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휘 득지 장인 우의정 민기 신도비

여묘(廬墓) 사는 박 청도(朴淸道)에게 주는 시의 서 소윤공 관련기사

아베베1 2014. 6. 21. 18:03

 

 

 

贈朴淸道廬墓詩序

校書郞崔直之以其外大父朴君臨絶遺子詩一絶示予曰。吾外祖早入大學。補經德齋。學旣通。應擧不第。退而不求仕。家于完山。嘉遯自樂。不惑於佛神妖007_207b誕之說。篤信斯道之正。年至八十。康強無恙。有男曰晉。中進士。仕內侍。出宰淸道。女則吾母也。吾父與吾昆弟聯擢科第。躋于仕版。以榮于家。實惟我祖翁訓誨之力是賴耳。淸道舅亦且六旬。悶親之老。棄官歸侍。修滫瀡奉湯藥。朝夕惟謹。及有疾將殆。賦詩以示。其辭曰。八十年當卧蟻床。六旬孝子藥先甞。死生存命終難避。近汝慈墳立壽堂。明日遂終。淸道廬墓三年。都觀察使成公,完山府伯安公嘉其孝行。旌表門閭。爲鄕黨榮已極矣。舅民乃欲分韵求諸縉紳之作。以耀先君潛德於無窮。使人走千里抵京師。以囑直007_207c之。直之亦不勝凱風寒泉之感。歷謁縉紳請之矣。是不可無序。吾子旣辱知吾舅。又嘗與吾父遊。而吾昆弟亦甞從而問學。雖未甞面吾祖而耳其言。然子之知吾家有素矣。若得吾子言冠篇首。以誇示于今而不泯于後。豈惟吾舅與吾父子幸也。吾祖亦且感激於地下矣。予義不辭。與之言曰。古者有鄕生抱道而不仕。生而能以其德善一鄕。沒而可祀於其鄕者。若予之外大父其人也。吾於平日雖未獲升堂而致拜。以接其緖論之高。今觀其臨絶之詩。則篤父子之情。達死生之理。從容得正而斃。殆與曾子啓手知免之007_207d之訓同一氣象。平日之所養可知也已。淸道又能養志不違。葬祭以禮。旌其閭而顯其家。稱於鄕而播於國。子之父子昆弟。振振其仁。曄曄其光。躡文科而踵膴仕。是盖乃祖德積而不施。慶發於無窮。孝友之美。勳烈之成。當世世相承而益振矣。奚待夫予言而後不泯哉。建文元年己卯十二月初吉


 

 

 

 

양촌선생의 문집에 기록된  문성공 5세손 휘 직지  

 

여묘(廬墓) 사는 박 청도(朴淸道)에게 주는 시의 서


교서랑(校書郞) 최직지(崔直之)가 그의 외할아버지 박군(朴君)이 임종할 때 그의 아들에게 유언한 시(詩) 한 절구를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우리 외할아버지가 일찍이 태학(太學)의 경덕재(經德齋)에 들어가 학문을 통하였으되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매, 물러나 벼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완산(完山)에 살아 스스로 은둔을 즐기면서, 불신(佛神)의 요사스럽고 허황한 말에 현혹되지 않고 사도(斯道 유교(儒敎))의 정당함을 독신하였는데, 나이 80에 이르도록 건강하여 병이 없었습니다. 아들 진(晉)은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내시(內侍)로 벼슬하다가 청도(淸道) 수령으로 나아갔으며, 딸은 곧 우리 어머니입니다. 우리 아버지와 우리 형제가 모두 과거에 올라 벼슬하여 문호를 빛낸 것은 실로 우리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을 힘입은 것입니다. 청도 외삼촌 또한 나이 60에 어버이의 늙음을 민망히 여겨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봉양하는데, 몸소 용변을 받아 내고 탕약(湯藥)을 받들며 아침저녁으로 삼갔습니다. 병들어 돌아가시게 되매 시(詩)를 지어 보였는데 그 시에,

나이 팔십이라 죽어야 마땅한데 / 八十年當臥蟻床
육십난 효자 약을 맛보누나 / 六旬孝子藥先嘗
사생은 천명이라 피하기 어렵나니 / 死生存命終難避
너의 어미 무덤 곁에 나를 묻어 다오 / 近汝慈墳立壽堂
하고, 이튿날 드디어 돌아가셨는데, 청도에서 3년 동안 시묘(侍墓)를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도관찰사(都觀察使) 성공(成公)과 완산부백(完山府伯) 안공(安公)이 그 효행을 가상히 여겨 문려(門閭)에 정표하니, 향당(鄕黨)의 영광이 이미 극진하였습니다. 외삼촌께서는 운(韻)을 돌려 여러 진신(縉紳)들의 글을 구하여, 돌아가신 아버지의 숨은 덕을 영원히 빛내려고 천리 길에 사람을 보내 서울에 이르러 직지(直之)에게 부탁하는지라, 직지 또한 개풍 한천(凱風寒泉)의 감회를 참지 못하여 진신들을 역방(歷訪)하며 청하였는데, 여기에 서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대는 이미 우리 외삼촌을 알고 또한 일찍이 우리 아버지와 더불어 교유하였으므로, 우리 형제도 일찍이 나아가 글을 배웠습니다. 비록 우리 외할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말씀도 듣지 못하였지만, 그대는 내 집을 본래부터 아는 처지라, 만약 그대의 글을 얻어 책머리에 붙여서 오늘날에 과시(誇示)하고 후세에 없어지지 않게 한다면, 어찌 우리 외삼촌과 우리 부자만의 다행이겠읍니까! 우리 외할아버지 역시 지하에서 감격할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의리로 보아 사양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이 쓴다.
“옛날에 시골 선비로서 도학을 갖추고 벼슬하지 않으며, 살아서는 능히 그 덕으로 한 고장을 잘 교화시키고 죽어서는 그 고장의 향사(享祀)를 받는 이가 있었으니, 지금 그대의 외할아버지 같은 이가 바로 그런 분이다. 내가 평일에 비록 그 문하에 나아가 뵙고 그 서론(緖論)의 고아(高雅)함을 접하지는 못하였으나, 지금 그 임종할 때의 시를 보니, 부자의 정의에 독실하고 사생의 이치에 밝아서 조용히 올바르게 죽었으니, 자못 증자(曾子)의 ‘내 손을 열어 보아라. 내가 이제 훼상(毁傷)을 면한 줄 알았노라.’고 한 훈계와 그 기상이 같은지라. 평일에 수양한 바를 알 수 있다. 청도가 또한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고 장제(葬祭)를 예로 받들어, 문려를 정표 받고 가문을 빛내 고장이 칭송하고 나라에 전파하였다. 그대의 부자 형제가 진진(振振)한 인(仁)과 빛나는 영광으로 문과(文科)에 올라 좋은 벼슬을 하였으니, 이는 그 할아버지가 덕을 쌓되 자긍하지 않았으므로, 경사가 무궁하게 발하는 것이다. 효우(孝友)의 아름다움과 훈렬(勳烈)의 이룸이 대대로 계승하여 더욱 떨치리니, 어찌 내 말을 기다린 뒤에 민멸하지 않으랴.”
건문(建文 명 혜제(明惠帝)의 연호) 원년 기묘(1399, 정종1) 12월 1일


 

[주D-001]경덕재(經德齋) : 고려 예종(睿宗) 4년(1109)에 국학(國學)에 베푼 7재(齋) 중의 하나로 모시(毛詩)를 전공하던 곳이다.
[주D-002]내시(內侍) : 고려 때 숙위(宿衛) 및 근시(近侍)의 임무를 맡아 보던 관원. 재예와 용모가 뛰어난 세족의 자제 또는 시문에 능한 문신 출신으로 임명하였다.
[주D-003]개풍 한천(凱風寒泉) : 개풍은 《시경》 패풍(邶風) 중의 편명. 한천은 개풍 중 ‘원유한천(爰有寒泉)’의 구절에서 인용된 것인데, 이는 자식들이 어버이를 잘못 섬기는 것을 자책한 시다.
[주D-004]내 손을……알았노라 : 증삼(曾參)이 병들어 제자들을 훈계한 말로, 몸을 온전히 보전하여 죽는 것도 효도의 하나인데, 이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論語 泰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