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율곡 이이

고선 구곡담기

아베베1 2014. 9. 1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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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록(稀年錄)

 

고산구곡담기(高山九曲潭記)

 


나는 율곡 공(栗谷公 이이(李珥))과 약관(弱冠)의 나이 때부터 벗으로 지냈다. 공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미 대유(大儒)라는 호칭을 받으면서 조정에 높이 등용되었는데, 불행하게도 대업(大業)을 완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지금 벌써 25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나는 공과는 정반대로 세상에 쓸모없는 하나의 물건이 되어서 이렇게까지 늙도록 죽지 않고 살아 있다.
그럴 즈음에 마침 공의 자제인 경림생(景臨生)을 서경(西京)에서 만나, 그동안의 세상일을 뒤돌아보노라니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눈물이 앞서는 것을 또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가 나에게 공이 예전에 살던 해주(海州) 고산(高山)의 구곡담(九曲潭)에 대해서 기문(記文)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나로 말하면 공이 그곳에 터를 처음 잡을 때부터 이웃 고을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왕래하다 보니 그곳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른바 구곡담이라고 하는 곳이 미상불 나의 꿈속에 나타나기까지 하던 터였다. 그래서 이제 다시 그가 보여 주는 자료에 의거해서 다음과 같이 차례로 술회하게 되었다.
제1곡(曲)은 관암(冠巖)이다. 해주성(海州城)을 벗어나 골짜기로 들어가서 45리 지점에 있는데, 바다의 입구와는 20리 정도 떨어져 있다. 산 정상에 관(冠)처럼 생긴 바위가 우뚝 서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인데, 어쩌면 관시(冠始)의 뜻을 취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에서부터 산의 형세가 구불구불 휘돌아 계곡물과 함께 나란히 뻗어 내려오는데, 갑자기 끊어져 벼랑을 이룬 곳마다 그 아래에는 반드시 맑은 못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은자(隱者)가 머물러 살기에 충분한 장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대개 이쯤에서부터 산촌(山村)의 몇 가호가 비로소 눈에 띄기 시작한다.
제2곡은 화암(花巖)이니, 관암에서 5리쯤 떨어진 거리에 있다. 암벽이 벌어진 곳이나 바위 틈새마다 모두 진달래와 같은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 뒤쪽으로 가면 산촌 10여 가호를 볼 수가 있다.
제3곡은 취병(翠屛)이니, 화암에서 3, 4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기이한 바윗돌들이 더욱 많아지면서 마치 푸른 병풍처럼 둥글게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앞에 자그마한 들판이 펼쳐져서 산골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있으며, 들판 가운데에 일산(日傘)처럼 서 있는 반송(盤松) 한 그루 밑에는 수백 인이 앉을 만한 자리가 있다. 취병 북쪽에는 사인(士人) 안씨(安氏)의 집이 있다.
제4곡은 송애(松崖)이니, 취병에서 3, 4리쯤 떨어져 있다. 1천 척(尺) 높이의 석벽(石壁) 위에 송림(松林)이 해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못 중앙에 배가 반쯤 드러난 모양의 바위가 솟아 있어서 선암(船巖)이라고 이름지었는데, 그 위에 여덟 명 정도는 앉을 수가 있다. 사인(士人) 박씨(朴氏)네 집이 이 선암을 마주 대하고 있는데, 그는 율곡 공을 따라서 이 골짜기로 들어온 사람이다.
제5곡은 은병(隱屛)이니, 송애에서 2, 3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높고도 둥근 석봉(石峯)의 모양이 조촐하고 산뜻하여 특이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못 주위를 마치 계단처럼 돌로 모두 쌓아올려 내려오는 물을 담아 두고 있다. 병(屛)의 뜻이 앞서의 것보다도 은(隱)하기 때문에 은병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인데, 이와 함께 공이 자신의 가까이에서 취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쉬려는 뜻을 여기에다 부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공이 처음에 석담(石潭)에 와서 집을 지을 때에는 간략하게 혼자서 서식(棲息)할 공간만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인데, 공을 따라와서 배우는 이들이 많아지자 서로 더불어 머물 곳을 상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설계하면서 선현(先賢)을 존숭하고 후학(後學)을 인도하는 일에 하나라도 부족함이 없게끔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은병정사(隱屛精舍)가 세워지게 되었고, 그 뒤로 이 정사의 부속 건물들도 차례로 낙성되면서 어지간히 면모를 갖추었다. 따라서 여기에 대해서도 각기 소기(小記)를 적어 두어야 마땅하겠지만, 지금 잠깐 해후(邂逅)한 사이에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에 우선 생략하기로 한다.
조계(釣溪)라고 하는 곳은 은병에서 3, 4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침계(枕溪)의 바위 가운데 낚시터로 삼을 만한 곳이 원래 많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여기가 바로 제6곡이다. 풍암(楓巖)이라고 하는 곳은 조계에서 2, 3리쯤 떨어져 있다. 바위산 전체가 온통 단풍나무 숲으로 뒤덮여서 서리가 내리면 마치 노을처럼 현란하게 비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여기가 바로 제7곡이다. 그 아래쪽에 몇 가호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데, 뽕나무와 사립문의 정경 등이 그야말로 은연중에 하나의 화폭을 이루고 있다. 금탄(琴灘)이라고 하는 곳은 여울물 소리가 그지없이 청랑(淸朗)하여 거문고 소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여기가 바로 제8곡이다. 문산(文山)이라고 하는 곳은 옛 이름 그대로 부른 것인데, 여기가 바로 제9곡으로서 구곡(九曲)의 끝이다.
공이 살아서는 산천의 빼어난 기운을 타고나서 사문(斯文)의 기대를 한 몸에 지녔고, 공이 죽어서는 육신과 함께 죽지 않는 정신을 하늘이 있게 하여 여전히 사문의 영광을 공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9는 바로 용덕(龍德)을 표상하는 숫자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공을 알았는데, 공의 아명(兒名)이 실로 구이(九二)에 응하였고, 또 소산(小山)의 옛 이름도 우연히 사문에 부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정이 이러한데도 조물자가 처음부터 그 사이에 개입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말을 누가 부정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
주자(朱子)가 민중(閩中 복건(福建)) 땅의 무이산(武夷山)에 거처할 때에는 구곡의 동천(洞天)이 있었고, 공이 해주(海州)의 고산(高山)에 거처할 때에는 구곡의 암천(巖川)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역적으로 각각 동쪽과 남쪽으로 만리나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오도(吾道)의 하나의 기맥(氣脈)이 자연히 서로들 관통해서 그렇게 된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하지만 임진년의 병란을 만난 이후로 공의 집안에서 화를 당한 것이 실로 참혹하였고, 이에 따라 산림(山林)과 수석(水石)도 화를 면치 못하였는데, 이것은 국운(國運)과 관계된 일이니 또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예전부터 공을 알고서 함께 어울렸으니, 공의 풍도(風度)를 듣고서 자기도 모르게 감동하여 분발하는 그런 사람이 원래 아니다. 그러나 공이 이미 지하 세계에 들어가서 다시 일으킬 수가 없으니, 어떻게 구곡의 맑은 물가에서 술잔을 나누며 노래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 가운데에서도 다만 함께 공부하며 문자의 교분을 나눈 이들이 있으니, 이들이 공을 위해 글을 지어 읊는다면, 추억 어린 구곡으로 공의 혼백(魂魄)을 다시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그들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의 시권(詩卷)으로 엮어서 경림생에게 줄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리하여 그가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서 현판(懸板)에 걸어 두게 할 수가 없으니, 아, 생각하면 슬픈 마음만 든다.


[주D-001]관시(冠始) : 《예기(禮記)》 관의(冠義)의 “이렇게 본다면 관이야말로 모든 예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故曰 冠者 禮之始]”라는 말을 요약한 것이다.
[주D-002]아명(兒名)이 …… 응하였고 : 율곡의 아명이 현룡(見龍)인데,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이(九二)에, “현룡이 논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는 말이 나온다.
[주D-003]풍도(風度)를 …… 사람 : 《맹자(孟子)》 진심 하(盡心下)에,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 같은 이는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할 만한데, 그들의 풍도를 듣고서 자질이 부족한 일반 사람들이 스스로 감동을 하여 분발한다는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