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 호조참의공 휘 담/월담공 처남 박진 묘표

校理朴公墓表 (박진 묘표)

아베베1 2011. 7. 29. 15:02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 도봉계곡 서광폭포의 모습이다 (2011.7.27. 촬영)

  

 박종수, 박진은 전주박씨로서 저의 시조공 이하 4세손 호조참의 휘 담 선조님의 (장인과 처남)되시는 분이시며 5세손 휘 직지(소윤공)

 연촌공(휘 덕지)선조님  외조부, 외숙이 되시는 분으로 고려 경덕제에 공부를 하셨고, 동국여지승람(전주부에)에 두분의 휘가 올라

 부자 효자로 기록되어있다 ,  (박종수 님은 목은 이색의 문인이며) 

 저의 선조님인 4세, 호조 참의 휘 담, 5세  휘 광직 휘 직지 휘 득 지 휘 덕 지 모두가 국조방목에휘를 올릴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외조부인 ,박종수 님과 아드님 이신 박종수 님의 영향이 많은듯 싶다 

 그리고 소윤공의 기사에서 외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글을 많이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           

 

錦谷先生文集卷之十七

 [墓表]
校理朴公墓表 a_303_450b


龍城府南無愁洞午坐之原。卽故校理朴公諱文燦之藏也。朴氏肇於新羅王。而十五世祖諱彦華。封全州大君。而子孫仍爲姓貫。伊後昭穆未詳。不能强推。麗季有諱志讓。文科典禮參議。生諱從壽。廉潔慷慨。不求仕進。隱居完山。不惑佛神。篤信正學。入太學。補經德齋。生諱晉號竹亭。自在孩提。誠孝出天。鄕黨稱303_450c之以今世曾子。年至强仕。經德公勉其赴擧。中南省試。歷官靈巖,淸道。俱有聲績。後聞親癠。卽日棄歸。有水斷成陸。得以利涉。花開雪中。味供背節之異。旌其閭而載於三綱錄。公之甥姪校書崔直之。卽烟村之兄。爲闡揚舅氏至行。遍謁陽村以下三十二賢之詩與文。遂成一帖。屢經兵燹。而手寫翰墨。宛然尙傳。大是奇事也。竹亭長男諱有誠。以孝行卓異。除廣興奉事。孫諱承龍。弘文博士。卽高,曾,祖,禰也。妣全州李氏。昌賢之女也。公字而顯號湖亭。以世宗戊申。生於全州四稧里。世祖戊寅。司馬。庚辰登第。歷官弘文303_450d校理,羅州牧使。移寓南原杏亭村。卒於成宗甲寅。享年六十七。配慶州金氏。直提學綽之女。葬在公墓下午坐。子桂賢。子三重。俱擧進士。子霖。以行誼。屢入剡薦。子堯天。子大虎。才兼文武。當壬辰之亂。以老母在堂。不能倡義。而與趙慶男,柳仁沃等。間有討賊斬獲之功。以下多不盡錄。公之世遠矣。兵火之餘。文獻蕩失。無以詳悉。其十二代孫暘與曼等。懼其墓道之無徵。持來家帖而謁余文。感其追遠之誠。姑記如此云。

  

 

양촌선생문집 제20권
 서류(序類)
여묘(廬墓) 사는 박 청도(朴淸道)에게 주는 시의 서


교서랑(校書郞) 최직지(崔直之)가 그의 외할아버지 박군(朴君)이 임종할 때 그의 아들에게 유언한 시(詩) 한 절구를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우리 외할아버지가 일찍이 태학(太學)의 경덕재(經德齋)에 들어가 학문을 통하였으되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매, 물러나 벼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완산(完山)에 살아 스스로 은둔을 즐기면서, 불신(佛神)의 요사스럽고 허황한 말에 현혹되지 않고 사도(斯道 유교(儒敎))의 정당함을 독신하였는데, 나이 80에 이르도록 건강하여 병이 없었습니다. 아들 진(晉)은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내시(內侍)로 벼슬하다가 청도(淸道) 수령으로 나아갔으며, 딸은 곧 우리 어머니입니다. 우리 아버지와 우리 형제가 모두 과거에 올라 벼슬하여 문호를 빛낸 것은 실로 우리 외할아버지의 가르침을 힘입은 것입니다. 청도 외삼촌 또한 나이 60에 어버이의 늙음을 민망히 여겨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봉양하는데, 몸소 용변을 받아 내고 탕약(湯藥)을 받들며 아침저녁으로 삼갔습니다. 병들어 돌아가시게 되매 시(詩)를 지어 보였는데 그 시에,

나이 팔십이라 죽어야 마땅한데 / 八十年當臥蟻床
육십난 효자 약을 맛보누나 / 六旬孝子藥先嘗
사생은 천명이라 피하기 어렵나니 / 死生存命終難避
너의 어미 무덤 곁에 나를 묻어 다오 / 近汝慈墳立壽堂
하고, 이튿날 드디어 돌아가셨는데, 청도에서 3년 동안 시묘(侍墓)를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도관찰사(都觀察使) 성공(成公)과 완산부백(完山府伯) 안공(安公)이 그 효행을 가상히 여겨 문려(門閭)에 정표하니, 향당(鄕黨)의 영광이 이미 극진하였습니다. 외삼촌께서는 운(韻)을 돌려 여러 진신(縉紳)들의 글을 구하여, 돌아가신 아버지의 숨은 덕을 영원히 빛내려고 천리 길에 사람을 보내 서울에 이르러 직지(直之)에게 부탁하는지라, 직지 또한 개풍 한천(凱風寒泉)의 감회를 참지 못하여 진신들을 역방(歷訪)하며 청하였는데, 여기에 서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대는 이미 우리 외삼촌을 알고 또한 일찍이 우리 아버지와 더불어 교유하였으므로, 우리 형제도 일찍이 나아가 글을 배웠습니다. 비록 우리 외할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말씀도 듣지 못하였지만, 그대는 내 집을 본래부터 아는 처지라, 만약 그대의 글을 얻어 책머리에 붙여서 오늘날에 과시(誇示)하고 후세에 없어지지 않게 한다면, 어찌 우리 외삼촌과 우리 부자만의 다행이겠읍니까! 우리 외할아버지 역시 지하에서 감격할 것입니다.”
하므로, 나는 의리로 보아 사양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이 쓴다.
“옛날에 시골 선비로서 도학을 갖추고 벼슬하지 않으며, 살아서는 능히 그 덕으로 한 고장을 잘 교화시키고 죽어서는 그 고장의 향사(享祀)를 받는 이가 있었으니, 지금 그대의 외할아버지 같은 이가 바로 그런 분이다. 내가 평일에 비록 그 문하에 나아가 뵙고 그 서론(緖論)의 고아(高雅)함을 접하지는 못하였으나, 지금 그 임종할 때의 시를 보니, 부자의 정의에 독실하고 사생의 이치에 밝아서 조용히 올바르게 죽었으니, 자못 증자(曾子)의 ‘내 손을 열어 보아라. 내가 이제 훼상(毁傷)을 면한 줄 알았노라.’고 한 훈계와 그 기상이 같은지라. 평일에 수양한 바를 알 수 있다. 청도가 또한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고 장제(葬祭)를 예로 받들어, 문려를 정표 받고 가문을 빛내 고장이 칭송하고 나라에 전파하였다. 그대의 부자 형제가 진진(振振)한 인(仁)과 빛나는 영광으로 문과(文科)에 올라 좋은 벼슬을 하였으니, 이는 그 할아버지가 덕을 쌓되 자긍하지 않았으므로, 경사가 무궁하게 발하는 것이다. 효우(孝友)의 아름다움과 훈렬(勳烈)의 이룸이 대대로 계승하여 더욱 떨치리니, 어찌 내 말을 기다린 뒤에 민멸하지 않으랴.”
건문(建文 명 혜제(明惠帝)의 연호) 원년 기묘(1399, 정종1) 12월 1일


 

[주D-001]경덕재(經德齋) : 고려 예종(睿宗) 4년(1109)에 국학(國學)에 베푼 7재(齋) 중의 하나로 모시(毛詩)를 전공하던 곳이다.
[주D-002]내시(內侍) : 고려 때 숙위(宿衛) 및 근시(近侍)의 임무를 맡아 보던 관원. 재예와 용모가 뛰어난 세족의 자제 또는 시문에 능한 문신 출신으로 임명하였다.
[주D-003]개풍 한천(凱風寒泉) : 개풍은 《시경》 패풍(邶風) 중의 편명. 한천은 개풍 중 ‘원유한천(爰有寒泉)’의 구절에서 인용된 것인데, 이는 자식들이 어버이를 잘못 섬기는 것을 자책한 시다.
[주D-004]내 손을……알았노라 : 증삼(曾參)이 병들어 제자들을 훈계한 말로, 몸을 온전히 보전하여 죽는 것도 효도의 하나인데, 이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論語 泰伯》

陽村先生文集卷之二十
 序類
朴淸道廬墓詩序 a_007_207a


校書郞崔直之以其外大父朴君臨絶遺子詩一絶示予曰。吾外祖早入大學。補經德齋。學旣通。應擧不第。退而不求仕。家于完山。嘉遯自樂。不惑於佛神妖007_207b誕之說。篤信斯道之正。年至八十。康強無恙。有男曰晉。中進士。仕內侍。出宰淸道。女則吾母也。吾父與吾昆弟聯擢科第。躋于仕版。以榮于家。實惟我祖翁訓誨之力是賴耳。淸道舅亦且六旬。悶親之老。棄官歸侍。修滫瀡奉湯藥。朝夕惟謹。及有疾將殆。賦詩以示。其辭曰。八十年當卧蟻床。六旬孝子藥先甞。死生存命終難避。近汝慈墳立壽堂。明日遂終。淸道廬墓三年。都觀察使成公,完山府伯安公嘉其孝行。旌表門閭。爲鄕黨榮已極矣。舅民乃欲分韵求諸縉紳之作。以耀先君潛德於無窮。使人走千里抵京師。以囑直007_207c之。直之亦不勝凱風寒泉之感。歷謁縉紳請之矣。是不可無序。吾子旣辱知吾舅。又嘗與吾父遊。而吾昆弟亦甞從而問學。雖未甞面吾祖而耳其言。然子之知吾家有素矣。若得吾子言冠篇首。以誇示于今而不泯于後。豈惟吾舅與吾父子幸也。吾祖亦且感激於地下矣。予義不辭。與之言曰。古者有鄕生抱道而不仕。生而能以其德善一鄕。沒而可祀於其鄕者。若予之外大父其人也。吾於平日雖未獲升堂而致拜。以接其緖論之高。今觀其臨絶之詩。則篤父子之情。達死生之理。從容得正而斃。殆與曾子啓手知免之007_207d之訓同一氣象。平日之所養可知也已。淸道又能養志不違。葬祭以禮。旌其閭而顯其家。稱於鄕而播於國。子之父子昆弟。振振其仁。曄曄其光。躡文科而踵膴仕。是盖乃祖德積而不施。慶發於無窮。孝友之美。勳烈之成。當世世相承而益振矣。奚待夫予言而後不泯哉。建文元年己卯十二月初吉。
陽村先生文集卷之二十


 

 

【효자】 본조 박진(朴晉) 아버지가 병이 들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시중하였는데, 언제나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아니하였으며, 약을 달이면 꼭 먼저 맛을 보았다. 아버지는 병이 위태하자 시를 지어 박진(朴晉)에게 주어 말하기를, “나이 80에 병상[蟻床]에 누우니, 육순된 아들이 약을 먼저 맛보네. 사생(死生)은 운명이기에 끝내 피할 수 없으니, 네 어머니 묘 가까이에 수당(壽堂 생존시에 지어 두는 묘)을 세워 두라.” 하였다. 아버지가 작고하자 장례와 제사를 예로써 하고, 묘막에서 3년을 지내니 고을에서 칭송하였다. 태조 7년에 마을에 정문을 세웠으며 벼슬은 지군사(知郡事)를 지냈다. 박유성(朴有誠) 나이 50세 때에 부모가 죽자 6년간 묘막 생활을 했다. 상을 마친 뒤에는 부모의 형상을 그려 벽에 붙이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그치지 아니했다. 성종(成宗) 6년에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특별히 광흥창(廣興倉) 봉사(奉事)에 제수되었다.

 

성종 2년 신묘(1471,성화 7)
 6월23일 (갑자)
예조에서 절행한 사람들을 포상하여 풍속을 격려하게 할 것을 청하다

예조(禮曹)에서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만경(萬頃) 사람 유학(幼學) 김호인(金好仁)은 그 어미가 병이 있거늘, 김호인이 스스로 다리 살을 베어 약(藥)에 타서 올리었더니 어미의 병이 드디어 나았고, 그의 아비 김맹방(金孟倣)도 일찍이 다리 살을 베어 아비의 병을 고쳤다 하니, 부자(父子)가 서로 이어서 효행(孝行)이 있고, 금산(錦山) 사람 양적(梁逷)의 처(妻) 삼덕(三德)은 지아비가 범에게 잡힌 바 되자, 삼덕이 왼손으로는 지아비의 발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짧은 낫을 휘둘러 범을 치고 곡읍(哭泣)하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범이 버리고 가거늘, 마침내 집 동쪽에 장사지내고 3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고 시아비를 따라서 살았다 하니, 청컨대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정문 복호(旌門復戶)하도록 하소서.
태인(泰人) 사람 전 주부(主簿) 허중민(許仲民)의 집에, 밤에 불이 나서 연기와 화염이 집에 가득하였는데, 허중민은 불길을 무릅쓰고 어미를 안고서 나왔다 합니다. 남원(南原) 사람 전 직장(直長) 임옥산(林玉山)은 어버이에게 효도하더니, 어미가 죽으매 7일을 먹지 아니하고 애훼(哀毁)하기를 예도에 지났으며, 아비가 또 병으로 40일을 누우니, 임옥산이 시약(侍藥)함에 옷의 띠를 풀지 않고 호흡(呼泣)하며 똥을 맛보고, 분향(焚香)하여 빌면서 몸으로써 대신하기를 구하여 아비의 병이 회유되었다 하며, 아비가 죽게 되니 정성껏 상제(喪祭)를 다하여 향인(鄕人)이 칭송한다 합니다. 전주(全州) 사람 진무부위(進武副尉) 박유성(朴有誠)은 어버이를 섬겨 효도하더니, 부모(父母)가 죽으매 묘(墓) 곁을 떠나지 않고 3년상을 마쳤고 양친(兩親)의 진영(眞影)을 그려, 삭망(朔望)에 치제(致祭)하되 지금까지 거두지 않았다 합니다. 생원(生員) 최신한(崔信漢)은 어릴 때부터 어버이를 섬기더니, 아비가 죽으매 여묘(慮墓) 3년을 살고 슬퍼하기를 한결 같이 하였고, 어미를 지극한 효도로 섬겨 20여 년 동안 몸소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였으며, 어미가 죽으매 또한 여묘 3년을 살았다 합니다. 청컨대 이조(吏曹)·병조(兵曹)로 하여금 존몰(存沒)을 상고하여 재주에 따라 서용(敍用)하게 하소서.창평(昌平) 사람 별시위(別侍衛) 진숭형(陳崇亨)의 처(妻) 박씨(朴氏)는 그의 지아비가 죽으매 묘소를 3년 지키고 조석(朝夕)으로 슬피 울면서 3년상을 마친 뒤에, 침방(寢房)에 반혼(返魂)하여 조석과 삭망에 전(奠)을 행하되 슬퍼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습니다. 익산(益山) 사람 학생(學生) 조민(曹敏)의 처 소사(召史)는 지아비가 죽으매 3년상을 행하고, 머리를 깍아 중이 되어 그 지아비의 형상을 그려 벽에 걸고 조석으로 분향하고 치전(致奠)하되, 애모(哀慕)하는 정성이 늙었어도 쇠하지 않는다 합니다. 청컨대 그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로 하여 각각 미두(米豆) 아울러 10석(石)을 주게 하고, 또 소거관(所居官)으로 하여금 때마다 치전(致奠)하는 식물(食物)을 주어, 포상(褒賞)하는 법을 보이게 하며, 또 모든 사람의 절행(節行)한 실적(實迹)을 8도(八道)에 널리 효유하여, 풍속을 격려(激勵)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8 집 586 면
【분류】 *풍속-예속(禮俗) / *윤리-강상(綱常)


[주D-001]정문 복호(旌門復戶) : 열녀(烈女)·의부(義婦) 등을 상줄 때 그 문려에 홍문(紅門)을 세워 주고, 그 집에 조세(租稅)를 면제하여 주던 것을 말함.

 

 

 

錦谷先生文集附錄

年譜 a_303_488a


先生諱來煕。字子七。姓宋氏。系出恩津。
皇明毅宗烈皇帝崇禎紀元後一百六十四年辛亥我正宗莊孝大王十五年 四月丁巳 十三日 卯時。先生生于公州坪基村外氏第。
壬子 先生二歲。
癸丑 先生三歲。
甲寅 先生四歲。
乙卯 先生五歲。
303_488b十一月 戊申 庚申。妣李夫人卒。葬于公州校洞。堤川府君兆右岡。
丙辰 先生六歲。
丁巳 先生七歲。
戊午 先生八歲。
己未 先生九歲。
六月。戊子 隨考郡守公。移寓九峰村。自宋村舊第西距數里。
庚申 先生十歲。
辛酉 純祖成孝大王元年。○先生十一歲。
壬戌 先生十二歲。
303_488c癸亥 先生十三歲。
甲子 先生十四歲。
乙丑 先生十五歲。
三月 乙酉 庚戌。丁繼妣趙夫人憂。○四月 甲寅 丁丑。葬趙夫人于懷德妙谷。○是月。隨考郡守公。移寓龍田里。九峰東南二里許。
丙寅 先生十六歲。
五月 戊申 丁巳。服禫。
丁卯 先生十七歲。
二月 癸酉。 隨祖妣李夫人板輿。往唐津縣衙。丙寅十二月二303_488d十日。郡守公拜唐津縣監。至是奉往板輿。 六月 辛未 朔日。服吉。○是月癸酉。冠。權公最仁。以靑陽宰。來爲賓。 八月 庚午 壬申。聘坡平尹氏。承旨應大女。承旨之考寺正公。方任淸道郡守。故行禮於衙中。
戊辰 先生十八歲。
七月 乙丑 甲申。祖妣李夫人卒。○九月 甲子 丙寅。葬祖妣李夫人於錦山桐谷。祖考縣監府君兆下也。
己巳 先生十九歲。
十一月 丁巳 己酉。內舅郡守李公訃至。設位而哭。
庚午 先生二十歲。
三月 乙卯 辛酉。拜中洲李先生 直輔 于茂朱府。李先生方就胤303_489a子茂朱任所。先生省仲姊氏于鎭安衙。歸路歷拜。多所問辨。
辛未 先生二十一歲。
壬申 先生二十二歲。
癸酉 先生二十三歲。
甲戌 先生二十四歲。
五月 辛卯 丁未。長子恪老生。
乙亥 先生二十五歲。
九月 癸未 丙午。中進士初試。○十二月 辛亥 庚午。聞惠慶宮薨逝。入縣庭參哭班。
丙子 先生二十六歲。
303_489b丁丑 先生二十七歲。
十二月 庚子。 郡守公有疾。奉還龍田第。
戊寅 先生二十八歲。
三月 戊戌 庚子。丁郡守公憂。先生侍湯焦勞。不交睫不解帶。爲四朔之久而不知疲。及遭刱。皇皇哭擗。幾至滅性。 五月 戊戌 癸酉。葬郡守公于桐谷先兆西麓。
己卯 先生二十九歲。
三月 癸巳 壬子。建新第于龍田。遵郡守公遺敎也。 八月 庚寅 庚子。外舅尹公訃至。設位而哭。
庚辰 先生三十歲。
303_489c五月 丙辰 丁巳。行禫事。○丁卯。行祫祀服吉。○十二月 癸未 丙午。仲子益老生。
辛巳 先生三十一歲。
三月 辛亥 癸亥。聞孝懿王后昇遐。入縣庭擧哀。成服日。又參哭班。
壬午 先生三十二歲。
六月 癸卯 甲寅。聞季姑夫校理李公 敎源 訃。○十一月辛未 丙戌。哭再從祖慶州公喪。
癸未 先生三十三歲。
甲申 先生三十四歲。
303_489d五月 癸亥 丁卯。竪表于曾祖考墓。墓在燕歧中山。有貞庵閔文純公遇洙撰。坏窩金公相肅書表石。而未及建。至是先生撰追記。幷書而刻竪。
乙酉 先生三十五歲。
丙戌 先生三十六歲。
三月 壬午 丁酉。季子約老生。○八月 庚戌 辛酉。偕從氏太愚公。遊安心寺,玉溪洞等地。
丁亥 先生三十七歲。
戊子 先生三十八歲。
九月 戊戌 戊申。偕從氏太愚公。遊大芚山。宋公叙五一敦,李公季麟趾秀,朴公華汝和韺同遊。
303_490a己丑 先生三十九歲。
九月 壬辰 乙巳。聞伯姑母淑夫人訃。設位而哭。
庚寅 先生四十歲。
四月 己未 戊辰。往哭伯姑母淑夫人靈筵於楊州廣津。操文致奠。 ○五月 丁巳 乙丑。聞孝明世子諱音。入縣庭擧哀。成服日。又參哭班。 ○七月 丙辰 乙亥。往迎文正公祠版行次於大田。時宗孫錫老。以知禮縣監。移順安縣令。祠板行次。自知禮奉還宋村第。 ○九月 丙辰 丙子。陪文正公祠板行次。至龍潭衙。轉覽安義三洞。尋月城遺躅。宗孫錫老。換授龍潭縣令。奉文正公祠版以往。三從弟正煕從之。
303_490b辛卯 先生四十一歲。
壬辰 先生四十二歲。
三月 戊申 乙亥。聞仲姊氏訃。設位而哭。○五月 丁未 壬子。會仲姊氏葬於結城三山。操文哭奠。 六月 丙子 丁丑。入華陽洞。窮九曲諸勝。歷拜尤菴先生墓於靑川。
癸巳 先生四十三歲。
正月 癸酉 朔日。哭仲母李夫人喪。○九月 戊辰 癸巳。哭從氏太愚公喪。
甲午 先生四十四歲。
七月 甲子 戊寅。哭伯姊氏喪。先生聞病報。卽發京行。纔及門而昨已臯復矣。303_490c以未得面訣。尤痛恨焉。 十一月 壬戌。 聞純祖大王昇遐。先生感疾。數朔彌篤。未入縣庭參哭班。
乙未 憲宗哲孝大王元年。○先生四十五歲。
四月 庚寅 戊戌。純祖大王下玄宮。入縣庭參哭班。○五月 己未 庚午。除繕工監假監役。六月日。入京就職。七月還鄕。旋又入京。 ○八月 丁巳 甲申。差純祖大王小祥時練主別工作。○十一月 丙戌 丙子。陞除瓦署別提。○十二月 乙卯 丙午。移司憲府監察。
丙申 先生四十六歲。
正月 乙酉 己未。呈辭還鄕。三月日入京。入來肅拜。以憲職異於他司也。303_490d壬午 壬辰。又還鄕。八月 壬子 庚申。遞付副司果。○九月 辛巳 癸巳。除氷庫別提。十月入京肅謝。
丁酉 先生四十七歲。
正月 己卯 丙戌。除黃澗縣監。丁未赴任。 四月 戊申 壬申。遊金陵黃岳山。歷觀直指諸寺。○五月 丁丑 丁酉。行祈雨祭。五月旱甚。夏至前行祈雨祭。間有雨澤。纔移秧而又暵乾。又行祭而甘霈普洽。穡事免歉。境內出兩歧麥。一出龜湖。一出棠底。一出梧谷。邑民相與歌頌。
戊戌 先生四十八歲。
二月 癸卯 辛亥。拜嶺伯尹公 聲大 於嶺營。尹公卽承旨公弟也。屢書請邀故委往。 五月 辛丑 甲辰。往別尹公於善山。尹公將還朝也。303_491a庚子 丙午。重修駕鶴樓。訖役後。與旬製被抄儒生三十五人。會遊樓上。有詩詠。 十二月 戊辰 戊寅。除平安道都事。○丙戌還第。是年五月日。右相李止淵請依正廟朝故例。令各道道臣取才學最著。衆所推服者。勿拘幼學生進朝官前啣。精抄備選。別錄啓聞。大王大妃殿允下。九月日。錦伯趙冀永啓本。才學別薦。悉心搜訪。別歧採探。最所表著。衆所推服者一人職姓名。開錄馳啓事。○薦目經禮趾美。薄試下邑。 是月丁亥。付經筵官。○己丑。下諭宣召。○甲午。修上附奏。
己亥 先生四十九歲。
正月 戊戌 乙卯。上疏辭經筵官及召命。兼陳情。䟽見文集。○批曰。省䟽具悉爾懇。頃於附奏之後。非不欲更加敦召。而姑且徐遅者。盖有所待焉耳。303_491b今見來章。謙抑太過。有若凂凂者然。是豈予所望於爾者耶。自爾登剡。予所以喜不自勝。側席虛衿者。非但爲林樊宿德之羽儀于庭。而尙有老成人典型也。爾亦豈不云爾之今之所値。卽亦爾祖之於昔日也乎。今欲求名祖之肖孫。法家之拂士。則舍爾伊誰。而予若不以昔日之所期勉於爾祖者致爾。則其可曰善繼孝廟之志事。而爾或不以爾祖之所藉手於昔日者勖予。則又可曰克體先正之遺意乎。此又予惓惓於爾者。爾若左右予朝夕予。資啓沃而任輔導。以引以翼。偕底于大道。則豈非古所謂臣主俱榮者乎。不在多誥。庶應幡然。爾其亟回遐心。以副予如渴之思。 二月 丁卯丙申。除司憲府持平。○三月 丁酉 甲辰。遞付副司直。甲寅。拜司憲府掌令。○四月 丙寅 丙戌。遞付副司直。
庚子 先生五十歲。
正月 壬辰 甲寅。下別諭召之。○辛酉。修上附奏。○四303_491c辛酉 丁卯。下別諭宣召。甲戌。史官來宣傳諭。修上書啓。啓見文集。 ○丁丑。上疏辭召命。䟽見文集。○批曰。前遣近侍。別宣親諭者。豈出於彌文虛禮。而巽牘又至。悵歎良深。爾雖終始牢讓。予則曰今日輔導。舍爾其誰。爾若不出。其可曰克追乃祖先正乎。不在多誥。尙望幡然。 六月 己未 戊子。拜掌令。○七月 己丑 乙未。遞付副司直。○十月 丁巳 癸酉。復拜掌令卽遞。付副司直。
辛丑 先生五十一歲。
正月 丁亥 戊戌。下別諭宣召。○甲辰。修上附奏。○丙午。哭三從叔秋陽先生喪。及葬。往會題主。 二月 丙辰 丁卯。上疏辭召命。仍勉聖學。䟽見文集。○批曰。側席延佇之際。巽牘又至。大303_491d失所圖。然而滿幅誠悃。非但於寡躬冲眇之時。切中箴警而已。雖古宏儒碩德之論心與學。何以加之於此。益知爾平日心得體驗之工矣。予方佩服自勵。而必致之念。有倍於前。且今耆宿凋謝之餘。所望於爾。尤何如矣。春煦漸長。講筵將開。爾其俟間上來。輔我不逮。 閏三月 乙卯 庚申。除掌樂院正。乙丑遞。 五月 甲寅 壬戌。下諭宣召。辛巳。修上附奏。因校理李正履所啓而下諭也。 六月 癸未 丁未。陞司憲府執義。七月。遞付司直。 八月 壬午 壬辰。史官來宣別諭。修上書啓。啓見文集。○因右相鄭元容所啓而下別諭。 己亥。上疏辭召命。䟽見文集。○批曰。所陳尙德尙言之說。曰誠曰僞之義。的確切實。深用感服。然而予之欲致爾於經席者。寧或出於爾䟽所云賁飾求士之名而止哉。誠以德與誠。非賢無以資也。爾何不諒予至意。又此牢讓乎。予則曰俾予一人成厥德立厥誠。在於爾幡然一著。爾其諒之。
303_492a壬寅 先生五十二歲。
正月 庚戌 癸酉。書鳳巖書院仁智堂額。舊額卽文正公筆。而因雨漏朽破。先生因院儒來懇而書揭。後又撰仁智堂記。 二月 庚辰 戊戌。禮節覽要成。凡四冊。 三月 庚戌 甲寅。黔潭儒生請山長。龍江儒生請山長。四月 己卯 壬辰。行講會于黔潭書院。○六月戊寅 己亥。除執義旋遞。○九月 丙午 丙辰。行講會于龍江書院。講小學。會者七十餘人。翌日。與諸生舟遊前江。
癸卯 先生五十三歲。
正月 甲辰 己未。下諭宣召。○己巳。修上附奏。因右相權敦仁所啓而下諭。 三月 甲辰 丙午。尹夫人卒。○是月辛未。史官303_492b來宣別諭。修上書啓。啓見文集。 五月 癸卯 壬子。葬尹夫人于文義黔潭。○八月 辛丑 己卯。聞孝顯王后昇遐。入縣庭擧哀。○九月 庚午 庚寅。有大行王妃輓章製進之令。辭之。○十一月 己巳 丁丑。禮郞以大行王妃卒哭後自上著黑白笠當否來詢。以病未對。○十二月 己亥 庚子。孝顯王后下玄宮。入縣庭參哭班。○乙巳。以未赴國葬。上疏待罪。䟽見文集。◎批曰。予於悼廓之餘。疾病之後。如得如爾讀書之士。常在經席。朝夕啓沃。則豈不爲開發善端之一機會乎。春序無遠。爾之幡然來造。予日望之。
甲辰 先生五十四歲。
303_492c二月 戊戌 辛丑。史官來宣別諭召命。修上書啓。啓見文集 戊申。上疏辭召命。䟽見文集。○批曰。予有必致之心而誠未孚。爾無可辭之義而志彌堅。皆由予不能好學而好賢也。反躬自慙。夫何多喩。尙以爾幸追乃祖。幡然改圖。爲厚望耳。 五月 丁卯 辛巳。除執義旋遞。○六月 丙申 戊戌。孝顯王后練日。入縣庭參哭班。○八月 乙未 癸亥。史官來宣別諭召命。修上書啓。啓見文集。 甲子。吏郞以雲坪宋公復逸事來詢。病未獻議。○九月 乙丑 甲戌。上疏辭召命。兼陳規戒。䟽見文集。○批曰。爾又辭病不來。益覺予誠禮之未能孚而致此也。愧悵交中。無以爲懷。第所引程子與李文成䟽語兩段。眞切懇至。足見爾平生所蘊。予雖否德。亦豈不惕然而警省乎。尙望爾俟病上來。資予啓沃。 丙子。行講會于303_492d黔潭書院。講小學。會者二百餘人。 十月 甲午 甲辰。遷奉妣李夫人柩。合窆于桐谷考郡守公墓。癸丑。德川儒生請山長。
乙巳 先生五十五歲。
正月 癸亥 辛未。岐湖儒生請山長。辭之。○九月 己未 甲子。行鄕飮酒禮。更定儀節。隣近諸生行之。 辛未。行鄕飮酒禮於黔潭。會者四百餘人。 十二月 戊子 戊申。除執義旋遞。
丙午 先生五十六歲。
五月 乙卯 朔日。有翼宗大王遷陵輓章製進之令。辭之。己未。禮郞以遷陵時大王大妃殿服色303_493a來詢。獻議。獻議見文集。 乙丑。滄洲儒生請山長。辭之。○閏五月 乙酉 乙未。翼宗大王出玄宮。入縣庭參哭班。○八月 癸丑 辛酉。除執義。九月遞。 癸酉。仲姊夫縣令李公訃至。設位而哭。
丁未 先生五十七歲。
三月 庚辰 乙未。遯巖儒生請山長。辭之。辛丑。除執義。四月遞。 四月 己酉 丙子。往觀福里水石。轉向二止堂。堂在沃川覺新里。卽重峰趙先生杖㞜之所也。安琴諸儒適至。略講大學。 六月 戊申 壬子。同春堂文集拾遺成。凡四冊。 七月 戊寅 癸巳。除執義。八月遞。九月 丁丑 丙申。行鄕飮酒禮於龍江。會者數百人。翌日講論語。
303_493b戊申 先生五十八歲。
二月 乙巳 乙卯。重建挹灝亭。亭在懷德西船巖川上。是八代祖淸坐窩府君暮年菟裘之所。歲久傾頹。至是重建。揭仙源金文忠公篆題亭額及諸詩文。板舊有望辰居中廢。先生以八分書望辰居三字幷揭。 十月 辛丑 丙寅。設洞稧。倣鄕約定䂓。 十一月 辛未 壬寅。行宗稧于宋村舊堂。會者四十二人。先生將修復舊稧。以事勢多掣旋寢。
己酉 先生五十九歲。
六月 丁卯 丁丑。聞憲宗大王昇遐。入縣庭擧哀。○戊寅。禮郞以大王大妃殿加上位號事來詢。獻議。獻議見文集。略陳不敢之意。 己丑。禮郞以魂殿與徽定303_493c殿祝式來詢。獻議。獻議見文集。 八月 丙寅 庚午。禮郞以全溪大院君墓告文屬稱事來詢。獻議。獻議見文集。 辛巳。有大行大王輓章製進之令。辭之。○丁亥。下諭宣召。○九月 乙未 丙午。上疏陳慰。因辭召命。兼論講學。䟽見文集。○批曰。纔布別諭。方切凝佇。巽牘又至。遐心莫回。大失所圖。自愧誠淺。見今予小子新服厥命。日開講筵。訓廸之方。輔翼之道。政須林下讀書之人。爾以先正之孫。早習家庭之訓。典型斯在。望實俱著。此時此任。不于爾而于誰。爾䟽中亦以先正之仰勉聖祖者爲言。予雖寡昧。思以聖祖之所期於先正者期爾。則爾亦安得不以先正之所以事聖祖者事予乎。予言至此。爾不宜過自撝謙。固守東岡之志。望須幡然簉朝。以盡朝夕納誨之責。 十月 乙丑 壬辰。憲宗大王下玄宮。入縣庭參哭班。○十一月 甲午303_493d乙巳。除執義。戊午遞。
庚戌 哲宗英孝大王元年。○先生六十歲。
二月 甲子 乙亥。丁繼妣李夫人憂。○四月 癸亥 癸酉。葬李夫人于懷德妙谷。
辛亥 先生六十一歲。
六月 丙辰 辛酉。入縣庭。參國祥外哭班。
壬子 先生六十二歲。
五月 辛亥 丁巳。服闋。○六月 庚辰 乙未。史官來宣傳旨。修上書啓。啓見文集。○因右議政李憲球所奏。有薦進學行表著者之命。 壬辰。除司僕寺正。○丙午。除執義。七月遞。 戊寅。史官傳諭敦303_494a召。修上書啓。啓見文集。 八月 己卯 戊子。上疏辭召命。兼陳勉戒。䟽見文集。○批曰。向日敦召之後。意謂幡然。及見附奏。大失所圖。今玆巽章。踵至於心焉惄如之際。是豈爾必欲懷瑾握瑜。無意乎致澤而然也。寔由予未能尊德樂道。不足與有爲之致也。見今悠悠萬事。惟在典學。爾若與二三新抄筵官。茅茹彙征。相與左右于廈氊之上。贊我緝煕之工。致我郅隆之化。則是奚獨予一人幸也。則亦擧國之福而爾等之願也。爾寧不念及此也。多少陳勉。莫不切近而的當。當書紳銘座。以爲恒目之資。而百書覼縷。不如一面。爾其勿復控辭。卽日登途。以副予如渴之望。 九月 戊申 戊辰。行講會于龍江。○十一月丁未 癸丑。下別諭宣召。○壬辰。修上附奏。○戊辰。上疏辭召命。因陳規戒。䟽見文集。○批曰。向見附奏。不覺失圖。巽牘今又如此。由予誠禮未盡。不能見孚之致。愧恧何言。所陳諸條。無非切實。可不服膺。而爾旣以先正之告於303_494b孝廟。爲予誦之。予獨不可以先王之致先正爲心乎。此歲無多。調養宿疴。俟春簉朝。以副如渴之望。 己巳。玉堂官以經筵繼講冊子事來詢。獻議。獻議見文集。◎因領府事鄭元容所啓而收議也。
癸丑 先生六十三歲。
正月 丙午 辛酉。陞通政大夫。付龍驤衛副護軍。○辛未。特除成均舘祭酒。○二月 丙子 庚寅。除刑曹參議。仍兼祭酒。己巳。上疏辭。䟽見文集。○批曰。巽章又何爲也。自古儒賢之先從蔭道。歷歷可數。向來晉秩。寔出禮遇之義。春煦漸長。講筵日開。此時嚮慕之心。當復如何。幸勿固辭。幡然登道。輔予匡予。是所望也。 ○四月 乙亥 壬午。除承政院同副承旨。旋遞。○辛丑。鳳巖儒生請山長。菊溪儒生請山303_494c長。○八月 癸酉 丙申。興巖儒生請山長。○九月 癸卯 辛未。下諭宣召。修上附奏。因領相金左根所啓而下諭。 十月 壬申 壬辰。哭季子進士約老喪。○十一月 壬寅 己巳。葬進士于錦山九億里。桐谷西數三里地。
甲寅 先生六十四歲。
五月 己亥 乙卯。忠賢儒生請山長。○九月 丁卯 壬申。就長子恪老高山任所。恪老六月除是縣宰。先生往留屢日。歷賞玉溪水石花巖安心義相尹弼等寺。
乙卯 先生六十五歲。
正月 乙丑 乙丑。下諭宣召。修上附奏。因領相金左根所啓而下諭。303_494d○二月 甲午 辛丑。上疏辭祭酒及召命。仍陳勉戒。䟽見文集。○批曰。成均之任。非爾伊誰。將爲因此而以爲敦召之地。不宜辭巽。至於滿幅所陳。寔出憂愛惓惓。一則感歎。一則愧恧。爾須迨此簉朝。以輔寡躬之不逮。側席而待。 四月 癸巳 甲寅。莘巷儒生請山長。○六月 壬辰 丙午。有綏陵遷奉時輓章製述之令。辭之。又有遷陵輓章製進之令。辭之。○八月 辛卯 丁酉。以輓章製進事承別諭。修上附奏。諭曰。輓章製述。前修之所以行者。而兩儒賢之其欲自效於終事之地者。宜非餘人之可比。更勿辭巽。 九月 辛酉 癸亥。以病不得進哭於遷陵。上疏陳慰待罪。仍辭祭酒。䟽見文集。時先生患痢疾。三朔委苦。月餘濱危故也。○批曰。病思如不能屬文。姑已之。何傷之有。爾其安心調理。 甲子。有303_495a徽慶園遷奉時輓章製述之令。辭之。○庚寅。移寓于桐谷丙舍。爲暮年瞻依先楸也。
丙辰 先生六十六歲。
正月 乙未 壬午。從容堂儒生請山長。○八月 乙酉 甲午。仁陵遷奉破土日。入郡庭。望哭受服。○壬寅。上疏請免遷陵時輓章製述。仍辭職。䟽見文集。○批曰。爾以文正之孫。植志硏學。雋永優重。庠均峻秩。諒乃克趾。恒擬戔帛而聘至廈氊召對。論姬孔之道。引陶夔之謨。資予三講之工。補予一初之政。前後㫌招。已罄予意。今見來章。退然克讓。永矢嘉遯。不改薖軸之樂。予惟誠禮有未至而然。良用慙歎。古人有言正宜處老成。不宜輕聽其去。予何遽準爾祈懇也哉。至於輓辭製述。緬昔親見之幸。庸寓於戱之思。攀紼揚徽。允叶情禮。爾不必過巽爲也。 ○九303_495b乙卯 己卯。仁陵下玄宮。入郡庭參哭班。○十月乙酉 丁未。遷奉妣趙夫人,李夫人柩。葬于桐谷。郡守公墓東麓數十步。
丁巳 先生六十七歲。
二月 癸未 庚寅。星川儒生請山長。辭之。○三月 癸丑 癸酉。行講會于從容堂。會者四十餘人。 ○四月 壬午 己亥。書閒靜堂公墓碣。○五月 辛亥 庚申。特陞嘉善大夫。下諭宣召。修上附奏。因右議政趙斗淳所啓陞資。 甲戌。拜工曹參判兼祭酒。○閏五月 辛巳 甲辰。上疏辭召命。兼辭陞資及本兼諸職。䟽見文集。○批曰。自敷心腹之諭。凝佇日深。及見卿章。一向凂303_495c免。悵失無比。士之爲學。非獨善其身。將以導其君而庇其民也。况卿以卿家之人。寧無意於當世哉。今以勉學之事言之。惓惓忠愛。出於懇悃。雖予否德。可不服膺。亞卿特授。卽禮遇之意也。何用辭爲。水府之啣。業已變通。而至若泮啣。舍卿伊誰。卿其幡然回心。剋日登途。出入講筵。以匡予不逮焉。◎乙巳。遞工參。六月 庚戌 乙亥。擬都憲。 ○七月 庚辰 朔日。行焚黃祭於家廟。三世推恩贈職。尹夫人壬子從封。至是幷改題有告文。 ○壬辰。拜大司憲。八月遞。 ○丁巳。純元王后昇遐。入郡庭擧哀。成服日參哭班。 ○庚午。上疏陳慰。䟽見文集。○批曰。予小子誠孝淺薄。罹此罔極之痛。忍見旬朔嬗改。攀擗靡逮。恤恤在疚。卿䟽際至。慰勉備摯。俯仰穹壤。冞增痛轖。此時奔問。在卿情禮之不容已者。而招延弘儒宿德。俾輔寡昧。卽我大行慈聖平日所眷眷。卿於追先報今之義。宜有所講確。矧今廟禮喪制儀節甚大。須如卿博洽。出而議正。幸卿從近簉朝。以副予哀遑中如渴之望。303_495d戊寅。禮郞以純祖改題事來詢。病未獻議。○九月 己卯 癸巳。有輓章製述之令。辭之。○十一月 戊寅 庚子。拜大司憲。旋遞。 ○十二月 戊申 己酉。上疏以未赴國葬待罪。仍辭本兼諸職。䟽見文集。○批曰。朝晡屢嬗。廞儀將戒。哀遑罔極。益復何言。意謂卿於此際。庶有奔問之擧。以遂覿德之願。而巽牘踵至。不勝缺然之至。憲長之任。協贊治敎。振肅朝綱。實如卿言。此時此任。舍卿其誰。見今開歲不遠。和煦將舒。望卿卽須幡然。以副予側席如渴之思焉。
戊午 先生六十八歲。
三月 丁丑 甲申。拜大司憲。○壬寅。上疏辭。䟽見文集。○批曰。延佇之餘。巽牘失圖。百度之解弛。百工之泄沓。未有若今日之甚焉。而紀綱二字。卽切中之箴警也。若303_496a其振肅頹惰。糾擧委靡。風憲之任所由設也。而卿今旣在其位矣。又陳其說矣。予所以必致乃已之心。尤有倍於前日矣。且况講對日行。啓沃是資。以卿邃學。豈可凂然不顧乎。卿其勿復固辭。俟間簉朝。出入左右。以輔不逮。是所望也。 ○五月 乙亥 戊戌。行講會于黔潭。會者百餘人。 ○七月 甲戌 乙亥。拜同知義禁府事。○八月癸卯 戊申。上疏以未赴國祥待罪。仍辭職。䟽見文集。○批曰。前後敷心之諭。不翅申複。而誠淺禮薄。遐心莫回。恒切歉愧。小子冲藐。叨承丕基。雖甞仰賴慈覆。俯伏宰輔。而踐位幾年。學未加進。治不徯志。矧又昨秋宅恤之後。國勢若無涯畔。寡昧無所倚毗。流光迅邁。練事奄過。痛廓靡逮。益復如初。卿於此時。意或赴班。兼冀一面。巽牘又至。豈勝悵然失圖。顧今民生困瘁而無拯濟之術。紀綱頹弛而無振肅之方。凡此數者。皆召災致警之端也。用是憂懼。不敢遑寧。際玆仁天告戒。彗孛示象。咎徵之作。捷於影響。是豈無所以而然哉。責躬求助。如渴求飮。303_496b此正上下交修。勵精圖理之時也。苟使如卿宿德宏儒。朝夕左右。薰陶啓沃。以輔予不逮。則應天以實。消弭可期。視諸無灾之日。反有自強之效。豈不爲天命民心眷顧蘄向之一大機會也。卿以賢祖之肖孫。已膺先朝之㫌招。德行經術。可以矜式當世。在今輔導之責。非卿伊誰。秋凉已生。講筵方開。卿若念到于此。不待予言之畢。必將幡然簉朝。以副予側席凝佇之誠也。議讞之任。間已遞解。至於泮啣。更毋固辭。 十月 癸卯 辛未。遷尹夫人墓于桐谷。○十一月 壬申 甲申。拜大司憲旋遞。壬辰。竪兩世墓表。埋誌石。先是戊申。送長子恪老。設床柱於祖考妣上下墓。己酉。設床柱于考妣墓。丁巳。設床柱於繼妣趙夫人李夫人墓。至是竪表埋誌於祖禰位墓及亡子進士墓。次第設石儀。墓道之儀。靡有遺憾。 癸巳。以元子誕降。上疏陳賀。兼陳勉聖學。䟽見文集。○批曰。皇天祖宗。默垂佑騭。元良載誕。邦本永鞏。同慶之情。上下惟均。此時側席之想。303_496c窃冀簉朝而欣賀。際見䟽辭。旋悵遐心之莫回。至若所陳諸條。無非碩論良箴。敢不服膺銘念。而卿旣以李文成之仰勉我聖祖者。爲他日取則之資。則予豈不以先正之事。期望於卿乎。况今歧嶷之姿。日以夙就。其在早諭之義。宜先躬率以正。而勤講學之爲急務。誠如卿言矣。薰陶涵養之方。亦惟邃學宏識之是須。則如卿老成宿德。出入廈氊。輔助予不逮。自然裨益弘多。推以爲遇物之誨。而士之藏器於身。亦將待時而需用。則逢此千一罕有之會。啓我雙隻日新之工。亦卿展布之期也。卿所謂大儒之恒如在座。曷若致如卿大儒而置諸座右乎。望卿體予至意。俟間登塗。甹告章奏上未罄之懷。開發我自省之心。克副日夕凝佇之思。
己未 先生六十九歲。
六月 己亥 辛亥。三川儒生請山長。○八月 戊戌 癸卯。純元王后大祥。上疏陳慰。䟽見文集。○批曰。居諸迅邁。孝正殿祥事奄303_496d過。予小子愾廓之痛。益復靡逮。意謂卿此時赴班。可伸一面。今見來章。愼節添損。奉慮之餘。悵夫殊深。顧今秋序已届。新凉將生。望卿善加調將。俟間幡然。以副予如渴之思。 ○九月 丁卯 己丑。遊俗離山。長子恪老方任永同縣。先生往留。轉向俗離山。歷拜象賢書院。
庚申 先生七十歲。
正月 丙寅 戊辰。有衣資食物賜給及存問之命。以先生壽躋七旬。有是命。俾每歲首輸送。 辛未。上疏辭職乞休致。兼陳二綱八目。䟽見文集。○批曰。旣有堯舜君民之志。而懷道長往。不我惠然者。不無慨然于卿矣。至於引年之請。何必如是而後可乎。予方凝佇。毋庸更申。俟間登途。用答至意。 辛巳。上疏辭衣資食物。䟽見文集。○批曰。所賜衣資食物。卽尙齒尊賢之義例。卿何必過加巽辭乎。此乃先修碩德甞所俛膺者。而顧今林下耆舊。以經術匡輔。憂國惓惓之誠。惟卿一人焉。則予安303_497a得不特施優典於卿也。卿其安心領受。幡然簉朝。庸副予側席之望。 ○二月 丙申 乙卯。上疏引咎。先生正月䟽中。有大官習於糊塗之語。左相朴晦壽自引請免。故先生上䟽申辨。䟽見文集。○批曰。儒賢引年。非曰無故事。而以予凉德所側席者。卿之幡然。則予何可曲副乎。至於大僚筵奏。不過泛言而已。卿旣以深看爲言。予則曰卿亦深看。望卿更勿以此爲引。不日簉朝。匡輔予不逮焉。○此因左相朴晦壽登筵辭免。有曰向來儒賢䟽中習於糊塗云者。果是着題語也。旣居其位。絲毫蔑效。則尸素之譏。固所當來。他山之攻。臣方拜受不暇。何敢以此爲引。而俯仰慙恧。尤無以自措云云。 ○四月 乙丑 丙戌。行講會于興巖書院。繼行鄕飮酒禮。會者八十餘人。 尋忠義壇,西山書院。○六月 癸亥辛巳。往尋三川書院。
辛酉 先生七十一歲。
303_497b正月 庚寅 壬辰。有衣資食物賜給及存問之命。○丙午。上疏辭職名及食物。○三月 己丑 乙卯。性理論辨成。凡五冊。 ○四月 己未 朔日。星川儒生請山長。○陽淵儒生請山長。辭之。○六月 戊午 辛巳。拜大司憲。七月遞。 ○八月 丁巳 己未。文正公家狀成。凡二冊 十二月 甲寅甲戌。拜大司憲。旋遞。
壬戌 先生七十二歲。
正月 甲申 丙戌。有衣資食物賜給及存問之命。○二月 甲寅 壬午。下別諭敦召。修上附奏。○三月 癸未 壬辰。以未赴召命及上候平復賀班。上䟽待罪。303_497c䟽見文集。○批曰。跂予之餘。巽牘此至。毋或誠淺禮薄。不足以勉回遐心而然歟。撫躬慙恧。靡所止届。顧予乍愆旋和。勿藥有喜。此正善端開發之會也。若其燃達之微。擴充之道。須卿老成宿德之左右予輔導予。卿雖欲退然不自有。其於輿望之不可孤何哉。成均之任。所以處當世之賢者也。非爲賁飾儀文而然。則卿何庸辭爲。愼節非不奉慮。而見今日候和暖。自當遄復。卿其俟間簉朝。出入經席。副予眷眷之意。 ○七月 壬午 壬辰。以三政矯捄事。下諭宣召。上疏應矯弊傳敎。䟽見文集。○批曰。頃下別諭。方切延佇。今見來章。眷眷忠愛。有溢辭表。感歎之極。其可不用作箴戒乎。至於三政之弊。推本溯源。痛切著明。知卿蘊抱之在此矣。展施之亦在此矣。卿若念到於卿祖先正之左右我先王。則幡然其來。必不待予言之畢。須諒艱棘之會。克體懇摯之誠。勉回雅操。以幸國事。是所區區之望也。
癸亥 先生七十三歲。
303_497d正月 戊申 庚戌。有衣資食物賜給及存問之命。乙丑。下諭宣召。修上附奏。○二月 丁丑 甲申。遷尹夫人墓于錦山明谷。桐谷西五里許。 ○四月 丁丑 乙酉。徽慶園遷奉時有輓章製述之令。上疏辭。○六月 丙子 乙酉。拜大司憲。七月遞。 七月 壬午 己丑。以未參尊號賀班。上疏待罪。因辭本兼諸職。䟽見文集。○批曰。潦暑盡而新凉生。睠言東岡。予懷冞切。惟予寡昧。夙宵一念。兢兢乎中者。繼志述事也。追遠報本也。而幸玆使事竣還。先烈益光。布告禮成。神人胥悅。此誠我祖宗在天之靈。默佑所垂。至於謙抑之不克固守。致有張大之擧慚恧云。爾有何可道。意謂此時或有賁然之喜。兼申一面。今見來章。愼節尙爾。奉慮實多。至於所帶之啣。在卿不以筋力爲禮。何如是巽辭爲也。所陳心字上勉勵。實予頂門一鍼。敢不體念。向所進講。卽尙303_498a書一部。每求二帝三王之道而不得其要。今聞卿言。果不外一心字也。苟非卿實究所得。其孰能啓心沃心之如是懇摯也。秋候漸淸。卿其亟回遐心。俟間簉朝。裨予存心之工。以副如渴之思。○十月 甲戌 乙亥。拜大司憲。十一月遞。 丙子。行鄕飮酒禮。使觀善稧員。行禮於庭中。 ○十二月 癸酉 乙酉。聞哲宗大王昇遐。出外次擧哀。先生有疾。不得入郡庭。成服日。始參哭班。 禮郞以中宮殿尊爲大妃進號事來詢。獻議。獻議見文集。 禮郞又以宗廟景慕宮祝式。英宗以至大行大王屬稱及服制來詢。獻議。獻議見文集。
甲子 當宁元年。○先生七十四歲。
正月 癸卯 乙巳。有衣資食物賜給及存問之命。壬303_498b戌。拜大司憲。旋遞。○癸亥。上疏陳慰。兼辭祭酒。䟽見文集。○批曰。皇穹降割。奄罹崩坼之痛。旬朔嬗改。禮制漸成。皇皇在疚。靡所逮泊。卿䟽際至。慰勉備摯。尤增哽轖。予以冲齡。叨承丕緖。仰賴我慈聖殿下光臨庶政。義方垂訓。庶幾夙夜。兢業負荷。而甘盤舊學。茫未知方。政須林下宿德啓沃輔導之益。夫備禮招徠。以資致澤之功。一初急先之務。而哀遑未暇。徒切凝想。卿以惓惓忠愛。勖之以學問治謨者。靡有餘蘊。敢不服膺。而卿試思之。求助於老成儒賢。何時不切。而在今日國勢。尤當如何。卿以先正之肖孫。遭被三朝禮遇。繩武趾美之願。追遠報今之義。必倍餘人。且予勉循古䂓。朝晡之暇。日開講筵。幸卿式遄簉朝。一以伸奔慰之忱。一以盡棐廸之方。是所渴望。至於成均之啣。此時此任。尤非卿可辭之日。卿其諒之。 ○二月 壬申戊子。下別諭宣召。修上附奏。戊子。有大行大王輓章製述之令。辭之。○十月 戊辰 丙戌。拜大司憲旋303_498c遞。
乙丑 先生七十五歲。
正月 丁酉 己亥。有衣資食物賜給及存問之命。壬子。特陞資憲大夫。甲寅。拜大司憲。乙丑。下諭宣召。修上附奏。○二月 丁卯 辛卯。上疏辭本兼諸職。兼辭召命。䟽見文集。○批曰。向於敦諭。罄悉凝佇之懷。今接巽牘。殊深悵缺之歎。讀卿謙冲之辭。半是陳勉之語。忠愛眷眷。深庸感歎。敢不服膺而銘佩乎。卿所云簡明識邃學之人。資討論而陳得失。實是今日之要務也。夫明識邃學。豈有賢於卿者乎。繼述家學。養德林樊。幾多歲月。而尙未使都邑之人。一見登對之盛儀。此又朝野所顒望者也。憲長之啣。向旣許遞。望卿勿以縻爵爲引。迨此春煦暢和。命駕戾止。俾予遂覩德之願。區區望焉。 壬辰。拜知義禁府事旋303_498d遞。○五月 乙未 戊戌。上疏辭職。仍論萬東廟事。䟽見文集。○批曰。宮漏晝永。殿角風薰。臨筵開講。凝佇更切。際接卿章。乃辭泮啣。予心悵缺。當如何哉。卿於此職。義無可辭。稍俟秋凉。幡然登途。以副予側席之望焉。所陳。卿或思之未周歟。向者慈敎。旣明且備。禮有損益。惟時爲大。今日之擧。豈有參差於先正當日志事哉。卿其諒之。 庚申。拜工曹判書。○十月 壬辰 丙午。拜大司憲旋遞。○癸丑。遷季子進士墓於舊壙右邊。五十餘步之地。 ○十二月 壬辰癸巳。以病未參國祥。上疏待罪。兼辭祭酒。䟽見文集。○批曰。孝文殿祥事奄過。日月之迅邁。曾隙駟之不若矣。俯仰慨廓。益復靡逮。歲云暮止。方切凝佇。巽牘此至。知有愼節。悵然之餘。繼以奉慮。至於成均之任。所以處林下宿德者也。此時此啣。舍卿伊誰。見今講筵日開矣。輔導啓沃之責。卿不可逡巡退讓。幡然改圖。俟間簉朝。以副予側席之想。303_499a戊戌。哲宗大王大祥。出外次擧哀。先生以病不得入郡庭。
丙寅 先生七十六歲。
正月 辛酉 癸亥。有衣資食物賜給及存問之命。
丁卯 先生七十七歲。
正月 丙辰 戊午。有衣資食物賜給及存問之命。○戊辰。哭長子郡守喪。○二月 乙酉 丁未。葬郡守于錦山川內。○三月 乙卯 戊辰。下諭宣召。修上附奏。○八月 辛巳 壬午。疾革。○戊子。信川閔觀赫來謁。閔觀赫自壬戌往來門下。其所居。與學徒習禮。讀先生章奏而講學。其歸也。書贈朱子所題道迷前聖統朋誤遠方來而贈之。乃絶筆也。○三從弟正煕來問疚。托以先代及門內諸般未遑事。俾圖竣工焉。 ○九303_499b辛亥 甲寅 初四日 辰時。考終于錦山桐谷瞻慕軒。自病患以後。親戚知舊門生。救護盡誠。及喪哀痛。如哭親戚。遠近相弔曰賢人亡矣。 訃聞于朝。撤朝市如例。傳曰。故祭酒以耆舊儒賢。蔚然爲朝野之矜式。屢宣敦召。雅操彌堅。卽見逝單。悵衋曷已。助祭之節。喪葬之需。令該曹照例擧行。造墓擔軍。亦令本道題給。 十月 庚辰 辛丑。上遣禮郞致弔祭。禮郞朴基陽。 舘學儒生。設位望哭。葬前爲文致祭。各道書院。亦皆致祭。 ○十一月 庚戌 癸酉。葬于錦山郡玉川巳坐之原。新卜也。三從弟正煕,李羲翼,趙尙圭,宋欽載皆相之。其外門下親賓。殆四百餘人。
辛未十月 戊午 丙寅。移窆于錦山南東星谷戌坐原。
丁酉四月 庚申 乙酉。合祔于錦山東一面明谷亥坐原。

獨谷先生集卷
 
占生字。題前淸道朴晉廬墓詩卷。 a_006_068d


三綱天地經。萬古日星明。物或無其則。吾何有此生。孩提才體具。愛敬已心萌。

 

顧我頭渾白。思親意轉輕。看君能盡職。有子豈虛名。夙夜念無忝。尋常如捧盈。

 

三年懷抱愛。百歲立揚情。蘭桂風霜苦。松楸雨露淸。何時聞鶴語。幾曉聽鷄鳴。

 

血洒樹應槁。聲悲雲不行。山河
006_069a空寂寞。歲月倏崢嶸。廬墓未爲盡。旌閭何足榮。

 

只應天上日。生死照余誠。

해동잡록 5 본조(本朝)
박유성(朴有誠)


전주(全州) 사람이며 50살에 부모가 동시에 죽어 묘막에서 6년을 보냈다. 상을 끝낸 뒤 그 화상을 그려 벽에 걸고 조석으로 상식을 그치지 아니했다. 성종(成宗)이 명하여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를 제수하였다.


 

陽村先生文集卷之二十
 序類
贈朴淸道廬墓詩序 a_007_207a


校書郞崔直之以其外大父朴君臨絶遺子詩一絶示予曰。吾外祖早入大學。補經德齋。學旣通。應擧不第。退而不求仕。家于完山。嘉遯自樂。不惑於佛神妖007_207b誕之說。篤信斯道之正。年至八十。康強無恙。有男曰晉。中進士。仕內侍。出宰淸道。女則吾母也。吾父與吾昆弟聯擢科第。躋于仕版。以榮于家。實惟我祖翁訓誨之力是賴耳。淸道舅亦且六旬。悶親之老。棄官歸侍。修滫瀡奉湯藥。朝夕惟謹。及有疾將殆。賦詩以示。其辭曰。八十年當卧蟻床。六旬孝子藥先甞。死生存命終難避。近汝慈墳立壽堂。明日遂終。淸道廬墓三年。都觀察使成公,完山府伯安公嘉其孝行。旌表門閭。爲鄕黨榮已極矣。舅民乃欲分韵求諸縉紳之作。以耀先君潛德於無窮。使人走千里抵京師。以囑直007_207c之。直之亦不勝凱風寒泉之感。歷謁縉紳請之矣。是不可無序。吾子旣辱知吾舅。又嘗與吾父遊。而吾昆弟亦甞從而問學。雖未甞面吾祖而耳其言。然子之知吾家有素矣。若得吾子言冠篇首。以誇示于今而不泯于後。豈惟吾舅與吾父子幸也。吾祖亦且感激於地下矣。予義不辭。與之言曰。古者有鄕生抱道而不仕。生而能以其德善一鄕。沒而可祀於其鄕者。若予之外大父其人也。吾於平日雖未獲升堂而致拜。以接其緖論之高。今觀其臨絶之詩。則篤父子之情。達死生之理。從容得正而斃。殆與曾子啓手知免之007_207d之訓同一氣象。平日之所養可知也已。淸道又能養志不違。葬祭以禮。旌其閭而顯其家。稱於鄕而播於國。子之父子昆弟。振振其仁。曄曄其光。躡文科而踵膴仕。是盖乃祖德積而不施。慶發於無窮。孝友之美。勳烈之成。當世世相承而益振矣。奚待夫予言而後不泯哉。建文元年己卯十二月初吉。
陽村先生文集卷之二十

제목: 평화광장 2007.10.19.금

전주박씨(全州朴氏)

 시조 박언화(朴彦華)는 신라 제54대 경명왕(박혁거세의 29세손)의 여섯째  아들로 완산대군에 봉해졌다. 완산은 전주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박언화의 9대손인 박진승(朴進昇)은 무안박씨(務安朴氏)의 시조가 된다.

 시조 박언화의 아들 박웅(朴雄)은 고려창업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에 올랐다. 증손 박보진(朴輔辰)은 정승으로 완산군에 봉해졌다. 박시령(朴是齡.박보진의 손자)의 아들 박혁(朴奕)은 평장사와 집현전 대제학을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박혁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 박철견(朴鐵堅)은 한림학사를, 둘째 박천견(朴天堅)은 우승지를 역임하여 시중에 오른 세째 박지견(朴地堅)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좌랑 박천익(朴薦益)의 아들 박실(朴實)은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과 의정부사를 거쳐 공신에 올랐다. 그는 학문이 뛰어나고 성품이 청렴강직하여  추앙을 받았다. 박실의 아들 박사인(朴思仁)은 전법판서와 상장군을 역임한 후 완산군에 추봉되었다.

 조선조에서 예조참판을 지낸 박지양(朴志讓.시중 박유의 아들)과 대사성을 역임한 박지온(朴志溫) 형제도 유명하다. 진사 박종수(朴從壽)의 아들 박진(朴晋)은 군수를 지냈고, 박문찬(朴文燦.군수 박진의 증손)은 목사, 박문증(朴文增)은 군수를 각각 역임했다.

 전주박씨는 조선시대에 무과 4명, 사마시 5명, 역과 2명 등 모두 1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2000년 현재 2,440명으로 1985년의 3,080명보다 오히려 줄었다. 전주박씨에서 갈라진 무안박씨는 2000년 현재 78,817명으로 훨씬 많다.  

 전북 장수군 계남면 궁양리, 함남 신흥군 하원천면 반석리, 함북 길주군 웅평면 쌍용동이 집성촌이다.

선조의 행록

                                      자료제공: 박순영  psy@hanmail.net

충절 편 

경덕재 (經德濟) 박종수(朴從壽)

선조의 휘는 종수 호는 경덕재 또는 죽당이시며 중시조의 제15세손이다. 선조께서는 고려 시대에 태어나시어 일찍히 태학보(太學補)에 가시어 경덕재 (經德齋)에서 학문을 연구 하셨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경덕선생 이라칭하였으며경덕재 (經德濟) 선조께서는 천성이 예의(禮義)바르고 청백하며 불의(不義)에 타협을 할 줄모르고 강개(慷慨)한 분이어서 결코 벼슬길에 나가지않았으며 전주(全州)에 조용히살면서도 유교(儒敎)의 정도를 따를뿐이었고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세상에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朝鮮王祖)가 들어서자 절개를 지켜 전주(全州)에 살면서 오직 유학(儒學)하는 선비로서 유도(儒道)를 독실하게 믿고 지키면서 충의(忠義)로운 마음으로 예전의 고려(高麗) 왕조의 일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번번히 사양하고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던 권근(權近)을 비롯한 32현인들과 도의(道義)로서 사귀고 시(詩)로서 교유(交遊)하며 지냈으므로 많은 시(詩)를 남겼으나 후손이 시첩(詩帖)으로 전해 오다 병난(兵難)을 거치면서 글들과 시첩이 소실(消失)되어 버리고 오직 남은 것이라고는 본인의 임종시 아들이 병구완하는 것을 보고 아들 죽정공에게 남긴 절구시(絶句詩) 한수밖에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 절구시(絶句詩) 

八十年堂臥蛾床  팔십년당와아상

六十老子藥先嘗    육십노자약선상

死生在命終難避  사생재명종난피

汝慈墳立壽堂    여자분입수당

「 여든살 먹은 내가 병석에 누워있으니

  예순살된 늙은 아들이 병구완하며 약 맛을 보는구나

  목숨은 천명에 달려있어 마침내는 피 할 길이 없나니

  너는 무덤 곁에서 집을 지어놓고 가까이 있겠지」

  선조의 위패가 전북 임실군 지사면 원산리 덕암서원에 포은(圃隱) 정몽주 (鄭夢周) 선생과 최만육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陰曆) 2월 16일 지역 유림(儒林)과 후손들에 의해 제사(祭祀)를올리고 있다. 또한 선조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외손이시다.

 

효행 편

죽정공 (竹亭公) 진(晉)

◎효자(孝子) 죽정공(竹亭公) 선조께서는 당시 군수(郡守)의 관직(官職)을 수행(遂行)하다 부친(父親)의 병환(病患)이 위독(危篤)하여 부친을 모시기위해 관직(官職)을 사직(辭職)하고 병환(病患)을 구완하여 부모에게 효행을 한사실과 부친께서 세상(世上)을 뜨시여 그는 통곡(痛哭)하면서 시묘(侍墓)생활(生活)을 3년간 실시하는 등 효행이 지극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어  당시 금세(今世) 증삼이라 불리었으며  전주부사 안공이 선조의 효행을 가상히 여겨 임금님에게 글을 올려 그후 이조(李朝)초기 태조(太祖)7년 (1398. 무인(戊寅))에 효자비(孝子碑)를 정려(旌閭)받아 전주시 남문거리에 최초 건립이 되었으나 도시발전으로  효자비는 전주시(全州市) 교동 전주향교(全州鄕校) 앞에 이축 되어 후손에 의해 보존(保存)되고 있다. 


◎ 完山誌 (완산지)와 全州市(전주시) 地表調査報告書(지표조사보고서)

- 죽정공 박진 효자비각

전주 향교 정면 우측에 비각이 있으며 순조 5년 을축(1805년) 후손 필성이 지은 「全州府(전주부) 孝子(효자) 朴晉(박진) 旌閭記(정려기)」가걸려있고 그 아래 자연석의 비석이 서있다. 전면 중앙에 「孝子郡守朴晉之閭」라고 새기고  좌측에 「洪武(홍무)三十一年 戊寅立(무인입)」우측에는 「崇禎後再甲辰十世孫 重刊立閣 李龜靈書」라 추각하였다.

지상높이 104㎝, 폭은 윗변 58㎝, 밑변 48㎝, 두께 17㎝이다

※ 홍무 三十一년은 1398년으로 1600년전에 세워진 비이다.

       (사진참조)

◎ 효행(孝行) 사실(事實)

선조의 이름은 진(晉). 자는 내신(乃臣) 이시며 완산대군(完山大君)의 16세손이시다.

선조께서는 아버지 경덕재 (經德濟), 어머니는 고려초의 개국공신(開國功臣) 영상(領相) 배현경(裵賢慶)의 후손으로 재덕(才德)을 겸비한 어미하에서 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 병자년(丙子年) 1336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父母)를 공경하고 사랑하며 얼굴빛을 온순히 하면서 부모님을 봉양하는 절차와 부모님께 순종하는 도리를 깨우쳐 알고서 매우 극진히 모셨다. 부모님께서 병환이나계시면 밤낮으로 탕약을 끓여 받들어 모시고 결코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허리띠조차 풀지않고 정성스럽게 병구완을 하시었다. 약을 받쳐 올릴때는 먼저 약맛을 직접보시고 올렸으므로 주위 어른들은 그를 가리켜 참으로 금세(今世)의 증삼(曾參) 이로구나 하면서 칭찬해 마지않았다. 선조는 나이가들어 주위에서 과거시험에 응시할 것을 권유하였고 또한 경덕부군께서 아들에게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어버이에게 대한 효도를 이제 나라에 충성(忠誠)된일을 하는 것으로 옮겨야한다고 권언 하였다.

그후 선조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들어 과거공부에 힘써 남성시(南省試)에 합격하고 이어서 승부시(升赴試)에 급제하고 진사(進士)에 올라 청도 군수(郡守)이 임명되었고 또한  영암 군수(郡守)에 부임하여 고을을 다스렸다. 그후 조선(朝鮮) 시대(時代)로 접어들어 때는 바야흐로 홍무(洪武) 갑술년(甲戌年) 1394년 조선(朝鮮) 태조(太祖) 3년이었다. 지방(地方)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교화하는데 힘써 고을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정사에 힘써 돌보았기 때문에 그의 덕을 칭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선조는 관직으로 인하여 부모님을 조석으로 가까이 모시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셨다. 그래서 자주 사람을 보내거나 서찰(書札)을 올려 문안 여쭙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소식이 두절되면 부모님에 대한 불효의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셨다. 그후 을해년(乙亥年) 1395년 태조 4년 8월에 부친께서 병환이 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즉시 관직을 정리하고 황급히 서둘러 가마를 재촉하여 부모님이 계시는 전주부(全州府)의 남쪽에 있는 한 정자에 이르렀으나 이 무렵 비가 많이 와서 물이 엄청나게 불어나 다리가 부수어져 떠내려가고 길은 끊겨 이미 몇일 동안 아무도 통행(通行)을 못하는 실정이었으나 선조는 급한 마음에 한필의 말로 갈아타고 곧바로 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하늘이 감동(感動)했음인지 이상하게도 강물이 갈라져 길이 열어졌는데 마치 맨 땅과 같아서 어렵지 않게 강을 건너고 나니 강물은 다시 합해저 흐르는 것으로 주위사람들은 놀라며 탄복해 마지않았다. 어렵게 도착 아버지 병구완에 정성을 다하였고 효행으로 지극히 모셨으나 동지(冬至) 섣달 엄동설한에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누워 계시면서 아버지가 아무런 음식을 못 드시기에 음식 드시기를 간청하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것도 먹고싶지 않고 삶은 꽃을 먹고싶구나 하셨으나 때가 아닌데 어떻게 한단 말이냐 하고 한탄을 하였으나 선조는 목욕을 재개하고 하늘에 축원을 하였다. 그리고 양지바른 산을 찾아 나서니 이상하게도 몇몇 진달래 나뭇가지에 홀연히 꽃이 피어 있어 그 꽃을 꺽어다 삶아서 아버지에게 올렸다. 이일로 인하여 그 꽃을 얻은 산(山)을 박모산(朴某山)이라고 이름붙여 불려젔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부친을 공경하였고 또 다른 효행으로 때가이른 시기에 수박이 먹고싶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어려운 수박을 구해 아버지에게 올렸다는 내용이 알려저 그곳을 수박동이라 이름붙혀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한 정성을 다하였건만 경덕부군은 향년 80세에 세상을 뜨시는데 임종(臨終) 직전에 아들을 보고 절구시(絶句詩) 한 수를 남겻다.


◎ 효자 비각 중수기

  비각의 중수는 수 차례 이루어 졌으나 기록이 없고 2001년 7월 비각의 누수로 비각 기둥과 도리를 보존한채 지붕 서가래와 창살 및 기와를 전면 보수하고 비단축석과 단청을 새로히하여 7월 10일 고유재에 19세 손인 태현과 후손들이었으며  전북 유림회장 이영하씨와 전주 향교 전교외에 다수가 참석하여 고유제를 올렸다.  


◎ 입(入)  장수후 선조의 행록

선조께서 입(入) 장수(長水) 하신지 약 450년이 되었으므로 많은 발자취가 남아있으며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떠한 삶을 하셨는지 역사의 기록으로 돌아 볼 수 있다. 시조의 21세인 삼윤(三胤)은 진사였으며 시조 23세 손(孫)인 언상(彦相)은 통정대부(通政大夫)였으며 그분의 아들 호(昈)는 선무랑사옹주부(宣務郞司甕主簿)로 가통을 이어왔으며 시조의 33세 손인 계대(啓大)는 통정대부로 관직(官職) 도정(都政)직을 역임하여 가문을 계승하여왔다. 역사의 記錄(기록)은 長水(장수)鄕校(향교) 碧溪勝覽(벽계승람) 編纂委員會(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碧溪勝覽(벽계승람) (1975년)에 기록되어있는 내용과 전북(全北) 교임록(校任錄) 및 장수(長水) 향교(鄕校) 경임록(經任錄)의 기록(記錄)을 참고(參考)한것이다.


◎ 碧溪勝覽(벽계승람)

1. 敎育(교육). 文化(문화)

-  興學堂(흥학당)

계남면 화양리 유용에 있다. 충주박씨. 연안송씨. 남원양씨. 보성오씨. 문화유씨. 전주최씨. 전주박씨 (全州朴氏). 동래정씨. 금계한씨. 안음서문씨. 청주한씨. 등 11성씨의 結社(결사)로 세워진 講學(강학) 場所(장소)이다.


주: 지역 유지들께서  뜻을 모아 건축하고 후학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학습을 시켰던 장소이다.


- 近水樓 (근수루)

「계남면 궁양리에 있으며 士人(사인)  오서규. 양하조. 朴再炯(박재경) 등이 同志(동지) 몇 사람과 함께 講學習禮 (강학습예)  한곳이다.」


주: 당시 지역에서 뜻있는 분들이 모여 후학을 위해 학습을 시키고  예의를 가르쳤던 곳으로 옛 장안국교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는 입장수하신 삼윤(三胤) 진사(進士) 선조의 7세손 이시며 저자의 10대조 이시다.


- 百忍臺 (백인대)

「계남면 궁양리에 있으며 農隱(농은) 朴啓大 (박계대)의 棲息 (서식)하던곳으로 洗耳波淨淸心石白 (세이파정청심석백) 8字(자)를 刻(각)하였다」


주: 궁평부락 교량(橋梁)밑 냇가 암벽에 백인대(百忍臺)라 암각(岩刻)

해놓고 당시 선비로서 생활하시면서  맑은 물에 마음과 얼굴을 씻으시면서 백석과 같이 청정을 읊으셧던 곳으로 위의 8자를 새겨 놓은 글자의 뜻이 정말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짐작한다. 선조는 저자의 曾祖父(증조부) 이시다.


- 防隨臺 (방수대)

「계남면 궁평상에 있다. 天然石臺(천연석대)가 屛風(병풍)을 둘러친 듯하고 가운데 鳧沼(부소)가있어 濯纓(탁영) 할만하다. 紹華(소화) 金相洙 김상수. 愚軒(우헌) 朴基福(박기복). 可菴(가암) 徐秉鉉(서병현). 海史(해사) 梁炳瑄(양병선). 愚溪(우계) 梁鍾浩(양종호). 守拙堂 吳升鎬(오승호) 등 6인이 棲息(서식) 하던 곳 이다.」


주: 궁평부락 위에 담소가 있는 곳이며 가마솟 거리라 하고  천연석대가 어우러져 옛 선조들이 풍류를 하고 운문으로 교우 하시던 곳 이다. 선조는 저자의 祖父(조부) 이시다.


- 長安亭 (장안정)

「계남면 궁평지양에 있는 石白水明(석백수명) 하여 風浴(풍욕)에 좋은 곳 이다. 士人(사인) 김흥술. 손병권. 장규식. 장원식. 朴奉鉉(박봉현). 양수철. 양병득. 김재문. 강문규. 김창순. 양종대. 朴珪鉉(박규현). 장준식. 등 다수외인이 結社構築(결사구축) 하였다. 」


주: 궁양리 냇가 언덕에 자리잡은 정자가 장안정이며 마을 유지분들께서 한가로운 시간을 갖기위해 지어진것이다


- 仙遊亭 (선유정)

「계남면 장안리 三水合流處(삼수합류처)에 잇다. 水石(수석)이 奇妙(기묘)하고 洞壑(동학) 이 고요하다. 양진철. 임봉직. 정용식. 김재용. 朴公鉉(박공현). 朴東鉉(박동현). 유남근 등 結社築亭(결사축정) 하였다.」

주: 장안리 입구에 세워저 있는 정자이며 地域(지역)의 有志(유지)들께서 한가한 시간을 갖기위해 지어진 것이다. 저자의 당숙과 부친이시다.


2. 人物 (인물). 文獻 (문헌)편

○ 朴祚漢 (박조한) 字(자) 道汝(도여) 生員(생원)

「必修(필수) 子(자)라 承襲庭訓(승습정훈)하여 孝養父母(효양부모)하며 定省甘旨(정성감지)를 無不盡誠(무불진성)하며 丁憂(정우)에 泣血居廬(읍혈거려)하니 鄕里(향리) 感歎(감탄)하여 累登敥薦(루등염천) 이라」


주: 선조는 6대조 이시며 가정교육을 잘받으셔서 부모를 봉양하는데 효를 다해 봉양하고 살피는데 가릴것없이 정성을 다하였으며 부모님에게 피눈물을 흘리도록 보살펴 드리기에 마을에서 감탄하여 살펴드리다.


○朴啓大 (박계대) 號(호): 農隱(농은)  官職(관직): 都正(도정)

「相春(상춘) 子(자)라 性根仁厚(성근인후) 하여 事親竭力(사친갈력)하고 家本淸貧(가본청빈)하니 採山魚水(채산어수)하여 以供甘旨(이공감지)하며 親疾危谹(친질위횡) 築壇禱天(축단도천)하며 及終(급종)에 哀毁 汝禮(애훼여례)하니 章甫薦(장보천)이라.」


주: 성품이 근본적으로 온후하여 가정과 친족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집안이 빈곤하다보니 산나물을 채취하고 고기도 잡아 부모님 공경에 애를쓰고 가족의 질환의 위험이 있을시 단을 만들어 하늘에 기도를 드리며 부모님을 공경하였으나 마침내 임종후에는 슬픔으로 예를 다하니 많은 학식을 가진 문호로  드리다.


3. 烈婦 (열부)

○ 全州朴氏 (전주박씨)

「竹亭(죽정) 晉(진) 后(후) 聖漢(성한) 女(여)요 남원인 梁思卿(양사경) 妻(처)라  性本端雅(성본단아)하여 供견祭儀(공견제의)가  充合內則(충합내칙)하고 夫患(부환)에 調藥竭誠(조약갈성)타가 경至殞絶(경지운절)

에 泣血毁瘠骨立(읍혈훼척골입) 一導古禮(일도고례)하니 鄕里(향리)咸稱(함칭)이라.」


○ 全州朴氏 (전주박씨)

「士衡(사형)의 女(여)요 남원인 양윤식의 妻(처)라 性素端淑(성소단숙)하여 以爲壺範(이위호범)터니 不幸早寡而撫育遣孤(불행조과이무육견고)하여 克承家道(극승가도)하니 鄕里薦藵)(향리천보) 하다.


4. 文官 (문관)

○ 朴楑 (박규) (三胤:삼윤)

- 全州人(전주인) 進士(진사) 孝子(효자) 竹亭(죽정) 晉(진)의 6世孫(세손)이라.


주: 입장수 하신 進士(진사) 선조 저자의 16대조이시며 墓所(묘소)는 장계면 금덕리 山(산)


○ 朴碩齡 (박석령)

- 全州人(전주인) 進士(진사) 楑(규) 之子(지자)라


주: 입장수 하신 선조의 아들이시며 15대조로 墓所(묘소)는 계남면 침곡리 독정


○ 朴戶 (박호)

- 全州人(전주인)이니 官職(관직) 主簿(주부)라.


주:  進士(진사) (三胤:삼윤) 선조의 4세손으로 저자의 13대조이시며 宣務郞(선무랑) 司甕主簿(사옹주부) 墓所(묘소)는 장수읍 대승리 山(산) 

○ 朴聖大 (박성대)

- 全州人(전주인) 字(자)는 泰源(태원)이니 蓮平(연평) 大虎(대호)의 后(후)라. 自幼穎悟(자유영오)하여 孝親友兄(효친우형)하고 奉先有誠(봉선유성)하며 敎子有方(교자유방)하고 睦族和鄰(목족화인)이라 官(관) 參奉(참봉)하다.


주: 相喆(상철) 子(자)라


5. 德行 (덕행)

○ 朴昌漢 (박창한)

- 全州人(전주인) 生員(생원) 養性齋(양성재) 三胤(삼윤) 后(후)라 性根純厚(성근순후)하여 才氛超越(재분초월)하고 博學篤志(박학독지)하여 深究經義(심구경의)하고 有所論述(유소논술)하니 後人模楷(후인모해)라.


6. 儒行 (유행)

○ 朴基福 (박기복) 字(자)는 英才(영재) 號(호) 遇軒(우헌)

高宗(고종)乙酉生(을유생) 孝子(효자) 晉(진)의 后(후)요 啓大(계대)의 子(자)라 承先裕後(승선유후)하며 篤志慕聖(독지모성)하니 除健元陵參奉(제건원능참봉)하고 歷鄕校齋長(역향교재장)하다.

주:

7. 善行 (선행)

○ 朴世漢 (박세한) 號(호):六無(육무)

全州人(전주인) 竹亭(주정) 晉(진) 后(후)요 必昇(필승) 子(자)라 性質淳仁(성질순인)하여 深究經義(심구경의)하니 當時(당시)에 稱君子(칭군자)라하고 老而篤工(노이독공)하니 家有六無序(가유육무서)하다.

 

해동잡록 5 본조(本朝)
박유성(朴有誠)

전주(全州) 사람이며 50살에 부모가 동시에 죽어 묘막에서 6년을 보냈다. 상을 끝낸 뒤 그 화상을 그려 벽에 걸고 조석으로 상식을 그치지 아니했다. 성종(成宗)이 명하여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를 제수하였다.

海東雜錄[五] 權鼈
 孝子
朴有誠

全州人。年五十。父母同時歿。廬墓六年。喪畢。圖形掛壁。奠朝夕不輟。

 

我成廟命授廣興倉奉事。

  • 여지도서   (한국사 데이타베이스)
  • 補遺篇 (全羅道)
    • 完山誌卷下
孝子 本朝朴晉 父病棄官歸侍晝不離側夜不解帶藥必先嘗父殆作詩遺晉曰八十年當臥蟻床六旬老子藥先嘗死生有命終難避近汝慈墳之壽堂及父卒葬祭以禮廬墓三年鄕黨稱焉 太祖七年旌閭官至知郡事 원주 朴有誠 年五旬父母同時而沒廬墓六年喪畢圖形掛壁奠朝夕不廢 成宗六年事聞特除爲廣興倉奉事 원주 卜閏文 至孝聞於世 원주 吳齡老 生員也繼母喪朞年始疏食燕山朝父歿時短喪法嚴齡老猶執喪如禮 中宗四年旌閏 원주 朴世直 生員也年十歲喪母哀泣三年父死啜粥廬墓 中宗二十三年旌閭 원주 金千同 私賤也母病腫幾死斷指和藥以進病愈 中宗二十三年旌閏 원주 金春 縣監五歲母沒哀慕不懈九歲丁父憂執喪如成人及長以未服母喪爲至痛遂追服居廬三年朝夕奠親自炊爨不出山外不顧妻病服闋以衆子不得立廟造素軸題考妣位奉以自隨出入必告朔望俗節必奠得新物必薦 明廟朝特 命旌閭 원주 柳得容 孝誠出天常盡子職壬辰倭亂遇賊

전주9세

전주10세

전주11세

전주12세

전주13세

전주14세

전주15세

전주16세

전주17세

전주18세

전주19세

전주20세

전주21세

례(禮)

 

 

 

 

 

 

 

 

 

 

 

 

경(景)

 

 

 

 

 

 

 

 

 

 

 

 

의(義)

 

 

 

 

 

 

 

 

 

 

 

 

현(玹)

천익(薦益)
佐郞

실(實)

直提學
議政府事

諡文節公

사인(思仁)
典法判書

上將軍

완산군

녕()

지양(志讓)
조선조
藝曹參判

종수(從壽)
竹堂公

진(晋)
郡守

孝子旌閭碑

유성(有誠)

승룡(承龍)

문찬(文燦)
牧使

계현(桂賢)

삼중(三重)진사공파

승남(承男)

문성(文星)

 

 

승경(承慶)

문형(文衡)

계림(桂林)

삼민(三閔)

맹유(孟由)

 

중유(仲由)

 

종유(終由)

암()
목사공파

승조(承祖)

 

 

 

효성(孝誠)

승백(承伯)

문증(文增)
郡守

계인(桂仁)

삼윤(三胤)
생원공파

제(題)

 

 

 

 

 

윤(玧)

 

 

 

 

 

종동(從東)

 

 

 

 

 

 

종주(從周)

 

 

 

 

 

 

지온(志溫)
大司成

 

 

 

 

 

 

 

(최 )

사덕(思德)

정(澄)

영규(瑛規)

두간(斗幹)

 순창박씨 관조

 

 

 

 

 

 

[요약정보]

본관명 전주(全州)
성씨명 박씨(朴氏)
본관소재지 전라북도(全羅北道) 전주시(全州市)
본관이칭
시조명 박언화(朴彦華)

[상세내용]

본관 연혁

전주(全州)는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成)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렸다가, 555년(위덕왕 2)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900년(효공왕 4)에 견훤(甄萱)이 무주(武州: 光州)로부터 이곳으로 후백제의 도읍을 옮겨 백제 부흥의 노력을 하였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후백제가 망하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었다가 940년에 다시 전주로 회복되었다. 983년(성종 2)에 12목 가운데의 하나인 전주목이 설치되었으며, 993년에 승화(承化)로 개칭하고 절도안무사(節度安撫使)를 두었다. 995년에는 강남도(江南道) 관하의 전주순의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안남대도호부로 승격되고, 1022년에 전주목으로 개칭되어 1곳의 속군과 11곳의 속현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전주로 강등되고, 1355년(공민왕 4)에는 부곡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에 완산부(完山府)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전주이씨의 본향지라 하여 완산부유수(完山府留守)로 승격되었으며, 1403년(태종 3)에 전주부(全州府)로 개칭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주부 전주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북도 전주군으로 개편된 이래 1935년 전주면이 부로 승격하여 독립하고 1949년 전주시로 개칭되었다.

성씨의 역사

전주박씨(全州朴氏) 시조 박언화(朴彦華)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여섯째 아들로 완산대군(完山大君: 완산은 전주의 옛이름)에 봉해지게 되어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을 전주(全州)로 삼아 세계를 계승하였다.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전주박씨는 765가구 총 2,440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뿌리를 찾아서(http://www.rootsinfo.co.kr)
傳統族譜文化社(http://www.genealogy.co.kr)
디지털한국학(http://koreandb.kdaq.empas.com/)

騎牛先生文集卷之一
 
朴淸道 晉○完山人。號竹亭。廬墓韻 二首 a_007_358d


有德必有壽。吾觀聖賢句。強康且樂易。固自幽潛富。尙志更無違。神明能勿佑。蕭然乘化歸。終始孰當究。

承家淸道公。偶得我來覯。一展平生言。蔚乎有傳授。又出搢紳詩。珠玉照衣袖。促膝讀琅然。果得使願副。余何贊一辭。寫字恐遷就。 淸道之大人病革。以絶句詩遺其子而歿。其外孫校書郞崔直之求和於當時諸賢。

박진(朴

 

 

 

 

 

 

 

 

 

 

 

 

 

 

 

 

 

 

 

 

 

 

 

 

 

 

 

 

 

 

 

 

 

 

 

 

 

 

 

 

 

 

 

 

 

 

 

 

 

 

 

 

 

 

 

 

 

 

 

 

 

 

 

 

 

 

 

 

 

 

 

 

 

 

 

 

 

 

 

 

 

 

 

 

 

 

 

 

 

 

 

 

 

 

 

 

 

 

 

 

 

 

 

 

 

 

 

 

 

 

 

 

 

 

 

 

 

 

 

 

 

 

 

 

 

 

 

 

 

 

 

 

 

 

 

 

 

 

 

 

 

 

 

 

 

 

 

 

 

 

 

 

 

 

 

 

 

 

 

 

 

 

 

 

 

 

 

 

 

 

 

 

 

 

 

 

 

 

 

 

 

 

 

 

 

 

 

 

 

 

 

 

 

 

 

 

 

 

 

 

 

 

 

 

 

 

 

 

 

 

 

 

 

 

 

 

 

 

 

 

 

 

 

 

 

 

 

 

 

 

 

 

 

 

 

 

 

 

 

 

 

 

 

 

 

 

 

 

 

 

 

 

 

 

 

 

 

 

 

 

 

 

 

 

 

 

 

 

 

 

 

 

 

 

 

 

 

 

 

 

 

 

 

 

 

 

 

 

 

 

 

 

 

 

 

 

 

 

 

 

 

 

 

 

 

 

 

 

 

 

 

 

 

 

 

 

 

 

 

 

 

 

 

 

 

 

 

 

 

 

 

 

 

 

 

 

 

 

 

 

 

 

 

 

 

 

 

 

 

 

 

 

 

 

 

 

 

 

 

 

 

 

 

 

 

 

 

 

 

 

 

 

 

 

 

 

 

 

 

 

 

 

 

 

 

 

 

 

 

 

 

 

 

 

 

 

 

 

 

 

 

 

 

 

 

 

 

 

 

 

 

 

 

 

 

 

 

 

 

 

 

 

 

 

 

 

 

 

 

 

 

 

 

 

 

 

 

 

 

 

 

 

 

 

 

 

 

 

 

 

 

 

 

 

 

 

 

 

 

 

 

 

 

 

 

 

 

 

 

 

 

 

 

 

 

 

 

 

 

 

 

 

 

 

 

 

 

 

 

 

 

 

 

 

 

 

 

 

 

 

 

 

 

 

 

 

 

 

 

 

 

 

 

 

 

 

 

 

 

 

 

 

 

 

 

 

 

 

 

 

 

 

 

 

 

 

 

 

 

 

 

 

 

 

 

 

 

 

 

 

 

 

 

 

 

 

 

 

 

 

 

 

 

 

 

 

 

 

 

 

 

 

 

 

 

 

 

 

 

 

 

 

 

 

 

 

 

 

 

 

 

 

 

 

 

 

 

 

 

 

 

 

 

 

 

 

 

 

 

 

 

 

 

 

 

 

 

 

 

 

 

 

 

 

 

 

 

 

 

 

 

 

 

 

 

 

 

 

 

 

 

 

 

 

 

 

 

 

 

 

 

 

 

 

 

 

 

 

 

 

 

 

 

 

 

 

 

 

 

 

 

 

 

 

 

 

 

 

 

 

 

 

 

 

 

 

 

 

 

 

 

 

 

 

 

 

 

 

 

 

 

 

 

 

 

 

 

 

 

 

 

 

 

 

 

 

 

 

 

 

 

 

 

 

 

 

 

 

 

 

 

 

 

 

 

 

 

 

 

 

 

 

 

 

 

 

 

 

 

 

 

 

 

 

 

 

 

 

 

 

 

 

 

 

 

 

 

 

 

 

 

 

 

 

 

 

 

 

 

 

 

 

 

 

 

 

 

 

 

 

 

 

 

 

 

 

 

 

 

 

 

 

 

 

 

 

 

 

 

 

 

 

 

 

 

 

 

 

 

 

 

 

 

 

 

 

 

 

 

 

 

 

 

 

 

 

 

 

 

 

 

 

 

 

 

 

 

 

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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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 12년(1937) 8월 2일
平壤地方法院 鎭南浦支廳 判事
中樞院 調査課 귀하
本貫調査에 관한 件 照會
위 제목의 건에 관해 조선의 朴姓 중에 본관이 밀양 외에 전주 박씨가 있는지가 불분명하므로 이 점에 대해 회답해 주시길 바라며 이 점을 조회합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호적정정 허가신청사건에 관계된 것이므로 빨리 회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안동시사 5 스크랩
【全州 柳氏】

류극서(柳克恕):생몰년 미상. 본관 全州. 시조 完山伯 濕의 子. 문과 급제. 내직으로는 宗溥令•判典客寺事•巡軍衛當直千戶•寶文閣直提學•知製敎 역임. 외직으로는 驪興郡守•楊廣道按察使•延安府使 역임. 贈職:通政大夫 吏曹參議. ▣참고:『岐下水柳』 ?집필:이원걸

류 빈(柳濱):1367(공민왕 16, 정미)∼1436(세종 18, 병진). 본관 全州. 克恕의 子. 1386년(우왕 12) 문과 급제. 眞寶縣監•永興大都護府使 등 여러 官을 역임.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의 상을 당하자 廬幕을 지어 3년간 侍墓했음. 太宗 李芳遠과 同甲(정미생) 契員으로 交分이 도타웠으며, 조선 창업에 功이 있어 개국 1등 공신에 錄勳됨. 贈職:嘉善大夫 戶曹參判 同知義禁府事 行 通政大夫. ▣참고:『岐下水柳』 ?집필:김태안
류의손(柳義孫):1398(태조 7, 무인)∼1450(세종 32, 경오). 본관 全州. 자는 孝叔. 호는 檜軒. 濱의 子. 1426년(세종 8) 문과 급제. 翰林을 거쳐 集賢殿에 뽑힘. 곧 직제학이 되어 南秀文•權採와 함께 文章•德行으로 집현전 3선생이라 일컬어짐. 그후 吏曹參判을 지냄. 首陽大君의 왕위찬탈 이후 黃方山에 들어가 笑臥亭을 짓고 자취를 숨김. 저서:『檜軒逸稿』. ▣참고:『安東鄕土誌』 ?집필:김태안

류숭조(柳崇祖):1452(문종 2, 임신)∼1512(중종 7, 임신). 본관 全州. 자는 宗孝. 호는 眞一齋. 之盛의 子. 1489년(성종 20) 문과 급제. 大司成에 이름. 시호:文穆. 저서:『眞一齋集』. ▣참고:「神道碑銘」(姜渾 撰) ?집필:김태안

류 식(柳軾):생몰년 미상. 본관 全州. 자는 和仲. 호는 西溪. 季潼의 子. 1486년 생원시 합격. 1507년 문과에 급제. 강릉판관•홍문관전한•인천부사 역임. ▣참고:『國朝人物志』 ?집필:이원걸

류윤선(柳潤善):1500(연산군 6, 경신)∼1557(명종 12, 정사). 본관 全州. 자는 善之. 軾의 子. 通禮院 引儀를 지냈고 한양 墨寺洞에서 살다가 영주군수를 역임하는 백씨 潤德을 따라 落南하여 汚川에 우거함. 司直 朴承張의 딸에게 장가들어 후사를 이으니 곧 전주류씨 水谷派의 落南 시조가 됨. ▣참고:『岐下水柳』 ?집필:이원걸

류 성(柳城):1533(중종 28, 계사)∼1560(명종 15, 경신). 본관 全州. 자는 子固. 시조 濕의 7대손. 潤善의 子. 榮川에서 川前(내앞)의 義城金氏 金璡의 사위가 된 이래 그 인연으로 천전과 가까운 水谷(무실)으로 이거함. 金誠一의 姉氏인 부인 의성김씨는 公이 병약하여 불행히 28세로 夭逝하자 3년상을 마친후 28세로 남편을 따라 순절한 節婦임. ▣참고:『水柳科宦者別行蹟』 ?집필:김태안

류복기(柳復起):1555(명종 10, 을묘)∼1617(광해군 10, 정사). 본관 全州. 자는 聖瑞. 호는 岐峯. 城의 子. 외조는 義城 金璡. 金誠一 문인. 鄭逑와 교유. 임란에 金垓•裵龍吉과 함께 倡義. 대장 김해가 경주에서 전사하여 軍勢가 위태롭자 분려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陣中의 사기를 진작시킴. 정유재란에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八公山•火旺山 등지에서 적을 막음. 만년에 岐陽書堂을 짓고 후진을 양성. 임란에 이바지한 공으로 禮賓寺正 및 左承旨에 제수됨. 贈職:吏曹參判. 1806년 岐陽 追遠祠에 배향됨. ▣참고:「墓碣銘」(鄭宗魯 撰) ?집필:이원걸

류복립(柳復立):1558(명종 13, 무오)∼1593(선조 26, 계사). 본관 全州. 자는 君瑞. 호는 墨溪. 副提學 潤德의 손자. 外叔 金誠一 문인. 蔭職으로 宗簿寺主簿에 제수됨. 임란에 慶尙右監司 김성일의 휘하에서 參謀로 晋州城을 공격해 온 적과 싸워 여러 번 전공을 세움. 김성일이 전사하자 倡義使 金千鎰•復讐將 高從厚•兵馬節度使 黃進 등과 함께 진주성을 방어함. 필사의 각오로 여러 달 저항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등과 함께 자결함. 忠臣旌門이 세워짐. 贈職:吏曹判書. ▣참고:『國朝人物考』 ?집필:이원걸

류우잠(柳友潛):1575(선조 8, 을해)∼1635(인조 13, 을해). 본관 全州. 자는 尙之. 호는 陶軒. 復起의 子. 李埈•張興孝•金是榲 등과 교유. 임란에 부친이 창의하자 19세의 나이로 부친을 따라 의병진에서 활약. 1597년 昌寧의 火旺山城을 수비. 1636년 仁祖의 강화도 피신 소식을 듣고 후금의 만행에 대해 비분강개함. 삼전도의 굴욕 이후 과거의 뜻을 포기하고 독서하며 후진을 양성. 영남 선비들이 五賢을 文廟에 배향하기를 청하자 上疏를 받들고 詣闕함. 저서:『陶軒集』. ▣참고:「行狀」(鄭宗魯 撰) ?집필:이원걸

류지잠(柳知潛):1583(선조 16, 계미)∼1653(효종 4, 계사). 본관 全州. 자는 樂之. 호는 龍巖. 復起의 子. 정유재란에 부친이 의병을 이끌고 화왕산성으로 향하자 동행하여 산성 수비에 참여. 만년에 향리 동지들과 함께 『呂氏鄕約』 절목을 만들어 문중에 시행함. ▣참고:『岐下水柳』 ?집필:이원걸

류희잠(柳希潛):1596(선조 29, 병신)∼1671(현종 12, 신해). 본관 全州. 자는 賢之. 復起의 子. 집이 가난해서 늘 선비로서 본분을 잃지 않고 은거하며 유유자적함. 손자 榰의 貴로 인해 이조참판을 제수받음.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 숙(柳橚):1600(선조 33, 경자)∼1684(숙종 10, 갑자). 본관 全州. 자는 廷秀. 호는 靈岩. 友潛의 長子. ‘長德巨人’으로 일컬어짐. 蔭仕로 護軍에 제수됨. ▣참고:「墓誌銘」(柳正源 撰) ?집필:권진호

류 직(柳직):1602(선조 35, 임인)∼1662(현종 3, 임인). 본관 全州. 자는 廷堅. 호는 百拙庵. 友潛의 子. 1630년 사마시 합격. 1635년 황해도 유생들이 成渾•李珥를 문묘에 배향하려는 논의를 일으키자 영남 선비의 領袖로 추대되어 1000명의 선비들과 詣闕하여 그 부당함을 주장. 저지시킴. 저서:『百拙庵文集』. ▣참고:「墓碣銘」(丁範祖 撰) ?집필:이원걸

류 학(柳椙學):1607(선조 40, 정미)∼1688(숙종 14, 무진). 본관 全州. 자는 廷直. 호는 冶溪. 友潛의 第4子. 일찍이 재주가 뛰어나 世人들에게 주목을 받았으나 끝내 山林에서 생을 마침. 저서:『冶溪遺稿』. ▣참고:「行狀」(柳範休 撰) ?집필:권진호

류 격(柳格):1610(광해군 2, 경술)∼1682(숙종 8, 임술). 본관 全州. 자는 廷賓. 호는 春厓. 友潛의 第5子. 1646년(인조 24)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류형립(柳亨立):1611(광해군 3, 신해)∼?. 본관 全州. 자는 時遇. 仁茂의 子. 1663년(현종 4)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류정립(柳貞立):1616(광해군 8, 병진)∼?. 본관 全州. 자는 公幹. 호는 耕隱. 仁茂의 子. 1646년(인조 24) 식년문과 급제. 佐郞 역임. ▣참고:『國朝榜目』 ?집필:권진호

류경립(柳經立):1622(광해군 14, 임술)∼?. 본관 全州. 자는 文叟. 호는 逸園. 仁茂의 子. 1654년(효종 5) 식년문과 급제. 府使 역임. ▣참고:『國朝榜目』 ?집필:권진호

류영립(柳英立):1623(광해군 15, 계해)∼1686(숙종 12, 병인). 본관 全州. 자는 爾粹. 호는 三客. 仁茂의 子. 叔父 涵에게 출계. 외조는 廣州 安民獻. 妻父는 羅州 羅以俊. 李光庭의 大父 時馣의 문인. 1651년(효종 2) 진사시 합격. 1663년(현종 4) 식년문과 급제. 戶曹正郞•成均館直講•順天府使 역임. 文詞로 당시에 聲望을 받음. ▣참고:「墓碣銘」(李光庭 撰) ?집필:권진호

류진휘(柳振輝):1623(인조 1, 계해)∼1675(숙종 1, 을묘). 본관 全州. 자는 伯春. 橚의 長子. 1660년(현종 원년) 진사시 합격. 그 뒤 출세를 단념하고 어버이를 봉양하며 隱居講學함. ▣참고:「墓誌銘」(柳晦文 撰) ?집필:권진호

류정휘(柳挺輝):1625(인조 3, 을축)∼1695(숙종 21, 을해). 본관 全州. 자는 仲謙. 호는 空空齋. 橚의 子. 1652년(효종 3) 문과 급제. 禮曹正郞•司諫院正言•驪州牧使 역임. 목민관으로서 淸廉潔白했으며 治道를 행하여 業績을 쌓음. ▣참고:「墓碣銘」(李玄逸 撰) ?집필:권진호

류 지(柳榰):1626(인조 4, 병인)∼1701(숙종 27, 신사). 본관 全州. 자는 重吾. 호는 乖厓. 希潛의 次子. 從兄인 (직)의 문인. 1646년(인조 24) 생원시 합격. 1654년(효종 5) 식년문과 장원급제. 禮曹佐郞•司憲府持平•司諫院正言•慶州府尹 역임. 관직에 있을 때는 剛直한 성품에다 ‘公正之治’를 행하여 時望이 있었음. 저서:『乖厓集』. ▣참고:「墓碣銘」(金世鎬 撰) ?집필:권진호

류 환(柳桓):1626(인조 4, 병인)∼?. 본관 全州. 자는 子毅. 垣의 증손. 達文의 손자. 景潛의 長子. 長孫 顯時가 貴하게 되어 左承旨에 贈職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증휘(柳增輝):1627(인조 5, 정묘)∼1707(숙종 33, 정해). 본관 全州. 자는 士晦. 友潛의 손자. 性度가 高潔하고 經史에 博識함. 蔭仕로 護軍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익휘(柳益輝):1629(인조 7, 기사)∼1698(숙종 24, 무인). 본관 全州. 자는 甭謙. 호는 萬嶺. 橚의 第4子. 과거를 단념하고 집의 남쪽에 초가 두어 칸을 지어 ‘萬嶺草堂’이라 하고 松林속에서 소요함. 사람들이 ‘松間丈人’이라 칭함. 曾孫 厚源이 貴하게 되어 司僕寺正에 贈職됨. 저서:『詩稿』. ▣참고:「墓碣銘」(金宏垌 撰) ?집필:권진호

류봉휘(柳鳳輝):1631(인조 9, 신미)∼1712(숙종 38, 임진). 본관 全州. 자는 子儀. 格의 長子. 蔭仕로 護軍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경휘(柳經輝):1639(인조 17, 기묘)∼1720(숙종 46, 경자). 본관 全州. 자는 魯野. 格의 次子. 蔭仕로 護軍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계휘(柳啓輝):1645(인조 23, 을유)∼1706(숙종 32, 병술). 본관 全州. 자는 季晦. 호는 鰲潭. 格의 第4子. 숙부 桓에게 출계. 1681년(숙종 7) 진사시 합격. 장남 顯時(號 壺窩)가 貴하게 되어 大司憲에 贈職됨.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류창시(柳昌時):1649(인조 27, 기축)∼1731(영조 7, 신해). 본관 全州. 자는 致和. 挺輝의 次子. 1702년(숙종 28) 진사시 합격. 성품과 도량이 간결하고 治家에 법도가 있었음.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종시(柳宗時):1650(효종 1, 경인)∼1700(숙종 26, 경진). 본관 全州. 자는 道膺. 振輝의 長子. 李栽•權斗寅•趙德隣 등과 학문으로 깊이 교유함. 1699년(숙종 25) 생원시 합격. 약관에 이미 文望이 있었음. ▣참고:「墓碣銘」(柳晦文 撰) ?집필:권진호

류경휘(柳慶輝):1652(효종 3, 임진)∼1708(숙종 34, 무자). 본관 全州. 자는 賀仲. 호는 蒙泉齋. 榰의 長子. 1675년(숙종 원년) 생원시 합격. 재산을 별도로 비축하여 가난한 이웃과 친척들을 救恤하니 사람들이 ‘義庫’라 일컬었음. 저서:『家禮集說』. ▣참고:「墓誌銘」(柳台齊 撰) ?집필:권진호

류상시(柳相時):1652(효종 3, 임진)∼1724(숙종 4, 갑진). 본관 全州. 자는 子順. 益輝의 長子. 次孫 厚源이 貴하게 되어 吏曹參議에 贈職됨. ▣참고:「墓碣銘」(柳炳文 撰) ?집필:권진호

류행시(柳行時):1654(효종 5, 갑오)∼1726(경종 2, 병오). 본관 全州. 자는 道能. 益輝의 次子. 長孫 景源이 貴하게 되어 左承旨에 증직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석명(柳錫命):1655(효종 6, 을미)∼1703(숙종 29, 계미). 본관 全州. 자는 伯三. 行時의 子. 文章과 行檢이 있었음. 長子 景源이 貴하게 되어 吏曹參判에 증직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응시(柳應時):1656(효종 7, 병신)∼1725(영조 1, 을사). 본관 全州. 자는 會甫. 文輝의 子. 가난한 宗族들을 救恤해 줌. 蔭仕로 佐郞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대시(柳大時):1657(효종 8, 정유)∼1739(영조 15, 기미). 본관 全州. 자는 子猷. 호는 磨泉. 益輝의 次子. 經學과 文章에 뛰어났고 孝友에도 篤實함. 저서:『磨泉集』•『紫陽集解』. ▣참고:『安東鄕校誌』 ?집필:권진호

류민시(柳敏時):1657(효종 8, 정유)∼1744(영조 20, 갑자). 본관 全州. 자는 子愼. 長輝의 長子. 인품이 重厚하고 德器가 있음. 蔭仕로 護軍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종유(柳宗儒):1659(효종 10, 기해)∼?. 본관 全州. 자는 道卿. 行立의 子. 1699년(숙종 25)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류후재(柳厚載):1663(현종 4, 계묘)∼1746(영조 22, 병인). 본관 全州. 자는 德裕. 椲의 손자. 斗輝의 次子. 蔭仕로 護軍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헌시(柳憲時):1665(현종 6, 을사)∼1747(영조 23, 정묘). 본관 全州. 자는 叔度. 萬輝의 子. 1710년(숙종 36) 진사시 합격. 壽職:護軍.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경시(柳敬時):1666(현종 7, 병오)∼1737(영조 13, 정사). 본관 全州. 자는 欽若. 호는 涵碧堂. 東輝의 次子. 李惟樟•李玄逸의 문인. 1694년(숙종 20) 문과 급제. 成均典籍•禮曹佐郞•司憲府掌令•黃海都事 역임.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에 兵書를 연구하여 관군의 장수들에게 陣法을 가르침. 牧民官으로 善政을 베풀어 淸白吏에 입록됨. 제향:洛淵書院. 저서:『涵碧堂集』. ▣참고:「行狀」(丁範祖 撰) ?집필:권진호

류현시(柳顯時):1667(현종 8, 정미)∼1752(영조 28, 임신). 본관 全州. 자는 達夫. 호는 壺窩. 啓輝의 長子. 외조는 眞城 李朝英•安東 權衍. 妻父는 原州 邊洙•淸州 鄭震雄. 權斗寅•權斗經•李栽를 從遊. 趙德鄰•金聖鐸에게 인정을 받음. 1711년(숙종 37) 생원시 장원. 그후 벼슬을 단념하고 書史를 탐독하여 憲時•錫斗•升鉉과 더불어 일시에 ‘柳氏四老’라고 불림. 壽職:同知中樞府事. 저서:『壺窩集』. ▣참고:「墓碣銘」(李光靖 撰) ?집필:권진호

류석구(柳錫龜):1673(현종 14, 계축)∼1737(영조 13, 정사). 본관 全州. 자는 聖徵. 相時의 長子. 隱德과 善行이 뛰어남. 次男 厚源이 貴하게 되어 吏曹參判에 증직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익시(柳翊時):1673(현종 14, 계축)∼1756(영조 32, 병자). 본관 全州. 자는 國輔. 祥輝의 長子. 壽職:同知中樞府事.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춘영(柳春榮):1673(현종 14, 계축)∼?. 본관 全州. 자는 君實. 震錫의 子. 1702년(숙종 28)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류봉원(柳奉源):1674(현종 15, 갑인)∼1731(영조 7, 신해). 본관 全州. 자는 元叔. 必達의 第4子. 蔭仕로 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석두(柳錫斗):1674(현종 15, 갑인)∼1741(영조 17, 신유). 본관 全州. 자는 君七. 호는 樸齋. 夏時의 第3子. 李玄逸 문인. 인품이 厚德하여 鄕邦에서 重望을 받음. 저서:『遺稿』. ▣참고:「墓碣銘」(柳致明 撰) ?집필:권진호

류원현(柳元鉉):1674(현종 15, 갑인)∼1755(영조 31, 을해). 본관 全州. 자는 台彦. 호는 月會堂. 宗時의 子. 1711년(숙종 37) 생원시 합격. “三代進士면 分에 足하다”하여 出世를 斷念하고 岐陽에 月會講學을 열고 讀書와 후진양성에 전념. 壽職:龍驤衛副護軍. 작품이 『月會堂逸詩』에 실려 있음. ▣참고:「墓誌銘」(柳廷鎬 撰), ?집필:권진호

류중영(柳重榮):1679(숙종 5, 기미)∼?. 본관 全州. 자는 子實. 震錫의 子. 1702년(숙종 28)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류승현(柳升鉉):1680(숙종 6, 경신)∼1746(영조 22, 병인). 본관 全州. 자는 允卿. 호는 慵窩. 奉時의 長子. 외조는 鵝洲 申以徵. 妻父는 光州 金漢璧. 金聖鐸과 莫逆交를 맺음. 1719년(숙종 45) 增廣文科 급제. 司憲府掌令•鍾城府使•工曹參議 역임. 1728년(영조 4) 李麟佐의 亂에 의병대장으로 推戴됨.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牧民官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士流의 重望을 받음. 저서:『慵窩集』. ▣참고:「墓碣銘」(蔡濟恭 撰) ?집필:권진호

류비시(柳賁時):1680(숙종 6, 경신)∼1761(영조 37, 신사). 본관 全州. 자는 晦而. 호는 醉軒. 守潛의 증손. 揚輝의 次子.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亂에 倡義하여 공을 세움. 저서:『詩集』.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만하(柳晩華):1685(숙종 11, 을축)∼?. 본관 全州. 자는 成彦. 宗儒의 子. 1714년(숙종 40)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류진현(柳晋鉉):1687(숙종 13, 정묘)∼1767(영조 43, 정해). 본관 全州. 자는 升伯. 호는 綠筠軒. 敬時의 長子. 외조는 昌原 黃昌述. 妻父는 安東 金履端. 趙德鄰 문인. 1726년(영조 2) 생원시 합격. 만년에 후진을 訓誨하여 성취한 자가 많았음. 壽職:僉樞. ▣참고:「墓碣銘」(柳必永 撰) ?집필:권진호

류인문(柳仁文):1689(숙종 15, 기사)∼1728(영조 4, 무신). 본관 全州. 자는 士俊. 奉源의 손자. 得休의 長子. 孫子 昌鎬가 貴하게 되어 吏曹參議에 증직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근시(柳謹時):1689(숙종 15, 기사)∼1771(영조 47, 신묘). 본관 全州. 자는 愼導. 호는 蒲柳齋. 宣輝의 第4子. 蔭仕로 參奉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광렴(柳光濂):1692(숙종 18, 임신)∼1756(영조 32, 병자). 본관 全州. 자는 叔明. 호는 松隱. 錫斗의 長子. 李栽 문인. 효성이 지극하여 異感이 있었음. 저서:『詩集』.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관현(柳觀鉉):1692(숙종 18, 임신)∼1764(영조 40, 갑신). 본관 全州. 자는 用賓. 호는 陽坡. 奉時의 次子. 외조는 鵝洲 申以徵. 妻父는 金九用. 伯氏인 升鉉의 문인. 金聖鐸과 忘形之友를 맺음. 1735년(영조 11) 增廣文科 급제. 司憲府持平•刑曹參議 역임. 외직에 있을 때 牧民官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丁若鏞이 쓴 『牧民心書』에 治績이 실려 있음. 저서:『陽坡集』. ▣참고:「墓碣銘」(蔡濟恭 撰) ?집필:권진호
류필달(柳必達):1693(숙종 19, 계유)∼1753(영조 29, 계유). 본관 全州. 知潛의 현손. 應時의 次子. 蔭仕로 護軍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명현(柳命鉉):1696(숙종 22, 병자)∼1739(영조 15, 기미). 본관 全州. 자는 聲遠. 大時의 子. 妻父는 義城 金龜重. 敬時•升鉉•觀鉉 등의 至親 先輩들을 師友로 대하여 크게 推獎을 받음. 堂姪인 柳正源과 도의를 강마. 1738년(영조 14) 생원시 합격. 지극정성으로 부모를 봉양. 특히 壽宴의 자리에서 ‘嬰兒戱’를 행하여 주위사람들이 ‘眞孝子’로 칭송함. ▣참고:「遺事」(柳炳文 撰) ?집필:권진호

류광택(柳光宅):1696(숙종 22, 신묘)∼1767(영조 43, 정해). 본관 全州. 자는 德源. 元鉉의 長子. 蔭仕로 討捕使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태제(柳台齊):1699(숙종 25, 기묘)∼1767(영조 43, 정해). 본관 全州. 자는 鉉甫. 호는 蘿隱. 尙載의 子. 외조는 眞城 李在運. 妻父는 義城 金謹行. 1726년(영조 2) 생원시 합격. 양친 봉양에 정성을 다하고 후진들을 훈육함. ▣참고:「墓碣銘」(李光靖 撰) ?집필:권진호

류득휴(柳得休):1702(숙종 28, 임오)∼1764(영조 40, 갑신). 본관 全州. 자는 敬善. 知潛의 6대손. 奉源의 長子. 同知中樞府事 昌鎬가 貴하게 되어 司僕寺正에 증직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권진호

류정원(柳正源):1703(숙종 29, 계미)∼1761(영조 37, 신사). 본관 全州. 자는 淳伯. 호는 三山. 錫龜의 子. 외조는 延安 李天麟. 妻父는 宣城 李曦•務安 朴廷煥. 1729년(영조 5) 생원시 합격. 1735년(영조 11) 增廣文科 급제. 弘文館修撰•大司諫 역임. 목민관으로 善政을 베풀어 정약용의 『牧民心書』에 治績이 실려 있음. 학문은 易學에 조예가 깊었고 아울러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박통했음. 저서:『易解參考』•『河洛指要』•『三山集』. ▣참고:「行狀」(李象靖 撰) ?집필:권진호

류 수(柳璲):1706(숙종 32, 병술)∼?. 본관 全州. 자는 濟人. 震華의 子. 1729년(영조 5)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류후원(柳厚源):1710(숙종 36, 경인)∼1806(순조 6, 병인). 본관 全州. 자는 重伯. 錫龜의 子. 역학 연구에 주력하여 많은 성취를 보임.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경원(柳景源):1711(숙종 37, 신미)∼1794(정조 18, 갑인). 본관 全州. 자는 吾長. 益輝의 증손. 계부는 錫命. 壽職:동지중추부사.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화현(柳和鉉):1712(숙종 38, 임진)∼1782(정조 6, 임인). 본관 全州. 자는 諧伯. 호는 松隱. 永時의 子. 族兄 觀鉉의 문인. 通源•道源•長源과 같이 공부함. 경사 및 천문•지리•복서•수학까지 섭렵함. 저서:『松隱遺集』.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원원(柳元源):1714(숙종 40, 갑오)∼?. 본관 全州. 자는 來遠. 호는 餘隱. 台鉉의 子. 1747년(영조 23)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류통원(柳通源):1715(숙종 41, 을미)∼1787(정조 11, 정미). 본관 全州. 자는 叔亨. 호는 笵溪. 觀鉉의 子. 증손 致明의 貴로 인해 司僕寺正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홍원(柳弘源):1716(숙종 42, 병신)∼1781(정조 5, 신축). 본관 全州. 자는 汝遠. 호는 江浦. 晋鉉의 子. 족형 正源의 문인. 서법이 고건하고 奇崛하여 岣嶁碑로부터 고전 등을 모두 능했음. 저서:『江浦集』. ▣참고:「行狀」(柳必永 撰) ?집필:이원걸

류도원(柳道源):1721(경종 1, 신축)∼1791(정조 15, 신해). 본관 全州. 자는 叔文. 호는 蘆厓. 觀鉉의 子. 1711년 사마시 합격. 1788년 이인좌 란에 창의한 친부 升鉉에게 증직을 내리면서 특명으로 명릉참봉에 제수하였으나 3년만에 병을 칭하고 물러남. 이어 선공감역에 임명됨. 壽職:첨지중추부사. 저서:『退溪集攷證』•『四禮便考』•『日省錄』•『東獻輯錄』•『蘆厓集』. ▣참고:「墓碣銘」(丁範祖 撰) ?집필:이원걸

류진휴(柳震休):1724(경종 4, 갑진)∼1757(영조 33, 정축). 본관 全州. 자는 景佑. 호는 壺溪. 正源의 장남. 학문과 덕행이 크게 진보하던 차에 요절함. 저서:『逸稿』. ▣참고:「墓誌銘」(柳箕鎭 撰) ?집필:권진호

류장원(柳長源):1724(경종 4, 갑진)∼1796(정조 20, 병진). 본관 全州. 자는 叔源. 호는 東巖. 생부는 信迪. 계부는 觀鉉. 백부 升鉉에게 취학. 1749년 표계로 이사하여 중씨 道源과 토론을 거듭함. 김낙행에게 중용의의를 질의함. 1763년 진사시 합격. 이후 진취에 뜻을 두지 않고 동암정을 구축하여 후진 지도에 힘씀. 저서:『東巖集』•『상변통고』•『溪訓類編』•『湖書類編』•『資警錄』 . ▣참고:「行狀」 ?집필:이원걸

류정엽(柳廷燁):1737(영조 13, 정사)∼1814(순조 14, 갑술). 본관 全州. 자는 明瑞. 호는 松皐. 陽休의 子. 1798년 사마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이원걸

류성휴(柳星休):1738(영조 14, 무오)∼1819(순조 19, 기묘). 본관 全州. 자는 井瑞. 通源의 子. 족숙인 道源•長源에게 수학. 1771년 생원시 합격. 성품이 인후하여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베풀기를 즐김. ▣참고:「行狀」(柳必永 撰) ?집필:이원걸

류천휴(柳川休):1742(영조 18, 임술)∼1796(정조 20, 병진). 본관 全州. 자는 大至. 通源의 子. 계부는 長源. 1790년 사마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이원걸

류범휴(柳範休):1744(영조 20, 갑자)∼1823(순조 23, 계미). 본관 全州. 자는 天瑞. 호는 壺谷. 道源의 子. 李象靖 문인. 1780년 사마시 합격. 1785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태릉 참봉•사옹원 봉사•평시서 직장•금부도사•송화현감•사복시주부 역임. 1797년 공릉령을 거쳐 안변부사에 부임. 1823년 통정계에 오름. 저서:『壺谷集』. ▣참고:「行狀」(柳致明 撰) ?집필:이원걸

류지원(柳之源):1750(영조 26, 경오)∼1794(정조 18, 갑인). 본관 全州. 자는 復初. 正鉉의 子. 1786년 문과 급제. 벼슬이 사록에 이름. 불행히도 경륜을 펴보지 못하고 일찍 죽음.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회문(柳晦文):1758(영조 34, 무인)∼1818(순조 18, 무인). 본관 全州. 자는 燁如. 星休의 子. 외조는 義城 金相復. 柳道源•李象靖의 문인. 1783년 사마 양시 합격. 사도세자의 신원을 촉구하는 상소 진달에 선두로 활약함. 경학 연구와 심성 수양을 함. 소수서원에서 향음례를 실시하자 賓席으로 초청받음. ▣참고:「墓碣銘」(柳致明 撰) ?집필:이원걸

류원문(柳元文):1758(영조 34, 무인)∼1836(헌종 2, 병신). 본관 全州. 자는 善卿. 호는 滄浪齋. 宅休의 子. 1795년(정조 19)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이원걸

류기원(柳淇源):1758(영조 34, 무인)∼1843(헌종 9, 계묘). 본관 全州. 자는 活卿. 宜潛의 5대손. 郁鉉의 子. 壽職:僉知中樞府事.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목문(柳穆文):1761(영조 37, 신사)∼1803(순조 3, 계해). 본관 全州. 자는 子熙. 說休의 子. 음직으로 통정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두문(柳斗文):1761(영조 37, 신사)∼1822(순조 22, 임오). 본관 全州. 자는 景韓. 호는 雅谷. 世源의 손자. 泰休의 長子. 저서:『雅谷集』.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귀휴(柳龜休):1761(영조 37, 신사)∼1837(헌종 3, 정유). 본관 全州. 자는 玄瑞. 호는 遯坡. 通源의 子. 1813년 사마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이원걸

류락문(柳洛文):1766(영조 42, 병술)∼1807(순조 7, 정묘). 본관 全州. 자는 景範. 호는 方谷. 泰休의 子. 長源의 문인이 되어 학문에 힘씀. 저서:『方谷集』.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병문(柳炳文):1766(영조 42, 병술)∼1826(순조 26, 병술). 본관 全州. 자는 仲虎. 호는 素隱. 萬休의 子. 柳長源에게 수학. 학문에 정진했으며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후진 양성에 주력함. 저서:『素隱集』•『完山世牒』. ▣참고:「墓表」(李野淳 撰) ?집필:이원걸

류건휴(柳健休):1768(영조 44, 무자)∼1834(순조 34, 갑오). 본관 全州. 자는 子强. 호는 大埜. 忠源의 長子. 족숙 柳長源에게 취학. 뒤에 다시 南漢朝를 사사함. 만년에 학문 연찬과 제자 훈육에 힘씀. 智德을 겸한 학자로 강회가 있을 때는 반드시 의장으로 추대됨. 저서:『大埜集』•『四書集評』•『異學集辨』•『國朝故事』. ▣참고:「行狀」(柳裁擇 撰) ?집필:이원걸

류약문(柳約文):1769(영조 45, 기축)∼1819(순조 19, 기묘). 본관 全州. 자는 孟博. 호는 龜岫. 長源의 손자. 川休의 子. 1792년 사마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이원걸

류휘문(柳徽文):1773(영조 49, 계사)∼1832(순조 32, 임진). 본관 全州. 자는 公晦. 호는 好古窩. 萬休의 子. 류장원•남한조•정종로의 문인. 1821년에 류장원이 지은 『예서통고』와 고조부 류정원의 『역해참고』를 교정함. 1830년 관찰사와 암행어사의 천거로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2년 뒤에 장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이미 사후였음. 저서:『家禮考訂』•『啓蒙攷異』•『好古窩集』•『周易經典通篇』. ▣참고:「行狀」(柳致明 撰) ?집필:이원걸

류소휴(柳韶休):1774(영조 50, 갑오)∼1829(순조 29, 기축). 본관 全州. 자는 子儀. 忠源의 子. 1805년 사마시 합격. ▣참고:「墓碣銘」(柳致明 撰) ?집필:이원걸

류치명(柳致明):1777(정조 1, 정유)∼1861(철종 12, 신유). 본관 全州. 자는 誠伯. 호는 定齋. 부친은 晦文. 남한조의 문인. 1805년 별시문과 급제. 전적•수찬•대사헌•병조참판 역임. 1855년 장헌세자의 추숭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가 대사간 박래만의 탄핵으로 평안도 상원에 유배도중 변경되어 전라도 지도에 안치됨. 6개월후 11월에 풀려나 돌아옴. 1857년 만우정을 신축하여 후진지도에 힘씀. 저서:『定齋集』•『家禮集解』•『太極圖解』. ▣참고:「家狀」(柳致游 撰) ?집필:이원걸

류성규(柳星奎):1781(정조 5, 신축)∼?. 본관 全州. 자는 聚明. 養九의 子. 1809년 사마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이원걸

류정문(柳鼎文):1782(정조 6, 임인)∼1839(헌종 5, 기해). 본관 全州. 자는 耳中. 호는 壽靜齋. 範休의 子. 조부 류도원과 종조 류장원에게 수업. 李象靖을 사사함. 1838년 학행으로 추천되어 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저서:『近思錄』•『壽靜齋集』. ▣참고:「行狀」(柳致明 撰) ?집필:이원걸

류각문(柳覺文):1786(정조 10, 병오)∼1833(순조 33, 계사). 본관 全州. 자는 學先. 호는 廣之. 和時의 현손. 朋來의 子. 1827년 사마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이원걸

류치교(柳致喬):1790(정조 14, 경술)∼1862(철종 13, 임술). 본관 全州. 자는 叔久. 호는 守齋. 徽文의 子. 가세는 궁박하였으나 주서절요를 읽는 것을 일상사로 하고 飢寒이 박절해도 개의하지 않음. 저서:『守齋集』. ▣참고:「墓碣銘」(金興洛 撰) ?집필:이원걸

류치백(柳致百):1790(정조 14, 경술)∼1866(고종 3, 병인). 본관 全州. 자는 千益. 哲文의 長子. 무과 급제. 오위장 역임.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기진(柳箕鎭):1792(정조 16, 임자)∼1856(철종 7, 병진). 본관 全州. 자는 京老. 호는 可隱.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으며 문장이 빼어남. 저서:『可隱集』. ▣참고:『安東鄕土誌』 ?집필:이원걸

류치구(柳致球):1793(정조 17, 계축)∼1854(철종 5, 갑인). 본관 全州. 자는 來鳳. 호는 小隱. 부친은 宗休. 16세에 大埜에게 종학하는 한편 柳致明와 함께 공부하여 조예가 깊었음. 1827년 생원시에 합격.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학문에 전심함. 저서:『小隱集』. ▣참고:「墓碣銘」(李彙載 撰) ?집필:이원걸

류형진(柳衡鎭):1796(정조 20, 병진)∼1864(고종 1, 갑자). 본관 全州. 자는 殷老. 호는 同窩. 致奎의 子. 문장에도 능하여 王魯齋의 「萬物造化論」의 후론을 지어 수륙동식물 및 일월도수•절기의 추배 등에 대해 교정한 바가 많음. 저서:『同窩集』•『讀易管窺』. ▣참고:「墓碣銘」(李晩燾 撰) ?집필:이원걸

류영휴(柳榮休):1796(정조 20, 병진)∼1872(고종 9, 임신). 본관 全州. 자는 英輔. 挺輝의 현손. 東源의 子. 음직으로 護軍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치교(柳致敎):1800(정조 24, 경신)∼1841(헌종 7, 신축). 본관 全州. 자는 仲敎. 호는 嘉齋. 생부는 鼎文. 계부는 起文. 1828년 사마시 합격. 흉년이 들어 기아에 허덕이는 이웃의 굶주림을 덜어주기 위해 재산을 흩어 구휼함. ▣참고:『司馬榜目』 ?집필:이원걸

류치호(柳致皜):1800(정조 24, 경신)∼1862(철종 13, 임술). 본관 全州. 자는 濯叟. 호는 東林. 台齊의 현손. 後文의 子. 柳致明의 문인. 1845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태릉참봉에 제수됨. 저서:『東林集』. ▣참고:「墓碣銘」(金興洛 撰) ?집필:이원걸

류치윤(柳致潤):1805(순조 5, 을축)∼1880(고종 17, 경진). 본관 全州. 자는 必身. 낙의 종손. 少文의 子. 1852년 향시 합격. 음직으로 선공감역에 제수됨. 강릉현령•하양현감•금산군수 역임. 어진 목민관으로 소임을 다한 미담이 전해짐. ▣참고:문중자료(류희걸)?집필:이원걸

류준문(柳駿文):1805(순조 5, 을축)∼1885(고종 22, 을유). 본관 全州. 자는 周瑞. 守潛의 7대손. 法休의 子. 壽職:通政大夫.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정수(柳廷燧):1805(순조 5, 을축)∼1888(고종 25, 무자). 본관 全州. 자는 敬鑽. 箕休의 子. 壽職:護軍.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치호(柳致好):1808(순조 8, 무진)∼1870(고종 7, 경오). 본관 全州. 자는 季叔. 호는 孔庵. 鼎文의 子. 1852년 문과 급제.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홍문관부수찬•수찬•교리 등을 거쳐 사헌부장령을 역임. 이어 통정계에 올라 형조참의를 역임함. ▣참고:「墓碣銘」(李晩慤 撰) ?집필:이원걸

류도영(柳道永):1808(순조 8, 무진)∼1891(고종 28, 신묘). 본관 全州. 자는 士凝. 興時의 7대손. 華鎭의 子. 壽職:同知中樞府事.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점문(柳漸文):1810(순조 10, 경오)∼1837(헌종 9, 정유). 본관 全州. 자는 士鴻. 雲休의 子. 蔭職:護軍.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치엄(柳致儼):1810(순조 10, 경오)∼1876(고종 13, 병자). 본관 全州. 자는 仲思. 號는 萬山. 道源의 증손. 魯文의 子. 柳致明의 문인. 『性理眞像』 2책을 엮었으며 퇴계의 문집이 너무 방대하여 요령을 얻기 어려움으로 근사편목을 모방하여 『溪訓輯要』를 엮음. 종제 致游와 더불어 스승 致明의 유고를 수집해서 3차나 필사하여 문집을 완성함. 저서:『萬山集』. ▣참고:「行狀」(李敦禹 撰) ?집필:이원걸

류치유(柳致游):1811(순조 11, 신미)∼1871(고종 8, 신미). 본관 全州. 자는 小游. 호는 櫟菴. 鼎文의 子. 柳致明의 문인. 1844년 사마시 합격. 평생 도학에 전심하였으며 문장에도 능함. 후진을 성심으로 지도하여 성취한 선비가 많았음. 저서:『櫟菴集』. ▣참고:「行狀」(柳淵楫 撰) ?집필:이원걸

류긍호(柳肯鎬):1819(순조 19, 기묘)∼1876(고종 13, 병자). 본관 全州. 자는 乃構. 호는 博羅. 致敎의 長子. 1866년 불란서가 전함 5척을 몰고 강화도를 습격해 왔을 때 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선공감가감역으로 제수했다가 총융청 참모로 차출함. 이듬해 전공에 대한 특진으로 군자감봉사에 임명되어 직장•판관 등을 거쳐 주부에 오름. 1874년 신창현감이 되어 치적을 남김. ▣참고:「墓誌銘」(柳淵楫 撰) ?집필:이원걸

류장호(柳章鎬:1823(순조 23, 계미)∼1870(고종 7, 경오). 본관 全州. 자는 伯憲. 致潤의 장남. 1861년 문과 급제. 副正字를 역임했으나 일찍 죽음. ▣참고:「墓碣銘」(柳淵楫 撰) ?집필:이원걸

류치덕(柳致德):1823(순조 23, 계미)∼1881(고종 18, 신사). 본관 全州. 자는 道峻. 호는 近庵. 渾文의 子. 伯祖인 柳健休에게 수학. 柳致明의 문인. 과거에 뜻을 끊고 심경•근사록•주퇴서를 탐독하여 理氣四七說과 太極動靜에 대해 탁견을 지님. 저서:『典禮考證』•『林廬問答』•『近庵集』. ▣참고:「墓碣銘」(李晩煃 撰) ?집필:이원걸

류기호(柳基鎬):1823(순조 23, 계미)∼1886(고종 23, 병술). 본관 全州. 자는 鞏甫. 호는 石隱. 鼎文의 주손. 致孝의 長子. 柳致明의 문인. 예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도내의 丈席으로 사림에 추중됨. 호계서원 중건에 지대한 역할을 감당함.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훼철할 당시 임천서원의 존속을 위해 영남 소수로 활약한 연유로 인해 1870년 강원도 금화로 유배됨. 이후 평북 선천으로 이배되어 謫所에서 생애를 마침. 저서:『石隱遺稿』•『客日隨錄』.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윤문(柳潤文):1824(순조 24, 갑신)∼1893(고종 30, 계사). 본관 全州. 자는 叔溫. 호는 鵝山. 申休의 子. 외조는 靑松 沈休邦. 과거를 포기하고 빈민구제와 질병구완 등을 몸소 실천함.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으로 여생을 마침. ▣참고:「墓碣銘」(柳淵楫 撰) ?집필:이원걸

류건흠(柳健欽):1825(순조 25, 을유)∼1891(고종 28, 신묘). 본관 全州. 자는 剛仲. 호는 廣林. 致復의 子. 외조는 義城 金鎭綱. 柳致明의 문인. 柳致明에게 존심양성의 방안과 실천 대의를 왕복 서찰로 질의하며 심성 수양에 전념함. ▣참고:「遺事」(柳淵根 撰) ?집필:이원걸

류지호(柳止鎬):1825(순조 25, 을유)∼1904(광무 8, 갑진). 본관 全州. 자는 元佐. 호는 洗山. 致明의 子. 1873년에 蔭補로 假監役에 제수됨. 掌樂院主簿•司憲府監察•靖陵令•宗廟署令 등 역임. 이어 新昌縣監•杆城縣監•蓮川郡守•長耆縣監•敦寧都正을 역임. 1902년에는 優老의 典으로 二品에 올라 中樞院官勅任官을 역임. 저서:『洗山集』. ▣참고:「墓碣銘」(郭鋾 撰) ?집필:이원걸

류정호(柳廷鎬):1837(헌종 3, 정유)∼1907(융희 1, 정미). 본관 全州. 자는 元直. 호는拙修. 致儉의 子. 외조는 義城 金逵漸. 柳致明의 문인.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심성 수양에 힘을 씀. ▣참고:「墓誌銘」(柳必永 撰) ?집필:이원걸

류치복(柳致福):1840(헌종 6, 경자)∼1875(고종 12, 을해). 본관 全州. 자는 箕五. 璟文의 子. 蔭職으로 主簿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성호(柳星鎬):1840(헌종 6, 경자)∼1886(고종 23, 병술). 본관 全州. 자는 叔景. 致潤의 子. 1864년 무과 급제. 오위장 역임.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필영(柳必永):1842(헌종 8, 임인)∼1924. 본관 全州. 자는 景達. 호는 西坡. 定鎭의 子. 柳致明의 문인. 일찍이 경학과 문장으로 유림에 중망을 받음. 일제가 「韓國이 獨立을 願하지 않는다」는 문서를 조작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케 한 사실이 탄로나자, 1919년 전국의 137명 유림 명의로 巴里長書署名이 이루어져 일제는 이를 못마땅이 여기고 관계 서명인을 검거했음. 이때 체포되어 3개월 옥고를 치르다가 집행유예 3년으로 방면됨. 枕山亭을 지어 후진강학에 힘씀. 저서:『西坡集』. ▣참고:「墓碣銘」(李相圭 撰) ?집필:이원걸

류연갑(柳淵甲):1850(철종 1, 경술)∼1920. 본관 全州. 자는 景禹. 호는 瓠石. 協同學校 校長 역임. 風儀整齊 하고 內行純修하였음. ▣참고:문중자료(류창훈) ?집필:이원걸

류연즙(柳淵楫):1853(철종 4, 계축)∼1933. 본관 全州. 자는 而用. 호는 汎庵. 章鎬의 子. 외조는 眞城 李彙正. 유교경전에 능통하여 사림의 중망을 받음. 서원철폐령이 내리자 상경하여 비분강개함. 저서:『汎庵集』 ▣참고:「墓碣銘」(權秉燮 撰) ?집필:이원걸

류치우(柳致遇):1855(철종 6, 을묘)∼1924. 본관 全州. 자는 呂卿. 호는 雅林. 損文의 次子. 金興洛의 문인. 풍도가 있고 문사가 뛰어남. 저서:『雅林集』.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봉희(柳鳳熙):1855(철종 6, 을묘)∼1927. 본관 全州. 자는 德允. 호는 石南. 元植의 長子. 文行이 있었음. 유고가 있음.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덕영(柳德永):1856(철종 7, 병진)∼1908(융희 2, 무신). 본관 全州. 자는 明瑞. 호는 昔齋. 병신 의병이 일어나자 여러 동지를 규합하여 군자금과 군량미 모집에 성과를 거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柳時淵 주재로 모여 화총 10여 자루를 구입하고 다음날 임동주재소를 습격하여 헌병 2명을 체포하려던 중 일군토벌대에 체포되어 총살 당함. ▣참고:『安東版獨立史』 ?집필:이원걸

류창호(柳昌鎬):1856(철종 7, 병진)∼1928. 본관 全州. 자는 瀷如. 致億의 독자. 음직으로 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연명(柳淵明):1856(철종 7, 병진)∼?. 본관 全州. 자는 砥如. 錫斗의 6대손. 中鎭의 長子. 蔭仕로 참봉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연성(柳淵成):1857(철종 8, 정사)∼1919. 본관 全州. 1919년 3월 임동 장날 독립만세운동을 사전에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동하여 시위운동을 지휘하다가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옥사. 추서:건국포장(1977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연근(柳淵根):1857(철종 8, 정사)∼1933. 본관 全州. 자는 聖燁. 호는 水西. 7세부터 族父에게 본격적으로 학문을 익힘. 성장하여 金興洛 문하에서 유학공부를 하고 향리에서 유림으로 활동. 저서:『水西集』. ▣참고:「墓碣銘」(李家源 撰) ?집필:이원걸

류창식(柳昌植):1858(철종 9, 무오)∼1912. 본관 全州. 1896년 안동향교에서 권세연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그는 안동부를 점령하는데 선두에서 활약. 그러나 다시 김석중이 관군으로 안동부를 점령하여 체포되어 안동경찰서에서 50여일간의 옥고를 치름. 추서:건국포장(1995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광호(柳廣鎬):1859(철종 10, 기미)∼1927. 본관 全州. 자는 居叟. 호는 臥松. 致麟의 子. 외조는 載寧 李相聖. 嶠南 사림의 巨儒로 칭송을 받음. 초대 국무령 이상룡 선생의 독립 운동 자금을 조달하고자 전 재산을 탕진하고 일본 경찰을 피해 만주로 망명함. 저서:『臥松文集』. ▣참고:「墓碣銘」(李家源 撰) ?집필:이원걸

류 완(柳琓):1860(철종 11, 경신)∼1903(광무 7, 계묘). 본관 全州. 자는 完玉. 達鎬의 長子. 1890년 무과 급제. 安東營將을 역임.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연구(柳淵龜):1861(철종 12, 신유)∼1938. 본관 全州. 자는 應夏. 廷鎬의 子. 외조는 英陽 南皐. 1890년 金興洛과 함께 향음례를 시행함.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항거. 구금되었다가 풀려남. 1918년 고산서원에서 李象靖의 상소문을 강론함. 1928년 曺兢燮과 『定齋集』을 교정함. 1931년 玉山書院에서 『晦齋集』을 교정함. 저서:『完山世蹟』•『常變要解』. ▣참고:「墓碣銘」(權相圭 撰) ?집필:이원걸

류수덕(柳隧德):1862(철종 13, 임술)∼1943. 본관 全州. 자는 明漆. 호는 退學堂. 挺揮의 6대손. 昌文의 長子. 蔭仕로 敎官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종식(柳琮植):1863(철종 14, 계해)∼1935. 본관 全州. 1919년 3월 21일 임동 책거리 장날을 기하여 전개된 만세시위에서 문서 연락책이 되어 임동·임북 지구 각동 유지에게 독립선언문•격문 등을 배부함. 당일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일경에게 체포되어 3년형을 받은후 1년 몇 개월 동안 옥고를 겪음. ▣참고:「判決文」 ?집필:이원걸

류인호(柳仁鎬):1864(고종 1, 갑자)∼1930. 본관 全州. 자는 周永. 漢休의 증손. 致憲의 長子. 蔭仕로 참봉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인식(柳寅植):1865(고종 2, 을축)∼1928. 본관 全州. 자는 聖來. 호는 東山. 신교육을 받아들여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킴. 金道和를 師事. 29세에 신채호와 교제하면서 개화 서적을 읽기 시작함.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대한협회를 발기하고 안동에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함. 1907년 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12년 만주로 망명. 1920년 李商在·兪鎭泰 등과 朝鮮敎育協會의 주동적 발기인이 되어 활동함. 1927년 新幹會 安東支會를 설립하고 지회장에 선출됨. 신분차별을 타파하여 인권을 평등화하고 상공업을 발달시켜 가난을 벗어나야 함을 강조함. 추서:건국훈장 국민장(1982년). 저서:『東山文稿』•『大東史』•『大東詩史』.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정희(柳鼎熙):1867(고종 4, 정묘)∼1933. 본관 全州. 자는 耳亨. 호는 鮮原. 復起의 13대손. 東植의 長子.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상복과 죽립을 쓰고 칩거. 민족적 지조를 지킴. 1912년 일왕이 사망하자 상복착용을 단호히 거절함. 일제의 식민지통치정책을 정면으로 반대하며 항일의식을 고취시킴. 묘지화장장이장 법령을 공포하자 부당성을 문서로 작성하여 배포. 조선총독부를 비판하는 서신을 안동경찰서에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금고 5월형을 받음. 추서:건국포장(1995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시연(柳時淵):1873(고종 10, 계유)∼1914. 본관 全州. 正鎬의 子. 1906년 2차 의병전쟁 때 경주에서 총대장으로 추대되어 진보·영덕 등지에서 전투를 벌임. 1907년 친일파인 박두일을 사살하고 이어서 영양·청송·안동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쳐 적에게 타격을 주어 큰 전과를 올림. 1911년 만주로 탈출하여 이상희•김동삼•안창호와 같이 독립운동을 전개함. 군사훈련을 위한 무기 구입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로 잡입했다가 밀고로 체포되어 1914년 교수형을 받고 순국함. 추서:건국훈장 국민장(1962). ▣참고:『獨立運動史』 ?집필:이원걸

류동걸(柳東杰):1874(고종 11, 갑술)∼1935. 본관 全州. 자는 聖興•慕庵. 淵甲의 長子. 1891년 진사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이원걸

류선호(柳宣鎬):1874(고종 11, 갑술)∼1950. 본관 全州. 자는 仁甫. 호는 追慕齋. 이상룡과 신돌석을 도와 항일 운동을 함. 全羅道 觀察府主事官을 역임. 盤隱亭을 세워 학문을 강론함. 저서:『追慕齋酬唱草稿』. ▣참고:『獨立運動史』 ?집필:이원걸

류연욱(柳淵郁):1877(고종 14, 정축)∼1947. 본관 全州. 자는 厚卿. 昌鎬의 長子. 음사로 承旨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삼호(柳三鎬):1878(고종 15, 무인)∼1909(융희 3, 기유). 본관 全州. 자는 興吉. 호는 逸山. 致億의 長子. 電話主事를 제수받음. 叙判任官 역임.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중호(柳仲鎬):1879(고종 16, 기묘)∼?. 본관 全州. 자는 道賢. 揮의 7대손. 음사로 군수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동태(柳東泰):1880(고종 17, 경진)∼1923. 본관 全州. 자는 穉登. 建鎬의 손자. 淵用의 長子. 왜정 치하에서 협동학교장인 柳寅植과 金東三 등이 만주로 떠난 뒤에 학교 교무를 맡아 항일교육을 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성흠(柳聖欽):1881(고종 18, 신사)∼1955. 본관 全州. 자는 性若. 호는 霽圃. 致運의 長子. 중추원 議官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상선(柳相善):1884(고종 21, 갑신)∼1944. 본관 全州. 1919년 3월 임동 장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시위를 계속하다가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름. 추서:대통령 표창(1977년). ▣참고:『獨立運動史』 ?집필:이원걸

류동환(柳東煥):1885(고종 22, 을유)∼1974. 본관 全州. 자는 絅晦. 호는 立軒.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 건물을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이튿날 체포됨.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함. 추서:대통령 표창(1977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교희(柳敎熙):1886(고종 23, 병술)∼1965. 본관 全州. 자는 聖穆.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주동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6년간 복역함. 추서:건국포장(1980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동수(柳東洙):1887(고종 24, 정해)∼1978. 본관 全州.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동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6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추서:건국포장(1982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기영(柳璣永):1888(고종 25, 무자)∼?. 본관 全州.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추서:대통령 표창(1977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연복(柳淵福):1890(고종 27, 경인)∼1965. 본관 全州. 자는 成萬. 호는 愼窩. 璋鎬의 子. 중국에 망명한 김영기로부터 상해 임시 정부의 어려운 실정을 듣고 안동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체포됨. 1920년 징역 2년형을 받고 복역. 출옥 후 영덕에서 다시 임시 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1926년 2월 21일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추서:건국포장(1982년). ▣참고:『安東版獨立史』 ?집필:이원걸

류동혁(柳東爀):1891(고종 28, 신묘)∼1920. 본관 全州. 자는 汝尹. 호는 琴愚. 淵珪의 子. 1919년 3월 21일 임동 편항 장날을 이용해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하여 활동중 체포되어 2년형의 선고를 받고 복역중 대구형무소에서 옥사. 추서:대통령 표창(1977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종렬(柳宗烈):1892(고종 29, 임진)∼1954. 본관 全州. 자는 萬甫. 東浩의 長子. 蔭仕로 참봉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주희(柳周熙):1892(고종 29, 임진)∼1965. 본관 全州. 자는 公緝. 호는 一畊. 東杰의 子. 1915∼1919년까지 협동학교 한문교사를 함. 新幹會에 참여하였으며 1937년 金東三이 서울 麻布 刑務所에서 獄死하자 韓龍雲•鄭顯模•李源赫과 함께 장사지냄. 광복후에는 慶北鄕校 理事長 역임. ▣참고:문중자료(류창훈) ?집필:이원걸

류연익(柳淵益):1892(고종 29, 임진)∼?. 본관 全州. 자는 謙汝. 龜鎬의 子. 1919년 3월 22일 임동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활동중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름. 출옥후 시베리아로 건너가 동지들과 항일전투를 하다가 渡滿함. ▣참고:『判決文』 ?집필:이원걸

류연덕(柳淵德):1894(고종 31, 갑오)∼1923. 본관 全州. 대한통의부에서 활동함. 1923년 대한통의부로부터 국내에 진입하라는 명령을 받고 동지들과 흥경현에 모여 각자 국내로 잠입하기로 하였으나 병이 나 흥경현에 남아 있다가 1923년 중국 병사에게 피살•순국. 추서:건국훈장 애국장(1995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후직(柳后稷):1894(고종 31, 갑오)∼1956. 본관 全州. 이명 東鵬. 1919년 3월 18일과 23일의 안동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함. 그후 주동자 검거에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추서:대통령 표창(1977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 림(柳林):1894(고종 31, 갑오)∼1961. 본관 全州. 호는 旦洲. 이명 華永•月波•高尙眞. 頤欽의 子. 1915년 대구에서 부흥회를 조직. 1917년 자강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 특파원으로 활동. 1921년 북경에서 申采浩와 함께 신한청년단에 가담. 임정 헌법 기초위원•건국강령 기초위원으로 활약. 광복후 귀국하여 비상국민회의 부회장에 피선. 1946년에는 독립 노동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됨. 추서:건국훈장 국민장(1962년). ▣참고:『永嘉의 脈』 ?집필:이원걸

류동수(柳東洙):1898(광무 2, 무술)∼1983. 본관 全州. 이명 東旭•晩秀. 자는 始一. 호는 渭南.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이튿날 체포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출옥 후에도 독립군자금을 모으고 후진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함. 추서:대통령 표창(1982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동창(柳東暢):1898(광무 2, 무술)∼1983. 본관 全州.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장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체포됨. 2년형을 받고 복역. 추서:대통령 표창(1977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연술(柳淵述):1898(광무 2, 무술)∼?. 본관 全州. 1925년 10월 사상단체 正光團 결성에 참여하고 조사부를 맡음. 1927년 조선 공산당에 입당. 1928년 신간회안동지회 간사•대표위원 및 정기대회 전형위원 역임. 8월 조선청년총동맹 경북연맹 집행위원. 1930년 신간회 대구지회 서기장 역임. 그해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2월 대구지법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음. 해방 후 1945년 12월 결성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에 안동군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 ▣참고:『韓國社會主義人名辭典』 ?집필:이원걸

류연화(柳淵和):1899(광무 3, 기해)∼?. 본관 全州. 1919년 4월 서울 중앙학교 재학중 3·1운동에 참가. 반일유인물 「자유민보」를 배포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음. 1920년 징역 1년 6월로 감형되어 1921년 2월 출옥. 이후 시대일보사 기자로 활약. 192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 언론기관 프랙션에 배속되어 활동. 1926년 제2차 조공 검거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928년 징역 2년을 선고받음. ▣참고:『韓國社會主義人名辭典』 ?집필:이원걸

류연건(柳淵建):생몰년 미상. 본관 全州. 1925년 길안청년회 혁신총회때 집행위원이 되었고 도산서원 철폐운동 집행위원이 됨. 이 무렵 「朝鮮之光」 안동지국기자단 창립 준비위원•안동청년연맹 간부 및 사상단체인 火星會 간부를 역임. 1929년 신간회 안동지회 서무총무 간사•안동기근구제회 창립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 ▣참고:『韓國社會主義人名辭典』 ?집필:이원걸

류면희(柳冕熙):1906(광무 10, 병오)∼1944. 본관 全州. 1926년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중 융희 황제의 인산일인 6월 10일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다가 체포됨. 이 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및 집행유예 3년형을 받고 복역. 추서:대통령 표창(1963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기만(柳基萬):1907(융희 1, 정미)∼?. 본관 全州. 1924년 안동 예안공립보통학교 졸업. 인쇄업과 제유업에 종사. 그 사이 신간회 안동지회•안동청년동맹 예안지부에 가입. 1931년 7월 예안노동행동대 결성에 참여. 조직훈련부 책임자로 선정됨. 1935년 대구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음. ▣참고:『韓國社會主義人名辭典』 ?집필:이원걸

류광식(柳廣植):1909(융희 3, 기유)∼1943. 본관 全州. 자는 聖居. 호는 羅溪. 기미독립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임동면과 임북면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함. 3월 21일 임동주재소와 사무소를 파괴함. 3월 22일에는 임북 사월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만세를 불렀으며 그후에도 지하운동을 전개함. ▣참고:『羅溪日誌』 ?집필:이원걸

류세희(柳世熙):1909(융희 3, 기유)∼1982. 본관 全州. 東杰의 子. 성품이 단아하고 孝友睦族하였음. 세무서장을 역임.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정기(柳正基):1910(융희 4, 경술)∼1995. 본관 全州. 자는 唯中. 호는 明谷. 轍薰의 長子.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을 졸업. 해방되어 돌아와 대학 교수로서 인재양성에 힘씀. 저서:『東洋思想辭典』•『東洋思想論集』•『四書三經譯解』•『孟子新講』•『啓蒙要傳』•『易經新講』. 번역서:『수류문헌총간』. ▣참고:문중자료(류희걸) ?집필:이원걸

류만희(柳萬熙):1916∼1940. 본관 全州. 1925년 吉林省 磐石縣으로 이주. 1930년 遼寧省 淸原縣 南山城에 정착. 만주사변 후 반일아동단에 가입. 1933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 동북인민혁명군에 입대. 1938년 일본군의 토벌에 대항하여 那爾轟전투•柳樹河전투 등에 참전. 1940년 臨江 곰골에서 변절한 대원에게 사살당함. ▣참고:『韓國社會主義人名辭典』 ?집필:이원걸

류연식(柳淵植):1921∼1949. 본관 全州. 영양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중 공비 토벌 작전에 참여하여 1949년 9월 18일 영양군 청기면에서 전사. ▣참고:『護國戰歿勇士功勳錄』•전쟁기념관 전사자명비. ?집필:이원걸

류덕영(柳德永):1924∼1949. 본관 全州. 조선 경비대 제6연대로 입대하여 제8사단 제10연대에서 복무. 공비 토벌작전에서 강릉지구 38도선 경비임무를 수행하던 중 1949년 7월 3일 전사. ▣참고:『護國戰歿勇士功勳錄』•전쟁기념관 전사자명비. ?집필:이원걸

류시보(柳時保):1925∼?. 본관 全州. 河南省 開封에서 부친 原海와 함께 광복군 지역으로 와서 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하여 활동. 추서:건국포장(1977년).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류기동(柳基東):?∼1924. 본관 全州. 안동협동학교를 졸업. 渡滿하여 西路軍政署에 가입. 1924년 하얼빈에서 일본경찰과 중국 경찰이 연합하여 급습하자 적 10여명을 사살하고 金萬秀•崔炳鎬 동지와 함께 그 자리에서 자폭. ▣참고:『安東版獨立史』 ?집필:이원걸

정열류씨(貞烈柳氏):생몰년 미상. 본관 全州. 致宇의 딸. 眞城 李益敎의 처. 남편이 억울하게 옥화를 당하자, 자기의 목숨을 대신 바치기로 하고 칼로 목찌름•독약을 마심•귀에 기름붓기까지 3차례나 시도하여 실패한 뒤 결국 목매어 자결함. 남편은 특사됨. ▣참고:『寰輿勝覽』 ?집필:이원걸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131C11DB9B0B1338X0
자수(自修)
독곡(獨谷)
시호 문경(文景)
생졸년 1338 (충숙왕복위 7) - 1423 (세종 5)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창녕(昌寧)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성석린(成石璘)에 대하여
1338년(충숙왕 복위 7)∼1423년(세종 5).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아버지는 부원군 여완(汝完)이다.
1357년(공민왕 6)에 과거에 급제, 국자학유(國子學諭)의 벼슬을 받았으며, 승진하여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이제현(李齊賢)이 국사를 편수하면서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그로 하여금 항상 글을 짓게 하였으며, 예문관(藝文館)공봉(供奉), 삼사(三司)도사(都事), 전의시(典儀寺)주부(注簿) 등을 지냈다.
공민왕도 그를 중용하여, 차자방(箚子房: 뒤의 尙瑞院)필도치(必闍赤)로 등용하였으며, 다시 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지인상서(知印尙書)·예부총랑(禮部摠郞) 등을 역임하였는데,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서 외관으로 해주목사가 되었으나, 이내 내직으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삼사좌윤(三司左尹)·밀직사 좌부대언(密直司左副代言)·지신사(知申事)·제학(提學) 등을 지냈다.
1380년(우왕 6) 여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원수(元帥)가 되고 양백연(楊伯淵)이 그의 부장(副將)이 되어 이를 맞아 싸웠다. 여러 장수가 왜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려 하자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여, 여러 장수가 이에 따라 적을 무찔렀다.
그해 가을 양백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그도 함안에 유배되었다. 다시 부름을 받아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지고 바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외직으로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가 되어 주·군에 의창(義倉)의 설치를 건의하자, 조정에서 이를 채택하여 모든 도에서 행하도록 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문하부평리(門下府評理)대사헌이 되었다.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錄券)이 내려지고 창성군충의군(昌成郡忠義君)에 봉하여졌다. 태조가 즉위하자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되었고, 1392년(태조 1) 개성부판사(開城府判事)를 거쳐 한성부판사를 지냈으며, 원종공신이 되어 노비 3인, 토지 30결을 하사받았다.
정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도절제사(都節制使)·평양부윤을 지내고, 내직으로 문하시랑찬성사가 되고, 익대공신(翊戴功臣)의 녹권이 내려지고,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에 올랐다가 곧 좌정승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고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403년(태종 3) 우의정, 1407년에 좌의정을 지냈고, 1411년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1414년 부원군으로 휴직하였다.
1415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다시 부원군으로 물러나서 쉬니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에 태조함흥으로 행차하여 머무니, 태종이 여러 사자를 보냈으나 감히 문안을 전달하지 못하였는데, 성석린태조의 옛 친구로서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 비로소 태조태종이 화합하게 되었다.
그는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초서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쉬는 곳에는 항상 한 나무궤를 놓아두고 앉아 ‘양화(養和)’라고 이름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世宗實錄
文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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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혜왕(忠惠王)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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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헌효(獻孝)/ 충혜(忠惠)
생졸년 1315 (충숙왕 2) - 1344 (충혜왕복위 5)
시대 고려 후기
본관 개성(開城)
활동분야 왕실 > 왕

[관련정보]

[상세내용]

충혜왕(忠惠王)에 대하여
1315년(충숙왕 2)∼1344년(충혜왕 복위 5). 고려 제28대 왕. 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년.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정(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 충숙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이다.
비는 원나라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딸인 덕녕공주(德寧公主: 충목왕의 생모)찬성사 윤계종(尹繼宗)의 딸 희비 윤씨(禧妃尹氏), 평리(評理) 홍탁(洪鐸)의 딸 화비 홍씨(和妃洪氏), 상인(商人) 임신(林信)의 딸 은천옹주(銀川翁主) 임씨(林氏)가 있다.
1328년 세자로 원나라에 갔다가 1330년에 충숙왕의 전위(傳位)를 받고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1332년 원나라에 의하여 전왕인 충숙왕이 복위하였으므로 다시 원나라로 갔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옹립하려는 조적(曺頔) 등이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복위하였다.
그는 본성이 호협방탕하여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후궁만도 1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기거주(起居注) 이담(李湛)의 충고와 전 군부판서(前軍簿判書) 이조년(李兆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방탕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여 유신들과 반목이 심하였다.
그는 관제를 개혁하여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을 다시 지공거(知貢擧)로, 정승을 중찬(中贊), 평리참리(參理)로 고쳤다.
1331년에는 종래의 은병(銀甁) 통용을 금하고 한개가 오종포(五綜布) 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小銀甁)을 통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에게 쌍성(雙城: 지금의 영흥)·여진·요양(遼陽)·심양(瀋陽) 등지에 유입한 고려인의 쇄환(刷還)을 요청하였다.
그해 이학도감(吏學都監)을 설치하였으며, 5도에는 염장도감(鹽場都監)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폐지하였다.
1342년에는 식화(殖貨)에 힘써 의성창(義城倉)·덕천창(德泉倉)·보흥창(寶興倉)의 포 4만8000필을 풀어 시장에 전포를 열게 하였다.
1343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 사용하였고,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이에 원나라에 가 있던 이운(李芸)·기철(奇轍) 등이 왕의 실정과 횡포함을 그곳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림으로써 원나라에 끌려가서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가다가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었다. 시호는 헌효(獻孝)이고, 원나라의 시호는 충혜이며, 능은 영릉(永陵)으로 지금의 개성에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元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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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忠肅王)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DA9C219C655B1294X0
의효(宜孝)
시호 의효(懿孝)/ 충숙(忠肅)
생졸년 1294 (충렬왕 20) - 1339 (충숙왕복위 8)
시대 고려 후기
본관 개성(開城)
활동분야 왕실 > 왕

[관련정보]

[상세내용]

충숙왕(忠肅王)에 대하여
1294년(충렬왕 20)∼1339년(충숙왕 복위 8). 고려 제27대왕. 재위 1313∼1330, 복위 1332∼1339년.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만(卍). 초명은 도(燾), 몽고식 이름은 아자눌특실리(阿刺訥忒失里).
자는 의효(宜孝). 충선왕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몽고인 의비(懿妃;몽고 이름은 也速眞)이다. 비(妃)는 원나라 영왕(營王) 야광티무르(也光帖木兒)의 딸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 원나라 위왕(魏王) 아목가(阿木歌)의 딸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몽고인 경화공주(慶華公主),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 홍규(洪奎)의 딸 명덕태후(明德太后: 德妃) 등 네 명이 있다.
1299년(충렬왕 25)에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졌고, 뒤에 강릉대군에 봉하여졌다. 아버지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1313년에 왕위를 전위(傳位)받아 돌아와서 연경궁(延慶宮)에서 즉위하였다.
1314년 백이정(白頤正)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배워오자,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삼고 또 민지(閔漬)·권부(權溥) 등에게 태조 이래의 실록을 약찬(略撰)하게 하였다.
그리고 강릉도존무사사(江陵道存撫使司)명주(溟州: 지금의 江陵)에서 등주(登州: 지금의 安邊)로 옮겼으며,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양광도, 경상진안도(慶尙晋安道)경상도, 교주도(交州道)회양도(淮陽道)로 고쳤다.
1315년 원나라의 강요로 귀천(貴賤)의 복색(服色)을 정하고, 동당시(東堂試)를 응거시(應擧試)로 고쳤다.
1316년 상왕인 충선왕심양왕(瀋陽王)의 지위를 조카인 세자 고(暠)에게 물려주어 원실의 대우를 받게 되자, 고려의 왕위를 넘보는 등 복잡한 관계를 자아내게 되었다.
1318년 제주민(濟州民) 사용(使用, 또는 士用)·김성(金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검교평리(檢校評理) 송영(宋英)을 보내어 안무(按撫)하게 하였다.
또, 그해 폐단이 많았던 사심관(事審官)을 폐지하였으며, 제폐사목소(除弊事目所)를 설치하였다가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으로 고쳐 권세가가 점령한 전민(田民)을 색출하여 그것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또, 채무에 있어서 그 이자가 원본(元本)에 상당할 때에는 그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안향(安珦)을 문묘에 배향하였으며, 화자거집전민추고도감(火者據執田民推考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즈음 심양왕 는 왕위찬탈의 뜻을 품고 원나라에 무고를 하여 왕이 불려가 그곳에서 5년 동안이나 머물게 하였으며, 또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에 편입시켜 다스려달라고 청원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차츰 정치에 싫증을 느껴 한때 왕위를 심양왕에게 넘겨주려 하다가 한종유(韓宗愈) 등의 반대로 취소하고, 1330년 세자에게 양위하고 원나라에 갔다.
1332년 충혜왕이 황음무도(荒淫無道)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원나라에 의하여 폐위되자 복위되었다. 충숙왕원나라가 지나치게 요구하는 세공을 삭감하게 하고, 공녀(貢女)와 환관의 징발을 중지하도록 청원하는 등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심양왕과의 정권다툼에 시달리고, 원나라에서 5년 동안이나 체류하고 돌아온 뒤에는 조신(朝臣)을 접견하지 않고 정사도 돌보지 아니하였다. 성품은 엄숙하고 의지가 굳고 침착, 총명하며, 속문(屬文)을 잘하고 예서(隷書)를 잘 썼다.
시호는 의효(懿孝), 원나라의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능은 의릉(毅陵: 開城 소재)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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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寓居 舊志 에서 : ...監子孫因居 崔汝達晚六 瀁之孫官至縣監贈參判子孫因居 朴文燦孝子晉之子 官至弘文校理自全州來子孫

 

 

本朝柳規自柳沔以下數世居于此皆顯達新增金四知麗朝 同平章事謚威烈公就礪之五代孫以遺逸拜正言自彦陽
 來子孫因居 金沖漢國初以前朝判書來寓此土子孫因   居大著 沈澮官至領議政靑松府院君謚恭肅卽
昭憲王后之弟始寓此子孫因居 趙緯韓察訪楊廷之子號 素翁文章擅代村局冠世文科官至知事 趙纘韓緯韓之
 弟號玄洲文章材局與其兄竝稱文科官至左承旨 李德 悅領議政浚慶之子文科官至都承旨子孫因居大著 金
 大壯副提學駿孫之子官至縣監子孫因居  崔汝達晚六 瀁之孫官至縣監贈參判子孫因居

 朴文燦孝子晉之子 官至弘文校理自全州來子孫因居 洪紹興唐城君彬之 六代孫寒暄堂門弟也以學行被選拜掌令戌午禍起寒暄
 堂謪順天紹興從之及先生卒以舊庄在南原黑城來家爲 後 贈禮曹判書子孫因居 卜承利沔川人高麗開國功臣
 知謙之後翰林俉之子兄承元承亨弟承貞俱擢文科承利 獨擢虎榜官至濟州牧使以其外祖判書太應辰農塵在本
 府時羅山故來居 金璣齊肅公秵之玄孫官至縣監 贈 右參贊 權寅 贈領議政號七峯常之子以生員官至縣
 監始居眞田 崔秀雄朔寧人領議政號太虛亭恒之孫參 議永潾之子 贈左通禮始居屯德 李聖任郡守仁弘之
 子登武科官至郡守 李千壽判尹伯良之玄孫官至郡守 自廣州來

 

 

 

원서명 騎牛先生文集
현대어서명 기우선생문집
청구기호 奎 12045
편저자(한자) 李行(高麗) 著  판본사항 木版本 간행지 [刊地未詳] 책권수 3卷 1冊(59張)
편저자(한글) 이행(고려) 저 간행연도 [高宗9年(1872)] 간행자 [刊者未詳] 책크기 31.5×20.5cm
匡郭 四周雙邊, 半葉匡郭:20.5×15.7cm, 有界, 10行 19字 版心 上下花紋魚尾 표기문자
表紙,版心,卷頭書名 表紙書名:騎牛集
序,跋,卷首,卷末 序:高宗九年壬申(1872)許傅, 跋:姜蘭馨
表題紙,內題紙
藏書記,內賜記
刊記
자료소개 李行(1352-1432)의 遺詩文을 추려 모은 것
목차 卷1:詩(題金溝鳳頭山, 金城東軒, 扶安聚遠樓, 眞寶鴨脚臺, 次伊川客館韻, 羅州碧梧軒, 屛巖聯句, 次朴淸道-晉-完山人號竹亭-廬墓韻-二首, 次李孝靖公-貞幹-慶壽韻得堂字, 淸河縣, 高敞縣, 瑞興縣, 平海越松亭, 偶題, 題成桑谷-石珚-衛生堂, 次成獨谷-石璘-韻, 兎山縣, 茂長縣, 關西謾詠-遠接使時, 輓曹兵使-信忠), 諫添設官職疏(5), 田制疏(6), 正憲大夫檢校參贊議政府事朴惇之墓誌-誄(8), 卷2(附錄):遺事摭錄(1), 九貞忠錄(8), 圃隱善友錄(9), 杜門洞七十二賢錄(9), 英廟朝杜門洞碑表(15), 杜門洞賜祭文(16), 不朝峴言志錄(16), 英廟朝不朝峴聯句(18), 不朝峴碑陰記(19), 諸賢唱酬(20, 送李修撰覲省行(權近), 中庵所畵李周道騎牛圖, 次李騎牛子韻-四首, 春夜與金翼之觀李騎牛子關東記行, 次韻贈騎牛道人, 西原雷雨告警題一絶, 騎牛子林亭-成石璘, 騎牛子賦二首用其意亦作二首, 騎牛子詩盛稱朝廷之美幷及鄕曲之私老生忘其鄙拙作京城樂鄕曲樂二首以發大笑, 復用來云寄呈騎牛子, 呈騎牛盤石, 騎牛子以菊花酒一缸紅枾一榼來惠卽書此答之, 騎牛子以留後賀誕日來京作詩招之, 有懷看花諸君子寄呈騎牛子, 偶讀常建閒齋臥病詩心與境會三復吟已仍用其韻寄呈騎牛子, 三復來詩灑沉疴去體而心上鄙吝又復消盡了也詠歎之餘復和一首奉呈騎牛先生, 晨起偶誦蘇州閒齋對雨詩仍用其韻寄呈騎牛子兼問起居, 聞騎牛子因督種瓜再負山行之約戱書俚言寄呈, 訪騎牛子李先生不遇, 病中賦阮郞歸寄呈騎牛子, 曝暄簷下吟成一絶寄呈騎牛子, 次權可遠送李翰林歸覲-鄭道傳, 次權可遠和李騎牛子-成石珚, 題騎牛子月下騎牛圖, 上騎牛子-柳方善, 戱贈騎牛子, 題羅州碧梧軒-成任, 次李大提學留別韻-李原), 騎牛說(28), 白巖居士贊(29), 卷3(附錄):行狀(1), 栢谷祠奉安文(5), 常享祝文(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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