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문곡(文谷) 김공(金公) 묘지명 병서

문곡(文谷) 김공(金公) 묘지명 병서(幷序) (문곡 김수항)

아베베1 2011. 8. 3. 15:44

 

 

 

 

공은 안동인(安東人)이다. 석실(石室) 노선생(老先生)의 손자이며 동지(同知) 휘(諱) 광찬(光燦)의 셋째 아들이다

김상헌의 손자되시는  분이묘 안동김씨 집안과는 전주최문 집안과는 상당한 교유를 가진 집안이다

 

송자대전 제182권

 묘지명(墓誌銘)
문곡(文谷) 김공(金公) 묘지명 병서(幷序)


아, 동문(東文) 밖 율북리(栗北里)는 석실(石室 김상헌(金尙憲))의 대묘(大墓)에서 몇 리 떨어진 곳인데, 그곳은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김공이 묻힌 곳이다. 숭정(崇禎 명 의종(明懿宗)의 연호) 기사년(1689, 숙종15)에 상이 앞으로 큰 처분을 내리려고 급히 승순(承順)하는 사람을 진용(進用)하였는데, 그들의 동류가 형세를 타고 일을 꾸미었다. 공은 진도(珍島)로 귀양 갔다가 그해 4월 19일에 사약(賜藥)을 받고 졸하니 환갑 되던 해였다. 죽음에 임하여 의사와 기운이 편안하고 여유가 있어 뒷일을 처리하고 자손에게 훈계하기를 자세한 일이라도 빠뜨리지 아니하였고, 또 주자(朱子)의 고사를 인용하여 고산일곡(高山一曲)을 추작(追作)하고 팔괘정(八卦亭) 시를 지어 율곡(栗谷)ㆍ우계(牛溪) 두 선생을 경모(景慕)하는 뜻을 보이니 그 지조의 굳음과 함양(涵養)의 깊음을 속일 수 없었다. 아, 오늘날에 어디서 다시 만나 보랴.
공은 안동인(安東人)이다. 석실(石室) 노선생(老先生)의 손자이며 동지(同知) 휘(諱) 광찬(光燦)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 연안 김씨(延安金氏)의 아버지는 목사(牧使) 내(琜)이며, 조(祖)는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의민공(懿愍公) 제남(悌男)이다. 노선생이 몸소 천하의 강상(綱常)을 담당하여 이름이 화이(華夷 중화(中華)와 변방 국가)에 떨쳤는데 그 뿌리를 살펴보면 주 문공(朱文公 문(文)은 주희(朱熹)의 시호)의 《소학(小學)》이니 주 문공이 논한,
“진정한 대영웅은 반드시 전전긍긍하기를 깊은 못에 임하거나 살얼음을 밟는 것같이 한다.”
한 말이 이에서 더욱 증명된다.
공이 가정의 학문을 받았는데 《소학(小學)》의 경신편(敬身篇)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노선생이 안동(安東)에 있으면서 구용장(九容章)과 사물장(四勿章)을 써서 부쳐 격려하였으니 그 기대한 바가 깊고도 멀다. 공은 어려서부터 온종일 걸터앉지 않고 꿇어앉았으며 어깨와 등이 똑바르고 조금도 몸을 기대거나 기울이지 않으면서 ‘외면에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심지(心志)를 잃게 된다.’ 하였다. 문사(文辭)는 전아(典雅)하고, 화려함을 힘써 없애니 노선생이 일찍이 ‘쓸모 있는 글이다.’ 하고 인정하였다.
17세에 반궁(泮宮 성균관)에 나아가 시험을 보았는데 태학사(太學士 대제학(大提學)) 택당(澤堂 이식(李植)) 이공(李公)이 상등(上等)에 뽑아 놓고 말하기를,
“근세(近世)의 문체를 변형시킬 것이다.”
하였다. 다음해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고, 그후 수년간은 장옥(場屋 과거 시험장)에 들지 아니하고 성리(性理)에 관한 여러 책에 뜻을 두고 스스로를 배양(培養)하였다. 23세에 알성 문과(謁聖文科)의 제일(第一)로 뽑히니 조정에서는 인재를 얻었다고 기뻐하였다. 28세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통정(通政)에 승직되고, 31세에 가선(嘉善), 34세에 자헌(資憲)이 되고, 신해년(1671, 현종12)에는 숭정(崇政)에 승직되고, 임자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나이 44세였고, 그사이의 경력은 모두 현요직(顯要職)이었다.
처음 대간(臺諫)이 되어 일을 논의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렀으나 그 뒤 경연(經筵) 강의에서 은총이 나날이 높아졌다. 문형(文衡)을 주관할 때 시론(時論)이 화합하여 서로 다투어 본을 받았기 때문에 재상이 되어서도 그대로 겸임하고 갈지 않았으며, 여러 번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어 등용하고 뽑아씀이 밝고 공정하니 사람들이 감히 헐뜯는 의론을 하지 않았다. 재상이 되어서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경제(經濟)의 재주가 없으니 옛 대신의 사업은 감히 바라볼 수 없으나 근래의 재상된 사람들이 군덕(君德)의 궐실(闕失)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지 않고 하나같이 대각(臺閣)에 떠맡기니 이것은 보필(輔弼)하고 바로잡는 의(義)가 아니다.”
하고, 오로지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현종은 허적(許積)에게 전임하였지만, 공이 바르고 성심이 있어 큰일을 부탁할 만함을 알았기 때문에 빈청(賓廳)에서 예(禮)를 의논한 뒤 중씨(仲氏 김수흥(金壽興))와 여러 관리가 많이 귀양 가거나 벌을 받았는데도 공은 도리어 좌상에 임명되었고, 고명(顧命) 때에도 매우 정녕하게 면유(勉諭)하고 위안하였다. 금상(今上)께서도 처음 즉위하여 더욱 융숭하게 예우(禮遇)하였는데 적휴(賊鑴 윤휴(尹鑴)를 말함)가 흉포를 자행하여 혹 불손한 말로 동조(東朝 명성왕후를 말함)를 헐뜯으므로 공은 말하기를,
“이것은 국가의 윤리 기강에 관계되는 것이니 일차 주상에게 말하여 깨닫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윤휴(尹鑴)ㆍ홍우원(洪宇遠)ㆍ조사기(趙嗣基) 등의 무패(誣悖)한 형상을 극론(極論)하니 군중의 감정이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도리어 공을 양궁(兩宮 숙종과 모후인 명성왕후)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하며 남쪽 끝으로 멀리 귀양 보냈다. 이보다 앞서 명성모후(明聖母后 현종비 김씨)가 상과 함께 편전(便殿)에서 수렴(垂簾)하고 허적(許積)을 접견하면서 통곡하며 반복하여 교유(敎諭)하고 이어 이르기를,
“내 음식을 전폐하고 죽고 싶다.”
하였으니, 이것은 지성측달(至誠惻怛)에서 나온 것인데 끝내 한 사람도 나가 사죄함이 없으니 그 심사는 길 가는 사람이라도 알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경신년에 정(楨)ㆍ남(枏)ㆍ허견(許堅 허적의 서자)ㆍ오정창(吳挺昌 정(楨)ㆍ남(枏)의 외숙)의 역모를 꾀한 사실이 발각되어 그 당이 혹 처형되고 혹 귀양 갔는데 윤휴는 상이 특명하여 죽이고 또 그의 모든 아들을 가두었다. 이때 공은 적소(謫所)에서 명을 받고 옥사를 주관하면서 거의 평반(平反)하였고, 이원정(李元楨)ㆍ유혁연(柳赫然) 같은 자는 여러 적도와 호응하였으나 공은 정상이 나타나지 아니하였다고 석방하기를 청하였는데 뒤에 다시 적도의 공초에 나와 일이 더욱 심하여 비록 구하여 풀어 주려 하여도 할 수 없었다. 이때에 명성모후(明聖母后)가 이르기를,
“김상(金相)이 여러 해 귀양 다녔는데도 옥사(獄事)를 밝고 진실되게 처리하고 조금도 통쾌하게 분풀이하는 의사가 없으니 가상하다.”
하였다. 이때에 간흉(奸凶)은 이미 벌을 받았고 군현(群賢)이 무리 지어 나아가니 모두 공으로 영수(領袖)를 삼았고, 상도 특별히 예우함이 우이(優異)하니 공 역시 몸과 마음을 다 바치어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의 소강(小康) 치적을 이루었으나 시의(時議)에 견제받았다. 대체로 벌주고 제거한 공(功)은 실로 사류 중의 외척에서 나왔다. 그런데 부박(浮薄)하고 일을 좋아하는 무리들은 힘써 깊이 욕하고 준열하게 공격하는 것으로써 공(功)을 삼았는데 공은 생각하기를,
“저들이 사직(社稷)을 편안히 한 공(功)은 있어도 아직 두드러진 죄과(罪過)는 없으니 심하게 밀어서 쫓아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래서 젊은 무리들이 공이 자기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는다고 한(恨)하며 비로소 공을 불쾌하게 여겼다. 옛 송(宋)의 재상 조여우(趙洳愚)가 소희(紹煕 광종(光宗)의 연호) 연간에 처리한 일은 사실 명분과 실제가 순(順)함을 거역하는 형세가 있으므로 주자(朱子)가 대변(大變)이라 여기면서도, 그 죽고 삶을 생각하지 않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킨 것은 불세출의 공이 되므로 명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성심으로 협동하여 함께 왕실을 도왔다. 더욱이 지금은 훈척(勳戚 김우명(金佑明)을 가리킴)이 충성으로 반역을 토벌하였으니 조공(趙公)의 입장과는 견줄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공을 공격하는 자는 스스로 주자(朱子)보다 어질다고 여기는 것인가. 이런 까닭에 더욱 시배(時輩)와 배치(背馳)하게 되었는데 허새(許璽)ㆍ허영(許瑛)의 옥사(獄事)를 말하는 자는 김익훈(金益勳)을 갈수록 심하게 몰아세워 심지어 옥사의 실정까지 의심하게 되었다. 공은 말하기를,
“허새ㆍ허영의 반역한 죄상은 본디 의심할 것 없고 김익훈(金益勳)이 정탐한 것은 사실 부탁 받음이 있었는데, 고발한 것이 정확하지 못하다 하여 이 옥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김익훈(金益勳)에게 심한 죄를 주려 함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 그래서 시의(時議)가 더욱 시끄러워져 마침내 공과 동의하는 자까지 함께 공격하여 갈수록 어그러지고 과격하게 되었는데 이윤(尼尹 윤증(尹拯))의 논쟁이 더욱 극도에 이르렀다. 대체로 적휴(賊鑴)가 퇴계(退溪)ㆍ율곡(栗谷)ㆍ우계(牛溪) 세 선생을 헐뜯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아가 주자(朱子)를 배척하고 마침내 공자(孔子)까지도 휘(諱)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기에 이르러서 실로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었다. 그런데 이윤이 그 당(黨)을 도우며 때로는 겉으로 배척하는 척하면서 몰래 보호하므로 내가 자신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통렬하게 배척하였다. 그러자 공이 나의 재주는 약한데 적이 강함을 안타깝게 여겨 때로 구해 주려는 말을 하니 시배(時輩)들이 공을 더욱 좋지 않게 여겼다. 공이 노선생에게 배우기를,
“술수를 부리는 것은 심술이 올바르지 못하고 이것과 저것을 조정하는 것은 일하는 데 매우 해롭다.”
하였고, 주자도 일찍이 말하기를,
“송원헌(宋元憲)의 농락은 나는 못하고 건중정국(建中靖國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의 조정은 난을 불러오는 방법이다.”
하였으니 공의 가법(家法) 연원(淵源)이 본래 이러하였다. 그러므로 항상 사마 온공(司馬溫公)의,
“하늘이 만약 송(宋)을 도운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한 말을 마음에 두고, 범충선(范忠宣)이 몰래 후일의 안전을 도모한 것으로 경계를 삼았으니, 이것이 시의(時議)와 서로 배치되고 특별히 간당(奸黨)의 원수같이 미워함이 된 것이다. 무릇 주자는 성인(聖人)이라 공이 주자(朱子)의 도(道) 따르다가 그 이익을 얻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주자의 도가 나쁜 것일까.
공은 용모가 단정하고 수려하여 매번 조회(朝會) 때 띠를 매고 홀(笏)을 꼽고 공수(拱手)하고 엄연히 서 있으면 정중(廷中)이 모두 주목하며 ‘사람 가운데 난곡(鸞鵠)이다.’라고 하였고, 노사(虜使) 역시 공경하며 칭찬하였다 한다.
이것을 미루어 말한다면 가정의 효성과 공경의 독실함과 안방의 윤리가 올바른 것은 남들이 이의가 없을 것이다. 아, 유지(劉摯)와 양도(梁燾)의 죽음은 천하가 슬퍼하고 여자약(呂子約)ㆍ채계통(蔡季通)의 화(禍)는 지금도 원송(寃訟)하니, 그렇다면 당시의 책임자가 어떤 사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제공(諸公)의 죽음은 영화이지 욕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 선모(宣母)가 무고당하고 성사(聖姒)가 폐욕(廢辱)을 당하고 양현(兩賢)이 성무(聖廡)에서 쫓겨났으니 이러한 때 죽은 공은 영화롭지 않겠는가. 노선생이 일찍이 시를 나에게 주어 주자의 학문으로 나를 권면하였는데, 나 또한 가만히 보면 그분이 스스로 한 것도 요약하면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노선생의 제손(諸孫)이 모두 주자서(朱子書)를 좋아하였고 공은 더욱 일삼아 익혔다. 내가 일찍이 망녕되게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편집하여 교정을 청하였더니 공이 기꺼이 함께 고증 산삭하여 흠됨이 적었으니 공의 학문을 여기에 의거하여 알 수 있다. 주자가 운명할 때 제생에게 진결(眞訣)을 주었는데,
“천지가 만물을 생성함과 성인이 만사에 응함은 직(直)일 뿐이다.”
하였고, 다음날 또,
“도리(道理)는 다만 이러할 뿐이니 마땅히 굳게 각고(刻苦)하라.”
하였으니, 이 어찌 공자와 맹자의 ‘사람 삶은 곧다. 곧음으로 길러야 한다.’는 정법(正法)이 아니겠는가. 공의 일생 언행(言行)이 굴곡(屈曲)하고 회호(回互)됨이 없는 것은 아마도 여기에서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얻은 것이리라.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죽음에는 악시도 있고 / 死有惡時
영시도 있다 / 亦有榮時
아 공의 시기는 / 嗟公之時
내 감히 알지 못하겠네 / 吾不敢知之


 

[주D-001]고산일곡(高山一曲)을 추작(追作)하고 : 송시열이 일찍이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본받아 고산구곡시를 문하 제공(門下諸公)에게 나누어 짓기를 부탁하였는데, 김수항이 이때에 추작(追作)하였다.
[주D-002]팔괘정(八卦亭) 시 : 팔괘정은 여산(礪山) 죽림서원 오른편에 있는데 송시열이 거처하던 곳이다. 이 시의 원운(原韻)은 남용익(南龍翼)이 지었다.
[주D-003]조여우(趙洳愚)가 …… 일 : 송 효종(宋孝宗)이 붕(崩)하자, 광종(光宗)이 심질(心疾)이 있어 상(喪)을 치를 수 없으므로, 재상 조여우(趙洳愚)가 헌성태후(憲聖太后)에게 청하여 가왕(嘉王)을 받들어 황제에 즉위시키니 바로 영종(寧宗)이다.

宋子大全卷一百八十二
 墓誌
文谷金公墓誌銘 幷序 a_114_191d


嗚呼。此國東門之外栗北里。去石室大墓幾里而近者。文谷金公衣履之藏也。崇禎己巳。主上將有大處分。亟進用承順之人。則其諸類乘勢媒孼。公始謫珍島。其四月九日。承後命以終。壽命甲子一周也。臨命。意氣安閒。處置後事。訓戒子孫。纖悉無遺。又用朱子故事。追作高山一曲,八卦亭詩。以寓景慕栗,牛兩先生之意。其持守之固。涵養之深。不可誣矣。嗚呼。今日何處得來。公安東人。文正公石室老先生之114_192a 孫同知諱光燦之第三胤。妣延安金氏。考牧使琜。祖延興府院君懿愍公悌男也。老先生身任天下綱常。名聞華夷。第考其根基。則文公小學也。文公論眞正大英雄。必以戰兢臨履爲言者。益驗焉。公受家庭學。最主於小學敬身一篇。老先生在安東。書寄九容四勿以勉之。其所期待深且遠矣。公自少終日危坐。未嘗箕踞。肩背竦直。不少跛倚。以爲外面有些罅隙。則心志從而走失。文辭典雅。務去靡麗。老先生嘗識之曰。有用之文也。十七。出試泮宮。大學士澤堂李公取置上游曰。可以變近世文體也。明年。魁司馬試。間數114_192b 年。不就場屋。留意性理諸書。以自培養。二十三。擢謁聖文科第一。朝廷賀得人焉。二十八。中重試陞通政。三十一嘉善。三十四資憲。辛亥。陞崇政。壬子。拜右議政。時年四十四。其間所履歷。無非極選。始爲臺諫。論事忤旨。及後筵講。恩顧日隆。其主文衡也。時論翕然。爭相速肖。以故至於入相而仍兼不遞。累拜吏判。登明選公。人不敢訾議。其爲相。自以爲無經濟才。古大臣事業。固不敢望。而至於輓近爲宰相者。君德闕失。不以爲己責。而一付之臺閣。此非輔弼匡救之義。故專以是自任焉。顯廟專任許積。然察公貞亮。可114_192c 屬大事。故賓廳議禮之後。仲氏及諸官多被譴罰。而公旋拜左相。至於顧命之際。所以勉諭慰安者。極其丁寧。今上初服。禮貌愈隆。及賊鑴肆兇。或有不遜語侵及東朝。公以爲此關國家倫紀。不可不一爲上言之。以冀開悟。遂極論鑴,宇遠,嗣基等誣悖狀。群憾蝟起。反以公爲離間兩宮而遠謫南荒。先是明聖母后夜與上同御便殿。垂簾引積。痛哭而反復敎諭。因曰。予欲閉口不食而死。此出於至誠惻怛。而終無一人出而謝罪者。其心可謂路人所知也。庚申。楨,柟,堅,挺昌謀逆事覺。其黨或誅或竄。而鑴114_192d 則上特命誅之。又囚其諸子。時公自謫所膺命主讞。率多平反。及如元楨赫然爲諸賊援引。則公以情節未著。卽請放釋矣。及後復出賊招。事益狼藉。雖欲救解而不可得矣。當是時。明聖聖母爲言金相累年竄逐之餘。按獄明允。少無乘快洩憤之意。可尙也。爾時奸兇旣誅。群賢彙征。咸以公爲領袖。上亦尊禮優異。公亦鞠躬盡瘁。聚精會神。以成元祐小康之治。而時議遽已掣肘矣。蓋誅除之功。實出士類中戚畹。而浮薄喜事之輩。務以深詆峻攻爲功。公以爲彼有安社稷之功。姑無顯然罪過。甚以排擯爲不114_193a 韙。少輩恨公不與己同。始不快於公矣。昔宋相趙汝愚紹煕處置。實有名實逆順之勢。故朱夫子以爲大變。而然其捨死生安宗社。爲不世之功。故承命入朝。誠心協同。共奬王室。況今勳戚以忠討逆。非趙公所遭之比。然則今之攻公者。自謂賢於朱子耶。由是益與時輩背馳焉。及璽,瑛之獄。言者持金益勳益急。至或致疑於獄情。公以爲璽,瑛逆節。本無可疑。益勳詗察。實有所受。今以發告之不審。遂疑此獄爲無實。而欲深罪益勳則不可。於是時議益譁然。遂並攻與公同意者。輾轉乖激。以至尼尹之爭而極矣。蓋賊鑴始114_193b 疵退,栗,牛三先生而轉斥朱子。遂至於不諱孔聖。此實斯文之亂賊。而尼尹挺身黨助。時亦陽擠陰護。愚不自量而痛觝之。公矜余才弱敵強。時有營救之言。時輩之不悅於公。於是尤甚。公受敎於老先生。以爲機關籠絡。心術之不正。調停彼此。事爲之深害。蓋朱子嘗曰。宋元憲籠絡之事。吾所不能。建中之調停。致亂之道。公之家法淵源。本來如此。故常以司馬公天若祚宋必無此事爲心。而以范忠宣陰爲他日自全之計爲戒。此其所以動與時議相背。而特被奸黨所仇嫉者也。夫朱子聖人也。公從朱子道而不獲其利。114_193c 豈朱子之道非耶。公容貌端秀。每朝會。垂紳搢笏。張拱儼立。廷中咸目屬以爲人中之鸞鵠。虜使亦起敬稱贊云。推此以言。則家庭孝敬之篤。閨門倫理之正。人亦可以無間焉。嗚呼。劉,梁之死。天下悲之。呂,蔡之禍。至今冤訟。然知當時用事者何如人。則諸公之死。榮也非辱也。況今宣母被誣。聖姒廢辱。兩賢見黜於聖廡。公以此時死之。顧不亦榮乎。老先生嘗以詩贈我。勉以朱子之學。余亦竊觀其自爲者。要不出此矣。以故老先生諸孫。皆喜朱子書。而公尤服習。余嘗妄編大全箚疑而就正焉。則公樂與之證訂删潤114_193d 而疵纇寡焉。公之所學。據此可見矣。朱子臨簀。授諸生眞訣曰。天地之生萬物。聖人之應萬事。直而已矣。翌日又曰。道理只是如此。但當堅固刻苦。此豈非孔孟人生直。以直養之正法耶。公之一生言行。無所屈曲回互者。其有得於此耶。其有得於此歟。銘曰。
死有惡時。亦有榮時。嗟公之時。吾不敢知之。
宋子大全卷一百八十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