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7.13. 도봉산 산행

2011. 7.13. 도봉산 산행

아베베1 2011. 7. 14. 10:14

  도봉산 산행 비가 내리는 날 도봉산 산행을 하기로 하고 집에서 출발하였다

  10분정도 늦게 도착하였서 일행과의 만남이 늦어서 다락능선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비가 많이 내린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산행이었다

  전망바위를 지나서 운무들의 움직임을 보고 몇장을 담아서 가는 도중에 일행을 만났다

  하산길에는 많은 분들이 산행을 시작하신다

 하산하여 00식당에 닭도리탕 에 막걸리 한잔 마시고 집으로 귀가 하였다  늘 좋은 모습의 도봉이었다

 

  

  만남의 광장아래 예전에 수영장이 있던 곳 ..

  도봉산 둘레길이 생겨서 이정목이 복잡하다 매표소 입구의 이정목

  도봉산 청소년 수련관 등산학교 공사가 마무리 금년 8월에 개관 예정

  도봉산의 관련 코스을 설명하고 있다

  다락으로 올라가는 조그마한 개울 물이 흐르고  

  다락원으로 가는 들레길 이정목

  다락능선입구 이정목 냉골가는 삼거리이정목  

 다락능선에서 바라본 수락과 불암산의 모습 운무속에 ..

 

  미륵봉과 (은석암 정상) 달꺌바위의 모습이 운무가 ..

 

 

 

   원도봉 능선의 연꽃 바위 ...

  위에서 바라본 연꽃바위의 모습

 

  순식간에 변하는 천년고찰 망월사 의 모습

 

  해골바위도 운무속에 가려지고 ..

 망월사와 사패능선이 안개속에 ..

 

 

 

 

 도봉산 입구의 광륜사 한때 청하스님이 주지스님으로 계셨던 사찰

  언제 보아도 명필이다 암각화는 우암 송시열 선생님의 친필이다

  도봉동문  도봉산 마을에 들어오는 마을의문 동네 입구 예전에 저자리위에 서원마을이 있었고 도봉서원이 있었다

  도봉서원은 사액(賜額) 서원으로 서울시내 유일의 서원이기에 문화적 가치가 상당히 놓은 곳이다

  정암 조광조  (한양인)  선생과 ,제자 이신 우암 송시열(은진인) 선생을 모시는 서원으로 당대의 명현인 백사 이항복 ,문곡 김수증 ,김수항  미백 최방언, 농암 김창협

  반남인 서계 박세당등 많은 분의 선현분이  도봉서원을 찾아서 강론과 토론을 하시는 곳이다 아울러 국가에서 서원 운영비를 지원한 기록도 찾아볼수가 있다. 

  양주목사 남언경이 도봉서원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며 사라져간 무우대, 침류대, 영국사지 등이 고문헌에 전해오지만

 지금은 흔적조 차 찾아보기 힘든 현실이 되었다

  도봉동문(道峰洞門)은 우암 선생님이 죽필(竹筆)로 글자를 썼다는 설이 있는데 잘암수가 없다

  저바위위를 통하여 도봉산 최고봉인 선인 만장 자운봉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수가 있었으나 지금은 樹木에 가려져 볼사가 없는 것이 현실이 되었다.         

  과연명필이다

 

시원한 물줄기가 문사동 거북골 도봉계곡의 물이 合水하여 중랑천으로 통하여 한강으로...

능소화는 조선 중엽 연경에서 가져 왔다는 기록이 있고 毒이 있어 눈에 들어가면 실명한다는 기록이 있기에 조심하여야 한다. 

 

   한편의 고시를 인용해본다

   농암 김창협 의 시를 인용해본다  안동인

 

 

농암집 제1권
 시(詩)
다음날 자익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오다.


묘봉암 높다랗게 솟아 있다면 / 迢迢妙峯菴
도봉사 정갈하여 엄숙도 하다 / 肅肅道峯祠
산행길은 저마다 길이 달라서 / 山行各異路
골짝서 서로 만날 기약했었지 / 中谷會有期
어제는야 후두둑 내리는 비에 / 冥冥昨日雨
동서를 분간 못할 구름과 안개 / 雲霧東西迷
산길이 서로간에 막히고 끊겨 / 山蹊兩阻絶
오는지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 去來不可知
지는 해를 서글피 바라보면서 / 悵望日向夕
서성대며 그대들 생각했었지 / 徙倚空相思

두 번째
그대들을 그리다 아침 해 뜨니 / 相思達明發
기대는 끊겼어도 배회하던 차 / 望絶猶徘徊
그 어찌 뜻했으랴 우리 그대들 / 何意二三子
고맙게도 이처럼 다시 올 줄을 / 惠然能復來
얼굴 펴며 봄옷을 걷어 잡고는 / 開顔攬春服
무우대에 모두 다 나란히 앉아 / 並坐舞雩臺
지나온 길 돌아보며 가리키는데 / 還顧指所歷
하늘 닿은 길이라 정말 험난해 / 天路何艱哉
험난한 길 힘들지 않았겠나만 / 躋攀能無疲
그래도 이내 마음 흐뭇하여라 / 且慰我心懷

세 번째
침울하던 마음이 트이고 나니 / 心懷旣已開
산수 풍경 더한층 맑고 새롭다 / 山水復淸新
구름 위로 높은 뫼 솟아 있고요 / 脩岑竦雲表
산안개에 붉은 기운 일어나누나 / 絳氣興氳氤
바위샘 해맑아라 거울 같아서 / 巖潭皎若鏡
가던 길 주저앉아 물고기 구경 / 行坐見游鱗
푸른 부들 저마다 하늘거리고 / 靑蒲相披拂
하얀 자갈 어찌나 반짝이는지 / 素石何磷磷
유별난 즐길 거리 마음 다 맞아 / 殊賞俱造適
흥미롭지 않은 건 하나도 없어 / 何物不宜人
평소에도 이따금 유람했지만 / 平生數游歷
이와 같은 흥취는 지금뿐일레 / 會興惟今辰


 

 

한수재선생문집 제22권  (한수재선생은 안동인 권상하를  말한다)
 기(記)
소광정기(昭曠亭記)


도봉(道峯)은 옛날 영국사(寧國寺) 유지(遺址)가 있던 곳이다. 봉만(峯巒)이 빼어나고 수석(水石)이 깨끗하여 본디부터 기내(畿內) 제일의 명구(名區)로 일컬어졌다. 만력(萬曆 명 신종) 계유년에 사옥(祀屋)이 창건되어 마침내 서울 동교(東郊)의 대유원(大儒院)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체와 규모가 성균관에 다음가므로, 서울의 선비들이 여기에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강당(講堂)의 서쪽으로 백 보를 다 못 가서 시내 위에 조그마한 대(臺)를 지어 무우(舞雩)라 이름하고, 대의 동쪽으로 문(門)을 내어 이를 영귀(詠歸)라 이름하였으니, 대체로 증점(曾點)이 무우에서 바람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다던 뜻을 취한 것이다.
대의 남쪽 시내 건너편에는 푸른 절벽이 우뚝 솟아 있는데, 여기에는 동춘 선생(同春先生)이 쓴 여덟 대자(大字)가 있고, 그 아래에는 큰 바위가 시내 위에 가로 뻗치어 있는데 여기에는 우재 선생(尤齋先生)이 회옹(晦翁)의 시(詩) 두 구(句)를 한데 써서 모아 놓은 것이 있는바 그 필세(筆勢)가 매우 힘차서 만장봉(萬丈峯)과 기세가 서로 등등하다. 그런데 계사년 여름에 큰비가 와서 홍수가 산을 삼켜버림으로 인하여 절벽이 갈라지고 암석이 빠져 떠내려감으로써, 무우대와 영귀문은 주춧돌이 뽑히었고 두 선생의 필적도 어지러이 표류되었으니, 참으로 고금에 없던 변고였다. 그로부터 수년 뒤에는 대(大)가 물러가고 소(小)가 옴으로써 소인들의 중상(中傷)이 두 선생의 묘향(廟享)에까지 미칠 뻔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사문(斯文)의 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먼저 그 조짐을 보여 준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리하여 친구 파평(坡平) 윤봉구 서응(尹鳳九瑞膺)이 바야흐로 원사(院事)를 주관하여 이에 침류당(枕流堂) 남쪽 가 빈 땅에다 영귀문을 세우고, 조금 아래 시냇가의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를 편편하게 닦아서 무우대를 지었다. 이는 대체로 구기(舊基)가 이미 파여서 못 쓰게 됨으로써 부득불 겁수(劫水)에도 안전할 수 있는 지금의 위치로 옮겨 짓게 되었으니, 또한 기이하지 않겠는가.
무우대 아래에 두어 길쯤 되는 폭포가 있고, 폭포 밑 오목한 암석 바닥에는 물이 돌아들어 담(潭)을 이루었으며, 담 남쪽에는 울퉁불퉁한 흰 암석이 있어 5, 60인이 앉을 만하니, 맑은 경치가 이전에 건축한 곳보다 나았다. 담 북쪽에는 기수(沂水) 두 글자를 새겼으니, 이는 무우와 영귀의 뜻이 본래 기수에 목욕한다는[浴沂] 데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두 선생이 옛날에 쓴 필적의 진본을 돌에 새기고 또 무우대(舞雩臺) 세 글자를 그 곁에 새겨 놓으니, 이에 문(門)과 대(臺)의 필적이 한결같이 다 복구되어, 사람들이 모두 중신(重新)한 것임을 모를 정도이다.
그러나 새로 지은 건물 좌우에는 그 위를 그늘지어 줄 소나무나 노송나무가 없으므로, 이곳에 오르는 이들이 이를 흠으로 여겼다. 그러자 서응(瑞膺)이 등나무와 풀숲 속을 헤치고 들어가 남쪽 비탈의 층암(層巖) 위에서 조그마한 돈대(墩臺) 하나를 찾아내어 이곳의 잡초 등 지저분한 것들을 깨끗이 제거하고 나니, 사방의 넓이가 기둥 4개를 세울 만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면 저 돌아드는 물과 깔려 있는 암석은 바로 눈 밑에 있고, 무우대와 두 석각(石刻)과 튼튼한 장옥(墻屋)과 우뚝우뚝 솟은 봉만(峯巒)들이 모두 조망(眺望) 가운데 죽 배열되었으니, 그 누가 이렇게 그윽한 속에 이토록 밝게 탁 트인 지경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겠는가. 혹 조화옹(造化翁)이 짐짓 이곳을 비장(秘藏)해 두었다가 호사자(好事者)를 기다려서 내놓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기에 모정(茅亭) 한 칸을 지어 소나무와 노송나무의 그늘을 대신하니, 그 제도가 정밀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아서 산중의 한 가지 진기한 완상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서응의 성근한 뜻이 아니면 그 누가 이 일을 해냈겠는가.
서응이 하루는 나에게 와서 이 모정의 이름을 묻기에, 내가 말하기를 “학자가 학문을 끝까지 힘써 연구하다가 활연관통(豁然貫通)의 경지에 이르면 고인(古人)이 이를 일러 소광(昭曠)의 근원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동(洞)에 들어온 이들도 언덕을 경유하고 골짜기를 찾아서 여기에 오르고 나면 가슴이 시원하게 탁 트일 것이니, 그 기상이 저 소광의 근원을 본 것과 서로 같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소광정(昭曠亭)이란 세 글자로 제명(題名)하고 아울러 그 전후의 사실을 기록하여 문지방 사이에 걸도록 하노니, 후일 이 원(院)에 노닐고 이 정자에 오르는 이들은 이 명칭을 돌아보아서 더욱 힘쓰기 바라는 바이다.


 

[주D-001]증점(曾點)이 …… 뜻 :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뜻을 물었을 때, 증점이 말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면 관자(冠者) 5, 6명과 동자(童子) 6, 7명으로 더불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고 한 것을 말한다. 《論語 先進》
[주D-002]대(大)가 …… 옴으로써 : 대는 양(陽)으로서 군자의 도를 뜻하고, 소(小)는 음(陰)으로서 소인의 도를 뜻한다. 《周易 否卦》
[주D-003]겁수(劫水) : 불가(佛家)의 말로, 세계가 괴멸(壞滅)할 때에 일어난다는 큰 수재(水災)를 말한다.

 

송자대전 부록 제19권
 기술잡록(記述雜錄)
권상하(權尙夏)


회옹 부자(晦翁夫子 주희(朱熹))는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를 높인 말)ㆍ정자(程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를 높인 말)ㆍ장자(張子 장재(張載)를 높인 말)의 뒤에 태어나서 여러 사람의 말을 절충(折衷)하여 경전(經傳)을 발휘(發揮)해서 만세의 보전(寶典)으로 만들었으니, 이른바 여러 현인(賢人)을 집대성(集大成)했다는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니라 하겠다.
그러나 회옹 부자가 죽고 나서는 성학(聖學)이 전해지지 않아서 괴이한 논설(論說)들이 시끄럽게 나와 사도(斯道 성인의 도)가 묻혀 버리고 드러나지 못하였는데, 하늘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에 참된 유학자(儒學者)가 배출되어 유학의 문을 열어젖히고 성리(性理)의 호리(毫釐)를 분석하였으니, 그 이학(理學)을 밝힌 공이야말로 저 염락(濂洛)이 융성했던 시대보다 신속하고도 훌륭했다 할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우암 선생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밝혀 놓은 이학을 더욱 확대시키고 천명(闡明)하여, 멀리는 고정(考亭 주희가 살던 지명으로, 곧 주희를 가리킴)의 정통(正統)을 연접하고 가깝게는 제유(諸儒)의 업적을 집대성하여 거룩하게 백세의 종사(宗師)가 되었으니, 그의 공이 크다고 이를 만하다.

회옹은 공자(孔子) 이후의 일인자(一人者)요, 우암은 회옹 이후의 일인자이다.

선생은 훌륭한 덕과 크나큰 업적으로 백세의 종사가 되었으니, 그의 한마디 말과 문자(文字) 하나하나가 모두 무궁토록 후세에 전할 만하다.

선생의 문집(文集) 가운데는 어떤 글을 막론하고 취할 것은 그 전문(全文)을 다 취해서 넣어야지, 산삭(刪削)하는 일은 큰 안목(眼目)을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경의(經義)와 예의(禮疑)는 모두 본집(本集) 가운데 편입시켜야 하며, 시집(詩集)은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예(例)에 따라 차례대로 편입시키는 것이 매우 온당하나, 다만 연월(年月)의 선후를 상고하기가 용이치 못한 점이 있다.

도봉산(道峯山) 무우대(舞雩臺)의 남쪽에 푸른 절벽이 높다랗게 깎아질렀는데, 그 아래는 큰 바위가 시내를 가로질러 있다. 이 바위에다 선생이 친히 써 놓은 회옹(晦翁)의 시(詩) 두 구(句)를 새겨 놓았는데, 필력(筆力)이 웅장하고 힘차서 만 길이나 되는 산봉우리와 서로 겨룰 만하였다.
선생은 옥천(沃川)에서 생장(生長)하여 어릴 때부터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풍도(風度)를 익히 들었던 터라, 평소에 그를 존경하고 숭앙하기를 석담(石潭 이이(李珥))의 다음으로 하였는데, 선생이 지은 비문(碑文)ㆍ행장(行狀) 등의 문자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있다.

선생이 제주(濟州)에 안치(安置)되었을 때, 특별히 임경업(林慶業) 장군을 위하여 전기(傳記)를 지었는데, 임 장군에 대한 표장(表奬)이 곡진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말세의 느낌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이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올린 소(疏) 가운데, 대비(大妃 선조(宣祖)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역모(逆謀)에 가담했다는 등의 말이 있고 이어서 그러나 결코 대비를 폐출(廢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나타낸 사실이 있는데, 춘당(春堂 송준길(宋浚吉)) 선생이 정한강의 이 소(疏)를 보고서 하루는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에게,
“정공(鄭公)의 이 사실을 어떻게 보는가?”
하고 묻자, 미촌이,
“광해군(光海君)을 달래려고 하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네.”
하고 대답하니, 춘당 선생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우암 선생이 뒤에 그 말을 듣고는,
“길보(吉甫 윤선거(尹宣擧))의 말은 매양 이해(利害)를 주장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였다.

이(尼 윤증(尹拯)이 이산(尼山)에 살았으므로 그를 가리킴)는 탄곡(炭谷 권시(權諰))이 장인(丈人)이고 권유(權惟)ㆍ권기(權愭)가 처남(妻男)이었으므로, 젊었을 때부터 다년간 한방에서 지냈고, 그의 아우(윤증의 아우인 윤추(尹推)를 말함)는 이유(李)가 장인이고 이삼달(李三達)이 처남이었으므로 정분(情分)이 천륜(天倫)에 가까운 사이이니, 서로 돈독히 믿는 사이임을 알 수 있다.
남인(南人)들은 ‘허견(許堅)과 이남(李枏 왕족(王族)인 복선군(福宣君))이 비록 죄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을 역적(逆賊)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대체로 역적이란 군상(君上)을 모해(謀害)한 자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허견과 이남은 분수에 넘치는 것을 바랐으니,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있기는 하였다. 그리하여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의 봉호)이 강압적으로 옥사(獄事)를 일으켜 대신(大臣)들을 마구 살해하였으니, 이는 사림(士林)의 크나큰 화(禍)였다.’ 하였다.
윤증은 마음속으로, 선생이 거제(巨濟)에서 유배(流配) 생활이 풀려 돌아오면 훈척(勳戚)들을 내쫓고 윤휴(尹鑴)ㆍ허적(許積) 등의 무리에게 신원을 해 주어야만 지극히 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선생의 뜻은 왕실(王室)을 반석(盤石)처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공을 쌓는 일이요 죄를 짓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윤증이 크게 경악하여 권이정(權以鋌 권시(權諰)의 손자요, 송시열의 외손자며, 윤증의 처질(妻姪)이다)에게,
“너의 외조(外祖 송시열을 가리킴)가 장차 천 길이나 되는 구덩이에 빠져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의 주견(主見)이 이러했기 때문에, 뒷날에라도 혹 남인이 다시 득세하게 되면, 윤증 자신 역시 선생의 고제(高弟)이기에 화(禍)를 면치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선생과 파당(派黨)을 약간 달리하여 호신(護身)의 계책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소위 같은 서인(西人) 중에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된 원인이다.


自著卷之八
 律詩
入道峯 a_249_140d


直出靑峰一萬丈。全鋪白石三千頭。先生已遠空遺廟。小子曾聞有此樓。聽澗誰知非點瑟。穿花人道是漁舟。山中故事憑樵叟。繡粉蒼崖字半留。

其二
萬丈峯高一徑廻。雜花晴繞舞雩坮。山深老木皆相向。春晩仙桃稍欲開。樓坐輕颸吹散髮。溪行飛瀑灑傳盃。巋然二老空祠廟。古道如今半綠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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