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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군(烏川君) 시(諡) 문정(文貞) 정공(鄭公)의 묘지명 병서(幷序) 포은 정몽주 묘지명

아베베1 2011. 9. 11. 17:01

목은문고 제19권
 비명(碑銘)
오천군(烏川君) 시(諡) 문정(文貞) 정공(鄭公)의 묘지명 병서(幷序)


근세에 태평 시대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명릉(明陵 충목왕(忠穆王))의 조정을 일컫곤 한다. 대개 영릉(永陵 충혜왕(忠惠王))은 뭇 소인배를 가까이하다가 악양(岳陽)의 화를 자초하였고, 총릉(聰陵 충정왕(忠定王))은 나라를 향유한 기간이 짧았던 데다가 개가 주인에게 대드는 것과 같은 최원(崔源)의 환란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반해서 오직 명릉의 5년 동안만은 조야(朝野)가 맑고 조용하여 선비는 즐거워하고 백성은 귀의하였으니, 소강(小康)의 시대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낭관(郞官)으로 있다가 전선(銓選)에 참여하고, 그로부터 겨우 4년이 지난 뒤에 추밀(樞密)의 지위에 올랐는가 하면, 공경하는 마음으로 일을 집행하고 몸가짐이 신중하여 일찍부터 한 나라의 칭송을 받은 분이 있으니,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오천(烏川) 정 문정공(鄭文貞公)이 당대의 인물 가운데에서도 첫손에 꼽힌다고 할 것이다.
현릉(玄陵) 초기에 공이 관례에 따라 재상의 직책을 그만둔 뒤로 한가롭게 보낸 세월이 13년이나 되었는데, 그때는 또 날마다 산수(山水)를 벗 삼고서 유유자적하였을 뿐 외물(外物)을 그리워하는 일이 없이 마음이 편안하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현릉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공을 가상하게 여겨 일성(日城)에 봉하고 나서, 이윽고 밀직상의 재상(密直商議宰相)에 임명하고 합포(合浦)와 동북면(東北面)에 출진(出鎭)하게 하자, 들어오면 재상이요 나가면 장수로 활약하며 인망(人望)이 더욱 중해졌다.
그 뒤에 금상(今上 우왕(禑王))이 즉위해서는 바야흐로 옛 조정의 신하를 중용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공이 그만 병이 들고 말았다. 아, 공이 처음 병들었을 적에 내가 병문안을 갔을 때에는 그다지 위독하지 않았었는데, 몇 개월이 지나서 다시 찾아갔을 때에는 이미 손님을 접견하지 못하였다. 그 뒤에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내가 상당(上黨) 한맹운(韓孟雲 한수(韓脩))과 함께 가서 치제(致祭)하였는데, 장례식을 행할 적에는 나의 병이 발작하는 바람에 상엿줄을 잡지도 못하였으니, 내가 지금까지도 그 일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는 터이다. 그런데 지금 공의 아들과 사위가 나를 찾아와서 묘지명을 청하였으니, 아, 내가 어찌 차마 이를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공의 휘(諱)는 사도(思道)요, 자(字)도 사도이다. 어릴 때의 이름은 양필(良弼)이었는데,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 그 글자를 피해야 할 일이 있게 되자 사도(思度)라는 이름으로 고쳤다가, 현릉을 섬기면서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 이름 속에는 대개 집에 물러나 있든 조정에 나아가든 간에 도 아닌 것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하겠다.
정씨(鄭氏)는 연일(延日)의 망족(望族)이다. 증조 휘(諱) 균지(均之)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증직받았고, 조부 휘 윤(潤)은 봉선대부(奉善大夫) 헌부의랑 지제교(獻部議郞知製敎)이고, 부친 휘 유(侑)는 중현대부(中顯大夫) 종부 영(宗簿令)이다. 경원군부인(慶原郡夫人)에 봉해진 모친 채씨(蔡氏)는 봉상대부(奉常大夫) 헌부 의랑(獻部議郞) 유길(惟吉)의 딸인데, 연우(延祐) 무오년(1318, 충숙왕5) 11월 을묘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는데, 조금 자라나서는 시를 지을 때마다 호쾌한 기상이 우러나왔으므로 같은 또래 사이에서 이름이 있었다. 나이 19세 때에 순천군(順天君) 채공 홍철(蔡公洪哲)과 연평군(延平君) 안공 규(安公規)가 함께 주관한 시험에서 공이 한 번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니, 이때가 후지원(後至元) 병자년(1336, 충숙왕 복위 5)이었다. 지정(至正) 신사년(1341, 충혜왕 복위 2) 봄에 권지 전교교감(權知典校校勘)이 되었다가 얼마 뒤에 주부(注簿)로 옮겼으며, 그해 여름에 낭관(郞官)이 되었다가 겨울에 이 자리를 떠나 당후관(堂後官)이 되었다. 그리고 공로를 인정받아 승봉랑(承奉郞) 감찰 규정(監察糾正)을 제수받았으니, 벼슬길에 들어선 지 10개월 만에 참관(參官 6품의 관원)에 오른 것도 드문 일이었다.
갑신년(1344)에 명릉(明陵 충목왕)이 즉위했을 때 규정(糾正)에서 순서를 뛰어넘어 군부 좌랑(軍簿佐郞)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봄에는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여름에 전리(典理)로 옮겼다가 18일 만에 자리를 또 옮겨 봉선대부(奉善大夫) 성균 사예(成均司藝)가 되었다. 그리고 11월에 다시 발탁되어 밀직사좌부대언 군부총랑 예문관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密直司左副代言軍簿摠郞藝文館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編修官)이 되었으며, 품계도 이에 따라 봉상(奉常)으로 올랐다. 공이 이처럼 좌랑으로 있다가 겨우 한 해를 지나고 나서 승선(承宣)의 명을 받게 되었으니, 이 또한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듬해에 승진하여 좌부대언 전리총랑(左副代言典理摠郞)이 되었다가 또 승진하여 우대언 지군부(右代言知軍簿)가 되었다. 6월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승진하였는데 품계는 중정대부(中正大夫)였다. 그해 겨울에 정순대부(正順大夫)의 품계에 올라 우대언 동지춘추관사(右代言同知春秋館事)가 되었다. 또 이듬해에는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여 지금의 지밀직(知密直)인 박형(朴形) 등 92인을 뽑았는데, 당시에 인재를 제대로 뽑았다고 일컬어졌다.
그해 여름에 지신사 지전리(知申事知典理)로 승진하고, 가을에 또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리 판서(典理判書)에 임명되었는데, 관직(館職)은 예전과 같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명릉(明陵)이 장차 공을 크게 쓸 목적으로 밀직사(密直司)에서 직제학(直提學)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대언(代言)에 처음 임명된 때로부터 도합 22개월 만에 양부(兩府)에 들어오게 된 것으로서, 이때 공의 나이가 겨우 30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론(士論)은 너무 빨리 승진했다고 여기지 않았으니, 이를 통해서도 공의 영예(榮譽)가 당시에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하겠다.
병신년(1356, 공민왕5)에 모친상을 당하자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복제(服制)를 마쳤다. 계묘년(1363, 공민왕12)에 현릉(玄陵)이 이르기를 “정모(鄭某)는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또 이와 같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하고는, 공을 일성군(日城君)에 봉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 상하(上下)에 기도를 드릴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그 일을 맡기곤 하였으니, 이는 공의 바르고 곧은 점을 취한 것이었다. 그해 가을에 밀직부사 상의 대보문 동지춘추관사(密直副使商議大寶文同知春秋館事)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봄에는 한양 부윤(漢陽府尹)이 되었다.
그해 가을에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 부름을 받고 돌아와서, 얼마 있다가 군(君)으로 봉해진 뒤에 합포(合浦)의 진(鎭)으로 나갔는데, 군대의 기무(機務)와 백성의 일이 모두 온당하게 되도록 조처하였으므로 한 지방이 편안하게 여겼다. 이때 마침 취성(鷲城 신돈(辛旽))이 지금 판삼사(判三司)인 최영(崔瑩)을 사죄(死罪)에 몰아넣을 목적으로, 그의 패거리인 이득림(李得霖)을 보내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죽기를 각오하고 불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자, 득림이 취성에게 호소하니, 취성이 상에게 아뢰어 진(鎭)의 직책을 파면토록 하였다.
정미년(1367, 공민왕16)에 첨서밀직(簽書密直)이 되고, 신해년(1371, 공민왕20)에 지사(知司)로 승진하였으며, 이듬해에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또 이듬해에 밀직(密直)으로 안변부(安邊府)의 일을 행하면서 동북면(東北面)을 진무(鎭撫)하였는데, 그 이름을 상원수(上元帥) 혹은 도순문사(都巡問使)라고 하였다. 당시에 군대와 백성에 관련된 일들이 한 몸에 모여들었으나, 모두 도리에 맞게 조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다. 계축년(1373, 공민왕22)에 공신의 호 가운데 단성(端誠)을 고쳐 충근(忠勤)으로 하였다. 그해 겨울에 본관(本官)으로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다.
금상(今上 우왕)이 즉위하자 광정대부(匡靖大夫)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승진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정당문학 지서연사(政堂文學知書筵事)에 임명되었으며, 관직(館職)은 모두 예전과 같았다. 이듬해에 평리 상의(評理商議)로 바뀌었다가 얼마 뒤에 일성군(日城君)에 봉해졌으며, 다시 얼마 뒤에 오천군(烏川君)으로 고쳐졌다.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이 되고 공신의 호를 더 하사받아 충근절의익찬공신(忠勤節義翊贊功臣)이 되었다.
무오년(1378, 우왕4)은 공이 회갑을 맞아 다시 갑자(甲子)가 시작되는 해였다. 그동안 명예와 절조 면에서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었는데 그만 병에 걸리고 말았으니, 이는 운명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기미년(1379, 우왕5) 9월 15일에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2세였다. 관청에서 장례에 관한 일을 보살펴 주는 가운데 11월 경신일에 율촌(栗村)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아, 군자(君子)로서 제대로 수명을 누리지 못한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수명을 내려 주면서 고작 이순(耳順)만을 넘기게 하다니, 하늘이 사람에게 인색한 것이 심하다고 하겠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다. 부인 배씨(裵氏)는 소윤(少尹) 휘(諱) 현보(玄甫)의 딸인데 2녀를 낳았다. 장녀는 전법 총랑(典法摠郞) 이용(李容)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사헌 지평(司憲持平) 안경공(安景恭)에게 출가하였다. 부인 정씨(鄭氏)는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휘 포(誧)의 딸로서, 1남 홍(洪)을 낳았는데 지금 전교 부령(典校副令)이다. 손자와 손녀 약간 명이 있다. 총랑은 자식이 없고, 지평은 1남 금경(金經)을 낳았다. 부령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어질도다 우리 문정공 / 文貞之賢
문과 무를 겸전하시고 / 文武具全
양부에서 몸 바치면서 / 致身兩府
삼십여 년을 봉직하였어라 / 餘三十年
네 조정을 두루 섬기는 동안 / 歷事四朝
그 의표 실로 맑기만 하였나니 / 展也淸標
검약하면서도 고루하지 않고 / 儉而非固
호화로워도 거만하지 않았어라 / 豪而非驕

아름답도다 우리 문정공 / 美哉文貞
그 이름 제대로 얻었다 할 것이니 / 宜得其名
앞으로 천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 千載之下
나의 이 묘지명이 징험되리라 / 尙徵斯銘


 

[주D-001]악양(岳陽)의 화 : 충혜왕이 황음무도한 생활을 하다가 복위(復位) 4년(1343) 11월에 순제(順帝)의 명으로 원나라에 잡혀 들어간 뒤에, 그 이듬해 정월에 다시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 가던 도중에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은 사건을 말하는데, 이때 왕을 시종하는 신하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주D-002]최원(崔源)의 환란 : 최원은 역신(逆臣) 최유(崔濡)의 동생이다. 충정왕 2년(1350) 6월에 최유가 왕에게 불만을 품고 대드는 것을 목격하고는 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이 그를 꾸짖자 왕의 면전에서 성을 내며 때린 사건이 있었고, 최원이 왕을 원망하며 불손한 말을 내뱉자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국문(鞫問)하게 하였으나 대신(大臣)들에게 욕을 하면서 형제가 함께 원나라로 도망친 사건이 있었다.
[주D-003]소강(小康)의 시대 : 유가(儒家)에서 이상(理想)으로 삼는 대동 사회(大同社會)의 전 단계에 해당하는 시대로, 소란하던 세상이 어느 정도 안정된 시대를 말하는데,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주D-004]검약하면서도 …… 않았어라 : 《논어》 술이(述而)에 “호화로우면 거만해지기 쉽고, 검약하면 고루하게 되기 쉬운 경향이 있다.[奢則不孫 儉則固]”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圃隱先生集本傳
圃隱先生本傳 a_005_625b


005_625c鄭夢周字達可。知奏事襲明之後。母李氏有娠。夢抱蘭盆忽墮。驚寤而生。因名夢蘭。生而秀異。肩上有黑子七。列如北斗。年至九歲。母晝夢黑龍升園中梨樹。驚覺出視。乃夢蘭也。因改夢龍。旣冠改今名。恭愍九年。應擧連魁三塲。遂擢第一人。十一年。選補藝文檢閱。十三年。從我太祖擊三善三介于和州。累遷典農寺丞。時喪制紊弛。士大夫皆百日卽吉。夢周於父母喪。獨廬墓。哀禮俱盡。命旌表其閭。十六年。以禮曹正郞。兼成均博士。時經書至東方者唯朱子集註耳。夢周講說發越。超出人意。聞者頗疑。及得胡炳005_625d文四書通。無不脗合。諸儒尤加嘆服。李穡亟稱之曰。夢周論理。橫說竪說。無非當理。推爲東方理學之祖。十七年。轉成均司藝。二十年。改太常少卿。俄遷成均司成。二十一年。以書狀從洪師範如京師。賀平蜀。還至海中許山遭颶風。船敗漂抵岩島。師範溺死。其得免者纔什二。夢周濱死乃生。割韂而食者十三日。事聞。帝具舟楫取還。厚加恩恤遣還。辛禑元年。拜右司議大夫。移成均大司成。初。皇明肇興。夢周力請于朝。首先歸附。至是恭愍被弑。金義殺使。國人恟恟。不敢通使朝廷。夢周又陳大義。以謂邇來變故。當005_626a早詳奏。使上國釋然無惑。豈可先自疑貳。構禍生靈。於是始遣使告哀。且辨釋金義事。時北元遣使賜詔。權臣李仁任,池奫欲復事元。議迎其使。夢周與文臣十數人上書云云。 書在文集。池李深忌之。貶流彦陽二年許。任便居住。時倭冦充斥。濱海州郡。蕭然一空。國家患之。嘗遣羅興儒。使覇家臺說和親。其主將拘囚興儒。幾餓死僅得生還。三年。權臣嗛前事。擧夢周報聘于覇家臺請禁賊。人皆危之。夢周略無難色。及至。極陳古今交隣利害。主將敬服。館待甚厚。倭僧有求詩者。援筆立就。緇徒坌集。日擔肩輿請觀奇勝。及005_626b歸。與九州節度使所遣周孟仁偕來。且刷還俘尹明,安遇世等數百人。且禁三島侵掠。倭人久稱慕不已。後聞夢周卒。莫不嗟惋。至有齋僧薦福者。夢周憫倭賊奴我良家子弟。乃謀贖歸。力勸諸相各出私貲若干。且爲書授尹明以遣。賊魁見書辭懇惻。還俘百餘人。自是每明之往。必得俘歸。四年。拜右散騎常侍。歷典工,禮儀,典法,版圖判書。六年。從我太祖擊倭雲峯。還拜密直提學。明年。簽書司事。十年。拜政堂文學。本國與朝廷多釁。帝怒將加兵于我。增定歲貢。乃以五歲貢不如約。杖流使005_626c臣洪尙載,金寶生,李子庸等于遠地。至是當遣使賀聖節。人皆憚行規避。最後乃擬遣密直副使陳平仲。平仲以臧獲數十口賂林堅味。遂辭疾。堅味卽擧夢周。禑召面諭曰。邇來我國見責朝廷。皆大臣過也。卿博通古今。且悉予意。今平仲疾不能行。乃代以卿。卿意何如。對曰。君父之命。水火尙不避。况朝天乎。然我國去南京凡八千里。除候風渤海。實九十日程。今去聖節纔六旬。脫候風旬浹。則餘日僅五十。此臣恨也。禑曰。何日就道。對曰。安敢留宿。遂行。晨夜倍道。及節日進表。帝覽表畫日曰。爾國陪臣。必相托故005_626d不肯來。日迫乃遣爾也。爾得非往者以賀平蜀來者乎。夢周悉陳其時船敗狀。帝曰。然則應解華語。特賜慰撫。勑禮部優禮以送。遂放還尙載等。十一年。同知貢擧取士。故事每試一塲。輒考較出榜。初塲不合格者。不得入中塲。終塲亦如之。懿妃弟盧龜山童騃無學。中塲不入格。禑大怒欲罷試。李成林,廉興邦等詣龜山父英壽第。請使龜山赴終塲。英壽辭以不可獨入。於是幷試不合格者十數人。竟取龜山。德昌府行首文允慶。本䆠官李匡從者。竊書其友策。夢周黜之。知貢擧廉國寶乃取之。崔瑩戱語人曰。前月005_627a監試學士尹就棄寒士取昏童。致天大雹。盡殺我麻。今東堂學士復致何等天變耶。十二年。如京師請冠服。又請蠲免歲貢。夢周奏對詳明。得除五年貢未納者及增定歲貢常數。及還。禑喜甚。賜衣帶鞍馬。拜門下評理。明年。請解職。封永原君。與河崘,廉廷秀,姜淮伯,李崇仁建議革胡服襲華制。十四年。拜三司左使。辛昌元年。改爲藝文館大提學。從我太祖定策立恭讓。拜門下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事,戶曹尙瑞司事,進賢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領書雲觀事。封益陽郡005_627b忠義君。賜純忠論道佐命功臣號。敎曰。云云。 詳載行狀。 王御經筵。夢周進言曰。儒者之道。皆日用平常之事。飮食男女。人所同也。至理存焉。堯舜之道亦不外此。動靜語默之得其正。卽是堯舜之道。初非甚高難行。彼佛氏之敎則不然。辭親戚絶男女。獨坐巖穴。草衣木食。觀空寂滅爲宗。是豈平常之道。時王欲迎僧粲英爲師。故夢周講及此。然王方惑佛不納。彝初獄起。臺諫論其黨甚力。夢周請因封崇四代大赦。臺諫猶論執不已。王下都堂議。夢周以爲罪狀不白。今又經赦。不宜復論。刑曹劾夢周右彝初黨。夢周再上牋005_627c辭。皆不允。召夢周宴慰之。尋拜壁上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事,領景靈殿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經筵事,益陽郡忠義伯。三年。王謂經筵官曰。今人知中國故事。而不知本朝之事可乎。夢周對曰。近代史皆未修。先代實錄亦不詳悉。請置編修官。依通鑑綱目修撰。以備省覽。王納之。卽命李穡,李崇仁等修實錄。不果行。成均博士金貂上書毀佛。上怒欲抵以死罪。兵曹佐郞鄭擢上疏曰。竊聞金貂排斥異端。極言不諱。上以其破毀先王成典。將置極刑。臣竊爲殿下惜之。書曰。監005_627d于先王成憲。其永無愆。所謂先王成典者。不過三綱五常。而佛氏皆背之。非貂毀先王成典。乃殿下自毀之也。願赦貂狂直之罪。代言等畏上怒不敢啓。夢周與同列上疏曰。信者人君之大寶也。國保於民。民保於信。近日殿下下敎求言曰。言之者無罪。於是人皆抗疏極論政事之得失。民生之休戚。眞所謂不諱之朝也。有國子博士生員等亦以排斥異端。上書陳說。言語不謹。觸犯天威。在朝之臣。不勝恐懼。臣等以爲斥詆佛氏。儒者之常事。自古君王置而不論。况以殿下寬大之量。蕞爾狂生。在所優容。乞霈寬恩。一005_628a皆原宥。示信國人。王從之。貂等得免。又疏曰。賞罰。國之大典。賞一人而千萬人勸。罰一人而千萬人懼。非至公至明。不足以得其中而服一國之人心也。自殿下踐祚以來。省憲,法司交章擧劾。以爲某人乃沮立王氏之議。扶立子昌者。某人與於逆賊金宗衍之謀。於行在所爲內應者。某人於諸將承天子之命。以辛禑父子爲非王氏。議復王氏之時謀迎辛禑。永絶王氏者。某人送彝初於上國。請親王動天下兵者。某人陰養先王孽孫。潛謀不軌者。章疏屢上。雖勞聖慮之勤。至今未見明白。必於其間。有罪者曲蒙肆宥。005_628b無辜者未能昭雪。其於公道。似乎兩失。是以。言者紛紛至今不已。臣等以謂宜令省憲,法司。共議商確。將連涉人等獄詞文案。更加詳覆。某人罪在不宥。宜置于法。某人情在可疑。宜從輕典。某人無罪被誣。宜令辨釋。獄章旣上。殿下坐朝門。召宰輔臣僚。親臨審錄。使無寃抑。然後加以罪黜。施以肆宥。則人心服而公道行矣。從之。於是省憲,刑曹論列五罪曰。沮立王氏之議。扶立子昌者。曹敏修,李穡也。與於金宗衍之謀。爲內應者。朴可興,池湧奇,李茂,鄭煕啓,李彬,尹師德,陳乙瑞,朴葳,李沃,李仲華,陳元瑞,金軾,李龜哲005_628c也。但湧奇,葳,茂,煕啓,彬,師德,乙瑞,元瑞,沃,仲華等。皆不問流貶。又無供辭。情在可疑。然湧奇,葳。名在功臣之列。位至將相。宜盡心輔佐。而多聚軍官。使宗衍有所依賴。欲遂其謀。其情難測。軾,龜哲等雖有供辭。辭不分明。情亦可疑。謀迎辛禑。永絶王氏者。邊安烈,李乙珍,李庚道,元庠,李貴生,鄭地,禹玄寶,禹洪壽,王安德,禹仁烈及穡,煕啓也。大逆安烈。雖無供辭。旣已伏誅。然不籍產。擧國缺望。乙珍與安烈同謀。擾亂國家。供辭明白。今據乙珍之辭。則庚道之與謀亦無疑矣。且以安烈腹心。爲其都鎭撫。豈有安烈謀事而005_628d庚道不知者乎。宜與乙珍同處較問。庠,貴生知情不首。且據李琳父子供辭。則洪壽雖涉迎禑。而無供辭。其情可疑。以鄭地供辭觀之。地之無罪被誣明矣。以朴義龍供辭觀之。則穡之謀迎辛禑固可罪也。玄寶,安德,仁烈,煕啓等已皆免職分配于外。皆無供辭。故問其時問事巡軍官。皆云。玄寶等之與謀。金佇已明言矣。然不以其時與佇對辨。又無供辭。情在可疑。而仁烈則以委官坐巡軍不明取佇之供辭。安德則都屯串敗軍後往見禑於驪興累日之程。其間難測。又觀李琳父子供辭。則安烈之欲使仁烈,安德迎005_629a禑明矣。其見於彝初書者。邊安烈,金宗衍已伏誅。李琳,曹敏修病死。禹仁烈,鄭地,李崇仁,權近,李貴生,禹玄寶,權仲和,張夏,李種學,慶補已承服。李穡,陳乙瑞,李仁敏,韓浚,鄭龍,仇天富,李大卿皆無供辭。其不在彝初書中。而見於洪仁桂供辭者。崔公哲已杖死。崔七夕,安柱,公義,郭宣,鄭丹鳳,曹彦,王承貴,張忠立已承服。趙卿病死。陰養先王孽孫者亦池湧奇也。湧奇陰養益富。事狀明白。其罪不可赦也。王御正殿。召夢周及判三司事裵克廉,兼大司憲金湊,門下評理柳曼殊,左常侍許應,右常侍全五倫,諫議朴子文,005_629b全伯英,獻納權軫,正言柳沂,金汝知,掌令崔咸,金畝,持平李元緝,李作,刑曹判書具成祐,揔郞成溥,正郞河係宗,佐郞朴猗等議定五罪。王曰。自寡人卽位以來。臺諫每以五罪交章上疏。然罪狀不白。難可罪之。不唯予之軫念。臺諫因此或落職或左遷。紛紛不已。卽今宜以明辨其有罪者。不可以私赦。被誣者亦不可不赦。卿等毋面從退有後言。乃問立昌迎禑之事欲寬李穡曰。戊辰年諸將回軍。議立王氏。問計於穡。而曹敏修以辛昌外戚。爲時大將。穡實怯懦。故曰。父廢子立。有國之常。乃立昌襲位。罪可恕也。夢周005_629c對曰。然。但穡無節操耳。何有罪乎。湊駁曰。當殿下龍潛之日。僞辛稱玄陵之後。穡知其非王氏。而倡立子昌曰。父廢子立。是成辛氏爲君也。成辛氏爲君。則殿下以辛氏之臣。而簒辛氏之位矣。穡爲世大儒。就斷國論。貪生忘義。罪可恕乎。當時大將如諸軍事可不恃賴。而固畏敏修乎。諸郞舍但唯唯。汝知獨希旨曰。臣亦以謂穡等無罪也。王又欲原禹玄寶,朴可興。湊又曰。殿下似有私意。王勃然變色曰。卿以予私耶。遂釋穡,玄寶等以無供辭。而但有金佇,鄭得厚之言也。王命敏修,安烈005_629d籍其家。湧奇,可興依舊付處。仁烈,安德,葳外方從便。餘皆京外從便。初。安德亦在京外從便中。湊曰。安德藍浦之役。專軍覆沒。其還也。必道驪興而謁辛禑議迎立。謂之罪狀未白可乎。外方從便。其賜亦大矣。王從之。夢周啓王著令曰。今後如有論上項人等罪者。以誣告論。尋賜夢周安社功臣號。四年。夢周取大明律至正條格本朝法令。參酌刪定。撰新律以進。夢周忌我太祖威德日盛。中外歸心。又知趙浚,南誾,鄭道傳等有推戴之謀。嘗欲乘機圖之。及世子奭朝見而還。005_630a太祖出迎黃州。遂畋于海州墜馬。體甚不平。夢周聞之有喜色。遣人嗾臺諫曰。李 太祖舊諱 今墜馬病篤。宜先剪羽翼。然後可圖也。遂劾浚,道傳,誾及素所歸心者五六人將殺之。以及太祖。太祖還至碧瀾渡將宿。太宗馳至告曰。夢周必陷我家。太祖不答。又告不可留宿於此。太祖不許。固請然後力疾。遂以肩輿夜還于邸。夢周憂不濟事。不食已三日。太宗又白曰。勢已急矣。將若何。005_630b太祖曰。死生有命。但當順受而已。太宗與太祖弟和,壻李濟等議於麾下士曰。李氏之忠於王室。國人所知。今爲夢周所陷。加以惡名。後世誰能辨之。乃謀去夢周。太祖兄元桂之壻卞仲良洩其謀於夢周。夢周詣太祖邸欲觀變。太祖待之如初。太宗曰。時不可失。及夢周還。乃遣趙英珪等四五人。要於路擊殺之。年五十六。太宗入告。005_630c太祖震怒。力疾而興。謂太宗曰。汝等擅殺大臣。國人以我爲不知乎。吾家素以忠孝聞。汝等敢爲不孝乃爾。太宗對曰。夢周等將陷我家。豈可坐而待亡。此乃所以爲孝也。宜召麾下士備不虞。太祖不得已使黃希碩白王曰。夢周等黨庇罪人。陰誘臺諫。誣陷忠良。今已伏罪。請召浚,誾等與臺諫辨明。於是鞫臺諫流之。幷流其黨。梟夢周首于市揭榜曰。飾虛事誘臺諫。謀害大臣。擾亂國家。太祖麾下士又上疏籍其家。夢周天分至高。豪邁005_630d絶倫。有忠孝大節。少好學不倦。硏窮性理。深有所得。太祖素器重。每分閫。必引與之偕。屢加薦擢。同升爲相。時國家多故。機務浩繁。夢周處大事决大疑。不動聲色。左酬右答。咸適其宜。時俗喪祭。專尙桑門法。夢周始令士庶放朱子家禮。立家廟奉先祀。又以守令雜用參外吏胥。秩卑人劣。始選用參官有淸望者。嚴其黜陟。又以金穀出納。都評議司錄事白牒施行。事多猥濫。始置經歷都事。籍其出納。又內建五部學堂。外設鄕校以興儒術。其他如立義倉賑窮乏。設水站便漕運。005_631a皆其畫也。所著詩文豪放峻潔。有圃隱集行于世。本朝贈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修文館大提學兼藝文春秋館事,益陽府院君。謚文忠。子宗誠,宗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