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永樂)ㆍ경태(景泰) 연간에 월당(月塘) 최공 담(崔公湛)이 직제학(直提學)으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오니, 공의 아들 연촌 선생(烟村先生) 휘(諱) 최덕지(崔德之)도 얼마 후 공을 뒤따라 물러났다. 그리하여 부자는 서로 지기(知己)가 되어 강호에서 늙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청절(淸節)에 감복하여 옛날 소광(疏廣)ㆍ소수(疏受)에 비유하였다. 지금 전주부(全州府) 향교에서 동쪽으로 가면 석탄(石灘) 가에 숲이 우거져 상쾌한 곳에 있는데, 여기에 한벽당(寒碧堂)이 있다. 이곳은 월당공(月塘公)이 평소에 거처하던 곳이다. 당의 서북쪽에 참의정(參議井)이라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 鳶飛戾天 물고기는 못에서 뛰노네 / 魚躍于淵 라는 8자를 크게 새겼는데, 이는 공의 필적이라 한다. 공의 15세손 최전구(崔銓九)가 한벽당을 중수한 뒤에 나를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기문 쓰는 문제를 상의해 왔다.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선조의 집이 낡으면 자손들이 보수하는 것은 당연한 임무이니 말할 것이 못 되며,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의 아름다움이나 풍연(風烟)과 운물(雲物)의 경치에 대한 것은 이 당에 오르는 자가 직접 목격할 것이므로 내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후인의 천박한 식견으로 수백 년 전의 일을 놓고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도 참람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직 사군자(士君子)가 나아가 벼슬하고 물러나 은퇴하는 대의(大義)는 예나 지금이 다름없는데, 그 현조(賢祖)의 자손을 대하고 어떻게 묵묵히 있겠는가. 대체로 어려서 공부를 하고 장년이 되어 벼슬하여 늙어서 물러나는 것은 예경(禮經)의 밝은 교훈이요 상물(常物)의 대정(大情)이다. 그런데도 혹자는 세리(勢利)에 급급하고 높은 관작에 연연하여 물러나지를 못한다. 혹 물러났다 하더라도 맛있는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던 끝이라서 담박한 음식을 싫어하고 옛날 호화롭던 것을 회고하여 잊지 못한다. 그리고 한숨 쉬며 애통하여 스스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이런 사람이 어찌 다시 물러남이 십분 시의(時義)임을 알아서 유감이 없을 것인가. 그러므로 벼슬에 나아가면서 나아감을 사양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행할 만한 도가 있는 자요, 물러나면서 물러남을 편안히 여기는 자는 반드시 견고한 내수(內守)가 있는 자이다. 아조(我朝)의 세종(世宗)ㆍ문종(文宗) 연간은 문명한 시대로 성인이 위에 있어 만물이 모두 우러러 준량(俊良)의 등용이 이때보다 성한 때가 없었는데 공이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호연히 물러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절조가 높고도 밝아서 봉황(鳳凰)이 천길을 나는 듯한 기상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백세 후에 오히려 사람을 흥기시킬 만한 것이 있다. 만일 그가 자잘하게 작은 청렴이나 삼가는 데 힘써서 어치렁거리며 세속의 이목에 잘 보이려고 분주했을 뿐이라면 어떻게 당대에 이름이 나서 이처럼 후세까지도 무궁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본다면, 공의 청풍(淸風)과 고절(高節)이 진실로 이 당(堂)으로 해서 전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후인들이 보고 느끼며 흠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이 당이 아니고는 부칠 곳이 없으니, 이 당의 중수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주자(朱子)의 시에,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 / 削成蒼石稜 찬 못에 비쳐 푸르도다 / 倒影寒潭碧 라는 시구가 있으니, 한벽당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혹 여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주D-001]영락(永樂)ㆍ경태(景泰) 연간 : 영락은 명 성종(成宗)의 연호이며 경태(景泰)는 명 경종(景宗)의 연호인데, 서기 1403~1457년 사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한벽당은 태종 4년(1404)에 최담이 낙향하여 세웠다는 전주읍지(全州邑誌)의 기록이 있다. [주D-002]소광(疏廣)ㆍ소수(疏受) : 소광은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으로, 태자 태부(太子太傅)가 되고, 조카인 소수는 소부(少傅)가 되었는데, 광이 수에게 말하기를 “벼슬이 높고 이름이 떨치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한다.” 하고 둘이 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漢書 卷71 雋疏于薛平彭傳》
6월 상이 밀유(密諭)를 내려서 돈소(敦召 왕이 신하를 간곡한 말로 부르는 일)하였다. 유서(諭書)의 대략에,
“매우 심하게 어려운 근심이 있으니 경의 노숙한 덕을 사모한다. 짐(朕)이 자리를 비워 두고 경을 맞이해서 함께 위기를 구제하고 싶어 특별히 최영년(崔永年)을 보내 짐의 간절한 뜻을 알리니, 경이 비록 노쇠하지만 빨리 와서 짐의 애타게 바라는 마음에 부응(副應)하면 종사(宗社)와 강토(疆土)에 매우 다행이겠다.”
하므로 선생이 회계(回啓)하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집 일 걱정하듯 하라.[愛君如父 愛國如家]’는 여덟 글자는 곧 신의 스승 고(故) 참판 이항로(李恒老)가 진신 사대부(搢紳士大夫)의 반열에 있는 자에게 정성스럽게 가르치던 것이었습니다. 신이 완악하고 어리석어서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날을 당했건만, 억지로 참고 구차하게 살아남아 부끄러운 낯으로 사람 축에 들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비상한 총명(寵命)이 궁벽한 초가에 미치니 오장이 떨려서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라에 급한 일이 있으면 의당 달려가야 마땅한데 어찌 소명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천한 나이가 망팔(望八 71세를 일컫는 말)에서 하나를 더했고 병세가 자주 심해서 길을 떠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오늘날 정사는 지금의 풍속을 변하지 않으면 비록 공자ㆍ맹자가 앞에 있고, 관자(管子)ㆍ제갈량(諸葛亮)이 뒤에 있더라도 결코 손쓸 곳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한두 사람의 능숙한 인물을 친근과 소원을 가리지 말고 선발하여 호령을 크게 발해서 우레같이 엄하고 바람같이 빠른 형세를 가지시면 어찌 천의(天意)와 인심을 변동시킬 도리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7월 초하루는 정축 9일(을유)에 궁내부 특진관에 제수되었다. ○ 12일(무자)에 다시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해서 사직하였다. 이때에 상이 선생을 반드시 불러오려고 특별히 각별한 예로 지방관을 보내어 비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경의 정성을 갖추 알았다. 나라를 걱정하는 간절한 생각이 어렵고 근심스러운 때에 갑절로 더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특히 이 자리를 맡기노니, 쇠병(衰病)을 참고 곧 올라오라.”
하였다.
8월 초하루는 정미 정산 향교[校宮]에서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였다. 선생이, 정산은 본디 사계 선생(沙溪先生 김장생(金長生))이 인애(仁愛)의 덕을 남긴 고을이건만 몇 백 년을 지나도록 제향[爼豆]하는 예가 아직 없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일찍이 본 고을의 사림(士林)과 단향(壇享)을 행하기로 의논했으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 문인 권응규(權膺圭) 등에게 명해 향음례를 행하여서, 사림의 기풍을 고동(鼓動)시킬 계획을 하였다. ○ 13일(기미)에 소명을 받들어, 서강(西江)에 이르러 두 번째 상소해서 사직하니, 임금이 의정부 낭관(郞官)을 보내어 윤허하지 않는 비답을 내렸다. 이때에 선생은 이질로 기운이 엄엄(奄奄)했으나 소명이 잇달아 내리니, 감히 집에만 있을 수 없었고 또 국가가 위급한 때를 당했으므로 의리에 차마 무심하게 볼 수 없어 드디어 병을 참고 수레에 올라 길을 떠났다. 대개 서울에 가까이 있으면서 죽음으로써 국가에 보답할 계획이었다. 두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뭇 소인이 나라를 망치고 정사를 어지럽히는 형상을 겸해 말하고, 또 병든 자는 입에 쓴 약을 싫어하지 말아야 원기가 회복된다는 것으로서 비유하여 간절하게 말하였다. 비답하기를,
“소장을 살펴서 정성스러움을 갖추 알았다. 병으로써 비유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반드시 좋은 의원을 만나야 한다. 시일이 바쁜데 만약 머뭇거리고 있으면 평소에 기대하던 바이겠는가? 다시 사직하지 말고 곧 들어와서 명에 응하라.”
하였다. ○ 21일(정묘)에 세 번째 사직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때에 선생이 수일 동안 서강(西江)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질이 더욱 심했으나 왕인(王人 사신)이 와서 성유(聖諭)를 전하자 그래도 일어나 앉아서 의관을 바르게 하고 엎드려서 들었다. 문인 이재윤(李載允)ㆍ윤긍주(尹兢周)가 와서 문후한 다음 최영조(崔永祚)에게,
“선생의 병세가 조석(朝夕)에 달린 것 같으니 모시고 미음(渼陰 이재윤의 집)에 돌아가서 며칠 동안 약을 복용하고 시골에 돌아가서 조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드디어 그날로 출발하여 미음에 도착한 뒤 두어 밤을 지내고, 바로 포천 옛집으로 향했다. 상소의 대략에,
“온갖 괴변(怪變)이 아울러 나와서 나라 운명이 실처럼 위태한 이때를 당해, 폐하께서 밤낮으로 걱정하느라 일상생활이 편치 않으심이 그지 있겠습니까. 신하된 분의(分義)와 도리로는 만약 질병이 위독하기에 이르지 않으면 명을 받들고 뜰에 나아가서 한번 천안(天顔)을 우러러보고 겸해서 성상의 계책을 여쭈어 봄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오나 병세가 이와 같아서 관직을 없애 달라는 청을 마치지 못하고 드디어 깊은 산으로 돌아오니, 가을 소리가 골짜기를 찢어 내듯이 슬픈 탄식을 더할 뿐입니다. 인생의 큰 은혜는 오직 임금과 어버이뿐인데, 지금 신은 어버이가 없으니, 마음을 모두 바쳐야 할 곳은 폐하뿐입니다. 폐하의 형세가 저처럼 위급하며 외롭고 날마다 요사스러운 도깨비들의 협박에 곤란당하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신이 한번 힘을 쓰거나 꾀를 내어서 구원하고 보호하는 방도를 행하지 못하니 사람의 도리가 없고 신하의 분의가 결핍되었습니다. 죄를 지고 한을 품어 죽어도 눈을 감기 어려운데, 이 직명(職名)마저 체직되지 않아서, 그대로 땅에 들어간다면 옳지 못합니다. 억지로 정신을 수습해서 다시 성청(聖聽)을 더럽히오니 폐하께서는 불쌍히 여겨 살피시어 바삐 깎아 고쳐서 신에게 안심하고 죽어 가게 하시기를 엎드려 청하옵니다.”
하였다. 비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경의 정성을 잘 알았다. 시대의 근심이 한창 심하니 모름지기 서둘러 학술(學術)로 구제해야 한다. 사직한 것은 반드시 허가하지 않을 것이다. 의외의 병은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나을 것이니, 병세가 조금 좋아지기를 기다려서 곧 올라오기를 도모하라는 것으로 지방관을 보내어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9월 초하루는 병자 7일(임오)에 상이 특별한 유지(諭旨)를 내려서 돈소(敦召)하였다.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짐이 경에게 찬양(贊襄)하는 직임을 맡긴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세도(世道)는 날로 저하하고 나라 운수에 어려움이 많으니, 노성한 덕과 충성된 신하가 좌우에서 바로잡아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만회(挽回)해서 유지할 수 있겠는가. 경의 깨끗한 명망과 곧은 절조를 짐이 향모(嚮慕)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전후로 돈면(敦勉)한 것이 간절할 뿐만이 아니었는데, 경은 한결같이 병만 말하고 있다. 대개 어려서 배운 것은 장성해서 시행하려는 것인데, 어떠한 일을 행하려고 시국의 어려움을 무심하게 보고서도 동쪽 산골에서 굳게 지조를 지켜 산중의 숨은 고상한 선비가 되려 하는가. 이것은 결코 중용(中庸)을 행하는 도리가 아니다. 들으니, 경이 지금 서울 근교에 있으며, 묵은 병도 벌써 나았다 하니, 곧 수레를 재촉하여 조정에 와서 짐의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여 밤낮으로 근심하는 일을 풀어 주기 바란다는 일로 지방관을 보내어 전유하라.”
○ 23일(무술)에 네 번째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대략에,
“신의 병세가 점점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앓고 있던 병과 새로 생긴 병이 번갈아 발작하며 함께 침공하니, 음식을 전폐하여 기운이 실낱처럼 겨우 이어 갑니다. 사람이 일을 하려면 뜻과 기운을 믿을 뿐인데 기운이 이미 다하였으니 뜻이 어찌 홀로 존재하겠습니까. 이리하여 신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나아갈 수 없는 의리가 신의 병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바로 머리를 깎는 일입니다. 차라리 머리를 보존하다가 죽을지언정 머리를 깎고 살지 않겠으며 차라리 중화(中華)를 위하는 사람이 될지언정, 오랑캐와 짐승이 되어서 살지는 않겠습니다. 이것은 신이 평소에 고집한 뜻으로서 병신년에 올린 소장에 이미 아뢴 바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머리를 깎고 백성들도 깎았으니, 이런 때에 신을 불러서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신은 불행하게 오늘까지 살아와서 선왕(先王)의 신민(臣民)이 귀신과 짐승 모양으로 되는 것을 차마 보아야 하니, 마음이 부서지고 쓸개가 찢어지는 듯합니다. 곧 죽어 없어지지 못함이 한스러운데 어찌 옷을 벗고 다리를 걷어 올리고서 그들의 유에 뛰어들어 물결에 휩싸이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나아갈 수 없는 의리가 신의 병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비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경의 정성을 잘 알았다. 마음속에 쌓아 놓은 경술(經術)과 확고하게 지켜온 지조를 기다림은 이번 유서(諭書)뿐이 아니다. 그리고 옳은 말을 하였고 또 이때를 당하여 어려운 걱정이 점점 심해지니, 기대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번거롭게 사양하지 말고 곧 올라오라는 것으로 지방관을 보내어 전유하라.”
하였다.
11월 초하루는 을해 25일(을해)에 소명에 나아가는 길을 떠나 소곡리(小谷里)에 도착하였다. ○ 26일(경자)에 상이 비서감 낭관(秘書監郞官)을 보내어 돈유(敦諭)를 전하였다. 조서는 다음과 같다.
“듣건대 경이 방금 와서 성문 밖에 머무르고 있다 하니 애타게 생각하던 나머지 소란한 소문이 잇달아 일어나고 어려운 근심이 점점 심하여 급박한 형세가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니, 다시는 머뭇거리지 말라. 경이 추운 길에 시달려 조금 휴식하기를 기다리나 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리는 마음 촌각이 급하니, 곧 들어오라.”
하였다.
12월 초하루는 을사 2일(병오)에 수옥헌(漱玉軒)에 입대(入對)하여 5조목의 수차(袖箚)를 올렸다. 상이 앞에 나오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경이 곧 올라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들어오는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신이 8월에 시골을 떠났으나 중도에서 병으로 두어 달이나 누웠다가 근간에 조금 소생해서 겨우 들어왔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신이 사적(仕籍)에 오른 지 50년이 되었는데, 분수에 맞지 않는 직위가 외람되게 정경(正卿)의 반열에 올랐으나 아직도 천안(天顔)을 뵙지 못하였습니다. 옛사람도 천폐(天陛)에 처음 올라서 천안을 우러러뵙기를 청한 자가 있었으니, 신도 머리를 들어 뵙기를 원합니다.”
하니, 상이,
“우러러보라.”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신이 계유년과 병자년에 함부로 미치광이 같은 말을 아뢰어서 귀양 가기에 이르렀으나, 폐하께서 다시 살려 주신 은택을 특히 입어 살아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모발 하나라도 성상께서 주신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후에 국가의 변고가 겹쳐 일어나서 폐하께서 천고에 없던 액운을 여러 번 만났는데도 신이 기력(氣力)을 내어 조그마한 보답도 하지 못했으니, 신의 불충함은 실로 국민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지금 신의 천한 나이가 벌써 7순을 넘었고 온갖 병이 침범하여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는 신이 쓸데없는 사람임을 모르시고 여러 번 소명을 내리시어 예우(禮遇)가 융숭하고 간절하셨으니 폐하께서 신에게 무엇을 취하려고 이런 비상한 은택을 내리시는 것입니까. 신은 본디 학문이 없고 또 시골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은 신의 할아비와 아비의 남긴 훈계일 뿐이니 어찌 성심(聖心)을 계도(啓導)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이미 무술년 상소에 밝혔으나, 채납(採納)되지 않았습니다. 신의 이번 걸음에 말하는 것인들 어찌 채납되기를 감히 기대하겠으며 또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기를 어찌 감히 바라겠습니까. 오늘날 나라의 위태한 형세가 조석으로 급박한데 폐하께서 받아들이려는 뜻이 있으실 것 같으면 신이 숨김없이 다 말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본디 강직한 까닭으로 남들과 화합하지 못함을 짐도 벌써 아는 바이다. 또 연전에 올린 소사(疏辭)는 귀에 거슬리는 것이 비록 많았으나 짐의 마음에는 그것이 옳은 줄을 알면서도 시세 형편에 구애되어 변통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어려운 걱정이 심한 이 마당에, 경의 바로잡아 구제하는 방책을 기다리는 까닭으로 이에 특히 불렀다. 경의 훌륭한 계획을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신은 언사가 비루하고 졸속하므로 삼가 차자 하나를 만들어 을람(乙覽 임금이 글을 보는 것)에 대비했습니다.”
하고, 이어 꿇어앉아 소매 속의 차자를 바치며,
“만약 채용(採用)하게 된다면, 실로 종사의 다행입니다.”
하였다. 비서감 승(秘書監丞) 이명상(李明翔)이 차자 읽기를 마치자 선생은 아뢰기를,
“폐하께서 오늘날의 사세가 장차 흥한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어지러운 때라 보십니까?”
하니, 상이,
“과연 어지러운 때이다.”
하니, 선생이,
“폐하께서 어지러운 때인 줄을 아실 것 같으면, 어지럽게 되는 연유를 아십니까? 다만 오늘날 민회(民會)로 말한다면 강한 이웃 나라를 끼고 감히 흉포함을 부리니, 그 죄는 진실로 죽어도 용서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민심은 바로 천심(天心)입니다. 민심이 이와 같이 풀어져 흩어졌으니, 천심도 따라서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하늘을 섬기는 정성이 혹 극진하지 못해서입니까, 아니면 일을 맡은 신하가 성덕(聖德)을 받들어 행하지 못해서입니까?”
하니, 상이,
“짐은 정성을 다해서 하늘을 섬겼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천도가 이처럼 응하지 않으니, 이것은 짐이 밝지 못하고 신하들을 감독해서 잘 거느리지 못한 때문이다.”
하였다. 선생이,
“오늘날 인심이 풀어져 흩어짐은 모두 을미년 변고 이후에 복수하려는 뜻이 없고, 복수하려는 정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복수하려는 뜻과 복수하려는 정사가 있었더라면 민심이 저절로 확고하여 오늘날의 어지러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신이 근일에 내리신 조칙(詔勅)을 여러 번 보았는데 애통한 뜻이 말 밖에 넘쳐 나와 널리 퍼졌으나, 실로 혜택이 아래까지 미침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은 폐하께서 한갓 겉치레[文具]만 일삼고 성실한 마음으로 성실한 정사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이 들으니, 폐하께서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는 예를 거행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합니다. 청하건대 바삐 대가(大駕)를 움직여서 태묘를 전알한 다음 망묘루(望廟樓)에 거둥하여 회민(會民)을 불러서 묘문(廟門) 밖에 각각 엎드리도록 하고 애통조(哀痛詔)를 내려 허물을 끌어 자신을 책망하기를, 성탕(成湯)의 ‘만백성에게 있는 죄는 그 탓이 나 한 사람에게 있다.[萬方有罪 在予一人]’라고 한 뜻과 같이 하소서. 그런 다음에 그 우두머리되는 두어 사람을 불러들여서 친히 타이르고, 그들의 말 중에 채용할 만한 것은 택해서 실시하고 각자 흩어져 돌아가도록 한다면 이들도 화육(化育)된 물(物)인데 어찌 끝내 거역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효혜전(孝惠殿 효정왕후(孝定王后)의 혼전(魂殿))의 연사(練祀) 전에 태묘를 전알함은 예제(禮制)에 거리낌이 있다.”
“신이 들으니, 일본 사령부에 고시(告示)한 바가 있는데, 모든 경내(境內) 경찰을 모두 저들이 담당한다 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경청(警廳)과 법부(法部)는 모두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아, 오백년 종사와 삼천리 강토가 하루아침에 일본에게 망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다음에 남이 업신여기게 되는데, 어찌 오로지 저들에게만 탓을 돌리겠습니까. 을미년 대변(大變) 이래로 우리 군신 상하가 모두 복수해야 한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분발해서 힘썼을 것 같으면 오늘날 나라 형세가 거의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온 나라 신민(臣民)이 모두 포로가 되어 참혹하게 짓밟힘을 당하건만 구해 내지 못하니 아, 천운입니까, 시변입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다만 죽고 싶은 소원이 있을 뿐입니다.”
하고, 목 놓아 통곡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금은 나라가 망할 판입니다. 비록 좋은 방책(方策)이 있더라도 장차 어디에 시행하겠습니까? 그러나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한번 번연히 깨달아서 적합한 약을 조금 시험한 다음, 다시 천명을 기다리는 것만 하겠습니까? 신의 수차(袖箚) 다섯 조목은 모두 오늘날의 급무입니다. 외부(外部) 사람에게 관계있는 것이 아니고 정부에게 도움을 요구할 것도 아니요, 모두 폐하께서 옮겨서 시행하는 사이에 있으니, 바라건대 바삐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다. 상이 차자를 모두 보고 이어 하교(下敎)하기를,
“철종(哲宗)과 헌종(憲宗)께 추존(追尊)하는 의식을 거행하지 않은 것은 옛날 예(禮)에 의거한 것이다. 주공(周公)이 문왕(文王)ㆍ왕계(王季)ㆍ태왕(太王)을 왕호(王號)로 추존하면서 방존(傍尊)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그리고 주공이 선공(先公)에게 천자의 예로써 제사한 까닭으로 태묘에는 모두 천자의 예를 썼다. 문묘(文廟)의 축문(祝文)에 경제(敬祭)라고 일컬은 것은 또한 《대명집례(大明輯禮)》에 기재되었고, 묘주(廟主)에 대명(大明)에서 내린 시호를 쓰지 않음도 참작한 것이 있다. 경효전(景孝殿 명성황후 민씨의 혼전(魂殿))과 홍릉(洪陵 명성황후의 능)에 전(奠) 올리는 것은, 《춘추》의 대의(大義)에 임금의 원수를 갚지 못했으면 장사하였다고 쓰지 않았으니, 지금 비록 인산(因山)했으나 장사하지 않은 것과 같기 때문에 장사하기 전 예(禮)에 의해서 오히려 전을 올린다. 순명비(純明妃 순종(純宗)의 비(妃) 민씨(閔氏))에 대한 복제(服制)는 단의빈(端懿嬪 경종(景宗)의 비 심씨(沈氏))의 상사에 소현세자(昭顯世子) 때의 예(禮)를 본떠서 시행하였다. 대명 전례(典禮)를 상고하면 의문태자(懿文太子)와 장경태자(莊敬太子)의 예제에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으므로 이에 의거해서 거행했으니, 기재된 책이 여기에 있다.”
하였다. 선생이,
“폐하께서 어찌 의거한 데가 없이 시행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변경할 수 없는 법이 아니며, 신이 아뢴 것은 경례(經禮)입니다. 채납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이것은 갑작스레 단행할 것이 아니니, 천천히 상량(商量)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때에 상이 항상 해가 돋은 다음에 잠자리에 들고 오후가 되어야 잠자리에서 일어나 온갖 법도가 해이해졌기 때문에, 선생이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며, 분발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되풀이해서 아뢰고는 물러 나왔다. 상이 음식을 하사하고 또 액례(掖隷)를 시켜 부축해서 뜰을 내려가게 하였다. ○ 이때 왜적이 우리나라 동학(東學)의 남은 무리를 유인해서 머리를 깎게 하고 창귀(倀鬼)로 삼아서, 명칭을 일진회(一進會)라고 하였다. 곳곳마다 모여서 임금을 비방하고 재상(宰相)을 능욕해서 기세가 날로 성해지니, 중외가 두려워했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그들이 윗사람을 범(犯)하는 부도(不道)한 죄를 처음 말했으니 차자에,
“저들이 민회(民會)라고 말하는 것은 여러 불평하는 무리를 모아서, 사단(事端)을 얽고 화근을 빚어온 지가 벌써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밖으로 강한 이웃 나라의 세력을 믿고, 안으로는 조정의 끄나풀을 빙자해서 군부의 엄명을 무시하고 정부의 대관도 무시합니다. 죄수를 함부로 탈취하고 입에 나오는대로 비방하며, 심지어는 대궐 문간에 모여서 곡(哭)하는 변괴까지 있었습니다. 아, 기강이 끊어지고 명문이 없으졌으니, 나라가 어찌 나라꼴이 되며 사람이 어찌 사람답겠습니까. 이 백성들도 모두 선왕(先王)께서 어루만지며 기른 적자(赤子)이며, 예의(禮義)로 다스리던 백성입니다. 당초부터 화(禍)를 즐기고 난(亂)을 좋아하는 성품을 가졌던 것은 아니며 또한 임금을 높이고 윗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성품이 변하고 마음이 바뀌어서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습니까. 아, 여기에 어찌 한심해서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뭇 백성의 죄이니 진실로 말할 것도 없지마는, 폐하께서 어떻게 수성(修省)하고, 정부가 어떻게 변동했는지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신은 진실로 폐하께서 급한 일을 당해도 정돈할 여가를 갖는 훌륭한 덕과 넓은 도량이 있는 줄은 알지마는, 오늘날 믿는 바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신이 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늘을 믿고자 하신다면, 민심이 곧 천심(天心)인데, 민심이 벌써 이와 같으니 천심도 알 만합니다. 정부를 믿고자 하신다면 지금의 정부는 바로 저들이 원수처럼 여기는 바입니다. 대개 저 난민(亂民)의 무리는 패류라면 패류이고 역적이라면 역적이니, 그 죄상을 논한다면 죽이는 것이 마땅한데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그러나 정부에서 스스로 한 짓이 이렇게 되도록 초래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생각하기 바랍니다. 근일 정부에 있는 자들은 과연 모두 어떤 사람들입니까. 비록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서 나랏일에 애쓰다가 죽은 다음에야 그만둔 제갈량(諸葛亮) 같은 이는 없더라도 마음을 나라에 두어 임금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려는 자가 있습니까. 비록 면전에서 잘못을 책망하며 조정에서 다투어 허물을 보완하고 유실된 것을 줍던 급암(汲黯) 같은 자는 없더라도 능히 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낯빛으로 임금의 뜻을 앞질러 영합하지 않는 자는 있습니까. 비록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의 성명도 모른다는 왕소(王素 송 인종 때의 간관)의 말과 같은 자는 없더라도 능히 단아한 절조를 다소 지켜서 몸을 삼가고 염치를 아는 자는 있습니까. 이와 같지 않다고 말한다면, 반드시 권세를 좋아하고 아첨하는 간사한 무리이며, 반드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쳐서 이(利)를 도모하며 재물을 모으는 무리며, 반드시 예의를 버리고 염치도 버려서 얻지 못하면 걱정하고 얻고 나면 또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이며, 반드시 임금을 팔고 나라를 팔아서 도적의 창귀가 된 무리입니다. 이와 같은 무리가 요로를 차지해서 수십여 년을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나라가 병들지 않겠으며, 어찌 백성이 고달프지 않겠으며 어찌 인심이 흩어지지 않겠으며, 화란(禍亂)이 겹쳐 이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은 고종(殷高宗)이 융제(肜祭)하는 날에 꿩이 우는 재이(災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라를 잘 다스려서 편안하게 하는 공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며, 주 선왕(周宣王)이 공화(共和)의 난(亂)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주 나라를 중흥시키는 아름다움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치욕(恥辱)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오(吳) 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며, 연 소왕(燕昭王)이 자쾌(子噲)의 변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제(齊) 나라를 보복하는 공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개 어지러움이 많음은 나라를 중흥하게 되는 까닭이 되며 어지러움이 지극하면 다스림을 생각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폐하께서는 진실로 오늘날의 사세가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변동하는 기틀은 오히려 폐하의 한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신하 가운데에 가장 무거운 죄를 지어 백성들이 이를 갈고 마음을 썩이는 자는 누가 그중에 가장 심하며, 정령(政令)으로서 시대의 큰 폐단이 되어 백성들이 머리를 앓고 이마를 찌푸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 그중 심한 것인지 요량하십니까. 신은 진실로 우매하고 고루해서 하나하나 들어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벼슬에 있으면서 욕심 많고 비루하여 사정(私情)에 따라 공사(公事)를 없애며 무뢰배(無賴輩)와 결탁해서 뇌물로 협잡하는 자는 죽여야 합니다. 관찰사(觀察使)나 수령으로 재물을 탐내고 백성을 약탈하여 민생(民生)을 짓밟는 자는 죽여야 하고, 오로지 재물을 모아 거두기만 일삼으며 아랫사람의 것을 덜어 내어 윗사람에게 보태어서 백성들의 원망을 윗사람에게 돌리는 자는 죽여야 합니다. 사술(邪術)과 좌도(左道)를 믿고 군상(君上)을 의혹하게 한 자는 죽여야 하고, 적국과 외인(外人)을 믿고 임금을 협박한 자는 죽여야 합니다. 계권(契券)을 만들거나 조약을 만들어서 국권과 토지를 남에게 넘겨준 자는 죽여야 하고, 강상(綱常)을 없애고 인륜을 무너뜨리며 말마다 반드시 성인을 헐뜯는 자는 죽여야 하고, 옛 도를 아주 싫어하고 외국 풍속을 즐겨 사모하며 신기함을 좋아하고 기교를 숭상하는 자 또한 죽여야 합니다.”
하였다. 또 어진 인재를 택해서 정부를 맡기고, 세금을 많이 거두는 일을 금지해서 백성을 보전할 것이며 학교를 세워서 인재를 양성하고, 신의를 닦아서 이웃 나라와 교섭하며, 나라의 예법을 바로잡아서 말세의 폐단을 구제하는 모두 다섯 가지를 말하였다. 그런데 나라 예법에 잘못되었다는 것은 바로 종묘(宗廟) 위패에 명 나라에서 내린 시호를 삭제한 것, 4대(代)를 추존할 때에 진종(眞宗)ㆍ헌종ㆍ철종을 빠뜨려서 거행하지 않은 것, 경효전(景孝殿)ㆍ홍릉(洪陵)에 전(奠) 올리는 것을 철폐하지 않는 것, 순명비(純明妃)의 상(喪)에 신민(臣民)의 복제(服制)를 기년(朞年)으로 한 것, 문묘(文廟) 축식(祝式)에 어휘(御諱)를 쓰지 않는 것이었다. 끝으로 또 ‘정심(正心)’이라는 2글자로 쇠퇴한 나라를 흥기시키고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리는 요법(要法)으로 삼으라고 상소한 것이 전후 누만(累萬) 마디였다. ○ 포덕문(布德門) 밖 향축과(香祝課)에서 대명(待命)하였다. 선생이 한 차례 천폐(天陛)를 하직했으나 의리상 경솔하게 돌아갈 수 없으므로 드디어 향실(香室) 옆방에 물러나 엎드려서, 올린 말 중에 한 가지라도 채납되기를 기다렸으나 상은 끝내 유음(兪音)을 내리지 않았다. 그때에 진신장보(搢紳章甫)로서 날마다 뵙는 자가 매우 많았고, 도하 백성들도 선생의 말이 실시되기를 목을 늘이고 기다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국사에 고질로 된 폐단을 짧은 시간에 바로잡아 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생은 모름지기 조칙(詔勅)을 받들어 공무를 보면서 오랜 세월을 두고 점차로 성상의 마음을 돌리도록 깨우치기를 기약해야 한다. 또 이미 도성에 들어왔으니 영수각(靈壽閣)에 숙배(肅拜)하고 기로사(耆老社)에 참여해도 의리에 불가할 것이 없다.”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이것은 이른바 ‘한 자[尺]를 굽혀서 한 길[尋]을 편다.’는 의론이다. 또 지금 위급한 날을 당했는데 어느 겨를에 기로사에 들어가서 일신의 영예(榮譽)를 삼겠는가?”
하였다. ○ 8일(임자)에 상소해서 진정(陳情)하였다. 상소의 대략에,
“생각건대 폐하께서 금년 6월 이후부터 특별한 예로 초야에 묻혀 있는 신을 부르신 것이 어찌 얼굴만 한 번 보고 그만두려던 것이겠습니까. 아마도 한 가지 어리석은 의견이나마 국가에 도움되리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궐문 밖에 대명(待命)한 지 벌써 6일입니다. 만일 신의 말이 좋다면 채납하여 날이 저물도록 기다리지 않아야 되고 만약 좋지 않다면 지척(指斥)하여 죄를 주는 것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좋아도 채납하지 않고 좋지 못해도 지척하지 않으니, 이것은 폐하께서 바로 신을 희롱하신 것입니다. 신이 보잘것없으나 또한 수치스러움은 아는데 폐하께서 어찌해서 신하를 가볍게 봄이 이에 이르렀습니까. 또 신이 말한 여러 조목이 성상의 마음에 흡족하기는 부족하겠지만 당장의 긴급한 일에 적으나마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행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설령 시행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폐하의 마음속에 ‘사(私)’ 자 하나만 없앤다면 막힘없이 시행되어서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폐하의 마음속에 둔 사 자가, 폐하가 계시는 위치나 다스리는 나라와 비교해 보면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이 가볍습니까? 또 신은 알지 못하오나 오늘날이 어떤 시기입니까? 외국 사람이 침해하고 업신여김은 오히려 괜찮은 편입니다만, 나라 안의 경찰권(警察權)을 저들이 담당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위로는 조정이 없어졌고 아래로는 인민이 없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되었지만 폐하께서 그래도 분발해서 척념(惕念)하지 않으며 조정에서도 오히려 묵은 생각을 씻고 새롭게 진작하지 않으니, 오백년 종사와 삼천리 강토와 민생(民生)을 어느 지경으로 이끌려고 하십니까? 신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통곡하면서 죽고 싶다가 드디어 미친병이 크게 일어나서 그칠 줄을 모릅니다. 신이 이미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받고 왔으니, 말씀을 드렸는데 시행되지 못하면 또한 죄를 받고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찌 머리를 숙이고 두려워하면서 한번 입대(入對)한 것을 영화롭게 여기며 물러나겠습니까? 청하건대 폐하께서는 벼락 같은 위엄을 바삐 내리시어 신의 미치고 망녕된 죄를 다스려서 신하된 자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비답하기를,
“‘소장을 보고서 경의 정성을 잘 알았다. 말한 바가 모두 절실하니, 깨우쳐 살펴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국세(國勢)가 진작되지 못하는 것은 오래된 고질병과 같으니, 달[月]을 기약해야 치료할 수 있으며, 환약 한 개로 하루에 소생을 바랄 수 없다. 방금 말하고 즉시 그 효과를 구하는 것은 아마도 시기에 알맞는 조치를 익히 생각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이 어려운 걱정을 생각하여 협찬(協贊)하기를 힘써서 나랏일을 함께 이룩하라.’고 의정부 낭관을 보내어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 24일(무진)에 두 번째 상소해서 떠날 수 없는 의리를 아뢰고, 겸해서 일본 화폐(貨幣)를 차관(借款)하여 외국에 의지하는 잘못을 말하였다. 그때에 선생이 오래도록 궐문 밖에 엎드려 있으니, 임금이 민망하게 여겼다. 시신(侍臣) 및 액례(掖隷)를 잇달아 보내어, 집에 물러가서 기다리도록 하유했으나 선생은 성의를 더욱 더하고 물러가지 않기를 고집하였다. 이는 대개 맹자가 ‘왕이 고치기를 나는 날마다 바란다.[王庶幾改之 予日望之]’라는 뜻이었다. 이에 이르러 또 상소했으니, 그 대략에,
“오늘날 국가의 형편을 보건대, 신이 폐하를 버리고 장차 어디를 가겠습니까. 폐하의 좌우(左右)를 말한다면 아첨하는 간사한 무리가 앞에서 아양을 떨며, 몰래 기만하는 마음을 갖고 온갖 방법으로 임금과 나라를 팔아넘기는 일을 합니다. 폐하의 조정으로 말한다면 소인이 안으로 간사한 사람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억센 적국(敵國)을 끼고서 권세와 녹(祿)을 도둑질할 계책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체면을 아는 자는 또한 모두 몸을 아끼고 일을 피하고 있으면서 뒤로 물러나며 우리 임금은 되지 않는다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폐하의 백성으로 말한다면, 화(禍)를 좋아하고 난(亂)을 생각하는 무리가 떠들썩하게 길에 횡행(橫行)하면서 감히 망측한 말을 떠벌리고 도적을 인도하는 창귀(倀鬼)가 되기를 꺼리지 않고 있습니다. 폐하의 이웃 나라로 말한다면 여우같이 아첨하는 모습으로 원숭이처럼 간사하여 동맹(同盟)을 깨뜨리고 조약(條約)을 저버려서 오로지 모두 삼키려는 술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정법(政法)의 권한을 잡아서 우리의 손발을 옭아매고, 우리의 입과 혀를 재갈 먹이고 있는데, 또 어떤 화변을 꾸며낼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임금이 이처럼 외롭고 나라가 이처럼 위태로우니, 신이 비록 머리를 부수고 목을 잘라서 폐하의 은택에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차마 폐하를 버리고 가겠습니까. 그리고 폐하께서 이미 이때에 신을 불렀으니, 어떻게 다시 이런 때에 신을 보내겠습니까. 대개 예로부터 나라를 잃는 데에는, 권세를 잡은 신하가 참람하게 정권을 훔쳐서 잃는 것이 있었고 적국(敵國)과 전쟁을 벌여서 이기지 못해서 잃는 것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어와 문자로써 계권(契券)을 만들고 조약을 맺어서 온 나라를 들어다가 도적에게 주어서 한 명의 군사도 교전(交戰)하지 않았고 한 개의 화살도 쏘지 않고서 나라를 잃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또,
“근일에 화폐(貨幣) 교정(矯正)하는 일을 말한다면, 교정하는 것이 진실로 옳지마는 교정을 장차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외국에서 차관(借款)하려면 반드시 전당(典當)하는 물건이 있을 것이며, 전당하는 물건은 반드시 토지로 할 것입니다. 토지는 폐하께서 선왕으로부터 강토와 인민을 잘 보존하라고 부탁을 받은 것인데, 하루아침에 남에게 주고자 하십니까. 또 차관을 해다가 장차 어디에 사용하려는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수량에 상관없이 차관하는 날이 바로 나라가 망하는 때입니다. 요즈음 이 조약을 이미 맺었다고 들었으니, 신은 이에 대하여 더욱 애통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아직 차관하지 않았다면 그 계권을 곧 돌려주기를 신은 원합니다. 재물을 절약하고 비용을 검소하게 줄이면서 차츰 국력이 조금 펴지기를 기다린 다음에 의논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들이 만약 조약을 깨뜨린 것으로써 우리를 책망한다면 비록 두어 달 이자를 부질없이 줄지라도 제 살을 베어서 배를 채우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진실로 이 화패(禍敗)의 연유를 찾는다면 모두 ‘의부(依附)’라는 2자가 병이 된 것입니다. 신은 원하건대, 성상께서 딴 나라에 의부하는 근성을 끊고 뜻을 확립하여, 흔들리지도 굽히지도 말고서 차라리 자주(自主)하다가 망할지언정 의부해서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무릇 여러 신하 중에 외국에 의부하는 자는 모두 저자[市]에서 죽여 온 나라에 호령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내수(內修)하는 방법을 부지런히 힘쓰고 자강(自强)하는 계책을 빨리 도모해서, 한결같이 신이 전일에 올린 차자에 말한 바와 같이 하소서. 성상께서 마음과 생각이 오직 백성을 편하게 하고 나라를 보전하는 데에 있으면 저들이 비록 의리가 없으나 또한 천하의 공의(公議)를 두려워해서 감히 우리를 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신이 밤낮으로 땅에 엎드려서 성상께 바라는 바입니다.”
하였다. 비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경의 정성을 잘 알았다.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오직 시행하기가 어려운데 또한 시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아뢴 바도 깊이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오직 시행할 만한 것은 시행하겠다. 그러나 경이 노쇠하여 억지로 할 수 없으니, 곧 집에 돌아가서 조리하라.’고 정부 낭관을 보내어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 25일(기사)에 비지(批旨)를 봉해서 도로 바쳤다. 소장을 봉상(封上)한 이튿날에 비지가 비로소 내렸다. 선생은 비지를 받고는,
“노신(老臣)이 전후로 아뢴 말은, 그만둘 수 있는 말을 한 것이 아닌데 위에서 비답한 바는 들으심이 아득할 뿐이 아니다. 다만 승순(承順)하는 것이 공순이라 한다면 비록 훌륭한 계획과 좋은 방책이 있을지라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 드디어 옛사람이 조서를 봉하여 바치는 전례에 의거하여 비지를 도로 바쳤다. ○ 28일(임신)에 세 번째 상소를 하고 대죄(待罪)하였다. 소의 대략은,
“신이 그저께 올린 소장에, 떠날 수 없는 의리를 말하고, 말미에 차관하면 나라가 반드시 망하고 외국에 의존하면 반드시 화를 당한다는 것을 아뢰었습니다. 말은 비록 미친 듯 망녕스러웠으나 이치는 실상 분명하고 곧으니 폐하께서 느껴 깨달으시고 조정도 깨우쳐 살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내리신 비지를 받으니, 겉치레를 하는 예사 투식(套式)에 불과하니, 상소의 뜻을 전혀 살피지 않으신 듯하여, 신은 당혹해서 탄식했습니다. 생각건대 출납(出納)하는 관원과 정부의 신하가 임금 섬기는 의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진실로 복역(覆逆)하여 왕언(王言)이 한결같이 성실한 데에서 나와서, 충성된 말을 싫어하여, 스스로 옳게 여기고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색은 신하에게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에 눈여겨보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신에게 괴상한 거조(擧措)를 해서 비지를 받지 않도록 했고, 또 능히 죄를 성토해서 나라 기강을 조금이나마 부호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조정의 어지러운 한 단서와 오늘날 화패가 이른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인해 왕명을 따르지 않은 죄를 받아서 신하된 자의 경계가 되기를 청합니다.”
하였더니, 상이 비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경의 정성을 잘 알았다. 경의 아뢴 말은 지극한 충성과 사랑이 아님이 없으니, 짐이 어찌 깊이 생각해서 행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상량(商量)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화폐 교정하는 일은 정부에서 타당하게 조처할 것이니, 경은 그렇게 알고 사제(私第)에 물러가 기다리라.’고 정부 낭관을 보내어 전유하라.”
하였다. ○ 홍문관 학사 남정철(南廷哲)이 상소하여 선생의 말을 채용(採用)하기를 청하였다. 상소의 대략에
“폐하께서 찬정 신 최익현에게 공경을 지극히 하고 예를 다해서 연석(筵席)에서 인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성대한 세대(世代)에 있던 일인데 지금 있었으니, 신민이 기뻐하며 몸을 솟구쳐 움직이며 다스림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최익현을 불러온 것은 아마도 벼슬길로 나오게 하여 그의 말을 쓰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이미 나와서 말을 했습니다만 여러 날 귀를 기울여도 채용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천하 후세에 최익현은 직간(直諫)하는 정성이 있었으나 폐하는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실상이 없었다고 말할 것이니, 신은 애석하게 여깁니다. 비록 태평무사한 때라도 허례(虛禮)로 어진 이를 얽어매고 겉치레로 말을 구함은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위태하고 망하려는 오늘날같이 두려운 때이겠습니까. 공자께서 이르기를 ‘좋아하기만 하고 이유를 찾지 않으며, 이유를 찾았으나 고치지 않으면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학자가 학문을 하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제왕(帝王)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최익현이 아뢴 차자와 소장을 정부에 내려 한결같이 공의에 부쳐 의논한 다음 아뢰게 하고, 폐하께서 직접 결재하여 시행할 만한 것은 시행하고, 시행할 수 없는 것은 그만두어 전환(轉圜)하는 거조가 일월처럼 밝고 받아들이는 도량이 하해(河海)처럼 깊고 넓음을 보게 하지 않습니까? 위태함을 전환하여 편안하게 하고, 비색(否塞)함을 없애어 태평하게 하는 기틀이 실상 여기에 있는데, 폐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습니까. 비록 그가 말한 여러 조목 중에 혹 한두 가지가 성심(聖心)에 맞지 않고 시의(時宜)에 적중하지 않아서, 일이 어려운 문제에 관계되고 예가 신중한 데에 관계되어 갑자기 의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뜻은 일찍이 충성되지 않음이 없고 말은 곧지 않음이 없으니, 또한 용납해서 폐하의 넓고 넓은 도량을 보이시면 성덕(聖德)에 더욱 빛이 되지 않겠습니까. 최익현이 연로하고 위독한 사람으로서 궐문 밖에 엎드려 추운 데서 자고 찬 음식을 먹은 지가 벌써 여러 날인데도 스스로 죽기를 작정하고 물러가지 않는다 하니, 이 또한 옛사람의 시간(尸諫)하던 뜻입니다. 만일 그 말은 미처 채용하지 않았는데 최익현을 문득 먼저 죽게 한다면 성조(聖朝)에 누(累)됨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최익현과 40년 전에 많은 사람이 모인 좌석에서 한 번 면대(面對)한 적은 있었으나 일찍이 평소의 교분과 방문하는 즐거움은 없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말하는 바는 털끝만큼도 감히 최익현을 위한 것이 아니며, 단연코 폐하를 위한 것이며, 천하 국가를 위한 것입니다. 청하건대 황상(皇上)께서는 세 번 깊이 생각하시고 빨리 처분을 내리시어 곧은 말을 받아들이고 결단하여 시행하시면 실로 종사 만대의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조병호(趙秉鎬)ㆍ김학진(金鶴鎭)도 또한 상소해서 아뢰었으나 회보(回報)가 없었다. ○ 선생께서 한 달 가까이 춥게 거처하고 찬 음식을 먹으면서 낮에는 수응(酬應)이 매우 번거롭고, 밤이면 근심으로 잠을 못 이루어서 《구경연의(九經衍義)》 및 《주역(周易)》 등 글을 열람하였다. 자질(子姪) 및 문인 중에 안필호(安弼濩)ㆍ최봉소(崔鳳韶)ㆍ채상덕(蔡相悳)ㆍ최전구(崔銓九)ㆍ윤항식(尹恒植)ㆍ이승회(李承會) 등이 시종 옆에서 모셨고, 족손(族孫) 최만식(崔萬植), 종인(宗人) 최효석(崔孝碩)과 영남 사람 이승원(李承遠)이 좌우에서 수고하였다. 이때에 와서 한 해가 거의 다 가고 또 폭풍이 눈비를 몰고 와서 기상이 매우 비참(悲慘)하였다. 선생도 온갖 감회(感懷)가 엇갈림을 스스로 금치 못하여 그믐날 밤에 다음과 같은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세모의 삼한에 / 歲暮三韓國 우리 임금 성명하네 / 吾王自聖明 고신이 치우친 사랑 받아 / 孤臣偏被眷 죄가 많은데도 지금껏 살아 있네 / 積罪至今生
[주D-001]연사(練祀) : 아버지는 살아 있는데 어머니가 먼저 죽으면 한 돌 만에 지낼 소상(小祥)을 11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 [주D-002]급암(汲黯) :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임금의 면전에서 잘못을 지적하고 조정에서 시비를 논쟁(論爭)했는데, 무제가 꺼려해서 “심하다, 급암의 어리석음이여.”라고까지 하였다. 《漢書 卷50 汲黯傳》 [주D-003]은 고종(殷高宗)이 …… 재이(災異) : 은 고종이 친묘(親廟) 제사에는 제물(祭物)을 풍성하게 하고 원조(遠祖)의 제사에는 약소하게 해서 예를 아주 잘못했으므로 융제(肜祭)하는 날 꿩이 우는 재이가 있었다. 은 고종이 조기(祖己)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여 정사를 닦고 덕을 행하여 은 나라를 중흥시켰다. 《書經 高宗肜日》 《史記 卷3 殷本紀》 [주D-004]공화(共和)의 난(亂) : 주 여왕(周厲王)이 무도한 정치를 하다가 난리를 만나 체(彘)로 출분(出奔)했을 때, 공백화(共伯和)가 제후의 권유로 14년간 천자의 일을 섭행(攝行)한 일을 말한다. 공화(共和)는 공경들이 서로 화합하여 함께 정사를 보는 것을 말하는데, 《사기(史記)》에는 “주공(周公)ㆍ소공(召公)이 협의하여 정사를 행하였다.”고 되었으나 사실이 맞지 않는다는 설이 있다. 주 선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여 주 나라를 중흥시켰다. 《史記 卷4 周本紀 注》 《竹書紀年》 [주D-005]구천(句踐)이 …… 치욕(恥辱) : 춘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회계산(會稽山)에서 교전하다가 패하여 항복하였다. 그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하여 와신상담(臥薪嘗膽)하기 20여 년, 마침내 오를 멸망시켜서 수치를 씻었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주D-006]자쾌(子噲)의 변란 : 자쾌는 연 역왕(易王)의 아들. 자지(子之)를 신임해서 나라를 맡기고 자신이 신하 노릇을 했다. 그리하여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 제(齊)의 침략을 받아 쾌가 죽었다. 태자(太子) 평(平) 즉 소왕(昭王)이 즉위한 뒤에 현자를 부르고 백성을 어루만지는 등 선정을 베풀어 부국강병을 이룬 다음, 제(齊)를 공격하여 도망간 자지(子之)를 잡고 제 나라 땅을 거의 차지하여 선왕의 수치를 복수하였다. 《史記 卷34 燕昭公世家》 [주D-007]한 자[尺]를 …… 편다 :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에 있는 말로, 맹자의 거취에 대해 논한 것인데, 맹자가 자신을 굽혀 한 번 제후(諸侯)의 왕을 만나 보면 왕도(王道)나 패도(覇道)를 행할 수 있으니, 굽히는 바는 작고 펴는 바는 큼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8]옛사람의 …… 뜻 : 위(衛)의 대부 사어(史魚)가 영공(靈公)에게 어진 이를 등용하고 착하지 않은 자를 물리치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죽을 무렵에 그 아들에게 장사하지 못하도록 명해서 임금에게 간한 고사. 《韓詩外傳》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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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병오년(1906, 광무 10) 선생 74세
2월 초하루는 무술 21일(무오)에 가묘(家廟)를 하직하고 가솔들과 작별한 후 창의(倡義)할 계획을 실행하려고 호남(湖南)을 향해 출발하였다. 작년 겨울 국변(國變) 이후로 선생은 왜적에게 저지되어 상경하지 못하였는데, 얼마 후에 송연재(宋淵齋 송병선(宋秉璿)) 공이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마련하여 통곡하며 이르기를,
“제공(諸公)이 인기(人紀)를 부식함은 진실로 나라의 빛이 되나, 사람마다 죽기만 하면 누구를 의지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인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은 마땅히 마음을 합치고 힘을 뭉쳐 불에서 구해 내고 물에서 건져 내는 것처럼 서둘러야지 일각도 잠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가 없다.”
하고, 드디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결정하고, 판서 이용원(李容元), 판서 김학진(金鶴鎭), 관찰 이도재(李道宰), 참판 이성렬(李聖烈), 참판 이남규(李南珪),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나아가 국난 구할 것을 권하였으나 모두 호응하지 않았다. 선생은,
하였다. 선생은 즉시 문인 최제학(崔濟學)을 보내어 편지로 뜻을 알렸더니, 임병찬은 선생의 뜻을 따르기를 원한다는 회답을 올렸다. 호서(湖西)의 선비 안병찬(安炳瓚)이 와서 아뢰기를,
“호우(湖右 충청도)의 유신(儒紳)들이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모두 선생을 맹주(盟主)로 추대할 것을 원하고 있으니, 즉시 행차하기 바랍니다.”
하니, 선생이 승낙하였다. 얼마 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홍주(洪州)에서 의기(義旗)를 들었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며 말하기를,
“이미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내가 갈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의 사졸(士卒)은 훈련되지 않았고, 병기도 예리하지 못하니, 반드시 각도와 각군이 세력을 합치고 주장이 일치된 뒤라야 거사가 성공할 수가 있다. 내가 남하(南下)하여 영남ㆍ호남을 경동(警動)하여 호서와 서로 성원(聲援)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마침, 곽한일(郭漢一)ㆍ남규진(南奎振)이 칼을 갖고 와서 뵈었다. 선생이 곽한일에게 말하기를,
“호서의 일은 내가 그대에게 부탁한다. 그대는 남규진과 함께 민중의 뜻을 격려하여 빨리 군사를 일으켜 영남ㆍ호남과 함께 기각(掎角)의 형세가 되도록 하다가 만일 여의치 못하면 그대도 남하하여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성명을 도장에 새겨 주어, 사방의 군사를 불러 모으고 군중에 명령하는 데에 모두 이것을 사용하게 하고, 또 격문(檄文)과 ‘존양토복(尊攘討復)’이란 기호(旗號)도 주니, 곽한일과 남규진은 자기들대로 가서 거사(擧事)하였다. 뒤에 곽한일과 민 참판이 홍주에서 합세하여 적을 베고 사로잡는 공이 있었는데 홍주가 패하자 곽한일이 선생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마침 선생도 패한 때여서 돌아가서 다시 거사를 계획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민 참판과 함께 사로잡혀 지도(智島)로 귀양 가고, 남규진도 마도(馬島)에 구금되었다가 뒤에 모두 방환(放還)되었다. 선생은 또 문인 이재윤(李載允)에게 편지를 보내어 북쪽 청 나라에 들어가 구원을 청하게 하고, 오재열(吳在烈)에게는 사졸과 병기를 수습하여 운봉(雲峰)을 지키면서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최제학(崔濟學)과 출발하여 임천(林川) 남당진(南塘津)을 건너 태인(泰仁) 종석산(鍾石山)에 이르러, 임병찬의 처소에 머물렀다. 병찬은 마침 모친상을 당하여 거상(居喪)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병찬에게 검은 상복으로 군무에 종사하도록 명령하여, 군사 모집과 군량(軍糧) 저장 및 군사 훈련하는 일을 모두 맡겼다. ○ 어떤 사람이 선생의 거사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도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러나 국가에서 양사(養士)한 지 5백 년에 기력을 내어 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함을 의(義)로 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내 나이가 80에 가까우니 신자(臣子)의 직분을 다할 따름이요, 사생(死生)은 깊이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이 문인 이정규(李正圭)를 보내어 편지로 처의(處義)의 방법을 묻자, 선생은 남북이 서로 호응하여 힘을 모아서 적을 토벌하자는 뜻을 써서 보냈다. 문인 조재학(曺在學)ㆍ이양호(李養浩)가 영남에서 왔는데, 선생은 모두 영남으로 돌아가서 사민(士民)을 격려하여 응원하게 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영우(嶺右) 각처에도 편지를 보냈다. 이때에 선생은 진안(鎭安)의 촌가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거처하는 집 지붕 위에 흰 기운이 두 번이나 하늘에 뻗쳐서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윤4월 초하루는 정묘 13일(기묘)에 태인(泰仁)에 머무르면서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알하고 여러 문생들을 거느리고 강회(講會)를 하고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疏)를 올렸다. 상소문의 대략에,
“신이 생각건대, 옛날의 인신(人臣)으로 나라가 망하려는 때를 당하여, 나라를 떠난 사람이 있으니 상(商) 나라 미자(微子)가 그러하며, 죽은 사람이 있으니 명(明) 나라 태학사(太學士) 범경문(范景文) 등 40여 인이 그들이며, 뜻을 국권 회복에 두어 거의하여 적을 토벌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있으니, 한(漢) 나라 책의(翟義)와 송(宋) 나라의 문천상(文天祥)이 이들입니다. 신은 불행히도 오늘날까지 살아서 이러한 변을 보았는데, 이미 떠나갈 곳과 의리(義理)가 없으니, 오직 입궐하여 소를 올리고 폐하(陛下) 앞에서 머리를 부수어 스스로 죽을 뿐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하실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니 공연한 헛소리로 떠드는 것이 다만 실상이 없는 글이 될 것이며 또 인심이 아직도 국가를 잊지 않음을 보았으니 스스로 헛되이 죽는 것도 경솔한 행동이옵기에, 참고 견디면서 약간의 동지와 함께 책의(翟義)ㆍ문천상(文天祥)이 의병을 일으킨 것과 같은 일을 계획한 지 4, 5개월이 되었습니다. 다만, 신은 본디 재능과 지모(智謀)가 없고 더구나 늙고 병들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모의하는 즈음에 형세가 자유롭지 못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니, 이 때문에 시일이 늦어짐을 면하지 못하여 앉은 채로 세월만 허비하였습니다. 지금 이 계획이 조금 정하여졌고 인사(人士)도 조금 모여, 이달 13일에 전(前) 낙안 군수(樂安郡守) 신(臣) 임병찬(林炳瓚)에게 먼저 의기(義旗)를 세워서 동지들을 권장하고 격려하여 차례로 북상하게 하였습니다. 이등박문(伊藤博文)ㆍ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등의 왜적들을 부르고, 각국의 공사ㆍ영사와 우리 정부의 제신(諸臣)들을 한자리에 모이도록 하여 담판을 열어서 작년 10월의 늑약(勒約)을 거두어 취소하고, 각부(部)에 있는 고문관(顧問官)을 돌려보내고, 우리의 국권을 침탈(侵奪)하고 우리 생민(生民)을 해롭게 하는 전후의 모든 늑약은 모조리 만국의 공론에 회부하여, 제거할 것은 제거하고 고칠 것은 고쳐서 국가는 자주의 권리를 잃지 않고, 생민은 어육(魚肉)의 화를 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본시 힘과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민중을 움직여서 힘센 적과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처지에서 한때의 목숨을 다투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하늘이 재앙을 뉘우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들에게 짓밟히는 화를 당한다면, 신도 달게 죽음을 받아 여귀(厲鬼)가 되어 원수를 말끔히 쓸어버릴 것을 기약하며, 그들과는 천지 사이에서 함께 살지 않겠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으로 그들의 노예되기를 좋아하여 대의(大義)를 원수처럼 여기고, 앞을 다투어 역도(逆徒)라는 이름을 씌워 훼방하는 자는 신이 진실로 불쌍히 여길 겨를조차 없습니다.”
하였다. ○ 선생은 남하하여 글로 영남과 호남 각처에 통고하여 모여서 거사를 논의하게 하였으나, 평소에 큰소리를 잘하고 서로 함께 약속한 사람들도 모두 두려워서 피하고 선뜻 오지 않고, 다만 문인 10여 명과 주야로 경영할 뿐이었다. 그러나 병기와 군량이 하나도 갖추어진 것이 없어서, 임병찬(林炳瓚)은 가을을 기다려 거사하려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 나이가 얼마 남지 않았는 데다가 국사는 날로 급하니, 이처럼 시일을 늦출 바에야 도리어 궁궐에 달려 들어가서 죽는 것이 더 낫겠소.”
라고 말하고, 마침내 즉시 거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날 태인(泰仁)에 도착하여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알하였다. 여러 문생들을 모아서 강(講)을 마치고, 선생이 가운데에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왜적이 나라를 도둑질하고 역신(逆臣)이 장난을 하여, 5백 년 종사(宗社)와 삼천리 강토가 이미 망할 처지에 이르렀다. 임금은 우공(寓公)의 욕을 면하지 못하시고, 생민은 모두 어육의 참화에 빠졌으니, 나는 구신(舊臣)의 한 사람으로 정말로 차마 볼 수가 없소. 종사와 생민의 화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힘을 헤아리지 않고 대의를 천하에 펴고자 하니 성패와 이해는 예견할 수는 없으나, 진실로 내가 전심(專心)으로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생각하고 살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천지신명이 도와서라도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소. 나와 종유(從遊)하는 제군은 나와 생사를 같이할 수 있겠소?”
하자, 문생들은 모두 좋다고 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비상(非常)한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비상한 뜻을 두어야 하고, 또 군사(軍事)에 종사하는 일은 사지(死地)이므로 쉽게 말할 수가 없으니, 제군은 다시 생각을 더하여 후회하지 말도록 하오.”
하니, 문생들은 모두 죽음으로 명령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과 한자리에 모인 사람 80여 명이 향교에 들어가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할 뜻을 선성(先聖)에게 고유하고, 곧이어 고을의 부로(父老)를 불러 대의를 일깨우니, 고을 안이 모두 기꺼이 호응하였다. 흥덕(興德)의 선비 고용진(高龍鎭) 석진(石鎭)의 형 은 포사(砲士) 강종회(姜鍾會) 등 30여 명을 거느리고 군세(軍勢)를 도왔다. 드디어 정읍(井邑)ㆍ순창(淳昌)ㆍ곡성(谷城)에서 군사를 모으니, 4, 5일 동안에 원근에서 부의(赴義)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고, 군량과 병기도 대략 갖추어졌다. 그리하여 임병찬(林炳瓚)ㆍ김기술(金箕述)ㆍ유종규(柳種奎)ㆍ김재귀(金在龜)ㆍ강종회(姜鍾會)ㆍ이동주(李東柱)ㆍ이용길(李容吉)ㆍ손종궁(孫鍾弓)ㆍ정시해(鄭時海)ㆍ임상순(林相淳)ㆍ임병인(林炳仁)ㆍ송윤성(宋允性)ㆍ임병대(林炳大)ㆍ이도순(李道淳)ㆍ최종달(崔鍾達)ㆍ신인구(申仁求)에게 명하여 여러 임무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 ○ 격문(檄文)을 여러 군(郡)에 급히 보내었다. 격문에 이르기를,
“난적(亂賊)의 변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을까마는 어느 것이 오늘의 역괴(逆魁)와 같았으며, 이적(夷狄)의 화가 어느 나라인들 있지 않았을까마는 어느 것이 오늘날과 같았겠는가. 즉시 거의(擧義)할 것은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생각건대, 우리 조선은 기자(箕子)의 옛 강토이며 요(堯)의 동쪽 번방(藩邦)으로서, 태조(太祖) 이래로 여러 성군(聖君)이 대를 이어 공자의 도를 숭상하고 여러 현인이 번갈아 나서, 임금과 신하가 그 도리를 다하여 이륜(彛倫)이 돈독하게 펴졌으며 지위가 높은 이를 높이고 귀한 이를 귀히 여겼다. 그리하여 예절과 문물이 널리 밝아져 집집마다 인의(仁義)와 효제(孝悌)를 행하여, 모두 유학을 숭상하고 도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녔다. 신(信)을 갑옷으로 삼고 의(義)를 방패로 삼아서, 모두가 윗사람을 친애(親愛)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을 뜻이 있어서, 민속(民俗)이 밝고 여유가 있었으니,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융성한 시대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문물(文物)이 발전하여 오랫동안 소화(小華)의 아름다움으로 불리었다. 한번 사교(邪敎)가 중국에 들어오면서부터 드디어 온 천하가 비린내로 더럽혀졌으나, 홀로 우리나라는 동쪽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편토(片土)를 건정(乾淨)하게 보전할 수 있었으니, 박괘(剝卦)의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 하겠다. 그러나 누가 장차 화가 닥쳐서 다만 머리 위의 상투가 있는 것으로써 홀로 천하의 모든 화살의 과녁이 될 것을 생각하였겠는가. 아, 저 왜적은 실로 우리나라 백세의 원수이니, 임진란에 두 능의 화[二陵之禍]를 차마 말하겠으며,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은 다만 외적이 엿보는 계기를 만들었고, 맹세한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협박의 근심이 바로 이르렀다. 우리의 궁금(宮禁)을 짓밟고, 우리의 도망자를 품에 안아 기르고, 우리의 인륜 도덕을 파괴하고, 우리의 의관을 찢어 버리고, 우리의 국모를 시해(弑害)하고, 우리 임금의 머리를 강제로 깎고, 우리의 대관(大官)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민중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 우리의 무덤을 파고 집을 헐고, 우리의 강토를 점령하여 빼앗고, 우리 국민의 목숨이 달려 있는 자원은 무엇이든 그들이 장악(掌握)한 물건이 아닌가. 이제는 그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갈수록 욕심을 낸다. 아, 지난 10월의 소행은 진실로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 하룻밤 사이에 종이 조각에 도장을 억지로 찍어서 5백 년 종사(宗社)가 드디어 망하니, 천지의 신이 놀라고 조종(祖宗)의 영혼이 슬퍼한다. 나라를 들어서 원수에게 준 역적 지용(址鎔)은 실로 우리 동방의 영원한 원수요, 그 임금을 시역(弑逆)하고 남의 임금을 범한 괴수 이등(伊藤)은 천하의 열국(列國)이 함께 토벌하여야 한다. 누대(累代)의 세신(世臣)은 바로 이때가 자방(子房)처럼 원수를 갚을 때인데, 왕실의 지친(至親)은 어찌 북지왕(北地王)의 성(城)을 등지고 싸우자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는가? 수실(秀實)의 홀(笏)은 마땅히 주자(朱泚)의 얼굴을 쳐야 했고,고경(杲卿)의 지위가 어찌 녹산(祿山)이 준 것을 영광으로 여겼겠는가. 변을 만난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으나, 적을 토벌하는 자가 어찌 한 사람도 없는가. 임금이 망하였는데 신하가 어찌 홀로 살 수 있으며, 나라가 패망하였는데 백성이 어찌 홀로 보전될 수 있겠는가. 불타는 대청 위의 참새와 가마솥에 든 생선은 함께 망할 뿐이니 어찌 한바탕 싸우지 않겠는가. 또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찌 죽어서 충의(忠義)의 넋이 되는 것만 하겠는가? 최익현(崔益鉉)은, 나이는 죽음이 가까웠고 병은 깊고 재능과 힘은 미약하여 작은 정성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여, 비록 사로잡히는 수치를 당하였으나 숨이 아직 있으니 보복할 뜻을 잊기 어렵다. 그러나 큰 집[大廈]이 무너지는데 어찌 한 개의 나무가 지탱할 것이며, 맹진(孟津)이 넘치는데는 한 줌의 흙으로 막지 못한다. 시중(市中)에 들어가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라.’고 하면 반드시 시중 사람이 왕손(王孫)에게 따랐고,서경(西京)에서 거병(擧兵)하니 누가 책의(翟義)를 도리어 쳤겠는가. 모든 우리의 종실ㆍ대신ㆍ공경(公卿)ㆍ문무(文武)ㆍ사농공상ㆍ서리ㆍ하인들까지도 무기를 가다듬고 마음과 힘을 한군데로 모아서, 역당(逆黨)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깔고 자며, 원수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씨를 없애고 그 소굴을 두들겨 부수자. 천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으니, 국세를 반석(盤石) 위에 올려놓고, 위험한 고비를 바꾸어 편안하게 만들어서 인류를 도탄(塗炭)에서 건져 내자. 믿는 바는 군사(軍士)이니 다만 적이 힘이 센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히 이에 격문을 돌리니 함께 나라를 구하기에 힘쓰자.”
하였다. ○ 일본 정부에 글을 부쳐서 신의를 저버린 16가지 죄를 따졌다. 그 대략에,
“아, 나라에 충성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신(信)을 지키고 의(義)를 밝히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사람이 성이 없으면 반드시 죽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반드시 망한다. 이것은 다만 완고(頑固)한 늙은이의 평범한 말이 아니다. 또한 개화하여 경쟁하는 열국(列國)이라도 이것을 버리면, 아마도 세계 안에 자립하지 못할 것이다. 병자년(1876, 고종13)에 우리 대관(大官) 신헌(申櫶)과 윤자승(尹滋承)이 귀국 사신 흑전청륭(黑田淸隆)ㆍ정상형(井上馨)과 강화부(江華府)에 모여서 약정한 제1조에 ‘조선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이 뒤 화친(和親)의 실상을 나타내려면 모름지기 피차가 서로 동등한 예로써 서로 대우해야 한다. 그러므로 추호도 침범하거나 시기하는 일이 없어야 하니, 먼저 예전부터 외교하던 실정을 저해하는 근심을 가져올 모든 예규(例規)를 모두 혁파하여 영원히 신의를 지킨다.’고 하였다. 을미년(1895, 고종32)에 청국(淸國) 사신 이홍장(李鴻章)과 귀국 사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마관(馬關)에 모여서 약정한 제1조에 ‘조선의 독립과 자주를 양국이 분명히 인정하며 추호도 침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명치(明治) 37년(1904, 광무 8)의 일본과 러시아의 선전 조서(宣戰詔書)에도 ‘한청(韓淸) 양국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구절이 있다. 또 귀국이 러시아에 대하여 국제 공법을 위반하였다고 열국(列國)에 통첩한 변명서에도 ‘원래 한국의 독립과 토지ㆍ주권을 보존하며 유지시키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사신을 서구(西歐)에 파견하여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 데도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전후 30년 동안에 귀국의 군신(君臣)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맹세한 바와 천하에 성명(聲明)한 것이, 우리의 토지와 인민을 침범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독립과 자주를 해치지 않는 것을 책임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천하의 열국(列國)도 한일(韓日) 두 나라는 순치(唇齒)의 나라로 서로를 보호하고 유지하며 서로 침해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귀국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흉포(凶暴)를 행하는 방법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무엇이든지 신의를 배반하였다. 전에는 ‘조선은 독립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保有)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우리를 노예로 삼는가. 전에 러시아와 전쟁을 할 때, ‘한국의 독립과 토지ㆍ주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는데, 지금 한국의 독립과 토지ㆍ주권을 빼앗아 가는 것은 어째서인가. 전에는 서로 간절하게 침범하거나 시기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오로지 침탈(侵奪)을 일삼아서 우리 2천만 국민의 복수심을 일으키게 하여 앉을 때 동쪽을 향하지 않게 만드는가. 전에는 조약을 변경할 필요없이 영원히 신의를 지키고 화평을 유지하는 바탕으로 삼았었는데, 지금 조약을 변경하여 신의를 저버리고 화평을 깨뜨려서 하늘을 속이고 신(神)을 속였으며, 또 천하의 열국(列國)을 속였다. 이유를 들어 증명하겠다. 갑신년(1884, 고종21)에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이 난을 일으켜 우리 황제를 강제로 옮기고 우리의 재상을 살육하였으니, 신의를 배반하고 저버린 죄의 첫째이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대조규개(大鳥圭介)가 난을 일으켜 우리의 궁궐을 불태우고 약탈하였으며 우리의 재물을 탈취하고 우리의 전장 문물(典章文物)을 훼손시켜 버리면서 우리나라를 독립시킨다고 일컫는데, 훗날에 빼앗고 점령할 터전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둘째이다. 을미년(1895, 고종32)에 삼포오루(三浦梧樓)가 변란을 일으켜 우리의 왕후를 시해하였으니 만고에 없는 대역죄가 되는데 오로지 도망하는 역적을 덮어 주고 감싸기를 일삼아 한 놈도 잡아 보내지 않았으니, 대역무도(大逆無道)하였다. 이것은 다만 신의를 배반하였을 뿐만 아니니, 죄의 셋째이다. 임권조(林權助)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가 우리나라에 와서 주재하면서 협박하고 겁탈한 일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각처에 철로를 부설(敷設)한 것이니, 경의선(京義線) 철로는 처음부터 통고도 없이 마음대로 한 짓이고, 어채(漁採 고기 잡이)와 삼포(蔘圃)의 이익, 광산과 항해의 권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크나큰 한 국가의 재원(財源)의 바탕인데 남김없이 빼앗아 갔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넷째이다. 군사(軍事)를 핑계하여 토지를 강점하며 인민을 침해하고, 무덤을 파내 버리며, 가옥을 헐어 버린 것은 그 수를 알지 못한다. 정부에 권고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비루(鄙陋)하고 패역(悖逆)한 무리들을 지지하여 벼슬을 주도록 강요하였고, 뇌물을 드러내 놓고 받아서 더러운 소문이 낭자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다섯째이다. 철도, 토지, 군율(軍律)이라는 것은, 용병(用兵)할 때에는 군용(軍用)을 빙자하여 사용할 수 있으나, 지금 전쟁이 이미 끝났는데 철도는 어찌하여 돌려줄 생각을 않으며, 토지는 전처럼 강점하고 군율을 전처럼 시행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여섯째이다. 우리의 역적 이지용(李址鎔)을 꾀어 의정서(議定書)를 강제로 만들어서 우리의 국권을 바꾸게 하고는, 그 속에 ‘대한 독립’과 ‘영토 보전’이라 말한 것은 제쳐 놓고 논의조차 하지 않았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일곱째이다. 사대부와 유생이 전후로 상소를 올린 것은, 모두 우리 임금에게 아뢰고 우리나라에 충성한 것인데, 바로 포박(捕縛)하여 오랫동안 가두어 두었고, 심지어는 죽이거나 석방하지 아니한다. 이것은 충언(忠言)하는 입을 막고 공론(公論)을 억제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국세가 혹 떨칠까 두려워하는 것이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여덟째이다. 우리의 동학(東學)이나 도적의 무리들과 같은 패역(悖逆)한 자를 꾀어서 일진회(一進會)라고 이름하고 그들을 창귀(倀鬼)로 만들어서 선언서(宣言書)를 만들게 해서 민론(民論)이라고 빙자하고 국민의 의로운 일로 여기며, 보안회(保安會)와 유약소(儒約所) 같은 것은 치안을 방해한다고 갖은 방법으로 저해하여 포박하고 구금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아홉째이다. 역부(役夫)를 강제로 모집하여 소에게 채찍질하고 돼지를 몰아치듯 하면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슬리면 풀이나 왕골을 베듯 죽였고 또 어리석은 국민을 꾀어 모아서 멕시코[墨西哥]로 몰래 팔아넘겨서 우리 국민의 부자 형제가 서러움을 당해도 하소연할 수 없고, 학대를 받아 거의 죽게 되어도 돌아올 수 없게 하였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째이다. 전우(電郵 전보사(電報司)ㆍ우체사(郵遞司))의 두 기관을 강탈하여 통신기관을 장악하였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한째이다. 각부(部)에 고문관을 강제로 두고 후한 봉록을 먹으면서, 오로지 우리를 망하게 하고 우리를 전복시키기를 일삼는데, 군경(軍警)의 경비를 감액하고 재부(財賦)를 탈취함과 같은 것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둘째이다. 차관(借款)을 한두 번 억지로 쓰게 하고 명목은 재정 정리라고 하면서 새로 만든 돈의 색깔과 무게가 예전 돈과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돈의 수효만 갑절로 할 뿐이니, 스스로 많은 이익을 취하여 일국의 재정을 고갈(枯渴)시켰으며, 또 유통되지 못하는 종이 조각을 원위화(元位貨)라고 억지로 이름을 붙였다. 또 차관은 이름뿐이고 미리 이식(利息)을 취하였고, 고빙(雇聘)은 이름뿐이고 미리 후한 봉록을 먹으면서 우리의 정혈(精血)을 빨아먹고 썩은 껍질만 남기려고 힘쓰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셋째이다. 작년 10월 21일 밤에 박문(博文)ㆍ권조(權助)ㆍ호도(好道) 등이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 안팎으로 포위하고 정부를 위협하여 억지로 조약을 만들고, 스스로 가부(可否)를 결정하였으며 인장을 빼앗아서 마음대로 찍고는 우리나라 외교를 옮겨 통감(統監)에 설치하여 우리의 자주 독립 권리를 하루아침에 잃게 하고, 오히려 위협이라는 여론을 숨겨서 만국의 이목(耳目)을 호도(糊塗)하려고 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넷째이다. 처음에는 외교의 감독이라고만 말하더니, 마침내는 한 나라의 정법(政法)을 전담하여 관리하고 거기에 따르는 관리가 수없이 와서, 우리의 손도 까딱 못하게 하며, 걸핏하면 곧 공갈(恐喝)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다섯째이다. 요사이 또 이민 조례(移民條例)를 만들어서 승인하도록 강요하는데, 인종을 바꾸는 흉칙한 계획으로서 우리 국민을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신의를 배반한 천지도 용납하지 못할 극악한 대죄의 열여섯째이다. 아, 귀국이 신의를 저버린 죄가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겠는가. 이것은 그 대강을 들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시험 삼아 이 열 대여섯 가지의 죄로써 강화(江華)ㆍ마관(馬關) 등의 조약, 열국에게 보낸 통첩과 전쟁을 설명한 여러 문서에 비추어 보면 반복 무상함이 여우와 원숭이가 속임수를 부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 한국의 수천만 인심이 과연 귀국에 대하여 유감없이 이것이 우리를 지지하고 우리를 공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마음 아파하고 골치를 앓으면서 삼호(三戶)의 말을 외치며 귀국의 온 섬[全島]을 한 번 짓밟고자 맹세할 것인가. 진실로 귀국을 위한 계책은 빨리 근본을 되찾는 것밖에 없으며,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은 또 신(信)을 지키고 의(義)를 밝히는 것밖에 없다. 신을 지키고 의를 밝히는 일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빨리 이 글을 귀황제에게 상주(上奏)하여 이상에서 열거한 열여섯 가지 큰 죄를 모두 회개할 것이니, 통감(統監)을 철수하고, 고문과 사령관을 소환하고, 다시 충신(忠信)한 사람을 파견하여 공사(公使)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시 이것으로 각국에 사죄하고, 우리의 독립과 자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 양국이 진정 영원히 서로 편안하게 된다면, 귀국은 거의 안전의 복을 누릴 것이고, 동양의 대국(大局)도 유지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을 주는 것이 천도(天道)의 분명한 이치인데, 지금 귀국이 하는 짓은 제 민왕(齊湣王)과 송 언왕(宋偃王)과 다를 것이 거의 없으니, 설사 이후에 화패(禍敗)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지 않다 하더라도 귀국이 어찌 스스로 망하는 것을 면하겠는가? 나는 시세(時勢)는 모르나 국가에 충성하고 남을 사랑하며, 신을 지키고 의를 밝히는 도리를 강론함에는 익숙하다. 국가와 인민의 화가 망극한 형편에 이르렀음을 눈으로 보고 오직 죽을 자리를 얻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긴 지 오래되었다. 불행히 지난봄에 욕을 당하고도 죽지 못하였고, 또 작년 10월 21일의 변을 당하였으니, 타국의 노예가 되어 구차하게 천지 사이에서 생을 탐낼 의리가 없다. 그래서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죽을 것을 결의하고 병든 몸으로 상경하여 박문(博文)ㆍ호도(好道) 등과 한 번 만나서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하고 죽으려고 한다. 사민(士民)으로 함께 죽기를 원하는 자가 또 약간 있어서, 먼저 마음을 피로(披露)하여 이 글을 만들어 귀국의 공사관에 보내어 머지않아 귀국의 정부에 전달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를 위한 계획일 뿐만 아니라 귀국을 위한 계책이며, 귀국을 위한 계책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양 전국(全局)을 위한 계책이니 살피기 바란다.”
하였다. ○ 14일(경진)에 행군하여 정읍(井邑)에 도착하여 내장사(內藏寺)에서 잤다. ○ 15일(신사)에 순창(淳昌)에 도착하여 구암사(龜巖寺)에 주둔하였다. ○ 17일(계미)에 곡성(谷城)에 도착하여 글을 지어서 호남의 각 고을에 고하였다. ○ 19일(을유)에 군사를 이끌고 순창으로 돌아갔다. 이때에 첩자가 와서 왜병 10여 명이 방금 군아(軍衙)에 들어가서 외인을 물리치고 군수 이건용(李建鎔)과 밀담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선생은 임병찬(林炳瓚)에게 일부의 병사를 거느리고 샛길로 가서 습격하도록 명하였다. 왜병이 기미를 알고 크게 놀라 빠져나가 산을 기어올라 도망쳤다. 임병찬이 뒤쫓았으나 따르지 못하고 왜병이 버린 문서를 얻었는데, 그것은 전주 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이건용에게 왜병을 인도하여 의병을 모해(謀害)하라는 비밀 문서였다. 선생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것들은 정말 개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다.”
하였다. 이건용이 마침 와서 뵈니, 선생은 그 편지를 던지면서 말하기를,
“너는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러 왔느냐? 나의 거사는 다만 국가를 위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것인데, 너는 종실의 지친으로 도리어 나를 해치려고 하니 너는 왜적보다도 더한 놈이다. 나는 지금 너를 베어서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는 무리들을 깨우치려고 하니, 너는 죽어도 나를 원망하지 말라.”
하니, 이건용은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기를,
“잠깐 동안 겁을 집어먹고 임시 모면을 하려고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사람이오니 만일 대감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용서하시면 정성을 다하여 명령을 받들어 머리가 부러져도 후회하지 않고 목숨을 살려 주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용서하고 자리에 앉게 한 뒤에 타이르기를,
“그대는 왕족 출신이고 나는 유신(遺臣)으로서 각기 의리와 분수를 다하여 함께 왕실을 도와야 한다. 성공하면 국가의 행복이고, 실패하여도 잃을 것이 없으니, 충의의 혼이 되어서 두루 만국을 비추고 꽃다운 이름이 멀리 천추에 끼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원수들에게 아첨하여 구차하게 한때의 요행을 얻더라도, 필경은 서로 이끌고 망하는 비참한 일을 당하는 데 비하면 소득이 어느 것이 많겠는가.”
하니, 이건용은 눈물을 거두고 공손한 태도로 사죄하였다. 선생은 이건용이 지방관으로 형편을 익숙히 알고 있고, 또 그 정성을 인정하여 선봉장[前部]을 삼으니, 어떤 이가 충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건용이 본군(本郡)에 돌아가서 주둔하기를 청하므로 선생은 허락하였다. ○ 20일(병술) 전주 관찰사 한진창(韓鎭昌)과 순창 군수 이건용(李建鎔)이 왜병을 거느리고 와서 의병을 습격하니, 의병은 마침내 무너지고 의사(義士) 정시해(鄭時海)가 전사하였다. 새벽에 광주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사람을 시켜 칙서(勅書)와 고시(告示) 하나를 보내왔는데, 모두가 해산하라는 뜻의 명령이었다. 선생은 칙지(勅旨)를 받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이것은 오적(五賊)들이 상을 끼고 호령하는 수단이다. 설사 이것이 정말 왕명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할 수 있다면 옛사람도 왕명을 받지 아니한 의리가 있었거든 하물며 이것은 적신(賊臣)들이 속여서 만든 위명(僞命)임에랴.”
하고, 이 관찰에게 회답을 하였는데 대략은,
“모(某)가 이미 상소(上疏)하여 의병을 일으킨 연유를 아뢰었다. 상소가 만일 상께 도달하면 반드시 비답(批答)을 내릴 터이니, 비답을 받들어 진퇴할 뿐이지 지방관이 지휘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해가 오시(午時)가 되지 않았는데 왜병이 군(郡)의 동북쪽으로부터 포위하여 온다고 알리는 자가 있었다. 선생이 스스로 나가 싸우고자 하니, 좌우에서 번갈아가면서,
“선생께 만약 불행이 있다면, 오늘날의 국가와 인민은 마침내 누구를 믿겠습니까?”
하며 말렸으나, 선생은 듣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사민(士民)들이 모두 옷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에워싸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임병찬(林炳瓚)에게 2대의 기병(奇兵)을 설치하여 맞아 싸우도록 명하였다. 얼마 후에 또 그들이 왜병이 아니라 전주(全州)와 남원(南原) 고을의 진위대(鎭衛隊)임을 알려 왔다. 선생은 말하기를,
“이들이 왜병이라면 마땅히 사전(死戰)으로 결판을 내어야 하나, 이들이 진위대군이면 우리가 우리를 서로 공격하는 것이니, 어찌 차마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하고, 임병찬을 불러들여서 싸우지 말도록 하고, 사람을 보내어 양대에 편지를 보내어,
“너희들이 왜군이라면 당연히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이나, 싸우지 않는 것은 동포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나는 차마 할 수 없어서이니 즉시 물러가라.”
하였으나, 양 진위대군은 모두 듣지 않고, 전주병이 먼저 포를 쏘아 포환이 비 오듯 쏟아지니, 의병 1천여 명이 모두 새나 짐승처럼 흩어졌다. 이윽고 정시해(鄭時海)가 갑자기 탄환을 맞고 죽었는데 막 죽으려고 할 때에 선생을 부르면서,
“시해가 왜적 한 놈도 죽이지 못하고 죽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악귀가 되어서 선생이 적을 죽이는 것을 돕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선생이 그를 붙들고 통곡하니 군중들도 역시 통곡하였다. 선생은 형세가 이미 틀어진 것을 알고 연청(掾廳)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좌우에게 이르기를,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니, 제군은 모두 가라.”
하자, 의사 중 선생을 따르고자 하는 자가 21명이 있었다. 이때에 두 대병(隊兵)은 선생이 물러나지 않을 것을 알고 합군(合軍)하여 포위하고 일제히 총을 쏘았다. 이때에 선생은 임병찬에게 명령하기를,
“이제 우리들은 반드시 모두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표지가 없이 서로 포개어 죽으면 누구가 누구인지 알겠는가? 뿔뿔이 흩어지지 말고 죽음을 명백하게 해야 하니, 성명 한 통씩을 벽에 써 붙이고 각자 자신의 이름 밑에 앉아라.”
하고, 또 말하기를,
“고인은 포위된 성 안에 있으면서도 관례(冠禮)를 행하여 지하에 있는 조상을 뵈려고 하였으니, 지금 제군은 의관을 정제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자, 사람들이 모두 행낭을 풀어서 도포를 꺼내어 입고, 갓끈을 다시 매고 공수(拱手)하고 벽을 등지고 꿇어앉았다. 이때에 유탄(流彈)이 어지럽게 날아들자, 여러 사람들이 유탄이 선생을 범할까 염려하여 모두 빙 둘러 무릎을 꿇고 선생을 가리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선생은 급히 말리면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이럴 필요가 없다. 각각 열좌(列坐)하여 바른 자세를 하고 죽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자, 사람들이 다시 열좌로 돌아가니, 갑자기 폭풍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천둥이 요란하고 번개가 번쩍이었다. 이날 전주부 희현당(希賢堂)이 까닭없이 무너지니 전주 사람들은 모두 선생을 위하여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양대의 군사는 깜짝 놀라서 총을 버리고 땅에 엎드렸다. 이에 포성은 그쳤으나 양대병은 사면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때에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밤은 깜깜한데 촛불은 없고 시신은 방 가운데에 있어서 피가 흥건한데, 여러 사람들은 피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앉아 있었다. 막하사(幕下士) 이도순(李道淳)ㆍ임상순(林相淳)이 마침 밖에 있다가 죽을 쑤고 술을 데워서 촛불을 가지고 왔다. 방 안을 점검(點檢)하니, 21명에 9명은 이미 간 곳을 몰랐고 다만 임병찬(林炳瓚)ㆍ고석진(高石鎭)ㆍ김기술(金箕述)ㆍ문달환(文達煥)ㆍ임현주(林顯周)ㆍ유종규(柳種奎)ㆍ조우식(趙愚植)ㆍ조영선(趙泳善)ㆍ최제학(崔濟學)ㆍ나기덕(羅基德)ㆍ이용길(李容吉)ㆍ유해용(柳海瑢) 12명이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 유종규는 정시해의 장사 때문에 나가고, 양재해(梁在海)는 앞서 선생의 명령으로 밖에 나가 정탐하다가, 선생이 포위되었음을 듣고 달려오니 다시 12명이 되었다. 문인 고제만(高濟萬)은 시종 힘을 다하였는데, 마침 정탐하기 위하여 밖에 나가 있다가 미처 오지 못하였다. ○ 이때부터 대병(隊兵)들은 밖에서 굳게 지키고 많은 왜병이 몰려 들어와 밤이면 총칼로 위협하며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선생은 태연 자약하게 앉아서,
“옛날 사람도 배 안에서 《대학》을 읽고 옥중에서 《상서(尙書)》를 읽은 예가 있으니 각각 한 책을 외라.”
하고 다시 정제하여 앉아 먼저 《맹자(孟子)》의 호연장(浩然章)과 웅어장(熊魚章)을 외니 제생도 따라 차례로 한 편씩을 외었다. 이때에 고을 사람 임창섭(林昌燮)과 백정 경철(景哲)이 포위를 헤치고 들어와서 “대감의 충의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대감을 모시고 군무에 종사하다 죽기를 원한다.”고 아뢰었다. 고을 사람 신인구(申仁求)와 노기(老妓) 하엽(荷葉)이 각각 육미(肉糜)와 주면(酒麵)을 문지기에게 주면서 “나는 죽어도 이것을 드려야 한다.”고 하니, 문지기도 의롭게 여겼다. ○ 23일(기축)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날 전주 소대장 김가(金哥)가 와서 칙서에 서울로 압송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아뢰었다. 선생은,
하고 꾸짖었다. 김가는 못 들은 척하고, 선생의 찬 칼, 염낭과 몸에 지닌 물건을 모두 끌러 내고 왜병 10여 놈이 대병과 함께 길을 재촉하여 떠났다. 선생과 임병찬은 가마를 타고 그 나머지 11명은 함께 결박되어 가니, 이때에 햇무리가 세 겹으로 둘렀으며 보는 사람들이 비분하여 견디지 못하였다. 선생은 노상에서 매일 밤 이소경(離騷經)ㆍ출사표(出師表)ㆍ원도(原道) 등과 《중용》ㆍ《대학》 등의 여러 책을 외며,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 길에 그들이 감히 죽이지는 못하고 바다를 건너게 될 것 같다.”
하였다. 이때에 안의(安義) 사람 이완발(李完發)이 노상에서 와 뵙고 통곡하며 따라오니, 왜병이 난타하나 이완발은 죽음을 무릅쓰고 가지 않다가 구속되어, 전주에 갇혔다가 5, 6일 만에 석방되었다. ○ 27일(계사)에 왜의 사령부(司令部)에 구금되었다. 장자 최영조(崔永祚)와 종질 최영설(崔永卨)이 순창(淳昌)의 소식을 듣고 최전구(崔銓九)ㆍ이명구(李命九)와 일가 사람 최영호(崔永晧)와 함께 달려와 진잠(鎭岑)의 길에서 뵈니, 왜병이 칼을 휘둘러 쫓으며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오시(午時)에 공주(公州)에 도착하니, 대전의 왜병이 윤차(輪車)에 선생을 태우고 저녁에 숭례문(崇禮門) 밖에 도착하였다. 왜의 헌병대장 소산삼기(小山三己)가 1백여 명의 왜병과 통역 박종길(朴宗吉)을 대동하고 와서 선생을 에워싸고 사령부에 갈 것을 청하였다. 선생은 땅에 버티고 서서 말하기를,
“나는 칙명에 의해서 온 줄 알았는데, 저들 왜놈은 무엇하는 놈인가. 내가 구금된다면 당연히 대한의 법관에 의하여 구금될 것이지, 대한의 최모(崔某)가 어찌 왜놈 사령부를 알겠느냐.”
하고 호통쳤다. 왜병들이 박종길에게 눈짓하여 부액(扶腋)하여 인력거(人力車)에 태우고 12명도 뒤따라서 곧바로 사령부로 향하였다. 문에 들어서자 선생은 또 땅에 주저앉아,
“여기가 법부(法部)인가, 군부(軍部)인가.”
하고 호통쳤다. 헌병이 부축하여 대청 위에 올라가서 북쪽 감방에 수감하니, 을사년 봄에 구금되었을 때에 거처하던 곳이었다. 선생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늙어서 제비처럼 거듭 옛집을 찾았구나.”
하였다. 왜병이 12명을 협박하여 도포ㆍ갓ㆍ망건ㆍ버선ㆍ갓끈 등속을 모두 벗기어 차례로 구속하고, 또 선생의 갓과 망건을 빼앗으려고 하였으나 선생이 꾸짖으니 왜놈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홍주(洪州) 의병 80여 명이 먼저 이곳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헌병이 머리 깎는 칼을 가지고 와서 막 강제로 깎으려고 할 때에 선생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깜짝 놀라며 최 대감이 왔다고 하면서 달아났다. 이 때문에 머리를 깎이는 곤욕을 면하여, 모두 우리들이 머리를 깎이지 않고 보전한 것은 선생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였다. 이날 저녁에 밥이 들어오자 선생은,
“내가 어찌 왜놈의 음식을 먹겠느냐?”
하고 호통쳤다. 자질들이 밖에서 장만하여 음식을 드리려고 하였으나 방해를 받아 올릴 수 없었는데 사흘이 되어도 한 잔의 물도 들지 않으니, 왜가 비로소 겁이 나서 자질들이 바치는 음식을 들여보내도록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선생은 낮에는 《주역》을 보고 밤에는 반드시 글을 외니 음향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심문하는 곳에 나아가서는 큰 목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뜻한 바와 일한 바는 상소(上疏)와 격문(檄文)을 너희 정부에 보낸 글에 실려 있다. 어찌 다시 묻느냐?”
하였다. 그리하여 큰소리로 박문(博文)ㆍ호도(好道) 등을 부르면서 개돼지처럼 꾸짖으며 죄역(罪逆)을 따졌고, 혹은 의자와 탁자를 들어 쳐서 부수어 집이 쩡쩡 울리니, 왜들이 모두 묵묵히 피하여 숨었다. 이같이 교접(交接)하기 전후 세 번이었고, 12인도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하고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한 사람도 굴하지 않으니, 왜도 역시 선생에게 경복(敬服)하여, 때로 문밖에 와서 자물쇠를 열고 서늘한 바람도 쐬게 하며, 혹은 차를 드리거나 담배를 담아 드리기도 하였고, 선생이 거처하는 곳을 지날 때마다 꼭 절을 하고 갔다. 헌병에 가라상(柯羅祥)이란 자가 있었는데 희우시(喜雨詩)를 지어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면서,
“하늘이 여러분의 충성에 감동하여 때 아닌 비를 내리니, 이것은 하늘의 눈물이다.”
하였다. 이때에 최영설(崔永卨)도 10여 일 동안 구금되어,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서 결국 무엇을 하려고 하였는가에 대하여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으나, 최영설도 상소문과 일본 정부에 보낸 글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7월 초하루는 병신 8일(계묘)에 임병찬(林炳瓚)과 압송되어, 바다를 건너 대마도(對馬島) 엄원(嚴原)에 도착하여 위수영(衛戍營) 경비대 안에 구금되었다. 이에 앞서 6월 25일 왜의 두목이 선생과 임병찬 등을 이현(泥峴 진고개) 사령부(司令部)에 가게 하여 소위 선고서(宣告書)라는 것을 읽고 통역을 시켜서 설명하기를,
하였다. 읽기가 끝나자 모두 총총히 피해 버리니, 선생의 호통 소리를 꺼려서였다. 선생은 이때에 현기증이 도져서 읽는 것이 무슨 글인지를 몰랐다. 이날 새벽에 자질과 문인ㆍ빈객(賓客) 수십 인이 남대문 밖 정거장에 나왔는데, 왜 헌병 2명이 선생과 임병찬을 보호하여 이미 차를 탔다. 그래서 최영조(崔永祚)ㆍ최영설(崔永卨)ㆍ최영학(崔永學), 족손 최정식(崔貞植)ㆍ최만식(崔萬植), 최전구(崔銓九)ㆍ이승회(李承會)ㆍ최제태(崔濟泰)ㆍ임응철(林應喆)이 배행(陪行)하였고, 최영직(崔永稷)ㆍ안필호(安弼濩)ㆍ박규용(朴圭容)ㆍ윤태선(尹泰善)ㆍ윤항식(尹恒植)ㆍ이낙용(李洛用)ㆍ최봉소(崔鳳韶)ㆍ정한용(鄭瀚鎔)ㆍ조영가(趙泳嘉)ㆍ이광수(李光秀)ㆍ문달환(文達煥)ㆍ임현주(林顯周)ㆍ이용길(李容吉)ㆍ조우식(趙愚植)ㆍ조영선(趙泳善)ㆍ유해용(柳海瑢)은 차 앞에서 절을 하고 하직하며 실성하고 통곡하였다. 선생은 웃으면서,
“남자로 태어나면 사방에 뜻을 둔다. 해 돋는 동쪽의 산천이 볼만한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다만 여전히 몸이 자유롭지 못하여 나의 마음과 몸을 다하지 못할 것이 한스럽다. 또한 내가 처음 거사할 때에 어찌 조금이라도 요행을 바랐겠는가. 국가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백 년이 되었는데, 상란(喪亂) 이후에 대의(大義)를 부르짖고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담당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탱해 볼 생각으로 나의 직분을 다하였다. 마음 편하게 한번 죽는 것은 정말 인(仁)을 구하여 인(仁)을 얻는 것이니, 비록 오늘 머리가 잘리고 가슴에 구멍이 뚫려도 웃으면서 땅에 묻힐 것인데, 더구나 아직 살아 있음에랴. 제군이 나를 사랑하거든 마땅히 빨리 죽기를 바랄 것이고, 서로 한탄하고 애쓰면서 나의 부끄러운 마음을 가중시켜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선생은 차 안에서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지쳐서 기대는 일이 없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정력(定力)이 굳은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중로에 이르러 선생이 탄 차의 바퀴에서 불이 일어나서 다른 차로 옮겨 타고 동래(東萊) 초량(草梁)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어두웠다. 이윽고 헌병이 선생을 인도하여 배에 오르자 최영조 등이 부여잡고 따라가고자 했으나, 헌병은 사령부의 문서가 없다고 허락하지 않으니 모두가 통곡하면서 부두에서 하직하였다. 이때에 달빛은 희미하고 항구의 등불은 바다 위를 비추고 있었다. 기적이 한 번 울리자 배는 쏜살같이 가니, 다만 뱃머리의 등불이 물결 속에 출몰할 뿐이었다. 이튿날 초량 뒷봉우리에 올라서 대마도를 바라보니 운애(雲靄) 속에 한 조각 산 그림자가 숨은 듯 나타나는 듯하였는데 이때의 정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애간장을 끊는 듯하게 하였다고 한다. 배 안에서 헌병 가라상(柯羅祥)이 정성을 다하여 부호(扶護)하여 이튿날 진시(辰時)에 대마도에 닿아 배를 내렸다. 헌병은, 이 뱃길은 늘 풍랑으로 고생을 하는데 이번에는 이처럼 평온하게 항해하였으니, 실로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엄원(嚴原)의 잠업 교사(蠶業敎師) 집에 머무르니, 위수영(衛戍營) 경비대의 임시 관서[權署]이었다. 홍주(洪州)의 의사 9인이 이미 먼저 와서 이곳에 구금되어 있었으니, 곧 문인 이칙(李侙)ㆍ유준근(柳濬根)ㆍ안항식(安恒植)ㆍ이상두(李相斗)ㆍ최상집(崔相集)ㆍ신보균(申輔均)ㆍ신현두(申鉉斗)ㆍ남규진(南奎振)ㆍ문석환(文奭煥)이었다. ○ 입식(粒食)을 끊고 곧 유소(遺疏)를 임병찬(林炳瓚)에게 불러 주었다. 선생이 차 안에서 최영설과 대마도에 들어간 뒤의 처의(處義)할 방도를 상의하였다. 최영설이 말하기를,
“소 중랑(蘇中郞)과 홍 충선(洪忠宣)은 먼 옛날의 일이고, 청음(淸陰)과 삼학사(三學士)로 말한다면 저들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로 삼지 아니하였고 후현(後賢)도 흠잡지 아니하였으니, 오늘날이라 하더라도 처의함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또 감금된 사람의 식료품은 모두 본국 정부에서 지불한다고 들었으니,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나 과연 이와 같다면 더욱 꺼릴 것이 없습니다.”
하니, 선생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영설은 또 임병찬과도 그 의(義)를 말하였다. 경비 대장이 병정 4, 5명을 거느리고 와서 감금된 사람들을 줄 세우고, 어째서 장관(長官)에게 경례를 하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갓을 벗게 하였으나 사람들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대개 왜는 갓을 벗는 것을 예(禮)로 삼은 것이다. 대장은 말하기를,
“여러분은 일본의 음식을 먹으니, 마땅히 일본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갓을 벗으라고 하면 벗고, 머리를 깎으라고 하면 깎아서 오직 명령에 따라야 하는데 어찌하여 감히 거역하는가.”
하였다. 한 왜가 선생의 갓과 탕건을 벗기려고 하자, 선생이 큰소리로 꾸짖으매 왜가 칼을 쳐들고 찌르려고 하자 선생은 가슴을 헤치고 큰소리로 빨리 찌르라고 호통쳤다. 대장이 갈 때에도 선생에게 일어서도록 명하니 선생은 일부러 앉아서 일어서지 않았다. 왜가 손으로 선생을 위협하니, 여러 사람들이 급히 구해 내었다. 선생은 기식(氣息)이 엄엄(奄奄)하여 임병찬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저 왜와 30년 동안 서로 버티어 온 혐의가 있으니, 저들이 나를 해치는 것은 조금도 괴이하지 않다. 또한 나는 나라가 위태하여도 부지(扶持)하지 못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여도 죽지 못하였으니, 내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까지 살아 있는 것은, 헛되이 죽는 것이 국가에 무익하니 대의(大義)를 천하에 외치고자 한 것이나, 일이 성공하지 못할 것은 의병을 일으키던 날에 이미 알고 있었으니, 오늘의 흉액(凶厄)은 오히려 늦다고 하겠다. 차라리 목을 자르고 죽을지언정 머리를 깎고는 살지 못한다는 의(義)는 이미 을미년(1895, 고종32) 겨울에 유길준(兪吉濬)에게 잡혔을 때 정해졌고, 지금 이미 이 지경에 이르러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도 의(義)가 아니니, 지금부터는 다만 단식(斷食)하고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 전쟁에서 죽지 않고, 먹지 않고 굶어 죽는 것도 또한 명(命)이니, 내가 죽은 뒤에 그대는 뼈를 거두어서 우리 아이에게 보내라. 그러나 이것도 어찌 기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평소에 임금을 바로잡고 국가를 부지(扶持)하기를 마음먹었으나, 성의가 부족하여 천심(天心)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내가 죽은 뒤에는 다시는 충언(忠言)을 우리 임금에게 드릴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내가 단소(短疏)를 그대에게 줄 것이니, 그대는 살아 돌아가서 꼭 진정(進呈)하도록 하라.”
하고 다음과 같이 유소(遺疏)를 불렀다.
“죽음에 임한 신 최모는 일본 대마도 경비대 안에서 서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황제 폐하께 아룁니다. 생각건대, 신의 거의(擧義)의 대략은 금년 윤4월 거사할 초두에 이미 자세히 아뢰었으나, 원소(原疏)가 들어갔는지 여부는 신이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신은 거사가 실효가 없어 마침내 사로잡히는 곤욕을 당하여 7월 8일에 압송되어 일본 대마도에 도착하여 현재 경비대라는 곳에 구금되었으니, 스스로 생각건대, 반드시 죽을 것이고 살아서 돌아갈 것을 바라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이 적(賊)이 처음에는 머리를 깎는다는 것으로 신에게 가해하다가 종내는 교활한 말로 달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으니, 반드시 죽이고 말 것입니다. 생각건대, 신이 이곳으로 들어온 뒤에 한 숟가락의 쌀과 한 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온 것이면, 설사 적이 신을 죽이지 않더라도 차마 구복(口腹)으로써 스스로 누(累)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마침내 음식을 물리쳐 옛사람이 스스로 죽어서 선왕(先王)에 보답한 의(義)를 따를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신의 나이 74세이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멸망시키지 못하였으며, 국권(國權)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도로 찾지 못하였습니다. 4천 년 동안의 화하(華夏)의 정도(正道)가 더럽혀져도 부지(扶持)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의 선왕의 적자(赤子)가 어육(魚肉)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생각건대, 왜적은 꼭 망할 징조가 있으니, 멀어도 4, 5년에 지나지 않을 것이나, 다만 우리가 대응하는 방법이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할 것이 염려됩니다. 지금 청국과 러시아는 주야로 왜적에게 이를 갈고, 영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도 매우 왜적과 서로 좋지 못하니, 머지않아서 반드시 서로 침공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나라가 함부로 전쟁을 한 나머지 백성은 궁핍하고 재정은 바닥이 나서 민중이 위정자를 원망할 것입니다. 대체로 밖에서 틈을 엿보는 적이 있고 안에는 윗사람을 원망하는 백성이 있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멀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국사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지 마시고 건강(乾剛)의 덕을 분발(奮發)하시고 성지(聖旨)를 확립하여 퇴미(頹靡)한 것을 떨치소서. 답습에서 깨어나 참을 수 없으면 참지 말고, 믿을 수 없는 것은 믿지 말며, 허위(虛威)를 지나치게 겁내지 말고, 아첨하는 말을 달게 듣지 마소서. 더욱 자주의 계획을 굳혀 영원히 의뢰하는 마음을 끊고, 더욱 와신상담하는 뜻을 굳건히 다져서 자수(自修)하는 방도를 다하소서. 영준(英俊)을 불러들이고, 군민(軍民)을 무육(撫育)하며, 세상의 형편을 살펴서 그 가운데서 할 일을 선택하소서. 그렇게 하면 이 나라 백성들은 본시 모두 존군 애국(尊君愛國)의 마음이 있고, 또 모두가 선왕의 5백 년 동안의 성덕(聖德)과 지극하신 성은을 흡족히 입었으니, 어찌 폐하를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해 큰 원수를 갚고, 심한 수치를 씻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그 기틀은 폐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이 죽음에 임하여 하는 말을 조금도 소홀히 듣지 않으시면, 신은 지하에서도 역시 손을 모아 기다리겠습니다. 신은 죽음에 임하여 정신이 아득하여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아뢰지 못하고, 그 한두 가지로 글을 만들어 같이 갇혀 있는 전 군수 신 임병찬에게 부탁하고 죽으면서 때를 기다려 상달하도록 하였습니다. 빌건대, 폐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굽어 살피소서. 신은 눈물을 이기지 못하오며 영결하는 마당에 삼가 자진(自盡)하여 아룁니다.”
하였다. 부르고 나서 조그마한 종이를 행낭에서 꺼내어 임병찬에게 써 감추어 두도록 명하고,
“내가 40년 동안 충성하려고 한 의(義)가 여기에서 끝났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사령부에 있을 때에 함께 일한 제군을 생각하여 혼자서 오언절구(五言絶句) 14수를 염격(簾格)에는 구애하지 않고 진심을 솔직하게 읊은 것이 있는데, 내가 욀 것이니 군은 돌아가는 날 각각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곧 서문을 부르니,
“서생(書生)은 군려(軍旅)의 책임이 없고, 80세는 군사에 종사할 나이가 아니다. 다만 비상한 때를 만나,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초야(草野)에 이르기까지 벙어리와 귀머거리와 절름발이를 제외하고, 집에 있어서 모른다고 말하는 자는 사람 마음이 없는 자이다. 다만 재앙을 스스로 만들어서 그 누(累)가 제군에게 미치니 부끄러움이 많다. 각자에게 오언 절구(五言絶句) 1수씩을 주어 뒷날 장고(掌故)에 대비한다.”
하였다. 그 하나는 자책(自責)이고, 임병찬과 고석진 등 12인에게 각각 준 것이며 또 하나는 정시해를 애도한 것이었다. 이날 저녁에 선생을 따라서 먹지 않은 사람은 임병찬(林炳瓚)ㆍ이칙(李侙)ㆍ유준근(柳濬根)ㆍ안항식(安恒植)ㆍ남규진(南奎振)이었고, 그 나머지 5인은 억지로 두어 숟가락을 들고는 그쳤다. 이튿날 대장(隊長)이 와서,
“노인이 왜 식사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임병찬이 일록(日錄)을 보이니 말하기를,
“통역이 분명하지 않더니, 이것을 보니 알겠습니다.”
하고, 다 보고 나서,
“삭발 운운한 것은 감금된 사람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니고, 대개 ‘일본에 있으면 일본의 법률에 따라야 옳다.’고 말한 것입니다. 삭발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억지로 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고 식사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선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령부에 있을 때에, 수인(囚人)의 식비는 우리 정부에서 부담한다고 들었기에, 어제 두 끼의 식사도 우리 정부에서 보내온 것으로 알고 먹었고, 또한 고인(古人)의 처의(處義)에도 근거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일본의 음식을 먹으면, 당연히 일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하니, 내가 어찌 생을 탐내어 입에 풀칠을 하고 ‘그 음식을 먹고 그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기롱(譏弄)을 받겠는가. 나의 일은 내가 이미 단정하였으나, 제군은 그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 다 나를 따라서 죽겠는가.”
하였다. 여러 사람이 번갈아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튿날 보병대 대장(大將)이 와서 대장(隊長)과 같은 말을 물었다. 임병찬이 선생의 처의(處義)의 연유를 상세히 말하니, 대장이 말하기를,
“삭발하고 변복(變服)한다는 것은 잘못된 소문이고, 감금된 사람의 식비는 모두 한국 정부에서 나옵니다. 우리들은 감시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니, 안심하고 식사하여서 국가를 위하여 자애(自愛)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래서 임병찬과 여러 사람이 옛날의 의(義)를 들어서 여러 가지로 말씀드리면서 울어 마지않으니, 선생이 겨우 뜻을 돌려 말하기를,
“그대들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다만 그대들을 위하여 다시 먹고 다음 기회를 보겠다.”
하였다. 대장(大將)이 간 뒤에 대장(隊長)이 또 와서,
“내가 전일 삭발과 변복을 요구한 것이 아니고 다만 방 안에서 갓을 벗으라고 말하였는데 통역이 잘못 말하여 여러분이 단식한 지 사흘이 되었으니, 어찌 백이(伯夷)ㆍ숙제(叔齊) 고사(故事)를 본받으려 합니까. 나는 결코 삭발과 변복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최씨에게 말씀드려서 노체(老體)를 자애(自愛)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 선생이 하루는 일찍 일어나서,
“내가 평소에 꿈을 꾼 일이 없었는데, 지금 갑자기 꿈을 꾸었으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 같은 수인(囚人) 여러 사람 가운데 간혹 관(冠)이 없어 상투 바람으로 있어서, 선생이 치포관(緇布冠 검은 베로 만든 유생이 쓰는 관)을 만들어 쓰게 하고, 곧이어 절구 한 수를 읊고 화답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선생과 여러 사람이 혹은 글을 외어 강론(講論)하고, 혹은 시를 지어 화답하니, 만리 이역(異域)에서도 적료(寂廖)하지 않았다고 한다.
9월 초하루는 을미 4일(무술)에 장자 최영조가 들어와 뵈었는데, 문인 오봉영(吳鳳泳)ㆍ임응철(林應喆)이 동행하여 왔다. 최영조와 임응철이 각기 병든 노친(老親)을 방환(放還)하고 대신 감금되겠다는 뜻을 경비 대장에게 청원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 8일(임인)에 최영조ㆍ오봉영ㆍ임응철이 귀국하였다. 최영조가 머무르면서 모시고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니, 선생이 집에 노인이 있고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맡을 사람이 없으니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바다 빛은 창망하고 새벽 기운은 찬데 / 海色蒼茫曉氣寒 이때에 가고 머무르는 두 사람의 괴로운 심정 / 此時去住兩情難 이란 시구가 있었다. ○ 20일(갑인)에 문인 조재학(曺在學)이 들어와 뵈었다. 선생이 매우 기뻐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오랜 세월 사귄 벗이 우정도 깊어서 / 契託蓬麻歲月深 배를 타고 먼 길 오니 음산한 가을일세 / 乘桴遠役趁秋陰 깊고 깊은 한 줄기 물 원천에서 솟아나니 / 淵淵一水源頭活 그 당시에 주고받던 마음 힘써 따르게 / 勉副當年援受心
조재학은 송연재(宋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인도 되기 때문이다. 수일간 머무르다가 돌아갔다.
10월 초하루는 갑자 16일(기묘)에 보병 경비대 안 새로 지은 건물로 옮겨 갔다. 먼저 거처하던 집으로부터 거리가 약 5리였다. ○ 19일(임오)에 병이 났다. 처음에는 감기로 편찮다가 점점 위중하게 되었다. 그곳에 우리나라 약이 없어 애쓰다가, 행낭에서 약간의 재료를 찾아서 불환금산(不換金散)과 부자산(夫子散)을 잇달아 올렸으나 효험이 없었다. 대장이 군의를 보내어 진찰을 하고 약을 보냈으나, 선생은,
“80세 늙은이가 병이 들었고 또 수토까지 맞지 않은 것인데 외국의 신통하지 못한 약으로 무슨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 다만 이것으로써 자진(自盡)할 것이니, 일본 약물은 일체 쓰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29일에 이르러 점점 부증(浮症)과 혀가 말려들고 변비 등의 여러 증세가 있더니, 정신이 혼몽하여 다시는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다.
11월 초하루는 갑오 5일(무술)에 최영조와 문인 노병희(魯炳熹)ㆍ고석진(高石鎭)ㆍ최제학(崔濟學)이 들어와서 시병하였다. 임병찬이, 선생의 병환이 날로 위중한 것을 보고 서울에 전보하여 본가에 알리게 하였다. 고석진ㆍ최제학이 마침 풀려 났고, 노병희도 서울에 있었기에 모두 최영조와 동행하였는데, 뱃길이 막혀서 여러 날 나루터에서 보내다가 5일에 이르러 비로소 들어왔다. 선생은 이미 누가 누구인지 몰랐다. 노병희는 소속명탕(小續命湯)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재료가 없어서, 고석진과 최제학에게 바다를 건너서 약을 구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배편이 몹시 힘들어서 9일에 비로소 부산에 돌아갔다. 마침 최영학(崔永學)과 최제태(崔濟泰)ㆍ최정상(崔鼎相)ㆍ강갑수(姜甲秀)의 일행을 만나서 약을 부탁하고 들어왔다. 해어탕(解語湯)과 소속명탕(小續命湯) 수 첩을 지어서 연거푸 썼다. 14일 아침에 선생의 정신이 조금 깨어나서, 모시고 있던 사람이 서로 말을 하면서 선생이 듣는지 못 듣는지를 시험해 보니, 혹 미소를 짓기도 하고 혹 눈썹을 찌푸리기도 하였다. 임병찬의 일록(日錄)에는,
“선생께서 병이 나면서부터 20여 일에 이르기까지 혹은 평좌(平坐)하시고 혹은 꿇어앉고, 혹은 구부리고 혹은 기대기도 하셨으나 한 번도 드러눕지 않으시니, 여기에서 선생의 평소 소양(所養)의 훌륭하심은 다른 사람이 따를 수가 없음을 알았다.”
하였다. ○ 17일(경술) 오전 인시(寅時)에 대마도 감방에서 별세하였다. 전날 저녁에 큰 별이 동남쪽에 떨어지며 환한 빛이 하늘에 뻗쳐서, 보는 사람이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날 새벽에 별세하였다. 이에 앞서 최영조가 염습(斂襲)할 제구(諸具)를 갖추어 가지고 왔다. 선생이 작고했다는 말을 들은 대장은 시신을 오래 이 건물에 머물게 할 수 없다 하여 시체실에 옮기도록 하였다. 시체실은 경비대 안에 있는 한 칸의 판잣집인데 땅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가운데에는 시상(尸床)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시(巳時)에 옮겨 모시고 염습하였다. 이때에 추위가 혹심하여 노시(露屍)로 밤을 지낼 수가 없어서 오후 신시(申時)에 소렴(小斂)을 하였다. 집사(執事)는 임병찬(林炳瓚)ㆍ신보균(申輔均)ㆍ남규진(南奎振), 집례(執禮)는 이칙(李侙), 호상(護喪)은 노병희(魯炳熹), 사서(司書)는 문석환(文奭煥), 사화(司貨)는 신현두(申鉉斗)였다. 이날 밤에 왜는 다만 최영조ㆍ최영학만을 시신 곁에 있기를 허락하고, 그 나머지 안에 있던 사람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밖에 있던 사람은 안에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날 전보로 본가와 서울에 부고하였다. ○ 18일(신해)에 입관(入棺)하여 수선사(修善寺)에 옮겨 모셨다. 노병희가 밖에 있다가 송판을 구해 와서 대목을 불러 관을 만드는데, 대장이 정부에서 명령이 있어서 부대 안에서 관을 만들어 와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관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였다. 원수의 물건이고 또 제도도 맞지 않으니 하루도 임시로 사용할 수가 없으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터이므로 꾹 참고 그것을 사용하였다. 신시(申時)에 입관하여 영구(靈柩)와 혼백 상자를 모시고 경비대 뒷문을 나와 가게 주인 해로(海老)의 집으로 갔다. 감금되어 있던 모든 사람이 모두 흰 두건에 환질(環絰)을 두르고 경비대 문안에서 통곡하면서 하직하였고, 다만 임병찬이 모시고 가게에 갔다. 해로의 아들 웅야(雄野)가 앞을 인도하여 수선사 법당에 영구를 모셨다. ○ 20일(계축)에 영구를 모시고 배를 타서 21일(갑인)에 초량(草梁) 나루에 내려 상무사(商務社)에 안치(安置)하였다. 술시(戌時)에 영구를 모시고 배를 탔다. 노병희가 초혼(招魂)하며 앞에서 인도하였고, 항구의 왜인들이 촛불을 들고 따라오면서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튿날 진시(辰時)에 초량 앞 항구에 정박하니, 최영설(崔永卨)ㆍ최만식(崔萬植)ㆍ최전구(崔銓九)ㆍ최봉소(崔鳳韶)는 서울에서, 최영복(崔永福)ㆍ곽한소(郭漢紹)는 정산(定山)에서 왔으며, 고석진(高石鎭)ㆍ최제태(崔濟泰)ㆍ최제학(崔濟學)ㆍ최정상(崔鼎相)ㆍ임응철(林應喆)과 숙소를 정하고 상무사(商務社)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무사란 본주(本州)와 영남ㆍ호남 사람들이 돈을 모아 회사를 만들어 장사하는 일을 처리하는 곳이다. 이보다 앞서 선생이 일본에 건너가는 일을 당시에 사원들이 모두 알지 못하고 뒤늦게 배행하러 왔다가 길에서 서로 붙들고,
“하늘이 어찌하여 선생에게 이런 행차가 있게 하는가.”
하면서 통곡하였는데, 이때 와서 선생의 부고를 듣고는 모두 망곡(望哭)하고 애통(哀痛)해하면서 사흘 동안 철시(撤市)하고, 치상(治喪)을 담당할 것을 자청하였다. 사무장 김영규(金永圭)가 정구청(停柩廳)을 새로 만들 것을 의논하니, 사원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가 이 건물을 지어서 왕래하는 사람은 모두 묵어 갔습니다. 만일 이곳에 최 선생을 모신다면, 비록 혼령이지만 우리들의 영광입니다. 지금 꼭 새로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 건물은 헐어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하니, 김영규가 말하기를,
“내가 제군의 뜻을 떠보았을 뿐이오.”
하였다. 이리하여 ‘면암 최 선생 호상소(勉菴崔先生護喪所)’라고 문에 크게 써 걸고, 사원에게 본분을 이미 정하여 집사(執事)로 삼았는데, 유진각(兪鎭珏)ㆍ이유명(李裕明)ㆍ권순도(權順度)는 호상, 박필채(朴苾彩)ㆍ송재석(宋在錫)은 집례, 이응덕(李應悳)ㆍ장우석(張禹錫)ㆍ안순극(安舜克)은 축(祝), 김교민(金敎玟)ㆍ손영두(孫永斗)ㆍ박봉석(朴鳳錫)은 사서(司書), 김영규ㆍ김도익(金道翊)ㆍ정시원(鄭時源)은 사화(司貨), 윤명규(尹明奎)ㆍ권상희(權爽煕)는 조빈(造殯)으로 성복(成服)과 반구(返柩)의 제구(諸具)를 모두 준비하였다. 이날 아침에 자질과 문인들이 모두 부두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사원 1천여 명이 대여(大轝)와 영거(靈車)를 갖추고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日月高忠)’이란 8자를 비단에 써서 높은 장대에 달고 영구를 출영하여, 들어와서 일내헌(一乃軒)에 모셨다. 영구를 모시고 하륙할 때에 김영규와 권순도가 영구를 부여잡고 부르짖기를,
“선생님, 이것은 대한 배입니다. 여기는 대한 땅입니다.”
하며 울었다. 부두의 남녀 노소 수만 명이 모두 선생을 부르니 곡성이 땅을 뒤흔들었고, 대여를 뒤따르는 사람이 5리에 이르렀다. 이때에 검은 구름이 덮여서 날이 어둡고 가랑비가 촉촉히 내려 쌍무지개가 동남쪽에 가로 걸려서 광채가 빛나더니, 영구를 안치한 뒤에 무지개는 사라지고 구름은 걷혀 비가 개니 한 점 먼지도 없었다. 항구에 가득했던 구경꾼들이 이상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이날부터 발인(發靷)할 때까지 원근의 사민들이 전물(奠物)과 제문을 가지고 와서 통곡하는 사람이 주야로 끊이지 않았고, 학교의 생도와 여학교 8, 9세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와서 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혹은 만사(輓辭)로, 혹은 연설로, 혹은 조가(吊歌)로 애도하면서 모두 땅을 치고 발을 구르며 친척처럼 슬퍼하였다. 본부(本部)의 기생 비봉(飛鳳)ㆍ옥도(玉桃)ㆍ월매(月梅)도 언문(諺文)으로 제문을 지어 치전(致奠)하고 매우 슬프게 곡하였고, 범어사(梵魚寺)의 중 봉련(奉蓮)이 승도들을 거느리고 길가에서 치전하였다. 초량의 세 과부는 부두에서부터 대여를 모시고 따라오다가, 구포(龜浦)에 이르자 머리에 전물을 이고 도보로 40리나 걸어와서,
“대감의 제수(祭需)는 왜놈 차에 실어서는 안 되고, 제기도 왜놈 물건을 쓰지 못합니다.”
하였다. ○ 22일(을묘)에 성복하였다. 원근의 사민 남녀가 와서 곡하는 사람이 수만 명이었고, 와서 보는 외국인도 모두 눈물이 얼굴을 덮었다고 한다. ○ 23일(병진)에 발인(發靷)하였다. 대여(大轝)ㆍ영거(靈車)와 짐꾼은 모두 상무사(商務社)에서 전담하였다. 초량에서 구포까지 40리 이내였는데, 상여를 뒤따르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고 집집마다 흰 기를 꽂아 지나는 곳마다 부녀들이 모두 곡하면서 맞이하였고, 노상에서 치전하는 사람이 서로 잇달아서 이날은 겨우 10리를 갔다. 다음날 30리를 가서 구포에 도착하였는데 여기는 동래(東萊)의 끝 경계이다. 상무사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모두 매우 슬피 곡(哭)한 뒤에 돌아가고, 유진각은 시종 호상하여 정산(定山)에 이르러 돌아갔다. ○ 선생의 상사가 처음 났을 때 엄원(嚴原) 경비 대장이 부의로 민전(緡錢) 2백을 보내와서 최영조가 여러 차례 거절하였으나, 대장이 성내면서 바다를 건너는 일을 방해하겠다는 말이 있기에 부득이 받아 간직하였다가 발인하는 날에 우편으로 돌려보냈다.
12월 초하루는 계해 7일(기사)에 정산(定山) 본가(本家)에 도착하였다. ○ 10일(임진)에 대렴(大斂)하였다. ○ 13일(을해)에 성빈(成殯)하였다. 구포강(龜浦江)을 건너, 김해(金海)ㆍ창원(昌原)ㆍ칠원(漆原)ㆍ창녕(昌寧)ㆍ현풍(玄風)ㆍ성주(星州)ㆍ개령(開寧)ㆍ김산(金山)ㆍ황간(黃澗)ㆍ영동(永同)ㆍ옥천(沃川)ㆍ회덕(懷德)ㆍ공주(公州)를 거쳐 15일이 걸려서 비로소 정산 본가에 도착하였는데, 지나온 고을에서 전물(奠物)을 가지고 와서 곡하는 사람이 동래(東萊)에서와 같았다. 창녕 사람 박지림(朴芝林)은 농부인데 선생을 추모하여 치전(致奠)하고 부의금을 내고 매우 슬프게 곡하였다. 평소에 의견을 달리하던 사람도 정성껏 슬픔을 다하여 만사(輓辭)ㆍ제문ㆍ치전ㆍ치부로 그 뜻을 극진히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영구가 바다를 건넌 이래로 사녀(士女)들이 달려와 부모를 잃은 듯이 울부짖으니, 천고(千古)의 옛 기록에도 거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비[士子]가 존상(尊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부녀와 어린이까지도 누가 시켜서 그렇겠는가. 아마도 하늘의 밝은 도리와 사람의 떳떳한 윤리는 시세(時勢)를 따라서 타락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었다. 제물과 제기를 절대로 왜의 물건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한 것이나, 승려와 천기(賤妓)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생을 부르며 깊이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한 일은 적신(賊臣)과 교활한 원수가 듣고 맥이 풀리게 했으니, 정말 선생의 영혼을 잘 위로했다고 할 만하였다. 창원에 이르자 왜병 10여 인이 마항(馬港)에서 와서 길을 차단하고 협박하면서 상여를 기차에 싣게 하니 종자(從者)가 정색으로 거절하며 승강이를 하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으니, 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아마도 영여(靈轝)가 이르는 곳마다 사민(士民)이 무리를 이루니 왜가 혹 다른 일이 생길까 염려해서였다. 창녕읍(昌寧邑)에 이르니, 헌병 소위 평전철차랑(平田鐵次郞)이란 자는 전에 사령부에서 신문할 때에 이미 사나운 놈인 줄 알았는데, 여기에 이르러 또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의 명령을 가지고 와서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종자(從者)가 함께 승강이를 하면서 밤새도록 팽팽히 싸우니, 평전도 이론에 굽히고 스스로 물러섰다. 곁에서 보고 있던 사람이,
“이날 밤 싸움은 10만의 군대보다도 더 강하여, 왜적이 한국을 경영한 지 30여 년에 처음으로 뜻대로 하지 못하는 일을 보았다.”
하였다. 이때부터 왜병 수십 명이 교대해 가면서 따라와서 연도에서 조상하고 치전하는 사람들을 모두 쫓고 본집에 이르러 성빈(成殯)하는 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돌아갔다. 장사 때에 또 와서, 사방에서 장사에 모인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고 다만 도포를 입은 사람은 금하지 않았다.
[주D-001]내가 사방을 …… 갈 곳이 없다 : 《시경(詩經)》 소아(小雅) 절남산(節南山)에 있는 말로, 사방이 다 혼란하여 갈 곳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주D-002]임병찬(林炳瓚)이 …… 토벌한 공 : 1894년(고종31) 동학란(東學亂) 때에 임병찬이 낙안 군수(樂安郡守)로 있으면서 동학교도 수백 명을 잡아 벌하거나 귀순시킨 일을 가리킨다. [주D-003]상(商) 나라 미자(微子) : 미자는 상, 즉 은(殷) 나라 주(紂)의 서형(庶兄)으로, 주의 무도함을 여러 차례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은 나라를 떠났다. [주D-004]명(明) 나라 …… 40여 인 : 명 나라 숭정(崇禎 의종(毅宗)의 연호) 말엽에 이자성(李自成)이 서안(西安)에서 왕을 칭하여 대순(大順)이라 참람하게 호(號)하며 여러 성을 깨뜨리고 드디어 경사(京師)를 함락하자, 장렬제(莊烈帝) 즉 의종(毅宗)과 범경문 등 수십 인이 순국한 일을 말한다. 《明史 卷24 莊烈帝紀2》 [주D-005]책의(翟義)와 …… 문천상(文天祥) : 책의는 왕망이 섭정을 할 때에 유신(劉信)을 세워 천자를 삼고 스스로 대사마(大司馬)라 칭하며 기병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漢書 卷84 翟義傳》 문천상은 원병(元兵)과 싸우다가 패하여 3년간 구금 생활을 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주D-006]우공(寓公)의 욕 :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에 우거(寓居)하는 천자나 제후가 겪는 곤욕. [주D-007]두 능의 화 :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선릉(宣陵 성종 및 그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과 정릉(靖陵 중종의 능)을 파헤친 일. [주D-008]자방(子房)처럼 원수를 갚을 때 : 자방(子房)은 장량(張良)의 자. 장량은 그 조상이 여러 대에 걸쳐 한(漢) 나라를 섬겨 왔는데, 진(秦)이 한 나라를 멸망시키자 창해(倉海)의 역사(力士)를 얻어서 박랑사(博狼沙)에서 철퇴로 진왕의 수레를 쳤으나 실패하였다. 《漢書 卷40 張良傳》 [주D-009]북지왕(北地王)의 …… 의리 : 북지왕(北地王)은 촉한(蜀漢)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아들 유심(劉諶). 후주 염흥(炎興) 1년(263) 위(魏)가 대거 침입하자, 후주는 광록대부(光祿大夫) 초주(譙周)의 말을 듣고 항복하려 하였다. 이때 유심은 화를 내며 “만약 힘이 모자라 패하게 되면 부자와 군신이 힘을 합하여 성을 등지고 싸우다가 사직과 함께 죽어 선제(先帝)를 뵙는 것이 옳다.”고 반대하였으나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심은 처자를 죽인 후 자살하였다. 《三國志 蜀書 卷3 後主傳3 註》 [주D-010]수실(秀實)의 …… 쳐야 했고 : 당(唐) 나라 덕종(德宗) 때에 주자가 배반하여 참위(僭位)하려고 하자 단수실(段秀實)이 원휴(源休)의 상홀(象笏)로 주자의 머리를 쳤다. 《唐書 卷153 段秀實列傳》 [주D-011]고경(杲卿)의 …… 여겼겠는가 : 상산 태수(常山太守) 안고경(顔杲卿)은 안녹산(安祿山)이 반란하자 그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혀 사지를 찢기면서도 큰소리로 녹산을 꾸짖었다. 그때 안녹산은 하북ㆍ하동의 채방사였고, 상산은 안녹산의 지배 하에 있었다. 《唐書 卷192 顔杲卿列傳》 [주D-012]시중(市中)에 …… 따랐고 : 왕손가(王孫賈)는 제(齊) 나라 민왕(湣王)을 섬기고 있었는데, 초장(楚將) 요치(淖齒)가 민왕을 죽였다. 그래서 왕손가는 시중에 들어가서, 나와 함께 요치를 치고자 하는 사람은 우단(右袒)하라고 외치면서 동조자 4백 명을 얻어 그를 토벌하였다. 《戰國策 卷13》 [주D-013]서경(西京)에서 …… 쳤겠는가 : 왕망이 섭정할 때에 유신(劉信)을 천자로 세우고 책의는 대사마가 되어 기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漢書》 [주D-014]삼호(三戶)의 …… 외치며 : 복수할 일념을 뜻한다. 초(楚)의 범증(范增)이 항량(項梁)을 찾아가서 진(秦)에 원수를 갚기 위하여 기병할 것을 권유한 말 가운데에, 남공(南公 음양가)의 말을 인용하여 “초 나라가 비록 삼호(三戶)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는 것은 초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 [주D-015]제 민왕(齊湣王)과 송 언왕(宋偃王) : 제 민왕은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하다가 초장(楚將) 요치(淖齒)에게 살해되었다. 송 언왕은 노(魯) 나라 사람 남궁만(南宮萬)의 감정을 사서 그에게 살해되었다. [주D-016]지난봄에 욕 : 토적소를 올렸다가 을사년(1905) 2월에 일본 사령부와 헌병대에 각각 한 번씩 구금된 일을 말한다. [주D-017]인(仁)을 …… 얻는 것 :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뉘우칠 것이 없다는 뜻. 자공(子貢)이 백이ㆍ숙제가 어떤 사람이냐고 공자에게 묻자, 공자가 대답한 말이다. 《論語 述而》 [주D-018]소 중랑(蘇中郞)과 홍 충선(洪忠宣) : 한(漢) 나라 소무(蘇武)가 중랑장(中郞將)으로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유폐되어, 눈과 전모(旃毛)를 씹으며 연명하였고, 북해(北海)로 옮겨진 뒤에는 들쥐와 풀 열매로 연명하다가 19년 만에 돌아왔다. 홍 충선은 송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호(皓), 충선은 시호인데 금(金)에 사신으로 갔다가 15년간 유폐당하였다. [주D-019]청음(淸陰)과 삼학사(三學士) : 청음은 김상헌(金尙憲)의 호.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가 심양(瀋陽)에 잡혀간 일이 있다. 삼학사는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세 사람으로 병자호란에 척화를 주장하다가 심양으로 붙잡혀 가서 끝내 굴하지 않고 처형되었다. [주D-020]뗏목을 …… 탄식 : 공자가 도의가 날로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한탄하기를 “도가 행하여지지 못할 것이니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뜰 것이다.[道不行 乘桴浮于海]” 하였다. 《論語 公冶長》 [주D-021]바다에 …… 노중련의 풍도 : 전국 시대 제 나라의 노중련(魯仲連)은 “진(秦)이 황제가 되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그 백성이 되지 않겠다.” 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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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병오년(1906, 광무 10) 선생 74세
2월 초하루는 무술 21일(무오)에 가묘(家廟)를 하직하고 가솔들과 작별한 후 창의(倡義)할 계획을 실행하려고 호남(湖南)을 향해 출발하였다. 작년 겨울 국변(國變) 이후로 선생은 왜적에게 저지되어 상경하지 못하였는데, 얼마 후에 송연재(宋淵齋 송병선(宋秉璿)) 공이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마련하여 통곡하며 이르기를,
“제공(諸公)이 인기(人紀)를 부식함은 진실로 나라의 빛이 되나, 사람마다 죽기만 하면 누구를 의지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인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은 마땅히 마음을 합치고 힘을 뭉쳐 불에서 구해 내고 물에서 건져 내는 것처럼 서둘러야지 일각도 잠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가 없다.”
하고, 드디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결정하고, 판서 이용원(李容元), 판서 김학진(金鶴鎭), 관찰 이도재(李道宰), 참판 이성렬(李聖烈), 참판 이남규(李南珪),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나아가 국난 구할 것을 권하였으나 모두 호응하지 않았다. 선생은,
하였다. 선생은 즉시 문인 최제학(崔濟學)을 보내어 편지로 뜻을 알렸더니, 임병찬은 선생의 뜻을 따르기를 원한다는 회답을 올렸다. 호서(湖西)의 선비 안병찬(安炳瓚)이 와서 아뢰기를,
“호우(湖右 충청도)의 유신(儒紳)들이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모두 선생을 맹주(盟主)로 추대할 것을 원하고 있으니, 즉시 행차하기 바랍니다.”
하니, 선생이 승낙하였다. 얼마 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 홍주(洪州)에서 의기(義旗)를 들었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며 말하기를,
“이미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내가 갈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의 사졸(士卒)은 훈련되지 않았고, 병기도 예리하지 못하니, 반드시 각도와 각군이 세력을 합치고 주장이 일치된 뒤라야 거사가 성공할 수가 있다. 내가 남하(南下)하여 영남ㆍ호남을 경동(警動)하여 호서와 서로 성원(聲援)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마침, 곽한일(郭漢一)ㆍ남규진(南奎振)이 칼을 갖고 와서 뵈었다. 선생이 곽한일에게 말하기를,
“호서의 일은 내가 그대에게 부탁한다. 그대는 남규진과 함께 민중의 뜻을 격려하여 빨리 군사를 일으켜 영남ㆍ호남과 함께 기각(掎角)의 형세가 되도록 하다가 만일 여의치 못하면 그대도 남하하여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성명을 도장에 새겨 주어, 사방의 군사를 불러 모으고 군중에 명령하는 데에 모두 이것을 사용하게 하고, 또 격문(檄文)과 ‘존양토복(尊攘討復)’이란 기호(旗號)도 주니, 곽한일과 남규진은 자기들대로 가서 거사(擧事)하였다. 뒤에 곽한일과 민 참판이 홍주에서 합세하여 적을 베고 사로잡는 공이 있었는데 홍주가 패하자 곽한일이 선생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마침 선생도 패한 때여서 돌아가서 다시 거사를 계획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민 참판과 함께 사로잡혀 지도(智島)로 귀양 가고, 남규진도 마도(馬島)에 구금되었다가 뒤에 모두 방환(放還)되었다. 선생은 또 문인 이재윤(李載允)에게 편지를 보내어 북쪽 청 나라에 들어가 구원을 청하게 하고, 오재열(吳在烈)에게는 사졸과 병기를 수습하여 운봉(雲峰)을 지키면서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최제학(崔濟學)과 출발하여 임천(林川) 남당진(南塘津)을 건너 태인(泰仁) 종석산(鍾石山)에 이르러, 임병찬의 처소에 머물렀다. 병찬은 마침 모친상을 당하여 거상(居喪)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병찬에게 검은 상복으로 군무에 종사하도록 명령하여, 군사 모집과 군량(軍糧) 저장 및 군사 훈련하는 일을 모두 맡겼다. ○ 어떤 사람이 선생의 거사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도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러나 국가에서 양사(養士)한 지 5백 년에 기력을 내어 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함을 의(義)로 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내 나이가 80에 가까우니 신자(臣子)의 직분을 다할 따름이요, 사생(死生)은 깊이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이 문인 이정규(李正圭)를 보내어 편지로 처의(處義)의 방법을 묻자, 선생은 남북이 서로 호응하여 힘을 모아서 적을 토벌하자는 뜻을 써서 보냈다. 문인 조재학(曺在學)ㆍ이양호(李養浩)가 영남에서 왔는데, 선생은 모두 영남으로 돌아가서 사민(士民)을 격려하여 응원하게 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영우(嶺右) 각처에도 편지를 보냈다. 이때에 선생은 진안(鎭安)의 촌가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거처하는 집 지붕 위에 흰 기운이 두 번이나 하늘에 뻗쳐서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윤4월 초하루는 정묘 13일(기묘)에 태인(泰仁)에 머무르면서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알하고 여러 문생들을 거느리고 강회(講會)를 하고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疏)를 올렸다. 상소문의 대략에,
“신이 생각건대, 옛날의 인신(人臣)으로 나라가 망하려는 때를 당하여, 나라를 떠난 사람이 있으니 상(商) 나라 미자(微子)가 그러하며, 죽은 사람이 있으니 명(明) 나라 태학사(太學士) 범경문(范景文) 등 40여 인이 그들이며, 뜻을 국권 회복에 두어 거의하여 적을 토벌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있으니, 한(漢) 나라 책의(翟義)와 송(宋) 나라의 문천상(文天祥)이 이들입니다. 신은 불행히도 오늘날까지 살아서 이러한 변을 보았는데, 이미 떠나갈 곳과 의리(義理)가 없으니, 오직 입궐하여 소를 올리고 폐하(陛下) 앞에서 머리를 부수어 스스로 죽을 뿐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하실 수 없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니 공연한 헛소리로 떠드는 것이 다만 실상이 없는 글이 될 것이며 또 인심이 아직도 국가를 잊지 않음을 보았으니 스스로 헛되이 죽는 것도 경솔한 행동이옵기에, 참고 견디면서 약간의 동지와 함께 책의(翟義)ㆍ문천상(文天祥)이 의병을 일으킨 것과 같은 일을 계획한 지 4, 5개월이 되었습니다. 다만, 신은 본디 재능과 지모(智謀)가 없고 더구나 늙고 병들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모의하는 즈음에 형세가 자유롭지 못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니, 이 때문에 시일이 늦어짐을 면하지 못하여 앉은 채로 세월만 허비하였습니다. 지금 이 계획이 조금 정하여졌고 인사(人士)도 조금 모여, 이달 13일에 전(前) 낙안 군수(樂安郡守) 신(臣) 임병찬(林炳瓚)에게 먼저 의기(義旗)를 세워서 동지들을 권장하고 격려하여 차례로 북상하게 하였습니다. 이등박문(伊藤博文)ㆍ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등의 왜적들을 부르고, 각국의 공사ㆍ영사와 우리 정부의 제신(諸臣)들을 한자리에 모이도록 하여 담판을 열어서 작년 10월의 늑약(勒約)을 거두어 취소하고, 각부(部)에 있는 고문관(顧問官)을 돌려보내고, 우리의 국권을 침탈(侵奪)하고 우리 생민(生民)을 해롭게 하는 전후의 모든 늑약은 모조리 만국의 공론에 회부하여, 제거할 것은 제거하고 고칠 것은 고쳐서 국가는 자주의 권리를 잃지 않고, 생민은 어육(魚肉)의 화를 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본시 힘과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민중을 움직여서 힘센 적과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처지에서 한때의 목숨을 다투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하늘이 재앙을 뉘우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들에게 짓밟히는 화를 당한다면, 신도 달게 죽음을 받아 여귀(厲鬼)가 되어 원수를 말끔히 쓸어버릴 것을 기약하며, 그들과는 천지 사이에서 함께 살지 않겠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으로 그들의 노예되기를 좋아하여 대의(大義)를 원수처럼 여기고, 앞을 다투어 역도(逆徒)라는 이름을 씌워 훼방하는 자는 신이 진실로 불쌍히 여길 겨를조차 없습니다.”
하였다. ○ 선생은 남하하여 글로 영남과 호남 각처에 통고하여 모여서 거사를 논의하게 하였으나, 평소에 큰소리를 잘하고 서로 함께 약속한 사람들도 모두 두려워서 피하고 선뜻 오지 않고, 다만 문인 10여 명과 주야로 경영할 뿐이었다. 그러나 병기와 군량이 하나도 갖추어진 것이 없어서, 임병찬(林炳瓚)은 가을을 기다려 거사하려고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내 나이가 얼마 남지 않았는 데다가 국사는 날로 급하니, 이처럼 시일을 늦출 바에야 도리어 궁궐에 달려 들어가서 죽는 것이 더 낫겠소.”
라고 말하고, 마침내 즉시 거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날 태인(泰仁)에 도착하여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알하였다. 여러 문생들을 모아서 강(講)을 마치고, 선생이 가운데에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왜적이 나라를 도둑질하고 역신(逆臣)이 장난을 하여, 5백 년 종사(宗社)와 삼천리 강토가 이미 망할 처지에 이르렀다. 임금은 우공(寓公)의 욕을 면하지 못하시고, 생민은 모두 어육의 참화에 빠졌으니, 나는 구신(舊臣)의 한 사람으로 정말로 차마 볼 수가 없소. 종사와 생민의 화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힘을 헤아리지 않고 대의를 천하에 펴고자 하니 성패와 이해는 예견할 수는 없으나, 진실로 내가 전심(專心)으로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생각하고 살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천지신명이 도와서라도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소. 나와 종유(從遊)하는 제군은 나와 생사를 같이할 수 있겠소?”
하자, 문생들은 모두 좋다고 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비상(非常)한 일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비상한 뜻을 두어야 하고, 또 군사(軍事)에 종사하는 일은 사지(死地)이므로 쉽게 말할 수가 없으니, 제군은 다시 생각을 더하여 후회하지 말도록 하오.”
하니, 문생들은 모두 죽음으로 명령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과 한자리에 모인 사람 80여 명이 향교에 들어가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할 뜻을 선성(先聖)에게 고유하고, 곧이어 고을의 부로(父老)를 불러 대의를 일깨우니, 고을 안이 모두 기꺼이 호응하였다. 흥덕(興德)의 선비 고용진(高龍鎭) 석진(石鎭)의 형 은 포사(砲士) 강종회(姜鍾會) 등 30여 명을 거느리고 군세(軍勢)를 도왔다. 드디어 정읍(井邑)ㆍ순창(淳昌)ㆍ곡성(谷城)에서 군사를 모으니, 4, 5일 동안에 원근에서 부의(赴義)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고, 군량과 병기도 대략 갖추어졌다. 그리하여 임병찬(林炳瓚)ㆍ김기술(金箕述)ㆍ유종규(柳種奎)ㆍ김재귀(金在龜)ㆍ강종회(姜鍾會)ㆍ이동주(李東柱)ㆍ이용길(李容吉)ㆍ손종궁(孫鍾弓)ㆍ정시해(鄭時海)ㆍ임상순(林相淳)ㆍ임병인(林炳仁)ㆍ송윤성(宋允性)ㆍ임병대(林炳大)ㆍ이도순(李道淳)ㆍ최종달(崔鍾達)ㆍ신인구(申仁求)에게 명하여 여러 임무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 ○ 격문(檄文)을 여러 군(郡)에 급히 보내었다. 격문에 이르기를,
“난적(亂賊)의 변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을까마는 어느 것이 오늘의 역괴(逆魁)와 같았으며, 이적(夷狄)의 화가 어느 나라인들 있지 않았을까마는 어느 것이 오늘날과 같았겠는가. 즉시 거의(擧義)할 것은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생각건대, 우리 조선은 기자(箕子)의 옛 강토이며 요(堯)의 동쪽 번방(藩邦)으로서, 태조(太祖) 이래로 여러 성군(聖君)이 대를 이어 공자의 도를 숭상하고 여러 현인이 번갈아 나서, 임금과 신하가 그 도리를 다하여 이륜(彛倫)이 돈독하게 펴졌으며 지위가 높은 이를 높이고 귀한 이를 귀히 여겼다. 그리하여 예절과 문물이 널리 밝아져 집집마다 인의(仁義)와 효제(孝悌)를 행하여, 모두 유학을 숭상하고 도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녔다. 신(信)을 갑옷으로 삼고 의(義)를 방패로 삼아서, 모두가 윗사람을 친애(親愛)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을 뜻이 있어서, 민속(民俗)이 밝고 여유가 있었으니,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의 융성한 시대에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문물(文物)이 발전하여 오랫동안 소화(小華)의 아름다움으로 불리었다. 한번 사교(邪敎)가 중국에 들어오면서부터 드디어 온 천하가 비린내로 더럽혀졌으나, 홀로 우리나라는 동쪽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편토(片土)를 건정(乾淨)하게 보전할 수 있었으니, 박괘(剝卦)의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 하겠다. 그러나 누가 장차 화가 닥쳐서 다만 머리 위의 상투가 있는 것으로써 홀로 천하의 모든 화살의 과녁이 될 것을 생각하였겠는가. 아, 저 왜적은 실로 우리나라 백세의 원수이니, 임진란에 두 능의 화[二陵之禍]를 차마 말하겠으며,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은 다만 외적이 엿보는 계기를 만들었고, 맹세한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협박의 근심이 바로 이르렀다. 우리의 궁금(宮禁)을 짓밟고, 우리의 도망자를 품에 안아 기르고, 우리의 인륜 도덕을 파괴하고, 우리의 의관을 찢어 버리고, 우리의 국모를 시해(弑害)하고, 우리 임금의 머리를 강제로 깎고, 우리의 대관(大官)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민중을 어육(魚肉)으로 만들고, 우리의 무덤을 파고 집을 헐고, 우리의 강토를 점령하여 빼앗고, 우리 국민의 목숨이 달려 있는 자원은 무엇이든 그들이 장악(掌握)한 물건이 아닌가. 이제는 그것도 오히려 부족하여 갈수록 욕심을 낸다. 아, 지난 10월의 소행은 진실로 만고에 없었던 일이다. 하룻밤 사이에 종이 조각에 도장을 억지로 찍어서 5백 년 종사(宗社)가 드디어 망하니, 천지의 신이 놀라고 조종(祖宗)의 영혼이 슬퍼한다. 나라를 들어서 원수에게 준 역적 지용(址鎔)은 실로 우리 동방의 영원한 원수요, 그 임금을 시역(弑逆)하고 남의 임금을 범한 괴수 이등(伊藤)은 천하의 열국(列國)이 함께 토벌하여야 한다. 누대(累代)의 세신(世臣)은 바로 이때가 자방(子房)처럼 원수를 갚을 때인데, 왕실의 지친(至親)은 어찌 북지왕(北地王)의 성(城)을 등지고 싸우자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는가? 수실(秀實)의 홀(笏)은 마땅히 주자(朱泚)의 얼굴을 쳐야 했고,고경(杲卿)의 지위가 어찌 녹산(祿山)이 준 것을 영광으로 여겼겠는가. 변을 만난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으나, 적을 토벌하는 자가 어찌 한 사람도 없는가. 임금이 망하였는데 신하가 어찌 홀로 살 수 있으며, 나라가 패망하였는데 백성이 어찌 홀로 보전될 수 있겠는가. 불타는 대청 위의 참새와 가마솥에 든 생선은 함께 망할 뿐이니 어찌 한바탕 싸우지 않겠는가. 또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찌 죽어서 충의(忠義)의 넋이 되는 것만 하겠는가? 최익현(崔益鉉)은, 나이는 죽음이 가까웠고 병은 깊고 재능과 힘은 미약하여 작은 정성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여, 비록 사로잡히는 수치를 당하였으나 숨이 아직 있으니 보복할 뜻을 잊기 어렵다. 그러나 큰 집[大廈]이 무너지는데 어찌 한 개의 나무가 지탱할 것이며, 맹진(孟津)이 넘치는데는 한 줌의 흙으로 막지 못한다. 시중(市中)에 들어가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라.’고 하면 반드시 시중 사람이 왕손(王孫)에게 따랐고,서경(西京)에서 거병(擧兵)하니 누가 책의(翟義)를 도리어 쳤겠는가. 모든 우리의 종실ㆍ대신ㆍ공경(公卿)ㆍ문무(文武)ㆍ사농공상ㆍ서리ㆍ하인들까지도 무기를 가다듬고 마음과 힘을 한군데로 모아서, 역당(逆黨)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깔고 자며, 원수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씨를 없애고 그 소굴을 두들겨 부수자. 천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 없으니, 국세를 반석(盤石) 위에 올려놓고, 위험한 고비를 바꾸어 편안하게 만들어서 인류를 도탄(塗炭)에서 건져 내자. 믿는 바는 군사(軍士)이니 다만 적이 힘이 센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히 이에 격문을 돌리니 함께 나라를 구하기에 힘쓰자.”
하였다. ○ 일본 정부에 글을 부쳐서 신의를 저버린 16가지 죄를 따졌다. 그 대략에,
“아, 나라에 충성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신(信)을 지키고 의(義)를 밝히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사람이 성이 없으면 반드시 죽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반드시 망한다. 이것은 다만 완고(頑固)한 늙은이의 평범한 말이 아니다. 또한 개화하여 경쟁하는 열국(列國)이라도 이것을 버리면, 아마도 세계 안에 자립하지 못할 것이다. 병자년(1876, 고종13)에 우리 대관(大官) 신헌(申櫶)과 윤자승(尹滋承)이 귀국 사신 흑전청륭(黑田淸隆)ㆍ정상형(井上馨)과 강화부(江華府)에 모여서 약정한 제1조에 ‘조선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이 뒤 화친(和親)의 실상을 나타내려면 모름지기 피차가 서로 동등한 예로써 서로 대우해야 한다. 그러므로 추호도 침범하거나 시기하는 일이 없어야 하니, 먼저 예전부터 외교하던 실정을 저해하는 근심을 가져올 모든 예규(例規)를 모두 혁파하여 영원히 신의를 지킨다.’고 하였다. 을미년(1895, 고종32)에 청국(淸國) 사신 이홍장(李鴻章)과 귀국 사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마관(馬關)에 모여서 약정한 제1조에 ‘조선의 독립과 자주를 양국이 분명히 인정하며 추호도 침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명치(明治) 37년(1904, 광무 8)의 일본과 러시아의 선전 조서(宣戰詔書)에도 ‘한청(韓淸) 양국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구절이 있다. 또 귀국이 러시아에 대하여 국제 공법을 위반하였다고 열국(列國)에 통첩한 변명서에도 ‘원래 한국의 독립과 토지ㆍ주권을 보존하며 유지시키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사신을 서구(西歐)에 파견하여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설명하는 데도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전후 30년 동안에 귀국의 군신(君臣)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맹세한 바와 천하에 성명(聲明)한 것이, 우리의 토지와 인민을 침범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독립과 자주를 해치지 않는 것을 책임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천하의 열국(列國)도 한일(韓日) 두 나라는 순치(唇齒)의 나라로 서로를 보호하고 유지하며 서로 침해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귀국이 우리나라에 대하여 흉포(凶暴)를 행하는 방법은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무엇이든지 신의를 배반하였다. 전에는 ‘조선은 독립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保有)하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우리를 노예로 삼는가. 전에 러시아와 전쟁을 할 때, ‘한국의 독립과 토지ㆍ주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는데, 지금 한국의 독립과 토지ㆍ주권을 빼앗아 가는 것은 어째서인가. 전에는 서로 간절하게 침범하거나 시기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오로지 침탈(侵奪)을 일삼아서 우리 2천만 국민의 복수심을 일으키게 하여 앉을 때 동쪽을 향하지 않게 만드는가. 전에는 조약을 변경할 필요없이 영원히 신의를 지키고 화평을 유지하는 바탕으로 삼았었는데, 지금 조약을 변경하여 신의를 저버리고 화평을 깨뜨려서 하늘을 속이고 신(神)을 속였으며, 또 천하의 열국(列國)을 속였다. 이유를 들어 증명하겠다. 갑신년(1884, 고종21)에 죽첨진일랑(竹添進一郞)이 난을 일으켜 우리 황제를 강제로 옮기고 우리의 재상을 살육하였으니, 신의를 배반하고 저버린 죄의 첫째이다. 갑오년(1894, 고종31)에 대조규개(大鳥圭介)가 난을 일으켜 우리의 궁궐을 불태우고 약탈하였으며 우리의 재물을 탈취하고 우리의 전장 문물(典章文物)을 훼손시켜 버리면서 우리나라를 독립시킨다고 일컫는데, 훗날에 빼앗고 점령할 터전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둘째이다. 을미년(1895, 고종32)에 삼포오루(三浦梧樓)가 변란을 일으켜 우리의 왕후를 시해하였으니 만고에 없는 대역죄가 되는데 오로지 도망하는 역적을 덮어 주고 감싸기를 일삼아 한 놈도 잡아 보내지 않았으니, 대역무도(大逆無道)하였다. 이것은 다만 신의를 배반하였을 뿐만 아니니, 죄의 셋째이다. 임권조(林權助)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가 우리나라에 와서 주재하면서 협박하고 겁탈한 일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각처에 철로를 부설(敷設)한 것이니, 경의선(京義線) 철로는 처음부터 통고도 없이 마음대로 한 짓이고, 어채(漁採 고기 잡이)와 삼포(蔘圃)의 이익, 광산과 항해의 권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크나큰 한 국가의 재원(財源)의 바탕인데 남김없이 빼앗아 갔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넷째이다. 군사(軍事)를 핑계하여 토지를 강점하며 인민을 침해하고, 무덤을 파내 버리며, 가옥을 헐어 버린 것은 그 수를 알지 못한다. 정부에 권고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으로 비루(鄙陋)하고 패역(悖逆)한 무리들을 지지하여 벼슬을 주도록 강요하였고, 뇌물을 드러내 놓고 받아서 더러운 소문이 낭자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다섯째이다. 철도, 토지, 군율(軍律)이라는 것은, 용병(用兵)할 때에는 군용(軍用)을 빙자하여 사용할 수 있으나, 지금 전쟁이 이미 끝났는데 철도는 어찌하여 돌려줄 생각을 않으며, 토지는 전처럼 강점하고 군율을 전처럼 시행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여섯째이다. 우리의 역적 이지용(李址鎔)을 꾀어 의정서(議定書)를 강제로 만들어서 우리의 국권을 바꾸게 하고는, 그 속에 ‘대한 독립’과 ‘영토 보전’이라 말한 것은 제쳐 놓고 논의조차 하지 않았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일곱째이다. 사대부와 유생이 전후로 상소를 올린 것은, 모두 우리 임금에게 아뢰고 우리나라에 충성한 것인데, 바로 포박(捕縛)하여 오랫동안 가두어 두었고, 심지어는 죽이거나 석방하지 아니한다. 이것은 충언(忠言)하는 입을 막고 공론(公論)을 억제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국세가 혹 떨칠까 두려워하는 것이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여덟째이다. 우리의 동학(東學)이나 도적의 무리들과 같은 패역(悖逆)한 자를 꾀어서 일진회(一進會)라고 이름하고 그들을 창귀(倀鬼)로 만들어서 선언서(宣言書)를 만들게 해서 민론(民論)이라고 빙자하고 국민의 의로운 일로 여기며, 보안회(保安會)와 유약소(儒約所) 같은 것은 치안을 방해한다고 갖은 방법으로 저해하여 포박하고 구금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아홉째이다. 역부(役夫)를 강제로 모집하여 소에게 채찍질하고 돼지를 몰아치듯 하면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거슬리면 풀이나 왕골을 베듯 죽였고 또 어리석은 국민을 꾀어 모아서 멕시코[墨西哥]로 몰래 팔아넘겨서 우리 국민의 부자 형제가 서러움을 당해도 하소연할 수 없고, 학대를 받아 거의 죽게 되어도 돌아올 수 없게 하였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째이다. 전우(電郵 전보사(電報司)ㆍ우체사(郵遞司))의 두 기관을 강탈하여 통신기관을 장악하였으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한째이다. 각부(部)에 고문관을 강제로 두고 후한 봉록을 먹으면서, 오로지 우리를 망하게 하고 우리를 전복시키기를 일삼는데, 군경(軍警)의 경비를 감액하고 재부(財賦)를 탈취함과 같은 것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둘째이다. 차관(借款)을 한두 번 억지로 쓰게 하고 명목은 재정 정리라고 하면서 새로 만든 돈의 색깔과 무게가 예전 돈과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돈의 수효만 갑절로 할 뿐이니, 스스로 많은 이익을 취하여 일국의 재정을 고갈(枯渴)시켰으며, 또 유통되지 못하는 종이 조각을 원위화(元位貨)라고 억지로 이름을 붙였다. 또 차관은 이름뿐이고 미리 이식(利息)을 취하였고, 고빙(雇聘)은 이름뿐이고 미리 후한 봉록을 먹으면서 우리의 정혈(精血)을 빨아먹고 썩은 껍질만 남기려고 힘쓰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셋째이다. 작년 10월 21일 밤에 박문(博文)ㆍ권조(權助)ㆍ호도(好道) 등이 군대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 안팎으로 포위하고 정부를 위협하여 억지로 조약을 만들고, 스스로 가부(可否)를 결정하였으며 인장을 빼앗아서 마음대로 찍고는 우리나라 외교를 옮겨 통감(統監)에 설치하여 우리의 자주 독립 권리를 하루아침에 잃게 하고, 오히려 위협이라는 여론을 숨겨서 만국의 이목(耳目)을 호도(糊塗)하려고 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넷째이다. 처음에는 외교의 감독이라고만 말하더니, 마침내는 한 나라의 정법(政法)을 전담하여 관리하고 거기에 따르는 관리가 수없이 와서, 우리의 손도 까딱 못하게 하며, 걸핏하면 곧 공갈(恐喝)하니, 신의를 배반한 죄의 열다섯째이다. 요사이 또 이민 조례(移民條例)를 만들어서 승인하도록 강요하는데, 인종을 바꾸는 흉칙한 계획으로서 우리 국민을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신의를 배반한 천지도 용납하지 못할 극악한 대죄의 열여섯째이다. 아, 귀국이 신의를 저버린 죄가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겠는가. 이것은 그 대강을 들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시험 삼아 이 열 대여섯 가지의 죄로써 강화(江華)ㆍ마관(馬關) 등의 조약, 열국에게 보낸 통첩과 전쟁을 설명한 여러 문서에 비추어 보면 반복 무상함이 여우와 원숭이가 속임수를 부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 한국의 수천만 인심이 과연 귀국에 대하여 유감없이 이것이 우리를 지지하고 우리를 공고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마음 아파하고 골치를 앓으면서 삼호(三戶)의 말을 외치며 귀국의 온 섬[全島]을 한 번 짓밟고자 맹세할 것인가. 진실로 귀국을 위한 계책은 빨리 근본을 되찾는 것밖에 없으며,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은 또 신(信)을 지키고 의(義)를 밝히는 것밖에 없다. 신을 지키고 의를 밝히는 일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빨리 이 글을 귀황제에게 상주(上奏)하여 이상에서 열거한 열여섯 가지 큰 죄를 모두 회개할 것이니, 통감(統監)을 철수하고, 고문과 사령관을 소환하고, 다시 충신(忠信)한 사람을 파견하여 공사(公使)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시 이것으로 각국에 사죄하고, 우리의 독립과 자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 양국이 진정 영원히 서로 편안하게 된다면, 귀국은 거의 안전의 복을 누릴 것이고, 동양의 대국(大局)도 유지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재앙을 주는 것이 천도(天道)의 분명한 이치인데, 지금 귀국이 하는 짓은 제 민왕(齊湣王)과 송 언왕(宋偃王)과 다를 것이 거의 없으니, 설사 이후에 화패(禍敗)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지 않다 하더라도 귀국이 어찌 스스로 망하는 것을 면하겠는가? 나는 시세(時勢)는 모르나 국가에 충성하고 남을 사랑하며, 신을 지키고 의를 밝히는 도리를 강론함에는 익숙하다. 국가와 인민의 화가 망극한 형편에 이르렀음을 눈으로 보고 오직 죽을 자리를 얻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긴 지 오래되었다. 불행히 지난봄에 욕을 당하고도 죽지 못하였고, 또 작년 10월 21일의 변을 당하였으니, 타국의 노예가 되어 구차하게 천지 사이에서 생을 탐낼 의리가 없다. 그래서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죽을 것을 결의하고 병든 몸으로 상경하여 박문(博文)ㆍ호도(好道) 등과 한 번 만나서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하고 죽으려고 한다. 사민(士民)으로 함께 죽기를 원하는 자가 또 약간 있어서, 먼저 마음을 피로(披露)하여 이 글을 만들어 귀국의 공사관에 보내어 머지않아 귀국의 정부에 전달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를 위한 계획일 뿐만 아니라 귀국을 위한 계책이며, 귀국을 위한 계책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양 전국(全局)을 위한 계책이니 살피기 바란다.”
하였다. ○ 14일(경진)에 행군하여 정읍(井邑)에 도착하여 내장사(內藏寺)에서 잤다. ○ 15일(신사)에 순창(淳昌)에 도착하여 구암사(龜巖寺)에 주둔하였다. ○ 17일(계미)에 곡성(谷城)에 도착하여 글을 지어서 호남의 각 고을에 고하였다. ○ 19일(을유)에 군사를 이끌고 순창으로 돌아갔다. 이때에 첩자가 와서 왜병 10여 명이 방금 군아(軍衙)에 들어가서 외인을 물리치고 군수 이건용(李建鎔)과 밀담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선생은 임병찬(林炳瓚)에게 일부의 병사를 거느리고 샛길로 가서 습격하도록 명하였다. 왜병이 기미를 알고 크게 놀라 빠져나가 산을 기어올라 도망쳤다. 임병찬이 뒤쫓았으나 따르지 못하고 왜병이 버린 문서를 얻었는데, 그것은 전주 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이건용에게 왜병을 인도하여 의병을 모해(謀害)하라는 비밀 문서였다. 선생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것들은 정말 개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다.”
하였다. 이건용이 마침 와서 뵈니, 선생은 그 편지를 던지면서 말하기를,
“너는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러 왔느냐? 나의 거사는 다만 국가를 위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것인데, 너는 종실의 지친으로 도리어 나를 해치려고 하니 너는 왜적보다도 더한 놈이다. 나는 지금 너를 베어서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는 무리들을 깨우치려고 하니, 너는 죽어도 나를 원망하지 말라.”
하니, 이건용은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기를,
“잠깐 동안 겁을 집어먹고 임시 모면을 하려고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사람이오니 만일 대감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용서하시면 정성을 다하여 명령을 받들어 머리가 부러져도 후회하지 않고 목숨을 살려 주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용서하고 자리에 앉게 한 뒤에 타이르기를,
“그대는 왕족 출신이고 나는 유신(遺臣)으로서 각기 의리와 분수를 다하여 함께 왕실을 도와야 한다. 성공하면 국가의 행복이고, 실패하여도 잃을 것이 없으니, 충의의 혼이 되어서 두루 만국을 비추고 꽃다운 이름이 멀리 천추에 끼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원수들에게 아첨하여 구차하게 한때의 요행을 얻더라도, 필경은 서로 이끌고 망하는 비참한 일을 당하는 데 비하면 소득이 어느 것이 많겠는가.”
하니, 이건용은 눈물을 거두고 공손한 태도로 사죄하였다. 선생은 이건용이 지방관으로 형편을 익숙히 알고 있고, 또 그 정성을 인정하여 선봉장[前部]을 삼으니, 어떤 이가 충고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건용이 본군(本郡)에 돌아가서 주둔하기를 청하므로 선생은 허락하였다. ○ 20일(병술) 전주 관찰사 한진창(韓鎭昌)과 순창 군수 이건용(李建鎔)이 왜병을 거느리고 와서 의병을 습격하니, 의병은 마침내 무너지고 의사(義士) 정시해(鄭時海)가 전사하였다. 새벽에 광주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사람을 시켜 칙서(勅書)와 고시(告示) 하나를 보내왔는데, 모두가 해산하라는 뜻의 명령이었다. 선생은 칙지(勅旨)를 받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이것은 오적(五賊)들이 상을 끼고 호령하는 수단이다. 설사 이것이 정말 왕명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하고 국가를 이롭게 할 수 있다면 옛사람도 왕명을 받지 아니한 의리가 있었거든 하물며 이것은 적신(賊臣)들이 속여서 만든 위명(僞命)임에랴.”
하고, 이 관찰에게 회답을 하였는데 대략은,
“모(某)가 이미 상소(上疏)하여 의병을 일으킨 연유를 아뢰었다. 상소가 만일 상께 도달하면 반드시 비답(批答)을 내릴 터이니, 비답을 받들어 진퇴할 뿐이지 지방관이 지휘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해가 오시(午時)가 되지 않았는데 왜병이 군(郡)의 동북쪽으로부터 포위하여 온다고 알리는 자가 있었다. 선생이 스스로 나가 싸우고자 하니, 좌우에서 번갈아가면서,
“선생께 만약 불행이 있다면, 오늘날의 국가와 인민은 마침내 누구를 믿겠습니까?”
하며 말렸으나, 선생은 듣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사민(士民)들이 모두 옷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에워싸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임병찬(林炳瓚)에게 2대의 기병(奇兵)을 설치하여 맞아 싸우도록 명하였다. 얼마 후에 또 그들이 왜병이 아니라 전주(全州)와 남원(南原) 고을의 진위대(鎭衛隊)임을 알려 왔다. 선생은 말하기를,
“이들이 왜병이라면 마땅히 사전(死戰)으로 결판을 내어야 하나, 이들이 진위대군이면 우리가 우리를 서로 공격하는 것이니, 어찌 차마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하고, 임병찬을 불러들여서 싸우지 말도록 하고, 사람을 보내어 양대에 편지를 보내어,
“너희들이 왜군이라면 당연히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이나, 싸우지 않는 것은 동포끼리 서로 죽이는 것을 나는 차마 할 수 없어서이니 즉시 물러가라.”
하였으나, 양 진위대군은 모두 듣지 않고, 전주병이 먼저 포를 쏘아 포환이 비 오듯 쏟아지니, 의병 1천여 명이 모두 새나 짐승처럼 흩어졌다. 이윽고 정시해(鄭時海)가 갑자기 탄환을 맞고 죽었는데 막 죽으려고 할 때에 선생을 부르면서,
“시해가 왜적 한 놈도 죽이지 못하고 죽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습니다. 악귀가 되어서 선생이 적을 죽이는 것을 돕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선생이 그를 붙들고 통곡하니 군중들도 역시 통곡하였다. 선생은 형세가 이미 틀어진 것을 알고 연청(掾廳)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좌우에게 이르기를,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니, 제군은 모두 가라.”
하자, 의사 중 선생을 따르고자 하는 자가 21명이 있었다. 이때에 두 대병(隊兵)은 선생이 물러나지 않을 것을 알고 합군(合軍)하여 포위하고 일제히 총을 쏘았다. 이때에 선생은 임병찬에게 명령하기를,
“이제 우리들은 반드시 모두 죽고 말 것이다. 그러나 표지가 없이 서로 포개어 죽으면 누구가 누구인지 알겠는가? 뿔뿔이 흩어지지 말고 죽음을 명백하게 해야 하니, 성명 한 통씩을 벽에 써 붙이고 각자 자신의 이름 밑에 앉아라.”
하고, 또 말하기를,
“고인은 포위된 성 안에 있으면서도 관례(冠禮)를 행하여 지하에 있는 조상을 뵈려고 하였으니, 지금 제군은 의관을 정제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자, 사람들이 모두 행낭을 풀어서 도포를 꺼내어 입고, 갓끈을 다시 매고 공수(拱手)하고 벽을 등지고 꿇어앉았다. 이때에 유탄(流彈)이 어지럽게 날아들자, 여러 사람들이 유탄이 선생을 범할까 염려하여 모두 빙 둘러 무릎을 꿇고 선생을 가리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선생은 급히 말리면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이럴 필요가 없다. 각각 열좌(列坐)하여 바른 자세를 하고 죽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자, 사람들이 다시 열좌로 돌아가니, 갑자기 폭풍이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천둥이 요란하고 번개가 번쩍이었다. 이날 전주부 희현당(希賢堂)이 까닭없이 무너지니 전주 사람들은 모두 선생을 위하여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양대의 군사는 깜짝 놀라서 총을 버리고 땅에 엎드렸다. 이에 포성은 그쳤으나 양대병은 사면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때에 비바람은 그치지 않고 밤은 깜깜한데 촛불은 없고 시신은 방 가운데에 있어서 피가 흥건한데, 여러 사람들은 피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앉아 있었다. 막하사(幕下士) 이도순(李道淳)ㆍ임상순(林相淳)이 마침 밖에 있다가 죽을 쑤고 술을 데워서 촛불을 가지고 왔다. 방 안을 점검(點檢)하니, 21명에 9명은 이미 간 곳을 몰랐고 다만 임병찬(林炳瓚)ㆍ고석진(高石鎭)ㆍ김기술(金箕述)ㆍ문달환(文達煥)ㆍ임현주(林顯周)ㆍ유종규(柳種奎)ㆍ조우식(趙愚植)ㆍ조영선(趙泳善)ㆍ최제학(崔濟學)ㆍ나기덕(羅基德)ㆍ이용길(李容吉)ㆍ유해용(柳海瑢) 12명이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 유종규는 정시해의 장사 때문에 나가고, 양재해(梁在海)는 앞서 선생의 명령으로 밖에 나가 정탐하다가, 선생이 포위되었음을 듣고 달려오니 다시 12명이 되었다. 문인 고제만(高濟萬)은 시종 힘을 다하였는데, 마침 정탐하기 위하여 밖에 나가 있다가 미처 오지 못하였다. ○ 이때부터 대병(隊兵)들은 밖에서 굳게 지키고 많은 왜병이 몰려 들어와 밤이면 총칼로 위협하며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선생은 태연 자약하게 앉아서,
“옛날 사람도 배 안에서 《대학》을 읽고 옥중에서 《상서(尙書)》를 읽은 예가 있으니 각각 한 책을 외라.”
하고 다시 정제하여 앉아 먼저 《맹자(孟子)》의 호연장(浩然章)과 웅어장(熊魚章)을 외니 제생도 따라 차례로 한 편씩을 외었다. 이때에 고을 사람 임창섭(林昌燮)과 백정 경철(景哲)이 포위를 헤치고 들어와서 “대감의 충의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대감을 모시고 군무에 종사하다 죽기를 원한다.”고 아뢰었다. 고을 사람 신인구(申仁求)와 노기(老妓) 하엽(荷葉)이 각각 육미(肉糜)와 주면(酒麵)을 문지기에게 주면서 “나는 죽어도 이것을 드려야 한다.”고 하니, 문지기도 의롭게 여겼다. ○ 23일(기축)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날 전주 소대장 김가(金哥)가 와서 칙서에 서울로 압송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아뢰었다. 선생은,
하고 꾸짖었다. 김가는 못 들은 척하고, 선생의 찬 칼, 염낭과 몸에 지닌 물건을 모두 끌러 내고 왜병 10여 놈이 대병과 함께 길을 재촉하여 떠났다. 선생과 임병찬은 가마를 타고 그 나머지 11명은 함께 결박되어 가니, 이때에 햇무리가 세 겹으로 둘렀으며 보는 사람들이 비분하여 견디지 못하였다. 선생은 노상에서 매일 밤 이소경(離騷經)ㆍ출사표(出師表)ㆍ원도(原道) 등과 《중용》ㆍ《대학》 등의 여러 책을 외며,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 길에 그들이 감히 죽이지는 못하고 바다를 건너게 될 것 같다.”
하였다. 이때에 안의(安義) 사람 이완발(李完發)이 노상에서 와 뵙고 통곡하며 따라오니, 왜병이 난타하나 이완발은 죽음을 무릅쓰고 가지 않다가 구속되어, 전주에 갇혔다가 5, 6일 만에 석방되었다. ○ 27일(계사)에 왜의 사령부(司令部)에 구금되었다. 장자 최영조(崔永祚)와 종질 최영설(崔永卨)이 순창(淳昌)의 소식을 듣고 최전구(崔銓九)ㆍ이명구(李命九)와 일가 사람 최영호(崔永晧)와 함께 달려와 진잠(鎭岑)의 길에서 뵈니, 왜병이 칼을 휘둘러 쫓으며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오시(午時)에 공주(公州)에 도착하니, 대전의 왜병이 윤차(輪車)에 선생을 태우고 저녁에 숭례문(崇禮門) 밖에 도착하였다. 왜의 헌병대장 소산삼기(小山三己)가 1백여 명의 왜병과 통역 박종길(朴宗吉)을 대동하고 와서 선생을 에워싸고 사령부에 갈 것을 청하였다. 선생은 땅에 버티고 서서 말하기를,
“나는 칙명에 의해서 온 줄 알았는데, 저들 왜놈은 무엇하는 놈인가. 내가 구금된다면 당연히 대한의 법관에 의하여 구금될 것이지, 대한의 최모(崔某)가 어찌 왜놈 사령부를 알겠느냐.”
하고 호통쳤다. 왜병들이 박종길에게 눈짓하여 부액(扶腋)하여 인력거(人力車)에 태우고 12명도 뒤따라서 곧바로 사령부로 향하였다. 문에 들어서자 선생은 또 땅에 주저앉아,
“여기가 법부(法部)인가, 군부(軍部)인가.”
하고 호통쳤다. 헌병이 부축하여 대청 위에 올라가서 북쪽 감방에 수감하니, 을사년 봄에 구금되었을 때에 거처하던 곳이었다. 선생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늙어서 제비처럼 거듭 옛집을 찾았구나.”
하였다. 왜병이 12명을 협박하여 도포ㆍ갓ㆍ망건ㆍ버선ㆍ갓끈 등속을 모두 벗기어 차례로 구속하고, 또 선생의 갓과 망건을 빼앗으려고 하였으나 선생이 꾸짖으니 왜놈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홍주(洪州) 의병 80여 명이 먼저 이곳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헌병이 머리 깎는 칼을 가지고 와서 막 강제로 깎으려고 할 때에 선생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깜짝 놀라며 최 대감이 왔다고 하면서 달아났다. 이 때문에 머리를 깎이는 곤욕을 면하여, 모두 우리들이 머리를 깎이지 않고 보전한 것은 선생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였다. 이날 저녁에 밥이 들어오자 선생은,
“내가 어찌 왜놈의 음식을 먹겠느냐?”
하고 호통쳤다. 자질들이 밖에서 장만하여 음식을 드리려고 하였으나 방해를 받아 올릴 수 없었는데 사흘이 되어도 한 잔의 물도 들지 않으니, 왜가 비로소 겁이 나서 자질들이 바치는 음식을 들여보내도록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선생은 낮에는 《주역》을 보고 밤에는 반드시 글을 외니 음향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심문하는 곳에 나아가서는 큰 목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뜻한 바와 일한 바는 상소(上疏)와 격문(檄文)을 너희 정부에 보낸 글에 실려 있다. 어찌 다시 묻느냐?”
하였다. 그리하여 큰소리로 박문(博文)ㆍ호도(好道) 등을 부르면서 개돼지처럼 꾸짖으며 죄역(罪逆)을 따졌고, 혹은 의자와 탁자를 들어 쳐서 부수어 집이 쩡쩡 울리니, 왜들이 모두 묵묵히 피하여 숨었다. 이같이 교접(交接)하기 전후 세 번이었고, 12인도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하고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한 사람도 굴하지 않으니, 왜도 역시 선생에게 경복(敬服)하여, 때로 문밖에 와서 자물쇠를 열고 서늘한 바람도 쐬게 하며, 혹은 차를 드리거나 담배를 담아 드리기도 하였고, 선생이 거처하는 곳을 지날 때마다 꼭 절을 하고 갔다. 헌병에 가라상(柯羅祥)이란 자가 있었는데 희우시(喜雨詩)를 지어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면서,
“하늘이 여러분의 충성에 감동하여 때 아닌 비를 내리니, 이것은 하늘의 눈물이다.”
하였다. 이때에 최영설(崔永卨)도 10여 일 동안 구금되어,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서 결국 무엇을 하려고 하였는가에 대하여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으나, 최영설도 상소문과 일본 정부에 보낸 글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7월 초하루는 병신 8일(계묘)에 임병찬(林炳瓚)과 압송되어, 바다를 건너 대마도(對馬島) 엄원(嚴原)에 도착하여 위수영(衛戍營) 경비대 안에 구금되었다. 이에 앞서 6월 25일 왜의 두목이 선생과 임병찬 등을 이현(泥峴 진고개) 사령부(司令部)에 가게 하여 소위 선고서(宣告書)라는 것을 읽고 통역을 시켜서 설명하기를,
하였다. 읽기가 끝나자 모두 총총히 피해 버리니, 선생의 호통 소리를 꺼려서였다. 선생은 이때에 현기증이 도져서 읽는 것이 무슨 글인지를 몰랐다. 이날 새벽에 자질과 문인ㆍ빈객(賓客) 수십 인이 남대문 밖 정거장에 나왔는데, 왜 헌병 2명이 선생과 임병찬을 보호하여 이미 차를 탔다. 그래서 최영조(崔永祚)ㆍ최영설(崔永卨)ㆍ최영학(崔永學), 족손 최정식(崔貞植)ㆍ최만식(崔萬植), 최전구(崔銓九)ㆍ이승회(李承會)ㆍ최제태(崔濟泰)ㆍ임응철(林應喆)이 배행(陪行)하였고, 최영직(崔永稷)ㆍ안필호(安弼濩)ㆍ박규용(朴圭容)ㆍ윤태선(尹泰善)ㆍ윤항식(尹恒植)ㆍ이낙용(李洛用)ㆍ최봉소(崔鳳韶)ㆍ정한용(鄭瀚鎔)ㆍ조영가(趙泳嘉)ㆍ이광수(李光秀)ㆍ문달환(文達煥)ㆍ임현주(林顯周)ㆍ이용길(李容吉)ㆍ조우식(趙愚植)ㆍ조영선(趙泳善)ㆍ유해용(柳海瑢)은 차 앞에서 절을 하고 하직하며 실성하고 통곡하였다. 선생은 웃으면서,
“남자로 태어나면 사방에 뜻을 둔다. 해 돋는 동쪽의 산천이 볼만한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다만 여전히 몸이 자유롭지 못하여 나의 마음과 몸을 다하지 못할 것이 한스럽다. 또한 내가 처음 거사할 때에 어찌 조금이라도 요행을 바랐겠는가. 국가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백 년이 되었는데, 상란(喪亂) 이후에 대의(大義)를 부르짖고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담당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탱해 볼 생각으로 나의 직분을 다하였다. 마음 편하게 한번 죽는 것은 정말 인(仁)을 구하여 인(仁)을 얻는 것이니, 비록 오늘 머리가 잘리고 가슴에 구멍이 뚫려도 웃으면서 땅에 묻힐 것인데, 더구나 아직 살아 있음에랴. 제군이 나를 사랑하거든 마땅히 빨리 죽기를 바랄 것이고, 서로 한탄하고 애쓰면서 나의 부끄러운 마음을 가중시켜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선생은 차 안에서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지쳐서 기대는 일이 없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정력(定力)이 굳은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중로에 이르러 선생이 탄 차의 바퀴에서 불이 일어나서 다른 차로 옮겨 타고 동래(東萊) 초량(草梁)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어두웠다. 이윽고 헌병이 선생을 인도하여 배에 오르자 최영조 등이 부여잡고 따라가고자 했으나, 헌병은 사령부의 문서가 없다고 허락하지 않으니 모두가 통곡하면서 부두에서 하직하였다. 이때에 달빛은 희미하고 항구의 등불은 바다 위를 비추고 있었다. 기적이 한 번 울리자 배는 쏜살같이 가니, 다만 뱃머리의 등불이 물결 속에 출몰할 뿐이었다. 이튿날 초량 뒷봉우리에 올라서 대마도를 바라보니 운애(雲靄) 속에 한 조각 산 그림자가 숨은 듯 나타나는 듯하였는데 이때의 정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애간장을 끊는 듯하게 하였다고 한다. 배 안에서 헌병 가라상(柯羅祥)이 정성을 다하여 부호(扶護)하여 이튿날 진시(辰時)에 대마도에 닿아 배를 내렸다. 헌병은, 이 뱃길은 늘 풍랑으로 고생을 하는데 이번에는 이처럼 평온하게 항해하였으니, 실로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엄원(嚴原)의 잠업 교사(蠶業敎師) 집에 머무르니, 위수영(衛戍營) 경비대의 임시 관서[權署]이었다. 홍주(洪州)의 의사 9인이 이미 먼저 와서 이곳에 구금되어 있었으니, 곧 문인 이칙(李侙)ㆍ유준근(柳濬根)ㆍ안항식(安恒植)ㆍ이상두(李相斗)ㆍ최상집(崔相集)ㆍ신보균(申輔均)ㆍ신현두(申鉉斗)ㆍ남규진(南奎振)ㆍ문석환(文奭煥)이었다. ○ 입식(粒食)을 끊고 곧 유소(遺疏)를 임병찬(林炳瓚)에게 불러 주었다. 선생이 차 안에서 최영설과 대마도에 들어간 뒤의 처의(處義)할 방도를 상의하였다. 최영설이 말하기를,
“소 중랑(蘇中郞)과 홍 충선(洪忠宣)은 먼 옛날의 일이고, 청음(淸陰)과 삼학사(三學士)로 말한다면 저들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로 삼지 아니하였고 후현(後賢)도 흠잡지 아니하였으니, 오늘날이라 하더라도 처의함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또 감금된 사람의 식료품은 모두 본국 정부에서 지불한다고 들었으니,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나 과연 이와 같다면 더욱 꺼릴 것이 없습니다.”
하니, 선생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영설은 또 임병찬과도 그 의(義)를 말하였다. 경비 대장이 병정 4, 5명을 거느리고 와서 감금된 사람들을 줄 세우고, 어째서 장관(長官)에게 경례를 하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갓을 벗게 하였으나 사람들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대개 왜는 갓을 벗는 것을 예(禮)로 삼은 것이다. 대장은 말하기를,
“여러분은 일본의 음식을 먹으니, 마땅히 일본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갓을 벗으라고 하면 벗고, 머리를 깎으라고 하면 깎아서 오직 명령에 따라야 하는데 어찌하여 감히 거역하는가.”
하였다. 한 왜가 선생의 갓과 탕건을 벗기려고 하자, 선생이 큰소리로 꾸짖으매 왜가 칼을 쳐들고 찌르려고 하자 선생은 가슴을 헤치고 큰소리로 빨리 찌르라고 호통쳤다. 대장이 갈 때에도 선생에게 일어서도록 명하니 선생은 일부러 앉아서 일어서지 않았다. 왜가 손으로 선생을 위협하니, 여러 사람들이 급히 구해 내었다. 선생은 기식(氣息)이 엄엄(奄奄)하여 임병찬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저 왜와 30년 동안 서로 버티어 온 혐의가 있으니, 저들이 나를 해치는 것은 조금도 괴이하지 않다. 또한 나는 나라가 위태하여도 부지(扶持)하지 못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여도 죽지 못하였으니, 내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까지 살아 있는 것은, 헛되이 죽는 것이 국가에 무익하니 대의(大義)를 천하에 외치고자 한 것이나, 일이 성공하지 못할 것은 의병을 일으키던 날에 이미 알고 있었으니, 오늘의 흉액(凶厄)은 오히려 늦다고 하겠다. 차라리 목을 자르고 죽을지언정 머리를 깎고는 살지 못한다는 의(義)는 이미 을미년(1895, 고종32) 겨울에 유길준(兪吉濬)에게 잡혔을 때 정해졌고, 지금 이미 이 지경에 이르러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도 의(義)가 아니니, 지금부터는 다만 단식(斷食)하고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 전쟁에서 죽지 않고, 먹지 않고 굶어 죽는 것도 또한 명(命)이니, 내가 죽은 뒤에 그대는 뼈를 거두어서 우리 아이에게 보내라. 그러나 이것도 어찌 기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평소에 임금을 바로잡고 국가를 부지(扶持)하기를 마음먹었으나, 성의가 부족하여 천심(天心)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내가 죽은 뒤에는 다시는 충언(忠言)을 우리 임금에게 드릴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내가 단소(短疏)를 그대에게 줄 것이니, 그대는 살아 돌아가서 꼭 진정(進呈)하도록 하라.”
하고 다음과 같이 유소(遺疏)를 불렀다.
“죽음에 임한 신 최모는 일본 대마도 경비대 안에서 서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황제 폐하께 아룁니다. 생각건대, 신의 거의(擧義)의 대략은 금년 윤4월 거사할 초두에 이미 자세히 아뢰었으나, 원소(原疏)가 들어갔는지 여부는 신이 알지 못하옵니다. 다만 신은 거사가 실효가 없어 마침내 사로잡히는 곤욕을 당하여 7월 8일에 압송되어 일본 대마도에 도착하여 현재 경비대라는 곳에 구금되었으니, 스스로 생각건대, 반드시 죽을 것이고 살아서 돌아갈 것을 바라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이 적(賊)이 처음에는 머리를 깎는다는 것으로 신에게 가해하다가 종내는 교활한 말로 달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으니, 반드시 죽이고 말 것입니다. 생각건대, 신이 이곳으로 들어온 뒤에 한 숟가락의 쌀과 한 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온 것이면, 설사 적이 신을 죽이지 않더라도 차마 구복(口腹)으로써 스스로 누(累)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기에 마침내 음식을 물리쳐 옛사람이 스스로 죽어서 선왕(先王)에 보답한 의(義)를 따를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신의 나이 74세이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멸망시키지 못하였으며, 국권(國權)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도로 찾지 못하였습니다. 4천 년 동안의 화하(華夏)의 정도(正道)가 더럽혀져도 부지(扶持)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의 선왕의 적자(赤子)가 어육(魚肉)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생각건대, 왜적은 꼭 망할 징조가 있으니, 멀어도 4, 5년에 지나지 않을 것이나, 다만 우리가 대응하는 방법이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할 것이 염려됩니다. 지금 청국과 러시아는 주야로 왜적에게 이를 갈고, 영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도 매우 왜적과 서로 좋지 못하니, 머지않아서 반드시 서로 침공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나라가 함부로 전쟁을 한 나머지 백성은 궁핍하고 재정은 바닥이 나서 민중이 위정자를 원망할 것입니다. 대체로 밖에서 틈을 엿보는 적이 있고 안에는 윗사람을 원망하는 백성이 있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멀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국사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지 마시고 건강(乾剛)의 덕을 분발(奮發)하시고 성지(聖旨)를 확립하여 퇴미(頹靡)한 것을 떨치소서. 답습에서 깨어나 참을 수 없으면 참지 말고, 믿을 수 없는 것은 믿지 말며, 허위(虛威)를 지나치게 겁내지 말고, 아첨하는 말을 달게 듣지 마소서. 더욱 자주의 계획을 굳혀 영원히 의뢰하는 마음을 끊고, 더욱 와신상담하는 뜻을 굳건히 다져서 자수(自修)하는 방도를 다하소서. 영준(英俊)을 불러들이고, 군민(軍民)을 무육(撫育)하며, 세상의 형편을 살펴서 그 가운데서 할 일을 선택하소서. 그렇게 하면 이 나라 백성들은 본시 모두 존군 애국(尊君愛國)의 마음이 있고, 또 모두가 선왕의 5백 년 동안의 성덕(聖德)과 지극하신 성은을 흡족히 입었으니, 어찌 폐하를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해 큰 원수를 갚고, 심한 수치를 씻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그 기틀은 폐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이 죽음에 임하여 하는 말을 조금도 소홀히 듣지 않으시면, 신은 지하에서도 역시 손을 모아 기다리겠습니다. 신은 죽음에 임하여 정신이 아득하여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아뢰지 못하고, 그 한두 가지로 글을 만들어 같이 갇혀 있는 전 군수 신 임병찬에게 부탁하고 죽으면서 때를 기다려 상달하도록 하였습니다. 빌건대, 폐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굽어 살피소서. 신은 눈물을 이기지 못하오며 영결하는 마당에 삼가 자진(自盡)하여 아룁니다.”
하였다. 부르고 나서 조그마한 종이를 행낭에서 꺼내어 임병찬에게 써 감추어 두도록 명하고,
“내가 40년 동안 충성하려고 한 의(義)가 여기에서 끝났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사령부에 있을 때에 함께 일한 제군을 생각하여 혼자서 오언절구(五言絶句) 14수를 염격(簾格)에는 구애하지 않고 진심을 솔직하게 읊은 것이 있는데, 내가 욀 것이니 군은 돌아가는 날 각각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곧 서문을 부르니,
“서생(書生)은 군려(軍旅)의 책임이 없고, 80세는 군사에 종사할 나이가 아니다. 다만 비상한 때를 만나,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초야(草野)에 이르기까지 벙어리와 귀머거리와 절름발이를 제외하고, 집에 있어서 모른다고 말하는 자는 사람 마음이 없는 자이다. 다만 재앙을 스스로 만들어서 그 누(累)가 제군에게 미치니 부끄러움이 많다. 각자에게 오언 절구(五言絶句) 1수씩을 주어 뒷날 장고(掌故)에 대비한다.”
하였다. 그 하나는 자책(自責)이고, 임병찬과 고석진 등 12인에게 각각 준 것이며 또 하나는 정시해를 애도한 것이었다. 이날 저녁에 선생을 따라서 먹지 않은 사람은 임병찬(林炳瓚)ㆍ이칙(李侙)ㆍ유준근(柳濬根)ㆍ안항식(安恒植)ㆍ남규진(南奎振)이었고, 그 나머지 5인은 억지로 두어 숟가락을 들고는 그쳤다. 이튿날 대장(隊長)이 와서,
“노인이 왜 식사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임병찬이 일록(日錄)을 보이니 말하기를,
“통역이 분명하지 않더니, 이것을 보니 알겠습니다.”
하고, 다 보고 나서,
“삭발 운운한 것은 감금된 사람을 가리켜 한 말이 아니고, 대개 ‘일본에 있으면 일본의 법률에 따라야 옳다.’고 말한 것입니다. 삭발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억지로 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고 식사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선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령부에 있을 때에, 수인(囚人)의 식비는 우리 정부에서 부담한다고 들었기에, 어제 두 끼의 식사도 우리 정부에서 보내온 것으로 알고 먹었고, 또한 고인(古人)의 처의(處義)에도 근거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일본의 음식을 먹으면, 당연히 일본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하니, 내가 어찌 생을 탐내어 입에 풀칠을 하고 ‘그 음식을 먹고 그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기롱(譏弄)을 받겠는가. 나의 일은 내가 이미 단정하였으나, 제군은 그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 다 나를 따라서 죽겠는가.”
하였다. 여러 사람이 번갈아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튿날 보병대 대장(大將)이 와서 대장(隊長)과 같은 말을 물었다. 임병찬이 선생의 처의(處義)의 연유를 상세히 말하니, 대장이 말하기를,
“삭발하고 변복(變服)한다는 것은 잘못된 소문이고, 감금된 사람의 식비는 모두 한국 정부에서 나옵니다. 우리들은 감시하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니, 안심하고 식사하여서 국가를 위하여 자애(自愛)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래서 임병찬과 여러 사람이 옛날의 의(義)를 들어서 여러 가지로 말씀드리면서 울어 마지않으니, 선생이 겨우 뜻을 돌려 말하기를,
“그대들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다만 그대들을 위하여 다시 먹고 다음 기회를 보겠다.”
하였다. 대장(大將)이 간 뒤에 대장(隊長)이 또 와서,
“내가 전일 삭발과 변복을 요구한 것이 아니고 다만 방 안에서 갓을 벗으라고 말하였는데 통역이 잘못 말하여 여러분이 단식한 지 사흘이 되었으니, 어찌 백이(伯夷)ㆍ숙제(叔齊) 고사(故事)를 본받으려 합니까. 나는 결코 삭발과 변복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최씨에게 말씀드려서 노체(老體)를 자애(自愛)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 선생이 하루는 일찍 일어나서,
“내가 평소에 꿈을 꾼 일이 없었는데, 지금 갑자기 꿈을 꾸었으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 같은 수인(囚人) 여러 사람 가운데 간혹 관(冠)이 없어 상투 바람으로 있어서, 선생이 치포관(緇布冠 검은 베로 만든 유생이 쓰는 관)을 만들어 쓰게 하고, 곧이어 절구 한 수를 읊고 화답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선생과 여러 사람이 혹은 글을 외어 강론(講論)하고, 혹은 시를 지어 화답하니, 만리 이역(異域)에서도 적료(寂廖)하지 않았다고 한다.
9월 초하루는 을미 4일(무술)에 장자 최영조가 들어와 뵈었는데, 문인 오봉영(吳鳳泳)ㆍ임응철(林應喆)이 동행하여 왔다. 최영조와 임응철이 각기 병든 노친(老親)을 방환(放還)하고 대신 감금되겠다는 뜻을 경비 대장에게 청원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 8일(임인)에 최영조ㆍ오봉영ㆍ임응철이 귀국하였다. 최영조가 머무르면서 모시고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니, 선생이 집에 노인이 있고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맡을 사람이 없으니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바다 빛은 창망하고 새벽 기운은 찬데 / 海色蒼茫曉氣寒 이때에 가고 머무르는 두 사람의 괴로운 심정 / 此時去住兩情難 이란 시구가 있었다. ○ 20일(갑인)에 문인 조재학(曺在學)이 들어와 뵈었다. 선생이 매우 기뻐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오랜 세월 사귄 벗이 우정도 깊어서 / 契託蓬麻歲月深 배를 타고 먼 길 오니 음산한 가을일세 / 乘桴遠役趁秋陰 깊고 깊은 한 줄기 물 원천에서 솟아나니 / 淵淵一水源頭活 그 당시에 주고받던 마음 힘써 따르게 / 勉副當年援受心
조재학은 송연재(宋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인도 되기 때문이다. 수일간 머무르다가 돌아갔다.
10월 초하루는 갑자 16일(기묘)에 보병 경비대 안 새로 지은 건물로 옮겨 갔다. 먼저 거처하던 집으로부터 거리가 약 5리였다. ○ 19일(임오)에 병이 났다. 처음에는 감기로 편찮다가 점점 위중하게 되었다. 그곳에 우리나라 약이 없어 애쓰다가, 행낭에서 약간의 재료를 찾아서 불환금산(不換金散)과 부자산(夫子散)을 잇달아 올렸으나 효험이 없었다. 대장이 군의를 보내어 진찰을 하고 약을 보냈으나, 선생은,
“80세 늙은이가 병이 들었고 또 수토까지 맞지 않은 것인데 외국의 신통하지 못한 약으로 무슨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 다만 이것으로써 자진(自盡)할 것이니, 일본 약물은 일체 쓰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29일에 이르러 점점 부증(浮症)과 혀가 말려들고 변비 등의 여러 증세가 있더니, 정신이 혼몽하여 다시는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다.
11월 초하루는 갑오 5일(무술)에 최영조와 문인 노병희(魯炳熹)ㆍ고석진(高石鎭)ㆍ최제학(崔濟學)이 들어와서 시병하였다. 임병찬이, 선생의 병환이 날로 위중한 것을 보고 서울에 전보하여 본가에 알리게 하였다. 고석진ㆍ최제학이 마침 풀려 났고, 노병희도 서울에 있었기에 모두 최영조와 동행하였는데, 뱃길이 막혀서 여러 날 나루터에서 보내다가 5일에 이르러 비로소 들어왔다. 선생은 이미 누가 누구인지 몰랐다. 노병희는 소속명탕(小續命湯)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재료가 없어서, 고석진과 최제학에게 바다를 건너서 약을 구해 오게 하였다. 그러나, 배편이 몹시 힘들어서 9일에 비로소 부산에 돌아갔다. 마침 최영학(崔永學)과 최제태(崔濟泰)ㆍ최정상(崔鼎相)ㆍ강갑수(姜甲秀)의 일행을 만나서 약을 부탁하고 들어왔다. 해어탕(解語湯)과 소속명탕(小續命湯) 수 첩을 지어서 연거푸 썼다. 14일 아침에 선생의 정신이 조금 깨어나서, 모시고 있던 사람이 서로 말을 하면서 선생이 듣는지 못 듣는지를 시험해 보니, 혹 미소를 짓기도 하고 혹 눈썹을 찌푸리기도 하였다. 임병찬의 일록(日錄)에는,
“선생께서 병이 나면서부터 20여 일에 이르기까지 혹은 평좌(平坐)하시고 혹은 꿇어앉고, 혹은 구부리고 혹은 기대기도 하셨으나 한 번도 드러눕지 않으시니, 여기에서 선생의 평소 소양(所養)의 훌륭하심은 다른 사람이 따를 수가 없음을 알았다.”
하였다. ○ 17일(경술) 오전 인시(寅時)에 대마도 감방에서 별세하였다. 전날 저녁에 큰 별이 동남쪽에 떨어지며 환한 빛이 하늘에 뻗쳐서, 보는 사람이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날 새벽에 별세하였다. 이에 앞서 최영조가 염습(斂襲)할 제구(諸具)를 갖추어 가지고 왔다. 선생이 작고했다는 말을 들은 대장은 시신을 오래 이 건물에 머물게 할 수 없다 하여 시체실에 옮기도록 하였다. 시체실은 경비대 안에 있는 한 칸의 판잣집인데 땅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가운데에는 시상(尸床)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시(巳時)에 옮겨 모시고 염습하였다. 이때에 추위가 혹심하여 노시(露屍)로 밤을 지낼 수가 없어서 오후 신시(申時)에 소렴(小斂)을 하였다. 집사(執事)는 임병찬(林炳瓚)ㆍ신보균(申輔均)ㆍ남규진(南奎振), 집례(執禮)는 이칙(李侙), 호상(護喪)은 노병희(魯炳熹), 사서(司書)는 문석환(文奭煥), 사화(司貨)는 신현두(申鉉斗)였다. 이날 밤에 왜는 다만 최영조ㆍ최영학만을 시신 곁에 있기를 허락하고, 그 나머지 안에 있던 사람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밖에 있던 사람은 안에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날 전보로 본가와 서울에 부고하였다. ○ 18일(신해)에 입관(入棺)하여 수선사(修善寺)에 옮겨 모셨다. 노병희가 밖에 있다가 송판을 구해 와서 대목을 불러 관을 만드는데, 대장이 정부에서 명령이 있어서 부대 안에서 관을 만들어 와야 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관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였다. 원수의 물건이고 또 제도도 맞지 않으니 하루도 임시로 사용할 수가 없으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터이므로 꾹 참고 그것을 사용하였다. 신시(申時)에 입관하여 영구(靈柩)와 혼백 상자를 모시고 경비대 뒷문을 나와 가게 주인 해로(海老)의 집으로 갔다. 감금되어 있던 모든 사람이 모두 흰 두건에 환질(環絰)을 두르고 경비대 문안에서 통곡하면서 하직하였고, 다만 임병찬이 모시고 가게에 갔다. 해로의 아들 웅야(雄野)가 앞을 인도하여 수선사 법당에 영구를 모셨다. ○ 20일(계축)에 영구를 모시고 배를 타서 21일(갑인)에 초량(草梁) 나루에 내려 상무사(商務社)에 안치(安置)하였다. 술시(戌時)에 영구를 모시고 배를 탔다. 노병희가 초혼(招魂)하며 앞에서 인도하였고, 항구의 왜인들이 촛불을 들고 따라오면서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튿날 진시(辰時)에 초량 앞 항구에 정박하니, 최영설(崔永卨)ㆍ최만식(崔萬植)ㆍ최전구(崔銓九)ㆍ최봉소(崔鳳韶)는 서울에서, 최영복(崔永福)ㆍ곽한소(郭漢紹)는 정산(定山)에서 왔으며, 고석진(高石鎭)ㆍ최제태(崔濟泰)ㆍ최제학(崔濟學)ㆍ최정상(崔鼎相)ㆍ임응철(林應喆)과 숙소를 정하고 상무사(商務社)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무사란 본주(本州)와 영남ㆍ호남 사람들이 돈을 모아 회사를 만들어 장사하는 일을 처리하는 곳이다. 이보다 앞서 선생이 일본에 건너가는 일을 당시에 사원들이 모두 알지 못하고 뒤늦게 배행하러 왔다가 길에서 서로 붙들고,
“하늘이 어찌하여 선생에게 이런 행차가 있게 하는가.”
하면서 통곡하였는데, 이때 와서 선생의 부고를 듣고는 모두 망곡(望哭)하고 애통(哀痛)해하면서 사흘 동안 철시(撤市)하고, 치상(治喪)을 담당할 것을 자청하였다. 사무장 김영규(金永圭)가 정구청(停柩廳)을 새로 만들 것을 의논하니, 사원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가 이 건물을 지어서 왕래하는 사람은 모두 묵어 갔습니다. 만일 이곳에 최 선생을 모신다면, 비록 혼령이지만 우리들의 영광입니다. 지금 꼭 새로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 건물은 헐어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하니, 김영규가 말하기를,
“내가 제군의 뜻을 떠보았을 뿐이오.”
하였다. 이리하여 ‘면암 최 선생 호상소(勉菴崔先生護喪所)’라고 문에 크게 써 걸고, 사원에게 본분을 이미 정하여 집사(執事)로 삼았는데, 유진각(兪鎭珏)ㆍ이유명(李裕明)ㆍ권순도(權順度)는 호상, 박필채(朴苾彩)ㆍ송재석(宋在錫)은 집례, 이응덕(李應悳)ㆍ장우석(張禹錫)ㆍ안순극(安舜克)은 축(祝), 김교민(金敎玟)ㆍ손영두(孫永斗)ㆍ박봉석(朴鳳錫)은 사서(司書), 김영규ㆍ김도익(金道翊)ㆍ정시원(鄭時源)은 사화(司貨), 윤명규(尹明奎)ㆍ권상희(權爽煕)는 조빈(造殯)으로 성복(成服)과 반구(返柩)의 제구(諸具)를 모두 준비하였다. 이날 아침에 자질과 문인들이 모두 부두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사원 1천여 명이 대여(大轝)와 영거(靈車)를 갖추고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日月高忠)’이란 8자를 비단에 써서 높은 장대에 달고 영구를 출영하여, 들어와서 일내헌(一乃軒)에 모셨다. 영구를 모시고 하륙할 때에 김영규와 권순도가 영구를 부여잡고 부르짖기를,
“선생님, 이것은 대한 배입니다. 여기는 대한 땅입니다.”
하며 울었다. 부두의 남녀 노소 수만 명이 모두 선생을 부르니 곡성이 땅을 뒤흔들었고, 대여를 뒤따르는 사람이 5리에 이르렀다. 이때에 검은 구름이 덮여서 날이 어둡고 가랑비가 촉촉히 내려 쌍무지개가 동남쪽에 가로 걸려서 광채가 빛나더니, 영구를 안치한 뒤에 무지개는 사라지고 구름은 걷혀 비가 개니 한 점 먼지도 없었다. 항구에 가득했던 구경꾼들이 이상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이날부터 발인(發靷)할 때까지 원근의 사민들이 전물(奠物)과 제문을 가지고 와서 통곡하는 사람이 주야로 끊이지 않았고, 학교의 생도와 여학교 8, 9세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와서 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혹은 만사(輓辭)로, 혹은 연설로, 혹은 조가(吊歌)로 애도하면서 모두 땅을 치고 발을 구르며 친척처럼 슬퍼하였다. 본부(本部)의 기생 비봉(飛鳳)ㆍ옥도(玉桃)ㆍ월매(月梅)도 언문(諺文)으로 제문을 지어 치전(致奠)하고 매우 슬프게 곡하였고, 범어사(梵魚寺)의 중 봉련(奉蓮)이 승도들을 거느리고 길가에서 치전하였다. 초량의 세 과부는 부두에서부터 대여를 모시고 따라오다가, 구포(龜浦)에 이르자 머리에 전물을 이고 도보로 40리나 걸어와서,
“대감의 제수(祭需)는 왜놈 차에 실어서는 안 되고, 제기도 왜놈 물건을 쓰지 못합니다.”
하였다. ○ 22일(을묘)에 성복하였다. 원근의 사민 남녀가 와서 곡하는 사람이 수만 명이었고, 와서 보는 외국인도 모두 눈물이 얼굴을 덮었다고 한다. ○ 23일(병진)에 발인(發靷)하였다. 대여(大轝)ㆍ영거(靈車)와 짐꾼은 모두 상무사(商務社)에서 전담하였다. 초량에서 구포까지 40리 이내였는데, 상여를 뒤따르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고 집집마다 흰 기를 꽂아 지나는 곳마다 부녀들이 모두 곡하면서 맞이하였고, 노상에서 치전하는 사람이 서로 잇달아서 이날은 겨우 10리를 갔다. 다음날 30리를 가서 구포에 도착하였는데 여기는 동래(東萊)의 끝 경계이다. 상무사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모두 매우 슬피 곡(哭)한 뒤에 돌아가고, 유진각은 시종 호상하여 정산(定山)에 이르러 돌아갔다. ○ 선생의 상사가 처음 났을 때 엄원(嚴原) 경비 대장이 부의로 민전(緡錢) 2백을 보내와서 최영조가 여러 차례 거절하였으나, 대장이 성내면서 바다를 건너는 일을 방해하겠다는 말이 있기에 부득이 받아 간직하였다가 발인하는 날에 우편으로 돌려보냈다.
12월 초하루는 계해 7일(기사)에 정산(定山) 본가(本家)에 도착하였다. ○ 10일(임진)에 대렴(大斂)하였다. ○ 13일(을해)에 성빈(成殯)하였다. 구포강(龜浦江)을 건너, 김해(金海)ㆍ창원(昌原)ㆍ칠원(漆原)ㆍ창녕(昌寧)ㆍ현풍(玄風)ㆍ성주(星州)ㆍ개령(開寧)ㆍ김산(金山)ㆍ황간(黃澗)ㆍ영동(永同)ㆍ옥천(沃川)ㆍ회덕(懷德)ㆍ공주(公州)를 거쳐 15일이 걸려서 비로소 정산 본가에 도착하였는데, 지나온 고을에서 전물(奠物)을 가지고 와서 곡하는 사람이 동래(東萊)에서와 같았다. 창녕 사람 박지림(朴芝林)은 농부인데 선생을 추모하여 치전(致奠)하고 부의금을 내고 매우 슬프게 곡하였다. 평소에 의견을 달리하던 사람도 정성껏 슬픔을 다하여 만사(輓辭)ㆍ제문ㆍ치전ㆍ치부로 그 뜻을 극진히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영구가 바다를 건넌 이래로 사녀(士女)들이 달려와 부모를 잃은 듯이 울부짖으니, 천고(千古)의 옛 기록에도 거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비[士子]가 존상(尊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부녀와 어린이까지도 누가 시켜서 그렇겠는가. 아마도 하늘의 밝은 도리와 사람의 떳떳한 윤리는 시세(時勢)를 따라서 타락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었다. 제물과 제기를 절대로 왜의 물건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한 것이나, 승려와 천기(賤妓)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생을 부르며 깊이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한 일은 적신(賊臣)과 교활한 원수가 듣고 맥이 풀리게 했으니, 정말 선생의 영혼을 잘 위로했다고 할 만하였다. 창원에 이르자 왜병 10여 인이 마항(馬港)에서 와서 길을 차단하고 협박하면서 상여를 기차에 싣게 하니 종자(從者)가 정색으로 거절하며 승강이를 하면서 조금도 굴하지 않으니, 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아마도 영여(靈轝)가 이르는 곳마다 사민(士民)이 무리를 이루니 왜가 혹 다른 일이 생길까 염려해서였다. 창녕읍(昌寧邑)에 이르니, 헌병 소위 평전철차랑(平田鐵次郞)이란 자는 전에 사령부에서 신문할 때에 이미 사나운 놈인 줄 알았는데, 여기에 이르러 또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의 명령을 가지고 와서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종자(從者)가 함께 승강이를 하면서 밤새도록 팽팽히 싸우니, 평전도 이론에 굽히고 스스로 물러섰다. 곁에서 보고 있던 사람이,
“이날 밤 싸움은 10만의 군대보다도 더 강하여, 왜적이 한국을 경영한 지 30여 년에 처음으로 뜻대로 하지 못하는 일을 보았다.”
하였다. 이때부터 왜병 수십 명이 교대해 가면서 따라와서 연도에서 조상하고 치전하는 사람들을 모두 쫓고 본집에 이르러 성빈(成殯)하는 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돌아갔다. 장사 때에 또 와서, 사방에서 장사에 모인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고 다만 도포를 입은 사람은 금하지 않았다.
[주D-001]내가 사방을 …… 갈 곳이 없다 : 《시경(詩經)》 소아(小雅) 절남산(節南山)에 있는 말로, 사방이 다 혼란하여 갈 곳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주D-002]임병찬(林炳瓚)이 …… 토벌한 공 : 1894년(고종31) 동학란(東學亂) 때에 임병찬이 낙안 군수(樂安郡守)로 있으면서 동학교도 수백 명을 잡아 벌하거나 귀순시킨 일을 가리킨다. [주D-003]상(商) 나라 미자(微子) : 미자는 상, 즉 은(殷) 나라 주(紂)의 서형(庶兄)으로, 주의 무도함을 여러 차례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은 나라를 떠났다. [주D-004]명(明) 나라 …… 40여 인 : 명 나라 숭정(崇禎 의종(毅宗)의 연호) 말엽에 이자성(李自成)이 서안(西安)에서 왕을 칭하여 대순(大順)이라 참람하게 호(號)하며 여러 성을 깨뜨리고 드디어 경사(京師)를 함락하자, 장렬제(莊烈帝) 즉 의종(毅宗)과 범경문 등 수십 인이 순국한 일을 말한다. 《明史 卷24 莊烈帝紀2》 [주D-005]책의(翟義)와 …… 문천상(文天祥) : 책의는 왕망이 섭정을 할 때에 유신(劉信)을 세워 천자를 삼고 스스로 대사마(大司馬)라 칭하며 기병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漢書 卷84 翟義傳》 문천상은 원병(元兵)과 싸우다가 패하여 3년간 구금 생활을 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주D-006]우공(寓公)의 욕 : 나라를 잃고 남의 나라에 우거(寓居)하는 천자나 제후가 겪는 곤욕. [주D-007]두 능의 화 :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선릉(宣陵 성종 및 그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과 정릉(靖陵 중종의 능)을 파헤친 일. [주D-008]자방(子房)처럼 원수를 갚을 때 : 자방(子房)은 장량(張良)의 자. 장량은 그 조상이 여러 대에 걸쳐 한(漢) 나라를 섬겨 왔는데, 진(秦)이 한 나라를 멸망시키자 창해(倉海)의 역사(力士)를 얻어서 박랑사(博狼沙)에서 철퇴로 진왕의 수레를 쳤으나 실패하였다. 《漢書 卷40 張良傳》 [주D-009]북지왕(北地王)의 …… 의리 : 북지왕(北地王)은 촉한(蜀漢)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아들 유심(劉諶). 후주 염흥(炎興) 1년(263) 위(魏)가 대거 침입하자, 후주는 광록대부(光祿大夫) 초주(譙周)의 말을 듣고 항복하려 하였다. 이때 유심은 화를 내며 “만약 힘이 모자라 패하게 되면 부자와 군신이 힘을 합하여 성을 등지고 싸우다가 사직과 함께 죽어 선제(先帝)를 뵙는 것이 옳다.”고 반대하였으나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심은 처자를 죽인 후 자살하였다. 《三國志 蜀書 卷3 後主傳3 註》 [주D-010]수실(秀實)의 …… 쳐야 했고 : 당(唐) 나라 덕종(德宗) 때에 주자가 배반하여 참위(僭位)하려고 하자 단수실(段秀實)이 원휴(源休)의 상홀(象笏)로 주자의 머리를 쳤다. 《唐書 卷153 段秀實列傳》 [주D-011]고경(杲卿)의 …… 여겼겠는가 : 상산 태수(常山太守) 안고경(顔杲卿)은 안녹산(安祿山)이 반란하자 그와 대항하여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혀 사지를 찢기면서도 큰소리로 녹산을 꾸짖었다. 그때 안녹산은 하북ㆍ하동의 채방사였고, 상산은 안녹산의 지배 하에 있었다. 《唐書 卷192 顔杲卿列傳》 [주D-012]시중(市中)에 …… 따랐고 : 왕손가(王孫賈)는 제(齊) 나라 민왕(湣王)을 섬기고 있었는데, 초장(楚將) 요치(淖齒)가 민왕을 죽였다. 그래서 왕손가는 시중에 들어가서, 나와 함께 요치를 치고자 하는 사람은 우단(右袒)하라고 외치면서 동조자 4백 명을 얻어 그를 토벌하였다. 《戰國策 卷13》 [주D-013]서경(西京)에서 …… 쳤겠는가 : 왕망이 섭정할 때에 유신(劉信)을 천자로 세우고 책의는 대사마가 되어 기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漢書》 [주D-014]삼호(三戶)의 …… 외치며 : 복수할 일념을 뜻한다. 초(楚)의 범증(范增)이 항량(項梁)을 찾아가서 진(秦)에 원수를 갚기 위하여 기병할 것을 권유한 말 가운데에, 남공(南公 음양가)의 말을 인용하여 “초 나라가 비록 삼호(三戶)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는 것은 초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 [주D-015]제 민왕(齊湣王)과 송 언왕(宋偃王) : 제 민왕은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하다가 초장(楚將) 요치(淖齒)에게 살해되었다. 송 언왕은 노(魯) 나라 사람 남궁만(南宮萬)의 감정을 사서 그에게 살해되었다. [주D-016]지난봄에 욕 : 토적소를 올렸다가 을사년(1905) 2월에 일본 사령부와 헌병대에 각각 한 번씩 구금된 일을 말한다. [주D-017]인(仁)을 …… 얻는 것 :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뉘우칠 것이 없다는 뜻. 자공(子貢)이 백이ㆍ숙제가 어떤 사람이냐고 공자에게 묻자, 공자가 대답한 말이다. 《論語 述而》 [주D-018]소 중랑(蘇中郞)과 홍 충선(洪忠宣) : 한(漢) 나라 소무(蘇武)가 중랑장(中郞將)으로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유폐되어, 눈과 전모(旃毛)를 씹으며 연명하였고, 북해(北海)로 옮겨진 뒤에는 들쥐와 풀 열매로 연명하다가 19년 만에 돌아왔다. 홍 충선은 송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호(皓), 충선은 시호인데 금(金)에 사신으로 갔다가 15년간 유폐당하였다. [주D-019]청음(淸陰)과 삼학사(三學士) : 청음은 김상헌(金尙憲)의 호.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가 심양(瀋陽)에 잡혀간 일이 있다. 삼학사는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세 사람으로 병자호란에 척화를 주장하다가 심양으로 붙잡혀 가서 끝내 굴하지 않고 처형되었다. [주D-020]뗏목을 …… 탄식 : 공자가 도의가 날로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한탄하기를 “도가 행하여지지 못할 것이니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뜰 것이다.[道不行 乘桴浮于海]” 하였다. 《論語 公冶長》 [주D-021]바다에 …… 노중련의 풍도 : 전국 시대 제 나라의 노중련(魯仲連)은 “진(秦)이 황제가 되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그 백성이 되지 않겠다.” 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37-08-07[06] 함녕전에서 산릉을 봉표한 총호사 등을 소견할 때 비서원 승 송종억 등이 입시하여 봉표 결과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 유시(酉時). 상이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갔다. 산릉을 봉표한 총호사와 원임 대신 이하가 입시하였다. 이때 입시한 비서원 승 송종억(宋鍾億), 비서원 낭 이의국(李義國)ㆍ안필호(安弼鎬), 총호사 심순택(沈舜澤), 산릉 제조 민응식(閔應植)ㆍ김영목(金永穆)ㆍ조정희(趙定煕), 학부 대신 김규홍(金奎弘), 내부 대신 이건하(李乾夏), 궁내부 서리대신 윤정구(尹定求), 장례원 경 이주영(李胄榮)이 차례로 나와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사관은 좌우로 나누어 앉으라.”
하였다. 이어 대신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니, 심순택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늦더위가 매우 심한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침수와 수라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명헌태후전의 기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결같으시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태자궁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순하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태자비궁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평순하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절기상 가을이 다가왔는데도 아직 더위가 심하니, 이는 남풍(南風) 때문인 듯하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봉표가 무사히 끝났으니, 매우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해 동안 걱정해 오던 끝에 지금에서야 좋은 산을 얻어 봉표까지 마치게 되었다. 또 동궁이 애타게 걱정하던 참이니 더욱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자, 심순택이 아뢰기를,
“동궁의 기쁨은 실로 지극한 효성에서 비롯된 것이니, 무한한 존경의 마음이 끝없이 우러러 나옵니다. 지금 이미 봉표하였으니, 장례원으로 하여금 각 항목에 대하여 택일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모든 일들을 서둘러 거행해야 할 것이다.”
하자, 심순택이 아뢰기를,
“가을 해가 봄, 여름에 비해 점차 짧아지는데 역사(役事)는 방대하니 매우 걱정이 됩니다. 당상관들이 일을 나누어 맡고는 있으나 특별히 독촉하고 감독해야만 제때에 역사를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럴 것이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상석(象石)과 사석(獅石)은 이미 새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明) 나라의 능제(陵制)대로 하려면 사세(事勢)와 재력(財力)이 미치지 못할 것이니, 제반 석의(石儀)를 적당히 줄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이 일은 성상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유년(1897, 고종34)에 사람을 보내어 명 나라의 제도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제반 석물이 매우 굉장하고 청(淸) 나라가 선 뒤에도 훼손된 것 하나 없이 각별히 보존하고 있다고 하니 청 나라가 명 나라에 대하여 또한 후하게 대했다고 하겠다. 제반 석물을 모두 동구(洞口)에 벌여 세우고 또 토성(土城)을 쌓았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힘으로 명 나라 제도를 그대로 따르려 한다면 설사 한두 해를 들인다고 하더라도 역사를 끝내기 어려울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문제(漢文帝)가 만든 수릉(壽陵)은 길이 100여 척(尺)에 너비가 90척이었으니, 어찌 그 역사가 이 정도까지 방대하였단 말인가. 진 문공(晉文公)이 이윤(伊尹)의 장례에 묘도(墓道)를 설치하기를 천자에게 청한 것도 반드시 예법에 맞는 일은 아니었으니, 장례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예법을 따르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윤 특진관(尹特進官 윤용선(尹容善))이 계속 몸이 좋지 못하였는데 또 오한이 들고 현기증마저 일어 연석에 나오지 못하고 지레 고향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매우 황송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기가 심한 처지에 어찌 그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자, 심순택이 아뢰기를,
“종기는 이미 완전히 아물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을 들으니 매우 다행스럽다. 큰 종기는 젊은 사람이라도 빨리 치유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칠십 노인이 이처럼 빨리 치유하였다 하니, 그의 근력이 좋음을 이로써 알 수 있겠다. 올해의 두 차례 북행(北行)도 모두 무사히 다녀왔었다.”
하자, 심순택이 아뢰기를,
“근래에 생긴 여러 병증은 모두 이 종기로 인한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의 근력은 아주 단단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봉표한 곳을 조금 위로 올리면 높이가 수릉(綏陵)만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수릉은 평지로부터 30여 척 떨어져 있고 이곳은 20여 척 떨어져 있다고 한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조금 위로 올리면 5척 정도는 높일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가(人家)와 전답(田畓)을 심하게 훼손하지는 않겠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인가는 많지 않습니다만, 홍릉(洪陵)에서부터 봉표한 곳까지 새로 길을 내게 되면 그사이에 전답이 필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 전 구종서(具鍾書)가 신을 찾아왔는데, 구종서는 바로 군장리(君壯里)에 무덤을 쓴 구가(具家)의 자손입니다. 용인(龍仁)에 있는 옛 향교(鄕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양주(楊州) 진벌면(眞筏面)에 있는 윤가(尹家)와 이가(李家)의 산을 사급(賜給)하도록 이미 처분하셨으니, 주본(奏本)을 올려 계하(啓下)를 청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신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 일에 대하여 주본을 올리는 것은 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본을 올리는 것은 안 되지만, 사패(賜牌)에 대해서는 아마도 규례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심순택이 이르기를,
“있습니다만 청하는 대로 허락한다면 은혜를 받은 사람의 처지에서는 다행스럽다 하겠으나, 옛 산의 주인인 윤가와 이가의 처지에서야 어찌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럴 것이다. 또 신식(新式)에는 사패에 대한 규례가 없지만, 국장(國葬)과 관련된 일이라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장(移葬)할 사람이 산릉도감에 와서 말한다면 궁내부로 보내고, 궁내부에서 주하(奏下)받아 내부에 알려 주고, 내부에서 각군(各郡)에 훈령(訓令)을 내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조가(趙家)의 경우에는 보령(保寧)의 수영(水營) 및 석실 서원(石室書院)의 옛터를 얻고자 한다고 한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석실 서원은 이미 허물었고, 보령의 수영 또한 허물어진 곳이 아닙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곳들은 공해(公廨)이니 이 또한 사급할 것이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공주(公主)ㆍ옹주(翁主)ㆍ국구(國舅)ㆍ부마(駙馬)의 예장(禮葬)과 관련한 등록(謄錄)이 있는가?”
하니, 이주영이 아뢰기를,
“그동안 문적(文蹟)을 상세히 살펴보았으나 기록이 없습니다.”
하였다. 윤정구가 아뢰기를,
“신이 조정희(趙定煕)에게 들으니, 예전 광릉(光陵) 인봉(因封) 당시 한원군(漢原君)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예장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록 예장하였던 묘라 하더라도 이장을 하는 경우에는 다시 예장하는 예는 없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원군의 일은 조가 족보에 나온다. 안양군(安陽君)의 묘도 이장하는 중인가?”
하자, 이건하가 아뢰기를,
“해자(垓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에 안양군의 이장 여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장해야 할 무덤에 대해 아직까지 적간하지 않았는가?”
하자, 이건하가 아뢰기를,
“이에 대해서는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일간 상세히 조사한 뒤에 대령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장하는 집에는 내하(內下)하기도 하고 탁지부에서 지급하기도 하는데, 모두 후하게 내려 보내어 조정의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마련하기 어려운 집에는 관가의 힘을 빌려 도와주도록 하라.”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처럼 지극하시니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물가가 예전과 다르고 대어 줄 물품은 지극히 많으니, 참으로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주ㆍ옹주ㆍ국구ㆍ부마의 장례 비용은 넉넉하게 내려 보내고, 훈신(勳臣)에 대해서도 생각해 주어야 할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일전에 상지관 3원을 더 차하하라는 처분을 받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군직에 붙이는 규례가 없기 때문에 ‘관디 차림으로 항상 사진(仕進)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던 것도 따라서 없어졌습니다. 지금 들으니, 최전구(崔銓九)가 평민 신분으로 직임을 수행한다는데, 그 자가 신에게 와서 말하기를, ‘봉표한 뒤에는 상지관이 입직해야 하는데, 직명도 없이 함부로 관복을 입을 수도 없고 평복으로 입직할 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아래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오늘 연석에서 여쭙겠다.’고 하였습니다. 평복으로 입직하는 것은 사체상 불가하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유년에는 직명이 없는 상지관에 대하여 산릉도감으로 하여금 월봉(月俸)을 지급하게 하였는데, 이는 하속(下屬)에게 요미(料米)를 지급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또한 마땅한 처분은 아니었다. 올해 준원전(濬源殿)의 충의(忠義)를 별도로 증원한 분참봉(分參奉)에 단부(單付)하였던 예를 원용할 수도 있고, 무진년의 예에 따라 임시로 상당직(相當職)에 붙여 관디 차림으로 항상 사진하게 하는 것도 안 될 것은 없다. 월급은 궁내부로 하여금 지급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이 또한 일반 정식(定式)으로 부표(付標)하라.”
하자, 김규홍이 아뢰기를,
“상지관은 본래 관상소(觀象所) 소속이니, 학부로 하여금 분주사(分主事)나 분기사(分技師)에 붙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학부의 관상소로 하여금 임시로 상당직에 붙이되 3품인 경우에는 분기사에 붙이고 6품 이하는 분주사에 붙인 다음 인산(因山)이 끝난 뒤에 해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대신에게 하교하기를,
“이런 내용으로 통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하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연석에서 주고받은 말은 차후 억만년 동안 정식이 될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말생(趙末生)이 비록 공신은 아니지만 조정의 뜻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또 그의 사손(祀孫)은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러하시니 매우 감격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자리로 돌아가라.”
하였다. 이어 사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였다. 또 대신에게 먼저 물러가라고 명하고, 또 물러가라고 명하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왔다.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우서(禹敍), 호는 지은(智隱)이다. 1850년 6월 5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학천리 169번지에서 태어났다.
[활동사항] 최전구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에 분격하여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전라북도 태인[현 정읍 지역]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였다. 이후 최익현 의병대가 순창에서 패전한 뒤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뒤에도 항거를 계속하였다.
1910년 왜적의 침략 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규정하고 일본의 군왕에게 통고문을 보내려다 체포되었다. 이후 욕지도(欲知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 1911년 동지들을 규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의금부순찰사로 활동하다 1917년 12월 28일 붙잡혔다. 이로 인해 다시 영종도(永宗島)에 1년간 유폐되었다. 1918년 고종이 죽자 단식 투쟁을 하는 등 10여 차례에 걸친 구검(拘檢)과 2차례의 유폐 생활 끝에 1936년 8월 성송면 학천리 독선재(獨鮮齋)에서 사망하였다.
[저서] 저서로 『남정록(南征錄)』과 『유고(遺稿)』 4권을 남겼다.
[상훈과 추모] 성송면 학천리에 최전구 추모비가 있고,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 선언서는 광무황제의 둘째아들인 의친왕이강(李堈)이 일본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압록강을 건너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향하다가, 중국 땅 안동(安東)에서 일본경찰에 잡힘으로써 탄로난 것이다.
이 선언서는 반만년 역사의 권위와 2,000만 민중의 성충(誠衷)을 의지해 우리 국가의 독립국 됨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 됨을 선언하며 또 증언한다고 하였다. 3월 1일에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0일에 정부를 건설했는데도 일본은 아직도 민중을 크게 억압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만일 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월 1일의 공약에 의해 최후의 1인까지 최대의 성의와 노력으로 혈전을 불사하겠다고 하여 독립쟁취의 폭력적 대항방법을 제시하였다. 이 선언서의 특징으로는 왕족 및 전직 고관 등이 가담한 독립선언서인 점, 최후의 1인까지 항전을 벌일 것을 강조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 선언서에는 이강·김가진(金嘉鎭)·전협(全協)·양정(楊楨)·이정(李政)·김상열(金商說)·정상무(鄭相武)·백초월(白初月)·최전구(崔銓九)·조형구(趙炯九)·김익하(金益夏)·정설교(鄭卨敎)·이종춘(李種春)·김세응(金世應)·정의남(鄭義南)·나창헌(羅昌憲)·한기동(韓基東)·신도안(申道安)·이신애(李信愛)·한일호(韓逸浩)·박정선(朴貞善)·노홍제(魯弘濟)·이직현(李直鉉)·이내수(李來修)·김병기(金炳起)·이겸용(李謙容)·이설후(李雪吼)·신태련(申泰鍊)·신형철(申瑩徹)·오세덕(吳世德)·정규식(鄭奎植)·김홍진(金宖鎭)·염광록(廉光祿) 등이 서명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우서(禹敍), 호는 지은(智隱). 전라북도 고창 출신.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이에 분격하였고,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였다.
최익현의병대가 순창에서 패전한 뒤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일본에 대하여 항거를 계속하였고, 1910년 왜적의 침략행위를 십대죄목(十大罪目)으로 성토하다가 붙잡혀 욕지도(欲知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
1911년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다가, 1917년 12월 붙잡혀 다시 영종도(永宗島)에 유배되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1(국가보훈처, 1986)
『독립운동사자료집』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朝鮮總督府警務總長命令書(1917.12.28)」
「朝鮮總督命令書(1912.8.7)」
[관련시청각]
최전구
3) 3·1운동의 전개와 민족자결주의 이해의 확산
(1) 지식인·학생과 중소시민註 133133 본장에서는 33인이 체포된 이후 운동이 발전·확산되는 대중화단계에서 주된 역할을 하는 지식인·청년학생과 중소자본가·자영업자의 활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참여자의 직업 중 ‘농업’이라고만 되어 있는 사람 중에는 중소지주·부농·중농를 포함’ 소작 빈농도 포함되었겠지만 이러한 농업자도 중소시민의 활등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또한 ‘무직자’도 상당한 지식인층으로 보아야겠다.닫기
3·1운동을 촉발·확산시키는데 33인의 선언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계획 초기인 2월초부터 최린·최남선·현상윤 등이 운동의 계획을 의논할 때부터 최린은, “이 운동의 골자는 선언문에 있은 즉 무엇보다 선언문을 먼저 준비해 두어야 겠다”고 하였다.註 134134 裵鎬吉, 앞 책, p.16.닫기 이는 선언서의 발표가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일제도 독립선언서의 발표 및 청원서의 방법이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결정적이라고 하였다. 즉 독립선언서를 두고, “개인으로서의 힘을, 국가로서는 병비(兵備)를 필요로 하지 않는 현명한 방법”이라고 하고, 또 무기의 사용은 그것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데 반해 이 방법은 “어떠한 장소에서도 사용할 수 있으며……군중의 심리(心理)를 통일하고 단결할 수 있는 점에서 총포·창검이 미칠 바 아니다”고 하여,註 135135 朴慶植, 앞 책, p.94.닫기 선언서의 발표가 대중의 만세시위의 대규모화에 미친 영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서울과 각 지방에 배포된註 136136 독립선언서의 각지 배포에 관해서는 申國柱,「3·1독립선언」,『한민족독립 운동사』Ⅴ.3, pp.243~246 참조.닫기 선언서 이외 각종 격문·신문·잡지 등 각종 유인물은 투쟁의 이념과 방향을 제시하고 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주된 매체였다. 그리고 비밀결사를 비롯하여, 지식인·중소시민은 3월 1일 이후 여러 시위에서 바로 이러한 유인물을 살포하면서 광범한 계층에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서울과 인근 지역의 시위 참여 후 귀향하여, 혹은 시위 소식을 듣고 각지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는데, 시위에 등장하는 유인물은 입수한 선언서를 등사하거나 33인의 선언서를 토대로 다시 제작하기도 하고, 기타 격문을 제작·배포하여 민중의 참여를 유도·촉구하였다. 각종 유인물에는 3·1운동의 주된 이념인 자유·평등·독립·정의·인도사상이 민중의 생활상의 요구와 함께 반영되어 있었다.
다음에서 우리는 3월 1일 이후 서울과 각 지방의 운동을 통해 이러한 이념들이 대중사회에 전달·확산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서울
1. 3월 1일 아침 국민대회(國民大會) 명의로 2천만 동포의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檄文)이 서울 각지에 살포되었다. 내용은 파리강화회의를 통한 민족의 독립청원에 대해 일본이 방해 공작을 하여 그 일환으로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점과 “미국대통령 윌슨씨가 13개조의 성명을 한 이래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소리는 일세(一世)를 혼동(欣動)하여 파란(波蘭 ; 폴란드)·애이란(愛爾蘭 ; 아일랜드)·서극(棲克 ; 체코) 등 12개국이 함께 독립을 하였다. 아한민족(我韓民族)인 자(者) 어찌 이 기회(機會)롤 놓칠 것인가……금일(今日)은 세계(世界)가 개조(改造)되고 망국(亡國)이 부활(復活)하는 호기회(好機會)이다. 거국(擧國)이 일치견결(一致堅結)하여 궐기(蹶起)하면 이 망실(亡失)한 국권(國權)을 회복(回復)할 수 있고 이미 망(亡)한 민족(民族)을 구제(救濟)할 수 있다……궐기(蹶起)하라 아 이천만동포(我二千萬同胞)여!註 137137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3, No 1302, p.20.닫기라고 하여, 민족자결주의의 주창에 대응하여 궐기를 촉구하였다.
2.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있었던 학생·시민의 독립선언은 황해도 해주 출신,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鄭在鏞)의 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선언서 낭독과 만세 고창 이후 군중은 “제국정부(帝國政府) 및 세계각국(世界各國)에 대하여 조선인은 총(總)히 독립자유(獨立自由)의 민(民)인 즉 조선(朝鮮)은 일독립국(一獨立國) 되기를 교망(翹望)한다”註 138138 國編,『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 Ⅴ.4,「金炳璣 등 豫審終結決定書」, 1919.8.30, p.546.닫기는 의사를 밝히고 선도자의 지시에 따라 동서로 나누어 시내 시위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 인천 거주 기독교 목사 동석기(董錫璣)가 미국 총영사관(總領事館) 앞에서 민족자결운동(民族自決運動)의 정황(情況)을 파리강화회의에 타전할 것을 의뢰하여, 미 총영사는 시내의 상황을 돌아보고 그 요지의 전보를 쳤다는 보고가 일제 관헌에 접수되기도 하였다.註 139139 국회도서관 편, 앞 책, No.1292, p.2.닫기
3. 3월 1일 시위에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이 배포되었는데, 이는 33인 중의 1인인 이종일(李鍾一)이 독립선언서의 인쇄 배부와 함께 독립선언의 취지를 보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시위참여를 촉구하기 위해 천도교월보사(天道敎月報社) 주필(主筆) 이종린(李鍾麟), 보성법률상업학교장(普成法律商業學校長) 윤익선(尹益善)과 함께 추진하였던 것이다. 제1호는 2월 28일 이종린이 원고를 작성한 뒤, 3월 1일 인쇄·배포하였는데,註 140140 조선총독부서무부조사과, 앞 책, p.24.닫기 그후 신문은 같은 해 6월 22일자 제36호와 8월 29일자 국치기념호(國恥記念號)까지 꾸준히 발행되었다.註 141141 이종린이 검거된 이후 장종건 등에 의해 계속 발행되는 상황은 윤병석, 앞 책, pp.216~221 참조.닫기 그 주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제1호(3.1) : 33인의 선언서 발표 사실과, 대표들이 “최후의 1인으로써 동지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조선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으로 바치노니 우리 신성한 형제는 우리들의 본뜻을 관철하여 어느 해 어느 날까지라도 우리 2천만 민족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참여할 것을 호소한 점과, “전국민은 제씨의 본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일제히 호응한다”고 하는 거사공고를 하고 있다.註 14214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165.닫기제2호(3.3) : 파리강화회의와 관련된 일제의 방해문서 사실과 “근일 중에 가정부를 조직하고 가대통령 선거를 할 것”이란 임시정부 추진 움직임을 소개하고 있다.註 14314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166.닫기
호외 제2 : “강화회의(講和會議)에서는 기(旣)히 조선독립(朝鮮獨立)을 승인(承認)하는 동시에……인도정의(人道正義)를 제창(提唱)하는 현시대(現時代)에” 민족자결(民族自決)이 가능할 것임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註 144144 국편,『한국독립운동사자료』5(3·1운동편)(1975), pp.9~10.닫기
제3호(3.5) : 3월 6일의 시위 공고 및 참여독려와 함께, “3일 밤 12시 20년간이나 폐쇄되었던 종로 보신각에서 종소리도 쟁쟁하였다……소년 1인이 의연히 ‘이 종이 울지 않음이 이미 20년! 천지신명께서 우리들의 울음 원통함을 내려 보살피사 오늘 자유를 준 것이다. 어찌 자유의 종이 아니겠는가?’”註 145145 국편, 앞 책, pp.165~166.닫기라고 하여 자유독립사상을 전달하고 있다.
제5호(3.13) : 철원 군수의 독립선언의 소개와 파리회의에 제출할 서류를 미국영사에게 위탁한 사실을 담고 있다.註 14614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166.닫기
제6호(3.15) : “조선은 즉 조선민족의 조선이므로 조선을 조선민족이 자유 독립 시킴은 민족자결주의에 의하여 정당한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註 14714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166.닫기
제9호(3.24) : 국내 각지와 블라디보스톡·북간도의 독립운동상황을 소개하고 동호(同號) 부록으로 “우리들은 정신상 언론·출판·신앙의 3대 자유를 박탈당하고 정의인도와 민족자결의 천명밑에 서서 독립을 선언한 청년 남녀를 포살당하였다……정의인도와 민족자결의 천명을 받은 평화세계에 오직 홀로 우리 동족만이 박멸당하여 고통을 받음은 통분하기 그지 없다……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결사의 각오로써…필생(必生)의 관문에 도착하라”註 14814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167.닫기고 하였다.
제11호(3.21) : 중국 광동 재류 동포들이 “평화회의에 위원을 파견하여 각국 위원과 기맥을 통하고 일대운동”을 일으킨 기사를 소개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기충천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註 14914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6, p.921.닫기
제16호(3.21) : 배재고등보통학교 장용하(張龍河)·무직 이춘봉(李春鳳)은 3월 7일 “조선은 독립할 수 있으니 일동은 분기하라”는 경고문 20여매를 복사하여, 3월 7·8일 시내 각 집에 배포하고, 28일 “조선독립의 승인은 가까워왔다. 마땅히 자유독립을 위하여 용왕매진하라”는 16호 300여매를 시내에 배포하였다.註 150150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5, p.229.닫기
『구조선독립신문』은 운동의 진행 과정에 대한 보도 그리고 집회 공고와 참여를 촉구하면서 서울·전국 각지에 배포되어,註 151151 윤병석, 앞 책, pp.222~223 참조.닫기 자유주의·민족자결주의와 같은 이념의 전달에 주된 매체였다. 그외에 『각성호(覺醒號)』제1호에는 “우리 조선독립의 이번 거사는 세계의 공도, 인류사회의 정칙으로서 실로 공명 정대하다”고 하고, 4호에서는 “천부의 자유를 잃어버리면 노예이며 멸망이다. 각자 분기하라”고 하여 전 민족의 궐기를 촉구하고 있다.註 15215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6, p.920.닫기
4. 3월 5일 강기덕(康基德)·김원벽(金元壁) 등 학생들이 주도한 제2시위운동이 있었는데, 남대문역 앞에서 기독교 전도사 최흥종(崔興)琮)은 인력거에서 「신조선신문(新朝鮮新聞)』수십매를 배포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이해시키면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였다.註 153153 국편,『일제침략하한국삼십육년사』4,「김형기 등 예심종결결정서」닫기 또한 고등보통학교 최윤창(崔潤昌)은 이동규(李東奎)와 함께 입수한 「국민회보(國民會報)』와 동일한 이름으로 “지금 강화회의에서 미국대통령이 12개조로 이루어진 민족독립(자결)주의를 성명하여 세계개조·망국광복의 기회이니 우리동포는 거국 일치하여 해외동포를 성원하라”는 문서를 50여매 인쇄하여 배포하였다.註 15415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235.닫기 이날 송주헌(宋柱憲)·백관정(白觀亭) 등 유생들은 청량리로 나가 순종의 복위를 상소하려고 하다가 일경의 제지를 받았는데, 이때 어대선(魚大善)도 “지금 파리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고 있으니, 우리도 분발노력하면 독립을 완수할 수 있다”는 의미의 연설을 하고 군중과 만세를 불렀다.註 155155 국편,『일제침략하한국삼십육년사』Ⅴ.4, pp.548~549.닫기
5. 3월 5일에 있었던 독립운동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경성고등보통학교 박노영(朴老英)온 3월 6일 경성공업전문학교 김세용(金世龍)에게 “이달 3일경까지는 독립에 관한 선동적 격문이 발행되었으나 그후는 그것을 반포함이 없다. 격문은 인심을 선동하기에 유력한 것이니 이를 발행하여 조선독립운동을 격렬하게 만들 것”을 주장하였는 데,註 15615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125.닫기 이처럼 격문 작성과 배포는 당시 민중의 운동 참여를 유도하는데 주된 수단이었다. 박노영은 보성고등보통학교 김준희(金俊禧)를 통해 경성의학전문학교 한위건(韓偉鍵)에게 원고를 부탁하였다. 한위건은 조선독립단 명의로 「동포여 일어서라」를 작성하여, “우리들이 민족자결에 따라 행하는 이 거사는 결코 경거망동이 아니다. 동포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분기하라”고 하였다.註 15715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125.닫기
6. 3월 8일 조선독립민족대회의 명의로 「중추원 고문·참의·기타 선인 고등관에게 보낸 것」에서 “우리나라는 민족자결로써 최상의 주의로 삼고, 이미 국제연맹이 성립되어 10여국의 독립을 보았다……우리 민족의 독립은 세계대세에서 라기보다 합리적으로 성립되어야 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세계대세에 통요한 각하가 수수방관하는 따위”는 부당하니 동맹퇴직을 단행하고 운동에 참여하도록 촉구하였던 것이다.註 15815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6, pp.923~924.닫기
7. 3월 12일 김백원(金百源)·문일평(文一平) 등 11명은 33인의 후계자임을 자처하고 독립운동을 계승할 것을 다짐하여, 13도 대표자 명의로 총독부 앞 청원서를 작성, 보신각 앞에서 군중에게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3월 1일에 발표한 한국독립선언서는 확실히 민심(民心)을 표시(表示)하는 아한(我韓) 전국민(全國民)의 내부적(內部的) 자각(自覺)에서 폭발(爆發)함이요……파(彼) 신시대(新時代)의 정신(精神)이 오인(吾人)을 선등(煽動)하고……오인의 주장하는 한국독립(韓國獨立)은 시대(時代)의 대세(大勢)와 상제(上帝)의 의사(意思)인 정의(正義)와 인도에 합치(合致)한다고 확신(確信)하노이다……정의와 인도를 위(爲)하야 자유(自由)와 자주(自主)를 주장(主張)함이로소니”註 159159 국편,『일제침략하한국삼십육년사』4,「김형기 등 예심종결결정서」, p.549 ; 국편,『한국독립운동사 자료』4, p.251. 관련된 연구로는 南富熙,「金允植의 獨立請願書에 대하여」, 박성봉 교수회갑기념논총,『경회사학』14호(1987) 참조.닫기라고 하여, 민족독립이 정의인도 그 자체임을 주장하였다.
8. 3월 17일경 평양 약학교(藥學校) 학생 김공우(金公瑀)는 휘문고등보통학교 정지현(鄭志鉉)으로부터 “저번 경성에서 학생이 주동하여 조선독립운동을 개시하였으나 힘이 미약하여 이 기회에 노동자계급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우니 이로부터 이 「노동공보(勞動公報)』란 인쇄물을 각 곳 노동자에게 배부하여 이들에게 독립운동을 권유하라”는 의뢰를 받고 잡화상 배희두(裵熙斗)와 함께 「노동회보(勞動會報)』11매를 서울 시내 노상 통행인에게 배부하였다.註 16016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223.닫기 노동회보 제2호(3.21) 에는 노동자에게 ‘우리는 정의와 인도에 따라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찾는 것’임과 경성시민에게 독립선언은 ‘정의 인도 밑에 조상의 유지를 관철하려는 것’임을, 그리고 동포에게 독립운동은 ‘정의 인도이고 또 공리천칙(公理天則)’임을 주장하고 있다.註 16116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6, pp.922~923.닫기
9. 중앙학교 최석인(崔碩寅)·유연화(柳淵和), 무직 백광필(白光弼)은 3월 하순경 조선국민자유단(朝鮮國民自由團)의 이름으로 “근래 조선인 유지자 사이에서 ‘조선인에게 출판·언론의 자유를 주고 조선에 대하여 식민지 이름을 삭제하고 대의사를 제국의회에서 선출케 하며 헌병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여 이것이 채택되는 것으로써 만족하는 자가 있으나, 우리들은 이들의 말에 현혹됨이 없이 단연코 이 기회에 조선을 일본통치하에서 떠나 완전한 독립국이 되게 하지 않으면 않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최후의 1인에 이르기까지 분투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타협적 자치론을 배격하고 완전한 독립을 위해 투쟁할 결의를 담은 문서를 최석인이 집필, 양인이 300매를 인쇄하여, 시내 민가에 투입·반포하였다. 이들은 다시 4월 1일부터 중순까지 『자유민보(自由民報)』1호에서 5호까지 각 호에서 “소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취지 아래 유연화는 논설을, 최석인은 기타 기사를 기초하여 각각 1,000매를 인쇄하여 광화문·동대문 부근 민가에 투입·배포하였다.註 16216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5, pp.242~243.닫기
또한 당시의 유인물 중에는 중국에서 작성된 것이 반입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령(臨時政府令)·신한민국정부선언서(新韓民國政府宣言書) 등이 북경(北京)·천진(天津)을 경유하여 국경 부근 철산·선천·의주 지방에 배포되었다.註 163163 강덕상 편,『현대사자료』Ⅴ.25, pp.393~394, p.400, pp.406~407 참조.닫기 유연화 등이 4월 8일 검거될 때 자유민보와 함께 해외 유인물 재고만주동포문(在吿滿州同胞文)이 압수되어, 이러한 해외유인물은 국내의 비밀지하신문류를 작성하는 토대로서 또 일반의 국제정세와 자유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註 164164 강덕상 편,『현대사자료』Ⅴ.25, p.395.닫기
10. 4월 1일자 『반도(半島)의 목택(木鐸)』제1호에는 “무력을 제외하는 오늘날, 정의를 창조하는 오늘날, 세계를 개조하는 오늘날……납세란 국민된 자의 의무의 일부다. 우리 민족은 이미 세계에 대해 독립을 선언하고 민족자결의 정의를 주장하는 오늘이다”고 하여, 민족의 자결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일제에 대한 납세거부를 촉구하였다.註 16516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6, p.1038.닫기 학생 허정묵 등이 중등학교 최하현(崔夏鉉)으로부터 이것을 3월 20일부터 4월 초순까지 두차례에 걸쳐 22매를 안국동 노상에 배포하였다.註 16616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5, p.234.닫기
11. 4월 6일, 본래의 소재지는 서울이지만 임시로 상해로 한 통일당(統一黨)이 당헌(黨憲)과 지부규칙(支部規則)을 발표하였다. “국민(國民)의 심력(心力)을 통일(統一)하여 조국(祖國)을 독립(獨立)한 신시대(新時代) 신이상(新理想)에 둔 신국가(新國家)롤 건설(建設)할 것”과 “세계개조(世界改造)의 벽두(劈頭)에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신문화(新文化)를 세계(世界)에 건설하여 인류(人類)의 이상적(理想的) 신생활(新生活)을 실현(實現)함을 종지(宗旨)로 함”이란 당강(黨綱)·당헌(黨憲)을 발표하였다.註 167167 국편,『일제침략하한국삼십육년사』4, 1919.4.6. p.385.닫기
12. 4월 9일 조선국민대회(朝鮮國民大會)와 조선자주당연합회(朝鮮自主黨聯合會) 명의로 조선민국임시정부조직포고문(朝鮮民國臨時政府組織布吿文)이 배포되었다. 무직 박이근(朴理根)·이임수(李林法), 의사 권희목(權熙穆) 등은 2월 20일경, 천도교·기독교가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을 진행하고 있음을 알고 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 일환으로 포고문이 작성·배포되었고, ‘민국(民國)’ 형태의 정체가 선포됨에 따라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할 것을 강조하면서 손병희를 정도령(正都領), 이승만을 부도령(部都領)으로, 그리고 파리대표까지 선임·발표하였다.註 168168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3, No.1415, pp.246~247, No.1458, pp.331~332 ; 국편,『일제침략하한국삼십육년사』Ⅴ.4, pp.397~399 ; 독립운동사편찬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6, pp.1028~1035 참조.닫기
13. 4월 2일 한남수(韓南洙)·김사국(金思國)·홍면희(洪冕熹)·이규중(李奎中) 등은 인천 만국공원에서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문제와 국민대회(國民大會) 개최 및 정부수립(政府樹立) 문제를 의논하였다. 이들은 거듭 회합하여 국민대회취지서(國民大會趣旨書)와 임시정부약법을 의결하고, 4월 23일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 즉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를 선포하였다. 취지서에는 33인을 대표로 민족이 ‘정의인도’에 따라 독립을 선언하였다고 하면서, ‘정의와 인도’로 용진(勇進)하여 민족적 독립을 달성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그리고 ‘국민대회·공화만세’의 기를 앞세우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제를 정체로 채택하였다.註 169169 국편,『한국독립운동사 자료』4, pp.323~32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5, pp.133~144 참조. 반면에 유생 李成修, 崔銓九는 ‘민족자결’이란 취지서가 황제를 폐하는 것이라 하여 이에 반대하기도 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141).닫기 이날 종로에서 학생들은 조선독립이 확정되었다는 전화가 파리로부터 있었다고 하면서, 엄중한 경계속에서 ‘국민대회’라고 쓴 기를 흔들며 만세를 고창하였기 때문에 일반대중 사이에는 조선독립이 확실하다고 믿기도 한다는 것이다.註 170170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3, No.1464, p.345.닫기
14. 최익환(崔益煥)·김협(金協)·김찬규(金燦奎)·권봉석(權奉錫)등은 독립운동을 실행하고자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명의로 선언서·진정서·방략 등을 작성하였다. 3월 하순 이후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이들은 중류 이상 계층과 청년 및 노동자를 참가시키기로 하고, 취익환이 주로 각종 문장에 대한 입안·인쇄·배부의 책임을 맡았다. 이 대동단은 5월까지 활동하다가 발각되었다.註 171171 조선민족대동단에 관해서는 장석홍,「조선민족대동단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3집(1989) 참조.닫기 4월 9일 일본 경찰에 의해 압수된 「선언서」에는 3·1선언이 ‘정의인도의 영원한 기초를 확립하고자’ 선포되었다는 점과 3대 강령으로 조선의 독립·세계의 평화·사회의 자유 발전을 선언하였다. 또한 결의사항으로 파리회의대표의 독려, 국제연맹에 가입, 상해임시정부를 원조하여 국민사무를 처리할 것을 제시하였다. 「일본국민에게 알린다」에서는 “대평등·대자유의 진리는 이제 바야흐로 우리의 안전에 전개되어……정의 인도의 대동세계는 그 서광을 뻗치었다”고 하면서 일본국민의 맹성을 촉구하였다. 또한 「진정서」에서는 “우리 민족은 천부인 생존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독립자유를 주장하고 정의 및 평화로써 세계를 개조하는 시세에 조우하여” 현 상황을 굉정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방략에서 “① 전민족을 통일하여 고유한 일정세력을 부식하고 외래세력에 의뢰하지 말 것, ② 열국의 교의를 통람하여 인류 공동의 정의·인도·자유를 실행 확장해서 열국의 동정과 원조를 얻을 것”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보면, 민족자결주의를 포함하여 열국의 동정·원조를 구하는 것과 외래세력에 의뢰하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사조와 각국에 대한 호소를 외세의존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민족의 단결된 힘을 주장했는데 이는 「등교 학생 제군에게」에서, “이제야 우리 민족의 독립은 미국 대통령이나 불국의 수상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자결자좌(自決自佐)로써 최대의 성의에 의해 분투 노력하면 어찌 도덕적 공론이 없겠는가”라고 하였다.註 17217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6, pp.1047~1061 참조. 대동단은 같은 해 11월 28일 의친왕 이하 33인의 명의로 선언서를 발표하였다.「선언서」에는 “世界의 改造·民族自決論은 天下에 드높아져 我國의 獨立, 我民族의 自由之聲은 宇內에 가득찼다……더욱 正義 人道로서 勇往 邁進함”이라 하였고,「독립운동가」에서도 ‘正義人道 밝은 빛 그 아래에’라고 하여 민족자결주의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2, No.1072, pp.558~561).닫기 이로써 볼 때 3·1운동은 전체 민족의 역량의 중시와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대한 기대속에 진행되었음 이 분명하다. 당시 세계를 풍미하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력과 그 생소한 이념의 강한 충격이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한층 강화·부각시켰다고 볼 수 있다.
15. 5월 한국경성독립회본부(韓國京城獨立會本部) 명의의 「대한국민독립대회진술서(大韓國民獨立大會陳述書)」에서 “현금(現今) 파리에서 진행(進行)하는 강화회의(講和會議)에 대하여 만공(滿腔)의 송축(頌祝)하는 뜻을 표(表)함과 동시에 정의(正義)와 인도(人道)에 기본(基本)한 우리의 요구(要求)가 당연히 관철(貫徹)할 것으로 자신(自信)”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파리회의의 사명인 세계개조를 위해서는 각 민족의 자결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자결주의에 기초한 독립의 요구가 관철될 것을 자신하면서, “정의(正義)를 표준(標準)하는 세계만국(世界萬國)은 당연(當然)히 아민족(我民族)의 후원군(後援軍)”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註 173173 국편,『한국독립운동사자료』4(1968), pp.265~269.닫기
16. 보성고등보통학교 장재권(張在瓘)은 6월 30일 「강화회의조인축하문(講和會議調印祝賀文)」이란 제하의 “우리들 2천만 조선인은 이번 강화조약의 성립을 축하하고 아울러 국제연맹의 발현을 희망한다……김규식은 국제연맹에서의 발언권을 얻게 되었다. 우리들은 위 연맹회의에 참석하는 위원 제씨가 정의 인도에 따라 비록 약소국의 문제라 하더라도 역시 공평하게 해결할 것을 희망한다”는 인쇄물을 배포하였다.註 17417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253.닫기 이는 강화조약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조선독립문제를 다시 국제연맹에 기대하면서, 대중의 민족독립의지의 약화를 만회하고자 한 것이다.
17. 배화여학교 교사 김응집(金應集)은 8월 12일 『국민신보』제21호에서 33인의 재판에 대한 비난과 임시정부의 동향을 소개하고, 8월 26일 『국민신보』 「국치특별기념호」에서 “이제야 정명인도는 평등자유를 확립하고 강약을 불문하고 대동형락하려 한다. 군국주의와 무단정치란 공리의 대적이며 정명의 패리이다”고 하면서 국치의 회복을 강조하였다. 또한 중앙학교 김응관(金應寬)은 8월 29일은 주권과 인권이 박탈당하여 ‘자유로부터 노예의 쇠사슬에 묶여진 날’이라고 하고, “우리들의 사정은 세계에서 동정한다”고 하면서 분기할 것을 강조한 「국치기념공고」를 입수·배포하였다.註 17517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171.닫기
18. 각종 유인물들이 민심을 자극하면서 독립운동을 부추기자, 일제는 더욱 단속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독립신문 같이 오늘 그 발행자를 갑(甲)에서 검거하면 그 신문은 내일 을(乙)에서 발각되어 검거가 용이하지 않다”註 176176 조선총독부서무부조사과,『朝鮮の獨立思想及運動』p.82.닫기고 토로하듯이 유인물 작성은 도처에서 집필·발행·인쇄되고 있었다. 10월중 서울에서 발각된 사례를 보도록 하자.
종로 경찰서는 10월 16일 동대문 방면에서 「국민해혹(國民解惑)」일부를 발견, 10월 21일 제조업 종사자 김상옥(金相玉)를 검거하였다. 그는 자신이 소지한 등사판을 이용, 대한민회취지서(大韓民會趣旨書)·임시정부후원회취지서(臨時政府後援會趣旨書)·정부후원회고본(政府後援會稿本)을 8월 하순부터 9월 초순까지 각 25매를 인쇄하여 고원성(高元成)을 통해 각 곳에 배포하였다. 이외 『혁신공보』는 고건성이 원고를 작성하여 8~10월까지 5회에 걸쳐 약 1,000매를 인쇄하였고, 「국민해혹」은 9월말~10월초까지 고원성이 기초한 원고에 따라 김상옥이 25부를 인쇄하여, 고원성과 함께 배포하였던 것이다. 또한 연희전문 교사 이일선(李日宣)은 33인의 독립선언의 취지에 찬동, 민중에게 그 사상을 전달하려면 ‘인쇄물을 출판하여 반포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여, 4월 이래 각종 유인물을 발행해왔다. 그는 「국치기념특별호」에서 “지금 인류는 자유평등이어서 강약의 구별없이 다같이 낙을 누릴 때가 되었다. 조국을 광복하고 국치를 말끔히 씻으라”는 내용을 약간은 자신이 작성하고 나머지는 입수한 문서를 토대로 작성하였는데, 이러한 문서에는 5월 상해 의정회원(議政會員) 임득산(林得山)으로부터 받은 의정회 회칙을 비롯하여 『국민신보(國民新報)』·「국치기념특별호(國恥記念特別號)」·「대한민주국임시대통령선언(大韓民主國臨時大統領宣言)」·「국치불망경고문(國恥不忘警吿文)」·「국치기념경고(國恥記念警吿)」등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문서를 ‘군중의 왕래가 빈번하고 그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종로·동대문 부근에 배포하였던 것이다.註 177177 독립운동사편찬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255 ; 강덕상,『현대사자료』, Ⅴ.25, pp.565~566 참조.닫기
이상에서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배포된 문서를 통해 민족자결주의가 3·1운동의 주된 이념으로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유·평등·민주·공화사상이 담겨있었는데, 이러한 이념은 민족자결주의 자체에 내포된 이념이기도 하면서 민족자결주의와 함께 확산되었다. 최근에 발굴된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이란 시론서(時論書)에서도 이점이 더욱 분명하다.註 178178 金源模,「서울에서의 三·一運動 : 新發掘 資料 ‘朝鮮과 日本’」’『향토서울』 49(1990).닫기 동경 유학생 정도의 지식인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내용에, 독립의 요구가 “민본(民本)에 기(基)한 자결적주의(自決的主義)을 실행(實行)하여 천리인도(天理人道)에 합(合)한 자유생존(自由生存)을 구(求)하는 것”이며, “세계대운(世界大運)이 개조(改造)의 국면(局面)을 전개(展開)하여 군국주의(軍國主義)의 권위(權威)는 이미 쇄퇴(衰退)에 경(傾)하고 정의(正義) 인도(人道)의 평화(平和)는 실로 광명(光明)을 발(發)하니……세계대전(世界大戰)이 오인(吾人)에게 여(與)한 계훈(誠訓)이 대(大)한줄 사(思)하노라…민족자결(民族自決)의 공의(公義)를 장(仗)하여……”라고 하듯이, 3·1선언 이래 자주·민주·정의·민족자결주의·인도주의를 천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의 표명과정에서 민주공화주의의 정체가 일반 대중 사이에 정착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경기도
1.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봉선사 승려 이순재(李淳載)·김성암(金星岩), 약종상 김석노(金錫魯)는 33인의 선언서 발표를 듣고, 시위운동을 위한 준비로 문서를 작성하여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 명의로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을 독립국으로 만들 것을 결정하고 있는 모양이니,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소요를 영속시켜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인쇄물을 작성, 200매를 인쇄하여 부근 동리에 배포하였다.註 17917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p.302~303.닫기
2. 양주군 별내면 유생 유해정(柳海正)은 선언서 발표 이래 각지 시위운동에 찬동하여 3월 하순 ‘일본황제전하(日本皇帝殿下)’라고 한 상주문을 작성하여 동경 궁내성(宮內省)에 발송하였다. 그 내용은 ‘미국강화(회의)위원은 조선을 독립시키기로 결정’하였다 하고, 일본의 결단을 촉구하였다.註 18018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308~309.닫기
3. 여주군 학생 이원기(李元基)·원필희(元弼喜), 농업종사자 조경호(趙經鎬) 등은 군민이 독립운동에 냉담하여 서울 사람에게 개·돼지로 취급받는 것을 분개하여, 군내 각지에 경고하여 시위운동을 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참고로 경고문을 기초하였다.註 18118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485.닫기
4. 가평군의 이윤석(李胤錫 ; 교사)은 33인의 선언서를 제시하여 운동의 주도자들과 시위운동을 합의한 뒤, 군민들의 참여를 촉구하는 ‘세계만국공회에서 민족자력주의의 원칙에 따라 속국은 이번 독립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 동리 주민에게 배부하거나 혹은 구두로 전달하여 3월 15일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註 18218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503.닫기
5. 파주군의 시위에서도 “독립운동을 하려면 격문을 개조하여 사람들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하여 격문을 작성·배포하였다.註 18318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556 ; 이외에도 학생들은(개성회취지서)등 각종 격문·경고문을 작성하였고, 소방용 경종도 이 때 군민을 동원하는데 사용되었다(앞 책, p.324,517,560 참조).닫기
문서작성은 이같이 운동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주민을 각성시켜 참여케 하는데 주된 수단이었고, 그것은 주로 지식인·학생·중소시민이 선언서를 토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경기도의 시위운동에 민족자결주의 이념이 큰 촉매제가 되자, 서울 실업가 예종석(芮宗錫)은 4월 22일 연천군 성묘를 마치고 면 유지자에게 “현하(現下) 조선내 각지의 소요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서 배태(胚胎)”되었음을 지적하고, 이에 따라 독립이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고 하였는데,註 184184 국회도서관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3, No.1478, p.373.닫기 이 점에서도 운동과 민족자결주의가 매우 밀접하게 관련성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사례로 고양군 정호석(鄭浩錫 ; 무직)은 ‘3월 1일경부터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을 독립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다수가 만세를 고창하면 독립이 승인되리라 믿고, 5일 흥영학교(興英學校) 학생들과 시위를 하였다.註 18518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164.닫기 그리고 개성의 박종림(朴宗林 ; 무직)은 ‘유럽 열강 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이 허용될 것’이라고 믿고 시위에 참여했던 것이다.註 18618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520.닫기
경상도
1. 동래군 북면 범어사 승려 김영규(金永奎)는 3월 18·19일 범어사 부속 지방학림 학생 김상기, 명정학교 김한기 등과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때 “한번 죽어서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내용의 유인물이 제작·배포되었다.註 18718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1205.닫기
2. 경북 영덕군 영해면 기독교 조사 김세영(金世榮)은 3월 초순 서울에서 돌아와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에게 “목하 열국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채용하고 있음. 그 결과 폴란드·아일랜드 등 각 민족은 모두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인도는 지금 5대국이 심의 중이다. 우리도 조선민족으로서 독립할 희망을 가지고 그 뜻하는 바를 발표하면 달성할 수 있다”고 운동을 권유하였다. 이어 권태원은 다수와 협의하여 18일 장날을 기해 시위운동을 하였다.註 188188 독립운동사편찬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6, p.503 ; 국편,『한국독립운동사』2(1966), pp.1070~1081 참조.닫기 영덕의 사례에서 보듯이 3·1만세운동이 대규모 집회로 가능할 수 있었던 원인중의 하나가 장날을 이용하여 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열렸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의 상업거래가 대부분 시장에서 이루어져, 민중생활이 시장을 중심으로 영유되면서 시장은 매우 긴밀하게 민중생활의 근간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장은 단지 화물수급의 기관에 그치지 않고, 금융 융통의 장으로서, 민중위안의 장으로서 그리고 새로운 보도를 청취하는 장으로서 시장은 경제·사교·오락 등에 불가결한 기관이었다.註 189189 善生永助 편,『朝鮮の市場經濟』(1929), p.2,176.닫기 이같은 장날을 이용하여 시장이 거사의 장소로서 이용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장날을 이용한 만세시위운동은 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다.註 190190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박경식, 앞 책, p.122,127,130,135,137,139,140,151,157,165,168,175,179,239 참조.닫기 시장이 주된 시위 장소가 되자 일제는 운동을 탄압하는 여러가지 방법 중에서 자주 시장을 폐쇄하였다. 1920년 시장취체(市場取締)가 개정되고 시장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어, 이후 ‘장날을 아용한 치안을 문란하게 하는 언동 선전같은 사례가 없게 되었다’라고 한다.註 191191 조선총독부,『朝鮮の市場』(1924), pp.552~649 참조.닫기 따라서 시장이란 일반대중의 생활권의 주된 한 부분을 이용한 점이 거족적인 3·1운동을 가능케 한 여러 요인 중의 하나였음은 주목해야 할 점이다.
3. 마산 곡물상 김용영(金容榮)은 신문지상으로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에 의하여 독립을 희망할 경우에는 각국이 이를 승인하여 독립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독립을 희망하는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3월 3일 선언서를 배포하고 군중 속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註 192192 독립운동사편찬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173.닫기 또한 학생들 사이에는 일본세력의 조선내의 급증과 일제의 동화정책으로 점차 민족관념을 망각케 되는 점을 지적하고 “금일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의해 조국의 회흥(恢興)을 도모하지 않으면 드디어 독립을 얻을 기회가 없으며, 조선민족은 자멸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註 193193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3, No.507, p.507.닫기
4. 경남 하동에서는 3월 18일 장날을 이용하여 박치화(朴致和)·정낙영(鄭洛榮)·정인영(鄭寅永) 등 12명이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작성·선포하였다. 그 내용은 “세계평화(世界平和)의 회의(會議)가 창개(倉開)됨을 반(伴)하야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여론(與論)이 병기(幷起)하난 차호시운(此好時運)이 래(來)하얏도다……시(時)가 래(來)하고 운(運)이 부(復)하얏네. 주차(蹰蹉)치 말며 관망(觀望)치 말고 우리의 사업(事業)을 우리의 심력(心力)으로 자결단행(自決斷行)합시다……최후(最後)의 일인(一人)과 최후(最後)의 일각(一刻)까지 폭동(暴動)과 난거(亂擧)난 행(行)치 말고 인도(人道)와 정의(正義)로 독립문(獨立門)으로 전진(前進)합시다”註 194194 동아일보사,『3·1운동과 민족통일』 자료 10, p.332.닫기라고 하여 민족자결주의 이념을 독립운동에 적용하되 외세의존적으로 관망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업은 우리의 심력으로 자결단행’하는 데 민족자결주의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하동의 분위기는 일제 관헌이 수집한 민심중에 “일본정부가 여하히 강압해도 괴리한 현하의 민심을 도저히 융화할 수 없으며 우리 조선의 최후 결정은 미국대통령 윌슨이 강화회의 종료후에 반드시 조선독립을 원조하기 위해 래조(來朝)할 예정임으로 지금부터 2, 3개월 후에는 어떻든간에 결정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이르렀다.註 195195 국회도서관 편, 앞 책, No.1518, p.525.닫기
5. 경남 산청군 산청명 민영길(閔泳吉)·신영길(申泳吉)·오명진(吳明鎭)·오원탁(吳元卓) 4명은 3월 18일 회합하여 “정의인도(正義人道)에 기(基)한 신세계(新世界)를 조직(組織)하려고 미국 대통령 윌슨이 14개조를 선언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안하였던바……국제연맹문제가 기(起)하여 세계를 개조하기로 되여 있으므로……한민족(韓民族)도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기(基)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어 선언서·결의서·태극기를 1,500매 인쇄하여, 3월 22일 산청시장에서 배포하고 시위를 전개하였다.註 196196 국편,『한국독립운동사』3, p.527.닫기
전라도
1.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제중원(濟衆院) 회계(會許) 황상호(黄尙鎬)는 조선독립신문 1·2호를 입수하여, 이를 모방하여 자신의 필명인 황송우 사장 명의로 『조선독립신문』과 『광주신문』를 제작하였다. 그 내용은 “미국 대통령 윌슨이 성명한 13(14)조는 민족자결논의를 일세(一世)를 진동케 하고 폴란드 등 12개국을 독립케 하였노라”고 하고, 해외·국내 학생들의 운동을 소개하고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각각 300매씩 인쇄하여 광주 시내·시장·제중원내 민간인에게 배포하였다.註 19719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p.1518~1519.닫기
2. 순천군 낙안면 유생 유흥주(劉興柱)·김종주(金鍾冑)는 시대의 추이를 잘 모르던 중 조선독립문제가 제기되었다는 것과 각지의 시위 소식을 듣고, 4월 13일 ‘조선독립기’ ‘대한독립기’를 기입한 태극기를 들고, 다른 참여자에게 독립운동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시위를 하였다.註 19819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1540~1541.닫기
3. 전주의 시위로 체포된 학생이 “상제의 감동으로 거국이 의기하여 만세를 부르거늘 교촉(敎囑)라 함은 무슨 소리이냐 녀희들은 정의와 인도가 없고 세계적인 안광(眼光)이 암매(暗昧)한 섬 오랑캐다. 무엇을 알겠느냐”고 하였다.註 199199 金秉祚,『韓國獨立運動史略』(1921), p.53.닫기
4. 4월 3일 식수기념일을 기해 남원군 덕과리 면장 이석기(李奭器)는 주민 800명을 집합시키고 자신이 작성한 「경고아동포제군(警吿我同胞諸君)」에서 “석시(昔時)의 약자(弱者)는 현시(現時)의 강자(强者)이다. 몽고(蒙古)도 독립(獨立)을 선언(宣言)하고 파란(波蘭)도 민족자결(民族自決)을 주창(主唱)한다. 하물며 신성자손(神聖子孫) 아조선민족(我朝鮮民族)에 있어서랴 자(玆)에 우생(愚生)은 면장(面長)의 직(職)을 그만두고 만강진성(滿腔眞誠)을 다하여 조선독립(朝鮮獨立)을 고창(高唱)”한다고 하면서 이에 분발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이다.註 200200 국편,『한국독립운동사』2, pp.1146~1161 참조.닫기
그외에 『대조선독립신문(大朝鮮獨立新聞)』사설(社說)은 목포 청년들의 분기를 촉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국이 윌슨의 주창에 따라 세계개조의 신세계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과 이 때 우리도 ‘정의(正義)와 자유(自由)와 박애(博愛)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民主主義)’ 위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한국만세(韓國萬歲)’와 ‘자유(自由)’를 고창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를 위해 많은 희생이 있었음을 알리고 있다.註 201201 국편, 앞 책, pp.961~962 참조.닫기
충청도
4월 1일 공주군 공주면 대화정 공주시장의 시위에서도 교사·학생들은 선언서의 등사와 함께 선언서를 바탕으로 유인물을 작성·배포하였다.註 202202 독립운동사편찬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1205.닫기 반면에 괴산군의 지식인 홍명희(洪命熹)는 “민족자결이 조선에 적용될 것이 못된다……그러므로 우선 참정권·대우평등·언론출판의 자유를 요구한다”고 하고 지금이 그 시위운동의 시기라고 하였다.註 203203 독립운동사편찬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6, pp.495~496.닫기 이 경우는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에서 문화운동으로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당시 민족자결주의가 일반에 미치고 있는 영향이 컸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강원도
춘천 거주 미국 선교사의 조선어 교사인 이흥범(李興範)은 연희전문학교 이병천(李炳天)으로부터 국민대회 취지서·선고문 등을 받아 4월 30일 이를 조선인 관리에게 배포하였다. 그리고 “오는 5월 15일은 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문제가 토의되는 날임으로 이 날로 관리는 사표를 제출하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하라”고 하였다.註 204204 국회도서관 편, 앞 책, No. 1493, pp.483~484.닫기
평안도
1. 3월 1일 의주의 시위운동은 민족대표 중의 한 사람인 유여대(劉如大)가 직접 주도하였다. 1919년 2월 28일 일본대학 졸업생 안석응(安碩應), 양실학교 교사 김두칠(金斗七)·정명채(鄭明采) 등은 유여대로부터 만세운동을 권고받고 3월 1일 읍내 예수교회당 부근 공지에서 개최할 것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2월 28일 밤까지 서울에서 선언서가 도착되지 않자 선천에서 입수한 선언서(2.8선언문)를 가선언서로 300매를 인쇄·배부하고자 했다. 3월 1일 7·800여명의 군중이 집합하자 이를 배부하고, 만주 안동현 주재 목사 김병농(金炳穠)이 독립운동의 성공을 기원한 기도에 이어 유여대가 선언서를 낭독하려고 하자, 서울의 선언서가 도착하여 이것도 함께 배포하였다. 이 때 독립창가가 군중과 함께 합창되였는데 그 내용은 “반도 강산아 너와 나와 함께 독립만세를 환영하자. 충의를 다해서 흔린 피는 우리 반도가 독립의 준비이다……만국평화회의에서의 민족자결주의는 하늘의 명령이다. 자유와 평등은 현재의 주의인데 누가 우리 권리를 침해할소냐”는 것으로,註 20520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p.877~878. 또 당시 독립운동가 중에도 “同胞야 이제야 나오너라 勇猛하게 赤手空券이라도 두려워마라 正義人道의 光明이 비치는 곳에 怨讐의 千軍萬馬 能히 이긴다”고 하여, 정의인도를 담고 있다(윤병석, 앞 책, p.204 참조).닫기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독립성취와 자유·평등의 권리 주장을 각성시키고 있다. 그리고 예수교 전도사 조수 김이순(金利淳)은 선언서에 담긴 취지와 같은 내용의 연설을 하여 일반 대중의 독립운동에 대한 여론을 다시 환기시켰다.
2. 3월 1일 선천 시위도 교사·학생들이 주도하였는데, 신성(信聲)학교 학생 장일현(張日炫)은 교사 김지웅(金志雄)의 지시에 따라 2월 27일 동경유학생의 독립선언서와 대판매일신보 번역문(1.28일자)·행보가·태극기를 다른 학생들과 등사·준비하였다. 이들은 당일 정오 12시 기도회에서 홍성익(洪成益)의 독립연설을 듣고 시위장소로 가서 5·600여 시민 앞에서 김지웅이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선언한 뒤, 선언서 등을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장일현이 독일 군주제의 붕괴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이념 아래 독립을 성취할 좋은 기회라고 하였듯이, 선천·의주의 시위에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일제 관헌이 조사한 평북지방의 민심에서, 다른 지역이 독립선언서 취지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는데 반해 의주·선천에서는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고 믿는 동향이라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註 20620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6, p.500.닫기
3. 평남 평양의 3월 1일 시위는 기독교 목사 김선두(金善斗), 전도사 정일선(鄭一善) 등이 주도하였다. 정일선은 2월초 상해 선우혁의 국내활동에 대한 소식과 2월 10일 길선주로부터 강화회의 대표파견만이 아니라 조선에서도 민족자결의 독립선언이 필요함을 듣고, 2월 23·24일 길선주 집에서 윤원삼·도인권·안세환 등과 함께 3월 1일 서울계획에 찬동하여 평양시위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당일 참석한 1,000여명의 군중에게 도인권(都寅權)은 ‘우리들은 인의로써 주의를 삼고 강약 평등주의를 존중할 뜻’을 전하고, 정일선은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 강규찬(姜奎燦) 목사의 ‘조국이 자유를 찾게 된 것을 경축해 마지 않는다’는 연설 다음에 김선두는 ‘구속되어 천년을 사는 것보다 자유를 찾아 백년을 사는 것이 의의가 있다’는 연설을 하였다. 윤원삼이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고 군중과 시위운동에 들어갔다.註 20720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Ⅴ.5, pp.786~788 참조.닫기
4. 평북 강계군의 이정화(李晶和 ; 강계·자성·후창의 3군과 중국 임강현 천도교무 통할자)·김명준(金明俊 ; 강계 천도교 교훈)은 국장 참배와 3월 10일 천도교 대기도일에 참석하고자 3월 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천도교 대교주 박인호(朴寅浩)로부터 33인의 체포 경위를 듣고, 손병희 등의 의사를 계승하여 시위운동을 할 것과 독립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파리·중국 등지에 대표자를 파견할 것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손병희 체포 이후 독립운동자금이 궁핍하자 이정화 등은 자금모금을 계획하였다. 그 일환으로 선언서를 인쇄하여 널리 반포하고 주요 도시에 사람을 파견하여 그 취지를 선전하기로 하였다. 3월 13일~7월 16일까지 자성군 이외 각지 천도교 수백명에게 그 취지를 전달하면서 17,765원 60전을 모금하게 되었다.註 20820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886~890 참조.닫기 이러한 과정이 또한 선언서에 담긴 내용을 상당수 일반인에게 환기시킬 수 있는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평안도의 만세시위운동에서도 민족자결주의가 주된 이념이었고, 이는 또한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더욱 전파되었는데, 이 점은 다음의 참여자들의 상고 취지서에서도 확연히 나타난다. 평강군 기독교학교 교사 정해원(鄭海元)은, 만세군중들이 조선독립은 만국평화회의에서 승인되었으므로 이를 축하한다고 하여, 함께 만세를 불렀다고 하였다.註 20920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816.닫기 또한 평양 숭실대학교 학생 이보식(李輔植)은 상고취지서에서 “세계(世界)의 대세(大勢) 변천(變遷)함에 따라 무강적(武强的) 침략시대는 지나가고 정의인도의 평화시대가 나타나 금번 만국평화회의에 있어서 민족자결을 제창하여 약소국 민족에게도 자유평등(自由平等)을 허급(許給)하기로 함은 만국 공언의 사실이다. 이와 같은 기회를 맞은 조선민족 어찌 자유(自由)를 절규(絕叫)하고 독립을 선언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3월 1일 이래 경성 기타 13도 각부·군에서 조선민족된 자는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독립만세를 호창하였다. 조선민족으로서 정당한 행위로서 당연한 의무이다”註 2102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777.닫기고 하면서 시위참여와 경고문 작성의 배경을 설명하였다. 그밖에 교사·종교인·서기·의생(醫生)들의 상고서도 대개 이와 같다. 이들은 하나같이 세계대세인 민족자결주의에 근거하여, 시위운동을 통해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주장함이 정당하고 민족·국민의 당연한 의무라고 하였다.註 211211 이와 같이 주장하고 있는 예를 몇가지 더 들어 보면,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같은 책에서, 전도사 朴鐘恩(p.775). 서당선생 崔永孝(p.801). 학교장洪基璜(p.807). 교사 李謙魯(p.808). 목사 李夏榮(p.809). 교사 李永煥(p.810). 서기 朴根昌(p.810). 의생 李根軾(p.812). 교장 曹晚植(p.861). 집사 金華湜(p.862) 등을 들 수 있다.닫기 따라서 선천 신성학교 교사 이기동(李起東)은 ‘죄가 있다면 민족자결주의를 시인한 강화회의에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註 21221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854.닫기
함경도
길주군(吉州郡) 읍내면(邑內面) 김학천(金學天) 등 3명은 3월 11일 성진군 학동면 방동(防洞)에 와서 동민(洞民)을 모아놓고, 각지 운동 기사를 게재한 신문과 독립신문 제2호 그리고 선언서를 배부하고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날 밤 면서기 김홍종(金洪鐘)·유명식(劉命寔), 방동 구장(區長) 허채(許埰) 등 30명이 집합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12·13일 각 동마다 20·30명이 집합하여, 구한국기를 게양하고 만세를 불렀으며, 14일 각 동에서 10여명씩 약 70명이 하천동(荷川洞)에서 시위하자 주동자, 방등 구장 허채 등이 체포되었다. 면서기 김홍종은 유명식·허채와 12일 오후 독립신문 제2호와 선언서를 등사하여 각 동에 배포하였다. 이 날 배포된 선언서(朝鮮獨立宣言書)는 33인이 서명한 선언서의 내용을 축약하여 보다 쉽게 다듬어진 것이었다. 그 내용은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립을 선포한다는 점, 특히 민족의 ‘자유’를 강조한 점이 특징이다.註 213213 국편,『한국독립운동사』Ⅴ.2, pp.787~789 참조. 朝鮮獨立宣言書는 “惟我民族은 世界의 大勢에 照하며, 正義人道에 基하여 民族自決의 原則에 依하여 最大의 決心과 最後의 誠意로서 朝鮮의 獨立을 宣言하노라……아 우리 同胞들아 豪邁의 力으로 束縛을 끊어버리고……正義人道를 向하여 獨立旗下로 나아갑시다……아 우리 同胞들아 機會는 두번 오지 아니하나니 時를 當하여 奮然히 起하여……이때에 猛起하라 覺醒하라”고 하였다.닫기 이 곳 성진군의 선언서는 경상도 하동의 선언서와 함께 33인 명의의 선언서를 토대로 약간의 내용을 수정하여 기술되었지만 기타 다른 지역은 33인의 선언서를 그대로 증쇄(增刷)하여 배포되기도 했다.註 214214 수집되어 있는 선언서 중에 평안도 철산과 전라도 목포에서 배포된 선언서가 모두 서울 선언서의 등사본인데, 철산의 것은 33인의 서명이 없고 ‘조선민족대표’라고만 되어 있다(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본).닫기
4월 현재 함경남도 종교지도자 가운데 많은 사람은 “지금의 세계(世界)에 윌슨씨의 제의(提議)에 정의인도(正義人道)를 숭상(崇尙)하는 세계가 되었다……고(故)로 조선(朝鮮)은 현황(現況)대로도 충분히 독립(獨立)할 수 있으므로써 호기(好機)를 잃치 말고 궐기(蹶起)하라”고 하였다.註 215215 국편, 앞 책, p.1170.닫기 그리고 학생간에는 “손병희 등의 행동은 세계의 대세(大勢)에 감(鑑)하여 어떤 근거(根據)에 기(基)하여 선언(宣言)한 것으로서 결(決)코 무모(無謀)의 경거(輕擧)가 아니다”고 하면서 독립실현을 전망하기도 하였다.註 216216 국편, 앞 책, p.1171.닫기
또한 함경북도 지식인들로 조직된 비밀결사인 연통제(連通制) 사건의 관련자에 대한 1920년 8월 공판에서 최형욱(崔衡郁) 역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에 의지하여 당당한 우리의 독립을 요구하는데 무슨 죄가 있어 우리를 죄를 주느냐”고 진술하였다.註 217217 국편,『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Ⅴ.5, p.551.닫기
기타
다음은 지역 구분이 가능하지 않은 경고문·건백서(建白書) 등의 내용이다.
1. 조선민회일동(朝鮮民會一同)의 건백서(建白書) : “이제 국제연맹(國際聯盟)이 만국재판(萬國裁判)을 하는 시(時)에 당하여 선민(鮮民)은 독립을 선언하였다……차(此)는 즉 공화(共和)의 진체(眞體)이다……선천시대(先天時代)는 요순(堯舜)이 시(是) 민주공화(民主共和)이다. 후천시대(後天時代)는 미국이 시(是) 민주공화(民主共和)이다……금일(今曰)의 공화시대(共和時代)에 어찌 독립자치(獨立自治)하지 않으랴……이제 공화시기(共和時機)에 당(當)하여 독립(獨立)의 선언(宣言)은 역일시기(亦一時機)이다 시운(時運)이다 시세(時勢)이다……병합(併合)은 인욕(人慾)의 사(私)이고 독립(獨立)은 천리(天理)의 공(公)이다”註 218218 국편,『한국독립운동사』 2, pp.976~977.닫기라고 하여, 대세에 따른 독립선언의 정당함과 그 정체가 공화정임을 주장하고 있다.
2. 의견서초(意見書抄) : “독국(獨國)의 금일(今日)의 형세(形勢)를 간(看)하면 전감(前鑑)으로 하기에 족(足)하다……국제회의(國際會議)는 민족자결(民族自決)로써 주의(主義)를 한다. 따라서 아민(我民)은 자결하여야 할 것이다.”註 219219 국편, 앞 책, p.979.닫기
3. 상서초(上書抄) : “세계(世界)를 개조(改造)하는 금일(今日)에 당(當)하여……우(又) 현금(現今) 구주회의(歐洲會議)의 민족평화자결(民族平和自決)을 통(通)하여……오인(吾人)의 원유권(原有權)인 자유독립(自由獨立) 운운(云云)을 주창(主唱)하는 것도 무슨 대과(大過)있을 것인가”註 220220 국편, 앞 책, p.182.닫기
4. 익명서초(匿名書抄) : “조선(朝鮮)의 독립(獨立)이란 문제(問題)도 피(彼) 윌슨씨(氏)가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표명(表明)한 고(故)로 이같이 된 것도 알고 있다. 지금(只今)의 세계열강(世界列强) 중에 자력(自力)없이 아민족(我民族)이 독립(獨立)하려고 소요(騷擾)하는 것은 나도 망동(妄動)으로 단언(斷言)하는 것이다. 나의 바라는 바는 전자(前者)를 원(願)하는 게 아니고 후자(後者)를 원(願)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自己)의 원(願)은 여하(如何)한 사람도 동대우하(同待遇下)에 자유권리(自由權利)를 가진 민족(民族)이 될 수 있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註 221221 국편, 앞 책, p.987.닫기
5. 경고문초(警吿文抄) : “민족자결(民族自決)과 독립자존심(獨立自尊心) 없는 민족(民族)은 금수(禽獸)와 같다. 조선인(朝鮮人)은 어찌 독립(獨立)을 원(願)하지 않으랴.”註 222222 국편, 앞 책, p.987.닫기
6. 민족대표부(民族大表部) 명의의 군수면장경고문(郡守面長警吿文) : “세계대전(世界大戰)은 종국(終局)하고 강폭(强暴)한 군국주의(軍國主義)와 무력정치(武力政治)는 타파(打破)되고 인종(人種)은 평등(平等)과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세계적(世界的) 평화(平和)의 신국면으로 전개(展開)되었다. 이로 인(因)하여 강국(强國)의 기반하(羈絆下)에 신음(呻吟)하든 각종(各種) 민족(民族)은 모두 자유독립(自由獨立)의 광영(光榮)을 얻었다”고 하고 우리의 독립(獨立)과 자유(自由)를 빼앗은 자를 “타(打)하고 박(縛)하고 살(殺)하여 견마(犬馬)와 같이 대우(待遇) 한다”註 223223 국편, 앞 책, p.988.닫기고 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민족자결주의의 이념이 만세시위운동의 전개와 확대과정에 주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해외 운동가들의 활동에 대한 소식과 함께 해외로부터 유입되는 각종 유인물도 민족자결주의의 이념을 전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19년 10월 31일 전남 순천군 김정태(金貞泰) 집에 대한 임시정부 13도 총간부 명의의 「유고(諭吿)」가 투입되어, 일반민중 특히 유산자에게 독립운동에 필요한 물자모금의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 내용은 세계대전에 대응하여, “정의(正義) 인도(人道)의 군(軍)은 도처에서 분기하여…… 세계를 개조하여 기왕의 인류세계의 참화(慘禍)를 재연시키지 않으려고 한다”고 하고, 이를 위한 선결문제가 바로 ‘민족(民族)의 자결(自決)’임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파리강화조약에서 폴란드·체코의 독립이 먼저 인정된 것은 ‘그 민족이 지난 전란에서 직접 관계가 있는 이유에 불과’한 것이며, “금후 국제연맹에서 전세계 민족에 대해 순차로 자결권을 모두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고 하여, 민족자결주의는 전세계 피압박민족의 독립이념이며 이를 통해서 피압박민족인 조선도 독립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를 억압하는 일제와 투쟁하는 본부(本部)를 위해 자금협조를 당부하고 있다.註 224224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3·1운동 2, No.1063, pp.543~544.닫기
민족자결주의는 대체로 독립달성을 확신케 하는 요인이었지만, 그 한계를 인식하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가 독립만세운동을 성공시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반에 대해 민족독립의 관념을 주입시킨 것은 장래 독립할 기초를 공고히 한 것이므로 다대한 효과가 있다”註 225225 독립운동사편찬회,『독립운동사자료집』6, p.683,859,949,992 참조 ; 국편,『한국독립운동사』2, p.168,843 참조.닫기고 까지 평가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독립운동 역량의 확충은 3·1운동의 성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세시위운동을 통해 대중에게 더욱 인식된 자유·평등·정의 인도사상은 민주공화정인 임시정부의 성립의 정신적 기반이 될 수 있었다. 4월 10일 임시정부 의정원이 발표한 「선포문(宣布文)」을 보면 3·1독립선언으로 전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국가(國家)의 독립(獨立)과 민족(民族)의 자유를 인도정의(人道正義)’에 호소함으로써, ‘국민성을 표시’하였고 ‘세계의 동정’을 집중시켰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국민성을 바탕으로 ‘이 때를 당하여 전 민족의 기대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설립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화정부 수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 독립선언이었는데, 이는 한말이래 근대사상이 3·1운동을 전후하여 수용한 민족자결주의 이념과 거기에 관련된 자유·평등·정의·평화의 사상으로 성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일반대중
만세운동은 3월 상순까지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남도의 천도교·기독교 계통 민족대표의 출신 지역과 그 조직력이 강한 지역에서 종교가·청년 학생·시민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운동은 중순경 남부지방으로 확대되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면서, 농민·노동자가 광범하게 참가하고 아울러 운동형태도 폭동화되었다. 그리고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 그 경향이 전국적으로 확산·강화되어,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와 같이 3·1운동이 대중화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통해 민족자결주의 이념도 일반 대중사이에 그 수용의 폭을 확대시켜 나갔다. 즉 앞에서 살펴본 종교인·청년 학생의 활동과 외국인 선교사의 활동을 통해 그리고 민중 자신들이 시위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선언문과 각종 유인물에 담긴 이념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이 국제적인 추세라는 사실을 일반 민중에게 전달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미국 총영사 바아홀쯔는 3·1운동 이전 미국인 선교사·시민들에게 조선인들을 선동하는 것을 삼가 하도록 당부한 것과는 달리, 시위운동의 확산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는 조선인에게 ‘조선인이 자기의 의견을 공표하여 민족자결주의를 부르짖음은 인류의 특권’이라고 하고, 선교사들에게는 “만일 경찰력이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따위의 경우가 있을 때는 관헌과 교섭하여 충분한 보호를 하겠다”고 하였다.註 226226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3, No.1302.닫기
서울 거주 감리교 선교사 영국인 하디는 조선인 전도사에게 “이번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벨기에는 많은 손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화회의에서 경시되어 그 발언이 인정되지 않은 상태인데, 겨우 독립만세를 제창해 가지고는 조선이 강화회의의 문제가 되지 않음은 명료하니 만약 조선인이 충심으로 그 희망을 관철하려고 한다면 결사적으로 소요를 하지 않으면 강화회의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註 227227 강덕상 편,『현대사자료』Ⅴ.25, p.405.닫기 또 3월 3일 이래 함경남도 함흥의 운동은 캐나다 선교사 영이 경영하는 영생학교의 조선인 교사·학생이 중심이 되었다. 영은 학생들에게 ‘세계의 대세가 민족자결의 기운에 있음’을 알리고 분기를 촉구하는 강연을 하였다. 캐나다 선교사 마그레도 학생들에게 폴란드 기타 민족의 독립 사실을 이야기하였다.註 228228 독립운동사편찬회,『독립운동사자료집』6, pp.916~917.닫기 함남 원산의 미국인 선교사 부라난은 일반인에게 “민족자결주의에서 나온 이번 독립운동은 당연히 있어야 할 일이며 하등 불사의(不思議)한 사건이 아니다……우리 미국인이 이상(理想)으로 하는 바는 자유평등주의(自由平等主義)임은 물론이며 금일 세계의 대표국이 되었음은 곧 자유의 사물(賜物)이다……조선독립문제는 가장 중대사이다. 마땅히 조선인의 여론을 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다. 이는 오로지 정의인도(正義人道)에 기인한 정책이다”註 229229 국회도서관 편, 앞 책, No.1323, p.58.닫기고 하면서 조선의 독립운동이 인류 본연의 요구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 ‘조선의 독립은 오는 6월에 이르면 강화회의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실망하지 말라’고 하여, 이들 기독교인 사이에서는 6월에 독립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한다.註 230230 국회도서관 편, 앞 책, No.1507, p.507.닫기 함북 성진에서 영국인 선교사 그레슨은 3월 10일 만세시위가 있기 전인 7일 제동병원에서 주도자들에게 “금번 독립운동은 신문에 나서 강화회의에 열석하는 각국 위원은 이를 성원할 지도 모른다”고 하였다.註 23123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6, p.917.닫기
이러한 선교사들의 발언은 접촉이 잦은 일반 민중들에게 민족자결주에 대한 이해를 확대시켰고 아울러 미국에 대한 기대감을 심화시키는데 기능하였다. 선교사들은 전도사업의 일환으로 의료·교육활동을 전개하면서 조선인들의 신뢰를 얻어왔으며, 교세확장과정에서 한국인의 민족주의를 이해하였다. 이는 조선인이 독립운동하면서 미국인의 원조를 기대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재한 선교사들은 조선의 민족독립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었으며 1919년 4월 윌슨에게 민족자결주의를 조선에 적용할 것을 서면으로 제출하기에 이르렀다.註 232232 강덕상 편, 앞 책, p.441 ; 국편,『한국독립운동사자료』4, pp.262~265 참조.닫기 그리고 미일개전설(美日開戰說)과 관련한 미국인들의 언동도 이러한 미국에 대한 기대감을 강화시키는데 작용하였다.註 233233 강덕상 편, 앞 책, p.396,405 참조.닫기 이렇게 되자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 있었던 조선인들의 미국에 대한 기대감은 상대적으로 클 수 밖에 없었다.
식민지 농정 아래 최대의 수탈 대상이었던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활상의 요구에 기초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농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 ‘독립이 되면 상식부(桑植付)·부역(賦役) 등이 필요 없다.’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되니’라고 선동되기도 했다. 생활상의 이해에서 참가한 민중은 점차 민족적 자각에서 적극적으로 시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언서·신문·격문 속에 담긴 이념들에 대해서도 자각 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독립운동의 주된 이념들이 민중 사이에 어떻게 확대되어 갔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3월 1일 이후 각지의 독립시위는 대체로 선언문 낭독과 독립운동의 취지와 관련한 연설 그리고 만세고창과 시위로 이어졌다. 선언문 낭독과 취지 연설 등을 통해 민족자결주의와 그 이념이 담고 있는 자유·평등사상이 민중들에게 전달되었다. 즉,
고 하여, 시위운동의 현장에서 선언서의 낭독과 함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설명’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민중들은 처음에는 시위참여를 통해 어렴풋이 민족자결주의를 인식할 수 있었지만, 불완전한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이해일지라도 그 이념이 점차 만세시위운동을 확대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한편으로 운동과정을 통해 그 이념을 더욱 명료하게 할 수는 있었다. 이렇게 되자 3월 5일 당황한 장곡천(長谷川) 총독이 민족자결주의가 조선과 전혀 관계없는 것임을 들어 엄중 단속을 지시한 사실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3월 6일 보도통제가 해제되고 그 이틀 후인 3월 8일자 『매일신보』에도 ‘소위(所謂) 독립운동(獨立運動)’이란 제하로 민족자결주의가 조선과 무관함을 강조하고 있다.註 235235 국편,『일제침략하한국삼십육년사』Ⅴ.4, p.347.닫기 이같은 조선 총독의 발언과 『매일신보』의 내용은 민족자결주의가 계속되는 독립운동의 고리로서 크게 관련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종래 선언서의 문체가 대부분 난해한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유식(有識)계층을 상대로 쓰여져, 그 정신이 민중 일반에 전이(轉移)되기 어려웠다는 주장도 있었다.註 236236 이덕주,「3·1운동의 이념과 운동노선에 관한 연구 : 33종의 독립선언서를 중심으로」,『기독교사상』351(1988), pp.112~113 참조. 그리고 가평 지방과 같이 시위주도자들이 선언서의 난해함에 공감하여, 주민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끌어내기 위한 방안으로 통문을 작성했음은 뒤에서 살펴보겠다.닫기 그러나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그 내용이 쉽게 민중에게 이해·정착될 수 있었다.
① 취지 설명 : 기독교 전도사 이병주(李秉周)는 3월 2·5일 서울 시내에서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하도록 선동하였다. 註 23723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p.162~163 참조. 이병주는 5일 운동 이후 ‘비법행동이 아니냐’라는 격문을 작성하여, 일본관헌의 무자비한 시위탄압을 비난하고 국민자주권의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였다.닫기 또 보성사 간사 인종익(印宗益)온 2월 28일 이종일로부터 선언서 2천매를 전주·청주 등의 유지자에게 배부하라는 위탁을 받고, 전북 전주 교구실 김진옥(金振玉)에게 1,700매를 교부하고 ‘그 취지를 백성에게 철저하게’ 하여, 일반인이 ‘그 취지를 체득하여’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지시하였다.註 23823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5, p.168.닫기 강원도 김화군 천도교도 신동민(申東敏)은 3월 2일 천도교도 채장숙(蔡章淑)으로부터 선언서 30매를 배부받았다. 신동민은 ‘자기는 무식하므로 그때 채장숙에게 선언서의 의미’를 물어 안 뒤, 이를 천도교도 박윤실(朴允實)·윤규우(尹圭祐)를 통해 마을에 첨부하도록 하였다. 박윤실 역시 신동민으로부터 ‘선언의 주지’를 들었고, 윤규우는 ‘선언서를 받아 이를 읽는데 불온한 문구를 사용한 부분이 있으나 좌우간 교주 손병회의 명령이므로’ 마을에 첨부했다고 한다.註 23923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925. 선언서 취지에 대한 설명과 연설에 찬성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난 사례는 이외에도 강원도 화천면(p.935). 통천군(p.971), 평안도 강서군(p.826). 안주군(p.829, p.832). 평원군(p.831) 등에서 볼 수 있다.닫기
② 내용 번역 : 김윤식(金允植)·이용직(李容植)의 일본 총리대신 앞 독립청원서를 김윤식이 작성하여 3월 25일 김기수(金麒壽)와 김유문(金裕門)에게 정서시켰다. 김유문은 이를 24통 등사했는데 그중에 “내가 언문(한글)으로 번역하였다. 자택의 부인에게 보이기 위해 작성”한 것이라고 하였다.註 240240 독립운동사편찬회, 앞 책, p.214.닫기 난해한 선언서는 이와 같이 쉽게 번역되기도 하였으니, 이는 함경도 성진의 만세시위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③ 회람 : 경기도 시흥군 서당 생도 권희(權憘)는 4월 6일 자신이 「비밀통고(秘密通吿)」를 만들어 ‘각 동리에서 차례로 회람하도록 그림으로 표시’를 하였다. 농업종사자 장수산(張壽山)은 동리구장인 조카 이종영(李鍾榮)의 집 앞에 이를 놓아 두고, 등리 주민이 회람하도록 하였다. 주민중에는 받아 직접 읽어 본 자도 있고, 또 글자를 모르는 자는 다른 사람에게 읽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註 24124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278. 통문 회람은 경기도 양주군(p.301)과 이천군(p.488), 포천군(p.512)에서도 보인다.닫기
④ 유인물 낭독 : 경기도 광주군 농업종사자 이시종(李時鍾)은 3월 26일 동리 주민을 규합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때 그는 “오늘까지는 면사무소에서 일본일을 하고 있었으나 조선이 독립하면 부역·세금 등이 필요없게 될 것”이라고 하고, 『조선독립신문』을 군중에게 읽어 주며 선동했다. 농업종사자 이재순(李載淳)이 그 옆에서 이시종이 모르는 글자를 알려주면서 함께 군중을 선동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註 24224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298.닫기
⑤ 해독가능자에게 전달 : 경기도 부천군 농업종사자 조명원(趙明元)은 3월 24일 조종서(趙鍾瑞)·최봉학(崔奉學)·문무현(文武鉉) 등과 혈성단(血誠團)을 조직하고 격문 80여종과 신서(信書) 1통을 작성하였다. 이들은 각자 이것을 “문자를 해독하리라 생각되는 이민(里民)에게 배부, 조선독립 시위운동에 참가하도록 선동하여 두었다가”, 3월 28일 전에 선동해 둔 사람과 기타 150 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만세시위을 하였다.註 24324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314.닫기
⑥ 구두로 전달 : 가평군 북면 이윤석(李胤錫 ; 교사)은 국장참배후 귀향한 부친 이규봉(李圭鳳)으로부터 서울과 각지의 시위운동을 전해 듣고, 3월 14일 정흥교(鄭興敎)에게 33인의 선언서를 제시하여 찬동을 얻은 후, 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하여 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때 어려운 문장의 선언서보다 농민이 쉽게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는 인식아래, 이윤석 등은 군내 주민 전체가 거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통문을 작성하였다. 그 통문에는 “작금 세계 만국공회에서는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타국에 속해 있는 모든 나라는 독립하기로 되었으며, 이 선포가 있은 후 경성에는 우리의 민족대표가 독립을 선포했고, 시민과 학생들은 연일 계속해서 대한독립의 만세를 외치고 있다”고 하면서 거사계획을 알림과 등시에 추신에서 ‘이 통문을 비밀로 이웃에도 알려 동참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통문류에는 선언서의 기본취지가 압축되어 있을 뿐 아니라 대중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었다.註 244244 加平鄕土文化推進協議會,『加平獨立運動史』(1985), pp.140~141 참조.닫기 이 통문은 500여매가 등사되어 각 동리 이민에게 배부하거나 또는 ‘구두’로 전달되었던 것이다.註 24524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503.닫기
⑦ 한글로 된 격문 : 경성 고등보통학교 상훈(尙燻)은 서울의 선언서 발표 이후 각지의 독립운동을 알고 이에 찬동하여, 3월 31일~4월 2일까지 이민과 봉화를 올리고 시위하였다. 이때 귀향길에 가지고 온 『조선독립신문』 「경고문」및 ‘한글’로 된 「경고」란 문서 30매를 각 이민에게 배부하거나 ‘대여’함으로써, 많은 이민들에게 취지를 전달하여 더욱 더 왕성하게 시위하도록 독려했던 것이다.註 24624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527.닫기
이같이 선언서의 주된 취지는 각종 방법을 통해 일반대중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적게는 수백명 많으면 수만명이 운집하여, 각종 정보를 교환하는 장날에 일반대중을 상대로 시위를 계획한 점은, 이를 주도한 사람들로 하여금 대중의 이해를 고려하여 각종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게 하였을 것이다.
다음에서는 각 지방별로 민중들이 선언서의 내용과 민족자결주의의 이념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만세시위운동의 참가자들의 심문서와 일본 관헌의 민심탐지의 내용으로 그 일단을 보도록 하겠다.
서울
3월 중순 이후 운동이 전국적 전민족적인 대중화 단계로 발전하자, 일제의 탄압이 4월 중순 이후 가중되면서 운동지역과 규모는 축소되고, 5월 이후 비밀결사에 의한 지하운동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러한 정황 속에 6월 현재 서울의 종교인·학생·시민들 사이에는 시국의 추 이에 주의하면서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의 구독자가 증가해 갔는데, 이들 중에는 “이승만 등은 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하여 클레망소·윌슨 대통령이 협의중이므로 독립승인은 확실하다”고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註 247247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2, No.891, p.195.닫기 또 “윌슨이 한국의 독립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를 축하하기 위해 시민들이 길가 미국인 앞에서 ‘만세 윌슨’을 외치기도 하였다.註 248248 “American Witness of Seoul Rioting”, Japan AdⅤertiser, 1919.3.9. 原口由夫,「三·一運動彈歷事例の硏究 : 警務局日次報吿の批判的檢討中を心にし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23집(1986), pp.242~243 참조.닫기 서울 대중의 민족자결주의의 이념과 강화회의에 대한 기대는 그와 관련하여 많은 오보(誤報)와 과장된 내용을 유발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다른 지방에서도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마찬가지였다.
경기도
6월 강화회의의 조인과 관련, 일반인들은 ‘독일의 조인문제와 조선독립과는 전혀 별개의 것’ 또는 ‘조선독립의 승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실패하였어도 가능하다’고 하기도 했다.註 249249 국회도서관 편, 앞 책, No. 903, p.239.닫기 또 총독부 관계자가 강화도 군내 인사를 소집하여’ 독립의 이유를 묻자 그 하나로 ‘세계의 사조가 침입한 것’을 지적했던 것이다.註 250250 김병조, 앞 책, p.207.닫기
충청도
3월 10일 강경에서 봉기가 있기 전에 충청남도에서는 극소수 유식자만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의하였는데, 독립운동이 발전됨에 따라 신문기사의 열독 등을 통해 이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 갔다.註 25125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6, pp 476~477.닫기 즉 4월 11일자 충청남도 도지사의 총독부 내무부 보고에 의하면, 당초 도민(道民)은 그(만세운동 : 필자) 원인 및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으며 도대체 민족자결이란 자의(字義)조차 이해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그런데 각지 소요상황이 유포되고 서울·평양 방면에서의 가맹권유에 이어 협박을 하므로 일종의 유행이 되어……일반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독립이란 호명제(好命題)에 사로잡혀註 252252 국편,『한국독립운동사』2, p.1163.닫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민심 추이로 연기군에서는 “강화회의의 결과 세계 각국이 재산균분주의(財産均分主義)를 취하기로 되었다”고 하고, 대전에서는 서울 거주 일본인들이 강화회의에서 운동할 준비로 ‘민주국 만세’를 고창했다는 항간의 이야기도 있었다. 연기군의 ‘균분(평등)’과 대전의 ‘민주국’의 내용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할지라도 민족자결주의와 강화회의와 관련하여 대중에게 그 이념들이 정착되어 가는 일면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충청북도 도민의 정치적 사상의 발전은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이 1918년 9월 25부에서 운동진행 중에 60부까지 증가한 사실에서註 25325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6, p.675.닫기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일제가 시위운동을 방지하기 위해 조직한 자위단(自衛團)의 규약서의 서명을 일반에게 강요하자, 그와 관련하여 “일본이 이 조인서를 강화회의에 가지고 나가 조선인이 병합에 불만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 삼으려는 것”이라고 이를 거부한다는 것이다.註 25425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675.닫기 자위단 규약서의 조인을 강화회의와 관련하여 거부한 사실은 일반대중의 강화회의에 대한 인식의 확대를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경상도
3월 17일 안동군 예산면 시위에서 다수와 함께 주재소를 습격한 조수인(趙修仁 ; 농업)은 “3천리 강토를 일본의 통치에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부득이 우리들은 폭력을 써서라도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으므로 이번 기회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 각 약소국가가 독립을 한다 하므로 이러한 행동을 취하게 된 것이다. 수백만 대중이 모두 궐기해서 진력하므로 결국은 목적을 달성하리라고 믿으며, 그러므로 절대 독립사상은 버릴 수가 없다”고 진술하였다.註 25525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5, pp.1344~1345. 검사측 증인 庄司政太는 조수인이 “장대한 체격으로 보기에도 든든해서 지금도 잘 기억”이 된다고 한다.닫기 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이 불가했음과 다른 약소국의 독립과 마찬가지로 독립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3월 9일 대구 봉기에 자극되어 11일 부산 기독교 부속학교에서 시위가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경상도의 민심동향을 보면, 부산의 시위 이전에 일부 지식인 사이에 일본 신문기사를 통해 동경유학생의 운동을 알기도 하고 또 ‘강화회의에 조선독립의 제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하였으나 일반 민심에 영향을 준 바가 없었다고 한다.註 25625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6, p.483.닫기 그러나 “강화회의가 종료할 때까지는 독립운동을 중지하지 말라.”註 257257 국편,『한국독립운동사』2, p.811.닫기 또는 “독립은 강화조약의 의제가 될 것이며, 특히 미국대통령은 조선인에게는 가장 깊은 동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의 통과는 명확할 것이다. 우리의 목적의 관철을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註 25825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6, p.507;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3, p.261 참조.닫기고 믿는 사람도 늘어갔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조선독립운동을 강화회의와 관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만세운동은 민족자결주의와 연계시키고 있음이 엿보인다. 또 당장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해도 ‘수차 독립을 부르짖으면 점차 그 사상이 고조되어’, 이것이 토대가 되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註 25925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683.닫기
전라도
전남 순천군 동초면 안상규(安尙圭 ; 농업)는 각지 시위운동에 공명하던 중, 4월 7일 면서기가 신문을 읽으며 “만국재판소에서 조선독립을 허용한다는 요지의 기사가 게재됐을 뿐 아니라 각국 식민지도 역시 각기 본국의 기반(羈絆)을 벗어나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자기의 결의를 굳혀 14일 다른 사람들과 협의하여 벌교시장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전라남도 도지사는 시위주동자들이 관리에게 협박장까지 돌려 각 군수들이 사표를 내게 이르자 각 군에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의의를 설명하도록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3월 14일~19일까지 각 군수는 관내 면장을 소집하여, 조선총독과 도지사의 유고를 낭독하고 민족자결의 의의에 대해 반복 설명한 다음 28일까지 각 군 단위로 군수·서기가 한 조가 되어 관내를 돌면서 그 취지를 설명하였다. 그 결과 참석자들이 ‘민족자결주의의 의의가 어떤 것인가를 비로소 이해함’과 동시에 ‘불상사(不詳事)가 속히 진정하도록 진췌(盡瘁)할 것’을 서약했던 것이다. 이로써 식민지권력은 만세시위운동의 사전방지와 진압에 앞서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재고시키는데 힘썼다. 이 또한 만세운동과 민족자결주의와의 관련성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註 260260 당시 기관지와 ‘時兆時報’에 대한 일반 구독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2, No.903, p.294).닫기
전라북도 민심의 동향을 보면, “강화회의 결과에 의하여 독립도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註 261261 국편,『한국독립운동사』2, p.971.닫기고 하는데, 관헌이 보기에는 “민족자결 등 운운과 같은 것은 시비선악(是非善惡)을 이해한 것도 아니고 단지 다른 지방의 소요”의 영향으로 보인다는 것이다.註 262262 국편, 앞 책, p.882.닫기 불완전한 이해일지라도 ‘민족자결’을 일반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이 일반인의 행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게다가 일반인 사이에 각종 신문을 구독하고 강화회의에 관한 기사에 주의하는 자가 중가하고 있다고 한다.註 263263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3, No.1493, p.482.닫기
강원도
강원도 역시 만세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은 이미 조선독립을 확인’했다는 민심의 동향이 있다. 춘천에서는 8월 16일자 『대동신보(大同新報)』제1호(편집 및 발행자 鄕必成)가 배포되었는데, 그 내용은 먼저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취지서를 게제하여 한국독립과 민족자결을 주장하고, 3대 강령으로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 사회주의 실행을 들고 있다.註 264264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2, No.944, p.376.닫기
황해도
황해도 지역의 운동 참가자의 상고 취지서를 보면, 하나같이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한 것으로 그 정당함을 주장하고 있다. 해주군 청룡면 이기봉(李起峰)은 자신은 “산간 벽촌에 침거하는 일개 필부이나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을 듣고 민족자결의 이념을 깨닫은 바”가 있어, 3월 16일 다수의 군중과 만세를 불렀는데 이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제창된 민족자결의 의사에 따른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하였다.註 26526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571.닫기 가좌면 최인영(崔仁永)은 “오늘날 주장하는 바의 민족자결을 일본정부에 있어서는 여하히 해석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할지라도 우리 조선민족에겐 정당한 문제”라고 하여 ‘민족자결의 정당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註 26626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582.닫기 그리고 상당수에게 이같은 운동이 ‘국민의 의무’로 받아들여 졌고註 26726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崔在棋(p. 574). 李鎭珏(p.578) 이외, 강원도 金瓚鎬(p.902). 申在根(p.954). 평안도 崔秉勳(p.809). 朴泰興(p.810) 등 다수에서도 확인된다.닫기 ‘자유주의’에 기초한국토의 회복이었던 것이다.註 26826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582. 李長軍의 상고 취지서 참조.닫기
이어 은율·신막·수안·장연·황주군 각지에 신문을 비롯한 다수의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민심동향도 “윌슨은 조선인에게 크게 동정을 부여 조선인 유력자들에게 강화회의에서 독립운동을 원조하겠으므로…… 의사를 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을 인정할지 안할지도 의문인데 그 근본을 알아보지도 않고 헛된 소요를 야기시키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여 낙관적 또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어디까지나 운동을 계속하면 드디어 독립목적은 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독립을 위한 세력강화로 인식하는 자도 있었다.註 269269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pp.983~984 참조.닫기
평안도
평안도 지방은 3·1운동 이전부터 의병운동·애국계몽운동·비밀결사의 활동 등 다양한 형태의 민족운동이 다른 지역보다 뿌리깊게 전개되어 왔다. 이 지방은 민족대표가 종교 교단조직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3월 1일부터 결열하게 운동이 진행되어 다른 지역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평북 철산군 이재근(李載根 ; 이발사)은 ‘민족자결론이 자국 신문에 기재된 것을 보고 또 조선민족대표자 33인의 선언서가 계속 공포된 것’을 들었고,註 27027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5, p.846.닫기 구성군 허상옥(許尙玉)은 “3월 1일 조선민족대표자 33인이 독립을 선언한 사실과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로서 그 독립을 희망하는 나라는 이것을 승인한다”註 27127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867.닫기는 데에 자극되어 시위에 참가 했다는 것이다. 이 지방 역시 운동의 대중화과정에서 33인의 선언서 와註 272272 33인의 선언서의 영향은 평안도의 金致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823) 金斗源(p.823) 이외에 ‘손병희 등의 취지’에 찬동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한 예는 많다. 그 몇가지만 보아도 경기도 李享益(p.221). 강원도 金福基(p.960) 崔祥麟(p.970) 등이며, 특히 천도교도들은 대개 ‘손병희 등의 독립운동은 멀지 않아서 성공할 것’이라고 하여 그 영향이 보다 컸던 것으로 보인다.닫기 민족자결주의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즉, 초산군 이도식(李道植) 같이 “강화회의에서 결정한 민족자결주의는 어디에 묻고 피고를 처벌하려는가”라는 항변도 나왔다.註 27327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885.닫기 그래서 민족자결주의에 따른 독립운동을 ‘국민으로서 당당한 의무’라고 하여, 재판부도 비고란에 “상고취지서의 내용이 한결같이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자기의 의무’이며,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의한 것’으로 죄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서술할 정도이었다.註 27427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804.닫기 대동군 이준배(李俊培)는 시위장소 부근에서 유탄을 맞고 시위자로 오인되자 자신은 “본년 봄 시세의 풍조에 의하여 조선 각지에서 자유독립을 고창했으나 본래 무식한 농민으로서 자유독립이란 의미를 몰랐고 더욱이 독립운동이란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정의인도’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다.註 27527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790~791.닫기 이와 같이 ‘자유’와 ‘민족자결’에 대한 인식이 없던 사람도 시위의 목격과 참여과정을 통해 점차 그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갔다. 그래서 ‘정의인도’에 입각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아가서 ‘민족의 자유적 권리’를 요구했던 것이다.註 27627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李鉉(p.796). 劉漢基(p.802). 金泗振(p.835) 등이다.닫기
민심의 동향은, 평양에서는 독립만세시위 이후 관련된 인쇄물과 풍설이 많아 3월 28일 “파리회의에서 조선독립판결이 되는 것이므로 독립 거사를 대규모 한다”는 말이 돌아 시민들이 생활필수품 구입 등 이에 대비했다는 것이다.註 277277 『毎日新報』1919.3.21일자 ; 국편,『일제하한국삼십육년사』Ⅴ.4, p.372.닫기 평안북도에서는 운동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종전과 강화회의 문제가 세상에 알려져도 신문 등을 통해 일부 상인 이외에는 지역 농민들이 이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註 27827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6, p.488.닫기 이후 “조선인의 정치사상은 현저하게 향상되고 견문도 넓어져 세계의 사조에 접촉하려고 근래 신문구독자가 점차 증가”하여 특히 독립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상황이라는 것이다.註 279279 국회도서관 편,『한국독립운동사』Ⅴ.2, No.903, p.292.닫기 반면에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은 독립했다.”註 280280 국회도서관 편, 앞 책, p.291.닫기 혹은 “파리평화회의의 민족자결문제에 응해서 조선의 독립이 승인되었다는 전보가 일본정부로부터 총독부에 도달하였다”註 28128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5, p.843.닫기는 등의 과장된 내용도 상당히 있었다.
함경도
함경도의 민심동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온성에는 평북 거주 이동휘(李東徽)가 “파리, 미국대통령에 의뢰하여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중인데 근간 강화회의에 제출하여 각국의 승인을 얻을 것”이니 독립은 시기문제라고 하였다.註 282282 국편,『한국독립운동사』2, p.842.닫기 또 고원에서는 “독일의 강화조인과 더불어 조선이 독립하여 목하 조선대통령을 선정 중”이라註 283283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2, No.903, p.292.닫기 하여, 파리회의에 대한 강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이에 반해 “민족자결로서 독립하고 타인종(他人種)의 지배하에 있음을 불쾌하게 여긴다. 단 목하는 이것이 불가능하니 불리하다면 은인(隱忍)하여 기(機)를 견(見)하자”고 하고, “독립(獨立)의 불가능(不可能)을 지(知)하여도 독립(獨立)이라는 어(語)는 심(深)히 흉저(胸底)에 향(響)하여 선언서(宣言書) 독립신문(獨立新聞) 등의 열독자(閱讀者)는 회천(回天)의 염(念)을 준(浚)하고”있다는 것이다.註 284284 국편,『한국독립운동사』2, p.837.닫기 이는 세계사조인 민족자결의 현실적 실현의 한계를 인식하고 당장 독립이 불가능할지라도 독립의 역량을 축적하여 후일을 기약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명천에서는 “한국은 이미 독립하였으므로 동계(洞契)도 폐지되었고 공동묘지(共同墓地)에도 매장할 필요가 없고 도축신고(屠畜申吿)를 하지 않고서 장제용(葬祭用)의 돈(膝)을 도살(屠殺)하고 또 산간부락에서는 세금을 납입할 곳이 없다”고 하여 구래의 관습의 개량과 시정 일반에 대한 저항감을 토로했고, 독립 후 각종 경비가 증가하여 “지금의 5배가 된다해도 납부에 주저하지 않는다. 또 의연금 모집이 있는 경우에는 몇 천 몇 백원이라도 아끼지 않는다”고 하여註 285285 국편,『한국독립운동사』2, pp.842~843 참조.닫기 독립국가에 대한 의무감과 함께 국민의식의 성장을 볼 수 있어, “이때 한민족의 진의를 발표해 두지 않으면 영구히 이러한 기회에 봉착하기 불가능할 것”이라 하고 어떠한 희생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또 독립운동의 성공에 관계없이 ‘손병희 이하의 애국심은 국사로 상찬’할 만 하다고 하여,註 286286 국편, 앞 책, p.843.닫기 33인의 선언서가 운동의 전 과정에서 영향력을 미친 결과 이러한 민족대표에 대한 평가도 가능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3·1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의 이념이 독립운동의 방향성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를 몇 몇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다. 민족자결주의는 3·1운동의 초기 단계뿐 아니라 전국적인 대중화 단계에도 민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주된 독립운동의 이념이었다. 물론 실제 운동의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의 이해가 지나치게 과장되고 와전된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이유로 만세시위운동에 미친 그 이념의 긍정적인 면을 간과할 수는 없다.
4월 중순 이후 일제의 강경한 탄압으로 만세운동은 5월 이후 지하운동으로 전환되면서 더욱 조직화되지만, 비밀결사의 활동은 3·1운동 이전부터 주된 항일운동의 한 방편이 되었으며, 3·1운동에서도 그 역할 이 컸다. 이들의 활동은 각종 지하 유인물의 제작배포와 함께 해외운동 가와의 연계활동 등으로 일반 만세시위운동보다 폭력적이고 투쟁성이 강했다. 이러한 비밀결사조직에서도 격문을 작성하면서 민족자결주의와 연계되어 구체적인 활동이 있었다. 3월 2일 의주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동지회(同志會)는 상당한 자금을 모아 파리의 대표자와 외국신문의 성원과 동정을 구하기 위해 송금을 직접하기도 하고, 선교사를 통해 상해 방면으로 보냈다. 이 조직은 주동자 일부가 상해로 간 뒤에 검거되고 만다.註 287287 강덕상 편,『현대사자료』Ⅴ.25, p.422.닫기
평양의 기독교 신학생 박인관(朴寅寬)·박승명(朴承明) 등은 독립운동을 미국의 후원에만 의뢰할 것이 아니라 자력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국민의 중견이 될 단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19년 8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롤 결성하였다.註 288288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2, No.1094,「秘密結社大韓國民會 및 ;大韓獨立靑年團檢擧에 關한 件」, pp594~599 참조. 大韓民國會趣旨에는 “吾國을 우리스스로 등에 지고 國任의 大小官職을 國民 스스로 選擇하여 委任하고 國家諸事를 官民共和下에 相議”하자고 되어 있다.닫기 이들은 임정의 승인을 얻어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으로 활동할 것, 향촌회(鄕村會) 조직을 통해 전국에서 회원을 모집할 것, 독립신문 등 각종 문서를 제작·배포하여 독립의식을 고취할 것 등이 협의되었다. 또한 평양의 기독교 전도사 안영극(安英極)·평양 고등보통학교 교사 윤종정(尹宗植) 등은 9월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을 조직하여, 1920년 2월 대조선국민군포고문(大朝鮮國民軍布吿文)을 선포하였다. 그에 따르면 독립을 성취하는데 외교와 군사의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전제하고, 강화회의와 국제연맹에만 집착하지 말고 군사준비를 강조하였다.註 289289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2, No.1237,「大朝鮮國民軍團檢舉의 件」참조.닫기 이로써 비밀결사는 강화회의에 대한 기대와 함께 무력투쟁을 강조했는데, 이들의 활동에는 상해 임정과 해외운동가의 국내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이 무렵 강화회의에 대한 기대는 곧 민족자결주의와 상통하기도 했다. 만주 통화현(通化縣) 거주 조승무(趙承武)는 국내로 들어가는 조선인으로 하여금 대한독립총단(大韓獨立總團)의 명의로 「경고대한등포(警吿大韓同胞)」를 배포하도록 했다. 그 내용은 먼저 독립운동이 파리강화회의와 각국의 호응을 얻었다 하면서, ‘정의와 인도’를 무시하는 일본에 대항하여 만주와 노령지방의 무력투쟁에 청년들의 참여와 자금모금에 대한국내의 협조를 구하고 있었다.註 290290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2, No.1115,「不穩印刷物配布에 關한 件」, p.634참조.닫기
요컨대 세계의 추세가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민족운동의 단계를 조성할 무렵, 민족자결주의는 독립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직접 행동을 개시할 수 있도록 촉매 역할을 하였는데, 이는 국내의 만세시위운동뿐 아 니라 비밀결사의 활동에도 그리고 다음에서 보는 해외운동가에도 마찬가지였다.
(3) 해외동포
3·1운동은 국내의 운동에 호응하여 해외 각 지방에 재류하는 조선인 사이에서도 그 지역의 객관적 주체적 조건에 따라 운동 방식을 달리하면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간도·연해주지방은 주로 무장투쟁의 근거지였고, 상해·미국은 외교선전활동의 중심지였다.註 291291 朴慶植,『朝鮮三·一獨立運動』p.201.닫기 해외재류 조선인은 세계대전 등 당시 국제정세의 변화를 분명히 인식하고 민족해방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게 되어, 국내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고자 했다. 민족자결주의는 국내의 독립운동뿐 아니라 국내보다 국제정세의 변화를 기민하게 포착할 수 있었던 해외민족운동가에게 더욱 강력하고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다음에서는 간도·연해주·중국방면의 해외 동포들의 독립운동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간도지방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 후 민족해방을 달상하기 위해 재결집되어 가던 연해주지방의 동포들의 활동이 간도에 있는 조선인에게 자극을 주었다. 이 무렵 간도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의 활동도 간도 조선인의 국제정세의 파악에 일익을 담당했다. 1918년 용정촌(龍井村)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들을 통해 독일·오스트리아의 궤멸과 소수 민족의 독립이 간도의 한인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1918년 12월초순 선교사 부두일(富斗一)은 “강화회의 개최를 맞아 재미한인들은 미국정부에 탄원하여 대표자를 미국 강화사절의 수행원으로 강화회의에 열석하는 것이 허가되었다”는 통신이 있었다고 조선인 기독교도에게 과장된 사실을 전해주었다. 또 12월 15일 제창(齊昌)병원장 마틴은 “강화회의에서는 반드시 인류의 자유평등주의가 제창될 것이며 영국의 인도, 일본의 조선문제도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고 말했다.註 292292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3, No.1531, pp.555~556.닫기 3·1운동 이전부터 각종 계몽활동과 교육활동을 통해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있던 간도지방의 조선인들은 이렇듯 국제정세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통로들이 있었다.
다음에서는 구체적인 운동준비와 전개과정은 생략하고 민족자결주의와 관련한 그들의 동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간도 명동중학교장 김약연(金躍淵)은 전로한족중앙총회장(全露韓族中央總會長) 앞으로 보낸 1919년 2월 6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금년은 우리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해이므로……세계민족이 자유를 고창하는 때에 우리 한국만이 무슨 이유로 악마가 발호하는 것을 경고하지 않을 것인가”라고 하고, 일본의 ‘독립연방합병’ 문서의 합병란 날인 강요에 대해 “이것은 이번 강화에 대문제가 되는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에도 실시하게 될 것을 예측하고” 세계를 기만하기 위한 술책임을 지적하고 나아가 전로한족중앙총회에서 세계신문을 통해 이 사실을 알려,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民族自決)’이 실현되는 데 장애가 없도록 당부했던 것이다.註 293293 국회도서관 편, 앞 책, No.1295, pp.5~6.닫기 따라서 간도지방의 독립운동의 중심 인물 중의 하나인 김약연은 민족자결주의와 연계지워 독립운동의 방략을 세웠다.
2. 2월 18·20일 국자가(局子街) 하장리에서 김영학(金永學)·이성근(李聖根) 등 33명이 한족자결운동(韓族自決運動)에 대한 방침을 결정하였다. 첫째, 간도내 각 교회, 단체는 상호 단결하고 일치 협력하여 한족독립운동에 힘쓸 것. 둘째, 곧 재러한민족(在露韓民族)이 발포할 한족독립선언서의 공표와 동시에 간도의 각 단체는 일제히 시위운동을 개시할 것, 그리고 시위운동의 방법은 각 단체 수백명이 집합하여 공공연하게 독립을 선언하고 세계대세의 추이·윌슨의 숭고한 행동의 찬미·‘데모크라시’를 고창하여 일제히 독립만세를 절규한다는 것이다. 셋째, 한족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면 각 단체의 유력자는 용정촌에 집합하여 독립선언을 위한 기세를 높힐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註 294294 국회도서관 편, 앞 책, No.1344, p.91.닫기
3. 해외 각지에 재류하는 민족운동가들이 시대사조에 대응하여 민족독립의 굳은 의지를 표명한 것이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일명 戊午獨立宜言書)이다. 이것은 39인의 공동명의로 1919년 2월 길림에서 발표되었다.
고 하여,註 295295 동아일보사,『3·1운동과 민족통일』자료 6.닫기 외교적 해결에 대한 기대와 세계사조의 변화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고 아울러 ‘인도와 정의’의 민족자결주의 등 국제정세가 민족운동을 전개하는데 유리하다고 분석하고 있다.註 296296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한 연구로는 송우혜,「「대한독립선언서」(세칭「무오독 립선언서」)의 실체 : 발표시기의 규명과 내용분석」,『역사비평』(1988, 창간호) ; 김동환,「무오독립선언의 역사적 의의」,『국학연구』2집(1988) ; 조항래,「무오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경위와 그 의의에 관한 연구」, 무오대한독립선언서 선포 제72주년 기념식 및 학술심포지움『발표문』(1991) 참조.닫기 또 “차(此)로써 이천 만적자(二千萬赤子)의 운명(運命)을 개척할지니 기(起)하라. 독립군아. 제(齊)하라. 독립군아……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고 하여, 항구적인 동양평화와 국제공도에 따라 합리적으로 투쟁할 것을 독려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의 자력으로 ‘육탄혈전(肉彈血戰)’의 독립전쟁까지 결의하고 있다. 따라서 민족자결주의는 보다 강경한 투쟁의지를 다지고 있는 길림의 대한독립선언서에까지 반영될 정도로, 독립운동을 촉발케 하는 강력한 투쟁이념이었던 것이다.
4. 국내의 선언서 발표의 소식과 함께 7일경 서울의 선언서가 전해져 용정촌·국자가 등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의 준비가 진행되었다. 13일 용정촌 천주교 교회당 정오의 종을 신호로 “함성을 높게 하고, 만세를 호창하면서 격문을 배포하고 ‘정의인도(正義人道)’라고 쓰인 깃발을 날리며, 구한국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축하회(獨立祝賀會)가 개최되었다. 김영학(金永學)이 등단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축하의 취지를 설명하자 등사판 인쇄물이 군중사이에 배포되었다.註 297297 박경식,앞 책, p.205.닫기 이날 간도거유조선민족일동(懇島居留朝鮮民族一同)의 명의로 「독립선언포고문(獨立宣言布吿文)」이 선포되었다.註 298298 동아일보사,『3·1운동과 민족통일』 자료 3.닫기
고 하여, 세계의 추세에 부응하여 민족의 ‘독립·자유·정의·인도’를 선언하고, ‘정의·인도·생존·존영’을 위한 정당한 민족적 요구인 거사가 배타적 감정으로 흘러 기본 목적을 흐리게 하지 않도록 당부하고 있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관헌이 이날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자 대표들은 길림성장(吉林省長)과 북경(北京) 정부(政府)에 대해 ‘한민족의 자결운동(自決運動)’에 대해 중국관헌의 발포의 부당성을 지적 하고 책임있는 해결을 촉구하였다.註 299299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3, No.1328, p.68.닫기 이날 배포된 격문 중에 간도한민회(墾島韓民會) K생의 명의의 「일본인에게 고함」이란 격문에는, “한국인은 동양의 평화를 위해 황인종을 위해 독립운동하는 것이며,……단지 정의인도에 따른 민족자결주의”라고 하면서 독립의 ‘당연’함과 ‘정당’함을 주장하면서 일본인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註 300300 강덕상,『현대사자료』Ⅴ.26, p.75.닫기
5. 혼춘(琿春)은 연해주와 가깝고 국내외로 통하는 간도지방의 중심지로, 용정촌의 시위 이후 독립계획이 추진되어 3월 20일을 기해 독립만세집회가 있었다. 시위참여자는 구한국기를 손에 들고, 2열 종대의
약 60명의 학생을 선두로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쓴 깃발을 들고, 나팔을 불고 노래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절규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행진하였다.註 301301 박경식, 앞 책, pp.207~208 참조.닫기 2,000 여명이 집합한 가운데 당일 지도자 황병길(黄丙吉)은 “이번 강화회의는 의외로 한국독립의 기회를 주었다”고 하면서, 이때 일치단결하여 독립의 의지를 관철할 것을 제창하였다.註 302302 국회도서관, 앞 책, No.1399, p.189.닫기 이날 대한국민의회 명의로 발표된 「선언서(宣言書)」에는
라 하여, 자주자결의 공리의 시대에 이를 적극적으로 독립의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것이며, 결의안으로 “기인세계민족자결주의(基因世界民族自決主義), 주장한족지정당자유독립사(主張韓族之正當自由獨立事)”라 하여 세계민족자결주의의 기초 위에 한민족의 자유독립의 ‘정당’함을 채택하고 있다.註 303303 등아일보사,『3·1운동과 민족통일』자료 5, pp.319~320.닫기
6. 혼춘 시위 이후 간도지방의 무력항쟁은 더욱 강화되었다. 3월 21일 김약연(金躍淵)은 노령에서 국자가에 와서 노령·간도에서 약5천 명이 무력으로 국경을 습격하여 함북 혹은 간도에 한국공화임시정부(韓國共和臨時政府)를 조직할 것, 그리고 최후의 것으로 중대한 목적을 강화회의의 문제로 삼는다는 것이다.註 304304 국회도서관 편, 앞 책, No.1377, 1383 참조.닫기 국내보다 무력투쟁의 객관적 조건이 갖추어 있는 간도지방도 무력항쟁의 추진과 함께 민족자결주의의 대세의 활용과 강화회의를 통한 외교적 수단도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병행되었던 것이다.註 305305 한말 산업과 교육활동을 추진해온 중심적인 비밀결사인 新民會는 이 시기 교전단체로서 활동하기 위해 新民團으로 명칭을 바꾸고 무력행사와 함께 파리대표에 대한 후원활동을 병행했다(강덕상,『현대사자료』Ⅴ.26, pp.208~209). 그리고 鄭安立·吕準 등의 東三省韓族生計會는 중국정부를 경유하여 남만주한인의 이름으로 파리에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운동하였다(국회도서관 편, 앞 책, No.1416, 1444 참조).닫기
7. 3월 28일 연길현(延吉縣) 수신사(守信社) 구사평(九沙坪)에서 있었던 시위의 지도자 이하영(李河英)은 “이번 만국강화회의에서 미국대통령 윌슨씨의 제창에 관계되는 자결주의에 기인하여 앞으로 모국(母國)도 독립할 수 있게 되어, 앞으로 도강(渡江)할 수 있게 된 것은 각자 애국심의 왕성함에 기인한다”고 하였다.註 306306 강덕상, 앞 책, p. 128 ; 국회도서관 편, 앞 책, No.1466 참조.닫기 여기서 민족자결주의의 활용과 함께 민족의 역량을 보다 주된 조건으로 파악하고 있다.
8. 김인종·김숙경 등이 3월에 발표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도 “고금에 업난 구쥬대견란의 결국에 민족젹 쥬의로 만국이 평화를 쥬챵하난 금일을 당하야 감사하신 남자사회에서 처처에 독립을 선언하고……우리도……국민됨은 일반이요 량심은 한가지리.……사라서 독립긔하에 활발한 신국민이 되여 보고……때난 두번 이르지 안이하고 일은 지내면 못 하나니”라 하여,註 307307 동아일보사,『3·1운동과 민족통일』자료 11.닫기 민본주의·평화주의의 시대를 파악하여 국민의의 무로서 적극적으로 분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9. 4월 재대륙대한독립임시위원회(在大陸大韓獨立臨時委員會) 명의의 「선언서」에는,
자(玆)에 구주(歌洲)의 극전(劇戰), 세계(世界)의 문운(文運)을 촉(促)함에 제(際)하야 크게 인도문제(人道問題)는 고창(高唱)되여……국제연맹(國際聯盟) 조관(條款)을 선포하고 특히 민족자결(民族自決)외 주의(主義)를 받들고 자주독립(自主獨立)은 그 민의(民意)에 청(聽)하야……정의인도(正義人道) 일광(日光)보다 광(光)이 있고……이제 아족(我族)이 일치단결하야 독립을 고창(高唱)함은 즉 국제연맹(國際聯盟)의 허(許)하는 자(者)로다……아(我)의 독립(獨立)은 정신(精神)으로써 차(此)를 구(求)하고 정의(正義)로써 차(此)를 득(得)하는 자(者)로다
고 하여,註 308308 동아일보사,『3·1운동과 민족통일』자료 13.닫기 이러한 선언서에 응하지 않는 것은 천의(天意)·시세(時勢)·공리(公理)·세계민족(世界民族)의 원수(寃讐)라고 지적하여 동참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세계여론과 강화회의에 호소하여 일제의 무력적 시위진압에 대한 문책을 주장하고, 전민족적인 ‘자위상(自衛相) 자유행동(自由行動)을 집(執)할 사(事)’라 하여 능동적인 직접 행등을 결의하고 있다.註 309309 임시위원회는 만국평화회장 앞 控吿詞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즉, “我韓族이 此自決主義에 據하여 獨立을 宣布한 것은 即 國際聯盟의 許한 바로서……世界의 自 由風潮 平和主義는 人心에 侵灌하여 活活潑潑하다 時에 因하고 機에 乘하여 彼의 羈禅을 脫할 것을 생각지 않으랴……今回 吾族이 獨立을 宣하자……唱한 바는 오직 獨立萬歲이며 呼한 것은 오직 民族自決이었다”고 하는 것이다(국편,『한국독립운동사』2, pp.993~995).닫기
10. 1919년 윤 7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경고문 「남만주거류대소동포(南滿洲居留大小同胞)에게 경고(警吿)한다」에서는, “천하만국이 화평대회(和平大會)를 개최하여……정의(正義)와 공리(公理)를 신장하려는 대(大)제목이 명백하게 천하에 선포되었다. 이러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타서” 독립만세를 불렀고 이것이 참석한 열강의 묵시적 공인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 일본과 결탁한 독립단체들의 속출로 동포사회가 교란되고 있어 이 점을 경계하도록 재류동포에게 당부 하였던 것이다.註 310310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2, No.1068, pp.553~555.닫기
일제의 탄압을 피해 병합 이전부터 많은 항일투사들이 간도에 이주해 옴으로써, 간도는 연해주와 함께 무력항일투쟁의 근거지가 되었다. 간도가 무력투쟁의 전통이 강한 지역이지만 당시 세계 대세인 민족자결주의의 이념과 강화회의에 대한 외교적 활동도 독립운동에 활용하였던 것이다. 이는 앞의 김약연·김영학의 투쟁의 방략과 신민단의 활동에서 살펴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관헌의 정보에 따르면, 간도지방의 독립운동이 강화회의를 계기로 민족자결주의를 고창하여 독립을 달성하려고 하고, 나아가 단지 만세만 부를 것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 한 지역에 임정을 수립하여 완전한 독립을 획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註 311311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3, No. 1433, p.295.닫기 그리고 간도의 독립운동에 민족자결주의의 이념이 역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음도 이미 살펴보았다.註 312312 5.17명동학교에서 열린 국민의회지부원 회합에서는 독립신문은 이후 각 촌·부락에 한책씩 배부하여 상호 회람·열독토록 할 것이라 하여, 정세파악 등에 신문 등이 많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강덕상,『현대사자료』Ⅴ. 26, p.193).닫기 그러나 3·1선언이 “인지(人智)의 향상과 함께 당연히 일어나야 할 문제로서, 때마침 민족자결주의가 창도됨에 따라 촉발되었던 것”이라 하여,註 313313 강덕상 편, 앞 책, pp.134~136 참조.닫기 민족문화의 진보가 보다 직접적인 조건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앞에서 본 3월 28일 구사평 시위에서도 이하영이 민족자결주의에 따른 독립을 주장하면서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각자 애국심이 왕성’함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간도지방의 운동이 국내와 마찬가지로 민족자결주의의 이념을 채택했다고 하여 운동의 성격을 외세의존적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 민족자결주의 이념에 대한 호소는 ‘민족자결주의의 조건은 제1로 자각심, 제2로 자활력’이라 하듯이註 314314 국편,『한국독립운동사자료』5, pp.14~15 참조.닫기 민족자체의 역량이 민족자결주의운동의 전제 조건이고, 이러한 자체 능력으로 충분히 독립할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구춘선(具春先)이 복벽주의 단체의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공화정부의 군인으로 ‘정의(正義)의 공화기치(共和旗幟치) 아래 죽어야 할 것’이라고 하듯이註 315315 강덕상 편,『현대사자료』Ⅴ.27, p.18.닫기 이러한 운동의 과정에서 민주공화주의 정체에 대한 인식의 폭도 확대되어 갔다.
연해주
러시아 10월 혁명 이전 시베리아 재주조선인의 생활과 독립운동은
일제와 결탁된 제정 러시아에 의해 억압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국내의 피압박민족은 해방되어 연해주 재주조선인도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회복하고, 장대한 민족적 과업의 달성을 위해 다시 집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독립운동은 일제와 결탁된 지방권력의 존재와 일본군의 출병에 따른 간섭으로 여전히 방해받으면 서,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중심으로 노령·연해주 지방의 조선인 지도자들은 파리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법을 강구하였다.
1. 한족회중앙총회(韓族會中央總會) 회장 문창범(文昌範)은 강화회의를 지켜보면서, 열강들이 일본과 전쟁을 하면서까지 한국의 독립문제를 관철시키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註 316316 노령 연해주의 3·1운동에 관해서는 반병를,「노령에서의 3·1운동」,『한민족독립운동사』, Ⅴ.3 참조.닫기 국제정세가 반드시 독립운동에 유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족회중앙총회를 확대·개편하여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가 조직되어 「조선독립선언서(朝鮮獨立宣言書)」를 선포하였다.註 317317 동아일보사,『3·l운동과 민족통일』자료 4.닫기
무릇 인도문제(人道問題)에 취(就)하여는 현시(現時)에 있어서와 같이 그 참신(斬新)한 의의(意義)를 엄숙(嚴肅)히 선명(宣明)되었던 일이 없다. 평화(平和)는 영구(永久)히 구출(救出)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자유(自由)·평등(平等)·동포주의(同胞主義) 급(及)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의 불변(不變)의 정의(正義)는 개조(改造)된 세계적(世界的) 생활(生活)의 기초(基礎) 위에 안치(安置)되어야 할 것이다. 연(然)이나 정의(正義)와 영구적(永久的) 평화(平和)의 보증(保證)을 일반(一般)에게 약속(約束)한 연합(聯合) 여국(與國)의 당당(堂堂)한 공약(公約)은 아직 수행(遂行)되지 아니하고 있다……그 독립(獨立) 급(及) 자유(自由)의 생존상(生存上) 신성(神聖)한 권리(權利)를 획득(獲得)하기 위(爲) 해서는 필요(必要)에 웅(應)하여 여하(如何)한 다대(多大)한 희생(犧牲)을 지불(支拂)한다 하여도 차(此)를 사양(辭讓)하지 아니한다……자유(自由)를 위하여 정의(正義)를 위(爲)하여 일반적(一般的) 평화(平和)를 위(爲)하여 또 인류최선(人類最善)의 이상(理想)을 위하여 압제자(壓制者) 급(及) 포학자(暴虐者)에 대(對)하여는 용감(勇敢)히 분투(奮鬪) 하고저 한다
하여, 자유·평등·민족자결주의가 세계적 생활의 토대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아직도 그것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음과 일본의 대륙침략주의를 정확하게 파악한 뒤, 자유·정의를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분투할 의지를 다지고 있다고 천명하였다.
2. 3월 26일 블라디보스톡에서 홍범도(洪範圖)·박은식(朴殷植)·김치보(金致寶) 등은 노인회(老人會)를 개조하여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을 결성하였다. 이는 노인을 결집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5월 31일 노인동맹단원 5명은 서울에 들어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기도 했고, 6월 24일자로 김치보 등 21명이 서명한 독립요구서가 일본정부에 제출되었다. 즉, “속자만국의강화각족자결지일(屬玆萬國議講和各族自決之日)하여 창방인민(敞邦人民) 도 역거차의(亦據此義)하여 선포독립(宣佈獨立)할서”라 하여, 각 민족이 자결하는 이때 이에 의거하여 독립을 선포하였다고 하고 일본의 재결을 요구하였다.註 318318 국편,『한국독립운동사자료』4, pp.273~275 참조.닫기 또한 단원인 강우규(姜宇奎)는 신임총독 재등실(齋藤實) 암살기도와 관련, 상고심에서 재등의 임명이 “세계(世界)의 대세(大勢)인 민족자결주의와(民族自決主義)와 인도정의(人道正義)를 지(旨)로 한 평화회의(平和會議)의 기도를 교란케 하고 평화를 억제하기 때문에 폭탄을 던졌”음을 주장하고 있다.註 319319 국편,『일제침략하한국삼십육년사』Ⅴ.5, pp.295~296.닫기
이와 같이 연해주 지방의 독립운동도 민족자결주의와 연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홍범도는 1919년 12월 “강권 아래 오직 정의인도만 주장해도 불가능하고, 권리없는 민족으로 단지 평화회와 연맹회에 의뢰해도 역시 권리가 없는 민족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면서,註 320320 강덕상, 앞 책, p.10.닫기 민족자결에 의한 만세시위뿐만 아니라 무력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점은 다른 해외지역의 활동과 마찬가지이다.
중국 방면
1. 상해에서도 영자신문을 통해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 개최에 대한 정보를 접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김철(金澈) 등은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1918년 11월 여운형은 중국의 세계평화회의 대표파견을 권고하기 위해 상해에 온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 크레인으로부터 강화회의에 대표파견의 가능성과 개인적 원조의 약속을 받았다. 한편 상해 평론잡지 주간 밀라드로부터 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문제가 논의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듣고,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민족의 독립을 호소해도 성과를 얻을 수 없다는 현실적인 한계를 이해하면서도 김규식을 파리로 보냈다. 또한 독립요망서(獨立要望書)를 작성하여 밀라드에게 파리강화회의와 윌슨대통령에게 전달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註 321321 박경식, 앞 책, p.61 참조.닫기 그 내용은 첫째, 윌슨이 주장하는 국제 연맹은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기관이며 둘째, 윌슨의 높은 이상 즉 국가는 그 인민의 의사에 따라 반드시 다스려져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비호하는 미국 인민의 동정을 요구하고 세째, 일본제국주의가 윌슨의 평화주의·민주주의를 정복하려는 이 때 조선의 독립과 아시아의 민주주의가 수호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2. 북경에서 미국의 대한인국민총회에 보낸 2월 18일자 전문에서는 “귀국 대통령 윌슨께서는 천명을 따라 각 민족에게 자결주의를 선포한지라 이럼으로 각하는 우리의 불쌍한 정형을 강화회에 진술함으로 자주독립국의 안락이 우리 민족에게도 미치게 하소서”라 하여,註 322322 국편,『한국독립운동사자료』4, p.335.닫기 민족자결주의의 조선독립에의 적용을 주장하고 있다. 또 중국 거주 한인들은 미국 공사에게 “위대하신 귀국 대통령은 인권을 존중히 여겨 각 민족으로 하여금 자결주의를 실행케 하니 우리는 깊은 고초 가운데서 이 소리를 듣고 성의를 다해 씨를 앙모하노라”고 하면서 미국정부에 청원서를 전달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註 323323 국편,『한국독립운동사자료』자료 4, pp.332~333.닫기
3. 상해에서 대한민족대표 박은식 등 30명은 10월 31일 「선언서」를 선포하였다. 지난 3·1독립선언 이후에도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민족을 탄압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삼월 일일의 초지(初志)를 중(重)히 하고 인도(人道)와 정의(正義)를 위해 한번 더 은인(隱忍)하여 독립을 선언한다는 것이다.註 324324 동아일보사,『3·1운동과 민족통일』, 자료 14.닫기
4. 상해에서 발행된 4월 11자 『독립신보(獨立新報)』제1호에는 “대제(大哉) 위제(偉哉), 대통령(大領統) 윌슨씨의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여, 만방(萬邦)이 다 이를 함희(咸喜)한다……이제 공도(公道)가 창연(暢然)하므로 일선(一線)의 춘광(春光)은 동서반도(東西半島)에 선달(先達) 하였다……귀남노유(婦男老幼)의 별(別) 없이……조국(粗國)의 독립(獨立)를 고창(高唱)하고 공도(公道)를 세상(世上)에 창명(暢明)하 려고 한다”고 하여, 민족자결주의의 공도(公道)에 따라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註 325325 국편,『한국독립운동사자료』5, pp.24~25.닫기
5. 5월 국무원 제1호 통유문에서 “정의와 인도에 기본한 우리의 요구는 당연히 관철할 줄로 자신하는 데 왜냐하면 파리회의의 사명은 세계개조에 있고 세계개조는 각 민족의 자결을 용인”하여 그 발전을 조성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자결의 운동이 세계를 진동하는 현재 정의를 표준하는 만국이 우리의 후원군으로 최후의 승리는 기필코 올 것이다”는 것이다.註 326326 金秉祚, 앞 책, p.146.닫기 국무원의 이러한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호소와 함께 1920년 1월 13일 포고 제1호에서는 세계대세를 무시하는 일제에 대한 독립전쟁을 위한 연해주, 중국 거주 동포의 단결을 촉구하고 있다.註 327327 국편,『일제침략하한국삼십육년사』Ⅴ.5, pp.7~11.닫기
6. 1920년 3월 16일 북경 데일리 뉴스에 실린 조선애국부인회 상해 대표자가 세계각국부인회에 발송한 「조선인(朝鮮人)의 참혹상(慘酷相)」을 보면,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등에 대신하는 정의와 인도의 시대에 조선민족은 ‘민족자결(民族自決)의 법칙(法則)’에 따라 독립(獨立)을 선언(宣言)하여’ 공화정부(共和政府)를 조직(組織)하고 평화회의(平和會議)에 대표자(代表者)를 파견(派遣)하였다고 하였다.註 328328 池中世 편,『三·一運動때 外國新聞에 나타난 朝鮮』(新光出版社, 1948), p.94.닫기
7. 기타 「성토일인시역문(聲討日人弑逆文)」에서도 “금자구주지전쟁고종(今者歐洲之戰爭吿終), 만국지화평방개민족자기자결(萬國之和平方開民族自其自決), 오족역발발욕등피어차시(吾族亦勃勃欲動彼於此時)”라 하여,註 329329 강덕상,『현대사자료』Ⅴ.25, p.76.닫기 민족자결주의의 전개에 따라 민족의 독립운동도 민족자결을 향해 분연히 일어났다는 것이다. 또 「한국아동읍혈진정서(韓國兒童泣血陳情書)」에서도 민족자결주의에 따른 국권의 회복을 호소하고 있다.註 330330 국편,『한국독립운동사자료』4, p.250.닫기
이상에서 중국방면의 독립운동의 발전에도 역시 민족자결주의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지산(志山) 정원택(鄭元澤)은 1918년 12월 20일 신규식으로부터 “윌슨이 민족자결을 제창하여, 파리에서 평화회를 개최하니 약소민족의 궐기할 시기”라는 편지를 받았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정원택은 민족자결주의가 고창되고 있는 이때 ‘일의 성패는 불구하고 한번 궐기하여 크게 외칠 기회’라고 하여, 민족자결주의를 독립운동의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하였다.註 331331 鄭元澤,「志山外游日誌」, 독립운동사편찬회,『독립운동사 자료집』8, pp.427~429 참조.닫기 또 임정의정원 의장 손정도(孫貞道)는 1920년 2월 7일부터 열린 북경 선교사 대회에서 3·1운동이 미국의 선동 혹은 윌슨세력에 의뢰했다는 일본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한민족은 “이번에 상재(上帝)는 의뢰하였을지언정 인류의 양심을 의뢰하였을지언정 어느 1개국이나 1개인을 의뢰한 사실도 절무(絕無)하거니와 그러한 우상(愚想)도 없나니”라고 하였다. 이는 곧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가 윌슨 개인과 미국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세계이념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인류의 양심에 의뢰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은 우리의 일이라……다만 정당한 동정과 원조를 청함이 인류 공존공영의 의(誼)가 아닌가”고 하였다.註 332332 국편,『한국독립운동사자료』3, p.24.닫기 이는 기본적으로 독립운동은 민족 스스로의 역량에 의하되, 그와 관련된 세계의 동정과 원조는 공존공영을 위한 우의라고 하였다. 따라서 민족자결주의의 수용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은 민족자결주의에 기초한 만세시위운동과 세계 양심을 향한 호소,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외교적 활동 그리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한 무력행사 등으로 모색되었다. 나아가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이 실현되지 않을 때는 적극적인 무력항쟁을 결의하였다.註 333333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1, No.175 ; Ⅴ.2, No.24 ; Ⅴ.3, No.343, 475,476 참조.닫기 따라서 일제의 무력적 압제 아래에 있는 국내보다 무력투쟁의 여건도 활용할 수 있는 해외의 독립운동은, 당시 세계를 압도하는 민족자결주의란 보편타당한 이념을 독립운동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민족운동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파리강화회의가 종결된 이후에는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역시 중요한 외교활동이 국제연맹과 국제회의를 두고 진행되었고,註 334334 국회도서관 편, 앞 책, No.358 ;Ⅴ.2, No.917,924,1095 참조.닫기 무력투쟁 또한 더욱 본격 적으로 조직화되어 갔다.
: 본장에서는 33인이 체포된 이후 운동이 발전·확산되는 대중화단계에서 주된 역할을 하는 지식인·청년학생과 중소자본가·자영업자의 활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참여자의 직업 중 ‘농업’이라고만 되어 있는 사람 중에는 중소지주·부농·중농를 포함’ 소작 빈농도 포함되었겠지만 이러한 농업자도 중소시민의 활등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또한 ‘무직자’도 상당한 지식인층으로 보아야겠다.
: 국편,『한국독립운동사 자료』4, pp.323~32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Ⅴ.5, pp.133~144 참조. 반면에 유생 李成修, 崔銓九는 ‘민족자결’이란 취지서가 황제를 폐하는 것이라 하여 이에 반대하기도 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14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6, pp.1047~1061 참조. 대동단은 같은 해 11월 28일 의친왕 이하 33인의 명의로 선언서를 발표하였다.「선언서」에는 “世界의 改造·民族自決論은 天下에 드높아져 我國의 獨立, 我民族의 自由之聲은 宇內에 가득찼다……더욱 正義 人道로서 勇往 邁進함”이라 하였고,「독립운동가」에서도 ‘正義人道 밝은 빛 그 아래에’라고 하여 민족자결주의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2, No.1072, pp.558~56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pp.877~878. 또 당시 독립운동가 중에도 “同胞야 이제야 나오너라 勇猛하게 赤手空券이라도 두려워마라 正義人道의 光明이 비치는 곳에 怨讐의 千軍萬馬 能히 이긴다”고 하여, 정의인도를 담고 있다(윤병석, 앞 책, p.204 참조).
: 이와 같이 주장하고 있는 예를 몇가지 더 들어 보면,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같은 책에서, 전도사 朴鐘恩(p.775). 서당선생 崔永孝(p.801). 학교장洪基璜(p.807). 교사 李謙魯(p.808). 목사 李夏榮(p.809). 교사 李永煥(p.810). 서기 朴根昌(p.810). 의생 李根軾(p.812). 교장 曹晚植(p.861). 집사 金華湜(p.862) 등을 들 수 있다.
: 이덕주,「3·1운동의 이념과 운동노선에 관한 연구 : 33종의 독립선언서를 중심으로」,『기독교사상』351(1988), pp.112~113 참조. 그리고 가평 지방과 같이 시위주도자들이 선언서의 난해함에 공감하여, 주민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끌어내기 위한 방안으로 통문을 작성했음은 뒤에서 살펴보겠다.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925. 선언서 취지에 대한 설명과 연설에 찬성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난 사례는 이외에도 강원도 화천면(p.935). 통천군(p.971), 평안도 강서군(p.826). 안주군(p.829, p.832). 평원군(p.831) 등에서 볼 수 있다.
: 33인의 선언서의 영향은 평안도의 金致善(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823) 金斗源(p.823) 이외에 ‘손병희 등의 취지’에 찬동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한 예는 많다. 그 몇가지만 보아도 경기도 李享益(p.221). 강원도 金福基(p.960) 崔祥麟(p.970) 등이며, 특히 천도교도들은 대개 ‘손병희 등의 독립운동은 멀지 않아서 성공할 것’이라고 하여 그 영향이 보다 컸던 것으로 보인다.
: 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Ⅴ.2, No.1094,「秘密結社大韓國民會 및 ;大韓獨立靑年團檢擧에 關한 件」, pp594~599 참조. 大韓民國會趣旨에는 “吾國을 우리스스로 등에 지고 國任의 大小官職을 國民 스스로 選擇하여 委任하고 國家諸事를 官民共和下에 相議”하자고 되어 있다.
: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한 연구로는 송우혜,「「대한독립선언서」(세칭「무오독 립선언서」)의 실체 : 발표시기의 규명과 내용분석」,『역사비평』(1988, 창간호) ; 김동환,「무오독립선언의 역사적 의의」,『국학연구』2집(1988) ; 조항래,「무오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경위와 그 의의에 관한 연구」, 무오대한독립선언서 선포 제72주년 기념식 및 학술심포지움『발표문』(1991) 참조.
: 한말 산업과 교육활동을 추진해온 중심적인 비밀결사인 新民會는 이 시기 교전단체로서 활동하기 위해 新民團으로 명칭을 바꾸고 무력행사와 함께 파리대표에 대한 후원활동을 병행했다(강덕상,『현대사자료』Ⅴ.26, pp.208~209). 그리고 鄭安立·吕準 등의 東三省韓族生計會는 중국정부를 경유하여 남만주한인의 이름으로 파리에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운동하였다(국회도서관 편, 앞 책, No.1416, 1444 참조).
: 임시위원회는 만국평화회장 앞 控吿詞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즉, “我韓族이 此自決主義에 據하여 獨立을 宣布한 것은 即 國際聯盟의 許한 바로서……世界의 自 由風潮 平和主義는 人心에 侵灌하여 活活潑潑하다 時에 因하고 機에 乘하여 彼의 羈禅을 脫할 것을 생각지 않으랴……今回 吾族이 獨立을 宣하자……唱한 바는 오직 獨立萬歲이며 呼한 것은 오직 民族自決이었다”고 하는 것이다(국편,『한국독립운동사』2, pp.993~995).
3·1운동 뒤 국내에서 전개된 임시정부 수립운동은 향후 민족운동을 이끌어 갈 영도기관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민족 구성원의 합의라는 절차가 중시되었다. 이런 점에서 국민대회는 합의의 절차로 간주되었다. 즉 국민대회가 갖추어야 할 요건은 국내를 기초로 13도 ‘국민대표’로 조직되어야 하며, 임시정부의 정치형태는 민주공화정이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註 188188≪朝鮮獨立新聞≫제2호(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資料5:3·1運動編, 正音文化社, 1968), 2쪽. 李賢周,<3·1운동 직후 ‘國民大會’와 임시정부 수립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6, 한울, 1997), 114쪽.닫기
국민대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은 3월초부터 李奎甲·洪冕禧(洪震)·韓南洙·金思國 등에 의해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여기에는 申泰鍊(申肅)·安商悳 등 천도교 측의 인물들도 개입하고 있었다.註 189189李奎甲,<漢城臨時政府 樹立의 顚末>(≪新東亞≫1969년 4월호, 동아일보사), 17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한남수·김사국에 대한 신문조서>(≪독립운동사자료집≫5:3·1운동재판기록, 1975), 78쪽. 申肅,≪나의 一生≫(日新社, 1963), 50쪽.닫기
이들은 ‘비밀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3월 17일에는 현직검사 韓聖五의 집에서 준비위원 회의를 개최하여 “13도 대표자회의를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이를 국민에게 공포할 것”을 결의했다. 회합에는 위의 4명 외에도 이교헌·윤이병·윤용주·최전구·이용규·김규·이민태·閔橿 등 준비위원 거의 전원이 참석해<국민대회 취지서>와<임시정부 약법>등을 작성하고 임시정부 각원, 평정관,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할 국민대표 명단을 확정했다.註 190190李奎甲, 위의 글, 176쪽. <국민대회취지서>의 내용은≪이화장소장 우남 이승만문서≫4(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1998), 26∼27쪽.닫기
그러나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린 13도 대표자회의는 성원 미달로 국민대회를 준비하는 회합에 머물렀다. 여기서 참석자들은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假政府를 만들어 파리강화회의 및 각국에 조선독립의 승인을 요구할 것”을 결정했다.註 191191<한남수 및 안상덕 신문조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138∼139쪽.닫기
국민대회의 실행은 김사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한남수와 홍면희·이규갑 등이 해외와의 연락을 위해 상해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김사국은 이미 3월 중순께 보성전문학교 졸업생인 朱翼의 소개로 明治大에 재학중인 金裕寅을 만나면서 張彩極·金鴻植·全玉玦·李鐵·崔上德 등을 끌어들였다.註 192192<김사국 예심조서>(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5, 1975), 140쪽.닫기 김사국·김유인·玄錫七·민강 등 국민대회 지도부는 4월 23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제반 준비를 진행했다. 현석칠과 민강은<국민대회 취지서>·<결의문>·<약법>·<선포문>등을 인쇄하기 위해 서소문동 李敏洪 집 홍제당에서 목판을 새겨 6천장을 인쇄했다.
이들의 계획은 4월 23일 정오에 서린동 춘추관에서 국내 13도 대표자가 모여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노동자를 동원, 종로 보신각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 문서를 배포한다는 것이었다.
당일 종로 일대에서는 이들 주도로 ‘國民大會’와 ‘共和萬歲’의 깃발 아래 만세시위가 벌어졌고 한성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다.註 193193고정휴는 13도 대표자회회의와 국민대회 개최사실을 부인하고 있다(高珽烋,<세칭 한성정부의 조직주체와 선포경위에 대한 검토>,≪한국사연구≫97, 1997;<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과정에 대한 검토>,≪한국근현대사연구≫12, 2000 참조).닫기
4월 23일 낮 12시 10분 종로 보신각 부근에서 4∼5명의 학생 같은 자가 3本의 小旗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질주하여 종로서 방면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곧 추적하였는데 소기를 종로통에 버리고 관철동 소로로 도망하여 드디어 소재가 불명되었는데 24일 이 5명 중 2명은 체포했다. 소기는 목면제이며 2本에는 國民大會라고 쓰고 1本에는 共和萬歲라고 묵서한 것이다. 4월 23일 경성에서<임시정부선포문>·<국민대회취지서>·<선포문>이라는 불온인쇄물을 발견하였다. 전항 1부의 행동은 이 선포에 관계가 있는 것으로 관찰되어 목하 신문중이나 … (≪韓國民族運動史料≫三一運動篇 其三, 국회도서관, 1979, 323쪽).
현장에서 주동자가 체포된 데 이어 5월 초에는 지도부를 포함하여 십수 명이 검속되었고, 8월 30일 예심 개정 전까지 모두 28명이 검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검거된 사람은 270여 명에 달했다.註 194194≪每日申報≫, 1920년 2월 2일. ≪獨立新聞≫, 1920년 2월 12일. ≪新韓民報≫, 1920년 4월 2일.닫기
주목되는 것은 검거가 계속되는 와중에서도 임시정부 수립을 알리는 만세시위와 전단의 살포가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4월 23일의 국민대회가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했다고 판단한 김유인·장채극 등은 풍선을 이용한 대규모 전단 살포를 계획, 준비하던 중 장채극 등이 체포되었고 5월 7일 서울 일원에서는 국민대회 당일보다 확대된 규모의 집회가 다시 시도되었다.註 195195<京城覆審法院 公判始末書, 장채극 신문>(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資料≫5), 61쪽. <韓人이 端午節에 臨時政府組織布告文을 宣布코자 하는데 關한 電報>, 特第131號, 1919. 5. 9(국회도서관,≪韓國民族運動史料≫三一運動篇 其一, 1977), 177∼178쪽.닫기
한성정부의 조직 소식은 국민대회 이전에 중국 신문에 보도되었다.≪天津大公報≫(4월 11일자)와≪上海時報≫(4월 16일자)는 한성정부의 조직과 각료 명단을 보도했다.註 196196任椿洙,<1920-30년대 中國 新聞에 실린 韓國 關係記事 硏究>(≪國史館論叢≫90, 國史編纂委員會, 2000), 245쪽.닫기 뿐만 아니라 한성정부의 성립은 국민대회 직후 尹致昊 등 기독교 세력과 국내 민족운동세력에게 알려지고 서울발 연합통신의 電文에 의해 미국 등 해외 한인사회에까지 전파되었다.註 197197≪尹致昊日記≫7, 1919년 4월 26일. ≪新韓民報≫, 1919년 6월 12일.닫기
그런데 국민대회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민족대표 33인’이 상해에 파견한 대표와의 연락 속에서 태동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김사국의 공판기록에 따르면 이규갑은 상해에 파견된 현순에게서 편지를 받고 3월 중순 경 이것을 한남수와 자신을 설득하여 국민대회의 준비에 착수했다는 것이다.註 198198<三一獨立示威關聯者公判始末書-5>(國史編纂委員會 編,≪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19:三一運動Ⅸ, 1994), 30쪽.닫기 玄楯의 막후 역할에 대해서는 윤치호도 동일한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다.註 199199≪尹致昊日記≫7, 1919년 4월 26일.닫기
현순이 3·1운동 계획에 처음 참여한 것은 1919년 2월 17·8일 무렵 세브란스병원 구내의 이갑성 방에서 열린 회합에서였다. 이 자리에는 이승훈·함태영·안세환·이갑성·박희도 등이 참여했다. 참석자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천도교와 공동으로 일본정부 및 조선총독부에 건의서를 보낼 것, 상해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강에 독립을 청원하는 문서를 발송할 것 등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상해 파견대표로 현순이 선임되었다.註 200200<朴熙道先生取調書>(李炳憲 편,≪三一運動秘史≫), 434∼435쪽.닫기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즉시 한국을 빠져나가 중국 奉天으로 가서 그곳에서 ‘한 독립운동가’를 만나 동행하는 것이었다. 현순은 봉천에서 崔昌植을 만나고 그와 동행하여 3월 1일 상해에 도착했다. 당일 이들은 미국인 선교사 피치(George A. Fitch)의 소개로 선우혁을 만나고 이튿날에는 申圭植·李光洙·金澈·신석우 등 신한청년당계 인사들을 만나 자신들이 “민족독립당(‘National Independence Party’)을 대표하여 연락·선전과 외교를 위해” 상해에 왔음을 밝혔다. 최창식은<독립선언서>를 소지했고 3·1운동 발발 소식이 연합통신을 통해 3월 4일자 중국신문에 보도되었다.註 201201Soon Hyun(현순), MY AUTOBIOGRAPHY(나의 자서전), p.79.닫기
이들은 상해 프랑스 조계지 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했다. 현순은 총무로 뽑혀 상해주재 각국 공관에<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국내의 독립운동 상황을 현지 언론에 제공하면서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김규식 및 미국의 이승만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3월 초·중순 경 현순은 국내의 이규갑에게 편지를 보내 ‘모종의 계획’을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특별히 이규갑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분명치 않으나, 1919년 1월 이규갑이 전도사로 시무하던 의주장로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다는 기록이 있어 참고된다.註 202202Soon Hyun, ibid., p.77.닫기 독립임시사무소의 이광수도 현순과는 별도로 3·1운동 지도자들이 남겨놓은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이봉수를 서울에 파견했다.註 203203이광수,<나의 고백>(≪이광수전집≫7, 삼중당, 1970), 255∼257쪽.닫기
3월 27일 밤 상해 프랑스 조계의 한 예배당에서 상해의 독립운동자들이 모인 가운데 ‘최고기관’을 조직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다수의 참석자들이 최고기관의 수립을 서두를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현순은 “국내로부터 지시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이에 반대했다.
이광수도 “독립선언을 하였으니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의사도 듣지 않고 우리가 여기에서 정부를 조직한다면 미국동포들도, 하와이동포들도, 노령에서도, 서북간도에서도 저마다 정부를 조직하게 될지도 모르니 이리되면 우리 독립운동이 분열될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서울에 보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註 204204이광수, 위의 글, 254쪽.닫기 현순의 주장에 동조했다.
이규갑은 현순의 편지를 받고 바로 동지 규합에 나섰다. 먼저 정부수립운동을 지휘할 ‘중앙대표’로 이규갑·신태련(신숙)·안상덕·권혁채·홍면희 등 5인이 선정되었다.註 205205李炳憲, 앞의 책, 854쪽.닫기 이들은 실행을 담당할 조직으로 ‘비밀독립운동본부’를 조직했다.
이 무렵 상해로부터 임시정부 조직문제에 관해 “국내의 동의를 얻기 위해” 洪濤(洪鎭義)와 李鳳洙가 파견되었다.註 206206申肅, 앞의 책, 50쪽.닫기 이에 5인의 중앙대표는 신숙의 중재로 통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통합이 결렬되자 5인 중앙대표는 당시 조직중이던 대동단에 주목했다. 대동단은 3·1운동 중 조직되어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망명시켜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으려던 비밀결사였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사상과 노선의 차이로 국민대회와 조직적으로 결합하지 않고, 일부가 개인으로 참여하는 데 그쳤다.
남은 문제는 정부형태와 각료의 인선이었다. 국민대회 지도부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3월 16, 7일 경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합에서 논란이 된 것은 정부형태였다. 기독교계 인사들은 공화정체를 주장했고 유림출신 인사들은 대한제국의 회복을 역설했다.註 207207그러나 이들도 공화정체를 대세로 받아들였다(≪省齋遺稿≫, 省齋尹履炳先生遺蹟刊行協會, 1959, 14∼16쪽).닫기 결국 정부수반과 각료 명칭 등 외형상으로는 후자로 했으나, 실제로는 약법을 통해 공화정체의 틀을 갖추었다.註 208208<약법>제1조 國體는 民主制를 採用함, 제2조 政體는 代議制를 채용함, 제3조 國是는 國民의 自由와 權利를 尊重하고 世界平和의 韋運을 增進케 함, 제4조 臨時政府는 左의 權限이 有함 ① 一切 內政 ② 一切 外政, 제5조 朝鮮國民은 左의 義務가 有함 ① 納稅 ② 兵役, 제6조 本 約法은 正式國會를 召集하여 憲法을 頒布하기까지 此를 適用함(≪이화장소장 우남이승만문서≫4, 1998, 29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