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 연촌선생 덕지 산소

전주최공 문성공 5세손 연촌선생 묘소

아베베1 2011. 8. 29. 21:17

 

 

 

 

                                           연촌선생  존영 (보물 594호 )  전주최씨 문중 (녹동서원)

 

素隱先生遺稿一
 [文]
烟村畫像贊 崔德之。文宗朝以直提學。退老靈巖永保 b_025_202a


有皎必汚。旣盈則昃。濟剛以柔。在巽而决。煕煕遺像。肅然可慄。燭照於微。履危猶安。進退能全。從古所難。卓乎高躅。孰匹其美。如吾不信。考之國史

 

 

택당선생집 제9권

 서(序)
연촌 최 선생의 집에 전하는 시문록 뒤에 쓴 글[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叙]


옛날 경태(景泰 1449~1456) 연간에 아조(我朝)에 덕이 순일하고 절조(節操)가 드높았던 정학지사(正學之士)가 있었으니, 연촌(煙村) 최 선생이 바로 그분으로서 이름을 덕지(德之)라 하였다.
일찍이 금근(禁近 시종신(侍從臣)을 말함)을 거쳐 주부(州府)의 목민관으로 나갔다가, 이를 또 즐겁게 여기지 아니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영암(靈巖) 영보촌(永保村)으로 돌아가서는, 서루(書樓)를 지어 존양(存養)이라 편액(扁額)을 내건 뒤 거기에서 생을 마칠 것처럼 지내었다.
그러다가 현릉(顯陵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선생에게 소명(召命)을 내리면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이르러 다시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향리로 돌아가자, 조정에 함께 있던 현경(賢卿)과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떠나는 길을 전송하면서 선생의 사적(事跡)을 높이 기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존양루(存養樓)에 제(題)하는 글을 짓기도 하고, 또 선생의 가대인(家大人 부친)인 참의공(參議公 이름은 담(霮)임)이 장수(長壽)를 누리고 훌륭한 자손을 둔 데 대해 일시에 찬송하는 작품도 많이들 내놓았다.
이 모든 시문(詩文)가 필적(筆迹)들을 최씨의 자손들이 대대로 지키면서 그지없이 조심스럽게 보관해 왔는데, 급기야 정유왜란(丁酉倭亂)을 겪는 바람에 존양루가 소실(燒失)되면서 간편(簡編)들도 함께 산일(散逸)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고향 사람들이 선생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서 제사를 올리게 되었고, 선생의 7대손인 전 참봉(參奉) 정(珽)이 또 타고 남은 시문(詩文)을 수습하여, 그나마 90여 수(首) 정도를 찾아낸 뒤 영원히 전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나에게 발문(跋文)을 써 달라고 요청해 왔다.
내가 삼가 살피건대, 선생은 순실(純實)한 행동이 성유(聖諭)에 드러나게 될 정도로 순덕(純德)의 소유자였고, 중년에 봉록(俸祿)을 마다하고 산해(山海)에 자취를 숨겼으니 고절(高節)의 인사라 할 만하며, 존심 양성(存心養性)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를 편액(扁額)으로 내걸어 자신을 깨우쳤으니 정학지사(正學之士)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다 해도 백세(百世)의 사범(師範)이 된다고 할 것인데, 더구나 이를 모두 아울러 지니고 있는 분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한편 생각건대,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은 경태(景泰) 2년인 신미년(1451, 문종 1)의 일이었다. 그런데 4년 뒤인 계유년과 7년 뒤인 병자년에 국가에 변고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진신(縉紳)들이 많이 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이 그야말로 이런 기미를 미리 환하게 알아 몸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될 법도 하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는 선생의 명지(明智)를 더욱 일컫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고찰해 보건대, 현릉(顯陵)이 일찍 빈천(賓天 임금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함)하여 노산(魯山 단종(端宗))이 갑자기 왕위를 내 주게 된 것은 하늘의 운수와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선생의 지혜가 아무리 밝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 될 줄이야 추측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선생은 세묘(世廟 세종(世宗))의 조정에서도 대방(帶方 남원(南原)의 옛 이름임)의 인끈을 풀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또 떠나야만 할 무슨 어려운 일이 발생하기라도 했었던가.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도는 가득 차면 무너뜨리고 겸손하면 더해 준다.[天道 虧盈而益謙]”고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화락한 군자는 신명이 위로해 준다.[愷悌君子 神所勞矣]”고 하였다. 선생의 급류 용퇴(急流勇退)는 그야말로 천도(天道)와 신명(神明)이 도와준 것으로서, 저절로 대란(大亂)에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이니, 어찌 눈치 빠르게 화(禍)의 기미를 살피다가 도망치는 자들과 견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이 시문록(詩文錄)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두루 살펴보건대, 안평(安平)과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의 호임)에 대한 일은 차마 말할 수가 없지만, 가령 하동(河東)이나 고령(高靈) 범옹(泛翁)이나 사가(四佳)같은 제공(諸公)으로 말하면 훈명(勳名)은 비록 성대해도 정절(情節)의 측면에서는 혹 부족한 점이 있고, 성근보(成謹甫 근보는 성삼문의 자(字)임) 등 제인(諸人)으로 말하면 자정(自靖)한 점은 있지만 규족(葵足)처럼 보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니 선생의 맑은 복과 완전한 명성에 비교해 본다면, 어떻다고 해야 하겠는가.
아, 이 문집을 살펴보노라면, 그 시문들을 통해 선생의 심지(心志)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될 뿐만이 아니요, 세태(世態)를 논한 것이나 기인(其人 단종을 가리킴)을 향한 정성이 또한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숭정(崇禎) 병자년 7월 보름에 덕수 후학 이식은 쓰다.


 

[주D-001]4년 뒤인 …… 되었다 : 단종(端宗)이 즉위한 계유년(145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부자를 강화에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한 일과, 세조(世祖) 2년인 병자년에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던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을 사형에 처했던 일을 말한다.
[주D-002]천도는 …… 더해 준다 :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화락한 …… 위로해 준다 : 대아(大雅) 한록편(旱麓篇)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급류 용퇴(急流勇退) : 한창 벼슬이 높아질 때에 물러나 명철 보신(明哲保身)하는 것을 말한다. 송(宋) 나라 전약수(錢若水)에게, 어떤 노승(老僧)이 끝내 신선은 되지 못하겠지만 벼슬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是急流中勇退人”이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聞見前錄 卷7》
[주D-005]하동(河東)이나 …… 사가(四佳)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이면서 호가 범옹인 신숙주(申叔舟), 호가 사가정(四佳亭)인 서거정(徐居正)을 가리킨다.
[주D-006]자정(自靖) : 각자 의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뜻을 정해서 결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미자(微子)의 “스스로 뜻을 정해서 각자 선왕에게 고하라. 나는 여기를 떠나 숨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7]규족(葵足)처럼 …… 못하였다 : 몸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제(齊) 나라 포견(鮑牽)이 난세(亂世)에 처하여 남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고발했다가 발이 끊기는 월형(刖刑)을 당했는데, 이에 대해 공자(孔子)가 “포장자의 지혜는 해바라기보다도 못하구나. 해바라기는 그래도 잎사귀를 가지고 제 다리를 가려서 보호해 주는데.[鮑莊子之知不如葵 葵猶能衛其足]”라고 비평한 고사가 있다. 포장자는 포견을 가리킨다. 《春秋左傳 成公 17年》

 

 

 

 

 

 

 

 

 

 

 

 

 

농암집 제3권
 시(詩)
연촌(煙村)을 바라보며


중류에서 노 한 쌍 춤을 출 무렵 / 雙楫舞中流
아침 해에 외론 뜸 걷어 올리니 / 孤篷卷初日
어디서 일어나나 아침 연기가 / 何許起朝煙
나무껍질 지붕의 썰렁한 마을 / 蕭然木皮室


 

송자대전 제148권
 발(跋)
연촌(煙村) 최 선생(崔先生)의 유사 발(遺事跋)


한 문공(韓文公 문은 한유(韓愈)의 시호)의 송양소윤서(送楊少尹序)에 ‘승상(丞相)이 시(詩)를 노래하니, 서울의 시를 잘하는 자가 이에 화답한다.’ 하였으니, 그때에 시가 매우 성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나, 장문창(張文昌 장적(張籍))과 배 사공(裴司空 배도(裴度))의 글만이 후세에 칭도(稱道)될 뿐, 그 나머지는 모두 적료(寂寥)하다.
이제 연촌 최 선생의 유적을 본다면, 그 모든 시문(詩文)이 하나도 빠짐없이 수록되었으니, 이는 양 소윤(楊少尹 당 나라 양거원(楊巨源)을 말함)은 덕행은 있어도 어진 자손이 없었고, 선생은 두 가지를 겸한 때문이 아닌지. 이번에 선생의 8세손 세영 몽여(世榮夢與 몽여는 자임)가 그 맏형 방언(邦彦)과 함께 그 구본(舊本)의 그릇된 데를 바로잡아 중간(重刊)하여 널리 세상에 전하려 한다. 나는 선생의 상언(上言 임금께 올리는 글) 중에서 그윽이 느끼는 바가 있다. 즉 이른바 ‘손실답험(損實踏驗)’이라는 말은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자주 보이는데, 이는 실로 주 부자(朱夫子)가 일찍이 마음을 기울이던 바이며, 또 이른바 ‘업거세존(業去稅存)’이라는 네 글자도 주 부자가 당시에 매우 통탄해하면서 기어이 변혁시키려 하다가 마침내 오우규(吳禹圭 장주(漳州)의 진사(進士))의 소(疏)에 의해 저지된 바이다. 그런데 어찌 5백 년 후 선생의 글 속에서 다시 볼 줄 뜻하였으랴. 택당(澤堂) 이 선생(李先生)이 선생을 정학(正學)의 인사(人士)라 칭하였던 까닭도 여기에서 그 일단(一端)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말한 ‘업거세존’은 사실 주 부자가 말한 것과 조금 다름이 있으니, 후인(後人)이 마땅히 알아야 할 점이다.
모든 서문과 발문 중에서 택로(澤老)의 것이 가장 상세하고 또 그 칭도(稱道)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다만 그중에 ‘기미(機微)를 알았다.’는 택로의 말을 후인들이 잘못 이해하여 선생을 일컫기에 부족한 것처럼 여겼는데, 그렇다면 《주역》에서 어찌 ‘기미를 아는 것이 신(神)이다.’ 하였겠는가. 이는 택로에게 반드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니, 몽여(夢與)는 택로의 아들 계주(季周 이단하(李端夏))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숭정 기원 후 무오년(1678, 숙종4) 3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주D-001]업거세존(業去稅存) : 본시 주희의 말인데, 여기는 가난한 백성이 쪼들리다 못해 자기의 전토(田土)를 부호(富豪)에게 매각하고 나서 도리어 부호의 소작인(小作人)이 되어 그 세(稅)를 물어야 하므로, 결국 전토는 없어지고 세만 부담하게 된 것을 말한다.

澤堂先生集卷之九
 
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敍 a_088_155a


昔在景泰間。我朝有淳德高節正學之士。曰煙村崔先生名德之。嘗由禁近。出守州府。又不樂而退歸靈巖永保村。築書樓。扁以存養。若將終身。顯陵卽位。召拜藝文直提學。明年冬。又告老而歸。同朝賢卿名士。賦詠贐行。以高其事。且爲存養樓題識。又先生家大人參議公有壽有後。一時多贊頌之作。凡茲詩文筆迹。崔氏子孫。世守之甚謹。及丁酉倭亂。存養樓燬088_155b而簡編隨以散逸。今其鄕人。旣爲先生立祠祀之。先生七代孫前參奉珽。又收拾燼餘詩文。尙得九十餘首。以圖不朽之傳。乃以題跋之辭命植。植竊惟先生純實之行。著於聖諭。淳德也。中歲納祿。遯迹山海。高節也。存心養性。揭扁自警。正學也。有一於是。尙可師範百世。況兼有之者乎。抑先生之退。當景泰二年辛未。越四年癸酉,七年丙子。國家禍故相繼。縉紳多及焉。則先生之擧。誠若炳幾保身者然。以此世尤稱其明智。以余攷之。顯陵賓天之促。而魯山遜位之遽。此天數也。先生雖明智。安能推測及此。且先生在088_155c世廟朝。已解帶方之印。彼時又何難之可違耶。易曰天道虧盈而益謙。詩曰愷悌君子。神所勞矣。先生急流勇退。道與神謀。自不蹈於大亂。豈規規焉審幾逃禍者之足儗也。今就是卷。閱其人物。則安平,節齋之事。不可言也。若河東,高靈,泛翁,四佳諸公。勳名雖盛而情節或歉。成謹甫諸人。自靖則有之而葵足莫衛。其視先生淸福完名。當何如也。噫。觀斯集者。不但据其詩文。知先生之所存。論其世尙其人。亦可以見先生之不可及矣。崇禎丙子七月之望。德水後學李植識。


頭陀草冊十
 詩○南行集[下]
前詩只道文谷農岩兩先生。而不及烟村崔先生父子事。又作此詩。並擧四先生本末。而末寓山頹之感。以示余志云爾。 a_191_380a


烟村百世師。卓節照今古。上書乞骸歸。志不戀圭組。南士誦高風。至今仰遺矩。峩峩月山麓。妥靈有庙宇。191_380b 後來文谷翁。受玦居玆土。乃以瑚璉器。允矣邦國柱。扶倫斥邪憸。直操尤可取。士林慕其名。一體享籩俎。肅穆二遺像。丹靑映廊廡。山堂與農岩。賢聲紹兩父。配食躋同堂。盛事實罕覩。我昔及農岩。萌甲潤時雨。山頹已幾歲。舊學日魯莽。獨立廟門雪。但自拜木主。人事有萬變。衰涕迷仰俯。九原果有知。深心向誰吐。休光永千載。亦足持門戶。烟村崔先生名德之。事英陵官至弘文舘副提學。後上書乞歸。朴醉琴成承旨作詩文以侈之。有畫像。並文谷像奉安東廡。相貌極古恠。山堂。烟村子。

 

  근보 성삼문

 

  최 제학 덕지 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崔提學 德之 還鄕] 

전원에 돌아감이 은둔의 계교 아니로세 / 歸田非隱計
나오고 드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 出處政如斯
한 나라 임금께선소광을 생각하고 / 漢主思疏廣
당 나라 조정에선 공규를 중시했네 / 唐朝重孔戣
강산이 그를 기다리는 듯 / 江山如有待
원숭이와 새도 또한 알아주네 / 猿鳥亦相知
처음에서 끝까지 의리를 다했으니 / 終始能全義
공 같은 사람 바로 나의 스승일세 / 如公我所師
최덕지(崔德之)는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존양당(存養堂)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급제하여 누차 고을을 맡았었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을 쌓았다. 세종(世宗) 때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시로 이름이 났다. 문종(文宗)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물러가 영암(靈巖)에서 늙으려 하니, 당시 명사들이 모두 전송하는 시를 지었다. 희현당 책에 제(題)하기를,
이윤(伊尹 탕(湯) 임금을 도와 상(商) 나라를 세운 어진 신하)의 자임하는 것과 안회(공자의 수제자)의 현명함으로 / 尹之任回也賢
혹은 즐겁게 요순의 도를 즐기고 / 或囂然而樂堯舜
혹은 길게 한숨 쉬며 높고 굳은 경지를 탄식하였다 / 或喟然而歎高堅
이 같은 행동하면 역시 이 사람이 되거늘 / 有爲亦若是
내가 어찌 홀로 그렇지 아니하리 / 余何獨不然
하였다.

艮齋先生文集後編續卷之七
 神道碑銘
烟村崔先生神道碑銘 幷序 a_336_313c


本朝作成之化。莫盛於世文兩廟之際。禮樂文物。彬彬有三代風。於是才俊盈庭。贊襄鴻猷。咸以功名自奮。蓋亦千載一時。時則有烟邨崔先生。歷敭內外。可以有爲。而決然投紱。嘉遯自樂。及再被恩召。亦纔出旋歸。未幾。國家多難。淸流之禍甚慘。世之篤論者以爲。悅卿今之伯夷。六臣今之方練。烟邨,霧巷。比六臣較高者。是也。先生諱德之。字可久。自號烟邨迂叟。系出全州。高麗門下侍中諡文成諱阿玄孫。曾祖諱龍鳳。中郞將。祖諱乙仁。司醞直長同正。考諱霮。336_313d入本朝直提學。妣全州朴氏。經德齋諱從壽女也。先生自幼。承襲家庭。德器夙成。永樂乙酉登第。由承文院。選入翰苑。歷玉堂臺閣。累典州郡。皆有成績。嘗爲淸道郡守。上疏論貢法損實便否。此可見爲政施措之一端。後以南原府使。退居靈巖永保邨。扁書樓以存養。若將終身。文廟元年辛未。特召以藝文館直提學。兼春秋館記注官。明年冬。上書乞退。上謂近臣曰。曩於召對。見其爲人純實。年未甚老。予欲留之。咸曰。歸志已定。必不留。不如從之以遂其高。先生卽日治裝。諸名卿賢大夫。咸與載酒送之江之滸。欽336_314a慕而歌頌者。凡四十餘篇。享年七十二而卒。葬于全州所陽面周德山酉坐原。崇禎三年庚午。湖南士林建祠於靈巖月山下。肅廟辛酉。賜額鹿洞。又享于全州西山院南原舟巖祠。朝廷錄用其子孫。事載國乘。配平壤趙氏。中郞將安鼎女。別葬于羅州元井洞艮坐原。有三男二女。男長淍。護軍。次潎。司勇。季淑。生員。女適忠贊金總。通禮愼後庚。護軍生四男。曰岱,嵆,崐,崗。司勇生四男。曰大成,智成,集成,忠成。生員無子。以司勇子智成。爲後。先生遺稿。散逸於兵燹。惟遺事一卷。傳於世。而諸賢論述亦附焉。朴忠文彭336_314b年曰。先生在朝。其聲名爵位。當不止此。而今也退休田里。已不與世相關。而萬口咨嗟。稱頌不已。其所以感人心而負物望。有不在彼而在此也。李文質芮曰。居官守道。一以古人自處。仕已無喜慍色。又曰。富貴榮華。皆無足以動其心。高風餘韻。足以使貪夫廉而懦夫立。又曰。一出一處。大有關於名敎。李文康石亨曰。無求於世兮。樂夫天命。逍遙一室之內兮。尙友千古之賢聖。李文靖植曰。先生純實之行著於聖諭。諄德也。中歲納祿。遯跡山海。高節也。存心養性。揭扁自警。正學也。有一於是。尙可師範百世。况兼之乎。又336_314c曰。急流勇退。道與神謀。自不蹈於大難。朴文純世釆曰。至德範世。而民或不知其所以爲賢。至於尤菴先生。則又推先生上言中損實踏驗者。而贊之曰。此實朱夫子所嘗眷眷者。而所謂業去稅存四字。則夫子當時極其痛歎。必欲變通者也。豈謂五百年之後。復見於先生文字閒耶。農巖先生嘗製書院請額疏。亦曰。不以一節自喜。而志於大道。不以閒散自適。而力於實踐。又引朱子所謂取舍之分明。然後存養之功密。存養之功密。則其取舍之分益明者。而質之曰。若某者。其庶乎此矣。合而論其世。考其實。則先生天稟336_314d甚高。德學甚粹。蓋其稟也高。故灑落如光風。其德也粹。故渾實如良玉。建乎居閒旣久。充養益篤。行之家。施之邦。沛然無所迂滯。而明知達識。超乎事物幾微之表。深造厚積。進乎精密正大之域。以至淸風高節早然爲百世師。然迹其平生。謙虛沈晦。不求異於人。人亦無能盡知者。嗚呼。此先生之所以爲先生也已矣。後孫圭庠,圭燮。謁余以隧道之文。累辭不獲。遂爲之銘曰。
殷師敎逖。羅麗治慌。天啓我朝。人文宣朗。英陵繼作。浸淫三古。百工煕載。萬物咸覩。允矣先生。誕膺336_315a盛運。學具體用。德孚遠近。翺翔館閣。歷選州牧。展布所蘊。爛然聲績。顯陵嗣位。再膺召命。宸眷彌重。同朝相慶。一朝卷懷。于彼巖堧。我讀我書。我食我田。天下煕煕。爵祿是榮。天下穰穰。名利是嬰。孰如先生。惟道是視。一出一處。實關世紀。易曰知幾。詩云明哲。愷悌君子。不俟終日。存心養性。敬以事夫。我庸勒石。昭示後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