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휘 득지 장인 우의정 민기 신도비

우의정을 지낸 민 문경공(閔文景公)의 신도비명

아베베1 2011. 6. 5. 10:13

잠곡유고 제13권
 신도비명(神道碑銘)
우의정을 지낸 민 문경공(閔文景公)의 신도비명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즉위한 첫해에 가장 먼저 어진 재신(宰臣)을 택해 재상으로 삼았으니, 문경공 민기(閔箕)가 바로 그 사람이다. 재상으로 있은 지 몇 달 만에 갑작스레 죽어서 새롭게 하는 지극한 다스림을 돕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공의 휘는 기(箕)이고 자는 경열(景說)이며, 여흥인(驪興人)으로,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민영모(閔令謨)의 후손이다. 고조는 사재감 직장을 지낸 휘 징원(澄源)으로,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을 지낸 휘 형(亨)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는 형조 참의를 지낸 휘 효손(孝孫)으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양천 현령(陽川縣令)을 지낸 휘 세류(世瑠)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장령 이인석(李寅錫)의 딸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홍치(弘治) 갑자년(1504, 연산군 10)에 탄생하였다. 5세 때 양(梁) 나라의 주흥사(周興嗣)가 운을 단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는데, ‘진초(晉楚)’ 두 글자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진 나라와 초 나라가 있기 이전에는 글자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니, 듣는 자들이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6, 7세 때 엄연하기가 마치 어른과 같았으며,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읽어 이미 학문하는 방도를 알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로는 사람들이 모두 학문하는 것을 기피하여 종사하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공은 개연히 발분하여 사서(四書)를 싸 들고 절로 올라가서 구부려 책을 읽고 우러러 생각하면서 밤낮없이 6, 7년 동안 계속하였다. 항상 이르기를, “옛 사람들은 글을 읽음에 있어 반드시 충분하게 읽고 깊이 생각한 뒤에 해석하였는데, 지금은 선유(先儒)들이 훈석(訓釋)을 해 놓아 보기만 하면 알 수가 있으니, 무슨 스스로 터득하는 공부가 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사서를 손으로 베껴 쓰면서 깊 궁구하였는데, 이해하여 깨닫는 바가 있으면 책에 쓴 다음 선유들의 학설과 대조하여 징험하였다. 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에게 가서 질정(質正)을 하였으니, 모재가 몹시 기이하게 여겨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세상의 유자(儒者)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신묘년(1531, 중종 26)에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기해년(1539) 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괴원(槐院)을 거쳐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며, 곧바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선발에 뽑혔다가 추천되어 사국(史局)에 들어갔다. 가을에 설서(說書)로 승진하였는데, 너무 빨리 승진하였다는 이유로 논박을 받아 체차되었다. 다시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겨울에 주서(注書)에 제수되었다. 경자년(1540)에 홍문관 정자와 저작을 역임하였다. 신축년(1541)에 수찬으로 전보되었다가 병조 낭관에 제수되었다.
임인년(1542)에 시강원 사서를 겸하였고, 천거되어서 이조 낭관이 되었다. 이때 공의 부친이 양천 현령(陽川縣令)으로 있었다. 공이 귀성(歸省)하여 어머니의 병을 보살폈는데, 직접 약을 맛보면서 침식을 폐하기까지 하였다. 7월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다음 해 선공(先公)께서 또 관(官)에서 졸함에 공은 통곡을 하면서 슬퍼하여 거의 실성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을사년(1545, 인종 1)에 복제(服制)를 마치고 8월에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이때 권간(權奸)이 용사(用事)하면서 큰 옥사(獄事)를 일으킨 탓에 사류(士類)들이 거의 다 죽었다. 그런데 공은 상복을 입고 외방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통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끝내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천거되어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 이기(李芑)가 이때 권상(權相)으로 있으면서 조정을 협박하였는데, 공은 그의 하료(下僚)로 있으면서 하는 일마다 서로 어긋났으나, 공은 정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이에 비록 이기의 노여움을 받았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이기가 몹시 껄끄럽게 여기면서도 흠잡을 만한 꼬투리가 없어 해칠 수가 없었다.
병오년(1546,명종1)에 응교로 승진되었고, 정미년(1547)에 병으로 사임하였다가 사도시 첨정을 거쳐 봉상시 부정이 되었다. 무신년(1548)에 전한에 제수되었고, 기유년(1549)에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5월에 충주(忠州)에서 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공이 문사관(問事官)이 되었다. 옥사가 끝나자 통정 대부로 승진하여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동부승지로 있으면서 이문정시(吏文庭試)에서 수석을 차지해 가선 대부로 승진하였다가 또다시 너무 빨리 승진하였다는 이유로 논박을 받았다. 이어 좌부승지로 전보되었다가 체차되어서 공조 참의, 병조 참지에 제수되었다.
신해년(1551)에 대사성에 제수되었고, 임자년(1552)에 사명(使命)을 받들어 북경(北京)에 가서 조회(朝會)하였다. 계축년(1553)에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을묘년(1555)에 또다시 이문정시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가선 대부로 승진되었는데, 외임으로 나가 호서(湖西)를 안찰하였다. 병진년(1556)에 조정으로 들어와 공조 참판이 되었다. 정사년(1557)에 대사간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무오년(1558)에 도헌(都憲)으로 전보되어 차자를 올려 ‘임금이 대신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예로써 해야 하며, 간쟁을 받아들임에 있어서는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극력 진술하였는데, 말이 몹시 절실하여 권귀(權貴)의 뜻을 거슬러 드디어 좌천되었다. 신유년(1561)에 다시 호서를 안찰하고 들어와서 대사성이 되었다. 또 사헌부의 장이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잡기에 힘썼으며, 뜻이 격양(激揚)시키는 데 있었으나 지나치게 심하게 하지는 않았다. 병조 참판과 이조 참판으로 전보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이 임금을 위협하면서 권세를 제멋대로 부렸다. 공이 한두 명의 재신들과 더불어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의리를 극론(極論)하여, 마침내 큰 간인(奸人)을 내쫓아서 조정이 맑아졌다. 이때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이미 죽었는데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에 공은 종사의 대계(大計)를 몹시 염려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에 나오는 ‘정국본(定國本)’ 한 편을 뽑아 영상 이준경(李浚慶)에게 올렸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마땅히 상(上) 앞에서 이 의리를 개진하여야 한다.” 하였는바, 이 영상(李領相)이 큰 계책을 정함에 있어서는 공의 힘이 컸던 것이었다. 얼마 뒤에 한성부 판윤으로 승진하였다.
병인년(1566, 명종 21)에 이조 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제수되었다. 상이 성심으로 어진 이를 구하면서 공으로 하여금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를 천거하게 하여 이항(李恒) 등 6명을 얻었다. 상이 이들을 편전(便殿)에서 인견하고는 차등 있게 관직에 제수하였는데,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은 실로 공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 나머지 공도(公道)를 넓히고 선류(善類)들을 드러내며, 재주에 따라 직임을 주는 등 능히 전형관의 직임을 다한 것은 일일이 다 기록할 수조차 없이 많다.
정묘년(1567)에 형조 판서로 전보되었다. 이때 명 나라 융경 황제(隆慶皇帝)가 새로 즉위하여 한림(翰林) 허국(許國)과 급사중(給事中) 위시량(魏時亮)이 조서를 받들고서 우리 나라로 왔는데, 공이 우참찬으로서 관반(館伴)이 되었다. 6월에 명종(明宗)이 승하하고 선조(宣祖)가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이었다. 중국 사신이 국경에 있는데 나라에 대상(大喪)이 있어 내외가 흉흉하였다. 공은 변례(變禮)에 처하여 접대를 함에 있어 잘못됨이 없게 하였다. 예조 판서로 옮겨서는 영천(永遷)하는 예식과 친제(親祭)하는 의식을 잘 치르도록 주선하고 이치에 합당하게 조처하니, 물의(物議)가 훌륭하게 여겼다.
10월에 우의정으로 승진 제수되었다. 공은 명을 듣고는 두려워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격의 차서에 따르지 않고 갑작스레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니, 반드시 복이 지나친 데 대한 재앙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피를 토하면서 간절하게 사직하였으나, 끝내 윤허받지 못하였다. 이에 공은 평소에 담비증(痰痺症)이 있었는데도 억지로 애써서 조정에 나아갔다.
무진년(1568, 선조 1) 1월 17일에 관청에서 퇴근하다가 행동이 불편하였는데, 다음 날 아침에 관대 차림을 하고서 손님을 만나 보다가 갑자기 구토를 하면서 정신을 잃어 잠을 자는 것처럼 혼수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에 상이 승지를 파견하여 문안하였으나, 이미 구제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향년(享年)이 65세였다.
상이 몹시 애도하면서 조회(朝會)를 철폐하였으며,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뜻하지 않게 대신이 서거하였는바, 애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하였으며, 또 승지를 파견하여 와서 조문하였다. 이해 4월에 통진(通津)의 치소(治所) 북쪽 해좌 사향(亥坐巳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선영이 있는 곳이다.
공은 천부적인 자질이 평온하고 넓었으며, 고요하고 조용하여 아무리 창졸간이라 하더라도 말을 빨리 하거나 안색을 바꾸는 법이 없었다. 상대방을 접함에 있어서 진실되게 하고 거짓이 없었으며, 집에 있거나 관청에 있을 적에는 사람들이 일찍이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착한 사람을 보면 지나치게 추켜세우는 법이 없었으며, 착하지 못한 사람도 능히 포용하였다. 혹 어떤 사람이 남의 단점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말하기를, “완전한 사람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단점을 버리고 장점만 취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계려(計慮)가 심원하여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을 생각하였으며, 자신의 덕을 숨기기를 잘하여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인묘(仁廟)께서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 학문이 고명하여 궁료(宮僚)들을 아주 신중하게 선발하였는데, 공은 항상 춘방(春坊)에 있었다. 인묘께서 즉위하였을 적에는 공이 막 부모의 상을 마쳤는데, 조정에서는 공이 조정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논사(論思)의 책임을 맡기었다.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가 도헌(都憲)이 되어서 공을 찾아와 묻기를, “현재 해야 할 일 가운데 어느 것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가?” 하자, 공이 말하기를, “임금을 바르게 하는 것이 급하다. 본원(本源)이 되는 곳인 임금이 통철하고 명쾌하게 되면 나머지 일은 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충주(忠州)의 옥사(獄事)에 있어 공은 마음 속으로 원통함에 대해 상심하고 있었으며, 또 그로 인해 승진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면서도 감히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승이 되어서는 경연 석상에서 그 원통함에 대해 극력 논하니, 상께서 깊이 받아들였다.
윤원형(尹元衡)의 종조(從祖) 동생인 윤춘년(尹春年)이 바로 공의 표매(表妹)의 아들이었는데, 시론(時論)을 틀어잡고서 정권을 농단하고 있었다. 공은 평소에 그의 사람됨을 박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 내왕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므로 자못 배제당하였다. 좌상으로 있던 윤개(尹漑)가 시사(時事)를 주도하자, 공이 끝까지 올라간 용은 후회가 있기 마련이라는 설로 풍자하니, 윤개가 기뻐하면서도 본뜻을 헤아리지는 않았다. 공이 그렇게 한 것을 미워하던 자가 일에 따라서 공을 헐뜯자, 상이 공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서 극언(極言)하자, 공을 미워하던 자들이 이 일을 매개로 하여 공을 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태연자약하게 대처하였다.
공은 세 번이나 대사성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앞뒤로 5, 6년이나 되었는데, 온 힘을 다하여 가르치면서 종시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은 학식도 있고 행실도 있어서 명망이 평소에 드러나, 조야에서 잔뜩 기대를 하면서 모두들 너무 늦게 정승이 된다고 하였다. 좌의정으로 있던 이명(李蓂)이 일찍이 입시하여 늙어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또 육경(六卿) 가운데 재주와 덕이 정승의 직책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있다고 아뢰었는데, 이는 대개 공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공은 성인(聖人)들의 책이 아니면 보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맹자(孟子)》와 《주역(周易)》을 가장 좋아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행실을 닦고 세상에 대처하는 도리가 모두 이 안에 들어 있다. 《주역》을 모르면 마치 담벼락을 마주하고 선 것과 같다. 그러니 종신토록 외워 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으며, 머물러 있는 곳을 관물재(觀物齋)라고 이름하였다.
말년에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읽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사학(史學)이 경학(經學)과 비교하여 어떠하기에 공은 그처럼 좋아하는가?” 하고 묻자, 공은 대답하기를, “무릇 국가의 치란과 흥망, 인재의 현부와 진퇴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고문(顧問)에 대비하여 성학(聖學)을 도울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낭료(郞僚)로 있을 적에 상이 신광한(申光漢)에게 뒷날에 문형(文衡)을 맡길 만한 자가 누구인가를 물으니, 신공이 공이라고 대답하였다. 공의 문장은 경술(經術)에 근본을 두었으며, 법도에 맞아 점잖고 명확하면서도 고상하였으므로, 나라에서 반포하는 교서(敎書)는 대부분 공의 손에 의해 지어졌다.
공은 종족들에게 화목하게 대하여 오래 전에 한 약속도 저버리지 않았으며, 형제들 사이에는 우애가 아주 돈독하였다. 나라를 위해 계획함에 있어서는 항상 원기(元氣)를 보양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고 군덕(君德)을 보필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경연에 입시하여서는 계옥(啓沃)한 것이 많았으며, 논의를 할 즈음에는 진정시키기를 유념하였는바, 혹 소요스러울 것을 염려하여 말하기를, “부득이한 일이라면 마땅히 먼저 해야 하겠지만, 다급한 일이 아니라면 조용하게 바로잡고 촉박하게 하다가 전도되는 일이 없게 하여야 한다.”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렸을 적에 집은 가난하고 부모님은 연로하시어, 시문(時文)을 짓는 데 힘써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나의 평소의 뜻은 이런 것이 아니다. 성명(性命)의 근원을 궁구하고 공자(孔子)와 안자(顔子)가 즐긴 것을 탐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풍진(風塵) 속에서 그럭저럭 지내다 보니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게 되었다. 이것이 운명이란 말인가.” 하였다.
공은 찰방 김택(金澤)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고려에서 시중을 지낸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다. 아들이 없어서 종제(從弟)인 민순(閔筍)의 둘째 아들 민수도(閔守道)를 후사로 삼았다. 민수도는 조정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상서원 부직장에 이르렀으며, 판서 성세장(成世章)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은 넷으로, 민대인(閔大仁), 민대륜(閔大倫), 민대수(閔大脩), 민대숙(閔大俶)이고, 딸은 둘로, 사인(士人) 홍효충(洪孝忠)과 김현(金睍)에게 시집갔다.
민대인은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민진원(閔震遠)으로 의금부 도사이고, 차남은 민진흥(閔震興)으로 성균관 진사이다. 1녀는 찰방 유성립(柳誠立)에게 시집갔다. 민진원의 1남은 민원(閔晼)이고, 1녀는 사인 최득지(崔得之)에게 시집갔다. 민대륜은 군기시 첨정으로 단지 1녀만 있는데, 첨지 이구원(李久源)에게 시집갔다. 민대수는 성균관 생원으로 1남을 두었는데, 민진경(閔震慶)이다. 민진경의 1남은 민윤(閔昀)으로 전 임실 현감(任實縣監)이고, 2녀는 참봉 유헌길(柳軒吉)과 진사 신명성(申命晠)에게 시집갔다. 민대숙은 후사가 없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90년이 되었는데, 묘비의 글이 없었다. 어느날 현감 민윤이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신도비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후생 말학으로서 견문이 고루한바, 참으로 감히 거칠고 졸렬한 말로 공의 일과 업적을 서술할 수가 없었으나, 현손(玄孫)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퇴계 선생이 지은 행장의 글에 따라서 차례대로 서술하고 신도비명을 짓는 바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학문을 함에 있어선 / 人之爲學
사물 이치 궁구함이 귀한 거라네 / 貴於窮格
성현들이 지은 글을 읽으면서는 / 讀聖賢書
더욱더 사색해야 하는 법이네 / 尤當思索
진실되고 진실되네 상공께서는 / 允矣相公
마음에서 스스로 터득했다네 / 於心自得
들어서 놓음이 마땅하였고 / 宜擧而措
공 이루어 은택이 미치게 했네 / 功成致澤
하늘이 남겨 두길 원하지 않아 / 天不慭遺
어쩜 그리 빠르게도 빼앗아 갔나 / 奪之何速
공에게 이미 재주 주어 놓고서 / 旣才之畀
베풀게 하는 데는 인색하였네 / 而施之嗇
나라의 입장에선 불행한 거고 / 邦家不幸
백성들도 복 없기는 마찬가지네 / 民亦無祿
만고토록 한스러움 남아 있기에 / 萬古遺恨
이 빗돌에 새기어서 남겨 두누나 / 留之玆石


 

[주D-001]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校理), 수찬(修撰)을 선거 임명하는 기록을 말한다. 본관록(本館錄), 관록(館錄)이라고도 한다.
[주D-002]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 : 명종 4년 4월에 윤임(尹任)의 사위인 이홍윤이 충주(忠州)에 살면서 그의 아버지 이약빙(李若氷)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원통히 여겨 분개하는 말을 자주 하였는데, 그와 사이가 나쁘던 그의 형 이홍남(李洪男)이 역모(逆謀)를 하였다고 고변(告變)하였다. 이로 인해 강유선(康惟善), 이이(李彝), 안세장(安世章) 등 33명이 처형되었으며, 충주는 강호(降號)하여 유신현(維新縣)으로 삼고 충청도는 청홍도(淸洪道)로 고쳤다. 《燃藜室記述 卷10 明宗朝故事本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