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7.13. 도봉산 산행

遊北漢記

아베베1 2011. 7. 15. 20:31

陽園遺集卷十
 
遊北漢記 a_348_205a


歲戊戌八月。余坐事免官。逬出江上留旬日。遂還梧洞鄕廬。時値重陽。菊花政開。方圖逍遙遣閒。忽聞時人告司法無狀。憲部奏請審判。余倉黃登途。待命于南門外。而憲部未卽拿審。淹延數旬。時事轉擾。附郭僦舍。喧鬧不堪住也。遂移投花樹亭鄭水村基鳳寓舍。再宿出東門。訪石室族人家。寔淸陰先生舊居也。院址尙存。背山臨江。士大夫多卜築焉。留連七八348_205b日。復向東闉。住普門尼菴又六七日。而時擾尙未靖。乃於十月二十六日。手筇理屩。作北漢之遊。償宿願也。姜又沙主事鳳朝,白灘北主事南斗,族人晩悔主事玟湜,姜君悳煕偕焉。從惠化門外。歷新興寺藥寺。至靑巖寺宿焉。新興是舊遊。而二十年間泉石依舊。寺刹增新。藥寺靑巖皆幽邃環抱。眞堪爲佛宇。是夜得一絶。
石室江邊賞月還。普門寺塔更躋攀。今宵又向靑巖宿。多謝天公餉我閒。
靑巖晨磬發。溪路更躋攀。古壑無人到。松聲348_205c盡日閒。
此遊乘興却忘還。到處梵宮雲裏攀。持呪誦經長夜曙。云何衲子得心閒。灘北
僧舍有壽福疊字屛風。覽而有作。
松風搖落撼鍾聲。夜靜山房一炷明。安得屛間千福字。撒施大界共昇平。
無眠鎭夜坐鍾聲。一屛篆籀著眼明。若使世人皆壽福。何須大易說陂平。灘北
廿七日。飯後向花溪寺。距靑巖五里而近。然中隔一岡。信筇而登。忽見岡脊穹窿。兩厓阧絶千尺。眩不堪348_205d步。如癯馬之脊。如騎虎之勢。凜乎惴惴。下岡而神魂猶然也。旣抵花溪。溪石淸絶。萬松環抱。梵宇雄偉。誠漢東名刹也。主僧出示大藏經目錄三冊。儒家五車不足以鬪其多。不覺望洋而歎。噫稊稗之茂如此。五糓雖美。安得以勝之耶。起向北漢東門。因賦一絶。
朝向華溪訪寺來。鶴棲樓上一徘徊。八萬經題看遍後。提筇遙指白雲臺。
鍾聲處處摠如來。直到華溪更轉徊。禪子向前因指路。空中翠揷白雲臺。晩悔
緣厓攀木入山來。到處名區暫徘徊。知是相348_206a公眞樂在。明朝應上白雲臺。悳煕
城門直臨萬丈之高。如針孔穿在山頂。自下望之。若可一超而登。而崎嶇灣曲。行行登登。十步一休。脚重氣喘。費了兩箇時辰。然後始抵東門。榜曰大東門。俯瞰北漢一區。如栲栳形。正在三角山下。曾爲百濟故都。我肅廟朝以其爲都城後鎭。築山城設管城將以鎭之。有寺菴共十一。皆仰給縣官。民戶湊集。舊稱殷盛。自甲午更張以後。將卒革廢。僧俗渙散。寺刹蕪頹。惟重興古寺巋然獨存。衲徒僅五六人。戶不滿數十。荒涼牢騷。眞可謂悽愴而寒心者矣。萬歲樓在寺前。348_206b是夜提燈而上。散步遊詠。仍宿寺中。又得一絶。
生老長安五十年。遙望三角似靑天。偶然來宿重興寺。夢裏還疑作地仙。
重興此寺昔何年。水抱山迴鏡裏天。明公高坐雲臺下。白髮紅顔望若仙。悳煕
三角之上峯曰仁壽。其次曰白雲臺。又其次列爲三峯。西曰露積。東曰龍巖。中曰萬丈。皆壁立千仞。而白雲臺尤秀拔特立。登其頂四望無際。如上霄漢。故遊北漢者必以登白雲臺爲無上大乘焉。廿八日。與同伴諸人。緩步上山。居人爲巡檢者爲之前導。自寺至348_206c萬丈露積兩峯之間。不滿五里。然登陟高峻。喘息難定。懸厓危巖。三步一跌。巡檢顧而笑曰公不能上雲臺矣。此地猶艱步如此。况雲臺之陡險十倍於此者乎。余亦望見白雲一峯。全石聳上。如削出芙蓉。了無攀援階級之可以上也。且雲霧掩其半面。尤難尋路。遂歎曰壯觀亦有緣矣。灘北與姜生勇往獨前。亦半途而還曰不可登矣。遂班荊於萬丈峯西。西眺露積。東顧萬丈。北瞻雲臺。俯臨畿輔山川。以極于海。亦足夸賞。惜雲霧迷茫。不能盡目力也。巡檢因說前後遊人往往多陟雲臺。而城內居人及京都隷役輩則升348_206d降如平地。至有擔瓮而登者。又言仁壽峯之高聳削立。又倍於白雲臺。自古絶無登其巓者。今年有嶺南金姓者結广祈靈於峯下。踪跡殊異。忽見有紅白旗二面植在峯上。人皆驚怪。自警廳拿金詰之。則乃金所爲也。督令還拔則金乃攀壁而上。如狙之登。或腹而匍。或背而聳。竟至峯頂。拔旗而下。其疾如飛。此殆妖人也。聞甚詑異。歎人之壯嬴勇怯之相懸。不啻霄壤也。日暮從東厓而下。訪奉聖菴則僧出而門鎖矣。還宿重興寺賦一律。
萬丈峯頭日欲西。淡雲微靄四望低。龍飛鳳舞何348_207a奇壯。玉削笋抽可品題。劫火千年經濟麗。滄溟一帶接靑齊。半途猶覺仙緣重。不必窮登破鐵鞋。
一望南北與東西。大界三千眼下低。前生有約始登眺。萬丈得名眞著題。重興幽邃詩興足。仁壽淸奇聖壽齊。信宿此城多感古。今行不是費筇鞋。晩悔
廿九日。將下山。僧曰大南門外有普賢峯。俯瞰長安。旣不能上雲臺則此亦可以爲其次矣。公能陟乎。余喜而從之。遂從南門路。有一廨在路傍。卽舊管城將所駐處。而今則募集兵丁三十名。屬之水原地方隊。348_207b正校一人領之。余携筇入廨廳。試觀演習而出。廨之上有行宮。卽肅英兩朝幸御之所也。荒廢滲漏。不蔽雨暘。外殿儲國史而門鎖不得啓。內殿奉安列聖御製大禮儀軌及內閣書籍。而守直官一人在焉。徘徊奉玩而退。旣出南門。卽見普賢峯。矗巖聳拔。其高雖遜於雲臺。而尙怕其峭峻。又逡巡而不敢登。灘北與姜生銳然而往。余與又沙,晩悔緣厓而訪文殊菴。菴在門西一弓之地。靠巖俯壑。眼界開豁。北漢諸寺稱爲第一勝境。菴左有羅漢殿。塑五百羅漢。盡著袈裟。累累叢叢。亦一奇觀也。菴後有大窟。穹窿黝深。348_207c高可丈餘。廣可二間。深五六間。有泉出焉。僧言昔文殊菩薩率五百羅漢。現法於此。故名文殊窟。多著靈跡。都人士女祈禳者以是雲集。其說荒唐。殊不可信。菴右數百步。巨巖列爲岡巒。較普賢峯稍平夷可陟。乃與二伴登巖上。盤桓聘矚。都城五江。直在眼底。西南北三面。茫茫無際。比萬丈峯下所眺望。倍覺爽豁。越瞻普賢峯上。二人已高坐指點。想其凭高縱目。頗覺得意。然吾三人之所得。亦何遜於彼哉。何必涉險費力爲也。移時還菴中。二君亦下來。日已晡矣。遂留宿焉。菴只有一僧。而禱賽者多。喧鬧可苦。有崧嶽僧348_207d瑞雲偶來寄宿。頗解文字。可與語也。是時天常開霽。絶無雨雪。數日內稍稍陰靄。至是夕復雲捲日出。夕陽可賞。夜忽聞風聲颼飀。又有霏霏打窓之聲。從者曰雪下矣。朝起見滿山遍野。一望瓊花。大風掀撼。滉漾鴻濛。不辨是雲是雪。咫尺長安。隔如千里。欲發旋止者屢矣。天有不測風雲。豈不信哉。李靑下麒鎭,金荷田上舍永煥聞余遊山。筇鞋來追。自重興穿雪而至。喜而迎之。遂與信宿。又占一律。
文殊菩薩昔何人。萬里西來轉法輪。千載伽藍臨絶壁。一聲磬鈸動淸晨。遠山極浦天無際。古窟名348_208a泉地有神。下界風塵渾不管。菴中信宿亦前因。
文殊逈坐鏡中人。七寶峯前慧月輪。石窟至今如昨日。鍾聲依舊報淸晨。同吟自愧塡詩竇。多病堪憐外酒神。兜率三千浮世界。不知何佛是前因。又沙
下界人來見上人。禪心圓覺月光輪。人生緣業無僧俗。客子淹留易夕晨。一洞雲深迷出處。千峯雪白倍精神。今遊何似山陰道。返棹王猷興有因。灘北
穿雪攀雲追後人。行行不覺日西輪。三界燈348_208b深渾靜夜。一聲鍾落更淸晨。道骨嶒崚山氣勢。塵心淨洗水精神。峯峯谷谷無窮像。盡是天公造化因。靑下
又賦雪曰。
一夜瓊花滿祗林。塵埃淨盡見禪心。千峯萬壑琉璃界。不辨長安何處尋。
穿雪遲遲下少林。天然老佛坐無心。歸路停盃留後約。長安明月好相尋。荷田
厥翌天始開霽。乃扶携下山。雪深尙數尺。疊迹穿路。由大南門出大星門而降。至洗劍亭。亦舊遊也。泉石348_208c爽槪。還勝北漢之幽閴。因吟一絶。
三十年來此重遊。少林寺下水西流。激石奔流如昨日。何人洗劍斬旄頭。
鍊戎臺下携筇遊。洗劍亭前見水流。隨喜少林登彼岸。塵根淨處是回頭。灘北
薄暮遂入城。時十一月初二日也。是行也。於北漢之勝。得其梗槩。而但重興寺西有山影樓。軒敞可賞。舊日總戎使碑數十。列立其前。遊北漢者登臨舒嘯。必先於此。而寺僧及巡檢幷不提說。漠然不知有此樓。及至文殊菴。始聞於追來之靑下,荷田。而阻雪不得348_208d更往。噫彼僧檢之一副腔膓。純是塵土鑄成。使吾輩遊洞庭而不登岳陽。入金剛而不見正陽。可恨亦可愧也。


 동문선 제78권
 기(記)
진관사 수륙사 조성기(津寬寺水陸寺造成記)


권근(權近)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은 왕도 정치의 먼저 할 일이요, 물건을 이롭게 하고 생명을 구제하는 것은 불교에서 중히 여기는 바이니, 두 가지가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인(仁)한 마음씨에서 출발하는 것이요, 사랑하고 효도하는 정성으로서 저절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옛날 어진 왕과 밝은 군왕의 도리는, 조상을 높이고 종친을 공경하여서 그 효도를 넓히며, 널리 베풀고 뭇 사람을 구제하여서 그 인(仁)을 넓히니 여기에 의하여 근본에 보답하고 물건을 이롭게 하는 일이 넓다고 하겠다. 불씨(佛氏)의 설(說)에는 말하기를, “사람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고, 그가 지은 선악에 따라 윤회하여 태어나는데, 부처님이 자비를 베풀어, 고생을 없애고 기쁨을 주며 물에 빠져 들어감을 건져 주시니, 산 사람이 부처님을 섬기고 중을 대접하여 복리로 인도한다면 죽은 귀신이 주리다가도 배부를 수 있고 괴롭다가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부처가 되어 길이 윤회의 응보를 면하고, 산 사람도 역시 부유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리하여 효자와 자손(慈孫)에서 우매한 부부까지 모두 휩쓸려 다투어 불도(佛道)로 돌아가지 않는 이가 없고, 혹시라도 믿지 못할까 걱정하여 온 세상이 거침없이 이를 높이고 이를 받드는데 수륙무차평등(水陸無遮平等)의 모임은 더욱 그 법 중에 가장 좋은 것이다. 홍무(洪武) 정축년 정월 을묘일에, 상이 내신(內臣) 이득분(李得芬)과 중 신하 조선(祖禪) 등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내가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조종(祖宗)의 적선에서 나온 것이므로 조상의 덕을 보답하기 위하여 힘쓰지 않아서는 안된다. 또 신하와 백성 중 혹은 국사에 죽고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맡을 사람이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엎어져도 구원하지 못함을 생각하니, 내가 매우 근심한다. 옛 절에도 수륙도량(水陸道場)을 마련하고 해마다 재회(齊會)를 개설하여 조종의 명복을 빌고 또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하니, 너희들은 가서 합당한 곳을 찾아보게 하라.” 하였다. 사흘째 되는 정축일에 이득분 등이 서운관(書雲觀)의 신하 상충(尙忠)ㆍ양달(陽達)ㆍ중 지상(志祥) 등과 함께 장소를 찾아 삼각산에서부터 도봉산(道峰山)까지 둘러보고 복명하여 말하기를, “여러 절 중에 진관사(津寬寺)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고 하니, 여기서 상이 명령하여 도량을 이 절에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선사(大禪師) 덕혜(德惠)ㆍ지상 등을 명하여, 중들을 소집해서 공사를 진행하게 하였는데 내신(內臣) 김사행(金師幸)이 더욱 힘썼다. 그 달 경진일에 역사를 시작하였으며 2월 신묘일에 상이 친히 와서 구경하고, 3단(壇)의 위치를 정하였으며 3월 무오일에도 거둥하여 구경하였다. 가을 9월에 이르러서 공사가 끝났다. 3단이 집이 되었는데 모두 3칸이며 중ㆍ하의 두 단은 좌우쪽에 각각 욕실(浴室) 3칸이 있고, 하단 좌우쪽에는 따로 조종의 영실(靈室) 8칸씩을 설치하였다. 대문ㆍ행랑ㆍ부엌ㆍ곡간이 갖추어지고 시설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모두 59칸인데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
이 달 24일 계유에 상이 또 친히 구경하시고 명하여 신(臣)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적어 후세에 보이라.”고 하였다. 신 권근이 삼가 들으니, 인륜의 도는 효도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군왕의 덕도 역시 효도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조종 제사의 예법과 존하 법전은, 군왕으로서 근본을 보답하는 효도가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그러나 성인의 마음으로는 아직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여, 하늘을 짝하여 교(郊)에 제사드리고 황제를 짝하여 명당(明堂)에 모시는 데까지 이르니 그 존숭하는 것이 극진하다고 할 것이다. 공손히 생각하니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하신 바탕과 인효(仁孝)하신 덕으로 천명을 받들어 국가를 창건하시니 공은 조종에 빛나고 은택은 온갖 물건에 끼쳤는데 선조를 받드는 생각이 주야로 더욱 정성스러웠다. 하늘에 배향하는 제사를 이미 극진히 하고 부처에 귀의하는 마음이 또한 간절하여 우리 조종의 하늘에 계신 영혼으로 친히 부처의 복을 받고, 묘한 인과(因果)를 증험할 수 있게 하며 주인 없는 귀신까지도 모두 그 이로운 은택을 입게 하시니, 성효(誠孝)에 감동하는 바가 지극하고 극진하다. 이 마음을 미루어서 만물에 미치되 친한 데에서 먼 곳으로, 어둔 곳에서 밝은 곳으로 하여 금일부터 무궁토록 전한다면 그 공덕의 큼과 혜택의 원대함을 어찌 쉽게 측량할 수 있겠는가.


동사강목 제6하
기해년 목종 2년(송 진종 함평 2, 거란 성종 통화 17, 999)


추7월 진관사(眞觀寺)를 지었다.
태후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진관사의 옛터는 개성부 남쪽 용수산(龍首山)에 있다

동10월 왕이 호경(鎬京)에 거둥하였다.
【안】 환궁한 때가 어느 달 어느 날이라는 것은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다. 이하도 같은 예(例)다.
죄수를 사면하고 기로(耆老)를 위문하였으며, 호경에는 1년분의 조세를 감해 주고, 경유한 주현에는 반년분의 조세를 감해 주었다.
○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왕을 가책(加冊)하였다.
왕을 책봉하여 상서령(尙書令)으로 삼았다.
○ 일본인이 귀순하였다.
일본인 도요미도(道要彌刀) 등 20호(戶)가 귀순하므로, 그들을 이천군(利川郡)에 살게 하였다.
○ 송에 사신을 보내어 조근(朝覲)하였다.
이부 시랑 주인소(朱仁紹)가 사명을 받들고 송에 가니, 황제가 특별히 그를 불러서 만나 보았다. 그 자리에서 주인소는 우리 나라 사람이 중국의 풍속을 사모하고 있으나 거란에게 견제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술하니, 황제는 조서를 주어 돌려보냈다.
【안】 《문헌통고》 사예고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송(誦)이 왕위에 오르자 일찍이 병교(兵校) 서원(徐遠)을 보내와서 문안하였는데, 거리가 멀어서 조정의 덕음(德音)이 오래도록 미치지 못하였었다. 함평(咸平 송진종(宋眞宗)의 연호) 3년(1000)에 그 신하 이부 시랑 조지린(趙之遴)이 아장(牙將) 주인소에게 명하여 등주(登州)에 가서 탐정하게 하였는데, 주장(州將)이 이 사실을 아뢰자, 상(上)은 특별히 주인소를 불러서 만나 보았다. 그 자리에서 주인소는 ‘우리 나라 사람이 황제의 교화를 사모하고 있으나 거란에게 견제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술하니, 이에 송(誦)에게 전함(鈿凾)과 조서를 주되 그로 하여금 가지고 가게 하였다.”


○ 고려조 탄연(坦然)의 시에, “한 칸 방 어찌 그리 너무도 고요한가, 일만 인연 모두 적막하네. 길은 돌 틈으로 뚫고 가고, 샘은 구름 속에서 새어나네. 밝은 달 처마 끝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숲 속에서 일어나네. 누가 저 스님[上人]따라, 고요히 앉아 참 즐거움 배우려나.” 하였다.
진관사(津寬寺) 삼각산에 있다.
○ 권근의 〈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은 왕도 정치의 먼저 할 바이요, 물건을 이롭게 하고 창생을 구제하는 것은 불교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인(仁)한 마음의 발동으로써 사랑하고 효도하는 정성이 자연 그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전의 덕이 높은 황제와 명철한 군왕의 도는 조(祖)를 높이고 종(宗 조상(祖上))을 공경하여 그 효도를 넓히며, 은혜를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여 그 인을 넓혀서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 지극하고, 물건을 이롭게 하는 것이 넓다고 할 것이다.
불가[佛氏]의 말에는, 사람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고 그가 한 일이 선하고 악함에 따라서 바퀴처럼 돌아 태어나게 되는데, 부처님은 자비를 베풀어서 고생을 없애고 기쁨을 주며 그 빠지는 것을 건져줄 수 있으니, 살아있는 이가 만일 부처님을 섬기고 중을 대접하여 죽은 이를 좋은 길로 인도한다면 죽은 이의 혼이 아귀(餓鬼)가 되었다가도 배부를 수 있고 괴롭다가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부처가 되어 길이 돌고 도는 보응(報應)을 면하며 살아 있는 이도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 여기서 효자 자손(慈孫)에서 우부(愚夫) 우부(愚婦)에 이르기까지 휩쓸려서 불도로 돌아가지 않는 이가 없고, 혹시라도 미치지 못할까 하여 온 세상이 물결처럼[滔滔] 불도를 높이고 이것을 받드는데 수륙 무차평등(水陸無遮平等)의 모임은 그 법 중에서도 제일 성대한 것이다.
홍무(洪武) 정축년(태종 6년) 정월 을묘일에 주상께서 내신(內臣) 이득분(李得芬)과 중[沙門] 신(臣) 조선(祖禪) 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내가 국가를 맡아 다스리게 된 것은 오르지 조종(祖宗)의 적선[積慶]에 의하여서이니, 조상에 대한 보답을 위하는 일이라면 힘쓰지 않는 것이 없다. 또 생각하니, 신하와 백성들이 혹은 나라 일에 죽고 혹은 스스로 운명하였는데, 주관하여 제사드릴 이가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쓰러져도 구원하지 못하니, 내가 매우 민망스럽게 여긴다. 옛 절에 수륙도량(水陸道場)을 마련하고 해마다 베풀어서 조종의 명복을 빌고 또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하니, 너희들이 가서 자리를 찾아 보라.’ 하였다. 사흘째 되는 정축일에 득분 등이 서운관(書雲觀) 신(臣) 상충(尙忠)ㆍ양달(陽達), 중 지상(志祥) 등과 함께 삼각산에서부터 도봉산(道峯山)까지 보고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여러 절들이 있지만 진관사(津寬寺)만큼 좋은 데가 없습니다.’ 하니, 이에 주상께서 도량을 이 절에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선사(大禪師) 덕혜(德惠)ㆍ지상(志祥) 등에게 명하여, 중들을 소집해서 공사를 시행하게 하였는데, 내신 김사행(金師幸)이 더욱 힘을 들였다. 그달 경진일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2월 신묘일에 주상이 친히 왕림하여 세단(壇)의 위치와 차례를 정하였으며, 3월 무오일에 또 행차하여 보았다.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는데 세 단은 모두 집을 3칸씩 지었으며, 중단과 하단 좌우에는 또 각각 목욕실 3칸 있고, 하단 좌우에는 따로 조종의 영실(靈室) 8칸씩을 설치하였다. 대문ㆍ행랑ㆍ부엌ㆍ곳간이 갖추어져 시설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모두 합하여 59칸이며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그 제도에 맞았다.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이 또 친히 보시고, 정축일에 명하여 신 근(近)을 불러, ‘그 시종을 적어서 후세에 보여 주게 하라.’ 하였다.
신 근이 가만히 들으니, 인륜의 도는 효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며, 군왕의 덕도 효보다 큰 것이 없다 하니, 조종 제사의 예의와 추모 숭봉하는 법전은, 군왕으로서 근본을 보답하는데 무엇이 효보다 더하리요. 그런데 성인의 마음은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하늘을 짝하여 교(郊)에서 제사드리고 상제를 짝하여 명당(明堂)에 임하시니, 높여 받드는 일이 극진하다 할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하신 자질과 인효(仁孝)하신 덕으로 천명을 받들어 국가를 창건하시니, 공은 조종조에 빛나고 은택은 만물에 덮였으며, 선조를 받드는 마음이 주야로 더욱 정성스러웠다. 하늘을 짝하는 제사가 이미 극진하고 부처에 귀의(歸依)하는 마음이 또한 간절하여 우리 조종의 하늘에 계신 영혼으로 불기(佛記)를 받고 묘과(妙果)를 깨달아 얻을 수 있게 하며, 그 은택이 주인 없는 귀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로운 은택을 입게 하시니, 성효(誠孝)의 감동하는 바가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 이 마음을 미루어 물건에도 미치며 친근한 데에서 소원한 데에 이르고, 어두운 데에서 밝은 데에 나아간다면, 금일부터 무궁한 후일에 이르기까지 그 공덕의 큼과 이택(利澤)의 영원함을 어찌 쉽게 측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2편
한성부(漢城府)


【건치연혁】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는데,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취하여 성을 쌓고,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蓋鹵王) 때에 이르러서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도성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성을 나가 달아나다가 해를 당하고,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으로 옮겨 도읍하였다. 후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한산에 이르러 국경을 설정하고, 18년에 북한산주(北韓山州) 군주(軍主)를 임명하였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고, 고려조 초기에 또 양주(楊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초에 10도(道)를 정하고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둘 때에, 좌신책군(左神策軍)이라 하여, 해주(海州)와 더불어 좌우 2보(輔)를 삼아서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으며, 현종(顯宗) 때에는 안무사(安撫使)로 고쳤다가, 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하여 양광도(楊廣島)에 예속시켰다. 문종(文宗) 때에 승격시켜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삼아, 유수 1명ㆍ부유수 1명ㆍ판관(判官) 1명을 두고 이웃 고을 백성들을 옮겨서 채웠다. 숙종(肅宗) 때에 김위제(金謂磾)가 도선(道詵)의 밀기(密記)에 의하여, “양주에 목멱양(木覓壤)이 있는데 도성(都城)을 건립할 만하다.”고 하면서 남경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청하고, 일자(日者 천문관)ㆍ문상(文象)이 따라서 주장하니, 임금이 친히 와서 살펴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을 명하여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해서 5년 만에 준공하였다. 충렬왕 때는 한양부(漢陽府)로 고치고 윤(尹)을 두었으며, 공양왕 때에는 경기좌도(京畿左道)에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太祖) 3년에, 도읍을 이곳에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쳐서, 경도(京都)의 구장(口帳 호구장부)ㆍ시전(市廛)ㆍ가사(家舍)ㆍ전토ㆍ사산(四山)ㆍ도로ㆍ교량ㆍ구거(溝渠)ㆍ포흠(逋欠)ㆍ부채(負債)ㆍ투구(鬪毆 쟁투와 구타 상해)ㆍ주순(晝巡)ㆍ검시(檢屍)ㆍ거량고실(車輛故失)ㆍ우마낙계(牛馬烙契) 등의 일을 맡게 하여, 판부사(判府事)ㆍ윤ㆍ소윤(小尹)ㆍ판관ㆍ참사(參事) 등의 관직을 두었다. 예종조(睿宗朝)에 판부사를 판윤(判尹)으로 고치고, 윤을 좌ㆍ우윤이라 하고 소윤을 서윤(庶尹)이라고 하였다. 영종 조(英宗朝)에 참군을 고쳐 주부(主簿)로 하였는데 그 밑에 5부(部)가 있었다.

 

【관원】
판윤 1인, 정2품. 좌윤ㆍ우윤 각 1인, 모두 종2품. 서윤 1인, 종4품. 판관 1인, 종 5품. 주1부 2인, 종6품.

 

【이속】
서리(書吏) 52인. 서사(書寫) 1명. 서원(書員) 11인. 사령(使令) 30인.

 

【속사오부】
중부(中部) 정사가 예전에는 본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는데, 후에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으로 옮겼다. 개국 초기에 5부를 설치하여 관내 방리(坊里) 거주인들의 불법(不法) 및 교량ㆍ도로ㆍ반화(頒火)ㆍ금화(禁火)ㆍ이문경수(里門警守)ㆍ집터 측량[家址打量]ㆍ인시 검험(人屍檢驗)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 영(令) 종5품 1인ㆍ도사(都事) 종9품 1인과 이속으로 서원 4인ㆍ사령 8인ㆍ대청직(大廳直) 1인ㆍ군사 2인을 두었다. 관장(管掌)하는 일 및 관원은 다른 부도 같으며 관할하는 구역은 8방(坊)인데, 부방조(部坊條)에 자세하다.
동부(東部) 본부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관할하는 구역은 11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남부(南部) 예전에는 본부의 명례방(明禮坊)에 있었는데, 후에 그 본부 훈도방(薰陶坊)으로 옮겼다. 관할하는 구역은 11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서부(西部) 예전에는 중부 징청방에 있었는데 후에 여경방(餘慶坊)으로 옮겼다. 관할하는 구역은 8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북부(北部) 예전에는 중부 징청방에 있었는데 후에 본부의 관광방(觀光坊)으로 옮겼으며, 또 그 본부의 안국방(安國坊)으로 옮겼다. 관할하는 구역은 10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관부】
중부 징청방은 이조(吏曹) 아래 남쪽에 있는데 개국 초기에 세웠다.
【강역】동쪽으로 양주목(楊州牧) 경계까지 10리, 남쪽으로 과천현(果川縣) 경계까지 10리, 서쪽으로 고양군(高陽郡) 경계까지 10리, 북쪽으로 양주목 경계까지 10리이다.

 

【군명】
남경ㆍ한양ㆍ남평양(南平壤)ㆍ북한산ㆍ양주ㆍ광릉(廣陵).
【부방】무릇 경외(京外)에는 5호(戶)로 1통(統)을 삼아서 통마다 통주(統主)가 있으며, 외방에는 5통마다 이정(里正)이 있고, 면(面)마다 권농관(勸農官)이 있는데, 같은 한 구역이라도 지역이 넓고 호구가 많으면 적당히 증가한다. 서울에는 방리(坊里)마다 관령(管領)이 있다.
중부(中部)
징청방(澄淸坊) 이조 내계(吏曹內契)ㆍ한성부 내계ㆍ한성부 후동계(後洞契)ㆍ호조 내계ㆍ호조 후문계(後門契)ㆍ고례조계(古禮曹契)ㆍ판정동계(板井洞契)ㆍ전함사계(典艦司契)ㆍ변종견계(卞宗堅契)ㆍ두석동계(豆錫洞契)ㆍ비변사계(備邊司契) ○ 이상은 훈국 우영(訓局右營)에 속한다. 수진방(壽進坊) 수진궁 내계(壽進宮內契)ㆍ수진궁 행랑계(行廊契)ㆍ간동계(磵洞契)ㆍ송현계(松峴契)ㆍ제용감 하계(濟用監下契)ㆍ사복시 전계(司僕寺前契)ㆍ사복시 천변계(川邊契)ㆍ개정동계(蓋井洞契)ㆍ상사동계(相思洞契)ㆍ청성군계(淸城君契)ㆍ종현병문계(鍾縣屛門契)ㆍ상어물전계(上魚物廛契). ○ 이상은 훈국 우영에 속한다. ○ 상미전계(上米廛契). ○ 훈국 후영(後營)에 속한다.
견평방(堅平坊) 의금부 내계ㆍ의금부 후동계(後洞契)ㆍ전의감 동계(典醫監洞契). ○ 이상은 훈국 후영에 속한다. ○ 중어물전 일패계(中魚物廛一牌契)ㆍ중어물전 이패계. ○ 이상은 어영청중영(御營廳中營)에 속한다.
장통방(長通坊) 수표교 동변계(水標橋東邊契)ㆍ비파동계(琵琶洞契)ㆍ함평 주인계(咸平主人契)ㆍ광주(廣州) 주인계ㆍ석정동계(石井洞契)ㆍ조세홍계(曹世弘契)ㆍ박계손계(朴戒孫契)ㆍ방종계(方宗契)ㆍ입전계(笠廛契)ㆍ창전계(昌廛契)ㆍ창전 행랑계ㆍ중로계(中路契)ㆍ의성정계(義城正契)ㆍ분전(粉廛) 중로계ㆍ하순원계(河順元契)ㆍ내종계(乃宗契)ㆍ이전계(履廛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禁衛營前營)에 속한다. ○ 백립전계(百笠廛契)ㆍ정만석계(丁萬石契)ㆍ지전계(紙廛契)ㆍ장만호계(張萬戶契)ㆍ장구담계(張九淡契)ㆍ청주 주인계(淸州主人契)ㆍ서천수계(徐千守契)ㆍ염전계(鹽廛契)ㆍ신형손계(辛亨孫契)ㆍ박기수계(朴己守契)ㆍ관자동계(貫子洞契)ㆍ유사익계(兪士益契)ㆍ원주 주인계(原州主人契)ㆍ흑립전계(黑笠廛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서린방(瑞麟坊) 포도청계(捕盜廳契)ㆍ일영대계(日影臺契)ㆍ고색정계(古索井契)ㆍ계아전계(鷄兒廛契)ㆍ사기전계(砂器廛契)ㆍ박정계(朴井契)ㆍ전옥내계(典獄內契)ㆍ전옥후동계(典獄後同契)ㆍ종루서변계(鐘樓西邊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관인방(寬仁坊) 대사동 일패계(大寺洞一牌契)ㆍ대사동 이패계ㆍ대사동 삼패계ㆍ대사동 사패계ㆍ충훈부(忠勳府) 내계.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경행방(慶幸坊) 시전계(市廛契)ㆍ한원서변계(漢源西邊契)ㆍ한원동변계ㆍ궁내계(宮內契)ㆍ오순덕계(吳順德契)ㆍ사거리계(四巨里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정선방(貞善坊) 비로전계(非老廛契)ㆍ임기손계(林己孫契)ㆍ김만년계(金萬年契)ㆍ수문동계(水門洞契)ㆍ고병조계(古兵曹契)ㆍ돈녕부 상계(敦寧府上契)ㆍ돈녕부 하계ㆍ파자전계(把子廛契)ㆍ하미전계(下米廛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대묘동계(大廟洞契)ㆍ의전일계(衣廛一契)ㆍ의전 이계. ○ 이상은 어영청 우영에 속하는데, 방내 백성들에게서 매달 전생서(典牲署)에서 기르는 소의 먹이 쌀겨[糟糠] 18석을 거두게 하였다. 숙종조(肅宗朝) 무인년에 감하여 8석 11두로 하고, 돈으로 대신내면 4냥 2전 7푼이 되는데, 매 석의 값이 5전이다.
동부(東部)
숭교방(崇敎坊) 성균관계(成均館契)ㆍ숭교 일계(崇敎一契). 이상은 어영청 전영에 속한다. ○ 열성조(列聖朝)에서 현관(賢關)을 우대하기 때문에, 순라졸과 금부 이속이 감히 반촌(泮村 성균관이 있는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연화방(蓮花坊) 연화동계ㆍ북 이계(北二契). ○ 이상은 어영청 전영에 속한다. ○ 종묘동계(宗廟洞契)ㆍ연 일계(連一契)ㆍ연 삼계ㆍ금중계(金衆契)ㆍ중로계(中路契). ○ 이상은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 천변계(川邊契)ㆍ분륙계(分六契)ㆍ연 이계.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건덕방(建德坊) 어의동계(於義洞契)ㆍ건덕방계. ○ 이상은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창선방(彰善坊) 창선방계ㆍ동학동계(東學洞契). ○ 이상은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 창선 이리계(彰善二里契)ㆍ동학내계(東學內契)ㆍ소천변계(小川邊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방내(坊內)에 오사인동(五舍人洞)이 있으니, 곧 유자빈(柳自濱)이 살던 곳이다. 자빈의 아우 자한(自漢)ㆍ자분(自汾)과 그 손아래 매부 김겸광(金謙光)ㆍ신중거(辛仲琚)가 모두 의정부의 사인(舍人)이 되었기 때문에 인하여 동명(洞名)이 된 것이다.
숭신방(崇信坊) 숭신방계. ○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이하는 성 밖에 속한다.
인창방(仁昌坊) 인창방계. ○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성외(城外) 제기리계(祭基里契)ㆍ전농리계(典農里契)ㆍ벌리계(伐里契)ㆍ중량동계(中梁洞契)ㆍ능동계(陵洞契)ㆍ가오리계(加五里契)ㆍ장위리계(長位里契)ㆍ안암동계(安岩洞契)ㆍ우이계(牛耳契)ㆍ미아리계(彌阿里契)ㆍ청량리계(淸涼里契)ㆍ수유촌계(水踰村契). ○ 이상은 어영청 전영에 속한다. ○ 왕십리역계(往十里驛契). ○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 신설계(新設契)ㆍ답십리계(踏十里契)ㆍ마장리계(馬場里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왕십리 사계(私契). ○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방내 백성들에게서 매달 예전 사축서(司畜署)에서 기르던 고양(羔羊)의 먹이 쌀겨[糟糠] 값 6냥을 거둔다.
남부(南部)
낙선방(樂善坊) 금위영창계(禁衛營倉契). ○ 금위영 전영(前營)에 속한다. ○ 와유두리계(瓦有豆里契). ○ 어영청 우영(右營)에 속한다. 진소리계(眞梳里契)ㆍ왜관동계(倭館洞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성명방(誠明坊) 석교 상계(石橋上契)ㆍ석교 하계.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연성위계(蓮城尉契). ○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훈도방(薰陶坊) 주자동계(鑄字洞契)ㆍ정승계(政丞契)ㆍ박정계(朴井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죽전동계(竹廛洞契)ㆍ혜민서계(惠民署契)ㆍ하돌지방계(下乭之坊契)ㆍ묵정동계(墨井洞契)ㆍ이현계(泥峴契)ㆍ저전동계(苧廛洞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태평방(太平坊) 한수견계(韓守堅契)ㆍ보십내계(甫十內契)ㆍ보십외계ㆍ구리현계(仇里峴契)ㆍ선산계(善山契)ㆍ하홍문계(下紅門契)ㆍ수하동 허허병문계(水下洞虛虛屛門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광통방(廣通坊) 동행랑계(東行廊契). ○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군기시 월변계(軍器寺越邊契). ○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모전계(毛廛契)ㆍ손복동계(孫福洞契)ㆍ대다방 북변계(大多坊北邊契)ㆍ소다방 남변계(小多坊南邊契)ㆍ소다방 북변계ㆍ옹대리문계(瓮垈里門契)ㆍ성천계(成川契)ㆍ서행랑 상계(西行廊上契)ㆍ서행랑 하계ㆍ소천변계(小川邊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 방 안에 보은단동(報恩緞洞)이 있으니 곧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이 살던 곳이다. 순언은 호협(豪俠)하고 의를 좋아하였다. 젊었을 때 명(明) 나라 서울에 가서 일세의 미인을 보고자 하여 수백 냥의 은을 가지고 기생촌[花房]으로 가서 제일가는 명기(名妓)를 찾았는데, 한 여자가 있어 생김생김이 절세가인인데 소복(素服)을 입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괴이하게 여겨서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첩은 원래 사천(四川) 사람이며 아버지가 서울 와서 벼슬하여 관직이 주사(主事)에 이르렀는데 객중(客中)에 연이어 부모님을 여의고, 또 한 형 마저 잃어서 세 상사를 지금 권장(權葬 임시 매장)하여 두었는데, 고향으로 모셔다 장사를 치를 길이 없어서 부득이 화류계에 나와 몸을 팔아서라도 장사를 치르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순언이 묻기를, “일찍이 다른 사람을 만난 일이 있느냐?”하니, 대답하기를, “오늘 처음 나왔기 때문에 아직 몸을 더럽히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순언이 가엾게 여겨서 곧 가지고 갔던 은 천 냥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이면 영구를 모시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몸을 깨끗이 가지고 돌아가 장사를 지낸 다음 사족(士族) 가문으로 잘 시집가거라. 내가 만일 네게 다른 생각이 있어서 이것을 준다면 의사(義士)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결의(結義)하여 누이동생을 삼고 돌아오니, 그 여인이 은혜에 감명하여 뼛속 깊이 새기며 순언의 성명을 물어서 알고 인하여 은을 팔아서 반구(返柩)하여 장사지냈다.
그 후 시집가서 상서(尙書) 석성(石星)의 부인이 되었는데, 그 은혜를 갚고자 하여 해마다 자신이 누에치고 손수 비단을 짰는데, 비단 첫 머리에는 보은단(報恩緞)이라는 세 글자를 수놓았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해 하고 우리나라 사신이 갈 때마다 반드시 순언이 오는가를 탐문하였다. 순언이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를 따라 명 나라 서울에 가게 되었을 때, 석 상서가 그때 예부시랑(禮部侍郞)이었는데 곧 그가 맡아하는 일이었으므로 쉽게 일을 다하였다. 하루는 석 상서가 순언을 초청하여 집으로 가서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대접하였는데, 한 성장(盛粧)한 부인이 뜰 아래에 나와서 배례하고 이어 당 위로 올라와서 잔을 드리는 것이었다. 순언이 깜짝 놀라서 달아나 피하려 하니, 시랑이 말리며 잔을 받게 하고 이어 자세하게 사실의 전말을 말하여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강을 건너려 하는데 사람이 와서 시랑 부인의 친필 서신과 예단(禮單)ㆍ보은단 수십 필 및 기타 진귀한 물품을 수없이 받들어 드리며, 순언이 안 받을까 염려하여 강가에 두고서 가니 순언이 부득이 가지고 돌아왔으며, 일을 성공한 공으로 광국훈공(光國勳功)에 책정되어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지고 지중추(知中樞) 벼슬을 주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사실로 인하여 순언이 살던 마을을 이름해서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하였다.
후에 임진왜란 때에는 석성이 병부상서[本兵]가 되어 우리나라에서 전후 주청(奏請)하는 병기와 군량 등을 힘써 주장하여 극진히 돌보아주어서 우리나라의 재조(再造)의 공적을 이루게 하였는데, 이것은 그 부인의 내조(內助)의 공에 힘입은 바가 많다고 한다. 지금은 잘못 전하여 미장동(美墻洞)이라 한다.

명례방(明禮坊) 장악원 내계(掌樂院內契). ○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명례동계ㆍ부계(部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남산동(南山洞)에는 훈국(訓局) 마병(馬兵)이 무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호현방(好賢坊) 호현동계ㆍ장흥동계(長興洞契)ㆍ송현계(松峴契)ㆍ의산위계(宜山尉契)ㆍ본궁내계(本宮內契)ㆍ소공동계(小公洞契)ㆍ부월변계(部越邊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서소문 월변계. ○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이간병문계(二間屛門契). ○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명철방(明哲坊) 수구문내계(水口門內契)ㆍ어영창계(御營倉契). ○ 이상은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남소문동계(南小門洞契)ㆍ쌍이문계(雙里門契)ㆍ청녕위계(靑寧尉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둔지방(屯之坊) 서빙고 일계ㆍ서빙고 이계ㆍ지어둔계(之於屯契)ㆍ미서계(尾署契)ㆍ이태원계(梨泰院契)ㆍ동파계(東坡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전생서 내계(典牲署內契)ㆍ전생서 외계.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이하는 모두 성 밖이다.
두모방(豆毛坊) 중촌리계(中村里契)ㆍ신당리계(新堂里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전관(箭串) 일계 ㆍ전관 이계. ○ 이상은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신촌리계(新村里契)ㆍ수철리계(水鐵里契) ㆍ두모포계(豆毛浦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한강방(漢江坊) 몽뢰정계(夢賚亭契)ㆍ한강계ㆍ주성리계(鑄成里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 방내 백성들에게서 전생서(典牲署)의 쌀겨 25석을 거두었는데, 무인년에 감하여 14석 3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7냥 7푼이다.
서부(西部)
여경방(餘慶坊) 신문내계(新門內契). ○ 훈국 전영에 속한다. ○ 장생동계(長生洞契)ㆍ두석동계(豆錫洞契)ㆍ선공감 내계(繕工監內契)ㆍ해풍군계(海豐君契)ㆍ동령동계(東嶺洞契)ㆍ서학동계(西學洞契)ㆍ서학 내계ㆍ모전계(毛廛契)ㆍ도자동계(刀子洞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적선방(積善坊) 야주현계(夜珠峴契)ㆍ당피동계(唐皮洞契)ㆍ필전계(筆廛契)ㆍ공조후동계(工曹後洞契)ㆍ사역원계(司譯院契)ㆍ율학청계(律學廳契)ㆍ도렴동계(都染洞契)ㆍ사헌부 내계(司憲府內契)ㆍ병조 내계(兵曹內契)ㆍ형조 내계(刑曹內契). ○ 이상은 훈국 전영에 속한다. ○ 수성궁월변계(壽城宮越邊契)ㆍ사온동계(司醞洞契)ㆍ중추부 내계(中樞府內契)ㆍ예조 내계(禮曹內契)ㆍ종각계(鐘閣契)ㆍ십자각계(十字閣契). ○ 이상은 훈국 중영에 속한다.
인달방(仁達坊) 분선공감 내계(分繕工監內契)ㆍ사직동계(社稷洞契)ㆍ내수사계(內需司契)ㆍ내행랑계(內行廊契)ㆍ내섬시 내계(內贍寺內契)ㆍ봉상시계(奉常寺契). ○ 이상은 훈국(訓局) 전영(前營)에 속한다. ○ 수성궁 내계(壽城宮內契). ○ 훈국 중영에 속한다. ○ 남사고(南師古)가 일찍이, “사직동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태평의 군왕이 그 방에서 나리라.” 하더니, 선조가 사직동 잠저(潛邸)에서부터 들어가 대통(大統 왕실의 종통)을 계승(繼承)하였다.
양생방(養生坊) 창동계(倉洞契)ㆍ송현계(松峴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태평관계(太平館契). ○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황화방(皇華坊) 서소문 내계(西小門內契)ㆍ취현동계(聚賢洞契)ㆍ소정동계(小貞洞契). ○ 이상은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이 처음에는 황화방 북쪽 언덕에 있었다. ○ 태종 9년에 양주(楊州)로 옮겨 모셨는데, 지금도 이곳을 정릉동이라고 한다.
반송방(盤松坊) 지하계(池下契)ㆍ경영고계(京營庫契). ○ 이상은 훈국 전영에 속한다. ○ 조판부사계(曹判府事契)ㆍ수근전계(水芹田契)ㆍ노첨정계(盧僉正契)ㆍ권정승계(權政丞契)ㆍ청성군계(靑城君契 ). ○ 이상은 훈국 좌영에 속한다. ○ 아현계(阿峴契). ○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인장리계(茵匠里契). ○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차자리계(車子里契). ○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 이하는 모두 성 밖이다.
반석방(盤石坊) 사거리계(四巨里契)ㆍ도저동계(桃楮洞契)ㆍ석교리계(石橋里契)ㆍ조전계(租廛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연지계(蓮池契)ㆍ약전계(藥田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고순청계(古巡廳契)ㆍ서소문 외계. ○ 이상은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미전 상계(米廛上契)ㆍ미전 하계ㆍ성삭주계(成朔州契)ㆍ유판부사계(兪判府事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 이정암(李廷馣)ㆍ정향(廷馨)ㆍ정유(廷)의 3형제가 모두 한림(翰林)을 지냈으므로 그들이 거주하던 곳을 한림동이라 한다.
용산방(龍山坊) 마포계(麻浦契). ○ 훈국 우영에 속한다. ○ 공덕리계(孔德里契)ㆍ토정리계(土亭里契). ○ 이상은 훈국 좌영에 속한다. ○ 옹리 상계(瓮里上契)ㆍ옹리 하계 ○ 이상은 훈국 중영에 속한다. ○ 신촌리계(新村里契)ㆍ사촌리계(沙村里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청파 일계(靑坡一契)ㆍ청파 이계ㆍ청파 삼계ㆍ청파 사계ㆍ청파 오계.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만리창계(萬里倉契)ㆍ동문외계(東門外契)ㆍ어영청창계(御營廳倉契)ㆍ진휼청계(賑恤廳契)ㆍ신창계(新倉契)ㆍ형제정계(兄弟井契)ㆍ탄항계(灘項契)ㆍ곽계(槨契)ㆍ도화동계(桃花洞契). ○ 이상은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윤민신(尹民新)의 집이 청파 작작동(灼灼洞)에 있었는데, 다섯 아들을 공부시켜서 5년 만에 모두 대과 급제(大科及第)하였으므로, 지금도 오자등과(五子登科) 터로 부른다. ○ 곽계는 귀후서(歸厚署)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지금도 신당(神堂)이 있으며, 지금 훈국의 별영(別營)이 역시 곽계 안에 있다. ○ 정종(正宗)이 읍청루(挹淸樓)에 나아가 마을 이름을 물으므로 사실대로 아뢰니, 하교하기를, “산 사람이 사는데, 어찌 관곽(棺槨)으로 이름을 하겠느냐.” 하면서, 도화동 외계로 고쳤다.
서강방(西江坊) 흑석리계(黑石里契)ㆍ율도계(栗島契).ㆍ신정리계(新井里契) ○ 이상은 훈국 중영에 속한다. ○ 신수철리계(新水鐵里契)ㆍ구수철리계ㆍ창전리계(倉前里契)ㆍ하중리계(下中里契)ㆍ수일리계(水溢里契)ㆍ당인리계(唐人里契). ○ 이상은 훈국 우영에 속한다. ○ 방내의 백성들에게서 전생서 쌀겨 56석을 거두었는데 무인년에 감하여 8석 13두로 하고 돈으로 수봉(收捧)한다.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사재감계(司宰監契). ○ 훈국 좌영에 속한다.
의통방(義通坊) 옥정리계(玉井里契)ㆍ후동계(後洞契). ○ 이상은 훈국 좌영에 속한다. ○ 영추문계(迎秋門契). ○ 훈국 중영에 속한다.
준수방(俊秀坊) 준수방계. ○ 훈국 중영에 속한다.
관광방(觀光坊) 관광방계. ○ 훈국 중영에 속한다. ○ 중학 내계(中學內契)ㆍ의정부 내계(議政府內契). ○ 이상은 훈국 우영에 속한다.
진장방(鎭長坊) 진장방계. ○ 훈국 우영에 속한다.
광화방(廣化坊) 광화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양덕방(陽德坊) 양덕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가회방(嘉會坊) 가회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안국방(安國坊) 안국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성외(城外) 합정리계(合井里契)ㆍ망원정 일계(望遠亭一契)ㆍ망원정 이계ㆍ여의도계(汝矣島契)ㆍ세교리계(細橋里契). ○ 이상은 훈국(訓局) 우영(右營)에 속한다. ○ 아현계(阿峴契)ㆍ연희궁계(延禧宮契)ㆍ성산리계(城山里契)ㆍ가좌동계(加佐洞契)ㆍ견산리계(甄山里契)ㆍ신사동계(新寺洞契)ㆍ갈고개계(葛古介契)ㆍ역계(驛契)ㆍ사계(私契)ㆍ불광리계(佛光里契)ㆍ수암리계(水巖里契)ㆍ수생리계(水生里契)ㆍ지서계(紙署契)ㆍ경리청계(經理廳契)ㆍ선혜청계(宣惠廳契)ㆍ양철리계(梁哲里契)ㆍ구리계(舊里契)ㆍ말흘산계(末訖山契)ㆍ홍제원계(弘濟院契). ○ 이상은 훈국 후영에 속한다. ○ 가좌동에 훈국 장막이 있으니 군사들의 무예 시험하던 곳이다. ○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이 수생리에 살았는데, 서재를 넓히고 학문을 강의하였다. 드디어 마을이름을 고쳐서, 물이촌(勿移村)이라 하고, 기문을 지어서 생각하는 바를 표시하였다. ○ 삼남약환계(三南藥丸契)ㆍ해서총약계(海西銃藥契)ㆍ폭백계(曝白契)ㆍ훈조계(燻造契)는 총융청(摠戎廳) 군영 밑으로 옮겨 설치하여 거주하는 백성들이 의지하여 사는 바탕을 삼게 하였다. ○ 방내의 백성들에게 거두는 예전 사축서(司畜署)의 쌀겨 값이 3냥 3전 3푼이다.
【성씨】 본부 한(韓) 시조는 고려조 고종(高宗) 때의 검교 태자첨사(檢校 太子詹事) 원서(元諝)이다. ○ 또 한 파는 고려조 고종 때의 판사복사(判司僕事) 균(均)이다. ○ 조(趙) 시조는 첨의중서(僉議中書) 지수(之壽)이다. ○ 또 한 파는 전중내급사동정(殿中內給事同正) 원경(元卿)이다. 민ㆍ신(申), 애(艾) 촌성(村姓)이다. 함(咸)ㆍ박(朴)ㆍ홍(洪)ㆍ부(夫)ㆍ최(崔)ㆍ정(鄭) 모두 내성(來姓)이다. ○ 무릇 다른 주에서 와서 사는 자는 성 아래에 그 본적만을 주로 적어둔다. 이(李)ㆍ김(金)ㆍ윤(尹)ㆍ권(權)ㆍ오(吳)ㆍ강(姜)ㆍ허(許)ㆍ장(張)ㆍ임(任)ㆍ서(徐)ㆍ유(兪)ㆍ원(元)ㆍ황(黃)ㆍ조(曹)ㆍ임(林)ㆍ우(禹)ㆍ노(盧)ㆍ정(丁)ㆍ배(裵)ㆍ맹(孟)ㆍ변(卞)ㆍ백(白)ㆍ전(全)ㆍ엄(嚴)ㆍ전(田)ㆍ문(文)ㆍ진(陳)ㆍ길(吉)ㆍ주(周)ㆍ염(廉)ㆍ유(劉)ㆍ양(楊)ㆍ차(車)ㆍ명(明)ㆍ석(石)ㆍ기(起)ㆍ천(千)ㆍ영(靈) 속성(續姓)이다.
【호구】세종(世宗) 10년에는 5부의 호수가 1만 6천 9백 21호에, 인구가 10만 3천 3백 28명이고, 관령(管領)이 46명이며, 성 밑 10리 둘레의 호수는 1천 6백 1호에, 인구가 6천 44명이고, 관령이 15명이었다. 선조(宣祖) 39년에는 5부의 원래 호수가 1만 2천 9백 65호였다, 인조 26년에는 5부의 호수가 1만 66호에 인구는 9만 5천 5백 69명이었다. 효종(孝宗) 8년에는 5부의 호수가 1만 5천 7백 60호에 인구가 8만 5백 72명이었다. 현종(顯宗) 10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3천 8백 99호에 인구가 19만 4천 30명이었다. 숙종(肅宗) 4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2천 7백 40호에 인구가 16만 7천 4백 6명이었다. ○ 43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8천 3백 56호에, 인구가 18만 5천 8백 72명이었다. 경종(景宗) 4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5천 8백 44호에 인구가 14만 7천 7백 72명이었다. 영종(英宗) 2년에는 5부의 호수가 3만 2천 7백 47호에, 인구가 18만 8천 5백 97명이었다. ○ 29년에는 5부의 호수가 3만 4천 9백 53호에 인구가 17만 4천 2백 3명이었다. ○ 44년에는 경성ㆍ외방의 도합 호수가 1백 67만 9천 8백 65호에 인구가 7백만 6천 2백 48명이었다. 정종(正宗) 원년에 5부의 호수가 3만 8천 5백 93호에 인구가 19만 7천 9백 57명이었다. ○ 10년에 5부의 호부가 4만 2천 7백 86호에 인구가 19만 9천 1백 27명이었다. ○ 태종조(太宗朝)에 연호법(煙戶法 호별 등급)을 정하였는데, 서울 안 현재 관직의 1ㆍ2품이 상호(上戶)가 되고, 3ㆍ4품이 중호가 되고 5ㆍ6품이 하호가 되며, 그 아래의 참외(參外 6품 이하)가 하하호가 되고, 서민 및 전직 각 품의 사람들은 각각 그 품계에 따라 차별하였다. 외방은 남녀 15명 이상의 집이 상호가 되고, 10명 이상이 중호가 되고, 5명 이상이 하호가 되며, 1ㆍ2명의 식구로 호(戶)를 이루지 못한 자는 3호를 합하여 1호를 삼았다. ○ 경성 외방에 모두 5호로 1통(統)을 삼고, 통마다 통수(統首)가 있어서 통내의 일을 맡아보며, 방(坊)마다 관령(管領)이 있다. ○ 호적은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 마다 정한 해에 고쳐 정리하여 한성부에 보관한다. ○ 남자 장정은 16세 이상이면 호패(號牌)를 차는데, 동ㆍ서반의 관원 및 내간(內官 궁중관원)의 2품 이상은 아패(牙牌)를 차고, 3품관 이하 및 삼의사(三醫司)와 잡과(雜科)에 합격한 사람은 각패(角牌)를 차고, 생원ㆍ진사는 황양목패(黃楊木牌), 유품잡직(流品雜職)과 사서인(士庶人)ㆍ서리(書吏)ㆍ향리(鄕吏)는 소목방패(小木方牌)를 차고, 공사천인가리(公私賤人假吏)는 대목방패(大木方牌)를 차고, 군사들은 그대로 요패(腰牌)를 찬다.
【풍속】 신의를 숭상하고, 유술(儒術)에 돈독하다 《함허자(涵虛子)》. 천성이 유순(柔順)하다 《후한서(後漢書)》.
【관제】 내명부 빈(內命婦嬪) 정1품. 교명(敎命)이 있는 자는 품계가 없다.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媛) 정4품. 숙원(淑媛) 종4품. 상궁(尙宮) 이하는 궁인(宮人)의 관직에 속한다. 상의(尙儀) 모두 정5품. 상복(尙服)ㆍ상식(尙食) 종5품. 상침(尙寢)ㆍ상공(尙功) 정 6품. 상정(尙正)ㆍ상기(尙記) 종6품. 전빈(典賓)ㆍ전의(典儀)ㆍ전선(典膳) 정7품. 전설(典設)ㆍ전제(典製)ㆍ전언(典言) 종7품. 전찬(典贊)ㆍ전식(典飾)ㆍ전약(典藥) 정8품. 전등(典燈)ㆍ전채(典彩)ㆍ전정(典正) 종8품. 주궁(奏宮)ㆍ주상(奏商)ㆍ주각(奏角) 정9품. 주변치(奏變徵)ㆍ주우(奏羽)ㆍ주치(奏徵)ㆍ주변궁(奏變宮) 종9품. ○ 세자궁의 양제(良娣) 종2품. 양원(良媛) 종3품. 승휘(承徽) 종4품. 소훈(昭訓) 종5품. 수규(守閨) 이하는 궁인(宮人)의 관직에 속한다. 수칙(守則) 모두 종6품. 장찬(掌饌)ㆍ장정(掌正) 종7품. 장서(掌書)ㆍ장봉(掌縫) 종8품. 장장(掌藏)ㆍ장식(掌食)ㆍ장의(掌醫) 종9품. ○ 외명부(外命婦)ㆍ공주(公主) 왕녀 중 적실(嫡室) 소생. 옹주(翁主) 왕녀 중 서생(庶生). 부부인(府夫人) 왕비의 어머니, 정1품. 봉보부인(奉保夫人) 대전(大殿)의 유모, 종1품. 군주(郡主) 세자의 딸, 적실 소생. 정2품. 현주(縣主) 세자의 딸, 서생. 정3품. ○ 종친 처(宗親妻)ㆍ부부인(府夫人) 정1품, 대군의 아내. 군부인(郡夫人) 정1품, 왕자 군의 아내. 군부인(郡夫人) 종1품의 아내. 현부인(縣夫人) 정ㆍ종2품의 아내. 신부인(愼夫人) 당상관 정3품의 아내. 신인(愼人) 정ㆍ종3품의 아내. 혜인(惠人) 정ㆍ종4품의 아내. 온인(溫人) 정ㆍ종5품의 아내. 순인(順人) 정6품의 아내. ○ 문무 관원 명부(命婦)의 예에 따라 작(爵)을 봉한다. ○ 문무관 처(文武官妻)ㆍ정경부인(貞敬夫人) 정ㆍ종1품. 정부인(貞夫人) 정ㆍ종2품. 숙부인(淑夫人) 당상관 정3품. 숙인(淑人) 정ㆍ종3품. 영인(令人) 정ㆍ종4품. 공인(恭人) 정ㆍ종5품. 의인(宜人) 정ㆍ종6품. 안인(安人) 정ㆍ종7품. 단인(端人) 정ㆍ종8품. 유인(嬬人) 정ㆍ종9품.
【동서반관계】무릇 직함(職啣)은, 먼저 품계요 다음이 관청이요 다음이 직위이다. 품계가 높고 직위가 낮으면 행(行)이라 하고, 품계가 낮고 직위가 높으면 수(守)라고 하는데, 행ㆍ수라는 글자는 관청 이름 위에 놓는다.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議政).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 국구(國舅)ㆍ종친(宗親)ㆍ의빈(儀賓). ○ 종친은 현록대부(顯祿大夫)ㆍ흥록대부(興祿大夫)요, 의빈은 유록대부(綏祿大夫)ㆍ성록대부(成祿大夫)이다. 보국숭록대부 종1품 숭록대부ㆍ숭정(崇政)대부 종친은 의덕(宜德)ㆍ가덕(嘉德)이요, 의빈은 정덕(靖德)ㆍ명덕(明德)이다. 정2품 정헌(正憲)대부ㆍ자헌(資憲)대부 종친은 숭헌(崇憲)ㆍ승헌(承憲)이요. 의빈은 봉헌(奉憲)ㆍ통헌(通憲)이다. 종2품 가의(嘉義)대부ㆍ가선(嘉善)대부 종친은 중의(中義)ㆍ소의(昭義)요, 의빈은 자의(資義)ㆍ순의(順義)이다. 당상 정3품 통정(通政) 대부 동반(東班). 절충장군(折衝將軍) 서반(西班). 종친은 명선(明善)이요, 의빈은 봉순(奉順)이다.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동반(東班). 어모장군(禦侮將軍) 서반. 종친은 창선(彰善)이요, 의빈은 정순(正順)이다. 종3품 중직(中直)대부ㆍ중훈(中訓) 대부 동반. 건공장군(建功將軍)ㆍ보공장군(保功將軍) 서반. 종친은 보신(保信)ㆍ자신(資信)이요, 의빈은 명신(明信)ㆍ돈신(敦信)이다. 정4품 봉정(奉正)대부ㆍ봉렬(奉列)대부 동반. 진위(振威)장군ㆍ소위(昭威)장군 서반. 종친은 선휘(宣徽)ㆍ광휘(廣徽)이다. 종4품 조산(朝散)대부ㆍ조봉(朝奉)대부 동반. 정략(定略)장군ㆍ선략(宣略)장군 서반. 종친은 봉성(奉成)ㆍ광성(光成)이다. 정5품 통덕랑(通德郞)ㆍ통선랑(通善郞) 동반. 과의교위(果毅校尉)ㆍ충의교위(忠毅校尉) 서반. 종친은 통직랑(通直郞)ㆍ병직랑(秉直郞)이다. 종5품 봉직랑(奉直郞)ㆍ봉훈랑(奉訓郞) 동반. 현신교위(顯信校尉)ㆍ창선교위(彰善校尉) 서반. 종친은 근절랑(謹節郞)ㆍ신절랑(愼節郞)이다. 정6품 승의랑(承議郞)ㆍ승훈랑(承訓郞) 동반. 돈용교위(敦勇校尉)ㆍ진용교위(進勇校尉) 서반. 종친은 집순랑(執順郞)ㆍ종순랑(從順郞)이다. 종6품 선교랑(宣敎郞)ㆍ선무랑(宣務郞) 동반. 여절교위(勵節校尉)ㆍ병절교위(秉節校尉) 서반. 정7품 무공랑(務功郞) 동반. 적순부위(迪順副尉) 서반. 종7품 계공랑(啓功郞) 동반. 분순부위(奮順副尉) 서반. 정8품 통사랑(通仕郞) 동반. 승의부위(承義副尉) 서반. 종8품 승사랑(承仕郞) 동반. 수의부위(修義副尉) 서반. 정9품 종사랑(從仕郞) 동반. 효력부위(効力副尉) 서반. 종9품 장사랑(將仕郞) 동반. 전력부위(展力副尉) 서반. ○ 종2품 이상은 동ㆍ서반의 품계가 같다. ○ 지금 임금 2년에 종친ㆍ의빈은 모두 동반의 품계를 따르게 하였다.
【잡직계】 정6품 공직랑(供職郞)ㆍ여직랑(勵職郞). 종7품 근임랑(謹任郞)ㆍ효임랑(効任郞). 정7품 봉무랑(奉務郞). 종7품 승무랑(承務郞). 정8품 면공랑(勉功郞). 종8품 부공랑(赴功郞). 정9품 복근랑(服勤郞). 종9품 전근랑(展勤郞).
【사관계】 정5품 통의랑 도무(通議郞都務). 종5품 봉의랑 장부(奉議郞掌簿). 정6품 선직랑 교부(宣職郞校簿). 종6품 봉직랑 감부(奉職郞勘簿). 정7품 희공랑 전사(熙功郞典事). 종7품 주공랑 장사(注功郞掌事). 정8품 공무랑 관사(供務郞管事). 종8품 직무랑 급사(直務郞給事). 정9품 계랑 참사(啓郞參事). 종9품 시사랑 섭사(試仕郞攝事). ○ 붙임. 녹과(祿科) 매달 요미[散料]를 전달에 나누어 준다. 제1과(科) 정1품. ○ 쌀 2석 8두, 콩 1석 5두. ○ 대군(大君)은 봄 석 달에 한 섬씩을 더 준다. 제2과 종1품. ○ 쌀 2석 2두, 콩 1석 5두. 제3과 정2품.○ 쌀 2석 2두, 콩 1석 5두. 제4과 종2품 . 쌀 1석 11두, 콩 1석 5두. 제5과 당상관 정3품. ○ 쌀ㆍ콩 1석 5두. ○ 이상은 25일에 나누어 준다. 제5과 당하관 정3품. ○ 쌀 1석 5두, 콩 1석 2두. 제6과 종3품. 쌀 1석 5두, 콩 1석 2두. 제7과 정ㆍ종4품. ○ 쌀 1석 2두, 콩 13두. 제8과 정ㆍ종5품. ○ 쌀 1석 1두, 콩 10두. ○ 이상은 26일에 나누어 준다. 제9과 정ㆍ종6품. 쌀 1석 1두, 콩10두. 제10과 정ㆍ종7품. ○ 쌀 13두, 콩 6두. ○ 이상은 27일에 나누어 준다. 제11과 정ㆍ종8품. ○ 쌀12두, 콩 5두. ○ 28일에 나누어 준다. 제12과 정9품. ○ 쌀 10두, 콩 5두. 제13과 종9품. ○ 쌀 10두, 콩 5두. ○ 이상은 29일에 녹을 나누어준다.
【과제】3년에 한 번씩 시험을 보는데, 전해 가을에 초시(初試)를 보고 이듬해 첫봄에 복시(覆試)를 본다. 전시(殿試)ㆍ문과(文科)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가 보며 무과도 같다.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시험은 통덕랑(通德郞) 이하가 보게 하고, 6품 이상은 생원ㆍ진사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 영물서용(永勿敍用 종신토록 벼슬하지 못함)의 죄를 범한 자가 아니라도, 탐관오리[臟吏]의 아들이나, 재가하고 행실 부정한 여자의 아들 및 손자, 서얼(庶孼)의 자손은 문과와 생원ㆍ진사 시험을 보지 못하며, 본도에 거주하지 않는 자나 조정 관원으로서 현재 직위에 있는 자는 향시(鄕試)를 보지 못하는데, 지방에 파견되었거나 휴가를 얻은 자는 여기에 구애되지 않으며 무과도 같다. 시험 장소는 한두 곳을 설치하여, 시험 보는 이가 시관(試官)과 서로 피하여야 할 경우는 다른 곳에서 보며, 아버지가 복시에 응시한 경우에는 아들이 피하는데 무과도 같다. ○ 음양과(陰陽科) 천문학 시험은 그 학교의 생도 외에는 보지 못한다. ○ 문과는 10년에 한 번씩 중시(重試 급제자의 재시험)가 있는데 당하관이 보며, 인원수 및 시험 방법은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서 정한다. 무과도 같다.
식년(式年) 3년에 한 번씩 시험보는 것이 대비지과(大比之科 대과)가 되는데, 지금은 자ㆍ오ㆍ묘ㆍ유년에 시행하니, 이것을 식년이라 한다.
문과 초시(初試) 인원수는 성균관 시험이 50명인데 두 곳으로 나누어 소속시키며, 한성부 시험이 40명이요, 경기(京圻) 시험의 20명은 한성부 시험에 나누어 보게 한다. 충청도ㆍ전라도 각 25명, 경상도 30명, 강원도ㆍ평안도 각 15명, 황해도 10명, 함경도 13명이다. 제술(製述) 시험은 초장(初場)에 사서의(四書疑) 1편, 논문 1편이요, 중장에는 부(賦) 1편, 표(表)ㆍ전(箋) 중 1편이며, 종장에는 대책문(對策文) 1편이다. 지은 것은 모두 바꾸어서 썼는데 지금은 폐지하였다. 명경(明經) 시험은 삼경 사서(三經四書) 중에서 조(粗)ㆍ약(略 강독하는 시험 성적의 등급인데, 조의 위, 순(純)의 다음이다.) 이상을 뽑는다.
복시(覆試) 인원수는 33명인데 칠서(七書)로 배강(背講 책을 보지 않고 돌아앉아서 읽는 것)하고 그 성적의 통(通)ㆍ약(略)을 계산하여 14분 반이면 뽑는다. ○ 두 시험 장소에서 16명씩 뽑는다.
생획(栍劃) 명경과의 시험 성적 14분 이하의 사람에게 보게 하여 1명씩 뽑는데, 모두 33명을 제술 시험으로 뽑는다.
전시(殿試) 인원수는 직부(直赴)ㆍ병부(並赴)를 합하여 정한 수효가 없으며, 제술 시험으로 뽑는다.
생원초시(生員初試) 인원수는 한성부 2백 명인데, 경기 60명이 나누어 한성부 시험을 보며, 충청도ㆍ전라도 각 90명, 경상도 1백 명, 강원도ㆍ평안도 각 45명, 황해도ㆍ평안도 각 35명이다. 제술 시험은 사경의(四經義) 1편과 사서의(四書疑) 1편이다.
복시(覆試) 인원수는 1백 명인데, 제술 과목은 초시와 같다.
진사 초시(進士初試) 인원수는 생원 시험과 같은데, 부 1편ㆍ시 1편을 제술한다.
복시 인원수는 생원 시험 복시의 인원수와 같으며, 제술은 초시와 같다.
증광(增廣)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혹은 여러 경사가 겹치면 특별히 증광 시험을 설치하되, 경사가 겹친 것이 제일 많은 경우에는 대증광(大增廣)이라고 이름한다.
문과 초시(文科初試) 인원수는 식년 시험과 같으며, 제술 3장(場)도 같은데 강경(講經) 시험은 없다.
복시 인원수는 33명이며 강경은 삼경(三經) 중에서 원하는 한 경으로 하며 조(粗) 이상을 뽑는다. 제술은 초시 시험의 중(中)ㆍ종장(終場)과 같다.
전시 식년 시험과 같다.
생원시ㆍ진사시 초시ㆍ복시의 인원수 및 제술은 식년 시험과 같다.
별시(別試) 중시(重試)의 준례에 의하여 거행하는데, 병년(丙年) 및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한다. 정시(庭試)도 같다.
문과초시 인원수는 병년 별과면 3백 명이요, 기타는 혹 천 명에도 이르는데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서 시행한다. 제술 시험 초장(初場)은 논(論) 1편, 표ㆍ전 중의 1편, 부 1편인데 번갈아 가며 두 제목을 낸다. 종장은 대책(對策) 1편이요, 강경은 삼경(三經) 중 원하는 한 경으로 하여 조(粗) 이상의 성적을 뽑는다.
회시 겸 전시(會試兼殿試) 인원수는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 정하며 제술은 증광전시(增廣殿試)와 같다.
광시(廣試) 국가 경사로 인하여 시행한다.
문과 초시(文科初試) 인원수는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 정한다. 제술(製述)은 부 1편, 표ㆍ전 중 1편이다.
회시 겸 전기(會試兼殿試) 인원수 및 제술은 별시ㆍ전시와 같다.
알성시(謁聖試)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거행하고, 이어 선비를 시험하는 것인데, 초시가 없고 그 날로 발표한다.
문과 인원수 및 제술은 별시ㆍ전시(殿試)와 같다.
중시(重試) 문ㆍ무과가 함께 10년에 한 번씩 보이는데, 당하관이 나가 보며 병년(丙年)마다 시행한다.
문과 인원수 및 제술(製述)은 별시ㆍ전시와 같다.
절일제(節日製) 성균관 서재에 거처하는 유생(儒生)들이 원점(圓點 출석 여부를 표시하는 점)을 찍고 식당에 들어가는데 두 번 식사한 것을 1점으로 잡아서, 유생들간의 제술[泮製]에는 50점, 성균관 시험에는 3백 점에 이르는 사람을 나가 시험보게 한다. ○ 정월 7일 곧 인일(人日)과, 3월 3일, 7월 7일, 9월 9일의 제술을 황감제(黃柑製)라고 하는데, 인원수는 원래 정해 있지 않으며, 수석한 사람은 바로 전시(殿試)에 나가게 하거나 바로 회시에 나가게 하되, 2분(分) 또는 1분의 점수를 주며, 서책ㆍ필묵(筆墨) 등도 상으로 나누어 준다.
도기(到記) 관학(館學 성균관에 설치한 학당)의 유생이나 생원ㆍ진사들이 나가 보며 제술은 절일제의 시험과 같고 강경(講經)은 3경 중 통(通)에 낙점된 이하 중에서 시험하여 뽑는다. 제술에 수석한 사람 및 강경에 수석한 사람은 바로 전시(殿試)에 나가게 하며 봄ㆍ가을로 시행한다.
통독(通讀) 매해 대사성(大司成)이 경향의 유생들을 시험보여 뽑는데, 제술ㆍ강서(講書)를 각 11차로 하며 통한 것을 계산하여, 식년 문과 복시(覆試)를 보게 하는데 인원수는 10명이다. 제술은 부 1편과 표ㆍ전ㆍ논 중의 1편을 보며, 강경은 7서 중에서 자원하는 것으로, 1서를 배송하여 조(粗) 이상의 성적을 뽑는다. ○ 무릇 모든 강경은 모두 배송(背誦)한다.
승보(陞補) 매해 대사성이 사학(四學) 및 지방 유생들을 공부시키고, 시험보는 것을 합하여 12차례 한다. 세초(歲抄 6월ㆍ12월)에 계산하여 식년 생원ㆍ진사 복시를 보게 하는데, 인원수는 12명이며, 제술은 부 1편, 시 1편이다.
사학합제(四學合製) 제술은 승보와 같으며 인원수는 16명인데 그 중 사서(四書)에서 4명, 《소학(小學)》에서 4명이다.
무과 식년ㆍ증광ㆍ초시 시험 장소는 훈련원(訓練院)의 한 곳과 모화관(慕華館)의 두 곳이다. 시험보여 뽑는 인원수는 70명인데, 경상도 30명, 충청도ㆍ전라도 각 25명, 강원도ㆍ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 각 10명이다. 목전(木箭)ㆍ철전(鐵箭)ㆍ기추(騎蒭)ㆍ관혁(貫革)ㆍ기창(騎槍)ㆍ격구(擊毬)ㆍ유엽전(柳葉箭)ㆍ조총(鳥銃)ㆍ편추(鞭芻)ㆍ강서(講書)의 기예(技藝)를 죽 써 놓고 점찍어서 그 중 몇 기예를 시험보여 뽑는다.
복시 인원수는 28명이며 시험보는 기예는 초시와 같다.
전시(殿試) 인원수는 직부(直赴)ㆍ병부(幷赴) 합하여 정한 수가 없으며, 기예는 초시와 같다.
제과(諸科) 시험보여 뽑는 여러 규정이 대략 같다.
잡과 식년 증광ㆍ역과(譯科) 초시 한학(漢學 중국어 통역) 23명, 몽학(蒙學)ㆍ청학(淸學)ㆍ왜학(倭學) 각 4명이다.
복시 한학 13명, 몽학ㆍ왜학 각 2명이다.
의과 초시 18명이다.
복시 9명이다.
음양과(陰陽科) 초시 천문학 10명, 지리학 4명, 명과학(命課學 운명 길흉 화복을 판단 하는 학문) 8명이다.
복시 천문학 5명, 지리학 2명, 명과학 4명이다.
율과(律科) 초시 18명이다.
복시 9명이다.
【의장】 조참(朝參)ㆍ상참(常參)ㆍ조계(朝啓) 모두 흑의(黑衣)를 입는다 종1품 이상 및 기로소(耆老所)의 당상관은 평교자(平轎子)를 타고, 종2품 이상은 초헌(軺軒)을 타며, 당상관은 호상(胡床 걸상) 안롱(鞍籠)을 가진 자가 앞에서 인도하고, 정3품 당하관은 안롱만을 가지게 한다.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의 관원은 갓에 옥정자(玉頂子)로 장식하고, 감찰(監察)은 수정 정자를 장식하며, 한산직(閑散職)의 당상관은 공석 회합이면 사모(紗帽)를 쓴다. 사헌부의 서리(書吏)나 통례원(通禮院)의 서원(書員)이 감찰 및 조하(朝賀 조정 하례) 할 때에는 공복(公服)을 입는다. ○ 무릇 어가(御駕)를 시종하고 조하하는 여러 신하들의 복색은 상복(上服)을 따르며, 임금이 나가 행차할 때에는 모두 공복을 입는다. ○ 시임대신(時任大臣)과 원임대신(原任大臣)ㆍ장신(將臣)이 융복(戎服)과 군복을 입을 때에는 갓에 옥로(玉鷺)를 장식한다.
관(冠) 1품관의 조복(朝服)은 오량목잠(五梁木箴)인데 제복도 같으며, 공복(公服)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평상복에는 사모를 쓴다. 관자(貫子)ㆍ갓끈은 금ㆍ옥을 쓰고, 갓의 장식은 은으로 하는데 대군(大君)도 같으며, 이엄(耳掩)은 주단 초피(貂皮)를 사용한다. 2품관의 조복은 4량(粱)이요, 대사헌(大司憲)은 해태[獬豸] 모양을 붙이고, 집의(執義) 이하는 모두 목잠을 사용한다. 이하도 위와 같음. 당상 3품관은 3량이며, 종친은 6품관에 이르기까지는 생초 초피 이엄(耳掩)을 사용한다. 당하관 정3품 이하로부터 9품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생초 서피(鼠皮) 이엄을 사용하며, 4품에서 6품까지는 2량이요, 7품에서 9품까지는 1량인데, 모두 목잠이다. 제복도 같고 공복엔 복두, 평상복엔 사모이다. 녹사(錄事)는 뿔 있는 평정건(平頂巾)이요, 여러 학당의 생도들은 검은 베 건(巾)을 쓰며, 서리(書吏)는 뿔 없는 평정건, 별감(別監)은 자색 건, 세자궁(世子宮) 하인은 푸른 건을 쓰며, 평상복엔 주황 초립(朱黃草笠)을 쓴다. 궁궐 안의 각 차비(差備 하인)는 푸른 모자, 길 인도하는 자는 자색 건, 나장(羅將)과 조예(皂隸)는 검은 건을 쓴다. ○ 당상관 3품 이상은 오사모(烏紗帽 검은 사모)에 문사각(紋紗角 무늬 있는 사각)이며, 융복(戎服)엔 자립(紫笠)이었는데, 칠사립(漆紗笠)으로 고쳤다. 당하관 3품 이하는 오사모이며, 융복에는 흑립(黑笠)에 수정 갓끈이다. 녹사는 오사모, 수복(守僕)은 검은 건이다.
복(服) 1품관은 붉은 생초의 의상(衣裳)과 폐슬(蔽膝 조복이나 제복을 입을 때 가슴에 늘이는 헝겊)이며, 백사(白紗) 중단(中單 웃옷 속에 있는 소매 넓은 두루마기)에 구름과 학을 수놓은 금고리에 술 있는 띠(雲鶴金環綬)를 사용한다. 제복(祭服)은 푸른 생초 옷에 붉은 생초 하의와 폐슬이고, 중단은 금고리에 술 있는 띠[金環綬] 위와 같음 이며 방심 곡령(方心曲領)이고, 공복은 홍포(紅袍)요, 평상복은 사라 능단(紗羅綾緞)으로 한다. 흉배(胸背)는 대군은 기린(麒麟)이고, 왕자군(王子君)은 자연 광택 있는 문채의 공작(孔雀)이며, 무관은 호표(虎豹) 모양이다. 2품관의 조복ㆍ제복(祭服)ㆍ공복ㆍ상복(常服)은 위와 같은데 흉배는 운안(雲雁)을 수놓았고 대사헌은 해태이며, 무관은 위와 같다. 3품관의 폐슬 이상은 위와 같고, 중단은 수리가 앉아 있는 것을 수놓은 은고리에 술 있는 띠[盤雕銀環綬]이며, 제복은 의상 폐슬이 1품과 같고, 중단은 위와 같으며 백초(白綃)의 방심 곡령은 위의 1품관과 같다. 공복은 정3품은 홍포(紅袍)요, 종3품은 청포(靑袍)이며, 상복(常服)은 당상관은 위와 같다. 흉배는 백한(白鷳)을 수놓았는데 무관은 웅비(熊羆)이다. 4품관의 조복 폐슬 이상은 위와 같으며 중단은 까치를 수놓은 은고리에 술 있는 띠[鍊鵲銀環綬]이다. 제복도 같고, 조복은 백초 방심령(白綃方心領)이요, 공복은 청포이다. 5ㆍ6품은 폐슬 이상은 위와 같으며 중단은 까치 수놓은 구리고리에 술 있는 띠[練鵲銅環綬]요, 제복(祭服)은 같고 조복은 백초 방심 곡령이며 공복은 청포이다. 7품에서 9품까지는 폐슬 이상은 위와 같으며, 중단은 접동새를 수놓은 구리고리에 술 있는 띠[鸂鶆銅環綬]이고 백초 방심 곡령이며 공복은 녹포(綠袍)이다. 녹사는 단령(團領 깃을 둥글게 만든 공복)이고 여러 학당의 생도도 단령이고 유학(儒學)은 청금(靑衿)이고 서리는 단령이며, 별감은 푸른 단령인데 평상복은 직령(直領)이다. 궁궐 안의 각 차비는 직령이며 인로(引路)는 푸른 단령, 나장은 푸른 반비의(半臂衣)이다. 형조와 사헌부의 전옥(典獄)은 검은 단령이며 사간원의 사(士)는 누런 단령이며, 조예(皂隸)는 푸른 단령이다. 공주와 옹주(翁主)의 시종은 초록색을 사용한다. ○ 당상관 이상은 담홍포(淡紅袍)인데 대소 조정 의식에는 현록색(玄綠色) 사단(紗緞)이며 흉배는 운학(雲鶴)을 수놓았는데 무관도 위와 같고, 융복엔 남색 첩리(帖裏)를 입는다. 당하관 3품 이하는 홍포였는데 지금은 폐지되었으며, 대소 조정 의식에는 현록색 저견(紵絹)이고 흉배는 백한이다. 무관도 위와 같은데 융복에는 청현색(靑玄色) 첨리를 입는다. 녹사의 홍단령은 지금 폐지되고 청현색 단령이며, 별감은 홍직령인데, 대소 조정 의식에는 녹색 직령을 입는다. 수복(守僕)은 홍직령이다. ○ 문ㆍ무사ㆍ서인이 모두 푸른 색을 숭상하게 하는데, 대소 인원은 문ㆍ무 직위를 물론하고 표의(表衣)가 앞은 땅 위에서 3촌 떨어지게 하며 뒤는 땅 위에서 2촌 떨어지게 한다. 소매는 길이가 손을 지나고 다시 돌아서 팔목에 이르며 소매통은 넓이가 1척이고 소맷 부리는 7촌이다. 서민(庶民)은 표의가 앞에는 땅 위에서 4촌 떨어지게 하며 뒤에는 땅 위에서 3촌 떨어지게 하고, 소매 길이는 손을 지나며 소매통 넓이는 8촌, 소맷부리는 5촌이다.
대(帶) 1품관의 조복에는 서대(犀帶)요, 제복ㆍ공복ㆍ상복(常服)에도 같으며, 사복엔 붉은실 띠(紅條兒)이다. 정2품관의 조복에는 정삽금(正鈒金)이며 종2품은 소금(素金)인데 제복ㆍ상복도 같다. 공복엔 여지금(荔枝金)이며 사복엔 붉은실 띠이다. 3품관의 조복에는 정삽은(正鈒銀). 종3품은 소은(素銀)이며, 제복과 평상복도 같고, 정3품의 공복에는 여지금, 종3품은 흑각(黑角)이고, 사복에는 붉은실 띠이다. 4품관의 조복에는 소은이며, 평상복도 같고, 공복엔 흑각이다. 5품에서 9품까지의 조복에는 흑각이며, 제복ㆍ공복ㆍ평상복도 같다. 녹사와 여러 학당의 생도들과 서리(書吏)는 실 띠이며 별감과 궁궐 안 각 차비도 실 띠이고, 인로(引路)는 자색 난삼[紫襴]이요, 나장ㆍ조예(皂隸)도 실 띠이다. ○ 왕자가 데리고 다니는 자는 자색 난삼에 놋쇠 패[豆錫牌]를 차고, 의정부(議政府)와 승정원(承政院)의 경연(經筵)에서는 납패(鑞牌)이며, 내각의 인로는 금패(金牌)이다.
홀(笏) 1품에서 4품까지는 조복에 아홀(牙笏)이며, 제복과 공복에도 같고, 5품에서 9품까지는 조복에 목홀(木笏)이며 제복과 공복에도 같다.
패옥(佩玉) 1품에서 3품까지는 조복에 반청옥(燔靑玉)이며 제복에도 같고, 4품에서 9품까지는 조복에 반백옥(燔白玉)이며 제복에도 같다.
말(襪) 1품에서 9품까지 조복에 백포(白布)인데 제복에도 같다.
화혜(靴鞋)1품에서 3품까지는 조복에 흑피혜(黑皮鞋)이며 제복에도 같고 공복엔 흑피화(黑皮靴)이다. 당상관은 평상복에는 금화(金靴)를 신는다. 4품에서 9품까지의 조복과 제복에는 위와 같으며 공복(公服)에는 흑피화를 신는다.
안구(鞍具) 1품에서 9품까지는 대랑피변안(大浪皮邊鞍)에 녹색 언치[䩞]와 단첨보로(段韂甫老)이며 골추륵 삼조수아(骨鞦勒三條垂兒)를 장식한다. 3품관 당상관은 대랑피변안에 녹색 언치이며 종친(宗親)의 3품 이하는 유청색(柳靑色)을 사용하여 골추륵 삼조수아를 장식하고, 기타의 3ㆍ4품은 백록각변안(白鹿角邊鞍)에 이조수아이며, 5ㆍ6품은 백록각 변안에 일조수아이고, 7ㆍ8ㆍ9품은 백록각변안이다. 사족의 의복은 첨리(帖裏) 및 치마[裳]가 13폭을 지나는 일이 없으며, 서인(庶人)의 의복은 9승(升) 포목에 첨리와 치마가 12폭이다. 사족의 초립(草笠)은 50죽(竹)이며, 또 마미립(馬尾笠)에 죽립(竹笠)을 붙인다. 서인은 초립이 30죽이며, 또 죽직립(竹織笠)과 승결립(繩結笠)이 있다.
【공헌】전부고(田賦考) 공제조(貢制條) 끝에 보인다. ○ 경기ㆍ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상도에는 대동법(大同法)을 행하는데, 무릇 서울 관청에 모든 공물(貢物)이 공안(貢案)에 기재되어 있고, 5도(道)에 나누어 배정된 것은, 5도 각 영읍(營邑)의 준비가 백성의 노력에서 나는 것으로 모두 쌀로 만들며, 양서(兩西 황해도 평안도) 지방의 공물 값인 쌀은 호조에서 주관하여 내어주고, 북도(北道)의 공물 값인 마포(麻布)는 각 해당 관청에서 내어준다. ○ 해서(海西 황해도)에서는 상정법(詳定法)을 시행하니 대동법의 규정을 의방(依倣)한 것이다. ○ 종친과 동반(東班)의 6품, 서반의 4품 이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자는 포목이 각각 백저포(白苧布) 3필이며, 동반의 7품 이하와 서반의 6품 이상은 각각 흑마포(黑麻布) 1필씩이다. 서울 안의 무녀(巫女)는 상등은 백저포ㆍ흑저포 각 3필, 중등은 각 2필, 하등은 각 1필이며, 서울 안에 사는 부유한 사람은 각기 백저포ㆍ흑마포 1필씩이다. ○ 석자(席子)ㆍ인삼ㆍ초피(貂皮)ㆍ수달피(水獺皮) 등의 공물이 있다. ○ 무릇 세납이나 공물로 받아들이는 물건은 이듬해 6월까지 상납(上納)하며 제향(祭享)에 진상하는 것 및 제철에 나는 산물(産物)은 모두 그때에 미쳐야 한다. ○ 여러 도의 공물을 지금은 쌀이나 포목으로 상납(上納)하며, 평안도의 공물은 지금 상납이 없는데, 그 값을 호조(戶曹)에서 쌀과 돈과 포목으로 공인(貢人 공물 바치는 계(契)의 계원)에 내어 주어서 방내 백성 중에서 정하여 주인을 삼고, 그 값을 넉넉히 정하여 주어서 예비하였다가 바치게 하며, 원 물건으로 상납하는 것은 제때에 미쳐야 한다. ○ 북도에서 바치는 인삼은 도합 수량이 1백 10근인데 5승(升) 생포(生布)로 대납(代納)한다. ○ 진상하는 포목은 15승에서 10승까지의 물품으로 하는데, 그 중 백저포ㆍ흑마포ㆍ저마교직포(苧麻交織布)는 12승에서 9승까지이며, 면포(綿布)ㆍ백면포(白綿布)는 15승에서 13승까지이다. ○ 별마(別馬)는 상ㆍ중ㆍ하등으로 나누며, 종마(種馬)는 웅마(雄馬)와 자마(雌馬)의 상ㆍ중ㆍ하로 나누고, 왜(倭)와 야인(野人)의 진상하는 것은 대마(大馬)의 상ㆍ중ㆍ하로 나누고 중마의 상ㆍ중ㆍ하로 나누며, 하마의 상ㆍ중ㆍ하로 나눈다. ○ 제주(濟州)의 자제들은 웅마의 상ㆍ중ㆍ하와 자마의 상ㆍ중ㆍ하를 진상하였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선상(選上) 여기(女妓) 1백 50명, 연화대(蓮花臺 나라 잔치 때 추는 춤의 한 가지) 10명, 의녀(醫女) 70명을 3년마다 여러 고을 여종 중에서 연소한 자로 뽑아 올리며, 진연(進宴 국가 경사 때에 궁중에서 열던 잔치)이 있을 때에도 52명을 뽑아 올린다. 의녀는 공부를 마친 후에는 본읍으로 돌려 보내는데 서울 안 각 관청의 여종들 중에서도 뽑는다.
【금제】분경(奔競)하는 자를 금하니, 도목 정사(都目政事 매 해 6월과 12월에, 관리들의 성적을 고과하여 승직과 강등을 결정하는 일) 시행하는 날을 정한 후에, 이조(吏曹)ㆍ병조(兵曹) 당상관의 집과 도목 정사 후 서경(署經 관리의 임명이 있은 다음 대간(臺諫)이 다시 인정 서명하는 일)이 있기 전에 양사(兩司 사헌부ㆍ사간원) 관원의 집에는 동성(同姓) 6촌이나 이성 4촌 및 혼가(婚家)가 아닌데 출입하는 자를 금단(禁斷)하며, 이조ㆍ병조의 여러 장수나 당상 관리(堂上官吏)ㆍ병방 승지(兵房承旨)ㆍ사헌부ㆍ사간원의 판결사(判決事)의 집에는 동성 8촌이나 이성 처가 친척 6촌과 이웃 마을의 사람이 아닌데 출입하는 자는 장(杖) 80을 쳐서 3천 리 밖으로 유배 보낸다. 잡문서를 가지고 다니는 자는 장 1백을 치며, 판매를 금지하는 물건인 활세포(濶細布)ㆍ채문석(彩紋席)ㆍ후지(厚紙)ㆍ초피(貂皮)ㆍ토초피(土貂皮)ㆍ해달피(海懶皮) 등을 몰래 파는 자는 장 1백을 치고 도형(徒刑) 3년에 처하며, 귀중한 철물(鐵物)ㆍ우마(牛馬)ㆍ금은ㆍ주옥ㆍ보석ㆍ염초(焰硝)ㆍ군기(軍器)를 파는 자는 교형(絞刑)에 처한다. 과장(科場)에서 과거 보는 이가 남의 손을 빌려 짓거나 대신 지어주는 자는 모두 장 1백을 치고 도형 3년에 처한다. 일설에는 과거보는 이가 과장에서 책을 가지거나 남의 손을 빌려 짓거나 대신 지어주는 자는 2회의 과거를 못 보게 한다고도 한다. 유생과 부녀자로서 절간에 올라가는 자나 여중이 되는 것도 같다. 조정 관원으로서 내어보낸 궁녀나 수사(水賜 무수리)에게 장가드는 자와 문서를 뜯어서 다시 종이를 만드는 자나 도성 안에서 야제(野祭)를 거행하는 자와 사족(士族)의 부녀자로서 산 속의 물가에서 잔치를 벌여 놀거나 친히 야제(野祭)ㆍ산천ㆍ성황사(城隍祠)ㆍ묘제(廟祭)를 거행하는 자와 과장의 이전(吏典)ㆍ복예(僕隸)로서 사실을 누설하고 연락[交通]하는 자나 이런 일을 보고서도 짐짓 단속[檢飭]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장 50대를 친다. 대소 인원(人員)으로서 홍ㆍ회ㆍ백색의 표의(表衣)와 흰 갓이나 붉은 언치를 사용하는 자거나 술그릇 외에 금은 청화 백자기(金銀靑畫白磁器)를 쓰는 자는 금하며 서인(庶人)의 남녀는 홍자의(紅紫衣)ㆍ자대(紫帶)ㆍ금은 청화 주기(金銀靑畫酒器)ㆍ비단실로 섞어 짠 옷감[交綺]ㆍ옥 마노[瑪瑙]ㆍ호박(琥珀)ㆍ명박(明珀)ㆍ청금의(靑金衣) 및 황동(黃銅)의 말안장 장식(粧飾)ㆍ삽등자(鈒鐙子)ㆍ사피(斜皮)도 함께 금한다. 그러나 수건ㆍ수파(手帕)ㆍ비뉴(轡紐) 같은 종류의 자잘한 물건들은 사라 능단(紗羅綾緞)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금하지 않으며, 혜사피(鞋絲皮)의 종류나 자잘한 장식물 같은 것은 금하지 않는다. 심염회색(深染灰色)의 옷이나 양구(兩具) 백색의 옷이거나 사족의 부녀자ㆍ아동과 서울 기생의 잡종 장식인 금은 주옥이나 정병(正兵)ㆍ서인의 백색 옷은 금하지 않는다. ○ 종친 집의 아내와 딸이나 당상관 집의 어머니ㆍ아내ㆍ딸ㆍ며느리와 음관(蔭官) 집 신부 외에, 방처럼 된 교자를 타는 자거나 사찰(寺刹) 외에 진채(眞彩)를 사용하는 자나 화석(花席)을 사용하는 자와, 주렴 칠기(朱染漆器)를 사용하는 자나 사화봉(絲花鳳) 금은노포화(金銀露布花)를 사용하는 자거나 염초를 사용하는 자와 관사(官舍) 및 당하관 이하 집에서 혼인하는 사람으로서 사라(紗羅)ㆍ능단(綾緞)ㆍ계담(罽毯)을 사용하는 자와 사족의 부녀ㆍ아동이나 서울 기생은 금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사채(私債)를 받는 자는 모두 장 60을 친다. ○ 선비로서 윤리를 문란하게[敗喪]하거나 탐장죄(貪贓罪)를 범한 자나, 사족집 부녀로서 실행(失行)한 자와 다시 세 번 시집간 자는 함께 녹안(錄案)을 만들어서 이조ㆍ병조 및 사헌부와 사간원으로 공문을 보내도록 한다. ○ 경성 안에 무격(巫覡)이 거주하는 자와 여염집에 승니(僧尼)가 유숙하는 자는 논죄(論罪)한다. ○ 이미 혼서(婚書)를 받고서 두 번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여 성혼(成婚)한 자는, 그 주혼자(主婚者)를 논죄하여 따로 살게 한다. ○ 경성 10리 안에 동쪽은 대보동(大菩洞)ㆍ수유현(水踰峴)ㆍ우이천(牛耳川)ㆍ상하벌리(上下伐里)ㆍ장위송계교(長位松溪橋)에서 중량포(中梁浦)에 이르기까지 하천으로 한계를 삼으며, 남쪽은 중량포 전관교(箭串橋)ㆍ신촌(新村)ㆍ두모포(豆毛浦)에서 용산(龍山)에 이르기까지 하천과 강으로 한계를 삼으며, 북쪽은 대보동ㆍ보현봉(普賢峯)ㆍ저서현(猪噬峴)ㆍ아미현(峨嵋峴)ㆍ연서구관기(延曙舊館基)ㆍ대조리(大棗里)에서 석관현(石串峴) 서남쪽 물이 합류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산 등으로 한계를 삼으며, 서쪽은 석관현ㆍ시위동(時威洞)ㆍ사천도관(沙川渡串)ㆍ성산(城山)ㆍ망원정(望遠亭)에서 마포(麻浦)에 이르기까지 하천과 강으로 한계를 삼아서 그 안에 입장(入葬)하는 자는 원릉(園陵)의 수목을 도벌(盜伐)한 형률과 같이 논죄하며, 강제로 시일을 정하여 파 옮기고 능침(陵寢)의 화소(火巢 불의 연소를 방지하기 위하여 미리 불을 놓아 경계를 삼게 한 곳)나 외안 금표(外案禁標) 안에 투장(偸葬)한 자는 사형을 감하여 정배한다. ○ 빈 대궐의 소나무를 몰래 찍은 자는 연한 없이 변방 먼 곳에 정배한다. ○ 경성 10리 안에 소나무를 찍는 죄를 범한 자는 형률에 의하여 죄를 정하며 사산금표(四山禁標) 안에서 나무 뿌리나 잔디 뿌리를 채취한 자나 토석(土石)을 채취한 자는 모두 산 소나무를 벤 준례에 의하여 논죄하며, 함부로 밭갈이한 자는 궁(宮)이나 민가의 언덕을 강제로 차지한 자와 같이 논죄한다. 신무문(神武門) 밖과 면악(面岳) 아래의 흙 파는 곳을 조사[擲奸]하여 엄금한다. ○ 마소의 밀도살 죄를 범하는 자나 경성 안에서 서민이 말을 타는 자는 금하되, 삼의사(三醫司)나 역관(譯官)ㆍ일관(日官)ㆍ사자관(寫字官)ㆍ산원(算員)ㆍ화원(畫員) 등 잡과 출신의 사람 및 아전(衙前)은 금하지 않으며, 녹사와 금군도 금하지 않는다. 성 안에서 구치(驅馳 거마를 빨리 몰고 다니는 일)하는 자는 병조(兵曹)로 잡아다가 곤장을 친다. 잡귀신에 제사지내는 자와 경성 내외의 대소 음사(淫祀)나, 성 밖 10리에서 모여 술마시는 자거나 3인 이상이 안주와 술을 준비하여 가지고 모여 마시는 자는, 맡아 차린 자만을 치죄(治罪)하되, 금군(禁軍)인 경우에는 금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술주정하는 사람이나 승니(僧尼)로서 함부로 도성 안에 들어오는 자나 처녀[童女]로서 여중이 되는 자는 치죄(治罪)하여 환속(還俗)하게 하되, 모두 금단(禁斷)한다. ○ 위로 궁궐 안에서부터 아래로 여염집에 이르기까지 장복(章服 관대를 갖춘 의복)이나 융복(戎服 군복) 외에는 토산(土産 국산)이 아니면 입지 못하는데, 금군이나 호위군관(扈衛軍官)이나 의녀(醫女)와 침선비(針線婢)는 지나친 의복을 금하지 않으며. 사족집 부녀들의 의복은 모두 그 남편의 작품(爵品)에 따라서 하게 한다. 겉에 대단금(大緞錦)을 사용하거나, 수봉차(繡鳳釵)ㆍ금옥차(金玉釵)ㆍ주전가환(珠鈿假鬟)을 사용하는 자는 신부에 한하여서만 금하지 않으며, 사단(紗緞)ㆍ능주(綾紬)는 물론하고 무엇이나 무늬 있는 것은 일체 엄금하는데, 범한 자는 시민(市民)도 모두 같은 형률로 시행한다. 역관이나 장사치는 의주[灣府]에서부터 먼저 목베어 매단 후에 장계하여 알리며, 물건은 목책(木柵) 밖에서 불태운다. ○ 당하관의 말안장에 은실로 새겨 장식한 자나 당하관으로서 교자를 탄 자는 남기률(濫騎律)로 처벌하며, 중관(中官 내시부의 관원들)으로서 교자를 탄 자는 그 관품의 당상ㆍ당하를 막론하고 당하승교(堂下乘轎)의 준례에 의하여 처벌한다. 국상(國喪) 때 풍악치고 기생 데리고 노는 자나 국기정일(國忌正日) 및 치재일(致齋日)에 풍악을 울리는 자를 모두 엄금하고 죄를 다스린다. ○ 시중 가격을 농간질하여 올리는 자와 두승(斗升)을 정한 규격대로 만들지 않는 자나 나무공이로 찧은 나쁜 쌀을 외상(外上)이라고 하며, 억지로 전(廛)보는 사람들에게 파는 자는 평시서(平市署)에서 주관하되, 시정이나 마을의 범금인(犯禁人)을 본서에서 물건을 거두어 놓아주지 말고 형조에 보고하여 죄를 주게 하며, 도고 계방(都庫契房 도매 가게)인 자는 형장을 쳐서 정배한다. 전안(廛案 시전 명부)에 매어 있지 않고 난전(亂廛 노점)을 보는 자는 경조(京兆)에서 주관한다. ○ 여러 군문(軍門)에 속한 군병들의 제조 물품은 난전에 관한 처벌로 시행하지 않는다. ○ 호위청(扈衛廳)에 소속된 난전은 법사(法司 형조와 한성부)에서 바로 처벌을 시행한다. ○ 점포를 잠그고 철시(撤市)하는 자는 그 주모자는 형장을 쳐서 정배하고 모두 금단(禁斷)한다. ○ 삼법사(三法司)인 형조ㆍ사헌부ㆍ한성부에서는 관원이 집에서 금단하지 못하며, 또 어두운 밤에 금단하지 못하며 경성 금표(禁標) 밖에 대하여 금단하지 못하며 난전과 같은 금지 조례 외에는 다른 금지 조례를 지어 내지 못한다. 시각을 생각해서 정하여 넘는 일이 없게 하며 먼저 금지 조례로 거듭 엄중히 당부하여 알려 준 후에 금단하는데 매달 6차례씩 한다. 사시 명절에는 모두 금령중 장 1백을 치는 것은 늦추어준다. 법사의 목패(木牌) 외에 추가로 지패(紙牌)를 내는 일은 일체 엄금하며 감찰이 출패하는 일도 일체 금단한다. ○ 여염집을 빼앗아 드는 자는 도형(徒刑)으로 3년 정배한다. ○ 자기가 제 몸을 판 자도 아내를 판 형률과 같이하며 산 자도 같은 죄로 본다. ○ 화랑 유녀(花郞遊女) 및 무녀(巫女)로서 경성 안에 머물러 있는 자는 모두 적발하여 논죄(論罪)한다. ○ 여자 복색으로 변장하고 남의 집에 출입하는 자는 장(杖) 1백을 쳐서 섬에 정배한다. ○ 집을 헐어버리고 시골로 가는 자를 일체 엄단한다. ○ 각 관청의 관원 및 하인들이 면신(免新)ㆍ벌례(罰禮)ㆍ허참(許參) 등의 일로 재물을 거두는 자는 관리가 재물을 받았으되, 법률을 어기지 않은 것으로 받은 재물을 계산하여 논죄하며, 여러 군문의 장교 및 군교(軍校)가 면신례(免新禮)라 하며 거두어들이는 자는 중한 죄목에 의하여 곤장을 친다. ○ 능원(陵園) 묘소의 나무를 찍었는데도 적발하지 못하면 범인이나 능관(陵官)을 경중을 구분하여 논죄한다.
금화(禁火) 병조ㆍ의금부ㆍ형조ㆍ한성부ㆍ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와 5부(部)의 당직 숙직하는 관원들이 순행하면서 금화한다. 궁궐 안에 화재가 나면 큰 종을 치든가 대신 호각[螺]을 부는데 궁궐에 있는 자는 뛰어가서 구원하되, 장병[將卒]은 당직 장소를 떠나지 않으며, 번에 나간 장병들은 각기 본위(本衛)에, 여러 관청의 관원들은 각각 그 조방(朝房)에 모이며 여러 관청의 인원과 공장(工匠)들과 5부 방리의 사람들과 번에 나간 별감과 각 차비인(差備人)들은 모두 궐문 밖으로 가서 대령한다. ○ 여러 관청을 모두 5부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구화패(救火牌)를 주는데, 그 부 안에서 불이 나면, 병조ㆍ형조ㆍ한성부ㆍ의금부ㆍ금화사의 관원들이 부속(部屬)의 여러 사람들을 거느리고 달려가서 구원한다. ○ 의금부에서는 망화인 나장(望火人羅將)을 정하며, 사복시(司僕寺)ㆍ군기시(軍器寺)의 종은 항상 종루에 올라가서 망을 보다가 이궁(離宮)이나 관청에서 불이 나면 종을 치며 사가(私家)가 연소(延燒)되어도 종을 친다. ○ 바람이 어지럽게 불면 금화사에서 방리(坊里) 각 호에 목탁을 흔들면서 순찰 경계한다. ○ 금화하는 공사 각처에는 모두 저수하는 구덩이를 만들어 놓고 방목토가(防木土架)와 구화기계(救火器械)를 준비하여 둔다. ○ 궁성과 궁장(宮墻)에서 사면으로 백 자 안에는 인가를 짓지 못하게 하며 창고는 30자로 한정한다. ○ 모든 조문의 금령은 경조ㆍ한성부 이외의 제읍(諸邑)에도 방을 붙여서 널리 알린다.
【요역좌경】종사 묘궁(宗社廟宮) 등 중요한 여러 곳 및 궁방(宮房)이나 전곡(錢穀) 있는 곳과 관청[衙門]이나 큰 거리 복처(伏處 순라군이 지키는 곳)에 좌경군(坐更軍 밤에 파수 서는 군사)이 두 명씩 있는데, 하나는 인가에서 나와 지키며 차례로 돌아가며 수직한다. 대군ㆍ왕자ㆍ공주ㆍ옹주ㆍ대신ㆍ국구(國舅) 및 맹인(盲人)ㆍ독녀로서 장정 없는 자 외에는, 종실 신하의 정1품이라 하더라도 경재(卿宰 재상)의 보국(輔國)ㆍ판서 이하는 모두 부역으로 나온다. 중부에 15처, 동부에 7처, 서부에 26처, 남부에 36처, 북부에 17처이다. 조강가(糟糠價) 중부 방내 백성들에게서 매달 거두는 전생서(典牲署) 가축[牲口]의 먹는 조강이 18석인데, 숙종 무인년에 감하여 8석 11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4냥(兩) 2전(錢) 7푼[分]이니 매석의 값이 5전이다. 동부에서 거두는 예전 사축서(司畜署) 양과 염소가 먹는 조강은 돈으로 6냥이다. 남부에서 거두는 전생서의 조강은 25석인데 무인년에 감하여 14석 3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7냥 7푼이다. 서부에서 거두는 전생서의 조강은 56석인데 무인년에 감하여 18석 13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9냥 3전 2푼이다. 북부에서 거두는 예전 사축서의 조강은 돈으로 대납하면 3냥 3전 3푼이다.
【영선】궁궐은 전연사(典涓司)에서, 공해(公廨 관청 청사)는 각각 그 관청 관원들이 나누어 맡아 간수(看守)하는데, 비가 새거나 헐린 곳이 있으면 공조(工曹)에 보고하여 수리하며, 매해 봄과 가을에 공조에서 순찰하여 그 상황을 위에 아뢴다. 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은 공조의 당하관 각 2명이 나누어 맡아 검찰(檢察)하며 건물ㆍ잡물 등에 대한 문서를 교체할 때에 인계 인수한다. ○ 대궐 안 건물로 관청이 된 곳은 그 관청의 관리가 군사들의 입직(入直)하는 곳과 체번(遞番)하는 날을 간수하며, 전연사(典涓司)의 관원과 그 부장(部將)이 간심(看審)하며, 만일 파손 훼상하였다든가 유실한 물건이 있으면 공문을 형조로 보내어 심문 조사해서 징수하게 한다. ○ 도성 각 문과 각처 군영(軍營) 경수소(警守所)는 소재지 부(部)의 관리가 인근 거주민들의 간수(看守)를 정한 문서를 교체할 때에 인계 인수하는데, 파손ㆍ훼상 또는 유실한 물건이 있으면 숙직(宿直)한 군사들에게 나누어 받아내며, 간수인은 군사들이 체번하는 날에 번갈아 서로 간심하여 주고받게 한다.
자문감(紫門監)의 9영선(營繕)이 궐내ㆍ궐외 각처의 수리하는 일을 나누어 맡아 한다 시어소(時御所)와 각 전(殿)과 각 당(堂) 안의 각 관청 청사의 수보(修補)와 차비문(差備門) 안의 각종 기구의 제조와 내빙고(內氷庫)의 공상(供上)을 맡아 한다. ○ 9영선은 지금 5소장(所掌)으로 되었다. 1소장은 종묘ㆍ육상궁(毓祥宮)ㆍ연우궁(延祐宮)ㆍ장생전(長生殿)ㆍ독소(纛所)ㆍ종친부(宗親府)ㆍ중학ㆍ돈녕부 조방(敦寧府朝房)ㆍ의빈부(儀賓府)ㆍ홍문관 조방(弘文館朝房)ㆍ정업원(淨業院)ㆍ선잠단(先蠶壇)ㆍ첨성대(瞻星臺)ㆍ목멱당(木覓堂)ㆍ마조단(馬祖壇)ㆍ하순청(下巡廳)이며, 2소장은 사직ㆍ덕흥대원군궁(德興大院君宮)ㆍ광명전 시어소ㆍ요령막(搖鈴幕)ㆍ경복궁ㆍ기로소(耆老所)ㆍ의정부 조방ㆍ돈녕부(敦寧府)ㆍ이조ㆍ동학ㆍ유하정(流霞亭)ㆍ종각ㆍ선농단(先農壇)ㆍ양정재(養正齋)ㆍ하함춘원(下含春苑)ㆍ좌순청(左巡廳)이며, 3소장은 영희전(永禧殿)ㆍ저경궁(儲慶宮)ㆍ선원록청(璿源錄廳)ㆍ대빈궁(大嬪宮)ㆍ남별궁ㆍ봉상시(奉常寺)ㆍ신당(神堂)ㆍ북단(北壇)ㆍ여단(厲壇)ㆍ내자시(內資寺)ㆍ권초각(捲草閣)ㆍ상함춘원(上含春苑)ㆍ중추부(中樞府)ㆍ예조ㆍ서학ㆍ내섬시(內贍寺)ㆍ우모가가(牛毛假家)ㆍ상하당직(上下當直)이며, 4소장은 경모궁(景慕宮)ㆍ경우궁(景祐宮)ㆍ동관왕묘ㆍ경희궁ㆍ12별당ㆍ어의본궁(於義本宮)ㆍ의금부ㆍ의정부 반열조방(議政府班列朝房)ㆍ사간원 조방ㆍ모화관(慕華館)ㆍ남학ㆍ상림원(上林苑)ㆍ승문원(承文院)ㆍ우사단(雩祀壇)ㆍ한강단(漢江壇)이며, 5소장은 성균관ㆍ창의궁(彰義宮)ㆍ융례전(隆禮殿)ㆍ문희묘(文禧廟)ㆍ남관왕묘ㆍ전계대원군궁(全溪大院君宮)ㆍ선무사(宣武祠)ㆍ연서비각(延曙碑閣)ㆍ차동비각(車洞碑閣)ㆍ남단(南壇)ㆍ사한단(司寒壇)ㆍ의정부 중추부 조방ㆍ사헌부ㆍ내각 조방(內閣朝房)ㆍ방마원(放馬苑)ㆍ전생서(典牲署)이다. ○ 무릇 영선하는 곳은 맡은 관원이 본사(本司)의 관원과 함께 나가 검거(檢擧)한다. ○ 궁장(宮墻)은 도성의 준례에 따라 3군문에 나뉘어 속하여 허물어진 곳을 돌로 쌓는다.
【형세】 삼각산이 진산(鎭山)이 되었는데 낙산(駱山)이 왼쪽에 높이 솟고, 모악(母岳)이 오른쪽에 자리잡았으며, 목멱산(木覓山)이 앞에 읍하고 한강[漢水]이 그 앞에 흐른다. ○ 서쪽은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고, 동쪽은 동해[桑暾]에 접하였다. 천지(天池)가 남호(南戶)에 미쳤고 말갈(靺鞨)이 북문이 되었다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있다. ○ 북쪽으로 화산(華山 삼각산)을 의지하여 자리잡고 남쪽으로 한강에 임하였는데 토지가 평탄하고 넓으며 백성이 많고 부유하여 번화하다 《고려사(高麗史)》에 있다.
【산천】한성부의 낭관이 사산(四山)을 나누어 맡아 긴관 금기처(緊關禁忌處)를 검거(檢擧)하며, 성 안의 전수 및 성 밖의 현무(玄武 북방) 주산(主山)에 표(標)를 세운다. 동지긴관(東指緊關)의 외청룡(外靑龍)인 석가호(釋迦岵) 안 사을한(沙乙閑) 남쪽 가에서부터 적유현(狄踰峴)을 지나 광평대군(廣平大君) 집 북호(北岵) 선잠제단(先蠶祭壇)에 이르기까지 선제원(善濟院) 서쪽 건너편 가에서 안암동(安岩洞)ㆍ저방동(猪房洞)ㆍ동대문에 이르기까지에는 모두 산 등 안팎에, 서지긴관(西指緊關)의 외백호(外白虎)인 모화관(慕華館) 뒤에서 사현(沙峴) 사축서호(司畜署岵)를 지나 청파(靑坡) 뒤에 이르기까지에는 산 등 내면(內面)에, 주작(朱雀 남방) 안산(案山)인 남산의 외면과 남대문 성 밖에서부터 전생서(典牲署) 뒤를 지나 벌아현(伐兒峴)에 이르고, 동쪽으로 두모포(豆毛浦) 후산(後山)ㆍ왕십리(往十里) 후산으로 나가고 돌아서 수구(水口)에 이르기까지는 산 등 내외면에 모두 표를 세운다.
삼각산(三角山) 도성 북쪽 30리 양주(楊州) 땅에 있는데 일명은 화산(華山)이요,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평강현(平康縣) 분수령(分水嶺)에서부터 연이어진 봉우리와 첩첩한 묏부리가 잇따라 뻗어와서 서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러 서남쪽에서 도봉산(道峯山)이 되고 또 북산(北山)이 되니, 사실 경성의 진산(鎭山)이다.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가서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으니 곧 이 북산이다. 백운(白雲)ㆍ만경(萬景)을 국망(國望)이라고도 하고, 인수(仁壽)의 세 봉우리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세종이 규표(圭表)를 바로할 때에, 세조 및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다른 유신(儒臣)들을 시켜서 이 산의 보현봉(普賢峯)에 올라가 해의 출입하는 곳을 관찰하게 하였는데, 돌길이 위험하고 그 아래가 한량없이 깊으니 안평대군 이하는 눈이 아찔하고 다리가 떨려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지만, 세조는 걸어가기를 나는 듯이 하며, 순식간에 올라가고 내려오니, 보는 이들이 절찬 탄복하면서 따를 수 없다고 여겼다. 만경봉이 동쪽으로 굽어 돌아서 석가(釋迦)ㆍ보현ㆍ문수(文殊) 등의 여러 봉우리가 되었는데, 보현봉의 갈라진 산기슭이 곧 도성의 주맥(主脈)이기 때문에 총융청(摠戎廳)에서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고 주관하여 보축(補築)하였다. 문수봉의 동쪽 가지가 형제의 두봉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구준봉(狗蹲峯)ㆍ백악산(白岳山)이 되며, 문수봉의 서쪽 가지가 칠성봉(七星峯)이 되고, 거기서 두 갈래로 나뉘어 떨어져서 나한(羅漢)ㆍ증봉(甑峯)ㆍ혈망(穴望)ㆍ의상(義相)의 여러 봉이 되어 중흥 수구(重興水口)에 이르며, 한 가지가 서쪽으로 달려서 승가사(僧伽寺)의 비봉(碑峯)과 불암 향림사(佛巖香林寺)의 후봉인 백운봉(白雲峯)이 되며, 서쪽으로 돌아서는 영취(靈鷲)ㆍ원효(元曉)의 두 봉이 되어 중흥 수구에 와서 멈춘다. ○ 우리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에 일찍이 이 산에 올라 시를 짓기를, “손 내밀어 덩굴 붙들며 푸른 봉우리 올라가니, 한 암자 높게도 백운 중에 누워 있네, 눈앞의 보이는 곳 다 우리 땅이라면, 오월(吳越) 강남(江南)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리.” 하니, 그 넓은 마음 큰 도량을 언어로 형용할 수 없다. ○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이 있다. ○ 고려 정종(靖宗) 원년에 적석정(積石頂)에 운석(隕石)이 있었다. 예종(睿宗) 원년에 이 산의 부아봉(負兒峯)이 무너졌으며 2년에도 무너졌다. 희종(熙宗) 6년에 산의 중봉(中峯)이 무너졌으며, 공민왕(恭愍王) 23년에도 중봉이 무너졌다. 신우(辛禑) 원년 6월에 크게 비가 와서 국망봉이 무너졌으며, 우리 조정 선조 30년에 산중에서 소리가 우레처럼 났다. ○ 기우제(祈雨祭)에는 초차(初次)에 당상 3품관이, 6차에 근시관(近侍官)이 드리며, 기설제(祈雪祭) 재차에는 근시관이 드린다.
백악(白嶽) 경복궁성 북쪽에 있는데 도성(都城)이 그 위로 지난다. 공극산(拱極山)이라고도 한다.
응봉(鷹峯) 백악 동쪽에 있는데 도성이 그 위로 지난다. 봉 아래 후원주맥(後苑主脈) 보토처(補土處)에는 매해 봄가을로 병조ㆍ공조ㆍ한성부의 당랑관(堂郞官)이 어영대장과 더불어 간심(看審)한다.
인왕산(仁王山) 백악 서쪽에 있는데 도성이 그 위를 지난다. 필운산(弼雲山)이라고도 하니 명(明) 나라 사신이 고쳐 이름지은 것이다. ○ 영천(靈泉)이 산허리 바위 아래에서 나는데 돌 짬에서 솟아나며 맛이 달고 맵지 않고 또 매우 차지도 않다. ○ 현종(顯宗) 임자년에 성매죽(成梅竹 삼문)의 신주를 인왕산 무너진 언덕 사이에서 얻었는데, 분칠한 쪽에는 성삼문 신주(成三問神主) 다섯 자만을 썼으며 움푹한 곳에는 무술생 외손 박호(戊戌生外孫朴壕) 일곱 자가 쓰여져 있었다. 봄에 홍주(洪州)에 있는 공의 구기(舊基)로 보내어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게 하였다.
타락산(酡酪山) 도성(都城) 안 동쪽에 있는데 도성이 그 위로 지난다. 응봉(鷹峯) 동쪽에서 뻗어 돌아 이 산이 되었는데 동쪽으로 안암(安巖)ㆍ고암(鼓巖)에 이른다.
목멱산(木覓山) 곧 도성의 남산이며 열경산(列慶山)이라고도 하는데 도성이 그 위를 지난다. 인왕산에서부터 낮게 평평해지며 남쪽으로 뻗어 오다가 동쪽으로 휘어지며 솟아올라 이 산이 된다. 한 기슭이 동쪽에서 대소(大小)ㆍ설마(雪馬)의 두 고개가 되고, 왕십리현(往十里峴)ㆍ동현(東峴)에 이른다. ○ 본조 개국 초기에 동요(童謠)가 있어 이르기를, “저 남산(南山)에 가서 돌을 떼내는데 정(釘) 남은 것 없다.” 하더니, 얼마 안가서 남은(南誾)ㆍ정도전(鄭道傳)이 사변으로 주형(誅刑)을 당하였다. 남(南)은 남은을 말함이요, 정(釘)은 정(鄭)과 음이 같으니 도전(道傳)을 말한 것이며, 여(餘) 자의 해석이 남은의 음과 서로 같으니 남(南)ㆍ정(鄭)이 모두 없어진다는 말인 것이다. ○ 기우제(祈雨祭)의 초차(初次)는 당하 3품관이, 6차는 근시관(近侍官)이 드리며, 기설제(祈雪祭) 재차는 근시관이 드린다.
선암(禪巖) 세상에서들 전하기를, “한양 도성(漢陽都城)을 쌓을 때에 바위가 중이 장삼 입은 모양 같은 것이 인왕산 모퉁이에 서있어 선암(禪巖)이라 불렀다.” 한다. 무학(無學)은 성 안으로 들여보내려 하고 정도전은 성 밖으로 내 보내려 하였는데, 태조가 그 이유를 물었다. 도전이 아뢰기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면 불교(佛敎)가 성하고 성 밖으로 내보내면 유교가 흥합니다.” 하니, 명하여 도전의 말을 좇게 하였는데, 무학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후로는 중들이 선비의 책보를 지고 따르게 되었다.” 하였다.
비봉(碑峯) 《택리지(擇里志)》에 이르기를, “우리 태조가 도읍터를 정할 때에 무학이 백운대(白雲臺)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萬景臺)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가서 비봉에 이르러 보니, 한 비석에 크게 ‘무학왕심도차(無學枉尋到此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른다)’라는 여섯 글자가 있으니, 이것은 곧 도선(道詵)이 세운 것이다.” 하였다.
모악(母嶽) 도성 서쪽에 있는데, 안현(鞍峴)이라 하기도 하고 기봉(岐峯)이라 하기도 한다. ○ 인왕산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어 추모현(追慕峴)이 되고, 이 산이 된다. 한 기슭이 남쪽으로 나가 약현(藥峴)ㆍ만리현(萬里峴)이 되고, 용산(龍山)에 이르러, 한 기슭이 서남쪽에서 계당치(鷄堂峙)가 되고, 와우산(臥牛山)에 이르러 잠두봉(蠶豆峯)이 된다. ○ 지봉(芝峯 이수광)이 말하기를, “민간에서들 이르기를, ‘부아암(負兒巖)이 집을 나가는[出世] 형상이 있기 때문에 이 산을 모악(母岳)이라 이름하였으며, 남쪽을 벌아령(伐兒嶺)이라 하니 대개 막으려 하다가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벌아라 한 것이다.’ 하였는데, 서쪽을 병시현(餠市峴)이라고 하니 이것은 나가려는 아이를 떡을 주어 달래어 멈추려 한 것이다. 옛날 이름지은 것이 모두 깊은 뜻이 있다.” 하였다. ○ 인조 갑자년 2월에 역적 이괄(李适)이 도성을 차지하였는데, 도원수 장만(張晩)과 부원수 이수일(李守一)과 방어사 정충신(鄭忠信) 등이 안현(鞍峴)에 진을 치고 힘써 싸워 적을 물리쳤다.
추모현(追慕峴) 모화관(慕華館) 서북쪽에 있는데 본래 이름은 사현(沙峴)이다. 영종(英宗) 45년에 명릉(明陵)에 역사가 있으니 왕이 친히 이 고개에 와서 바라보고, 명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녹반현(綠礬峴) 추모현 북쪽에 있다. 석벽(石壁)에서 자연동(自然銅)이 나는데, 뼈 부러진 이들이 많이 캐어다 사용한다. ○ 당 나라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한 사람이 지키면 일만 사람이 이기지 못할 곳이다.” 하였다.
동망봉(東望峯) 연미정동(燕尾亭洞)에 있는데 영종 47년에 어필로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다. ○ 불우(佛宇) 정업원조(淨業院條)에 자세하다.
계당치(鷄堂峙) 서부(西部)의 기봉(岐峯) 서쪽 기슭에 있다.
와우산(臥牛山) 도성 밖 서쪽 13리에 있는데, 산 남쪽에 광흥창(廣興倉)이 있다.
용산(龍山) 도성 밖 서남쪽 10리에 있는데, 군자감(軍資監)과 훈국(訓局)의 별영(別營)이 있다. ○ 위의 두 산은 모두 한강 가에 있다.
잠두봉(蠶頭峯) 도성 밖 서쪽 10리,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는데, 민간에서 가을두(加乙頭)라고 부르며, 또 용두봉(龍頭峯)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 강희맹(姜希孟)이 서술한 기문이 있다.
설마현(雪馬峴) 둘이 있는데, 목멱산(木覓山) 남쪽에 있는 것을 대설마(大雪馬)라 하고, 동쪽에 있는 것을 소설마라고 한다. 민간에서는 부어현(夫於峴)이라고 부른다.
가산(假山) 도성 수구 안, 훈련원(訓練院) 동북쪽에 있다. 하나는 물[水] 남쪽에 있고 하나는 물 북쪽에 있는데, 흙을 쌓아 산을 만들어서 지기(地氣)를 기르는 것이다. 영종 경진년에 버들을 양쪽 언덕에 심어서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는데, 지금은 식목소(植木所)라고 하며 어영청(御營廳)이 관할한다. 경모궁(景慕宮) 안산(案山) 및 관현(館峴)과 흥인산(興仁山) 내외의 3곳에 각각 장졸을 배정하여 수호 금양(守護禁養)하는데, 경모궁 패장(牌將)으로 오래 벼슬한 사람이 전임(轉任)한다.
개천(開川) 제소남(齊召南 청(淸) 나라 사람)의 《수도제강(水道提綱 천하의 수도를 총론하였음)》에 이르기를, “왕경(王京) 한양은 동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는데, 동(東) 12도 6분에 극(極) 37도 5분이며, 서쪽으로 강화도(江華道)에 이르는데, 동 9도에 극 37도 4분이다.” 하였다. ○ 백악(白岳)ㆍ인왕ㆍ목멱(木覓)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 도성(都城) 안을 가로 질러서 3수구(水口)로 나가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간다. ○ 수원(水源)이 인왕산 백운동(白雲洞)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자수궁교(慈壽宮橋)를 지나서 옥류동(玉流洞) 누각동수(樓閣洞水) 수원이 인왕산 동쪽에서 나와 모여 남쪽으로 흘러 창의궁(彰義宮) 서쪽에 있는 금청교(禁淸橋)와 사직동(社稷洞)에 있는 종침교(琮琛橋)를 지난다. 오른쪽으로 큰 물이 지나 작은 물과 합하는 것을 ‘과(過)’라 하며, 후에도 이와 같다. 수원이 사직 남쪽 경희궁(慶熙宮) 북쪽에서 나오는 승전색교(承傳色橋)를 지나 적선방(積善坊)에 있는 송기교(松杞橋)에 이르며, 오른쪽으로 수원이 대은암(大隱巖)에서 나와서 경복궁 서쪽으로 들어가 경령지(慶令池)의 물을 합하고, 금청교(禁淸橋) 동남쪽을 지나고, 남금교(南禁僑)를 경유하는 북어수교(北御水橋)를 지나서 꺾여 삼청동(三淸洞) 물 수원이 사동(寺洞)ㆍ수침동(水砧洞) 두 곳에서 나와서 백련봉(白蓮峯) 남쪽에 이르러 합류하며, 장원서(掌苑署) 앞 장생전(長生殿) 다리와 관광방(觀光坊)에 있는 십자각(十字閣) 앞 다리를 지나서 경복궁성 안 동쪽 가의 물과 합하여 중학 앞에 있는 중학교(中學橋)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흘러 혜정교(惠政橋)를 지나는데, 민간에서 말하기를, “관으로 재물 많이 탐한 자를 이 다리 위에서 삶는다.” 한다. 운종가 남교(雲從街南橋)는 민간에서 모전교(毛廛橋)라고 하는데 서린방(瑞麟坊)에 있다. 대광통교(大廣通橋)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곡교(曲橋)의 물을 지난다. 하나는 목멱산(木覓山) 아래 북창동(北倉洞)에서 나와서 숭례문(崇禮門) 안에 있는 수각교(水閣橋)ㆍ황화방(皇華坊)에 있는 전도감교(錢都監橋)ㆍ미장동 동교(美墻洞東橋)를 지나서 동쪽으로 흐른다. 하나는 정릉동(貞陵洞)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군기시(軍器寺) 다리가 되며, 동쪽으로 흘러서 수각교 물과 합하여 소광통교(小廣通橋)가 되어 온다. 하나는 회현동(會賢洞)에서 나와서 동현동(銅峴洞)을 지나 소광통교의 물과 합하여, 태평방(太平坊)에 있는 곡교(曲橋)가 된다. 하나는 명례동(明禮洞)에서 나와서 곡교로 들어가고 동쪽으로 장통교(長通橋)가 되니, 송기교(松杞橋)에서 여기까지 길이가 7백 68척, 넓이가 10여 보(步)이며, 훈련도감(訓鍊都監) 관내가 된다. 왼쪽으로 수원이 대소안국동(大小安國洞)에서 나오는 통운교(通雲橋)를 지나고, 수표교(水標橋)ㆍ하량교(河良橋)를 지나며, 오른쪽으로 수원이 목멱산(木覓山) 북쪽에서 나와서 주자동(鑄字洞) 다리를 경유하여 오는 초전동(草廛洞)을 지나고, 또 오른쪽으로 수원이 목멱산 북쪽에서 나와서 중부동 다리를 경유하여 오는 중부동(中部洞)을 지나서 영풍교(永豐橋)가 되고, 동쪽으로 흘러서 왼쪽으로 이교(二橋) 물을 지난다. 하나는 응봉(鷹峯) 동쪽에서 나와서 북영(北營) 요금문(曜金門) 곁의 수구(水口)를 경유하여 창덕궁 금청교(禁淸橋)로 들어갔다가, 단봉문(丹鳳門) 곁의 수구로 나와서 창경궁 후원으로 들어가며, 금청교의 선인문(宣仁門) 밖 수구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흘러서 연화방(蓮花坊)에 있는 황참의교(黃參議橋)를 경유하여 와서 단봉문 수구의 물과 합한다.
하나는 회동(灰洞)ㆍ제생동(濟生洞)에서 나와서 향교동(鄕校洞)을 경유하여 돈화문(敦化門) 밖 병문(屛門)에 있는 기자교(杞子橋)가 되고, 대묘동(大廟洞)에 이르러 단봉문(丹鳳門) 수구물과 합하여 함께 이교(二橋)로 들어간다. 오른쪽으로 청녕교(靑寧橋) 물의 근원이 목멱산 북쪽에서 나와서 금위영(禁衛營)의 남별영(南別營)을 경유하여 명철방(明哲坊)에 있는 무침(無沈)ㆍ청녕(靑寧)의 두 다리를 지나와서 태평교(太平橋)가 되는데, 민간에서들 마전교(馬廛橋)라고 하며 영종조에 옛 이름으로 회복하였다. 장통교에서 여기까지 길이가 1천 1백 81보, 넓이가 20여 보이며, 금위영 관내이다. 다시 오른쪽으로 수원이 목멱산 북쪽에서 나와서 쌍리문동(雙里門洞)을 경유하는 청교(靑橋)를 지나서 명철방(明哲坊)에 있는 어청교(於靑橋)를 지나며, 또 동쪽으로 흐르는 초교(初橋) 물은 수원이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나오는데, 동반수(東泮水)는 성균관 앞 다리와 식당교(食堂橋)와 비각교(碑閣橋)를 경유하고, 서반수(西泮水)는 집춘문(集春門) 앞 다리를 경유하여 대성전(大成殿) 남문 밖에서 합하며, 남쪽으로 흘러서 관기교(觀旗橋)가 되고, 동쪽으로 흘러서 충락교(忠樂橋)가 되며, 광례교(廣禮橋)에 이르러 흥덕동(興德洞) 물과 합하고, 또 남쪽으로 흘러 오른쪽 응란교(凝鸞橋) 물을 지나서 경모궁(景慕宮) 앞에 있는 장경교(長慶橋)가 되고, 어의동 본궁(於義洞本宮) 앞을 지나고 신교(新橋)를 지나와서 오칸 수문(五間水門)으로 들어간다. 성 밖에 나가서는 수원이 남소문동(南小門洞) 남쪽 가에서 나오는 이칸 수문(二間水門) 물을 지나서 영도교(永渡橋)를 거치는데, 태평교(太平橋)에서 여기까지 길이가 1천 1백 73보, 넓이가 30여 보이고, 장경교(長慶橋)에서 큰 개천 골목에 이르기까지는 길이가 1천 4백 7보, 넓이가 10여 보이며, 모두 어영청(御營廳) 관내에 속한다. 차현(車峴) 동쪽에서 수원이 양주(楊州) 불곡산(佛谷山) 및 벽석현(碧石峴)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녹양역(綠楊驛)ㆍ송계교(松溪橋)로 흘러서 남쪽으로 와서 모이는 중량포(中梁浦)와 모이며, 남쪽으로 흘러 전관교(箭串橋)를 지나고, 서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 ○ 영종 경진년에 오래도록 쳐내지 않았으므로 개천 길이 막혀서 모래가 덮이고 다리가 묻혀, 장마 때가 되기만 하면 그만 넘쳐흐르게 되니 백성을 모집하여 개천을 쳐내게 하였다. 그리고 완공된 다음에는 준천사(濬川司)를 수표교 북쪽 냇가에 설치하고, 양쪽 언덕에 버들을 심고 얽어매어서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계사년에는 고쳐서 돌로 쌓았다.

한강(漢江) 도성 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목멱산 남쪽으로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고 하였다. 신라 때에 북독(北瀆)이라 하여 중사(中祀)로 적혀 있으며, 고려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고 하였는데, 민간에서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근원이 강릉부(江陵府)의 오대산 우통(五臺山于筒)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충주(忠州) 서북쪽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합하고, 원주(原州) 서쪽에 이르러 안창수(安倉水)와 합하고, 양근군(楊根郡)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하며, 광주(廣州) 지경에 이르러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광진(廣津 광나루)이 되고, 삼전도(三田渡)가 되고, 두모포(豆毛浦 두뭇개)가 되며,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흘러서는 노량(露梁)이 되고, 용산강(龍山江)이 되며, 또 서쪽으로 가서 서강(西江)이 되며, 시흥현(始興縣)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며, 양천현(陽川縣) 북쪽에서 공암진(孔巖津)이 되며, 교하군(交河郡)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며, 통진부(通津府)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 처음에는 도승(渡丞)을 배치하여 출입하는 사람들을 기찰하였는데, 후에 별장(別將)으로 고쳤다. 세금을 거두는 관내[字內]는 광주의 압구정(押鷗亭)과 두모포, 독도(纛島 뚝섬)의 몽뢰정(夢賚亭), 한강의 서빙고(西氷庫)이다. ○ 속한 선박은 훈국(訓局)의 배 10척이 있는데 관방조(關防條)에도 보인다. ○ 명(明) 나라 예겸(倪謙)ㆍ기순(祈順)의 기문(記文)이 있다. ○ 선조 21년에 강물이 5ㆍ6일간 핏빛 같았다. ○ 기우제에 초차(初次)는 당하 3품관이, 6차는 근시관(近侍官)이 드리는데 호두(虎頭)를 물 속에 넣으며, 기설제(祈雪祭) 재차는 근시관이 드린다.
노량(露梁 노들) 도성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 처음에는 도승을 배치하여 출입하는 사람을 기찰하였는데, 후에 별장으로 고쳤다. 세금을 거두는 관내는 과천(果川)의 신촌리(新村里)ㆍ사촌리(沙村里)ㆍ곽계(槨契)ㆍ형제정계(兄弟井契)ㆍ마포강(麻浦江)이다. ○ 속한 선박은 금위영(禁衛營)의 배 10척인데 관방조에도 보인다. ○ 강 북쪽 모래사장에 용호영(龍虎營) 및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 3영의 습진(習陣)하는 곳이 있다. ○ 선조 36년에 큰 돌이 물 속에서 언덕 가의 다른 돌 위에 일어섰다.
용산강(龍山江) 도성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고양군(高陽郡) 부원현(富原縣) 땅이다. 경상ㆍ강원ㆍ충청ㆍ경기도 상류의 조운(漕運)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서강(西江)의 한 갈래가 바로 시흥현(始興縣)에서부터 방학동(放鶴洞)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서 양화도에 이르러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되니, 이것이 용산포(龍山浦)이다. ○ 예전에는 10리 장호(長湖)가 되었는데 서쪽으로 염창(鹽倉)이 막히고 모래 언덕이 새지 않으며, 연이 그 가운데에 나서 이름을 용산(蓉山)이라고 하였다. ○ 기우제(祈雨祭)에 재차는 종2품관이, 7차는 정2품관이 드린다.
삼전도(三田渡) 광주 지경에 있는데 도성에서 30리이다. ○ 처음에는 도승(渡丞)을 배치하였는데 후에 별장으로 고쳤으며 속한 관청은 어영청(御營廳)이요, 녹안(錄案)에는 관선(官船)이 3척이다. ○ 삼전도와 신포(新浦) 사이에 상전(桑田)이 있다.
마포(麻浦) 도성 서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용산강 하류이다.
서강(西江) 도성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마포에서 여기까지를 통틀어 서호(西湖)라고 한다. 황해ㆍ전라ㆍ충청ㆍ경기도 하류의 조운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양화도(楊花渡) 곧 서강의 하류이다. ○ 처음에는 도승(渡丞)을 배치하였는데 후에 별장으로 고쳤다. 세금을 거두는 관내는 토정리(土亭里)ㆍ옹리 상하계(甕里上下契)ㆍ현석리(玄石里)ㆍ율도(栗島)ㆍ다인리(多人里)ㆍ하중리(下中里)ㆍ합정리(合井里)ㆍ수파리(水波里)ㆍ망원정 일이계(望遠亭一二契)ㆍ시흥 신정리(始興新井里)이다. ○ 호조(戶曹)의 점검청(點檢廳)이 있다. ○ 선조 24년에 물이 얕아져 배가 통행하지 못하였고, 인조 14년에 또 물이 얕아져서 배가 통행하지 못하였다. 속한 선박은 어영청(御營廳)의 배 10척인데 관방조에도 보인다.
독도(纛島) 혹은 독백(禿白)이라고 하는데 두모포의 상류이다. ○ 강변에 예전에는 호조(戶曹)의 수세소(收稅所)가 있었다. 효종 병신년에 설치하였는데 무릇 각종 목물(木物)이 물 상류에서 내려오는 것은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10분의 1의 세를 받았다.
저자도(楮子島) 도성 동쪽 25리, 삼전도(三田渡) 서쪽에 있다. 고려의 한종유(韓宗愈)가 여기에 별장을 두었는데, 우리 조정의 세종(世宗)이 섬을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으며, 공주의 아들 안빈(安貧) 이후로 대대로 전하여 소유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이 있다. ○ 기우제에 초차는 종2품관이, 7차는 정2품관이 드린다.
두모포(豆毛浦) 도성 동남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동호(東湖)라고 한다. 명종(明宗) 을축년에 두모포 어부가 한 마리 흰 고기를 얻으니 그 크기가 배[船] 같았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고기가 바다에서 멀리 와서 강에 이르러 죽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의 형(衡)자가 행(行) 자와 어(魚) 자로 되었으므로 고기가 죽은 것은 곧 원형이 죽을 징조였다.” 하였다.
입석포(立石浦) 두모포 상류에 있다.
신포(新浦) 광주 지경에 있으며, 도성에서 거리가 27리이다. 한강 물이 넘쳐서 기류(岐流)가 되었는데, 그 정파(正派)가 기류로 옮겨져서 신포(新浦)라고 한다. 가물면 그대로 건너고, 물이 넘치면 두 강이 되며, 저자도(楮子島) 아래에 이르러서는 합하여 하나가 된다.
중종조(中宗朝)에 그 물 형세가 바로 선릉(宣陵)에 부딪히므로, 군사들을 출동시켜 돌을 운반하여 언덕이 무너져 들어간 곳을 막다가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도요연(桃夭淵) 전관교(箭串橋)에 있다.
만초천(蔓草川) 수원이 경성 서쪽 모악(母岳)에서 나와서 성을 돌며 남쪽으로 흐르는데, 반송방(盤松坊)에 있는 혁교(革橋),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는 경영교(京營橋), 소의문(昭義門) 밖에 있는 신교(新橋)ㆍ비교(圮橋),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 염초청(焰硝廳), 청파(靑坡) 남쪽에 있는 주교(舟橋)를 지나 만초천(蔓草川)이 되고, 서남으로 흘러 용산강(龍山江)에 들어간다.
창천(倉川) 도성 서쪽 10리 되는 광흥창(廣興倉) 근처에 있다. 동남쪽으로 흘러서 서강으로 들어간다.
사천(沙川) 수원이 문수봉(文殊峯)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탕춘대(蕩春臺)ㆍ홍제원(弘濟院)을 지나며, 모악을 돌면서 서남쪽으로 흘러 강으로 들어간다.
중량포(中梁浦) 일명 속계(涑溪)라고도 하는데, 도성 동쪽 13리 지점에 있으며, 양주(楊州) 독두천(獨豆川)의 하류이다.
율주(栗洲) 일명 율도(栗島)라고도 하고, 일명 가산(駕山)이라고도 한다. 길이가 7리인데, 경성의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마포(麻浦) 남쪽이다. ○ 상림(桑林)이 있는데 곧 공상(公桑)이며, 약전(藥田)은 지금 내의원(內醫院)에 속하였다. 전의감(典醫監)에 속하였다고도 한다. 모래 섬 중에 늙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세상에서들 전하기를, 고려의 김주(金澍)가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정지】 종묘서(宗廟署)의 우물 하나는 서(署) 안에 있고, 하나는 서 밖에 있다.
성제정(星祭井) 소격서(昭格署) 곁에 있는데, 물이 돌 사이에서 나오며 맛이 매우 맑고 차다. 옛날 초제(醮祭 별에 제사 드리는 것) 드릴 때 사용하였기 때문에 성제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의성위정(宜城尉井) 타락산(駝駱山) 아래 어의동(於義洞)에 있다. 성종조(成宗朝)에 그 우물을 봉(封)하고 길어다가 임금께 진상하였으므로 어정(御井)이라고 하였으며, 후에 의성위에게 하사하였기 때문에 사정(賜井)이라는 두 글자를 우물 돌 위에 새겼다.
미정(尾井)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는데 물의 품질이 매우 좋다.
통정(桶井) 훈련원(訓鍊院) 서남쪽에 있는데, 물의 품질이 가장 좋아서 성 안에 제일이다. 맛이 매우 달고 차며 겨울에는 따스하고 여름에는 차다. 가뭄과 장마에 늘고 줄지 않으며 조정에서 봉하여 어정으로 삼았다.
초정(椒井) 인왕산 아래에 있는데 목욕하면 병이 나았다. 효종조(孝宗朝)ㆍ현종조(顯宗朝)에 모두 여기에 행차하였다.
잠룡지(潛龍池) 이문(里門) 안에 인조의 잠저(潛邸)가 있었는데, 당(堂) 안에 영종(英宗)의 어필 사액(賜額)을 걸어 잠룡지(潛龍池)라고 하였다.
동지(東池)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는데 연꽃을 심었다. 하나는 경모궁(景慕宮) 앞에 있는데 연꽃을 심었다.
남지(南池)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데 연꽃을 심었으며, 연지(蓮池)라고 한다. 민간에서 김안로(金安老)의 집터라고 말한다.
서지(西池)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는데 큰 가뭄에 비를 빌면 영험이 있으며 연꽃을 심었다. ○ 못 가에 옛날에는 반송(盤松)이 있어 수십 보(步)를 덮었는데, 고려 임금이 일찍이 남경(南京 서울)에 행차하였다가 여기서 비를 피하였다. 본조(本朝) 초기에도 그 소나무가 그대로 있어서 반송지(盤松池)라고 하였다. 태종(太宗) 8년에 모화관을 남지(南池)에 닿게 하려다가 오래도록 이루지 못하니, 사헌부에서 제조관(提調官) 박자청(朴子靑)을 탄핵하였다. ○ 못 서쪽 언덕 위에 경기도 중군영이 있다. 천연정(天然亭)을 지었으며 또 원관정(遠觀亭)이 있다.
와암천(臥巖泉) 모화관(慕華館) 곁에 있는데 맛이 매우 상쾌하고 차다.
휴암천(鵂巖泉) 목멱산(木覓山) 아래 삼아동(三丫洞) 위에 있는데, 물의 품질이 달고 차다. 양어소(養魚所) 훈국(訓局)의 양어소는 보제원(普濟院)에 있는데, 착어군(捉魚軍)이 보살펴 기른다. 금위영(禁衛營)의 양어소는 왕십리에 있는데, 군병(軍兵)을 정하여 붕어를 사다가 기른다. 어영청(御營廳)의 양어소는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는데 붕어를 사다가 기른다.
종목소(種木所) 가산(假山) 주(註)에 보인다.
【명승】중흥동(重興洞) 삼각산(三角山) 서남쪽에 있는데 위에 중흥사(重興寺)가 있고 천석(泉石)이 유수(幽邃)ㆍ청절(淸絶)하여 도성 사람들이 놀며 구경하는 곳이 된다. 또 산영루(山映樓)가 있다.
조계동(漕溪洞) 북한산성(北漢山城) 동문 밖에 있는데 7층 폭포가 있다. ○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헐렸다.
탕춘대(蕩春臺) 창의문(彰義門) 밖 삼각(三角)ㆍ백운(白雲) 두 산 사이에 있어, 수석(水石)의 좋은 경치가 있으며 장의사(藏義寺) 옛 터가 있다. 연산군(燕山君) 때에 이궁(離宮)을 설치하고 놀며 잔치하였다. 또 돌 구유를 만들고 궁녀들과 더불어 음란한 짓을 하였다. 그 후에 이궁은 헐리고 조지소(造紙所)를 개천 동쪽에 설치하였다.
북저동(北渚洞) 혜화문 밖 북쪽에 있는데, 동(洞) 가운데 복숭아나무를 벌여 심어서 봄철에 복사꽃이 한창 피면, 도성 사람들이 다투어 나가서 놀며 구경한다. 민간에서는 도화동(桃花洞)이라 부르며, 어영청의 성북둔(城北屯)이 있다. ○ 북사동(北寺洞)이라고도 하며 옛날에 묵사(墨寺)가 있었기 때문에 묵사동(墨寺洞)이라고도 한다. 맑은 시내의 언덕을 따라 주민들이 복숭아나무를 심어서 생활을 한다. 늦은 봄철마다 노는 사람들과 거마(車馬)가 가득 찬다.
안암동(安岩洞) 혜화문 밖에 있는데, 훈국(訓局) 군마의 기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연미정동(燕尾亭洞) 흥인문 밖에 있는데, 훈국 군마의 기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 영풍정(映楓亭)이 있다.
세마평(洗馬坪) 노량(露梁) 북쪽에 있는데 훈국 보군(步軍)이 중순(中旬)마다 기예를 시험하는 곳이 되었다.
산단(山壇) 바깥 남산에 있는데 곧 남단 곁이요, 녹사장(綠莎場) 동쪽이다. 민간에서 단오절마다 나이 젊고 건장한 이들이 편을 나누어, 이곳에서 씨름을 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삼청동(三淸洞) 인왕산 기슭에 있다. (주ㆍ오기(誤記)임) 냇물이 석벽으로 흐르고, 석벽 위에는 삼청동문(三淸洞門) 네 글자를 새겼는데, 감사 이상겸(李尙謙)의 글씨이다. ○ 동문 곁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의 옛 집이 있으며 동(洞) 가운데 또 팔판동(八判洞)이 있으니, 옛날 8판서(判書)가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산청(山淸)ㆍ수청(水淸)ㆍ인청(人淸)하기 때문에 삼청(三淸)이라 하였다.” 한다.
필운대(弼雲臺) 인왕산 아래에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소시에 대 아래 원수(元帥) 권율(權慄)의 집에 처가살이[贅寓]하였으므로 인하여 필운이라 불렀는데, 석벽에 새긴 필운대(弼雲臺) 세 글자는 곧 이백사의 글씨이다. 대 곁 인가에서 꽃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경성 사람들의 봄철 꽃구경은 반드시 먼저 이곳을 손꼽게 되었다.
육각현(六角峴) 필운대 곁에 있는데 대와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 인가가 있는데 담장 둘레가 매우 길기 때문에, 사람들이 만리장성(萬里長城) 집이라고 한다.
옥류동(玉流洞) 인왕산 아래에 있는데 수석의 좋은 경치가 있다. 계겹란(鸂鵊瀾)ㆍ청휘각(淸暉閣)이 있는데, 모두 사암(思巖) 김창협(金昌協)이 이름지은 것이다. 물이 석벽 사이에서 나오며 석벽 위에는 옥류동(玉流洞)이란 세 글자를 새겼다.
전대(殿臺) 삼청동에 있는데, 훈국(訓局)에서 큰 기치(旗幟)를 새로 만들 때 제사드리는 곳이다.
세심대(洗心臺) 인왕산 아래 육상궁(毓祥宮) 뒤에 있는데, 석벽에 세심대(洗心臺)란 세 글자를 새겼다. 꽃나무가 많아서 봄철에는 구경하기에 적당하다. 영종 을묘년에 장헌세자가 탄생하였는데,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 “그대는 노래하고 나는 웃으며 동대(東臺)에 올라가니, 오얏꽃 희고 복사꽃 붉게 일만 나무 피었네. 이런 풍광 이런 즐거움에, 해마다 태평 술잔에 크게 취한다네.” 하였다. ○ 정종(正宗)이 일찍이 임어(臨御 임금이 행차함)하였는데, 그 후에 순조(純祖)ㆍ익종(翼宗) 열성조(列聖朝)도 많이 거둥하였다. 사정(射亭)이 있다.
청풍계(淸楓溪)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동부(洞府)가 그윽하고 깊으며 천석(泉石)이 아름답고 조용하여[窈窕] 놀며 구경할 만하다.
도화동(桃花洞) 북악(北岳) 아래에 있는데 복사꽃이 많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회맹단(會盟壇) 신무문(神武門) 북쪽에 있다.
화개동(花開洞) 안국방(安國坊)에 있는데, 지역이 치우쳐서 술마시며 시 읊기에 적합하다. 이 동리에 옛날 토기도감(土器都監)이 있었기 때문에 변하여 화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포곡(浦谷) 성균관(成均館) 북쪽 산기슭 아래에 있다.
쌍회정(雙檜亭) 창동 앞에 있는데, 석간수(石澗水)를 내려다보고, 단풍나무와 측백나무가 많아서, 가을에 놀며 구경하기에 적합하다.
칠송정(七松亭) 남산 기슭에 있는데, 정자는 없지만 일곱 그루의 소나무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올라가서 먼 곳을 바라보기에 적합하다.
【관방】 탕춘대성(蕩春臺城) 탕춘대 서쪽 수구(水口)에 있다. 숙종(肅宗) 계사년에, “평창(平倉)을 방비ㆍ수호함이 있어야 하겠다.” 하면서 처음으로 한북문(漢北門) [한(漢)은 한(捍)으로도 씀]을 설치하고, 좌우익(左右翼)의 성을 쌓았다. 주위가 1천 1백 10보이며 높이는 10척인데, 좌상 이유(李濡)가 감독하여 쌓았다. 그 안에 총융청(摠戎廳)의 군창(軍倉)과 혜청(惠廳)의 별창(別倉)이 있다. ○ 수문부장(守門部將)은 춘방(春坊) 서리(書吏) 강효원(姜孝元)의 자손이 전교에 의하여 정해 두고 임명된다.
북한산성(北漢山城) 경성 북쪽 30리 삼각산의 온조왕(溫祚王) 옛 터에 있다. 숙종 37년에 성을 쌓았는데, 행궁(行宮)을 짓고 군량과 군기를 저장하여 유사시에 보장(保障)하는 장소로 삼았다. 성은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7천 6백 20보, 여첩(女堞)이 2천 7백 97, 성곽이 1백 21에, 장대 3, 못 26, 우물 99개 소이다. 대문 4, 암문(暗門 누가 없는 성문) 10이며, 안에는 군창(軍倉)과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 3영의 창고가 있다. ○ 창고 7, 큰 절 11, 작은 절 3곳이 있으며, 관성장(管城將)을 배치하고, 숯 1천 1백 석은 동문 안에 묻고, 1천 20석은 용암사(龍巖寺) 앞에 묻어 두었다. 영종 경진년에 대성문(大城門) 길이 도성 주맥(主脈)에 방해된다고 하여 폐쇄하고, 또 3곳의 대남문(大南門)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중흥동 중성(重興洞中城) 중흥사(重興寺) 북쪽 옛 성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천 4백 17척이며, 내성ㆍ외성ㆍ석문(石門)ㆍ석비(石扉)가 있는데,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백제 중엽에 여기에 도읍하였는데, 석문이 곧 그때 궁문이었다.” 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성중에 산이 있는데, 우뚝 높이 솟아 있는 것이 노적 같으므로 민간에서 노적봉(露積峯)이라고 한다. ○ 산성의 수구(水口)가 낮고 넓으므로 돌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척이다.
성북둔(城北屯) 혜화문 밖에 있다. 영종 을유년에 창건하였으며 둔감(屯監)이 있고, 또 환곡미(還穀米) 4백 섬과 돈 2천 냥 가량, 둔의 소 33쌍이 있다.
한강진(漢江鎭) 영종 계유년에 설치하여 훈국(訓局)의 진(鎭)으로 삼았다. 정종 14년에 장용영(壯勇營)으로 이속(移屬)하였다가 순조(純祖) 2년에 다시 훈국에 소속시켰다. 별장이 있는데 본영(本營)의 지구관(知彀官)과 기패관(旗牌官)을 돌아가며 30삭(朔)씩 교대 임명한다. ○ 진선(鎭船)이 15척인데, 그 중에 본진의 것이 8척이요, 동작진(銅雀津)의 것이 1척 이요, 서빙고(西氷庫)의 것이 6척인데, 산천조(山川條)에 보인다.
노량진(露梁津) 숙종 계미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숙종조에는 금위영(禁衛營) 소속이었으며, 정종 14년에 장용영(壯勇營) 주교소(舟橋所)에 이속하고, 주교소에서 별아별장(別牙別將)을 겸하였는데, 파영(罷營)한 후에는 금영(禁營)으로 환속(還屬)하였다. 별장이 있고 초관(哨官) 2명, 기패관(旗牌官) 1명, 명원(名員) 8명이 있다. 아병(牙兵) 1백 24명은 매삭(每朔)마다 10명씩 돌아가며 당직하고, 취고수(吹鼓手) 30명ㆍ기수(旗手) 8명ㆍ취고수(吹鼓手) 10명인데, 환곡미 2천 석과 돈 5천 냥이 있다. ○ 진선(鎭船)이 15척인데, 그 중 본진의 것이 9척이요, 동작진의 것이 6척이다. 또 급수선(汲水船) 2척, 향축배행선(香祝陪行船) 1척이 있는데, 산천조에 보인다.
양화진(楊花鎭) 영종 갑술년에 설치하였는데 어영청(御營廳)에 속하였다. 별장이 있고 아병(牙兵)이 1백 명이며, 환곡미가 2천 석, 전세전(田稅錢)이 8백 20냥, 돈이 3천 냥, 둔우(屯牛)가 33짝인데, 산천조에 있다.
【도로】 도성 안 대로(大路)는 넓이 46척인데,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하며,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이며, 양쪽의 도랑은 넓이 2척인데, 만일 침범하여 차지하고 파낸다든가, 혹 더러운 물건을 버려두는 자는 모두 처벌한다. 본부의 관리 및 관령(管領)이 천(川)ㆍ지(池)ㆍ성(城)ㆍ장(場)을 그 근처 사람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장부를 만들어 두어 간수(看守)하게 한다. ○ 8도의 도로는 명(明) 나라 준례에 의하여,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측량하는데, 자 여섯 치가 한 보(步)가 되고, 3백 60보가 한 리(里)가 되며, 30리가 한 참[息]이 된다. 무릇 제향(祭香)이나 수향(受香)이 있을 때는, 한성부의 관원이 미리 길을 청소한다. ○ 서로(西路)에 기발(騎撥)을 두니 의주(義州)까지 45참(站)이요, 남북로(南北路)에 보발(步撥)을 두니 동래(東萊)까지 35참, 경성(鏡城)까지 59참이다. ○ 서울에서 개성부(開城府)ㆍ죽산(竹山)ㆍ직산(稷山)ㆍ포천(抱川)까지 대로인데, 한 참에 5호(戶) 씩을 배정하며, 서울에서 양근(楊根)까지, 죽산에서 상주(尙州)까지, 진천(鎭川)에서 성주(星州)까지, 직산에서 전주(全州)까지, 개성부에서 중화(中和)까지, 포천에서 회양(淮陽)까지가 중로인데, 3호씩을 배정하고, 기타 소로에는 2호씩을 배정하는데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한성부에서 조사ㆍ검찰한다.
서북으로 의주(義州)에 가는 것이 제1로가 된다 홍제원(弘濟院)과 양철평(梁鐵坪)을 경유한다.

동북으로 경흥부 서수라진(慶興府西水羅鎭)에 가는 것이 제2로가 된다 흥인문(興仁門)과 수유치(水諭峙)를 경유한다.
동으로 평해군(平海郡)에 가는 것이 제3로가 된다 흥인문과 중량포(中梁浦)를 경유한다.
동남으로 동래부ㆍ부산진(釜山鎭)에 가는 것이 제4로가 된다 숭례문과 한강진(漢江津)을 경유한다.
남으로 고성현(固城縣)과 통제사영(統制使營)에 가는 것이 제5ㆍ6로가 된다 두 길로 나뉘는데 한강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5로가 되고, 노량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6로가 된다. 남으로 제주(濟州)에 가는 것이 제7로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남으로 보령현(保寧峴)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에 가는 것이 제8로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쪽으로 강화부(江華府)에 가는 것이 제9로가 된다 양화진(楊花津)을 경유한다.
행행진로(幸行津路) 선릉(宣陵)ㆍ정릉(靖陵)ㆍ장릉(章陵)ㆍ건릉(健陵)ㆍ현륭원(顯隆園)은 모두 노량진을 경유하며, 헌릉(獻陵)ㆍ영릉(英陵)ㆍ영릉(寧陵)ㆍ인릉(仁陵)은 모두 광진(廣津 광나루)을 경유한다.
【교량】구거 교량(溝渠橋梁)은 공조와 한성부에서 조사ㆍ검찰하고 수리ㆍ정리하였는데, 지금은 준천사(濬川司)에 속하였다. 송기교(松杞橋)에서 장통교(長通橋)에 이르기까지는 훈련도감에서, 장통교에서 태평교(太平橋)에 이르기까지는 금위영에서, 태평교에서 영도교(永渡橋)에 이르기까지는 어영청에서, 사산(四山)의 참군(參軍)과 함께 나누어 맡아서 순시(巡視)하며, 모래가 뭉치고 돌이 무너진 곳은 해당 관청에 보고하여 수축하게 한다.
혜정교(惠政橋)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는데 다리 동편에 앙부일영대(仰釜日影臺)가 있다. 《원사(元史)》에 기록된 곽수경(郭守敬)의 법에 의하여 만들었는데, 안에 시각을 새겼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들여다보고 시간을 알게 하려한 것이다. 둘이 있는데, 세종 14년에 처음으로 만들어 설치하였다. 하나는 여기 두고 하나는 종묘 앞 거리에 두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김돈(金墩)의 기문이 있다.
대광통교(大廣通橋) 종루(鐘樓) 남쪽에 있는데 돌난간이 있다.
소광통교 대광통교 남쪽에 있다.
통운교(通雲橋) 민간에서들 철물전(鐵物廛) 다리라고 하는데, 종루 동쪽 대사동(大寺洞) 어귀에 있다.
연지동교(蓮池洞橋) 연근동(蓮根洞)에 있다. 또 통운교 동쪽에 있는데, 민간에서들 이교(二橋)라고 한다.
동교(東橋) 연지동교 동쪽에 있는데, 민간에서들 초교(初橋)라고 한다.
광제교(廣濟橋) 광통교 동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장통교(長通橋) 중부 장통방에 있는데 곧 광제교 동쪽이다. ○ 민간에서는 장창교(長倉橋)라고 한다.
수표교(水標橋) 중부 장통방(長通坊), 장통교 동쪽에 있다. 다리 서쪽 물 가운데 석표(石標)를 세우고,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기고, 또 척촌(尺寸)의 수효를 새겨서 빗물의 얕고 깊음을 알게 하였는데, 높이가 10척이다.
하량교(河良橋) 옛날에는 신교(新橋)라고 하였는데 영표교 동쪽 장통방에 있다. 민간에서들 하량교(河梁橋)라고 하니, 옛날 하남위(河南尉)의 집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하였다.
영풍교(永豐橋) 하량교 동쪽에 있다. 민간에서들 효경교(孝經橋)라고 한다.
태평교(太平橋) 영풍교 동쪽에 있다. 민간에서들 마전교(馬廛橋)라고 한다.
송첨교(松簷橋) 사헌부(司憲府) 서쪽에 있는데, 곧 서부의 적선방(積善坊)이다.
영도교(永渡橋) 흥인문 밖에 있는데, 곧 개천(開川)의 하류이다.
제반교(濟盤橋) 전관(箭串)에 있는데, 다리가 3백여 보 이상에 걸쳐있다. 두 다리는 모두 중종(中宗)이 어필로 글씨를 써서 정한 것이다.
청파신교(靑坡新橋) 숭례문 밖에 있는데, 민간에서들 주교(舟橋 배다리)라고 한다.
경고교(京庫橋)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다.
홍제교(洪濟橋) 홍제원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 임금이 능에 거둥할 때에는 도성 안팎의 교량을 호조(戶曹)에서 수리 개선하는데, 동쪽은 안암천(安巖川)을 한계로 하고 서쪽은 홍제원을 한계로 하고 남쪽은 노량강 가를 한계로 한다.
【전야】 동적전(東籍田) 동교 10리 전농리(典農里)에 있는데, 곧 선농단(先農壇) 곁이다. 왕이 친히 밭 가는 땅이 있고 친경대(親耕臺)가 있다. 또 분필각(芬苾閣)이 있고, 또 창고가 있다. ○ 수전(水田 논)과 한전(旱田 밭)을 총합하여 37결(結) 59부(負) 6속(束)인데, 친경전(親耕田)은 8일 갈이이다. ○ 열성조(列聖朝)에서 친히 밭 가는 예절을 많이 거행하였으며, 영묘(英廟)에도 행차하여 추수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 제사에 쓰는 여러 가지 곡식을 심어서, 별제(別祭)의 자성(粢盛) 및 천신(薦新)하는 6종의 곡물로 바친다.
친경대(親耕臺) 선농단(先農壇) 곁에 있다.
성경대(省耕臺) 숭례문 밖 청파(靑坡) 남쪽에 있는데, 관가대(觀稼臺)라고도 한다. ○ 영종조에 해마다 친히 행차하여 농사짓는 것을 권장하였으며, 가을 성숙기에도 행차하여 보았다. 43년에는, 임금이 왕세손(王世孫 뒷날의 정조)과 함께 거둥하였는데, 정종 정사년에 단을 쌓아 그 일을 기념하고 성경대(省耕臺)라고 이름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의 기문이 있다.
고암전(鼓巖田) 태종이 하루는 미행(微行)으로, 박은(朴訔)의 집에 갔다. 그때 은의 지위는 높고 이름났지만 가세는 매우 가난하였다. 마침 조밥을 먹다가 재채기가 나서 곧 맞이하여 절하지 못하고, 문 밖에 조금 오래 서 있으니 임금이 매우 노하였다. 은이 황공하여 사실대로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은 재상인데 조밥을 먹는가?” 하고, 사람을 시켜 들어가 보게 하였는데 과연 사실이었다. 임금이 놀라고 감탄하면서 특별히 청문(靑門 동대문) 밖 고암전의 땅을 약간 하사하였다.
홍덕전(弘德田) 나인(內人 궁중의 여관) 홍덕(弘德)이 병자란(丙子亂)에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 봉천(奉川))에 들어갔는데, 김치를 잘 담가서 때때로 효종(孝宗)이 인질로 있는 집에 드렸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 홍덕도 이어서 돌아왔는데, 다시 김치를 담가서 나인을 통하여 드렸다. 임금이 맛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 출처를 물으니 나인이 사실대로 아뢰었다. 임금이 놀라고 신기하게 여겨 곧 홍덕을 불러 들여서 후하게 상을 주려고 하니, 홍덕이 굳이 사양하면서 감히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에 명하여 낙산(駱山) 아래 밭 몇 경(頃)을 하사하여 그 수고를 갚아 주었다. 지금도 그 밭을 홍덕전(弘德田)이라고 한다.
왕십리평(往十里坪) 흥인문 밖 5리쯤에 있는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무와 배추 등 채소류를 심어 생활한다.
동잠실(東蠶室) 구잠실(舊蠶室)은 성 동쪽 아차산(峨嵯山) 아래에 있고, 신잠실(新蠶室)은 한강 원단동(圓壇洞)에 있는데, 모두 환관(宦官)들이 주관한다.
서잠실(西蠶室) 성에서 10리 서쪽 연희궁(延禧宮)에 있는데, 상의원(尙衣院)에 속하였다. 서잠실에서는 2년씩 간격으로 뽕나무를 심었는데, 훈국(訓局)에서 적간(摘奸)한다.
내농포(內農圃) 돈화문(敦化門) 밖 동쪽 가에 있다. 포전(圃田)이 있는데 내관(內官)이 주관하고, 채소를 세납으로 받아서 임금의 찬거리에 충당한다.
약전(藥田) 율주(栗洲)에 있는데, 지금 전의감(典醫監)에 속하였다.
고초전(苦草田) 서쪽 연희궁 앞 들에 있다.
남전(藍田) □□□에 있다.
상전(桑田) 삼전도(三田渡)에 있다.
상림(桑林) 율주(栗洲)에 있는데 공상(公桑)이다.
【목장】 전관(箭串 살곶이) 곧 국도의 동교(東郊)인데, 그 지역이 평탄하고 넓으며 수초(水草)가 매우 풍요하다. 둘러서 우리를 만들고 국마(國馬)를 기르는데 넓이가 34리나 된다. 처음에는 목책을 만들었다가 해마다 개수(改修)하니, 백성은 이속들의 농간질에 피폐하고, 말도 도둑맞아 도망갔다. 명종조(明宗朝)에 이르러서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 상진(尙震)이 정부에 건의ㆍ요청하여, 돌을 쌓아 제방을 만들고 냇물이 흐르는 곳에는 철삭(鐵索)으로 열고 닫게 하니, 그 후로 폐단이 제거되었다고 한다.
나의주(羅衣洲) 또 잉화도(仍火島)라고도 하며 도성 서쪽 15리에 있는데, 곧 서강 남쪽이다. 율주와 서로 잇닿았는데, 장마로 인하여 끊어져 둘이 되었다. ○ 옛날에는 축목장(畜牧場)이 있어, 사축서(司蓄署)ㆍ전생서(典牲署)의 관원을 나누어 보내 기르는 것을 감독하게 했는데 후에 폐지되었다. 지금은 옛 사축서의 양 50마리, 염소 6마리만을 놓아 기른다. 위토전(位土田) 경중(京中)에 92일 갈이가 있어, 1년의 세금이 2백 22냥이다.
【봉수】평시에는 한 홰[炬]요, 적이 보이면 두 홰, 지경에 가까이 오면 세 홰, 지경을 침범하면 네 홰, 접전하면 다섯 홰이다. 수직하는 금군(禁軍)이 5명이며, 병조(兵曹)의 봉수장(烽燧將)에게 보고한다. 충순위(忠順衛)를 혁파(革罷)한 후에는, 금군 중에서 녹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번 차례로 돌아가며 수직한다. ○ 봉대(烽臺)에는 표(標)를 설치하고 경계를 정하는데, 위봉(僞烽)ㆍ방화(放火) 등의 일을 막론하고, 백 보(步) 안에 있는 것은 병조에서 맡아 처리하고, 백보 외의 것은 금위영에서 맡는다. ○ 봉대 근처에는 음사(淫祀) 기도를 금한다.
목멱산 봉수(木覓山烽燧) 동쪽의 제1봉(烽)은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에 응하는데 이것은 함경ㆍ강원ㆍ경기도에서 오는 봉화(烽火)요, 제2는 광주(廣州) 천천령(穿川嶺 천림산(天臨山)이라고도 함)에 응하는데 이것은 경상ㆍ충청ㆍ경기도에서 오는 봉화요, 제3은 무악(毋岳) 동봉(東烽)에 응하는데 이것은 평안ㆍ황해ㆍ경기도의 육로로 오는 봉화요, 제4는 무악 서봉에 응하는데 이것은 평안ㆍ황해ㆍ경기도의 해로로 오는 봉화요, 제5는 양천현(陽川縣) 개화산(開花山)에 응하는데 이것은 전라ㆍ충청ㆍ경기도의 해로로 오는 봉화이다. 제1봉화는 직봉(直烽)이 1백 20곳, 간봉(間烽)이 60곳이며, 제2봉화는 직봉이 40곳, 간봉이 1백 23곳이며, 제3봉화는 직봉이 78곳, 간봉이 22곳이며, 제4봉화는 직봉이 71곳, 간봉이 35곳이며, 제5봉화는 직봉이 60곳, 간봉이 35곳이다. ○ 매일 초저녁에는 반드시 다섯 자루를 든다. 그런데 동쪽 제1봉화는 혹 때로 들지 않으니, 북도의 봉화가 구름이 끼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매일 초저녁에 봉수군(烽燧軍) 1명이 단봉문(丹鳳門) 밖에 나가서 본산의 봉화 다섯 자루를 드는데, 혹 한 자루를 들지 못하게 되면 부장(部長)이 남소(南所)에 보고하며, 남소의 부장은 그 길로 병조에 보고하고, 이튿날 아침에 들어가서 아뢴다. ○ 봉수ㆍ연대(煙臺)의 봉군(烽軍) 등은 정한 다른 부역이 없고, 오로지 후망(候望)만을 한다. ○ 혹 구름이 어둡고 바람이 어지러워서 연화(煙火)가 통하지 않을 때에는, 봉수군이 차례로 달려가 보고한다. ○ 목멱ㆍ무악 두 산 봉수군의 호(戶)는 30씩인데, 매호에 보솔(保率) 3명을 둔다. 각 1백 20명이 나누어 24번을 만들고, 매번 5명이 6일마다 교체한다.
무악봉수(毋岳烽燧) 동쪽 봉화는 서쪽으로 고양군(高陽郡) 염포(鹽浦)에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제3봉화에 보고하며, 서쪽 봉화는 서쪽으로 고양군 고봉(高烽)에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제4봉화에 보고한다.
붙임 척후(斥候) 백악척후(白岳斥候)ㆍ목멱산 척후ㆍ무악 척후.
【행순】 궐내(闕內)는 위장(衛將)이나 부장(部長)이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시간을 나누어 다니면서 순찰한 후에, 무사한지의 여부를 바로 아뢴다. 도성(都城) 내외의 행순(行巡)을 병조에서 당직한다 충의(忠義)ㆍ충찬(忠贊)ㆍ충순(忠順)ㆍ족친(族親)ㆍ내금위(內禁衛)ㆍ외오위(外五衛)의 각 1부를 2소(所)로 나누어 행순을 배정하며, 또 점고(點考) 받는 순장(巡將)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첨지(僉知)에 이르기까지는 망(望)에 올려 정하는데, 부족하면 당직 당상관을 망에 올려 정한다. 및 감군(監軍) 선전관과 병조, 도총부(都摠府)의 당하관 중에서 망에 올려 정한다. 각 운영관(運領官) 상호군(上護軍)ㆍ대호군(大護軍)ㆍ호군(護軍)으로 정하되, 부족하면 그 다음의 별시위(別侍衛)로 정한다. 출입번(出入番)의 장수는 대궐에 나가 숙배(肅拜)하고, 대내(大內)에서 납패수패(納牌受牌)한다. 각 부대의 영관이 받는 패(牌)는 순장(巡將)이 모두 받아서 나누어준다. 병조(兵曹)에서 사무를 맡기는데, 궁성(宮城) 4문 밖의 숙직은 각 상호군(上護軍)ㆍ대호군ㆍ호군 중 1명과, 정병(正兵) 5명이며, 도성 안팎 여러 경수소(警守所)에는 보병(步兵) 2명이 부근 동리 사람 5명을 거느리고 하는데, 소(所)에 따라서는 활ㆍ검ㆍ지팡이 등을 가지고 경첨(更籤)을 받아 가지고서 숙직한다 신표[籤]는 나무를 깎아 만들고, 아무 경수소 신표라고 썼다. 광화문(光化門) 호군은 초저녁에 요령[鐸]을 병조에서 받는데 군호도 함께 받는다. 민간에서는 언적(言的)이라고 한다. 인정(人定) 후에는 정병(正兵) 2명이 요령을 흔들면서 궁성을 순찰하는데, 4면 경수소(警守所) 및 각 문을 차례로 전하고 받으면서, 돌기를 말지 않으며, 파루(罷漏) 때가 되어서야 그친다. 운영관(運領官)은 매 시간마다 궁성을 돌고, 4면 경수소 및 각 문에 가서 경첨(更籤)을 거두며, 밝으면 병조에 바친다. 여러 경수소에는 순장이나 순관(巡官)이 불시에 가서 신표를 거두어 병조에 바친다. 2경(更) 후, 5경 전에는 대소 인원이 나다니지 못하는데, 불을 낸 자가 있으면 순관이 쫓아가서 도둑을 살핀다. ○ 병조ㆍ형조ㆍ의금부ㆍ한성부ㆍ수성금화사(守城禁火司) 5부의 숙직하는 관원은 표신(標信) 몸체가 둥근데 1면에는 통행(通行)이라 쓰고 1면에는 전자로 통행이란 화인을 찍었다. 밤에 다닐 때 및 군중(軍中)에서 사용한다. 을 정원(政院)에서 받는다. 이튿날 아침에 환납(還納)한다. 군호(軍號)를 병조에서 받고 각각 그 관청의 아전(衙前)ㆍ사령을 통솔하는데 행순은 없다. 형조 이하의 여러 관청은 5부 외에는 지금 폐지되었다. ○ 군호는 병조에 입직(入直)한 당상관이 친히 써서 봉함하는데, 매일 신시(申時)가 되면 낭관(郎官)이 직접 가서 정원에 드리게 한다.
○ 두 포청(捕廳)에서는 각기 패장(牌將) 8명, 군사 64명을 정하여, 도성 안팎을 밤새워 행순 하며,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군문에서는 날을 나누어 돌아가면서 한다. 도감은 첫날인데 인(寅)ㆍ신(申)ㆍ사(巳)ㆍ해(亥)일이고, 금영(禁營)은 중간 날인데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일이며, 어청(御廳)은 마지막 날인데 인(寅)ㆍ술(戌)ㆍ축(丑)ㆍ미(未)일이다. 각기 패장(牌將) 9명을 정한다. 군사는 도감이 83명, 금영이 84명, 어청이 67명이다. 도성 안팎을 야순(夜巡)하며, 또 각 군문에서는 그 외영(外營)에서 입직한 장교 1명으로 입직한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 밖을 시간을 정하여 야순한다 도감은 초경ㆍ3경, 금위영은 2경, 어영청은 5경이다. 또 3군영에서는 각기 장교 1명을 정하여, 입직한 군사 5명을 거느리고 궁장(宮墻) 밖을 밤새워 순행한다. 모두 땅거미질 때[日晡時]부터, 날이 밝기까지 하되, 별순라패(別巡邏牌)를 만들어 준다. ○ 금령을 범하고 밤에 다니는 사람은 잡아서 인근 경수소(警守所)에 보내며, 이튿날 각기 그 군영에서 곤장(棍杖)을 쳐서 처벌한다 초경(初更)에 다닌 사람은 곤장 10도를 때리고, 2경은 20도, 3경은 30도, 4경은 25도, 5경은 10도이다. 무릇 행순(行巡)하는 사람은 모두 군호(軍號)를 받는데, 대궐 안의 사람이나 담장 밖의 사람이 다른 군인과 신지(信地)를 만나면, 그때 그때 문득 서로 응하면서 돌아서 멈추지 않고 파루(罷漏) 때 가서야 그친다. ○ 외삼영(外三營) 북영(北營)ㆍ신영(新營)ㆍ동영(東營)이다. 입직 중에는 원 순라(巡邏) 외의 장관(將官)을 매일 밤 파루 후에 내보내어, 날이 밝기까지 각 해당 영관 내의 궁성(宮城)을 살펴본다.
붙임
파수(把守) 궁성 문은 병조에서 정병(正兵)ㆍ갑사(甲士)를 정하여 나누어 여러 소(所)에 소속시켜 파수하게 하며, 또 대졸(隊卒) 10명을 정하여 광화문(光化門)을 지키며, 종묘문(宗廟門)ㆍ도성문은 출직(出直)한 보병으로 파수하고, 흥화(興化)ㆍ숭례(崇禮)ㆍ돈의(敦義)ㆍ혜화문(惠化門)은 호군(護軍)으로 정하며, 그 밖의 문은 5명씩을 정한다. 사직(司直) 이하로 칭호되는 사람이 통솔하게 한다. 각 대문에 30명이며 그 좌우 협문(夾門)도 같다. 중문은 20명인데 그 좌우 협문도 같으며, 소문(小門)은 20명이고 종묘문은 4명이다.
○ 궁성문은 초혼(初昏)에 닫고, 명평(明平)에 열며, 도성문은 인정(人定)에 닫고, 파루(罷漏)에 연다. 궁성문은 주서(注書)가 총부(摠部)의 낭관(郎官)과 선전관으로 더불어 자물쇠를 맡아서 열고 닫고 하는데, 열쇠를 정원(政院)에서 받으며, 도성문은 호군(護軍) 5명이 열고 닫고 하는데 교대할 때에 병조에서 받고 바치고 한다. 제때[及期]에 아뢸 일이 생기면, 호군 5명이 문틈에서 받아 가지고 급히 대궐문으로 가서 아뢴다. 정한 시간 외에 도성문을 열게 되면 대내(大內)에서 개문좌부(開門左符)를 내린다. 몸체가 둥근데 한 쪽에는 전자로 신부(信符)라 쓰고, 한쪽에는 전자로 신부라 쓴 것을 찍었으며, 가운데가 나누어졌다. 호군 5명이 좌부(左符)를 받으며 교대할 때에는 병조에서 받고 바치고 한다. 궁성문은 표신(標信)을 사용하여 문을 열고 문을 닫는다. 표신은 몸체가 모가 났는데, 한 쪽에는 개문(開門)이라 쓰고 한 쪽에는 어압(御押 임금의 수결을 새긴 도장)이 있다. 폐문(閉門) 표신도 같은데, 한 쪽에 폐문이라 썼다. 긴급한 때는 도성문에도 통용한다. ○ 개국 초기부터 파루(罷漏)가 되면 궁성문 및 외성(外城)문을 모두 열었는데, 예종조(睿宗朝)부터는 평명에야 궁문을 열게 하였다.
【복처】 1패(牌)의 복처(伏處 순라군이 잠복 근무하던 요긴한 곳). 회현동(會賢洞) 동구에 있는데, 구역 안은 숭례문에서 타락동(駝駱洞)까지이다. 상(上) 2패의 복처. 남산동(南山洞)에 있는데, 구역 안은 타락동 동쪽에서 영희전(永禧殿) 서쪽까지이다. 하(下) 2패의 복처. 필동교(筆洞橋)에 있는데, 구역 안은 주자동(鑄字洞)에서 생민동(生民洞)까지이다. 3패의 복처. 청량교(淸梁橋)에 있는데, 구역 안은 생민동 동쪽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이다. 4패의 복처. 어의동(於義洞)에 있는데, 구역 안은 파자교(把子橋) 동쪽에서 동대문 북쪽까지이다. 5패의 복처. 재동(齋洞)에 있는데, 구역 안은 파자교 서쪽에서 전의감동(典醫監洞) 동쪽에 이르기까지이다. 6패의 복처. 수표교(水標橋)에 있는데, 구역 안은 종루(鐘樓)에서 오간수문(五間水門)에 이르기까지이다. 7패의 복처. 동대문 밖에 있는데, 구역 안은 동대문 밖에서 관왕묘(關王廟)까지이다. 좌변 포도청(左邊捕盜廳)에 속한다.
【궁실】 북한행궁(北漢行宮) 산성 안 상원봉(上元峯) 아래 있다. 숙종(肅宗) 37년에 내정전(內正殿) 28칸, 외정전 28칸과 그 외의 행각(行閣)ㆍ월랑(月廊) 등 73칸을 지으니, 합하여 1백 29칸이다.
종루(鐘樓)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다. 태조 4년에 큰 종을 주조하고, 권근(權近)이 명(銘)을 지었는데, 각(閣)을 큰 거리[通衢]에 짓고 종을 달아서 새벽과 어두울 때 치게 하였다. 세조조에 고쳐 층루(層樓)로 지으니, 동서의 넓이가 5칸, 남북이 4칸인데, 십자가(十字街)를 만들고 종을 누 위에 달고, 인마(人馬)는 누 아래로 통행하게 하였다. 세조 13년에 명하여 다시 큰 종을 주조하여 달아서 새벽과 밤을 알리게 하였는데, 1경(更) 3점(點)에 비로소 징과 북을 치니, 북으로 경(更)을 알리고 징으로 점을 알리는 것이며, 큰 종을 28번 치니, 이것을 인정(人定)이라 하며, 5경 3점에는 징과 북을 치우고, 큰 종 33번을 치니, 이것을 파루(罷漏)라고 한다. 선조 임진년 병란 때에 광화문의 종과 함께 모두 녹아버렸으며, 환도한 후인 갑오년 가을에 숭례문의 종을 옮겨다가 달고 새벽과 밤을 알려주니, 도성 사람들이 종소리를 듣고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유년에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 경리(經理)가 종을 명례동(明禮洞) 고개로 옮겨 달았다. ○ 《추관지(秋官志)》를 보면 간고(諫鼓)를 남현(南峴)에 달고, 방목(謗木)을 서교(西橋)에 설치하였다.” 하였으며, 지금도 종현(鍾峴), 방목교(謗木橋)라고 부르니, 국조(國朝)에서 옛날 삼대(三代 옛날 중국의 하(夏)ㆍ은(殷)ㆍ주(周)시대)를 모방하던 성대한 의사를 알 수 있는 일이다. ○ 또 살펴보면, 중종조에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이 되어 흥천사(興天寺)의 종을 흥인문(興仁門)에, 원각사(圓覺寺)의 종을 숭례문(崇禮門)에 옮겨 놓고, 새벽과 밤을 알려주려 하였는데 미처 달지 못하고 안로가 실패하여, 그만 풀숲 속에 버려둔 지 오래였다. 선조 갑오년에 명하여 숭례문의 종을 종루로 옮겨 달게 하였다.
종각(鐘閣) 세조 2년에 큰 종을 주조하고, 신숙주(申叔舟)가 명을 지었으며, 사정전(思政殿) 앞 행랑에 두었는데, 지금은 광화문 밖 서쪽에 있다. 영종 무진년에 종각을 지었다.
태평관(太平館) 숭례문 안 양생방(養生坊)에 있는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관 뒤에 누(樓)가 있는데 명 나라 사신 예겸(倪謙)ㆍ기순(祈順)이 모두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 지금은 칙사(勅使)를 영접할 때에 나례(儺禮 가면극(假面劇))를 준비하여 거행하는 곳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칙사를 접대하는 규정은 없다. ○ 상고해 보면 문정왕후(文定王后)ㆍ인목왕후(仁穆王后)의 가례(嘉禮)를 모두 이 관에서 거행하였다.
남별궁(南別宮) 남부 회현방(會賢坊)에 있는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명설루(明雪樓)가 있다. ○ 상고해 보건대, 조사(詔使)가 오면 반드시 태평관에 거처하였는데, 선조 임진년 병란에 태평관이 불탔으며, 계사년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경성을 수복하고 여기에 거처하여 그대로 조사가 거처하는 곳이 되었으며, 그 후로 남별궁이라 하였다. ○ 세상에서들 전하기를, 조대림(趙大臨)의 집이라 하는데 상고하여 경험할 데가 없으니 믿을 수 없을 것 같다. 의안군(義安君)의 새 궁이라고도 한다.
모화관(慕華館) 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있다. 본래는 모화루(慕華樓)였는데, 세종 12년에 관(館)으로 고쳐서, 무과(武科) 시험장으로 삼고 무이소관(武二所館)이라 하였다. 앞 길 위에 옛날에는 홍전문(紅箭門)이 있고, 중종 30년에 사신[王人]을 맞이하고 전송하던 곳인데, 사체에 온당하지 못하다 하여 김안로의 건의로 고쳐서 두 기둥의 한 칸 집을 짓고, 푸른 기와로 덮은 다음 영조(迎詔)라는 현판을 걸었다. 33년에 중국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맞이하는 것은 조(詔)ㆍ칙(勅)ㆍ뇌(賚) 등이 있는데, ‘조’라고만 이름하는 것은 치우친 것 같다.” 하면서, 고쳐 현판을 써서 영은(迎恩)이라고 걸었다. 후에 명 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고쳐 현판 글씨를 썼다. 영종 갑신년 가을에 명릉(明陵)에 전알(展謁)하고 늦게 돌아오는데, 정종이 세손(世孫)으로서 영은문 밖에 나와 맞이하니, 임금이 친히 장막에 들어가서 사언시(四言詩) 4구를 써서 기쁜 뜻을 표시하였으며, 세손이 화답하여 지어 올렸다. ○ 관 동쪽 건너 산기슭에 연향대(燕享臺)가 있으며, 대의 동북쪽에 양호(楊鎬) 경리(經理)의 공덕비(功德碑)가 있다. ○ 못이 있으며 못 가에서 석척동자(蜥蜴童子)로 기우제 9차를 드리는데, 무관 종2품관이 연 3일간 거행하고 그친다.
동평관(東平館)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다. 개국 초기에 설치하였으며, 일본 등 제국(諸國) 사신을 접대하던 곳인데, 임진년 병란에 불타고 그만 폐지되었다. 지금은 그곳을 왜관동(倭館洞)이라 한다. 선조 24년에 왜사(倭使)가 관에 와서 머물며 벽 위에 시를 써서 이르기를, “매미 시끄럽게 우느라 당랑이 잡을 줄 모르고, 고기 노닒은 해오라기 졺을 기뻐함일세. 이곳이 어느 곳이냐, 다른 해에 다시 잔치 벌여 보세나.” 하였다.
북평관(北平館) 동부 흥성방(興盛坊)에 있다. 야인(野人 여진)으로 와서 조회하는 자들을 접대하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독서당(讀書堂) 옛날에 용산에 폐지한 절간이 강 북쪽 언덕에 있었는데, 성종조에 고쳐 짓고 당(堂)을 만들어서 홍문관(弘文館)의 연소한 학자들의 글 읽는 곳을 만들었다. 연산군 때에 혁파하고 당은 궁인(宮人)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중종 10년에 다시 독서당을 옛날 정업원(淨業院)에 설치하였는데, 여염집 사이여서 공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하여 다시 좋은 자리를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 월송암(月松庵) 서쪽 산기슭을 선택하여 창건하였으며, 호당(湖堂)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다시 임진년의 병란으로 인하여 폐지되었는데, 광해군 무신년에 고쳐 한강별영(漢江別營)을 독서소로 삼았다. 옛날에 절간[僧舍]이 남문 밖 귀후서(歸厚署) 뒷산 기슭에 있었는데, 세상에서들 말하기를, “16나한(羅漢)이 영험(靈驗)이 있다.”고 해서, 불공[香火]이 끊기지 않았다. 중 상운(尙雲)이 그 집에 살면서 아내를 얻어 아들을 낳으니,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중을 처벌해서 속인이 되게 하고, 불상을 흥천사(興天寺)로 옮겼다. 드디어 그 집을 홍문관에 주어서 번갈아 가서 글을 읽게 하고, 이름을 독서당이라고 하였다. ○ 조위(曹僞)의 〈용산독서당기(龍山讀書堂記)〉와 이식(李植)의 〈독서당기〉가 있고, 또 호당고사(湖堂故事)를 지었으며, 윤현(尹鉉)의 〈문회당기(文會堂記)〉가 있다.
【누정】 황화정(黃華亭) 두모포 북쪽 산기슭에 있는데, 연산군이 짓고서 나와 노는 곳으로 삼았다. 중종조 초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에게 하사하였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유하정(流霞亭) 두모포에 있다. 원래는 제안대군의 정자이며 수진궁(壽進宮)에 속한 공청이었는데, 정종(正宗) 5년에 명하여 규장각(奎章閣) 신하들에게 하사하여, 여러 각신(閣臣)들의 승경지를 가려 놀며 구경하는 장소로 삼았다. ○ 혹은 말하기를, 본래 제안대군의 집으로 효종의 잠저(潛邸) 때 정자가 되었다고 한다.
제천정(濟川亭) 한강 북쪽 언덕에 있다. 풍경이 매우 좋으며, 중국 사신들의 놀며 구경하는 곳이 되었다. 성종이 일찍이 행차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 한강 도승(漢江渡丞)이 검찰하고 간수(看守)한다.
칠덕정(七德亭) 곧 한강 하류의 백사정(白沙亭)이다. 세조가 여러 번 행차하여 무예(武藝)를 사열하고, 인하여 이름지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읍청루(挹淸樓) 용산 별영 앞에 있는데, 긴 강류에 임하여 풍경이 매우 좋다.
영복정(榮福亭) 강 서북 언덕에 있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별장이다. 세조가 일찍이 행차하여 손수 영복(榮福)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하사하여 정자 현판으로 삼고, 인하여 영일세 복백년(榮一世福百年)이라는 여섯 글자로 그 뜻을 풀이하였다.
망원정(望遠亭)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다. 정자는 본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장이었는데, 세종이 행차하여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성종 갑진년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고쳐 짓고, 지금 이름으로 현판을 걸었다. 성종이 매년 농사를 살피거나 세납선(稅納船)을 집합시켜 수전(水戰)을 연습할 때 언제나 이 정자에 행차하였으며, 어제시(御製詩)가 있다. 대군이 졸한 후에는 다시 행차하지 않았다. ○ 변계량의 〈희우정기(喜雨亭記)〉가 있으며, 신장(申檣)이 현판을 썼다.
낙천정(樂天亭) 전관(箭串)에 있다. 태종이 선위(禪位)한 후에 이궁(離宮)을 동교대산(東郊臺山)에 창건하여, 정자를 그 위에 짓고 박은(朴訔)에게 명하여 정자 이름을 짓게 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 변계량(卞季良)의 기문이 있다.
화양정(華陽亭) 낙천정 북쪽 언덕에 있다. 본래 태복시(太僕寺)의 목장이었는데, 세종 14년에 그곳에 이 정자를 지었다. ○ 유사눌(柳思訥)의 기문이 있다.
세검정(洗劍亭) 창의문(彰義門) 밖 탕춘대(蕩春臺) 앞에 있는데, 차일암(遮日巖)이 있다. ○ 열조(列朝)의 실록(實錄)이 이루어진 후에, 반드시 여기서 세초(洗草 원고 정리)하였다. ○ 정자가 돌 위에 있는데, 폭포수가 그 앞을 지난다. 매년 장마 때 도성 사람들이 나가서 넘쳐흐르는 물을 구경한다.
산영루(山映樓) 북한산 성 안에 있다.
반송정(盤松亭)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는데, 소나무가 구불구불 우뚝 서있음으로 인하여 이름한 것이다. 서지조(西池條)에 자세하다.
천연정(天然亭) 서지 가에 있다. 본래 이해중(李海重)의 서재였는데, 지금은 경기 중영(京圻中營)이 되었다. ○ 여름철 연꽃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데, 서지조에 자세하다.
풍월정(風月亭) 북부 안국방(安國坊)에 있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정자를 지었는데, 성종이 친히 집 서쪽 동산에 행차하여, 풍월(風月)이라는 두 글자를 하사하여 정자 현판으로 삼게 하고, 시 6수를 짓고 문신들에게 화답하게 하였다.
몽답정(夢踏亭) 훈국북영(訓局北營) 안에 있는데 천석(泉石)의 승경(勝景)이 있다. 숙종이 일찍이 꿈에 이 정자에 행차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또 사정(射亭)이 있는데 괘궁정(掛弓亭)이라 하며, 연꽃 구경하는 정자를 군자정(君子亭)이라 한다.
쌍회정(雙檜亭) 명승조에 자세하다.
칠송정(七松亭) 명승조에 자세하다.
천우각(泉雨閣) 금위영(禁衛營)의 남별영 안에 있는데, 시내에 걸쳐 집을 지어서 여름철 피서에 좋다. 석벽에 아계(丫溪) 두 글자를 새겼다.
협간정(夾澗亭) 타락산(駝駱山) 아래에 있다. 앞으로 시내와 폭포에 임하여 있어 동촌(東村) 사람들의 놀고 구경하는 장소가 되었다.
백림정(柏林亭) 타락산 아래에 있는데 박은의 옛 집이다. 이 정자 이름으로 하여 동리를 백동(柏洞)이라고 한다.
【제택】《조가지(造家志)》에 의하면, 한성부에서는 사람들의 청원에 의하여 공지(空地)로서 만 2년간 비워두고 짓지 않은 땅을 나누어주어 공대(空垈) 및 포전(圃田 채마밭)을 물론하고 백성들에게 집짓는 것을 허가하되, 본 주인이 이것을 막고 방해하는 경우에는 제서유위(制書有違)의 법률로 논죄한다. 무릇 가대(家垈)가 산을 의지한 곳은 관상감(觀象監)으로 하여금 산기슭과 산등성이가 도성ㆍ궁궐에 임압 금기(臨壓禁忌)되는 곳이 아닌가를 살펴보아서 나누어주지 말게 하며, 함부로 받아서 집을 짓는 자는 죄주고 철거한다. ○ 집터의 면적은 대군ㆍ공주는 30부(負), 왕자ㆍ군ㆍ옹주(翁主)는 25부, 1ㆍ2품관은 15부, 3ㆍ4품관은 10부, 5ㆍ6품관은 8부, 7품관 이하 및 음관(蔭官)의 자손은 4부, 서인은 2부인데, 3등 전척(田尺)을 사용하여 측량한다. 집의 규모는 대군은 60칸, 왕자ㆍ군ㆍ공주는 50칸, 옹주 및 종친(宗親), 문ㆍ무관의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 서인은 10칸으로 하되, 숙석(熟石 다듬은 돌)ㆍ화공(花供)ㆍ초공(草供)은 사용하지 못한다.
중부(中部)
구수영(具壽永)의 집 견평방(堅平坊) 이문(里門) 안에 있다. 태화정(太華亭)ㆍ부용당(芙蓉堂)이 있고, 당 앞에 잠룡지(潛龍池)가 있으니 인묘가 예전에 공부하던 곳이다. ○ 문학(文學) 이정(李挺)이 기문을 지었다.
조광조(趙光祖)의 집 경행방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예전 한양현(漢陽縣) 향교가 이 동리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동명(洞名)을 한 것이다.
동부(東部)
이석형(李石亨)의 집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지금 자손들이 그 근방에 사는데, 동촌 이씨라고 한다.
이정귀(李廷龜)의 집 연화방에 있다. 사당 앞에 단엽 홍매(單葉紅梅)가 있는데, 곧 중국인이 공에게 선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홍매화가 단엽인 것은 이 한 그루뿐이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집 건덕방(建德坊) 타락산(駝駱山) 아래에 있는데, 용흥궁(龍興宮)과 동ㆍ서쪽으로 마주 서 있다. 석양루(夕陽樓)가 있는데 기와 벽돌에 모두 그림을 새겼으며, 규모의 넓고 화려하기가 여러 제택(第宅) 중에 제일이다. ○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
신광한(申光漢)의 집 타락산 아래 있는데, 세상에서 신대명승지지(申臺名勝之地)라고 한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새겼다.
송시열(宋時烈)의 집 성균관(成均館) 서쪽 산기슭에 있는데, 우암(尤菴)이 예전에 기거하였기 때문에 동명(洞名)을 송동(宋洞)이라고 한다. 동리의 골이 깊으며 석벽에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새겼는데, 우암의 글씨이다. 동리 가운데 꽃나무가 많아서 봄놀이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남부(南部)
조말생(趙末生)의 집 명례방(明禮坊)에 있는데, 중 무학(無學)이 터를 잡은 곳으로 낙양(洛陽)의 명원(名園)이라고들 한다. 남산의 바른 줄기가 바로 낙동(駱洞)에 닿았기 때문에 복귀형(伏龜形)이라 일컫는다. 서쪽이 조말생의 집이고, 동쪽은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의 집이 되어 좌우의 거북 눈을 이루었다. 그 꼬리가 공북헌(拱北軒)이 되니, 곧 지금 박제헌(朴齊憲)의 집이다.
권람(權擥)의 집 목멱산(木覓山) 산기슭의 비서감(祕書監) 동쪽에 있으니, 곧 무학이 정한 암석(巖石)으로 된 터이다. 세조가 일찍이 행차하였으며, 그 서쪽 언덕에 석천(石泉)이 있는데 이름하여 어정(御井)이라 한다. 그 위에 소조당(素凋堂) 옛 터가 있는데, 후에 후조당(後凋堂)이라 하였다. 지금은 녹천정(鹿川亭)이 되었는데, 박영원(朴永元)이 차지하였다.
박팽년(朴彭年)의 집 낙선방(樂善坊) 생민동(生民洞)에 있다. 반송(盤松)이 있어 육신송(六臣松)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말라 죽었다.
상진(尙震)의 집 숭례문(崇禮門) 안에 있다. 예전 전례에 대가(大駕)가 이곳을 지날 때에는 액례(掖隷)들이 동명(洞名)을 불러 고하면 임금이 반드시 수레 위에서 허리를 굽혔으며, 그 동리를 이름하여 상정승동(尙政丞洞)이라 하였다.
정광필(鄭光弼)의 집 회현방(會賢坊)에 있다. 은행나무[鴨脚樹]가 있는데, 신인(神人)이 서대(犀帶 정1품ㆍ종1품관이 띠던 띠) 열두 개를 이 나무에 걸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동리 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세상에서들 회현동(會賢洞)이라고 부른다. 정씨들은 또 남문 밖에도 산다.
이안눌(李安訥)의 집 낙선방 묵사동(墨寺洞)에 있는데, 비파정(琵琶亭) 위에 시단(詩壇)이 있다. ○ 위에 훈국(訓局) 군병들의 무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정숙옹주(貞淑翁主)의 집 명례방(明禮坊)에 있는데, 장악원(掌樂院)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다. 뜰이 좁고 이웃집이 곁에 붙어 있어 말소리가 서로 들리며, 처마가 낮고 짧아 막히고 가리운 데가 없었다. 옹주가 조용히 임금에게 아뢰기를, “땅을 사서 넓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니, 선묘가 하교하여 이르기를, “소리가 낮으면 들리지 않고, 처마를 가리면 보이지 않을 것이니, 뜰을 어찌 반드시 넓게 하겠는가.” 하며, 발 두 부(部)를 하사하면서, “이것으로 가려라.” 하였다. 그 후로 선공감(繕工監)에서 해마다 발을 내려 보냈다. ○ 지금은 윤치의(尹致義)의 집이 되었다.
한준겸(韓俊謙)의 집 □□방에 있다. 같은 종문의 여러 한씨 집이 많이 동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종종 사람들이 자주 난정 수계회(蘭亭修禊會)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동명을 난정동(蘭亭洞)이라 하였다.
박승종(朴承宗)의 집 낙선방에 있다. 별원(別園)은 후조당(後凋堂) 동편 산기슭에 있다. ○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가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있었는데, 서궁은 성 서쪽 백악산(白岳山) 아래 있다. 그러므로 당(堂)을 짓고 백악을 바라보며 읍백(挹白)이라 현판하였으니, 대개 서궁에 공읍(拱挹)한다는 의미이다.
조형(趙珩)의 집 명철방(明哲坊)에 있는데, 일감정(一鑑亭)이 있다. 후손들이 근방에 살고 있으므로, 세상에서들 청녕교 조씨(淸寧橋趙氏)라고 부른다 한다.
윤선도(尹善道)의 집 명례방 종현(鐘峴)에 있다. 지금도 주춧돌에 먹으로 쓴 여산부동(如山不動)이라는 네 글자가 있어, 바람과 비에 씻기지 않았다. 혹은 허목(許穆)의 글씨라고도 하며 집터는 연소형(燕巢形)이라고 한다.
김석주(金錫冑)의 집 회현방(會賢坊) 회현동 남산 기슭에 있는데, 청성군(淸城君) 김석주가 지은 것이다. 청성이 어렸을 때 얼굴의 생김새가 범 같았는데, 범은 의당 산에 있어야 한다고 여겨, 드디어 거처하는 누대를 재산(在山)이라고 이름하였다. 담장 밖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으니, 곧 손수 심은 소나무이다. 19번 꺾어진 폭포가 있고 그 아래 우물이 있는데, 맛이 매우 향기롭고 차다. 우물이 푸른 석벽 위에 있는데, 창벽(蒼壁)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문명(趙文命)의 집 낙선방(樂善坊) 묵사동(墨寺洞)에 있다. 귀록정(歸鹿亭)이 있는데, 일찍이 푸른 실로 사슴을 정자 아래에 매어 두었다.
심강(沈鋼)의 집 회현방 분호조(分戶曹) 앞에 있는데, 지금도 심본금(沈本衿)이라고 한다. 선묘조 계사년에 환도(還都)한 후에 궁궐과 종묘가 새로 병화[兵燹]를 겪었으므로 부득이 종묘 신주를 이 집에 봉안하였다.
홍현주(洪顯周)의 집 □□방 이전동(履廛洞)에 있는데, 외당(外堂)에 금옥당(金玉堂)이라고 전자로 현판을 써서 걸었다. ○ 순조의 어필로 원정(園亭)이라 썼으며, 시림정(市林亭)은 익종(翼宗)의 어필이다.
서부(西部)
이숙번(李叔蕃)의 집 □□방에 있다. 숙번이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크게 전장과 집을 만들었는데, 인마(人馬)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싫어하여 문(門)을 막고 사람들이 통행을 금하였다.
신개(申槪)의 집 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중 무학이 터를 잡은 곳이다. 양체당(養棣堂)이 있다.
이황(李滉)의 집 □□방 학교(鶴橋)에 있다. 선생이 이 동리에 살았으므로, 승지(勝地)라고 한다. 뜰에 노송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다. 병란 후에 도성 안의 교목(喬木)이 모두 없어졌지만 이 나무만이 그대로 푸르러서 하늘에 닿았다. 신해년 봄에 홀연히 부러지니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고 의아(疑訝)하게 여겼더니, 그 해 여름에 인홍(仁弘)이 박여량(朴汝樑)의 무리를 사주하여, 상소하여 퇴계(退溪)를 훼방하기를 못할 일이 없이 하니 나무 부러진 변고가 여기서 과연 징험이 되었다.
최규서(崔奎瑞)의 집 황화방 소정동(小貞洞)에 있다. 영종 4년에 역적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을 모의하였는데, 공이 봉조하(奉朝賀)로 물러나 용인(龍仁)에 거주하다가 기미를 알고 달려와 고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공훈의 명칭을 치사(致仕)한 원로에게 더하는 것은 경례(敬禮)하는 뜻이 아니다.” 하면서, 손수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각(閣)을 지어서 그 집에 간직하게 하니 이름을 어서각(御書閣)이라 한다.
신수근(愼守勤)의 집 소의문(昭義門) 안에 있는데 어서각(御書閣)이 있다.
북부(北部)
허종(許琮)의 집 인달방(仁達坊) 사직단(社稷壇) 앞 길가에 있다. ○ 종(琮)이 일찍이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성종(成宗)이 사직에 일이 있어서 갔다가 돌아올 때에 종의 집에 들러서 그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다. 당시에 이 말을 들은 사람은 감격하고 분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종이 그때 아우 침(琛)과 함께 살았으므로 그 집 앞의 다리를 종침교(琮琛橋)라고 부른다.
성수침(成守琛)의 집 백악산(白岳山) 아래 유란동(幽蘭洞)에 있다. 소나무 숲 속에 서당 몇 칸을 지어서, 청송당(聽松堂)이라고 편액하였다. ○ □□가 그때의 일이 크게 그릇되었음을 보고 고향에 돌아가려 할 때, 수침과 작별하려고 청송당에 이르렀더니, 수침이 없었다. 이에 벽에 한 수 절구(絶句)를 적었는데, 그 첫 구에 이르기를, “은근하게 잘 있구나 두 그루 소나무, 저무는 해 풍상에도 그 모습 바꾸지 않았네.” 하였다. 대개 소나무의 시들지 않음을 수침에게 비유한 것이다. ○ 동산 중턱에 금오(金吾 의금부(義禁府)) 나장(羅將)들이 기예를 익히는 곳이 있다.
이기설(李基卨)의 집 삼청동(三淸洞)의 평지가 다한 끝 바로 북악(北岳)이 내려와서 밑에서 뭉친 백련봉(白蓮峯) 아래에 있다. ○ 석벽(石壁)에 영월암(影月巖)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 인왕산(仁王山) 기슭, 넓은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으니 바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의 호))의 옛 집터이다. 시내가 흐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여름철에 노닐고 구경할 만하고,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麒麟橋)라 한다.
조희신(趙希臣)의 집 순화방에 있다. 아우 희철(希哲)과 더불어 모두 그 효행이 정표(旌表 사람의 선행을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 표창함)된 까닭에 지금 쌍효자(雙孝子) 거리라고 일컫는다.
성삼문(成三問)의 집 진장방(鎭長坊)에 있다. 바로 장원서(掌苑署) 뜰 앞이다. 예전에 손수 심은 소나무가 있었는데, 뒤에 사람들이 베어서 거문고를 만드는 재목으로 삼았다.
유관(柳灌)의 집 진장방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있다. ○ 하의(荷衣 별호) 홍적(洪迪)의 〈유정승의 옛집 잣나무를 보고 느낌이 있어〉 라는 시에 이르기를, “옛 잣나무 푸르고 푸르러 그림 처마 덮었으니, 겹겹한 그 그늘에 석양 햇빛 얼마나 더했던가. 서리 내린 뿌리에 궂은 비 다시 뿌리니, 지나는 나그네 무정하지만 눈물 저절로 적시네.” 라고 하였다.
이염의(李念義)의 집 인왕산 기슭 백운동(白雲洞)에 있다.
소세양(蘇世讓)의 집 인왕산 아래 인왕동에 있다. 청심당(淸心堂)ㆍ풍천각(風泉閣)ㆍ수운헌(水雲軒)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헐어졌다.
김상용(金尙容)의 집 순화방 창의동(彰義洞) 청풍계(淸風溪)에 있다. 태고정(太古亭)ㆍ늠연당(凜然堂)이 있고 선원(仙源 김상용의 별호)의 화상을 봉안했다. 후손들이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으므로 세상에서 창의동 김씨라고 일컫는다. 시내 위의 돌에 ‘대명일월 백세청풍(大明日月百世淸風)’이라는 8자를 새겼다. ○ 순조(純祖)와 익종(翼宗)이 일찍이 봄날에 들린 일이 있다.
김수항(金壽恒)의 집 백악산 아래에 있는데, 육상궁(毓祥宮)과 담이 붙었다. 무속헌(無俗軒)이 있다.
민유중(閔維重)의 집 안국방(安國坊)에 있는데, 바로 인현왕후(仁顯王后 숙종의 비 민씨)가 왕후 자리에서 물러나서 살던 사제(私第)가 있던 곳이다. 감고당(感古堂)이 있다. ○ 또 아래에 보인다.
김주신(金柱臣)의 집 순화방 대은암동(大隱巖洞) 연우궁(延祐宮) 곁에 있다. ○ 양정재(養正齋)가 있는데 인원왕후(仁元王后 숙종의 계비(繼妃) 김씨)가 난 곳이다.
연령군(延齡君)의 집 북부 안국방에 있는데, 바로 영안군(永安君) 홍주원(洪柱元)의 옛집이다. 인목왕후(仁穆王后 선조의 계비 김씨)가 정명공주(貞明公主)에게 지어 주었는데, 궁실과 정원이 매우 넓고 뛰어나서 성 안에서 제일가는 집이다. 지금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철종의 생부)의 사당이 되었다.
이완(李浣)의 집 관인방(寬仁坊) 대사동(大寺洞)에 있다. 이완이 죽은 지 20년 뒤에 민종도(閔宗道)가 빼앗아 살았다. 뜰에 상공이 손수 심은 배나무가 있는데, 민가가 들어가 사니 열매를 맺지 않더니, 갑술년 뒤에 이정승의 서손(庶孫)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되찾아 들어가니 뜰의 배가 다시 열매를 맺었다.
박명원(朴明源)의 집 □□방 제생동(濟生洞)에 있다. 정종(正宗)이 일찍이 여기 거둥하여 편액을 하사하여 만보정(晩葆亭)이라고 했다.
동문(東門) 밖 유관(柳寬)의 집 숭인문(崇仁門) 밖에 있다. 집 몇 칸에 울타리가 없었는데, 태종이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밤중에 그 집에 가서 대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알리지 않게 했다. ○ 일찍이 장마비가 달이 지나도록 내려서 집이 마치 삼대 같이 새는데, 공이 우산을 들고 비를 가리면서 부인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까.” 하자, 부인이 말하기를, “우산 없는 집은 반드시 대비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웃었다.
영순군(永順君) 부(溥)의 집 안암동(安巖洞)에 있다. 성종 14년에 정희왕후(貞熹王后 세조비 윤씨)가 온천에 갔다가 행궁(行宮)에서 돌아가시어 찬궁(欑宮)으로 봉환할 때 이 집에 임시로 봉안했다. 후손들이 지금까지 전하여 지킨다.
서남문(西南門) 밖 이정보(李廷俌)의 집 □□방 만리현(萬里峴)에 있다. 한양에 서울을 정할 때에 무학(無學)의 말에 따라 터를 잡고 집을 지었다. 뒤에 6세손 정암(廷馣)의 3형제가 모두 한림(翰林)이 되어 드디어 한림동이라 부르게 됐다.
홍윤성(洪允成)의 집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데, 세조가 일찍이 다녀간 일이 있다.
강희맹(姜希盟)의 집 숭례문 밖에 있다. 연산군이 세자로 있을 때 일찍이 잠시 그곳에 머물러 우거하였다. 매양 그 동산 안의 소나무 밑에서 놀았는데, 뒤에 즉위하게 되자, 그 소나무에 관작을 내리고 금띠를 두르게 하고, 또 그 문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리게 했다. 지금의 순청동(巡廳洞)이다.
윤두수(尹斗壽)의 집 하나는 청파리(靑坡里)에 있었는데, 선지당(先志堂)이 있고, 또 애산당(愛山堂)이 있어, 최립(崔岦)이 기문을 지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졌다. 하나는 반송방 동자동에 있었는데, 공이 죽은 뒤에 중국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나와서 공의 큰 아들 방(昉)을 찾아와 말하기를, “선공(先公)의 충효가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내가 마땅히 편액을 써서 늘 마음에 두고 사모하던 뜻을 붙이겠습니다.” 하고, 충효당(忠孝堂)이란 세 글자를 벽 위에 특별히 쓰고 돌아갔다.
기건(奇虔)의 집 만리현에 있다. 건이 일찍이 걸어서 반궁(泮宮 성균관)에 왕래하면서 반드시 《중용》과 《대학》을 외웠다.
정광필(鄭光弼)의 집 숭례문 밖 전생서(典牲署) 앞에 있다. 수풀이 빽빽해서 단오에 서울 사람들이 그네 타는 곳이 되었다. 또 남부에도 있다.
이지남(李至男)의 집 숭례문 밖 자연암(紫煙巖)에 있다. 지남이 효행으로 정표 받고, 아내 정(鄭)씨가 정렬(貞烈)로 정표 받고, 큰아들 기직(基稷)ㆍ둘째 아들 기설(基卨)ㆍ딸 처녀가 모두 효행으로 정표 받고, 기설의 아들 돈오(惇五)가 충성으로 정표 받고, 돈오의 아내 김씨가 정절(貞節)로 정표 받고, 돈서(惇敍)가 충성으로 정표 받았으니, 한 가문에서 8정표를 받은 것이 된다. 영종 21년에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지금 능행(陵幸 임금이 능에 참배하는 것)하는 길에 이지남의 3대가 충ㆍ효ㆍ열 정려(旌閭)로 삼강(三綱)이 모두 한 집안에 빛난 것을 보았으니, 마땅히 상을 주어 칭찬하는 법전을 시행하여야겠다.” 하고, 특별히 명하여 제사 받드는 자손에게 녹을 주어 등용하게 하였다.
정연(鄭淵)의 집 반송방 미정동(尾井洞)에 있는데, 지금껏 대대로 전하여 오는 집이다.
서성(徐渻)의 집 숭례문 밖 약현(藥峴)에 있다. 공의 어머니인 이씨는 두 눈이 보이지 않았으나 여러 가지 일에 익숙해서, 일찍이 집을 짓는데 공장들을 감독하여 거짓을 부리지 못하게 했다. 목수가 원한을 품고 일을 함부로 해서 손해를 끼치려고 대청의 첫 기둥을 거꾸로 세웠는데, 부인이 나뭇결을 만져보고 목수를 불러서 꾸짖었더니, 목수가 놀라고 감복해서 감히 다시는 속이지 못했다.
민유중(閔維重)의 집 반송방의 고거자동(古車子洞)에 있다. 인현왕후가 탄생한 옛집으로서 영종 37년에 누각을 세우게 하고 임금이 손수 글씨를 써서 비를 세우고, 그 동리를 추모동(追慕洞)이라고 명명했다.
무슨 동리인지 알 수 없는 것.
이득분(李得芬)의 집 태조 5년에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비 강씨)가 옮겨 살다가 돌아가신 곳이다.
안기지(安耆之)의 집 세조 5년에 장순왕후(章順王后 예종의 비 한씨)가 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기지】 연서별서(延曙別墅) 북부 연서역촌에 있었다. 인조가 즉위하기 전의 별서(別墅 별장)였으며, 숙종 을해년에 임금이 글을 지어 비를 세웠다.
추흥정(秋興亭) 용산강에 있으며, 이숭인(李崇仁)의 기문이 있다.
담담정(淡淡亭)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지은 것인데, 서적 만 권을 저장했고, 선비들을 불러모아서 십이경시문(十二景詩文)을 짓고 사십인영(四十人詠)을 지었다.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다.
무계정사(武溪精舍)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에 있다.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源)에서 놀고 이윽고 이 집을 지었다. ○ 이식(李埴)의 기문이 있다.
쌍계재(雙溪齋) 성균관(成均館)의 반수(泮水) 동쪽에 있었는데, 참판 김뉴(金紐)의 옛집이다. ○ 강희맹의 부(賦)가 있다.
침류당(枕流堂) 한강에 있었는데, 경력(經歷 관직명) 이사준(李師準)의 별장이다.
무풍정(茂豐正)의 별서 양화도(楊花渡)에 있었다.
성현(成俔)의 집 약전현(藥田峴)에 있었는데, 언덕을 뒤에 두고 집을 지었다. 개국 초에 중 무학이 터를 잡아서 성씨에게 주었다. ○ 허백당(虛白堂 성현의 별호)이 밤 경치를 감상하며 홀로 뒷동산에 올라 시를 낭송하는데, 때마침 밤 닭이 울려하고 달빛은 희미하게 밝았다. 손이 와서 자고있다가 잠을 깨서 창문 틈으로 엿보고는, 신선이 내려왔다고 여겨 황망히 일어나 뒤쫓아갔는데, 서로 보고서는 크게 웃었다고 한다. 성씨가 서로 전한 지 또 2백여 년이었고, 그 뒤로는 더 지키지 못하였다. 뒤에 약산(藥山) 오광운(吳光運)의 집이 되었다.
남재(南在)의 집 남부 명철방(明哲坊) 제이리(第二里)에 있었는데, 바로 나라에서 내려준 집이다. 집 근처에 한 바위가 있어서 그 모양이 거북을 닮았으므로 드디어 귀정(龜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 남소동(南小洞) 안에 구유바위[槽巖]가 있는데 귀정의 옛 터라고 한다. 아마도 구유바위의 말소리가 바뀌어 귀정이 된 것 같다.
남이(南怡)의 집 동부 □방에 있었는데, 사람이 감히 살지 못했기 때문에 드디어 없어져서 채소밭이 되었다. ○ 뜰에 반송(盤松)이 있는데 비길 데 없이 커서, 32 개의 기둥으로 떠 받쳤다. 애송(愛松)이라 부른다. 이 소나무는 바로 영종 정해년에 부사(府使) 조진세(趙鎭世)가 심은 것이라 한다.
손순효(孫舜孝)의 집 남부 명례방(明禮坊) 상층(上層)에 있었다. 성종이 어느 날 저물녘에 두세 명의 내시와 함께 경회루(慶會樓) 올라 남산쪽으로 멀리 바라보니 몇 사람이 숲이 드문 곳에 둘러 앉아 있었다. 성종이 그것이 순효인줄 알고 곧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가 두 손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쟁반에는 오이뿐이었다. 임금이 술과 안주를 하사하니 순효가 손들과 더불어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실컷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 이 집은 지금은 없어졌다.
이행(李荇)의 서옥(書屋 서재) 목멱산(木覓山) 기슭의 청학동(靑鶴洞)에 있었다. 집 뒤에 병풍 바위[屛巖]와 반석이 있어서 그윽하고 고요하기가 사랑할 만하였다. 중국 사신 당고(唐皐)와 사도(史道)가 모두 시를 읊은 것이 있다. ○ 길 양쪽에 소나무ㆍ노송나무ㆍ복숭아나무ㆍ버드나무를 심었다. 공이 관직에서 물러나서 여기에서 지팡이를 짚고 소요하며 늙음을 마쳤다.
정여창(鄭汝昌)의 집 남부 회현방(會賢坊)에 있었다. 그래서 일두(一蠹 정여창의 호)의 후손이 해마다 그곳에 사는 민가에서 텃세를 거둔다.
윤관(尹寬)의 정사 쌍계동(雙溪洞)에 있었다. 윤이 동리 안에 삼휴정사(三休精舍 삼휴는 별호)를 짓고 공부하면서 늙음을 마쳤다.
수진동(壽進洞)에 정도전(鄭道傳)의 집터가 있었다. 제용감ㆍ사복시ㆍ중학이 모두 그 옛터라 한다. ○ 송현(松峴)에 있는 달성위(達城尉 이름은 서경주(徐景霌)의 집은 바로 옛날 판서 유자신(柳自新)이 살던 곳이다. ○ 대정동(大貞洞)에 하징(夏徵)의 집터가 있다. ○ 누국동(漏局洞)에 김사계(金沙溪 이름은 장생(長生))의 옛집이 있는데, 지금까지 서로 전해 온다. ○ 태평관(太平館)에 박사암(朴思庵 순(淳))과 이아계(李鵝溪 산해(山海))의 옛집이 있다. ○ 창동(倉洞)에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옛집이 있다. ○ 회현동에 선복교(善復橋)가 있다. ○ 장흥동(長興洞)에 박읍취헌(朴挹翠軒 은(誾))과 심일송(沈一松 희수(喜壽))의 옛집이 있다. ○ 낙동(駱洞)에 정고옥(鄭古玉 작(碏))의 옛집이 있다. ○ 나석좌(羅碩佐)가 살던 곳은 나대장동(羅大將洞)이라고 일컫는다. ○ 교서관동(校書館洞)에 임경업(林慶業)과 채호주(蔡湖洲 유후(裕後))의 옛집이 있고, 예관 부군당(藝館府君堂)에 임 장군의 화상을 그려놓고 제사지낸다. ○ 필동(筆洞)에 윤미촌(尹美村 선거(宣擧))의 옛집이 있다. ○ 옛날 묵사(墨寺)가 있던 곳에 송송정(宋松亭)이 있으니, 곧 송씨 성을 가진 사람의 송정이다. ○ 쌍리문동(雙里門洞)은 이첨(爾瞻 성은 이)이 살던 곳인데, 광해군 폐위시에 권세가와 귀족들이 많이 살았고, 윤희굉(尹希宏)도 살았다. ○ 묵사동(墨寺洞)에 찬신정동(纘新井洞)이 있고 남소동(南小洞)에 이동고(李東皐 준경(浚慶))의 옛집이 있다. ○ 허적(許積)이 현종조에 동현(銅峴)에 체찰부(體察府)를 설치했으므로 체부청동(體府廳洞)이 동현에 있다. ○ 대은암(大隱巖) 바위 곁에 옥랑(屋廊 제(第)와 같이 모든 것을 갖추지 못한 작은 집)이 있는데, 바로 송귀봉(宋龜峯 익필(翼弼))이 태어난 곳이며, 낭옥은 지금도 있다. ○ 삼청동문 곁에 민로봉(閔老峯 정중(鼎重))의 옛 집이 있다. ○ 만리탄(萬里灘)은 곧 백악산 기슭 남곤(南袞)의 집 뒤에 있는데, 박읍취헌이 이름지어졌다. ○ 청석동(靑石洞)은 대사동 서쪽에서 전의감동으로 통하는 작은 동리인데, 청성(淸城 부원군 김석주(金錫冑))이 옛적 살던 곳인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 ○ 율곡(栗谷 이이(李珥))이 살던 대사동 집은 바로 정승 신만(申晩)의 집이라 한다. ○ 계생동(桂生洞)은 바로 제생원(濟生院)이다. 이동고의 옛집과 연암(燕庵) 박지원(朴趾源)의 중국식 집이 있다. ○ 맹감사현(孟監司峴)은 감사 맹만택(孟萬澤)이 살던 곳이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 누각동(樓閣洞)은 인왕산 아래에 있다. 연산군 때에 누각을 지었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지금 그 거리에는 아전으로 늙어 퇴직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꽃과 과실나무를 많이 심어서 생업으로 한다. ○ 장동(壯洞)에는 정송강(鄭松江 철(澈))의 옛집이 있다. ○ 독암(獨庵) 조종경(趙宗敬)의 집은 남문 밖의 염초청(焰硝廳) 곁에 있다. 담 안에 이른 감 두 그루가 있어 잘 열었는데, 길가는 사람이 보고 말하기를, “올 감이 저렇게 만발했는데 팔아서 돈을 거둔다면 그 이익이 얼마나 될까.” 하니, 부인 이씨는 헌납(獻納 관직명) 잠(箴)의 딸인데, 듣고 크게 부끄러이 여겨 말하기를, “양반 집에서 과일 나무를 심어서 이익을 본다는 이름이 나면 그 어찌 세상에서 떳떳하겠느냐.” 하고, 곧 그 나무를 베어 없애고 집을 팔아 이사했다.

【사묘】 백악신사(白岳神祠) 백악산 정상에 있는데, 봄ㆍ가을에 초제(醮祭)를 거행한다. 중악(中岳)인 삼각산(三角山)을 이곳에서 제사지낸다. 삼각산 신위는 북쪽에 있고 백악산 신위는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목멱신사(木覓神祠) 목멱산 정상에 있는데, 봄ㆍ가을에 초제를 거행한다. 지금은 없어지고 사당만 있다.
한강단(漢江壇) 한강의 북쪽 언덕에 있는데, 봄ㆍ가을마다 제사지낸다.
부군사(符君祠) 각사(各司) 아전의 청방 곁에 있으며, 해마다 10월 1일에 제사지낸다. 세상에서 혹 말하기를, 고려의 시중(侍中 고려 관제의 수상직) 최영(崔瑩)이 관직에 있을 때 재물에 깨끗하고 징수를 하지 않아서, 이름이 떨쳤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사모하여 그 신을 모셔 존숭한다고 한다. 각 고을에도 모두 있다.
통명청(通明廳) 맹인청(盲人廳)이라고도 한다. 영희전(永禧殿) 동쪽 담 밖에 있는데, 김자점(金自點)의 집 옛터라 한다. 국복(國卜 나랏일을 점치는 점쟁이) 한 사람에게 지중추(知中樞)의 직함을 주어 주관하게 한다.
이색(李穡)의 영당(影堂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 중부 수진방에 있는데, 봄ㆍ가을마다 후손이 제사지낸다.
지덕사(至德祠) 숭례문 밖 청파리에 있는데, 곧 양녕대군의 사당이며, 숙종이 이름을 내렸고 정종이 편액을 내렸다. 사당기(祠堂記)가 있다.
신수근(愼守勤)의 사당 소의문(昭義門) 안에 있다. 영종 기미년에 공에게 영의정 익창부원군(領議政益昌府院君)을 증직(贈職)하고, 임금이 손수 고금동충(古今同忠)이라는 네 글자의 큰 글씨를 써서 내리고, 호조에 명하여 사당 옆에 각(閣)을 지어서 간직하게 했다.
광평대군(廣平大君)의 사당 흥인문(興仁門) 밖 안암동의 옛 집터에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사당기가 있다.
심희수(沈喜壽)의 생사당(生祠堂 살아 있을 때에 제사지내는 사당) 반촌(泮村 반궁 곧 성균관 근처 마을)에 있다. 선조 병오년에 투서한 자가 있어서 명하여 체포하니, 학관원(學官員)이 법을 잘못 집행하여 반례(泮隷 성균관 하인)에 미쳤는데, 공이 장관으로서 밝히기 어려움을 힘써 아뢰어 송사를 종결지을 수 있었다. 공이 죽은 뒤에는 반촌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지낸다.
윤집(尹集)의 사당 서부 반송방 옛집에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지은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윤성준(尹星駿)의 생사당 반촌에 있다. 옛 규례로는 재실 유생들의 식당에서 여종이 상을 나르는데, 급식이 끝난 다음에 규례를 어기고 야비한 짓을 하는 일이 심해졌으므로, 숙종 기축년에 윤성준이 대사성(大司成 성균관의 장관)으로서 상소하여 이 규례를 폐지하니, 반촌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생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낸다.
화순옹주(和順翁主)의 사당 서부 적선방에 있다. 옹주가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상을 당하자, 음식을 끊고 죽었는데, 영종이 손수, “정성이 부족해서 돌이키지 못했구나, 네가 정절을 따랐음을 가상히 여긴다[誠淺莫回嘉隨貞].”라는 8자를 써서 내려 사당 안에 받들어 걸게 하고, 뒤에 정렬을 정표하게 했다.
【역원】 노원역(蘆原驛) 흥인문 밖 4리 떨어진 곳에 있다.
청파역(靑坡驛) 숭례문 밖 3리에 있다. ○ 위의 두 역은 병조에 직속되어 있다.
보제원(普濟院) 흥인문 밖 3리에 있는데, 누각이 있어 상원(上元 음력 1월 15일)과 중양(重陽 음력 9월 9일)에 기로소의 재상들이 이곳에서 잔치를 한다. ○ 조말생(趙末生)의 서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홍제원(洪濟院) 홍(洪)은 홍(弘)으로도 쓴다. 추모현(追慕峴) 북쪽에 있는데, 고려 성종 을유년에 중 정현(鼎賢)이 창설한 것이다. 누각이 있어 중국 사신의 옷 갈아입는 곳인데, 뒤에 폐지했다. 인조 26년에 태평관(太平館)과 인경궁(仁慶宮)의 자재를 거두어 관우(館宇)를 옮겨 지어 중국 사신이 유숙하는 곳으로 삼았다.
이태원(梨泰院) 목멱산 남쪽에 있다. ○ 세상에서 전하기를, 임진란 뒤에 왜인의 귀순한 자를 숭례문 밖 남산 아래에 살게 하여 자연히 한 마을을 이룬 까닭에 이타인(異他人)이라고 일컬었으므로 동리 이름이 되었는데, 뒤에 이름을 고쳤다.
전관원(箭串院) 전관교(箭串橋 살곶이다리) 서북쪽에 있다.
【시가】 운종가(雲從街) 곧 종루서가(鐘樓西街)인데 속칭 생선전이라 한다. 영종 경진년에 다시 개국초의 옛 이름을 회복하여 운종가로 고쳤다.
【장시】행상이 모여서 물건을 바꾸고 헤어지는 것을 장(場)이라고 한다.
○ 세상에 전하기를, 신무문(神武門) 밖 북쪽에 예전에 시장이 있었으니, 곧 주례(周禮 주(周) 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책 또 그 제도를 뜻함) 후시(後市)의 뜻이라고 하는데, 지금 상고할 수가 없다. 모두 네 곳이 있다.
종루가상(鐘樓街上)ㆍ이현(梨峴)ㆍ칠패(七牌)ㆍ소의문외(昭義門外)이다.
【시전】 정종(定宗) 원년에 비로소 시전을 설치하니, 좌우 행랑(行廊) 8백여 칸이 혜정교(惠政橋)로부터 창덕궁 입구까지 이르렀다.
유분각전(有分各廛) 각 전 가운데서 형편이 괜찮은 자로, 분수를 헤아려 정해서 국역(國役나라의 일)에 응하게 하고, 유분각전이라고 부르며, 10분에서 1분까지 모두 37전인데, 국역을 당할 때마다 10분전은 10분의 일에 응하고 1분전은 1분의 일에 응하여, 대궐 안팎 여러 상사(上司)의 각처 수리와 도배, 재봉하는 사람도 이에 준해서 나가 일한다.
선전(縇廛) 전의감 동구의 동ㆍ서쪽 곧 종루로(鐘樓路) 북쪽에 있다. 모두 42방(房)인데, 중국산 필로 된 단(緞 겨울 비단)ㆍ초(綃 여름 비단)ㆍ견(絹 봄ㆍ가을 비단) 같은 것을 판다. ○ 저자가 서는 처음에, 먼저 선전을 세웠다. 속칭 입전(立廛)이라 하며, 국역 10분에 응한다.
면포전(綿布廛) 종루로 서쪽에 있는데, 은붙이도 겸하여 팔기 때문에 은목전(銀木廛) 또는 백목전(白木廛)이라고도 부르며, 국역 9분에 응한다.
면주전(綿紬廛) 면포전 뒤, 전옥서 앞에 있는데, 국산 면포와 명주를 팔고, 국역 5분에 응한다.
내어물전(內魚物廛) 이문(里門) 동ㆍ서쪽에 있는데, 여러 가지 건어물을 팔고, 국역 5분에 응한다.
외어물전(外魚物廛) 소의문 밖에 있는데, 국역 4분에 응하며, 내전과 합쳐서 9분역이다.
지전(紙廛) 동전(東廛)은 포전 남쪽에 있고, 서전은 면포전 남쪽에 있는데, 9분역에 응한다.
저포전(苧布廛) 진사전 동쪽에 있는데, 모시와 황모시를 팔며, 국역 6분에 응한다.
포전(布廛) 면포전 건너편에 있으며, 국역 5분에 응하고, 저포전과 합쳐서 11분역이다. ○ 선전으로부터 여기까지 6전을 육의전(六矣廛)이라 하는데, 속칭 육주비전(六注比廛)이라 하며, 각 전 중에서 가장 큰 전이다. ○ 예전에는 선전ㆍ면포전ㆍ면주전ㆍ지전ㆍ저포전 및 내외어물전ㆍ청포전을 합쳐서 육의전으로 구분했는데, 지금은 고쳐서 선전ㆍ면주전ㆍ면포전ㆍ내외어물전ㆍ내전을 합쳐 구분하고, 지전ㆍ저포전ㆍ포전의 저ㆍ포를 합쳐 구분해서 육의전으로 하며, 육의전 외에는 난전(亂廛)을 금하지 않는다.
청포전(靑布廛) 종루 동쪽에 있는데, 중국산 삼승포(三升布)와 양털, 모자를 팔며, 국역 3분에 응한다.
연초전(煙草廛) 도가(都家)가 하량교(河良橋) 남쪽에 있으며, 국역 5분에 응한다.
상전(床廛) 물건들을 상 위에 늘어 놓은 까닭에 속칭 상자리전(箱貲利廛)이라 한다. 말총ㆍ가죽ㆍ초[燭]ㆍ실ㆍ책ㆍ휴지 같은 잡물(雜物)을 파는데, 모두 13곳이다. 망문(望門) 상전은 의금부 앞에 있으며 국역 3분에 응하고, 신(新) 상전은 안국동에 있으며, 묘(廟) 상전과 국역 2분씩에 응하고, 동(東) 상전은 종루 남쪽에 있으며, 수진(壽進) 상전과 국역 1분씩에 응하고, 포(布) 상전ㆍ철(鐵) 상전ㆍ필(筆) 상전ㆍ남문(南門) 상전ㆍ염(鹽) 상전은 이전(履廛 신전) 동쪽에 있다. 정릉동(貞陵洞) 상전ㆍ동현(銅峴) 상전ㆍ지(紙 종이) 상전은 모두 국역 분수가 없다.
생선전(生鮮廛) 병문(屛門) 동남쪽에 있는데, 여러 가지 생선을 팔며, 국역 3분에 응한다. 미전(米廛) 여러 가지 곡식을 팔며, 모두 다섯 곳인데, 상ㆍ하 미전은 상전(上廛)이 의금부 서쪽에 있고 하전이 이현에 있어, 국역 3분씩에 응하며, 문외(門外) 미전은 소의문 밖에 있어 국역 2분에 응하며, 서강(西江) 미전과 마포(麻布) 미전은 모두 분수가 없다.
잡곡전(雜穀廛) 철물교(鐵物橋)의 서쪽 가 남ㆍ북쪽에 있으며, 국역 3분에 응한다. ○ 남문안 미전 도가는 수각교(水閣橋) 서쪽에 있어 한달에 40냥을 잡곡전에 납세한다.
유기전(鍮器廛) 바리전이라고도 한다. 내어물전의 서쪽 행랑 뒤에 있는데, 여러 가지 놋그릇을 판다.
은면전(銀麪廛) 전의감 동구 동쪽 가에 있다.
의전(衣廛) 잡곡전 서쪽에 있는데, 남녀가 입는 옷을 판다.
면자전(綿子廛) 광통교 북쪽 가 동ㆍ서쪽에 있는데, 면화전(綿花廛)이라고도 하며, 씨를 뺀 솜을 판다.
이전(履廛) 청포전 동쪽에 있는데, 여러 가지 가죽신을 판다. 이상 5전은 국역 5분에 응한다. ○ 신전은 여러 곳에 있으나 종루전(鐘樓廛)만이 유정혜(油釘鞋 기름 바르고 징을 박은 신)를 판다.
화피전(樺皮廛) 동상전 동쪽에 있다. 여러 가지 물감과 중국 과실을 파는데, 물건을 벗나무 껍질로 쌌으므로 이렇게 이름을 부른다.
인석전(茵席廛) 수진동 동구 서쪽에 있으며, 용수석(龍鬚席 용수풀로 만든 자리)ㆍ책상ㆍ걸상 같은 물건을 판다.
진사전(眞絲廛) 의금부 문 밖 동쪽에 있고 여러 가지 당사실ㆍ과실ㆍ갓끈ㆍ띠ㆍ실을 엮어서 만든 끈 같은 물건을 판다.
청밀전(淸蜜廛) 도가는 하피마병문(下避馬屛門) 동쪽 가에 있다.
경염전(京鹽廛) 숭례문 밖에 있으며, 서해에서 구운 소금을 판다.
체계전(髢髻廛) 칠목기전 남쪽에 있는데, 속칭 다리전이라 하며, 부인네의 머리 장식하는 다리를 판다.
내장목전(內長木廛) 여러 곳에 있는데 집을 짓는 재목을 판다.
철물전(鐵物廛) 여러 곳에 있으며, 여러 가지 철물을 판다.
연죽전(煙竹廛) 도가가 둘인데, 하나는 군기시 앞에 있고 하나는 약현에 있으며, 여러 가지 물들인 담뱃대, 담배통을 판다. 위의 9전은 모두 국역 1분씩에 응한다.
시저전(匙箸廛) 모두 내ㆍ외 2전인데 내전은 염탄전(鹽炭廛) 동쪽에 있고 외전은 소의문 밖에 있으며, 국역 1분씩에 응한다.
우전(牛廛)ㆍ마전(馬廛) 양전이 모두 태평교(太平橋)의 남쪽 언덕에 있으며, 1분씩에 응한다. 이상의 41전 가운데서 10전은 분수가 없고, 나머지 31전과 위에 나온 6주비전을 아울러 37전이 된다. 무분각전(無分各廛)ㆍ외장목전(外長木廛) 성 밖에 있다.
채소전(菜蔬廛) 하나는 종루에 있고, 하나는 이현에 있다.
모전(毛廛) 속칭 우전[隅廛]이라 하는데, 처음에 길모퉁이에 설치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었으며 토산(土産 그 지방 고유의 산물)의 과실을 판다. 모두 여섯 곳인데 송현(松峴) 모전ㆍ정릉동(貞陵洞) 모전ㆍ상 모전ㆍ하 모전ㆍ전의감동 모전이다.
혜정교잡전(惠政橋雜廛) 우산ㆍ갈대발ㆍ용지(龍脂)ㆍ중간치 횃불[炬] 같은 것을 판다. 세물전(貰物廛) 여러 곳에 있는데 도가는 혜정교 남쪽에 있으며, 혼례ㆍ상례에 쓰는 제구를 세준다.
양대전(涼臺廛) 돈의문 밖에 있다.
잡철전(雜鐵廛) 여러 곳에 있다.
염전(鹽廛) 숭례문 밖에 있고, 마포에도 있다.
백당전(白糖廛) 여러 곳에 있다.
좌반전(佐飯廛) 곧 반찬전인데, 절인 생선ㆍ젓갈 따위를 판다. 모두 네 곳인데, 생선 좌반전ㆍ상미(上米) 좌반전ㆍ내어물(內魚物) 좌반전ㆍ외어물 좌반전이다.
계전(鷄廛) 광통교에 있다.
생치전(生雉廛) 생선전 병문에 있으며, 꿩을 판다.
계란전(鷄卵廛) 생치전 곁에 있다.
저전(豬廛) 각처에 있다. ○ 큰 상사[喪]에는 준례로서 저전 사람이 방상시(方相氏 장례 행렬 맨 앞에서 탈을 쓰고 귀신을 쫓으며 가는 사람)가 된다.
복마제구전(卜馬諸具廛) 종루에 있는데, 나무안장ㆍ말가슴걸이ㆍ고삐ㆍ채찍 같은 것을 판다.
세기전(貰器廛) 잔치에 쓰이는 것을 세주는데, 사기 그릇과 홍칠반(紅漆盤 나무에 붉은 칠을 한 그릇)은 숙수도가(熟手都家 숙수는 요리사 숙수가 모여 있는 곳)에 있다.
승혜전(繩鞵廛) 생마혜(生麻鞋)와 숙마혜(熟麻鞋 삼으로 만든 신. 숙마혜는 익힌 삼으로, 생마혜는 익히지 않는 삼으로 만든 것)를 파는데, 여러 곳에 있으며 도가는 의금부 문밖의 동쪽에 있다.
상ㆍ하목기전(上下木器廛) 상전은 육조 앞에 있고, 하전은 이현에 있는데, 모판ㆍ싸리농[杻籠]ㆍ성긴 싸리농ㆍ키ㆍ궤짝 같은 것을 판다.
칠목기전(漆木器廛) 여러 가지 나무 그릇과 장(欌)을 팔기 때문에 장전이라고도 부르며, 무늬 있는 나무장ㆍ종이장ㆍ방장(房欌) 따위를 판다. 여러 곳에 있는데, 효경교(孝經橋)에 지금 가장 많다.
등전(鐙廛) 곧 마상전(馬床廛)인데, 광통교 곁에 있으며, 지상전(紙上廛)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는 지전 앞에 있는데 말안장을 판다.
백립전(白笠廛 국상이 있으면 사용하는 흰말총으로 만든 갓)ㆍ흑립전(黑笠廛) 양전의 도가는 어의동 병문에 있다.
초립전(草笠廛) 청포전 서쪽에 있다.
자기전(磁器廛) 종루와 숭례문 밖에 있는데, 토산 자기와 중국 자기를 판다.
침자전(針子廛) 은침(銀針)과 크고 작은 보통 바늘을 판다.
분전(粉廛) 모두 넷인데, 하나는 영희전 동쪽 안팎에 둘씩 있다. 또 여러 곳에 있는데, 분ㆍ연지ㆍ색실을 팔며, 방물전(方物廛)이라 부른다. 여자 장사가 다니며 팔거나, 앉아서 팔기도 한다.
족두리전(簇頭里廛) 종루에 있는데, 부인네의 머리 장식품을 판다.
망건전(網巾廛) 하나는 종루에 있고, 하나는 소의문 밖에 있다.
내전립전(內氈笠廛) 마전교에 있다.
외전립전(外氈笠廛) 돈의문 밖에 있다.
파립전(破笠廛) 여러 곳에 있는데, 도가는 어의동에 있다.
고초전(蒿草廛) 숭례문 밖과 흥인문 밖에 있는데, 지붕을 잇는 짚과 울타리 대싸리를 판다.
초물전(草物廛) 소의문 밖에 있는데, 생삼[生麻], 삶은 삼ㆍ칡[葛]ㆍ노끈ㆍ왕골ㆍ기령풀 따위를 판다.
죽물전(竹物廛) 숭례문 밖에 있는데,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대로 만든 물건들을 판다.
이저전(履底廛) 창전(昌廛)이라고도 한다. 입전동(笠廛洞)에 있는데, 소가죽신 창을 판다. 시목전(柴木廛) 용산 강변에 있다.
파자전(笆子廛) 성 밖에 있다.
합회전(蛤灰廛 조개껍질을 구워서 만든 회) 하나는 이현 아래에 있고, 하나는 육조 앞에 있다.
전족전(箭鏃廛 화살과 촉) 이교남천(二橋南川) 가에 있다.
도자전(刀子廛) 종루 거리 위에 있는데 거리에 앉아서 장도ㆍ은비녀ㆍ부인네의 패물ㆍ금 은 가락지ㆍ담배통을 판다.
염수전(鹽水廛)ㆍ종자전(種子廛) 여러 곳에 있으며, 채소ㆍ쪽ㆍ연지풀의 씨앗을 판다.
교자전(轎子廛) 회현방 동구에 있으며, 여러 가지 가마를 판다.
형파전(荊把廛) 성 밖에 있으며, 나무꾼이 쓰는 갈퀴를 파는데, 갈퀴라는 것이 즉 형파(荊把)이다. 이 밖에 소소한 여러 전은 종류가 번다해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전에 없거나 드문 물건은 평시서(平市署)에서 나누어 정해주어서 육의전에 무역해 들인다. 붙임 감고(監考) 일이소(一二所)가 있는데 각 전 사람 중에서 착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을 뽑아서, 일이소의 감고로 정하고, 해마다 중국으로 사신이 갈 때 세폐(歲幣)로 가져갈 생상목(生上木 상등면포)을 일이소 감고처에서 2통 40자씩 값을 받고 올린다. 뒤에 금계(金契)의 공인(貢人 조공을 바치러 가는 사람)과 더불어 요역(徭役 나랏일에 이바지하는 것)하여 삯을 받고, 세폐 1백 25바리를 평산부(平山府)에 운반해 놓는다.
【포사】 서적포(書籍舖) 정도전의 서문이 있다. ○ 상고해 보건대, 개국 초에 가게를 열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그만둔 것 같다.
책사(冊肆) 정릉동 병문에도 있고, 육조 앞에도 있는데,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百家 여러 학자 또는 그 학파)의 여러 가지 책을 판다.
서화사(書畫肆) 대광통교(大廣通橋) 서남쪽 개울 가에 있는데, 여러 가지 글씨와 그림을 판다.
금교세가(金轎貰家) 여러 곳에 있는 종친ㆍ옹주ㆍ공주의 옛집에서 세주는 것인데, 혼인하는 신부의 집에서 쓴다.
약국(藥局) 동현의 좌ㆍ우 거리에 있고 또 여러 곳에 산재하는데, 대신의 관청이나 여러 군영에는 다 약방이 있다.
현방(懸房) 소를 잡아 고기를 파는 곳이다. 반인(泮人 성균관에 딸려 있으며 대대로 쇠고기를 팔던 사람. 관인이라고도 한다.)이 그 파는 일을 맡았는데, 고기를 걸어 놓고 파는 까닭에 현방이라 부른다. 중부 다섯 곳인데, 하량교ㆍ이전(履廛)ㆍ승내동(承內洞)ㆍ향교동(鄕校洞)ㆍ수표교이고, 동부 세 곳인데 광례교(廣禮橋)ㆍ이교(二橋)ㆍ왕십리이고, 남부 네 곳인데, 광통교ㆍ저동ㆍ호현동(好賢洞)ㆍ의금부이고, 서부 일곱 곳인데, 태평관ㆍ소의문 밖ㆍ정릉동ㆍ허병문(許屛門)ㆍ야주현(冶鑄峴)ㆍ육조 앞ㆍ마포이고, 북부 세 곳인데, 의정부ㆍ수진방ㆍ안국방으로 합쳐서 스물 세 곳이다.
붙임
향도(香徒 상여꾼) 는 소광통교(小廣通橋) 남쪽에 있고, 수표교의 남쪽 개울 가의 동쪽에도 있으며, 또 여러 곳에 산재한다.
【장방】 금방(金房) 여러 곳에 있으며, 또 금박(金箔 금을 엷게 입히는 것)하는 집이 있다. 은방(銀房) 도가가 둘인데, 하나는 백목전 도가(白木廛都家) 남쪽에 있고, 하나는 내어물전 북쪽의 향도정동(香徒井洞)에 있다.
옥방(玉房) 여러 곳에 있는데, 비녀ㆍ가락지 따위를 판다.
두석방(豆錫房 두석은 주석) 도가는 다래전 남쪽에 있다.
능라방(綾羅房) □산루(□山樓)에 있고 또 여러 곳에 있다.
주피방(周皮房) 안장 따위를 만들며, 도가는 장악원 건너편에 있다.
궁방(弓房) 내방(內房)은 도총부 북쪽에 있고, 외방은 마전교에 있다.
시방(矢房) 역시 내ㆍ외방이 있고, 또 여러 곳에 있다.
사모방(紗帽房) 여러 곳에 있다.
각대방(角帶房) 여러 곳에 있다.
도자방(刀子房) 여러 곳에 있다.
안경반(眼鏡房) 여러 곳에 있다.
석경방(石鏡房 예전의 구리 거울 등에 대하여 지금의 유리 거울을 말함) 여러 곳에 있다. 모의방(毛衣房) 여러 곳에 있다.
필방(筆房) 여러 곳에 있다.
입방(笠房) 여러 곳에 있다.
연죽방(煙竹房) 여러 곳에 있다.
【공장】서울의 여러 중앙 관서의 장인(匠人 기술자)은 그 관계 서류를 작성하여 공조와 소속 관서에 비치하며, 가장 긴요한 장인이 궐원이 있을 때에는 군인ㆍ보솔(保率)ㆍ관속(官屬 관청의 최하급 관원)ㆍ공천(公賤 관청 소속의 하인)을 막론하고 합당한 사람으로 차출하여 정한다. ○ 옹기점 장인은 군병이거나 공천ㆍ사천을 물론하고 그릇 굽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자를 공조에서 세를 거두어 채용하며, 무쇠 장인의 인원수가 모자라는 것은 모자라는 대로 곧 보충한다. ○ 사옹원(司饔院)의 사기그릇[沙器] 장인은 그 자손이 다른 일에 충당되지 않고 대를 잇는다. ○ 공조에는 초립장(草笠匠) 8명, 사모장(紗帽匠) 2명, 도다익(都多益) 2명, 다회(多繪) 2명, 망건장(網巾匠) 2명, 모자장(帽子匠) 2명, 옹장(瓮匠) 13명, 화장(和匠) 4명, 은장(銀匠) 8명, 금박장(金箔匠) 2명, 과피장(裹皮匠) 2명, 화혜(靴鞋) 6명, 숙피장(熟皮匠) 10명, 화아(花兒)10명, 사피장(斜皮匠) 4명, 전장(氈匠) 4명, 입사장(入絲匠) 2명, 칠장(漆匠) 10명, 두석장(豆錫匠) 4명, 주장(鑄匠) 20명, 나전장(螺鈿匠) 2명, 유장(鍮匠) 8명, 배첩장(褙貼匠) 2명, 침장(針匠) 2명, 경장(鏡匠) 2명, 조각장(雕刻匠) □명, 동장(銅匠) 4명, 주피장(周皮匠) 6명, 한치장(汗致匠) 2명, 안롱장(鞍籠匠) 2명, 간다개(看多介) 2명, 필장(筆匠) 8명, 죽장(竹匠) 2명, 추골장(鞦骨匠) 2명, 인장(印匠) 2명, 수철장(水鐵匠) 30호(戶), 대ㆍ중ㆍ소야장(大中小冶匠) 각 10명, 야장(冶匠) 4명, 주장(珠匠) 2명, 점보로(䩞甫老) 2명, 매즙(每緝) 2명, 안자장(鞍子匠) 10명, 어적(於赤) 4명, 점장(䩞匠) 2명, 목소장(木梳匠) 2명, 소성장(梳省匠) 2명, 통개장(筒介匠) 2명, 첩선장(貼扇匠) 4명, 표통장(表筒匠) 2명, 칭자장(稱子匠) 2명, 원선장(圓扇匠) 2명, 죽소장(竹梳匠) 10명, 침선장(針線匠) 6명, 초염장(草染匠) 6명, 목영장(木纓匠) 4명이다. ○ 봉상시에는 옹(瓮) 10, 화(花) 6, 변두(邊荳) 4이다. ○ 내의원에는 분(粉) 2, 향(香) 2이다. ○ 상의원에는 능라(綾羅) 1백 5, 장립(章笠) 6, 유립(襦笠) 2, 사모 4, 양태(涼太) 2, 도다익 2, 다회(多繪) 4, 망건 4, 모자 2, 도련(擣鍊) 2, 잠(箴) 10, 옥(玉) 10, 옹(瓮) 10, 화(和) 8, 은 8, 금박 4, 과피 4, 화(靴) 10, 피혜(鞁鞋) 8, 숙피 8, 화아(花兒) 4, 침피(針皮) 4, 모의 8, 전 8, 입사(入絲) 4, 모관(毛冠) 2, 사금(絲金) 4, 칠 8, 두석 4, 마조(磨造) 4, 궁현(弓絃) 4, 유칠(油漆) 2, 주(鑄) 4, 나전 2, 하엽사(荷葉絲) 2, 생피(生皮) 2, 유(鍮) 2, 배첩(褙貼) 4, 침 2, 경(鏡) 2, 풍물(風物) 8, 조각 4, 묵(墨) 4, 동(銅) 4, 궁인(弓人) 18, 시인(矢人) 21, 도자(刀子) 6, 야(冶) 8, 연(鍊) 10, 매즙 4, 목소(木梳) 2, 재금(裁金) 2, 도목개(都目介) 2, 도결아(都結兒) 2, 웅피(熊皮) 2, 전피(猠皮) 2, 화빈(火鑌) 2, 죽소(竹梳) 2, 환도(環刀) 12, 침선 40, 합사(合絲) 10, 청염(淸染) 10, 홍염(紅染) 10, 세답(洗踏) 8, 도침(擣砧) 14, 연사(鍊絲) 75, 방직(紡織) 20, 초염(草染) 4이다. ○ 군기시에는 칠 12, 마조(磨造) 12, 궁현(弓絃) 6, 유칠 2, 주 20, 생피 4, 갑(甲) 35, 궁인(弓人) 90, 시인(矢人) 1백 50, 쟁(錚) 11, 아교(阿膠) 2, 고(鼓) 4, 연사(鍊絲) 2이다. ○ 교서관에는 야 6, 균자(均字) 40, 인출(印出) 20, 각자(刻字) 14, 주 8, 조각 8, 목(木) 2, 지(紙) 4이다. ○ 사옹원에는 사기 3백 80이다. ○ 내자시에는 옹 8, 화(花) 20, 방직 30, 잠(箴) 2이다. ○ 내섬시에는 옹 8, 방직 30, 잠 2이다. ○ 사도시(司導寺)에는 옹 8이다. ○ 예빈시에는 옹 8, 화 6이다 ○ 사섬시(司贍寺)에는 인출 2, 저폐(楮幣) 2 이다. ○ 선공감에는 마조 8, 조각 10, 죽 20, 목 60, 석(石) 40, 개(蓋) 20, 이(泥) 20, 도분(塗粉) 20, 돌(堗) 8, 거(車) 10, 우산(雨傘) □, 단(簞) 10, 염(簾) 14, 파자(把子)10, 상화롱(牀花籠) 4, 석회(石灰) 6, 마미사(馬尾篩) 4, 통(桶) 10, 아교 2 이다. ○ 제용감에는 숙피 2, 모관(毛冠) 2, 화엽사(花葉絲) 2, 분 2, 황단(黃丹) 2, 절죽(截竹) 2, 홍염(紅染) 10, 도침(擣砧) 6, 세답(洗踏) 4, 침선 24, 방직 30, 잠 2, 청염(靑染) 20이다. ○ 장악원에는 풍물 4, 황엽(簧葉) 2이다. ○ 관상감에는 자격(自擊) 10이다. ○ 전설사(典設司)에는 침 2, 다회(多繪) 6이다. ○ 전함사에는 선(船) 10이다. ○ 내수사(內需司)에는 옹 7, 야 2, 도 10, 유 5, 수철(水鐵) 6호(戶), 대중소야 각2, 사기 6, 목 2이다. ○ 소격서에는 옹 4이다. ○ 사온서는 옹 4이다. ○ 의영고는 옹 4, 촉(燭) 4이다. ○ 장흥고는 균(菌) 8, 도배(塗褙) 8이다. ○ 장원서에는 옹 8이다. ○ 사포서는 옹 10이다. ○ 양현고는 옹 □이다. ○ 조지서는 목 2, 염(簾) 8, 지 81이다. ○ 도화서는 배첩 2이다. ○ 와서는 와(瓦) 40, 잡상(雜象) 4이다. ○ 귀후서는 목 4, 야 2, 칠 2이다. (봉상시 이하는 장(匠) 자를 쓰지 않았다.) ○ 이상의 여러 관서 중에서 사섬시ㆍ전함사ㆍ소격서ㆍ사온서ㆍ귀후서는 지금 모두 폐지되고, 내자시ㆍ내섬시ㆍ사도시ㆍ예빈시ㆍ제용감, 전설사ㆍ장악원ㆍ사포서ㆍ양현고ㆍ도화서는 지금 공장(工匠)이 없으며, 그 밖의 여러 관서는 명색이 새로운 것과 예전대로 있는 것이 서로 차이가 있고, 인원수의 더하고 덜한 것이 일정하지 않은데, 적(籍)을 만들어서 공조에 두는 규례를 폐지하여 행하지 않고 속전(續典 속대전)을 만들 때에도 거론되지 않은 까닭에 지금도 모두 예전 그대로 하고 고치지 않았다. 금장ㆍ은장ㆍ옥장ㆍ두석장(豆錫匠)ㆍ목수ㆍ석수ㆍ소목장(小木匠)ㆍ대정(大丁) 쇠를 부어 칼이나 잡물을 만드는 사람을 속칭 대정이라 한다. ㆍ조주장(造主匠 신주 만드는 공장)ㆍ관곽장(棺槨匠)ㆍ모의장(毛衣匠)ㆍ안장장(鞍粧匠)ㆍ주자장(鑄字匠)ㆍ숙수장(熟手匠)ㆍ각수장(刻手匠)ㆍ장책장(粧冊匠)ㆍ칠장은 모두 지금 세상에서 통용하는 장색(匠色 색은 종류라는 뜻)이다.
【원묘】 의소묘(懿昭墓) 북부 아현(阿峴)의 서쪽, 연희궁(延禧宮)의 동쪽에 있다.
효창묘(孝昌墓) 서부 청파(靑坡) 서쪽에 있다.
선희묘(宣禧墓) 연희궁(延禧宮) 대야동(大野洞)에 있다. 의빈성씨 묘(宜嬪成氏墓) 효창묘의 왼쪽 언덕에 있다.
【불우】대체로 절은 새로 창건하지 못하며, 다만 옛터를 중수하는 자는 양종(兩宗 교종ㆍ선종의 두 종)에 고하고 예조에 보고하여 계문(啓聞 임금에게 알리는 것)하며, 능침(陵寢)에 가까운 곳에 사찰을 새로 세우는 것은 엄금한다. 서울의 여러 관서나 궁방(宮房)의 원당(願堂 부처에게 원하는 집)은 일체 혁파했다. ○ 승과시험을 보아 승(僧)이 된 자는 3개월 안으로 선종(禪宗)에 고하고, 혹 교종(敎宗)은 경의 암송을 시험보는데, 예조에 보고하여 계문하고 정전정포(丁錢正布 부역이나 병역을 면제하는 대신에 바치는 포목) 30필을 걷고 도첩(度牒)을 내어 준다.
흥천사(興天寺) 서부 황화방의 정릉 동쪽에 있는데, 본래 고려의 옛절이다. 홍무(洪武 중국 명 태조의 연호) 정축년에 중건하여 선종이 되었다. 권근의 기문이 있으며, 사리각(舍利閣)이 있어 우뚝한 높이가 5층이고 서울 안에 높이 섰으며, 보물과 불경을 그 안에 간직하였다. 능을 옮긴 뒤에 절은 예전대로 두었다. 연산군 때에 폐지하여 분사복시(分司僕寺)로 삼았고, 중종 반정 뒤에 계속 관청을 삼았다. 절은 이미 무너졌고 사리각만 남았는데, 경오년 3월에 이르러 중학의 유생들이 이단(異端)을 쓸어버린다고 부르짖으며 밤을 타서 부수고 불살라서 불길이 공중에 치솟고, 불구름이 하늘을 덮었는데, 도성 안의 깊은 골짜기의 그윽한 굴 속의 조그만 것까지도 다 들어내어 불태웠다. 세조 7년에 큰 종을 주조하여 걸었고, 한계희(韓繼禧)의 명(銘)이 있었는데 지금은 흥인문 안에 있다. 영종 무진년에 각을 세웠는데 뒤에 무너졌으며 지금은 광화문 루에 걸려 있다.
흥덕사(興德寺) 동부 연희방(燕喜坊)에 있으니, 바로 정종(定宗)의 잠저 동쪽이다. 연못이 있다. 교종(敎宗)이 됐고 지금은 없어졌다. ○ 변계량(卞季良)이 늘 이 절에 거처하면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지었다. 권근의 〈덕안전기(德安殿記)〉가 있다.
내불당(內佛堂) 인왕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원각사(圓覺寺)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으며, 옛 이름은 흥복사(興福寺)인데, 개국 초에는 조계종(曹溪宗)의 본사(本社)가 되었다가 뒤에 폐지되어 관청이 되었다. 세조 10년에 고쳐 창건하여 원각으로 삼았으며,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고 또한 큰 종이 있는데, 바로 지금의 종루의 종이다. 연산군 때 흥청(興淸)ㆍ운평(運平) 등을 두고서 연방원(聯芳院)이라 부르고 이 절에 국(局)을 설치하였다. 중종 7년에 양종(兩宗)과 원각을 철거하여, 그 재목을 연산군 때 집을 헐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내려주었다. 이름난 탑 13층에 12회상(會相)을 새겼는데, 새긴 불상이 매우 정밀하고 기교하며, 또 처마 밑에 각각 해서로 쓴 작은 액자 다보회(多寶會)ㆍ영산회(靈山會) 등 글씨가 있고, 탑 기둥 사면에는 모두 용의 모양을 새겼다. 위 3층은 임진년에 왜적들이 무너뜨렸다. ○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이르기를, “원각사는 옛 큰 절의 터이며, 처음에는 대전(大殿)과 동ㆍ서의 선당(禪堂)뿐이었는데, 관습도감(慣習都監)을 대전의 서선당에 붙이고, 예장도감(禮葬都監)을 동선당에 붙이고, 대전의 북쪽은 중학의 유생들이 모이는 곳으로 삼았다. 세조가 일찍이 철거하여 다시 대가람(大伽藍)을 창건하게 하고 이름하여 원각이라 하였으며, 임금이 여러 번 행행하였고,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가 되어 내리고, 사리가 여러 개로 나누어지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 뒤에 중부청사가 가각고(架閣庫) 자리에 옮겼고, 예장도감을 송현행랑(松峴行廊)에 붙여서 귀후서에 속하고, 관습도감을 봉상시의 악학(樂學)에 합쳐서 이름하여 악학도감이라 했다가 얼마 안 되어 장악원으로 고쳤다.” 하였다.
인왕사(仁王寺) 인왕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금강굴(金剛窟) 인왕사 서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금륜사(金輪寺) 성 안에 있는데, 이 절 안에 사국(史局 춘추관)을 개설하였다. 유관(柳寬)이 일찍이 영수사(領修史)로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갔었다는데, 바로 흥덕사인 듯하다.
복세암(福世菴) 인왕산에 있었으며 세조조에 세웠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장의사(藏義寺) 창의문 밖에 있다. 신라가 백제 군사와 황산벌에서 싸웠는데,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이 싸움터에서 죽었으므로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두 사람을 위하여 이 절을 창건했다. 우리 조정의 세종이 이 절을 집현전의 여러 신하에게 하사하여 그 안에서 글을 읽게 했으며, 성종조에 나이 적은 문관 채수(蔡壽) 등을 뽑아서 말미를 주어 이 절에서 글을 읽게 하니, 문장접(文章接)이라고 했다. 뒤에 없어졌다. 연산군 병인년에 장의문(藏義門) 밖에 수각(水閣)을 세웠는데, 지금은 탕춘대(蕩春臺)가 되었다.
연굴(演窟) 소격서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향림사(香林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고려 현종 경술년의 사변(거란의 2차 침입), 무오년의 난(거란의 3차 침입) 때에 태조의 재궁(梓宮 임금의 관)을 이 절에 옮겨 모셨다.
적석사(積石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청량사(淸涼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고려의 이자현(李資玄)이 청평산(淸平山)으로부터 불려와서 머물렀다.
승가사(僧伽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의 상서(尙書) 이오(李䫨)의 중수기(重修記)가 있다. ○ 옛날 신라 낭적사(狼迹寺)의 중 수태(秀台) 어령대사(飫聆大師)의 성적(聖跡)이다. 삼각산 남쪽에 좋은 곳을 가려서 바위를 깨고 굴을 만들며, 돌을 깎아 대사의 도용(道容 도통한 이의 성스러운 모습)을 본따 새겼다. 나라에 재난과 이변이 있으면 기도하여 재앙을 물리쳤는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적이 없었다 한다.
삼천사(三川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대지국사비명(大智國師碑銘)〉이 있다.
진관사(津寬寺) 삼각산 서쪽에 있다. 태조가 수륙도량(水陸道場)의 상ㆍ중ㆍ하 3 단(壇)을 만들게 하고 여러 번 행행하였으며, 권근의 〈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가 있다. 세종 조에 신숙주(申叔舟) 등에게 말미를 주어, 이 절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도성암(道成庵) 삼각산 동쪽에 있는데, 정의공주(貞懿公主)의 원찰(願刹 어느 사람을 위해서 기도 드려 주는 절)이다.
자수원(慈壽院) 바로 개국 초의 북학이 있던 자리이다.
인수원(仁壽院) 현종 2년에 자수, 인수 양원을 철거하고 그 재목으로 학궁(學宮)과 무관(武館)을 수축하여, 중과 여승들은 환속(還俗 중이 도로 세상에 나와 보통 사람이 됨)하게 하며, 북학을 다시 세웠다. 북학조에 상세하다.
정업원(淨業院) 연미정동(燕尾亭洞)에 있는데, 성 안에 있다고도 한다. 정순왕후(定順王后 단종의 비 송씨)를 부인으로 강봉(降封)할 때 세조가 흥인문 안의 연미정동에 집을 내려주었는데, 주인이 따로 초가를 짓고 자칭 정업원 주지(住持)라 했다. 앞에 돌산 봉우리가 있는데, 주인이 때때로 올라가서 영월(寧越)을 바라보았으므로 동망봉(東望峯)이라고 부른다. 영종 계묘년에 어필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5자를 써서 동망봉 아래에 작은 비석을 세웠다. ○《장릉지(莊陵志)》의 〈해평가전(海平家傳)〉에 이르기를, “노산군부인(魯山君夫人 세조 찬위 후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 송씨가 살아 있을 때 성 안에 있으려 하지 않고 동쪽 교외에 살면서 노릉(노산군의 능 곧 장릉)을 바라보기를 원하므로 조정에서 동문 밖에 집을 짓고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 불렀는데, 부인이 따로 초가 몇 칸을 짓고 살면서 소의소식(素衣素食 흰옷을 입고 채소 음식을 먹음)으로 일생을 지냈다. 성종조에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불상을 만들어서 이 원에 보냈는데, 유생 이벽(李鼊) 등이 빼앗아서 불태웠다. 선조 계유년에 성균관 유생들이 철거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했으나 허가하지 않았다. ○ 이상의 3원은 모두 여승이 사는 곳이다. ○ 성현의《용재총화》에, “성 안에 여승의 절간이 이미 철거되고 정업원만이 남았으며 여승들은 모두 다 흥인문 밖으로 쫓겨나 안암동 등지에 서너 집이 있었다. 숭례문 밖 종약산(種藥山) 남쪽에 예전에 한 집이 있었는데, 그 후에 그 곁에 작은 집들을 지어서 지금은 10여 집이 있다.” 하였다.
중흥사(重興寺) 북한 삼각산 등안봉(登岸峯) 아래에 있다. ○ 고려의 중 보우(普愚)가 늘 이 절의 동쪽 봉우리에 살았으며 태고(太古)라고 편액했다. ○ 목은 이색이 지은 원증국사 보월(圓證國師寶月)의 〈승공탑명(昇空塔銘)〉이 있다. ○ 총섭(摠攝 승병(僧兵)의 사령관)이 여기에 군영을 개설했다. ○ 1백 49칸이다.
태고사(太古寺) 북한 등안봉(登岸峯) 태고대(太古臺)아래에 있다. ○ 경서(經書)ㆍ통사(通史)ㆍ옛 당 나라의 당시(唐詩) 등의 판을 저장했다. ○ 1백 36칸이다.
보국사(輔國寺) 금창(禁倉) 아래에 있다. ○ 67칸이다.
진국사(鎭國寺) 노적봉(露積峯) 아래 중성문(中城門) 안에 있다. ○ 1백 4칸이다.
부왕사(扶旺寺)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다. ○ 1백 11칸이다.
국영사(國寧寺) 의상봉(義相峯) 아래에 있다. ○ 70칸이다.
보광사(普光寺) 대성문(大城門) 아래에 있다. ○ 75칸이다.
원각사(圓覺寺) 증봉(甑峯) 아래에 있다. ○ 81칸이다.
용암사(龍巖寺) 일출봉(日出峯) 아래에 있다. ○ 88칸이다.
상운사(祥雲寺) 영취봉(靈鷲峯) 아래에 있다. ○ 89칸이다.
서암사(西巖寺) 수구문(水口門) 안의 민지암(閔漬巖)의 옛 집터에 있다. ○ 1백 7칸이다. ○ 위의 11절에는 승장(僧將) 1명, 수승(首僧) 1명, 번승(番僧) 3명씩을 두었다.
봉성암(奉聖菴)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 25칸이다.
원효암(元曉菴) 원효봉(元曉峯) 아래에 있다. ○ 10칸이다.
문수암(文殊菴) 문수봉 아래에 있다. ○ 이상의 여러 절은 모두 북한성 안에 있다.
【고적】남평양성(南平壤城)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성과 궁궐을 세워 서울을 옮겼으며, 진사왕(辰斯王) 7년에 궁실을 중수하고 땅을 파서 산을 만들고 기이한 풀을 심으며 기이한 새를 길렀다. 개로왕(蓋鹵王)이 궁실을 크게 세우고 도성 안의 사람을 모두 동원해서 흙을 쪄서 토성을 쌓았다. 누각(樓閣 누나 각이나 비슷하나 누에는 다락이 있음)ㆍ대사(臺榭 높은 곳에 있다는 점에서 같고 사에는 집이 있다고 한다)가 웅장하고 수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 때문에 나라가 피폐하고 백성이 원망하여 죽게까지 되었다. ○ 진사왕이 구원행궁(狗原行宮)을 세웠다.
장한성(長漢城) 한강 위쪽에 있다. 신라 때에 중요한 진(鎭)을 두었는데, 뒤에 고구려가 점거한 것을 신라 사람들이 군사를 일으켜서 회복하고 장한성가를 지어서 그 공을 기념하였다.
대성락영(大星落營) 용삭(龍朔) 당 고종의 연호) 원년 봄에 고구려와 말갈이 군사를 일으켜서 진군하여 북한산성을 에워싸서 성 안이 위태로웠는데,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우레치고 비오며 벼락치니, 적들이 놀라서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
신혈사(神穴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의 현종이 머리 깎고 이 절에 거처하였다.
면악(面嶽) 고려 숙종이 최사추(崔思諏)ㆍ윤관(尹瓘) 등을 시켜 남경의 지리를 살피게 하였더니, 사추가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노원역ㆍ해촌(海村)ㆍ용산 등지에 가서 산수를 살펴보니 도읍을 세우기에 합당치 않은데, 삼각산 면악의 남쪽 만은 산의 모양과 물의 형세가 옛글에 부합됩니다. 원줄기의 중심이 임좌병향(壬坐丙向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함)이니 형세에 따라 도읍을 세우소서.” 하였다. 여기서 형세를 따라서 동쪽으로는 대봉(大峯)까지, 남쪽으로는 사리(沙里)까지, 서쪽으로는 기봉(岐峯)까지, 북쪽으로는 면악까지를 경계로 하여 남경을 세우며, 오얏나무를 심고 이씨를 택해서 윤(尹 서울 지방의 장관)으로 삼고, 임금이 또한 한 해에 한 번씩 순행하며 용봉장(龍鳳帳 임금의 포장)을 묻어, 지기(地氣)를 진압하였다. ○ 지금 상고해보면 면악은 바로 백악인 듯하다.
【제영】 8영(八詠) 기전(圻甸 임금 직할의 지역 곧 경기)의 산하, 도성의 궁원, 여러 관서가 별처럼 모여 있음, 여러 동리가 바둑처럼 펼쳐 있음, 동대문의 교련장, 서강의 조선(漕船)이 머무름, 남쪽 나루터의 길손, 북쪽 교외의 기르는 말. 10영 목멱산의 꽃구경, 마포의 배 띄우기, 제천정의 달 구경, 양화도의 눈밟기, 반송정의 손님 배웅, 장의사의 중 찾기, 흥덕사의 연꽃 구경, 입석포의 낚시질, 전관교의 꽃찾기, 종가의 등불 구경하기. 남산 8영 북쪽 대궐에 비낀 구름, 남쪽 강에 가득한 물, 바위 아래의 그윽한 꽃, 고개 위의 긴 소나무, 봄철 3월의 푸른 풀 밟기, 9월 9일에 높은 곳에 오름, 산봉우리에 올라가 등불 구경하기, 시내 따라가며 갓끈 빨기. 국도(國都) 8영 필운대의 꽃과 버들, 압구정의 배 띄우기, 삼청동의 녹음, 자각의 관등, 청계의 단풍놀이, 반지의 연꽃 구경, 세검정의 시원한 폭포, 광통교의 맑은 달.
【명환】 고려의 강감찬(姜邯贊) 현종 때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한양에 범이 많았다. 감찬이 편지 한 장을 적어서 아전에게 주며 말하기를, “북문 밖에 있는 산골짜기에 반드시 두 중이 있을 것이니, 갖다 주어라.” 하였다. 아전이 그 말대로 하니, 과연 두 중이 있어 아전을 따라와서 배알하였는데, 감찬이 꾸짖기를, “너는 빨리 무리를 데리고 멀리 가거라.” 하니, 한성유수(漢城留守)가 그 말을 괴상하게 여겼는데, 감찬이 또 본색을 드러내라고 명령하니, 중이 곧 옷을 벗고 두 범으로 바뀌어서 크게 울부짖었다. 감찬이 말하기를, “빨리 가라.” 하니, 범은 곧 뛰어서 사라졌는데 이후로 호환(虎患)이 드디어 없어졌다.


 

[주D-001]평교자(平轎子) : 교자 바탕만 있고, 위에 가리는 것이 없어서 전신이 드러나게 되어 있고, 교자 자체가 길어서 휘청휘청하므로 빨리 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
[주D-002]옥로(玉鷺) : 옥으로 조그마하게 백로 형상으로 만든 것인데, 그것을 모자 꼭대기에 단다. 그것은 생쇄권(生殺權)이 있다는 표지이다.
[주D-003]기린(麒麟) : 예전 관복의 가슴과 등에 수놓은 것. 약 20cm의 사각형을 대는데, 그것을 흉배(胸背)라고 한다. 그것이 관직의 고하에 따라 다른 것은 여기의 본문과 같다.
[주D-004]화혜(靴鞋) : 화(靴)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긴 신이요, 혜(鞋)는 보통 발등까지도 안 올라오는 신이다.
[주D-005]북독(北瀆) : 독은 물이란 말인데, 나라에서 큰 강물에 제사할 때 그 강물을 말한다.
[주D-006]하징(夏徵) : 예전에 역적은 성(姓)을 떼고 이름만 쓰는 것이 법이었다. 그러므로 여기 이하징(李夏徵)이라는 사람도 성을 떼고 이름만 쓴 것이다. 아래에도 그런 곳이 여러 곳 있다.

 

 

靑莊館全書卷之三 完山李德懋懋官著男光葵奉杲編輯德水李畹秀蕙隣校訂
 嬰處文稿[一]
記遊北漢 a_257_072b


二宿五飡。觀山內外寺十一。菴與亭樓各一。不見者一菴二寺。曰奉聖。曰輔國。僧曰是刹之最下者。偕遊者。子休,汝修曁吾三人。詩共四十一。菴,寺,亭,樓各有記。山葢百濟古都。我祖宗。鍊兵峙糓。爲保障之地。距漢師三十里。257_072c從文殊門以入。出城西門。時辛巳九月晦也。


洗釰亭
緣萬石以上。亭在大磐陀。石白色。溪閒石以流。倚欞而眺。水聲掠衣履去也。亭名洗釰。左有立石。鐫曰鍊戎臺。


小林菴
亭之北數十난001。右室開。三石佛坐焉。古以往香火不絶也。余幼時見窟而無龕。今以小屋覆之。苾蒭曰淨和。


文殊寺
257_072d日晡至文殊。瞰平地。疑到天半也。佛龕當大石窟。仍龕左右。逶迤以行。水如雨滴人衣。行盡有石泉紺寒。左右五百石羅漢坐累累也。窟名普賢。或曰文殊。有三佛。石曰文殊。玉曰地藏。金塗者。爲觀音菩薩。以是亦曰三聖窟。窟旁有臺。名七星。留以飯。北入文殊城門。


普光寺
日暮抵城門。乃山之臬處。門以下地稍底。多楓楠松杉。曠然谷易應。寒氣始襲人也。遂抵普光法堂。右藻井。大書三人字姓。和尙皆談兵。壁室。貯鎗刀弓矢。黃257_073a昏。抵太古寺宿。


太古寺
寺東峯下。有高麗國師普愚碑。牧隱撰。書者。權鑄也。師謚曰圓證。太古爲號。辛旽用事。上書論其罪。爲時君所逐。卓乎桑門之有節者。旣寂。舍利百枚。三浮屠以난002之。碑陰有我太祖微時爵姓諱。爵曰判三司事。上之今年난003난004命閣以覆焉。有肅敏上人者。稍識字冲澹。可與語。朝飯向龍巖寺。


龍巖寺
是寺最北漢之東隩也。北有五峯。大者三。曰白雲,萬257_073b景,露積。故三角名焉。仁壽,龍巖小者。


重興寺
捨龍巖。遵去路以下。地稍平。有寺焉。曰重興。麗時建也。十一寺最爲古且大。金佛坐者。過丈。僧將開府以處。領八路僧兵。名曰軌能。난005曰摠攝。旁有磨石。仍巖石以刻。


山映樓
迤重興以西。林木翳然。溪淸而鳴。多大石如冠如舟。積而爲臺者。間有之。葢如洗釰亭奧過之。


扶旺寺
257_073c寺在漢之南奧。洞名曰靑霞洞。門其幽而寂。它皆難與之侔。有壬辰僧將泗溟師像。據梧執白麈尾。落髮而存其髯過腹也。西壁有敏環像焉。憇而午飯。


圓覺寺
登南城門。見西海。與天接也。摩尼諸山。間於海。如拳也。有羅漢峯。巍然如浮屠立也。其下有寺墟。麗時三千僧處焉。仍名曰三千僧洞也。


鎭國寺
背山映樓。崎嶇而北。三丈石。銘白雲洞門。循石路。到寺門。紅樹白石。壑而泠泠。
257_073d
祥雲寺
自鎭國到祥雲。嶺以間之。曰積石。日入抵寺。飯而宿。朝向西巖谷。行三四里。水成瀑逶迤。以卧槩嶺之左右。殊其曠奧也。


西巖寺
近城西門。大樓臨水石之交。風湍松籟。曠而生韻。翛如雨。對語不辨音也。寺最卑。獨以淸曠聞。飯向津寬。


津寬寺
出西門十里。野多田。高處爲人壙。南尋小壑。始有林木。寺是高麗津寬大師居也。大石柱數十。尙列溪左257_074a焉。林石之佳。雖不如內山。佛畵之靈異。獨不讓也。


[난-001]兮 :
[난-002]莊 :
[난-003]上之今年 : 英宗朝
[난-004]持 :
[난-005]識 :

청장관전서 제3권
 영처문고 1(嬰處文稿一) - 기(記)
북한산(北漢山) 유람기

이틀 밤을 묵고 다섯 끼니를 먹으면서 산의 내외에 있는 열한 개의 사찰과 암자(庵子)ㆍ정자(亭子)ㆍ누(樓)를 각각 하나씩 관람하였다. 보지 못한 것은 암자가 하나 사찰이 둘이니, 봉성사(奉聖寺)와 보국사(輔國寺)이다. 중은 ‘이는 사찰(寺刹) 중에서 최하의 것이다’ 하였다. 함께 유람한 사람은 자휴(子休 남복수(南復秀)의 자)와 여수(汝修 남홍래(南鴻來)의 자)와 나 3인이었다. 시(詩)는 모두 41편이며, 암자(庵子)ㆍ사찰ㆍ정자ㆍ누각에는 각각 기(記)가 있다.
이 산은 대개 백제(百濟)의 고도(古都)이니 우리 조종(祖宗)께서 군사를 훈련하고 양곡을 저장하여 보장(保障)하는 곳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30리다.
문수문(文殊門)으로 들어가 산성(山城)의 서문으로 나왔다. 때는 신사년(1761, 영조 37) 9월 그믐날이다.

세검정(洗劍亭)
수많은 돌을 따라 올라가니 정자는 큰 반석 위에 있다. 돌은 흰 빛인데, 시냇물은 돌 사이로 흐른다. 난간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있노라니 물소리가 옷과 신을 스쳐갔다. 정자의 이름은 세검정이며 왼쪽에는 선돌[立石]이 있는데 ‘연융대(鍊戎臺)’라 새겨져 있다.

소림암(小林庵)
세검정의 북쪽 수십 보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고, 3개의 석불(石佛)이 앉아 있는데, 예로부터 내려오며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굴(窟)만 보았고 감실(龕室 탑 밑에 있는 작은 석실로 여기서는 불단(佛壇)을 말함)은 없었는데, 지금은 작은 지붕을 만들어 덮었다. 중은 이를 정화(淨和)라고 한다.

문수사(文殊寺)
저녁때 문수사에 이르러 평지를 굽어보니 하늘의 절반쯤 오른 듯하다. 불감(佛龕 불상을 모신 감실)을 큰 석굴(石窟)로 만들었다. 감실을 따라 좌우로 구불구불 걸어가는데 물방울이 비오듯하여 옷을 적신다. 끝까지 가자 돌샘이 있는데 물빛이 푸르고 차갑다. 좌우에는 5백 나한(羅漢)을 나란히 앉혀 놓았다. 석굴의 이름은 보현사(普賢寺)라고 하기도 하고 문수사라고도 한다. 삼불(三佛)이 있는데 돌로 만든 것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고 옥(玉)으로 만든 것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며, 금으로 도금한 것은 관음보살(觀音菩薩)이다. 이 때문에 삼성굴(三聖窟)이라고도 한다. 굴 옆에 칠성대(七星臺)라고 부르는 대(臺)가 있다. 여기에서 머물러 밥을 먹고 북으로 문수성문(文殊城門)에 들어갔다.

보광사(普光寺)
날이 저물어 성문에 이르니 바로 산이 끝나는 곳이다. 성문의 아래는 지형이 약간 낮고 단풍나무[楓]ㆍ남나무[楠]ㆍ소나무[松]ㆍ삼나무[杉]가 수없이 많으며, 텅 빈 골짜기에는 메아리가 잘 울린다. 찬 기운이 처음으로 사람을 엄습하였다.
드디어 보광사에 이르러 법당(法堂)의 오른쪽 조정(藻井 화재를 예방한다는 뜻으로 수초(水草) 모양의 그림을 그려넣은 천장)에 세 사람의 성명(姓名)을 크게 써 놓았다.
화상(和尙)들은 모두 무예[兵]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으며, 벽실(壁室)에는 창ㆍ칼ㆍ활ㆍ화살 등을 저장하고 있었다.
항혼 무렵에 태고사(太古寺)에 도착하여 투숙하였다.

태고사(太古寺)
절의 동쪽 산봉우리 밑에 고려(高麗)의 국사(國師)인 보우(普愚)의 비(碑)가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호)이 찬술하고 권주(權鑄)가 글씨를 썼다. 국사의 시호는 원증(圓證)이고 태고(太古)는 호이다. 신돈(辛旽 고려 말엽의 요승(妖僧))이 권세를 잡자 글을 올려 그 죄를 논하였으므로 당시의 임금에게 축출되었으니 불가로서 탁월하게 충절이 있는 자이다. 입적(入寂)하자 사리(舍利) 백 개가 나왔는데 이것을 세 곳의 부도(浮屠 사리탑)에 저장하였다.
비음(碑陰 비의 후면)에 우리 태조(太祖)가 나라를 세우기 전의 벼슬과 성명(姓名)이 있는데 벼슬은 ‘판삼사사(判三司事)’라고 되어 있다.
상(上 영조를 가리킴)이 금년에 특별히 명하여 비각을 지어 덮게 하였다.
숙민상인(肅敏上人)이라는 자가 있는데 조금은 글을 알고 성품이 온화하고 담박하여 말을 나눌 만하였다.
조반을 먹고 용암사(龍巖寺)로 향하였다.

용암사(龍巖寺)
이 절은 북한산의 동쪽으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큰 것이 셋이니, 백운봉(白雲峯)ㆍ만경봉(萬景峯)ㆍ노적봉(露積峯)이다. 그러므로 삼각산(三角山)이라 부른다. 인수봉(仁壽峯)과 용암봉(龍巖峯)은 작은 것이다.

중흥사(重興寺)
용암사를 떠나 오던 길을 따라 내려가니 지대가 조금 평평하였다. 거기에 중흥사(重興寺)라는 절이 있는데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11개의 사찰중에 가장 오래되었고 크다. 앉아 있는 금불(金佛)은 높이만도 한 길[丈]이 넘었다.
승장(僧將)이 개부(開府 부(府)를 창설하는 것)하여 주둔하고, 팔도(八道)의 승병(僧兵)을 영솔하였는데, 이름은 ‘궤능(軌能)’이라 하고 직책의 이름은 ‘총섭(總攝)’이라 하였다. 옆에 마석(磨石)이 있는데 암석에다가 그대로 조각한 것이었다.

산영루(山映樓)
중흥사에서 비스듬히 걸어 서쪽으로 가면 숲이 하늘을 가리우고 맑은 시냇물이 콸콸 흐른다. 갓[冠]같기도 하고 배[舟]같기도 한 큰 돌이 많은데, 쌓이고 쌓여 대(臺)를 이룬 것도 간혹 있었다.
대개 세검정과 같으나 더 그윽하였다.

부왕사(扶旺寺)
이 절은 북한산 남쪽 깊은 곳에 있다. 골짜기는 청하동(靑霞洞)이라 하는데 동문(洞門)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다른 곳은 모두 이와 짝하기 어렵다.
임진 왜란 때 승장(僧將)이었던 사명대사(四溟大師 이름은 유정(惟政))의 초상이 있는데, 궤[梧]에 의지하여 백주미(白麈尾 흰 사슴 꼬리로 만든 총채)를 잡았으며, 모발은 빠져 없고 배를 지나는 긴 수염만이 남아 있다. 서쪽 벽에는 민환(敏環)의 초상이 있다. 쉬면서 점심을 먹었다.

원각사(圓覺寺)
남쪽 성문(城門)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니 하늘과 연접되었다. 마니(摩尼)의 여러 산이 바다 사이에 있어 주먹만하였다.
나한봉(羅漢峯)이 있으니 높이 솟은 모양이 부처[浮屠]가 서 있는 것 같다. 그 아래에 절터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 3천 명의 중이 거처하였으므로 ‘삼천승동(三千僧洞)’이라 한다.

진국사(鎭國寺)
산영루를 등지고 험악한 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白雲洞門)’이라고 새겨져 있다.
돌길을 따라 사문(寺門)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훤하게 구렁을 이루고 물소리가 시원하고 맑게 들리었다.

상운사(祥雲寺)
진국사로부터 상운사에 이르는데는 적석(積石)이라는 고개가 사이에 끼어있다. 해질녘에야 절에 도착하여 밥을 먹고 투숙하였다.
아침에 서암사(西巖寺)로 향하는데 골짜기로 3~4리쯤 가니 물이 폭포를 이루었다가 구불구불하게 흘렀다.
대개 고개[嶺]의 좌우는 자못 넓고 깊었다.

서암사(西巖寺)
성의 서문에서 가까운 곳에 큰 누(樓)가 물과 돌이 교차된 곳에 임하여 있다. 바람이 이는 거센 여울과 소나무에서 나는 바람소리, 텅 빈 가운데 음운(音韻)이 생기니 쏴쏴하는 빠른 소리는 비오는 것 같아 대면하여 말하여도 음성을 분별할 수가 없다.
이 절은 가장 낮지만 유독 깨끗하고 시원한 것으로 소문이 났다. 밥을 먹고 진관사(津寬寺)로 향하였다.

진관사(津寬寺)
서문에서 10리쯤 나오면 들에는 밭이 많고 높은 곳은 사람들의 무덤이 되어 있다. 남쪽으로 작은 골짜기를 찾아가니 비로소 숲이 있다.
이 절은 바로 고려의 진관대사(津寬大師)가 거처하던 곳이다. 큰 돌기둥 수십 개가 아직도 시내의 왼쪽에 나란히 있다. 숲과 돌의 아름다움은 비록 내산(內山 성안의 산)만 못하지만 불화(佛畫)의 영묘(靈妙)하고 기이한 것 만은 못지않았다.
 雲石遺稿卷之十
 
僧伽寺訪碑記 a_299_191c


北漢之南。有僧伽寺。其上峰曰碑峰。自京師雲從街迤北。見峰巓一柱兀然如人立。俗傳麗僧道詵碑。今沒字云。歲丙子秋。秋史金元春語余曰。吾上碑峰。碑有殘字。實新羅眞興王碑也。余聞之狂喜。約與之共尋。越明年六月八日。始踐之。工執墨拓具以從。由僧伽寺後麓。轉石磴數百武。得壁刻佛像甚偉。夾像而右。循嶺脊攀厓腹登焉。東自龍門諸山。南西至于海。可一擧目盡也。遂令工搨之。細加審定。除全缺不可强解。餘點畫可辨確然無疑者。凡九十有二字。如眞299_191d興王三字。巡狩二字。南川二字。皆實事可證。而與史文經緯者也。按三國史。眞興王十六年。王巡幸北漢山州。拓定封疆。二十九年。廢北漢山州。置南川州。碑盖紀其蹟也。碑文有眞興二字。而據智證王本紀。新羅諡法始此。智證之後。歷法興至眞興。則眞興時。不應預稱其諡。似眞興後所立。據眞平王二十六年。廢南川州。還置北漢山州。而碑文有南川二字。則又似南川廢州之前也。眞興王元年。在梁武帝大同六年。眞平王元年。在陳宣帝大建十一年。則要之梁陳間刻者。又按咸興府之草芳嶺。有眞興王北巡碑。今佚。299_192a但拓本在耳。字體似楷似隷。極古雅。與此碑。若出一手。意同時所刻也。歷數羅麗碑目。洵爲上乘。然輿地勝覽北漢誌諸書。並闕之。何哉。乃鐫名於碑之左側。以識月日。始秋史尋碑時。東籬金時顯偕之

 

태조 3년 갑술 (1394, 홍무27)
 8월 12일(기묘)
星湖先生全集卷之五十三
 
游北漢記 a_199_466c


上之三十八年。有建議築北漢城者。蓋爲都城居四散。緩急不可守。南漢阻水。倉卒難致故也。於是役起於春。至秋甫畢。余乃往遊焉。新堞縹緲。若不可以攀躋。而鑿開砥道。可並馬驅也。蓋城圍恰三十里。凡人所得容氊者。皆有雉堵。北自白雲東迤舊城址。復由羅漢諸峯西會于中興洞口。眞所謂百二天設者是也。昔百濟溫祚之興也。與其十臣登漢山負兒嶽。望可居之地。卽今白雲峯是也。遂定199_466d都慰禮。其後移南漢。至比流時。王庶弟內臣佐平優福。據北漢以叛。王發兵討之。近肖古二十六年。復移都漢山。至蓋鹵二十一年。句麗陰使浮屠道琳侍王。琳說王修宮室築城郭。於是盡發國人。蒸土爲城。倉庾虛竭。人民竆困。琳逃還以告。句麗率兵攻陷。獲王害之。王子文周卽位于熊津。此其故事也。當句麗之攻陷也。攻其北城。七日拔之。移攻南城云云。今城之南門外。復有一谷。與都城接。亦甚有形勢。其必於此爲內外郭也。聞有人謀及此云。大槩居此者。不必砲矢之利。可制梃投石。升高墉而搏豼貅也。且掎角東峙。梯航西湊。如用之有術。其勢有足多者。但當水口199_467a門頗低平。雲梯空車可得以攀緣矣。內甚窞入陡急。略無夷曠處。或當雨水汰崩。衆難寄足。又如高峯絶頂等地。天旱則運水必艱。日寒則凍冽難守。此其利害也。城纔役完而宮室未起。儲偫未充。民志易渙。國用難贍。不期以數十年之久。則不可籍力於不虞也。將不恤民事。專意速成。是亦割股充腹而已。雖有衛城之具。恐無禦敵之卒也。且自古城敗者。多於所忽處患生。若國朝丙子江都之類是也。天險可恃而又可怕。在守之者處之如何耳。此城縱曰有欠缺。尙爲濟王百餘年鞏基。當三國攻鬬之際。與麗交忤。固嘗頓之城下。以張其威。至昏弱縱欲而後敗。是豈城之199_467b罪歟。不知朝廷所施設何出也。此其時務也。蓋鹵之亡。聽慫惥之說。忘覆敗之機。高宮闕飾臺觀。或取槨郁里之石。或樹堰蛇城之東。遂乃國勢危而敵謀成。晩悔無及。身死於亡虜。其言曰予愚而不明。信用姦人之言。以至於此。民殘而兵弱。誰肯爲我力戰。嗚呼。悟之何益。濟之不殄。其亦幸。此其監戒也。夫泥古者曰在德非險。恃末者曰先占地形。是皆擧一而廢二也。梁溝宮而民先潰。莒無備而楚入鄆。豈但曰在彼非此。在此非彼也哉。然子常城郢。沈尹戍譏其守之已小。晉爲蒲屈。士蔿戒其無戎而城。此又制國筭者不可不知。余至中興寺寄宿。詰朝與二三同伴。由露199_467c積登北城。望仁壽峯。至白雲中臺。路危而止。還憇于寺中。遵水口門而返。若其山川景狀。具在前遊小記。不復述。


왕이 도읍터를 잡기 위해 왕사 자초를 부르다

임금이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밥을 먹이었다. 처음에 임금이 여기 와서 터를 잡으려고 할 때 먼저 사람을 보내서 맞아온 것이다.
【원전】 1 집 68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玉吾齋集卷之十三
 
遊北漢記 a_171_473a


九月初一日。出彰義門。過蕩春臺。憶在丁卯春。與金相士肯,李友仲剛。同遊于此。屈指三十年。金相已作古人。俛仰今昔。不堪山陽之感。武溪萬株松。今無一存。壬戌初夏。陪先君及退憂,文谷兩舅氏。農巖諸從。171_473b 連袂遊從。今獨余一人在耳。而松亦爲虫蝕盡。山水林壑。無復舊觀。不但人事之變。爲可愴悢而已。稍迤而上。有臨陽君溪亭。引澗水。鑿上下兩池。頗覺蕭洒。過北郊。山路漸高漸險。行幾五里。卽北漢新城南門也。小憇門樓。僧輩數人來迎。仍歷見御營廳別館及輔國寺。寺新創無可觀。寶光寺在南麓而亦陋湫云。禁衛營別館。在東門內。地勢規制。不及御廳。自此沿城堞行。登將臺。高絶無比。一山形勢。幾盡包攬。白雲,露積諸峰巒。指顧羅列。西南江海。亦繚繞於雲煙杳茫中。昨年行幸時駐蹕之所也。龍巖寺新創。在白171_473c 雲臺下。鮮淨可坐。循洞而下。到中興寺。日已夕矣。經理廳別館及倉庾百餘間。聯絡周布於寺左右前後。僧輩重修山映樓。丹雘才訖。展席倚欄。水光山影。映帶上下。耳目俱淸。神骨欲醒。甚可樂也。此寺舊有名。而築城設倉時。軍夫雜處汚傷。淸致頓减。夜宿別館。朝起歷見露積寺。寺亦新創。在露積峰下。尋常見此峰。固已奇壯。而到此面目尤別。石骨千萬仞。拔地冲霄。無所倚附。使人不覺神。子瞻所謂不見廬山眞面目。只緣身在此山中者。未必信然也。中將臺在寺後。與上將臺相望。而登臺見之。則白雲又高出露積171_473d 上。不知其孰爲上下也。踰一岡而下。歷訓局別館。倉厫北門在其後。由澗谷中。行到閔漬寺。此亦新創。閔漬巖水石。與中興幷稱。而巖爲沙水所埋。不如前。寺在西門內。雖欠幽邃。澗瀑巖壑。亦自可觀。房室軒敞明爽。最於諸寺。登西城門。則此乃南北兩山盡處。一山衆水。總由此出。城亦臨水而止。兩厓斗絶。中缺爲石門。懸流石上。幾數丈餘。城外則山勢漸低。迤連平野。曠望數十里。少憇樓上。復由中興路還歸。國寧,元覺兩寺。在元曉峰下。忙未入。歷上中城門樓。據一山之中。中設水門。此處水石洞壑。爲最勝。甑峰下扶王171_474a 寺新刱。金碧隱映於松檜中。亦覺開眼。還過山映樓。仍詣行宮周覽。遂由來時路。出南門歸。煥兒與閔郞。來待於蕩春臺新館。是遊也。雖獨往無伴。情悰鮮歡。而然正當秋色方酣之時。山水淸媚。楓菊照映。徘徊嘯詠。悠然忘返。亦足以洗滌塵襟。眞所謂偶得浮生半日閒者也。若夫城池規制。利害得失。非玆記之所可盡。故不之及焉。
 계곡선생집 제31권
 칠언 율시(七言律詩) 2백 33수(首)
다시 앞의 운을 써서 기옹에게 수답한 시 여섯 수[復用前韻 奉酬畸翁 六首]

오악 찾아보는 일 너무 늦어 유감이라 / 五嶽尋眞恨已遲
천지간에 몸담고서 몇 번이나 생각하였던가 / 側身天地幾含思
청운의 뜻 이룰 그릇 원래 못 되어 / 靑雲器業元非分
백발이 다 되도록 시만 잡고 고생하네 / 白首辛勤只爲詩
중산의 절교서(絶交書)가 오는 것도 당연한 일 / 中散書來應告絶
만용보다 높은 관직 어떻게 걸맞으리 / 曼容官過豈相宜
그래도 나의 뜻 알아 주는 우리 기옹 / 知音賴有畸翁在
시와 술로 정녕코 세모를 함께 보내리라 / 文酒丁寧歲暮期

번지처럼 농사 기술 배었어도 무방한데 / 何妨農圃學樊遲
한창 때에 충분히 생각 못한 게 유감이오 / 恨不當年爛熟思
조정에서 반악처럼 일찍도 센 귀밑머리 / 雲閣早彫潘岳鬢
만년에 부질없이 두릉의 시만 읊고 있소 / 暮途空詠杜陵詩
책 보기도 귀찮아서 던져 버리고 / 殘書總向慵時卷
잠 깬 뒤엔 그저 쓴 차만 입에 대오 / 苦茗偏於睡後宜
서쪽 시내 궁벽진 그대의 집 빼고 나면 / 除却西街幽僻處
말 타고 찾아갈 곳 그 어디 있으리요 / 出門騎馬與誰期

쫓기는 계절의 변화 도시 멈출 줄을 몰라 / 節序相催苦不遲
중방 제결의 때 그윽한 감회 느껴지네 / 衆芳鶗鴂感幽思
아직도 못 올린 삼천 독 문장 / 文章未奏三千牘
풍자하는 백일시를 그 누가 진달할까 / 風刺誰陳百一詩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썰렁한 막다른 길 / 末路凉凉無籍在
좋은 기회 놓쳐버린 위태로운 신세로세 / 危踪落落失便宜
어느 때나 임금 은혜 모두 보답하고 / 何時報答君恩畢
한가한 시간 얻어 숙원을 풀 수 있을런지 / 乞得閒身果夙期

화기로운 태평 시대 어찌 이리도 더디어서 / 玉燭元和何太遲
우리 임금 공연히 노심초사(勞心焦思)하게 하나 / 空勞聖主劇焦思
이 나라에 우국지사 없지도 않은 터에 / 非無憂國忘家士
흉적 없애 복수하는 시를 아직 못 읊다니 / 未賦除兇雪恥詩
오늘날 중책 맡은 자 상책 올려야 마땅하니 / 今日登壇須上策
예로부터 방편으로 오랑캐 달래 왔었다오 / 古來和虜出權宜
모두 떨어진다고 사천이 아뢸 따름이랴 / 司天但奏旄頭落
실제로 오랑캐 조만간 망하리라 / 早晚亡胡會有期

한가한 때 맞는 흥취 어찌 더디게 할까 보냐 / 閑時趁興肯敎遲
남쪽 기슭 이름난 동산 그리워지지 않소 / 南麓名園佳可思
맑은 대자리 성긴 발 멋진 손님 묶어두고 / 淸簟疎簾留勝客
옥 같은 샘물 그윽한 골 새로운 시 솟아나리 / 玉泉丹壑入新詩
시가(市街)와 붙었어도 속진(俗塵)의 내음 하나 없고 / 地連朝市無塵到
수레 소리 끊긴 골목 게으른 자에게 적격이오 / 巷絶輪蹄興懶宜
휴가 얻어 다시 한 번 찾아와 주지 않으려오 / 休沐不妨重命駕
언제 올지 이 늙은이 묻고만 싶소이다 / 老夫還欲問前期

당성의 소식 어찌 이리도 늦은지 / 唐城消息寄來遲
헤어진 뒤 구슬프게 정운시(停雲詩) 읊었노라 / 怊悵停雲別後思
자금장유의 생각 애가 타는데 / 紫禁常懸長孺戀
청산에선 응당 사가의 시 있었으리 / 靑山應有謝家詩
우리의 명성 위협하는 후생들 반갑소만 / 後生不厭聲名逼
말계는 오직 취향이 같아야 어여쁘지 / 末契唯憐臭味宜
곡구자진께서도 생각하고 계시는지 / 谷口子眞還憶否
한 잔 술에 바둑 두며 언제나 흉금 헤쳐 볼까 / 棋樽何日寫心期

[주D-001]오악(五嶽) : 다섯 개의 명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동쪽의 금강산(金剛山), 서쪽의 묘향산(妙香山), 남쪽의 지리산(智異山), 북쪽의 백두산(白頭山), 중앙의 삼각산(三角山)을 가리킨다.
[주D-002]중산의 절교서(絶交書) :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중산대부(中散大夫)를 지낸 혜강(嵇康)이 자신을 그의 후임자로 천거한 자(字)가 거원(巨源)인 산도(山濤)에게 절교하는 글을 보낸 고사가 있다. 《문선(文選)》에 그의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絶交書)가 실려 있다.
[주D-003]만용보다 높은 관직 : 6백 석(石)보다 높은 직질(職秩)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병만용(邴曼容)이 6백 석에 불과한 관직에 몸을 담고 있다가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자 고향에 돌아간 고사가 있다. 《漢書 卷72, 卷88》
[주D-004]번지(樊遲) : 공자의 제자로 농사일을 배우기를 청하였다. 《論語 子路》
[주D-005]반악(潘岳) : 진(晉) 나라의 문장가로, 그의 추흥부(秋興賦)에 “余春秋三十有二 始見二毛”라는 말이 있다.
[주D-006]두릉(杜陵) : 두릉(杜陵)에 거하며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 자호(自號)했던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주D-007]중방 제결의 때 : 온갖 꽃이 시드는 처량한 시절이라는 말이다. 제결(鶗鴂)은 두견새로 이 새가 울면 꽃이 시든다고 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恐鶗鴂之先鳴兮 使百草爲之不芳”이라 하였고, 백거이(白居易)와 소식(蘇軾)의 시에도 각각 “殘芳悲鶗鴂”과 “只恐先春鶗鴂鳴”이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16 東南行 一百韻》 《蘇東坡詩集 卷8 和致仕張郞中春晝》
[주D-008]삼천 독(三千牘) : 임금에게 올리는 장편의 상소문을 말한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동방삭(東方朔)이 처음 장안에 들어와 삼천 독의 주문(奏文)을 바쳤던 고사가 있다. 《史記 滑稽列傳》
[주D-009]백일시(百一詩) : 한(漢) 나라 응거(應璩)가 당시의 세태를 준열하게 비판한 풍자시의 편명(篇名)이다.
[주D-010]모두 …… 따름이랴 : 천문상으로 오랑캐의 별이 떨어질 뿐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旄頭)는 묘수(昴宿)로 호성(胡星)이고, 사천(司天)은 관상감(觀象監)의 별칭이다.
[주D-011]당성(唐城) : 남양(南陽)의 옛 이름이다.
[주D-012]정운시(停雲詩) : 친구를 생각하는 노래를 말한다. 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정운시서(停雲詩序)’에 “停雲思親友也”라 하였다.
[주D-013]자금(紫禁) : 임금이 있는 곳으로 궁정(宮廷)을 가리킨다.
[주D-014]장유(長孺) : 강직하게 간언을 하여 사직신(社稷臣)으로 일컬어졌던 한(漢) 나라 급암(汲黯)의 자(字)인데, 태자 세마(太子洗馬)를 역임했던 급암에 빗대어 왕세자의 사부였던 정홍명(鄭弘溟)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15]사가(謝家) : 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記得謝家詩 淸和卽此時”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後集 卷20 首夏猶淸和聯句》
[주D-016]말계(末契) : 장자(長者)와 후배와의 교의(交誼)를 말한다.
[주D-017]곡구자진(谷口子眞) : 곡구(谷口)에서 은거하며 수도하던 한(漢) 나라 정자진(鄭子眞)으로, 기옹이 정씨(鄭氏)이기 때문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4권
 문궐(門闕)
외문(外門)

왕성의 모든 문은 거개 초창기(草創期)에 만든 것인데, 선의문(宣義門)은 사자(使者)가 출입하는 곳이고, 북창문(北昌門)은 사자가 회정(回程 돌아가는 길)하거나, 사묘(祠廟)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아주 엄숙하게 꾸며져 다른 문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회빈문(會賓門)ㆍ장패문(長覇門) 등부터는 그 제도가 대략 같은데, 오직 그 한가운데에 쌍문을 만들어 존비(尊卑)에 구애없이 모두 출입할 수 있게 했다.
성(城)은 모두 양쪽을 나무로 받치고 철통(鐵筩)으로 보호하였으며, 위는 회랑(回廊)처럼 되었는데 산 지형의 높고 낮은 대로 쌓았다.
아래서 숭산(崧山) 등성이를 바라보면, 성의 담장을 빙 두른 것이 마치 뱀이 꿈틀거리는 형상과 같다.
장패문은 안동부(安東府)로 통하고, 광덕문(光德門)은 정주(正州)로 통하고, 선인문(宣仁門)은 양주(楊州)ㆍ전주(全州)ㆍ나주(羅州) 등 3주로 통하고, 숭인문(崇仁門)은 일본으로 통하고, 안정문(安定門)은 경주(慶州)ㆍ광주(廣州)ㆍ청주(淸州) 등 3주로 통하고, 선기문(宣祺門)은 대금국(大金國)으로 통하고, 북창문은 삼각산(三角山)으로 통하는데, 신탄(薪炭 땔나무와 숯)ㆍ잣[松子]ㆍ포백(布帛)이 나는 지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