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12.9. 삼각산 산행

2011.12.09. 삼각산 산행

아베베1 2011. 12. 10. 10:08

 

 

 

 

 

 

 

 

 

 

 

 

 

 

 

 

 

 

 

 

 

 

 

 

 

 

 

 

 

 

 

 

 

 

 

 

 

 

 

산당집 ( 山堂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山堂集
판심제  山堂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866年刊
권책  5권 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0.9×14.7(㎝)
어미  上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040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6
 저자
성명  최충성(崔忠成)
생년  1458년(세조 4)
몰년  1491년(성종 22)
 弼卿
 山堂
본관  全州
특기사항  金宏弼의 문인. 南孝溫 등과 교유
 가계도
 崔德之
 直提學
 崔
 司勇
 密陽朴氏
 
 崔大成
 
 崔忠成
 
 全義李氏
 參議 李若水의 女
 崔演文
 萬戶
 女
 
 薛俊
 忠順衛

기사전거 : 家狀 및 萬姓大同譜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세조 4 1458 무인 天順 2 1 羅州에서 태어나다.
세조 11 1465 을유 成化 1 8 형을 따라 漢陽을 여행하다.
성종 14 1483 계묘 成化 19 26 月出山을 유람하다.
성종 15 1484 갑진 成化 20 27 長湍의 湧巖山을 유람하다.
성종 16 1485 을사 成化 21 28 한양의 三角山ㆍ白嶽山, 송도의 天磨山ㆍ聖居山을 유람하다.
성종 17 1486 병오 成化 22 29 瑞石山을 유람하다.
성종 18 1487 정미 成化 23 30 頭流山을 유람하다. 도중에 金鍵과 함께 南孝溫을 방문하여 「小學」ㆍ「近思錄」을 講論하다. ○ 점필재 金宗直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글을 올려 佛巫의 폐단을 물리칠 것을 청하다.
성종 19 1488 무신 弘治 1 31 봄, 方丈山을 유람하다. ○ 金宏弼의 부친상을 조문하러 嶺南에 가다. ○ 여름, 完山ㆍ玉川 등지를 유람하다. ○ 가을, 雪山을 유람하다. ○ 8월, 昌平監試에 응시하다. ○ 9월, 金堤文場에 응시하다. ○ 겨울, 金鍵 등과 더불어 月出山 精廬에서 講學하다.
성종 20 1489 기유 弘治 2 32 겨울, 鳳城에서 中風으로 병석에 눕다. 〈蒸室記〉, 〈警慮焚刻記〉를 짓다.
성종 21 1490 경술 弘治 3 33 전라도 관찰사에게 글을 올려 약을 구하다.
성종 22 1491 신해 弘治 4 34 3월 24일, 졸하다. 羅州 可芝洞 선산에 묻히다.
현종 6 1665 을사 康熙 4 - 2월, 士林이 祖 崔烟村이 享祀되어 있는 存養祠에 배향하다.
숙종 11 1685 을축 康熙 24 - 후손 崔秀華가 소장하고 있던 유고를 朴世采에게 校勘을 받다.
숙종 39 1713 계사 康熙 52 - 存養祠에 제관을 보내 致祭하고 ‘鹿洞書院’으로 賜額하다.
순조 5 1805 을축 嘉慶 10 - 9대손 崔爀이 2권 1책으로 문집을 간행하다.
순조 28 1828 무자 道光 8 - 후손 崔鍾翼이 家狀을 짓다.
고종 1 1864 갑자 同治 3 - 宋來熙가 行狀을 짓다.
고종 3 1866 병인 同治 5 - 후손 崔秉潤 등이 문집을 增補하여 간행하다.

기사전거 : 家狀ㆍ行狀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문집은 후손 崔邦彥이 소장하고 있던 草稿를 朴世采에게 校勘하여 1685년 원집 2권 1책으로 편집하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간행되지 못하고 稿本으로 남아 있던 것을 1805년에 9대손 崔爀이 宋煥箕의 序文을 받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
그 후 후손 崔秉潤 등이 그의 부친이 轉寫하여 보관하고 있던 것에 부록을 덧붙여 別集ㆍ附錄 합 3권 1책을 편차하고 1866년 원집과 함께 5권 2책으로 간행하였다.《중간본》 현재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66년에 간행된 중간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이다.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原集 2권ㆍ別集 1권ㆍ附錄 2권 합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의 雜著는 〈續原人〉ㆍ〈讀小學文〉 외에 「小學」에 관한 글 3편, 〈讀進學解〉ㆍ〈正名論〉ㆍ〈天堂地獄辨〉 등이 실려 있다. 이 중 「小學」에 관한 글이 많은 것은 저자가 金宏弼의 제자로 「小學」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생활의 기본으로 삼은 데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正名論〉은 군신과 부자의 名分을 바르게 함으로써 인륜을 밝히는 것이 중요함을 논하였으며, 〈藥戒〉는 병자가 藥으로 치유하는 이야기를 中心으로 국가 다스리는 것을 身體를 調理하는 데 비유하여 설명한 글이다.
권2의 書는 〈上佔畢齋先生書〉와 〈上湖南方伯求藥書〉로, 전자는 1487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점필재에게 佛巫의 폐해를 물리칠 것을 청하는 상서이며, 후자는 1490년 中風을 앓을 때 전라도 관찰사에게 약을 구하기 위해 올린 글이다. 記는 〈蒸室記〉와 〈警慮焚刻記〉로 中風을 치유하려고 힘쓰던 때의 기록이다. 傳은 〈山堂書客傳〉으로 1488년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한 후에 지은 自傳的인 글이다. 그 밖에 〈擬送張舍人歸江東序〉ㆍ〈擬齊王田橫墓誌〉ㆍ〈擬褚遂良諫立武氏爲后疏〉는 모두 擬作으로 義理ㆍ三綱을 강조한 내용들이다. 권미에는 1491년 盧伯玉이 쓴 〈上山堂書〉가 부록되어 있고, 1685년에 쓴 朴世采의 識가 있다.
권3은 別集으로 招宦遊子文, 雜說, 慶會樓記, 送韓侍郞謫湖州序, 題明道先生墓碑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招宦遊子文은 1488년 과거에 응시하여 낙방한 뒤에 지은 것으로 富貴에 집착하지 않고 江湖에서 自適하는 생활을 권하는 내용이다. 雜說은 두 편인데, 하나는 養材에 관한 글이고, 다른 하나는 仁을 통한 成材에 관한 글로 그 긴요함을 잘 나타낸 글이다.
권4는 附錄으로 家狀(후손 崔鍾翼 撰), 行狀(宋來熙 撰), 墓表(宋穉圭 撰)와 저자가 享祀된 鹿洞書院에 관한 기록 등을 모은 것이다. 그중 鹿洞書院에 관한 기록은 配享通文, 祝文, 金昌協과 宋相琦 등의 請賜額疏, 1713년 延額時 賜祭文과 후손 崔鍾翼이 이 事蹟 뒤에 썼던 글 등을 모은 것인데, 金昌協 등의 請賜額疏와 墓表 등은 편집상태 및 版型으로 보아 1866년 重刊시에 追刻한 것으로 보인다.
권5는 附錄으로 擅勝樓題詠과 저자의 손자 崔彥潾의 詩, 증손 崔福男의 行狀 2편(崔尙重ㆍ尹濟弘 撰)ㆍ墓表(李肇源 撰)를 모은 것이다. 그중 擅勝樓題詠은 저자의 아들인 崔演文의 別墅에 대해 읊은 金麟厚와 林億齡의 詩를 收錄한 것이다. 끝에 1866년에 쓴 후손 崔秉潤의 附錄後識가 있다.

필자 : 鄭弼溶

계곡선생집 제31권
 칠언 율시(七言律詩) 2백 33수(首)
다시 앞의 운을 써서 기옹에게 수답한 시 여섯 수[復用前韻 奉酬畸翁 六首]


오악 찾아보는 일 너무 늦어 유감이라 / 五嶽尋眞恨已遲
천지간에 몸담고서 몇 번이나 생각하였던가 / 側身天地幾含思
청운의 뜻 이룰 그릇 원래 못 되어 / 靑雲器業元非分
백발이 다 되도록 시만 잡고 고생하네 / 白首辛勤只爲詩
중산의 절교서(絶交書)가 오는 것도 당연한 일 / 中散書來應告絶
만용보다 높은 관직 어떻게 걸맞으리 / 曼容官過豈相宜
그래도 나의 뜻 알아 주는 우리 기옹 / 知音賴有畸翁在
시와 술로 정녕코 세모를 함께 보내리라 / 文酒丁寧歲暮期

번지처럼 농사 기술 배었어도 무방한데 / 何妨農圃學樊遲
한창 때에 충분히 생각 못한 게 유감이오 / 恨不當年爛熟思
조정에서 반악처럼 일찍도 센 귀밑머리 / 雲閣早彫潘岳鬢
만년에 부질없이 두릉의 시만 읊고 있소 / 暮途空詠杜陵詩
책 보기도 귀찮아서 던져 버리고 / 殘書總向慵時卷
잠 깬 뒤엔 그저 쓴 차만 입에 대오 / 苦茗偏於睡後宜
서쪽 시내 궁벽진 그대의 집 빼고 나면 / 除却西街幽僻處
말 타고 찾아갈 곳 그 어디 있으리요 / 出門騎馬與誰期

쫓기는 계절의 변화 도시 멈출 줄을 몰라 / 節序相催苦不遲
중방 제결의 때 그윽한 감회 느껴지네 / 衆芳鶗鴂感幽思
아직도 못 올린 삼천 독 문장 / 文章未奏三千牘
풍자하는 백일시를 그 누가 진달할까 / 風刺誰陳百一詩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썰렁한 막다른 길 / 末路凉凉無籍在
좋은 기회 놓쳐버린 위태로운 신세로세 / 危踪落落失便宜
어느 때나 임금 은혜 모두 보답하고 / 何時報答君恩畢
한가한 시간 얻어 숙원을 풀 수 있을런지 / 乞得閒身果夙期

화기로운 태평 시대 어찌 이리도 더디어서 / 玉燭元和何太遲
우리 임금 공연히 노심초사(勞心焦思)하게 하나 / 空勞聖主劇焦思
이 나라에 우국지사 없지도 않은 터에 / 非無憂國忘家士
흉적 없애 복수하는 시를 아직 못 읊다니 / 未賦除兇雪恥詩
오늘날 중책 맡은 자 상책 올려야 마땅하니 / 今日登壇須上策
예로부터 방편으로 오랑캐 달래 왔었다오 / 古來和虜出權宜
모두 떨어진다고 사천이 아뢸 따름이랴 / 司天但奏旄頭落
실제로 오랑캐 조만간 망하리라 / 早晚亡胡會有期

한가한 때 맞는 흥취 어찌 더디게 할까 보냐 / 閑時趁興肯敎遲
남쪽 기슭 이름난 동산 그리워지지 않소 / 南麓名園佳可思
맑은 대자리 성긴 발 멋진 손님 묶어두고 / 淸簟疎簾留勝客
옥 같은 샘물 그윽한 골 새로운 시 솟아나리 / 玉泉丹壑入新詩
시가(市街)와 붙었어도 속진(俗塵)의 내음 하나 없고 / 地連朝市無塵到
수레 소리 끊긴 골목 게으른 자에게 적격이오 / 巷絶輪蹄興懶宜
휴가 얻어 다시 한 번 찾아와 주지 않으려오 / 休沐不妨重命駕
언제 올지 이 늙은이 묻고만 싶소이다 / 老夫還欲問前期

당성의 소식 어찌 이리도 늦은지 / 唐城消息寄來遲
헤어진 뒤 구슬프게 정운시(停雲詩) 읊었노라 / 怊悵停雲別後思
자금장유의 생각 애가 타는데 / 紫禁常懸長孺戀
청산에선 응당 사가의 시 있었으리 / 靑山應有謝家詩
우리의 명성 위협하는 후생들 반갑소만 / 後生不厭聲名逼
말계는 오직 취향이 같아야 어여쁘지 / 末契唯憐臭味宜
곡구자진께서도 생각하고 계시는지 / 谷口子眞還憶否
한 잔 술에 바둑 두며 언제나 흉금 헤쳐 볼까 / 棋樽何日寫心期


 

[주D-001]오악(五嶽) : 다섯 개의 명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동쪽의 금강산(金剛山), 서쪽의 묘향산(妙香山), 남쪽의 지리산(智異山), 북쪽의 백두산(白頭山), 중앙의 삼각산(三角山)을 가리킨다.
[주D-002]중산의 절교서(絶交書) :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중산대부(中散大夫)를 지낸 혜강(嵇康)이 자신을 그의 후임자로 천거한 자(字)가 거원(巨源)인 산도(山濤)에게 절교하는 글을 보낸 고사가 있다. 《문선(文選)》에 그의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絶交書)가 실려 있다.
[주D-003]만용보다 높은 관직 : 6백 석(石)보다 높은 직질(職秩)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병만용(邴曼容)이 6백 석에 불과한 관직에 몸을 담고 있다가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자 고향에 돌아간 고사가 있다. 《漢書 卷72, 卷88》
[주D-004]번지(樊遲) : 공자의 제자로 농사일을 배우기를 청하였다. 《論語 子路》
[주D-005]반악(潘岳) : 진(晉) 나라의 문장가로, 그의 추흥부(秋興賦)에 “余春秋三十有二 始見二毛”라는 말이 있다.
[주D-006]두릉(杜陵) : 두릉(杜陵)에 거하며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 자호(自號)했던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주D-007]중방 제결의 때 : 온갖 꽃이 시드는 처량한 시절이라는 말이다. 제결(鶗鴂)은 두견새로 이 새가 울면 꽃이 시든다고 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恐鶗鴂之先鳴兮 使百草爲之不芳”이라 하였고, 백거이(白居易)와 소식(蘇軾)의 시에도 각각 “殘芳悲鶗鴂”과 “只恐先春鶗鴂鳴”이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16 東南行 一百韻》 《蘇東坡詩集 卷8 和致仕張郞中春晝》
[주D-008]삼천 독(三千牘) : 임금에게 올리는 장편의 상소문을 말한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동방삭(東方朔)이 처음 장안에 들어와 삼천 독의 주문(奏文)을 바쳤던 고사가 있다. 《史記 滑稽列傳》
[주D-009]백일시(百一詩) : 한(漢) 나라 응거(應璩)가 당시의 세태를 준열하게 비판한 풍자시의 편명(篇名)이다.
[주D-010]모두 …… 따름이랴 : 천문상으로 오랑캐의 별이 떨어질 뿐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旄頭)는 묘수(昴宿)로 호성(胡星)이고, 사천(司天)은 관상감(觀象監)의 별칭이다.
[주D-011]당성(唐城) : 남양(南陽)의 옛 이름이다.
[주D-012]정운시(停雲詩) : 친구를 생각하는 노래를 말한다. 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정운시서(停雲詩序)’에 “停雲思親友也”라 하였다.
[주D-013]자금(紫禁) : 임금이 있는 곳으로 궁정(宮廷)을 가리킨다.
[주D-014]장유(長孺) : 강직하게 간언을 하여 사직신(社稷臣)으로 일컬어졌던 한(漢) 나라 급암(汲黯)의 자(字)인데, 태자 세마(太子洗馬)를 역임했던 급암에 빗대어 왕세자의 사부였던 정홍명(鄭弘溟)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15]사가(謝家) : 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記得謝家詩 淸和卽此時”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後集 卷20 首夏猶淸和聯句》
[주D-016]말계(末契) : 장자(長者)와 후배와의 교의(交誼)를 말한다.
[주D-017]곡구자진(谷口子眞) : 곡구(谷口)에서 은거하며 수도하던 한(漢) 나라 정자진(鄭子眞)으로, 기옹이 정씨(鄭氏)이기 때문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