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문곡(文谷) 김공(金公) 묘지명 병서

선부군(先府君) 행장 상 문곡 김수항

아베베1 2011. 8. 13.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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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선부군(先府君) 행장


고조는 휘(諱)가 생해(生海)인데, 신천 군수(信川郡守)를 지냈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비(妣)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가 대효(大孝)인데, 삼가 현감(三嘉縣監)을 지냈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비 광주 이씨(廣州李氏), 영일 정씨(迎日鄭氏), 완산 이씨는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조(祖)는 휘가 상헌(尙憲)인데, 의정부 좌의정을 지냈고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다. 세상에서는 청음(淸陰) 선생이라고 불렀다.
비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가 광찬(光燦)인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비 연안 김씨(延安金氏)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은 국구(國舅)인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시호 의민공(懿愍公) 휘 제남(悌男)의 손녀이자 청주 목사(淸州牧使) 휘 래(琜)의 딸이다.

부군(府君)은 휘는 수항(壽恒), 자(字)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이다.
김씨는 고려 시대의 태사(太師)인 휘 선평(宣平)에게서 나왔는데, 이분은 고려 태조가 처음 일어날 적에 고창(古昌)의 성주(城主)로 있으면서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甄萱)을 격파한 공으로 책훈(策勳)되어 태사 아보(太師亞父)가 되었고 죽어서는 고창의 고을 사당에 향사되었다. 고창은 뒤에 안동(安東)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자손들이 마침내 그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김씨 가문은 그 뒤 800여 년 동안 벼슬이 끊이지 않았는데, 문정공(文正公)과 그의 형 우의정 문충공(文忠公) 휘 상용(尙容)이 나란히 큰 절개를 세워서 더욱 명족(名族)이 되었다.
부군은 기사년(1629, 인조7) 8월 1일 사시(巳時)에 경성(京城) 대사동(大寺洞)에 있는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5세에 김 부인(金夫人)이 별세하여 외조모 정씨(鄭氏)에게서 양육되었으며, 8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이미 스스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번거롭게 꾸짖을 일이 없었다. 문정공이 이때 안동에서 구용(九容)사물(四勿)을 써 보내어 면려하였다. 12세에 안동으로 돌아가 처음으로 문정공에게 글을 배웠는데, 이때부터 보통 사람보다 갑절이나 열심히 학업에 몰두하여 문사(文詞)가 급속도로 향상되었기 때문에 문정공이 자주 칭찬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정공이 청(淸)나라에 억류되자 부군은 의정공을 따라 도성으로 돌아왔다.
17세에 반시(泮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자 태학사(太學士) 택당(澤堂) 이공(李公)이 크게 칭찬하고 면려하는 한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번 사마시에서는 반드시 아무개를 장원으로 뽑을 것이다. 그러면 과장(科場)의 지나치게 섬세하고 유약한 습성을 쇄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뒤에 과연 진사시에 장원하였다. 부군은 이때 나이가 18세였는데, 어린 나이로 많은 선비들을 누르고 장원을 차지했기 때문에 스스로 깊이 두려운 마음을 품어 그 후 몇 년 동안 과장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경전과 역사 공부에만 매진하여 스스로 근본을 배양하였다.
신묘년(1651, 효종2) 9월에 효종(孝宗)이 즉위한 후 처음으로 문묘(文廟)에 배알하고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부군이 문과에서 1등으로 뽑혔다. 바로 그날 여창(臚唱)하는데 날이 이미 어둑어둑해지자 상이 특별히 어촉(御燭)을 거두어 내려 주었다. 이때 백강(白江) 이공 경여(李公敬輿)가 독권관(讀券官)이었는데, 문정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외람되이 과장의 시관(試官) 노릇을 하여 훌륭한 인재를 얻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였다. 부군은 즉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가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겨 제수되고 또 실록청낭청 겸 춘추관기사관(實錄廳郎廳兼春秋館記事官)에 차임되고 얼마 있다가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다.
임진년(1652, 효종3) 봄에 경기 도사(京畿都事)에 제수되었으나 겨울에 병 때문에 사직하여 물러났다. 곧이어 다시 서용되어 계사년(1653) 봄에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이때 마침 하늘의 재변(災變)을 만나서 재변을 그치게 할 방책을 강구하여 건의하였는데, 근본을 확립하여 성상의 뜻을 굳건히 하고, 사욕을 끊어 성상의 덕을 닦고, 기쁨과 노여움을 경계하여 성상의 도량을 넓히고, 학문을 극진히 하여 성상의 학문을 향상시키고, 성심(誠心)을 열어 아랫사람들을 대하고, 공도(公道)를 펴 어진 인재를 수용하고, 궁중 출입을 엄히 단속하여 사사로이 통하는 길을 막고, 언로(言路)를 넓혀 충성스러운 간언을 불러들이고, 변방을 공고히 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고, 수령에 적임자를 잘 가려 차임해서 백성을 고통에서 구제하고, 붕당(朋黨)을 이유로 옳은 사람을 의심하지 말고, 과격하다는 이유로 사기(士氣)를 꺾지 말고, 궁노(宮奴)들을 외방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여 원망 사는 길을 끊고, 중관(中官)으로 하여금 어공(御供)을 주관하지 못하게 하여 궁중에서 매입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의 재물을 약탈하는 조짐을 막으라는 등 모두 14가지의 일이었다.
뒤에 무슨 일로 인하여 스스로 탄핵하여 면직되었다가 이윽고 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사간원이 오정일(吳挺一)을 탄핵하기를,
“전에 평안 감사(平安監司)가 되어서는 질병을 이유로 일을 폐하다가 체직(遞職)되자 곧 질병이 나았으니, 그 뜻이 평안 감사 직을 싫어하여 교묘히 회피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의 아우 오정원(吳挺垣)이 정언으로 있으면서 인혐(引嫌)한다는 핑계로 해명하면서 말이 거리낌이 없자, 부군이 오정원을 논척하기를,
“혐의쩍은 것을 피하지 않고 장황하게 송변(訟辨)하였으니 국가에서 대간(臺諫)을 둔 것이 어찌 죄에 빠진 부형(父兄)을 구제하여 사사로운 목적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마침 사헌부도 같은 날 이러한 의론을 내자 상이 마침내 하교하기를,
“이것이 어찌 양사(兩司)가 함께 발론할 일인가. 이와 같은 습성을 나는 매우 통탄스럽게 여긴다. 물러나 두려운 마음으로 잘 생각해 보라.”
하였다. 이에 부군은 스스로 탄핵하고 면직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신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직 기강이 날로 허물어지고 염치가 날로 상실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오정원의 방자한 습성을 통탄스러워하지 않으시고 대각(臺閣)을 중히 하려는 신들의 습성을 통탄스러워하시니, 내심 전하의 호오(好惡)가 중도(中道)에 맞지 않은 것이 아닌지 우려됩니다.”
하였는데, 홍문관이 출사시킬 것을 청했으나 상이 특명으로 부군을 체차시켰다. 이때 양사가 모두 스스로 탄핵하였지만 유독 부군만 체차되었는데, 이는 말이 강경하고 가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6월에 또 정언에 제수되었다. 전에 장령 서원리(徐元履)가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자신의 종을 사사로이 비호하여 사헌부의 장관에게 금리(禁吏)를 죄주도록 청탁하였다.”라는 이유로 이후원을 탄핵하려 하자 동료들이 말하기를,
“이공은 종을 위해 청탁할 사람이 아니다. 다만 금리가 뇌물을 받고 죄인을 일부러 풀어 준 것이 미웠기 때문에 사헌부 장관을 만나 말한 것뿐이니, 함부로 탄핵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에 서공이 벌컥 화를 내며 스스로 논죄하고 사헌부 장관 이하를 비난하였는데, 대부분 뜻밖의 말이었다. 상은 이미 서공이 중신(重臣)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을 논한 것을 매우 좋아하는 한편 이공이 실로 사심을 품었다고 의심하고 있었는데 대간들이 모두 이공을 변호하자 엄한 교지를 내려 호되게 질책하고는 사헌부 장관 이하를 모두 삭탈관작(削奪官爵)하고 이공도 파직하였다. 이에 승정원과 사헌부가 간쟁하자 상이 또 연달아 엄한 교지를 내렸다. 이때에 이르러 부군이 상소하여 견벌(譴罰)이 지나치다고 극언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늘 ‘나라에는 상형(常刑)이 있다. 작록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라.’라고 하교하셨는데, 애석하게도 전하의 이런 하교는 돌이킬 수 없는 실언입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는 존비가 현격하기 때문에 성신(誠信)으로 대해도 정의(情義)가 미덥지 못할까 걱정스러운데, 더구나 작록으로 붙들어 매고 형륙(刑戮)으로 위협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노하여 특명으로 체차하였다. 이에 승정원이 이전대로 복직시키도록 복역(覆逆)하였으나 부군은 끝내 면직되었다. 가을에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급제하여 말을 하사받고 얼마 뒤에 다시 정언이 되었으나 양주(楊州)로 귀근(歸覲)하겠다고 말미를 청하여 체차되었다.
겨울에 전적(典籍)에 제수되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갔다가 갑오년(1654, 효종5) 3월에 복명하였다. 도중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제수되었고 교리(校理)로 승진되었다가 이조 좌랑으로 옮겨 제수된 다음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으며 국조보감찬집낭청 겸 춘추관기주관(國朝寶鑑纂集郎廳兼春秋館記注官)에도 차임되었다. 가을에 시강원 사서, 교서관 교리, 한학 교수(漢學敎授)를 겸임하였다. 대사성 김공 익희(金公益熙)의 건의로 사학(四學)에 겸교수(兼敎授)를 두고 조정의 선비 가운데 문학이 뛰어난 자를 잘 가려 차임하게 되었는데, 부군이 중학겸교수 겸 시강원겸문학(中學兼敎授兼侍講院兼文學)이 되었다.
을미년(1655, 효종6)에 교리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이조로 돌아갔으며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호당은 폐지된 지 오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옛 모습을 되찾았는데, 부군이 맨 먼저 선발된 것이다. 태학사(太學士) 채공 유후(蔡公裕後)가 특별히 부군이 지은 시를 칭찬하며 의발(衣鉢)을 전할 뜻이 있었다. 9월에 이조와 시강원에서 체차되어 청풍(淸風)의 임소(任所)에 계시는 의정공을 찾아뵙고 겨울에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이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병신년(1656, 효종7) 봄에 다시 겸문학에 제수되었는데, 왕명에 응하여 상소해서 여덟 가지 일을 논하기를,
“성상께서는 비록 부지런히 학문을 강구하시지만 학덕을 닦아 향상시키는 실효가 없고, 비록 뜻을 세우셨지만 물욕에 흔들림을 면치 못하시며, 어진 이를 구하는 것이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정성과 예의가 극진하지 못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백성을 침해하여 사역하는 일이 여러 가지로 일어나고 있으며, 임금의 권세가 날로 높아져 상하가 서로 막히고, 언로(言路)가 두절되어 아첨하는 풍습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사기(士氣)를 꺾어 버려 선비들이 명분과 절개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형법을 엄하고 각박하게 하여 사람들이 수족을 둘 곳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곧이어 의정부사인 겸 춘추관편수관(議政府舍人兼春秋館編修官)으로 승진되었다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고쳐 제수되었으며,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사복시 정(司僕寺正), 시강원 겸보덕(侍講院兼輔德)을 역임하였다. 가을에 중시(重試)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는데, 작은형 퇴우(退憂) 부군(府君)도 함께 급제해서 함께 말미를 청하여 청풍으로 의정공을 찾아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조 참의(刑曹參議),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에 제수되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전보되었으며, 11월에 소명을 받들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정유년(1657, 효종8)에 우부승지로 승진되었다가 여름에 체차되어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제수되고 이조 참의로 전보되었다. 가을에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 순차적으로 벼슬이 올라 우승지에 이르렀다가 홍문관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되었으나 추고(推考) 중에 있다고 스스로 탄핵하여 면직되었다. 겨울에 다시 대사간에 제수되었는데, 동료와 함께 왕명에 응하여 진언해서 ‘하늘의 경계를 경외(敬畏)하고 학문을 강하고 몸소 실천하며 어진 이를 임용하고 간언을 들으며 인재를 아끼고 민생을 돌보는 실제적인 일’을 극론하자, 상이 답하기를,
“참 뜻 깊은 말이다. 나를 사랑한다고 할 만하다. 눈에 보이는 일 보이지 않는 일 할 것 없이 숨김없이 극언하였으니, 지성(至誠)이 없다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지문(鄭之問)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광해군(光海君) 때에 여러 차례 폐모소(廢母疏)를 올렸는데 그 말이 너무나 패악하여 나라 사람들이 자자하게 전송(傳誦)하였다. 그런 그가 뒤에 번번이 의술(醫術)을 수단으로 사대부 사이에 출입하자 식자들이 분통해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양사가 함께 그를 법으로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상은 따르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비로소 대신에게 내려 논의하게 하였는데, 대신은 의금부의 문서를 다시 보게 해 주십사 청하더니 얼마 있다가는 또 원래의 상소가 유실되었고 죄가 없음이 밝혀졌다고 아뢰었다. 이에 부군이 마침내 동료와 함께 스스로 탄핵하고는 ‘대신의 의론은 옳지 않으니, 의금부의 문적(文籍)은 근거로 삼을 가치가 없다.’고 극론하였다. 뒤에 상이 사헌부의 신하가 올린 계사에 답하면서 부군의 말이 지나치다고 심하게 질책하였다. 이에 부군이 또 스스로 탄핵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다가 이윽고 질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뒤에 또 대사간,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하여 면직되었다.
무술년(1658, 효종9) 2월에 평양 연위사(平壤延慰使)로 서로(西路)에 갔다가 돌아와 예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여름에 좌승지가 되었다가 부제학(副提學)으로 고쳐 제수되었는데, 퇴우공(退憂公)이 교리에 제수되자 부군은 형제가 함께 홍문관(弘文館)에 있으면 관아의 질서가 잡히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가을에 대사간으로 옮겨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의정공의 병이 심해지자 사직하여 체직되어서 병간호하는 데에 편리를 기했다. 이윽고 다시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동춘(同春)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사헌부 장관을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이에 부군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국가에서 중시하는 것은 정조(政曹)와 법부(法府)만 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전형(銓衡)을 송시열(宋時烈)에게 맡기셨으니, 풍헌(風憲)을 맡아 기강을 진작시키는 일로 말하면 송준길(宋浚吉)이 아니면 담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사직을 청했다고 하여 즉시 체직을 허락하셨으니, 억지로 시키지 않고 예우하는 뜻은 지극하다 하겠으나 관직에 어진 이를 임용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어떠합니까. 신은 즉시 명을 거두고 전에 내린 명을 다시 내리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자, 상이 그 말에 따라 즉시 송공을 사헌부의 장관으로 복직시켰다.
기해년(1659, 효종10) 설날에 경계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부터 지금까지 벌써 1기(紀)가 다 되어가니, ‘대국(大國)은 5년이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라는 것에 비하면 그 햇수가 갑절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하늘의 별은 한 바퀴를 거의 다 돌았는데 시운은 회복되지 않고 있으며, 전하께서 비록 젊기는 하나 춘추가 불혹을 넘으셨습니다. 옛말에 ‘사람은 젊음을 두 차례 누릴 수 없고 세월은 나를 위해 연장되지 않는다.’ 하였으니, 반드시 때늦지 않게 학덕을 닦아 향상시키셔야 합니다. 시기가 지난 뒤에는 부지런히 하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오늘부터 금을 긋듯이 명확하게 생각을 바꾸어, 젊은 시절이 지났다고 낙심하지도 말고 세도(世道)가 떨어졌다고 미리 포기하지도 마소서.
우(禹) 임금처럼 짧은 시간도 아끼고 날로 덕을 새롭게 했던 탕(湯) 임금을 본받으며, 뜻을 세우기는 화살을 쏠 적에 반드시 과녁을 향하는 것처럼 하고 학문에 힘쓰기는 목마를 때 물을 들이키듯이 하소서. 또 방탕한 욕망의 싹은 반드시 못물을 막듯이 빈틈없이 막고 분노가 터져 나오는 것은 반드시 산을 꺾듯이 강력히 억누르며, 하늘의 위엄을 경외하기는 하늘의 상제를 늘 마주 대한 듯하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기는 자신이 앓는 병을 치료하는 것처럼 하며, 얼음을 밟듯이 조심스럽게 왕위에 임하시고 둥근 구슬을 굴리듯 스스럼없이 간언(諫言)을 따르소서. 한 가지라도 생각의 착오나 일의 과오가 있다면 모두 깊이 반성하고 여지없이 고쳐 나가기에 힘써서 혹시라도 잘못을 거듭하여 자주 뉘우치는 일이 없게 하며, 고식적으로 대처하여 안일을 추구하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용납하지 마소서. 그리하여 단연코 요순을 반드시 본보기로 삼아 주 선왕(周宣王)과 한 광무제(漢光武帝)만큼은 꼭 되고야 말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우리나라 대업의 기틀이 장차 여기에서부터 닦여질 것입니다.
아, 추운 계절이 다하면 봄이 돌아오고 막힌 운수가 극도에 이르면 태평한 운수가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리고 세밑이 되어 음기가 모두 깎이면 하늘의 도가 반드시 회복되고 어려움에 처하여 깊이 뉘우치면 나라의 운명이 반드시 창성하는 것이니, 이는 임금이 어떻게 태도를 바꾸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정월 초하루는 한 해를 다시 시작하는 때라 만물이 다시 싹트고 겨울잠 자던 벌레들이 모두 깨어나니, 하늘과 땅이 모든 생물을 끊임없이 생성하는 이치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병환을 막 치르고 난 터라 경계하고 뉘우치는 마음이 바야흐로 간절하며 날마다 어진 선비를 상대하는 만큼 학덕을 닦는 공부가 더욱 향상될 것이니, 이 또한 성상의 조정이 새 출발할 때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선한 마음을 확충하고 이로 말미암아 선정(善政)의 교화를 펴서 마치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고 북두칠성의 자루가 동녘으로 도는 것처럼 시운이 돌아오면, 일을 알맞게 처리할 수 있어서 만물이 질서 있게 생육하는 묘리(妙理)에 천지와 더불어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상이 답하기를,
“매우 뜻 깊은 말이다. 옛날 위 무공(衛武公)은 나이 90에도 나태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내 비록 명민하지 못하지만 경의 말을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얼마 있다가 체차되고 우승지가 되었다.
5월에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승하하였는데, 산릉(山陵)의 일이 끝나자 보전(寶篆)을 쓴 노고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수리(修理)를 감독하던 중관(中官)이 공조 참판 이시매(李時楳)가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에 노하여 공조의 이속(吏屬)을 매질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관(臺官)이 논죄하고 그를 파직하여 횡포를 징계하십사 청하였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잠시 후에 이시매를 파직하고 추고하도록 다시 명하면서 임금의 명을 멸시하고 대관을 사주했다고 죄를 삼자 부군이 동료와 함께 반론을 달아 교지를 반환하였는데, 상이 노하여 엄한 비지(批旨)를 내리고는 이어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을 물었지만 부군은 거듭 물어도 거듭 대답하지 않았다. 한편 임금에게 신뢰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죄하였는데, 비지가 더욱 온당치 않았다. 이에 부군은 물러나서 또 상소하여 견책을 청하였는데, 이윽고 상도 뉘우치고 온화한 비지를 내려 위로하였다.
경자년(1660, 현종1) 여름에 우윤(右尹) 권시(權諰)가 상소하여 윤선도(尹善道)를 변호하고 또 말하기를,
“먼저 윤선도를 용서해 주어야 송준길(宋浚吉)을 타일러 돌아오게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때는 송공이 막 물러간 터라 상은 그를 돌아오게 할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즉시 승정원에 명하여 권시의 상소에서 말한 내용으로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이에 부군이 아뢰기를,
“윤선도의 음흉한 정상(情狀)은 여정(輿情)이 공분을 느끼고 있으며 양사(兩司)가 일제히 극률(極律)로 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말로 인해 한창 일어나는 공론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윤선도는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고 윤선도를 용서하지 않고 송준길에게만 유지를 전하는 것은 또 권시의 본의가 아니니, 전유하라는 명령은 봉행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권시의 상소 내용을 보면, 윤선도를 두고 할 말을 하는 선비라고 하였는데, 윤선도가 두 신하를 무함한 일은 그만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위로 선왕을 범한 패역스런 말까지도 할 말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가 이렇게까지 뒤틀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자, 상이 마침내 그 명을 거두었다. 그 뒤에 권시는 대간의 논죄를 받고 물러나 돌아갔다. 상은 모쪼록 머물러 있도록 전유하라고 사관(史官)에게 명했다가 당직 승지 박세성(朴世城)이 제때에 명을 봉행하지 않은 것에 노하여 그를 형리(刑吏)에게 내려 신문하게 하였다. 부군은 이때 기우제 지내는 곳에 있다가 일을 마치고서 즉시 상소하여 말하기를,
“어제 본원에 권시가 떠난다고 아뢰었습니다만, 신은 ‘권시가 공의에 배척당하고 있는 만큼 그의 거취는 상께 아뢸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상당히 머뭇거렸으니, 전유하라는 명이 내려진 뒤에 신이 본원에 있었다면 신도 박세성과 다름없이 즉시 봉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찌 감히 죄를 면하게 된 것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겨 뻔뻔스럽게도 구차히 자리에 눌러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뒤로 뭇 신하를 격의 없이 성의껏 대하셨는데 지금 갑자기 임금을 업신여기고 명을 거역했다는 것으로 박세성의 죄를 삼으셨습니다. 이에 본원의 동료가 명을 거두어 주십사 힘껏 청하자 도리어 비호한다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임금은 한 번 기뻐하고 한 번 성내는 것조차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한 만큼 오늘 이 일이 사방에 알려지면 필시 보고 듣는 사람들이 매우 놀랄 것이니, 이 점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신의 이 말은 감히 털끝만큼도 박세성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만 전하께서 만약 또 비호한다고 의심한다면 속히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고, 이튿날 입대(入對)하여 또 이러한 내용으로 아뢰는 한편 전지 가운데 지나친 말을 삭제하십사 청하였으나 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에 실록청 당상(實錄廳堂上)에 차임되고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임하였다. 7월에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게 되었는데, 의정공의 병이 심해져서 재차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승지 자리만 체차되었다. 8월에 대사성, 예조 참판에 제수되고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임하였으며 중간에 부제학이 되었다. 겨울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신축년(1661, 현종2)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으며, 명을 받들고 《효종실록(孝宗實錄)》을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에 봉안하고 11월에 복명하였다.
임인년(1662, 현종3) 1월에 동지의금부사를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이보다 앞서 지평 이지익(李之翼)이 이공 일상(李公一相)이 호서(湖西)의 군량미를 실은 배를 받았다고 논죄하였는데, 그 일이 매우 맹랑하였다. 부군은 그때 여러 대신과 함께 입대하여 그 일이 맹랑하다고 말했는데, 뒤에 조사해 본즉 과연 사실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지익은 다시 대간이 되어 전에 논죄했던 일을 더욱 강력히 주장하는 한편 붕당을 지어 임금의 눈을 가린다고 여러 신하를 비난하였다. 이에 부군이 상소하여 스스로 논죄하고, 이지익은 임금을 현혹하고 조정에 알력을 일으키는 자로서 바른 선비가 아니라고 극언했다. 이때에 이르러 이지익이 전의 일로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으면서 함답(緘答)에 “이일상을 비호하는 사람이 혐의쩍은 것을 무릅쓰고 옥사를 다스렸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부군을 가리킨 말이었다. 이에 부군이 거듭 상소하여 사직해서 체차되었다.
3월에 고관(考官) 후보자가 되었으나 병 때문에 소명에 나아가지 못하자 특명으로 파직되었다. 마침 문형(文衡)의 자리가 비어 있었는데, 이때 노성(老成)한 선배들 가운데 문학으로 이름난 사람이 매우 많았고 부군은 나이가 가장 젊은 데다 또 파산(罷散)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중망이 모두 부군에게 쏠리자 마침내 특별히 서용되어 양관(兩館) 대제학에 제수되고 규례에 따라 겸임을 맡았다. 부군은 세 번 상소하여 고사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5월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가 도승지, 이조 참판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가을에 예조 판서로 발탁되어 제수되었는데, 겸임은 모두 이전과 같았다. 이에 부군이 더욱 두려운 마음으로 사양해서 세 번 상소하여 힘껏 사직하였으나 상은 번번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릴 뿐 윤허하지 않았다. 뒤에 또 패초(牌招)하자 부군은 비로소 할 수 없이 나가 사은(謝恩)하였다. 겨울에 청(淸)나라 사신이 오자 명을 받들고 의주(義州)에서 영접하고 전송하였다. 정공 지화(鄭公知和)가 이때 평안 감사였는데, 뒤에 돌아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아무개 공(公)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도 온 도의 사람들이 저절로 두려워했으니 기이하다.”
하였다.
계묘년(1663, 현종4)에 도총부 도총관, 지의금부사를 겸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퇴우공(退憂公)이 그때 대사간으로 있어서 부군은 형제가 동시에 양사의 장관을 나란히 맡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사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이윽고 어떤 일로 인하여 스스로 물러났다가 다시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이조 판서에 옮겨 제수되었는데, 대사간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비록 재주와 명망이 있기는 하나 나이가 너무 젊습니다.”
하여, 마침내 개차(改差)의 명을 받았다. 이윽고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여러 차례 사직하고 아울러 문형도 해임시켜 주십사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부군은 동료와 함께 왕명에 응하여 차자를 올려서, 성상의 학문을 부지런히 닦고 신하들의 실정을 통찰하며, 어진 선비를 예우하고 언로를 넓히며, 사정(邪正)과 음양의 구분을 엄격히 하고 희로(喜怒)와 공사(公私)의 실마리를 잘 살피며, 윗사람의 기득권을 줄여 아랫사람에게 혜택을 베풀고 형벌을 신중히 적용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며, 뭇 신하들을 독려하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는 등 모두 아홉 가지의 일을 말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간원이 조사(朝士)를 욕보인 내관(內官) 양달원(梁達源)을 논죄하고 법관으로 하여금 심문하게 하십사 청하였는데, 상이 처음에는 그를 파직하고 추고하라고 명하였다가 양달원이 함답(緘答)하여 스스로 해명하자 사헌부에 내려 조사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에 부군이 ‘이 일은 본디 조사할 만한 점이 없을 뿐 아니라, 조사한다는 것 자체가 대각을 불신하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복계(覆啓)하여 곧장 형률을 적용하십사 청하였다. 상은 노하여 엄한 유지를 내려 꾸짖고 처음 내린 명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부군이 동료들을 이끌고 가서 아뢰기를,
“양달원이 사대부를 욕보인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함답의 내용을 교묘하게 꾸며 사실을 왜곡하고 은폐한 까닭에 전하께서 의혹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사하여 처리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셨지만 풍헌(風憲)을 담당하는 신들은 결코 구차히 명을 봉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복계했던 것인데 전하께서는 또 근거 없다고 책망하셨으니, 이는 스스로 해명한 말을 공론보다 신뢰하고 법을 집행하는 신하를 환관보다 경시한 것입니다. 신들이 비록 지극히 보잘것없기는 하나 언론의 책임을 맡은 이상 만약 누군가에게 법을 어기고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당장 지적하여 견책하고 파직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께서는 신들을 그러한 직책에 두고서 뜻을 굽혀 순종할 수 없는 일을 따르도록 강권하고 계십니다. 밝으신 성상께서 대각을 이 같이 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는 이어 파면시켜 주십사 청하였다. 이에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려 부군을 출사시키도록 청하였다. 부군은 소명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재차 스스로 탄핵하여 체차되었다. 이윽고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형옥(刑獄)의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11월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재차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에 명을 받들어 의주까지 수행하고 갔다가 돌아왔다.
갑진년(1664, 현종5) 4월에 정청(政廳)에서 엄한 교지로 견책받고 파직되었다. 이보다 앞서 김만균(金萬均)이 할머니의 원수를 피하여 청나라 사신을 만나지 않은 일로 서공 필원(徐公必遠)이 우재(尤齋) 송 문정공(宋文正公)과 논쟁하며 여러 차례 함부로 비난하였는데 옳지 않은 말이 많았다. 이에 그를 탄핵하자는 의론이 대각에 상당히 일었으나 윤형성(尹衡聖), 조원기(趙遠期)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반대하며 버티었다. 그중에서도 조원기가 더욱 구차하게 오락가락하며 시비에 대한 확고한 주견이 없자 그를 비판하는 공론이 일었다. 인사 담당 부서에서는 앞서 이미 윤형성을 지방의 수령 후보자로 올렸었다. 이때에 와서 또 조원기를 통진 현감(通津縣監)의 후보자로 올리자 상이 노하여 특명으로 조원기를 지평에 제수하고 또 이규령(李奎齡), 조성보(趙聖輔)를 북로(北路)의 고을로 좌천시켰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일찍이 윤형성, 조원기를 논죄하려 했던 자들인데 이날 인사 개편에서 또 모두 대간의 후보자로 올랐기 때문에 상이 특명으로 좌천시킨 것이다. 그러고는 엄한 교지를 내리기를,
“인사 담당 부서의 관원이 거리낌 없이 방자하여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는 것이 요즘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하였다. 이에 승정원과 홍문관이 뵙기를 청하여 힘껏 간쟁하고 대간도 그러한 말을 하였다. 임금은 모두 듣지 않다가 이윽고 대신의 말로 인해 체직만 명하고 마침내 부호군(副護軍)에 제수하였으며 겸직은 이전대로 두었다. 부군은 감히 도성 안에 있지 못하여 즉시 한강으로 나갔다. 이윽고 석실서원(石室書院)에 갔다가 결국은 과천(果川)의 반계(盤溪)에 우거(寓居)하였다. 그 뒤에 동춘(同春) 송공(宋公)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인사 담당 부서의 관원들은 모두 연소한 명사들로서 갑자기 은총 어린 발탁을 받고는 한창 명분과 절의를 갈고 닦아 청류(淸流)를 밀어주고 탁류(濁流)를 누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향 각지에서 그 풍채를 상상하며 우러르고 있으니, 단지 정성스럽고 부지런하다는 말만 들었을 뿐 제멋대로 하는 일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성상께서 노한 나머지 공정하지 못한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하였다.
6월에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특별히 중신을 관북(關北)에 보내어 과거를 설행하여 인재를 뽑자는 조정의 의론에 따라 부군이 의정부 우참찬으로서 명을 받아 가게 되었는데 조금 있다가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10월에 일을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도중에 도내의 군민(軍民)이 겪는 고통스런 폐단을 묻고 돌아와 모두 조목조목 아뢰었는데, 임금이 특지(特旨)를 내려 그에 대한 대책을 대부분 시행하였다. 백헌(白軒) 이상 경석(李相景奭)이 뒤에 의정공을 만나 말하기를,
“이조 판서가 올린 북로에 대한 서계(書啓)를 보았는데, 참으로 재상감입니다.”
하였다. 부군이 또 말하기를,
“북로는 왕업을 일으킨 중요한 지역인데도 무비(武備)와 국경 수비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만약 급박한 비상사태가 생긴다면 철령(鐵嶺) 이북은 우리나라 땅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큰 폐단은 육진(六鎭)이 매우 멀리 있어 백성의 실정이 알려지지 않는 가운데 교활한 관리와 탐욕스런 장수가 거리낌 없이 수탈하는 것이다. 크게 변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고는 마침내 상소하여 역대 임금들이 북로에 적절히 지방관을 배치하여 백성들을 위무하던 방책을 낱낱이 말씀드리고 청하기를,
“북도 관찰사를 따로 두어 북병사를 겸하게 하거나, 만약 이것이 불편하다면 문신을 북병사로 삼아 순변사(巡邊使)를 겸하게 하거나, 이것도 불편하다면 순찰사의 행영(行營)을 성진(城津)에 설치하여 북병사가 겨울철에 종성(鍾城)의 행영에 들어가 주재하는 예처럼 하게 하소서. 다만, 방백(方伯)이 행영에 오랫동안 머물 수 없으므로 별도로 순찰사 종사관을 설치하거나 도사(都事)를 적임자로 차임해서 항상 그곳에 머물러 주재하며 때때로 육진을 순찰하여 변방의 실정과 백성의 폐막(弊瘼), 수령과 변장(邊將)의 치민(治民) 사업과 행실을 보고 듣는 대로 방백에게 알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작은 것은 방백이 재량껏 결단하여 처리하고 큰 것은 역말로 조정에 아뢰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떤 것을 시행할지는 조정에서 선택하여 시행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또 특별히 대신 한 사람을 정하여 북로의 일을 전담하게 하십사 청하면서 아울러 무예에 뛰어난 자들을 선발함으로써 무예를 권장하고, 무기를 만들 재료를 지원하고, 고공(雇工)과 보인(保人)의 오래된 폐단을 헤아려 혁파하고, 여러 읍에 필요한 재용을 넉넉히 지급하고, 백성의 절행(節行)을 표창하여 권장하는 등 모두 네댓 가지의 일을 언급하였는데, 그 큰 요지는 백성들의 옹색한 형편을 다소 펴주고 민심을 결속하여 역대 임금의 기업(基業)을 실추시키지 않는 데에 있었다. 그 상소에 말하기를,
“역대의 제왕들은 모두 국가의 기업을 처음 일으킨 곳을 중시하였으니, 한(漢)나라의 풍패(豐沛)와 당(唐)나라의 진양(晉陽)이 그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 있어 북방은 애써 경영하여 영토를 넓힌 곳이므로 그 중요도가 풍패나 진양에 비할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 줌의 흙, 한 사람의 백성도 버릴 수 없는 아까운 것입니다. 역대 임금이 애써 얻었는데 결국 자손이 소홀히 관리하여 잃어버린다면 옛 임금의 뜻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의정부에 내려 논의하게 하였는데, 한두 가지 작은 일만 채용하고 가장 큰 세 가지 일은 모두 내버렸다. 부군이 또 상소하여 거듭 논하였으나 의정부에서는 끝내 변통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 나머지 시행되지 못하였으니 식자들이 유감스러워하였다.
을사년(1665, 현종6) 설날 아침에 압운(押韻)한 말로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인심(仁心)을 넓히기는 마치 봄에 새싹이 돋아나듯이 하고, 치도(治道)를 회복하기는 북두칠성 자루가 돌듯이 하며, 사욕을 막아 버리기는 마치 얼음이 녹듯이 하고, 신하들을 책려하기는 마치 우레가 겨울잠 자는 벌레를 깨우듯이 하며, 교화는 단비처럼 베풀어 더러운 풍속을 확 씻어 버리고, 은택은 따뜻한 볕처럼 베풀어 추운 골짜기까지 두루 미치게 하며, 날마다 새롭게 가다듬고 또 새롭게 가다듬어 하늘과 덕이 합치되게 하소서.”
하고, 그 끝에 또 말하기를,
“선왕이 다스릴 적에 신은 새해를 맞이하여 경연(經筵)에서 말씀을 올린 적이 있는데, 효묘께서 가납하시고 이어 위 무공(衛武公)이 90세가 되어서도 나태하지 않은 일을 떠올리며 스스로 자세를 가다듬으셨습니다. 효묘의 이러한 뜻을 잘 이어받는 것은 실로 전하의 몫입니다.”
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여 상이 칭찬하고 받아들였다.
좌랑 홍만용(洪萬容)이 관원 후보자를 정하는 일로 아전(亞銓)과 다투고 매우 강력하게 버티자 아전이 견디지 못하고 상에게 아뢰어 일러바쳤다. 이에 상이 노하여 홍만용을 형리에게 내렸다. 부군은 이때 마침 질병을 이유로 인사 개편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다투는 일이 자신과 상관이 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스스로 논죄하고는 이어 힘주어 말하기를,
“홍만용을 처벌해서는 안 됩니다. 그를 처벌하면 인사 행정의 체모를 무너뜨려서 훗날의 폐단을 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홍만용은 처벌을 면하였다.
4월에 상이 온천에 행차하였는데 어가를 호위하고 다녀왔다. 이때 처음으로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을 설치하였는데, 부군이 우재(尤齋), 동춘(同春) 두 선생과 함께 선발되자 거듭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어가를 호위한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가 대간의 계사로 인해 취소되었다. 겨울에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를 겸임하였다.
부군은 인사 담당 부서의 장관이 된 뒤로 전후에 걸쳐 여러 차례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는데, 병오년(1666, 현종7) 봄에 또 세 번 정고(呈告)하고 여섯 번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상은 번번이 돈독히 면려할 뿐 윤허하지 않았다. 부군은 인사 행정을 함에 있어 인물됨을 잘 살펴 후보자를 정함으로써 요행으로 등용되는 자가 없게 하였는데, 특히 법도를 잘 지켜 한 번도 자신의 사사로운 뜻으로 빼버리거나 넣어준 적이 없었다. 하루는 동료가 부군이 인사 개편에 참여하지 않은 틈을 타서 부군을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에 제수하였는데, 부군은 이수광(李睟光)의 고사를 끌어대며 매우 강력하게 사직하였다. 이에 상이 그 뜻을 꺾지 못하고 윤허하였다.
이때 원자의 나이가 겨우 6세였는데, 부군은 매번 진강(進講)할 때마다 안색이 온화하고 예모가 공손하고 성의가 간절하고도 지극하였으며 물러나서는 집안사람이나 자제들과 말할 때에도 흐뭇함이 안색과 음성에 넘쳐흘렀다. 일찍이 사직소를 올리는 기회에 보양하는 도를 진달하기를,
“옛날 성왕(聖王)이 태자를 가르칠 적에는 태부(太傅)가 앞에 있고 소부(少傅)가 뒤에 있으며 들어오면 보(保)가 있고 나가면 사(師)가 있어서 지각이 막 생기는 유아기 때부터 효(孝), 인(仁), 예(禮), 의(義)의 도리를 깨우쳤습니다. 그리하여 거처하고 출입할 때에 돌보지 않는 일이 없었고 의복과 음식에도 모두 잠규(箴規)를 두었으니, 요는 한 걸음도 바른 사람 곁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 잠시라도 반드시 정도를 따르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제도는 옛날과 판이하게 달라서 안팎이 단절되고 사와 부도 정해진 때에만 나아가 뵙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훌륭한 덕을 갖춘 선비가 원자 보양의 임무를 맡는다 하더라도 보양한 효과가 미미하지 않을까 걱정인데 더구나 신같이 보잘것없는 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가령 신들이 날마다 나아가 뵙는다 하더라도 궁중에서 일어나는 일과 평상시 생활에 대해서는 미처 알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이는 오직 전하께서 일에 따라 이끌어 주고 옳은 방법으로 인도하셔야 하는데, 안일에 젖게 해서는 안 되고 지나치게 구속해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관대하게 보아주는 것과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 이 두 가지의 도리를 다해야 게을러져서 오래하지 못하는 병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을 따져 본다면 그것은 또 전하께서 몸소 실천하심으로써 가르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대체로 전하의 한마디의 말씀과 한 가지의 행동도 모두 원자가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실로 아무리 소소한 일일지라도 삼가고 어디에 있든지 늘 공경하여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무슨 일이든 하늘의 법칙을 따라 모두 모범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심(道心)을 강조하신 성조(聖祖)의 훈계큰 사업을 이루려던 선왕(先王)의 뜻을 늘 유념하고 실천하여 선조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가법을 이루셔야 합니다.
또한 반드시 궁중 출입을 엄격히 하여 사사로이 통하는 길을 막아서 교묘한 말로 아첨 떠는 사람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원자가 진기한 노리갯감을 접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근본을 단정히 하고 근원을 맑게 한다면 후세에 훌륭한 계책을 물려주고 자손을 유복하게 하는 길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될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상의 몸에 유익한 점이 또한 어찌 작겠습니까.”
하자 상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니 과인을 경계시켜 일깨워주고 원자를 보양하는 뜻이 지극하다. 나라를 염려하고 임금을 아끼는 충성심을 참으로 잘 알 수 있으니, 감탄스럽다.”
하였다.
3월에 상이 재차 온양(溫陽)으로 행차하였는데, 어가를 호위하고 다녀왔다. 가을에 본직을 강력히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이윽고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가 대사헌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겨울에 날씨가 계속 따뜻하기만 하고 우레가 치자 부군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임금의 한 가지 행실, 한 가지 사업도 천지와 통합니다. 이 때문에 행실에 선악이 있으면 기(氣)가 각기 유별(類別)로 응합니다. 주(周)나라 말엽에는 추운 때가 없었으니, 이는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졌기 때문입니다. 재변을 가지고 견강부회하는 것이 비록 한(漢)나라 유자가 억지로 끌어다 붙인 설에 가깝기는 합니다. 그러나 만약 전혀 상관이 없다고 여겨 소홀히 하고 경계하지 않는다면 희풍(熙豐) 연간의 소인배들이 주장했던 ‘외경할 가치가 없다’는 설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천둥은 하늘이 노한 것이고 추위와 더위는 하늘의 명령이니, 신은 전하의 희로(喜怒)가 중정(中正)을 얻지 못하고 전하의 정책과 법령이 해이함을 면치 못하였기 때문에 하늘이 이런 식으로 응한 것이 아닌가 내심 염려스럽습니다.
지금 우려스러운 일을 낱낱이 거론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신의 걱정은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있으니, 하늘의 뜻에 부응하여 재변을 끝내는 길 역시 멀리서 구해서는 안 됩니다. 전하의 마음속이 공명정대하고 광명(光明)하여 치우치거나 가려진 것이 없으면 곧 상서로운 별과 구름이 나타나게 되고 전하께서 정책과 법령을 행하실 적에 완급과 경중이 각기 질서에 맞으면 곧 때에 맞게 추위와 더위가 찾아오게 되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반성하여 하늘의 뜻에 부응하는 실제적인 일로 삼으셔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타고난 자품이 인후(仁厚)하고 도량이 넓어 뭇 신하가 흠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전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있어 갑자기 진노하시면 의리가 발로되는 점은 늘 적고 혈기에 치우치는 점이 늘 많아 대신이 간쟁해도 소용이 없고 대각의 말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점차 남을 이기기를 좋아하고 편협하게 얽매이는 병통으로 변화되어서, 정사를 해치고 일을 해치는 문제로 발현되는가 하면 일이 끝나 노기가 풀린 뒤에도 절대로 뉘우치는 뜻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신하들의 말이 간혹 성상의 뜻을 거스르면 당장 뜻밖의 교지를 내리시는데, 심지어는 신하가 차마 들을 수 없는 말까지 하시어 신하들로 하여금 억장이 무너지고 사기가 떨어져 어쩔 줄 모르게 하시고는 명분과 의리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단단히 얽어매시니, 어찌 성심을 미루어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기억하건대, 전에 신이 홍문관의 장관으로 있을 적에 송시열과 함께 경연에 입시했는데, 송시열이 마음 다스리는 방도를 상세히 말씀드리자 선왕께서 하교하기를, ‘나의 병통은 내가 스스로 알고 있으니, 격노할 때에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 늘 문제이다. 요사이 한 가지 방법을 터득하였으니, 성날 적에 그 노여움을 곧 잊어버리고 오래 있다가 생각해 보면 비로소 그 잘못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노력하면 아마도 허물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선왕께서는 이처럼 정신을 집중하여 사심을 극복하는 공부가 요순의 그것과 똑같았습니다. 신은 지금까지도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공손히 외며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습니다. 또한 선왕의 바른 심법(心法)을 추념하며 밝으신 성상께서도 이와 같이 하시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마음을 바르게 하려면 학문을 익혀 이치를 밝히는 것이 중요한데,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뒤로 강석(講席)을 여신 일이 무척 드뭅니다. 비록 옥후(玉候)가 많이 편찮으시어 접견이 여의치 못한 탓이기는 하나, 그렇더라도 정자(程子)가 논한 것처럼 정무를 마치고 난 뒤 을야(乙夜), 병야(丙夜) 사이의 한가한 겨를에 신하를 불러 편안히 학문과 시사를 물으실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정무에 부지런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본디 역대 임금들이 전한 가법(家法)이니, 후세에 계책을 물려주기 위해 만든 규정과 제도가 자세히 구비되어 있습니다. 곧, 조참(朝參)이 있고 상참(常參)이 있고 윤대(輪對)가 있고, 조강(朝講)ㆍ주강(晝講)ㆍ석강(夕講) 외에 또 야대(夜對)가 있으니, 한순간도 태만한 때가 없게 한 뜻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어찌 전하께서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사서를 보면 전대(前代)의 제왕은 모두 근심과 근면함으로 나라를 얻었는데 후사(後嗣)에 와서 모두 태만과 소홀함으로 나라를 잃었습니다. 신은 이를 보고는 책을 덮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또 말하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궁중을 잘 다스리려면 반드시 먼저 궁중 출입을 엄격히 단속하였는데, 오늘날에는 궁중 출입이 엄격히 단속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임금의 은혜와 사랑에 가려져 예법이 혹 지켜지지 않기도 하고 제한이 느슨해져 부정한 길이 쉽게 열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궁 안의 말이 밖으로 나가고 있으니, 그렇다면 밖의 말이 궁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결코 없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궁가(宮家)의 여악(女樂)이 궁중에 드나든다는 소문이 여염에 자자한데, 신은 그 말의 허실을 막론하고 이런 소문이 있게 만든 것 역시 궁중 출입이 엄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사방 백 리의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은 지극히 미천한데도 관아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지 않으면 그 정사를 알 만합니다. 더구나 당당한 왕자(王者)의 존엄함으로 궁중을 엄하게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조정을 바르게 하고 사방을 바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궁중의 일은 비밀에 부치는데 바깥사람이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지 마시고,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써서 맑고 밝은 다스림을 드러내소서.”
하고, 끝에 또 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임금의 덕에 대해 말하자면 마음을 미혹시키고 뜻을 잃게 하는 아름다운 음악이나 여색, 재미난 유람이나 사냥도 없고, 조정에 대해 말하자면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권세를 부려 재앙을 부르는 간신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늘의 노여움이 날로 깊어지고 백성의 원망이 날로 심해지고 나라의 형편이 날로 위태로워지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신은 생각건대, 재미난 노리개가 덕을 잃게 할 수는 있으나 그러한 습성을 고치면 덕을 닦을 수 있고, 간신이 나라를 병들게 할 수는 있으나 그러한 자를 제거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전하께서 비록 노리개에 빠지는 병통이 없기는 하나 원기 왕성하게 나아가는 뜻도 없고, 조정에 비록 간신의 해가 없기는 하나 충성을 다하는 현신(賢臣)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활력이 없이 축 처져 수습할 수가 없으니, 약을 써서 병을 치료하는 것이 저 두 가지를 치료하는 것에 비해 도리어 어렵습니다. 신은 이 점이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전하께서 큰일을 하지 않겠다면 그만이지만 참으로 큰일을 할 뜻이 있다면 상황을 변화시킬 기틀은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어찌할 수 없는 때라거나 혹 힘이 부족하다고 핑계하지 마시고 마치 화살이 과녁을 향하여 날아가듯 꿋꿋한 심지로 용맹하게 나아가서, 혹시라도 꽁무니를 빼며 핑계 삼는 뜻이나 특정인을 편파적으로 우대하는 생각이 털끝만치도 그 사이에 섞여들지 못하게 하소서. 그러한 자세로 조정의 선비들을 독려하고 기강을 진작시킨다면 재앙을 길상(吉祥)으로 바꾸고 꽉 막힌 운수를 반전시켜 확 트인 운수로 돌이키는 방도가 실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며칠 뒤에 또 우레가 치는 이변으로 말미암아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분발하고 진작하여 안으로는 은미한 한 마음을 살피시어 조금이라도 편파적으로 얽매이거나 이욕(利欲)을 좇는 사심이 있거든 반드시 남김없이 끊어 버리고, 밖으로는 말단적인 사업과 행위를 살펴 백성을 병들게 하거나 정사에 누를 끼치는 것이 있거든 반드시 주저하지 말고 모두 철저히 고치소서. 그리하여 요컨대 한 가지 행실, 한 가지 사업도 모두 하늘의 법칙에 부합하게 하소서. 또한 대신과 삼사(三司), 경(卿)의 반열에 있는 신하들을 자주 불러 재앙을 그치게 할 방도를 널리 묻고, 바람처럼 빠르고 우레처럼 맹렬하게 조치하고 잘못을 고치소서.”
하자,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가납하기를,
“내 마땅히 경의 말을 명심할 것이니, 경은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직임에 힘써서 과인을 보필하라.”
하였다. 이튿날 상이 삼공(三公)과 구경(九卿), 삼사를 불러 정사에 대해 물었는데,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어제 대사헌과 홍문관의 차자를 보니 성상의 덕에 매우 절실한 내용이었습니다. 전하께서도 그런 줄을 아십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나도 안다.”
하였다. 부군이 이어 아뢰기를,
“신이 전에 논한 궁중 출입에 대한 일은 여염에 전하는 말이 이를 데 없이 자자하니, 신이 말씀드린 것은 오히려 미진합니다. 다만 여악이 궁중에 출입하는 것은 매우 놀라웠기 때문에 감히 대략이나마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삼가 듣건대, 왕자와 왕손이 더러 평상복으로 궁중에 출입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궁중에서 유숙하기도 한다는데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주역(周易)》에 윤리를 바르게 하고 애정을 돈독히 하는 것을 가인(家人)의 도리라고 하였습니다. 인지상정으로 말하자면 집안사람에 대한 도리는 애정보다 앞서는 것이 없는데 굳이 윤리를 바르게 하는 일을 우선시한 것은, 윤리가 바르지 않으면 애정도 끝까지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예로부터 임금은 재변을 당하면 자신을 돌아보며 수양하였는데, 이는 한 가지 정사, 한 가지 일로 즉시 하늘의 노여움을 풀 수 있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오늘 한 가지 선정(善政)을 행하고 내일 한 가지 선한 일을 행하여 부지런히 노력하여 조금도 간단(間斷)이 없으면 자연히 감응의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학문의 목표는 말단적인 훈고(訓詁)에 있지 않으니, 선유(先儒)들은 책은 책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따로 놀아서 책을 읽은 뒤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특히 제왕의 학문은 필부의 학문과 같지 않아서 한갓 문자를 강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의리를 실천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행동거지와 언행에 늘 체험하기를 잊지 않는데, 이렇게 하면 한 장(章)을 읽으면 한 장의 유익함을 얻고 두 장을 읽으면 두 장의 유익함을 얻어서 바야흐로 강학의 실효를 볼 수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달리 덕을 실추하는 일은 없으나 다만 정책과 법령을 느슨하게 행하는 잘못을 면치 못하십니다. 안일은 임금이 경계해야 할 중요한 점이니, 예로부터 나라를 망친 길이 한 가지가 아니나 그 가운데 안일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여러 신하가 늘 이런 말씀을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전하께서는 아직까지 그 병통을 철저히 고치지 않고 계십니다. 전하께 이미 이러한 병통이 있기 때문에 온갖 일이 날로 더욱 심하게 해이해지고 뭇 관원들이 날로 더욱 태만해지고 있으니,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받는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무슨 일을 해내고 싶으시다면 반드시 이러한 병통을 제거하셔야 하니, 그런 뒤에야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날 조정에서 백성의 고통을 염려하여 요역을 줄여주는 조처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늘 경비가 충분치 않아 밀린 요역을 대대적으로 탕감해 주지 못해서 실질적인 혜택이 널리 미치지 못하므로 백성들이 원망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 씀씀이를 절제해서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지 않고 한낱 백성의 부담을 줄여주기만을 일삼는다면 이런 일은 오래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이 정치를 논할 적에도 씀씀이를 절제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 것입니다. 신은 안으로 궁중에서부터 반드시 비용을 아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힘써 절약하시기를 바라니, 오직 이렇게 해야만 재용이 넉넉해져서 아랫사람들에게 보태주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인재 모으기를 급선무로 삼는 한편 성의와 예를 더욱 잘 갖추어 지방에 있는 유현(儒賢)을 불러들이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받아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과 다르게 일을 논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탄핵하여 면직되었다가 우참찬 겸 세자좌빈객(右參贊兼世子左賓客)에 제수되었다. 형조 판서에 고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에 다시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정미년(1667, 현종8)에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본직을 사직하고 이어 말하기를,
“신은 전에 민정중(閔鼎重)과 함께 인사 행정을 하는 자리에 있다가 함께 엄한 교지를 받들었는데, 그 뒤에 민정중은 북로(北路)로 나가 백성을 다스리게 되었지만 신은 곧 예전의 직임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민정중에게 변방을 맡긴 것은 견책하고 처벌하기 위해 좌천시킨 것이 아니었고, 임기가 끝난 뒤에 계속 연임시킨 것은 또 백성의 뜻에 따른 조처임을 잘 압니다. 그러나 내직과 외직은 고되기와 직임의 경중이 자별한데 신만 요직에서 유유자적 지내고 민정중은 오랫동안 지방에서 수고하며 4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신이 어찌 감히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은 면려하는 뜻으로 유시할 뿐 윤허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영남 유생 황연(黃壖)이 상소하여 재야 유현과 조정에 있는 두세 신하를 강력히 비난하는 가운데 특히 부군에 대해 추한 말로 욕하여 심지어는 임금을 위협하여 제어하고 대각에게 아첨하여 빌붙는다고 말하였다. 이에 부군이 거듭 상소하여 해직을 청하였으나 상은 면려하는 뜻으로 유시할 뿐 윤허하지 않았다.
성균관 유생 심유(沈濡) 등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성균관의 유생들이 이미 이 일로 상소했었다. 상은 심유 등이 그때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할 때에 불참했던 것을 보면 그 뜻이 본디 사태를 관망하는 데에 있었는데 지금 특별히 이런 상소를 올려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는 친히 부군에게 유시하여 벌을 내리게 하였다. 그러나 부군은 그러한 조처가 옳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물러나 또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역대 임금들은 선비를 마치 부모의 사랑을 믿는 응석받이, 한창 자라나는 초목처럼 대우하여 사랑하고 지켜주고 붙들어 주었으며 그러고도 혹시 손상되지 않을까 염려하였으니, 수백 년 동안 그 훌륭한 일과 아름다운 말들을 사람들이 보고 들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학문을 시작하는 후생들이 옛일을 익숙히 듣고는 자신의 재목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헤아리지 않고 걸핏하면 역대 임금들이 선비를 대했던 예로 자신들을 대해 주기를 성상께 바라곤 하는데 늘 일을 당해서는 번번이 사기가 꺾여 의기소침해진 나머지 떨쳐 일어서지 못하곤 하니 어찌 크게 우려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처음에 상소에 불참했다가 뒤에 말을 한 것은 실로 전후의 행동이 어긋난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을 알면서도 포용한다면 성상의 덕이 더욱 빛나서 선비들이 흥기할 수 있을 것이니, 가혹하게 적발하여 꾸짖는 것은 성스러운 조정의 큰 체모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 말을 받아들여 심유 등이 마침내 죄를 면하였다.
3월에 상이 인사 담당 부서에서 최일(崔逸)을 승지 후보자로 올리지 않은 것에 노하여 엄한 교지를 내려 낭관 2인을 모두 지방의 찰방(察訪)으로 좌천시켰다. 이에 부군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최일은 일찍이 간관으로 있을 때 여러 신하가 쫓겨나자 임금의 위엄이 무서워서 끌어대서는 안 되는 혐의를 억지로 끌어대어 책임을 교묘히 회피하는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신의 망녕된 생각으로는,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을 당하여 교묘히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그 습성이 매우 가증스러우므로 좌천하는 벌을 내리지 않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혼자 인사 행정을 하던 날 최일을 가장 먼저 어천 찰방(魚川察訪)의 빈자리에 후보자로 올려서 대각의 후보자로 오르지 못하게 하였으니, 승지 후보자로 올리지 않은 것과 비교해 볼 때 죄가 갑절이나 큽니다. 오늘날의 일은 신이 지은 죄가 가장 큰데 도리어 낭관들만 견책받고 내쫓기게 하였으니, 신이 뻔뻔하게도 구차하게 눌러앉아 있다면 염치에 비추어 볼 때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취할 도리는 속히 보잘것없는 신을 내쫓고 이 직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교체하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관원 선발이 성상의 마음에 흡족하게 되고 조정이 진정될 수 있으며 신도 큰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뒤에 대신도 연달아 이렇게 말하자 상이 마침내 그 명을 거두었다.
윤4월에 가뭄이 심하자 상이 하교하여 대책을 구하였는데, 부군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전하께서 자신을 책망하며 정전(正殿)을 피하시고 친히 뭇 옥사를 처결하시자 지극한 정성이 사무쳐 단비가 내렸으니, 감응의 효과가 어김없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가 조금 내려 대지를 충분히 적시기 전에 밝은 해가 곧 떠올랐으니 어찌 하늘의 마음에 아직도 불쾌한 점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신은 삼가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난겨울에 우레가 치는 이변이 있었을 적에 전하께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경동(驚動)하여 즉시 경연(經筵)에 납시고는 신하들을 나오게 하여 재변을 그치게 할 방책을 널리 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때를 놓치지 않을까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신속히 백성을 돌보고 폐단을 제거하셨으니, 중외(中外)의 백성들이 모두 흠앙하며 ‘하늘의 노여움을 풀 수 있고 훌륭한 정치를 이룩할 수 있다.’라고들 하였습니다. 간간이 어떤 언관들은 전하의 그러한 조치를 눈앞에서 생색만 내는 겉치레로 규정하였는데, 신은 내심 통탄하며 생각하기를, ‘우리 임금은 못한다고 단정 짓는 것은 임금을 해치는 것에 가깝지 않은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경연이 곧 폐쇄되어 신하들이 나아가 뵙는 일이 드물어지고 정책과 법령, 언행이 한결같이 이전의 투식을 따랐으니, 신은 지난날 언관들이 지금의 사태를 예견했던 것임을 비로소 알고는 신이 도리어 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음을 스스로 슬퍼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늘 겨울에 우레가 치던 날처럼 하늘을 경외하셨다면 필시 재변이 오늘날 다시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하늘의 뜻에 응하는 방도는 또 지난날 취했던 겉치레의 조치 정도에 불과한데 마침내 한 번 비가 왔다고 자족하여 하늘을 받드는 정성을 거둔다면 훗날 지금을 보는 것이 지금 과거를 보는 것만도 못하게 되지 않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이어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마음을 바르게 하며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간언을 따르는 일을 논하면서 중요하게는 지극한 정성을 근본으로 삼았는데,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지금 조정의 신하들이 충성스럽게 보필하고자 하는데도 임금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전하께서 자신을 돌아보고 수양하는 도를 다하려고 힘쓰시는데도 상제(上帝)를 감응시키지 못하는 것은 정성이 지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하가 함께 자신을 돌아보고 수양하면서 지극한 정성이 지속된다면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효과를 이루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가납하는 한편 힘써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을 진출시켜 나랏일에 도움이 되게 하라고 유시하였다.
5월에 이석복(李碩馥)이라는 자가 황연(黃壖)에 이어 상소하였는데, 무함이 더욱 무자비하였다. 이에 부군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파면을 청하였다. 이때 일부의 사람들이 사류(士類)를 해쳐 조정을 엎으려고 모의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무뢰한(無賴漢)이 가명으로 투서하여 임금의 마음을 떠보았는데, 특히 부군이 인사 담당 부서에 있는 것을 꺼려 기어코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도 그러한 실정을 통촉하였기 때문에 비답에 이르기를,
“간사한 소인의 말은 개의할 것이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오늘 어쩔 수 없이 경의 뜻에 따라 준다면 이는 바로 간사한 자의 계책에 빠지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큰 화를 당할 조짐이 이때에 이미 나타난 것이다. 7월에 또 세 번 상소하여 사직을 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에 승지에 결원이 있자 상이 거듭 명하여 후보자를 더 올리게 하였다. 부군은 상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알았지만 그들은 모두 어떤 일에 연루되어 청직(淸職)으로의 진출이 막힌 지 오래되지 않은 자들이었다. 부군은 청직으로의 진출을 허용하고 막는 것은 구차히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연고를 아뢰고는 거듭 지방에 있는 다른 사람을 후보자로 올려 명에 응하였다. 이에 상이 노하여 엄한 교지를 내려 추고하라고 하자, 부군은 물러나 동료와 함께 상소하여 스스로 논죄하고는 질병을 이유로 말미를 청하였다. 상은 더욱 노하여 엄하게 추고하도록 다시 명하였는데, 비지의 내용이 극도로 엄하였다. 그리하여 대간이 간쟁해도 들어주지 않다가 대신이 여러 차례 말하자 비로소 명을 거두었고, 부군이 세 번 상소하여 사직을 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겨울에 영녕전(永寧殿)을 개수하는 일이 끝났는데, 부군은 감독한 노고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무신년(1668, 현종9) 1월에 이조 판서를 사직하여 체차되고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청하기를,
“하늘을 받드는 정성을 더욱 독실하게 하여 혹시라도 간단이 없게 하고, 진작하는 뜻을 크게 떨쳐 반드시 안일과 태만을 경계하며, 재상과 시종신(侍從臣)을 자주 만나 치도(治道)를 강구하고, 초야의 큰 덕을 지닌 선비를 불러들여 학문을 닦으소서.”
하였다. 이윽고 체차되고 예조 판서가 되었다. 2월에 의정공의 상을 당하였다.
경술년(1670) 봄에 상복을 벗고 지중추부사 겸 지경연사에 제수되었다. 여름에 우참찬, 지의금부사, 세자좌빈객에 제수되었다가 대사헌으로 고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소명에 나아가지 못하고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다. 이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슬기를 타고나시어 행실이 백왕(百王) 중에 으뜸이니, 안으로는 음악, 여색, 재물, 이익 따위에 유혹되지 않고 밖으로는 재미 삼아 토목공사를 일으키거나 사냥을 즐기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하늘의 경계를 삼가고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고 유현을 예우하는 등 제왕의 거룩한 덕과 아름다운 일을 모두 갖추셨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린 지 1기(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의 효과는 더욱 아득해져서 하늘의 노여움이 날로 심해지고 백성의 원망이 날로 불어나고 나라의 형세가 날로 위축되어 급속도로 나날이 망해 가는 길로 나아가고 있으니, 이것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첫 번째 일입니다.
대신은 직무에 부지런하여 날마다 아침에 일찍 들어왔다가 저물어서야 돌아가며 온갖 관사의 사무를 겸하여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빠짐없이 다스리고, 일을 맡은 경향 각지의 신하들은 전심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앞다투어 재능을 발휘하여 장부를 정리하는 등의 일을 한결같이 실정에 맞게 하고 아랫사람들을 엄하게 신칙하려고 힘쓰며, 주현(州縣)의 관리들은 허물을 바로잡기에 여념이 없고 조정의 명령을 봉행하느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기강이 서고 공적이 빛나는 것은 볼 수 없고 부질없이 체통이 날로 무너지고 간사한 소행이 날로 불어날 뿐이니, 이것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째 일입니다.
국가가 여러 번 흉년을 만나 비용을 절감하는 정책을 누차 행하여 관원수를 줄이고 긴요치 않은 비용을 감축한 것이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국가 재정이 점점 바닥나고 재용이 증가되지 않아서 홍수나 가뭄을 만나면 늘 진대(賑貸)할 자본이 없음을 걱정하니, 이것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세 번째 일입니다.
신처럼 어리석고 고루한 사람은 실로 시무에 대해 함께 논의할 자격이 없습니다만 만약 그 까닭을 찾아본다면 또한 말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자질은 비록 고명하나 뜻이 확립되지 않았고, 품행과 도의는 비록 독실하나 사정(私情)에 치우치는 마음을 극복하지 못하셨습니다. 뜻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책과 법령을 행할 적에 느슨함을 면치 못하며, 결단을 내리는 데에는 어물어물 망설이는 병통이 있고 공부를 하는 데에도 훌륭하게 성취되는 실상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심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뻐하거나 노여워할 적에 화평한 마음을 잃는 일이 많아서 역대 임금들로부터 내려온 제도가 혹 친애하는 사람 때문에 흔들리기도 하고 대각의 공론이 혹 귀하고 가까운 사람 때문에 무시되기도 합니다.
대책을 구하고 죄수들을 심리하는 일은 단지 한때의 형식적인 조치일 뿐이라 재변이 지나가면 두려운 마음이 풀려서 한 달도 지속되지 않으니, 하늘의 경계를 신중히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은택이 아래에까지 이르지 못하여 그나마 베푸는 조그만 은혜가 산적한 민폐를 없애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신뢰가 먼저 쌓이지 않아서 일을 할 때에는 걸핏하면 사람들의 정서를 거스르니, 백성들의 고통을 돌본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충성스러운 말과 곧은 의론은 실제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적고 융숭한 예우와 후한 녹봉은 그저 헛되이 사람을 붙잡아 두는 수단으로 전락했으니, 이런 식으로 유현(儒賢)을 대우하는 것은 천박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몇 가지 일을 가지고 다른 일들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볼 때 지금 정치의 효과가 아득하고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운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철저히 반성하고 실제적인 덕을 닦는 데 힘쓰는 한편 병통을 살피고 약을 써서 개과천선하기를 꺼리지 마시어 아름다운 극기복례의 경지에 이르소서.
의정부에서는 지엽적인 일이나 계획하고 경연에서는 잘못을 바로잡는 아름다운 대화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우쭐거리며 뽐내는 자를 유능하다 하고 하찮은 일을 지나치리만큼 꼼꼼히 따지는 자를 현명하다 하며, 윗사람은 의심하고 아랫사람은 태만하여 속임수가 자라나는가 하면 한 눈금 한 푼을 따져서 잗달기가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옥송(獄訟)의 판결은 대부분 제 한 몸의 호오를 따르고 아랫사람을 들이거나 버리는 것은 걸핏하면 친한 사람의 청탁에서 나오며, 독책(督責)이 갈수록 엄해지나 인심을 제압하지는 못하고, 법망이 비록 조밀하나 사사로운 뜻을 막지는 못합니다. 모든 일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기강이 확립되겠으며 체통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예로부터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은 그것을 본받아 더욱더 좋아하였으니, 전하께서 위에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올바른 도리에 온전히 부합하지 못한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정도(正道)로 아랫사람을 이끌고 공도(公道)로 외물을 대하시며, 신료를 취할 때에는 정직함과 신실함을 먼저 보고 말재주는 따지지 말며, 사무를 재량할 때에는 대체(大體)를 보전하고 소절(小節)은 생략하소서. 그리하여 푯대가 바르면 그림자가 곧듯이 올바른 임금을 본받아 아랫사람들이 다 바르게 되는 교화를 이루소서.
이번에 흉년이 들자 백성을 진휼하기 위한 모든 방책을 강구하여, 여러 관사의 저축과 뭇 관원의 녹봉을 줄이고 또 줄였으며 심지어는 정규의 부세와 공물도 감축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각종 군병은 벼슬아치에게 주는 녹봉의 몇 갑절이나 소비하여 모두 밑 빠진 독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변통하지 않았으니, 국가 재정이 바닥나 재용이 부족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훈련도감(訓鍊都監)과 금위영(禁衛營)의 군병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비록 함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만, 지금 별대(別隊)의 정원을 채우고 정초청(精抄廳)을 설치하는 일까지도 그만둘 수 없단 말입니까. 그리고 호위 군관들의 경우는 그대로 두어도 일에 유익하지 않고 없애도 나라에 손해될 것이 없는데도 혁파할 수 없단 말입니까.
주 세종(周世宗)이 말하기를, ‘농부 백 사람이 전사(戰士) 하나를 부양할 수 없는데, 어찌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 이 쓸모없는 물건을 기르는가?’ 하였는데, 훌륭한 말입니다. 극도로 혼란한 오대(五代) 때에는 날마다 전쟁을 일삼았는데도 그 말이 이와 같아서, 그 덕분에 가는 곳마다 당할 자가 없이 적을 격파하여 땅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변경에 격서(檄書)를 날릴 만한 급한 일도 없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위급한데도 병정을 모아 중앙과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재물을 소모하여 경비가 바닥나게 만들고 있으니, 이 어찌 나라를 위한 깊고 원대한 계책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본말과 완급을 잘 살펴 구분하고 깊이 생각하여 결단하되, 백성을 소란하게 하는 군정(軍政)에 관계된 일을 금을 긋듯이 당장 정파(停罷)하고 재용을 소비하는 긴요치 않은 각청(各廳)의 군관을 우선 속히 혁파하여 오로지 민생 구제를 급선무로 삼으소서. 그리고 전하께서도 몸소 앞장서서 근검절약하여 재용을 아껴 백성을 기르고 국가 재정을 넉넉히 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이때 허적(許積)이 국정을 독단하면서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총애를 공고히 하느라 애쓰는 한편 문서를 꾸미는 하찮은 재주를 자부하여 걸핏하면 유사(有司)의 일을 직접 행한 나머지 정책과 법령이 더욱 잗달아져 나라의 체모가 비천해졌다. 그래서 부군이 이에 대해 더욱 간절하게 말한 것이다. 끝에 또 말하기를,
“김징(金澄)은 어버이에게 수연(壽宴)을 베푼 일로 장죄(贓罪)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는 한창 효성으로 온 나라를 다스리고 계시는 데다 지금은 재변을 당하여 옥사를 신중히 심리하는 때인지라 자신을 살찌운 교활한 관리도 너그럽게 용서받았습니다. 어찌 김징 정도의 죄상으로 정상을 참작하는 은전(恩典)을 받지 못한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가납하였다. 이윽고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8월에 명을 받들고 청나라 사신을 의주까지 수행하고 전송하였는데, 돌아와서는 상소하여 서로(西路)의 민사(民事)를 자세히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이미 진휼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여러 관사에서는 한결같이 평년처럼 포(布)를 거두고 있습니다. 부질없이 백성의 원망만 사고 끝내 거두지도 못할 바에는 차라리 미리 덕스러운 윤음을 내려 백성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재해의 실상을 조사하기 전에 일괄적으로 탕감하는 것이 어렵다면 여러 관사에 연분(年分)을 감정하는 일이 끝날 때까지는 일체 독촉하지 말도록 신칙하되 우선 이러한 뜻을 도신(道臣)에게 선유(宣諭)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언제 주검이 되어 골짜기를 메울지 모를 백성들로 하여금 덕스러운 뜻이 자신들에게도 미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안착하여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게 해야 하니, 이것이 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번에 전에 없던 기근을 당하여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전멸할 위기가 목전에 닥쳤습니다. 지금 취할 도리로는 군신(君臣), 상하가 한 뜻으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철저히 스스로 근신(謹身)하기를 마치 전쟁 중에 한데서 거처하듯 하여, 안으로는 궁중에서부터 밖으로는 모든 관사에 이르기까지 겉치레에 필요한 긴요치 않은 경비를 모두 삭감하고 비록 용도를 폐할 수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되도록 검소하게 하여 아쉬운 대로 비용을 댈 수 있을 정도로만 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그리고 백성을 살리는 정사를 밤낮으로 강구하여 부지런하고 급급하게 시행하기를 늘 불구덩이나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내듯이 한다면 그래도 절반은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느릿느릿 조처하며 그저 전철(前轍)이나 따른다면 해낼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여러 관사에 필요한 비용은 완급의 차이가 없지 않고 각 관사에 저축된 재용도 많고 적은 차이가 있으니, 각 아문으로 하여금 1년의 경비를 통계 내게 한 다음 저축된 재용으로 변통하여 쓸 수 있는 경우는 금년에 거두어들일 수량 가운데 절반을 감해 주거나 전량을 감하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그리고 급하지 않은 비용을 크게 감축하는 것도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조치입니다. 옛날 당 태종(唐太宗)은 거듭 흉년을 만나서 지극한 정성으로 백성을 어루만져 결국은 쌀 한 말이 3전(錢)밖에 되지 않는 훌륭한 성과를 이룩하였으니, 난국을 타개할 기틀은 오직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오늘날 하늘의 뜻 역시 성상의 덕을 연마시켜서 쇠퇴한 국운을 부흥시켜 태평성대로 돌아가는 기틀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고 장담하겠습니까.”
하였다. 뒤에 또 입궐하여 상을 뵙고 말하기를,
“신은 전에 군신, 상하가 마치 전쟁 중에 피난하여 한데서 거처하는 것처럼 근신해야 한다는 뜻을 상소에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궁궐 밖의 각 관사를 보면 안일에 빠져 두려워하거나 근심하는 마음이 없으니, 성상께서도 이러한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닌지 내심 우려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거(莒) 땅에 있었던 때를 잊지 말라.’ 하였습니다. 성상께서는 비록 병란을 겪어보지 않으셨지만 원컨대 늘 존망의 기로에 서 있는 위급한 때에 처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신해년(1671, 현종12)에 재차 문형(文衡)을 담당하였으며 특명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제수되었다. 이해 봄에 기근이 크게 들어 사방의 굶주린 백성 수십만 명이 경성에 모였는데, 부군은 김공 좌명(金公佐明), 민공 정중(閔公鼎重), 조공 복양(趙公復陽)과 함께 진휼하는 일을 나누어 맡고 밤낮으로 마음을 다 기울이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 결과 여름에 또 보리가 흉작이었고 여역(癘疫)이 크게 돌아 사망하는 백성이 더욱 많았는데도 끝내 도적이 되거나 유랑하여 흩어지지 않았다. 이에 군자들이 말하기를, “이는 실로 현묘(顯廟)의 거룩한 덕과 지극한 인(仁)이 사람들을 깊이 감화시켰기 때문이지만 또한 여러 어진 신하가 좌우에서 부지런히 애쓴 공이기도 하다.” 하였다.
임자년(1672, 현종13) 3월에 지의금부사 정공 지화(鄭公知和)가 새로 숭정대부의 자급을 얻어 판사(判事)로 승진하자 부군이 마침내 의금부의 직임을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5월에 우의정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네 번 올렸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는 한편 대제학을 그대로 맡으라고 명하였다. 정승이 문형을 겸임하는 것은 역대 조정에서도 이따금 있는 일이기는 하나 반드시 재주가 뛰어나고 인망이 두터워 온 세상이 추존하고 복종하는 자라야만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부군은 고사하고 맡지 않았다. 그런데도 상은 윤허를 아껴 한 달 남짓 지나서야 체직되었다.
이보다 앞서 동춘(同春) 송공(宋公)이 상소하여 정승 허적(許積)을 비판하면서 노기(盧杞)에 빗대자 허적이 벼슬을 내놓고 떠나 버렸다. 이에 상이 연달아 하유하여 부르면서 번번이 ‘유현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자를 치고 있다.’고 지목하자 집의 이공 상(李公翔)이 뒤이어 상소해서 허적을 논죄하였는데 그 말이 더욱 격하였다. 상이 노하여 그의 직임을 빼앗자 대각의 신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간쟁하며 논하였는데, 견책을 받은 자가 매우 많았다. 윤경교(尹敬敎)가 전에 간관으로 있을 적에 허적에 대해 앞장서서 말했다가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좌천된 지 오래였는데, 이때에 와서 갑산(甲山)에 안치(安置)하라고 뒤미처 또 명하였다. 이에 부군이 차자를 올려 극론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 언관들은 모두 전하께서 유현에 대한 예우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의심합니다만 신은 지나친 염려라고 생각합니다. 선왕께서 천고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셨으며 유현이 일편단심으로 충성한 것은 귀신에게 물어봐도 수긍할 것입니다. 또한 전하께서 그에게 갖춘 공경과 예우도 처음부터 끝까지 쇠하거나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말 한마디가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급작스레 멸시하여 멀리하겠습니까. 이는 사리상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평범한 임금도 하지 않는 일을 어찌 전하처럼 지극한 인과 거룩한 덕을 지닌 분이 하시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 결코 그러지 않으시리라 확신합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전후의 말씀이 존경하고 신뢰했던 평소의 뜻과는 전혀 딴판이었으니, 뭇 신하가 놀라며 의혹을 느끼고 경향 각지에서 이러쿵저러쿵 시비가 이는 것은 실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뒤이어 ‘산림(山林)에서 지내면서 오로지 당론(黨論)만을 일삼는다.’라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불안하게 여긴 사람이 어찌 이상(李翔) 혼자뿐이겠습니까.
윤경교의 일에 대해서는, 남의 뜻에 영합한다는 하교가 있었는가 하면 안치하는 형률까지 가함으로써, 기회를 틈타 이간질하는 말이 뚫고 들어오고 유현이 스스로 죄책하는 글을 거듭 올리게 만들었으니, 성상의 마음에 품은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주 부자(朱夫子)는 도덕으로 후세에 실로 높이 우러러 존경받지만 당시에는 국가의 대우가 오늘날 유현에 대한 전하의 성대한 예우만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후(前後)에 진달한 말에서 모두 통렬히 대신을 비판하여 ‘벼슬자리를 훔친 비부(鄙夫)’라느니, ‘교묘한 말주변으로 사특하게 아첨한다.’느니, ‘음흉한 데다 용렬하고 비뚤어졌다.’느니 하여 이와 같은 말이 한량이 없었습니다만 사특한 무리의 미움을 받았을 뿐 당시 임금이 파당을 짓는다고 의심하여 견책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유현은 충성스럽게 할 말을 다 하고자 할 때에는 늘 선철(先哲)을 본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어찌 오늘날 신하들이 송나라의 여러 임금보다 낮은 수준을 전하께 기대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뒤에 또 입궐하여 뵙고 이상(李翔)의 일에 대해 말하기를,
“임금이 초야의 차분하고 화평한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니, 오직 미친 사람처럼 우직하고 과격한 말까지 너그럽게 용납해야만 임금의 덕이 더욱 빛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가 지금 태평하지 못하여 조정에 이미 공론이 없어졌는데 초야의 사람이 또 말 때문에 죄를 얻는다면 초야에도 공론이 없게 될 것입니다.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목전의 한때만 생각해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또 영상 정공 태화(鄭公太和)와 함께 이제 와서 윤경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말씀드리자 상이 마침내 처벌의 수위를 낮추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명선공주(明善公主)가 장차 하가(下嫁)하게 되었는데, 부군이 말씀을 올리기를,
“기근이 거듭 닥쳐 국가 재정이 바닥났는데도 사치스러운 풍속이 이미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으니 반드시 상께서 솔선수범하고서야 이러한 습성을 고칠 수 있습니다. 지난번 세자의 가례(嘉禮) 때에는 긴요치 않은 비용과 번다한 문식을 줄인 것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공주의 혼례에는 되도록 절약하여 힘써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심이 마땅합니다. ‘검소함은 비단 덕을 기를 뿐만 아니라 복도 키운다.’라는 옛말도 있습니다.”
하자, 상이 가납하였다.
7월에 대사성 이공 민적(李公敏迪)이 상소하여 시사를 논하고 또 허적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상이 노하여 인동 부사(仁同府使)로 좌천시켰다. 이에 사헌부의 신하가 의견을 고집하여 간쟁하자 상은 하루에 두 번 아뢴 것을 죄로 삼고 아울러 봉입(捧入)한 승지를 파직하였다. 부군이 차자를 올려 속히 명을 거두어 주십사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튿날 입궐하여 뵙고 자신의 말이 쓰이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기를,
“대신의 직책은 비단 문서를 봉행하는 것뿐만이 아니니, 임금과 신하는 한 몸처럼 서로 의지하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에 따라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게 하였으니 그 책임이 실로 무겁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정승의 직책이지만 적임자를 얻으면 시사를 논하는 것이 합당하여 임금에게 중시받는 반면, 적임자가 아니면 비록 어쩌다 한 번 좋은 생각이 있더라도 임금에게 신뢰받지도 사람들을 압도하지도 못합니다. 성상의 포용력이 지극히 큰데도 신처럼 식견이 어두워 처사가 바르지 못한 사람이 외람되이 이 자리를 차지한 까닭에 마음을 비워 간언을 받아들이는 성상의 미덕을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벼슬을 훔친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하고, 이어 또 말하기를,
“요사이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자가 많은데, 전지(傳旨)에 매번 ‘임금을 압박한다.’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이는 천지간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므로 이 죄목에 해당되면 벌이 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이 그렇지 않다면 매번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니, 언행은 군자가 천지를 움직이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죄가 있으면 자연히 그에 맞는 벌이 있게 마련인데 어찌 굳이 이와 같이 하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상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았는데, 윤경교가 유배지에 도착한 것이 또 기일에 맞지 않았다. 그러자 먼저 나졸(羅卒)을 체포하여 신문하고 또 윤경교를 체포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부군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옛날 당 현종(唐玄宗) 말년에 지방으로 좌천되는 자들이 길에서 지체한다고 여겨 하루에 10역(驛)을 가도록 칙령을 내렸는데 이때부터 좌천된 관리가 대부분 온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자(朱子)가 특별히 이를 역사에 기록하여 그 잘못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뒷날의 법식을 정한 것에 불과했을 뿐, 길에서 지체한 사람을 죄주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사방의 노정(路程)이 하루에 백 리를 한계로 삼는데, 의령(宜寧)에서 갑산(甲山)까지는 거리가 수천리인 데다 함관령(咸關嶺)의 험난함과 여름철의 세찬 비에 막히는 일을 생각하면 7, 8일 정도 지체된 것은 고의로 체류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것으로 죄를 삼았으니, 당 현종보다도 더 사리에 어긋난 처사입니다. 신은 이 법이 결국 시행된다면 앞으로 멀리 쫓겨나는 사람 가운데 필시 독촉에 못 이겨 황망히 가다가 길에서 쓰러져 죽는 자가 많을까봐 걱정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찌 무궁한 폐단이 되지 않겠습니까. 윤경교가 죄를 입는 것은 한때의 일에 불과합니다.”
하였는데, 상은 받아들이지 않는 한편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라고 하교하였다. 이에 부군이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사직을 청하기를,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간언을 올리자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말하기를, ‘사람을 깨우치는 것은 이와 같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는 그 말이 명백하고 뼈에 사무치게 절실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본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환히 알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래로는 국면을 전환하는 공을 이루고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유익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실로 사람마다 바랄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말 한마디가 입에서 나왔다 하면 곧 임금의 의심을 사게 되어 그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니 평소에 임금을 섬기는 것이 보잘것없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디로 도망간들 그 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옛글에 이르기를, ‘벗에게 신뢰받지 못하면 임금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임금에게 신뢰 받지 못하면서 백성이 모두 우러러보는 정승 자리에 어찌 하루라도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부군은 정승으로 있으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할 만한 재주가 없으므로 감히 옛 대신들이 했던 사업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근래의 재상들은 그저 장부를 정리하고 회의에 참석하는 것만 일삼을 뿐 임금의 덕에 허물이 있어도 그것을 바로잡는 일을 자신의 책무로 여기지 않고 대각에 일임하는데, 이는 임금을 보필하여 세도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하는 의리가 아니다.’ 하였다. 그래서 오로지 이런 일을 자임하였는데, 마침 유현이 임금의 뜻을 거슬러 노기 어린 견책이 거듭되었다. 이에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기를 피하지 않고 일에 따라 극론하였으나 상은 부군의 간언을 채용하지 않고 상당히 자만한 기색이 있었다. 그래서 부군은 마침내 질병을 이유로 말미를 청하여 상소와 차자를 여러 차례 올렸으나 상은 면려하는 내용의 비답을 내릴 뿐 윤허하지 않았다.
영안위(永安尉) 홍공 주원(洪公柱元)이 별세하자 이공 단하(李公端夏)가 명을 받들어 제문을 지어 올렸는데, 내용 중에 선왕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이에 상은 선왕의 본의가 아니라며 노하여 법사(法司)에 내렸는데, 부군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문장 때문에 사람을 처벌한 적이 없으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사리를 따져보심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군이 또 벼슬자리에서 떠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기를,
“지금 우리나라의 형세는 너무나 어려워서 믿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 하늘의 노여움이 여러 차례 격발하고 아랫사람들의 뜻이 막혀 위로 전달되지 못하고 조정의 기강이 날로 문란해지고 민심이 뿔뿔이 흩어져서, 위아래가 서로 어우러져 태평을 누리며 국가를 유지할 가망이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근년에는 재변으로 흉년이 든 나머지 얼마 남지 않은 백성이 고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근심과 원망의 소리가 원근에 울려 퍼지니, 지금이야말로 위아래의 임금과 신하가 두려운 마음으로 자세를 가다듬으며 근심하고 부지런히 노력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진작하는 것이 비록 임금에게 달려 있는 일이기는 하나 그러한 뜻을 받들어 보필하는 것은 실로 재상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신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이 차지해서는 안 될 자리를 차지하고는 성상의 덕에 보탬이 되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민생에 이로운 정책 한 가지도 시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잠자다가도 깜짝 놀라고 꿈속에서도 두려워 한순간도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능력이 부족하여 중임(重任)을 감당하지 못한다.[覆餗]’라는 《주역(周易)》의 경계를 외노라면 마치 살얼음을 밟는 듯하고, ‘직임을 다하지 못하면서 녹봉만 받아먹는다.[素餐]’라는 《시경(詩經)》의 시를 읊노라면 얼굴이 화끈거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뿐이건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상은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면려하는 뜻으로 유시하였다. 11월에 좌의정 겸 세자부(左議政兼世子傅)로 승진하였다.
계축년(1673, 현종14) 1월에 입궐하여 뵙고 아뢰기를,
“오늘은 신년 초인데 이렇게 인견(引見)하셨습니다. ‘1년이 지날 때마다 1년 치의 공부가 쌓인다.’라는 선유(先儒)의 말이 있는데, 비단 학문하는 방도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나랏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매년 더욱 부지런히 힘써야 합니다. 오늘날의 형세를 보면 마치 물이 점점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과 같은데, 이는 모두가 신하들이 보잘것없어 성상의 아름다운 덕을 제대로 받들지 못한 탓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상께서 책려하고 신칙하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야 되겠습니까. 옛날 송(宋)나라 주자(朱子)가 효종(孝宗)에게 아뢰기를, ‘세월이 흐르는 것은 마치 냇물의 흐름과 같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성상의 얼굴을 우러러뵈니 이 또한 예전의 얼굴이 아니십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야말로 감개무량한 심정에서 우러나온 절실한 말이라 하겠습니다. 만약 다시 구차하게 세월을 보낸다면 나랏일이 어찌 더 이상 가망이 있겠습니까.
지난번에는 상께서 오래도록 건강이 좋지 못하셨으니, 아랫사람들의 근심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요즘 들어 전보다는 건강이 회복되셨으니, 이야말로 종묘사직과 신민(臣民)들의 경사입니다. 만약 날씨가 따뜻해지거든 유신(儒臣)을 불러 만나 보시고 때때로 경연을 연다면, 성상의 덕이 날로 새로워지는 아름다운 일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아랫사람들도 오랫동안 성상을 뵙지 못하던 끝이라 감동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세화(李世華)가 전지(田地) 점검에 착오가 있었다는 이유로 장벌(杖罰)을 받게 되었는데, 부군이 말하기를,
“부윤은 직질(職秩)이 2품(品)이고 또 그가 범한 잘못도 군기(軍機)를 그르친 것에 비할 것이 못 됩니다. 그런데도 갑자기 장(杖)을 치는 벌을 가한다면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키게 될 것입니다.”
하고는 당나라 장열(張說)이 광주 도독(廣州都督) 배주선(裴伷先)을 장형(杖刑)에 처하지 말도록 간한 일을 끌어대어 말하였다. 그리하여 이세화가 마침내 장형을 면하였다.
이보다 앞서 지평 조창기(趙昌期)가 상소하여 시사를 논하였다가 정언 임규(任奎)의 비판을 받게 되자 곧 다시 나가 스스로 논죄하였는데 말이 더욱 장황하여 마침내 이 때문에 체차되었다. 뒤에 대각에 빈자리가 생기자 상이 조창기를 대관(臺官)으로 삼고 싶어서 인사 개편 때가 되어 지시하였는데 인사 담당 관원이 일부러 명을 받들지 않았다. 이에 상이 노하여 인사 담당 관원의 방자함을 꾸짖고 파직하자, 부군이 차자를 올려 인사 담당 관원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비지(批旨)에 또 온당치 못한 점이 많자 부군은 여러 차례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파면을 청하였으나, 상은 온화한 비답을 내릴 뿐 윤허하지 않았다.
4월에 산릉(山陵)의 일이 일어났다. 처음에 영릉(寧陵)복토(復土)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봉분의 석물(石物)에 틈이 생기자 조정에서 논의하여 새로 봉축(封築)하려고 하다가, 상이 친히 살피고는 새로 봉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여겨 봉분을 그대로 두고 보수만 하도록 명하였다. 얼마 뒤에 또 틈이 생기자 다시 대신과 유사를 보내어 살펴보고 보수하게 하는 한편 그렇게 하는 것을 매년의 상규(常規)로 삼게 하였다. 그런데 기회를 노리던 뭇 소인배가 이 일을 가지고 전후로 산릉 조성을 감독하거나 능을 살피고 온 신하들을 무함하여 죄에 얽어 넣으려고 하였다. 마침내 종실의 영림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를 사주하여 상소하였는데 되도록이면 그 일을 과장하여 상이 듣고는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어 수찬 조위봉(趙威鳳)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전후로 능을 살피고 온 신하들이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으니, 그 죄가 산릉 조성을 감독한 신하보다 큽니다. 이러한 습성을 막지 않고 그대로 두어 키우면 비록 장릉(長陵)의 흙 한 줌을 가져가는 자가 있더라도 전하께서는 듣지 못하실까 염려스럽습니다.”
하고는 이어 양사에서 그 죄를 들춰내어 바로잡지 않은 것을 비판하여 상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이에 상이 모두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칭찬하고 받아들였다.
이보다 앞서 신해년(1671, 현종12) 8월에 부군이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로 영릉을 살피고 왔는데, 우상 정공 치화(鄭公致和), 예조 판서 정공 지화(鄭公知和),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남공 용익(南公龍翼)이 실로 동행했었다. 이때에 와서 상이 매년 영릉을 살핀 결과를 기록한 문서를 가져다 보고는 그해에 올린 서계(書啓)의 내용을 들추어내어 숨긴 점이 있다면서 모두 체포하여 신문하도록 명하였다. 고례(古例)에는 대신을 형리(刑吏)에게 내릴 때는 반드시 먼저 직첩을 환수하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승정원이 상께 아뢰니 우선 파직부터 하고 죄명이 정해지기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는데, 이때가 4월 22일이었다. 부군이 정(鄭) 정승과 함께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명을 기다린 지 8일 만에야 비로소 관원들의 죄명이 정해졌는데, 부군과 정공에게 모두 삭탈관작을 명하였다. 부군은 그날 바로 도성을 나가 반계(盤溪)에 우거하였다.
부군은 비록 젊은 나이에 현직(顯職)에 오르기는 했으나 본심은 늘 산수(山水)에 있었다. 경술년(1670, 현종11)에 상복을 벗은 뒤로는 벼슬하고픈 마음이 더욱 줄어들어서, 즉시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 아래의 밭을 사 필마로 가보고는 그곳에서 노년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다만 세상의 인망을 받는 몸이고 임금의 신임이 날로 융숭해져서 감행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때에 와서 비록 견책을 받고 파면되었지만 부군은 바야흐로 초연히 즐거워하여 날마다 시골 노인들과 함께 어울려 낚시하면서 마치 애초에 벼슬이 없었던 사람처럼 지냈다. 가을에 다시 백운산에 들어가 고(故) 동은(峒隱) 이공(李公)의 낚시터를 발견하고는 좋아하더니 마침내 그 위에 집을 짓고 두자미(杜子美)의 시어를 취하여 송로암(送老菴)이라 이름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특별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서용되고 연경(燕京)에 가는 사은사(謝恩使)로 차임되었는데, 부군은 이전의 일을 끌어대어 스스로 논죄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여 결국은 사은사로 가게 되었다.
이듬해 3월에 조정으로 돌아왔으며,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승하하자 지문(誌文)을 지어 올렸다. 7월에 빈청(賓廳)에서 예법을 논의하는 일이 일어났다. 처음에 효묘(孝廟)의 상을 당했을 적에 대신과 유신(儒臣)이 함께 논의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을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하였는데, 이는 실로 국제(國制)를 적용한 것이었다. 그 뒤에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고례(古禮)를 끌어대며 “기년복을 입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으니, 예법상 마땅히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우재(尤齋)동춘(同春) 두 선생이 각기 《의례주소(儀禮注疏)》의 “비록 승중하였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경우가 네 가지가 있다.[雖承重 不得爲三年者有四種]”라는 설을 인용하여 논변하였는데, 이때부터 장자(長子)와 서자(庶子),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의 구별에 대한 예송(禮訟)이 일어나서 유현을 해치려는 일부 사람들이 걸핏하면 효묘를 서자로 폄하했다고 꼬투리를 잡았다. 그러나 여러 대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국제를 주관하였고 국제는 장자, 중자(衆子) 할 것 없이 모두 기년복이기 때문에 이설(異說)이 끝내 채택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행대비(大行大妃)의 상에 이르러 예관이 처음에는 자의대비의 복을 기년복으로 정하였다가 곧 외부의 의론을 끌어대며 대공복(大功服)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국제에서 중자의 아내를 위한 상복이다. 뭇 소인배가 이러한 틈이 생긴 것을 보고는 지난번의 설이 채택될 수 있음을 알아서 마침내 영남 사람 도신징(都愼徵)을 사주하여 ‘자의대비는 대행대비를 위해 중자의 아내를 위한 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으로 상소하게 하였다. 이에 상이 다시 여쭈어 의논하지 않고 성급하게 자의적으로 복제를 바꾸었다고 예관을 꾸짖고 공경(公卿), 예관, 삼사(三司)가 빈청에 모여 기해년(1659, 효종10)의 일을 고찰하고 논의하여 아뢰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퇴우공(退憂公)이 수상(首相)이었는데 부군과 함께 빈청에 나아갔으며, 빈청에 모인 다른 재상과 삼사는 민공 유중(閔公維重), 김공 만기(金公萬基) 이하 모두 10인이었다. 이들은 기해년 이래로 여러 대신과 유신들이 헌의(獻議)한 일의 본말을 자세히 나열하고 또 말하기를,
“고례(古禮)는 장자를 위해서는 삼년복을, 중자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게 되어 있지만 국제(國制)는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기년복을 입게 되어 있습니다. 당초에 기년복으로 정한 것은 국제를 적용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그 뒤에 고례를 둘러싼 논쟁이 일다가 그대로 기년복을 입게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고례의 중자를 위한 복을 적용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해조(該曹)가 곧장 복제를 바꾸기를 청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처사입니다.”
하였다. 상이 여러 차례 내시를 보내어, 지금 적용할 복제가 기년복인지 대공복인지를 계사(啓辭)에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고 꾸짖자, 다시 아뢰기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자식을 위한 상복은 모두 기년복으로 되어 있어 장자와 중자를 구별하지 않았고, 며느리를 위한 상복은 장자의 아내를 위해서는 기년복, 중자의 아내를 위해서는 대공복으로 되어 있는데 이 또한 승중(承重) 여부는 논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근거하면 오늘날 적용할 복제는 대공복이어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더없이 중대한 복제를 감히 우리나라의 제도에만 근거하여 정할 수 없으니, 장순(章順)공혜(恭惠) 두 왕후의 상사에 행했던 선례를 고찰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상은 재차 아뢴 계사는 반환하고 오직 처음 계사에만 답하면서, 기해년에 적용한 것이 고례인지 우리나라의 제도인지를 고찰하여 오늘날의 복제를 정하지 않고 그저 등록(謄錄)을 베껴 일개 승지의 직임만 행했다고 꾸짖었다. 상의 뜻은 아마도 ‘기해년에 기년복을 입은 것은 실로 우리나라의 제도를 적용한 것이지 고례를 적용한 것이 아니다. 고례의 장자와 서자를 구별한 설은 그 뜻을 실로 분명히 알기 어렵지만, 우리나라의 제도를 기준으로 말하면 감히 효묘를 중자 취급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렇게 재우쳐 물은 것이다. 그러나 재차 아뢴 계사에 이미 이러한 뜻을 논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몇 마디 말을 보태어 올리자, 상은 비로소 아뢴 대로 가서 실록(實錄)을 고찰하라고 명하였다. 이윽고 또 고찰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다시 회의하여 아뢰도록 명하자, 아뢰기를,
“예로부터 예(禮)를 논의하는 사람들에 대해 ‘서로 옳고 그름을 따져 결말이 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예법을 단정 짓기가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국가의 중대한 예를 어찌 신들이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여 정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미 명을 받들었기 때문에 감히 현재의 제도를 근거로 답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국대전》에는 자식을 위한 상복이 장자와 중자의 구분이 없이 모두 기년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해년에 복제를 정할 적에도 장자와 중자를 거론하지 않고 단지 기년복을 입게 하였습니다. 지금의 복제로 말하면, 《경국대전》의 며느리를 위한 상복에는 이미 장자와 중자를 구별하였고 ‘중자의 아내를 위해서는 대공복을 입는다.’라는 문구 아래에 또 ‘승중했을 경우는 기년복을 입는다.’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으로써 보면 대왕대비께 해당하는 복제가 대공복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해년에 장자와 중자를 거론하지 않은 것은 그 복제가 똑같이 기년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차례를 가지고 말한다면 본디 장자와 중자의 구별이 있고 ‘중자가 종통을 이었으면 장자라고 부른다.’라는 문구로 말하면 우리나라의 법전에 나타나 있지 않으니, 오늘날의 복제는 법전에 규정된 대공복 외에는 억견(臆見)으로 가벼이 논의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기해년의 복제를 정할 적에는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는 설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허목(許穆)의 상소에 대한 복계(覆啓)로 인해 의견을 수합할 적에 비록 간혹 이러한 설이 있기는 하였으나 조정에서 채택하여 시행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감히 중자의 아내를 위해 대공복을 입는다는 설을 제기하면서, 《경국대전》에 중자가 종통을 이은 경우에 대한 규정이 없는 것은 미비한 조문이건만 현재의 제도라는 핑계를 대며 예경(禮經)을 참고하지 않았으니, 회의한 의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였다. 처음에 상이 재우쳐 물었을 적에는 그 뜻이 본디 우리나라의 법전에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계사를 모두 법전에 근거하여 올리자 그 설을 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또 예경을 참고하게 한 것이다. 이에 네 번째 계사를 올려 비로소 예경의 4종(種)의 설을 가지고 대답하자, 상이 진노하여 엄한 비답을 내리고 대비의 상복을 기년복의 제도를 따르라고 명하는 한편 예관을 법사에 내려 엄하게 문책하도록 하였다.
퇴우공을 중도부처(中道付處)하도록 명하였는데, 승정원과 홍문관 관원이 입궐하여 뵙고 간쟁하려 했으나 상은 엄한 말로 물리치고 만나지 않았으며 논집(論執)하는 대관(臺官)들도 모두 견책을 당하였다. 이에 여러 공들이 모두 함께 교외로 나가 대죄하였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뒤이은 명이 없었고, 부군이 먼젓번에 성지(聖旨)를 받들고 삼성추국(三省推鞫)을 주관하게 되었는데 그 또한 개차하라는 명이 없었다. 부군이 마침내 차자를 올려 속히 위관(委官)에서 면직시켜 다른 신하들과 똑같이 견책을 받게 해 주십사 청하였으나 상은 위로하는 내용으로 유시할 뿐 윤허하지 않았다. 부군은 네 번째 계사를 올릴 적에 마침 제사에 차출되어 재계하는 곳에 나아간 관계로 그 계본(啓本)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전후의 비지에서 번번이 이 일을 가지고 다른 신하들과 부군을 구별하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상의 뜻은 본디 여러 신하를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수상과 예관의 고집을 꺾어 엄히 처분하려는 것뿐이었으며 부군을 신임하였기 때문에 체차하지 않은 것이다. 이윽고 상은 친히 인사를 단행하여 부군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하고, 거듭 사직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그 뒤에 상의 질병이 위독해져서 승지가 상의 명으로 부군에게 들어오라고 재촉하자 부군은 마침내 대궐에 나아갔다. 그러나 감히 곧장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수상 허적이 아뢰기를,
“좌상이 대궐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스스로 죄를 지은 몸이라 하여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상은 거의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도 즉시 앞에 불러들여 “안심하고 공무를 행하라.”라고 유시하였으니, 부군을 향한 마음이 매우 간절했던 것이다.
금상(今上 숙종(肅宗))이 거상할 적에 부군은 총호사(摠護使)가 되고 또 원상(院相)의 일을 함께 행하였는데, 부군은 이미 선왕의 남다른 대우에 감격한 데다 새 임금이 어린 것을 염려하여 상례를 치르고 금상을 보필하는 데에 충성을 다하였다. 이때 뭇 소인배가 곁에서 이미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곽세건(郭世楗)이란 자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송(宋) 아무개는 바로 빈청 신하들의 뿌리이니, 선왕께서는 본디 송 아무개를 먼저 법규에 따라 처벌한 다음 차례로 여러 신하를 처벌하려고 하셨는데 다만 미처 실행하지 못하셨을 뿐입니다. 대행왕(大行王)의 지문(誌文)을 송 아무개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였다. 이에 우재(尤齋)는 명을 받들고 교외에 갔다가 그날 바로 돌아가 버리고, 부군은 상소하여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이튿날 부군이 또 들어가 상을 뵙고 떠나게 해 주십사 청하자, 상은 면려하는 뜻으로 유시하여 안심시켰다. 이윽고 조함(趙諴)이 또 상소하여 빈청 신하들을 비난하고 이어 산릉 자리를 잘못 잡았다고 말하여 부군을 흔들었다. 이에 부군은 또 상 앞에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면직을 청하면서 우선 총호사의 직임을 체차해 주십사 청하였다. 그러나 상은 또 위로하는 뜻으로 유시할 뿐 윤허하지 않았다.
우재가 축출당하고 지문 짓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명하자, 부군이 또 상소하여 말하기를,
“송 아무개에게 지문을 짓도록 하신 명을 지금 이미 거두셨으니, 이는 곽세건의 말대로 된 것입니다. 당초에 의논하여 결정한 잘못이 전적으로 신에게 있는데 신이 어찌 그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은 온화한 비답을 내려 위로하고 면려하였다. 이때 마침 겨울에 우레가 치는 이변이 있었는데, 부군이 상에게 권면하기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시어 재변을 상서로 바꾸소서. 또한 해마다 흉년이 들어 물력(物力)이 바닥났으니, 늘 절약을 생각하시어 백성을 사랑하는 뜻을 잊지 마소서.”
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인(士人) 민신(閔愼)이 아비가 몹쓸 병에 걸린 관계로 할아비의 상에 아비의 복을 대신 입었다. 이는 사실 현석(玄石) 박공(朴公)의 말을 따른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잘못된 처사라고 의심하였다. 이에 우재가 복제에 대해 논한 주자(朱子)의 차자를 인용하여 더욱 힘써 증명하였으나, 국구(國舅) 김공 우명(金公佑明)이 입궐하여 선왕을 뵙고 아비를 무시한 패륜아라고 민신을 비판하고 그 죄를 따져 다스리십사 청하였다. 그리하여 민신은 마침내 하옥되고 박공도 옥문 밖에서 명을 기다렸다. 이때에 와서 형조가 이 일을 대신에게 내려 논의하게 하십사 청하였는데, 부군이 자세히 말하기를,
“민신의 처사는 실로 예법상 큰 변고입니다. 그러나 선유가 논한 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그 또한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없으니, 이 일로 죄주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그 뒤에 또 경연에서 하교하여 예법을 논의하는 데에 참여한 사람들을 모두 정배하라고 명하였는데, 부군이 옳지 않은 조처라고 강력히 말하여 일이 중단되었다.
경기 유생 이필익(李必益) 등이 우재를 위해 억울함을 변론하자 상이 예론(禮論)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죄주었다. 이에 부군이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원임(原任) 정공 치화(鄭公致和)가 도로 정승 자리로 들어와서 부군은 우의정으로 강등되었는데, 법전에 따르면 좌상이 총호사가 되는 것이 규례이다. 부군은 이 규례에 따라 체차해 주십사 청하는 한편 형편상 편히 있기가 어렵다고 진달하여 정승의 직임도 아울러 파면시켜 주기를 청하고는 물러나 칩거하며 견책을 기다렸는데, 상이 또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 청나라가 우리 군사를 징발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대응 방법을 논의하게 되었다. 부군은 산릉에서 일을 감독하고 있다가 속히 들어오라는 명을 받았다. 이때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하여 이필익을 변호하고 이어 곽세건의 상소를 흉악한 상소로 지목하였는데, 상이 엄한 비답을 내려 비판하였다. 이에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고 물러가 버리자, 상이 노하여 성균관에 하교하기를,
하였다. 부군은 이 때문에 더욱 불안해져서, 명을 받들고 근교에까지 왔다가 상소하여 죄를 청하였는데, 상은 더욱 돈독히 면려할 뿐이었다.
이때 마침 대관(臺官)이 또 민신의 일을 끄집어내어 민신과 박공 세채(朴公世采)를 죄주십사 청하였다. 부군은 민신에게 죄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전에 헌의(獻議)했던 내용으로 또 말하고는 일찌감치 자신을 꾸짖고 물리쳐 대관의 비평에 부응하십사 청하였다. 그러나 상은 윤허하지 않고 또 특별히 근시(近侍)를 보내어 유지를 전하였다. 이에 부군은 어쩔 수 없이 조정에 나아갔는데, 장령 남천한(南天漢)이 대사간 이혜(李嵇)와 민신의 일로 다투다가 부군을 비판하는 말을 하였다. 이에 부군이 상의 유지에 대한 답변에서 이러한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남천한이 또 왕성한 기세로 상소하여 마구 비난하면서 부군에 대해 “억지로 끌어다가 자신에게 해당시켰다.”라고 말하였다. 부군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전에 남천한이 주자의 차자에 있는 의론을 끌어다가 스스로 명백히 설파했다고 한 것은 신이 당초에 헌의한 것과 조목조목 상반되었는데, 그는 신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미루어 오랑캐와 금수의 영역으로까지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민신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신의 의론을 비판하였으니, 남천한이 비록 신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신은 실로 남천한의 배척을 받은 것입니다. 신은 이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이니, 어찌 억지로 끌어다가 자신에게 해당시킨 것이겠습니까. 신이 비록 보잘것없으나 국가의 형벌을 받지 않아 대신의 직함이 아직은 보전된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이처럼 매우 편치 않은 상황에 입을 꼭 다물고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일까지 감히 말하지 못한다면 나라의 체모가 무슨 꼴이 되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전하께 견책을 당할지언정 차마 신에 대해 사람들이 헐뜯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잘 타일렀다.
12월에 숭릉(崇陵)이 완공되었다. 양사(兩司)의 남천한, 이옥(李沃), 이우정(李宇鼎), 목창명(睦昌明) 등이 앞장서서, 4종(種)의 설을 주장했다는 죄명으로 우재를 삭탈관작하여 내쫓고 빈청 신하들을 파직하십사 청하였다. 부군이 그날 바로 강가로 나가자, 상이 연달아 승지와 사관(史官)을 보내어 유지를 전하기를,
“선왕께서 이미 빈청의 다른 신하들과 구별하였으니, 속히 들어오라.”
하였다. 부군이 거듭 상소하여 속히 견책해 주십사 청하자, 상은 이미 승지를 보내어 비답를 내린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바로 또 별도로 승지를 보내어 잘 타일러서 함께 들어오게 하였다. 이에 부군이 다시 상소하여 형편을 남김없이 말하기를,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어 보니, 나랏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신을 꾸짖으셨습니다. 전하께서 신을 불러들이려 하는 것은 신의 몸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필시 장차 나랏일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조정에 나아가서 무슨 말을 아뢰고 무슨 일을 하여 전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천재(天災)와 나라의 근심으로 인해 상께 경계의 말씀을 드리자니, 근래에 이에 대해 언급한 자를 전하께서는 ‘겁을 주어 흔든다.’라고 죄주고 조정의 신하들은 ‘거짓으로 꾸며 공갈한다.’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만약 이런 혐의 때문에 하늘의 변고를 두려워할 것이 없고 나라의 형편을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을 것이니, 이는 신이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이 일에 따라 말을 다하여 임금의 직책을 돕자니, 전하께서는 이미 금령을 만들어 언로를 막고 귀에 거슬리는 말이 한마디라도 있으면 용서 없이 꾸짖습니다. 만약 신이 홀로 금령을 범한다면 그 말은 필시 전하께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만약 신이 비위를 맞추어 아첨코자 한다면 비위를 맞추어 아첨하는 말은 많지 않을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신이 인물을 진퇴(進退)시키자니, 출척(黜陟)을 행할 때부터 작당하여 사리사욕을 꾀한다는 지목을 받고 끝내는 필시 권세가 아래에 있다는 죄명을 쓰게 될 것입니다. 신이 조정을 진정시키자니, 신의 정성과 역량으로는 실로 이러한 일을 해내리란 기대를 할 수가 없으며, 그렇다고 시비를 가리지 않고 선악도 분별하지 않고 흐릿하게 뒤섞어 놓고는 조정(調停)했다는 명분을 억지로 내세우는 것도 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원망을 품고 한껏 원한을 갚아 사사로운 뜻을 성취하거나 낯을 바꾸어 새로이 귀하게 된 자를 붙좇아 섬기는 일은, 신이 비록 비루하기는 하나 결코 차마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데도 부질없이 작록(爵祿)을 훔쳐 일신(一身)의 영화로 삼는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신에게서 무엇을 취하겠으며, 또한 어디에서 구한들 이와 같은 사람이야 얻지 못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또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승지를 보내며 전교하기를,
“우상이 오지 않으면 승지는 들어오지 말라.”
하였다. 이에 부군은 마지못해 도성에 들어와 입궐하였는데, 이때가 을묘년(1675, 숙종1) 1월 14일이다. 상이 즉시 불러 만나 보고 온화하게 타이르자, 부군은 죄가 매우 커서 공의가 거듭 일어났으니 체차하여 나라의 체모를 중하게 해 주십사 청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경은 선왕께서 이미 빈청의 신하들과 구별하였고 대간의 계사도 처음부터 끝까지 계사에 참여한 사람만 거론하였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지나치게 사직하는가?”
하자, 부군이 말하기를,
“신은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동참하였으니, 이는 선왕께도 이미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죄는 같은데 ‘나는 대간의 계사에 거론되지 않았으니 안심해도 된다.’라고 한다면 공의(公議)가 어찌 허락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재변이 참으로 심하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사적인 형편만 돌아보고 나랏일은 생각지 않는단 말인가.”
하자, 부군이 대답하기를,
“신은 전부터 외람되이 중임을 차지해 왔으며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은 뒤로도 이미 몇 개월이 지났건만 말 한마디, 일 한 가지도 임금의 덕과 조정에 보탬이 된 것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나랏일에 힘쓰는 것으로 말하면 어찌 감히 스스로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일신의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분주히 행세하기만 일삼는 것이 또한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또 면려하는 뜻으로 유시해 마지않자, 부군은 물러나 진정(陳情)하겠다고 청하고 물러 나와서는 즉시 강가로 돌아가서 연달아 열한 번의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상은 번번이 온화한 비답을 내려 돈독히 면려할 뿐이어서 근시(近侍)가 끊임없이 왕래하였다.
이때 마침 청나라 사신이 국경 안에 들어와 일의 조짐이 우려스러웠다. 이에 상이 더욱 재촉하여 부르자 부군은 마지못해 명을 받들었는데, 도성 밖에 이르렀을 때에 어지럼증이 갑자기 생겨 나아가지 못하고 거듭 상소하여 죄를 청하였다.
때마침 원접사(遠接使) 오시수(吳始壽)가 청나라 통역관에게서 들은 말을 급히 아뢰기를,
“선왕이 강한 신하에게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 특별히 두 번 치제하여 가련하게 여기는 뜻을 보이는 것이다.”
하였는데, 대비(大妃)가 이 말을 듣고 분통해하며 여러 대신을 모아 변무(辨誣)하는 것이 마땅한지 여부를 논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소명이 거듭 내려왔으나 부군은 병 때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보다 전에 윤휴(尹鑴)가 승지로 와서 임금의 유지를 전달했는데, 돌아와서는 문득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진달하면서 부군을 비판하기를,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은명(恩命)에 대한 감격과 두려움으로 부지런히 힘을 다해 허물을 보완할 길을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대궐 밖에 거적을 깔고 머리를 땅에 조아려 죄를 청하면서 조정의 처분을 기다리지도 않고 제 집에서 편안히 지내며 성상께서 수고스럽게 여러 차례 유지를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임금의 은혜와 위엄, 상과 벌은 본디 시행해 마땅한 곳이 따로 있는 법인데 지금 죄를 지어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신하에게 은혜로운 예우가 보통 이상으로 융숭하니, 은혜는 가치가 떨어지고 법은 시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은혜와 상을 시행해 마땅한 사람에게는 또 무슨 방법으로 이보다 더 예우하시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와서 또 말하기를,
“나라에 임금이 치욕을 당한 일이 있어 대신들을 두 번, 세 번 명하여 불렀건만 한 사람도 들어오는 자가 없습니다. 옛날 진 목제(晉穆帝)는 채모(蔡謨)가 사도(司徒)가 되어 여러 차례 불러도 오지 않자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습니다. 임금의 도리는 기강을 위주로 합니다. 반드시 임금의 도리가 위에서 확립된 뒤에야 신하의 도리가 아래에서 이루어집니다. 김 아무개는 빈청에서 회의하는 사람인데도 상께서 여러 차례 은혜롭게 예우하셨건만 한결같이 원망을 품고 끝끝내 조정에 달려오지 않으니, 어쩌면 이리도 여러 차례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김 아무개에게 물으신다 한들 그의 답변 중에 시행할 만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빈청의 신하들은 반드시 한 번 죄주어 마음을 새로이 가다듬게 한 뒤에야 거두어 쓸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김수항은 선왕께서 이미 빈청의 다른 신하들과 구별하셨는데 지금 어찌하여 다시 소란을 일으키는가?”
하자, 윤휴가 말하기를,
“선왕께서 비록 구별하긴 하셨지만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이와 같이 하셔서는 안 됩니다. 신이 김 아무개의 상소를 보니 그는 아직도 뉘우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의 상벌이 적절치 않고 국시(國是)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성낼 만한데 성내지 않으면 신하가 호랑이로 변한다.’ 하였는데, 오늘날의 일이 혹 이에 가깝지 않나 합니다. 반드시 분명하고 바르게 처치한 뒤에야 훗날의 재앙과 환난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는 윤휴가 새로 권세를 잡은 터라 거리낌 없이 방자하여 일대(一隊)의 선류(善類)를 모조리 배척하여 뜻을 통쾌히 이루려고 하였다. 그런데 상이 부군에 대한 사랑을 풀지 않는 것을 보고는 더욱 심하게 미워하여 걸핏하면 위태로운 말로 겁을 주어 흔들곤 하였다. 부군은 이때에 질병을 무릅쓰고 소명에 나아가려다가 이를 듣고는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상소하여 죄를 청하였는데, 상이 또 승지를 보내어 유지를 전하는 한편 함께 들어오도록 하였다. 이에 부군이 마지못해 입궐하여 뵙고, 형편상 감히 편안히 있을 수 없으니 만약 체차받지 못한다면 비록 중한 견책을 받는다 하더라도 당장 하직하겠다고 강력히 말씀드렸다. 상이 비로소 마지못해 윤허하는 한편 안심하고 조정에 있으라고 유시하자, 부군은 감히 더 이상 떠나겠다고 청하지 못하여 마침내 도성 안에 머물렀다. 그리고 규례대로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질병을 이유로 숙배(肅拜)하지 않았다.
상이 장차 숭릉(崇陵)에 행차하려 할 적에 부군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위급하고 험난하여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가운데 종묘사직과 신민(臣民)이 오직 전하의 한 몸에 의지하고 있으니, 경계하고 조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당분간 행차를 보류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비록 윤허하지는 않았으나 비지(批旨)가 매우 온화하였다. 며칠 뒤에 다시 좌의정에 제수되었는데, 일곱 번을 상소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자 마침내 마지못해 나와 사은(謝恩)하고 이어 주강(晝講)에 입시하였다.
처음에 뭇 소인배가 은밀히 역적 이남(李柟) 형제에게 붙어 안팎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선동하여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국구(國舅) 김공 우명(金公佑明)이 상소하여 이정(李楨)과 이연(李㮒)이 궁인(宮人)과 음란한 짓을 한 일을 들춰내자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이 갑자기 입궐하여 상을 뵙고는 김공을 불러들여 말의 출처를 따져 물으십사 청하였는데, 그 마음이 사납기 그지없었다. 이정과 이연이 질문에 답변하며 스스로 변명하자 상은 또 갑자기 그들을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김공이 도리어 그들을 무함했다는 죄를 받게 되자 두려운 마음으로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명을 기다렸다. 이에 명성대비(明聖大妃)가 상과 함께 편전(便殿)에 거둥하여 발을 드리우고 대신을 만나 친히 이정과 이연이 음란한 짓을 한 일의 전말과 선왕이 깊이 근심했던 정황을 유시하자, 대신이 마지못해 비로소 그들의 죄를 청하였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할 뿐 완전히 법대로 처벌하지는 않았고, 윤휴와 홍우원(洪宇遠)은 도리어 허물을 대비에게 돌려 겉으로는 권면하고 경계시키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사실 협박하였다. 윤휴는 대비의 행동거지를 단속하십사 청하고, 홍우원은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를 끌어다가 남녀는 각기 안팎에서 자리를 바르게 잡아야 한다는 의론을 펼쳤으며, 그 외에도 번갈아 가며 무도한 말을 올린 자들이 전후로 계속 이어졌다. 이에 사람들이 분통하게 여기면서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부군이 이날 아뢰기를,
“이정과 이연 등은 왕실의 지친(至親)이므로 혹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편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그 궁인은 법대로 분명히 처벌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지난번에 대비께서 친히 납시어 대신들을 만난 일은 실로 상도(常道)가 아니므로 범범하게 말하자면 온당치 않다고 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듯합니다. 그러나 대비의 이 일은 성상의 처분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그에 관계된 바가 지극히 중한데 어찌 이처럼 비상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옛말에 ‘천하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 하였습니다. 성상께서는 늘 이 말을 명심하고 반성하셔야 하고 신하들도 이 말로써 상께 당부 드리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런데 전후로 말씀을 올린 자들이 대비의 잘못만 말하고 단 한 사람도 전하의 처분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자가 없으니 신은 내심 의혹이 입니다. 언관들이 대비의 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만 알고 전하의 당초의 잘못은 알지 못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 어쩌면 대비의 허물을 말하는 것은 쉽고 전하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어려워서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런 식으로 논의한다면 그 말류의 폐단은 장차 의리가 꽉 막히고 인륜과 기강이 어두워지는 데에 이를 것이니, 어찌 몹시 두렵지 않겠습니까. 상께서는 늘 염두에 두셔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수긍하였다. 부군이 또 말하기를,
“이정과 이연 등이 범한 죄는 국가의 더 없이 큰 변고로서, 고금에 없던 일입니다. 선왕께서 융숭히 사랑할 때 어찌 이와 같이 하기를 바라셨겠습니까마는, 옛말에 ‘총애를 받고도 교만하지 않은 자는 드물다.’ 하였습니다. 애정이 너무 지나치면 제한이 점차 느슨해져서 이러한 지경에 이르는 것이니, 이는 당연한 이치입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골육을 시기하고 의심하여 죄가 없는데도 해친 경우는 실로 말할 것도 없지만 애정이 지나쳐 결국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이 또한 끝내는 골육을 해치는 똑같은 결과로 귀결되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종족(宗族)을 대하는 도리는 오직 사랑을 돈독히 하고 재물을 넉넉히 주어 부귀를 누리게만 하면 되는 것이니, 안팎의 경계로 말하면 엄격히 제한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기왕의 일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장래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자, 상이 이 또한 수긍하였다.
이때에 윤휴가 전투용 수레를 사용하자고 건의하였는데, 조정의 의론은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수레가 완성되자 장수와 정승 등 여러 신하가 모두 그것을 써서는 안 된다고 논박하였는데, 윤휴는 또 고집스레 논쟁하였다. 이에 상이 내시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고는 시행하도록 허락하자, 부군이 또 아뢰기를,
“수레를 사용하는 것이 편리한지 여부는 우선은 논하지 않겠습니다. 대신과 여러 재상이 이미 모두 그것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여 의견이 정해질 판이었는데 결국 내시의 말 한마디에 의해 결정되어 버렸으니, 이는 대신과 여러 재상은 경시되고 내시는 중시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천하의 일은 한 집안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 말씀을 올린 자가 자신의 뜻이 행해지기를 기필할 수 있단 말입니까. 또한 조정에서 어찌 그 사람이 불평한다고 하여 불편한 법을 억지로 시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상은 답하지 않고 수찬 이하진(李夏鎭)이 강력하게 해명하였다. 이에 부군이 말하기를,
“비지에는 분명히 ‘내시로 하여금 살펴보게 하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하진은 이렇게 운운하고 있습니다. 경연에 입시하는 신하가 임금과 매우 가까이에 있으면서 일을 논하는 것이 어쩌면 이리도 구차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근래에 사대부들이 내시와 관련된 말이면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으니, 조정의 일이 정말 지극히 한심합니다.”
하자, 이하진이 또 나가서 논변하였다. 부군이 그가 자기만 옳다고 강변한다고 비판하고 추고(推考)하십사 청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입궐하여 뵐 적에는 갑자기 하교하기를,
“좌상이 어제 ‘근래에 사대부들이 내시와 관련된 말이면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무슨 말인가? 어린 임금이라고 업신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였다. 부군이 대답하기를,
“다른 일은 차치하고 다만 윤휴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신과 중신(重臣)이 사용하기 어렵다고 말하였건만 오직 내시의 말에 의거하여 사용하게 하셨으니, 이는 대신은 경시되고 내시는 중시된 것입니다. 이하진의 말에는 실상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드러나 있기 때문에 감히 말씀드린 것이니, 신이 비록 보잘것없기는 하나 어찌 감히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물러나가 대죄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부군이 말하기를,
“신은 전후로 지은 죄가 매우 중한데도 성상의 은총에 감격하여 감히 한결같이 물러나 칩거하지 못하고 어제 비로소 나와 사은하였습니다만 일을 그르쳐 낭패하리란 것은 실로 이미 스스로 예견하였습니다.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 보아도 신의 어리석고 망녕된 실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비록 성상의 관대하신 도량으로 죄주지는 않으셨지만 어둡고 그릇된 견해로 말미암아 끝내는 반드시 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 만약 그 죄를 밝히고 내쫓아서 큰 죄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해 주신다면 비단 신에게 다행일 뿐만 아니라 국가에도 다행일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신이 죄가 두려워 할 말을 못하면서 국록을 허비한다면 이와 같은 신하를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고, 물러나서 또 상소하여 견책을 청하였으나, 상은 온화한 비답을 내려 타일렀다.
그 뒤에 홍우원이 상소하여 부군을 공격하고, 상이 또 엄한 비지를 내려 출근하지 않는 신하들을 꾸짖으며 독촉하였다. 이에 부군은 더욱 불안한 나머지 연달아 상소하여 죄를 청하였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에 선류들은 모두 쫓겨나고 뭇 소인배만 빽빽한 삼[麻]처럼 많았는데, 부군은 그 사이에 혼자 있으면서 공격과 배척을 받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부군은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스스로 논죄하면서도 번번이 바른 말로 지탱하고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예컨대 홍우원이 여러 신하가 출근하지 않는 것에 대해 조정을 더럽히는 처사라고 비난하자 부군이 말하기를,
“신은 출근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감히 출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죄명이 매우 무거워 여론이 들끓더니 나중에는 직함을 갖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배척하고 거만하고 분노한다고 지목하여 더 이상 나아갈 길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신이 비록 출근하고자 한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의 조부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은 일찍이 정축년(1637, 인조15)의 난리 뒤에 유감을 품은 자들의 참소와 무함을 받아 임금을 부정하게 여겨 섬기지 않았다는 죄명을 쓰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신이 당한 경우도 이와 똑같습니다. 신의 조부도 이런 곤경을 면치 못하였는데, 더구나 신처럼 불초한 사람에게 있어서야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홍문관 관원이 신록(新錄)이 지연되었다는 이유로 부군을 패초하십사 청하자, 부군이 상소하기를,
“홍문관의 신록이 비록 중하고 급하기는 하나 이 때문에 정승을 패초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고, 홍문관 관원이 정승을 부르십사 청한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조정의 체통이 크게 무너졌다고는 하나 만약 정승의 직책에 있는 사람이 옛 대신들처럼 훌륭하다면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이 또한 보잘것없는 신이 구차히 정승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경멸을 자초한 결과입니다.”
하였다.
또 오정위(吳挺緯)가 아무개를 이조 판서로 삼아야 한다고 천거했다가 윤가적(尹嘉績)의 비판을 받게 되자 문정공(文正公)이 김 문경공(金文敬公)을 천거한 일을 끌어대어 스스로 해명하였는데, 부군이 상소하기를,
“신의 조부는 세 임금을 모신 원로인 까닭에 효묘(孝廟)께 천고에 유례없이 융숭한 예우를 받았습니다. 효묘께서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죄다 신의 조부에게 물으셨으니, 그렇다면 사람을 천거하는 것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 본디 대신의 직분이므로 이름을 들어서 차자를 올린 것은 본디 지나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오정위가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올랐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높이 받드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벼슬은 육경(六卿)입니다. 육경이 총재를 천거한다는 말은 이제껏 들어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 일과 동일시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나이가 어려서 아직 고사(故事)를 분명히 알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온 세상 사람 중에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기에 임금에게 고하는 말을 이렇게 함부로 한단 말입니까.
신이 듣건대, 임금을 섬길 적에도 감히 조상을 잊지 않는 것이 옛 의리라고 합니다. 남들이 하는 말이 신의 조부와 상관이 없는 것이라면, 비록 법을 무너뜨리고 분수를 넘어 못하는 말이 없다 하더라도 실로 오늘날 신이 감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내심 생각건대, 신의 조부가 죽은 지 이미 20여 년이 지났는데 갑자기 남의 핑곗거리가 되어 결국은 사대부들이 모두 부끄럽게 여기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으니, 신이 이러한 상황에서 어찌 감히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차마 조정에 끼어 있으면서 함께 그 논의를 주고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부군은 일에 따라 시비를 따져 사리를 밝히느라 소인배들의 미움을 사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기 때문에 당시에 득세한 자들이 더욱 미워하였다.
부군은 다시 정승이 되었다가 5월에 수십 차례 연달아 정사(呈辭)를 올리고 나서야 비로소 체직되고 도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7월에 가뭄이 심하자 공경(公卿) 이하가 모여 재변을 그치게 할 방책을 강구하도록 명하였는데, 부군은 병 때문에 소명에 달려가지 못하고 수천 자의 차자를 올려 교지에 응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지금 여론을 주도하는 자들은 걸핏하면 반드시,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윤리를 밝힌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보건대 이른바 군신과 부자의 윤리가 밝은 게 아니라 어두움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송시열(宋時烈)의 죄를 논할 적마다 ‘정권을 장악하고 상벌을 전행(專行)한다.’라는 죄명을 씌우고 심지어는 ‘임금도 감히 그 죄를 바로잡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아, 전하께서는 명철한 임금이 위에 있는데도 그 밑에 정권을 장악하고 상벌을 전행하는 신하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번 ‘신하가 강하다.’라는 말이 청나라 통역관의 입에서 나왔을 적에 군신 상하가 몹시 분통해하며 장차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으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신하를 위하여 그런 것이었겠습니까. ‘신하가 강하다.’라는 말에는 임금이 약하다는 의미가 자연히 들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하가 강하기로 말하면 정권을 장악하고 상벌을 전행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마땅히 바로잡아야 할 왜곡된 시각은 다른 나라에 있지 않고 우리 조정에 있다 하겠습니다. 다른 나라의 것은 바로잡고 우리 조정의 것은 방치한다면 의리에 있어 과연 어떻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타고난 효성으로 대비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라면 실로 지극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전하의 신하들은 전하의 효성을 받들지 못하여 전후로 전하께 말씀을 올린 자가 거의 다 윤리를 거스르고 강상(綱常)을 어지럽게 했으며, 심지어 전하께 대비의 행동거지를 잘 돌보십사 권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자식이 부모를 돌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어찌 이치를 거스르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설사 대비께 과연 점잖지 못한 행동이 있었다 하더라도, 공족(公族)은 중죄를 범했더라도 ‘친척을 위하여 과실을 숨겨 준다.’라며 기필코 덮어두려 하면서 어찌하여 유독 대비에 대해서는 《춘추(春秋)》의 ‘존귀한 사람을 위하여 과실을 숨겨 준다.’라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 단(彖)〉에 말하기를 ‘여자의 바른 자리는 안에 있고 남자의 바른 자리는 밖에 있다.’ 하고, 그 아래 글에 말하기를 ‘가인(家人)에는 엄한 임금이 있는데, 이는 부모를 이르는 것이다.’ 하였는데, 주석(註釋)을 단 자가 말하기를 ‘남자와 여자의 바른 자리를 말하고 나서 또 그 근본을 부모의 엄함에서 찾았다.’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남녀의 안팎의 위치가 어머니와 아들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어찌 매우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를 끌어다가 비유하였으니, 실로 너무나 사리에 어긋난 일입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라는 말은 더욱 신하로서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입니다. 지금 항간에서는 대등한 사이에서조차 감히 아들 앞에서 그 부모의 잘못을 지적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전하 앞에서 대비의 허물을 지적하며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말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분의(分義)이며 무슨 도리입니까. 그런데도 명철하신 전하께서 오히려 그 큰 잘못을 용서하시어 한 번도 엄중한 말씀으로 통렬하게 물리치지 않으셨으니, 여우와 쥐처럼 간사한 박헌(朴瀗) 같은 자들이 뒤를 이어 일어난 것은 실로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박헌의 정상(情狀)은 성상께서도 이미 통촉하시어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을 특별히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조사기(趙嗣基)가 공공연하게 소를 올려서 ‘대비께 원망이 돌아간다.’라는 말로 겁주어 임금을 흔들려고 획책하기까지 하였으니, 너무도 기탄없는 행위라고 할 만합니다. 조사기가 견책을 받은 뒤에 박헌을 두둔하던 무리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지기는 했습니다만 온갖 계책으로 그를 구원하면서 합사(合辭)하여 석방을 청하였으니, 그들이 박헌을 위하는 데에는 지극하지만 어찌하여 대비는 위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와 같이 하고도 군신과 부자간의 윤리를 밝힌다고 이를 수 있습니까.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정(李楨)과 이연(李㮒) 등은 왕실의 지친(至親)으로서 두 임금의 망극한 은혜를 입고도 전고에 없던 죄를 범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분해하고 있으며 국법상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펴서 유배보내는 정도에 그치셨으니, 이는 실로 덕이 거룩하게 빛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겨우 반년 만에 갑자기 완전한 석방을 명하신 것은 은혜에 치우쳐서 법을 무시한 처사가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조치가 처음부터 특별한 은혜에서 나왔다면 그래도 친척을 친애하는 어진 마음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하의 강력한 요청을 받고 석방이 너무 늦어진 것이 아닌가 걱정하며 급급해하였으니, 어찌 매우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그들의 변명을 듣건대, ‘애당초 중대한 죄가 아니니, 빗대어 말하자면 이는 여느 집 자제가 부형 앞에서 계집종을 가까이한 것과 같다.’라고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선왕께서 깊이 근심하며 난처해하셨던 점을 대비께서 전에 이미 신하들에게 친히 유시하셨으니, 만일 선왕의 근심을 부당한 근심으로 여기고 대비의 하교를 굳이 믿을 것 없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결코 감히 방자하게 이런 말을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군신과 부자의 윤리를 밝힌다는 자도 이렇단 말입니까.
신하들이 올리는 말은 큰 윤리와 큰 기강에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렇게까지 인륜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리는 말을 하고 있으니, 반드시 인륜과 기강을 표방하도록 한 뒤에야 임금의 덕을 닦을 수 있고 조정의 정사를 다스릴 수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신은 아마도 나날이 몹시 어지러운 지경에 빠져들어 구원할 수 없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말단적인 업무와 미세한 폐단을 혁파하거나 시행하는 일, 그리고 일반적인 옥사의 가벼운 죄수를 너그럽게 처결하여 석방하는 일로 말하면 행해도 되고 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 이런 것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노여움을 풀고 나라의 운명을 길이 이어지게 하려는 것은 잘못된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소차(疏箚)가 들어가자 상이 진노하여 엄한 비답을 내렸다. 이에 양사가 합계하여 죄를 청하였으나 상은 도리어 부군이 양궁(兩宮)을 이간하였다 하여 처음에는 중도부처(中道付處)를 명하였다가 이윽고 멀리 영암(靈巖)으로 유배 보내었다.
이때에 부군의 차자가 한번 나오자 역적 윤휴(尹鑴)의 무리는 심장과 간장이 도마 위에 놓인 것처럼 두려워하였는데, 그러한 모습은 사람마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부군 자신은 비록 좌절당했으나 자전을 흔들려는 뭇 소인배의 소행도 그로 인하여 저지되었으니, 이는 실로 부군의 힘이었다. 부군은 유배지에 간 뒤로 두문불출하며 날마다 《논어》와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송독하고 음미하였으며 유배당했다는 사실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재(尤齋)가 이때에 바닷가에 있었는데, 부군과 거의 매달 빠짐없이 서찰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강론하고 토의하는 가운데 뜻이 맞아 더욱 깊이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사방의 선비가 모두들 흔쾌히 추중하였으나 뭇 소인배는 더욱 꺼려서 중간에 부군을 내지(內地)로 옮겨 안치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번번이 가로막았다. 무오년(1678, 숙종4)에 비로소 철원(鐵原)으로 옮겨 안치되었다.
경신년(1680, 숙종6) 3월에 허견(許堅)과 이남(李柟)이 반역을 모의한 일이 발각되어 간사한 무리가 모두 귀양 가거나 처형되었다. 부군은 유배지에서 서용되어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마침 질병이 있어 사직하고 즉시 부임하지 못하였다. 이에 상이 더욱 급하게 재우쳐 불러서 며칠 사이에 근시(近侍) 4, 5명이 이르렀다. 부군이 마침내 질병을 무릅쓰고 도성에 들어가자 도성 안의 사민(士民)들이 모두 이마에 손을 대고 길 양쪽에서 발돋움하며 바라보았다. 상은 즉시 인견(引見)을 명하고서 술을 하사하며 온화하게 타이르기를,
“지난날 대간들이 무도하여 방자하게 임금을 속이고 나 또한 어려서 깨닫지 못한 나머지 해를 꿰뚫을 만큼 충성심이 지극한 경을 처벌하였으니, 오늘날 경을 보자니 내 몹시 부끄럽다.”
하고는 나가서 옥사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때에 임금과 매우 가까운 곳에서 반역을 꾀한 변고가 일어나 하마터면 종묘사직이 위태로울 뻔하였다. 그런데도 우두머리만 처형되고 나머지 패거리는 대부분 법망을 빠져나갔다. 이에 사람들이 분노하여 되도록이면 시원하게 그들을 모조리 처형하려 했으나 부군은 번번이 형벌의 남용을 근심하였으니, 전후의 헌의가 대부분 다시 조사하여 처벌을 타당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혁연(柳赫然)은 이천(伊川)의 둔병(屯兵)을 통솔하여 역적 허견의 처남 강만송(姜萬松)으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였는데, 역적 허견이 모반할 적에 실로 이것을 무력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부군은 그가 세 임금을 모신 숙장(宿將)인 데다 그 자신이 모반에 참여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으므로 사형을 감하여 논죄하십사 특별히 청하였다. 이원정(李元楨)은 체부(體府 체찰부(體察府))를 다시 설치하십사 건의해서 여러 역적이 그의 말을 끌어다 논거로 삼았지만 그 정상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번 신문하고는 즉시 석방하였다. 그러다가 이원성(李元成)이 재차 고변하고 유혁연과 이원정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더욱 빈번하게 나오자 마침내 모두 사형되었다.
또 대간이 맨 처음 윤휴의 죄를 말하면서, “대비의 행동거지를 단속하라.”라고 한 윤휴의 말을 가지고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의 간악함을 이어받았다고 규정하고는 그를 주벌하십사 청하였는데, 한 번 아뢰어서 즉시 윤허받았다. 이에 부군이 속히 뵙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윤휴의 이 말을 궁극적으로 미루어보면 그 마음이 실로 괘씸하고 엉큼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가지고 곧장 정인홍, 이이첨과 같은 죄로 단정하는 것은 법을 적용하는 도리로 볼 때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조정에서 형벌을 시행할 적에는 자세하고 신중해야 하며 또한 사죄(死罪)에 대해서는 세 번 심리하는 법이 있습니다. 더구나 지난날 총애가 비상했던 사람을 심문도 않고 곧장 사형에 처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인 듯싶습니다. 그리고 윤휴가 이 말을 할 적에 신은 경연 석상에 입시하지 못하여 다만 돌보시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그 후에 김석주(金錫胄)의 말을 들으니, 윤휴는 단속하시라고 했지 돌보시라고 하지 않았으며 당시에 허적(許積)도 상 앞에서 잘못된 말이라고 대놓고 비판했다고 하였습니다. 대간의 계사에 말한 것은 아마도 이로 말미암은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곡절을 분명히 말하지 않고 느닷없이 ‘단속하시라.’라고 글월을 고친 것도 온당치 못한 것 같습니다.”
하고는, 윤휴를 체포해 와서 국문한 뒤에 그 죄를 분명히 판결하십사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윤휴가 국문을 받으며 즉시 자복하지 않자 상이 무오년(1678, 숙종4)에 그가 올린 비밀 상소를 꺼내어 의금부에 내렸는데, 말이 지극히 음험하여 그 뜻이 한 무리의 사류를 모두 도륙하려는 데에 있었다. 윤휴는 마침내 이 때문에 사사(賜死)되었다. 이때에 밖에서는 너무 느슨하게 논죄한다고 부군을 상당히 탓하는 여론이 일었는데, 훗날 간사한 무리가 무함할 적에는 마침내 이 몇 사람이 죽은 것을 모두 부군의 죄로 삼았으니, 아,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5월에 가뭄이 심하여 죄수들을 너그럽게 처결하는 일이 있었다. 우재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내지로 옮겨 안치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또 석방을 명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날 비가 세차게 내리자 부군이 들어가 상을 뵙고 말하기를,
“전부터 가뭄 때문에 죄수들을 너그럽게 처결한 때가 없지 않았으나 오늘처럼 그 효과가 빨리 나타난 적은 없었으니,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것은 물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고 북을 치면 북소리가 나는 것보다 더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말에, ‘임금이 하는 일은 천지와 서로 통한다.’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 명령을 내리고 한 가지 조치를 취할 적에도 화복(禍福)이 그에 따라 곧바로 이르는 것이니, 자신을 반성하여 수양하는 도를 어찌 신중히 지키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일시적으로 비를 얻은 것이 비록 다행스럽기는 하나 마음을 다잡거나 방치하는 것은 늘 변하여 고정되지 않는 것이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더욱 하늘을 마주 대한 것처럼 경건히 지내소서.”
하고, 뒤에 또 상에게 말하기를,
“옛날 주자(朱子)가 조여우(趙汝愚)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기를, ‘오늘날 제일가는 급선무는 임금에게 몸과 마음을 수습하고 정신을 보호하여 아끼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옛사람이 임금을 권면하고 경계시킬 적에 반드시 이를 우선으로 한 것은 깊고 절절한 뜻에서 그런 것입니다. 《근사록(近思錄)》에도 이르기를, ‘배우는 사람은 늘 정력(精力)을 아껴 길러야 하니, 정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피로해져서 임하는 일마다 모두 마지못해 할 뿐 성의가 없게 된다.’ 하였습니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루에 만 가지 정무를 처리하는 임금이 만약 정력을 기르고 보호하여 정신을 수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에 응하여 피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마음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하였으니,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이 점에 더욱 유의하소서. 그리하여 시종 성상의 몸을 보양하신다면 학문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필시 유익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모두 받아들였다.
이때에 홍문관 관원을 선발하는 일이 있었는데, 상이 ‘이사명(李師命)은 글재주가 있으므로 경연에 두어야 한다.’라고 하며 도당(都堂)으로 하여금 일률적으로 권점(圈點)하게 하였다. 이에 부군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국가에서는 경연관을 선발하는 데에 매우 신중하여, 우선 홍문관으로 하여금 후보자를 뽑아 기록하게 한 다음 이를 다시 의정부의 대신 이하 및 관각(館閣)과 인사 담당 부서의 신하들에게 일제히 모여 권점토록 명해서 그 취사를 결정하였으니, 사안이 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선발하였더라도 적임자가 아니면 뒤에 논박하여 바로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께서 미리 지휘를 하시니, 이는 업무를 우선 유사에게 맡기는 의리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아래에 있는 사람이 오직 상의 명령만 받들기를 마치 해당 관서의 말단 관원이 명령을 봉행하는 것처럼 한다면 훗날의 폐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그 사람의 재주를 아껴서 한번 등용해 보고 싶다면 그의 재능을 길러 성취시켜 주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만약 급작스레 비상한 조치를 취하여 바깥에서 비난하는 여론이 일게 한다면 그 사람도 필시 위축되어 감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그 재능을 장려하여 향상시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하자, 상이 마침내 그 명을 거두었다. 또 일찍이 주강(晝講)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옛날에는 임금을 보양(輔養)하는 방도로 사(師), 부(傅), 보(保)의 세 직임을 두었으니, 사(師)는 가르쳐 인도하고 부(傅)는 덕의(德義)를 돕고 보(保)는 신체를 보호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이 세 직임이 모두 경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임금은 궁중에서의 말과 행동, 의복과 음식을 모두 경연관으로 하여금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후세의 규정은 옛날과 달라서 매일 연석을 열어도 불과 몇 시간 만에 파하고 맙니다. 이 때문에 임금이 궁중에 들어가고 나면 말과 행동, 의복과 음식의 상세한 내용을 아무리 가까운 신하라 해도 알 길이 없으니, 임금이 환관과 궁첩(宮妾)을 대할 적에도 한결같이 어진 사대부를 접할 때처럼 한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옛 성현은 늘 안일을 경계하였는데, 임금이 참으로 이 경계를 지켜 궁중에서 안일하게 지내는 즐거움에 빠지지 않고 때때로 신료들을 불러서 경서(經書)의 뜻을 토론하고 치도(治道)를 자문한다면 신료들도 격앙되고 감동하여 소양을 다 발휘할 것이니, 임금을 성의껏 깨우치고 보도(輔導)하는 보람이 어찌 적겠습니까.
옛날 우리 세종(世宗)과 성종(成宗)께서는 경연관을 우대하여 길러서 한 시대의 문사(文士)가 부쩍 성하게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이때보다 인재가 많은 때가 없었으니, 인재를 기른 효과를 매우 잘 알 수 있습니다. 인종(仁宗)은 보위에 오래 계시지 않았지만, 여러 해 동안 춘궁(春宮)에 계셨습니다. 당시 중묘(中廟)께서는 학문이 고명하시어 춘방(春坊)의 요속(僚屬)을 당대의 가장 뛰어난 인재로 기용하였고, 인묘(仁廟)께서는 왕왕 입직하는 곳에 친히 납시어 경전의 의미를 논란하였으니, 역대 임금들께서는 유신(儒臣)을 이처럼 우대하였습니다. 경연관의 직임은 학문과 시사를 논하는 것이니 비단 규례대로 강독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진강(進講)하는 것 외에 별도로 편안히 만나서 치도를 자문한다면 필시 유익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주자(朱子)의 두 번째 〈갑인행궁편전주차(甲寅行宮便殿奏箚)〉에 독서하고 이치를 궁구하는 방법을 매우 상세히 논하였으니, 상께서 살펴보실 수 있도록 홍문관으로 하여금 써 올리게 하소서. 성상의 학문에 유익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즉시 써 들이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상이 《상서(尙書)》 군석편(君奭篇)을 강하고 있었는데, 부군이 나아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혈기 왕성한 한창의 나이에 나랏일을 밝게 익히고 정신을 가다듬어 잘 다스리려고 노력하며 지성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특히 간언을 받아들일 적에 막힘이 없으니, 대소 신료 중에 누구인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이 아무리 총명하고 슬기롭더라도 혼자서 정치를 할 수는 없으니, 반드시 재주와 덕이 모두 뛰어난 신하를 얻어야만 나랏일을 잘 다스릴 수 있고 조정이 편안해집니다. 오늘 진강(進講)하는 글을 가지고 보면, 대신은 온갖 책무가 집중되는 자리이므로 세상을 진정시키고 중론(衆論)을 조정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은 조정이 막 변고를 당하여 소공(召公) 때보다도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신은 재주가 부족하고 기국이 작아서 세상을 진정시키고 중론을 조정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식견이 어두워서 준걸을 선발하여 조정에 포진시키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신하가 용렬하여 큰일을 해낼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마시고 지극히 공정한 도를 더욱 넓혀 지성으로 아랫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소서. 그리하신다면 필시 어질고 지혜로운 선비가 감격하고 보답할 생각을 하여 세상에 나와 쓰일 것입니다.”
하였다.
대간이 지난날 역적 집안에 빌붙은 사람을 논죄하였는데, 각기 자신이 보고들은 것에 의거한 까닭에 중도에 지나쳐 사실과 다른 점이 없을 수 없었다. 이에 사람들이 매우 불안해하자, 부군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흉악한 역모가 왕실의 지친과 장수나 정승 같은 거족에서 나와 조정의 고관 중에도 연루된 자가 매우 많으니 죄상이 현저히 드러난 자는 실로 물리쳐 내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까지 모두 심하게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 옥사를 다스릴 때에 특별히 관대한 형률을 쓴 까닭에 법망을 빠져나가는 자가 있을까봐 경향 각지에서 모두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사람을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법대로 처벌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 낫다는 도리로 볼 때 어찌 나쁠 것이 있겠습니까. 음관(蔭官)과 무관(武官) 등으로 말하면 비록 한때 역적 집안에 빌붙었던 자취가 있더라도 만일 그들을 모조리 다스리려고 한다면 그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대간의 소장에 번거롭게 다 언급할 필요가 없고, 비록 인사 담당 부서의 관원이라 해도 보고 들은 것에 따라 기용하거나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각의 관원들이 세상을 진정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과격하게 주장할 생각만 하니, 참으로 옳지 않습니다.”
하고, 이어 낱낱이 말하기를,
“대간의 계사에서 아무개, 아무개를 비난하며 역적 허견(許堅)의 심복이라고도 하고 역적 허견의 심려(心膂)라고도 하였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그 말이 사실과 다르다고 합니다. 그 밖의 경우가 비록 다 그렇지는 않으나 대체로 비평하는 말이 매우 많습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옛말에 이르기를, ‘우두머리는 처단하되 위협에 못 이겨 추종한 자들은 다스리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도 이르기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안심시키려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지금도 죄인을 용서해 주는 은전(恩典)을 써서 관대한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부군이 말하기를,
“이 일은 대신이 진정시켜야 하는데 신은 역량이 부족합니다. 만약 그 근본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신들을 꾸짖어 물리치고서 먼저 대신을 잘 가려 뽑은 다음 대각의 장관도 세상의 변고를 겪은 노성한 사람으로 뽑아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대간 정면(鄭勔)의 말을 채택하여 선왕의 실록을 개수하면서 부군을 총재관(摠裁官)으로 삼고는, 거듭 사직해도 윤허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상이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이미 방례(邦禮)가 정해졌으니,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강신(强臣)이나 흉악한 자가 있으면 역률(逆律)로 논죄하라.”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상당히 의구심을 품고 상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와서 부군이 입궐하여 뵙는 기회에 차분히 말하기를,
“옛날 진 평공(晉平公)이 숙향(叔向)에게 묻기를, ‘나라의 환란 중에는 무엇이 중대한가?’ 하자, 대답하기를 ‘대신은 녹(祿)만 받고 극간(極諫)하지 않고 하급 관원은 죄를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않으면 아랫사람의 실정을 위에서 알 수가 없으니, 이것이 큰 환란입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송 철종(宋哲宗) 초년에 사마광(司馬光)은 맨 먼저 상소하여 《주역》의 ‘천지가 사귀면 기운이 통하고 사귀지 않으면 막히게 된다.’라는 설을 인용하며 임금과 신하가 서로 교제하는 도리를 힘껏 진달하였습니다. 지금은 밝은 성상께서 등극하시어 아랫사람들을 성의껏 대하며 간언을 물 흐르듯 막힘없이 받아들이니, 아랫사람의 실정을 위에서 알지 못할까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들의 본심을 성상께서 간혹 다 통촉하지 못하시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성상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신료들이 간혹 다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서로 의심하여 단절되는 상황으로 점점 악화되어 불행히도 천지의 기운이 막히는 형상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외람되이 대신의 반열에 있는 신이 만약 혐의가 두려워 할 말을 하지 않는다면, 끝내 상하의 따뜻한 정과 참된 뜻이 시원히 통하여 의심이 풀릴 날이 없을 것이니 어찌 감히 소회를 남김없이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내리신 성상의 하교는 실로 그럴 만한 뜻이 있는 것임을 잘 압니다만, ‘강신이나 흉악한 자’라는 말은 신하가 감히 들을 수 없는 말이라 신하들이 대부분 송구하여 불안해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성상의 하교가 엄중한 데다 예론(禮論)과 관련된 일이기에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상께서 이내 지나치다는 것을 깨닫고 신하가 말씀드리기 전에 특명을 내려 그 말을 삭제하게 하셨으니, 경향 각지의 사람들 중에 그 누군들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예법이 정해지기 전에 갑론을박하며 쟁송하는 것은 예로부터 피할 수 없는 과정이지만 임금이 한때의 의리에 비추어 새로 정한 규정도 그 나름대로 당대의 제도입니다. 선왕께서 이미 친히 예경(禮經)을 상고하여 복제(服制)를 바로잡았는데 신하 된 자로서 어찌 감히 비난하거나 헐뜯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갑인년(1674, 현종15) 이후로 어지럽게 상소하여 말씀드린 것은 감히 선왕께서 정한 예법을 비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을 헐뜯고 얕잡아 보며 종통(宗統)을 어지럽힌다는 죄명을 씌워 사지(死地)로 내몰았으니, 어찌 신의 본심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후의 논변은 이러한 정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감히 예를 논하는 말로 다시 성상을 번거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인조(仁祖) 임금 때의 일을 가지고 한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인묘(仁廟)의 부친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던 때에 조정 신하들이 반대 주장을 펼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견책을 당한 자가 많았는데, 전례(典禮)가 정해지자 즉시 명하여 죄입은 신하들을 다 풀어 주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일은 이와 매우 유사한데 하교의 내용이 이와 같으시니, 밝으신 성상께서 오히려 아랫사람들의 본심을 통촉하지 못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성상께서는 몇 개월 전부터 죄명을 씻어주는 은전(恩典)을 크게 베푸시어, 유배 간 자는 용서하여 돌아오게 하고 죄받고 버려진 자는 거두어 쓰는 조치를 성상 스스로 결단하되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기뻐하였습니다만, 아랫사람들은 아직도 분명히 알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성상께서 만약 죄를 받은 신하들이 예를 논할 때에 착오가 있었을 뿐 본심은 원래 처벌할 만한 점이 없었다고 여겨 이러한 조치를 취하신 것이라면 아랫사람들은 오로지 성상의 후덕한 뜻을 받들고 감동과 두려움 속에 직무를 다하기에 여념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성상께서 이들이 임금을 얕잡아 보고 종통을 어지럽힌 죄는 정말 사람들의 말과 같다고 여기시면서 다만, 전번에 임용한 신하가 쫓겨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보다 먼저 임용했던 사람을 다시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이처럼 죄명을 씻어주는 것이라면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이른바 죄명을 씻어준다는 것은 하찮은 허물, 미미한 잘못에 대해 하는 말입니다. 임금을 폄하하고 종통을 어지럽힌 것으로 말하면, 이는 바로 신하의 지극히 큰 죄이므로 비단 윗사람이 용서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아랫사람도 이러한 죄명을 지고는 하루라도 숨을 쉬고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관직을 가지고 조정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밝으신 성상께서 결코 이와 같지는 않으실 줄 압니다. 그러나 명백하게 성상의 뜻을 열어 보이는 하교가 없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의구심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송 태조(宋太祖)가 말하기를, ‘중문(中門)을 활짝 열어 놓으니 내 마음과 똑같구나.’ 하였습니다. 임금의 마음은 반드시 떳떳하고 정당하여 가까이는 조정의 신하들로부터 멀리는 사해(四海)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막힘이 없이 환히 통해야 합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털끝만치라도 막힘이 있으면 비단 서로 신뢰하는 의리에 어긋날 뿐만이 아니니, 어찌 나랏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말하기를,
“나는 지난번에 나온 ‘임금을 헐뜯고 얕잡아보며 종통을 어지럽힌다.’라는 등의 말이 실정을 벗어난 무고임을 안다. 그래서 죄입은 신하들의 죄명을 모두 씻어주고 거두어 쓴 것이니, 어찌 마음속으로는 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억지로 거두어 쓸 리가 있겠는가. 임금과 신하 사이는 따뜻한 정과 참된 뜻이 통하여 서로 신뢰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서로 의심하여 격의를 두어서는 안 되니, 내 뜻은 본디 이와 같지 않았다.”
하였다. 이에 경향 각지에서 모두가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환하게 알았다. 부군이 또 상에게 말하기를,
“신은 일찍이 윤증(尹拯)과 박세채(朴世采)를 초빙하여 경연 석상에 출입하게 하십사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왕왕 유자(儒者)의 이름을 빌려 세상을 속이는 자가 있었으니, 크게는 나라를 해치고 작게는 자신을 망칩니다. 간혹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듯, 임금도 그러한 자 때문에 선비들을 경시하는 마음을 품기도 하는데, 이는 학문의 죄가 아닙니다. 지난날 윤휴가 평소에 두터운 명성과 인망을 지녔다가 온 세상을 다 그르쳐 놓았지만 어찌 그 일 때문에 학문한 선비를 경시해서야 되겠습니까.
송(宋)나라 신하 여공저(呂公著)가 일찍이 상질(常秩)을 천거했는데, 상질이 뒤에 상당히 품행을 바꾸었습니다. 이에 여공저가 그를 천거한 것을 후회하자 정명도(程明道)가 말하기를, ‘시랑(侍郞)은 차라리 백번 남의 속임을 받을지언정 어진 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시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학문이 고명하여 매우 부지런히 어진 이를 구하시니, 필시 윤휴의 일 때문에 선비를 경시하는 마음을 품지는 않으실 줄로 압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이처럼 되기가 쉬우니, 바라건대 더욱 돈독히 예우하여 반드시 윤증과 박세채를 경연 석상에 초치해서 성상의 학문에 보탬이 되게 하소서.”
하자, 상이 가납하였다.
8월에 상이 공신 회맹(功臣會盟)에 몸소 나와서 경복궁 옛터를 두루 살펴보았는데, 부군이 나아가 말하기를,
“역대 임금들이 덕과 인을 쌓아 이 궁궐이 있게 되었습니다. 성상께서 오늘 이곳에 오셨으니 처음 창업할 때의 수고로움을 유념하소서.”
하고, 이어 숭녕전(崇寧殿)과 문소전(文昭殿) 및 궐내의 여러 관사가 있는 곳을 낱낱이 가리키며 고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안에는 아름다운 못과 누대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북문 밖은 바로 회맹단(會盟壇)으로, 그곳은 삼청동(三淸洞)과 가까워 수석이 상당히 아름다운데도 후원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주색과 유람에 빠진 연산군(燕山君)도 감히 그곳을 후원으로 만들지 못하였으니, 선왕께서 후손을 위하여 세우신 계책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원성(李元成)이 허견(許堅), 이남(李柟)의 잔당을 고발하여 그들이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이에 상이 국청(鞫廳)의 신하들에게 재차 시상하려 하자 부군이 입궐하여 상을 뵙는 기회에 그러한 처사가 옳지 않다고 극언하였다. 이윽고 말을 하사하라는 명이 있자 부군이 또 차자를 올려 강력히 사양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상이 또 이원성이 거듭 고발한 뒤에 역모의 정상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며 정공신(正功臣) 5인을 다시 녹훈(錄勳)하려고 논의하였는데, 부군과 여러 대신이 모두 옳지 않다고 말하였으나, 상은 따르지 않고 속히 감정(勘定)하라고 명하면서 부군의 헌의(獻議) 가운데 있는 한 단락의 말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다. 이에 부군이 또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공이 있는데도 녹훈되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라는 신의 말은 단지 문장을 구사하다 보니 들어간 일반론일 뿐이고, 그 맺음말에서 중점을 둔 것은 전적으로 ‘근거할 만한 선례가 없으므로 가볍게 논의하기 어렵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처분은 일반론만 취하고 그 중점을 둔 말은 채택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신이 헌의한 본의가 아니요, 또한 성상께서 자문하여 의견을 듣는 도리에 어긋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세운 공훈을 이제 와서 녹훈하는 조치가 일의 성격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국가의 대소사(大小事)는 반드시 법규에 근거하여 행해야 합니다. 더구나 공신을 녹훈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례(典禮)인데 선례가 있는지 따져보지도 않고 신하들의 논의를 배제한 채 급작스레 결정함으로써 후세의 비판을 초래하고 말류의 무궁한 폐단을 열어 놓는단 말입니까.”
하였다. 뒤에 또 입궐하여 뵙고 그러한 조처가 옳지 않다고 말하고, 효종(孝宗) 때의 신호(申壕)의 선례대로 녹훈은 하지 않더라도 상전(賞典)과 예우를 한결같이 정공신과 같이 하십사 청하였으나, 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경술년(1670, 현종11)에 역적 이남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아뢰기를,
“청나라 임금이 ‘그대의 나라는 신하가 강하다.……’라며 물었지만, 당시에 신이 혼자 가까이 불려가 질문을 받았고 부사(副使) 이하는 모두 멀리 있었으므로 무슨 말을 했는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오시수(吳始壽)가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또 이러한 말을 아뢰면서 통역관 박정신(朴廷藎)이 청나라 통역관 장효례(張孝禮)에게 들었다고 하였는데, 박정신은 그런 말을 듣지 않았다고 강력히 부인하였다. 오시수가 또 황해 감사(黃海監司) 윤계(尹堦)를 증인으로 내세웠으나, 윤계가 또 상소하여 말하기를,
“실은 오시수가 신에게 말한 것이니, 신은 달리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오시수가 스스로 꾸며내어 역적 이남의 말에 증거를 대는 것이 아닌가 상당히 의심하였다. 청나라의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을 방안을 논의할 적에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이 상의 뜻을 받들고 와서 부군에게 묻자 부군이 말하기를,
“먼저 장효례에게 물어보아야 하니, 그런 뒤에야 바로잡을 방안을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마침내 허적으로 하여금 장효례에게 물어보게 하자, 허적이 청나라 사신이 머무는 객관(客館)에 가서 좌우를 물리치고 장효례와 대담하였다. 이윽고 돌아와 말하기를,
“장효례가 자신이 한때 실언한 것이라고 실토하였으니, 청나라에 들어가 바로잡을 것이 없습니다.”
하여, 일이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정세가 뒤바뀐 초기에 수찬 박태손(朴泰遜)이 맨 먼저 오시수의 간악한 정상을 말하고는 속히 시비를 가려 밝히기를 청하였다. 이때 마침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게 되자 상이 금을 가지고 가서 장효례가 한 말의 허실을 탐지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는데, 과연 사실과 달랐다. 이에 상이 더욱 오시수가 스스로 꾸며낸 것임을 알고는 그를 체포하여 국문(鞫問)하도록 엄한 교지를 내렸다. 부군이 여러 대신과 함께 명을 받들어 조사하고 신문하였는데, 오시수는 더는 할 말이 없는 상황에서도 실토하지 않았으며 전후로 널리 끌어댄 증거가 모두 실상이 없었다. 상이 혹독한 형벌을 가하며 신문해서 실정을 캐내도록 명하자 부군이 입궐하여 뵙고 말하기를,
“오시수는 명색이 대신이므로 함부로 고문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의 지위를 참작하여 사사(賜死)하소서.”
하였다. 다른 대신과 국청(鞫廳) 신하들의 의견이 모두 이와 같으니, 상이 따랐다. 그리고 대간이 엄히 국문하여 처단하십사 청하는 계사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에 혜성이 나타났다. 상이 공경(公卿)과 삼사(三司)를 불러서 재변을 그치게 할 방책을 자문하자, 부군이 청하기를,
“상께서는 신독(愼獨)하여 덕을 닦고, 궁중을 바르게 다스려서 그 기반 위에 나라를 통치하고, 사사로운 뜻을 내버려서 나랏일에 전념하고, 재용을 절약하고 경비를 아껴서 군민(軍民)들이 받는 폐해를 바로잡으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신하들이 대답한 말을 모두 써 올려서 성상께서 살펴볼 수 있도록 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부군이 물러나서 상께 대답한 내용을 부연하여 글을 짓고 차자를 갖추어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삼가 아룁니다. 전하께서 성상(星象)의 이변 때문에 경각심을 지니고 공경과 여러 신하를 불러 차분히 자문하며 병야(丙夜)가 되도록 쉬지 않으셨으니, 이 하나만으로도 하늘을 감동시켜 돌리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신은 외람되이 전하를 보필하는 직임을 맡고도 생각이 부족하고 학식이 엉성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거나 일을 바로잡는 방도를 아뢰어서 성상의 아름다운 명에 답하지 못하였으니, 물러 나와 종일토록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마음만 간절합니다. 신이 진달한 것은 참으로 고루하여 채택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창졸간에 바쁘고 부산한 나머지 혹은 실마리만 거론하고 내용을 다 말하지 못한 것도 있고, 혹은 외면적인 일만 제기하고 그 의리를 상세히 말하지 못한 것도 있어서, 그 본의를 드러내어 밝히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대략 부연 설명하여 논리를 갖추고 삼가 별지(別紙)에 기록해서 남들을 따라 올립니다.
한편 신은 삼가 생각건대, 이번에 신하들이 각기 소회(所懷)를 진달한 것 가운데 기이한 계책이 없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하나 모두 임금의 덕에 관계되고 백성의 폐막(弊瘼)과 밀접한 것들로서 한결같이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여 잘못을 바로잡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전하께서 만약 그 가운데 좋은 계책을 가려 힘써 행하신다면 그 또한 재변을 그치게 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동중서(董仲舒)가 하늘을 섬기는 임금의 도리를 논하면서 ‘일은 힘써 노력하는 데에 달렸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힘써 노력하신다면 한마디 말로도 족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한갓 한때의 말거리, 들을 거리로만 삼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계책을 매일 성상 앞에서 말씀드린다 한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반드시 덕을 닦되 덕을 닦은 실상이 있고, 학문을 강하되 학문을 강한 실상이 있고, 백성을 사랑하되 백성을 사랑한 실상이 있어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힘써 노력했다고 할 수 있고 하늘의 상서가 점점 많이 이르러 여러 가지 복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11월에 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이변이 있었다. 이에 부군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을 면직시켜 하늘의 견책에 답하고 훌륭한 정승을 새로 뽑아 어려운 시국을 타개하소서. 또한 전하께서도 더욱 경각심을 품고 힘써 실제적인 덕을 닦으셔야 할 것이니, 쇠미(衰微)하다고 의기소침하지 말고 분발하여 진작하시고, 혹시라도 슬픔과 근심 때문에 신하들을 불러 시사를 자문하고 학문을 강론하기를 폐하지 마소서. 그리고 움직일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조심하여 혼자 계실 때에도 반드시 몸가짐을 삼가고,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빠짐없이 대응하되 반드시 먼저 원대한 뜻을 세우소서.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은 비록 분명히 분변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나 반드시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견고히 정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벌은 되도록 법과 이치에 부합하도록 하여 반드시 고식적이고 구차하게 내리는 것을 경계하소서. 그리하여 은미한 마음속에서부터 정책과 법령을 시행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하늘의 법칙을 따르고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운 뜻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신다면, 재앙을 상서로 돌리고 하늘에 영원한 국운을 기원하는 방도가 그 속에 들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인경왕비(仁敬王妃)가 막 승하하였는데 해마다 기근이 들어 국가와 민간의 재력이 모두 바닥난 까닭에 산릉(山陵)의 비용을 댈 수 없었다. 부군이 이를 근심하여 청하기를,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의 군사 1천 명을 2개월 동안 번(番)에서 빼고 그 늠료(廩料)를 흠위(廞衛)와 여러 가지 역사(役事)에 보태소서. 그리고 강화도의 돈대(墩臺)에 사용할 석회가 해변에 쌓여 있는데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아직 많으니, 그것을 가져다가 인광(闉壙)을 만드는 데에 충당하고 외방에 요구하지 않도록 하소서. 그 밖에도 옮겨 쓸 수 있는 물력이 있으면 모두 상규에 얽매이지 말고 그때그때 적당하게 조처하여 경비를 아껴 백성의 부담을 줄이려는 성상의 후덕한 뜻이 밝게 드러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모두 따랐다. 이리하여 산릉에 소요되는 민력(民力)이 많이 줄어들었다.
전에 공훈을 추록(追錄)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대간이 반대하여 오래도록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와서 대간이 비로소 계사를 정지하자 상이 대신(大臣)을 재우쳐 불러 원훈(元勳)과 함께 공훈을 감정하게 하였다. 부군이 빈청에 나아갔으나 대신이 아직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모두 모인 뒤에 감정하겠다고 청하였는데, 거듭 아뢰고서야 대신들을 부르라고 명하였다. 그런데도 좌상과 우상이 모두 나오지 않자, 상이 부군에게 혼자서 원훈들과 함께 감정하라고 명하였다.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려 옳지 않은 조처라고 말하자 상이 노하여 엄한 비답을 내리고, 승정원이 복역(覆逆)하자 또 면전에서 몹시 꾸짖었다. 이에 부군이 차자를 올려 잘못을 지적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홍문관에서 진달한 내용은 모두 여론에서 나온 것이지 본디 한두 사람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니, 전하께서는 실로 모두 받아들여 가납하심이 마땅합니다. 설령 문장에 간혹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더라도 이는 근심과 사랑이 간절하여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말이 격발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 또한 너그럽게 용납하고 관대히 용서함으로써 신하의 간언을 어기지 않고 따르는 미덕을 드러내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지금 몹시 노여운 말과 표정으로 무섭게 을러대며 기를 꺾어서 학문과 시사를 논하는 근신(近臣)으로 하여금 낭패하여 당황하게 하셨습니다. 이 어찌 성상의 시대에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전하께서는 하늘의 재변이 매우 참혹한 날에 잘못을 바로잡을 방도는 생각지 않고 홍문관의 관원을 꾸짖었으니, 오늘날 신하들은 하늘의 재변을 그치게 하여 성려(聖慮)를 덜어드릴 한마디 말, 한 가지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소 신료가 모두 죄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임금의 언행은 천지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말을 할 때에 몹시 화평함을 잃고 조치할 때에 뒤죽박죽 전도되는 것을 면치 못하시는데, 이것으로 하늘에 응하기는 어렵습니다.
공훈을 감정하는 것은 나라의 큰일이니 진실로 충분히 강구해서 신중하게 조처해야 하며, 비록 감정이 적절하게 되었더라도 감정한 뒤에 시행해야 할 전례(典禮)는 본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무슨 급한 일이 있기에 전후의 처분이 매번 정상적인 격례(格例)를 벗어나 마치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것처럼 급급하게 서두르는 것입니까. 신은 이것이 어찌된 조처인지 모르겠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두름으로 인하여 잘못되지 않는 일이 세상에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명철하신 전하께서 어찌 이러한 뜻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도 한 번 조치를 취하시는 사이에 이렇게까지 스스로 위엄을 손상하신단 말입니까. 신은 내심 안타깝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평온한 마음으로 이치를 살펴 속히 뉘우치는 뜻을 보이시고 홍문관의 신하를 위로하여 직책에 편안히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경향 각지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해와 달이 다시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듯 성상의 덕이 온전해진 것을 우러러보게 하소서.
신은 공훈을 추록하는 일에 대해 애초에는 반대하다가 결국에는 명을 봉행하였으니 전후의 처신에 근거가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하나하나 늘어만 가는 성상의 잘못된 조처가 모두 이로 말미암은 것이니, 잘못된 조처를 하도록 유도한 죄가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신은 참으로 부끄럽고 황공합니다. 공의(公議) 앞에 어떻게 스스로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속히 파면하고 신의 죄를 다스려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온화한 비답을 내려 위로하였다.
우재(尤齋)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교외에 있다가 대비의 부름을 받들고 다시 조정에 들어왔다. 이때에 상이 천연두를 피하려고 오랫동안 신료들을 접하지 않고 있었는데, 부군이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불러들인 것만을 능사로 여기지 마시고 지성으로 직임을 맡겨 시종 일관된 마음으로 대하여 두터운 신임을 보이소서. 그리고 상규(常規)에 구애받지 말고 자주 만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자문하소서. 또한 추위가 좀 누그러지고 날씨가 차츰 따뜻해지거든 경연(經筵)을 열어 강학하면서 그를 매번 입시(入侍)하게 하여 충성스러운 인도를 받으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뭇 신하가 성상의 위엄스런 존안(尊顔)을 뵙지 못한 지가 벌써 몇 개월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뵙고 여쭈어야 하는 정책, 법령과 사무가 적체를 면치 못하여 아랫사람들이 매우 안타깝고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의심을 품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는 것과 유언비어가 떠도는 것도 결코 이로 말미암지 않았다고는 못합니다. 지금 비록 평상시처럼 신료들을 널리 접할 수는 없겠지만 보필을 담당하는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신하마저 일시에 멀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더구나 송시열이 비록 금기(禁忌)에 구애된다는 이유로 사양하기는 했으나 그는 천연두가 퍼진 곳과 동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전염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입시(入侍)하는 신하가 미리서 한동안 재계(齋戒)해야 한다는 것은 또 그가 평소에 강조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리 지시하시어 수시로 입궐하여 뵙게 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상이 즉시 받아들이고 1월 초에 불러서 만나 보겠다고 허락하였다. 이때는 새해까지 며칠 밖에 남지 않은 시기였다.
부군은 지난 초봄에 유배지에 있을 때부터 이미 화병(火病)에 시달렸고, 조정에 돌아와서는 나라에 일이 많은 상황을 연달아 만나서 피로가 매우 심하였다. 게다가 12월에는 또 여식(女息)의 상을 당하여 슬픔으로 질병이 더 심해져서 조정에 나아가지 못하고 연달아 소장과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상이 신하들을 불러 만나볼 때에도 입시하지 못하고 마침내 차자를 올려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말하기를,
“봄은 한 해의 시작으로 삼양(三陽)이 회복되어 만물이 소생하므로, 덕화(德化)를 펴고 정책을 베풀기에 딱 좋은 때입니다. 참으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하들을 경계시킬 적에는 주인(遒人)이 목탁(木鐸)을 흔들며 돌아다닌 것과 같은 방법을 쓰고, 어진 선비를 존중할 적에는 월령(月令)의 초빙하고 예우하는 뜻을 따르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할 적에는 진대(賑貸)를 명한 한 문제(漢文帝)의 조령(詔令)을 본받으시되, 또 반드시 마음에 근본을 두어 만물을 생성하는 천지의 인(仁)을 본받으소서. 그리하여 온갖 선(善)의 으뜸을 세우고 지극히 공정한 이치를 크게 넓히소서. 요컨대 정책과 형벌을 한결같이 중정(中正)하게 하신다면, 때에 맞게 만물을 길렀던 옛 성왕(聖王)의 방도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이르기를, ‘1년이 지날 때마다 1년 치의 공부가 쌓인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나날이 새로워지지 않는 자는 반드시 나날이 퇴보한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이제 벌써 7년이 되었는데, 과연 해마다 나날이 새로워지는 성과가 있었다면 나라의 형세가 진작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사악한 자들을 주벌하여 성상의 이목을 가리는 장애물을 깨끗이 제거한 결과 사방의 백성들이 훌륭한 정치를 전보다 갑절이나 간절하게 열망하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전하께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덕을 닦고 정사를 행하는 데에 있어 날로 새로워지지 못하고 날로 퇴보하는 결과를 면치 못한다면 불행히도 《주역》의 ‘끝이라고 하여 멈추면 어지럽다.’라는 것에 가까울 것입니다. 천명(天命)의 거취와 민심의 향배는 그 기미가 실로 오늘날에 있으니, 삼가 전하께서는 명심하고 또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2월에 좌상 민공(閔公)이 질병 때문에 총호사(摠護使)에서 체차되고 부군이 명을 받들어 그 직임을 대신 맡았다. 송 문정공이 조정에서 떠나자 상이 연이어 근시(近侍)와 중신(重臣)을 보내어 만류하였으나 도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에 부군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어진 이의 출처는 시운(時運)에 큰 영향을 주고 세상 사람들이 본받는 정식(程式)이 되는 만큼, 비단 윗사람이 묵묵히 그 거취의 기미를 살펴야 할 뿐만 아니라, 어진 이도 스스로 처신이 적합한지의 여부를 잘 살피는 것이 도리입니다. 송시열이 오늘날 물러난 것은, 인지상정으로 헤아려 보면 떠날 만한 의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결연히 떠나 뒤돌아보지 않는 데에는 분명 나름대로 그만한 의리가 있을 것이나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가 물러나겠다고 고한 소장과 서계(書啓)한 내용은 시종 노령(老齡)으로 사임한다는 한 대목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말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70세가 되면 벼슬을 내놓는 것이 예경(禮經)의 명시적인 가르침인 것은 물론이지만, 그 아래에 또 사직하지 못하는 경우에 대한 조문이 있습니다. 삼대(三代)로부터 후세에 이르기까지 비록 나이가 70이 넘고 혹은 8, 9십에 이르더라도 만약에 나라가 그 덕업(德業)과 위망(位望)에 의지하고 있다면 윗사람이 놓아주려 하지 않았고 아랫사람도 감히 물러나지 못하였으니, 이러한 경우가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예와 의를 손상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나라의 형세가 실오라기에 매달린 이상으로 위태롭고 조정에는 믿고 맡길 만한 신하가 없습니다. 그런데 송시열은 세 임금의 보기 드문 예우를 받고 성상과 대비 두 분의 비상한 총애를 받아 빈사(賓師)의 중책을 맡고 사림의 종주가 되었으니, 어찌 한갓 상례(常禮)에 따라 스스로 적막한 물가에서 칩거하게 한다는 말입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다시 이러한 뜻으로 거듭거듭 간곡히 타일러서 그의 은둔하려는 생각을 돌리고 기어코 다시 조정에 불러들이기 위한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편 신이 또 삼가 생각건대, 예로부터 임금이 유현(儒賢)을 모멸하여 멀리 배척한 경우는 실로 논할 것이 없지만, 비록 존모할 줄 아는 경우에라도 처음에는 예모가 지극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불러도 오지 않고 붙잡아도 머물지 않아 은혜에 대한 보답을 받지 못하면 싫증을 내는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경우가 드뭅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간혹 유감과 노여움으로 이어져서, 이내 ‘어진 이는 실용(實用)에 무익하다.’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온 세상의 선비들까지 모두 멸시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임금의 위세는 날로 높아지고 바른 선비는 날로 멀어져서 나랏일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습니다. 신은 이것이 밝으신 성상께 경계시켜 드릴 만한 점이 아닌 줄을 잘 알면서도 구구한 어리석은 마음에 만일의 우려가 없을 수 없어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하였다. 이때에 상이 유현을 지극히 융숭하게 예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정공이 갑자기 떠나버렸으니, 부군은 상의 뜻이 혹시 이 때문에 약해지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차자의 끝에 이러한 뜻을 재삼 말한 것이다.
처음에 대간이 오시수(吳始壽)의 일을 간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더니, 나중에는 또 대비의 특교(特敎)로 말미암아 사형을 감해 주라는 명이 있었다. 그래도 대간은 계사를 정지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옥송(獄訟)이 오래도록 결판나지 않았다. 조지겸(趙持謙)이 사간이 되자 맨 먼저 인피(引避)하며 사사(賜死)하는 것과 국문하는 것 모두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하루는 또 부군에게 와서 이 일에 대해 극론하더니, 이윽고 또 차분히 말하기를,
“그의 집안은 대가(大家)입니다. 훗날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니, 이 또한 생각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부군이 성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이 무슨 말입니까. 공은 젊은 명사인데도 훗날의 이해를 따진단 말입니까.”
하자, 조지겸이 부끄러워하며 사례하고 떠났다. 그러나 이때부터 논의가 점차 갈려서 정세(政勢)를 관망하는 자가 더욱 많아지더니 간당(奸黨)이 마침내 이 일을 구실로 삼았다. 이때에 와서 대사간 윤지완(尹趾完)이 또 인피하며 말하기를,
“오시수의 죄는 실로 사람들이 똑같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의 근원은 다른 나라 사람이고 증인은 역관의 무리이니, 이는 필시 훗날 시빗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시수는 일찍이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의 반열에 있었기 때문에 형벌을 가하며 신문할 수 없으니, 차라리 특별히 사형을 감해 주고 종신토록 변방의 가시울타리 안에서 지내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부군이 차자를 올려 논변하기를,
“오시수의 일은 실로 고금에 다시없는 변고이니, 그 사람이 비록 보잘것없기는 하나 그래도 일찍이 대신의 축에 끼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어찌 국가의 큰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를 처벌하는 과정에 한낱 분하여 몹시 미워하는 마음만 품고 분명히 살펴 신중을 기하는 도리를 생각지 않는다면 비단 죄받는 자가 원망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체모도 적지 않게 손상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번거로이 중복되는 것을 피하지 않고 전후의 추핵(推覈)을 면밀히 진행하여, 그가 끌어대는 자는 아무리 긴요치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단 그의 입에서 나왔다 하면 모두 다 체포하여 신문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끌어댄 증거에 근거가 없고 말이 막혀서 실정이 드러나자 성상께서 벌컥 성내시며 혹독한 형벌을 가하며 신문하라는 명을 특별히 내리셨습니다. 신과 국문에 참여했던 신하들은 삼가 생각하기를, ‘오시수의 죄는 위로 선왕과 관련되니, 그렇다면 역적을 국문하는 규정에 따라 그를 다스리도록 하신 데에는 그럴 만한 뜻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문은 차마 함부로 가할 수 없었고 또한 나라를 위해 아끼는 것이 없지 않아서 감히 잠시 기왕의 명을 거두십사 청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동행한 감사(監司) 및 함께 들은 병사(兵使)를 잡아다 신문하고 또 오시수의 전후의 공사(供辭) 가운데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총합하여 따져 물었으며, 그런 뒤에 또 박정신(朴廷藎)과 함께 두 번 대질시켰습니다. 그러자 실정과 허위가 저절로 밝혀져 속마음이 다 드러났습니다. 다만 ‘너무 오래 속여서 죄송하다.[遲晩]’라는 두 글자가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더는 용서해 줄 길이 없어져서, 형벌을 가하며 신문하라는 명을 거두십사 더는 청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이미 드러난 범죄 사실을 바탕으로 죄의 경중을 헤아려 사사(賜死)하는 것이 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토죄(討罪)하는 형전(刑典)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죄인 스스로 쟁반에 물을 담고 그 위에 칼을 올려놓고 자결하게 해 달라고 죄를 청했던 옛 의리에도 어긋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에 마침내 함께 뵙기를 청하여 말씀드리고 품의하였는데, 밝으신 성상께서는 또 각자의 의견을 물으시고 특별히 헤아려 조처하겠다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사사하라는 명이 내려진 뒤에 대간이 엄히 국문하십사 청한 것은 실로 법 집행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일을 지체할 생각으로 별스럽게 새로운 견해를 만들어 냈는데, 심지어는 이미 추핵한 역관들을 함께 국문하십사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옥사를 다스리는 법은 본디 정범(正犯)과 증인을 함께 국문하는 격례가 없습니다. 역관들의 죄는 단지 말을 하는 과정에 거짓말을 하여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데에 있을 뿐이고 이번 옥사의 본질과는 애초에 아무 관계가 없으니, 오직 그들의 죄로만 죄주면 됩니다. 기어코 오시수와 함께 국문하려는 뜻이 무엇인지 아무래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오시수의 범죄 사실에 용서할 만한 점이 있어 법대로 처벌하지 않는다고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의론이 나오겠습니까.
사람들의 의견은 각기 달라서 실로 억지로 일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실토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장 사사하는 것은 일의 성격에도 전혀 맞지 않고 법을 굽히는 조처라 여기고는, 이견을 내세워 인피하고 논의에 참여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은 전혀 일을 알지 못하는 자의 견해에 가까우니, 참으로 한 번의 웃음거리도 못 됩니다. 만약 오시수가 스스로 죄를 실토한다면 실로 신속히 나라의 형전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니, 어찌 굳이 구구하게 정황을 참작하여 처치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윤지완이 의견을 내세워 문장을 구사한 것은 더욱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어지러워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의 이른바 ‘말의 근원은 다른 나라 사람이고 증인은 또 역관의 무리이다.’라는 말은 이 옥사를 모두 믿을 수 없는 허망한 지경으로 귀착시키고 있습니다. 오시수의 죄는 애초에 다른 나라 사람의 말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시작되었지만, 당초에 대비께서는 몹시 분통하다는 하교를 친히 내리시며 청나라에 들어가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게 하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다른 나라 사람이라 하여 그 말의 근원을 조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하가 강하다는 말은 본디 치제(致祭)와 상관이 없는데 청나라에서 듣지 않은 것을 장효례(張孝禮)가 감히 우리나라에 전파하고 장효례가 말하지 않은 것을 역관의 무리가 감히 조작해 내어 오시수에게 말하다니요. 이는 모두 그들 자신의 이해와 상관이 없으니, 이치로 보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천하의 사리는 본디 확연히 드러나 속이기 어려운 것인데, 또 어찌 다른 나라 사람, 역관의 무리라는 이유로 믿지 않겠습니까. 이는 오시수가 궁지에 몰려 할 말이 없어진 뒤에 구실로 삼은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윤지완이 또 감히 이것을 결정적인 논거로 삼는 꼴은 실로 오시수가 스스로 도모하는 모습과 동일하니, 오시수를 위하는 것은 지극하다 하겠으나, 신은 이러한 처사가 의리로 볼 때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윤지완의 말처럼 말의 근원과 증인을 모두 믿을 수 없다면, 오시수의 죄가 될 일이 전혀 없는데도 어찌 굳이 변방에 위리안치 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의 ‘사람들이 똑같이 미워한다.’라는 말은 무슨 일을 두고 한 말이며, ‘분명히 형벌을 시행한다.’라는 말은 또한 무슨 죄에 대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까? 이상하기도 합니다. ‘필시 훗날 시빗거리가 될 것이다.’라는 말은 더욱 신의 얕은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원우(元祐) 초년에, 훗날 입게 될 화를 가지고 사마광(司馬光)에게 넌지시 충고한 자가 있었는데, 사마광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하늘이 만약 송나라의 명을 끊으려 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일찍이 내심 생각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에는 오직 이러한 뜻을 유념하여 의리를 따라 반드시 합당하게 대처하는 것이 도리이니, 일체의 화복과 이해는 도외시하는 것이 옳다. 만약 장래의 일을 미리 따져서 오로지 구차하게 고식적으로 대처하려고만 한다면, 그 해가 필시 의리가 캄캄하게 꽉 막히고 간사한 적이 기회를 엿보아 군신 간의 큰 윤리와 국가의 큰 법이 모두 남김없이 무너져 버리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의 망녕된 근심은 바로 여기에 있으니, 감히 일신의 장래를 위해 꾀를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국가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지나치게 훗날을 염려하여 미리 스스로 형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조치를 취할 때에 뒤죽박죽 전도됨을 면치 못한다면, 나라의 체모를 도리어 가볍게 하고 인심을 안정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내는 필시 말할 수 없는 후회가 있을 것이니, 어찌 매우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윤지완 같은 자는 명색이 간관이면서 이처럼 이상한 의론을 주창하여 사설(邪說)이 횡행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습니다. 목전의 근심을 부른 것만도 이미 한심한데 훗날의 시비를 또 어느 겨를에 논하겠습니까.”
하였다. 뒤에 또 입궐하여 뵙고 말하기를,
“조지겸(趙持謙)은 실토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사사(賜死)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로 말도 되지 않는 주장입니다. 만약 사사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여긴다면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캐내십사 청하는 계사에 동참하지 못할 일이 조금도 없는데 기어코 이론(異論)을 내세워 불참하였으니, 신은 이것이 무슨 의리인지, 무슨 의론인지 모르겠습니다.
상께서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대비의 덕을 본받으시어 비록 사형을 감해 주라는 명을 내리기는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죄가 털끝만치라도 용서할 만한 점이 있어서가 아니었으니, 전후의 성상의 하교에 선왕을 무함하여 욕되게 한 그의 죄를 거론한 것이 엄격하고 단호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신하 된 자가 어찌 감히 그를 구원할 마음을 지닐 수 있단 말입니까.
조지겸은 젊은 사람들 중에 평소 재주와 인망이 있는 자인데도 이처럼 알기 쉬운 의리를 명백히 분변하지 못하여 이렇게까지 소견이 가리어지고 미혹되었으니, 참으로 괴이합니다. 조지겸이 이러한 의론을 주창한 뒤로 한 가지 망녕된 의론이 거리낌 없이 횡행하더니 윤지완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간당(奸黨)이 핑계 대고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여 나라의 체모가 날로 무너져서 장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이는 비단 일시적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망녕된 주장을 한 조지겸의 죄를 한번 꾸짖어 벌함으로써 근거 없는 논의를 진정시키고 나라의 체모를 엄숙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를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오시수는 뒤에 마침내 사사되었다.
5월에 중궁(中宮)을 책봉하였다. 부군이 명을 받들고 정사(正使)가 되었는데, 예가 끝나자 안장을 얹은 말을 하사하였다. 가뭄이 심해지자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면직을 청하였다. 이때에 내수사(內需司)의 거짓 소장으로 인하여 시장(柴場) 가까이에 있는 백성의 무덤을 파서 옮기도록 명하였다. 이에 부군이 옳지 않다고 하고 덧붙여 말씀드리기를,
“살아 있는 사람의 집을 부수고 생업을 잃게 만드는 것도 왕도정치(王道政治)에서 불쌍히 여기는 일입니다. 더구나 국법상 파서 옮길 이유가 없는 백 년 가까이 묻힌 수많은 유골을 하루아침에 파내어 무덤을 보존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원망이 어찌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기에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하늘이 진노하여 백성이 장차 다 죽게 되었으니, 한 가지 정사를 시행하고 한 가지 명령을 내릴 때에도 더욱 신중을 기하여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인자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하는 데에도 치우침이 없지 않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아랫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공명정대한 정치를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그 명을 거두었다.
7월에 질병을 이유로 말미를 청하여 상소와 차자를 18회나 올렸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고 여러 차례 승지를 보내어 돈독히 면려하였다. 이에 마지못해 나와서 사무를 보았다.
처음에 조정의 논의는, 군민(軍民)의 신역(身役)이 편중된 것이 백 년 된 고질적 폐단이므로 각 도(道)의 14세 이하의 어린이와 도망간 자, 죽은 자를 조사해 내어 연한을 정하여 신역을 탕감해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불과 몇 해 만에 그 폐단은 예전과 같은데 그러한 조치를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재력이 바닥나 버렸다. 이에 부군이 한두 대신과 논의하기를, 호포법(戶布法)을 시행하여 변통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사대부(士大夫)와 유민(遊民) 가운데 이를 원치 않는 사람이 많아서 갑자기 전국적으로 시행하기 어려움을 염려하였다. 그리고 양서(兩西)는 형세가 다른 도와 다르기 때문에 그곳에 먼저 시범적으로 시행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시행할 조짐을 보이기로 하였다.
이때 마침 관서(關西)의 사민(士民) 중에 호포법의 시행을 바라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마침내 감사 유상운(柳尙運), 병사(兵使) 이세화(李世華)에게 편지로 물었더니, 모두 법이 좋고 편해서 사민 중에 시행하기를 바라는 자가 많다고 말하고는 이어 절목(節目)의 초안을 정하여 보내왔다. 이에 부군이 건의하기를, 먼저 주관 당상(主管堂上) 1인을 두어 그 일을 맡기고 도신(道臣)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강론해서 이 법이 편한지 여부를 더욱 잘 따져 보게 한 뒤에 시행하십사 하였다. 그러나 상의 윤허를 받은 뒤에 좌상은 휴가 중이었고 우상은 미처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여 즉시 본도에 분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대간이 갑자기 반대하고 우상도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책임을 지고 면직을 청하였다. 부군이 차자를 올려 자세히 말씀드리기를,
“건의한 본의는 단지 호포법이 편한지 여부를 충분히 강론하려는 것이었지 결행하려는 데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고는 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이때가 임술년(1682, 숙종8) 1월이었다.
뒤에 또 상이 불러 만나 뵐 적에 아뢰기를,
“호포법에 대한 논의가 조정에서 진행된 지 오래되었건만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농사가 거듭 흉년이 들어 지금까지도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의 뜻은 본디 충분히 토론하여 시행할 만하면 시행하고 시행할 만하지 않으면 그만두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간이 이러한 곡절을 모르고 마침내 속히 명을 거두십사 청하여 마치 당장 시행하려고 했던 것처럼 만듦으로써, 사람들을 동요시켜 근거 없는 의론이 마구 생겨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신이 제대로 진정시키지 못한 죄가 큽니다. 그러나 논의하는 자들이 만약 호포법을 결코 시행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또다시 다른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1, 2년도 지탱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장령 신양(申懹)이 또다시 유상운과 이세화가 백성의 실정을 헤아리지 않고 호포법이 편하다고 망녕되이 말하였다고 탄핵하자, 상이 노하여 특별히 신양을 체직시켰다. 이에 부군은 ‘법이 시행할 만한 것인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조정이 먼저 동요하여 어지러워진다면 이는 더욱 우려스러운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즉시 입궐하여 뵙고 신양을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을 거두십사 청하기를,
“우리나라의 일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논의가 점차 격해지면 결론이 날 가망은 전혀 없고 도리어 실제의 일에 해를 끼치게 됩니다. 지금 대각이 모두 피혐하여 장차 대관(臺官)이 없어질 판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이러한 움직임은 일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한 까닭에 새로운 법령을 시행할 수 없으니, 일단은 보류하여 대각을 진정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으나, 상은 따르지 않았다.
얼마 뒤에 상이 또 신양을 변방 고을로 좌천시키자 부군이 또 지나친 조처라고 말하였으나, 상은 끝내 듣지 않고 또 여러 신하에게 빈청에 모여 호포법이 편한지의 여부를 함께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부군이 입궐하여 뵙고 맨 먼저 말하기를,
“민심이 소란스러우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단은 정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은 반드시 대단한 변통이 있어야만 지탱해 나갈 수 있으니, 적당한 해를 기다려 반드시 시행해야 할 듯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빈청에서 보니, 의견을 제시하는 신하들은 대부분 ‘법은 나쁘지 않으나 지금은 행하기 어렵다.’라고 말하는데, 혹자는 ‘법이 매우 편하니 시행해야 한다.’라고 하고 혹자는 ‘법이 불편하니 결코 행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행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자들도 어떤 방법으로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는 말하지 않았으니, 성상 앞에 불러 하문하실 적에 각자 폐단을 바로잡을 대책을 말하게 하소서.”
하였다. 신하들이 입궐하여 상을 뵙고 각기 소견을 말씀드렸는데, 대체로 다 급작스레 시행해서는 안 된다면서도 끝내 다른 대책은 없었다. 상이 마침내 일단은 정지했다가 농사가 조금 잘되기를 기다려 다시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도 끝내 시행되지 못하자 식자들이 한탄하였다.
6월에 질병을 이유로 말미를 청하여 상소와 차자를 일곱 차례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좌랑 김진귀(金鎭龜)를 천거받아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제수하자 부군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김진귀는 조정에 나온 지 2년도 되지 않아 갑자기 2품 관직에 올랐습니다. 너무 갑작스레 발탁한 것만도 정상적인 인사 발령이 아닌데, 순서를 뛰어넘어 낙점하셨으니 더욱더 사람들의 의혹을 불렀습니다. 송(宋)나라 왕증(王曾)은 조사(朝士)를 진용할 적에 반드시 말하기를, ‘참으로 이 사람을 잘 안다. 그러나 관직을 지낸 경험이 아직 일천하니, 우선 인망을 쌓게 하여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발탁하여 임용한다면 중앙관과 지방관에 모두 합당하여 영화로운 벼슬길이 탄탄할 것이다.’ 하였는데, 사람을 등용하는 요체를 잘 알았다고 할 만합니다. 지금 김진귀는 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아 명성이 막 생기려는 참이니, 급급하게 순서를 뛰어넘어 발탁하는 것은 그를 아껴 성취시켜 주는 방도가 아닐 듯합니다.”
하자, 상이 속히 그 명을 거두었다.
7월에 큰바람이 불어 능침(陵寢)과 종묘, 사직의 나무가 뽑혔다. 부군이 입궐하여 뵙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한편 말하기를,
“인조(仁祖) 을해년(1635, 인조13)에 바람으로 인한 재해가 매우 심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이 있었습니다. 바람은 성질이 급하여 그 호응이 매우 빠른 것이니 매우 두렵습니다. 《주역》에 ‘바람과 우레가 익(益)이다.’라고 하였으니, 선(善)으로 옮겨가기를 바람처럼 빠르게 하고 잘못을 고치기를 우레처럼 맹렬하게 한다면 반드시 유익하기 때문에 《주역》의 상사(象辭)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잘못은 성인(聖人) 이하의 사람이면 없을 수 없는 것이니, 오직 빨리 고쳐 선을 따르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임금은 하루에 만 가지 정무를 처리하는 만큼 더욱 잘 성찰하여 잘못을 고치고 선을 따라야 하니, 이른바 ‘한 마음이 하늘에 부합한다.’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한때의 재변이 도리어 성상의 덕에 유익할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이때에 상이 대왕대비를 위해 풍정례(豐呈禮)를 행하려고 유사에게 재계하도록 명해 둔 상태였는데, 부군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위로 두 분의 자전(慈殿)을 받들고 계시는 만큼 봉양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지극히 하는 것이 마땅하기는 합니다. 그리고 연달아 흉년을 만나 일상적으로 올리는 음식조차 줄인 나머지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실로 모두 헛헛해하고 있으며, 더구나 대왕대비의 춘추가 이미 회갑에 가까우므로 기쁨과 두려움이 함께 드는 성상의 효심으로 의식(儀式)을 갖추어 축수를 올리는 것은 정리(情理)상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니, 신하 된 자로서 그 누가 전하의 뜻을 받들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풍정례는 그야말로 풍성하게 차리는 성대한 의식인지라 효묘(孝廟) 이후로 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게다가 금년은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기대하기 어렵고 재변도 계속하여 나타나고 있는데 조정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하고 수양하는 일은 달리 없고 갑자기 이러한 명만 내리셨으니, 원근에서 보고 듣는 이들이 의혹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번다한 문식을 줄여 잔치를 베푸소서.”
하자, 상이 따랐다.
대간이 생진시(生進試) 복시(覆試) 때에 절차를 밟지 않고 함부로 과장에 들어간 자가 많다는 이유로 파장(罷場)하고 과거를 다시 설행하십사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합격자 명단이 발표된 뒤에도 대간이 또 합격자 전원의 합격을 취소하십사 청하면서 몇 개월 동안 계사를 정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생진시 복시를 본 먼 지방의 응시자들과 여러 도의 수령들이 모두 파하여 가 버렸다. 대간이 계사를 그제야 정지하자 식자들이 너무 늦게 정지했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대사간 유상운(柳尙運)이 곧 상소하여 대간이 계사를 정지한 것이 오히려 잘못이라고 말하고, 지평 조형기(趙亨期)는 합격자 전원의 합격을 취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힘껏 말하는 한편 합격을 취소하자고 주장한 여러 대간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정언 이굉(李宏)이 처음에는 조형기의 비판을 받고 스스로 탄핵하더니 이윽고 갑자기 나와 조형기를 탄핵하였다. 상이 엄한 교지로 몹시 꾸짖자 이굉은 또 스스로 논죄하는 가운데 말이 더욱 장황하였다. 그런데 홍문관은 도리어 이굉을 출근시키십사 청하여 시비가 완전히 거꾸로 되었다. 부군이 입궐하여 뵙는 기회에 말하기를,
“유상운은 계사를 정지한 대간들을 비난하여 그들을 제압하려는 뜻이 뚜렷이 있었으니, 이미 화평한 도(道)를 잃은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말을 어찌 겸손히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조형기의 계사는 실로 지루하고 거칠며 과격하여 중도에 맞지 않는 데다 또 겸양하고 서로 공경하는 기풍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합격자 전원의 합격 취소가 부당하다고 논한 것은 말뜻이 명백하고 절실하니 어찌 죄가 있겠습니까. 이굉은 합격을 취소해야 한다고 맨 먼저 주장한 사람으로서 이미 비판을 받아 스스로 탄핵해 놓고 나중에는 도리어 조형기를 탄핵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대간의 체통에 매우 어긋난 일입니다. 게다가 그는 합격 취소 주장을 온 나라의 공통된 여론이라고 하여 속임수를 썼습니다. 그런데 홍문관은 도리어 그를 출근시키십사 청하면서, ‘사람들의 견해는 본디 동일하지 않은 것이니, 굳이 구차하게 합치시킬 것이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른바 처치(處置)라는 것은 시비를 분명히 분간하여 손을 들어주거나 배척하는 것입니다. 만약 시비를 따지지 않고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므로 굳이 구차하게 합치시킬 것이 없다.’라고만 한다면 장차 체차당하는 대관(臺官)이 없을 것입니다. 학문과 시사를 논하는 자리에 어찌 이러한 의론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대간은 임금의 눈과 귀이므로 실로 너그러이 포용하고 관대히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만, 시비가 분명하지 않아 논의가 거꾸로 뒤집힌 것만은 모호하게 처리해서는 안 됩니다. 이굉을 그 직책에 그대로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홍문관 관원도 정신 차리게 꾸짖어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굉을 파직하고 홍문관 관원을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부군이 말하기를,
“파직은 너무 무겁습니다. 그리고 조정의 처치가 중도에 맞지 않으면 도리어 근거 없는 논의가 점차 과격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니, 체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적절합니다.”
하였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부군은 물러나서 또 차자를 올려 이에 대해 말하였다.
이때에 대사간 유상운도 전의 일로 인해 스스로 탄핵하였는데, 간원에서 그를 출근시키십사 청하였으나 상은 특별히 체차하였다. 부군이 그 일의 부당함을 아울러 말하기를,
“국가에서 형벌을 쓸 적에는 중도에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한데, 언로(言路)에 관계되는 문제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이에 대해 취하신 조처는 경중(輕重)의 법칙을 잃었다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의심과 답답증이 나날이 심해지고 뭇 논의가 나날이 더욱 어지럽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의 본의는 근거 없는 논의를 진정시키고 나쁜 습성을 억제하려는 것이었는데 끝내 소란을 가중시켜 언로에 해를 끼치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이 그 허물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은 물론이지만, 밝으신 성상께서도 어찌 잘못을 바로잡는 조치가 지나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굉을 파직하고 유상운을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을 거두었으나 젊고 부박(浮薄)한 무리는 더욱 과격한 논의를 일삼았다.
문정공(文正公)이 일찍이 인조(仁祖) 때에 대사헌을 지내며 과거 합격자 전원의 합격을 취소하자는 논의가 있자, 혼자 선왕의 명을 끌어대어 이견을 제시하며 인피(引避)하였다. 이에 인조가 옳다고 여겨 결국은 합격을 취소하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합격자 전원의 합격을 취소하자고 주장하는 대관(臺官)들이 마침내 간혹 문정공의 일을 왜곡하여 끌어대서 말하자, 부군이 차자를 올려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말하기를,
“신의 조부는 합격자 전원의 합격을 취소하는 풍습을 평소에 병폐로 여기다가 조정에서 관직을 맡게 되자 합격을 취소하지 말자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니, 오늘날 언관들이 고집스레 주장하는 것과는 현격히 다릅니다. 그런데 저들은 마침내 그 일을 선례로 거론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마구 구실로 삼고 있습니다. 신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신이 자초한 일이기는 하나, 또한 세태가 변하지 않은 곳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이 전후로 말씀드린 것이 비록 매우 망녕되고 경솔하기는 하나, 신은 스스로 ‘위로 국법을 받들고 아래로 가훈을 이어받은 덕에 큰 죄를 짓는 데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니 다행스럽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신뢰할 만한 명망과 언론을 갖추지 못한 나머지 결국은 백해무익하여 공적으로는 나라의 체모를 실추시키고 사적으로는 선조를 욕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또다시 경솔히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하게 된다면, 좌절하고 낭패하는 것이 또 어찌 오늘날 당한 이 정도에 그치겠습니까. 신이 다시는 감히 국가의 일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 실로 이미 분명해졌다 하겠습니다. 어찌 이와 같은데도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자리를 구차히 차지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면려하는 뜻으로 하유하여 위안하였다. 그 뒤에 여러 차례 질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소명을 받고 도성 안으로 다시 들어오자 승지 이현석(李玄錫)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은 전에 대각에 있을 적에 송 아무개를 논죄하는 계사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상께서 그를 높여 예우하는 지금, 직책이 예방 승지(禮房承旨)인데도 예모를 갖추어 대우하는 등의 일을 봉행하는 것이 내키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신이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그를 안심시키는 방도가 아니므로 면직하여 피할 수 있게 해 주소서.”
하였다. 송공이 이 일을 듣고 그날 바로 다시 성을 나가 버렸다. 이에 상이 홍문관의 말로 인하여 이현석의 관작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리고 여러 차례 승지를 보내어 송공에게 면려하는 뜻으로 타일렀다. 송공은 시사(時事)가 어렵고, 또 상이 융숭히 돌보아 주는 것을 생각하여 차마 결연히 떠나지 못하고, 마침내 서울 가까운 곳에 머무르며 여러 차례 상소와 차자를 올려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부군이 입궐하여 상에게 권면하고 청하기를,
“성급하게 치사를 허락하지 말고 더욱 정성스럽게 예우하여 그가 오거든 천천히 대처 방도를 논의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이때에 대간이 이현석의 죄를 논하면서,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내쫓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먼 변방으로 유배 보내십사 청하였다. 상이 오랫동안 윤허하지 않자, 부군이 속히 대간의 의론을 따르십사 청하고 또 말하기를,
“천하의 일은 실로 은미한 데에서 시작되어 뚜렷이 드러나는 데에까지 이르는 것이니, 조짐이 나타났을 때에 막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성상께서는 송시열(宋時烈)에 대해 지난날의 일이 잘못되었음을 크게 깨닫고 보통을 뛰어넘어 융숭히 예우하시니, 이는 참으로 천고에 보기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전후로 그를 불러 만나실 적에 예론(禮論)과 관련해서는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불만을 품은 무리가 남몰래 기회를 엿보며 ‘전하께서는 다만 정세가 변하였기 때문에 겉으로만 예모를 보이는 것이니, 성상의 마음에는 아직도 석연치 않아 하시는 점이 있으시다.’라고 하면서 이것을 꼬투리 삼아 훗날 시국을 뒤바꿀 계획을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이현석의 상소도 성상의 마음을 한번 탐지해 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니, 이 점을 잘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즉시 이현석을 중도부처(中道付處)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허새(許璽)와 허영(許瑛)이 반역을 모의했다가 사형당했는데, 김환(金煥)이 실로 그 일을 고발하였다. 그리고 전익대(全翊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어영청(御營廳)의 장교(將校)였다. 그가 일찍이 유명견(柳命堅)의 정황이 의심스럽다고 김환에게 고했는데, 김환이 허새와 허영의 흉악한 편지를 입수해 보니 유명견의 이름도 그 가운데에 들어 있었다. 김환은 전익대가 전에 한 말이 근거가 있다고 상당히 의심하여 전익대를 꾀어다가 그 정황을 힐문하였다. 이에 전익대는 김환이 장차 고변하려는 것을 알고 갑자기 스스로 의구심이 든 나머지 지레 김익훈(金益勳)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유명견의 일을 고하였는데, 김익훈은 마침내 전익대를 구속하여 군영 안에 두고 일이 드러나기를 기다렸다. 김환은 이미 전익대에게 물어 유명견에게는 역모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를 고변서에 써넣지 않았으니, 그 때문에 국청(鞫廳)에서도 전익대를 체포하여 신문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뒤에 김익훈이 전익대를 처리할 길이 없어 여러 대신에게 와서 묻자, 부군은 좌상 민공(閔公)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김환이 비록 이 일을 알기는 했지만 이 일까지 고하지는 않았으니, 국청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김익훈으로 하여금 와서 고하게 하는 것 모두가 옳지 않다.” 하고, 우상 김공 석주(金公錫胄)는 “김익훈이 스스로 아뢰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김익훈이 아방(兒房)에 나아가 그 일을 밀계(密啓)하자, 마침내 유명견을 체포하여 한 번 신문하고 즉시 풀어 주었다.
이때에 와서 대간이 김익훈이 밀계한 것은 잘못이라고 탄핵하자, 부군이 입궐하여 상을 뵙는 기회에 일의 곡절을 자세히 말씀드리는 한편,
“전익대가 고한 것이 비록 끝내 실상이 없었지만, 군사를 거느리는 신하가 이런 말을 듣고서 어찌 덮어두고 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령 덮어두었다가 뒤에 발각되었다면 도리어 큰 죄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유효립(柳孝立)의 변란 때에 양릉군(陽陵君) 허적(許)이 병 때문에 스스로 와서 고하지 못하고 사람을 시켜 홍서봉(洪瑞鳳)의 집에 서찰을 보내었는데, 홍서봉은 도로 원훈(元勳)의 집에 보내어 그로 하여금 비로소 입궐하여 고변하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고변이 상당히 지체되었습니다. 그 뒤에 홍서봉이 녹훈(錄勳)되자 대간이 ‘홍서봉은 고변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즉시 와서 고하지 않았다.’라며 훈적(勳籍)에서 삭제하십사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논의는 지금의 논의와 달랐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허새와 허영의 흉악한 모의가 낭자하지만 단서가 다 드러나지 않았고 도당(徒黨)을 다 실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깥사람들이 간혹 옥사가 명백하지 않다고 의심하는가 하면, 고변한 자에 대한 상전(賞典)이 지나치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신은 이번 옥사를 시종 다스리면서 실로 지나치게 신중을 기한 잘못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고변서가 올라오면 흉서(凶書)에 이름이 오른 자를 한꺼번에 체포하여 신문하는 것이 옥사의 성격에는 맞습니다만, 성상께서 차례로 체포하여 신문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신들도 성상의 뜻을 받들었던 것입니다. 만일 허새 등에게 다른 도당은 없고 오직 그들 몇 사람이 흉악한 짓을 하려 했다면 옥사가 이 정도에 그친 것이 참으로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법망을 빠져나간 잔당이 있다면 훗날의 근심이 어찌 작겠습니까. 그리고 고변한 자에 대한 상은 역적의 인원수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므로, 이번에 내린 상이 지나치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젊은 후진(後進)들은 대부분 깊고 원대한 생각이 없이 한갓 이론(異論)을 내세워 명성이 높아지고 저쪽 사람들에게 덕을 보이는 것만을 좋아하여, 밀계한 것을 김익훈의 죄로 삼았다. 게다가 그들은 또 허새와 허영은 본디 역모가 없었는데 김익훈이 김환 등과 함께 부추겨서 그렇게 만들었다고 의심하여, 김익훈을 더욱 급하게 몰아붙였다. 부군은 사실을 근거로 분명히 변론하여 시종 굽히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젊은 층의 마음을 잃어 조정의 논의가 더욱 분열되어 갔다.
이해 겨울에 날씨가 계속 따뜻하고 우레도 쳤다. 부군이 입궐하여 상을 뵙고는 자신을 반성하고 수양하며 재용을 절약하는 방도를 말씀드리고 또 말하기를,
“벼슬을 새로 주거나 높여 주는 상전(賞典)은 나라의 큰일이니 비록 대신이라도 쉽게 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강이 엄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청하곤 해서, 특별히 한 번 벼슬을 내리는 것이 상례(常例)가 되려 합니다. 인조(仁祖) 임금 때의 일은 신이 사실 상세히 알지 못합니다만, 효묘(孝廟) 이후는 신이 직접 보았습니다. 하지만 어찌 이러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심지어는 선왕 때에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쉽게 말하기도 하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성상께서 신하의 말을 들을 적에는, 성상의 덕과 조정의 정사에 관계된 것은 물론 너그러이 받아들이셔야 하지만, 은혜로운 상전을 내려 주십사 청하는 것은 쉽게 들어주지 않는 것이 도리입니다. 더구나 대신과 간관에게 하문하지도 않고 오직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곧장 내려 주겠다고 허락하는 것은 더욱 부당합니다. 신하들이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실로 사사로운 뜻을 버리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만, 성상께서도 이러한 습성을 고쳐 정도(正道)를 돌이킬 방도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가납하였다.
12월에 지평 유득일(兪得一)이 또 밀계한 일로 김익훈을 탄핵하고 멀리 유배하십사 청하였다. 부군은 이때에 질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면서 이어 말하기를,
“신이 전번에 입대하여 감히 김익훈이 밀계한 곡절을 진달했는데 사헌부의 관원이 지금 이 일로 김익훈을 엄중히 탄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이 전에 진달한 것이 결국은 잘못되고 망녕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더욱더 감히 이 자리를 구차히 차지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계해년(1683, 숙종9) 봄에 질병을 이유로 말미를 청하여 상소와 차자를 여덟 차례 올렸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이때에 송 문정공(宋文正公)과 현석 박공(玄石朴公)이 모두 조정에 있었는데, 대각에서 한창 김익훈의 일을 간쟁(諫爭)하여 논의가 점차 격해져서 진정시킬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송 문정공이 차자를 올려 일을 담당한 대신에게 책임을 돌렸으며, 박공은 특별히 대신이 헤아려 처단하기를 건의하여 조정이 진정되기를 바랐다. 부군이 마침내 이러한 뜻을 미루어 상에게 말하자, 비로소 김익훈의 관작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내쫓으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젊은 층의 벌 떼 같은 의론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3월에 《실록(實錄)》이 완성되어 안장 얹은 말을 하사하자 사은숙배(謝恩肅拜)하였다. 이때에 대간이 ‘김환(金煥)이 전익대(全翊戴)를 회유하고 협박한 것은 그 뜻이 무고하려는 것이었다.’라며 국문(鞫問)하십사 청하고, 또 민암(閔黯)을 무고한 김중하(金重夏)의 죄를 다스리십사 청하였다. 그러나 상은 ‘김중하가 민암을 고발한 것은 비록 무고였지만, 종친 이수윤(李秀胤)이 임금을 범하는 무도한 말을 했다고 고한 것은 나름대로 실상이 있으므로 곧장 무고율(誣告律)을 적용할 수는 없다.’라고 하며 특명으로 사형을 감하여 유배형에 처하였다. 대간은 이를 간쟁하고 또 법을 집행하지 못한다고 대신들을 책망하였다.
이때에 와서 부군이 조강(朝講)에 입시하였는데, 대간이 또 김환과 김중하의 일을 강력히 간쟁하며 이전의 견해를 속히 고쳐 공론을 펴지 못했다고 대신을 비판하는 가운데 말이 상당히 모욕적이었다. 송 문정공이 이를 보고 생각하기를, ‘대신은 주상께서 존경하는 사람이다. 잘못한 점이 있으면 대간이 탄핵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대신을 능멸하고 핍박하여 기어코 견해를 굽혀 대간의 말을 따르게 한다면 체통을 손상하게 된다.’ 하고는 물러나 좌상 민공(閔公)을 만나서 이러한 뜻을 말하였는데, 민공이 마침내 송공의 말을 상에게 아뢰었다. 이에 대사간 유상운(柳尙運)과 정언 이동욱(李東郁)이 잇따라 인피(引避)하고 체통 운운한 말을 비판하였는데 더 이상 거리끼는 태도가 없었다.
송 문정공이 이때 마침 말미를 청하여 영동(嶺東)에서 목욕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동교(東郊)에 이르러 이 일을 듣고 여강(驪江)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당시의 의론은 송공에게 편지를 보내 떠나도록 권면한 이공 선(李公選)을 비난해 마지않았고, 심지어 송공을 현혹하여 알력을 일으켰다는 죄명을 씌우기도 하였다. 송공은 이에 더욱 불안해져서 마침내 여강에 있다가 결연히 돌아가 버렸다. 이에 부군이 입궐하여 상을 뵙고 대각의 의론이 지나치다고 자세히 아뢰고는 이어 말하기를,
“여러 신하가 어찌 그 어른을 핍박할 뜻을 지녔겠습니까마는, 만약 그들에게 참으로 존모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어른의 마음을 다소나마 편안하게 해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도 그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한갓 자신들의 견해만 펴고 있으니,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차츰 그 어른을 침해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상께서 그 어른을 예우하는 것이 비록 융숭하지만 그 어른이 편안히 있기 어려운 정황도 살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응교 박태손(朴泰遜)이 상소하여 부군을 비난하며 ‘사류로 하여금 죄를 얻게 하여 이간질하는 자들의 계획대로 되게 하였다.’라고 하자 부군이 차자를 올려 논변하기를,
“송시열이 행로를 바꾸어 동쪽으로 돌아간 것은 본디 처음부터 지녔던 뜻이 아니라 차츰 불안해져서 마침내 영원히 떠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된 까닭이 무엇이든지 간에, 세 임금이 빈사(賓師)로 예우했던 그 어른이 만사일생(萬死一生)의 뜻밖의 재앙을 겪고 다시 성상의 훌륭한 시대를 만나서 전에 없던 예우를 받다가, 낭패하여 서울 근교에 편안히 머물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후세에 알려져서는 안 될 일입니다. 신은 내심 매우 분하고 원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던 차에 마침 성상 앞에 나아오게 되어 외람되이 소회를 진달하는 바입니다. 그렇지만 이 또한 감히 근거 없이 억측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오직 그 어른의 상소와 대신(臺臣)의 계사에 근거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사람들이 모두 본 것입니다.
편지를 보낸 일에 대해 그 어른은 경애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다른 뜻이 없다고 하였는데, 대신(臺臣)은 ‘편지를 보내어 그 어른의 행보를 막았다.’라고도 하고 ‘마음이 훤히 보여 가릴 수 없다.’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른은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이 모두 연좌된 것 때문에 자책하여 심지어는 사람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는 말을 하였는데, 대신(臺臣)들은 일제히 이선(李選)을 공격하여 기어코 ‘현혹하여 알력을 일으켰다.’라는 죄명을 씌우려 하였습니다. 설령 편지를 보낸 사람의 마음이 대각의 주장처럼 참으로 가증스럽더라도 그 어른의 상소가 이와 같음을 보았으니 일단은 그런 말을 멈추고 다소나마 그 처지를 생각하는 뜻을 지녔어야 옳습니다. 그런데 또 독특한 의견을 내세우며 한결같이 사리에 어긋난 주장을 함으로써 겉으로는 그 어른을 존모한다면서 자신도 모르게 배치되는 뜻으로 공격하는 말을 하여 마찰을 빚고 있으니, 너무나도 생각이 짧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어른이 결연히 돌아가 버린 것에 대해 전적으로 이간질한 자 때문이라고 한 것은 더욱더 옳지 않습니다. 기회를 틈타 이간질한 자에게 죄가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어른은 뜻이 돌처럼 굳센데 어찌 이간하는 말 때문에 흔들려 거취를 결정했겠습니까. 이런 말을 보면 침해하고 비난하지 않는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심극(沈極)처럼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비위를 맞추는 무리야 어찌 깊이 책망할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지금 중론(衆論)이 한데 뭉쳐져 깨뜨릴 수 없을 만큼 견고해졌으니, 신은 실로 이 점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신은 할 말을 다하여 논의를 더 어지럽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오직 말을 부드럽고 완곡하게 하였습니다. 당장의 사태는 버려두고 먼 일을 근심하였으니 지나치게 완곡했다고 하겠습니다. 신은 이 때문에 거듭 사람들의 노여움을 격발시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신은 재난이 임박하고 나라의 형세가 불안한 이때에 차지해서는 안 될 자리에 외람되이 있으면서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조정의 논의가 어수선하고 풍파가 한창 일어나는 것을 목도하면서도 조정하여 진정시킬 가망이 없으니, 밤낮으로 근심과 두려움 속에 죄책이 내리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게다가 이번에 한마디 말을 입에서 내었다가 비난을 자초하였으니, ‘사류로 하여금 죄를 얻게 하여 이간질하는 자들의 계획대로 되게 한다.’라는 말의 뜻이 매우 절실합니다. 신의 죄안(罪案)에 한 가지 죄를 더 보태고 말았으니, 어찌 감히 뻔뻔스럽게도 구차히 정승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비답하기를,
“서로 뒤흔들고 공격하는 논의를 진정시키는 것이 본디 대신의 직책이니, 이처럼 천박하고 경솔한 말에 어찌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윽고 장령 심극이 재차 인피(引避)하며 김익훈(金益勳)의 일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외척에게 아부하고 사류를 해쳤다고 부군을 비난하였다. 심극은 본디 용렬하여 글자를 모르고 나이가 젊어 과격한 주장을 일삼는 자였는데, 부군을 싫어하는 자들이 그를 끌어다가 심복으로 삼고 사주하여 그의 손을 빌려 추악한 비난을 마구 가한 것이다. 이에 부군이 차자를 올려 인책하고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튿날 입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멸시받을 만한 짓을 한 뒤에 남이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신이 당한 낭패는 모두 자초한 것이니 또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다만 신 한 사람 때문에 국가의 체모가 이미 많이 손상되었으니, 속히 사직을 허락하시어 예(禮)로 물리치신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편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은 또 면려하는 뜻으로 유시할 뿐 허락하지 않았으며 심극을 죄줄 뜻을 보였다. 부군이 말하기를,
“심극은 전후로 인피하는 계사를 올리면서 마치 항간에서 욕하는 말처럼 장황하게 욕하였는데, 이는 실로 사대부가 서로 공경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조정의 체모로써 말하면, 만약 대신을 침해하고 비난했다고 곧장 대관(臺官)을 죄준다면 성상의 덕에 어찌 누가 되지 않겠으며 조정의 의론이 어찌 더욱 격해지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어 말하기를,
“오늘날의 말썽은 모두 김익훈의 일에 연유한 것이며 그를 도성 밖으로 내쫓는 형벌에서 풀어 줄지의 여부는 본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니, 일단은 대간의 주장을 따라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유득일(兪得一)이 다시 대각에 들어가 김익훈의 일을 논하자 상이 엄한 비지를 내려 “타고난 성품이 사악하고 악독하다.[賦性邪毒]”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부군이 말하기를,
“신하에 대한 임금의 입장은 마치 만물을 덮어주는 하늘과 같으니, 끝내 내버리는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한때 성상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을 경우 일에 따라 가르치고 질책하는 것은 물론 안 될 것이 없지만 그 사람의 일생을 들어 비난하는 것은 실로 중도에 지나칩니다. 성인(聖人)은 말씀이 박절하지 않으셨으니, 이러한 하교를 대각의 신하에게 경솔히 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성상의 함양(涵養) 공부에 흠이 될까 염려됩니다.”
하자, 상이 김익훈을 풀어 주라는 명을 거두는 한편 엄한 교지에 들어 있는 네 글자를 고쳤다. 그리고 심극은 결국 맹산 현감(孟山縣監)으로 좌천되었는데, 부군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심극의 직책은 사헌부 관원이고 법망에 걸린 이유는 대신을 비판했다는 것인데 하루아침에 변방의 고을로 좌천시켜 창황하게 내몬다면, 먼 지방 사람들이 갑자기 ‘대관이 간언했다가 견책받았다.’라는 말을 듣고는 필시 놀라고 의아하게 여겨 수군거릴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성상의 조정에 그 얼마나 누가 되겠습니까. 신 때문에 시의(時議)가 더욱 격해지고 성상의 덕에 흠이 생긴다면 그 죄를 스스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어떤 대간이 심극을 구원하는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심극이 인피하는 계사를 올린 것은 대신이 격발시킨 것입니다.”
하였다. 이 때문에 부군이 차자 끝에 이 일을 아울러 거론해서 스스로 논죄하기를,
“신은 일찍이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사헌부 장관으로 있을 적에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비위를 잘 맞춘다.’라고 정언 윤승훈(尹承勳)을 비난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은 시의(時宜)를 헤아리지 않고 망녕되이 이러한 옛 의리를 본떠서 그러한 처사가 대각을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혼미하여 판단이 흐려짐으로 인한 잘못입니다. 설령 심극에게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적으로 신이 격발시켰기 때문에 유발된 것이라면, 신이 마땅히 심극보다 먼저 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어찌 심극만 죄주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부군이 또 질병을 이유로 말미를 청하여 상소와 차자를 십수 차례 올렸으나 상은 더욱 돈독히 면려하는 가운데 하루에 세 번 승지를 보내어 재우쳐 불렀다. 이에 부군이 마침내 마지못해 일어나 입궐해서 뵙기를 청하고 자세히 진달하기를,
“정승이 된 4년 동안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하고 한갓 조정의 공론을 더욱 격하게만 만든 까닭에 경향 각지의 여론은 모두 ‘중직(重職)에 그대로 있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하고 있으니, 속히 파면시켜 주소서.”
하고, 또 송(宋)나라 한기(韓琦)가 사직을 청할 적에 물러나지 않는다고 자신을 꾸짖은 사방 인사들의 편지를 가지고 입궐하여 신종(神宗)에게 고한 일을 끌어대어 말하였다. 상이 윤허하지 않고 말하기를,
“옛날 사마광(司馬光)이 조정에 들어갈 적에 도성의 백성들이 이마에 손을 대고 바라보았다는데, 경이 정승으로 복귀할 적에도 이와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인심이 좋지 않아 이런 비방이 있으니 지극히 한심하다. 경은 선왕을 보필했던 신하로서 과인이 깊이 신임하여 의지하는 사람이니 비록 하루에 열 번 사직서를 올린다 해도 결코 따라줄 리가 없으니, 이러한 뜻을 이해하여 안심하고 공무를 행하라.”
하자, 부군은 묵묵히 물러났다.
우상 김공 석주(金公錫胄)가 조지겸(趙持謙) 등이 사정(私情)에 치우쳐 당파를 만들어서 나랏일을 망쳤다면서 견책과 처벌을 행하여 조정을 안정시키십사 청하였다. 이리하여 조지겸과 한태동(韓泰東)은 파직되고 오도일(吳道一)은 강원도의 고을로 좌천되었다. 부군이 좌상 민공(閔公)과 함께 입대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의 죄명이 드러나기도 전에 지레 죄벌을 가하여 처분이 중도에 지나치니 여론을 진정시키는 처사가 아닙니다.”
하였으나 상은 듣지 않았다.
7월에 다시 말미를 청하고 면직을 청하는 등 전후로 차자를 모두 10여 차례나 올렸다. 부군은 이때에 실로 질병이 있었고 처지가 불안하여 나랏일에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에 기어코 짐을 벗으려 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 번째 차자에서 다시 한기의 일을 끌어대어 말하기를,
“한기가 사직할 적에 물러나지 않는다고 자신을 꾸짖은 사방 인사들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가 황제 앞에서 펼쳐 보였는데, 그 꾸짖었다는 것이 어찌 한기를 미워해서 일부러 공격하여 흔들려고 그런 것이겠습니까. 다만 한기가 마땅히 물러나야 하는데도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거취(去就)의 의리를 지키라고 당부한 것일 뿐입니다. 또한 한기가 한사코 이것을 가지고 말한 것은 공의가 이와 같으므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인 것입니다. 하물며 죄가 산더미처럼 쌓여 질책이 세상에 넘쳐나는 신은 물러나야 하는 의리가 또 한기가 처했던 상황 이상이니, 지난번 차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신은 마땅히 물러나야 할 사람이라고 일컬은 것이 바로 신의 실상에 대한 공론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성상의 하교처럼 신을 미워하여 일부러 비방하는 것이겠습니까.
한기는 두 임금에 걸쳐 정책을 결정했던 대신으로서 자신의 덕망이 천하의 안위에 관계되는데도 강력히 사직하여 기어이 물러났고, 신종(神宗)은 그가 물러나는 것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면서도 끝내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어찌 한기가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이 부족하고 신종이 임금을 보필하는 정승을 대우하는 도리가 박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함께하는 것은 오직 정성과 신뢰, 예의와 의리에 달렸을 뿐, 한낱 외모와 겉치레를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송나라 문언박(文彦博)이 당개(唐介)에게 논박 당할 적에 인종(仁宗)이 비록 그 때문에 당개를 죄주었지만 문언박도 면직시켰으며, 왕도(王陶)가 한기를 논죄하여 헐뜯을 적에 신종이 왕도를 지방으로 내쳤지만 한기가 사퇴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 어찌 대신을 사방의 푯대로 삼아 일단 남의 말을 들었다 하면 피차의 시비를 막론하고 염치없이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문언박과 한기도 그랬는데 하물며 신처럼 보잘것없기 짝 없는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으며, 더구나 신이 온 나라 사람에게서 비난받는 것은 한두 사람이 논척(論斥)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닌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하여, 사직을 청하는 말이 이와 같이 간절했는데도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9월에 억지로 일어나 입궐해서 전후로 상의 명을 어긴 죄를 스스로 말씀드리자, 상이 불러서 위로하고 면려하였다.
10월에 상이 두진(痘疹)을 앓았다. 부군은 이때에 내의원 도제조(內醫院都提調)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밤낮으로 궁중에 입직하여 관디를 벗지 않았고 잠자리에 들지 않았으며 지성으로 노심초사하여 곁에 있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인심이 놀라 동요할까봐 걱정하여 상의 증후가 계속 바뀌어 왕왕 위급해졌을 때에도 차분하고 침착하게 처신하여 아무 일 없다고 진정시켰다. 이 때문에 상이 약을 복용한 것이 무려 수십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향 각지가 다 평온하였으니, 부군이 진정시켜 다스린 덕분이었다. 상이 건강을 회복한 뒤에 백금(白金), 안마(鞍馬), 모피 요[皮褥], 논밭과 노비를 하사하고 공신의 예처럼 자제 한 사람을 관직에 임명하였다. 이에 부군이 입궐하여 뵙고 상전(賞典)이 분수에 지나치다고 강력히 진달하고 간곡히 사양하여 받지 않자, 상이 그 수를 줄였다.


 

[주D-001]구용(九容) : 옛날 군자가 수신하고 처세할 적에 견지해야 하는 아홉 가지 몸가짐으로, “발걸음을 경망하게 하지 않고, 손으로 아무 데나 어지럽게 가리키지 않고, 눈은 흘겨보지 않고, 말을 경박하게 하지 않고, 목소리를 온화하게 하여 괴상한 소리를 내지 않고, 고개를 곧게 세워 마구 갸우뚱거리거나 돌아보지 않고, 기운을 엄숙하게 하고, 서 있을 때에는 바르게 서서 덕 있는 기상을 지니고, 낯빛을 장중하게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라는 것이다. 《禮記 玉藻》
[주D-002]사물(四勿) :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하기 위한 실천 지침으로 제시한 네 가지 금기 사항으로,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마음을 동하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는 것이다. 《論語 顔淵》
[주D-003]반시(泮試) : 성균관의 기숙사에서 숙식하며 수학하는 유생들에게 보인 시험이다.
[주D-004]태학사(太學士) :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의 이칭이다.
[주D-005]택당(澤堂) : 이식(李植, 1584~1647)의 호이다.
[주D-006]무슨 …… 면직되었다가 : 1653년 2월 26일에 연석(筵席)에서 효종이 “근래 대관들이 한마디도 없이 조용한데 어찌 조정에 잘못된 일이 없겠는가.……양사의 장관을 모두 체차시키고 싶다.”라고 하자 그 이튿날인 27일에 대사헌, 대사간과 함께 양사의 관원들이 인피하였는데, 옥당의 차자에 따라 김수항 등 대부분의 양사 관원들이 체차되었다. 《孝宗實錄 4年 2月 26日, 27日》
[주D-007]복역(覆逆) : 승정원에서 임금의 명을 받들지 않고 복계(覆啓)하여 반대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8]퇴우(退憂) :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의 호이다.
[주D-009]추고(推考) : 죄과 있는 관원을 신문하여 그 죄상을 고찰하는 것으로, 관원에 대한 일종의 징계 조치이다.
[주D-010]폐모소(廢母疏) :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를 억누르기 위해 뼈를 능묘에 묻고 잘라낸 고깃점에 임금의 이름을 써서 까마귀와 솔개에게 먹이는 등 저주를 하고 자신의 아들인 영창대군(永昌大君) 이의(李㼁)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고 주장하며 폐출하라고 청한 상소를 말한다. 《光海君日記 9年 11月 28日》
[주D-011]동춘(同春) :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호이다.
[주D-012]기(紀) : 햇수를 세는 단위로, 1기는 12년에 해당한다.
[주D-013]대국(大國)은 …… 있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문왕(文王)을 본받으면 큰 나라는 5년, 작은 나라는 7년 만에 반드시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라고 한 것을 인용한 말이다.
[주D-014]주 선왕(周宣王)과 한 광무제(漢光武帝) : 모두 쇠퇴한 나라를 중흥시킨 임금이다.
[주D-015]위 무공(衛武公)은 …… 하는데 : 《시경(詩經)》 〈대아(大雅) 억(抑)〉의 장하 주(章下註)에 《국어(國語)》 〈초어(楚語)〉에 있는 좌사(左史) 의상(倚相)의 말을 인용하기를, “옛날 위 무공은 나이가 95세였는데도 도성 안에 경계하여 말하기를, ‘조정에 있는 자들은 모두 내가 늙었다 하여 나를 버리지 말고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공손히 하고 조심하여 나를 경계시키라.’ 하였다.” 하고 언제 어디서든 경계의 뜻을 담은 글과 말을 가까이하였다고 하였다.
[주D-016]보전(寶篆) : 죽은 왕이나 왕비의 존호(尊號)를 새긴 도장을 금보(金寶)라고 하는데, 여기에 전자체(篆字體)로 쓰는 글씨를 말한다. 이때 김수항은 보전문 서사관(寶篆文書寫官)이었다.
[주D-017]수리(修理)를 감독하던 중관(中官) : 차지 중사(次知中使)였던 내관 윤완(尹完)을 가리킨다. 《顯宗實錄 1年 7月 26日》
[주D-018]지평 …… 논죄하였는데 : 《현종실록(顯宗實錄)》 1년 6월 11일에 정언 이지익이 대사간 이정기(李廷夔) 등과 함께 “전라 우수사 이동현(李東顯)이 쌀과 베를 배 1척에다 가득 싣고 그 배까지 싸잡아서 이조 참판의 집으로 보냈는데 이조 참판 이응시(李應蓍)가 그 서간을 받지 않고 전임자에게 떠넘겼고, 전임 참판 이일상(李一相)도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여 쌀 실은 배가 오래도록 강가에 정박하고 있다는 소문이 몹시 자자하게 전파되고 있습니다.”라며 이동현을 뇌물죄로 다스릴 것을 청한 일이 보이고, 12일에는 이 일을 덮어두려 했다는 이유로 이지익이 이응시와 이일상을 탄핵한 일이 보인다. 또 《현종실록》 2년 9월 17일에는 지평 이지익이 위의 일로 인피하면서 “일찍이 호서(湖西)에서 방백에게 간청하여 군영의 미곡을 아산현(牙山縣)에서 받아내 배를 이용해 집으로 운반한 뒤, 그 적곡(糴穀)을 전의현(全義縣)에 이록(移錄)시켜 황조(荒租)로 대납(代納)하고는 민간에 나누어 주게 하여 미곡으로 바꿔서 징수하게 하였다.”라고 이일상의 또 다른 죄상을 아뢴 일이 보인다. 여기에서는 이일상이 호서의 군량미를 실은 배를 받은 것만 논죄했다고 하였으나, 실은 위의 두 가지 일을 함께 논한 것으로 보인다.
[주D-019]문형(文衡) :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을 이른다.
[주D-020]양관(兩館) :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을 이른다.
[주D-021]정청(政廳) : 인사 행정을 담당한 이조, 병조의 관원이 궁중에서 정사를 보는 곳을 이른다.
[주D-022]북로(北路) : 함경도를 가리킨다.
[주D-023]대신의 …… 명하고 : 약방 도제조 정태화(鄭太和)가 현종과 면대하여 관원에 대한 처벌이 심하여 국사를 집행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하자, 현종이 “이조 당상과 낭청에 대해서는 체직 추고만 하고 파직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한 것을 이른다. 《顯宗改修實錄 5年 4月 20日》
[주D-024]관북(關北) : 함경도를 가리킨다.
[주D-025]고공(雇工)과 …… 폐단 : 조선 시대에 북방의 변경이 안정되기 전에는 함경도의 거주민들이 모두 변경 수비의 임무를 지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생업에 지장이 있게 되자, 타지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을 고공으로 정해 주어 농사일을 대신하게 하고 토착민 중에 솔정(率丁)을 정해 주어 물품을 공급하게 하였다. 뒤에 변경이 안정된 뒤에도 이러한 풍습이 그대로 남아 고공과 솔정을 노비처럼 부리고 심지어는 10세가 되기 전부터 잡아다 부리고 생사여탈권까지 쥐었다고 한다. 보인은 솔정을 이른다. 《顯宗改修實錄 5年 12月 30日》
[주D-026]위 무공(衛武公)이 …… 가다듬으셨습니다 : 스스로 경계했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억(抑)〉의 장하 주(章下註)에 《국어(國語)》 〈초어(楚語)〉에 있는 좌사(左史) 의상(倚相)의 말을 인용하기를, “옛날 위 무공은 나이가 95세였는데도 도성 안에 경계하여 말하기를, ‘조정에 있는 자들은 모두 내가 늙었다 하여 나를 버리지 말고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공손히 하고 조심하여 나를 경계시키라.’ 하였다.” 하고 언제 어디서든 경계의 뜻을 담은 글과 말을 가까이하였다고 하였다.
[주D-027]아전(亞銓) :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관서의 차관으로, 여기서는 당시에 이조 참판이었던 이상진(李尙眞)을 가리킨다. 《顯宗改修實錄 6年 1月 28日》
[주D-028]좌랑 …… 내렸다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6년 1월 28일 기사에, 이조 참판 이상진(李尙眞)이 판결사 김소(金素)를 승지의 물망에 올리려 하였으나 좌랑 홍만용(洪萬容)이 끝내 단자에 김소의 이름을 쓰려 하지 않고 붓을 던지며 일어나자 추고를 청하고 그에 따라 현종이 홍만용을 하옥시킨 일이 보인다.
[주D-029]이수광(李睟光)의 고사 : 인조조에 이수광이 이조 판서로 있을 적에 그가 병 때문에 인사 개편에 참여하지 못한 틈을 타서 동료가 그를 내의원 제조에 제수하였는데, 이수광이 인혐하고 고사하자 인조가 윤허한 일을 가리킨다. 《文谷集 卷10 吏曹判書三告加由後乞遞三疏, 韓國文集叢刊 133輯》
[주D-030]도심(道心)을 …… 훈계 : 인조(仁祖)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봉림대군이 눈물을 흘리며 고사하였는데, 이때 인조가 “나는 이미 결정하였고 여러 사람의 의견도 모두 같으니 너는 고사하지 말고 삼가 도심을 지키라.”라고 훈계한 말을 가리킨다. 《孝宗實錄 卽位年 5月 8日》 뒤에 결국 봉림대군이 즉위하여 효종이 되었다.
[주D-031]큰 사업을 …… 뜻 : 청나라를 정벌하려던 효종(孝宗)의 뜻을 말한다.
[주D-032]희풍(熙豐) : 송 신종(宋神宗) 때의 연호인 희령(熙寧)과 원풍(元豐)을 합칭한 말이다.
[주D-033]을야(乙夜), 병야(丙夜) : 을야는 2경(更) 곧 밤 9시부터 11시 사이를, 병야는 3경 곧 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를 이른다.
[주D-034]성인이 …… 것입니다 : 공자가 나라를 다스릴 적에 주의할 점 세 가지를 말하였는데, 첫째 일을 신중히 하여 백성들에게 신뢰를 받아야 하고, 둘째 씀씀이를 절제하여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고, 셋째 백성들을 농한기에만 부려야 한다는 것이다. 《論語 學而》 여기서는 둘째 사항에 대해 말한 것이다. 곧 씀씀이를 절제하는 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기본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주D-035]영남 …… 말하였다 : 《현종개수실록》 8년 2월 29일에, 자신들과 논의가 맞지 않고 색목(色目)이 같지 않으면 현우(賢愚)를 따지지 않고 일체 물리쳤다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을 비난하고, 조복양(趙復陽), 김만기(金萬基), 민유중(閔維重), 원만리(元萬里), 이민서(李敏敍) 등을 의기(義氣)가 없는 자들이라고 비난하고, 김익렴(金益廉)을 간악한 성품과 짐승 같은 행실을 지닌 자라고 비난하고, 김수항(金壽恒)과 김수흥(金壽興)이 자리에 연연하여 시류에 따라 인사 행정을 하고 친한 사람을 사간원의 장관에 맨 먼저 후보자로 올려 대관에게 아첨하고 임금을 견제하는 기화로 삼았으며 외척의 힘을 빌려 임금의 위엄을 막으려 했다고 비난한, 유학 황연(黃壖)의 상소가 보인다.
[주D-036]청나라가 …… 미쳤으니 : 1666년(현종7) 7월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우리나라 사람이 몰래 염초(焰硝)를 사 온 일과 청나라로 잡혀갔던 사람이 도망 온 것을 묵인해 주고 청나라로 돌려보내지 않은 일에 대해 조사하였다. 이때 도망 온 자를 돌려보내지 않은 일에 대해 현종이 죄를 자처하자 뒤에 청나라에서 현종에게 벌금을 물렸다. 《顯宗實錄 7年 7月 10日, 12月 25日》 대신이 목숨을 걸고 죄를 자처했더라면 대신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을 텐데 임금에게 죄가 있는 것으로 청나라에 보고하도록 놓아두었기 때문에 현종이 치욕적으로 벌금을 물게 되었다는 말이다.
[주D-037]최일은 …… 삼았습니다 : 1667년(현종8) 2월에 헌납 최일이 자신은 “임금이 죄를 감당하는 것을 보고도 사실관계를 바로잡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으므로, 당시에 힘껏 쟁집하지 않은 대신들을 논죄하는 합계(合啓)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면직된 일을 가리킨다. 임금이 죄를 감당하였다는 것은 1666년 7월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우리나라 사람이 몰래 염초(焰硝)를 사 온 일과 청나라로 잡혀갔던 사람이 도망 온 것을 묵인해 주고 청나라로 돌려보내지 않은 일에 대해 조사하였는데, 이때 도망 온 자를 돌려보내지 않은 일에 대해 현종이 죄를 자처하자 뒤에 청나라에서 현종에게 벌금을 물린 일을 말한다. 《顯宗實錄 7年 7月 10日ㆍ 12月 25日, 8年 2月 4日》
[주D-038]9월에 …… 자들이었다 : 1667년(현종8) 9월 14일에 열린 인사 행정에서 현종이 승지의 후보자를 더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이조에서 홍처량(洪處亮), 이시술(李時術), 민유중(閔維重)을 올리자, 현종이 또 더 의망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김우석(金禹錫), 이익(李翊)을 올리자 이익을 낙점하였다. 김우석과 이익은 《승정원일기》에 관한 일로 분분하게 쟁변하여 오랫동안 청직(淸職)으로의 진출이 막혀 있던 자들이었다. 《顯宗實錄 8年 9月 14日》
[주D-039]별대(別隊) : 본대 밖에 따로 조직한 군대이다. 《현종실록》 10년 7월 23일 조에 훈련 별대(訓鍊別隊)를 창설하는 논의가 보인다.
[주D-040]정초청(精抄廳) : 정초군(精抄軍)의 군무를 맡아 보는 관아이다. 인조 때에 정초군을 설치하고 입직하는 위장(衛將)이 통솔하게 하였다가 1648년(인조26)에 병조 판서로 대장을 삼아 지휘하게 하였으며 1668년(현종9)에 정초청을 설치하고 숙위에 관한 군무를 맡게 하였다가, 1682년(숙종8)에 훈련 별대(訓鍊別隊)와 함께 금위영(禁衛營)에 합쳤다.
[주D-041]주 세종(周世宗)이 …… 하였는데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92 〈후주기(後周紀) 3〉의 내용으로, 주 세종의 이 말은 쓸모없는 군사를 많이 키우는 것보다 소수의 정예군을 키우는 것이 낫다는 기조의 말이다.
[주D-042]서로(西路) : 황해도와 평안도를 이른다.
[주D-043]거(莒) …… 말라 : 춘추 시대 제(齊)나라에 내란이 발생하자 공자 소백(小白)이 거(莒)나라로 망명했다가 나중에 돌아와 임금이 되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환공(桓公)이다. 환공이 포숙(鮑叔)에게 나라를 잘 다스릴 방도를 묻자 포숙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께서는 거 땅에 계셨던 때를 잊지 마소서.” 하였다. 《新唐書 卷97 魏徵列傳》 곧 과거에 곤액을 당했던 시절을 잊지 말아서 안일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라는 말이다.
[주D-044]노기(盧杞) : ?~대략 785. 그는 말재주가 있어 당 덕종(唐德宗)에게 신임을 받고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발탁되었던 인물인데,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시기하여 조금이라도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으면 사지(死地)로 내몰아 양염(楊炎), 두우(杜佑), 안진경(顔眞卿) 등을 모해하였다.
[주D-045]주 부자(朱夫子) : 주희(朱熹, 1130~1200)를 이른다.
[주D-046]10역(驛) : 10리가 1역이므로 10역은 100리이다.
[주D-047]내용 …… 있었다 : 이단하(李端夏)가 지은 홍주원(洪柱元)의 치제문(致祭文)에 의하면, 효종은 나라의 제도에 구애되어 홍주원을 정승 자리에 두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하고, 홍주원이 유배 간 조석윤(趙錫㣧)과 박장원(朴長遠)에 대해 해명하자 효종이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다가 끝내는 홍주원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매우 융숭하게 예우했다고 한다. 《顯宗改修實錄 13年 11月 1日》
[주D-048]1년이 …… 쌓인다 : 《근사록(近思錄)》 〈치법류(治法類)〉에 인용된 정이(程頤)의 말이다.
[주D-049]당나라 …… 일 : 722년 11월에 전 광주 도독(廣州都督) 배주선(裴伷先)이 하옥되자 중서령(中書令) 장가정(張嘉貞)이 곤장을 치도록 현종(玄宗)에게 주청하였다. 이에 병부 상서(兵部尙書) 장열(張說)이 아뢰기를, “신은 듣건대, 대부에게는 형장(刑杖)을 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대부가 임금과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비를 죽이면 죽였지 욕보여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하자, 현종이 수긍하였다. 《新唐書 卷127 張嘉貞列傳》
[주D-050]영릉(寧陵) : 효종(孝宗)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이다.
[주D-051]복토(復土) : 하관(下棺)한 후에 파낸 흙으로 덮고 봉분을 만드는 일을 말한다.
[주D-052]장릉(長陵) : 인조(仁祖)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능이다.
[주D-053]금오문(金吾門) : 의금부의 정문이다.
[주D-054]동은(峒隱) : 이의건(李義健, 1533~1621)의 호이다.
[주D-055]두자미(杜子美) :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 712~770)로, 자미는 그의 자이다.
[주D-056]가을에 …… 지었다 : 대본은 ‘秋 復入白雲山 得故峒隱李公釣臺樂之規 築室其上 取杜子美詩語 名以送老’인데, 한국문집총간 162집에 수록된 《농암집(農巖集)》 권24의 〈영령정기(泠泠亭記)〉에 ‘得故李氏釣臺而樂之 遂名之曰風珮洞 而送老菴作焉’이라 한 것에 근거하여 ‘規’는 ‘遂’의 오자로 보아 고쳐 번역하였다.
[주D-057]인선대비(仁宣大妃) : 1618~1674. 효종(孝宗)의 비 장씨(張氏)이다.
[주D-058]빈청(賓廳) : 조선 시대에 3정승과 2품 이상의 고위 관리들이 모여 국사를 의논하던 궁궐 내의 회의실을 이른다.
[주D-059]자의대비(慈懿大妃) : 1624~1688. 인조(仁祖)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조씨(趙氏)로, 자의는 1651년(효종2)에 받은 존호이다.
[주D-060]우재(尤齋) :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호이다.
[주D-061]동춘(同春) :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호이다.
[주D-062]승중(承重) : 아버지를 여읜 맏아들이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상사(喪事) 때 아버지를 대신하여 상주 노릇을 하는데, 이러한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 맏아들이 없으면 둘째 아들이 승중한다.
[주D-063]대행대비(大行大妃) : 인선대비(仁宣大妃), 곧 효종(孝宗)의 비 장씨(張氏)를 가리킨다.
[주D-064]외부의 의론 : 송시열(宋時烈) 등의 주장으로, 《가례복도(家禮服圖)》 및 시왕(時王)의 제도에 며느리의 복은 기년복과 대공복(大功服)의 구분이 있으며, 기해년 국상 때에도 대왕대비가 기년복을 입었으므로 이때에는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顯宗實錄 15年 2月 27日》
[주D-065]퇴우공(退憂公) : 김수항의 작은형 김수흥(金壽興, 1626~1690)으로, 퇴우는 그의 호이다.
[주D-066]장순(章順) : 1445~1461. 예종(睿宗)의 비 한씨(韓氏)의 봉호이다.
[주D-067]공혜(恭惠) : 1456~1474. 성종(成宗)의 비 한씨(韓氏)의 봉호이다.
[주D-068]예경의 4종(種)의 설 : 승중했어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네 가지 경우에 대한 설로, 네 가지란 첫째, 정(正)이고 체(體)이기는 하나 전중(傳重)할 수 없는 경우, 즉 적자가 불치병이 있어서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지 못한 경우, 둘째, 전중은 했지만 정도 아니고 체도 아닌 경우, 즉 서손이 후사가 된 경우, 셋째, 체이기는 하나 정이 아닌 경우, 즉 서자가 후사가 된 경우, 넷째, 정이기는 하나 체가 아닌 경우, 즉 적손이 후사가 된 경우이다. 《儀禮注疏 卷11 喪服》
[주D-069]삼성추국(三省推鞫) : 삼성, 즉 의정부, 사헌부, 의금부의 관원이 한데 모여 강상(綱常)의 중죄를 범한 자를 국문하는 일이다.
[주D-070]위관(委官) : 중죄인의 국문을 주관하는 벼슬로, 의정 대신 가운데서 임시로 뽑아 임명한다.
[주D-071]총호사(摠護使) : 국상이 났을 때 상례와 장례에 관한 일을 총괄하여 보살피는 임시 벼슬이다.
[주D-072]원상(院相) : 임금이 죽은 뒤 26일 동안 정무를 맡아 보는 임시 벼슬로서, 원로대신 중에서 임명한다.
[주D-073]곽세건(郭世楗)이란 자가 상소하여 : 곽세건은 진주(晉州)의 유학(幼學)이며 이 상소는 《숙종실록(肅宗實錄)》 즉위년 9월 25일에 보인다. 아래의 송(宋) 아무개가 원래의 상소에는 송시열(宋時烈)로 되어 있다.
[주D-074]우재가 …… 명하자 : 다른 사람은 김석주(金錫胄)를 가리킨다. 《숙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에 송시열이 지문(誌文) 짓는 일을 사양하자 숙종이 김만기(金萬基)에게 시키려고 하다가 김수항의 반대와 추천을 받아들여 결국 김석주에게 명한 일이 보인다.
[주D-075]현석(玄石) :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호이다.
[주D-076]성균관 …… 비판하였다 : 이윤악(李胤岳) 등 90여 인의 성균관 유생이 올린 상소와 임금의 비답이 《숙종실록》 즉위년 11월 11일 기사에 보인다.
[주D-077]유현이 …… 통탄스러워하셨다 : 대본은 ‘儒賢之議禮 先朝常痛其見欺’인데, 《숙종실록》 즉위년 11월 11일 기사에는 ‘禮’ 뒤에 ‘乖舛’ 2자가 더 있다.
[주D-078]대관(臺官)이 …… 청하였다 : 대관은 장령 남천한(南天漢)이며, 이 계사는 《숙종실록》 즉위년 11월 20일에 보인다.
[주D-079]숭릉(崇陵) : 현종(顯宗)의 능이다.
[주D-080]대비(大妃) : 현종의 비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를 가리킨다.
[주D-081]진 목제(晉穆帝)는 …… 삼았습니다 : 목제는 동진(東晉)의 첫 임금이다. 채모(蔡謨, 281~356)는 자는 도명(道明), 시호는 문목(文穆)으로, 명제(明帝) 때부터 벼슬을 시작하여 각주의 자사(刺史)를 거치고 광록대부(光祿大夫)에까지 오른 인물로, 박학하고 예제(禮制)에 밝았다. 348년부터 350년까지 목제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채모가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자 신하들이 그의 오만불손함을 문제삼아 처벌하기를 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채모가 소복차림으로 자제들을 데리고 스스로 정위(廷尉)에 이르러 대죄하자, 황태후가 그는 선왕의 스승이었다며 처벌을 면해 주고 서인(庶人)으로 삼게 하였다. 《晉書 卷77 蔡謨列傳》
[주D-082]김 아무개 : 《숙종실록》 1년 3월 8일 윤휴(尹鑴)의 계사에는 ‘金壽恒’으로 되어 있다.
[주D-083]처음에 …… 빠뜨렸다 : 1673년(현종14)에 이익수(李翼秀)가 윤휴(尹鑴)와 이남(李柟)의 사주를 받고 영릉(寧陵) 즉 효종의 능의 석물(石物)에 하자가 있다 하여 이를 과장하고 충동질하여 능을 옮기자고 청함으로써 애초에 영릉을 조성할 당시의 책임자였던 송시열(宋時烈) 등을 타격하려 한 일을 이르는 듯하다. 《宋書續拾遺 附錄 卷2 墓誌》
[주D-084]이정(李楨)과 …… 일 : 이정과 이연(李㮒)은 모두 인조(仁祖)의 손자이자 인평대군(麟平大君) 이요(李㴭)의 아들로, 이정의 봉호는 복창군(福昌君), 이연의 봉호는 복평군(福平君)이다. 궁인이란, 군기시(軍器寺)의 서원(書員) 김이선(金以善)의 딸 김상업(金常業)과 내수사(內需司)의 종 귀례(貴禮)를 가리킨다. 이정과 이연이 궁중에 출입하며 궁인과 교통하여 자식까지 갖게 된 일을 말한다. 《肅宗實錄 1年 3月 12日》
[주D-085]명성대비(明聖大妃) : 1642~1683. 현종의 비 김씨(金氏)이다.
[주D-086]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 : 〈가인괘 단(彖)〉의 “여자의 바른 자리는 안에 있고, 남자의 바른 자리는 밖에 있다.”라는 말을 가리킨다.
[주D-087]천하에 …… 없다 : 《소학집주(小學集註)》 권5 〈가언(嘉言)〉에 이 말이 보이는데, 진순(陳淳)의 설에 따르면 이는 “효자의 마음은 부모와 하나가 되어 모든 부모의 과실을 다 자기의 과실로 여기기 때문에 자연히 부모에게 옳지 않은 점이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주D-088]신록(新錄) : 홍문관의 교리와 수찬 등을 새로 뽑는 일을 말한다.
[주D-089]김 문경공(金文敬公) : 김집(金集, 1574~1656)으로, 문경은 그의 시호이다.
[주D-090]임금을 …… 합니다 : 춘추 시대 주루국(邾婁國) 고공(考公)의 초상에 서국(徐國) 임금이 용거(容居)를 시켜 조문하게 하고 아울러 주옥(珠玉)을 보내어 직접 앉아서 반함(飯含)의 예를 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는 천자국이 제후국을 조문하는 예이기 때문에 주루국에서는 신하가 와서 임금의 예를 행하는 경우는 없다며 거부하였다. 이에 용거가 말하기를, “제가 듣건대, 임금을 대신하여 일을 할 적에는 감히 임금을 잊지 않고 또한 선조도 잊지 않는다고 했습니다.[容居聞之 事君 不敢忘其君 亦不敢遺其祖]” 하며 주루국의 선군(先君)인 구왕(駒王)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할 적에 늘 임금의 예를 행하였으므로 자신도 임금의 예를 행할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용거가 서국의 왕족이라서 구왕이 용거의 선조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禮記 檀弓下》 여기서는 김수항이 자신의 선조인 김상용의 행적이 왜곡되는 것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다는 뜻으로 쓰였다.
[주D-091]친척을 …… 준다 : 제(齊)나라로 도망간 노(魯)나라 공자 경보(慶父)가 노나라에 온 것을 《춘추(春秋)》에 “제 중손(齊仲孫)이 왔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에 대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민공(閔公) 원년 조에 “왜 제 중손이라고 하였는가? 제나라에 귀속시킨 것이다. 왜 제나라에 귀속시켰는가? 노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왜 노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는가? 《춘추》는 존귀한 사람을 위하여 과실을 숨겨 주고, 친한 사람을 위하여 과실을 숨겨 주며 어진 사람을 위하여 과실을 숨겨 준다.” 하였다. 여기서는 왕실의 친인척들에 대해서 과실을 숨겨 줄 때에 《춘추》의 이러한 의리를 끌어댄다는 말이다.
[주D-092]양궁(兩宮) : 대전(大殿)과 자전(慈殿), 즉 숙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를 가리킨다.
[주D-093]바닷가 : 송시열이 유배 가 있던 경상도 장기(長鬐)를 이른다.
[주D-094]길 양쪽에서 발돋움하며 바라보았다 : 송나라 신종(神宗)이 죽었다는 부음을 듣고 사마광(司馬光)이 대궐로 달려가자 호위 군사들이 모두 “사마 상공(司馬相公)이시다.” 하며 이마에 손을 대었으며, 백성들이 길을 꽉 메우고 바라보며 “낙양으로 돌아가지 말고 머물러 천자를 보좌해서 백성을 구제하소서.” 하였다. 이는 당시에 신종의 뒤를 이은 철종(哲宗)이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었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김수항이 도성으로 돌아올 적에도 이 고사처럼 백성들이 길을 메우고 바라보며 공경의 뜻을 표했다는 말이다.
[주D-095]도당(都堂) : 홍문관의 교리 이하의 벼슬아치를 선출하기 위해 의정부에 모여 권점을 행하는 주체를 뜻하는 말로, 영경연사(領經筵事), 대제학, 좌참찬과 우참찬, 이조의 판서와 참의가 이에 해당한다. 《銀臺條例 禮典 儒臣》
[주D-096]권점(圈點) : 벼슬아치를 뽑을 때 뽑고자 하는 후보자의 이름 아래에 둥근 점을 찍는 일, 또는 그 점을 이른다. 홍문관, 예문관 등 중요 관아의 벼슬아치를 임명할 때에 홍문관, 예문관, 의정부의 관원 등이 권점을 행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임금이 최종 결정을 내려 임명한다.
[주D-097]관각(館閣) : 홍문관과 예문관을 이른다.
[주D-098]소공(召公) …… 어렵습니다 : 이때 진강하고 있는 《서경(書經)》 〈군석(君奭)〉은 국가의 원로대신인 소공이 조정을 떠나려 하자 주공(周公)이 만류하는 내용인데, 그 당시의 어려움과 현실의 어려움을 비교하여 말한 것이다.
[주D-099]심려(心膂) : 심장과 등뼈처럼 마음 놓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심복(心腹)과 비슷한 말이다.
[주D-100]우두머리는 …… 않는다 : 하(夏)나라 때에 희화(羲和)가 직무를 유기하고 술에 빠져 고을을 망치자 천자 중강(仲康)이 윤후(胤侯)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는데, 윤후가 희화를 정벌한 뒤에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한 말이다. 《書經 胤征》
[주D-101]두 마음을 …… 것이다 : 24년 5월에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한단(邯鄲)을 함락하여 왕랑(王郞)을 죽이고 궁중의 문서를 수습할 적에 왕랑과 사통하거나 자신을 비방한 내용의 편지 수천 장을 장군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 버리고 한 말이다. 《後漢書 卷1上 光武帝紀》
[주D-102]숙향(叔向) : 양설힐(羊舌肹)의 자이다.
[주D-103]공신 회맹(功臣會盟) : 공훈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책에 써 올릴 때에 임금과 신하가 모여서 서로 맹세하는 의식이다.
[주D-104]정공신(正功臣) : 원종공신(原從功臣)과 대비되는 말로,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이른다.
[주D-105]5인 : 이원성(李元成), 김익훈(金益勳), 이광한(李光漢), 조태상(趙泰相), 신범화(申範華)를 이른다. 《承政院日記 肅宗 6年 9月 18日》
[주D-106]신호(申壕) : 대본은 ‘申琥’인데, 《효종실록(孝宗實錄)》 3년 1월 10일 기사 등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107]신독(愼獨) :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언행을 삼가는 것이다.
[주D-108]병야(丙夜) : 3경(更), 즉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를 말한다.
[주D-109]흰 무지개가 …… 이변 : 해 좌우에 흰 운기(雲氣)가 길게 뻗어 있어 마치 흰 무지개가 해를 꿴 듯이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주D-110]인경왕비(仁敬王妃) : 1661~1680. 숙종의 비 김씨(金氏)이다. 이때 천연두에 걸려 8일 만에 죽었다.
[주D-111]흠위(廞衛) : 제왕의 장의(葬儀) 행렬에 쓰는 여러 가지 도구를 말한다.
[주D-112]인광(闉壙) : 묘혈(墓穴)의 바닥을 석회로 채워 넣어 그 위에 관곽(棺槨)을 올려놓게 만든 것이다.
[주D-113]원훈(元勳) : 나라에 큰 공을 세워서 임금이 아끼고 믿으며 가까이하는 늙은 신하를 이른다.
[주D-114]삼양(三陽)이 회복되어 : 음력 1월에 해당하는 《주역(周易)》의 태(泰) 괘는 여섯 개의 효가 모두 음효(陰爻)인 10월의 곤(坤) 괘에서 양효(陽爻) 세 개를 회복하여 이루어진 괘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115]주인(遒人)이 …… 방법 : 주인은 임금의 명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사람을 이른다. 《서경(書經)》 〈윤정(胤征)〉에 “매년 초봄에 주인이 목탁(木鐸)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말하기를, ‘관원들은 잘못을 바로잡아 주고 백공들은 기술에 대하여 간하라. 혹시라도 이렇게 공손히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라의 떳떳한 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주D-116]월령(月令)의 …… 뜻 : 《예기(禮記)》 〈월령(月令) 계춘지월(季春之月)〉에 “제후들에게 이름난 선비를 초빙하고 어진 이를 예우하도록 면려한다.” 하였다.
[주D-117]진대(賑貸)를 …… 조령(詔令) : 한 문제(漢文帝)가 사방에 명하기를 “화창한 봄에 초목 같은 생물들은 모두 즐거워하는데 우리 백성 가운데 환과고독(鰥寡孤獨) 같은 곤궁한 사람은 혹 죽을 지경에 놓여 있어도 돌보아 주거나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짐이 백성의 부모로서 장차 어떻겠는가. 진대할 방도를 의논하라.” 하였다. 《漢書 卷4 文帝紀》
[주D-118]1년이 …… 쌓인다 : 《근사록(近思錄)》 〈치법류(治法類)〉에 인용된 정이(程頤)의 말이다.
[주D-119]나날이 …… 퇴보한다 : 《근사록》 〈위학류(爲學類)〉에 인용된 정이(程頤)의 말이다.
[주D-120]끝이라고 …… 어지럽다 : 《주역》 〈기제(旣濟) 단(彖)〉에 있는 말로, 《근사록》 권8에는 이에 대해 “보통 사람은 일이 이룩되고 나면 구차히 안주하기 때문에 쇠하고 어지러워지는 반면에 성인은 도가 궁해지기 전에 변통하기 때문에 어지러움이 없이 유종의 미를 거둔다.”라고 부연 설명하였다.
[주D-121]빈사(賓師) : 관직에 있지 않으면서 임금에게서 빈객과 스승의 예우를 받으며 자문에 응하거나 학문을 강하는 사람을 이른다.
[주D-122]죄인 …… 의리 : 《한서(漢書)》 권48 〈가의전(賈誼傳)〉에 “대신이 중대한 죄를 지어 견책을 받게 되면 상복(喪服) 차림으로 쟁반에 물을 담고 그 위에 칼을 올려놓고서 죄를 청하는 곳에 스스로 나아가 죄를 청했지 임금이 신하를 보내어 잡아오게 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의 주에 여순(如淳)의 말을 인용하기를, “물은 성질이 수평을 유지하려 하므로 임금이 공평한 법으로 다스리는 것을 상징한다. 검을 올려놓은 것은 자결하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하였다. 대신은 처벌할 때에도 이처럼 예우했다는 말이다.
[주D-123]원우(元祐) :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이다.
[주D-124]하늘이 …… 것이다 : 사마광(司馬光)이 좌복야(左僕射)가 되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폐기하려 하자 장돈(章惇), 여혜경(呂惠卿)의 무리가 “선왕의 법을 폐기한 것에 대해 훗날 부자간의 의리를 근거로 문제 삼는다면 붕당의 화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충고하였는데, 사마광은 훗날의 화가 두려워 옳은 일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史略 卷6 宋哲宗》
[주D-125]시장(柴場) : 땔나무를 베는 일정한 장소이다. 서울의 각 관사는 강변에 일정한 면적의 시장을 두었다.
[주D-126]14세 이하의 어린이 : 대본은 ‘兒弱’인데, 《대전회통(大典會通)》 〈병전(兵典) 성적(成籍)〉에 황구(黃口)나 아약(兒弱)을 군적에 충정한 수령을 처벌하는 조항이 있는데, 소자(小字)로 ‘황구’는 5세 이하, ‘아약’은 14세 이하라고 되어 있다.
[주D-127]양서(兩西) : 황해도와 평안도를 이른다.
[주D-128]관서(關西) : 황해도와 평안도를 이른다.
[주D-129]이조 …… 제수하자 : 김진귀(金鎭龜)는 숙종의 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로, 이때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다음 날 광주 부윤의 마지막 후보자로 들어가 낙점받았다. 《肅宗實錄 8年 6月 28日》
[주D-130]왕증(王曾) : 대본은 ‘王朝’인데,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전집(前集) 권5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131]풍정례(豐呈禮) : 임금이나 왕비, 대비 등에게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서 올리는 의식을 이른다.
[주D-132]문정공(文正公)이 …… 인피(引避)하였다 : 문정공은 김수항(金壽恒)의 할아버지 김상헌(金尙憲)의 시호이다. 1635년(인조13)에 감시(監試)의 생원시(生員試)를 보일 적에 서울과 지방에서 출제한 문제의 개수가 달랐다. 이에 양사(兩司)에서 합격자 전원의 합격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김상헌이 ‘과거 시험장에 변고가 있었더라도 문제가 있는 시험관을 파직하거나 해당 응시자의 합격을 취소할 뿐, 합격자 전원의 합격을 취소하지는 말라.’라는 선조(宣祖) 때의 과거 시험 규칙을 들어 반대하였다. 《仁祖實錄 13年 8月 23日, 9月 4日》
[주D-133]송 문정공(宋文正公) :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가리킨다.
[주D-134]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는 것을 이른다. 70세가 되면 치사하는 것이 상례였다.
[주D-135]중도부처(中道付處) : 유배형의 한 가지로, 평소의 공로 등 정상을 참작하여 유배지로 가는 중간 지점의 한 곳을 지정하여 그곳에 안치시키는 처분이다.
[주D-136]아방(兒房) : 대궐을 지키는 장신(將臣)들이 때때로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는 방이다.
[주D-137]현석 박공(玄石朴公) : 박세채(朴世采, 1631~1695)로, 현석은 그의 호이다.
[주D-138]송 문정공이 …… 돌렸으며 : 1683년(숙종9) 2월 27일에 송시열이 차자를 올려 “일을 담당하여 곡절을 아는 대신도 실상을 알지 못하는데, 더구나 신처럼 노쇠한 사람이 어찌 감히 기력을 내어 김익훈을 구원하겠습니까. 지금 신이 김익훈을 구원하느라 여력이 없다고들 하는데, 이는 정말 신은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한 것을 이른다. 《宋子大全 卷17 引咎仍乞致仕箚, 韓國文集叢刊 108輯》
[주D-139]3월에 실록(實錄)이 완성되어 : 1683년(숙종9) 3월 11일에 《현종대왕실록(顯宗大王實錄)》 개수본 24권이 완성되었는데, 이때 김수항이 총재관(摠裁官)으로서 총책임을 맡았다. 《肅宗實錄 9年 3月 11日》
[주D-140]사마광(司馬光)이 …… 바라보았다는데 : 백성들이 공경의 뜻을 표한 것이다. 송나라 신종(神宗)이 죽었다는 부음을 듣고 사마광(司馬光)이 대궐로 달려가자 호위 군사들이 모두 “사마 상공(司馬相公)이시다.” 하며 이마에 손을 대었으며, 백성들이 길을 꽉 메우고 바라보며 “낙양으로 돌아가지 말고 머물러 천자를 보좌해서 백성을 구제하소서.” 하였다. 이는 당시에 신종의 뒤를 이은 철종(哲宗)이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었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송자대전 제182권
 묘지명(墓誌銘)
문곡(文谷) 김공(金公) 묘지명 병서(幷序)


아, 동문(東文) 밖 율북리(栗北里)는 석실(石室 김상헌(金尙憲))의 대묘(大墓)에서 몇 리 떨어진 곳인데, 그곳은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김공이 묻힌 곳이다. 숭정(崇禎 명 의종(明懿宗)의 연호) 기사년(1689, 숙종15)에 상이 앞으로 큰 처분을 내리려고 급히 승순(承順)하는 사람을 진용(進用)하였는데, 그들의 동류가 형세를 타고 일을 꾸미었다. 공은 진도(珍島)로 귀양 갔다가 그해 4월 19일에 사약(賜藥)을 받고 졸하니 환갑 되던 해였다. 죽음에 임하여 의사와 기운이 편안하고 여유가 있어 뒷일을 처리하고 자손에게 훈계하기를 자세한 일이라도 빠뜨리지 아니하였고, 또 주자(朱子)의 고사를 인용하여 고산일곡(高山一曲)을 추작(追作)하고 팔괘정(八卦亭) 시를 지어 율곡(栗谷)ㆍ우계(牛溪) 두 선생을 경모(景慕)하는 뜻을 보이니 그 지조의 굳음과 함양(涵養)의 깊음을 속일 수 없었다. 아, 오늘날에 어디서 다시 만나 보랴.
공은 안동인(安東人)이다. 석실(石室) 노선생(老先生)의 손자이며 동지(同知) 휘(諱) 광찬(光燦)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 연안 김씨(延安金氏)의 아버지는 목사(牧使) 내(琜)이며, 조(祖)는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의민공(懿愍公) 제남(悌男)이다. 노선생이 몸소 천하의 강상(綱常)을 담당하여 이름이 화이(華夷 중화(中華)와 변방 국가)에 떨쳤는데 그 뿌리를 살펴보면 주 문공(朱文公 문(文)은 주희(朱熹)의 시호)의 《소학(小學)》이니 주 문공이 논한,
“진정한 대영웅은 반드시 전전긍긍하기를 깊은 못에 임하거나 살얼음을 밟는 것같이 한다.”
한 말이 이에서 더욱 증명된다.
공이 가정의 학문을 받았는데 《소학(小學)》의 경신편(敬身篇)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노선생이 안동(安東)에 있으면서 구용장(九容章)과 사물장(四勿章)을 써서 부쳐 격려하였으니 그 기대한 바가 깊고도 멀다. 공은 어려서부터 온종일 걸터앉지 않고 꿇어앉았으며 어깨와 등이 똑바르고 조금도 몸을 기대거나 기울이지 않으면서 ‘외면에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심지(心志)를 잃게 된다.’ 하였다. 문사(文辭)는 전아(典雅)하고, 화려함을 힘써 없애니 노선생이 일찍이 ‘쓸모 있는 글이다.’ 하고 인정하였다.
17세에 반궁(泮宮 성균관)에 나아가 시험을 보았는데 태학사(太學士 대제학(大提學)) 택당(澤堂 이식(李植)) 이공(李公)이 상등(上等)에 뽑아 놓고 말하기를,
“근세(近世)의 문체를 변형시킬 것이다.”
하였다. 다음해엔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고, 그후 수년간은 장옥(場屋 과거 시험장)에 들지 아니하고 성리(性理)에 관한 여러 책에 뜻을 두고 스스로를 배양(培養)하였다. 23세에 알성 문과(謁聖文科)의 제일(第一)로 뽑히니 조정에서는 인재를 얻었다고 기뻐하였다. 28세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통정(通政)에 승직되고, 31세에 가선(嘉善), 34세에 자헌(資憲)이 되고, 신해년(1671, 현종12)에는 숭정(崇政)에 승직되고, 임자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나이 44세였고, 그사이의 경력은 모두 현요직(顯要職)이었다.
처음 대간(臺諫)이 되어 일을 논의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렀으나 그 뒤 경연(經筵) 강의에서 은총이 나날이 높아졌다. 문형(文衡)을 주관할 때 시론(時論)이 화합하여 서로 다투어 본을 받았기 때문에 재상이 되어서도 그대로 겸임하고 갈지 않았으며, 여러 번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어 등용하고 뽑아씀이 밝고 공정하니 사람들이 감히 헐뜯는 의론을 하지 않았다. 재상이 되어서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경제(經濟)의 재주가 없으니 옛 대신의 사업은 감히 바라볼 수 없으나 근래의 재상된 사람들이 군덕(君德)의 궐실(闕失)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지 않고 하나같이 대각(臺閣)에 떠맡기니 이것은 보필(輔弼)하고 바로잡는 의(義)가 아니다.”
하고, 오로지 그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다. 현종은 허적(許積)에게 전임하였지만, 공이 바르고 성심이 있어 큰일을 부탁할 만함을 알았기 때문에 빈청(賓廳)에서 예(禮)를 의논한 뒤 중씨(仲氏 김수흥(金壽興))와 여러 관리가 많이 귀양 가거나 벌을 받았는데도 공은 도리어 좌상에 임명되었고, 고명(顧命) 때에도 매우 정녕하게 면유(勉諭)하고 위안하였다. 금상(今上)께서도 처음 즉위하여 더욱 융숭하게 예우(禮遇)하였는데 적휴(賊鑴 윤휴(尹鑴)를 말함)가 흉포를 자행하여 혹 불손한 말로 동조(東朝 명성왕후를 말함)를 헐뜯으므로 공은 말하기를,
“이것은 국가의 윤리 기강에 관계되는 것이니 일차 주상에게 말하여 깨닫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마침내 윤휴(尹鑴)ㆍ홍우원(洪宇遠)ㆍ조사기(趙嗣基) 등의 무패(誣悖)한 형상을 극론(極論)하니 군중의 감정이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도리어 공을 양궁(兩宮 숙종과 모후인 명성왕후)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하며 남쪽 끝으로 멀리 귀양 보냈다. 이보다 앞서 명성모후(明聖母后 현종비 김씨)가 상과 함께 편전(便殿)에서 수렴(垂簾)하고 허적(許積)을 접견하면서 통곡하며 반복하여 교유(敎諭)하고 이어 이르기를,
“내 음식을 전폐하고 죽고 싶다.”
하였으니, 이것은 지성측달(至誠惻怛)에서 나온 것인데 끝내 한 사람도 나가 사죄함이 없으니 그 심사는 길 가는 사람이라도 알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경신년에 정(楨)ㆍ남(枏)ㆍ허견(許堅 허적의 서자)ㆍ오정창(吳挺昌 정(楨)ㆍ남(枏)의 외숙)의 역모를 꾀한 사실이 발각되어 그 당이 혹 처형되고 혹 귀양 갔는데 윤휴는 상이 특명하여 죽이고 또 그의 모든 아들을 가두었다. 이때 공은 적소(謫所)에서 명을 받고 옥사를 주관하면서 거의 평반(平反)하였고, 이원정(李元楨)ㆍ유혁연(柳赫然) 같은 자는 여러 적도와 호응하였으나 공은 정상이 나타나지 아니하였다고 석방하기를 청하였는데 뒤에 다시 적도의 공초에 나와 일이 더욱 심하여 비록 구하여 풀어 주려 하여도 할 수 없었다. 이때에 명성모후(明聖母后)가 이르기를,
“김상(金相)이 여러 해 귀양 다녔는데도 옥사(獄事)를 밝고 진실되게 처리하고 조금도 통쾌하게 분풀이하는 의사가 없으니 가상하다.”
하였다. 이때에 간흉(奸凶)은 이미 벌을 받았고 군현(群賢)이 무리 지어 나아가니 모두 공으로 영수(領袖)를 삼았고, 상도 특별히 예우함이 우이(優異)하니 공 역시 몸과 마음을 다 바치어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의 소강(小康) 치적을 이루었으나 시의(時議)에 견제받았다. 대체로 벌주고 제거한 공(功)은 실로 사류 중의 외척에서 나왔다. 그런데 부박(浮薄)하고 일을 좋아하는 무리들은 힘써 깊이 욕하고 준열하게 공격하는 것으로써 공(功)을 삼았는데 공은 생각하기를,
“저들이 사직(社稷)을 편안히 한 공(功)은 있어도 아직 두드러진 죄과(罪過)는 없으니 심하게 밀어서 쫓아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래서 젊은 무리들이 공이 자기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는다고 한(恨)하며 비로소 공을 불쾌하게 여겼다. 옛 송(宋)의 재상 조여우(趙洳愚)가 소희(紹煕 광종(光宗)의 연호) 연간에 처리한 일은 사실 명분과 실제가 순(順)함을 거역하는 형세가 있으므로 주자(朱子)가 대변(大變)이라 여기면서도, 그 죽고 삶을 생각하지 않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킨 것은 불세출의 공이 되므로 명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성심으로 협동하여 함께 왕실을 도왔다. 더욱이 지금은 훈척(勳戚 김우명(金佑明)을 가리킴)이 충성으로 반역을 토벌하였으니 조공(趙公)의 입장과는 견줄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공을 공격하는 자는 스스로 주자(朱子)보다 어질다고 여기는 것인가. 이런 까닭에 더욱 시배(時輩)와 배치(背馳)하게 되었는데 허새(許璽)ㆍ허영(許瑛)의 옥사(獄事)를 말하는 자는 김익훈(金益勳)을 갈수록 심하게 몰아세워 심지어 옥사의 실정까지 의심하게 되었다. 공은 말하기를,
“허새ㆍ허영의 반역한 죄상은 본디 의심할 것 없고 김익훈(金益勳)이 정탐한 것은 사실 부탁 받음이 있었는데, 고발한 것이 정확하지 못하다 하여 이 옥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의심하고 김익훈(金益勳)에게 심한 죄를 주려 함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 그래서 시의(時議)가 더욱 시끄러워져 마침내 공과 동의하는 자까지 함께 공격하여 갈수록 어그러지고 과격하게 되었는데 이윤(尼尹 윤증(尹拯))의 논쟁이 더욱 극도에 이르렀다. 대체로 적휴(賊鑴)가 퇴계(退溪)ㆍ율곡(栗谷)ㆍ우계(牛溪) 세 선생을 헐뜯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아가 주자(朱子)를 배척하고 마침내 공자(孔子)까지도 휘(諱)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기에 이르러서 실로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었다. 그런데 이윤이 그 당(黨)을 도우며 때로는 겉으로 배척하는 척하면서 몰래 보호하므로 내가 자신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통렬하게 배척하였다. 그러자 공이 나의 재주는 약한데 적이 강함을 안타깝게 여겨 때로 구해 주려는 말을 하니 시배(時輩)들이 공을 더욱 좋지 않게 여겼다. 공이 노선생에게 배우기를,
“술수를 부리는 것은 심술이 올바르지 못하고 이것과 저것을 조정하는 것은 일하는 데 매우 해롭다.”
하였고, 주자도 일찍이 말하기를,
“송원헌(宋元憲)의 농락은 나는 못하고 건중정국(建中靖國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의 조정은 난을 불러오는 방법이다.”
하였으니 공의 가법(家法) 연원(淵源)이 본래 이러하였다. 그러므로 항상 사마 온공(司馬溫公)의,
“하늘이 만약 송(宋)을 도운다면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한 말을 마음에 두고, 범충선(范忠宣)이 몰래 후일의 안전을 도모한 것으로 경계를 삼았으니, 이것이 시의(時議)와 서로 배치되고 특별히 간당(奸黨)의 원수같이 미워함이 된 것이다. 무릇 주자는 성인(聖人)이라 공이 주자(朱子)의 도(道) 따르다가 그 이익을 얻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주자의 도가 나쁜 것일까.
공은 용모가 단정하고 수려하여 매번 조회(朝會) 때 띠를 매고 홀(笏)을 꼽고 공수(拱手)하고 엄연히 서 있으면 정중(廷中)이 모두 주목하며 ‘사람 가운데 난곡(鸞鵠)이다.’라고 하였고, 노사(虜使) 역시 공경하며 칭찬하였다 한다.
이것을 미루어 말한다면 가정의 효성과 공경의 독실함과 안방의 윤리가 올바른 것은 남들이 이의가 없을 것이다. 아, 유지(劉摯)와 양도(梁燾)의 죽음은 천하가 슬퍼하고 여자약(呂子約)ㆍ채계통(蔡季通)의 화(禍)는 지금도 원송(寃訟)하니, 그렇다면 당시의 책임자가 어떤 사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제공(諸公)의 죽음은 영화이지 욕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지금 선모(宣母)가 무고당하고 성사(聖姒)가 폐욕(廢辱)을 당하고 양현(兩賢)이 성무(聖廡)에서 쫓겨났으니 이러한 때 죽은 공은 영화롭지 않겠는가. 노선생이 일찍이 시를 나에게 주어 주자의 학문으로 나를 권면하였는데, 나 또한 가만히 보면 그분이 스스로 한 것도 요약하면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노선생의 제손(諸孫)이 모두 주자서(朱子書)를 좋아하였고 공은 더욱 일삼아 익혔다. 내가 일찍이 망녕되게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편집하여 교정을 청하였더니 공이 기꺼이 함께 고증 산삭하여 흠됨이 적었으니 공의 학문을 여기에 의거하여 알 수 있다. 주자가 운명할 때 제생에게 진결(眞訣)을 주었는데,
“천지가 만물을 생성함과 성인이 만사에 응함은 직(直)일 뿐이다.”
하였고, 다음날 또,
“도리(道理)는 다만 이러할 뿐이니 마땅히 굳게 각고(刻苦)하라.”
하였으니, 이 어찌 공자와 맹자의 ‘사람 삶은 곧다. 곧음으로 길러야 한다.’는 정법(正法)이 아니겠는가. 공의 일생 언행(言行)이 굴곡(屈曲)하고 회호(回互)됨이 없는 것은 아마도 여기에서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얻은 것이리라.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죽음에는 악시도 있고 / 死有惡時
영시도 있다 / 亦有榮時
아 공의 시기는 / 嗟公之時
내 감히 알지 못하겠네 / 吾不敢知之


 

[주D-001]고산일곡(高山一曲)을 추작(追作)하고 : 송시열이 일찍이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본받아 고산구곡시를 문하 제공(門下諸公)에게 나누어 짓기를 부탁하였는데, 김수항이 이때에 추작(追作)하였다.
[주D-002]팔괘정(八卦亭) 시 : 팔괘정은 여산(礪山) 죽림서원 오른편에 있는데 송시열이 거처하던 곳이다. 이 시의 원운(原韻)은 남용익(南龍翼)이 지었다.
[주D-003]조여우(趙洳愚)가 …… 일 : 송 효종(宋孝宗)이 붕(崩)하자, 광종(光宗)이 심질(心疾)이 있어 상(喪)을 치를 수 없으므로, 재상 조여우(趙洳愚)가 헌성태후(憲聖太后)에게 청하여 가왕(嘉王)을 받들어 황제에 즉위시키니 바로 영종(寧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