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10.25. 소요산산행

2011.10.25. 소요산 산행 (

아베베1 2011. 10. 26. 09:51

 미수 허목선생의 소요산기의 내용이다   

기언 별집 제9권

 기(記)
소요산기(逍遙山記)


소요산(逍遙山)은 양주읍(楊州邑) 북쪽 40리에 있으니, 대탄진(大灘津 지금의 한탄강(漢灘江))에서 20리가 못 되고 왕방산(王方山) 서록(西麓)의 별산(別山)으로 되어 있다. 그 골짜기 입구 안팎의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왕궁의 옛터 두 곳이 있는데 우거진 숲 속에 두어 층의 층계만이 남아 있으니, 이것은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때에 태상왕(太上王)의 행궁(行宮)이다.”
하였다. 서울서 1백 리 인데 풍양궁(豊壤宮)도 또 1백 리이다. 골짜기 입구에는 옛날 우물의 돌난간이 있다. 산중에 들어서면 산이 모두 돌이어서 봉우리와 동굴, 장명등(長明燈)과 다리도 다 돌로 되었으며, 산의 나무는 소나무ㆍ단풍나무ㆍ철쭉나무가 많다. 궁터가 있는 남산(南山)에는 돌이 뾰족하게 솟았으니, 가장 높은 곳에 백운대(白雲臺)가 있고 조금 아래 중백운(中白雲)이 있고 또 조금 아래 동북으로 하백운(下白雲)이 중대(中臺) 위에 있다. 궁터 위에 폭포가 있는데 높이는 8, 9인(仞 1인은 8척)이 되고, 그 밑으로 계곡을 따라 중대로 올라가면 큰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빈터만 남았다. 폭포 옆 높이 10여 인이나 되는 절벽에 비스듬히 걸쳐 있는 나무사다리를 올라가면 원효대(元曉臺)이고 원효대를 지나면 소요사(逍遙寺)가 있다. 소요사 벽기(壁記)에,
“신라의 중 원효가 이 산에 머물러 있었고, 그 뒤 3백 년 갑술년에 고려(高麗)의 중 각규(覺圭)가 태상왕(太上王)의 명을 받들어 정사(精舍)를 지었고, 그 뒤 2백 년 계유년에 이 정사가 불에 탔고 그 이듬해 갑술년에 관동(關東)의 중 각령(覺玲)이 불전(佛殿)과 법당을 중건했다.”
하였는데, 목암(牧庵)의 기(記)에는,
“원효는 신라의 태종(太宗)과 문무(文武) 때의 중이니, 그 연대를 따져 보면 신라의 태종 때부터 우리 강헌대왕(康獻大王) 갑술년까지는 767년이 되고, 또 만력(萬曆) 갑술년까지는 180년이나 되는데, 벽기에 ‘3백 년’이라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였다. 동쪽 모퉁이에서 폭포 구경을 하는데, 그 위에 5, 6장이나 되는 큰 돌이 절벽 위에 서 있다. 암벽 사이의 돌구멍에서는 샘물이 졸졸 흐르는데 이것이 원효정(元曉井)이다. 이규보(李奎報)는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산 따라 위험한 다리 건너 / 循山渡危橋
발을 포개며 좁은 길 걷네 / 疊足行線路
백 길이나 높은 산마루에 / 上有百仞巓
원효가 일찍이 절을 지었네 / 曉聖曾結宇
신령한 자취는 사라지고 / 靈蹤渺何處
초상만이 흰 비단폭에 남았구나 / 遺影留鵝素
차 끓이던 샘에 찬물이 고여 / 茶泉貯寒玉
마셔보니 젖같이 맛있네 / 酌飮味如乳
이곳에 예전에 물이 없었기에 / 此地舊無水
중들이 머물러 살 수 없었는데 / 釋子難棲住
원효가 와서 거처하매 / 曉公一來寄
단물이 돌구멍에서 솟았네 / 甘液湧碞竇

암벽을 오르고 깊고 험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 구봉(九峯)을 바라보니, 산의 돌이 모두 기이하게 생겼다. 중봉(中峯)의 바위굴을 지나 현암(懸庵)의 동남쪽으로 나와서 의상대(義相臺)에 오르니, 여기가 최고의 정상이요, 그 북쪽은 사자암(獅子庵)이다. 골짜기 입구에서 폭포를 지나 층벽을 따라 의상대에 오르기까지의 높이가 9천 장(丈)이다. 10월이어서 산은 깊고 골짜기는 음산한데, 아침 비가 지나간 뒤에 시냇가 돌에 낀 푸른 이끼는 봄철 같고, 단풍잎은 마르지 않았다.
4년 계묘 10월 기해에 공암 미수는 기(記)한다.

4년 계묘 맹동(孟冬) 무술에 목(穆)은 완산(完山) 이진무(李晉茂), 상당(上黨) 한균오(韓均吾), 외생(外甥) 이구(李絿)와 이무경(李茂卿)의 세 아들 원기(遠紀)ㆍ정기(鼎紀)ㆍ현기(玄紀)와 함께 소요사에서 자고, 그 이튿날 같이 의상대 아래서 논 뒤에 제명(題名 명승지(名勝地)에 등람(登覽)한 날짜와 등람자의 이름을 적는 것)하였다.
공암 허목은 쓴다.

원효대 아래 폭포 옆 바위굴에 또 제명하고, 저녁에 무경(茂卿)의 청초별업(靑草別業)에서 잤다. 그 이튿날 대탄진(大灘津)을 건너 10리를 가서 구절탄(九折灘)에 있는 이생(李甥)의 계장(溪莊)에 당도하니, 옛날 화암(花巖 최유원(崔有源))의 별업으로 산수가 가장 아름다웠다.
미수는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