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 6. 1. 도봉산 둘레길

2011. 6.1. 도봉산 둘레길 역사적 문화재 탐방 (2)

아베베1 2011. 6. 1. 17:42

 

연산군의 부친은 성종 .. 성종의 장자가 연산군이다 .. 

연려실기술 제6권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성종


성종 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 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의 이름은 혈(娎)이고 덕종(德宗)의 둘째 아들이다.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천순(天順) 원년 정축 세조 2년 7월 30일 신묘에 세자궁에서 낳았다. 신사년에 처음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하였다가 성화(成化) 무자년에 현록대부 자을산군(顯祿大夫者乙山君)이라 더 올렸다. 기축년 11월 28일에 경복궁 안의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고 홍치(弘治) 7년 갑인 12월 24일 기묘에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세상을 떠났으니,왕위에 있은 지는 25년이요, 수(壽)는 38세였다. 명 나라 조정에서 강정(康靖) 온량(溫良)하여 즐거워하는 것을 강(康)이라 하고, 관락(寬樂)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 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인조 13년 을해에 세실(世室)로 정하였으며 능은 선릉(宣陵) 광주(廣州) 서학당동(西學堂洞)의 임좌이다. 을묘년 4월 6일에 장사 지냈으며 표석이 있다. 이다.
○ 비(妃)는 휘의신숙공혜 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청주이며, 영의정 상당부원군 충성공 명회(明澮)의 딸이다. 경태(景泰) 7년 병자 10월 11일 정미에 연화방(蓮花坊)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성화 정해년에 가례를 거행하였으며 기축년에 왕비로 책봉되고,갑오년 성종(成宗) 5년 4월 15일 기사에 창덕궁의 구현전(求賢殿)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는 19세였다. 연산주(燕山主) 정사년에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휘호(徽號)를 올렸으며, 능은 순릉(順陵)이다. 파주(坡州) 공릉(恭陵)의 남쪽 산 묘좌이다. 갑오년 6월 7일에 장사 지냈다.
○ 폐비(廢妃) 윤씨(尹氏)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묘(起畝)의 딸이다.
○ 계비(繼妃)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 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우의정 영원부원군 평정공(右議政鈴原府院君平靖公) 호(壕)의 딸이다. 천순 6년 임오 세조 7년 6월 26일 기축에 신창(新昌) 관아에서 탄생하였다. 성화 계사년에 뽑혀 들어와서 처음에는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가,기해년에 윤비가 쫓겨났으므로 경자년에 드디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연산주 정사년에 자순(慈順)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갑자년에 화혜(和惠)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가정(嘉靖) 9년 경인 중종 25년 8월 22일 기묘에 경복궁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는 69세였으며 능은 선릉(宣陵) 경인 10月 29일에 성종대왕(成宗大王)의 능의 왼쪽 산 간좌에 장사 지냈다. 이다.
○ 아들 열 여섯과 딸 열 둘을 두었다.
사(嗣) 중종대왕(中宗大王)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낳았다.
첫째 딸 신숙공주(愼淑公主) 정현왕후가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첫째 아들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 융(㦕) 어머니는 폐비 윤씨이다.
둘째 아들 계성군(桂城君) 순(恂) 숙의(淑儀) 하씨(河氏)가 낳았다. 부인은 원주 원씨(原州元氏)인데, 첨정 증찬성 치(菑)의 딸이다.
셋째 아들 안양군(安陽君) 항(㤚) 귀인(貴人) 정씨(鄭氏)가 낳았다. 연산주 때에 화를 입었다. 시호는 공회(恭懷)이다. 부인은 능성 구씨(綾城具氏)인데 능천군(綾川君) 증 찬성 수영(壽永)의 딸이다.
넷째 아들 완원군(完原君) 수(㥞) 숙의 홍씨가 낳았고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부인은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니, 생원 증 찬성 하림(河臨)의 딸이다. 후취는 양천 허씨(陽川許氏)인데 별좌(別坐) 증 찬성 적(磧)의 딸이다.
다섯째 아들 회산군(檜山君) 염(恬)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죽산 안씨(竹山安氏)인데 찬의 증 찬성 방언(邦彦)의 딸이다.
여섯째 아들 봉안군(鳳安君) 봉(㦀) 귀인 정씨가 낳았는데 연산주 때에 화를 입었다. 부인은 평양 조씨(平壤趙氏)인데 판관 증 찬성 성기(成紀)의 딸이다.
일곱째 아들 견성군(甄城君) 돈(惇)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이고 봉사(奉事) 증 찬성 우호(友灝)의 딸이다.
여덟째 아들 익양군(益陽君) 회(懷)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영일 정씨(迎日鄭氏)인데 첨지 증 찬성 문창(文昌)의 딸이다.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아홉째 아들 이성군(利城君) 관(慣) 숙용(淑容) 심씨(沈氏)가 낳았다. 시호는 장평(章平)이다. 부인은 남평 문씨(南平文氏)인데, 인의(引儀) 증 찬성 간(簡)의 딸이다. 후취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며 군수 증 찬성 수중(守中)의 딸이다.
열째 아들 경명군(景明君) 침(忱)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며 첨정 증 찬성 첩(堞)의 딸이다.
열한째 아들 전성군(全城君) 변(忭) 귀인(貴人) 권씨(權氏)가 낳았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인데, 지중추 증 찬성 건(健)의 딸이다.
열두째 아들 무산군(茂山君) 종(悰) 명빈(明嬪) 김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인데 별좌(別坐) 증 찬성 수(銖)의 딸이다.
열세째 아들 영산군(寧山君) 전(恮) 숙용(淑容) 심씨가 낳았다. 부인은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니, 군수 증 찬성 순로(順路)의 딸이다. 후취는 경주 정씨(慶州鄭氏)이고 별좌(別坐) 증 찬성 홍선(弘先)의 딸이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열네째 아들 운천군(雲川君) 인() 숙의 홍씨가 낳았다. 아내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고 참의 증 찬성 인손(仁孫)의 딸이다.
열다섯째 아들 양원군(楊原君) 희(憘)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양 조씨(平壤趙氏)이고 충의위(忠義衛) 증 찬성 경(經)의 딸이다. 후취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니 정(正) 증 찬성 종손(終孫)의 딸이다.
첫째 딸 혜숙옹주(惠淑翁主) 숙의 홍씨가 낳았다. 남편은 고원 위 문효공(高原尉文孝公) 신항(申沆)인데 본관이 고령(高靈)이다. 그 아버지는 참판 종호(從濩)이다.
둘째 딸 휘숙옹주(徽淑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풍원위(豐原衛) 임숭재(任崇載)인데 본관이 풍천(豐川)이며, 그 아버지는 사홍(士洪)이다.
셋째 딸 공신옹주(恭愼翁主) 귀인 엄씨(嚴氏)가 낳았다. 남편은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인데 본관이 청주(淸州)이다. 그 아버지는 낭성군 양호공(琅城君襄胡公) 보(堡)이다.
넷째 딸 경순옹주(慶順翁主) 숙용 심씨(沈氏)가 낳았다. 남편은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인데 시호는 영희공(榮僖公)이며 본관이 의령(宜寧)이다. 그 아버지는 부사 회(懷)이다.
다섯째 딸 경숙옹주(敬淑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여천위(驪川尉) 민자방(閔子芳)인데 본관이 여흥(驪興)이다. 그 아버지는 현령 종원(宗元)이다.
여섯째 딸 정순옹주(靜順翁主) 숙의 홍씨(洪氏)가 낳았다. 남편은 봉성위(奉城尉) 정원준(鄭元俊)인데, 본관이 봉화(奉化)이다. 그 아버지는 주부 현(鉉)이다.
일곱째 딸 숙혜옹주(淑惠翁主) 숙용 심씨(沈氏)가 낳았다. 남편은 한천위(漢川尉) 조무강(趙無彊)인데 본관이 양주(楊州)이며 그 아버지는 참봉 광세(光世)이다.
여덟째 딸 경휘옹주(慶徽翁主) 숙용 권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원위(鈴原尉) 윤정(尹鼎)인데, 본관이 파평이고, 그 아버지는 부사 승세(承世)이다.
아홉째 딸 휘정옹주(徽靜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의천위(宜川尉) 남섭원(南燮元)인데, 본관이 의령(宜寧)이고 그 아버지는 승지 흔(忻)이다.
열째 딸 정혜옹주(靜惠翁主) 귀인 정씨가 낳았다. 남편은 청평위(靑平尉) 한기(韓紀)인데,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그 아버지는 판서 형윤(亨允)이다.
열한째 딸 정숙옹주(靜淑翁主) 숙의 홍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평위(鈴平尉) 윤섭(尹燮)인데,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그 아버지는 정(正) 승류(承柳)이다.
○ 의경세자(懿敬世子 성종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세조는 자산군(者山君)을 궁중에서 양육하였다.
임금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국과 도량이 웅걸스러웠으므로 세조가 특별히 사랑하였다. 일찍이 같은 어머니 소생의 형인 월산군(月山君)과 함께 궁중에 있을 때, 마침 뇌성이 진동하여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내시 백충신(白忠信)이 곁에 있다가 벼락을 맞아 죽으니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벼락이 전상(殿上) 좌우 기둥을 때렸다.”고 기록되었다.좌우에 있던 사람이 모두 넘어지고 넋을 잃었으나 《오산설림》에는 “정희왕후(貞熹王后)도 얼굴 빛이 변하고, 여러 왕손들은 놀라서 어쩔줄을 몰랐다.”고 기록되었다. 성종은 전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세조는 더욱 이상히 여겨 일찍이 이르기를, “이 애의 기국과 도량은 우리 태조를 닮았다.” 하였다. 《오산설림》에는 “세조가 정희왕후에게 이르기를, ‘뒷날의 나라 일은 마땅히 이 애에게 맡길 것이니 이 말을 잊지 마시오.’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예종(睿宗)이 세상을 떠나니 아들이 어리고 어리석었으므로 정희왕후가 성종으로써 대를 잇도록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 예종이 세상을 떠나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안팎이 매우 불안하였다. 신숙주가 왕대비에게 아뢰기를, “속히 상주(喪主)를 결정하여 인심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왕대비는 성종으로써 왕통을 잇게 하고 친히 정사를 보살폈다.
예종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월산군이 차례에 해당되나 정희왕후가 차례를 건너 뛰어 성종으로 위를 잇게 하였다. 성중은 나이가 겨우 열세 살이었으나 오히려 조정이 편안하고 일이 없었다. 권 충정공(權忠定公) 벌(橃)의 을사년 상소
○ 임금이 열세 살에 들어와 왕통을 잇고 학문에 독실하며 어질고 밝아서 태평시대의 성군이 되었다.
○ 임금은 총명하고 영걸스럽고 너그럽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경서와 사서에 통달하였는데 더욱 성리(性理)의 학문에 이해가 깊었으며, 백가(百家)의 글과 역법(曆法), 음악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달하고 활쏘기, 글씨, 그림도 또한 정묘(精妙)한 경지에 이르렀다.효도하고 우애함은 천성에서 나왔으며 제사는 사고가 있지 않는 한 반드시 몸소 지내고 몸을 삼갔다. 세 분 대비를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으며, 월산대군(月山大君)을 은혜와 예절로써 대우하고 종실 여러 친족들도 때때로 대궐 안으로 불러 보고 술을 내어 가인례(家人禮)를 행하여 매우 화락하였다.
○ 임금이 몸소 경안전(景安殿)에 제향(祭享)하고 경연으로 돌아오자 영경연(領經筵) 한명회(韓明澮)와 최항(崔恒)이 아뢰기를, “제사 지낸 후에 또 경연에 나오시니 옥체가 피로하실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임금은 “나는 하루의 시간도 아끼는데, 재계하는 날은 할 수 없지마는 제사지낸 후에는 경연을 정지할 수 없다.” 하였다.
○ 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지금 날이 점점 길어가니 임금께서는 경연의 석강(夕講)에 나가야 할 것이요, 내시들과 늘상 함께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였다. 원상(院相)김질(金礩) 등이 아뢰기를, “지금 한창 더위가 심한데 하루 동안에 세 차례나 경연에 나오시면 옥체가 피로하실까 염려되오니 주강은 정지하시고 또 석강도 편전에서 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임금은 “내가 촌각을 아끼는데 어찌 주강을 정지하리오. 그리고 조신들을 편복으로 접견할 수 없소.” 하였다.
대비가 임금이 쉴 사이 없이 글 읽는 것을 보고, “피로하지 않으시오?” 하니 임금은 “읽고 싶어서 읽으니 피로한 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첨재(僉載)》
○ 임금은 학문에 뜻이 독실하여 아침ㆍ낮ㆍ저녁의 세 때에 글을 강론하고 밤에도 옥당에 입직한 선비를 불러 강론을 마치고는 편복으로 마주 앉아 술을 내리면서 조용히 고금의 치란과 민간의 편리한 일, 병폐로운 일을 물으니 전각 안에는 촛불 하나만을 켰을 뿐이었다. 때로 밤중에 이르러 선비들이 크게 술에 취하면 어전 촛불[御前燭]을 주어 본원까지 바래다 주게 하였으니, 곧 당 나라 금련거(金蓮炬)의 고사와 같은 뜻이었다. 《용재총화》
○ 이때 혜장왕비(惠莊王妃)ㆍ회간왕비(懷簡王妃)ㆍ양도왕비(襄悼王妃)가 한 궁중에 거처했는데 임금은 세 분을 똑 같이 섬기었다. 또 임금은 대비를 위하여 날마다 작은 연회를 베풀고, 내수사의 여종 5~6명을 뽑아 속악(俗樂)을 익히게 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얼굴과 재예(才藝)가 뛰어났더니 항상 임금에게 추파를 보내었다.임금은 이를 깨닫고 그 부모에게 명하여 시집보내게 하고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부터는 궁중에서 작은 연회도 베풀지 아니하였다. 또 임금은 사고가 없는 한 날마다 세 번 경연에 나오고 세 번 대비전에 뵈러 갔으며 종실들을 불러 후원에서 술도 마시고 활도 쏘았다.종실들을 대하면 반드시 작은 술잔치를 베풀어 기생과 음악이 따르게 하였으니 이것은 태평시대의 좋은 일이지마는 논하는 이는 혹 말하기를, “연산군(燕山君)이 연락에 즐겨 빠진 것은 성종 때부터 귀와 눈에 배었으므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니 애석한 일이다. 《전언왕행록(前言往行綠)》
○ 임금은 해서(楷書) 쓰는 법에 정통하여 글씨 모양이 사랑스럽고 단아하며 무게가 있었으니, 조송설(趙松雪)의 필법을 깊이 연구하여 얻은 바가 깊다. 또 묵화에도 뜻을 두었으니, 이는 모두 임금의 뛰어난 재능으로서, 모방하여 익히기를 힘쓰지 않아도 옛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때때로 필묵을 가까이 하여 약간 솜씨를 보인 것인데, 짧은 종이[寸牋]와 작은 서폭(書幅)들이 세상에 흩어져 이것을 얻은 자는 공경하며 감상하고 겹겹으로 싸서 간직하여 귀중히 여기기를 주옥보다 더하였다. 《용천담적기》
후일에 중종(中宗)은, 일찍이 성세창(成世昌)이 글씨를 잘 쓰고 필법을 볼 줄 안다고 하여, 궐내에 불러들여 간직했던 몇 장의 글씨를 내려주면서, “궐내에서는 성종과 용(瑢 안평대군)의 글씨를 분별하지 못하니 이것을 가려내어 들이라.” 하였다. 세창이 분류하여 아뢰었다.
○ 임금은 매양 월산대군(月山大君)을 궐내에 불러들여 작은 연회를 베풀고, 나가 있을 때에는 편지로서 서로 수창(酬唱)하기를 빠뜨린 날이 없었다. 참외를 내려주는 시에,

새 참외를 처음 맛보니 수정처럼 차구나 / 新苽初嚼水精寒
형제간의 친한 정의로서 어찌 차마 혼자만 먹고 보랴 / 兄弟親情忍獨看

하였다. 대개 그 우애의 지극함을 문자에서도 상상할 수 있었다. 《지봉유설》 《소문쇄록》
궁인의 상자 속에 들었던 휴지 조각을 내 보이는 이가 있는데 종이와 필체가 보통 것과 달랐다. 그 종이에 쓰이기를,

깊숙한 정자는 흐르는 물을 내려다 보고 / 幽亭瞰流水
높은 나무는 잔잔한 물을 굽어본다 / 高樹俯潺湲
화류(驊騮 준마)는 푸른 풀밭에서 우니 / 驊騮嘶靑草
봄이 푸른 산기슭에 있구나 / 春在翠微間

하고, 또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은 천 길이나 섰는데 / 絶壁立千仞
솔바람은 불어 그치지 않네 / 松風鳴未休
난간에 기대 선 무한한 뜻에 / 憑欄無限意
고향의 가을이 어렴풋 하네 / 依約故山秋

하고, 또

묻노니 형은 무슨 일로 세월을 보내는가 / 問兄何事送羲娥
상상하건대 거문고와 노래겠지 / 遐想洋琴與渭歌

하고, 또

친척들을 모으고 아름다운 기생을 부르니 / 期會親戚 聘招佳妓
의리는 비록 군신이지마는 은혜는 곧 형제이다 / 義雖君臣 恩則兄弟

하였다. 이것을 보건대, 임금의 평상시 희필(戱筆)임을 알겠다. 《소문쇄록》
○ 임금의 학문은 깊고 넓으며 문사(文詞)는 넓고 명백하였다. 글하는 선비 노사신(盧思愼) 등을 명하여 《여지승람》ㆍ《동국통감》ㆍ《삼국사절요》를 편찬하게 하고, 또 교서관에 명하여 서적을 많이 간행케 하였으니, 《사기(史記)》ㆍ《좌전(左傳)》ㆍ《사전춘추(四傳春秋》ㆍ《전한서(前漢書》ㆍ《진서(晋書)》ㆍ《당서(唐書)》ㆍ《송사(宋史)》ㆍ《원사(元史)》ㆍ《강목(綱目)》ㆍ《통감(通鑑)》ㆍ《대학연의(大學衍義)》ㆍ《고문선(古文選)》ㆍ《문한유선(文翰類選)》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구소문집(歐蘇文集)》ㆍ《서경강의(書經講義)》ㆍ《천원발미(天原發微)》ㆍ《주자전서(朱子全書)》ㆍ《자경편(自警編)》ㆍ《두시(杜詩)》ㆍ《왕형공집(王荊公集)》ㆍ《진간재집(陳簡齋集)》 등이다. 그 밖에도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용재총화》
○ 세조의 정난(靖難)에 한 장사치가 공이 매우 컸던 터라 세조가 어필을 내리기를, ‘세 번 죽을 죄를 지어도 용서 받는다.[三死無與]’ 하였다. 임금(성종)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그 장사치가 사람을 죽였는데 법 맡은 관원이 법대로 처단하기를 논죄하였더니, 그 장사치가 세조의 어필을 올렸다. 정희대비(貞熹大妃)가 교지를 내리기를,“선왕께서 손수 쓰신 유교(遺敎)가 있으니, 그를 용서해 주시오.” 하였다. 임금은 곤란해하며 말하기를, “선왕의 유교는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요, 사람을 죽인 자가 죽게 되는 것은 만세의 공법(公法)이니 어찌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로써 만세의 공법을 폐기하겠습니까.” 하였다. 대비는 “비록 그렇지만 선왕의 유교는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용서해 주오.” 하였다.임금은 두 번 세 번 반대하면서, “대비께서 저의 말을 듣지 않으시면 감히 나라 일을 맡을 수 없사오니, 원컨대, 다른 사람에게 나라 일을 맡기소서.” 하였다. 대비는 “그렇다면 임금이 알아서 하오.” 하였다. 임금은 그 장사치를 곤장으로 치게 하였으나 끝내 죽이지는 아니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
밀부(密符)를 만들도록 명하여 신숙주(申叔舟)ㆍ한명회(韓明澮) 등 두세 명의 중신에게 나누어 주어서 임금이 부를 적에 증거물로 삼게 하고 또 불의의 변고를 막도록 하였다.
○ 영안도(永安道) 관찰사 이계손(李繼孫)이 아뢰기를, “본도는 조종(祖宗)께서 탄생하고 일어난 땅이므로 주(周)의 기산(岐山)이나 한(漢)의 패읍(沛邑)과 같사오나 다만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거나 서울에 가서 벼슬한 사람은 백 명에 한, 두 사람도 못 되어 조정의 예의ㆍ풍속과 문물의 아름다움을 귀와 눈으로 접촉할 수 없기 때문에 풍기(風氣)와 습성에 국한되어 오로지 억세고 사나운 것이 풍속이 되고 활쏘기,말타기로 업을 삼고 있습니다. 학문하는 일에 대해서는 부형들도 가르치지 않고 자제들도 뜻을 두지 않으며, 공리만 서두르고 거짓을 일삼으며 예의를 버리고 기력만 숭상하게 되니, 습관이 풍속이 되어 드디어는 교만한 군사가 되고 맙니다. 지난번에 역적(이시애(李施愛))이 한번 일어나자 온 도민이 쏠리듯이 따라갔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고 배우지 못한 까닭입니다.기습(氣習)을 개혁시키고 교화를 밝히는 방법은 학교를 일으키고 영재를 기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비록 육진(六鎭)이 궁벽한 곳일지라도 자질이 영특하고 민첩한 사람이 왕왕 있으니, 바라건대, 영흥부(永興府)의 향교에 학업이 정밀하고 해박하며 명망이 있는 문관을 교수로 임명하여 여러 고을의 총명ㆍ민첩한 소년들을 가려 모아서 가르치고, 또 향교에 노비와 토지를 주어서 그 경비로 쓰도록 하소서.” 하였다.
○ 2년 신묘 겨울에 혜성이 하늘에 나타났으므로 교지를 내려 직언을 구하였다. 임금이 보경당(寶敬堂)에 나와서 원상(院相) 김질(金礩)을 불러 조정의 득실과 민생의 이해를 의논하였다.대비가 교지를 전하기를 “나의 일가 친척 중에서 용렬한 무리들이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봉록(俸祿)만 먹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번에 혜성이 나타난 변괴는 아마 이에 관계된 것일 것이니 두려움이 실로 크다. 현명하고 준수한 선비로서 산림에 물러가 숨은 이를 마땅히 찾아서 불러 오라.” 하였다.
○ 3년 임진에 응방(鷹坊)에서 일찍이 해동청(海東靑 송골매) 한 마리를 길렀는데, 임금이 경연에 나가자 신종호(申從濩)가 아뢰기를, “지금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굶어 죽을 지경입니다. 이때야말로 전하께서 매우 걱정하고 부지런하실 때이온데, 지금 궐내의 응방에서는 해동청을 기르고 있으니 이는 전하께서 완호(玩好)에 마음이 없지 않은 것입니다.이것은 아마 하늘을 공경하고 정치를 부지런히 하는 실상이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은 “군자의 과실은 일식, 월식과 같은 것이니 내가 어찌 그 과실을 숨기리오.” 하고, 즉시 명하여 매[鷹]를 놓아 주게 하고 다시는 기르지 아니하였다.
○ 명하여 역대 제왕과 후비들의 본받을 만한 점과 경계할 점을 채록(採錄)하고 정리해서 세 편을 만들고, 이름을 《제왕명감(帝王明鑑)》, 《후비명감(后妃明鑑)》이라 하였다.
○ 임금이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다가 한 나라 조조(晁錯)의 상서(上書) 중에, “곡식을 생산하는 토지가 모두 개간되지 못했고 놀고 있는 백성이 모두 농사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대목에 이르니, 시강관(侍講官) 이맹현(李孟賢)이 아뢰기를, “신은 지금도 또한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중[僧]의 무리들이 군역(軍役)을 피하기를 도모하고 놀고 앉아 먹는 백성이 그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비록 다 쫓아버리기는 어려우나 청컨대, 승려되는 것을 금하는 법을 거듭 밝히소서.” 하였다. 임금은 “사헌부로 하여금 규찰케 하라.” 하였다.맹현(孟賢)은 또 아뢰기를, “옛날부터 제왕은 친히 밭 갈아서 자성(粢盛 곡식으로 만든 제물(祭物))을 만들고 후비는 몸소 누에를 쳐서 제사 지낼 예복을 만들었으니 이는 제사를 중히 여겨 근본(조상)을 잊지 않고 갚는 것입니다. 한 나라 문제(文帝)는 가의(賈誼)의 말에 감동되어 친히 적전(籍田)을 갈았습니다. 예문이 갖추어 있는데도 조종조(祖宗朝)에서 미처 시행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신은 원컨대, 임금께서 친히 적전을 갈아서 위로는 자성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농사에 힘쓰는 뜻을 모범 보이소서.” 하였다. 임금은 승지 김영견(金永堅)에게 명하여, “적전 가는 의식을 갖추어 아뢰라.” 하였다.
○ 6년 을미에 어떤 사람이 익명서를 승정원에 붙였는데 그 뜻은 대비가 섭정하는 폐단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에 대비는 임금에게 정사를 돌려 주니 임금은 굳이 사양하였으나 대비가 듣지 않았으므로 또 원상(院相) 한명회로 하여금 대비에게 아뢰게 하였다. 명회가 대비에게 아뢰기를,“지금 만약 대비께서 정사를 내놓으신다면 이는 동방의 백성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신이 평상시에 대궐에 들어와 안심하고 술을 마셨는데,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안심하고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대비는 따르지 않고 정사를 돌려주었다. 한명회가 아뢴 말에 온당치 못한 뜻이 있으므로 교지를 내려서 꾸짖었다.이에 양사에서 번갈아가며 세조가 언어가 불경한 죄로 양정(楊汀)을 죽이고 정인지(鄭麟趾)와 정창손(鄭昌孫)을 귀양 보냈던 일을 인용하면서 명회를 국문하기를 굳이 청했으나 왕은 따르지 아니하였다.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도 글을 올려 명회의 말 잘못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자광이 다시 글을 올렸으나 말에 잘못된 점이 있어 파직되었다. 《야언별집》
○ 집현전이 폐지된 후에 독서당(讀書堂)도 폐지되었더니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먼저 홍문관을 열어 집현전의 옛 제도를 회복시켰다.
○ 7년 병신에 관각의 여러 사람이 건의하여 문신 중에 나이 젊고 자질이 총명 민첩한 채수(蔡壽)ㆍ양희지(楊熙止)ㆍ유호인(兪好仁)ㆍ조위(曹偉)ㆍ허침(許琛)ㆍ권건(權健) 등을 뽑아 휴가를 주고 장의사(藏義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후에 용산(龍山)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으나 아무런 명호(名號)가 없었으므로 조위를 시켜 기문을 짓게 하고 아울러 ‘독서당’이란 세 글자로 액호(額號)를 걸게 하였다. 술과 음악을 내려 주고 승지를 보내어 낙성식(落成式)을 올렸다. 그 이튿날 감사하다는 글을 지어가지고 대궐에 나아갈 때 붉은 보로 싼 함을 메고 기생과 음악을 뒤따르게 하였다.
○ 명을 내려 신농(神農)ㆍ요제(堯帝)ㆍ순제(舜帝)ㆍ우왕(禹王)ㆍ탕왕(湯王)ㆍ은 고종(殷高宗)ㆍ주 문왕(周文王)ㆍ무왕(武王)ㆍ한 문제(漢文帝)ㆍ당 태종(唐太宗)과 주 문왕의 후비(后妃)ㆍ주 선왕(周宣王)의 강후(姜后)ㆍ제화(齊華) 맹희(孟姬)번희(樊姬)ㆍ한의 풍소의(馮昭儀)반첩여(班婕妤)명덕왕후(明德王后)ㆍ당(唐)의 문덕왕후(文德皇后)원헌황후(元獻皇后) 등의 모범될 만한 사적과 오왕 부차(吳王夫差)ㆍ한 무제(漢武帝)ㆍ진 무제(晋武帝)ㆍ당 명황(唐明皇)ㆍ덕종(德宗) 등 처음에는 현명하였으나 후에는 어두웠던 임금들의 사적을 그려서 병풍을 만들고 글 잘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그 위에 쓰게 하고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항상 보면서 권면ㆍ경계의 자료로 삼았다.
○ 8년 정유에 사축서(司畜署)에서 가축 기르는 비용이 많이 들므로 명하여 가축의 수를 줄이게 하였다. 호조에서 돼지 3백 마리를 사재감(司宰監)에 맡겨 포육(脯肉) 만들기를 청하니, 임금은 “3백 마리를 어찌 차마 한꺼번에 죽이겠는가. 재신(宰臣)과 종신(宗臣)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
○ 전에는 국왕이 탄생한 날에는 훈구(勳舊)의 신하가 절에 가서 재(齋)를 올리며 복을 빌었는데 임금은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말하지 않았는가. ‘복을 구하되 사특한 짓을 하지 않는다.’ 했으니, 어찌 부처에게 아첨하여 복을 구하겠는가. 그것을 폐지하라.” 하였다.
이때 주계정(朱溪正) 심원(深源)이 글을 올려 축수하는 재(齋)를 폐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은 손수 글을 써서 답하기를, “그대가 정도(正道)를 진술하고 이단(異端 불교)을 배척하여 나로 하여금 요ㆍ순 같은 임금을 만들고자 하니 내가 비록 덕이 적고 어두운 사람이지마는 실로 그대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지금 말한 것을 따르겠노라.” 하였다.
○ 12년 신축 11월에 장원서(掌苑署 화초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관아)에서 영산홍(映山紅) 화분을 하나 올리니, 임금은 “겨울철에 꽃이 피는 것은 인위(人爲)로 된 것이니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다시 올리지 말라.” 하였다.
○ 임금은 매양 경연에서 부지런히 강론을 듣고서도 오히려 범위가 넓지 못하다 하여 2품 이상 벼슬로서 고문될 만한 사람을 뽑아 차례로 참시(參侍)케 하고 그 칭호를 특진관이라 하였다.
○ 15년 갑진 5월에 명을 내려 조맹부(趙孟頫)의 서자(書字)를 모아 장온고(張蘊古)의 <대보잠(大寶箴)>을 새겨서 편전에 걸어 놓고 스스로 깨우쳤다. 친히 왕우칭(王禹儞)의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써서 승정원에 내려 주면서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우칭의 기문이 비록 집정(執政)하는 이를 위해 지었던 것이지만 벼슬 자리에 있는 백관들도 모두 이것으로 좌우명을 삼을 만하다. 하물며 승정원은 추기(樞機)의 처지에 있지 않는가.” 하였다. 《국조전모(國朝典謨)》
○ 임금은 일찍이 한재(旱災)로 인하여 각도에서 바치는 물품을 줄이게 하니 경상 감사가 아뢰기를, “해산물 같은 것은 구하기가 매우 쉬우니 종전대로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뜻으로는 비록 갸륵하지마는 임금이 아랫 사람을 사랑하는 정도 또한 간절한 것이니 그것을 바치지 말라.” 하였다.
○ 20년 기유에 장령 이승건(李承健)이 황해도로부터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이 향시에서 책문(策問)을 내어 본도의 여러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물으니, 영유 훈도(永柔訓導) 권계동(權季同)이 대답하기를, ‘오직 부처를 공양해야만 능히 구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씨가 바르지 못하고 그 말이 명교(名敎)에 해로운 점이 있기에 내쫓았습니다.” 하였다.임금은 “불교가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대개 지각 있는 사람이면 이것을 당연히 물리칠 것인데, 계동은 남의 사표(師表) 되는 처지에 있으면서 유교를 배반하고 부처에게 아첨하여 불교로써 백성 구하는 방법을 삼으려 하니, 사도(邪道)로 백성을 미혹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있는가. 사헌부로 하여금 국문케 하라.” 하였다. 또 손수 쓴 글씨로 교지를 내려,
“내가 일찍이 중들이 천륜을 버리고 백성의 재물을 소모시키는 것을 미워하여 장차 그 뿌리를 뽑고 세상의 교화를 굳건히 하고자 했는데,지금 유생들이 나라에서 어진 사람을 들어 쓰는 시기를 당하여 요ㆍ순의 도리는 진술하지 않고 부처의 법을 주창하게 되니, 이는 나로 하여금 양(梁) 나라 무제(武帝)가 절에 가서 사신(捨身)하고 당 나라 헌종(憲宗)이 예불했던 것과 같이 하도록 하려 함이니, 마땅히 법을 맡은 관원으로 하여금 국문케 하여 먼 지방으로 내쫓게 하라.” 하였다.
○ 대사헌 허침 등이 아뢰기를, “듣건대, 왜인이 귤(橘)나무를 바치고 유구국(琉球國)의 사자도 또한 이상한 나무를 바쳤다 하니 만약 전하께서 이것을 받으시면 저들은 전하께서 먼 지방의 물건을 귀중히 여기신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다투어 와서 바칠 것이오니, 어찌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임금은 “지난번에 유구국에서 바친 나무는 약재이므로 받았다. 귤나무는 우리나라에서도 생산되니 받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지중추 고태필(高台弼)은 아뢰기를, “신은 제주 사람이온데 제주에서 진주 앵무배(眞珠鸚鵡杯)를 바치므로 백성에게 폐를 끼침이 많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것은 그 용도가 나라에 이로움은 없으면서 백성에게 폐만 끼치니 그것을 바치지 말라.” 하였다.
○ 24년 계축 6월에 임금이 병환이 났는데, 의원이 “즉어(鯽魚)라야만 병환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근시에게 이르기를, “지금은 한창 장마철이므로 고기 잡는 사람이 물에 빠질 염려가 있다. 어찌 나의 구복(口腹)을 위하여 백성에게 폐를 끼칠 수 있느냐.” 하였다.
○ 25년 갑인 겨울에 임금은 병환이 나서 오랫동안 병중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정사를 결재(決裁)하고 쉬지 아니하였다. 병환이 위독하자 의관을 갖추고 대신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였는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 임금이 글을 좋아하고 두 임금(세종ㆍ세조)을 계승하여 유림(儒林)을 사랑하며 장려함이 보통 규모보다 훨씬 뛰어났으니 당대 문장에 걸출한 선비들이 옥당에 빛났다. 조위(曹偉)ㆍ신종호(申從濩)ㆍ유호인(兪好仁)ㆍ김흔(金訢)ㆍ성희안(成希顔)이 더욱 우대를 받아 항상 저술한 것을 그날 그날 써서 바치었다.조위와 유호인이 모두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를 들어 외직을 원하므로 특히 쌀을 보내어 그 어버이를 우대하였다. 조위가 상사(喪事)를 당하자 치제(致祭)하여 그를 영화롭게 함으로써 임금의 은총이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에게 함께 미치니 사람마다 감동하였다. 인재를 고무하고 선비의 기운을 진작시켰으니 진실로 천년을 두고 있기 어려운 장한 일이었다.
성희안(成希顔)이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있을 때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복제를 마치었다. 임금이 편전의 문 밖에까지 나가 맞으며 그를 위로하고, 내시에게 명하여 매 한 마리를 주면서, “그대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공무의 여가에 이 매로써 사냥하여 맛있는 고기를 드리도록 하라.” 하였다.또 야대(夜對)할 적에 술과 과실을 주니 희안이 감자(柑子)와 귤 여 나무 개를 소매 속에 넣었다. 술이 취하여 정신을 잃었으므로 내시가 엎고 나가다가 소매 속의 과실이 떨어져 땅바닥에 흩어졌다. 그 이튿날 임금은 감자와 귤 한 쟁반을 옥당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어제 희안이 귤을 소매 속에 넣은 것은 어버이에게 드리려 한 것이므로 지금 내려준다.” 하였다.희안은 이 은혜를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죽음으로 갚으려고 생각하였는데, 마침내 반정의 의거를 일으켜 은혜를 갚았으니 임금의 선비 대우하는 정성과 사람을 알아 보는 밝음이 진실로 남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희안이 위태한 시국을 바로 잡아 안정하게 만들어 훈공(勳功)이 길이 국가에 남았으니 임금이 자기를 알아 주는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임금이 착한 일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함이 또한 지극하였다. 명 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허종(許琮)에게 말하기를, “당신 나라에는 임금은 있어도 신하는 없다.” 하였다. 정암(靜菴)의 연주(筵奏)
○ 재상 이영은(李永垠)과 이곤(李坤) 두 사람이 기생 하나를 함께 관계하고 서로 빼앗으려 하였는데, 간관이 죄를 논하여 파직하기를 청한 지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대궐에 나아가서 스스로 변명하고 서로 허물을 상대에게 돌리거늘,임금은 “옛날부터 사대부들이 아내와 첩을 서로 빼앗는 것은 쇠망해 가는 세상의 일이다. 나는 차마 이 세상을 쇠망해 가는 세상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대간(臺諫)의 파직하라는 말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지 그대들에게 죄가 없다고 한 것은 아니니 물러가서 반성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송와잡기(松窩雜記)》
○ 임금은 경연의 강론이 끝나면 반드시 편전에 나오는데 육승지(六承旨)가 각기 소속 관청의 공사(公事)를 가지고 그 해당 관원들을 거느리고 와서 임금께 바치었다. 임금은 반드시 그 승지와 관원과 더불어 사리를 되풀이 연구하여 그것이 옳지 않으면 물러가서 다시 의논하게 하고 옳으면 반드시 묻기를, “이것이 당상관의 의사인가, 해당 관원의 의사인가?”하고 반드시 그 성명을 기록하여 훗날의 승진에 대비하였다. 수령과 변장들이 부임할 때에도 또한 반드시 한 사람씩 불러 보고 먼저 그 사람의 출신 내력과 친족 교우 관계를 묻고, 다음은 공사를 처리하고 군졸을 어루만지며 백성을 다스리고 외적을 방어하는 방법을 물어서 잘 하는 사람을 칭찬해 주고 또 이어 등급을 뛰어 승진시켜 주며,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내쫓고 아울러 그를 천거한 사람까지 죄를 주었다. 비록 시종하는 신하나 외국에 사신 가는 사람일지라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이러므로 지방관으로 부임할 사람이 자기가 그 임무를 감당하기 힘들게 여겨지면 문득 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감히 부임하지 못하였다. 《기재잡기(寄齋雜記)》
임금께서 한 수령이 특이한 정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 사람이 크게 쓸 수 있는 인물임을 알아보고 뽑아 올려 집의(執義)를 명했다. 삼사에서 글을 번갈아 올려 다툰 지 수일 만에 또 그 사람을 승진시켜 이조 참의로 삼았다. 삼사에서 또 극력 논란하자, 수일 만에 또 이조 참판으로 승진시켰다.삼사는 드디어 중지하고 다시 논란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만약 이를 그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정승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니 그만 중지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 사람은 후에 정승이 되었으며 과연 그 재능이 직무에 알맞았으니 이로써 나라 사람들은 임금이 사람을 잘 알아보는 데 감복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내시가 충청도로부터 돌아왔으므로 임금은 조용히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일을 묻고 이어 그 밖의 이야기도 물었다. 내시는 답하여 아뢰기를, “충주 목사(忠州牧使)에게 어떤 객(客)이 있었는데, 한 기생을 보고 매우 사랑했으나 기생은 냉정하게 대하였습니다.이별할 때에 객은 울면서 차마 작별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광문(廣文) 도사(都事) 이 좌석에 있었으므로 문객은 광문의 손과 기생의 허리띠를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광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나의 이별하는 서러움을 위로해 주지 못하는가.’ 하니 광문이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자지작(紫芝雀) 띠는 가는 허리에 둘리었고 / 紫芝雀帶橫腰細
흑서화(黑黍靴) 신은 발에 맞아 편안하다 / 黑黍張靴着足安

했으나 문객은 돌아다 보지도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싱긋이 웃으면서 이내 광문의 이름을 기둥에 써 두었다. 훗날에 특별히 광문을 홍문록(弘文錄)에 들게 하니 사헌부에서 이를 논란하였다. 임금이 불러 물으니 답하여 아뢰기를, “옛날부터 홍문록은 한 때의 공론(公論)을 채용하였으되 일찍이 임금의 특별한 명령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은 “권력 있는 이에게 쫓아 다녀서 얻은 것이 공정하냐? 명성이 임금에게 알려져 채용된 것이 공정하냐?” 하였다.그 사람 사헌부의 언관이 힘써 다투거늘 임금은 말 소리와 얼굴 빛에 노기를 띠며 나가라고 꾸짖으니, 그 사람은 벌벌 떨면서 나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임금이 다니는 길로 나갔다. 임금은 눈여겨 보다가 이윽고 좌우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제가 가야 될 길도 알지 못하면서 남의 앞길을 막으려 하는가.” 하였다. 광문이 결국 옥당에 들어 왔는데 아주 기특한 재주 있는 인물이었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임금은 당대의 인물을 이리저리 다루었는데 그 수단이 매우 능란하였다. 어느 날 임금이 후원(後苑)을 산보하고 있을 때 까치가 종이 한 장을 물고 가다가 우연히 임금 앞에 떨어뜨렸다. 그 종이를 살펴보니, 해변 고을 수령이 좌승지에게 선사한 물목 단자(物目單子)였다. 임금은 그 종이를 소매 속에 넣고 경영에 나가서 육승지를 불러 조용히 이르기를,“지방의 수령들이 음식물을 그대들에게 선사한다면 예의를 돌보지도 않고 받겠는가?” 하니, 여러 승지는 “어찌 감히 받겠습니까.” 하고 한결같은 대답을 하였다. 좌승지만은 자리를 피하여 물러가서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은 그렇지 못합니다. 신에게는 90세가 된 늙은 어미가 있사온데, 평소부터 교분이 두터운 한 수령이 어제 해산물을 신에게 선사했으므로 그것을 받았습니다.” 하였다.임금은 웃으며 소매 속에서 그 종이를 내어 보이고, “그대는 옛날 정직한 사람의 유풍을 지녔다고 이를 만하다.”고 하였다. 《축수편(逐睡篇)》
○ 임금이 친히 종묘에 제향하는데, 한 장령이 축관(祝官)이 되어 축 읽을 때를 당하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입이 붙은 것 같았다. 그 이튿날 임금이 그 사람을 풍산 만호(豐山萬戶)로 임명하니 간관이 논쟁하였다. 임금은 “명색이 문관이라 하면서 축문 한 자도 읽지 못하는구나. 활 쏘는 것은 안다 하니 한 성보(城堡)나 지키면 족하지.” 하였다. 2, 3개월 후에 불러서 다시 전일의 벼슬을 시켰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어떤 한 사람이 글을 올려 원통한 일 풀어주기를 원하였다. 임금이 “이 글을 누가 썼느냐?”고 물으니, “사인(士人) 강신(姜信)이 썼습니다.” 하였다. 곧 강신을 불러 해서와 초서를 써서 바치게 하더니, “해서는 비할 데가 없으리만치 잘 썼다.” 하고, 드디어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坐)란 벼슬을 주고 자주 불러 보았다. 몇 년 동안에 벼슬 등급을 뛰어 판결사(判決事)에까지 이르게 하였는데, 역시 재능이 그 직무에 알맞았다. 《기재잡기》
○ 이번(李蕃)은 안강현(安康縣) 경주(慶州)에 소속되었다. 에 살았는데, 자질이 준수하고 얼굴이 단정하였다. 나이 20세가 되어 경주부(慶州府)의 향교에서 스승에게 배우고 친구를 사귀어 배우니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글씨도 또한 정묘하였다.임금께서 이번이 향시에 장원했던 작품을 보고 이를 칭찬하여 즉시 역마를 타고 오라고 명하여 종이와 붓을 주어 다시 시험해 보았다. 또 의복과 식품 비용까지 내려 주고 성균관에 머물게 하여 그 학업을 마치게 하니 많은 선비들이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이번은 기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그의 아들은 언적(彦迪)이다.
임금이 일찍이 밤에 놀다가 보니 멀리 삼각산(三角山)에 불이 밤새도록 켜져 있었다. 사람을 시켜 가서 보게 했더니, 서생이 등불을 달아 놓고 글을 읽고 있었다. 심부름 간 사람이 묻기를, “무엇하러 이렇게 부지런하며 고생하느냐?”고 하니 서생은 “과거에 급제하려고 한다.” 하였다. 임금은 그 사람에게 명하여 절구(絶句)를 짓게 하고 이내 급제를 시켜주었다. 《오산설림》
○ 임금이 밖에 나갔다가 어떤 사람이 까치집이 있는 나무를 베어 자기 집 문 앞에 세우는 것을 보았다. 사람을 시켜 물으니, 답하여 아뢰기를, “문 앞의 나무에 까치가 집을 지으면 과거에 급제한다 하는데, 문 앞에 나무가 없으므로 이렇게 함으로써 좋은 징험이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입니다.” 하였다.또 물어 이르기를, “강송(講誦)을 잘 하는가? 제술(製述)을 잘 하는가?” 하니 답하여 아뢰기를, “다 잘 하는데도 수십 년 동안이나 과거에 억울하게 실패하였습니다.” 하므로 드디어 즉시 급제를 시켜주었다. 《오산설림》
○ 전 찰방(察訪) 이관의(李寬義)는 나이 75세가 되었는데, 이천(利川)에 살고 있었다. 성리(性理)의 학문에 깊었으므로 당시의 선비들이 모두 그를 추앙하였다. 계묘년에 손순효(孫舜孝)의 추천으로 불려 와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강송(講誦)하게 하고,서거정(徐居正)ㆍ허종(許琮)ㆍ이극기(李克基) 등에게 명하여 성리의 근원과 천지의 도수(度數) 및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세차역법(歲差曆法) 등을 논하게 하니 관의는 분변하여 대답함이 조금도 틀리지 아니하였다. 임금은 감사에게 명하기를, “전 찰방 이관의가 성리학에 정통하고 숙달했다 하므로 불러 시험해 물어보니 과연 듣던 바와 같았다.장차 크게 쓰려고 했으나 관의가 스스로 나이 많음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려고 하니, 내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의복을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감사는 그 지방의 수령을 시켜 미곡을 주어 내가 그 사람을 표창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 예문관 교리(藝文館校理) 최한정(崔漢楨)은 성품이 순량(醇良)하고 근실하기에 임금이 후한 대우를 하니, 승지 임사홍(任士洪)이 그를 시기하여 임금께 아뢰기를,“최한정은 나이 많으니 시독(侍讀)하는 데 적합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은 대답하지 않고 어필로써 한정의 이름을 쓰고 등급을 뛰어 대사헌으로 임명하니 사홍은 황공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으며, 사림(士林)들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용재집(容齋集)》
○ 임금이 장차 반궁(泮宮)에 행차하여 옛 글을 강론하고 직언을 구하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노사신(盧思愼)과 이승소(李承召)가 어떤 일에 대하여 아뢰었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아니한 일이 있었다.이칙(李則)이 나와 아뢰기를, “노사신과 이승소는 노성(老成)한 대신인데도 아뢴 바를 들어주시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성균관에 행차하여 다시 무슨 말을 구하시렵니까.” 하자 임금이 그 말에 마음을 움직였다.
○ 안계송(安繼宋)의 부인은 세종의 손녀 계양군(桂陽君) 증(璔)의 딸이다. 임금께서 친히 적전(籍田)을 갈고 돌아오다가 그 집에 들려 보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간할까 염려하여 흥인문(興仁門) 안의 둘째 다리에 이르러서야 타고 있던 연(輦)을 갑자기 배고개[梨峴]에 있는 계송의 집으로 가게 하였다. 간관이 과연 논란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계송의 아내는 몸에 무명베 검은 적삼을 입고 손수 길쌈을 하다가 허둥지둥하면서 임금을 영접하여 뵈었다. 임금은 특별히 계송에게 장악원 봉사(掌樂院奉事) 벼슬을 주고 바로 그 날에 사은숙배(謝恩肅拜)케 하고, 또 행차 중에 썼던 금ㆍ은 그릇을 모두 다 내려주게 하였다. 《안씨추록(安氏追錄)》 ○ 후손의 집에 임금이 앉았던 방석이 있어 항상 집 안에 달아 두었는데 해가 오래 되매 삭아서 없어졌다.
계송은 자는 자윤(子胤)이며, 스스로 박전경수(薄田耕叟)라 불렀다.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팔대손(八代孫)이다. 천성이 어리석어 시 짓고 술 마시는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벼슬은 직장(直長)으로 17년이나 있어도 옮기지 아니하였다. 《추강록(秋江錄)》
○ 명숙공주(明淑公主)가 임금에게 청하기를, “홍상(洪常)의 숙부 칭(儞)이 장흥 부사(長興府使)가 되었으나 아내가 병이 나서 부임하기가 어려우니 원컨대, 본직을 갈아 주소서.” 하니, 임금은 명하여 경직(京職)으로 임명하였다. 대사간 손비장(孫比長) 등이 차자를 올려,“홍칭의 사정(私情) 때문에 국법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니 기한을 정하여 쓰지 마소서.” 하였다. 임금은 편지로 답하기를, “대사간의 말이 대단히 바르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번 일은 사정이요, 공정한 것이 아니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오. 과실을 듣고 곧 고치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대들이 능히 그 직무를 다하니 나는 이를 매우 칭찬하노라.” 하였다. 《국조모열(國朝謨烈)》
○ 임금은 신하들을 접견할 때는 한 집안의 부자 사이처럼 하였으나 정사에는 엄숙하고 공경하니, 여러 신하들이 감히 실정을 숨기고 행실을 꾸미지 못하였다. 임금 앞에서는 서로의 잘잘못을 따져서 숨기거나 회피하지 않았으나, 대궐 문 밖에 나가서는 마음을 털어버리고 서로 기뻐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대개 임금의 뛰어난 밝음과 위엄있는 덕에 신하들이 감화를 받은 것이다. 《오산설림》
○ 임금은 큰 술잔으로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맑기가 물과 같은 옥 술잔 하나가 있었는데, 임금은 매양 술이 취하면 다른 신하에게도 이 술잔으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종실의 한 사람이 술을 마신 뒤에 이 술잔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 춤추다가 거짓으로 땅바닥에 넘어지니 술잔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것은 임금의 술 많이 마심을 은연히 간하는 뜻이었다. 임금도 또한 그것을 허물하지 아니하였다. 《오산설림》
○ 함경도의 유생 박원령(朴元齡)이 글씨를 잘 써서 일찍이 남의 소(疏)를 대신 써서 올렸다. 임금이 “누가 쓴 것이냐?”고 물으니, 박원령이 썼다고 대답하였다. 승정원으로 불러 술과 고기를 내려주고 화살통[箭筒]을 내어 주면서 그 거죽에 글을 써서 바치게 하고, 곧 임금은 손수 글씨를 쓴 병풍을 내려 주었다. 비록 작은 기예(技藝)라도 칭찬하고 장려함이 이와 같았다. 《필원잡기》
진사 박원령이 글씨를 조금 쓸 줄 알므로 임금은 이를 보고 칭찬하면서 그 고을에 글을 내리고 종이와 붓을 주어 장려하였다. 그 영광스러움이 향리에 빛나고 떨쳐서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작은 기예가 어찌 족히 임금의 칭찬을 받을 수 있으랴마는 임금은 자기가 능하다 하여 남의 잘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 장려함이 이처럼 마음에서 우러나왔던 것이다.이로 인하여 문장ㆍ서화(書畫)ㆍ공예 등 온갖 기술이 모두 격찬을 받아 진보되었으니, 이것으로 임금의 고무(鼓舞)ㆍ격려시키는 기틀이 특히 한 번 찡그리고 웃는 사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임금이 진심으로 좋아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비록 온갖 방법으로 권장ㆍ신칙(申飭)하고 과정(課程)을 엄격히 세웠더라도 다만 소란ㆍ번잡하고 퇴폐ㆍ나타(懶惰)함만 볼 뿐이지 능히 이처럼 깊이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였을 것이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지평 유경(劉璟)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죽음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조회에 나오시지 않고, 행차하실 때에도 음악을 폐지 하셨습니다. 예(禮)에 기년복(朞年服)은 임금은 입지 않고 대부(大夫)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니, 청컨대, 의(義)로써 정을 끊으소서.” 하였다.임금은 “조회에 나가는 것은 마땅히 아뢴 대로 할 것이지만은 대신의 죽음에도 오히려 차마 음악을 들을 수 없거늘, 하물며 친형의 시체가 지금 빈소에 있는데 내가 어찌 차마 음악을 듣겠는가.” 하였다. 《국조전모(國朝典謨)》
○ 임금이 한 왕자만을 매우 사랑하여 흔히 치우치는 일이 있었으므로 사헌부에서 이를 논란하였다. 임금은 즉시 성상소(城上所)의 장령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 글 한 구절을 써서 주었는데, 그 글에,

세상 사람이 늦은 가을 국화를 가장 사랑하나니 / 世人最愛霜後菊
이 꽃이 핀 뒤에는 다시 다른 꽃이 없기 때문이다 / 此花開後更無花

라 하였다. 그 사람이 눈물을 닦고 나갔는데 얼마 후에 임금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산설림》


 

[주D-001]세실(世室) : 종묘(宗廟)에 모시는 신주(神主)는 위로 4대(代)가 넘으면 옮기게 되는데 공덕(功德)이 높은 임금은 특히 옮기지 않고 영원히 받들게 되는데, 이것을 세실이라 한다.
[주D-002]가인례(家人禮) : 왕실에 있어서 조정례(朝庭禮)와 가인례가 있는데, 예를 들면, 조정례에서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성종에게 신하가 되지마는, 가인례에서는 월산대군이 형이 되고 성종은 동생이 된다.
[주D-003]원상(院相) : 국상(國喪) 직후에 임시로 국정을 대리하는 책임자를 말한다.
[주D-004]금련거(金蓮炬)의 고사 : 임금 앞에만 쓰는 촛불인데, 당 나라 선종(宣宗)이 한림학사 영호도(令狐綯)를 불러서 밤 늦게까지 담화하다가 돌려 보낼 때에 금련거를 주어 앞에서 인도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5]밀부(密符) : 옛날 임금이 특정한 신하에게 신임의 표시로서 주는 것인데, 부(符)라는 것은 동철(銅鐵)로 만든 것으로 두 조각을 내어 한 조각은 임금이 지니고, 다른 한 조각은 장수나 지방관이 지니어 일이 있을 때에 마음의 표시[信標]를 삼았던 것이다.
[주D-006]적전(籍田) : 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토지로서, 그 토지에서 나는 수확으로 종묘의 제사를 받들고, 또한 임금이 친히 경작함으로써 백성에게 농사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주D-007]강후(姜后) : 주(周) 나라 선왕(宣王)이 어느날 강후와 동침한 다음날 아침에 늦게 일어났더니, 강후가 문 밖에 엎드려 사과하기를, “첩의 허물로 왕이 늦게 일어나시어 정사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8]맹희(孟姬) : 제(齊) 나라 화씨(華氏)의 딸이 예법을 지켜 정당한 예절을 갖추지 않으면 시집가지 않겠다 하여 늦도록 처녀로 있었더니, 임금이 듣고 후비로 맞아들였는데 이를 맹희라 하였다.
[주D-009]번희(樊姬) : 초(楚) 나라 장왕(莊王)이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번희는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0]풍소의(馮昭儀) : 한(漢) 나라 성제(成帝)가 풍소의를 데리고 상림원(上林苑)에서 동물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곰 한 마리가 뛰어나와 성제에게 덤벼들므로 풍소의가 곰 앞에 가로 막아섰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1]반첩여(班婕妤) : 한 나라 성제의 후궁이었는데 조비연(趙飛燕)에게 밀려나서 장신궁(長信宮)에 있었는데, 반첩여가 임금을 원망하고 저주한다고 참소한 자가 있어 성제가 반첩여를 잡아 문초하였더니, 반첩여가 아뢰기를,“저주는 귀신에게 비는 것인데, 귀신이 아는 것이 있다면 사특(邪慝)하게 하소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귀신이 만일 아는 것이 없다면 하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2]명덕왕후(明德王后) :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의 황후인데 어질고 검소하여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으므로 후세의 황후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주D-013]문덕황후(文德皇后) : 당 나라 태종이 하루 아침에 조회를 파한 뒤에 내궁에 들어가서 옷을 벗으면서 노한 어조로 “내가 장차 이 촌 늙은 이를 죽여 버리리라.” 하였다. 문덕황후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위징(魏徵)이 여러 신하들 앞에서 나를 모욕하였다.” 하므로 황후가 엎드려 절하며 “임금이 밝아야 신하가 직언(直言)을 하는 것이니 축하합니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4]원헌황후(元獻皇后) : 당 나라 숙종(肅宗)의 어머니. 현종의 궁인으로서 숙종을 임신했을 때 현종이 낙태시킬려고 하였는데 꿈에 신이 두 번이나 나타나 그것을 막더니 과연 중흥주인 숙종을 낳았다.
[주D-015]장온고(張蘊古) : 당 나라 사람인데, 태종에게 대보잠(大寶箴)이라는 임금의 좌우명이 될만한 격언을 지어 올렸다.
[주D-016]왕우칭(王禹儞) : 송(宋) 나라 사람인데, 조회때 신하가 시간을 기다리는 휴게실에다 대루원(待漏院)이라는 대신을 경계하는 기문(記文)을 지어 붙였다고 한다.
[주D-017]추기(樞機) : 문을 여닫는 문지방인 돌저귀를 말하는데, 사람의 말[言語]하는 일을 추기에 비하였다. 승정원은 임금의 말[言語]을 관할하는 곳이므로 추기하고 하였다.
[주D-018]육승지(六承旨) : 조선시대, 승정원의 도승지ㆍ좌승지ㆍ우승지ㆍ좌부승지ㆍ우부승지ㆍ동부승지를 말하는데, 순위에 따라 육조의 일을 분담하여 맡아 보았다.
[주D-019]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ㆍ수찬을 선거ㆍ임명하는 기록을 말하는데, 교리ㆍ수찬의 선거는 먼저 칠품(七品) 이하의 홍문관원이 뽑힐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홍문관 부제학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의중의 사람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말한다.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연산군은 이름은 융(㦕)이며, 성종(成宗)의 원자요, 폐비 윤씨(尹氏)가 낳았다. 성화(成化) 병신년에 나서 홍치(弘治) 을묘년에 왕위에 오르고, 정덕(正德) 병인년에 폐위되니 왕위에 있은 지 12년만에 연산군(燕山君)으로 강봉되어 교동(喬桐)으로 내쫓겼다.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나니 수(壽)가 31세였다. 묘는 양주(楊州) 해등촌(海等村)에 있다.

 

○ 폐비 신씨(愼氏)는 본관은 거창(居昌)이며, 영의정 승선(承善)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 의 딸이다. 연산이 폐위되자 위호를 낮추어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이 되고 정청궁(貞淸宮)에 나가 있다가 중종(中宗) 때에 세상을 떠났다. 묘는 망우리(忘憂里) 폐비 윤씨 묘의 국내(局內)에 있다. 제사 받드는 것은 외손 구엄(具渰)에게 전해졌는데, 구엄은 또 외손 이안눌(李安訥)에게 전해 주었다.

 

○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다.

첫째 아들 폐위된 세자 황() 정사년에 났다. 폐주(廢主) 9년 계해에 사자를 보내어 세자로 책봉하였다. 연산군이 이미 폐위되니 세자도 폐위되어 정선(旌善)으로 귀양갔다.
둘째 아들 인(仁) 처음에 창녕대군(昌寧大君)으로 책봉했다가 뒤에 그 칭호를 깎아버렸다.
딸 하나는 구문경(具文璟)에게 시집갔다. 처음에 능양위(綾陽尉)로 책봉했다가 뒤에 그 칭호를 깎아버렸다.
서자 성(誠) 처음에 양평군(陽平君)으로 책봉했다가 뒤에 그 칭호를 깎아버렸다.
서자 돈수(敦壽)  서녀는 신거홍(愼居弘)에게 시집갔다. 벼슬은 판관이다. 후취로 시집갔다.

 

○ 강희맹(姜希孟)의 집이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었는데, 폐주가 일찍이 그 집에 우거(寓居)하였다.
성종(成宗) 정유년에 원자(연산)가 병이 났으므로 그 집에 가서 치료하였다. 그 때 매양 정원의 소나무 밑에서 놀았는데 왕위에 오르고 나자 진시황(秦始皇)이 소나무 다섯 그루에 대부의 벼슬을 준 것처럼 그 소나무에 벼슬을 주고 금띠[金帶]를 둘러 주고, 또 그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말에서 내리게 하였는데 지금의 순청동(巡廳洞)이 바로 그 피마병문(避馬屛門)이라 한다.

 

○ 성종(成宗) 무신년 2월 6일에 세자빈을 맞이하였는데 그날은 아침부터 비바람이 세차게 일었다. 성종(成宗)이 편지를 세자빈의 아버지 좌참찬 신승선(愼承善)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에, “세상의 풍속은 혼인날에 바람 불고 비 오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나 대개 바람이 만물을 움직이게 하고 비가 만물을 윤택하게 하니 만물이 사는 것은 모두 바람과 비의 공덕이라.” 하였다. 점심 때부터 날씨가 개어 청명하였다.
《충민공잡기(忠敏公雜記)》에 있다. 신보(愼譜)에는 충민(忠敏)의 민(敏) 자가 민(愍)이라 쓰여있다.

 

○ 성종(成宗)이 인정전(仁政殿)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술이 반쯤 취하였는데 우찬성 손순효(孫舜孝)가 “친히 아뢸 일이 있습니다.” 하였다. 성종이 어탑(御榻)으로 올라오게 하였더니 순효는 세자이던 폐주(廢主)가 능히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을 알고 임금이 앉은 평상을 만지면서,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 하니, 성종은 “나는 또한 그것을 알지마는 차마 폐할 수 없다.” 하였다.순효는 거듭 아뢰기를, “대궐 안에 사랑하는 여자가 너무 많고 신하들이 임금에게 말을 올릴 수 있는 길이 넓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성종은 몸을 굽혀, “어찌하면 이를 구하겠는가?” 하니, 순효는 “전하께서 이를 아신다면 저절로 그 허물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입시한 신하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대간은 “신하로서 임금의 용상에 올라가는 것도 크게 불경한 일인데 또 임금의 귀에 가까이 대고 말하는 것은 더욱 무례한 태도이니 순효를 옥에 내려 가두소서.” 하고, 또 “순효가 비밀히 아뢴 것이 무슨 일입니까?” 하니 성종은 “순효가 나를 사랑하여 나에게 여색 좋아함을 경계하고 술 끊기를 경계하였으니 무슨 죄 될 것이 있으리오.” 하고 마침내 말하지 아니하였다.
《국조기사(國朝記事)》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오산설림》에는 모두 연월(年月)이 없는데 《조야첨재(朝野僉載)》에는 정미년에 이 기사가 있으니 어디에 증거했는지 알 수 없다.

 

○ 임금이 세자로 있을 때 허침(許琛)은 필선(弼善)이 되고, 조지서(趙之瑞)는 보덕(輔德)이 되었다. 폐주는 날마다 유희만 일삼고 학문에는 전연 마음을 두지 아니하였는데, 다만 성종의 훈계가 엄함을 두려워하여 서연에 억지로 나올 따름이었다. 동궁의 관원이 비록 마음을 다하여 강의를 하여도 모두 귀 밖으로 들었다. 조지서는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매양 나아가 강의할 때마다 책을 앞에 던지면서, “
저하께서 학문에 힘쓰지 않으시면 신은 마땅히 임금께 아뢰겠습니다.” 하니 폐주가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허침은 그렇지 않고 부드러운 말로써 조용히 깨우쳐 주었으므로 폐주가 매우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벽 사이에 크게 써 붙이기를, “조지서는 큰 소인이요, 허침은 큰 성인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는 조지서를 위하여 매우 위태롭게 여겼다.폐주가 왕위에 오르고 갑자년의 화가 일어나자 먼저 조지서를 베어 죽이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허침은 우의정이 되어 비록 잘못된 것을 바로 잡지는 못했으나, 매양 왕의 명을 받들어 의정부에 앉아서 죄수를 논죄할 적에 주선하고 구원하여 살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 정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매양 피를 두어 되 가량 토하더니 분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인해 죽게 되었다. 《사재척언(思齋摭言)》

 

○ 연산군이 새로 왕위에 오르니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영명(英明)한 임금이라 일컬었으나 김종직(金宗直)은 늙음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갔다. 동향(同鄕)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지금 임금이 영명한데 선생은 어찌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왔습니까?” 하였다. 종직이 “새 임금의 눈동자를 보니 나처럼 늙은 신하는 목숨을 보전하면 다행이지 싶소.” 하였다. 얼마 안 가서 무오ㆍ갑자년의 화가 일어나니 사람들은 모두 그가 미리 안 것을 탄복하였다.
<축수편(逐睡篇)>
○ 박영(朴英)이 처음 과거에 올라 선전관이 되었을 때 폐주가 성종이 기르던 사슴 새끼를 쏘아 그 사슴이 화살을 꽃은 채 피를 흘리면서 나오는 것을 보고는 바로 그날 병을 핑계하고 시골로 돌아갔으니 그 당시에 기미를 알고 미리 간 이는 오직 송당(松堂) 한 사람뿐이었다. 《명신록》
일찍이 성종이 사향 사슴 한 마리를 길렀는데 길이 잘 들어서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폐주가 곁에서 성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 사슴이 와서 폐주를 핥았다. 폐주가 발로 그 사슴을 차니 성종이 불쾌히 여기면서, “짐승이 사람을 따르는데 어찌 그리 잔인스러우냐.” 하였다. 뒤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폐주가 왕위에 오르자 그날 손수 그 사슴을 쏘아 죽였다. 《오산설림》

 

○ 10년 갑자에 여러 도의 크고 작은 고을에 모두 기생을 설치하게 하여 운평(運平)이라 부르고 운평 3백 명을 뽑아 서울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임사홍(任士洪)을 채홍사(採紅使)로 삼았다. 사홍이 백성에게 심한 해독을 끼치니 길 가는 사람도 그를 흘겨 보았다.

갑자년 이후에 창기로서 얼굴이 예쁜 자를 대궐 안으로 뽑아 들이니 처음에는 백 명 정도였던 것이 나중에는 만 명이나 되었다. 기생의 칭호를 고쳐 운평(運平)이라 했는데, 대궐 안에 들어온 자는 흥청(興淸)ㆍ계평(繼平)ㆍ속홍(續紅)이라 하고 가까이 모신 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 하고 임금과 동침한 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하였으며,장악원(掌樂院)을 고쳐 계방원(繼芳院)이라 하였다. 또 크고 작은 각 고을에 모두 운평을 설치하고 임금께 뽑아 올리는데 대비케 하였다. 흥청(興淸)의 보증인을 호화첨춘(護花添春)이라 하였다. 대신들을 나누어 보내어 홍준체찰사(紅駿體察使)란 칭호를 띠고 서울과 지방의 공천(公賤)의 처첩 및 창기 등을 전부 찾아 내어 각 원(院)에 나누어 두게 하였다.흥청과 운평들이 쓰는 화장 도구의 비용을 모두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니 백성들의 재산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해동야언》

 

○ 폐주는 새로운 명칭과 칭호를 많이 만들었으니 악공(樂工)은 광희(廣熙)라 하고, 기녀는 운평이라 했다가 승격시켜 가흥청(假興淸)이라 하고 또 승격시켜 흥청이라 하고, 운평의 뒤에 들어온 자는 속홍(續紅)이라 하였다. 입는 옷은 아상복(迓祥服)이라 하고 있는 곳은 연방원(聯芳院)이라 하였으며 원각사(圓覺寺)를 그 국(局)으로 삼았다.또 의성위(宜城尉)
성종의 부마 남치원(南致元) 의 집을 함방원(含芳院)이라 하고,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을 뇌양원(蕾陽院)이라 하고, 견성군(甄城君)의 집을 진향원(趁香院)이라 하여 흥청(興淸)과 광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선택에 뽑힌 자는 취홍원(聚紅院)에 거주하게 하였는데, 취홍원은 명정전(明政殿)의 오른쪽 숙장문(肅章門)에 있었다.

 

○ 질병가(疾病家)를 흠청각(欽淸閣)이라 하고, 자수궁(慈壽宮)을 회록각(會綠閣)이라 하여 일찍이 임금과 동침한 자를 이 곳에 살게 하였다. 늙은 나인이 자는 곳을 두탕호청사(杜蕩護淸司)라 하였다. 흥청의 식료품 저장하는 곳은 호화고(護華庫)라 하고 그 식품 공급을 맡은 자는 전비사(典備司)라 하였다.초상 장사에 관한 일을 맡은 나인이 있는 곳을 추혜서(追惠署)라 하고 제사에 관한 일을 맡은 나인이 있는 곳은 광혜서(廣惠署)라 했는데 효사묘(孝思廟)에 있었다. 포염사(布染司)를 설치하여 아상복(迓祥服)을 감독ㆍ제조케 하고 봉순사(奉順司)를 설치하여 사냥하는 그물과 도구를 실어오게 하였으며, 응방(鷹坊)에는 고안관(考按官)과 응사군(鷹師軍)이 있었다.말 기르는 곳을 운구(雲廐)
정릉(貞陵)에 있다.ㆍ기구(麒廐) 본사복(本司僕)에 있다.ㆍ인구(麟廐) 경복궁(景福宮)에 있다.ㆍ용구(龍廐)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다. 라 하고, 의금부의 당직청을 고쳐 밀위청(密威廳)이라 하였다. 왕의 사명을 받들고 가는 자는 모두 승명(承命)이라 일컫고 아름다운 여자와 좋은 말을 각도에 가서 찾아 내는 자를 채홍준사(採紅駿使)라 하고,나이 어린 여자를 찾아 내는 자를 채청사(採靑使)라 하였다. 죄인을 섬에 감금하는 자를 진유근리사(鎭幽謹理使)라 하고 백성을 착취하고 온갖 물건을 독려해 거두는 자를 모두 위차(委差)라 하였다. 시사(時事)를 비난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모든 관원들에게 패(牌)를 차도록 하였는데 그 패에, “입은 재화(災禍)를 오게 하는 문이고[口是禍之門]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舌是斬身刀]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간수해야만 몸이 편안하여 가는 곳마다 견고하리라.” 하였다. 명을 받고 밖으로 나가는 자는 모두 승명패(承命牌)를 찼으니 그 가장 빠른 것은 추비전(追飛電)이라 하고 그 승명이 가는 앞 길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죄가 사형에 이르렀다. 《소문쇄록》
순자(荀子)의 ‘왕제편(王制篇)’에, “채청(採淸)을 닦아 도로를 깨끗이 한다.” 했는데 그 주(註)에, “채(採)는 그 더러움을 버리는 것이고 청(淸)은 청결하게 한다는 것이니 모두 도로에 있는 더러움을 제거함이라.” 하였다. 연산군이 대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사족(士族)들의 처녀를 모두 거두어 오게 하고 그것을 ‘채청사(採靑使)’ 라고 불렀는데,그것이 미처 돌아오지 못하고 중종(中宗)이 왕위에 올라 연산의 더러움을 제거했으니,이상한 일이다. 《소문쇄록》

 

○ 성균관을 오락을 즐기는 장소로 만들고 공자 이하 모든 위패(位牌)를 옮겨 고산암(高山菴)
혹은 고암(高巖) 속이라 한다. 에 두었다가, 또 태평관(太平館)으로 옮기고, 이어 장악원(掌樂院)으로 옮겨서 풍암(楓巖)은 “또 서학(西學)으로 옮겼다.” 하였다.위패를 순서도 없이 깨끗치 못한 곳에 쌓아 두어 제사도 오랫동안 폐지하였으며, 강당(講堂)과 제사 올리는 집들은 흥청(興淸)의 음탕한 놀이 장소로 변하니 신과 사람의 분노가 극도에 달하였다.
○ 여러 선비를 쫓아내어 태학을 비우고, 무당을 모아 난잡한 제사를 그 안에서 벌렸다.
○ 4월에 소혜왕후(昭惠王后) 인수대비(仁粹大妃) 의 초상에는 역월지제(易月之制)를 따랐으며, 선왕의 제사 날에도 음악을 듣고 고기 먹기를 평시와 같이하였다.
이때 삼년상의 기일을 짧게 줄이는 제도를 행하고자 의논하니, 정현왕후(貞顯王后) 자순대비(慈順大妃) 가 예에 의거하여 옳지 않다고 고집하며, “나는 감히 그대로 따를 수 없다.” 하였다. 폐주가 몹시 성내며 “부인은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말로 대답하니, 왕후는 “내가 소혜왕후(昭惠王后)에게 죄를 얻을 것이 분명하다.”고 탄식하였다. 《용재집》
○ 이때 삼년상의 기일을 짧게 줄이는 법이 매우 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단성(丹城) 군사 나유문(羅有文)은 어머니 상사에 예대로 행하니 사람들이 모두 상옷 벗기를 권고했으나 그는 따르지 아니하였다.
○ 가을에 내도성(內都城)을 쌓고 성터 밖의 인가를 헐어버렸다.
○ 양주(楊州)ㆍ파주(坡州)ㆍ고양(高陽) 등의 고을을 폐지하고 그 땅을 비워 놀이터를 만들고 나머지 땅은 이웃 고을에 나누어 합쳤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중종(中宗) 초년에 그전대로 회복되었다.
폐주는 동쪽과 북쪽 백 리 거리에 표말을 세우고, 관사와 민가를 헐어버리고 통행을 금지하고 이를 범한 자는 사형에 처하였다. 어느 날 또 명을 내려 서쪽과 남쪽도 동쪽과 북쪽처럼 표말을 세우니 조정과 민간에서는 시사에 대한 말을 크게 기휘(忌諱)로 알았고, 말하는 사람은 죄가 불측한 죄를 당하였다. 이때 박원종(朴元宗)이 경기 감사로 있었는데 분연히 글을 올려 말하였다. 《용재집》ㆍ박평성(朴平城) 묘지(墓誌)
○ 응준방(鷹隼坊)을 후원에 두고 8도의 매ㆍ개ㆍ진귀한 새ㆍ기이한 짐승을 모두 잡아다가 기르고, 민간의 배를 빼앗아 경회루(慶會樓) 못에 띄워 놓고 채색 누각을 그 위에 지어 첫째 것은 만세(萬歲)라 하고, 둘째 것은 영춘(迎春)이라 하고, 셋째 것은 진방(鎭邦)이라 하였으니, 세 누각이 산처럼 높이 솟구쳐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폐주 자신이 율시 한 수를 지었으니 그 시에,

웅장한 산봉우리 공중에 솟구치니 / 壯氣仙峯聳碧霄
신령스런 큰 새우와 학이 시대를 맞추어 모였구나 / 神鰲靈鶴應詩稠
여러 영준이 함께 잔치하니 충성스런 마음이 합쳐지고 / 羣英咸宴忠臟合
외로운 귀신이 잡혀 갇히니 간사한 폐부가 타는구나 / 孤鬼幽囚譎腑焦
안개 누각ㆍ구름 창에 용선이 아득하고 / 霧閣雲牕龍舸逈
무지개 사다리에 노래와 피리소리 봉루(鳳樓)가 까마득하네 / 虹梯歌管鳳樓遙
누가 오락하려고 백성의 힘을 괴롭힌 것이냐 / 是誰留玩勞民力
모두 조선을 위하여 오래 살고 잘 사는 것을 표시함인데 / 都爲朝鮮表壽饒

하였다. 또 그네 놀이를 설치하여 여름이 지나도 걷지 않았다. 도성 백 리 안에 출입 금지의 표말을 세워 사냥하는 장소로 만들어 항상 말을 타고 내시 한 사람만 거느리고 개인 날이나 비오는 날이나 달려서 갔다 왔다 하였다. 따로 응사(鷹師) 만여 명을 두어 항상 사냥하는데 따라 다니게 하였다. 저자도(楮子島)ㆍ제천정(濟川亭)ㆍ장단석벽(長湍石壁)ㆍ장의사(壯義寺)의 수각(水閣)ㆍ영치정(迎置亭)ㆍ경회루(慶會樓)ㆍ후원(後苑) 등에서 흥청을 데리고 밤낮으로 놀았는데, 이것을 작은 거동이라 일컬었다. 광주(廣州)ㆍ양주(楊州)ㆍ고양(高陽)ㆍ양천(陽川) 등의 고을을 폐지하고 그 고을의 백성은 모두 쫓아 버리고 내수사(內需司)의 노비들을 살게 하였다. 또 나루 건너는 것을 금하고 노량진(鷺梁津)으로만 다니게 하니 길 가는 나그네가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으며, 나무꾼도 끊어졌었다. 서총대(瑞葱臺)를 쌓고 궁전을 크게 건축하였으므로 군사들도 또한 부역을 치르게 되니 민간에 소동이 일어나고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이 생겨 숭례문(崇禮門) 밖과 노량진 사이에 송장이 산더미처럼 쌓이었다.폐주도 스스로 자신이 옳지 못함을 알고는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경연을 폐지하고 사간원과 지평 두 사람을 폐지하고, 소를 올리고 신문고 두드리는 일들을 모두 폐지시켰다. 《풍암집화(楓岩輯話)》

 

○ 을축년에 광주(廣州) 사람 중에
난언(亂言)을 한 자가 있었으므로 고을을 폐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중종(中宗) 초년에 그 전대로 회복시켰다.
○ 을축년 봄에 서총대(瑞葱臺)를 쌓았다.
성종(成宗)때 후원(後苑)에 한 줄기에 아홉 가지나 되는 파[葱]가 났는데 이것을 서총(瑞葱)이라 하고 돌을 쌓아 재배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대를 쌓아 음란한 놀이하는 장소를 만들고 그 명칭을 서총대(瑞葱臺)라 하였다. 대를 쌓을 적에 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군사와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고역(雇役)을 하였으며,베[布]를 공출함이 너무 많아서 백성들이 능히 감당하지 못하여서 옷 속에 든 솜까지 꺼내어 베를 짰으니, 그 빛깔이 거무죽죽하게 절었고 자수[尺數]도 짧았다. 이로 인하여 지금도 품질이 나쁜 무명베를 서총대포(瑞葱臺布)라 한다. 《소문쇄록》
○ 창의문(彰義門) 밖에 수각(水閣)을 세웠다.
창의문(彰義門) 밖의 탕춘대(蕩春臺)에 석조(石槽)를 만들고 궁녀들과 음란한 장난을 하고 서교(西郊)에 연희궁(衍禧宮)을 짓고 왕래하면서 노닐었다.
○ 홍문관을 폐지하고 경연을 진독(進讀)이라 고쳐서 예문관으로 겸무(兼務)케 하였다. 예문관에 봉교(奉敎) 이하 네 사람과 주서(注書) 두 사람을 더 두고, 정언을 폐지하고 헌납 한 사람을 더 두었다.
○ 13년 병인 여름에 사간원을 폐지하고, 사관(四館)의 박사(博士)이하를 다른 관사에 나누어 소속시켜 본관의 직임을 겸직케 하였다.
대사간 유헌(柳軒)과 사간 강숙(姜叔)이 갑자기 귀양을 가게 되자 이어 사간원을 폐지하였다. 유헌(柳軒)의 이름 밑에 상세하다.
○ 폐주가 일찍이 내시를 보내어, “대간으로 하여금 기생들이 부를 가사를 지어 바치게 하라.” 하였다. 여러 관원들이 글을 읊조리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대사헌 이자건(李自健)이 홀로 아뢰기를,“기생을 위하여 시를 짓는다면 아마 성덕에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폐주는 즉시 짓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집의 이계맹(李繼孟)이 붓을 던지며 탄식하기를, “공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이 아마 뒷 세상의 나무람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양곡집(陽谷集)》
○ 바야흐로 연산군이 음탕한 짓을 할 적에 문관과 유생 삼색인(三色人)을 연(輦) 메는 인부에 충당시켰다. 어떤 사람이 대간도 충당시켜야 될지를 물으니 연산군이 “대간도 충당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에 놀러가는 곳에 연을 메고 갔으며, 때로는 글을 짓게 하고 상을 주었으니 유관(儒冠 유생)의 치욕이 극도에 달하였다.조광조(趙光祖)가 일찍이 중종(中宗)에게 “연산군이 유생들로 하여금 연을 메게 했는데도 선비로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붓과 벼루를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상 받기를 희망하여 선비의 기습(氣習)이 크게 무너졌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마땅히 선비의 기습을 고치고 추향(趨向)을 바로 잡는 일을 급선무로 하여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사대부의 아내로 궁중 잔치에 들어와 참예한 자는 그 성명을 옷섶에 쓰게 하고 얼굴이 예쁜 자는 나인을 시켜 단장이 잘못되었다고 핑계하고 구석진 방으로 끌어 들였다.
폐주는 남녀 관계의 행실이 더욱 추잡하여져서 선왕의 궁녀까지 음행한 일이 있을 뿐만 아니라, 외명부(外命婦)까지도 궁정에 잔치를 베풀어 주고 그 얼굴이 예쁜 자는 문득 끌어들여 간통하였다. 부끄러움이 없는 부인들은 궁중에 남아 있기를 원하기까지 하였는데, 그 중에 사랑을 받은 자는 자주 불러들여 유숙시켜 내보내고 그 남편은 벼슬을 승진시켜 주었다.월산대군(月山大君)의 부인 박씨(朴氏) 박원종(朴元宗)의 누이 를 세자를 보호해 주라고 핑계하고 대궐 안으로 끌어들여 강간하고, 그 관과 의복을 특이하게 해주고 은으로 만든 도서(圖書)를 쓰게 하여 품질(品秩)이 비빈과 같게 하였다. 또 그로 하여금 사은하게 하니 박씨는 부끄러워 자살하였다.
○ 판서 윤순(尹珣)의 부인 이씨(李氏)는 종실의 딸인데 폐주에게 사랑을 받았다. 중종 갑술년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윤순이 연산군에게 사랑을 입어 과거에 오른 지 5년만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었으며, 그 아내도 또한 연산군의 사랑을 입어 대궐에 드나들어 자못 추잡한 소문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윤순이 자헌대부로 승진된 것은 계집을 판 값이라.’ 하였습니다.지금에 와서도 오히려 벼슬을 그대로 하고 그 아내도 그 전처럼 대우하고 있으니, 뭇 사람의 평판이 비루하게 여겨 비웃고 있습니다.”고 아뢰었다. 그 후에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책봉할 때 조광조(趙光祖)가 정언이 되었는데, “음탕하고 더러운 물건이 혹시 대례(大禮)에 참예될까 염려되니 성 밖으로 내쫓아 버리고 성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중종이 허락하였다. 《국조기사》
○ 생원 황윤헌(黃允獻)의 첩이 얼굴이 예쁘고 가야금을 잘 타니 구수영(具壽永)이 빼앗아 폐주에게 바쳤다. 폐주가 매우 사랑했으나 그는 성질이 사납고 괴퍅하여 말하고 웃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폐주는 그전 남편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드디어 황윤헌을 죽였다. 《황토기사(黃兎記事)》
○ 최유회(崔有淮)의 딸이 가야금을 잘 타더니 정승 한치형(韓致亨)이 끌어다가 구사(丘史)의 비(婢)를 만들고 그와 관계하였다. 뒤에 여자를 뽑아 올릴 적에 풍원위(豊原尉) 임숭재(任崇載)와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이 다투어 이 여자를 추천했는데, 구수영(具壽永)이 먼저 빼앗아 궁중에 바치니 폐주가 매우 사랑하여 숙의(淑儀)로 봉하였다.어느 날 연회를 하는데 최녀(崔女)가 갑자기 머리를 풀어 헤치고 통곡하므로 놀라서 물으니, “아버지가 병들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폐주가 노하여, “과연 죽었느냐?” 하고 내시를 시켜 가서 보게 하였다. 최유회는 병이 났으나 죽지는 않았었는데, 폐주가 노했다는 말을 듣고 이에 목매어 죽었다.내시가 돌아와 보고하니 폐주는 “혹시 거짓으로 죽었거든 반드시 형벌에 처하라.” 하였다. 형벌 맡은 관원이 송장을 매어 놓았다가 이튿날 아뢰니 폐주는 술이 깨어서, “후하게 장사해 주라.” 하고 참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소문쇄록》
○ 성세정(成世貞)이 영남 감사로 있을 적에 상주(尙州) 기생을 사랑하여 집에 데려다 두었더니, 폐주가 그 기생을 뽑아 들여 매우 사랑하였다. 어느 날 폐주는 그 기생에게, “너는 성세정이 보고 싶으냐?” 하였다. 기생이 “어찌 그런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가 저를 집에 두었지마는 사나운 아내를 무서워하여 서로 왕래가 없어 저를 외롭게 하고 괴롭혔으므로 어느 때나 마음이 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니,폐주가 “그렇다면 죽이고 싶으냐?” 하자, 기생이 “죽이는 것은 통쾌하지 않사오니 반드시 곤장을 쳐서 변방으로 귀양보내어 갖은 고생을 시킨 뒤에 죽여 주십시오.” 하였다. 폐주가 웃으면서 그 말대로 하여 세정을 세 번이나 옮겨 귀양가서 거의 죽을 뻔 하다가 중종(中宗)이 왕위에 오르자 죽음을 면하였다. 《장빈호찬(長貧胡撰)》
○ 총애 받는 기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동무에게 “지난밤 꿈에 예전 주인을 보았으니 매우 괴상한 일이구나.” 하였다. 폐주는 즉시 작은 쪽지에 무엇을 써서 밖에 내 보내었다. 조금 뒤에 궁인이 은쟁반 하나를 받들어 바치었는데 그 기생에게 열어 보게 하니, 그것은 곧 그 남편의 머리였다. 그 기생까지 아울러 죽였다. 《장빈호찬》
○ 어느 날 폐주가 승정원에 묻기를, “거문고를 잘 타고 그림을 잘 그리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사람을 보고자 한다.” 하니 승정원에서 훈도(訓導) 유우(柳藕)가 그런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연산주는 “승정원에서 시험해 보고 기다리라.” 하였다. 유우는 부름을 받고 승정원에 와서 시험을 보고 나갔는데 그 뒤에 다시 부르지 않았으니, 그에 대해 잊은 까닭이었다.그는 평생에 거문고를 부수고 그림 그리기를 끊고서, “매양 승정원에 가서 시험 보던 일을 생각하면 곧 땅을 파고 들어가서 싶은 심정이다.” 하고, 자제들에게는 거문고와 글씨를 익히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기재잡기》
○ 폐주의 황음(荒淫)하고 패란(悖亂)함이 날로 심해지자 신비(愼妃)는 매양 바른 말로 간하다가 여러 번 부당한 능욕을 당하였다. 당시 숙의(淑儀)의 노자(奴子)라고 칭하는 자가 사방에 흩어져서 물건을 독점하여 이익을 구하고 평민들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차지하였으나 공사(公私) 간에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신비는 매양 탄식하기를,“여러 궁인들이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게 하니, 나는 그 나쁜 것을 알면서 본받을 수 없다.” 하고, 일찍이 내수사(內需司)에 간절히 경계하기를, “만약 본궁의 노자들 가운데 횡포한 자가 있다고 들리면 반드시 먼저 매를 쳐서 죽이리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본궁의 노자들은 감히 그러하지 못하였다. 《소문쇄록》
등명사(燈明師) 학조(學祖)가 직지사(直指寺)에 있을 때 절에 좋은 반시(盤柿)가 있어 매양 두 바리씩을 내전에 바치고 비밀히 아뢰기를, “저의 절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사오니, 원컨대 본궁의 노자들을 시켜 해마다 와서 두세 바리씩 실어 가도록 하소서.” 하였다. 신비는 이르기를,“이것은 매우 쉬운 일이나 다만 과실이 잘 여는 해도 있고 잘 안 여는 해도 있으니 만약 안 여는 해에 본궁의 노자가 가서 정한 바리 수대로 징수한다면 영원히 폐단이 될 것이다.” 하였으니, 그가 뒷일을 염려함이 이와 같았다. 그의 척당(戚黨)중 지방 고을의 원이 있었는데, 잇[紅藍] 수십 두(數十斗)와 풀솜[雪綿子] 수십 근(數十斤)을 바쳤다. 신비는 이것을 물리치면서, “백성들이 못살고 있는데 이런 물건이 어디서 나왔느냐? 나는 차마 받아 둘 수 없다.” 하였다. 《소문쇄록》


 

[주D-001]저하 : 신하가 국왕에게는 전하라 부르고 세자에게는 저하라 부른다.
[주D-002]연산의 …… 제거했으니 : 청자(靑字)와 청자(淸字)가 음이 같기 때문에 옛 글에 있는 채청(採淸)과 연산(燕山)의 채청(採靑)이 음으로 부르기는 같은데 그것이 옛 글에 있는 더러움을 제거하는 징조가 된다고 본 것이다.
[주D-003]역월지제(易月之制) : 한 나라 문제(文帝)가 죽을 때에 유언하기를, “삼년상을 하지 말고 날자로서 달을 대신하라.” 하였으니, 말하자면 25일이 3년이 되는 것이다.
[주D-004]난언(亂言) : 행동으로 난을 일으키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그 말이 행동으로 나타났을 경우 반란에 속하는 것을 ‘난언’이라 한다.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복위


일찍이 성종(成宗) 기유년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했는데, 폐출되어 사약을 내린 일은 성종조에 나와 있다. 윤씨가 눈물을 닦아 피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하므로 건원릉(健元陵)의 길 왼편에 장사하였다.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세상을 떠나자 신씨는 나인들과 서로 통하여 연산주의 생모 윤씨가 비명으로 죽은 원통함을 가만히 호소하고 또 그 수건을 올리니 폐주는 일찍이 자순대비(慈順大妃)를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매우 슬퍼하였다. 시정기(時政記)를 보고 성을 내어 그 당시 의논에 참여한 대신과 심부름한 사람은 모두 관을 쪼개어 시체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기묘록》
윤씨가 죽을 때에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흰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전하여 뒤에 폐주에게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心病)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성종(成宗)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 <파수편>
○ 윤씨가 폐위된 뒤에 폐주가 세자로 동궁에 있던 어느 날, “제가 거리에 나가 놀다 오겠습니다.” 하므로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 때 대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네가 오늘 거리에 나가서 놀 때 무슨 기이한 일이 있더냐?” 하니 폐주는 “구경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소를 따라가는데,그 어미소가 소리를 하면 그 송아지도 문득 소리를 내어 응하여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 있으니 이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슬피 여겼다. 대개 연산군이 본성을 잃은 것은 윤씨가 폐위된 데 원인이 있는 것이지만 왕위에 처음 올랐을 때는 자못 슬기롭고 총명한 임금으로 일컬어졌었다. 《아성잡기(鵝城雜記)》
○ 병진년 봄에 폐비 윤씨를 복위하고 무덤을 옮기려고 의논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 재상들에게 의견을 수렴하게 하였는데 잔혹하게 사람을 마구 죽이므로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였다. 예조 참판 신종호(申從濩)가 홀로 의논을 주장하기를, “폐비가 선왕(성종)에게 죄를 얻어 유교(遺敎)가 지금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구익부인(鉤弋夫人)이나 견후(甄后)와 같은 처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니 의논이 매우 올곧았다. 비록 임금의 위엄이 무서웠으나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니 포악한 폐주로서도 죄를 주지 못하였다. 《부계기문》 《소문쇄록》
사당과 신주 세우기를 의논할 때 신종호가 옛날 제도를 근거로 들어 아뢰기를, “장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신주를 만들어 귀신을 편안하게 하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받드는 법입니다. 윤씨가 전하를 낳아서 길렀으니 마땅히 사당을 높여서 받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왕께 죄를 얻었으니 예를 상고해 보면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삼가 살펴보건대, 한 나라 소제(昭帝)의 어머니 조첩여(趙婕妤)는 그를 위하여 원읍(園邑)을 두고 또 장승(長丞)을 시켜 지키기를 법대로 하였지마는 사당을 세웠다는 것은 상고할 데가 없습니다. 위현성(韋玄成)의 전기에, ‘효소태후(孝昭太后)의 침사원(寢祠園)을 수리하지 말라.’ 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다만 침사만 있고 서울에 사당이 없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위 나라 명제(明帝)의 어머니 견후(甄后)는 신하들이 주(周) 나라 강원(姜嫄)의 예(例)에 의거하여 따로 침묘(寢廟) 세우기를 청하니 그 의견을 옳다 하였습니다. 대체 강원(姜嫄)은 제곡(帝嚳)의 비이고 후직(后稷)의 어머니였습니다. 주 나라에서 후직을 높여서 시조를 삼았으니 강원(姜嫄)은 배향할 데가 없으므로 특별히 사당을 세워서 제사 지냈던 것입니다.견후와 강원은 그 일이 같지 않은데 끌어다 보기로 삼았으니 대개 당시에 억지로 끌어댄 말이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한 무제(漢武帝)와 위 문제(魏文帝)는 모두 유교(遺敎)가 없었으니 지금의 일과는 같지 않습니다. 폐비는 이미 종묘와는 관계가 끊어졌으니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써 예를 어겨서는 안될 것입니다.비록 사당과 신주를 세우지 않고 묘에만 제사 지내어도 효도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의논이 비록 행해지지는 않았으나 다른 여러 의논이 능히 이 의논을 누르지는 못하였다. 《소문쇄록》
○ 이때 사당 세우는 문제를 의논함에 있어 대대적으로 위협을 가하여 아랫사람의 입을 막으니, 임금의 하고자 하는 일을 감히 거스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리 권달수(權達手)는 분개하여, “이것은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홍문관에서도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니 폐주가 노하여 그들을 모두 곤장을 쳐서 귀양 보내었다.
○ 사묘(私廟) 지금의 종부시(宗簿寺) 를 세워 제사 지내는 것은 원묘(原廟)와 같이 하고 그 무덤을 높여서 회릉(懷陵)이라 하였다. 지금은 묘의 석물은 없어지고 돌난간만 남아 있다.
폐주가 폐비를 위하여 효사묘(孝思廟)를 세우니 대사헌 김심(金諶)이 여러 대관(臺官)을 거느리고,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고 고집하여 뜰에서 10여 일이나 버티고 섰으나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이에 폐주가 “전 대사헌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정의를 알았는데 그대는 홀로 알지 못하니 어쩐 일이냐?” 하니,김심은 “전 대사헌은 다만 어머니가 있는 것만 알고 아버지가 있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는데 그 당시의 세론(世論)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 폐주가 그 어머니 윤비(尹妃)의 묘를 봉하여 회릉이라 하였다. 대사간 강형(姜詗)이, “선왕께서 금하신 것입니다.”고 간하니 폐주는 매우 노하였다. 갑자년 봄에 이르러서 그 전에 법을 들어 논하던 자를 다 죽였는데 강형의 집은 일족을 남김없이 멸망시켰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계해년 봄 2월에 ‘왕비를 폐하다[廢妃]’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야언별집》
○ 갑자년 봄에 폐주는 어머니 윤씨가 내쫓겨 죽은 것을 깊이 한하여 선조(先朝 성종조)의 옛 신하들을 거의 다 죽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 조에 상세하다. 또 윤씨를 높여 그 휘호를 극진히 올리고자 하여 조정의 신하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지당합니다.” 하였다. 응교로 있던 이행(李荇)이 동료들과 의논하고, “추숭(追崇)하는 전의식(典儀式)을 예에 있어 이미 극도로 다했는데,지금 다시 더 올릴 수 없습니다.” 하니, 폐주가 크게 노하여 잡아서 국문하게 하고 의논을 먼저 주창한 사람을 장차 사형에 처하려고 하니 이를 면하려는 이들은 힘써 변명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이때 응교 권달수(權達手)는 밖에서 잡혀 나중에 들어 와서는, “먼저 말한 사람은 나요, 이행(李荇)은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권달수는 죽음을 당하고 이행은 곤장을 맞고 충주(忠州)로 귀양가게 되었다. <용재행장>
앞서 권달수가 폐비의 사당 세우는 것은 선왕의 뜻이 아니라고 솔선해 말했는데 그 뒤에 폐주의 노여움이 더욱 심하였다. 홍문관과 대간 중에서 그 의논을 먼저 발언한 자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여 지나간 일을 다시 조사하여 먼저 말한 사람을 캐내어서 날마다 가혹한 형벌을 가하니 모두 먼저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미루어 땅 밑의 송장을 파내어 관을 쪼개게 하면서까지 자기의 죽음을 구차스럽게 면하려고 했는데,홀로 권달수만은 자기가 했다고 스스로 책임을 지고 죽은 동료들을 저버리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대간 가운데 먼저 말한 사람과 함께 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데 옥리(獄吏)가 그를 불쌍히 여겨, “홍문관과 대간 양편이 다 죽는 것보다는 한편이 책임을 지고 한편은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하니, 사헌부의 관원은 옥리의 뜻을 받아 들여 다시 “홍문관이 사헌부보다 먼저 말했다.”고 하였다.이에 권달수는 눈을 부릅뜨고 한참 눈여겨 보면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네가 과연 나를 본받을 수 있으랴.” 하고 즉시 붓을 휘둘러 공초를 쓰기를, “불초신 달수가 감히 이 말을 했으므로 구차히 숨겨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고 하였는데 다 쓰고난 뒤에는 얼굴빛도 변하지 아니하였다. 술을 주니 다 마시고는 형벌에 나아가는데 보통 때와 다름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용천담적기》


 

[주D-001]시정기(時政記) : 그 당시의 정사에 있어서 역사상 자료가 될 만한 것을 기록한 것.
[주D-002]견후(甄后) : 견후는 위(魏) 나라 문제(文帝)의 황후이요, 명제(明帝)의 어머니인데 폐출 당하여 죽음을 받았다. 뒤에 명제가 따로 사당을 세워 받들었다.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병인년에 정국(靖國)하여 중종(中宗)을 추대하다


폐주가 들로 사냥을 나갈 때, 당시 진성대군(晋城大君)이었던 중중(中宗)이 모시고 따라갔다. 사냥을 마치고 난 뒤에 임금은 준마를 타고서 중종에게 말하기를, “나는 흥인문(興仁門)으로 들어갈 터이니 너는 숭례문(崇禮門)으로 들어오라. 나보다 뒤에 오면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하니 중종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영산군(寧山君) 전(恮)이 가만히 아뢰기를, “걱정마십시오.내 말은 임금이 타신 말보다 매우 빠른데, 내가 아니면 제어할 수 없습니다.” 하고, 즉시 하인 옷으로 바꾸어 입고 말고삐를 잡고 따라가니 말이 나는 듯이 달려갔다. 대궐 문에 이르니 조금 후에 임금이 이르렀다. 이에 중종이 죽음을 면하였으니 사람들은 “영산군과 그 말은 모두 중종을 위하여 때를 맞추어 난 것이다.” 하였다. 《부계기문(涪溪記聞)》 ○ 영산군은 곧 중종의 서형(庶兄)인데 그 당시 이름이 있었다. 후에 이과(李顆)의 옥사에 관련되어 정국공신(靖國功臣)에게 살해되었다 한다. 살펴보건대 이과의 옥사는 중종 2년에 있었고, 영산군은 중종 8년에 막개(莫介)가 반역을 고발한 박영문(朴永文)ㆍ신윤무(辛允武) 등의 옥사에 관련되어 귀양갔다가 이홍간(李弘幹)의 아룀으로 인하여 석방되었다.
○ 성희안(成希顔)은 성종(成宗) 때에 옥당에 뽑혀 들어가서 은혜와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폐주가 왕위를 이은 뒤에 양화도(楊花渡) 혹은 망원정(望遠亭)이라 한다. 에 임금을 따라 놀러 갔다. 따라간 신하들에게 시를 짓도록 명하자 성희안이 “임금은 본래 청류(淸流)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글귀를 지으니, 임금이 매우 노하여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라고 여겼다.이로 인해 드디어 이조 참판의 벼슬자리에서 떨어져 집에 있었다. 성희안은 평소에 뛰어난 지략이 있었는데 폐주의 어지러운 정사가 날로 심해지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반정(反正)할 뜻이 있었다. 그러나 함께 계획할 사람이 없으므로 도와줄 이가 없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중추 박원종(朴元宗)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처남인데,부귀한 집에서 자라났으나 기상이 크고 얽매임이 없어 시정(市井)에 드나들다가 무과에 올라 중요한 관직을 두루 지냈다. 풍채가 좋고 일찍 귀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무사들이 그를 높이 받들었다. 마침내 기절을 꺾고 글을 읽어 대의에 통하여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다. 또 그 누이가 임금에게 몸을 더렵혀 병이 나서 죽은 것으로 인하여 마음 속으로 항상 불평을 품고 분하게 여기었다.성희안은 박원종이 큰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여겼으나 서로 교분이 없었다. 동리 사람 신윤무(辛允武)란 이가 두 집에 다니면서 매우 친근하였으므로 성희안이 신윤무를 시켜 가만히 의향을 물어보니 박원종은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면서, “이는 내가 밤낮으로 마음 속에 품고 있던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성희안은 저녁에 박원종의 집으로 가서 서로 통곡하고,“우리가 평생에 충성과 절의를 지켜 왔으니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입니다. 대장부의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렸으니, 종사의 위태함이 경각에 있음을 보고 어찌 구제하지 않으리오.” 하고, 드디어 의논을 결정하였다. 몇 개월 지나는 동안 스스로 고립되어 성공하기 어려움을 염려하다가,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이 당대의 명망 있는 이라 그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들의 의사를 알리니,유순정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이왕 이 일에 참여하여 들었으므로 마지못하여 따라올 뿐이었다. 드디어 신윤무와 군기시 첨정 박영문(朴永文)ㆍ사복시 첨정 홍경주(洪景舟) 등에게도 두루 알려서 각기 동지를 불러 모으게 하니 모여든 자는 대개 무사가 많았다. 이들은 의리는 헤아리지 않고 공을 세우기를 좋아했으므로 의논함이 없어도 의견이 서로 맞아 곳곳에서 좋아 날뛰었다. 《음애일기》 《동각잡기》
○ 박원종 등은 귀양갔던 이과(李顆)가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수령들과 함께 본도(本道)의 군사와 군마를 거느리고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시기를 앞당겨 먼저 거사하였다. 《기묘속록(己卯續錄)》
이때 유빈(柳濱)ㆍ이과ㆍ김준손(金駿孫) 등은 호남으로 귀양가 있었는데, 임금의 음란함이 날로 심하여 사직이 위태로움을 보고 중종(中宗)을 추대하려고 격서(檄書)를 서울로 보냈는데, 그 격서가 이르기 전에 벌써 반정(反正)이 되었다. 그 격서의 대략에, “태조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서 나라를 창업하였으며,세종은 덕화가 밝았고 성종(成宗)은 한결같이 선대의 법도를 따라 용도를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였기에, 백성이 편안하고 물질은 풍성하여 태평한 세상이 되었더니 뜻밖에 뒤를 이은 임금이 포학 무도하여 부왕의 후궁을 때려 죽이고, 옹주와 왕자를 귀양보내 죽이었다. 간언을 올리는 대간을 귀양보내고 죽였으며, 대신을 욕보이고 충직하고 선량한 신하를 죽여,이들 부자ㆍ형제들까지 연좌시키는 것이 진(秦) 나라 법보다 더 심하였다. 무덤을 파서 해골에까지 화가 미치게 되었으니 시체를 토막토막 베는 형벌과 뼈를 부수는 형벌은 무슨 형벌인가. 남의 아내와 첩을 빼앗아 마음대로 음욕(淫慾)을 행하고 남의 집을 부수어 원유(園囿)를 넓히었다. 선왕의 능침은 모두 여우와 토끼의 놀이터가 되고, 선성(先聖)의 사우(祠宇)는 곰과 범을 기르는 우리로 변하였다.세금을 한없이 많이 거두니 백성들은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종실 형제들의 아내와 첩까지도 핍박하여 서로 간통하고, 삼년상은 예로부터 다 행하는 것인데도 그 기한을 짧게 줄이고, 부모의 기일도 또한 모두 폐지시켰으니, 인륜은 무너지고 인도가 없어졌다. 그밖에 토목 공사와 노래ㆍ여색을 즐기고 못을 파며 대(臺)를 쌓고 사냥을 일삼으며 새ㆍ짐승과 화초를 좋아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많은 죄가 걸ㆍ주(桀紂)보다도 오히려 더 심하니, 백성들의 한때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만일 크게 간악한 자가 신기(神器 왕위(王位))를 엿보아 하루 아침에 일어난다면 왕조가 바뀌는 화가 생길 것이 두렵다. 성종이 26년 동안 신하들을 잘 대우하고 충의(忠義)를 배양한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이다.진성대군(晋城大君)은 성종대왕의 친 아드님이니 어질고 덕이 있어 온 나라의 칭송이 그에게 돌아간다. 이에 아무 아무 등은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아무 달 아무 날에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격서를 모든 도에 돌려서 기일을 약속하여 서울로 모일 것이니, 조정에 있는 공경(公卿)과 백관들은 마땅히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종실의 위태함을 붙들라. ……” 하였다. 《동각잡기》
○ 병인년 9월 2일에 폐주가 장단(長湍)의 석벽(石壁)에서 놀고자 할 때 따라가는 재상들에게 다만 하인 한 사람만 데리고 가게 하였다. 성희안(成希顔)은 그날 성문을 닫아 막고 진성대군을 추대하기로 벌써 계획이 이루워졌는데 폐주가 마침 장단에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였다. 장수와 병졸들은 분발하려는 생각에 기밀한 일이 이미 누설되었으므로 형세가 중지할 수 없게 되었다.이에 초하룻날 밤중에 장수와 병졸들을 훈련원에 모이게 하니 약속을 같이 한 모든 벼슬아치ㆍ군사ㆍ백성들과 풍문을 들은 자들이 다투어 달려왔으므로 골목과 길이 꽉 막히었다. 이에 부서를 나누어 변수(邊修)와 최한홍(崔漢洪)은 내성(內城) 동쪽을 지키게 하고 심형(沈亨)과 장정(張珽)은 내성 서쪽을 지키게 했는데, 창졸간에 군사가 없으므로 역군(役軍)들을 몰아서 호위하게 하였다. 성희안은 유순정ㆍ박원종과 함께 바로 광화문(光化門) 혹은 돈화문(敦化門)이라고도 한다. 앞 수백 보 쯤 되는 지점에 나아가서 말을 세우고 진을 쳤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밤 삼경에 창덕궁(昌德宮) 어귀에 진을 쳤다.” 한다. 박원종은 부채를 휘두르며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그 모습이 신과 같아 모두 “이 일을 먼저 발의한 이는 반드시 박영공(朴令公 박원종)일 것이다.” 하였다. 《음애일기》ㆍ《동각잡기》
○ 처음에 성희안이 우의정 김수동(金壽童)에게 가서 이 계획을 고하니 김수동은 “이는 나라의 큰 일이오. 나는 애초에 그 일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데 갑자기 한 재상의 말만 듣고 바쁘게 서둘 수 있겠는가.” 하고 곧 베개를 베고 누우면서, “그대는 내 머리를 베어 가라.” 하고 이어 목을 내밀어 책상 위에 얹었다.성희안이 진성대군을 세운다는 뜻을 고하니, 수동은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갈 것이니 그대는 먼저 가시오.” 하였다. 성희안이 일어나 나가자 수동은 천천히 의관을 정제하고 사람들을 벽제(辟除)하면서 왔다. 이때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모두 군복을 입고 창덕궁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김수동은 진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서는 곧장 윗자리로 가 앉았다.즉시 병조 판서를 불러, “그대들은 사람을 보내 진성대군(晋城大君) 집을 호위했느냐?” 하니, “미처 못했습니다.” 하므로, “마땅히 판서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호위하라.” 하였다.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해동악부》
○ 이때 형조 정랑 장정(張珽)이 칼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와, “진성대군의 저택이 매우 허술한데 어찌 시위를 아니하는가.” 하니, 세 대장(大將 성희안ㆍ박원종ㆍ유순정)은 두 손을 마주 잡으면서, “우리들의 실수이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심순경(沈順經)을 보내어 위사(衛士)를 거느리고 가서 호위케 하니, 장정은 후에 일등공신으로 책정되었다. 《기재잡기》
운수군(雲水君) 효성(孝誠) 덕천군(德泉君)의 둘째 아들이다. 이등공신으로 책정되었다. 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시위하게 하였다. 《기묘속록》
○ 신윤무(辛允武)를 시켜 용사 이심(李)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연산군을 꾀어서 악한 짓을 하게 한 신수영(愼守英)을 먼저 쳐 죽이고 그 다음은 임사홍(任士洪) 좌참찬 과 신수근 좌의정 등을 쳐 죽이게 했으니, 신윤무는 이심을 시켜 쇠몽둥이를 가지고 길 왼쪽에 숨어 있게 하고,한편 별감 한 사람을 시켜 명패를 가지고 가서 대궐에 가도록 그들을 재촉하게 하였다. 그들이 놀라서 창황히 대궐로 가는데 이심이 힘껏 내려쳐서 말에서 떨어 뜨리니 머릿골이 다 쏟아져 나왔다. 신수근도 맞아서 땅에 떨어지니 종 하나가 그 위에 엎드려 제 몸둥이로 쇠몽둥이를 막았다. 이에 이심은 드디어 종까지 함께 쳐 죽였다. 신수겸(愼守謙)은 이때 개성 유수였으므로 일이 성공하기를 기다려 천천히 사람을 보내어 죽이기로 하였다.
신수근 등이 비록 권세를 빙자하고 임금의 총애를 믿어 사치하고 방자하였으나, 그 당시에 음란한 임금에게 아부하여 나라의 근본을 기울게 한 자가 어찌 그 사람뿐이리오. 그런데 홀로 이 세 사람만 베어 죽인 것은 신수근이 본래 교만하고 방자스러워 법규에 따르지 않았으며, 또 국구가 되면 세력이 강하여 제어할 수 없게 될까 염려한 까닭이었다. 《음애일기》
○ 이심은 네 사람을 죽였으므로 튀긴 피가 얼굴에 가득히 묻었고 의복도 전부 붉게 물들었다. 그 공로를 남에게 보이고자 며칠이 지나도록 낯을 씻지도 않았으며 옷을 바꾸어 입지도 않았으니,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추하게 여겼다. 《음애일기》
○ 처음에 반정하려는 의논이 결정될 적에 세 대장이 “아무 아무는 죽여야 된다.” 하였는데, 강혼(姜渾)의 이름도 나왔다. 일을 일으키던 날에 유순(柳洵)을 묵은 정승이라 하여 부르니 유순이 달려갔다. 이때 시간이 삼경도 되지 않았는데 벽제(辟除)를 하면서 대궐에 나아가는 도승지 강혼을 만났다.이에 유순이 하인을 시켜 이르기를, “오늘은 너무 이르니 반드시 경고(更鼓)의 시간을 잘못 들었을 것이오. 영감(令監)은 내가 가는 대로 꼭 따라 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말 못한 일이 있을 것이오.” 하니, 강혼은 의아스럽게 여겨 이내 그 뒤를 따라갔다. 남소문(南小門) 어귀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훈련원에 사람과 말이 빽빽히 들어차고 등불이 휘황하였다. 유순은 말을 멈추면서,“오늘은 나를 뒤따라 잠시도 떠나지 마시오. 큰 일이 닥쳐 왔소.” 하니, 강혼은 그제야 매우 두려워하여 말에서 내려 유순을 가깝게 따라 나아가니 세 대장은 유순을 보고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하였다. 자리에 앉은 뒤에 박원종이 눈을 부릅뜨고 강혼을 보면서, “이 이가 누구요?” 하니 유순은 “강혼인데 내가 데리고 왔소.” 하였다. 박원종이 “전에 약속이 있어 먼저 죽이기로 했으니 지금 남겨둘 수 없소.” 하니,유순은 움찔하면서 말이 없었다. 유순정이 이를 보고 급히 박원종에게 “지금 요란한 시기에 서기(書記)할 사람이 없으니 서기를 맡겼다가 뒤에 죽여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박원종이 투덜거리다 말았다. 강혼은 드디어 소매를 걷어 올리고 붓을 잡고 이쪽 저쪽 다 받아 써서 능히 알맞게 하니 모두 다 잘한다고 하였다. 결국은 공신으로 책정되어 진천군(晋川君)이 되었다.
이로부터 강혼은 유순을 부형처럼 섬겨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가서 뵈옵고 새로운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올렸다. 유순이 죽은 후에는 그 부인을 섬겨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기재잡기》
○ 구수영(具壽永)은 임금의 음란한 행실을 인도하고 악을 퍼뜨린 죄가 있어 아울러 죽이려고 했는데, 그 족질(族姪) 구현휘(具賢暉)가 반정의 계획에 참여했으므로 구수영에게 달려가서 고하였다. 구수영이 훈련원에 나아가서 살려주기를 애걸하니 박원종 등이 그를 용서해 주었다. 《음애일기》
구현휘는 곧 구수영의 동성(同姓) 서얼(庶孼)이었다. 용력(勇力)이 뛰어나 세 공신(성희안ㆍ박원종ㆍ유순정)의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곧 일을 일으키려 할 때 장차 구수영이 화를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세 공신이 밤에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수영에게 가만히 알려서 술과 안주를 가지고 함께 세 공신이 모인 곳으로 나아갔다.구수영은 구현휘의 소개로 세 공신을 보고, “일찍이 평소 궁궐에 드나들면서 올바른 말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임금의 뜻을 감히 거스리지 못하고 명대로 거행한 일이야 어찌 없었다 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척당이 된 관계로 처지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또 사위 구수영의 사위 두 사람은 안양군(安陽君) 항(㤚)과 임희재(任熙載)이다. 가 화를 입고난 뒤에는 더욱 감히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할 수 없었지마는 그 본 마음이야 어찌 척당의 연줄을 타고 또 그것을 믿고서 다른 사람을 해친 일이 있겠습니까. 나를 용서하든지 죄를 주든지 다만 오늘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세 공신도 그렇게 여겨 같이 술잔을 나누고 헤어졌다. 마침내 반정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뒤에 공신을 책정할 때 구수영은 2등공신이 되고 구현휘는 3등공신이 되었다. 구씨가승(具氏家乘) ○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구수영은 박원종 등이 광화문(光化門) 밖에서 진을 쳤다는 말을 듣고 온 집안이 목놓아 울었다. 한 건장한 종이 있어,‘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습니까.’ 하고 급히 좋은 안주와 술을 갖추어 말을 타고 종들을 거느리고 벽제 소리를 내며 몰려 가서 세 대장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세 대장은 밤새도록 한데서 앉아 있었으므로, 시장하여 먹고 싶던 차에 종이 안주와 큰 술잔을 차례로 바쳤더니 여러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묻지도 않고 문득 너댓 잔씩 다 마시고 나서야,‘이것이 뉘집 물건이냐?’ 고 물으니 종은 구수영을 가리키면서, ‘구대감께서 가져온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세 대장은 서로 돌아보면서 깜짝 놀랐다. 종은 ‘오늘의 모임에는 이것이 큰 공을 이룰 것인데 이것이 아니면 여러분들이 매우 시장하신데 어찌 큰 일을 마칠 수 있습니까.’ 하여, 드디어 구수영이 공신으로 책정되었다.” 하였는데,이 말은 너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광화문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는 사람들을 살리고 죽이고 할 명부를 이미 만들어 의논을 정하고 있었다.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면 당장 국구가 될 사람도 오히려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찌 좋은 술과 안주의 공으로 이심(李)의 쇠몽둥이를 피하고 도리어 공신으로 책정되었으랴.또 과연 술과 안주로 화를 면했다면 어찌 2등공신 13명 안에 들어갈 수 있으리오. 기재(寄齋)의 시대는 음애(陰涯) 보다도 더욱 멀었으니 전문(傳聞)이 잘못되었음은 괴이할 것이 못된다.
○ 이때 여러 사람의 의논이 “유자광(柳子光)은 일을 많이 겪어 꾀가 많으니 이 일을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거사할 임시에 이르러서야 사람을 보내어 일러주고 또 만약 숨거나 머뭇거리면 때려 죽이겠다고 경계하였다. 유자광은 이 말을 듣고 말을 타고 군복을 입고 나갔다. 또 심부름하는 종을 시켜 두꺼운 유지(油紙) 비옷을 싸 가지고 따라오게 하니,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진중(陣中)에 와서 장수와 병졸을 파견할 때 급작스러워서 부신(符信)을 만들 만한 것이 없었다. 곧 유지를 오려서 부신을 만드니 사람들은 그 지혜에 탄복하였다. 《동각잡기》
○ 박원종은 심순경(沈順徑)과 더불어 교분이 매우 가깝고 정의가 아주 친하여 서로 간격이 없었으나 큰 계획이 결정되지 않은 날에는 오히려 감히 그 일의 단서를 발표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심순경을 대하여 술낌에 종사가 위태한 사실과 정사의 어지러운 일을 말하여 그 의사를 알아보니 심순경도 또한 동감임을 표시하였다.박원종은 그 누이가 죽으면서 반드시 원수를 갚아 달라는 부탁이 있었음을 남김없이 말하고 심순경은 또 그 가문의 화가 참혹했던 것을 말하였다. 이에 눈물을 거두고 의논을 정하고 나서는 비록 처자와 형제일지라도 이 일을 알리지 아니하였다. 일을 일으키는 날에 심순경은 그 어머니에게 “오늘은 여러 친구들과 교외에서 무예를 연습하고 활 쏘기를 겨루고자 하니 술을 마시고 얼근히 취해서 가겠습니다.” 하니 어머니가 술을 주었다.술을 다 마시고 난 후에 꿇어앉아 술 한 잔을 그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이것은 어머니의 장수를 비는 장수 술잔입니다.” 하니, 그 어머니는 웃으면서 받았으니 실상 그것이 영결하는 것인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의 누이는 종실 안현군(安賢君)의 아내인데 또한 술잔을 드리고 헤어졌다. 드디어 군기(軍器)와 군장(軍裝)을 검열하고 모두 가져 가서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았으나 집안 식구는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밤이 새고 일 되어 가는 기틀이 잡힌 뒤에야 그 기미를 깨달았다. 그 누이는 남편과 함께 이불을 쓰고 서로 붙들고 울면서, “나는 죄를 많이 얻었으니 장차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인정도 적구나. 이 사람아, 친동기가 한 방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알리지 않는구나.” 하였다. 안현군은 대개 종실 중에서 임금의 악을 인도하여 사랑을 받은 자였다.그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민망히 여겨 곧 사람을 시켜 심순경에게 말하였다. 순경이 박원종에게 간청하여 안현군을 불러서 일을 같이 하게 하여 마침내 공신에 참여되었다. 《기재잡기》
○ 폐인(嬖人 임금에게 총애 받는 내시 등) 전동(田同)ㆍ김효손(金孝孫)ㆍ강응(姜凝)ㆍ심금손(沈今孫) 등을 군영(軍營) 앞에서 베어 죽였다. 감옥의 문을 열어 죄수들을 내놓아 모두 군에 참가하게 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대궐 밖으로 진군하였다.
○ 해가 뜰 무렵에 벼슬아치들이 모두 모였으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 자도 있었다. 입직한 도총관 민효증(閔孝曾)과 참지 유경(柳涇)은 먼저 나가고 승지 이우(李堣)는 그 다음에 나갔다. 처음에 대궐 안에서는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까닭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임금은 차비문(差備門) 안에 앉아 승지를 불러 들어와 앉게 하고서,“이 같이 태평한 때에 어찌 다른 변고가 있으랴. 아마 흥청(興淸)의 본부(本夫)들이 서로 모여서 도적질하는 것이니 빨리 정승과 금부 당상을 불러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이우를 명령하여 열쇠를 가지고 대궐문을 돌아 다니면서 살피게 하였다. 이우는 먼저 사람을 보내어 사태를 알아 보게 하고 조정이 벌써 소속된 데가 있는 것을 자세히 알고는 그만 몸을 피해 밖으로 나가 버렸다.폐주는 이우가 벌써 나갔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서 윤장(尹璋)과 조계형(曹繼衡)의 옷소매를 잡았다. 두 사람은 거짓으로 공손히 하는 척하면서 소매를 뿌리치고 문구멍으로 빠져 나가려고 하였으나 조계형은 이때 임금의 총애를 받던 신하이므로, 문을 지키던 장사들이 상을 받으려고 붙들어 군영 앞에 나아갔다. 성희안(成希顔) 등은 그들을 모두 용서해 주었다.입직한 군사들은 혹은 수구(水口)로 빠져 나오기도 하고 혹은 성에서 줄에 매달려 넘어오기도 하며 다투어 군영 앞으로 달려갔다. 환관과 여러 색인(色人 궁중의 잡무를 맡는 사람들) 등은 모두 나가고 다만 후궁과 기생의 무리만이 서로 모여 목놓아 우니 소리가 밖에까지 진동하였다. 이에 군문(軍門) 안에서 회의를 열어 유자광(柳子光)ㆍ이계남(李季男)ㆍ김수경(金壽卿)ㆍ유경(柳涇)으로 하여금 머물러서 대궐 문을 지켜 도주할지 모르는 폐주를 지키게 하고,성희안 등은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 문 앞에 나아가서 자순대비(慈順大妃 성종의 계비이며 중종의 어머니)에게 처분을 청하니 조금 후에 문을 열고 그들을 들어오게 하였다.
○ 대비에게 아뢰기를, “지금 임금이 임금의 도리를 잃고 정사가 어지러워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사가 매우 위태하므로 모든 관원과 백성들은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임금을 삼기 위하여 감히 대비의 명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니, 대비는 “우리 아이가 어찌 중한 책임을 감당하겠오.지금 세자가 나이 장성하였으니 왕위를 이을 만하오.” 하고 사피하였다. 이에 유순(柳洵) 등이 여러 번 아뢰어서 명을 받았다. 《국조보감》
○ 성희안 등은 근정전(勤政殿) 서쪽 뜰에 나아가서 줄지어 앉고 유순정ㆍ정미수(鄭眉壽)ㆍ강혼을 시켜 진성대군을 그의 사저에서 맞아 오게 하였다. 진성대군이 평시서(平市署)의 이웃집으로 피해 가니 유순정 등은 이문(里門) 밖에 앉아 두 번 세 번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였다.이에 임금은 군복 차림으로 연을 타고 법물(法物)을 갖추어 나오니 저자에서는 가게 문을 닫지 않고 부로(父老)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오시(午時)에 경복궁으로 들어가서 해가 저물기 전에 백관의 반열을 정하였다.
○ 유순 등이 의논하기를, “옛날부터 임금을 폐하고 새로 세울 적에 그 죄를 따진 것은 창읍왕(昌邑王)을 폐할 때 뿐이니 지금도 마땅히 잘 조처합시다.” 하고 승지 한순(韓洵)과 내시 서경생(徐敬生)을 창덕궁으로 보내어 폐주에게 국새(國璽)를 내놓고 정전(正殿)을 피해 나가도록 청하였다. 폐주는 “내가 내 죄를 안다.” 하면서 곧 국새를 내어 상서원(尙瑞院)의 낭관에게 주었다. 미시(未時)에 백관들이 전정(殿庭)에 들어와서 반열이 정해졌다. 《국조보감》
○ 대비의 교지를 선포하였는데, “우리나라가 백년 동안이나 덕을 쌓아 백성의 마음에 흡족하여 만년토록 튼튼한 왕업이 마련되었는데, 불행히도 사군(嗣君 연산군)이 임금된 도리를 잃어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모든 신하들이 말하기를, ‘종사(宗社)가 중요하니, 진성대군 휘(諱) 은 일찍부터 인덕이 있어 백성의 마음이 모두 쏠리었다.’ 하여 세우기로 하였다.내가 생각하건대 어두운 임금을 폐하고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고금에 통하는 의리이니 이에 여러 사람의 소원에 따라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임금은 페하여 연산군(燕山君)으로 삼는다. 백성의 생명이 끊어지려다가 다시 이어졌으며, 종묘와 사직이 이미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하였다. 《국조보감》
○ 중종은 면류관과 곤룡포를 갖추어 입고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으며 이가 중종(中宗)이 되었다. 부부인(府夫人) 신씨(愼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백관의 하례를 받고 교지를 반포하여 모든 죄인을 사면하였다. 연산주 때의 나쁜 정사를 모두 고치게 하니 신하들이 천세를 부르며 기뻐 고함치는 소리가 우레 소리와 같았다. 《국조보감》
○ 김수동(金壽童)이 대궐에 들어가서 연산주를 폐하고 울면서, “노신이 죽지 않고 있다가 차마 이 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너무 인심을 잃었으니 또한 어찌 하겠습니까. 잘 보중(保重)하여 가시옵소서.”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은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을 폐했던 고사(故事)에 따라 전왕(前王 연산주)을 대궐 안으로 나오게 하고 대비에게 주(主 연산주)를 폐한 사유를 고하고자 하니 성희안(成希顔) 등이 말렸다. 폐하고 난 후에 전한(典翰) 김전(金詮)은 눈물을 흘리고 장순손(張順孫)은 춤을 추었다. 《음애일기》 《해동악부(海東樂府)》
대체 반정의 일은 성희안에게서 계획이 나와 박원종이 완성하였다. 위태함을 편안하게 만들고 재화를 복으로 변하게 하였으니 실로 우리나라가 만세(萬世)토록 뻗어나갈 사업이었다. 그러나 성희안은 성품이 과단성은 있었으나 학술이 없었으며, 유순정(柳順汀)은 천성이 너그럽고 나약하여 집념(執念)이 없었으며, 박원종은 추솔하고 사나우며 견식이 없었다.비록 충성과 절의에 북받쳐 공을 이루게 되었으나 일처리에 마땅함을 잃었으니, 전에 입은 은혜로 적신 유자광을 용납하여 뒷날의 화를 열어 놓고 자질구레한 인아친척(姻婭親戚)들에게 모두 철권(鐵券)을 주었으며,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훈공의 등급을 정하였으니 연거속구(連車續狗)의 허물은 지금까지도 비난거리가 되었다.
○ 폐주 연산군을 교동(喬桐)에 안치시키고, 폐비 신씨(愼氏)를 정청궁(貞淸宮)으로 나가 있게 하며 폐세자(廢世子) 황()ㆍ창녕대군(昌寧大君) 인(仁)ㆍ양평군(陽平君) 성(誠)과 돈수(敦壽)등은 모두 가마를 타고 귀양가게 하였다. 《국조보감》
변이 일어나던 처음에 폐주는 급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오라 했는데, 측근자들은 이미 밖으로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이에 폐주는 창황히 달려 들어가서 왕비에게 함께 나가서 간절히 빌자고 하니, 왕비는 “일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빌어본들 무엇이 도움되리오. 순하게 받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전일에 여러 번 간해도 끝내 고치지 않다가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스스로 화를 초래한 사람이야 비록 죽어도 마땅하겠지마는 이 불쌍한 두 아이는 끝내 어찌될고.” 하며 이내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니, 폐주는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들 무엇하리오. 뉘우쳐도 어찌 할 수가 없다.” 하였다. 날이 새기 전에 왕비는 대궐에서 나가는데 신었던 비단 신이 자주 벗겨져서 갈 수가 없었으므로,비단 수건을 찢어 신을 동여 매었다. 세자와 대군은 유모와 함께 청파촌(靑坡村)의 무당 집에 나가 있었는데, 해가 저물도록 먹지 못했으므로 무당이 밥을 대접하였다. 대군이 “어찌 새끼 꿩을 올리지 않느냐?” 하니, 유모는 울면서, “내일은 이런 밥을 얻어 먹어도 다행일 것입니다.” 하였다. 이를 보는 자도 또한 눈물을 흘렸다. 《장빈호찬(長貧胡撰)》
○ 대신들은 폐주를 안치시킬 절목(節目)을 의논하여 나인 4명, 내시 2명, 반감(飯監) 1명만 따라가게 하고, 당상관 한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호위하여 가게 하였다. 연산군은 붉은 옷에 갓을 쓰고 띠도 띠지 않고 내전문으로 나와 땅에 엎드리면서,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였다.평교자(平轎子)를 타고 선인문(宣仁門)ㆍ돈의문(敦義門)을 나올 적에 갓을 숙여 쓰고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연희궁(衍禧宮)에 유숙하고, 금포(金浦)에 유숙하고, 통진(通津)과 강화(江華)에 유숙하고 교동(喬桐)에 당도하였다. 따라갔던 장수 심순경이 복명하기를, “아무 탈 없이 모시고 갔습니다. 가는 길에는 노인과 아이들이 모두 달려와서 다투어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통쾌하게 여겼습니다.안치소(安置所)에 도착해 보니 둘레에 친 울타리가 좁고 높아서 해를 볼 수가 없었으며, 다만 작은 문 하나가 있어 음식을 통하였습니다. 울타리 안에 들어가자 시녀들은 모두 목놓아 울었습니다. 신이 하직을 고하니 말씀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고 수고했으니 고맙다.’ 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중종(中宗)이 전교하기를, “전왕의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안되었다. 나는 종사가 위태하고 신민이 추대하므로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길 수 없어 사피하지 못하고 이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전왕은 나와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였고 정의로는 형과 아우이다. 지금 날씨가 점차 추워지니 의복과 음식물을 실어 보내라.”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신 등은 폐주에 대한 대의(大義)가 이미 끊어졌으니 감히 마음을 쏠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전교는 지극한 정의에서 나온 것이오니 의복과 음식을 내려 보냄이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교동(喬桐)에는 반드시 털옷이 없을 것이니 털옷과 어물(魚物)을 따로 보내고자 한다.” 하니, “전하의 명은 지당하십니다. 그러하오나 지나치면 거북스러움이 있으니 간신히 배고픔과 추위만 면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연산군은 평소 소행이 한없이 잔인ㆍ패려하여 사람 죽이기에 거리낌이 없었으니, 폐위되어 물러갈 적에 마땅히 형벌을 받을 줄로 알고 몹시 두려워하였다. 이 날 큰 바람이 일어나 배가 거의 뒤집힐 뻔 하다가 간신히 교동에 당도하였다. 좌우로 호위하여 고을 뜰에 들어감에 장수와 군사들이 둘러섰으니 땅에 엎드려 땀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 보지도 못하였다.반정하던 때에 세자와 왕자는 다 보전하지 못 하는 것이므로 궁에서 나갈 적에 신씨(愼氏)는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교동에 가서 별일 없다고 하니 신비는, “그 때에 여러 대장에게 청해서 귀양간 곳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고 탄식하였다. 《소문쇄록ㆍ국조기사》
일찍이 연산군이 절구를 지었으니

여러 어진 이들과 화정에 연회하여 / 時許群賢宴畵亭
꽃과 술을 즐기며 태평을 깨달았네 / 閑憑花酒覺昇平
어찌 다만 은혜 입은 것만 좋아하랴 / 何徒爭喜鴻私厚
모두가 충성하여 정성 바치게 하고자 하노라 / 咸欲思忠獻以誠

하였다. 또,

중현대의 모임이 은대보다 넓은데 / 重賢寬於會銀臺
봄 바람 길 위에는 붉은 준마가 달려 가네 / 春滿長途叱撥催
취해서 한가하게 달을 즐길 뿐만 아니라 / 不啻醉憐閒夜月
돌아올 때도 악대를 이끌고 다시 거닐어 오네 / 歸牽歌菅可重徊

하였다. 조신(曹伸)이 뒷날에 차운(次韻)하였으니,

남의 집 헐어서 정자를 만들고 / 撤人廬舍摠爲亭
많은 여자 뽑아서 운평을 만들었네 / 採却靑紅作運平
원훈과 간신을 다 죽이고 / 誅盡元勳屠諫輔
내시들만 남겨서 충성하게 하였네 / 只留皂帽表忠誠

하였다. 또

서총대 쌓느라고 만인이 죽었는데 / 萬人駢死築葱臺
춤을 춘 기생에게 비단을 내려주네 / 舞罷迓祥賜錦催
부끄러운 기색으로 여러 아우의 뼈를 찾고자 / 忸怩欲尋諸弟骨
문득 해상에서 잠시 거닐고 있네 / 却於海上暫徘徊

라 하였다.
○ 12월에 이르러 호위하는 장수가 연산군이 역질(疫疾)로 매우 고통받는다고 아뢰었다. 이에 중종이 의관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으나 도착하기 전에 운명하였다. 시녀들은 “연산군이 죽음에 다달아 다른 말은 없었으며, 다만 신씨가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신씨는 곧 그의 왕비였다.임금은 전교를 내리기를 “후한 예로 장사 지내 주고 또 조회와 개시(開市)를 정지하고 묘지기를 정함이 어떠한가?” 하였다. 대신은 의논하여 아뢰기를, “장사는 왕자의 예로써 지내줄 것이나, 조회와 개시를 정지하고 묘지기를 정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전교를 내리기를, “그렇다면 감사를 시켜 상사를 보살피게 하고, 본관(本官)은 묘소에 화재를 금하고 수목의 벌채를 금하게 하라.” 하였다. 《패관잡기》
○ 이에 공조참의 겸 경연참찬관(工曹叅議兼經筵叅贊官) 유숭조(柳崇祖)가 차자를 올렸으니 그 대략에, “전일에 전왕이 인심을 크게 잃어 종사가 위태할 뻔했는데, 두세 대신이 천명과 인심에 따라 왕대비의 명을 받들어 전하를 추대하니 전하께서는 신민의 추대에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는데,전왕을 받드는 정성은 더욱 돈독하여 재부(宰夫 가축을 잡는 천직)와 선감(膳監)과 사랑받던 여자와 시종과 장사들에게 호위를 맡겨 뜻밖의 변고를 방비하게 하고 의복과 음식물도 길 왕래가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내려주셨습니다. 불행히 역질을 만나 갑자기 승하하자 전하께서 매우 슬퍼하시어 수라상을 폐하시고 조회를 정지하면서 초상 장사의 예절을 다하려고 대신에게 의논하셨는데,대신이 의논해 아뢴 것은 아마 의리에 합당치 못한 듯 하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임금과 아버지는 한 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비록 아버지 구실을 하지 못하더라도 아들은 아들된 도리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순제(舜帝)가 어찌 고수(瞽瞍)가 완악하다고 생존했을 때에 섬기고 죽은 뒤에 장사 제사 지내는 예절을 폐지했겠습니까. 태갑(太甲)이 법도를 파괴하고 예절을 문란하게 하자 이윤(伊尹)은 그를 동궁(桐宮)에 내쫓아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기를 기다렸습니다. 태갑이 혹시 잘못을 뉘우쳐 고치지 못하고 죽었다면 초상 장사의 예절을 어찌 처리하였겠습니까.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은 정치를 문란히 하여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쁜 시호를 얻었지마는 왕의 칭호는 없애지 않았습니다.전왕은 종사에 죄를 얻었으니 종묘에 모셔 제사지낼 수는 없지마는 신하가 임금을 위해 치르는 초상 장사의 예절은 마땅히 이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장사에는 능의 의식을 쓰며 따로 사당을 세우고 중국에 부고를 하는 것이 정의와 의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송태조(宋太祖)가 공제(恭帝 후주(後周))에게,우리 태조가 고려 공양왕(恭讓王)에게 초상 장사를 치러 주고 시호를 올렸던 예절을 본받을 것입니다. 중국의 사신이 만약 이 일을 묻는다면 미리 대책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겉만 꾸며서 대답하는 것은 정성으로 중국을 섬기고 아랫 사람에게 보이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널리 의논케 하였더니 모두 시행할 수 없다 하였다.유자광은 그 말을 극력 배척하여 법 맡은 관원에게 맡겨 그 실정을 국문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며, 박원종은 “그 사람을 근시(近侍)의 자리에 있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중종은 경연관의 벼슬을 갈게 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유승조를 죄 주면 언로가 방해된다 하여 벼슬을 갈지 않기를 청하고 다투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동각잡기》
○ 중종(中宗) 11년 병자에 도승지 이자화(李自華)를 보내어 연산군의 묘에 제사지냈는데 그 제문에, “나는 보잘 것 없는 몸으로 국운이 중간에 비색함을 당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신하에게 추대되어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으니 실로 두렵고 부끄러운 나의 마음이 어찌 끝이 있으리오.끝까지 서로 우애있게 지냄으로써 이 뜻을 풀고자 했는데, 한번 병들어 돌아갔으니 하늘은 어찌 그리 참혹한가. 세월이 흘러가니 추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도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제수를 드리고 삼가 나의 심정을 고하오니 제물은 극히 박하지마는 나의 적은 정성을 흠향하기 바라오.” 하였다. 《국조보감》 《동각잡기》
○ 병자년 10월에 참찬관(參贊官) 김굉(金硡)이 아뢴 말에 의하여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 줄 일을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폐비 신씨에게 자기 뜻대로 후사를 세우도록 하였다. 단종기(端宗記)에 상세하다.
○ 중종 13년 무인에 승지 권발(權橃)과 김정국(金正國)은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야 함을 극력으로 논했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단종기(端宗記)에 상세하다.
○ 중종 34년 기해에 한산 군수(韓山郡守) 이약빙(李若氷)이 소를 올려 연산군을 위해 후사를 세우기를 청하였다. 단종기(端宗記)에 상세하다.
○ 명종(明宗) 을사년에 이언적(李彦迪)이 의논해 아뢰기를, “전일에 사신이 북경에 갔을 때 중국 사람이 혹시 양로왕(讓老王 처음 반정하였을 때 중국에는 연산군이 자진하여 아우에게 양위하였다고 알렸다.)이 생존했는가, 별세했는가를 물으니 통역관이 감히 바른 말을 하지 못하고 별세한 것을 생존했다고 대답했으니 이것은 의리에도 미안할 뿐 아니라 뒷날에도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지금 상신(相臣)을 보내어 중국의 예부(禮部)에서 양로왕이 생존했는가, 별세했는가를 물으면 마땅히 사실대로 대답해야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쪽에서 만약 ‘그때에 왜 부고를 내고 시호를 청하지 않았느냐?’ 하면 대답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니 반드시 사리에 따라 잘 말해야 될 것입니다.또 ‘너희 나라의 통역관이 지난 겨울에 와서도 양로왕이 지금도 생존해 있다 했는데 어찌 그 말이 다르냐?’고 하면, ‘그때의 통역관은 아는 것이 없어서 창졸간에 잘못 대답한 것이 매우 해괴하니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되겠다.’고 대답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회재집(晦齋集)》
○ 중종 때에 폐비 신씨가 세상을 떠났다.
○ 심언광(沈彦光)이 신비의 만장(輓章) 세 수(首)를 지었으니 그 첫째에,

꿈 같은 장추궁에 몇 해 봄을 지냈던가 / 一夢長秋度幾春
표령한 신세가 다시 슬프게 되었네 / 飄零身世更悲辛
매양 보통 부부간의 이별을 들어도 눈물이 흐르는데 / 每聞契濶堪流涕
하물며 그 당시에 신하된 사람이랴 / 何况當時北面人

하였고, 그 둘째에,

10년 동안 소후가 수궁에 있었는데 / 十年蕭后在隋宮
말로의 생애는 안정되지 못했도다 / 末路生涯逐轉蓬
술지하라고 한 말은 참으로 약석이었건만 / 述志一言眞藥石
임금은 오히려 깊은 충곡(衷曲)을 살피지 못하였네 / 乾心猶不省深衷

하였고, 그 셋째에,

한 시대의 충량은 모두 간하다가 죽었는데 / 一世忠良眞剖心
임금은 무슨 일로 날마다 음란했던가 / 君王何事日荒淫
그 당시에 중전이 덕이 있었으니 / 當年中壼多陰敎
계명계가 깊지 않은 것이 아니로다 / 不是鷄鳴戒不深

하였다. 《어촌집(漁村集)》 《신씨족보(愼氏族譜)》


 

[주D-001]창읍왕(昌邑王) : 한 무제(漢武帝)의 아들로서 소제(昭帝)를 계승하여 황제가 되었다가 덕이 없어 폐위되었다.
[주D-002]곽광(霍光) : 창읍왕(昌邑王)을 폐출하고 선제(宣帝)를 세운 대신.
[주D-003]철권(鐵券) : 공신에게 주어 영구히 보존케 하는 것.
[주D-004]연거속구(連車續狗) : 옛날 중국 남북조 시대에, “보궐(補闕 : 관명)은 수레를 잇달아 실을 정도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관직을 남발한 것을 조롱한 말이며, 또 서진(西晉) 때에, “수달피의 꼬리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잇는다.”란 말이 있는데 이것도 관직이 남발되어 벼슬아치가 다는 수달피의 꼬리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잇는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이러한 고사에서 공신이 너무 많은 것을 말하였다.
[주D-005]고수(瞽瞍) : 순(舜)의 아버지인데 완고하여 아들을 죽이려 하던 자이다.
[주D-006]태갑(太甲) : 은왕(殷王) 성탕(成湯)의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는데, 덕이 없어 이윤(伊尹) 등에게 동궁(桐宮)으로 추방 당하였다. 후에 그가 잘못을 깨닫고 고쳤으므로 다시 복위시켰다.
[주D-007]장추궁 : 한대(漢代)에 태후가 거처하던 곳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신비(愼妃)가 왕비 자리에 있었던 것을 말한다.
[주D-008]술지하라고 한 말 : 왕비 신씨(愼氏)가 연산군(燕山君)에게 바른 말로 경계한 것을 말한다.
[주D-009]계명계 : 《시경(詩經)》에 ‘계명편(鷄鳴篇)’이 있는데 여기에 왕후가 왕에게 정사에 부지런할 것을 권한 계명계가 있다.

 

연산군 12년 병인(1506,정덕 1)
 9월2일 (기묘)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연산군을 폐하여 교동현에 옮기다

금상(今上)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왕을 폐(廢)하여 교동현(喬桐縣)으로 옮겼다.
처음에 왕의 어머니 폐비 윤씨(廢妃尹氏)가 성질이 모질고 질투하였다. 정희(貞喜)·소혜(昭惠)·안순(安順) 세 왕후가, 윤씨의 부도(不道)한 짓이 많음을 보고 매우 걱정하여 밤낮으로 훈계하였으나, 더욱 순종하지 않고 악행(惡行)이 날로 심하므로, 성종(成宗)이 할 수 없이 의지(懿旨)를 품(稟)하여 위로 종묘에 아뢰고 〈왕비를〉 폐하였었다.
왕은 그때 아직 강보(襁褓) 속에 있었는데, 자라남에 미쳐 성종은 그가 어머니 여읜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적장(嫡長)이기 때문에 왕세자(王世子)로 세웠다. 그런데 시기와 모짐이 그 어미와 같고 성질이 또한 지혜롭지 못하므로 성종은 당시의 단정한 선비들을 골라 뽑아 동궁(東宮)의 관원으로 두어 훈회(訓誨)하고 보도(輔導)함을 특별히 지극하게 하였다.
왕이 오랫동안 스승 곁에 있었고 나이 또한 장성했는데도 문리(文理)를 통하지 못했다. 하루는 성종이 시험삼아 서무(庶務)를 재결(裁決)시켜 보았으나 혼암하여 분간하지 못하므로 성종이 꾸짖기를 ‘생각해 보라. 네가 어떤 몸인가. 어찌 다른 왕자들과 같이 노는 데만 힘을 쓰고 학문에는 뜻이 없어 이같이 어리석고 어둡느냐.’ 하였었는데, 왕이 이 때문에 부왕(父王) 뵙기를 꺼려 불러도 아프다고 핑계하고 가지 않은 적이 많았다.
하루는 성종이 소혜 왕후에게 술을 올리면서 세자를 명소(命召)하였으나, 또한 병을 칭탁하고, 누차 재촉해도 끝내 오지 않으므로, 성종이 나인(內人)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더니, 병이 없으면서 이르기를 ‘만약 병이 없다고 아뢰면 뒷날 너를 마땅히 죽이겠다.’ 하매, 나인은 두려워서 돌아와 병이 있다고 아뢰었다. 성종은 속으로 알고 마음에 언짢게 여기며 그만두었었다. 이로부터 〈세자를〉 폐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으나 금상(今上)이 아직 어리고, 다른 적자(嫡子)가 없으며, 또한 왕이 어리고 약하여 의지할 곳이 없음을 불쌍히 여겨 차마 못하였다.
성종이 승하하자 왕은 상중에 있으면서도 서러워하는 빛이 없으며, 후원의 순록(馴鹿)을 쏘아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며 놀이 즐기기를 평일과 같이 하였고, 심지어 군신(群臣)들을 접견(接見)하고 교명(敎命)을 내리면서도 숨기고 가리며 거짓 꾸미기를 힘썼는데, 외부 사람들은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 초년에는 선조(先朝)의 옛 신하들이 많이 남아 있어 아직 조정이 완전하므로 정령(政令)이 문란하지 않았는데, 무오년 주륙(誅戮)이 있는 뒤부터는 왕의 뜻이 점차 방자해져, 엄한 형벌로 아랫사람들을 억제하매, 선비의 기개가 날로 꺾여져 감히 정언(正言) 극론(極論)을 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더욱 꺼릴 것 없어 멋대로 방탕해졌다.
임술·계해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장녹수(張綠水)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또한 광포(狂暴)한 짓이 많으므로 소혜 왕후가 걱정이 되어 누차 타일렀지만 도리어 왕의 원망만 사게 되었다. 외부에까지 왕왕 듣고 서로 보여 귓속말을 하며 그윽이 근심하게 되므로, 소혜 왕후가 또 다시 몰래 대신들에게 유시를 내려 간절히 간하게 하니, 왕이 더욱 분해했다. 그리하여 항상 조정에 구애되어 하고 싶은 대로 못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으나 발로할 수 없었다.
이때 임사홍(任士洪)이 음험하고 간사한 자로 선조(先朝) 때부터 내쫓긴 지 거의 30년이나 되므로 항상 이를 갈다가, 그 아들 임숭재(任崇載)가 옹주에게 장가듦을 인하여 금중(禁中)을 출입할 수 있게 되자 왕의 뜻을 짐작하고 마침내 조정을 위협하는 술책으로써 가만히 뜻을 갖추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급히 숭품(崇品)에 발탁, 아무때나 불러 보았으며, 무릇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묻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사홍이 부름을 받으면 반드시 미복(微服)으로 어둠을 타 편문(便門)으로 들어 갔고 왕은 항상 내 벗 활치옹(豁齒翁)이 왔다 하였으니, 아마 사홍이 이가 부러져 사이가 넓었기 때문이리라. 왕은 이에 크게 형륙(刑戮)을 자행하였는데 언관(言官)들을 추구(追究)하여 대신으로부터 대간(臺諫)·시종들까지 거의 다 죽이거나 귀양 보내어 조정이 텅 비었고, 폐비한 일을 원망하여 성종의 후궁을 장살(杖殺)하고 그 자녀를 귀양 보내거나 죽이고, 그 며느리를 남의 첩으로 시집보내거나 제군(諸君)·부마(駙馬)에게 주어 갖게 하였고, 소혜 왕후를 후욕(詬辱)하여 마침내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나 죽게 하고서는 그 상기(喪期)를 단축하되 날을 달로 치는 제도[以日易月制]로써 하였고, 대행(大行)이 아직 빈소에 있는데도 풍악을 그치지 않았다. 폐비하는 의논에 참여한 자와 추숭(追崇)을 불가하다고 의논한 자를 모두 중형(重刑)에 처하되, 죽은 자는 그 시체를 베고 가산을 몰수하며, 그 족속을 연좌하고, 살아 있는 자는 장신(杖訊)하여 멀리 귀양보냈는데, 교리(校理) 권달수(權達手)는 먼저 주창하였다 하여 죽임을 당했다.
드디어 조종(祖宗)들의 옛 제도를 모두 고쳐 혼란케 하였는데, 먼저 홍문관 사간원을 혁파하고 또 사헌부의 지평 2원(員)을 없애므로써 언로(言路)를 막았고, 손바닥 뚫기[穿掌]·당근질하기[烙訊]·가슴빠개기[斮胸]·뼈바르기[剮骨]·마디마디 자르기[寸斬]·배가르기[刳腹]·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碎骨飄風] 등의 이름이 있었으며, 말이 조금만 뜻에 거슬리면 명령을 거역한다 하고, 말이 내간(內間)에 미치면 촉상(屬上)이라 지적하여, 얽어 죄를 만들되, 기제서(棄制書)를 경률(輕律)로 삼고 족속을 멸하는 것[夷族]을 상전(常典)으로 여겨 한 번만 범하면 부자 형제가 잇달아 잡혀 살륙되고 일가까지도 또한 찬축(竄逐)을 당했고, 익명서(匿名書) 및 다른 죄로 잡힌 자가 사연이 서로 연루되어 옥을 메웠는데, 해를 넘기며 고문하여 독한 고초가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옛 당직청(當直廳)이 협소하다 하여 이내 복야청(僕射廳)으로 옮겨 넓히되 밀위청(密威廳)이라 하고 감옥의 관원을 더 두었으며, 죄수를 신문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삼공(三公)과 승지·금부 당상이 섞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사대부로서 매를 맞는 자가 빈 날이 없었으나 모두 그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고, 또 비방하는 의논이나 우어(偶語)를 금하는 법을 만들어 감찰로 하여금 날마다 방방곡곡을 사찰하였다가 초하루 보름으로 아뢰게 하였고, 온갖 관사(官司)와 여러 부(府)도 또한 초하루 보름으로 시사(時事)를 비방하는 자가 있나 없나를 적어 아뢰게 하여, 비록 부자간이라도 관에 보고한 뒤에라야 서로 만나도록 하므로, 모두 서로 손을 저어 말을 막았고, 사람마다 스스로 위태롭게 여겨 길에서 눈짓만 했다.
또 도성(都城) 사방에 백 리를 한계로 모두 금표를 세워 그 안의 주현(州縣)과 군읍(郡邑)을 폐지하고 주민을 철거시켜 비운 뒤에 사냥터로 삼고, 만약 여기에 들어가는 자는 당장 베어 조리를 돌리고, 기전(畿甸) 수백 리를 한 없는 풀밭으로 만들어, 금수를 기르는 마당으로 삼았다. 그리고 내수사 종 중 부실(富實)한 자를 가려 들어가 살게 하여 몰이하는 데 편리하게 하니, 본래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사망하여 길에 즐비하였고, 능침(陵寢)이 다 금표 안에 들어가 지키는 사람이 없어 향화(香火) 역시 끊겼다.
또 도성 안 대궐에 가까운 인가를 철거하고 동서로 돌성을 쌓아 한계를 정하고 문묘(文廟)의 신판(神版)을 옮긴 뒤 그 안에 짐승을 길렀으며, 수리 도감(修理都監)을 두고 크게 공사를 일으켜 사방의 공장(工匠)을 모으고 민호(民戶)를 징발, 모두 서울에 집중시켜 궁실을 넓히고, 대사(臺榭)를 더 지어 강가나 물구비에 그들먹하게 벌여 놓으며,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메워 큰 길을 이리 저리 내고, 밤낮으로 시녀들과 오가며 놀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삼각산 밑 장의사동(藏義寺洞)에 있는 탕춘정(蕩春亭)인데, 시냇물이 구비쳐 흐르는 위에 위치하여 단청(丹靑)이 수면에 현란하고, 시내를 가로 질러 낭원(廊院)을 벌여 지었는데 규모가 극히 웅장하였다. 일찍이 강물을 끌어 정자 밑에 이르게 하고 또 산을 뚫어 다른 시냇물을 끌어 정자 밑에 합류시키려 했는데, 모두 이루지 못했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것은 서총대(瑞葱臺)라 하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며 넓기도 높이와 걸맞았다. 그 아래 큰 못을 파는데 해가 넘도록 공사를 마치지 못했다. 또 임진강 가 툭 내민 석벽 위에 별관을 지어 유행(遊幸)하는 장소를 만들었는데, 굽이진 원(院)과 빙 두른 방(房)이 강물을 내려다 보아 극히 사치스럽고 교묘하다.
또 이궁(離宮)을 장의사동(藏義寺洞)과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짓게 하여 바야흐로 재목을 모아 역사를 하는데, 모든 역사를 감독하는 벼슬아치들이 독촉하기를 가혹하고 급하게 하여 때리는 매가 삼단과 같으며, 조금만 일정에 미치지 못하면 또한 반드시 물건을 징수하므로, 원망과 신음이 길에 잇달았다.
축장군(築墻軍)·축성군(築城軍)·서총정군(瑞葱亭軍)·착지군(鑿地軍)·이궁 조성군(離宮造成軍)·인양전 조성군(仁陽殿造成軍)·재목 작벌군(材木斫伐軍)·유하군(流下軍)이라고 부르는 따위의 징발하는 명목을 다 셀 수가 없다. 그러므로 중외(中外)가 모두 지치고 공사(公私)가 탄갈(殫竭)하여 유리 멸망이 서로 잇달아 온 고을이 거의 비게 되었으며 서울에서 역사하는 자는 주리고 헐벗고 병들어서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마을과 거리에 시체가 쌓여 악취를 감당할 수 없는데, 더러는 굶주리고 지친 나머지 길가에 병들어 쓸어진 자가 아직 숨이 붙어 있지만, 그 근방에 사는 사람들이 시체를 버려 두었다는 죄를 입을까 겁내어 서로 끌어다 버리므로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구수영(具壽永)은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사위이고, 그 아들은 또 왕의 딸 휘순 공주(徽順公主)에게 장가들어, 아첨과 간사로 왕에게 굄을 받았는데, 그는 미녀(美女)를 사방으로 구하여 바치니, 왕이 매혹되어 수영을 발탁, 팔도 도관찰사(八道都觀察使)를 삼으니 권세가 중외를 기울였다.
이때부터 내총(內寵)이 점차 성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굄을 받은 것이 전 숙원(田淑媛)과 장 소용(張昭容)이다. 왕이 두 후궁에게는 하는 말을 따르지 않음이 없고, 하려는 것을 해주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옥사(獄事)를 농간하고 벼슬을 팔며 남의 재물·장획(臧獲)·가사(家舍)를 빼앗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고,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거슬리면 반드시 화로써 갚으므로 종척(宗戚)이나 경대부(卿大夫)들이 그들의 침해와 모욕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주인을 배반하고 이익을 노리는 무뢰배로서 일가라 일컫고 투탁(投托)하는 자가 다 셀 수 없었다. 두 집의 도서(圖書)나 서찰을 가진 자가 사방에 널려 이르는 곳마다 소란을 피우며 수령을 업신여기고, 백성들에게 못살게 굴어 기세가 넘쳤으나 아무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빌며 사양하고 움츠려 피할 뿐이었다.
왕이 이들을 위하여 큰 집을 짓되, 대관(臺官)에게 감독하게 하여 지어 주었는데, 그들이 만약 부모를 뵈러 출입할 때면, 중관(中官) 및 승지·주서(注書)·재상들이 모두 따라가며 앞에서 인도하고 뒤를 감싸 마치 왕비의 행차와 같았다. 또 시녀 및 공·사천(公私賤)과 양가(良家)의 딸을 널리 뽑아 들이되, 사자(使者)를 팔도에 보내어 빠짐없이 찾아내어 그 수효가 거의 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들의 급사(給使)·수종(隨從)과 방비(房婢)라고 일컫는 자도 그 수와 같았으며, 7원(院) 3각(閣)을 설치하여 거처하게 했는데, 운평(運平)·계평(繼平)·채홍(採紅)·속홍(續紅)·부화(赴和)·흡려(洽黎) 따위의 호칭이 있었으며, 따로 뽑은 자를 흥청악(興淸樂)이라 하고 악에는 세 과(科)가 있었는데, 굄을 거치지 못한 자는 지과(地科)라 하고 굄을 거친 자는 천과(天科)라 하며, 굄을 받았으되 흡족하지 못한 자는 ‘반천과(半天科)라 하고, 그중에서 가장 굄을 받은 자는 작호를 썼는데, 숙화(淑華)·여원(麗媛)·한아(閑娥) 따위의 이름이 있으며, 그 기세와 굄이 전 숙원이나 장 소용과 더불어 등등한 자도 또한 많았다.
왕이 그 속에 빠져 오직 날이 부족하게 여기며 흥청 등을 거느리고 금표 안에 달려 나가 혹은 사냥, 혹은 술마시며 가무(歌舞)하고 황망(荒亡)하였다. 성질이 광조(狂躁)하여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내달려 동쪽에 있다 서쪽에 있다 하므로 비록 가까이 모시는 나인이라도 그 행방을 헤아리지 못했다. 또 자전(慈殿)을 효도로 받든다 하고 날마다 연회를 베풀되 때로는 밤중에 달려가 연회를 베풀기도 하고 때로는 시종들을 핍박하여 험한 곳에 놀이를 나가기도 하였는데, 대비(大妃) 또한 능히 감당치 못하면서도 두려워 감히 어기지 못하였으며, 언제나 내연(內宴)을 베풀되 반드시 종재(宗宰)·사대부의 아내를 입참(入參)하도록 하였는데, 연달아 밤낮으로 나오지 못하는 자가 있으므로 추문(醜聞)이 파다하였다.
이때 대비는 경복궁으로 옮겨 거처하였는데, 왕은 대비를 위하여 경회루 연못에 관사(官私)의 배[船]들을 가져다가 가로 연결하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 평지처럼 만들고 채붕(彩棚)을 만들었으며,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하여 가운데는 만세산(萬歲山), 왼쪽엔 영충산(迎忠山), 오른쪽엔 진사산(鎭邪山)을 만들고 그 위에 전우(殿宇)·사관(寺觀)·인물(人物)의 모양을 벌여 놓아 기교를 다하였고, 못 가운데 비단을 잘라 꽃을 만들어 줄줄이 심고 용주 화함(龍舟畫艦)을 띄워 서로 휘황하게 비췄는데, 그 왼쪽 산엔 조정에 있는 선비들의 득의 양양한 모양을 만들고 오른쪽엔 귀양간 사람들의 근심되고 괴로운 모양을 만들었다.
왕은 스스로 시(詩)를 지어 걸고 또 문사들도 짓되, 모두 세 산(山)을 명명한 뜻을 서술하게 하고 날마다 즐겁게 마시며 놀되, 화초와 인물의 형상이 비를 맞아 더러워지면 곧 새 것으로 바꾸었다. 대비가 억지로 잔치에 참석은 하였지만 연회가 파하면 늘 한숨쉬며 즐거워하지 않았다.
또 궁내(宮內)에 조준방(調隼坊)을 두어 매와 개를 무수히 기르므로 먹이는 비용이 걸핏하면 1천(千)으로 헤아렸고, 사방의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모아 들여 역시 그 속에 두되, 따로 응군(鷹軍)이란 것을 두어 내응방(內鷹坊)에 소속시키고 번갈아 바꾸도록 하여 1만 명이나 되는데 두 대장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고, 또 위장(衛將)이 있어 여러 장수들의 수를 서로 통솔하게 하고, 고완관(考頑官)과 해응관(解鷹官)을 두어 매와 개를 몰아 사냥하는 일을 살피도록 하는데, 모두 미치고 방종한 무뢰한이었다. 왕이 사냥을 하려 하면 대장 이하가 각기 응군을 거느리고 달려 오는데 이것을 내산행(內山行)이라 했다. 또 사방의 준마(駿馬)를 모아 용구(龍廐)·인구(麟廐)·운구(雲廐)·기구(麒廐)·신준방(神駿坊)·덕기방(德驥坊)·봉순사(奉巡司)를 따로 두어 기르되, 사복시의 관원을 더 두어 오로지 감목(監牧)하게 하여, 유행(遊幸)·출엽(出獵)할 때 썼다.
왕은 스스로 자신의 소행이 부도(不道)함을 알고 내심 부끄러워하여 인도(人道)를 혼란시켜 자기와 같게 만들려고 하여, 사대부의 친상(親喪)을 단축하였으며, 효행(孝行)이 있는 사람을 궤이(詭異)하다 하여 죽였고, 형제들을 핍박하여 그 첩을 서로 간범하게 하니, 삼강(三綱)이 끊어지고 이륜(彝倫)이 소멸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배반하고 친척들이 이탈하여 중외(中外)가 다 원망하는데, 오직 사홍(士洪)·수영(壽永) 및 간사하고 아첨하는 군소(群小) 무리들이 세력을 믿고 스스로 방자하므로, 당시 대신의 반열에 있는 자들은 방관할 뿐 어찌 할 수 없었다. 총애를 탐내며 화를 두려워함이 날로 더하여 사직을 보전할 계책을 도모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왕은 항상 귀양간 사람들이 원한 때문에 일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모두 절도(絶島)에 유배시켜 고역(苦役)을 치르게 하고, 2품(品) 당상을 진유 근리사(鎭幽謹理使)라 칭하여 보내되 각기 종사관 1명씩을 거느리고 가서 검찰하고 구류당한 죄수들을 얽매어 자유롭지 못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죽음이 조석간에 있음을 알았다.
왕은 오랠수록 더욱 의심하여 모두 없애려고 하였으며, 이장곤(李長坤)이 가장 용맹한 사람이니 마침내 변을 일으킬까 싶다 하여, 경사(京師)로 잡아 보내게 하여 장차 먼저 죽이려고 하므로 장곤이 듣고 곧 망명하니, 왕은 크게 노하여 상금을 걸고 체포를 서둘되, 경조관(京朝官)을 보내어 모든 도에 있는 관원과 함께 군대를 풀어 찾게 하니, 도하(都下)가 흉흉하여, 혹자는 이장곤이 망명하여 무리들을 모아 거병(擧兵)한다 하였다.
평성군(平城君) 박원종(朴元宗)과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이 한 마을에 살았는데, 서로 만나 시사를 논할 적마다 ‘이제 정령(政令)이 혼암 가혹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종묘 사직이 장차 전복될 것인데, 나라를 담당한 대신들이 한갓 교령(敎令)을 승순(承順)하기에 겨를이 없을 뿐, 한 사람도 안정시킬 계책을 도모하는 자가 없다. 우리들은 함께 성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차마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천명과 인심을 보건대 이미 촉망된 바 있거늘, 어찌 추대하여 사직을 바로 잡지 않을 수 있으랴.’ 하고, 드디어 큰 계책을 정했는데 모사에 참여할 자가 있지 않았다.
부정(副正) 신윤무(辛允武)는 왕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이로서 평소에 늘 근심하고 두려워하기를 ‘일조에 변이 있게 되면 화가 장차 몸에 미치리라.’ 생각하고, 원종 등에게 가서 말하기를 ‘지금 중외(中外)가 원망하여 배반하고 왕의 좌우에 친신(親信)하는 사람들도 모두 마음이 떠났으니, 환란이 조석간에 반드시 일어날 것이오. 또 이장곤은 무용과 계략을 가진 사람인데, 이제 망명하였으니 결코 헛되이 죽지는 않으리다. 만약 귀양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군읍(郡邑)에 격문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쳐 들어온다면, 비단 우리들이 가루가 될 뿐 아니라, 사직이 장차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것이니, 일이 그렇게 된다면 비록 하고자 한들 미칠 수 없게 될 것이오.’ 하니, 원종 등이 뜻을 결정하였다.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은 함께 일할 수 있다 하고, 그 계획을 말하자 따르므로 이어 장정(張珽)·박영문(朴永文)을 불러 윤무(允武)와 더불어 무사를 모을 것을 언약하였다. 또 용구(龍廐)의 모든 장수들과 각기 응군(鷹軍)을 거느리고 오기로 약속하였다.
이윽고 무인일 저녁에 모두 훈련원에 모여 희안이, 김수동·김감에게 달려가 함께 가자고 하니, 감은 즉시 따랐고 수동은 두려워 망서리다가 결국 따랐다. 또 유자광이 지모가 많고 경력이 많다고 하여, 역시 불러 함께 하는 한편 용사들을 임사홍과 신수근·신수영의 집에 보내어 퇴살(椎殺)하고, 또 사람을 보내어 신수겸(愼守謙)을 개성부에서 베니, 이를 들은 도중(都中)의 대소인들이 기약도 없이 모여 들어 잠깐 동안에 운집하자 즉시 모든 장수들을 편성하고 용구마(龍廐馬)를 내어 주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에워싸고 지키게 하였으며, 또 모든 옥에 있는 죄수들을 놓아 종군하게 하니, 밤이 벌써 3경이었다.
윤형로(尹衡老)를 금상(今上)의 사제(私第)에 보내어 그 사유를 아뢰고 그대로 머물러 모시게 하고, 이어서 운산군 이계(雲山君李誡)와 무사 수십 명을 보내어 시위하여 비상에 대비하게 하였다. 희안 등은 모두 돈화문 밖에 머물러 날새기를 기다리니, 숙위(宿衛)하던 장사와 시종·환관들이 알고 다투어 수채 구멍으로 빠져 나가 잠시 동안에 궁이 텅 비었다.
승지 윤장(尹璋)·조계형(曺繼衡)·이우(李堣)가 변을 듣고 창황히 들어가 왕에게 사뢰니, 왕이 놀라 뛰어 나와 승지의 손을 잡고 턱이 떨려 말을 하지 못하였다. 장(璋) 등은 바깥 동정을 살핀다고 핑계하고 차차 흩어져 모두 수채 구멍으로 달아났는데, 더러는 실족하여 뒷간에 빠지는 자도 있었다.
원종 등은 내시를 시켜 장사 두어 명을 거느리고 왕에게 가 옥세를 내놓고 또 동궁에 옮길 것을 청하였으며, 전동(田同)·심금손(沈金孫)·강응(姜凝)·김효손(金孝孫) 등을 군중(軍中)에서 베었다.
여명(黎明)에 궁문이 열리자 원종 등이 경복궁에 나아가 대비에게 아뢰기를 ‘주상이 크게 군도(君道)를 잃어 종묘를 맡을 수 없고 천명과 인심이 이미 진성 대군 〈이역(李懌)〉에게 돌아갔으므로, 모든 신하들이 의지(懿旨)를 받들어 진성 대군을 맞아 대통(大統)을 잇고자 하오니, 청컨대 성명(成命)을 내리소서.’ 하니, 대비는 전교하기를 ‘나라의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사직을 위한 계책이 부득이하다. 경 등이 아뢴 대로 따르리라.’ 하였다.
순정이 전지를 받들고 즉시 금상의 사제로 가 아뢰니, 상이 굳이 사양하기를 ‘조정의 종묘 사직을 위한 대계(大計)가 진실로 이러해야 마땅하나 내가 실로 부덕하니 어떻게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고, 재삼 거절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순정이 호종 시위하여 경복궁에 들어가니, 길에서 첨앙(瞻仰)하는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모두들 ‘성주(聖主)를 만났으니 고화(膏火) 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신시(申時)에 근정전에서 즉위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중외해 내렸으며, 대비의 명에 의하여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李)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베니, 도중(都中) 사람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들의 국부에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책공(策功)을 의정(議定)하게 하자, 원종 등이 여러 종실·재상들과 공을 나눔으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하니, 처음부터 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유순(柳洵) 등 수십 인이 다 정국 공신에 참여되었다. 당초에 원종 등이 돈화문 밖에 모여 순(洵)에게 사람을 보내어 순(洵)을 부르니, 순이 변이 있는 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라 나와 문틈으로 엿보다가 도로 들어가기를 너덧 차례나 하였으며, 또 문틈으로 말하기를 ‘나는 구항(溝巷)에서 죽고 싶지 않으니, 이번 일이 가하오. 마음대로 하오.’ 하고, 오랫동안 다른 일이 없음을 알고서야 나왔다. 그리고 구수영(具壽永)은 당초 원종 등이 거의(擧義)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훈련원에 달려가 제장들을 보았다. 여러 장수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랬지만, 벌써 와 몸바치기를 허하였으므로, 마침내 훈적(勳籍)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때 적인(謫人) 유빈(柳濱)·이과(李顆)·김준손(金駿孫) 등은 무리들을 불러 모아 전라도에서 거병하기로 하고, 조숙기(曺淑沂) 등은 또한 경상도에서 거병하기로 의논하여, 모두 금상을 추대하려 하였다가 상이 이미 즉위했다는 말을 듣고 곧 중지하였다.
처음에 왕이 백관에게 충(忠) 자·성(誠) 자를 새겨 사모(紗帽)의 앞뒤에 붙이게 하였으니, 대개 충성으로써 책려(責勵)하려 한 것이요, 모든 유행(遊行)과 출입을 행행(行幸)이라 일컬음을 금하고 거동이라 하게 하였으며, 또 흥청을 선치(選置)하되 기필코 1만 명을 채우려고 했었는데, 교동으로 폐천(廢遷)되어 가시 울타리 안에 거처하게 되자 백성들이 왕을 뒤쫓아 원망하여 이가(俚歌)를 지어 부르기를,
충성이란 사모요
거동은 곧 교동일세
일 만 흥청 어디 두고
석양 하늘에 뉘를 좇아 가는고
두어라 예 또한 가시의 집이니
날 새우기엔 무방하고 또 조용하지요
하였으니, 대개 사모(紗帽)와 사모(詐謀), 거동(擧動)과 교동은 음이 서로 가깝고, 방언에 각시[婦]와 가시[荊棘]는 말이 서로 유사히기 때문에 뜻을 빌어 노래한 것이다.
폐부(廢婦) 신씨(愼氏)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또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원전】 14 집 67 면
【분류】 *왕실(王室)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인사(人事)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변란(變亂) / *인물(人物) / *재정(財政) / *건설(建設) / *신분(身分) / *풍속(風俗) / *역사(歷史) / *가족(家族) / *호구(戶口)


[주D-001]금상(今上) : 중종(中宗).
[주D-002]정희(貞喜) : 세조비 윤씨(尹氏).
[주D-003]소혜(昭惠) : 덕종(德宗)비 한씨(韓氏).
[주D-004]안순(安順) : 예종(睿宗)비 한씨.
[주D-005]의지(懿旨) : 왕비의 명령. 여기에서는 대비(大妃)의 명령.
[주D-006]촉상(屬上) : 위를 범하는 것.
[주D-007]무인일 : 9월 1일.
[주D-008]고화(膏火) : 화환(禍患).
[주D-009]적인(謫人) : 귀양간 사람.

 

 

연려실기술 제7권

 중종조 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중종(中宗)


중종 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 대왕(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은 휘는 역(懌)이며, 자는 낙천(樂天)으로, 성종(成宗)의 둘째 아들이다. 정현왕후(貞顯王后)가 홍치(弘治) 원년 무신년(1488) 성종 19년 3월 5일 기사일에 낳았다. 처음에는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封)해졌다가 정덕(正德) 병인년(1506) 9월 무인일에 즉위하여 가정(嘉靖) 23년 갑진년(1544) 11월 14일에 인종(仁宗)에게 전위(傳位)하였으며 15일 경술에 창경궁(昌慶宮) 환경전(歡慶殿)에서 승하하니, 재위 39년이요, 수는 57세이다.명(明) 나라에서 공희(恭僖) 공경히 위를 섬기는 것을 공(恭)이라 하고 조심스럽고 공순함을 희(僖)라 한다. 라는 시호를 주었다. 능은 정릉(靖陵) 광주(廣州) 선릉(宣陵) 동편 건좌(乾坐 북서)이다. 을사년 2월에 처음 고양(高陽) 희릉(禧陵)에 모셨다가 명종(明宗) 17년 임술 9월 4일에 이장하였으며, 표석이 있다. 명종 때 홍춘경(洪春卿)이 지은 묘지에 정릉으로 이장한 자세한 사적이 적혀 있다. 이다.
○ 비(妃) 공소순렬단경 왕후(恭昭順烈端敬王后) 신씨(愼氏)는, 본관은 거창(居昌)이고, 좌의정 증 영의정 익창부원군 신도공(左議政贈領議政益昌府院君信度公) 수근(守勤)의 딸이다. 성화(成化) 23년 정미년(1487) 성종 18년 1월 14일에 태어났고, 기미년에 가례를 행하였다. 처음에는 □□부부인(府夫人) 군호(君號)는 자세하지 않다. 에 봉해졌다가 정덕(正德) 병인년 (1506) 9월 2일에 중전이 되고, 9월 9일에 사제(私第)로 쫓겨났으며 가정 정사년(1557) 명종 12년 12월 7일 병술에 승하하였다. 본가(本家)의 기록에는 12월 5일로 되어 있으나 실록(實錄)에는 7일로 기일(忌日)을 삼고 있으므로 지금 그에 따르고 있다. 수는 71세이다. 영조(英祖) 15년 기미년(1739)에 복위(復位)되어 종묘에서 제사 지낸다. 능은 온릉(溫陵) 양주(楊州) 서쪽산 장흥면(長興面) 수회동(水回洞) 해좌(亥坐 북서)이다. 이다.
○ 계비(繼妃) 선소의숙장경 왕후(宣昭懿淑章敬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영돈녕부사 파원부원군 정헌공(領敦寧府事坡原府院君靖憲公) 여필(汝弼)의 딸이다. 홍치 4년 신해년(1491) 성종 22년 7월 6일 경진에 호현방(好賢坊) 집에서 태어났다. 정덕 병인년(1506)에 궁중에 들어와 처음에는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가 정묘년에 마침내 왕비로 책봉(冊封)되었다. 을해년(1515) 중종 10년 3월 2일 기미에 경복궁(景福宮) 별전(別殿)에서 승하하니, 수는 25세이다.숙신명혜(淑愼明惠) 숙(淑) 자가 겹치기 때문에 어첩(御牒)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라는 휘호(徽號)를 올렸다. 명종 정미년에 선소의숙(宣昭懿淑)이라는 휘호를 더 올렸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다. 능은 희릉(禧陵) 고양(高陽) 남쪽 원당리(元堂里) 간좌(艮坐 북동)이다. 처음에는 을해년 윤4월에 광주(廣州) 헌릉(獻陵) 바른편 산에 모셨다. 김안로(金安老)가 묘지(墓誌)를 지었다. 중종 32년 정유에 이장하였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이다.
○ 계비(繼妃) 성렬인명문정 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영돈녕부사 파산부원군 정평공(領敦寧府事坡山府院君靖平公) 지임(之任)의 딸이다. 홍치 14년 신유년(1501) 연산 7년 10월 22일 정묘에 태어나 정덕 정축년(1517)에 왕비로 책봉되어 태평관(太平館)에서 가례를 행하였다.명종 정미년에 성렬(聖烈)이라는 존호를 올렸고, 9월에 다시 인명(仁明)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가정 44년 을축(1565) 명종 20년 4월 7일 계유에 창덕궁(昌德宮) 소덕당(昭德堂)에서 승하하니, 수는 65세이다.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낳았다. 능은 태릉(泰陵) 양주(楊州) 남쪽 노원면(蘆原面) 임좌(壬坐 북)이다. 을축년 7월 15일에 장사지냈으며, 표석이 있다. 이다.
○ 아들 아홉과 딸 열 하나를 두었다.
사(嗣) 인종대왕(仁宗大王)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낳았다.
사(嗣) 명종대왕(明宗大王)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낳았다.
1녀 효혜공주(孝惠公主) 장경왕후가 낳았다. ○ 남편은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로,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아버지는 안로(安老)이다.
2녀 의혜공주(懿惠公主) 문정왕후가 낳았다. ○ 남편은 청원위(淸原尉) 한경록(韓景祿)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아버지는 첨지 승권(承權)이다.
3녀 효순공주(孝順公主) 문정왕후가 낳았다. ○ 남편은 능원군(綾原君) 구사안(具思顔)으로,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아버지는 현감 순(淳)이다.
4녀 경현공주(敬顯公主) 문정왕후가 낳았다. ○ 남편은 영천위(靈川尉) 신의(申檥)로,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아버지는 목사 수경(秀涇)이다.
5녀 인순공주(仁順公主) 문정왕후가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1남 복성군(福城君) 미(嵋)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낳았다. ○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현감 증 찬성(贈贊成) 인범(仁範)의 딸이다. 정해년에 화를 입었다가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신성군(信城君)이 봉사(奉祀)한다.
2남 해안군(海安君) 희(㟓) 숙의 홍씨(淑儀洪氏)가 낳았다. ○ 부인은 진주 유씨(晉州柳氏)로, 진산군(晉山君) 증 찬성 홍(泓)의 딸이며, 후처는 거창 신씨(居昌愼氏)로, 참봉 증 찬성 홍유(弘猷)의 딸이다.
3남 금원군(錦原君) 영(岭) 희빈 홍씨(熙嬪洪氏)가 낳았다. ○ 부인은 해주 정씨(海州鄭氏)로, 도사 증 찬성 승휴(承休)의 딸이다.
4남 영양군(永陽君) 거(岠) 창빈 안씨(昌嬪安氏)가 낳았다. ○ 부인은 순흥 안씨(順興安氏)로, 판관 증 찬성 세형(世亨)의 딸이다.
5남 덕양군(德陽君) 기(岐) 숙의 이씨(淑儀李氏)가 낳았다. 시호는 정희(靖僖)이다. ○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판서 증 찬성 찬(纘)의 딸이다.
6남 봉성군(鳳城君) 완(岏) 희빈 홍씨(熙嬪洪氏)가 낳았다.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 부인은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정(正) 증 영상(贈領相) 유인(惟仁)의 딸이다.
7남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岹) 창빈 안씨(昌嬪安氏)가 낳았다. ○ 부인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로, 판중추부사 증 영의정 세호(世虎)의 딸이다.
1녀 혜순옹주(惠順翁主)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낳았다. ○ 남편은 광천위(光川尉) 김인경(金仁慶)으로, 본관은 광주(光州)이고, 아버지는 참의 헌윤(憲胤)이다.
2녀 혜정옹주(惠靜翁主) 경빈 박씨가 낳았다. ○ 남편은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로, 정해년에 화를 입었다가 뒤에 신원되었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서주(叙疇)이다.
3녀 정순옹주(貞順翁主) 숙원 이씨(淑媛李氏)가 낳았다. ○ 남편은 여성위(礪城尉) 문단공(文端公) 송인(宋寅)으로,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아버지는 첨지 지한(之翰)이다.
4녀 효정옹주(孝靜翁主) 숙원 이씨가 낳았다. ○ 남편은 순원위(淳原尉) 조의정(趙義貞)으로, 본관은 순창(淳昌)이며, 아버지는 부사 침(琛)이다.
5녀 숙정옹주(淑靜翁主) 숙원 김씨가 낳았다. ○ 남편은 능창위(綾昌尉) 구한(具澣)으로,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아버지는 부정(副正) 신경(信璟)이다.
6녀 정신옹주(靜愼翁主) 창빈 안씨(昌嬪安氏)가 낳았다. ○ 남편은 청천위(淸川尉) 한경우(韓景祐)로,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아버지는 현감 자(慈)이다.
○ 신비(愼妃)가 사제로 쫓겨나자 예조 판서 송일(宋軼)과 참판 정광세(鄭光世)가 아뢰기를, “신씨가 나갔으니 처녀를 뽑아 내직(內職)을 갖추게 하고, 또 중궁을 책봉하는 일도 미리 거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대로 하라.”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 정묘년(1507) 6월에 좌의정 박원종(朴元宗) 등이 왕비를 책봉할 것을 청하니, 곧 윤 숙원(尹淑媛)을 왕비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조야기문》
○ 정묘년에 김안국(金安國)이 중시(重試)에 뽑혀 지평으로 임명되었다. 그때는 연산군(燕山君)의 혼정(昏政)의 잔재가 남아서 상례(喪禮)가 행해지지 않은 채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김안국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삼강(三綱)은 천지의 큰 도리로서 옛 사람이 ‘하늘을 떠받치는 세 기둥’이라고 하였으니 하루도 폐할 수 없습니다. 폐주(廢主 연산군)가 단상법(短喪法)을 쓴 뒤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어버이를 잊고 예를 저버려 윤리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분명하게 하교를 내려 특별히 권선징악하는 법을 보여 풍속과 교화를 세우소서.” 하였다. 《조야기문》
○ 무진년 검열 권벌(權橃)이 봉교 이희증(李希曾)ㆍ김영(金瑛), 대교 윤인경(尹仁鏡)ㆍ정웅(鄭熊), 검열 문관(文瓘)ㆍ김희수(金希壽)ㆍ소세양(蘇世讓) 등과 함께 무오 사국(戊午史局)에 관한 일을 논계(論啓)하며, 이극돈(李克墩)을 추죄(追罪)하고 김종직(金宗直)의 원통함을 풀어주기를 청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 무진년에 중종이 직접 글을 써서 정원에 내리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그 허물을 듣기 좋아하는 이는 적고 듣기 싫어하는 이는 많았다. 신하로서 그 임금의 허물을 알고 과감히 간(諫)하여 옳은 길로 인도하는 자는 곧 곧은 신하요, 그 임금의 잘못을 알면서도 아첨하느라 잘한다고 하는 자는 곧 아첨하는 신하이다. 옛날에 당 태종(唐太宗)이 밖으로는 바른말을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었으나 안으로는 부끄러울 만한 일이 있었으니, 나는 감히 하지 못한다.만약 과실이 있다면 외정(外政)의 신하들도 모두 다 말해야 하는데, 더구나 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 있어서랴. 바야흐로 지금 나의 잘잘못에 대해 너희들이 각각 숨김 없이 말하라. 비록 지나친 말이 있더라도 죄주지 않겠다.” 하였다. 이어 황모필(黃毛筆) 40자루와 먹[墨] 20홀(笏)을 정원과 보문관(寶文館)에 내려주며 이르기를, “지금 하사한 붓과 먹은 무릇 나의 과실을 숨김 없이 말하여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갑술년에 이조에 특별히 유시하여 고세보(高世輔)를 숨김없이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로 삼았다. 세보의 아들 증(曾)이 혜민서 교수로 있었는데, 이조에서 이 사실을 아뢰니 또 활인서 제조 하해종(河海宗)과 서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세보와 해종은 모두 연산조 때 음란을 일삼던 신하인데, 세보가 더욱 연산군의 음란을 부추긴 엉큼한 자였다. 반정(反正) 후에 이내 수의(首醫)가 되고 청탁질을 많이 하여 이때에 이르러 특명으로 벼슬을 준 것이다. 임금은 또 잡술(雜術)에 마음을 두어 지관(地官)과 복자(卜者)들을 모두 불러 보고 어의(御衣)를 내려주었는데, 술객(術客) 조륜(趙倫)은 궁중을 무상으로 출입하였다. 《음애일기(陰崖日記)》
○ 과거에 완성군(莞城君) 귀정(貴丁)을 정국 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승진시켜 군(君)을 봉하였는데, 3년 뒤에 간관들이 반정 때에 하찮은 공으로 높은 벼슬을 받은 이들을 논열(論列)하여 몇 달을 두고 항쟁(抗爭)하는 소(疏)를 올렸다. 이에 임금은, 완성군은 선조(先朝)의 옛 신하이고 또 종친의 늙은이이므로 특별히 고칠 수 없다고 유시하고 그 밖의 사람들은 윤허하였다. 심사순(沈思順)이 지은 완성군의 <묘표(墓表)>.


 

 

 

 

 燕山君 墓 (사적 제362호)

 조선 10대 임금이신 연산군 (燕山君, 1476-1506)은  9대임금이신 (成宗, 1457- 1494)과 윤기무의 딸 폐비윤씨사이에서 태어나 7살의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어 19세에 조선왕조 제10대 임금이 되었다 . 연산군은 붓글씨를 잘쓰고 실록에 있는 시가 130여 편이나 될정도로 시를 잘짓는 임금이었다.

즉위 초에는 성종시대에 형성된 평화로운 풍요가 그대로 이어져 왔고 성종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사치풍조를 잠재우기 위하여 구체적인 금제절목(禁制節目)을 만들어 강력한 단속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며,

민간의 동정이나 관료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하여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변방 지역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 되자 귀화한 연진인을 회유하여 변방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하였으며 ,문신의 사가독서 (유능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다시 실시하여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했으며, 세조 이래 3조 국조보감을 편찬해 제왕수업에 귀감이 되었다.    

                       연산군은 사화로 인한 백성의 지탄을 받아 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추방되어 그기서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왕  

 

 

   이곳이 조선 10대임금이신 연산군 ,부인 거창신씨 양위의 묘지

 

 

 

 

연려실기술 제6권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윤씨(尹氏)의 폐사(廢死)


숙의(淑儀) 윤씨는 증 좌의정(贈左議政) 기묘(起畝)의 딸이며 성화(成化) 병신년에 연산군(燕山君)을 낳았고, 이해 8월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 정유년에 어떤 사람이 감찰상궁(監察尙宮)의 집안 사람이라고 거짓 일컬으면서 권 숙의(權淑儀)의 집에 투서를 하였다. 숙의가 그 투서를 임금에게 올렸는데, 그 글에 “엄 소용(嚴昭容)과 정 소용(鄭昭容)이 장차 왕비와 원자(세자로 봉하기 전의 맏아들)를 해치려고 한다. ……” 하였다. 임금은 왕비의 방에서 작은 주머니에 든 비상과 작은 상자 속에 간수된 방술[方穰]하는 서책을 보았다. 임금이 왕비에게 물으니, 삼월(三月)이란 여종이 친잠(親蠶)할 때에 올린 것이라 했으나, 후에 삼월이 제가 쓴 것이 아니라고 공초(供招)하였다. 임금이 장차 왕비를 폐하려고 조정에 의논하니 영의정 정창손은 강력하게 간할 수 없었다. 임금은 왕비를 빈(嬪)으로 강등하여 책봉하고 자수궁(慈壽宮)에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승지 이극돈과 임사홍이 힘써 간하다가 중지하였다.삼월이란 여종은 목을 매어 죽이고 그 나머지 사람은 곤장을 치고 귀양 보내었다. 대간은 부부인(府夫人) 신씨(申氏) 윤비(尹妃)의 어머니이다. 도 중궁의 일에 참여하여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써 부부인의 직을 삭탈하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후에 임금은 중궁이 외부 사람과 서로 통을 하는 것을 보고 즉시 정원을 시켜 금지시켰다. 《야언별집》
○ 돈녕부 참봉인 윤우(尹遇)와 선전관 윤구(尹遘)를 옥에 가두게 하였다.
○ 무술년에 임금이 장차 왕비를 폐위하려고 하니, 허종(許琮)은 진황후를 폐한 한 무제(漢武帝)와 맹황후를 폐한 송 인종(宋仁宗)의 실수를 들어 그 옳지 않음을 힘써 진술하였다. 《명신록》
○ 무술년에 임금이 윤구를 불러 묻기를, “전토의 송사는 맡은 관청이 있는데, 네가 어찌 너의 어머니를 시켜 중궁에게 간청했느냐?” 하니, 윤구는 “그것은 신이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후에도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때는 네가 비록 알지 못하더라도 나는 마땅히 너에게 죄 줄 것이다. 중궁은 국모이므로 사사 일로 청할 수 없는 법이다.” 하였다.
○ 경자년 10월에 윤비(尹妃)는 죄를 지어 폐출되었다. 11월에 숙의 윤씨(尹氏)를 승격시켜 비(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로 삼았다.
처음에 윤비가 원자를 낳아 임금의 사랑이 두터워지자 교만하고 방자하여 여러 후궁들 양가(良家)의 엄씨(嚴氏)와 정씨(鄭氏) 을 투기하고 임금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어느 날 임금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났으므로 인수대비(仁粹大妃) 소혜왕후(昭惠王后) 가 크게 노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돋구어 외정(外廷)에서 대신에게 보이니 윤필상(尹弼商) 등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의견을 아뢰어 윤비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치도록 하였다. 《기묘록》
○ 이때 임금이 장차 중궁을 폐하려고 위엄이 진동하니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손순효(孫舜孝)가 소를 올리기를, “예(禮)를 상고하건대, 부인에게 일곱 가지 내쫓길 나쁜 일[七去之惡]이 있으니 첫째는 자식이 없으면 내쫓기고, 둘째는 질투하면 내쫓긴다 했습니다. 두 가지를 비록 다 가졌더라도 만약 세 가지 내쫓기지 않을 일[三不去]이 있으면 옛사람은 오히려 용서했는데 한 가지 내쫓길 것만 있고 여섯 가지 허물이 없는데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물며 원자의 모후를 단 하루 동안이라도 궁벽한 여염집에 있도록 하겠습니까. 왕비 윤씨는 일찍이 만복의 근원을 받아 홀로 아들 많이 낳는 경사를 얻었는데, 하루아침에 여염집에 물러가 있게 하고 또 공봉(供奉)할 물자까지 끊어버렸으니 비록 자기 허물로 인한 것이지마는 그렇듯 전하께서 박정해서야 되겠습니까.군신과 붕우 사이에 있어서는 은혜가 의리보다 앞서야 될 것입니다. 훗날에 원자가 측은한 마음을 가진다면 전하께서 어찌 후회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동문선》 ○ 《명신록》에는, “손공(孫公)이 소를 올려 극력 말하고 또한 통곡하였다.” 한다.
○ 이해에 한명회 등을 보내어 명 나라 조정에 아뢰기를, “계비(繼妃) 윤씨는 성품이 패려(悖戾)하여 국모의 덕이 없고 과실이 많아 신민의 바람을 크게 잃었으므로, 부득이 신(우리나라 임금이 중국 황제에 대하여 자기를 ‘신’이라 하였다)의 조모 윤씨(尹氏)와 신의 어머니 한씨(韓氏)의 명을 받들어 폐하여 친정에 내보내고, 부실(副室) 윤씨(尹氏)로써 처를 삼았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계비의 고명(誥命)과 관복을 주옵소서.” 하였다. 《고사촬요》ㆍ《조야기문》
○ 계묘년에 대사헌 채수(蔡壽)가 경연에 입시하여 교리(校理) 권경우(權景祐)와 더불어 아뢰기를, “폐비 윤씨는 비록 폐위되었으나 일찍이 전하의 배필이었는데, 지금 여염집에 거처하고 봉양도 군색하니 청컨대, 따로이 집 한채에 거처하게 하고 관에서 일용 물자를 공급해 주소서.” 하였다.임금은 크게 노하여 그들이 원자에게 아첨해서 훗날을 바란다고 하며 공경들을 전부 모아 채수(蔡壽)를 국문하였으나 채수는 그대로 대답하고 굴복하지 않았다. 또 의금부에 가두어 국문하였으나 채수는 역시 전과 같이 대답하였다. 마침내 그를 놓아 주고 죄주지 않았으며, 3년 후에 비로소 임용하였다. 《명신록》ㆍ《국조기사》
이때 경우는 동궁 시독관(侍讀官)으로서 아뢰기를, “아들이 동궁이니 어머니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여염집에 거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크게 노하여, “그가 세자에게 몰래 붙어서 훗날에 은혜 받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여 국문하게 하였다.경우는 조금도 꺾이지 않은 채 사리대로 말하고 정성을 털어놓아 역대의 군주들이 폐비를 대우한 일을 인증(引證)하면서 말이 더욱 간절하니 임금은 이에 노염을 풀고 그 관직만 파면시키었다. 《패관잡기》ㆍ《부계기문》
○ 기유년 여름 5월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이때 경상 감사 손순효(孫舜孝)가 울면서 소를 올려 극력으로 간하였다.
윤씨는 폐위되자 밤낮으로 울어 끝내는 피눈물을 흘렸는데 궁중에서는 훼방하고 중상함이 날로 더하였다. 임금이 내시를 보내어 염탐하게 하였더니, 인수대비(仁粹大妃)가 그 내시를 시켜, “윤씨가 머리 빗고 낯 씻어 예쁘게 단장하고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이 없다.”고 대답하게 하였다. 임금은 드디어 그 참소를 믿고 죄를 더 주었던 것이다. 《기묘록》
○ 윤씨(尹氏)가 폐위된 후에 임금은 항상 언문(諺文)으로 그 죄를 써서 내시와 승지를 보내어 날마다 장막을 사이에 두고 읽어 그가 허물을 고치고 중궁에 복위되기를 바랐으나 윤씨가 끝내 허물을 고치지 않으므로 마침내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이 왕위를 이어받자 그 당시의 승지들을 모두 죽였는데, 채수는 언문을 알지 못하므로 홀로 죽음을 면하였다. 《파수편(破睡篇)》
○ 죽음을 내리는 전지에 이르기를, “폐비 윤씨는 성품이 본래 음험하고 행실에 패역(悖逆)함이 많았다. 전일 궁중에 있을 때 포학함이 날로 심하여 이미 삼전(三殿)에게 공순하지 못했고 또 나에게도 행패를 부리며 노예처럼 대우하여 심지어는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으나, 오히려 이것은 사소한 일이다. 그는 일찍이 역대 모후들이 어린 임금을 끼고 정사를 마음대로 하였던 일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였고, 또 항상 독약을 품 속에 지니기도 하고 혹은 상자 속에 간수하기도 했으니, 그것은 다만 그가 시기하는 사람만 제거하려는 것만이 아니고 장차 나에게도 이롭지 못한 것이었다. 일찍이 혼자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게 되면 장차 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하니, 이것은 종묘와 사직에 관계되는 부도한 죄이다. 그런데도 차마 대의대로 처단하지 않고 다만 폐하여 서인을 삼아 사제(私第)에 있게 하였더니,지금 외부 사람들이 원자가 점점 커가는 것을 보고는 앞뒤로 시끄럽게 이 문제로 말을 하니 비록 지금은 그다지 걱정할 것이 못 되지만 훗날의 화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만약 후일에 그의 흉험한 성질로 국권을 잡게 된다면 원자가 비록 현명하더라도 중간에서 어찌 할 수 없게 되고 발호(跋扈)하는 마음은 날로 더욱 방자하게 될 것이니, 한(漢) 나라 여후(呂后)와 당(唐) 나라 무후(武后)의 화를 멀지 않아 보게 될 것이므로 나는 생각이 이에 미치면 매우 가슴이 선뜻하다. 지금 만약 이럭저럭 넘기고 큰 계획을 결정하지 않아 후일 나라 일이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뉘우쳐도 어찌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한(漢)의 무제(武帝)도 오히려 만세의 계획을 위하여 죄 없는 구익부인(鉤弋夫人)을 죽였는데 하물며 이 음험한 사람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음에랴. 이에 이달 16일에 그 사제에서 죽게 하노라.” 하였다. 《소문쇄록》
○ 20일에 예조에 교지를 내리기를, “폐비의 죄악은 사책(史策)에 밝게 나타나 있으니 국민이 함께 분개할 뿐만 아니라 천자께서도 폐위를 허용한 것이다.나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좋은 사람을 배필로 얻지 못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의 큰 덕에 누를 끼치게 되고 아래로는 신민의 큰 기대를 저버렸으니 부끄러운 마음 헤아리기 어렵도다. 천지 신명과 조종의 도와주심에 힘입고 삼전(三殿)의 간절하신 말씀을 받들어 내 몸은 이미 당(唐) 나라 중종(中宗)의 화를 면하였고 진(晋) 나라 가후(賈后)의 죄를 처단하였으니 이것은 대신들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바이다. 나는 지금도 전일을 생각하고는 밤중에 탄식하면서 홀로 앉아 잠못 이룬 지가 몇 날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비록 그에게 영영 제사를 끊더라도 영혼인들 무엇이 원통하겠으며 난들 무엇이 불쌍하랴마는,다만 어머니(윤씨)가 아들(원자) 덕으로 영화롭게 됨은 임금이 주는 은혜이고, 훗날의 간악함을 예방한 것은 임금이 해야 할 정책인 것이다. 동궁의 심정을 생각해보면 어찌 가엾지 않으리오. 이제 특히 그의 무덤을 ‘윤씨의 무덤’이라 하고,묘지기 두 사람을 정하여 시속 명절 때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여 그의 아들을 위로해 주고 또 죽은 영혼도 감동하게 할 것이니, 내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바꾸지 말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게 하라.” 하였다. 《소문쇄록》
폐비에게 사약을 내릴 때 이세좌(李世佐)가 대방승지(代房承旨)로서 약을 가지고 갔다.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와 그 아내와 한 방에 자는데, 그 아내가 묻기를, “듣건대 조정에서 계속하여 폐비의 죄를 논한다 하더니 결국은 어찌 될까요?” 하였다. 세좌(世佐)가 “지금 이미 약을 내려 죽였다.” 하니 아내는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슬프다. 우리 자손이 종자가 남지 않겠구나. 어머니가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아들이 훗날에 보복을 않겠는가. 조정에서 장차 세자를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하더니, 연산군 갑자년에 세좌는 그 아들 수정(守貞)과 함께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송와잡기》


 

[주D-001]숙의(淑儀) : 궁중의 여환(女宦)으로서, 종3품(從三品)의 내명부(內命婦)를 말한다.
[주D-002]친잠(親蠶) : 왕비가 친히 누에를 기르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으로 왕의 옷을 만들어 제공한다고 한다.
[주D-003]여섯 가지 …… 못하겠습니까 : 부인이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있어도 내쫓지 아니하는 세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 첫째는, 시부모의 상복을 입고 있는 동안, 둘째는 돌아갈 친정이 없을 경우, 셋째는 시집올 때에 빈천하였는데, 시집온 후로 부귀하여졌을 경우에는 내쫓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주D-004]삼전(三殿) : 성종의 조모인 정희(貞熹)왕후, 생모인 소혜(昭惠)왕후, 양모인 안순(安順)왕후를 말한다.
[주D-005]여후(呂后) : 한 나라 고조의 황후로서 고조를 도와 오다가 고조가 죽은 뒤에 여주(女主)로 집권하여 여씨 일족을 왕으로 봉하고, 유씨(劉氏)의 한 나라를 위태롭게 한 ‘여씨의 난’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주D-006]무후(武后) : 측천무후라고도 하는데, 당 나라 고종의 황후로서 고종이 죽은 후에 당 황실(唐皇室)의 자손을 쫓아내 죽이고, 자기가 여주(女主)가 되어 신성황제(神聖皇帝)라 일컫고 국호도 당(唐)을 없애고 주(周)라 하였으나 후에 재상 장간지(張柬之) 등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주D-007]구익부인(鉤弋夫人) : 한 나라 무제(武帝)의 궁녀 조첩여(趙婕妤)를 말하는데, 소제(昭帝)의 생모이다. 무제가 자기는 늙고 소제는 어리므로 후일 자기가 죽은 뒤에 어린 임금을 끼고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죽음을 내렸다.
[주D-008]중종(中宗)의 화 : 중종이 황후인 위후(韋后)의 음란하고 방자함을 방치하였다가 뒤에 위후에게 도리어 시해를 당하였다.
[주D-009]가후(賈后) : 진(晋) 나라 혜제(惠帝)의 황후인데, 흉한(凶悍)하고 음란하여 국정을 어지럽히다가 뒤에 처단 당하였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연산군부인신씨지석(燕山君夫人愼氏誌石)이다. 1537년(중종 32년)에 제작된 이 지석은 5편의 직사각판형 백자(白瓷) 지석으로, 글씨는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있다. 신씨(1476~1537년)는 1488년(성종 19년)에 연산군의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었다가, 연산군이 즉위하자 왕비(王妃)가 되었지만, 1506년(중종 원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연산군과 함께 폐위되었다. 연산군은 유배지인 강화도(江華島) 교동(喬洞)에서 죽어 그 곳에 묻혔는데, 부인 신씨가 중종에게 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으로 옮겨달라고 청하여 1513년(중종 8년)에 이장(移葬)하게 되었다. 현재 부인 신씨의 묘는 연산군의 묘와 나란히 있으며, 사적 3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석에는 부인의 가계(家系)와 평소 성품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燕山君 夫人 愼氏 誌石
1
燕山君夫人愼氏墓誌銘」嘉善大夫漢城府右尹兼」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 府副摠管鄭士龍 撰」
愼氏之先系出居昌其顯自」 新羅始有諱以衷判利川縣」 事 贈議政府右贊成諱詮」 黃海道觀察使 贈議政府」
領議政考諱承善捷魁科又」 擢拔英試參翼載佐理功臣」

2
官至議政府領議政居昌府 院君 贈謚章成以貴追贈」  三代▣中牟縣主寔臨瀛大」 君璆之女也婫德儷美克生」
夫人聰慧異常生甫六歲縣」 主▣不煩▣▣▣▣婦則成」  化戊申選入東宮奉承」 四殿備盡誠謹受小學內訓諸」
篇靡不究解甲子以後燕山」 荒悖夫人隨事進規釐救頗」
3
多丙寅燕山廢出居私第」  今上卽祚憫念有加以嬪禮供」  給又賜京第」貞顯特賜臧獲嘉靖丁酉夫人」寢疾卒」 上復賜賻祭」    
命以王后考妣禮營葬皆」   異數也夫人靜重寡言君未亡」  三十餘年親戚仰其賙急僕」妾承其撫愛世以此多之夫」
4
人生于成化丙申十一月二」  十九日終于嘉靖丁酉四月」  初八日享年六十有二是年」  六月二十六日葬于楊州道」
峯山海村里之原與燕山同」   域異塋夫人生四男三女皆」  夭一女出嫁綾川君具壽永」   子文璟生一男曰渰今爲活」
人署別提初娶僉正沈思恭」   之女無嗣繼娶參判黃孝獻」
5
之女生一女尙幼渰自撰夫」  人行狀來請銘銘曰」  生極其榮 歿又不替 托」  嗣離孫 亦云能世 義有」
三從 最貴從奮 納刻玄」  竁 用詒子後」

 

연산군부인(燕山君夫人) 신씨묘지명(愼氏墓誌銘)

가선대부 한성부윤 겸동지성균관사 오위총 부부총관(嘉善大夫 漢城府右尹 兼同知成均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

정사룡(鄭士龍)은 찬(撰)하노라. (동래인이며, 호가 호음이며 고행이 의령이다) 

신씨(愼氏)의 선계(先系)는 거창(居昌)에서 나와 세상에 드러난 것은 신라(新羅)때 부터이다.휘(諱) 이충(以衷)은 판이천현사(判利川縣事)를 지냈고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증직이 되고 휘(諱) 전(詮)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고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증직이 되었다. 부(父) 휘(諱) 승선(承善)은 괴과(魁科)에 급제하였고 또 발영시(拔英試)에서 발탁이 되어 참익재좌리공신(參翼載佐理功臣)이 되었다.
벼슬은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에 이러렀고, 시호를 내리고 글을 지어 귀하게 여겨 삼대(三代)를 미루어 증직이 되었다.

중모현주(中牟縣主)   는 진실로 임영대군(臨瀛大君)
의 딸이다. 덕(德) 아름답고 능히 태어나 부인(夫人)의 총명하고 지혜로움을 남달라 태어난 지 여섯 해가 되어 현주(縣主)가 되어 ~ 결 ~ 를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다. 부인은 성화(成化) 무신년(戊申年)에 동궁(東宮)으로 선발이 되어 들어가 사전(四殿)을 받들어 모시기를 정성을 다하고 삼가 소학(小學)과 내훈(內訓) 등 여러 편(篇)을 수업 받으면서 끝까지 이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갑자년(甲子年)이후로 연산(燕山)이 황패해지자 부인(夫人)이 일마다 바로잡아 준 것이 자못 많았다. 병인년(丙寅年) 연산(燕山)이 폐위가 되어 사저(私邸)로 쫓겨나자 지금의 왕께서 왕이 되시어 민망하게 여겨 빈(嬪)의 예를 더하여 주었다. 또 서울에 집을 내리고 정현왕후(貞顯王后)께서 특별히 종을 내리셨다. 가정(嘉靖) 정유년(丁酉年) 부인이 병으로 죽자 왕께서 다시 부의(賻儀)를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고 왕후고▨(王后考▨)의 예로 장사를 지내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 남다른 대우였다. 부인(夫人)은 조용하면서도 정중하고 말이 적어 연산군(燕山君)이 죽기 30여 년 동안 친척들이 ▨를 우러러 보았다. 종들이 어루만지고 사랑해주심을 받들어 대대로 이로써 종질하는 자들이 많았다. 부인(夫人) 성화(成化) 병신년(丙申年) 11월 29일에 태어나 가정(嘉靖) 정유년(丁酉年) 4월 8일죽으니 향년 61세였다. 그해 6월 26일에 양주(楊州) 도봉산(道峯山) 해촌리(海村里)의 언덕에 장사를 지내니 연산(燕山)과는 같은 지역이면서 다른 봉분이다. 부인(夫人)은 4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고 딸 하나 만이 능천군(綾川君) 구수영(具壽永)의 아들 문경(文璟)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하나를 낳으니 ?였다. 지금 활인서 별제(活人署 別提)가 되었다. 처음엔 첨정(僉正) 심사공(沈思恭)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가 후사가 없어 참판(參判) 황헌지(黃孝獻)의 딸에게 다시 장가를 가 딸 하나를 두니 아직 어리다. 자신이 부인(夫人)의 행장(行狀)을 찬술하여 와서 명(銘)을 청하였다. 명(銘)하기를,

살아서 영광 지극하니   죽어서도 없어지지 않네.  자식에게 맡기니  세상에 능하다고 하네.
삼종(三從)의 의리가 있지만   쫓아서 떨친 것이 가장 귀하다네.  무덤을 새겨 들이니 자손들 ▨하리.

 

 

                                     조선10대임금  연산군 지묘 묘비 

 

    燕山君

燕山君甞作絶句曰時許群賢宴畫亭閒憑花酒覺 昇平何徒争喜鴻私厚咸欲思忠獻以誠又曰重 賢寬許㑹銀䑓春滿長途叱撥催不啻醉憐閒夜     月䢜牽歌管可重徊適庵曹伸追次其韻曰撤人廬舍揔為亭採却青紅作蓮平誅盡元勳屠諌輔    只留卑㡌表忠誠萬人餅死築葱䑓舞罷迓祥賜 錦催忸怩欲尋諸弟骨却於海上暫徘徊

 

연산군은 이름은 융(㦕)이며, 성종(成宗)의 원자요, 폐비 윤씨(尹氏)가 낳았다. 성화(成化) 병신년에 나서 홍치(弘治) 을묘년에 왕위에 오르고, 정덕(正德) 병인년에 폐위되니 왕위에 있은 지 12년만에 연산군(燕山君)으로 강봉되어 교동(喬桐)으로 내쫓겼다.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나니 수(壽)가 31세였다. 묘는 양주(楊州) 해등촌(海等村)에 있다.(해등촌이 지금의 방학동)


 


              묘지석 망주석 비석 상석 장명등 향로석 문인석  

   서울시내 가장오래된 노거수 은행나무 수령 830년  도봉 의 명소 이기도

  입구에서 바라본 모습

 

  묘지의 상설도

   ★ 연산군묘  거찬신씨 묘

       의정궁주조씨 (태종의 후궁)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 묘   

 

첫번째 양위의 묘지가  구문경의 묘지이다  휘순공주의 묘지

 

능양위 구문경 관련자료

연산군 7년 신유(1501,홍치 14)
 윤 7월3일 (기묘)
구문경·남치원·임숭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구문경(具文璟)을 숭덕 대부(崇德大夫) 능양위(綾陽尉)로, 임숭재(任崇載)를 통헌 대부(通憲大夫) 풍원위(豊原尉)로, 남치원(南致元)을 자의 대부(資義大夫) 의성위(宜城慰)로 삼았다.
【원전】 13 집 448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연산군 10년 갑자(1504,홍치 17)
 12월14일 (경오)
공주의 뜻을 보아 구순복을 특별히 놓아주다

어서를 내려 이르기를,
“구순복(具順福)을 특별히 놓아준 것은 공주의 뜻을 보아서이다. 놓아줌이 너무 빠른 듯하나, 특은(特恩)을 베푼 것이요, 간사한 자가 이미 형을 받았고 흉계가 그 처에게 있는 것도 아니며, 역사시킨 날은 비록 적다 할지라도 경계받음이 얕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순복은 임희재(任熙載)의 처인데 능양위(綾陽尉) 구문경(具文璟)의 누이동생이다.
【원전】 13 집 677 면  【분류】 *사법(司法)

연산군 11년 을축(1505,홍치 18)
 12월4일 (갑인)
능양위 구문경에게 좋은 말 3필을 내리다

능양위(綾陽尉) 구문경(具文瓊)에게 좋은 말 3필을 내렸다.
【원전】 14 집 31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중종 1년 병인(1506,정덕 1)
 9월11일 (정해)
구문경 부처의 가사와 전민을 속공하다

정승 등이 아뢰기를,
구문경(具文璟) 부처(夫妻)는 이미 직첩을 거두고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으니, 공주(公主)로 있을 때 사급(賜給)한 물건 및 가사(家舍)와 전민(田民)은 아울러 속공(屬公)시키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그렇게 하라.’ 전교하였다.구문경(具文璟)은 구수영(具壽永)의 아들이요, 폐왕의 부마다.】
【원전】 14 집 77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인사-관리(管理) / *농업-전제(田制)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신분-천인(賤人)

중종 1년 병인(1506,정덕 1)
 9월16일 (임진)
사헌부가 민효증·신극성·이승녕·노종 등을 탄핵하니 이승녕·노종의 일만 허락하다

헌부(憲府)가 아뢰기를,
“우참찬 민효증은 지독한 사람입니다. 폐왕조 때에 형조 참의가 되어 폐주의 명으로 곤장치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내한매(耐寒梅)에게 형장을 칠 때 옷 속에 물건이 있을까 의심하고 옷을 찢어 보고는 노루 가죽이 있자 곧 치계(馳啓)하였습니다. 낭관(郞官)을 시켜서 아뢰어도 되는데, 하필이면 직접 갈 것이 있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폐주가 일찍이 그를 밀위청 당상(密威廳堂上)으로 발탁하여 무릇 죄인의 판결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될수록 가학(苛虐)한 것을 좇아 무거운 쪽의 조문에 맞추어 다스렸는데 여느 동료들보다 더 심하였습니다. 또 당상·낭관은 예도가 마땅히 엄숙해야 하는데, 효증은 항상 상스러운 말씨로 낭리(郞吏)를 꾸짖었습니다. 정부(政府)는 의표(儀表)가 되는 곳이고, 경연관(經筵官)은 임금의 덕성을 보양(補養)하는 자리이며, 의금부(義禁府)는 조옥 아문(詔獄衙門)이니, 이런 사람을 이런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청하건대 체직시키소서.
신극성(愼克成)은 비록 신수근(愼守勤)의 먼 일가이기는 하나, 지위가 2품에 이른것은 모두 신씨 집안 때문입니다. 전일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집을 감독하여 지을 때, 인가를 널찍이 철거하여 극도로 사치를 다해서 시종 폐단을 만들었고, 또 상주(尙州) 목사로 있을 때는 부역과 조세가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파직시켜 밖으로 내치소서.
대사성(大司成) 이승녕(李承寧)은 사표(師表)에 적합하지 않아 공의(公議)가 시끄럽게 끊어오르니, 이 사람을 중임에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 폐조 때 각도 향시(鄕試)의 시제(試題)는 기일에 앞서 미리 출제하게 되어 있는데, 비록 전왕의 법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승녕의 처지로는 마땅히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승녕은 함께 의논하여 출제하고는 곧 아들에게 말하여 외인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는 이가 없게 하였습니다.
병조 정랑 노종(盧種)은 임사홍의 사위로서, 비록 친아들과 견줄 것은 아니나, 병조는 중요한 자리이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정승 및 여러 재상들에게 묻는다.”
하였다. 정승이 아뢰기를,
“민효증이 의 뜻에 영합하여 가학하게 하기를 힘썼다는 것은 신 등이 알지 못합니다. 효증은 성품이 본래 꼿꼿[耿介]하여, 성종조에 대간이 되어서는 정직하다는 말을 들었고, 뒤에 성천 부사(成川府使)가 되어서는 백성을 잘 다스린 업적이 있었습니다.”
하고, 유자광은 혼자 아뢰기를,
“성종조에 신이 특진관으로 입시할 적에 효증도 대간으로서 입시하였는데, 간하는 말이 바르고 간절한 것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정직한 사람이라 일컬었습니다.”
하고, 김감은 아뢰기를,
“신이 효증과 더불어 일찍이 금부 당상이 되었는데 가혹한 것을 보지 못하였고, 또 상스런 말로 낭관을 꾸짖는 것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경내(境內)에 들어간 지 4일 만에 부름을 받아 올라왔기 때문에, 신극성이 그 때 비록 상주 목사로 있었으나, 그 어진지의 여부는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정승 등이 아뢰기를,
“극성이 비록 공주의 집을 감독하여 지었으나, 각박하게 독촉한 것이 아니라, 다만 담당관으로서 역사를 감독하였을 뿐입니다. 또 신수근의 족속에도 스스로 친소(親疎)가 있는 것이니, 먼 일가까지 귀양보내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부역과 조세가 번거롭고 중하였던 것에 대해서는 그 죄가 있습니다. 이승녕·노종 등의 일은 대간의 말을 좇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승녕·노종은 아뢴 대로 하라. 민효증은 성품이 본래 강정(剛正)하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일을 하였을 뿐이지, 어찌 영합하기 위해서였겠는가? 신극성이 부역과 조세를 번거롭고 중하게 한 것은 잘못이나, 소원(疎遠)한 친족을 아울러 연좌(緣坐)시키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원전】 14 집 77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가족-친족(親族)


[주D-001]조옥 아문(詔獄衙門) : 왕의 조서를 받들어 죄범을 다스리는 관아 조선 시대는 의금부가 이에 해당되었다.
[주D-002]휘순 공주(徽順公主) : 연산군의 딸. 구문경에게 시집갔음.
[주D-003]상 : 연산.

중종 1년 병인(1506,정덕 1)
 10월30일 (을해)
헌부가 구수영을 탄핵하니 불허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구수영은 후비(后妃)의 지친으로서, 임사홍·신수근과 더불어 사돈을 맺고 궁중에 출입하면서 폐주에게 총애를 받는가 하면 사비(私婢)인 사랑(思郞)과 보비(寶非)를 바쳐 임금 마음을 고혹시켰으며, 국사가 이미 글러지자 자기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그 아들 구문경으로 하여금 절혼(絶婚)하게 했으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없습니다. 청컨대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원전】 14 집 92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가족-가족(家族) / *신분-천인(賤人) / *풍속-예속(禮俗)

중종 1년 병인(1506,정덕 1)
 11월1일 (병자)
대사간 윤희손 등이 공신의 일 등을 아뢰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다

조강에 납시었는데, 대사간 윤희손·장령 김언평이 아뢰기를,
“공신 부자 원종 공신 1등의 관작이 외람된 일은 누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이조 낭관이 은수(恩數)를 바라 자신이 제관(祭官)에 차임되기를 자원하는데 비록 자질구레한 일이지만 관작을 함부로 얻으려는 조짐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사전을 만약 도로 주면 폐사(廢寺)가 장차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청하건대 개혁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구수영은 다른 사람의 종[婢]을 강탈하여 바쳐서 폐주에게 아첨하였으니, 간사스럽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반정(反正)에 이르러서는 자기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그 아들로 하여금 절혼하게 하였으니,【아들은 능양위 구문경(具文璟)이다.】 차마 이럴수 있습니까? 청하건대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이 핍박하여 바치게 한 것이니, 어찌 감히 어기겠는가?”
하였다. 시독관 김세필이 아뢰기를,
“옛말에, ‘정성(鄭聲)을 내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 하라.’ 하였으니, 대저 아첨하는 사람은 임금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 좋아하고, 임금이 싫어하는 것을 따라 싫어하여 나라를 그르치기에 이르되, 임금은 오히려 어질게 여기고 그 화가 깊어짐을 알지 못합니다. 지금 수영이란 자는 바로 이른바 옛날의 아첨하는 사람입니다. 대군의 사위로서 궁중에 출입하면서 폐주에게 아첨하고, 사사로이 미색을 구해다가 그 욕망을 채워서 법도를 무너뜨리게까지 하였으나, 그 죄를 형언할 수 없습니다. 만약 공신이라 하여 죄주지 않으면 공덕(功德)있는 사람들이 무엇으로써 권장하는 것을 알겠습니까? 반드시 함께 대오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묵묵히 있다가 한참 만에 이르기를,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영사 박원종은 아뢰기를,
“기내(畿內) 열읍 중에 광주(廣州)의 피폐가 더욱 심하니, 청하건대 판관(判官)을 혁파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좇았다.
【원전】 14 집 92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농업-전제(田制)


[주D-001]정성(鄭聲) : 춘추 시대 정나라의 음악, 정나라와 위(衛)나라의 음악은 음란하기로 이름 있었음.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중종 3년 무진(1508,정덕 3)
 10월7일 (신미)
정광필·박수문이 조례와 나장, 휘신 공주의 이혼, 학교의 폐이에 대해 아뢰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대사헌 정광필(鄭光弼)·정언 박수문(朴守紋)이 김경의의 일을 가지고 반복하여 논하고, 광필이 또 아뢰기를,
“근래 천변(天變)이 있으니, 민원(民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례(皂隷)·나장(羅將)들의 폐단 같은 것은 조정에서 그 조(曹)와 상의하여 처치하도록 하면 되겠으나, 가까운 고을의 거주민들은 금표(禁標)의 철거로 인하여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원도(遠道)의 백성으로 충원하고 세 번을 나누어 번들게 하니, 그 번차(番次)의 도수가 잦고 식량을 싸 가지고 다니기가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이 때문에 도망치는 자가 많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원도의 백성으로 충원하지 말고, 경중(京中)에 새로 배출되는 장정으로 점차 충원하면 좋을 듯합니다. 또 근일에 전지(傳旨)를 보건대, 휘신 공주(徽愼公主)의 칭호를 삭제하고, 구문경(具文璟)의 처(妻)로 칭하게 하셨습니다. 처음에 문경의 아비 구수영(具壽永)이 이혼하기를 계청한 것은 그 사리를 몰랐던 것이며, 국가에서도 또한 이혼까지 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부부(夫婦)된 자가 비록 난신자녀(亂臣子女)에 들었다 할지라도 차마 이별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는 죄인에 들게 되면 곧 이혼시키니, 인심의 각박함을 여기에서 보겠습니다. 부부 사이에 어찌 원한이 없겠습니까?”
하고, 수문(守紋)은 아뢰기를,
“근래 학교의 폐이(廢弛)가 너무 심합니다. 조종조에서는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이 항상 그 정원에 찼었고, 윤차 당상(輪次堂上)이 수시로 재주를 시험하여 그 학과를 권장하는 방도가 지극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조의 여습(餘習) 때문에 국학 유생들이 정원에 차지 않고, 여항(閭巷)에도 또한 글을 읽는 사람이 없으니, 조종조의 옛 제도에 따라 학업을 권장하여 성취하게 하소서.”
하였다.
【원전】 14 집 280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 *신분-천인(賤人) / *윤리-강상(綱常) / *풍속-예속(禮俗)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과학-천기(天氣)
중종 3년 무진(1508,정덕 3)
 10월7일 (신미)
정광필의 말에 따라 구문경과 휘신 공주가 다시 합치는 일을 의논하게 하다

정광필(鄭光弼)에게 전교하기를,
“경이 경연에서, 천변(天變)은 혹 원한이 있어 일어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매우 좋은 말이니, 널리 의논하리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경이 말한 천변은 결국 구문경(具文璟)의 일을 말하는 것 같은데, 또한 명확하게 말하지 아니하니 그 뜻은 무엇인가?”
하니, 회계(回啓)하기를,
“신이 말씀드린 천변은, 신 등이 억울한 사정을 다 풀어 주지 못한 소치인 듯하여, 이를 아뢴 것이며, 또 신의 뜻으로는, 폐주는 비록 종묘·사직에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 여식(女息)은 아직 살아 있어 부부의 정의는 마땅히 예와 같을 것입니다. 저들이 배필이 되는 것이 국가에 무슨 꺼릴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말만으로는 이들을 다시 합하도록 할 수 없으니, 널리 의논하여 처리하여야 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부원군 이상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원전】 14 집 280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중종 3년 무진(1508,정덕 3)
 10월7일 (신미)
유순 등에 따라 구문경 부부를 결합시키고 문정부정 상과 노종도 결합시키다

유순(柳洵)이 의논드리기를,
“대저 부부의 윤리는 매우 중하고, 배필의 정의 또한 간절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비록 칠거(七去)의 법이 있었어도, 또한 차마 처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더구나 출가한 딸은 그 친부 쪽의 죄에 연좌시키지 않는 뜻이 매우 분명합니다. 다만 구수영(具壽永)이 계청하여 그 아들 구문경(具文璟)이 그 처와 이혼하게 한 것은, 오로지 폐주가 종묘 사직에 득죄하였고 그 딸이 일찍이 공주의 칭호가 있었기 때문에, 제 아들로 하여금 그대로 부부가 되게 하는 것은 마음에 미안하므로 이혼하기를 계달한 것이니, 이 또한 변란을 만나서 부득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은 성명(聖明)께서 밝게 살피시어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으니, 필부 필부(匹夫匹婦)의 원한 또한 마땅히 불쌍히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문경 부부를 다시 결합하도록 명하시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하고, 김수동(金壽童)·박원종(朴元宗)·신준(申浚)·김감(金勘)·정미수(鄭眉壽)·노공필(盧公弼)·성희안(成希顔)·박건(朴楗)·박안성(朴安性)·민효증(閔孝曾)이 의논을 하여 다 같이 의계(議啓)하니, 임금이 이에 따르고, 임사홍(任士洪)의 사위 문성부정 상(文城副正湘)과 노종(盧種)도 아울러 다시 결합하도록 하였다.
【원전】 14 집 280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풍속-예속(禮俗)
중종 3년 무진(1508,정덕 3)
 10월10일 (갑술)
구문경 부부의 가사를 반정 때 몰수하였으니 빈집을 사급하라고 전교하라

전교하기를,
구문경(具文璟) 부부를 다시 합하도록 명한다. 그 가사(家舍)를 반정(反正) 때 모두 관에 몰수하였으니, 지금 빈 집을 사급(賜給)해야 마땅하다. 만약 빈 집이 없으면 그 값을 계산하여 면포를 주라.”
하였다.
【원전】 14 집 281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중종 3년 무진(1508,정덕 3)
 10월15일 (기묘)
간원이 구문경 부부에게 가사를 사급한 일은 옳지 않다고 아뢰다

대간(臺諫)이 앞의 일을 아뢰고, 간원(諫院)이 또 아뢰기를,
구문경(具文璟)의 처의 집은 국가에서 이미 몰수하였으니, 지금 그 집의 있고 없음을 진념(軫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구문경의 처가 집을 빼앗겨 살 만한 곳이 없으므로 주도록 명한 것이다. 나머지도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원전】 14 집 283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가족-가산(家産)


 

희순공주 관련자료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1월8일 (신사)
홍문관 부제학 김선 등이 사직을 청하다. 휘순 공주의 집 짓는 일에 선공감 제조 등을 보내어 감독하게 하다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김선(金瑄) 등이 아뢰기를,
“사헌부의 상소에 ‘중용(中庸)에 반대되는 사람은 경연(經筵)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신 등은 비록 어떤 사람을 지목하여 말을 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직책이 경연을 겸무하고 있으므로 직책에 있기가 미안하여 사직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전교하기를,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집을 짓는 곳에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와 내관(內官) 김자원(金子猿)과 지사(知事) 구수영(具壽永)을 시켜 함께 가서 감독하게 하라.”
하였다. 수영(壽永)은 공주의 시아비였다.
【원전】 13 집 460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왕실-종친(宗親) / *건설-건축(建築)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1월15일 (무자)
휘순 공주의 혼례에 쓸 쌀 8백 석을 주혼의 집으로 보내라 하다

호조에 전지하기를,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혼례(婚禮) 때에 쌀가루[米]가 다 없어졌으니, 쌀 8백 석(石)을 주혼(主婚)의 집으로 운반해 보내라.”
하였다.
【원전】 13 집 463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재정-상공(上供)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4월13일 (갑인)
휘순 공주의 집을 짓는데 선공감 제조를 보내어 감독하게 하다

전교하기를,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집을 짓는 곳에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가 때때로 가서 감독하되, 그 나머지 지체시키거나 또는 혹시 무너지기 쉽게 하는 일은 마땅히 그 죄를 다스리는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아뢰라.”
하였다.
【원전】 13 집 485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건설-건축(建築) / *사법-행형(行刑)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5월2일 (계유)
휘순 공주에게 줄 전지를 마련하도록 하다

시강(侍講)한 재상(宰相)에게 전교하기를,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출가(出家) 날짜가 가까워지는데, 전지(田地)를 하사하는 전례가 있으므로, 나는 합덕(合德)의 제언(堤堰)을 내려주고 싶은데 어떠하오?”
하니, 좌의정 성준(成俊)이 아뢰기를,
“합덕의 제언은 혜택을 입는 백성이 많으니 이를 빼앗아 줄 수는 없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이세좌(李世佐)는 아뢰기를,
“제언을 폐지하여 공주에게 주는 것은 사체에 옳지 못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공주에게 줄 전지(田地)를 해조(該曹)에서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13 집 490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농업-전제(田制) / *농업-수리(水利)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5월15일 (병술)
장령 유세침이 역사를 중지할 것을 건의하다

경연(經筵)에 납시었다. 장령 유세침(柳世琛)이 아뢰기를,
“요사이 한재로 인하여 영선(營繕)을 정지시키고, 또 진성 대군(晉城大君)과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집짓는 군사를 줄였는데, 지금 모두 도로 하게 하니, 토목(土木) 일은 하루 동안에 마칠 수는 없습니다. 금년은 한재로 인하여 밀·보리가 이삭이 패지 않으므로, 시가(市價)가 매우 헐하고, 군량(軍糧)을 잇대기가 어려우므로 굶주리고 피곤하여 쓰러져 가는데도, 감역관(監役官)은 매질하며 징발 독촉합니다. 신 등은 이 역사를 영구히 정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선 올 곡식이 익기를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하고, 헌납(獻納) 신징(申澄)은 아뢰기를,
“근년에는 가뭄이 너무 심하니, 전하께서 심상히 여겨서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대체로 백성을 괴롭히는 일은 토목 역사보다 무거운 것이 없으니 아직 정지하여 하늘의 경계에 보답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왕은 답하지 않았다.
【원전】 13 집 492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 / *건설(建設) / *군사-지방군(地方軍) / *과학-천기(天氣) / *재정-역(役)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6월10일 (경술)
휘순 공주의 집 상량에 보시할 물건을 내려주게 하다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집 상량(上樑)에 보시(布施)할 면포(綿布) 80필과 생초(生綃) 1필을 내려주게 하였다.
【원전】 13 집 497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8월5일 (갑진)
휘순 공주의 집짓는 역사 등을 빨리 마치라 하다

전교하기를,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집은 일이 매우 쉬우니 마땅히 빨리 역사(役事)를 마치도록 하라, 만약 금년에 마치지 못하고 내년 봄에 이르면 봄날씨는 항상 가물기가 쉬우니, 언사(言事)하는 사람이 반드시 이것을 구실로 삼을 것이다. 성종(成宗) 때에도 또한 일찍이 집을 건축하는 공사를 했는데, 그때 대간들이 비록 혹시 이를 발언하기도 했지마는 어찌 오늘날과 같이 심했겠는가? 지금은 조그마한 행동이 있어도 문득 불가하다고 말하며, 반드시 생각하기를,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서 논계(論啓)하면 반드시 정지하기를 명할 것이라고 여기면서, 임금으로 하여금 한 가지 일도 시작하지 못하게 하니, 이런 풍습을 조장(助長)시킬 수는 없다. 또 공공(公共)의 역사는 비록 정지하더라도 사사의 공사는 그치지 않으므로 공공의 일을 핑계로 해서 개인의 일을 이룩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니, 백성들이 괴로움을 받기는 한가지이다. 인정전(仁政殿)의 단청과 선정전(宣政殿)을 개조하는 여러 가지 일은 이미 준비가 되었으니, 지금 일을 시작해야 한다.”
하였다.
【원전】 13 집 507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건설-건축(建築) / *재정-역(役)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8월9일 (무신)
대사간 안윤손 등이 선정전 행랑을 고치는 일과 나뭇갓의 일 등을 아뢰다

경연(經筵)에 납시었다. 대사간 안윤손(安潤孫)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금년에 이미 추수기가 임박하였으나, 면포 1필의 값이 쌀 2두(斗)에 해당되므로 백성들이 심히 주리고 곤핍해 있습니다. 모화관(慕華館)이나 태평관(太平館)의 수리와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집을 건축하는 일 같은 것은 진실로 부득이한 일이지마는, 선정전(宣政殿)의 행랑은 고쳐 건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꺼번에 큰 역사(役事)를 모두 시작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으나, 왕이 답하지 않았다. 안윤손이 아뢰기를,
“나뭇갓[柴場]은 모두 이미 백성들에게 주었었는데, 지금 월산 대군(月山大君) 부인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돌려주게 되니, 백성과 더불어 함께하는 뜻이 전혀 없어집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왕자(王子)·왕녀(王女)의 나뭇갓은 이미 모두 백성들에게 주었으니, 한둘의 나뭇갓을 월산 대군 집에 돌려주는 것이 어찌 사리에 방해가 되겠는가?”
하였다. 집의(執義) 정인인(鄭麟仁)이 아뢰기를,
“지금 만약 예(例)를 처음 만들면 여러 군(君)들이 모두 돌려받기를 희망할 것입니다.”
하고, 안윤손은 아뢰기를,
“월산대군 부인은 비록 나뭇갓이 없더라도 진실로 부족한 것이 없는데도, 민생(民生)을 돌보지 않고 누차 함부로 상언(上言)한 것은 지극히 불가합니다. 경기 지방의 백성들은 부역이 갑절로 무거운데, 만약 곡식이 여물지 않아 흉년이 들면 땔나무와 꼴로써 생계를 돕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정인인(鄭麟仁)이 아뢰기를,
“금년은 큰 흉년이 들어 쌀값이 지극히 비싸므로 각도의 군사들이 모두 면포로써 곡식을 사서 먹게 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태창(太倉)의 쌀이 오래 묵으면 붉게 변질되어 쓰지 못하게 되니 값을 올려서 군사들에게 주고 풍년을 기다려서 값을 낮추어 받아들이면 공사(公私)가 모두 편리할 것이므로, 이것이 상평창(常平倉)의 예입니다. 그러나 곡식을 출납할 즈음에 관리들이 조심하지 않으면 시중의 부상(富商)들이 함부로 받아가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해사(該司)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마련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고, 안윤손(安潤孫)은 아뢰기를,
“관리들이 그 법을 잘 운용하면 공사가 모두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비록 공사에 편리하다 하더라도 또한 이것은 새로 만드는 법이니, 마땅히 수의(收議)하여 처리해야 한다.”
하였다. 정인인이 아뢰기를,
“도총부(都摠府) 관원이 입직(入直)하는 군사들을 점검하여 살필 적에 무기(武器)를 손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를 얽어 만들어서 일일이 속전(贖錢)을 거두니, 이 때문에 군사들의 곤핍이 더욱 심합니다.”
하니, 왕이 좌우의 신하를 돌아보고 묻기를,
“이 말이 어떠한가?”
하매, 동지사(同知事) 강귀손(姜龜孫)이 아뢰기를,
““대간의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마는, 이미 초범자와 재범자의 율이 있으니, 초범자는 말감(末減)하여 죄를 주어야 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무기를 만약 빌리거나 혹시 손질하지 않으면 도총부에서 점검하여 살피는 것이 당연하다.”
하였다. 강귀손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도총관이 되었을때 이 폐단을 깊이 알았습니다. 그러나 무기 관리가 허술한 까닭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종(成宗)께서도 속전을 징수하는 것이 너무 지나침을 염려했으나, 손질하지 않은 무기를 가지고 대궐안에 들어오는 것을 점검하여 살피기를 명하여, 과연 그 허술함을 알았기 때문에 속전 징수를 다시는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이 아뢰기를,
“집의(執義)가 아뢴 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신도 일찍이 도총부(都摠府)의 속전 징수가 너무 지나치다고 들었습니다.”
하고, 참찬관(參贊官)이자건(李自健)은 아뢰기를,
“과연 정인인이 아뢴 바와 같습니다. 도총부와 병조에서는 낭청(郞廳)으로 하여금 점검하여 살피게 하고 낭청은 서리(書吏)로 하여금 점검하여 살피게 해서, 범한 사람에게는 곤장 80의 속전을 징수하니, 그 사이에 어찌 폐단이 없겠습니까? 만약 무기를 손질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일정한 시일을 한정하여 그 안에 잘 손질하지 않으면 죄주는 것이 매우 온당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갑옷·투구·활·화살은 진실로 점검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만약 우연히 등장(籐杖)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해서 죄준다면 과연 온당치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자건(李自健)이 아뢰기를,
“등장으로 말하면 초범과 재범의 율이 있습니다.”
하고, 윤필상(尹弼商)은 아뢰기를,
“도총부가 점검하여 살피는 것이 너무 각박합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마지 않는다면 군사들은 소생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마련(磨鍊)하게 하라.”
하였다. 정인인이 아뢰기를,
“금년에 물가가 뛰어 올라서 차지(次知)의 품삯이 면포 2필에 밑돌지 않습니다. 장정(壯丁)이 없는 사람은 모두가 차지를 고용하고 있으므로 민폐(民弊)가 매우 심하니, 옛날과 같이 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왕은 답하지 않았다.
【원전】 13 집 508 면
【분류】 *구휼(救恤) / *사법-행형(行刑) / *군사-군기(軍器) / *왕실-경연(經筵) / *왕실-사급(賜給) / *정론-간쟁(諫諍) / *재정-역(役) / *재정-창고(倉庫) / *건설-건축(建築) / *농업-임업(林業) / *물가-물가(物價)


[주D-001]태창(太倉) : 나과 창고.
[주D-002]차지(次知) : 주인을 대신하여 일을 하는 하인.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9월12일 (신사)
사알 이팽동을 면천하여 내수사 별좌를 제수하다

전교하기를,
“사알(司謁) 이팽동(李彭同)을 특별히 풀어서 양민(良民)이 되게 하고 내수사 별좌(內需司別坐)를 제수하라.”
하였다. 이팽동은 장원서(掌苑署)의 종이고,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유모(乳母)의 남편이다.
【원전】 13 집 513 면
【분류】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 *인사-임면(任免)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10월14일 (계축)
휘순 공주가 출가할 때 쌀 1백 석 등을 주도록 하다

호조에 전지하기를,
“휘순 공주(徽順公主)가 출가할 때에 쌀과 콩 각 1백 석을 특별히 내려주라.”
하였다.
【원전】 13 집 520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종친(宗親)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10월29일 (무진)
멥쌀 3석을 휘순 공주의 집에 내려주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멥쌀[粳米] 3석을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집에 내려주라.”
하였다. 승지 등이 아뢰기를,
“멥쌀은 다만 공상(供上)에만 쓰는 것이요, 아랫사람들에게는 쓸 수 없습니다. 전일에 또 화룡준(畫龍樽)을 내려주라고 명했으니, 신 등은, 중국 사신이 올때에도 오히려 쓰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공주의 집에 하사(下賜)할 수 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대체로 공주의 집에는 비록 이와 같이 하지 않더라도 나중에는 장차 사치와 분수에 넘치는 폐단이 있을 것인데, 하물며 사여(賜與)가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이 두 가지 물건을 아끼는 것은 아니나, 등급이 분별 없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다면 하사할 필요는 없다. 양대비전(糧大妃殿)에 드릴 멥쌀 각 1석과 중궁(中宮)에 드릴 3석을 내전으로 들이라.”
하였다.
【원전】 13 집 524 면
【분류】 *재정-상공(上供) / *왕실-사급(賜給)


[주D-001]화룡준(畫龍樽) : 용을 수놓은 술 항아리.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10월29일 (무진)
멥쌀 3석을 휘순 공주의 집에 내려주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멥쌀[粳米] 3석을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집에 내려주라.”
하였다. 승지 등이 아뢰기를,
“멥쌀은 다만 공상(供上)에만 쓰는 것이요, 아랫사람들에게는 쓸 수 없습니다. 전일에 또 화룡준(畫龍樽)을 내려주라고 명했으니, 신 등은, 중국 사신이 올때에도 오히려 쓰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공주의 집에 하사(下賜)할 수 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대체로 공주의 집에는 비록 이와 같이 하지 않더라도 나중에는 장차 사치와 분수에 넘치는 폐단이 있을 것인데, 하물며 사여(賜與)가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이 이 두 가지 물건을 아끼는 것은 아니나, 등급이 분별 없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그렇다면 하사할 필요는 없다. 양대비전(糧大妃殿)에 드릴 멥쌀 각 1석과 중궁(中宮)에 드릴 3석을 내전으로 들이라.”
하였다.
【원전】 13 집 524 면
【분류】 *재정-상공(上供) / *왕실-사급(賜給)


[주D-001]화룡준(畫龍樽) : 용을 수놓은 술 항아리.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11월23일 (임진)
장령 김천령이 휘순 공주에게 집을 지어 주는 것이 부당함을 아뢰다

상참을 받고 경연에 납시었다. 장령(掌令) 김천령(金千齡)이 아뢰기를,
“여러 군(君)과 공주(公主)의 집을 그전에는 국가에서 지어서 주다가, 그 후에 경비 소모가 많다고 하여 값을 주어 자신들이 짓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폐단이 없는 일이온데, 지금 별도로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집을 짓기를 명하시니 선왕(先王) 때의 여러 군(君)과 옹주(翁主)의 경우와 아주 다릅니다. 옛날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제왕(齊王)을 봉(封)하면서 이내 말하기를 ‘내 아들을 어찌 선제(先帝)의 아들과 비교하겠는가?’ 하고는, 모든 것을 초 회양(楚淮陽)의 절반으로 하기를 명령했으며, 그 후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장락 공주(長樂公主)를 시집보내면서 자송(資送)장공주(長公主)보다 갑절이나 되자, 위징(魏徵)이 한 명제(漢明帝)의 일을 인용하여 간(諫)하기를 ‘자송(資送)이 어찌 장공주보다 갑절이나 될 수 있습니까?’ 하였으니, 지금 전하께서 공주를 대우함에는 여러 군과 옹주와 같이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여러 군과 옹주의 집도 또한 마땅히 지어 주어야 하겠으나, 그것이 폐단이 있기 때문에 값을 주는 것이다. 진성 대군(晉城大君)에게도 일찍이 집을 지어서 주었는데, 대군과 여러 군과는 차이가 있다. 공주는 대군과 같은 신분이므로 또한 집을 지어서 주도록 명한 것이다.”
하였다. 김천령이 다시 아뢰기를,
“진성 대군은 성종(成宗)의 아드님이니, 전하께서 대우하기를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휘순 공주는 전하의 따님이니 신하들이 공주와 옹주를 보는 데는 마땅히 등급이 있어야 하겠지만, 전하께서는 응당 일례(一例)로 대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과연 그러하다. 다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였다. 정언 오익념(吳益念)은 아뢰기를,
“근년의 흉년으로서는 을사년과 같은 해가 없었는데, 금년은 을사년보다 지나쳐서 면포(綿布) 1필 값이 쌀 2말에 해당되니, 진휼(賑恤)하는 방도를 마땅히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부자 사람이야 걱정할 게 없지만, 가엾은 것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이라.’고 하였고,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정치를 펴서 인덕(人德)을 베풀되 반드시 이 네가지부터 먼저 구제했다.’고 했는데, 즉 환과 고독(鱞寡孤獨)을 말한 것입니다. 고려(高麗) 때에도 환과 고독에게 음식을 준 일이 있었고, 전조(前朝)에도 또 고독(孤獨)을 구제하는 은전을 거행하였으니, 지금에 또한 문왕을 법으로 삼아 서울에서는 한성부(漢城府)가, 지방에서는 관찰사(觀察使)가 호소할데 없는 고독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구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방도는 마땅히 거행해야 한다.”
하였다.
【원전】 13 집 530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 / *건설-건축(建築) / *역사-고사(故事) / *물가(物價) / *구휼(救恤)

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12월21일 (기미)
승지 이점이 성균관의 노비를 하사해 주지 말 것을 청하다

왕자와 공주에게 노비(奴婢)를 하사하는 데는 전례(前例)가 모두 스스로 희망하게 했다. 휘순 공주(徽順公主)에게 전례대로 60구(口)를 주는데, 그 안에는 양현고(養賢庫)의 노비 3구가 들어 있었다. 승지 이점(李坫) 등이 아뢰기를,
“성균관의 노비는 선왕(先王) 때에 다른 역사는 시키지 않았으며, 비록 대궐로 들어 간 여자라도 곧 도로 나가게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공자(孔子)를 위해서 바친 노비들이므로 하사해 주지 말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원전】 13 집 535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신분-천인(賤人)


[주D-001]양현고(養賢庫) :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던 관청.
연산군 9년 계해(1503,홍치 16)
 3월1일 (무진)
휘순 공주가 출가하자 벼를 호조에서 마련하도록 하다

전교하기를,
“휘순 공주(徽順公主)가 근일 출합(出閤)하게 되니 준례대로 벼 8천 섬을 주어야겠다. 전일에 내수사(內需司)에서 주도록 하였는데, 지금 저장된 것이 없으니 호조에서 마련하여 주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13 집 549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연산군 9년 계해(1503,홍치 16)
 3월6일 (계유)
허집과 구수영을 보내 휘순 공주의 집 근방의 헐 곳을 살펴보도록 하다

승지 허집(許輯)과 호조(戶曹)·한성부 당상(漢城府堂上)·선공 제조(繕工提調)·판돈령(判敦寧) 구수영(具壽永)을 보내어,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새 집 근방에 더 헐 곳을 살펴보게 했는데, 허집 등이 헐어야 될 집 수십 채를 써서 아뢰니, 전교하기를,
“해당 관사(官司)에서 값을 주고 철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전】 13 집 550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주생활-가옥(家屋)

연산군 10년 갑자(1504,홍치 17)
 1월24일 (병술)
단천의 납철을 불리게 하다

전교하기를,
“단천(端川)의 납철[鉛鐵]을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집 종 10인에게 15개월 동안, 월산 대군(月山大君)의 집 종 7인에게 10개월 동안 캐서 불리게 하되 모두 세납을 받지 말라.”
하였다.
【원전】 13 집 590 면
【분류】 *광업-제련(製鍊) / *왕실-종친(宗親) / *신분-천인(賤人) / *재정-잡세(雜稅)


중종 1년 병인(1506,정덕 1)
 9월16일 (임진)
사헌부가 민효증·신극성·이승녕·노종 등을 탄핵하니 이승녕·노종의 일만 허락하다

헌부(憲府)가 아뢰기를,
“우참찬 민효증은 지독한 사람입니다. 폐왕조 때에 형조 참의가 되어 폐주의 명으로 곤장치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내한매(耐寒梅)에게 형장을 칠 때 옷 속에 물건이 있을까 의심하고 옷을 찢어 보고는 노루 가죽이 있자 곧 치계(馳啓)하였습니다. 낭관(郞官)을 시켜서 아뢰어도 되는데, 하필이면 직접 갈 것이 있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폐주가 일찍이 그를 밀위청 당상(密威廳堂上)으로 발탁하여 무릇 죄인의 판결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될수록 가학(苛虐)한 것을 좇아 무거운 쪽의 조문에 맞추어 다스렸는데 여느 동료들보다 더 심하였습니다. 또 당상·낭관은 예도가 마땅히 엄숙해야 하는데, 효증은 항상 상스러운 말씨로 낭리(郞吏)를 꾸짖었습니다. 정부(政府)는 의표(儀表)가 되는 곳이고, 경연관(經筵官)은 임금의 덕성을 보양(補養)하는 자리이며, 의금부(義禁府)는 조옥 아문(詔獄衙門)이니, 이런 사람을 이런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청하건대 체직시키소서.
신극성(愼克成)은 비록 신수근(愼守勤)의 먼 일가이기는 하나, 지위가 2품에 이른것은 모두 신씨 집안 때문입니다. 전일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집을 감독하여 지을 때, 인가를 널찍이 철거하여 극도로 사치를 다해서 시종 폐단을 만들었고, 또 상주(尙州) 목사로 있을 때는 부역과 조세가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파직시켜 밖으로 내치소서.
대사성(大司成) 이승녕(李承寧)은 사표(師表)에 적합하지 않아 공의(公議)가 시끄럽게 끊어오르니, 이 사람을 중임에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 폐조 때 각도 향시(鄕試)의 시제(試題)는 기일에 앞서 미리 출제하게 되어 있는데, 비록 전왕의 법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승녕의 처지로는 마땅히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승녕은 함께 의논하여 출제하고는 곧 아들에게 말하여 외인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는 이가 없게 하였습니다.
병조 정랑 노종(盧種)은 임사홍의 사위로서, 비록 친아들과 견줄 것은 아니나, 병조는 중요한 자리이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정승 및 여러 재상들에게 묻는다.”
하였다. 정승이 아뢰기를,
“민효증이 의 뜻에 영합하여 가학하게 하기를 힘썼다는 것은 신 등이 알지 못합니다. 효증은 성품이 본래 꼿꼿[耿介]하여, 성종조에 대간이 되어서는 정직하다는 말을 들었고, 뒤에 성천 부사(成川府使)가 되어서는 백성을 잘 다스린 업적이 있었습니다.”
하고, 유자광은 혼자 아뢰기를,
“성종조에 신이 특진관으로 입시할 적에 효증도 대간으로서 입시하였는데, 간하는 말이 바르고 간절한 것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정직한 사람이라 일컬었습니다.”
하고, 김감은 아뢰기를,
“신이 효증과 더불어 일찍이 금부 당상이 되었는데 가혹한 것을 보지 못하였고, 또 상스런 말로 낭관을 꾸짖는 것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경내(境內)에 들어간 지 4일 만에 부름을 받아 올라왔기 때문에, 신극성이 그 때 비록 상주 목사로 있었으나, 그 어진지의 여부는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정승 등이 아뢰기를,
“극성이 비록 공주의 집을 감독하여 지었으나, 각박하게 독촉한 것이 아니라, 다만 담당관으로서 역사를 감독하였을 뿐입니다. 또 신수근의 족속에도 스스로 친소(親疎)가 있는 것이니, 먼 일가까지 귀양보내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부역과 조세가 번거롭고 중하였던 것에 대해서는 그 죄가 있습니다. 이승녕·노종 등의 일은 대간의 말을 좇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승녕·노종은 아뢴 대로 하라. 민효증은 성품이 본래 강정(剛正)하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일을 하였을 뿐이지, 어찌 영합하기 위해서였겠는가? 신극성이 부역과 조세를 번거롭고 중하게 한 것은 잘못이나, 소원(疎遠)한 친족을 아울러 연좌(緣坐)시키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원전】 14 집 77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가족-친족(親族)


[주D-001]조옥 아문(詔獄衙門) : 왕의 조서를 받들어 죄범을 다스리는 관아 조선 시대는 의금부가 이에 해당되었다.
[주D-002]휘순 공주(徽順公主) : 연산군의 딸. 구문경에게 시집갔음.
[주D-003]상 : 연산.
연산군 10년 갑자(1504,홍치 17)
 윤 4월29일 (기축)
단천 은의 캔 양을 묻다

전교하기를,
“휘순 공주(徽順公主)와 장 숙용(張淑容)이 단천(端川)의 은(銀)을 얼마나 캐었는지 본도 감사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원전】 13 집 619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광업-광산(鑛山)
연산군 10년 갑자(1504,홍치 17)
 7월1일 (기축)
대군과 휘순 공주에게 종을 내리다

전교하기를,
“한 대군(大君) 및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처소에 각각 종[奴] 2구(口)를 주라.”
하였다.
【원전】 13 집 642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신분-천인(賤人)

연산군 10년 갑자(1504,홍치 17)
 8월20일 (정축)
평시서를 휘순 공주에 주고 다른 곳으로 옮기라 전교하다

전교하기를,
“평시서(平市署)가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집을 압박하니, 이를 공주에게 주고 평시서는 다른 곳으로 옮기라.”
하였다.
【원전】 13 집 657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사급(賜給) / *행정(行政) / *건설(建設)

연산군 10년 갑자(1504,홍치 17)
 9월3일 (경인)
죄인 윤간의 전지를 장흥 부부인 신씨에게 주고, 금표 안 전지의 값을 치르게 하다

전교하기를,
“죄인 윤간(尹侃)의 강음(江陰)에 있는 전지 12결을 장흥 부부인(長興府夫人) 신씨(申氏)에게 주고, 휘순 공주(徽順公主)와 월산 대군(月山大君) 부인 및 성준(成俊) 처의 금표 안에 들어간 전지의 대가를 그들의 원에 따라 주라.”
하였다.
【원전】 13 집 660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종친(宗親) / *농업(農業) / *사법(司法)

연산군 11년 을축(1505,홍치 18)
 1월16일 (임인)
대비전·휘순 공주 등에게 쌀을 내리게 하다

전교하기를,
“대비전(大妃殿)에 쌀 1백 석(碩)을 진상(進上)하고, 휘순 공주(徽順公主) 처소에 쌀 1백 석, 월산 대군 부인(月山大君夫人) 처소에 쌀 50석을 내려 주라.”
하였다.
【원전】 13 집 685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중종 1년 병인(1506,정덕 1)
 9월16일 (임진)
사헌부가 민효증·신극성·이승녕·노종 등을 탄핵하니 이승녕·노종의 일만 허락하다

헌부(憲府)가 아뢰기를,
“우참찬 민효증은 지독한 사람입니다. 폐왕조 때에 형조 참의가 되어 폐주의 명으로 곤장치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내한매(耐寒梅)에게 형장을 칠 때 옷 속에 물건이 있을까 의심하고 옷을 찢어 보고는 노루 가죽이 있자 곧 치계(馳啓)하였습니다. 낭관(郞官)을 시켜서 아뢰어도 되는데, 하필이면 직접 갈 것이 있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폐주가 일찍이 그를 밀위청 당상(密威廳堂上)으로 발탁하여 무릇 죄인의 판결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될수록 가학(苛虐)한 것을 좇아 무거운 쪽의 조문에 맞추어 다스렸는데 여느 동료들보다 더 심하였습니다. 또 당상·낭관은 예도가 마땅히 엄숙해야 하는데, 효증은 항상 상스러운 말씨로 낭리(郞吏)를 꾸짖었습니다. 정부(政府)는 의표(儀表)가 되는 곳이고, 경연관(經筵官)은 임금의 덕성을 보양(補養)하는 자리이며, 의금부(義禁府)는 조옥 아문(詔獄衙門)이니, 이런 사람을 이런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청하건대 체직시키소서.
신극성(愼克成)은 비록 신수근(愼守勤)의 먼 일가이기는 하나, 지위가 2품에 이른것은 모두 신씨 집안 때문입니다. 전일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집을 감독하여 지을 때, 인가를 널찍이 철거하여 극도로 사치를 다해서 시종 폐단을 만들었고, 또 상주(尙州) 목사로 있을 때는 부역과 조세가 번거롭고 무거워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파직시켜 밖으로 내치소서.
대사성(大司成) 이승녕(李承寧)은 사표(師表)에 적합하지 않아 공의(公議)가 시끄럽게 끊어오르니, 이 사람을 중임에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 폐조 때 각도 향시(鄕試)의 시제(試題)는 기일에 앞서 미리 출제하게 되어 있는데, 비록 전왕의 법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승녕의 처지로는 마땅히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승녕은 함께 의논하여 출제하고는 곧 아들에게 말하여 외인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는 이가 없게 하였습니다.
병조 정랑 노종(盧種)은 임사홍의 사위로서, 비록 친아들과 견줄 것은 아니나, 병조는 중요한 자리이니, 체직시키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정승 및 여러 재상들에게 묻는다.”
하였다. 정승이 아뢰기를,
“민효증이 의 뜻에 영합하여 가학하게 하기를 힘썼다는 것은 신 등이 알지 못합니다. 효증은 성품이 본래 꼿꼿[耿介]하여, 성종조에 대간이 되어서는 정직하다는 말을 들었고, 뒤에 성천 부사(成川府使)가 되어서는 백성을 잘 다스린 업적이 있었습니다.”
하고, 유자광은 혼자 아뢰기를,
“성종조에 신이 특진관으로 입시할 적에 효증도 대간으로서 입시하였는데, 간하는 말이 바르고 간절한 것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정직한 사람이라 일컬었습니다.”
하고, 김감은 아뢰기를,
“신이 효증과 더불어 일찍이 금부 당상이 되었는데 가혹한 것을 보지 못하였고, 또 상스런 말로 낭관을 꾸짖는 것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경내(境內)에 들어간 지 4일 만에 부름을 받아 올라왔기 때문에, 신극성이 그 때 비록 상주 목사로 있었으나, 그 어진지의 여부는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정승 등이 아뢰기를,
“극성이 비록 공주의 집을 감독하여 지었으나, 각박하게 독촉한 것이 아니라, 다만 담당관으로서 역사를 감독하였을 뿐입니다. 또 신수근의 족속에도 스스로 친소(親疎)가 있는 것이니, 먼 일가까지 귀양보내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부역과 조세가 번거롭고 중하였던 것에 대해서는 그 죄가 있습니다. 이승녕·노종 등의 일은 대간의 말을 좇으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승녕·노종은 아뢴 대로 하라. 민효증은 성품이 본래 강정(剛正)하기 때문에 곧이곧대로 일을 하였을 뿐이지, 어찌 영합하기 위해서였겠는가? 신극성이 부역과 조세를 번거롭고 중하게 한 것은 잘못이나, 소원(疎遠)한 친족을 아울러 연좌(緣坐)시키는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원전】 14 집 77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가족-친족(親族)


[주D-001]조옥 아문(詔獄衙門) : 왕의 조서를 받들어 죄범을 다스리는 관아 조선 시대는 의금부가 이에 해당되었다.
[주D-002]휘순 공주(徽順公主) : 연산군의 딸. 구문경에게 시집갔음.
[주D-003]상 : 연산.



 

 









 







 


 

 

 

 

 

 

 

 

 

 사천목씨 재실인 묘현제 사진을 찍는데 관리인이 누구냐며 질문을 한다

 

  목씨재실 입구에서 우측으로 진입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병인년에 정국(靖國)하여 중종(中宗)을 추대하다


폐주가 들로 사냥을 나갈 때, 당시 진성대군(晋城大君)이었던 중중(中宗)이 모시고 따라갔다. 사냥을 마치고 난 뒤에 임금은 준마를 타고서 중종에게 말하기를, “나는 흥인문(興仁門)으로 들어갈 터이니 너는 숭례문(崇禮門)으로 들어오라. 나보다 뒤에 오면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하니 중종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영산군(寧山君) 전(恮)이 가만히 아뢰기를, “걱정마십시오.내 말은 임금이 타신 말보다 매우 빠른데, 내가 아니면 제어할 수 없습니다.” 하고, 즉시 하인 옷으로 바꾸어 입고 말고삐를 잡고 따라가니 말이 나는 듯이 달려갔다. 대궐 문에 이르니 조금 후에 임금이 이르렀다. 이에 중종이 죽음을 면하였으니 사람들은 “영산군과 그 말은 모두 중종을 위하여 때를 맞추어 난 것이다.” 하였다. 《부계기문(涪溪記聞)》 ○ 영산군은 곧 중종의 서형(庶兄)인데 그 당시 이름이 있었다. 후에 이과(李顆)의 옥사에 관련되어 정국공신(靖國功臣)에게 살해되었다 한다. 살펴보건대 이과의 옥사는 중종 2년에 있었고, 영산군은 중종 8년에 막개(莫介)가 반역을 고발한 박영문(朴永文)ㆍ신윤무(辛允武) 등의 옥사에 관련되어 귀양갔다가 이홍간(李弘幹)의 아룀으로 인하여 석방되었다.
○ 성희안(成希顔)은 성종(成宗) 때에 옥당에 뽑혀 들어가서 은혜와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폐주가 왕위를 이은 뒤에 양화도(楊花渡) 혹은 망원정(望遠亭)이라 한다. 에 임금을 따라 놀러 갔다. 따라간 신하들에게 시를 짓도록 명하자 성희안이 “임금은 본래 청류(淸流)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글귀를 지으니, 임금이 매우 노하여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라고 여겼다.이로 인해 드디어 이조 참판의 벼슬자리에서 떨어져 집에 있었다. 성희안은 평소에 뛰어난 지략이 있었는데 폐주의 어지러운 정사가 날로 심해지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반정(反正)할 뜻이 있었다. 그러나 함께 계획할 사람이 없으므로 도와줄 이가 없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중추 박원종(朴元宗)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처남인데,부귀한 집에서 자라났으나 기상이 크고 얽매임이 없어 시정(市井)에 드나들다가 무과에 올라 중요한 관직을 두루 지냈다. 풍채가 좋고 일찍 귀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무사들이 그를 높이 받들었다. 마침내 기절을 꺾고 글을 읽어 대의에 통하여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다. 또 그 누이가 임금에게 몸을 더렵혀 병이 나서 죽은 것으로 인하여 마음 속으로 항상 불평을 품고 분하게 여기었다.성희안은 박원종이 큰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여겼으나 서로 교분이 없었다. 동리 사람 신윤무(辛允武)란 이가 두 집에 다니면서 매우 친근하였으므로 성희안이 신윤무를 시켜 가만히 의향을 물어보니 박원종은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면서, “이는 내가 밤낮으로 마음 속에 품고 있던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성희안은 저녁에 박원종의 집으로 가서 서로 통곡하고,“우리가 평생에 충성과 절의를 지켜 왔으니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입니다. 대장부의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렸으니, 종사의 위태함이 경각에 있음을 보고 어찌 구제하지 않으리오.” 하고, 드디어 의논을 결정하였다. 몇 개월 지나는 동안 스스로 고립되어 성공하기 어려움을 염려하다가,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이 당대의 명망 있는 이라 그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들의 의사를 알리니,유순정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이왕 이 일에 참여하여 들었으므로 마지못하여 따라올 뿐이었다. 드디어 신윤무와 군기시 첨정 박영문(朴永文)ㆍ사복시 첨정 홍경주(洪景舟) 등에게도 두루 알려서 각기 동지를 불러 모으게 하니 모여든 자는 대개 무사가 많았다. 이들은 의리는 헤아리지 않고 공을 세우기를 좋아했으므로 의논함이 없어도 의견이 서로 맞아 곳곳에서 좋아 날뛰었다. 《음애일기》 《동각잡기》
○ 박원종 등은 귀양갔던 이과(李顆)가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수령들과 함께 본도(本道)의 군사와 군마를 거느리고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시기를 앞당겨 먼저 거사하였다. 《기묘속록(己卯續錄)》
이때 유빈(柳濱)ㆍ이과ㆍ김준손(金駿孫) 등은 호남으로 귀양가 있었는데, 임금의 음란함이 날로 심하여 사직이 위태로움을 보고 중종(中宗)을 추대하려고 격서(檄書)를 서울로 보냈는데, 그 격서가 이르기 전에 벌써 반정(反正)이 되었다. 그 격서의 대략에, “태조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서 나라를 창업하였으며,세종은 덕화가 밝았고 성종(成宗)은 한결같이 선대의 법도를 따라 용도를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였기에, 백성이 편안하고 물질은 풍성하여 태평한 세상이 되었더니 뜻밖에 뒤를 이은 임금이 포학 무도하여 부왕의 후궁을 때려 죽이고, 옹주와 왕자를 귀양보내 죽이었다. 간언을 올리는 대간을 귀양보내고 죽였으며, 대신을 욕보이고 충직하고 선량한 신하를 죽여,이들 부자ㆍ형제들까지 연좌시키는 것이 진(秦) 나라 법보다 더 심하였다. 무덤을 파서 해골에까지 화가 미치게 되었으니 시체를 토막토막 베는 형벌과 뼈를 부수는 형벌은 무슨 형벌인가. 남의 아내와 첩을 빼앗아 마음대로 음욕(淫慾)을 행하고 남의 집을 부수어 원유(園囿)를 넓히었다. 선왕의 능침은 모두 여우와 토끼의 놀이터가 되고, 선성(先聖)의 사우(祠宇)는 곰과 범을 기르는 우리로 변하였다.세금을 한없이 많이 거두니 백성들은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종실 형제들의 아내와 첩까지도 핍박하여 서로 간통하고, 삼년상은 예로부터 다 행하는 것인데도 그 기한을 짧게 줄이고, 부모의 기일도 또한 모두 폐지시켰으니, 인륜은 무너지고 인도가 없어졌다. 그밖에 토목 공사와 노래ㆍ여색을 즐기고 못을 파며 대(臺)를 쌓고 사냥을 일삼으며 새ㆍ짐승과 화초를 좋아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많은 죄가 걸ㆍ주(桀紂)보다도 오히려 더 심하니, 백성들의 한때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만일 크게 간악한 자가 신기(神器 왕위(王位))를 엿보아 하루 아침에 일어난다면 왕조가 바뀌는 화가 생길 것이 두렵다. 성종이 26년 동안 신하들을 잘 대우하고 충의(忠義)를 배양한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이다.진성대군(晋城大君)은 성종대왕의 친 아드님이니 어질고 덕이 있어 온 나라의 칭송이 그에게 돌아간다. 이에 아무 아무 등은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아무 달 아무 날에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격서를 모든 도에 돌려서 기일을 약속하여 서울로 모일 것이니, 조정에 있는 공경(公卿)과 백관들은 마땅히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종실의 위태함을 붙들라. ……” 하였다. 《동각잡기》
○ 병인년 9월 2일에 폐주가 장단(長湍)의 석벽(石壁)에서 놀고자 할 때 따라가는 재상들에게 다만 하인 한 사람만 데리고 가게 하였다. 성희안(成希顔)은 그날 성문을 닫아 막고 진성대군을 추대하기로 벌써 계획이 이루워졌는데 폐주가 마침 장단에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였다. 장수와 병졸들은 분발하려는 생각에 기밀한 일이 이미 누설되었으므로 형세가 중지할 수 없게 되었다.이에 초하룻날 밤중에 장수와 병졸들을 훈련원에 모이게 하니 약속을 같이 한 모든 벼슬아치ㆍ군사ㆍ백성들과 풍문을 들은 자들이 다투어 달려왔으므로 골목과 길이 꽉 막히었다. 이에 부서를 나누어 변수(邊修)와 최한홍(崔漢洪)은 내성(內城) 동쪽을 지키게 하고 심형(沈亨)과 장정(張珽)은 내성 서쪽을 지키게 했는데, 창졸간에 군사가 없으므로 역군(役軍)들을 몰아서 호위하게 하였다. 성희안은 유순정ㆍ박원종과 함께 바로 광화문(光化門) 혹은 돈화문(敦化門)이라고도 한다. 앞 수백 보 쯤 되는 지점에 나아가서 말을 세우고 진을 쳤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밤 삼경에 창덕궁(昌德宮) 어귀에 진을 쳤다.” 한다. 박원종은 부채를 휘두르며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그 모습이 신과 같아 모두 “이 일을 먼저 발의한 이는 반드시 박영공(朴令公 박원종)일 것이다.” 하였다. 《음애일기》ㆍ《동각잡기》
○ 처음에 성희안이 우의정 김수동(金壽童)에게 가서 이 계획을 고하니 김수동은 “이는 나라의 큰 일이오. 나는 애초에 그 일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데 갑자기 한 재상의 말만 듣고 바쁘게 서둘 수 있겠는가.” 하고 곧 베개를 베고 누우면서, “그대는 내 머리를 베어 가라.” 하고 이어 목을 내밀어 책상 위에 얹었다.성희안이 진성대군을 세운다는 뜻을 고하니, 수동은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갈 것이니 그대는 먼저 가시오.” 하였다. 성희안이 일어나 나가자 수동은 천천히 의관을 정제하고 사람들을 벽제(辟除)하면서 왔다. 이때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모두 군복을 입고 창덕궁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김수동은 진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서는 곧장 윗자리로 가 앉았다.즉시 병조 판서를 불러, “그대들은 사람을 보내 진성대군(晋城大君) 집을 호위했느냐?” 하니, “미처 못했습니다.” 하므로, “마땅히 판서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호위하라.” 하였다.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해동악부》
○ 이때 형조 정랑 장정(張珽)이 칼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와, “진성대군의 저택이 매우 허술한데 어찌 시위를 아니하는가.” 하니, 세 대장(大將 성희안ㆍ박원종ㆍ유순정)은 두 손을 마주 잡으면서, “우리들의 실수이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심순경(沈順經)을 보내어 위사(衛士)를 거느리고 가서 호위케 하니, 장정은 후에 일등공신으로 책정되었다. 《기재잡기》
운수군(雲水君) 효성(孝誠) 덕천군(德泉君)의 둘째 아들이다. 이등공신으로 책정되었다. 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시위하게 하였다. 《기묘속록》
○ 신윤무(辛允武)를 시켜 용사 이심(李)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연산군을 꾀어서 악한 짓을 하게 한 신수영(愼守英)을 먼저 쳐 죽이고 그 다음은 임사홍(任士洪) 좌참찬 과 신수근 좌의정 등을 쳐 죽이게 했으니, 신윤무는 이심을 시켜 쇠몽둥이를 가지고 길 왼쪽에 숨어 있게 하고,한편 별감 한 사람을 시켜 명패를 가지고 가서 대궐에 가도록 그들을 재촉하게 하였다. 그들이 놀라서 창황히 대궐로 가는데 이심이 힘껏 내려쳐서 말에서 떨어 뜨리니 머릿골이 다 쏟아져 나왔다. 신수근도 맞아서 땅에 떨어지니 종 하나가 그 위에 엎드려 제 몸둥이로 쇠몽둥이를 막았다. 이에 이심은 드디어 종까지 함께 쳐 죽였다. 신수겸(愼守謙)은 이때 개성 유수였으므로 일이 성공하기를 기다려 천천히 사람을 보내어 죽이기로 하였다.
신수근 등이 비록 권세를 빙자하고 임금의 총애를 믿어 사치하고 방자하였으나, 그 당시에 음란한 임금에게 아부하여 나라의 근본을 기울게 한 자가 어찌 그 사람뿐이리오. 그런데 홀로 이 세 사람만 베어 죽인 것은 신수근이 본래 교만하고 방자스러워 법규에 따르지 않았으며, 또 국구가 되면 세력이 강하여 제어할 수 없게 될까 염려한 까닭이었다. 《음애일기》
○ 이심은 네 사람을 죽였으므로 튀긴 피가 얼굴에 가득히 묻었고 의복도 전부 붉게 물들었다. 그 공로를 남에게 보이고자 며칠이 지나도록 낯을 씻지도 않았으며 옷을 바꾸어 입지도 않았으니,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추하게 여겼다. 《음애일기》
○ 처음에 반정하려는 의논이 결정될 적에 세 대장이 “아무 아무는 죽여야 된다.” 하였는데, 강혼(姜渾)의 이름도 나왔다. 일을 일으키던 날에 유순(柳洵)을 묵은 정승이라 하여 부르니 유순이 달려갔다. 이때 시간이 삼경도 되지 않았는데 벽제(辟除)를 하면서 대궐에 나아가는 도승지 강혼을 만났다.이에 유순이 하인을 시켜 이르기를, “오늘은 너무 이르니 반드시 경고(更鼓)의 시간을 잘못 들었을 것이오. 영감(令監)은 내가 가는 대로 꼭 따라 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말 못한 일이 있을 것이오.” 하니, 강혼은 의아스럽게 여겨 이내 그 뒤를 따라갔다. 남소문(南小門) 어귀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훈련원에 사람과 말이 빽빽히 들어차고 등불이 휘황하였다. 유순은 말을 멈추면서,“오늘은 나를 뒤따라 잠시도 떠나지 마시오. 큰 일이 닥쳐 왔소.” 하니, 강혼은 그제야 매우 두려워하여 말에서 내려 유순을 가깝게 따라 나아가니 세 대장은 유순을 보고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하였다. 자리에 앉은 뒤에 박원종이 눈을 부릅뜨고 강혼을 보면서, “이 이가 누구요?” 하니 유순은 “강혼인데 내가 데리고 왔소.” 하였다. 박원종이 “전에 약속이 있어 먼저 죽이기로 했으니 지금 남겨둘 수 없소.” 하니,유순은 움찔하면서 말이 없었다. 유순정이 이를 보고 급히 박원종에게 “지금 요란한 시기에 서기(書記)할 사람이 없으니 서기를 맡겼다가 뒤에 죽여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박원종이 투덜거리다 말았다. 강혼은 드디어 소매를 걷어 올리고 붓을 잡고 이쪽 저쪽 다 받아 써서 능히 알맞게 하니 모두 다 잘한다고 하였다. 결국은 공신으로 책정되어 진천군(晋川君)이 되었다.
이로부터 강혼은 유순을 부형처럼 섬겨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가서 뵈옵고 새로운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올렸다. 유순이 죽은 후에는 그 부인을 섬겨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기재잡기》
○ 구수영(具壽永)은 임금의 음란한 행실을 인도하고 악을 퍼뜨린 죄가 있어 아울러 죽이려고 했는데, 그 족질(族姪) 구현휘(具賢暉)가 반정의 계획에 참여했으므로 구수영에게 달려가서 고하였다. 구수영이 훈련원에 나아가서 살려주기를 애걸하니 박원종 등이 그를 용서해 주었다. 《음애일기》
구현휘는 곧 구수영의 동성(同姓) 서얼(庶孼)이었다. 용력(勇力)이 뛰어나 세 공신(성희안ㆍ박원종ㆍ유순정)의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곧 일을 일으키려 할 때 장차 구수영이 화를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세 공신이 밤에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수영에게 가만히 알려서 술과 안주를 가지고 함께 세 공신이 모인 곳으로 나아갔다.구수영은 구현휘의 소개로 세 공신을 보고, “일찍이 평소 궁궐에 드나들면서 올바른 말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임금의 뜻을 감히 거스리지 못하고 명대로 거행한 일이야 어찌 없었다 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척당이 된 관계로 처지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또 사위 구수영의 사위 두 사람은 안양군(安陽君) 항(㤚)과 임희재(任熙載)이다. 가 화를 입고난 뒤에는 더욱 감히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할 수 없었지마는 그 본 마음이야 어찌 척당의 연줄을 타고 또 그것을 믿고서 다른 사람을 해친 일이 있겠습니까. 나를 용서하든지 죄를 주든지 다만 오늘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세 공신도 그렇게 여겨 같이 술잔을 나누고 헤어졌다. 마침내 반정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뒤에 공신을 책정할 때 구수영은 2등공신이 되고 구현휘는 3등공신이 되었다. 구씨가승(具氏家乘) ○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구수영은 박원종 등이 광화문(光化門) 밖에서 진을 쳤다는 말을 듣고 온 집안이 목놓아 울었다. 한 건장한 종이 있어,‘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습니까.’ 하고 급히 좋은 안주와 술을 갖추어 말을 타고 종들을 거느리고 벽제 소리를 내며 몰려 가서 세 대장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세 대장은 밤새도록 한데서 앉아 있었으므로, 시장하여 먹고 싶던 차에 종이 안주와 큰 술잔을 차례로 바쳤더니 여러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묻지도 않고 문득 너댓 잔씩 다 마시고 나서야,‘이것이 뉘집 물건이냐?’ 고 물으니 종은 구수영을 가리키면서, ‘구대감께서 가져온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세 대장은 서로 돌아보면서 깜짝 놀랐다. 종은 ‘오늘의 모임에는 이것이 큰 공을 이룰 것인데 이것이 아니면 여러분들이 매우 시장하신데 어찌 큰 일을 마칠 수 있습니까.’ 하여, 드디어 구수영이 공신으로 책정되었다.” 하였는데,이 말은 너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광화문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는 사람들을 살리고 죽이고 할 명부를 이미 만들어 의논을 정하고 있었다.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면 당장 국구가 될 사람도 오히려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찌 좋은 술과 안주의 공으로 이심(李)의 쇠몽둥이를 피하고 도리어 공신으로 책정되었으랴.또 과연 술과 안주로 화를 면했다면 어찌 2등공신 13명 안에 들어갈 수 있으리오. 기재(寄齋)의 시대는 음애(陰涯) 보다도 더욱 멀었으니 전문(傳聞)이 잘못되었음은 괴이할 것이 못된다.
○ 이때 여러 사람의 의논이 “유자광(柳子光)은 일을 많이 겪어 꾀가 많으니 이 일을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거사할 임시에 이르러서야 사람을 보내어 일러주고 또 만약 숨거나 머뭇거리면 때려 죽이겠다고 경계하였다. 유자광은 이 말을 듣고 말을 타고 군복을 입고 나갔다. 또 심부름하는 종을 시켜 두꺼운 유지(油紙) 비옷을 싸 가지고 따라오게 하니,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진중(陣中)에 와서 장수와 병졸을 파견할 때 급작스러워서 부신(符信)을 만들 만한 것이 없었다. 곧 유지를 오려서 부신을 만드니 사람들은 그 지혜에 탄복하였다. 《동각잡기》
○ 박원종은 심순경(沈順徑)과 더불어 교분이 매우 가깝고 정의가 아주 친하여 서로 간격이 없었으나 큰 계획이 결정되지 않은 날에는 오히려 감히 그 일의 단서를 발표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심순경을 대하여 술낌에 종사가 위태한 사실과 정사의 어지러운 일을 말하여 그 의사를 알아보니 심순경도 또한 동감임을 표시하였다.박원종은 그 누이가 죽으면서 반드시 원수를 갚아 달라는 부탁이 있었음을 남김없이 말하고 심순경은 또 그 가문의 화가 참혹했던 것을 말하였다. 이에 눈물을 거두고 의논을 정하고 나서는 비록 처자와 형제일지라도 이 일을 알리지 아니하였다. 일을 일으키는 날에 심순경은 그 어머니에게 “오늘은 여러 친구들과 교외에서 무예를 연습하고 활 쏘기를 겨루고자 하니 술을 마시고 얼근히 취해서 가겠습니다.” 하니 어머니가 술을 주었다.술을 다 마시고 난 후에 꿇어앉아 술 한 잔을 그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이것은 어머니의 장수를 비는 장수 술잔입니다.” 하니, 그 어머니는 웃으면서 받았으니 실상 그것이 영결하는 것인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의 누이는 종실 안현군(安賢君)의 아내인데 또한 술잔을 드리고 헤어졌다. 드디어 군기(軍器)와 군장(軍裝)을 검열하고 모두 가져 가서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았으나 집안 식구는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밤이 새고 일 되어 가는 기틀이 잡힌 뒤에야 그 기미를 깨달았다. 그 누이는 남편과 함께 이불을 쓰고 서로 붙들고 울면서, “나는 죄를 많이 얻었으니 장차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인정도 적구나. 이 사람아, 친동기가 한 방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알리지 않는구나.” 하였다. 안현군은 대개 종실 중에서 임금의 악을 인도하여 사랑을 받은 자였다.그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민망히 여겨 곧 사람을 시켜 심순경에게 말하였다. 순경이 박원종에게 간청하여 안현군을 불러서 일을 같이 하게 하여 마침내 공신에 참여되었다. 《기재잡기》
○ 폐인(嬖人 임금에게 총애 받는 내시 등) 전동(田同)ㆍ김효손(金孝孫)ㆍ강응(姜凝)ㆍ심금손(沈今孫) 등을 군영(軍營) 앞에서 베어 죽였다. 감옥의 문을 열어 죄수들을 내놓아 모두 군에 참가하게 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대궐 밖으로 진군하였다.
○ 해가 뜰 무렵에 벼슬아치들이 모두 모였으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 자도 있었다. 입직한 도총관 민효증(閔孝曾)과 참지 유경(柳涇)은 먼저 나가고 승지 이우(李堣)는 그 다음에 나갔다. 처음에 대궐 안에서는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까닭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임금은 차비문(差備門) 안에 앉아 승지를 불러 들어와 앉게 하고서,“이 같이 태평한 때에 어찌 다른 변고가 있으랴. 아마 흥청(興淸)의 본부(本夫)들이 서로 모여서 도적질하는 것이니 빨리 정승과 금부 당상을 불러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이우를 명령하여 열쇠를 가지고 대궐문을 돌아 다니면서 살피게 하였다. 이우는 먼저 사람을 보내어 사태를 알아 보게 하고 조정이 벌써 소속된 데가 있는 것을 자세히 알고는 그만 몸을 피해 밖으로 나가 버렸다.폐주는 이우가 벌써 나갔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서 윤장(尹璋)과 조계형(曹繼衡)의 옷소매를 잡았다. 두 사람은 거짓으로 공손히 하는 척하면서 소매를 뿌리치고 문구멍으로 빠져 나가려고 하였으나 조계형은 이때 임금의 총애를 받던 신하이므로, 문을 지키던 장사들이 상을 받으려고 붙들어 군영 앞에 나아갔다. 성희안(成希顔) 등은 그들을 모두 용서해 주었다.입직한 군사들은 혹은 수구(水口)로 빠져 나오기도 하고 혹은 성에서 줄에 매달려 넘어오기도 하며 다투어 군영 앞으로 달려갔다. 환관과 여러 색인(色人 궁중의 잡무를 맡는 사람들) 등은 모두 나가고 다만 후궁과 기생의 무리만이 서로 모여 목놓아 우니 소리가 밖에까지 진동하였다. 이에 군문(軍門) 안에서 회의를 열어 유자광(柳子光)ㆍ이계남(李季男)ㆍ김수경(金壽卿)ㆍ유경(柳涇)으로 하여금 머물러서 대궐 문을 지켜 도주할지 모르는 폐주를 지키게 하고,성희안 등은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 문 앞에 나아가서 자순대비(慈順大妃 성종의 계비이며 중종의 어머니)에게 처분을 청하니 조금 후에 문을 열고 그들을 들어오게 하였다.
○ 대비에게 아뢰기를, “지금 임금이 임금의 도리를 잃고 정사가 어지러워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사가 매우 위태하므로 모든 관원과 백성들은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임금을 삼기 위하여 감히 대비의 명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니, 대비는 “우리 아이가 어찌 중한 책임을 감당하겠오.지금 세자가 나이 장성하였으니 왕위를 이을 만하오.” 하고 사피하였다. 이에 유순(柳洵) 등이 여러 번 아뢰어서 명을 받았다. 《국조보감》
○ 성희안 등은 근정전(勤政殿) 서쪽 뜰에 나아가서 줄지어 앉고 유순정ㆍ정미수(鄭眉壽)ㆍ강혼을 시켜 진성대군을 그의 사저에서 맞아 오게 하였다. 진성대군이 평시서(平市署)의 이웃집으로 피해 가니 유순정 등은 이문(里門) 밖에 앉아 두 번 세 번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였다.이에 임금은 군복 차림으로 연을 타고 법물(法物)을 갖추어 나오니 저자에서는 가게 문을 닫지 않고 부로(父老)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오시(午時)에 경복궁으로 들어가서 해가 저물기 전에 백관의 반열을 정하였다.
○ 유순 등이 의논하기를, “옛날부터 임금을 폐하고 새로 세울 적에 그 죄를 따진 것은 창읍왕(昌邑王)을 폐할 때 뿐이니 지금도 마땅히 잘 조처합시다.” 하고 승지 한순(韓洵)과 내시 서경생(徐敬生)을 창덕궁으로 보내어 폐주에게 국새(國璽)를 내놓고 정전(正殿)을 피해 나가도록 청하였다. 폐주는 “내가 내 죄를 안다.” 하면서 곧 국새를 내어 상서원(尙瑞院)의 낭관에게 주었다. 미시(未時)에 백관들이 전정(殿庭)에 들어와서 반열이 정해졌다. 《국조보감》
○ 대비의 교지를 선포하였는데, “우리나라가 백년 동안이나 덕을 쌓아 백성의 마음에 흡족하여 만년토록 튼튼한 왕업이 마련되었는데, 불행히도 사군(嗣君 연산군)이 임금된 도리를 잃어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모든 신하들이 말하기를, ‘종사(宗社)가 중요하니, 진성대군 휘(諱) 은 일찍부터 인덕이 있어 백성의 마음이 모두 쏠리었다.’ 하여 세우기로 하였다.내가 생각하건대 어두운 임금을 폐하고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고금에 통하는 의리이니 이에 여러 사람의 소원에 따라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임금은 페하여 연산군(燕山君)으로 삼는다. 백성의 생명이 끊어지려다가 다시 이어졌으며, 종묘와 사직이 이미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하였다. 《국조보감》
○ 중종은 면류관과 곤룡포를 갖추어 입고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으며 이가 중종(中宗)이 되었다. 부부인(府夫人) 신씨(愼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백관의 하례를 받고 교지를 반포하여 모든 죄인을 사면하였다. 연산주 때의 나쁜 정사를 모두 고치게 하니 신하들이 천세를 부르며 기뻐 고함치는 소리가 우레 소리와 같았다. 《국조보감》
○ 김수동(金壽童)이 대궐에 들어가서 연산주를 폐하고 울면서, “노신이 죽지 않고 있다가 차마 이 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너무 인심을 잃었으니 또한 어찌 하겠습니까. 잘 보중(保重)하여 가시옵소서.”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은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을 폐했던 고사(故事)에 따라 전왕(前王 연산주)을 대궐 안으로 나오게 하고 대비에게 주(主 연산주)를 폐한 사유를 고하고자 하니 성희안(成希顔) 등이 말렸다. 폐하고 난 후에 전한(典翰) 김전(金詮)은 눈물을 흘리고 장순손(張順孫)은 춤을 추었다. 《음애일기》 《해동악부(海東樂府)》
대체 반정의 일은 성희안에게서 계획이 나와 박원종이 완성하였다. 위태함을 편안하게 만들고 재화를 복으로 변하게 하였으니 실로 우리나라가 만세(萬世)토록 뻗어나갈 사업이었다. 그러나 성희안은 성품이 과단성은 있었으나 학술이 없었으며, 유순정(柳順汀)은 천성이 너그럽고 나약하여 집념(執念)이 없었으며, 박원종은 추솔하고 사나우며 견식이 없었다.비록 충성과 절의에 북받쳐 공을 이루게 되었으나 일처리에 마땅함을 잃었으니, 전에 입은 은혜로 적신 유자광을 용납하여 뒷날의 화를 열어 놓고 자질구레한 인아친척(姻婭親戚)들에게 모두 철권(鐵券)을 주었으며,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훈공의 등급을 정하였으니 연거속구(連車續狗)의 허물은 지금까지도 비난거리가 되었다.
○ 폐주 연산군을 교동(喬桐)에 안치시키고, 폐비 신씨(愼氏)를 정청궁(貞淸宮)으로 나가 있게 하며 폐세자(廢世子) 황()ㆍ창녕대군(昌寧大君) 인(仁)ㆍ양평군(陽平君) 성(誠)과 돈수(敦壽)등은 모두 가마를 타고 귀양가게 하였다. 《국조보감》
변이 일어나던 처음에 폐주는 급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오라 했는데, 측근자들은 이미 밖으로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이에 폐주는 창황히 달려 들어가서 왕비에게 함께 나가서 간절히 빌자고 하니, 왕비는 “일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빌어본들 무엇이 도움되리오. 순하게 받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전일에 여러 번 간해도 끝내 고치지 않다가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스스로 화를 초래한 사람이야 비록 죽어도 마땅하겠지마는 이 불쌍한 두 아이는 끝내 어찌될고.” 하며 이내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니, 폐주는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들 무엇하리오. 뉘우쳐도 어찌 할 수가 없다.” 하였다. 날이 새기 전에 왕비는 대궐에서 나가는데 신었던 비단 신이 자주 벗겨져서 갈 수가 없었으므로,비단 수건을 찢어 신을 동여 매었다. 세자와 대군은 유모와 함께 청파촌(靑坡村)의 무당 집에 나가 있었는데, 해가 저물도록 먹지 못했으므로 무당이 밥을 대접하였다. 대군이 “어찌 새끼 꿩을 올리지 않느냐?” 하니, 유모는 울면서, “내일은 이런 밥을 얻어 먹어도 다행일 것입니다.” 하였다. 이를 보는 자도 또한 눈물을 흘렸다. 《장빈호찬(長貧胡撰)》
○ 대신들은 폐주를 안치시킬 절목(節目)을 의논하여 나인 4명, 내시 2명, 반감(飯監) 1명만 따라가게 하고, 당상관 한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호위하여 가게 하였다. 연산군은 붉은 옷에 갓을 쓰고 띠도 띠지 않고 내전문으로 나와 땅에 엎드리면서,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였다.평교자(平轎子)를 타고 선인문(宣仁門)ㆍ돈의문(敦義門)을 나올 적에 갓을 숙여 쓰고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연희궁(衍禧宮)에 유숙하고, 금포(金浦)에 유숙하고, 통진(通津)과 강화(江華)에 유숙하고 교동(喬桐)에 당도하였다. 따라갔던 장수 심순경이 복명하기를, “아무 탈 없이 모시고 갔습니다. 가는 길에는 노인과 아이들이 모두 달려와서 다투어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통쾌하게 여겼습니다.안치소(安置所)에 도착해 보니 둘레에 친 울타리가 좁고 높아서 해를 볼 수가 없었으며, 다만 작은 문 하나가 있어 음식을 통하였습니다. 울타리 안에 들어가자 시녀들은 모두 목놓아 울었습니다. 신이 하직을 고하니 말씀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고 수고했으니 고맙다.’ 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중종(中宗)이 전교하기를, “전왕의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안되었다. 나는 종사가 위태하고 신민이 추대하므로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길 수 없어 사피하지 못하고 이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전왕은 나와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였고 정의로는 형과 아우이다. 지금 날씨가 점차 추워지니 의복과 음식물을 실어 보내라.”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신 등은 폐주에 대한 대의(大義)가 이미 끊어졌으니 감히 마음을 쏠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전교는 지극한 정의에서 나온 것이오니 의복과 음식을 내려 보냄이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교동(喬桐)에는 반드시 털옷이 없을 것이니 털옷과 어물(魚物)을 따로 보내고자 한다.” 하니, “전하의 명은 지당하십니다. 그러하오나 지나치면 거북스러움이 있으니 간신히 배고픔과 추위만 면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연산군은 평소 소행이 한없이 잔인ㆍ패려하여 사람 죽이기에 거리낌이 없었으니, 폐위되어 물러갈 적에 마땅히 형벌을 받을 줄로 알고 몹시 두려워하였다. 이 날 큰 바람이 일어나 배가 거의 뒤집힐 뻔 하다가 간신히 교동에 당도하였다. 좌우로 호위하여 고을 뜰에 들어감에 장수와 군사들이 둘러섰으니 땅에 엎드려 땀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 보지도 못하였다.반정하던 때에 세자와 왕자는 다 보전하지 못 하는 것이므로 궁에서 나갈 적에 신씨(愼氏)는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교동에 가서 별일 없다고 하니 신비는, “그 때에 여러 대장에게 청해서 귀양간 곳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고 탄식하였다. 《소문쇄록ㆍ국조기사》
일찍이 연산군이 절구를 지었으니

여러 어진 이들과 화정에 연회하여 / 時許群賢宴畵亭
꽃과 술을 즐기며 태평을 깨달았네 / 閑憑花酒覺昇平
어찌 다만 은혜 입은 것만 좋아하랴 / 何徒爭喜鴻私厚
모두가 충성하여 정성 바치게 하고자 하노라 / 咸欲思忠獻以誠

하였다. 또,

중현대의 모임이 은대보다 넓은데 / 重賢寬於會銀臺
봄 바람 길 위에는 붉은 준마가 달려 가네 / 春滿長途叱撥催
취해서 한가하게 달을 즐길 뿐만 아니라 / 不啻醉憐閒夜月
돌아올 때도 악대를 이끌고 다시 거닐어 오네 / 歸牽歌菅可重徊

하였다. 조신(曹伸)이 뒷날에 차운(次韻)하였으니,

남의 집 헐어서 정자를 만들고 / 撤人廬舍摠爲亭
많은 여자 뽑아서 운평을 만들었네 / 採却靑紅作運平
원훈과 간신을 다 죽이고 / 誅盡元勳屠諫輔
내시들만 남겨서 충성하게 하였네 / 只留皂帽表忠誠

하였다. 또

서총대 쌓느라고 만인이 죽었는데 / 萬人駢死築葱臺
춤을 춘 기생에게 비단을 내려주네 / 舞罷迓祥賜錦催
부끄러운 기색으로 여러 아우의 뼈를 찾고자 / 忸怩欲尋諸弟骨
문득 해상에서 잠시 거닐고 있네 / 却於海上暫徘徊

라 하였다.
○ 12월에 이르러 호위하는 장수가 연산군이 역질(疫疾)로 매우 고통받는다고 아뢰었다. 이에 중종이 의관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으나 도착하기 전에 운명하였다. 시녀들은 “연산군이 죽음에 다달아 다른 말은 없었으며, 다만 신씨가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신씨는 곧 그의 왕비였다.임금은 전교를 내리기를 “후한 예로 장사 지내 주고 또 조회와 개시(開市)를 정지하고 묘지기를 정함이 어떠한가?” 하였다. 대신은 의논하여 아뢰기를, “장사는 왕자의 예로써 지내줄 것이나, 조회와 개시를 정지하고 묘지기를 정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전교를 내리기를, “그렇다면 감사를 시켜 상사를 보살피게 하고, 본관(本官)은 묘소에 화재를 금하고 수목의 벌채를 금하게 하라.” 하였다. 《패관잡기》
○ 이에 공조참의 겸 경연참찬관(工曹叅議兼經筵叅贊官) 유숭조(柳崇祖)가 차자를 올렸으니 그 대략에, “전일에 전왕이 인심을 크게 잃어 종사가 위태할 뻔했는데, 두세 대신이 천명과 인심에 따라 왕대비의 명을 받들어 전하를 추대하니 전하께서는 신민의 추대에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는데,전왕을 받드는 정성은 더욱 돈독하여 재부(宰夫 가축을 잡는 천직)와 선감(膳監)과 사랑받던 여자와 시종과 장사들에게 호위를 맡겨 뜻밖의 변고를 방비하게 하고 의복과 음식물도 길 왕래가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내려주셨습니다. 불행히 역질을 만나 갑자기 승하하자 전하께서 매우 슬퍼하시어 수라상을 폐하시고 조회를 정지하면서 초상 장사의 예절을 다하려고 대신에게 의논하셨는데,대신이 의논해 아뢴 것은 아마 의리에 합당치 못한 듯 하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임금과 아버지는 한 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비록 아버지 구실을 하지 못하더라도 아들은 아들된 도리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순제(舜帝)가 어찌 고수(瞽瞍)가 완악하다고 생존했을 때에 섬기고 죽은 뒤에 장사 제사 지내는 예절을 폐지했겠습니까. 태갑(太甲)이 법도를 파괴하고 예절을 문란하게 하자 이윤(伊尹)은 그를 동궁(桐宮)에 내쫓아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기를 기다렸습니다. 태갑이 혹시 잘못을 뉘우쳐 고치지 못하고 죽었다면 초상 장사의 예절을 어찌 처리하였겠습니까.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은 정치를 문란히 하여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쁜 시호를 얻었지마는 왕의 칭호는 없애지 않았습니다.전왕은 종사에 죄를 얻었으니 종묘에 모셔 제사지낼 수는 없지마는 신하가 임금을 위해 치르는 초상 장사의 예절은 마땅히 이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장사에는 능의 의식을 쓰며 따로 사당을 세우고 중국에 부고를 하는 것이 정의와 의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송태조(宋太祖)가 공제(恭帝 후주(後周))에게,우리 태조가 고려 공양왕(恭讓王)에게 초상 장사를 치러 주고 시호를 올렸던 예절을 본받을 것입니다. 중국의 사신이 만약 이 일을 묻는다면 미리 대책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겉만 꾸며서 대답하는 것은 정성으로 중국을 섬기고 아랫 사람에게 보이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널리 의논케 하였더니 모두 시행할 수 없다 하였다.유자광은 그 말을 극력 배척하여 법 맡은 관원에게 맡겨 그 실정을 국문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며, 박원종은 “그 사람을 근시(近侍)의 자리에 있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중종은 경연관의 벼슬을 갈게 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유승조를 죄 주면 언로가 방해된다 하여 벼슬을 갈지 않기를 청하고 다투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동각잡기》
○ 중종(中宗) 11년 병자에 도승지 이자화(李自華)를 보내어 연산군의 묘에 제사지냈는데 그 제문에, “나는 보잘 것 없는 몸으로 국운이 중간에 비색함을 당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신하에게 추대되어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으니 실로 두렵고 부끄러운 나의 마음이 어찌 끝이 있으리오.끝까지 서로 우애있게 지냄으로써 이 뜻을 풀고자 했는데, 한번 병들어 돌아갔으니 하늘은 어찌 그리 참혹한가. 세월이 흘러가니 추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도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제수를 드리고 삼가 나의 심정을 고하오니 제물은 극히 박하지마는 나의 적은 정성을 흠향하기 바라오.” 하였다. 《국조보감》 《동각잡기》
○ 병자년 10월에 참찬관(參贊官) 김굉(金硡)이 아뢴 말에 의하여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 줄 일을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폐비 신씨에게 자기 뜻대로 후사를 세우도록 하였다. 단종기(端宗記)에 상세하다.
○ 중종 13년 무인에 승지 권발(權橃)과 김정국(金正國)은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야 함을 극력으로 논했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단종기(端宗記)에 상세하다.
○ 중종 34년 기해에 한산 군수(韓山郡守) 이약빙(李若氷)이 소를 올려 연산군을 위해 후사를 세우기를 청하였다. 단종기(端宗記)에 상세하다.
○ 명종(明宗) 을사년에 이언적(李彦迪)이 의논해 아뢰기를, “전일에 사신이 북경에 갔을 때 중국 사람이 혹시 양로왕(讓老王 처음 반정하였을 때 중국에는 연산군이 자진하여 아우에게 양위하였다고 알렸다.)이 생존했는가, 별세했는가를 물으니 통역관이 감히 바른 말을 하지 못하고 별세한 것을 생존했다고 대답했으니 이것은 의리에도 미안할 뿐 아니라 뒷날에도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지금 상신(相臣)을 보내어 중국의 예부(禮部)에서 양로왕이 생존했는가, 별세했는가를 물으면 마땅히 사실대로 대답해야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쪽에서 만약 ‘그때에 왜 부고를 내고 시호를 청하지 않았느냐?’ 하면 대답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니 반드시 사리에 따라 잘 말해야 될 것입니다.또 ‘너희 나라의 통역관이 지난 겨울에 와서도 양로왕이 지금도 생존해 있다 했는데 어찌 그 말이 다르냐?’고 하면, ‘그때의 통역관은 아는 것이 없어서 창졸간에 잘못 대답한 것이 매우 해괴하니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되겠다.’고 대답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회재집(晦齋集)》
○ 중종 때에 폐비 신씨가 세상을 떠났다.
○ 심언광(沈彦光)이 신비의 만장(輓章) 세 수(首)를 지었으니 그 첫째에,

꿈 같은 장추궁에 몇 해 봄을 지냈던가 / 一夢長秋度幾春
표령한 신세가 다시 슬프게 되었네 / 飄零身世更悲辛
매양 보통 부부간의 이별을 들어도 눈물이 흐르는데 / 每聞契濶堪流涕
하물며 그 당시에 신하된 사람이랴 / 何况當時北面人

하였고, 그 둘째에,

10년 동안 소후가 수궁에 있었는데 / 十年蕭后在隋宮
말로의 생애는 안정되지 못했도다 / 末路生涯逐轉蓬
술지하라고 한 말은 참으로 약석이었건만 / 述志一言眞藥石
임금은 오히려 깊은 충곡(衷曲)을 살피지 못하였네 / 乾心猶不省深衷

하였고, 그 셋째에,

한 시대의 충량은 모두 간하다가 죽었는데 / 一世忠良眞剖心
임금은 무슨 일로 날마다 음란했던가 / 君王何事日荒淫
그 당시에 중전이 덕이 있었으니 / 當年中壼多陰敎
계명계가 깊지 않은 것이 아니로다 / 不是鷄鳴戒不深

하였다. 《어촌집(漁村集)》 《신씨족보(愼氏族譜)》


 

[주D-001]창읍왕(昌邑王) : 한 무제(漢武帝)의 아들로서 소제(昭帝)를 계승하여 황제가 되었다가 덕이 없어 폐위되었다.
[주D-002]곽광(霍光) : 창읍왕(昌邑王)을 폐출하고 선제(宣帝)를 세운 대신.
[주D-003]철권(鐵券) : 공신에게 주어 영구히 보존케 하는 것.
[주D-004]연거속구(連車續狗) : 옛날 중국 남북조 시대에, “보궐(補闕 : 관명)은 수레를 잇달아 실을 정도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관직을 남발한 것을 조롱한 말이며, 또 서진(西晉) 때에, “수달피의 꼬리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잇는다.”란 말이 있는데 이것도 관직이 남발되어 벼슬아치가 다는 수달피의 꼬리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잇는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이러한 고사에서 공신이 너무 많은 것을 말하였다.
[주D-005]고수(瞽瞍) : 순(舜)의 아버지인데 완고하여 아들을 죽이려 하던 자이다.
[주D-006]태갑(太甲) : 은왕(殷王) 성탕(成湯)의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는데, 덕이 없어 이윤(伊尹) 등에게 동궁(桐宮)으로 추방 당하였다. 후에 그가 잘못을 깨닫고 고쳤으므로 다시 복위시켰다.
[주D-007]장추궁 : 한대(漢代)에 태후가 거처하던 곳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신비(愼妃)가 왕비 자리에 있었던 것을 말한다.
[주D-008]술지하라고 한 말 : 왕비 신씨(愼氏)가 연산군(燕山君)에게 바른 말로 경계한 것을 말한다.
[주D-009]계명계 : 《시경(詩經)》에 ‘계명편(鷄鳴篇)’이 있는데 여기에 왕후가 왕에게 정사에 부지런할 것을 권한 계명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