暗行御史下封書。受命西征。 有關西錄 八月。復命。○九月。又拜實錄廳兼春秋。○十月。爲體府從事官。 都體察使李公恒福,副體察使黃愼啓請差下。十二月。遞兼春秋。○差舟師句管司從事官。備邊司啓曰。舟師句管司堂上張晩從事官一員。稱以司郞廳。爲先下送事。入啓蒙允。卽今春節已迫。召集浦邊流民。設屯耕農。且審防汛形止。一日爲急。今方事目磨鍊。刻日下送矣。第念此事非諳委南邊事067_499c情。誠於任事者。蓋難責以成功。而措置號令之際。或不無生弊於列邑。司果崔晛前在嶺南。熟察本道人情物態。且多誠懇。允合是任。方以都體察使從事官。難於遷動。以此意議于都體察使。則答以本局時無緊急公幹。彼此同是國事。先爲下送。似無所妨云。聞崔晛今在善山本家。以此人差下。行文該道。給馬上送。指授應行事宜。不多日內急急發送爲當。敢啓。傳曰。允。
三十九年辛亥 先生四十九歲
正月。入都拜完平相公。稟議舟師事。○二月。疏陳舟師利害。請停不急之役。以省浮費。專力防備事。因辭朝南下。○在洗兵館。與統制使李慶濬論兵事。因出洋中觀水操。至閑山島打圍。○四月。到泗川三歧里。祭先祖開寧公墓。 崔堈諸族人來參 到晉州。與兵使林得義067_499d周覽山川形勢。 鶴峯先生歿于此地。倡義諸人。陷於此城。不勝感慨。吟一絶示兵使。六月。到玉山謁晦齋先生廟。遍尋諸名勝。○八月。重到兵營。議分防事。轉往湖南。入防踏點閱戰船軍器什物。○到玉川書院。謁文敬公廟。○九月。在長興游月出山。 有詩一律 十一月。歷尋威鳳山城。 山在全州。先生旁先祖護軍公龍角曾游賞。有舊蹟故竣事將還歷尋。有感懷一律。除鏡城判官。旋遞仍任本職。以從事官仍留。專管事備局。初啓不允。再啓曰。去九月。朴東亮所啓南方舟師虛疏。宜別遣人。使之巡歷。整勅邊務事。傳曰。南方舟師邊備遣官巡飭事。言于備邊司事傳敎矣。自數年以來。南警稍息。海防諸務。頗似弛廢。議者之憂此久矣。上年秋冬間。本司別爲建請。料理措置。而只緣朝家事勢。不得專意於邊事。軍兵半歸於上番。貢物遽設於沿海。雖欲大段着力於舟師。依舊復設。而其勢末由。然而備邊之重。不可067_500a不另加檢飭。故自本司郞廳崔晛下送。兩南使之往來巡檢。悉心料理矣。崔晛終年在彼。採訪邊情。其所規畫。稍有頭緖。若其實效之成就。當在於明年。故本司之意。欲令崔晛仍爲竣事。而移授鏡城判官之後。其代尙未差出。今欲別遣使命。而若不遵倣崔晛所規畫。則前後號令。或至相背。邊情眩於奉行。有害無益。此甚可慮。文官中極擇有計慮盡心國事之人。急速差出。以爲崔晛之代。下送巡檢。使崔晛未及措置之事。有所完結。似爲宜當。傳曰。崔晛鏡城判官遞差。使之仍察前管之任。復命。
四十年壬子 先生五十歲
二月。又除實錄廳兼春秋。○製進大司諫具義剛致祭文。○三月。以舟師從事官。兼兩南巡撫御史。○稟議舟師事于三公。仍辭朝南征。○五月。到統營。與統制使會操于前洋。 同乘上船。分坐東西。較閱殿最。犒賞而罷。自固城到三067_500b歧里。祭先祖墓。○登順天梨花亭試射。○到靈巖。尋存養樓。 傍親直提學煙村先生德之之遺宅 九月。在扶安。調理察任事有旨。 辭狀回下 浴井亍沈源。○十月。登南原廣寒樓試射。○除弘文館修撰○還到茂朱赤裳山城。審視形勢。○詣闕書啓。仍謝恩復命。 因登對請建實錄閣于赤裳山。仁祖朝。復申前說以建白。其後遂置藏史庫。閏十月。上箚請寢交河遷都事。 五箚始寢十一月。以鳥嶺主屹山城巡審御史。承命拜辭。○到聞慶。與縣監趙稷同審山城形勢。○看審加恩,鳳笙,會溪,舟津等處。 有傷時一絶曰。馬上憂時默念行。無端老淚自縱橫。蚩蚩郵卒焉知我。却訝梨園戀別情。復命。○除弘文館副校理。兼差備邊司鳥銃067_500c廳都廳。○十二月。上箚請勿追錄僞勳。
四十一年癸丑 先生五十一歲
二月。上箚請寢奉慈殿奏請誥命事。 答曰。明有舊例。勿爲煩論。三度呈辭遞○三月。拜侍講院文學。 陳疏請博選山林賢士。輔導東宮。入書筵。講史略五代漢隱帝紀。○三度呈辭遞○四月。拜司諫院正言。○五月。詣闕避嫌。 時李爾瞻慫慂廢主。羅織成獄。以大妃父金悌男爲首逆。以八歲王子永昌大君爲禍本。按律之啓垂發。朝野汹汹。先生以白衣出弔故承旨金時獻發引。因餞鄕友金允安於門外。路逢崇陽府院君金信元。馬上相見。以此引嫌。柳活,朴弘道啓遞。廢主下備忘記曰。當此主辱臣死之日。三司之官。尤當忘身殉國。以扶討逆之義。而前正言崔晛敢生規避之計。故擧微瑣之事。瀆擾於推鞫之日。其情可惡。姑先罷職。以警他人。鄭造,尹訒啓曰。當此067_500d鞫逆之日。知有大論。故着白衣往弔出餞。期得避遞之資。掇拾細瑣之事。至瀆天聽。自稱鄕闇。欲掩其跡。臨事規避之罪。不可不懲。請削奪官職。廢主從之。卽日出寓富平。○七月。南還。○十二月。歷入安東壽洞。拜西厓先生墓。○在金溪撰輯鶴峯先生言行錄。
四十二年甲寅 先生五十二歲
正月。留在金溪。校讐鶴峯先生遺集。○二月。移栽冶隱竹。○三月。與金洗馬潗共往泗水。拜寒岡先生。請撰鶴峯先生行狀。○四月。築堤于松山南坡之下。○十月。約會旅軒于桃李寺論史記。○十一月。校讐冶隱先生行錄及杜谷先生遺集。○八月。覽馬史。釐正067_501a中國地誌山川經緯誤處。○寄詩鄭桐溪輝遠 大靜謫所。 先生自爲小序曰。永昌獄起。輝遠見爾瞻。極言大君幼稚。不與其謀。今若請罪。恐傷慈殿之心。李怫然曰。討逆是何等事。君奈何出此言。輝遠正色爭辨面斥李。李大怒曰。吾知邪論之所自出。時吾與吳翼承日相見。翼承又與輝遠相從。論議皆同。有人言嶺南三人力主全恩。李聞此語。因怒輝遠。將欲移禍於我二人。及輝遠爲弼善。抗疏極言永昌之冤。遂係獄逾年。栫棘海外。余寄書付一短律云云。第二聯曰。擬將所學扶人紀。豈爲虛名觸世罾。
四十三年乙卯 先生五十三歲
正月。往留金陵。轉往茂長尋源。○九月。哭夫人李氏。在尋源聞訃還鄕 十二月。改葬先考妣。 合堋于上林
四十四年丙辰 先生五十四歲
067_501b正月。往留尋源。○九月。還鄕。○與張敬堂興孝,金東籬允安論理氣。 張敬堂請改鶴峯先生行狀草來到。東籬金公亦適來會。仍與先生同宿。論理氣之說。東籬曰。天地之性與氣質之性。各有所主。有主理而言者。有主氣而言者。不可混同說也。譬諸水焉。天地之性。川流之水也。氣質之性。貯器之水也。先生曰。天地氣質之性。不可太分別。天地之性性字。與氣質之性性字。初無分別。但有理氣之別爾。敬堂問東籬曰。高明之見是矣。而取譬之言。頗有可疑。古人云。人生而靜以上。不容說。川流之譬。無乃認命爲性乎。又問先生曰。若子之說。則夫所謂天地之性。就氣質中拈出不雜乎氣質者而爲言否。曰。然。
四十五年丁巳 先生五十五歲
四月。往拜寒岡先生。與李石潭潤雨諸友參訂五先生禮說。○九月。與縣人築石界池。 是池大關一縣生理。故松亭先生蓋067_501c嘗有志而未就。至是。先生呈書巡營。遂築之。後人至今賴之。
四十六年戊午 先生五十六歲
正月。往留金陵。○四月。還鄕。○往拜寒岡先生○十一月。與盧敬菴景任諸友會金烏書院。議定奉安諸規。○一善誌成○往拜寒岡先生。
四十七年己未 先生五十七歲
二月。與金烏山長盧景任宿書院。議定院規。○三月。與主倅金雲川涌,張旅軒會書院。奉安四賢。 書院舊在金烏山下。兵火之後。不免蕩析。地且偏遠。不便於學子往來。故移建于藍山。四月。拜寒岡先生。考訂鶴峯先生行狀。○往拜張旅軒。請參贊公墓067_501d碣。○七月。自靑松椒井還無語坪。○與鄕士友共賞月巖書堂。仍議三仁廟刱建事。 三仁卽籠巖金先生澍,丹溪河先生緯地,耕隱李先生孟專也。先生終始主張是役。宜有記事。而時大司諫李偉卿詆先生以作史謗訕朝廷。將欲拿鞫。遂絶筆不書。故無日記可考。
光宗皇帝泰昌一年庚申 先生五十八歲
正月。哭寒岡先生。 有祭文○許眉叟撰寒岡墓誌。引先生祭文百餘言。以爲結語。
熹宗皇帝天啓元年辛酉 先生五十九歲
二年壬戌 先生六十歲
擬上攻李爾瞻疏
三年 仁祖大王元年 癸亥 先生六十一歲
067_502a三月。仁祖反正。除弘文館修撰。○四月。入都謝恩。陳疏乞遞。上優答。 疏略曰。壬子春。有推戴大君之說。飛語城中。播傳宮禁。人心汹汹。朝夕待發。臣時拜正言。欲言不得。遂引身苟避。竟遭削黜之罪。臣責在言地。職當碎首。而坐見群兇誣殺幼稚大君。而噤無一言。終未免惜一死負先王。爲鄭蘊之罪人。自是杜門絶跡。自分終身於窮谷。幸際龍飛。得列彙征。顧省前罪。忸怩于中。臣何敢不有物議。冒恥靦面。重以負罪之身。玷辱淸朝之名器乎。入直本館。自九月至十月。連入經筵。 講大學衍義首章。先生進曰。德不明。則天理滅私慾勝。而身不能修矣。身不修。則好惡不正。家道日亂。安能親睦九族。古今帝王孰不欲明德新民。而以堯舜不可幾及。安於自畫。所以日向昏蔽而不能明也。願殿下勿以堯之克明峻德爲高遠難行。而顧諟明命。加自明之功。如衣服飮食之不可一日廢。則是亦堯而已矣。爲學最難於終始如一。而人君尤難。殿下監覆轍爲戒。克終其德。無少間斷。則親九族和萬邦不難致矣。因067_502b陳所懷曰。天下自有一定不易之法。非執法者所可低昂。如有罪犯綱常。謀廢國母。投疏之首唱儒生。論啓之臺官。必殺無赦。請殺大君者。當置次律。附托元兇。陷害忠良者次之。陰主其議。名漏疏箚。而久秉銓衡。廣植徒黨者次之。其或本心不然。而怵禍隨波。參於庭請啓事及儒生之被脅參疏者。宜從脅從罔治之律。以次科罪。斷以公議。則何有紛擾淹滯之患乎。○講論語詩三百章。先生進曰。思無邪者誠也。毋不敬者敬也。爲學終始。不出立誠居敬而已。○講周而不比章。先生進曰。君子小人所爲不同。而亦相近似。小人之陷君子也。亦以朋黨目之。漢之黨錮。我朝己卯之禍。可以見矣。若人君以至正之心。大公之道。行之以誠。悠久持循。則偏私之習。自然丕變矣。○講子在川上章。先生進曰。大而天地造化之往來屈伸。小而吾人之死生呼吸。皆流行不息之妙。由人有私慾間之故息也。學者時時省察。不爲私慾間斷。而天理流行。則乃自強不息也。又曰。程子言天德王道其要只在謹獨。所謂天德。卽純亦不已。誠而無私也。純天理而不雜以私。則王道可成也。然其要在於謹獨。能謹於幽獨之地。則誠而無私僞。所以做得王道。067_502c有一毫私僞雜乎其間。謹獨工夫不至也。如何做得王道。聖人觀川流之不息而悟道體之無窮。程子因夫子之言而論王道之至要。誠萬古傳心之要訣也。若非程子。誰知純亦不已之德。蕩蕩平平之道。只繫乎幽獨隱微之能愼也。拜弘文館校理。○五月。陪祭文廟後。以對讀官。參試謁聖文科。 取洪靌等十人 製進祈雨祭文。○參圈弘文錄。 錄全湜等二十人 聯箚論全恩事。○六月。以都元帥從事官拜辭。 傳曰。姑勿退去。因有旨賜酒賜弓一長箭片箭各一油芚一部。七月。到黃州。査點列邑軍兵。○八月。除弘文館應敎。陳辭疏兼請全恩。○十月。竣事。呈病帥府啓遞。○十七日。還朝肅拜。○除成均館司藝○入將薦 上令備邊司薦儒士中有將才者。先生及尹守謙,李溟,李昌庭,李聖求,李敏067_502d求,金時讓,沈光世,鄭基廣等九人被薦。○閏十月。拜司䆃寺正。○十一月。拜議政府舍人。○十二月。拜司憲府執義。俄拜弘文館應敎。轉拜成均館司成,侍講院輔德。
四年甲子 先生六十二歲
正月。拜體府從事官。 李相公元翼以都體察使啓請李時發,鄭曄爲副使。先生及金時讓爲從事官。拜知製敎,春秋館編修官。○拜議政府舍人○拜督戰御史。 賊适擧兵叛。上特有是命。授之以劍曰。副元帥以下不力戰者。皆斬之。先生承命馳赴。元帥張晩擁重兵不戰。先生移文責之。晚怒。至猪灘始與交鋒。官軍見敗。晩歸咎先生。上達天聽。先生乃狀啓曰。張晩以其見敗。歸咎臣身。而猪灘之戰。我軍雖敗。物故僅六百人。賊兵逃散者。多至累千。前果累戰。則賊兵自底散亡。而養寇貽患。以致鴟張。元帥烏免其罪。晩大憾067_503a之。及鞍峴大捷。行朝論功。以副元帥李守一爲首。奪張晩職。白衣從軍。先生馳詣行在。上問曰。鞍峴之功。何人爲首。先生對曰。李守一狀啓雖先到。指授方略。皆出於張晩。晩當爲首功也。上從之。鑾輿還宮。特陞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六月。自鄕入都謝恩。疏辭陞秩。○七月。拜兵曹參知。俄拜承政院同副承旨。○啓請還收勿治宮奴之敎。 時有宮隷冒稱慈殿圖書以作挐者。憲府推治之。上下敎政院。以爲非尊敬慈殿之道。命諭憲府。先生封還曰。宮奴犯科。而憲府治之。職也。臣不敢奉旨。頃之。憲府又請治宮奴踵惡者。上愈怒。下旨切責之。先生又封還曰。天子之父殺人。有司按之。況一宮奴乎。臣等前以此獲罪而猶不知止者。寧臣之重得罪於殿下。而不欲殿下之得罪於丘民也。其隨事盡節如此。九月。遞拜副護軍。○十月。拜司諫院大司諫。 先生上箚極論時務。上下批優奬。而勳067_503b臣以箚中論宿衛一事。衆怒朋興。先生避嫌請遞。上意欲調劑。特命遞差。而勳臣猶懷不平。上下敎于筵臣曰。曾雖相善。後見其不是。當絶之。曾雖不知。後見其善處。則當許之。若雖有不善之過。而以爲故舊而庇護之。豈不爲偏黨之獘乎。鄭曄曰。此則聖敎至當矣。且崔晛箚辭似緊。故勳臣不安。其所言差過。自上特命遞差。臣觀其爲人。似是嶺南人之醇厚者。其言亦不至爲大段過擧。而如此處置。而群臣不安。似有妨於國事。故敢達矣。 出政院日記。 拜知製敎。○十一月。拜兵曹參知。○被誣賊招。陳疏自明。 時逆賊金愿伏辜。先生及一時名流。多入誣招。傳曰。竝拿問。崔晛勿問可也。出政院日記。先生雖蒙天日之照臨。而事有不能已者。遂陳疏自明。左贊成金瑬箚論先生甚峻。上下批曰。崔晛不思反省。陳疏自明。猥濫甚矣。然其本心則質直而已。豈有知逆謀而不告之理乎。卿言亦過。勿以情外之說論人之罪可也。 出政院日記。 十二月。呈辭還鄕。
067_503c五年乙丑 先生六十三歲
春。拜刑曹參議。轉拜禮曹參議,大司成,副提學。條陳八務箚。 一曰。明心學以爲出治之本。二曰。謹辭令以順群下之情。三曰。嚴宮掖以絶街巷之議。四曰。重相臣以責治平之效。五曰。器使人以盡一代之才。六曰。戒數遷以存敦樸之風。七曰。植公論以消朋黨之弊。八曰。崇儒學以培風化之原。因進講。陳修明弊政箚。 一官制。二田制。三兵制。又拜大司成兼承文院副提調。 時詔使將到。上命極選本院提調。先生及李澤堂植,張谿谷維,李白洲明漢。同被是選。
六年丙寅 先生六十四歲
二月。拜承政院右副承旨。俄陞左副。 時有白虹貫日之變。先生聯啓陳勉。○以延慰使。承命向定州。 時以皇子誕生詔使姜曰廣,王夢,067_503d尹越海將到。先生膺是命。道中疾作。控辭蒙遞。六月。還朝。○閏六月。遞職下鄕。○又拜承政院左副承旨。 陳疏乞遞。上允之。特賜藥物。八月。拜江原道觀察使。 時虛位田結。國穀逋欠。爲本道巨弊。先生爲虛實兩册。陳疏請蠲。自上特命蠲減虛結。蕩滌逃故。一道之民。均蒙實惠。八月二十三日。追贈考嘉善大夫兵曹參判。妣東萊鄭氏,德陽奇氏,星山李氏貞夫人。○二十七日。加贈考參判府君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 以先生前參振武原從功臣一等故
七年丁卯 先生六十五歲
春。虜入平山。大駕幸江都。承命防守漢江。移檄道內。倡起義旅。 先生聞變。領兵勤王。以朝命防守漢江。又調發精銳。赴海西副元帥067_504a陣下。時都元帥及南兵使領軍來駐淮陽,鐵原間。先生殫心經紀。給餽餉不絶。又爲檄文。曉諭一路。其略曰。義無定處。惟所在致忠之爲義。勇無別人。惟張膽厲氣之爲勇。元沖甲以敢死數十人而能收奇功。郭再祐以同志五十人而屢摧勁寇。丈夫氣節。前後炳朗。此人豈必有百夫之勇哉。不過一斗忠膽耳。諸君子生長禮義之邦。不習軍旅。値此顛沛之日。救死不贍。而惟懷主辱臣死之義。共奮與國同仇之志。倡起義旅。鳩聚義粟。誠有古烈士之風。而于國家有光云云。檄到。人莫不奮勵焉。四月。大駕還都。疏陳禦敵洒恥之策。 其略曰。堂堂我朝受命于天。二百年于玆。惟我殿下計存宗社。念及元元。包羞忍恥。屈從犬羊之約誓。此政君臣上下唾手扼腕。惕然改慮。翻然易轍。同心戮力。共發憤慨。雪會稽千載之恥。洗城下百代之辱。嘗膽瞋目。以圖恢復之秋也。臣竊念夷狄。禽獸也。詐譎反覆。朝和夕叛。已然之情狀。昭載往史。臣固知我殿下以宣,光之明哲。思周,漢之再興。益勵尊周之志。計切攘夷之擧者。未嘗斯須忘也。雖然。凡有作爲。先立大志。志者。萬化之本源。萬事之根柢地。偸067_504b安江左。無意興復者。晉主之昏庸也。甘心和議。忍辱忘親者。宋帝之懦弱也。此皆志不立而安於姑息。越王棲于山上。請爲臣妾。當時似乎怯懦矣。然其沼吳之志。已定於臣妾之日。堅苦刻厲。至於二十年之久。若使越王少惰其志。則種蠡之輩。亦豈能盡其心膂。卒建霸功哉。句越,晉,宋講和一也。而成敗懸殊。其不在兵之強弱。而在立志之強弱可知也。伏願殿下先立大志。堅剛奮發。恢弘志士之氣。振作三軍之勇。則今日之恥。可以一洒矣。爲治之道。先擧大要。紀綱之謂也。我國紀綱之不立。專在於官員多而委任不久。官員多。則莫肯盡心。而惟事塞責。委任不久。則遞易無常。而事無終始。今也一司之中。官員之數。多至七八。坐席不煖。轉授他職。庶績之凝。固無其暇。臣以爲各司只存堂上一員郞廳二員。朝夕治事。勿爲遷動。則權不下移。而紀綱自立矣。苟得其人。一夔足矣。何待乎十羊而九牧乎。至於兩司之多員。所以繩君過糾官耶。意甚盛也。然古無其官。人無不諫。漢置御史。唐有司諫。亦不過一二員。君能從諫。何人非諫官。君苟愎諫。雖設百臺諫而何益。臣愚以爲憲府,諫院。亦存執義,司諫兩員。數年一遞。則亦可以繩愆弼違。067_504c而無避嫌騷擾之弊矣。當今之務。莫急於養兵。而不分兵農。則養之不專。我國兵制。倣三代寓兵於農之意。而時世旣異。制度亦變。結繩不可以治亂。文舞不可以解圍。今玆之變。勢若土崩。堅城巨鎭。觸處糜碎。兩道山河。盡染腥血。此豈徒歸罪於將卒哉。不敎於平素。而用之於倉卒。百戰百敗。固無足怪。爲今之計。先擇武臣之可堪牧民。文臣之可堪領衆者。爲州郡之長。分爲兵農。各專其業。年少勇健者。敎之兵。老鈍孱弱者。歸之農。守令親自簡閱。擇其精銳。日習超距。明其賞罰。以奬其勇敢之氣。蠲其徭賦。以厚其資活之路。申之以約束。則見賊無驚潰之患。結之以恩信。則臨急有捍衛之誠。夫然後使守令各領其軍而赴戰。則恩威素立。將卒相信。如身之使臂。臂之使指。坐作進退。可以如意矣。一片東區九種三韓之時。其兵食豈甚夥哉。而唐宗敗於遼陽。隋煬退於孤城者。蓋以養兵有素故也。今也統三爲一。地非不廣也。民非不衆也。而見賊失魄。畏之如虎。臨急獻策。不過去邠。廟堂籌畫。只是講和。反而思之。心寒肝裂。伏惟殿下隨時變通。亟布兵農之政。則國步庶可以扶持也。養兵之道。必蓄財用。財用之蓄。亦多其方。本067_504d末俱擧。方可足食。今之所謂校生閑良及托屬諸處者甚衆。其餘遊食之徒。不可勝計。各出米布。以養軍士。則此有身有庸之遺法也。雖然。生財之道。不但專恃末節。必先務本。惟在省浮文而崇節儉。罷都監而汰宂官也。浮文之弊。可以亡國。奢侈之害。甚於天災。漢文之惜露臺。衛侯之衣大布。豈徒然哉。誠以人君以身先之。以爲民勸也。今之事勢。無一可恃。而保障之地。尙未堅定。漢都雖曰龍盤虎踞。而決非可守之地。南漢形勢。勝於漢都。而奴賊長技。乃其攻城。背城一戰。是或危道。亦不可定爲萬全之地也。江都形勢。自成天塹。地利之便。無出於此。然以臣愚意。虜必不遠而渝盟。渝盟則必大擧分路而長驅。如粘罕兀朮之謀。則一帶通津。奚足恃乎。如不得已則無如茂朱之赤裳山城。臣曾於巡撫三南。目見其形勢。兵不滿萬。足以必守。臣於其時。請建實錄閣于此者。意有在也。目今自漢以北。皆爲蕩敗之地。自漢以南。尙爲完全之域。居空虛之地。而聚遠方之兵糧則其勢難。據完富之地。而爲保障之計則其勢易。況湖嶺相連。閑山諸島。統營舟師。前後相望。屹爲聲援。若以城守爲危。則臨機應變。恢恢乎有餘地矣。措辦軍067_505a需。送助龍骨山城義兵將鄭鳳壽。 城在平安道。鄭鳳壽與張士俊唱義旅。守孤城。多有摧賊之功。先生慮其勢孤無援。自辦木綿弓矢桶兒火藥鉛丸等物及戰馬一匹。定軍官送助。旋以無朝令。越送他道爲未安。狀啓以聞。○平安監司啓曰。當此纔經大亂物力蕩竭之日。雖有朝廷命令。其勢或有所未及擧行。而今此趙翼,崔晛入送銀參軍器。其數甚優。臣以爲鄭鳳壽守龍骨易。趙翼,崔晛救龍骨難云云。時開城留守趙翼亦送助糧械故云。九月二十六日。巡到橫城縣。 原州牧使洪靌亦隨後同至 二十七日。以試閱事留橫城。 先是。縣居前翊贊李仁居因縣道封疏。上屢加嘉奬。又下別諭。有優給食物之敎。由是先生有相見際接之事。是日朝。仁居使人來曰。方欲上疏而來。仍有求見之意。先生答以明日見之。已而洪靌入見曰。俄見李仁居。問其上疏之事。則答曰。將欲倡義討賊。因具道其酬酢之語。時縣監李擢男在座。相與駭笑之際。仁居入來。其所言一如洪靌所傳。先生責喩其事理之不然。仍揮斥而罷。二十067_505b八日。向洪川。 先生將發。與洪,李兩人同見仁居。仁居出示疏草。語意與昨日所言。頗加删略。而有起兵討賊等語。先生嚴辭揮斥之。仁居曰。然則當待上疏回下矣。先生先起。洪,李繼出。臨別密屬兩人以詗察事機相通之意。中途又送人申飭。及到洪川。又送書申飭。皆以仁居爲慮。而觀勢急通之意也。二十九日。在洪川。封啓上李仁居疏。夜又馳啓仁居起兵狀。勑諸軍進勦。復啓請嚴宿衛備不虞。自橫城報來仁居疏本。其疏曰。國運不幸。屬此艱虞。臣未知天心何所怒於殿下。而有如此之變乎。殿下自賊變以來。躬擐甲冑。不避風雨。與祖宗休養之群臣。豆粥麥飯。臥薪嘗膽。同心同德。而至誠祈天。則可以感鬼神格天地。而況於人乎。以此制敵。何敵不摧。以此圖功。何功不成。殿下中興之本。專在於此也。此之不爲。而內以胡差接待爲事。外而譏察爲謨。其故何歟。此所以天地神人之所共憤也。大槪凶奴者自絶于天。故天下之大賊也。殺其父妻其母。所謂犬戎者此也。二百年禮義之封疆。反爲犬戎067_505c之地。則宗社何依。聖廟何托。被髮左袵。其可忍乎。思之至此。不若早死之爲安。故臣分雖貧賤。性則人也。參以義理。則固難不出。故臣首倡大義。奮然起兵。伏願殿下勿以臣之起兵爲妄。而特賜兵權。曲副討賊之大義焉。請斬主和賣國之姦臣。以雪殿下萬世之恥。然後肅拜西下。臣無任慷慨憂恐之至云云。先生顧謂縣監南瀞曰。疏中無顯然悖逆之語。若還退則近於沮抑。第爲狀啓。使朝廷預知而善處。如何。南瀞曰。甚當。遂捧上。狀啓曰。橫城縣監李擢男馳報內。縣居前翊贊李仁居上疏上使事牒呈。疏中所陳起兵一事。似非其時。未知作何處置。不敢不達。馳啓上送云云。是夜疾甚不寐。與縣監南瀞相議之際。橫城縣吏文報內。縣監以事往原州。仁居之子乘其空官。潰出軍器。擇弓子三十餘柄。不能呵禁云云。先生始知仁居起兵狀。卽爲馳啓曰。當日臣在洪川縣。試閱百餘名束伍。罷遣後疾甚臥閤矣。戌時量。橫城守官文狀內。縣監以軍兵點閱事。原州馳去後。李仁居子弟一人。從後二三人。到軍器庫。潰門擇弓矢三十餘張。使不得禁止云云。聞來不勝驚駭。馳送營門軍官一人。偵探處置計料矣。臣來時。067_505d行到橫城。仁居來邑內。送人于臣及原牧洪靌處曰。欲爲一上疏。嫌於干謁公門。不敢入見云云。臣答言以送。而洪靌及李擢男先爲往見。來言曰。李也上疏後欲爲率兵二百餘名。乞兵糧于湖西南等處。守令之不從者斬。仍往京城肅拜後。斬誤國姦臣。因爲討賊。俺等明言起兵之無理。而自執己見。不爲回意云。臣大駭曰。有是哉。處士之迂闊也。賊在境上時。不待命令。倡起義兵。猶或可也。今賊兵已撤。無可相戰。又不可以二百之軍投賊巢穴。彼欲何爲。自古請斬佞臣者則有之矣。不待朝廷命令。而徑先起兵。以誅姦爲名者。其名爲逆。賢者而亦爲此言乎。相與駭笑。三人偕往見之。亦以此意反復喩之。仁居曰。然。上疏後當待回下而起兵云。臣以爲彼爲處士之大言。而必無實事。且仍日晩。便卽起出。來到洪川。翌日其疏果至。觀其疏。語亦甚不的。而彼以林下之人。以討賊陳疏。不敢沮抑。卽自捧上。而縣吏馳報如是。近境騷動。彼自謂慷慨所激。不顧事體。而賊不在境。起兵非時。不待朝廷之命。徑先調發。乘其空官。潰出軍器。處事顛倒。有若喪心之人。不可任其所爲。故傳令橫城縣監李擢男,原州牧使洪靌。朝令未下之067_506a前。絶不可借以兵權。嚴守本官。觀其所爲而處之云云。彼乃迂僻之人。不聽人言。不揆事理。實爲起兵。以討賊爲名而上京。則何以處之。朝廷從速處置云云。先生旣已封啓。因念原,橫兩守旣有屢度申勅。終無一番馳報者。已極怪駭。而事迫蒼黃。未暇往復詰問。乃星火傳令于原,橫兩守。使之整軍進勦。又傳令春川府使閔機。使之領兵馳來。洪川之兵則因試閱留待官門。故使縣監更加整飭。且念仁居以討賊爲名而不顧事理。如是妄動。則可遺一言而罷其兵。遂募可信武士二人。付書以送。責以順逆之理。速令罷兵待罪。纔送人。洪,李兩人馳通始到。蓋洪靌已先直啓。而不以牒報爲意故也。先生憤激于中。更爲狀啓曰。當初仁居上疏之時。已見其言語無倫。擧措顛倒。莫知其由。狀啓中已陳起兵一事。似非其時。作何處置。今此擧措。尤極悖逆。追捕一事。不可少緩。一邊整勅近官軍兵。左右共進。期於擒滅。一邊作書入送。責以順逆。令速罷兵待罪。以試其所答。自朝廷嚴勑宿衛。以備不虞云云。三十日。留洪川。馳啓仁居就擒狀。 先生方欲進兵合攻之際。所送偵探軍官來言曰。仁067_506b居雖欲聚兵。四五將官。數三卒徒之外。人皆走避不出。仁居只與三十餘人在官奴永守家。不敢動。原州軍。今日卯時馳入。盡爲生擒。目見以來云云。以此具由馳啓。因分囚賊魁妻孥及支黨于橫,原兩獄。○初。先生屬原,橫兩守以詗機急通。非止一再。而仁居叛。先生因縣吏文報而始知之。及仁居擒。又因偵伺軍官而聞之。二守馳通。率皆後時。此不可曉。今附洪啓于下。以備參考。○洪靌狀啓曰。臣本月二十六日。監司臣崔晛出巡北關。臣陪行行到橫城。縣居前翊贊李仁居以監司相見事。已來本縣。二十七日朝。李仁居來到監司處。出言曰。吾欲有一陳疏事云。監司問曰。所欲陳疏者何事乎。曰。朝廷與奴賊相和。吾欲起義兵。由忠淸道得軍器。直向京城。請斬主和姦臣一人頭。掛於旗竿。因爲西下討賊云。監司答曰。然則西下後欲直擣巢穴乎。曰。巢穴則不可去。監司答曰。奴賊已盡撤還。欲擊何賊。仁居不答。須臾辭出。監司以試才事因留。二十八日朝向洪川時。與臣及橫城縣監李擢男約以同往。察其辭色。則仁居出其疏草。其大槪首言與虜不可相和之意。末端言起兵討賊。請斬主和奸臣。又言殿下勿以臣起兵爲067_506c疑。賜臣兵權等語。多有悖慢之語。監司答曰。欲起兵則兵在何處。所得之兵幾許。仁居曰。已募數百餘名云。監司大駭。色變而出。行到里許。送人於臣處曰。吾當留洪川。凡事須與橫城縣監細探馳報云。臣與李擢男密議。使之備細譏察。連續馳報事言說後。臣卽爲還官。傳令將官。聚會軍兵待變矣。當日巳時量。橫城縣監李擢男不意馳進。面言李仁居擅自傳令於本縣將官出身等。聚會軍兵。縣監事出蒼黃。罔知所措。欲與臣面議軍務。只率衙奴與吏房,給唱等。棄其妻子。馳到本州。追後馳到橫城縣戶房金應瑞進告內。李仁居發遣同縣出身高纘,高繼立等。追捕橫城縣監而未及。仁居已爲聚兵於本縣云云。追後橫城縣戶長草報內。李仁居子二人。潰軍器廳。取弓矢云云。李仁居爲逆之狀。益加明白無疑。臣與橫城縣監臣李擢男聚會本州軍兵。一邊進勦。而監司旣已出巡。臣不得已事出蒼黃。從聞見馳啓。追後偵探賊勢。詳細馳啓計料云云。十月。因賓廳啓。就理原情。 賓廳啓曰。伏見原州牧使洪靌狀啓。逆豎仁居已取橫城軍器。射天之志已著。臣等不勝憤憤。急遣宣傳官。探其蹤跡以067_506d來。觀察使崔晛若見此等事狀。則所當具由馳啓。設機措捕。而狀啓之辭。但曰起兵似非其時云。尤爲駭然。請崔晛拿來推問云云。○先生原情。矣身慮事素遲。而過於詳審。每有緩不及事之患。至於討賊。是何等事。而敢有一毫慢忽之心哉。逆魁仁居。素昧平生。而頗有高士之名。聖明亦加優禮。頻下題給食物之敎。矣身依送饌物。原州牧使洪靌聞其貧窮。遺以糧饍。上年冬間。仁居適來原州。致謝于牧使及矣身。始得相見。與之接語。不過迂闊固滯之人也。然爲其林下處士。年近大耋。待以長者之禮。自此仁居間或送人通書矣。九月間。仁居送書于牧使及矣身。書中有憤慨不平之語。洪靌謂矣身曰。仁居書中有前萬古所未有等語。未知爲何事也。矣身曰。我亦怪之。所答略及寒暄而已。此等怪語。不必答也。今年束伍改定後。因備局事目。將爲試閱。而以國舅禮葬。未暇出巡。冬防已迫。軍政可憂。今春變亂之時。以繼糧爲難。矣身欲爲儲糧於伊川近西六七官。一以除嶺東遠輸之弊。一以繼北路將士之供。艱難拮據。別備大小米千餘石。又收拾營儲木匹。將換貿戶曹唐糧及贖罰之徵米竝千餘石。分置近西列邑。而未措其067_507a半。必身親巡歷。然後方可了事。去九月二十六日。強疾作行。與原州牧使洪靌同往橫城。翌朝。仁居送人曰。欲爲一上疏。昨日來此邑內。而嫌於干謁公門。不敢投拜。矣身答以今日有故。明日出行時就見。洪靌見臣謂曰。今朝見李仁居。問其上疏之事。將欲倡義討賊。已得軍二百餘人云。矣身曰。賊不在境。此非義兵之時。設使討賊。其以二百軍當之乎。相與一笑。洪靌又言曰。問其軍器軍糧出處。則仁居答以此處兵糧乏少。欲往湖西南。借得兵糧云。矣身曰。此言尤不近理。此時軍器。處處修備。猶患不足。誰得以贏餘借乎。官家軍器。萬無見借之理矣。洪靌曰。彼言我乃爲國討賊。則守令孰敢不從。不從者。雖斬之可也云。矣身與橫城縣監李擢男相顧而言曰。此言尤可駭也。無朝廷命令。而孰肯受制於彼乎。洪靌等相與拍手曰。大大迂闊也。須臾仁居入來。初頭矣身曰。欲爲上疏。未知何事。仁居曰。我耕耘山谷。老而無用。今春胡變之時。人或勸爲義兵。自知無能。欲偸生計也。今聞國家與虜講和。胡差往來云。二百年禮義之邦。將爲左袵之屬。不勝慷慨。兹欲陳疏。倡義討賊。死於戰場。上京肅拜後。請先斬主和奸臣。因往賊路也。067_507b矣身始思其書中云前萬古所未有者此也。謂仁居曰。賊已撤歸。戰于何所。曰。欲斬胡差耳。矣身曰。斬胡差不難。惹出大寇。則其以二百義兵能敵乎。且請斬佞臣者。古亦有之。起兵而誅姦者。亦有之乎。此不過處士之大言。矣身心氣不平。不肯酬酢。仁居出。矣身謂洪,李兩人曰。若不待朝廷命令。徑先起兵。以討賊誅姦爲名。則是無異於淸君側之惡。卽當勦捕。而彼有重名。情跡未露。只以言語問答之辭。捕治以啓。則非但朝廷不信。擧國亦當論之以誣殺處士。此事極難處。當觀其所爲。擧其實狀而治之。翌日。矣身將行。與洪靌,李擢男同往仁居所寓處。問曰。上疏已書乎。仁居自袖中出示疏草曰。無寫疏者。未及書耳。其意蓋欲請得下人之寫疏者也。矣身聽而不聞。三人同見其疏。與昨日所言頗加删略。矣身曰。疏中起兵誅姦等語。大不順理。朝廷萬無許之之理。未許之前。絶不可起兵。反復戒止之。辭與昨日無異。仁居曰。然則當待上疏回下。今日未及寫疏。明當封疏。付送橫城下人矣。矣身行忙先起。洪靌,李擢男追別于籬外。矣身密囑兩人曰。若有可通之事。須卽馳通。兩人曰。已知之矣。半程。送人于兩人。及到洪川。又送067_507c書。皆觀勢急通之意也。矣身到洪川試閱時。仁居之疏至。矣身顧謂縣監南瀞曰。此疏似不當捧。時無顯然悖逆之語。今若不捧而還退。則近於沮抑。欲爲狀啓。使朝廷預知而善處。如何。南瀞曰。甚當。矣身遂爲捧上。狀啓中所謂起兵似非其時。未知作何處置之語。蓋欲朝廷預知其所爲也。是夜疾甚。心神昏悶。達夜不寐。與縣監南瀞相議之際。橫城縣吏文報內。縣監以事往原州。仁居之子乘其空官。潰出軍器。擇持弓矢三十餘柄。不能呵禁云。矣身始知仁居起兵之狀。卽爲馳啓。而未見洪,李兩人馳通。只據縣吏之報。猶不敢斷以仁居爲謀逆。而謂或喪心妄作。不知自陷於悖逆之罪。蓋仁居之素所自許。不至於如此之甚故也。且駭且怪。一邊傳令于原州牧使,橫城縣監。使之整頓軍兵。相機進勦。春川之兵。因先文試閱。整待官門。故傳令于府使閔機。使之領來。洪川之兵則昨因試閱。留待本縣。矣身與縣監南瀞更加整飭。矣身又思仁居實爲討賊。不顧事體。如是妄動。則可遺一書而罷散其兵。遂募可信武士二人。付書而送。責以順逆之理。速令罷兵待罪。以觀其所答。若遲疑一刻。則謀逆無疑。其時狀啓中。亦陳遺067_507d書之意矣。其書終乃不傳而迴。雜在文書中。想已入內矣。分付移時。洪,李兩人馳通始到。矣身始悔見事不敏。憤激于中。更爲狀啓。又申飭左右軍兵。約以是夜竝進。方欲行兵之際。矣身所送偵探軍官來言曰。仁居雖欲聚兵。四五將官。數十卒徒之外。人皆奔避不出。仁居只與三十餘人在官奴永守家。不敢動。原州軍。今日卯時馳入。盡爲生擒。目擊以來。以此具由狀啓。仍留洪川。以待諸賊之盡擒。移送原州。逆魁妻子奴屬。囚于橫城。無有遺漏。然後矣身前進春川。大槪矣身知人不明。不能早知仁居謀逆之狀而先爲捕治。又不能及期領兵親進。掩捕凶賊。而與洪,李兩人密議約束。終始同事。一邊狀啓。一邊整兵設策。傳令左右。刻期進勦之事。非一非再。仁居之聚兵橫城也。李擢男方在原州。矣身方在洪川。橫城距原州四十里。距洪川七十里。賊之動靜。縣人先報原州。轉報於矣身。事機之遲速。狀啓之先後。是固不同。矣身情實。暴白無餘。惟在天日孔昭。幽枉畢燭云云。禁府啓請照律。上下敎特命放釋。 謹按長陵誌狀曰。崔晛被逮於逆獄。鞫廳請刑。王曰。頃年夜對。其時067_508a適有處置未盡之事。此人以入侍之官。力爭不已。予頗苦之。厥後思量。眞是愛予者也。今雖被罪。必不負初心。卽命放釋。蓋崔晛不知李仁居之叛逆。妄稱處士大言之事被罪也。其言忠則不惟取於一時。又能久而識之也如此云云。兩司啓請依律。不允。 上曰。崔晛之事。實爲駭異。難免刑章。眚災肆赦。亦是古人恤刑之道。爾等須體予意。亟停勿煩。二十四日。合啓不允。 上曰。已爲議定。更勿煩瀆。二十六日。合啓不允。上曰。愚戇之人。昧於逆順。以至於此。罪固重矣。其情則不無可恕之端。減死論罪。何傷。爾等須體予意。更勿煩瀆。十一月初二日。朝講。兩司榻前啓。不允。上曰。崔晛之罪。固重矣。故前已言之。但昏昧所致。非故犯之事也。其情可恕也。古人有言曰。眚災肆赦。此亦肆赦之意也。○玉堂臨文。因論以愛己之心愛人則盡仁啓曰。凡人皆受天地生物之心以生。故皆有愛人之心。此所謂仁也。至於人君則尤以愛人爲職。故曰爲人君止於仁。天子則天下之人。皆在吾067_508b仁之內。諸侯則一國之人。皆在吾仁之內。盡仁之言。自上所當深體也。上曰。古之人君。於人有犯罪而情在可貰者貰之。其後。其人或有益於國。此亦仁之事乎。答曰。此是聖人好生之德。正是仁也。刑者。聖人之所不得已。善善長而惡惡短。乃聖人之心也。上曰。崔晛之事。眞是眚災也。其人頗有計慮。朝議皆以可用之材擬之。而何故如此處置乎。對曰。臣與晛居相近少相善。知其爲人甚熟。反正以後。與爲同僚甚久。今番處事。直是迷惑。大不類渠平日事。此是死厄將至。天奪其魄。倘非聖明視爲眚災。則渠之所爲。死亦甘心矣。上曰。必以仁居爲隱士耳。對曰。渠性白直。見仁居除官不就。認爲隱士。做錯至此。安有如此可慨之事乎。上曰。以所犯言之。罪果重矣。可以依法。而但其本情實非故犯。情與罪不同。如無可貰之事。何可強拂群情乎。書曰。宥過無大。今須停論可也。
崇禎皇帝元年戊辰 先生六十六歲
正月初八日。合啓不允。 上曰。不允之意。前已盡喩。而如是堅執。至於閱歲067_508c經年。殊爲過矣。凡事有當堅執者。亦有不必堅執者。予非有私意。但以其情不至於死。故不得允從。當此鞫獄多事之時。速爲停止可也。兩司爭執不已。特命流配會寧。○九月。特命放還。道經洛山寺。 有山水屛記
二年己巳 先生六十七歲
春。還鄕。 先生感激天恩。列錄備忘記。書遺戒於其後。傳示子孫。勖以世世圖報之意。
三年庚午 先生六十八歲
冬。被誣逮獄。卽蒙特放。 時無賴賊楊天植謀逆發覺。誣及先生被逮。上曰。崔晛嘗指陳宮闈得失。言甚切直。予甚苦之。厥後思之。眞愛予之言。尋常不忘于懷。如此忠亮之人。豈有與賊相知之理乎。卽令放釋。
四年辛未 先生六十九歲
067_508d五年壬申 先生七十歲
著東國通鑑 春秋以魯國之年編次。而月則用周月。故先生以新羅年號爲主。而其餘高麗,百濟及中國年號則分行書之。
六年癸酉 先生七十一歲
十月。築楓川亭。 亭在草谷東洛江西岸。今有遺址。○旅軒張先生丙子記行云。江之右畔。萬疊層崖。上有亭翼然。亭是何名。晩間其揭也。亭之主誰。默坪崔斯文也。
七年甲戌 先生七十二歲
八年乙亥 先生七十三歲
九年丙子 先生七十四歲
十二月。淸兵猝至。大駕入南漢。與一鄕士友倡義067_509a起兵。
十年丁丑 先生七十五歲
正月三日。整頓軍旅。 一鄕推先生爲大將。金彥陽寧爲副將。李聞慶景節,金公羾,朴參奉晉慶,金參奉翧等三十餘人。皆在陣中。地主給軍七十名,鳥銃數柄以助。四日。發行。 先生有疾。使副將代領先行。追到舍方里。五日。面喩誓衆。行軍宿梧里院。 先生命中軍許申生列立行伍。躬至陣中。喩以一心進退。無敢違令。無敢驚動云云。六日。雨雪留。夜半。地主傳令。來自聞慶。聞雙嶺戰左右兵使敗死之報。七日。行軍至論谷。子山輝追至。 風雪尤緊。先生強疾行軍。轉加添劇。至是氣塞。良久乃蘇。十日。到聞慶杜谷留陣。○十六日。入聞慶縣見地主。因留宿。 先生病勢轉劇。不能管攝軍務。委任於朴參奉晉慶。使之替領。尋聞南漢解圍。遂罷。二月。還寓會溪。送067_509b子山輝。奔問于朝。○三月。哭子山輝。 府使公歸自奔問。道遘痘患。沒于楓川精舍。有哀辭祭文。九月。哭旅軒張先生。 有輓詩祭文
十一年戊寅 先生七十六歲
十二年己卯 先生七十七歲
十三年庚辰 先生七十八歲
五月。寢疾轉谻。遺書戒子孫。 二十五日。先生疾革不能操筆。呼門生曺俊南書。書曰。萬曆己丑六月二十五日。是我先君永諱之辰也。先君不知不肖子之不可以敎。臨沒丁寧敎戒。以爲永世遺書。今我以先君之望於我者。再告於汝等。如是以後。庶不負先君九泉之意。每念及此。悲痛罔極。汝等稍知人子之情。則此非動心處乎。先君臨終時。呼我戒之曰。居處恭。執事敬。與人忠。雖之夷狄。不可棄也。此非吾言。乃孔聖之言。汝宜終身服膺也。六月初四日。考終于067_509c金山鳳溪之別墅。 先生屢遭慘慽。不樂家居。移寓已屢年矣。七月二十七日辛丑。上遣禮曹佐郞張應一賜祭。○八月二十七日。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完城君。 以子山輝參勳故也 九月。返葬于善山默語坪坤向之原。
我肅宗大王三十三年 丁亥
四月。鄕人立社于松山。奉安位版。 幷享松亭先生
我英宗大王五十二年 丙申
九月。移建松山社于昌林洞。
067_509d訒齋先生年譜終

訒齋先生文集跋
 [跋]
訒齋先生文集跋[權斗經] a_067_492a


余覩訒齋遺編而東國之世變。可得而言已。蓋萬曆之中。爲崇圮之際。大難未夷。群策胥奮。則訒齋公以布衣獻三綱九目書於體府。以齋郞上善後九條疏於公車。辰猷石畫。咸可底績。萬曆之末。爲閉塞之時。067_492b兇黨鴟張。綱常垂墜。則訒齋公惕履霜堅氷之戒。用見幾色斯之擧。一臥江湖。十年沈晦。天啓之間。爲撥反之機。彝倫復正。君子彙征。則訒齋公進長乎成均諫省。出任乎藩臬。節制捄弊。陳戒慮長謀忠。夫一人之卷舒昇沈。而世道之否泰關067_492c焉。則素言之伏。野有遺賢。豈不爲世道之憂哉。槪公生文獻之邦。受詩禮之敎。幼從翠屛高公學。稍長。受鉗錘於鶴峯先生金文忠公。又莊。事鄭寒岡先生。得聞正學淵源。以英才達識。抱負經奇。俄値世亂。慨然有亨屯致用之志。晩067_492d登儒科。進塗始闢。而旋遘大往之運。逮乎改玉拔茅。庶幾哉登敭光顯矣。而枘鑿抹摋。矛盾參差。曾不幾時。扞文罔而賦牢愁矣。天旣豐公之賦。篤公之才。而不偶以時與命。抑曷故也。公雅意經世。始擬以功業表見。不數數文章家數。而其見067_493a於文詞者。渾浩演迤。不可漈涯。其論事揆策。敍次地形險夷軍謀利鈍。的破機投。鑿鑿如指掌。所謂識時務俊傑。非公之謂歟。其美質偉器。得諸天植。而漸乎師友。輔以修治。表裏洞朗。始終純全。則學之力也。嗚呼。有如是之蘊畜。而始躓於昏朝。晩畸067_493b於昭代。卒不克展布其一二。卽安得無貽識者之遺恨哉。不佞讀公乙丑官制變通箚子。未嘗不三復太息。以爲反正之初。政屬中興鼎革之會。向使公言得行。謬規一洗。庶可以奮積衰矯弊。而良法美政。次第可行。豈至於擧朝優游。庶事067_493c叢脞。而致丁卯丙子之敗哉。雖然。賈誼,董子之言。不盡槪於當世。而主父偃,魏相條擧施行。漢室賴之。愚知公言之底行。或待於後之君子。革弊制明法體。而世道回泰。邦命維新。則公於是未爲終不遇也。上之四十四年戊戌春正月乙卯。通訓067_493d大夫前行弘文館修撰知製敎權斗經謹跋。



 

 

 

 

訒齋先生文集後識
 [識]
[訒齋集後識 崔光璧] a_067_494a


嗚呼。今去先祖之世。百三十有九年矣。先祖之捐館也。從曾大父護軍公以曾孫承重。當時之家禍。可知已。許多遺文。太半散佚。屢卷手稿。旋被回祿。族曾大父學生公象乾,族大父學生公斗南相繼收稿。猶未成帙。三從叔學生公㦂,再從叔生員公壽頤蒐輯散在諸房者若契家所藏。始爲草稿。而生員公以宗孫克任幹蠱之責。反復參互。更定成編。就校于權荷塘,蒼雪軒兩公。仍受碣文于荷翁。跋文于雪翁。而以未有弁卷之文。不克繡梓。每與我先考生員府君共憂闡揚之無日也。鳩材經紀。厥惟舊矣。而先父兄旋皆067_494b謝世。事歸烏有。可勝歎哉。吾仲氏生員公光岳惟不克卒先志是懼。與家人語。未嘗不惓惓於兹。而又未就而卒。今伯氏曁不肖等年且遲暮。恐終無以成先志也。合族而謀之曰。百年未遑之擧。且待後人乎。僉曰。唯唯。乃斷然始事。傾出三治永懷之若干貲。須材戒具。旣又淨寫數本。就訂于正言李公象靖及提學蔡公濟恭,湖堂丁公範祖。受行狀于李公。碑文序文于蔡公。誌文序文于丁公。但文蹟旣少可攷。當時荷,蒼兩老所撰。猶未免實蹟之疏漏。丙戌夏。不肖適忝左史。取考本院日記之事關先蹟者。亦嘗遇災。多缺067_494c少補。只得略采。添入于草狀。俾諸家得以據實撰次。又搜得先祖手本日記于諸族人家。拈成經筵講義及年譜竝關西錄一卷,逸稿二卷。更質于正言公及寢郞朴公孫慶。彙次成袠。原集十三卷。別集二卷。拾遺一卷。年譜一卷。附錄一卷凡十八卷。開刊于三治堂。鄕士林迭來相役。四朔而功訖。猶恨夫嘉言谹詞之十不一傳也。屢世經營。今適遂周南執手之托。而且幸行狀年譜碑誌序諸文字。徵諸斷爛。視碣跋稍該詳。不可無一字辨識。敢忘僭猥。略敍顛末如右云爾。
067_494d上之二年戊戌中秋。不肖昆孫前行司憲府持平光璧謹識。
訒齋先生文集後識


 

訒齋先生文集拾遺
 事蹟
三仁事蹟 a_067_489b



籠巖先生
先生諱澍。善山金氏。考諱元老。世居府北走兒里。至先生移居新谷。娶開城尹柳思雨女。高麗亡。先生入中原不返。柳夫人生遺腹子。名揚普。子孫甚盛。按先生之事。雖無載籍。去故未遠。父老或有傳者。先生五代孫金應敎振宗。與朴龍巖爲道義交。嘗以此密語龍巖。龍巖每加景嘆。惟恐先生節義泯而無傳。故其仲子演及孫遂一錄其父師之言。載于日記。余先君亦爲應敎。一家人親聞其語而誨余如是。常與朴君商確所聞。思有以闡揚龍巖之言者素矣。夷考當時之跡與先生子孫之所傳。067_489d詳略雖或不同。而槪不出於採薇之意焉。且墓而不表。非但先生之爲然。子判官揚普亦無墓碣。孫縣監地有墓碣而無文。自先生以下。皆追贈崇品。曁之以常禮。則豈無一字之可記耶。至其曾孫大憲之慶,左相應箕。始立墓碣。具列祖系。而皆止于先生。沒其名不書。蓋諱其名跡。固非尋常矣。以禮儀判書奉使不返則國人之所共知。雖欲泯其名跡。其可得乎。然則其子孫所傳還到鴨江。付書遺命者。安知其訣別乘桴臨發密付之語。而不敢顯言。泛稱以奉使云云者耶。世代旣遠。文獻無徵。如此等事。固不臆料。而其抗志秉義。飄然遠逝之跡。067_490a終有不可得以泯滅者。故拜錄鄙見。以備參考云。

丹溪先生
先生姓河。諱緯地。字天章。世居晉州。考諱澹。始居善山延鳳里。先生沈靜寡言。勤學好禮。英廟朝。以生員擢文科壯元。選補集賢殿。與朴彭年,成三問,申叔舟,崔恒諸公昵侍經幄。多所裨正。魯山癸酉。以直提學乞暇下鄕。有終老之志。及誅金宗瑞等。徵以左司諫。登道辭以疾。上書極陳履霜苞桑之計。乙亥。光廟受禪。白上王下敎。請致甚懇。先生就召。拜禮曹參判。憐上王避位。丙子五月。與朴彭年,李塏,成三問,柳誠源,兪應067_490b孚等。因金礩,鄭昌孫上變告。六人同日死。先生有一子曰璉。中生員。謹有家行。連坐被誅。被拿之日。從容處置家事。拜辭于祠堂。有女適李由義。以出家僅免。李又有女適縣監金仲慶。仲慶之後以先生外孫。守舊墓。立廟奉祀。

耕隱先生
先生姓李。諱孟專。字伯純。號耕隱。世居星州北面椧谷村。自先考諱審之判書公移居善山南面荊谷村。 在金烏山下洛水之西 先生生長名門。早擢高第。選補翰林。世宗朝。歷司諫院正言,知製敎。聞望夙著。中年見時事艱危。力067_490c求補外。得居昌縣監。以淸白聞。 錄淸白吏 景泰甲戌間。時事一變。先生益自韜晦。無意世念。退老網障村。託跡盲聾。謝絶親朋。子弟問其故則曰。修養所忌。朔日每向朝暾而拜。子弟問其故則曰。祈禱已疾。嘗自吟曰。眼欲昏昏耳欲聾。見聞無敏與癡同。雖家人婦子。莫能測識也。與司藝金先生諱淑滋爲平生道義之契。佔畢齋入語則披露心曲。應答無礙。畢齋曰。我先生之疾。今庶幾矣。先生答曰。疾非庶幾也。阽死蓬廬。旣見君子。自不覺心胸豁然也。金先生識其微意。改容加敬。至於吐款相對。勸酬杯酌。忘其早暮而歸。夫人金氏以此知盲聾之非眞067_490d也。先生處于廳事。曝穀在前。每爲鷄雀啄盡而任其攤棄。未嘗語人。至臨沒。一家子弟始知之。先生誠孝出天。生事葬祭。一遵禮文。待人恭而少戲笑。視物淡而無所嗜。淸儉爲家。閫範嚴肅。禁子弟騎從曰。親病如此。乘馬從徒。情豈自安乎。家人子孫。非百里之遠。則皆舍馬而徒。第三子惇往來軍威聘家也。未嘗以騎從自逸。一日至延香。有農者追捕獐兒。惇爲奉病親。乞其獐。負入網障村。相去二十餘里。一家儉素如此。有一後生問曰。先生林下百年。家徒四壁。恐爲子孫憂。先生曰。貧窶傳家。何病乎。佔畢齋先生撰彝尊錄。記以師友之列而書曰。表裏067_491a無瑕。與物無競。中年不樂仕宦。退老網障。年至九十。夫人金氏亦無恙云云。雖以當時所諱。不敢直書。而微意已見。先生弟參判恭僖公諱季專記先生出處終始。其說頗詳。而亂離散失。先生私稿二秩。幷失於兵火中。先生生于洪武二十五年壬申。終于成化十六年庚子。享年八十九。葬于善山府東延香之南彌石山西向之原。有短碣而無文。夫人金氏之墓在其前。先生娶直提學金成美之女。 善山人。爲尙州按廉使申祐之壻。生四男一女。男一曰朝散大夫行大丘敎授恂。嫡孫淸河縣監堢源。外泒有修撰李德洙,都事李德泗, 淸州 判書鄭經世。 尙州 曰惴。外泒有縣067_491b監李軫李輔, 軍威 承旨崔晛, 善山 進士申適道,掌令申達道,佐郞申悅道。 義城 曰惇。外泒有牧使金涌,進士李榮男。曰怡。外泒有進士金安節,生員金光繼, 禮安 進士朴弘慶,幼學宋光弘。 善山 女適輔德朴斯悌。姓孫之在星州者無多。在永川者稍多。六代長孫司果希芳。其子。支孫生員希陽。其子得澍,得㵟得以奉先生丘壠。

訒齋先生文集拾遺
 
答鄭仁弘書 別幅在原集 a_067_488c


比年來。賤跡絶不近軒屛。秪爲屑屑世故牽撓。至于三四年不能飛訴衷曲。常懷慨恨。金慶遠來。得台監手筆。仍審邇來台體益康。欣幸如何。且不以賤生無狀而絶之。問死生垂警誨。流汗之餘。感幸尤極。賤生本無剛果振發之氣。懶性薄行。學力掃如。斂容危坐。亦強不得。況難於此者乎。邪鄙之念。闊遠之思。迭相擾攘。隨滅隨起。到此方知。謹獨境界未易言也。看人能過此界者。仰之如堂上人。不敢輕議。未過此界者。於我等夷。視之便輕067_488d也。一世友朋間。亦且如是。何敢輕議於先賢也。悠悠浪度。已迫白首。半生經營。都是捉影。有何尺寸之實得耶。晩來計窮志卑。復人所謂場屋者。被抄於科目。拜見於君門。人或不知其無實而列之於史館。掠取虛名。瞞過一世。非但自恧於心。寧不爲明目者所嗤笑耶。旣無強力健步。而顚躓於昏夜之途。前頭狼狽。必有大於前日者。至此而雖欲望救於相愛者。安可及乎。以此思欲斂避於未仆之前。從遊於長者之門。以遂平日之志願。但自揣懦弱。恐亦未能斷也。台監所謂不敢相問以累其人者。豈非以賤生蹤跡之久隔。爲怕世人唇舌。而置067_489a疑於生而發此語耶。旗幟自別之後。人之從違。異於曩時。台監之自疑而疑之。亦或然也。餘在別紙。幸賜覽察。

附仁弘書
曾聞攀桂之慶。迨不能相賀。繼聞又登淸班。久未相慶。是固衰朽之物一廢人事之致。又有一事有不能自安者故也。與無狀相知。爲世所忌。人有相就。輒不自安。況自家敢與人相問。以累其人乎。以此遲徊。聞問一斷。良可悢悢也。幸因金慶遠見過。敢此奉問。

仁弘再書 先生答書在原集
前承辱復。傾倒宿蘊。感幸迨深。目今仕況。想惟萬安。067_489b前簡中許多說話。有非泓穎所能盡。特付之一笑間耳。凡人得於人言者不詳且深。而得之目見者深且明矣。左右雖因金鶴峯有所聞見。鶴峯初不識先生。只襲退溪緖論。鄙人曷嘗遽易平生所目見者。而爲人言所動也。且國乘雖禁。士流間傳說。亦幾多年。決非妄傳。而一家事。人有手目不可掩。人有頰舌不可箝。此亦可有所考定而後。得其眞的耶。幸左右十分商量。不效齊人也。如何如何。



 

 

 

 

訒齋先生文集附錄

 [神道碑銘]
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完城君。行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訒齋先生崔公神道碑銘[蔡濟恭]。 a_067_521c


 

067_521d公諱晛。字季昇。自號訒齋。崔本全州人。鼻祖諱阿。在麗官侍中。五傳至縣監諱水智。始居善山之海平。子孫家焉。諱以淮。主簿。贈左通禮。諱致雲。參奉。贈左承旨。諱深。贈左參贊。寔公之曾大父大父父也。以公故貤贈三代。妣贈貞夫人星山李氏。智源女也。公弱冠。游學鶴峯金先生門。聞爲學大方。萬曆戊子。中生員。丙午。登第。自翰苑以後。雖間値昏朝。偃蹇鄕里。及仁祖067_522a龍興。知遇昭融。歷揚三司。位躋觀察使。官序非不顯也。才諝非不試也。後之人論及公平生。或有絫欷長嘆不能已者。此其故何也。公天資超詣。才智通敏。師友所講。發之爲經綸大業。方壬辰之亂。以布衣陳書體察幕府。皆經國撥亂之謀。李公元翼爲之感嘆。除健元陵參奉。旣肅命。疏陳萬言。其條有九。而所以行之者一也。所言皆中時弊。已而謝病歸。及登第。薦授翰林。光海戊申。遷說書。拜正言。作九知銘以自省。以賀節書狀朝京師。律己馭下。象胥皆肅然。及還。連除正言,持平,實錄郞廳,體府從事官。選玉署奉暗行命。察關西沿江防067_522b守。旣復命。大臣李公德馨,李公恒福辟爲備局郞兼舟師句管司從事官。公疏陳舟師利害。遂巡遍兩南。施設中窾。俄除鏡城判官。大臣難其代。屢白上仍之。拜弘文館修撰。時光海入術士言。議遷國都。公上箚力爭。議遂寢。又除校理。移文學。光海方追崇奉慈殿。議奏請誥命。公上箚言家無二尊。禮無二嫡。魯隱之於仲子。僖公之於成風。春秋深以爲非。而未聞二君追請册命於天王。豈非守禮畏義而不敢爲也。移正言。賊臣爾瞻誣大妃父擁永昌大君謀變。獄旣成。臺閣議按律大君。公度爭之無益。引例嫌辭遞。賊黨怒。劾之削公職。公夷然臥067_522c田里者十有一年。仁祖反正。拜修撰兼都元帥從事官。公疏言方群兇之誣殺大君。臣官以諫爲名。噤不得一言。其不爲鄭蘊之罪人乎。自是歷應敎,舍人,執義,司成,輔德,體府從事官。及陞通政。累除承旨。遷大司諫,禮兵刑三曹參議,大司成,副提學,承文副提調。廟堂薦廷臣才堪將帥者十人。公與焉。皆極選也。當仁廟初卽位。勳貴張甚。擧措多不厭淸議。建虜日耽耽西北。有朝夕憂。公旣起廢。感激殊遇。事有關朝廷得失。知無不言。言無不盡。而於二者懃懃懇懇。累致意而不知止焉。其以玉堂進講。力言治獄不可太濫。朋黨不可不臨之067_522d以至正大公。使偏私自底丕變。論禦敵之策則曰。虜若長驅。不可與爭鋒其勢。避之而已。而今諱言避寇。臨急避亦不易。雖不可以預言避。以怠人心。然堅壁淸野。不可不爲之所也。其赴元帥幕。上賜以酒曰。往懋哉。馳往黃州。閱海西兵馬。亡何逆适叛。上命公爲督戰御史。授之劍曰。戰不力者。副元帥以下劍斬之。元帥張晩與賊遇猪灘。戰不利。乃馳啓歸咎公督戰。公亦馳啓罪狀晩。及鞍峴大捷。朝廷論功未決。公詣行在。盛言晩指授方略。由是策晚爲元勳。其爲承旨也。大妃宮隷有僞署橫畿甸者。憲府繩以法。上飭曰。隷。慈067_523a殿屬。愼毋刑。公繳還。上切責之。宮隷後又如之。憲府捕治急。上又命放遣。公繳還如前。仍啓曰。臣寧得罪於殿下不欲使殿下得罪於丘民也。以大司諫上箚極言曰。近日旄頭動曜。天狼生芒。藏雷暴發於昴,畢之分。應在燕胡。虎視方張之賊。蓄謀待時。而老成狃於媕婀。名流昧於遠圖。仍又反復言勳臣之募聚軍官。宿衛私室。有難言之弊。嗚呼。公之心君耳國耳。一字三歎。爲時事累致意者在此。不在他也。而穽石隨集。使公終不得展布支體者。亦未始不在於他。嗚呼欷矣。時諸勳貴大慍怒。白上曰。某之言欲杜絕譏察。俾逆徒得067_523b逞其計也。會有賊金愿誣引公。贊成金瑬至以公爲知逆謀而不告。上責之以情外。特原公勿問。以副提學箚陳八務。又陳修明弊政箚。曰官制也。曰田制也。曰兵制也。援古適今。皆得損益之宜。未幾拜江原道觀察使。明年丁卯。虜跳入。公亟選精銳。聲援海西陳。自以卒千餘人屯漢津。都元帥及關北軍之頓江原界者。給饋餉不絕。草檄文以風勵義士。士爭爲用。及虜退。公慷慨復陳萬言疏。其要先之以立志。次以立紀綱省宂官養軍兵蓄財用設保障爲五急務。而末乃言江都,南漢。非萬全地。惟赤裳城。據湖嶺饒物力。閑山諸島。統營舟師。互067_523c爲聲援。今之保障。恐無踰於此矣。上嘉納之。亟命議處。廟堂竟不用。時橫城賊李仁居謀叛。原州守洪靌執以獻諸朝。前此公已疑仁居有叛謀。密令靌伺察而嚮之。不悅公者反謂公縱賊。逮繫詔獄。上曰。崔晛嘗於夜對。直陳宮闈過失。予甚苦之。徐以思。眞愛我深也。曾謂伊人乃與賊相關耶。特放之。以言者爭執竄會寧。尋宥還。後有無賴賊楊天植誣及公被逮。上又以前所敎者敎之。又放之。嗚呼。此固仁廟明聖不忘公讜直之言。而亦可見公之孤忠直道。有以結主之深也。以庚辰六月四日卒。壽七十八。葬于善山默坪向坤067_523d之原。上遣禮官弔祭。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如例。以子山輝參勳倦也。公早登師門。又從寒岡,旅軒諸先生遊。象緯堪輿。兵法籌數。靡不旁通。而百世之後所可見者。獨章疏在爾。公未沒。已有南漢下城之役。公之先事所言。不幸皆中。擯斥公不用其言者。于國事何如也。公言之不見用。非公之不幸。實世運之使然也。後之讀公書者。其有不絫欷長歎矣乎。公元配義城金氏府使復一女。生一男山輝。策寧社勳。通政府使。後配昌寧曺氏,載寧李氏。皆贈貞夫人。山輝三男一女。爾博,爾厚,爾遠。壻縣監朴愰。爾博二男一067_524a女。應乾,體乾。壻呂景和。爾厚三男一女。大乾,象乾,峻乾。壻進士李萬英。爾遠無子。玄孫司馬者一。斗元。五世孫司馬者二。壽頤,壽仁。登第者一。憼。六世孫司馬者七。萬柱,廷柱,光玉,光岳,光翊,光稷,光迪。登第者一。光璧。卽請銘者。七世孫司馬者三。綽,溟羽,陽羽。內外雲仍。多不盡錄。銘曰。
君子之學。所貴淵源。韙哉崔公。有光師門。公奮自躬。仁廟知臣。何以寵之。玉署薇垣。憂治危明。公膽輪囷。內有勳貴。家兵如雲。外有強胡。磨牙虎蹲。公有琅函。瀝血天閽。王曰旨哉。嘉乃攸言。柄臣憤詈。口正沫出。乘機067_524b下石。禍積身孑。王曰予知。汝惟忠直。命開圓戶。天日之白。公廢在家。奈何南漢。勿謂無人。公實先見。仁廟明聖。匪曰棄公。公躓不騫。實維彼穹。默坪之阡。有鬱其楸。我銘昭眎。志士之吁。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原任兼兵曹判書,判義禁府事兼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孫左賓客,奎章閣提學蔡濟恭撰。


訒齋先生文集附錄
 [行狀]
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完城君。行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訒齋先生崔公行狀[李象靖]。 a_067_510a


公諱晛。字季昇。姓崔氏。其先全州人。高麗門下侍中諡文成公諱阿實爲鼻祖。五世至諱水智。比安縣監。贈都承旨。始卜居于善山之海平縣。子孫仍家焉。曾祖諱以淮。司僕主簿。贈通禮院左通禮。祖諱致雲。參奉。067_510b贈承政院左承旨。考諱深。贈議政府左參贊。三世皆以公貴也。參贊公隱德不仕。旅軒張先生實銘其墓。妣東萊鄭氏。煕佐之女。德陽奇氏。敎導遇之女。星山李氏。秉節校尉智源之女。正言耕隱先生孟專之曾孫。俱贈貞夫人。嘉靖癸亥六月十日。公生。幼穎秀異凡兒。八歲。受學於杜谷高公應陟。厲志尙學。屬對輒驚人。九歲。貞夫人卒。執禮如成人。十三。方伯策士於金烏書院。公製居魁。人莫不驚歎。弱冠游鶴峯金先生之門。得聞爲學之方。自是問學日進。同列皆推服。萬曆戊子。登生員第二名。己丑。丁參贊公憂。式禮罔愆。壬辰。島夷發難。公067_510c避居于眞城,寧海之間。甲午。還故居。丙申。體察使李公元翼開府于嶺南。公上書陳三綱九目。皆經國撥亂之謨。李公復書感歎。戊戌。宰臣薦公才行。除健元陵參奉。旣肅命。疏陳九條。曰。人才戕鑠。朋比之習壞之也。曰。綱紀不振。以將相之無權也。曰。人心解弛。以賞罰之不明也。曰。士氣偸靡。以奬勵之未至也。曰。賢俊未集。以誠信之未孚也。曰。庶官不職。以委任之不專也。曰。軍容失振。以御將之無方也。曰。民生日困。以守令之不擇也。曰。國計日蹙。以制置之失宜也。其條有九。而所以行之者一也。一者何也。卽所謂誠也。時新經大亂。百度叢067_510d脞。所言皆切中時務。遂謝病歸。後除參奉。不赴。丙午。登第。丁未。薦授藝文館檢閱。時相有濁亂朝政。公直書不諱。時輩將攻擊。公呈由南還。光海戊申。陞待敎。遷侍講院說書。俄除司諫院正言。作九知銘以自省曰。持身不可不重。處事不可不審。發言不可不謹。趨舍不可不明。學識不可不廣。威儀不可不飭。交道不可不愼。應接不可不誠。吏事不可不習。八月。兼司憲府監察。充賀節使書狀。翌年三月。復命。公律己簡約。馭下嚴明。驛隷畏服。以未及改正勑書中權署二字。三使俱被拿推。旣出。遂還鄕。在途拜正言。呈辭遞。庚戌正月。赴宣廟再期。067_511a除司憲府持平兼春秋館記注官,實錄廳郞廳兼體府從事官。旣而錄玉堂。以暗行御史下關西。有規畫沿江防守便宜。復命。還郞廳從事官。大臣李公德馨,李公恒福啓請公爲備局郞兼舟師句管司從事官。整飭海防諸務。時公在鄕。令道臣給馬上送。辛亥。詣闕。疏陳舟師利害。請停不急之役。省浮費專防守。遂巡歷兩南。設施得宜。未竣。移除鏡城判官。備局啓曰。崔某下去兩南。分防磨鍊。稍有頭緖。若以他人代管。事歸渙散。請改遞判官。使仍管舟師之務。再啓得請。未幾還朝復命。復授實錄廳郞廳,春秋記注。管舟師之務兼兩南巡撫御史。海067_511b防諸務。次第就緖。拜弘文館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記事官。還朝拜命。廢主聽術士言。欲遷都交河。命大臣率觀象提調獻言地官。往相形便。大臣臺諫極言不便。公聯箚力爭。言甚剴切。議遂寢。以御史巡審聞慶,御留山城形勢。陞弘文副校理兼經筵侍讀官。又以備郞。兼鳥銃廳都廳。癸丑。除侍講院文學。陳疏請博選山林賢士。輔導東宮。廢主追崇奉慈殿。欲奏請誥命。公上箚言。旣膺顯號。享以別殿。尊奉之典。極其隆盛。今以誥命之請。欲上聞於天子。臣聞家無二尊。禮無二嫡。大經大法。至嚴至明。故魯隱之於仲子。僖公之於成風。春秋深067_511c以爲非。而未聞二君追請册命於天王。豈非守禮畏義而不敢爲也。今位號已定。尊稱國中。無一毫未盡。雖或請于天朝。無所增加。況請之而未蒙準許。反取上國之譏議。不亦有慊於顯揚之道乎。移拜正言。時賊臣爾瞻陰嗾其黨。以府院君金悌男欲推戴永昌大君。羅織成獄。按律大君之啓。朝夕且發。公度不可爭。引例嫌辭遞。廢主不悅。鄭造,尹訒啓曰。崔某引小嫌規避大議。請削奪。廢主從之。自是斂跡丘園。以圖史自娛。凡十有一年。癸亥。仁廟改玉。拜弘文館修撰兼都元帥從事官。公陳疏乞遞。略曰。壬子春。有推戴大君之說。飛語城中。067_511d播傳宮禁。人心汹汹。朝夕待發。臣時拜正言五日矣。烈焰迫眉。欲言不得。遂引身苟避。竟遭削黜之罪。傳曰。臣下不匡。其刑墨。況臣責在言地。職當碎首。而坐見群兇誣殺幼稚大君。而噤無一言。狼狽而退。終未免惜一死負先王。爲鄭蘊之罪人。寧獨不愧於直士之風乎。自是杜門絕跡。自分終身於窮谷。無望登仕籍而入國門也。幸今獲際龍飛。得列彙征。而顧省前罪。忸怩于中。何敢不有物議。冒恥靦面。重以負罪之身。玷辱淸朝之名器乎。上優批。仍使察職。時鞫獄未畢。囚繫滿獄。公進曰。天下自有一定不易之法。非執法者所可低昂。如067_512a有罪犯綱常。謀廢國母。投疏之首唱儒生。論啓之臺官。必殺無赦。請殺大君者。當寘次律。附托元兇。陷害忠良者次之。陰主其謀。名漏疏箚。而久秉銓衡。廣植徒黨者次之。其或本心不然。而怵禍隨波。參於庭請啓辭及儒生之被愶參疏者。宜從脅從罔治之律。等級分明。以次科罪。則一有司之事。自上亦勿留難。斷以公議。則何有紛擾淹滯之患乎。上是之。拜校理。日侍講筵。因文進戒。有曰。君子小人。所爲不同。而亦相近似。小人之陷君子也。亦以朋黨目之。漢之黨錮。我朝己卯之禍。可以見矣。人君衡鑑未精。不察其公私之分。則其禍067_512b大矣。小人之黨。易知而易去。君子之不相和協。尤爲不幸。宋之洛朔。我國之東西是也。上以至正大公之道。行之以誠。悠久持循。則偏私之習。自然丕變矣。又曰。古今帝王。孰不欲明德新民。而以堯舜不可幾及。安於自畫。而無進進之工。所以日向昏蔽而不能明也。願殿下勿以大堯之克明峻德爲高遠難行。而顧諟明命。加自明之功。如衣服飮食之不可一日廢。則是亦堯而已。若乍作乍輟。則旣明而還蔽也。爲學最難於終始如一。而人君尤難。近日殿下監覆轍爲戒。與民更始。若因此克終其德。無少間斷。則親九族和萬邦。不難致矣。又067_512c曰。聖人無私欲間斷。而自無不誠。衆人則思慮方萌。善惡幾頭。最是難處。必勉爲誠實。無自欺之蔽。是學聖工夫。其實一也。又曰。禦敵之策。曰戰曰守。不能戰守則避之。今毛將孤棲海島。僅圖自保。我雖竭一國之力。虜若長驅。則不可與爭鋒。一敗塗地。根本蕩竭。雖欲固守。亦不可得。其勢必至於避之而已。稍緩之日。諱言避寇。而臨急則避亦不易。今雖不可以預言避。以怠人心。宜思堅壁淸野之戒。尹昉曰。崔某自少留心兵務。曉達軍事。頃往關西。圖畫山川。規畫守禦之策云。今爲人佐幕。不足以有爲。可使當一面之任。公曰。臣質弱性緩。不合兵067_512d陣間。但生長干戈。徒有慷慨坐談而已。況今年衰多病。元帥之辟爲從事。惟知臣盛壯時也。旣爲幕官。明當拜辭。扶病下去矣。上曰。往懋哉。命進圖畫山川一册。宣醞賜弓矢。到黃州。査點列邑軍兵。未幾拜弘文應敎。元帥以病啓遞從事官。卽還朝陳病免。遷成均館司藝,司䆃寺正。上命備局薦儒紳有將才者。凡薦十人。極一時之選。公與焉。歷議政府舍人,司憲府執義,弘文館應敎,成均館司成,侍講院輔德。甲子。拜體府從事官。尋移拜舍人。賊适擧兵叛。上命公爲督戰御史。授以劍曰。有不力戰者。副元帥以下聽自斷。公星夜西067_513a馳督諸帥。勉以忠義。時元帥張晩擁兵持重不卽戰。公移文責之。晩怒。至猪灘始交鋒。官軍見敗。晩馳啓歸咎公督戰。公上啓曰。猪灘之戰。我軍物故僅六百人。賊兵逃散者殆累千人。前此果能屢次交戰。則賊兵自底散亡。而養寇貽患。以致鴟張。元帥烏得免其罪。及鞍峴大捷。行朝論功。副元帥李守一爲首。奪張晩職。白衣從軍。公詣行在。上問曰。今日元勳當爲誰。公對曰。指授方略。皆出於張晩。而李守一特先啓捷報耳。宜有首從之分。上從之。又問李興立之罪。公曰。興立迎賊之狀。昭然難掩。尙保首領。臣竊怪之。卽命處斬。067_513b上之倚重於公。言聽計從如此。旣還都。特陞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公謝恩訖。陳疏自劾。辭陞秩。未幾拜兵曹參知。俄拜承政院同副承旨。時明禮宮掌務僞印圖署。作挐畿邑。憲司摘發推治。上下敎曰。上殿所屬。事體自別。而無端刑訊。震驚慈殿。有欠尊敬之道。今後十分愼戒事。言于憲府。公啓曰。法府之任。綱紀庶政。作奸犯科之人。無論宮府。所當糾治。明禮宮掌務敢做圖書文字。侵擾民間。法府之摘發刑訊。乃其職也。使中外曉然皆知中間奸細輩所爲。而不使民怨上及於慈殿。揆以事理。豈有未安哉。今若以十分愼戒067_513c之意。下于憲府。則竊恐臺官沮喪。下輩增氣。曩時橫恣之弊。將復見於今日。臣等待罪喉舌。不敢以此敎傳于憲府。謹以還入。惟聖明三思焉。上曰。近來政院不識事體。凡下敎。任意還入。極爲駭惡。承旨推考。兩司啓請還收。不允。後筵臣相繼苦諫。遂寢推考之命。本宮掌務猶踵前習。圖出印文。撓害外方。隱避不現。憲府又極論其前後姦橫之罪。上答曰。累啓不允之事。如是任意囚治。今日臺官。可謂慢蔑君命者矣。速爲放送。公啓曰。作弊下人。法府以糾摘推治爲己任。而殿下以本宮所屬。非他下人比。嚴敎至於再三。067_513d司寇之職。以詰姦禁暴。爲尊主庇民之義。雖以天子之父殺人。猶且按法不饒。況本宮下人在法當治者乎。若以請罪爲任意。按法爲慢蔑。則不亦未安之甚乎。臣前以封還下敎。負罪已大。而今又冒死煩瀆。臣等寧重得罪於殿下。不欲使殿下得罪於丘民也。伏願亟加三思此公事。付標允下。以示優容臺閣之道。公隨事覆逆。出納惟允。人以爲古道復行於今日。遞拜護軍。俄拜司諫院大司諫。上箚極言時弊。其略曰。臣伏見天災時變。莫甚於今日。兩曜失明。五緯亂行。流星犯於明堂。木宿凌乎執法。旄頭動耀。天狼生芒。又於四日之067_514a夜。藏雷暴發於昴,畢之分。應在燕胡。臣等終宵憂悸。累日靡定。丙枕之中。所以惕慮憂懼者。寧有其極耶。殿下以勤勵不息之誠。孜孜於上。而耆舊之臣。賢能之士。各循其職。百弊俱除。求諸人事。似無致災之由。變異之生。或出於適然者。然竊觀近日所爲。皆襲秦故。了無整頓之實。殿下雖有求賢之誠。而少延攬交孚之道。雖有圖新之志。而失先後本末之序。雖有節儉之德。而無汰宂省費之實。群臣雖有夙夜之勤。而百職之廢隳猶古。雖有甄拔之稱。而循私之獘習猶古。雖有裁省之令。而姦吏之操縱猶古。綱紀日紊。人心日撓。軍政日壞。國計067_514b日蹙。虎視方張之賊。畜謀待時。懷怨樂禍之徒。扇動俟隙。當今之勢。可謂岌岌。而猶益張虛文。修飾外貌。老成狃於媕婀而莫肯擔當。名流昧於遠圖而惟事浮議。設或外有猝發之寇。內有不虞之患。則其孰能爲國家出一計。止此波蕩之勢乎。反正之初。巨姦大慝。旣伏其辜。則罪犯倫紀之外。枝葉緣坐之類。在所勿治。而竄配太多。樹怨益衆。似非王者廣大之治。勳臣軍官。稱以扈衛。宜若有賴於緩急。而謀避遠戍之輩。爭相投附。千百爲群。宿衛私室。雖爲一時姑息之計。而實非久遠常行之規。弊源一開。末流難防。欲善於後。宜審於早。號牌067_514c之法。非不美矣。而根本未定。紀綱不立。法不徒行。旋立旋廢。只爲騷屑之端。終無整理之期矣。凡所猷爲。必有其幾。及今不改。則必至危亡。此天心之不豫而警動之。欲使殿下惕然而改紀也。伏願殿下。勿以天道之幽遠而弛其寅畏之心。思得忠實無華辦局宏博之人。委以股肱之任。朝夕延訪。不使浮議間之。而得以展布其四體。又得才略勇敢計慮長遠之人。委以閫帥之責。節制區畫。惟其所爲。不以道謀亂之。而得以自盡其才智。旣得二三忠藎之臣。則文武百職。隨器以使。旣分其職。勿爲遷動。使庶官老於其職。帥臣死於邊城。不效則067_514d責其怠慢之罪。置諸誅殛之典。其誰敢不盡力於今日之爲哉。若其急務之當先者。汰不急之官。罷別設之局。以省浮費。赦緣坐之人。業無賴之徒。以鎭人心。擺脫文具。專效實務。居弱以制強。處簡以制煩。力行不怠。以次修擧。則人心旣悅。天意可回。危亡之禍可捄。而中興之績可致矣。答曰。爾等之言。正中時病。爾等可謂識時務者也。挽回世道。振肅頹綱。責在君上。今日老成狃於媕婀。年少者之惟事浮薄。豈非寡昧無德之致也。天災如是。習俗又如是。予極慙懼。罔知攸濟。爾等職在言責。隨事極言。毋或少隱。箚辭當體念焉。勳臣以疏中有軍067_515a官投附宿衛私室之語。衆怒朋興。公論啓引嫌。上意欲調劑。特命遞差。未幾拜兵曹參知。會有賊金愿伏法。一時名流多誣引。而公名亦在其中。上命勿問。公陳疏自劾。略曰。臣姓名出於賊招。而天日燭幽。旣下勿問之旨。又以勿待罪察職爲敎。感激之至。黽勉供仕。竊聞重臣登對之日。以臣請去軍官。欲杜譏察之路。使兇逆之徒得逞其計。又以臣知逆謀而不告。夫知而不告者。與之同罪。是豈人臣之忍爲乎。臣雖無狀。粗知君臣之分義。兇賊之所知也。彼雖兇頑。豈以不軌之言。聞於臣耳。而臣亦忍聞此言。默然而已乎。重臣067_515b之言。旣發於筵席。臣不敢自以爲無罪而強顏世間。伏願下臣于吏。究其情僞。以治臣罪。左贊成金瑬箚論公甚峻。上下批曰。崔晛陳疏自明。猥濫甚矣。然其本心則質直而已。豈有知逆謀而不告之理乎。卿言亦過。勿以情外之說論人之罪可也。公旣忤勳貴。旋被賊誣。群憾交搆。乘機詆斥。而幸賴聖明下燭。直許勿問。倘非孤忠直道蚤結於人主。幾乎不免矣。乙丑。拜刑曹參議。轉禮曹,大司成,副提學。箚陳八務。曰。明心學以爲出治之本。曰。謹辭令以順群下之情。曰。嚴宮掖以絕街巷之議。曰。重相臣以責治平之效。曰。器使人以盡一代之才。曰。067_515c戒數遷以存敦樸之風。曰。植公議以銷朋黨之弊。曰。崇儒學以培風化之原。又因進講。陳修明弊政箚。其略曰。今之尤甚頹廢者有三。曰。官制田制兵制也。三者之中。官制尤急。今備局專主國政而政府爲一閑局。政院只管出納而承旨爲一該吏。別設都監而本司反歸剩官。數遞官員而省寺有同郵舍。不管文書而吏胥得以弄法。職多兼帶而無專責之實。事歸曹司而無分職之意。課責不明而瘝曠成習。俸祿太薄而廉恥易喪。此皆官制之弊也。我朝自廢署事之法。三公無論政之所。於是。別設備局。以宰臣之知軍務者爲堂上。以武班之識067_515d字者爲郞廳。其制略似宋朝之樞密院。而朝家政令。幷歸備局。自此贊成,參贊爲養病之地。舍人,檢詳爲妓樂之司。機衡之重。反付無物望之宰相略識字之武夫。如是而望治道之成。不已左乎。宜遵祖宗之法。復設署事之規。然後政令出一而紀綱立矣。今之承旨。卽古之侍中,尙書令。而中朝之內閣也。國之大小文書。莫不關由於此。凡政令之利病。君德之得失。大臣臺諫無由得聞。獨承旨知之。其位之重爲如何。而今之物望。反在三司之下。只得奉行文書而已。臣謂宜極擇時望。以充其選。頻賜顧問。以重其權。使之隨事封駁。密贊王067_516a猷。與政府相爲表裏可也。今日政事之頻煩。皆由於臺諫之數遞。亦由於小嫌之皆避。臣聞祖宗朝臺諫。雖有推考。亦不避遞。使兩司互相發緘。可知避嫌本非祖宗之制也。且或偶感微疾。略有難便。爭相引告。如或不及。尤爲未安。且古之言官。各自論事。故人人得盡其所見。今之啓辭。下吏持簡通奔走各員之家。必待歸一。然後啓之。以此動被拘礙。不敢盡言。一有違誤。鬧端紛起。今宜悉倣舊制。勿爲避嫌。勿爲呈告。凡有所懷。各自陳啓。惟大段擧措。朝議僉同者。方爲合啓。則讜言日聞。而且無紛擾之患矣。至如朝臣之有經學者。067_516b置之經幄。專責輔導君德。有華藻者。置之詞掖。專責代贊王言。其他隨其才地。置六曹及各寺。專責一任。勿爲兼官。勿爲遷動。其有異績者。各於其司。得以陞遷。且諸司之不緊者。合而一之。員額之太多者。汰而去之。又別設散局。多其員數。而少其祿俸。凡積仕年老。無田可歸者。實有疾病者。一以爲錄用之階。或有奉使差祭等事。皆以此塡差。則在職者無曠闕之患。失官者無落魄之歎矣。外方則監,兵,水使皆許帶一州。令各食其地之入。而置文臣判官。察其細務。防其縱恣。則有久任責成之效。而無侵奪列邑之弊矣。若乃軍政則揀精壯而編067_516c束伍。除老殘而收價布。寬其役而返逋逃。敎技藝而致精鍊。田制則改量田而收漏結。復大同而均民役。禁立案而抑兼幷。除免稅而廣賦入。此大略也。大抵今世之人。以淸曠爲高致。以勤幹爲陋俗。以循私爲厚風。以奉法爲薄德。以數遷爲榮華。以久任爲苟且。以關節爲法典。以浮議爲公論。此等風俗。若不丕變。則爲江左之偸安。宋朝之委靡。良法美政。亦無所用之矣。又拜大司成兼承文院副提調。疏辭不允。丙寅。拜右副承旨。例遷左副。時有白虹貫日之變。陳啓弭災格天之道。皇子誕生。頒詔使渡海。公以延慰使下關西。病未將事。067_516d上命他使臣代行。還朝病遞。遂下鄕。在途拜左副承旨。陳疏乞遞。辭意甚懇。上允之。賜藥物。未幾。拜江原道觀察使。田結虛位。糴穀逋欠。爲一道痼弊。公卽陳疏。令列邑爲虛實兩册。蠲虛位而出賦實結。査逃故。以蕩條逋欠。一道均沾實惠。丁卯。北虜東搶。大駕播越。公選精兵送海西副元帥陳下。糾合老弱千餘。防守漢江。都元帥及關北軍兵來住境內。公竭誠拮據。以毋乏其饋餉。爲檄文通諭一路曰。嗚呼。大賊猖獗。國步蒼黃。廟謨顚倒。未有定計。方岳守宰。惟奔走策應之不暇。而無一人張弮冒刃。北首而爭死者。數百年培養之067_517a元氣。靡然如烈風之枯草。言念及此。可堪痛哭。諸君子生長禮義之邦。不習軍旅。値此顚沛之日。救死不贍。而猶懷主辱臣死之義。共奮與國同仇之意。倡起義旅。鳩聚義糧。誠有古烈士之風。而于國家有光矣。似聞列邑或有非笑義士。不從其令。甚者至有陰排顯斥。必欲沮撓而後已者。聞來不覺怒髮衝冠。拔劍而斫案也。當職白首腐儒。按節一路。心勞才拙。縱無可觀之績。尙義癉惡。出自所性之天。誠有爲國效忠。願爲擁帚而趨迎。如或害義壞事。必欲按治而抵法。當令列邑守令一一摘發。斷不饒貸。唐之悍卒。尙泣興元之詔。凡有血氣067_517b者。獨不念十行哀痛之敎乎。凡百君子。益勵爲國之丹忠。勿爲小人之所動。或聚糧餉。或募義士。助戰王師。期於盡節。又置善惡籍。其有不惜財力。樂赴義兵者。置之善籍。或有厭聞大義。譏詆排斥者。置之惡籍。終當轉聞。顯施賞罰。亦或有初迷後悟。改過從善者。恕其前罪。共濟大事。幸甚。檄到。人爭奮勵。及大駕還都。公疏陳時務近萬言。大要以立志爲本。而立紀綱省宂官養軍兵蓄財用設保障五者爲急務。其末有曰。所陳五事。皆是末節。固非儒者進君之辭。而火燃眉上。不待規行。伏願殿下。折衷裁擇。如或可採。則斷然行之。067_517c以爲綢繆之一助焉。上答曰。嘉卿愛君憂國之誠。所陳之事。當議處焉。公前後箚疏。皆切中時弊。而至是尤加切焉。其辰猷石畫。眞爲治之良法。救弊之要務。而竟未能施行。識者恨之。公聞關西義將鄭鳳壽入龍骨山城。有奮義却賊之功。而兵匱食盡。遂以木綿弓矢丸藥馬匹。送助軍須。以不待朝令。私助他境。啓聞自劾。關西伯啓曰。鄭鳳壽守龍骨易。崔某救龍骨難云。九月。巡到橫城。縣人李仁居請見。自言欲起兵討賊。方治疏西上。公嚴辭揮斥。密戒原,橫二守。另加譏伺。而行到洪川。又再三申飭。使隨機急通。及聞其盜竊橫城軍器。067_517d大驚卽馳啓言狀。而急遣人遺書仁居。諭以逆順。整飭諸邑官軍。使左右進勦。原守洪寶發兵捕獲。直獻子朝。而始報于公。公聞卽馳報。而朝廷以緩於譏捕。逮繫累月。事將不測。上曰。頃年夜對。適有處置未盡事。此人力爭不已。予頗苦之。厥後思量。眞愛我者也。今雖被罪。必不負初心。其令放送。言者猶爭執不已。竄會寧。尋宥還。庚午。無賴賊楊天植謀逆發覺。辭連被逮。上又引前言下敎曰。如此忠諒之人。豈有與賊相知之理乎。特命放釋。公感激天恩。書傳敎以戒子孫。丁丑。哭子山輝。慘悴不樂居家。移寓金陵別墅。庚067_518a辰六月四日卒。享年七十有八。十二月某日。葬于默坪向坤之原。訃聞。遣禮官弔祭。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完城君。蓋以山輝參勳故也。公娶義城金氏府使復一之女。生一男。卽山輝。通政府使。策寧社勳。再娶昌寧曺氏。後娶載寧李氏。俱贈貞夫人。府使三男一女。男長爾博。副司果。次爾厚,爾遠。女適朴愰。縣監。爾博二男。應乾。副護軍。體乾。副司果。爾厚三男。大乾。象乾出后。峻乾。應乾四男。斗瞻,斗望,斗紀,斗昂。體乾一男斗樞。大乾二男。斗極,斗齡。象乾四男。斗興,067_518b斗元生員。斗寅,斗南。峻乾二男。斗光,斗徵。雲仍以下僅數百人。多不盡載。其登科第者。五世孫壽頤生員。憼文科典籍。壽仁生員。六世孫萬柱,廷柱生員。光玉進士。光岳俱中生員,進士。光璧文科前持平。光翊進士。光稷生員。七世孫綽,陽羽生員。公天資超邁。氣度寬毅。忠信以宅心。廉謹以持己。聰悟絕人。博聞強記。尤用力於經傳。有深造自得之功。至天文地誌兵陣籌數之法。亦皆精曉。爲文章取理順辭達。不爲險棘語。見人之善。稱之如不及。聞人過惡。未嘗出諸口。與人言誠意懇惻。至臨事辨是非。則毅然有不可奪者。公自少留心經濟之務。平067_518c居激昂慷慨。論古今成敗得失。爬梳糾錯。貫穿肯綮。要以見諸施措運用而非空言也。釋褐未久。遭値昏亂。炳幾謝事。杜門自靖。及際會淸明。眷遇昭融。則感激言事。長疏短箚。極言竭論。不避忌諱。其指切事情。披露悃愊。殆無讓於陸贄奉天之奏。賈傅痛哭之策。上皆虛心開納。悉其忠諒。許之以識時務。嘉之以愛君憂國。君臣之間。抑不可謂不遇也。不幸遭罹厄會。再被逮繫。雖天日照燭。卽蒙雷雨之澤。而勳貴交憾。乘機構毀。自是公之跡。浩然於烏山洛水。而不復起矣。抱負經奇。際遇明時。而不能展其萬一。豈非百載志士之憾067_518d哉。雖然。今其書具在世。有主父偃者。讀而薦之於朝。得見採焉。是亦公之言行也。不恨其不見用於當時也。公早遊師門。旣又從寒岡,旅軒諸先生。往復論辨。薰陶資益爲多。而務爲韜晦。不自著述。故無以攷其學問造詣之詳。然賴有講義一篇。其剖析經訓。陳說義理。皆合乎聖賢之旨。而敷對明晳。因事規戒。又深得告君之體。若公之學。豈非所謂因理以制事。明體而適用者與。今有詩文雜著,經筵講義,鶴峯言行錄,一善志,關西錄若干卷。光璧奉家牒屬象靖曰。先祖事行。具有本末。而遭世多故。狀行之文。尙未有所託。敢以煩吾子。自惟晩生067_519a末學。何敢紀德撰事。以犯不韙之罪。敢辭。持憲君泫然曰。今去先祖之世。且百有餘年矣。今而不圖。益翳然而莫之徵。吾子旣慕庸之深。烏得無情於此事。敢固以請。象靖不敢終辭。謹因家牒。第錄如右。以竢秉筆者攷焉。謹狀。歲丙申仲春上浣。韓山李象靖狀。


訒齋先生文集附錄
 [墓碣銘]
有明朝鮮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完城君。行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訒齋先生崔公墓碣銘[權斗寅]。 a_067_519a


067_519b吾嶺有訒齋崔公以文章德業伏一世。不佞邈然一後生。又重以寡陋。粗得公梗槪。不能詳也。間者公之後孫壽頤持公行錄若遺文。不遠數百里而來。屬余爲隧道之銘。余不獲讓。遂按其狀而序之曰。公諱晛。字季昇。自號訒齋。其先全州人。上祖阿。高麗門下侍中。諡文成。文成後簪紱相嬗。王傳至水智。登第官止比安縣監。於公爲高祖。曾祖諱以淮。司僕寺主簿。贈通禮院左通禮。祖諱致雲。將仕郞。贈承政院左承旨。考諱深。有隱德。贈議政府左參贊。三代追贈。皆以公貴故。妣星山李氏。司諫院正言耕隱先生孟專之曾孫。秉節校尉智067_519c源之女。公以嘉靖癸亥生。幼穎秀。八歲。從杜谷高公應陟學。嘗命占句。輒出驚人語。杜谷大奇之。九歲。丁內艱。執喪如成人。參贊公常器重之曰。是將興吾門。甫成童。文譽蔚然。弱冠遊鶴峯金先生之門。得聞爲學大方。自是學業日就。儕流莫之先。戊子。陞上庠。己丑。遭參贊公憂。葬祭以禮。戊戌。薦授陵署郞。謝歸上萬言疏。丙午。捷文科。選入翰苑。光海初。移待敎。尋遷侍講院說書。陞司諫院正言。作九知銘以自省。八月。以書狀官赴燕。翌年三月。復命。勅書中有權署國事之語。以不及改正。公及上,副使皆被拿推。四月。還鄕。十月。拜正言。在途呈遞。067_519d自是至癸丑。歷司憲府持平,弘文館修撰副校理,侍講院文學,司諫院正言。問亦爲實錄郞,體府從事官,備局郞,舟師從事官,兩南巡撫御史。施設中窾。事皆就緖。時賊臣李爾瞻誣金悌男逆。以永昌大君爲禍本。按律之啓且發。公引微嫌求去。廢主怒。命特罷。鄭造,尹訒等論劾。削奪官職。自是退處田里者。凡十有一年。癸亥反正。卽起公爲修撰。公自劾言。往臣在言地。不能一言以救王子死。臣實惜一死。負先王。獨不愧於心乎。上優批不許。時鞫囚滿獄。公請脅從罔治。從輕重科罪。務從平反。上深然之。卽拜校理。公入侍經幄。竭誠啓沃。067_520a仍陳禦敵之策。上傾聽從容。酬酢如響。會元帥辟公爲從事官。七月。到黃州。査點海西軍兵。八月。拜應敎還朝。遷成均司藝。轉司䆃寺正。尋拜議政府舍人,司憲府執義,弘文館應敎,成均館司成,侍講院輔德。甲子正月。又拜舍人。李适擧兵叛。勢甚猖獗。上命公爲督戰御史。以劍授之曰。副元帥以下不用命者皆斬之。公星夜西馳督將士。勖以忠義。移文都元帥張晩。責其擁兵不戰。晩怒。及猪灘敗績。晩歸咎公督戰。以自解於上。公亦狀論晩養寇以貽患。晩大憾之。未幾賊平。公馳詣行在。上問鞍峴之功。誰當首者。公對曰。指授方略067_520b出於晩。晩當爲首。又問何以處李興立。對曰。興立罪在迎賊。不可貸也。上幷從之。車駕還。擢授僉知中樞府事。公以無功陞秩辭。七月。以兵曹參知。拜承政院同副承旨。公隨事封駁。出納惟允。時議多之。九月。遞拜護軍。冬。爲司諫院大司諫。公因天災極陳時弊。又言勳臣置軍官宿衛私室之非。上下優批。於是。勳臣憤怒。衆怨朋興。公避嫌請遞。冬。移拜兵曹參知。會愿賊誣引公。勳臣乘機敲撼。公上疏自明。乙丑。因進講。陳修明弊政箚。春。由刑曹參議。移禮曹參議。又轉大司成兼承文院副提調。公上疏辭謝。上不許。丙寅二月。以右副承067_520c旨轉左副。時有白虹貫日之變。公啓陳應天以實以弭災。詔使姜曰廣,王夢尹越海將到。公以延慰使西下。以病還。呈遞下鄕。在途又拜左承旨。又陳疏得遞。上特賜藥物。八月。觀察江原道。丁卯。建奴東搶。猝至平山。大駕播越。都元帥及咸鏡軍兵咸聚淮陽,鐵原間。糧餉俱責本道。公多方策應。不乏軍興。又草檄文。激忠義諭禍福。人爭奮勵。及虜退。公慨然上疏。陳戒大意。以立大志振紀綱爲本。而其他莫非革弊救時之要。九月。行部至橫城。有李仁居者上謁。語極悖。公疑之。屬原,橫二守詗刺以報。原守洪靌捕仁居。先以聞之朝。言者論067_520d公緩於治逆。逮繫經冬。禍機叵測。公怡然不易常操。戊辰春。竄會寧。是冬宥還。庚午。無賴賊楊天植謀逆事覺。語及公被逮。上曰。崔晛嘗指陳宮闈得失。言甚切直。予甚苦之。罷後思之。眞愛予也。如此忠亮之人。豈有與賊相知之理乎。其釋之。丁卯之獄。上擧是事以白公。至是復申之。論者以爲於此見君臣云。丁丑春。南漢解圍。公子山輝奔問于朝。歸途遘疫不起。公哀傷不樂家居。移寓金陵別墅。年七十八。考終。卽崇禎庚辰之六月四日。九月。返葬于善山默坪坤向原。上遣禮官致祭。以山輝參勳。追贈公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067_521a判書。封完城君。公天稟俊邁。宇量寬弘。望之知其爲鉅人長德。人莫不以遠大期之。公亦以經濟自任。常激昂慷慨。論古今成敗得失。若決河注海。尤長於籌邊應變之策。當時如白沙,漢陰,梧里諸鉅公。皆以國士遇公。爭相辟召以自佐。及起自屛廢。遇知聖明。感激圖報。竭忠無隱。凡疏章陳奏。率鑿鑿中肯綮。庶幾一展抱負。不幸再被逮繫。重忤當路。竟抑鬱而不大究。嗟乎惜哉。公樂道人之善。口不言人過惡。至臨利害遇事變。毅然有不可奪者。秉心公平。不以論議異同左右之。人亦不敢訾謷。蓋公早登師門。旣聞正人君子之論。又從寒岡,旅067_521b軒兩先生遊。浸灌磨礲。畜之有素。其所樹立。豈無本而然哉。公聰明強記。天文地理。兵法난001數。無不該通。爲文章不事鉤棘。紆餘滂沛。專以理達爲主。所著有詩文疏箚,一善志,亂中雜錄藏于家。公凡三娶。元配義城金氏。府使復一之女。生一男曰山輝。通政大夫靑松府使。後配昌寧曺氏,載寧李氏。皆無后。俱贈貞夫人。府使有三男一女。爾博,爾厚,爾遠。皆先公夭。壻縣監朴愰。曾孫男。曰應乾,體乾。爾博出。曰大乾,象乾,峻乾。爾厚出。縣監有五男三女。男漢老,台老,聃老,文老。皆早歿。次未成人而夭。三女適李在雅敎官,曺時虎,李元禮。內外玄孫皆067_521c不錄。銘曰。
士方處窮。自期甚確。旣達而試。鮮克稱塞。嶷嶷維公。允副名實。蓋公樹立。孰非學力。早從師友。琢磨薰刮。涵停秩積。有本有末。蘊爲德行。發爲事業。乃議于朝。乃奮其節。鶚立昌言。左右君側。根據往則。密勿啓沃。投無不可。展也邦傑。使究厥用。何有匡國。胡卒不遇。遭罹蹇厄。不容亦命。維名之永。我銘非諛。來者是鏡。
上之四十二年丙申十月日。奉列大夫前長水縣監權斗寅撰。


[난-001]弄 : 弄從竹下

 訒齋先生文集附錄
 [墓誌銘]
有明朝鮮贈純忠補祚功臣,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完城君。行通政大夫守江原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訒齋先生崔公墓誌銘[丁範祖]。 a_067_524b


067_524c故觀察使訒齋先生崔公之卒。今百有餘年。而公之六世孫光璧以公狀來屬不佞範祖曰。私家連世不延。我先祖幽堂之文。尙不克屬筆於當世君子。敢屬之子。不佞旣辭不獲。則謹按公立朝事行而竊慨然歎息。以爲漢之賈太傅。豈不遇文帝哉。而獨不能媚勳臣絳灌等。卒擯不用。以公通才達識。遭遇仁廟之明聖。而其臲卼於當時。不得展布其素學。與賈太傅異世而同調。然其先事慮患綢繆之策。雖歸於空言無補。而猶可爲後067_524d世法。故不佞敍公之始終。而特於癸亥丁卯之際致詳焉。公姓崔氏。諱晛。字季昇。蚤自力學。十三歲。魁道伯所試性理策。華譽藉甚。宣祖戊子。中司馬。久之用宰臣薦。除健元陵參奉。上萬餘言。極論時政。卽棄歸。後屢除參奉。不就。丙午。登文科。凡仕歷大略。藝文館檢閱至待敎。侍講院說書至輔德,議政府舍人。成均館司藝至大司成。選兼承文院副提調。司諫院正言至大司諫。司憲府持平至執義。弘文館修撰至應敎,副提學。爲承政院承旨,兵曹參知,禮刑曹參議。江原道觀察使。公爲檢閱。直書首相柳永慶擅政事。忤當塗。告由歸。亡何相067_525a國李公德馨,李公恒福啓請公爲備邊司郞兼舟師句管司從事官。董飭海防諸務。設施兩南得宜。尋除鏡城通判。諸公又啓海防非崔某不可管得遞。時李爾瞻嗾誣大妃父金悌男推戴永昌大君。搆大獄。大君按律之議將發。公適在言地。度不可爭。引例嫌遞職。爾瞻之黨劾公規避削職。癸亥。仁廟靖亂。首拜修撰兼都元帥從事官。公自立朝。慷慨論事不諱。博學通時務。以經濟自任。旣際會昌辰。益感激知無不言。思報答殊遇。因進講陳謀害大妃。罪有輕重。宜科次施律。毋久滯囚。君子小人。自爲一朋。宜公明辨別。毋使混淆。時建州067_525b虜張甚。有侵軼之虞。陳國家竭兵食以輸西邊。而畢竟莫遏彊虜長驅之勢。則寧豫爲保守之策。仍進西路山川城池圖。將赴元帥幕。陛辭。上賜弓矢。公査閱黃州軍實。選丁壯赴西。還朝。上令備邊司薦儒臣有將才者。公被選。相國李公元翼以都體察使。啓公爲體府從事官。甲子。平安兵使适擧兵叛。上拜公督戰御史。賜劍曰。副元帥以下不力戰者。皆斬之。公馳下。激勵諸將。書責元帥張晩擁兵逗遛。督令進戰。詣行在陳鞍峴之捷。晩宜居首功及李興立迎賊當斬狀。上皆從之。車駕自公州還。特陞通政。俄拜同副承旨。大067_525c妃宮隷僞章作奸閭里。憲府按治。而上敎曰。慈殿所屬。不可刑訊事。飭憲府。公繳還下敎。啓曰。明正奸細之罪。不使怨歸慈殿。法府職也。上屢下嚴敎。而公爭不已。人皆難之。以大司諫因災異陳箚。略曰。雷電旣藏。而暴發於酉日。酉是昴畢之分。應在燕胡。有動胡之象。而綱紀日紊。人心日搖。軍政日壞。國計日蹙。當今之勢。可謂岌岌。誠得忠實宏博之士。委以股肱。才略勇敢之人。畀以閫臬。專任責成。則誰敢不盡心力哉。又曰。遠近武士投附勳臣。宿衛私室。謀避西赴之役。宜一切禁之。時勳臣稱以詗察非常。募聚武士。私使推奴婢067_525d土田。戚里慕效。侵擾閭巷。怨謗載路。故公陳其弊。上下批嘉奬。而勳臣皆憤怒。飛語煽謗。必欲中傷之。以副提學陳箚。請明心學爲出治之本。謹辭令順群下之情。嚴宮掖絕街巷之議。重相臣責治平之效。器使人盡一代之才。戒數遷存敦樸之風。植公論消朋黨之弊。崇儒學培風化之源。又陳箚請修明官田兵三制。皆斟酌古今。井井有條理。尋拜江原道觀察使。釐蠲虛稅逋糴。惠均一道。嚴考績務持風裁。丁卯。建虜侵我。車駕幸江都。公調發精銳赴海西。又募兵守漢津。三路諸軍之來駐道內者。給饋餉不絕。檄諭士庶。使倡義擊賊。人爭奮067_526a勵。虜旣退。上疏論禦敵洒恥之策。其大要以爲人主當先立其志。以正綱紀。分兵於農。選丁壯隷行伍。厚資蠲徭。日加操鍊。守令各領其兵。使自爲戰。而時仕之外。亡論貴賤。身出米布。以贍軍需。南漢,江都。非萬全之地。茂朱赤裳山城。據湖嶺饒物力。閑山諸島。統營舟師。互爲聲援。保障之地。無踰於此。宜預爲設施。凡數千言。皆切中當時之務。然朝廷竟不能施用。丙子之難。江都陷南漢圍。至有城下之辱。壹如公言。初公旣大忤勳貴。而會有賊金愿誣引搢紳名流及公。金瑬持公甚急。至謂知逆謀不告。上曰。予知崔晛素質直。勿以情外論人。067_526b特原之。至是橫城賊李仁居謀叛伏誅。公先已疑其情跡。密戒原,橫守使譏伺。未及摘發而仁居叛。言者謂公緩治逆賊。逮繫請刑。禍將不測。上曰。此人嘗論宮闈事甚切直。眞愛我者也。命全釋。而以言者爭執竄會寧。尋蒙宥公家居。十三年庚辰六月四日卒。距其生癸亥壽七十有八。葬善山默坪山坤向之原。訃聞。上遣禮官弔祭。以子山輝勳功。贈資憲大夫禮曹判書,弘文館提學。公忠信謹厚樂善。諱言人過失。至辨是非。大節毅然不可奪。世方黨同伐異。而獨視人善惡爲取舍。蓋嘗師事鶴峯金先生。又從寒岡鄭先生,旅軒張067_526c先生游。學問講習。助發其德性之美爲多。旁通於藝。天文地理兵陳籌數。靡不涉獵其大略。爲文章贍博。辭理俱美。其積于躬而可以需當世者如此。而阨於時以沒。豈非命耶。公全州人。自始祖高麗門下侍中諡文成公諱阿。傳五世至文科比安縣監贈承政院都承旨諱水智。承旨生司僕寺正贈通禮院左通禮諱以淮。通禮生將仕郞順陵參奉贈左承旨諱致雲。是爲公高曾祖。考諱深。贈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皆以公貴。參贊公蘊德不仕。旅軒先生實銘其墓。妣贈貞夫人星山李氏。正言孟專曾孫。秉節校尉智源女。公元配067_526d義城金氏府使復一女。生一男山輝。策寧杜勳。官通政府使。後配昌寧曺氏,載寧李氏。皆無后。贈貞夫人。山輝娶盈德朱氏奉事應邦女。生三男一女。男長爾博。蔭授副司果。次爾厚。次爾遠。女適密陽朴愰。縣監。爾博娶晉州柳氏縣監時亨女。生二男一女。男長應乾。副護軍。次體乾。副司果。女適呂景和。爾厚娶豐山金氏都事昌祖女。生三男一女。男長大乾。次象乾。次峻乾。女適李萬英。進士。爾遠無子。朴愰生四男三女。男長漢老。次台老。次文老。次聃老。女長適李在雅。敎官。次適曺時虎。次適李元禮。凡玄孫中司馬者一人。斗元。五世孫中司馬者067_527a二人。壽頤,壽仁。大科者一人。憼。六世孫中司馬者六人。萬,柱,廷柱,光玉,光岳,光翊,光稷。大科者一人。光璧。七世孫中司馬者二人。綽,陽羽。餘不盡錄。銘曰。
公淑儒訓。博學多聞。處昏以哲。逢明而騫。輸忠所事。瀉其血肝。慮遠若迂。言直若愚。卒蹈于坎。復張以弧。身躓心亨。名因謗榮。尙冀來世。視此幽銘。通政大夫前行承政院同副承旨錦城丁範祖撰。


訒齋先生文集序
 [序]
[訒齋集序 蔡濟恭] a_067_157a


蓋當仁祖撥亂御極之世。魚鱗雜襲。任靖杜勳者有之。秉執淸議。擔世道責者有之。二者有國之所賴而存也。然淸議之人。亢厲自重。不肯苟同067_157b於勳貴之意。往往不免有罹罟擭遭擯斥以終其身者。後之尙論之士。不能不有憾於賈誼長沙之非無聖主也。嶺之南。有訒齋崔公。卽居一於067_157c仁廟名臣者。其師友。鶴峯寒岡,旅軒諸先生也。薦引幕府。朝夕於謀猷者。鰲漢諸名公也。公遭際明時。感激主知。毅然以經濟自任。入而啓沃經067_157d席。則非天德王道。不言也。出而勤勤懇懇於章奏之間。則尤以繕戎兵修城池。爲謀國急務。當是時。建虜日睥睨。凜凜乎朝夕搶我。朝廷不之憂。067_158a呴呴若燕雀處堂。公以太息流涕之痛。重言復言。知有國而不知有身。知守道而不知媚竈。居然使任國柄者。仄目以胥之矣。已而媒孼罔極。投間而進。067_158b忠不見賞。身蹈禍機。向微仁廟念公忠直之言。曲賜全保。其可免履虎之噬乎哉。公卒擯斥。其後十年。虜大入。公天資聰悟。象緯籌數軍旅067_158c之學。靡不洞貫。文章。不足爲公多也。然其文。紆餘鬯贍。不事脂粉塗飾。惟理達而止。讀之可知爲君子之言也。章奏之先事懇款。燭照數計者。067_158d生而畸於世。雖百不施一二。若使後之君子。讀其書而喜其言。以之利益於天下國家。則雖百世之下。未必不爲遇也。公之六世孫前持憲光璧067_159a氏。剞劂公遺集。屬不佞弁首。不佞感慨久之。書此以歸。一以解尙論者之憾。一以詔吾黨之有志於天下國家者云爾。聖上二年戊戌。輔國崇067_159b祿大夫行判中樞府事原任兼兵曹判書判義禁府事兼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孫左賓客,奎章閣提067_159c學平康蔡濟恭。謹序。

 

訒齋先生文集卷之十二
 行錄
先考贈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府君言行錄 a_067_394c


府君諱深。字太源。其先全州人。高麗門下侍中諡文成公諱阿之後。文成公有三子。長曰龍生。仕至按廉使。次曰龍角。文科壯元。改名永濡。官至海州牧使。次曰龍甲。067_394d亦登文科。子孫或居全羅道。或移慶尙道。世代變遷。失其譜牒。一云龍生爲本道按廉使。婚其子于泗川。是爲澤。澤生諱斯泌。版圖正郞。正郞生諱子涇。開寧縣監。是府君之高祖也。縣監生諱水智。登文科。官至比安縣監。以孫應龍貴。追贈都承旨。都承旨先娶牟舍人之女。生諱以湜。子孫因居泗川。後娶海平金氏敎導由舍之女。生員英發之孫。生三子。公愛海平江山之勝。卜居縣之下里。子孫蕃昌。長子諱以淮。蔭補司僕寺主簿。主簿娶星山李氏隴西公長庚之後仲恭之女。生諱致雲。學書劍頗稱藝。俱不成名。性剛正眞率。不喜苟循。以鄕老終。資補067_395a將仕郞。參奉娶金海許氏司馬諒之孫生員裕之女。生三子三女。府君次也。以正德七年壬申八月二十二日。生于下里宗家。十六歲。始讀書。從伯氏進士公海,堂叔參判公應龍。志游學焉。與吉司馬勉之,金后溪範,盧進士守諴,朴司馬灝,金都事珣,朴進士鵬擧。相友講學。冬月寒夜。叩泉氷盥漱。以警昏睡。不覺成病。盧進士手抄性理群書箴銘一册以與。誦之不輟。不務博涉。專專於四子及大學或問。年未三十。得寒疾。廢擧調養。再中生員監試。猶無意於得失。靜處養痾。四十後宿疾沈綿。少時。嘗聞養生方於神醫金允璞。及是。又問病于金眞樂067_395b堂。防喜怒少言語。絕嗜欲謝賓朋。雖或少愈。不出戶庭。親友時至。引入臥內。略敍寒暄。或値風日和暖之時。因洞里族人強請。勉意暫出。而終日不言。座中有或爭詰諠譁。則閉目而睡。人皆比之於處子。先室族中。有好訟人。縣監尹希洙。以非理要訟蒼赤。不辨曲直而與之。如是者三次。奴婢盡爲人有。而終不入府庭。隣里子弟請業者。亦不強拒。從容開導。不久自解。痛禁雜技戲謔。不從者。峻責絕之曰。汝旣自棄。又妨同學。不可留此。爭願托其子弟。而謝之以病。閑養四十餘年。終始如一。疾亦少減。雖屢遭喪患。而齒髮不脫。精神不耗。常有惺惺之067_395c意。歲己丑六月二十五日。卒于正寢。享年七十八。家于松山。自號松庵。府君先娶東萊鄭氏煕佐之女。早歿。遺兒繼夭。次娶德陽奇氏敎導遇之女。金應敎振宗之甥女。以此府君與應敎最善。常語金先生澍朝天之事而景歎之。奇氏亦早歿。幼子幷夭。府君傷再室俱無嗣。三娶星山李氏士人智源之女。正言孟專之曾孫。嘗語李正言託盲不仕事甚詳。李氏亦慈詳仁恕。雖婢僕。未嘗詬罵。盡其撫恤。厚睦隣族。未嘗以有無靳施。其歿也。人思其德。里巷涕泣悲惜之。無異辭。生于甲申七月十七日。歿于辛未八月十日。壽四十八。生一女二男。女適忠067_395d義衛李景祿。男長曰昕。次晛也。忠義生三男。遠根,遠樹,遠枝。昕娶一善金氏。逾年。金氏亡。生子亦夭。再娶奇氏。亦生子夭。辛巳。忠義歿。壬午。長男昕亡。晛娶義城金氏昌原府使復一之女。生一子山輝。丁亥。金氏婦亡。是年冬。玉氏寡妹。無後而歿。戊子冬。季弟處士公歿。府君病在床褥。悲慟無虛歲。以傷其性命。歿後三年。而壬辰之變起。李姊及遠根,遠枝。兄之再室奇氏。晛之後妻曺氏。俱亡於兵亂中。唯晛父子及甥遠樹。得不死在世間耳。山輝娶江陵朱氏武科奉事應邦之女。生二子一女。遠樹娶安東高氏士人騁雲之女。生四子。俱未名。府067_396a君以庚寅三月。葬于海平縣東南二十七里默語坪。妣李氏。初葬梧里洞。皆坐艮向坤。丁酉十一月。遷厝李氏于上林驛北癸坐丁向之原。乙卯十二月。俱改府君及妣墓。合堋于上林前墳後十步許。以西爲上。以午丁爲向。
先君晩年多病。不能讀書。然猶喜觀書。敎誨子孫。聖賢格言。先儒箴儆。圖說書貼四壁。令子弟晨昏習誦。或有未解處。使就質于高杜谷先生。兒輩稍長。因令受學於杜谷。
先君慈詳恬靜。淡於世味。累歲鰥居。家事一無所問。契067_396b活屢空。略不介意。常戒飭子弟。惟務讀書。愼毋留念於紛華玩好畋獵技藝等事。常曰。衣弊縕袍。與衣狐貉者。立而不恥者子路也。子路志有所在。狐貉之衣。視如塵土。何暇念及乎。汝等。少有意於好衣美食。則平生志向可知也。吾何望乎。
先君恭遜愼默。或終日對人。不喜說話。亦未嘗言人過失。人或有言。不入於耳。嘗語二兒曰。長兒言訥質淳。可免恥辱。然少振發之氣。恐未能自立也。少兒頗警曉。然輕淺氣銳。恐以口過致辱也。汝等。戒其所失。勉其所短。則庶乎其可也。又書范魯公,馬伏波戒子弟書于壁上。067_396c使朝夕誦之。至效伯高不得。猶爲謹勑之士。效季良不得。陷爲天下輕薄子。戒之愼之。勿願汝曹效之之語曰。父兄之望於子弟。不外於此。汝等念之。少兒晛。嘗因言里人之過。頗有詰問之語。先君有憂色不悅者良久。招晛峻責曰。吾嘗戒汝妄言者。正爲此也。聞人過。如聞父母之名。耳可得聞。口不可言。此則少辱也。其如大辱之至何哉。一言之失。或至殺身。可不懼哉。
兒嘗有憤於洞里人。久而不釋曰。里必擇仁。兒意請欲避居。不然則恐有大患也。先君責之曰。人有不善。反求自省可也。汝欲焉往。孔子曰。言忠信行篤敬。雖蠻貊之067_396d邦。可以行矣。言不忠信。行不篤敬。雖州里行乎哉。汝能謹於言行。則不待辨說而人自信之。不能見信。則無往不然。將焉往乎。兒俛首悔悟。不與之較。其人聞之。來謝先君。至於請罪。權大丘文海聞此語。題先君挽曰。忠信勖諸子。詩書敎後孫云云。
先君絕不好肥膩之味。至於珍果異味。視如堇荼。雖爲調病而然。亦戒兒輩令食一二箇而止曰。爽口之物。令人疾病。家有好梨樹。聞有人食梨而病。卽令斬之曰。此殺兒之物。又有葡萄一架。聞族人子食葡萄得痢而死。卽令撤去其根。雖因暑熱飢渴。未嘗苟焉食飮。亦戒兒067_397a輩。
先君喜怒未嘗見於色。嘗因洞會優人呈戲。左右皆凝視歡笑。先君未嘗注目開笑。敎兒以書。令勿視也。晛中司馬。親友共賀。先君未嘗喜動顏色。族人曰。寧無喜意乎。答曰。此士子發揚之階梯也。衰門有幸矣。然吾望吾兒。豈止此乎。吾懼其安於小成也。一日。同年李宗文。率倡優到家。兒爲悅親。亦設席陳戲。請洞中族人。先君引族人。見于燕寢而不出。族人等。強請出觀。先君曰。優人之戲。在此已料之。何必出見。又謂兒曰。優人等率來旣誤矣。速爲謝送。勿爲橫行州里也。兒輩赴擧。先君不言067_397b得失。但戒之曰。擯攻停擧改題等事。例致擾亂場屋。至陷罪辟。功宜避之。及還。不問得失。見所製而已。己丑。兒參文科增廣初試。將赴京。先君語季父曰。吾精神筋力。將不持久。兒若參今榜。則可及見矣。季父以語兒。兒心不能不動。及下第而還。亦不問也。是年季夏。先君棄世。科擧雖小事。而每念語季父之言。未嘗不懷痛無涯也。


訒齋先生文集卷之十二
 墓誌
直長崔公墓誌 a_067_393c


崔姓系出全州。最蕃而顯。在前朝。有侍中文成公諱阿。始大其家。生四子。曰龍生,龍角,龍甲,龍鳳。皆有顯名高067_393d秩。龍鳳生司醞直長乙仁。乙仁生修文直提學霮。霮生少尹得之。得之生縣監自睦。娶縣監李雲亭女。移居古阜。生上將軍汾。汾生郡守命孫。命孫生希潤。希潤生鎭河。鎭河生汝浩。仕爲主簿。卽公之考也。娶康津金氏將仕郞若愚之女。以嘉靖乙巳。生公。幼而聰穎。雅操脫俗。慷慨志學。飾勵修進。而至於孝友。則天性也。己巳。丁母憂。甲戌。遭父喪。廬于墓側。喪祭以禮。罄家財豎墓碣。及于王父母。有弟富,寅,容三人。同居四十餘年。友愛彌篤。衣服飮食。共之無私。內外娣姒。化順咸服。子侄盈庭。皆敎以義方。家道穆如。鄕里稱之。早棄科業。守拙田園。未嘗067_394a以非義于人。外和內剛。明於好惡取舍之分。以此爲人所敬重焉。壬辰倭變。與一鄕同志。起義收募。補天將衣絮。授繕工直長。公娶扶安金氏文貞公丘之裔內禁衛孝順之女。生二男。曰敬承,敬行。萬曆三年乙亥。金氏先逝。葬郡治東三十里墓洞卯坐酉向之原。先塋側也。有二側室。其一生二女。長適司僕鄭暹。生男女各二人。次適李匪鷹。其二生一男敬直。長子敬承。娶生員柳德潤之女。生四女一男。女長適忠義衛李海。次適士人金地千。男曰沆。餘女幼。次子敬行。先娶參軍柳光雯之女。生一女而歿。再娶縣監金成業之女。公卒以乙卯十二月067_394b十九日。葬以明年丙辰三月三日。與金氏雙墳。公諱安。字士止。享年七十一。嗚呼。公於五福。能嚮其三。而所未有者。富與貴也。然世之所謂高爵厚祿。以業其子孫者。人皆仰而慕之。惟公以孝友之政。施于家。以及其族。而遺子孫之業者不薄。又以天年終。斯固所謂古之達尊者非耶。余知天之所以享公以尊富安榮者。不在彼而在此也。歲在辛亥。余奉命南來。見公于金堤。敍同姓之好。望表知裏。不覺起敬也。去歲。余又寄跡松沙。公貽書。懇懇以老不能相訪爲歎。今閱七月。而余自嶺再投湖寓。取路長順。要拜公也。豈料公已卽世。而使余抱無067_394c涯之慟也。公之兩弟兩胤。以余見知於公。義分所在。非但族也。遂以冥道之誌。不求當世之作者。而屬之余。旣不敢辭。略志言行世系而係以銘。銘曰。
學古之學。匪巧匪華。行古之行。宜室宜家。生順歿寧。眞榮在是。不食其報。以昌其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