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둘레길 산행을 시작하였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방학사거리에서 1144 차량에 몸을 싣고 우이동 의암 손병희 선생님 묘소입구
표석 있는 곳을 출발바여 횡단보도를 건너서 해병대 초소를 지나서 고개를 향한다
빨간 장미가 울타리를 넘어 아름다움을 더하고
☞ 해병대 초소을 지나면서 ◆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라는 문구는 해병의 정신
☞ 삼각산 백운봉 인수봉 국망봉을 타고 넘는 운무의 모습 해병대 초소 위에서 바라본 모습
☞ 초소위에서 소나무숲 구간을 표시하는 이정목
☞ 여기서 부터 산행이 시작되고
☞ 입구로부터 약 100여미터 올라가다가 보면 나오는 첫번째 이정목
☞ 두번째 이정목 가는 곳에서 죄측으로 이동 우측으로 가시면 다른 곳으로
☞ 어느분의 묘지인지 알수가 없다 정부인 전주최씨 증 정경부인 전주최씨 지묘
정부인은 정 종 2품의 관직자의 부인에게주는 작호 이고 정경부인은 정 종 1품 관직자 부인에게 주는 작호
저가 전주최가라서
자료를 찾아 볼려고 노력중이다 .. 수차례 지나가면서 생각을 하면서 ...
다움 백과의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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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墓碣) | ||||
지사(知事) 이공(李公) 무(堥) 묘갈명 병서 |
현종(顯宗) 때에 허적(許積)이 잘못 복상(卜相)되어 갑자기 정승 지위에 올랐다. 이때 허적의 간악함이 다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으나, 유독 장령 이공 무(李公堥)만은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배척하였는데, 말한 내용이 늠름하고 간절하였다. 상(上)은 진노하여 공을 북쪽 지방으로 귀양 보낼 것을 명하였으나, 대신과 삼사에서 강력히 구원함을 힘입어 다만 삭탈관직을 명하였다. 뒤에 허적이 과연 국정을 그르치고 흉악한 짓을 저지르자, 공의 이름이 크게 드러나니, 사람들은 여헌가(呂獻可)의 선견지명에 공을 비하였다.
공의 자는 자삼(子三)이니, 우리 중종대왕의 별자(別子)이신 덕양군(德陽君) 기(岐)의 현손이다. 증조의 휘는 종린(宗麟)으로 풍산군(豊山君)에 봉해졌으며, 조고의 휘는 수(睟)로 구천군(龜川君)에 봉해졌는데 광해군 때에 큰 절개가 있었으며, 시호가 충숙(忠肅)이다. 선고의 휘는 형윤(炯胤)으로 봉래군(蓬萊君)에 봉해졌는데, 세상에서는 한(漢) 나라의 동평왕(東平王)에 비하였다. 선비는 최씨(崔氏)로 참판에 추증된 최행(崔行)의 따님이다.
공은 천계(天啓) 신유년(1621, 광해군13) 6월 4일에 태어났는데, 어릴 때에 기국이 범상하였으며, 차츰 자라자,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충숙공이 기특히 여기고 사랑하였다. 겨우 15세가 되자 문예(文藝)가 크게 진전하여 여러 번 성균관 시험에 장원하였으며, 택당 이공(澤堂李公 이식(李植))에게 찾아가 배우니, 이공은 자주 칭찬하였다.
계미년에 기이한 병을 만났으며, 을유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몹시 슬퍼하다가 몸이 쇠약해져 거의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신묘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계사년에는 알성시에서 제3번으로 급제하고, 괴원(槐院)에 뽑혀 설서(說書)에 임명되었으며, 한원(翰苑)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다. 때마침 사단(事端)이 있었는데, 공은 임금께 아뢰기를 분명하고 간절히 하니, 상(上)은 가납하였다. 대교(待敎)와 봉교(奉敎)로 승진하고 설서를 겸직하였으며, 전적(典籍)으로 옮겼다가 예조와 병조의 낭관(郞官)이 되었고,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로 나갔다.
다음해에 병조 낭관과 사서(司書), 정언(正言), 문학(文學)을 지냈으며, 또 고산 찰방(高山察訪)이 되었는데, 이졸(吏卒)들은 비석을 세워 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무술년에 소명(召命)을 받아 정언에 제수되었으며, 기해년에는 병조의 낭관으로 있으면서 상소하여 북쪽 지방의 민폐를 조목조목 나열하고 인하여 폐단을 바로잡는 대책을 진언하니, 상은 비답을 내려 가상히 여겼으며, 묘당에서는 모두 시행하도록 요청하였다. 그 결과 북쪽 지방 백성들이 큰 덕을 입었다.
공은 얼마 안 있다가 죄에 연좌되어 파직되었으며, 현종 초년에 서용되어 지평에 임용되었다. 이때 현종은 산릉(山陵)에 관한 일로 여러 번 엄한 교지를 내리니, 여러 신하들이 몹시 걱정하고 답답해하였다. 공이 상소를 올려 이를 개진하자 상은 특별히 우대하는 비답을 내렸다. 가을에 체직되고 다시 옛 직책을 맡았다.
이때에 궁가(宮家)들이 멋대로 시장(柴場)을 점거하여 폐단이 매우 많았다. 공은 법에 의거하여 이를 폐지할 것을 청했으며, 또 겨울철에 천둥이 치는 변괴가 있자, 공은 이에 차자를 올려 경계 말씀을 올리면서 “하늘의 변괴에 대응하는 도리는 군주가 과오를 살펴 몸을 닦음에 있으며, 과오를 살펴 몸을 닦는 방법은 간언을 받아들이고 현인을 등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여 극진히 말하였고, 마지막에는 또 선왕이 사랑하고 대우하던 신하에게 정사를 위임할 것을 요청하였다. 상은 허심탄회하게 공의 말을 받아들였다.
겨울에 체직되어 정언에 임명되자, 다시 수백 자의 상소문을 올렸는데, 마음을 바로잡고 학문을 힘쓰며 어진 인물을 접견하는 것을 요점으로 말씀하였으며, 미루어 기강을 떨치고 조정을 조화롭게 하며 백성의 힘을 기르고 군정(軍政)을 보살피는 것까지 말씀하였는데, 매우 간절하고 절실하였다. 상은 비답을 내리기를 “진언한 것이 모두가 지극한 말이니, 내 마땅히 가슴속에 간직하겠다.” 하였다.
얼마 후 지평으로 있으면서 동료들과 함께 윤선도(尹善道)가 사림에게 화를 전가하는 죄를 논하였고, 또 법률에 의하여 처단할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윤선도는 나쁜 마음을 속에 품은 지가 이미 오래였는데, 이때에 예론(禮論)에 가탁하여 우암과 동춘 두 송 선생을 해치고자 하였으며, 그 말이 고변(告變)에 가까울 정도여서 일이 매우 위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피하였다. 그러나 공은 마침내 용감히 말하여 몸을 돌보지 않으니, 이것을 듣는 자들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얼마 후 예조와 병조의 낭관으로 있다가 다시 지평이 되었는데, 일에 미안한 점이 있으므로 피하여 교체되었으며, 다시 병조의 낭관으로 있다가 정언으로 전직하였다. 이때에 호남과 영남 지방에 흉년이 드니, 조정에서는 특별히 공을 암행어사로 보내어 곡식을 수송해서 백성들을 구휼하게 하였다. 공은 상소를 올려 조세를 전액 감면해 주어 곤궁한 백성들로 하여금 실제 은혜를 입게 하였다.
임인년 4월에는 개성 경력(開城經歷)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부모를 봉양하기에 편함을 다행으로 여겼으나, 사람들은 공이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공은 부임하자 몸을 다스리기를 청렴하고 근검하게 하였으며, 옥사와 송사를 다스리고 결단하기를 공명정대하게 하였다. 1년에 3번이나 청 나라 사신을 치뤘는데도 응접하기를 법도에 맞게 하고, 비용을 크게 절약하였다.
계묘년에 정언에 임명되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장령이 되었다. 공은 재이(災異)로 인하여 입대할 것을 요청하여 궁장(宮庄)의 폐단을 지극히 논하였으나, 상은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공은 이해에 옛 병이 다시 도져 오랫동안 산직(散職)으로 있었다.
을사년에 허적(許積)을 논죄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려 벼슬에서 물러난 다음 광릉(廣陵)의 송추(松楸 선영) 밑에 은둔하여 두문불출하였다. 병오년에 죄가 감해져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다음해인 정미년에 서용되었다. 이 뒤로 수년 동안 이조에서는 결원이 있으면 곧 공을 후보로 추천하였으나 성상은 한결같이 낙점하지 않았다.
공은 황송하여 외직으로 나갈 것을 요구하여 기유년에 비로소 풍덕 부사(豊德府使)가 되었으나, 친척이 상관으로 부임한 관계로 피혐하여 즉시 체직되고, 다시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나갔으나 재상(災傷)으로 인해 파직되었다. 이는 허적의 무리 한 사람이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가 되어 허적의 비위를 맞추느라 공을 몰아붙인 때문이었다.
신해년에 모친상을 당하였으며, 계축년에 상을 벗자, 태상시 정(太常寺正)으로 있다가 집의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인 갑인년에 체직되고 종부시 정(宗簿寺正)이 되었다가 얼마 후 헌납으로 옮겼으며, 다시 종부시 정이 되었다.
공은 10년 동안 금고를 당한 뒤에 은혜로운 명이 여러 번 내리니, 조정에서는 서로 축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얼마 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승하하자, 산릉도감 도청(都廳)으로 선임되었다가 병으로 체직되고, 사간과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 보덕(輔德)으로 있다가 집의에 임명되었다. 이때 현종(顯宗)의 상을 당하였는데, 마침 조신(朝臣)들의 반열을 단속하는 자가 없으니, 이조의 낭관은 공을 당하의 반열에 앉히려고 하였다. 이에 공은 “이조의 낭관은 비록 백관(百官)을 총괄한다고 하나, 나는 해당 관사의 중승(中丞)이다. 옛날의 어사(御史)를 어찌 해당 낭관의 아래에 놓을 수 있겠는가? 지금은 비록 애통하여 경황이 없는 중이지만 사체(事體)는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문곡(文谷) 김 상공(金相公 김수항(金壽恒))은 공의 말이 대체를 얻었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공은 체직되어 호군(護軍)에 제수되었다. 공은 “국가가 잘 다스려지고 잘못 다스려지는 것은 군주가 처음 즉위하는 때에 달려 있다.” 하여, 맨 먼저 글을 올려 성학(聖學)을 부지런히 힘쓰고 인재를 발탁하며, 언로(言路)를 넓히고 사류(士類)들을 배양함을 지극히 말하였고, 특히 둔전(屯田)을 혁파하여 군정(軍政)을 변통하는 대책을 급급히 말하였으며, 맨 마지막에는 송 철종(宋哲宗)의 고사를 인용하여 선왕조에서 견책을 당했던 여러 신하들을 풀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유식한 자들은 공의 이 말이 새로 교화시키는 데에 큰 보탬이 있다고 말하였다.
당시에 화(禍)의 기미가 이미 싹트고 있었다. 영남 사람인 곽세건(郭世楗)은 간당(姦黨)의 사주를 받고 뛰쳐나와 상소를 올려 사류(士類)들을 일망타진할 계책을 세우니, 일시에 인심이 흉흉하여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은 사간으로서 홀로 아뢰어 곽세건을 국문(鞫問)할 것을 요청하였는바, 말이 엄하고 의리가 정당하였다. 상은 비록 허락하지 않았으나, 사론(士論)은 기운이 배가되었다.
겨울철에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유현(儒賢)을 위하여 글을 올려 변론하였는데, 임금의 비답이 매우 엄하였다. 공은 또다시 사간으로 있으면서 선비의 기운을 꺾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논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려 체직되었다. 이로부터 간당들이 뜻을 얻으니, 공은 서울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고, 마침내 양주(楊州)의 고향 마을에 집을 짓고 둔길(遁吉)이라 당호(堂號)를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었다.
경신년(1680, 숙종6)에 세상일이 크게 변하자, 공은 즉시 발탁되어 사성(司成)이 되었다가 사간으로 전직하였으나 얼마 후 지론(持論)을 너그럽고 공평히 하여 이미 반론된 의논을 정지하려고 하다가 체직되어 태복시 정(太僕寺正)이 되었으며, 다시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나갔다. 조정의 관리들은 모두 억울하다고 칭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서운해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태연히 임지로 부임하였다.
다음해인 신유년에 들어와 집의가 되었는데, 인경왕후(仁敬王后)의 봉릉관(封陵官)으로 통정대부로 승진되고, 공조 참의와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지진으로 인하여 경계하는 말씀 수십 가지를 올리니, 상은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공은 체직되어 공조와 호조, 병조의 참의가 되었으며, 갑자년에 다시 승지가 되었으나 신병으로 사은숙배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 병을 조리하기 위하여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나갔다. 공은 젊은 날에 명망이 있던 사람으로서 궁벽한 고을에 머물러 있자, 우암 선생은 일찍이 세상에서도 군평(君平)을 버린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탄식하였다. 겨울에 체직되어 돌아오고 병조의 참지와 참의, 공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
기사년(1689, 숙종15)에 사화가 일어나자, 공은 자취를 거두어 두문불출하고 세상일을 사절하였다. 정축년에 공은, 세 조정에서 가까이 모신 사람이라고 진달(陳達)한 대신이 있어 가선대부로 승진하고 동지중추부사와 호조 참판이 되었으며, 특진관으로 발탁되었다. 경진년에 다시 효종조(孝宗朝)의 한림(翰林)으로서 나이가 80세라고 건의한 경연관이 있었으므로, 특별히 계급을 높여 자헌대부 지돈녕부사가 되고, 기로사(耆老社)에 참여하였다.
이해 겨울 천둥의 변괴로 인하여 상이 여러 재상들에게 재변에 대응하는 대책을 묻자, 공 또한 부름에 달려가고자 하였다. 자제들은 공이 노환이 있음을 걱정하여 만류하였으나, 공은 “어찌 군부(君父)가 위에서 재변을 걱정하시는데 신하들이 감히 물러나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성상을 뵈온 지 여러 해니, 만일 한 번 용안을 뵙는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하고는, 마침내 수레를 재촉하여 경연으로 나아가 재앙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진언하였다. 상은 곧 노쇠함을 염려하여 경연이 아직 파하지 않았으나 특별히 공에게 먼저 나가도록 명하셨으니, 이는 실로 특별한 대우였다.
계미년(1703, 숙종29) 5월 24일에 공이 성동(城東)의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83세였다. 부고가 전해지자 상은 철조(撤朝)하고 부의를 내려 조문하였다. 이해 8월 16일에 양주(楊州)의 북면(北面) 석적리(石積里)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산에 장례하였다.
공의 원배(元配)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판서 최내길(崔來吉)의 따님이다. 타고난 자질이 유순하고 착하였으며, 말과 웃음을 급히 하지 않으니, 친척들이 모두 그 어짊을 칭찬하였다. 36세인 갑오년(1654, 효종5) 2월 20일에 별세하니, 공의 묘 왼쪽에 부묘하였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기장(箕章)과 정랑 기명(箕明), 지평 기익(箕翊)이며, 딸은 한림 이윤조(李潤朝)와 사인(士人) 권화만(權和萬)에게 출가하였다.
계실(繼室)은 정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학생(學生) 한석중(韓碩中)의 따님인데, 지혜롭고 숙성하여 부도(婦道)에 결함이 없었으며, 여러 아들들을 사랑으로 길러 자기가 낳은 자식과 똑같이 대하고 간격이 없었다. 을해년(1635, 인조13)에 출생하여 무인년(1698, 숙종24) 3월 13일에 별세하니, 공의 묘소 오른쪽에 부묘하였다.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서윤(庶尹) 기헌(箕獻)이요, 장녀는 일찍이 요절하였으며, 차녀는 사인 윤호(尹濩)에게 출가하였다.
기장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시국(蓍國)이요, 딸은 윤덕로(尹德老)ㆍ윤세관(尹世觀)에게 출가하였으며, 막내딸은 어리다. 기명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시만(蓍萬)ㆍ시대(蓍大)이며, 딸은 진사 권감(權瑊)과 박중정(朴重鼎)에게 출가하였다. 기익은 3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시원(蓍遠)ㆍ시서(蓍瑞)ㆍ시성(蓍成)이며, 딸은 문과 급제하여 사서(司書)인 김상윤(金相尹)과 유숭기(兪崇基)ㆍ박필유(朴弼濡)ㆍ나서규(羅瑞奎)ㆍ홍윤보(洪允輔)에게 출가하였다. 기헌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에 시덕(蓍德)ㆍ시철(蓍徹)은 모두 진사에 합격하였고 다음은 시업(蓍業)이며, 딸은 김관(金爟)에게 출가하였다. 이윤조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명신(命臣)이며, 딸은 현감 조광명(趙光命), 교리 여광주(呂光周)와 홍유인(洪有人)에게 출가하였다. 윤호는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 상복(相復)은 일찍 죽었고, 딸은 진사 이정욱(李挺郁)과 임훈(林薰)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이 60여 명이다.
공은 마음이 온순하고 어질며 화평하여 천진(天眞) 그대로였으나, 당연히 해야 할 일에 있어서는 분발하여 용감히 결단하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마음을 청렴하고 고매하게 두어 상스러운 말을 입에서 내지 않았으며, 재물을 밝히지 않고 검소함을 숭상하여 양식이 자주 떨어졌으나 태연히 대처하였다.
집 안에 있을 때에는 의리를 행함을 우선으로 삼았으며, 형제들과 매우 화목하여 매양 한집에서 살지 못함을 한으로 여겼다. 종족들을 인자하게 대하여 만일 곤궁함을 보게 되면 반드시 구제할 방법을 생각하였다.
조정에 벼슬한 지 50년 동안 상소문을 많이 올려 우국충정을 잊지 못하였으며, 임금의 과실과 백성의 폐단에 대해서는 반드시 말을 다하고야 그만두었다. 일찍이 사악함을 배척하고 정도를 붙드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중씨(仲氏)인 사간공(司諫公)과 함께 차례로 대각(臺閣)에 거처하였는데, 풍채가 떨치고 엄숙하니, 보고 듣는 자들이 크게 감동하였으며 권문세가들은 두려워하여 피하였다. 사람들은 “충숙공(忠肅公)의 기절(氣節)이 실추되지 않았다.”고 칭찬하였다.
공은 책 읽기를 좋아하여 노년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았으며, 문장을 지으면 붓을 잡는 즉시 완성하였다. 시(詩) 또한 운치가 전중(典重)하고 고상하였다. 저술한 책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은 처음 생관(甥館)으로 들어갔는데, 판서공(判書公)에게 사랑과 중망을 받았다. 하루는 촛불을 밝히고 책을 읽고 있었는데, 판서공이 부인과 함께 와서 보고는 토지와 노비 문서를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주었으나, 공은 명분이 없다고 사양하고 끝내 받지 않으니, 판서공은 가상히 여기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는 비록 하찮은 일이나 충분히 공의 지조를 알 수 있다.
아, 공의 인물과 지벌로 일찍이 임금의 인정을 받아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였으니, 마땅히 크게 뜻을 펼 듯하였으나 불행히 병에 침체되었고, 또 성품이 강직하여 남들과 뜻이 합하지 않았으므로 벼슬길에 통용되는 것이 항상 탄토(呑吐)의 사이에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뛰어난 충성과 지극한 정성이 좋은 세상에 베풀어지지 못했으니, 어찌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온갖 어려운 변고를 겪었으면서도 공은 깨끗한 얼음과 옥 같은 지조에 조그마한 하자도 없었으며, 연령과 관작이 모두 높고 자손들이 번창하였으며, 좋은 이름을 보전하고 완전한 복을 누려 세상에 비견할 자가 드무니, 이 또한 사람마다 원하고 사모하는 바이다.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나는 고인(故人)의 자제로서 오랫동안 공을 모셔왔다. 지금 세상을 돌아보면 공을 자세히 아는 자는 나만 한 이가 없다. 지금 공의 여러 아들들이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함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어찌 감히 문장을 못한다 하여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대략 서술하기를 위와 같이 하고 명문(銘文)을 붙인다.
훌륭하신 귀옹은 하늘의 떳떳한 윤리 붙들었는데 / 於赫龜翁柱天常
어진 후손 두어 빛나는 업적 계승하였네 / 曰有賢孫肧前光
묘년에 조정에서 드날려 임금을 가까이 모셨고 / 妙歲颺廷近御牀
대파에서 직필로 추상처럼 늠름하였네 / 直筆臺坡凜秋霜
아는 것 모두 말하였는데 반드시 좋은 말씀이었으나 / 知無不言言必昌
양구의 액운 당하여 거두어 은둔하였네 / 運丁陽九捲而藏
어찌 기회가 없다 하리오 길 가는 것이 어려우니 / 豈曰無時行路難
남들은 달려가나 나는 뒤처져 한가로움을 좋아하였네 / 人馳我後我愛閒
나이 많아 기로사에 들고 지위 경상(卿相)에 올라 / 年高耆社位卿班
만년 절개 온전히 보전하여 죽어서도 편안하리 / 全吾晩節歿亦安
울창한 저 양주의 산에 의관을 감추었으니 / 鬱彼楊山閟衣冠
우뚝한 비갈에 훌륭한 이름 없어지지 않으리 / 有屹桓楹名不刊
[주D-002]동평왕(東平王)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아들로 이름은 창(蒼). 건무(建武) 17년(41) 동평왕에 봉해졌는데, 어려서부터 경전(經傳)을 좋아하고 지혜가 뛰어났으며, 수염이 아름답고 풍채가 좋았다. 예악(禮樂)에도 밝아 예악의 제정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後漢書 卷42 東平憲王列傳》
[주D-003]군평(君平) : 전한(前漢) 말기 촉(蜀) 지방의 은사(隱士)로 성은 엄씨(嚴氏). 세상에 나오지 않고 90세가 되도록 복서(卜筮)를 하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漢書 卷71 王貢兩龔鮑傳》
[주D-004]생관(甥館) : 처가살이하는 것을 일컫는 말. 생(甥)은 사위를 지칭하는 말로,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순 임금이 올라가 요 임금을 뵙자, 요 임금은 사위인 순 임금을 부궁(副宮)에 머무르게 하였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05]탄토(呑吐)의 사이 : 벼슬길에 항상 있지 못하고 들어갔다 나왔다 하기를 여러 번 반복함을 뜻한다.
[주D-006]대파(臺坡) : 대각(臺閣)과 같은 말로, 사헌부ㆍ사간원을 널리 칭한다.
[주D-007]양구(陽九)의 액운(厄運) : 옛날 음양설에 4617년을 1원(元)이라 하는데, 양(陽)의 재난(災難)은 한해(旱害)이며, 음(陰)의 재난은 수해(水害)가 되는바, 1원의 첫 번째인 106년 가운데 양의 재난인 한해가 아홉 번 있다 하여 이르는 것으로, 이 때문에 백육(百六)이라 하기도 한다. 《禮典 王傳 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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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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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赫龜翁柱天常。曰有賢孫肧前光。妙歲颺廷近御牀。直筆臺坡凜秋霜。知無不言言必昌。運丁陽九捲而藏。豈曰無時行路難。人馳我後我愛閒。年高耆社位卿班。全吾晩節歿亦安。鬱彼楊山閟衣冠。有屹桓楹名不刊。
☞ 정경부인 전주최씨 산소를내려와서 좌측으로 이동하여야 연산군 묘지로 이동
☞ 오리집앞에서 본 모습 쪽동백같기도 하고 ..
☞ 연산군 재실의 모습
☞ 왕릉을 지키는 책임자는 종5품 능令이며 하위직은 참봉 종8품이다
☞ 재실정문이다
☞ 원당천 파평윤문이 관리하였다는 기록이 지금은 음용수로서 부접합
☞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노거수 830년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수령이 오래된듯
조선독립 운동가 의암 손병희 삼일운동 33인중의 한분 . 기미독립선언문 의 위하여 비밀 조직을 한곳이 봉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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