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율곡 이이

율곡 이이 선생 전서 행장(行狀)

아베베1 2011. 6. 26. 12:09

 

 

    이미지 사진은   2011.6.26.  도봉산 원통사에서 바라본 서울시내의 모습

   검단산 예봉산 불암산 팔당댐이 보인다

 

  조선의 석학 율곡 본관이 덕수 이며 비조 고려중랑장  이돈수의 후손이시다  

 

  해동18현 중의 한분이며 조선의 과게에서 8번 합격중 8번의 장원급제를 하신분 신사임당이 모친이시다 .

 

     

 율곡선생전서 제35권
 부록(附錄) 3
행장(行狀) [김장생(金長生)]


문인(門人) 김장생(金長生) 지음[撰]
본관(本貫)은 경기(京畿) 풍덕부(豐德府) 덕수현(德水縣)이다.
고조(高祖)의 이름은 이추(李抽)인데 벼슬이 지군사(知郡事)로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고, 그 부인 윤씨(尹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증직되었다.
증조(曾祖)의 이름은 이의석(李宜碩)인데 벼슬이 판관(判官)으로서 대사헌(大司憲)에 증직되었고, 그 부인 최씨(崔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조부(祖父)의 이름은 이천(李蕆)인데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그 부인 홍씨(洪氏)는 정부인에 증직되었다.
부(父)의 이름은 이원수(李元秀)인데 벼슬은 감찰로서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그 부인은 의인(宜人) 신씨(申氏)로 정경부인에 증직되었다.

선생(先生)의 휘(諱)는 이(珥)요, 자(字)는 숙헌(叔獻)이다. 그 상세(上世)에 이돈수(李敦守)라는 분이 고려(高麗) 때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는데, 이분이 시조(始祖)가 되었다. 대대로 훌륭한 점을 계승하여, 벼슬이 정승(政丞)으로서 부원군(府院君)이 된 분은 이윤온(李允蒕)이고, 벼슬이 사공(司空)으로서 낙안백(樂安伯)에 봉해진 분은 이천선(李千善)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분은 이인범(李仁範)인데, 이분이 이양(李揚)이란 분을 낳았다. 이분이 아조(我朝)에서 처음으로 벼슬하여 참의(參議)가 되었고, 판서(判書)에 증직되었다. 이분이 이명신(李明晨)이란 분을 낳았는데, 이분의 벼슬은 지돈녕사(知敦寧事)로서 시호(諡號)는 강평(康平)이다. 이분이 지군사(知郡事)를 낳았는데, 자세한 것은 덕수세보(德水世譜)와 여러 묘비(墓碑)와 묘갈(墓碣)의 기록에 있다.
감찰공(監察公)은 진실하고 정성스러워 꾸밈이 없고[無華], 마음이 너그럽고 착한 것을 좋아하여, 옛사람의 풍도가 있었다. 신씨(申氏)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신명화(申命和)의 딸로서 자질(資質)과 천품(天品)이 아주 뛰어나, 예(禮)에 익숙하고 시(詩)에 밝았으며, 옛날 여자의 법도[女範]를 모르는 것이 없었다.
선생은 가정(嘉靖 명나라 세종의 연호) 병신년(1536, 중종31) 12월 26일에 관동(關東 영동(嶺東)) 임영(臨瀛)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에 신부인(申夫人)의 꿈에, 용(龍)이 아이를 감싸 품 안에 넣어 주는 것을 보았으므로, 어렸을 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하였다. 나면서부터 남달리 영리하고 뛰어나서 말을 배우면서 바로 글을 알았다. 세 살 때에, 외할머니가 석류(石榴)를 가지고 “이것이 무엇 같으냐.” 하고 물어보자, 선생은 곧 고시(古詩)를 들어 대답하기를, “석류 껍질 속에 부서진 붉은 구슬[石榴皮裏醉紅珠]이라” 하여,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5세에 신부인이 병이 나서 위독하여 온 집안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선생은 몰래 외할아버지 사당(祠堂)에 들어가 기도를 드렸다. 그의 이모가 마침 지나가다가 보고 경탄하고 그를 달래어 마음을 풀어 주고 안고서 돌아왔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물을 건너가다가 넘어져 거의 죽을 뻔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손뼉을 치면서 웃었으나, 선생은 홀로 내려다보며 걱정스러운 모습을 하고, 놀라 소리를 지르다가, 그 사람이 나오고 나서야 그쳤으니, 어버이에 효도하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8세에 스승에게 글을 배워 학업이 날로 진취하였다. 일찍이 화석정(花石亭)에 올라가 시를 지었는데, 그 격조(格調)가 완전하게 이루어져 아무리 시율(詩律)에 능숙한 사람이라도 따를 수 없었다.
9세에 《이륜행실(二倫行實)》을 읽다가 장공예(長公藝)의 9대(代)가 한집에 산다는 대목에 이르러 바로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9대가 한집에 사는 것은 형편상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형제간에는 떨어져 살 수는 없다.” 하고는, 마침내 형제가 함께 살면서 부모를 봉양하는 그림을 손수 그려 놓고 보았다. 또 옛날 명현이나 장상의 사실을 모으기를 좋아하여 그 이름을 쓰고 그 행적을 기록하여 우러러 사모하였다.
13세에 진사(進士) 초시에 합격되었다. 문장이 날마다 진취하여 칭찬이 자자하였지만 그런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드디어 성현의 학문에만 전심(專心)하였다.
16세에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 하면서 꼭 가례(家禮)대로 하여 최질(衰絰)을 벗지 않고, 손수 제찬을 장만하였고, 그릇 씻는 일까지도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18세에 관례(冠禮)를 하였다. 학문을 하는 데는 오로지 심법(心法)에만 힘을 썼다. 그때에 선생이 막 상복을 벗었으나 애모하는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항상 밤낮없이 부르짖으며 울었다. 하루는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불서(佛書)를 읽고 그 생사(生死)의 설에 깊이 감명하였으며, 또 그 학문이 간편(簡便)하면서도 고상하고 오묘한 것이 좋아 한번 속세(俗世)를 떠나 구도해 보려 하였다.
19세에 여러 친구들에게 편지로 이별하면서 말하기를, “글[文]은 배워서 능할 수 없으나 기(氣)는 길러서 이룰 수 있다. 이 기란 것은 사람마다 똑같이 타고난 것으로서, 잘 기르면 마음에 의해 부릴 수 있지만, 잘 기르지 못하면 마음이 기에 부림을 당하게 된다. 기가 마음에 의해 부려지면 몸에 주재(主宰)하는 바가 있어서 성현도 될 수 있지만, 마음이 기에 부림을 당하게 되면 칠정(七情)을 통솔할 수 없어 어리석고 미친 사람이 됨을 면할 수 없다. 옛날 사람으로 기를 잘 기른 이가 있는데, 맹자(孟子)가 바로 그분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즐기고, 어진 사람은 산을 즐긴다.’ 하였는데, 산을 즐기는 자는 우뚝 서 있는 것만을 취할 뿐 아니라 그 고요한 도[靜之道]를 취해 본받아야 하며, 물을 즐기는 자는 흘러가는 것만을 취할 뿐 아니라 그 움직이는 도[動之道]를 취해 본받아야 할 것이니,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기를 기르려면 산과 물을 놔두고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하고, 절에 들어가 침식도 잊어 가며 열심히 계율을 지키고 선정(禪定)을 닦았다.
한참 지난 후에 홀연히 생각하기를, ‘불씨(佛氏 부처님)가 그 제자에게, 생각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라고 경계한 것은 무슨 뜻인가. 대개 그 학문은 별다르게 기묘한 것이 없다. 다만 이 마음이 내달리는 길을 끊어 정신을 집중시켜 정(靜)함이 지극하여 허명(虛明)한 경지로 나아가게 하고자 할 뿐이다. 화두(話頭)를 두고 거기에 매달려 공부하게 하는데, 또 그 사람이 미리 이런 뜻을 알면 선(禪) 공부가 알뜰하고 전일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런 금법(禁法)을 만들어서 속이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이단(異端) 학설의 잘못된 것을 깨달아서 그 학문을 다 버리고 유도(儒道)에 전심(專心)하면서 스스로 경계하는 글[自警文]을 지어, 한결같이 성현을 표준으로 삼아 경(敬)과 의(義)를 지니고 아는 것을 실천하여, 스승의 가르침 없이도 스스로 그 미묘한 것을 얻었다. 한번은 배우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릴 때에 쓸데없이 선가(禪家)의 돈오법(頓悟法)이 도(道)에 들어가는 매우 빠르고 묘한 법이라고 생각하여, ‘만상(萬象)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는 것을 화두로 삼아 수년(數年)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깨닫지 못하다가 돌이켜 구해 보고는 그제야 그것이 참된 학설이 아님을 알았다.” 하였다.
23세에 퇴계(退溪) 선생을 도산(陶山)에 가 뵙고, 주일무적(主一無適)ㆍ응접사물(應接事物)의 요령을 물었다. 그 후 서찰을 주고받으며 거경(居敬)ㆍ궁리(窮理)와 《중용(中庸)》ㆍ《대학(大學)》의 집주(輯註)와 〈성학십도(聖學十圖)〉 등의 학설을 변론하였는데, 퇴계가 옛날의 의견을 버리고 율곡의 설을 따른 것이 많았다. 일찍이 편지를 보내와 말하기를, “세상에 영특한 인재가 한량없이 많지만, 옛날 학문에 마음 두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대처럼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젊은 사람이 바른길에 발을 내디뎠으니, 앞으로 성취될 바가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천만번 부탁하니 스스로 더욱더 원대(遠大)한 뜻을 기약하라.” 하였다.
신유년(1561, 명종16)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다. 갑자년(1564)에 사마시(司馬試)와 문과(文科)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곧 호조 좌랑(戶曹佐郞)이 되었다. 명종(明宗)이 〈석갈등용문(釋褐登龍門)〉이라는 글제를 내놓고 글을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선생이 30운(韻) 율시(律詩)를 지어 바치자, 상이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특별히 많은 상을 주었다. 을축년(1565)에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겨 제수되었고, 얼마 있다가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는데, 스스로, “새로 나온 사람이 갑자기 언관(言官)의 직책을 맡을 수 없다.”고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그러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병인년(1566)에 동료(同僚)를 거느리고 상소하기를, “뜻을 세워 학문에 힘쓰시고 정당한 선비들을 가까이하소서.” 하였다. 겨울에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옮겼다. 벼슬길이 혼탁한 것을 개탄하고 공정한 도를 펴는 데 힘써, 뇌물을 주고[關節] 청탁하는 길을 막으려 하였으나, 이조 판서 박영준(朴永俊)이 시행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이 탄식하기를, “고질이 된 나쁜 폐습을 진실로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융경(隆慶 명나라 목종(穆宗)의 연호) 정묘년(1567, 선조1) 명종의 장사 때에 택일(擇日)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넉 달 만에 장사를 지내려 하자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예월(禮月)을 기다리지 않고 급히 장사 지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자 왕대비(王大妃)가 다섯 달이 되거든 장사 지내라고 하면서, “비록 길하지 않다 하여도 그대로 하는 수밖에 없다.” 하였다. 그러자 영상(領相) 이준경(李浚慶)과 좌상(左相) 이명(李蓂)이 아뢰기를, “선왕(先王)의 영혼을 편안히 모시는 데 좋은 달을 가리지 않는 것은 죄송합니다.” 하였다. 선생이 이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제후(諸侯)가 다섯 달 만에 장사 지내는 것은 선왕이 정해 놓으신 제도이며 달을 택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자전(慈殿)께서는 정당한 이치를 밝게 아시는데, 대신들이 그 훌륭한 뜻에 순종하지 못하고, 도리어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중요시하니, 시국이 되어 가는 것을 알 만하다.” 하였다.
무진년(1568, 선조1)에 옮겨 가 직강(直講)이 되어,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北京)에 갔다가 겨울에 조정에 돌아와서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제수되었는데, 바로 선조(宣祖)가 복(服)을 입고 처음 임금이 된 때였다.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어릴 때에 선학(禪學)에 물든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감히 논사(論思)의 책임을 맡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상이 좋은 말로 비답하기를, “예전부터 아무리 호걸스러운 선비라도 불씨(佛氏)에게 빠져들어 간 것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전에 선문(禪門)에 종사(從事)했다는 작은 실수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논사(論思)하는 중대한 직책을 경솔하게 체차할 수는 없다. 또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진 그 뜻이 가상하다.” 하였다.
얼마 있다가 다시 이조 좌랑이 되었는데 외조모의 병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벼슬을 내놓고 강릉(江陵)으로 내려가자, 사간원에서 “외조모를 가 뵙는 것은 법전(法典)에 없다.”고 탄핵하였으나, 상이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겨 윤허하지 않았다.
기사년(1569, 선조2)에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서울에 들어와서, “스스로 아직 학문이 미진하여 정사에 나갈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 일이 있기 전에도 여러 번 요직(要職)을 사양해 오다가 이때에 와서는, “외조모께서 양육해준 은혜가 있는데, 강릉에 살면서 늙고 병든 데다가 자식이 없으니, 벼슬을 내놓고 돌아가 봉양하게 해 주옵소서. 장차 학문이 진취될 때를 기다려 벼슬하게 해 주옵소서.” 하였다. 그러자 상이 답하기를, “몸은 비록 조정에 있어도 또한 왕래하면서 보살필 수 있는데 어찌 꼭 벼슬을 내놓아야만 하는가.” 하시고는 이조(吏曹)에 명하기를, “외조모를 가 보는 것이 아무리 법에 없다고 하나 교리(校理) 이이(李珥)만은 특별히 가 보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선생이 임금의 은혜에 감동하여 벼슬에 나가니, 그때가 명묘(明廟)의 담사(禫祀) 때였는데, 구례(舊例)에 담사(禫祀) 후에 하례하는 자리를 베풀게 되어 있었다. 선생이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상께서 상제(喪制)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하례를 받는 것은 정리(情理)에 비추어 미안한 노릇이요, 또 백관(百官)이 통곡하던 끝에 바로 하례를 드리는 것은 노래하고 곡하는 것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다.” 하고는,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하례하는 것을 위안례(慰安禮)로 대신할 것을 청하였다.
8월에 경연에서 《맹자》를 강의하다가 아뢰기를, “세대(世代)마다 각각 숭상하는 것이 있는데, 전국(戰國) 시대에는 나라를 부요하게 하고 군사를 강하게 하여 싸워서 이기고, 공격하여 빼앗는 것뿐이었습니다. 서한(西漢)의 순후(淳厚)한 것과 동한(東漢)의 절의(節義)와 서진(西晉)의 청담(淸談)은 모두 그 시대에 숭상하던 것입니다. 임금은 마땅히 그 시대의 숭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되, 그 숭상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으면 그 폐단을 고쳐야 합니다. 지금은 권간(權姦)들이 선비들을 꼼짝 못하게 한 후로, 선비들의 습관이 맥이 풀어지고 안일하고 나태하여, 녹이나 먹어 제 몸 살찌우는 것이나 알 뿐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비록 뜻있는 사람 한둘 있더라도 모두 유속(流俗)에 구애되어, 감히 기운을 내서 나라의 힘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풍속의 숭상하는 것이 이러하니, 성상께서는 크게 무언가 해 보고자 하는 뜻을 떨치시어 사기를 북돋아 주셔야만 세도(世道)를 고칠 수 있습니다. 옛날 맹자는 필부(匹夫)의 힘으로 단지 언어만 가지고 사람을 가르치면서도 간사한 불길을 끄고 바른길을 넓혔습니다. 하물며 임금은 세상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고 계시니, 능히 사도(斯道)로써 백성을 가르치신다면, 후세에 교훈을 남길 뿐만 아니라 또한 당대에도 교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니, 그 공이 어찌 맹자와 같을 뿐이겠습니까.” 하였다.
강의를 마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이 다스리려 하지 않으면 그만이거니와 만일 다스려 보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학문에 힘써야 합니다. 학문이란 것은 단지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나가서 예전 글을 많이 읽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격물(格物)ㆍ치지(致知), 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공부를 게을리하지 아니해서 실제로 그 공효가 있어야만,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필부는 제 집에만 있기 때문에 아무리 학문의 공(功)이 있어도 그 공효가 세상에 나타날 수 없지만, 임금은 그렇지 않아서 마음속에 쌓인 것이 정사로 발현되기 때문에 그 공효가 즉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백성들은 살기가 어렵고, 풍속은 각박하고 모질고, 기강(紀綱)이 없어지고, 선비의 습관은 바르지 아니한데, 전하께서 임금이 되신 지 수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다스린 공효를 볼 수 없으니, 전하의 격물ㆍ치지, 성의ㆍ정심의 공부가 미치지 않음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다스리는 데 뜻을 두신다면, 비록 추요(蒭蕘 꼴 베고 나무하는 하찮은 사람)의 말이라도 성덕(聖德)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만일 전하께서 그럭저럭 별생각 없이 단지 글이나 알려고 하신다면, 비록 공자ㆍ맹자가 항상 좌우에 있으면서 날마다 도리(道理)를 말한다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나아가 아뢰기를, “조정에서는 마땅히 체통(體統)을 지켜야 하는데, 며칠 전에 승지(承旨)가 면대를 청하였습니다. 이 일이 근래의 규정에 맞지 않아서 체통을 무너뜨릴까 염려됩니다. 가령 국가에 무슨 큰일이 날 기미가 있다 하여도 논사(論思)를 맡은 대간(臺諫)이 있는데 하필 승지가 청대(請對)한단 말입니까.”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이 말은 맞지 않습니다. 다만 그 말한 것이 어떤 것인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만약 그 말한 것이 옳다면 체통에 손상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승지도 경연(經筵)의 참찬관(參贊官)이니, 청대하여 논사(論事)하는 것 또한 그의 직분입니다. 요즘 들어 착한 정사가 시행되지 못하고 온갖 제도가 해이해지고 있으니, 만약 발분하여 일어서서 일대(一代)의 법규를 새롭게 하지 않고, 한갓 구습에 구애되어 예전 것만 지키려 한다면 어찌 쌓여 온 폐단을 바로잡아, 크게 무언가를 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신으로서 임금을 정당한 길로 인도하지는 아니하고, 오직 근규(近規)만을 지키는 것에만 힘쓰니, 너무도 아랫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선생은 매양 경연에서 진강(進講)할 적에, 학문과 정사에 대해 자세히 진달하였다. 그러나 상께서 아무 말도 없이 잠자코 있자, 아뢰기를, “입시(入侍)하는 신하가 아뢸 일을 미리 생각하여 밤낮없이 연구하였다가도, 전하 앞에 와서는 임금의 위엄에 눌려서 속에 있는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말씀을 주고받으신다 해도 오히려 아랫사람의 마음이 위에 이르지 못할까 염려될 것입니다. 하물며 잠자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어 저지하는 경우야 어떠하겠습니까. 요즘의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은 근고(近古)에는 없던 것으로서, 백성들은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좋은 계책을 널리 구하여 빨리 이 시국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며, 깊숙이 팔장이나 끼고 있으면서 아무 계책도 세우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명종께서 2백 년의 종사를 전하께 물려주셨으니, 전하는 그 근심을 물려받은 것이요, 그 즐거움을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2백 년의 종사가 날마다 위태롭게 되어 가는데 전하께서는 떨쳐 일으킬 방법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공부가 쌓여 덕행(德行)이 되어야만 여기서 발전하여 사업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덕행도 없이 사업이 있을 수 있는가. 또 삼대(三代)의 다스림은 갑자기 회복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전하의 이 말씀은 참으로 근본을 따지는 이론입니다. 덕행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나 정사는 하루라도 덮어 둘 수 없는 것입니다. 훌륭한 덕행이 이룩되기 전이라 해서 정사를 불문에 붙이고, 문란한 대로 내버려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덕행과 사업은 마땅히 아울러 닦고 진행하여야 합니다. 또 삼대의 다스림을 참으로 갑자기 회복할 수는 없지만, 폐습을 개혁하여 백성을 구하는 일이야 어찌 하기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요순(堯舜)의 덕은 따라가기 어렵지만, 다만 요순의 심법(心法)을 구하여 요순의 정사를 본받기만 하면 요순의 다스림도 거의 따라갈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전에도 또한 요순의 덕이 없이 요순의 다스림을 한 이가 있었는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예전 사람으로서 요순을 본받은 이가 없기 때문에 그 다스림을 보지 못하였는데, 실로 요순을 본받아 시행하였다면 어찌 그 다스림이 없었겠습니까. 맹자께서 제 선왕(齊宣王)과 양 혜왕(梁惠王)에게 왕도(王道)를 행하라고 권한 것은 이 두 임금이 왕도를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어찌 빈말하기를 좋아하여 그러했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독서당(讀書堂)의 월제(月製)에서,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말을 만들어서, 왕도(王道)와 패도(霸道),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도(道)를 변론하고, 그 이름을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 하여, 성상께서 보시게 하였다. 그 뒤에 상이 묻기를, “어째서 한 문제(漢文帝)가 스스로 포기했다고 여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한 문제는 진실로 어진 임금으로서 한(漢)나라의 전성기를 맞았으니, 예전 도(道)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잡패(雜霸)에 그치고 말았기 때문에 신이 스스로 포기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한 문제가 능히 예전의 도를 회복하지 못한 것은 경적(經籍)이 불에 타서 진실한 선비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어째서 한 문제의 허물인가?” 하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한 문제는 큰 뜻이 없어서 매양 비루한 의논을 좋아하였으니, 문헌(文獻)이 있다한들 또한 어쩔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으로 뜻을 높이 세우지 않은 이는 대체로 모두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에 왕비(王妃)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는데, 선생이 상소하여 그때의 폐단을 논하고 이어서 왕비(王妃) 선택하는 도(道)를 진달하였다. 그 대략에, “예전에는 제왕(帝王)과 혼인한 사람은 선성(先聖)의 후손이거나 선현(先賢)의 후예가 아닌 이가 없었고, 그를 구하는 방도는 요조숙녀(窈窕淑女)를 자나깨나 구해도 얻을 수 없어서 자나깨나 생각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대궐 뜰에 모아 놓고 그 우열(優劣)을 간택하기를 지금같이 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왕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지금부터는 얼굴의 생김새나 옷맵시로 등급을 정하거나, 앞날의 길흉(吉凶)을 미루어 점치는 것을 우선으로 삼지 말고, 먼저 그 부모의 어진 정도를 보아서 그 가법(家法)을 살피고, 그다음에는 위의(威儀)가 법도에 맞는가를 보아서 그 여덕(女德)을 살피며, 또 대신에게 물어 반드시 여러 사람의 마음에 흡족한 뒤에야 결정을 짓는다면, 하늘과 사람의 뜻이 같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루는 상께서 말씀하시다가 을사년(1545, 인종1) 이야기가 나왔는데,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아뢰기를, “위사(衛社)할 때에 착한 선비로서 죽은 사람이 있어서 그때 그 일의 흉터가 아직도 아물지 못했습니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대신의 말이 어째서 이렇게 어물어물하며 분명하지 않습니까. 위사(衛社)란 것은 위훈(僞勳) 으로서 그때 죄진 사람은 모두가 착한 선비입니다. 인종(仁宗)께서 승하하신 후 중종(中宗)의 적자(嫡子)는 단지 명종(明宗) 한 분이 계실 뿐인데,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어찌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데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간흉(姦凶)들이 천공(天功)을 탐내어 사림(士林)을 쳐 죽이고 위훈에 등록하여, 신인(神人)이 분노(憤怒)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정사를 베푸시는 초기에, 마땅히 그 위훈을 삭제하시고 명분을 바르게 세우시어 국시(國是)를 정하는 일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준경이 아뢰기를, “이 일은 선조(先朝)에서 해 놓은 것이라 갑자기 고칠 수 없습니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명종께서 어리신 나이로 즉위하셔서 간흉들의 속임수를 면치 못하셨으나, 지금은 하늘에 계시는 영혼도 그 간악한 것을 다 아셨을 터이니, 아무리 선조(先朝)에서 해 놓은 일이라 하여도, 고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였다. 겨울에 그 외조모의 병이 중하다는 기별을 듣고 벼슬을 내놓고 돌아가 뵈었다.
경오년(1570, 선조3)에 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제수되었다. 5월에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기를, “을사년과 기유년에 누명(陋名)을 쓴 억울한 죄를 씻어 주옵소서.”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와 삼사(三司)에서도 동시에 논계(論啓)하였으나, 여전히 위훈(僞勳)이라고 거론하지는 않았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명분을 바로 세우는 것은 정사의 근본인데, 명분의 바르지 않은 것으로 위훈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하고는 동료들에게 말하여 위훈을 삭제하는 의논을 힘껏 주장하였다. 그때에 퇴계(退溪) 선생도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또한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이미 정해 놓은 일을 고쳐 없앨 수는 없다.” 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선생의 변론이 지나쳤다고 보는 의견이 많았지만, 선생은 홀로 여러 사람의 의론을 배척하고 시종일관 흔들리지 않았다. 옥당(玉堂)에서 41회나 올린 차자(箚子)가 모두 선생이 손수 쓴 글이었다. 정축년(1577, 선조10)에 가서 선생의 의논을 가지고 또 변론하여 결국 임금의 마음을 돌리니, 여러 사람들이 시원하게 여겼다. 겨울에 벼슬을 사양하고 해주(海州)로 내려갔다.
신미년(1571, 선조4)에 파주(坡州)로 돌아왔는데,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시켰으나 나가지 않았다. 얼마 있다가 임금의 부르심을 받들어 홍문관 교리로 조정에 들어왔는데, 검상사인(檢詳舍人)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6월에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제수되어 백성의 교화(敎化)에 오로지 힘써서 손수 향약법(鄕約法)을 만들어 거느리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병으로 내놓았다.
임신년(1572, 선조5) 여름에 홍문관 부응교에 제수되자 사은(謝恩)하고, 병으로 인해 벼슬을 맡을 수 없다 하고는 다시 사양하고 파주(坡州)로 돌아갔다. 그때에 정승 이준경은 거만한 태도로 선비들에게 몸을 낮추지 아니하고, 또 구례(舊例)를 고수하는 것으로 임금을 인도하며 그럭저럭 때워, 정승으로서 볼만한 업적이 없어 선비들이 대부분 시원치 않게 생각하였다. 더욱이 홍담(洪曇)ㆍ김개(金鎧)의 무리와 함께 선비들을 억누르려는 의향이 있었다.
무진년(1568, 선조1) 간에 김개가 대사헌이 되어서 이준경이 시키는 뜻을 받들어, 박순(朴淳)ㆍ박응남(朴應男)ㆍ기대승(奇大升)ㆍ이후백(李後白)ㆍ윤두수(尹斗壽) 등 16명을 논핵하여 제거하려 하다가, 마침내 다른 일로 벼슬을 내놓게 되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기사년(1569, 선조2)에 두 번째로 경연에 들어가, “나이 젊은 사람들이 당파(黨派)를 만들어 어른을 업신여겨, 기묘년의 풍습을 이루고 있다.”고 하자, 대간(臺諫) 안자유(安自裕)ㆍ정철(鄭澈), 승지(承旨) 심의겸(沈義謙) 등이 면전에서, “기묘년의 사람들을 비난하고 남곤(南袞)ㆍ심정(沈貞)의 하던 일을 그대로 한다.”고 배척하니, 삼사(三司)에서도 모두 문외출송(門外黜送)할 것을 청하였다. 그 이튿날 승지 기대승이 청대(請對)하여 그 곡절을 힘껏 진달하고는, 그를 죄줄 것을 청하였다. 퇴계 선생도 그의 행위를 미워하여 기대승에게 편지하기를, “우리들이 오늘날 실제로 국사를 바꾸거나 정치법을 바꾸어 혼란스럽게 한 것이 없는데, 전에 있던 사람을 박해하여 내쫓고 자기 일을 하기 위하여 당파(黨派)를 만들려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있지도 않은 일을 억지로 덮어씌워 죄를 만들고 옛날 사람이 잘못한 것을 가지고 지금 사람을 배척하는 증거로 만들어서 반드시 그물이나 함정 가운데 쓸어 넣고야 말려고 한다.” 하였다. 그 뒤에 이준경이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승지(承旨)로서 청대(請對)하는 것은 근래에는 없는 법입니다.” 하니, 선생은 그렇지 않다고 변론하였다. 명묘(明廟)의 삼년상(三年喪)을 마친 뒤에 선비들이 말하기를, “명묘는 이미 인묘(仁廟)의 뒤를 이었으며, 남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아들이 되는 법이니, 인묘는 연은전(延恩殿)에 모셔서는 안 되며 문소전(文昭殿)에 모셔야 합니다.” 하였는데, 이준경은 “인묘와 명묘 사이는 아비와 아들과 달라서 연은전(延恩殿)에 모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논의가 합치되지 않자, 삼사(三司)에서 “이준경이 또 이기(李芑)의 말을 따라간다.”고 논핵하였다.
신미년(1571, 선조4)에 이준경이 그 사촌 아우 이원경(李元慶)을 시켜 백인걸(白仁傑)ㆍ홍담(洪曇) 등 여러 재신(宰臣)을 통하여, 다시 박순(朴淳)ㆍ박응남(朴應男)ㆍ이후백(李後白)ㆍ윤두수(尹斗壽)ㆍ윤근수(尹根壽)ㆍ오건(吳健)ㆍ정철(鄭澈) 등 17명을 죄주게 하려 하였는데 그 말이 퍼져 백인걸에게 혐의가 돌아가자, 백인걸이 갑자기 파주(坡州)로 내려갔다. 이 때문에 이준경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준경이 병들어 죽을 무렵에,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조신(朝臣)들 사이에 당파가 있어서 전하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니, 반드시 없애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깜짝 놀라 의심하였다. 선생이 상소하여 그 의혹을 풀어 드리고, 조금 있다가 원접사(遠接使)의 계차 종사관(啓差從事官 임금의 뜻을 전달하는 관리)으로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또 홍문관 응교에 제수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이(李珥)는 본래 오활(迂闊)한 사람이다.” 하는 전교(傳敎)를 내리기도 했다. 이는 선생이 스스로 학문이 진취되지 못하여 정사에 나갈 수 없다며 여러 번 요직을 사양하면서 아뢴 말들이 반드시 당우(唐虞)와 삼대(三代)의 도(道)로 말하였기 때문에 이런 전교를 내린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한(典翰)을 시켰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계유년(1573, 선조6)에, 홍문관 직제학을 제수하고 세 차례나 부르시면서 그대로 두지 않자, 조정에 들어왔다. 상이, “그대는 어찌하여 물러가기만 하고 오지는 않는가.” 하시니, 선생은 “신은 병이 깊고 재주가 적어서 무언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없이 녹(祿)만 축낼 뿐이라, 물러나 죄를 면하는 게 낫기 때문에 감히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그대의 재주는 내가 아는 바이다. 지나치게 겸손한 말만 하지 말고, 지금부터는 다시는 물러가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시니, 선생은, “신은 시골에 처박혀 있어서 전하의 학문이 얼마나 성취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백성들은 초췌하고 풍속은 자꾸만 나빠져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전하의 학문이 날로 빛나기를 기대하고 있으나 끝내 그 공효를 볼 수 없으니, 신은 이 점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즉위하신 초기에는, 대신들이 보좌하고 인도한 것이 잘못되어 매양 근래의 법만 가지고 선비의 의론을 배척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잘 다스리지 못한 것입니다. 필부(匹夫)도 오히려 글을 읽어 실천하면, 세상을 구제해 볼 생각이 있는 법인데, 하물며 전하께서는 할 만한 자질을 타고나셨고, 온 나라의 백성을 통솔하시면서 무언가 해 볼만한 권세를 다 가지셨으니, 어찌 걱정이 되시거나 스스로 분발할 뜻이 없으시겠습니까. 향약(鄕約)은 바로 삼대 때 쓰던 법인데, 전하께서 시행하라고 명을 내리셨으니, 진실로 근대(近代)에는 없던 경사입니다. 다만 모든 일은 근본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향약은 온 백성을 바루게 하는 법입니다. 조정에 있는 백관(百官)이 바른 데에 이르지 못했는데, 먼저 만민(萬民)을 바르게 하려 한다면 이는 뿌리를 버려두고 말단(末端)을 다스리는 것이니, 일은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몸소 실천하시고 마음으로 본받으셔서 조정에서부터 실천하게 하여, 정사와 명령이 모두 정당한 데서 나오게 되어야만 백성들이 감동하여 따라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실정을 살펴보고 경솔하게 시행하려 하지 않았으나 언관(言官)들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간 것이다.” 하시자, 선생은, “전하께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정치를 해 보려고 하신다면 단지 이 한 가지 생각만이 곧 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뜻이 되는 것이니, 어찌 덕이 문왕(文王)과 같아야만 비로소 주(周)나라의 사업을 시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10월에 경연에서 아뢰기를, “임금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스스로 만족스럽게 여긴다면 착한 말이 어떻게 들어가겠습니까. 반드시 귀를 기울여 널리 들어서 그중 착한 것을 가려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여야만, 모든 신하가 나의 스승이 되어서 여러 가지 착한 것이 임금의 몸으로 모여들어 덕업(德業)이 높아지고 넓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겸손하신 태도로 아무것도 모른다 하시면서 물러나 사양하시는 것이 하교(下敎)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공론(公論)을 따르지 않고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남이 나만 못하다고 보는 병통이 있는 것이니, 신은 민망하게 생각합니다. 삼공(三公)이 아무리 건의하여 아뢰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전하의 뜻을 거스르고 도리어 군덕(君德)에 누가 될까 두려워하는 까닭에 민망하게 여기면서도 잠자코 있으면서 시간만 보내는 것입니다. 만약 전하의 뜻이 좋은 정사를 해 보려고 하신다면, 대신들도 또한 속에 있는 말을 다할 것이요, 조정에 있는 신하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각각 진달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우리나라 일은 참으로 다스리기가 어렵다. 한 가지 폐단을 고치려 하면 또 한 가지 폐단이 생겨서, 폐단은 능히 고치지도 못하고 도리어 해만 더한다.” 하니, 선생이, “기강이 서지 않고 인심이 해이하고, 관청에서는 사람을 가려 쓰지 않아 구차하게 자리나 채우고 있는 자가 많고, 한갓 먹고사는 것만 알고 나랏일은 생각하지 않기에, 폐단을 고치라는 명령이 내리기만 하면 귀찮아하고 꺼리는 생각부터 먼저 가져서, 능히 받들어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그 기회를 타서 고의로 폐단이 생기게 하는데, 이것이 공적을 나타내지 못하는 소이입니다.” 하였다.
얼마 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하여 경연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지금 나라에는 기강이 없어서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만약 그대로 나간다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반드시 전하께서 큰 뜻을 분발하시고 기왕 잘못하신 것을 깊이 뉘우치셔서 대신들을 엄하게 신칙하되, 한꺼번에 정신을 차리게 하여 기강을 세워야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기강은 법령이나 형벌로써 억지로 세울 수 없습니다. 조정에서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을 공정하게 하여 사사로운 정(情)이 통할 수 없게 한 뒤에 기강이 서는 것입니다. 지금은 공(公)이 사(私)를 이기지 못하고 정당한 것이 간사한 것을 이기지 못하니, 기강이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보는 바는 자고로 같지 않아 오활(迂闊)한 선비는 ‘요순(堯舜)의 다스림을 하루에 이룰 수 있다.’ 하고, 속된 선비들은, ‘옛 도[古道]는 결코 행할 수 없다.’ 여기는데, 이것은 모두 옳지 않습니다. 정사는 당우(唐虞)를 표준으로 삼아야 하고 사업은 점진적으로 해 나가야 합니다. 신이 그전에 옥당(玉堂)의 자리에 있으면서 늘 당우와 삼대(三代)의 일을 가지고 전하께 아뢰었는데, 신이 별안간 실효를 보고자 해서가 아니고, 다만 오늘 한 가지 일을 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해서, 차차 훌륭한 경지로 들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정사를 본받을 수 있는데, 그때에는 인재를 등용함에 상례(常例)에 얽매이지 않았고, 어진 사람에게 맡기거나 능한 사람을 등용하되 각각 그 재주에 알맞도록 하였습니다. 지금도 반드시 사람을 가려 벼슬을 시키고 직임을 맡겨서 책임을 완성하게 하여야만 모든 업적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기묘년(1519, 중종14) 간에 조광조(趙光祖)가 임금에게는 훌륭한 임금이 되게 하고, 백성들을 윤택하게 해 줄 뜻이 있었지만, 나이 젊은 선비로서 일을 점진적으로 해 나가지 못해 시끄러움을 면치 못하였고, 결국 사림(士林)의 화를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이에 책임을 맡은 자들이 문득 기묘년의 화를 경계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기묘년에 일을 점진적으로 하지는 못했다 하나 어찌 오늘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반드시 먼저 실천하시어 근원이 맑아진 뒤에 다스림이 갖추어지고 다음에 시행하여야만 모든 아랫사람들이 감동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내 몸을 닦으려면 반드시 어진 사람을 높여야 하는데, 어진 사람을 높인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 벼슬을 주는 것뿐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 말을 사업에 옮겨야만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어진 사람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으나 다만 그에게 벼슬을 주는 것만을 보았을 뿐이고 그 말을 사업에 옮겼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도(道)를 지키고 있는 선비가 어찌 허례(虛禮) 때문에 나와서 벼슬을 하겠습니까. 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만약 재덕(才德)만 있으면 헌관(憲官)으로 쓰는 것이 국가의 상규(常規)인데, 기묘년 이후부터는 드디어 벼슬길을 막아 버렸으니, 이것은 조종(祖宗)의 법규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어진 사람을 쓰는 것이 진실로 좋기는 하나 다만 일에 경험이 없는 사람이 그 일을 하면서 너무 지나칠까 염려가 된다.” 하니, 선생은, “만약 너무 지나친 일이 있으면 전하께서 마땅히 제재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세도(世道)가 점점 쇠미해져서, 선비들은 과거가 출세하는 길인 줄로만 알고 있지만 저 훌륭한 인물들은 과거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으니, 과거로 사람을 쓰는 것은 말세(末世)의 습관입니다.” 하였고, 또, “지금 꼭 해야 할 것은 공도(公道)를 넓히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 털끝만큼도 사사로운 뜻이 없으셔야만 인심을 감동시킬 수 있는데, 요즘 들어 대간(臺諫)이 아뢴 바가 궁궐의 내수사(內需司)에 관계되는 일이면 전하께서 반드시 딱 막아 버리셨습니다. 모든 아랫사람들이 전하께서 무슨 사사로움이 있으신가 의심하면서, 아무 말 없이 넘어가는 것이 체면을 유지하게 됩니다. 신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어리석은 자라도 어쩌다가 제대로 아는 것이 있으니, 또한 들을 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다른 날 선생이 다시 “과거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라도 언관(言官)의 길을 열어 주옵소서.” 하여, 상이 그 안건을 대신에게 내렸다. 대신들이 모두 옳다고 여기자,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밤에 비현합(丕顯閤)에 나가 시신(侍臣)을 불러 《서전(書傳)》을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태갑(太甲)은 이윤(伊尹)이 바로잡아 주고 보좌함에 힘입어 능히 훌륭한 덕을 이루었으니, 만일 이윤이 없었으면, 그가 덕(德)을 이루었을지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임금이 어진 사람을 얻는 것은 다만 한때의 이익이 될 뿐만이 아니요, 또한 육척의 고아[六尺之孤]를 부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리 성스럽고 지혜로운 임금이라도 넒은 천하를 홀로 다스릴 수는 없어서 반드시 어진 사람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요(堯)는 순(舜)을 얻지 못하는 것을 근심으로 삼았고, 순(舜)은 우(禹)와 고요(臯陶)를 얻지 못하는 것을 근심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임금의 책임은 어진 사람을 얻는 데 있습니다.” 하였다.
진강이 끝나자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변론하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학설은 지극히 정밀하고 절실하니, 이런 정명(精明)하신 학문으로 실천하는 공부에 더욱 힘쓰시면 이 시국을 바른길로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글 뜻만 잘 안다하여도 만일 자신에게 공부하지 않는다면, 또한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신이 보건대, 근래에 와서 기강이 해이해지고 명령이 시행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불속이나 물속에 있는 것과 같으니, 이러고는 국가가 무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시급히 어진 선비를 부르시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진술하게 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절실한 것을 채택하여 시행하신다면, 그래도 이 시국을 구제할 수 있겠지만, 혹시라도 머뭇거리고 예전의 전철을 밟는다면, 점점 더 나빠져 아무리 훌륭한 현인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어쩔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예전부터 새로 나라를 세운 임금은 덕을 잃은 일이 있더라도 오히려 작은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세운 지가 오래되어 점점 쇠퇴해지면, 아무리 어진 임금이 있어도 능히 다스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니, 선생이, “그렇지 않습니다. 주(周)나라 선왕(宣王)과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는 모두 중흥(中興)한 임금인데, 이 두 임금이 어찌 문왕(文王)과 고조(高祖)보다 어질다 하겠습니까. 진 도공(晉悼公) 같은 이는 14세에 즉위하였는데, 육경(六卿)은 강하고 공실(公室)은 약하였지만,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마침내 패업(霸業)을 이룩하였으니, 생각건대, 그 뜻을 세우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뜻을 세우고 정치를 하시는 데 묵은 폐단을 고치려 하신다면 무슨 정치인들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폐단을 고치기란 지극히 어려운 노릇이다.” 하니, 선생이, “만약 적임자를 얻으신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아무리 적임자를 얻었다 하더라도 만일 송 신종(宋神宗) 처럼 뜻만 크고 재주가 적다면 이익될 것이 무엇인가?” 하니, 선생이, “송 신종이 세웠다는 뜻은 잘못 세운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신종(神宗)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만을 일삼았기 때문에, 소인들이 이익을 꾀하는 것에 대한 말만을 올렸으니, 만일 백성을 보호하는 것에 힘썼다면, 소인들이 어떻게 그 간사함을 내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 된 이로서는 모름지기 백성을 보호하는 것으로 뜻을 삼아야 합니다.” 하였다.
그때에 여러 신하들이, “퇴계(退溪) 선생의 시호(諡號)를 내리옵소서.” 하니, 상께서 아직 행장(行狀)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황(李滉)의 행적은 환하게 귀로 듣고 눈으로 보신 것인데, 그 행장이 있고 없음으로 더해지거나 줄어들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죽은 어진 이에게도 포숭(褒崇)하시기를 주저하시니, 하물며 지금 살아 있는 선비들에게야 어찌 착한 것을 좋아하시는 정성이 있겠습니까. 이황의 시호를 내리는 일은 비록 1, 2년 지체된다 하여도 큰 해는 없겠으나, 사방(四方)의 선비들이 전하께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없지나 않나 의심을 하게 된다면, 그 해가 어찌 적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때에 선생은 정성을 들여 임금의 뜻을 돌려 보려고 애를 써 가며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우계(牛溪) 선생이 말하기를, “선비는 마땅히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 힘써야 한다. 그러나 만약 임금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면, 속히 물러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편다는[枉尺直尋] 격이니, 선비로서 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 말이 진실로 옳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을 어떻게 별안간 돌릴 수 있겠는가. 서서히 정성을 쌓아서 임금이 감동하여 깨닫기를 기다려야 한다. 만약 천박(淺薄)한 정성으로 열흘이나 또는 한 달 안에 성공하려고 서둘다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곧 물러가려고 하는 것도 또한 신하의 의리는 아니다.” 하였다.
갑술년(1574, 선조7) 1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극력 진달하고, 또 재앙을 막아 내는 계책과 덕을 키우는 공부에 대해 말하였다. 상이, “훌륭한 논의로다. 예전 사람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신하가 있는데, 어찌 다스리지 못할까를 근심하겠는가. 다만 고쳐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갑자기 다 바꿀 수는 없다. 이 상소는 대신에게 보여 의논해 처리하겠다.” 하고는, 또 “이 상소를 한 벌 더 베껴 써서 올리라.” 명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유희춘(柳希春)이, “음식을 조심하는 것이 병을 고치는 요체입니다.” 하고 아뢰니, 선생이, “병을 고치는 것은 단지 약이나 음식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고, 반드시 마음을 다스리고 기운을 기른 뒤에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의 시(詩)에도 ‘온갖 보양이 모두 거짓이라네. 마음 하나 잡는 것이 제일 중요한 법이라네.[萬般補養皆虛僞 只有操心是要規]’ 하였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근본이 되고, 음식을 조심하는 것은 말단이 되는 것이니, 진실로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어떻게 몸을 양생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이 비록 성상의 보살핌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 말이 쓰이지는 못했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그대가 조정에 있은 지가 수개월이 되었는데, 무슨 공업(功業)이 있었습니까.” 하니, 선생이, “국정을 맡은 사람에게도 수개월 동안에 무슨 공업이 있기를 요구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말만 아뢸 뿐이고 실천할 수 없는 사람에게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식자(識者)들은 숙헌(叔獻)이 조정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퍽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니, 선생이, “늘 임금의 마음을 혹시라도 돌려 볼 수 있을까하고 바라기 때문에 거취를 결정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였다. 또 어떤 이가 선생에게, “엎어지는 것을 부축하고 위태한 것을 붙들어 주려고 하면 구차(苟且)한 점이 있더라도 물러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구차한 것은 자기 몸을 먼저 굽히는 것이니, 자기 몸을 굽혀서 엎어지는 것을 부축하고 위태로운 것을 붙들어 준다는 말은 내가 들어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 사람이, “비록 큰일은 하지 못했어도 그때그때 일에 따라서 보좌해 나가는 이익이 있어서 나라가 위태롭거나 망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한다면, 이것도 혹 한 가지 길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런 일은 나라를 맡은 대신이나 하는 일이다. 대신은 중대한 임무를 맡으니, 나라의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하며 물러나서는 안 된다. 만일 대신이 아니라면 기미를 보고 행동하고 처신에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선생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수개월 동안 조정에 머물러 있으니까, 어떤 사람은 왜 그렇게 오래 있는가 의아해하고, 어떤 사람은 속히 물러날까 겁을 내니, 식견이 중(中)을 얻기가 어려운 노릇입니다.” 하였다. 대개 상이 유학을 퍽 좋아하여 선생에게 마음이 쏠리자, 선생은 스스로 중한 책임을 지고 무언가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있어도 연연하고 머뭇거리며 훌쩍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2월에, 상이 선생에게 이르기를, “한 문제(漢文帝)는 어째서 가의(賈誼)를 등용하지 않았는가?” 하니, 선생은 “한 문제는 어질기는 했으나, 그 뜻이 높지 못하여 가의가 큰일을 얘기하는 것을 보고 의심이 나서 쓰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큰 뜻이 있어야만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주인은 두어 칸쯤 되는 조그마한 집을 지으려 하는데, 목수가 큰 집을 지으려 하는 것과 같으니, 그러면 어찌 그의 말을 들어줄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는, 이어서 상에게 아뢰기를, “요즈음 재변이 자꾸 일어나 백성들이 날로 더욱 살기가 힘들어지니, 한갓 두려워하고 반성한다는 말만 하고 실효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근래에 전교나 명령이 다 옳으신데도 실효는 볼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어떻게 하면 실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니, 선생은, “전하께서 매양 변통(變通)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시기 때문에 마침내 실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제도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를 다스릴 방도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만일 조종(祖宗)이 정해 놓은 법이 아니라면 개정하기 어려울 게 뭐 있겠는가?” 하니, 선생은, “조종이 정해 놓은 법을 다 개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공안(貢案)은 연산군(燕山君) 때 정한 것이지, 조종의 법이 아닙니다. 신이 개혁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자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정사를 개정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그 일을 할 만한 인재를 구해야 하겠지만, 개정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어진 사람은 구하여 무엇에 쓰겠습니까. 예전부터 성현은 때에 따라 변통하여 나아갔습니다. 하늘의 운행으로 말하더라도, 세월이 오래되면 역수(曆數)에도 반드시 차이가 생기므로 그 세대(世代)마다 그 일을 할 만한 사람이 나와 개정하였습니다. 만일 때에 맞추어 개정하지 않으면 천상(天象)이 어긋나서 사시가 그 차례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하였다.
그 뒤 어느 날, 상이 나라에 기강(紀綱)이 서지 않는 것을 탄식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국가에 기강이 있는 것은 사람의 몸에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호연지기는 의리가 모여서 생기는 것으로, 한 가지 일이 우연히 의리와 합해졌다 하여 갑자기 취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한 가지 의리를 실행하고, 내일 한 가지 의리를 실행하여, 의리가 그 몸에 쌓여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땅을 굽어보아 부끄럽지 않게 된 연후에 호연의 기가 그 몸에 가득 차서 유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강도 또한 그러하여, 하루아침에 분발한다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평(公平)하고 정대(正大)한 마음으로 정사에 옮겨서 오늘 한 가지 선정(善政)을 실행하시고, 내일 한 가지 선정을 실행하시어, 곧은 사람은 반드시 등용하고, 나쁜 사람은 반드시 버리시며, 공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벌을 주면 기강이 설 것입니다.” 하였다.
상께서, “지금 어떤 일을 시행하면 다스려질 수 있겠는가?” 하니, 선생이, “정치하는 도(道)를 어찌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마는, 대개는 먼저 큰 뜻을 세우고 어진 이를 얻어서 위임해야 합니다. 다만 사람을 알기가 참으로 어려우니, 반드시 학문에 공을 쌓아서 궁리(窮理)ㆍ거경(居敬)ㆍ역행(力行)의 세 가지를 쉴 새 없이 공부하여 이치가 환해지고 덕(德)이 이루어지면, 인물(人物)의 어질고 어리석고 간사하고 정당한 것을 환히 알아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학문은 반드시 계옥(啓沃)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니, 학문이 있는 신하를 가까이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성을 다하여 보좌하고 인도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바로 정치를 하는 근본이며, 이 밖에 다른 교묘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만약 신하들을 가까이하시어 틈을 두지 않으신다면, 그 정상을 자세히 알 수 있어 등용하고 내치는 바른 기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사람을 알고 잘 맡긴 것도 그 정상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세종조(世宗朝)에서 사람을 등용할 때에는 오래 벼슬한 사람이건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건 그 지위가 높건 낮건 간에, 오직 그 사람의 능력과 맞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한 직임만 맡은 사람도 있었고, 계급을 초월하여 발탁되어 얼마 되지 않아 재상이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육경(六卿)과 모든 관리들이 그 직책을 오래 맡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모든 공적이 다 이루어졌고, 또 학문이 있는 신하들을 각별히 돌봐 주고 예우해 주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모두 임금을 위해서는 목숨도 바치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아직까지 가까이하며 신임하는 신하가 없으며, 여러 관리를 자주 바꾸시기 때문에 모든 일이 다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집안일에 비유하면, 집안 식구들에게 일을 나누어 맡겨서 밭 가는 사람은 밭을 갈게 하고, 나무하는 사람은 나무를 하게 하고, 길쌈하는 사람은 길쌈을 하게 한 뒤에야 집안 살림살이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아침에 밭을 갈다가 점심때에 나무하거나, 점심때 나무하다가 저녁에 길쌈을 하거나 한다면, 한 가지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지금은 사대부로서 그 직책을 다한 사람에게도 상 주시는 일이 없으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벌주시는 일이 없으니, 자기 한 몸 잘 살자는 사람에게는 좋겠지만, 나랏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째서 사람을 가려 벼슬을 주시거나, 그 자리에 오래 있게 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수찬(修撰) 윤현(尹晛)이 아뢰기를, “이이(李珥)는 학문을 논의하면서, 궁리(窮理)를 거경(居敬) 앞에 두었는데, 신의 생각에는 거경을 궁리보다 앞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자, 선생이, “정자가 말하기를, ‘치지(致知)를 하고 경(敬)에 있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였습니다. 윤현의 말이 옳기는 합니다만 경(敬)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공부로 먼저 해야 한다거나 나중에 해야 한다거나를 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또 궁리는 아는 것이요 거경은 실행하는 것이므로 신은 지행(知行)의 차례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학문을 하시려 한다면 먼저 뜻을 세워서 흔들리지 않게 굳게 정해 놓고 경(敬)으로 이치를 궁구하고 경으로 힘써 행하소서, 이렇게 오랫동안 공부를 해서 의리(義理)를 음미하고 학문을 낙(樂)으로 삼게 된다면 착한 데 머무르고 이치에 따라서 시원스레 만족하게 되며, 마음은 넓어지고 몸은 편안해져 태연하게 즐거울 것입니다. 옛날에 임금이 능히 그 나라를 다스릴 줄은 알면서 학문하는 즐거움을 알지 못하여, 그저 사업에만 힘쓴 까닭에 처음과 끝이 같지 않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옛날에 당 명황(唐明皇)이, ‘내 몸은 여위었어도 나라는 살찔 것이다.’라고 한 말이 있으나, 이것은 억지로 한 것이니, 그것이 능히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학문에 실제 공효가 있었다면, 그 몸이 나라와 더불어 함께 살쪘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들이 나이 차례대로 앉자 대부분 잘못된 일이라 여기는 분위기였다. 이해수(李海壽) 공이 선생에게 말하기를, “나이 차례대로 앉는 것은 성균관에서는 옳지 않은 일입니다. 방중(榜中)에서 장원(壯元)을 존중하는 것도 또한 예절인데 어찌 장원 윗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장원을 존중하는 것은 방회(榜會)에서 시행하는 것은 맞지만, 성균관이라 하면 윤리(倫理)를 밝히는 곳이니, 어른과 어린 사람의 차례를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또 장원이 높다하나 왕세자(王世子)에 비하면 어떻겠습니까. 옛날에 왕세자가 입학(入學)할 적에도 오히려 나이에 따라 앉았으니, 장원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였다.
3월에 상이 의영고(義盈庫 기름ㆍ꿀ㆍ밀ㆍ후추ㆍ따위를 맡은 관청)에 명하여, “황랍(黃蠟 벌꿀에서 나오는 밀) 5백 근을 바치라.” 하니, 외부(外部)에서는 어디에 쓸 것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불공(佛供)하는 데 쓸 것이다.” 하였다. 당시 선생이 대사간(大司諫)이었는데, 아뢰기를, “황랍은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빨리 전하의 뜻을 보이시어 모든 사람의 의혹을 풀어 주옵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궐 안에서 쓰는 물건은 아랫사람들이 감히 물을 바가 아니다.” 하셨다. 그러자 또 아뢰기를, “궁중에는 저렇게 많은 황랍을 쓸 곳이 별로 없으니, 이것은 좋지 못한 곳으로 나가는 것이라 남에게 알릴 수 없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신 등은 전하의 뜻이 혹시라도 혹한 데에 있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미미할 때 막아 더 커지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옛적에 사마광(司馬光)이 말하기를, ‘내가 평생에 해 온 일로 한 번도 남에게 말 못할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신 등은 정심(正心)ㆍ성의(誠意)를 전하께 기대했는데, 이 일 한 가지도 펴놓고 보이려 하시지 않으니, 알지 못하겠거니와 혼자서 마음 놓고 하실 수 있는 그윽한 곳에서는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정당하지 않은 데 쓸 물건은 올리라고 하지 마시고, 성스러운 생각을 환하게 보이시기를 청천백일(靑天白日)같이 하셔서 모든 아랫사람들이 다 우러러볼 수 있게 하옵소서.” 하였다. 상이 화가 나서 이르기를, “옛적에 양 무제(梁武帝)가 입이 쓰니 꿀을 좀 달라고 하다가 얻어먹지 못했다 하더니, 오늘 또 이 꼴을 다시 당할 줄은 몰랐다. 지금 시사(時事)가 이같이 되었으니 어찌 마음 아픈 노릇이 아니냐.” 하였다.
그러자 선생이 동료를 거느리고 사직(辭職)하면서 아뢰기를, “성교(聖敎)의 말씀이 너무 엄격하여 신들을 후경(侯景)에 비유하시기까지 하시니, 신 등은 몹시도 놀랍고 벌벌 떨립니다. 의영고에 있는 물건은 원래 전하의 소유물이니 올바른 용도로 쓰시기만 한다면 모든 아랫사람들은 마땅히 봉행하느라 겨를이 없을 것이니, 어찌 감히 말 한마디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올바르지 않은 일로 그것을 써서 전하의 하시는 일이 불법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아무리 그것을 맡고 있는 관청이라도 또한 복계(覆啓)하여 반대해야 합니다. 그러니 하물며 언관(言官)으로서 어찌 감히 잠자코 있겠습니까. 요즘 외부에 파다하게 난 소문으로, 불상(佛像)을 만들려고 한다 하기도 하고, 불사(佛事)를 일으키려 한다 하기도 하는데, 수은(水銀)과 황랍을 바치라는 명령이 마침 이때에 내리시니, 신 등이 어째서 근심스럽고 두려운 생각이 없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다만 속으로 반성해 보시어 그런 일이 있으시다면 고치시고, 그런 일이 없으시다면 더욱 힘쓰시면 될 뿐입니다. 그런데 이다지도 심하게 숨기고 딱 잡아떼시는 것은 어찌된 까닭이십니까. 옛날에 순(舜) 임금이 옻칠한 그릇을 만들자 간한 사람이 10명이었고, 무왕(武王)이 포어(鮑魚)를 좋아했지만 태공(太公 무왕(武王)의 선생인 여상(呂尙))이 바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부족해서이겠습니까. 진실로 충신은 덕(德)으로써 임금을 사랑하고, 예(禮)로써 임금을 공경하되, 비위를 맞춰 받들고 따르는 것은 도리어 사랑하고 공경하는 데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말 한마디를 받들어 따르지 않았다 하여 문득 진노(震怒)하시고 마음이 아프다고까지 하셨습니다. 대체로 비위를 맞춰 받들어 순종하는 태도가 부족해서 ‘내가 말만 하면 그 말을 어기지 않는 것.’에 방해가 된다고 하는 것이 전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것이요, 위에는 겸허한 태도로 받아들이는 아량이 없고, 아래에는 충성스럽고 강직한 보필이 없어서, 나랏일이 날마다 잘못되어 수습할 수 없게 된 것이 신들이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신 등은 경솔하고 천박하며 고루하고 비열하여, 정성이 신뢰를 얻지 못하였으니 신 등을 내치시옵소서.” 하였다.
상이 더욱 노하여 이르기를, “지금 계사(啓辭)를 보니 한번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는다. 가령 이교(異敎)를 숭봉(崇奉)하려고 한다면 오랑캐 땅에서 흘러들어 온 불상도 많은데 무엇하러 새로 만들겠는가. 그 말을 누구한테 들었는지 내가 잡아다 국문(鞫問)을 하려고 한다.” 하였다. 그러자 아뢰기를, “떠도는 소문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만약 반드시 하나하나 잡아다 국문하려 한다면, 위(衛)나라 무당이 임금을 비방(誹謗)하는 것을 감시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다만 신 등이 함부로 말한 죄를 다스리시면 그만이지, 어찌 반드시 위엄을 세워서 남의 입을 틀어막아 사방에서 보고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려 하십니까. 아, 임금의 위엄은 날마다 드높아 가고 선비들의 습관은 날마다 쇠약해 가니, 주운(朱雲)이나 급암(汲黯)으로 하여금 지위에 있게 하면서 날마다 곧은 말을 진달한다 하여도, 오늘날의 문제를 바르게 하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천박하고 비열한 신 등이 어찌 능히 만분(萬分)의 일이라도 도움될 게 있겠습니까. 물리쳐 파면하여 주옵소서.” 하였다. 무릇 다섯 차례나 계를 올렸는데, 상의 전교가 엄해질수록 선생의 말은 더욱 간절하고 강직하여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러자 얼마 뒤에 상이 자못 후회하고 황랍을 도로 내려보낼 것을 명하였다.
선생이 입시(入侍)할 때마다 정성껏 진달하는 것이 많았는데, 정승 노수신(盧守愼)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아무개는 경연에서 상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너무 많이 하여,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는데 내가 중지시키려 하여도, 서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다.” 하였다. 선생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자기는 말하지도 못하면서 또 다른 사람의 말을 중지시키려 하니, 평생 동안 글을 읽고 무슨 생각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가.” 하였다.
다른 날 입시하였다가 선생이 병이 많아 벼슬에 있을 수 없으니 물러가 조섭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병이 만약 그러하다면 또한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숨어 사는 것이 가장 좋은데, 예전 시(詩)에, ‘귀를 씻고 세상사를 듣지 않으니, 푸른 소나무가 벗이 되고 사슴이 친구가 된다.[洗耳人間事不聞 靑松爲友鹿爲羣]’ 하였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대답해 아뢰기를, “신의 형편으로는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예전 은사(隱士)는 임금과 만난 적이 없어 임금과 신하의 약속이 없기 때문에, 서로 잊을 수 있었고, 또 몸이 튼튼하고 병이 없어서 좋은 산 좋은 물에서 제멋대로 노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은혜를 너무 많이 입었기 때문에 시골에 있다 하여도, 마음은 성상에게서 떠나지 않고, 또 병이 있으니 숨어 산들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다만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녹만 타먹기가 어렵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을 수 없을 뿐입니다.” 하고는, 병으로 사양하고 면직되었다. 조금 있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제수되었으나 다시 병으로 사양하고 파주(坡州)로 내려갔으며, 승지(承旨)와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0월에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자, 선생은 생각하기를, 외직(外職)은 근시(近侍)와 다르고 또 감사(監司)는 이 백성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없애 줄 수 있다고 여겨 취임하였다. 상소로써 백성의 고통을 아뢰고, 낡은 정사를 없애고, 학교를 세우고, 교화를 숭상하고, 백성의 근심을 돌봐 주고, 군정(軍政)을 닦고, 착한 일 하는 사람은 표창하고, 악한 짓하는 사람은 벌을 주는 일에 오로지 힘쓰니, 선비와 백성들이 감복하여 좋아하고, 탐관(貪官)이나 교활한 아전은 겁이 나서 꼼짝 못하였다.
을해년(1575, 선조8) 봄에 병으로 사임하고 파주(坡州)로 돌아왔다. 곧 부제학에 제수되자 또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인순왕후(仁順王后 명종(明宗)의 왕비 심씨(沈氏))의 상사가 있었는데, 병든 몸으로 가마에 실려 서울에 들어와 사표(辭表)를 세 번이나 올렸으나 또 허락되지 않았다. 지평(持平) 민순(閔純)이, “졸곡(卒哭 장사 지낸 지 석 달 만에 지내는 제사) 뒤에는 송 효종(宋孝宗)이 하던 예(例)대로 흰옷에 흰 갓을 쓰고 정사를 보게 하옵소서.” 하여, 2품 이상과 삼사(三司) 장관(長官)을 모아 놓고 정의(廷議)가 열렸다. 2품 이상은 모두 말하기를, “《오례의(五禮儀)》는 조종(祖宗) 때에 만들어 놓은 지가 오래되어서 경솔히 고칠 수 없습니다.” 하였고, 대사헌(大司憲) 유희춘(柳希春)도 조종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보고, 또 말하기를, “임금의 거상(居喪)은 사대부(士大夫)와 다르다.” 하였다. 그때에 선군자(先君子)가 대사간(大司諫)으로 선생과 더불어 의견이 합치되어, “상례(喪禮)가 옛날과 같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니, 이 기회에 고쳐서 근고(近古)의 예(禮)에 따라 변통해야 합니다.” 하고 적극 주장하였다.
선생은 옛날 예(禮)를 가지고 아뢰기를, “반드시 선왕(先王)의 예에 다 맞게 하려 하면 당초에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모두 최질(衰絰)을 갖추어 《의례(儀禮)》의 제도대로 하고, 따로 포모(布帽)와 포단령(布團領)과 포대(布帶)를 만들어, 시사(視事 사무를 봄)하는 옷을 만들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벌써 잘못된 채로 지내왔기 때문에, 《의례(儀禮)》를 회복할 수 없으니, 차라리 송나라 효종의 제도대로 하는 것이 옛날 예에 가깝습니다. 검은 갓에 검은 띠를 띠는 제도로 말한다면, 송나라 고종(高宗) 때에는 나점(羅點)이 건의하여 시행한 것입니다. 그때에 상례의 법도가 무너져서 역월(易月) 뒤에는 길복(吉服)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점의 이 의논은 아주 안 입는 것보다는 낫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주자(朱子)의 〈군신복의(君臣服議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복 입는 법을 말한 글)〉에 아주 자세히 변론해 놓았는데, 어째서 주자의 말은 따르지 않고 나점의 말에만 매여 있습니까. 《오례의(五禮儀)》를 만들 때에 예를 아는 신하가 없어 선왕(先王)을 올바른 예로 인도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오늘에 와서 또다시 잘못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좌의정 박순(朴淳)과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흰옷에 흰 갓을 쓰는 제도를 따르게 하옵소서.” 하였다.
선생이 지난해에 대사간(大司諫)으로서 올린 말이 상의 뜻에 맞지 않아 물러났는데, 지금 또 벼슬을 하자, 제공(諸公)이 그 출처(出處)에 대해 의아해하는 이가 많았다. 우계(牛溪) 선생도 또한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숙헌(叔獻) 같은 출처(出處)는 옛날에도 없었다.” 하니, 선생은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출처는 실로 한 가지 뿐이 아니다. 내가 처음에는 참으로 벼슬할 생각이 없고 산능(山陵 인순왕후의 장사)의 일이나 마친 뒤에 물러가려 하였으나, 마침 성상께서 여러 차례 휴가만 주시고, 그 벼슬은 바꾸지 않으셨고, 또 성상께서 슬퍼하시는 가운데 착한 마음이 생겨서 그전과는 달라지셨으므로 우선 그대로 있으면서 정성을 쌓아서 만분의 일이라도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군자가 과연 이 세상을 등지려고 하면 그만이지만, 만일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 뜻이 있다고 하면 이런 음(陰)이 막히고 양(陽)이 생기려는 때를 당하여 어찌 좋은 기회를 탈 수 없겠는가.” 하였다.
상이 졸곡(卒哭)을 지낸 뒤에도 여전히 고기반찬을 자시지 않자, 삼공(三公)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 권도(權道)를 따르실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오는데 상이 선생을 불러오라 하여 이르기를, “부제학(副提學)이 시골로 내려갔다가 그대로 감사(監司)가 되어 서로 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하고는 온유한 말씀으로 황해도 백성들의 어려움을 물어보시고 한참을 말씀하신 뒤에 자리를 파하였다.
훗날 《서전(書傳)》을 강의하다가 긍구긍당(肯構肯堂)이란 대목에 가서 선생이 아뢰기를, “지금 사람은 긍구긍당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이가 많아서 단지 옛날 법을 고집하는 것만 가지고 긍구긍당이라 하는데, 이것은 아주 옳지 않습니다. 그 아비가 그 터전을 마련하였다면 그 아들은 그 제도에 의지하여 집을 지어야만 그 아비의 사업을 잘 계승하는 것입니다. 지금 만약 그 터전만을 지키고 있을 뿐, 집은 아무것도 지은 것이 없으면 이것은 긍구긍당이 아닙니다. 국가로 말하면, 조종(祖宗)이 창업(創業)할 때에 법도가 미비하였거나, 시대가 달라지고 세태가 변천되어 고쳐 만들 것이 있으면 마땅하도록 법을 세우는 것이 당연한 의리(義理)입니다. 바로 이것이 조종(祖宗)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고, 조종의 사업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만약 단지 그 법을 지킬 줄만 알고 변통할 줄은 몰라서 그대로 어물어물하다가 점점 무너지게 되면 이것이 어찌 조종의 뜻을 계승하고 조종의 사업을 잇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선생이 정치의 폐단을 고치고자 하여 글을 읽다가 넌지시 간한 것이다.
이어서 상에게 묻기를, “그전에 전하께서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학문을 하고 싶으나 여러 가지 많은 일에 얽매여 겨를이 없다.’고 하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진실로 이런 일이 있으십니까?” 하니, 상이, “그런 일이 있었다.” 하였다. 선생이, “신이 이 말씀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뻐하였고 한편으로는 근심하였는데, 기뻐한 것은 전하께서 학문에 뜻이 있으시기 때문이요, 근심한 것은 전하께서 학문의 이치를 자세히 알지 못하실까 해서입니다. 학문은 꼿꼿하게 단정히 앉아서 종일 글만 읽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날마다 하는 일이 하나하나 이치에 맞아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이 이치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스스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글을 읽어서 그 이치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만약 단지 글 읽는 것만 가지고 학문이라 하고, 날마다 하는 일이 이치에 합당한가를 찾아보지 않으신다면 어찌 학문이라 하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일상생활하시는 가운데 일마다 이치에 합당한가를 깊이 찾아보시되, 조금이라도 잘못한 것이 없으면 이것이 곧 학문입니다. 전하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시고 욕심이 적으시므로, 학문을 하지 않으실지언정 할 수 없으신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6월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어제 전하께서 성균관의 차자에 답하시면서, ‘너무 높은 이론[高論]을 논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겸사로 하신 말씀이라면 괜찮아도 실제로 신 등의 말을 높은 이론이라 하신다면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에게 복된 일이 아니라 걱정이 됩니다. 한 문제(漢文帝)가 삼대(三代)의 이야기를 높은 이론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 공적이 비열함을 면치 못하였는데 어찌 이것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어느 날 경연에서 상이 이르기를, “사서(四書)의 소주(小註)가 온당하지 않은 곳이 많아서 조금씩 삭제하고 개정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려고 하는데, 옥당(玉堂)에서 이 임무를 맡아야 한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이것은 신의 학력(學力)으로 홀로 담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출신(出身) 여부를 묻지 말고 학문하는 선비가 옥당에 참여하여 같이 의논해서 삭제하여 개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 대신(大臣)이 나로 하여금 성혼(成渾)을 불러 보게 하고, 나도 또한 보고 싶었는데, 다만 출신 못한 사람이 경연에 들어와 참여한 예(例)가 없다. 비록 어진 사람을 불러 본다 하여도 단지 한 번 보고 말뿐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진실로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하면 전례에 없는 일이라도 변통할 수 있습니다. 옛날 법만 고집하고서야 어찌 무슨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학문하는 선비를 한직(閒職)에 두고 번갈아 가면서 경연에 입시하게 하시면, 훌륭한 덕(德)을 이룩하는 데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다른 날 또 아뢰기를, “오늘날의 급선무로서, 전하께서 성학(聖學)에 더욱 힘써서 정치가 나오는 근본을 삼고 반드시 어진 선비를 구해 그와 함께 계시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전에 출신(出身) 못한 사람이 경연에 참여하는 일을 가지고 아뢰었으나 전하께서 어렵게 여기셨는데, 마땅히 다시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셔야 합니다. 또 승지가 직접 들어가 아뢰던 것은 중종조[中廟朝]에 시행한 일입니다. 성종조[成廟朝] 때에는 독대(獨對)라고 하여, 불시(不時)에 옥당에 입직(入直)한 신하를 불러 편전(便殿)에서 마주하였습니다. 이 제도도 복구해야 합니다.” 하고는, 또 아뢰기를, “마땅히 품계를 초월하여 올려 주기도 하고 한 관직에 오래 있도록 하는 법을 써야 합니다. 세종께서는 이 법으로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지금은 벼슬을 아침저녁으로 바꾸어 아이들 장난하듯 하니 모든 일이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7월에 궁노(宮奴)가 금법(禁法)을 범하여 사헌부 이속을 때리고 왕자의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이튿날 사헌부에서 급히 쫓아가 잡으니, 상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헌부의 아전이 왕자의 집에 가서 난리를 피웠다 하시고는 사헌부의 아전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전지(傳旨)에, “사헌부에서 왕자의 집에 가서 사람을 잡아 온 것은 옳지 못하다.” 하니, 사헌부에서 피혐(避嫌)하였다.
그때에 선생이 복(服)을 당하여 집에 있다가 출사(出仕)하여 홀로 아뢰기를, “이 일은 위에서나 아래에서 모두 잘못한 것입니다. 사헌부의 아전이 한 일은 대관(臺官)이 직접 본 것이 아닌데, 왕자의 집에서 직접 잡아 오지 않은 것을 어찌 알아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까? 전하께서도 또한 눈으로 보신 것은 아니고 다만 부녀자와 내시(內侍)의 말만 들으신 것이니, 부녀자와 내시의 말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 또 왕자궁(王子宮)의 노비들이 평소부터 방자하다고 소문이 났으니, 마땅히 엄하게 단속해야 합니다. 후씨(侯氏)는 일개 부녀자이었는데도 오히려 자식을 가르치는 방법을 알아서 항상 말하기를, ‘남에게 굽히지 못할까 걱정하되, 남에게 기세를 펴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왕자를 두셨는데 어찌 남에게 기세를 펴지 못할까를 걱정하십니까.” 하였다.
그 뒤 경연에서 아뢰기를, “사람마다 모두 어질 수도 없고 모두 못날 수도 없습니다. 어진 사람은 임금이 시비를 분명히 가려 선비를 사랑하고 좋아하기를 바라지만, 못난 사람은 임금의 시비가 분명하지 않아서 선비를 좋아하지 않기를 바라니,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전에는 전하께서 대신을 자주 접견하시고 선비를 깊이 좋아하시어, 불시에 불러 보시는 전교가 있으셔서 사람들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는데, 근일에 와서는 사세(事勢)가 별안간 변하여 선비를 불러 보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경연도 드문드문 여시니, 여염집의 착하지 않은 이들은 모두 좋아서 기운이 나게 되었습니다. 어진 사람은 근심하며 못난 사람은 좋아하니, 이것이 어찌 좋은 세월의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근일에 사헌부 아전의 한 가지 일을 놓고, 법을 지키려고 뜻을 거스르는 신하를 전하께서 싫어하시는데, 옛날부터 아첨하고 달라붙는 자는 뒤에 반드시 임금을 버렸으며, 정당한 것을 지키면서 아부하지 않는 이는 뒤에 반드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주창(周昌)의 일을 가지고 본다면 주창이 조정에서 간쟁할 적에는 매우 강경하여 조왕(趙王)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조(趙)나라 정승이 되어서 충성을 다하여 보호하니, 여후(呂后)는 조왕을 불러 가지 못하고 먼저 주창을 부른 뒤에야 조왕을 불러 갔습니다. 오직 평소에 정당한 절개를 지킨 것이 있기 때문에 뒷날에 능히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니, 이것은 전하께서만 아실 게 아니라, 비빈(妃嬪)들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때에 허엽(許曄)이 대사간이 되고 김효원(金孝元)이 사간이 되어, 좌의정 박순이 옥사를 맡아 다스릴 때에 잘못 처리하였다 하여 추고(推考)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박순이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그때에 양사(兩司)의 의논이 서로 일치되었는데, 정언(正言) 조원(趙瑗)만이 선군자(先君子)와 더불어 대신을 추고할 것을 청한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그때 선군자가 대사헌으로서, “허엽(許曄)이 죄로 죽은 사람의 아주 가까운 족속으로 주장한 말이 너무 지나치다.”고 논박하자 양사에서 피혐(避嫌)하여 사직하여 홍문관(弘文館)에서 이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선생이 동료들에게 묻기를, “이 일을 어떻게 해야 좋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만약 양사를 갈아 치우면 언로(言路)에 방해가 된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마땅히 그 일의 잘잘못을 따져 보아야 할 뿐이다. 간관(諫官)에게 잘못이 있을 때 옥당(玉堂)에서 바로잡아 주는 것이 언로에 방해될 게 뭐가 있겠는가. 죄가 대신에게 있다면 갈아 치워도 좋고 파면시켜도 좋으며, 멀리 추방하거나 귀양 보내거나 죽이더라도 괜찮다. 언관(言官)은 그 일에 따라 논핵하니, 무엇을 회피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다만 추고를 청할 수는 없으니, 이른바 추고란 그 일을 담당한 관리가 따져 물어 조율(照律)하는 것이지, 대신을 대우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한(漢)나라 신하 중에 사예교위(司隸校尉)로 하여금 삼공(三公)을 감독하고 사찰하게 할 것을 청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일을 논의하는 사람이 잘못이라 여기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삼공을 감독하고 사찰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지금 대신을 추고할 것을 청한 것은 곧 유사가 삼공을 감독하고 사찰하는 것이다. 간원(諫院)의 계(啓)가 잘못되었는데 사헌부에서 부화뇌동하였으니 모두 갈아야 한다. 다만 김 대헌(金大憲 김계휘(金繼輝))과 조 정언(趙正言 조원(趙瑗))만은 벼슬에 나와도 된다.” 하였다. 동료들의 의논이 같지 않았는데 선생이 강력히 변론하여 한참 후에 합의를 도출해 냈다. 저작(著作) 홍적(洪迪)과 이성중(李誠中) 등이 말하기를, “허 대간(許大諫 허엽(許曄))이 어찌 자기의 친족이라 하여 지나친 말을 하였겠는가. 김 대헌 또한 체직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차자를 올려, 양사를 다 갈고 조원(趙瑗)만 벼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전에 윤원형(尹元衡)이 한창 세력이 있을 때, 심의겸(沈義謙)이 사인(舍人)이 되어 무슨 일 때문에 그 집에 갔는데,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李肇敏)이 심의겸과 서로 아는 처지여서 서실(書室)로 데리고 들어갔다. 심의겸이 서실에 침구(寢具)가 많은 것을 보고 이것은 누가 덮고 자는 것이냐고 차례차례 물으니, 이조민이 묻는 대로 대답하였는데, 그중 하나는 김효원이 덮고 자는 것이었다. 김효원은 당시 과거에 합격하지는 못하였으나 글 잘한다는 이름은 있었다. 심의겸이 마음속으로 비루하게 여기면서 ‘학문한다는 선비가 세도 있는 집 자제(子弟)와 어울려 논단 말인가. 이 사람은 결코 깨끗한 선비는 아니다.’ 여겼다.
그 뒤에 김효원이 과거에 장원이 되어서 명성이 날로 높아가니, 조정의 선비들이 너도나도 추켜세워 칭찬하였다. 오건(吳健)이 김효원을 전랑(銓郞)으로 추천하자, 심의겸이 윤원형의 집에서 본 일을 가지고 바로 가로막아 김효원이 낭료(郎僚)에 있은 지 6, 7년 만에야 전랑이 되었다. 계해년 연간에 이량(李樑)이 한창 사림(士林)들을 잡아들일 때에 심의겸이 구하고 보호해 준 힘이 있었기 때문에, 선배 선비들은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이가 많았으나, 김효원만은 마음속으로 심의겸을 미워하여 항상 남에게 말하기를, “심의겸은 미련하고 기질이 거칠어서 일을 맡길 수 없다.” 하였다. 선배들은 모두 김효원이 전날의 감정을 가지고 보복하려는 생각이 있는가를 의심하였고, 그를 소인이라는 자들도 있었다. 김효원의 무리들 또한 모두 심의겸을 배척하여 바른 것을 해치는 사람이라 여겼다. 이 때문에 선후배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여 당파가 갈리는 조짐이 되었다.
허엽은 비록 선배이긴 하나 김효원을 잘한다 하였기 때문에 나이 젊은 사람들이 높여 우두머리로 삼았고, 박순(朴淳)은 깨끗한 이름과 두터운 명망이 있었으나 선배인 까닭에 어떤 사람은 심의겸의 당파로 지목하기도 했다. 허엽과 김효원이 박순을 공격한 것은 실제로는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나이 젊은 사람들은 모두 김효원의 무리이기 때문에 그 논의(論議)에 이렇게 부화뇌동한 것이다.
9월에 대사간(大司諫) 정지연(鄭芝衍)이 선생에게 묻기를, “사림(士林)의 의론이 분분하니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것은 전조(銓曹)의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조용히 진정시켜야 하고 끝까지 논박하고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박근원(朴謹元)의 소행은 여러 사람의 마음에 맞지 않으니, 그는 계(啓)를 올려 체차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니, 정지연은 깊이 수긍하여 박근원만 논박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료들이 전조의 관원을 모두 논박하고자 강력히 논의하자 정지연은 억제하지 못하고 참판(參判) 이하를 모두 체차할 것을 청하였다. 당시 선생은 상의 마음을 바로잡으려는 생각에 정성을 쏟아 경전과 사서(史書) 중에 학문과 정사에 절실한 중요한 말들을 뽑아내어, 같은 것끼리 나누고 차례를 정하되,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순서를 정해 《성학집요(聖學輯要)》라 이름 지어 차자와 함께 올렸다.
그 이튿날 상이 경연에 나와 선생에게 이르기를, “책의 내용이 몹시 절실하고 긴요하다. 이것은 부제학의 말이 아니라 성현의 말이니, 다스리는 도(道)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나같이 불민한 사람이 실행하지 못할까가 염려될 뿐이다.” 하였다. 선생이 일어났다가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늘 이런 말씀을 하시니 신으로서는 지극히 민망하게 생각합니다. 전하께서는 자질이 탁월하셔서, 그 성인의 학문을 하지 않는 것일지언정 못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뒤로 물러서지 마시고 단단히 뜻을 두시고 스스로 분발하여 훌륭한 덕(德)을 이루소서. 옛날에 송나라 신종(神宗)이 말하기를, ‘이것은 요순(堯舜)이 한 일이니 짐(朕)이 어찌 감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니,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호) 선생이 걱정스럽게 아뢰기를, ‘폐하(陛下)의 이 말씀은 종묘사직과 신민(臣民)에게 복된 것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전하의 말씀이 이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10월에 선생은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으로 조정이 편안치 않은 것을 근심하여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에게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모두 선비로서 흑백과 사정(邪正)이 바로 가려지는 자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뒤로 오면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근거 없는 말들로 어지러워진 것뿐이니, 대신이 마땅히 계를 올려 그 두 사람을 외관(外官)으로 내보내면 진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우의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경연에서 아뢰었다.
선생이 나와 아뢰기를, “이 사람들이 꼭 깊은 혐의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두 사람의 친구들이 각각 소문을 전하여 그만 시끄럽게 된 것입니다. 대신이 이런 말을 한 것은 진정시키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오늘날 조정에 현저하게 간사한 사람은 없다 하더라도 반드시 소인이 없다고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소인이 붕당을 짓는다고 지목하며 두 쪽을 다 다스릴 계획을 한다면 사림(士林)의 화(禍)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오니, 이 점을 모르셔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에 특지(特旨)를 내려 김효원을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삼고 심의겸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으니, 김효원의 무리들이 겁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또 김효원이 병으로 변방에 나갈 수 없게 되자 선생은 홀로 아뢰기를, “김효원을 외직으로 보내야 한다는 말은 다만 대신과 신의 뜻이 합치될 뿐만이 아니라, 진실로 사림의 공론(公論)입니다. 그러하오나 김효원은 병이 몹시 중하니, 이런 근력으로 북쪽 변방의 책임을 맡는다면 죽지 않는 것만도 다행일 것이니 어떻게 무슨 일을 계획하여 변방을 튼튼하게 하겠습니까. 또 대신의 생각은 다만 진정시키려는 계책일 뿐, 김효원이 죄가 있다 하여 내쫓자는 것은 아니오니, 가까운 곳의 궁벽한 고을을 김효원에게 맡겨서, 안으로는 군신(君臣)의 의(義)를 온전하게 하시고 밖으로는 변방의 방비를 튼튼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그 뒤 인대(引對)하던 날 다시 김효원의 말을 언급하여 삼척 부사(三陟府使)로 고쳐 주었다. 이어서 상에게 아뢰기를, “전일(前日) 전하의 비답(批答)에 온당치 못한 곳이 있습니다. ‘남의 신하로서 녹(祿)을 먹으면 마땅히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한 것은 신하 스스로 하는 말이라면 옳겠사오나, 임금으로서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임금은 마땅히 신하의 재주와 역량을 보아서 그가 감당할 만한 벼슬을 가려 주어야 하고, 신하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때에 평탄한 데나 험난한 데나 한결같은 절개로 나가야 합니다. 많은 녹과 깊은 은혜는 진실로 신하의 마음을 묶어 둘 수는 있으나, 신하 된 사람은 마땅히 명분과 의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만약 단지 은혜와 녹만을 생각하여 충성을 바친다고 하면 다른 사람도 또한 반드시 은혜와 녹을 가지고 꾈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 하였다.
선생이 또 아뢰기를, “옛날에는 학문(學問)이란 이름이 없었고 일상 속에서의 이륜(彛倫 사람으로 떳떳이 해야 할 일)의 도리가 모두 사람마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어서 따로 뚜렷한 명목(名目)이 없었고, 군자(君子)는 단지 그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할 뿐이었습니다. 후세(後世)에 도학이 밝지 않고 이륜도 그에 따라 어두워지자, 그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을 학문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학문이란 이름이 생기고부터는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지목하게 되어, 취모멱자(吹毛覓疵)해 가면서, 더러는 위학(僞學)을 한다고 지목하여, 착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꺼리고 숨기게 함으로써 학문한다는 이름을 피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후세의 큰 근심거리입니다. 인군(人君)은 모름지기 학문을 주장하여 속류(俗流)들로 하여금 비방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선생에게 이르기를, “내가 지나간 역사를 보니 시대가 점점 변천하여, 하(夏)나라가 당우(唐虞)만 못하고 상(商)나라가 하나라만 못하며, 주(周)나라가 상나라만 못하니, 오늘날 삼대(三代)의 정치는 회복하기가 진실로 어렵다.” 하니, 선생이, “세도(世道)가 점점 낮아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일 옛날 도(道)를 실행한다면 어찌 옛날로 돌아갈 이치가 없겠습니까. 정자의 말에, ‘우제(虞帝)는 따라갈 수 없지만 삼대는 분명코 회복할 수 있다.’ 하였으니, 대개 당우(唐虞) 때는 아무 하는 것 없이 저절로 화(化)하였기 때문에 후세(後世)에서 따라갈 수 없었지만, 삼대의 정치 같은 것은 진실로 그 도(道)를 실행하기만 하면 반드시 회복할 수 있는데 다만 하지 않을 뿐이니, 3000년 동안에 그 일을 하고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볼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11월에 야대(夜對)에서 아뢰기를,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사이에는 머리털 하나도 들어가지 않으니, 이 두 가지가 애당초 근본이 둘이 아니어서, 발하기 이전에는 단지 혼연한 천리뿐이었는데, 매양 움직이는 곳에 가서 착한 것과 착하지 않은 것이 갈라지는 것이니, 마음이 움직인 뒤에야 인욕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움직이는 것은 기운 때문인데, 기운에 맑고 흐린 것이 있기 때문에 착하고 악한 것이 갈라지는 것이요, 천리와 인욕이 처음부터 마음 가운데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아니다.” 하니, 선생이, “전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천리와 인욕이 애당초 두 근본이 아니지만, 갈라지고 난 뒤에는 한계가 아주 분명하여 천리가 아니면 인욕이요, 인욕이 아니면 천리여서 천리도 아니고 인욕도 아닌 것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행동하는 것은 비록 착해도 혹시라도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또한 천리라고 할 수 없다.” 하니, 선생이, “마음으로는 명예를 구하면서 겉으로는 착한 척한다면 이것 또한 인욕일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천승(千乘)의 나라를 사양할 수는 있지만, 밥 한 그릇과 국 한 그릇에도 그 감정이 얼굴에 나타나니, 그 근본이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또 이(利)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을 속이지 못하지만,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사람을 속이는 데 능하므로 그 폐단이 크다.” 하니, 선생이, “전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다만 착한 일을 하는 이와 명예를 좋아하는 이를 분별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만약 착한 일을 하는 이를 보고 문득 그가 명예를 좋아한다고 의심하시면 착한 이를 좋아하는 실상이 없는 것이오니 이것을 모르셔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얼마 안 있다가 병으로 벼슬을 사양하니, 체직하고 서반(西班)을 제수하였다.
병자년(1576, 선조9)에 선생이 부제학(副提學)에서 체직되자,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늘 경연에서, 그가 어질고 재주가 있어서 쓸 만한 사람이라고 천거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 사람은 교격(矯激)하고 나를 섬기려 하지 않으니 내가 무엇 때문에 구태여 붙잡아 두겠는가. 옛날부터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여 그 뜻을 이루게 한 일이 많다. 가의(賈誼)는 글을 읽어서 말은 잘했으나 실제로 쓸 만한 재주가 못 되었으니, 한 문제(漢文帝)가 가의를 쓰지 않은 것은 참으로 본 바가 있어서이다.” 하였다.
김효원이 외직으로 나간 뒤에 조정의 의논이 곧 격렬해져서 그의 죄를 강하게 징계하려 하였는데, 선생이 극력 반대하여 조화롭게 진정시키려 하였다. 그러자 전배(前輩)들은 선생이 김효원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후배들은 김효원을 쓰지 않는다고 원망하여, 그 논의가 둘로 나뉘었는데 모두 선생만 잘못했다고 하였다. 선생은 당초부터 동서(東西)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다만 인재(人才)를 보합(保合)하여 오직 훌륭한 사람을 가려 쓰려 하였는데, 동인들은 도리어 선생이 서인을 위주로 한다 하여 반드시 거세(去勢)하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선생에게 말하기를, “천하에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이 없는데, 공(公)께서는 요사이 일에 대해 시비를 가리지 않고 둘 다 온전히 하려고 힘쓰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선생이 “심의겸과 김효원의 일은 국가에 관계된 것이 아니고, 자기들끼리 서로 알력이 생겨 조정이 편치 않게 되는 데 이른 것이니, 참으로 둘 다 그른 것입니다. 비록 둘이 다 잘못이긴 하지만 그들은 모두 선비들이니, 다만 마땅히 화해시켜 풀어 주는 것이 옳습니다. 반드시 이쪽은 옳고 저쪽은 그르다고 한다면 생겨나는 말과 알력하는 형세가 언제나 없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은 위로는 임금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아래로는 동료나 친구들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자, 드디어 물러갈 뜻을 결론하였다. 선비들이 선생이 물러가려는 것을 알고는 와서 작별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동인과 서인이 섞여 앉아 있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정론(定論) 하려 하니 여러분은 잘 들어 보십시오. 권간(權奸)들이 조정을 혼탁하게 하고 어지럽힌 지가 오래인데 그들을 숙청해 없애고 선비들이 의론을 펼 수 있게 한 것이 어찌 방숙(方叔 심의겸)과 여러 분의 공이 아니겠습니까. 인백(仁伯 김효원)이 나랏일을 하려고 한다면 넓은 도량(度量)이 없어서는 안 되는데, 전배들을 배척하여 눌러 분을 품게 하고 사림(士林)이 서로 대립각을 세우게 하였으니, 이는 인백의 죄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공론(公論)이 그를 제재하여 외관으로 나가게 한 것이니, 알맞게 처리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심하게 미워하고, 너무 지독하게 공격하니 이것은 전배들의 죄입니다. 이와 같이 판단을 내린다면 제대로 실정을 파악한 것입니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이 말은 참으로 공정한 논의입니다.” 하였다.
3월에 벼슬을 내놓고 파주(坡州)로 내려갔다. 우부승지(右副承旨)ㆍ대사간(大司諫)ㆍ이조 참의(吏曹參議)ㆍ전라 감사(全羅監司)ㆍ병조 참의(兵曹參議) 등 여러 벼슬을 시켰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정축년(1577, 선조10)에 해주(海州)로 내려갔다. 선생은 일찍이 장공예(張公藝)가 동거(同居)하던 일을 사모해 오다가, 이때에 와서 사당(祠堂)을 세우고 거처할 집을 지어서 그 형수[伯嫂] 곽씨(郭氏)에게 청하여 종가(宗家)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와서 형제(兄弟)ㆍ자질(子侄)을 모두 모아 놓고 한집에 살면서 평소의 뜻을 이루었다. 대사간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때에 상이 친히 대원군(大院君 임금의 친부(親父))의 사당에 제사 지내려 하니,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 올리기를, “예(禮)로 보아 사가(私家)의 사당에 제사 지내서는 안 되리라 여겨집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크게 노(怒)하여 이르기를, “누가 이런 의논을 하였는가?” 하고, 의금부의 옥에 내려 국문하려 하다가 대신이 해명하고서야 그만두었다. 선생이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주상께서 대원군의 사당에 친히 제사 지내는 것은, 예(禮)에도 잘못되는 것이 없고 정리(情理)로도 반드시 있을 법한 일인데, 옥당(玉堂)에서는 무엇을 보고 그만두라고 한 것인가. 대원군의 제사에 임금이 신하의 사당에 가는 예절로써 한다면, 아들이 아버지를 신하로 대접할 수 없다는 점이 걸리고, 아들이 아버지의 사당에 가는 예절로써 한다면 정통(正統)을 높이는 데 문제가 있지나 않나 의심한 것인 듯한데, 이것은 옛날 글을 상고하지 못하고 한 말이다. 공조(公朝)의 예(禮)에는 임금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백부(伯父)ㆍ숙부(叔父)라 하더라도 모두 신하의 예(禮)로써 행하지만, 친부(親父)만은 신하로써 대할 수 없는 것이다. 가인(家人)의 예에는 어른을 높여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임금이라도 아버지나 형님 밑에 앉을 수 있는 것이니, 효혜제(孝惠帝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아들)가 궁중(宮中)에서 제왕(齊王) 아래에 앉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학궁(學宮)의 예에는 스승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천자(天子)라도 노인(老人)에게 절하는 절차가 있으니, 효명제(孝明帝)가 환영(桓榮)에게 절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물며 대원군은 상을 낳았으니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주상이 반드시 감히 신하로 대하지는 못하고, 궁중에서 만나면 반드시 절을 해야 할 것이다. 지금 그 사당에 들어가서 조카로서 숙부에게 제사 지내는 예(禮)로써 한다면 안 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다.
무인년(1578, 선조11) 3월에 대사간으로 부름을 받고 나아갔다. 그때에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승하하여 상이 상중(喪中)에 있었다. 그러므로 차마 편안히 있을 수가 없어서 한 번 나아가 사은(謝恩)했을 뿐이요 본래 벼슬할 생각은 없었다. 파산(坡山 파주(坡州)의 옛 이름)으로 내려갈 때에, “배 떠나니 종남산을 차마 멀리할 수 없네. 사공에게 이르노니 돛을 올리지 말아라.[舟行不忍終南遠 爲報篙師莫擧帆]”라는 시를 지었다. 5월에 또 대사간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약 신이 쓸 만한가 못한가를 알려고 하신다면, 마땅히 시사(時事)를 가지고 물어보시고, 말하는 것이 쓸 만한 것이 없다면 다시는 부르지 마옵소서.” 하였다. 상이, “대사간의 자리는 오래 비워 둘 수 없어서 지금 그 자리를 바꾸는 것이니, 만일 말할 것이 있으면 글로 써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자 상소하여 당시의 폐단을 끝까지 다 전달하고, 또 시국 구제할 계책을 진달하였는데, 만여 자가 넘었고 그 말이 아주 간절하였다. 정원(政院)에서, 다시 부를 것을 청하자 부르는 명을 내렸다. 조금 있다가 다시 대사간을 시켰는데, 선생은 대사간에 제수된 것은 모르고 다만 부르는 명만을 사양하였는데, 상이 갑자기 체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정원과 옥당이 모두 스스로 사직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지레 대사간을 체차하는 것은 옛날의 법도가 아니며,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도 아니라고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계(牛溪) 선생이 선생이 시폐(時弊)를 진달한 상소를 읽어 보고 말하기를, “참으로 곧은 말로 지극히 간한 것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계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상소가 임금의 윤허(允許)를 받고 못 받고는 시운(時運)과 관계되는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며칠 있다가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제수하였으나, 선생은 마침내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그때에 선비들이 둘로 갈라져서 동인은 세도가 왕성하고 서인은 쇠퇴하자, 당시 벼슬하는 사람들은 모두 동인으로 모여들어 팔뚝을 걷어올리면서 동인은 옳고 서인은 그르다고 하였다. 윤현(尹晛)과 김성일(金誠一)이 함께 이조 전랑이 되었는데 의논이 서로 맞지 않아서 드디어 틈이 벌어졌다. 윤현의 숙부 윤두수(尹斗壽)와 계부(季父) 윤근수(尹根壽)가 모두 요직에 있으면서, 서인을 도와주고 동인을 억압하자, 동인들이 몹시 미워하였다. 김성일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전응정(全應禎)이 뇌물을 보내다가 죄를 받았는데도 쌀을 싣고 다니면서 뇌물을 쓰는 자가 있으니, 탐욕스런 풍습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어떤 사람이 그런가?” 하니, 김성일이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수(李銖)입니다.” 하였다. 대간에서도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상이 이수를 옥(獄)에 가두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준 사람만 다스리고, 받은 사람은 다스리지 않는 게 옳은가.” 하니, 대간에서 곧 삼윤(三尹 윤현ㆍ윤두수ㆍ윤근수)을 들어 받은 사람이라 하였다.
선군자(先君子)가 대사간으로 휴가를 얻어 시골에 있다 돌아와 아뢰기를, “삼윤은 모두 특별히 발탁된 사람으로서 별로 큰 과오도 없습니다.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 남을 중상하는 사람의 꾸며 낸 말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천천히 옥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서 그 죄를 다스려도 늦지 않을 텐데 갑작스럽게 세 사람의 이름을 끄집어내어 죄를 다스리라고 청하는 것은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그러자 양사(兩司)가 격분하였으며 장령(掌令) 이발(李潑)은 추한 말을 끄집어내어 못하는 소리가 없었다. 사헌부에서는 이수가 뇌물로 가지고 온 쌀을 장사꾼 장세량(張世良)의 집에 맡겨 두었다는 말을 듣고는 다른 일을 핑계 대고 장세량을 잡아다 의금부(義禁府)로 옮겨 가두고, 옥사를 만들려고 20여 차례나 고문하였다. 거의 죽게 되었는데도 끝까지 승복하지 않자, 어떤 사람이 장세량에게 말하기를, “네가 만약 승복하기만 하면 죽는 것을 면할 수 있는데, 어째서 곤장을 맞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는가?” 하니, 장세량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승복하지 않으면 죽고 승복하면 산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다만 실제로 이런 일이 없는데 어찌 나 살자고 남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은 장세량이 오래도록 승복하지 않자 이수의 옥(獄)이 사실이 아닌가 의심하고, 놓아주라고 명하였다. 정원(政院)에서 네 차례나 계를 올려 쟁집하자, 임금은 크게 노하여 승지(承旨)를 모두 체차하였다. 선군자가 본래부터 깨끗한 명망이 있어서 후배들도 간혹가다 물어보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와서는 아주 틀어져 버렸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이번 옥사를 바르지 않다고 하였는데 말이 여기에 미치자 동서 간에 이제 더 이상 화합할 희망이 없어지게 되었다.
선생이 듣고 말하기를, “이수가 뇌물 보낸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장세량이 쌀을 받아 둔 죄는 아주 가벼운 것이다. 장세량을 증인으로 삼아 기필코 직접 문초하고자 한 것이라면 증인을 형신(刑訊)하는 것은 세 차례 밖에 못 하게 되어 있는데, 어째서 함부로 20여 차례나 하였는가. 설령 장세량이 정범(正犯)이라 하더라도 국법(國法)에, ‘죽을죄가 아니면 실정을 말할 때까지 고문할 수는 없다.’ 하였는데, 장세량의 죄는 장(杖)을 몇 대 칠 정도에 불과할 뿐인데 어떻게 그 실정을 말할 때까지를 한정할 수 있는가. 후배들의 식견이 밝지 못하고 생각이 넓지 못하여, 단지 그 옥사가 성립되지 않아 도리어 그 화를 당하게 될까만을 걱정하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의(義)를 해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앞뒤의 시비는 돌아보지 않으며, 오직 옥사 만드는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였다. 또 이발에게 편지로 답장하는 데에도 절실하게 책망하였다.
기묘년(1579, 선조12) 5월에 다시 대사간으로 부르니, 선생은 병으로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고 상소하여 동서로 분당(分黨)한 것에 대해 논하였다. 동인이 서인을 공격하는 것이 너무 심하여 억지로 시비를 정하려 하니, 동서의 당파를 깨끗이 없애고 선비들을 화합시켜 한마음으로 나라를 받들게 하라는 내용이었는데, 그 말이 몹시 격렬하고 절실하였다. 상은 상소의 사연이 맞지 않는다 여기고는 체차할 것을 명하였다.
7월에 참찬(參贊) 백인걸(白仁傑)이 상소하여 동서의 당파를 화합시킬 계책을 극력 논하였다. 백인걸이 상소하려 할 때에 그 문장이 자기의 뜻을 제대로 다 말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선생에게 그 글을 고쳐 달라고 청하였는데, 선생은 그가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죽을 때까지도 변하지 않는 것을 애틋하게 여겨 그 의견대로 글을 고쳐 주었다. 이때에 와서 정언(正言) 송응형(宋應泂)이 이양원(李陽元)의 사주를 받아 아뢰기를, “백인걸의 상소는 이이(李珥)가 지은 글입니다. 백인걸은 노망(老妄)하였으니 책망할 것도 없거니와, 이이는 경연의 옛 신하로서 무엇이든지 생각한 것이 있으면 의당 직접 숨김없이 진달해야 할 텐데, 감히 그 자취를 감추고는 저리 돌려서 몰래 남의 상소를 대신 지었으니, 신하로서 임금을 속이는 바르지 못한 잘못을 바로잡으소서.” 하였다. 그러자 양사와 옥당에서 시비를 서로 들고 나오니, 백인걸이 상소하여 스스로 해명하기를, “송(宋)나라의 정이(程頤)는 팽사영(彭思永)을 대신하여 복왕(濮王)의 전례(典禮)를 논란하는 소(疏)를 지었고, 부필(富弼)을 대신하여 영소릉(永昭陵)을 논란하는 소를 지었으며, 여공저(呂公著)를 대신하여 응조소(應詔疏)을 지었으니, 이런 일은 선유(先儒)들도 한 일이기 때문에 신은 이이의 글을 쓰면서도 혐의하지 않았고, 남에게 숨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이가 신(臣)을 꾀어 상소했다 하는데, 신이 아무리 못났다 해도 어찌 감히 신의 본의(本意)가 아닌 것을 가지고 남이 시키는 대로 하여 이렇게 소를 올렸겠습니까.” 하였다.
경진년(1580, 선조13) 겨울에 대사간을 제수하니 부름을 받고 해주(海州)로부터 서울로 들어와서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을 인견하여 그 지방의 흉년(凶年) 든 형편을 물어보고, 또 이르기를,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하였는데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하니, 선생이 곡식을 옮겨다가 주리는 백성을 구제할 것을 청하였고, 다스리는 도(道)의 요령을 차례차례로 진달하였다. 또 상에게 아뢰기를, “전하께서 성혼(成渾)에게 은례(恩禮)를 더하신 것은 근고(近古)에 드문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성혼이 어질다는 것은 내가 이미 들어 아는 것이지만 그 재주가 어떠한지는 아직 모른다.” 하시니, 선생이 아뢰기를, “재주라는 것도 다 같은 게 아닙니다. 혼자서 온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을 만한 사람도 있고, 착한 사람을 좋아하여 여러 인재를 등용할 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성혼의 재주는 만약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치겠지만, 그 사람됨이 착한 것을 좋아합니다. 착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면 천하를 다스리기에 넉넉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쓸 만한 재주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신사년(1581, 선조14) 1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자, 선생은 동료를 거느리고 정사(政事)를 닦아서 하늘의 재앙을 없앨 것을 청하였다.
선생이 처음에는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는데, 상이 자못 등용해 주려는 뜻이 있고, 또 선비들의 의논에 분열이 생긴 것을 보고 머물러 있으면서 화해를 시켜 보고자 하였다. 선비들이 선생에게 꼭 해야 할 것을 묻자, 선생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근심은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알지 못하고 선비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로 뭉쳐 하나가 되어 서로 의심하거나 막힘이 없이 함께 정성을 쌓아서 임금의 뜻을 돌리는 것이 제일 좋은 계책입니다.” 하였다.
2월에 《춘추(春秋)》를 강론하다가 아뢰기를, “정자의 말에, ‘후세의 임금이 만약 《춘추》의 뜻을 안다면 비록 우탕(禹湯)의 덕(德)은 없더라도 또한 삼대의 정치는 본받을 수 있다.’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이 경(經)을 읽으실 때마다, 반드시 어떻게 해야 삼대의 다스림을 회복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신다면, 반드시 이익 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해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평안도와 황해도의 흉년이 특별히 심하였다. 나라에 비축해 둔 곡식은 다 떨어지고, 굶주림을 구제할 계책이 없는데도 조정에서는 가만히 앉아서 아무 대책도 내놓지 못하였다. 선생이 몹시 근심이 되어 경연에서 아뢰기를, “만약 낡은 법을 고쳐서 백성의 어려움을 구제하지 않고, 단지 곡식을 옮겨다가 백성을 살리려고만 하신다면 곡식도 다 떨어져 옮겨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공안(貢案)이 잘못된 까닭에 방납(防納)하는 자들이 폭리(暴利)를 취하고 백성들은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공안을 개정하여 공평하게 배정하고 반드시 그 지방 특산물을 바치게 한다면, 백성들의 누적(累積)된 고통거리가 없어질 것입니다. 또 백성이 잘 살고 못 살고는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달렸으며, 수령의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은 감사에게 달렸는데, 감사를 자주 바꾸기 때문에 모두 그저 세월이나 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쩌다 최선을 다해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미처 해 볼 사이도 없이 갈리게 되니, 반드시 대읍(大邑)을 골라서 감영(監營)을 만들어 놓고 오래 그 자리에 있게 하며, 특별히 다스리는 재주가 공보(公輔)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가려내어 제수한다면 반드시 그 실효를 거둘 것입니다.” 하였다.
물러 나와 동료들과 상의하여 차자를 올려서 낡은 법을 고치고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감사를 오래 맡게 하고, 조그마한 고을을 병합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며, 어진 사람을 써서 인재(人才)를 진작시키고 몸을 닦아서 정치의 근본을 깨끗이 하며, 당파를 없애어 조정을 화합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그때에 우리나라 왕실 종계(宗系)의 기록이 잘못되어 고치는 것을 허락한다는 명나라 황제의 명은 받았으나, 반포하기도 전에 《대명회전(大明會典)》을 편찬하는 일이 거의 끝나게 되었다. 그러자 선생이 탄식하기를, “필부(匹夫)의 계통이 잘못되어도 오히려 고칠 수가 있는데,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계통이 잘못된 것을 2백 년이 되도록 고치지 못하는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사신을 보낼 때 적임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고는, 곧 사람을 가려 보낼 것을 계청하고 교지를 받들어 명나라에 아뢰는 주본(奏本)을 지어 바치니, 상이 이르기를, “좋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큰일이 잘 될 것이다.” 하였다.
6월에 특별히 가선(嘉善)으로 올려 대사헌을 제수하였다. 두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때에 조정의 의논이 더욱 두 갈래로 갈라져서 일마다 분열이 생겼다.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과 전한(典翰) 이발(李潑)은 그전부터 심의겸을 미워하며 반드시 탄핵하여 없애려 하였는데, 선생이 중지시키려 애썼으나 안되고 말았다. 우계(牛溪)에게 말하기를, “정인홍이 반드시 방숙(方叔 심의겸)을 쳐 없애려 하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약 그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정인홍은 반드시 노하여 고향으로 내려갈 것이며, 그 무리들은 반드시 이 일을 가지고 나를 공격할 것입니다. 내가 떠난다면 동서가 다시 화합할 가망이 없어질 것이므로, 형편상 어쩔 수 없이 따라갑니다.” 하니 우계도 수긍하면서 탄식하기를, “정인홍은 평지(平地)에 풍파(風波)를 일으키는 사람이다.” 하였다.
선생은 마침내 정인홍과 더불어 의논하여 계사(啓辭)를 초하여 놓고 말하기를, “이 계사는 매우 잘 되었으니, 이 뒤에 한마디도 고쳐서는 안 됩니다.” 하자, 정인홍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으나, 첫 번째 계(啓) 끝에다, “심의겸이 선비들을 끌어들여 그 세력을 늘린다.”는 등의 말을 덧붙여 썼다. 상이 묻기를, “선비라는 사람이 누군가?” 하니, 정인홍이 대답해 아뢰기를, “선비라고 하는 사람은 심의겸과 윤두수ㆍ윤근수ㆍ정철 등 여러 사람으로, 서로 결탁하여 형세를 엿보고 있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정인홍에게 이르기를, “연전(年前)에 시론(時論)이 과격하였기 때문에 계함(季涵 정철)이 너무 지나치다고 여겨 평하는 말을 하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심의겸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계함은 지조 있는 선비입니다. 만약 심의겸과 결탁하여 세력을 키우려고 했다 하면 너무 원통한 일입니다. 그대가 피혐(避嫌)하여 정철을 위해서 따로 상소한 연후에 내가 일을 볼 것입니다.” 하니, 정인홍이 여기서 자기 뜻을 굽히고 따라왔다.
선생이 동료와 더불어 정인홍의 일을 처리하려 하는데, 동료들의 논의가 일치되지 못하고 서로 피혐하려 하였다. 윤승훈(尹承勳)이 정언(正言)이 되어서, 선생이 당(黨)을 위하여 송강(松江)을 비호한다 여겨 체직을 논하려 하였으나 동료들의 논의가 일치하지 않자 홀로 피혐하고 계(啓)를 올렸다. 그러자 공론(公論)은 윤승훈을 체직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시속의 무리들은 송강을 몹시 미워하여 옥당의 의논이 심지어는 윤승훈은 그대로 두고 양사를 모두 갈자고 까지 하였다. 이발과 김우옹(金宇顒)이 이 둘 사이에서 미적미적하다가 차자를 올리면서도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양사를 모두 내보낼 것을 청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시론(時論)의 치우침을 내가 바로잡을 수 없고, 삼사(三司)에 모두 공론(公論)이 없으니 내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곧 혐의를 피하여 아뢰기를, “옥당에서 올린 차자는 그 말이 애매모호하니, 이러고도 시비를 진정시킬 수 있다는 것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정철은 선비들이 과격하지 않나하여 여러 번 그 말투나 얼굴빛에 나타났고, 선비들도 정철의 마음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헐뜯고 배척하였는데, 선비들이 정철을 의심하는 것이 심해질수록 정철의 불평도 더욱 깊어졌습니다. 정철도 진실로 옳지 않지만 정철이 심의겸의 당파가 되었다 하는 것도 또한 공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 윤승훈은 선비들의 뜻에 영합하여 세력에 붙으려는 생각에서 한 짓이니, 선비들의 하는 짓이 이래서야 어찌 편안할 때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양사에서 윤승훈을 지적하여 배척한 것이 너무 지나치다 하여 선생을 체차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준엄한 전교를 내려 윤허하지 않았으나 여러 차례 계를 올리자, 이에 윤허하고 특별히 윤승훈을 신창 현감(新昌縣監)으로 삼았다. 선생이 대사헌에서 체직되니 공론이 모두 시속 무리들의 하는 짓이 정당한 사람을 해친다고 여겼다. 선생은 같은 조정에 있는 선비들이 모두 식견이 없는 것을 보고 매우 답답해하고 즐거워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내가 동서를 타파하고 선비들을 화합시키려고 하는데, 시속 무리들은 스스로 자기 주견만이 옳다 하여 나랏일을 그르치려 한다. 내가 물러가면 이 시국은 더욱 분열될 것이므로 꾹 참고 물러가지 못한다.” 하였다. 그 뒤에 입시(入侍)한 기회를 빌어,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또, 윤승훈을 너무 지나치게 억눌러서는 안 된다고 하니, 상이 넉넉하게 수용하는 답을 내렸다. 그전에 삼사(三司)에서 선생을 공격할 적에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탄식하기를, “나이 젊은 사람들이 식견이 없다. 숙헌(叔獻 이이) 같은 이는 선비의 종장(宗匠)이 될 만하니, 시속 무리들은 그 명령을 들어야 할 것인데도, 조그만 일을 가지고 다투어 여기까지 이르고 나랏일은 도외시하니, 사슴을 좇느라 태산을 보지 못하는 경우라[逐鹿而不見泰山] 할 수 있다.” 하였다.
9월에 예문관 제학과 사간원 대사간을 제수하니,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지금의 급선무는 동서를 타파하고 선비를 화합시키는 것인데, 신이 진정시킬 수가 없으니, 서관(庶官)이 되어 충성을 다하게 해 주옵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뜻을 다 알았으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마침내 병으로 체직되었다. 상이 호조(戶曹)에 적임자가 없는 것을 근심하자, 대신이 첫 번째로 선생을 추천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시켜 호조 판서를 제수하였다. 선생은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천재(天災)로 인하여 공경(公卿)들을 불러 그 대책을 물었는데, 선생이 나와 아뢰기를, “천도(天道)는 현묘(玄妙)하고 원대(遠大)하여 실로 알 수 없으나, 옛 역사를 보면, 그 나라의 치란(治亂)의 형세가 정해진 뒤에는 재이(災異)가 없습니다. 재이는 반드시 어지러워지려고 할 때에 생기는 것이니, 아무리 어진 임금이라도 재이를 면하지 못하는 것은 대개 하늘이 인애(仁愛)로운 마음으로 임금으로 하여금 정치를 잘하게 깨우쳐 주려 해서입니다. 우리 조정에서 나라를 세운 지가 거의 2백 년이 되었으니, 오늘날에 와서는 노인(老人)이 원기(元氣)가 다 떨어져서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된 것과 같습니다. 다행히 성상(聖上)께서 이 세상에 나오셨으니, 이때야말로 다스려질 수도 있고 어지워질 수도 있다는 시점입니다. 만약 이때 분발하여 떨치고 일어서면 우리 동방(東方)에 억만년의 한량없는 복이 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다 기운이 빠져 없어지고 무너져 패함에 이르니 구제할 수 없습니다. 임금이 반드시 그때의 폐단을 알아야만 한 세대의 다스림을 일으킬 수 있으니, 의원이 반드시 병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만 그 증상에 따라 약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폐단은 진실로 낱낱이 열거하기 어려우나, 대개 그 병의 근원은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에게 맡기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능히 실제의 공력을 들이지 않으면서 재앙이 없어지기를 바란들 될 수 있겠습니까. 폐단을 고치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신에게 계획이 있습니다. 대신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로 의논해 보시고 국(局)을 설치하여, 그 이름을 경제사(經濟司)라 하시고, 대신에게 그것을 주관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선비로서 지금 꼭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나랏일에 마음을 두는 사람을 가려서 그 인선(人選)에 참여하게 하고, 건의하는 모든 말을 사(司)로 내려서 상의하여 낡은 정사를 개혁한다면 하늘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금 교화(敎化)를 밝히려고 하면 반드시 선현(先賢)을 높이고 숭배하여 후학(後學)으로 하여금 공경하여 본받을 바가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름 난 선비를 다 사전(祀典 문묘(文廟))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사오나 조광조(趙光祖) 같은 이는 도학(道學)을 주창하여 밝혔고, 이황(李滉) 같은 이는 이치의 근본을 오래도록 연구하였으니, 이 두 사람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여 선비들에게 착한 곳으로 향하는 마음을 흥기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다른 날 입시하여 아뢰기를, “신하들을 불러 조언을 구하시기는 하는데, 아무개의 계책을 써서 어떤 폐단을 고쳤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사오니, 이렇다고 한다면 한갓 겉치레가 될 뿐이니, 천재(天災)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천재를 막을 수 있겠는가?” 하니, 선생이 “전하께서 먼저 이래야 한다거나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세우지 마시고, 대신 및 시무(時務)를 잘 아는 사람과 이 시국을 안정시킬 정책을 의논해 정하시되, 개혁하는 것만 주장하지도 말고, 구례(舊例)대로만 고집하는 것을 주장하지도 말아서, 조종(祖宗)의 좋은 법인데 폐지되어 시행되지 못한 것은 정비하여 시행하고, 근래에 만든 법규로서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개혁하여 없애며, 새 정책으로서 나라에 이익이 되고 백성을 잘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강구하여 시행해야 합니다. 이처럼 부지런히 시국을 바로잡을 계책을 구하여 날마다 실제로 하는 일이 있으면,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를 고칠 수 있고 하늘의 노여움 또한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단지 말로만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한다고 하고 그 실제의 행동이 없으면 어떻게 위로 하늘의 마음에 보답하겠사오며, 아래로 여러 사람들의 희망을 위로하겠습니까.” 하였다.
이해 겨울에 양관(兩館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에 제수되어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은 늘 내용 없이 문사(文詞)만 꾸미는 폐단에 대해 탄식해 왔는데, 대제학을 맡게 되자 이 습관을 꼭 고치고자 하여 선비를 뽑는 모든 시험에서 반드시 문장(文章)보다 이치를 더 중시하는 것에 주안을 두었다.
임오년(1582, 선조15) 봄에 이조 판서를 제수하니 세 차례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선생은 오로지 묵은 폐단을 개혁하고 벼슬길을 깨끗하게 하는 것에 힘썼으니, 어진 선비를 가려내어 대헌(臺憲)의 자리를 채우고, 학행 있는 사람을 뽑아내어 사유(師儒)의 벼슬을 시키고, 벼슬이나 명예에 뜻이 없는 사람을 천거하여 명예와 절개를 숭상하는 기풍을 가다듬고, 관리 노릇할 만한 재주가 있는 사람을 천거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을 맡기고, 감사(監司)를 선출하는 것을 신중하게 하고 수령(守令)을 천거하는 것을 엄격하게 한 것 모두가 그때에 시행하라고 청하였던 것이다.
가을에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에 제수되고, 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여 우찬성(右贊成)에 제수되었다. 모두 사양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전교를 받들어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과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지어 올렸다. 이에 앞서 상이 경연에서 선비들의 습관이 야박해지고 스승의 도(道)가 없어져 가는 폐단에 대해 논하고 스승을 가려 선비를 양성하는 법규를 만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선생은 이리저리 생각하고 구상하여 스승을 가려 선비를 양성하는 것으로써 사목(事目)을 만들어 놓고, 또 〈학교모범(學校模範)〉 16조(條)를 만들어서 학교 법령을 보완하였다.
겨울에 명(明)나라에서 국사편수(國史編修) 황홍헌(黃洪憲)과 공과급사중(工科給事中) 왕경민(王敬民)이 사신으로 와서 조서(詔書)를 반포(頒布)하였는데, 삼공(三公)이 선생을 천거하여 원접사(遠接使)로 삼아서, 국경에 나가 맞아들이게 하였다. 중국에서 온 두 사신이 선생을 한참 보고 있다가 통역관에게 묻기를, “자못 산림(山林)의 기상(氣象)이 있는데, 산림에 숨은 선비를 억지로 데려다 우리를 맞이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므로, 통역관이 대답하기를, “삼장장원(三場壯元)을 하여 오래도록 시종(侍從)으로 있다가 중년(中年)에 물러가 산림에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 임금이 의지하여 직임을 맡긴 지가 오래되었으니, 실로 산림에 있는 선비가 아닙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그러면 〈천도책(天道策)〉을 지은 사람인가?” 하여, 그렇다고 대답하니, 두 사신은 머리를 끄덕끄덕하였다. 길을 떠나오면서 두 사신과 시(詩)를 지어 읊었는데, 선생이 붓을 들고 그대로 죽죽 써 내려도 그 문장과 의미가 모두 아름다우니, 두 사신이 탄복하여 찬미하기를, “큰 솜씨로다. 큰 솜씨로다.” 하고는, 선생이 도학군자인 줄을 알고 예(禮)로써 공경하는 것이 아주 지극하여 반드시 율곡(栗谷) 선생이라 불렀다.
서울에 들어와서 문묘(文廟)에 배알(拜謁)할 적에 그 벽에 걸린 정자(程子)의 〈사잠(四箴)〉을 보고 선생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인(仁)의 뜻이 되는 뜻에 대해 강의해 줄 것을 청하자, 선생이 곧 설명하는 글을 지어 해석해 주었다. 두 사신이 5, 6번이나 읽어 보고, “이 설명하는 글이 지극히 좋으니 중국 조정에 가서 꼭 전포(傳布)하겠습니다.” 하였다.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가에 이르러 곧 떠날 무렵에 정사(正使)가 별안간 칠언시(七言詩)와 고율시(古律詩)를 각각 한 수씩 내놓고는 화답해 달라고 하니, 선생은 그들이 곧 떠나기 때문에 즉석에서 시를 써서 주었다. 두 사신이 돌려가면서 감상하고는 작별할 때에 모두 헤어지기 섭섭하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 그 일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조사(詔使)가 그렇게 공경하는 것은 근고(近古)에 없던 일이다.” 하였다.
얼마 후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계미년(1583, 선조16) 1월에 또 사양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는 사무가 복잡하고 많은 데다가, 또 호인(胡人)의 침범이 있어서 편지와 통첩이 구름 쌓이듯 하였는데, 선생은 척척 해결하였고, 비변사(備邊司)의 그 많은 계획은 모두 선생께 맡겨 처리하게 했는데, 모든 대책과 대응이 각각 올바르게 들어맞았고, 호령이 엄숙하고 분명하며, 급한 것을 먼저 처리해 모든 사람이 복종하며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모두 든든하게 의지하였다.
그때에 나라에는 태평한 시절이 오래가다 보니 군비는 소홀해졌고, 징발이 계속되게 되니 군사와 식량이 모두 떨어지게 되었다. 선생이 건의하기를, “서자(庶子)와 하인을 모집하여 북쪽 변방으로 보내어 수자리를 살게 하고 무예(武藝)가 없는 사람은 변방에 군량미를 바치게 하며, 서자도 벼슬길을 터 주고 하인도 양민이 되게 해 주옵소서.” 하였다. 모두 한때에 편하도록 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조종조(祖宗朝)에서 벌써부터 시행하던 법이었다. 서자를 금고(禁錮)해 온 지가 이미 백 년이 지나서 사람마다 모두 보고 듣는 습관에 젖어 있었는데, 선생만은 임금으로서 어진 사람을 뽑아 쓰는데 꼭 정해 놓은 법이 없으니, 인재(人才)를 버려서는 안 된다 여기고는 매양 서자에게 벼슬길을 터 주려고 하다가, 이때에 와서 시작하였는데, 유속(流俗)들 중에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퍽 많았다.
또 여섯 조목을 내놓고 아뢰었는데,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을 쓸 것,[任賢能] 군민(軍民)을 양성할 것,[養軍民]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할 것,[足財用] 변방의 방어를 튼튼하게 할 것,[固藩屛] 전마(戰馬)를 비치(備置)할 것,[備戰馬] 교화(敎化)를 밝힐 것[明敎化]” 등이었으니, 모두가 그 시기에 적절한 일이었다. 또 당시의 폐단을 고치자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의하면, “조정을 화합하게 하여 낡은 정사를 개혁하는 것이 근본이고, 군대와 식량을 조달하여 방어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말단입니다.” 하였으니, 선생의 뜻은 대개 연산조(燕山朝) 때의 폐단과 근래에 잘못된 법을 모두 개혁하고, 조종의 전성 시기에 하던 일을 그대로 따라서 쇠해 가는 것을 부흥시키고, 폐단을 바로잡아 모두 옛 법대로 하려는 것이었다. 오직 문소전(文昭殿)과 연은전(延恩殿)의 제사와 산릉(山陵)에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제사는 예(禮)가 아닌 까닭에 “비록 하루아침에 예(禮)대로 다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번독(煩黷)이 너무 심하여 계속할 수 없는 일이니, 산릉에는 사절(四節)에만 제사를 지내고 문소전과 연은전의 제사는 하루 한 번씩만 지내어 제사 지내는 일을 삼가서 백성을 덜 수고롭게 해 주옵소서.” 하였으니, 이것은 선생이 조정에 있을 때에 건의하여 아뢴 큰 의논이었다.
상이 조정에 있는 신하들을 볼 때 모두 용렬하고 쩨쩨하고 무능하면서 자리나 채우고 녹이나 받아 먹고 있는데 선생만은 공정하고 충성스러워서 당파에 휩쓸리지 않으며, 지성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것을 보고서 전적으로 믿고 맡겨 그 말을 많이 들어주었다. 그러자 시속 무리들이 더욱 심하게 꺼리어 밤낮없이 기회를 엿보면서 함정으로 몰아넣을 궁리를 하고 건의하여 아뢰는 것이라도 있으면 문득 가로막고 나서서 근거 없는 의논이 쏟아져 나오고, 비방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와 당시의 일을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해 여름에 북쪽 오랑캐가 두 번째 침입하여 나라 안이 떠들썩해서 사수(射手)를 뽑아 들이는데, 관가에는 전마(戰馬)가 없어서 갑자기 마련할 수 없었다. 선생은 을묘년에 전사(戰士)들이 서로 말을 빼앗던 일을 생각하고, 군대가 문란한 것을 몹시 근심하였다. 그래서 뽑아 놓은 군대의 3등(等) 이하를 골라 말을 바치고 군대를 면제받게 해 주고 그 말은 1ㆍ2등에 뽑혀 부방(赴防)하는 사람에게 주었다. 처음에는 계청(啓請)하고자 했으나 응모할 사람이 적을까 염려가 되어 먼저 명령을 내려 모집해 보았는데, 이때 말을 바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군대가 떠날 때가 되어 그 시기를 늦출 수 없으므로 먼저 말을 나누어 주고 뒤에 보고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군인으로 나가는 사람은 말을 얻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나가지 않는 사람은 군역을 면제받는 것을 좋아하여 공사(公私) 간에 두 가지가 다 좋게 되었다. 또 “군자감(軍資監)에 있는 면포(綿布)를 군인의 옷감으로 내어 주고, 관리들의 녹(祿)을 삭감하여 군대로 나간 사람의 처자(妻子)에게 나누어 주옵소서.” 하니, 군인들이 모두 기뻐하여 수자리하는 괴로움을 몰랐으며, 응모(應募)하여 군용으로 바치는 곡식 또한 군량(軍糧)으로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은 변방에서 보고가 있어서 상이 명령하여 선생을 부르니, 선생은 한창 어지럼증이 심하였으나 병을 참고 부르는 명령에 나오다가 정원(政院)에 도착하기도 전에 병이 더하여, 할 수 없이 내병조(內兵曹)에 들어가 누웠다. 이를 가지고 삼사(三司)에서,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교만하여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논핵하였다.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른다는 것은 말을 바치면 군대를 면제하게 해 줄 때에 먼저 계청(啓請)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 것이요,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부름을 받고도 정원에 나오지 않은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앞서 허엽(許曄)이 경상 감사(慶尙監司)가 되어 병이 몹시 위중하였는데, 그 아들 허봉(許篈)이 응교(應敎)로서 사표를 내고 그 아버지를 뵈러 가서는 기생을 끼고 놀이만 하고 병간호를 잘하지 않아서, 허엽이 결국 죽고 말았다. 선생이 이조 판서가 되자 시속 무리들이 허봉을 직제학(直提學)에 주의(注擬)하려 하였는데, 선생은 그 일을 지적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허봉의 무리는 많이 원망하였다. 박근원(朴謹元)이 이조 참판이 되자 선생은 정지연(鄭芝衍)에게 권하여, 사정(私情)만 돌아보고 공도(公道)는 생각지 않아서 정사를 그르친다고 탄핵하게 하였고, 선생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또 박근원을 욕심 많고 비루하고 간사하다고 탄핵하였다. 또 선생이 중립(中立)하여 당파에 끼지 않고 나쁜 짓하는 사람을 격리하고 깨끗한 사람을 추켜세워서, 서인(西人) 중에 쓸 만한 사람을 거두어 등용하고 동인(東人) 중에 편벽된 사람을 억눌렀다. 그러자 모든 감정이 고슴도치 털처럼 일어나서 헐뜯는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오래전부터 못된 생각을 빚어 오던 것이 이때에 와서 터져 여러 번 탄핵하는 계를 올렸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여섯 차례나 상소를 올려, 잘못에 대한 죄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아득한 천 년 동안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나서 공업(功業)을 이룩한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경(卿)은 지난날 내가 한 말을 직접 듣지 않았는가. 내가 물러가라고 명한 뒤에 물러가라고 한 간곡한 이 한마디는 귀신도 또한 알 것인데, 경은 어찌 차마 오늘 사양하고 떠나려 하는가.” 하였다. 전후(前後)에 비답(批答)한 내용이 더욱더 간절하게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자, 선생은 드디어 대궐에 나가 다시 아뢰었으나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대간(臺諫) 송응개(宋應漑) 등이 다시 대간을 무시하고 공론(公論)을 멸시한다고 탄핵하였으며, 허봉(許篈)이 전한(典翰)이 되어서 스스로 차자를 써 가지고 동료들을 거느리고 논계하였는데, “한쪽 말만 들으면 간사한 자가 생겨나고 한 사람에게만 맡기면 혼란스러워집니다. 어진 이를 시기하고 유능한 이를 미워하며, 아랫사람을 막고, 임금의 총명을 가려서 제 사사로운 당파를 만드니 장차 무슨 짓을 하려는 속셈입니까.”라고까지 하였다.
상이 손수 전교를 써서 대신(大臣)에게 내리기를, “요즘 들어 이이(李珥)의 말이 별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대간이 서로 격렬하게 논쟁하면서 반복해서 얽어매고, 심지어 옥당(玉堂)에서 올린 차자에는 이이를 나라를 망치는 소인에 비유하기까지 하니, 이것은 우연한 말이나 별 것 아닌 일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다. 대개 이이가 전부터 신진 사류들을 억제하여 시기에 따라 당파에 가담하는 것을 미워해 여러 차례 논의를 폈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지가 오래된 것이다. 그래서 조그마한 잘못을 빌미로 때를 틈타 흠을 찾아내 탄핵해 제거하고야 말려고 한다. 공경대부(公卿大夫)로서 부름을 받고 오지 않는 사람은 많아도,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논박하는 말은 듣지 못하였는데, 어째서 대간은 이이에 대해서만 박절하게 말할 수 있는가. 그가 말[馬]을 바칠 때에 아뢰지 못한 것 또한 많은 사무를 처리하느라 미처 취품(取稟)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것이 어찌 권세를 제멋대로 휘둘러서 그런 것이겠는가. 도대체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임금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신하로서 제일 큰 죄다. 임금은 소민(小民)에게도 오히려 그 실상이 없는 죄명을 함부로 뒤집어씌울 수 없다. 하물며 재상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미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임금을 업신여겼다고 한다면, 어째서 그 죄를 왕법에 비추어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지 않고 파직시킬 것을 감히 청하는가. 을사년에 간신들이 반역했다고 지목하면서도 죄를 주는 것으로는 파면시키라고 한 것과 같지 않은가. 이것이 이이가 심복하지 않고 여러 번 사양할 적에 과연 스스로 변명하는 듯한 점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어찌 언관을 시기하고 앙심을 품은 것이겠는가. 대간(臺諫)이 귀중한 이유는 공론(公論)을 담당한 몸이기 때문인데, 만약 남몰래 사욕을 채우고자 남을 배척하여 함정에 빠뜨릴 계획을 한다면 대간의 도(道)가 어디에 있겠는가. 경(卿) 등은 만일 이이(李珥)가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라면 마땅히 명확하게 따져서 물리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공격하는 사람이 바로 소인이니, 어찌 임금이 소인을 써서 나랏일을 할 이치가 있겠는가. 그 선한 사람과 사특한 사람을 분별하는 일을 오늘날에 해야 하지 않겠는가. 경 등은 어물어물하고 분명히 가려내지 않아서는 안 된다. 도대체 조정에서 몰려다니며 당파를 만들어 나랏일은 날마다 잘못되어 가는데, 대신이 분별해 내지 않는다면 장차 나랏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병무(兵務)를 오래 비워 둘 수 없어 우선 그의 직임을 체직하였다. 선생이 물러나 파주(坡州)로 내려가니 조야(朝野)가 격분하고 여론이 떠들썩하였다.
우계(牛溪) 선생이 상소하여, 삼사(三司)에서 억지로 얽어 넣어 모함한 진상을 강력히 진달하니, 상이 삼공(三公)을 불러 놓고 전교하기를, “며칠 전에 경 등에게 어질고 간사하고, 옳고 그른 것을 물었는데, 경 등은 감히 어물어물하는 말만을 하였다. 내가 진실로 경 등의 마음을 잘 알고서 이다음에 처리하겠다는 전교를 이미 내렸거니와, 지금 성혼(成渾)의 상소를 보니 대신으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과연 이럴 수 있는가. 당초에 이이를 배척한 것은 누가 한 짓이며, 붕당을 짓는 간악한 무리들은 또 누구인가. 자세히 분별하여 아뢰라.” 하였다.
사암(思菴) 박순(朴淳)이 수상으로서 청대(請對)하여 선생이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나라를 위하는 사실과 허봉(許篈)과 송응개(宋應漑)가 거짓말을 꾸며서 정당한 사람을 해친 죄를 낱낱이 아뢰니, 송응개는 곧 피혐(避嫌)하면서 다시 거짓말을 꾸미는데 못하는 말이 없이 추하게 비난을 해 댔다. 그래서 태학(太學)과 호남(湖南)의 유생들은 서로 계속하여 항의하는 상소로써 자세히 변명하였는데, 박근원(朴謹元)이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전후(前後) 여러 차례 계(啓)를 올려 유생들의 상소가 도리에 어긋나고 질서를 어지럽힌다고까지 하였다. 상이 그 정상을 환히 다 알고 손수 전교를 써서 내려 박근원ㆍ송응개ㆍ허봉 등을 귀양 보내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무리들이 상소하여 구원하려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이 상소를 보니 다만 삼사(三司)에서 아뢴 말을 베껴 썼을 뿐이다. 사당(邪黨)의 말이 이 같은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지만, 이이(李珥)가 당파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이따위 말을 가지고 내 뜻을 움직일 수 있다고 보는가. 진실로 군자라면 당(黨)이 있는 것이 근심되지 않고, 다만 그 당이 작을까가 걱정이 되는 것이다. 나도 주희(朱熹)의 말을 본받아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어가기를 원하니, 지금부터는 너희들이 나를 이이와 성혼의 당이라 해도 좋다. 너희들은 그래도 더 할 말이 있는가. 이이와 성혼을 헐뜯었다가는 반드시 죄를 주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파주(坡州)에서 해주(海州)로 내려갔는데 조금 뒤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부르자 선생은 상소하여 간절히 사양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아, 하늘이 우리나라를 잘 다스리려 하지 않는 것인가. 경(卿)같이 훌륭한 사람이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은 어찌된 일인가. 생각해 보니 하늘이 경으로 하여금 마음을 분발하고 성질을 참아 가면서 아직 능숙하지 못한 점을 보충하여, 장차 재상[舟楫霖雨]의 책임을 맡기려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하늘이 경에 대해 곡진하게 성취시켜서 그대를 옥(玉)으로 만들려는 것이니, 지금의 일이 경에게 나쁠 게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특명으로 이조 판서를 제수하고 또 부르는 명령이 있으니, 선생이 다시 상소하여 사양하고 서울에 들어와 또 사양하였다. 상이 즉시 명령하여 인견(引見)하니, 선생은 잘못을 대어 사죄하면서 소를 올려 귀양 간 세 사람을 풀어 줄 것을 청하고 이어서 치사(致仕)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은 우계(牛溪)와 더불어 전후로 인견할 때마다 귀양 간 세 사람을 풀어 줄 것을 강력히 청하였고, 물러 나와 서로 이야기하기를, “그 세 사람이 비록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말 잘못한 죄로 외지고 험한 시골로 귀양까지 보내는 것은 뒷사람에게 보일 만한 것이 못되니, 이 일을 반복해서 아뢰어 임금의 뜻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때에 시속 무리들이 대각(臺閣)에 늘어서 있으면서 의심을 품고 눈치만 슬슬 보면서 같이 일할 의사가 없었다. 그러자 선생은 탄식하여 말하기를, “시속 무리들 중에도 마음이 공정한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보면 시간이 흐른 뒤에는 마땅히 나의 진실한 마음을 알 것이며, 함께 일을 할 것이다.” 하였다.
갑신년(1584, 선조17) 1월 3일에 병이 났는데, 14일에 서익(徐益)이 순무사(巡撫使)의 명령을 받아 함경도로 갈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병든 몸을 추스려 방략(方略) 여섯 조목을 입으로 불러 아우 이우(李瑀)에게 받아쓰게 해서 서익한테 주었다. 이때부터 병이 더욱 심해져서 그 이튿날 졸(卒)하니, 나이 49세였다. 병이 났을 적에 상이 의원을 보내어 문병을 하고 약을 내렸는데 부고를 받고는 상이 슬피 통곡하고는, “소식(素食)을 올리고 3일간 조회를 열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러고는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상하고 제사를 지내어 주었는데, 그 제문(祭文)에 이르기를, “나라 위해 온 힘을 다한 뒤에야 그만두었으니 경(卿)이야 무엇이 슬플 것이 있겠는가만 큰물 가운데서 노를 잃었으니 나는 못내 슬퍼하노라.” 하였다. 또 연로(沿路)의 고을에 명령하여, 그 집안 식구들을 호송(護送)해 주도록 하였다. 이해 3월 모일(某日) 파주(坡州) 두문리(斗文里) 자운산(紫雲山) 모좌모향(某坐某向)의 땅에다 장사 지냈으니, 그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다.
선생의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노씨(盧氏)인데, 곡산(谷山)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노중례(盧重禮)의 현손(玄孫)이다. 그 아버지 노경린(盧慶麟)은 종부시 정(宗簿寺正)이요,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선공감 정(繕工監正) 김한로(金漢老)의 딸이다. 부인은 가정(嘉靖) 신축년(1541, 중종36)에 나서 정사년(1557, 명종12)에 선생에게 시집왔다. 어질고 순하며 인자하고 온화하여 군자의 배필로서 어긋남이 없었고, 서모(庶母) 섬기기를 친어머니 섬기듯이 하였고, 손위 동서 곽씨(郭氏)를 받드는데 성의를 다하였으며, 첩(妾)들을 은혜로 대우하되 자매처럼 여겼고, 첩의 아들을 어루만지기를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여겨 스스로 안아서 길러 주었다. 비록 천한 여종에게라도 한 번도 성내어 꾸짖은 적이 없었으니, 대개 그 성품이 화순(和順)해서였다.
갑신년(1584, 선조17) 봄에 선생의 궤연(几筵 영좌(靈座))을 모시고 해주(海州)로 내려가서 아침ㆍ저녁 상식(上食)을 드리되, 반드시 두 첩(妾)과 더불어 친히 깨끗이 장만하였고, 삼년상을 지낸 뒤에도 초하루ㆍ보름이 되면 반드시 곡(哭)하면서 제수를 올렸다. 지성스런 마음으로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서자(庶子)를 어루만지고 아껴서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전부 주관하게 하고 자기는 간여하지 않았다. 조카들을 돌봐 주기를 자기 자식보다 더하였는데 종손 집 조카에게 더욱 더하였다.
파주(坡州)에 있는 토지에서 추수하는 곡식은 모두 제사 지내는 비용으로 삼아, 일가친척을 대우하고 이웃 사람을 대접하는 것을 선생이 계실 때 하던 대로 똑같이 하니, 사람들이 보고 배운 데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 여겼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적(賊)들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문을 듣고 자식과 조카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본래 병이 있는 사람이라 말을 탈 수 없고, 또 이 왜적들이 온 나라에 꽉 들어찼으니 반드시 살기를 도모할 곳이 없을 것이다. 타향으로 전전하다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파산(坡山) 산소 옆에 가서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는 뜻을 결정하였으니, 너희들은 내 걱정은 말고 왜적을 잘 피해 있다가 이다음에 난리가 평정되거든 내 뼈를 산소 옆에 잘 묻어다오.” 하였다. 자식과 조카가 대답하기를,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자, 부인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그리 어렵게 생각하느냐. 내가 하늘로 섬기던 분을 잃어버린 지가 벌써 8년이나 되었으니, 내 목숨도 모질지 않느냐. 더욱이 큰 난리를 만났는데 산소 옆에서 죽지 않고 구차스럽게 살려고 하는 건 무슨 의리냐. 내 뜻이 결정되었으니 다시 더 말하지 말아라.” 하였다.
4월 그믐날 임금의 수레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자, 곧 신주(神主)를 모시고 파주(坡州) 산소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적군이 몰려오는데도 처음 뜻을 그대로 지키고 산소 옆을 떠나지 않다가 마침내 5월 12일에 적군을 만나 굴하지 않다가 마침내 살해를 당하였다. 그 이듬해 임금이 조정으로 돌아와서 명령하여 정려문(旌閭門)을 세워 주었다.
부인은 딸 하나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첩(妾)에게 아들 둘이 있었으니 이경림(李景臨)과 이경정(李景鼎)이요, 딸 하나는 진사(進士) 김집(金集)의 첩(妾)이 되었다. 이경림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이제(李穧)와 이거(李秬)와 이추(李秋)와 이칭(李稱)과 아무개[某]요, 딸 하나는 아직 어리다. 이경정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염(李稔)과 아무개[某]요, 딸 하나는 아직 어리다. 김집의 첩은 자녀가 넷인데 모두 아직 어리다.
선생은 천품(天稟)이 지극히 높아서 충후(忠厚)하고 화락하고 공경스러웠다[愷悌]. 용모가 빼어나고, 신채(神彩)가 사람을 경동(驚動)시켰으며, 말에는 핵심이 있고[有物], 행동에는 한결같음이 있었다. 너그러우면서도 절제가 있고, 온화하면서도 절도가 있으며, 기쁘거나 서운한 기색이 얼굴에 나타나지 않고 화가 났어도 꾸짖는 소리를 입에서 내지 않았다. 걸음걸이는 반드시 자세히 살폈으며,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어서 누구든지 한 번만 보면 도학군자인 줄 바로 알 수 있었다.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는 마음을 가다듬고 성품을 기르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 한결같이 고요[靜]한 것을 주로 하여 드디어 잠깐 선학(禪學)에 물들기도 했지만 하루아침에 완전히 깨닫고서 사악한 것을 버리고 바른 데로 돌아와 순수하게 되었다.
천인(天人), 성명(性命)의 미묘(微妙)한 것과,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道)를 끝까지 연구하여 찾아내지 않은 것이 없어서, 큰 원칙을 환하게 알았고, 몸과 마음으로 체득(體得)하고 실천에 옮겨서 부산한 가운데서도 스스로 단속하기를 더욱 엄하게 하고, 옥루(屋漏)에서도 홀로일 때를 삼가니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식견(識見)이 정밀하고 조예가 깊었으며, 착실하게 실천에 옮기면서도 늘 부족하게 생각하였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오직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비록 세상 사는 재미에 있어서는 일체(一切) 담박하게 지냈지만 남을 상대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조리를 자세히 따져서 한 치의 잘못도 남기지 않았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사당(祠堂)에 나아가 분향(焚香)하고 절한 뒤에, 서실(書室)로 물러 나와서 경전(經傳)을 두루 읽었는데 《주자대전(朱子大全)》을 특히 좋아하였다. 예전부터 위장병이 있어서 소리 내어 글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만약 이치가 마음에 와 닿는 대목이 있으면 문득 좋아서 소리를 내어 읽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반드시 하는 일이 있어서, 어떤 때는 글을 읽어 그 뜻을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친구들과 강론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일을 처리하기도 하여, 병이 있을 때가 아니면 한 번도 자리에 누운 적이 없었다. 도리(道理)를 강론하는 데는 정밀하고 투철해서, 예전 선비가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밝힌 것이 많았는데, 그 큰 것을 추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운봉 호씨(雲峯胡氏)가 말하기를, “성(性)이 발(發)하여 정(情)이 되니 그 처음에는 착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마음이 발하여 의(意)가 되면서는, 곧 착하고 착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하였고, 퇴계(退溪) 선생이 말하기를,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따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하여 이(理)가 탄다.[乘]” 하여, 호씨(胡氏)는 정(情)과 의(意)의 두 갈래[二岐]로 보고, 퇴계(退溪)는 이(理)와 기(氣)가 서로 발하는 것이라 하였다. 선생은 이에 대해 변론하기를, “마음의 본체(本體)는 성(性)이요, 마음의 작용이 바로 정(情)이니, 성(性) 밖에 다시 다른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마음의 움직임이 정(情)이니, 정은 외물(外物)에 감촉되어 피어나는 것이요, 의(意)는 정(情)에 이끌려 이리저리 계교(計較)하는 것이다. 정이 아니면 의가 인연할 데가 없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또 말하기를, ‘의(意)가 정(情)이 있는 것을 인연한 뒤에 작용한다.’ 한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은 것을 그대로 응용하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마음이 감동하여 그대로 통(通)하는 것을 정(情)이라 하고, 마음이 감동되어 이리저리 생각해 보는 것을 의(意)라 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마음과 성품에 과연 두 가지 작용이 있고, 정(情)과 의(意)에 과연 두 갈래가 있겠는가. 오성(五性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 밖에 다른 성(性)이 없고, 칠정(七情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 밖에 다른 정(情)이 없으니, 맹자(孟子)가 칠정 가운데서 그 선한 정(情)을 뽑아내어 사단이라 지목한 것이요, 칠정 밖에 따로 사단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정(情)의 선하고 악한 것이 어느 것인들 성(性)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마는, 그 악한 것이 본래 악한 것이 아니다. 단지 형기(形氣)에 가려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선하고 악한 것이 모두 천리(天理)이다.’ 하였고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천리(天理)를 인연하여 인욕(人欲)이 있다.’ 한 것이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과연 두 가지 정(情)이 되고, 이(理)와 기(氣)는 과연 서로 발한다 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마음과 성품을 두 가지 작용이라 하고 사단과 칠정을 두 가지 정(情)이라 하는 것은 모두 이와 기를 투철히 알지 못해서이다. 대개 정(情)이 발할 때에, 발하는 것은 기요, 발하게 하는 것은 이인데,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하게 할 것이 없으니, 이와 기는 한데 엉겨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서로 떨어졌다 합했다 하는 것이 있다고 하면, 동(動)과 정(靜)이 끝이 있는 것이요, 음(陰)과 양(陽)이 시초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태극(太極)이요, 기는 음양(陰陽)이다. 지금 태극과 음양이 서로 움직인다고 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태극과 음양이 서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이치와 기운이 서로 발한다[理氣互發]는 것이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우계(牛溪)가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어떤 때는 서로 낳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근본이 된다.’고 한 말은 퇴계(退溪)의 의사와 부합되는 듯합니다. 사단ㆍ칠정과 인심(人心)ㆍ도심(道心)이란 것이 비록 그 말해 놓은 의미가 조금 다른 것은 있지만, 모두 성(性)과 정(情)의 작용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와 기가 서로 발한다는 말이 천하(天下)에 정해진 이치가 아니라면, 주자가 어째서 ‘낳기도 하고 근본이 되기는 한다.’는 설을 주장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감동하는 것이 진실로 형기(形氣)이긴 하지만, 그 발하는 것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정당한 데서 바로 나오기 때문에 이(理)를 주로 하여 도심(道心)이라 지목하고, 그 근원이 천성(天性)에 근본한 것이긴 하지만 그 발하는 것이 귀ㆍ눈ㆍ사지(四肢)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기 때문에 인심(人心)이라 지목한 것이니, 인심과 도심은 단지 한 가지 마음인데 그 발하는 것을 따라 이름을 다르게 붙인 것입니다. 만약 이와 기가 서로 발한다 하면, 이것은 이와 기의 두 가지가 각각 마음 가운데 뿌리를 박고 있어서 발하기 전에 벌써 인심ㆍ도심의 싹이 생겼다가 이가 발하면 도심이 되고, 기가 발하면 인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두 가지 근본이 있는 것이니, 어찌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퇴계(退溪)는 사단(四端)은 마음속에서 발하는 것이고, 칠정(七情)은 외물(外物)에 감촉되어 발하는 것이라 하여, 이를 선입견(先入見)으로 삼고 주자(朱子)의 ‘이에서 발하고 기에서 발한다.’ 는 학설을 가지고 주장하여 더 부연한 것입니다. 대체로 마음은 반드시 감촉이 있어야 움직이는데, 감촉되는 것은 모두 외물(外物)입니다. 천하에 감촉되는 것이 없이 마음 가운데서 스스로 발하는 정(情)이 어디 있겠습니까. 감촉하는 것에는 정당한 것도 있고 간사한 것도 있으며, 움직이는 것에는 지나치는 것도 있고 미치지 못하는 것도 있어서 여기서 선(善)과 악(惡)의 판가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측은지심을 가지고 말한다면 어린아이가 우물로 빠지는 것을 본 뒤에 이 측은한 마음이 비로소 발하는 것입니다. 감촉시킨 것은 어린아이이니, 어린아이가 외물이 아니겠습니까. 어린아이가 우물로 빠지는 것을 보지 않고 저절로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마음에 병이 있는 사람이요, 정상적인 사람의 정(情)은 아닙니다. 주자의 말은 반드시 뜻을 둔 데가 있어서, ‘사단은 전적으로 이만 가지고 말한 것이요, 칠정은 기를 겸하여 말한 것이다.’라고 한 데 불과(不過)하니, 사단은 이가 먼저 발하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먼저 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칠정으로 말하자면 사단이 그 가운데 있어서 인심과 도심이 상대하여 이름 불리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이미 도심이라 하였다면 인심이 아니요, 이미 인심이라 하였다면 도심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둘로 갈라서 말할 수 있지만, 이렇게 사단이라 하는 것은 단지 칠정 가운데서 곧장 나온 것이니, 어떻게 사단이 칠정이 아니요 칠정이 사단이 아니라 하여 둘로 갈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전후(前後)로 주고받은 편지가 10여 차례나 되는데, 모두 두 선생(先生)의 문집(文集)에 실려 있다. 선생은 심(心)ㆍ성(性)ㆍ이(理)ㆍ기(氣)의 근원에 대해 끝까지 연구하여 투철하고 시원스러웠다. 그러므로 그 견식과 언론은 근세(近世)의 여러 선비들이 미칠 수 없는 바이다.
집안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마음에서 우러나와 어려서부터 온 집안이 한집에서 같이 살 생각을 하였는데, 집안 형편이 가난하여 부모 형제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자, 항상 이를 마음 아파했다. 맏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그 형님의 집이 회덕(懷德)에 있었는데, 집으로 맞아들여 그 아들ㆍ딸 들을 길러 주었으며, 가르쳐 성장시켜 제때에 장가들이고 시집보내면서 자기 집 종들까지도 나누어 주고, 재용(財用)과 관련한 일들을 큰집 조카가 맡아서 처리하게 하였고, 둘째 형님ㆍ막내아우와 모든 조카와 모든 생질들을 한집에 모아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잤다. 명절이나 좋은 날 술이나 음식이 생기면 아우에게 거문고를 타게 하고 젊은이ㆍ늙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불러 화답하게 하여, 한껏 즐긴 뒤에 자리를 파하였다. 제사 지내는 모든 일은 한결같이 주자의 예[家禮]에 따라 하였고, 초하루ㆍ보름날 사당(祠堂)에 참배한 뒤에는 안팎 친족들을 안방에 모여 앉히되, 선생은 동쪽에 앉고 서모(庶母)와 형수 곽씨(郭氏)와 그 부인은 서쪽에 앉아서, 아들ㆍ조카ㆍ며느리ㆍ딸 들의 절을 받았다. 또 아들과 아우로 하여금 선생이 지은 《동거계사(同居戒辭)》를 읽게 하여 경계하도록 하였다. 계집종과 사내종들도 뜰아래에 남자와 여자로 갈라 서서 차례대로 인사를 하게 하고, 또 《동거계사》를 우리말로 풀어서 정성껏 가르쳐 일상의 규칙으로 삼도록 하였다.
그 당시 국법으로 소의 도살을 엄금하여 국법을 범하는 사람은 변방으로 내쫓는 경우도 있었다. 선생은 나라에서 금하는 것은 범해서는 안 된다 하고 이때부터는 쇠고기를 제사에 쓰지도 아니하고 먹지도 않았다. 누가 선물을 가지고 오면 반드시 가려서 받았고, 하찮은 것이라도 모두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서모를 정성껏 섬겨서 결국에는 그 서모의 사나운 성격마저 고치게 되었고, 종을 부리는 데는 먼저 은혜로써 하고 뒤에 위엄으로 하여 가정에서 엄숙하고 화목한 것이 조정(朝廷)에서와 같았다. 평소 여색(女色)을 멀리 하였는데, 한번은 그 누님을 뵈러 가는데, 황주(黃州)에 이르러 유명한 기생이 선생의 방에 들어오자 바로 불을 켜서 거절하였으니, 그 조화를 이루면서도 휩쓸리지 않는 것이 이러하였다.
선생은 산수를 아주 좋아하여 모든 이름 난 명승지(名勝地)에는 가 보지 않은 데가 없었는데, 해주(海州)의 잠양동(濳陽洞)ㆍ장선동(藏仙洞)ㆍ승선암(乘仙巖)ㆍ한암동(寒巖洞)ㆍ호연정(浩然亭) 같은 곳은 노닐고 읊조리던 곳으로, 항상 배우는 사람 5, 6명과 더불어 흥이 나면 찾아가 물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해가 지도록 돌아올 줄 몰랐다. 어떤 때는 술을 가지고 갔으나, 아주 취하지는 아니하였고 조금 취하면 문득 노래도 하고 시(詩)도 읊으며 스스로 즐겼다.
옛집이 파주(坡州) 율곡촌(栗谷村)에 있었기 때문에 옛터에 화석정(花石亭)을 지어 놓고 스스로 율곡(栗谷)이라 호(號)를 지었다. 그 뒤에 수양산(首陽山) 서쪽으로 이사 갔는데, 시내와 산이 수려하고 바위와 돌이 기괴하며, 물이 아홉 굽이로 감돌았으며 높은 데는 절벽이 병풍같이 서 있었고, 낮은 데는 흐르는 물이 못을 이루어 마치 무이산(武夷山) 구곡(九曲)의 모양 같았다. 선생이 지팡이를 짚고 노닐다가 제오곡(第五曲)에 이르러서, 이곳에 살 만하다 하고는 그곳을 은병(隱屛)이라 이름하고 정사(精舍)를 지었다. 또 사당을 지어서, 주자의 신주(神主)를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정암(靜菴)과 퇴계(退溪)를 배향(配享)하였다. 봄가을에 제사 지내기를 예의(禮儀)대로 하였고, 가끔 여러 선비를 거느리고 그 사당 뜰에 나가 참배하고 사당 문밖에 나와 서로 향하여 읍(揖)하며, 초하루ㆍ보름에는 관복(官服)을 입고 중문(中門)을 열어 놓고서 향을 피우고 배례하고 물러 나왔는데, 이곳이 바로 석담서원(石潭書院)이란 곳이다.
그가 조정에 있을 때에는 임금을 인도하여 도(道)로 나아가게 하였는데, 반드시 당우(唐虞)와 삼대(三代)를 목표로 삼고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학문을 권하여 책을 펴놓고 설명하였는데, 뜻을 밝혀낸 것이 많았다. 매양 원대(遠大)하게 뜻을 세워 규모를 정하고, 공도(公道)를 넓혀서 그 기강(紀綱)을 세우고, 널리 어진 사람을 불러서 조정에 벼슬을 시키고, 낡은 법을 고쳐서 백성의 고통을 깨끗이 없앨 것을 청하였으며, 상소로 진달하는 내용은 모두 당시 정치의 급선무(急先務)를 정성껏 간절하게 아뢴 것이었다. 혹시 임금의 하는 일이 정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정색(正色)하고 바른말을 하여 임금의 마음을 돌리려 하였으며, 아무리 우레 같은 위엄으로 압박하여도 정당한 것을 지키고 굴하지 않았다. 임금도 마음을 비우고 귀 기울여 듣고 감탄하고 칭찬하는 일이 많았다. 어떤 때는 해가 기운 뒤에야 연석(筵席)에서 물러 나온 적도 있었다. 김응남(金應南)이 한번은 경연(經筵)에서 나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다시 삼대(三代)의 도유(都兪)하는 훌륭한 일을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였다.
한번은 경연에서, “미리 군대 10만 명을 양성하여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 대비하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10년이 못 되어 흙이 무너지듯 하는 화(禍)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정승 유성룡(柳成龍)은 일이 없이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화를 키우는 것이라 하였다. 당시 난리가 없은 지가 오래되어 안일한 것에 젖어 경연에 있던 신하들이 모두 선생의 말을 잘못되었다고 여겼다. 선생이 나와서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달걀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태로운데, 시속 선비는 시무(時務)를 아뢰지를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진실로 기대할 것이 없지만 그대 또한 이런 말을 하십니까? ”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난 뒤에 유 정승이 조정에서 누구에게 말하기를, “지금 와서 보면 이 문성(李文成 문성은 선생의 시호)이야말로 참 성인이다. 만약 그 말대로 하였으면 나랏일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왔겠는가. 또 그가 전후(前後)로 계획한 것을 어떤 사람은 잘못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모두 정확히 들어맞아서 참으로 따라갈 수 없으니, 율곡(栗谷)이 만약 살아 있다면 반드시 오늘날을 타개할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백 년을 기다리지 않고도 안다[不待百年而知]는 것이다.
일찍이 조정이 화합하지 못하면 정치를 할 수 없다고 여겨 동인과 서인이 서로 대립한 뒤로부터 반드시 동서를 타파하고 양편을 융화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심의겸과 김효원을 모두 외관(外官)으로 내보내어 진정시킬 계획을 하였으며, 서인이 김효원을 지나치게 치죄하려 하자 힘껏 말리고, 심의겸을 논핵하여 파면시키려 할 때, 동인의 말이 너무 심하여 선비들까지 모두 배척하려 하자 제재하여 누르고 함께 논쟁하였으니, 선생의 뜻은 다만 선비들을 조화시켜서 같이 나랏일을 하자는 것뿐이요, 실제로 어디에도 치우친 데가 없었다. 그러나 시비가 서로 부딪쳐 다투어 선생을 나무랐으니, 선생의 도(道)가 시대와 어긋나서 나아가기는 어렵고 물러가려고만 하였다. 그러나 다만 나라에 일이 많아 새로 중국에서 온 조사(詔使)를 맞이하였고, 또 호인(胡人)의 변을 만나서 물러갈 틈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런데도 감정을 가지고 있는 무리들이 속으로 질투하다가 감히 드러내 놓고 공격하여 그 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기도 했다. 다행히 공론(公論)이 없어지지 않아 시비가 자연히 판가름이 났으니 선생에게야 무슨 이롭고 해로운 것이 있겠는가.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그 사람의 귀천을 묻지 않고 오는 사람은 받았으며, 슬기롭고 어리석은 것을 따지지 않고 각각 그 재주에 맞게 가르쳤다. 배우는 이로 하여금 먼저 《소학(小學)》을 읽고, 다음에 사서(四書)를 읽고, 《근사록(近思錄)》ㆍ《심경(心經)》을 읽게 하여 반드시 뜻 세우는 것을 먼저 하여 성현(聖賢)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게 하였고, 실천하는 것을 힘써서 효제(孝悌)의 정성을 다하게 하여, 경(敬)으로 도(道)에 들어가는 요체를 삼고, 성(誠)으로 성학(聖學)의 근본을 삼아, 차례차례로 잘 인도하여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서삼경(四書三經)에 구결과 언해가 정밀하지 못하여 본뜻에 위배될까 염려하여 다시 고친 것이 많았고, 소주(小註)의 여러 설(說)을 놓고도 취사선택한 것이 많았다. 《소학》 책에 예전 주(註)가 잘못되고 자세한 정도에 차이가 나는 것을 걱정하여, 정밀하고 중요한 것을 가리고 번다하고 분명치 않은 것은 삭제하고, 미비한 데가 있으면 자기의 뜻으로 보충하여, 《집주(集註)》라고 이름 붙였다.
또 처음으로 배우는 사람이 향방(向方)을 모르고 또 굳은 의지도 없이 그저 도움이 되겠거니 하면 아무 도움이 없을까 걱정하여, 《격몽요결(擊蒙要訣)》이란 책을 지어 마음을 세우고 몸을 단속하며, 어버이를 받들고 남을 접촉하는 도리를 알게 하였다. 또 학규(學規)를 만들어서 베풀어 단단히 단속하여 깨우쳐 주었다.
일찍이 배우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도(道)는 높고 먼 데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사람이 꼭 해야 하는 일상적인 일 사이에 있는 것이다. 일에 따라 각각 마땅함을 얻으면 된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답답하고 식견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글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여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밝게 한 뒤에야 조예가 바르게 되고, 실천이 중도를 얻게 된다.” 하였다. 배우는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먼 곳에서도 가까운 곳에서도 모두 모여들어 서당(書堂)이 꽉 차서 나중 오는 사람은 들어설 데가 없었다. 또 해주(海州) 야두촌(野頭村)에다 사창(社倉)을 설치하였는데, 한편으로는 덕업(德業)를 권장하고, 한편으로는 환난(患難)을 구제하였다.
선생은 남의 잘하는 것을 들으면 한 번도 숨긴 적이 없었고, 남의 잘못을 들추어 내려 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우할 때 마음을 열어 놓고 정성을 보여서 숨겨 두는 것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남을 너무 쉽사리 허용(許容)한다고 비평하자, 선생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 사람이 먼저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왔는데, 내가 어떻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대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졸(卒)한 뒤에 사대부(士大夫)들은 조정(朝廷)에서 조상하고 처사(處士)들은 집에서 조상하여 깊은 촌구석에 있는 늙은이들까지도 또한 모두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 “백성들이 복(福)이 없다.”고 말하였다. 태학생(太學生)ㆍ삼의사(三醫司)와 각사(各司)의 서리(胥吏)들까지도 모두 와서 울면서 제사 지냈으며, 발인(發引)할 때에는 금군(禁軍)과 장사꾼들까지도 길 좌우(左右)에서 횃불을 들고 통곡하면서 장송(葬送)하였다.
아, 우리나라는 기자(箕子) 때부터 인의(仁義)ㆍ충신(忠信)ㆍ예악(禮樂)ㆍ의관(衣冠)들로 중국으로부터 군자(君子)의 나라라는 칭찬을 받아 왔는데, 성리(性理)를 연구한 선비는 잠잠하여 드러난 사람이 없다가, 고려 말엽(末葉)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부르짖어 이름 난 선비가 계속해 나와서, 조선조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나 학문의 조예가 고명(高明)하고 재주가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으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데 의리(義理)에 맞게 한 분으로는 문정공 조광조(趙光祖)와 선생이 있다. 기묘년(1519, 중종14)의 일에 있어서는 기가 막히는 일이니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선생은 도(道)를 밝히는 것을 당신의 책임이라 여기고 시국을 바로잡는 것으로 당신의 근심이라 여겨, 시골에 가 있더라도 한 번도 임금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고, 여러 차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나와서 훌륭한 능력을 감춰 두지 않았으나, 모두 시행하지 못한 공허한 말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절실한 말인들 무슨 도움이 있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선생의 학문을 논의한 취지가 저술해 놓은 여러 책에 뚜렷하게 실려 있고, 전후(前後) 상소에 건의하여 아뢴 정책(政策)이 모두 문집(文集) 가운데 있으니, 뜻있는 선비가 진실로 그 말을 통해 그 마음을 찾아보고 그 정책을 실행하여, 자기 몸에 체득하여 국정에 실행한다면 선생의 도(道)가 당세에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만세(萬世)를 위하여 태평(太平) 시대를 열어 줄 것이니, 그 공이 원대하다 하겠다. 하늘이 세상에 대현(大賢)을 내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주D-001]장공예(張公藝) : 당(唐)나라 수장(壽張)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9대가 한집에 동거하여 우애가 돈독하다고 알려졌다. 고종(高宗)이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집을 방문하고 9대가 동거하는 비결을 묻자, 인(忍) 자 100여 개를 써 올리니, 고종이 크게 칭찬하였다 한다. 《舊唐書 卷188 孝友列傳》
[주D-002]주일무적(主一無適) : 한 가지 일에 정신을 집중해 잡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경(敬) 공부라고 하는데, 정주학(程朱學)에서는 이를 학문의 기본으로 삼았다.
[주D-003]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년(선조1)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성학(聖學)의 개요를 그림으로 설명하여 선조에게 올린 것이다. 십도(十圖)는 첫째는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가감한 〈태극도(太極圖)〉, 두 번째는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근거한 〈서명도(西銘圖)〉, 세 번째는 주자(朱子)의 《소학(小學)》을 체계화한 〈소학도(小學圖)〉, 네 번째는 《대학(大學)》을 체계화한 〈대학도(大學圖)〉, 다섯 번째는 주자의 〈백록동서원 동규(白鹿洞書院洞規)〉를 근거한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여섯 번째는 임은(林隱) 정복심(程復心)의 것을 수정한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일곱 번째는 인(仁)을 설명한 〈인설도(仁說圖)〉, 여덟 번째는 정복심의 것을 수정한 〈심학도(心學圖)〉, 아홉 번째는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을 근거한 〈경재잠도(敬齋箴圖)〉, 열 번째는 남당(南塘)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근거한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이 중에 〈심통성정도〉와 〈심학도〉에 대하여 이견(異見)을 제시하였다.
[주D-004]논사(論思)의 책임 : 학문을 강론하고 사리를 논변하는 책임을 말한다. 경연(經筵)에서 경서의 강론을 맡은 관원으로서의 책임을 말한다.
[주D-005]잡패(雜霸) : 정치에 정도(正道)만을 쓰지 않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혼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한서(漢書)》 〈원제기(元帝紀)〉에 “태자인 원제가 유신(儒臣)을 등용할 것을 청하자, 선제(宣帝)는 ‘우리 나라는 본래부터 패도와 왕도를 섞어 썼으니, 어찌 순전히 덕교(德敎)만을 써서 옛날 주(周)나라 정사와 같게 하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주D-006]위훈(僞勳) : 거짓 공신이란 뜻으로, 을사년(1545)에 인종(仁宗)이 승하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등에 업은 윤원형(尹元衡) 등이 인종의 외숙인 윤임(尹任)과 그와 가까운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모함하여 사화(士禍)를 일으키고, 이에 가담한 정순붕(鄭順朋), 이기(李芑), 임백령(林百齡), 허자(許磁) 등 29명을 추성위사협찬홍제보익 공신(推誠衛社協贊弘濟保翼功臣)으로 녹훈(錄勳)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들은 뒤에 관직과 녹권(錄券)을 모두 삭탈당하였다.
[주D-007]을사년과 …… 죄 : 을사년(1545, 명종1)에 발생한 을사사화(乙巳士禍)와 기유년(1549, 명종4)에 이약빙(李若氷)의 아들 이홍남(李洪男)이 그의 아우 이홍윤(李洪胤)을 모함하여 일으킨 옥사(獄事)에 연루된 자들을 가리킨다. 이홍윤은 윤임(尹任)의 사위로 충주(忠州)에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의하여 윤임 등이 처형되고 부친 역시 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 사건에 연루되어 죽자, 불평하는 말을 자주 하였다. 이에 동생과 사이가 나쁜 이홍남이 고발하자, 이기(李芑) 등은 이홍윤이 윤임의 사위라는 이유로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이 사건을 확대하여 충주의 한 면민(面民)이 거의 다 연루되어 억울하게 처형되고, 충주는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되기까지 하였다.
[주D-008]기묘년(己卯年)의 풍습 : 기묘년(1519, 중종14) 연간에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급속한 개혁을 주장하다가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 훈구파(勳舊派)들에게 모함당하여 실패한 일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의 명현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고,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 칭한다.
[주D-009]연은전(延恩殿) : 경복궁 안에 있는 덕종(德宗)의 위패 봉안소이다. 1471년(성종2)에 성종은 그의 생부인 덕종을 추존하여 문소전(文昭殿)에 모시려 하였으나, 원래 문소전은 태조와 그 이하 4대만을 봉안하는 사당이었으므로, 덕종을 봉안하면 예종이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연은전을 따로 건립하였는데, 그 후 인종이 승하하자, 1547년(명종2)에 다시 인종의 향사 문제가 대두되어 논란을 거듭한 끝에 결국 연은전에 모시게 하였다가, 1569년(선조2) 문소전에 후전(後殿) 1칸을 짓고 인종의 위패를 옮겨 봉안하였다.
[주D-010]문소전(文昭殿) : 원래는 이 태조(李太祖)의 비(妃)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를 모셔 인소전(仁昭殿)이라 했던 것을, 1408년(태종8) 문소전으로 개칭하였는데, 1433년(세종15)에 태조와 태종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후 다시 세종 이하 세 명의 왕을 모시게 되었다.
[주D-011]관저(關雎)와 인지(麟趾)의 뜻 : 모두 《시경(詩經)》 〈주남(周南)〉의 편명인데, 〈관저〉는 후비(后妃)의 덕을 읊은 것으로 부부간에 화합하여 가정이 원만함을 표현하였고, 〈인지〉는 어진 공자(公子)를 찬양한 것으로 모두 왕자(王者)의 덕화(德化)를 상징한다. 《시경》 〈주남〉의 〈인지〉 서(序)에, “인지의 교화는 관저의 효응(效應)이다. 관저의 교화가 행해지면 천하에 비례(非禮)를 범하는 자가 없어, 비록 쇠퇴한 세상의 공자일지라도 인지의 시에서 읊은 것처럼 믿음직하고 후덕해지게 된다.” 하였다.
[주D-012]진 도공(晉悼公) :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군주로 양공(襄公) 환(歡)의 증손이며, 문공(文公) 중이(重耳)의 현손(玄孫)인데, 이름은 주(周)이다. 여공(厲公)을 시해한 권신(權臣) 난서(欒書) 등의 추대로 옹립되었는데, 시역에 가담한 역신(逆臣) 7명을 축출하고 군권(君權)을 장악하였으며,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여 강대국인 초(楚)나라를 물리치고 다시 제후국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주D-013]송 신종(宋神宗) : 북송(北宋)의 6대 황제로, 이름은 조욱(趙頊)이다. 영종(英宗)의 태자로 1067년 즉위한 다음,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신법(新法)을 시행하여 새로운 정치를 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신법에 반대하는 사마광(司馬光) 등의 원로들을 물리치고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송나라는 결국 쇠퇴하고 말았다.
[주D-014]한 …… 편다는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맹자께서, “한 자를 굽혀서 한 길을 편다는 것은 이(利)로써 말한 것이니, 만약 이로써 한다면 한 길을 굽혀서 한 자를 펴더라도 그것이 이롭다 하겠는가.”라고 한 구절이 있다. 한 번 지조를 굽혀 훌륭한 공업을 이루는 것을 비유한 말인데, 맹자께서는, “자기 몸을 굽히고 남을 바르게 하는 법은 없다.” 하여, 이를 비판하였다.
[주D-015]가의(賈誼) : 서한(西漢) 때 낙양(洛陽) 사람으로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였다. 20세에 문제(文帝)에게 발탁되어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승진되었다. 정삭(正朔)과 복색(服色)을 고치고 법률을 제정하며 예악(禮樂)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주발(周勃) 등 당시 고관들의 시기로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좌천되었다. 4년 뒤 복귀하여 문제의 막내아들인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太傅)가 되었으나 왕이 낙마하여 급서하자 이를 애도한 나머지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주D-016]공안(貢案) : 공물(貢物)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한 문부(文簿)로, 공적(貢籍)이라고도 한다.
[주D-017]계옥(啓沃) : 신하가 자기의 생각을 충심으로 임금에게 진언하여 선도(善導)하는 것을 가리킨다. 은 고종(殷高宗)인 무정(武丁)이 명재상인 부열(傅說)에게, “네 마음을 열어서 내 마음에 쏟아 달라.[啓乃心 沃朕心]” 한 데서 유래하였다. 《書經 說命上》
[주D-018]궁리(窮理)를 …… 두었는데 : 궁리는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연구하는 것으로 지(知) 공부에 해당하며, 거경(居敬)은 몸과 마음을 공경히 갖는 것으로 주로 행(行) 공부에 해당한다. 그러나 경건한 마음의 자세가 없이는 지 공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궁리에도 거경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주자는, “거경은 공부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지 공부에도 필요하며, 공부의 종결이라 할 수 있는 행 공부에도 필요하다.” 하였다.
[주D-019]당 명황(唐明皇) : 당나라 6대 황제인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를 말한다. 당시 재상으로 있던 한휴(韓休)는 직간(直諫)을 좋아하여 현종의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반드시 간하였다. 좌우에 있는 신하들이, “한휴가 재상이 된 후로 폐하께서 전보다 크게 수척해지셨습니다. 어찌하여 그를 축출하지 않습니까?” 하자, 현종은 탄식하며, “내 용모는 비록 수척해졌으나 천하는 반드시 살찌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그 후 현종은 결국 간신 이임보(李林甫)를 등용하고 양 귀비(楊貴妃)에게 빠져 천하가 크게 혼란해졌으며,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숙종(肅宗)에게 선위(禪位)하고 말았다.
[주D-020]옥루(屋漏) : 방 안의 서북쪽 귀퉁이로 신주(神主)를 모셔 두는 곳이니, 곧 사람이 보지 않는 곳을 가리킨다. 《시경》 〈대아(大雅) 억(抑)〉에, “거의 옥루에 부끄럽지 않게 한다.[尙不愧于屋漏]” 하였는데, 이는 타인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경건함을 지켜 마음속에 부끄럽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주D-021]양 무제(梁武帝)가 …… 하더니 : 남북조(南北朝) 시대 양(梁)의 초대 황제인 고조(高祖) 소연(蕭衍)을 말한다. 549년 무제는 적신(賊臣) 후경(侯景)의 강압으로 유폐되어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 못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화병으로 정거전(淨居殿)에 누워 있으면서 입이 써서 꿀물을 찾았으나 끝내 얻어먹지 못하고 죽었다.
[주D-022]위(衛)나라 …… 것 : 주(周)나라의 폭군인 여왕(厲王)은 자신의 실정(失政)을 비방하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위나라의 무당을 데려다가 비방하는 자를 감독하는 책임자로 임명하고 실정을 비방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처형하게 하였다. 그 결과 주나라는 3년 만에 대혼란에 빠졌으며, 여왕은 쫓겨나고 말았다. 《國語 卷1 周語上》
[주D-023]주운(朱雲) : 한 성제(漢成帝) 때의 직간(直諫)하는 신하로, 당시 성제의 사부(師傅)로 있던 장우(張禹)가 간신들을 탄핵하지 않자, 괴리 영(槐里令)으로 있던 주운은 상서(上書)하여, “상방검(尙方劍)을 빌려 주시면 간신 한 사람의 목을 베겠습니다.” 하였다. 성제가 그를 불러, “간신이 누구인가.” 하고 묻자, 옆에 있는 장우를 가리켰다. 이 때문에 성제의 노여움을 사서 참형에 처해지게 되었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주D-024]급암(汲黯) : 한 무제(漢武帝) 때의 직간하는 신하로, 당시 승상(丞相)으로 있던 공손홍(公孫弘)의 위선(僞善)을 논박하였으며 무제의 잘못을 여러 번 극간(極諫)하였다.
[주D-025]송 효종(宋孝宗) : 남송(南宋)의 제2대 황제로 이름은 조신(趙愼)이다. 고종(高宗)의 양자가 되어 그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하였는데, 순희(淳煕) 14년(1187) 고종이 죽자, 백포건(白布巾)으로 삼년상을 마쳤다.
[주D-026]선군자(先君子) : 본 행장의 찬자(撰者)인 사계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金繼輝)를 가리킨다. 자(字)는 중회(重晦)이고 호는 황강(黃岡)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549년(명종4)에 문과에 급제하고 1555년(명종10)에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있다가 김홍도(金弘度)의 일파라 하여 쫓겨났으나 1563년(명종18)에 복직되었으며, 식견이 높고 박학하여 명망이 높았다.
[주D-027]역월(易月) : 상례(喪禮)를 빨리 끝내기 위하여 달수를 날수로 바꾸어 계산하여 상례를 치르던 제도를 말한다.
[주D-028]긍구긍당(肯構肯堂) : 긍당긍구(肯堂肯構)와 같은 말로, 부조(父祖)의 창업을 자손들이 잘 계승함을 가리킨다. 《서경(書經)》 〈대고(大誥)〉에 “비유하면 아버지가 집 짓는 법을 정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집터를 제대로 닦으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기꺼이 집을 지으려 하겠는가.”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D-029]후씨(侯氏) :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인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의 어머니이다.
[주D-030]주창(周昌) : 패현(沛縣) 사람으로 강직한 성격에 말을 몹시 더듬었다. 일찍이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따라 출전하여 군공을 세우고 분음후(汾陰侯)에 봉해졌다. 고조가 여후(呂后)의 소생인 태자 영(盈)을 폐위하고 척부인(戚夫人)의 소생인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태자로 세우려 하자, 말을 더듬거리면서도 그 부당함을 강력히 간하여 중지시켰다. 고조는 자기가 죽은 후 나이 어린 조왕 여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창을 조왕의 정승으로 삼았는데, 주창은 조왕에게 충성을 바쳤다. 고조가 죽고 태자 영이 즉위하여 혜제(惠帝)가 되었는데, 여후는 조왕을 살해하기 위하여 세 차례 소환하였으나, 주창은 그때마다 조왕에게 병을 칭탁하고 가지 못하게 하였다. 여후는 하는 수 없이 주창을 소환하여 장안(長安)에 오게 한 다음 다시 조왕을 소환하니, 조왕은 그대로 갔다가 결국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이에 주창 역시 병을 칭탁하고 조회하지 않다가 3년 만에 병사하였다. 《漢書 卷42 周昌傳》
[주D-031]취모멱자(吹毛覓疵) : 털을 불어가며 흠집을 찾아낸다는 뜻으로, 남의 과실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것을 말한다.
[주D-032]천승(千乘)의 나라 : 병거(兵車)가 천승인 제후국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병거의 대수를 국력으로 평가하였는데, 병거 1승(乘)에는 통상 군마(軍馬) 4필, 갑사(甲士) 3명, 보졸(步卒) 72명, 취사병(炊事兵) 25명이 배속되었다. 땅이 천 리인 천자국을 만승지국(萬乘之國), 땅이 백 리인 제후국을 천승지국(千乘之國)이라 칭하였다.
[주D-033]서반(西班) : 원래 문관(文官)인 동반(東班)과 대칭되는 말로 무관(武官)을 지칭하였으나, 여기서는 현직을 떠난 문무관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중추부(中樞府)의 관직을 가리킨 것이다.
[주D-034]장공예(張公藝)가 동거(同居)하던 일 : 장공예는 당(唐)나라 수장(壽張) 사람으로, 9대가 한집에 동거하여 우애가 돈독한 집안으로 알려졌다. 고종(高宗)이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집을 방문하고 9대가 동거하는 비결을 묻자, 인(忍) 자 100여 개를 써 올리니, 고종이 크게 칭찬하였다. 《舊唐書 卷188 孝友列傳》
[주D-035]효혜제(孝惠帝)가 …… 것 : 효혜제는 한 고조(漢高祖)의 적자인 유영(劉盈)을 가리키며, 제왕(齊王)은 서장남(庶長男)인 도혜왕(悼惠王) 유비(劉肥)를 가리킨다. 효혜제 즉위 2년에 제왕 유비가 입조(入朝)하자, 효혜제는 그와 더불어 술을 마셨는데, 군신 간의 예의를 쓰지 않고 가인(家人)의 예로 대하여 일반 집안의 예의를 썼다. 《史記 卷52 齊悼惠王世家》
[주D-036]효명제(孝明帝)가 …… 것 : 효명제는 후한(後漢)의 2대 황제인 유장(劉莊)을 가리킨다. 환영(桓榮)은 용항(龍亢) 사람으로 자(字)는 춘경(春卿)이며, 경학(經學)에 밝아 광무제(光武帝) 때에 당시 태자인 효명에게 오경(五經)을 가르쳤다. 효명제가 즉위한 다음 스승으로 예우하여 오경(五更)에 임명하고 태학(太學)에 행차하면 반드시 절하였다. 《後漢書 卷37 桓榮列傳》
[주D-037]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 : 인종(仁宗)의 비(妃)인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朴氏)를 말한다.
[주D-038]복왕(濮王)의 전례(典禮) : 복왕은 송 영종(宋英宗)의 생부(生父)인 복안의왕(濮安懿王) 조윤양(趙允讓)을 가리키며, 전례는 그의 추존과 관련된 예전(禮典)을 말한다. 영종이 인종(仁宗)의 양자로 즉위한 다음, 생부인 복왕을 추존할 것을 의논하자, 사마광(司馬光), 구양수(歐陽脩) 등이 “영종은 인종의 양자가 되었으니, 인종을 황고(皇考)라 칭하고, 복왕을 황백(皇伯)으로 칭해야 한다.” 하여, 추존할 것을 반대하였으나, 영종은 이를 따르지 않고 이에 반대한 자들을 많이 파직하거나 좌천시켰다. 이에 관한 내용은 《이천선생문집(伊川先生文集)》 권5에, 〈대팽사영상영종황제논복왕전례소(代彭思永上英宗皇帝論濮王典禮疏)〉라는 제목으로 보인다.
[주D-039]영소릉(永昭陵) : 하남성(河南省) 공현(鞏縣)에 있는 송 인종(宋仁宗)의 능(陵)이다. 이에 관한 내용은 《이천선생문집》 권5에, 〈대부필상신종황제논영소릉소(代富弼上神宗皇帝論永昭陵疏)〉라는 제목으로 보인다.
[주D-040]응조소(應詔疏) : 신종(神宗)의 조명(詔命)에 응하여 올린 상소로, 《이천선생문집》 권5에, 〈대여공저응조상신종황제서(代呂公著應詔上神宗皇帝書)〉라는 제목으로 보인다.
[주D-041]공보(公輔) : 삼공(三公)과 사보(四輔)로 임금을 보필하는 직임을 말한다.
[주D-042]우리나라 …… 잘못되어 : 명(明)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 왕조의 시조인 태조(太祖)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고려의 네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기록된 사실을 가리킨다.
[주D-043]삼장장원(三場壯元) : 과거(科擧) 볼 때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에 거듭 장원으로 합격하는 것을 말한다.
[주D-044]정자(程子)의 사잠(四箴) :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지은 〈시잠(視箴)〉, 〈청잠(聽箴)〉, 〈언잠(言箴)〉, 〈동잠(動箴)〉을 가리킨다.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공자는 인(仁)을 묻는 안연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말하고, 그 조목으로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고 하였는데, 정주학(程朱學)에서는 이것을 사물(四勿)이라 하여 학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으로 삼았으며, 이천은 이에 근거하여 〈사잠〉을 지었다. 일명 〈사물잠(四勿箴)〉이라고도 한다.
[주D-045]사절(四節) : 설날ㆍ단오ㆍ추석ㆍ동지를 말한다.
[주D-046]전사(戰士)들이 …… 일 : 1555년(명종10)에 있었던 을묘왜변(乙卯倭變) 때에 출정하는 군사들이 타인의 말을 약탈하여 의복과 식량을 싣고 간 사건을 가리킨다.
[주D-047]세 사람 : 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宋應漑)ㆍ허봉(許篈)을 가리킨다.
[주D-048]운봉 호씨(雲峯胡氏) : 원(元)나라의 성리학자 호병문(胡炳文)을 가리킨다. 자(字)는 중호(仲虎)이며 주자학에 정통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역본의통석(易本義通釋)》, 《서집전(書集傳)》, 《춘추집해(春秋集解)》, 《예서찬술(禮書纂述)》, 《사서통(四書通)》 등의 저서를 남겼다. 《元史 卷189 胡炳文列傳》 《宋元學案 卷89》
[주D-049]동(動)과 …… 것이다 : 정이천(程伊川)은 음양동정(陰陽動靜)을 논하면서 “동(動)과 정(靜)은 실마리가 없고 음(陰)과 양(陽)은 시초가 없다.[動靜無端 陰陽無始]” 하였는데, 만일 호병문과 퇴계의 학설을 따른다면 그와 정반대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주D-050]어떤 …… 된다 : 주자는 《중용장구(中庸章句)》 서문에서 인심, 도심을 설명하면서 “어떤 것은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고, 어떤 것은 성명의 바름에서 근원하기도 한다.[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하여, 인심은 형기가 있은 뒤에 생겨나고 도심은 고유한 성명에 근원한다고 보았다.
[주D-051]무이산(武夷山) 구곡(九曲) : 무이산은 중국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 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구곡은 무이산을 감돌고 흐르는 구곡계(九曲溪)인데, 절경이 아름다운 승진동(升眞洞), 옥녀봉(玉女峯), 선기암(仙機巖), 금계암(金鷄巖), 철적정(鐵笛亭), 선장봉(仙掌峯), 석당사(石唐寺), 고루암(鼓樓巖), 신촌시(新村市) 등을 말한다. 주자는 일찍이 시인 신기질(辛棄疾)과 함께 이곳에서 뱃놀이하면서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를 읊었는데, 율곡 역시 해주(海州)의 석담(石潭)을 무이 구곡에 비유하여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어 읊었다.
[주D-052]도유(都兪) : 도(都)와 유(兪)는 모두 감탄사인데, 《서경》에 요순과 삼대의 성군들이 신하와 더불어 정사를 논한 기록 가운데 이러한 감탄사가 자주 보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53]삼의사(三醫司) : 의료를 맡은 세 관사로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