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별 족보 서문, 가전 등/완산 최씨 족보(完山崔氏族譜) 서문

완산 최씨 족보(完山崔氏族譜) 서문 을묘년(1675, 숙종 1) 문정공파

아베베1 2011. 7. 3. 12:36

약천집 제27권
 서(序)
완산 최씨 족보(完山崔氏族譜) 서문 을묘년(1675, 숙종 1)


지난해에 구만이 북관(北關)에 있을 때에 도사(都事) 최한경(崔漢卿) 씨가 편지를 보내오기를, “저의 9대조이신 평도공(平度公)의 묘소가 용인현(龍仁縣)에 있는데, 옛날에 글을 쓴 표석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부러지고 넘어져서 이제 다시 새 것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그대 또한 공의 외손이 되니, 마땅히 이 일을 도와주십시오.” 하였다. 구만은 늦게 태어나고 몽매하여 선대(先代)의 고사를 알지 못하였는데, 한경 씨가 최씨의 족보를 새로 편수했다는 말을 듣고서 청하여 살펴보았다. 구만의 고조인 승지공(承旨公)은 박씨(朴氏)의 사위가 되고, 박씨의 위 3대는 최씨(崔氏)의 사위가 되고, 최씨의 위 4대는 바로 평도공(平度公)이니, 구만에게 11대조가 된다.
아, 나의 몸은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은 또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니, 거슬러 올라가 찾는다면 비록 연대가 더욱 멀고 계파가 더욱 많다 하더라도 모두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올라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시는 분들이니, 내 성씨의 종통(宗統)이 아니라 하여 소홀히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지금 마침내 대단치 않게 생각하고 잊고서 내가 이 몸을 소유하게 된 유래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를 면할 수 있는 길은 보첩을 편수하는 것이다. 이제 한경 씨의 족보를 통하여 마침내 이 구만이 최씨의 외손이 됨을 알았으니, 만약 당대의 사대부 집안에서 모두 한경 씨가 족보를 편수한 것과 같이 한다면 비록 이 구만처럼 몽매한 자들이라 해도 씨족을 상고한 내용을 얻어들어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위로 올라가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이미 이것을 안다면 먼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이 저절로 그치지 않을 것이요, 이미 먼 조상을 추모한다면 친척에게 돈독히 하려는 마음이 또 그치지 않을 것이니, 먼 선조를 추모하고 친척에게 돈독히 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비록 후덕해지지 않으려 하나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첩을 편수하는 자가 또 나와 같은 성씨의 후손이 아니라 하여 버려서는 안 됨이 분명하다.
이제 최씨의 보첩은 외손들을 함께 기록하여 그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았으니, 진실로 거룩한 덕의 아름다움이 외손에게까지 미침이 또한 이와 같아 다만 본손(本孫)들이 세상에 혁혁할 뿐만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또 구만과 같은 무리로 하여금 백성들의 마음이 후덕해지는 데에 면려하도록 하고자 하였으니, 사람들에게 자신이 말미암아 태어나게 된 선조를 잊지 않기를 바람이 지극하다 할 것이다. 한경 씨가 보첩을 다 편수한 다음 나에게 한마디 말을 부탁하였다. 모든 원류(源流)에서 쌓은 덕의 깊고 멂과 기재한 범례의 요체에 있어서는 족보를 보는 자가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니 여기에 감히 다시 말할 것이 없으며, 다만 구만이 마음속에 느낀 바를 이와 같이 쓰는 바이다.


 

[주D-001]최한경(崔漢卿) : 한경은 최후량(崔後亮)의 자이다. 호는 정수재(靜修齋)이고 본관은 전주(全州)로 이조 판서 최혜길(崔惠吉)의 아들인데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에게 입양(入養)되었으며, 아들 최석정(崔錫鼎)은 약천의 제자이다.

 

약천집 제27권
 서(序)
최한경(崔漢卿)의 청주 봉선계(淸州奉先契) 서문 갑자년(1684, 숙종 10)

정수재(靜修齋) 최공(崔公)이 하루는 나에게 이르기를, “저의 선친이신 문충공(文忠公)을 청주(淸州)의 북쪽 대율리(大栗里)에 장례하였는데, 먼 선조인 전서(典書) 부군 완산군(完山君)과 부군의 족조(族祖)인 좌윤 덕성(德成)과 동족(同族)인 판서 천건(天健)의 묘소가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세시(歲時)의 제향을 오직 선군에게만 올리고 4대 이상은 대수가 멀어서 미치지 못하니, 저는 실로 서글프게 여깁니다. 그리하여 가까운 지역에 사는 종씨들과 약속하고는 각각 쌀과 곡식 약간을 내어서 봄에 꿔 주었다가 가을에 거두어서 그 본전과 이자의 남는 것을 가지고 매년 맹동(孟冬)에 한 번 제사하는 비용으로 삼고 이것을 일러 ‘봉선계’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곡식을 꿔 주었다가 거두어들이는 것이 오래가지 못할까 염려하여 남는 곡식을 팔아서 묘소 아래의 전지(田地) 약간 묘(畝)를 샀습니다. 비록 인사(人事)의 변천이 무상하나 농토에서 나오는 소출은 무궁하니, 지금 이후로 비록 백 년, 천 년이 되더라도 매년 한 번 제사 지내는 비용이 계속 충당되지 못함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이것이 제가 전지를 산 뜻입니다. 그대는 부디 저를 위하여 서문을 써서 후인들로 하여금 이것을 보아 삼가 지키고 실추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나는 공을 대면하여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형체를 서로 물려주고 기혈(氣血)을 서로 이어 가는 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과 짐승이 다를 것이 없으나 사람이 유독 동물 중에 귀한 까닭은 자신의 몸이 어디로부터 나왔는가를 알아서 옛날 뿌리를 찾고 시조를 찾아서 오래되고 먼 선조를 소홀히 하여 잊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禮)는 사당에만 제사하고 무덤에는 제사 지내지 않으며 대부(大夫)의 제사는 3대에 그치는데, 지금 제사가 먼 선조의 묘소에까지 미쳐서 무궁한 계책을 세우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아, 봉분의 높이가 4척이니, 이미 봉분하지 않는 것과는 달라서 묘소에 올라가 제사하는 예가 이로부터 생겨난 것이요, 매월 제물을 올리고 때로 제향하는 것을 비록 3대에 국한하였으나 기도하는 제사는 또한 이단(二壇)에까지 미쳤으니, 단에 모시는 이상의 선조는 애당초 추모하는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요, 형세가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세가 미치지 못하면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사람들에게 반드시 행하라고 강요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 마침내 묘소 아래에 전지를 장만하고 후세에 법을 남겨서 향화를 올리는 것을 백대에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나는 성인이 다시 나온다 해도 반드시 백성들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감을 허락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일은 대략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에 나와 있으나 세상에 행하는 자가 드물다. 그런데 이제 공이 그 남겨 준 뜻을 따라서 윤색하고 또 더 자세하게 하여 재물을 출납하는 규정과 제향을 올리는 법식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풍성하고 소략함이 법도에 맞고 의식과 예문이 실정에 걸맞아서 모두 후세에 폐해지지 않고 세상의 모범이 되게 하였다. 나는 공의 요청을 소중히 여기고 또 사람마다 이것을 듣고 흥행(興行)하며 서로 보고 좋은 풍습을 이루기를 바라면서 이에 말하노라.”

[주D-001]문충공(文忠公) : 최명길(崔鳴吉)의 시호이다. 최명길은 자가 자겸(子謙)이고 호가 지천(遲川)이며,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에게 수학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주D-002]기도하는 …… 이단(二壇) : 《예기(禮記)》 제법(祭法)에 “대부는 삼묘ㆍ이단을 세우는데 …… 현고와 조고에게는 묘가 없고 기도할 일이 있으면 단을 만들어 제사 지내며 제사가 끝나면 단을 헐어 버린다.〔大夫立三廟二壇 …… 顯考祖考無廟 有禱焉 爲壇祭之 去壇爲鬼〕” 하였다.

 
前歲九萬在北關。崔都事漢卿氏抵書曰。吾九代祖平度公衣冠之葬在龍仁縣。舊有題表之石。歲久折仆。今欲易以新之。子於公。亦外裔也。宜相玆役。九萬晩出蒙陋。未達於先代之故。聞漢卿氏新修崔氏族132_443d譜。請而考焉。九萬高祖承旨公爲朴氏之壻。朴氏之上三世。有爲崔氏之壻。崔氏之上四世。是爲平度公。於九萬爲十一代祖。噫。吾之身旣有父母。父母之身又皆有父母。泝而求之。雖年代益遙。族系益多。然皆自吾父母以上所父母者也。其不可以非吾得姓之宗而忽之明矣。今乃汗漫遺忘。不知吾之所以有此身者有所自。豈不傷哉。雖然有可以免此者。譜牒之修是己。今因漢卿氏之譜。乃知九萬爲崔氏之外裔。若使當世士大夫家。皆如漢卿氏之爲。則雖蒙陋如九萬者。亦可得聞於氏族之考。而知自吾父母以上132_444a所父母者矣。旣能知之則追遠之心。自不能已。旣能追遠則敦族之心。又不能已。追遠而敦族則民德雖欲不厚。不可得矣。然則修譜牒者。又不可以非吾得姓之裔而去之明矣。今崔氏之譜。並錄外裔。不嫌其繁。誠以明盛德之休及於自出者亦如此。不但本胃之奕世而已。且欲使如九萬輩得有所勉。於民德之厚。其望人以不忘其所由生。可謂至矣。漢卿氏修譜旣訖。徵一言於九萬。凡其源流積累之深遠。記載凡例之體要。覽譜者當自得之。玆不敢容喙。而獨書九萬所感於心者如此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