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 연촌선생 덕지 산소

연촌공 자료 연촌서원

아베베1 2013. 4. 18. 20:55

 

 

 

 

 

 

 

 

농암집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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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차(疏箚)

영암(靈巖) 유생을 대신하여 지은 연촌서원(煙村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소 경신년(1680)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조정에서 벼슬했던 인물들 중에 일단 들어가면 물러나지 않고 녹을 끌어안고 총애를 탐하다가 신세를 망친 사람은 많고, 결연히 물러나 부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 상황을 고찰하여 논하자면, 이들은 또 모두 쇠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화를 당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을 온전히 할 방도를 궁리한 끝에 벼슬하지 않은 경우이거나, 이미 최고의 명성과 지위를 누렸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그리한 것일 뿐입니다. 성군(聖君)의 시대를 만나 임금이 크게 등용할 의향이 여전한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난 경우는 수백 수천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더구나 절조(節操) 하나만으로 자족하지 않고 대도(大道)에 뜻을 두며, 유유자적 한가로이 지내지 않고 실천에 힘쓰는 경우로 말하자면 어찌 더욱 뛰어나 그와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먼 고을의 어리석은 선비로서 견문이 넓지 못하지만 한 가지 들은 것이 있습니다. 세종(世宗), 문종(文宗) 때에 신(臣) 최덕지(崔德之)가 있었으니, 그는 한림원(翰林院)에서 출발하여 옥당(玉堂)과 대각(臺閣)을 거치고,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있다가 물러나 영암에서 지내면서 서재를 지어 존양(存養)이라고 편액을 달고 두문불출하였는데, 당시는 세종의 만년이었습니다. 문종이 즉위했을 때 불러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고 순수하고 진실하다고 칭찬하며 계속 등용하려 하였는데, 조정에 있은 지 2년도 못 되어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와서 끝내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정치와 교화는 세종, 문종 때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뛰어난 인재들이 시운(時運)을 타 구름같이 모여들고 경학과 문장에 밝은 선비들이 진기하고 뛰어난 식견으로 줄지어 조정에 서서 모두 공명(功名)을 떨쳤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습니다. 최덕지의 그 훌륭한 재주로 그들과 어울릴 때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니 만일 느긋하게 따라가며 시운에 편승하였더라면 경상(卿相)의 자리에 올라 공명이 찬란했을 터인데, 벼슬을 버리고 멀리 떠나서 변방 산천에 은둔한 채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는 경중의 구분에 밝고 영욕(榮辱)의 경계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저들 기미를 살펴 화를 피하는 자들과 지위가 극도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는 자들의 경우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은둔한 선비는 대부분 스스로 고상함을 표방하여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고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면서 마음 쓰는 것이 없었으니, 이들이 비록 부귀의 유혹에 빠져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는 자들보다는 낫다 하나, 그 역시 도(道)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지금 최덕지는 귀향하여 마침내 맹자(孟子)가 말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한다.[存心養性]’는 말을 택하여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가 바른 학문에 마음을 두고서 덕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일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분명해진 뒤에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고,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면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더욱 명백해진다.” 하였는데, 최덕지로 말하면 이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기록된 것이 소략하여 그의 말과 풍격을 상세히 상고해 볼 수 없으니 애석합니다.
그러나 그 높은 지조와 바른 마음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 후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손자 대에 이르러 최충성(崔忠成)이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특출한 재주와 독실한 학문으로 수제자라 일컬어졌으니, 이는 그 사우(師友)의 연원이 본디 그럴 만했을 뿐만 아니라 선조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최덕지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200여 년이 흘렀는데도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도 변치 않아서 남쪽 고장을 찾아오는 사대부는 반드시 이른바 존양루(存養樓)라는 곳을 방문하여 그의 초상 앞에 예모를 갖추고 탄식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곤 하니, 그가 남기고 간 영향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또한 깊다 하겠습니다.
지난 경오년(1630, 인조8)에 온 읍의 선비들이 힘을 모아 사당(祠堂)을 세워 최덕지를 향사하고 최충성을 배향하였는데, 향사하는 일이 세월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여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먼 지방의 고루한 곳인 관계로 아직까지 조정에 사액(賜額)을 요청하지 못하여 사류(士類)의 수치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는 현인을 높이고 도를 중시하여 선비들이 행하고 싶어하는, 사문(斯文)의 누락된 전례(典禮)를 모두 흔쾌히 행하고 계시니, 신들은 지금 이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여럿이 함께 와서 대궐문 아래에서 명을 청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최덕지의 출처의 전말과 학문의 대체가 사류의 존경을 받을 만함을 살피시고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그를 표창하시어 먼 지방의 선비들이 현인을 존경하는 성심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시고, 후세에도 보고 느끼는 점이 있어 분발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신들은 우러러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주C-001]영암(靈巖) …… 소 : 작자의 나이 30세 때인 1680년(숙종6)에 지은 소로서, 작자의 부친인 김수항(金壽恒)이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살이할 당시에 작자가 부친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여러 번 왕래한 적이 있었던 인연으로 대작한 듯하다. 연촌서원은 세종과 문종 때의 문신인 최덕지(崔德之)와 그의 손자 최충성(崔忠成)을 향사(享祀)하는 서원으로, 전라남도 영암의 사류들이 1630년(인조8)에 세운 것이다. 당시에 최덕지의 생존시에 그린 초상화인 영정(影幀)이 그가 거처하던 존양루(存養樓)에 봉안되어 있었다. 《煙村遺事》
[주D-001]존양루(存養樓) : 최덕지가 남원 부사를 그만두고 내려와서 건립하여 거처하던 곳으로 영암 덕진면(德津面) 영보리(永保里)에 있는데, 존양당(存養堂)이라고도 한다.


 

 

 

 농암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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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연촌(煙村)을 바라보며


중류에서 노 한 쌍 춤을 출 무렵 / 雙楫舞中流
아침 해에 외론 뜸 걷어 올리니 / 孤篷卷初日
어디서 일어나나 아침 연기가 / 何許起朝煙
나무껍질 지붕의 썰렁한 마을 / 蕭然木皮室

 

농암집 제3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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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附錄)
연보 하(年譜下)



갑술년(1694, 숙종20) 선생 44세
○ 1월에 봉인사(奉印寺)에 머물렀다.
이 절은 양주(楊州)에 있다. 이때에 모친이 영평(永平)에서 양산(楊山)의 묘사(墓舍)로 나와 거처하였는데, 선생이 늘 왕래하며 문안하였다. 이후로 수년 동안은 대부분 이 절에서 독서하였다고 한다.
○ 4월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정을 아뢰고 사직하였다.
이때에 흉악한 무리가 쫓겨나고 왕비가 복위되었으며, 상이 특명으로 의정공(議政公 김수항(金壽恒))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이러한 제명(除命)을 내렸다. 그러나 선생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천지 사이의 일개 죄인으로 그 불효한 죄가 위로 하늘까지 알려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오늘에 와서 보니 속죄할 길이 없음을 더욱 잘 알겠습니다. 옛날 제영(緹縈)은 일개 여자였는데도 한 통의 편지로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켜 아비를 형벌에서 구제하였고, 전횡(田橫)의 식객들은 혈육의 은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기 하나로 뭉친 사이였는데도 죽기를 주저하지 않고 지하에까지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신은 선신이 화를 당할 때에 나아가서는 대궐 문에 머리를 짓찧으며 아비를 살려 달라고 빌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또 칼에 엎어져 함께 죽지 못하였으니, 이는 남자의 몸으로 일개 연약한 여자만도 못하고 부자간의 은정으로 도리어 의리로 뭉쳐 추종하는 식객만도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 제(齊)나라 여자가 하늘을 향해 통곡하자 궁전에 폭풍이 몰아치고 연(燕)나라 신하가 통곡하자 한여름에 된서리가 내렸습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위로 하늘에까지 사무쳐 재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은 외진 산골로 달아나 통한을 참고 구차히 살면서 한 번도 지성으로 분발해서 천지신명을 감동시켜 총명하신 성상께서 한번 깨달아 주시기를 바라지도 못하고 부질없이 세월만 보내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지극히 인자하고 명철하신 전하가 아니었다면 신은 비록 늙어 죽어 시체가 골짜기에 버려지더라도 끝내 선신의 원통한 사연을 밝혀 죄인의 명부(名簿)에서 이름을 지우지 못했을 것이니, 예로부터 자식으로서 불효했던 자를 통틀어 보더라도 어찌 또 신처럼 심한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신에게는 마음속에 더욱 통탄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선신이 조정에 섰던 40년 동안 임금을 섬기고 스스로 처신했던 법도와 나라를 근심하고 공무를 봉행했던 절개는 그 전말이 잘 알려져 있으니 다시 진술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선신은 조심하고 삼가서 권세와 지위를 자처하지 않고 겸손과 검약으로 시종일관하였으니, 귀신의 시기와 인도(人道)의 화를 자초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형제는 한 가지 덕행과 재능도 없으면서 연줄을 타고 요행히 기회를 만나서 연달아 조정에 올라 청현직(淸顯職)을 지내고 급작스레 하대부(下大夫)의 반열에 올라 영광과 총애가 눈부시게 빛나서 세상 사람들의 지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신들은 ‘능력이 못 미치는 자리에 있으면 화를 부른다.’는 경계와 ‘분수에 만족하라.’는 교훈을 생각지 않고 미련하게 나아가서 높은 자리에 오르도록 물러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가득 차서 기우는 재앙이 선신에게만 미치게 하고 신은 요행히 그 화를 면하였으니, 불효가 이보다 더 클 수는 없습니다. 신은 늘 생각이 이에 미칠 때마다 부끄럽고 원통하여 식은땀과 눈물이 함께 흐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영원히 농부로 살다 죽을 것이지 다시는 사대부의 반열에 끼지 않으리라 맹세한 지 오랩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일시적인 기회를 다행으로 여겨 지난날 품어 온 오랜 뜻을 잊고 금세 다시 갓끈을 날리고 인끈을 차고서 세상에 뛰어든다면 인효(仁孝)한 군자에게 거듭 죄를 얻어 지하에서 선신을 볼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아무리 미련하다 하나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소인배들로 인한 재앙이 어느 시대라고 없었겠는가마는 지난번만큼 참혹한 경우는 있지 않았다. 평소에 나라를 사랑한 선경(先卿)의 순수한 정성은 신명(神命)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그 심사(心事)를 드러내어 밝히지 못하고 저승에서 한(恨)을 머금게 되었으니,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이것은 나의 허물로서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다. 아, 그러나 천도(天道)가 선한 이에게 복을 내리는 이치는 어그러지지 않아 지극히 억울한 누명이 깨끗이 벗겨지고 간사한 무리가 변방으로 쫓겨났으니, 그대가 조정에 서는 데에 어찌 털끝만치라도 불안한 점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이때에 친척과 벗들은 대부분 아무쪼록 왕명을 받들라고 권유하고 가족들 중에도 그렇게 말하는 이가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나는 머리에 사모(紗帽)를 쓰지 않겠다고 결단한 지가 오래되었다.” 하고는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 5월에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남상 구만(南相九萬)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때는 환국(換局 갑술환국)이 단행된 초기였는데 남공이 영의정으로 국정을 담당하면서 남몰래 사사롭고 부정한 생각을 품어 토죄(討罪)가 엄격하지 않았다. 선생이 이에 울분과 개탄을 참지 못한 나머지 편지를 보내어 할 말을 다 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제가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이 국면에 대처할 계책을 세우는 사람은 마땅히 생사와 화복은 제쳐 놓고 눈앞에 오직 도리만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숨을 바쳐 일을 해 나가되 털끝만치도 눈치를 살피거나 이해를 계산하는 사심이 그 속에 끼어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한 뒤에야 나랏일을 제대로 할 수 있고 인심(人心)을 승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이른바 한 무리의 사류(士類)라는 자들이 대체로 다 혹독한 시련을 겪어서 의기가 꺾이고 풀이 죽어 넋이 나가고 생기가 없는 나머지 더 이상 바르고 곧으며 강인하고 예리한 기운이 없습니다. 게다가 훗날 정국이 뒤바뀔까 하는 염려 때문에 논의할 때에 오로지 어물거리며 간흉을 보호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자신의 몸과 집안을 아끼는 것을 장책(長策)으로 삼고 있습니다.
대각(臺閣)에서는 구차하고 가식적인 행태가 더욱 심하여 죄를 성토하고 악을 징벌하는 모든 일을 임금께 맡겨 버리고 자신이 직접 담당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간혹 공론에 못 이겨 한두 사람을 논죄하여 축출할 때에도 반드시 완곡하게 감싸 주고 구차하게 대충대충 넘어가서 논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죄명조차 제대로 붙이지 못하곤 합니다. 이렇게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주저하고 겁을 내어 위축되어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수치스럽고 분하고 애통합니다.
아,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선비들의 의기가 저하된 것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혹시 불행히 국가에 변고라도 생긴다면 어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절개와 의리를 지킬 자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근심이 비단 죄를 성토하는 것이 엄정하지 못한 데에 있을 뿐만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토죄(討罪)하는 의리를 가지고 말하자면, 저 흉악한 무리가 스스로 지은 재앙은 이미 온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분명히 알려져 부녀자와 아이들, 하인들과 군졸들조차 모두 손가락질하고 온갖 욕을 하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똑같이 분하게 여기는 자에게는 하늘의 토죄가 반드시 가해지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한 의리에 밝지 못하여, 일체 너그럽게 용납하고 되도록 가벼운 벌을 적용하면서 겉으로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오점을 남기겠다.’라고 스스로 핑계를 대고 속으로는 후환을 염려하는 사심을 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항간과 초야에서는 민심이 분통해하고 공론이 들끓어 막을 수 없는 지경인 반면, 간흉들은 손뼉을 치며 축하하고 남몰래 세력을 키우면서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마음이 없으니, 훗날의 화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저는 합하께서 전일한 마음과 곧은 도로 꿋꿋하게 토죄를 주재하되, 사마공(司馬公 사마광(司馬光))의 이른바 ‘하늘이 만일 송(宋)나라에 복을 내린다면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마음을 먹고, 주 부자(朱夫子)의 ‘범 충선(范忠宣 범순인(范純仁))은 남몰래 훗날 스스로를 보전하려는 계산을 하였다.’라는 비난을 경계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사대부의 기상을 진작시켜 그들이 빠져 있는 나쁜 습성을 씻어낼 수 있을 것이며, 하늘의 토죄가 행해져 간흉들이 모두 그 죄의 대가를 치러서 세도(世道)와 국사가 의지할 데가 있게 될 것입니다.”
○ 가족을 데리고 도성을 나가 양주(楊州) 금촌(金村)에 우거하였다.
모친을 문안하기에 편하였기 때문이다.
○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에 차임되었다.
○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옮겨졌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6월에 세 번째 상소를 올려 선친의 경계를 끌어대며 완강히 사직하였다.
상소의 대략에,
“신의 망부(亡父)가 임종하는 날 유계(遺戒) 한 장을 손수 써서 신의 형제들에게 주었는데, 그 내용 중에, ‘나는 본디 재주와 덕이 없는데 다만 선대의 음덕에 의지하고 나라의 은혜를 후히 받아서 분수에 넘게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재앙을 자초하였다. 오늘의 일은 모두 높은 지위에 올라도 그칠 줄 모르다가 물러나려 해도 물러날 수 없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내 자손들은 나와 같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여 항상 겸손한 뜻을 품어, 집에서는 공손하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벼슬할 때에는 현요직(顯要職)을 피함으로써 몸을 편안히 하고 집안을 보전하는 터전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의 형제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유훈을 받아 간직하고 감히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신의 아비의 뜻은, ‘가득 찬 복은 천도(天道)가 덜어 내기 마련이고, 큰 세력과 높은 지위는 사람들이 시기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책임이 중하면 거기에 부합하기 어려워 허물이 생기고, 명망이 높으면 거기에 부응하기 어려워 비방이 돌아오는 법이다. 이는 예로부터 누구나 우려해 온 것인데 자신은 불행히 이미 그 허물에 걸려들었으니, 후손들은 더 이상 위험한 처지에 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간곡히 경계했던 것이니, 그 말이 지극히 간절하고 그 뜻이 매우 슬픕니다. 이는 후손들이 심장과 뼛속에 아로새겨 영원히 지켜나가야 할 것인데 더구나 신 자신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지금 삼사(三司)의 직책이 어느 것인들 현요직이 아니겠습니까마는,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은 더더욱 신중하게 제수해야 할 자리입니다. 신이 만일 은총 어린 녹봉이 좋아할 만하다는 것과 위엄스러운 임금의 명령이 두렵다는 것만 알고 염치 불고하고 나아가 영화로운 자리에 의기양양하게 앉는다면, 이는 죽음을 앞두고 남긴 선친의 말을 무용지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신이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그대가 진술한 일이 비록 선경(先卿)의 유계(遺戒)라고는 하나, 조정에서 이미 환히 알고 깨끗이 설원(雪寃)하였으니, 나와서 벼슬에 봉직하는 데에 어찌 털끝만치라도 불안할 것이 있겠는가.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서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 대사간으로 옮겨졌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농암(農巖)에 들어가 청령뢰(淸泠瀨) 가에 정자를 지었다.
상량문에 “종신토록 피눈물을 닦으며 왕부(王裒)처럼 〈육아(蓼莪)〉를 외는 것을 폐하였고 거친 골짝으로 도망가 유신(庾信)처럼 갈대로 엮은 사립문을 닫았다. 지금 마침 국운이 다시 돌아온 때를 만나니 신세에 대해 더욱 많은 감회가 일어난다. 움막살이 속에서도 요행히 목숨을 보전하고픈 마음이 본디 없는데 저 금옥으로 장식한 대궐을 무슨 심정으로 다시 들어가겠는가. 우군(右軍)이 무덤 앞에서 한 맹세는 분명히 끝까지 변치 않을 것이고 소초(小草)가 산 밖으로 나간 것은 내심 매우 부끄러울 일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선생의 심사가 이 몇 구에 다 드러났다고 한다.
○ 8월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 9월에 우부승지로 승진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좌상(左相) 현석(玄石) 박공 세채(朴公世采)가 경연에서 아뢰기를, “김 아무개는 문사(文辭)가 전아하고 풍부한 데다 참화를 당한 뒤로 경전에 마음을 두어 학문의 조예가 깊고 선비들 사이에서 명망이 극히 높습니다. 이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 필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고, 이때에 이르러 남상 구만(南相九萬)이 또 선생의 재주와 인망은 따를 자가 드물다고 하며 특별히 힘써 불러들이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은 후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 좌부승지로 승진되었는데,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10월에 세 번째 상소를 올리자 상이 체직을 윤허하였다.
상소의 대략에,
“신이 듣건대, ‘군자가 조정에 서서는 반드시 자신의 뜻을 실천하고, 충신이 임금을 섬길 때에는 목숨을 바쳐야 하니,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벼슬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지조를 굽혀 유리한 것은 따르고 불리한 것은 피해 가며 오직 구차히 녹을 받고 편안히 지내는 것으로 말하면 현명한 임금에게 버림받고 치세(治世)에 수치로 여겨지는 것이 그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신은 본디 대대로 국록(國祿)을 받아 온 집안의 자손으로서 이러한 의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신의 증조 문정공(文正公) 신(臣) 상헌(尙憲)은 정직하고 강직함으로 여러 대에 걸쳐서 임금을 섬겨 사림의 영수(領袖)가 되었는데, 무엇보다 군자와 소인, 선과 악의 구분에 가장 엄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묘(仁廟) 초기에 조정의 논의가 오로지 잘못을 덮어 주고 포용하는 쪽으로 쏠렸는데, 신의 증조만은 선을 드러내고 악을 배격하는 논의를 힘껏 주장하며 시종 변치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여러 번 소인배들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어 마침내 유석(柳碩), 이계(李烓) 등의 무함(誣陷)을 받았고, 심지어는 그들이 외국과 비밀히 결탁하여 모의하는 바람에 거의 죽을 뻔하다가 다행히 화를 면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신(先臣) 수항(壽恒) 때에 와서도 증조가 남긴 법도를 준수하여 감히 실추시키지 않았습니다. 선신은 경신년에 환국(換局)이 단행되었을 때에 영의정에 올랐는데, 당시 사람들은 훗날 정국이 뒤바뀌었을 때의 일을 상당히 걱정하였으나 선신만은 사마광(司馬光)의 ‘하늘이 만약 송(宋)나라를 돕는다면 필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마음을 먹고 범순인(范純仁)이 내심 훗날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던 일을 경계로 삼아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조금도 굽힘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 때문에 큰 화에 빠졌지만 또한 후회는 없었습니다.
신은 진정 나약하여 스스로 뜻을 세우고 지키지는 못했지만 가정에서 보고 들은 것이 이러했기 때문에 늘 ‘신하가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길 때에는 오직 이러한 도리를 따라야 하니, 이해와 화복은 개의할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의 논의와 사대부의 취향을 보면 이와 크게 다른 듯합니다. 신이 이러한 때에 가정에서 배운 것을 그 속에서 행하려 한다면 필시 모순되어 서로 맞지 못할 것이요, 선인의 유훈을 저버리고 한때의 관습을 따라 구차히 영합함으로써 용납되기를 바라는 것은 더욱 신이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옛사람의 말에 ‘헤아려 본 뒤에 들어가는 것이지 들어간 뒤에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신이 비록 못났지만 자신을 헤아리고 시대 상황을 헤아리는 것은 이미 충분히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몸이 한번 조정에 들어가면 그 형세가 필시 걸핏하면 마찰을 빚고 수없이 혐의와 시기를 부르게 되어 나라에 실오라기만큼도 득이 되지 못할 줄을 스스로 잘 압니다. 신이 밤낮으로 심사숙고해 보았지만 정말 불초한 신의 몸을 공사(公私) 간에 아무 도움도 못 되고 진퇴에 아무 기준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필부(匹夫)의 뜻은 뺏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에게 있어 특히 나아가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인데, 전에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 마침내 전하께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벼슬하지 않은 것은 비록 화를 당하여 스스로 그만둔 것이기는 하나, 시대 상황을 헤아려 보고 나아가기 어려워한 의리를 또한 볼 수 있다.

을해년(1695) 선생 45세
○ 1월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 3월에 농암(農巖)에 들어갔다.
선생은 이때부터 반드시 봄가을로 풍광이 좋은 날에 자제와 문생을 데리고 산에 들어가서 노닐다 돌아오곤 하였는데, 그것이 매년 정례적인 일이 되었다고 한다.
○ 4월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다가 장(狀)을 올려 사직하자 체직되었다.
○ 5월에 여주(驪州)에 갔다.
둘째 딸인 이씨 부인(李氏婦人)의 병 상태를 보기 위한 것이었다.
○ 7월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발탁되어 제수되었는데, 세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8월에 비국(備局)의 품계(稟啓)로 인하여 체직되었다.
○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제수되었다.
○ 9월에 농암에 들어갔다.
○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10월에 상소하여 사직하고 장(狀)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11월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옮겨졌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머물렀다.
당시 선생은 미음(渼陰)에 우거하며 늘 서원에 왕래하였는데, 미음과 서원은 모두 양주(楊州) 땅에 있다. 이때에 이르러 서원에 머물며 강학하였는데, 원근의 선비들이 매우 많이 와서 모였다.
○ 12월에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병자년(1696) 선생 46세
○ 2월에 창계(滄溪) 임공(林公) - 영(泳) - 의 상에 곡하였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임공과 사이가 좋았는데, 화를 당한 뒤로는 더욱 도의로 서로 격려하였으며 뜻이 맞아 인정하기를 더욱 깊이 하였다. 이때에 와서 선생이 매우 애통해하였는데, 뒤에 만사(挽詞)와 제문을 지었고 또 그의 유집(遺集)에 서문을 썼다.
○ 3월에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 농암에 들어가서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 철원부(鐵原府)의 관아에 가서 몽와공(夢窩公 김창집(金昌集))을 문안하였다.
○ 4월에 미음(渼陰)으로 돌아왔다.
○ 5월에 홍문관 제학을 겸임하였다.
○ 6월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7월에 인천부(仁川府)에 가서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부인을 문안하였다.
이때에 부인이, 아들 이희조(李喜朝)가 재직 중인 인천부 관아에 있었다. 그래서 가서 문안하고 돌아온 것이다.
○ 황생 주하(黃生柱河)의 상에 곡하였다.
황생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아름다운 데다 옛것을 좋아하고 학문에 힘썼다. 그런데 불행히 급작스레 죽자 선생이 애통하게 곡하고 애사를 지어 애도의 뜻을 지극히 표현하였다.
○ 8월에 농암에 들어갔다가 원주(原州)로 향하여 황생의 장례를 보고, 청평(淸平)과 한계산(寒溪山)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동정기(東征記)〉가 있다.
○ 9월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세 번 상소하여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11월에 수원(水原) 만의촌(萬義村)에 가서 우재(尤齋) 선생의 개장(改葬)을 보았다.
제문(祭文)을 지어 올렸는데, 그 끝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엮으신 일은 후세에 영원토록 은덕을 끼치신 것인데, 선군자가 이미 일찍이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 내용을 상의하여 바로잡았고, 어리석은 소자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간혹 문장의 뜻과 사실에 대한 고증에 관해 살펴 질정(質正)을 구하면 늘 제 견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이전의 설을 버리기를 아까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담아도 새지 않겠다고 칭찬하시고 스승인 당신보다 제자인 제가 낫다고 허여하셨으며, 마지막에는 또 있는 힘을 다하여 정리를 잘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화기(禍機)가 이미 임박한 상황에서도 간곡히 당부해 마지않으시더니 제주도로 유배 가서는 황강(黃江 권상하(權尙夏))에게 편지를 보내어 부탁하시고, 오산(鼇山)에서는 또 밤에 막내아우에게 직접 명하시기를, ‘내가 죽어도 손자 주석(疇錫)이 있으니 그 아이와 힘을 합쳐 이 일을 끝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변고가 일어나 영손(令孫)마저 갑자기 별세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문목(問目) 초고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기는 하나 앞으로는 누구와 논의한단 말입니까. 여러 벗들에게 두루 물어보자니 다양한 의견을 절충하지 못할까 염려스럽고, 독단적으로 수정하자니 혹 선생의 뜻에 위배될까 두렵고, 수정하지 않고 예전 그대로 놓아두자니 또 완전하지 못하여 지난날 간곡히 당부하신 뜻을 저버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소자는 이에 늘 유편(遺編)을 품고 장탄식하면서 황천에 가서 여쭙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였습니다. 아, 어쩔 수 없나 봅니다. 하늘이 사문(斯文)을 돕지 않으시니 영원히 한이 남게 되었습니다.”
송 선생이 살아 있을 적에 《주자대전차의》를 수정하는 일이 3분의 1도 끝나지 않았다. 선생은 유촉(遺囑)을 받고 나서 더욱 깊이 그 일에 마음을 두어 강구하고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권공(權公)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평론하였는데, 아무리 화변을 당하여 경황이 없고 병을 앓아 고생스러운 상황이라 해도 잠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선생의 평생 정력이 모두 이 책에 담겨 있으니, 그 의미를 드러내어 밝혀서 더 이상 남겨진 뜻이 거의 없다. 그런데 무자년까지도 일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또 무궁한 한으로 남았다.

정축년(1697) 선생 47세
○ 2월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농암(農巖)에 들어갔다.
○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 3월에 미음(渼陰)으로 돌아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윤달에 제생(諸生)과 함께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찾아갔다.
사흘을 묵고 돌아왔는데, 밤에 무우단(舞雩壇)에서 술을 마시며 차례로 술을 돌리는 예를 행하고 운(韻)을 나누어 시를 지어 읊었으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사우(祠宇)를 방문하였다.
○ 4월에 장(狀)을 올려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6월에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 부제학으로 옮겨졌다.
○ 8월에 삼주(三洲)에 거처를 정하였다.
선생은 본디 농암에서 여생을 마치려 하였으나, 모친이 이때에 서울 집에 있었기 때문에 문안하고 모시기에 편리하도록 근교에 머문 것이다. 그리고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주변 산수가 깨끗하게 탁 트여 한가로이 거처하며 늘 학문에 힘쓰는 즐거움이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그곳에 거처를 정한 것이다. 몇 칸짜리 사랑채를 지어 거처하면서 삼산각(三山閣)이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앞에 모래톱 세 개가 있기 때문에 그곳을 또 삼주(三洲)라고 명명하였다.
○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민언휘(閔彦暉) - 이승(以升) - 의 편지에 답장하였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서문의 소주(小註)에 나오는 운봉 호씨(雲峯胡氏 호병문(胡炳文))의 설(說)에, “주자(朱子)가 사서(四書)의 인(仁), 의(義), 예(禮)에 대해서는 모두 확정된 풀이가 있으면서 유독 ‘지(智)’ 자에 대해서만은 분명한 풀이가 없다. 그래서 지난날 외람되이 주자의 뜻을 취하여 ‘지(智)는 심(心)의 신명(神明)으로, 온갖 이(理)를 묘합(妙合)하고 만물을 주관하는 것이다.’라고 보충하고 싶었다.” 하고, 파양 심씨(番陽沈氏 심귀보(沈貴珤))의 설에, “지(智)는 천리(天理)의 동정(動靜)의 기틀을 포함하고, 인사(人事)의 시비(是非)의 거울을 갖춘 것이다.”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이 두 설을 그르다고 여겨 “이 두 설은 단지 심(心)의 지각(知覺)만 말한 것으로, ‘지(智)’ 자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리고 지(智)는 이(理)인데 ‘온갖 이(理)를 묘합한다’느니 ‘천리를 포함한다’느니 말한다면, 이는 이(理)로써 이(理)를 묘합하고 이(理)로써 이(理)를 포함하는 꼴이니 더더욱 온당치 않은 것 같다.”라고 하였다. 민언휘가 선생의 이러한 설을 듣고 편지를 보내어 논란하였기 때문에 선생이 답한 것이다. 그 대략에,
“성(性)은 심(心)이 갖추고 있는 이(理)이고 심은 성이 담겨 있는 그릇입니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이른바 성인데 그 체(體)는 지극히 정미하여 볼 수가 없고, 허령한 지각이 이른바 심인데 그 용(用)은 지극히 신묘하여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성이 아니면 심에 준칙이 없고 심이 아니면 성이 운용될 수 없으니, 이것이 심과 성의 구분입니다. 두 가지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지만 섞일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심과 성을 말하는 자가 심에 나아가 성을 가리키는 것은 옳지만 심을 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유자(儒者)가 학문할 적에 정밀히 살피고 분명히 분변해야 할 것은 이보다 더 우선인 것이 없으니, 여기에서 혹시라도 어긋나면 불가(佛家)의 견해로 떨어져 버릴 것입니다.
지(智)에 대한 운봉의 풀이가 비록 주자의 설을 모은 것이라고는 하나, 주자의 설은 본디 《대학》의 ‘치지(致知)’의 지(知)를 풀이한 것입니다. 저는 이 지(知) 자가 과연 인, 의, 예, 지의 지(智) 자와 같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신명(神明)’과 이른바 ‘묘합한다’, ‘주관한다’는 것이 과연 성의 체(體)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아니면 심의 용(用)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제 생각으로 말하면, 지(智)는 시비의 이치로 오성(五性)의 하나이고 지(知)는 허령한 지각의 묘용(妙用)으로 심의 용만을 가리킵니다. 시비의 이치가 실로 허령한 지각의 용에 발현되는 것이니, 요컨대 이 두 가지를 혼동하여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 지(知)에 대한 풀이를 가지고 지(智)의 풀이로 삼았으니 어찌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주자는 일찍이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성은 곧 이이다.[性卽理也]’라는 구절에 대해 “예로부터 이렇게 말한 분이 없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성(五性)을 풀이할 적에 반드시 이(理)를 위주로 하였는데, 《논어혹문(論語或問)》과 옥산강의(玉山講義)가 가장 상세합니다. 《혹문》에서는 ‘지(智)는 분별의 이(理)로, 그것이 발현되어 시비가 된다.’ 하고, 강의에서는 ‘지(智)는 시비를 분별하는 도리이다.’ 하였습니다. 이는 그 의미를 천명한 것이 정밀하고 정확하여 고칠 것이 없는데, 이른바 ‘심에 나아가 성을 가리킨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반면에 ‘심의 신명으로 온갖 이(理)를 묘합하고 만물을 주관한다.’는 말은 오로지 허령한 지각의 뜻을 형용한 것이니, 이(理)를 위주로 말하는 것과 자연 뜻이 다릅니다. 이것으로 지(智)를 풀이한다면 어찌 이른바 ‘심을 성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운봉은 심과 성의 구분에 대해 밝지 못한 점이 있다고 의심하는 이유입니다.
파양(番陽)의 설은 비록 이와 조금 다른 듯하기는 하나, ‘천리(天理)의 동정(動靜)의 기틀을 포함한다.’는 것은 또한 이 심(心)의 영명(靈明)한 운용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니, 운봉의 견해와 거의 같다 하겠습니다. 지(智)는 시비를 분별하는 도리인데 지금 ‘온갖 이(理)를 묘합한다’느니 ‘천리를 포함한다’느니 하고 말하였으니, 이를 두고 ‘이(理)로 이(理)를 묘합한다’, ‘이(理)로 이(理)를 포함한다’고 하지 않고 무어라 하겠습니까.
저는 이런 의심을 품어 온 지가 오래되었으나 감히 자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 부자(朱夫子)가 반겸지(潘謙之 반병(潘炳))에게 답한 편지에, ‘성(性)은 이(理)일 뿐이고 정(情)은 흘러나와 운용되는 부분이며 심(心)의 지각은 이 이(理)를 갖추고 이 정(情)을 행하는 것이다. 지(知)를 가지고 말해 보자면, 시비를 알게 되는 이(理)는 지(智)이니 성(性)이고, 시비를 알아서 시비하는 것은 정(情)이며, 이 이(理)를 갖추고 시비임을 깨닫는 것은 심(心)이다.’라고 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심과 성의 구분에 대해 극히 정미한 것으로, 세밀하고도 낱낱이 분석하여 더 이상 분석의 여지가 없으니, 아마도 만년(晩年)의 정론(定論)인 듯합니다. 기타의 같고 다른 설들은 《주자어류(朱子語類)》에 기록된 것을 막론하고 비록 당시 손수 쓰신 것이라 해도 이 말을 기준으로 절충하여 취사(取捨)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운봉이 지(智)를 풀이한 것은 바로 이 편지의 이른바 ‘심의 지각은 시비임을 깨닫는 것이지, 시비를 아는 이(理)가 아니다.’라는 것이니, 그렇다면 그것이 심을 성으로 이해한 것임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리하여 감히 과거에 제가 품었던 의심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자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민언휘는 이전의 설을 고집하여 편지를 6, 7번이나 보내왔는데, 선생은 그 과정에서 낱낱이 논파하여 철저히 드러내어 밝혔다. 상세한 것은 문집에 보인다.
○ 11월에 광주(廣州) 수종사(水鍾寺)에 머물며 의정공(議政公)의 행장을 지었다.

무인년(1698) 선생 48세
○ 7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8월에 상이 건원릉(健元陵)을 참배할 적에 들에 나가 엎드린 채 대가(大駕)를 멀리서 바라보고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대사간 윤세기(尹世紀)가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김(金) 아무개는 문학과 학식으로 조정 신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실로 그 동배(同輩)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게다가 십수 년 전부터 벼슬길에 뜻을 끊고 독서하며 이치를 궁구하였으니, 이런 사람을 조정에 불러들인다면 도움 되는 일이 어찌 적겠습니까. 능행(陵幸) 때에 필시 그가 길가에서 맞이하여 첨배(瞻拜)할 텐데, 상께서 특별히 불러 만나보고 대의(大義)로 권면하신다면 구구한 사사로운 분의(分義)를 어찌 감히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뒷수레에 태운 일도 있었으니, 불러서 만나보고 권면하신다면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진달한 것이 절실하니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교리(校理) 윤지인(尹趾仁)이 나아가 아뢰기를,
“김 아무개는 재주와 명망이 동배들 중에 특출하니, 조정 신료들이 그를 초치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뒷수레에 태워 오는 것은 아래에서 감히 청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비유가 옳지 못하여 상당히 체모를 잃었습니다.”
하자, 승지 조태채(趙泰采)가 아뢰기를,
“독서하며 이치를 궁구하고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는 김 아무개의 행적은 오늘날 세상에서 추중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과거를 통해 출신(出身)하였기 때문에 상께서 그를 대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과 똑같으십니다만, 옛 유현(儒賢)들 중에는 과거를 통해 출신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는 옛사람에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니, 만약 능소(陵所)에서 불러 만나 보시고 군신간의 대의를 당부하신다면 그도 대대로 국록을 먹어 온 집안의 신하로서 어찌 한사코 떠나려고만 하겠습니까. 뒷수레에 태우는 일로 말하면 당 태종(唐太宗)도 방현령(房玄齡)을 그렇게 한 일이 있습니다만, 대사간은 꼭 이 일을 오늘날 행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그런 일도 있었다고 운운한 것뿐입니다. 옥당에서 이 말에 대해 심각하게 공격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대신(臺臣)이 마침내 윤지인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고 대사간도 인피(引避)하였다. 능행(陵幸)하는 날 선생은 감히 능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또 집에 있는 것도 온당치 못하여 집 뒤의 들에 나가 엎드려 있다가 대가가 지나간 뒤에 즉시 돌아왔다. 돌아가는 길에 상이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서 사알(司謁)을 시켜 김 아무개가 근처에 와 있는지 여부를 물어보게 하였는데 오지 않았다고 승정원에서 대답하였다. 이에 지평 최중태(崔重泰)가 상소하여 그들의 모호한 태도를 비판하기를, “성상께서는 이렇게까지 간절히 생각하시는데 신하들은 그렇게 범범히 처리하였으니, 신은 내심 개탄스럽고 안타깝습니다.” 하였다.
○ 장(狀)을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은 회유(回諭)를 내려 돈독히 불렀다.
전교하기를,
“‘경의 학식과 문학은 내 익히 알고 있다. 지금처럼 어려움이 많은 때에 대대로 국록을 먹어 온 경의 입장에서 나라와 고락을 함께하는 의리를 어찌 차마 나 몰라라 할 수 있겠는가. 부디 군신간의 대의를 유념하여 구구한 사사로운 의리를 끝까지 지키려고만 들지 말고 안심하고 올라와서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고 회유하라.”
하였다.
○ 9월에 세 번째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상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어제 삼가 성상의 하유를 받들고 보니 칭찬이 융숭하고 당부가 간절하여 미천한 신이 감히 받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 신은 두렵고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신은 본디 어리석고 고루하여 백에 하나도 잘하는 것이 없습니다. 학문은 경학에 밝지 못하고 식견은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며 문장은 당대의 필요에 적합하지 못하니, 어느 모로 보나 일개 무능하고 용렬한 사람일 뿐입니다. 신은 지난날 오랫동안 경연에서 모시면서 졸렬함이 다 드러났으니 전하의 밝은 지혜로 어찌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급작스레 이 분수에 넘은 분부를 내리신 것은, 어찌 얼마 전 연석(筵席)에서 여러 신하들이 지나치게 신을 칭찬하여 성상을 속이자 성상께서 못 이긴 체하고 우선 그들의 뜻을 따라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성인의 한마디 칭찬은 화려한 의복을 하사받는 영광에 비할 것이 아니니, 걸맞은 점이 전혀 없는 신에게 경솔히 베푸시어 성인의 말씀의 중한 가치를 훼손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리고 신은 요사이 내심 마음이 편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며칠 전 경연에서 대사간이 진달한 말은 대의가 이미 잘못된 데다 뒷수레라는 말은 더욱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옥당에서 그를 비판한 것은 정말 지나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헌부 관원들이 뒤이어 그를 추고(推考)하도록 청함으로써 유신(儒臣)을 난처하게 하여 모양이 좋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이 신의 마음이 편치 못한 첫 번째 일입니다.
상께서 능(陵)을 참배하시던 날 신은 몸져누워 있었고 또 다른 사람들과 처지가 다른 관계로 길가에서 공경히 맞이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수와 의리상 집 안에 태연히 있을 수도 없었기에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대가를 바라볼 수 있는 야외에 가서 멀리 수레의 먼지를 바라보며 간소하나마 정성을 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뒤에 삼가 들으니 돌아가시는 길에 성상께서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특별히 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셨다 하니, 신은 이것만으로도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또 들으니 사헌부 관원이 승정원이 잘못 대답했다고 하며 그의 모호한 태도를 비판하였다고 합니다. 신은 애당초 사람들을 따라 지영(祗迎)한 적이 없고 다만 흰옷을 입고 밭 사이에 엎드려 있기만 하였는데 그곳은 또 한길과의 거리가 꽤 멀었으니, 그 누가 그러한 줄을 알았겠습니까. 더구나 상께서 돌아가실 때에 신은 이미 집에 돌아온 지 오래되었으니 승정원의 대답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사헌부 관원이 대뜸 비판하고 지적하여 마침내 여러 신하들이 인혐(引嫌)하여 소장을 분분히 올리는 사태를 초래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편치 못한 두 번째 일입니다.
신의 행방이 무슨 중대한 문제이기에 이 일 때문에 조정에서 논쟁이 겹겹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식견이 있는 사람이 곁에서 본다면 필시 손뼉을 치며 웃을 것이니, 신의 입장에서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어찌 이루 다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 두 가지 편치 못한 일이 없었다 해도 염치 불고하고 나아갈 까닭이 없지만, 신의 생각을 성상께 감히 다 아뢰지 않을 수도 없기에 이렇게 아뢰는 바입니다.”
○ 네 번째 상소를 올려 본직(本職)에서 체직되었다.
○ 10월에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찾아갔다.
이틀을 묵고 돌아왔다.
○ 11월에 모친을 모시고 강화부(江華府)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에 몽와공(夢窩公 김창집(金昌集))이 강도(江都)의 유수(留守)로 있었다. 그래서 선생이 가마를 모시고 간 것이다.

기묘년(1699) 선생 49세
○ 1월에 강화부에서 모친을 문안하고 돌아왔다.
○ 3월에 강화부에서 모친을 문안하였다.
○ 송도(松都)의 천마산(天磨山)을 유람하고 다시 강화로 돌아갔다.
아우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과 자질(子姪)들이 함께하였다.
○ 4월에 몽와공을 모시고 보문암(普門庵)을 유람하였다.
보문암은 섬에 있는데 경치가 상당히 수려하다.
○ 삼주(三洲)로 돌아왔다.
○ 5월에 형의 아들 호겸(好謙)의 부음을 듣고 강화부에 가서 곡하고 돌아왔다.
○ 6월에 광주(廣州)에 가서 의정공(議政公 김수항(金壽恒))의 묘지석(墓誌石)을 굽는 일을 감독하였다.
○ 7월에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윤달에 이조 참판으로 옮겨졌는데, 세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농암(農巖)에 들어갔다.
○ 9월에 강화부에서 모친을 문안하고 돌아왔다.
○ 10월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좌의정 서문중(徐文重)과 인척으로 피혐 관계에 있고 이종형 이공 세백(李公世白)이 우의정이었는데 모두 사관(史館)의 직책을 겸임하였다. 그래서 규례를 끌어대어 사직해서 체직된 것이다.
○ 12월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강화부에서 모친을 문안하였다.

경진년(1700) 선생 50세
○ 1월에 삼주(三洲)로 돌아왔다.
○ 네 번째 상소하여 사직해서 본직에서 체직되었다.
○ 2월에 서원의 석채(釋菜)에 참여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다.
○ 3월에 농암에 들어갔다.
10여 일 동안 머물다 돌아갔다. 백로주(白鷺洲), 금수정(金水亭), 창옥병(蒼玉屛) 등 여러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였는데, 선생은 매번 이르기를, “이번 걸음에 유람한 경치는 전에 없이 마음에 든다.” 하였다.
○ 6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7월에 장(狀)을 올려 사직해서 본직에서 체직되었다.
○ 셋째 딸 오씨(吳氏) 부인(婦人)을 곡하였다.
○ 9월에 광주(廣州)에 가서 오씨 부인을 장사 지냈다.
○ 10월에 아들 숭겸(崇謙)을 곡하였다.
숭겸은 지기(志氣)가 뛰어나고 재주와 행실이 탁월하여 아는 이들이 모두 원대한 사업을 이룰 것으로 기대하였으며 선생도 부자간의 지기지우(知己之友)로 인정했다. 그런데 불행히 19세의 나이로 요절하자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이 모두들 서로 고하며 탄식하고 안타까워하였다. 숭겸은 또 시에 뛰어나 선생이 선창하면 번번이 화답시를 지어 올려 즐겁게 했었는데, 이때부터 선생은 마침내 종신토록 다시는 시를 읊지 않았다.

신사년(1701) 선생 51세
○ 1월에 석관촌(石串村)에 우거하였다.
동교(東郊)에 있는데, 아우 노가재(老稼齋) 창업(昌業)의 별장이다. 이때에 선생의 병이 깊어져서 의원을 대고 약을 쓰기 편하도록 우선 그곳에 머문 것이다.
○ 2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 3월에 백부 곡운(谷雲) 선생을 곡하였다.
○ 9월에 영지동(靈芝洞)에 가서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 선생의 개장(改葬)을 지켜보았다.
제문이 있다.
○ 11월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전에 언급한 혐의를 끌어대어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퇴계(退溪), 율곡(栗谷) 두 선생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에 관해 논하였다.
그 대략에,
“사단은 이(理)를 위주로 말한 것으로 기(氣)가 그 속에 들어 있고, 칠정은 기를 위주로 말한 것으로 이가 그 속에 들어 있다. 사단의 기가 곧 칠정의 기이고 칠정의 이가 곧 사단의 이인데, 다만 형언할 적에 각기 주로 삼는 것이 있을 뿐이다. 칠정은 기를 위주로 말한 것이라는 견해를 율곡(栗谷)은 그르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사(子思)가 대본(大本), 달도(達道)를 논하면서 ‘희로애락이 발한 것이 바로 천하의 달도이다.’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달도라고 한 것은 바로 인심의 기(氣)의 기틀은 동할 적에 절도에 어긋나기가 쉽기 때문에 반드시 이(理)를 따라 바르게 된 뒤에야 달도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자(程子 정이(程頤))도 ‘정(情)이 이미 성한데 더욱 동탕(動蕩)하게 되면 그 성(性)이 훼손된다.’ 하였다. 이천(伊川 정이)이 정(情)이 이(理)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은 또한 기를 위주로 하여 말했기 때문이다.
‘사단은 선(善) 한 쪽만 지니고 있고 칠정은 선과 악을 겸하고 있으며, 사단은 이(理)만을 말하고 칠정은 기를 겸하여 말한다.’는 율곡의 설이 명백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나의 견해는 그와 조금 다르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기를 겸하여 말한다.’는 한 구절 때문이다. 칠정이 비록 이와 기를 겸하고 있기는 하나 그중에 선한 것은 기가 이를 잘 따른 것이고 그중에 선하지 않은 것은 기가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애당초 기를 위주로 말해도 무방한 것이다.
퇴계는 이 부분이 극히 정미하여 형언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분석할 때에 번번이 두 갈래로 나누어 말하였는데, 기가 발하면 이가 타고 이가 발하면 기가 따른다는 것은 형언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그 정밀하고 상세한 뜻은 후세 사람들이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또 율곡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가운데 “선은 청명한 기(氣)가 발한 것이고 악은 혼탁한 기가 발한 것이다.”라는 단락에 관해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기 중에 청명한 것이 모두 선한 것은 물론이지만 선한 정(情)이 모두 청명한 기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정 중에 악한 것이 혼탁한 기에서 나온 것은 물론이지만 혼탁한 기가 발하면 그 정이 모두 악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중등(中等) 이하의 사람은 혼탁한 기가 많고 청명한 기는 적다. 그런데도 어린아이가 우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가슴이 철렁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지 않는 자가 없다. 이것이 어찌 모두 청명한 기가 발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매우 완악하고 어리석어 평소의 소행이 지극히 무도한 자도 누군가 제 어버이를 해치려는 것을 갑자기 보면 반드시 불끈 성이 나서 원수 갚을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람은 마음속에 혼탁한 기가 꽉 차 있으니 어찌 더 이상 조금이라도 청명한 기가 있겠는가. 다만 부자간의 사랑은 천성(天性) 중에도 가장 중한 것이라서 급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참마음이 발현되어 나오는 것뿐이다. 여기에서 사람의 성(性)이 선한 것은 천리(天理)상 필연적인 것으로서, 인심이 동할 적에 이(理)가 비록 기(氣)에 올라타기는 하나 기(氣)도 이(理)에게 명령을 듣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만약 선한 정과 악한 정의 원인을 한결같이 기의 청탁(淸濁)으로 돌린다면 이(理)의 실체, 곧 성(性)이 선하다는 것을 볼 수 없다.”
하였다. 끝에 또 선과 악, 청과 탁의 변화를 극론하였는데, 그 가운데 본래부터 타고난 것, 때에 따라 청명해지거나 혼탁해지는 것, 감응하는 데에 경중이 있는 것 등 세 가지의 차이를 설명한 대목이 있으니, 여러 학설을 종합하여 광범하게 미루어 가고 곡진히 의미를 꿰어 율곡이 말하지 않은 뜻을 드러내어 밝힌 것이 많다고 한다.

임오년(1702) 선생 52세
○ 2월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몽와공(夢窩公)이 도총관(都摠管)으로 궁중에 입직할 적에 상이 특별히 어제시(御製詩) 절구 두 수를 내리기를,
새벽 꿈에 또렷하게 상국을 만나서 / 曉夢分明遇相國
예전처럼 재촉하여 법온을 하사했네 / 催宣法醞似平昔
어제 유편 읽으면서 무척이나 슬프더니 / 昨閱遺篇多愴懷
본디부터 감응이 어긋난 적 없었네 / 元來感應不曾忒
하고, 또
진정한 나라 사랑 늙을수록 깊었으니 / 純誠體國老彌深
기사년 일 말하자면 지금껏 부끄럽네 / 忍說屠維愧至今
임금 사랑 마음만은 피 같단 말 욀 적마다 / 每誦愛君心似血
서글픈 마음에 눈물 줄줄 흐르네 / 傷神猶有涕涔淫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엊그제 성상께서 꿈에서 본 것을 계기로 선신(先臣)을 추념하시고 특별히 시를 지어 신의 형 창집(昌集)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이처럼 특별한 대우도 전에 없던 것인데, 더구나 그 말씀이 간곡하고 뜻이 애틋하시어 융숭한 칭찬은 썩은 해골을 빛나게 하기에 충분하고 절실한 뉘우침은 귀신을 울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래서 원근에서 전하여 외면서 성상의 거룩한 덕을 우러러 흠모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신의 황공함과 감격스러움이야 어떠했겠습니까.
신은 화를 당하고 남은 목숨으로 요행히 죽지 않아서 이러한 일을 보게 되었으니 천지처럼 크신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성상 앞에 나아가 백배하고 머리를 조아려 변변찮은 정성이나마 다소 편 다음 물러나 골짝에 쓰러져 죽는 것만이 의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질병이 위독하여 생사의 문턱을 넘나든 지 벌써 두 해가 지났으니, 비록 부축을 받고 한번 나가 도성에 올라가려 한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은 무한한 은혜를 받고도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이렇게 심하니, 조만간 죽게 되더라도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돌아보며 눈물 흘릴 뿐,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선경(先卿)을 추념하는 나의 지극한 뜻을 이해하여 질병을 이유로 들어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에 좌승지 조태동(趙泰東)이 연석(筵席)에서 나아가 아뢰기를,
“동지돈녕부사 김 아무개가 지금까지 벼슬에 나오지 않는 것은 지키는 의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갑술년(1694, 숙종20) 초에 상께서 마음을 풀어 주는 말씀을 곡진히 내리셨을 뿐만 아니라 요전번에 또 특별한 은총으로 어제시(御製詩)를 내리시되 추도하고 후회하는 뜻이 말씀에 넘쳐흘러 신하들이 모두들 감동하였으니, 더구나 그의 형제가 성은에 감격한 것이야 어떠했겠습니까. 그가 대대로 고관을 지내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신하로서 10년 동안 은거하며 전후에 내린 제명(除命)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교지에 응하지 않은 것은 그만한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군부(君父)의 뉘우침이 이처럼 절실하여 글로 형용하기까지 한 것을 보았으니, 신자(臣子)의 분수와 의리상 애초에 먹었던 구구한 뜻을 결코 고집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문장과 학식은 당대에 비할 자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심사가 공평하고 의론이 과격하지 않으니, 비록 중병을 앓고 있어 분주한 직무를 처리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만약 조정에 불러들여 경연 석상에 출입하게 한다면 성상의 덕을 돕고 세도(世道)에 보탬이 되는 점이 필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인재가 고갈된 지금 같은 때에 어찌 스스로 은둔하도록 내버려 두어 초야에서 부질없이 늙어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각별히 하유하시어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의리로써 당부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감히 진달하는 바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진달한 뜻이 좋다.”
하였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조태채(趙泰采)가 아뢰기를,
“김 아무개가 갑술년(1694) 이후로 제명(除命)에 응하지 않는 것은 그만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만, 얼마 전에 그가 노모를 만나기 위해 상경했다가 마침 어제시가 내려지자 모자, 형제가 서로 마주하여 감읍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비록 온몸이 다 부서진다 하더라도 성은에 보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심사가 공평하고 의론이 과격하지 않으니, 이러한 때에 조정에 불러들인다면 세도(世道)에 도움 되는 것이 어찌 적겠습니까. 그러나 전후(前後)로 상께서 은근히 부르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끝내 올라오지 않았으니 범범한 상소 비답으로는 필시 불러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각별히 그의 마음을 풀어 주는 뜻으로 유시(諭示)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다.”
하였다. 선생이 재차 올린 상소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의 질병이 이러하여 다른 것은 논할 겨를이 없습니다만, 신이 삼가 들으니 엊그제 경연에서 신을 거명하여 성상께 진달한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신이 지난날 벼슬하지 않았던 것은 그만한 뜻이 있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상께서 뉘우치는 뜻을 깊이 보이셨으니 신의 입장에서 사사로운 의리를 고집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합니다. 비록 전해 들은 말이 상세하지는 않으나 대의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그지없이 황공하고 놀라웠습니다. 신이 근 몇 년 동안 벼슬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화를 당한 뒤라서 다시는 영화로운 벼슬길을 밟고 싶지 않아서였지, 애당초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전후의 소장에도 이미 이러한 심정을 자세히 진술한 바 있으니 성상께서는 당연히 이미 헤아리셨을 줄 압니다. 지금 그 연신(筵臣)의 ‘그만한 뜻이 있었다.’는 말이 과연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이 분명치 않은 가운데 마치 신이 벼슬하지 않는 이유를 성상의 처분에 불만이 있어서였다고 여기는 것 같으니, 어찌 매우 온당치 못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엊그제 성상께서 어제시를 하사하신 것이 비록 전에 없던 일이고 상례(常例)를 벗어난 은전이긴 합니다만, 선신(先臣)을 깊이 칭찬하고 마음을 간절히 열어 보이신 것은 신이 갑술년에 올린 첫 번째 소에 대한 비답부터 벌써 그러하셨습니다. 신은 참으로 감격하여 지금까지 감히 잊지 못하고 있는데, 또 어떻게 털끝만치라도 스스로 성상의 다스림을 피하여 물러날 생각을 하겠습니까. 신이 비록 형편없는 사람이기는 하나 진정 그렇게까지 못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또 갑자기 평소의 뜻을 바꾸어 연신의 말처럼 나가 벼슬에 종사한다면 신이 9년 동안 제명에 응하지 않았던 것이 참으로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을 것이니, 신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연신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마음이 편치 못한 이유입니다. 연신이 신에 대해 실상보다 지나치게 칭찬하여 성상을 크게 속인 점으로 말하면 신이 논변할 경황이 없습니다.”
○ 부제학으로 옮겨졌는데, 전에 언급한 혐의를 끌어대어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7월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8월에 만취대(晩翠臺)를 유람하였다.
기문(記文)이 있다.
○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전에 언급한 혐의를 끌어대어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9월에 상소하여 제학을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10월에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전에 언급한 혐의를 끌어대어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11월에 상소하여 제학을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계미년(1703) 선생 53세
○ 2월에 둘째 딸 이씨(李氏) 부인(婦人)을 곡하였다.
○ 3월에 여주(驪州)에 가서 이씨 부인을 장사 지냈다.
○ 6월 22일에 모친 나 부인(羅夫人)의 상을 당하여 백씨(伯氏)의 집에서 여막살이를 하였다.
○ 8월에 나 부인을 장사 지냈는데, 의정공(議政公)의 묘를 옮겨 양주(楊州) 금촌(金村)의 언덕에 합장하였다.

갑신년(1704) 선생 54세
○ 2월에 권 수찬(權修撰) - 상유(尙游) - 의 편지에 답장하여 《사변록변(思辨錄辨)》에 대해 논하였다.
《사변록(思辨錄)》은 박세당(朴世堂)의 저술로, 주자(朱子)의 사서(四書)에 대한 《집주(集註)》와 《장구(章句)》의 정설(定說)을 비방하여 극도로 사리에 어긋났다.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하여 통렬히 배척하기를 청하자, 상이 그 책을 가져다가 유신(儒臣)을 시켜 논파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권공이 그 일을 주관하여 《사변록변》의 설을 가지고 선생에게 질정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대체적인 내용은 옳으나 상세하지가 않다. 이는 사문(斯文)의 중대한 일이므로 내가 맡은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혐의하고 피해서는 안 되겠다.” 하고는 마침내 조목별로 논변하였다.
○ 이종형 우상 이공(李公) - 유(濡) - 에게 편지를 보내어 황단(皇壇)을 쌓는 일에 대해 논하였다.
편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삼가 듣건대, 집사께서 며칠 전 연석(筵席)에서 황단(皇壇)의 규모를 너무 크게 해서도 안 되고 의장을 너무 성대하게 해서도 안 되는데 인부를 동원하여 공사하는 과정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게 했다는 이유로 공사 감독관에게 그 허물을 돌렸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는 제 생각에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이 논의가 있은 뒤로 이 일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면서 사안이 온당치 않다느니 예법상 난처한 점이 있다느니 하고 기타의 자잘한 설을 주장하는 말들이 이루 다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저는 이들이 모두 옳지 않고 오직 화를 염려하는 주장만이 가장 진실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묘당(廟堂)에서 이 일을 논하는 자들은 애당초 곧바로 이 점을 지적하여 명백히 판결하지 못하고 늘 사안의 성격과 예법을 겸하여 들먹이며 모호하게 주저하는 모습이 마치 양다리를 걸친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해야 한다는 주장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서 고심하다가 제단을 쌓자는 쪽으로 결정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제가 불쾌하게 여기는 점입니다. 그러나 저의 이러한 불쾌함은 제단이 사당만 못해서가 아니며, 또한 이 한 가지 일 때문만도 아닙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제현(諸賢)이 조정에서 이런 큰일을 처리하면서 논의하고 조처하는 모습이 이처럼 불분명하고 구차스러우니, 나라가 장차 어디에 기대겠습니까.
제단이 사당과 다르기는 하나 사안은 역시 중합니다. 명이 내려진 날에 도성의 백성들이 모두 알고 열흘이 못 되어 팔도에 소문이 퍼졌으니, 제단의 터가 한 길을 넘지 않고 인부들이 한마디도 발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식에 밝은 저들이 끝까지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모르게 하려면 제단을 쌓는 것까지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만두지 않으면서 이 일을 깊이 숨겨 소문이 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는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이 일은 본디 성상의 지성(至誠)과 대의(大義)에서 나온 것으로, 한결같은 충정이 위로 신명과 통하고 한마디 하교가 아래로 만대에 전해질 만하니, 어찌 거룩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집사께서는 두려움이 앞서고 화를 방지하려는 마음이 지나쳐, 일이 시작되자마자 예(禮)의 등급을 제대로 적용했는지의 문제로 감독관을 질책함으로써 한사코 공사 규모를 감소시키고 의장의 등급을 낮추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구차히 책임 때우기만 일삼으셨으니, 너무나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말은 한번 입 밖에 내면 주워 담을 수 없고 말을 하는 것이 아무 도움도 못 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기에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집사께서는 마음을 비우고 멀리 보아 올바른 사리와 이해(利害)의 실상을 깊이 파악하시고 지나치게 꺼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일에 관련된 문제를 한결같이 모두 의리에 입각하여 헤아려 조처하시고, 줄이고 간략히 하기만을 주장하지 않으신다면 그래도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다소 위로해 줄 수 있고 후세의 비판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을유년(1705) 선생 55세
○ 8월에 상복을 벗고 삼주(三洲)로 돌아왔다.
○ 9월에 한성부 좌윤에 제수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비답에 “기어코 불러들이고야 말겠다는 뜻이 굳게 정해졌다.”는 하교가 있었다.
○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은 소장을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다.
○ 11월에 상소하여 대죄(待罪)하였다.
이때에 상의 옥후가 편치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하루는 승정원에 하교하여 왕위를 선양(禪讓)하는 절차를 거행하게 하였다. 이에 뭇 신하들이 놀랍고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며 백관이 합문에 엎드려 극력 간쟁하였다. 선생은 생각하기를, ‘몸은 비록 도성 밖에 있지만 의리상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하고는 소장을 써 정서하고 있었는데, 마침 조정의 청이 윤허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즉시 상소하여 자책하기를,
“우둔하기 짝이 없는 신이 하늘처럼 끝없이 두터운 은혜를 받고도, 국가에 큰일이 있는 때에 아래로 아전과 군졸과 백성들까지 모두 한목소리로 호소하며 각기 자신의 충정을 표했는데 신만은 집 안에 들어앉아 끝내 충정을 바치지 않았으니, 이는 신하의 의리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불충한 신의 죄를 다스리시어 영원히 신하들의 경계로 삼으소서.”
하였다.
○ 대사간으로 옮겨졌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이조 참판으로 옮겨졌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병술년(1706) 선생 56세
○ 1월에 재차 상소하였으나 상은 소장을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다.
○ 2월에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에 제수되었다.
○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4월에 상이 특별 유시를 내렸다.
전교하기를, “대제학 김 아무개는 전후의 제수가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대대로 국록을 먹어 나라와 고락을 함께해야 할 신하가 번번이 유계(遺戒)를 들먹이며 한결같이 명에 응하여 공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온당치 못한 일이다. 게다가 군신간의 의리 역시 중한 것이니 어찌 유계를 고집스레 지키며 스스로 벼슬을 멀리해서야 되겠는가. 대제학 김 아무개에게 속히 올라오라고 특별히 하유하라.” 하였다.
○ 형조 판서에 발탁되어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고 연석(筵席)에서 백씨(伯氏) 의정공(議政公 김창집(金昌集))에게 선생의 출사를 권면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연석에서 하교하기를, “형조 판서 김 아무개에게 지난번에 특별 유시를 내렸고 상소의 비답에서도 올라오도록 권면하였건만, 오늘 사직소를 보니 그는 조정에 나올 뜻이 없어 보인다. 그의 본직과 겸직은 모두 긴중한 것이라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두어서는 안 되며, 비록 뭔가 지키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끝끝내 스스로 벼슬을 멀리할 의리는 없다. 게다가 군신간의 대의도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어찌 한결같이 사직을 고집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우상이 입시하였기에 이처럼 하교하는 바이니, 부디 이러한 뜻을 전달하여 속히 나오도록 권면하라.” 하였다.
○ 예조판서 겸 세자우부빈객(禮曹判書兼世子右副賓客)에 제수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상소의 대략에,
“삼가 듣건대, 연석(筵席)에서 특별히 하교하시어 신의 형 창집(昌集)으로 하여금 신에게 유시를 전하여 조정에 나오도록 권면하게 하셨는데, 그 세심하고 간곡한 뜻이 한 집안에서 부자간에 귀에 대고 서로 일러 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특별한 예우가 어찌 근래에 없었던 일이기만 하겠습니까. 과거 역사 전체에서도 드문 일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보거나 들은 이들은 모두 감격하였는데 더구나 신은 직접 당하였으니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병이 들어 다 죽어 가는 중에 깜짝 놀라 일어나서 마치 위엄스러운 용안을 가까이 뵙는 듯, 옥 같은 음성을 직접 받든 듯 황홀하여 신의 몸이 멀리 초야에 있다는 사실도 잊었습니다.
형편없는 미천한 신이 이처럼 세상에 보기 드문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니 비록 끓는 물이나 불속에 뛰어들라 하시더라도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밖의 것이야 어찌 감히 따지겠습니까. 당연히 당장 길을 떠나서 성상 앞에 나아가 사은숙배하여 다소나마 신하로서의 분수와 의리를 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병세가 거의 죽을 지경이라 실로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형편입니다. 아침 이슬처럼 갑자기 죽게 되면 변변찮은 작은 정성마저 끝내 펴지 못하여 영원히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한이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갑술년(1694, 숙종20) 이후로 10여 년간 은혜로운 제수를 받은 것이 몇 번인지 기억할 수도 없는데 한 번도 나가서 명을 받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외람되이 은혜롭게 발탁되어 상경(上卿)의 지위에 오르게 되자 관복을 입고 의기양양하게 조정의 반열에 나아간다면 이전에 질병을 이유로 물러나서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사직을 간청했던 것들은 모두 속임수가 되고 말 것이니, 주자(朱子)가 말한, 핑계 대고 속임수를 써서 벼슬을 취한다는 것이 거의 이에 가까울 것입니다. 십만 종(鍾)의 녹을 사양하고 만 종의 녹을 받는 것도 옛 군자는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참판은 사양하고 판서 자리에 나아간다면 신의 입이 석 자인들 어떻게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질병을 제외하고는 이 문제가 신이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에 감히 아울러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심정을 잘 알았다. 그러나 지난번 연석에서의 하교를 들었으면 기어코 경을 불러들이고야 말겠다는 나의 뜻을 상상할 수 있을 텐데 연달아 소장을 올려 고집하다니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아, 경이 일찍이 한 번도 조정에 나와 명에 응하지 않았던 것은 유계(遺戒)를 지키고자 함이지만, 내가 돈독한 소명을 빈번히 내려 군신간의 대의를 요구하는 이상 경이 사사로운 마음을 고집할 수 없는 것은 도리상 응당 그러한 것이니, 어찌 낮은 자리는 사양하고 높은 자리에 나아간다는 혐의가 있겠는가. 게다가 예조 판서로 옮겨 제수한 것은 경의 질병을 염려하여 바쁜 사무를 무리하게 시키지 않으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경은 더더욱 질병을 이유로 사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뜻을 이해하여 즉시 길에 오르라.”
하였다. 이때에 성상의 돌보심이 더욱 융숭하여 기어코 한번 조정에 불러들이고자 하였고 심지어 몽와공이 또 면대하여 유시를 받들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관례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한번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였으며 선생을 아는 사우들도 대부분 한번 분수와 의리를 펴라고 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처음 뜻을 단단히 지켜, 죄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나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상도 강권하기 어려움을 알고 이후로는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 5월에 재차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6월에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소장을 도로 내주라고 명하였다.
○ 7월에 네 번째 상소하여 사직해서 체직되었다.
○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승진되었다.
○ 8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제수되었는데, 두 번 상소하여 사직해서 본직에서 체직되었다.

정해년(1707) 선생 57세
○ 1월에 상소하여 겸임한 여러 직임을 사직하자 상이 빈객(賓客)을 체직하도록 윤허하였다.
○ 4월에 대제학을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5월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되었다.
○ 장(狀)을 올려 사직해서 대제학에서 체직되었다.
○ 7월에 녹천(鹿川)으로 옮겨 가 우거하였다.
녹천은 동교(東郊)에 있는데, 상공(相公) 이유(李濡)의 별장이다.
○ 상소하여 지돈녕부사를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 9월에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찾아갔다.
한두 문인과 밤새 소요하다가 돌아왔다.
○ 옥류동(玉流洞)을 유람하였다.
옥류동은 수락산(水落山) 기슭에 있는데, 시내와 폭포가 아름답다. 간암(艮庵) 이공 희조(李公喜朝)와 함께 가서 유람하였다.
○ 10월에 삼주(三洲)로 돌아왔다.
○ 묘적사(妙寂寺)를 유람하였다.
묘적사는 묘적산(妙寂山)에 있다.

무자년(1708) 선생 58세
○ 윤3월에 몽와공(夢窩公)을 모시고 앞 강에서 배를 타고서 물고기를 구경하였다.
이때에 몽와공은 정승에서 파직되어 금촌(金村)에 물러나 지내고 있었는데, 선생과 아침저녁으로 만났다. 이때에 이르러 관어회(觀魚會)를 가졌는데, 아우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이 참여하였다.
○ 몽와공을 모시고 묘적사를 유람하였다.
○ 4월 11일에 삼주의 정침(正寢)에서 별세하였다.
선생은 거듭 상(喪)을 당하며 질병이 깊어졌는데, 지난겨울에 여러 차례 감기에 걸린 뒤로는 더욱 심하게 야위었다. 이때에 이르러 또 오한과 신열이 번갈아 나다가 허기(虛氣)를 타고 갑자기 피를 토하더니 결국 별세하는 데에 이르렀다.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과 초야에서 모두들 서로 조상(弔喪)하였고, 원근의 선비들이 달려와 슬픔을 다해 곡하였으며, 문인들 중에 가마(加麻)하는 이가 6, 7십 명이나 되었다.
○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장례 물품과 상여꾼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지돈녕부사 김 아무개는 여러 차례 불러도 올라오지 않더니만, 앞으로 다시 돈독히 권면하여 기어코 불러들이려던 참에 뜻밖의 흉한 소식이 갑자기 이르렀으니 놀라움과 슬픔을 어찌 형언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해조(該曹)에 명하여 장례 용품을 넉넉히 지급하도록 하고 또 본도(本道)로 하여금 상여꾼을 정하여 보내게 하였다.
○ 6월 - 9일 - 에 석실(石室)에 있는 선영의 경좌(庚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선생의 6대조 평양부서윤부군(平壤府庶尹府君 김번(金璠))으로부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까지 대대로 모두 같은 산에 장사 지냈는데, 선생의 묘는 그 서쪽 기슭의 수백 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곳에 있다. 뒤에 묘표(墓表)를 세우고 묘지(墓誌)를 묻었는데, 모두 아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지은 것이다.
○ 7월에 성균관과 사학(四學)의 유생들이 제문을 지어 가지고 가서 제사하였다.
○ 12월에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경인년(1710)
○ 가을에 문집이 완성되었다.

신묘년(1711)
연촌서원(烟村書院)에 배향하였다.
연촌서원은 영암(靈巖)에 있다. 연촌(烟村) 최공 덕지(崔公德之)와 의정공(議政公)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선생을 나란히 향사하고 연촌의 손자 산당(山堂) 최충성(崔忠成)을 배향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선생의 위패를 뒤미쳐 올린 것이다.

계사년(1713)
○ 가을에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배향하였다.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과 청음(淸陰) 두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향사하고 문곡(文谷),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정관재(靜觀齋)를 배향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양주(楊州) 유생 구문기(具文沂) 등의 상소로 인하여 또 선생의 위패를 뒤미쳐 올린 것이다.

계묘년(1723) 경종대왕(景宗大王) 3년
○ 여름에 석실서원의 배향을 철회하였다.
이때에 몽와공(夢窩公)이 이미 전해에 흉악한 역적의 무리에게 화를 당했는데, 사간 이세덕(李世德)이 일찍이 발계(發啓)하여 화를 당한 사람들의 아비와 형제도 아울러 관작을 추탈하고, 서원에서 향사하는 이들은 제향 대상에서 제외하기를 앞장서서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 마침 간언하는 사람이 있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심준(沈埈)이 다시 발계하여 흉악한 논의를 더욱 펼치고 의정공(議政公 김수항(金壽恒))과 선생 양대의 도덕을 무함하여 비방하면서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이들도 연좌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윤회(尹會)가 또 그러한 주장을 이어서 펼쳤다. 이리하여 결국 의정공과 선생의 향사를 같은 날에 철회하게 된 것이다.

을사년(1725) 금상(今上) 원년

○ 봄에 석실서원의 제향을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흉악한 역적의 무리가 쫓겨나 세도(世道)가 거듭 새로워졌는데, 양주(楊州) 유생 이지항(李志沆) 등이 상소하여 심준 등이 사리에 어긋나게 무함한 실상을 논변하고, 의정공과 선생의 향사를 회복해 주기를 청하자 상이 즉시 윤허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같은 날에 제향하게 되었다.
○ 가을에 문간공(文簡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해 여름에 시독관(侍讀官) 서종섭(徐宗燮)이 주강(晝講)하는 기회에 아뢰기를,
“고(故) 판서 김 아무개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식견이 명철한 까닭에 이미 많은 선배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기사년(1689, 숙종15) 이후로는 의리에 입각하여 지조를 지켜서 벼슬을 단념하고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의 학문에 전념한 결과 실로 사림(士林)이 종주로 우러르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에서는 그를 대우하는 예(禮)가 유현(儒賢)과 다름이 없었는데, 그의 겸손한 뜻 때문에 죽은 뒤에도 시호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벌써 수십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시호를 내리지 않고 있으니 선비들이 한탄하고 안타까워하는 논의를 해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유도(儒道)를 숭상하는 오늘날 특별히 시호를 내리심이 어떠신지요?”
하고, 시독관 이기진(李箕鎭)이 아뢰기를,
“이 사람에 대한 조정의 대우가 과거를 통해 출신했다는 이유로 산림의 유현과 달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장(諡狀)이 올라오기 전에 시호를 내려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신사철(申思喆)도 한목소리로 청하자, 상이 명하기를,
“시장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특별히 시호를 하사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니, 도덕이 높고 문학이 풍부한 것을 ‘문(文)’이라 하고 덕이 한결같아 해이하지 않은 것을 ‘간(簡)’이라 한다. 이조 좌랑 이현록(李顯祿)이 와서 선시(宣諡)하였다.


 

[주D-001]제영(緹縈)은 …… 구제하였고 : 한 문제(漢文帝) 13년(기원전 167)에 제군(齊郡) 태창령(太倉令) 순우의(淳于意)가 죄에 연루되어 형벌을 받게 되었을 때 그의 다섯 딸 가운데 막내인 제영이 아버지를 따라 장안(長安)에 와서 천자에게 글을 올리기를,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개과천선할 기회조차 없어집니다. 더구나 첩의 아비는 청렴하다고 이름났는데 지금 죄에 걸려 형벌을 받게 되었으니, 청컨대 첩이 관비(官婢)가 되어 아비의 죄를 대신 받게 해 주소서.” 하자, 문제가 가엾게 여겨 죄를 면해 주고 일체의 육형(肉刑)을 철폐하였다. 《漢書 卷23 刑法志》
[주D-002]전횡(田橫)의 …… 들어갔습니다 :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하자, 이전에 제(齊)나라 왕으로서 그와 맞섰던 전횡이 500명의 의사(義士)를 거느리고 멀리 섬으로 들어갔는데, 유방은 후환을 염려한 나머지 그를 회유하여 낙양으로 불렀다. 전횡은 그에 응하여 부하 두 명과 함께 낙양 가까이 와서 말하기를, “지금 한왕(漢王)은 황제가 되었는데 내가 포로가 되어 그를 알현하는 것은 너무도 치욕스럽다. 황제가 나를 부른 것은 내 얼굴을 보기 위해서이니, 너희들은 내 머리를 들고 가서 보여 주도록 하라.” 하고는 자결하였다. 부하들은 그 말대로 한 뒤에 전횡의 무덤 곁에서 자결하였고, 나머지 섬에 있던 부하들도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자결하였다. 《史記 卷94 田儋列傳》
[주D-003]제(齊)나라 …… 몰아치고 : 춘추 시대 제 경공(齊景公) 당시 자식이 없이 개가하지 않고 성실히 시어머니를 섬기던 과부가 있었는데, 시누이가 재산을 탐하여 자기 어머니를 죽이고 과부에게 누명을 씌우자, 과부가 원한이 맺혀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그러자 제 경공의 궁전에 벼락이 쳤다고 한다. 《淮南子 卷6 覽冥訓》
[주D-004]연(燕)나라 …… 내렸습니다 : 춘추 시대 연 혜왕(燕惠王) 당시에 음양가(陰陽家)인 제(齊)나라 출신 추연(鄒衍)이 연나라에 충성을 바쳤는데, 왕의 측근들이 그를 참소하자 왕이 감옥에 가두었다. 이에 추연이 억울하여 하늘을 향해 통곡하니, 한창 무더운 5월이었는데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論衡 卷5 感虛篇》
[주D-005]종신토록 …… 폐하였고 : 왕부(王裒)는 진(晉)나라 사람이고 〈육아〉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효자가 죽은 부모의 은혜를 기리는 노래이다. 왕부가 그의 아버지 왕의(王儀)가 사마소(司馬昭)에게 억울하게 죽자, 이를 애통해한 나머지 조정에서 벼슬을 주겠다고 여러 번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 언제나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절을 하고 무덤 가의 잣나무를 부여잡고 울었는데 그 눈물로 인해 나무가 말라 죽었다 한다. 그리고 《시경》을 읽다가 육아편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세 번을 반복하여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슬픔을 자아낼까봐 육아편은 폐하고 읽지 않았다 한다. 《晉書 卷88 王裒列傳》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애통해하는 작자의 처지가 왕부의 경우와 같으므로 인용한 것이다.
[주D-006]거친 …… 닫았다 : 유신(庾信)은 남북조(南北朝) 주(周)나라 때의 시인이다. 그가 양(梁)나라에서 동궁학관(東宮學官) 겸 건강령(建康令)으로 있을 때인 양 무제(梁武帝) 2년(548) 10월에 후경(侯景)이 반란을 일으켜 도성인 금릉(金陵)에까지 쳐들어오자, 오늘날의 호북(湖北) 형주(荊州) 지역인 강릉(江陵)으로 피신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周書 卷41 庾信傳》 유신이 지은 〈애강남부(哀江南賦)〉 첫머리에 “지난 무진년 10월에 큰 도적이 나라를 유린하여 금릉이 와해되었다. 나는 거친 골짝으로 도망하여 피신하였는데 공실(公室)과 사문(私門)이 모두 도탄에 빠졌다.” 하였는데, 거친 골짝이란 강릉을 가리킨다. 《庾子山集 卷2 哀江南賦》 기사년에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이를 피해 시골 농암으로 들어온 작자의 처지가 유신의 그때 경우와 비슷하므로 인용한 것이다.
[주D-007]우군(右軍)이 …… 맹세 : 우군은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를 말한다. 그는 왕술(王述)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왕술이 고관이 되어, 왕희지가 회계 군수(會稽郡守)로 재직하면서 행한 정사를 검찰하면서 잘잘못을 일부러 까다롭게 따지자, 이를 치욕스럽게 여긴 왕희지가 관직을 그만두고 부모의 무덤 앞에 가서, 앞으로 만일 뜻을 바꾸어 또 벼슬살이를 한다면 당신들의 자식이 아니라고 맹세하였다. 《晉書 卷80 王羲之傳》 작자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 다시는 벼슬살이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이 왕희지의 경우와 비슷하므로 인용한 것이다.
[주D-008]소초(小草)가 …… 것 : 은거하던 사람이 세상에 나가 벼슬하는 것을 뜻한다. 동진(東晉) 때 사안(謝安)이 오랫동안 동산(東山)에 은거하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세상에 나가 당시 권력자인 환온(桓溫)의 관속이 되었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환온에게 바친 약초 가운데 원지(遠志)가 있었다. 환온이 사안에게 묻기를, “이 약은 소초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왜 하나의 약에 두 이름이 있는 것입니까?” 하니, 사안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참군(參軍) 학륭(郝隆)이 서슴없이 대답하기를, “그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산속에 있으면 원지라 하고 산 밖에 나오면 소초라고 부릅니다.” 하자, 사안이 매우 부끄러워하는 빛이 있었다 한다. 본디 원지는 뿌리이고 소초는 원지의 싹을 말하는데, 학륭이 절개를 굽힌 사안을 일부러 조롱하기 위해 원지는 뜻을 원대하게 갖는다는 의미로, 소초는 하찮은 잡초라는 의미로 말하였다. 《世說新語 排調》 곧 작자 자신은 사안처럼 세상에 나감으로써 부끄러울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주D-009]막내아우 : 송시열의 막내아우 송시걸(宋時杰)을 말한다.
[주D-010]무자년 : 작자가 죽은 1708년(숙종34)을 말한다.
[주D-011]건원릉(健元陵) : 조선 태조(太祖)의 능으로, 당시에 작자가 거처하고 있던 양주(楊州)에 위치해 있다.
[주D-012]옛날에 뒷수레에 태운 일 : 춘추 시대 제 환공(齊桓公)이 손님을 맞이하러 교외에 나갔다가 영척(寧戚)의 노랫소리를 듣고 비범한 사람이라 여겨 뒷수레에 태우도록 명한 일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숙종이 건원릉에 간 김에 그곳에 있는 작자를 데리고 오라는 뜻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呂氏春秋 離俗覽 擧難》
[주D-013]유편(遺篇) : 김수항이 기사년(1689, 숙종15)에 유배지인 진도(珍島)에서 사약을 받고 지은 〈문후명(聞後命)〉 시를 말한다.
[주D-014]경좌(庚坐) 언덕 : 남쪽으로 약간 비낀 서쪽을 등지고 북쪽으로 약간 비낀 동쪽을 향한 언덕을 말한다.


 

 

 

 

농암집 별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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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附錄) 1
영암(靈岩) 녹동서원(鹿洞書院) 배향 봉안 제문 [어유봉(魚有鳳)]


문인 어유봉(魚有鳳)

삼가 생각건대 선생은 / 恭惟先生
세상에 드문 뛰어난 이로 / 間世英雋
기쁘게도 어진 아버지 있어 / 樂有賢父
일찍부터 좋은 가르침 받았네 / 早襲嘉訓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르자 / 凌高邁往
선현처럼 되려는 뜻을 품고 / 志希先哲
자나 깨나 주자 생각하며 / 寤寐考亭
그 경지를 엿보았네 / 洞窺堂室
깊이 생각하여 깨달으며 / 潛思妙契
끊임없이 날마다 새로워졌고 / 日新不已
시원스럽고 화락하여 / 淸通和樂
안팎이 모두 순수하였네 / 表裏純粹
진정한 군자로서 / 允矣君子
나라의 기둥이었으나 / 邦國之楨
망극한 때를 만나자 / 遭時罔極
벼슬을 헌신처럼 버리고 / 脫屣簪纓
세상 밖에 홀로 서서 / 獨立世表
산림에서 도를 맡아 / 任道丘園
사문이 여기에 있으니 / 斯文有在
명성과 덕망이 더욱 높아졌네 / 名德彌尊
풍도를 듣고 덕을 목도한 이들이 / 聞風覿德
사방에서 우러러보았는데 / 四方仰止
더구나 이곳 낭주는 / 矧玆朗州
아름다운 발자취가 이르렀던 곳이네 / 徽躅攸曁
지난 갑인년과 을묘년에 / 粤在甲乙
군자의 도가 비색해져서 / 君子道否
문곡(文谷)이 남쪽으로 유배되어 / 文老南遷
공경 대신의 의표가 의젓하였네 / 赤舃几几
이때 선생은 / 維時先生
집안에서 학문하여 / 詩禮于庭
토론하고 강습하니 / 討論講習
그 말씀을 많은 이가 몰려와서 들었다네 / 謦咳羣聽
다행히 먼 지방 사람들도 / 幸哉遐逖
덕과 의에 훈도를 받아 / 薰炙德義
죽어도 잊지 못함은 / 沒世之思
우리 선비들 똑같았네 / 均我人士
옛적에 우리 고장에 / 昔有鄕賢
연촌이란 현자 있어 / 曰維烟村
높다란 사당에다 / 有翼明宮
조부와 손자를 제사하는데 / 祀祖侑孫
누구를 함께 제향하였나 / 誰其並享
문곡이 왼편에 있다네 / 文老于左
이제 선생을 배향하니 / 今配先生
예에 맞는 일이로다 / 於禮則可
해와 달이 찬란하고 / 日月其良
성대한 의식 갖추니 / 縟儀斯備
다른 시대 두 성씨를 / 兩氏異代
한곳에 함께 제사한다네 / 一體同祀
고을은 찬란히 빛나고 / 鄕邦有光
보고 듣는 이 모두 공경하니 / 瞻聆俱聳
선한 본성 모두 지녔기에 / 民彝同好
누군들 공경하지 않으리오 / 孰不欽奉
아름다운 푸른 대나무를 볼 때 / 綠竹之猗
군자의 아름다운 덕을 잊을 수 없네 / 有斐不諼
바라건대 보살펴 주시고 / 尙冀啓佑
길이 흠향하소서 / 永歆苾芬

양정 축문(兩丁祝文)

정밀하게 학문을 강론하고 / 講學精密
심도 있게 도에 나아갔네 / 造道深崇
드높은 풍도와 크나큰 덕은 / 高風碩德
후학이 존숭하는 바이네 / 後學所宗


 

 

 

명재유고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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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최주일(崔主一) 기만(基萬) 에 대한 만사 3수


명현의 후예이자 선인의 집안에서 / 名賢之後善人家
효자가 뒤를 이어 총전을 받았었지 / 孝子仍蒙寵典加
그대는 또 한평생 행실이 도타웠는데 / 君又平生惇行義
어이하여 명이 짧아 탄식하게 하느뇨 / 如何無命使人嗟
주일(主一)은 최연촌 덕지(崔煙村德之)의 후예이자 일두(一蠹) 선생의 외손(外孫)이다. 그의 선고(先考)인 최경(崔璥)도 효행(孝行)으로써 포증(褒贈)을 입었다.

탄방에서 당시에 성(誠)에 대해 가르치니 / 炭坊當日敎人誠
한 글자가 종신토록 행할 만하였었네 / 一字終身儘可行
사문으로 향한 정이 줄곧 지극하였으니 / 終始師門情獨至

이 마음 이익과 명예 위한 게 아니었지 / 此心非爲利兼名
상제에 쏟은 마음 세상에서 드물었고 / 盡心喪祭世猶稀
유정함을 지키는 삶 도(道)에 거의 가까웠지 / 靜守幽貞又庶幾
과거 급제 못 한 것을 다들 아쉬워하나 / 文未成名皆爲惜
욕됨이 없어야 온전히 돌아가는 것이라네 / 不知無辱是全歸


 

[주D-001]탄방(炭坊)에서 …… 가르치니 : 탄방은 최기만(崔基萬)의 스승인 탄옹(炭翁) 권시(權諰)를 가리키는 듯하다. 《탄옹집(炭翁集)》 권12에 최기만의 아버지 최경(崔璥)의 묘갈명이 ‘최효자묘갈명개산정(崔孝子墓碣銘改刪定)’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송자대전 제1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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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跋)
연촌(煙村) 최 선생(崔先生)의 유사 발(遺事跋)


한 문공(韓文公 문은 한유(韓愈)의 시호)의 송양소윤서(送楊少尹序)에 ‘승상(丞相)이 시(詩)를 노래하니, 서울의 시를 잘하는 자가 이에 화답한다.’ 하였으니, 그때에 시가 매우 성행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나, 장문창(張文昌 장적(張籍))과 배 사공(裴司空 배도(裴度))의 글만이 후세에 칭도(稱道)될 뿐, 그 나머지는 모두 적료(寂寥)하다.
이제 연촌 최 선생의 유적을 본다면, 그 모든 시문(詩文)이 하나도 빠짐없이 수록되었으니, 이는 양 소윤(楊少尹 당 나라 양거원(楊巨源)을 말함)은 덕행은 있어도 어진 자손이 없었고, 선생은 두 가지를 겸한 때문이 아닌지. 이번에 선생의 8세손 세영 몽여(世榮夢與 몽여는 자임)가 그 맏형 방언(邦彦)과 함께 그 구본(舊本)의 그릇된 데를 바로잡아 중간(重刊)하여 널리 세상에 전하려 한다. 나는 선생의 상언(上言 임금께 올리는 글) 중에서 그윽이 느끼는 바가 있다. 즉 이른바 ‘손실답험(損實踏驗)’이라는 말은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자주 보이는데, 이는 실로 주 부자(朱夫子)가 일찍이 마음을 기울이던 바이며, 또 이른바 ‘업거세존(業去稅存)’이라는 네 글자도 주 부자가 당시에 매우 통탄해하면서 기어이 변혁시키려 하다가 마침내 오우규(吳禹圭 장주(漳州)의 진사(進士))의 소(疏)에 의해 저지된 바이다. 그런데 어찌 5백 년 후 선생의 글 속에서 다시 볼 줄 뜻하였으랴. 택당(澤堂) 이 선생(李先生)이 선생을 정학(正學)의 인사(人士)라 칭하였던 까닭도 여기에서 그 일단(一端)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말한 ‘업거세존’은 사실 주 부자가 말한 것과 조금 다름이 있으니, 후인(後人)이 마땅히 알아야 할 점이다.
모든 서문과 발문 중에서 택로(澤老)의 것이 가장 상세하고 또 그 칭도(稱道)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다만 그중에 ‘기미(機微)를 알았다.’는 택로의 말을 후인들이 잘못 이해하여 선생을 일컫기에 부족한 것처럼 여겼는데, 그렇다면 《주역》에서 어찌 ‘기미를 아는 것이 신(神)이다.’ 하였겠는가. 이는 택로에게 반드시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니, 몽여(夢與)는 택로의 아들 계주(季周 이단하(李端夏))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숭정 기원 후 무오년(1678, 숙종4) 3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주D-001]업거세존(業去稅存) : 본시 주희의 말인데, 여기는 가난한 백성이 쪼들리다 못해 자기의 전토(田土)를 부호(富豪)에게 매각하고 나서 도리어 부호의 소작인(小作人)이 되어 그 세(稅)를 물어야 하므로, 결국 전토는 없어지고 세만 부담하게 된 것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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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全羅道)
영암군(靈巖郡)


동쪽으로 나주 경계까지 14리, 북쪽으로 동주(同州) 경계까지 30리, 남쪽으로 강진현 경계까지 17리, 해남현 경계까지 75리, 서쪽으로 해안까지 50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2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월나군(月奈郡)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성종 14년에 낭주안남도호부(朗州安南都護府)로 고치고, 현종 9년에 다시 강등되어 영암군이 되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월나(月奈)ㆍ낭주(朗州)ㆍ낭산(郎山).
【성씨】 【본군】 최(崔)ㆍ박(朴)ㆍ주(周)ㆍ백(白)ㆍ혜(嵇)ㆍ육(陸). 곤미(昆湄) 허(許)ㆍ유(庾)ㆍ배(裵)ㆍ전(田)ㆍ종(種)ㆍ유(柳). 진남(鎭南) 혜(嵇)ㆍ오(吳)ㆍ육(陸). 북평(北平) 조(曹). 송지(松旨) 김(金)ㆍ전(全). 심정(深井) 김(金) 전(全)이라고도 한다. 회의(懷義)도 같다.
【풍속】 근엄하고 소박하며 화려함이 없다. 군승(郡乘)에, “농업에 전적으로 종사하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꾸밈이 없다.” 하였다.
【형승】 긴 내가 성을 안았다. 유관(柳觀)의 시에, “긴 내가 출렁출렁 성을 안고 흐르네.” 하였다. 땅이 창해 바다와 접했다. 고려 김췌윤(金萃尹)의 시에, “땅이 창해 바다와 접하여 장한 경치가 많다.” 하였다.
【산천】 월출산(月出山) 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신라 때는 월나산(月奈山)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렀다. 속설에 본국의 외화개산(外華蓋山)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작은 금강산이라고도 하며, 또 조계산(曹溪山)이라고도 한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흐림과 갬 추위와 더위가 모두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함을 자랑하누나. 하늘이 영험한 자라로 하여금 세 개의 섬을 짊어지고, 지상으로 황홀하게 옮겨 놓게 했구나. 오정(五丁 다섯 역사)이 갑자기 촉도(蜀道)를 다시 뚫어 깊게 둘러싸인 계곡에 높은 능선이 위태롭구나. 나무꾼이 오지 않으니 속세의 번거로운 일 없고, 다만 신선이 몰래 보호할 뿐이로다. 어두운 골짜기는 연기와 아지랑이 아득하게 자리잡고, 우뚝한 봉우리는 해와 달을 가렸구나. 내가 산 아래 와서 가던 말고삐를 푸니, 서리 맞은 대의 한 가지를 부질없이 가졌어라. 댕댕이 덩굴을 더듬으며 곧장 올라가서 얼마나 알쏘냐. 기러기 등에 남은 태양이 이미 아래를 엿보누나. 서쪽 봉우리 높고 높아 우뚝 솟은 모양인데, 사나운 범이 노하여 걸터앉았고 물소가 달려가는 모양이로다. 나그네의 흥이 기이함을 탐내어 험난함을 잊고, 뱀 서리듯 몸을 굽히면서도 피로한 줄 모르겠네. 길이 막히니 큰 돌이 홀연히 눈 안에 들어온다.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 어찌 근원을 찾을 수 있으랴. 처음 보매 솥밭같이 솟아서 만 경(京)이나 되게 무겁더니 손을 따라 둘러보니 하나의 쇠꼬리만큼 가볍구나. 하늘은 새벽 놀이 퍼져 붉게 섞여 윤택하고, 땅은 저녁 아지랑이를 뿜어 내어 푸른색 진하게 떠오른다. 상사(相師)는 신선이 되어 아득하게 편안히 가버리고, 삽상한 남은 바람 천고에 길이 부는구나. 상사는 지난 날에 홀로 간 날이 있어, 소나무 아래 돌문에서 날마다 놀았구나. 돼지를 타고 숨어 노니 물질 밖[象外]의 경지요, 거마(車馬)를 비웃으니 시끄러움을 따르는 것을 낮게 여기는구나. 어느 때나 기러기 그림자를 용암(龍巖)에 머물게 할까. 교묘한 생각이 오로지 조물주를 뺏고 싶구나. 향기로운 진흙으로 만들어 낸 봉우리가 이미 극에 달했으니, 오히려 다시 붓끝을 번거롭게 해야 하겠구나. 영원히 항상 오봉(五峯)이 솟을 것이니, 누가 마룻대[棟]가 부러지고 사람이 시들었다고 한탄할까. 하물며 쇠지팡이를 남겨 벽 구석에 걸어 두었으니, 호랑이를 항복받은 이상한 자취가 길이 희미해지리. 해상(海商) 백 명이 옛날에 바다를 넘어갈 때, 산 위의 신광(神光)을 아득히 바라 보았어라. 산에 올라 성인을 배알하고 마침내 집을 엮으니, 동구(洞口)의 쑥과 띠를 마구 베었네. 종신토록 다시는 옛 마을[故里] 생각하지 않고 시냇물 마시고 초목을 먹으며 바위 문에 의지하네. 푸른 벽에는 분명히 자금(紫金)의 상(像)이라, 내려와 역사를 본들 누가 다시 알 것인가. 숲 속의 중과 시골의 노인이 억지로 칭찬하니, 눈[雪]에 새기고 구름에 새겨 놓은 듯 숱한 분(枌)나무 패(牌)로다. 비바람 무정하여 상(像)이 들어 있는 누각을 무너뜨리니, 끊어진 서까래와 깨진 주초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도다. 백 척이나 되는 층층대를 홀로 밟아 멀리 가는데, 네모진 봉분을 좌우에 높이 쌓고 쌓았도다. 숨은 늙은이[逋翁] 어릿어릿 갑자기 나를 방문하니, 목 가득 학발(鶴髮)이요 몸뚱이는 닭의 가죽이었다. 멀리 북령(北嶺)으로 오르니 멋이 더욱 진진하여, 도리어 맛있는 반찬으로 아침에 주림을 해장하는 것보다도 나았다. 언덕에 의지하여 한 번 웃고 사방을 바라보니, 눈 아래 만상(萬像)이 모두 기우뚱하구나. 멀리 잠겼던 것 처음으로 오래 감추어 두었던 거울을 여니, 먼 봉우리가 반쯤 나타나고 새로 눈썹을 그린 듯하네. 물과 구름이 그윽하고 고와 완상하기에 족하니, 과거의 사적을 찾으려는 이 그 누굴까. 김막(金漠)은 생명을 경시하고 요염(妖艶)을 중히 여겨, 꽃을 꺾고 돌아가지 않으니, 아, 슬프다. 옥소봉(玉霄峯) 아래 이 징군(李徵君)은 처음에는 땅에 집을 짓고 사는 것 같더니, 갑자기 학의 편지를 받고 높은 언덕으로 나가, 아침에는 푸른 봉우리에서 자고 저녁에는 붉은 섬돌에서 자는구나. 슬프다, 두 사람이 마침내 면치 못하였으니, 다만 세상 마음 물질을 잊지 못해서였네. 어느 사람이 혜초 장막[蕙帳] 밖으로 내려가지 않아, 자취를 감추어 종산(縱山) 신령의 기롱을 면하였나. 선객(禪客)이 백운원(白雲院)에 영원히 깃드니, 세망(世網)을 깨뜨려 없애어 남은 것이 없구나. 중과 속인이 이름을 흠모하여 다투어 모임에 들어오니, 처음에는 빈손으로 갔으나 결국에는 실한 데로 돌아가도다. 나도 지금 내[川]를 건너온 코끼리를 사모하거니, 어찌 양을 잃고 갈래 길에서 길이 울 것인가. 공(公)이 아직도 시상옹(柴桑翁 도연명)을 생각하는 것에 감동하였으니, 구름은 무심히 나오고 새는 피곤하게 날도다. 준마(駿馬)를 칭찬하던 도림(道林)의 보배로운 눈을 돌려서, 나의 노둔한 재질이 고삐에 매이는 것을 용납하라. 눈살을 찌푸리며 어찌 감히 고개에서 나오기를 재촉하리요. 다섯 번 웃어도 양무위(楊無爲)를 면하지 못하도다. 푸른 측백나무 뜰 앞에서 우수수 불고, 붉은 연꽃 못 위에는 물이 찰랑찰랑하는구나. 고요한 가운데 탑(榻)을 대하니 온갖 생각 사라지고, 물고기와 새마저 와서 친하여 의심하지 않는구나. 조용히 성긴 비단으로 덮은 벽을 가리키면서, 나더러 붓 휘둘러 좋은 시를 지으라 하네. 강호(江湖)의 묘운(妙韻)을 혹시라도 빌려 준다면, 좋은 글귀 용궁시(龍宮詩)에도 양보하지 않으리.”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등불 켜고 자리 걷지 않은 채 밥 먹고 서성대는 것 괴로운데, 월출산 꼭대기에 햇빛이 비치도다. 뭉게뭉게 들구름은 동혈(洞穴)에서 걷히고, 삐죽삐죽 가을 산은 하늘에 솟았구나. 뜬 인생이 반넘어 살도록 이름 들은 지 오래면서, 절정에 올라 보지 못하였으니 세상일 바쁜 것이라. 가야산(伽倻山)과 방불한 것 참으로 기쁘니, 무단히 마상에서 고향을 생각하게 하노라.” 하였다.
구정봉(九井峯) 월출산의 최고봉이다. 꼭대기에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곁에 한 구멍이 있어 겨우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하다. 그 구멍을 따라 꼭대기에 올라가면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그 편평한 곳에 오목하여 물이 담겨 있는 동이 같은 곳이 아홉이 있어 구정봉이라 이름 붙인 것이니,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은 마르지 않는다. 속설에 아홉 용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동석(動石)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層巖) 위에 서있는 세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그 무게는 비록 천백 인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암(靈巖)이라 칭하고,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 백분화(白賁華)의 시에, “저 돌은 태산같이 무겁고 내 힘은 하나의 새깃처럼 가볍구나. 태산의 경중을 어찌 일찍이 저울로 달 수 있으랴. 태산을 끼고 바다를 건너 뛰는 것을 누가 다시 어렵고 쉬운 줄 알리요. 이제 이 돌에서 천지를 한 손바닥처럼 운전하는 이치를 알겠도다.” 하였다. 달마산(達摩山) 옛날 송양현(松陽縣)에 있는데, 군의 남쪽으로 1백 24리 떨어져 있다. 또 해남현(海南縣)에서도 보인다. ○ 고려 때 중 무외(無畏)의 기(記)에, “전라도 낭주(朗州)의 속현을 송양현이라 하는데, 실로 천하에서 궁벽한 곳이다. 그리고 그 현의 경계에 달마산이 있는데, 북쪽으로는 두륜산(頭輪山)에 접해 있고, 삼면은 모두 바다에 닿아 있다. 산 허리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무성하여, 모두 백여 척이나 되는 것들이 치마를 두른듯 늘어 서 있다. 그 위에 아주 흰 돌이 우뚝 솟아 있는데 당(幢)과도 같고 벽과도 같다. 혹 사자가 찡그리고 하품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용과 범이 발톱과 이빨을 벌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멀리 바라보면 쌓인 눈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 길이나 되는 벽 아래, 미타혈(彌陀穴)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 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세 사람이 앉을 만하다. 앞에는 층대가 있어 창망한 바다와 산들이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있는 것 같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 보를 가면 높은 바위 아래 작고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 물은 짜며, 조수를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그 땅의 끝편에 도솔암(兜率庵)이 있는데, 그 암자가 앉은 형세가 훌륭하여 그 장관을 따를 만한 것이 없다. 이곳은 화엄조사(華嚴祖師) 상공(湘公)이 터잡고 지은 곳이다. 그 암자 북쪽에는 서굴(西窟)이 있는데, 신라 때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처음 살면서 낙일관(落日觀)을 수리한 곳이다. 서쪽 골짜기에는 미황사(美黃寺)ㆍ통교사(通敎寺)가 있고, 북쪽에는 문수암(文殊庵)ㆍ관음굴(觀音窟)이 있는데, 그 상쾌하고 아름다움이 참으로 속세의 경치가 아니다. 또 수정굴(水精窟)이 있는데, 수정(水精)이 나온다. 지원(至元) 신사년 겨울에 남송(南宋)의 큰 배가 표류해 와 이 산 동쪽에 정박했을 때, 한 고관이 산을 가리키면서 주민에게 묻기를, “내가 듣기에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 하는데, 이 산이 그 산 아닌가.” 하므로, 주민들이 “그렇다.” 하였다. 이에 그 고관은 즉시 그 산을 향하여 예를 하고, “우리나라는 다만 이름만 듣고 멀리서 공경할 뿐인데, 그대들은 이곳에서 생장했으니 부럽고 부럽도다.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상주할 땅이다.” 하고 그림으로 그려 갔다. 위대하다, 이 산이여. 어찌 매우 높고 빼어난 모양이 산과 바다의 아름답고 풍부함을 다 했을 뿐이랴. 그 성적(聖跡)과 영험한 자취도 많았도다. 또 외국인들까지도 우러르고 공경함이 저와 같았다. 그러나 먼 지방에 있어서 세상에는 등반하여 감상하는 자가 없으니 슬프다. 만약 세상을 버리고 도를 찾는 선비로서 절정에 올라가 차가운 바람을 타고, 대사(大士)가 세상 밖에서 이른바 전하지 못한 묘함을 얻은 자가 있다면, 저 소림(少林)에서 진수(眞髓)를 얻은 자 또한 어떠한 사람이라 할까.” 하였다. 갈두산(葛頭山) 군의 남쪽 1백리에 있다. 화현(火峴) 군의 남쪽 28리에 있다. 가학현(駕鶴峴)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율현(栗峴) 군의 서남쪽 25리에 있다. 영원현(嶺院峴) 군의 동쪽 10리에 있다. 동음소현(冬音所峴) 군의 동남쪽 25리에 있다. 바다 군의 서남쪽에 있다. 덕진포(德津浦) 군의 북쪽 5리에 있다. 월출산에서 나와 바다로 들어간다. 노도(露島) 주위가 40리이고, 목장이 있다. 달목도(達木島) 주위가 56리이고, 목장이 있다. 보길도(甫吉島) 주위가 63리이다. 여차라도(餘次羅島) 주위가 30리이다. 화도(花島) 주위가 50리이다. 백내리도(白乃里島) 주위가 27리이다. 횡간도(橫看島) 주위가 39리이다. 감물내리도(甘勿乃里島) 주위가 44리이다. 어응포도(於應浦島) 주위가 40리이다. 고도(羔島) 주위가 29리이다. 죽청도(竹靑島) 주위가 20리이다. 계화도(界火島) 주위가 14리이다. 달도(達道) 주위가 14리이다. 말응두도(末應豆島) 주위가 53리이다. 말개도(末介島) 주위가 19리이다. 어화도(於火島) 주위가 24리이다. 거요도(居要島) 주위가 17리이다. 가지도(可知島) 주위가 18리이다. 내등도(內等島) 주위가 25리이다. 장좌도(長佐島) 주위가 27리이다. 좌지도(左只島) 주위가 36리이다. 수덕도(愁德島) 주위가 27리이다. 여작지도(餘作只島) 주위가 27리이다. 소모도(小茅島) 주위가 30리이다. ○ 이상은 군의 남쪽 90리 바다 가운데 있다.
【토산】 감ㆍ석류ㆍ유자ㆍ굴[石花]ㆍ새우[蝦]ㆍ낙지[絡締]ㆍ전복[鰒]ㆍ붕어[鯽魚]ㆍ홍합(紅蛤)ㆍ조개(蛤)ㆍ숭어[秀魚]ㆍ게[蟹]ㆍ감태(甘苔)ㆍ김ㆍ우무[牛毛]ㆍ매산(苺山)ㆍ황각(黃角)ㆍ미역ㆍ가사리(加士里)ㆍ소금ㆍ복령(茯笭)ㆍ안식향(安息香)ㆍ표고[香蕈]ㆍ생강.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4천 3백 69척이고, 높이가 15척이며, 안에 네 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달량영(達梁營) 군의 남쪽 90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을 두었다. 『신증』 정덕(正德) 임오년에 없애고, 강진(康津) 가리포(加里浦)로 옮겼다.
【봉수】 갈두산 봉수(葛頭山烽燧) 동쪽으로 강진현의 좌곡산(佐谷山)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해남현 관두산(館頭山)에 응한다.
『신증』 【궁실】 객관 이숙함(李淑瑊)의 시에, “나그네의 고향 생각 세어 보면 많은데, 역로(驛路)는 멀고 멀리 하늘 가에 있구나. 아침 안개 개니 신기루의 도시가 벌어지고, 저녁 연기 나는 곳에 어부의 집이 있구나. 밤 깊고 사람 고요한데 발 걷으니 달이 환하고, 가을 다 가고 서리 내렸는데 국화꽃 피었구나. 놀며 구경하면서도 밥 한 그릇 먹을 동안을 잊지 못하여, 매양 남두성(南斗星)에 의지하여 서울을 바라보누나.” 하였다.
【누정】 양휘루(揚輝樓) 객관 동쪽에 있는데, 군수 강삼(姜參)이 세웠다. 『신증』 배회루(徘徊樓)라 개명하였다. ○ 안침(安琛)의 시에, “배회루 위에 달이 배회하는데, 나그네도 배회하니 또한 쾌하도다. 옥토끼는 몇 년 동안 선약(仙藥)을 찧었으며, 항아(姮娥)는 어느 곳에서 경대를 펼쳤는가. 흔들리는 파도에 백 동파(百東坡) 흩어지는 물이요, 그림자를 대하여 셋이 되는 태백(太白)의 잔이로다. 곧 밤이 되자 하늘은 씻은 듯한데, 서늘한 바람은 계향(桂香)을 불어 보내는구나.” 하였다.
【학교】 향교 군의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영보역(永保驛) 군의 북쪽 성 밑에 있다. 청풍원(淸風院) 일명 청정원(淸淨院)이라고도 한다. 군의 남쪽 11리에 있다. 보현원(普賢院)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수원(燧院) 군의 북쪽 25리에 있다.
【교량】 덕진교(德津橋) 덕진포에 있다.
【불우】 도갑사(道岬寺) 월출산에 있다. 도선(道詵)이 일찍이 머물렀던 곳이다. 비석이 있는데 글자가 마멸되어 읽을 수가 없다. 절 아래 동구(洞口)에 두 개의 입석(立石)이 있는데, 하나에는 ‘국장생(國長生)’ 3자가 새겨져 있고, 또 하나에는, ‘황장생(皇長生)’ 3자가 새겨져 있다. 통교사(通敎寺)ㆍ미황사(美黃寺)ㆍ도솔암(兜率庵)ㆍ관음굴(觀音窟)ㆍ서방굴(西方窟)ㆍ수정굴(水精窟) 모두 달마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 군의 남쪽 3리에 있다. 월출산신사(月出山神祠) 본읍에서 제사를 지낸다. 여단(厲壇) 군의 북쪽에 있다.
【고적】 곤미폐현(昆湄廢縣)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고미현(古彌縣)인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속현으로 만들고 고려와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고진도(古珍島) 곤미현 서쪽에 있다.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에 진도현(珍島縣)이 왜구 때문에 땅을 잃고 여기에 붙어 살다가 이제는 본토에 돌아갔으나 고을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최씨원(崔氏園) 군의 서쪽 15리에 있다. ○ 속설에, 신라 사람 최씨가 있었는데 정원 안에 열린 외 하나의 길이가 한 자나 넘어 온 집안 식구가 퍽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최씨 집 딸이 몰래 그것을 따 먹었더니, 이상하게 임신이 되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부모는 그 애가 사람 관계없이 태어난 것이 미워 대숲에다 내 버렸다. 두어 주일 만에 딸이 가서 보니 비둘기와 수리가 와서 날개로 덮고 있었다. 돌아와 부모께 고하니, 부모도 가서 보고 이상히 여겨 데려다가 길렀다. 자라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는데, 이름을 도선(道詵)이라 하였다. 그는 당 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 산을 답사하고 물을 보는데 신명스러움이 많았다. 뒤에 그곳을 구림(鳩林) 또는 비취(飛鷲)라 했다. ○ 최유청(崔惟淸)이 지은 광양(光陽)의 옥룡사비(玉龍寺碑)를 상고하건대, 도선의 어머니는 강씨(姜氏)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최씨라고 하였으니, 누가 옳은지 모르겠다. 동석사(動石寺) 월출산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월출산 서쪽 고개 마루에 이상한 한 덩어리 바위가 있네. 지나는 길손 모두 길을 굽히고, 대개 올라서 구름 자취를 찾는다. 내가 만약 그대로 지난다면 땅의 신령이 응당 책망하리라. 산 아래에 와서 말을 멈추니, 나뭇가지에 나는 신이 멈추도다. 과연 천 길이나 되는 바위를 만나니, 높고 우뚝한 것 빈 하늘을 의지했구나. 여와씨(女媧氏)가 일찍이 하늘을 기울 때 아직도 금액(金液)을 굳히지 못하여, 날아서 백운 풀에 떨어지니 하늘에서 거리가 겨우 지척일세. 참으로 그는 낙(駱)ㆍ원(原)의 사신이라, 명승지를 사랑하여 멀리 가는 것도 잊었도다. 어떤 사람이 포금(布金)의 곁에다 처음으로 절[空王宅]을 창건했는가. 정녕 형악(衡岳)의 창름(倉廩)을 사랑하여 난간에 임하여서 등척(騰擲)하고자 하나, 혹시라도 신물(神物)의 보호가 있을까 두려워서 놀라 바라보고 썼던 모자를 바로 하였으리라. 손을 따라 바야흐로 흔들어 떨치니, 응당 먼지를 끌어 붙이는 호박(琥珀) 같으리라. 이름만 듣고 오래도록 의심만 품었는데 한 번 보자 얼음이 풀리듯 알겠도다. 흥이 다하여 깨끗한 방을 찾아 방석 깔고 비고 훤한 데에 앉으니, 잠깐 사이에 감로반(甘露飯) 한 사발이 부엌[香積]에서 왔도다. 그대로 도연명의 술잔을 잡고 해가 서산에 육박해 감을 알지 못했더니, 달빛이 사람을 비추며 오니 맑은 경치 더욱 아깝구나. 고요한 가운데 누가 반려(伴侶)가 될까? 소나무ㆍ돌까지 세 익우(益友)가 되네.” 하였다. 회의부곡(懷義部曲) 군의 남쪽 1리에 있다. 심정부곡(深井部曲) 군의 남쪽 1백 30리에 있다. 귀인부곡(貴仁部曲) 군의 남쪽 90리에 있다. 송정부곡(松井部曲) 군의 남쪽 1백 10리에 있다. 진남향(鎭南鄕)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동백소(冬柏所) 군의 동쪽 15리에 있다.
【명환】 고려 유광식(柳光植) 정치는 청백하고 엄격한 것을 숭상하니,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모하였다.
【인물】 고려 최지몽(崔知夢) 처음 이름은 총(聰)이다.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는데, 복서(卜筮)에 더욱 정통했다. 태조가 그의 이름을 듣고 꿈을 점치게 했더니, 길조를 얻었다면서, “반드시 삼한(三韓)을 통어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기뻐하여 지몽(知夢)이라고 이름을 고쳐 주었다.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경종(景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열녀】 고려 최씨(崔氏) 진주 호장(晉州戶長) 정만(鄭滿)의 아내이다. 자세한 것은 진주 열녀 편을 보라. 김씨(金氏) 중랑장(中郞將) 조안정(趙安鼎)의 아내이다. 나이 17세에 아버지가 죽고 18세에 남편이 죽고 19세에 어머니가 죽었으나, 모두 여막에서 3년상을 치루었다. 애통해 하기를 고치지 않았고 생업(生業)을 일삼지 않았다. 그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려하였다.
【제영】 연해고연인도가(連海孤煙認島家) 김극기의 시에, “구름을 격한 두어 마디 경쇠 소리가 언덕의 절을 알리고, 바다를 연한 외줄기 연기 섬의 인가를 알게 하네.” 하였다. 송황교영육칠리(松篁交影六七里) 김신윤(金莘尹)의 시에, “소나무 대나무 그림자 6, 7리에서도 얽히고, 닭과 개짖는 소리 수백 집일세.” 하였다. 수점취연죽외가(數點炊煙竹外家) 고득종(高得宗)의 시에, “한 소리 우는 경쇠는 구름 가운데 절에서 나오고, 두어 줄기 불때는 연기는 대나무 밖의 집에서 나는도다.” 하였다. 죽림신순장룡추(竹林新筍長龍雛) 서거정(徐居正)이 이 사군(李使君)을 보내는 시에, “황원(黃原)이 바다를 진무(鎭撫)한다 말하는 것 같더니, 그대를 보내노라. 이제 다시 어부(魚符 군수의 인)를 찼도다. 덕진(德津)에는 물이 얕아도 다리가 아직 있고, 도갑(道岬)에는 비석이 남았는데 글씨가 반은 없구나. 매화나무 언덕엔 꽃이 눈처럼 흩날리고, 죽림의 새 죽순은 용의 새끼가 자란 듯, 흰 머리 외로이 노는 흥취를 저버리니, 누가 호남의 색칠한 그림[着色圖]을 보내주랴.”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군시(郡始) 서쪽으로 5리이다. 군종(郡終) 동쪽으로 20리. 북일시(北一始)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일종(北一終)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북이시(北二始)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북이종(北二終) 위와 같다. 서시(西始) 끝이 15리이다. 서종(西終) 끝이 20리이다. 곤일시(昆一始)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곤일종(昆一終) 서쪽으로 끝이 90리이다. 곤이시(昆二始) 서쪽으로 끝이 40리이다. 곤이종(昆二終) 서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옥천시(玉泉始) 남쪽으로 처음이 6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옥천종(玉泉終) 남쪽으로 처음이 80리이고, 끝이 90리이다. 북평시(北平始) 옛 북평향(北平鄕)이다. 남쪽으로 처음이 1백 리이고, 끝이 1백 10리이다. 북평종(北平終) 남쪽으로 처음이 1백 20리이고, 끝이 1백 30리이다. 송수시(松首始) 옛 송수향(松首鄕)이다. 남쪽으로 끝이 1백 30리이다. 송수종(松首終) 남쪽으로 끝이 1백 50리이다. 위의 6면(面)은 해남(海南)의 남쪽 경계 너머에 있으며, 모두 바다와 연해 있다. 노아도(露兒島) 남쪽으로 1백 80리이다. 보길도(甫吉島) 남쪽으로 2백 리이다. 잉거도(芿巨島) 위와 같다. 소안도(所安島) 위와 같다. 추자도(楸子島) 남쪽으로 3백 리이다. 위의 다섯 섬은 모두 육지에 면(面)을 두고 있다. ○ 진남향(鎭南鄕)은 서쪽으로 20리, 회의부곡(懷義部曲)은 남쪽으로 10리이며, 귀인부곡(貴仁部曲)은 남쪽으로 90리이고, 송정부곡(松井部曲)은 남쪽으로 1백 리이며, 심정부곡(深井部曲)은 남쪽으로 1백 30리이다. 위의 세 곳은 모두 해변에 있다. 동백소(冬栢所)는 동쪽으로 12리이다.
【진보】 이진진(李津鎭) 남쪽으로 1백 20리에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4백 78척이며, 우물이 둘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명이다. 어란포진(於蘭浦鎭) 남쪽으로 1백 50리에 있다. 성의 둘레는 1천 4백 7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해남(海南)에서 본군으로 이속되었다. ○ 수군만호 1명이다.
【창고】 창(倉) 넷 읍내에 있다. 해창(海倉)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서창(西倉)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옥천창(玉泉倉) 남쪽으로 70리에 있다. 이창(梨倉) 이진(梨津)에 있다.
【목장】 노아도(露兒島)ㆍ소안도(所安島).
【진도】 이창진(梨倉津) 이진에 있다. 용당진(龍堂津) 무안(務安)과 목포진(木浦鎭)으로 통한다.
【교량】 쌍교(雙橋) 남쪽으로 60리에 있다.
【토산】 왕대[篁竹]ㆍ화살대[箭竹]ㆍ감ㆍ유자ㆍ옻[漆]ㆍ차[茶].
【누정】 대월루(對月樓) 읍내에 있다. 해월루(海月樓) 이진(梨津) 남쪽에 있다. 제주도로 가는 자는 여기서 배를 타며, 소안도(所安島)에서 바람을 살린다. 영보정(永保亭)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회사정(會社亭) 서쪽으로 20리에 있다.
【단묘】 월출산단(月出山壇) 신라 때에는 월나악(月奈岳)이라 부르고, 명산이라 하여 소사(小祀)로 모셨으며, 본조(本朝)에서도 본읍에 제사하도록 영을 내렸다.
【사원】 녹동서원(鹿洞書院) 인조 경오년에 건립하고 숙종 계사년에 사액하였다. 최덕지(崔德之) 자는 우수(迂叟)이며, 호는 연촌(煙村)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벼슬은 제학(提學)이었는데 문종 때에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다. 김수항(金壽恒) 양주(楊洲) 조에 보라. 최충성(崔忠成) 자는 필경(弼卿)이며, 호는 산당(山堂)이다. 최덕지의 아버지이다. 김창협(金昌協) 양주(楊洲) 조에 보라. ○ 충절사(忠節祠) 효종 임진년에 건립하고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정운(鄭運) 자는 창진(昌辰)이며,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임진왜란 때에 녹동 만호(鹿洞萬戶)였는데, 거제(巨濟)의 옥포(玉浦)에서 전사하였다.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주D-001]오정(五丁)이……뚫어 : 예전에 중국의 진 나라와 촉(蜀) 나라는 검각산을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그 검각산이 원체 험악하여 교통하지 못하였다. 진 나라에서 쇠로 소를 하나 만들어 놓고 밤에 그 소 뒤에다가 금을 한 덩이씩 갖다 놓고 그 쇠로 만든 소가 금똥을 눈다고 말하였다. 촉 나라에서 그 소문을 듣고 힘이 센 역사[五丁力士]를 시켜서 산의 돌을 깨고 사닥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고, 그 소를 훔쳐 갔다. 그것이 검각산의 길이 열리게 된 시초이다.
[주D-002]사람이 시들었다 : 《예기》의 단궁(檀弓)에 “현철한 사람이 시드니, 나는 장차 누구를 따르랴[哲人其萎吾將安放].”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공자의 죽음을 말한 것이다.
[주D-003]이 징군(李徵君) : 징군(徵君)이라는 말은 그 자신이 벼슬하려 하지 않았으나 나라에서 먼저 부른 사람이란 말이다. 여기 이 징군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주D-004]양을 잃고……울 것인가 : 양주(楊朱)가 갈림길에서 양을 잃은 것을 보고,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을 탄식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주D-005]당(幢) : 당(幢)은 절 같은 데에서 무쇠나 구리로 기둥같이 높게 세운 것인데, 원래는 여러 깃발을 달기 위하여 만들었을 것이나 깃대는 아닌 것이다.
[주D-006]저 소림……얻은 자 : 인도 불교의 28대 교조인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와서 하남성 숭산 소림사(河南省嵩山少林寺)에서 선학(禪學)을 전수하였는데, 그의 수제자 혜가(彗可)가 그의 학문의 진수를 얻었다 한다.
[주D-007]흔들리는……물이요 : 소동파(蘇東坡)가 달 밝은 밤에 낚시하는데 물이 평온할 때에는 그림자가 하나이지만, 물이 출렁대면 물결마다 한 그림자가 보여서 백 동파(百東坡)가 된다고 한 말이 있다.
[주D-008]나뭇가지에……멈추도다 : 고개가 원체 높으므로 길가는 사람이 마치 나무 끝에 있는 것 같아서 그가 신은 신 역시 나무 꼭대기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주D-009]응당……같으리라 : 호박(琥珀)을 뜨겁게 문질렀다가 티끌에 대면 전기가 일어서 티끌이 호박으로 달라붙는다.

연려실기술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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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정난(靖難)에 죽은 여러 신하

황보인(皇甫 仁) 《세종조 상신록》
김종서(金宗瑞) 《문종조 상신록》
정분(鄭苯) 《상신록》
이양(李穰)
이양은, 종실 사람이오,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랐고, 세종의 수릉관(守陵官)이 되어서 정일품(正一品)에 오르고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조극관(趙克寬)ㆍ조수량(趙遂良)ㆍ조번(趙藩)

조극관은, 본관이 양주(楊州)인데, 정평공(靖平公) 계생(啓生)의 아들이요, 문강공(文剛公) 말생(末生)의 조카이다. 태종 갑오에 문과에 오르고, 세종조에 경상 감사를 거쳐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계유년 10월 10일 밤에 향교동(鄕校洞) 네거리에서 죽었는데, 적몰하고 연좌되었다가 예종(睿宗)조에 해금되었다.조수량은 극관의 아우인데, 세종 경자에 문과에 오르고 계유년에 평안 감사가 되어 미처 부임하지 못하고 난을 만나 영광(靈光)으로 귀양갔다 《해동야언》에는 고성(固城)으로 귀양갔다 하였다 가 조금 뒤에 사사되었다.
조번은 극관의 종제인데, 계유년에 같이 화를 입었다.
번의 아우 이(籬)가 진사로서 연좌되어 청주로 귀양갔었고, 김시습(金時習)ㆍ서거정(徐居正)과 서로 시를 지어 주고 받고 하였다. 성종조에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이상은 양주 조씨의 족보


민신(閔伸)

민신은,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문종조에 병조 판서가 되고 곧이어 이조 판서로 옮겼는데, 계유년에 화를 입었다. 뒤에 보관(復官)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 임신에 세조가 연경에 갈 때에 신을 부사(副使)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민신이 병을 칭탁하고 가지 않았다. 계유년에 정수충(鄭守忠)이 세조께 아뢰기를, “신이 가만히 용(瑢)에게 붙었으니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황보인(皇甫麟)의 무리를 베는 시기에 이르러 신이 마침 현릉(顯陵)에 비 세우는 역사를 감독하고 있었는데, 세조가 삼군 진무(三軍鎭撫) 서조(徐遭)를 보내어 역사하는 장소에서 베었다. 신의 아들 보창(甫昌)ㆍ보해(甫諧) 등 다섯 사람도 모두 죽었다.


허후(許詡)

허후는, 본관은 하양(河陽)이니, 영상 문경공(文敬公) 조(稠)의 아들이다. 세종 병오에 문과에 오르고, 병진에 중시(重試)에 뽑혔다. 황보인ㆍ김종서 등과 더불어 문종의 고명을 받았는데, 계유년에 좌참찬으로 귀양갔다가 사사되었다.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 공의 가문은 충효를 대대로 가풍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여의고 상주 노릇함에 극히 애통히 하였으며, 어머니를 섬김에 있어서 마음을 기쁘게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세종조 20여 년 동안에 몸을 조심하고 입을 삼가 지켰다. 《추강집 본전》
○ 처음에, 허후가 승지에 올랐을 때에 사람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는데, 아버지 허조는 홀로 근심하는 안색을 띠고 밤새 자지 않았다. 혹자가 물으니, 조가 말하기를, “천도로 보면 무엇이든지 차면 이지러지기 시작하는 법인데, 내가 세상에 공덕도 없이 관품이 신하로서는 최고인 정승의 자리에 이르렀고, 자식도 승지가 되었으니. 허씨의 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하더니, 과연 그 말이 들어맞았다. 《추강집》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

안평대군 용은, 자는 청지(淸之)이며, 호는 비해당(匪懈堂)이요,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계유년에 강화(江華)에 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시호는 장소공(章昭公)이다.
○ 공이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시와 문에 더욱 능하였으며, 서법이 기이하고 뛰어나, 천하에 제일이었다. 또 그림을 잘 그리고, 거문고와 비파를 잘 탔다. 성품이 호방하여, 옛것을 좋아하고 좋은 경치를 찾아서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지었고, 또 남호(南湖)에는 담담정(淡淡亭)을 짓고, 만 권의 서적을 쌓아놓고 문사들을 불러모아 〈십이경시(十二景詩)〉를 짓고, 또 〈사십팔영〉을 지었으며, 밤에 등불을 켜 달고 얘기하기도 하고 달빛 아래 배를 띄우기도 하며, 연구(聯句)를 짓기도 하며, 바둑이나 장기를 두기도 하니,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고, 진탕 마시고 취하여 우스갯 소리를 하며, 한때의 이름 있는 선비와 모두 사귀었는데, 무뢰배와 잡인들도 많이 따랐다.바둑판과 바둑알을 모두 옥으로 만들었으며, 바둑알에 도금(鍍金)도 하였다. 또 사람을 시켜 얇은 비단을 짜게 해서 진서(眞書)ㆍ초서ㆍ행서를 휘갈겨 써서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내주었다. 하는 처사가 모두 이와 같았다. 《용재총화》
○ 성간(成侃)이 크게 이름이 났으므로, 공이 사람을 시켜 청하니, 간이 가보고 시부로 화답하였다. 공경히 대접하여 보내고 후일에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였다. 간의 어머니가 간에게 말하기를, “왕자의 도리로는 마땅히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근신하며 다른 일이 없어야 하니, 어찌 사람을 모아 패거리를 만드는 일을 하겠는가.그 실패할 것을 알 수 있으니, 너는 함께 사귀지 말라.” 하였다. 그 뒤에 두세 번 성간을 불렀으나, 끝내 왕래하지 않았다. 얼마 안되어 공이 실패하여 죽었으니, 간의 집안 사람이 모친의 식견에 탄복하였다. 《용재총화》 ○ 성간은 용재의 중형이다.
○ 안평의 필법이 뛰어나고 갸륵하며 재기가 가장 우수하여, 조자앙(趙子昻) 맹부(孟頫)와 서로 견주어야 마땅한데, 공은 조자앙의 필법만을 본받았기 때문에, 속스러운 것을 면치 못하였다. 또한 안평이 귀공자로서 처음으로 이 필법을 주창하여 온 세상을 휩쓸었다. 이 때문에 그 뒤 역대의 어필(御筆)이 우연히 모두 이 필법을 써서,드디어 나라 습속이 되었다. 근년까지 온 세상이 이 필법에 쏠려서 왕우군(王右軍 왕희지)과 자앙을 같은 수준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말하기를, “청지(淸之 안평(安平))가 왕우군의 필획으로 조자앙의 서체를 썼다.” 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원교필결(圓嶠筆訣)》


박팽년(朴彭年)

박팽년은, 자는 인수(仁叟)이며, 호는 취금헌(醉琴軒)인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세종 갑인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에 중시에 뽑혔다. 병자에 형조 참판으로 아버지 판서 중림(仲林)과 아우 네 사람과 아들 헌(憲) 등과 함께 모두 죽었다. 숙종 때에 시호를 충정(忠正)이라 내려 주고, 영조 무인(1758)에 이조 판서로 증직하였다.
○ 공은 성품이 침착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소학(小學)》책에 나오는 예법으로 몸을 단속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의관을 벗지 아니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하였다. 문장이 온화하고 맑으며 필법은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다. 《추강집본전》
○ 공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충성심이 있어 명 나라의 천순(天順) 황제가 오랑캐에게 잡혔을 때에는 정침(正寢)에서 자지 않고 항상 지게문 밖에 짚자리를 깔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물으니 답하기를, “천자가 오랑캐 나라에 있어, 천하가 당황하니, 내가 비록 배신(陪臣)이나, 차마 마음이 편치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치재일기(耻齋日記)》 ○ 《무인기문(戊寅記聞)》에는 이것을 하위지의 말이라 하였고, 혹은 두 공이 다 행하였다 한다.
○ 집현전의 문학하는 선비에 신숙주ㆍ최항(崔恒)ㆍ이석형(李石亨)ㆍ정인지 등이 박팽년ㆍ성삼문ㆍ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와 함께 모두 한때 이름을 날렸는데, 성삼문은 문란(文瀾)이 호방하나 시에는 재주가 짧고, 하위지는 대책(對策)과 소장(疏章)에는 능하나 시를 알지 못하고,성원은 타고난 재주가 숙성하였으나, 견문이 넓지 못하고, 이개는 맑고 영리하여 발군의 재주가 있으며 시도 뛰어나게 맑았으나 제배들이 모두 팽년을 추앙하여 집대성(集大成)이라 하였으니, 그가 경학ㆍ문장ㆍ필법에서 모두 능함을 이름이다. 그러나, 모두 참화(慘禍)를 입어서 저술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용재총화》
○ 세조가 영의정이 되어서 부중(府中)에서 잔치하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 풍악 소리 구슬프니 / 廟堂深處動哀絲
만사가 오늘에는 도무지 모를레라 / 萬事如今摠不知
풍이 솔솔 불고 버들가지 푸르른데 / 柳綠東風吹細細
꽃이 핀 밝은 봄날 길고 기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이 이룬 대업은 금궤에 있는 책을 찾아 놓고 / 先王大業抽金櫃
성주의 큰 은혜는 옥잔에 취하도다 / 聖主鴻恩倒玉巵
즐기지 아니하고 어이하랴 / 不樂何爲長不樂
취하고 배부르니 태평성대 노래하세 / 賡歌醉飽太平時

하였다. 세조가 그 시를 부중에 현판으로 걸게 하였다.
○ 세조가 육신들에게 형신할 때에 김질(金礩)을 시켜 술을 가지고 옥중에 가서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러준 노래를 읊어 시험하니, 성삼문은 정포은의 노래로 답하였고, 박팽년과 이개는 모두 스스로 단가(短歌)를 지어서 답하였다 한다.
○ 일찍이 단가(短歌)를 지어 이르되,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며,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들 임 마다 좇을소냐.” 하였다.[金生麗水라 들 물마다 金이 나며 玉出崑崗이라 들 뫼마다 玉이 나며 女必從夫라 들 님마다 조츨소냐] 《추강집》
○ 공이 처형에 임하여 사람들을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우리들을 난신(亂臣)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들의 죽음은 계유년 때 사람(김종서 등을 말함)과 같지 않다.” 하였다. 금부랑 김명중(金命重)이 사사로이 박팽년에게 말하기를, “공이 어찌 군부(君父)에게 불효를 저질러 이런 화를 당하는가.” 하니, 공이 탄식하되, “마음이 평온하지 않으니 할 수 없다.” 하였다. 《추강집》
○ 공이 죽을 때에 아들 순(珣)의 아내 이씨(李氏)가 임신 중이었다. 대구(大邱)에 사는 교동(喬桐) 현감 이일근(李軼根)의 딸인데, 자청하여 대구로 갔다.
조정에서 명하기를, “아들을 낳거든 죽이라.” 하였다. 박팽년의 여종 또한 임신 중이었는데,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인이 딸을 낳으면 다행이요, 나와 똑같이 아들을 낳더라도 종이 낳은 자식으로 대신 죽게 하리라.” 하였는데, 해산을 하니, 주인은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았다. 바꾸어 자기 자식을 삼고, 이름을 박비(朴婢)라 하였다.장성한 뒤 성종조 때에 박순의 동서 이극균(李克均)이 본 도 감사로 와서 불러 보고 눈물을 씻으며 말하기를, “네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왜 자수하지 않고 끝내 조정에 숨기는가.” 하며, 곧 자수시켰다.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고 이름을 일산(壹珊)으로 고쳤다. 지금 박 동지(同知) 충후(忠後)가 그 자손이다. ○《장빈호찬(長貧胡撰)》 《노릉지(魯陵誌)》
○ 부인 이씨(李氏)는 관비가 되어서 수절하며 평생을 마쳤다.
○ 공이 그 사위 이공린(李公麟) 평안 감사 윤인(尹仁)의 아들이요, 재사당(再思堂) 원(黿)의 아버지이다. 을 맞던 날에 공청에서 물러 나와 묻기를, “납폐하였는가?”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납폐는 하였지만 폐백을 대광주리에 담았으니, 이것이 무슨 무례인가요.”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 사람을 취한 것이 이 때문이요” 하였다. 《병자록》 ○ 공린이 무과를 하였는데, 장인에게 연좌되어 폐고(廢錮)되었다가 성종조에 서용되어 현령이 되었고 연산조(燕山朝)에 또 아들 원에 연좌되어 청주로 귀양갔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뒤에 청주에 물러나서 살았다.
○ 공이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에서 번드는데, 세종이 친히 나와서 잔에 술을 부어 돌렸다. 공이 취하여 엎어져서 고꾸라지매, 세종이 비단 남빛 옷을 벗어서 덮어 주었다. 죽은 뒤에 공의 자손이 이 옷만을 여러 대 전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옷과 신주를 함께 땅에 묻었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에 파내어 보니, 신주는 완전하나 옷은 썩었다고 한다. 《병자록(丙子錄)》
○ 공의 후손 충후(忠後)가 대구에 살면서 천역에 들었는데, 부사 박응천(朴應川)이 명부에서 빼어 천역을 면하게 하였고, 선조 초년에 관직을 제수하였다. 《동각잡기》
○ 선조가 하루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박팽년이 일찍이 친구를 천거하였는데, 그 친구가 밭을 주려 하매, 박팽년이 말하기를, ‘친구간에 주고받는 것은 비록 거마라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옛 글이 있지마는 혐의스러우니 받을 수 없다.’ 하고, 거절하였다 하니, 이것이 청렴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하고 곧 명하여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 공의 현손(玄孫) 계창(繼昌)이 선조 신미에 처음으로 녹용의 은전(恩典)을 입어서 소격서(昭格署) 참봉을 제수 받았다. 일찍이 계창이 공의 기제사날 꿈에 여섯 사람이 사당 문 밖에 와서 서 있는 것을 보고 깨어나서 곧 여섯 분의 제사를 지냈다. 박숭장(朴崇章)이 기록한 것에 “한강(寒崗) 정구(鄭逑)가 말하기를 ‘사대부 집에 훈공이 있어서 군을 봉한 조상은 의례 시조가 되어서 조천(祧遷)하지 않는 것인데, 지금 선생의 사업은 어찌 봉군뿐이겠는가’ 하며, ‘영원히 조천하지 말라’ 하였기 때문에, 정식(定式)삼았다.” 하였다.
○ 대대로 회덕(懷德)에 살다가, 뒤에 전의(全義)로 옮겼는데, 지금도 박동(朴洞)에 유지(遺址)가 있다. 《노릉지(魯陵誌)》


박중림(朴仲林)

박중림은, 호는 한석당(閑碩堂)이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세종 계묘에 문과에 오르고, 정미에 중시에 뽑혀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병자에 아들 박팽년과 같이 죽었다. 과보(科譜)에는 계유년에 죽었다 하였다. 시호는 문민공(文愍公)이다.
○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웠고, 장성하여서는 경적(經籍)에 정통하였다. 세종이 집현전을 두니, 공이 문장과 덕행이 있다는 이유로 뽑히었다.
○ 병자에 박팽년과 함께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같이 죽었다. 처형에 임하여 여러 아들이 울며 고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려 하니, 효도에 어긋납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임금을 섬기는 데 충성하지 못한 것은 효가 아니니라.” 하였다. 《장릉지(莊陵誌)》


성승(成勝)

성승은,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도총관(都摠管)에 이르렀다. 병자에 아들 성삼문과 같이 죽었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 을해년에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할 때에 공이 도총부에서 번들다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말하기를, “일은 끝났다.” 하고, 곧 말을 몰아 돌아왔는데 딴 방에 누워서 집 사람들도 볼 수가 없었고, 오직 성삼문이 오면 좌우사람을 물리치고 같이 얘기하였다. 병자년에 성삼문이 상왕의 복위를 꾀하여,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잔치 날에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공과 유응부와 박정(朴崝)이 운검(雲劒)이 되었는데, 이 날 전내(대궐안)가 좁으므로, 운검을 그만 두게 되었다. 공이 칼을 차고 들어가려 하자, 한명회가 말하기를, “이미 전교가 내렸으니, 들어오지 말라.” 하므로 공이 명회 등을 치려 하매 성삼문이 말렸다.


성삼문(成三問)

성삼문은, 자는 근보(謹甫)이며, 호는 매죽헌(梅竹軒)이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세종 무오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년에 중시에 장원으로 뽑혔다. 병자년에 승지로서 아버지 승과 아우 세 사람이 모두 죽었다. 숙종이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주고, 영조 무인년(1758)에 이조 판서로 증직하였다.
○ 공은 홍주(洪州) 노은동(魯隱洞 적동리(赤洞里)) 외가에서 났는데, 날 때에 공중에서 “났느냐.”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렸기 때문에 성삼문으로 이름 지었다. 사람됨이 소탈하여 얘기와 농담을 좋아하고 앉고 눕는 것도 절도가 없어 겉으로 보기에는 주장이 없는 것 같으나 속뜻은 단단하고 확고하여 빼앗을 수 없는 뜻이 있었다 한다. 《추강집》
○ 항상 임금을 경연청(經筵廳)에서 모시며, 보좌할 때가 많았다. 세종이 말년에 병이 있어 여러 번 온천에 거둥하였는데, 편복(便服) 차림으로 늘 성삼문과 이개에게 대가(大駕) 앞에서 고문(顧問)에 응하게 하니, 당시에 영광으로 여겼다.
○ 일찍이 북경에 갔었는데 어떤 사람이 백로(白鷺) 그림에 넣을 시를 써 달라고 청하여서, 공이 건성으로 부르기를,

흰 눈으로 옷을 만들고 옥으로 발을 만드니 / 雪作衣裳玉作趾
갈대 숲 물가에서 고기 노리기 몇 번 이런고 / 窺魚蘆渚幾多時

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림을 내 보이는데, 수묵(水墨)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이어 아랫 구절을 채워서 이르기를,

산음 고을 우연히 지나다가 / 偶然飛過山陰野
왕희지가 벼루 씻던 못(池)에 잘못하여 떨어졌네 / 誤落羲之洗硯池

하였다. 패관잡기
○ 북경에 가는 길에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사당에 쓰기를,

말머리를 잡고 두드리며, 그르다고 말한 것은 / 當年叩馬敢言非
대의가 당당하여 일월같이 빛났건만 / 大義堂堂日月輝
풀나무도 주 나라의 비와 이슬에 자랐는데 / 草木亦霑周雨露
부끄럽다, 그대 어찌 수양산 고사리는 먹었는고 / 愧君猶食首陽薇

하였다. 중국 사람들이 보고 충절이 있는 사람인줄 알았다 한다.
○ 일찍이 단가(短歌)를 짓기를,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峰)에 낙락(落落) 장송(長松)되어 있어,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이몸이 죽어가서 무어시될고 니 蓬萊山第一峯의 落落張松되여읜셔 白雪이 滿乾坤졔 獨也靑靑 리라]” 하였다.
○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원(元)이다. 그 아내가 관비가 되었으나, 절개를 지켰다. 《추강집》
○ 명 나라 급사(給事) 장녕(張寧)이 시강(侍講) 예겸(倪謙) 문희(文僖) 에게 배웠는데, 예겸보다 십 년 뒤에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나왔다. 그때에 나이 24세였는데, 성삼문 등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탄식하며 의아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 스승 예시강(倪侍講)이 동국에 재사가 많다고 말하였는데,어찌 눈앞에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가.” 하며, 이 때문에 시의 수창(酬唱)에 뜻이 없었다. 장녕이 지은 〈예양론(豫讓論)〉을 혹자는 의심하기를, “의도가 있어서 지은 것이 아닌가.” 하였다 한다. 《지봉유설(芝峰類說)》
○ 중종조에 박호(朴壕)가 과거에 올라 육품관이 되었다가, 곧 정언을 제수받았는데, 대사간으로 있는 조(趙)라는 성을 가진 자가 반론하기를, “역신의 후손이 간관(諫官)이 될 수 없다.”고 논박하여 체직(遞職)시키자, 조(趙)의 동배(同輩)들이 책하기를, “네가 감히 명신의 후손을 탄핵하고 논박하니,이렇게 무식하고서야 어떻게 그대로 간관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가.” 하였다. 조가 곧 병을 핑계하여 체직되고, 박이 도로 청반(淸班)에 올라 이조 판서까지 되었다 한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현종(顯宗) 임자년(1672)에 호조 아전[戶曹吏] 엄의룡(嚴義龍)이 우연히 인왕산(仁王山) 비탈 무너진 곳에서 자기 그릇을 발견하였는데, 그 속에는 밤나무 신주 세 개가 있었다. 하나는 고(故) 승지 성삼문의 것이요, 둘은 성삼문의 외손 참찬 박호(朴壕) 부부의 것이었다. 성 승지의 신주는, 겉면(面)에는 성삼문(成三問) 무술생이라고 쓰고, 신주의 감중(坎中)에도 또 그와 같았다.엄의룡이 놀랍고 이상하여 달려와 여러 사대부에게 고하더니 이에 벼슬아치와 선비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몰려가서 배례를 하고 신여(神輿)에 담아 떠메고 와서 임시로 공의 외후손인 진사 엄찬(嚴纘)의 집에 봉안하고, 곧 홍주에 사는 외후손들에게 기별하니 와서 받들고 남쪽으로 돌아갔는데, 홍주 노은골에 아직도 공의 옛 생가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경기 감사는 김우형(金宇亨)이었는데, 연로(沿路)의 관원을 시켜 호송하게 하였다. 각 고을 수령들이 영송함에 정성을 다하지 않는 이가 없고, 혹은 제수를 갖추어 제사지내는 이도 있었다.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이 이로 말미암아 감동하여 구택 옆에 사당을 세우고 거사 당시의 동지였던 다섯 분을 아울러 향사하기로 하고, 병진 여름에 녹운서원(綠雲書院)을 세웠다.공이 순절한 뒤에 부인 김씨가 자기 손으로 신주를 써서 종에게 부탁하여 봉사하다가, 김씨가 죽은 뒤에 신주가 외손 박호에게로 돌아갔었는데, 박호 또한 자손이 없으므로 인왕산 기슭에 자기 집 신주와 함께 묻었다. 이백여 년 뒤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장릉지》


이개(李塏)

이개는, 자는 백고(伯高) 또는 청보(淸甫)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니, 목은(牧隱) 색(穡)의 증손이요, 종선(種善)의 손자이다. 나서부터 문장에 능하였다. 세종 병진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 중시(重試)에 뽑혀 직제학까지 지내다가 병자년(1456)에 죽었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요, 영조 무인년(1758)에 이조 판서를 추증했다.
○ 시와 문이 맑고 절묘하여 세상에서 중하게 여겼다. 《동각잡기》
○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개의 숙부 계전(季甸)이 세조와 대단히 친밀하여 출입하므로, 개가 경계하였다. 병자년에 일이 발각되매, 세조가 말하기를, “일찍이 개가 그런 말을 하였다는 것을 듣고, 마음에 바보스럽게 여겼더니, 과연 비상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구나.” 하였다. 《동각잡기》
○ 몸이 여위고 가냘퍼서 옷도 이기지 못할 것같이 보였는데, 엄한 형신에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으니, 보는 자가 모두 감탄하였다. 《추강집》
○ 단가를 짓기를,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 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가마귀눈비마자희난듯검노라 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向 一片丹心이야 變줄이잇시랴]” 하였다.
○ 공이 직제학으로 있을 때에, 박사 성 간(成侃)과 집현전에서 연구(聯句)를 지었는데,

옥당에 봄은 따뜻하고 날은 길어지기 시작하였는데 / 玉堂春暖日初遲
졸며 남창에 의지하여 백치(白痴)를 기른다 / 睡倚南窓養白癡
우는 두어 마리 새의 소리는 낮 꿈을 놀래게 하고 / 啼鳥數聲驚午夢
살구꽃의 아리따운 웃음은, 새 시에 들어온다 / 杏花嬌笑入新詩

하였다. 성간이 차운(次韻)하기를,

어린 제비와 우는 비둘기 낮 시간이 더딘데 / 乳燕鳴鳩晝刻遲
봄이 찬 연못에는 버들이 어리석은 것 같구나 / 春寒太液柳如癡
집현전에서 졸음을 파하매, 바쁜 일이 없어서 / 鑾坡睡罷無餘事
때로 종이를 펼치고 작은 시를 쓴다 / 時展蠻牋寫小詩

하였다. 《용재총화》
○ 성간이 일찍이 그 형 성임(成任)에게 말하기를, “꿈에 이백고(李伯高)가 용이 되었다. 내가 붙들고 날아서 강을 건너는데, 떨어질까 두려워하였더니, 용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 뿔만 굳게 잡으라’하였다.”고 하였다. 임(任)이 말하기를, “백고는 당시 명망이 높고 일찍이 중시(重試)에 뽑혔는데, 자네가 그 뿔을 붙잡았으니, 반드시 중시 장원에 뽑힐 것이라.” 하였다. 얼마 안되어,공이 죽임을 당하고 간도 또한 병으로 죽었다. 《용재총화》 ○ 총화에는 모두 공을 백고로 일컬었는데, 상촌집(象村集)에 끌어서(引用) 변명하기를, “백고는 청보의 또 하나의 자(字)인가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하건대, 《노릉지(魯陵誌)》에 《추강집(秋江集)》에 있는 본전(本傳)을 인용하여 청보라 하지 않고 백고라고 하였으니, 상촌이 《추강집》을 보지 못하고 이런 논란을 한 것이 아닌가.


하위지(河緯地)

하위지는, 자는 천장(天章) 또는 중장(仲章)이며, 호는 단계(丹溪)요,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세종 무오년(1438)에 문과에 자원하였고, 병자년(1456)에 예조참판으로 죽었다.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
○ 공의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고 말수가 적어, 말을 함에 버릴 것이 없으며, 공손하고 예(禮)에 밝아, 대궐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비가 와서 땅이 질더라도 한번도 통행이 금지된 길로 가지 않았다. 항상 집현전에서 임금을 모시고 경연에서 강의하여, 보정(補正)한 사항이 많았다. 《추강집》
○ 천순(天順)황제가 북쪽 오랑캐에게 잡혔을 때에, 공이 일찍이 감개하여 말하기를, “천자가 몽진(蒙塵)한 것은 천하가 다같이 분하게 여기는 바이다. 우리들이 비록 해외의 배신(陪臣)이지만, 어찌 황제의 고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매양 바깥 사랑에 거처하고 침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공의 뜻과 행실이 이와 같으니, 능히 충의로 순국할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인기문(戊寅記聞)》
○ 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단종이 왕위를 이으니, 인심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였다. 박팽년이 일찍이 공에게 도롱이를 빌렸는데, 공이 시로 답하기를,

남아의 득실이 예나 지금이나 같도다 / 男兒得失古猶今
머리 위에는 분명히 백일이 임하여 있네 / 頭上分明白日臨
도롱이를 주는 것이 아마도 뜻이 있으리니 / 持贈蓑衣應有意
오호(五湖)의 연우(煙雨)에 좋게 서로 찾으리 / 五湖煙雨好相尋

하였는데, 대개 시사(時事)를 슬퍼함이었다. 《추강집》 《동각잡기》
○ 세조가 김종서를 죽이고 영의정이 되매, 공이 조복(朝服)을 다 팔아버리고, 전 사간(前司諫)으로 선산(善山)으로 퇴거하였다. 세조가 임금께 아뢰어 좌사간(左司諫)으로 불렀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을해에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교서를 내리어 간곡히 불렀다. 공이 부름에 응하매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으나, 녹 먹기를 부끄러워하여 을해 이후의 녹은 따로 한방에 쌓아 두고 먹지 않았다. 《추강집》
남 추강(南秋江)의 《육신전》은 전해들은 말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오류를 면치 못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이 승지로 승정원에 있을 때에 《노산조일기(魯山朝日記)》를 보았는데, 계유 봄에 《역대병요(歷代兵要)》가 편찬되자, 공에게 편찬에 참가한 공로로 상을 주었더니, 극력 사양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추강집》에 보인다.집의로 직제학이 되었다가 이어 병으로 휴가를 신청하여, 영산(靈山) 온천에 목욕한다고 하고서 시골로 내려갔다. 그해 10월에, 세조가 정난(靖難)하자 임금께 아뢰기를, “지난번 하위지가 면대를 청하였을 때에 김종서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간신이 임금의 총명을 가린 것과 같습니다. 위지를 다시 불러 쓰기를 청합니다.” 하였다.이에 드디어 좌사간에 임명하자, 공이 상소하였다. 추강이 기록하기를, “계유10월에 공이 조복을 팔고 전 사간으로 선산에 퇴거하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세조가 선위를 받고, 불러서 나아가니, 예조 참판을 제수하고 심히 총애하였다.” 하였는데, 공이 선산으로 물러갔다는 것은 그럴듯하나, 그가 벼슬에 나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듯 하다.아마도 공이 상소한 뒤에 얼마 안되어 조정에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이때에는 노산이 아직 왕위에 있었던 듯 하다. 《서애집》
○ 단종 즉위 초에 공이 병을 칭탁하고 시골로 내려가 있는 중 김종서 등이 피살되매, 조정에 돌아올 뜻이 없었다가, 세조가 선위를 받고 부르므로 나와 예조 참판이 된 것은, 그 뜻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여헌집(旅軒集)》 〈묘갈(墓碣)〉
○ 세조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공이 형신을 받을 때에 비밀히 달래기를, “네가 만일 음모에 참가한 사실을 숨기면 면할 수 있다.” 하였더니, 공이 웃고 답하지 않았다. 세종이 배양한 인재 중에 공을 으뜸으로 쳤다 한다. 《동각잡기》
○ 공은 선산부 영봉리(迎鳳里)에서 생장하였는데, 어렸을 때에 작은 서재를 짓고 형제와 더불어 문을 닫고 글을 읽어서,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묘가 선산부 서쪽 고방산(古方山)에 있는데, 부인 김씨와 합장(合葬)하였다. 〈묘갈(墓碣)〉
○ 공의 처자가 일선(一善 선산(善山))에 있었는데, 금부 도사가 그 아들들을 잡으러 왔다. 공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호(琥)요, 차자는 박(珀)이었다. 《동학사 초혼기(東鶴寺招魂記)》에는 연(璉)ㆍ반(班)이라 기록되었다. 박은 나이 이십 밖에 되지 않았지만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이 도사에게 말하기를,“원컨대, 조금만 늦추어 주시오, 어머니에게 고할 말이 있소” 하였다. 도사가 허락하매, 박이 문안에 들어가 꿇어앉아 어머니께 고하기를,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죽었으니, 자식이 어찌 홀로 살겠습니까. 비록 조정의 명령이 없더라도 자결하여야 합니다. 다만 누이동생이 장차 출가할 나이가 되었으니,천한 종이 되더라도 부인의 의리로 마땅히 한 사람을 따를 것이요, 개와 돼지 같은 행실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드디어 재배하고 나와서 조용히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과연 공의 아들이라고 말하였다. 《송와잡기(松窩雜記)》


유성원(柳誠源)

유성원은, 자는 태초(太初)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요, 사인(舍人) 사근(士根)의 아들이다. 세종 무오년(1438)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년(1447)에 중시에 뽑혔다. 병자에 사예(司藝)로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경공(忠景公)이다.
○ 세종조에 《송사(宋史)》가 우리나라에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세종이 여러 번 명 나라에 청하였다. 하루는 집현전의 여러 학사들이 송 나라 조정의 인물을 논하다가 누군가가 말하기를, “왕안석(王安石)이 《송사》의 어느 전(傳)에 들었을까?” 하였다. 여러 사람은 “왕안석이 간신전에 들어야 한다.” 하였다.한두 사람이 반박하기를, “안석이 신법을 만들어서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이것이 진실로 소인이다. 그러나, 문장과 절의가 일컬을만한 것이 많고, 그 마음을 캐어 보면 오직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을 뿐이다. 그가 천하를 그르친 것은, 다만 오활하고 고집이 셌기 때문이니, 진회(秦檜)와 채경(蔡京)의 무리에 넣을 수는 없고, 열전(列傳)에 넣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더니,공이 이 의논을 힘써 주장하였다. 얼마 안 되어 송사가 나왔는데, 과연 〈열전〉에 있었다. 공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옛적에 《강목(綱目)》이 우리나라에 오지 않았을 때, 익재(益齋) 선생 이제현(李齊賢) 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의 《무후기(武后紀)》를 읽다가 탄식하고 시 한 구를 지었는데,
어쩌면 주의 여분을 가져다가 우리 당 나라의 일월을 이었는고[那將周餘月 續我唐日月]” 하였더니, 뒤에 《강목》을 얻어 오니, 주자가 과연 주(周)를 내치고 당을 높였는지라, 익재가 매우 자부하였는데, 아무개를 감히 익재에게 견줄 수는 없지마는, 마땅히 제군의 항복을 받을 만은 하다.” 하였다. 《필원잡기》 《명신록》
○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는데, 기사 경오년 간에 흰 까치가 와서 깃들고 새끼가 모두 희었으며, 계유년에는 나무가 홀연히 다 말랐으므로, 공을 희롱하여 말하기를, “화가 반드시 유(柳)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하더니, 공이 패하고 조금 뒤에 집현전이 혁파되었으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 《필원잡기》


유응부(兪應孚)

유응부는, 본관이 기계(杞溪)이다. 무과에 올랐고, 키가 남보다 크며 용모가 엄장(嚴莊)하고 날래며 활쏘기를 잘하며, 능히 담장을 뛰어넘었다. 세종과 문종이 모두 아끼고 중하게 여겼다. 벼슬이 2품에 이르렀고 병자년에 화를 입었다. 시호는 충목공(忠穆公)이다.
○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였다. 아우 응신(應信)과 함께 활쏘기와 사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새와 짐승을 만나면 쏘아서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집이 가난하여 한 섬 곡식의 저축도 없으나,어머니를 봉양하는 데는 넉넉히 갖추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이 포천(抱川) 농장에 왕래할 때, 형제가 따라 가다가 말 위에서 몸을 돌려 기러기를 쏘매, 활시위 소리와 동시에 떨어지니, 어머니가 크게 기뻐하였다. 《추강집》
○ 공이 일찍이 북병사(北兵使)가 되어서 시를 짓되,

장군이 절(節)을 가지고 와서 국경을 진정시키니 / 將軍持節縝夷蠻
변방에 티끌이 없어지고 군사들이 조는도다 / 塞外塵淸士卒眠
해 긴 낮 빈 뜰에서 무엇을 구경하는가 / 晝永空庭何所玩
날랜 매 삼 백 마리 누 앞에 앉았다 / 良鷹三百坐樓前

하였다. 가히 그 기상을 알 수 있다. 《추강집》 《명신록(名臣錄)》
○ 일찍이, 단종 복위를 꾀할 때에 공이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주먹을 자랑하며 말하기를, “한명회와 권람을 죽이는 데는 이 주먹이면 족하다. 긴 창과 큰 칼이 필요 없다.” 하였다.
《동각잡기》 《추강집》
○ 공은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고, 먹는 데는 고기 한 점 없었으며, 때로 양식이 떨어졌었다. 죽던 날에 그 부인이 울며 말하기를,“살아서는 평안히 산 적이 없고, 죽을 때는 큰 화를 얻었다.” 하니, 길가는 사람이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관에서 그 가산을 몰수하는데, 방안에는 떨어진 짚자리만이 있었다. 아들은 없고 딸이 둘 있었다. 《동각잡기》 《추강집》
태사씨(太史氏)가 말하기를, “누군들 신하가 아니리요마는, 지극하다, 육신(六臣)의 신하 노릇함이여. 누군들 죽지 않으리요마는, 장하다, 육신의 죽음이여. 살아서 임금을 받들 때는 신하된 도리를 다하고, 죽을 때는 임금에게 충성하여 신하의 절개를 세웠다. 충분(忠憤)이 백일을 꿰뚫고, 의기는 가을 서리 보다 늠름하여,백세 후에 신하된 자로 하여금 한마음으로 임금 섬기는 의리를 알게 하였다. 충절은 천금(千金)이요, 한 몸을 터럭같이 여겨서 몸을 죽여 인을 이루고 목숨을 버려 의를 취하였으니, 군자가 말하기를, ‘은 나라의 삼인(三仁)과 동국의 육신(六臣)이 행적은 다르나, 도는 같은지라, 이 또한 장하구나.’ 하였다. 세조가 정승이 되어서는 공을 주공(周公)에 견주고, 왕위에 나가서는 덕이 우순(虞舜)을 짝하여 높고 크고 넓어서 이름할 수 없으니, 육신이 복종하지 않는다고 세조에게 무슨 누(累)가 되겠는가. 백이(伯夷)가 서산(西山)에 고사리를 캐었으나, 주 무왕의 덕이 떨어지지 않았고, 엄자릉(嚴子陵)이 동강(桐江)에서 고기를 낚았어도, 한 광무(漢光武)의 공이 손상되지 않았다. 슬프다. 육신으로 하여금 금석 같은 단심만을 지키고 강호에 물러가게 하였더라면, 상왕(上王)의 수명도 연장할 수 있었고, 세조의 덕이 더욱 빛났을 것인데, 불행히도 분격한 마음으로 큰 화에 빠졌도다. 공경히 조사를 지어 가로되,

사나운 기운이 가득한데 / 厲氣初濟
뭇 구멍이 막혔도다 / 衆窺爲塞
서리와 눈이 희게 덮였는데 / 霜雪皎皎
소나무만이 홀로 푸르도다 / 松獨也碧
신하의 머리는 / 有臣之首
임금 위한 마음으로 희었거니 / 愛君而白
그 머리는 끊을 수 있어도 / 有頭可截
굽힐 수 없는 절개로다 / 節不可屈
다른 사람의 곡식은 / 他人之粟
죽을지언정 먹지 않았으니 / 寧死不食
고죽(孤竹)의 맑은 바람이요 / 孤竹淸風
시상(柴桑)의 밝은 달이로다 / 柴桑明月
흙 가운데 귀신이 있으니 / 土中有鬼
원통한 피가 한 움큼이로다 / 寃血一掬

하였다. 《추강집》 《육신전》
○ 노량(鷺梁) 남쪽 언덕 길가에 다섯 무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예전에 여기에서 죄인을 죽였다 한다. 이 있는데, 그 앞에 각각 작은 돌을 세워 표지를 하였다. 가장 남쪽은 박씨의 묘라 하고, 다음 북쪽은 유씨(兪氏)의 묘라 하고, 또 다음 북쪽은 이씨의 묘라 하고, 또 다음 북쪽은 성씨의 묘라 하고, 또 성씨의 묘가 그 뒤 십여보 사이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어떤 중이 육신의 시체를 져다가 묻었는데 그 중은 김시습(金時習)이라 한다.” 하였다. 성씨의 두 묘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성씨 부자의 묘인데, 뒤에 있는 것이 성승(成勝)의 묘라 한다. ○ 일설에는 육신 묘가 다섯 무덤만 있고 하나는 없다 하는데, 하위지의 묘가 선산부 서쪽에 부인의 묘와 같이 있다는 것이 장현광(張顯光)의 기록에 보였으니, 하공은 시골에 반장(返葬)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 허봉(許篈)이 말하기를, “부인을 씨(氏)라고 일컫는데, 지금 다섯 묘가 한 곳에 늘어 있으니, 부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남자는 반드시 관직을 일컫는데, 지금 씨(氏)라고만 일컬었으니, 당시의 의사가 오신(五臣)을 여기에 묻어 놓고는 감히 드러내어 새기지 못하고, 이렇게 일컬은 것이 아닌가.” 하였다. 지봉(芝峰)이 세 묘만을 일컬어 말하기를, “성삼문ㆍ박팽년ㆍ유응부의 묘가 틀림없다.” 하였다. 임진왜란 뒤에 어떤 사람이 가보니, 비석은 그대로 있는데, 자획이 마모되어 거의 분별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 인조조(仁祖朝)에 장릉(章陵)을 발인(發靷)할 때에 길을 닦는 관원이 다섯 신하 묘인 것을 알지 못하고 무너뜨려서 평평하게 하고 그 앞에 세웠던 돌까지 무너뜨렸는데, 효종(孝宗) 경인에 박팽년의 후손 숭고(崇古)가 다시 분묘를 봉축하고, 그 돌을 세웠다. 《지봉유설》 《미수기언》 《노릉지》 《장릉지》 ○ 숭고가 묘를 수축할 때에는 성씨의 한 무덤은 갈(碣)이 없어서 분별할 수 없었다.
영남 일선부(一善府)에 하씨의 묘가 있고, 유씨(柳氏)만은 장사지낸 곳이 없다. 호서(湖西) 홍주(洪州)에 성씨의 묘가 있고, 충주 덕면리(德面里)에 박씨의 묘가 있다. 성씨는 외손이 있는데 전하기를, “성씨 묘라는 것은 그 한 몸의 한 부분을 묻은 것이다.”고 하였다. 《기언》 ○ 숭고는 곧 박팽년의 칠대손이다.
○ 성종조에 김종직(金宗直)이 아뢰기를, “성삼문은 충신입니다.” 하니, 성종의 얼굴빛이 변하였다. 종직이 천천히 말하기를, “만일 변이 있으면, 신은 마땅히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하니, 성종의 얼굴빛이 밝아졌다. 《석담일기(石潭日記)》 《장릉지》
○ 인종조에 경연관 한주(韓澍)가 아뢰기를, “세조가 박팽년 등을 마음으로는 가상히 여기나, 위태롭게 의심하는 시기에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일찍이 하교하기를 ‘너희들은 당대에는 난신이요, 후세에는 충신이라.’ 하였으니, 후세에 그 자취가 없어질까 두려워서 이 말씀을 하여서 자손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고 하였다. 《동각잡기》 《노릉지》
○ 선조 병자에 박계현(朴啓賢)이 경연(經筵)에서 박팽년과 성삼문의 충성을 논하여 말하기를, “《육신전》은 남효온(南孝溫)이 저술한 것인데, 전하께서 취하여 보시면, 그 자세한 사항을 아실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가 육신전을 가져다 보고 놀랍고 분하여 이르기를, “지금 소위 《육신전》이라는 것을 보니, 극히 해괴하여 춥지 않아도 소름이 끼친다.옛적에 우리 세조께서 천명을 받아 중흥하여, 하늘이 주고 백성이 귀의하였는데, 예부터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오르는 것은 하늘이 명한 것이요,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저 남효온이란 자는 감히 사사로이 문묵(文墨)을 희롱하고 요망한 혀끝을 놀려서 국사를 폭로하였으니, 심히 패악하고 부도하여 그 죄는 붓으로 이루 다 쓸 수 없다. 이 자는 아조(我朝)의 죄인이다.옛적에 최호(崔浩)가 국사를 폭로한 죄로 처벌을 받았으니, 이 사람이 만일 살아 있다면, 내가 반드시 엄하게 국문하여 치죄할 것이다. 저 육신이 충신이라면, 왜 선위를 받던 날에 쾌히 죽어서 인신의 절개를 바치지 못하였는가. 만일 그리하지 못했다면, 왜 도망하여 서산에서 고사리를 캐지 못하였는가. 이미 세조를 신하로서 섬겨놓고 또 임금을 해치기를 몰래 도모하는 것은 옛날 예양(豫讓)이 깊이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저 육신이란 자들이 우리 조정에 무릎을 꿇고서 자객의 음모를 하여, 만에 하나 요행을 바라다가 일이 실패한 뒤에 의사로 자처하였니, 마음이나 행동에서 낭패했다고 할 수 있으니 열장부(烈丈夫)가 될 수 있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헛되게 죽는 것이 공을 세우는 것만 못하고, 이름을 없애는 것이 덕으로 갚는 것만 못하다.’ 하는데,성삼문 등의 마음이 잠시라도 그 임금[단종]에게 있지 않음이 없으면서 일부러 세조의 조정에 신하 노릇하여 장차 다른 날에 성공을 기약하였다. 어찌 못난 사람들처럼 스스로 개천에 목매어 죽어서 아는 이가 없게 하리오 했다면 이는 옳지 못한 처사이다. 만일 성공하는 것만 귀하게 여기고, 원수에게 신하 노릇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백이ㆍ숙제(伯夷叔齊)와 삼인(三仁)이 반드시 꾀하여 주 나라에 신하 노릇하면서 은(殷) 나라의 흥복을 도모하였을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이 무리가 그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 모범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들의 옳지 못함을 드러내어 의논한다. 이 글은 오늘날 신자(臣子)가 볼 것이 못되니, 내가 모두 거둬다가 불사르려 한다.만일, 이 책에 있는 말을 이야기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엄중히 다스리려 한다.” 하였다. 삼공이 답하기를, “이 책이 민간에도 드물고 연대가 오래되어 없어졌는데 만일 수색하는 거조를 내린다면, 반드시 큰 소란만 일어나고, 이익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 홍섬(洪暹)이 입시하여 육신의 충성을 극진히 말하였는데, 언사가 지극히 간절하여 신하들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이가 많았다. 선조가 이에 감동하여 깨달아서 그만 두었다. 《석담일기》 《장릉지》
삼가 상고하건대, 육신은 참으로 충절의 선비라는 사실은 지금에 와서 말할 바가 아니요, 《춘추(春秋)》에, “나라를 위하여 악한 것을 숨기는 것도 또한 고금을 통한 의리라.” 하였거늘 박계현이 경솔하게 때아닌 의논을 내 놓아 주상께서 잘못된 거조가 있을 뻔 하였으니, 어리석어 일을 알지 못하는 자라 하겠다. 애석하게도 모신 신하들 중에, 김종직이 성종께 대답한 말을 임금 앞에서 아뢴 자가 없었다. 《동각잡기》 《노릉지》
○ 효종 3년 임진년(1652)에 태학생 조경(趙絅)이 구언(求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국가가 정몽주(鄭夢周)의 무리에게는 모두 아름다운 시호를 주고 박팽년ㆍ성삼문 등에게는 정려(旌閭)하는 은전(恩典)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명 나라 문황(文皇)이 방효유(方孝孺), 연자녕(練子寧)들의 삼족(三族)을 멸하고서도, 마침내 말하기를, ‘자녕이 있으면 짐이 마땅히 쓰겠다.’ 하였고, 만력(萬曆) 초에 이르러 혁제(革除)할 때에 죄를 진 여러 신하들의 분묘에 유사(有司)를 시켜 제사지내고, 후손들을 후하게 구하고 등용하여 충절을 표창하고 장려하였는데, 우리 선조 대왕께서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여 교서를 내리어 육신의 후손을 등용하였으니, 전에 없는 넓은 은전(恩典)이 신종(神宗)과 일치하였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당시의 조정 신하들이 그들의 사당과 분묘에 충절을 표창하여, 선조 대왕의 뜻을 확장시켜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듣건대, 성삼문의 홍주(洪州) 옛 집이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다 하니, 만일 전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옛날 주 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의 마을을 표(表)한 것같이 하시면 지하의 썩은 뼈를 위로하는 것 뿐 아니라, 실로 선왕이 남겨주신 가르침을 준수하고 드러내어 후세에 신하가 되어서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야기문》 《장릉지》
○ 효종(孝宗) 8년 정유년(1657)에 찬선(贊善) 송준길(宋浚吉)이 아뢰기를, “명 나라의 방효유는 실상 일대의 죄인이요, 만고의 충신이라, 수년이 못되어 그 문집을 간행하고 전사(專祠)를 지어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중국 조정의 규모와 기상이 관대하고 심원합니다. 우리나라의 성삼문과 박팽년의 무리는 실로 방효유의 짝입니다.일찍이 성삼문은 연산(連山)에 살았고, 박팽년은 회덕(懷德)에 살았는데, 연산과 회덕에 모두 유현(儒賢)의 사당이 있으므로, 학자들이 두 사람을 함께 향사하기를 원하였는데, 이것이 중국의 전사에 비교할 것은 아닌데, 이것도 감히 못하옵니다. 전하께서 명 나라의 전례에 의거하여 특별히 허락하여 주시어 한 지방사람들의 소원에 맞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효종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으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서, 행하지 못하였다. 《육신유고(六臣遺稿)》 《장릉지》
○ 숙종(肅宗) 5년 기미년(1679)에 노량에 행차하여 군사를 사열할 때에, 영부사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 강 건너편에 성삼문 등 육신의 묘가 있는데, 지금 듣건대, 그 무덤이 모두 무너져서 평토가 되었다 합니다. 세조조에 역률(逆律)로 논하였지마는, 일찍이 선조조에 신하가 각각 제 임금을 위한 행동이라 하여 그 자손을 등용하였으나,이번에 가까운 곳에 행차하신 때를 계기로 만일 그들의 무덤을 봉식(封植)하는 특전을 내리시면, 실로 절의를 포창하고 장려하는 도리가 빛이 날 것입니다.” 하니, 숙종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에서 이미 자손을 등용하는 처사가 있었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그 무덤을 봉식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장릉지》
○ 숙종 6년 경인에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선(李選)이 상소하여, 육신 및 황보인, 김종서의 원통함을 논하여 말하기를, “저 여러 신하들은 천명이 이미 구주(舊主 단종 (端宗))에게 끊어지고 운명이 이미 진인(眞人)에게로 돌아간 것을 어찌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끝끝내 본래의 뜻을 지키어 죽음에 이르러도 뉘우치지 않는 것은 각각 제 임금을 위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세조께서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시절을 만나 그들을 베었지마는 실로 그들의 지조를 가상하게 여겼으므로, 당시에 말씀하시기를, ‘삼문 등은 오늘의 난신이요, 후세에는 충신이라.’ 하였고, 또 훈사(訓辭)를 지어 예종(睿宗)에게 보이기를, ‘나는 둔(屯)한 때를 만났고 너는 태(泰)한 때를 만났으니, 일은 때를 따라 변하는 것이다.만일 나의 한 일에 구애되어 변통할 줄을 알지 못하면, 이른 바 둥근 구멍에 네모진 물건을 끼우는 것이다.’ 하였고, 세조가 병환이 있으실 때를 당하여, 예종이 정무에 참여하여 결재하는데, 첫째로 명하여 계유 병자에 죄를 입은 사람에 연좌된 이백여 인을 모두 방면하였으니, 이러한 은전이 이미 세조가 계신 때에 행해졌습니다. 선조의 유신 송준길(宋浚吉)이 성삼문 등의 일을 진달하였는데, 선왕께서 심히 칭찬하시기를, “성삼문 등은 방효유(方孝孺)의 무리라 하셨으니, 열성조의 남겨주신 뜻을 이어서 여러 신하의 죄명을 씻는 것은 전하께서 선대의 뜻을 계술(繼述)하기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숙종이 답하기를, “육신의 일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열성조에서 죄를 용서하지 않았으니, 분묘를 봉식하거나 선비들이 존묘(尊墓)하는 것만 금지하지 않을 뿐이요, 이 밖에 따로 은전을 가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국조보감》
○ 숙종 7년 신유년(1681)에 과천(果川) 유림이 통문(通文)을 내어 관학(館學)에 고하고, 노량강 남쪽 언덕에 육신의 사원(祠院)을 처음으로 세웠다. 구월에 상량하는데, 대제학 이민서(李敏敍)가 상량문을 짓고 영부사 남구만(南九萬)이 봉안하는 제문을 지었다. ○ 《장릉지》
○ 숙종 17년 신미 9월에, 능에 거둥할 때에 노량진을 건너다가 육신 묘를 보고 특별히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판부사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육신묘가 비록 예로부터 전설은 있으나, 아직도 명백한 증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박팽년의 후손인 고(故) 군수(郡守) 숭고(崇古)가 표석을 고쳐 세워서,의심스러운 그대로 전할 뿐이요, 감히 분명히 조상의 분묘라고 말하지 못하여, 한 번도 제사를 무덤 앞에서 행하지 않았는데, 나라에서 이제 갑자기 행하면 사체가 온당치 못합니다. 노량 가에 육신의 사우(祠宇)가 있으니, 여기에서 치제하는 것이 어떠할까 합니다.” 하였고, 도승지 목창명(睦昌明)은 말하기를, “육신이 일찍이 복관(復官)된 일이 없으니, 나라에서 치제한다면, 제문에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였다.숙종이 이르기를, “육신의 절의가 방효유(方孝孺)의 무리와 다름이 없는데, 어찌 지금까지 복관을 하지 않았는가?” 하였으며, 덕원이 아뢰기를, “방효유 등 여러 사람들은 두어 대 후에 모두 증직하고 시호를 내려주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과 같이 관대하지 못하여, 밑에 있는 신하들이 감히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위에서 특별히 명하시면, 무엇이 불가 하오리까.” 하였다.숙종이 이르기를, “내 뜻은 다만 그 절의를 가장(嘉獎)하고자 하는 것이니, 육신을 특별히 복관하고, 그 사우도 사액(賜額)하고, 치제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목창명이 아뢰기를, “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일을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우니, 대신과 지방에 있는 유신(儒臣)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숙종이 그렇게 하는 것이 가하다고 허락하였다. ‘체제는 아직 천천히 하라.’ 하였다.《장릉지》
○ 이에 진사 한종석(韓宗奭) 등이 소를 올렸는데, 경연에 참여하는 신하들이 곧 임금의 뜻을 받들어 행하지 못하여 숭장(崇獎)의 은전을 속히 베풀지 못하게 한 것을 공박하고, 이어서 복관(復官)ㆍ사액ㆍ치제를 빨리 거행하여 육신을 포숭(褒崇)하고 격려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분부하겠다.” 하였다.
숙종이 대신들을 인견할 때에 영상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이 일로써 고(故) 상신(相臣) 허목(許穆)에게 물은 사람이 있었는데 허목이 답하기를, “매우 불가하다.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기는 것이 만세에 바뀌지 않는 정론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고, 좌상 목래선(睦來善)은 아뢰기를,“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뜻한 바가 있는 것 같고, 선배의 의논도 또한 여러 갈래이니,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였고, 우참찬 유명천(柳命天)은 아뢰기를, “그 자손을 등용하고 사우(祠宇) 세우는 것을 금하지 않았으니, 육신을 대접하는 도리가 지극하다 하겠으니, 복관의 일에 이르러서는 실상 거리낄 일이 없습니다.” 하였고, 병판 민종도(閔宗道)는 아뢰기를,“제왕가의 일은 필부(匹夫)와 다르니, 오늘날 만일 포창의 거조가 있으면, 사방이 그 소문을 듣고 반드시 흠앙하여 마지않을 터인데, 어찌 시비가 있겠습니까.” 하였고, 형판 윤이제(尹以濟)는 아뢰기를, “열성조에서 행하지 않은 것을 가벼이 논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고, 이판 유명현(柳命賢)은 아뢰기를, “육신의 일은 사람마다 그들의 지조를 슬프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전하의 행차가 지나시는 즈음에 이미 느끼신 바가 있을 것이니, 반드시 한번 치제하시옵소서.” 하였고, 부제학 권해(權瑎)는 아뢰기를, “육신의 충절은 만고에 빛나는데, 세조가 말씀하시기를 당세의 난신이라고 한 것은 후세로 하여금 포창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포창하는 은전이 전하의 마음으로써 결정되었으니, 참으로 거룩하신 일입니다.” 하였고,교리 이동표(李東標)는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의 신중한 의논은 육신의 절의를 높일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뜻은 있습니다. 세조께서 난신으로 베고는 충의로 포창하였더라면 어찌 천고의 거룩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때와는 조금 다르나, 전하께서 그 절의를 포창하고자 한다 하였으니, 지금 자기 임금에게 마음을 다한 사람들을 포창하는 일에 대하여 신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제왕가의 일은 선조(先朝)에 득죄한 자도 후에 추장(追獎)하는 일이 많은데, 오늘 전하의 말씀은 매우 훌륭하니, 신하들이 받들어 거행하는 데에 무엇이 불가하겠습니까.”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모든 신하들의 갑논을박이 각각 견해가 있어, 그러할 것이나 방효유의 빛나는 충절을 이미 성조가 인정하였고, 그 뒤에 시호를 준 것이 또한 관대한 은전에서 나왔으며, 세조께서 그들에 대하여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라.”고 한 말씀은, 그들을 가상히 여기시는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춘추에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는 의리를 내가 알지 못함이 아니나, 제왕가의 일은 필부와 다르므로, 다만 그 절의를 포창하고 후인을 격려하고자 함이니, 오늘의 이 일이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또 제문의 문자에 꺼리고 구애받음이 있다는 논의에 대하여는 지금 포창하려는 것은 오직 절의를 가상히 여기는 데 있으니,제문을 지을 때에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도리에 신중해야 하며 용이하게 처리할 수 없으니, 예랑(禮郞)을 시켜 지방에 있는 유신에게 물으라.” 하였다.
○ 진사 민언심(閔彦諶)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급히 쾌한 결단을 내리시어 거듭 치제ㆍ복관ㆍ사액의 명령을 내리시옵소서.” 하였다. 숙종이 답하여 이르기를, “이 일은 내가 본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었으나, 다만 도리(道理)에 신중하게 해야 하기에 널리 물어서 재량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였다.
○ 이조 참판 이현일(李玄逸) 지방에 있는 유신 의 논의의 대략에, “세조가 천명과 인심에 핍박되어 부득이 단종에게서 전위를 받았는데, 저 육신들이 자기가 섬기던 임금[端宗]에게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절개를 지켜 항거하고 충성을 다하여 그 마음을 변하지 않았으니, 백이(伯夷)가 무왕(武王)을 그르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일은, 주의 한통(韓通)ㆍ명의 경청(景淸)ㆍ고려의 정몽주와 같습니다. 대개 백이가 무왕을 그르게 여겼지만 공자가 가로되, ‘백이는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 하였으니, 백이를 칭송한 까닭으로 해서 무왕에게 해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한통이 주(周)에 충성을 바쳐 죽었는데, 송 태조가 후하게 추증하였고, 경청과 정몽주가 섬기던 임금에게 절개를 다하였는데, 명 나라 선종(宣宗)과 우리 태종이 복관도 명하고,포증(褒贈)도 명하였으니, 모두 절의를 숭장하여 후세 신하의 충의를 권한 것입니다. 하물며 세조가 육신을 후세의 충신이라고 한 말씀이 실상 송 태조가 한통을 추증한 뜻과 같고, 또 은미한 뜻을 후세 자손에게 보인 것이니, 지금 이 일은 실로 선왕의 뜻을 잘 이어 받들어 실행하는 것입니다.또 어찌 털끝만한 거리낌이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 어름어름 선대의 일을 숨기려고 하면 도리어 세조가 천명(天命)에 응하고 인심을 순히 한 거사에 누가 되고, 선조의 너그럽고 넓은 도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장릉지(莊陵誌)》
12월에 특명으로 육신의 관작을 회복하여, 민절사(愍節祠)라 사액(賜額)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국조보감》 ○ 또 명하여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벼슬을 회복하고 연산(連山)에 있는 성씨의 밭과 노비를 도로 내어 주었다. 전교하기를, “대개 국가가 먼저 힘쓸 것은 절의을 숭장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고,신하로서 가장 어려운 일이 또한 절의에 죽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옛적 제왕들이 절의를 지키는 선비를 중하게 여기고 포창을 한 이유이다. 생각건대, 저 육신들은 어찌 천명과 인심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지 못하였으리요마는, 자신이 섬기던 임금에게 마음을 두어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으니,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충절이 수백 년 후에도 늠름하게 떨쳐져서 명 나라의 방효유ㆍ경청과 함께 논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마침 선릉(先陵)에 행차하는 일이 있어 연(輦)이 육신묘 옆을 지나다가 내 마음에 더욱 느낀 바가 있었음에서랴. 슬프다,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는 의리를 모르겠는가. 내가 포창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그들의 절의만이 아니라, 당세의 난신이요,후세의 충신이라 하신 세조의 말씀에 뜻이 있으니, 오늘의 이 일은 세조의 남겨준 뜻을 계승하고 세조의 거룩한 덕을 빛내는 것이다. 어찌 온당치 못한 일이 있으랴. 성삼문 등 육신을 특별히 복관하고 치제하여 백대의 풍성(風聲)을 세우라.” 하였다. 《장릉지》
우승지 강선(姜銑)이 아뢰기를, “육신 중에 박팽년만이 혈족이 있어서 나라에서 써 주었고, 성삼문은 자손이 없고 외손만 있었는데, 연전에 서울 인왕산에서 우연히 매장된 신주를 얻었다 합니다. 지방에 유락(流落)한 외손이 지금 제사를 받들고 있는데, 가난하여 제사를 지낼 수 없다 하오니, 만일 그곳의 감사로 하여금 그 성명을 찾아 아뢰게 하여, 써 주시면 더욱 전하의 거룩한 덕을 빛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숙종이 그대로 따랐다. 《장릉지》
○ 장릉(莊陵)을 능으로 봉한 뒤에 총리사(摠理使) 최석정(崔錫鼎)이 장계(狀啓)하기를, “지난 을축 연간에 육신의 사당을 단종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였던 옛 사당 남쪽에 창설하였는데 감사 홍만종(洪萬鍾)ㆍ도사(都事) 유세명(柳世鳴)ㆍ군수 조이한(趙爾翰)이 상의하여 창건하고 엄흥도(嚴興道)를 배향하였다.보통 규정으로 말하면 능침(陵寢)과 화소(火巢) 안에 신하의 사당을 둘 수 없지마는, 능의 멀리 지방의 외진 곳에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육신들이 능침을 모시고 호위하는 것이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 다를 바가 없는데, 지금 만일 능에 봉해졌다고 해서 갑자기 육신의 사당을 헐게 한다면, 신도(神道)에서 보더라도 온당치 못한 바가 있으니, 헐지 말고 그대로 두어 동시에 제사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숙종이 대신들을 불러 볼 때에 영상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사당은 분묘와 다르니, 능의 화소 안에 그대로 두는 것이 부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촉한(蜀漢) 무후(武侯 제갈량)의 사당이 소열(昭烈)황제의 사당 근처에 있으므로, 두보(杜甫)의 시에 ‘군신(君臣) 일체로 제사를 같이한다.[一體君臣祭祀同]’ 하였으니, 육신의 사당을 그대로 능 안에 두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 하였다. 상운이 아뢰기를, “소열황제의 사당은 촉한 때에는 반드시 백제성(白帝城)에 따로 세우지 않았을 것이요, 뒷사람이 창설한 것 같으니, 오늘 이 일을 증거 삼을 수 없고, 또 봄가을로 선비들이 모여서 왕릉의 정자각(丁字閣)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육신의 제사를 행하는 것이 타당치 않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최석정이 아뢰기를, “단종은 연대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영녕전(永寧殿)에 올려 모시고, 배향(配享)하는 공신이 없었는데, 육신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니, 능에 모시어 호위하게 하는 것은 이승이나 저승이 다를 바가 없으므로, 그들의 사당을 화소 밖에 옮겨 세운다면 섭섭하게 여기실 것 같습니다. 모든 일에 경(經)과 권(權)이 있어서, 반드시 전례(前例)에 구애될 것이 없으니, 사당을 그대로 두어서 옮기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호판(戶判) 민진장(閔鎭長)이 아뢰기를, “정자각에서 조금 먼 곳에 옮겨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예판 최규서(崔奎瑞)가 아뢰기를, “조천(祧遷)된 능에는 한식 차례 외에 없는데, 육신의 사당에는 춘추의 제향이 있을 것이니,이것도 또한 장애가 됩니다. 옮겨 세우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우참찬(右叅贊) 서종태(徐宗泰)ㆍ이조 참판 이인환(李寅煥)ㆍ부제학 조상우(趙相愚)ㆍ우부승지 김우항(金宇杭)은 모두, “그대로 두는 것이 무방하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신리(神理)와 인정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육신은 다른 신하와 처지가 다르니, 사당을 조금 먼 곳에 옮겨 세운다는 것은 옳은 줄로 모르겠다.” 하였다. 최석정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도 공신을 능에 모신 예가 있고, 이번에 사릉(思陵) 근처에 정씨(鄭氏) 분묘도 파서 옮기지 않기로 하였으니, 육신의 사당에도 그런 예를 쓸 수 있습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육신의 사당은 그대로 두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장릉지》
○ 그 뒤에 화소 밖으로 옮겨 세웠다.


엄흥도(嚴興道)

엄흥도(嚴興道)는 영월(寧越) 호장(戶長)인데, 숙종 조에 공조 참의를 증직하고 영조 무인에 종이품을 증직하고, 뒤에 공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이라 하였다.
○ 선조 을유년(1685)에 군수 김늑이 흥도의 종손(宗孫)인 정병(正兵) 한례(漢禮)의 호역(戶役)을 면제하여 주고, 이어서 그 고을에 있는 노산묘(魯山墓)를 수호하게 하고, 문안(文案)을 만들어 주었다. 《조야기문》
○ 숙종 무인년(1698) 겨울 주강(晝講) 때에 이유(李濡)가 아뢰기를, “엄흥도의 자손을 돌보아 주는 도리가 있어야 마땅한데, 근래에 들으니, 그 7대손 신무(信武) 형제가 청주 땅에 살고, 그 밖의 족속도 많다 하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자세히 알아본 뒤에 처분을 내려주심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본도로 하여금 알아보게 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최석정이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주는 편지에 말하기를, “엄호장이 국가의 변고를 당하여 의를 붙든 것에 감탄하고 가상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니, 지금 후손의 등용에 대하여 어찌 인색하게 돌아보지 않을 뜻이 있으리오. 다만 엄신무가 말하기를, ‘그 아비 생존시에 송상(宋相) 시열(時烈)이 화양동(華陽洞)에 있었는데, 그 선조 호장의 사적을 기술하여 주기를 청하니, 송상이 허락하고 이루지 못하였으며, 계축 영릉(寧陵 효종의 능)을 천봉(遷奉)할 때에 송상이 화양동에서 능 아래로 가는데, 그 아비가 따라 갔다.’ 한다. 내가 장릉에 있을 때에 육신 사당에서 기문(記文) 현판을 보았는데, 곧 송상이 지은 것으로서, 그 글에 이르기를, ‘무신 년간에 내가 경연에서 호장의 자손을 등용하자는 뜻을 아뢰고 그 뒤에 여러 곳으로 알아보았으나,찾지 못하였으니 슬프도다.’ 하였다. 이 글은 을축년에 지은 것이어서 엄신무의 아비가 송상을 따라다녔다는 계축년으로부터 십여 년이 되거늘,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신무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영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호장이 늙어 죽은 뒤에 자손이 없으므로 영월에 있는 분묘를 고을 사람들이 제사지내고 폐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였다. 《명곡집(明谷集)》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

금성대군 유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데, 을해에 삭녕(朔寧)으로 귀양갔다가 병자에 순흥(順興)에 안치되었고, 정축에 화를 입었다. 뒤에 신원하였고, 시호는 정민공(貞愍公)이다.
○ 을해년(1455)에 대신들이 말하기를, “공이 난을 음모하여 한남군(漢南君) 어()ㆍ영풍군(永豊君) 선(瑔)ㆍ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과 더불어 서로 공모하였으니, 급히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삭녕으로 귀양보냈다. 병자에 성삼문 등이 죽으매, 공을 순흥에 안치하고 그 가산을 몰수하였다.정축년(1457)에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안동(安東) 옥에 갇히었다. 하루는 알몸으로 도망하였는데, 부중(府中)을 크게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한참만에 밖에서 들어오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무리는 많으나, 하잘 것 없구나. 내가 어찌 진실로 도망할 사람이냐. 우리 임금이 영월에 계시다.”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북향하여 사배(四拜)하고 죽음을 받았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릉지》


이보흠(李甫欽)

이보흠은,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는 대전(大田)이요,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세종 기유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 박사를 지냈다. 정축에 순흥 부사(順興府使)가 되어 금성대군과 더불어 함께 상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베임을 당하였다. 시호는 충장공(忠莊公)이다.
○ 공은 문장에 능하고 사무 처리에 재주가 있었으며, 성품이 검소하여 옷이 때묻고 떨어져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해동잡록》
○ 단종이 왕위를 내놓은 뒤에 공은 벼슬하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일찍이, 글을 지어서 길주서(吉注書)의 묘에 제사하였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주무왕이 의거를 하매, 백이ㆍ숙제가 고사리를 수양산에서 캤고, 한 광무가 중흥하니, 엄자릉(嚴子陵)이 낚시를 부춘(富春)에 드리웠다.” 하였다. 《병자록》
○ 정축에 순흥 부사가 되었다. 금성대군 유가 순흥으로 귀양와서 매양 공과 더불어 서로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가만히 영남 인사들과 연결하여 상왕을 복위시키려다가 일이 발각되니 곤장을 때리고, 박천(博川)으로 귀양 보냈다가 얼마 뒤에 금부 도사를 보내어 베었다.


정종(鄭悰)

본관은 해주(海州)인데, 문종의 부마(駙馬)이다. 경혜공주(敬惠公主)에게 장가들어 영양위에 봉해졌다. 시호는 헌민공(獻愍公)이다.
○ 공이 적소에 있다가 사사된 뒤에, 공주가 순천 관비가 되었다. 부사 여자신(呂自新)은 무인인데, 장차 공주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 하니, 공주가 곧 대청에 들어가 교의(交椅)를 놓고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은 왔지마는,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 하므로 마침내 부리지 못하였다. 여자신은 뒤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여유길(呂裕吉)의 방조(旁祖)이다.


정보(鄭保)

호는 설곡(雪谷)이요, 본관은 연일(延日)이니, 포은 정몽주의 손자요, 이조 참의 종성(宗誠)의 아들이다. 벼슬이 감찰ㆍ예안 현감(禮安縣監)에 이르렀다.
○ 공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는 윤정(允貞)이니, 주부이고, 다음은 윤화(允和)요, 끝은 윤관(允寬)이다. 윤화가 장가들기 전에 문과에 올랐는데, 창방(唱榜)할 때에 잘못해서 좌판(坐板)에서 떨어져 즉사하였다. 공이 슬퍼하여 마침내 홧병을 얻었다. 병자의 변에 공이 말하기를, “우리 아이가 다행히 먼저 죽었다. 안 죽었더라면 반드시 이 난에 참여하였을 것이라.” 하였다. 《월정만필》


권절(權節) 중귀(重貴)의 아들 엄(嚴)이 고려의 집의(執義)로서 조선에 들어와서 성을 권(權)으로 회복하였다. 백 세(百歲)를 살았는데, 집에 있은 지 50 년에 한 번도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는 단조(端操)요, 호는 율정(栗亭)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집의(執義) 엄(嚴)의 손자요, 밀직사(密直司) 왕중귀(王重貴)의 증손이다. 고려말의 정승 왕후(王煦)는 국재(菊齋) 권보(權溥)의 아들이요, 아홉 봉군[九封君]중의 하나이다. 충선왕(忠宣王)이 길러서 아들을 삼고 성을 왕씨로 주었다.아들 중귀(重貴)가 밀직사로 공민왕 때에 화를 입었다. 중귀의 아들 숙(肅)ㆍ엄(嚴)이 이씨 조선에 들어와 성을 권으로 회복하였다. 세종 정묘에 문과에 올라 집현전 교리를 지냈는데, 병자 이후에는 미친 병을 칭탁하여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 어려서 기이한 상모(相貌)가 있고 힘이 남보다 뛰어나 남이(南怡)와 한 때에 함께 이름을 날렸다.
○ 세종조에 과거에 올랐는데 세종이 말하기를, “문무(文武)에 큰 재주가 있으니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여 그 그릇을 성취시키겠다.” 하여 특별히 사복 직장(司僕直長)을 제수하였다가 이어서 집현전 교리를 시켰다.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여러 번 그 집에 가서 술을 마시며, 서로 친밀히 하며 은밀히 대사를 귀띔하였다.공이 귀먹은 체 하며 응하지 않고, 드디어 자취를 감출 생각으로 미친 병을 칭탁하고 일생동안 벼슬하지 않았으니, 절(節)이라는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겠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매, 그 재주와 그릇을 아끼어 첨추(僉樞)에 제수하고 충청 감사를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오지 않고 죽은 뒤에 교리(校理)라는 관직명을 묘비에 썼다. 《지봉유설》 《후촌만록》
○ 처신할 방법을 그 조카인 은군자(隱君子) 권안(權晏)과 상의하여 몸가짐과 일에 대응함에 있어 검속을 하지 않고 정신병 든 사람같이 하며 그 몸을 마쳤다. 《율곡집(栗谷集)》 〈율정난고서(栗亭亂稿序)〉
○ 단종에게 사육신과 생육신이 있는데, 공과 원호(元昊)의 무리가 생육신이 된다. 일찍이 남의 집의 묵은 편지첩을 보니 공의 짧은 편지가 있는데, “근보(謹甫 성삼문의 자)가 멀리 세상을 떠나버리니 같이 의논할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었다. 《후촌만록》
○ 공이 어렸을 때, 친척의 집안 여종이 와서 공의 어머니에게 말을 전하느라고 중문 옆에 섰는데, 공이 지나다가 기둥을 들고 여종의 치마폭을 그 밑에 넣었으나 여종은 알지 못하였다. 갈 때에야 알고 울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공의 누이가 역시 엄청나게 힘이 세어 기둥을 들고 꺼내주었다. 권씨 옛 집에 맷돌 한 쌍이 있는데 사람들 사이에 전하기를, 공이 평일에 들고 치던 것이라 한다. 《후촌만록》
○ 공이 산에서 놀다가 이상한 중을 만났는데, 일부러 와서 힘자랑을 하였다. 공이 절에 있는 사기그릇을 모으게 하니 열 죽이나 되었다. 중으로 하여금 손가락으로 퉁겨서 깨뜨리게 하였다. 두 죽까지 깨뜨리고 나서는 중이 손톱이 아파서 그만두었다. 공이 이어서 잠깐 사이에 여덟 죽을 다 깼는데 그 손톱 자국이 사기 그릇 죽마다 모양이 달랐다.어떤 것은 열 개의 눈썹같이 되고 어떤 것은 열 개의 화판(花瓣)같이 되었는데, 예리한 칼로 오린 것 같았다. 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공은 하늘이 내린 분이라.” 하였다. 《후촌만록》. 방언에 그릇 열 개를 한 죽이라 한다.
○ 숙종 임오에 강원도 선비들이 상소하여 육신 사당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고, 갑신에 경기도 선비들이 상소하여 선산이 있는 양주(楊州)에 서원을 세우기를 청하였다. 예조에서 아뢰어 정려(旌閭)를 명하고 이조 판서의 증직과 충숙(忠肅)의 시호를 내렸다. 영조 임자에 영월 선비들이 팔현사(八賢祠)를 육신 사당 옆에 세웠는데 팔현은 즉 김시습(金時習)ㆍ남효온(南孝溫)ㆍ원호(元昊)ㆍ권절(權節)ㆍ이맹전(李孟專)ㆍ조려(趙旅)ㆍ정보(鄭保)ㆍ성담수(成聃壽)다. 뒤에 신설한 모든 사당을 헐어 없애라는 명령이 있어서 헐었더니 삼일 뒤에 예조의 공문이 내려왔는데 팔현사는 헐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미처 고쳐 세우지 못하였다. 조공(曺公) 하망(夏望)이 그 때에 부사로 있었는데 그 아들 명후(命後)가 친히 보고 아주 자세히 전하였다.


원호(元昊)

원호는, 본관은 원주(原州)이며 호는 관란(觀瀾)이다. 세종 계묘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숙종조에 특별히 정려(旌閭)를 세우라고 명하였다. 무인에 최석정의 아룀으로 인함.
○ 단종 초기에 공이, 세조의 세력이 날로 커가는 것을 보고, 집현전 직제학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원주 남송촌(南松村)에 들어가 세상과 등졌다. 단종이 영월로 내쫓기니, 공이 영월 서쪽에 나가 집을 짓고 관란(觀瀾)이라는 호를 짓고, 흐르는 물에 임하여 읊조리기도 하고, 문을 닫고 책도 지으며, 아침저녁으로 단종 있는 쪽을 바라보고 울며 임금을 생각하였다.정축에 단종이 승하한 뒤에, 3년상을 입고 복이 끝나매 다시 원주의 옛집으로 돌아와서 문밖으로 나오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사촌인 판서 원성군(原城君) 효연(孝然)이 하인들을 대동하지 않고 문에 이르러 뵙기를 청하였으나, 굳건하게 허락하지 않았다. 세조가,특별히 호조 참의를 제수하며 불렀으나, 죽기로 맹세하고 명에 응하지 않았다. 앉으면 반드시 동으로 향하고 누우면 반드시 동으로 머리 두니, 장릉(莊陵)이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명곡집 묘비(明谷集墓碑)〉
○ 친지들 가운데 조정에 벼슬하는 자가 많이 와서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절대로 접하지 않았다. 한 관찰사가 따르는 하인들을 떼어놓고 평복차림으로 찾아갔다. 공이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고 나와 만나서 대면하니 관찰사였다. 곧 손을 내두르며 달아나 들어가서 장차 몸을 더럽혀질 것 같이 하였다. 관찰이 무안하고 섭섭하여 돌아갔다. 관부(官府)와 가까운 것을 싫어하여 주천현(酒泉縣) 산골 속으로 들어가서 몸을 마쳤다. 묘는 남송에 있다.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
○ 공의 손자 숙강(叔康)이 예종조(睿宗朝)에 사관으로 화를 입으니, 공이 평생의 저술과 소장을 다 태워버렸다. 또 그 자제를 경계하되, “다시는 글을 읽어서 명리를 구하지 말라.” 하였다. 〈묘비〉 ○ 숙강의 일은 예종조에 보인다.
○ 군자가 말하기를, “열경(悅卿 김시습의 자)은 지금의 백이(伯夷)요, 육신은 지금의 방효유(方孝孺)ㆍ연자녕(練子寧)이요, 연촌(煙村 최덕지(崔德之))ㆍ무항(霧巷 공의 사는 곳)은 육신보다도 오히려 기상이 높다.” 하였다. 〈묘비〉


최덕지(崔德之)

최덕지는 호는 연촌우수(煙村迂叟)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태종 을유(乙酉)에 문과에 올랐으며,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영암(靈岩)의 영보(永保)에 퇴거하여 그 서실(書室)을 존양(存養)이라 편액하였다. 문종이 불러서 예문 직제학을 제수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사직하고 돌아가서 나이 72세에 죽었다.
○ 계유년(1453)간에 국가에 사고가 많았으니, 공이 물러간 것은 참으로 기미를 미리 알고 몸을 보전한 것 같았다. 이것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일컫기를, “밝은 지혜와 바른 학문과 높은 절개가 견줄 데 없다.” 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선현(先賢)으로 기록하고 그의 자손을 등용하였다. 《명신록》


기건(奇虔)

기건은, 호는 청파(靑坡)이며, 본관은 행주(行州)이다. 세종조에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持平)을 제수받아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무공(貞武公)요, 청백리(淸白吏)에 들었다.
○ 공은 타고난 바탕이 영민하고 학업이 정민하고 순수하였다. 집이 청파 만리현(萬里峴)에 있었는데, 항상 걸어서 성균관에 왕래하면서 반드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외웠다. 《월사집(月沙集)》 〈기대헌비(奇大憲碑)〉
○ 공은 단종조부터 벼슬을 쉬고, 문을 닫고 인사를 사절하였다. 세조가 잠저에 있을 때에 세 번이나 공을 집으로 찾았는데, 공이 청맹(靑盲)으로 칭탁하였다. 세조가 바늘을 가지고 찌를 것처럼 하여 시험하니, 공이 눈을 딱 뜨고 보면서도 깜짝하지 않았다. 세조는 마침내 공을 등용치 못하였고 공도 화를 면하였다. 〈묘비〉
○ 이씨 조선의 인재가 세종조보다 성한 때가 없었는데, 공이 과거에 응하지 않고도 지평에 뽑혔으니, 공의 무리 중에서 뛰어난 높은 이름이 일세의 중망을 받은 것이 어떠했겠는가.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나 이미 몸을 바치고서, 시국이 어지럽고 위태로우니 어쩔 수 없는 것을 헤아리고는 벼슬 버리기를 헌신짝 버리듯 하였고,병을 핑계로 자취를 감추어 천년(天年)을 마침으로써 끝내 절개를 변치 않았으니, 명예도 또한 보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죽음으로 임을 섬기고 선도(善道)로 명철보신한 것’이아닌가. 〈묘비〉
○ 옛날에는 부인이 출입할 때, 머리쓰개가 없었는데, 공이 그것을 속칭으로 소위 너울[羅兀]이라고 하는 것인데 지금 궁녀가 밖에 나갈 때에 쓴다 처음 만들어 바치니 지금도 쓴다.
○ 연안(延安)에 붕어가 나는 큰못이 있는데, 공사간(公私間)에 관에서 붕어를 징수하거나 개인적으로 붕어를 요청하는 폐가 백성에게 미치므로, 사람들이 그 연못을 붕어 무덤이라고 조롱하였다. 공이 부사가 되어 말하기를, “어찌 내 입맛 때문에 염치를 상할 수 있는가.” 하였다. 드디어 끊고 먹지 않으며 잔치가 아니면 그물을 들이지 못하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필원잡기》 〈묘비〉
○ 공은 평생 전복을 먹지 않았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답하기를, “일찍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어 백성들이 전복 따기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차마 먹지 못한다.” 하였다. 《용재총화》
○ 제주의 예전 풍속에 부모를 장사 지내지 않고 죽으면 곧장 언덕이나 구렁에 버렸다. 공이 부임하기 전에 먼저 고을에 영을 내려 관곽을 갖추고 염습하여 장사지내도록 가르쳤다. 제주 사람이 그 부모를 장사 지내는 것이 공으로부터 시작되고,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졌다. 하루는 공이 꿈을 꾸니,삼백여 명이 뜰 아래에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공의 은덕으로 해골이 땅에 드러나는 것을 면하였는데, 은혜를 갚을 것이 없으니, 공이 응당 금년에 어진 손자를 보실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까지 공의 세 아들이 다 자식이 없었는데, 과연 이 해에 공의 아들 장령 축(軸)이 아들 찬(禶)을 나아서, 뒤에 벼슬이 응교에 이르렀다. 《월사집(月沙集)》


이맹전(李孟專)

이맹전(李孟專)은, 자는 백순(伯純)이며, 호는 경은(耕隱)이요, 본관은 벽진(碧珍)이니, 병판(兵判) 심지(審之)의 아들이다. 심지가 먼저 선산(善山) 금오산(金烏山) 밑에 살았다. 세종 정미에 문과에 뽑혔고, 한림(翰林)ㆍ정언(正言)을 거쳐 외임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거창 현감(居昌縣監)이 되었는데, 청백하기로 소문이 났다.갑술년간에 나라 일이 어지럽고 위태로운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와서 선산 강정리(綱正里)에 살면서, 귀먹고 청맹이 되었다고 칭탁하여 전원에 묻혀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문 밖에 나가지 않은지 30여 년이었다.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고, 대궐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집이 가난하여 앉을 돗자리가 없었고, 먹을 때에 수저가 없었으나 태연하여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다. 자손이 많았으며 자녀가 아홉 사람 출입하는 데는 탈것이 없어서 걸어 다녔다. 사실이 《청백전》에 실렸다.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정간공(靖簡公)이다.
○ 김숙자(金叔滋)가 공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귄 친구가 되었는데, 만년에는 병을 칭탁하며 만나주지 않았다. 다만 김종직(金宗直)이 들어와 뵈오면 문을 닫고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하였고,간혹 시를 지어 창수(唱酬)하기도 하였다. 한집안의 처자라도 청맹이 거짓으로 칭탁한 줄 알지 못하였는데, 죽을 때에 임해서야 비로소 알았다. 부인 김씨와 함께 모두 나이 90세 죽었다. 《일선지(一善志)》 《해동잡록(海東雜錄)》 ○부제학 이준(李埈)의 일선지(一善志) 발문


조상치(曺尙治)

조상치는, 자는 자경(子景)이며, 호는 단고(丹皐)이다. 또는 정재(靜齋)라고도 한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문과로 병사(兵使)가 된 신충(信忠)의 아들이다. 기해에 문과에 장원하였고,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 공이 세종ㆍ문종 두 조정의 지우(知遇)를 입어 오래도록 관직에 있다가 부모의 공양에 편리하도록 자청하여 합천(陜川)ㆍ함양(咸陽) 두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그때에 집현전이 창설되었는데, 공이 부제학으로 뽑혔다.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드디어 문을 닫고 병을 일컬어 하례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이가 은퇴할 때가 못되었는데,상소하여 은퇴하기를 칭탁하기를, “세 아들이 조정에 올라 복이 너무 과하니 마땅히 물러가야 한다.” 하였다. 세조가 그의 속뜻을 알고 허락하였다.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으나 다릿병을 칭탁하고 들어가 사은하지 않았다. 세조가 백관을 시켜 동대문에서 전송하니 사흘만에 비로소 벗어나 돌아갔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엄자릉(嚴子陵)의 절조가 아니면 한 광무(漢光武)에게 용납될 수 없고, 한 광무의 성스러운 덕이 아니면 엄자릉의 높은 절조를 이루어 줄 수 없다.” 하였다. 《유사(遺事)》
○ 단종조에 벼슬이 부제학이었는데, 세조가 선위를 받으매, 마단(麻丹) 영천(永川) 창수(滄水)의 마을 이름이다. 에 퇴거하여 종신토록 서쪽을 향하여 앉지 않았다. 일찍이 큰 돌 한개를 얻어서 쪼지 않고, 꾸미지 않고, 그 표면에 써서 새기기를, ‘노산조(魯山朝) 부제학 포인(逋人) 조모(曹某)의 묘’라 하고, 자서(自序)하기를,‘노산조라고 한 것은 오늘의 신하가 아닌 것을 밝힌 것이요,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으려는 것이고, 포인이라고 쓴 것은 망명하여 도망한 신하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이 돌을 묘 앞에 세워라.” 하였다. 공이 죽으매, 여러 아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그 돌을 묻었다.공이 일찍이 자규(子規 두견새)를 읊은 사(詞)에,

접동 접동 접동새 소리 / 子規啼子規啼
그 무엇을 호소하노 / 夜月空山何所訴
돌아가리 돌아가리 / 不如歸不如歸
떠나온 파촉 땅을 날아서 건너고저 / 望裡巴岑飛欲度
뭇 새는 깃을 찾아 고요히 잠드는데 / 看他衆鳥摠安巢
너만 홀로 피 토하여 꽃잎을 물들이니 / 獨向花枝血謾吐
그 얼굴 외로웁고 그 모습 초췌하다 / 形單影孤貌樵悴
존숭(尊崇)도 안 하는데, 뉘라서 널 돌보리 / 不肯尊崇誰爾顧
슬프다 인간 원한, 그 어찌 너뿐이랴 / 嗚呼人間冤恨豈獨爾
의사충신(義士忠臣) 강개불평(慷慨不平)은 / 義士忠臣增慷慨激不平
손꼽아 못 셀 것을 / 屈指難盡數

하였는데, 대개 단종이 영월에서 지은 자규 노래를 듣고, 느낌이 있어 화답한 것이다. 《취원당수록(聚遠堂手錄)》
○ 박팽년이 보내 편지에 말하기를, “행차 뒤에 일어나는 티끌을 멀리서 바라보니 높아서 미치기 어렵도다.” 하였고, 성삼문이 다른 사람에게 준 편지에 말하기를, “영주(永州)의 맑은 바람이 문득 동방의 기산(箕山)ㆍ영수(潁水)가 되었으니, 우리들은 조장(曺丈)의 죄인이라.” 하였다. 《영남가찬(嶺南家撰])》


조변륭(曺變隆)

조변륭은, 본관은 창녕이니, 단고(丹皐) 상치의 아들이다. 세종 갑자에 문과에 오르고, 정묘에 중시(重試)에 뽑혀 벼슬이 예조 참의에 이르렀다.
○ 상치가 영남에 돌아가 숨던 때에 그의 아들인 변륭은 어버이가 영남에 있으므로 벼슬에 종사할 형편이 못되어 드디어 같이 돌아갔다. 뒤에 발탁되어 예조 참의에 이르렀으나,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자손에게 유언하여 노릉조(魯陵朝) 부지괴원정자(副知槐院正字)라 묘석에 표하고 참의(叅議)직함은 쓰지 말라 하였다.


조려(趙旅)

조려는, 자는 주옹(主翁)이며, 호는 어계(漁溪)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니, 계유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김종직의 방하(榜下). 시호는 정절공(貞節公)이다.
○ 단종이 내쫓긴 뒤에 다시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고을 서쪽 원북동(院北洞)에는 인가가 하나도 없고 수목이 울창하였는데, 공이 처음으로 집을 짓고 살면서, 스스로 호를 어계(漁溪)라 하였다. 〈본전(本傳)〉 《성창랑집(成滄浪集)》 ○ 《어계집(漁溪集)》이 한 권을 후손 영호(榮祜)가 안음(安陰) 군수로 있을 때에 간행하였다.
○ 낙동(洛東)에 돌아와서 낚시질로 몸을 마치었으니, 세상을 등지고도 번민함이 없는 뜻이 김시습(金時習)과 같았다. 깊이 스스로를 숨겨서 사람들이 일컬을 것이 없었다. 일찍이 구월 구일에 높은 곳에 올라 지은 그 시의 대략에,

머리 돌려 눈을 드니 강산은 저물었고 / 回頭擧目江山暮
땅은 넓고 하늘은 아득하니, 생각 또한 아득하다 / 地闊天張思渺茫
만고풍류 두목지(杜牧之)는 취미수(翠微峀)에 올랐는데 / 杜牧旣上翠微峀
국화 따는 도연명(陶淵明)은 술 오기만 기다림을 / 陶潛悵望白衣郞
복희씨와 헌원씨는 아득하여 슬픔이 한이 없고 / 羲軒遠矣悲何極
요임금과 순임근은 뵐 수 없어 절로 마음 슬프네 / 勛華不見心自傷
시 읊는 붓 밑에는 하늘땅이 넓었는데 / 沈吟筆下乾坤闊
취해서 어지러운 술잔 앞엔 세월마저 더디도다 / 爛醉樽前日月長
슬프다, 늙은 몸이 살아 늦도록 고생하니 / 嗟哉潦倒生苦晩
일편단심 고운 님을 꿈속엔들 잊을 소냐 / 懷佳人兮不能忘

○ 보배로운 구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독 속에 싸서 두고 그 빛을 감추고 초목과 같이 썩어도 뉘우치지 않으니, 그 마음이 어디 있었는지 후인이 측량할 수 없다. 만일 서산(西山)의 백이ㆍ숙제가 당시에 났더라면 반드시 서로 더불어 마음을 터 놓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을 것이다. 우참찬 이미(李薇)가 지은 〈비문〉
○ 공이 일찍이 백이산(伯夷山) 밑에 살았는데, 숙종 기묘에 단종이 복위된 뒤에, 영남 선비 신만원(辛萬元) 등이 공의 절개와 행실을 조정에 알리니, 특별히 이조 참판을 증직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산 밑에 사당 서산서원(西山書院)이다. 을 세웠는데, 공과 김시습ㆍ원호ㆍ이맹전ㆍ성담수ㆍ남효온을 향사하였다.


성담수(成聃壽)

성담수(成聃壽)는, 자는 이수(耳壽)이며, 호는 문두(文斗)이다. 본관은 창녕이니, 교리 희(熺)의 아들이다. 진사에 합격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뒤에 이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시호는 정숙공(靖肅公)이다.
○ 아버지 희가 성삼문에 연좌되어 폐고(廢錮 벼슬길을 막는 것)되었는데, 공은 지극한 행실과 높은 식견으로 파주의 어버이 묘 밑에 물러가 살면서 한 번도 서울에 이르지 않았다. 그 때 죄인의 자제는 의례히 참봉을 제수하여, 그 거취(去就)를 보는데 머리를 숙이고 취직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공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 공이 높은 가문의 자제로 자처하지 않기 때문에 촌사람들이 보기를 농사꾼같이 하였다. 그 조카 몽정(夢井 교리 담년(聃年)의 아들)이 경기 감사로 순시하던 차, 그 고을을 지나다가 만나보려고 찾았으나, 고을 사람이 그의 있는 곳을 아는 이가 없었다. 물색하여 알아 가지고 그 문에 이르니, 초가집이 엉성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고,토상(土床)이 겨우 무릎을 들여놓을 정도요, 손님이 와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몽정이 탄식하고 집에 돌아가 방석 열 개를 보냈는데, 공이 손을 저어 돌려보내며 말하기를, “이 물건은 빈천한 집에 적합하지 않다.” 하였다. 《우계집(牛溪集)》


윤혜(尹譓)

윤혜는, 본관은 남원(南原)이요, 관찰사 임(臨)의 손자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이르렀다.
○ 단종이 내쫓기니, 공이 예조 좌랑으로 벼슬을 버리고 산에 들어갔다. 임종시에 충효(忠孝) 두 글자를 써서 아들에게 주었다. 《대동야승(大東野乘)》
○ 공의 숙부 지정(之定)이 딸이 있어 권완(權完)에게 출가하였는데, 완의 딸이 단종의 후궁(後宮)이 되었다. 완이 형을 받아 죽으니, 공이 밤에 신을 벗고 한강가로 도망하였으며, 이어서 가족을 끌고 호남 장성(長城)으로 돌아가서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본전(本傳)〉


김시습(金時習)


김시습(金時習)은, 자는 열경(悅卿)이며, 본관은 강릉(江陵)이요, 고려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일성(日省)이요, 어머니는 선사(仙槎) 장씨(張氏)이다. 승명(僧名)은 설잠(雪岑)인데,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어 동봉(東峰)ㆍ청한자(淸寒子)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는 청간공(淸簡公)이다.
○ 숙종조에 최석정(崔錫鼎)이 말하기를, “세조가 선위를 받은 뒤에 사인(士人) 김시습이 중이 되어 세상에서 도망하였는데, 그 문장과 절행이 탁월하기 때문에 그 뒤의 명현(名賢)들이 지금 세상의 백이(伯夷)라고 일컬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특별히 증직하고 치제하면 절의를 격려하는 도리에 합당할까 합니다.” 하였다. 숙종이 이르기를 “특별히 증직하라.” 하니 사헌부 집의를 증직하였다. 《장릉지(莊陵志)》
○ 공이 태어난 지 여덟 달만에 능히 글을 알았다. 일가 할아버지[族祖]인 최치운(崔致雲)이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주었다. 말은 늦게 하나 정신은 민첩하여 글에 대하면 입으로 읽지는 못해도 뜻은 다 알았다. 세 살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니 삼월이 저물었다.[桃紅柳錄三月暮]”는 것과, “구슬을 푸른 바늘로 꿰었으니 솔잎에 맺힌 이슬이라.[珠貫靑針松葉露]”는 것 등이다. 유모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읊기를, “비도 안 오는데 우레 소리는 어디에서 울리는고. 누런 구름이 쪼각쪼각 사방으로 흩어지누나.[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하니,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다섯 살에 대학을 통하고 능히 글을 지으니, 신동(神童)이라고 이름이 났다. 허 정승 조(稠)가 찾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늙었으니 노자(老子)로 시구를 지으라.” 하였다.곧 대답하기를,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老木開花心不老]” 하매, 허정승이 무릎을 치며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 바 신동이다.” 하였다. 세종이 듣고 명하여 승정원으로 불렀다.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이 시험하기를, “동자의 공부는 백학(白鶴)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도다.[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하매, 공이 대답하기를, “성주(聖主)의 덕은 황룡(黃龍)이 푸른 바다 가운데에 뒤집는도다.[聖主之德 黃龍飜碧海之中]” 하였다. 이창이 무릎 위에 앉히고 앉아서, 시를 짓게 한 것이 많았다. 이창이 벽에 그린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네가 이 그림을 두고 시를 지을 수 있는가.” 하매, 곧 대답하기를,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는가.[小亭舟宅何人在]” 하였다. 세종이 전교하기를 혹은 그 아버지 일성(日省)을 불러서 전교 하였다고 한다 “내가 보고자 하나, 남이 들으면 해괴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드러내지 말고 가르치고 길러,나이 장성하고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서 내가 장차 크게 쓰겠다.” 하고, 곧 비단 오십 필을 주어서 스스로 가지고 가게 하니 공이 그 끝을 모두 이어서 끌고 나갔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명성이 한 나라에 진동하여 ‘다섯 살’이라고 불렀으며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공이 임금의 포장을 받고서 더욱 원대한 학업에 힘썼다. 단종 을해에 바야흐로 삼각산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이 내쫓겼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하여 중이 되어 절에 의탁하였다. 《율곡집(栗谷集)》 《명신록(名臣錄)》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공은 사람됨이 호매(豪邁)하고 영발(映發)하며, 간솔(簡率)하고 경직(勁直)하였다. 시사를 슬퍼하고, 세속에 분개하여, 울적한 기운을 펴지 못하고 시속을 따라 처세하지 못하여, 드디어 물외에 방랑하였다. 국내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머물렀다. 고도(故都)에 유람하여 머뭇거리며 슬피 노래하며 여러 날을 보냈다.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여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온갖 서적에 빠짐없이 통달하여 사람이 거론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곧장 말하여 막힘이 없었다. 고상하고 강개한 마음을 풀 데가 없어서, 세상 풍운ㆍ천석ㆍ화과(花果)ㆍ조수ㆍ인사의 시비ㆍ득실과 귀천ㆍ사생으로부터 성명ㆍ이기ㆍ음양에 이르기까지 일체를 문장에 붙였기 때문에 그 글이 물이 솟구치고 산이 일어나듯 하며,산이 온갖 물상을 간직하듯이, 바다가 모든 생물을 감추듯이, 신(神)처럼 부르고 귀(鬼)처럼 화답함이 번갈아 나타나고, 단계별로 나와서 성률과 격조에 그리 유념하지 않아도 생각과 운치가 높고 원대해서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도리에 정밀하여 연구하고 수양하는 공부는 적으나, 재주와 지혜가 탁월하여 자연스럽게 해득함이 있어서 의논이 유가(儒家)의 종지를 잃지 않았고,선교(禪敎)ㆍ도교에 이르러서는 깊이 그 병폐의 근원을 연구하였으며, 선어(禪語)를 하기를 좋아하여 미묘한 이치를 드러내므로, 늙은 중으로서 그 학문에 조예가 깊은 자라도 감히 대항하여 변론할 이가 없었다. 명성이 일찍 드러 났다가 하루아침에 세상을 피하여 마음은 유(儒)이면서 행적은 불(佛)이었는데,세상 사람들이 해괴히 여길까 하여 짐짓 미친 태도를 취하여 실상을 숨기려 한 것이다. 선비가 글을 배우고자 찾아오면 나무나 돌로 때리거나 활을 쏘려 하면서 그의 성의를 시험하였다. 산전을 개척하기를 좋아하여 귀한 집 자제에게도 반드시 밭일을 시키니 끝까지 수업하는 자가 적었다.
○ 수락정사(水落精舍)에 들어가 살면서 도를 닦았다. 유생을 보면 말할 적마다 공맹(孔孟)을 일컫고, 입으로는 불법을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수련법에 대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또한 말하여 주지 않았다. 《사우명행록》
○ 미친 듯이 읊조리고 방랑하면서 한 세상을 조롱하였다. 비록 불가에 들어가 세상을 피하였으나 그 법을 받들지 않으므로 세상에서 미친 중으로 지목하였다. 거리에 자나다가 눈으로 한 군데를 응시하면서 돌아가기를 잊고 한참 동안 박힌 듯이 서 있기도 하고,간혹 거리에서 소변을 보면서 뭇 사람들이 보는 것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여러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웃고, 서로 다투어 기와조각과 조약돌을 던지면서 쫓아다녔다. 《명신록》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세조가 내전(內殿)에 중을 불러들여 법회(法會)를 벌였을 때, 공도 또한 뽑혀서 참여하였는데, 홀연 이른 새벽에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서 뒤를 밟으니,일부러 거리의 거름구덩이에 빠져서 얼굴만 내놓고 있었다. 거느리고 다니는 상좌 중이 있었는데 목소리가 맑아서 능히 상성(商聲 비장한 음조(音調))을 낼 줄 알아서 길게 소리를 내어 읊으면, 여운이 공중에 감돌았다. 매양 달 밝은 때를 만나면 밤중에 홀로 앉아 상좌 중으로 하여금 《이소경(離騷經)》을 한번 읊게 하고는 문득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었다. 성품이 술을 즐기어 취하면 반드시 말하기를, “우리 세종 대왕을 뵈올 수가 없구나.”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매우 슬퍼하였다. 여러 중들이 추앙하여 신사(神師)라 하며 지성껏 섬겼다. 하루는 함께 청하기를, “저희들이 대사를 받든 지가 오래나, 아직도 한번 설법을 들려주지 아니하니 대사의 청정(淸淨)하신 법안(法眼)을 마침내 누구에게 전하시렵니까.저희들이 방향을 잘 알지 못하니, 금 집게로 눈에 가린 것을 벗겨 주소서”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크게 법연(法筵)을 열라.” 하고, 공이 가사(袈裟)를 갖춰 입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았다. 중들이 가득 모여서 합장하고 꿇어 앉아 듣고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소 한 마리를 몰고 오라.”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그 영문을 모르고 소를 끌어다가 뜰 아래에 매었다.공이 또 말하기를, “소 먹일 꼴을 가져 오라.” 하여 소 엉덩이 뒤에 놓게 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 이와 같다.” 하니, 사람의 희미하고 어둡고 무식한 자를 속담에 말하기를 소 뒤에 꼴이라 한다. 여러 중들이 얼굴을 붉히고 물러갔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 책《금오신화(金鰲神話)》을 저술하여 석실(石室)에 감추고 말하기를,“후세에 반드시 설잠(雪岑)을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책은 대개 기이한 이야기를 기술한 것으로 《전등신화(剪燈神話)》를 모방한 것이었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평소의 심회를 세상 사람이 엿볼 수 없었다. 시집(詩集)에 미자(薇字)ㆍ궐자(蕨字)를 쓰기를 좋아하였다. 중흥사(中興寺)에 있을 때에 비가 내린 뒤에 시냇물이 불어서 넘쳐 흐르는 때를 만나면 종이를 썰어 100여 조각을 만들고 사람을 시켜 붓과 벼루를 가지고 뒤에 따르게 하고 시내를 따라 내려가다가 반드시 물살이 급한 곳을 택해 앉아서 읊조렸다.율시(律詩)나 오언고풍(五言古風)을 지어 종이에 써서 물에 띄워 보내고, 멀리 떠내려간 것을 보고, 또 써서 띄워 보내기를 밤이 늦도록 계속하여 종이가 다하면 돌아왔다. 어떤 때는 하루에 지은 시가 거의 100여 수나 되었는데, 여기서도 그 생각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사재척언(思齋摭言)》
○ 서 있는 나무껍질을 벗기고 시를 쓰기를 좋아하였다. 한참 읊고 나서 문득 곡하며 그 부분을 깎아버렸다. 어떤 때는 종이에 시를 써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물에다 던져 버렸다. 어떤 때는 나무로 농부의 모양을 조각하여 만들어서 책상 옆에 두고 하루종일 들여다 보다가 곡하고 불태워 버렸다.어떤 때에는 자신이 심은 벼가 심히 무성하여 이삭이 탐스러워 볼 만한데도, 술이 취한 때에 낫을 내둘러 한 이랑을 다 베어 땅에 버리고는 목을 놓아 울었다. 달밤에 만나면 《이소경(離騷經)》 외기를 좋아하였는데, 외우고 나면 반드시 울었다. 제목(除目)이 발표되는 것을 보고 대관이 된 자가 혹시라도 인망이 없으면 반드시 울며 말하기를, “이 백성이 무슨 죄를 졌는가.” 하였다. 《장릉지》
○ 김수온(金守溫)과 서거정(徐居正) 등이 공을 국사(國士)로 칭찬하였다. 거정이 막 대궐에 들어가느라고 사람을벽제(辟除)하고 있는데, 공이 헤진 옷을 입고 새끼로 만든 띠를 띠고 패랭이를 쓰고 거리에서 거정을 만났다. 비켜서지 않고 머리를 제치고 쳐다보며 부르기를, “강중(剛中) 거정의 자 이 평안한가.” 하였다. 거정이 웃고 대답하며 초헌(招軒)을 멈추고 얘기하니, 온 거리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모두 놀랐다.그때에 조정 벼슬아치 중에 공에게 모욕을 당한 자가 있어서 서거정을 보고 조정에 아뢰게 하여 죄를 다스리려 하였다. 거정이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그만 두게 그만 두게, 미친 사람을 상관할 것 있나. 지금 이 사람을 죄 주면 후세에 반드시 자네의 이름에 누가 될 것이네” 하였다. 《명신록》
○ 지관사(知館事) 김수온(金守溫)이, “맹자가 양(梁) 나라 혜왕(惠王)을 만나본 일을 논함”이라는 문제로 성균관 유생들에게 시험 보였다. 유생 한 사람이 삼각산에 가서 공을 보고 말하기를, “괴애(乖崖) 수온의 호 가 장난을 좋아하도다. 이것이 논제(論題)에 합당한가.”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이 늙은이가 아니면 이런 제목을 못 낼 것이다.” 하고 붓을 달려 한 편을 지어주며 말하기를, “생원이 스스로 지은 것처럼 하여 그 늙은이를 속여 보게.” 하였다. 그 말대로 하였더니, 수온이 읽다가 끝마치기 전에 갑자기 묻기를, “열경(悅卿)이 지금 서울 어느 절에 있는고” 하였으니, 그를 알아봄이 이와 같았다. 그 논(論)에 대략 말하기를 “양혜왕은 본시 제후(諸侯)로서 왕을 참칭(僭稱)한 자이니, 맹자가 가히 볼 것이 아니라.” 하였다. 《율곡집》 《명신록》
○ 도성에 들어오면 매양 향교동(鄕校洞) 남의 집에 붙어 있었다. 서거정(徐居正)이 찾아오면 공이 예(禮)를 갖추지 않고, 누워서 두 발을 거꾸로 하여 벽에 대고 발장난을 하면서 하루 종일 얘기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김모가 서대감에게 예를 갖추지 않고 소홀히 하는 것이 저와 같으니, 뒤에 반드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수일 뒤에 서거정이 매양 다시 찾아와 보았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신숙주가 소시에 친한 친구로서, 공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그 주인을 시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여 눕게 한 뒤에 가마에 태워 신숙주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술이 깨어 속은 줄 알고 놀라 일어나서 가려 하였다. 신숙주가 그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열경이 어째서 말 한마디도 않는가.” 하였다. 공이 입을 다물고 옷자락을 뿌리치고 가버리고 그 뒤에는 종적을 더욱 비밀히 하였다.
○ 엄자릉(嚴子陵)의 조어도(釣魚圖)에 시를 지어 쓰기를,

부춘산(富春山) 동강(桐江) 위에서 연파(烟波) 낚는 저 늙은이 / 桐江江上釣煙波
생계는 소연(蕭然)하여, 도롱이 하나뿐이로다 / 生計蕭然一箇蓑
한(漢) 나라 천문대에 객성(客星) 아니 비쳤던들 / 漢殿若無星象動
깨끗한 몸 천추 뒤에 누명은 없을 것을 / 千秋定不婁名侯

하였다. 《노릉지》 ○ 세속에서 전하기를 “신숙주가 태공(太公)ㆍ자릉(子陵) 두 노인의 조어도(釣魚圖)를 내놓으매, 공이 시를 지어서 조롱하였다.” 하고 《후정쇄어(候鯖瑣語)》에는 태공의 조어도 시는 서거정이 지은 것이라 하였으므로 서거정의 아래에 기록되었다.
○ 어떤 사람이 김수온이 좌정하고 일을 전하매, 공이 말하기를, “괴애(乖崖)가 평생에 욕심이 많았으니, 반드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좌화(坐化)하는 것이 예(禮)에서는 귀한 것이 아니다. 나는 증자(曾子)의 역책(易簀)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죽은 것만 귀히 여기고, 그 밖의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조우(祖雨)라는 중이 일찍이 노사신(盧思愼)에게 《장자(莊子)》를 배웠다. 그 중이 어떤 종실(宗室)의 집에 이르렀는데 공이 뒤늦게 도착하여 짐짓 모르는 체하고 말하기를, “조우가 노(盧)에게 수학하였다 하니 그게 사람 축에 드는 자인가, 만일 여기 오면 내가 꼭 죽이겠다.” 하였다. 조우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툭 뛰어 나오며 말하기를,“공이 감히 정승에게 공공연히 욕을 하니 나를 죽이고 싶거든 죽여 보라.” 하였다. 공이 조우의 멱살을 잡고 때리려 하니, 앉았던 손님들이 모두 싸움을 뜯어 말려서 조우가 간신히 빠져 나와 달아났다. 그 뒤에 조우가 공을 수락산(水落山)에서 만났는데 공이 반가운 안색으로 말하기를, “네가 나를 찾아 왔는가?” 하고 밥을 지어먹게 하였다.밥이 들어와서 조우가 밥을 떠서 먹으려 할 때, 숟갈을 입에 이르려 할 때마다 공이 미리 발로써 땅 위의 먼지를 밥숟가락에 묻혀서 한 술도 떠먹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네가 노모(盧某)에게 수학하였으니, 네가 어찌 사람이냐.” 하였다. 《월정만필》
○ 학조(學祖)는 공의 일가로서 중이 된 자인데, 공에게 승복하지 않고 매양 더불어 항거하였다. 하루는 산중에서 동행하는데, 그 때에 날이 비로소 갰는데 길 옆에 산돼지가 칡뿌리를 파내서 깊은 웅덩이가 생긴 곳에 흙탕물이 가득 차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 웅덩이 속에 들어가서 한번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려 하는데,네가 나를 따를 테냐?” 하고, 곧 둘이 흙탕물에 들어가서 철벅거리다가 나왔다. 공은 몸과 의복에 한 군데에도 젖은 곳이 없는데, 학조는 흙탕물이 얼굴에 가득하고 의복이 다 젖었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어떻게 나를 본받을 수 있는가.” 하였다. 《월정만필》
○ 신축 연간에 공이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고 나이 43세 글을 지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제사 지내었는데, 그 대강에 말하기를, “순(舜) 임금이 펴신 오륜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 첫머리요, 삼천 가지 죄 가운데 불효가 가장 크옵거늘, 어리석은 불효자가 가계를 이어받고도 이단(異端 불교)에 미혹타가 늦게 서야 후회하노라.[帝敷五敎 有親居先 罪列三千 不孝爲大 愚騃小子 似續本支 沈滯異端 末路方悔]” 하고, 드디어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사람들이 벼슬하기를 권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방광(放曠)하기를, 전처럼 하다가 얼마 후에 아내가 죽으니 다시 산으로 돌아가서 중이 되었다. 《명신록》 《추강냉화》
○ 임인 이후에 세상이 장차 쇠락할 것을 알고 여염간에 버린 사람으로 처신하며 날마다 장예원(掌隸院)에서 노비에 관련된 문제로 송사하였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거리를 지나다가 영상 정창손(鄭昌孫)을 만나 말하기를, “너 그만 두어라.” 하였다. 정이 못 들은 체 하였으나,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위태롭게 여겨서 예전에 교유(交遊)하던 사람들이 모두 발길을 끊고 왕래하지 않았다.공이 혼자 거리의 불량한 자들과 같이 놀며 취하여 길가에 쓰러져서 늘 바보처럼 웃었다. 뒤에 혹은 설악산(雪岳山)에도 들어가기도 하고, 춘천(春川)산에도 살기도 하여 출입이 일정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수천 부정(秀泉副正) 정은(貞恩) 자는 정중(正中)ㆍ홍유손(洪裕孫) 자는 자용(子容)ㆍ안응세(安應世) 자는 자정(子挺)ㆍ남효온(南孝溫)이었다.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그의 노비(奴婢)와 전택(田宅)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빼앗아가도 개의하지 않았는데, 다시 홀연히 그 사람에게 반환을 청구하니, 그 사람이 주려하지 않았다. 공이 송정(訟庭)에 나가 대면하여 떠들썩하게 다투는데 무식한 장돌뱅이들 같았다. 마침내 승소하여 문서가 완성되니 품속에 넣고 문밖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고는 갑자기 문서를 꺼내어 발기발기 찢어서 개천 속에 던졌다. 사람을 희롱하고 속세를 무시함이 이와 같았다. 《명신록》 《용천담적기》
○ 공이 풍악(楓岳)에 놀러가려 하는데 전날에 여러 명사 남효온의 무리가 용산(龍山) 수정(水亭)으로 찾아왔다. 서로 대하여 담소하다가 홀연 몸을 창 바깥 두어 길 되는 곳으로 떨어뜨려 매우 다치고 숨도 못 쉬니 여러 손님들이 분주히 구환하여 깨어났다. 손님들이 말하기를, “이렇게 중상을 입었으니, 내일 어떻게 떠날 수 있는가.” 하니 공은,“자네들은 다락원에 가서 나를 기다리기나 하게. 내가 마땅히 병을 무릅쓰고 출발하리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여러 손이 같이 다락원으로 가보니 공은 먼저 와 있었는데 조금도 떨어져 다친 기색이 없었다. 효온이 말하기를, “자네가 어찌하여 환술(幻術)로 우리들을 공갈하고 속이는가.” 하였다.
○ 계축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는데, 나이 59세였다. 유언하기를,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매장하라.” 하였다. 3년만에 사람들이 열어보니 얼굴이 산 것 같았다. 이분은 부처라 하면서 마침내 화장(火葬)을 하고, 그를 위하여 부도(浮圖)를 세웠다. 《명신록)》
○ 손수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의 화상 두 본을 그리고, 스스로 찬(讚)을 짓기를, “네 형상이 지극히 작고 네 말이 혹은 심(心) 매우 어리석으니, 너를 산골짝 가운데 두는 것이 마땅하다.[爾形至藐 爾言(一作心)大侗 宜爾置之 丘壑之中]” 하였다. 《율곡집》 《미수기언(眉叟記言)》
○ 화상은 여러 해가 지나도록 절간에 두었다가 홍산 현감 곽시(郭翅)가 그 유적을 찾아서 절 옆에 사당을 세우고 그 화상을 모시고 제사지냈는데, 그 제문에 이르기를, “백이(伯夷)의 마음이요, 태백(泰伯)의 행적이라.” 하였다. 《영남야언(嶺南野言)》
○ 저술한 시가 수만여 편이나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사이에 거의 다 흩어져 없어졌다. 조신(朝臣)과 유사(儒士)들이 간혹 표절하여 자기가 지은 것으로 삼았다. 《사우행록》
○ 《사방지(四方志)》 1600, 《기산기지(紀山紀志)》 2백이 있고, 시권(詩卷)이 있는데 이자(李耔)가 그 글을 읽고 말하기를, “행색은 불가요, 행실은 유가라.” 하였다. 《미수기언》
○ 강릉(江陵)과 양양(襄陽) 사이에서 노닐기 좋아하였는데 유자한(柳自漢)이 양양 군수로 있으면서 공을 예로 대접하고, 다시 세속 살림을 회복하기를 권하니, 공이 편지로 사절하여 말하기를 “장차 긴 삽을 만들어서 복령(茯苓)과 백출(白朮)을 캐고, 일만(一萬) 나무에 서리가 맺힐 때에 중유(仲由)의 무명옷을 기워 입고, 일천(一千) 산에 눈이 쌓일 때 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를 떨쳐입으려 한다. 낙백(落魄)하여 세속에 사는 것보다는 소요하며 여생을 보내는 것이 낫지 않은가. 천년 뒤에 나의 본 마음을 아는 이 있기를 바라노라” 하였다. 《율곡집》
○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아서 맑고 흐리고 후하고 박함의 다름이 있어서 나면서부터 아는 것과 배워서 아는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의리(義理)로 말한 것이다. 김시습 같은 이는 글에 있어서는 천성적으로 얻었으니 문자(文字)에도 생지(生知)가 있는 것이다. 미친 척하며 세상을 피하는 것이 은미한 뜻은 숭상할 만 하나,꼭 명교(名敎)를 포기하고 멋대로 방자하게 처신하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 그리하였는가. 빛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어 후세에 김시습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무엇을 근심하랴. 그러나 절의(節義)를 표하고 윤기(倫紀)를 붙든 것이 일월과 빛을 다툴 수 있어서 그 풍도를 듣고 나약한 사람도 태도를 확립할 수가 있었으니, 백세의 스승이라고 할 것이다. 《율곡집》
○ 명 나라의 천연(天淵)이란 사람은 원 나라 말의 한림학사(翰林學士)인데 원 나라가 망하니,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은 내복(來復), 자는 견심(見心)이라 하였다. 수염은 깎지 않고 길렀다. 고황제가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대답하기를, “머리를 깎은 것은 번뇌를 없앤 것이요,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를 표시한 것이라.” 하였다.뒤에 시를 지었는데 기롱하고 풍자하는 뜻을 머금고 있음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아조의 매월당도 중이 되어서 수염을 기르고 말하기를, “머리를 깍은 것은 당세를 피한 것이요,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를 표시한 것이라.” 하였는데 모르겠다. 내복의 기상을 사모함이 있어서 본받은 것인가. 아니면 우연히 부합한 것인가. 두 공의 절개가 대강같으니,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계곡만필(溪谷漫筆)》
○ 허 하곡(許荷谷) 봉(篈)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에게 묻기를, “세상 사람들은 매월당이 중이 되었으니 족히 볼 것이 없다 하는데, 저의 생각으로는 매월당이 세상을 도피한 일절(一節)이 실로 중용(中庸)의 도에는 부합하지 않으나, 처신은 청(淸)에 맞고 폐인 노릇한 것은 권도(權)에 맞다[身中淸廢中權]는 것으로 보는 것은 어떠합니까.” 하였다.대답하기를, “매월(梅月)은 일종의 이상한 사람이다. 색은(索隱)ㆍ행괴(行怪)에 가까운 사람인데, 만난 시대가 마침 그러하여서 그 높은 절개를 이룬 것뿐이다. 유양양(柳襄陽)에게 준 편지와 《금오신화(金鰲新話)》 같은 것을 보면 높고 원대한 식견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듯 하다.” 하였다.

[주D-001]주의 …… 있었는고 : 당(唐) 나라 무후(武后)가 여주(女主)가 되어 당 나라의 국호를 없애고 주(周)라 하였다가 그가 죽은 뒤에 당 나라가 다시 회복되었다.그러므로 사마광(司馬光)이 지음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무후의 집권시대에는 주의 연호를 썼는데 주자(朱子)가 강목을 지으면서 주의 연호를 빼고 대신 당의 연호를 썼다.
[주D-002]삼인(三仁) : 《논어》에 말하기를, “은 나라에 세 인인(仁人)이 있는데 미자(微子)와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이라” 하였다. 이 세 사람은 은 나라의 충신이다.
[주D-003]엄자릉(嚴子陵) :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그의 친구 엄자릉(嚴子陵)을 불러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돌아갔다.
[주D-004]고죽(孤竹) :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임.
[주D-005]시상(柴桑) :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동리.
[주D-006]장릉(章陵) : 인조(仁祖)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능호.
[주D-007]예양(豫讓) : 전국(戰國)시대 진(秦) 나라의 예양이 그의 주군인 지백(智伯)을 위하여 조양자(趙襄子)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고생을 겪으므로 그의 친구가 권하기를, “조양자 곁에 붙어서 신하 노릇을 하다가 기회를 노려 암살하면 쉽지 않겠는가.” 한 즉 그는 답하기를, “나도 그렇게 하면 일이 쉬울 줄 알지만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은 남의 신하되어서 두 마음 갖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D-008]구언(求言) : 나라에 위급한 일이나 재변이 있을 때에 정치에 관한 좋은 의견을 해줄 것을 국중(國中)에 널리 구하는 것.
[주D-009]방효유(方孝孺) : 명(明) 나라 성조(成祖)가 건문제(建文帝)의 왕위를 빼앗을 때 죽은 충신.
[주D-010]혁제(革除) : 명 나라 성조가 건문제를 제거한 것을 혁제(革除)라 함.
[주D-011]계유ㆍ병자 : 계유년(癸酉年)은 김종서가 죽은 해이고 병자(丙子)는 성삼문(成三問)이 죽은 때이다.
[주D-012]춘추에 …… 의리 :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이 지극히 엄하나 친(親)을 위하여 어버이에 관련된 나쁜 사실을 숨긴다 하였다.
[주D-013]한통(韓通) : 송 태조(宋太祖)가 임금이 되는 날에 후주(後主)의 신하 한통(韓通)이 대항하다가 죽었다.
[주D-014]경(經)과 권(權) : 경(經)은 정상적인 도리이고, 권(權)은 임시로 변통한 도리를 말한다.
[주D-015]사릉(思陵) : 단종(端宗) 왕비 송씨의 능.
[주D-016]정려(旌閭) : 충신ㆍ효자ㆍ열녀가 살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것.
[주D-017]존숭(尊崇)도 안 하는데 : 두견새는 임금이 죽은 혼이므로 존숭(尊崇) 한다는 말을 썼다.
[주D-018]기산(箕山)ㆍ영수(潁水) : 옛날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세상의 영화를 마다하고 숨어 살던 곳.
[주D-019]국화 따는 …… 기다림을 : 도연명(陶淵明)이 9월 9일에 국화를 따고 있는데, 마침 흰옷을 입은 사람이 술을 가져 왔으니, 그것은 강주자사(江州刺史) 왕홍(王弘)이 술을 보낸 것이었다.
[주D-020]《이소경(離騷經)》 : 초(楚) 나라 굴원(屈源)이 임금에게 쫒겨나서 애국심과 울분을 참지 못하여 이소를 지었다. 이소는 장편의 운문(韻文)으로서 중국 사부(辭賦)의 조(祖)가 되었다.
[주D-021]미자(薇字)ㆍ궐자(蕨字) : 미(微)자ㆍ궐(蕨)자를 많이 쓴 것은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꺾은 것을 의미한 것임.
[주D-022]제목(除目) : 관리(官吏) 임명(任命)의 명부.
[주D-023]벽제(辟除) : 재상이 출입할 때에 앞에 잡인이 다니는 것을 금하는 것.
[주D-024]역책(易簀) : 죽을 때에 임하여 깔고 있던 자리를 바꾼다는 말.
[주D-025]자로(子路)가 결영(結纓)하고 : 자로(子路)가 죽을 때에 갓끈을 똑바로 매고 죽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
[주D-026]중유(仲由)의 무명 옷 : 중유(仲由)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인데 무명옷을 입고 좋은 옷을 입은 자와 같이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이 《논어(論語)》에 있다.
[주D-027]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 : 진(晋) 나라 명사인 왕공(王恭)이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눈 속에 걸어다니니 사람들이 보고 신선이라 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일해 이식 (공역) ┃ 1966

 

 
  간본 아정유고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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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文)-서(書)
이낙서(李洛瑞) 서구(書九) 에게 주는 편지

비 내리는 밤에 등불을 밝히고 양철애(楊鐵崖 철애는 명(明) 나라 시인 양유정(楊維楨)의 호)의 시를 읽으니 그 시가 힘차고 쾌활하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이후의 재자(才子)들이야 여기에 비교하면 참으로 모기 소리와 같소.

족하가 나에게 부탁하여 그 장서(藏書)를 나의 자필로 교정하고 평점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소. 내가 18~19세 때에 거처하던 집의 이름을 구서재(九書齋)라 하였는데, 이는 바로 독서(讀書)ㆍ간서(看書)ㆍ장서(藏書)ㆍ초서(鈔書)ㆍ교서(校書)ㆍ평서(評書)ㆍ저서(著書)ㆍ차서(借書)ㆍ폭서(曝書)를 일컬은 것이었는데 10년 후에 족하의 명자(名字)와 상부하게 되니 우연한 일이 아니오. 일찍이 구서재에 대한 시조를 지었으나 지금은 잊어 기억하지 못하오. 심초연(沈蕉硏 초연은 심염조(沈念祖)의 호)이 일찍이 도곡상공(陶谷相公 도곡은 이의현(李宜顯)의 호)의 소장서를 손수 평점하고 또다시 나에게 교점(校點)을 부탁하니, 그 책은 바로 《이십일사(二十一史)》인데 이는 모두 고인들이 남긴 전아(典雅)한 뜻을 이어받은 것이었소. 또 새해가 되었으니 족하는 많은 기서(奇書)를 얻어 슬기로운 지식이 날로 더해지기를 바라오. 나는 한가롭고 탈없이 지내는 형편이라, 창문에 비치는 햇빛이 항상 선명하며, 밤에는 잇달아 등(燈)을 밝힐 뿐이오. 여염의 나이든 친구인 간취자(看翠子) 이수익(李壽益)이 쓴 《금강기(金剛記)》 속에 낭선군(朗善君 종실로 이름은 우(俁))을 일컬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이를 보내드리오. 마침 어떤 사람이 나에게 좋은 일본 종이를 보내왔으므로 시험삼아 먹을 갈아 놓고 붓을 휘둘러 옛사람들의 좋은 일을 찾아 쓰고 싶었소. 동성(同姓)ㆍ동한(同閈 같은 마을에 사는 것)ㆍ동지(同志)들 중에 좋은 사람을 회상해 보니 족하(足下)보다 더 좋은 이가 없소. 족하가 이미 나의 변변치 못한 편지를 간직하였으니, 종이가 나비 날개 같고 자획이 모기 다리 같더라도 모두 보내 주오. 내가 뽑아 등초하여 정의를 두터이하겠소.

내 집에 가장 좋은 물건은 다만《맹자(孟子)》7책뿐인데, 오랫동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하여 돈 2백 닢에 팔아 밥을 잔뜩 해먹고 희희낙락하며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의 호)에게 달려가 크게 자랑하였소. 그런데 영재의 굶주림 역시 오랜 터이라, 내 말을 듣고 즉시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그 남은 돈으로 술을 사다가 나에게 마시게 하였으니, 이는 자여씨(子輿氏 맹자(孟子)를 가리킨다)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생(左丘生 좌구명(左丘明)을 가리킨다)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리하여 맹씨와 좌씨를 한없이 찬송하였으니 우리가 1년 내내 이 두 책을 읽기만 하였던들 어떻게 조금이나마 굶주림을 구제할 수 있었겠는가? 이 참으로 글을 읽어 부귀를 구하는 것이 도대체 요행을 바라는 술책이요, 당장에 팔아서 한때의 취포(醉飽)를 도모하는 것이 보다 솔직하고 가식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으니 서글픈 일이오. 족하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파성(婆城)의 조경암(趙敬菴)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학문을 권면한 것이라 읽어 볼 만하였소. 세속 부랑자들은 《소학(小學)》 두 글자를 들으면 비평하고 나무라며, 《근사록(近思錄)》을 보면 기지개를 켜고 누우려 하니, 참으로 너무나 얄밉소. 족하는 심상한 말로 보아넘기지 않기를 바라오.

일본(日本)에서 모각(摸刻)한 역산비(嶧山碑 이사(李斯)의 글씨로 된 진(秦)의 덕을 칭송한 비)는 전가(篆家)에서 드물다고 생각하는 것이요, 화악묘비(華嶽廟碑 한(漢) 나라 때의 비로 화산(華山)에 있었다)는 예서(隸書) 중에서 오확(烏獲 진(秦) 나라의 용사)과 임비(任鄙 전국 시대 진(秦) 나라의 역사(力士))처럼 힘찬 것이라, 그것을 대하면 소름이 끼치며 떨리는 것이 마치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굵은 모래가 튀는 것 같고 군데군데 부러진 칼과 활촉이 노출된 격이라 장사(將士)의 가슴을 뚫고 표한한 장수의 목구멍을 찌르는 것이 연상되오. 족하는 세밀히 살펴보시오.

내가 단 것에 대해서는 마치 성성(狌狌)이가 술을 좋아하고 원숭이가 과일을 즐기는 것과 같으므로 내 친구들은 모두 단 것을 보면 나를 생각하고 단 것이 있으면 나를 주곤 하는데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의 호)만은 그렇지 못하오. 그는 세 차례나 단 것을 먹게 되었는데, 나를 생각지 않고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이 나에게 먹으라고 준 것까지 수시로 훔쳐먹곤 하오. 친구의 의리에 있어 허물이 있으면 규계하는 법이니, 족하는 초정을 깊이 책망해 주기 바라오.

나는 전부터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좋은 책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학집요(聖學輯要)》ㆍ《반계수록(磻溪隨錄)》ㆍ《동의보감(東醫寶鑑)》이니, 하나는 도학(道學), 하나는 경제(經濟), 하나는 사람을 살리는 방술로 모두 유자(儒者)가 할 만한 것이오. 도학은 진실로 사람됨의 근본이 되는 일이니 말할 것 없거니와, 요즈음 세상에는 오로지 사한(詞翰)만을 숭상하며 경제를 멸시하니, 의술(醫術)이야 그 누가 밝히겠는가?
옛날부터 전해 오는 두 가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으니, 진명경(陳明卿 명경은 명(明)의 진인석(陳仁錫)의 자(字))은 청초한 문인이지만 경제에 몰두하였고, 왕자안(王子安 자안은 당(唐)의 왕발(王勃)의 자)은 경박한 재사이지만 의술에 통달하였다 하오. 나는 이 두 사람에 대하여 일찍이 기특히 여기며 사랑하였는데, 지금 족하는 침착하고 슬기로워 바탕과 재질을 갖춘데다가 나이 또한 한창이니, 사장(詞章)에만 전심하지 말고 항상 이와 같이 참다운 마음으로 물건을 사랑하는 일에 심력을 기울이시오. 그러면 이 세상을 헛되이 살았다는 탄식은 거의 없을 것이라 생각되오. 창고 속에서 누렇게 뜬 곡식과 같은 나야 말할 것도 없소. 이 두 책을 봉정(奉呈)하고 내키는 대로 세 책을 더 뽑아 보내니 이미 열람한 것은 중복해 보지 마시오.

삼가 이백시(李伯時 백시는 송(宋) 나라 이공린(李公麟)의 자)가 석탑(石榻)에 그린 선성(先聖 공자를 말한다)의 화상 및 72제자(弟子)의 화상을 보니, 자연(子淵 안연(顔淵)의 자)은 하관이 풍후하게 되어 빈요(貧夭)하지 않을 것 같고, 자공(子貢)은 얼굴이 파리하게 되어 재물을 많이 늘릴 것 같지 않고, 안쾌(顔噲)의 얼굴은 사납기가 번쾌(樊噲)와 같고, 번수(樊須)의 수염은 참으로 번수(繁鬚 텁석부리)이고, 양전(梁鱣)은 전어(鱣魚)를 들고 있으니 또한 무슨 의미요? 아마 백시(伯時)가 자기의 신통한 붓을 멋대로 내두른 것인가 보오. 그러나 관복(冠服)이 예스럽고 엄연하니, 마땅히 그것을 음미해 볼 것이지 까다롭게 그 수염에서 구해 볼 필요는 없는 것이오.

고종(高宗)이 찬(讚)을 지은, 후자리(后子里)ㆍ악자성(樂子聲)의 무리는 사적이 없는데도 억지로 그 찬을 꾸미고 보니 너무나 무미하여 도리어 붓을 휘둘러 의미를 붙인 백시의 것만 못하오. 한 위공(韓魏公 위공은 송(宋) 나라의 한기(韓琦)의 봉호)이 짓고 쓴 북악비묘(北嶽碑廟)는 은은하고 질박하며 아담하고 정제하니 참으로 대신(大臣)의 것이오. 서맥(書脈)은 노공(魯公 안진경(顔眞卿)의 봉호)을 모방하였는데, 다만 자획이 보다 비대하면서 약하오. 왕원미(王元美 원미는 명(明) 왕세정(王世貞)의 자)가 이를 보고 ‘칼날이 사방으로 뻗쳐 바로 볼 수 없다.’고 한 것은 옳은 평가가 아니오. 난시(亂時)의 절신(節臣 노공(魯公)을 가리킨다)과 치세(治世)의 보상(輔相 한 위공(韓魏公)을 가리킨다)을 그 필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오.

전에 남의 책을 빌어다 읽는 사람을 보고 나는 그가 너무 부지런하다고 비웃었는데, 이제 문득 나도 그를 답습하여 눈이 어둡고 손이 부르트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참으로 사람은 자신을 요량하지 못하는 것이오. 《유계외전(留溪外傳)》 첫 권을 보내니 저녁에 한 번 읽어 보고 내일 이른 아침에는 돌려 주오. 이는 모두가 효자(孝子)ㆍ충신(忠臣)ㆍ열처(烈妻) ㆍ 기부(畸夫)에 관한 것인데 세도(世道)에 보익이 되는 글이라, 매양 갑신년 대목을 읽을 때에는 눈물이 어리고 뼈가 아프며 간담이 서늘하오.
어떤 이가 나에게 소책(素冊 지금의 공책과 같다)을 주기에 그것을 벼루 머리에 두고, 한적할 때 글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면 고인들의 득의한 명문(名文)을 아무것이나 뽑아 낭독하고 나서, 급히 먹을 갈아 세대를 구별하지 않고 그 글을 쓰면 마음이 몹시 즐거웠소. 이때에는 비록 좋은 술과 아름다운 꽃이라도 이 즐거움과 바꿀 수 없었소. 이제 문득 이헌길(李獻吉 헌길은 명(明) 나라 문인 이몽양(李夢陽)의 자)의 글이 생각나서 한두 수를 기록하여 보내려 하는데, 이것은 내가 7~8년 전에 읽은 것이오. 《설부(說郛)》 1권을 돌려보내오.

내가 어제 남한(南漢)에서 돌아왔는데, 물이 깊고 맑으며 하늘이 드높았소. 가을과 겨울에는 더욱 회포를 참지 못할 것이 산음(山陰) 길만 못하지 않소.
《수색집(水色集)》에 성명을 쓰지 않았으니, 전고(典故)에 익숙한 이가 아니면 그가 공신(功臣) 허적(許)임을 알 수 없고, 서문을 짓는 이도 성명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허균(許筠)으로 생각되오. 그 책을 찍어내어 없애지 않으려 하면서도 누구인가를 숨기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우매한 것이 이와 같소. 아는 이라야 더불어 말할 수 있을 것이오. 《산해경(山海經)》의 글을 뽑고자 하니 잠깐 빌려 주시겠소? 연선(演蟬)을 보내니 이것은 족하의 필적인 듯하오.

내가 비록 학자는 아니나 매양 《근사록(近思錄)》을 애중하여 가까이 두고 밤낮으로 3~4조목씩 보아 남몰래 경계를 삼는 터이라, 잠깐도 놓고 싶은 생각이 없소. 그러나 족하의 소청을 어떻에 따르지 않겠소. 9책을 모두 보내오. 이를 보내고 나면 내가 볼 책이 없으니, 《원문류(元文類)》나 혹은 《송시초(宋詩抄)》 두 책 가운데 하나라도 빌려 주는 것이 어떠하오.

해가 새로 바뀌고 사람은 점점 늙어가오. 군자는 밝은 덕을 높여야 할 것인데, 나는 해가 바뀐 후 남의 집 손이 되지 않으면 집에 손님이 찾아와서 한 번도 한가한 틈을 타 상봉하지 못하니 마음이 불안하오. 그러나 창문의 햇볕은 따뜻하고 벼루의 얼음이 풀리므로 전에 하던 공부를 되찾고자 하오. 《전당시(全唐詩)》를 인편에 보내 주면 좋겠으며, 윤회매(輪回梅) 2수도 돌려보내 주는 것이 어떠하겠소.

《일지록(日知錄 명말 청초(明末淸初) 고염무(顧炎武)의 저술)》을 3년 동안이나 고심하면서 구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남이 비장(祕藏)해 둔 것을 얻어 읽어 보니, 육예(六藝)의 글과 백왕(百王)의 제도와 당세의 일에 그 근거를 고증한 것이 분명하였소. 아, 고영인(顧寧人 영인은 고염무(顧炎武)의 자)은 참으로 옛날의 기풍이 있는 큰 선비요. 돌아보건대, 지금 세상에 족하가 아니면 누가 이 글을 읽을 것이며 내가 아니면 누가 다시 이를 초(鈔)하겠소. 4책을 우선 보내니 잘 간수하여 보기 바라오. 전에 보내 준 조그마한 책(쓰지 않은 책을 가리킨다)은 아미 다 썼으니 족하는 계속 보내 주어 나의 초하는 일을 마치게 해주기 바라오.

세월은 덧없이 흘러 또 여름이 되었소. 족하를 따라 경사(經史)를 토론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천 그루 도화(桃花) 속에서 미친 듯이 통음(痛飮)하거나, 아니면 문을 닫고 굶주리고 누워 빈사전(貧士傳)이나 읽으면서 오릉가 이조(於陵家李螬)의 글자 주(注) 내는 일 때문이오. 여러 운사(韻士)들의 시권(詩卷)을 보내니 한 번 보고 돌려주기 바라오.

어제 재선(在先 박제가(朴齊家)의 자)과 함께 묵계(墨溪)에 가서 용촌(龍村) 사는 임장인(林丈人 임씨의 어른이라는 뜻)과 만났는데, 장인은 소명하고 온화하며 자상한 분이었소. 이야기하는 도중에 이낙서(李洛瑞)를 칭찬하면서 세 번이나 치사하였소. 이때 모인 사람은 10인인데 시를 지은 사람은 7인이었소. 장인이 굳이 시를 지으라고 권하기에 나도 마지못해 지었소. 이제 장인이 하신 말씀을 써서 보내거니와 ‘과거(科擧)는 장사꾼이요, 문장은 이단이다.’ 하였소. 이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헤어져서, 오늘은 나는 듯이 미호(渼湖)로 향하여 가고 있소. 담원팔영(澹園八詠)을 보내 주면 좋겠소. 밤중에 차[茶]를 빌려가기에 족하가 편찮은 줄 알았는데 오늘은 병환이 어떠하오?

나처럼 나태한 사람이 어떻게 날마다 자전각(字典閣)에 나아가 허다한 글자를 교열하겠소? 옛날에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호) 송 선생(宋先生)은 반드시 남에게 책을 빌려 주고 독서를 권하였다가, 빌려갔던 사람이 책을 돌려왔을 때 책에 보풀이 일지 않았거나 때가 묻지 않으면, 선생은 반드시 학문에 부지런하지 않았음을 책망하고 다시 빌려 주곤 하였소. 그런데 어느 악소년(惡少年)이 책을 빌어다가 읽지 않고 돌려 주면서 책망을 들을까 두려워, 그 책을 밟고 문질러 많이 읽은 것처럼 꾸민 일이 있었소. 족하는 송 선생의 중후함을 본받으면 좋겠소. 하물며 내가 악소년처럼 밟고 문지르지 아니함에랴?

고려 말년 제공(諸公) 중에서 당(唐) 나라의 문장을 이을 만한 이는 포은(圃隱) 선생이오. 그러나 화려한 것이 익재(益齋)에 비하면 약간 손색이 있고, 기이하고 웅건한 것이 목은(牧隱)에 미치지 못하오. 대개 익재는 원(元) 나라 격조요, 목은은 송(宋) 나라 문체이니, 어찌 일찍이 포은의 유연한 운치에 미치겠소? 또 명가(名家)의 글이 있거든 보내 주면 좋겠소.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소. 그러나 박식한 이에게 강문(講問)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족하는 근본을 안다고 할 만하오. 내가 먼저 찾아갈 것이니 기다려 주기 바라오. 이공(李公)께서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의 호)의 《여지(輿地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말함)》를 보겠다고 하므로 내가 가져다 보여 드리려 하니, 보내 주기 바라오.

춘추 시대 1백 24개 열국에 외자로 된 국호가 많고 간혹 두 자로 된 국호가 있으니, 두 자로 된 것은 소주(小邾)ㆍ남연(南燕) 같은 것이오. 이 책에는 잇달아 써서 기본 숫자에 차지 않으니, 두 자 국호까지 분정하여 기본 숫자를 채워 보내 주기 바라오.

원(元) 나라 태정제(泰定帝)가 천하를 나누어 18로(路)를 만들었다고 하나 고증할 길이 없었는데, 다행하게도 《문헌통고(文獻通考 송(宋)의 마단림(馬端臨)의 저서)》와 《청일통지(淸一統志 화신(和珅) 등이 지은 전국의 지리서)》에서 연혁(沿革)을 상고해 내서 18로를 채워 쓰게 되었으니 지금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보내 주기 바라오.

나의 생각에는, 중원(中原)은 원기(元氣)가 모인 곳이라 일월(日月)이 바로 비추고 수토(水土)가 그 조화를 이루어, 성현의 기지가 되고 문헌의 육성지가 되었다고 보오. 안남(安南)은 옛 교지(交趾)의 지역으로 연경(燕京)과의 거리가 1만여 리가 되나 역대의 문물이 왕성하여 볼 만하고, 유구(琉球)는 바다 가운데 조그마한 하나의 섬이나, 자손들을 중원에 입학시켜 명(明) 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근실하므로 오랑캐의 풍속을 크게 혁신하였소. 이는 모두 내가 전적(典籍)에서 상고한 것으로 나만이 흠모할 뿐 남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오.

우리 조선은 기성(箕聖)이 피난 온 곳으로 요동(遼東)과의 거리가 1천여 리밖에 되지 않고, 전장(典章)과 예악(禮樂)은 사이(四夷)의 으뜸이라, 저 교지ㆍ유구와 비교해 볼 때 그 문명이 어떠하겠소? 그리하여 전사(前史) 외이열전(外夷列傳)을 두루 읽어 보니 조선이 제일이요, 다음은 안남(安南)이요, 그 다음은 유구의 차례로 되어 있으니 이는 세력이 강한 것을 이름이 아니라 문명으로 따진 것이오. 그러므로 최치원(崔致遠)ㆍ김이어(金夷魚)ㆍ김가기(金可紀)ㆍ최승우(崔承祐)가 당(唐) 나라 조정에 과거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날리고, 박인량(朴寅亮)이 송(宋) 나라에 사신가서 그 이름을 천하에 떨쳤고, 서긍(徐兢)이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저술하면서 김부식(金富軾)을 특별히 세가(世家)에 나열하였소.
호원(胡元)에 이르러서는 익재(益齋) 이공(李公)이 서천(西川)에 봉사(奉使)하고 강남(江南)에 강향(降香)하였으며, 가정(稼亭)ㆍ목은(牧隱) 부자가 제과(制科)에 올랐소. 우리 조선의 개국(開國)은 황명(皇明)과 함께 일어났는데,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여 거의 없는 해가 없었소. 이와 같이 2백 년 동안 계속하여 그 주고 받은 의식의 성대함과 보고 느낌에 진지한 것이 참으로 지극하다고 말할 만하오. 그러나 도리어 세 조정(당(唐)ㆍ송(宋)ㆍ원(元))만큼 성대하지는 못하오.

묵장(墨莊)이 나에게 먼저 《패문시운(佩文詩韻)》을 주겠다고 하는 것을 사양하고 《운략(韻略)》을 청하였더니, 《운략》은 희귀한 책이라, 유리창(琉璃廠) 20여 서방(書坊)을 뒤져 찾은 끝에야 비로소 이 책을 얻었다 하오. 그처럼 두터운 정의에 참으로 감격하였소. 갈 길이 바빠 미처 볼 겨를이 없었는데, 족하는 먼저 그 범례를 깨달아 우리들의 운문(韻文)에 대해 모두 금쪽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반공(潘公)이 이른바 ‘문운(文運)에 관계가 있다.’고 한 말이 허언이 아닌 듯싶소.

《통지(統志)》포주(蒲州)조에 이른 ‘기자묘(箕子墓)’는 몽현(蒙縣)에 있는 기자묘를 인증함에 불과하고, 별도로 포주에 묘가 있는 것은 아니오. 대개 기자묘가 셋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몽현에 있고, 하나는 평양(平壤)에 있고, 하나는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소.

편지를 받고 근간의 기거(起居)가 편안함을 들으니 우러러 위로되는 마음을 어떻게 다 말하겠소. 이 못난 사람은 이원(摛院)에 번들어서 날마다 1만에 가까운 많은 말을 쓰니 손가락이 마비되었고, 또 사신이 압록강을 건널 날이 한 열흘 남았는데 두목(頭目 중국 사신 중에 무역을 위해 따라온 상인)을 공궤(供饋)하기 위하여 내일은 고을로 돌아가야 되겠소. 이처럼 수고로우니 크게 탄식한들 어찌하겠소. 《기년아람(紀年兒覽)》은 지금 서 직각(徐直閣 직각은 벼슬 이름. 서영보(徐榮輔)를 말함) 댁에 있고, 기타는 모두 고을 관아에 있으므로, 《청정국지(蜻蜓國志)》2책만 보내드리오.

《지지(地志)》의 초본을 한 번 자세히 보니 참으로 물샐틈 없이 잘되었다고 할 만하나 명환인물(名宦人物)은 실로 평가하기 어려운 것이니, 이 못난 사람의 천박한 식견으로는 한결같이 《승람(勝覽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말함)》에 의존하여 기록하고,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고려사(高麗史)》에서 세밀히 간추려 《승람》에 누락된 것을 하나하나 다 보충해야 할 것이오. 또 반계(磻溪 반계는 유형원(柳馨遠)의 호)의 《지지(地志)》와 최연촌(崔煙村 연촌은 최덕지(崔德之)의 호)의 《유초(流鈔)》에 의해 수록하되, 명종조(明宗朝)로 한계를 하고, 선조(宣祖) 이후는 우선 생략하였다가 가능할 때에 처리하였으면 하오. 《승람》에 기록된 것에 지나치게 소략하거나 잘못된 부분은 신빙성이 있는 책을 참고하여 첨부할 것이며, 효자(孝子)ㆍ열녀(烈女)에 이르러서도 《명사(明史)》의 예에 의거하시오. 이미 어제 만나 의논했듯이 《여지(輿地)》도 사류(史流)에 관계되는 것이니, 십분 신중하여 주기를 바라오.
인생의 이합(離合)이 흐르는 물과 뜬구름 같아서 본래 정처가 없는 것이나, 금년 봄처럼 분장(分張)이 극심한 적은 없었소. 나는 다행히 병이 없고 지난달부터 또다시 《무예도보(武藝圖譜)》의 일을 계속하였는데, 미구에 일을 마치겠으나 곧 내각(內閣)으로 들어가 어제(御製)를 교열하게 되었소. 유료(柳寮 유득공(柳得恭)을 가리킨다)도 이 일로 여지국(輿地局)에 있지 않소. 그 부하(府下)에 사는 사인(士人) 이인섭(李仁燮)은 곧 나와 단문지친(袒免之親 삼종(三從) 또는 사종(四從)의 친족)이오. 지난번에 연동(蓮洞) 장신(將臣)이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갔었는데, 인섭이 혈혈단신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 곧 본부 향인의 데릴사위가 되었소. 지금 자녀를 낳았으나 영원히 먼 곳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 어찌 가련한 일이 아니겠소. 곧 하인을 보내 찾아 보고 무슨 일이건 곡진히 돌봐 주며, 그로 하여금 관아에 출입하게 하여 믿고 의지할 곳이 있게 하면 매우 다행하겠소. 또한 그 사람됨이 근실하기만 하지 다른 재주는 없는지라 친근히 한다 하더라도 세도를 끼고 폐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이처럼 간곡히 부탁하오. 더구나 나의 족질(族姪)이 귀부의 부민(部民)이 되었으니 역시 드문 일이오.
또 들으니, 길현(吉衒)이란 자가 전관(前官) 별감(別監)이었는데 사건에 연루되어 부옥(府獄)에 구금되었다고 하니, 그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조부 고(故) 별제(別提) 인화(仁和)는 곧 관서(關西)의 부자(夫子 스승)였소. 향천(鄕薦)으로 관직에 임명되었다가, 신임무옥(辛壬誣獄)이 일어나자 벼슬을 내놓고 귀향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소.
선조는 그 당시에 주서로 물러났고 / 先祖當年注書退
미손(微孫)은 오늘날 별제로 돌아오네 / 孱孫今日別提歸
성세에 어찌 감히 기미 알아 간다 하랴 / 敢言聖世知幾去
가을철의 살찐 노어 생각나서라네 / 却憶鱸魚秋正肥
선왕이 그 자손 연(衍)을 불러 보고 그 시(詩)를 읊조리며 가상히 여겨 포상하였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일이오? 현(衒)의 죄가 이미 원악대대(元惡大憝 반역죄를 범하거나 크게 악한 것을 말함)가 아니라면 그 어찌 옛날을 생각하여 용서해 줄 길이 없겠소? 모름지기 영문(營門)에 논보(論報)하여 되도록이면 속히 감방(勘放)하여 현인의 손자로 하여금 그 가문을 보전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거듭 편지를 받아 읽으니 손을 잡고 마주앉아 자세한 일까지 얘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더구나 ‘요즈음은 늘 화도시(和陶詩)만 읊조리고 조굴부(吊屈賦)는 짓지 아니하며 운명에 맡겨 버린다.’ 하니 흠모하오. 나는 또 운서(韻書)를 편찬하는 일을 당하여 글자를 간추리고 자획을 조사함에 털끝처럼 미세한 데까지 이르고 있는데,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니 심력이 쉽게 풀어지고 그 번뇌를 이겨내지 못하겠소. 자신의 잔약한 몸뚱이를 돌아보매 겨우 형체만 갖추고 있는데, 나이 50에 믿는 것이라고는 밝은 눈 하나뿐이었소. 향조(香祖 청(淸) 나라 반정균(潘庭筠)의 호)가 말하듯이 다른 사람의 눈과는 다르다고 하나, 운자(韻字)를 편집한 뒤부터는 공중을 쳐다보면 어른거리니 이는 실로 작은 일이 아니오.
근자에 영공(令公)을 양이(量移 죄수의 유배지를 가까이로 옮기는 것)한 것은 대개 《여지(輿地)》를 쉽게 성취하려는 것이니, 비와 이슬을 내리고 서리와 눈을 내리는 것이 모두가 조화 아닌 것이 없소. 편지 속의 허다한 가르침을 각중(閣中)의 여러분들과 의논하니, 대개 착수가 너무 늦어진 것을 한탄하나 내각(內閣)의 서적을 함부로 시골에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소. 그리고 좌보(左輔)에 해당되는 지역이라 차츰 옮겨 가까워지면 몹시 편리하겠으나, 이마 적적(謫籍)에 있으니 뜻대로 될지는 기필할 수 없소. 붓과 먹과 종이는 전과 같이 보내 준다 하니 그 말이 불가한 것은 아니오. 지금 보여 준 네 가지 어려움은 영공이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소. 대략 수찬(修纂)하였다가 후일에 다시 정정을 더해 완료하는 것이 일의 순서일 듯하오. 가능한 한 편리한 방법을 따라 속히 손을 써주기 바라오.
《인물고(人物考)》는 내각에 그 책이 소장되어 있는데, 기회를 보아 각신(閣臣)에게 요청하려 하나 기필할 수는 없소. 이 일이 마치 서담포(徐憺圃)가 전리(田里)에 쫓겨나가 《일통지(一統志)》를 편찬한 것과 흡사하니 어찌 이처럼 기이하게 일치하오? 《장릉지(蔣陵志)》 역시 지금까지 끌어올 일이 아니며, 또한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개정할 일이 아닌데, 어찌하여 모(某) 태수(太守)를 두려워하겠소? 그 책이 모두 심대교(沈待敎 심염조(沈念祖))의 집에 있으니, 이는 그 배식록(配食錄)을 개수(改修)하기 때문이오. 찾아다가 교열하기 바라오. 배식록은 고증한 증거가 자세하고 명백한 것이라 없애지 못할 전적(典籍)이 되었으니, 이것으로 수정하면 본지(本志)의 힘이 덜할 것이오. 다만 초고(草藁)는 비장해 두고 내지 아니하니 어찌하겠소? 《경도지(京都志)》는 각중(閣中)에 있으니 거두어 보내겠소. 《황화여고(黃華旅稿)》는 내 마음대로 평점하여 감히 공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소. 다시 10여년 전 일부터 계속하면 그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소.

《전운(全韻)》초고 7장을 먼저 비성(祕省)에 보내어 교열한 다음에 그곳으로 보내니 반드시 상세히 보아 주(注)를 달고 만약 잘못된 곳이 있으면 쪽지를 붙여 주시오. 간명(簡明)을 기하려 하나 어떻게 진선진미하기를 바라겠소. 만약 사반공배(事半功倍)의 방법을 얻는다면 글을 다루다가 머리가 희었다는 나무람을 면할 것이니 어떻게 생각하시오. 한나절이면 충분할 것이니 하인을 보내거든 즉시 그 편에 부쳐 보내어, 여러 곳에 돌려 보여서 짧은 기일내에 완공하면 그 얼마나 시원하겠소? 결락된 곳은 대강 보충하여 뒤로 물리거나 도려내고 덧붙이는 지경이 되지 않게 하기 바라오. 돌려 보는 순서는 먼저 비성(祕省)에 보내고, 다음은 집사(執事), 다음은 유(柳 유득공(柳得恭)), 다음은 박(朴 박제가(朴齊家)), 다음은 내각(內閣), 다음은 이 영공(李令公 영공은 존칭)으로 하여 물레바퀴와 같이 잠시도 쉬지 않고 돌리려 하오. 7장을 지금 보내니 오전에 다 보아 주기 바라오.

지금 온 다섯 장에 부전이 둘만 붙었으니 좌우(左右 상대에 대한 존칭)는 피곤한가 보오. 조금 전에 내각에 불려갔었는데, 여러 곳의 지속(遲速)이 한결같지 않으니 극히 민망하오. 어제 물어 온 세 글자의 뜻은 명백하지 못하니 답답한 일이오. 난수(灤水)는 둘이 있는데, 하나는 명백하고 하나는 분명치 못하니, 요서(遼西)의 수명(水明)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경측(瓊畟)이 《한단순예경(邯鄲淳藝經)》을 보았는데 거기에 ‘― ―’라 한 것은 지금의 투(骰) 자요. 세(勢) 자의 훈(訓)은 지금 그 장이 있지 않으니 다시 상고하기 바라오. 좌우께서 하시는 교정이 정밀하여 다시 적수가 없는데, 유혜보(柳惠甫 혜보는 유득공의 자)가 그 뒤를 이어 탐구해 찾아내 좌우께서 알지 못하는 것을 잡아내니 혜보가 교서(校書)에 공부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대개 교서의 묘리가 끝이 없어서인가 하오. 또 12장을 바꾸어 보내니 전의 것과 아울러 62장이라, 이틀 동안이면 마칠 수 있을 것이오. 성시도(城市圖)와 금강봉시(金剛峯詩)를 보내 드리오.

종용(慫慂)의 종(慫) 자는 권(勸 권면하는 것)자로 해석되니 글자 그대로 종용인 것이오. 지금 이 운례(韻例)에 용(慂) 자에다 권(勸)의 뜻으로 해석을 붙이고 종(慫) 자에 또 다시 경(驚 경동하는 것)의 뜻으로 해석을 붙였으니, 종 자 밑에는 거듭 권의 뜻으로 해석을 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오. 만약 종 자에 따른 해석이 없다면 거듭 권의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오. 다른 나머지도 다 이와 다름이 없소.

흉용(洶溶)의 용(溶) 자는 과연 오서(誤書)된 것이나, 강(洚) 자는 곧 강(降) 자인데, 하내(河內)의 물이름으로 홍수(洪水)와 같은 뜻이니 참작하여 개정하시오. 옥(剭) 자의 해석을 ‘주(誅 목을 베는 것)라 형(刑 형벌하는 것)이라’ 한 것은 바꾸어 놓아야 할 것이오. 규(葵) 자 밑에 퇴(椎 방망이)의 뜻으로만 붙여 놓은 해석은 어제 삭제하려다가 말았는데, 종규(終葵)로 해석을 붙인다 하더라도 긴밀하지 못하오. 이미 본의(本意)가 있으므로 이와 같은 해석을 덧붙이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는 운부(韻府)에 엮어진 문자(文字)와 흡사하기 때문이오. 규(葵) 자 밑에 성(姓)이라 써야 한다고 하나, 대개 성명(姓名)의 뜻으로 해석을 붙이는 것은 성과 인명으로 발음되는 것으로 사람의 성명에 따라 특별하게 하나의 별개 음(音)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니 바로 묵기[万俟]와 이기(食其) 같은 것이오. 그러나 규(葵) 자에 대해서는 그 음이 한 가지뿐이니 특별히 성(姓)이라는 해석을 붙일 필요가 없소.
비(庳) 자의 해석에 대해서는 의례(義例)에 관계되는 것이니, 나타낼 만한 사람이 없으면 국명(國名)으로 해석을 붙일 뿐이오. 미(湄) 자에 대한 해석을 수초교(水草交 물과 풀이 한데 뒤엉키는 것)라 한 것이 가장 타당하니 그대로 바루어야 하겠소. 한 글자로 특별히 달리 발음되는 것은 두 가지 음으로 주(注)를 달 것이니, 항(缸) 자의 음이 강(江)과 항(降)으로 발음되는 따위오.
또 음은 같고 뜻이 다른 것과 글자의 뜻은 같고 음이 서로 다른 것에 대해서는 본주(本注) 밑에 권(圈 둥근 계선)을 치고 별도로 주를 달아야 할 것이니 권을 치지 않으면 본주와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오. 이(黟) 자 밑과 기기(庪觭) 자 밑에는 여백이 있으니 주(注)를 첨부할 것이요, 이(餌) 자 밑에 기(耆) 자를 도려내고 붙인 것은 잘못이니, 이(餌) 자는 곧 저(底) 자요. 이와 같은 곳을 귀신같이 적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등에 찬물을 끼얹듯이 써늘하게 하오. 그러나 의아한 것은 옹(翁) 자의 해석에 조경모(鳥頸毛 새의 목털)라 한 것을 고집하면서 ‘《설문(說文)》ㆍ《급취(急就)》에서 나온 것이라,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하지는 않으리라.’고까지 하니, 족하는 어찌 이처럼 답답하게도 물정을 모르시오? 조경모(鳥頸毛)가 2책에 나왔다는 그것이 곧 사람들의 눈을 놀라게 하는 것이오. 도대체 《설문》이란 무엇이며, 《급취》란 무슨 물건이오? 또한 저 새[鳥]가 우리들과 무슨 관계가 있소? 왈칵 성을 내며 홀(笏)을 이끌고 물러서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오. 또한 그 많은 글자마다 다 본의를 갖추기 위해 해석을 붙인다면 불(不) 자 밑에도 화부(花跗)란 해석을 붙여야 하고, 언(焉) 자 밑에도 황조(黃鳥)란 해석을 붙인 다음이라야 그 근원을 추구하였다고 할 것이나 누가 이를 다 알겠소? 명철한 족하가 한바탕 웃으라고 이와 같은 해담(諧談)을 하였소. 지금 교정해 온 다섯 장을 일체 개정하였으니, 분명하게 서로 일치되었다 하겠소.

[주D-001]갑신년 : 명 의종(明毅宗)이 순국(殉國)하고 여러 충신들이 절사(節死)하였던 1644년(인조 22)을 가리킨다.
[주D-002]산음(山陰) : 진(晉) 나라 왕휘지(王徽之)가 거처하던 곳으로 경치가 좋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왕휘지에게 산음(山陰)의 산수(山水)를 물으니, 왕휘지는 “천암(千巖)이 경수(競秀)하고 만학(萬壑)이 쟁류(爭流)한다.” 하였다.
[주D-003]오릉가 이조(於陵家李螬) : 오릉(於陵) 집의 벌레먹은 오얏. 진중자(陳仲子)는 청렴한 선비이지만 3일을 굶어 듣지도 보지도 못하자 엉금엉금 기어가 우물 위에 있는 벌레먹은 오얏을 따 먹은 뒤에 의식을 회복하였다는 말이 있다.《孟子 滕文公下》
[주D-004]신임무옥(辛壬誣獄) : 경종(景宗) 원년에 왕위의 계승을 에워싸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에 일어난 당쟁의 화옥(禍獄). 신축년(1721, 경종 1)ㆍ임인년(1722, 경종 2) 두 해에 일어났다 하여 신임무옥 또는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도 한다.
[주D-005]화도시(和陶詩) : 소동파(蘇東坡)가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의고시(擬古詩)에 화답한 화도연명의고(和陶淵明擬古)를 가리킨다. 이 시는 대개 자연스럽고 한적한 정취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古文眞寶 前集》
[주D-006]조굴부(弔屈賦) : 한(漢) 나라 가의(賈誼)가 굴원(屈原)을 조상하는 조굴원부(弔屈原賦)를 가리킨다. 이 부는 강개 비분한 뜻이 내포되었다.《古文眞寶 後集》

 

청장관전서 제5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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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엽기 6(盎葉記六)
국조명신언행록(國朝名臣言行錄)


송성명(宋成明)이 엮은 《국조명신언행록》이 아직 간행은 되지 않았지만 이제 그 목록을 적어 본다.
전집(前集) ○ 제1권 : 조준(趙浚) 송당(松堂)ㆍ남재(南在) 귀정(龜亭)ㆍ심덕부(沈德符)ㆍ성석린(成石磷) 독곡(獨谷)ㆍ민제(閔霽) 어은(漁隱)ㆍ조인옥(趙仁沃)
○ 제2권 : 하륜(河崙) 호정(浩亭)ㆍ권근(權近) 양촌(陽村)ㆍ조영무(趙英茂)ㆍ유정현(柳廷顯)ㆍ한상경(韓尙敬) 신재(信齋)ㆍ박은(朴訔) 조은(釣隱)ㆍ이원(李原) 용헌(容軒)ㆍ유관(柳觀) 하정(夏亭)ㆍ이직(李稷) 형재(亨齋)ㆍ이래(李來)ㆍ함부림(咸傅霖) 난계(蘭溪)
○ 제3권 : 황희(黃喜) 방촌(厖村)ㆍ맹사성(孟思誠)ㆍ조연(趙涓)ㆍ변계량(卞季良) 춘정(春亭)ㆍ허조(許稠)ㆍ조말생(趙末生) 두곡(杜谷)ㆍ한상덕(韓尙德)ㆍ이맹균(李孟畇)ㆍ이종무(李從茂)ㆍ최윤덕(崔潤德)
○ 제4권 : 노한(盧閈)ㆍ신개(申槩) 인재(寅齋)ㆍ하연(河演) 경재(敬齋)ㆍ권홍(權弘)ㆍ윤상(尹祥)ㆍ박안신(朴安信)ㆍ윤회(尹淮)ㆍ남지(南智)ㆍ허성(許誠)ㆍ박연(朴堧)ㆍ어변갑(魚變甲)ㆍ정척(鄭陟) 정암(整庵)ㆍ안지(安止) 고은(皐隱)ㆍ김구(金鉤)ㆍ김반(金泮) 송정(松亭)ㆍ김말(金末)ㆍ정갑손(鄭甲孫)ㆍ최치운(崔致雲)
○ 제5권 : 정인지(鄭麟趾) 학역재(學易齋)ㆍ한확(韓確)ㆍ김숙자(金叔滋)ㆍ이맹전(李孟專)ㆍ 이변(李邊)ㆍ기처(奇處)ㆍ강석덕(姜碩德) 완역재(玩易齋)ㆍ신석조(辛碩祖) 연빙당(淵氷堂)ㆍ유의손(柳義孫)ㆍ권채(權採) 매헌(梅軒)ㆍ남수문(南秀文)ㆍ정창손(鄭昌孫)ㆍ이계전(李季甸)ㆍ어효첨(魚孝瞻)ㆍ구치관(具致寬)ㆍ황수신(黃守身) 나부(懦夫)ㆍ최항(崔恒) 태허정(太虛亭)ㆍ박원형(朴元亨) 만절당(晩節堂)
○ 제6권 : 신숙주(申叔舟) 보한재(保閑齋)ㆍ권남(權擥)ㆍ한명회(韓明澮)ㆍ윤자운(尹子雲) 낙한정(樂閒亭)ㆍ이석형(李石亨) 저헌(樗軒)ㆍ김수온(金守溫) 괴애(乖崖)ㆍ양성지(梁誠之) 눌재(訥齋)ㆍ이예(李芮)ㆍ강희안(姜希顔) 인재(仁齋)ㆍ홍일동(洪逸童) 마천(麻川)
○ 제7권 : 서거정(徐居正) 사가정(四佳亭)ㆍ강희맹(姜希孟) 사숙재(私淑齋)ㆍ임수겸(林守謙) 갈곡(葛谷)ㆍ성임(成任) 안재(安齋)ㆍ이극배(李克培)ㆍ한계희(韓繼禧)ㆍ홍응(洪應)ㆍ노사신(盧思愼)ㆍ이약동(李約東)ㆍ이파(李坡)ㆍ성간(成侃)ㆍ손순효(孫舜孝) 물재(勿齋)ㆍ윤효손(尹孝孫)ㆍ어유소(魚有沼)
○ 제8권 : 허종(許琮) 상우당(尙友堂)ㆍ어세겸(魚世謙)ㆍ어세공(魚世恭)ㆍ정난종(鄭蘭宗) 허백당(虛白堂)ㆍ이종생(李從生)ㆍ이덕량(李德良)ㆍ성현(成俔) 용재(慵齋)ㆍ유순(柳洵) 노포(老圃)ㆍ이륙(李陸) 청파(靑坡)ㆍ허침(許琛)ㆍ노공필(盧公弼) 국일(菊逸)ㆍ안침(安琛)ㆍ채수(蔡壽)ㆍ이손(李蓀)ㆍ권경우(權景祐)ㆍ김흔(金訢) 안락당(顔樂堂)ㆍ유호인(兪好仁) 뇌계(㵢溪)
○ 제9권 : 김수동(金壽童)ㆍ송일(宋軼)ㆍ김응기(金應箕)ㆍ이집(李諿)ㆍ박원종(朴元宗)ㆍ유순정(柳順汀)ㆍ성희안(成希顔)ㆍ정광필(鄭光弼)ㆍ신용개(申用漑) 인락당(仁樂堂)
○ 제10권 : 임유겸(任由謙)ㆍ성세순(成世純)ㆍ조원기(趙元紀)ㆍ성몽정(成夢井)ㆍ이사균(李思鈞) 눌헌(訥軒)ㆍ이현보(李賢輔) 농암(聾巖)ㆍ박상(朴祥) 눌재(訥齋)ㆍ우맹선(禹孟善)ㆍ허굉(許硡)ㆍ이자(李耔) 음애(陰厓)ㆍ홍언필(洪彦弼) 묵재(黙齋)ㆍ권벌(權橃)ㆍ성세창(成世昌) 돈재(遯齋)ㆍ임추(任樞)
○ 제11권 : 신광한(申光漢) 기재(企齋)ㆍ소세양(蘇世讓) 양곡(陽谷)ㆍ심연원(沈連源) 보암(保庵)ㆍ상진(尙震) 범허정(泛虛亭)ㆍ정옥형(丁玉亨)ㆍ임권(任權)ㆍ안현(安玹)ㆍ장언량(張彦良)ㆍ심광언(沈光彦) 둔암(鈍庵)ㆍ조광원(曺光遠)ㆍ오겸(吳謙)ㆍ이윤경(李潤慶)
○ 제12권 : 이준경(李浚慶) 동고(東皐)ㆍ홍섬(洪暹) 인재(忍齋)ㆍ권철(權轍)ㆍ임호신(任虎臣)ㆍ조언수(趙彦秀)ㆍ조사수(趙士秀) 송강(松岡)ㆍ민기(閔箕) 관물재(觀物齋)ㆍ이탁(李鐸)ㆍ심달원(沈達源) 효창(曉窓)ㆍ이택(李澤)ㆍ남치근(南致勤)ㆍ장필무(張弼武)
후집(後集) ○ 제1권 : 백인걸(白仁傑) 휴암(休庵)ㆍ정유길(鄭惟吉) 임당(林塘)ㆍ노수신(盧守愼) 소재(蘇齋)ㆍ정종영(鄭宗榮) 항재(恒齋)ㆍ이준민(李俊民) 신암(新菴)
○ 제2권 : 박순(朴淳) 사암(思庵)ㆍ김계휘(金繼輝) 황강(黃岡)ㆍ박응남(朴應男) 퇴암(退庵)ㆍ이후백(李後白) 청련(靑蓮)ㆍ정탁(鄭琢) 약포(藥圃)ㆍ정지연(鄭芝衍) 남봉(南峯)
○ 제3권 : 황정욱(黃廷彧) 지천(芝川)ㆍ구사맹(具思孟) 팔곡(八谷)ㆍ윤두수(尹斗壽) 오음(梧陰)ㆍ윤근수(尹根壽) 월정(月汀)ㆍ신응시(辛應時) 백록(白麓)ㆍ구봉령(具鳳齡) 백담(柏潭)ㆍ이산해(李山海) 아계(鵝溪)
○ 제4권 : 정철(鄭澈) 송강(松江)ㆍ홍성민(洪聖民) 졸옹(拙翁)ㆍ이해수(李海壽) 약포(藥圃)ㆍ배삼익(裵三益) 임연(臨淵)ㆍ김명원(金命元) 주은(酒隱)ㆍ이제신(李濟臣) 청강(淸江)ㆍ변협(邊協)
○ 제5권 : 유성룡(柳成龍) 서애(西厓)ㆍ이산보(李山甫) 명곡(鳴谷)ㆍ이정암(李廷馣) 월천(月川)
○ 제6권 : 김성일(金誠一) 학봉(鶴峯)ㆍ권율(權慄)ㆍ이순신(李舜臣)
○ 제7권 : 이원익(李元翼) 오리(梧里)ㆍ정곤수(鄭崑壽) 백곡(柏谷)ㆍ심희수(沈喜壽) 일송(一松)ㆍ유근(柳根) 서경(西埛)ㆍ윤기(尹祁) 간보(艮輔)ㆍ한응인(韓應寅)ㆍ홍이상(洪履祥) 모당(慕堂)
○ 제8권 : 이덕형(李德馨) 한음(漢陰)ㆍ이항복(李恒福) 백사(白沙)ㆍ장운익(張雲翼)ㆍ오억령(吳億齡) 만취(晩翠)ㆍ이호민(李好閔) 오봉(五峯)ㆍ박동현(朴東賢) 활당(活塘)ㆍ나급(羅級)
○ 제9권 : 한준겸(韓浚謙) 유천(柳川)ㆍ구성(具宬) 초당(艸塘)ㆍ서성(徐渻) 약봉(藥峯)ㆍ이수광(李睟光) 지봉(芝峯)ㆍ정엽(鄭曄) 수몽(守夢)ㆍ정경세(鄭經世) 우복(愚伏)
○ 제10권 : 신흠(申欽) 상촌(象村)ㆍ황신(黃愼) 추포(秋浦)ㆍ오윤겸(吳允謙) 추탄(楸灘)
○ 제11권 : 김상용(金尙容) 선원(仙源)ㆍ이정귀(李廷龜) 월사(月沙)ㆍ박동량(朴東亮) 오창(梧囱)
○ 제12권 : 김류(金瑬) 북저(北渚)ㆍ이귀(李貴) 묵재(黙齋)
○ 제13권 : 홍서봉(洪瑞鳳) 학곡(鶴谷)ㆍ신경진(申景禛)ㆍ이서(李曙)ㆍ구인후(具仁垕) 유포(柳浦)ㆍ장만(張晩)ㆍ이시발(李時發)ㆍ유행(柳珩)ㆍ정충신(鄭忠信)
○ 제14권 : 김상헌(金尙憲) 청음(淸陰)ㆍ정온(鄭蘊) 동계(桐溪)ㆍ윤황(尹煌) 팔송(八松)ㆍ이안눌(李安訥) 동악(東岳)
○ 제15권 : 최명길(崔鳴吉) 지천(遲川)ㆍ장유(張維) 계곡(谿谷)
○ 제16권 : 조익(趙翼) 포저(浦渚)ㆍ김시양(金時讓) 하담(荷潭)ㆍ이경직(李景稷) 석문(石門)
○ 제17권 : 이경여(李敬輿) 백강(白江)ㆍ이무(李楘) 송교(松郊)
○ 제18권 : 임숙영(任叔英) 소암(疏菴)ㆍ민응형(閔應亨)ㆍ유백증(兪伯曾) 취헌(翠軒)ㆍ강석기(姜碩基) 월당(月塘)ㆍ신익성(申翊聖) 낙전당(樂全堂)ㆍ이명한(李明漢) 백주(白洲)ㆍ김육(金堉) 잠곡(潛谷)
외집(外集) ○ 제1권 : 김굉필(金宏弼) 한훤당(寒暄堂)ㆍ정여창(鄭汝昌) 일두(壹蠹)ㆍ정붕(鄭鵬) 신당(新堂)ㆍ박영(朴英) 송당(松堂)ㆍ유우(柳藕) 서봉(西峯)ㆍ김안국(金安國) 모재(慕齋)
○ 제2권 : 조광조(趙光祖) 정암(靜庵)ㆍ김정국(金正國) 사재(思齋)ㆍ조성(趙晟) 양심당(養心堂)ㆍ조욱(趙昱) 보진암(葆眞庵)
○ 제3권 : 이언적(李彦迪) 회재(晦齋)ㆍ채세영(蔡世英) 임진(任眞)ㆍ박소(朴紹) 야천(冶川)ㆍ성운(成運) 대곡(大谷)ㆍ홍인우(洪仁祐) 치재(恥齋)
○ 제4권 : 이황(李滉) 퇴계(退溪)ㆍ성수침(成守琛) 청송(聽松)
○ 제5권 : 서경덕(徐敬德) 화담(花潭)ㆍ유희춘(柳希春) 미암(眉巖)ㆍ이항(李恒) 일재(一齋)ㆍ성제원(成悌元) 동주(東洲)ㆍ이중호(李仲虎) 이소재(履素齋)ㆍ기대승(奇大升) 고봉(高峯)
○ 제6권 : 조식(曺植) 남명(南冥)ㆍ장현광(張顯光) 여헌(旅軒)ㆍ김장생(金長生) 사계(沙溪)
○ 제7권 : 송인(宋寅) 이암(頤庵)ㆍ서기(徐起) 고청(孤靑)ㆍ이지남(李至男) 영응(永膺)ㆍ김근공(金謹恭) 척암(惕菴)ㆍ정지운(鄭之耘) 추만(秋巒)ㆍ민순(閔純) 행촌(杏村)ㆍ한호(韓濩) 석봉(石峯)ㆍ박민헌(朴民獻) 슬한재(瑟僩齋)ㆍ남언경(南彦經) 동강(東岡)ㆍ박지화(朴枝華) 수암(守庵)
○ 제8권 : 김우옹(金宇顒) 동강(東岡)ㆍ오건(吳健) 덕계(德溪)ㆍ최영경(崔永慶) 수우당(守愚堂)
○ 제9권 : 김인후(金麟厚) 하서(河西)ㆍ조호익(曺好益) 지산(芝山)ㆍ황준량(黃俊良) 금계(錦溪)
○ 제10권 : 조헌(趙憲) 중봉(重峯)ㆍ정구(鄭逑) 한강(寒岡)
○ 제11권 : 조목(趙穆) 월천(月川)ㆍ이정(李楨) 귀암(龜巖)ㆍ남치리(南致利) 분지(賁趾)ㆍ권호문(權好文) 가암(柯巖)ㆍ권춘란(權春蘭) 해곡(海谷)ㆍ박형(朴浻) 정산(鼎山)ㆍ송익필(宋翼弼) 귀봉(龜峯)
○ 제12권 : 이이(李珥) 율곡(栗谷)
○ 제13권 : 성혼(成渾) 우계(牛溪)
별집(別集) ○ 제1권 : 김종서(金宗瑞) 절재(節齋)ㆍ박순(朴淳)ㆍ정본(鄭苯)ㆍ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ㆍ김시습(金時習) 동봉(東峯)ㆍ권절(權節) 율정(栗亭)ㆍ조려(趙旅) 어계(漁溪)
○ 제2권 : 김종직(金宗直) 점필재(佔畢齋)ㆍ조위(曺偉) 매계(梅溪)ㆍ최보(崔溥) 금남(錦南)ㆍ김일손(金馹孫) 탁영(濯纓)ㆍ이종준(李宗準) 용헌(慵軒)ㆍ무풍부정총(茂豐副正摠) 서호주인(西湖主人)ㆍ박한주(朴漢柱) 우졸자(迂拙子)ㆍ이계맹(李繼孟) 묵암(墨巖)ㆍ이목(李穆)ㆍ임희재(任熙載) 물암(勿庵)ㆍ허반(許磐)
○ 제3권 : 윤필상(尹弼商)ㆍ홍귀달(洪貴達) 함허당(涵虛堂)ㆍ성준(成浚)ㆍ표연말(表沿沫) 남계(藍溪)ㆍ조지서(趙之瑞)ㆍ정성근(鄭誠勤)ㆍ주계정 심원(朱溪正深源) 성광(醒狂)ㆍ정희량(鄭希良) 허암(虛菴)ㆍ김천령(金千齡)ㆍ박은(朴誾) 읍취헌(挹翠軒)ㆍ권달수(權達手) 동계(桐溪)ㆍ이원(李黿) 재사당(再思堂)
○ 제4권 : 안당(安瑭)ㆍ김정(金淨) 충암(沖庵)ㆍ김식(金湜)ㆍ한충(韓忠) 송재(松齋)ㆍ기준(奇遵) 복재(服齋)
○ 제5권 : 이장곤(李長坤) 금헌(琴軒)ㆍ유운(柳雲)ㆍ김구(金絿) 자암(自庵)ㆍ박세희(朴世熹) 도원재(道源齋)ㆍ박훈(朴薰) 강수(江叟)ㆍ이연ⲽ(李延慶) 탄수(灘叟)ㆍ정완(鄭浣)ㆍ김대유(金大有) 삼족당(三足堂)ㆍ경세인(慶世仁) 경재(敬齋)
○ 제6권 : 유관(柳灌) 송암(松庵)ㆍ유인숙(柳仁淑) 정수(靜叟)ㆍ송인수(宋麟壽) 규암(圭庵)ㆍ박광우(朴光佑) 필재(蓽齋)ㆍ정희등(鄭希登)ㆍ송희규(宋希圭)ㆍ이림(李霖)ㆍ나식(羅湜) 장음정(長吟亭)ㆍ이약빙(李若氷) 준암(樽巖)ㆍ이해(李瀣)ㆍ임형수(林亨秀) 금호(錦湖)ㆍ임억령(林億齡) 석천(石川)ㆍ정황(丁瑝) 유헌(游軒)ㆍ이담(李湛) 정존재(靜存齋)ㆍ민기문(閔起文) 역암(櫟菴)ㆍ김난상(金鸞祥)ㆍ김저(金䃴)ㆍ윤결(尹潔) 취부(醉夫)
○ 제7권 : 고경명(高敬命) 제봉(霽峯)ㆍ송상현(宋象賢) 천곡(泉谷)ㆍ김천일(金千鎰)ㆍ이정란(李廷鸞)ㆍ조종도(趙宗道) 대소헌(大笑軒)ㆍ김여물(金汝岉)ㆍ유극량(劉克良)ㆍ황진(黃進)ㆍ원호(元豪)
○ 제8권 : 박진(朴晉)ㆍ곽재우(郭再祐) 망우당(忘憂堂)ㆍ김덕령(金德齡)ㆍ정문부(鄭文孚) 농포(農圃)ㆍ김시민(金時敏)ㆍ정담(鄭湛)ㆍ이대원(李大源)
○ 제9권 : 김덕함(金德涵) 성옹(醒翁)ㆍ정홍익(鄭弘翼) 휴옹(休翁)ㆍ귀천군 수(龜川郡睟)ㆍ금산군 성윤(錦山郡誠胤)ㆍ정택뢰(鄭澤雷)ㆍ조직(趙溭) 입재(立齋)
○ 제10권 : 김응하(金應河)ㆍ남이흥(南以興)ㆍ이중로(李重老)ㆍ김준(金浚)ㆍ김양언(金良彦)ㆍ이희건(李希建)
○ 제11권 : 홍명구(洪命耈)ㆍ최진립(崔震立)ㆍ임경업(林慶業)ㆍ이상길(李尙吉)ㆍ심현(沈誢)ㆍ이시직(李時稷) 죽창(竹囱)ㆍ윤계(尹棨)ㆍ홍익한(洪翼漢) 화포(花浦)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속집(續集) ○ 제1권 : 최덕지(崔德之) 연촌(煙村)ㆍ남효온(南孝溫) 추강(秋江)ㆍ최수성(崔壽城) 원정(猿亭)ㆍ정렴(鄭磏) 북창(北囱)ㆍ이몽규(李夢奎) 천휴(天休)ㆍ양사언(楊士彦) 봉래(蓬萊)ㆍ이지함(李之菡) 토정(土亭)ㆍ이의건(李義健) 동은(峒隱)ㆍ성윤해(成允諧) 판곡(板谷)ㆍ성로(成輅) 석전(石田)ㆍ문위(文緯) 모계(茅溪)ㆍ최명룡(崔命龍) 석계(石溪)ㆍ안방준(安邦俊) 우산(牛山)


 

택당선생집 제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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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序)
연촌 최 선생의 집에 전하는 시문록 뒤에 쓴 글[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叙]


옛날 경태(景泰 1449~1456) 연간에 아조(我朝)에 덕이 순일하고 절조(節操)가 드높았던 정학지사(正學之士)가 있었으니, 연촌(煙村) 최 선생이 바로 그분으로서 이름을 덕지(德之)라 하였다.
일찍이 금근(禁近 시종신(侍從臣)을 말함)을 거쳐 주부(州府)의 목민관으로 나갔다가, 이를 또 즐겁게 여기지 아니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영암(靈巖) 영보촌(永保村)으로 돌아가서는, 서루(書樓)를 지어 존양(存養)이라 편액(扁額)을 내건 뒤 거기에서 생을 마칠 것처럼 지내었다.
그러다가 현릉(顯陵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선생에게 소명(召命)을 내리면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이르러 다시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향리로 돌아가자, 조정에 함께 있던 현경(賢卿)과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떠나는 길을 전송하면서 선생의 사적(事跡)을 높이 기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존양루(存養樓)에 제(題)하는 글을 짓기도 하고, 또 선생의 가대인(家大人 부친)인 참의공(參議公 이름은 담(霮)임)이 장수(長壽)를 누리고 훌륭한 자손을 둔 데 대해 일시에 찬송하는 작품도 많이들 내놓았다.
이 모든 시문(詩文)가 필적(筆迹)들을 최씨의 자손들이 대대로 지키면서 그지없이 조심스럽게 보관해 왔는데, 급기야 정유왜란(丁酉倭亂)을 겪는 바람에 존양루가 소실(燒失)되면서 간편(簡編)들도 함께 산일(散逸)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고향 사람들이 선생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서 제사를 올리게 되었고, 선생의 7대손인 전 참봉(參奉) 정(珽)이 또 타고 남은 시문(詩文)을 수습하여, 그나마 90여 수(首) 정도를 찾아낸 뒤 영원히 전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나에게 발문(跋文)을 써 달라고 요청해 왔다.
내가 삼가 살피건대, 선생은 순실(純實)한 행동이 성유(聖諭)에 드러나게 될 정도로 순덕(純德)의 소유자였고, 중년에 봉록(俸祿)을 마다하고 산해(山海)에 자취를 숨겼으니 고절(高節)의 인사라 할 만하며, 존심 양성(存心養性)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를 편액(扁額)으로 내걸어 자신을 깨우쳤으니 정학지사(正學之士)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다 해도 백세(百世)의 사범(師範)이 된다고 할 것인데, 더구나 이를 모두 아울러 지니고 있는 분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한편 생각건대,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은 경태(景泰) 2년인 신미년(1451, 문종 1)의 일이었다. 그런데 4년 뒤인 계유년과 7년 뒤인 병자년에 국가에 변고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진신(縉紳)들이 많이 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이 그야말로 이런 기미를 미리 환하게 알아 몸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될 법도 하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는 선생의 명지(明智)를 더욱 일컫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고찰해 보건대, 현릉(顯陵)이 일찍 빈천(賓天 임금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함)하여 노산(魯山 단종(端宗))이 갑자기 왕위를 내 주게 된 것은 하늘의 운수와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선생의 지혜가 아무리 밝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 될 줄이야 추측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선생은 세묘(世廟 세종(世宗))의 조정에서도 대방(帶方 남원(南原)의 옛 이름임)의 인끈을 풀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또 떠나야만 할 무슨 어려운 일이 발생하기라도 했었던가.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도는 가득 차면 무너뜨리고 겸손하면 더해 준다.[天道 虧盈而益謙]”고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화락한 군자는 신명이 위로해 준다.[愷悌君子 神所勞矣]”고 하였다. 선생의 급류 용퇴(急流勇退)는 그야말로 천도(天道)와 신명(神明)이 도와준 것으로서, 저절로 대란(大亂)에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이니, 어찌 눈치 빠르게 화(禍)의 기미를 살피다가 도망치는 자들과 견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이 시문록(詩文錄)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두루 살펴보건대, 안평(安平)과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의 호임)에 대한 일은 차마 말할 수가 없지만, 가령 하동(河東)이나 고령(高靈) 범옹(泛翁)이나 사가(四佳)같은 제공(諸公)으로 말하면 훈명(勳名)은 비록 성대해도 정절(情節)의 측면에서는 혹 부족한 점이 있고, 성근보(成謹甫 근보는 성삼문의 자(字)임) 등 제인(諸人)으로 말하면 자정(自靖)한 점은 있지만 규족(葵足)처럼 보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니 선생의 맑은 복과 완전한 명성에 비교해 본다면, 어떻다고 해야 하겠는가.
아, 이 문집을 살펴보노라면, 그 시문들을 통해 선생의 심지(心志)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될 뿐만이 아니요, 세태(世態)를 논한 것이나 기인(其人 단종을 가리킴)을 향한 정성이 또한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숭정(崇禎) 병자년 7월 보름에 덕수 후학 이식은 쓰다.


 

[주D-001]4년 뒤인 …… 되었다 : 단종(端宗)이 즉위한 계유년(145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부자를 강화에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한 일과, 세조(世祖) 2년인 병자년에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던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을 사형에 처했던 일을 말한다.
[주D-002]천도는 …… 더해 준다 :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화락한 …… 위로해 준다 : 대아(大雅) 한록편(旱麓篇)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급류 용퇴(急流勇退) : 한창 벼슬이 높아질 때에 물러나 명철 보신(明哲保身)하는 것을 말한다. 송(宋) 나라 전약수(錢若水)에게, 어떤 노승(老僧)이 끝내 신선은 되지 못하겠지만 벼슬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是急流中勇退人”이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聞見前錄 卷7》
[주D-005]하동(河東)이나 …… 사가(四佳)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이면서 호가 범옹인 신숙주(申叔舟), 호가 사가정(四佳亭)인 서거정(徐居正)을 가리킨다.
[주D-006]자정(自靖) : 각자 의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뜻을 정해서 결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미자(微子)의 “스스로 뜻을 정해서 각자 선왕에게 고하라. 나는 여기를 떠나 숨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7]규족(葵足)처럼 …… 못하였다 : 몸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제(齊) 나라 포견(鮑牽)이 난세(亂世)에 처하여 남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고발했다가 발이 끊기는 월형(刖刑)을 당했는데, 이에 대해 공자(孔子)가 “포장자의 지혜는 해바라기보다도 못하구나. 해바라기는 그래도 잎사귀를 가지고 제 다리를 가려서 보호해 주는데.[鮑莊子之知不如葵 葵猶能衛其足]”라고 비평한 고사가 있다. 포장자는 포견을 가리킨다. 《春秋左傳 成公 17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