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별 족보 서문, 가전 등/완산 최씨 족보(完山崔氏族譜) 서문

완산 최씨 족보(完山崔氏族譜) 서문 을묘년

아베베1 2011. 9. 7. 03:57

약천집 제27권
 서(序)
완산 최씨 족보(完山崔氏族譜) 서문 을묘년(1675, 숙종 1)


지난해에 구만이 북관(北關)에 있을 때에 도사(都事) 최한경(崔漢卿) 씨가 편지를 보내오기를, “저의 9대조이신 평도공(平度公)의 묘소가 용인현(龍仁縣)에 있는데, 옛날에 글을 쓴 표석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부러지고 넘어져서 이제 다시 새 것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그대 또한 공의 외손이 되니, 마땅히 이 일을 도와주십시오.” 하였다. 구만은 늦게 태어나고 몽매하여 선대(先代)의 고사를 알지 못하였는데, 한경 씨가 최씨의 족보를 새로 편수했다는 말을 듣고서 청하여 살펴보았다. 구만의 고조인 승지공(承旨公)은 박씨(朴氏)의 사위가 되고, 박씨의 위 3대는 최씨(崔氏)의 사위가 되고, 최씨의 위 4대는 바로 평도공(平度公)이니, 구만에게 11대조가 된다.
아, 나의 몸은 이미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은 또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니, 거슬러 올라가 찾는다면 비록 연대가 더욱 멀고 계파가 더욱 많다 하더라도 모두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올라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시는 분들이니, 내 성씨의 종통(宗統)이 아니라 하여 소홀히 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지금 마침내 대단치 않게 생각하고 잊고서 내가 이 몸을 소유하게 된 유래가 있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를 면할 수 있는 길은 보첩을 편수하는 것이다. 이제 한경 씨의 족보를 통하여 마침내 이 구만이 최씨의 외손이 됨을 알았으니, 만약 당대의 사대부 집안에서 모두 한경 씨가 족보를 편수한 것과 같이 한다면 비록 이 구만처럼 몽매한 자들이라 해도 씨족을 상고한 내용을 얻어들어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위로 올라가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이미 이것을 안다면 먼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이 저절로 그치지 않을 것이요, 이미 먼 조상을 추모한다면 친척에게 돈독히 하려는 마음이 또 그치지 않을 것이니, 먼 선조를 추모하고 친척에게 돈독히 한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비록 후덕해지지 않으려 하나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첩을 편수하는 자가 또 나와 같은 성씨의 후손이 아니라 하여 버려서는 안 됨이 분명하다.
이제 최씨의 보첩은 외손들을 함께 기록하여 그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았으니, 진실로 거룩한 덕의 아름다움이 외손에게까지 미침이 또한 이와 같아 다만 본손(本孫)들이 세상에 혁혁할 뿐만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또 구만과 같은 무리로 하여금 백성들의 마음이 후덕해지는 데에 면려하도록 하고자 하였으니, 사람들에게 자신이 말미암아 태어나게 된 선조를 잊지 않기를 바람이 지극하다 할 것이다. 한경 씨가 보첩을 다 편수한 다음 나에게 한마디 말을 부탁하였다. 모든 원류(源流)에서 쌓은 덕의 깊고 멂과 기재한 범례의 요체에 있어서는 족보를 보는 자가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니 여기에 감히 다시 말할 것이 없으며, 다만 구만이 마음속에 느낀 바를 이와 같이 쓰는 바이다.


 

[주D-001]최한경(崔漢卿) : 한경은 최후량(崔後亮)의 자이다. 호는 정수재(靜修齋)이고 본관은 전주(全州)로 이조 판서 최혜길(崔惠吉)의 아들인데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에게 입양(入養)되었으며, 아들 최석정(崔錫鼎)은 약천의 제자이다.

耳溪集卷十
 
完山崔氏族譜重刊序 a_241_189d


大易家人之象曰。風自火出家人。風象其和。火象其明。此處家人之道也。同人之象曰。君子以。類族辨物。此譜牒之攸源也。堯典曰。平章百姓。盖謂百官之得姓者。此族姓之肇起也。逮于成周。始立族師之官。以掌其戒令。下至春秋。晉有欒郤。齊有高國。楚有昭屈。皆以氏族爲重。而漢晉以降。稱貴姓名宗者。可摟指數也。惟我東尤重氏族。粤自新羅六部大人。共立西干。建邦設都。各得姓爲宗臣。崔氏其一也。崔有衆派。241_190a而貫完山者最盛。稱三韓之甲族。在隆慶中。始有譜牒。而世遠則難稽。人衆則易漏。本支益繁。編簡隨增。爰有萬曆崇禎庚申乙丑之譜焉。皆因後承之賢者。裒輯而辨證。當世之名公。鋪張而記述。亦旣詳且備矣。乙丑之後。諸派又盛。咸曰時可以續成。盖於羅麗之間。文章名節。磊落相望。皆以完州伯爲祖。而洎本朝有若判敦寧襄度公,左贊成敬節公。以忠孝淸白。兄弟聯武。顯名一代。有若遲川文忠公。勳業盖世。明谷文貞公。經術贊襄。祖孫相繼。傑然爲名相。觀察使弘僩,大冢宰天健,左參贊寬。亦皆高官聞人也。東方241_190b之望。罕與爲比。而惜其後裔寢微。力不能改修。遲川公冢孫郡守在修氏。慨然發憤。與其宗長守忱氏。通告諸族。合謀登梓。而未及就緖。今郡守之嗣子文顯。克紹先志。銳意經始。求序於良浩。禮曰。尊祖故敬宗。敬宗故收族。收族之道。不外乎和與明。和以通其志。明以辨其類。家人之卦盡之矣。崔君勉乎哉。


剛齋先生集卷之五
 
全州崔氏族譜序 a_271_103a


崔氏籍全州者。其遠代昭穆失次。於是譜系者。各從其斷然可知者。始焉則遂分而爲三祖。於高麗進賢館太學士完山府院君文忠公諱羣玉者。其一也。譜云。宋哲宗元祐元年。文忠公奉使上賀時。司馬呂范諸公。薦程伊川。爲崇政說書。又薦公爲門下侍郞。及伊川罷。公亦論事見罷而還。噫。以外國使臣。被薦授271_103b官于中朝明時者。其事已是超絶。况薦罷。乃與伊川同其顚末乎。雖其文章事業未有所考。千載之下。足以知其賢。然則若晩六公瀁罔僕之節。梅村公湜居喪之禮。愛日公應參養親之誠。其卓偉敦篤。實有不容言者。而其可曰靈芝無根。醴泉無源耶。且威靖公七夕南征大勳。至獲賜名之殊寵。而再受封於完山。以晩六從祖而爲誌晩六者。所引重亦甚盛矣。禦侮公得男之壬辰原從。參議公聃齡之從於倡義。又其流風之益遠。而後人之所不可不知者。凡譜於是者。旣知其來處。又能考蹟而感奮。思所以無忝。則歐陽271_103c氏所云傳家四以者。必不待勉而後能之也。譜旣成。崔生運泰光岳洙一。來問序於余。辭以陋拙。不獲。遂略述其世德。以致欽尙之意。始終殫誠於譜事者。晩六公十五世孫復一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