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동춘당 송준길

동춘당(同春堂) 송공(宋公) 송준길 묘지(墓誌)

아베베1 2011. 8. 3. 13:15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의 운무의 모습니다  

 

동춘당 선생은 은진이다 사계 김장생의 문화생이시다 (본관 은진 우암과, 동춘당)은 해동18현을 두분이나 배출하신 집안이다  

 

송자대전 제182권

 묘지명(墓誌銘)
동춘당(同春堂) 송공(宋公) 묘지(墓誌)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임자년(1672, 현종13) 12월 2일 자(字)가 명보(明甫)인 동춘 선생(同春先生) 송공(宋公) 휘(諱) 준길(浚吉)이 회덕현(懷德縣)의 시골집에서 졸하였다. 공의 치명(治命 유언(遺言)과 같은 뜻)이,
“명장(銘狀)이나 뇌문(誄文) 등을 구하지 말고 다만 작은 표석(表石)에 성명(姓名)이나 새겨 두라.”
하였으므로 그 손자 병문(炳文)ㆍ병하(炳夏)ㆍ병원(炳遠)ㆍ병익(炳翼) 등이 감히 어기지 못하여 비록 문인(門人)이나 지구(知舊)들이 말하여도 모두 듣지 않았다. 시열(時烈)이 이르기를,
“공의 도덕(道德)과 사실(事實)은 이미 사람의 귀와 눈에 익어 있으니 앞으로 오래될수록 더욱 나타날 것이고 또 사관(史官)이 적어 두었으며, 나도 일찍이 유사(遺事) 한 통을 만들어 그 작고 큰일을 기록해 두었으니, 본디 금석(金石)에 새기려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른바 유지(幽誌)란 것은 주 부자(朱夫子 주희(朱熹))가 일찍이 ‘능곡(陵谷)이 변천(變遷)하면 이 지(誌)가 먼저 나타날 것이다.’ 하였다. 아, 공자(孔子)의 무덤도 사수(泗水)에 가까이 있었으니, 이를 한없이 유전하기를 도모하려면 마땅히 묘지를 새겨 두어야 한다. 묘지가 있고서 능곡의 변천이 없는 것은 괜찮지만 불행히도 능곡(陵谷)이 변천하여 무덤에 이상이 있을 경우에 묘표마저 나타나지 않게 된다면 나는 백대(百代) 이후에 그 책임을 져야 할 자가 생기게 될까 염려하는 바이다.”
하였더니, 병문(炳文) 등이 울며 말하기를,
“감히 명(命)하는 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마침 대례(大禮)를 망녕되이 논의하다 여토(癘土 나쁜 지방)에 귀양 가서 형벌을 기다리고 있는데 병문(炳文) 등이 그 일을 내게 부탁하므로 나는 감히 만번 죽을죄를 무릅쓰고 서술한다.
공은 은진인(恩津人)이다. 동방(東方)의 송씨(宋氏)는 휘 유익(惟翊)ㆍ천익(天翊)에서 시작되는데 유익(惟翊)은 여산(礪山)이 관향(貫鄕)이고 천익(天翊)은 은진(恩津)이다. 고려에 판원사(判院事) 휘 대원(大原)이 있었고 이로부터 성대한 세대의 기록이 있다.
회덕(懷德)으로 온 자는 집단(執端) 휘 명의(明誼)이고 그 손자는 쌍청당(雙淸堂) 휘 유(愉)이고 그 현손(玄孫) 휘 세영(世英)이 군수(郡守) 휘 응서(應瑞)를 낳았고 이분이 영천 군수(榮川郡守) 휘 이창(爾昌)을 낳았다. 영천공(榮川公)이 첨추(僉樞) 김은휘(金殷輝)의 딸에게 장가들어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병오년(1606, 선조39) 12월 28일에 공을 한양(漢陽) 우사(寓舍)에서 낳았는데 이웃집의 한 관인(官人)이 와서 축하하기를,
“공이 얻은 아이는 반드시 귀인(貴人)이 될 것이다. 지난밤 꿈에 한 사람이 출산(出産)할 때의 도구를 가지고 말하기를 ‘나는 천인(天人)인데 이것을 송씨 집에 줄 것이다.’고 했다.”
하였다. 이때 영천공(榮川公)의 나이 이미 46인데 아들이 없다가 이렇게 되니 종족과 이웃이 서로 경하하기를,
“공이 늦게서야 득남(得男)하고 또 이상한 일이 이와 같으니 어찌 적선(積善)한 보답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지각(知覺)이 있게 되자 어른의 말씀을 공경하며 믿고 어른을 보면 반드시 용모를 단정히 하여 꿇어앉았다. 영천공(榮川公)이 일찍이 방과 마루를 청결히 하고 공(公)을 손님의 자리에 앉히고 마주하니 공은 곧 움츠리고 불안해 하며 피하였다. 차츰 자라자 글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어른이 어쩌다 일이 있어 일과를 빠뜨리면 공이 반드시 요청하였고 비록 밤이라도 배우지 않으면 자리에 들지 않았다. 또 글씨 쓰기를 좋아하였는데 열 살도 못 되어 글씨를 잘 쓰는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이 보고 말하기를,
“네가 이미 나보다 낫다.”
하였다. 이웃 아이와 사귀면서 반드시 서찰로 주고받았는데 글과 글씨가 모두 격에 맞으니 사람들이 더러 가져다 구경하였다.
신유년에 김 부인(金夫人)이 돌아가니 영천공(榮川公)은 그 파리하고 약한 것이 마음에 걸려 음식과 거처의 간호를 평소보다 배로 하였고 그 정문(情文 문질(文質)을 말함)도 볼 만한 것이 있었다. 상을 마치고는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선생을 찾아가 《소학(小學)》과 《가례(家禮)》 등의 책을 배웠다.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갑자년(1624, 인조2)에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 정묘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상(喪) 치르기를 한결같이 의문(儀文)대로 하고 조금이라도 의문 됨이 있으면 반드시 사문(師門)에 질문하니 문원공(文元公)이 기뻐하며 답해 주고,
“이 사람은 앞으로 예가(禮家)의 종장(宗匠)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계해년에 공이 문숙공(文肅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집안에 장가들었는데, 문숙공 역시 학문을 크게 이룰 것을 기대하고 항상 공경히 대하였는데 이때에 조문을 와서 서로 상례(喪禮)를 자세히 논란하였다.
숭정(崇禎) 경오년(1630, 인조8)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으니 문원공(文元公)은 그 취지를 가상히 여기었는데, 문숙공이 나아가기를 권한다는 말을 듣고 서신으로 책망하기를,
“송모(宋某)는 학문에 뜻이 있어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으니 그 뜻이 매우 훌륭한데, 공은 그의 뜻을 낮추려 하니 아마도 남의 자식을 해치는 데 가깝지 않겠는가.”
하니, 문숙공이 부끄러워 사례하는 말을 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학문에 더욱 몰두하여 두 분의 문하에 왕래하니 나날이 진보되었다. 신미년에 문원공(文元公)이 졸하니 공은 인하여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스승으로 삼았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김 선생 부자(父子)의 문하에 종유(從遊)한 지 오래되었는데 망녕된 말일지 모르나 규모가 크기는 노선생(老先生 김장생을 말함)만 한 이가 없고 조리가 정밀(精密)하기는 소선생(少先生 김집을 말함)만 한 이가 없다.”
하였는데, 논의하는 자들이 잘 지적한 말이라 하였다. 임신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니 공은 말하기를,
“번번이 제명(除命)을 사양하다가는 물러남을 구하는 것이 승진을 얻으려 한다는 혐의가 생길까 걱정된다.”
하고, 억지로 직위에 나아갔다. 계유년에 문숙공(文肅公)이 졸(卒)하니 즉시 사직하고 돌아가 장례(葬禮)에 참석하고 사제(師弟)의 복(服)으로 상(喪)을 입었다.
병자년에 상이 인재(人才)를 찾아 맞아들이니 대신(大臣) 이하 공을 추천하는 이가 많았고 중신(重臣)이 차자(箚子)를 올려 그 학행(學行)의 실상을 열거하여 논의하니, 상이 특별히 예산 현감(禮山縣監)에 제수하였으나 공은 받지 아니하고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해 겨울에 난리를 피하여 안음(安陰)에 갔는데 그곳의 산 높고 물 맑음을 사랑하여 1년을 살다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오니 학도가 나날이 많아졌다. 이때 대란(大亂)을 겪은 지 얼마 안 되고 융로(戎虜 청(淸) 나라를 가리킴)가 참람하게 황제(皇帝)로 호칭하니 현사 대부(賢士大夫)가 많이 강호(江湖) 생활을 하면서 날마다 공의 집에 찾아와 질문하고 도(道)를 강론하였다.
계미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이로부터 소명(召命)이 자주 있었다. 을유년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훙(薨)하였는데 공이 마침 소명(召命)을 받고 글을 올려 사양하면서 인하여 원손(元孫)을 속히 책봉하여 인망(人望)을 안정시키를 청하였고 겸하여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을 불러 세손의 교양(敎養)과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기라고 아뢰었으나, 상은 이때 이미 효종대왕(孝宗大王)에게 뜻을 두었으므로 회답하지 아니하고 미안해 하는 뜻을 보였다. 백강(白江) 상공(相公) 이경여(李敬輿)의 뜻이 공과 같았는데 먼 곳으로 귀양 가게 되니 사람들은 더욱 공을 위하여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그래도 태연하였다. 이로부터 인조조(仁祖朝)가 끝나도록 폐치(廢置)되었는데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이 일찍이 공을 위하여 그 충성스럽고 곧음을 송변(訟辨)하였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다.
기축년에 효종대왕이 즉위하니 사람들은 ‘화(禍)를 장차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으나 상은 맨 먼저 별도로 타이르며 공을 부르니, 경외(京外)가 놀라지 아니함이 없었고 하례하기를,
“이는 백왕(百王)에 으뜸가는 훌륭한 일이니 국가의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공이 드디어 배명(拜命)하니, 연이어 진선(進善)ㆍ장령(掌令)에 제수하고 특별히 월름(月廩)을 하사하며 집의(執義)에 제배하니 공이 은권(恩眷)에 감동하여 스스로 생각하기를,
“새 임금께서 크게 나라를 잘 다스릴 의사가 있으셔서 사류(士流)를 불러들이니 만약 이 시기에 심력(心力)을 다하여 성덕(聖德)을 돕지 아니하고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세월이 흘러 이 좋은 기회를 저버린다면 어찌 천 년의 큰 한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사유(四維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가 시행되지 않으면 국가를 운영할 수 없는데 지난번 권신(權臣)이 세력을 잡고 조정을 어지럽혀 선비들이 거기에 붙은 자가 많으니 만약에 격양(激揚)시키지 않는다면 끝내 맑아질 날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동료(同僚)들과 상의하여 김자점(金自點)과 거기에 붙은 무리를 논핵하여 귀양 보내기를 청하였다.
체직되었다가 다시 임명되어 명을 받아 능묘(陵墓)를 봉축(封築)하고 예에 따라 통정(通政)에 승직되니 대간(臺諫)에서,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으로 개정하고 경연관(經筵官)을 겸임하여 강론(講論)에 출입하게 하라고 청하니 윤허하고, 또 옷감ㆍ모엄(冒掩)ㆍ말을 하사하였다. 상의 뜻에 답하여 상소(上疏)하고, 또 병자호란 때 행실을 잃은 부녀(婦女)들의 남편들로 하여금 이혼하고 다시 장가드는 것을 허락하기를 청하였다.
이때 마침 주상이 《중용(中庸)》을 강(講)하는데 공이 개석(開析)함이 심오(深奧)하였고 인하여 규풍(規風 비유하여 간함)하니 주상은 하나하나 모두 귀를 기울여 들었다. 함께 입시(入侍)한 제공(諸公)들은 물러나면 반드시 침이 마르도록 탄상하기를,
“문의(文義)는 본디 그의 본업(本業)이거니와 어쩌면 조정의 의식에도 익숙하기가 이와 같은가.”
하였다.
경인년 1월에 휴가를 얻어 남쪽으로 돌아왔다. 대개 소명에 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제배(除拜)하고 하사함이 많았으나 공은 모두 굳이 사양하고 부득이한 다음에야 받아들였다.
이때 김자점(金自點) 등이 공을 원망하여 노인(虜人 청(淸) 나라 사람)에게 참소하여 죄를 얽어서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에 주둔하고 일곱 번이나 연속으로 사자(使者)가 와서 위협하니 앞으로의 사태를 예측할 수 없었으나 상이 직접 담당하는 바람에 마침내 풀리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사기(事機)는 또 크게 변하였다. 공이 돌아오자 상은 공의 계옥(啓沃)의 도움을 생각하여 소명하는 글을 연속으로 내리고 때로는 간절한 내용의 별유(別諭)를 내렸으며 또 미두(米豆)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을미년에 통정(通政)에 올라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와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임명했는데 상은 반드시 공을 올라오게 하려고 4개월이 지난 다음에야 참의(參議)를 갈아 주었다. 이보다 앞서 인조대왕이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의 시호)을 위하여 특별히 시강원 찬선(侍講院贊善)을 두었는데 이때에 공에게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제수하면서 이 직을 겸하게 하고 별유(別諭)로 불러 가마를 타라는 특명을 내렸다. 공은 상의 뜻이 간절함을 알고 정유년 7월에 마침내 서울로 들어갔다. 상은 공이 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즉시 접견하고 술을 하사하였으며 세자도 술과 음식으로 위로하였다. 세자는 이로부터 학문에 매우 부지런하니 상은 마주 대하여 이르기를,
“세자의 학문이 진취됨은 찬선(贊善)의 공이다.”
하였고, 액궁인(掖宮人)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또 동지(冬至)를 인하여 양(陽)을 기르고 선(善)을 회복하는 도리를 지극하게 진술하니 상이 비답(批答)하기를,
“나날이 새롭게 하는 조목이 여덟 가지가 있으니 진실로 이른바 책난(責難) 진선(進善)의 의(義)이다.”
하였다.
12월에 밀소(密疏)를 올려 ‘몰래 중조(中朝 명(明) 나라의 조정)와 내통하여 명 나라를 위한 의(義)를 펴자.’고 하였으나 그 일은 비밀이라 남은 알 수 없었다. 무술년 2월에 휴가를 얻어 남쪽으로 돌아가니 상은 입고 있던 초의(貂衣)를 하사하고 인하여 타이르는 뜻을 천신(賤臣) 시열(時烈)에게 말씀하였다. 얼마 후 특별히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승직시키고 두 번 사양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7월에 상이 편찮다는 말을 듣고 대궐에 달려가 기거(起居)하였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제수하고 찬선(贊善)과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를 그대로 겸임케 하였다.
기해년 3월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특배(特拜)되니 누차 사양하고 또 차자(箚子)를 올려 시무(時務)를 논의한 다음 나아가 사례하고 다시 사양하여 갈리게 되었다. 대사헌(大司憲)에서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으로 갈아 제수되었다.
5월에 효종대왕이 승하(昇遐)하고 현종(顯宗)이 즉위하니 대사헌으로 산릉(山陵) 등의 일을 논의하였고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재궁(梓宮)이 빈소에 있고 상하가 애황(哀遑)하였는데 오히려 힘써 사양하기를 마지않았으나 상이 공을 의지함이 매우 중하였으므로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배명(拜命)하고 차자(箚子)를 올려 오례의절목(五禮儀節目)을 논의하였다.
효종 때부터 정(楨)ㆍ남(枏) 등을 마치 자기 소생처럼 어루만져 길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기세가 더욱 성대해져 출입을 다시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공이 급히 억제를 가하라는 소(疏)를 올려 청하였으나 소를 머물러 두고 정원(政院)에 내리지 아니하였다. 산릉(山陵)에 복토(復土)를 마치고 또 사양하여 갈리어 참찬(參贊)이 되었다.
경자년에 대왕대비(大王大妃 인조의 계묘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의 복제(服制)를 논의하였는데 그 대략은,
“모든 대신의 뜻이 ‘우리나라 전례에 실제는 자식을 위하여 3년을 입는 제도가 없고 고례(古禮)에도 십분 명백하지 아니하여 혹 후일의 뉘우침이 있게 된다면 차라리 국전(國典)을 준용(遵用)함이 낫지 않겠느냐.’고 하니 그 때문에 신도 다른 의견이 없이 마침내 기년제(期年制)로 정하였는데 요즈음 장령(掌令) 허목(許穆)의 소(疏)에 경(經)을 인용하고 의(義)를 증거하여 매우 열심히 논설하니 신이 이 의논에 비록 감히 따지고 서로 힐난할 수 없으나 역시 의심나는 것이 없을 수 없습니다.
대저 《의례(儀禮)》에 ‘아비가 장자(長子)를 위하여[父爲長子]’라 함은 상하를 통틀어서 말한 것인데 만일 허목(許穆)의 설과 같이 한다면 가령 대부(大夫)나 사(士)의 적처(適妻) 소생이 10여 명이라면 제1자가 죽으면 그 부친은 그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고, 제2자가 죽으면 그 부친은 또 3년을 입어야 하며 불행히 제3자ㆍ제4자ㆍ제5자ㆍ제6자에 모두 그들을 위하여 3년을 입어야 할 것이니, 제 생각은 아무래도 《의례(儀禮)》의 뜻이 결단코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소(注疏)에 ‘제2적자(弟二適子) 이하는 통틀어 서자(庶子)라고 한다.’는 뜻을 분명히 말하였고, 그 아래 글에 ‘체이부정(體而不正)이란 말은 바로 서자(庶子)로서 입후(立後)된 자다.’ 하였는데 이 서자(庶子)를 허목(許穆)은 반드시 첩자(妾子)로서 해당시키려 하니 과연 그렇다면 소가(疏家 소(疏)를 쓴 사람)의 설(設)은 앞뒤가 서로 모순되니 아마도 그럴 리가 없고, 기년(期年) 조항에 이른바 장자(長子)ㆍ장자부(長子婦) 등의 곳을 허목은 또 모두 첩자(妾子)로 단정하니 《의례(儀禮)》의 뜻이 과연 이러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신이 능히 깨닫지 못하는 바입니다.
생각건대 소(疏)에 이른바 ‘제1자가 죽었다.[第一子死者]’는 말은 바로 아래 글에서 말한 ‘적자(適子)가 폐질(廢疾)이 있거나, 또는 다른 까닭이 있거나, 아니면 죽고 자식이 없는 자로서 수중(受重)하지 못하여 삼년복(三年服)을 받지 못한 자이다.’ 하였으니 제1자로서 수중(受重)하지 아니한 자가 죽으면 적처(適妻) 소생의 제2장자(弟二長子)를 입후(立後)하고 역시 장자라고 이름하며, 불행히 또 죽으면 이미 제1자를 위하여 삼년복(三年服)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응당 제2의 입후된 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어야 하고, 만약 제1자가 폐질(廢疾)이나 아들이 없지 아니하고 이미 그를 위하여 삼년복(三年服)을 입었다면 제2자가 비록 다른 날 올려서 입후(立後)를 하였다 하더라도 역시 삼년복은 입지 않고 다만 기년복(期年服)만 하는 것이니 바로 아래 글에서 말한 체이부정(體而不正)이 이것입니다. 만약 첩자(妾子)로 입후(立後)하였다면 비록 제1자가 폐질(廢疾)이 있거나 아들이 없이 죽고 삼년복(三年服)을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역시 첩자(妾子)를 위하여는 삼년복(三年服)을 입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위 글에 ‘적처(適妻) 소생’이란 것을 특별히 말하여 밝힌 것입니다. 신이 비록 감히 잘라 말하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의례(儀禮)》의 뜻은 이러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하였다. 또 연제(練祭)의 변례(變禮)를 논하다가 윤선도(尹善道)의 무함(誣陷)을 받아 글을 올려 대죄(待罪)하였으며 마침내 남쪽으로 돌아가니, 상은 사관(史官)을 보내어 만류하고 또 도승지(都承旨)를 특명하여 속히 따라가 만류하라 하였다. 성균관과 사부학당(四部學堂)의 선비들도 글을 올려 만류시키기를 청하니 주상의 비답은 더욱 융중(隆重)하였으나 공은 끝내 감히 머물지 못하였다. 연이어 사헌부(司憲府)와 이조(吏曹)의 직을 명하였다.
신축년에 또 참찬(參贊)으로 부르므로 드디어 경사(京師 서울)에 들어왔고, 3월에 글을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였다. 4월에는 조경(趙絅)이 글을 올려 매우 심하게 배척하므로 공은 스스로 탄핵하는 글을 올렸으며, 5월 4일은 바로 효종대왕 대상(大祥)이었다. 5일에 물러나기를 청하니 상이 매우 간절하게 만류하므로 차자(箚子)를 올려 시사(時事)를 아뢰어 7월에 비로소 돌아갈 것을 허락받았다.
계묘년 정월에 시열(時烈)과 연명으로 상소하여 규간(䂓諫)하였고 또 상소하여 대사헌(大司憲)의 직을 사양하면서 인하여 연평(延平) 이 선생(李先生 송(宋) 나라 학자 이동(李侗). 주희(朱熹)의 스승)을 문묘(文廟)에 배향하고 우리나라의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ㆍ문강공(文簡公) 성혼(成渾)을 종사(從祀)하자고 청하였다. 홍우원(洪宇遠)이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이어서 헐뜯으므로 공은 스스로를 탄핵하였다. 갑진년 여름에 상소하여 경계할 것을 아뢰었고, 겨울에 또 군덕(君德)을 논의하였다. 을사년 여름에 상이 온천(溫泉)에 행행할 때 대사헌(大司憲)으로 행궁(行宮 왕이 임시로 머무는 곳)에 들어가 뵙고 왕을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갈리어 참찬(參贊)에 임명되어 차자를 올려 원자(元子) 보양(輔養)하는 도리를 논하였다. 마침내 보양관(輔養官)을 설치하면서 공에게 맡기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또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이 논한 보양(輔養)의 요점을 차자(箚子)로 올리고 종묘악(宗廟樂)의 차이를 논하였고 《심경(心經)》의 구두(句讀)를 교정하여 올렸다. 원자(元子)가 부지런히 배우므로 공도 마음을 다하여 인도하였다. 10월에 물러나 돌아왔다.
병오년 봄에 유세철(柳世哲) 등이 윤선도(尹善道)의 뜻을 부연하여 상소하여 핍박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므로 공은 온천(溫泉)의 행궁(行宮)에 들어가 스스로 탄핵하고, 행차를 모시고 가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뒤떨어졌다. 8월에 소명(召命)을 사양하고 인하여 분발(奮發)하는 요지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은,
“아, 신민(臣民)이 평소 성명(聖明)께 기대하고 바람이 어떠하였습니까. 쇠약함을 일으키고 어지러움을 다스려 국가를 아름답고 안정되게 하여 구명(舊命)을 오직 새롭게 하여 귀신과 사람의 희망에 보답할 것이라 하였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8년 동안에 천심(天心)이 편하지 못하여 재앙과 변괴가 거듭 일어나고 군민(軍民)이 서로 원망하며 국사가 날로 글러져서 외국의 업신여김과 국내의 근심이 끝이 없으니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어떤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지난번 7월 초순에 갑자기 괴풍(怪風)의 변이 있었는데 지난번 청병(淸兵)의 핍박이 그 시기의 달에 있었으니 그 들어맞고 틀리지 아니함이 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바람의 재앙은 빨리 부응된다.’ 하였는데 아마도 헛말이 아닙니다. 근세(近歲) 이래로 크고 작은 이변이 수를 셀 수 없이 많았으니 그 부응함이 더딜수록 그 화(禍)가 더욱 클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것이 신의 더욱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수치를 느낀 후에야 능히 분발할 줄 알게 되고, 분발할 줄 안 뒤에야 능히 스스로 강하여지고, 스스로 강한 후에야 능히 그 정령(政令)을 행하고 그 국가를 보존한다.’ 하였으니 금번 전하께서 겪으신 곤액은 실로 병자년 이후에는 없던 것입니다. 인심이 참담(慘憺)하고 국세(國勢)가 더욱 꺾이었는데 일이 지난 후에는 게으르고 안일함만 추구하기를 한결같이 전일의 방식대로 따라서, 전하가 경연(經筵)에 납시지 않는 것도 옛날과 같고, 신하들을 자주 접견하지 않음도 옛날과 같고 시들하고 나약해져 그럭저럭 고식(姑息)하기를 옛날과 같이 할 뿐 일찍이 한 행동과 한 정령(政令)이 수치를 분하게 여기어 스스로 강해지는 의사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 하늘이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 어쩌면 전하의 의지가 맥없이 남에 의하여 신축(伸縮)됨이 이렇게까지 되었습니까. 오늘날 보필(輔弼)하는 신하들이 스스로 보존하지 못함은 진정 통곡할 만하지마는 만일 다른 때에 침욕(侵辱)당함이 이보다 심할 때가 있게 되면 장차 어떻게 대응하며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하였으니, 아마도 당시에 노인(虜人)이 들어와 협박하여 수치와 모욕이 매우 심하였기 때문에 공의 소(疏)가 이러하였을 것이다.
정미년 정월에 치사(致仕)하기를 빌고 《소학언해(小學諺解)》를 교정하여 올렸고, 글을 올려 시사를 논하였다. 또 황연(黃壖)의 날조한 무고로 인하여 스스로 탄핵하여 진정(陳情)하였다. 무신년 9월에 온천 행궁(行宮)에 들어가 사례하고 인하여 모시고 가다 중도에서 병이 났다. 세자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입궐(入闕)하였고, 세자의 병이 낫자 공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자주 들어가니 상과 세자가 모두 자신을 낮추고 들었다.
기유년에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올려 조화본원도(造化本源圖)를 밝혔고 제관(祭官)에 차출되어 영릉(寧陵 효종의 능)을 배알하여 추모의 정을 폈다. 대가(大駕)가 남으로 온천에 행행하면서 공을 뒤따르라고 하였다. 서연(書筵)에 들어가 강론하고 틈 나는 날은 제생(諸生)과 함께 반궁(泮宮 성균관(成均館))에서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였다. 행차가 환궁하자 휴가를 청하여 돌아가는데 갈 때 상이 인견하여 은혜와 예모가 다정하고 흡족하였다.
경술년에 세자가 관례(冠禮)를 행하므로 마침내 소명에 응하였다. 그때 마침 호남백(湖南伯 전라도 관찰사) 김징(金澄)의 시비(是非) 다툼에 공이 그 억울함을 송사하다가 많은 말을 듣고 관례(冠禮)를 마치고 즉시 돌아가 강을 건너니, 상과 동궁(東宮)이 모두 유지(諭旨)를 내리고 관학(館學) 제생(諸生)이 또 글을 올려 상에게 만류하기를 청하므로 공이 다시 들어와 조금 머물렀다. 그러나 상은 이미 간사한 사람에게 빠져 있었다. 마침내 앞서의 간청을 거듭하여 돌아감을 허락받았다. 얼마 후 흉인(凶人)의 무고변(誣告變)을 당하였고 시열(時烈)에게는 또 풍이 함양(馮異咸陽)의 설(說)을 씌우니 상은 승지(承旨)를 보내어 열심히 위로하였다. 그러나 공은 감히 스스로 편안할 수 없어서 서울 가까이 나아가서 죄를 청하여 비답을 받고 돌아왔다.
임자년 4월에 병이 들었는데 스스로 치료하기 어려운 줄을 알고 드디어 소(疏)를 올려 소인이 임금을 현혹하는 폐해를 극언(極言)하기를,
“전하께서 윤경교(尹敬敎)의 일로 노여움이 너무 과도하고 음성이 너무 높으시며, 명령도 잘못되고 처리도 두서가 없으시니, 전하께서는 어찌 이 같은 음성과 기색을 대각(臺閣)의 직언(直言)하는 신하에게 사용하십니까. 형세가 그렇게 되어 온 조정이 바람에 쏠리듯 아유(阿諛)가 앞을 다투고 종용(慫慂)이 차례로 일어나, 결국은 전하께서 천고에 없던 은례(恩例)를 베풀어 저 겁 많고 약삭빠른 무리들을 도리어 백료(百僚)의 위에 앉혀 놓으시니, 그 행상(倖相 허적(許積)을 가리킴)의 입장은 잘된 일이 되지만, 전하에게는 천만고(千萬古) 천만인(千萬人)의 비난과 조소를 거듭 받게 되었으니, 어쩌겠습니까. 지난 기유년에 대간(臺諫) 권격(權格)이 크게 천노(天怒)를 촉발시켰는데 그 여덟 자의 꾸중은 신하들이 실색(失色)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신과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가 그 잘못됨을 힘써 말하여 마침내 정원(政院)에 명하여 표를 붙여 고치게 하였으니, 지금 윤경교(尹敬敎)의 일에 성교(聖敎)가 분노(忿怒)에서 나온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마치 이른바 ‘흉악하고 약삭빠른 금수(禽獸) 같고 귀축(鬼畜) 같은 마음으로 동류를 끌어들인다.’는 등의 말로 안팎이 모두 놀랐습니다. 바라건대 속히 명지(明旨)를 내려서 권격의 예에 의하여 통쾌히 뉘우치고 깨닫는 뜻을 베풀어 윤경교를 소환하여 다시 대직(臺職)에 두어 곧은 기개를 표창한다면 국가의 다행일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당사(唐史)》를 읽다가 덕종(德宗)이 이필(李泌)에게 이른 말 가운데 ‘사람들이 노기(盧杞)를 간사하다고 말하는데 짐(朕)은 알지 못한다.’ 하니, 이필(李泌)은 대답하기를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간사함이 되는 것입니다.’ 한 것을 보고 신은 일찍이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덕종(德宗)이 간사한 아첨에 현혹된 것은 정말 후대 임금이 경계할 거울이지만 이필(李泌)의 대답도 어쩌면 그렇게 절중하고 의미가 있습니까. 아, 오늘날 전하는 비단 알지 못할 뿐이 아닙니다.
신이 매번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성왕(聖王)의 유정 유일(唯精唯一)의 전통을 전하께 기대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말세의 일에 차츰차츰 빠져드니 이 어찌 신이 평소에 기대하였던 것이겠습니까. 정말 통곡해도 부족할 일입니다.”
하였는데, 상은 기뻐하지 않았다.
11월에 병이 더욱 위급하여지자 또 유소(遺疏)를 초(抄)하여 학문을 부지런히 하기를 권하고, 인하여 군자를 친하고 소인을 멀리하는 도리를 극언(極言)하였다. 이때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수흥(金壽興)이 은례(恩禮)의 명이 있어야 한다고 아뢰니, 상은 태의(太醫)를 보냈으나 공은 이미 알아보지 못했다. 부음(訃音)을 듣고 상은 놀라 슬퍼하면서 특별히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장수(葬需)를 넉넉히 내렸다. 이에 성균관과 학당(學堂)의 유생(儒生)이 잇달아 거애(擧哀)하였고 관직에 있는 자나 벼슬하지 않은 자를 막론하고 조문(吊問)하였다.
아들 광식(光栻)은 먼저 죽었고 병문(炳文) 등이 문인(門人)과 친구와 함께 예대로 염습하여 계축년 2월에 연기(燕岐) 죽안리(竹岸里)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례하였다. 정 부인(鄭夫人)은 먼저 졸하였는데 공주(公州)에 별도로 장례하였다. 딸은 둘인데 맏은 사인(士人) 나명좌(羅明佐)에게, 다음은 판서(判書) 민유중(閔維重)에게 출가하였다. 광식(光栻)은 관직이 정랑(正郞)인데 그의 딸은 사인(士人) 원몽익(元夢翼)의 처가 되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절이(絶異)하여 정밀하고 밝으며 온화하고 순수하며 밝게 통하여 흠이 없고 얼굴빛은 화평하고 기운은 온화하여 보는 이의 마음이 취하였다. 일찍부터 유현(儒賢)을 따라 학문의 방향을 얻어 듣고 부지런히 힘써 늙어도 그만두지 아니하였다. 대체로 공은 찌꺼기가 본디 적었으므로 매우 힘쓰지 않아도 쉽게 융화되는 경지에 이르렀고 식견이 정밀하고 투철하였기에 괴롭게 힘쓰지 않아도 스스로 이치에 나아갔다. 마음에 이미 흠이 없기에 아는 것이 매우 밝아 그가 가정에서 행한 것도 어버이에 효도하고 처에게 본보기가 되고 자식을 가르치고 아랫사람을 부림에 각기 그 도를 얻었고, 상제(喪制)의 절차에 가장 삼갔다. 대저 인(仁)과 애(愛)로 주장을 삼고 예(禮)로써 다스렸기에 윤리가 극히 바르고 은의(恩義)가 매우 독실하니 모두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하다.
병자년ㆍ정축년 이래 세상의 도가 크게 변하니 행적을 감추기를 더욱 긴밀하게 하여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지조가 있었다. 을유년에 올린 소(疏)는 세상의 꺼리는 바가 되어 사람들은 몹시 위태롭게 여기었으니 공의 상경(常經)을 지키는 뜻이 컸다. 효종이 등극하게 되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초빙하여 예우(禮遇)함이 상규(常規)를 벗어나니, 공도 형적(形跡)을 두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보필하며 자신을 돌보지 않아 성덕(聖德)은 더욱 빛나고 공의 어짊도 더욱 나타났다.
경인년의 변고는 자칫하면 종국(宗國)에 재앙을 끼칠 뻔하였고, 공도 배회하며 물러나 다시 선비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효종 말년에 이르러 은총과 예우가 더하여지니 감격하여 더욱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존주(尊周)의 의와 복수의 뜻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서 국력의 쇠약함도 돌아보지 않으며 우리 형세의 고단함도 걱정하지 않고 시종 일심으로 마치 일성(日星)의 밝음과 하한(河漢)이 동으로 흐름과 같았으니 이는 신명에게 맹세하여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현종(顯宗)은 스승으로 높이는 예를 더욱 다하여 국인에게 법이 되게 하려 하였고, 공도 마음과 지혜를 다하여 들어와서는 도덕을 논의하고 나가서는 모유(謨猷)를 도우며 때때로 선비들과 반궁(泮宮)에서 강송(講誦)하니 사류(士類)가 기뻐하며 서로 벼슬길에 나오려 하였다. 공이 연석(筵席)에서 항상 ‘분노를 억제하고 욕심을 막으며, 개과천선(改過遷善)하는 것이 성학(聖學)의 긴요한 도리’라고 하였고,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갈림길에 있어서는 더욱 반복하여 정녕히 분석하여 설명하였다.
효종조(孝宗朝)에 ‘순(舜)과 도척(盜跖)의 선(善)과 이(利)의 틈 사이에는 머리카락도 용납할 수 없다.’는 교훈을 논의하면서 공이 아뢰기를,
“오늘날 전하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정치가 지극하오나 만약에 털끝만큼이라도 칭찬을 요구하는 마음이 그 사이에 있다면 그 일이 비록 선(善)하다 하더라도 실제는 거짓이니, 이것은 천리(天理)ㆍ인욕(人欲)의 분기(分岐)가 매우 미미하지만 공(公)과 사(私)의 도와 왕(王)과 패(覇)의 책략(策略)처럼 서로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니, 효종이 송연(悚然)히 머리를 숙이며 답하기를,
“이것은 과인이 일찍이 맹성(猛省)하던 바이다.”
하였다. 대체로 공이 여기에 깊이 마음을 썼기 때문에 임금에게 아뢴 바가 이러하였으니, 이 일단(一段)에 의거하여 공이 학문하는 요령을 알았음을 알 수 있다.
공이 벼슬에 어렵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가는 의(義)는 우러러 주자(朱子)의 성법(成法)을 이어받았다. 전후에 지평(持平)에 3번, 진선(進善)에 6번, 집의(執義)ㆍ찬선(贊善)에 7번, 대사헌(大司憲)에 26번, 참찬(參贊)에 12번,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3번이나 임명되었다. 30년간에 은지(恩旨)가 있지 아니한 때가 없었으나, 공은 반드시 시기를 헤아리고 의리를 살핀 다음에야 움직였으므로 조정에 있는 날짜는 겨우 1년 남짓하였으나 군덕(君德)과 세도(世道)에 도움됨은 컸다.
공이 가장 힘쓴 것은 《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에 있었고 일체를 낙민(洛閩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말함)의 연원(淵源)에 소급하였으며, 또 선유(先儒)로는 이연평(李延平)의 질박하고 정명(精明)한 것을 가장 사모하여 항상 성묘(聖廟)에 배향하지 못함을 불만으로 여겼으며,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종신(終身)토록 사법(師法)하였기 때문에 졸(卒)하던 해에는 꿈에 보았다는 작품도 있으니 어찌 정신이 감통되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것에서 공의 심지(心志)와 기상(氣象)의 대개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의(正義)의 일을 만나면 이해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분육(賁育)도 빼앗지 못하는 절개가 있었다. 그러므로 간혹 임금의 뜻을 잃었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원수처럼 미워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온후 화평한 속에서도 스스로 정직 강대한 기운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아, 공과 같은 학식 덕행은 마땅히 백세의 종사(宗師)가 될 것인데 무덤의 풀이 두 번이나 묵었는데도 예송(禮訟)이 그대로 재앙의 함정이 되어, 추적(追謫)의 율(律)이 갑자기 천양(泉壤)에 시행되고 효종의 성덕 지선(盛德至善)도 그 때문에 박식(剝蝕)당하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와 공은 8, 9세 때부터 옷을 나누어 입고 한 책상에 공부하여 머리가 흴 때까지 학문을 강마(講磨)하였다. 옛날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말하기를,
“나와 경인(景仁)은 성(姓)이 같지 않은 형제다.”
하였는데, 이제 공과 나는 성(姓)도 같으니 이는 다만 부모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나의 성품은 편벽되고 응체되어 공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끝내 비슷하지도 못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기질이 한 번 정하여져 바꿀 수 없는 것이리라. 그러나 온공(溫公 사마광(司馬光)의 봉호)과 촉공(蜀公)이 종률(鍾律)에는 끝내 합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나는 억지로 이를 인용하여 시시로 변명하기를,
“구차스레 같으려고 하지 아니한 것은 바로 공의 높은 경지이지만 내게 있어서는 성품이 편협해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아, 이천(伊川)이 일찍이 온공(溫公)이 죽은 뒤에 말하기를,
“《시경》에 ‘만약 생명을 대신해 줄 수만 있다면, 그를 위해서 죽어 줄 사람이 수없이 많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공의 죽음을 슬퍼하고 삶을 영광되게 여기는 마음은 극을 이루었고 공의 이름과 덕성은 길이 고금(古今)에 높았다.”
하였는데, 나도 공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숭정(崇禎) 을묘년(1675, 숙종1) 10월 일 송시열(宋時烈)은 쓴다.

공의 무덤인 연기(燕岐)의 묘소는 지세가 낮고 습기가 많아 장구한 계획이 못 되므로 병진년 11월 18일에 회덕(懷德)의 남쪽 흥농리(興農里) 갑좌(甲坐) 경향(庚向)의 언덕으로 옮기고 부인을 부장(祔葬)하였다. 그후 5년 되던 경신년에 상이 간흉(奸凶)을 주제(誅除)하고 준량(俊良)을 등용하였고 대신의 말에 따라 공의 관작과 중직을 회복하고, 또 장 곡강(張曲江)의 고사처럼 묘소에 사제(賜祭)하니 대개 공이 일찍이 적신(賊臣 허적을 가리킴)을 극론(極論)한 것을 생각하여서이다. 뒤에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추증하고 상례보다 넘치게 병문(炳文)을 녹용(錄用)하였다. 병하(炳夏)와 병원(炳遠)이 모두 관직에 올랐고 민 판서(閔判書 민유중(閔維重)을 말함)는 성녀(聖女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말함)를 탄강하여 신유년에 왕비(王妃)가 되었고, 판서는 봉하여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이 되고 부인은 은성부부인(恩城府夫人)이 되었으니 대개 공의 여경(餘慶)에 힘입은 것으로 아, 훌륭하다.
계해년(1683, 숙종9) 윤6월 24일에 시열(時烈)은 추서(追書)한다.


 

[주D-001]전하께서 …… 곤액 : 이경억(李慶億)의 행장에 의하면, 변방의 백성이 청 나라 영토에서 삼(蔘)을 캔 일이 있어 북사(北使 청국 사신)가 이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에게 추궁하니 사태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는데, 또 대신을 책망하기를 “청 나라의 사관(使館)에 와서 죄를 기다리라.” 하자, 우의정 허적(許積)이 혼자 임금에게 스스로 담당하라고 비밀스레 권하였다. 이리하여 임금이 사관에 나가서 북향(北向)하여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마침내 벌금을 물고 일이 해결되었다.
[주D-002]김징(金澄)의 시비(是非) 다툼 : 김징이 전라 감사로 있으면서 어머니를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각 지방 수령이 많은 예물을 보내왔으므로 사간(司諫) 김석주(金錫胄)가 탄핵하였던 일을 말한다.
[주D-003]풍이 함양(馮異咸陽)의 설說) : 위권(威權)이 막중함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 풍이(馮異)가 외방(外方)에 오랫동안 나가 있자,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려 “풍이의 위권(威權)이 대단하여 민심(民心)이 그에게 쏠려서 모두들 풍이를 함양왕(咸陽王)이라고 칭합니다.”라고 했다는 고사이다. 《後漢書 卷17》
[주D-004]꿈에 보았다는 작품 : 퇴계(退溪)를 꿈에 보고 “평생을 퇴도옹(退陶翁) 흠앙하였더니, 죽을 때 되어도 정신이 오히려 감통되누나. 이날 밤 꿈속에 가르침 받았는데 깨어 보니 산 달만 창문에 가득하네.[平生欽仰退陶翁 沒世精神尙感通 此夜夢中承誨語 覺來山月滿窓櫳]”라는 시를 지은 것을 말한다.
[주D-005]온공(溫公)과 …… 아니하였으므로 : 촉공(蜀公) 범진(范鎭)이 다른 업적(業績)은 사마 온공(司馬溫公)과 동일하였으나, 종률(鍾律)의 제도에 만은 둘이 서로 의사가 맞지 않아서 논쟁하다가 마침내 “우리 두 사람의 소견이 각기 한쪽만 지키고 있으니, 그만두고 논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주D-006]장 곡강(張曲江)의 고사 : 당(唐) 나라 재상 곡강 장구령(張九齡)이, 안녹산(安祿山)의 상(相)이 반역자의 상이 있음을 미리 알고 현종(玄宗)에게 죽이기를 권한 일이 있었으나, 현종이 듣지 않다가, 그 뒤에 과연 안녹산이 반역하였다. 이 난이 평정된 뒤에 숙종(肅宗)이 장구령에게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고 하여 사제(賜祭)하였다.

송자대전 제151권
 축문(祝文)
동춘당(同春堂)의 사당에 고한 글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계축년(1673, 현종14) 7월 26일, 중표제(中表弟) 송시열(宋時烈)이 서울에 가게 되었기에 동춘 형의 궤연(几筵)에 찾아와 삼가 고합니다. 말씀드리건대 영릉을 옮겨 모시는 의논이 금년 여름에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구릉(舊陵)에 새긴 것은 바로 형이 손수 쓴 지문인데, 이제 그것을 버리고 저에게 새로 고쳐 쓰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일을 굽어보고 옛날 일을 우러러볼 때 어떻게 슬픈 마음을 누를 수 있겠습니까. 형께서 세상에 계시면 다시 이 명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는데, 형이시라면 나가기 곤란한 혐의가 있다 하더라도 빨리 달려가 스스로 성고(聖考)의 마지막 일에 신명을 다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 영남 사람들의 헐뜯는 말이 다시 일어나서 조정이 조용하지 못한데, 형의 충순(忠純)하던 마음을 생각해 볼 때 반드시 지하에서도 상심하여 탄식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매함을 무릅쓰고 단신으로 가게 되매 보잘것없는 천한 종적이 누구와 주선할 길이 없습니다. 병하(炳夏)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려 합니다. 형의 밝으신 신령이 이 슬픈 정성을 굽어 살피실 것을 생각하며 삼가 고합니다.


 

[주D-001]중표제(中表弟) : 이종 육촌 형제(姨從六寸兄弟)를 말한다.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은 이종 육촌 형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