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동춘당 송준길

동춘당(同春堂) 송공(宋公) 묘지(墓誌) 동춘당 송준길 선생 묘지명 

아베베1 2012. 4. 21. 17:21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 정상부의 모습이다

 

동춘당 선생은 해동 18현이시고 관향은 은진이시다 은진 송씨는 .동춘당 선생과  우암 선생 , 두분의 해동 18현을 배출하신 집안이시다

전주최문과 혼인관계를 가진 분이시기도 하다  

 

송자대전 제182권

묘지명(墓誌銘)
동춘당(同春堂) 송공(宋公) 묘지(墓誌)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임자년(1672, 현종13) 12월 2일 자(字)가 명보(明甫)인 동춘 선생(同春先生) 송공(宋公) 휘(諱) 준길(浚吉)이 회덕현(懷德縣)의 시골집에서 졸하였다. 공의 치명(治命 유언(遺言)과 같은 뜻)이,
“명장(銘狀)이나 뇌문(誄文) 등을 구하지 말고 다만 작은 표석(表石)에 성명(姓名)이나 새겨 두라.”
하였으므로 그 손자 병문(炳文)ㆍ병하(炳夏)ㆍ병원(炳遠)ㆍ병익(炳翼) 등이 감히 어기지 못하여 비록 문인(門人)이나 지구(知舊)들이 말하여도 모두 듣지 않았다. 시열(時烈)이 이르기를,
“공의 도덕(道德)과 사실(事實)은 이미 사람의 귀와 눈에 익어 있으니 앞으로 오래될수록 더욱 나타날 것이고 또 사관(史官)이 적어 두었으며, 나도 일찍이 유사(遺事) 한 통을 만들어 그 작고 큰일을 기록해 두었으니, 본디 금석(金石)에 새기려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른바 유지(幽誌)란 것은 주 부자(朱夫子 주희(朱熹))가 일찍이 ‘능곡(陵谷)이 변천(變遷)하면 이 지(誌)가 먼저 나타날 것이다.’ 하였다. 아, 공자(孔子)의 무덤도 사수(泗水)에 가까이 있었으니, 이를 한없이 유전하기를 도모하려면 마땅히 묘지를 새겨 두어야 한다. 묘지가 있고서 능곡의 변천이 없는 것은 괜찮지만 불행히도 능곡(陵谷)이 변천하여 무덤에 이상이 있을 경우에 묘표마저 나타나지 않게 된다면 나는 백대(百代) 이후에 그 책임을 져야 할 자가 생기게 될까 염려하는 바이다.”
하였더니, 병문(炳文) 등이 울며 말하기를,
“감히 명(命)하는 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마침 대례(大禮)를 망녕되이 논의하다 여토(癘土 나쁜 지방)에 귀양 가서 형벌을 기다리고 있는데 병문(炳文) 등이 그 일을 내게 부탁하므로 나는 감히 만번 죽을죄를 무릅쓰고 서술한다.
공은 은진인(恩津人)이다. 동방(東方)의 송씨(宋氏)는 휘 유익(惟翊)ㆍ천익(天翊)에서 시작되는데 유익(惟翊)은 여산(礪山)이 관향(貫鄕)이고 천익(天翊)은 은진(恩津)이다. 고려에 판원사(判院事) 휘 대원(大原)이 있었고 이로부터 성대한 세대의 기록이 있다.
회덕(懷德)으로 온 자는 집단(執端) 휘 명의(明誼)이고 그 손자는 쌍청당(雙淸堂) 휘 유(愉)이고 그 현손(玄孫) 휘 세영(世英)이 군수(郡守) 휘 응서(應瑞)를 낳았고 이분이 영천 군수(榮川郡守) 휘 이창(爾昌)을 낳았다. 영천공(榮川公)이 첨추(僉樞) 김은휘(金殷輝)의 딸에게 장가들어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병오년(1606, 선조39) 12월 28일에 공을 한양(漢陽) 우사(寓舍)에서 낳았는데 이웃집의 한 관인(官人)이 와서 축하하기를,
“공이 얻은 아이는 반드시 귀인(貴人)이 될 것이다. 지난밤 꿈에 한 사람이 출산(出産)할 때의 도구를 가지고 말하기를 ‘나는 천인(天人)인데 이것을 송씨 집에 줄 것이다.’고 했다.”
하였다. 이때 영천공(榮川公)의 나이 이미 46인데 아들이 없다가 이렇게 되니 종족과 이웃이 서로 경하하기를,
“공이 늦게서야 득남(得男)하고 또 이상한 일이 이와 같으니 어찌 적선(積善)한 보답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지각(知覺)이 있게 되자 어른의 말씀을 공경하며 믿고 어른을 보면 반드시 용모를 단정히 하여 꿇어앉았다. 영천공(榮川公)이 일찍이 방과 마루를 청결히 하고 공(公)을 손님의 자리에 앉히고 마주하니 공은 곧 움츠리고 불안해 하며 피하였다. 차츰 자라자 글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어른이 어쩌다 일이 있어 일과를 빠뜨리면 공이 반드시 요청하였고 비록 밤이라도 배우지 않으면 자리에 들지 않았다. 또 글씨 쓰기를 좋아하였는데 열 살도 못 되어 글씨를 잘 쓰는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이 보고 말하기를,
“네가 이미 나보다 낫다.”
하였다. 이웃 아이와 사귀면서 반드시 서찰로 주고받았는데 글과 글씨가 모두 격에 맞으니 사람들이 더러 가져다 구경하였다.
신유년에 김 부인(金夫人)이 돌아가니 영천공(榮川公)은 그 파리하고 약한 것이 마음에 걸려 음식과 거처의 간호를 평소보다 배로 하였고 그 정문(情文 문질(文質)을 말함)도 볼 만한 것이 있었다. 상을 마치고는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선생을 찾아가 《소학(小學)》과 《가례(家禮)》 등의 책을 배웠다.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갑자년(1624, 인조2)에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 정묘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상(喪) 치르기를 한결같이 의문(儀文)대로 하고 조금이라도 의문 됨이 있으면 반드시 사문(師門)에 질문하니 문원공(文元公)이 기뻐하며 답해 주고,
“이 사람은 앞으로 예가(禮家)의 종장(宗匠)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계해년에 공이 문숙공(文肅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집안에 장가들었는데, 문숙공 역시 학문을 크게 이룰 것을 기대하고 항상 공경히 대하였는데 이때에 조문을 와서 서로 상례(喪禮)를 자세히 논란하였다.
숭정(崇禎) 경오년(1630, 인조8)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으니 문원공(文元公)은 그 취지를 가상히 여기었는데, 문숙공이 나아가기를 권한다는 말을 듣고 서신으로 책망하기를,
“송모(宋某)는 학문에 뜻이 있어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으니 그 뜻이 매우 훌륭한데, 공은 그의 뜻을 낮추려 하니 아마도 남의 자식을 해치는 데 가깝지 않겠는가.”
하니, 문숙공이 부끄러워 사례하는 말을 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학문에 더욱 몰두하여 두 분의 문하에 왕래하니 나날이 진보되었다. 신미년에 문원공(文元公)이 졸하니 공은 인하여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스승으로 삼았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김 선생 부자(父子)의 문하에 종유(從遊)한 지 오래되었는데 망녕된 말일지 모르나 규모가 크기는 노선생(老先生 김장생을 말함)만 한 이가 없고 조리가 정밀(精密)하기는 소선생(少先生 김집을 말함)만 한 이가 없다.”
하였는데, 논의하는 자들이 잘 지적한 말이라 하였다. 임신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하니 공은 말하기를,
“번번이 제명(除命)을 사양하다가는 물러남을 구하는 것이 승진을 얻으려 한다는 혐의가 생길까 걱정된다.”
하고, 억지로 직위에 나아갔다. 계유년에 문숙공(文肅公)이 졸(卒)하니 즉시 사직하고 돌아가 장례(葬禮)에 참석하고 사제(師弟)의 복(服)으로 상(喪)을 입었다.
병자년에 상이 인재(人才)를 찾아 맞아들이니 대신(大臣) 이하 공을 추천하는 이가 많았고 중신(重臣)이 차자(箚子)를 올려 그 학행(學行)의 실상을 열거하여 논의하니, 상이 특별히 예산 현감(禮山縣監)에 제수하였으나 공은 받지 아니하고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해 겨울에 난리를 피하여 안음(安陰)에 갔는데 그곳의 산 높고 물 맑음을 사랑하여 1년을 살다가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오니 학도가 나날이 많아졌다. 이때 대란(大亂)을 겪은 지 얼마 안 되고 융로(戎虜 청(淸) 나라를 가리킴)가 참람하게 황제(皇帝)로 호칭하니 현사 대부(賢士大夫)가 많이 강호(江湖) 생활을 하면서 날마다 공의 집에 찾아와 질문하고 도(道)를 강론하였다.
계미년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이로부터 소명(召命)이 자주 있었다. 을유년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훙(薨)하였는데 공이 마침 소명(召命)을 받고 글을 올려 사양하면서 인하여 원손(元孫)을 속히 책봉하여 인망(人望)을 안정시키를 청하였고 겸하여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을 불러 세손의 교양(敎養)과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기라고 아뢰었으나, 상은 이때 이미 효종대왕(孝宗大王)에게 뜻을 두었으므로 회답하지 아니하고 미안해 하는 뜻을 보였다. 백강(白江) 상공(相公) 이경여(李敬輿)의 뜻이 공과 같았는데 먼 곳으로 귀양 가게 되니 사람들은 더욱 공을 위하여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그래도 태연하였다. 이로부터 인조조(仁祖朝)가 끝나도록 폐치(廢置)되었는데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이 일찍이 공을 위하여 그 충성스럽고 곧음을 송변(訟辨)하였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였다.
기축년에 효종대왕이 즉위하니 사람들은 ‘화(禍)를 장차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으나 상은 맨 먼저 별도로 타이르며 공을 부르니, 경외(京外)가 놀라지 아니함이 없었고 하례하기를,
“이는 백왕(百王)에 으뜸가는 훌륭한 일이니 국가의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공이 드디어 배명(拜命)하니, 연이어 진선(進善)ㆍ장령(掌令)에 제수하고 특별히 월름(月廩)을 하사하며 집의(執義)에 제배하니 공이 은권(恩眷)에 감동하여 스스로 생각하기를,
“새 임금께서 크게 나라를 잘 다스릴 의사가 있으셔서 사류(士流)를 불러들이니 만약 이 시기에 심력(心力)을 다하여 성덕(聖德)을 돕지 아니하고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세월이 흘러 이 좋은 기회를 저버린다면 어찌 천 년의 큰 한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사유(四維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가 시행되지 않으면 국가를 운영할 수 없는데 지난번 권신(權臣)이 세력을 잡고 조정을 어지럽혀 선비들이 거기에 붙은 자가 많으니 만약에 격양(激揚)시키지 않는다면 끝내 맑아질 날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동료(同僚)들과 상의하여 김자점(金自點)과 거기에 붙은 무리를 논핵하여 귀양 보내기를 청하였다.
체직되었다가 다시 임명되어 명을 받아 능묘(陵墓)를 봉축(封築)하고 예에 따라 통정(通政)에 승직되니 대간(臺諫)에서,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으로 개정하고 경연관(經筵官)을 겸임하여 강론(講論)에 출입하게 하라고 청하니 윤허하고, 또 옷감ㆍ모엄(冒掩)ㆍ말을 하사하였다. 상의 뜻에 답하여 상소(上疏)하고, 또 병자호란 때 행실을 잃은 부녀(婦女)들의 남편들로 하여금 이혼하고 다시 장가드는 것을 허락하기를 청하였다.
이때 마침 주상이 《중용(中庸)》을 강(講)하는데 공이 개석(開析)함이 심오(深奧)하였고 인하여 규풍(規風 비유하여 간함)하니 주상은 하나하나 모두 귀를 기울여 들었다. 함께 입시(入侍)한 제공(諸公)들은 물러나면 반드시 침이 마르도록 탄상하기를,
“문의(文義)는 본디 그의 본업(本業)이거니와 어쩌면 조정의 의식에도 익숙하기가 이와 같은가.”
하였다.
경인년 1월에 휴가를 얻어 남쪽으로 돌아왔다. 대개 소명에 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제배(除拜)하고 하사함이 많았으나 공은 모두 굳이 사양하고 부득이한 다음에야 받아들였다.
이때 김자점(金自點) 등이 공을 원망하여 노인(虜人 청(淸) 나라 사람)에게 참소하여 죄를 얽어서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에 주둔하고 일곱 번이나 연속으로 사자(使者)가 와서 위협하니 앞으로의 사태를 예측할 수 없었으나 상이 직접 담당하는 바람에 마침내 풀리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사기(事機)는 또 크게 변하였다. 공이 돌아오자 상은 공의 계옥(啓沃)의 도움을 생각하여 소명하는 글을 연속으로 내리고 때로는 간절한 내용의 별유(別諭)를 내렸으며 또 미두(米豆)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을미년에 통정(通政)에 올라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와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임명했는데 상은 반드시 공을 올라오게 하려고 4개월이 지난 다음에야 참의(參議)를 갈아 주었다. 이보다 앞서 인조대왕이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의 시호)을 위하여 특별히 시강원 찬선(侍講院贊善)을 두었는데 이때에 공에게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제수하면서 이 직을 겸하게 하고 별유(別諭)로 불러 가마를 타라는 특명을 내렸다. 공은 상의 뜻이 간절함을 알고 정유년 7월에 마침내 서울로 들어갔다. 상은 공이 왔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즉시 접견하고 술을 하사하였으며 세자도 술과 음식으로 위로하였다. 세자는 이로부터 학문에 매우 부지런하니 상은 마주 대하여 이르기를,
“세자의 학문이 진취됨은 찬선(贊善)의 공이다.”
하였고, 액궁인(掖宮人)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또 동지(冬至)를 인하여 양(陽)을 기르고 선(善)을 회복하는 도리를 지극하게 진술하니 상이 비답(批答)하기를,
“나날이 새롭게 하는 조목이 여덟 가지가 있으니 진실로 이른바 책난(責難) 진선(進善)의 의(義)이다.”
하였다.
12월에 밀소(密疏)를 올려 ‘몰래 중조(中朝 명(明) 나라의 조정)와 내통하여 명 나라를 위한 의(義)를 펴자.’고 하였으나 그 일은 비밀이라 남은 알 수 없었다. 무술년 2월에 휴가를 얻어 남쪽으로 돌아가니 상은 입고 있던 초의(貂衣)를 하사하고 인하여 타이르는 뜻을 천신(賤臣) 시열(時烈)에게 말씀하였다. 얼마 후 특별히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승직시키고 두 번 사양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7월에 상이 편찮다는 말을 듣고 대궐에 달려가 기거(起居)하였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제수하고 찬선(贊善)과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를 그대로 겸임케 하였다.
기해년 3월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특배(特拜)되니 누차 사양하고 또 차자(箚子)를 올려 시무(時務)를 논의한 다음 나아가 사례하고 다시 사양하여 갈리게 되었다. 대사헌(大司憲)에서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으로 갈아 제수되었다.
5월에 효종대왕이 승하(昇遐)하고 현종(顯宗)이 즉위하니 대사헌으로 산릉(山陵) 등의 일을 논의하였고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재궁(梓宮)이 빈소에 있고 상하가 애황(哀遑)하였는데 오히려 힘써 사양하기를 마지않았으나 상이 공을 의지함이 매우 중하였으므로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배명(拜命)하고 차자(箚子)를 올려 오례의절목(五禮儀節目)을 논의하였다.
효종 때부터 정(楨)ㆍ남(枏) 등을 마치 자기 소생처럼 어루만져 길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기세가 더욱 성대해져 출입을 다시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공이 급히 억제를 가하라는 소(疏)를 올려 청하였으나 소를 머물러 두고 정원(政院)에 내리지 아니하였다. 산릉(山陵)에 복토(復土)를 마치고 또 사양하여 갈리어 참찬(參贊)이 되었다.
경자년에 대왕대비(大王大妃 인조의 계묘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의 복제(服制)를 논의하였는데 그 대략은,
“모든 대신의 뜻이 ‘우리나라 전례에 실제는 자식을 위하여 3년을 입는 제도가 없고 고례(古禮)에도 십분 명백하지 아니하여 혹 후일의 뉘우침이 있게 된다면 차라리 국전(國典)을 준용(遵用)함이 낫지 않겠느냐.’고 하니 그 때문에 신도 다른 의견이 없이 마침내 기년제(期年制)로 정하였는데 요즈음 장령(掌令) 허목(許穆)의 소(疏)에 경(經)을 인용하고 의(義)를 증거하여 매우 열심히 논설하니 신이 이 의논에 비록 감히 따지고 서로 힐난할 수 없으나 역시 의심나는 것이 없을 수 없습니다.
대저 《의례(儀禮)》에 ‘아비가 장자(長子)를 위하여[父爲長子]’라 함은 상하를 통틀어서 말한 것인데 만일 허목(許穆)의 설과 같이 한다면 가령 대부(大夫)나 사(士)의 적처(適妻) 소생이 10여 명이라면 제1자가 죽으면 그 부친은 그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고, 제2자가 죽으면 그 부친은 또 3년을 입어야 하며 불행히 제3자ㆍ제4자ㆍ제5자ㆍ제6자에 모두 그들을 위하여 3년을 입어야 할 것이니, 제 생각은 아무래도 《의례(儀禮)》의 뜻이 결단코 이와 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소(注疏)에 ‘제2적자(弟二適子) 이하는 통틀어 서자(庶子)라고 한다.’는 뜻을 분명히 말하였고, 그 아래 글에 ‘체이부정(體而不正)이란 말은 바로 서자(庶子)로서 입후(立後)된 자다.’ 하였는데 이 서자(庶子)를 허목(許穆)은 반드시 첩자(妾子)로서 해당시키려 하니 과연 그렇다면 소가(疏家 소(疏)를 쓴 사람)의 설(設)은 앞뒤가 서로 모순되니 아마도 그럴 리가 없고, 기년(期年) 조항에 이른바 장자(長子)ㆍ장자부(長子婦) 등의 곳을 허목은 또 모두 첩자(妾子)로 단정하니 《의례(儀禮)》의 뜻이 과연 이러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신이 능히 깨닫지 못하는 바입니다.
생각건대 소(疏)에 이른바 ‘제1자가 죽었다.[第一子死者]’는 말은 바로 아래 글에서 말한 ‘적자(適子)가 폐질(廢疾)이 있거나, 또는 다른 까닭이 있거나, 아니면 죽고 자식이 없는 자로서 수중(受重)하지 못하여 삼년복(三年服)을 받지 못한 자이다.’ 하였으니 제1자로서 수중(受重)하지 아니한 자가 죽으면 적처(適妻) 소생의 제2장자(弟二長子)를 입후(立後)하고 역시 장자라고 이름하며, 불행히 또 죽으면 이미 제1자를 위하여 삼년복(三年服)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응당 제2의 입후된 자를 위하여 삼년복을 입어야 하고, 만약 제1자가 폐질(廢疾)이나 아들이 없지 아니하고 이미 그를 위하여 삼년복(三年服)을 입었다면 제2자가 비록 다른 날 올려서 입후(立後)를 하였다 하더라도 역시 삼년복은 입지 않고 다만 기년복(期年服)만 하는 것이니 바로 아래 글에서 말한 체이부정(體而不正)이 이것입니다. 만약 첩자(妾子)로 입후(立後)하였다면 비록 제1자가 폐질(廢疾)이 있거나 아들이 없이 죽고 삼년복(三年服)을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역시 첩자(妾子)를 위하여는 삼년복(三年服)을 입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위 글에 ‘적처(適妻) 소생’이란 것을 특별히 말하여 밝힌 것입니다. 신이 비록 감히 잘라 말하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의례(儀禮)》의 뜻은 이러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하였다. 또 연제(練祭)의 변례(變禮)를 논하다가 윤선도(尹善道)의 무함(誣陷)을 받아 글을 올려 대죄(待罪)하였으며 마침내 남쪽으로 돌아가니, 상은 사관(史官)을 보내어 만류하고 또 도승지(都承旨)를 특명하여 속히 따라가 만류하라 하였다. 성균관과 사부학당(四部學堂)의 선비들도 글을 올려 만류시키기를 청하니 주상의 비답은 더욱 융중(隆重)하였으나 공은 끝내 감히 머물지 못하였다. 연이어 사헌부(司憲府)와 이조(吏曹)의 직을 명하였다.
신축년에 또 참찬(參贊)으로 부르므로 드디어 경사(京師 서울)에 들어왔고, 3월에 글을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였다. 4월에는 조경(趙絅)이 글을 올려 매우 심하게 배척하므로 공은 스스로 탄핵하는 글을 올렸으며, 5월 4일은 바로 효종대왕 대상(大祥)이었다. 5일에 물러나기를 청하니 상이 매우 간절하게 만류하므로 차자(箚子)를 올려 시사(時事)를 아뢰어 7월에 비로소 돌아갈 것을 허락받았다.
계묘년 정월에 시열(時烈)과 연명으로 상소하여 규간(䂓諫)하였고 또 상소하여 대사헌(大司憲)의 직을 사양하면서 인하여 연평(延平) 이 선생(李先生 송(宋) 나라 학자 이동(李侗). 주희(朱熹)의 스승)을 문묘(文廟)에 배향하고 우리나라의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ㆍ문강공(文簡公) 성혼(成渾)을 종사(從祀)하자고 청하였다. 홍우원(洪宇遠)이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이어서 헐뜯으므로 공은 스스로를 탄핵하였다. 갑진년 여름에 상소하여 경계할 것을 아뢰었고, 겨울에 또 군덕(君德)을 논의하였다. 을사년 여름에 상이 온천(溫泉)에 행행할 때 대사헌(大司憲)으로 행궁(行宮 왕이 임시로 머무는 곳)에 들어가 뵙고 왕을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갈리어 참찬(參贊)에 임명되어 차자를 올려 원자(元子) 보양(輔養)하는 도리를 논하였다. 마침내 보양관(輔養官)을 설치하면서 공에게 맡기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또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이 논한 보양(輔養)의 요점을 차자(箚子)로 올리고 종묘악(宗廟樂)의 차이를 논하였고 《심경(心經)》의 구두(句讀)를 교정하여 올렸다. 원자(元子)가 부지런히 배우므로 공도 마음을 다하여 인도하였다. 10월에 물러나 돌아왔다.
병오년 봄에 유세철(柳世哲) 등이 윤선도(尹善道)의 뜻을 부연하여 상소하여 핍박하기를 더욱 급하게 하므로 공은 온천(溫泉)의 행궁(行宮)에 들어가 스스로 탄핵하고, 행차를 모시고 가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뒤떨어졌다. 8월에 소명(召命)을 사양하고 인하여 분발(奮發)하는 요지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은,
“아, 신민(臣民)이 평소 성명(聖明)께 기대하고 바람이 어떠하였습니까. 쇠약함을 일으키고 어지러움을 다스려 국가를 아름답고 안정되게 하여 구명(舊命)을 오직 새롭게 하여 귀신과 사람의 희망에 보답할 것이라 하였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8년 동안에 천심(天心)이 편하지 못하여 재앙과 변괴가 거듭 일어나고 군민(軍民)이 서로 원망하며 국사가 날로 글러져서 외국의 업신여김과 국내의 근심이 끝이 없으니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어떤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지난번 7월 초순에 갑자기 괴풍(怪風)의 변이 있었는데 지난번 청병(淸兵)의 핍박이 그 시기의 달에 있었으니 그 들어맞고 틀리지 아니함이 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의 말에 ‘바람의 재앙은 빨리 부응된다.’ 하였는데 아마도 헛말이 아닙니다. 근세(近歲) 이래로 크고 작은 이변이 수를 셀 수 없이 많았으니 그 부응함이 더딜수록 그 화(禍)가 더욱 클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것이 신의 더욱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수치를 느낀 후에야 능히 분발할 줄 알게 되고, 분발할 줄 안 뒤에야 능히 스스로 강하여지고, 스스로 강한 후에야 능히 그 정령(政令)을 행하고 그 국가를 보존한다.’ 하였으니 금번 전하께서 겪으신 곤액은 실로 병자년 이후에는 없던 것입니다. 인심이 참담(慘憺)하고 국세(國勢)가 더욱 꺾이었는데 일이 지난 후에는 게으르고 안일함만 추구하기를 한결같이 전일의 방식대로 따라서, 전하가 경연(經筵)에 납시지 않는 것도 옛날과 같고, 신하들을 자주 접견하지 않음도 옛날과 같고 시들하고 나약해져 그럭저럭 고식(姑息)하기를 옛날과 같이 할 뿐 일찍이 한 행동과 한 정령(政令)이 수치를 분하게 여기어 스스로 강해지는 의사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아, 하늘이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 어쩌면 전하의 의지가 맥없이 남에 의하여 신축(伸縮)됨이 이렇게까지 되었습니까. 오늘날 보필(輔弼)하는 신하들이 스스로 보존하지 못함은 진정 통곡할 만하지마는 만일 다른 때에 침욕(侵辱)당함이 이보다 심할 때가 있게 되면 장차 어떻게 대응하며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하였으니, 아마도 당시에 노인(虜人)이 들어와 협박하여 수치와 모욕이 매우 심하였기 때문에 공의 소(疏)가 이러하였을 것이다.
정미년 정월에 치사(致仕)하기를 빌고 《소학언해(小學諺解)》를 교정하여 올렸고, 글을 올려 시사를 논하였다. 또 황연(黃壖)의 날조한 무고로 인하여 스스로 탄핵하여 진정(陳情)하였다. 무신년 9월에 온천 행궁(行宮)에 들어가 사례하고 인하여 모시고 가다 중도에서 병이 났다. 세자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입궐(入闕)하였고, 세자의 병이 낫자 공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 자주 들어가니 상과 세자가 모두 자신을 낮추고 들었다.
기유년에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올려 조화본원도(造化本源圖)를 밝혔고 제관(祭官)에 차출되어 영릉(寧陵 효종의 능)을 배알하여 추모의 정을 폈다. 대가(大駕)가 남으로 온천에 행행하면서 공을 뒤따르라고 하였다. 서연(書筵)에 들어가 강론하고 틈 나는 날은 제생(諸生)과 함께 반궁(泮宮 성균관(成均館))에서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였다. 행차가 환궁하자 휴가를 청하여 돌아가는데 갈 때 상이 인견하여 은혜와 예모가 다정하고 흡족하였다.
경술년에 세자가 관례(冠禮)를 행하므로 마침내 소명에 응하였다. 그때 마침 호남백(湖南伯 전라도 관찰사) 김징(金澄)의 시비(是非) 다툼에 공이 그 억울함을 송사하다가 많은 말을 듣고 관례(冠禮)를 마치고 즉시 돌아가 강을 건너니, 상과 동궁(東宮)이 모두 유지(諭旨)를 내리고 관학(館學) 제생(諸生)이 또 글을 올려 상에게 만류하기를 청하므로 공이 다시 들어와 조금 머물렀다. 그러나 상은 이미 간사한 사람에게 빠져 있었다. 마침내 앞서의 간청을 거듭하여 돌아감을 허락받았다. 얼마 후 흉인(凶人)의 무고변(誣告變)을 당하였고 시열(時烈)에게는 또 풍이 함양(馮異咸陽)의 설(說)을 씌우니 상은 승지(承旨)를 보내어 열심히 위로하였다. 그러나 공은 감히 스스로 편안할 수 없어서 서울 가까이 나아가서 죄를 청하여 비답을 받고 돌아왔다.
임자년 4월에 병이 들었는데 스스로 치료하기 어려운 줄을 알고 드디어 소(疏)를 올려 소인이 임금을 현혹하는 폐해를 극언(極言)하기를,
“전하께서 윤경교(尹敬敎)의 일로 노여움이 너무 과도하고 음성이 너무 높으시며, 명령도 잘못되고 처리도 두서가 없으시니, 전하께서는 어찌 이 같은 음성과 기색을 대각(臺閣)의 직언(直言)하는 신하에게 사용하십니까. 형세가 그렇게 되어 온 조정이 바람에 쏠리듯 아유(阿諛)가 앞을 다투고 종용(慫慂)이 차례로 일어나, 결국은 전하께서 천고에 없던 은례(恩例)를 베풀어 저 겁 많고 약삭빠른 무리들을 도리어 백료(百僚)의 위에 앉혀 놓으시니, 그 행상(倖相 허적(許積)을 가리킴)의 입장은 잘된 일이 되지만, 전하에게는 천만고(千萬古) 천만인(千萬人)의 비난과 조소를 거듭 받게 되었으니, 어쩌겠습니까. 지난 기유년에 대간(臺諫) 권격(權格)이 크게 천노(天怒)를 촉발시켰는데 그 여덟 자의 꾸중은 신하들이 실색(失色)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신과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가 그 잘못됨을 힘써 말하여 마침내 정원(政院)에 명하여 표를 붙여 고치게 하였으니, 지금 윤경교(尹敬敎)의 일에 성교(聖敎)가 분노(忿怒)에서 나온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마치 이른바 ‘흉악하고 약삭빠른 금수(禽獸) 같고 귀축(鬼畜) 같은 마음으로 동류를 끌어들인다.’는 등의 말로 안팎이 모두 놀랐습니다. 바라건대 속히 명지(明旨)를 내려서 권격의 예에 의하여 통쾌히 뉘우치고 깨닫는 뜻을 베풀어 윤경교를 소환하여 다시 대직(臺職)에 두어 곧은 기개를 표창한다면 국가의 다행일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당사(唐史)》를 읽다가 덕종(德宗)이 이필(李泌)에게 이른 말 가운데 ‘사람들이 노기(盧杞)를 간사하다고 말하는데 짐(朕)은 알지 못한다.’ 하니, 이필(李泌)은 대답하기를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간사함이 되는 것입니다.’ 한 것을 보고 신은 일찍이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덕종(德宗)이 간사한 아첨에 현혹된 것은 정말 후대 임금이 경계할 거울이지만 이필(李泌)의 대답도 어쩌면 그렇게 절중하고 의미가 있습니까. 아, 오늘날 전하는 비단 알지 못할 뿐이 아닙니다.
신이 매번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성왕(聖王)의 유정 유일(唯精唯一)의 전통을 전하께 기대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말세의 일에 차츰차츰 빠져드니 이 어찌 신이 평소에 기대하였던 것이겠습니까. 정말 통곡해도 부족할 일입니다.”
하였는데, 상은 기뻐하지 않았다.
11월에 병이 더욱 위급하여지자 또 유소(遺疏)를 초(抄)하여 학문을 부지런히 하기를 권하고, 인하여 군자를 친하고 소인을 멀리하는 도리를 극언(極言)하였다. 이때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수흥(金壽興)이 은례(恩禮)의 명이 있어야 한다고 아뢰니, 상은 태의(太醫)를 보냈으나 공은 이미 알아보지 못했다. 부음(訃音)을 듣고 상은 놀라 슬퍼하면서 특별히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장수(葬需)를 넉넉히 내렸다. 이에 성균관과 학당(學堂)의 유생(儒生)이 잇달아 거애(擧哀)하였고 관직에 있는 자나 벼슬하지 않은 자를 막론하고 조문(吊問)하였다.
아들 광식(光栻)은 먼저 죽었고 병문(炳文) 등이 문인(門人)과 친구와 함께 예대로 염습하여 계축년 2월에 연기(燕岐) 죽안리(竹岸里)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례하였다. 정 부인(鄭夫人)은 먼저 졸하였는데 공주(公州)에 별도로 장례하였다. 딸은 둘인데 맏은 사인(士人) 나명좌(羅明佐)에게, 다음은 판서(判書) 민유중(閔維重)에게 출가하였다. 광식(光栻)은 관직이 정랑(正郞)인데 그의 딸은 사인(士人) 원몽익(元夢翼)의 처가 되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절이(絶異)하여 정밀하고 밝으며 온화하고 순수하며 밝게 통하여 흠이 없고 얼굴빛은 화평하고 기운은 온화하여 보는 이의 마음이 취하였다. 일찍부터 유현(儒賢)을 따라 학문의 방향을 얻어 듣고 부지런히 힘써 늙어도 그만두지 아니하였다. 대체로 공은 찌꺼기가 본디 적었으므로 매우 힘쓰지 않아도 쉽게 융화되는 경지에 이르렀고 식견이 정밀하고 투철하였기에 괴롭게 힘쓰지 않아도 스스로 이치에 나아갔다. 마음에 이미 흠이 없기에 아는 것이 매우 밝아 그가 가정에서 행한 것도 어버이에 효도하고 처에게 본보기가 되고 자식을 가르치고 아랫사람을 부림에 각기 그 도를 얻었고, 상제(喪制)의 절차에 가장 삼갔다. 대저 인(仁)과 애(愛)로 주장을 삼고 예(禮)로써 다스렸기에 윤리가 극히 바르고 은의(恩義)가 매우 독실하니 모두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하다.
병자년ㆍ정축년 이래 세상의 도가 크게 변하니 행적을 감추기를 더욱 긴밀하게 하여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지조가 있었다. 을유년에 올린 소(疏)는 세상의 꺼리는 바가 되어 사람들은 몹시 위태롭게 여기었으니 공의 상경(常經)을 지키는 뜻이 컸다. 효종이 등극하게 되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초빙하여 예우(禮遇)함이 상규(常規)를 벗어나니, 공도 형적(形跡)을 두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보필하며 자신을 돌보지 않아 성덕(聖德)은 더욱 빛나고 공의 어짊도 더욱 나타났다.
경인년의 변고는 자칫하면 종국(宗國)에 재앙을 끼칠 뻔하였고, 공도 배회하며 물러나 다시 선비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효종 말년에 이르러 은총과 예우가 더하여지니 감격하여 더욱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존주(尊周)의 의와 복수의 뜻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아서 국력의 쇠약함도 돌아보지 않으며 우리 형세의 고단함도 걱정하지 않고 시종 일심으로 마치 일성(日星)의 밝음과 하한(河漢)이 동으로 흐름과 같았으니 이는 신명에게 맹세하여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현종(顯宗)은 스승으로 높이는 예를 더욱 다하여 국인에게 법이 되게 하려 하였고, 공도 마음과 지혜를 다하여 들어와서는 도덕을 논의하고 나가서는 모유(謨猷)를 도우며 때때로 선비들과 반궁(泮宮)에서 강송(講誦)하니 사류(士類)가 기뻐하며 서로 벼슬길에 나오려 하였다. 공이 연석(筵席)에서 항상 ‘분노를 억제하고 욕심을 막으며, 개과천선(改過遷善)하는 것이 성학(聖學)의 긴요한 도리’라고 하였고,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갈림길에 있어서는 더욱 반복하여 정녕히 분석하여 설명하였다.
효종조(孝宗朝)에 ‘순(舜)과 도척(盜跖)의 선(善)과 이(利)의 틈 사이에는 머리카락도 용납할 수 없다.’는 교훈을 논의하면서 공이 아뢰기를,
“오늘날 전하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정치가 지극하오나 만약에 털끝만큼이라도 칭찬을 요구하는 마음이 그 사이에 있다면 그 일이 비록 선(善)하다 하더라도 실제는 거짓이니, 이것은 천리(天理)ㆍ인욕(人欲)의 분기(分岐)가 매우 미미하지만 공(公)과 사(私)의 도와 왕(王)과 패(覇)의 책략(策略)처럼 서로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니, 효종이 송연(悚然)히 머리를 숙이며 답하기를,
“이것은 과인이 일찍이 맹성(猛省)하던 바이다.”
하였다. 대체로 공이 여기에 깊이 마음을 썼기 때문에 임금에게 아뢴 바가 이러하였으니, 이 일단(一段)에 의거하여 공이 학문하는 요령을 알았음을 알 수 있다.
공이 벼슬에 어렵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가는 의(義)는 우러러 주자(朱子)의 성법(成法)을 이어받았다. 전후에 지평(持平)에 3번, 진선(進善)에 6번, 집의(執義)ㆍ찬선(贊善)에 7번, 대사헌(大司憲)에 26번, 참찬(參贊)에 12번,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3번이나 임명되었다. 30년간에 은지(恩旨)가 있지 아니한 때가 없었으나, 공은 반드시 시기를 헤아리고 의리를 살핀 다음에야 움직였으므로 조정에 있는 날짜는 겨우 1년 남짓하였으나 군덕(君德)과 세도(世道)에 도움됨은 컸다.
공이 가장 힘쓴 것은 《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에 있었고 일체를 낙민(洛閩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말함)의 연원(淵源)에 소급하였으며, 또 선유(先儒)로는 이연평(李延平)의 질박하고 정명(精明)한 것을 가장 사모하여 항상 성묘(聖廟)에 배향하지 못함을 불만으로 여겼으며,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종신(終身)토록 사법(師法)하였기 때문에 졸(卒)하던 해에는 꿈에 보았다는 작품도 있으니 어찌 정신이 감통되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것에서 공의 심지(心志)와 기상(氣象)의 대개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의(正義)의 일을 만나면 이해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분육(賁育)도 빼앗지 못하는 절개가 있었다. 그러므로 간혹 임금의 뜻을 잃었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원수처럼 미워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온후 화평한 속에서도 스스로 정직 강대한 기운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아, 공과 같은 학식 덕행은 마땅히 백세의 종사(宗師)가 될 것인데 무덤의 풀이 두 번이나 묵었는데도 예송(禮訟)이 그대로 재앙의 함정이 되어, 추적(追謫)의 율(律)이 갑자기 천양(泉壤)에 시행되고 효종의 성덕 지선(盛德至善)도 그 때문에 박식(剝蝕)당하니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와 공은 8, 9세 때부터 옷을 나누어 입고 한 책상에 공부하여 머리가 흴 때까지 학문을 강마(講磨)하였다. 옛날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말하기를,
“나와 경인(景仁)은 성(姓)이 같지 않은 형제다.”
하였는데, 이제 공과 나는 성(姓)도 같으니 이는 다만 부모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나의 성품은 편벽되고 응체되어 공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끝내 비슷하지도 못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기질이 한 번 정하여져 바꿀 수 없는 것이리라. 그러나 온공(溫公 사마광(司馬光)의 봉호)과 촉공(蜀公)이 종률(鍾律)에는 끝내 합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나는 억지로 이를 인용하여 시시로 변명하기를,
“구차스레 같으려고 하지 아니한 것은 바로 공의 높은 경지이지만 내게 있어서는 성품이 편협해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아, 이천(伊川)이 일찍이 온공(溫公)이 죽은 뒤에 말하기를,
“《시경》에 ‘만약 생명을 대신해 줄 수만 있다면, 그를 위해서 죽어 줄 사람이 수없이 많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공의 죽음을 슬퍼하고 삶을 영광되게 여기는 마음은 극을 이루었고 공의 이름과 덕성은 길이 고금(古今)에 높았다.”
하였는데, 나도 공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숭정(崇禎) 을묘년(1675, 숙종1) 10월 일 송시열(宋時烈)은 쓴다.

공의 무덤인 연기(燕岐)의 묘소는 지세가 낮고 습기가 많아 장구한 계획이 못 되므로 병진년 11월 18일에 회덕(懷德)의 남쪽 흥농리(興農里) 갑좌(甲坐) 경향(庚向)의 언덕으로 옮기고 부인을 부장(祔葬)하였다. 그후 5년 되던 경신년에 상이 간흉(奸凶)을 주제(誅除)하고 준량(俊良)을 등용하였고 대신의 말에 따라 공의 관작과 중직을 회복하고, 또 장 곡강(張曲江)의 고사처럼 묘소에 사제(賜祭)하니 대개 공이 일찍이 적신(賊臣 허적을 가리킴)을 극론(極論)한 것을 생각하여서이다. 뒤에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추증하고 상례보다 넘치게 병문(炳文)을 녹용(錄用)하였다. 병하(炳夏)와 병원(炳遠)이 모두 관직에 올랐고 민 판서(閔判書 민유중(閔維重)을 말함)는 성녀(聖女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말함)를 탄강하여 신유년에 왕비(王妃)가 되었고, 판서는 봉하여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이 되고 부인은 은성부부인(恩城府夫人)이 되었으니 대개 공의 여경(餘慶)에 힘입은 것으로 아, 훌륭하다.
계해년(1683, 숙종9) 윤6월 24일에 시열(時烈)은 추서(追書)한다.


 

[주D-001]전하께서 …… 곤액 : 이경억(李慶億)의 행장에 의하면, 변방의 백성이 청 나라 영토에서 삼(蔘)을 캔 일이 있어 북사(北使 청국 사신)가 이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에게 추궁하니 사태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는데, 또 대신을 책망하기를 “청 나라의 사관(使館)에 와서 죄를 기다리라.” 하자, 우의정 허적(許積)이 혼자 임금에게 스스로 담당하라고 비밀스레 권하였다. 이리하여 임금이 사관에 나가서 북향(北向)하여 머리를 조아림으로써, 마침내 벌금을 물고 일이 해결되었다.
[주D-002]김징(金澄)의 시비(是非) 다툼 : 김징이 전라 감사로 있으면서 어머니를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각 지방 수령이 많은 예물을 보내왔으므로 사간(司諫) 김석주(金錫胄)가 탄핵하였던 일을 말한다.
[주D-003]풍이 함양(馮異咸陽)의 설說) : 위권(威權)이 막중함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 풍이(馮異)가 외방(外方)에 오랫동안 나가 있자, 어떤 사람이 글을 올려 “풍이의 위권(威權)이 대단하여 민심(民心)이 그에게 쏠려서 모두들 풍이를 함양왕(咸陽王)이라고 칭합니다.”라고 했다는 고사이다. 《後漢書 卷17》
[주D-004]꿈에 보았다는 작품 : 퇴계(退溪)를 꿈에 보고 “평생을 퇴도옹(退陶翁) 흠앙하였더니, 죽을 때 되어도 정신이 오히려 감통되누나. 이날 밤 꿈속에 가르침 받았는데 깨어 보니 산 달만 창문에 가득하네.[平生欽仰退陶翁 沒世精神尙感通 此夜夢中承誨語 覺來山月滿窓櫳]”라는 시를 지은 것을 말한다.
[주D-005]온공(溫公)과 …… 아니하였으므로 : 촉공(蜀公) 범진(范鎭)이 다른 업적(業績)은 사마 온공(司馬溫公)과 동일하였으나, 종률(鍾律)의 제도에 만은 둘이 서로 의사가 맞지 않아서 논쟁하다가 마침내 “우리 두 사람의 소견이 각기 한쪽만 지키고 있으니, 그만두고 논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주D-006]장 곡강(張曲江)의 고사 : 당(唐) 나라 재상 곡강 장구령(張九齡)이, 안녹산(安祿山)의 상(相)이 반역자의 상이 있음을 미리 알고 현종(玄宗)에게 죽이기를 권한 일이 있었으나, 현종이 듣지 않다가, 그 뒤에 과연 안녹산이 반역하였다. 이 난이 평정된 뒤에 숙종(肅宗)이 장구령에게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고 하여 사제(賜祭)하였다.

 

 송자대전 제212권
 유사(遺事)
동춘(同春) 송공(宋公) 유사


공(公)은 온화한 성품으로 사람을 접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을 매우 좋아하였으나, 또한 냉정히 안면(顔面)을 바꾸는 때도 있었다. 붓을 들고 혹 장난으로 낙서를 하게 되더라도 반드시 성현(聖賢)의 격언(格言)을 썼다.

영운(靈運)이라는 중[僧]이 불경(佛經)의 제목(題目)을 써 달라고 공에게 요청하기에, 내가,
“주자(朱子)께서는 사관(寺觀)에 편액(扁額)을 쓰지 않았는데, 이제 이 책의 제목을 쓰려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자, 공이,
“내가 진작 써 주마고 승낙을 하였기 때문에 이 사람이 수고로움을 생각지 않고 먼 길을 왔으니, 이제 식언(食言)을 할 수가 없구려.”
하였다. 그 중이 하직하고 물러갈 때 공이 그 중에게,
“뒤에는 다시 이런 일로 나를 찾아오지 말라.”
하고는 이때부터 영원히 사절하였으니, 이해가 바로 임신년(1632, 인조10)이다. 충고를 받아들이는 공의 용기가 이러하였다.
이애일(李愛日)이라는 자가 약간 침(鍼)을 놓을 줄 아나 성질이 망녕되었다. 공이 어렸을 적에 손가락에 질환(疾患)이 있어, 이애일이 와서 치료를 하였던 바, 그와 매우 친근하게 유희(遊戱)하였다. 5, 6년이 지난 뒤에 그가 다시 왔는데, 공은 이미 관례(冠禮)를 행하여 성인(成人)이라는 예의범절상의 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대략 안부(安否)만을 묻고 다른 말은 대꾸도 하지 않자, 애일이 크게 화를 내어 면박하기를,
“조대(措大 서생(書生)을 일컫는 말)가 이제는 대인(大人 어른)이 되었군.”
하므로, 공이 경악하여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애일이 또,
“조대가 재상(宰相)이 되었구만, 정승(政丞)이 되었구만.”
하고는 또 감히 말할 수 없는 해괴한 언동까지 범하였다. 그러자 좌석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져 버리니 공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고 애일은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그날에 있었던 일을 함부로 말하는 자는 애일과 똑같은 사람이다.”
하였다. 10여 년 뒤에 애일이 찾아와서 사죄하자, 공은 예전과 똑같이 대우해 주고 조금도 지난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내가 8, 9세 되어서는 공의 선고(先考) 영천 부군(榮川府君)에게서 자랐는데, 매양 공과 똑같은 도포(道袍)를 입었던 바, 내가 입은 도포가 해져서 이[虱]가 일었을 때는 공이 자기가 입은 도포를 나에게 줄 것을 청하였는데 공의 선비(先妣) 김 부인(金夫人)께서는 대뜸 승낙하였다.

옛 여종[婢] 가히(佳屎)는 정헌공(正獻公 이윤경(李潤慶)의 시호)댁에서 우리 집으로 와 부림받은 종이다. 공이 태어나자, 영천 부군이 우리 집에 와서 말하기를,
“가히의 어미는 내가 태어나던 때 그에게 더없이 큰 은혜를 입었으므로, 또 이제 가히를 데려다가 내 아이(송준길(宋浚吉)을 가리킴)를 보양(保養)하게 하고 싶다.”
하여, 우리 제부(諸父)와 상의한 끝에 곧장 가히를 보냈다. 가히는 공의 집에 들어가 성심을 다해서 공을 보양하였고, 공 또한 가히를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봄철에 군수 부군(郡守府君)께서 포도(葡萄) 덩굴을 등가(藤架)에 올릴 적에 그 포도의 동해(凍害)에 대비하여 싸 주었던 시초(柴草 땔감으로 쓰는 마른 풀)가 많이 나오므로, 공이 그 시초를 모조리 가히에게 주자고 부군께 청하자 승낙하였다. 공은 종 선남(先男)을 시켜 시초를 가히 집에 져다 주라고 하였으나, 선남은 싫어하는 기색으로 즉시 져다 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이 부군께 청하여 매를 때려 주도록 하자, 가히가 와서 선남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니, 공이 또 부군께 청하기를,
“저 할미(가히를 가리킴)가 불안한 마음이 들어 용서해 줄 것을 간곡히 청하니, 매를 때리지 마소서.”
하므로, 부군께서 또한 승낙하였다.

김씨(金氏) 집으로 출가한 고모(姑母) 호군(護軍) 김호덕(金好德)의 아내이다 가 일찍이 나에게 와서,
“네가 영천(榮川) 이형(姨兄 이종 오빠)이 때어날 때의 일을 들어 보았느냐?”
하기에, 듣기를 청하니 고모가,
“종모(從母, 이모)께서 이 오빠를 분만할 적에 겨우 어깨가 드러났을 때 종모가 갑자기 기절하였다. 그래서 가인(家人)들은 발상(發喪) 준비를 하고 있는 터에, 이 정헌(李正獻) 댁의 여종 아무 가히(佳屎)의 어미이다. 가 매우 담력(膽力)이 있어 제창하기를 ‘마님은 그만이라 치더라도 이 아기는 어찌하겠습니까? 또 엎드려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남자 아이입니다.’ 하고는 드디어 여러 사내종을 다 물리치고 여종 네 사람만을 가려 한 사람이 산모를 뒤에서 붙들게 한 다음 두 손으로 아기의 두 어깨를 꼭 잡고 조심스럽게 서서히 흔들어 잡아당기자 허리가 빠져나오니 이어 저절로 순조로이 나왔다. 아기가 겨우 짚자리에 떨어지자 종모께서도 점차 소생하시어 결국 두 모자(母子)가 다 온전하였다. 그러므로 종모 댁에서는 그 여종(가히의 어미)을 다른 종보다 특별히 잘 대우하였고 이종 오빠는 항상 그녀를 어머니라 불렀었다. 그의 딸 가히는 우리 집에 예속되었는데, 준길(浚吉)이 태어나자 이종 오빠가 우리 집에 와서 가히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 여종의 어미는 나에게 큰 은인(恩人)이니, 이 여종으로 하여금 다시 우리 아이를 보양하게 하고픈데 어떻겠는가?’ 하므로, 우리 집에서 마침내 승낙하였다. 그러므로 가히는 끝내 이종 오빠 집으로 들어가 아모(阿母)가 되어 지성으로 준길(浚吉)을 보양하면서 자기 남편, 딸과는 결별하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시종 한 마음으로 정성껏 준길을 보양하였는데, 준길이 장성한 후에 죽었다.”
하였다. 김씨 집에 출가한 우리 고모는 서사(書史)에 통하고 의리(義理)를 알아서 여러 아들을 잘 가르쳤고 딸에게도 문자(文字)를 가르쳤으므로 큰딸 또한 글을 안다.

나와 공과는 서로 매우 좋아하였지만, 시비(是非)를 논하는 데 있어서는 가끔 의견이 서로 동떨어지게 다른 것도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옥천(沃川)에 있는 전곽(全郭, 전팽령(全彭齡)과 곽시(郭詩))의 사우(祠宇)를 훼철(毀撤)하는 일이었다. 이 일로 각기 소견을 고집하여 끝내 서로 양보하지 않다가, 나는 성미가 좁고 급하여 겉으로 흥분하기에 이르렀고 공 또한 나를 너그러이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무례함을 뉘우쳐 사과하였지만 그 일의 시비에 관해서는 끝내 서로 타협이 되지 못하였다. 그후에 공이 상(上)의 앞에서 끝내 내 말을 채택하여 민대수(閔大受, 민정중(閔鼎重))와 합사(合辭)해서 훼철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으니, 공의 처사(處事)가 주밀하고 자상하여 자기 의견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이러하였다.

이 일의 시말(始末)은 다음과 같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문원 선생(文元先生, 김장생(金長生)의 시호)이 소(疏)를 올려, 정개청(鄭介淸)과 곽시(郭詩)의 사우(祠宇)를 훼철할 것을 요청하여 윤허는 받았으나, 병란(兵亂)으로 인하여 즉시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후 서공 필원(徐公必遠)이 감사(監司)가 되어 비장(裨將)을 보내서 훼철하도록 하였는데, 그 비장이 공을 찾아가 뵙자, 공이 그 일을 못하게 하면서,
“아무리 성명(成命 임금이 결정하여 내린 명령)이 있기는 했으나, 인순(因循)하여 시행하지 못하고 벌써 3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에 난리를 여러 번 겪음으로 인해 그 문서(文書)의 존부(存否)도 알 수 없는 형편이니, 반드시 사유(事由)를 갖추어 다시 전하(殿下)께 청한 다음에 시행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하므로, 비장이 마침내 옥천(沃川)으로 가지 않고 다시 감사에게 보고하자, 감사가 드디어 그만두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미 문원 선생의 소본(疏本)이 있고 보면 이는 실로 하나의 공안(公案)인데 왜 다시 전하께 청해야만 한다는 것인가 하여, 이 일로 왕복하면서 엎치락뒤치락 서로 격돌하여 각기 흥분해서 얼굴을 붉히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내가 거칠고 사나운 소치였다. 지금 그 일을 생각하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휴적(鑴積, 윤휴(尹鑴)와 허적(許積)) 당시에 다시 그 사우(祠宇)를 세웠었는데, 그 두 흉인(凶人)이 처형된 뒤에 민상(閔相 민정중을 가리킴)이 다시 계청(啓請)하여 훼철하였다.
효종(孝宗) 때에 윤휴(尹鑴)가 벼슬에 제수되기만 하면 그때마다 고신(告身)을 반납하고 받지 않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의 높은 절조가 이와 같으니, 끝내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살펴보건대, 끝내 조용히 한정(閑靜)을 지킬 사람은 아닐세.”
하였는데, 17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과연 그 말이 꼭 들어맞았다. 옛날 왕중조(王仲祖 진(晉) 나라 왕몽(王濛))ㆍ사인조(謝仁祖 진(晉) 나라 사상(謝尙))ㆍ유진장(劉眞長 진(晉) 나라 유담(劉惔))이 함께 은호(殷浩)를 방문하였을 때 그에게 견고한 뜻이 있음을 보고는, 왕중조와 사인조가,
“심원(深源, 은호(殷浩))이 세상에 나오지 않으니 억조창생을 어찌해야 할까?”
하자, 유진장이,
“당신들은 참으로 심원이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가?”
하였는데, 뒤에 은호가 과연 세상에 나와서 크게 낭패하였으니, 공의 식견과 도량은 진정 옛사람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하겠다.
무술년(1658, 효종9)에 함께 탑전(榻前)에 들어갔는데, 공이,
“종묘(宗廟)에서 쓰는 축(祝)이 잘못되었고 또 종기(宗器)도 법식대로 되어 있지 않으니, 아무(송시열을 말함)를 시켜서 감정(勘定)하도록 하소서.”
하기에, 내가 진언(進言)하기를,
“신(臣)은 진실로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설사 신이 그런 일을 할 만한 재량이 있다 할지라도, 신의 소견으로는 이 일이 오늘날의 급무(急務)가 아닌 듯 싶습니다. 옛날 제갈량(諸葛亮)은 촉한(蜀漢)을 다스릴 때에 사관(史官)을 두지 않았었고, 주자(朱子)는 묘제(廟制)가 옛적만 못하다는 것을 논하면서, ‘바라건대 국가가 흥복(興復)이 된 다음에 구도(舊都)로 돌아가서 그를 일신(一新)하여 천 년 동안 잘못되어온 것을 바로잡으소서.’ 하였습니다.”
하였더니, 상(上)이 끝내 공의 말을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밖으로 나와서 나를 책망하기를,
“우리들의 논의가 이토록 서로 다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하였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나라의 대사(大事)는 군사(軍事)와 제사(祭祀)에 있는 법인데 지금 사전(祀典)이 이토록 멸렬(滅裂)하기 때문에 무궁한 복을 더욱 많이 내려 줄 것을 조종(祖宗)에게 바라는 마음에서이겠지만 그렇게 되겠는가고 생각하여,
“상(上)께서 ‘대계(大計)는 이미 정해졌다.’고 하셨으니, 이후로 마땅히 임시로 온갖 일을 차치하고 하나같이 여기에 전심하여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 다음에야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이는 마땅히 병행(並行)되어야지, 어느 한쪽도 폐할 수는 없는 걸세.”
하므로, 내가 말하였다.
“어전에 올라가서는 일찍이 구차하게 서로 뜻을 영합하지 않았고, 어전을 내려와서는 일찍이 얼굴을 붉히지 않았던 것은 바로 옛사람의 좋은 일이니, 우리들은 다 같이 이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듣건대, 종묘(宗廟)의 축사(祝辭)가, 태조(太祖)에게 썼던 것을 열성(列聖)에게 옮겨 썼으므로, 칭송하는 공덕(功德)이 전혀 서로 부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기축년(1649, 인조27)에 내가 도하(都下)에 있을 적에 일찍이 공이 나에게,
“민중집(閔仲集 민광훈(閔光勳))은 복 있는 사람일세. 그의 셋째 아들이 또한 매우 훌륭하더군.”
하였는데, 이때에 지숙(持叔 민광훈의 셋째 아들인 민유중(閔維重))은 매우 연소(年少)한 시절이었다.

나의 외종 누이 김씨(金氏)는 도사(都事) 이영선(李榮先)의 아내가 되었는데, 성석(聖錫)과 범석(範錫) 두 아들을 두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와서 전하기를,
“김씨가 아들을 잃었습니다.”
하기에, 나는 깜짝 놀라, 어떤 아들이냐고 묻자, 공이,
“반드시 큰아들일 것이네.”
하였는데, 뒤에 알아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공이 만년에는 자못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매양 약간 취기가 오를 때면 언성(言聲)이 쾌활하고 표정이 매우 화락하므로, 족인(族人)이 ‘동춘(同春)은 노년(老年)의 호기(豪氣)가 있다.’ 하였는데, 내가 본 견해로는 아마도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시호)의 위인(爲人)을 사모한 듯 싶었다.

공은 우리나라의 선현(先賢) 가운데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을 가장 존숭하여, 일찍이 이렇게 말하였다.
“정우복(鄭愚伏 정경세(鄭經世)) 등 제공(諸公)이, 정인홍(鄭仁弘)이 상동설(喪童說)로 퇴계(退溪)를 무함하는 소리를 듣고는, 만일 명백하게 변석(辨釋)하지 않으면 끝내 미심쩍은 일이 되고 말 것이라면서 드디어 퇴계의 연보(年譜) 가운데 ‘첩의 아들 아무가 아무 해에 태어났다.[妾子某生於某年]’는 문구 밑에 이 사실을 추록(追錄)하였다. 그러므로 그 판본(板本)에 추록한 흔적이 현저하게 있다. 내가 정랑(正郞) 조희인(曺希仁)과 함께 우복(愚伏)에게서 이 말을 듣고 함께 그 판본도 보았었다.’ 을해년(1635, 인조13))에 영남(嶺南) 사람이 소(疏)를 올려 ‘이황(李滉)에게는 본디 이런 설이 없는데, 연신(筵臣)들이 날조(捏造)한 것입니다.’ 하므로, 조희인이 ‘참으로 이런 설이 있습니다.’ 하자, 영남 사람이 조희인을 극력 공박하여 꼼짝하지 못하게 하고야 말았다. 이는 실로 우복 등 제공이 선현(先賢)의 무함을 변명한 데서 비롯된 것이요, 조희인은 또 우복에게서 직접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 시말(始末)을 진술한 데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영남 사람도 그 말을 우복에게서 함께 들은 자가 또 있는데도 이제 모두 쉬쉬하고 조희인만을 공박하니, 그 좋지 못한 용심(用心)이 이와 같다.”

이 일은 본말(本末)이 매우 뚜렷하다. 인조(仁祖) 13년(1635) 여름에 관학(館學)의 유생(儒生)들이 소를 올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시호) 이 선생과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시호) 성 선생(成先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 생원(生員) 채진후(蔡振後)가 종사에 이의(異議)하는 자 약간 명을 인솔하고 아울러 소본(疏本)을 올려서 두 선생을 무함하자, 상이 그들의 말을 받아들여 관학 유생들의 소청을 준엄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여러 대신(大臣) 이하가 차자(箚子)와 소(疏)를 올려 미안(未安)하다는 뜻을 극력 진술하였다. 상이 하루는 연신(筵臣)을 대하여,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생존시에 일찍이 ‘이이(李珥)에게 상동(喪童)했다는 비방이 있다 ……’고 하였으니, 과연 이런 일이 있다면 어찌 종사(從祀)하기에 합당하겠는가.”
하자,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진언하기를,
“이귀의 말은 곧 이황(李滉)을 가리킨 것이지, 이이(李珥)가 아닙니다. 이귀도 이황에게는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일찍이 이황이 이런 무함을 받았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는 이귀가 평상시에 동료들에게 늘 얘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귀가 늙어서 정신이 혼몽해진 뒤에는 언어가 늘 전착(顚錯)되어 소신(小臣, 최명길 자신을 말함)을 최경길(崔敬吉)이라 부르고, 김자점(金自點)을 김자겸(金自兼)이라 부르고, 이민구(李敏求)를 이성구(李聖求)라 불렀던 바, 이는 조신(朝臣)이 모두 아는 바이니, 당시에 이황을 이이로 불렀던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귀는 이이에게 사사(師事)하여 평생 동안 존경하였으니, 그것은 정해년(1647, 인조25)에 올린 소(疏)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설사 이이에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이귀가 반드시 죽을 무렵에 평생 가져온 마음을 일변하여 스스로 자기 스승의 과실을 공척(公斥)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수긍하였다. 그러자 어떤 일로 서울에 온 영남 사람이 무리를 지어 소를 올리기를,
“이귀는 실로 이이를 가리킨 것인데, 최명길이 함부로 이황에게 그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전번에 정인홍도 비록 이황을 무함하였지만 실로 이런 말은 없었습니다.”
하자, 최명길이 바로 소를 올려 사직(辭職)하였는데, 그 대략에,
“어떤 사람이, 증삼(曾參)이 밥을 훔쳐 먹었다[竊飯]는 책망을 받았다고 한다면, 신(臣)은 반드시 ‘이는 증삼이 아니라 바로 안회(顔回)이다.’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안회에게 사람을 죽였다는 비방이 있었다고 한다면, 신은 반드시 ‘이는 안회가 아니라 바로 증삼이다.’ 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안회와 증삼에게 참으로 밥을 훔쳐 먹었거나 사람을 죽인 누(累)가 있다고 여겨서이겠습니까.”
하였다. 공(송준길을 말함)은 당시에 영남 사람들의 바르지 못함을 늘 탄식하였다.
“우복이 만일 살아 있다면 이 일이 반드시 이토록 시끄럽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유세철(柳世哲) 등이 소를 올리던 당시에 공이 말하기를,
“이 일은 윤휴(尹鑴)가 실로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만일 김수홍(金壽弘)의 선동(煽動)이 없었다면 윤휴도 이토록 어지럽히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일찍이 국조 고사(國朝故事)로서 대비(大妃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조씨(趙氏))가 대행왕(大行王 효종을 말함)을 위해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한다는 설(說)을 정 영상(鄭領相 정태화(鄭太和)를 가리킴)에게 말했다. 영상이 의심스럽게 여기면서 ‘이 말을 어떤 사람에게서 들었소?’ 하기에 ‘김수홍(金壽弘)에게서 들었소.’라고 대답하니, 영상이 빙긋이 웃으면서 ‘그렇다면 믿을 수 없는 말이오.’ 하였다. 김수홍은 남에게 이토록 업신여김을 받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니 슬픈 일이다.”
하기에, 내가,
“남에게 이토록 업신여김을 당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발분(發奮)한 것입니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 또한 그렇게 된 걸세.”

기축년(1649, 인조27)에 권공 우(權公堣)가 대간(臺諫)이 되어, 국상(國喪)에 달려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윤선도(尹善道)를 논핵하자 공이,
“선도는 하나의 음패(淫悖)한 사람인데 논핵한들 무엇이 애석하겠는가마는, 국상에 달려오지 않은 것만을 죄로 여긴다면, 고인(古人)들은 반드시 국상에 달려가는 것만을 의(義)로 삼지는 않았으니 조정에 있는 자는 조정에서 곡(哭)하고 초야에 있는 자는 초야에서 곡할 뿐인데, 이제 어찌 논죄(論罪)까지 한단 말인가.”
하였고, 나도 그 옳지 못함을 극력 말함으로써 권공(權公)이 드디어 정계(停啓)하였다. 국상을 막 당했을 때에 김공 홍욱(金公弘郁)이 대간으로 있으면서 송공 국택(宋公國澤)을 늦게야 국상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논죄하여 파직(罷職)시키자, 공이 일찍이 탄식하였다.
“시인(時人)들이 고인(古人)의 덕행(德行)에는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면서 유독 군상(君喪)에만은 고인들보다 나으려고 애를 쓰니 이는 이해할 수가 없다.”

공이 일찍이 나와 함께 송이버섯을 먹다가 말하였다.
“성인(聖人)이 예(禮)를 만들어 상인(喪人)에게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한 것은 그 맛이 좋기 때문인데, 송이버섯은 비록 소찬(素饌)이라고는 하나 맛이 매우 좋으니, 상인이 먹기에는 미안할 듯하군.”

갑술년(1634, 인조12)에 초려(草廬 이유태(李維泰))가 금산 군수(錦山郡守) 김성발(金聲發)에게 노염을 사서 정소(定所)를 얻지 못하자, 공이 여기에 불평을 갖고 여러 번 이 일을 들먹였다. 금산 군수의 아들 손현(巽賢)이 예전에는 공과 서로 좋게 지냈지만, 이 일이 있고 나서는 공을 대단히 원망하였다. 그러나 차마 마구 배척하지는 못하고,
“이는 소인(小人)으로서 어진 사람이다.”
하였다. 공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어찌 소인으로서 어진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기에, 내가,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의하면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이 화(禍)를 당했을 때 사람들이 그를 어리석은 군자[愚君子]라고 했다.’ 하였는데, 지금 형(兄)은 어진 소인[仁小人]이 되었으니 그 대(對)가 정밀합니다.”
하였는데, 그후로 공은 김손현(金巽賢)을 예전처럼 잘 대해 주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을 때, 충암(冲菴 김정(金淨))의 후예(後裔)라 하여 김손현을 정석(政席)에 주의(注擬)하였고, 김손현이 죽은 뒤에는 그의 집안을 특별히 후하게 돌보아 주었다. 나의 중표매(中表妹 이종 누이를 말함) 두 사람이 김손현의 자부(子婦)와 질처(姪妻)가 되었는데, 이들이 김씨의 부인(夫人)이 공의 덕(德)에 감복한 뜻을 말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였다.
“일찍이 사단 칠정(四端七情)과 이발 기발(理發氣發)의 설(說)을 우복(愚伏)에게 물으니, 우복이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설을 옳게 여겼다. 그러나 영남 사람이 들으면 반드시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고, 내 말을 믿는다면 반드시 우복과 아울러서 공박할 것이다. 퇴계(退溪)는 자상하고 온화하고 공손하여 선현(先賢) 가운데 가장 훌륭하였는데, 풍속이 일변하여 영남 사람의 풍성(風聲)과 기습(氣習)이 이와 같으니 자못 알 수가 없다.”

효종대왕(孝宗大王) 을미년(1655, 효종6)에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비로소 성교(聖敎)에 의해 간행(刊行)하였다. 이에 앞서 공이 이 글을 매우 중요시하여, 경인년(1650, 효종1)에 김공 경여 유선(金公慶餘由善)이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되자, 급히 유선(由善)에게 글씨 잘 쓰는 영리(營吏)를 모아서 1통(通)을 베껴 달라고 청하니, 유선이 두말 없이 승낙하였다. 그러자 공이 기뻐하면서,
“주자(朱子)가 후학(後學)에게 선사한 뜻을 이제 와서 세상에 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하였는데, 그 책이 이루어지자 밤낮으로 펼쳐 보았다.

공이 일찍이 말하였다.
“서남(西南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논(論)이 각기 한쪽을 주장하여 누가 옳고 그른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문원(文元 김장생(金長生)의 시호) 노선생(老先生)과 포저(浦渚 조익(趙翼)) 조야(趙爺)는 모두가 후덕 공심(厚德公心)을 가진 군자(君子)로서 매양 서인(西人)의 논을 주장하였으니, 후학(後學)들은 마땅히 존숭하여 믿어서 정론(定論)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윤휴(尹鑴)가 고신(告身)을 반납하였을 때에, 나와 초려(草廬)가 그를 칭찬하여 백이(伯夷)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자, 공이 웃으면서,
“군자는 말 한마디를 가지고 슬기롭다고도 하고 슬기롭지 못하다고도 하는 것인데, 제공(諸公)의 말이 이토록 짐작없이 나올 줄은 몰랐네. 희중(希仲 윤휴)의 이 일절(一節)이 높기는 높지만, 모르긴 하나 과연 성(聖)의 경지까지야 이르렀을까. 그리고 백이(伯夷)는 주(周) 나라 곡식을 먹지 않은 일 외에도 덕행(德行)이 어떠했기에 공자(孔子)에게 인(仁)하다고 칭도되었던가?”
하기에, 내가,
“전체(全體)를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일절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오.”
하니, 공이 말하였다.
“아무리 일절만 가지고 말한다 할지라도 아사(餓死)까지 한 뒤에 그 말을 해도 늦지 않을 걸세.” 이어 그가 윤이흠(尹以欽)을 위해 상복(喪服) 입은 일을 말하였다.

송득필(宋得弼)이 일찍이 자기 증조(曾祖) 동지공(同知公)의 명(命)을 공에게 전하면서,
“회덕재(懷德宰 회덕의 원)가 곧 우리 집에 올 것이니, 우리 집에 오셔서 얘기를 나누라십니다.”
하자, 공이 꾸짖었다.
“장자(長者)의 말이 과연 이렇더란 말이냐? 장자는 반드시 성주(城主)라고 해야 할 것인데, 너는 바로 ‘회덕재’라고 하였으니 어찌하여 이렇게 불손하단 말이냐.”

《사략(史略)》을 배울 때에 영천 부군(榮川府君)이 묻기를,
“사람을 감히 속이지 못하기도 하고, 차마 속이지 못하기도 하고, 능히 속이지 못하기도 하니, 이 세 가지의 다른 점이 무엇이냐?”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위엄(威嚴)이 있으면 사람이 감히 속이지 못하니 이는 두려워서이고, 인심(仁心)이 있으면 누가 차마 속이지 못하니 이는 마음으로 복종해서이고, 지술(智術)이 있으면 누가 속이려고 해도 속이지 못하니 이는 그의 밝음에 복종해서입니다.”
하므로, 부군(府君)께서,
“그렇다면 어느 것이 가장 우세한가?”
하자, 대답하기를,
“차마 못하는 것이 가장 위이고, 능히 못하는 것이 그 다음이고, 감히 못하는 것이 가장 아래입니다.”
하니, 부군께서 크게 기특히 여겼다. 나의 선군자(先君子 돌아가신 아버지를 말함)께서 매양 영천 부군을 방문하고 돌아오셔서 불초(不肖)에 이르기를,
“매양 아무(송준길을 말함)를 볼 때마다 반드시 학업(學業)의 진보를 보겠더라.”
하셨으니, 바로 공의 10세 때였다.

기묘년(1639, 인조17)에 공이,
“윤경(尹鍞)은 아직 풋내기로서 감히 선현(先賢)을 포폄(褒貶)하여 퇴계ㆍ율곡의 논(論)을 흠잡고, 우계(牛溪)에 대해서는 그의 자(字)를 바로 지척(指斥)하기까지 한다. 또 이미 글을 저술하여 후세에 전할 뜻이 있으니, 그 설(說)의 여하는 막론하고라도 그의 기상(氣象)이 매우 협소하다. 그러고서야 대성(大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경(鍞)은 뒤에 휴(鑴)로 개명(改名)한 자이다.

효묘(孝廟) 계사년(1653, 효종4)에 우리 종문(宗門)에서 유씨 조비(柳氏祖妣)를 위해 국은(國恩)을 요청할 적에 묘표(墓表)에 적혀 있는 두어 줄의 문자(文字)만을 의거하자니 사적이 너무 적막하였다. 그러나 김 호군(金護軍) 댁으로 출가한 나의 고모(姑母)가 나에게, 조고(祖考) 도사공(都事公)이 기록해 놓은 유씨 조비의 사적을 매우 자상하게 얘기해 주었다. 그래서 내가 문자로 기록해 줄 것을 청하자 고모가,
“나는 평생 한번도 문자를 작성해서 남에게 보여 준 적이 없다.”
하고, 드디어 언서(諺書)로 기록해 주기에, 나는 보은(報恩)으로부터 급히 사람을 보내 종문(宗門)에 알렸더니, 공이 이를 열어 보다가 끝까지 다 읽지도 못하고 그만 눈물을 비 오듯 흘렸다. 전중(殿中) 송사신(宋士臣)이 마침 그 좌석에 있어 친히 보았는데,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우리 무리는 사람도 아니라고 했다 한다. 오래된 선대(先代)의 일을 위하여 충정(衷情)이 이처럼 드러나니 다른 사람의 미칠 바가 아니다.

우리 종문은 판교공파(判校公派)와 정랑공파(正郞公派) 두 파로 나누어졌는데, 판교공파의 자손은 제례(祭禮)를 국법(國法)에 의거하여 삼대(三代 증조(曾祖)ㆍ조(祖)ㆍ고(考))만 제사를 지내고, 정랑공파는 《가례(家禮)》에 의거하여 사대(四代 고조ㆍ증조ㆍ조ㆍ고)를 제사 지내므로, 한 종문에 제례가 각기 달라 불안한 점이 있었다. 그러자 공이 제종(諸宗)에 의논하여, 정랑공파의 제례에 의거해서 사대를 제사 지낼 것을 요청하니 제종이 모두 믿고 따랐다. 이때부터 제례는 모두 문공(文公 주희(朱熹)의 시호)의 《가례》를 따르게 되었으니, 전례(典禮)가 돈후(敦厚)하여 유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공이 종인(宗人)들에게 미쁘게 보인 것도 알 수 있었다.

공은 매양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심력(心力)이 매우 약하여 글을 읽을 때에 뜻을 다해 깊이 연구하지 못한다.”
하였으나, 이는 겸사(謙辭)이다. 공이 깊이 연구한 곳은 십분 정명(精明)하여 의혹을 깨뜨렸다.

대저 공은 이미 오랫동안 공부에 용력(用力)하여 만년에 덕(德)이 이루어져서는 정수(精粹)한 기운이 면모(面貌)에 드러나고, 동정 어묵(動靜語默)이 단엄 장중하고 단아 엄정하여 아무런 규각(圭角)이 없이 법도를 넘지 않았다. 얼굴빛은 청화(淸和)하고 말 기운은 창달(暢達)하여 존심(存心)과 처사(處事)가 간측(懇惻)하고 정당(精當)하였다.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을해년(1635, 인조13)ㆍ병자년(1636, 인조14) 무렵에 공의 병(病)이 심하여 항상 의약(醫藥)을 다루었는데, 의원(醫員)이 각반(脚絆, 행전(行纏)과 같음)을 풀어 버려 기혈(氣血)이 잘 통하도록 하라고 공에게 여러 번 청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고 말하기를,
“그렇게 하면 몸가짐이 해이해질 것이니 도리어 병이 더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였으니, 몸을 검속(檢束)하는 공의 공부를 이 조그마한 일에서도 볼 수가 있다.

공은 남의 분쟁(紛爭)을 잘 해결하였는데, 술자리의 분쟁 해결에 더욱 뛰어났다.

사징(士徵 송국시(宋國蓍))이 자기 셋째 아들의 이름을 창(昌) 자로 지으려고 공에게 묻기를,
“미안한 점이 없을는지 모르겠소?”
하였으니, 이는 공의 선대(先代)의 휘(諱)에 창(昌) 자가 있었기 때문인데 공이,
“조금도 미안한 점이 없다.”
하니, 사징이 드디어 창(昌) 자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공이 일찍이 《주역(周易)》 오찬(五贊)을 읽다가 ‘태악비인(泰愕匪人)ㆍ구희래복(姤喜來復)’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치면서 탄상(歎賞)하여 마지않았으니, 그 이른바 마음에 썩 맞은 곳이라 하지 않겠는가.

임신년(1632, 인조10) 봄에 나에게 말하였다.
“지난밤 꿈에 오상 윤겸(吳相允謙)을 보았는데 나는 이를 어수선한 꿈으로 여겼네. 그런데 그날 낮에 어떤 사람이 와서 고사(故事)를 묻기에 청좌공(淸坐公, 송준길의 아버지인 송이창(宋爾昌)) 때의 고지(故紙)를 꺼내서 펼쳐 보다가 갑자기 오상(吳相)의 글을 얻었으니, 이는 비록 작은 일이지만 또한 기이한 일일세. 주 선생(朱先生 주희(朱熹)를 가리킴)이 일찍이 ‘평생에 매양 꿈에 친구나 친척을 볼 때마다, 그 다음날에 그의 서신(書信)을 접하여 보게 되지 않으면 반드시 어떤 사람이 그에 관한 말을 언급(言及)하게 된다.’ 하였으니, 이런 꿈만이 곧 정몽(正夢)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정몽이 아닌 걸세……”

공이 매양 말하였다.
“우복(愚伏)이 《가례》의 관소(冠梳)의 소(梳) 자를 분명히 유(旒) 자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나도 그렇게 여겼었네. 그런데 뒤에 《주자어류(朱子語類)》를 보니 또한 소(梳) 자로 되어 있었네. 그러나 우복은 반드시 증거가 없는 말을 하지 않았을 터인데, 그 당시에 다시 공사(公事)로 인하여 우복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네.”

공은 우복을 독실히 믿었으나, 격물설(格物說)에 이르러서는 그렇다고 여기지 않았다. 공이 일찍이,
“하루는 조용히 우복에게 ‘하교(下敎)에 이른바, 격물 물격(格物物格)은 바로 손을 청하여 손이 온 것[請客而客來]과 같다고 하신 말씀이 과연 정론(正論)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우복이 ‘나는 그 말을 바꿀 수 없는 설(說)로 여긴다……’ 하셨는데, 그 뜻을 보건대 견고하여 깨뜨릴 수가 없었네.”
하였다.
공이 인하여 말하기를,
“격물 물격의 설은 주자(朱子)가 이미 힘을 다해 해석해 놓았는데도 그후의 논의가 이토록 분분하니, 장차 어느 설을 따라야 옳을는지 모르겠네. 특히 퇴계의 설은 율곡의 설과 동떨어지게 다르니 취사(取捨)가 가장 어렵구려. 공의 뜻은 누구를 따르는가?”
하기에, 내가,
“퇴계나 율곡을 불문하고 주자의 설과 같은 사람을 따르고 같지 않은 사람은 따르지 않을 뿐입니다.”
하자, 공이,
“누가 같고 누가 같지 않은가?”
하므로, 내가,
“격물(格物) 두 글자에 대하여 논의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자가 장구(章句)에서 이미 ‘중물의 표리와 정조가 이르지 않음이 없다.[衆物之表裏精粗無不到]’ 하였으니, 이는 물(物)을 위주로 한 말임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는 또 ‘사물(事物)의 이치가 각기 그 극(極)에 도달하여 남김이 없다.’ 하였으니, 그 뜻은 장구와 비교할 때 더욱 밝고 또 자상한 것입니다.
퇴계(退溪)가 경오년(1570, 선조3) 이전에 논(論)한 물격(物格)은 모두가 바로 지지(知至)였고 물격이 아니었는데, 경오년에 기고봉(奇高峯, 기대승(奇大升))에게 보낸 글에서 앞서의 잘못된 견해(見解)를 크게 반성하고 비로소 물(物)을 위주로 하여 말함으로써 곧 주자의 설과 같아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주자와 같다고는 하더라도, 그 주의(主意)는 실로 같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주자(朱子)가 이미 ‘표리와 정조가 이르지 않음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체용(體用)을 겸해서 말한 것인데, 퇴계의 설은 체(體)는 놓아두고 용(用)만을 말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큰 다른 점입니다. 또 주자의 이른바 ‘이르지 않음이 없다.[無不到]’와 ‘그 극에 도달한다.[詣其極]’는 것은 대체로 물(物)의 이치가 이미 다하여 더 이상 이르러 갈 데가 없다는 뜻을 말한 것입니다. 이제 퇴계의 설에서 발현(發見)이니, 현행(顯行)이니, 비사물(非死物)이니 한 것은, 모두 이치는 바로 활물(活物)이기 때문에 저절로 운용(運用)하여 이[此]로부터 저기[彼]에 이른다는 뜻이니, 이것이 또 주자의 뜻과 같지 않은 점입니다.
율곡(栗谷)의 말은 주자와 꼭 맞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자가 미처 다 말하지 못한 것까지 발명(發明)한 것이 있어 의리(義理)가 통투(通透)하고 명백하므로, 비록 약간만 문리(文理)를 아는 사람일지라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니, 공이 그렇다고 하였다.


 

[주D-001]은호(殷浩)가 …… 낭패하였으니 : 은호는 진(晉) 나라 때 사람으로 특히 청담(淸談)으로 유명하였다. 진 강제(晉康帝) 때에 부름을 받아 건무장군(建武將軍)이 되었고, 뒤에 양주(楊州)ㆍ예주(豫州)ㆍ서주(徐州)ㆍ연주(兗州)ㆍ청주(靑州) 등 오주(五州)의 군사도독(軍事都督)이 되었는데, 요양(姚襄)의 반란(反亂)을 당하여 두려워서 허둥지둥한 나머지 군기(軍器)와 군량(軍粮) 등을 요양에게 약탈당하는 등 크게 패전(敗戰)하였다.
[주D-002]밥을 …… 책망 : 공자(孔子)가 진채(陳蔡)에게 곤액(困厄)을 당할 때, 양식이 떨어져서 7일 동안 밥을 먹지 못하여 문인(門人)으로 하여금 밥을 짓게 하였는데, 먼지가 밥솥에 떨어지므로 안회(顔回)가 솥 안에서 그 먼지를 걷어 내자, 자로(子路)가 그것을 보고는 ‘안회가 밥을 훔쳐 먹는다.’고 했던 것을 가리킨다.
[주D-003]사람을 …… 비방 : 공자의 제자(弟子)인 증삼(曾參)과 똑같은 성명(姓名)을 가진 사람이 또 있어 그가 사람을 죽였는데, 어떤 사람이 잘못 알고 공자의 제자인 증삼의 어머니에게 “당신의 아들 증삼이 사람을 죽였소.”라고 했던 것을 가리킨다.
[주D-004]태악비인(泰愕匪人)ㆍ구희래복(姤喜來復) : 《주역(周易)》 오찬(五贊) 명서(明筮)에 있는 말로 태괘(泰卦)는 소인(小人)을 경악(驚愕)하고 구괘(姤卦)는 복괘(復卦)가 오는 것을 기뻐한다는 뜻이다.
[주D-005]중물(衆物)의 …… 없다 : 이 말은 《대학장구(大學章句)》 전 5장 아래 부록(附錄)한 주희(朱熹)의 대학장구 보전(大學章句補傳)에서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