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 호조참의공 휘 담/조선호조참의 휘 담

조선호조참의 휘 담 묘소

아베베1 2011. 8. 29. 21:57

최담(崔霮)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지낸 최덕지(崔德之)의 아버지로, 참의(參議)를 지냄.

 

   전주최씨 문성공 휘 아    4세손  조선 호조참의  휘 담  의 묘소

  전북 완주군 소양면 분토동 소재 주덕재 건너편 능선   

 

 

 

 

 

 

 

 

 

 

 

 

 

면암선생문집 제20권
 기(記)
한벽당 중수기(寒碧堂重修記)


영락(永樂)ㆍ경태(景泰) 연간에 월당(月塘) 최공 담(崔公湛)이 직제학(直提學)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오니, 공의 아들 연촌 선생(烟村先生) 휘(諱) 최덕지(崔德之)도 얼마 후 공을 뒤따라 물러났다. 그리하여 부자는 서로 지기(知己)가 되어 강호에서 늙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청절(淸節)에 감복하여 옛날 소광(疏廣)ㆍ소수(疏受)에 비유하였다.
지금 전주부(全州府) 향교에서 동쪽으로 가면 석탄(石灘) 가에 숲이 우거져 상쾌한 곳에 있는데, 여기에 한벽당(寒碧堂)이 있다. 이곳은 월당공(月塘公)이 평소에 거처하던 곳이다. 당의 서북쪽에 참의정(參議井)이라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 鳶飛戾天
물고기는 못에서 뛰노네 / 魚躍于淵
라는 8자를 크게 새겼는데, 이는 공의 필적이라 한다.
공의 15세손 최전구(崔銓九)가 한벽당을 중수한 뒤에 나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기문 쓰는 문제를 상의해 왔다.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선조의 집이 낡으면 자손들이 보수하는 것은 당연한 임무이니 말할 것이 못 되며,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의 아름다움이나 풍연(風烟)과 운물(雲物)의 경치에 대한 것은 이 당에 오르는 자가 직접 목격할 것이므로 내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후인의 천박한 식견으로 수백 년 전의 일을 놓고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참람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직 사군자(士君子)가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은퇴하는 대의(大義)는 예나 지금이 다름없는데, 그 현조(賢祖)의 자손을 대하고 어떻게 묵묵히 있겠는가.
대체로 어려서 공부를 하고 장년이 되어 벼슬하여 늙어서 물러나는 것은 예경(禮經)의 밝은 교훈이요 상물(常物)의 대정(大情)이다. 그런데도 혹자는 세리(勢利)에 급급하고 높은 관작에 연연하여 물러나지를 못한다. 혹 물러났다 하더라도 맛있는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던 끝이라서 담박한 음식을 싫어하고 옛날 호화롭던 것을 회고하여 잊지 못한다. 그리고 한숨 쉬며 애통하여 스스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이런 사람이 어찌 다시 물러남이 십분 시의(時義)임을 알아서 유감이 없을 것인가. 그러므로 벼슬에 나아가면서 나아감을 사양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행할 만한 도가 있는 자요, 물러나면서 물러남을 편안히 여기는 자는 반드시 견고한 내수(內守)가 있는 자이다.
아조(我朝)의 세종(世宗)ㆍ문종(文宗) 연간은 문명한 시대로 성인이 위에 있어 만물이 모두 우러러 준량(俊良)의 등용이 이때보다 성한 때가 없었는데 공이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호연히 물러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절조가 높고도 밝아서 봉황(鳳凰)이 천길을 나는 듯한 기상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백세 후에 오히려 사람을 흥기시킬 만한 것이 있다. 만일 그가 자잘하게 작은 청렴이나 삼가는 데 힘써서 어치렁거리며 세속의 이목에 잘 보이려고 분주했을 뿐이라면 어떻게 당대에 이름이 나서 이처럼 후세까지도 무궁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본다면, 공의 청풍(淸風)과 고절(高節)이 진실로 이 당(堂)으로 해서 전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후인들이 보고 느끼며 흠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이 당이 아니고는 부칠 곳이 없으니, 이 당의 중수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주자(朱子)의 시에,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 / 削成蒼石稜
찬 못에 비쳐 푸르도다 / 倒影寒潭碧
라는 시구가 있으니, 한벽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혹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주D-001]영락(永樂)ㆍ경태(景泰) 연간 : 영락은 명 성종(成宗)의 연호이며 경태(景泰)는 명 경종(景宗)의 연호인데, 서기 1403~1457년 사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한벽당은 태종 4년(1404)에 최담이 낙향하여 세웠다는 전주읍지(全州邑誌)의 기록이 있다.
[주D-002]소광(疏廣)ㆍ소수(疏受) : 소광은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으로, 태자 태부(太子太傅)가 되고, 조카인 소수는 소부(少傅)가 되었는데, 광이 수에게 말하기를 “벼슬이 높고 이름이 떨치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한다.” 하고 둘이 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漢書 卷71 雋疏于薛平彭傳》

 

剛齋先生集卷之八
 
月塘崔公遺墟碑 a_271_167d


全州府南門外。溪山擅勝。鉢山之陽玉流洞。有月塘崔公遺墟。今去公之世已累百年矣。而巖臺諸刻。尙271_168a宛然。人之過之者。猶指點而咨嗟。夫豈一時繁華之盛。有以致然哉。公全州人。名霮。煙村先生德之之考也。煙村公手錄公實蹟。求文字於人。有曰。吾先君生於至正丙戌五月四日。甫九歲而孤。性好學。擧業中司馬試於壬寅。仕內侍。拜參官。又中丁巳文科。不勝將母之念。退于桑鄕。子職極修。而仍喜遯自樂。不求宦達。丙子。爲賢相所薦。以奉常少卿應命。戊寅。拜中訓知珍州事。庚辰。解組還鄕。日以花木詩句爲事。而優遊自適。丙申。蒙優老恩。陞檢校戶曹參議,集賢殿提學。又曰。接人謙恭。康強無比。八旬以後。騎馬271_168b無人扶持。徒步無杖提携。而遍行鄕閭。遇孫姪輩。亦下馬受禮。而鄕中慶弔迎餞。無不與焉。嘗餞府伯于月塘樓上。呼兩妓執紙。立書一絶。有願入岐陽朝罷後。湖南須記一閒人之句。甲寅六月。得疾。言語動止。無異平日。似不極苦。以其二十五日。倏然而逝。此其始終大略。而所謂丁巳。皇明洪武十年。而丙子。我朝受命之五年也。嗚呼。公旣有厚德。復享淸福。當時名勝。多作詩讚頌之者。其爲後人之所誦說不衰。固宜矣。且巖臺諸刻。若光風霽月。鳶飛魚躍。公之襟懷意趣。有足以想像者。而所與遊。是金節齋,權陽村,崔271_168c晩六諸公。則又豈非不見其山。願見其木者耶。公有四男長匡之。次直之。皆集賢直提學。次得之。典農少尹。季卽煙村。以淳德高節。爲世文兩朝名臣。官藝文直提學。孫曾以下。以文武官顯者甚多。而從事儒門。行義著稱者。又非一二。則讚詩序所謂積善餘慶之正理者。信不誣矣。遺墟久爲他人所有。公諸後孫。合力還取之。而將立石以識之。來求余文者曰觀錫謙錫也。余感其爲先之誠意。不以蕪拙辭。而略書之如此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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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닥 산줄기 따라 옥처럼 맑고 푸른 물 만들어내다
[전북 현판의 숨결을 찾아서]<4> 한벽당 편액 이야기
2012년 04월 16일 (월)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 APSUN@sjbnews.com
   
 
  ▲ 구강재  
 
후백제 역사의 한이 서린 동고산성에서 한가닥 산줄기가 동쪽으로 내려오며 발이산을 형성하고 여기서 한 가닦이 전주천과 마주치는 배산임수의 터에 누정이 자리하니 한벽당이다.

누정 안에는 한벽당의 풍광을 읊은 시판과 중건기 등이 빽빽이 걸려있고 밖에는 명필 강암 송성룡이 한벽당 편액을 중후한 예서로 썼다. 바로 옆에는 달밤에 풍류를 즐기며 시를 짓는 요월대가 있는데, 석전 황욱이 왼손 악필법으로 편액을 썼다. 또 재미있는 것은 아홉 살 먹은 김예산이 한벽당 편액을 썼으니 어리숙한 필치가 엿보인다.

   
  ▲ 한벽당 바로 밑 바위‘심매경’이란 암각서  
 
한벽당은 전주팔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淸煙)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즉 만마관에서 생성된 물줄기가 남관과 색장을 거쳐 이곳에 도착하여 푸른 물줄기를 만들어냈고 그리하여 옛 문인들은 이곳을 벽옥한류(碧玉寒流)라 칭하고 이 부근의 명칭도 옥류동이라 하였다.

한벽당은 1404년(태종 4)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집현전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의 별장이다. 월당은 고려말 중랑장 최용봉의 장남으로 태어나, 말년에 전주 발이산 밑에 한벽당을 짓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한벽당의 서쪽 발이산 자락에는 자만동과 옥류동이 자리하고 있다. 자만동에는 조선왕조의 서기가 뭉친 곳으로 목조대왕이 태어난 자리임을 표시하는 이목대비가 있고, 바로 옆에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를 의미하는 자만동금표가 서있다. 옥류동에는 금제사당을 비롯하여 서당인 구강재와 월당최담유허비가 있다.

옥류동 월당최담유허비 바로 뒤는 창암 이삼만의 고택이 있던 자리이다. 창암은 조선후기의 3대 명필의 하나로 이곳 바위 위에 글씨 연습을 하다 잘 써진 글씨는 직접 바위에 새겼다. 취리한중 건곤일월, 수풍(水風), 백화담, 연비어약, 옥류암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일부 땅속에 매몰되거나 유실된 것도 있다.

창암이 명필로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 중에 한벽당 근방에서 부채장수 이야기가 전한다. 창암은 어느 날 초라한 몸차림으로 한벽당 산마루에 걸터앉아 삼복의 찌는 듯 한 더위를 피하고 있는 판이었다. 때마침 그곳을 남루한 옷차림을 한 부채장수가 등짐을 짊어지고 누각에 오르면서 쓰러지는 듯 짐을 부려놓고 시원한 냇바람에 그만 곤한 잠에 떨어지고 만다. “부채는 여름이 한철인데---저 원선(圓扇)이 저렇게 밋밋해서 쓰겠는가!” 혼자 이렇게 중얼거린 이삼만은 때마침 더위를 피할 겸 필묵을 다듬어 일필휘지 한 것이다. 이윽고 잠에서 깬 주인이 자기 부채에 먹칠을 하듯 가득가득 글씨를 써 놓은 것을 보고 아연 실색(失色)하여 “그나마 이 생업마저 망쳐 놓으려는 당신은 도대체 무슨 속셈이오”라고 대들자, 창암은 “임자 몰래 글을 쓴 것은 실례로되 그냥 밋밋한 원선보다는 졸필(拙筆)이나마 기왕 쓴 것이니 갖고 나가보오”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과연 그 부채장수는 어떻게 됐을까요. 어느 날 지나가는 중국인의 눈에 들어 단번에 그 많은 부패를 팔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한벽당은 전주인들의 풍류와 문화가 서린 곳입니다. 초의선사가 서울을 가다 이곳 한벽당 아름다움에 빠져 등한벽당을 지었습니다.
   
  ▲ 한벽당 편액(9세에 쓴 김예산 글씨)  
 

시골 사람 옷차림으로 물가의 정자에 다다르니(田衣當水?)

이곳은 옛날 왕이 태어난 곳이라 하지(云是故王州)

고요한 계곡 새소리 은근하고(谷靜禽聲遠)

맑은 계곡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 그윽하기도 하여라(溪澄樹影幽)

바쁜 장사치는 저문 길을 재촉하고(遞商催晩日)

쫙쫙 내린 비에 씻긴 산뜻한 기운(積雨洗新秋)

정말로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라(信美皆吾土

누각에 올랐으나 어찌 노래하랴(登臨寧賦樓)



한벽당은 초의선사, 추사와 창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이곳을 지나가는 대목이 나오지요. 한벽당 바로 밑 바위에 ‘매화향기를 찾아 가는 작은 소로’라는 뜻의 심매경(尋梅逕)이란 암각서가 있다. 초봄을 맞아 심매경 암각서를 보고 바람쐬는길을 따라 매화 향기를 찾아 꽃구경 한번 가보시죠?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전주문화원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