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8.26. 구례 화엄사

2011.8.26. 구례 화엄사 방문

아베베1 2011. 8. 26. 23:38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께서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 후, 백제법왕(599)때 3천여 명의 스님들이 계시면서 화엄사상을 백제 땅에 꽃피웠습니다.


신라시대는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4사자 3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세우셨습니다. 원효성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또 문무왕 17년(677)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 법당(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습니다.

경덕왕(742~764)때 이르러 8원 81암자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고, 신라말기 헌강왕(875)때 도선국사는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 조성과 더불어 화엄사 중흥조가 되시면서 화엄사가 대총림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고려 태조 26년(943)에 왕명으로 고려 최초로 화엄사를 중수하였고, 홍경선사가 퇴락한 당우와 암자를 중수하였습니다. 문종(1047~1083)때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중수, 인종(1126~1146)때 정인왕사가 중수, 명종 2년(1172)에 도선국사비 건립, 충렬왕(1236~1308)때 원소암 중건, 충숙왕(1313~1330)때 조형왕사에 의한 전면적인 보수를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세종 6년(1426)에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된 화엄사는 배불의 와중에도 설응, 숭인, 부휴, 중관, 무렴 등의 고승대덕들에 의해 법석의 요람을 이루었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때는 호남의 관문 구례 석주관에서 승병 300여 명을 조직하여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이 앙갚음으로 왜장 가등청정은 화엄사를 전소시키기에 이릅니다.

인조(1630~1636)때 벽암선사와 문도들이 대웅전 등 몇몇 건물을 중건하고, 숙종(1699~1703)때 계파선사와 문도에 의하여 장육전 자리에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규모로 웅장한 각황전 건립과 더불어 선교 양종대가람이 되었고, 근세에 이르러 도광대종사의 전면적인 중수에 힘입어 지금의 화엄사로 중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창건주 緣起祖師가 三昧中에서七佛祖師인 大智文殊師利菩薩께서 많은 菩薩이 圍繞한 가운데 華嚴經問明品等을 問答함을 보고 智利山이라 命名하였다고 한다. 海拔 一千九百一五米의 高山으로 東의天王峰과 日留峰, 西의 般若峰과 月留峰, 南의 文殊峰 七星峰 德坪峰 明善峰 그리고 中央의 中峰등 峭壁한 奇峰들을 眷屬으로 거느린 智慧道場 智利山이 되었다. 禪敎兩宗大伽藍華嚴寺는 全羅南道求禮郡馬山面黃田里十二番地 智利山南麓에 자리하고 있는 大韓佛敎曹溪宗 第一九敎區本寺이다. 義湘祖師가 華嚴經을 傳敎토록한 華嚴十刹中하나이니 十刹이란 北岳太白山浮石寺, 南岳智異山華嚴寺, 康州伽倻山海印寺, 中岳八公山美理寺, 瑞山伽倻山普願寺, 鷄龍山岬寺, 良州金井山梵魚寺, 大邱毘瑟山玉泉寺, 全州母岳山國神寺, 漢州負兒山靑潭寺, 原州毘摩羅寺등으로 전하는바 차이가 있다. 華嚴寺를 中心으로 東南에는 雙溪寺, 鷰谷寺, 西北에는 泉隱寺 그리고 東北에는 法界寺, 大源寺, 碧松寺, 靈源寺, 實相寺, 百丈寺등이 마치 衛星처럼 둘러싸고 大莊嚴法界를 형성하고있다.

華嚴寺는 이름 그대로 華嚴經을 所依經典으로 하는 華嚴宗寺刹이다. 우리나라 華嚴宗史를 살펴보건대 華嚴經을 들여온 慈藏律師와 六十卷本晉華嚴經疏를 撰述한 元曉大師가 바탕을 만들고 六六一年에 入唐하여 智儼會下에서 華嚴經을 受學한 義湘祖師가 海東華嚴初祖가 되어 화엄종의 始源을 이루었다. 元曉는 芬皇寺에서華嚴經疏를 지어 圓融한 敎學을 크게 떨쳐 圓融宗, 圓宗, 海東宗, 法性宗등으로 일컫는 종파를 이루었다. 入唐하여 終南山智儼門下에서 華嚴經을 受學하고 歸國하여 浮石寺를 創建한 後華嚴宗祖가 된 義湘祖師이후에 新羅華嚴은 相源․神琳․順應․理貞․賢俊․希朗․觀惠등으로 繼承되었다. 高麗王建의 福田이었던 海印寺의 希朗과 後百濟甄萱의 福田이었던 華嚴寺의 觀惠는 南北의 對立的宗派를 形成하기도 하였다.高麗均如는 南北岳華嚴을 統合하였고 大覺國師義天은 圓敎宗風을 드날렸다. 一四0七年인 太宗七年議政府의 奏請으로 從來의 十一宗을 七宗으로 縮小하였으니 華嚴宗刹은 모두 長興金藏寺․密陽嚴光寺․原州法泉寺․淸州源興寺․昌原熊神寺․江華栴香寺․襄陽成佛寺․安邊毘沙寺․順天香林寺․淸道七葉寺․新寧功德寺등 十一個寺刹에配屬되었고 一四二四年인 世宗六年에 다시 七宗을 禪敎兩宗으로 統廢合하였으니 禪宗寺刹로는 서울 興天寺․開城崇敎寺․演福寺․觀音窟․楊州僧伽寺․開慶寺․檜岩寺․津寬寺․高陽大慈庵․公州鷄龍寺․晉州斷俗寺․慶州祇林寺․求禮華嚴寺․泰仁興龍寺․高城楡岾寺․原州覺林寺․殷栗停轂寺․安邊釋王寺등 十八個寺刹中에 歸屬시킴으로써 朝鮮時代에는 禪宗寺刹에 移屬되었다. 위와같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엄종찰 화엄사의 창건주는 지극한 효심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天竺으로부터 연을 타고 東土에 到來한 緣起祖師이다. 그는 五四四年 百濟 聖王二二年智異山에 들어와 華嚴寺를 創建하고 華嚴宗趣를 宣揚하였다. 
 
이외에도 高敞煙起寺․羅州雲興寺․求禮甘露寺․鷰谷寺․昆陽栖鳳寺․山淸大源寺등 많은 절을 創建하였다. 화엄사는 茶의 本鄕으로도 이름이 높은데 六七七年義湘祖師가 丈六殿법당을 중창하고 丈六田에 차를 심었으며 興德王三年(828)에 唐의 使臣金大廉이 長竹田을 조성하여 安智院터 주변에 차를 심었으니 竹露茶의 기원이 되었고 天竺의 摩耶茶와 더불어 茶種子를 이곳 華嚴院에 栽培하여 華嚴茶의 本鄕이 되게하였다. 그후 8세기경 同名의 緣起祖師가 全羅北道高敝郡興德面(興德縣)에서 출생하였으니 生沒年代와 자세한 行蹟이 남아있지 않고 華嚴要決十二卷, 華嚴經眞流還源樂圖一卷, 華嚴經開宗決疑三0卷, 大乘起信論珠網三卷, 大乘起信論捨繁取妙一卷등을 찬술하여 宗學을 선양하였으나 著述은 現存하지않는다. 現存하는 唯一한 新羅寫經인 唐本八十華嚴經二軸의 寫經은 이 緣起祖師가 十數人의 寫經師를 指揮하여 製作한 國寶이다. 六三六年 慈藏律師가 入唐遊學途中 五臺山文殊로부터 傳해 받은 佛舍利一百顆를 全國各地에 分散奉安하였는데 이는 緣起祖師의 至極한 孝心을 기려 孝臺라고 부르는 四獅子三層石塔도 그중의 하나라고 전한다. 이어 丈六殿三層四八間을 建立하였으니 至今 覺皇殿의 前身이다. 三五代景德王의 命으로 丈六殿壁에 靑紫石으로 晉華嚴經을 새겼으니 이는 國內最高의 石經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큰절에는 華嚴院․奉天院․安智院․弘敎院․西遊院․彌陀院․禪林院․證林院等의 八院과 山內八一個所의 庵子가 創建되었으니 이른바 華嚴의重重無盡한 網羅幢世界를 形成하였다. 羅末麗初에 風水地理와 圖讖의 元祖로서 널리알려진 道詵國師는 靈岩出生으로 一五歲때 月留山華嚴寺에서 得度한 후 華嚴宗寺刹의 中興을 주도한 華嚴宗 스님이다. 도선국사는 入唐遊學中에 만난 一行禪師로부터汝國山川이 多背本主故로 或作九韓하며 或作三韓하여 內外逆賊이 連綿不絕하리니 此는 天地血脉不調之病也라 山川도 若此하여 爲戰場也라 하고 行倚繩座하여 拔筆點地曰人若有疾이면 尋血脉針炙即愈矣라 山川之疾도 亦然하나니 今我落點處에 建寺立佛立塔立浮圖則如人針炙할 새 名曰裨補라는 指示를 받고 歸國하였다. 훗날 太祖가 登極한후 傳奏함으로써 太祖는 訓要十條에 이를 反映하고 大匡인 朴述希에게 親授하여無違施行토록 하였다. 道詵國師는 華嚴寺에 駐錫하면서 憲康王의 도움을 받아 三百餘칸의 堂宇를 建立하여 湖南地方의 甲刹로 昇格시켰고 아울러 崔致遠으로 하여금 華嚴經社會願文을 짓게하고 華嚴大德인 賢俊에게 命하여 華嚴經을 講說케하는 한편 國戚重臣인 金一과 金林甫로 하여금 晉華嚴經을 寫經케하고 國統과 僧錄등에게는 貞元華嚴經을 講說토록 하는등 寺勢를 확장하고 宗學을 중흥하였다고 한다. 王妃金氏도 벼三十石을 喜捨하였으며 八八六年에는 定康王의 도움으로 三一칸의 光學藏을 建立하였다고 한다. 
 
이어 高麗太祖 또한 道詵의 傳言을 받아 全國에 裨補寺刹로써 禪刹五百과 敎刹三千八百寺를 創建토록 命하였는데 華嚴寺는 旣存寺刹中 第一 먼저 擴張重修되었다. 高麗光宗朝를 前後하여 後唐의 閩府에 가서 大藏經一部를 모시고 와서 開城帝釋院에 奉安한 洪慶禪師가 光宗의 命으로 華嚴寺 큰절 堂宇와 山內庵子까지 一新重修하였고 文宗의 第四子인 大覺國師義天이 初期華嚴宗刹靈通寺로 出家하여華嚴宗僧으로써 한동안 駐錫함에 따라 文宗은 義天을 위해 大規模擴張補修를 하는 한편 全羅南北道와 慶尙南道등 三道의 사찰에 每年穀物獻納을 許諾하였으니 이를 貯藏키위해 華嚴寺 一柱門밖에는 두채의 큰 倉庫가 지어지기도하였다. 一七代仁宗은 華嚴法師인 定仁王師에게 華嚴寺를 重修토록 하고 道詵國師의 行蹟碑도 세우게하였다. 二七代忠肅王은 道詵의 駐錫處였던 圓炤庵을 重建하였고 王師인 祖衡은 王의 後援으로 全面補修하는 한편 祝釐所인 願堂을 創建하였다. 三三代 恭愍王때에는 李成桂와 李豆蘭將軍이 南原荒山에서 倭敵阿只抜都軍과 싸울때 敵을 물리친 先鋒隊가 勝利의 赤色旗를 세웠던 求禮郡土旨面文殊洞에 赤旗庵을 創建하였다. 高麗中期以後부터는 參考할 史料가 없다. 朝鮮朝에 접어들어서는 一四二四年司憲府의 上疏로 世宗이 從來의 七宗을 禪敎兩宗으로 統合하고 兩宗에 各一八個寺刹씩 配屬시켰으니 이때華嚴寺는 禪宗의 一八個寺刹中 首寺刹로서 說禪法會와 講經法席을 常設하고 많은 高僧大德을 輩出하였다. 
 
이들은 國民이 塗炭에 빠지고 나라의 危殆로움에 임해서는 閑靜한 修行을 접고 스스로 救國의 先鋒이 되어 苦難의 現場을 避하지 않았다. 一五八四年에는 芙蓉靈觀의 弟子인 浮休善修가 華嚴經을 講說함에 全國의 龍象大德이 구름처럼모였고 一五八七年에는 中觀海眼이 이어 華嚴法席을 열었다. 一五九一年에는 無染堂戒訓禪師가 禪敎一致論을 闡揚하여 護國安民과 和合團結을 주창하기도 하였다.一五九二年 四月 倭軍이 釜山에 上陸하였으나 國防의 對備는 全無하여 對抗없는 避難에 民生은 허둥지둥 彷徨하였다. 이곳 求禮地方에서 不撤晝夜勇猛精進하고 있던 스님들은 無主空山이 된 國土의 悽慘한 現實에 통분하고 柱杖子代身槍을 집고 奮然히 일어나 民生을 塗炭에 빠트린 倭敵을 향해 下山하였다. 當時 麗水市德忠洞鐘高山石泉寺스님으로 華嚴大選兼禪敎判의 僧職을 가지고 있던 慈雲處寬스님은 壬亂이 勃發하자 바로 水軍에 入隊하여 李舜臣將軍의 副將으로서 거북船設計등 重要한 役割을하였으며 晉州城戰鬪에서 激烈히 싸우다가 戰死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慈雲大將이라는 職帖을 下賜하고 左水營忠武詞에 配享토록 하였다. 中觀海眼도 湖南地方에서 僧兵을 糾合하여 싸웠고 雪泓大師는 華嚴寺住持로서 河東과 求禮의 길목을 通過하는倭軍을 막기위해 스스로 僧大將이 되어 僧兵을 糾合하였으며 房處仁等三百餘名의 華嚴寺스님을 引率하고 軍糧米三百石을 준비하여 楡谷의 石柱鎭을 固守하다가 壯烈하게 戰死하였다. 
 
이와같이 護國安民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衆寡不敵의 상황은 계속되었다. 一五九三年 드디어 倭軍이 華嚴寺에 侵入하였고 五百餘칸의 殿閣이 一時에 全燒되었으며 丈六殿의 石經도 모두 火熱로 片石이 되는 비극을 맞는 한편 蟾津江에서는 梵鐘을 日本으로 옮기려던 倭將加藤淸正의 倭軍무리들의 배가 顚覆하여 모두 魚食이 되고 말았다. 殺生과 破沒의 빈터는 假幕을 치고 寺域을 지키던 대중들에 의해再建되기 시작하였고 苦難의 세월에도 華嚴寺는 覺性․海眼․戒訓등 世稱九八大德을輩出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復元의 機運을 얻지 못하고 있던 華嚴道場에 重興主가 出現하였으니 明의 將帥와 함께 海戰에서 큰 功을 세운 탓으로 四溟의 천거로 判禪敎都摠摄이 된 碧岩覺性大師이다. 나라에서 스님들로 하여금 南漢山城을 쌓게할 때八道都摠攝으로 헌신하였으며 仁祖로부터 衣鉢을 下賜받고 華嚴寺住持가 된 一六三十年부터 六年間重建佛事를 수행하였다. 大雄殿을 비롯하여 一部佛殿및 佛像과 幀畵․丹靑․鑄鐘등의 불사를 이루었으나 丈六殿 復元은 못한채 一六四十年五月三南都摠攝이 되었다. 一六三六年 十二月에는 丙子胡亂이 일어나 朝廷이 南漢山城으로 避難하였다는 消息을 듣는 卽時 僧兵三千名을 糾合해서 降魔軍이라 이름하고는 上京途中大田에서 仁祖가 三田渡에서 降伏하고 還宮하였다는 消息을 接하고는 痛恨의 心境으로 華嚴寺로 돌아온 이후 一六五十年禮曹에서 救國愛民道場인 華嚴寺를 禪宗大伽藍으로 昇格시켰다. 一六五三年에는 碧岩等 五十餘名을 施主로 하고 智英等 六名을佛母로하여 靈山會上이 다시 到來한듯한 장엄한 掛佛幀靈山會上圖가 造成되었다. 一六九九年에는 碧岩의 弟子인 桂坡性能이 스승의 遺命을 받들어 丈六殿을 復元코자 發願하고 建築費마련에 전전하였다. 
 
어느날밤 白衣老人이 現夢하여 이르기를 손을 물속에 넣어서 물이 묻지않는 스님으로 하여금 化主로 選定하고 化主하려나가다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化主冊을 맡기도록하라 하였다. 다음날 大衆을 모아놓고 모두 물속에 손을 넣게하였으니 大衆스님들중에 오직 한 老스님만이 물이 묻지않았다. 化主冊을 받은 老스님은 하는 수없이 化主次 洞口밖을 나가다가 나물캐는 한 老婆를 만나 化主冊을 던져주었다. 화주책과 現夢이야기를 전해받은 老婆는 또한 어찌할 方法없어 제가 죽어 王宮에 태어나서 華嚴寺丈六殿을 重建할수 있도록 해주십사라는 發願을 한후 곁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져 죽고말았다. 그는 死後願生으로 肅宗의 妃 仁敬王后金氏夫人의 둘째딸로 태어났으나 이름모를 病에 걸려 百藥이 無効였다.
 
어느날 肅宗이 꿈을 꾸니 公主의 命이 다하였으니 王은 지체없이 華嚴寺의 丈六殿을 復元하라 그 功德으로 公主는 반드시 忉利天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記別하였다. 王은 十萬兩의 內帑金을 하사하였고 英祖의 母親이며 肅宗의 後宮인 淑嬪崔氏도 同參하여 一七0二年 二層七十칸의 大法堂이 竣工되었다. 延礽君(英祖)의 願堂을 삼고 三尊佛像과 四大菩薩像을 造成奉安하고는 七日間慶讚法會를 열어 丈六殿落成을 告하고 肅宗이 覺皇殿이라 改稱하고 刑曹參判李震休에게 쓰게하여 扁額을 下賜하는 한편禮曹에서는 禪敎兩宗大伽藍으로 昇格시켰다 . 中興된 大伽藍에서는 一七0六年二月에는 明谷堂玄眼이 禪敎를 講說하였고 같은해 七月에는 雪岩堂秋鵬이 華嚴經을 宣說하였다. 
 
一七一一年 四月부터 北漢山城築造를 始作하였는데 이때 性能이 八道都摠攝으로써 僧營의 築城을 監督하여 竣工한 功勳으로 조정은 嘉義大夫八道都摠攝兼僧大將性能이라는 讚號를 내리고 三百六十州의 僧軍을 統攝케하였으며 一七一三年에는 八方都僧統弘覺登階國一都大禪師라는 德號를 받았다. 一七一八年에는 應還大師가 八道僧風糾正都僧統이 되는 등이 모든 것은 救國護民과 朝鮮佛敎中興의 旗幟를 드날린 화엄도량의 대역사이다. 一七四十年 霜月璽篈講伯이 華嚴經을 講說함에 항상 受講弟子가 三百이 넘었으며 그중 龍潭慥冠등 뛰어난 英衲이 있었다. 一七五七年에는 會心住持가 處寬․學賛․攝心․卓戒등의 도움으로 大雄殿을 重修하고 三尊佛像改金과 後佛幀三軸을 造成하였으며 一七六一年에는 松蕓禪師가 圓通殿을 重修하였다. 一七七八年에는 僧尼와 道儒三百餘名이 契를 맺어 大雄殿과 覺皇殿의 佛米와 香燭代에 供하고자 土地를 獻納하였으며 一七九五年에는 曇仁禪師가 羅漢殿을 創建하였고, 一七九八年에는 黃岳幸元禪師가 寂默堂을 重建하였으며, 一八二七年에는 錦峰堂祐益과 朗圭禪師가 普濟樓를 重修하였고, 一八三六年에는 錦峰和尙이 凝香閣과 三殿을 重建하였으며 一八三七年에는 內院庵을 創建하였다. 一八四一年에는 正祖․純祖․憲宗․哲宗朝까지 禮曹에서 海南大興寺의 表忠祠에 守護典穀․有司와 祭享官에 華嚴寺의 宰元․錦峰․應敏․智圓․俊彦등 스님이 任命되었는데 宰元은 八道都僧統이고 智圓은 八道禪敎都摠攝이었으며 俊彦은 禪敎兩宗都有司였으니 華嚴寺의 高僧과 寺勢를 짐작할수 있다. 一八四六年에는 翠峰大師가 鳳泉庵을 創建하였고, 一八四七年에는 義憲․允幸․道實등이 合心하여 覺皇殿을 重修하였으며, 一八六七年에는 草雲堂攝律大師가 般若峰밑에 文殊庵을 創建하였고, 一八六九年에는 求禮縣監方孝函이 奉香閣을重修하였으며, 一九0一年에는 幻月禪師가 寶積庵에 選佛場을 開設하여 後學을 指導하였고 이어 震應慧燦講伯도 座主로 後學을 養成하였다. 같은해 三月부터 僧俗六十餘名이 九層庵에서 白蓮社를 맺고 發徵和尙이 乾鳳寺에서 行하였던 彌陀念佛萬日會의 遺風을 이어 받아 念佛修行을 振作하였다.
 
一九一五年에는 大雄殿을 重修하였으며 一九三六年에는 鄭曼宇住持가 覺皇殿을 補修하였고, 一九四三年에도 覺皇殿을 一部修理하였으며, 一九五十年六․二五韓國戰爭때에는 山內의 地藏․內院․寶積․上院․寶蓮庵등과 滿月堂이 燒失되는 아픔을 겪었다. 一九五五年 敎團淨化後田岡永信禪師가 德藏殿을 重修하였고 一九六一年에는 政府補助로 覺皇殿上層部를 解體補修하 였다. 一九六三年에는 金烏太田禪師가 塔殿을 重修하였으며 离山導光禪師가 初任一九六七年부터와 再任 一九八十年부터의 二次에 걸쳐 住持에 在任하면서 禪院의 新築․堂宇의重創․寺規의刷新․靑少年敎化등 四大目標를 設定하고 覺皇殿․大雄殿․冥府殿․普濟樓․圓通殿․德藏殿․天王門․金剛門․一柱門․寂黙堂等의 補修와 改金佛事등으로 道場을 一新中興하여 初期의 目標를 達成하고 華嚴道場의 중흥을 完遂한功勞로 一九七二年宗正賞을 받았으니 實로 近世 華嚴寺의 中興主라고 稱頌할만하다.
 
一九七五年부터 金城明煽住持가 梵鐘鑄造와 鐘閣을 建立하고 圓通殿․寂黙堂․三殿․塔殿․雲鼓閣등을 重修하였으며, 百八階段補修및 妙香臺改築等工事를 하였고, 一九八四년부터는 圓應宗源住持가 一柱門․滿月堂․圓融寮․淸風堂․緣起庵등을 復元하였으며, 一九九二年부터는 平典宗守住持가 聖寶博物館인 蓮華堂을 建立하였고, 一九九四年부터는 松泉宗烈住持가 三殿을 重創하고 道場을 整備하는 등 未盡한 佛事를마무리하고, 一九九五年 八月 寶物 제一三三호인 大雄殿앞 西五層石塔을 解體補修할때에는 부처님舍利二二顆와 七二点의 聖寶文化財가 出現하였다. 一九九八年부터는 愚岩宗乞住持가 光學藏과 禪燈禪院을 重建하고 奉香閣․鳳泉庵․惠圓堂을 重修하였으며, 二00二年부터는 愚峰明燮住持가 大衆療養所인 省行堂과 觀靜寮등을 新築하였다.
 
現住 持抱月宗三和尙은 二00五年 五月九日字로 就任한 以來 梵音寮를 重建하고二層普濟樓를 重修하였으며 圓融寮․淸風堂․近世華嚴寺의 中興主인 离山堂導光禪師의 行蹟碑를 세웠다. 現在建物은 大雄殿一五칸․覺皇殿二層七十칸․奉香閣一五칸․圓通殿九칸․冥府殿一五칸․羅漢殿六칸․影殿一五칸․三殿二八칸․塔殿一五칸․山神閣一칸․德藏殿二十一칸․寂黙堂四八칸․滿月堂三十칸․普濟樓二層五六칸․圓融寮二層五八칸․淸風堂一五칸․梵鐘閣六칸․雲鼓閣二層八칸․天王門六칸․金剛門六칸․光學藏三五칸․禪燈禪院三六칸․見性堂一十칸․休休堂一十칸․觀靜寮一四칸․梵音寮二層六九칸․省行堂一五칸․惠圓堂一九칸․千佛殿․聖寶博物館三九칸․一柱門․倉庫․水閣․宗務所․解憂所등 三五棟 六百五0餘칸에 達한다. 過去에는 山內에 九層庵․金井庵․地藏庵․圓炤庵․靑蓮庵․赤旗庵․隱霧庵․隱仙庵․禪定庵․深源庵․白蓮庵․道詵庵․金剛窟․鳳泉庵․聽溪庵․寶積庵․緣起庵․吉祥庵․內院庵․彌陀庵․龍穴,庵․上庵․妙香臺․文殊臺등 二四個所의 屬庵이 있었으나 自然廢墟 또는 六․二五韓國戰爭과 그후 敗隱兵討伐로 燒失되었고 現存하는 庵子로는 緣起庵․聽溪庵․九層庵․彌陀庵․吉祥庵․內院庵․鳳泉庵․金井庵․地藏庵․寶積庵․上庵․龍穴庵․妙香臺․文殊臺등 一四個所이다. 國家指定聖寶文化財로는 國寶제一二호華嚴寺覺皇殿앞石燈, 國寶제三五호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國寶제六七호華嚴寺覺皇殿, 國寶제三0一호華嚴寺掛佛幀, 寶物제一三二호華嚴寺東五層石塔, 寶物제一三三호華嚴寺西五層石塔, 寶物제二九九호華嚴寺大雄殿, 寶物제三00호華嚴寺圓通殿앞獅子塔, 寶物제一0四十호華嚴寺華嚴石經, 寶物제一三四八호華嚴寺西五層石塔舍利莊嚴具一切, 寶物제一三六三호大雄殿三身幀畵, 市道指定文化財 제四九호華嚴寺普濟樓, 市道指定文化財제一三二호華嚴寺九層庵石燈, 天然記念物三八호 올벗나무등이 있고 非指定文化財로는 浮休堂文集木板이있다. 金石文으로는 一一七二年에 道詵國師의 行蹟碑를 세웠으나 至今은 破滅되고없다. 國一都大禪師碧岩堂覺性大師碑는 李景奭이 짓고 吳竣이 써서 一六六三年에세웠고 虎隱堂文性大律師碑는 韋庵張志淵이 짓고 陳震應스님의 主幹으로 一九一九年에 세웠으며 大華嚴寺中興功德主賜僧風糾正八道都僧統錦峰堂祐益大禪師碑는 金澤榮이 짓고 一九二九年에 門孫들이 세웠으며 离山堂導光大禪師碑는 東谷一陀가 짓고 李榮植이 써서 一九八七年宗源住持가 세웠으나 規模가 矮小하고 內容이 闕略하다 하여다시 伽山智冠이 碑文을 짓고 松泉鄭夏建이 써서 二00七年에 세웠으며 司果朴弼鐘喜捨功德碑는 高墉柱가 짓고 一九三十年 寺中에서 세웠다. 高僧의 浮圖로는 桂坡堂性能塔․比丘尼順洪知云應安塔․東軒堂完圭塔․大月堂塔․登階景峰堂塔․明谷堂玄眼塔․碧岩堂覺性塔․보산당탑․養直堂塔․慈雲堂處寬塔․震應堂慧燦塔․幻空堂塔등이있으며 筆跡으로는 宣祖의 第八王子인 義昌君의 글씨인 大雄殿扁額과 一柱門扁額이있고 이밖에도 秋史金正喜와 蒼巖李三晩栢庵性聰의 親筆書簡등이 유적으로 전해지고있다. 大海같이 悠長한 華嚴大道場의 寺跡을 有限石面에 略述하니 面外의 遺事 또한寺勢法風과 더불어 永遠無窮키를 바라는 바이다.


 

부처님께서도 成道後 三七日동안 黙黙히 숙고하시고는 不得已 無言의 寂靜世界를 뒤로 하고 言說의 敎海를항해하시며 四五年間 八萬法藏을 남기시었으니 無緣大悲의 金口說法을 記錄하여 時空을 통해 傳播하므로서 衆生들의 어두운길을 비춰주고 있다.

近世에 宿世의 願力을 타고 이나라 이民族과 이땅의 佛敎를 위해 福慧具足한善知識이 出現하셨으니 离山堂導光大禪師이시다. 禪師의 諱는 導光이요 號는 离山이며 俗名은 午南이고 俗姓은 金氏며 本貫은 金海이다. 아버지의 諱는 基春이고 어머니는 仁同 張氏 五鉉夫人이시다. 어머님이 아들을 하나더 얻고자 求禮 華嚴寺覺皇殿에서 三七日 觀音祈禱中 白衣觀音菩薩님께서端正한 靑衣童子를 안겨주시는 胎夢을 꾼 후 姙娠하여 一九二二年 四月三日(壬戌年陰三月七日) 全羅南道潭陽郡金城面外秋里四七0번지에서 二男二女中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禪師께서는 天禀이 聰明하고 寡黙鎭重하였으며 孝心또한 至極하여 鄕里에서 稱頌이 자자하였다. 일찍부터 世俗榮華에 無心하고 居家를 마치 監獄과 같이 여겼으며 日帝强占治下 新學工夫마저 단호히 거절하고 父親으로부터 漢學을 수학하였으나 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儒學의 本旨라하거늘 治國安民은 커녕 黨派싸움으로 나라마저 빼앗긴 현실을 통분하여 靑雲의 雄志가 어둠에 갇혀있던 어느날 舍廊房에 留宿하게된長城白羊寺에서 托鉢나온 스님을 만났다 禪師께서 超然自若한 그스님의 모습을 보고 크게 感動되어 스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여쭈웠으니 答하되 스스로 많은 惡業을 짓는 居家의 狹小함은 마치 監獄과 같고火宅과 다르지 않으나 廣闊함이 虛空과 같아 天上天下에 無碍自在한 出家修道를 업으로 삼아 普賢의 願海에 들어서 生死苦海에 飄弱하는 수많은 衆生들을 涅槃의 彼岸으로 引導하는 뱃사공이요 라하였다. 
 
이말을 들은 禪師께서는 곧 出家修道할 것을 굳게 決心하고 父母님 앞에 꿇어앉아 流轉三界中에 恩愛未能脫이오니 棄恩入無爲함이 眞實報恩者입니다 라는 立志偈를 說上하고 許諾을 구하였으나 祈禱 끝에 얻은 귀여운 막내아들을 許諾할 리가 없었다. 禪師께서는 몇 달 동안 煩憫 끝에 一九三五年五月一五日 “假使侍養極盡誠이라도 時至命終相別離로다 不供甘旨爲解脫하노니 比如死子比如無하소서” 라는 出家詩를 남기고 夜半에 집을 나와 멀리 釜山梵魚寺로 入山하였다.
 
梵魚寺의 行者 담당스님이 信根因緣을 알아보기 위해 쉽게 받아주지아니하였으나 禪師는 宿世의 善根功德이 堅實하여 마치 九鼎祖師와 같은 爲法忘軀의 堅固한 信心으로 模範的 行者生活을 하다가 마침내 一九三七年七月一五日 梵魚寺金剛戒壇에서 東軒堂完圭大宗師를 恩師로 東山堂慧日律師를 戒師로 하여 沙彌戒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타고난 天稟의 至極한 孝心으로 恩師스님을 侍奉하면서 梵魚寺佛敎專門講院에서 三藏을 硏磨하여 一九四二年一月一五日 大敎科를 卒業하였고 같은해 三月一五日 梵魚寺金剛戒壇에서 東山律師로부터 比丘戒와 菩薩戒를 받았다. 禪師께서는 出家初志를 金剛과 같이 堅持하였으니 三藏受業을 履修한 후에도 不撤晝夜手不釋卷하면서 굳게 戒律을 지켜 大衆의 模範이 되었음은 물론 外柔內强하고 溫厚質樸한 性品의 바탕에 馬勝比丘와 같은 威儀로 대중을 사랑하셨으니 世人들이 常不 輕菩薩이라 稱頌하였다. 
 
禪是佛心이요 敎是佛語라하고 三藏敎海를 깊이 연마하여 遊遊自在하였으나 驚天動地하는 西來密旨를 흠모하여 恩師인 東軒大宗師에게 修行次第와 그 方法을 問議하였다. 宗師께서 이르시길 大抵初心修行者는 多劫生의 두터운 業障부터 消滅한 然後에라 야사 비로소 話頭를 제대로 參究할 수있다면서 六途衆生의 堅厚한 모든 業障을 消滅시켜주시는 觀世音菩薩의 本心微妙六字眞言인 옴마니반메훔을 稱念하라고 指導하였다. 禪師께서는 이 지도를 받고 觀音聖地인 襄陽洛山寺紅蓮庵을 찾아가 一九四二年冬安居이후 三年間 六字呪眞言祈禱를 奉行하던중 一九四五年二月二0日 東海漁船의 汽笛소리가 새벽을 가르는 순간 胸中이 割然하고 天地가 空豁함을 체득하고는 觀世音菩薩六字大明眞言 옴마니반메훔이여! 千古大悲萬古月이 通照無限利人天이라고 祈禱成就의 境地를 읊었다. 그로부터 無字話頭를 看擇하여 參禪修行을 시작하였다. 
 
一九四五年智異山七佛庵에서 夏安居를 시작으로 靈鷲山極樂禪院 鏡峰會下에서 冬安居를 一九四六年長城白羊寺雲門禪院에서 夏安居를 伽倻山海印寺堆雪禪院에서冬安居를 一九四七年梵魚寺淸風禪院東山會下에서夏安居를 聞慶鳳岩寺禪院에서 冬安居를 一九四八年八公山杷溪寺聖殿禪院에서 夏安居를 永川銀海寺百興禪院에서冬安居를 一九四九年太白山覺華寺에서夏安居를 黃岳山直指寺千佛禪院에서冬安居를 一九五0年曹溪山松廣寺三日禪院에서 夏安居를 順天仙岩寺七殿禪院에서冬安居를 一九五一年俗離山福泉禪院에서 夏安居를 德崇山修德寺禪院에서 冬安居를 하는동안 如救頭燃의 勇猛精進을 계속하여 禪敎를 兼通하고는 먼저 故鄕地方부터 佛種子심어주길 발원하여 一九五二年一0月 道伴인 道川스님과 함께 金城땅에 普光禪院을 創建하였다. 禪師와 道川화상은 金剛山表訓寺修道中 平生間 同修琢磨의 道伴이 되기로 다짐하고는 入寂할 때 까지 友情의 決意를 굳게지켰으며 그 後學들 또한 두스승의 뜻을 이어 禪師의 偉蹟에 同參하겠다하여 모두 본 碑銘의 位牌上佐로서門徒秩에 入列되었다. 
 
一九五四年七月부터는 宗團重鎭스님들을 모시고 敎團淨化佛事에 先導的役割을 하였고 一九六二年부터 曹溪宗의 一․二․三代의 中央宗會議員을 역임하였으며 一九六三年五月 曹溪宗中央監察委員에 選任되는 등 종단중흥에 헌신하였다. 四四歲되던해인 一九六五年 河東七佛庵亞字房禪院에서 夏安居를 하다가 解制前 七日間의 勇猛精進中이던 七月一三日 새벽천둥소리를 듣는 순간 忽然히 無字話頭를 打破하였으니 大地가 平沈하고 虛空이 粉碎하며 胸中이 灑落하여 虛割割蕩蕩然으로 更無一法可當情함이 與初生兒로 無異하여 喫茶에 不知茶하고 喫飯에 不知飯하여 分別心이 사라지고 情識이 頓淨한 無心三昧에 들어 心花가 割開하여 十方世界를 通照하는 頂門正眼을 얻었다. 이에 菩提란 本來具足한 것이므로 修得할것이 아니며 煩惱또한 本空하니 힘써 除去할 것 없음을 깨닫고는 妄心無處即菩提요 生死涅槃本平等이로다 迷悟本無除何物가 靑天白日莫謾人하라는悟道頌을 읊고는 東軒大宗師에게 呈似하니 宗師께서 點頭하고는 汝見如是하니 吾亦如是라면서 認可하고 靑山白雲吾面目이어니 淸風明月豈外在이리요 莫言佛身在何處하라 塵塵刹刹法身體라는 傳法偈와 함께 离山이라는 幢號를 傳授하였다. 禪師께서는 이와같이 上求菩提하는 家裏事를 마치고 돌이켜 下化衆生의 途中事를 行하여 佛祖의 恩惠를 報答코자 外護와 敎化의길에서 쉼이 없었다. 
 
水原龍珠寺住持를 비롯 康津白蓮寺, 釜山梵魚寺, 大邱杷溪寺와 求禮華嚴寺等住持에 就任하여 道場을 중흥하는등 護法과 布敎의功勞로 一九七二年四月二八日 大韓佛敎曹溪宗宗正賞을 받았으며 一九七五年八月에는 陜川海印寺住持에 就任하여 性徹方丈을 모시고 叢林운영에 模範을 보이기도 하였다. 一九七六年五月 모든 公職을 벗어던지고 東南亞佛敎聖地를 비롯하여 유럽 美州등 二0餘國을 巡訪하면서 韓國佛敎와 傳統文化를 宣揚하는 한편 外國文物을 參觀하며 時代를 先導하는 佛敎革新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歸國後에는 後學을 물리치고 晦跡隱住하되 智異山般若峰德裕山白蓮庵 太白山兜率庵등지에서 精進하였다. 一九八0年一0月부터는 華嚴寺祖室이며 恩師인 東軒大宗師의 命으로 不得已 다시 華嚴寺住持職을 맡아 覺皇道場에 부임하여 今生의 마지막 公職이라 생각하고 禪院의 新築, 堂宇의 重創, 寺規의 刷新, 靑少年敎化등 四大目標를 設定하여 華嚴寺를 全國第一의 修行道場으로 昇化시켰으니 實로 華嚴寺中興主라 稱頌할일이다.
 
禪師의 一生을 거듭 回想해 보니 公私에 分明하고 淸廉潔白할뿐만 아니라後學을 指導함에도 賞罰이 分明하였으며 住持職을 遂行함에 있어서도 大衆外護와 伽藍守護, 聖寶保存과 布敎活動, 法要儀式과 社會福祉등 그 어느 한쪽도 疎忽함이 없이 均衡있게 施行하였음이 더욱 돋보이시며 三寶의 淨財를 嚴護함에는 마치 五祖師戒의 弟子인 洞山自寶禪師가 生薑을 取扱하듯 後學들에게 模範을보였고 三寶淨財와 常住物의 濫用은 勿論 施主物의 互用도 嚴禁하였으니 오늘의 寺刹運營과 大衆外護에 不滅의 龜鑑이 됨은 물론이 時代를 사는 人間事運營에도 오래 傳하여 잊지말아야할 永世不忘의 자 취라고 稱頌할 일이다. 둥근달이 높이 뜨면 天下는 銀色光明으로 훤함과 같이 선사의 일생이 이와 같았다. 선사께서 世緣을 마감하신때는 一九八四年九月一九日(甲子年陰八月二三日)새벽四시三0分이다. 六三年間遊幻海 今朝脫却殼漏子 來時何物去時誰 生死去來無踪跡이라는 臨終偈를 남겼으니 世壽는 六三세요 法臘은四七夏였다.
 
法軀를 火葬하여 火蓮속에 떠나 보내고 나니 五色玲瓏한 舍利 一百二十粿가 出現하였다. 이 修道의 結晶은 一切가無常하고 諸法이 無我한줄 깨달은 이에만 남겨지는 不忘의 寶賠인줄 世間은 알일이다. 굽이굽이 샛길로 어지러운 無限山川을 길따라 훤히 비추던 둥근달이 西山으로 사라져 보이지않으니 스승의 자취를 사무쳐 그리워하던門徒들이 禪師의 鴻跡을 貞石에 記錄하여 後代에 길이 전하고자하였다. 이에 華嚴寺住持이며 上佐인 宗三和尙이 伽山佛敎文化硏究院으로 찾아와 碑銘을 청탁하므로 以上과 같이 약술한 禪師의 偉跡을 담아 華嚴寺入口左便에 舍利塔을 세우고 다음과 같이 銘하는 바이다.


처음화엄사창건 연혁 - 화엄사의 설화




농부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에 한창 바삐 일손을 놀리고, 동리에서 꼬마들은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소꼽놀이 준비에 한창이었다. 꼬마들은 멀리 두류산을 향하여 합장하고 그들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조석으로 염불을 외던 대로 소리를 맞추어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으며 선재할아버지는 밭 언덕에 쉬면서 꼬마들의 놀이에 눈을 던지며 미소를 지으면서 두류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박노인은 어제도 그제도 산 중턱 골짜기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한 그는 지금 또 안개마냥 골짜기에 번지는 것을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자연히 보니 안개가 아니라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었다. 박노인은 필시 산중에 무엇이 있겠구나 하면서 마을사람 십여명을 대동하고 골짜기에 이르렀다.

계곡 겉에 움막을 발견하고 다가가니 움막 안에서는 낭랑한 목소리와 장중한 음성이 조화를 이룬 독경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들은 발을 멈추고 귀를 모았다. 사실 마을 사람들로서는 일찍이 들어보지도 못한 다른 나라 사람이 읽고 있는 독경 소리를 알아들을 줄도 몰랐으며, 독경이 끝나고 잠시후 한 사문이 나왔다.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친 사문의 모습은 이들의 마을 십여리 떨어진 홍련사(紅蓮寺)라는 절의 스님과 어딘가 다른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얼굴 셍김세와 피부가 우리민족과는 전혀 달랐으며 가사를 둘둘 말아서 몸을 감고 있는 점이었다. 박노인은 사문과 합장한후 대화를 나눴지만 의사 소통을 할 수 없었다. 사문은 움막안에서 벼루, 붓, 종이를 갖고 나와 글로서 얘기를 주고 받게 되었다.

천축국에서 불법을 펴고자 인연국토에 찾아왔으며 한문은 천축국에 유학온 양나라 스님에게 배웠고 백제국에는 연(?)이라는 짐승을 타고 비구니이신 어머니와 함께 날아서 왔다는 말에 마을사람들은 놀라는 기색을 하였다. “빈도는 바닷가의 절에 살면서 바다 속에 사는 연이라는 짐승과 친해졌지요. 이 연은 능히 공중을 날으고 바다 속으로도 헤엄쳐 가며 바다에 떠서 배처럼 다니기도 합니다. 빈도는 이 연을 교화하여 오계(五戒)를 주고 제자를 삼아 이곳에 까지 왔고 방금 읽던 경전은 부처님의 최고경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입니다.

” 이렇게 필담을 나눈 후 사문은 저녁공양 거리를 준비하기 위하여 피리 비슷한 악기를 꺼내어 입에 대고 길게 세 번 불어대니 웅장한 소리와 함께 천년묵은 거북만한 연이 공중에서 날아오더니 사문 곁에 사뿐히 내려 앉았는데 그 형상이 머리는 꼭 용같고 몸은 거북이며, 몸 길이가 열자는 넘어 보이고 두 날개를 가진 짐승이었다. 박노인 일행은 숨을 죽이고 이 신기한 동물을 보느라고 노비구니께서 그들의 등뒤에 나와 서 있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연의 등에 사문이 앉자 노비구니는 바른손을 들어 번쩍들어 떠나도 좋다는 신호를 보내고 사문은 노비구니에게 합장하고 다음에 연의 목을 쓰다듬어 주고는 범어로 뭐라고 이르니 연은 곧 공중으로 솟아오르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박노인 일행들은 감탄을 말하며 사문이 사라져간 남쪽을 향하여 합장을 하였다. 연을 타고 다니시니 연존자라 할까. 비연존자(飛?尊者)라 할까. 의논한 끝에 연기존자(?起尊者, 緣起尊者)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후 “우리 고을에 경사가 난거야. 부처님께서 태어난 나라에서 오신 스님께서 부처님의 최고경전인 화엄경을 백제땅에 가져왔으니,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충만한 이곳이 바로 최고의 불연국토(佛緣國土)야”

몇 달이 지나고 연기존자도 우리말에 상당히 익숙해져서 이제는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향상되었고 박노인의 손자인 선재를 시자로 두게 되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존자님의 법문을 듣고 싶어하나 예불할 장소가 마땅치 못했다. 움막에서 그러한 생활을 할 수 없다하여 박노인의 마을 사람들은 법당을 건립하고자 존자님께 간청을 하여 불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이룩된 건물이 요사(寮舍)겸 설법전인 해회당(海會堂)이고, 또 한해가 지난 다음해 가을에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인 법당이 낙성되었다. 바로 이해가 백제성왕22년 갑자세(서기544년)였다. 박노인은 존자에게 연기존자님이라고 부르고 있아오니 연기사(?起寺)라 하자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존자는 한참동안 침묵하여 골똘히 생각을 하더니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며 “빈도는 본국에서 대방광불화엄경을 수지독송해 왔고 현재도 이 화엄경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수행을 쌓고 있을 뿐만 아니라 멀리 창해를 건너 이 나라에 온 것도 화엄법문을 선양하기 위함이니 華嚴寺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지요.” 마을사람들은 “존자님께서 命名(명명)한 가람 이름에 이의가 없이 대찬성입니다. 화엄사, 화엄경, 화엄법문, 연화장세계라 이 나라가 연화장 불국토세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존자는 또 한마디 하는데 “ 이 산은 멀리 백두산의 정기가 줄곳 흘러 내려와서 이뤄진 산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 일컫는다니 좋은 이름이외다.”헌데 빈도가 이 산에 처음 닿았을 적에 삼매에 들어보니 문수대성께서 일만보살대중에게 설법하시는 것을 친견하였으니 이산은 분명히 문수보살이 항상 설법하는 땅 임에 틀림이 없소. 그리니 만큼 산 이름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이름을 택하여 지리산(智利山)이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리하여 智利山 華嚴寺가 되었다.

연기존자는 박노인외 마을사람들에게 특별히 차공양을 했다. 처음 먹어보는 차맛이었다. 혀끝과 입안에 젖어드는 향내음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그윽함이 깃들어 있었다. “존자님, 이 차는 무슨 차 입니까 ?”

이 차는 작설차(雀舌茶)라고 하는데 빈도가 여기에 올 때 수십 그루의 차나무와 씨앗을 갖고와 이산 금방에 심어 났지요. 이 차는 불보살님께 올리는 귀중한 차 이지요. 이 차를 올린 후에 이렇게 게송하지요.

“깨끗한 맑은 물 감로수로 변하여 삼보님께 받잡노니 굽어 살펴 주옵소서”하고 염불, 독경을 한 후 내려서 빈도가 마시지요. 이 찻잔 안에 화엄법계의 무진법문이 들어있고 자비광명이 충만히 들어 있지요. 여러분 이 차를 드시지요. 이 마을사람들은 찻잔을 들어 불단에 올려놓고 게송을 읊고는 소원을 빈 다음 찻잔을 불단에서 내린 후 제자리에 각기 앉아서 흡족하게 차를 마셨다.

연기존자는 “빈도가 천축에서 제조하여 가지고 온 것이 조금 있어서 여러분께 차공양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빈도의 소원대로 화엄법문을 문수보살 도량에서 선양할 수 있도록 화엄사를 창건한 여러분의 불사동참 공덕이야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고맙기 때문이오. 여러분의 마음이 곧 불보살님의 마음이 아니겠소. 그래서 여러분께 차공양 올리는 것입니다.” 그윽한 차 향기는 화엄사 골짜기를 맴돌고 연화장세계에 가득가득 퍼졌다. 연기존자는 화엄법문을 들려주는 것과 차공양으로 마을사람들의 노고에 보답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존자의 위덕과 효심과 무궁 무진한 법문에 감화를 입어 어느덧 신심이 지극한 신도로 변해 갔다.

그리하여 화엄사에 도인이 계신다는 소문은 날로 펴져서 널리 알려졌으며 연기존자는 문수보살을 원불(願佛)로 삼아 문수대성의 명호를 날마다 십만송을 하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고 그를 찾는 청신사 청신녀에게 문수보살의 위덕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두류산으로만 불러오던 것을 방방곡곡에서 문수대성의 상주도량으로 여기고 지리산이라 부르는이가 많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문수보살은 과거 7불의 스승이라 하거니와 지혜가 가장 뛰어난 분으로서 일체보살중에 상수(上首)의 위치에 있는 보살이시며 보살이 계시는 산을 청량산(淸凉山)이라 하므로 사람들은 때로는 지리산을 청량산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

연기존자는 이따금씩 연을 타고 지리산의 여러곳을 두루 살피기도 하고 더러는 며칠씩 묶고 오는 일도 있었다. 존자는 이산의 주봉을 반야봉이라 이름 하였으니 반야(般若)란 지혜요, 문수를 일컬음이다. 이 주위가 팔백리나 되는 웅장한 산이 문수대성의 상주도량이라면 이 산의 주봉을 반야봉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지리산이 문수도량이라면 산 그대로가 바로 문수의 몸이 아니랴? 수천척 높이의 봉우리가 수백도 더 되는 우뚝한 산 전체가 그대로 문수대성의 진신(眞身)이요 본면목인 것이다. 존자는 반야봉에 조그만 토굴을 하나 짓고 이름하여 묘향대(妙香臺)라 하였는데 문수를 한역을하면 묘수(妙首), 묘덕(妙德), 묘길상(妙吉祥) 등이 된다. 다시 말하면 문수의 체(體)는 바로 묘유(妙有)라는 것으로 향상 변함이 없는 자성(自性)자리를 가리키는 것이니 이 묘유를 묘향(妙香)이라 일컬은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32여년전 백제국 구차례(求次禮: 현재 구례)라는 곳 두류산(지리산)에서 범승(梵僧)이신 연기존자께서 화엄경을 설했다고 합니다. 두류산이 문수보살의 상주설법처(常住說法處)라해서 지리산이요, 화엄경을 설했다고하여 화엄사라고 합니다. 화엄사는 백두산의 혈맥과 섬진강의 태극이 합류하여 무한한 힘이 솟는 곳이지요.

고구려는 백두산의 힘. 백제는 백두산의 혈맥으로 강대한 힘을 얻었고 신라국은 혈맥이 없어 힘을 발휘할 수 없었지요. 그래도 한가닥 희망을 갖고 화랑들은 지리산 세속평정에서 무예를 닦으며 그 곳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백제 무왕때 우리가 그 곳을 차지했지요. 화랑도에게 무한한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용맹스러움이 서라벌까지 전해지고, 이 소승도 화랑도 출신이라 화랑도에게 삼국통일의 염원을 심어주기 위하여 화엄사에 가 보았지요. 그 곳이 중국적인 화엄사상이 아니라 불타의 나라 천축에서 온 화엄의 도량인 것을 알고 감회가 깊었지요.

이국땅 백제국에서 화엄의 꽃이 피워 있을 줄이야. 등잔밑이 어둡구나. 의상스님은 지척에 천축적 화엄사상을 두고 위험을 무릎쓰고 멀리서 중국적 화엄사상을 배우고 있었다니 말입니다.”

“소승은 화엄사에서 화엄경의 이치를 통달하고 연기조사, 자장법사께서 거주(居住)하시던 해회당(海會堂)에서 화랑도에게 화엄사상을 설하며, 천차만별의 강물이 바다로 모이면 이름과 차별이 없어지고 하나가 되어 원융무애 하듯 삼국이 어디에 있는가. 한민족이 아닌가. 이렇듯 화암사상은 화랑도에게 원융무애한 힘을 줌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를 수 있는 기반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있지요.”

의상스님은 놀라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칭 화엄학의 시조요. 부석사를 화엄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적인 화엄사상을 갖고 근본도량을 삼을 수 없다하여 문무왕 17년(677년)에 지리산화엄사에 오셨다.

“이곳이 바로 범승이신 연기존자께서 화엄의 꽃을 피었던 곳이니 부처님의 성지에 온 느낌이구나. 여기야말로 해동의 연화장세계로구나. 삼국인이 한 민족임을 실현하는 정신적 통일을 이루게 하며, 또 화엄사가 해동의 근본도량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화엄석경의 거대한 법당을 세우므로써 중생계를 연화장세계로 꽃피우게 위하여, 부처님의 화엄힘을 빌어 백두산의 혈맥 아래에 장육전(丈六殿) 법당을 건립하여야겠구나.”

장육이란 부처님의 몸(16자)을 일컬으며 장육금신(丈六金身)이라 한다. 2층4면7칸의 사방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黃金丈六佛像)을 모셨다고 합니다.

이 화엄경은 팔십화엄(八十華嚴)으로 10조9만5천48자로 되어 있으며 옥돌에 새겨진 화엄경은 부처님의 화엄사상을 꽃피웠고, 지금도 그 석경(石經) 조각들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연화장세게의 화려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 의상조사께서 전국에 화엄십찰(華嚴十刹)을 두어 화엄사상 선양에 전신의 노력을 기우렸다.

화엄십찰는 지리산화엄사(智利山華嚴寺),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 원주 비마라사(原州毘麻羅寺),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비슬산옥천사(毘瑟山玉泉寺), 금정산범어사(金井山梵魚寺, 팔공산미리사(八公山美理寺), 계룡산갑사(鷄龍山岬寺), 웅주 가야협보원사(熊州 伽倻峽普願寺) 삼각산청담사(三角山淸潭寺) 등이다.

인도(印度)적 화엄사상은 연기존자께서 씨를 뿌려 백제 승려와 백제국에 화엄의 꽃을 피웠고, 또 다시 신라 자장법사에서 원효성사로 이어 의상조사로부터 화엄의 종풍(宗風)이 해동에 가득하여 연화장세계를 이루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 담은 항아리와 밀가루 담은 항아리를 준비하고, 먼저 물항아리에 손을 담근 다음, 밀가루 항아리에 손을 넣어서 밀가루가 묻지 않은 사람이 장육전 건립의 화주승이라는 부촉이 있었다고 말했다.꿈 이야기를 들은 대중스님들은 그대로 실행하기로 하였다. 사시(巳時)마지 때 대웅전에 두 항아리를 준비하고 계파스님이 “만일 물 묻은 손에 밀가루가 묻지 않는 스님이 있다면 산승(山僧)과 함께 장육전 중건불사를 각별히 의논할까 하는 바이오.”

산내 모든 대중들은 차례 차례 계파스님의 지시대로 시행하였으나 손에 밀가루 묻지 않은 스님은 없었다. 천여중 대중을 모두 시험해 보았으나 기대하는 스님은 끝내 나타나지 않더니만, 맨 나중에 시험해 본 공양주 스님의 손에 과연 밀가루가 묻지 않는 것이었다. 대중스님들은 일제히 공양주 스님을 향해 삼배하고 장육전 건립을 위한 화주승의 중임을 맡겼다.

계파스님은 공양주 스님에게 “그대가 10년을 공양주로 일한 복력(福力)이 천여명 대중 중에서 가장 수승하기에 오늘의 시험에서 이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내가 짐짓 시험한 것이 아니라 꿈에 지리산의 주인이신 문수대성께서 지시한대로 시행한 것이니 그대는 문수대성께서 선택하신 화주승입니다. 그러므로 대 시주자를 잘 얻어 장육전 중창불사를 이루도록 합시다.”

공양주 스님은 공양을 짓는 수행만 했을 뿐 화주에는 전혀 인연이 없어 걱정이 태산 같았다. 밤새껏 걱정허며 대웅전에 정좌(正坐)하여 부처님께 기도를 올렸다.

비몽사몽간에 한 노인(문수보살)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 그대는 걱정 하지말라. 내일 아침에 바로 화주를 위해 떠나라.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시주를 권하라.” 하시며 사라지는 것이었다. 공양주 스님은 용기를 얻어 대웅전 부처님께 절을 하며 ‘ 맡은 바 화주 소임을 잘 완수하도록 가호를 내리소서.’ 하고 일주문을 나서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니 그의 앞에 남루한 옷을 걸친 거지 노파가 절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 노파는 자식도 없이 혼자서 움막에 사는데 절에 자주 올라와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곤 하였으므로 공양주였던 스님과는 아주 친근히 지내온 터였다. 화주승은 노파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거지노파에게 어떻게 장육전을 지어달라고 하랴 싶어서였다. 그러나 화주승은 간밤에 문수대성(文殊大聖)의 교시를 생각하고 노파 앞에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 오 ! 대시주이시여 ! 장육전을 지어주소서.” 이렇게 외치며 절을 계속 하였다. 노파는 처음엔 서로 익히 아는터라 농담으로 그러는 줄 여겼으나 스님의 진지한 모습에 아무 말도 못했다.

화주승은 하루종일 노파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고 시주 하기를 간청했으나 노파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노파는 화주승의 정성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다가 이윽고 화엄사를 향하여 합장하고 대 서원을 발했다.

“ 이 몸이 죽어 왕궁에 태어나서 큰 불사를 이룩하오리니 문수보살이시여 ! 가호룰 내리소서.” 이렇게 원력을 아리며 수십번 절한 뒤 소(沼)에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눈 깜박할 사이의 일이었으나 이미 이승 사람은 아니었다. 화주승은 너무나 갑작스런 일에 대경질색하여 그 길로 멀리 도망쳤다.

그후 오륙년이 흘러 한양성에 다달았다. 화창한 봄날 하루는 창덕궁앞에서 서성거리다가 유모와 함께 궁밖을 나와 놀던 어린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어린공주는 화주승을 보자 반가워하며 달려와서 우리 스님이라면서 누더기 자락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 공주는 태어나서부터 한쪽 손을 쥔채로 펴지 않았다. 화주승이 꼭 쥐고 있던 그 손을 만지니 신기하게도 공주의 손이 펴지는데 손바닥에 장육전이라는 석자가 쓰여져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대왕은 화주승을 내전으로 불러 자초지조을 모두 듣고 감격하여 “ 오! 장하도다. 노파의 깨끗한 원력으로 오늘의 공주로 환생했구나. 그 원력을 이루어 줘야 말고.”하며 장육전 건립의 대 서원을 발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라에서는 공주를 위해 장육전을 중창할 비용을 하사하였고 장육전이 완성되자 사액(賜額)을 내려 각황전(覺皇殿)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을 깨달은 왕이란 뜻과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뜻으로 각황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가람배치도

 




 

글 구례화엄사 자료

 

 

 

  오층석탑

  소나무가 최근에 심은듯

  명부전

  대웅전

  影殿

  대웅전

   영전

  원통전

 나한전

  석탑

  각황전

 

  사사자 3층석탑

 

 

  범종각

 

 

 

 

  대화엄사 중흥공덕주 금봉담우익대선사비

  방장교

 

 지리산 화엄사 불이문

추강집 제6권
 잡저(雜著)
지리산 일과(日課)



정미년(1487, 성종18) 9월 27일 계해일
진주(晉州) 여사등촌(餘沙等村)을 출발하여 단속사(斷俗寺)로 향하였다. 동구(洞口)에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바위 표면에 새겨져 있으나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른다. 암문(巖門)에 들어가서 1리쯤 지점에 단속사가 있었다. 예인(隸人)의 집이 감나무 숲과 대나무에 어우러져 한 촌락을 이루었고, 그 가운데 큰 가람(伽藍)이 있었다.
그 문에 ‘지리산단속사(智異山斷俗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문 앞에 탄연선사비명(坦然禪師碑銘)이 있으니, 평장사(平章事) 이지무(李之茂)가 짓고, 금나라 대정(大定) 12년 임진년(1172, 고려 명종2) 1월에 세운 것이다. 절 서쪽에 신행선사비명(神行禪師碑銘)이 있으니, 당나라 위위경(衛尉卿) 김헌정(金獻貞)이 짓고, 원화(元和) 8년(813, 신라 헌덕왕5) 9월에 세운 것이다. 절 북쪽에 감현 선사(鑑玄禪師) 통조(通照)의 비석이 사람들에 의해 뽑힌 채로 있었다. 승려가 이르기를 “세속의 무리들이 한 짓입니다.” 하였다. 한림학사(翰林學士) 김은주(金殷周)가 짓고, 개보(開寶) 8년 갑술년(974, 고려 광종25) 7월에 세운 것이다.
절 안의 동북쪽 모퉁이에 방 한 칸이 있으니,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독서하던 방이다. 절 뜰에 매화 두 그루가 있으니, 전조(前朝)의 정당문학(政堂文學) 강통정(姜通亭)이 손수 심은 것인데 매화나무가 지난 4, 5년 전에 말라죽어 그 증손 용휴(用休) 선생이 다시 심었다.
나는 탄연선사비명을 읽은 뒤에 들어가서 주지 성공(聖空)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공은 일암(一庵)의 문인으로, 나를 후하게 대접하였다. 다시 나와서 서쪽과 북쪽에 있는 두 비석을 보고, 들어가서 강용휴가 심은 매화나무를 보았다. 누각 위에 앉아서 고개를 들어 강용휴가 지은 〈종매기(種梅記)〉를 읽었다. 성공이 나에게 밥을 대접하고 또 시종에게도 밥을 내주었다. 식사가 끝난 뒤에 주인과 작별하고 아래로 내려왔다. 조연(糟淵)에 이르러 알몸으로 들어가서 목욕하니, 물과 바위가 맑고 산뜻하였다. 조연 북쪽에 샘이 있는데, 바위 표면에서 솟구쳐 나와서 유달리 맑고 시원하였다. 나는 손으로 움켜서 마셨다.
광제암문을 도로 나와서 불령(佛嶺)을 넘어 백운동(白雲洞)을 지나갔다. 백운동의 물이 덕천(德川)의 물과 합쳐져서 태연(苔淵)이 된다. 태연의 하류는 곧 진주의 남강(南江)이다. 태연을 지나 덕천의 벼랑 위를 따라 10여 리를 갔다. 긴 냇물을 내려다보니 확 트이고 시원하여 마음이 상쾌하였다. 동구를 다 지나서 양당(壤堂)이라는 한 마을에 들어갔다. 집집마다 큰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감나무와 밤나무가 뒤덮고 있었다. 사립문이나 닭과 개들이 영락없이 무릉도원이나 주진촌(朱陳村)인 듯하였다.
그 오른쪽에 시천동(矢川洞)이 있다. 시천은 진주의 속현(屬縣)이다. 그 현의 아전들은 지리산 석교(釋敎)가 되기를 바라서 벼슬이 호장(戶長)이나 기관(記官)에 이르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가 체임(遞任)되면 다시 속인으로 돌아오니, 드디어 오랜 풍습이 되어 관장(官長)도 그 풍속을 고칠 수 없었다.
날이 저물어 덕산사(德山寺)에 이르렀다. 이 절은 두 냇물이 합류하는 언덕에 있고, 대나무가 두루 펼쳐져 있다. 그 왼쪽에 있는 냇물은 고였다가 다시 흐르는데 용연(龍淵)이라 하고, 오른쪽에 있는 폭포는 떨어졌다가 소용돌이를 이루는데 부연(婦淵)이라 한다. 그 깊이는 한량이 없다.
주지 도숭(道崇)은 일찍이 비해당(匪懈堂)을 만난 뒤에 선림(禪林)에 이름이 있었는데, 비해당이 패망하자 임천(林泉)에 자취를 감추었다. 나를 만나 담론하며 매우 기뻐하였고, 나와 시종들에게 밥을 대접함이 매우 융숭하였다. 이야기가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그의 무리 형유(泂裕), 의문(義文), 의화주(誼化主) 등이 모두 반가운 눈빛으로 나를 대하였다. 이날 40리를 갔다.

갑자일(28일)
도숭, 형유 등과 함께 용연과 부연을 둘러보았는데, 연못 곁의 대나무가 감상할 만하였다. 의화주가 나에게 밥을 대접하였다. 식사 뒤에 도숭이 의문으로 하여금 나를 데리고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부연에서 위로 올라가 붉게 물든 나무숲 속을 걸어갔다. 왼쪽으로 금장암(金藏庵), 해회암(解會庵)을 지나고 오른쪽으로 석상암(石上庵), 백왕암(百王庵), 도솔암(兜率庵), 내원암(內院庵)을 지난 뒤에 동쪽으로 고개 하나를 돌아 대숲 속으로 들어가서 어렵게 뚫고 지나왔다. 회방령(檜房嶺)에 올랐다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갈대밭으로 들어갔고, 갈대밭을 다 지나서 싸리나무 숲으로 들어가니 길이 몹시 험난했다.
산길로 40리를 가서 보암(普庵)에 들어가니 감나무와 대나무가 집을 둘러싸고 있었다. 주지승 도순(道淳)이 감을 따서 대접하였다. 도순은 무(無) 자 화두에 대해 뜻을 간파함이 정밀하지 못하여 스스로 ‘나밖에 아무도 없다.’라고 생각하고는 불경을 외거나 염불하는 것을 그만두고 앉거나 누울 때에 언제나 음경(陰莖)을 드러내 놓았고, 다방면으로 계책을 내어 승도(僧徒)를 모아 선림(禪林)의 종주(宗主)가 되려는 자였다. 나와 처음 담론할 때는 조금 합치했지만, 재차 얘기할수록 망녕된 주장이 들쭉날쭉하고 윤회의 법칙을 고집하였다. 한밤중에 나에게 기침(起寢)이나 잘 하라고 하였는데, 말씨가 부드럽고 공손하였다.

을축일(29일)
보암을 출발하였다. 동상원사(東上院寺)를 바라보면서 문수암(文殊庵)의 삼밭을 지나 나무 밑의 냇가를 걸어갔다. 어지러운 돌밭에는 길이 없고, 가끔 돌을 모아 탑을 만들어 산길을 표시한 것이 있었다. 나는 돌탑을 찾아가다가 갑자기 법계암(法界庵) 길을 잃었다. 또 산비를 만나 석굴 아래서 묵으려고 하였으나 비가 개어 다시 길을 가서 향적암(香積庵)에 이르렀다.
암자에 한 명의 승려가 있었다. 이름이 일경(一冏)으로, 자못 총명하여 선지(禪指)를 깨달았고, 일찍이 무(無) 자 화두에 대해 대의를 대략 간파하였다. 일경이 나에게 《육조단경(六祖檀經)》을 보여 주었는데, 자못 청정(淸靜)하여 애호할 만하였다. 이날 40리를 갔다.

병인일(30일)
의문, 일경 선사와 함께 향적암에서 상봉(上峰)으로 올라갔다. 구름에 묻히고 바람에 깎이어 나무는 온전한 가지가 없고 풀은 푸른 잎이 없었다. 서리가 매섭고 땅이 얼어 추위가 산 아래보다 갑절이나 더하였다. 구름사다리와 석굴은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였는데 우리들이 뚫고서 올라갔다. 상봉에 올랐을 때에 이른바 천왕(天王)이라는 것을 보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는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摩倻夫人)이 이 산의 신령이 된 것으로, 당세의 화복(禍福)을 주관하다가 장래에 미륵불을 대신하여 태어날 자입니다.” 하였다. 그 말이 어찌 이리 황당하며 근거가 없단 말인가. 나는 사당 모퉁이의 바위 부리에 앉았다. 엷은 구름이 사방으로 걷히어 산과 바다를 헤아릴 수 있었고, 전라도와 경상도가 내 발 밑에 있었다. 사당 안에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정의문(鄭義門)의 현판 기문이 있고, 내 벗 김대유(金大猷) 등의 이름이 현판 위에 적혀 있었다. 저녁이 되어 향적암으로 도로 내려오니, 왕복 20리 길이었다.

10월 초하루 정묘일
쌀 한 말을 남겨 두고 일경과 작별하였다. 향적암을 출발하여 소년대(少年臺)에 올랐다. 솜대를 뚫고 계족봉(雞足峰)을 지나 산길로 30리를 가서 빈발암(貧鉢庵)에 닿았다. 암자 아래에 영신암(靈神庵)이 있고 암자 뒤에 가섭전(伽葉殿)이 있으니, 세속에서 이른바 영험이 있다는 곳이다. 내가 상세히 살펴보았지만 무딘 석상만 하나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내가 가섭전 뒤쪽에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위를 쳐다보며 산 하나를 올라갔는데, 이름이 좌고대(坐高臺)이다. 상ㆍ중ㆍ하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나는 중층까지 올라가서 멈추었으니, 심신(心神)이 놀라 두근거려 더는 올라갈 수 없었다. 좌고대 뒤에는 좌고대보다 더 높은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올라 좌고대 위를 내려다보니 또한 기이한 구경거리였다. 의문(義文)이 좌고대 아래에 앉아서는 두려움 때문에 올라오지 못하였다. 이날 서쪽 방면이 전날보다 갑절이나 청명하여 서해와 계룡(鷄龍) 등의 여러 산을 뚜렷이 구분할 수 있었다. 잠깐 있다가 빈발암으로 도로 내려와서 저녁밥을 먹었다. 그 무렵에 지는 해가 암자에 걸렸는데 아래의 인간 세상은 밤처럼 어둡게 보였다.

무진일(2일)
빈발암을 출발하여 영신암을 통과하고 서쪽 산 정상의 수목 속으로 30리를 가서 의신암(義神庵)에 이르렀다. 암자 서쪽은 모두 긴 대나무이고, 감나무가 대나무 사이에 뒤섞여 나 있었다. 붉은 감이 햇빛에 투명하였다. 방앗간과 뒷간도 대나무 사이에 있었다. 근일에 구경한 아름다운 경치로는 이에 비할 것이 없었다.
전(殿) 안에는 금불(金佛) 하나가 있었다. 서쪽 방에 승상(僧像) 하나가 있어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분은 의신조사(義神祖師)입니다. 이곳에 이르러 도를 닦다가 도가 반쯤 이루어졌을 때에 이 산의 천왕(天王)이 조사에게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를 권하고 스스로 굴뚝새〔鷦鷯〕가 되어 길을 인도하므로 조사가 그 새를 따라갔습니다. 큰 고개에 이르러 굴뚝새가 수리〔鵰〕로 변하였으니, 지금도 그 고개 이름을 초료조재(鷦鷯鵰岾)라고 합니다. 수리가 또 길을 인도하여 하무주(下無住) 터에 이르렀습니다. 조사가 묻기를 ‘이곳은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 하니, 수리가 말하기를 ‘삼칠일(三七日)입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더디다고 여기자, 수리가 또 중무주(中無住) 터에 이르렀습니다. 조사가 묻기를 ‘이곳은 며칠이면 도를 이루겠습니까?’ 하니, 수리가 말하기를 ‘칠일입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또 더디다고 여기자, 수리는 또 상무주(上無住) 터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말하기를 ‘이곳은 하루면 도를 이룰 수 있지만, 여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조사가 스스로 들어가서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정진하며 이름을 바꾸어 무주조사(無住祖師)라 하였습니다.” 하니, 그 말이 매우 황당하였다.
암자 앞에서 도시락을 먹은 뒤에 대숲 속을 통과하여 세 개의 큰 내를 건너 내당재(內堂岾)에 올랐다. 북쪽으로 초료조재를 보며 남쪽으로 풀숲 속으로 내려가 30리를 가서 칠불사(七佛寺)에 이르렀다. 절의 본래 이름은 운상원(雲上院)이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에 사찬(沙飧) 김공영(金恭永)의 아들로 이름이 옥보고(玉寶高)라는 사람이 있었다. 거문고를 메고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서 50여 년 동안 거문고로 마음을 닦으며 30곡을 작곡하여 매일 연주하였다. 경덕왕(景德王)이 거리의 정자에서 달을 구경하고 꽃을 감상하다가 홀연히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왕이 일명(一名)이 문복(聞福)인 악사(樂師) 안장(安長)과 일명이 견복(見福)인 악사 청장(請長)에게 묻기를 “이것은 무슨 소리인가?” 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인간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니, 바로 옥보선인(玉寶仙人)이 거문고를 타는 소리입니다.” 하였다. 왕이 7일 동안 재계하자, 옥보가 왕 앞에 이르러 30곡을 연주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안장과 청장으로 하여금 익혀서 악부(樂府)에 전하게 하였다. 또 그가 거처하던 절에 큰 가람을 세우니, 37국(國)이 모두 이 절을 으뜸으로 여겨 원당(願堂)을 삼았다. 형 수좌(泂首坐)는 선법(禪法)을 조금 알아 산중 승려들의 스승이 된 사람인데, 이상은 그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기사일(3일)
이 절의 온 법주(溫法主)가 나에게 옥보고의 사적을 보여 주었는데, 형 수좌가 말한 것과 같았다. 작별할 때에 형 수좌가 나에게 시를 청하기에 내가 절구(絶句) 한 수를 남겼다.
서쪽으로 금륜암(金輪庵)에 올랐다. 전 선사(田禪師)가 우리를 맞아들여 과일을 대접하였다. 다시 청굴(靑窟)을 지나 시내 하나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헷갈려 길을 잃은 것이 두 번이었다. 처음에는 멀리까지 헤매다가 돌아왔고 끝에는 조금 갔다가 돌아왔다. 큰 고개 하나를 넘어 벌초막(伐草幕)에 이르렀다. 벌초막의 위쪽에 새로 지은 초막 한 칸이 있었다. 설근(雪根)이라는 승려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나에게 김치, 간장을 가져다주었다. 이날 내 발에 못이 박혀 간신히 걸으며 30리를 갔다.

경오일(4일)
설근, 의문과 함께 반야봉(般若峰)에 올랐다. 내려다보니 봉우리 북쪽에 혼흑동(昏黑洞)과 월락동(月落洞)이 있고 초막 한 칸이 있었으니, 설근이 사는 곳이다. 또 그 북쪽의 중봉산(中鳳山)은 곧 빈발봉(貧鉢峰)의 북쪽 줄기이다. 산등성이 끊어진 곳에 적조암(寂照庵), 무주암(無住庵) 등의 암자가 있다. 또 그 북쪽의 금봉산(金鳳山)에는 금대암(金臺庵)이 있다. 반야봉 서쪽에 방장산이 있고, 방장산 꼭대기에 만복대(萬福臺)가 있다. 만복대 동쪽에 묘봉암(妙峰庵)이 있고, 만복대 북쪽에 보문암(普門庵)이 있으니, 일명이 황령암(黃嶺庵)이다. 반야봉 남쪽에 고모당(姑母堂)이 있고, 고모당 남쪽에 우번대(牛翻臺)가 있으니, 우번 선사(牛翻禪師)의 도량(道場)이었다. 반야봉 동쪽에 선인대(仙人臺)가 있고, 선인대 동쪽이 곧 쌍계동(雙溪洞)이다. 빈발봉은 반야봉의 동쪽에 있고, 천왕봉(天王峰)은 또 그 동북쪽에 있다.
나는 서쪽으로 반야봉 중봉(中峰)을 내려갔다. 주위를 둘러본 뒤에 우동수(牛銅水)를 내려다보았다. 물이 마르고 흰 벌레만 우물에 가득하여 좋은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이날 누른 구름이 사방에 자욱하여 산 아래 보이는 곳은 남원(南原)뿐이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의문이 초막으로 돌아가기를 재촉하였다. 왕복 20리 길이었다.

신미일(5일)
쌀 다섯 되를 남겨 두고 설근과 작별하였다. 식사 뒤에 벌초막을 출발하여 연령(淵嶺)을 지나 고모당에 올랐다. 오른쪽으로 우번대를 끼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보월암(寶月庵), 당굴암(堂窟庵), 극륜암(極倫庵) 등의 암자를 지났다. 승려가 이르기를 “송나라 인종황제(仁宗皇帝)가 총애하던 비(妃)가 죽어 꿈속에 인종황제에게 고하기를 ‘첩은 고려국(高麗國) 지리산 남쪽 화엄사(花嚴寺) 골짜기의 지옥에 들어갔으니, 원하건대 첩을 위하여 명복을 비는 절을 지어 주소서.’ 하니, 황제가 슬퍼하며 극륜사(極倫寺)를 지었습니다.” 하였다. 그 말은 문헌상의 근거가 없어 믿을 것이 못 된다.
이날 30리를 가서 봉천사(奉天寺)에 닿았다. 절은 대숲 속에 있고, 누각 앞의 긴 시내가 대나무 밑을 지나가며 우니,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이날 황제가 붕어했다는 기별을 들었다. 늙은 주지 육공(六空)은 신축년(1481, 성종12)에 산을 유람할 때 개성(開城)의 감로사(甘露寺)에서 보았던 사람이다. 나를 누각 위로 영접하고 선당(禪堂)에 묵게 하였다.

임신일(6일)
비에 막혀 봉천사에서 머물렀다. 누각 위에 앉아 근체시(近體詩) 한 수를 지어 누각 창에 붙였다.

계유일(7일)
수좌(首坐) 도민(道敏)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선산 김씨(善山金氏)라고 일컬으며 내가 양식이 떨어진 것을 보고 쌀 다섯 되를 선사했다. 최충성 필경(崔忠成弼卿)과 김건 자허(金鍵子虛) 등이 지급암(知及庵)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안부를 물었다.
밥을 먹은 뒤에 내려와서 황둔사(黃芚寺)를 구경하였다. 절의 옛 이름은 화엄사(花嚴寺)로, 명승(名僧) 연기(緣起)가 창건한 것이다. 절의 양쪽은 모두 대나무 숲이었다. 절 뒤에 금당(金堂)이 있고, 금당 뒤에 탑전(塔殿)이 있는데, 전각이 몹시 밝고 산뜻하였다. 차 꽃과 큰 대나무와 석류나무와 감나무가 그 곁을 에워싸고 있었다.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니 긴 시내가 가로로 걸쳐 있는데, 그 아래가 웅연(熊淵)이다.
뜰 가운데에 석탑이 있었다. 탑의 네 모퉁이에 탑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 있고, 또 부인(婦人)이 중간에 서서 정수리로 떠받치는 형상이 있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것은 비구니가 된 연기의 어머니입니다.” 하였다. 그 앞에 또 작은 탑이 있었다. 탑의 네 모퉁이에 또한 탑을 떠받치는 네 기둥이 있고, 또한 남자가 중간에 서서 정수리로 떠받치며 탑을 떠받치고 있는 부인을 우러러 향하고 있는 형상이 있으니, 이것이 연기이다. 연기는 옛날 신라 사람으로, 그 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들어와서 절을 세웠다. 제자 천 명을 거느리고서 화두(話頭)를 정밀히 탐구하니, 선림(禪林)에서 조사(祖師)라고 불렀다.
저녁에 필경과 자허가 나를 찾아왔다. 법주(法主) 설응(雪凝)이 인도하여 그의 방에 묵게 하고 배와 감을 대접하였다. 한밤중에 등불을 밝히고 필경 등이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하였다. 설응은 비록 불자(佛者)이지만 일찍이 제학(提學) 유진(兪鎭)에게 《중용장구(中庸章句)》를 배운 사람이라서 우리들의 말을 듣고도 거북해하지 않았다. 밤을 새우며 얘기하였다.

갑술일(8일)
황둔사 비물 선사(非勿禪師)가 나에게 밥을 대접하였다. 필경과 자허가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나에게 봉천사에서 유숙하기를 청하였다. 육공 대사가 다시 우리들을 청하므로, 내가 필경 등과 함께 도로 봉천사에 들어갔다. 밤에 《근사록》을 보았다. 그때 지급암의 오 수좌(悟首坐)가 우리들의 성정(性情)에 관한 논의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마음을 잡거나 성찰하는 공부는 유가와 불가가 다름이 없습니다.” 하였다.

을해일(9일)
설응이 그 제자를 시켜 종이를 가지고 봉천사로 와서 시를 청하거늘 내가 오언(五言) 장편(長篇)을 남기고 작별하였다. 또 필경, 자허 두 사람과 작별하니, 필경이 흰쌀 4말을 주며 작별하였다.
나는 황둔사 앞의 큰길을 따라 구례(求禮) 정정촌(鼎頂村)을 지나갔고, 강변을 따라가다가 웅연 벼랑길을 지나갔다. 온 산은 비단으로 수 놓였고, 물은 콸콸거리며 산을 뚫고 울었다. 걸어서 30여 리를 가니 정신이 상쾌하였다. 진주(晉州) 화개동(花開洞)에 이르렀다. 웅연 벼랑길을 벗어나 쌍계천(雙溪川) 서쪽 가를 거슬러 올라갔다. 좌우의 인가(人家)가 그림 병풍처럼 환했다. 진주와 구례 경계의 소후(小堠)에서 또 20여 리를 걸어갔다. 서쪽에서 동쪽을 건너자 문처럼 생긴 양쪽의 바위가 있었다.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손수 적은 것이다. 석문 안 1, 2리쯤에 쌍계사(雙溪寺)가 있었다.
내가 승려에게 묻기를 “어디가 청학동이오?” 하니, 의문이 말하기를 “석문을 3, 4리쯤 못 미쳐 동쪽으로 큰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 안에 청학암(靑鶴庵)이 있으니, 아마 옛날의 청학동인 듯합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이인로(李仁老)의 시에,
지팡이 짚고서 청학동 찾으려 하니 / 杖策欲尋靑鶴洞
숲 너머로 들리는 건 원숭이 울음뿐 / 隔林惟聽白猿啼
누대는 아득하고 삼신산은 저 멀리이니 / 樓臺縹緲三山遠
이끼 속에 어렴풋이 네 글자 적혀 있네 / 苔蘚依稀四字題
하였으니, 석문 안 쌍계사 앞이 여기가 아니겠는가. 쌍계사 위 불일암(佛日庵) 아래에 청학연(靑鶴淵)이 있으니, 여기가 청학동임은 의심할 것이 없다.
절 앞에 광계(光啓) 3년(887, 신라 진성여왕1) 7월 모일에 세운 진감선사비명(眞鑑禪師碑銘)이 있으니, 바로 문창후가 교서(敎書)를 받들어 짓고 글씨와 전액(篆額)도 아울러 쓴 것이다. 선사의 이름은 혜소(慧昭)이다.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였고, 고국에 돌아와서 이 절을 창건하고 임금을 위해 염불하며 일생을 마쳤다. 문창후가 그의 도를 칭찬한 것이 너무 심하니, 선사는 문자선(文字禪)을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문창후가 어찌 추앙함이 이와 같단 말인가.
내가 비석을 다 읽고서 나무뿌리로 된 다리를 건넜다. 산승(山僧)이 전하기를 “문창후가 손으로 나무뿌리를 틀어잡고 시냇물을 건너자, 그 뿌리가 점점 커져 다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600년 뒤에 들불에 타게 되었으나 아직도 검은 줄기가 남아 있습니다.” 하였다.
절 앞에 흰 국화 몇 떨기와 사계화(四季花) 한 그루가 있었다. 내가 꽃 사이에 앉아 쉬면서 차마 떠나가지 못하였다. 절의 부엌은 대통을 이어서 시냇물을 끌어들이니, 대통 끝에 물소리가 울렸다. 절 뒤에 금당(金堂)이 있으니, 친구 여경(餘慶)징원(澄源)이 이 방에서 글을 읽었다. 방 앞에 팔영루(八詠樓) 옛터가 있으니, 곧 문창후가 거처하던 방이다. 지금은 큰 대나무 수십 줄기만 있을 뿐이다. 밤에 선당(禪堂)에서 묵었다. 객승 학유(學乳)가 있었다. 일찍이 여경을 따라 반야봉을 유람한 사람으로, 내가 그와 함께 선(禪)을 얘기하였다. 나에게 시를 애써 요구하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주었다.

병자일(10일)
시냇물을 10여 리쯤 거슬러 올라서 왼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어 불일암에 이르렀다. 이 암자는 바로 혜소가 도를 닦던 곳이다. 암자 앞에 청학연이 있으니, 고운(孤雲)이 일찍이 그 위에서 노닐었다. 내가 암자의 승려 조성(祖成)에게 찾아가 보기를 청하였으나 길이 궁벽하여 찾을 수 없었다. 또 보주암(普珠庵)에 올랐다. 바로 보주 선사(普珠禪師)의 옛 거처이니, 암자의 이름이 이로 인하여 붙여진 것이다. 어떤 노승(老僧)이 나에게 배와 감을 대접하였다.
불일암으로 돌아와서 묵었다. 조성이 시 한 수를 지어 나에게 주었는데, 시운(詩韻)이 원숙(圓熟)하며 청광(淸曠)하고 주밀(周密)한 것으로 보아 일찍이 시 짓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다. 나에게 차운하기를 요구하여 내가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고운은 돌아가서 머물지 않고 / 孤雲歸不駐
청학은 돌아옴이 어찌 더딘가 / 靑鶴返何遲
인물은 고금에 다름이 없으니 / 人物無今古
맑고 빈한한 가도의 시일세
/ 淸寒賈島詩
내가 보기에 조성은 재능이 비상하고 유가(儒家)의 기상이 있기 때문에 운운한 것이다. 이날 눈이 내렸다.

정축일(11일)
조성이 나의 봉천사(奉天寺) 율시(律詩)에 화운(和韻)하여 나를 송별하였다. 조성과 작별하고 보주암을 지나 불지령(佛智嶺)에 올랐다가 묵계동(默溪洞)으로 내려가니, 물과 바위가 매우 맑고 기이하였다. 오서연(鼯鼠淵), 광암연(廣巖淵), 용회연(龍廻淵)을 지나고 비문령(碑文嶺)을 넘어 사자암(獅子庵)에 이르렀다.
이 암자에 있는 승려 해한(海閒)과 계징(戒澄)이 나를 맞이하였다. 해한은 바로 나의 젊은 날 불가(佛家)의 벗이다. 10여 년을 보지 못했더니, 나를 보고 반가워하였다. 이때 밝은 달이 하늘 가운데 떴고 큰 대나무가 암자를 에워싸고 있는데 가지 끝의 높이가 사람 키의 3, 4십 배 정도였다. 말을 주고받으며 오랜 회포를 풀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무인일(12일)
해한이 나에게 굳이 머물기를 청하므로 그대로 머물렀다. 식사 뒤에 해한, 계징 등과 함께 내려가서 오대사(五臺寺)를 구경하였다. 절 앞에 고려 국자 사업(國子司業) 권적(權適)의 〈수정사기(水精社記)〉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송나라 소흥(紹興) 8년(1138, 고려 인종16)에 세워진 것이다. 수정(水精)은 일명이 여의주(如意珠)이다. 무자년에 맹승(盲僧) 학열(學悅)이 나라에 건의한 뒤에 탈취하여 그것을 낙산사(洛山寺) 탑 속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안치하였다. 비문을 다 읽고 들어가 누대 위에 앉았다. 어떤 승려가 나에게 감을 대접하였다. 한참 있다가 사자암으로 도로 올라갔다.

기묘일(13일)
해한, 계징과 작별하였다. 정축일(11일)부터 오늘 아침까지 나와 노복 다섯 사람에게 해한이 모두 식량을 마련해 주었다.
오대사를 지나 또 부윤(府尹) 하숙부(河叔孚)의 집을 들렀다. 집이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하였으며 채소밭이 앞에 일구어져 있고 대나무 숲이 두루 펼쳐졌으니, 중장통(仲長統)이 〈낙지론(樂志論)〉에서 말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40여 리를 걸어가서 다시 여사등촌에 이르렀다.


 

[주D-001]탄연선사비명(坦然禪師碑銘) : 원문은 ‘皎然禪師碑銘’으로 되어 있는데, 본문의 내용을 참조하여 ‘皎’를 ‘坦’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아래도 같다. 현존하는 이 비명의 사본(寫本)에는 ‘대감국사비문(大鑑國師碑銘)’이라 되어 있으며 현재 비는 전하지 않는다. 대감국사의 휘가 탄연이다.
[주D-002]대정(大定) : 금나라 세종(世宗)의 연호이다.
[주D-003]원화(元和) : 당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주D-004]개보(開寶) 8년 갑술년 : 개보는 송나라 태조의 연호이다. 갑술년은 개보 7년으로, 착오가 있는 듯하다.
[주D-005]강통정(姜通亭) : 강회백(姜淮伯 : 1357~1402)을 가리킨다. 통정은 호이다.
[주D-006]용휴(用休) 선생 : 강귀손(姜龜孫 : 1450~1505)을 가리킨다. 용휴는 자이다.
[주D-007]주진촌(朱陳村) : 중국 강소성(江蘇省) 풍현(豊縣)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백거이(白居易)의 〈주진촌〉 시에 등장한다. 깊은 산속에서 외부와의 왕래 없이 자급자족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주씨(朱氏)와 진씨(陳氏)의 마을이다.
[주D-008]용연(龍淵)이라 하고 : 원문은 ‘白龍淵’으로 되어 있는데, 초간본(初刊本)에 근거하여 ‘白’을 ‘曰’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비해당(匪懈堂) :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당호(堂號)이다.
[주D-010]기침(起寢) : 절에서 새벽에 일어나 종을 치고 부처에게 염불 배례하는 일을 말한다.
[주D-011]뚫고서 올라갔다 : 원문은 ‘穿土’로 되어 있는데, 초간본에 근거하여 ‘土’를 ‘上’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2]김대유(金大猷) : 김굉필(金宏弼 : 1454~1504)을 가리킨다. 대유는 자이다.
[주D-013]수리 : 원문은 ‘師’로 되어 있는데, 문맥상 ‘鵰’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소후(小堠) : 역로(驛路)의 10리마다 설치하는 작은 돈대(墩臺)이다. 돈대에는 거리와 지명을 새겨 넣는다.
[주D-015]광계(光啓) : 당나라 희종(僖宗)의 연호이다.
[주D-016]문자선(文字禪) : 글을 통해 선학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주D-017]여경(餘慶) : 홍유손(洪裕孫 : 1431〜1529)의 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소총(篠叢) 또는 광진자(狂眞子)이다. 남효온 등과 함께 죽림칠현으로 자처하였다.
[주D-018]징원(澄源) : 양준(楊浚)의 자이다.
[주D-019]고운(孤雲) : 최치원(崔致遠)의 호이다.
[주D-020]인물은……시일세 : 옛날의 가도(賈島)와 같은 인물의 시라는 것이다. 가도는 당나라 시인으로,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하였다. 평생토록 몸이 수척하고 몹시 곤궁하였다고 한다.
[주D-021]권적(權適) : 원문은 ‘權迪’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東文選)》 권64〈지리산수정사기(智異山水精社記)〉에 근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2]소흥(紹興) : 남송(南宋) 고종(高宗)의 연호이다.
[주D-023]중장통(仲長統) : 후한(後漢) 때의 사람으로, 자(字)가 공리(公理)이다. 공명에 뜻을 두지 않고 자연 속에 한가히 노니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낙지론(樂志論)〉을 지어 자신을 뜻을 밝혔다. 《古文眞寶後集 卷1》

동국이상국전집 제16권
 고율시(古律詩)
문 선사(文禪師)가 각월 수좌(覺月首座)를 곡(哭)한 시에 차운함


세상은 불도의 대덕현인(大德賢人)을 잃었구나 / 世喪彌天釋苑賢
부음 듣고 나니 슬프기 그지없네 / 我方聞訃倍凄然
여악의 연사는 헛되이 남고 / 空餘廬岳裁蓮社
화정의 달 실은 배 다시 띄울 수 없네 / 無復華亭載月船
시평이 있다는데 보지 못하여 애석하다 / 聞有詩評嗟未覿
스님은 일찍이 시평을 지었는데, 나에게 보이지 않았다.
일찍부터 엮던 고승전(高僧傳) 겨우 마쳤네 / 早修僧傳僅終編
스님은 일찍이 고승전을 엮었다.
법문의 대들보 이제 꺾였으니 / 法門梁棟今頹折
후학은 누구를 의지하여 십현을 토구(討究)하랴 / 後學憑誰討十玄


 

[주C-001]각월 수좌(覺月首座) : 일명 각훈(覺訓). 호는 고양취곤(高陽醉髡)인데, 화엄 수좌(華嚴首座)라고도 한다. 글을 잘했고 저서에는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이 있다.
[주D-001]대덕현인(大德賢人) :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스님을 칭하는 말. 본래는 부처님을 일컫던 말인데 뒤에 사문(沙門)의 존칭으로 되었다.
[주D-002]여악(廬岳)의 연사(蓮社) : 중국 강서성 강남부(江南府)에 있는 여산(廬山)의 백련사(白蓮寺)를 말한다.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 때에 고승 혜원(慧遠)이 맨 처음 이 산에 들어가 백련사를 결성하고 염불을 수행하였는데 그의 문도(門徒)가 수천 명이나 되었고, 그 후부터 그곳이 강남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D-003]화정(華亭)의……없네 : 옛날의 운치 있던 생활을 되찾지 못함을 한탄한 말이다. 진(晉) 나라 육기(陸機)는 화정에 살면서 학(鶴) 우는 소리를 듣곤 하였는데, 뒤에 참소를 입어 죽게 되자 “화정의 학 우는 소리를 어찌 다시 들을 수 있으랴.” 하였다. 《晉書 卷54 陸機傳》
[주D-004]십현(十玄) : 열 가지의 현묘(玄妙)한 연기(緣起)를 뜻하며 불법(佛法)의 근본 원리로 삼는 ‘십현연기 무애법문(十玄緣起 無礙法門)’을 가리킨다.

梅溪先生文集卷之四
 
海印寺重創記 a_016_334c


伽倻之山。最秀東南。峻絶峭壁如畫。山之陽。有巨刹曰海印。新羅哀莊王時。高僧順應所刱。寺前有蓬萊,方丈,瀛洲等峯。衆壑之水。繞出前洞。奔流激石。萬雷轟豗。俗號紅流洞。自武陵橋抵寺十有餘里。丹崖翠壁。愈深愈佳。古記山形絶於天下。地勢隻於海東者。016_334d信不誣也。文昌公崔致遠晩年。掛冠卜隱于此。讀書堂廢。而題詩石尙存。高麗時。藏國乘。又藏大藏經板。山之著於圖誌。寺之額於東方者。尙矣。我世祖惠莊大王。中興王業。萬機之暇。留意釋道。思欲洪揚竺敎。普濟群生。天順戊寅。命僧竹軒等。就本寺。印大藏經五十件。又命惠覺,尊者,信眉,燈谷,學祖等往視之。藏經之堂隘且陋。仍命本道監司。稍增舊制。措四十餘間。越十一年戊子。世祖上賓。貞熹王后。克定大義。寧濟東民。深仁厚澤。浹于遠近。念惟世祖之尊崇篤信者。琅函祕典。而曾幾何時。藏經之016_335a堂。已爲傾陊。可不動念。於是乎慨然有重營之志。而歲辛丑。始停住持。命學祖主其寺。屬仍歲侵。國家多事。未遑擧也。癸卯。貞熹昇遐。仁粹王大妃,仁惠王大妃殿下。遹追先志。凡所以嗣徽音而薦冥福者。無所不盡其心。而悼貞熹之有志而未就也。則又命學祖。往董其役。戊申春。施內需司米布若干石匹。遣都料匠朴仲石等。改搆藏經板堂三十間。扁曰普眼堂。又撤板堂中佛殿三間。移搆於寂光殿西。扁曰眞常殿。又撤祖堂三間。移搆於眞常殿側。扁曰解行堂。明年己酉春。又施米布。又明年。亦如之。搆016_335b窮玄,探眞,鑑物,雙運等堂及一源,谷應,摠持,倒甁等寮。修講堂曰無說。食堂曰滿月。改營毗盧殿曰大寂光。主佛補處。皆改飾黃金。起鍾樓曰圓音。建中門曰不二。撤舊大藏殿。移營於寂光殿東。扁曰含虛寮。藏銀字大藏經 有脫字 卷。又營解設,蕭然,可鑑,圓融,雙割,浩然,逗元,緣起,冥眞,玄根,達俗,省行,重瑩,轉生,作熟等寮。又起東西樓庫。東曰無盡藏。西曰貳盈庫。凡爲屋百六十間。或增或損。皆因舊制。而宏麗精彩倍之。庖湢廏溷之所。鍾魚鐃鼓之類。亦莫不畢具而一新。金碧煇煌。照耀山谷。乃於秋九月望。招集淨侶數千指。016_335c大設法會以落之。於是。山門之事。畢矣。燈谷以偉曾遊是地。粗識其槩。走書求記甚勤。偉本儒者徒。於釋敎。蓋懵然者也。修善種福之理。輪回因果之說。未之學也。其餘功德。何足論之有無哉。雖然。崔文昌。吾東文士之祖。此是終焉之地。則不可不致意於此。而況兩殿爲先后之誠。終始彌篤。在所當書。垂之罔極。而能奉慈旨。孜孜靡遑。程功授事。不使小怠。操術要而收功速。在乎董役之得其人也。可不記其勝蹟。與古順應同傳不朽乎。噫。盛衰。數也。成毀。亦數也。寺創於有唐貞元十八年。歷新羅高麗。巍然獨存於兵016_335d火之餘。至于今日。遇太平之世。逢任姒之聖。殿堂寮宇。煥然一新。豈非有數存乎其間。而海印之一大幸耶。抑不知成毀之數。一係於天耶。一係於人耶。盛衰成毀之理。無窮於人世。則寺之長如今日。亦安可保耶。使後之主此寺者。恤念兩殿篤孝之誠。燈谷營搆之勤。謹守不毀。無徒諉於盛衰成毀之數則可矣。弘治四年龍集辛亥十月上澣。昌寧曺某。記。

 

韶濩堂集續卷五
 [文]
智異山華嚴寺。新羅佛敎祖緣起大師碣。甲子 a_347_471c


韓亡之十四年正月。智異山華嚴寺住持釋秉憲。自號滄海居士。俗姓鄭氏者。走一錄言曰。吾先師新羅緣起公英慧天縱。生347_471d好如來之道。因其書獨覺妙旨。撰華嚴經起信疏一篇。以授其徒。徒之歸者三千人。眞興王五年甲子。勑國中興寺院。公聞之。帥其徒營造本寺。智異山之有寺。自此始焉。其後元曉,義相,道詵,正行,朗圓,賢俊。及高麗之義天,洪慶,定仁,祖衡。韓之善修,潤訥,覺性諸名流。或以居住。或以遊歷。或以善緣。或以修役。相繼至于本寺。紹述宗風。迭起讚歎。公之道於是乎益尊。而今年適當創寺之期。故憲等有感于中。購一美石。欲刻右蹟。請子文之。余甞讀金文烈公三國史。見新羅訥祗王時。有高句麗僧墨胡子者來客于一善郡。鳴其學。於是新羅人始知慕佛法。至眞興王時。有覺德者入唐求法。屆王之十年。與唐使偕還。以爲覺德347_472a當爲新羅佛敎之初祖矣。今以憲之所錄觀之。緣起公之創寺。在於覺性東還之前五年。則其聞法之先於覺德者。又當爲幾年。然則緣公豈惟爲本寺開山之初祖也。實爲新羅佛敎之初祖。而千餘年之間。未有說及乎此者。以其未列於文烈之史也。何其慨矣。然天下之所謂緣者。或伏於冥冥之難測。或現於昭昭之正感。冥冥難測者。天之未定。而昭昭正感者。天之定也。夫以緣公之苦行絶識。而前日之未盡發露者。豈非天之未定乎。今日之出憲手而入吾目者。豈非天之定乎。不惟是也。余近修高麗史。倣北魏史例。補撰釋志。方且博採三國時名釋。而一朝之間。忽不勞而得緣公。則竊自不勝大喜。急急濡筆以書于志。347_472b是尤非緣之昭昭者乎。佛氏之書。多說因緣。余故爲此說。使憲參以觀之。仍繫以頌。其詞曰。
千江之水千明月。仰而四顧月只一。云誰此月抱懷中。新羅慧者緣起公。聞公昔講華嚴經。三千大衆涕泣聽。如飮河水各充量。下屆曉詵派流放。雖然公亦何所講。是唇是吻都不動。經亦只是一白紙。視睫視之不見字。六通一時發霹靂。天上天下隻影立。是以精神動君王。九天勑下托佛場。金砂玉流南岳南。始有精舍出穹林。旃檀之香長不灺。朝鐘暮鼔開聾啞。史家掛漏亦何傷。種瓜得瓜終允臧。堂堂新羅佛敎祖。天王峰共尊萬古。


韶濩堂集借樹亭雜收卷二
 甲子文錄
智異山華嚴寺。新羅佛敎祖緣起大師碣。他本以釋秉憲爲住持者悞也。 a_347_481c


韓亡之十四年正月。智異山華嚴寺住持釋龍華俗姓河氏者。走一錄言曰。吾先師新羅緣起公英慧天縱。生好如來之道。因347_481d其書獨覺妙旨。撰華嚴經起信疏一篇。以授其徒。徒之歸者三千人。眞興王五年甲子。勑國中興寺院。公聞之。帥其徒營造本寺。智異山之有寺。自此始焉。其後元曉,義相,道詵,正行,朗圓,賢俊。及高麗之義天,洪慶,定仁,祖衡。韓之善修,潤訥,覺性諸名流。或以居住。或以遊歷。或以善緣。或以修役。相繼至于本寺。紹述宗風。迭起讚歎。公之道於是乎益尊。而今年適當創寺之期。故龍等有感于中。購一美石。欲刻右蹟。請子文之。余甞讀金文烈公三國史。見新羅納祗王時。有高句麗僧墨胡子者來客于一善郡。鳴其學。於是新羅人始知慕佛法。至眞興王時。有覺德者入唐求法。屆王之十年。與唐使偕還。以爲覺德當爲新羅佛敎347_482a之初祖矣。今以龍之所錄觀之。緣起公之創寺。在於覺德東還之前五年。則其聞法之先於覺德者。又當爲幾年。然則緣公豈惟爲本寺開山之初祖也。實爲新羅佛敎之初祖。而千餘年之間。未有說及乎此者。以其未列於文烈之史也。何其慨矣。然天下之所謂緣者。或伏於冥冥之難測。或現於昭昭之正感。冥冥難測者。天之未定。而昭昭正感者。天之定也。夫以緣公之苦行絶識。而前日之未盡發露者。豈非天之未定乎。今日之出龍手而入吾目者。豈非天之定乎。不惟是也。余近修高麗史。倣北魏史例。補撰釋志。方且博採三國時名釋。而一朝之間。忽不勞而得緣公。則竊自不勝大喜。急急濡筆以書于志。是尤非緣之昭347_482b昭者乎。佛氏之書。多說因緣。余故爲此說。使龍參以觀之。仍繫以頌。其詞曰。
千江之水千明月。仰而四顧月只一。云誰此月抱懷中。新羅慧者緣起公。聞公昔講華嚴經。三千大衆涕泣聽。如飮河水各充量。下屆曉詵派流放。雖然公亦何所講。是唇是吻都不動。經亦只是一白紙。洗睫視之不見字。六通一時發霹靂。天上天下隻影立。是以精神動君王。九天勑下托佛場。金砂玉流南岳南。始有精舍出穹林。旃檀之香長不灺。朝鐘暮鼓開聾啞。史家掛漏亦何傷。種瓜得瓜終允臧。堂堂新羅佛敎祖。天王峰共尊萬古。

 

국보  제35호

명 칭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求禮 華嚴寺 四獅子 三層石塔)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62.12.20
소 재 지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산20-1
시 대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화엄사
관리자(관리단체) 화엄사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운 절로, 호남 제일의 사찰답게 많은 부속 건물과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12호),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보물 제132호),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보물 제133호),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 등의 중요한 유물들이 전해온다.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종목 : 국보 301호
명칭 : 화엄사영산회괘불탱(華嚴寺靈山會掛佛幀)
분류 : 불화
수량 : 1폭
지정일 : 1997.09.22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대 : 조선 효종
소유자 : 화엄사
관리자 : 화엄사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12호)
종목 : 국보 12호
명칭 : 화엄사각황전앞석등(華嚴寺覺皇殿앞石燈)
분류 : 석등
수량 : 1기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대 :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 화엄사
관리자 : 화엄사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35호)
종목 : 국보 35호
명칭 :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분류 : 석탑
수량 : 1기
지정일 : 1962. 12. 20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대 : 통일신라시대
소유자 : 화엄사
관리자 : 화엄사
 
  화엄사 각황전(국보 67호)
종목 : 국보 67호
명칭 : 화엄사각황전 (華嚴寺覺皇殿)
분류 : 사찰건축
수량 : 1동
지정일 : 1962.12.20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제작시기 : 조선 숙종 25년(1699)부터 약 4년간
소유자 : 화엄사
관리자 : 화엄사

종목 : 국보 301호
명칭 : 화엄사영산회괘불탱(華嚴寺靈山會掛佛幀)
분류 : 불화
수량 : 1폭
지정일 : 1997.09.22
소재지 :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 화엄사
시대 : 조선 효종
소유자 : 화엄사
관리자 : 화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