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10.25. 소요산산행

2011.10.25. 소요산산행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 남아있는 소요산)

아베베1 2011. 10. 26. 09:58

記言別集卷之九
 
逍遙山記 a_099_087c


逍遙山。楊州治北四十里。不及大灘津二十里。爲王方西麓別山。谷口內外山下人相傳。王宮遺墟二處。荒草中有石砌數重而已。此永樂間太上行宮云。去京城百里。豐壤宮又百里。谷口有廢井石欄。入山中。山皆石。爲石巒。爲石洞。爲石燈。爲石梁。山木多松多楓多躑躅。宮墟南山。石極高峭。最上有白雲臺。少下有中白雲。又少下東北下白雲。在中臺上。宮墟上有瀑布。高八九仞。其下從陰崖。上中臺。最大刹。今皆墟矣。瀑099_087d布傍當石絶十餘仞。橫木爲梯。上元曉臺。過元曉臺有逍遙寺。逍遙壁記云。新羅僧元曉住此山。後三百年甲戌。麗僧覺圭奉太上旨。築精舍。二百年癸酉。精舍燬。明年甲戌。關東僧覺玲重作佛殿僧寮。牧庵記云。元曉當新羅太宗文武之世。曆年紀自新羅太宗。至我康獻大王甲戌。七百六十七年。又至萬曆甲戌百八十年。記曰。三百年何也。東隅觀瀑布。其上有大石。起立臨壁五六丈。碞壁間石竇。石泉涓涓。元曉井也。李奎報詩曰。循山渡危橋。疊足行線路。上有099_088a百仞巓。曉聖曾結宇。靈蹤渺何處。遺影留鵝素。茶泉貯寒玉。酌飮味如乳。此地舊無水。釋子難棲住。曉公一來寄。甘液湧碞竇。登臨碞壁。循絶壑石上。望九峯皆山石奇處。從中峯石竇。出懸庵東南。登義相臺。最高爲絶頂。其北獅子庵。從谷口過瀑布。緣崖上義相臺九千丈。十月山深谷陰。朝雨後溪石綠苔如春。楓葉不枯。四年癸卯十月己亥。孔巖眉叟。記。四年癸卯孟冬戊戌。穆與完山李晉茂,上黨韓均,吾外甥李絿,李茂卿三子遠紀,鼎紀,玄紀。宿099_088b逍遙寺。明日。同遊義相臺下。仍題名。孔巖許穆。書。
元曉臺下瀑布傍石竇。又題名夕宿茂卿靑草別業。明日。渡大灘津十里。至九折灘。李甥溪莊古花巖舊業。山水最佳。眉叟。識。

 

소요산(逍遙山)은 양주읍(楊州邑) 북쪽 40리에 있으니, 대탄진(大灘津 지금의 한탄강(漢灘江))에서 20리가 못 되고 왕방산(王方山) 서록(西麓)의 별산(別山)으로 되어 있다. 그 골짜기 입구 안팎의 산 밑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왕궁의 옛터 두 곳이 있는데 우거진 숲 속에 두어 층의 층계만이 남아 있으니, 이것은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때에 태상왕(太上王)의 행궁(行宮)이다.”

하였다. 서울서 1백 리 인데 풍양궁(豊壤宮)도 또 1백 리이다. 골짜기 입구에는 옛날 우물의 돌난간이 있다. 산중에 들어서면 산이 모두 돌이어서 봉우리와 동굴, 장명등(長明燈)과 다리도 다 돌로 되었으며, 산의 나무는 소나무ㆍ단풍나무ㆍ철쭉나무가 많다. 궁터가 있는 남산(南山)에는 돌이 뾰족하게 솟았으니, 가장 높은 곳에 백운대(白雲臺)가 있고 조금 아래 중백운(中白雲)이 있고 또 조금 아래 동북으로 하백운(下白雲)이 중대(中臺) 위에 있다. 궁터 위에 폭포가 있는데 높이는 8, 9인(仞 1인은 8척)이 되고, 그 밑으로 계곡을 따라 중대로 올라가면 큰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빈터만 남았다. 폭포 옆 높이 10여 인이나 되는 절벽에 비스듬히 걸쳐 있는 나무사다리를 올라가면 원효대(元曉臺)이고 원효대를 지나면 소요사(逍遙寺)가 있다. 소요사 벽기(壁記)에,

“신라의 중 원효가 이 산에 머물러 있었고, 그 뒤 3백 년 갑술년에 고려(高麗)의 중 각규(覺圭)가 태상왕(太上王)의 명을 받들어 정사(精舍)를 지었고, 그 뒤 2백 년 계유년에 이 정사가 불에 탔고 그 이듬해 갑술년에 관동(關東)의 중 각령(覺玲)이 불전(佛殿)과 법당을 중건했다.”

하였는데, 목암(牧庵)의 기(記)에는,

“원효는 신라의 태종(太宗)과 문무(文武) 때의 중이니, 그 연대를 따져 보면 신라의 태종 때부터 우리 강헌대왕(康獻大王) 갑술년까지는 767년이 되고, 또 만력(萬曆) 갑술년까지는 180년이나 되는데, 벽기에 ‘3백 년’이라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였다. 동쪽 모퉁이에서 폭포 구경을 하는데, 그 위에 5, 6장이나 되는 큰 돌이 절벽 위에 서 있다. 암벽 사이의 돌구멍에서는 샘물이 졸졸 흐르는데 이것이 원효정(元曉井)이다. 이규보(李奎報)는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산 따라 위험한 다리 건너 / 循山渡危橋
발을 포개며 좁은 길 걷네 / 疊足行線路
백 길이나 높은 산마루에 / 上有百仞巓
원효가 일찍이 절을 지었네 / 曉聖曾結宇
신령한 자취는 사라지고 / 靈蹤渺何處
초상만이 흰 비단폭에 남았구나 / 遺影留鵝素
차 끓이던 샘에 찬물이 고여 / 茶泉貯寒玉
마셔보니 젖같이 맛있네 / 酌飮味如乳
이곳에 예전에 물이 없었기에 / 此地舊無水
중들이 머물러 살 수 없었는데 / 釋子難棲住
원효가 와서 거처하매 / 曉公一來寄
단물이 돌구멍에서 솟았네 / 甘液湧碞竇

암벽을 오르고 깊고 험한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 구봉(九峯)을 바라보니, 산의 돌이 모두 기이하게 생겼다. 중봉(中峯)의 바위굴을 지나 현암(懸庵)의 동남쪽으로 나와서 의상대(義相臺)에 오르니, 여기가 최고의 정상이요, 그 북쪽은 사자암(獅子庵)이다. 골짜기 입구에서 폭포를 지나 층벽을 따라 의상대에 오르기까지의 높이가 9천 장(丈)이다. 10월이어서 산은 깊고 골짜기는 음산한데, 아침 비가 지나간 뒤에 시냇가 돌에 낀 푸른 이끼는 봄철 같고, 단풍잎은 마르지 않았다.

4년 계묘 10월 기해에 공암 미수는 기(記)한다.


4년 계묘 맹동(孟冬) 무술에 목(穆)은 완산(完山) 이진무(李晉茂), 상당(上黨) 한균오(韓均吾), 외생(外甥) 이구(李絿)와 이무경(李茂卿)의 세 아들 원기(遠紀)ㆍ정기(鼎紀)ㆍ현기(玄紀)와 함께 소요사에서 자고, 그 이튿날 같이 의상대 아래서 논 뒤에 제명(題名 명승지(名勝地)에 등람(登覽)한 날짜와 등람자의 이름을 적는 것)하였다.

공암 허목은 쓴다.


원효대 아래 폭포 옆 바위굴에 또 제명하고, 저녁에 무경(茂卿)의 청초별업(靑草別業)에서 잤다. 그 이튿날 대탄진(大灘津)을 건너 10리를 가서 구절탄(九折灘)에 있는 이생(李甥)의 계장(溪莊)에 당도하니, 옛날 화암(花巖 최유원(崔有源))의 별업으로 산수가 가장 아름다웠다.

미수는 기록한다.



 

 

 

 

 

 

 

 

 

 

 

 

 

 

 

 

 

 

 

 

 

 

 

 

 

 

 

 

 

 

 

 

 

 

 

 

 

 

연려실기술 제1권
 태조조 고사본말고사본말(故事本末)옛날에 일어났던 일의 시초와 결말이라는 뜻인데, 이 책에서는 편자가 의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기사본말체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순수한 기사본말체가 아니고 각 왕조 때 일어난 중요한 사실의 시초와 결말을 시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엮어, 각 왕조마다 ‘고사본말’이라고 붙였다.(太祖朝故事本末)
태조의 함흥 주필(咸興駐蹕)


월(月)에 상왕(上王 태조)이 새 도읍지인 한양(漢陽)에 돌아왔다가 금강산에 가서 그 길로 함흥 본궁(咸興本宮)에 갔다. 《조야첨재(朝野僉載)》
○ 방석의 변이 있은 뒤에 태조가 왕위를 버리고 함흥으로 갔다. 태종이 여러번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안을 하였는데, 태조가 번번이 활을 버티고 기다리고 있어서 전후 여러 차례 갔던 사자가 감히 문안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성석린(成石璘)은 태조의 옛 친구로 그가 자청하여 태조의 뜻을 돌이킬 것을 다짐하므로 태종이 허락하였다. 석린이 백마를 타고 베옷 차림으로 과객같이 하고 말에서 내려 불을 피워 밥을 짓는 시늉을 하였더니, 태조가 바라보고 내시를 시켜 가 보게 하였다. 석린이 “용무가 있어 지나가다가 날이 저물어 말을 매고 유숙하려 한다.” 말하니, 내시가 돌아가서 그대로 태조에게 아뢰었다.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곧 불렀다. 석린이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하니, 태조가 변색하여 이르기를, “너도 너의 임금을 위하여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 아니냐.” 하였다. 석린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의 자손은 반드시 눈이 멀어 장님이 될 것입니다.” 하니, 태조는 이 말을 믿었다. 그래서 양궁(兩宮 태조와 태종)이 이때부터 화합해졌으나, 뒤에 석린의 두 아들은 과연 눈이 멀었다. 《축수편(逐睡篇)》
석린의 맏아들 지도(至道)와 지도의 아들 창산군(昌山君) 귀수(龜壽)와 귀수의 아들이 다 태중에서부터 장님이 되어 삼대를 이었고, 석린의 작은 아들 발도(發道)는 후사가 없었다. 《명신록》
○ 당시에 문안사(問安使) 중에 한 사람도 돌아온 이가 없었다.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누가 갈 수 있는가?” 하니 응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박순(朴淳)이 자청하여 간다고 하였다. 가는데 하인도 딸리지 않고 스스로 새끼 딸린 어미말을 타고 함흥에 들어가서, 태조 있는 곳을 바라보고 일부러 그 새끼말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 어미말을 타고 나아가니, 어미말이 머뭇거리면서 뒤를 돌아보고 서로 부르며 울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태조를 뵙자, 태조는 말이 하는 짓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그가 아뢰기를, “새끼말이 길가는 데 방해가 되어 매어 놓았더니, 어미말과 새끼말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비록 미물이라 하더라도 지친의 정은 있는 모양입니다.” 하고, 풍자하여 비유하니, 태조가 척연(慼然)히 슬퍼하고 잠저에 있을 때 사귄 옛 친구로서 머물러 있게 하고 보내지 않았다. 하루는 태조가 박순과 더불어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마침 쥐가 그 새끼를 안고 지붕 모퉁이에서 떨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박순이 다시 장기판을 제쳐놓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더욱 간절하게 아뢰니, 태조가 마침내 서울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다.
박순이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허락을 듣고 곧 그 자리를 하직하고 떠나니, 태조를 따라와 모시고 있던 여러 신하들이 극력 그를 죽일 것을 청하였다. 태조는 그가 용흥강(龍興江)을 이미 건너 갔으리라고 생각된 뒤에야 허락하여 사자에게 칼을 주면서 이르기를, “만약 이미 강을 건넜거든 쫓지 말라.” 하였다. 박순은 병이 나 중도에서 체류하였다가 이때에 겨우 강에 도달하여 배에 오르고 아직 강을 건너지 못했으므로, 드디어 그의 허리를 베었다. 그때에 “반은 강 속에 있고 반은 뱃속에 있다.[半在江中半在船]” 하는 시가 있었다. 태조가 크게 놀라 애석하게 여겨 이르기를, “박순은 좋은 친구이다. 내가 마침내 전에 그에게 한 말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하고, 드디어 남쪽에 있는 한양에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태종은 박순의 죽음을 듣고 곧 그의 공을 기록하고 벼슬을 증직하였으며, 또 화공에게 명하여 그의 반신을 그려서 그 사실을 나타내었다. 그의 부인 임씨(任氏)는 부고를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노봉집 시장(老峯集諡狀)》 ○ 박순의 옛 마을은 고양(高陽)과 교하(交河)의 경계에 있다. 지금까지 그 마을을 부사문(府事門)이라 부른다.
○ 태조는 처음에 덕원(德源)으로 갔다가 또 함흥으로 갔는데, 문안사(問安使)로 죽은 사람이 속출하였다. 태종이 태조께 돌아오시라고 청하고자 하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아뢰기를, “무학(無學)이면 능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므로, 태종이 물색하여 찾아서 간곡히 청하니, 무학이 어쩔 수 없이 함흥에 가서 태조를 뵈었다. 태조가 노하여 이르기를, “너도 또한 나를 달래러 왔구나.” 하니, 무학이 웃으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제 마음을 모르십니까. 빈도(貧道 승려가 겸손하게 자기를 가리키는 말)가 전하와 더불어 서로 안 지가 수십 년인데, 오늘 특별히 전하를 위로하기 위하여 왔을 뿐입니다.” 하였다.이에 태조의 안색이 조금 부드러워져서 머물러 함께 잤는데, 무학은 말을 할 때마다 언제나 태종의 단점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하여 수십 일을 지내니, 태조가 굳게 믿었다. 하루는 밤중에 무학이 태조를 달래어 아뢰기를, “방원(芳遠 태종의 이름)이 진실로 죄가 있으나, 전하께서 사랑한 아들은 이미 다 죽고 다만 이 사람이 남아 있을 뿐이니, 만약 이 아들마저 끊어 버리면 전하가 평생 애써 이룬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려고 하십니까.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차라니 내 혈속에게 주는 것이 나으니, 원컨대 신중히 생각해 보소서.” 하니, 태조가 그의 말이 꽤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행차를 돌릴 뜻이 생겼다.무학이 이어 급히 돌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태조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처음에는 소요산(逍遙山)에 이르러 두어달 머물렀다가 그 길로 풍양(豐壤)에 가서 궁을 지어 거처하였다. 뒤에 무학이 죽은 데는 알지 못한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돌아오니, 태종이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면서 성대히 장막을 설치하였다.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일(遮日)에 받치는 높은 기둥은 의당 큰 나무를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허락하여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었다. 양전(兩殿 태조와 태종)이 서로 만나자, 태종이 면복(冕服)을 입고 나아가 뵈었는데, 태조가 바라보고 노한 얼굴빛으로 가졌던 동궁(彤弓)과 백우전(白羽箭)을 힘껏 당겨서 쏘았다. 태종이 급해서 차일 기둥에 의지하여 몸을 가렸으므로 화살이 그 기둥에 맞았다.태조가 웃으면서 노기를 풀고 이르기를,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고, 이에 나라의 옥새를 주면서 이르기를, “네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이제 가지고 가라.” 하였다. 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 마침내 잔치를 열고 태종이 잔을 받들어 헌수(獻壽)하려 할 때에 하륜 등이 몰래 아뢰기를, “술통 있는 곳에 가서 잔을 들어 헌수할 때에 친히 하지 말고 마땅히 내시에게 주어 드리시오.” 하므로, 태종이 또 그 말대로 하여 내시가 잔을 올렸다. 태조가 다 마시고 웃으면서 소매 속에서 쇠방망이를 찾아 내어 자리 옆에 놓으면서 이르기를, “모두가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였다. 《축수편(逐睡篇)》


 

[주C-001]주필(駐蹕) : 임금의 행차(行次)가 머무는 것.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차천로(車天輅) 찬

○ 이태백(李太白)이 한형주(韓荊州 당 현종(唐玄宗) 때 사람 한조종(韓朝宗))에게 올린 편지에, “청평(靑萍)과 결록(結綠)이 설하(薛下)의 문에서 값이 올라 간다.”라는 문구가 있다. 《고문진보 후집》 주에 의하면, 청평과 결록은 모두 칼 이름이라 하였으니, 이 주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청평이 검(劍) 이름이라 함은 고서에 나오고, 결록이 옥 이름이라 함은 범수(范睢)가 진왕(秦王)에게 올린 편지에서 볼 수 있다. 설(薛)은 설촉(薛蜀)이란 사람으로 월(越) 나라의 검을 잘 아는 사람이니, 《월기서(越紀書)》에 나오고, 하(下)자는 변(卞)자가 되어야 하니, 초(楚) 나라의 변화(卞和)란 사람이다.
〈우언(寓言)〉에,
옛날 무왕이 병을 앓을 때 / 武王昔不豫
손톱과 발톱을 깎아 하수 가에 던졌다 / 剪爪投河湄
란 시구가 있는데 그 주에, 〈금등(金縢《서경》의 편 이름)〉에 ‘왕이 병이 나서 편치 못하였다.’ 하였고, 《사기(史記)》와 《상서(尙書)》에는 모두, “삼단(三壇)을 만들고, 주공(周公)이 북쪽을 향하여 벽(璧)을 놓고 규(珪 벽과 규는 다 홀(笏)의 이름)를 잡아 태왕(太王)과 왕계(王季)와 문왕(文王)께 고했다.” 하였는데 손톱과 발톱을 깎은 일에 대한 이 주는 잘못이다. 《사기(史記)》〈몽염전(蒙恬傳)〉에, “성왕(成王)이 병을 앓아 매우 위태로워지자, 주공 단(旦)이 손톱과 발톱을 깎아 하수에 던졌다.” 하였으니, 이태백의 구절은 무왕의 고사와 성왕의 고사를 겸하여 인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한양 보록사(漢陽輔錄事)에게 띄운 시에,
장사에 버려진 나그네를 생각하니 / 應念投沙客
공연히 굴원을 조상하는 슬픔만 남네 / 空餘弔屈悲
라는 시구가 있는데 그 주에 장사에 버려진 나그네를 굴원(屈原)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굴원은 회사부(懷沙賦)를 지었으나, 장사에 버려진 것은 아니다. 《사기》를 고찰하면, 가의(賈誼)가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가 되어서 상수(湘水)를 건너게 되었을 때 부(賦)를 지어서 굴원의 혼을 조위(弔慰)하였다. 이제 여기에서 ‘장사에 버려진 나그네’라 함은 이태백이 정배 가는 신세가 되었으므로, 스스로 자기를 가리켜 가의와 같이 장사에 버려진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또 시를 지어,
장사에 버려져 초 나라의 신하를 조위하누나 / 投沙弔楚臣
하였고, 또
이미 장사에 버려져 사람의 짝이 되었노라 / 已作投沙伴
하였다.
○ 〈호무인(胡無人 이태백의 시의 한 편명)〉편 끝에,
호에 사람이 없으니 한 나라의 도가 융창하겠고 / 胡無人漢道昌
폐하의 수가 3천 세를 누릴 것입니다 / 陛下之壽三千霜
다만 대풍운비양만 부를 것이지 / 但歌大風雲飛揚
어찌 맹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겠다 합니까 / 安用猛士守四方
하였다. 소사빈(蕭士贇)이 주하기를, “다른 판본에는 폐하의 수 이하 세 구절이 없는데, 그것이 옳다.” 했다. 소자유(蘇子由)로 하여금 이것을 보게 하면, 반드시 어떻다는 말을 할 것이니, 이 주는 대단히 가소롭다. 영빈(穎濱 소자유의 호이다)은 일찍이 말하기를, “이태백의 시에는 이치를 알지 못하는 곳이 있다. 한 고조(漢高祖)의 〈대풍가(大風歌)〉에,
어찌 맹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까 / 安得猛士守四方
란 뜻은 바로 제왕(帝王)이 편안하더라도 위태로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태백이 말하기를, ‘어찌 맹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겠다 하였는고.’ 하였으니, 무슨 말인가.” 하였다. 오늘날 이태백의 시를 주하는 자는 이 세 구절을 버림으로써 영빈의 조롱을 변명하는데 소사빈도 틀린 것이고, 영빈도 태백의 시의 뜻을 모른 것이다. 이태백이 이미 호무인(胡無人)으로 시의 편명을 짓고 이에 이르기를, “호(胡)에 사람이 없으니 한(漢) 나라의 도가 융창하겠고, 폐하는 수를 3천 세 누릴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다만 대풍가만 부르면 그만이지, 맹사는 무엇에 쓸 것입니까.” 한 것으로 보아, 말뜻이 명백한데 소사빈과 영빈 두 사람은 이것을 미처 알지 못하였으니 이상하다.
○ 〈국가행(鞠歌行 이태백의 시의 한 편명)〉에,
어찌하여 오늘날 사람은 / 奈何今之人
두 눈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내는가 / 雙目送飛鴻
란 시구가 있는데, 그 주에 제 환공(齊桓公)과 관중(管仲)이 홍안(鴻雁)을 말한 고사를 인용하였으니, 대단히 잘못이다. 《사기》〈공자세가(孔子世家)〉에, “위령공(衛靈公)이 공자와 같이 앉아 말하다가 때마침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그것을 우러러보느라고 시선이 공자에게 있지 않으니, 공자가 드디어 떠나고 말았다.”란 고사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태백이 시에 또 쓰기를,
눈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내니 / 目色送飛鴻
막연하여 더위잡지 못하겠구나 / 邈然不可攀
한 것도, 공자의 이 고사를 가리켜 쓴 것이다.
○ 이태백의 〈고어과하읍(枯魚過河泣)〉에,
만승 천자는 출입을 조심하여야 하고 / 萬乘愼出入
백인으로서 경계를 삼아야 하는 것이다 / 栢人以爲戒
라는 시에서 ‘백인이위계(栢人以爲戒)’의 백인은 백곡(栢谷)이 되어야 한다. 《사기(史記)》〈장이전(張耳傳)〉에 보면. “한(漢) 나라 8년에 고조(高祖)가 동원(東垣)에서 돌아와 조(趙) 나라를 지나게 되었는데 관고(貫高) 등이 바로 벽인(壁人)과 백인으로 하여금 고조를 기습할 것을 노려 변소에 숨어 있게 하였다. 고조가 들려서 자려고 하다가, 마음이 섬뜩하여 묻기를, ‘이 고을 이름이 무엇인가.’ 하였더니, ‘백인현(栢人縣)이라.’ 하였다. ‘백인이란 사람에게 핍박한다는 뜻이다.’ 하고, 고조는 유숙하지 않고 떠났다.” 하였는데, 이 고사로 보면 이치가 그럴 듯하지만 이때 고조는 미행(微行)한 것이 아니다. 반악(潘岳)의 〈서정부(西征賦)〉에,
정장이 백곡에서 손님에게 거만하게 굴었는데 / 長傲賓於栢谷
아내가 얼굴을 보면서 밥상을 드렸다 / 妻覩貌而獻餐
란 구절이 있는데 그 주에, “한 무제(漢武帝)가 미행하여 밤중에 백곡에 이르니, 정장이 죽이려 하였다.” 는 고사가 있다. 이것으로 보아, 백인보다는 백곡이 더 사리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 비록 협골로 하여금 향기롭게 할지언정 / 縱使俠骨香
세상의 영웅에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겠노라 / 不慙世上英
란 구절의 사(使) 자는 사(死) 자가 되어야 한다. 그 증거로서는 왕유(王維)의 시의 ‘종사유문협골향(縱死猶聞俠骨香)’을 들 수 있고, 또 일찍이 다른 본을 보았는데, 거기에도 이와 같이 되어 있었다.
○ 선성(宣城) 태수(太守) 조열(趙悅)에게 준 시에,
바다가 늠실늠실 움직이지 아니할 양이면 / 溟海不振蕩
어떻게 하여 붕곤(가상의 큰 새와 큰 물고기)이 주름 잡겠는가 / 何由縮鵬鵾
기하는 것은 검은 나무가 희게 되는 것이라 / 所期玄津白
아무에게나 구속됨이 없이 멀리 저 하늘에 펄펄 날아 오르리라 / 倜儻假騰騫
란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축(縮) 자는 종(縱) 자의 잘못이요, 현진백(玄津白)은 요진일(要津日)의 잘못이다.〈기남능제오송산(紀南陵題五松山)〉시에,
이윤(은나라 초기 탕 임금의 산하 이름)이 공상(이윤의 출생지. 지금의 하남성 자류현의 남부임)에서 태어나 / 伊尹生空桑
손으로 요리하여 탕왕을 도왔다 / 指庖佐皇極
에서 지포(指庖)의 지(指) 자는 연(捐) 자가 되어야 한다. 이어서,
3년에 임금의 도가 밝아지니 / 三年帝道明
신하가 되어 끝까지 도왔다 / 威質終輔翼
에서 위(威) 자는 위(委)가 되어야 한다.
○ 위 시어(韋侍御)에게 준 시에,
풍년옥과 같은 나를 / 我如豐年玉
가을 밭 풀 속에 버려 두노라 / 棄置秋田草
란 구절이 있는데, 《세설(世說)》을 보면, “세상에서 말하기를 유문강(庾文康)을 풍년옥이라 하고, 치공(穉恭)을 황년곡(荒年穀)이라 한다.” 하였다.
○ 이태백의 〈효고(效古 시의 편제)〉에,
예로부터 뛰어난 미인이 있으니 / 自古有秀色
서시와 동린이라 / 西施與東隣
는 구절이 있다. 이 시를 옳지 않게 여기는 송 나라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태백이 동시(東施)를 동린(東隣)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압운(押韻 시를 지을 때 먼저 내는 5개 또는 4개의 운자)에 이끌린 것으로, 매우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미치지 못한다. 소동파의 시에,
붉은 초가 다 닳으니, 옥 불꽃이 튀기 시작하고 / 絳蠟銷殘玉熒飛
이별가를 끝마치니, 한없는 눈물만 흐르는구나 / 離歌唱徹萬行啼
다른 해에 한 조각배에다 치이와 가서 / 他年一舸鴟夷去
내 집의 옛 성 서를 써오리라 / 記取儂家舊姓西
했는데, 이 시에 어디가 운에 구애됨이 있는가.” 하였는데, 송 나라 사람의 이 평은 좁은 소견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동가시(東家施)ㆍ서가시(西家施)란 것을 고찰해 보건대, 시씨(施氏) 두 사람이 있는 까닭으로 동과 서로써 구별한 것이니 서(西)는 결코 성(姓)이 아니다. 이태백이 동린이라 한 것은 바로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미인부(美人賦)〉의 시어를 인용한 것이지, 꼭 동시를 가리킴은 아니다.
○ 노두(老杜 성당(盛唐)의 시인 두보(杜甫)를 말함)가 선주(先主 삼국 시대 촉한의 황제 유비를 말함) 사당을 배알하고 지은 시에,
금강은 원래 초를 지나 흘렀고 / 錦江元過楚
검각은 다시 진에 통한다 / 劍閣復通秦
라는 시구가 있다. 그 주에 말하기를, “초를 지나고 진에 통한다는 것은 본래부터 한데 묶어 볼 수 있지만, 이제 그렇지 못하다 함은 그것을 슬퍼함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지나치게 작자의 뜻을 잃어버린 것이다. 금강은 촉(蜀)으로부터 형주(荊州)를 지나 비로소 바다로 들어가게 되니 이것은 형주가 본래 선주 유비의 소유였는데 동오(東吳)한테 빼앗긴 것을 말한 것이다. 진 혜왕(秦惠王) 때 장의(張儀)가 처음으로 촉도(蜀道)를 개통하였는데, 이제 촉이 위(魏) 나라에 병탄되었으니 이것은 검각이 다시 진에 통한 것이다.
○ 혜의사원(惠儀寺園)에서 신 원외(辛員外)를 보내는 시에,
곧장 면주에 이르러 비로소 악수하고 이별하니 / 直到綿州始分手
강가 나무 사이로 누구와 같이 올꺼나 / 江頭樹裏共誰來
란 시구가 있다. 그런데 다른 책에는 분수(分手)가 분수(分首)로 되어 있으니, 이것은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있는 말이다. 한(漢) 나라의 정홍(鄭弘)이 심양례(沈釀隷 심양은 본래 배의 통행세를 받던 부두의 이름)에서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아침 서로 헤어졌다는 고사에서 분수(分首)임이 확실하여진다. 또 낙빈왕(駱賓王) 서(序)에 ‘분수삼진(分首三秦)’이란 말도 있어 이것을 증명한다.
○ 《사기(史記)》〈사마양저전(司馬穰苴傳)〉에, “복거(僕車)의 우(右)와 부마(駙馬)의 좌참(左驂)을 참(斬)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색은(索隱)》주에는, “부(駙)는 수레 옆에 세운 나무이다.” 하였다. 수망(殊亡)은 말하기를, “《좌전(左傳)》을 상고하건대, 아무개로서 우(右)를 삼는다는 글이 있다.” 하였다. 《설원(說苑)》에는 “수레 오른쪽에 검을 눕힌다.” 하였고, 《장감박식(將鑑博識)》에서는 ‘바로 수레의 오른쪽’이라 하였다. 또 《주례(周禮)》주를 상고하건대, ‘부마(駙馬)는 바로 수레의 좌우에 있는 곁말이다. 그 이유는 가운데 말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사마양저가 벤 것은 종 한 사람과, 수레 오른쪽의 한 사람과, 부마 가운데의 한 마리 참마인 것이다.
○ 〈이사전(李斯傳)〉에, “금록시육(禽鹿視肉)과 같은 자로 사람의 탈을 쓰고 억지로 행세하는 자이다.”란 구절이 있는데, 《산해경(山海經)》을 상고해 보면, 시육(視肉)은 수명(獸名)이라 하였다.
○ 〈굴원전(屈原傳)〉에, “죽어 용납하지 않고 스스로 소원하게 하였으며, 탁요오니지중(濯淖汚泥之中)”이란 말이 있는데, 이 뜻은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편을 보면, “요약(淖約)함이 처자(處子)와 같다.” 하고, 그 주에, “요(淖)는 우(又)와 됴(卓 현재의 음은 탁이나, 중국의 발음으로는 됴이다)의 반절음이며, 예쁜 모양이다.” 하였다. 반악(潘岳)의 〈적전부(籍田賦)〉에, “보개보요(簠簋普淖)”라는 구가 있는데, 여기서도 요(淖)는 깨끗한 것을 뜻한다. 이것을 종합하여 말하면, ‘탁요오니지중(濁淖汚泥之中)’의 뜻은 “더러운 곳에서도 깨끗하고 예쁘다.”로 해석된다.
○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항우(項羽)가 척촌(尺寸)도 없이 형세를 타고 농묘(隴畝)의 가운데에서 일어났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중국 사람들은 모두 척촌으로 구를 나눈다. 《사기》에서 서락(西樂)의 편지를 보면, “척촌의 세력도 없이, 여항(閭巷)에서 일어나 창을 짚고 의거했다.”란 말이 있다.
○ 《사기(史記)》는 무제(武帝) 때에 지어졌다. 무제 때에 지어졌다면 마땅히 ‘금황제(今皇帝)’ 또는 ‘금상(今上)’이라 불러야 했을 터인데, ‘무제(武帝)’라고 한 곳이 있는 것은, 바로 저소손(褚少孫)의 글이 혹 잘못 끼어 들어간 것 같다. 〈혹리전(酷吏傳)〉 〈위관전(衛綰傳)〉 풍당전(馮唐傳)〉 〈이광전(李廣傳)〉 〈가의전(賈誼傳)〉에서도 볼 수 있으며, 그밖의 것은 다 기록할 수 없다. 그런데 왕세정(王世貞) 등 여러 사람이 이 저소손의 글이 《사기》에 끼어 있는 문제에 대하여 한 마디도 언급함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 반맹견(班孟堅)이 자장(子長)을 위하여 전(傳)을 썼는데, 그의 임종에 대해서는 쓰지 아니하였다. 위굉(衛宏)은 《한의(漢儀)》를 짓고 그 주(注)에 이어서 말하기를, “사마천이 하옥(下獄)됨에 원망하는 말이 있었으므로, 드디어 죽음을 받았다.” 하였으니, 이 말은 반드시 잘못일 것이다. 사마천이 형벌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사기》가 다 쓰여졌다. 만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면, 태사공(太史公) 자서(自序)란 말은 누구의 말인가. 위굉과 반고(班固)는 같은 시대의 사람이요, 사마천의 시대와도 그리 멀지 아니한데, 이와 같이 차이가 있음은 무슨 까닭인가.
○ 자장의 《사기(史記)》는 만고에 우뚝 선 위작(偉作)이지만 크게 세상에 유행되지 못하였다. 소장공(蘇長公)은 《전국책(戰國策)》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사기》를 더욱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명 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표장(表章)하는 사람들이 있게 되었다. 즉 왕세정의 무리가 이것을 존숭하게 되매, 천하 사람들은 집집마다 전하고 호호(戶戶)마다 외우게 되었으니, 역시 운수(運數)라는 것은 그 가운데 들어 있지 아닌한가.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만세뒤에 한 번 큰 성인을 만나 그 뜻을 알게 된다면, 바로 아침저녁에 이것을 만나는 격이다.”하였으니, 자장이 왕감주(王弇州 왕세정의 호)를 만난 것도 또한 ‘만세의 뒤라도 아침저녁에 이것을 만나는 격’이라 할 만한 것이다.
○ 맹호연(孟浩然)의 시에,
말을 육 내사에게 부치노니 / 寄語陸內史
순갱을 전함에 어찌 족하리오 / 蓴羹何足傳
이란 주에, 진(晉)나라 장한(張翰)의 말을 인용하고, ‘육 내사는 자세하지 않다.’고 하였다. 《세설(世說)》을 고찰해 보면, 육사형(陸士衡)이 처음 낙양에 들어가 왕무자(王武子)를 보았는데, 무자는 양 젖을 가리키면서, “그대의 오(吳) 땅에서는 무슨 물건으로 이것을 대적할 수 있소.” 하니, 육사형이 대답하기를, “천리 순갱이 콩자반에 못지 않습니다.” 하였다. 《문선(文選)》에 육기(陸機)가 평원내사(平原內史)를 사례하는 표(表)가 있다.
○ 《두번천집(杜樊川集)》의 잡문(雜文) 4권과 잡시(雜詩) 2권을 서거정(徐居正) 공이 주를 낼 때에, 그 외집(外集)에 있는 80여 수는 끼우지 않았으며 또 어려운 곳은 빼었으니, 일반 사람의 견해와 매일반이라고 할 만하다. “거경(巨卿)이 곡하는 곳에 구름이 하염없이 끊어지고, 아무(阿騖)가 돌아옴에 달이 정히 밝더라.”는 구절이 있다. 《삼국지(三國志)》 주건평전(朱建平傳)을 고찰해 보면, 처음에 종요(鍾繇)와 순유(荀攸)가 벗을 삼았는데, 종요의 나이가 순유보다 열 살이 위였다. 그 뒤 종요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말하기를, “그전에 순유와 같이 주건평에게 갔었는데, 건평이 말하기를, ‘순유군이 나이는 비록 적지만, 뒷일을 종군에게 부탁하는 것이 옳겠다.’ 하므로, 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아무(阿婺)를 좋은 곳에 시집보내리라.’ 하였다. 그런데, 그 말이 오늘날 어찌 실현될 줄이야 뜻하였으랴. 방금 아무가 시집을 갔으니 말이다.” 하였다. 아무는 순유의 첩이다. 지주(池州) 이 사군(李使君)이 죽었을 때 두목(杜牧)이 길에서 그 첩을 만나, 이 시를 지은 까닭으로, 아무(阿騖)는 아무(阿婺)가 되어야 한다.
○ 고려(高麗) 의종(毅宗) 때에 청교역(靑郊驛)에서 검정 소를 바쳤는데, 의종은 시신(侍臣)들에게 이것을 글제로 하여 시짓기를 명했다. 방(房) 자와 당(堂) 자를 운으로 짓게 하였는데, 시 한 구절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 중에서,
흙 모란꽃이 설당에 이르렀다 / 黑牧丹花到雪堂
라는 구절이 그 가운데서 약간 좋았다. 어떤 시 잘 짓는 선비 한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시를 지었는데, 그 경구(警句)에,
함곡에서 새벽에 돌아오니 붉은 기운을 탔고 / 函谷曉歸乘紫氣
도림에 봄이 되니 홍방을 밟더라 / 桃林春放踏紅房
하였다. 이것을 왕이 보고 탄미(歎美)한 나머지, 마침내 그 사람에게 벼슬을 주었다.
○ 고려 말에 어떤 고상한 선비 한 사람이 있었는데,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아니하면서 강 위에 자리 잡고 살았다. 죽은 뒤에 벼슬아치 몇 사람이 그의 옛집을 찾았더니, 벽 위에 그가 지은 시가 붙어 있었는데, 긁혀 떨어져 다만 한 구절 밖에 볼 수 없었다. 그 글에,
파초(芭蕉) 소리가 문발 밖에서 들리니 산 비가 오는 줄 알겠고 / 蕉鳴薄外知山雨
배 돛대가 봉우리 끝에서 나오니 바닷 바람이 부는 것을 짐작하겠다 / 帆出峯頭見海風
하였다. 이 글을 본 벼슬아치들이 한참 동안 읊조리더니, 서로 말하기를, “섬돌 아래 파초란 말을 보고 윗 구절을 알만 하지만 재 돛을 보고 바닷바람이 부는 것을 짐작한다는 것은 모르겠다.” 하였다. 조금 지나서 앞 포구에 홀연히 한 척의 배가 돛에 바람을 잔뜩 안고 봉우리 밖에서 점점 나왔다. 이것을 보게 되면, 배는 해구로부터 올라오는 것이다.
○ 고려 말에 한 시인이 뛰어난 시구를 얻고자 하여 몸에다 짧은 도롱이를 걸치고 황소 등에 걸터 앉아 천수원(天壽院)과 사천(沙川)을 왕래하면서 날마다 수염을 쓰다듬은 지 근 백일이나 지난 다음에야 겨우,
흰 갈매기가 날면서 푸른 산허리를 두 쪽으로 가른다 / 白鷗飛割碧山腰
라는 한 구절을 얻었으니, 마치 평양 연광정(練光亭)에서 김황원(金黃元)이
높은 성을 빙 두른 것은 넘쳐 흐르는 물이요 / 危城一面溶溶水
대야 먼 동쪽에는 점점이 산이구나 / 大野東頭點點山
라는 시구만을 얻는 데에 그친 것과 마찬가지 경우이다.
○ 양창해(楊滄海) 선생의 경구에,
바다가 하늘을 머금어 가 다하고 / 海銜天去盡
산이 돌을 이고 와 많더라 / 山戴石來多
라는 구절을 그는 얻고, 자기 나름대로 고금(古今)에 으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唐) 나라의 이빈(李頻)은 벌써,
들이 하늘을 머금어 가 다하고 / 野銜天去盡
산이 한수를 끼고 와 깊더라 / 山夾漢來深
라는 시구를 지은 것이 있다.
○ 창해(滄海) 선생이 일찍이 오대사(五臺寺)에서 시 한 구절을 얻었는데, 그 시에,
고기는 중의 바리 밥을 머금고 / 魚呑僧鉢飯
거북은 학의 집 구름을 헤아린다 / 龜度鶴巢雲
하였는데, 이 구절은 크게 공교롭다고 생각된다.
○ 상공(相公) 정응두(丁應斗)가 나아가서 관서(關西) 지방을 다스릴 때, 양창해(楊滄海) 옹(翁)은 삼등(三登) 현감으로 있었다. 정공(丁公)이 여러 고을을 순찰할 때 창해 옹은 임시 우관(郵官)이 되었다. 한 고을에 당도하니, 명승지가 있는데, 산 이름은 고모(姑母)라 하며, 앞으로 흐르는 물은 바다로 들어갔다. 창해 옹이 시를 지었는데,
고야산 앞에는 구곡천이 흐르고 / 姑射山前九曲川
도화는 짙게 되어 무릉의 연기를 가라앉히는구나 / 桃花深鎭武陵煙
나뭇가지가 휘늘어진 골짜기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데 / 依依洞府無人見
어디서 고기잡이 뱃노래가 아득하게 떨어져 들려오누나 / 何處漁舟落杳然
하였다. 정공도 이어서 시를 지었는데,
건곤은 무진장인데 / 乾坤無盡藏
호해에 기약 없이 노니는구나 / 湖海不期遊
하였다. 이렇게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용재(容齋)가 쓴
건곤은 무진장하고 / 乾坤無盡藏
풍월은 언제든지 찾아 드는구나 / 風月不時需
란 구절이 어떨는지.
○ 윤결(尹潔) 선생과 돌아가신 내 아버지는 정축년에 같이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같이 정유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또 계묘 용방(龍榜)에도 같이 합격하여 교유(交遊)가 가장 두터웠다. 선군께서 송경(松京)에 계실 때, 윤 선생과 안수(安璲) 공 두 분과 같이 천성산(天聖山)에서 노셨다. 안 선생 역시 정유에 과거 급제한 분이시다. 산중으로부터 선군의 처소로 오셔서 종일 말씀하셨는데, 윤공이 오언절구 한 구절을 부르시고, “이 시가 어떻습니까?” 하자, 선군이 말하기를, “이것은 귀신의 시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윤공이 대단히 놀라면서, “그대는 어떻게 귀신의 시인줄 아시오. 내가 어젯밤 꿈에 어떤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놀았는데, 흰 모래가 십여 리나 깔렸고, 달빛은 낮과 같았습니다. 어디서 꾀꼬리 소리가 들려 왔는데, 이 골짜기를 물어보니, 바로 ‘석문동(石門洞)’이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흥이 나서 오언시 한 수를 지었는데,
우연히 석문동(石門洞)에 들어와 / 偶入石門洞
시를 읊조리면서 홀로 밤길을 걷고 있구나 / 吟詩孤夜行
달은 대낮같이 밝고 시냇가 모래는 희기도 한데 / 月午澗沙白
텅빈 산골짜기 어디에선가 꾀꼬리 울음소리 한 차례 들리어 온다 / 空山啼一鶯
라고 지었습니다.” 하였다.
○ 윤결(尹結) 공이 젊었을 때 지은 명구 하나가 있다.
벼슬아치 백년에 좋은 솜씨가 있고 / 簪笏百年□好手
강호 천리에 기재(奇才)가 있구나 / 江湖千里有奇才
라고 했다. 내 선군(先君)께서 서화담(徐花潭) 선생에게 이 시를 읊어 주시자, 선생께서 말하기를, “이 시는 재주가 있는 듯하지만, 뜻이 원대하지 못하다.” 하였다.
상공(相公) 윤자신(尹自新)은 윤장원(尹長源) 공의 재종질(再從姪)이다. 임인년 그해에 상공의 나이 14세였고, 장원공의 나이 바로 27세였는데, 사마시에 합격한 지가 벌써 6년이나 되었다. 윤공이 어느날 풍소(風騷)를 끼고 와서 장원에게 배우고 있었다. 마침 장원은 침모(寢帽)를 쓰고 작은 마루에 나와 앉아 손으로 거문고를 타며, 입으로 시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고운 옷을 입은 종 하나가 나타나, 명함을 내어 놓기에 문으로 가서 맞이하니, 한 관인(官人)이 따라 들어오는데, 의관과 용모가 매우 바르고 깨끗하였다. 장원이 말하기를, “ 반드시 잘못 찾아오신 겁니다. 어찌 우리 집에 올 관인이 있겠습니까. 그만두시고 다른 데 가서 찾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자, 그 관인은 말하기를, “꼭 윤 진사님을 뵙고자 합니다.” 하였다. 윤공이 그때에 어린 나이로 장원을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말하기를, “남이 몸을 깨끗이 하고 뵙고자 왔는데, 거절하시는 것은 옳지 않은 줄 압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장원은 바로 갓과 옷을 가져오라 명하고 손님을 들어오시도록 하니, 그 사람은 허리를 구부려 절하는데, 장원은 다만 한참 동안 읍만 할 뿐이었다. 주인과 손님이 좌정한 뒤에도 여전히 먼저 가르치던 시를 윤공은 손님이 오셨으니 그만두시라고 하였으나, 조금도 개의하지 않고 계속하였다. 얼마 지나서 그 관인은 자리를 옮겨 꿇어 앉아 말하기를, “제가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 어른을 번거롭게 하니, 말이 나오지 아니하여 감히 여쭙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고명하신 어른께서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장원이 말하기를, “공의 모습을 뵈옵건대 현달한 관원 같으신데, 무슨 일이 있으시기에 이렇게 오시어 이름도 없는 저를 찾으셨습니까.” 하였다.
그 관인은 용모를 단정히 하고 말하기를, “장옥견(張玉見) 선생이 남양부백(南陽府伯)이 되었는데, 일찍이 거문고와 노래 잘하는 종 다섯 명을 곁에 두고 달마다 한 사람씩 교대로 서울로 보내, 한 달 동안씩 마음대로 놀고 오게 하였습니다. 기일이 다하여 돌아오면, 또 다른 사람을 그와 같이 서울로 보냈습니다. 지난달 중순에 거문고 잘 타는 사람이 차례가 되어 서울에 왔었는데, 제가 우연히 그와 만나는 기회를 얻게 되어 그것을 계기로 정이 함빡 들어 떨어지려 하여도 차마 떨어질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장공에게 관대하게 용납하기를 청해 보았지만 허락해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이름난 어른들의 글을 가져다가 청을 넣어 보았지만 그래도 허락하지 못하겠다 하시더니, 말씀하시기를, ‘만일 윤 진사의 시를 얻게 된다면, 내가 1년 동안 빌려 주겠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감히 두려움을 무릅쓰고 와서 청하는게 올시다.” 하고, 이어서 술과 돈과 홍화전(紅花牋 글 쓰는 종이)한 폭을 꺼내서 무릎을 꺼내서 무릎을 꿇고 바치면서, “원하옵건대 명공(明公)께서 한 번 글 지으시는 노고를 아끼지 마시고 베푸시어 이 목마르고 주린 사람의 소망을 풀게 해 주십시오. 그러신다면 저의 죽음을 살려 주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곳에 살을 붙여 주는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풍류장(風流場)의 한 좋은 일이라 생각되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장원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왜 다른 시를 구해다가 내가 지은 양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합니까.” 하니, 그는 또 말하기를, “고명한 선생의 시명(詩名)이 당대에 제일인 까닭으로 장공께서 꼭 얻고자 하옵니다. 다른 분의 시야 어디 이를 나위가 있습니까.” 하였다. 장원이 이에 윤공에게 명령하여 붓과 벼루를 가져오게 하였다. 성천화연(成川畵硯 벼루 돌)에는 붉은 갑(匣)으로 꾸미고 금과 주석으로 단장하였다. 낭미필(狼尾筆) 한 자루와 영해선단(瀛海仙丹 먹 이름) 한 개를 가져왔다. 장원은 본래 미목이 훤하게 생겼으며, 바야흐로 시를 읊을 때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신을 낸다. 손수 먹을 갈고 윤공더러 종이를 펴라 하여, 마침내 율시(律詩) 한 수를 내리쓰니,
보압좋은 향로(옛날의 향로는 오리 모양이었다)에 향불 잦아지고 / 寶鴨香銷罷
난당(아름다운 방 또는 여자가 쓰는 그윽한 방)에는 연기 흩어지네 / 蘭堂烟散初
등잔불 식어가니 작은 병풍은 어슴푸레하고 / 燈寒小屛暗
달 떠오르니 반쯤 드린 발에 빛 새어 들어 오누나 / 月上半簾疎
혀를 내밀면 모두 시샘을 이루고 / 吐舌皆成妬
맹약을 삼으면 또 헛될까 두렵구나 / 申盟更怕虛
낭군(郞君)의 정이 나와 같을 양이면 / 郞君情似妾
어찌 백년 된 옥이라도 아낄 것인가 / 何惜百年磲
하였다. 다 써서 주니, 그 관인이 고맙다 인사하고 돌아갔다. 얼마 후에 그 관인이 와서 사례하여 말하기를, “장 사또께서 선생의 시를 얻고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거문고 타는 아가씨를 돌려보내라고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또께서 그 운자를 써서 시를 지어 편지를 선생께 보내는 동시에, 바다의 맛난 생선도 보냈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장원이 또 배율(排律)을 지어 보내 답례하니, 왕복이 항시 끊이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그 관인이 또 와서 윤공에게 청하기를, “제가 다행히도 변변치 못한 음식을 장만하였으며, 또 성악(聲樂)도 준비하였으니, 공께서 부디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라며, 또 윤 수재(尹秀才)도 함께 오셨으면 합니다.” 하니, 장원이 승낙하였다. 다음 날 둘이 같이 그 집에 가 보니, 집은 백악산(白岳山) 밑 장의동(臧義洞)에 있는데, 동산과 연못의 경치가 매우 좋았고, 음식도 잔뜩 차려 놓았다. 술에 어느 정도 취하자, 금랑(琴娘)을 나오라 하여 술을 권하게 하였다. 그때에 참석한 사람은 교리 민기문(閔起文)이었는데, 아마 관인과 친한 사이인 것 같다. 이 날은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게 놀고 밤이 들어 헤어졌다. 그 관인은 옥천군수(沃川郡守) 왕손명(王孫名)이었다. 윤상공이 일찍이 나에게 이같이 말하여 주었다.
○ 을유년에 사암(思菴) 박순(朴淳)은 영의정이 되고,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과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은 좌의정과 우의정이 되고,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청천(聽天) 심수경(沈守慶)은 좌찬성과 좌참찬이 되었는데, 다섯 공은 모두 장원 급제를 한 분들이었다. 그때에 다섯 분이 장원 계(契) 축(軸)을 만들었는데, 이름을 ‘정부용두회축(政府龍頭會軸)’이라 했다. 심 상국(沈上國)이 시 짓기를,
깊고 넓은 상부(相府)의 용두회는 / 潭潭相府會龍頭
성하여 오늘날 비할 만한 짝이 없구나 / 盛事如今罕比侔
-제 3구는 기억하지 못한다. -
도리어 보통 물건이 명류에 섞인 것을 부끄러워하노라 / 却慙庸品厠名流
하였다. 정송강은 이에 화답하여,
다섯 학사가 다섯 장원이 되고 보니 / 五學士爲五狀頭
성명(聲名)이 내게 이르러 서로 짝이 못 되노라 / 聲名到我不相侔
다만 좋은 일에 분별이 없어서 / 祗應好事無分別
모두 당시에 제일류라 하는구나 / 等謂當時第一流
하였다.
○ 기축년에 종묘의 도적 이산(李山)의 옥사가 일어났는데, 정송강(鄭松江)이 좌상(左相)으로서 위관(委官)이 되고, 상국(相國) 유홍(兪泓)은 판금오(判金吾 금오는 이조 때 의금부(義禁府)의 별칭이다)가 되어 같이 옥사를 다스렸다. 하루는 승지가 논죄서를 가지고 대궐로 들어간 뒤, 송강과 유공이 그냥 앉아서 임금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밤이 이미 깊었는데도 나오지 아니하자, 심심파적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유공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에게 그럴싸한 일이 있었는데, 상국께서 다행히 한 번 웃으시는 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이어서, “어떤 양반의 한 종이 딸 하나를 낳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답니다. 그 종의 집이 밖에 있는 까닭으로, 그 딸이 가끔 와서 찾아보는데, 바야흐로 이팔청춘이 되어 봄바람에 나부끼는 꽃과 같았습니다. 그 양반이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 벌써 몸이 늙고 쇠약해져서 창녀를 가까이할 수 없소. 아무 종의 딸이 성품이 혜명(彗明)한 듯하니, 그녀로 하여금 금침을 거두게 하려 하는데, 부인 생각은 어떠하오.’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영감, 영감을 모시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디 될 말씀이오. 그렇게까지 밖에 있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 만일 아무 종으로 하여금 앞에서 시중을 들게 한다면 매우 좋겠소. 내 좋은 날을 보아 데려오도록 하리다.’ 하였습니다. 이 바보는 부인의 말에 시기하는 기색이 없음을 매우 기뻐하여 날 받아 성례하기만 고대하였습니다. 며칠 뒤 장인이 들렀는데, 그와 부인이 같이 모시고 있다가 부인이 바로 이 사실을 말하기를, ‘이 영감께서 아무 종의 딸로 자리걷이를 시키고자 하옵는데, 좋겠습니까.’ 물었다. 그랬더니 장인이 말하기를, ‘네 그게 무슨 말이냐. 그것은 잘못이다. 내 벌써 그와 상중(桑中 남녀가 불의로 즐기는 것)의 기쁨을 나누고 있는 터인데.’ 하였더니, 바보는 얼굴이 빨개져서 감히 아무 말도 못하였다고 합니다. 얼마 후에 한 작은 아전이 이 여자를 얻어 송현동 어떤 행랑에 두고,출입할 때에는 문을 잠그고 다녔다 합니다. 이 바보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눈이 아뜩아뜩해지도록 바라볼 뿐이었답니다.” 라고 말이 끝나자, 송강은 드디어 자리에서 그대로 구점(口占 압운 같은 형식을 갖추지 않고 즉석에서 부르는 시이다)으로 칠언절구 한 수를 지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기약을 잘못 부인을 향해 꾀하였더니 / 佳期誤向婦人謀
허락은 비록 은근하였지만 결국은 속아서 마음만 허전할 뿐 / 唯諾雖勤竟謬悠
문득 청아로 하여금 꿈에 오게 하더라도 / 却使靑蛾來夢寐
바라보는 가운데 석양에 다락만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리라 / 望中明滅夕陽樓
하였다. 유공이 사례하여 말하기를, “상국의 시는 참 좋습니다. 이 시는 박한 풍정(風情)을 더욱 드러나게 합니다.” 하였다.
○ 《장자(莊子)》〈천하편(天下篇)〉에,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란 말이 있다. 사마(司馬) 주에 이르기를, “새가 빛을 없어지게 하는 것은 고기가 물을 가리는 것과 같으니, 고기가 움직이면 물을 가리나 물은 움직이지 않는다. 새가 움직이면 그림자가 생기고, 그림자가 있으면 빛이 없어진다. 그러나 없어지는 것은 가는 것이 아니요, 빛은 오는 것도 아니다.” 라고 했다. 임용재(林庸齋)는 말하기를, “새가 감에 그림자가 따르니, 이는 새는 움직이되 그림자는 일찍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 주장은 모두 조리에 잘 통하지 않는다. 서화담 선생이 말하기를, “만물은 본래 그림자가 없다. 해를 만나게 되어 그림자가 생기는 것이니, 물(物)이 해를 만나게 되면, 어디에 가든지 그림자가 없지 아니하다. 나는 새가 어찌 그림자를 낳을 수 있겠는가. 그림자는 해에서 나오는 것이니, 새가 움직인다 함은 옳지만 만일 그림자가 움직인다고 한다면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이 극히 이치 있는 말이다.
○ 정송강은 이부 낭중이 되고 정지연(鄭芝衍) 공은 원외랑(員外郞)이 되었다. 그 뒤 신사년에 정공이 재상의 자리에 앉게 되자, 취하여 한 절을 지어 보냈는데,
티끌 속에서 어찌 지금 승상이 될 줄을 알았으리오 / 塵中豈識今丞相
취한 뒤에 오히려 그저 옛 좌랑을 의심하네 / 醉後猶疑舊佐郞
라고 했다.
○ 상국 정지연(鄭芝衍)이 재상이 되었을 때 송강은 호남(湖南) 안절사가 되었다.정공에게 사의를 표하여 말하기를, “방금 남도를 사찰하니 조심스러운 것이 많고, 군사일도 매우 많다 하옵니다. 저 같은 백면서생으로서 군사의 일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그 적임자가 되겠습니까.” 하였다. 정공이 말하기를, “세상 의론이 모두 그대가 선비의 절개가 있다고 일컫는데, 그 절개를 굳게 지킨다면, 어디에 간들 잘 하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송강이 웃으며 말하기를, “공명과 부귀는 상공께서 다하시고 홀로 괴로운 선비의 절개를 송강 나 한 사람에게만 맡기시면, 제가 어떻게 이겨내겠습니까.” 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이 이 말을 명언이라고 하였다.
○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벼슬을 버리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가실 때, 송강이 뒤따라 강가에서 선생을 보냈다. 그 전별시에.
안위는 아랑곳없이 나라를 떠나가는 날 / 安危去國日
풍우를 무릅쓰고 성을 나가는 사람이 되었도다 / 風雨出城人
떠나는 마음은 봄풀같이 무럭무럭 자라 / 離思如春草
강남 가는 곳마다 새로웠으리 / 江南處處新
하고, 또 한 수 지어 보내기를,
뒤따라 광릉까지 와 보니 / 追至廣陵上
신선 배는 이미 어디 갔는지 아득하구나 / 仙舟已杳冥
봄바람에 한없는 생각을 안고 / 春風無限思
석양에 홀로 정자에 오름이여 / 斜日獨登亭
하였다.
○ 병인년에 정송강이 직지어사(直指御使)의 직함을 띠고 영북(嶺北 함경도)으로 나아가, 함산(咸山)에 이르렀다. 10월에 국화를 보고 칠언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하늘 밖에 기러기가 없어 소식이 오지 않아 갑갑하구나 / 天外無鴻信不來
돌아가고픈 마음 안타까워 날마다 망향대에 올라 봄이여 / 思歸日上望鄕臺
은근히 피어나는 10월 함산의 국화는 / 殷勤十月咸山菊
중양(9월 9일)을 위하여 핀 것이 아니라 나그네를 위하여 피었구나 / 不爲重陽爲客開
하였다. 조정으로 돌아오니, 상공(相公) 박충원(朴忠元)이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이러한 까닭으로,
은근히 피어나는 10월의 함산 국화는 / 殷勤十月咸山菊
중양을 위하여 핀 것이 아니라 나그네를 위하여 피었구나 / 不爲重陽爲客開
란 것을 지었구려.” 하고 환영했다.
○ 송강이 암행어사가 되어, 북쪽 변방(함경도 지방)으로 갈 때에 단가(短歌)한 수를 지었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명종대왕이 돌아가시니, 아마 그 노래가 참서(讖書)인 모양이다. 계미년 봄에 송강이 관풍사(觀風使)로 순찰하는 길에 길주(吉州)에 이르렀더니, 늙은 기생 하나가 그 단가를 불렀다. 취한 김에 이것을 두고 칠언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스무 해 앞서 부른 새하곡이 / 二十年前塞下曲
어느 해에 이 기생들 와중에 떨어졌는가 / 何年落此妓林中
외로운 신하 아직 죽지 못하여 먼 하늘가에서 짓는 눈물을 / 孤臣未死天涯淚
강릉을 바라보며 새벽바람에 뿌려 볼까 하노라 / 欲向康陵洒曉風
하였다.
○ 계미년 봄에 변방 오랑캐가 쳐들어와 경원부(慶源府)를 함락시켰다. 그때의 부사 김유(金濡)와 판관 양사의(梁士毅)만이 홀로 화를 면했다. 임금께서 선전관을 파견하여 이들을 처벌하였는데, 그때에 이제신(李濟臣) 공은 북문을 지키고, 김우서(金禹瑞) 공은 남도의 병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송강은 상공(相公) 유홍(兪泓)과 교대하여 방백(方伯)이 되어 함경도에 들어간 지 3일만에야 비로소 자세한 보고를 덕원(德源) 도중에서 들었고, 경성(鏡城)에 이르러 10여일을 묵게 되었다. 조정에서 정언신(鄭彦信)으로 도순찰사(都巡察使)에 보충하여 임지에 가게 하였는데, 송강은 경성에서 이 일행을 기다렸다. 정공이 입성하던 날, 방백이 5리 길을 나와서 맞이하였고, 군복을 입고 활과 살을 동개에 넣어 메고 앞서서 인도하였다. 순찰사가 들어가 대청 북벽(北壁)에 좌정하였고, 두 홍의병(紅衣兵)이 하사한 검을 메고 등 뒤에 서고, 이조 정랑 김수(金晬)와 홍문관 교리 정희적(鄭熙績)은 종사관으로서 모두 군복에 활과 칼을 차고 교의(交椅) 앞에 모시고 서 있고, 원량(元亮)과 이유의(李由義)는 당상비장(堂上裨將)으로서 동서 벽에 마주 서 있었고, 군관(軍官) 30여 명은 나누어 그 뒤에 서고, 뜰 가운데에는 깃발을 세웠다. 방백이 군복을 입고 들어가 알현하며 읍례를 하였다. 병사는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입어야 하는데, 이날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대소(大小) 관원이 차례대로 들어가 예를 행하였다. 당시 나는 안변(安邊)의 교수로서 방백을 따라 그 막하에 참여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깃발을 메고 와 뜰 가운데 비로소 세우는 것을 보았다. 조정에서 정언신(鄭彦信) 공을 관찰사 겸 도순찰사로 삼고, 송강은 체직되어 예조 참판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 송강이 돌아올 때 마천령(磨天嶺) 원수대(元帥臺)에 올라, 이 고을 사람에게 술을 가져오도록 명하고, 한 순배 돌아가 괴로움이 사라지자, 마침내 한 절구를 즉석에서 짓고 부르기를,
천 길 산머리에서 한 잔 술 마시니 / 千仞江頭一杯酒
북쪽 구름은 다 날아가고 펀펀한 바다만이 넓기만 하도다 / 朔雲飛盡海茫茫
대장이 승전을 보고함은 어느 때쯤 되겠는지 / 元戎奏捷知何日
늙어가는 몸이 봄을 만나니 발광이라도 하고 싶네 / 老去逢春欲發狂
하였다.
○ 이후백(李後白) 공이 영북(嶺北 함경도)의 안절사로 가서 그 전부터 내려오던 폐단을 모두 없애버렸다. 따라서, 군현의 부세 수입을 거의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 웅부(雄富)한 고을이 드디어 쇠해지고 말았다. 그 뒤 수령들이 혹 허위로 조작하여 다른 세를 징수하니 백성들이 비로소 이것을 괴롭게 여겼다. 임제(林悌)가 시로써 이것을 풍자하고 슬피 여겨 말하기를,
혜초는 서릿바람에 지고 옥은 티끌에 버려졌는데 / 蕙折霜風玉委塵
한때 맑은 덕이 벼슬아치들을 고무시켰네 / 一時淸德動簪紳
가련하도다 맥도는 결국 이어가기가 어려워 / 可矜貊道終難繼
상국이 백성의 병을 고쳐 준 것이 바로 백성의 병이 되었도다 / 相國醫民是病民
하였다.
○ 양창해(楊滄海)가 안변 군수(安邊郡守)로 있을 때, 임제(林悌)는 고산 찰방(高山察訪 지금의 철도 국장과 같은 벼슬)이 되었다. 임제가 창해에게 농담삼아 말하기를, “덕산(德山)역 벽 위에 칠언절구 한 수가 붙어 있는데, 내 못 쓰는 글씨로 쓴 것입니다. 아마 북도(北道) 변장(邊將)이 지은 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고 창해에게 그 시를 죽 불러 주는데,
오랑캐가 일찍 수십 고을을 엿보았는데 / 胡虜曾窺數十州
장군이 말을 달려 봉후가 되었구나 / 將軍躍馬取封侯
이제 멀리 떨어진 요새에 전란이 그치면 / 如今絶塞煙塵靜
장사들이 한가로이 옛 역루에서 잠들리로다 / 壯士閑眠古驛樓
하였더니, 창해가 웃으면서, “이것은 무부(武夫)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반드시 고산(高山) 당신의 솜씨일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최경창(崔慶昌)이 ‘장군약마취봉후(將軍躍馬取封侯)’를 고쳐서 ‘당시약마취봉후(當時躍馬取封侯)’로 하였다.
○ 임진란 때에는 왜놈들이 득실거렸다. 선조(宣祖)는 서쪽으로 피란 길을 떠났는데, 상국(相國) 정철(鄭澈)을 귀양살이에서 풀어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에 임명하였다. 정철이 명을 받고 남으로 내려갈 때, 황해도 장연(長淵)의 금사사(金沙寺)에 이르러 10일 동안을 묵게 되었는데, 때는 - 4자 빠짐 - □해 7월 가을이었다. 정철이 감개하여 드디어 율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금사사에 열흘 머무른 것이 / 十日金沙寺
고국을 생각하는 마음 삼년과 같이 길게 하누나 / 三秋故國心
밤 밀물은 새벽 바람을 흩뜨리는데 / 夜潮分爽氣
돌아오는 기러기 떼는 슬픈 소리를 보내오네 / 歸雁送哀音
오랑캐가 나타나니 자주 칼을 보게 되고 / 虜在頻看劍
훌륭한 사람이 죽었으니 거문고를 끊고자 하노라 / 人亡欲斷琴
평소에 읽던 출사표를 / 平生出師表
난리를 당하여 다시 한 번 길게 읊어 보노라 / 臨難更長吟
하였다. 이때에 고경명(高敬命) 공이 전사한 까닭으로 제6구에 훌륭한 사람이 죽었다고 썼다.
○ 진후산(陳后山)의 〈진소유자서(秦小游字序)에 이르기를, “미산(眉山) 소공(蘇公)이 서주(徐州)의 수령이 되었을 때, 내가 평민으로서 간간이 찾았는데, 양주(楊州)에서 손님으로 있을 때와 같았다. 그때에 진자(秦子)가 들렸다.”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간견여객(間見如客)’과 ‘양진자과언(楊秦子過焉)’에 구두를 떼니, 매우 가소롭다. 일찍이 《시인옥설(詩人玉屑)》을 보니, “소동파(蘇東坡)가 양주 지사로 있을 때 진후산이 가서 그와 종유하였는데, 동파가 대단히 후하게 대접하였다. 진후산은 서주 사람이다. 동파가 서주의 수령이 되었을 때 후산이 가끔 뵈었고, 동파는 대접하기를 양주에 손님으로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하였다.
○ 당시(唐詩)에 “풍취산대요지우(風吹山帶遙知雨) 노습하상이보추(露濕荷裳易報秋)”란 구절이 있는데, 주석가들이 해석을 하지 못하였다. 성홍(盛弘)의 〈형주기(荊州記)〉를 고찰해보면, “형산(荊山)에 아침 구름이 있어, 산허리에 비껴 띠면, 아침이 다하기 전에 비가 오는데, 지방 사람들은 이것을 ‘산대(山帶)’라 부르니, 《예문유취(藝文類聚)》에서 볼 수 있다.” 하였다. 이에 의하면 본문의 해석은, “바람이 불고 형산에 아침 구름이 끼니 비올 줄 짐작하겠고, 이슬이 연잎에 맺혔으니 쉽사리 가을됨을 알리누나.” 로 하는 것이 옳겠다.
○ 《사기》〈신릉군전(信陵君傳)〉에, “고기를 굶주린 범에게 던져 줌과 같다.”란 말이 있는데, 반맹견(班孟堅)은 이글을 인용하되 요약하여 말하기를, “주린 범에게 고기로써 함과 같다.” 하였으니 이것은 주린 범에게 고기로써 한다는 말이다. 《설문(說文)》및《운서(韻書)》를 상고해 보면 뇌(餒)와 뇌(餧) 자는 음과 뜻이 같다. 두초당(杜草堂)은 《한서(漢書)》의 글 뜻을 알지 못하여, 바로 〈세병마행(洗兵馬行)〉제목의 시에서, ‘회흘위육포도궁(回紇餧肉葡萄宮)’이라 하고, 소과(蘇過)가 읊은 〈서수필(鼠鬚筆)〉이란 시에는, ‘걸육위아묘(磔肉餧餓猫)’라 하여, 모두 뇌(餧)를 먹일 궤(餽) 자의 뜻으로 읽었다. 이는 두자미의 잘못으로 보기는 하지만, 의심할 만하다.
○ 서울 안에 한 선비가 있었는데, 집이 남산 아래에 있었다. 동산 가운데는 바위틈에서 나오는 샘이 맑고 차가웠으며, 또 오래 묵은 밤나무가 있기 때문에, 이름을 ‘율정(栗亭)’이라 하였고 그 집이 이 정자로 유명해졌다. 어느 날 이름난 친구 5ㆍ6명이 그 집에 모여 고회(高會 모임을 높여서 하는 말)를 가졌다. 이 가운데 높은 벼슬을 가진 사람이 말하기를, “내 집은 서울 가까이 있는데, 지대(池臺)가 그윽하고 뛰어납니다. 그대의 이 집과 바꾸려 하는데, 어떻소.” 하자, 주인은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흔들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 별장까지 더 드리겠소.” 했지만, 또 승낙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또 주인에게 말하기를, “악양루(岳陽樓)에다 덤으로 천하의 반을 덧붙여서 주면, 주인은 허락할 수 있겠소.” 하였으나, 주인은, “안 될 말이오.” 하였다. 옆에 있던 사람이 말하기를, “이만하면 장사가 잘된 셈인데, 주인은 왜 허락하지 않으시오.” 하자 마침내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상국(相國) 용재(容齋 이행(李荇)의 호)가 이 말을 듣고, 그를 위하여 시 한 구절을 지었다.
한 골짜기에 천하의 절반을 더하는 값을 오래도록 지니고 있으니 / 一壑久傾天下半
율정을 어찌 악양루와 바꾸랴 / 栗亭寧換岳陽樓
하였다. 그 사람이 죽은 다음 용재는 이 구절에다 한 구절을 더 지어 절구로 만들어 만가(挽歌)로 하였는데, 지금 문집 속에는 이 말이 전해지지 않으니,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 최표(崔豹 진(晉) 나라 사람. 자(字)는 정능(正能))의 《고금주(古今注)》에, “〈공후인(箜篌引)〉은 조선(朝鮮)의 진졸(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것이다. 자고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가는데, 한 백발이 성성한 미친 늙은이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손에는 술병을 든 채 물에 뛰어들어 난류(亂流)를 헤치며 건너가니, 그 아내가 따라오면서 가지 말라고 소리쳤으나.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그 아내가 공후(箜篌)를 잡아당겨 타며 부른 것이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이다. 그 소리가 대단히 슬펐는데, 이 곡을 끝마치자, 그 아내도 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곽리자고가 돌아와 그 소리를 아내에게 말해 주니, 하내 여옥(麗玉)이 슬피 여겨 공후로 그 소리를 묘사했는데, 이 소리를 듣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울지 않는 자 없었다. 여옥은 이 소리를 가지고 이웃집 여자 여용(麗容)에게 전하였는데, 이름을 ‘공후인(箜篌引)’이라 하였다.” 했는데, 조선진(朝鮮津)을 고찰해 보면,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이다. 그런데, 이태백의 〈공무도하〉에,
황하가 서로 흘러와 곤륜을 터놓았으니 / 黃河西來決崑崙
만 리를 울부짖어 용문에 와서 부딪치누나 / 咆哮萬里觸龍門
하였으니, 비록 시인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일로 하여금 실(實)을 잃어버리게 하였으니, 법 받을 것이 못 된다.
○ 《맹자》에, “어른을 위하여 절지(折枝)한다.”란 말이 있는데, 송자(宋子)는 이에 주하기를, ‘초목의 가지를 꺾는 것이다.’ 하였다. 《문선(文選)》의 〈광절교론(廣絶交論)〉을 고찰해 보면, ‘포복위이절지저치(匍匐逶迆折枝舐痔)’ 주에, 조기(趙岐)의 《맹자(孟子)》주를 인용하여서 해석하기를, ‘가려운 데를 긁는 것이다.’ 하였다. 《예기(禮記)》‘경앙소지(敬仰搔之)’ 주에, ‘절지(折枝)는 가려운 데를 긁는 것이다.’ 하였다. 명 나라 사람도 이에 대하여 변론한 사람이 있다.
○ 두시(杜詩)에,
비파는 나무마다 향기롭다 / 枇杷樹樹香
고 한 시구에 대해 해설하는 사람들이 ‘비파는 향기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잘못이다. 내가 일본에 갔을 때, 어느 옛 절에서 비파나무 한 그루를 보았는데, 대단히 무성하였고 키가 몇 길이나 되었다. 아래의 잎은 크고 둥글며, 위의 잎은 길쭉하고 약간 작아 모양이 북나무 잎 같았다. 10월에 꽃이 활짝 피는데, 모양은 배꽃 같고, 향기가 매우 진하여 바람이 없어도 멀리 퍼졌다. 늙은 중에게 물어 보니, ‘노귤(盧橘)’이라 하였다. 겨울에 열매가 나서 여름 5월달이 되어서야 익는다. 당시(唐詩)에,
노귤꽃이 피니 신나무 잎이 쇠했다 / 盧橘花開楓葉衰
하였고, 또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上林賦)〉에도,
노귤이 여름에 익는다 / 盧橘夏熟
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그러하다.
○ 산곡(山谷 중국의 시인 황산곡)에게 〈수선화(水仙花)〉라는 시가 있는데, 나는 무슨 꽃인지 몰랐었다. 일본에 한 가지 풀이 있는데, 10월에 처음 나고 잎은 가란(假蘭) 같은데, 키가 두어 자나 되었다. 11월에 꽃이 활짝 피는데 흰 빛이다. 12월에 꽃이 떨어지고, 1월에 줄기가 마르고, 2월에는 말라 죽는다. 중에게 이 풀의 이름을 물었더니, ‘수선화(水仙花)’라 하였다.
○ 삼신산(三神山)은 모두 바다 가운데 있다. 연 소왕(燕昭王) 때부터 방사를 보내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고 진시황(秦始皇)이 서불을 보내서 남녀 3천을 싣고 가서 불사약을 구하게 하였으나, 또 찾지 못하였는데, 매양 바람이 배를 휘몰아 간 것으로 해석하였다. 오피(伍被)는 말하기를, “서복(徐福)이 단주(亶州)에 이르러 평원과 넓은 못을 얻고 왕불래(王不來)에 머물렀다.” 하였는데, 곧 지금의 일본이다. 두시(杜詩)에,
방장은 삼한 밖이다 / 方丈三韓外
란 구절이 있는데, 해설하는 사람들은 삼신산이 모두 우리 나라에 있는 것으로 여겨, 방장(方丈)은 지리산(智異山)이라 하고, 영주(瀛洲)는 한라산(漢拏山)이라 하고, 봉래(蓬萊)는 바로 금강산(金剛山)이라 한다. 내 생각으로는, 한라산은 바다에서 솟아 나왔고, 당 나라 때에는 일본의 부사산(富士山)이 높이가 4백 리요, 겨울 여름 할 것 없이 눈이 있다고 알려졌으니, 이것이 영주산이 아닐까. 그러나 《열자(列子)》〈귀허편(歸墟篇)〉에, “다섯 산이 있는데, 여섯 자라가 이것을 이고 있었다. 용백국(龍伯國)의 사람들이 자라를 낚은 뒤로는 이 다섯 산이 물결을 따라 오르내려 대여(岱輿)와 원교(圓嶠) 두 산은 표류하여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다만 봉래ㆍ방장ㆍ영주 세 산만이 처음으로 뿌리를 박았다.” 하였으니, 세 산은 동해 대황중(大荒中)에 있는 것이요, 우리 나라에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 당(唐) 나라의 모란은 서촉(西蜀)으로부터 왔는데,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 비로소 중국에 성하였다. 명황(明皇) 초년에 나라 금중(禁中)에 심었는데, 소위 ‘목작약(木芍藥)’이란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많이 심었으나 일찍이 덩굴로 나는 것은 없었다. 함경도(咸鏡道) 경흥(慶興) 땅에 바로 덩굴로 난 모란이 있는데, 식자들은 생각하기를, 금(金) 나라의 황룡부(黃龍府)는 경흥 땅과의 거리가. 6ㆍ7일의 일정 밖에 걸리지 않는다. 금 나라 사람이 송 나라의 간악(艮岳) 화목(花木)을 다 옮겨다 황룡부에 심었다는데 이것이 그 종자라고 여긴다. 또 고찰해 보면, 송경(松京 지금의 개성임)에 진봉산(振鳳山)이 있는데, 도성(都城)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몇 리 안 가서 옛 절터가 있는데, 돌틈에 덩굴로 나는 모란이 있다. 붉은 것과 흰 것이 서로 섞여 나와 돌 위에 뻗었는데, 사람들이 옮겨다 심으려고 해도 그 뿌리가 돌 사이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캐어 내지 못한다. 산불이 나서 매양 이 모란을 태우지만, 죽지 않는다.
○ 《사기》〈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사왈주신(謝曰主臣)’이란 말이 있는데, 장안(張晏)이 주하여 말하기를, “오늘날 남에게 사례하면서, ‘황공(惶恐)합니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마융(馬融)의 〈용호부(龍號賦)〉에.
용맹 있는 자나 겁장이가 보더라도 / 勇怯見之
주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莫不主臣
하였고, 〈풍당전(馮唐傳)〉을 고찰해 보면, 또한 ‘주신’이란 말이 있다. 한문공(韓文公)의 〈평회서비(平淮西碑)〉에, “내외를 막론하고 모두 주(主)요, 모두 신(臣)이다.” 하였는데, 이 말을 쓴 것이다. 그러므로 《운부군옥(韻府群玉)》에서 신(臣) 자에 대해 이것을 인용하였다.
한문공(韓文公)의 〈서언왕묘비(徐偃王廟碑)〉에, 언왕탄당국(偃王誕當國)이라는 말이 있는데, 읽는 사람들이 모두 탄(誕) 자에 와서 글귀를 끊어 탄을 언왕(偃王)의 이름으로 여긴다. 이것은 방회(方回)의 잘못을 답습한 것이니, 방회가 《영규율수(瀛奎律髓)》주에 있어서 서언왕의 이름은 탄(誕)이라 하였다. 이것은 바로 한문공의 비문을 보고 그것을 이름으로 오인한 것이다. 《박물지(博物志)》를 상고해 보면, 서(徐) 나라 궁인(宮人)이 잉태하여 알을 낳았다.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여 물가에 내다 버렸다 외로운 홀어머니가 곡창(鵠蒼)이란 개를 길렀는데, 곡창이 버린 알을 물고 돌아왔다. 덮어서 따뜻하게 하였더니 바로 어린애가 나왔는데 궁인이 듣고 다시 가져다 길렀다. 자라서 가계를 이어 받아 서군(徐君)이 되었다. 뒤에 곡창(鵠蒼)이 죽을 때 뿔이 나오고 꼬리가 아홉이 되어 황룡(黃龍)으로 변화하였는데, 곡창을 혹은 후창(后蒼)이라 한다. 시자(尸子)는 말하기를, “서언왕(徐偃王)이 힘줄은 있으나 뼈가 없다”고 하였는데, 배인(裴駰)이 말하기를 “언(偃)이라고 이름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언은 바로 그 이름이다. 또 한문공이 비문을 지을 때 일찍이 그 사람의 이름을 바로 가리켜 쓰지 아니하고, 반드시 ‘휘(諱)는 아무 자(字)는 아무’라 하였다. 이제 언왕의 비문을 지으면서 바로 가리켜 ‘언왕탄’이라 한다면, 서□부(徐□夫)는 바로 언왕의 후세손인데, 어찌 남의 선조를 위하여 비문을 지으면서 그 이름을 휘(諱)하지 않겠는가. 내 생각에는 탄(誕) 자는 시서(詩書)의 ‘탄수궐명(誕受厥命)’의 탄(誕)과 탄치지한빙(誕寘之寒氷)의 탄 자와 같다.
○ 영동(嶺東) 아홉 고을은 모두 바다에 연해 있으나, 평해(平海)의 망양정(望洋亭)만은 몇 리 바다로 들어간 지점에 있다. 뛰어난 시로서는 오정(梧亭) 박란(朴蘭)의 시를 절창(絶唱)으로 삼는다.
나는 듯한 정자의 뛰어난 경치가 우리 나라에 으뜸이라 / 飛亭勝絶冠吾邦
영 밖 누대들 모두 와 항복을 하네 / 嶺外樓臺盡乞降
양곡 (해 돋는 곳)에 치미는 물결은 솟는 해를 떠받쳐 올리고 / 暘谷浪飜掀出日
고깃배 돛에 심한 바람이 불어오니 휘청거리는 돛대만 앙상하구나 / 漁帆風急露危杠
누가 앞으로 낚시질을 배워서 자라를 여섯씩 한 줄에 꿸꼬 / 誰將學釣鼇連六
나는 신선을 따르고자 신을 한꺼번에 둘씩 들어보네 / 我欲追仙寫擧雙
천년토록 뛰어난 시인들이 수곽에 부끄럽게 여긴 까닭은 / 千古雄才慙水郭
바다와 강을 아우른 장관을 읊기 어렵기 때문이라네 / 壯觀難賦海兼江
하였는데, 이 시는 오정(梧亭)이 강릉의 교수로 있을 때의 앞의 운으로 지은 것이다.
○ 참판(參判) 성수익(成壽益)이 막좌(幕佐)로 있을 때 절구 하나를 지었는데, 내 아버지께서 제일이라고 치켜세웠다. 그 시에,
행차 10리길 오는데 꿈틀거려 열흘이 걸렸네 / 行來十里動經旬
동쪽 경치 모조리 보고나니 눈이 더욱 새롭고야 / 看盡東隅眼更新
알지 못하겠노라, 아득한 저 바다 밖을 / 不識渺然滄海外
어떤 천지가 있고,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 有何天地有何人
라고 하였다. 성공이 호서도사(湖西都事)로 있다가 관동(關東)으로 옮겨온 까닭으로 또,
언덕 같은 속리산을 버려두고 / 除却俗離丘垤外
웃으면서 풍악 팔천 봉을 보네 / 笑看楓岳八千峯
이란 시구도 있었다. 갑술년 겨울 아버지께서 평해(平海) 수령으로 계실 때 상공(相公) 이준민(李俊民)이 절구 한 수를 보냈는데,
평소에 크게 취했던 곳은 / 平生大醉處
평해 망양정 / 平海望洋亭
그대를 보내고 그 틈에 놀게 하오니 / 送子樂其間
벼슬길에 얻은 정이 끝이 없어라 / 風塵無限情
하였다. 박오정이 이 글을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영공의 시가 어찌하여 평측(平仄)을 잃었습니까. 모름지기 고쳐야 할 것입니다.” 하니, 이상공이 말하기를, “양념을 하지 않은 고깃국과 현주(玄酒 물의 별명)에 초맛을 가미하지 않는 것을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 간성(杆城) 청간정(淸澗亭)의 누제(樓題)는 모두 쌍(雙)과 창(窓) 두 자를 써서 지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양창해 선생 것이 더욱 좋다.
푸른 바다 붉은 무리 둥근 해의 반을 줄그었는데 / 碧海暈紅規日半
이끼 푸르고 바위 흰데 연기와 갈매기 짝지어 가네 / 蒼苔巖白煙鷗雙
금과 은으로 꾸민 대 위에 외로이 휘파람 부니 / 金銀臺上發孤嘯
넓고 넓은 천지 창으로 들어오네 / 天地浩然開入窓
이 시를 어떤 사람이 전하다가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공에게 보이니 말하기를, “혹 득의하여 이처럼 지을 만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반드시 이 시보다 나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우리 아버지께서도 이 운을 사용하여 지으시기를,
가랑비에 흰 갈매기 쌍쌍이 날고 / 疎雨白鷗飛兩兩
해질 녘 고깃배는 쌍쌍이 떴네 / 夕照漁艇泛雙雙
바다에서 돋는 해를 맞고자 / 擬看暘谷金烏出
정각의 동쪽 문을 두지 않았네 / 畵閣東頭不設窓
하였는데,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였다. 김첨경(金添慶)공이 관찰사였을 때에 지은 시 두 수가 있다. 그 하나는
아깝다 홍문(鴻門)에서 구슬 한말[玉斗] 깨뜨린 것이 / 可惜鴻門玉斗撞
조각조각 흩어져서 한 쌍 두 쌍 못 맞추네 / 紛紛片片不論雙
변해 흰 새가 되어 천백 떼를 이루어 / 化成白鳥群千百
해돋이 객 창가에 시끄럽게 울어대네 / 日出呶呶鬧客窓
이며, 또 하나는,
좋은 경치 하도 많아 좌우 부딪치는데 / 好景紛紛左右撞
말 머리엔 미인들도 쌍쌍이 보이는구나 / 馬頭紅粉亦雙雙
다음 구절은 기억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그 뒤에 글을 쓰기를,
가소롭다 김문길이 / 可笑金文吉
정신 없이 좌우에 부딪치네 / 紛紛左右撞
하니, 듣는 사람이 조소하였다.
○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에서 양창해(楊滄海)가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푸르고 푸른 안개 누각은 삼천 길이나 되고 / 靑靑霧閣三千丈
희고 흰 구름 창은 일만 리 하늘과 같더라 / 白白雲窓萬里天
바라보다 뗏목을 잡으나 사람 보이지 않으니 / 望望乘槎人不見
어느 곳에서 누선(樓船)이 뜨는가 / 不知何處泛樓船
하였다.
○ 고성군(高城郡) 객사(客舍)에 제영(題詠)이 대단히 많다. 나의 아버지께서 지은 시에,
봉래산 바람과 햇빛이 속세를 떠나 / 蓬萊風日隔塵寰
기화와 요초가 눈 속에 피었구나 / 瑤草琪花耐雪寒
모래 쌓이니 삼천리가 은세계요 / 沙積三千銀世界
다락 높았으니 열두 옥난간이네 / 樓高十二玉欄干
햇빛이 푸른 바다에 비추어 드니 금거울을 연 듯하고 / 照人碧海開金鏡
손님을 공경하여 신선산도 돌관을 썼구나 / 敬客仙山戴石冠
아득한 연하는 수은 반죽과 같은데 / 縹渺煙霞多煉汞
곤륜에 어찌 홀로 참란이 있는가 / 崑崙何獨有驂鸞
하였다. 양창해가 이에 차운하여 짓기를,
참을 찾다 잘못하여 신선 지경에 들어오니 / 尋眞誤入羽人寰
백옥 같은 높은 누가 은하수에 닿았네 / 白玉高樓倚廣寒
창을 여니 안개 낀 하늘이 거울 속에 있고, / 窓拓烟千生鏡裏
뜰 앞 흐름에는 반짝이는 별이 강가에 떨어지네 / 砌流星漠落江干
주인은 예부터 요력(堯曆)을 나누어 줄줄 아는데 / 主人舊識頒堯曆
손님은 새로이 변한 초나라 관(冠)을 전하더라 / 客子新傳變楚冠
이태백의 하목(霞鶩) 자(字)를 달만한데 / 可戀謫仙霞鶩字
은 갈고리와 철 노끈에 난조 새가 춤추네 / 銀鉤鐵索舞廻鸞
하였다.
○ 고성(高城)에는 옛날부터 가볼 만한 명승지가 없었다. 병인년 겨울에 아버지께서 고성에 부임하시자, 다음 해 봄에 바로 관아 뒤 가시밭 가운데서 한군데 절승지(絶勝地)를 얻게 되어, 높은 곳을 평평하게 고르고 정자를 지었다. 서쪽은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이 쳐다보이는데, 천봉(千峯)이 한눈에 들어오며, 열흘 안 걸려 닿을 수 있고, 동쪽은 바다에 임하였는데, 거리가 10리도 못 되고, 남쪽은 남강을 수백 보 앞에다 굽어보며, 북쪽은 36봉이 바라보인다. 아래 제일 기승(奇勝)은 선군(先君)께서 기문을 짓고, 또 십영(十詠)을 지었으며, 양창해도 십영을 짓고 또 여기에 발문(跋文)을 지었는데, 문인들로 화답하는 분들이 많았다. 석봉(石峯) 한호(韓濩)는 거기에 액자를 크게 썼는데, 바로 해산정(海山亭)이다.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시를 보냈는데,
새로이 제일가는 강산을 열어 / 聞說新開第一區
바다와 산을 영동 한쪽 높이달았다는 말을 들었네 / 海山高揭嶺東陬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두었던 모든 것이 눈앞에 나타나니 / 天慳地秘森呈露
시흥(詩興)이 나면 그 누가 넓다 하여 이 경치를 거두지 못하랴 / 詩興何人浩莫收
하였고, 감사(監司) 김여경(金餘慶)이 시를 짓기를,
이제 와서야 비로소 물 되기가 어려움을 믿겠네 / 今來始信難爲水
이 산 밖에 다시 좋은 산이 있다고 누가 말하리 / 此外誰言更有山
조그만 마음이 저같이 큰 것을 용납하니 / 方寸容他如許大
이번 행차가 말발굽 사이에 있음이 아니라네 / 玆行不在馬蹄間
하였다. 국상(國相) 윤두수(尹斗壽)의 시에,
삼일포(三日浦)에 조각배 띄우니 / 三日湖中泛小舟
한 갈피 좋은 곳 이루어 물과 구름이 한가롭네 / 一區形勝水雲悠
일찍이 자주 놀던 곳 기억을 더듬어 써오니 / 書來曾憶重遊處
서른여섯 봉우리마다 가을 다함 없네 / 三十六峯無盡秋
하였고, 남언경(南彦經) 공의 시에,
가을 달에 남강이 넓고 / 秋月南江闊
서리 단풍은 북령에 높았더라 / 霜楓北嶺高
꿈속에 늘 그리는 그곳 / 夢魂長繞處
갈대밭에 바람도 우수수하겠지 / 蘆荻吹蕭蕭
하였다. 황윤길(黃允吉)공의 시에
희한한 서른 봉우리 아흔 호수는 / 三十奇峯九十湖
네 신선 거닐던 날 몰래 놀던 곳 / 四仙當日秘名區
티끌 낀 소매 깨끗해짐을 문득 깨닫겠구려 / 尋眞斗覺塵襟淨
이 몸이 도리어 그림 가운데 있지 않나 의심이 나네 / 身世還疑入畵圖
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그 전에 〈남강(南江)〉 〈입석(立石)〉 〈귀암(龜巖)〉세 시를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산해정에서 본 것을 읊은 시인 까닭에, 선군께서 원주 목사(原州牧使) 박공(朴公)에게 가 얻어다가 정자에 써 달았다. 〈남강〉의 시에,
맑은 놀이 뒤 개울 끝까지 가고 / 淸遊窮後浦
아름다운 구경 다시 남강에서 하누나 / 佳賞復南江
통발을 벗어난 고기 뛰는 놈 하나 / 跋扈魚跳一
사람 스친 기러기 나는 건 한 쌍 / 衝人雁飛雙
구름 열리니 하늘이 산을 놓았고 / 雲開天縱岳
봉우리 이지러졌는데 햇살이 창을 쬐이네 / 峯缺日烘窓
늦은 잔 거나히 취하니 / 晩酌成堪醉
나그네의 수심 어느덧 사라져 가누나 / 羇愁又受降
하였고, 〈입석(立石)〉의 시에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깎아 멧부리에 옮겨 두었나 / 夸娥剖劂移山岳
눈이 치솟고 구름이 쌓여서 바다에 던졌는가 / 雪矗雲堆擲海中
호랑이는 움키고 용은 잡아당기고 사람은 마주 섰으니 / 虎攫龍拏人偶立
총석정(叢石亭)만이 희한한 꾸밈 독점하지는 못하리라 / 未應叢石擅奇功
하였으며, 〈귀암(龜巖)〉의 시에는,
먼 곳에 돌아다니는데 알아주는 이 없고 / 驅馳天畔少知音
다락에 오르니 고향 생각 간절하구나 / 感謝登樓動越吟
머리를 돌려 구봉에 푸른 구름이 합함을 보고 / 回首龜峯碧雲合
햇가에 일 없이 홀로 마음만 걸리네 / 日邊無事獨關心
하였다.
○ 판서(判書) 안위(安瑋)가 파주(坡州)의 목사로 있을 때, 아버지께서 그곳의 교수로 글을 가르쳤는데, 이미 황해주(黃海州)에 반자(半刺)를 지냈으므로, 안공이 선군(先君)과 풍류스러운 벗이어서 접대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 어느 날 선군께 종정도(從政圖) 시를 다시 지어 달라고 청했다. 선군께서 칠언장률(七言長律)을 지으셨는데,
단 낮잠을 몰아내는 꾀가 없더니 / 無術能驅午睡酣
종정도 펴 주사위 던져 다투니 기쁘기 한없어 / 展圖爭擲喜難堪
몸이 장상을 겸해 얻기를 시간 안에 기하고 / 身兼將相期移晷
손바닥에 침칠하여 공훈과 명성을 취하는 것이 잠깐 사이 / 唾取勳名在立談
마음속으로 세 번 생각함은 덕에 힘씀을 보존함이요 / 心上三思存懋德
가슴 가운데 하나의 염원은 탐욕의 싹이 틀까 경계함이네 / 胸中一念戒萌貪
뒷날 정색하기를 이같이 한다면 / 他年正色要如此
요순 군민에도 크게 부끄럽지 않으리 / 堯舜君民不大慙
하였다.
○ 내 맏형님의 휘는 은로(殷輅)이다. 5세 때부터 글을 잘 지어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상공(相公) 한규(韓㞳)가 강화 유수(江華留守)가 되었는데, 그때 선군께서는 성균관의 직강(直講)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계셨다. 맏형께서 겨우 아홉 살 되던 해, 어쩌다가 기와 조각 던진 것이 잘못되어 남의 집 장독에 떨어졌다. 이웃 사람은 누구의 짓인지 알지 못하고 불손한 말로 욕을 했다. 맏형은 이것을 듣고 그 사정을 하나하나 유수에게 호소했다. 유수는 잘 생긴 어린이가 뜰에 들어섬을 보고, 물어서 직강 집 아들임을 알게 되자,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묻기를, “너는 시를 지을 수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겨우 운이나 맞출 줄 압니다.” 하였다. 이때에 가뭄이 심하였으므로, 유수가 민우시(悶雨詩)를 짓도록 명하고 운(韻)자를 천(天) 하고 불렀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답하기를,
구름발이 공연히 하늘을 가렸네 / 雲霓空蔽天
하니, 또 전(田) 자를 가지고 짓도록 명했다. 대답하기를,
거북 등에 마른 논이 갈라졌네 / 龜背坼乾田
하였다. 또 연(年) 자를 가지고 지으라 하니,
노나라에서 무당을 불태우던 날이요 / 魯國焚巫日
은나라 탕 임금이 손톱 깎던 해일세 / 成湯剪爪年
하니, 유수가 무릎을 치며 칭찬하였다. 처음에는 사운(四韻 네 구로 된 율시임)을 짓도록 명하고자 했으나 서너 구절을 보더니, 곧 그만두었다. 아마도 재주를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이어서 불러들여 약과와 음식을 먹이는 동시에, 지ㆍ필ㆍ묵도 내주었다. 그리고 그 이웃 사람을 불러다 매를 때렸다. 그 뒤 한공(韓公)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그대 아들의 재주가 매우 기특하니 꼭 숨기시오. 시를 지어서 여러 사람에게 보이지 마시오. 내 손녀를 시집보내리다.” 하였다.
○ 우리 집 맏형은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열 살 전에 고문(古文)과 《운부군옥(韻府群玉 시 짓는 데 쓰여 지는 참고서)》를 읽어 시학(詩學)이 대성되었다. 항상 입 안에서는 글 외는 소리가 흥얼거렸다. 열여섯 살에 경기우도(京畿右道)의 향시 진사 초시(鄕試進士初試)에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는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나이 열일곱 되던 병진년(丙辰年) 7월 29일에 경성 제생원동(濟生院洞)에 있는 남의 집에서 죽었다. 선군께서 지으신 〈삼몽부합전(三夢符合傳)〉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선군께서 고향 친구 10여명과 계를 맺었는데, 맏형께서 시를 짓기를,
오백년 도읍 터는 으뜸가는 고을이요 / 五百王都第一州
선비들 계 닦으니 가장 좋은 놀음일세 / 儒林脩禊最佳遊
3월엔 들풀 밟아 긴 낮을 보내고 / 踏靑三月消長晝
9월엔 국화 띄워 늦은 가을 읊조리네 / 泛菊重陽詠晩秋
굽이진 물에 잔 띄우니 부러울 게 무엇이며 / 曲水流觴何足羨
용산에서 모자 날리니 이에 짝할쏜가 / 龍山落帽亦難儔
삶을 누리고 죽음을 맞으매 유감없이 하세 / 養生送死當無欠
사람의 한 세상엔 기쁨과 슬픔 다 있나니 / 做得人間樂與憂
하였다. 맏형께서 행서(行書)를 잘 쓰시어 당신이 손수 쓰신 것만 하여도 무려 수십 권이 되는데, 나도 그것을 얻어 읽었다.
○ 상공(相公) 윤춘년(尹春年)은 아버지와 계묘년(癸卯年)에 같이 과거에 합격하였다. 시를 감상하는 눈이 있었는데, 선군께서 지으신 율시 한 수를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성당시(盛唐詩)를 읽었으되, 그 가운데에서도 필시 노두(老杜 두자미의 별칭)를 읽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군께서, “그렇습니다. 지금 두시에 힘쓰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 시에,
강을 건너기는 풀 길을 따르고 / 渡江緣草徑
취함을 타서 강성에서 잠자네 / 乘醉宿江城
흰 달은 봉우리마다 비치고 / 白月千峯照
봄 두견은 홀로 밤에 우누나 / 春鵑獨夜鳴
물 마을에 돌아가는 꿈을 깨니 / 水村歸夢罷
두메 어귀에 나그네 넋이 놀라네 / 山郭旅魂驚
소쩍새 봄 마음을 위탁하니 / 望帝春心托
외로운 신하 괴로운 정 한결 더하네 / 孤臣再拜情
하였다. 그 뒤 당(唐) 나라 때의 고취(鼓吹 군대 행진곡) 곡조를 읽고 시를 지어 보이니, 윤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만당(晩唐) 냄새가 풍깁니다. 반드시 당시의 고취 곡조일 것입니다.” 하였다. 선군이 또 두시(杜詩)를 읽으셨는데, 윤공이 지은 시를 보고, “이건 또 성당(盛唐) 음률이 있는데, 반드시 두율(杜律)을 읽었을 것입니다.” 하여, 말하는 것마다 모두 들어 맞았다. 이에 선군이 그에게 경복(敬服)하였다. 이내 선군께서 시를 보냈는데 그 시에,
시문에 나아가 시험 삼아 한 번 들어 보면 / 欲詣詩門試一聽
힘써 다듬은 곳에 스스로 영감이 살아 나오리 / 功夫着處自生靈
맑은 하늘 해와 달 낱낱이 비추고 / 靑天日月昭昭影
넓은 땅과 산천을 샅샅이 그려 / 大地山河歷歷形
봄기운 무르녹아 만물이 피어나고 / 春氣和融陶萬物
센 물결 늠실거려 바다를 뒤흔드네 / 波濤洶湧起滄溟
이름을 만고에 남김이 어려운 일 아니요 / 留名萬古非難事
온 세상이 어두울 때 나 홀로 깨어 있네 / 擧世沈冥也獨醒
하였다.
○ 고려 왕씨는 부처를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였다. 도성 내에 이름난 절이 3백 개나 되었는데, 그 가운데 연복사(演福寺)가 가장 커 5층 불전이 높이 하늘에 치솟아, 영광(靈光)이 우뚝 홀로 있는 것 같았다. 이건(李楗) 공이 유수(留守)로 있을 때, 사위를 맞이하기 위하여 비둘기를 잡게 하였더니, 관인이 횃불을 들고 올라가 잡다가, 불똥이 떨어져 불이 일어나 타버렸다. 계해년에 내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불꽃이 밤에 하늘로 치솟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귀부(龜趺 비석의 대(臺)와 비석이 지금도 옛터 가운데 있다.
○ 송악산(松岳山) 밑 불운사(佛雲寺)에 동불(銅佛) 세 좌가 있는데, 좌고(座高)가 다섯 길이므로, 세상에 전하기를 제일좌불(第一座佛)이라 한다. 그 뱃속에 이태백의 〈촉도난(蜀道難) 〉초본(草本)을 간직해 두었는데, 바로 이태백이 손수 쓴 것으로서, 오늘날 본과 매우 다름이 있고 뭉개고 고친 곳도 많다. 첫 구의 희(噫)ㆍ우(吁)ㆍ희(희嚱) 석 자가 처음에는 ‘우돌재(吁咄哉)로 되어 있었는데 뒤에 엷은 먹으로 고쳤다. 개성에 도사(都事)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인 정문진(鄭文振)이 이 초본을 찾아 가지고 갔다 한다. 그 부처는 뒤에 복령사(福靈寺)로 옮겨졌는데 나도 가 보았다. 뒤에 녹여서 총대를 만들었다 한다.
○ 복령사 벽에 수십 사람의 이름을 쓴 것이 있는데, 자획이 뚜렷하여 바래지 않았다. 이색(李穡)ㆍ이숭인(李崇仁)ㆍ정몽주 ㆍ정도전(鄭道傳)ㆍ권근 등 여러 분이 있는데, 나도 요즘에 직접 보았다. 나머지는 쓰지 않는다.
○ 문충당(文忠堂)은 바로 정포은 선생의 옛집 터에 세운 사당(祠堂)이다. 선조께서 사액(賜額)하기를, ‘숭양서원’(嵩陽書院)이라 하였다. 그 앞 작은 시내를 건너 언덕에 대나무 우거진 곳은, 바로 이익재와 여러 현인들이 살던 곳이다. 이 대나무 숲은 곧 죽림당의 옛 물건이다. 아래 작은 연못이 있는데 지금도 전한다. 그 뒤 작은 봉우리와 시내 밑에 상국 이규보의 옛 집터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산전(山田)이 되고 말았다.
○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같이 목은(牧隱)의 집에 모여서 밤이 깊도록 담론했다. 도은이 포은을 보고 하는 말이, “달가(達可 포은 선생의 자(字))의 문장은 나와 서로 오르내리는 적수이지만, 운어(韻語)와 편장(篇章)으로 말한다면 어찌 나의 고명(高名)을 따르겠소.” 하자, 포은은 아무 말 없이 얼굴빛이 변했다.
○ 도선국사(道詵國師)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 당 나라의 중 일행(一行)의 제자라고 말하는데 잘못이다. 일행은 바로 당 나라 현종(玄宗) 때 사람이다. 도선은 바로 왕건 태조의 아버지 왕륭(王隆)과 동시대 사람이며, 왕 태조의 고려는 바로 조씨(趙氏)의 송 나라와 같이 섰다. 그렇다면 도선과의 시대적인 차이가 수백 년이 될 뿐만이 아니니, 일행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망령이 아니겠는가.
○ 고려의 수창궁(壽昌宮)은 우리 나라 들어와 개성부의 양곡을 저장하는 창고가 되었으니, 바로 내금위청이 그것이다. 내금위청은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불타버리고, 마당 가운데 있는 연못은 오늘날 돼지 기르는 구역이 되고 말았다. 임견미(林堅味)의 집 수십 칸은 헐리지 아니하고 아직도 있는데, 민가가 되었다.
○ 신돈(辛旽)의 집은 아직도 층루(層樓) 한 구역이 남아 있어, 그 전에는 혜민국(惠民局)이 되었더니, 심락(審樂)이 여기에서 살았다. 이창(李敞)이 도사(都事)가 되었을 때, 그 위층을 헐어 합쳐서 한 채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상평창(常平倉)이 되었다. 나의 아버지 집도 그 앞에 가까이 있었으므로, 내가 어릴 적에 그 누에 올라간 일이 있었다. 곳곳에 우묵하게 구부러진 방을 만들어 대낮에도 깜깜하였다. 이는 신돈이 요직에 있었을 때, 고의로 조정 관리들을 속여 폐간(狴犴 감옥. 옛날 감옥 문에 사나운 폐간을 그려 붙인 데서 나온 말)에 가두고 그들의 아내가 와서 애걸하게 되면, 신돈은 흰 말을 잡아 그 음경(陰莖)을 말려 갈아서 가루를 만들어 두었다가, 그들의 아내에게 술에 타 먹여 취하게 한 다음, 이 누(樓)에서 음행(淫行)을 저질렀다고 한다.
○ 강헌대왕(康獻大王 이성계)이 아직 등극하기 전, 일찍이 칠성(七星)님께 기도한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밤에 길가의 나무 구유통에 들어가 자게 되었다. 아직 밤이 깊지 아니했는데 어떤 자가 밖에서 부르기를, “오늘 밤에 이 시중(李侍中)이 아무 신(神)에게 정공(淨供)을 드리는데, 내가 제사 밥을 얻어 먹으러 가니, 그대도 같이 가세.” 하니, 나무통 속에서 어떤 자가 대답하기를, “오늘 저녁 우리 집에 손님이 와서 나는 못 가겠으니, 자네나 다녀오게.” 하였다. 얼마 있다가 또 밖에서 부르기를, “내가 갔더니오늘 밤에 여러 성인이 왕림하셨지만 ‘제사 음식이 불결하다.’ 하면서, 노하여 갔네. 그래서 나도 얻어먹지 못하고 오는 길일세.” 하였다. 그 사람은 날이 새자, 바로 강헌대왕 저택으로 달려가 뵙기를 청했다. 문지기가 거절하기를, “주공(主公)께서 지금 재계하고 계셔서 여쭈어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 사람이 재삼 억지를 쓰면서, “내가 일 때문에 왔는데, 말할 내용이 오늘을 넘겨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했다. 문지기도 괴이하게 생각하게 생각하고, 드디어 그 말을 강헌대왕에게 아뢰었다. 강헌 왕이 앞으로 불러오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기를, “오늘 밤에 무슨 치성을 드릴 일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태조(太祖)가 “아무 일도 없다.” 하자, 그 사람은, “제가 징험이 있어서 아뢰는 말이오니 숨기지 마옵소서.” 하였다.
이렇게 되어 태조는 사실대로 그에게 말하여 주었고, 그도 바로 밤에 들은 말을 낱낱이 고했다. 태조는 드디어 그 사람을 관(館)에다 두고 수십 일을 재계한 뒤, 제사 지내는 밤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전에 자던 나무 속에 가서 자도록 하였다. 그 사람은 말대로 나무로 갔는데, 밤중이 되어 밖에 와 부르는 자가 말하기를, “이 시중이 또 신에게 치성을 드리는데, 자네 나하고 같이 가려나.”하자, 나무 속에서 대답하기를, “먼저 자고 간 손님이 또 오셔서 난 못 가겠네.” 했다. 얼마 뒤에 또 밖에서 부르기를, “오늘 밤에 이 시중이 정성껏 재개하고 제사지냈으므로, 여러 성인들이 모두 흠향하고 갔네. 그런데 맨 첫자리의 한 성인이 말하기를, ‘이 시중의 정성스러운 공양이 이 같으니, 보답이 없을 수 있겠소. 무엇으로써 답례함이 옳겠소,’ 하자, 그 아래 여섯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그렇다면 무슨 물건을 가지고 영험을 나타내겠소.’ 하였다. 맨 첫 자리의 성인이 말하기를, ‘삼한 땅으로써 상 줌이 옳을까 하오.’ 하자, 모두들 좋다고 허락하였네. 이 말을 듣고 또 음식을 얻어 먹은 뒤에 돌아오는 길일세.” 하니, 나무의 귀신이, “내 따라가지 못한 것이 한이오.” 하였다. 그 사람이 곧 강헌대왕의 처소에 가서 이것을 자세히 말씀드렸더니, 태조는 마음에 홀로 기쁘고 자부심이 생겨, 그 사람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얼마 안 있어 그 사람은 하직하고 물러갔다. 태조께서 귀하게 되자 그 사람을 찾았으나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 태조께서 영흥(永興)에 있는 외할아버지 집에서 나셨으니, 곧 지금의 준원전(濬源殿)이다. 환조(桓祖)께서 돌아가셨을 때 태조는 함흥에 계셨는데, 복된 땅을 얻어서 장례 지내려 하였으나, 아직 좋은 지관(地官)을 만나지 못하였다. 어느 날 나무꾼 아이가 산에 갔다가 두 중이 먼저 산에 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산을 오르내리면서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더니, 나이 많은 중이 말하기를, “아랫것은 비록 지법(地法)에 응하기는 하나 장상(將相)이 날 자리에 불과하고, 약간 위 것은 당세에 왕후(王侯)가 날 자리네.” 하고, 두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무꾼 아이가 숲 속에 숨어서 그 말을 듣고 태조에게 달려가 고했다. 태조는 말에 안장 얹을 사이도 없이, 그대로 말을 달려 바로 따라갔다. 10여리를 따라가니, 두 중이 길가에 지팡이를 멈추고 쉬고 있었다. 태조께서 말에서 내려 재배하고 말하기를, “저의 집이 누추하지만 스님들께서 잠시 들렀다 가시기를 원합니다.” 하니, 두 사람은 갈 길이 멀다고 사양하면서 듣지 아니하였다. 태조께서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두 번 절하고 청하기를 매우 정성껏 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이 지극한 정성으로써 청하니, 헛되이 욕보일 수도 없지 않소.” 하고, 마침내 같이 갈 것을 허락했다.
태조께서는 두 스님을 조용한 방에 거처하게 하고, 예(禮)로 대접하기를 정성껏 했다. 두 사람이 하루를 묵고 떠나려고 하자 태조께서 애써 만류하여 하루를 더 묵게 하였다. 태조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재배하고 말씀하기를, “제가 지금 아버지 상을 당하였습니다. 좋은 곳을 가려서 모시고자 하옵는데, 스님 어른께서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자, 두 사람이 옷을 떨치고 일어나면서, “빈도(貧道)는 단지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며 놀 뿐이요. 청오금낭(靑烏錦囊 비결)의 술법은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태조께서 맨 땅에 엎드려 절하고 억지로 붙잡으며 눈물 흘려 사례하자, 두 사람은 마침내 또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태조께서 재배하고 다시 청하니, 나이 많은 중은 잠자코 있는데, 젊은 중이 말하기를, “남의 성의를 어찌 차마 저버리겠소.” 하니, 늙은 중이 “그러면 어찌할 것이오.” 하자, 젊은 중이 “그곳을 가리켜 주면 좋지 않겠소.” 하고, 두 사람은 마침내 태조와 함께 산으로 올라가 지팡이를 꽂고 말하기를, “첫째 혈(穴)은 왕후(王侯)의 조짐이 있고, 둘째 혈은 장상의 자리이니, 이 둘 가운데서 하나를 고르시오.” 하였다. 태조께서, “첫째 것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하니, 나이 많은 이가 말하기를, “너무 지나치지 않소.” 하였다. 태조께서 대답하기를, “사람의 일이란 상(上)을 얻으려 하여도 겨우 하를 얻게 되는 법이므로,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니, 두 사람은 웃으며, “원대로 하시오.” 하고,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늙은 중은 나옹장로(懶翁長老)이고, 젊은 중은 무학상인(無學上人)이었다.
○ 태조께서 등극하신 뒤 팔도(八道) 방백(方伯)에게 하교하여 무학을 물색하여 찾게 하였으나, 해가 넘어도 찾지 못하였다. 경기ㆍ황해ㆍ평안 3도의 방백이 한때 합동하여 찾았다. 황해도 곡산(谷山) 고달산(高達山)에 이르자, 산 밑에 초가집 몇 칸이 있는데 한 고승이 홀로 거처한다는 말을 듣고, 3도 방백이 부하를 데리고 그 동네로 들어가 세 사람의 인끈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두고, 짚신을 신고 걸어서 그 초암(草菴)에 당도하니, 한 늙은 중이 쇠코잠방이를 입고 몸소 남새밭을 매고 있었다. 3도 방백이 앞으로 나아가 묻기를, “이 암자는 누가 처음 세웠습니까.” 하니, “내가 손수 세운 것이오.” 하였다.
“무엇을 보신 바가 있어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습니까.” 하니, “저 삼인봉(三印峯) 때문에 자리 잡았습니다.” 하였다. “어찌하여 삼인이라 하십니까.” 하니, “삼봉이 앞에 있으므로 삼인이라 합니다. 만일 이곳에 집을 짓게 되면, 3도 관찰사가 골짜기 가운데 있는 나무 위에 세 개의 인(印)을 걸 때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 응험(應驗)입니다.” 하였다. 3도 방백이 크게 기뻐하여 그의 손을 잡으며, “이 분이 무학임에 틀림없다.” 하고, 그와 같이 돌아와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여 스승의 예로써 대접하고, 이내 정도(定都)할 고을 물으니, 무학이 바로 한양을 점쳐 말하기를, “인왕산(仁王山)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백악(白岳)과 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삼으시오.” 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이 난색을 보이며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南面)하고 다스렸다.’는 말은 들었어도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무학이 말하기를,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2백 년을 지나서 내 말을 생각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또 원하기를, “내 일생을 마친 뒤에 유물을 간수할 만한 자리를 보아 주십시오.” 하니, 무학이 한 곳을 가리켜 말하기를, “전하의 아들과 손자를 대대로 모두 여기에 장사지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바로 오늘의 건원릉(建元陵)이다. 또 일설에는 정로위(定虜衛) 최산(崔山)이란 사람이 대대로 이곳에 살았었는데 매우 잘 살았다 한다.
바로 그 집을 태조에게 바치며 말하기를, “제가 약간 땅 보는 법을 아옵는데, 이곳은 제왕의 인산(因山 제왕을 장사 지내는 것)하는 상(相)에 해당하는 곳이옵니다.” 하였다. 태조는 이 말을 따라 드디어 큰 집을 다른 곳에 짓게 하고, 이어서 토지 백결(百結)을 주었다 한다. 아마도 최산이 바치고 무학이 자리 잡은 것이리라. 지금까지도 최장군의 묘석이 있다 한다.
《산수비기(山水祕記)》를 보면, “도읍을 선택하는 자가 만일 중의 말을 믿게 되면 약간 오래 갈 희망이 있고, 정가(鄭哥) 사람이 나와 시비를 하게 되면 5대를 가지 못하여 자리다툼의 화가 생기고, 2백 년이 못 가서 나라가 어지러워 흔들리는 난이 날 것이니 조심조심 하라.” 고 하였는데, 《산수비기》는 바로 신라(新羅)의 고승 의상대사(義相大師)가 지은 것으로, 8백 년 뒤의 일을 미리 알아 착착 들어 맞혔으니, 어찌 성승(聖僧)이 아니겠는가. 이제 와서 보면, 《비기(祕記)》에서 이른바 중이란 무학을 말함이요, 이른바 정가 사람이란 바로 정도전을 말함이다. 무학도 또한 우리 나라 일을 불을 봄과 같이 밝게 알았으니, 또한 신승(神僧)이라 할 만하다.
정도전이 무학의 말이 옮음을 알지 못함은 아니었다. 그는 다른 마음이 있어서 나라에 틈이 있게 되면 빼앗으려 했기 때문에 듣지 아니한 것이다. 소인의 ‘빼앗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한다.’는 마음이 집안을 해치고 나라를 흉하게 하려는 계책이 이와 같았으니 통탄할 일이다.
○ 이방번(李芳蕃)과 이방석(李芳碩)의 난으로 태조가 함흥에 내려가 숨었다. 한 늙은이가 찾아왔는데 바로 태조의 고향 친구였다. 그는 닭 한 마리와 말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다. 태조가 취한 뒤에 즉석에서 절구 하나를 불렀는데,
비늘 달고 북해에서 날아올랐음을 이르지 말고 / 休道騰鱗北海間
오늘날 비단옷으로 돌아온 것도 말하지 마소 / 莫言今日錦衣還
내 감히 풍패(豐沛 한나라 고조의 고사에서 인용)를 노래하려 함이 아니니 / 我行不是歌豊沛
도리어 당명황(唐明皇)의 촉도난(蜀道難)을 부끄러워하노라 / 却愧明皇蜀道難
하였다.
○ 태조는 처음 덕원(德源)에 물러가 계시다가 또 함흥으로 갔다. 공정대왕(恭定大王 태종)이 사신이 보내어 문안을 드리자, 그 뒤부터 문안 행차가 그치지 아니하였는데, 태조는 사신을 보기만 하면 반드시 죽이니 죽는 사람이 잇달았다. 그 때 사람들이 죄 없이 죽는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태조가 마음에 두지 아니함을 슬피 여겼다. 공정대왕이 돌아오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어떻게 나올는지 짐작 못하여 근심하고 있을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무학의 힘이면 태조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하였다. 공정대왕이 수소문하여 찾아 가지고 굳이 청하니, 무학이 말하기를, “부자지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사옵니까. 내가 장차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고 개의(介意)치 않았다. 오래 되자 무학이 마지못해 그 말을 따르자, 태종이 가는 차비를 차려서 보냈다. 함흥에 이르러 태조를 뵈니, 태조는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아무를 위하여 유세(遊說) 온 것이 아니냐.” 하였다. 무학이 웃으며 말하기를, “전하 왜 믿지 않으시나이까. 빈도(貧道)와 전하가 서로 알고 지낸 것이 몇 해이오니까. 오늘은 전하를 위하여 한 번 위로할 뿐입니다.” 하니, 태조의 얼굴빛이 약간 풀어졌다. 이렇게 되어 머물러 같이 자게 되었는데, 태종(太宗)의 단점을 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같이 하기를 수십 일이 되니, 태조는 무학이 태종에게 가담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 더욱 그를 믿게 되었다. 그 뒤 수십 일이 되어 무학이 태조를 모시고 같이 자게 되었다. 야밤에 무학이 태조에게 말하기를, “태종이 참으로 죄과가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서 사랑하는 아들들은 다 이미 죽었습니다. 단지 이 사람만 남았사온데 만일 끊어 버리신다면, 전하께서 평생 고생하여 이룬 대업을 앞으로 누구에게 부탁할 것입니까. 남에게 부탁하기보다는 차라리 나의 혈속(血屬)에게 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세 번 다시 생각하시기 원하옵니다.” 하니, 태조도 자못 그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환궁할 뜻을 가졌다. 무학이 이내 급히 돌아오기를 권하였으나, 태조께서 성안에 들고자 아니하므로, 처음에는 소요산(逍遙山에 이르러 수개월을 머무르다가, 마침내 풍양(豐壤 평양)으로 가서 궁을 짓고 지내셨다. 이 뒤로 무학의 종적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 화담(花潭) 선생은 항상 등이 시린 증세가 있어서 비록 더운 여름이라 하더라도 솜저고리를 벗지 못하였다. 그가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 놀러 갈 때는 한더위인데도 불구하고 솜옷을 입고 갔다. 60리를 걸어간 이날 땀이 흘러 뼈에까지 젖었는데, 그 병이 바로 나아버렸다. 이 때부터 여름에 솜옷을 입지 않았다.
○ 서 선생은 역리(易理)에 깊었다. 그러므로 수(數)를 추리하는 것을 일삼지 않더라도 그 학문이 그윽히 소강절(邵康節)에 부합하였다. 그러나 한 번도 소강절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어느날 선생은 소강절이 지은 《자미수(紫微數)》를 보다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술수가(術數家)인 진희이(陳希夷)의 극묘(極妙)이다.” 하였다. 선생의 아우 숭덕(崇德)이 일찍이 이 수를 가지고 선생에게 물었는데, 선생은 말씀하기를, “만일 심지(心志)가 밝지 못하다면, 꼭 이것을 배울 필요는 없다.” 하고, 드디어 그 책을 불살랐다.
○ 화담 선생이 젊을 때 금강산에 가 놀았는데, 바다를 끼고 가다가 도중에서 양식이 떨어졌다. 쌀을 고성(高城) 태수에게 빌리러 갔더니, 태수는 무인(武人)이므로 서생(書生)을 경시하고 누워서 대하며 이내 묻기를, “산 구경을 하니, 무슨 장관(壯觀)이 있었소.” 하였다. 선생은 대답하기를, “불정대(佛頂臺)에 올라가 해 뜨는 것을 본 것이 가장 기관(奇觀)이었습니다.” 하니, 태수는 또, “그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새벽이 되어 절정(絶頂)에 발걸음을 날려 굽어 만 리를 내다보니, 구름과 안개는 자욱하고 하늘과 바다는 한데 붙어 뒤범벅이 되어 분별이 없는 듯 하였습니다. 갑자기 밝은 기운이 점점 열리고, 상하 사방이 걷혀 올라가기 시작하자, 가볍고 맑은 것은 하늘이 되고, 무겁고 흐린 것은 땅이 되는 듯하더니, 건곤(乾坤)이 정하여지고 만상이 나뉘어졌습니다. 조금 있다가 오색구름이 바다를 뒤덮고, 붉은 기운이 하늘에 치솟았으며, 물결은 겹겹이 늠실거리고, 둥근 해를 치받쳐 올리니, 바다 빛이 밝아지고 구름 기운이 흩어졌습니다. 상서로운 햇빛이 가득하니 눈이 부셔 볼 수 없고, 점점 높아져서 우주가 광명하고, 먼 봉우리와 가까운 산부리가 비단같이 얽히고 실처럼 나뉘어져서, 붓으로 그릴 수 없고 입으로 형용하여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일 장관이었습니다.” 하였다. 태수는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자네 말이 매우 통쾌하여 사람에게 세상을 초월하여 독립하는 뜻이 있게 하였다.” 하고, 마침내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 서 선생이 남으로 지리산(智異山)에 가 놀았다. 산에 들어간 지 오래되어 식량이 떨어져 밥을 못 지어 먹게 되었다. 하루는 마침 호남 도백(道伯)의 행차를 만났었다. 명함을 전하고 만나 보려고 하였으나, 종자(從者)들이 거부하여 통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도백이 반석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 높이가 열 길이나 되었다. 선생이 한 걸음에 뛰어 올라 서니, 도백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누구냐고 물었다. 선생은 대답하기를, “저는 한 청빈한 선비입니다. 천성이 산수를 좋아하여 구름처럼 사방으로 떠다니며 노는 길에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호구할 길이 없어서, 절하(節下 존칭)께 밥 지을 식량을 얻으려고 했으나, 종자들이 거절하므로 감히 이같이 당돌하게 하오니, 만나 뵙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감사는 앉으라고 명하고 서로 이야기해 보니, 선생이 보통 사람이 아닌 줄 알자, 쌀과 생선을 많이 주어 돌아가게 했다.
○ 선생이 지리산에 있을 때 장차 최고봉에 다다라 보고자 아침내 점을 쳤다. 그리고 종자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틀림없이 이인(異人)을 만나겠다.” 하고, 드디어 신을 메고 지팡이 짚으며 올라가 정상에 다다랐다. 소나무에 의지하고 돌에 걸터앉았는데, 조금 있자 한 대장부가 반공(半空)에 우뚝 서서 길게 읍하고 말하기를, “내 그대가 올 줄 알았노라.” 하니, 선생께서도, “나 또한 그대가 나를 방문할 줄 알았노라.”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기(氣)를 가다듬고 정신을 수양하면, 상등은 백일 충천(白日沖天)할 수 있고, 중등은 팔극(八極)을 휘두를 수 있으며, 하등은 천춘(千春)에 정좌할 수 있으니, 공은 나를 따라 놀 수 있겠소.” 하고 물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신선(神仙) 황백(黃白)의 술법은 비록 혹 전하지만, 유자(儒者)는 말하지 않는 법입니다. 나는 공자를 배우는 자입니다. 더욱이 구전묘결(九轉妙訣 도가에서 장생불사의 단약(丹藥)을 아홉 번 굽는 신기한 방법)을 비록 배울 만하더라도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하니, 그 사람은 웃으며 말하기를, “도가 같지 아니하니, 서로 꾀할 수 없구려. 내 또 그대의 고고함을 알았노라.” 했다. 이날 종자들은 모두 이 사람을 보지 못하였는데, 선생만이 홀로 말을 주고받고 하여, 종자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이윽고 한 손을 번쩍 드니 번개와 같이 사라졌다. 이 일을 선생은 일찍이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선생의 병세가 악화되자 선군께서 서울에서 송도로 가서 선생을 뵈었더니, 선생이 자세히 말하였다 한다. 또 말하기를, “그 사람은 몸에 우의(羽衣)를 입었고, 두 팔에는 털이 한 자 남짓씩 났으며, 나이는 30세 남짓하더라.” 하였다.
○ 서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천하에 세 도가 있는데, 유도(儒道)가 최상이고, 불도(佛道)가 다음 가며, 선도(仙道)는 또 그 다음 간다. 학술도 또한 그러하다.” 하였다.
○ 서 선생이 화담 초당에 계실 때, 어느 날 못가를 거닐다가, 뛰노는 피라미가 문득 호량(濠梁)의 뜻이 있음을 보고 종이를 한 치쯤 잘라 글 몇 자를 써서 물 가운데 던졌다. 길이가 석 자쯤 되는 한 쌍의 고기가 물 속에서 뛰어 나와 돌 위에 자빠져 있었다. 선생은 손으로 주워 보고 웃으면서 도로 물에 던진 다음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이 거짓이 없구나.” 하였다. 이 때에 선생은 장자(莊子)를 읽고 있었다. 내 선군께서 어릴 때부터 선생 문하에서 글을 배우셨기에 그 일을 눈으로 직접 보시고, 일찍이 말씀하셨다.
○ 목조(穆祖)는 전주(全州) 대성(大姓)으로 용기(勇氣)를 자부(自負)하였다. 사랑하는 관기(官妓)가 있었는데, 관찰사가 그녀를 수청 들게 하였다. 밤이 되어 목조는 곧장 객관 서쪽 채 방으로 가서 그 기생을 나오라 하였다. 그 기생은 다리를 떨면서 일어났다. 관찰사가 크게 노하여 급히 소리쳐 종자를 부르면서, “도둑이 문 밖에 왔으니, 빨리 오백(五伯 형을 집행하는 사람)을 명하여 잡아라.” 했다. 목조는 장막 속으로 곧장 들어가 검으로 관찰을 찌르고, 드디어 그 기생을 안고 말을 채찍질하여 나왔다. 밤에 백 여리를 달려가다가 그 길로 영북(嶺北)으로 갔다. 처음에는 의주(宜州)의 적전(赤田)에 가 머물렀는데, 곧 지금의 덕원(德源)이다. 뒤에 경흥(慶興)으로 가 살았다. 말 달리기와 활쏘기를 잘하고 사냥을 좋아하니, 오랑캐들이 두려워하였다.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바로 아무 못의 용입니다. 아무 못의 용이 내가 사는 못을 빼앗고자 하여 내일 만나 싸우기로 했는데, 그가 강하여 내가 격투를 하지 못할까 걱정이니, 부디 그대는 나를 구하여 주시오.” 하였다. 목조는 말하기를, “무엇으로써 주객(主客)을 알겠습니까.”하니, “그는 희고 나는 누런빛이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니, 목조는 허락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이 활을 들고 갔다. 갑자기 못 물이 끓어오르고 물결이 용솟음치기 시작하더니, 황ㆍ백 두 용이 서로 얽혀서 물 위에 엎치락뒤치락하였다. 목조는 한 화살로 흰 놈을 맞히니 못물이 새빨개지고, 백룡이 도망갔다. 이날 밤에 또 꿈에 와 고하기를, “당신을 힘입어 생명을 보전했으니, 앞날에 꼭 두터운 보답이 있을 것이오. 자손 때에 가서 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 때문에 적(赤) 자로써 못 이름을 지었다. 목조가 사냥 갔다 돌아오는 길에 목이 말라 물을 찾는데, 어떤 할미가 표주박에 물을 떠 가지고 와 드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우리 애들이 공(公)을 해치고자 하는데, 힘으로 대적할 수 없어 이미 깊숙이 있는 오랑캐에게 청병했으니, 곧 올 것입니다.” 하였다. 목조는 뒤 봉우리로 말을 달려 올라가 바라보니, 수천 기(騎)가 구름처럼 덮이어 와서 황진(黃塵)이 하늘을 가리었다. 드디어 급히 말을 타고 그녀를 옆에 끼고 달려갔다. 따라오는 오랑캐가 뒤에 있어 일이 급하자,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물이 말의 배밖에 닿지 않았다. 쫓아오는 자들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그만두고, 서로 이상한 눈으로 마주 보며 흩어져 갔다. 그 뒤 목조는 함흥으로 옮겨와 살았다. 올라가 오랑캐를 바라보던 뒤 봉우리를 뒷사람들이 망적봉(望狄峯)이라 불렀다.
○ 선춘령(宣春嶺)은 갑산(甲山)과 닷새 길 거리에 있는데, 백두산 밑에 가깝다. 짤막한 비(碑)가 풀 가운데 묻혀 있었는데, 신입(申砬) 공이 남병사(南兵使)가 되었을 때에 끌어왔으므로 나도 볼 수 있었다. 높이는 다섯 자쯤이고 넓이는 두 자쯤인데, 글자는 필진도(筆陣圖)와 비슷하나 작고 태반이 뭉그러졌다. 여기서 ‘황제’라 함은 고구려왕이고, 또 ‘탁부(啄部) 아무개 6ㆍ7명’이라고 했는데, 나는 탁부가 어떤 관직[官]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 뒤 하곡(荷谷) 허봉(許封)이 말하기를, “일찍이 고사(古史)를 보니, 탁부는 지금의 대부와 같다.” 하였다.
○ 이징석(李澂石)과 이징옥(李澂玉)은 아산(牙山) 사람인데, 징옥은 징석의 아우이다. 징석이 열여덟 살 때 징옥은 열네 살 때, 그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산 멧돼지를 보고 싶구나.” 하였다. 두 아들은 곧 물러갔다. 징석은 이날 돼지 한 마리를 쏴 가지고 돌아오니, 어머니가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징옥은 이틀 뒤에야 비로소 맨손으로 돌아왔다. 그 어머니는 의아하게 여겨 말하기를, “사람들이 그 전에 말하기를, ‘네 형의 용력(勇力)이 매우 너에게 못 미친다.’ 했는데, 네 형은 바로 산 멧돼지를 붙들어와 나에게 보여 주었고, 너는 이틀이나 되어서 빈손으로 돌아 왔으니 웬 일이냐.”고 물었다. 징옥은 꿇어 앉아 말하기를, “어머니께서 시험 삼아 문 밖에 나아가 보십시오.” 하므로, 그 어머니가 따라 나가니, 큰 돼지 한 마리가 문 밖 마당에 자빠져 눈을 부릅뜨고 씨근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징옥이 꼭 어머니로 하여금 산 멧돼지를 눈으로 보게 하기 위하여 뒤 밟아 쫒아, 어떤 때는 몰고 어떤 때는 역습을 당하면서, 산을 넘고 들을 건너면서 밤낮을 다하여 발로 차고 협박하여 그 놈을 굴복시키고, 반드시 기진맥진하게 만든 다음에 발로 차서 몰고 왔을 것이다.
○ 이징옥은 맹호 쏘기를 좋아하였다. 활을 쏠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면 호랑이는 눈을 감고 머리를 떨어뜨리니, 호랑이를 한 발(發)에 거꾸러뜨렸다.
○ 이징옥이 일찍이 김해 부사의 집에 갔었는데, 부사는 사절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한 젊은 부인이 매우 슬프게 우는 것을 보고, 그 연고를 물었더니, “내 남편이 호랑이에게 잡혀 가서 현재 대밭 가운데 있습니다.” 하였다. 징옥은 팔을 걷어 올리고 대숲으로 들어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아 끼고 나와 그 배를 가르고, 그 사람의 육신을 다 빼내니, 아직 소화가 되지 않았다. 부인으로 하여금 그 육신을 싸게 하고, 호랑이 가죽을 벗겨서 그 부인에게 주면서 부사에게 말하게 하였더니, 부사는 크게 놀라 사람을 시켜 쫓아와 사례하고 돌아오게 하였으나.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 이징옥의 아내가 교만하여 징옥을 배반하고 갔다. 징옥은 그것을 억지로 말리지 않았다. 뒤에 징옥이 영남절도사가 되었는데, 그 부인은 벌써 남에게 시집간 지 오래되었다. 징옥이 여러 고을을 합하여 크게 사냥하고, 그 뒷남편 집 앞에서 많이 잡고 적게 잡은 것을 검사하여 보고, 뒷남편 된 사람을 불러 사냥하여 잡은 새와 짐승 수백 마리를 모두 다 주었다. 이것은 주매신(朱買臣)의 고사와 비슷하다.
○ 이징옥은 열여덟 살에 강계 부사가 되었다. 김종서 공이 사표를 내고 돌아오게 되자, 세종이 그 후임을 물색하기 어려워, “누가 경을 대신할 수 있는가.” 하고 묻자, 김 공이 징옥을 추천하니 허락하였다. 세종은 드디어 그를 채용하여 북도(北道) 절도사로 삼고, 이어서 은밀히 유시하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지 않으면 너를 소환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징옥이 북도 절도사가 되자, 6진 가운데 오랑캐로서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자를 뽑아, 모두 부하로 예속시키고 각각 나누어 편대를 만들었는데, 회령(會寧) 오랑캐는 모두 흰 말에 흰 옷이요, 종성(鍾城) 오랑캐는 모두 푸른 말에 푸른 옷을 입힌 것과 같이, 다른 오랑캐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날마다 교련을 시키니 두어 해 뒤에는 정예가 된 자들이 모두 3천 명이나 되었다. 여러 고을을 순찰할 때마다 각각 경계에 나와 맞이하고 보내게 했다. 징옥이 두만강을 순찰하면서 살펴보다가, 오랑캐를 만나면 귀순자를 물어 강가에 살게 하고, 귀순을 원하지 않는 자는 쫓아 보냈다. 약속하기를, “내 명령을 범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 만일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 하니, 강을 지나 열흘길을 가도록 오랑캐의 자취가 하나도 없게 되었다. 그 후에 조정에서의 의논이 오랑캐를 뽑아서 졸오(卒伍)를 만들고, 군중(軍中)에 편입시키면 징옥은 이들을 좌우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이 맡게 되면 필시 잘 하지 못하여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이것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마침내 이징옥이 오랑캐를 좋은 말로 타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미 의(義)를 향하여 귀화하였으니 우리 사람과 같다. 다만 농사짓는 데 편안하도록 하고, 토지세와 부역을 없앰이 옳겠다. 그러나 만일 법령으로써 묶고 척적(尺籍 호적)과 오부(伍符 병적)에 편입시키면 곧 이것은 너희들을 구속시키는 것이니, 이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해제한다.” 하였다. 그러나 오랑캐들은 징옥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고, 먼 곳 사람까지도 사모하였다.
○ 세조가 반정(反正)하자 다른 사람으로서 북도 절도사를 대체하고 징옥을 불렀다. 징옥이 교대를 하고 길주에 이르러 생각하기를, ‘조정에서 큰일이 있지 아니하면, 나를 부르지 않겠다고 한 임금의 교(敎)가 일찍이 있었는데, 이제 일 없이 나를 체직시키니,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고 도로 달려 경성(鏡城)에 이르러 신임 절도사에게 물으니 말하지 아니하였다. 징옥은 종자를 돌아보고 신임 절도사를 움켜잡아 내리라 명령하고, 교의에 앉아 꾸짖기를, “네가 만일 말을 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 하니, 그 사람은 숨기지 못하고 사실을 말했으나 마침내는 죽였다.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서울을 향하면서 말하기를, “내 위신(威信)이 본래부터 산융(山戎 되놈을 가리킴)에 드러났으니, 이제 마땅히 강을 건너가 대금황제(大金皇帝)의 손발이 되라라.” 하고, 내일 군대를 인솔하고 가기로 약속하였다. 이때에 육진(六鎭) 판관들이 모두 편장(偏將)과 비장(裨將)으로 있었다. 회령 판관이 사람을 판자 위에 잠복시켰다. 이날 밤에 징옥은 동쪽 채에서 자고 있었는데 역사 두 사람이 장검을 쥐고 판자에서 줄을 잡고 내려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찍으니 징옥의 오른팔이 떨어졌다. 징옥이 놀라 일어나 그 검을 빼앗아 역사를 찍고, 알몸으로 날듯이 나와 왼손으로 후려갈기니, 죽은 사람이 수십 수백이 되었다. 마침내 비 오듯 하는 화살 속에서 죽었는데 그때의 나이 24세였다. 내가 어렸을 때, 정평부사 이충백(李忠伯)과 영흥부사 이언화(李彦華)가 모두 말하기를, “일찍이 야사(野史)를 보았는데 그 말이 위와 같았다.” 하였다. 징석은 세조조에 이시애(李施愛)를 평정할 때에 공이 있었다 한다.
○ 금 태조(金太祖)의 선계(先系)는 양산(梁山) 사람이다. 원(元) 세조(世祖)는 그 후예로서 평산(平山)에서 났다. 일찍이 이 일을 기록한 것이 있었다.
○ 이충백(李忠伯) 공이 말하기를, “그의 할아버지의 이름은 빙(砯)이다. 아우 아무개가 있는데 용모가 뛰어나 천신(天神)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옥인(玉人)이라 지목하였다. 나가 다니면 기생과 창녀들이 다투어 따라다니므로, 낮에는 시내에 감히 나가지도 못했다. 성종(成宗)이 풍진풍정연(豐進豐呈宴)을 베풀어 관기와 사창이 뜰에 가득 찼었는데, 종일토록 그들이 모두 한곳만 주목하였다. 성종이 괴이하게 여겨 하문하니, 시신(侍臣)이 대답하기를, ‘선전관 이 아무개가 시열(侍列)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하루는 성종이 편전(便殿)에 있을 때, 시신(侍臣)이 들어가 입시하였는데 이모(李某)도 입시했다. 때는 바야흐로 한여름이라 임금이 용포자락에서 백첩선(白貼扇)을 꺼냈는데, 흰 명주가 석 자쯤 매어 있었다. 손으로 두세 번 부치더니 이어서 시신에게 묻기를, ‘이 부채를 누구에게 줄 것 같은가’ 하니, 어떤 사람은 정승, 어떤 사람은 주병상서(主兵尙書), 어떤 사람은 종백(宗伯)으로 문형(文衡)을 장악한 사람에게 ……”라고 하였다. 임금이 잠자코 돌아보다가 마침 이모(李某)가 약간 멀리 입시함을 보고 그 앞에 던지며 말하기를, “네가 가질 만하다.” 하였다. 좌우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사랑 받음을 영광이라고 하였지만 속으로는 질투하여, 그는 종신토록 벼슬을 얻지 못하고 선전(宣傳)의 직함에서 그쳤다 한다.
○ 성종 때 한 환관(宦官)이 명을 받들어 호서(湖西)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조용히 백성들이 괴롭게 여기는 것과 한가한 일을 물었다. 환관은 대답하기를, “충주에 한 한사(寒士 가난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목사(牧使)의 객(客)이 되었는데, 목사는 친구로 대해 주었고, 또 한 기생으로 시침을 들게 하였습니다. 그 선비는 사랑을 쏟았으나, 기생은 그에게 정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 기생을 이별함에 미처 선비는 눈물을 흘리며 놓지 못했습니다. 그 고을의 광문(廣文 교수의 별칭)은 바로 문관인데, 또한 이별하는 자리에 참여했습니다. 그 선비가 또 광문의 손을 잡아 그 기생과 같이 끈에다 매어 놓고 광문에게 말하기를, ‘그대 홀로 나와 이별한(離別恨)을 할 수 없겠는가.’ 하였습니다. 광문이 그를 위하여 율시 한 구를 지었는데, 그 첫 대구에,
붉은 빛 높은 띠는 가는 허리에 비꼈는데 / 紫芝崔帶橫腰細
검은 빛 큰 신은 발에 신기 편안하네 / 黑黍張靴着足安
라고 하였습니다. 그 선비는 이어 그 시를 기생에게 주며 말하기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하였습니다. 또 이틀이 되었으나 차마 이별하지 못하니, 보는 사람이 눈웃음을 치지 아니 하는 자 없어도, 그 선비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나서 빙그레 웃고, 따라서 광문(廣文)의 이름을 기둥에 적었다. 그 뒤에 임금이 특히 광문의 이름으로 홍문(弘文)의 녹(錄)을 주니 백부(柏府 어사대)에서 이것을 논란하기 여러 날이 되었다. 하루는 임금이 성상소(城上所)에 입알(入謁)한 장령(掌令)을 불러 입대(入對)하기를 명하였다.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 논란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예로부터 홍문의 기록은 일시의 공론을 따랐지 일찍이 내지(內旨)에서 나온 일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권세가와 요로에 달려가서 얻은 것이 공(公)인가? 이름이 임금에게 통하여 알아줌을 얻는 것이 공인가?” 하였다. 그 장령이 힘껏 아뢰었으나, 그만두게 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소리와 얼굴빛을 매우 엄하게 하고, 책하며 그 사람을 나가도록 명하니, 떨면서 물러갔는데, 잘못하여 어도(御道)로 갔다. 임금이 자세히 보고 좌우에 이르기를, “제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아직도 스스로 가지 못하면서, 도리어 남의 앞길을 막으려 하는가.” 하였다. 간관이 그 장령을 탄핵하여 벼슬을 떼었고 광문은 마침내 옥당(玉堂)에 들어오게 되니, 바로 기재(奇才)이다.
○ 성묘(成廟 성종)께서 한 태수가 남다른 정사를 하여 크게 유용한 그릇이라는 말을 듣고 척발하여 집의(執義) 벼슬을 주었다.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에서 문서를 올려 논한 지 며칠 안 되어 또 발탁하여 이조 참의를 삼으니, 삼사에서 또 극력 탄핵하기 여러 날이 되었다. 또 발탁하여 이조 참판을 삼자 삼사는 또 탄핵한 지 여러 날이 되었다. 또 발탁하여 이조 판서를 삼으니, 삼사는 마침내 그만두고 다시 논하지 아니하며, “이와 같이 계속 올라가면, 반드시 삼공(三公)에 이를 것이니, 우선 그만두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 사람은 뒤에 재상이 되었으니, 과연 직루에 걸맞는다 하였다. 이 까닭으로 온 나라 사람이 임금의 사람 알아보는 데 탄복하였다.
○ 구종직(丘從直)은 초야(草野)의 사람이다. 젊어서 성균관 아래 재(齋)에 들어왔다. 그때 생원 진사 20여명이 점 잘 치는 사람을 청해서 평생의 화복을 점 쳤는데, 끝으로 종직에게 이르자 점쟁이는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이 점은 수법(數法)에 마땅히 정일품(正一品)에 이르겠고, 수는 70을 넘어 80을 바라볼 것이니, 크게 부귀(富貴)할 괘입니다. 여러분 20여 명은 모두 이 분께 미치지 못할 것이오.”하자, 여럿이 모두 크게 웃었다. 종직이 문과에 급제하여 나뉘어져 교서관(校書館) 숙직을 할 때 경회루의 절승(絶勝)함을 듣고 마음에 보고 싶어 하였으므로 숙직 복장인 편의(便衣)를 입은 채 몇 개의 문을 거쳐 경회루 아래에 당도하여 연못가를 거니는데, 갑자기 성종이 편여(便輿)를 타고 환관 몇 명을 데리고 후원으로부터 이르렀다. 종직이 어쩔 줄 모르다가 연(輦 임금이 타는 가마) 길 아래 엎드렸는데, 임금이 묻기를, “누구냐.” 하니, 종직이 대답하기를, “교서관 정자(正字) 구종직이올시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어떤 일로 여기 왔는가.” 하니, 종직이 대답하기를. “신이 일찍이 경회루는 옥계요지(玉桂瑤池)라 바로 천상선계(天上仙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 밤 다행히 예각(藝閣)의 숙직을 하게 되었사온데, 예각은 경회루와 그리 멀지 아니한 까닭으로, 초야의 신이 감히 이렇게 몰래 와 보던 길이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네가 편복(便服)으로써 나를 볼 수는 없다. 의관을 갖추고 오라.” 하니, 종직이 곧 옷을 입고 대령하였다. 임금이 교의(交椅)를 누 아래 놓게 하고, 종직에게 명하여 앞으로 오라 하고 묻기를, “ 너는 노래를 잘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젊었을 때 노래를 배웠습니다만, 농사꾼의 노래이오니, 어찌 성률(聲律)에 맞으리까.” 하였다. 임금이 “어디 불러보라.” 하니, 종직이 아름다운 소리로 길게 부르니, 임금이 잘한다 하고 또 명하자, 목을 제쳐 높이 부르니, 소리가 들보를 흔드는지라, 임금이 크게 기뻐하고 또, “경전을 외는가.” 하고 물었다. “신이 《춘추》를 잘 기억하옵니다.” 하자, 임금은 “소리 내어 읽으라.” 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받아서 외는데, 흐르는 물과 같이 막힘없이 한 권을 마치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술을 내주고 파했다. 다음날 임금은 특별히 구종직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제수한 문안이 내려오자, 사람들이 모두 크게 괴이하게 여겼고, 삼사(三司)에서는 번갈아 글을 올려 극론하였으나 듣지 아니했다. 5ㆍ6일이 지난 다음, 임금은 편전에 나아가 삼사의 관원을 모두 불러들이고 또 구종직도 오라고 명하였다. 작은 환자(宦者)에게 명하여 《춘추》를 가져오라 하고, 대사헌(大司憲) 이하에 명하여, 외도록 하니, 한 구절도 잘 외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임금이 종직을 불러 입시하게 하고 제1권을 외우게 한 다음 마구 다른 책에서 뽑아 물어도 즉석에서 외지 못함이 없었다. 임금이 그만두게 하고, 삼사의 제관(諸官)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한 구절도 욀 수 없으면서 오히려 높은 벼슬에 앉았는데, 구종직 같은 사람이 어찌 이 직무를 담당하지 못하겠는가. 너희들은 모두 물러가거라.” 하고, 종직에게 명하여 곧 숙배(肅拜)하고 출사하게 했다. 뒤에 벼슬은 정 1품에 이르고, 수명은 79세를 누렸다.
○ 성종이 친히 종묘 제사를 지낼 때 장령(掌令)이 축문을 읽으려 하였으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는데, 목이 멘 것 같았다. 다음날 임금이 그 장령을 풍산 만호(豐山萬戶)에 제수하라 명하자 언관(言官)이 쟁론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문관이라 부르는 자가 축문도 읽지 못하지 않는가. 결습(決拾)을 대충 아는 자는 하나의 보장(保障)을 담당하게 하면 족하다.” 하였다. 몇 달 지나서, 그전 직으로 불러들였다.
○ 성종이 밤에 재신(宰臣) 및 근신(近臣)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자리가 파하자, 저마다 궁촉(宮燭)한 자루씩 내려 주어 말 위에서 손에 받들고 집으로 돌아가 각각 영촉연(迎燭宴)을 베풀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겼다.
○ 성종 때 임금의 장인 중에 은대(銀臺)에 적을 가진 자가 있었는데, 자단(紫檀)으로 마루를 깔았다. 임금이 듣고 면대하여 묻기를, “경이 단향을 가지고 집을 지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하니, “아닙니다.” 하자, 임금이 곧 시신(侍臣) 및 중인(中人)에게 명하여 가 보도록 하였다. 그들이 아뢰기를, “과연 자단으로 지었사옵니다.” 하니, 임금이 바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장인을 치죄하도록 명하였다. 얼마 있다가 환궁하여 이르기를, “내 병이 나았노라.” 하였는데, 이는 당시 대비가 아직 살아계셨으므로, 임금께선 대비가 용서를 청할 것을 피하여 병을 칭탁하고 거처를 옮겼다가 치죄하라고 명하고, 이미 처벌하자 곧 다시 돌아온 것이다, 해설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금의 이번 일은 용단은 용단이나, 한 문제(漢文帝)의 소왕(昭王)을 박대한 사실과 어떠한지, 뒷날 반드시 의론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 성종이 밤에 놀다가 멀리 삼각산에 불빛이 있음을 바라보고, 사람을 시켜 가보게 하였더니, 한 서생이 등불을 달고 글을 읽고 있었다. 서생에게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과거 급제를 하려 한다.” 했다. 임금이 불러 절구 짓기를 명하고 드디어 급제를 주었다.
○ 성종이 행차하다가, 어떤 사람이 까치집 있는 나무를 찍어다 그 문 앞에 세우는 것을 보고 물어보게 하니, 대답하기를, “까치가 문앞 나무에 둥지를 지은 집에서는 급제를 얻는다고 들었사온데, 문앞에 수목이 없어 까치집 지을 것을 바랄 수 없는 까닭으로, 이것으로 대신하여 징험 있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외우기를 잘하는가, 짓기를 잘하는가.” 하니, “겸하여 가지고 있습니다만, 낙방한 지가 거의 수십 년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곧 명하여 급제를 주었다.
○ 성묘(成廟)께서 왕자 한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여 심히 과벽(過僻)한 일이 있어 오부(烏府 어사대의 별명)에서 이것을 논하였다. 임금이 성상소(城上所)에 들어온 장령 아무에게 불러 입알(入謁)하도록 명하고 앞으로 나오라 한 다음, 시 한 구를 써서 내려 주기를,
세상 사람은 다 같이 서리 온 뒤 국화를 사랑하나니 / 世人共愛霜後菊
이 꽃이 핀 뒤에 다시 꽃이 없기 때문이로다 / 此花開後更無花
하였다. 그 사람이 눈물을 닦으며 나왔는데, 얼마 안 되어 임금이 세상을 떠났다.
○ 성묘 때 어떤 환관 한 사람이 관서로부터 왔다. 임금이, “여러 고을에서 대접을 하던가.” 물으니, “음식이 대단히 사치스럽고 많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임금이 좋게 여기지 아니했다. 조금 있다가 또 아뢰기를, “신이 한 고을에 이르렀사온데, 손님이 자리에 가득하고, 아침 식상에 술을 내왔사옵니다. 그런데, 정오가 지나도록 밥이 나오지 않으니, 손님은 모두 취하고 소반 가운데 그릇들은 모두 먼지가 쌓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 반드시 성하게 차리기를 그처럼 넉넉하게 한단 말인가.” 하였다.
○ 어떤 사람이 방백으로부터 들어와 승선(承宣)이 되었다. 성종이 묻기를, “감사는 음식이 많고 적은 것을 가지고 수령들의 잘하고 못함을 저울질한다고 하는데 그런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런 일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좋지 않게 여겨 이르기를, “어찌 구복(口腹)의 공양으로써 관인을 책하리오.” 하였다. 대답하기를, “음식의 공양도 아직 입에 맞게 할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 일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은 말이오.” 하였다.
○ 성종이 신료(臣僚) 접하기를 집안사람과 부자(父子)와 같이 하되, 정사에 임해서는 엄숙하고 공경히 하여, 여러 신하들이 감히 정(情)을 숨기고 행동을 꾸미지 못하게 함이 있었다. 임금 앞에서 서로 장단을 말하다가 면전에서 주장이 꺾이더라도 조금도 꺼리거나 피하지 아니하다가 대궐 문을 나섬에 미쳐서는 탄연히 즐기며 조금도 서로 어긋남이 없었으니, 아마 임금의 신명과 성덕(成德)이 변화시킨 것이리라. 이로써 보건대, 옛날 신하들이 각각 서로 당을 가지고 비주(比周)함이 일찍이 임금의 호오(好惡) 여하에 말미암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성종이 어느 날 사랑하는 환관(宦官) 5ㆍ6명과 민간 일을 말하다가, 이어서 시자(侍者)에게 고기를 주도록 명하였다. 어떤 더벅머리 고자가 사양하며 먹지 않고 말하기를, “오늘은 국기(國忌)이오니, 고기를 먹지 않음이 옳은 줄 아뢰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 선조의 세대가 먼 까닭으로 그러는데, 네 어찌 이같이 정답지 못한 말을 하는가. 어찌 네 아비냐. 물러가라.” 하였다. 좌우가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아무개는 바로 함흥의 천한 사람입니다. 젊었을 적에 여러 친구와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그때에 환관 아무가 명을 받자와 함흥으로 가는데, 앞에는 빛나는 말이 있고, 붉은 옷 입은 자가 호각을 불고 엄숙히 앞에서 인도하는데, 환관이 역마를 탄 것이 매우 성대했습니다. 나무꾼 아이들이 머리를 한데 모으고 발 돋음하며 보았습니다. 이 더벅머리 고자는 매우 부러워했습니다. 나무꾼 중에 일을 아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저 사람은 한갓 고자임에도 귀하게 됨이 이와 같다.’ 하였습니다. 이 더벅머리는, ‘어떻게 하면 환자(宦者)가 됩니까.’ 하고 물었더니, 일을 안다는 나무꾼이 그 까닭을 말하여 주었습니다. 이 더벅머리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 드디어 칼로 그의 불알을 치고, 이내 중상시(中常侍)의 열(列)에 적을 두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상서롭지 못한 사람이로다.” 하고, 환관의 적에서 뺐다.
○ 성종이 놀기를 좋아하므로, 양사(兩司)에서 상소를 올려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바로 임금의 행차가 한 변두리 지역에 나가 순유(巡遊)하는데, 간하는 글이 그치지 않았으나, 임금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
○ 성종이 가끔 나가 놀았는데,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곧 수레에서 내려 땅에 앉았고, 어떤 때에는 악사에게 명하여 춤을 추고 갔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 성종이 술을 좋아하였는데, 흔히 가까운 궁인들이 모셨다. 내수사(內需司)에 명하여 날마다 흰 병풍을 들이라 했는데, 하룻밤이 지나면 전부 새빨개져서 나왔으니, 피를 뱉기 때문이었다.
○ 성종이 큰 술잔 기울이기를 즐기었다. 옥잔 하나가 있었는데, 맑기가 물 같았다. 임금이 매양 술을 두고 술이 거나해지면, 문득 이 술잔을 가지고 사람에게 술을 권했다. 어떤 종실이 있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은혜를 내렸다. 어느 날 또 이 잔으로 권하였는데, 그 사람이 마신 뒤 곧 옷소매에 넣고 춤을 추다가 거짓 땅에 엎어져 잔을 깨뜨렸다. 아마 성종을 풍자하여 간하려 함이리라. 임금도 이것을 허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 연산군(燕山君)이 세자로 있을 때, 심히 법도가 없었으나, 여러 신하들은 모두 그것이 동심(童心)에서인 줄 알고 있었다. 손순효(孫舜孝) 공이 어느 날 취기가 오르자 곧장 어상(御床)에 올라가 손으로 만지며,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또한 알고 있으나, 차마 폐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간관이 아뢰기를, “신하로서 어상에 오름은 이미 크게 불경한 것인데, 또 감히 귀에 대고 말을 하니, 이것은 법을 무시한 것입니다. 순효를 옥에 가두어 형률대로 논죄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순효는 나를 아껴 나에게 술 끊기를 권한 것인데, 무슨 죄에 해당할꼬.” 하였다.
○ 손순효가 찬성 겸 태학사(贊成兼太學士)가 되었는데, 성종이 그 재주를 아껴 매우 중히 여겼다. 매양 그의 술마시기 좋아함을 경계하여 이르기를, “경은 이제부터 석 잔 이상을 마시지 말지어다.” 하니, 순효가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나이다.” 하였다. 어느 날 승문원(承文院)에서 사대문서(事大文書)를 올렸는데, 임금이 그 표문(表文)이 좋지 아니함을 보시고 급히 대제학(大提學)을 불렀다. 사자(使者) 열 사람이 찾았으나, 순효의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자주 용상에서 일어나 매우 간절히 기다리었다. 해 떨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순효가 비로소 입대했는데, 흩어진 머리를 거두어 올리지도 않았거니와, 술기가 만면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이르기를, “이번에 하표문(賀表文)이 좋지 않아 경으로 하여금 다시 짓게 하고자 하는데, 경이 이와 같이 취하였는가. 또 내 일찍이 경계하기를 술 마시지 말라고 하였고, 약속하기를 석 잔을 넘기지 말라 하였는데, 경은 어찌하여 그 말을 실천하지 않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딸자식이 있어 출가하였사온데, 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오늘 지나는 길에 들렸더니, 만류하면서 술을 먹이는 까닭으로 감히 마지못하여 단지 석 잔만 기울이고 그만두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어떤 그릇에 따랐는가.” 하니, “밥주발이라는 것으로 세 사발 마셨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이 이미 취하였으니, 글을 지을 수 없지 않을까 염려되오. 제학(提學)을 불러다가 같이 지어 정하는 것이 옳겠소.” 하였다. 대답하기를, “제학을 번거롭게 하지 마옵소서. 신이 짓기를 끝맺겠사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신이 이미 지었사온데, 써야하겠나이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이 비록 묘하게 쓰지만, 부본(副本)을 술에 취해서 휘두르는 것은 불가하오. 모름지기 사자인(寫字人)을 쓰는 것이 옳겠소.” 하였다. 순효가 억지를 써 아뢰기를, “신이 쓰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필연을 가져오도록 명했다. 순효가 서너 자루의 붓을 골라 손바닥에 그어 보더니, “모두 중 글자는 못쓰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어연(御硯)을 거두어 주라 명하니, 그 가운데에서 새 붓 하나를 가져다 그어 보고, “이것은 쓸 만하다.” 하고, 이어서 청하기를, “신은 늙었습니다. 상(牀)을 얻어 펴기를 원하옵니다.” 하자, 임금이 주도록 명하였다. 순효가 곧 부본에 나아가 쓰기 시작하여 다 쓰자, 붓대를 거꾸로 잡고 글 줄을 따라 한 차례 보더니 임금께 올렸다. 임금이 급히 받아보니, 글에 한 자도 버릴 것이 없고, 글자에 한 자도 고칠 것이 없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서 곧 승문원에 돌린 다음 봉투에 싸서 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사옹원에 명하여 연회 음식을 갖추라 하여 즐거이 놀 제, 순효에게 마음껏 먹도록 명하니, 마침내 대취하였다. 임금이 일어나 춤추기를 명하고 묻기를, “경은 시를 지을 줄 아오.” 하자, “명하기만 하십시오.” 하였다. 임금이 장량(張良)으로써 글제를 삼고 마침내 가운데 중(中) 자로 첫 운자를 불러 지으라고 명했다. 대답하기를,
기모를 수랑사 가운데서 팔지 못하고 / 奇謀不售浪沙中
하니, 또 공(公) 자로 불렀다.
검을 짚고 돌아와 패공을 도왔네 / 杖劒歸來相沛公
하자, 그 대(對)를 봉(封) 자로 하니
계획은 이미 한 나라 왕업을 이루고 / 借箸已能成漢業
분모(모토를 분봉함 또는 제후로 봉하는 것)는 도리어 스스로 제 나라 봉해 줌을 사양했네 / 分茅却自讓齊封
했다. 그 다음 대(對)는 송(松) 자로 하니,
평생의 지략은 황석에게 전해 얻고, / 平生智略傳黃石
늘그막의 공명은 적송에게 붙였네 / 末路功名付赤松
하였고, 다음 대는 웅(雄) 자로 하니,
한신과 팽월이 끝내 젓갈 담겨진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노니 / 堪恨韓彭竟葅醞
공을 이루고 몸은 물러가는 것이 바로 영웅이라네 / 功成身退是英雄
하여, 응하기를 메아리치듯 하였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경은 늙을수록 더욱 장성해지는 자라고 할 만하오.” 하고, 술이 취하자 임금이 늙은 궁인 하나를 나오라 하여, 비파를 타면서 노래를 부르게 하고, 또 순효에게 일어나 춤을 추라 하니, 순효는 취했기 때문에 거꾸러져 일어나지 못하므로 임금이 남금단첩리(藍錦段貼裡 임금이 걸치듯 입는 옷 이름)를 벗어 덮어 주고 들어갔다. 임금과 신하 사이가 이와 같았으므로 지금까지도 듣는 사람이 감격하여 눈물짓는다.
○ 광묘(光廟)께서 정희왕후(貞熹王后)와 같이 앉았는데, 성종의 나이 겨우 아홉 살에 또 왕손 한 사람과 같이 모시고 있었다. 갑자기 우레 소리가 한번 나더니, 전(殿) 위의 한 기둥이 흔들렸다. 정희왕후가 깜짝 놀라 얼굴빛이 변했고, 왕손도 뜻밖의 일로 졸지에 놀라 절도를 잃었는데, 홀로 광묘만이 끄떡없었고 성묘도 태연하였다. 광묘가 정희왕후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훗날 나라 일은 이 아이에게 부탁함이 옳겠소. 내 말을 잊지 마시오.” 하였다.
○ 광묘가 문선왕묘(文宣王廟 성균관의 공자(孔子)의 묘)를 배알하고 돌아와 이내 병이 났다. 정희대비(貞熹大妃)가 근심하여 무당에게 물었더니, 모두 공자묘(孔子廟)의 귀신에게 빌라고 하였다. 정희대비가 궁인에게 명하여 여러 무당을 인솔하고 가서 음사(淫祀)를 대성전(大成殿) 뜰 가운데서 행하게 하였는데, 여러 무당이 휩쓸려 분장하고 갖은 재주를 어지러이 부렸다. 성균관(成均館) 안의 여러 선비 가운데 사기(士氣) 있는 사람이 들고 일어나, 여러 선비를 인솔하고 무당을 내몰았다. 장구와 여러 악기를 방망이로 때려 부수니, 궁인이 놀라 흩어져 달아나 대비에게 들어가 아뢰었다. 대비가 크게 노하여 여러 선비를 모조리 하옥하려 하자, 지관(知館) 이하가 제생(諸生)을 인솔하고 대궐 앞에 가 명을 기다렸다. 대비가 사람을 시켜 성종에게 들어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편안치 아니하여 무당에게 물었더니, 모두 공자묘의 빌미라고 하기에 내 궁인에게 명하여 기도하라 하였더니, 제생(諸生)이 대역무도(大逆無道)하게 무당을 때리고 궁인을 협박해 쫓고, 발길로 여러 기구를 차 깨뜨렸으니, 이것은 군부(君父)가 없는 놈들이외다. 내가 모두 벌주려 하여 이것을 알립니다.” 하니, 성묘가 베개를 밀치고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우리 태학(太學) 생도(生徒)가 이와 같이 의절(義節)이 있는가.” 하고, 드디어 사옹원에 명하여 음식을 갖추게 하고 지관사(知館事) 이하 제생을 인솔하고 들어오라 명하여, 근정전(勤政殿) 뜰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고, 제생에게 후추(胡椒) 한 되씩을 하사하였다.
○ 성묘가 밤에 근신(近臣)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취하지 아니하면 술상을 치우지 않겠다 하니, 승지들이 모두 취하여 쓰러졌다. 임금이 중인(中人)에게 명하여 가만히 그의 은띠를 끄르게 하고, 금띠로 바꿔 띠어 준 다음 부축하여 나가게 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급히 입시(入侍)를 명하니, 숙취(宿醉)가 아직 깨지 아니하여 띤 것이 금띠인지 살피지 못하였다. 날이 훤히 밝아 온 무렵 좌우 사람이 그 금띠를 보고 모두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언관이 이것을 탄핵하자,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미 황금 띠를 띠었으니, 그대로 승진하는 것이 옳겠다.” 하고, 마침내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명하였다.
○ 성묘가 술을 장만하여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 때마다 꼭 여악(女樂)을 벌였다. 어느 날 소춘풍(笑春風 영흥(永興)의 이름난 기생 이름)에게 술을 부어라 명하니, 준소(蹲所 술 두루미 있는 곳)에 나아가 금잔에 술을 부었으나, 감히 지존(至尊 임금) 앞에 나아가 드릴 수 없어, 바로 영상(領相) 앞에 가서 잔을 들고 노래를 부르니, 그 뜻은, 순(舜)이 계시지만 감히 지적하여 말할 수 없거니와, 요(堯)라면 바로 나의 좋은 짝이라는 것이다. 이때에 무신(武臣)으로 병조 판서 된 자가 있어 생각하기를, 이미 상신(相臣)에게 술을 권했고 보면 의당 장신(將臣)에게 술을 권할 것이니, 다음은 꼭 내 차례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대종백(大宗伯 주 나라 때의 벼슬 이름. 제사 전례(典禮)를 맡음)으로 문형(文衡)을 맡은 자가 앉아 있었는데, 소춘풍은 술을 부어 가지고 그 앞으로 가서 노래하기를, “통금박고(通今博古)한 명철군자(明哲君子)를 어찌하여 버려두고 바로 저 무지한 무부(武夫)에게 갈 수가 있으리오.” 하였다. 병권을 주관하는 그 사람이 바야흐로 노기를 품었는데, 소춘풍이 또 잔을 부어 권하면서, “앞서 말은 농담이요, 내 말이 잘못됐소. 규규(赳赳) 무부(武夫)를 어찌 아니 좇겠는가.” 하였다. 이 세 노래는 모두 속요(俗謠)인데, 뜻으로 해석해 보면 이와 같다.
이때에 성묘가 크게 기뻐하여 소춘풍에게 금단(錦段), 견주(絹紬) 및 호표피(虎豹皮)ㆍ후추(胡椒)를 매우 많이 상으로 하사하였는데, 소춘풍의 힘으로는 혼자 다 운반할 수 없었다. 입시하였던 장사들이 모두 날라다 주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소춘풍의 이름이 온 나라에 퍼졌다. 영상에게 술 따르며 노래하기를, “순도 계시건마 의아 내님인가 노라.”
○ 유호인(兪好仁) 공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성묘께서 특별히 남다른 은혜로 돌보아 주어 다른 학사(學士)는 비길 수 없었다. 달밤마다 환자(宦者) 몇 사람을 거느리고 경회루에서 놀 때, 연못 가운데 작은 배는 겨우 5ㆍ6명을 태울 수 있는데, 홀로 호인만을 따르게 한 것은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이적선(李謫仙 이태백의 별호)을 대우함과 같다 하겠다. 호인이 교리(校理)로서 숙직하게 되었는데, 임금이 작은 환관 한 사람을 거느리고 밤에 숙직하는 방에 왕림했다. 호인이 놀라 일어서니, 임금이, “사모(紗帽)만 쓰고 앉으시오.” 하고, 조용히 논담했다. 임금이 그 명주 이불이 떨어져 솜이 비쭉 나오고 누런 물감 들인 빛이 바랬음을 보자, “그대는 높은 관직을 지냈는데 검소하기 이와 같으니, 가상하도다.” 하고, 곧 환관에게 명하여, “어피(御被)를 가져오라.” 하여, 덮어주고 갔다. 이것은 바로 당(唐) 나라 문종(文宗)이 위욱(韋澳)을 사랑한 것과 동일한 은총이다. 성종이 호인의 시재(詩才)를 사랑하여 혜총(惠寵)이 날로 높아졌으나 끝내 대관(大官)에 이르지 못하였음은, 아마 성종께서 그의 그릇이 재상의 직책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살폈기 때문이리라. 당시 사람들이 이로써 임금이 사람을 씀에 각각 그 재주를 따라 쓰는 데 탄복했다. 성묘께서 주군(州郡)에 혹 잘 다스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되는 자는 궐하(闕下)에 끌어다 놓고, 친림(親臨)하여 매를 치고 그 임지로 돌려보내면서 경계하기를, “만일 개심하여 정사를 하지 아니하는 날이면, 의당 죄를 물으리라.” 하니, 사람마다 다투어 힘쓰지 아니함이 없었다.
○ 성묘가 달마다 광화문(光化門)에 행차하여 정사를 들었다. 사관(史官)과 환관을 나누어 보내어 각사를 돌아가면서 살피게 했는데, 자리에 없는 관리가 있으면, 친림하여 매를 치고, 비록 육부상서(六部尙書)라 하더라도, 혹 꾸짖음을 받았고, 벌이 매에 이르는 사람도 있었다.
○ 유호인의 집은 남쪽 지방에 있었다. 매양 귀향하여 노모(老母)를 섬기기를 빌었으나, 성묘가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호인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는데, 성묘가 친히 전별하고 술이 반쯤 취하여 노래를 지어서 이시렴브듸갈다아니가든못소냐므더니솔티랴남의권을드런다그려도하애답고나가뜻을일너라 부르니, 호인이 감격하여 울었고, 좌우 사람도 감격하였다. 다른 날 호인이 성종에게 아뢰지 아니하고 가니 임금이 비밀히 사람을 보내어 그 행동을 밟아보게 하며 이르기를, “내 그를 생각하여 마음에 아직 잊어본 적이 없는데, 그도 나를 생각하는가 보라.” 하였다. 명을 받은 사람이 따라가 한 역정(驛亭)에 이르니, 호인이 누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주저하기 오래 하더니, 마침내 벽 위에 율시 한 구를 쓰는데,
북쪽을 바라보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갈렸는데 / 北望君臣隔
남쪽으로 오니 어미와 아들이 서로 만나게 되었네 / 南來母子同
한 것을 보았다. 돌아와 그 실정을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지, 그도 나를 생각하는구나.” 하였다.
○ 호인이 한 고을의 수령을 청해 늙은 어머니를 편하게 봉양하고자 하였으나, 성묘가 허락하지 않았다. 혈성(血誠)으로 해마다[頻年] 구하니, 명하여 의성(義城) 수령을 제수했다. 비밀히 감사(監司)에게 유시하기를, “호인은 나의 벗이다. 어버이를 위하여 백리(百里 고을의 뜻)에 굽혔으니 잘 보아 주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감사가 업적을 고과했는데, 하지하(下之下)였다. 임금이 노하여 감사에게 묻기를, “내가 일찍이 명한 것이 있는데, 어째서 호인을 꼴찌로 했는가.” 하니, 감사가 대답하기를, “나라가 수재(守宰)를 설치한 것은 그 일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백성을 사랑하고 사물의 법칙을 세우기 위함에서입니다. 이제 호인은 음풍농월(吟風弄月)하여 공무를 다스리지 아니하므로, 떨어뜨렸사옵니다.” 하였다.
○ 성묘가 독한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하였다. 감독하는 늙은 내시가 있어, 임금이 상할까 염려하여 약간 물을 타 그 맛을 묽게 하였다. 임금이 마시고 나서 싱겁다 하시고, 그 환관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그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내쫓았다.
○ 종실(宗室)에 소원(疎遠)한 사람 하나가 수염이 아름답고 길이가 두어 자 되나, 용모가 훤출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돌보아 주기를 매우 특별히 하여, 상으로 내려 줌이 많았다. 하루는 그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내 모양을 누워서 생각하니, 이와 같은데도 임금이 특별히 대우하여 여러 신하 가운데 나보다 나은 자가 없습니다. 내가 만일 이 긴 수염을 자르면, 임금의 은고(恩顧)가 반드시 더욱 깊을 것입니다.” 하고, 손에 가위를 잡아 모두 깎았다. 얼마 안 있어 임금이 갑자기 불러 들였는데, 그 사람이 환관 같음을 보고 이상히 여겨 묻자, 그 사람이 정황을 말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끌어내 보냈다.
○ 3월 상사(上巳 3월 3일날)에 성묘께서 내시 몇 사람을 거느리고 후원(後苑)에서 놀다가 어떤 별감(別監)에게 명하여 반궁(泮宮)에 가서 유생(儒生) 몇 사람이 있는가 보고 오게 하였다. 얼마 있다 돌아와서 아뢰기를, “다만 한 서생만이 반궁에서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후원 작은 문을 열라 명하고, 급히 그 사람을 불러 친히 물어 보기를, “제생을 다 갔는데, 너만 혼자 남아 있음은 무슨 까닭인고.” 하자, 대답하기를, “오늘은 명절이라, 제생이 혹은 집으로 가고, 혹은 친구의 집으로 가고, 혹은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여 노옵는데, 신은 먼 곳에서 온 가난한 선비오라, 몸을 글방에 부친 뒤는 친척도 없고 짝도 없사오니, 가고자 하온들 어디를 가겠나이까. 그래서 혼자 머물러 있는 터이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제생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10여 명이 방금 서재(西齋) 뒤 반수(泮水)가에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네 시험 삼아 그곳으로 가라.” 하자, 그 사람은 조심하여 명한대로 하였더니, 얼마 안 되어 승전환자(承傳宦者) 및 대전별감(大殿別監)이 왔고, 어주(御廚)의 음식과 임금이 쓰는 두루미의 술을 8ㆍ9명이 지고 이고와 바로 그 선비 앞에 놓고, 그 사람을 시켜 제생을 부르게 하여 같이 먹게 하니, 제생이 크게 놀랬다. 다음날 특명으로 전강(殿講)을 행하여, 그 사람에게 마침내 급제를 주었다.
○ 광묘(光廟) 반정(反正) 때 어떤 더벅머리 장사꾼이 가장 공이 많이 있었으므로 어필로 써 주기를, ‘삼사무여(三死無餘 죽을 죄를 세 번 거듭하여도 죄를 주지 말라)’라 했다. 뒤에 성묘가 처음 즉위했을 때 그 사람이 살인을 했다. 유사들이 논하기를 형률대로 하니, 그 사람이 어교(御敎)를 바쳤다. 정희대비(貞熹大妃)가 보고 교서를 내리기를, “선왕이 이미 수교(手敎)를 써 주었으니, 방면하라.” 하였다.
성묘가 난색하여 말하기를, “선왕의 교는 일시의 은혜요, 살인한 자가 죽어야 하는 것은 만고의 공법(公法)입니다. 어찌 일시의 은혜를 따라 만세의 공법을 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정희대비가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 하지만, 선왕의 유교를 받들지 않을 수 없지 않으오. 특별히 놓아 주시오.” 하였다. 성묘는 재삼 난색을 하였으나, 정희대비가 따르지 아니하니 성묘가 말하기를, “할머님께서 제 말씀을 듣지 않으신다면, 저는 나라 일을 감히 이어 맡을 수가 없사오니, 다른 사람에게 맡기시기 바라옵니다.” 하였다. 정희대비가 말하기를, “너 할 대로 하라.” 했다.
○ 성묘의 폐비 모씨(某氏)가 친히 길쌈을 했다. 일찍이 주홍기(朱汞機 베틀 이름)에 올라 앉아 명주를 짜고 있었는데, 성묘가 와서 보니 비(妃)가 베틀에서 내려와 아뢰기를, “상감께서 키가 어찌 이리도 크시오” 하자, 성묘가 말하기를, “나보다 더 큰 사람도 있소. 불러서 보여 주리다.” 하였다. 드디어 허종(許琮)을 불러오라 명했는데, 허종의 키는 열한 자나 되었다.
○ 성묘가 궁중에다 사슴 새끼를 길렀는데, 길들이기를 오래 하여 항상 좌우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어느 날 연산(燕山)이 옆에 모셨는데, 그 사슴이 와서 핥으니 연산이 발로 찼다. 성묘가 언짢게 여겨 이르기를, “짐승은 사람을 의지하는데, 어찌 그리 불인(不仁)한고.” 하였다. 뒤에 성묘가 승하(昇遐)하고 연산이 즉위하던 날, 연산이 손수 그 사슴을 쏘아 죽였다.
○ 《사기》〈채택전(蔡澤傳)〉에 ‘지량척지비(持梁刺齒肥)’란 구절의 ‘척지(刺齒)’ 두 자는 마땅히 ‘설차(囓此)’로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땅히 본 글자와 같이 읽어야 하니, 《예기》에 ‘무척치(毋刺齒)’라 하였다.
○ 사마자장(司馬子長)이 말하기를, “문왕이 구류되어 《주역(周易)》을 부연했다.” 하고, 〈점술가전[日者傳]〉에 또 “문왕이 육십사괘(六十四卦)를 부연했다.” 하였는데, 양자운(楊子雲 양웅(楊雄))도 자장의 말을 따랐다. 그러나 《연산(連山)《귀장(歸藏)》에 모두 64괘가 있으니, 문왕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삼국 시대의 한단순(邯鄲淳)은 말하기를, “신농(神農)이 64괘를 부연하였다.” 하고 《색은(索隱)》에 삼황(三皇)을 기록하면서, “또 신농이 64 괘를 부연하였다.” 하였다. 주회암(朱晦庵)은 말하기를, “《연산》과《귀장》은 다 문왕의 앞에 있었고, 64괘가 이미 있었은즉, 문왕이 부연했다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였다. 옛사람이 혹 이르기를, “복희(伏羲) 때에 64괘가 갖추어 있었다.”고 했는데, 누가 옳은지 알 수 없다.
○ 광묘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었을 때, 나이 14세에 어떤 창녀의 집에서 잤는데, 밤중에 그와 더불어 사통하는 자가 와서 문을 두들기었다. 광묘가 놀라 일어나 발로 뒷벽을 차니, 벽이 쓰러지자 밖으로 나와 몸을 솟구쳐 두어 길 되는 담을 뛰어 넘었는데, 그 사람도 뛰어 넘었다. 광묘가 세겹 성을 뛰어 넘으니, 그 사람도 같이 했다. 광묘가 대로를 따라 1리쯤 달리다가 길가에 묵은 버드나무가 있어, 마침내 그 속에 숨으니 그 사람을 따라 잡지 못하고 또 종적을 잃었는지라, 혀를 차고 욕을 하면서 갔다. 얼마 뒤에 점잖은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와 작은 다리 가에 오줌을 누고 나서 성문(星文 천문)을 쳐다보고 이상히 여겨, 혼잣말로, “자미(紫微)별이 유수(柳宿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를 거쳤으니, 반드시 임금이 버들에 의지한 상이다. 매우 이상한 일이다.” 하고, 얼마 있다 들어갔다. 광묘가 바로 돌아와 다음날 그 사람을 물색하니, 바로 관상감(觀象監)으로 추보(推步)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광묘가 그 성명을 암기하고 마음으로 홀로 기뻐하였다. 뒤에 등극하여 물으니, 그 사람이 죽은 지 이미 오래였으므로 그 자손에게 후히 하사했다.
○ 성묘조에 재신(宰臣) 가운데 권찬(權纂)이라는 성명(姓名)을 가진 자가 있었다. 조사(詔使)가 왔을 때 연위사(延慰使)로서 안주(安州)에 있었는데, 평양 서윤(庶尹)의 아들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자가 아버지 빈소 옆에서 관기(官妓)를 사간(私姦)했다는 말을 들었다. 뒤에 권공이 대사헌이 되니, 그 사람은 이미 등제(登第)하여 정언(正言)이 되었다. 권공이 그 일을 추거(推擧)하여 탄핵하니, 그 사람이 상소하여 힘껏 변명하였다. 임금이 권공에게 묻기를, “누구에게서 들었소.” 하였다. 대답하기를, “신이 그전에 연위사(延慰使)로 오래 안주에 머물렀사온데, 평양 사람 아무가 신을 위하여 매우 자세하게 말하였사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사람을 하옥하라고 명하고, 5ㆍ6명이 연좌되어 체포되었다. 그 말이 나온 곳을 따지니, 결국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 돌리게 되어 증좌할 수 없으므로 마침내 그만두었다. 임금은 권공이 남의 숨은 악을 캐냈다 하여 끝내 승진시키지 않으니 결국은 가선(嘉善)에서 죽었다. 권공이 아직 죽지 않았을 때, 조정의 의론이 그를 애석하게 여겨, 녹을 수지사(守知事)에 붙인 까닭으로 죽은 뒤에 시호(諡號)를 얻었다. 정언이란 자는 끝까지 높은 자리를 지냈는데, 빈소 곁에서 기생을 사간한 일만은 과연 거짓이 아니라고 한다.
○ 세조가 봄날에 우연히 한 글귀를 기둥 위에 쓰기를,
푸른 비단을 가위질하여 삼춘 버들을 지었고 / 綠羅剪作三春柳
붉은 비단을 말라서 2월 꽃을 이뤘네 / 紅錦裁成二月花
했다. 오래 있다가 시 한 구가 그 밑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읽어 보니,
만일 왕손으로 하여금 이 빛을 다투게 하면 / 若使王孫爭此色
봄빛이 야인(野人)의 집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네 / 春光不到野人家
하였다. 임금이 좌우에게 물었으나, 모두 알지 못한다 하는데, 어떤 문지기 한 사람이 땅에 엎드려 말하기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신이 썼습니다.” 하니, 그에게 벼슬을 주라고 명했다.
○ 어떤 내금위(內禁衛) 한 사람이 손가락을 퉁기면 소리가 몇 리까지 들렸다. 밤 숙직 때 달밤에 손을 퉁겼는데, 연산이 이것을 듣고 묻기를, “이 소리가 어디서 나는고.” 하였다. 좌우가 소리를 따라 가보고 아뢰니, 연산이 그 사람을 불러다 손가락을 퉁기게 하고, 그 사람에게 물건을 후히 내려 주었다.
○ 연산(燕山)이 밤에 미복차림으로 다녔다. 멀리 못가에 황새가 서있는 것을 보고 사람인가 하여 크게 놀랐는데, 가까이 가니 날아갔다. 다음날 황새를 사로잡도록 명했다.
○ 홍윤성(洪允成)은 호서(湖西) 사람인데, 서울에 가 과거에 응시하려 하였다. 짐을 지고 걸어서 한강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제천정(濟天亭)에 나가 놀았다. 대궐의 창두(蒼頭 졸병 또는 하인) 10여 명이 배 가운데 있어 배를 살피고 배를 가지 못하게 하는데, 윤성이 배 안에 뛰어 들어 손으로 작은 노를 꺾고, 그들을 모두 쳐 물에 빠뜨린 다음, 독신으로 배를 저어 건넜다. 수양대군이 기특하게 여겨 앞으로 불러오게 하여 후히 대접하고, 몰래 은의(恩意)를 맺었는데, 뒤에 그가 공신이 되어 매우 존숭과 총애를 받았다. 수양대군은 바로 세조이다.
○ 홍윤성이 교생(校生)이 되었을 때, 어떤 도사(都事) 한 사람이 순행하다가, 그 고을에 들려 제생(諸生)에게 경서를 강(講)하도록 하였는데, 윤성도 참여했으므로 한 번 만나본 친분이 있게 되었다. 그 뒤 그 도사가 조정에 들어와 병조 정랑(兵曹正郞)이 되었을 때, 어떤 서생 한 사람이 그 집에 찾아 왔는데, 바로 홍윤성이었다. 이에 말하기를, “추위가 매서우나, 가난해서 휘양도 장만하지 못하였습니다. 값을 얻어 갖추기를 원합니다.” 하자, 정랑이 즉석에서 그 값을 주었다. 얼마 후에 한 아전이 와서 문부(文簿)를 올리는데, 그가 입은 적호(赤狐)가 새로운 것을 보고, 윤성이 자기 손으로 벗겨서 입었다. 이어 정랑에게 말하기를, “다시 값을 주십시오.” 하니, 정랑이 조금도 내색 안하고 주었다. 그 뒤 세조가 보위(寶位)에 올라 온양 탕천(溫陽湯泉)에 행차가 있었는데, 윤성이 따라갔다. 이때에 정랑이 일찍이 참판으로서 그 고을에 좌천되어 가 있었는데, 윤성이 바로 대구(大口) 수백 마리를 사 가지고 가서 주고, 이윽고 세조에게 건의하니, 그전 관직을 복구해 주었다. 윤성이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내 평소 그대의 옛 덕을 갚고자 하였더니, 이제 복관이 되었소. 모름지기 그 대구는 돌려보내 주시오.” 하였다. 그 사람이 벌써 이웃에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다시 얻기가 어려웠다. 혼자 근심하기를, “차라리 용서를 받지 않았더라면, 이 물건을 내라고 하지 않았을 터인데.” 하고 결국 사 보내 주었다.
○ 홍윤성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을 때 그 숙부(叔父) 아무 갑(甲)이 그 아들의 벼슬을 청했다. 윤성이 말하기를, “숙부께서 만일 아무 곳 논 스무 섬지기 하종(下種)하는 것을 저에게 주시면,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숙부가 말하기를, “공은 왜 이런 말을 꺼내시오. 그전에 공이 뜻을 얻지 못하였을 때, 내게서 의식을 구해 지내기를 10여 년 했고, 그 밖에 의뢰한 것도 추호라도 내것 아님이 없었소. 이제 공이 경재(卿宰)의 지위에 이르렀는데, 유독 내 아들 하나를 벼슬시킬 수 없겠는가.” 했다. 윤성이 그 말이 퍼질까 두려워, 자리에서 그 숙부를 박살내고 드디어 동산 가운데 묻어 버렸다. 그 아내가 이 사실을 서장을 올려 고소하려 하나, 형조에서 받지 아니하고, 헌부(憲府)도 듣지 아니하며, 당직(當直)도 또 허락하지 않았으니, 모두 윤성의 세도 때문이었다. 광묘가 온양 탕천에 행차할 때, 그 아내가 미리 광묘가 지나갈 만한 길가 버드나무에 밤에 올라가 기다렸다. 연(輦)이 그곳에 이르자, 나무 위에서 호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광묘가 사람을 시켜 물으니, 그 아내가 아뢰기를, “말할 것이 권신에 관한 것이라, 반 걸음 사이에 반드시 언어가 변할 것이니, 감히 말하여 드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연을 멈추고 내려오라 명하니, 그 아내가 앞에 와 대답하기를 매우 자세하게 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윤성을 벌주려 하였으나, 그의 공이 크므로, 그 자리에서 그의 하인 열 사람을 벌주고 갔다.
○ 나주(羅州) 성황사(城隍祠)에 신이 있는데 매우 영험하였다. 그 앞을 지나는 사람이 내리지 아니하면, 곧 타고 가는 말이 죽었다. 홍윤성이 이 고을 자사(刺史)로 가자, 하리(下吏)가 이 연고를 고하였더니, 윤성이 크게 노하여 말을 채찍질하여 그곳을 지났는데, 그 말이 일 리도 가지 못해 거꾸러져 죽었다. 윤성이 크게 노하여 바로 그 말을 잡고 열 동이 술을 실었다. 군졸에게 궁시도부(弓矢刀斧)를 가지도록 명하고 몸소 그 사(祠)에 가서 말고기와 술을 그 앞에 놓고 그 신을 욕보여 말하기를, “네가 이미 내 말을 죽였으니, 이것은 그 고기를 먹고자 위해서이다. 만일 이 고기를 먹고 이 술을 마시지 못한다면, 내 응당 너를 불살라 겁탈할 것이다.” 했다. 잠깐 있다가 보니, 술은 약간 축났으나, 고기는 그대로 있었다. 윤성이 대노하여 마침내 그 사당을 불살라 쫓으니, 그 신은 마침내 멀리 총사(叢祠)로 옮아갔다. 그 뒤 고을 사람이 혹 제사하면, 그 신이 말하기를, “먼저 홍지주(洪地主)를 청하여 제사한 다음에 나를 제(祭)하오.” 하였다. 고을마다 음사(淫祀)가 있으면, 반드시 먼저 윤성을 제사하는데, 윤성이 어떤 때에는 훈훈히 취하는 것 같았다.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가 신에게 제사지내는구나.” 하였다. 뒤에 물어보면, 과연 그러하였다.
○ 《십구사략(十九史略)》에, ‘주력능신철구삭벌유시씨(紂力能伸鐵鉤索伐有施氏)’ 라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역능신철구삭’으로 구를 뗀다. 어떤 이는 또 ‘신철구’, ‘삭벌유시씨’로 구를 떼는데, 더욱 가소롭다. 《회남자(淮南子)》에 보면, ‘주력능별약신구삭철(紂力能別䚥伸鉤索鐵)’이라 있는데, 이 세 구는, “주(紂)의 힘이 능히 소뿔 가운데 있는 속뿔을 뽑아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설문(說文)》에, “약(䚥)은 소나 양의 뿔 속의 뼈이다.” 하였으니, 뽑아서 구별하는 것이다. ‘신구(伸鉤)’는 쇠갈고리를 펴서 곧게 하는 것이요, ‘삭철(索鐵)’은 철을 꼬아서 노끈을 만든다는 것이다.《초사(楚辭)》에, ‘삭호승지사사(索胡繩之纚纚)’란 말이 있는데, 이제 ‘주력능신구 삭철 벌유시씨(紂力能伸鉤索鐵伐有施氏)’로 고쳐 세 구로 하여 읽음이 옳겠다.
○ 홍윤성(洪允成)이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호남(湖南)에 나갔다. 전주 사람 아무개가 대대로 망족(望族 명망 있는 족속)이고 집이 부자인데, 딸 셋이 있어 모두 아름답다 하였다. 윤성이 그 딸을 첩으로 삼고자 하여, 전주에 가기 전에 먼저 호남 방백(湖南方伯)과 전주 부윤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 계획을 알렸다. 또 묵을 차비를 그 집에 차리도록 하였다. 감사와 부윤이 그 아버지를 불러 그 글을 보이며 말하기를, “네가 만일 앞에서 물리치면, 화가 너의 집에 미칠 뿐만 아니라, 감사와 부윤도 모두 죽게 될 것이다. 너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 혼구(婚具)를 정리하라.” 하였다. 그 아버지가 “예, 예” 하고 물러나와 집으로 돌아와 그 아내와 더불어 울면서 탄식하기를, “계집애를 너무 많이 낳아, 앉아서 가문을 망치는구려.” 하였다. 셋째 딸이 그 연고를 물으니,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의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딸이 말하기를, “한 집안 일을 어찌 자녀라 하여 참여해서 알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하니, 그 아버지가 자세히 일러 주었다. 딸이 말하기를, “이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제가 여기에 대응하겠사오니, 근심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윤성이 이르자 그 딸은 단장을 성하게 하고 중문 뒤에 섰다가 윤성이 군복을 입고 들어오는데, 그 딸이 그의 팔을 잡아 당겼다. 윤성이 돌아다보니, 한 아리따운 계집이 마주서서 읍하고 말하기를, “공은 바로 나라의 상신(相臣)으로 이제 대원수가 되었고, 저도 이 지방의 양반 성의 딸이온데, 공이 저로써 첩을 삼고자 한다니, 이 저에게 무슨 욕이 오니까. 만일 처로 삼는다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꼭 첩으로 삼는다면 오늘 이 앞에서 죽겠습니다. 공이 어찌 차마 이런 무례를 행하여 억울하게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하였다. 윤성이 웃으며, “네 말과 같이 하겠다.” 하고, 드디어 나와서 비밀히 광묘에게 서장을 올리기를, “신의 처가 매우 해명하지 못해 집안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바꾸려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오늘 전주에 오니, 아무의 딸이 어질고 아름다워 계실로 삼기를 원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것은 경의 집안 일인데, 하필 나에게 물으리오.” 했다. 윤성이 드디어 예를 갖추어 장가들었다. 윤성이 죽은 뒤에 전후처가 서로 적첩(嫡妾)을 다투었는데, 바로잡지 못했다. 후처가 말하기를, “어느 해 어느 날 선왕께서 제 남편 집에 행차했을 때, 저로 하여금 어느 날 행배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정원(政院)에 반드시 일기(日記)가 있을 터이니, 부인으로서 행주(行酒)한 것으로 되어 있는가, 첩으로서 행주한 것으로 되어 있는가, 그 글을 상고해 보기 바랍니다.” 하였다. 일기를 꺼내어 보니, 쓰기를, “모년 월일에 왕이 홍윤성의 집에 행차하여 술자리를 가졌는데, 술이 거나하자, 윤성의 부인을 나오게 하여 행주하게 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 사실을 열거하여 아뢰니, 성묘가 그 후처로 명하여 정처로 삼았다. 이 말을 내가 남병사(南兵使) 신립(申砬)에게서 들었다.
○ 성묘 때 어떤 조정 관리 한 사람이 후취(後娶)로 대부(大夫)의 딸을 얻어 처로 삼았다. 사흘 뒤에 글을 올려 아뢰기를, “처녀로서 실행(失行)을 하였사오니, 버리고자 하옵니다.” 하였다. 성묘가 의심하여 늙은 의녀(醫女)에게 명하여 진찰시켰더니, 의녀가 아뢰기를, “발가벗기고 그 음을 보니, 금사(金絲)가 아직 끊기지 아니하옵고, 계안(鶴眼)이 오히려 새로웠습니다. 다른 의심 없음을 보장하옵니다.” 하였다 성묘가 매우 그럴 듯하게 생각하고, 여의(女醫)에게 후하게 사례하고, 그 사람에게 부부를 이루어 살도록 명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처녀가 연소한데다가 남편 된 자가 술에 취하여 그 어떠한지를 살피지 못하고 잘 못하여 이러쿵저러쿵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묘는 의심하고 여의는 확정하여, 여자 집에서 이로 말미암아 악명을 벗어날 수 있었다.
○ 성묘조 때 조정 관리 가운데 후취(後娶)한 자가 있었는데, 마음에 처녀로 다른 남자를 경험해 본 것 같다는 의심이 들어 소(疏)를 올려 그 처를 버리기를 청했다. 임금이 환시(宦侍)에게 명하여 그 집 방의 형세를 그려 오게 한 다음 보니, 침실 옆에 높은 누가 있었다. 임금이 그 사람에게 글을 내리기를, “비유하여 말하자면, 가을 밤(栗)과 같아 때가 되면 스스로 벌어지는 법이니, 거느리고 더불어 종신(終身)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당시에 식자들이 말하기를, 높은 누(樓)가 침실에 이어 있어, 어렸을 때 오르내리며 서로 부딪쳐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뜻으로서 이것을 생각해 보면, 임금의 생각은 뭇 사람이 따라갈 바가 아니다.
○ 성묘가 큰 가뭄을 만나, 신이란 신을 다 들어 섬겼다. 임금이 친히 경회지(慶會池) 가에서 기도하는데, 뜨거운 햇볕 아래 그대로 앉아 거의 협진(浹辰 12일간)에 이르렀을 때 어디서 여러 음악 소리가 들려 왔다. 임금이 물으니, “바로 방주 감찰(房主監察)의 행례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하늘이 오래 비를 주지 아니하여 초목이 말라 비틀어져 서성(西成 추수)의 희망이 끊어지고, 대명(大命 천명)이 가까이 머물러, 내 바로 정전(正殿)을 피하고, 음식을 줄이고, 음악을 폐하며, 한데에 앉아 빌기를 여러 날하고 근고하기를 이같이 함은 백성을 위함인데, 녹을 먹는 무리가 감히 음악을 벌여 즐기며 노니, 매우 사리에 어긋난다. 그들은 모두 하옥하라.” 하니, 24명이 일시에 구속됐다. 그들은 그 아들들로 하여금 상소를 올려 애걸하게 했는데 상소가 들어오자, 임금이 대노하여, “너희들이 이미 예절이 없어 죄에 빠졌고, 또 그 어린 것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내게 하니, 더욱 미워할 것이다.” 하고, 상소 올린 자들은 모조리 잡아들이게 하였다. 임금이 편전에서 기다렸는데, 마침내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홀로 방주 감찰의 아들만이 가지 않고 붙잡혔는데, 나이가 아직 어린 아이였다. 임금이 묻기를, “너는 어린아이로서 어찌하여 달아나지 아니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애초부터 아버지를 건지기 위하여 글을 올렸사온데, 비록 죄를 받는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도망하겠나이까.”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이 소(疏)는 누가 지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자작하였사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쓴 사람은 누군가.” 하니, 대답하되, “신이 썼사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네 나이 몇 살이냐.” 하니 대답하되, “열세 살이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네가 과연 능한가. 속이면 마땅히 죄를 줄 것이다. 숨기지 말지어다.” 한즉, 대답하되, “짓고 쓴 것이 모두 신의 손에서 나왔사옵니다. 시험하여 보시옵소서.”하니, 임금이 민한부(悶旱賦)로써 글제를 삼아 짓기를 명하였다. 그 애가 바로 지어 썼는데, 그 끝 구절에 이르기를, “옛날 동해의 한 원부(寃婦)가 3년의 가뭄을 이르게 하였으니, 성주(聖主)께서 이것으로써 진념(軫念)하시게 되면 성탕(成湯)의 천리 비를 이르러 오게 하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보고 몹시 기뻐하여, “네 아비는 누군가.” 하니, 대답하기를, “주방 감찰 신 김모가 바로 신의 아비옵니다.” 하였다. 또 “네 이름은 무엇이냐.” 물으니, 대답하되, “규(虯)로서 이름 하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어필(御筆)로 종이에 쓰기를, “예로부터 글 잘 짓는 선비는 글씨를 잘못 쓰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글을 잘못 지었는데, 너는 글도 잘 짓고 또 글씨도 잘 쓴다. 네 글을 보고 아비를 놓아주고, 네 아비를 보아서 네 아비의 동료를 놓아준다. 네 그 효도를 충성에 옮길지어다.” 하고, 이내 승전색사관(承傳色史官 승전색은 이조 내시부의 벼슬 이름, 왕지를 전달함)에게 명하여 그 글을 가지고 그 아이를 따라 의금부로 가서 모두 놓아주었다. 판의금(判義禁) 이하가 모두 문에 나와 기다려 그 서장을 펴 보았으며, 임금은 마침내 24명을 내보냈다. 김규(金虯)는 성묘 때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그 뒤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정이품에 이르렀다. 광묘의 기제가 있을 때 마다 꼭 사흘씩 울었고, 그 달이 다하도록 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죽은 뒤 그 자손이 그 글로써 병풍을 만들어 신주의 뒷벽에 달아 놓았다 한다.
○ 《사기》〈한비전(韓非傳)〉에, ‘미자지모병 인문왕야고지(彌子之母病人聞往夜告之)’란 구절이 있는데, 《한비자》에서는 ‘인문왕야고지(人聞往夜告之)’ 구절에 대해 ‘인문왕(人聞往)’ 구와 ‘야고지(夜告之)’ 구로 떼었으니, 극히 간고(簡古)하다.
○ 《사기》〈형경전(荊卿傳)〉에 ‘진왕탐기세 필득소욕(秦王貪其勢必得所欲)’ 구절이 있는데, 《전국책(戰國策)》에는, ‘진왕탐기지(秦王貪其贄)’로 되어 있다. 《전국책》의 구절이 《사기》보다 낫다.
○ 《두시(杜詩)》《망악(望嶽)》편에, ‘안득선인구절장 주도옥녀세두분(安得仙人九節杖 柱到玉女洗頭盆)’이란 구가 있다, 《두시우득(杜詩愚得)》을 읽어 보면, ‘주도(柱到)’가 주도(柱倒)로 되어 있는데, 그 주(注)에 아마도 옥녀로서 양귀비에 비유한 것 같다고 하고, 말하기를 “어찌 선인의 구절장을 얻어서 양귀비의 머리 감는 동이를 뒤엎으리오.” 하였다. 섬인(剡人) 단원양(單元陽)은 어리석다 하겠다.
○《회남자(淮南子)》에, “해는 양곡에서 나와 함지에서 목욕하고 부상에서 떨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소장공(蘇長公)의 〈한문공조주묘비(韓文公潮州廟碑)〉에, ‘서유함지약부상(西游咸池略扶桑)’이란 서(西) 자는 반드시 잘못일 것이다.
○ 왕포(王褒)의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에, ‘수백아조체종봉문자만오호유미족이유기의야(雖伯牙操遞鍾蓬門子彎烏號猶未足以喩其意也)’란 구절이 있다. 《소미통감(少微通鑑)》에서는 ‘수백아(雖伯牙)’ 이하 ‘오호(烏號)’에 이르는 열두 자를 버리고, 다만 ‘유미족이유기의야(猶未足以喩其意也)’라 하였는데, 이른바 ‘유기의(喩其意)’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가.
○ 《한서(漢書)》〈고조기(高祖紀)〉에, 조서를 내리기를, ‘승상은 어사(御史)에게 내리고, 어사는 중집법(中執法)에게 내리고, 중집법은 군수에게 내렸다.’ 란 구절이 있는데, 이 조서는 승상이 마땅히 어사에게 내리고, 이것으로 또 아래로 내려 보낸다고 한 말인데, 《통감(通鑑)》에서는, 다만, “어사와 중집법이 군수에 내린다.” 하였으니, 누가 이해할 것인가.
○《한서》〈문제기(文帝紀)〉에, “조서를 내리기를, ‘지금 세수(歲首)라 때때로 사람으로 하여금 장로(長老)를 존문(存問)하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의 부모가 된 뜻이라고 일컫겠는가. 그 80세 이상 된 자에게는 솜 한 근, 고기 열 근을 내려주라.’ 는 구절이 있는데, 《통감》에서는 다만, ‘지금 세수니 불시(不時)로 사람으로 하여금 장로를 존문하되, 그 80세 이상 된 자에게는 …… 내려주라.’ 하였으니, 어찌 단장(斷章)하기를 조리가 통하지 않게 하였는가.
○ 《시》삼백편(三百篇 시경 3백 5편의 준말)의 육의(六義) 가 각각 다른데, 시를 짓는 자가 단장취의(斷章取義)하는 까닭으로 옛사람은 정(正)과 변(變)을 분간하지 않고 다 그 시를 인용하였으니,《좌전》에서 이것을 상고하여 볼 수 있다. 한때의 가구(街謳)와 항요(巷謠)가 꼭 사람마다 모두 정(正)에서 나왔다 하지 못할 것이요, 또 꼭 사람마다 음(淫)에서 나왔다고도 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에도 혹 음풍(淫風)의 시가 있고, 정(鄭) 나라와 위(衛) 나라의 시에도 혹 정풍(正風)의 시가 있는 것과 같으며, 대서(大序)에서도 볼 수 있다. 주자(朱子)가 단정하여 서설(序說)을 만든 뒤로 드디어 바꿀 수 없는 《시》로 되어, 옛사람이 시를 짓는 뜻이 폐해졌다. 예를 들면, 〈개풍시(凱風詩)〉를 한 나라 사람이 혹 인용하여 황후를 찬미하였고, 유자후(柳子厚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 유종원의 자)는 또한 이 글을 인용하여 어머니를 사모하되,
내 삶이 맑지 못함을 슬퍼함이여 / 哀吾生之不淑
개풍의 슬픈 시를 따르노라 / 循凱風之悲詩
하였다. 옛사람이 시를 인용함에 구애받지 아니함이 이와 같았다. 오늘날 사람이 만일 〈개풍〉을 인용할 때 혹 왕후에 대하여서나 어머니에 대하여 인용하게 되면, 반드시 망발이라고 기록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춘추 때 아무나 아무 시를 지었다는 뜻이겠는가.
○ 송 나라 때 어떤 무인(武人)이 두보(杜甫)의 시를 들어 사람에게 묻기를, “두자미는 말하되, ‘이태백이야 말로 시에 적수가 없다.’ 하고, 이어서
청신함은 유개부요 / 淸新庾開
준일함은 포참군이다 / 俊逸鮑參軍
하였다. 이미 무적(無敵)이라 말하고서 어찌하여 단지 유포(庾鮑)에게 비교하였는가.” 하
자, 그 사람은 대답을 못했다. 그렇다면, 무인도 경시하지 못할 것이다. 이의산(李義山)의 〈혼하중(渾河中)〉절구에,
구묘에 티끌이 없고 팔마는 돌아왔는데, / 九廟無塵八馬廻
성루에서 봄을 받드니 봄 이끼만 자랐더라 / 奉春城壘長春苔
함양언덕 위에 영웅의 뼈는 / 咸陽原上英雄骨
반이나 그대 집을 향하여 말을 키워 오누나 / 半向君家養馬來
란 말이 있다. 내 일찍이 이 시를 읽었을 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어떤 무신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일찍이 한 책을 보았는데 시중(侍中) 혼감(渾瑊)이 항상 사람 뼈를 잿 가루로 만들어 말에 먹였는데, 말이 살찌고 건강하기가 보통과 달랐다고 씌어 있더라.” 하였다. 이로써 보면 비록 무사라 하더라도, 어찌 하찮게 여길 수 있겠는가.
○ 이의산(李義山) 회중(回中)의 〈모란위우소패시(牧丹爲雨所敗詩)〉에,
낭소유화불급춘 / 浪笑榴花不及春
선기영락갱수인 / 先期零落更愁人
옥반병루상심삭 / 玉盤迸淚傷心數
금슬경현파몽빈 / 錦瑟驚絃破夢頻
만리궁음비구포 / 萬里窮陰非舊圃
일년생의속류진 / 一年生意屬流塵
전계무파군회고 / 前溪舞罷君回顧
병각금조분태신 / 倂覺今朝粉態新
이라 했다. 10년 전에 내가 간이당(簡易堂) 최립(崔岦)씨와 이 시를 논하였는데, 최 공은 생각하기를, “‘전계무파(前溪舞罷)’란 모란이 바람을 따라 날아간다는 말이고, ‘군회고(君回顧)’란 군은 모란을 가리킨 것이고, ‘병각금조분태신(倂覺今朝粉態新)’이란 모란꽃이 이미 떨어졌으나, 빛은 아직도 새롭다는 것을 말함이라.” 하였다. 내 크게 웃고 마음으로 옳지 않게 생각했다. 최 공이 내 말을 옳게 여기지 아니하니, 그의 고집이 심하다. 내가 뜻으로써 이 시를 해석하기를, “‘낭소유화불급춘(浪笑榴花不及春)’이란 모란이 헛되이 유화가 봄에 미처 피지 못함을 웃는다는 말이고, ‘선기영락갱수인(先期零落更愁人)’이란 모란이 아직 다 피지 못하였는데, 비가 제 시기보다 앞서 떨어지게 되므로, 족히 사람으로 하여금 수심하게 한다는 말이고, ‘옥반병루상심삭(玉盤迸淚傷心數)’이란 비에 젖기를 상의 눈물같이 했다는 말이며, ‘금슬경현파몽빈(錦瑟驚絃破夢頻)’이란 빗소리가 금슬소리 같다는 말이고, ‘만리궁음비구포(萬里窮陰非舊圃)’란 회중(回中) 그 자신이 촉도(蜀道)로 들어갔으니, 고향의 꽃밭이 아니라는 말이고, ‘일년생의속류진(一年生意屬流塵)’이란, 모란이 버림을 받아 진흙에 있게 되니 생의(生意)가 진했다는 말이며, ‘전계무파군회고(前溪舞罷君回顧) 병각금조분태신(倂覺今朝粉態新)’이란 전계무(前溪舞)와 후계무(後溪舞)는 곧 곡명(曲名)으로 악부에 보이고, 군(君)은 가인(佳人)을 가리킴이니, 가인이 일찍이 모란과 고움을 다투었는데, 오늘 전계무파(前溪舞罷)한 뒤, 모름지기 나와 너의 분태(粉態)를 회고하니, 아울러 곱고 새로움을 깨닫겠다. 시의 뜻은 모란꽃이 있음에 미인의 안색이 일찍이 빼어나고 다름이 없더니, 오늘 모란꽃이 떨어지니, 비로소 나의 옥같은 모양과 아름다운 빛이 더욱 곱다는 것을 말함이다.” 하여 내 말이 이 같은데, 최 공은 스스로 자기의 의견을 지켜 옳게 여기지 않으니, 저 어찌 족히 더불어 시를 논할 만한 사람이 되겠는가. 가장 웃을 만한 것은 모란은 붉은 빛이니 분색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요, 가령 백모란이라 하더라도 비 때문에 패했은즉, 떨어져 진흙에 있게 되면 더러움이 심할 것이니 어찌 분태가 새로울 수 있겠는가.
○ 《사기(史記)》〈소진전(蘇秦傳)〉에, ‘임치지도 거곡격인견마(臨淄之途 車轂擊人肩磨)’란 말이 있는데, 《통감(通鑑)》에도 이 글이 있다. 읽는 사람들이 ‘거곡’에서 띄어 ‘격(擊)’ 을 ‘인견’에서 띄어 ‘마(磨)’를 읽는다. 나도 이와 같이 읽어 왔으나, 이제 비로소 깨달았다. ‘거(車)’에서 띄어 ‘곡격(轂擊)’을 읽고, ‘인’에서 띄어 ‘견마’를 읽는 것이 옳은 줄 알게 되었다. 옛사람의 토에 “거곡이 격하며, 인견이 마하며,”라 해 왔으나, 이제 와서는, “거는 곡격하고 인은 견마하고”로 이같이 토를 다는 것이 옳겠다.
○ 노두(老杜)의 〈두견행(杜鵑行)〉에,
업공이 깊은 나무에 숨어 / 業工竄伏深樹
4,5월에 울기를 일편되이 하누나 / 四月五月啼偏呼
하는 구가 있는데, 업공(業工)은 주(注)에서 해석하지 못했다. 내가 옛날 젊었을 적에 일찍이 어떤 책을 보았는데, 두견의 새끼를 업공이라 한다고 했는데, 지금 어느 책에서 나왔는지 기억하지 못하겠다.
○ 당 현종(唐玄宗)이 《장자(莊子)》를 높여 《남화진경(南華眞經)》으로 하였다. 나는 ‘남화’의 뜻을 알지 못하였는데, 《노자익(老子翼)》을 읽게 되자 비로소 ‘남화’는 장자의 살던 동네 이름인 줄 알았다.
○ 두번천시(杜樊川詩)에,
광문이 옛날 저산 저력산목의 준말)에 머물렀다 / 廣文昔日留樗散
라는 구가 있다. 서거정(徐居正)공이 이것을 주(注)하였는데, 바르게 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두시에,
정공(鄭公)이 저산(樗散)하니 귀밑이 실 같더라 / 鄭公樗散鬢如絲
하였다. 정건(鄭虔)이 일찍이 광문관 학사(廣文館學士)가 되었는데 목지(牧之)가 시를 준 것은 바로 정건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광문저산’이라 하였는데, 지금 ‘저산은 자(字)이다’ 한 것은 잘못이다.
○ 임기(林芑)란 이는 이문학관(吏文學官)에서 제일이었다. 박학능문(博學能文)으로 그 무리에서 뛰어났다. 항상 두시를 사람에게 가르쳤는데,
종에겐 흰 밥을 주고 말에겐 푸른 꼴을 준다 / 與奴白飯馬靑蒭
란 말을 해석하기를, “백(白)이란 백면(白面)과 백도(白徒)와 같은 말로 맨밥을 줄 뿐이다는 말이다.” 하니, 어떤 제자 한 사람이 희롱하기를, “종에게 단지 밥만 주고 소금과 장을 주지 않는다면, 반드시 말을 먹일 때에도 단지 꼴만을 주고 죽과 콩을 주지 않겠습니다.” 하니, 임기는 노하고 듣는 사람은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 《한서(漢書)》 〈이릉전(李陵傳)〉에, ‘역액호사명중(力扼虎射命中)’이라 했는데, 토를 달기를, “역은 액호하고 사는 명중하나니.”로 함이 옳겠다.
○ 황산곡(黃山谷)〈수선화(水仙花)〉시에
능파선자 (물 위를 걷는 신선) 버선 위에 티끌 이나니 / 凌波仙子生塵襪
물 위를 사뿐사뿐 달빛에 걷는 듯 / 水上盈盈步微月
이란 구가 있다. 화담 선생이 제자에게 시를 가르쳐 주다가, 이 구에 이르러 해석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선생이 잡서(雜書)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조자건(曹子建)의 〈낙신부(洛神賦)〉에,
물결 위를 가만가만 걸으니 / 凌波微步
비단 버선에 티끌 이누나 / 羅襪生塵
이란 말이 있다.
○ 김안로(金安老)가 재상이 되자, 화담 선생의 명망이 매우 중함을 꺼려 마음으로 해치고자 하였는데,
창이 넓으니 바람맞이에 족하고 / 窓豁迎風足
뜰이 비었으니 달 보기를 많이 했더라 / 庭空得月多
란 구를 보고, 말하기를, “자수(自修)하는 선비에 불과하다.” 하더니, 시기하는 마음이 마침내 그쳤다.
○ 상공(相公) 박우(朴祐)가 송도의 유수일 때, 상국(相國) 박순(朴淳)은 그의 아들이다. 상국이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가끔 선생을 집에 청하여, 상국으로 하여금 변취(辨聚)하게 하였다. 유수가 문 뒤에서 듣고 자신도 모르게 심취(心醉)하였다. 매양 선생이 가실 때마다 문에 나와 목송(目送)하면서, “참으로 신선 가운데 사람이다.” 하였다.
○ 화담은 자주 양식이 떨어졌고, 항상 담식(淡食)하였다. 사람이 어쩌다가 고기나 생선을 보내도 먹지 않았다.
○ 화담은 말린 밴댕이를 즐겨 먹었다.
○ 화담은 일찍이 남에게 취(取)하지 아니하였고, 또 감히 남을 주지도 아니 하였다. 비록 음식이라 하더라도 그러하였다.
○ 황은손(黃殷孫)이란 이는 시정(市井)의 유식한 사람이었다. 평소 화담을 경모하였고, 선생 또한 더불어 말하였다.
○ 화담이 일찍이 제자에게, “태허(太虛) 가운데서 티끌보다 많은 것은 무슨 물건인가.” 하니, 모두 대답을 못하였다. 황은손이 대답하기를, “천지입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 화담이 내 선군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학문에 유(儒)가 가장 어렵고, 불(佛)이 다음이고, 선(仙)이 가장 아래이다.” 하였다.
○ 화담이 또 말하기를, “달(達)한 자는 생사에 있어서 밤과 아침의 떳떳함이 있는 것과 같이 여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귀화(歸化)날이 하루가 급하다. 세상에서 하루를 지내는 것이 1년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 하였다.
○ 화담 선생이 일찍이 나무를 깎아 선기옥형(璿璣玉衡)을 만들었다.
○ 화담이 제갈 공명의 목우유마(木牛流馬)를 말하기를, “공명(孔明)의 심장(心匠 마음으로 생각함)은 얼마나 되는가. 그러나 이것은 신묘하지는 못하다.” 하였다.
○ 화담 선생이 화담 별장에 있을 때, 뜰에 있는 살구나무가 봄이 되었어도 홀로 생기가 없었다. 선생이 머슴에게 명하여 흙을 긁어내고 물을 뿌려 주게 하고 거적자리를 덮어 주게 하였더니, 며칠 안 되어 새싹이 돋아 나왔다. 문인(門人)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상할 것 없네. 무릇 초목이 생(生)하는 데에 땅에서 나오는 것이 각각 분수가 있다. 이제 이 나무를 보니 배토(培土)가 너무 많다. 아침저녁 마당을 쓸어서 묻었기 때문이다. 흙이 많아 기를 펴지 못하는 까닭으로 생의가 발할 수 없는 것이다. 헤쳐서 성글게 하고 양기를 통하게 한 까닭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것이 이(理)의 떳떳함인데 다만 사람이 알지 못한다.” 하였다.
○ 황해 방백(方伯)으로 화담 선생과 서로 아는 자가 있었다. 선생에게 한 번 들르기를 청하므로 선생이 손님이 되어 갔다. 방백은 사우(師友)의 예로 대접하였다. 악(樂)을 벌이고 즐겼는데 선생이 취한 뒤에 일어나 춤을 추니, 사람이 모두 신선인가 여겼다. 하루를 머무르고 곧 돌아왔는데, 방백이 많은 노자와 종이ㆍ붓을 드렸으나, 선생은 모두 받지 아니하고 단지 닷 되 쌀만 받을 뿐이었다.
○ 화담 문인(門人)으로는 상국(相國) 박순(朴淳), 감사(監司) 박민헌(朴民獻), 감사 허엽(許曄), 부사(府使) 민순(閔純) 같은 이들이 모두 일컬을 만한 사람들이다.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가 수업을 가장 오래했고 소득도 많았다. 선생은 개성 교수(開城敎授) 심의(沈義)와 상종하였는데, 또한 재주를 취할 만한 것이 있었던가보다.
○ 병인년(丙寅年)에 내 선군(先君)께서 고성(高城) 군수가 되었을 때, 신응시(辛應時) 공의 송별 시에,
고성은 군이 된 지 오랬으나 / 高城爲郡久
읍은 매우 쓸쓸하다 / 邑里太蕭條
서쪽을 바라보니 산은 모두 뼈인데 / 西望山皆骨
동쪽을 내다보니 바다엔 밀물이 없네 / 東臨海不潮
단사는 갈로를 부르고 / 丹砂招葛老
부석이 왕교(王喬)를 보내더라 / 鳧舃送王喬
홀로 꽂고 시를 읊은 곳에 / 拄笏吟詩處
겸하여 조금이라도 시끄러움을 받음이 없네 / 兼無簿領囂
하였다.
○ 양창해(楊滄海)가 강릉 부사가 되었을 때, 내 선군이 고성 군수 된 지 이미 네해나 되었다. 선군께서 시관(試官)으로 강릉에 갔었는데, 창해선생이 우리 선군을 위하여 시를 강선정(降仙亭) 기둥에 쓰기를,
강선정 위에서 선옹을 바라보니 / 降仙亭上望仙翁
어느 곳 방울과 저가 푸른 하늘을 의하여 오는가 / 何處鸞笙倚碧空
가락봉머리에 비낀 해가 떨어지는데 / 伽樂峰頭斜日落
흰 갈매기 가랑비에 해당화도 붉었네 / 白鷗疎雨海棠紅
하였다. 내 선군께서도 또한 사시(私詩)가 있었는데,
바다에 임해 한번 신선 늙은이를 찾으니 / 臨瀛一訪偓佺翁
옥으로 만든 기둥은 어느 해에 채필을 휘둘러 / 玉柱何年揮彩筆
저 바다 큰 조개가 놀라 청홍을 펼쳐 놓았네 / 驚他海蜃散靑紅
하였다.


[주D-001]우언(寓言) : 이태백의 시의 한 제목. 우언이란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물에 비교해서 은근히 풍자하는 말로 우의(寓意)와 같음.
[주D-002]저소손(褚少孫) : 한 나라의 패(沛) 땅 사람. 왕식(王式)에 사사(師事)함. 원성중(元成中)에 박사가 됨.
[주D-003]순갱 :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 진(晉)나라 장한(張翰)이 자기 고향의 명산물 두 가지를 먹기 위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함.
[주D-004]육기(陸機) : 진(晉)대의 시인(A.D.261-303). 자는 사형(士衡). 아우인 육운(陸運)과 더불어 이륙(二陸)으로 불리어 이름이 높았음. 문집으로 평원내사집(平原內史集)이 있다.
[주D-005]두번천 : 당 나라 경조(京兆)의 사람. 자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 강직한 선비로서 특히 그의 시는 호매(豪邁)하기로 알려져 소두(小杜)라 하였다.
[주D-006]풍소(風騷) : 《시경》의 〈국풍(國風)〉과 《초사(楚辭)》의 〈이소(離騷)〉를 말한다. 심약(沈約)의 〈송서사령운전론(宋書謝靈運傳論)〉에 그 표류(飇流)의 시초를 찾아 가면, 풍소(風騷)를 같은 할아버지로 하지 아니함이 없다 하고, 《남사(南史)》 〈유견오전(庾肩吾傳)〉에 보면, 이미 비흥(比興)이 다르고, 또 다시 풍소에 배반했다고 되어 있다. 또 일설에는 시가들의 풍류운사(風流韻事)를 말한다.
[주D-007]위관(委官) : 죄인을 추국할 때 의정 대신 가운데에서 임시로 뽑아 임명하던 재판장.
[주D-008]두자미의 ……의심할 만하다 : 저자 차오산이 여기에서 두자미(杜子美)를 공격하되, 뇌(餒)와 뇌(餧)는 음의(音義)가 같은데, 말하자면 “주린다”는 뜻인데, “먹인다”란 궤(餽)의 뜻으로 썼다고 한다. 이것은 오산의 잘못이다. 뇌(餒) 자는 다만 “주린다”란 뜻으로 쓰이고 뇌(餧) 자는 발음이 “뇌” 할 때에는 뇌(餒) 자와 같은 뜻을 나타내지만, 위(餧) 할 때에는 “먹인다” 는 뜻으로 되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반맹견ㆍ두초당ㆍ소과의 용법은 음을 “위”로 읽을 때 바른 것이다. 따라서 저자도 단안을 내리지 못했다.
[주D-009]악양루(岳陽樓) : 중국에 있는 누 이름. 악주부(岳州府))의 부성(府城) 서문(西門)이다.
[주D-010]종정도(從政圖) : 선비들 놀이감의 하나. 벼슬의 승진되는 길을 따라 서로 누가 먼저 높이 되나를 겨룸.
[주D-011]호량(濠梁) : 장자와 혜자가 호량(濠梁) 위에서 놀다가, 장자가 말하기를, “피라미가 조용히 나와 노니, 이것은 고기의 낙인가 봅니다.” 하였다. 혜자가 말하기를, “그대가 고기가 아닌데 어찌 고기의 낙을 아시오.” 하고 힐난했다. 장자는 다시 말하기를, “그대는 내가 아닌데 어찌하여 내가 고기의 낙을 알지 못한다 하시오.” 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주D-012]주매신(朱買臣) : 한(漢) 나라 주매신이 50세가 되도록 궁하게 사니, 그의 아내가 그를 버리고 갔다. 수년 후에 그의 고향인 회계(會稽)의 태수(太守)가 되어 부임하니, 그의 아내가 개가한 남편과 함께 길을 닦는 부역을 하고 있었다. 주매신은 그들 부부를 뒷수레에 싣고 가서 마소 먹이는 심부름을 시켰더니, 그 부인이 목을 매어 죽었다.
[주D-013]결습 : 활 쏘는 데 쓰는 기구. 결(決)은 깍지 손. 코끼리뼈로 만들고,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끼고 줄을 잡아당긴다. 습(拾)은 토시이며, 가죽으로 만들고 왼팔에 껴서 활줄이 닿는 것을 막는다.
[주D-014]비주(比周) : 비(比)는 사사로운 마음으로 편벽되게 친하는 것이며, 주(周)는 정도(正道)로 널리 사귀며 널리 공사의 구별 없이 친하는 것.
[주D-015]수랑사 : 지명. 하남성 박랑헌의 동남. 《사기》의 〈진시황기〉나 《한서 장량전》에는 같이 박랑사(博浪沙)로 되어 있다.
[주D-016]계획 : 저를 빌린다. 저를 빌려서 계획하는 것. 자저(藉箸) 또는 차근(借筋)이라고도 쓴다. 한서》 〈장량전〉에 ‘신청차전저이주지(臣請借前箸以籌之)’란 말이 있는데, 장안(張晏)은 주를 내기를, “음식 먹는 젓가락을 빌려 가지고 붓 대신 그으면서 계획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했다. 따라서 계획하는 것이 된다.
[주D-017]황석 : 진(秦)의 은사(隱士) 장량이 하비 이상(圮上)에서 놀 때 노인(老人)을 만났다. 양(良)으로 하여금 떨어뜨린 신발을 주어오라 하고, 바로 책 한 권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왕자의 스승이 되리라. 13년 뒤에 제북(濟北) 곡성산(穀城山) 아래 황석(黃石)을 보리라. 그것이 바로 나다.” 하였다. 장량이 그 글을 읽었는데, 바로 태공의 병법이었다. 드디어 한 조고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뒤에 13년에 고조를 따라 제북 곡성산을 지날 때 황석을 얻어 가져다 제사지냈다. 장량이 죽자, 돌도 같이 장사지냈다. 세상에 전하기를, 《황석공삼략소서(黃石公三略素書)》라 한다.
[주D-018]적송 : 상고(上古)의 선인의 이름. 신농(神農) 때의 우사(雨師)로, 뒤에 곤륜산(崑崙山)에 들어가 신선이 됨. 장량이 따르고자 한 사람은 이 분이다.
[주D-019]반수(泮水) : 반궁(泮宮) 앞에 둘러 있는 물. 곧 지금의 성균관(成均館) 앞의 개울 이름.
[주D-020]연산(連山) : 삼역(三易)의 하나. 태고의 역점(易占)의 이름. 복희(宓戱)가 지었다 한다. 일설에는 하역(夏易)이라고도 한다. 그 뜻은 간(艮)을 수(首)로 삼아 산의 구름이 나오기를 연연하여 끊어지지 아니함을 상(象)하였다 함. 지금 옥함산방일서(玉函山房佚書) 및 엄가균(嚴可均)의 집본이 있다.
[주D-021]귀장(歸藏) : 은 나라 때의 역. 순곤(純坤)으로써 수(首)하고 만물이 그 가운데 귀장(歸藏)하는 뜻을 말함. 연산(連山)ㆍ주역(周易)과 합하여 삼역(三易)이라 함. 일설에는 황제(黃帝)의 역. 황제 또는 귀장씨라고 함으로 이름하였다 함.
[주D-022]금사(金絲) : 여자의 음부에 있는 봉기처(峯起處).
[주D-023]계안(鶴眼) : 여기에서는 처녀막(處女膜)을 말함이다.
[주D-024]육의(六義) : 시의 육의(六義)란 풍(風)ㆍ아(雅)ㆍ송(頌)ㆍ부(賦)ㆍ비(比)ㆍ흥(興)이다. 풍아송이 시체(詩體)에 의한 구별임에 비하여, 부비흥은 시의 수사법 또는 표현법으로 구별함이 보통이다. 고금시 어느 것을 막론하고 이에 의하지 아니함이 없다.
[주D-025]단장취의(斷章取義) : 장을 끊어서 뜻을 취해 온다. 작자의 본의, 시문 전체의 뜻이 어떠함은 상관없이 그 가운데에서 자기가 소용으로 하는 장구만을 뽑아다 쓰는 것.
[주D-026]팔마 : 여덟 마리의 말 또는 옛날 현관(顯官)의 수레 앞에서 행인을 물리치던 군졸.
[주D-027]갈로 : 진(晉) 나라 구용(句容)의 사람. 현(玄)의 손자. 자는 치천(稚川). 호는 포박자(抱朴子). 세상에서 소갈선옹(小葛仙翁)이라 한다. 더욱 신선 도양(神仙導養)의 법을 좋아하고 연단(煉丹)의 술을 현의 제자 정은(鄭殷)에게 배웠다. 함화의 처음에 산기상시(散騎常侍) 겸 대저작(大著作)에 불리었으나,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교지(交趾)에서 단사가 난다는 말을 듣고 구하여 구루령(句漏令)이 되었다. 자질을 이끌고 광주를 지나 나부산(羅浮山)에 이르러 단(丹)을 연단하고, 이루어짐에 시해(尸解)했다. 저작에서 황백(黃白)의 일을 말한 것을 내편(內篇)으로, 기타 박잡통석(駁雜通釋)한 것을 외편(外篇)이라 한다. 그리고 그 호에 의하여 《포박자(抱朴子)》라 이름 했다. 따로 신선전, 주후방(肘後方) 및 비주시부(碑誅詩賦)ㆍ잡문(雜文) 등 수백 권의 책이 있다.
[주D-028]부석 : 후한의 왕교(王喬)가 섭현(葉縣)의 영으로 되어 매월 삭망에 서울로 왔는데, 먼 길에 빈번한 것과 차량이 없는 것, 그리고 올 때에는 항상 두 마리의 오리가 날아온 것을 현종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서 그물로 그것을 잡았더니, 그물 안에 한 켤레의 신이 있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秋江先生文集卷之二
 詩 五言古詩○七言古詩○五言律詩○七言律詩
逍遙山。經元曉舊居。削木題詩。 a_016_034b


兮昔新羅代。高僧元曉居。靑山元不俗。雨後靑更舒。茫茫千萬古。代序一談餘。神通不生滅。法象應如初。桮渡向何處。如聞響木魚。

秋江先生文集卷之二
 詩 五言古詩○七言古詩○五言律詩○七言律詩
逍遙山。經元曉舊居。削木題詩。 a_016_034b


兮昔新羅代。高僧元曉居。靑山元不俗。雨後靑更舒。茫茫千萬古。代序一談餘。神通不生滅。法象應如初。桮渡向何處。如聞響木魚。

태종 2년 임오(1402,건문 4)
 1월28일 (신해)
소요산으로 가서 태상왕께 헌수하고, 종친과 성석린이 환가를 청하다

임금이 태상왕을 소요산에 가서 뵈었다. 임금이 조용히 헌수(獻壽)하였다. 태상왕과 임금은 술이 거나하자 시(詩)를 읊고 화답하였다. 시연(侍宴)하였던 종친(宗親)과 성석린(成石璘) 등이 태상왕의 환가(還駕)를 극력 청하였다. 또 사뢰기를,
“염불하고 불경을 읽음에 어찌 꼭 소요산이라야만 되겠습니까?”
하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뜻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
하고, 공중에다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들도 이미 서방 정토(西方淨土)로 향하여 있다.”
고 하였다. 태상왕은 무인년에 병이 든 뒤로부터 마음이 항상 답답하여 즐겁지 아니하기 때문에, 유행(遊幸)이 점점 잦아졌다.
【원전】 1 집 224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사상-불교(佛敎)

태종 2년 임오(1402,건문 4)
 2월11일 (갑자)
태상왕의 환가가 늦어짐을 걱정하다

임금이 정사(政事)를 보았다. 대간(臺諫)이 면대하여 아뢰기를,
“태상왕께서 소요산에 오래 계심은 불가하옵니다. 산람(山嵐)으로 인하여 건강이 나빠지실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이달 24일은 의비(懿妃)의 기일(忌日)이니 반드시 돌아오실 것이다.”
【원전】 1 집 225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주D-001]산람(山嵐) : 산에 가득하게 낀 안개.

태종 2년 임오(1402,건문 4)
 3월9일 (임진)
태상왕이 소요산 아래에 별전을 짓다

태상왕이 소요산 아래에다 별전(別殿)을 지었다. 태상왕이 경기우도 도사(都事) 이명덕(李明德)에게 말하기를,
“전(殿)을 하나 지어 손님을 대접하려고 한다.”
하니, 이명덕이 의정부에 고하고, 의정부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바로 경기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역사에 나가게 하였다.
【원전】 1 집 227 면
【분류】 *건설-건축(建築) / *재정-역(役) / *왕실-국왕(國王)


태종 2년 임오(1402,건문 4)
 3월24일 (정미)
소요산에서 돌아오다. 말무역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는 병부의 자문

임금이 소요산으로부터 돌아왔다. 중국 조정의 병부(兵部)에서 자문(咨文)이 왔다. 그 자문은 이러하였다.
“본부(本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역환마(易換馬) 7천 필을 이제서야 바꾸어 왔습니다. 조선에서 1만 필을 채울 수 없다면 억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 사신을 돌아오게 함이 옳겠습니다.”
임금이 기뻐하였고 축맹헌·단목지도 자문을 보고 모두 기쁘다고 말하였다.
【원전】 1 집 228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외교-명(明)
태종 2년 임오(1402,건문 4)
 4월21일 (계유)
박만이 울면서 태상왕께 환궁을 청하니 받아들이다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 박만(朴蔓)이 소요산(逍遙山)으로 가서 하직을 고하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동북면의 사람들은 모두 내 형제들이다. 지난번에 순문사(巡問使) 윤사덕(尹師德)이 매우 시끄럽게 굴었다. 경이 편안하게 어루만져 줌이 좋겠다.”
하매, 박만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기를,
“신이 마땅히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하니, 태상왕이 웃었다. 박만이 울면서 아뢰기를,
“지금 도망온 군대가 많이 양계(兩界)에 이르러 국가에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모두가 전하의 환궁(還宮)을 바라고 있사온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속히 환궁하시지 아니하옵니까?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전하께서 나라 일을 염려하지 않는다고 여기옵니다.”
하니, 태상왕이 말하였다.
“옳다. 내 장차 돌아가겠다.”
【원전】 1 집 232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명(明)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태종 2년 임오(1402,건문 4)
 4월28일 (경진)
태상왕이 소요산에서 신도로 가서 환왕의 기신 법회를 열다

태상왕이 소요산(逍遙山)으로부터 신도(新都)에 행차하여 승도(僧徒)를 모아 법회(法會)를 흥천사(興天寺)에서 베풀었으니, 이달 그믐날이 환왕(桓王)의 기신(忌晨)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내관(內官) 이용진(李龍進)을 보내어 중들에게 포(布) 1백50필을 시주하였다.
【원전】 1 집 233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사상-불교(佛敎)

태종 2년 임오(1402,건문 4)
 6월1일 (계축)
소요산에 가려고 했으나 간관이 농사철이라 민폐를 끼친다고 간하다

임금이 소요산에 가서 태상왕께 헌수(獻壽)하려고 하였으나 행하지 못하였다. 사간(司諫) 최긍(崔兢)과 정언(正言) 신개(申槪) 등이 청하기를,
“때가 한창 농사철이오니 7월을 기다려서 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종(侍從)을 감(減)하고 또 전중(田中)에서 사냥도 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농사에 해로움이 있겠는가? 벌써 주군(州郡)으로 하여금 공억(供億)을 번거롭게 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 하룻밤을 자고 갔다가 하룻밤을 자고 돌아오려는 것이다.”
하였다. 최긍 등이 다시 청하기를,
“비록 시종을 감한다고 하시오나, 곡식[禾稼]이 들에 가득하오니, 어찌 발로 밟아 손상시킬 폐단이 없겠사오며, 비록 공억(供億)을 감생(減省)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폐단이 없다고는 못할 것이옵니다. 태상왕의 뜻도 근현(覲見)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폐단을 입는다면 마음이 편치 못하실까 염려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봄·여름에는 부왕(父王)께 찾아 뵙지도 못한단 말인가?”
【원전】 1 집 235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정론(政論)
태종 2년 임오(1402,건문 4)
 6월9일 (신유)
태상왕이 소요산에서 회암사로 행차, 사찰 중수에 착수하다

태상왕이 소요산에서 회암사(檜巖寺)로 행차하였다. 태상왕이 회암사를 중수(重修)하고, 또 궁실(宮室)을 지어 머물러 살려고 하니, 임금이 그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서 대부(隊副) 1백 50명을 보내어 부역(赴役)하게 하였다. 어느 한 사람이 망명(亡命)하였으므로, 태상왕이 체포하여 죽이라 명하였다.
【원전】 1 집 236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건설-건축(建築) / *사법-행형(行刑) / *재정-역(役) / *사상-불교(佛敎)

태종 5년 을유(1405,영락 3)
 3월19일 (갑인)
산불로 소요산의 이궁이 불타다

소요산(逍遙山)의 이궁(離宮)에 불이 났으니, 산불이 연소(延燒)된 것이었다.
【원전】 1 집 322 면
【분류】 *군사-금화(禁火) / *왕실-종사(宗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