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신묘년 산행 /2011.12.16.수락산 산행

201.12.16 .반남인 (서계 박세당선생의 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박세당,박태보 등 문화유적지 탐방)

아베베1 2011. 12. 16. 17:39

                         수락산 산행 역사탐방  

 

  오래 전부터 수락산을  자주로 가는 편이다  

 산행을 하러고 아니면 여름에 더위를 식히려 다녀온 수락산이다

  수락산 아래 처움에는 잘모르는 곳이었다  친형님의 뒤를 따라 다니기 시작한 수락산 산행은

  어느듯  30년이 된듯하다

   

   도봉으로 발길을 옮기기 전에는 일년에 130회 이상을 다녀온 산으로 수 천회를 다녀온 산이기도 하다

  수락산 산행중에는 여러분과 산행을 하면 역사적 가치와 사실을  조사하기는 상담히 어려운 문제가 많다

  그래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산행을 시작하였다

  산행시에는 추운관계로 10분 정도밖에 만나지   못하였다

  수락산에는 많은 역사적 사실이 담겨져 있었다

   태조, 매월당, 서계, 남추강, 박태보등 당대에 유명하신분들의  역사가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산행코스

    수락산 입구 -곰바위 - 매월정(매월당 김시습 선생의 사적)  

    - 깔딱고개 -독수리바위 - 배낭바위 - 철모바위 -정상 (주봉637) -

    기차바위 -  능선을 타고 오면서 도솔봉가는 갈림길

     노강서원

     궤산정

     석천동

    서계선생 고택 (출입을 금지 큰개 6-7마리가 지키고 있고 주인의 허락을 득한후

    서계선생의 묘소를 탐방하였다.

    반남인 박세당 , 박태보등 후손 분들의 발자취를 탐방하였다 .

    이자료는 개인적으로 수집하고 개인적인 의견 이기에 사실과 다를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 

    반남인 박세당은 전주최문과 연관이 있는 분이시다  조선 영의정 최석정님과 , 후손중에 

    비문에 전주최문의 기록이 나오는 부분이다.        

    

   수락산의 모습  주봉이 정상이다 (637미터)

     서계 선생의 묘지 좌측록  처사 박공 인석지묘  배 동래정씨   附左 (좌측 가까이)  

     서계 선생의 후손 공의 휘는 승준 이고..자는  경팔이고 본관은 반남이다  고종13년 1876년 출생

   현릉참봉 박공승준지묘  배 전주최씨 附 左  주변 좌측에 있다는 뜻이다  

   ▶ 서계 박세당 선생의 묘역   수락산의 곰바위능선을 북현무로 조망은 도봉산 만장봉

 묘지에서 바라본 조망 도봉산 만장봉과 선인봉 자운봉이 보이고

  ▶ 신도비 우측면 신도비는 정2품 이상의 관직을 가진분에게 세우는 비석이다

 신도비 후면이다  시호 문정공  예조 이조 공조 판서 한성판윤  대사헌 홍문관제학겸  동지경연사 시 문정 박공

   비문을 받아 두고 오랜세월이 지나서 건립   

  자헌대부 홍문관 예문관 제학 겸 이조판서  전의후인 서당 이덕수 근선

 

인물 사전   이덕수(李德壽){2}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774B355C218B1673X0
인로(仁老)
벽계(蘗溪)
서당(西堂)
시호 문정(文貞)
생몰년 1673(현종 14) ~ 1744(영조 20)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전의(全義)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이징명(李徵明)
저서 《서당집》
저서 《서당사재 西堂私載》
 

[상세내용]

이덕수(李德壽){2}에 대하여
1673년(현종 14)∼1744년(영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인로(仁老), 호는 벽계(蘗溪) 또는 서당(西堂). 참판 이징명(李徵明)의 아들이다. 박세당(朴世堂)·김창흡(金昌翕)의 문인이다.

음보(蔭補)로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문의현감으로 임명되었으며, 경종이 즉위하자 지평에 임명되어 내직으로 옮겼다.

그뒤 홍문관수찬·부수찬·부교리·부응교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722년(경종 2) 집의로 있을 때에 임인옥사로 몰리게 된 호조판서 김연(金演)을 구하려다 사간원으로부터 김창집(金昌集)과 같은 역당(逆黨)으로 몰려 탄핵을 받았으나 무마되었고, 이듬해에 보덕에 임명되었다가 간성군수로 나갔다.

경종이 죽자 이광좌(李光佐)의 추천에 의하여 이진망(李眞望)과 함께 실록청당상에 임명되어 이를 계기로 당상관으로 승진하였고, 1732년 경종의 행장을 찬진함과 함께 《경종실록》을 완성시켰다.

1734년 왕명으로 당나라《여사서(女四書)》를 언해하여 민간에 반포하였으며, 1741년부터 유수원(柳壽垣)의 참여하에 《국조오례의》의 수정작업에 착수하여 1744년 그가 죽은 뒤 이종성(李宗城)에 의하여 《속오례의》가 찬수되게 하였다.

내직으로는 대사성·대제학·제학·부제학·수찬·부수찬·교리·부교리·대사헌·동지의금부사·동지경연사·좌우부빈객·좌우참찬·이조참판·이조좌랑·공조참판·공조판서·형조판서·부총관 등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1733년 개성유수를 지냈다.

그뒤 1735년 동지 겸 사은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문장이 출중하여 홍문관예문관의 관직에 여러 차례 올랐으며, 성품이 근후하여 당론에 뛰어들지 않았다.

1737년 이현필(李顯弼)이 책문(策問)을 볼 때에 영조를 비방하였던 사건으로 인하여 탄핵을 받았을 때나, 이광의(李匡誼)김복택(金福澤)의 일을 거론하여 화를 입었을 때 이광의를 은근히 비호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았을 때에도 무사하였던 것은 그의 이러한 성품으로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저서로는 《서당집》·《서당사재(西堂私載)》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西堂私載

[집필자]  박광용(朴光用) 

대표명 이덕수(李德壽){2}
성명 이덕수(李德壽)

성명 : "이덕수(李德壽)"에 대한 용례

전거 용례
歷代總要v04 在楊州天藏山行狀李德壽撰誌文柳鳳輝撰又有表石
紀年便攷v30 朴弼夔潢曾孫吏議泰遜子字一哉肅宗己亥登節製官止校理景宗壬寅以正言䟽論戶判金演無才局冝速遞吏郞李德壽素有聽瑩且無可觀玉堂金啓煥言論無取鄭錫三物倩未允兵判李光佐不叶太學工判韓配夏不叶賑堂禮判柳重茂亦不叶
紀年便攷v30 尹淳李德壽等纂定
紀年便攷v30 右參䝺李德壽䟽言萬物始於東成於西東方人尙西方色盖取其有始有終况東俗尙白前史多記之今而改之未見其可也上曰我國處於青
斷爛v1 金在魯金雲澤鄭澔趙道彬李㙫趙觀彬黃龜河郞廳宋成明洪廷弼趙尙絅李明彦申晢鄭錫五金相玉趙尙健兪拓基李眞望李德壽藥院都提擧李頥命改差代金○
斷爛v1 二十四日開政江監金相元持平李德壽戶議吳命恒兵議趙觀彬○持平申晢疏喉司出納之責貴在惟允凡於命令之間或過差則卽效封駁乃其職耳頃聞獻納宋必
羹墻錄v1 室可以永有辭於天下後世然在予榮顯父母之心豈待陳請而爲之命卽擇日行之上同六年庚戌肅廟寶鑑成先是命大司成李德壽採摭實錄中盛德大業可以爲後王法者撰成寶鑑以續國朝宣廟兩寶鑑至是進之上同七年辛亥遷奉長陵于交河上親詣
紫橋小藏v1 採公論而承宣反請顯斥沮擊言者之習不可不規警草草臚列矣尙不自反云云例批○玉堂箚請諸臺李廷熽持宋必恒執李德壽持李浣掌洪龍祚正任泂司蔡膺福掌出仕趙聖復納遞差
紫橋小藏v1 ○四月初二日實錄廳堂上三宋相琦李觀命李光佐郞廳四金濟謙兪拓基李德壽趙文命一房堂上四崔錫恒趙道彬沈宅賢李肇郞廳五申昉尹淳洪鉉輔洪龍祚徐宗伋二房堂上四閔鎭遠李晩成李台佐金
紫橋小藏v1 念宗社下副臣民亟稟慈聖收還成命答曰已悉於昨日批旨有何多誥毋庸更辭以安予心承旨往宣○政副校理洪廷弼修撰李德壽○判樞李頥命疏略殿下深惟宗社大計上稟聖母慈旨早定國本歡聲四馳況玆先王骨肉之敎益見聖人天倫之至群情聳感
紫橋小藏v1 李弘述李晩成李宜顯權尙游兪集一黃一夏許玧申翊夏李森尹慤李秉常金在魯李㙫南泉記二十七日禮參李㙫追參修撰李德壽封章救鳳輝而旋仍王世弟四疏有柳鳳輝疏極其危險之語而還推其疏而去抵書金昌集而責之云
紫橋小藏v1 李德壽三告遞其代
國朝捷錄v01 見相錄孝章世子入學典文尹淳字和仲號白下吏判持平世喜子趙文命見相錄李眞望字久叔號陶雲羽成子吏判白幹曾孫李德壽字仁老號西堂吏判淸江六代孫文會祖參議徵明子參判山壙父承昌會曾祖吳瑗字伯玉號月谷判書遂庵孫婿震應妹夫文
郯述v01 正使驪善君壆副使吏判李德壽書狀兼持平具宅奎
郯述v04 尹德駿吏參兼弘提李光佐吏郞宋成明○行畐副學柳鳳輝應敎鄭栻本館錄南道揆鄭壽期二人未參金東弼金有慶朴師益李德壽尹淳宋眞明趙觀彬七人加入○壬寅四月復錄事承傳
職官考v01 李德壽
鶴塘銓攷v1 有慶朴文秀李重彦李廷濟李箕翊李夏源李翊漢兪崇金相玉趙觀彬洪鉉輔李世瑾沈珙○鄭錫五趙遠命宋眞明梁聖揆李德壽尹惠教徐宗伋閔應洙金始慶兪命凝洪好人安重弼徐命淵趙鳴鳳申弼賢朴聖輅梁廷虎鄭宇柱李濟李承源趙錫命柳綏沈
鶴塘銓攷v1 左尹○沈珙李德壽李世瑾
鶴塘銓攷v1 承旨李尹陽來李萬選南就明金有慶朴文秀李重彦趙遠命李箕翊李夏源李翊漢兪崇金相玉李世瑾沈珙李眞淳梁聖揆李德壽徐宗伋○李春躋金始慶兪命凝洪好人安重弼徐命淵趙鳴鳳朴聖輅李濟李承源沈埈金尙奎柳復明愼無逸徐宗燮李瑜
鶴塘銓攷v1 承旨尹陽來李重彦趙遠命兪崇金相玉沈珙○朴師洙李德壽尹惠教徐宗伋趙錫命李廷熽兪命凝安重弼趙鳴鳳李濟李承源金尙奎李鳳翼柳復明愼無逸李聖龍徐宗燮李瑜成震齡徐
鶴塘銓攷v1 承旨朴文秀趙遠命○兪拓基兪崇金相玉李世瑾沈珙朴師洙李德壽徐宗伋趙錫命李廷熽李春躋兪命凝洪好人安重弼趙鳴鳳梁廷虎柳綏金相奎洪龍祚柳復明愼無逸○李聖龍徐宗燮李
鶴塘銓攷v1 兵曹參判沈珙李德壽○趙明翼
公車類覽 李德壽疏號西堂
端敬王后復位謄錄n1-1책 玉冊製述官右參贊李德壽預差工曹判書尹渟書寫官前參議尹得和預差承旨任珽
端敬王后復位謄錄n1-1책 給奉冊寶右議政宋寅明鞍具馬一匹玉 冊文製述官左參贊李德壽書寫官大司成尹得和諡冊文製 述官領府事李宜顯書寫官
端敬王后覆位儀軌 意 敢啓 傳曰 知道 都監別單 玉冊文製述官右參贊李德壽預差行工曹判書尹淳玉冊文書寫官前大司成尹得和預差左
端敬王后覆位儀軌 刻 一邊畢治玉 可無停役遲滯之患 而 玉冊文製述官李德壽 今方在鄕 製述官啓下 今已多 日 而未聞有上來之
端敬王后覆位儀軌 至 都監別單 端敬王后玉冊文製述官議政府左參贊李德壽書寫官前成均館大司成尹得和諡冊文製述官領中樞府事李
端敬王后覆位儀軌 寶官右議政宋寅明 鞍具 馬一匹 玉冊文製述官右參贊李德壽書寫官大司成尹 得和 諡冊文製述官領府事李宜顯書寫
端敬王后覆位儀軌 鑠於百代 嗚呼哀哉 謹言 玉冊文製述官議政府右參贊李德壽書寫官 前大司成尹得和維歲次 己未五月丙午朔日 國
和平翁主嘉禮謄錄 君韓陽君楹夏豊君梴靈川君壄昌 溪君櫟領議政■右參贊李德壽全陽君李益馝蓬城君鄭必世淸平 君金世望鷄興君李橚完
御眞圖寫事寶 衣樣盡出後自今夕始可施 彩矣 上曰故相閔鼎重故判書李德壽故相李宜顯 畫像持入 上曰今此御容摹寫時入參諸臣依
[國朝寶鑑]監印廳儀軌n1-1책 還納守禦使密符逬出門外上屢勉出而終不膺 遂命大司成李德壽兼春秋館修撰官代爲堂上專管編摩而 以副護軍柳儼兼春
[國朝寶鑑]監印廳儀軌n1-1책 五 編三十四張別編二十四張○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臣李德壽
[國朝寶鑑]監印廳儀軌n1-1책 臣尹淳 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兼春秋館修撰官知製敎臣李德壽 禦侮將軍行龍驤衛副護軍兼春秋館編修官臣柳儼 中直
璿源譜略修正時校正廳儀軌n1-1책 衡 李瑜註書徐命臣 戶曹參議李命熙承政院 禮曹參判李德壽弘文館 大司憲金始絅兵曹參判尹惠敎 大司諫李匡輔同
璿源譜略修正時校正廳儀軌n1-1책 直李宜晩司直趙最壽大司諫李光輔大司憲金始絅禮曹參判李德壽戶曹參議李命熙吏曹參議李宗城兵曹參判尹惠敎同知趙明
璿源譜略修正時校正廳儀軌 賢司直趙最壽刑曹參判趙顯命 漢城左尹宋眞明禮曹參判李德壽兵曹參判尹惠敎 副司直吳光運大司憲金始炯同知趙明翼
璿源譜略修正時校正廳儀軌 中樞府事尹游戶曹參議李命熙 行副提學趙遠命禮曹參判李德壽 吏曹參判申昉大司憲金始炯 月城尉金漢藎大司諫李匡
璿源譜略修正時宗簿寺儀軌 瑜 左參贊李□□戶曹參議李命□ 知事尹□□禮曹參判李德壽 行副提學趙遠命大司憲金始烱 吏曹參判申昉大司諌李
璿源譜略修正時宗簿寺儀軌 李瑜 左參贊李眞望戶曹參議李命熙 知事尹游禮曹參判李德壽 行副提學趙遠命大司憲金始炯 吏曹參判申昉大司諫李
璿源譜略修正時宗簿寺儀軌 李瑜行司直朴泰恒戶曹參議李命熙左參贊李眞望禮曹參判李德壽知中樞府事尹游大司憲金始炯行副提學趙遠命大司鍊李匡
靑邱風雲v1 典文衡李縡字煕卿號陶岩李宜顯李秉常尹淳趙文命李眞望吳瑗字伯玉號月谷工參副學□卯□□李德壽字仁老號蘖□趙觀彬□甫號悔軒南有容德哉致仕耆社辛丑司馬永睿文淸公號昏溯鄭翬良尹鳳朝金陽澤李
東國續修文獻錄v1 李秉常汝玉三山韓山人再典文李縡見湖堂不爲行公尹淳和仲白下海平人輔國趙文命見相李眞望允叔陶雲全州人禮判李德壽仁老西堂全義人吏判吳瑗伯玉月谷海州人吏判李匡德存齋眞望子參判趙觀彬國甫晦軒楊州人參贊尹鳳朝鳴淑圃菴坡
東國續修文獻錄v1 最壽季良豐壤人七十知敦南就明季良宜寧人八十一知敦申思喆明叔平山人八十九領中尹陽來季彥坡平人七十九判敦李德壽仁老全義人七十三吏判李震箕輝東全州人九十四知中李夏源元禮廣州人八十四知敦李聖龍子雨七十七工判趙遠命致
수정일 수정내역
2005-11-30 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신도비의 전면이다  

 신도비문 전면

 전제의 모습이다

 안내판  중농주의 실학자로  사변록 색경 서계집을 저술하신분이라 기록

 묘지와  묘석

 주간룡의 모습이다

 묘지후면에서 바라본 모습  좌측령이 조망을 가린듯 하다

 묘지봉문이 특이한 형태이다

 반남인 서계 박세당 선생의 묘비  조선숭정대부행 이조판서 서계 박선생 세당지묘  

                                               증 정경부인의령남씨 부우 (宜)가가 획 갓머리가 없어진 이유를 ??  (약천 남구만의 매형되시는 분이다)

                                               증 정경부인 광주정씨부좌

비문 초수생 박세당 기명야 기선양세 정헌 ...

 

  인물 사전

박세당(朴世堂)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BC15C138B2F9B1629X0
계긍(季肯)
잠수(潛叟)
서계초수(西溪樵叟)
서계(西溪)
시호 문절(文節)
생몰년 1629(인조 7) ~ 1703(숙종 29)
시대 조선 중기
본관 반남(潘南)
활동분야 학자 > 유학자
 
박정(朴炡)
조부 박동선(朴東善)
저서 《서계선생집 西溪先生集》
저서 《사변록》
저서 《신주도덕경 新註道德經》
저서 《남화경주해산보 南華經註解删補》
저서 《색경 穡經》
 

[상세내용]

박세당(朴世堂)에 대하여
1629년(인조 7)∼1703년(숙종 29). 조선 후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서계(西溪).
1. 가계
좌참찬박동선(朴東善)의 손자이며 이조참판 박정(朴炡)의 아들이다.

4살 때 아버지가 죽고 편모 밑에서 원주·안동·청주·천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13세에 비로소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에게 수학하게 되었다.
2. 관직생활
1660년(현종 1)에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고, 그뒤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경연시독관·함경북도병마평사(兵馬評事)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왔지만 당쟁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났다.

그뒤 한때 통진현감이 되어 흉년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쓰기는 하였으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맏아들 박태유(朴泰維)와 둘째아들 박태보(朴泰輔)를 잃게 되자 여러 차례에 걸친 출사권유에도 불구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만 힘썼다.

그뒤 죽을 때까지 집의·사간·홍문관부제학·이조참의·호조참판·공조판서·우참찬·대사헌·한성부판윤·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의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02년(숙종 28)에는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송시열(宋時烈)을 낮게 평가하였다 하여 노론(老論)에 의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되기도 하였다.
3. 사상 형성의 바탕
그의 학문과 사상은 성장기의 고난과 청·장년기의 관리생활을 통한 개혁의식, 그리고 당쟁의 와중에서 겪은 가족의 수난과 어려운 농촌에서 지낸 그의 생애 등을 통해서 형성된 사회현실관의 반영이라 하겠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보기 드문 민족적 시련과 정치적 불안정 및 민생의 곤궁이 매우 심하였던 시기이었다.

즉 병자호란의 국치와 당쟁의 격화로 말미암아 국력은 약화되고 민생이 도탄에 허덕이고 있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외의 현실을 직시하며 국가를 보위하고 사회개혁을 통한 민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사상적 자주의식을 토대로 해서 그의 학문과 경륜을 펼쳤던 것이다.

그의 근본사상에 대하여는 유학의 근본정신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는 견해가 있고, 주자학은 물론 유학 자체에 회의하여 노장학(老莊學)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의 근본입장이 당시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태도에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는 데는 이론이 없다.

뿐만이 아니라, 17세기 우리나라의 사상계는 국내외적 시련에 대한 극복을 위하여 사상적 자주의식이 제기되어 이의 수정과 사회적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입장도 주자학에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 반성이 싹튼 것은 16세기에 비롯하였지만, 주자학에 대한 정면도전이 표면화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의 열렬한 신봉자들인 송시열 등은 주자학 비판자들을 사문난적이라 하여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이러한 배척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그와 윤휴(尹鑴)·윤증(尹拯) 등이었다.
4. 주자학의 비판
이들은 주자학을 비판함에 있어서 공통적이었지만 그들의 학문연구의 입장은 달라 대략 세 방향을 띠었다.

즉, 첫째는 고대의 유학, 특히 한(漢)나라 때의 유학을 빌어 통치이념을 수정하려는 윤휴와 같은 남인(南人)계통의 학파이고, 둘째는 명나라왕양명(王陽明)의 유학을 도입하여 채용해보려는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등 양명학파(陽明學派)이며, 셋째는 노장사상을 도입하여 새로운 시각을 모색하려는 박세당계통이었다.

박세당은 당시의 학자들이 꺼려하였던 도가사상(道家思想)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노장서(老莊書)에 탐닉하면 스스로 되돌아올 줄 모르고 심취하게 된다고 고백할 정도이었다.

그가 이러한 학문경향을 지니게 된 데에는 젊었을 때 지녔던 그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혁적 사고 때문이었고, 또 백성의 생활안정과 국가를 보위하는 데 있어서 차별을 본질로 하는 유가사상(儒家思想)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5. 사회개혁과 자주정신
그는 해서지방(海西地方)암행어사함경북도병마평사를 역임한 뒤, 홍문관수찬으로 있으면서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양반지배세력의 당쟁과 착취로 비참한 경지에 이른 백성들의 생활안정책과 무위도식하고 있는 사대부(士大夫)에 대한 고발이었다.

그는 요역(徭役)과 병역의 균등화를 주장하였고, 모든 정치·사회 제도가 문란하므로 개혁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법률이 쇠퇴하였으므로 혁신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국민 가운데 공사천민(公私賤民)이 6할, 사대부양반이 2할, 평민이 2할인데, 사대부양반은 8∼9할이 놀고 먹으니 이는 봉록(俸錄)만 받아먹는 나라의 커다란 좀〔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중국대륙의 세력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고대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미약하였던 신라당나라에게 망하지 않은 원인이 외교정책의 현실주의적 실리추구에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고려정몽주(鄭夢周)와 자기의 선조 박상충(朴尙衷)에 관한 평가에 있어서도 고려에 대한 충절로서보다는 원나라·명나라 교체의 국제적 변동에 대처하려는 대외정책으로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을 배척할 것을 주장한 실리주의자였던 데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숭명배청(崇明排淸)이 풍미하던 당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적 생존과 국가의 보위를 위하여 국제사회에서의 주체적 적응이란 입장에서, 존명사대(尊明事大)의 명분을 버리고 민족자존의 실리를 위한 친청정책(親淸政策)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6. 유가사상 비판
이와같은 대내외정책에 대한 개혁의식을 가졌던 그는 관직을 버린 뒤 《논어》·《맹자》·《대학》·《중용》 등 사서와 《도덕경(道德經)》장자(莊子)의 연구를 통하여 주자학적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는 학문적 지향을 취하였다.

그는 육경(六經)의 글은 그 생각이 깊고 취지가 심원(深遠)하여 그 본뜻을 흐트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 후대의 유학자들이 훼손하였으므로, 이를 바로잡아 공맹(孔孟)의 본지(本旨)를 밝혀야 한다는 뜻에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자유분방하여 매우 독창적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유가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인(仁)에 대하여, 공자가 말하는 ‘인’이란 인간과 동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조화(自然調和)의 심정이 아니라 동물에 대한 인간중심적인 사랑이며, 사람과 동물에 차별을 두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맹자의 인에 대하여도, 맹자의 차마 할 수 없는 심정인 불인지심(不忍之心)으로서의 ‘인’이란 도살장과 부엌을 멀리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고작일 뿐, 역시 살생을 배격하지 않는 잔인성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또한, 맹자는 ‘왕도(王道)’를 민심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하지만, 민심을 얻는 데만 뜻을 먼저 둔다면 이는 패자(覇者)의 행위이고 왕도는 아닐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자가 제왕권체제(帝王權體制)를 강화하기 위하여 설정한 모든 만물의 근원적 원인자(原因者)로서의 태극(太極)에 대한 이해에도 이의를 제기하였다.

주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현실적 차별이 이러한 현상에 앞선 원인자인 태극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하여, 인간이 제왕권(帝王權)에 복종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당연한 도리이고, 또 인간이 감각적 욕구를 추구하는 것은 인욕(人欲) 또는 인심(人心)으로서 악행(惡行)이라고 피력하였으나, 그는 태극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함께 감각적 욕구를 작용시키는 감성(感性)도 인간의 불가피한 기능임을 지적하였다.

그는 도심(道心) 못지않게 인욕의 충족도 중요시하였던 것이니, 이는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명분론보다도 의식주와 직결되는 실질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그의 실학사상을 나타낸 것이라 보겠다.

그는 도를 밝힌다는 것은 지식과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으며, 백성들이 실질을 떠나서 허위의 비현실적인 가치관만을 배우게 되면 이것을 다스리려 하여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백성의 생활가치를 신장시키는 것에 학문의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이단시되던 노장학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노장학도 그 본질면에서 보면 세상을 바로잡는 길에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버릴 것이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도가사상이 차별사상이 아니고 민중중심적인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인의 지배욕구의 포기를 그 근본으로 하는 것이 《도덕경》의 정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노자의 무위(無爲)란 일하지 않는 불사(不事)가 아니라, 사사로운 욕구에 얽매이지 않는 무욕(無欲)의 정치태도이며, 장자의 무위자연도 자연을 벗삼아 사는 것이 아니라 치자(治者)에게 과도한 지배욕구를 버리고 백성들의 생활권을 신장시키는 데 힘쓸 것을 요청한 무욕의 뜻이라고 이해한 것이었다.
7. 평가
그리하여 그 자신도 스스로 무욕을 실천하는 생애를 보냈지만 정치와 사회현실에 전연 무관심한 것이 아니었고, 비교적 혁신적 사고를 지녔던 소론파(少論派)와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그는 소론의 거두인 윤증을 비롯하여 같은 반남박씨로 곤궁할 때 도움을 준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하였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수십인의 제자를 키우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과 행적에 대한 변론은 계속되어 그가 죽은 지 약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西溪先生集)》《대학》·《중용》·《논어》·《상서》·《시경》 등의 해설서인 《사변록》, 그리고 도가에 대한 연구서인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1책과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删補)》 6책이 전하며, 편저로는 농서(農書)인 《색경(穡經)》이 전한다.

[참고문헌]

顯宗實錄    肅宗實錄   景宗實錄    朝野輯要
朴西溪와 反朱子學的 思想(李丙燾, 大東文化硏究 3, 1960)
朴世堂의 實學思想에 관한 硏究(尹絲淳, 亞細亞硏究 15―2, 1972)
西溪 朴世堂의 政治思想(金萬圭, 國學紀要 1, 1978)

[집필자]   김만규(金萬圭)
 

부자가 장원급제 한 집안이다 반남인은 해동 한분이 박세채를 배출하신 집안이도

 

 묘지 측면이다

 망주석

 상석의 묘습이다

 좌측 망주석

 우측에서 바라본 모습

 봉문이 크다 왕실 묘역과 비슷한 모습이다

 산신제를 지나는 곳이다 측면에 위치

 좌측에서 바라본 모습 전면이 경사도가 심한 듯하다

 박태보의 조망이다

 

 

 

 바태보 선생의 묘지 전면 박세당의 아드님이시다

 

  정재 박태보 선생의 묘석  조선통훈대부홍문과 부응교  贈 이조판서  문열공 박태보지묘  증 정부인 전주이씨 부좌  

  정재 호                         정3품 관직                         증직 이조판서  시호                 증 부인의 작호 (이조판서)          

 

[주D-009]박태보(朴泰輔) : 1654〜1689. 박세당의 둘째 아들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이다. 1689년 인현왕후의 폐출을 반대하다 국문을 받고 진도(珍島)로 유배되던 도중 노량진에서 사망하였다.

 


 

박태보(朴泰輔)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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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士元)
정재(定齋)
시호 문열(文烈)
생몰년 1654(효종 5) ~ 1689(숙종 15)
시대 조선 중기
본관 반남(潘南)
활동분야 문신 > 문신
 
박세후(朴世垕)
생부 박세당(朴世堂)
외조부 남일성(南一星)
저서 《정재집》
 

[상세내용]

박태보(朴泰輔)에 대하여
1654년(효종 5)∼1689년(숙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박세당(朴世堂)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령(縣令)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당숙인 박세후(朴世垕)에게 입양되었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서 1677년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을 때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하였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80년 부수찬·수찬·부교리·지평(持平)·정언(正言)을 거쳐 교리가 되었는데, 이때 문묘 승출(陞黜)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판서 이단하(李端夏)를 질책한 상소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서인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환수를 청함에 1682년 홍문관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 사가독서를 마치고 나서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나간 것을 시작으로 부수찬·교리·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하였으며, 호남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宋時烈)윤선거(尹宣擧)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족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그 옳고 그름을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하여나갔던 바도 있다.

이어 응교를 거쳐 파주목사로 나갔을 때, 조정에서 성혼(成渾)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는데, 그가 부임하여 재직하는 파주에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이를 존속시켜나갔다 하여 인책, 면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 데 주동적인 구실을 하였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재주가 뛰어나서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를 한 경력이 있으며, 학문적인 태도도 깊고 높아 당대의 명망 있는 선비들과도 깊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특히 그가 교유한 친우는 주로 서인의 소론파들로 최석정(崔錫鼎)·조지겸(趙持謙)·임영(林泳)·오도일(吳道一)·한태동(韓泰東) 등이 있다. 타고난 성품도 뛰어나 지기(志氣)가 고상하고 견식이 투철하여 여러 차례의 상소를 통해서 보여준 바와 같이 시비를 가리는 데는 조리가 정연하고 조금이라도 비리를 보면 과감히 나섰으며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왕은 곧 후회하였고,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문이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豊溪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정재집》 14권, 편서로 《주서국편(周書國編)》, 글씨로는 박임종비(朴林宗碑)·예조참판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박상충비(朴尙衷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正祖實錄   純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定齋集    朝鮮金石總覽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박태보 선생의 묘  전면

숙종 3년 정사(1677,강희 16)
3월26일 (임인)
문묘에서 작헌례를 행하고 과거를 보아 인재를 뽑다

임금이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친행(親行)하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과장(科場)을 차리고 문과(文科)를 보여 박태보(朴泰輔) 등 7인을 뽑았다. 임금이, 무과(武科) 규정에 편전(片箭)을 두 번 맞추게 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여, 한 번 맞춘 사람도 또한 급제(及第)를 주도록 명하고, 이어 관무제(觀武才)를 시행하고, 또 문신(文臣)에게도 관혁(貫革)을 쏘도록 하고 내관(內官)들도 또한 쏘도록 하였다.
【원전】 38 집 352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행행(行幸)


[주D-001]관무제(觀武才) : 무과 시험(武科試驗)의 하나로,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두 가지가 있음. 초시에는 2품 이상의 문무관 2명, 복시에는 2품 이상의 문관 1명과 무관 2명을 보내어 시험을 보게 하였는데, 특별한 어명(御命)이 있을 때에만 이 시험을 보았음. 복시는 반드시 임금이 친림(親臨)한 가운데 시행하였는데, 여기에서 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즉시 지방의 수령(守令)이나 변장(邊將)에 임명하거나 품계를 올려 주었음.

          정재 선생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신분이다

 

명재유고 제35권
 묘표(墓表)
박사원(朴士元) 묘표 기묘년(1699, 숙종25)


오호라, 이곳은 반남(潘南) 박군 태보(朴君泰輔) 사원(士元)의 묘이다. 세상의 도가 땅에 떨어진 뒤로 참된 학문을 하는 선비가 드물고 참된 재주를 지닌 사람을 보기 어렵게 되었으니, 우리 사원과 같은 사람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몇 년 만 더 살았더라면 군의 학문이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고서 심원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며, 군의 재주가 큰일을 맡아서도 현혹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늘이 군을 세상에 내려 주고서 다시 중도에서 죽게 하였으니,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군은 갑오년(1654, 효종5)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출중하여 특정한 분야 없이 널리 공부하였고, 책을 보면 반드시 그 의미를 파고들어 아무리 은미한 말이나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 하더라도 한 번만 보고도 분석해 내어 사람들의 의표(意表)를 찔렀다. 문장은 이치를 담는 데에 주력하여 한 자라도 구차하게 쓰지 않았으며 함축되고 노련하게 지었으니, 본디 가법(家法)이 있었던 것이다.
22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24세에 과거에 장원하였으며, 얼마 후 죄 아닌 죄로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경신년(1680, 숙종6)에 비로소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호당(湖堂)에 들어가니, 당대 뛰어난 선비들이 아무도 앞서지 못하였다.
군은 사람됨이 과감하고 명쾌하여 일을 만나면 앞뒤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밀고 나갔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더욱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군 또한 외직을 요청하여 이천 현감(伊川縣監)으로 5년 동안 나가 있었다. 오랜 뒤에 전랑(銓郞)을 거쳐 응교로 승진하였다가 또다시 부모 봉양을 이유로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나갔다. 그 이듬해가 바로 기사년(1689, 숙종15)이다.
상이 중궁(中宮)을 바꾸려고 하자 군이 당시에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있다가 여러 사람과 함께 상소를 올려 기휘(忌諱)를 범하는 간언을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마자 정국(庭鞫)을 설치하였는데, 군이 앞에 나서서 자신이 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윽고 온갖 고문을 당하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말투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기면서도 애처로워하였다. 진도(珍島)로 유배를 가다가 노량강(露梁江) 가에 이르러 세상을 마치니, 같은 해 5월 5일이었다.
예전에 노소재(盧蘇齋)강주천(康舟川)의 묘문(墓文)에 “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기를 천 번 치고 만 번 치도다.[仰天搥胸 千椎萬椎]”라는 말로 슬퍼하였는데, 그 글을 읽을 때마다 예의에 맞지 않는 표현이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그것이 지극한 슬픔에서 저도 모르게 나온 것임을 알겠다.
군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이 매우 후회를 하면서 관직의 회복을 명하였고, 6년이 지난 갑술년(1694, 숙종20)에 상이 잘못을 크게 깨달아 중궁을 복위시키고 군에게 정경(正卿)의 벼슬을 추증하고 사제(賜祭)와 정려(旌閭)의 조처를 내려 충혼(忠魂)을 위로하였다. 해와 달이 바뀜에 따라 은전이 구천에까지 미쳤으나 다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애통하고 애통한 일이다.
군은 식견과 사려가 깊고 원대하며, 논의가 강경하고 충후하였다. 옥당(玉堂)에 있을 때 문묘(文廟)의 배향(配享)과 출향(黜享)에 대해 논하면서,
“겸손한 덕을 숭상하고 신중한 도를 지켜서 임금의 치우친 생각을 바로잡는다.”
하였으니,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대의(大義)를 매우 잘 실천한 것이다.
일찍이 암행 어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전라도 한 도에서 일어나는 흥판(興販)의 폐단에 대해 아뢰고, 경향(京鄕) 각지에서 이익의 추구에 매달리는 사태를 망국의 징조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또한 맹자가 의(義)와 이(利)를 분별한 것과 부합된다 하겠다. 나는 이 두 가지 일을 보고서 늘 진심으로 탄복하여 ‘이와 같은 식견과 주장에 견줄 만한 것은 세상에 별로 없다.’라고 생각하였다. 만약 군이 죽지 않았더라면 임금이 반드시 등용하여 도움을 받았을 텐데 지금 그렇게 되지 못하고 후세에 군을 아는 사람들에게 공원로(孔原魯)추지완(鄒志完)의 절개 정도로 인식되는 데에 그치고 말았으니, 아, 이는 군의 운명이요 시운(時運)의 불행이라 하겠다. 옛사람이 그 억울함을 하늘에 하소연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 것이 어찌 악 무목(岳武穆) 한 사람뿐이었겠는가.
정묘년(1687, 숙종13)에 우리 선친이 무함을 당했을 때 여러 문인이 소장을 올려 변호하려고 하자 군이 이들을 위해 붓을 잡았는데, 사림에서 그 내용을 옳게 여겼다. 그 밖에 세도(世道)와 관계된 문장들이 매우 많았다. 유집(遺集) 약간 권이 세상에 전하므로 후세 사람들이 상고해 볼 수 있다.
군의 호는 정재(定齋)이고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선대는 고려 말에 문정공(文正公) 상충(尙衷)이 있고, 조선 중종 때에 사간(司諫)을 지낸 소(紹)가 있었는데, 모두 정학(正學)과 대절(大節)을 지키다 당시에 곤액을 당하였다. 군이 이 두 분을 닮았으나 불행의 정도는 그중에서도 제일 심하였다. 증조 휘 동선(東善)은 참찬을 지내고 정헌공(貞憲公)의 시호를 받았고, 조부 휘 정(炡)은 참판을 지내고 충숙공(忠肅公)의 시호를 받았다. 부친 세당(世堂)은 지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있으며, 모친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현령 일성(一星)의 따님이다. 판추공(判樞公)의 숙형(叔兄) 휘 세후(世垕)가 일찍 죽어 군을 후사로 삼았는데, 양가(養家)의 모친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바로 내 누님이다.
군의 효성은 지극한 성품에서 나와 양가의 모친을 모시면서 안색을 살피고 뜻에 순종하여 부드러운 얼굴로 봉양한 것이 비록 자기를 낳아 준 부모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정도였다. 예전에 우리 큰 고모가 현숙하고 명철하였으나 일찍 과부가 되어 이민적(李敏迪)을 양자로 들였는데 모자간에 사랑이 매우 깊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 고모를 보고 덕만 있고 명이 박하니 하늘이 훌륭한 아들로 보답한 것이라고 하였다. 일가친척들이 우리 누님을 칭찬할 때도 또한 그런 말을 하였다. 이는 우리 집안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외부 사람들은 더러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 누님은 늙어서 또 군을 저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내 그 복을 끝까지 누리지 못하였으니, 우리 고모보다 명이 더욱 박하다 하겠다. 너무도 슬픈 일이다.
군은 상공(相公) 이후원(李厚源)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고, 딸 하나만 남았다. 판추공이 또다시 군의 형인 지평 태유(泰維)의 작은아들 필모(弼謨)를 군의 후사로 삼고, 또 군의 묘표를 세우고자 나에게 편지를 보내,
“그 애가 비록 짧은 세상을 살았지만 그래도 후세에 전할 만한 행적이 없지 않으니, 부디 한마디 적어 주어서 끝내 잊히지 않게 해 주게나.”
하였고, 군의 벗 남학명(南鶴鳴)이 또 자신이 지은 행장 한 통을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다. 나는 늙고 혼매하여 문장이 먼 미래까지 전해지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군이 세운 업적이 어찌 사람들이 말을 하고 안 하고에 따라 드러나거나 묻히는 그런 것이겠는가. 다만, 그 대강을 모아 위와 같이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이 사람의 묘소임을 알게 할 뿐이다. 아, 슬프도다.


 

[주D-001]죄 아닌 …… 유배되었다가 : 1677년(숙종3) 10월에 증광 별시 고시관으로 들어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미진불여악석(美疢不如惡石)’이라는 구절을 시제(試題)로 낸 일로 논척을 받고 선천에 유배된 것을 가리킨다.
[주D-002]노소재(盧蘇齋) :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이다.
[주D-003]강주천(康舟川) : 주천은 강유선(康惟善)의 호이다.
[주D-004]공원로(孔原魯) : 원로는 공도보(孔道輔:985~1039)의 자이다. 그는 송나라 인종(仁宗) 때 인물로 명도(明道) 2년(1033)에 곽황후(郭皇后)가 폐위되자 “황후는 천하의 어머니이므로 경솔히 폐위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간하다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宋史 卷297 孔道輔列傳》
[주D-005]추지완(鄒志完) : 지완은 추호(鄒浩:1060~1111)의 자이다. 그는 송나라 철종(哲宗) 때 인물로 철종과 휘종(徽宗) 2대에 걸쳐 유황후(劉皇后)의 복위를 간하다가 두 번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宋元學案 卷35 陳鄒諸儒學案鄒浩》
[주D-006]옛사람이 …… 사람뿐이었겠는가 : 옛사람은 남송의 학자 여조겸(呂祖謙:1137~1181)을 가리키고, 악무목은 남송의 충신 악비(岳飛:1103~1142)로 무목(武穆)은 시호이다. 고종 때에 악비가 금나라에 대한 북벌을 주장하다 화친을 주장하는 진회(秦檜)의 모함에 걸려 죽은 사건을 두고서 여조겸이 “매번 악 무목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곧장 하늘에 호소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였다.”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여기서는 박태보(朴泰輔)를 악비에 견준 것이다. 《葛庵集 卷21 書東巖李公潑南溪李公洁事實記後, 韓國文集叢刊 128輯》
[주D-007]유집(遺集) …… 전하므로 : 박태보(朴泰輔)의 《정재집(定齋集)》은 원집 9권과 별집 5권이 7책으로 편집되었으며, 부친 박세당(朴世堂)에 의해 1702년(숙종28) 양주(楊州)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이 묘표는 문집이 간행되기 3년 전에 쓴 것이다.

 

 

명재유고 제37권
 묘지명(墓誌銘)
박사원(朴士元) 묘지명


금옥의 아름다움과 / 金玉之美
송백의 우뚝함을 지녔으니 / 松柏之特
남들은 군을 위해 슬퍼하나 / 人爲君哀
나는 나라 위해 슬퍼하노라 / 我爲國衋
태어나면 죽게 마련이라 / 有生必死
똑같이 땅으로 돌아가지만 / 同歸土阜
열렬한 지조와 기상은 / 烈烈志氣
천년토록 썩지 않으리 / 千載不朽


 

[주C-001]박사원(朴士元) : 사원은 박태보(朴泰輔:1654~1689)의 자로서, 명재의 생질이다.

 

명재유고 제37권
 묘지명(墓誌銘)
박사원(朴士元)의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 묘지


군의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군보다 1년 뒤에 태어나 나이 15세에 군에게 시집왔다. 혼인 초에 군이 청상과부가 된 모친을 잘 모셔 줄 것을 당부하자, 며느리의 도리 중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 그리하겠노라 응낙하였다. 그리고 평생토록 모친을 물심양면으로 봉양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이 약속대로 실천하였다. 기사년(1689, 숙종15)의 변고가 있고 나서 시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궁한 살림에도 정성을 다해 예법에 따라 제사를 모셨으며, 상을 마친 뒤에도 몸가짐을 상중일 때와 다름없이 하였다. 시댁의 내외 친족을 만나도 군이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대하였다. 그러니 부인이 이른바 여자로서 선비의 행실을 갖춘 것은 군이 몸소 실천으로 보여 준 가르침 때문만은 아니었다. 갑술년(1694)에 군이 이조 판서에 추증됨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으며, 신묘년(1711, 숙종37) 5월 13일에 별세하여 군의 묘소 왼편에 부장(祔葬)되었다.
갑술년(1694, 숙종20) 이후로 조정에서 매달 양식을 하사하였고, 세상을 떠나자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하사하라고 또 명하였으니, 충신의 가족을 돌보아 주는 우대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큰딸은 사인 이덕해(李德海)에게 시집갔고 아들 필모(弼謨)는 정랑 신수화(辛受和)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딸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조정에서 군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므로 재랑(齋郞)에 제수되었다가 봉사(奉事)로 옮겼다.
처음에 나는 군의 묘표를 지어 주었는데, 나중에 군의 종자(從子) 필기(弼基) 등이 명(銘) 몇 구절을 더 지어서 이것으로 묘지를 만들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명을 짓고 원문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부인의 행적과 생몰년 및 자녀와 혼인의 내역을 대략 기술하여 후기(後記)로 만들어 그 아래에 덧붙이는 바이다.


[주C-001]박사원(朴士元)의 …… 묘지 : 박태보(朴泰輔)의 문집인 《정재집(定齋集)》에는 이 글이 박태보의 〈묘지후기(墓誌後記)〉로 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 박태보의 묘지명, 즉 상문(上文)의 〈박사원 묘지명〉이 함께 실려 있다. 《정재집》에 따르면 묘표는 1702년(숙종28), 묘지후기와 묘지명은 1711년에 함께 지어졌다. 《定齋集 後集 卷3 朝鮮通訓大夫弘文館副應敎贈吏曹判書文烈公朴泰輔之墓貞夫人全州李氏祔左, 墓誌後記, 韓國文集叢刊 168輯》
[주D-001]기사년의 변고 : 기사년에 남편 박태보가 죽은 것을 가리킨다. 1689년에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하려 하자, 박태보가 그 부당함을 주장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서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를 가던 중 노량진에서 죽었다.

 

명재유고 제41권
 신도비명(神道碑銘)
좌참찬 증 영의정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 박공(朴公) 신도비명


숭정 13년 경진년(1640, 인조18) 1월 2일에 좌참찬 박공이 그 직위에서 졸하였다. 아들의 공훈으로 인해 순충보조 공신(純忠補祚功臣) 의정부영의정 금천부원군에 증직되고 그해 2월에 김포(金浦) 마산리(馬山里) 신좌(辛坐)의 언덕에 안장되었으며 뒤에 ‘정헌(貞憲)’의 시호를 받았다. 태학사 조공 복양(趙公復陽)이 행장을 기술하였고, 영의정 남공 구만(南公九萬)이 묘지(墓誌)를 찬술하였다. 공의 손자 판중추부사 세당(世堂)이 신도비명이 아직 없다고 하여 파평(坡平) 윤증(尹拯)에게 명을 부탁하였는데, 감히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박씨는 본래 신라 출신으로 나주(羅州)의 반남(潘南)을 관향으로 삼았다. 고려 말에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 휘 상충(尙衷)이 포은(圃隱), 목은(牧隱) 등 제공과 동시에 이름을 날렸는데, 이인임(李仁任)이 북원(北元)과 내통하여 왕인(王人)을 살해한 죄를 항변하다가 귀양 가는 도중에 졸하니, 세상에서 ‘반남 선생(潘南先生)’이라고 일컬었다. 아조(我朝)에 들어와 문정(文正)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아들 은(訔)이 우리 태종을 섬겨 좌명 공신(佐命功臣)에 책훈되고 좌의정이 되었으며 평도(平度)의 시호를 받았으니, 이분이 공의 7대조이다. 증조 휘 조년(兆年)은 이조 정랑을 지냈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조부 휘 소(紹)는 호가 야천(冶川)인데 중종조에 김안로(金安老)의 무함을 받아 사간으로 관직을 마쳤다. 뒤에 영의정에 증직되고 문강(文康)의 시호를 받았다. 고(考) 휘 응천(應川)은 사재감 정(司宰監正)을 지냈는데, 몸가짐에 규범이 있었고 여러 번 지방관을 맡아 명성과 실적이 드러났다. 비(妣) 순천 김씨(順天金氏)는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 희려(希呂)의 따님이다.
공의 휘는 동선(東善)이고 자는 자수(子粹)이다. 가정 임술년(1562, 명종17) 6월 21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신중하고 질박하였고 유희를 좋아하지 않았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진사가 되고, 경인년(1590)에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에 선발되었다. 계사년(1593)에 검열에 제수되었다가 설서(設書)로 옮겼고, 당시 세자인 광해군이 군사를 위무하기 위해 전주에 내려갈 때 공이 따라가서 사서(司書)로 승진되었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정언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무리들이 최영경(崔永慶)의 죽음을 빌미로 정공 철(鄭公澈)을 무함하는 것을 논척하였다가 체직되어 봉상시 주부로 옮겼다. 을미년(1595)에 병조 좌랑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남포 현감(藍浦縣監)에 보임되었다.
병신년(1596)에 홍산(鴻山)의 도적 이몽학(李夢鶴)이 몇몇 현을 겁략하여 그 수령을 결박하고 점차 홍주(洪州)로 다가오자 공이 수사(水使) 최호(崔湖)에게 함께 토벌하기를 요청하였다. 최호가 처음에는 따르려 하지 않다가 공이 의리로써 책면하자 따랐다. 드디어 주변 현(縣)의 군사를 출동시켜 함께 홍주로 나아가 목사 홍가신(洪可臣)과 병력을 합하여 성 위에 올라가 지키니, 적이 성 아래에 이르렀으나 들어오지 못하다가 마침내 흩어졌다. 그리고 그 일당이 몽학을 베어 항복하였다. 조정이 공(功)을 논할 때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일을 주간하여 유독 공만 제외하였는데, 공은 함구하고 끝까지 스스로 말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더욱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정유년(1597)에 왜구가 다시 침입하니 공이 또 수사에게 현 동쪽 옥마봉(玉馬峰)을 막아 차단하자고 요청하였는데 따르지 않았다. 적이 현에 들어오자 공이 비로소 이민(吏民)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피하였는데 사람이 많아 배에 다 탈 수가 없자 공이 타고 다니던 말을 버리고 사람을 건너게 하였다. 이 일은 고을 사람들 사이에 계속 전해지고 있다.
가을에 스스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전적, 직강, 예조의 좌랑과 정랑, 병조 정랑, 통례원의 상례와 통례, 종부시 정, 사복시 정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그사이에 외직으로 나가 경기 도사, 수안 군수(遂安郡守), 인천(仁川)과 부평(富平), 남양(南陽)의 부사를 지냈다. 부임한 곳에서는 백성을 다스리고 공무를 수행하기를 한결같이 성실하게 하고 자신을 단속하였으며 간소하고 차분하게 아랫사람 부리기를 힘썼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춘방(春坊)에서 수고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동지 부사(冬至副使)로서 중국에 조회하러 갔다.
갑인년(1614)에 안동 부사로 나갔다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당시 모후를 폐한다는 논의가 이미 일어나서 이이첨(李爾瞻) 등이 백관을 위협하여 정청(庭請)을 하도록 하였는데 공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당리(堂吏) 가운데 공이 죄를 입을까 걱정하여 화를 면하게 해 주고자 하는 이가 있어서 몰래 관아의 문서에 공의 이름을 써서 올렸다. 공은 즉시 실상을 드러내어 스스로 말하기를, “당리가 함부로 한 것이지 나는 실로 나아가지 않았다.” 하니, 듣는 이들이 놀라 혀를 내둘렀다. 흉도들이 멀리 유배 보낼 것으로 논하여 사태를 헤아릴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 마침 우연한 일로 유배 가지 않게 되었다. 이로부터 서울을 떠나 기전(畿甸) 밖에 물러나 기거하게 되었다.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가 즉위하자 우선적으로 대사간에 제수하니, 간흉들을 토죄하고 더러운 이들을 쫓아내어 공도(公道)를 회복하고 폐정(弊政)을 혁파하였으니, 이 때문에 새로운 교화를 펴는 데에 대각에서 보익한 것이 많았다. 갑자년(1624)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상이 공주(公州)로 행차하자 공이 병조 참의로서 수종(隨從)하였다. 적이 평정되고 서울로 돌아온 뒤노고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을축년(1625)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고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아들의 공으로 인해 은전이 추급되어 자헌대부에 올랐다.
병인년(1626)에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 과거가 있었는데 고관(考官)의 자제가 많이 참방(參榜)하자 공이 논하여 파방(罷榜)하였다. 정묘년(1627)에 호란(胡亂)이 일어나 상이 강도(江都)로 행차하자 공이 대사헌으로서 수종하였는데, 평양과 황주(黃州)에서 성이 함락당한 죄를 논하여 마침내 군율을 바로잡았다. 형조 판서, 좌참찬, 우참찬, 지돈녕부사, 지중추부사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를 역임하고 다시 대사헌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경오년(1630, 인조8)에 장릉(章陵)을 추숭(追崇)하고 부묘(祔廟)하는 예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공이 동료와 함께 존호(尊號)의 자수(字數)를 줄이기를 청하니, 상이 진노하여 집의 권도(權濤)를 찬배하도록 명하였고 공도 관작을 삭탈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그 뒤에 바로 대신의 말로 인하여 파직하는 데에 그치고 얼마 되지 않아 도로 서용되었다.
임신년(1632)에 아들의 상을 당하여 비통한 심정에 외직을 구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었다가 이듬해 체차되어 돌아왔다. 이후에 누차 참찬,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병자호란 때 상이 강도로 행차하게 되자 공이 집안 식구들과 결별하고 수가(隨駕)하려고 하였다. 이에 상이 늙고 병든 신하들을 먼저 가도록 명하였다. 공이 마침내 먼저 떠나 강도로 들어갔는데 상은 오랑캐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어가를 돌려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강도가 함락당하게 되자 공은 교동(喬桐)에 가서 왕손(王孫)을 모시고 배종하여 내처 호서로 내려갔다가 난이 평정되자 서울로 돌아왔다.
참찬으로서 경진년(1640)까지 조정에 있었으니 춘추가 79세였다. 공은 병이 위중한데도 정신을 놓지 않아서 약을 물리치고 복용하지 않았다. 자주 병풍에 있는 절구를 읊조렸는데, 절구에,
하였다. 집안 식구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제 부모가 남겨 주신 몸을 온전히 하여 돌아가게 되니 여한이 없다.” 하고 정침(正寢)에 나가 조용히 서거하였다. 아, 이것이 공의 일생이다.
공은 천품이 온후(溫厚)하면서도 엄중하였으며 규범을 따라 실천함이 한결같았고 꾸밈없이 소박하여 거짓이 없었다. 일상생활에서도 외물에 마음을 쓰지 않아서 거처하는 방이 화려한 물품 하나 없이 단출하였다. 엄숙하게 종일토록 앉아 있었고 선행을 좋아하며 남을 사랑하는 것이 지성에서 우러나왔으므로, 비록 완악하고 비루한 자라도 모두 기뻐하며 공경할 줄 알아서 후덕한 장자라고 여겼다.
젊어서 조정에 들어섰으나 조용히 물러나 다투지 않았으며 말은 공손하게 하여 말하지 않는 듯하였다. 대절(大節)과 대사에 임해서는 의리와 정도를 잡아 지킴에 늠름하여 빼앗을 수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비로소 그 용기에 감복하여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여러 번 대관(臺官)의 수장이 되었는데 주장을 내고 논의하는 것이 관대하고 공평하였다. 일을 당해서는 자신의 손익에 따라 처신하지 않았으니, 이를테면 병인년(1626, 인조4)과 정묘년(1627)에 계사를 올린 일과 같은 것인데, 거실(巨室)이나 친구와 관련된 문제라 난처한 일이었던 것이다. 당시 여론이 더욱 이 일로 공을 중시하였다.
그 가법(家法)은 야천공(冶川公)으로부터 덕과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중부(仲父)인 부원군 응순(應順)은 국구(國舅)가 되었고 숙부인 대사헌 응남(應男)은 호가 남일(南逸)로 사림(士林)의 종주가 되었다. 공의 형제 및 자질(子姪) 수십 인에 이르러 모두 시와 예로 명성을 드날렸다. 검소함을 매우 숭상하고 예법을 준수하니 논하는 자들이, “국조에 외척의 가문으로서 영달하고 성대하면서도 명행(名行)이 더욱 빛나는 집안은 박씨 가문이 최고이다.” 하였다. 공의 맏형인 사간(司諫) 동현(東賢)은 호가 활당(活塘)으로, 성품이 꼿꼿하였고 집에 거처할 때나 조정에 섰을 때나 항상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공은 맏형을 아버지와 스승처럼 섬겼고 종신토록 모범으로 삼는 한편 그것으로 자손들을 가르쳤다.
공의 나이 19세 때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상제를 일체 《가례(家禮)》에 따랐다. 여러 형이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서 홀로 모친 김 부인을 봉양하였는데 영예와 봉양을 다 겸비하였다. 누이가 일찍 과부가 되자 함께 기거하였다. 고아가 된 여러 조카와 종손을 모두 돌봐 주고 교육하였으며, 동복(僮僕)들까지도 빠뜨리지 않았으니, 온 집안이 항상 화기애애하였다.
김 부인이 향년 92세에 임종하니 몹시 슬퍼하며 상제를 극진히 다하였다. 이후 벼슬이 재신의 반열에 이르러서는 녹봉이나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누이와 함께 나누었다. 질손(姪孫) 여러 집안이 모두 가난하여 아침저녁 끼닛거리나 관혼상제에 들어가는 비용을 모두 공에게 받았으므로 공의 집에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멀리 사는 먼 친족으로 비록 비천한 자일지라도 또한 모두 넉넉히 도와주고 정성껏 대우하니 감격하고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집에 거처할 때에는 위세는 세우지 않더라도 엄격하였으며 궤안(几案)은 반드시 정돈되어 있었다. 동복에게는 명령을 어기지 말도록 신칙하였다. 집안사람이 공의 곁에 있을 때는 비록 어린아이라도 나쁜 말로 다른 사람을 꾸짖지 못하였다. 이상 홍주(李相弘冑)가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며 탄식하기를, “요즘 세상에 가법을 지키기를 예전에 일컬어지던 양파(楊播), 유빈(柳玭)과 같이 할 수 있는 자는 자수(子粹) 그 사람뿐이다.” 하였다.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우리 성종의 서자인 익양군(益陽君) 회(懷)의 증손이요 용천군(龍川君) 수한(壽閑)의 손자이며 청성군(淸城君) 걸(傑)의 따님이다. 성품이 엄정하며 법도가 있었고 일찍 일어나 집안일을 건사하였는데 늙어서도 해이하지 않았다. 집안 살림이 빈한한데도 잘 다스리고 조처하여 제사나 손님 접대에 들어갈 비용을 모두 저축해 두어서 남편의 뜻을 한결같이 받들었다. 병인년(1566, 명종21) 5월 9일에 태어나 경인년(1650, 효종1) 3월 8일에 졸하였으니 나이 85세였다. 그해 9월에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정(炡)은 이조 참판으로서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오르고 금주군(錦洲君)에 봉해졌다. 깨끗한 명성과 곧은 절개가 당시 사람들을 고무시켰는데, 공보다 먼저 졸하였다. 딸은 찰방 정사무(鄭思武)에게 시집갔다.
금주군은 관찰사 윤공 안국(尹公安國)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며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 세규(世圭)는 문재(文才)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차남 세견(世堅)은 승지이며 삼남 세후(世垕)는 비상한 재주가 있었으나 또한 단명하였다. 막내는 세당(世堂)이다. 딸은 군수 이영휘(李永輝)에게 시집갔다. 찰방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사인(士人) 박경(朴熲)에게 시집갔다.
세규는 2녀를 두었으니 이지만(李之萬), 조창운(趙昌耘)에게 시집갔다. 세견은 2남을 두었는데, 태상(泰尙)은 이조판서 겸 대제학을 지냈고 태소(泰素)는 병조 좌랑으로 세규의 후사가 되었다. 세당은 3남을 두었는데 태유(泰維)는 정언이고 태보(泰輔)는 응교로 세후의 후사가 되었다. 태보는 기사년(1689, 숙종15)에 간언(諫言)하다가 죽었는데 뒤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고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막내아들은 태한(泰翰)이다. 세당의 2녀는 이렴(李濂), 김홍석(金弘錫)에게 시집갔다. 이영휘는 3남을 두었으니 택제(澤濟)와 철제(澈濟)인데, 철제는 현재 광주 부윤(廣州府尹)이다.
나는 후생이라 공을 직접 만나 뵙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 선조인 팔송공(八松公)이 정묘년(1627, 인조5)에 간원에 있을 때 나라의 정세가 위급한 상황에서 실로 공과 함께 주선하였는데, 공이 일을 당하여 정도를 견지하며 굽히지 않는 데에 감복하여 이때의 일을 선조가 늘 칭송하여 말하는 것을 삼가 들었다. 그리고 뒤에 공의 여러 손자들과 종유하면서 공의 성덕과 유풍(流風)을 익히 들었으니,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에 삼가 행장, 묘지 등의 여러 글을 이어 삼가 명을 지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실로 반남은 / 於惟潘南
덕망과 명성이 있는 곳 / 有德有名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 世濟厥美
나라의 기둥이 되었다 / 爲國之楨
우리 정헌공은 / 維貞憲公
가문의 명성을 돈독하게 지켜서 / 克篤家聲
내용과 외관이 훌륭하게 갖추어지고 / 質文彬彬
이른 나이에 벼슬길에 올랐네 / 蚤歲蜚英
난리를 만나 공적을 이루었고 / 遇難效績
혼조를 당해 절개를 지켰네 / 丁昏抗節
화가 두렵지 않으니 / 禍非所怵
공을 어찌 자랑하겠는가 / 功豈可伐
중흥의 때를 만나 / 中興際遇
현능한 사람의 진로가 비로소 형통하였네 / 賢路始亨
수는 팔십을 거의 누렸고 / 壽享大耋
벼슬은 경의 반열에 올랐네 / 官尊列卿
신실하고 공손하게 인의를 실천하고 / 恂恂行義
강직하고 화평한 풍범을 보였으니 / 侃侃風範
본말이 모두 수립되고 / 本末俱立
시종토록 허물이 없었네 / 始終無玷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이지만 / 沒世旣遠
남은 교훈은 더욱 떨쳐져서 / 餘敎益振
집안 대대로 나라를 위해 죽는 / 承家死國
아름다운 명성이 끊이질 않네 / 令聞無隕
즐거운 이 땅은 / 有樂斯丘
군자가 편안히 쉴 곳이니 / 君子攸寧
격식대로 비를 세워 / 維式有碑
무덤 앞을 비추게 하리 / 用昭山扃


[주D-001]이인임(李仁任)이 …… 죄 : 이인임(?~1388)은 고려 후기의 권신(權臣)으로, 공민왕이 피살되자 우왕(禑王)을 즉위시키는 한편, 당시 고려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이 공민왕 피살 사건을 본국에 보고하면 그 책임이 재상인 자신에게 돌아올까 염려하여 호송관을 시켜 채빈을 살해하고 그동안 배척당했던 원나라와 가깝게 지내려고 하였다. 왕인(王人)은 명나라 사신 채빈을 말한다.
[주D-002]정청(庭請) : 세자나 의정(議政)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나아가 중대 사건을 계품하고 하교를 기다리는 일을 말한다.
[주D-003]당리(堂吏) : 각 관아에 소속된 하급 관리를 지칭하는데, 여기서는 정청을 담당한 의정부의 관리를 말하는 듯하다.
[주D-004]평양과 …… 논하여 : 평안 감사 윤훤(尹暄)과 황해 감사 정호서(丁好恕)에 대해 논죄한 것을 말한다. 양사가 합사하여 성을 함락당하게 하고 도망간 두 사람을 효시할 것을 연계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5년 1월, 2월》
[주D-005]장릉(章陵) : 선조(宣祖)의 5남이며 인조의 본생부모인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의 묘호이다. 흥경원(興慶園)이라고 했다가 1632년(인조10)에 추존하면서 장릉이라고 고쳤다.
[주D-006]장릉(章陵)을 …… 내렸는데 : 이 일은 《인조실록》 10년 3월 13일 조에 나오는데, 그달 11일에 원종의 시호를 ‘경덕인헌정목장효(敬德仁憲靖穆章孝)’라 하고 부인을 ‘경의정정인헌(敬懿貞靖仁獻)’이라고 정한 데 대해 집의 권도(權濤)가 시호를 줄이라는 계사를 올리자, 상이 진노하여 권도를 국문하게 하고 함께 모의한 죄목으로 대사헌 박동선(朴東善)을 삭탈관작하였다. 이후 16일에 좌의정 이정귀(李廷龜),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차자로 인해 삭탈관작의 명이 환수되었다.
[주D-007]약을 …… 않았네 :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은 상(商)나라 고죽국의 왕자였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말한다. 백이와 숙제가 주(周)나라를 피해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 먹으며 절의를 지킨 고사가 있다. 이 절구는 원(元)나라 학자 노지(盧摯)의 시 〈채미도(采薇圖)〉이다. 《元文類 卷8》
[주D-008]양파(楊播) : 중국 북위(北魏) 사람인데, 가문이 대대로 순후하여 의리와 겸양을 모두 돈독히 하였으며, 형제들이 한집안에서 서로 공경하며 화목하게 지냈다. 《小學 卷6 善行》
[주D-009]유빈(柳玭) : 당(唐)나라 유공작(柳公綽)의 손자로, 가풍을 이어 효제(孝悌)와 예법(禮法)을 준수하였다. 자제들을 경계시킨 다섯 가지 조목이 《소학》 권5 〈가언(嘉言)〉에 실려 있다. 《新唐書 卷163 柳公綽列傳》 《通鑑節要 卷48 唐紀 昭宗》
[주D-010]태보는 …… 죽었는데 : 박태보(朴泰輔)는 1689년(숙종15) 5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국문(鞫問)을 받고 유배 가던 도중 노량(露梁)에서 죽었다.
[주D-011]팔송공(八松公) : 명재의 조부인 윤황(尹煌:1571~1639)을 가리킨다. 팔송은 윤황의 호이다.
홍재전서 제20권
 제문(祭文) 2
문열공(文烈公) 박태보(朴泰輔) 치제문

우뚝한 저 충렬이여 / 卓彼忠烈
우리 동방에 해와 달처럼 빛나네 / 日星吾東
한 장의 상소로 기강을 세우니 / 尺疏扶綱
백대에 풍성을 수립했네 / 百世樹風
파산의 서원은 / 坡山之院
삼절을 함께 제사하네 / 三節祀同
동향에 사랑을 끼쳤으며 / 桐鄕遺愛
노강에 자취를 남겼도다 / 鷺江餘躅
나의 행차를 멈추고 아득히 생각하며 / 駐蹕緬懷
관원을 보내어 대신 잔을 드리게 하네 / 伻官替酌

[주D-001]삼절(三節) : 문열공(文烈公) 박태보(朴泰輔), 충숙공(忠肅公) 이세화(李世華),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을 말한다.
[주D-002]동향(桐鄕) : 한(漢) 나라의 주읍(朱邑)이 젊었을 때 동향의 색부(嗇夫)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는데, 그가 죽은 후에 자손이 그를 동향에 장사 지내자 백성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든 일이 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일반적으로 고을 원이 되어 은혜를 베푼 고을을 말한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

  처사박공 세황지묘 (처사는 벼슬을 하지않은분이다)  배 영산신씨

 영산신씨 검정 신수화 女

 

 

  조선통훈대부 청주목사 박공 필모 지묘  숙인영산신씨 부좌  (숙인 통훈대부 3품)의 부인에게 주는 작호이다

 

비두에 갓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갓을 쓰지 않는 듯하다  삿갓 형태의  비두이다  

반남인이 박세 당선생이   정재 박r태보 선생이 사사되는 것을 보고

 후손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것이 전해 오기도 한다 (아마도 비문에  宜 의를  획을 쓰지 않은 듯하다)   박태보선생의 묘지 아래 마지막 묘이다

 

 

 박세당을

숙종실록보궐정오 32년 병술(1706,강희 45)

8월5일 (경인)
오도일과 박세당의 누명을 벗기고 복관 시키기를 대신들이 건의하다

인견(引見) 때에 부교리(副校理) 이사상(李師尙)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오도일(吳道一)은 문장(文章)·직도(直道)와 청백(淸白)한 절개가 참으로 남들보다 나은데, 인군(人君)을 섬기면 숨기는 것이 없고 일을 당하면 과감히 말하므로, 오랫동안 시의(時議)에 미움을 받아 오던 차에 과옥(科獄)이 일어나자 연루시키려고 온갖 계책으로 단련(鍛鍊)하고 한 해 동안 경영하였으나 단서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심익창(沈益昌)·유세기(兪世基)가 시관(試官)을 보러온 것은 망(望)이 이미 들어간 뒤라 하고, 오도일은 그날 총부(摠府)에 입직(入直)하였으므로 마침내 근거없는 무함으로 돌아갔고, 시관(試官) 1원(員)이 바꾸어 양(兩) 자로 만든 정상도 이미 드러났으므로, 판부사(判府事) 이유(李儒)가 판의금(判義禁)이었을 때에 그 실상을 알고 의논하여 아뢰려 하였더니, 김진규(金鎭圭)가 짐짓 다른 일로 상소하여 맞아 쳐서 그 일을 막았습니다. 이것이 온 세상에서 억울하다 하며 오래되어도 그치지 않는 까닭입니다. 죄인 민언량(閔彦良)의 어지러운 공초(供招)로 말하자면 진실로 믿을 것도 못되거니와, 오도일이 한 마디말이라도 참섭(參涉)한 일이 있었다면, 권중경(權重經)의 여러 차례 형신(刑訊)을 받으면서 어찌 조금이라도 오도일을 아깝게 여길 것이 있어서 끝내 곧게 공초하지 않겠습니까? 또 참으로 긴요하게 나온 일이 있었다면, 시의(時議)가 또한 어찌 버려두고 묻지 않았겠습니까? 오도일이 당한 것은 애매할 뿐만이 아니며, 급작스레 멀리 귀양보내는 율(律)에 대하여 성명(聖明)께서는 끝내 망설이시는 뜻을 가지셨으나, 시의가 매우 급하게 주장하여 마침내 먼 지방에서 죽어 살아서는 대궐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지극히 원통하다 하겠습니다. 오도일이 살아 있을 때에 대우가 신하들 중에서 뛰어나서 성상께서 시(詩)를 내려 권계(勸戒)하신 일까지 있었으니, 참으로 천고(千古)의 성사(盛事)였습니다. 지금 이름이 죄적(罪籍)에 있는 자를 거의 다 차례차례 용서하였으나, 오도일은 이미 뼈가 된 사람으로서 아직 단서(丹書)의 억울함을 씻지 못하였으니, 성상께서 생각이 여기에 미치신다면 반드시 마음에 측은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바야흐로 입시(入侍)하였으니, 하순(下詢)하여 처분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영의정(領議政) 최석정(崔錫鼎)·판의금(判義禁) 조상우(趙相愚) 등도 누누이 이어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도일은 두 가지 일로 죄받았는데 마지막에 당한 것이 더욱 긴중(緊重)하였으나, 민언량이 공초한 말은 어지러워서 몹시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때 국청(鞫廳)에서 권중경 등 여러 사람을 나문(拿問)하기를 청하였으나, 오도일은 거론한 일이 없었다. 또 대계(臺啓)가 나온 뒤에 나도 오도일은 권중경 등의 소의(疏議)에 간섭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처음에 윤허하지 않고, 여러 날 동안 망설인 것이 이 때문이었다. 이제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살아 있다 하더라도 여러 번 대사(大赦)를 겪어 반드시 소환되었을 것이다. 특별히 복관(復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인엽(李寅燁)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박세당(朴世堂)은 《사변록(思辨錄)》과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의 비문(碑文) 때문에 신사년에 죄를 받은 뒤로 아직 은전(恩典)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사변록》은 비록 얻어 보지 못하였으나, 대개 듣건대 그 대강은 잘못 생각한 것임을 면하지 못한다 하고, 비문의 문자도 지나치다 합니다. 그러나 모두 국가에서 형벌을 쓸 일은 아닙니다. 집안 제사(祭祀)에 대해서도 또한 아뢴 것이 있는데, 이것이 후세에 통행하는 제도에 어긋나기는 하지만 고례(古禮)는 그러합니다. 그가 새로 지어 낸 것이 아니니 더욱 죄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가 벼슬을 그만둔 한 가지 사실은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 없고, 성상께서도 일찍이 포장(褒奬)하는 은전을 여러 번 내리셨습니다. 또 그 아들 박태보(朴泰輔)의 절의(節義)가 빛나는 것을 생각하면 어찌 그 아비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죄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최석정이 말하기를,
“박세당은 처음부터 유가(儒家)에서 학문하던 사람이 아니고 과거로 출신하였으나, 급류(急流)에서 용감이 물러나 서적(書籍)에 잠심(潛心)하였습니다. 그가 경서(經書)를 볼 때에 그 장구(章句)의 의심스러운 곳에 차기(箚記)하여 스스로 두세 책자를 만들었는데, 설사 선유(先儒)의 훈석(訓釋)과 어긋나는 것이 있기는 하나, 육구연(陸九淵)·왕양명(王陽明)의 무리처럼 고의로 이론(異論)을 세운 것은 아닙니다. 그 서문(序文)·발문(跋文) 가운데도 또한 주자(朱子)를 높이는 뜻이 있습니다. 대저 이단(異端)이라면 양주(楊朱)·묵적(墨翟)·육구연·왕양명을 이릅니다. 그 학식과 마음을 닦는 법이 유자(儒者)와 같지 않고 그 해독이 무군무부(無君無父)하는 데 이르니, 진실로 배척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겠으나, 이 경우는 이단과 같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박세당이 벼슬에 생각을 끊기는 하였으나 국가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집에서는 행의(行誼)가 청백하고 근신하여 세상에서 뛰어났습니다.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가 살아 있을 때에 매번 ‘서계형(西溪兄)의 소견에는 혹 선유와 다른 것이 있기는 하나 꼭 깊이 배척할 것은 없다. 만약 이단이라면 내가 먼저 배척할 것이다.……’ 하였는데, 서계는 박세당의 자호(自號)입니다. 이단으로 돌릴 수 없음을 여기서도 또한 볼 수 있는데, 한때의 논의가 준열하고 좁아 마침내 멀리 귀양가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 연로(年老)한 때문에 귀양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는 하였으나, 죽은 뒤로 세월도 또한 오래 되었으니, 추복(追復)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조상우 등이 또 이어서 힘껏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문이 선정(先正)까지 범하였으니 진실로 옳지 않고, 《사변록》에서 주자의 주석을 옳지 않다고 한 곳이 비일비재하니, 더욱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당초에 이 때문에 벼슬을 삭탈하고 내쳤으나, 이미 배척하는 뜻을 보였고, 또 그 조용히 물러가 있는 절개가 숭상할 만하니, 특별히 복관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여러 신하들이 《사변록》을 이언적(李彦迪)의 《대학보유(大學補遺)》에 견주어 논한 적이 없었는데, 초사(初史)를 편수한 자는 근거없는 말로 뒤미처 헐뜯었으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원전】 40 집 245 면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사법-행형(行刑) / *사상-유학(儒學) / *출판-서책(書冊)


[주D-001]직도(直道) : 정도(正道).
[주D-002]과옥(科獄) : 과거에 관한 옥사.
[주D-003]단련(鍛鍊) : 없는 죄를 교묘하게 꾸며냄.
[주D-004]총부(摠府) : 도총부(都摠府).
[주D-005]단서(丹書) : 죄인의 죄명(罪名)과 성명을 붉은 글씨로 써 놓은 문서.
[주D-006]신사년 : 1701 숙종 27년.
[주D-007]차기(箚記) : 책을 읽어 얻은 것을 수시(隨時)로 적어 놓음. 또는 그 기록을 말함. 수필(隨筆). 수록(隨錄).

 

서계집 제4권
 시(詩)○석천록 하(石泉錄下)
석림암(石林庵)의 승 묘찰(妙察)이 누차 조르기에 이 시를 지어 주다


곡기 끊으려니 공부 익지 않았고 / 絶粒功未熟
신을 삼으려니 흉년을 만났네 / 捆屨遇飢年
다만 채륜의 기술 배워 / 聊學蔡倫技
짐짓 문자의 인연을 붙이네
/ 故黏文字緣


 

[주C-001]석림암(石林庵) : 지금의 수락산(水落山) 석림사(石林寺)를 말한다. 1671년(현종12) 석현(錫賢)과 그의 제자 치흠(致欽)이 창건하였다. 서계가 〈석림암기(石林庵記)〉와 〈석림암상량문(石林庵上梁文)〉을 지어 주었고, 뒤에 서계의 아들 박태보(朴泰輔)가 김시습(金時習)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중창하였다.
[주D-001]신을 …… 만났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허행(許行)의 무리들이 신을 삼고 자리를 짜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곧 신을 삼는다는 것은 자신의 본업에 전념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산승 묘찰(妙察)이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하며 수행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즉 신을 삼아 길을 떠나려 해도 흉년이 든 해라 볏짚이 없어 미투리를 삼을 수 없다는 뜻이다.
[주D-002]채륜(蔡倫)의 …… 붙이네 : 석림암에서 종이를 만들어 그 종이를 가지고 서계에게 시를 써 달라고 채근했다는 의미이다.

 서계집 제7권
 서(書) 7수(七首)
최 참판(崔參判) 석정(錫鼎) 에게 보내는 편지 임신년(1692, 숙종 18)


설날에 어버이를 모시며 복이 넉넉하시리라 생각되니, 위안이 되고 경하해 마지않습니다. 저는 노쇠한 몸으로 죽지 않고 있으니, 하루, 한 해가 참으로 고해가 아닌 날이 없습니다. 어찌하겠습니까, 어찌하겠습니까. 남 상국(南相國 남구만(南九萬))이 남쪽으로 돌아갔는데 근자에 그의 병세가 위태롭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몹시 염려스럽습니다. 하늘이 선인(善人)을 보우하지 않음이 이리도 심하니, 어찌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탁받은 선조 문집의 서문은 본래 저 같은 사람이 감히 써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오래도록 시일을 끌었었는데, 끝내 성의(盛意)를 거절하면 후중한 보살핌을 저버리겠다 싶어 이 때문에 참람됨을 잊고 근일에서야 지어 보았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당금 세상에 비록 인물이 없다 해도 어찌 일세를 복응시킬 만하고, 성대한 공렬(功烈)의 광휘를 발양하여 천고의 정론을 세워서 중론을 잠재울 만한 한두 명의 탁월한 식견과 우뚝한 변론을 가진 자가 없기야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보잘것없는 저로 하여금 자기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이렇듯 보잘것없고 말이 안 되는 글을 짓게 하신단 말입니까. 참으로 한 잔의 물로 한 수레의 섶에 붙은 불을 끄듯 역량이 부족하여 일을 이루지 못하고야 말 것입니다. 더구나 지자(知者)가 이를 본다면 또 “너의 불결한 오물을 어찌하여 청정한 불두(佛頭)에 끼얹는단 말인가.”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죄가 되니, 또한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깊이 헤아려 취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만약 굳이 제 글을 쓰시겠다면 되는 대로 정서해 보내어 채택을 기다리겠습니다.


 

[주C-001]최 참판(崔參判) : 최석정(崔錫鼎 : 1646 〜 1715)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초명은 석만(錫萬)이고, 자는 여시(汝時)ㆍ여화(汝和)이며, 호는 존와(存窩)ㆍ명곡(明谷)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D-001]선조 문집 : 최석정의 조부 최명길(崔鳴吉)의 《지천집(遲川集)》을 가리킨다.

 

 

서계집 제7권
 서(序) 9수(九首)
《색경(穡經)》 서(序)


옛날 번지(樊遲)가 공자(孔子)에게 농사짓는 법과 채전(菜田) 가꾸는 법을 배우고자 하였는데, 공자께서 노농(老農)과 노포(老圃)만 못하다고 사양하고, 번지가 물러나자 또 소인(小人)이라고 책망하여 번지가 이를 듣고 부끄러워할 줄 알도록 하였으니, 농사짓고 채전 가꾸는 일이 어찌 도(道)가 들어 있지 않은 일이겠으며, 군자(君子)가 아예 단절하고 하지 않는 일이겠는가.
사서(史書)에 “기(棄)가 나무 심는 일을 좋아하자 요(堯) 임금이 그를 후직(后稷)으로 삼았다.” 하였고, 《맹자(孟子)》에서도 “후직(后稷)이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쳐 오곡(五穀)을 심고 가꾸게 하셨는데, 오곡이 익자 백성들이 잘 길러졌다.” 하였다. 그렇다면 농사는 그야말로 민생(民生)의 근본이요 천하의 요도(要道)로서, 성인(聖人)이 그 기술을 폐한 적이 없으며 몸소 직접 배워서 남에게 가르치기까지 한 것인데, 부자(夫子)께서는 어찌하여 대번에 거절하였는가?
공자께서 “내가 젊었을 때 미천(微賤)하였기 때문에 비천(鄙賤)한 일에 능함이 많다.” 하였다. 미천한 처지에서 비천한 일을 할 적에는 비록 농사짓고 채전 가꾸는 것보다 더 비천한 일도 부자는 이를 할 수밖에 없었을 터인데, 하물며 본래 미천한 자가 늘 부지런히 힘쓰는 항업(恒業)인 농사짓고 채전 가꾸는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성인이 일에 대해서는 했다 하면 반드시 그 일에 맞게 방도를 다 하였으니, 농사짓고 채전 가꾸는 것보다 더 비천한 일에도 오히려 능하였는데, 유독 농사짓고 채전 가꾸는 일에 능하지 못하였을 리가 있겠는가. 농사짓고 채전 가꾸는 것은 진실로 백성들에게 중요한 일이니, 성인이 응당 하였으되 그 일을 태만히 하거나 소홀히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번지는 아마도 성인이 이 일에 대해 잘 알고 계실 줄 알았기 때문에 이를 배우고자 한 것일 것이다.
객(客)이 혹 말하기를,
“부자께서 ‘장기와 바둑이라도 있지 않은가? 그것을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지금 이처럼 대번에 번지를 거절한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농사짓고 채전 가꾸는 것이 장기 두고 바둑 두는 것보다 훨씬 낫거늘, 부자께서 장기와 바둑은 내세우고 농사짓고 채전 가꾸는 것은 물리치시니, 참으로 이상하다.”
하였다. 대답하기를,
“아니다. 이 말씀은 부자께서 까닭이 있어 말씀한 것이지, 장기와 바둑이 농사짓고 채전 가꾸는 것보다 외려 낫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 집지(執贄)의 예(禮)를 갖춘 다음 책을 들고 찾아와 배움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부자께서는 그를 가르치실 것이지만, 만약 장기와 바둑을 들고 와 배움을 청하는 자가 있으면 결코 그를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자는 부자께서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기와 바둑을 배우려 하는 자 또한 감히 부자의 문하에 찾아오지 못할 것이니, 이러한 까닭은 무엇인가? 불가한 줄 알기 때문이다. 지금 번지가 성인에게 배우면서 농사짓는 법과 채전 가꾸는 법을 배우기를 청하였으니, 번지의 생각은 이를 불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부자께서 번지에게 이상하게 대한 까닭이다.
부자께서는 단지, 군자(君子)는 도(道)를 배움에 있어 힘써 그 대도(大道)를 배워야 하며 농사짓고 채전 가꾸는 것과 같은 소도(小道)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니, 군자가 힘써 배울 일이 아닌데 저 번지가 그 대도를 버려 두고 소도를 배우려 하니, 도에 나아가지 못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다. 때문에 이와 같이 사양하고 책망한 것이다.”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농사짓고 채전 가꾸는 일은 배워서는 안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안 되겠는가. 군자가 되어서는 군자가 할 일을 배우고 야인이 되어서는 야인이 할 일을 배우는 법이다. 현재 처한 위치에 따라 각각 그 일을 힘써 행할 뿐이니, 어찌 야인만이 이를 배우겠는가.”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누구에게 찾아가 배워야 옳은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활쏘기를 배우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예(羿)나 방몽(逄蒙)에게 배우고, 수레 모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조보(造父)나 왕량(王良)에게 배울 것이며, 만일 바둑을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반드시 혁추(奕秋)의 문하에 가서 배워야 할 것이다. 지금 야인이 할 일을 배우면서 나의 스승이 될 만한 야인을 찾아가 배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부자(夫子)께서 본래 ‘나는 노농(老農)만 못하고, 나는 노포(老圃)만 못하다.’라고 고해 주셨다. 어느 누가 농사짓고 채전 가꾸는 법을 배우고자 하면서 스승을 찾되 노농과 노포를 버려 두고 다른 데로 갈 자 있겠는가. 심하도다, 번자(樊子)가 군자의 문하에서 야인의 기술을 익히고자 함이여. 이는 추환(芻豢) 앞에서 여곽(藜藿)을 말하고, 호학(狐狢) 앞에서 온포(縕袍)를 말하는 격이니, 이렇게 하고도 비방을 받고 비웃음을 사지 않을 자는 드물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객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대가 이 책을 지은 것은 장차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대는 군자가 되지 않고 야인이 되려는 것인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그렇다. 나는 본디 야인이다. 선비로서, 나아가 조정에 벼슬하여 그 도를 행하는 자를 군자라 이르고, 물러나 들에서 밭을 갈아 자기 힘으로 사는 자를 야인이라 이른다. 나는 이미 들에서 밭을 가니, 야인이 되지 않고자 한들 될 법이나 하겠는가. 그리고 나는 일찍이 벼슬할 때, 나의 도가 세상에 행해지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물러나 스스로 농사나 지으며 살고자 한 지가 오래이다. 그리하여 비각(祕閣)의 도서(圖書)를 열람하다가 이를 얻고는 ‘내가 나의 스승을 얻었다.’라고 좋아하여 그 즉시 이를 베꼈다. 이어서 번잡한 내용을 산절하고 중복된 부분을 제거하여 한 질(帙)로 만듦으로써 찾아보기 편리하도록 한 다음 《색경(穡經)》이라 이름하였다. 그 속에는 구곡(九穀)ㆍ백과(百果) 및 오이ㆍ박ㆍ채소ㆍ삼ㆍ모시 등속을 가꾸는 법과 닭ㆍ돼지ㆍ거위ㆍ오리ㆍ벌ㆍ물고기 따위를 키우는 법과 재목(材木)ㆍ화초(花草)ㆍ약초(藥草)와 같은 식물을 재배하는 법이 자세히 실려 있고, 뽕나무를 키우고 누에를 치는 법 등 민생(民生)에 도움이 되는 대소 완급의 일들이 모두 다 구비되어 있으며, 게다가 월령(月令)을 달아 이를 징험할 수 있도록 하였고, 수한(水旱)ㆍ풍흉(豐凶)ㆍ음청(陰晴)ㆍ한서(寒暑)를 점험(占驗)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또 전가(田家)의 고락(苦樂)ㆍ송축(頌祝)ㆍ원망(怨望)과 관련된 일에 대해 화를 피하고 복에 나아가는 방도를 알 수 있도록 한 내용이 남김없이 모두 실려 있으니, 그 법이 상세하고 극진하다 이를 만할 것이다.
내가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올 적에 이 책을 함께 싣고 돌아와 야인들과 이를 공유하고자 하였다. 시골에 살면서 이러한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자들로 하여금 노농과 노포에게서 기술을 배운 다음 또 이 책을 통해서 그 뜻을 깊이 터득하게 한다면 이 책이 또한 농가의 큰 스승이 되어 사람들마다 모두 기한(飢寒)의 근심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니, 그 이로움이 또한 크지 않겠는가.”
하였다. 객이 말하기를,
“그렇다. 그대의 말이 좋다. 내 장차 그대에게서 배우겠다.”
하였다.
이에 이 말을 서술하여 서문으로 삼는다.


 

[주C-001]색경(穡經) : 1676년(숙종 2) 박세당(朴世堂)이 지은 농서(農書)이다. 이 책은 농림축잠(農林畜蠶) 및 양어(養魚), 양봉(養蜂)과 농산제조(農産製造) 등 농사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기술한 농법기술서로 2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래의 농서에 비하여 내용이 광범위하고 체계화되어 있어, 뒤에 나온 《산림경제(山林經濟)》와 같은 소백과서의 선구 격인 저서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주D-001]번지(樊遲)가 …… 하였으니 : 번지는 공자의 제자이다. 번지가 농사일을 배우기를 청하자, 공자는 “나는 늙은 농부만 못하다.” 하고, 채전을 가꾸는 것을 배우기를 청하자, “나는 늙은 원예사만 못하다.” 하였다. 그리하여 번지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는 “소인이구나, 번수(樊須)여. 윗사람이 예(禮)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윗사람을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의(義)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고, 윗사람이 신(信)을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실정대로 하지 않는 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방의 백성들이 자식을 포대기에 업고 올 것이니, 어찌 농사짓는 것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論語 子路》
[주D-002]내가 …… 많다 : 태재(太宰)가 자공(子貢)에게 묻기를, “공자는 성자(聖者)이신가? 어쩌면 그리도 능한 것이 많으신가?” 하자, 자공이 “부자께서는 진실로 하늘이 내신 성인일 것이요, 또 능한 것이 많으시다.” 하였다. 공자께서 이 말을 듣고 “태재가 나를 아는구나. 나는 젊었을 때 미천하였기 때문에 비천한 일에 능함이 많으니, 군자는 능한 것이 많은가? 많지 않다.” 하였다. 《論語 子罕》
[주D-003]예(羿)나 방몽(逄蒙) : 모두 활의 명수이다. 예는 하(夏)나라 때 유궁국(有窮國)의 군주로 활을 잘 쏘았으며, 방몽은 하나라 사람으로, 예에게 활 쏘는 법을 배웠는데 천하에서 자기보다 나은 자는 오직 예밖에 없다 생각하고 스승인 예를 쏘아 죽였다. 《孟子 離婁下》
[주D-004]조보(造父)나 왕량(王良) : 모두 말을 잘 몬 자이다. 조보는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 사람으로 왕이 서쪽으로 가서 수렵에 빠져 돌아오길 잊었는데, 서언왕(徐偃王)이 반란하자 그가 왕의 말을 몰아 하루에 천 리를 달려가 서언왕을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한다. 《史記 卷43 趙世家》 왕량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조간자(趙簡子)의 가신(家臣)이었는데 말을 잘 몰았다. 《孟子 滕文公下》
[주D-005]혁추(奕秋) : 바둑을 잘 두는 자로 이름이 추(秋)이다. 《孟子 告子上》
[주D-006]추환(芻豢) …… 온포(縕袍) : 추환(芻豢)은 풀이나 곡식을 먹는 소, 양, 개, 돼지를 말하는데 이는 좋은 음식을 비유하며, 여곽(藜藿)은 명아주 잎과 콩잎이라는 뜻으로, 변변치 못한 음식을 비유한다. 호학(狐狢)은 여우나 담비가죽으로 만든 갖옷으로 아주 귀한 옷을 가리키고, 온포(縕袍)는 수삼으로 둔 솜옷으로 몹시 값싼 옷을 가리킨다

서계집 제7권
 서(序) 9수(九首)
수락산(水落山)을 유람하며 지은 시의 후서


삼각산(三角山)과 도봉산(道峯山)은 도성 근교의 우뚝한 산으로 수락산(水落山)과 더불어 솥발처럼 높이 솟아 있다. 그리하여 사방의 여러 산이 옷깃을 여미고 빙 둘러 향하고 있으니, 크고 작은 산들이 모인 형상이 마치 아들 손자들이 모여 있는 것과 같다. 우뚝 솟은 형세로는 삼각산과 도봉산이 갑을(甲乙)을 다투고 유심(幽深)하고 기이(奇異)함으로는 동봉(東峯)이 으뜸이다. 비록 함양(咸陽)을 누르고 있는 저 종남산(終南山)과 태화산(太華山)이나 낙양(洛陽)에 짝하고 있는 숭산(嵩山)과 소실산(少室山)인들 그 장엄하고 수려함으로 말하면 수락산만 못할 것이다.
일찍이 몇몇 사람들과 수락산 정상에 올랐었는데, 초입에서는 구불구불 깊숙이 들어가 마치 우물 속에 앉아 있거나 무덤 속에 떨어진 듯하고, 정상에 오르자 온 사방이 훤하게 트여 마치 바람을 타고 신선이 된 듯하였으니, 그야말로 인간사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성곽은 아련하고 집집마다 저녁연기 피어나며 강물은 구불구불 천 리를 달려 바다로 흐르며, 서남쪽으로는 운해가 자욱하고 동북쪽으로는 이내가 아득하여, 눈앞에 펼쳐지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경광이 발길을 따라 다른 것으로 말하면, 심목(心目)으로 그 요체를 잡을 수 없고 그림으로 그 절경을 그려 낼 수 없으니, 또 어찌 우내(宇內)의 아름다운 볼거리가 아니겠는가.
때는 마침 가을 경치가 저물어 강산(江山)이 맑고 쓸쓸한데 벼랑에는 붉은 단풍 시들고 연못에는 누런 국화 떨어지니, 오싹하여 감회를 자아내고 처량하여 감상(感傷)에 젖어든다. 더구나 청한자(淸寒子 김시습(金時習))의 구서(舊棲)에는 등나무가 늙고 수목이 시들며 사람은 가서 자취가 없는데, 서글프게 홀로 와 만 길 푸른 절벽을 마주하고 천고(千古)에 남긴 자취를 생각하노라니,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개연히 서글픈 감회에 젖어들게 한다. 밤에 선원(禪院)에서 묵은 다음 아침에 부지(鳧池)에서 물을 마시고 아쉬운 마음에 서성이며 차마 떠나지 못하는 듯이 하는 것은 인정(人情)이 그러한 것인가. 아니면 산천(山川)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가. 하산하여 시 약간 수를 지었다.
정사년(1677, 숙종 3) 9월 그믐에 후서(後序)를 쓰노라. 서계초수(西溪樵叟).


서계집 제7권
 서(序) 9수(九首)
연경(燕京)으로 가는 최 참판(崔參判) 석정(錫鼎) 을 전송하는 서


선비로서 불행하게 외진 동방(東方)에서 태어나 중국(中國)의 큰 땅을 보거나 선왕(先王)의 옛 자취를 밟아 보지 못하고 그저 서책(書冊)만 읽고 만 리 중국은 어떨까, 천 년의 자취는 어떨까 상상하여, 이따금 책을 어루만지매 답답하고 울적하여 한밤중에도 마음을 진정하지 못한다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다행히 사행(使行)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유람하면서 지난날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했던 곳을 보고, 지난날 밟고 싶었으나 밟지 못했던 유적을 밟게 되었으니, 숙원을 풀고 소망을 이루어서 다시는 여한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또 불행하게도 세상은 성쇠(盛衰)가 있기 때문에, 그 유적과 땅을 밟고 그 사람과 풍속을 보매 의관(衣冠)이 오래전에 바뀌어 버렸고 문물(文物)이 모두 사라져 버려 구국(舊國)과 고도(古都)에서 그저 서글프기만 할 뿐이니, 이 또한 족히 슬프지 않겠는가.
지금 그대의 사행이 장차 요동(遼東)을 지나고 계구(薊丘)를 거칠 터이니, 헌후(軒后)를 상상하고 유안(幼安)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저 난리를 피해 뜻을 온전히 한 유안의 유풍(遺風)이 이미 사라지고, 짐승을 몰아내고 문자(文字)를 창제한 헌후의 유적(遺跡)이 벌써 민멸되었으니, 그렇다면 어찌 깊은 사모와 감회를 일으키며 울울하게 고인을 생각하는 한이 있지 않겠는가. 그대가 이번 사행에 얻는 것이 장차 이에 불과할 터이므로 애오라지 이를 말하여 전별의 말을 삼으니, 그대가 중국에 가면 필시 내 말을 생각할 것이다.


 

[주D-001]계구(薊丘) : 북경성(北京城) 덕승문(德勝門) 밖 서북쪽에 있는 고대의 지명으로, 일명 계문(薊門)이라고도 한다.
[주D-002]헌후(軒后) :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黃帝) 훤원씨(軒轅氏)를 가리킨다.
[주D-003]유안(幼安) : 유안은 관녕(管寧)의 자이다.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황건적(黃巾賊)의 난 때에 요동(遼東)으로 피하였는데, 학문을 잘하여 따르는 사람이 한 고을을 이룰 정도로 많았다. 그는 여러 차례 천거를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문제(文帝)가 즉위하여 조서(詔書)로 부르자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에 배를 띄워 고향으로 돌아가고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서계집 제7권
 서(序) 9수(九首)
《지천집(遲川集)》


《좌전(左傳)》에 “가장 훌륭한 것은 덕을 세우는 것이요, 그 다음은 사공(事功)을 세우는 것이요, 그 다음은 문장(文章)을 남기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본말(本末)을 논한 말이다. 덕이 근본이요 사공과 문장이 말단이니, 넉넉한 덕이 진실로 몸에 있으면 이를 베푸매 사업(事業)과 공렬(功烈)이 되고, 이를 드러내매 언어와 문장이 된다. 그 성취한 사공을 상고하고 그 드러난 문장을 관찰하면 그 사람에게 갖추어진 근본을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니, 또 뉘라서 이를 숨길 수 있겠는가.
일찍이 생각건대, 최 문충공(崔文忠公)이 세상에 큰 공을 세운 것이 세 가지이다. 제공(諸公)들과 책모(策謀)를 결정하여 혼암한 임금을 몰아내고 명성(明聖)한 군주를 도와서 천지 사이에 인륜을 밝혔으니, 이것이 문충공의 첫 번째 공이다.
예송(禮訟)이 일어났을 때에, 여러 장로(長老)들이 그 누구도 털끝만큼이라도 문란(紊亂)시켜서는 안 되는 소목(昭穆)의 차서와 털끝만큼이라도 간단(間斷)시켜서는 안 되는 본말의 계통을 잘 알지 못한 채, 마침내 유사한 주변의 설을 끌어들여 증거로 삼았는데, 온 세상이 그들의 주장에 휩쓸려 다시 그 오류를 살피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홀로 뭇사람들의 비방을 받으며 여러 의논의 잘잘못을 가리니, 그 논의가 매우 상세하고 그 말이 매우 분명하여 아무도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존친(尊親)의 분수가 크게 안정될 수 있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문충공의 두 번째 공이다.
청국(淸國)이 점차 기세를 떨칠 때, 청국과 우리의 강약이 대등하지 않다는 것은 누군들 알지 못하였겠는가. 그런데도 제공들은 한가하게 앉아서 공허한 말만 하고 아무도 시세(時勢)를 보고 진퇴할 계책을 세우지 않다가, 적병(敵兵)이 성하(城下)에 닥치고 나서야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비로소 깨달았다. 이때에는 비록 평소 전섭(專聶)같은 결단을 자부하고, 늘 신포(信布) 같은 용맹을 자부하던 자들도 안색이 바뀌고 기운을 잃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공은 6척도 채 안 되는 몸으로 몇 안 되는 시종을 거느리고 적군으로 달려 들어가 적의 예봉(銳鋒)을 늦추었다. 그리하여 임금의 수레가 그 틈을 타고 길을 돌려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갈 수 있었으니, 이는 누구의 힘인가. 적의 노략질이 5도(道)를 휩쓸고 외로운 성에 포위가 풀리지 않았으며, 강도(江都)가 함락되자 복심(腹心)이 되는 곳이 먼저 무너졌는데, 이때에 공은 군중(軍中)에 출입하며 이리저리 애써서 구설(口舌)로 칼날에 맞서고 유순함으로 강포함을 눌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복될 뻔한 사직(社稷)을 온전히 하고 위태로웠던 생민(生民)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또 누구의 공인가.
동토(東土)의 사람들이 그 침석(枕席)을 편안히 하고 그 자손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 모두 공의 은택인데, 도리어 오늘날 말하는 자들이 그에게 힘입었으면서도 그 사람을 헐뜯으니, 너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주의(奏議)는 곡진하고 명백 직절하여 육선공(陸宣公)에 손색이 없다. 잠깐 사이에 충만한 기운을 움직였으니, 그 빼어나고 과감한 기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장은 어찌 근대에 드물다뿐이겠는가.
전배(前輩)들은 문장에 있어 모두 계곡(谿谷)을 추중(推重)하고, 공 또한 평소에 한 수 양보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나만은 계곡이 너무 문장을 꾸민 점이 없지 않아 외려 흉중에서 우러나와 넉넉한 여운이 있는 공의 문장만 못하다고 여긴다. 온축된 밝은 식견이 언어에 나타난 것은 남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요, 시 또한 고절(高絶)하여 세상에서 시 잘 짓기를 자부하는 자도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이다. 이로써 말해 보면 앞에서 말한, 그 사업과 문장을 관찰하면 그 사람에게 보존된 덕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문충공에 있어서 어떠한가.
문충공의 시문(詩文) 몇 권이 ‘《지천집(遲川集)》’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간행되어 있으니, 아, 이 문집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없어지지 아니하여 후세에 공을 알고자 하는 자들이 여기에서 찾는다면 공의 면모를 한둘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주C-001]지천집(遲川集) : 조선 중기의 문신 최명길(崔鳴吉)의 시문집이다.
[주D-001]가장 …… 것이다 :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숙손표(叔孫豹)의 말로, 덕을 세운다는 것은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 같은 성인(聖人)을 이르고, 사공을 세운다는 것은 홍수를 다스려 백성들을 구제한 우(禹) 임금과 같은 분을 이르고, 문장을 남긴다는 것은 좋은 글과 말을 남긴 사일(史佚)과 장문중(臧文仲) 같은 사람을 이른다. 《春秋左氏傳 襄公24年》
[주D-002]최 문충공(崔文忠公) : 문충공은 최명길(崔鳴吉 : 1586 〜 1647)의 시호이다. 자는 자겸(子謙)이요, 호는 지천(遲川)ㆍ창랑(滄浪)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완성군(完成君)에 봉해졌고, 1627년 인조의 어머니 계운궁(啓運宮)의 신주(神主)를 흥경원(興慶園)에 합부(合祔)하는 문제로 옥당(玉堂)의 배척을 받았으며,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주D-003]전섭(專聶) : 춘추 시대 오(吳)나라의 공자(公子) 광(光)을 위하여 왕료(王僚)를 죽이고자 비수를 고기 뱃속에 숨겨 들어가 그를 찔러 죽였으나 자기도 그 자리에서 잡혀 죽임을 당한 전저(專諸)와, 전국 시대 엄중자(嚴仲子)를 위해 연(燕)나라 재상 협루(俠累)를 암살하고 자결한 섭정(聶政)의 병칭으로, 고대의 대표적인 자객들이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주D-004]신포(信布) : 신포는 한(漢)나라의 명장인 한신(韓信)과 영포(英布)를 가리킨다.
[주D-005]육선공(陸宣公) : 당나라 덕종(德宗) 때의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육지(陸贄)를 말한다. 자는 경여(敬輿)이고, 선공(宣公)은 시호이다. 《당서(唐書)》 권157에 “천자에게 올리는 주의(奏議)를 짓는 데 능란한 재능이 있다.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란 책이 있으니, 사정을 곡진하게 말하고 일의 기미에 적중하였다” 하였다.
[주D-006]계곡(谿谷) : 조선 중기의 문신 장유(張維 : 1587 〜 1638)의 호이다. 자는 지국(持國)이고 호는 계곡(谿谷)ㆍ묵소(默所)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서계집 제8권
 기(記) 4수(四首)
석천동기(石泉洞記)


석천동(石泉洞)은 잠수(潛叟)가 사는 곳이다. 잠수가 조정에서 시종(侍從)으로 벼슬한 지 10년이었는데, 어느 날 병으로 물러나 선부봉(仙鳧峯) 아래에 은거하고는 사는 곳의 샘물을 ‘석천(石泉)’이라 이름하고 이어 그 골짜기를 ‘석천동(石泉洞)’이라 이름하였다. 이 지역이 도성의 동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또 그 산등성이를 ‘동강(東岡)’이라 하고, 시내를 ‘동계(東溪)’라 하였으며, 또 이곳에 잠수가 산다고 하여 그 물을 ‘잠수(潛水)’라 하고 언덕을 ‘잠구(潛丘)’라 하였다.
‘석천’이라 이름한 까닭은 산속의 뭇 샘물이 모여 이 시내가 되었고, 온 산이 모두 바위인데 시냇물이 구불구불 흘러서 바위를 따라 오르내리며 담(潭)이 되기도 하고 폭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석천’이라 이름한 것이다. 맑은 샘물이 바위 위로 흐르고 하얀 바위가 샘물에 씻겨 샘물은 바위 때문에 더욱 맑고 바위는 샘물 때문에 더욱 희니, 아름답고 즐겁도다. 잠수가 사는 곳이여. 잠수는 날마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며 아침저녁으로 수석(水石) 사이를 소요(逍遙)하는데, 질병과 우환이 있지 않으면 이곳에 거닐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즐거워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르는 자라 하겠다.
시내에서 북쪽으로 8, 9보 떨어진 곳에 집이 있으니 곧 잠수가 거처하는 집이요, 집에서 동쪽으로 수백 보 떨어진 곳에 언덕이 있으니 곧 잠수의 무덤자리이다. 이 언덕을 ‘낙구(樂丘)’라 하고, 이 집을 ‘정사(精舍)’라 하였으니, 잠수가 살아서는 여기에 거처하고 죽으면 이곳에 묻힐 것이다. 비록 삽을 메고 따라다니게 한 유령(劉伶)과는 다를 법하지만, 잠수의 경우 또한 자신을 위한 도모를 잘 하였다고 할 만할 것이다.
그 회일(回日)ㆍ영월(迎月)ㆍ백학(白鶴)ㆍ채운(彩雲)ㆍ선부(仙鳧) 등 봉우리들의 기이함과, 선유(仙游)ㆍ도장(道藏)ㆍ토운(吐雲)ㆍ서하(栖霞) 등 계곡들의 빼어남과, 취선대(聚仙臺)ㆍ초학대(招鶴臺)와 수옥정(漱玉亭)ㆍ난가정(爛柯亭)과, 객성기(客星磯)와 음우담(飮牛潭)과 크고 작은 폭포와 샘물의 빼어난 경치로 말하면 도성 근교에서 보기 드문 경치인데, 잠수가 골라서 이름을 붙인 곳까지 합하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하여 지금 우선 그중에 한두 곳을 기록하여 후인(後人)들로 하여금 잠수가 이곳에서 즐거워한 바를 알게 하노라.


[주D-001]잠수(潛叟) : 잠수는 박세당의 호이다. 무신년(1668, 현종 9) 1월 40세에 벼슬을 버리고 양주 수락산(水落山) 석천동(石泉洞)에 은거하였다.
[주D-002]삽을 …… 유령(劉伶) : 유령은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성품이 남달리 술을 좋아하여 늘 녹거(鹿車)를 타고 술을 담은 호로병 하나를 가지고 다녔는데, 한 사람에게 삽을 메고 따라다니게 하여 자기가 죽으면 그 자리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그가 지은 주덕송(酒德頌)이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後集)에 실려 있다. 《晉書 卷49 劉伶傳》

 

명재유고 제2권
 시(詩)
생질 박사원(朴士元)에게 이별하면서 주다


차가운 하늘에서 기러기 울고 / 旅鴈號霜空
가을바람은 차디차게 불어오는데 / 秋風正憀慄
병마와 싸우면서 신음하느라 / 呻吟伴二竪
문을 닫고 적막하게 들어앉았네 / 寂寞閉一室
그때 마침 그대가 찾아왔는데 / 之子忽來訪
이미 점차 두각을 드러냈기에 / 頭角轉
밤새워 도란도란 얘기 나눔에 / 連宵得晤語
남모르는 걱정 다 사라졌다네 / 頓令幽憂失
글 보는 데 어려움 없을뿐더러 / 看書已無難
주석까지 샅샅이 망라하였고 / 箋註能爬櫛
간간이 서산의 경 논함에 있어 / 間論西山經
황돈의 무릎을 꿇리려 했네 / 欲屈篁墩膝
어저께 바닷가를 지나오면서 / 昨過右海壖
주머니가 넘치도록 시를 지었고 / 有作奚囊溢
나를 위해 서재의 편액을 쓰는 데도 / 爲我寫齋扁
전서(篆書) 쓰는 붓놀림 멈추지 않았네 / 古篆不停筆
풍부한 학예 실로 훌륭한 데다 / 賢哉富學藝
빼어난 재질이 아름다워라 / 美矣妙才質
도가 본래 사람을 멀리 않는데 / 爲道不遠人
성인 경지 들 방법 어찌 없으랴 / 入聖豈無術
진취에는 입지가 귀한 법이고 / 進取貴立志
실질적인 공부에 기본 있으리 / 根基在務實
바라건대 앞으로 더 노력하여 / 願言更勉旃
명철하고 성실한 데 도달하게나 / 明誠期異日
명리 따윈 관심 둘 것이 못 되고 / 名利不足慕
화란쯤은 두려워할 게 아니지 / 世禍非所怵
남군은 사람됨이 정직 선량한 데다 / 南君儘端良
임군 역시 뛰어난 선비인 만큼 / 林子亦超逸
격려하고 권면하는 의리 힘써서 / 且敦切偲義
부족함이 없는 좋은 짝들 되게나 / 彬彬好儔匹
이 몸은 무엇 하나 이룬 것 없이 / 嗟余無一成
어느새 늙고 병든 가련한 신세 / 可憐奄衰疾
어찌하면 그대를 붙잡아 두고 / 安得挽子留
오두막집에서 함께 책 볼 수 있나 / 窮簷共殘帙
늙은 소처럼 비록 게으르지만 / 雖如老牛倦
채찍질을 가하면 변화될 텐데 / 庶以賴鞭抶
막상 헤어지려니 서운해져서 / 臨分却悵然
감회를 그대 위해 적어 보노라 / 有懷爲君述


 

[주D-001]서산(西山)의 경(經) : 송(宋)나라 때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심경(心經)》으로, 성현(聖賢)들이 심(心)에 대해 논한 격언(格言)을 뽑아 모으고, 또 제유(諸儒)들의 논의(論議) 가운데 정밀하고 중요한 것들을 모아 주석을 단 책이다.
[주D-002]황돈(篁墩)의 …… 했네 : 황돈은 명(明)나라 때 정민정(程敏政)으로, 《심경》에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더 발췌하고 보완하여 《심경부주(心經附註)》를 편찬한 바 있다. 여기에서는 박태보(朴泰輔)가 《심경》에 해박한 식견을 지녔음을 말하기 위해서 이렇게 쓴 것이다.

 

 명재연보 부록 제1권
가장(家狀)


부군(府君)은 휘(諱)가 증(拯)이고 자는 자인(子仁)이며, 처음의 자는 인경(仁卿)이다. 중부(仲父)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선생이 ‘명재(明齋)’라는 두 글자를 손수 써서 주었던 것을 배우는 자들이 그대로 명칭으로 삼았다.
윤씨(尹氏)는 선계(先系)가 파평현(坡平縣)에서 나왔으니, 고려의 벽상공신(壁上功臣) 휘 신달(莘達)이 바로 시조(始祖)이다. 몇 대를 내려와서 휘 관(瓘)은 평융 좌리(平戎佐理)로 큰 공훈을 드러내었는데, 군중(軍中)에서도 항상 오경(五經)을 지니고 있었다. 영평백(鈴平伯)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이분이 동평장사(同平章事)를 지내고 시호가 문강(文康)인 휘 언이(彦頤)를 낳았다. 이로부터 대대로 명성과 덕망을 갖춘 사람이 배출되었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휘 곤(坤)이 태종(太宗)을 섬겨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서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으니, 시호가 소정(昭靖)이다. 그로부터 4대손이 되는 휘 탁(倬)은 관직이 대사성에 이르렀는데, 중종 기묘년(1519, 중종14) 연간에 경학(經學)으로 성균관을 오랫동안 관장하였다. 3세를 내려오면 휘 창세(昌世)에 이르게 되니, 바로 부군의 증조로서 이조 참판에 추증(追贈)되었다. 지극한 성품과 뛰어난 행실이 있었으니, 일이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지문(誌文)에 실려 있다. 조부는 휘가 황(煌)으로, 대사간을 역임하였고 호는 팔송(八松)이다. 선을 좋아하고 행실이 독실하였으며, 굳세고 강직한 인품의 소유자로서 큰 절개가 있었다. 인조 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여 누차 상소하여 힘껏 화의(和議)를 배척하였다. 김 문정공이 또한 그 묘지명을 지었다. 뒤에 특별히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내렸다.
고(考)는 휘가 선거(宣擧)인데, 병자년(1636, 인조14)ㆍ정축년(1637) 이후에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며 정학(正學)을 체득하고 대의를 밝혀 우뚝이 사문(斯文)과 세도(世道)의 비중 있는 인물이 되었다. 효종조와 현종조에 누차 예(禮)를 다해 징소(徵召)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뒤에 특별히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경(文敬)으로 내렸다. 배우는 자들이 노서(魯西) 선생이라 일컬었다.
비(妣)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생원(生員) 휘 장백(長白)의 따님이다. 바른 성정과 빼어난 재능을 갖추었고 경사(經史)를 환히 통달하였으며 옛날 열녀의 기풍이 있었는데, 강도(江都)의 난리에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
부군은 숭정(崇禎) 2년(1629, 인조7) 기사 5월 28일에 한양의 정선방(貞善坊)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무게 있고 기량(器量)을 타고나서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고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았다. 7, 8세 때 마침 집안에 존장(尊長)이 없어서 조모 성씨(成氏) 부인이 여러 손자들에게 가묘(家廟)의 참례(參禮)를 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참신(參神)이 끝나자마자 여러 아이들이 갑자기 떼를 지어 웃어 댔지만 부군은 혼자 단정히 두 손을 마주 잡고 용모를 바르게 한 채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성씨 부인이 이를 보고 팔송공(八松公 윤황(尹煌))에게 고하기를,
“이 아이는 특별한 아이입니다.”
하였다.
정축년(1637) 1월에 병화(兵禍)를 피해 강도에 있었는데, 성이 함락되자 이씨(李氏) 부인이 순절(殉節)하였다. 부군이 자씨(姊氏)와 함께 여종을 데리고 직접 관렴(棺殮)을 살피고 손수 수의(壽衣)를 정제하여 살고 있던 집의 대청 아래에 가매장하고, 흙을 모아 수북하게 덮고 돌 여덟 개를 사방 모퉁이에 묻고 가운데 숯을 뿌려서 표시하였다. 그런 뒤에 곡하며 작별을 고하고 떠났으니, 차분히 대처한 것이 성인과도 같았다. 이때 부군은 9세였고 자씨는 10세였다.
그러고는 모두 오랑캐에게 함락되었는데, 부군이 초혼(招魂)한 모시 적삼을 등에 지고서 한 달이 되도록 끝내 잃어버리지 않아 그것으로 혼백(魂帛) 세우는 예(禮)를 행하였다. 어지러운 적진(敵陣)으로 들어가게 되자 족보를 적은 작은 첩자(帖子)를 꺼내어 자씨에게 주면서,
“누이는 여자이니, 불행하게 서로 헤어지게 되면 이걸로 징표를 삼도록 하오.”
하였다. 뒤에 과연 서로 헤어지게 되어 자씨가 매번 우리나라 사람에게 보첩(譜帖)을 펼쳐 보이며 하소연하니, 마침내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속환(贖還)되었다. 부군은 어린 나이에도 이렇게 효성이 극진하고 사려가 범상치 않았다.
난리가 끝난 뒤에 조정에서 척화(斥和)를 주장했던 사람들의 죄를 소급하여 다스려 팔송공이 영동(永同)으로 유배되었으므로 부군도 따라가게 되었다. 나이가 어려서 빈소 곁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소리 내어 통곡하였다. 팔송공이 타이르기를,
“어른 옆에서는 슬픔을 다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하니, 그 뒤로는 단지 초하루와 보름에만 슬피 곡하고, 아침저녁으로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3년을 마쳤다. 기년(期年)이 지나도 소식(素食)을 하고, 어른이 고기를 권하면
“자식의 정사(情事)는 남들과 다른데 고기를 어찌 차마 먹겠습니까.”
라며 눈물을 주루룩 흘렸으므로 어른들도 끝내 강권하지 못하였다.
부군은 학업을 일찍 시작하여 가르치고 독려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겨우 10여 세 때 이미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외우고 제자(諸子)와 사서(史書)를 섭렵하였다. 어렸을 때 〈거미를 읊다[詠蜘蟵]〉라는 시를 짓기를,
거미가 매달려서 거미줄 치니 / 蜘蟵結網罟
가로지른 다음엔 위로 아래로 / 橫截下與上
잠자리야 너에게 부탁하노니 / 爲語蜻蜓子
조심하여 처마 밑엔 가지 말거라 / 愼勿簷前向
하였는데, 포저(浦渚) 조공(趙公 조익(趙翼))이 듣고 기특해하며 이르기를,
“이 아이는 그 뜻을 채워 나가면 인(仁)을 미처 다 쓰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임오년(1642, 인조20)에 문경공(文敬公 윤선거(尹宣擧))이 호남(湖南)의 금산(錦山)에 정착했는데, 시남(市南) 유 선생(兪先生 유계(兪棨))도 가족들을 이끌고 이사 와서 한집에서 함께 지내며 도의(道義)를 강론하였으므로 부군이 시남에게 수업하였다. 시남이 일찍이 기화(氣化)와 인사(人事)를 책제(策題)로 삼아 제생(諸生)에게 과제를 내주었는데, 부군의 대책(對策)을 보고 말하기를,
“양한(兩漢)의 문장이요 정주(程朱)의 의논이다.”
하였다. 부형과 사우들이 간혹 과거에 응시하기를 권하기도 했으나, 부군은 지극한 슬픔이 가슴에 있었기 때문에 ‘이미 유자우(劉子羽)만 한 재주와 도량이 없을 바에는 차라리 병산(屛山)이 뜻을 지켰던 것을 배우는 편이 낫다.’고 여겨, 마침내 박사 가업(博士家業)을 사양하고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정해년(1647, 인조25)에 탄옹(炭翁) 권 선생(權先生 권시(權諰))의 사위가 되어 왕래하며 학업을 묻고 인하여 스승으로 섬겼다. 일찍이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金先生 김집(金集))에게 《주자서(朱子書)》를 물었는데, 선생이 이르기를,
“우리들 중에서 영보(英甫 송시열(宋時烈))가 이 책을 가장 많이 읽었으니 군은 그리로 가서 묻는 것이 좋겠다.”
하였고, 문경공도 그렇게 명하였다. 정유년(1657, 효종8)에 드디어 회천(懷川)에게 가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강(講)하고, 또한 스승으로 섬겼다.
대개 부군은 가르침에 설복되고 보고 감화받은 것이 가정에서 혼정신성(昏定晨省)할 때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여러 어른들의 문하에서 학문을 성취한 것이 또한 회옹(晦翁)이 호헌(胡憲), 이동(李侗), 유면지(劉勉之), 유자휘(劉子翬)에게 가서 배우고 주숙(朱塾)이 동래(東萊)에게 나아가 배운 것과 같았다.
효종 무술년(1658, 효종9)에 학행(學行)의 선비를 천거하라는 명이 내리자 여러 재신(宰臣)들이 부군을 번갈아 천거하였다. 그리하여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연이어 의망(擬望)되었는데, 문경공이 나이가 아직 젊은데 이름이 너무 빨리 알려지는 것을 깊이 우려하여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시남 등 여러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류하였다. 이로부터 부군의 명망과 실덕(實德)이 점차 높아졌다.
현종 계묘년(1663, 현종4)에 이르러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연명으로 상소하여 함께 천거하였고, 시남도 온공(溫公)이 유기지(劉器之)를 천거한 고사를 본떠서 부군을 천거하는 것으로 명에 응하였다. 갑진년(1664)에 처음으로 내시 교관(內侍敎官)을 제수하고 을사년(1665)에 공조 좌랑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무신년(1668)에 두 차례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직 정장(呈狀)을 올려 체차되었다.
기유년(1669) 봄에 별유(別諭)로 징소하자 부군이 상소하여 정세(情勢)를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지난 정축년(1637, 인조15) 난리에 신의 어미가 강도(江都)에서 죽었습니다. 신은, 자식이 불효하여 비명에 어미를 잃고서도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한 채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며 남들처럼 말하고 웃고 먹고 옷을 입는 것을 스스로 통탄스럽게 생각합니다. 매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것만 같습니다.
옛날에 송나라 유겹(劉韐)이 정강(靖康)의 난에 죽자 그 아들 자휘(子翬)가 무덤 아래에서 은거하며 병을 이유로 종신토록 세상에 나가지 않았으니, 고인이 변란을 만났을 때 어떻게 자처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신은 이에 사환(仕宦)의 뜻을 버리고 시골에서 칩거하며 평생을 보내겠다고 스스로 맹세하였습니다.
오직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은 황천(皇天)이 우리 성주(聖主)를 보우하시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 대업(大業)을 크게 일으켜 사해(四海)에 아름다운 명성을 널리 떨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필부(匹夫)의 가슴에 사무친 사사로운 슬픔도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니, 그날 바로 죽는다 하더라도 지하에서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처럼 처신한 탓으로 소문이 과장되어 안으로는 허명(虛名)을 훔쳤다는 수치를 안고 밖으로는 인륜을 어지럽히는 전철을 밟게 되었습니다.
아! 만약 신이 실제로 재주와 학식이 있어서 사령(使令)을 맡을 만하다면 국가에 충성하고 집안에서 효도하는 것은 본래 두 가지 일이 아니니, 벼슬길에 나가 밝은 조정에 몸을 바치고 일마다 힘을 다함으로써 위로 성상의 큰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 남모르는 원통함을 푸는 것이 어찌 또한 신자(臣子)의 분수 밖의 일이겠습니까. 고인 중에서도 이를 행한 사람이 있으니, 자휘(子翬)의 형 자우(子羽) 부자가 이런 경우입니다.
신은 그렇지 않아서 타고난 기질이 이미 남만 못한 데다 변화하려는 노력마저 하지 않아 인순하는 것이 습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구나 경술(經術)을 밝게 익혀 제왕(帝王)의 학문에 도움을 주고 세무(世務)에 환히 통달하여 국가의 일에 보탬이 되는 것을 어떻게 바라겠습니까. 지금 만약 스스로의 역량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단지 은총과 영광에 감격하여 마침내 원통함을 머금고 슬픔을 참고자 했던 초심(初心)을 바꾸어 단지 갓끈을 드날리고 인끈을 묶고서 벼슬살이하는 데로 귀결되게 할 뿐이라면, 조정에 나아가서는 이루는 바가 없고 물러나서는 지키는 바가 없어서 참으로 유씨(劉氏)의 죄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3월에 상이 온천에 행행(行幸)하여 또 거듭 유시하여 징소하였으나 정장하여 사양하였다.
4월에 문경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제(喪制)를 모두 문공(文公 주희(朱熹))의 《가례(家禮)》에 따라 행하였다. 교하(交河)에 장사 지내고 집으로 반곡(反哭)한 뒤 계씨(季氏) 농와공(農窩公 윤추(尹推))과 번갈아 가며 가서 시묘(侍墓)하기를 3년 동안 하였는데, 시묘할 때는 매일 새벽과 저녁마다 묘소에 올라가서 절하고 곡하여 슬픔을 다하였다. 이때 경기와 서울의 선비들이 많이 찾아와서 학업을 청하였는데, 부군이 주자(朱子)가 한천(寒泉)에서 시묘하던 때의 고사에 의거하여 때로 혹 강의하였다.
신해년(1671, 현종12) 여름에 삼년상을 마쳤다. 이에 앞서 문경공과 동토공(童土公)이 범씨(范氏)의 의장(義庄)여씨(呂氏)의 독법(讀法)을 본떠서 종약(宗約)을 세우고 종회(宗會)를 만들고는 한집안의 장유(長幼)를 인솔하여 학업을 익히게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부군이 ‘선친께서 별세한 지금은 종인(宗人)들을 훈도하고 이끌어서 인재로 양성하는 것이 평소 지니셨던 뜻을 계승하는 큰일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종인들을 모아 학규(學規)를 거듭 밝히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몸소 강(講)을 받고 과제를 내주어 인재를 배양하였다.
이해 여름부터 갑인년(1674) 여름까지 세자시강원 진선에 네 번, 장령에 한 번, 집의에 네 번 제수하였는데, 모두 상소와 정장으로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가을에 숙종이 즉위하여 두 차례 집의로 징소하였는데, 을묘년(1675, 숙종1) 1월에 상소하여 사직하고, 개인적으로 슬픔을 품고 통한을 숨긴 채 평생 숨어 지내고자 하는 뜻을 거듭 아뢰었다.
병진년(1676, 숙종2)에 유봉(酉峯)에 집을 짓고, 무오년(1678)에 공주(公州)의 청림(靑林)으로 이사하였다. 기미년(1679)에는 홍주(洪州)의 용계(龍溪)에 산수의 정취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이사하였는데, 원근에서 배우려고 찾아온 자들이 많았다. 마침내 서실(書室)을 짓고 경승재(敬勝齋)라고 이름을 붙인 뒤 학규를 만들어 가르쳤다.
경신년(1680)에 유봉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이해 여름에 조정이 일신(一新)되었다. 대신(大臣)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등이 상에게 아뢰기를,
“윤 모(尹某)는 본래부터 가학(家學)이 있고 성실히 실천하여 크게 사론(士論)의 추중(推重)을 받고 있으니, 조정으로 초치하여 연석(筵席)에 출입하게 하소서.”
하자, 마침내 두 차례 별유로 징소하였다. 이로부터 몇 해 동안 누차 집의, 사업(司業)을 제수하고, 또 누차 거듭 징소하는 유시를 내렸는데, 모두 상소와 정장으로 사양하였다.
신유년(1681) 여름에 두 차례 지진으로 구언(求言)하는 교지를 내렸는데, 부군이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그 대략에,
“아! 지금은 실로 말세(末世)여서 위망(危亡)의 상(象)을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모두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주(人主)는 명(命)을 개척할 수 있는 법이니, 전화위복의 기틀이 어찌 인주의 한 마음에서 벗어나겠습니까. 실심(實心)을 가지고 실공(實功)에 힘써서 쇠약한 나라를 부흥하고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아 재앙을 상서(祥瑞)로 돌림으로써 하늘에 빌어 명을 영원히 하는 것은 오직 전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술년(1682) 가을에 또 재이(災異)로 인하여 별유로 징소하였는데, 부군이 사양하는 상소에 덧붙여 아뢰기를,
“아! 세도(世道)의 도도함이 물이 날마다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습니다. 비록 변이(變異)가 없더라도 이미 한심스러워할 만한데, 인사(人事)와 천시(天時)가 서로 재촉하듯 하여 대소(大小)가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니, 마지막에 가서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위로 하늘에 핑계 대고 아래로 사람에게 핑계 대며 태만하게 세월을 허송하고 말아서는 안 될 것이니, 또한 오직 군신 상하가 함께 정신을 차려 반드시 한마음의 정성이 하늘에 통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이른바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책과 전화위복으로 삼는 방도를 착수할 곳이 있어 참된 공력이 확립되고 실질적인 효과가 나타날 것이요, 구구한 형식과 말단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바가 아닙니다. 천하의 일은 인주의 한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이러한 일을 어찌 다른 데서 구하겠습니까. 오직 성상의 입지(立志)가 어떠한지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때 대신이 또 선생의 덕망과 학문을 천거하며 특별히 발탁하기를 청하자 7월에 특별히 호조 참의로 올려 제수하였다.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처음에는 은거해야 할 사사로운 정리 때문에 실로 평생 산골에서 지낼 계획을 세웠고, 마지막에는 용렬하고 비루한 천품(賤品)으로 인하여 감히 분수에 넘치는 직위를 받들 수 없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융통성 없게 고집을 부리며 50년을 살았으니, 조정의 관점에서는 이른바 시험해 보지 않은 신하입니다. 옛날의 제왕은 반드시 정사를 아뢰게 해서 훌륭하면 받아들이고 밝게 시험하기를 공(功)으로써 하여 그 실질을 환히 알게 된 뒤에야 들어서 관작을 제수하였습니다. 어찌 깊은 골짝에서 나오지 않았는데도 단숨에 대부(大夫)의 높은 반열에 이르게 한 자가 있었습니까.”
하였다. 또 누차 상소하여 면직(免職)을 청하였으나 모두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현석(玄石) 박공(朴公 박세채(朴世采))이 이미 명에 응하여 입조(入朝)해서는 부군을 초치하여 나랏일을 함께하기를 청하였고, 부제학 조공 지겸(趙公持謙)도 정성을 다해 반드시 초치해야 한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상이 이에 특별히 체직을 허락하고 별유로 돈소(敦召)하였으나 부군이 사양하였다. 이때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는데, 부군이 노강서원(魯岡書院) 원재(院齋)에 거처하면서 왕래하며 강학(講學)하였다. 초하루와 보름에는 또 고을의 우수한 자제들을 모아 과송(課誦)하여 진작하고 권면하는 방도로 삼았다.
계해년(1683, 숙종9) 봄에 상이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독한 예로 거듭 징소하고 데리고 오도록 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은수(恩數)였다. 사관이 세 차례 이르렀는데 성상의 유시가 갈수록 더욱 간곡하고 지극하였으니,
“전후로 징소할 때마다 절박한 사정을 나오기 어려운 첫 번째 이유로 들었는데, 이것은 절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아! 지금이 어떠한 때인가. 국가의 형세가 위태롭고 재이(災異)가 거듭 나타나서 상하가 근심하고 허둥대느라 편안히 먹고 자지도 못한다. 이러한 때에 그대가 세록(世祿)의 인사(人士)로서 한 가지 절개만을 지키며 향촌으로 물러가 누웠으니, 나랏일을 어찌 그리도 줄곧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것인가.”
라는 내용이 있었다. 부군이 힘껏 사양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세신(世臣)의 의리는 뒷담을 뚫고 달아나거나 담장을 넘어 도망가는 부류와는 다르고, 편안히 집에서 지내며 은례(恩禮)를 헛되이 받는 것도 감히 하지 못할 바이다.”
라고 하고, 4월에 자진하여 교외로 나아가 상소하여 대죄(待罪)하였다. 상이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선유(宣諭)하고 데리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는데, 부주(附奏)하여 사양하기를,
“신이 이번에 올라온 것은 감히 외람되이 은혜로운 징소를 받아들이고자 함이 아닙니다. 단지 집에서 편안하게 지내며 줄곧 버티는 것이 신하 된 마음에 너무도 근심스럽고 황송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아와서 대죄한 것이요, 감히 서울 가까이 이르렀다고 해서 태도를 바꾼 것이 아닙니다.
아! 선비라고 해서 모두 같지는 않고 국가에서 대우하는 방법도 한 가지만이 아닙니다. 정자(程子)의 《역전(易傳)》 이래로 이미 그 단계를 몇 층으로 나누어 설명함으로써 선비 된 자로 하여금 법 삼는 바가 있게 하였고, 윗사람 또한 이를 인하여 선비에게 베푸는 예를 그에 맞게 하였으니, 획일적으로 걸맞지 않은 은수를 가하여 위에서는 거조를 그르치고 아랫사람은 분의를 잃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신은 이미 나가서 군주를 섬길 만한 재주와 학식이 없는데, 밖으로는 위명(威命)에 쫓기고 안으로는 본심을 잃어 중도에 뜻을 꺾고 진퇴(進退)에 근거함이 없어 거듭 사방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면,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성조(聖朝)에 수치와 욕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온화한 비답으로 돈독히 유시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 그대가 산림에서 덕을 쌓아 온 선비로서 이렇게 어려움이 많은 때에 오랫동안 초야에 숨어 지내며 줄곧 나랏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 과인이 서운해하고 사림이 실망한 지가 본디 오래이다. 얼마 전 부지런하고 간곡한 별유를 내렸고, 또 시세의 위태로움을 염려하는 정성이 있은 덕분에 척연히 생각을 바꾸어 상경하였으니, 내 마음이 기쁘고 다행스러울 뿐만 아니라 당면한 나랏일 또한 가망이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서계(書啓)를 보니 겸양하는 말이 더욱 간절해졌고, 이어서 또 귀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것은 모두 평소 나의 성신(誠信)이 미덥지 못했던 데서 비롯된 일이니 단지 스스로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오를 뿐이지만, 유독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함께 해 나가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이때에 그대를 기다리는 심정은 큰 가뭄에 비를 고대하는 것에 비길 정도가 아니다.”
하고, 연이어 근시를 보내어 입대(入對)하라고 독촉하였다. 이에 부군은 ‘이번에 한번 움직인 것은 본래 분의(分義)가 곤궁하므로 나아와 대죄하려 함이었는데, 근기(近畿)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무한한 은례를 입게 되었으니, 더욱이 하루라도 감히 지체하여 머무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상소를 남겨 놓고 물러나 귀향길에 올랐다. 상소의 대략에,
“이번에 신은 감히 소명(召命)을 받들기 위해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대죄하기 위해서 올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조(聖朝)에서 관대하게 용서하고 죄를 주지 않으셨으니, 신의 분의로는 마땅히 쓸모없는 몸을 거두어서 속히 시골집으로 돌아가 성상의 은택에 무젖은 채 전야(田野)에서 분의를 다해야 할 뿐입니다.
근시를 보내 데리고 오도록 하는 예(例)에 대해서는 신이 근일의 상소에서 대략 그 단서를 드러내었습니다. 무릇 윗사람에게는 징소하는 예(禮)가 있지만 아랫사람에게는 진퇴(進退)의 의리가 있습니다. 의리가 만약 나아갈 만하다면 어찌 지키고자 하는데도 위에서 놔두지 않은 뒤에야 나아가겠습니까. 신처럼 미천한 자는 본디 말할 것이 못 되지만, 만약 절대로 나아가기 어려운 입장에 있는 선비에게조차 다시 그 의리의 가부(可否)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얽매어 초치하기만을 급하게 여긴다면, 윗사람은 속박하여 달려 나오게 하는 혐의가 있고 아랫사람은 끌리고 쫓겨서 허둥대는 근심이 있을 것이니, 예가 있고 의리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선비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으니, 세상에 나가는 것과 은거하는 것 두 가지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신의 미혹한 견해로는 이미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이상 물러나는 길밖에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승지가 아뢰자 상이 뒤쫓아 가서 데리고 돌아오라고 명하고, 특별 유시로 거듭 더욱 간곡하게 징소하였다.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이 귀한 법인데, 나의 정성과 예가 독실하지 못하여 마침내 초치한 유신으로 하여금 상소를 남겨 놓고 곧장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 어찌 내 마음이 서운하고 부끄러울 뿐이겠는가. 실로 국가와 사림의 불행이기도 하다.”
하였다. 부군이 감히 대번에 돌아가지 못하여 마침내 수원(水原)에 머물러 처분을 기다렸다. 승지가 또 두 차례 성상의 유시를 전하였는데, 돈독히 권면하기를 마지않는 내용이었다. 부군이 또 부주하여 간곡히 사양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계속해서 억지로 다그치는 것도 예우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 승지를 소환하였으므로 부군이 마침내 남쪽으로 돌아왔다.
이 행차 때 상이 자리를 비워 놓고 기다렸으니, 융숭한 예(禮)와 특별한 은수(恩數)가 근년에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정의 여러 공들이 모두
“한번 사은숙배(謝恩肅拜)하는 것은 분의로나 도리로나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하였고, 평소 친애한 사이로 불리던 사람들도 다 너무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지만 부군의 뜻은 확고하였다. 현석(玄石) 박공(朴公)도 찾아와서 조정에 나가 함께 나랏일을 도모하기를 힘껏 권하였는데, 부군이 개인적인 정세 외에 또 나갈 수 없는 의리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우리들이 지금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나간다면 정치를 제대로 해야 할 것이네. 만약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우암(尤庵)의 세도(世道)를 변화시키지 않아서는 안 되고,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원한 관계를 풀지 않아서는 안 되고, 삼척(三戚)의 문호(門戶)를 닫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인데, 우리들의 역량으로 이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것도 하지 못하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속으로는 절대로 하지 못할 줄을 알면서 무턱대고 나가는 것을 나는 할 수가 없네.”
하니, 현석이 끝내 강요하지 못하였다. 부군이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화숙(和叔 박세채(朴世采))이 기미를 보지 못하는 걸로 봐서 조정에 오래 있지 못할 듯하다.”
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곧 이어서 이조 참의를 제수하였는데, 누차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에 특별히 한성부 우윤으로 올려 제수하였는데, 네 번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갑자년(1684, 숙종10) 봄에 사헌부 대사헌을 제수하였는데 또 세 차례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여름에 최신(崔愼)이라는 자의 상소가 있었는데, 부군의 사서(私書)를 끄집어내어 송상 시열(宋相時烈)을 위해 변무한다는 명목으로 부군이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헐뜯고, 문경공(文敬公)까지 침범하여 헐뜯기에 이르렀다. 현석이 상소하여 그 터무니없는 무함을 논하니, 상신(相臣) 김수항, 민정중(閔鼎重) 등이 아뢰기를,
“윤 모가 사감(私憾)으로 송시열을 헐뜯었으니, 다시는 유현(儒賢)을 대우하는 예로 대우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이로부터 시의(時議)가 시끄럽게 일어나, 위로는 대신(大臣)과 삼사(三司)로부터 아래로 향곡(鄕曲)의 어리석은 유생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뜻을 받들고 눈치를 살펴 무리 지어 비난하고 헐뜯었다. 부군은 한결같이 변론하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것을 의리로 삼고, 매번 문경공의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은 몸으로 비록 보답은 하지 못할지언정 어찌 차마 편론(偏論)을 만들어 거듭 만세의 죄책(罪責)을 입겠는가.”라는 말을 외며 친구와 문인들을 가르치고 경계하였다.
처음에 부군이 송상을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을 때 문경공이 가르치기를,
“우옹(尤翁)은 특출한 점에 있어서는 따라가기 어려운 사람이다. 너는 그의 좋은 점을 스승 삼되 병통 또한 몰라서는 안 된다.”
하고, 또 이르기를,
“우옹은 선(善)을 수용하는 도량이 넓지 못하니, 너는 모쪼록 《주자서(朱子書)》를 가지고 일마다 절차탁마(切磋琢磨)하기를 옛사람이 삼백편(三百篇)으로써 간(諫)했던 것처럼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매번 송상이 선(善)을 수용하지 못하고 사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기질의 병통으로 여겼다. 그러다가 송상이 조정에 나가 세도(世道)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사의(私意)를 주장하여 국론(國論)이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누차 편지를 보내 진정으로 충고하고 경계하였고, 송상이 윤휴(尹鑴)와 예송(禮訟)으로 원수가 되었을 때는 또 너무 심하게 하면 안 된다는 것으로 거듭 경계하였다. 송상이 이를 자못 언짢게 여겨 번번이 자신에게 다른 마음을 가진 것으로 의심하였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재차 조정에 들어갔을 때 다시 한 통의 편지로 충고하고자 말을 무척 절실하고 지극하게 하였으나, 곧바로 송상이 서울을 떠나게 되었으므로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문경공이 별세하였다.
계축년(1673)에 이르러 부군이 연보(年譜) 및 현석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가서 송상에게 묘갈명을 청하고, 기유년에 쓴 편지를 아울러 보여 문경공의 간절한 유의(遺意)를 매듭짓고자 하였다. 송상이 행장과 연보에 도학(道學)의 연원을 일컬어 진술한 말과 전후에 충고한 말들이 실린 것을 보고서 이미 시기하고 성내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한 데다 기유년의 편지가 이를 더욱 격발하였다. 마침내 현석에게 편지를 보내어 강도(江都)의 일윤휴의 일을 가지고 뒤늦게 문경공을 억압하기를 마지않았다. 대개 문경공이 일생 동안 강도의 일을 스스로 허물하였으나 송상은 “허물 삼을 만한 의리가 없다.”라고 하였고, 또 처신을 바르게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윤휴를 배척하고 버렸었는데 송상도 서로 절교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갑자기 두 가지 일을 가지고 흠집을 내고 욕하는 자료로 삼고, 마지막에는
“죽어야 하는데도 죽지 않았고, 절교했다고 말만 하고 절교하지 않았네.”
하였으니, 나중의 수천, 수백 가지 기괴한 말들이 모두 이로부터 나왔다.
급기야 묘갈문이 완성되었는데, 그 내용이 현석의 행장을 칭탁하여 글을 엮어 조롱하고 따돌리는 것이었다. 부군이
“전편(全篇)의 주제가 이미 도의(道義)로써 기대하고 권면하는 뜻에 어긋나고, 또 붕우 사이에 애도하고 상심하는 정의(情誼)가 없습니다.”
라고 하며 편지를 보내 고쳐 주기를 청하였으니, 대개 덕을 형용한 것이 실제와 맞고 일을 말한 것이 사실에 근거하기만을 바란 것이었다. 송상은 혹은 고쳐 주겠다고 해 놓고 고치지 않기도 하고, 혹은 비꼬는 말로 조롱하고 헐뜯기도 하여, 억양하고 조종하며 계획적으로 흠집을 내려 하는 것이 거의 상정(常情)이 아니었다. 부군은 이를 계기로 기질의 문제로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로소 본원적인 병통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귀양지로 방문하게 되었을 때는 송상이 또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가 예설(禮說)을 바꾸어서 목숨을 구하려 했다고 말하였는데, 부군이 돌아가서 그 글을 보니 본래 예설을 바꾼 것이 아니었고, 또 그 예설이 송상이 직접 수정해 준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매우 의아하게 여겨 누차 편지로 질의하고 충고하였는데, 송상의 대답하는 말이 매우 장황하고 앞뒤가 어긋났다. 이로부터 본원에 대한 의심이 더욱 깊어져서 한 번 충고하는 글을 올리고자 하였으나, 바야흐로 곤액(困厄)을 당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헐뜯는 말의 빌미가 될까 염려하여 드러내지 못하였고, 간간이 경계하는 말을 하더라도 깊게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6)에 이르러서 송상이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조정으로 들어갔는데, 출처(出處)에 의리가 없고 언론과 하는 일이 또 대부분 사류(士類)를 만족시키지 못하여 평생 수립한 업적과 명망을 모조리 잃고 말았다. 선생이 더욱 상심하여 수백 글자에 달하는 편지를 엮어 기유년(1669, 현종10) 편지의 대지(大旨)를 거듭 말하였는데, ‘왕패병용 의리쌍행(王覇竝用義利雙行)’으로 강(綱)을 삼고 행기(行己)ㆍ접물(接物)ㆍ부험(符驗)ㆍ사공(事功)으로 목(目)을 삼되, 기질을 변화하지 못하고 학문이 진실하지 못한 것을 근본 원인으로 들었으며, 마지막에는 위 무공(衛武公)이 억계(抑戒)를 지어 자신을 경계했던 일한 무제(漢武帝)가 윤대(輪臺)와 관련하여 후회하는 조서(詔書)를 내렸던 일을 들어 권면하였다.
대개 기질의 문제로 보았던 평가가 심술에 대한 의심으로 변하였으나, 부자(父子) 양대(兩代)에 걸친 사우(師友)의 정의로서 끝내 침묵하고 있을 수 없어 비간(比干)이 한번 충언을 올리고 죽었던 일을 본받아 분명히 말하고 통절히 설파하여 본질적인 문제점을 다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척연히 뉘우치고 고쳐서 만절(晩節)을 수습하기를 바라서였고, 불행하게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차라리 옛사람이 문을 닫아걸고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던 의리를 본받고자 하였으니, ‘나를 알아주거나 나에게 죄를 주는 것이 거의 여기에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었다. 이는 세도(世道)를 위하고 국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문경공이 평소 보였던 정성을 마무리 짓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편지를 이미 완성하였으나 현석이 세도에 누가 될까 염려된다며 보내지 못하게 말렸는데, 부군은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여 사람을 통해서 편지의 대의(大意)를 먼저 전하게 하였다. 송상이 듣고서 크게 성을 내니, 이로 인하여 사설(辭說)이 분분하였다. 현석이 그 내막을 물어 왔으므로 부군이 답서를 보냈는데,
“왕패병용 의리쌍행(王覇竝用義利雙行)은 《대학》의 성의(誠意)ㆍ정심(正心) 학문과 같지 않으니, 동춘(同春)이 이른 바 ‘모두가 기관이다.[都是機關]’는 말과 초려(草廬)가 이른 바 ‘오로지 권모술수만 쓴다.[專用權數]’는 말이 바로 함장(函丈)의 실제 병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내가 한번 의심나는 바를 질정하여 함장에게 말씀드리고자 한 것이 바로 이 말이었습니다.”
라는 말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 편지가 송상의 손에 들어가면서 최신(崔愼)의 상소가 마침내 나왔는데, 묘갈명의 내용에 유감이 있어서 그런다는 주장이었다. 이때 송상이 다른 사람의 말을 악의적으로 인용하여 문경공을 추하게 욕한 것이 또 한두 가지 일에 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부군이 진작 관계를 끊고 배척하지 않는 것을 사우들이 모두 의심하였으나, 부군은 오히려 차마 과감하게 끊지 못하고 다시 편지로 변론하고 질의하며 혹시라도 깨우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저쪽에서 말을 더욱 패만하게 하여 양친(兩親)까지 모욕함으로써 끝내 절교를 자처하였던 것이다.
대개 스승은 도(道)가 있는 바이므로 장차 스승을 통해 의심나는 점을 묻고 의혹을 밝히고자 하는데, 부군과 송상은 도가 이미 다르고 정(情)이 이미 괴리되어 의심이 나도 묻지 못하고 의혹이 있어도 해명하지 못하였으니, 예로부터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러한 의리는 없었다. 끝내는 그 심술의 간특함을 더욱 간파하게 되었고 또 망극한 무함을 입었으므로 사제 관계를 한결같이 유지하는 것으로는 자신의 도를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군의 마음가짐은 ‘불행하게 사생(師生)의 변고를 만났으니 묵묵히 자신의 도리를 다해야 할 뿐이다.’는 것이었으며, 지성으로 안타까워하고 불쌍히 여기는 뜻을 항상 가슴에 담고서 후세에 구실거리가 될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이해 겨울에 송상의 무리가 또 부군이 율곡(栗谷)을 무함했다고 하면서 중대한 사안에 의탁하여 모함하였다. 대개 부군이 일찍이 명촌(明村) 나공(羅公 나양좌(羅良佐))에게 보낸 편지에서 율곡이 초년(初年)에 불문(佛門)에 귀의했던 사실을 인용하여 문경공이 강도(江都)의 일로 비방을 입은 것이 그와 유사함을 밝혔는데, 이 과정에서 “입산한 잘못이 있다.”고 한 한마디 말을 이때 와서 자구(字句)를 끼워 맞추어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든 것이었다. 이로 인해 상소가 분분하게 이르렀으나, 상은
“개인적인 편지를 들추어내어 선현을 무함했다는 죄를 덮어씌우려 한다.”
라고 하며 배척하였다. 정묘년(1687, 숙종13)에 이르러 송상이 또 직접 상소하여 문경공을 무함하여 욕하되 하지 않는 말이 없었으니, 여기에 이르러서 어떤 의도하에 나온 행동인지가 더욱 여지없이 드러났으므로 사류들이 모두 놀라고 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명촌의 변무 상소가 나왔다.
무진년(1688)에 만암(晩庵) 이공 상진(李公尙眞)이 연석에서 부군의 심사(心事)를 아뢰어 스승을 배반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또 차자(箚子)를 올려 예우하기를 청하였다. 기사년(1689) 2월에 상이 부군을 처음과 같이 예대(禮待)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경오년(1690)에 이르러 대사헌을 제수하였으니, 이것은 접때의 사람들이 부군이 윤휴를 감싸고 율곡을 무함하여 욕보였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권력을 잡은 자들이 이를 끌어다 윤휴를 신구(伸救)하고 율곡과 우계를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하는 증거로 삼고, 또 관직과 품계를 회복시켜 고의적으로 모욕하고 멸시하려 한 것이었다. 부군이 마침내 상소하여 스스로 논핵하였는데, 그 대략에,
“어리석은 신은 어려서부터 이이와 성혼의 글을 외우고 익혔고, 성현이 전수한 학문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여 평생 연마하고 흠앙할 대상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두 공(公)이 사람들에게 무함을 입어 문묘의 종향(從享) 반열에서 내쳐지고 말았으니, 이는 연원이 끊어진 것이고 근본이 뽑힌 것입니다. 그러니 신의 종적이 어찌 다시 당세에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신의 갑자년(1684, 숙종10) 이후 일은 실로 두 가지 죄를 진 것입니다. 신은 송시열을 젊어서부터 스승으로 섬겼는데, 불행하게도 정의(情義)를 끝까지 보전하지 못하고 마침내 서찰에 관련된 일로 뜻밖에 시끄러운 단서를 만들어 수년간의 분란을 초래하였습니다. 신이 망언(妄言)으로 죄를 자초하고 모욕이 부모에게까지 미친 것에 대해서는 말할 겨를조차 없지만, 성명(聖明)께서 매번 조정의 논의가 분열되고 갈라지는 것을 근심하고 탄식하셨고, 끝내는 두 신하의 출향을 윤허하는 비답에서도 이 일을 언급하시어 두 신하에게 죄를 돌리는 듯이 하셨습니다. 이것은 수년 동안 조정을 시끄럽게 하고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괴리되게 하여 끝내는 위로 성상의 하교에 흠이 있게 하고 뒤미처 전현(前賢)에게 누를 끼친 것이니, 곰곰이 그 허물을 생각해 보면 모두가 신으로 인해서 비롯된 일입니다. 이것이 신의 한 가지 죄입니다.
윤휴 역시 선신(先臣)이 일찍이 친하게 지냈던 자인데, 예송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선신은 이미 그의 잘못된 처신을 배척했으나 충고해도 따르지 않았으므로 끝내 서로 절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에 드러난 그의 무상(無狀)함에 대해서는 더욱 다시 논할 것이 없는데, 접때 한 무리의 상소에서 매번 천신(賤臣)이 윤휴를 비호하였다고 하였으니, 그들이 억지로 끌어다 붙인 주장에는 없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간에 연신(筵臣)이 윤휴를 신구하면서 드디어 신을 거론하여 증거로 삼았으니, 비록 전에는 죄를 주려고 했고 뒤에는 끌어대어 이용하고자 한 것이지만 그것이 신의 실정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전에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숨을 죽인 채 죄를 기다렸고, 뒤에는 또 감히 주제넘게 글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본심을 드러내지 못한 채 그대로 침묵을 지킴으로써 바르지 못한 사람을 보증한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신의 두 번째 죄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박태보(朴泰輔)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후로는 놀라움에 넋이 나가 살고자 하는 의욕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박태보는 신의 생질입니다. 당초에 비통한 나머지 성상을 향한 간절한 정성으로도 북받치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성명의 세상에 이런 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초야에 묻혀 있는 하찮은 몸이 감히 주제넘게 나설 수 없어 한마디 말씀을 올려 충성을 조금이나마 바치지도 못했으니, 신하 된 직분이 어그러지고 사람의 윤리가 끊어졌습니다.”
하였으니, 이에 앞서 기사년(1689, 숙종15) 4월에 중궁(中宮)이 폐위되었을 적에 박공(朴公)이 간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상소 말미에 언급하여 충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하교하기를,
“상소 중의 말뜻이 바르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한 태도가 많으니, 매우 놀랍다. 상소를 도로 내주라.”
하였다. 이어 집의 김일기(金一夔) 등이 아뢰어 관작을 삭탈하였다.
갑술년(1694) 여름에 곤의(坤儀)가 다시 바르게 되자 상이 특별 서용을 명하고 즉시 이조 참판을 제수하였다. 부군이 누차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식견이 어둡고 처신이 형편없어 초야에서 은거하는 몸으로 세도에 해를 끼쳤으니, 스스로 지은 죄가 죽음으로도 속죄할 수 없습니다. 신은 실로 주제넘게 감히 자세히 아뢰지 못하지만, 성상께서는 그 죄를 이미 속속들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였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이것을 죄로 들며 힘껏 사직하였다. 상이 연석의 하교에서 갑자년(1684, 숙종10)에 경솔히 두 상신(相臣)의 말을 들어준 것을 깊이 뉘우치고, 또 비지(批旨)에서 매우 정성스럽게 마음을 열어 보였다. 그 대략에,
“경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게 사면을 청하니, 지난날의 일로 불안하게 여기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스스로 깊이 뉘우쳐 예전처럼 관직에 임용하고 처음처럼 예대(禮待)하도록 하였으니, 반드시 경을 초치하여 나랏일을 함께 하고자 함은 실로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또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얼굴을 알지 못한다고 하유하고 연이어 사관을 보내어 간곡한 뜻으로 징소하였는데, 부군이 부주(附奏)하여 사양하기를,
“성상의 은총이 이처럼 간곡하니 저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흐릅니다.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 있는데 또한 어찌 한 번만이라도 천안(天顔)을 우러러 뵙고 싶은 지극한 바람이 없겠습니까. 단지 한 번 나가 뵙는 것으로는 큰 은혜에 보답할 수가 없는데, 하잘것없는 정성만 가지고 징소하는 거룩한 예에 답하는 것은 의리상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8월에 또 상소하여 거듭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는데, 성상의 비답이 더욱 간곡하였다. 그 대략에,
“유신(儒臣)을 대우하는 도리는 직사(職事)로써 얽어맬 필요가 없다. 만약 본직(本職)을 해임한다면 송조(宋朝)의 고사를 조금 모방하여 포의(布衣)로서 나와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부군이 또 부주하기를,
“포의로서 나와 만나라는 하교는 또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신은 세록(世祿)의 후예로서 본래 산림의 유일(遺逸)이 아니고, 용렬하고 비루한 미물(微物)로서 또한 고인(古人)과 같은 훌륭한 행실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내세울 것이 있다고 곧장 이렇게 상례(常例)를 크게 뛰어넘고 세상에 드물게 있는 거룩한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선신(先臣)은 효종대왕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입었습니다. 일찍이 선비 복장으로 인견하는 자리에 나오라는 명이 내렸으나 선신이 사양하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는데, 결국은 너그러이 용납해 주시는 성은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불초하고 미천한 신이 또 성조(聖朝)에서 이같은 총명(寵命)을 입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하였다. 이때 현석이 조정에서 편지를 보내기를,
“성상의 비답 가운데 ‘아직 얼굴을 알지 못한다.’는 하교와 ‘포의로 입대(入對)하라.’는 하교는 이전에 직사(職事)로 징소했을 때 오히려 버틸 수 있었던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하고, 상리(常理)와 정법(正法)을 따르도록 권면하였다. 부군이 답서에 이르기를,
“상리와 정법이야말로 바로 유자의 출처이지만, 나의 사사로운 정리는 이미 상리로써 자처하지 못하고, 보잘것없는 분수는 또 함부로 정법을 무릅쓰지 못합니다. 지금 ‘한번 나와서 등대(登對)하여 정세를 아뢰고 사퇴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세상에 어찌 얼굴만 한 번 내미는 출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성상이 반드시 한번 만나고자 하였지만 부군은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을해년(1695, 숙종21) 봄에 시강원 찬선(侍講院贊善)을 제수하고 사관을 보내어 별유(別諭)로 징소하였다. 상소하여 사양하자, 비지에 “포의로 입대하라.”는 명을 다시 거듭하였다. 4월에 또 이조 참판을 제수하였는데, 두 차례 정장하여 거듭 사직하였다. 우의정 신공 익상(申公翼相)이 부군의 평소 뜻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윤 모(尹某)가 끝내 필부(匹夫)의 뜻을 지켜 기꺼이 한 가지 절개를 고집하는 선비가 되려는 것은 그의 자처함이 남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그의 직임을 체차한 뒤 나아가서 조정의 정사를 묻고 관(官)에서 월름(月廩)을 보내 주게 한다면 선비를 대우하는 예절에 거의 부합할 듯합니다.”
하니, 영의정 남공 구만(南公九萬)이 아뢰기를,
“체직하는 것은 혹 예우하는 도리에 혐의가 있을 듯하고, 월름도 필시 받지 않을 것입니다. 상께서 그의 품계를 올리고 가난한 형편을 구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6월에 가서 주급(周急)하라는 명이 내렸는데,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공경히 받아서 족당(族黨)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뒤로도 조정의 하사가 있으면 모두 그렇게 하였다. 이달에 특별히 공조 판서로 옮겨 제수하였는데, 일곱 차례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부군은 사직소를 올리는 경우에, 전후로 내린 관직이 모두 분수 밖의 것이어서 전배(前輩)들이 혹 구함(舊銜)을 써서 새로 제수한 관직을 사양했던 사례처럼 골라서 쓰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단지 조정에서 명한 바에 의거하여 스스로 이름하되 자급(資級)의 규식을 갖추어 쓰지 않음으로써 구구한 뜻을 조금 드러냈었다. 이때에 와서는 반열(班列)이 더욱 높아져서 감히 한결같이 무릅쓰고 쓸 수 없었으므로 단지 재야 선비의 본분을 따라 ‘초망신(草莽臣)’이라고 일컬었다. 10월에 의정부 우참찬으로 옮겨 제수하였는데, 누차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하사한 은전을 사양하였다.
병자년(1696, 숙종22)에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를 겸직하게 하였다. 연신(筵臣)이 부군의 집안 형편이 가난하다고 아뢰자 주급을 명하였는데, 상소하여 하사한 물자를 환수해서 기민(饑民)을 구휼하는 물자에 보태기를 청하였다. 여름에 별유로 징소하였으나 두 차례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정축년(1697) 1월에 사관에게 명하여 전유(傳諭)하고 선소(宣召)하였다. 3월에 이조 판서에 제수하고 또 연달아 거듭 징소 전지를 내렸는데, 부군이 누차 상소와 정장(呈狀)으로 힘껏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또 주급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을에 대사헌을 제수한 뒤 거듭 전유하고 돈소(敦召)하도록 명하였는데,
“기억하건대 지난 계해년(1683)에 경이 나를 버리지 않고 분연(賁然)히 올라왔으므로 마음이 절로 기쁘고 위로되었는데, 도성 문을 지척에 두고 곧장 돌아갈 줄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 생각해도 한탄스러움과 실망스러움이 다 가시지 않았다. 내 마음이 이와 같은데 경이 어찌 나를 잊었겠는가. 포의(布衣) 차림으로 입대하라는 하교 또한 끝내 저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어찌 차마 대수롭게 않게 여기며 나오려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 있었다.
무인년(1698)에 좌참찬을 제수하고 또 두 차례 거듭 하유하고 징소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때 전 현감 신규(申奎)가 노산군(魯山君)신비(愼妃)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두 차례 하문하였다. 부군이 전후의 수의(收議)에는 감히 우러러 대답하지 못했으나, 이때 와서는 ‘이것은 나라 안의 모든 신민(臣民)들이 지금까지 마음속으로 애통하게 여겨 온 일이다. 만약 이 일을 거행할 수 있다면 장차 성덕(聖德)을 빛나게 할 것이니, 구구한 뜻을 대략 아뢰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고, 마침내 예관 편에 부쳐 헌의(獻議)하기를,
“두 건의 논의는 실로 더할 수 없이 중대한 일로서, 200년간 원통하게 억눌려 있던 기운이 오늘에 와서 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밝으신 열성(列聖)의 영령이 위에 오르내리시는데 성상의 일념이 위로 천지와 통하니, 성덕(盛德)의 비상한 조처는 실로 성상의 결단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였다.
겨울에 사간(司諫) 정호(鄭澔), 부응교 김진규(金鎭圭) 등이 상소하여 부군이 스승을 배반했다고 헐뜯었는데, 상이 모두 엄히 배척하고 또 정호를 처벌하였다. 하교하기를,
“아비와 스승 가운데 누가 중하고 누가 가볍겠는가. 그 아비가 욕을 당하는데 아들 된 자가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선소하였다. 부군이 부주하여 초야에 은거하는 몸으로 세도에 해를 끼친 죄를 깊이 진달하였다. 이로부터 ‘부사경중(父師輕重)의 의리’가 그대로 사류(士類)의 정론(定論)이 되었다. 부군이 이르기를,
“이와 같다면 ‘한결같이 섬기고 목숨을 바친다.[一事致死]’는 말이 헛된 의리가 되니, 실로 온당하지 않다. 스승이라도 천심(淺深)과 경중(輕重)의 구별이 있다. 예컨대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에게 있어서 공자(孔子)는 군부(君父)와 동일하지만, 그 아래는 현격한 차등이 있는 것이다. 지금 만약 사생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일체 모두 부자간, 군신간의 윤리와 동등하게 여긴다면 이는 본디 불가하거니와, ‘부친이 중하고 스승이 가볍다.’는 것으로 하나의 설을 정한다면 이 또한 불가하다. 만약 ‘아비와 스승은 본디 경중을 나눌 수 없지만, 스승도 여러 등급이 있으므로 일체 다 군부와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한다면 고훈(古訓)에도 어긋나지 않고 저들의 마음도 승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기묘년(1699, 숙종25) 봄에 아들 행교(行敎)가 시종(侍從)의 관직에 제수되었다는 이유로 추은(推恩)하여 숭정(崇政)의 품계로 올렸는데, 부군은 은례(恩例)에 의지하여 높은 품계에 오르는 것을 극히 황공하게 여겨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을에 특별히 액례(掖隷)를 보내어 식물(食物)을 하사하고 기거(起居)를 물었으므로 상소하여 사은하였다. 이때 유생들 사이에서는 초치하기를 청하거나 변무하는 상소가 이어졌고, 태학(太學)에서는 유벌(儒罰)을 가하여 제명하는 일도 분분하였다. 부군이 깊이 우려하여 문인(門人) 한배주(韓配周)에게 편지를 보내 주장하는 잘못을 꾸짖었다. 그 대략에,
“여러 사람들이 매번 사론(士論)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이른바 사론이라는 것은 의리의 바름에서 나오는 것이니, 지금과 같은 일은 단지 편론(偏論)일 뿐이네. 이렇게 세도(世道)가 괴리되어 곳곳에 구멍이 생기고 상처가 낭자한 때에 은미한 일을 들추어내어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공격하면서 대체(大體)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사사로운 뜻만 만족시키려 드니, 이러한데도 오히려 사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접때의 일도 꼭 이와 같았으니, 세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거기에 원인이 있네. 지금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달리 방도가 없네. 선비 된 자가 의(義)를 먼저 행하고 논의는 뒤로 미루며, 충신(忠信)을 숭상하고 거짓됨을 경계하며, 공정함을 견지하고 사사로움과 치우침을 버리며, 화평함을 힘쓰고 음험(陰險)함과 사특함을 배척하여, 어떤 일이건 어떤 상황에서건, 크건 작건 간에 반드시 천리의 순수함을 구하여서 따르고 털끝만큼이라도 이해를 계산하고 따지는 사사로움이 섞여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네. 이렇게 하면 내 몸에 좋을 뿐만 아니라 당류(黨類)에도 좋고, 당류에 좋을 뿐만 아니라 세도에도 좋을 것이네. 그렇지 않다면 앞서 전복된 수레와 가는 길이 다르더라도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네.”
하였다.
부군이 교산(交山)에 성묘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오랫동안 직명(職名)을 벗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기전(畿甸) 가까이 가지 못하다가, 경진년(1700, 숙종26)에 소명(召命)이 조금 뜸한 틈을 타서 선영에 영결하고자 길을 떠나 묘소 아래에 이르렀다. 정원(政院)이 이 사실을 아뢰었고, 보덕(輔德) 이진수(李震壽)가 또 상소하여 정성을 다해 초치하기를 청하였으며, 유생의 상소도 뒤이어 올라왔다. 상이 두 차례 사관을 보내어 거듭 징소하는 뜻으로 하유하였는데, 부군은 계해년(1683) 강외(江外)의 행차 때처럼 다시 은례(恩禮)가 내릴 것을 두려워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즉시 돌아왔다.
7월에 의정부좌찬성 겸 세자시강원이사를 제수하고 별유로 징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경은 유림의 숙덕(宿德)으로서 단지 나라 사람들의 본보기가 될 뿐만이 아니다. 경을 우대하고 의지하는 내 뜻이 융숭하고 정중할 뿐만이 아니어서 반드시 좌우에 초치하여 보도(輔導)에 힘입어 세도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지금 경을 발탁하여 이공(貳公)의 직책을 제수하고, 춘궁(春宮)의 빈사(賓師) 직임을 겸하게 하였다. 보도하여 성취시키는 일을 경과 같이 큰 덕망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또한 누가 그 책임을 맡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부군이 상소하여 또 숭자(崇資)는 과분하고 명기(名器)가 가볍게 된다는 것을 진달하고 모두 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하였는데, 부군이 분곡(奔哭)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대죄신(待罪臣)’이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이후로도 누차 소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계속 그렇게 칭하였다.
부군은 긴요한 직임을 오래 맡게 되면 연달아 누차 상소하여 반드시 해임되고야 말았고, 한가한 관사인 경우에는 번독하게 해 드릴 것을 두려워하여 간간이 특별 징소가 있을 때나 세말(歲末), 세초(歲初)를 이용하여 상소나 정장으로 사직하였다. 이해 겨울 궁정(宮庭)의 변고가 발생하여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사사(賜死)되었는데, 부군은 춘궁(春宮)이 어린 연세에 이런 변고를 당했다 하여 초야 백성으로서의 깊은 근심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직소를 올리면서 끝 부분에다 동궁을 보호하는 의리를 덧붙여서 아뢰기를,
“예로부터 국가가 패망하려 할 때는 변고가 한번 생겨나서 화란(禍亂)이 끝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고금의 물정(物情)과 세변(世變)을 통찰하시니 무엇인들 비추어 살피지 못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세자 저하께서 아직 어린 연령에 이렇게 큰 어려움을 당했으니, 우러러 믿을 분은 오직 지존(至尊)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질병을 걱정하고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며 다각도로 보살펴 돌보아 주는 것에 실제로 성상께서 관심을 기울이셔야 할 것입니다. 성인(聖人)의 자애로움에 그치는 지극한 정에다 사직의 중요함을 거듭 생각하시어 은근하게 거듭거듭 돌아보며 보호하고 안정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속으로 다 판단하고 계실 것이나, 신민들의 남모르는 근심과 지나친 우려 또한 어디엔들 이르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임오년(1702, 숙종28) 가을에 별유로 징소하였으나 두 차례 상소하여 거듭 사양하였다. 갑신년(1704)에 상이 신종황제(神宗皇帝)의 사당을 세워 강한(江漢)의 생각을 부치고자 예관을 보내어 하문하였다. 부군은, 이렇게 인심이 투박하고 나태하며 천리(天理)가 어둡고 꽉 막힌 날에 사당을 세우겠다고 하교한 것은 신인(神人)을 감동시킬 만한 일이니, 변변찮은 정성을 조금이나마 보이지 않는 것은 의리상 감히 할 수 없는 바이다 하고, 마침내 예관 편에 부쳐 헌의(獻議)하였다. 그 대략에,
“신종황제의 망극한 은혜는 실로 우리 동방 신민이 만세(萬世)토록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명나라를 종주로 삼는 의리를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는데, 성상께서 이런 생각을 하신 것은 귀신을 감읍(感泣)시킬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당을 세우는 논의는 실로 국가의 막중한 사전(祀典)이니, 미천하고 아는 것이 없는 신으로서는 감히 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에 후원(後苑)에 단(壇)을 세워 대보단(大報壇)이라 이름 붙이고 친히 제사 지냈다. 어제(御製) 시 한 수가 있는데, 부군이 공경히 그 시에 차운하여 충분(忠憤)을 드러내었다.
을유년(1705, 숙종31) 11월에 상이 선위(禪位)를 명하였는데, 부군이 사직소를 올리면서 대사(大事)를 갑작스럽게 단행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덧붙여 아뢰고, 더욱 덕을 공경히 하고 백성들의 일을 살피는 데 힘써서 하늘에 영원한 명을 빌기를 도모하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선위하겠다는 명을 거두었으므로 상소가 올려지지 않았다.
병술년(1706) 여름에 임부(林溥)라는 자가 상소하여 부군을 징소하기를 청하면서 부군이 나오지 않는 것은 한쪽 편 사람들이 동궁을 위태롭게 하려고 도모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므로, 상이 그 거짓됨을 통촉하고 죄를 주었다. 서울에 있는 문인들이 상소하여 해명하려고 하니, 부군이 듣고서 놀라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해명할 일이겠는가. 더구나 내가 살아 있으면서 남이 하도록 하다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이 같은 일은 모두가 직명(職名)을 지니고 있어서 생긴 것이다.”
하고, 마침내 상소하여 사직하고 아울러 유소(儒疏)의 무함을 언급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으로 위유(慰諭)하였다. 이때 부군이 이질(痢疾)을 매우 심하게 앓았는데, 사관이 아뢰자 어의(御醫)를 보내어 약을 가지고 가서 간병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므로 상소하여 사은하였다. 겨울에 또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하사하였는데,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해년(1707) 봄에 설서(說書) 이세덕(李世德)이 명을 받들고 와서 동궁이 이어 진강할 책에 대해 물었는데, 부군이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세덕이 개인적으로 물은 데 대해 답하기를,
“성현의 경전(經傳)은 모두가 당연히 읽어야 할 책이지만, 초야의 보잘것없는 신하가 한 번도 서연(書筵)에 입시(入侍)한 적이 없으니, 어떻게 제대로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주제넘게 망녕되이 대답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근사록(近思錄)》과 《성학집요(聖學輯要)》는 가장 요긴하고 절실한 책일 듯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사사로이 귀하에게 말해 주어 시강하는 데 얼마간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하였는데, 이세덕이 이 내용을 덧붙여 아뢰자 마침내 《근사록》을 이어 진강하라고 명하였다. 가을에 특별히 액례를 보내어 식물을 하사하고 기거를 물었으므로 상소하여 사은하였다.
기축년(1709, 숙종35) 1월에 의정부 우의정을 제수하고, 사관이 와서 전유하고 선소(宣召)하였다. 부군이 극히 황송해하고 두려워하며 상소하여 간곡히 개정을 청하였는데, 성상의 비답이 매우 융숭하고 정중하였다. 비답의 대략에,
“이번의 우의정 임명은 내 뜻에 따른 것이었다. 경의 진퇴(進退)에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 것이 자연히 지난날과는 같지 않은데, 어찌 차마 나를 버리듯이 하고 수수방관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내 평생 경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경을 생각하는 일념(一念)이 잠시도 느슨해진 적이 없다. 그런데 경에게 어찌 유독 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여러 해 전에 누차 예를 갖추어 징소하였을 때 다행히 은거하려는 마음을 돌려 강교(江郊)에 이르렀으나,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실로 내 성의가 미덥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진다.
아! 국가의 형세와 조정의 기상이 무엇 하나 믿을 수가 없으니, 이러한 때에 부지(扶持)하고 조제(調劑)하는 책임을 경과 같은 산림의 숙덕(宿德)이 아니면 누가 맡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정성과 예를 더욱 독실히 하여 반드시 초치하고야 말려는 까닭이다.”
하였다. 부군이 네 번째 상소하였는데, 대략에,
“아! 초야에서 발탁하여 낭묘(廊廟)에 오르게 하는 일은 삼대(三代) 이후로 없었습니다. 만약 진정한 현인(賢人)이 이렇게 거룩한 때를 만났다면 어찌 아름다운 명을 받들어서 천하에 드날려 천고(千古)의 아름다움에 짝하지 않았겠습니까. 성상의 뜻은 본디 옛 성왕(聖王)의 거룩한 마음이지만 신이 적임자가 아닌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일찍이 갑술년(1694, 숙종20)에 ‘군신 간에 얼굴을 알지 못한다.’는 성상의 유시를 받들었습니다. 애틋한 성상의 권우(眷遇)가 신하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었기에 10여 년 이래로 가슴에 맺혀 한순간도 감히 잊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하교가 또 여기에 미쳤으니, 받들어 읽는 동안 목이 메어 감격스러운 마음을 형용할 길이 없었습니다. 천은(天恩)의 망극함은 영원히 보답할 길이 없는데, 미천한 목숨은 명이 다하여 이미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니, 대궐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는데, 부주하여 사직하기를,
“강교로 나갔을 때의 일을 성상께서 번번이 하교하시니, 신은 실로 감격의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시에 박세채(朴世采)가 실제로 찾아와 권면하면서 대궐로 들어가 사은하기를 간곡히 권하였으나, 신은 분수를 돌아보고 의리가 두려워서 끝내 감히 따르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신도 스스로 한스럽게 생각됩니다. 만약 그때 한번 대궐로 들어가 용안(龍顔)을 우러러 뵙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죽음을 맞이했다면 다시 유감이 없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연이어 열네 차례나 상소하여 힘껏 사직하였다. 전후로 성상의 유시가 더욱 융숭하고 간곡하여,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70의 나이로 끝내 소명에 응했으니, 이는 진실로 우리 성조(聖祖)의 지극한 정성 덕분이었다. 경의 높은 연령과 밝은 덕이 선정(先正)에게 부끄럽지 않은데, 단지 나의 정성이 얕고 예가 박한 탓으로 조정에 나올 날이 아직까지 지연되고 있으니, 나는 실로 부끄럽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지난번 서계(書啓)를 보니, 경이 여러 해 전에 강교에서 수레를 돌렸던 일에 대해 자못 후회하는 뜻이 있었다. 여기에서 더욱 경의 정성을 볼 수 있거니와, 경을 생각하는 내 마음도 여기에 이르러 배나 더 간절해졌다.”
라는 말까지 있었다. 이때 수찬 심수현(沈壽賢)이 명을 받들고 와서 경연(經筵)에서 이어 진강할 책에 대해서 물었는데, 부군이 부주하여 대략 아뢰기를,
“삼가 강관(講官)의 말을 들으니 사서오경(四書五經) 이하로부터 《성학집요》에 이르기까지를 이미 두루 다 진강하였다고 합니다. 성현의 책 중에 무엇을 여기에 더 보태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성상께서 이미 진강한 책을 다시 더 정밀하고 익숙하게 공부하시는 데 달렸으니, 이렇게 하면 밝게 빛나는 경지에 도달하는 데에 반드시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주자(朱子)의 주차(奏箚)에서 논한 독서법이 실로 절실하고 지극한데, 삼가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을 것으로 생각되니 멀리 초야의 미천한 신에게 하문하실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고, 또 심수현의 개인적인 질문에 답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책은 충분히 읽고 정밀하게 연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예전에 배운 내용을 거듭 익혀 새로운 내용을 터득하는 것이 옛사람의 독서법이었습니다. 만약 이미 진강한 책 가운데 요지가 되는 것을 택해서 다시 깊이 연구하고 토론한다면 다른 책을 데면데면 보는 것보다는 실효가 있을 듯합니다. 《근사록》과 《대학혹문(大學或問)》은 가장 요지가 되는 책인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진강한 대상 속에 들어 있지 않습니까.”
하였다. 심수현이 이로써 덧붙여 아뢰니, 마침내 《근사록》을 이어 진강하라고 명하였다.
경인년(1710, 숙종36) 봄에 상의 체후(體候)가 오랫동안 미령(靡寧)하였는데 부군이 이미 나아가 문후를 여쭙지 못하였고, 가만히 앉아서 엄한 소명을 어긴 지도 1년이 다 되어 갔으므로, 마침내 고인이 현옥(縣獄)에서 대명(待命)한 예에 의거하여 읍저(邑底)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고는 열일곱 번째 상소하여 대죄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듣건대 사물의 이치가 극에 달하면 변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허명(虛名)이 이미 극에 달하였고, 직위를 훔친 것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며, 성상의 은례(恩禮)가 이미 극에 달하였고, 지은 죄가 이미 극에 달하였습니다. 한 몸에 있는 만 가지 일이 극에 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신이 이미 마음을 바꿔 명에 응할 길이 없다면 단지 죽음으로 나아가야 할 뿐입니다. 지금 혜택이 널리 미치고 큰 교화가 두루 젖어들어 만물이 기뻐하며 모두 제 살 곳을 얻었는데, 신은 홀로 천지 사이에서 두려워하고 조심하느라고 몸 둘 곳을 찾지 못해 촌로들과 함께 여유롭게 생을 영위하지도 못합니다. 신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며 내심 스스로 슬퍼합니다.”
하였다. 3월에 열여덟 번째 상소하여 비로소 체차하는 은혜를 입어 중추부(中樞府)에 부직(付職)되었다. 그리고 상의 체후도 회복되었으므로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문정공(文正公 윤황(尹煌))과 문경공(文敬公)에게 특별히 증직(贈職)하고 사시(賜諡)하는 명이 있었으므로 선묘(先廟)에 고하였다.
가을에 진연(進宴)한 일로 은혜를 미루어 기로 대신(耆老大臣)에게 의자(衣資)와 식물을 하사하였다. 부군은 ‘진실로 대신이라는 이름을 감당하지는 못하지만, 은혜를 미루어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이 서민 노인들에게까지 미쳤으니, 하사한 것이 조금 후하다고 해서 번독스럽게 사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공경히 받은 뒤 상소하여 사은하고, 이어 중추부의 직함 및 월름을 사양하였다.
이에 앞서 상국(相國) 최석정(崔錫鼎)이 《예기(禮記)》 책에 서로 얽히고 뒤섞인 부분이 많다고 여겨 유별(類別)로 편차하되 《중용》과 《대학》도 구경(舊經)에 의거하여 유별로 편차하는 대상에 포함시켰다. 또 책 말미에 강확(講確)한 사람을 기록하였는데 부군의 이름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이 일로 한쪽 편 사람들이 경서를 훼손하고 성인을 업신여겼다며 최상(崔相)에게 죄를 덮어씌웠고, 홍주형(洪胄亨)이라는 자가 또 강확했다는 명목을 빙자해서 상소하여 부군을 헐뜯고 욕하였다. 성균관 유생 박필기(朴弼琦) 등이 상소하여 무함한 것에 대해 변론하니, 상이 홍주형을 정거(停擧)하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정호(鄭澔)가 상소하여 홍주형을 신구(伸救)하였고, 또 곽경두(郭景斗)라는 자가 상소하여 추악하게 무함하였다. 이에 유생 이태우(李泰宇) 등이 또 상소하여 정호 등의 죄상을 아뢰니, 상이 홍주형과 곽경두를 정배(定配)하고 정호를 삭출(削黜)하라고 명하였다. 교리 홍우서(洪禹瑞), 이교악(李喬岳), 이택(李澤) 등이 등대(登對)하여 신구하니, 상이 또 정호 등 4인을 모두 멀리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향유(鄕儒)가, 강확했다는 명목을 핑계로 유현(儒賢)을 무함하고 욕보였으니 지극히 가슴 아프다.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위안하라.”
하였다. 부군이 부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불초한 몸으로 세도(世道)의 한 가지 누가 되어 번번이 조정에 소란을 일으킴으로써 국가에 수치와 욕을 끼쳤습니다. 끝내는 신 때문에 성상께서 크게 진노하시어 엄중한 처분을 내리시어 중외(中外)가 황공하고 의혹스러워하며 원근(遠近)이 놀라고 두려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대성인(大聖人)이 공평한 마음으로 사물에 대처하는 도리로 볼 때, 득실(得失)을 굽어 헤아리고 경중(輕重)을 참작하여 조용히 가르쳐 변화시킬 일에 불과합니다. 어찌 성상의 음성과 기색에 노여움을 드러낼 만한 것이겠습니까.
‘유현’이라는 호칭으로 말씀드리자면 더욱 어찌 미천한 신에게 견줄 바이겠습니까. 그런데 성상의 하교가 매번 여기에 미치니, 이것이 또 신이 내심 근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항상 귀신에게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설령 참으로 유현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을 금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번 그 잘못을 말했다고 해서 즉시 유현을 업신여긴 죄로 벌을 주었으니, 아랫사람을 놓고 말한다면 말세(末世)에 자신의 단점을 비호하여 남의 말을 막는 사사로움이요, 옛날의 군자가 자신의 잘못을 즐겁게 듣던 공평정대한 마음이 아닙니다. 또 윗사람을 놓고 말하더라도 남의 입을 막는 데에 가까운 행동이요, 사람의 마음을 승복시킬 만한 처사가 아닙니다.”
하였다. 또 상소하여 스스로 인책하고 처분이 과중했다는 것을 다시 아뢴 다음, 마지막에 뇌우(雷雨)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의리를 덧붙여 아뢰었는데,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위유하였다.
겨울에 서쪽 국경 지대에 해구(海寇)가 침략해 올 우려가 있었으므로 특별히 거듭 하유하여 징소하였는데, 부군이 부주(附奏)하여 분의(分義)가 미천한 데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아 몸을 바칠 길이 없는 실상을 갖추 진달하였다. 문인(門人)이
“국가에 만약 사변(事變)이 생긴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자처(自處)하시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답하기를,
“송(宋)나라 때 정강(靖康)의 난리에 양구산(楊龜山 양시(楊時)), 윤화정(尹和靖 윤돈(尹焞)), 호 문정(胡文定 호안국(胡安國))이 모두 달려가지 않았고, 우계(牛溪) 선생도 삼현(三賢)의 일을 인용하여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에 달려 나가지 않는 것으로 미리 뜻을 정했었다. 더구나 나는 골짝에서 평생을 산 미천한 몸이니 골짝에서 죽는 것이 본디 나의 의리이다. 다만 그렇더라도 시세에 순응하는 의리가 있으니, 나는 응당 우리 왕을 따라서 한번 죽을 것이다.”
하였으니, 평소 정한 뜻을 명백히 드러낸 것이 이와 같았다.
신묘년(1711, 숙종37) 봄에 또 의자와 식물을 하사하였는데, 사양하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겨울에 문정공(文正公)과 문경공(文敬公)의 연시례(延諡禮)를 거행하였다. 상소하여 시호를 하사한 은혜에 사례하고 이어 사직하였다. 임진년(1712) 봄에 곤전(坤殿)이 두질(痘疾)을 앓다가 회복되었는데, 나아가 문후하지 못한 일로 상소하여 대죄하였다. 여름에 문경공의 유고(遺稿)를 편간(編刊)하였다.
계사년(1713) 봄에 액례를 보내어 식물을 하사하였는데, 상소하여 사직하고 사은하였다. 이에 앞서 문경공이 금산(錦山)에서 살 때에 시남(市南)과 함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엮었고, 이산(尼山)으로 돌아온 뒤에는 또 나중에 수정한 본이 있었다. 이해 여름에 시남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가례원류》를 시남이 독자적으로 편찬한 책이라고 하며 시상(時相)에게 부탁하여 연석에서 아뢰었는데, 상이 이를 호남에서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시남이 부군에게 부탁하여 보유본(補遺本)을 만들게 했다고 하면서 와서 나중의 수정본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부군은 애당초 부탁받은 일이 없었으므로 처음에 함께 엮은 실상에 의거하여 말하였으나, 유상기가 남의 부추김을 받고서 부군이 이 책을 독차지하려 한다며 제멋대로 도리에 어긋난 말로 헐뜯다가 끝내 관계를 끊기에 이르렀다. 부군은 그가 미혹하여 잘못 행동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시옹(市翁)의 자손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실로 불쌍하게 생각할 일이지 노여워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7월에 학질에 걸렸는데, 약을 물리치고 들지 않으면서
“이 병이 어찌 약물로 효험을 볼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상이 듣고서 어의를 보내 간호하게 하고 병세를 계속해서 아뢰도록 하였으며, 또 이어서 어부(御府)의 약제(藥劑)를 보내게 하니, 부군이 임금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고 여겨 마침내 약을 드셨다. 또 특별히 액례를 보내어 병세를 묻고, 어주(御廚)의 진찬(珍饌)을 하사하였다. 겨울에 상소하여 사은하고, 인하여 중추부의 직함을 사직하였다.
“신이 이렇게 늙어서도 죽지를 않으니, 마음이 항상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두렵습니다. 이제 곧 숨이 넘어갈 듯한 위태로운 목숨이 어찌 약을 복용한다고 연명되겠습니까.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 온 것도 모두가 성상의 은혜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분수에 넘치는 직명을 여전히 지니고 있으니, 이제 곧 죽을 몸이 어찌 그대로 시일을 끌다가 참람하게 직명을 도둑질한 채로 죽어서 조정의 수치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성상이 비답을 내려 더욱 잘 조섭하라고 하유하였다. 이때 상이 방상(方喪)의 고제(古制)를 회복하고자 하여 하문하도록 명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신은 병석에 쓰러져 신음하며 천고(千古)의 군주들 가운데서도 탁월하신 성학(聖學)을 우러러 흠앙할 뿐입니다.”
하였다.
부군은 병이 깊어진 지 몇 달이 되었지만 오히려 세수하고 머리 빗는 일과 새벽의 사당 참배를 폐하지 않았다. 11월에 이르러서는 병세가 점점 더 중해졌고, 갑오년(1714, 숙종40) 1월에는 하루가 다르게 위독해졌다. 이에 동원(東源)에게 명하여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대한 유서(遺書)를 쓰게 하였다. 20일에는 여러 자손 및 병시중 드는 문인과 영결하고, 각각 가르치고 타이르는 말씀을 남겼으며, 사례(士禮)로 상을 치르라고 명하였다. 또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장례에 중국 물건을 쓰지 말아서 내 본뜻을 드러내도록 하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들이 간혹 재호(齋號)나 ‘선생’으로 명정(銘旌)을 쓰는데, 나는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계 선생은 묘표(墓表)에다 ‘창녕성모지묘(昌寧成某之墓)’라는 여섯 글자만 쓰도록 명했으니 이것을 법 삼을 만하다. 내가 죽은 뒤에 명정과 묘표는 의당 모두 여기에 따르되, 다만 일생 동안 징소(徵召)의 은혜를 입었으니 ‘모인(某人)’ 위에 ‘징사(徵士)’라는 두 글자를 쓰도록 하라. 신주(神主)를 쓸 때도 이에 따라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문인이 옳지 않을 듯하다고 의심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관함(官銜)을 쓰지 않는 것은 나의 보잘것없는 의리를 보이려 함이요, 징사라고 쓰는 것은 내가 국가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려 함이다.”
하였다. 또 두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리 밖에 부모님을 장사 지내고 묘소 곁에 의지하여 살지 못했으므로 마음에 항상 통한이 되었다. 그래서 늘 나를 선영에 묻으라고 말하였고, 너희들이 그곳에 와서 살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이것은 그릇된 계획이다. 지금의 편론(偏論)은 장차 나라와 함께 망하고야 끝이 날 것이니, 살육(殺戮)으로도 부족해서 반드시 창칼을 겨누게 될 것이다. 사대부가 비록 이런 폐단을 바로잡고 고치지는 못할지라도 어찌 무익한 편론을 거듭하여 국가에 화를 끼칠 수 있겠느냐. 경기는 분잡하고 시끄러운 곳이므로 너희들이 반드시 그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모쪼록 나를 깊숙하고 정결한 곳에 묻고 그곳에 살도록 하여라.”
하였다. 23일은 이씨 부인의 기일(忌日)이다. 6, 7일 전에 동원에게 명하기를,
“내 병이 심하다고 해서 제사 날짜를 말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대개 정신이 혼미하여 혹시라도 잊을까 염려한 것이었다. 기일이 되어 말씀드렸는데, 그때 아침 해가 창으로 비쳐 들고 있었다. 부군이 흐느끼며 말씀하기를,
“선비(先妣)께서 목숨을 버리신 것이 바로 이때였다.”
하였다. 마침내 한참 동안 거애(擧哀)하고 나서는 병세가 크게 악화되었다. 입 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서 시중들던 사람이 가만히 들어보니,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고 살얼음을 밟는 듯이 한다.[如臨深淵 如履薄氷]”, “바른 도리를 얻고서 죽으면 그뿐이다.[得正而斃 斯已矣]”,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정직함이니,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생존하는 것은 요행으로 죽음을 면한 것이다.[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 “군자는 ‘마친다’고 하고 소인은 ‘죽는다’고 한다.[君子曰終 小人曰死]”라는 등 몇 구절의 말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부녀자를 물리치라고 명하고, 자리를 반듯하게 하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한 뒤 편안하게 돌아가셨으니, 바로 24일 신시(申時)였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노성산(魯城山)이 3일 동안 크게 울려 바람이 부는 듯하고 우레가 치는 듯한 소리가 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문인들이 유교(遺敎)를 그대로 준행하여 사례(士禮)로 상례를 치렀다.
부음이 올라가자 상이 몹시 놀라 애도하며 누차 애통해하는 하교를 내리고, 특별히 동원(東園)의 비기(秘器)를 골라 보내도록 명하였다. 또 상수(喪需)와 제수(祭需)를 지급하게 하고, 3년 동안 월름(月廩)을 계속 지급하게 하였으며, 예장(禮葬)과 조제(弔祭)를 의식대로 거행하게 하였다. 동궁도 궁관(宮官)을 보내 조제하였다. 아들 행교(行敎)가 유지(遺志)에 따라 상소하여 예장을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월 19일에 공주(公州) 향지산(香芝山) 백운동(白雲洞) 좌묘(坐卯)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와서 참석한 원근의 인사가 1300여 인이었다.
이에 앞서 부군이 중추부의 직함을 지닌 뒤로 호조에서 의례적으로 월름을 실어 보냈는데,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또 상소나 정장도 번독스러울까 염려되어 단지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실어 보내지 못하게만 했었다. 이때에 와서 도신(道臣)이 아뢰자, 상이 그대로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아들 행교가 대궐로 나아가 상소하여 도로 바치기를 청하고, 아울러 3년 동안 월름을 계속 지급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다가 나중에 또 하교하기를,
“살았을 때 받지 않았던 물자를 지금에 와서 그 아들이 감히 편안히 받지 못하는 것은 정리(情理)로 봐서 당연하다. 내렸던 명을 도로 거두어 그 뜻을 따라주되, 월름은 3년 동안 계속 지급하여 제수로 사용하게 하라.”
하였다.
부군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한쪽 편 사람들이 원수처럼 미워하기를 그만두지 않았고, 부제학 정호(鄭澔)가 또 《가례원류》 서문을 쓰면서 무함하여 욕하였는데, 상이 보고 진노하여 정호에게 죄를 주도록 하교하였다. 또 절구 두 수를 지어 추모하고 애도하기를,
유림은 도덕을 숭상하였고 / 儒林尊道德
소자 또한 일찍이 흠앙했었소 / 小子亦甞欽
평생 한 번 만나 보지 못했었기에 / 平生不識面
사후에 한이 더욱 깊어진다오 / 沒後恨彌深

살게 해 준 세 분 은혜 똑같다지만 / 生三雖事一
본래부터 경중의 차이 있는 법 / 自有重輕殊
우습구나 논사의 장관으로서 / 可笑論思長
제멋대로 대로를 무함했으니 / 甘心大老誣
하였으니, 성주(聖主)의 권우(眷遇)와 은례(恩禮)가 사후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병신년(1716, 숙종42)에 이르러 불행하게도 당인(黨人)이 용사(用事)하게 되자 교묘하게 참소하고 추악하게 무고하고, 심지어 문경공이 효묘(孝廟)를 무함하고 부군이 스승을 배반했다고까지 말하였다. 이에 대해 중외(中外)의 유생들이 맞서서 상소하여 신구하고 변론하였다가 모두 죄를 입었고, 정유년(1717)에는 끝내 양세(兩世)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였으므로 사림이 극도로 분통해하였다.
경종 임인년(1722, 경종2)에 이르러서 양호(兩湖)의 유생 김수귀(金壽龜) 등, 성균관 유생 황욱(黃昱) 등이 상소하여 그 억울한 무함을 변론하였고, 대신(大臣)이 또 전후에 무함을 입은 실상을 아뢰고 선생의 본뜻이 아님을 밝혔다. 이에 상이 마침내 양세의 관작을 회복하도록 명하고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니, 시법(諡法)에 ‘도덕이 널리 알려진 것[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예악이 밝게 갖추어진 것[禮樂明具]’을 성(成)이라고 한다. 여러 유생들이 용계(龍溪)의 옛 거처에 서원을 세워 제향(祭享)하였으며, 또 노강서원(魯岡書院)에 종향(從享)하였다.
부군은 덕성이 인자하고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되 의용(儀容)이 장엄하고 정중하며 도량이 깊고 넓었으니, 대개 타고난 성품이 이와 같았다. 그런 데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의 가르침을 통해 순차적으로 법도를 갖추어, 청소하고 응대하며 수건을 매고 버선을 신고 바지를 입는 등의 일상적인 일에서 그 근기(根基)를 함양한 것이 이미 조화로웠다. 장성해서는 한결같이 문경공의 법문(法門)을 준수하여 주경 궁리(主敬窮理)와 극기 궁행(克己躬行)을 친절히 강습(講習)하고 빈틈없이 힘썼으니, 대개 가정을 벗어나지 않고도 몸가짐과 학업이 이미 이루어졌다.
학문은 오로지 내면에 힘을 써서 인륜을 기본으로 삼고 엽등(躐等)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입지(立志)의 독실함에 있어서는
“성인의 성(性)도 나의 성과 같다. 배워서 성인에 미치지 못한다면 내 성에 힘을 다 쏟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고, 무실(務實)의 지극함에 있어서는
“모두가 실리(實理)여서 사물마다 근간이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무실은 위로도 통하고 아래로도 통하는 공부이다.”
하였다. 수기(修己)는 경(敬)을 위주로 하되 외면을 수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일찍이 잠시라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고, 존심(存心)은 성(誠)을 전일하게 하되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으로 공부를 삼아 한순간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 독서하여 그 이치를 궁리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진지(眞知)와 실득(實得)에 주안점을 두고 지루한 훈고(訓詁)에는 힘쓰지 않았고, 성찰하여 그 기미를 징험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자신에게 절실한 문제를 체인(體認)하는 것으로 요지로 삼아 공사(公私)와 의리(義利)를 정밀히 살폈다. 널리 배우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기괴하고 특이한 것을 숭상하고 좋아하는 병통을 배척하였으며, 간략함으로 돌이키는 공부를 귀하게 여기되 외물을 추구하고 이름을 따르는 폐단을 특히 경계하였다. 스스로 수양하는 실질을 힘쓰는 데는 반드시 충신(忠信)의 공부를 위주로 하고, 도(道)에 나아가는 법을 말함에 있어서는 매양 홍의(弘毅)의 가르침을 외웠다. 겸허하여 부족한 점이 있는 사람처럼 각고하여 스스로를 독책하였고, 무엇을 잃은 것처럼 급급하였으나 너그럽고 도량이 커서 박절하지 않았다.
늘 배우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학문은 뜻을 세우지 않으면 이루지 못하고, 처음 시작할 때 실질에 힘쓰지 않으면 끝내 이루지 못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예(禮)로써 사람을 가르쳤던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인간의 일상생활은 예가 아닌 것이 없다. 예가 없으면 귀와 눈을 돌릴 곳이 없고 손과 발을 둘 곳이 없으니, 더욱 하루라도 강구하고 익히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고, 또 이르기를,
“공문(孔門)의 학문은 독서를 근본으로 하였다. 지경(持敬)과 궁리(窮理), 수심(收心)과 양성(養性)이 모두 여기에 달렸으니, 이것을 놔두고는 의거할 바가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반드시 종사함이 있으면 자연히 하는 바가 있고, 미리 기대하지 않으면 기필함이 없으며, 마음에 잊지 않으면 중단함이 없고, 조장함이 없으면 엽등(躐等)하는 병통이 없다. 맹자(孟子)의 이 말은 실로 천고에 뛰어난 학문의 지결(旨訣)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른바 ‘자득(自得)’이라는 것은 성현의 가르침 밖에서 별도의 의리를 탐구해 내는 것이 아니다. 성현의 가르침 속에서 그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을 진정으로 알아내어 내 마음과 일치하여 간격이 없게 된다면 이것이 자득이고 이것이 진정한 학문인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선유(先儒)들이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논변한 것이 많은데, 율곡이 이른 바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는 단어는 실로 바뀔 수 없는 정론이 되었고, ‘이통기국(理通氣局)’ 4자는 또 조리가 분명하고 뜻이 잘 통하여 막힘이 없으니, 명리(名理)의 설이 여기에 이르면 거의 완벽하여 더 논할 바가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선현(先賢)이 말씀한 의리는 비록 동이(同異)와 득실(得失)이 있더라도 모두 공력을 쌓고 실제로 터득한 데서 나온 것이니, 후학이 또한 쉽게 단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 단지 각각 그 설에 나아가서 각각 그 뜻을 연구해야 할 뿐이니, 깊이 연구하고 음미하다 보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연히 진정으로 이해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했던 것이야말로 진정 성인이 되는 근기(根基)이다.”
하였고, 또 우리나라 선유 중에서 퇴도(退陶 이황(李滉))를 가장 사모하여,
“퇴도는 동방의 회옹(晦翁 주희(朱熹))이니, 회옹을 배우려 한다면 퇴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였다. 이것은 모두 부군이 평소 참되게 실천하고 실질적으로 체득한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내외(內外)가 함께 닦이고 지행(知行)이 아울러 정진되어 안으로 수양하고 밖으로 익힘으로써 표리(表裏)가 막힘이 없었으니, 동정(動靜)은 한결같이 천칙(天則)을 따르고 언행은 예도(禮度)를 어기지 않았다. 내면세계는 차분히 가라앉아 고요하면서도 깊고, 사람들을 접하는 데는 진실하고 순수하며 정성스럽고 독실하였으니, 겸손하고 공손하면서도 평탄하고 진실하며 온화하고 순수하면서도 광휘를 발하여 끝내 하나의 성(誠)으로써 덕을 이루었다.
행사(行事)에 나타난 것을 살펴보면, 평상시 거처할 때는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집 안을 깨끗이 청소한 뒤에 궤안(几案)을 정돈하고 반듯이 앉아 독서하였는데, 온종일 삼가고 조심하면서 어깨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시선을 바르게 하였다. 한가한 시간에도 숙연하기가 빈객이나 벗을 대한 듯하였고, 병을 앓을 때조차도 몸가짐을 조심하여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음식을 드시고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는 데도 정해진 법도가 있고, 의복과 지팡이, 신발 같은 것도 모두 정해진 자리가 있었으며, 위의(威儀)의 법칙 및 말하고 침묵하는 절목이 정연하여 각각 법도가 있었다. 만년에는 참된 공력이 쌓이고 오랜 세월 힘쓴 덕분에 행함이 순조롭고 이치가 터득되었으니, 일상적인 행동은 남들과 크게 다른 것이 거의 없었지만 저절로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여러 책들을 돌아가며 반복해서 읽고 깊이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한결같이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여 사람들과 강설할 때에는 마치 자신의 말을 외우는 듯이 하였다. 때때로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시경(詩經)》, 《서경(書經)》, 《중용(中庸)》, 《대학(大學)》 등 책을 묵송(默誦)하였다. 역사서 중에서는 《강목(綱目)》을 가장 사랑하였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이 책은 주자(朱子)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범례(凡例)가 엄정하고 사실이 완비되었으며, 선유(先儒)의 좋은 의논도 모두 채택되어 들어갔으니, 배우는 사람들은 익숙히 읽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리고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의 글까지도 통독하였다. 또 예학(禮學)에도 조예가 깊어서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예(禮)나 특수한 상황에서의 예를 물어 오면 일일이 예경(禮經)에 의거하고 여러 학설들을 인용하여 대답하였는데, 수답(酬答)에 막힘이 없고 내용과 형식이 곡진하게 맞았다. 부지런히 강송(講誦)하는 일을 노년이 되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의리를 탐구함에 있어서는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도 빈틈이 없었으나, 또한 일찍이 스스로 만족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저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어떤 문인이
“그러시면 장차 후인(後人)에게 은택을 주지 못하게 됩니다.”
라고 말했는데, 부군이 이르기를,
“책을 저술하여 입언(立言)하는 것을 어찌 후학(後學)이 감히 할 바이겠는가. 옛사람의 저술은 농기구를 만들고 질그릇을 굽는 것처럼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은 경전(經傳)으로부터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책에 이르기까지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본디 저술을 일삼을 필요가 없다. 배우는 자들은 단지 여기에 나아가서 익숙히 읽고 정밀히 생각하여 진정으로 알고 실제로 행하면 될 뿐이다. 만약 여기에 힘쓰지 않고 저술만 일삼아 전현(前賢)들보다 나아지기를 구한다면 이는 무실(務實)의 학문이 아니다.”
하였다. 천문(天文), 지리(地理), 율려(律呂), 상수(象數) 분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뜻을 두지 않고,
“나는 이런 것을 볼 여가가 없다.”
하였으며, 여기에 대해서 묻는 사람이 있으면
“공부해 본 적이 없어서 감히 억지로 설명하지 못하네.”
라고 답하였다.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안색을 살펴 뜻에 맞추었고, 봉양함에 있어서 어기는 일이 없었다. 부모상을 치를 때는 예법을 준행하여 감히 과도하게 곡읍(哭泣)하지 않았으나, 눈물로 상복의 소매가 다 삭았다. 이씨 부인이 비명에 돌아가신 것이 평생의 통한이 되어 부귀영화를 가까이하지 않고, 누추한 집에 살며 거친 음식을 먹는 고생을 감수하였다. 손위 누이와 동생에 대한 우애가 시종 한결같고 어린아이들을 어루만지고 돌보는 데에 은혜와 자애가 두루 미쳐 가정에 화기(和氣)가 가득 넘쳤다.
제사를 특히 엄격하게 받들어 때맞추어 제물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차분한 마음으로 깨끗이 재계하여 정성과 사랑을 다하면서도 집안 형편에 맞추어서 조촐하고 정갈하게 차리도록 힘썼다. 기일(忌日)에는 반드시 4일 동안 소식(素食)을 하고, 제사를 마치더라도 종일토록 슬퍼하는 마음이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선세(先世)의 기일에 혹 제사에 참여하지 못할 경우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조용히 앉아 날이 밝기를 기다렸고, 가묘(家廟)의 새벽 참배는 팔순의 연세에도 추위나 더위, 비바람을 이유로 폐하는 법이 없었다. 누군가 주자(朱子)가 70세에 장손(長孫)에게 제사를 물려주었던 뜻을 가지고 말씀드리자, 답하기를,
“근력이 감당할 만해서 하는 것이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또 사우(師友)들에게도 독실하였으니,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탄옹(炭翁 권시(權諰)), 시남(市南 유계(兪棨))의 기신에는 이틀간 소식을 하였는데 노년에도 이를 폐하지 않았으며, 신독재의 후손이 영락(零落)하자 기제 및 세사(歲祀)에 반드시 제수 마련을 도왔다. 친구의 상에는 반드시 곡위(哭位)를 만들어 곡을 하고, 또 소식하고 슬퍼하며 조문하고 부의를 전하여 정의(情誼)를 빠뜨리는 바가 없었다.
종족이 매우 많았으나 각각 사랑을 쏟았고, 존비(尊卑)와 친소(親疎)에 대해 반드시 친목을 다하였으며, 질병이 있거나 상이 나면 지극히 근심하고 슬퍼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선조(先祖)가 차별을 두지 않고 사랑하였던 마음을 늘 가슴에 새겨야 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한 사람의 선악(善惡)은 또한 한 집안의 영욕(榮辱)이다.”
하였다. 항상 공자(孔子)가 이른 바 “이익을 따라서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 “소인은 형벌을 두려워한다.”라는 등의 말로 종족들을 힘껏 이끌어 불의(不義)에 빠지지 않게 하였다. 종족 중에 선하지 않은 사람이 있더라도 엄한 말로 호되게 꾸짖는 법이 없이 반드시 조용하게 가르치고 타이르기를,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잘못이다.”
하고, 일에 따라 잘 인도하며 성의를 다하려고 노력하였다.
자질(子姪)을 가르치는 데는 반드시 문(文)ㆍ행(行)ㆍ충(忠)ㆍ신(信)과 겸공(謙恭)ㆍ퇴양(退讓)으로써 하였다. 과거 공부 역시 일찍이 금지한 적이 없었다. 이르기를,
“자제 가운데 지기(志氣)가 있는 자는 절로 이것을 탐탁해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무위도식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새로운 책을 읽지 못하게 하면서,
“비록 문장(文章) 공부를 하고자 하더라도 경서(經書)를 읽으면 어찌 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과문(科文)도 반드시 경전(經傳)을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고, 내외(內外)와 경중(輕重)의 나뉨에 대해서도 일찍이 자상하게 일러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손 중에 교훈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비록 성년이 되었더라도 곧바로 회초리를 들었고, 과실이 있으면 간혹 눈을 감고 단정하게 앉아서 말씀도 하지 않고 물러가라고도 하지 않은 채 한참을 기다렸다가 자신의 죄를 깨달은 뒤에야 비로소 사색(辭色)을 대략 누그러뜨렸다.
동원(東源)은 나면서부터 어리석고 노둔하였는데, 부군께서는 가르치는 방도에 온갖 힘을 다 기울였다. 항상 중인(衆人)이 분음(分陰)을 아끼는 뜻으로 밤낮없이 권면하였고, 간혹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쏟느라고 독서에 힘쓰지 않으면 또 훈계하기를,
“학문의 도리는 다른 것이 아니다. 마음에 불안한 바는 곧 의리에 불안한 바이니, 마음에 불안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웬만큼은 된 것이다. 비록 독서하지 못하더라도 모쪼록 이러한 생각을 잊지 않는다면 일상적인 생활과 행위가 모두 학문일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병중에는 병중의 공부가 있고, 말 위에서는 말 위에서의 공부가 있으며, 침상이나 측간, 앉고 눕고 걸을 때까지도 각각 당연한 공부가 있으니, 어느 곳인들 공부할 곳이 아니겠느냐.”
하고, 또 이르기를,
“일을 만나면 반드시 그 당연한 바의 이치를 추구해야 하니, 이것이 또한 궁리이다.”
하였으니, 당면한 상황에 알맞은 교훈으로 일러 주고 경계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향촌에서는 늘 몸가짐을 겸손하게 하고 온화하고 공경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였다. 현우(賢愚)와 친소를 모두 각각 예에 맞게 대하고, 흉례(凶禮)에 조문을 하고 혼례(婚禮)에 축하를 함에 정을 곡진히 하였다. 학문에 힘쓴다는 말을 들으면 칭찬하고 인정하여 진덕 수업(進德修業)을 권면하였고, 혹 과실이 있으면 불쌍히 여기며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인도하였다. 원근의 인사들이 줄지어 와서 찾아뵈면 비록 병이 있을 때라도 만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의관을 정제하고서 절하고 꿇어앉기를 조심스럽게 하였고, 온화하고 정성스럽게 응대하여 상서로운 화기(和氣)가 사람에게 배어들었다. 말과 표정에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종복(從僕)들을 욕하며 나무라지 않으니, 교활하고 거짓된 자가 정성을 바치고 모질고 사나운 자가 마음을 고쳤으며, 고을 사람들이 감화되고 사방이 존경하였다. 마을의 소민(小民)들도 모두 사모하고 좋아하며 사랑하고 신뢰하였으며, 평소 추향(趨向)을 달리했던 사람들도 한번 의용(儀容)을 접하고 나면 사사로이 공경하고 탄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한평생 겸양의 덕을 지켜 사도(師道)로써 자처하지 않고 문하의 선비들을 모두 붕우로 대하였으며, 각자의 재능에 따라 자상하게 열어 주고 이끌어 주었다. 가르침의 요지는 행의(行義)를 우선하고 문예(文藝)를 뒤로하며, 본실(本實)을 숭상하고 부화(浮華)를 생략하는 것으로, 반드시 명목을 좇지 말고 실질적인 공부를 하게 하였다. 문공(文公 주희(朱熹))의 《소학(小學)》, 《격몽요결(擊蒙要訣)》, 《주문지결(朱門旨訣)》로 먼저 그 대본(大本)을 세우고, 또 우계(牛溪)와 율곡(栗谷)이 정한 독서의 순서에 따라 차례차례 가르쳤다. 초학자(初學者)는 반드시 하학(下學)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며 〈초학획일도(初學畫一圖)〉를 게시하고, 배우는 자는 반드시 문로(門路)를 바르게 해야 된다고 하며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를 드러내었다. 의심나는 부분을 깨닫지 못하면 자상하게 비유하여 깨우쳐 주고, 범범하게 묻는 경우에는 반드시 다시 생각하게 하였으며, 상대가 묻지 못하는 것이나 알 수 없는 것을 먼저 억지로 설명하는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장황하게 강설하는 것을 보면 매우 싫어하면서,
“묻는 자는 의문을 해소하는 데에 오로지 뜻을 두지 않고, 답하는 자는 또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것에 가까우니, 이것이 심신(心身)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하였으니, 또한 배우는 자로 하여금 절실하게 묻고 일상적인 것을 생각하며 자신의 몸에 돌이켜 체인(體認)하고자 한 것으로서, 일찍이 입지(立志)와 무실(務實)의 가르침을 반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년(1684, 숙종10) 이후로는 문을 닫고 강의를 중단하였다. 간혹 상대방의 정성스러운 뜻에 감복하여 일러 주는 경우도 있었으나, 부귀한 집안의 자제는 비록 정성과 예를 극진히 하더라도 끝내 사절하면서,
“나는 세상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싶지 않다.”
하였다.
집안 살림이 매우 가난하여 잡곡밥과 나물 반찬도 떨어질 때가 있었지만 편안하게 받아들였고, 몸을 봉양하는 일로 마음을 쓴 적이 없었다. 만년에도 밥상에 반찬이 두 가지 올라오면 반드시 한 가지를 치우게 하였다. 사양하고 받는 문제에 특히 엄격하여 의(義)가 아닐 경우에는 지푸라기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일찍이 이르기를,
“젊었을 적에 벼슬살이하는 족인(族人)에게 벼룻집 하나를 달라고 했는데 선군자(先君子)께서 이를 나무라셨다. 그 이후로는 감히 남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였다. 수령(守令)과 방백(方伯)의 의례적인 선물도 두미(斗米) 이상은 모두 물리쳤고, 관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보내오는 선물은 하찮은 것이라도 받지 않았으며, 말년에 직위가 높아진 뒤에도 친지들이 의례적으로 보내오는 선물이 조금 많을 경우에는 조금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돌려보냈으니, 미세한 일에서 능히 삼간 것이 이와 같았다.
평소 마음가짐이 충성스럽고 어질어서 남과 절교하는 것을 깊이 경계하였다. 간혹 교제를 끊는 일이 있더라도 부군 쪽에서 먼저 절교한 적은 없었고, 절교한 뒤에도 상대의 과실이나 악을 말하는 법이 없었다. 항상 이르기를,
“저쪽이 만약 뉘우치는 마음을 갖는다면 어찌 그의 새로워진 면모를 허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이르기를,
“피혐(避嫌)의 길이 너무 넓은 것은 말세의 폐습이다.”
하고, 자질(子姪)들에게 피혐을 너무 과도하게 하지 않도록 경계시켰다. 일찍이 일가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회천(懷川) 및 유상기(兪相基)와는 내 자손만 관계를 끊을 것이요, 다른 사람들은 절교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부군은 어린 나이에 남모르는 슬픔을 가슴에 품었기 때문에 은거하여 절개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세상에 나갈 뜻을 버렸다. 그러므로 조정의 징소(徵召)가 연달아 내려도 번번이 개인적인 정리를 들어 힘껏 사양하였다. 계해년(1683, 숙종9)에 이르러서는 성주(聖主)가 간곡하게 초치하고 동지들이 함께 잡아당기고 조정의 신하들이 혹 잠시 뜻을 굽히기를 바랐지만 돌처럼 굳은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만년에는 지위가 더욱 높아지고 예우가 더욱 융숭하여 삼공(三公)의 직책에 취임할 만도 했으나, 분열된 당론(黨論)과 무너진 세도(世道)는 더욱 손댈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종신토록 산골에서 은거하기로 정한 마음을 바꾸지 않은 것은 또한 지극한 슬픔이 마음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만약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와 같은 재주가 있다면 당연히 나가서 일을 할 것이요, 이미 나가서 나라를 안정되고 강성하게 만들어 복수설치(復讎雪恥)하는 계책에 뜻을 둔다면 청나라에 사신 가고 오랑캐 사신을 접대하는 것은 절목(節目)에 관계된 미세한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한번 해볼 만한 재주가 없다면 차라리 내 마음에 편안한 바를 지키는 쪽이 낫다.”
하였다.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이 일찍이 교지(敎旨)에서 청나라 연호를 삭제하여 출처(出處)의 절도(節度)를 삼기를 청했는데, 부군이 이르기를,
“그렇게 할 바에는 나가지 않았어야 한다. 이미 나간 이상 어찌 이러한 일에 구구하게 마음을 써서야 되겠는가. 이것은 일을 하는 모양새가 아니니, 끝내 명목상의 사업으로 귀결될 뿐이다.”
하였다. 항상 “하찮은 동남(東南)의 일만으로도 오히려 근심을 감당하지 못할 판에 어떻게 회복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라는 주 부자(朱夫子)의 말을 외우며 재삼 통탄하고 한스러워하였다.
부군은 비록 일찍이 나가서 세상을 위해 일한 적은 없었지만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지성(至性)에 근본하였다. 조정의 잘못된 정사, 허물을 꾸짖는 천재지변, 사방의 수한(水旱)ㆍ기근 등에 대해서 들으면 문득 수심 띤 얼굴로 우려하고 탄식하였고, 때때로 한밤중까지 잠들지 못하기도 하였다. 간혹 구언(求言)의 교지가 내려오면 비록 칩거하는 몸이라는 이유로 감히 분수를 넘어 헌의(獻議)하지 못했지만, 전후의 사양 상소에서 본원(本源)에 나아가 대의(大意)를 제시함으로써 애틋한 정성을 조금이나마 바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근시(近侍)가 어명을 받들고 이르면 전후(前後)로 사배(四拜)한 뒤 공경히 성지를 받들고, 왕인(王人)을 맞이하여 남쪽을 향해서 설치한 자리로 오르게 하였다. 그런 다음 북쪽을 향해 몸을 구부린 채 엄숙하게 앉아 숨소리조차 내서는 안 될 듯이 하면서, 먼저 성후(聖候)를 묻고 다음으로 먼 길을 온 노고에 사례하고 다음으로 황공하고 곤궁한 사정을 언급하였는데, 온화한 말씨와 겸손한 용모가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감동시켰다.
중년(中年)에 회천(懷川)의 일을 만난 것은 실로 횡역(橫逆)이었다. 침범하여 욕보이고 꺾고 속박한 것이 거의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으나, 부군은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스스로를 지켜 그 권도(權度)의 바름을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옛 정의(情義)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우옹(尤翁)’이라고 칭하였고, 그가 직접 상소한 이후에는 ‘회천(懷川)’이라고 칭하였으나 또한 한 번도 그 성명을 지척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날조한 상소를 보면 거의 원수보다 심하게 대한 것인데, 가만히 생각하면 원망스럽거나 노여운 줄은 모르겠고 도리어 그 미혹됨이 불쌍하게 여겨지니, 이것이 내 성정(性情)과 기질의 부족한 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나도 회천의 일에 잘못한 점이 없지 않으니, 사람들이 나더러 한 가지도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도 편파적인 논의이다. 후세에 은혜와 원망이 모두 잊혀진 다음에도 반드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의가 있겠지만, 다만 반드시 나를 두고 스승을 배반했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혹 내가 겪었던 일을 거울삼아 사제(師弟)라는 이름을 싫어하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면 이것은 내가 후세에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종제(從弟) 덕포공(德浦公 윤진(尹搢))이 일찍이 감탄하기를,
“우리 형의 의로운 처신은 어진 군자의 마음가짐이다.”
하였다.
저서로 문집 50권이 있고, 또 속집(續集)과 예서(禮書) 약간 권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행교(行敎)는 대사헌이고, 차남 충교(忠敎)는 부솔(副率)이며, 딸은 임진영(任震英)에게 출가하였다.
행교의 초취(初娶)는 도사(都事) 박태소(朴泰素)의 딸인데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재취(再娶)는 장령 송기후(宋基厚)의 딸로서 3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동원(東源)이고, 차남은 동준(東浚)이며, 막내 동함(東涵)은 진사이다. 딸은 현령 송익보(宋翼輔), 조한보(趙漢輔), 현령 오수채(吳遂采)에게 출가하였다. 충교는 한성량(韓聖亮)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동렴(東濂), 차남은 동엄(東淹)이며, 딸은 김상갑(金相甲), 권횡(權宖), 이정림(李挺霖), 이시연(李蓍延)에게 출가하였다. 임진영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사경(思敬)이고, 딸은 현감 박필기(朴弼基)에게 출가하였다. 동원은 1남 광집(光緝)이 있고 두 딸은 어리다. 동준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동렴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동엄은 2녀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아! 동원이 태어난 것이 거의 부군께서 예순 가까이 된 때였으므로 평소의 언행을 보고 듣지 못한 것이 실로 많았고, 사리를 분별할 만한 나이가 되어서도 미혹하고 어리석고 거칠고 서툰 탓으로 일용(日用)과 동정(動靜)을 잘 관찰하여 묵묵히 깨달아 알지 못하였다. 타계하신 이후로 부군의 진실된 면모가 갈수록 유실되는 것이 두렵기에, 집안에 전해 오는 문자를 고찰하고 고로(故老)들이 전하는 기록을 증거 삼은 다음 가정에서 직접 본 한두 가지 일화들을 참고하여 연도별로 뽑아 기록하였다. 그러나 도덕의 고하(高下)와 조예(造詣)의 천심(淺深)은 어두운 식견이 미칠 수 없는 바일 뿐만 아니라 자손이 사사로이 말할 것도 아니기에 감히 함부로 논하지 못하였고, 또한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과장된 말을 함으로써 우리 조고(祖考)께서 평생 지키셨던 겸양의 덕을 손상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당세의 붓을 잡은 군자가 가련히 여겨 채택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정미년(1727, 영조3) 7월에 손자 동원(東源)은 삼가 기술한다.


[주D-001]이미 …… 낫다 : 유자우(劉子羽)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1127년 정강(靖康)의 난리 때 부친 유겹(劉韐)이 맞서 싸우다 전사하자 상을 치른 뒤 출사(出仕)하여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촉(蜀) 지방을 지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병산(屛山)은 유자우의 동생 유자휘(劉子翬)의 호이다. 유자휘는 부친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마음에 벼슬에 대한 생각을 끊고 무이산(武夷山)으로 들어가 평생 강학에만 힘을 쏟았으며, 계모(繼母)와 형을 정성을 다해 섬겼다. 송대의 학자 주희(朱熹)가 이들 형제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마침내 대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宋史 卷129 劉子羽列傳, 卷193 劉子翬列傳》 《宋元學案 卷43 劉胡諸儒學案》
[주D-002]박사 가업(博士家業) : 가업을 계승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것으로, 여기서는 과거에 응시하여 사환(仕宦)하는 것을 뜻한다. 양(梁)나라 사마경(司馬褧)의 부친은 삼례(三禮)에 밝아 제(齊)나라의 국자박사(國子博士)에 이르렀는데, 사마경이 가업을 이어받아 관로에 나아가서 국가의 중요한 예제(禮制)를 주관했던 데서 나온 말인 듯하다. 《梁書 卷40 司馬褧列傳》
[주D-003]회옹(晦翁)이 …… 같았다 : 아버지의 친구에게 나아가 수학(受學)한 것을 말한다. 회옹은 송나라 주희(朱熹)이고, 호헌(胡憲), 이동(李侗), 유면지(劉勉之), 유자휘(劉子翬)는 주희의 부친 주송(朱松)의 친구들로, 주희는 부친의 명에 따라 이들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주숙(朱塾)은 주희의 아들이며, 동래(東萊)는 주희의 친구인 여조겸(呂祖謙)이다. 《宋元學案 卷49 晦翁學案下》
[주D-004]온공(溫公)이 …… 고사 : 스승이 자신의 제자를 천거한 고사이다. 온공은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이고, 유기지(劉器之)는 그의 제자 유안세(劉安世)인데, 사마광이 재상이 되어 그를 천거하여 비서성 정자로 삼았던 고사가 있다. 유안세는 매우 강직하여 직언(直言)을 잘하였기 때문에 ‘전상호(殿上虎)’라고 불리었으며, 장돈(章惇) 등 간신의 모함을 받아 영외(嶺外)로 축출되기도 하였으나, 심지(心志)가 매우 확고하여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의 위협에 흔들리지 않았던 인물이다. 《宋史 卷344 劉安世列傳》 《宋元學案 卷20 元城學案》
[주D-005]송나라 …… 않았으니 : 난리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유겹(劉韐)과 부친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은거한 유자휘(劉子翬)의 고사이다. 유자휘는 송(宋)나라 사람으로, 1127년 정강(靖康)의 난리 때 부친 유겹이 맞서 싸우다 전사하자 부친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마음에 벼슬에 대한 생각을 끊고 무이산(武夷山)으로 들어가 평생 강학에만 힘을 쏟았으며, 계모(繼母)와 형 유자우(劉子羽)를 정성을 다해 섬겼다. 송대의 학자 주희(朱熹)가 이들 형제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마침내 대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宋史 卷193 劉子翬列傳》 《宋元學案 卷43 劉胡諸儒學案》
[주D-006]유씨(劉氏)의 죄인 : 유씨는 유자우(劉子羽)ㆍ유자휘(劉子翬) 형제를 가리킨다. 세상에 나가 능력을 다해 국가를 위해 일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지도 못한다면 동일한 처지에서 바르게 처신했던 유씨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
[주D-007]범씨(范氏)의 의장(義庄) : 송나라의 명상 범중엄(范仲淹)이 종중(宗中)에 설치했던 전장(田莊)으로, 좋은 전지 수천 묘(畝)를 사들여서 그 조(租)를 거두어 비축해 두었다가 혼인이나 상장(喪葬) 등을 치르지 못하는 가난한 족인들에게 경비를 지급해 주었다. 《宋史 卷314 范仲淹列傳》
[주D-008]여씨(呂氏)의 독법(讀法) : 《여씨향약(呂氏鄕約)》에 매달 한 차례 집회를 갖고 규약(規約)을 읽어 익히도록 정한 규정을 말한다.
[주D-009]조정이 일신(一新)되었다 :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축출되고 서인(西人)이 정권을 잡은 것을 가리킨다.
[주D-010]뒷담을 …… 부류 : 은거하면서 절대로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고 각오하고, 임금이 징소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아나는 사람을 가리킨다. 안합(顔闔)은 임금이 재상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뒷담을 뚫고 달아나고, 단간목(段干木)은 제후가 만나려고 하자 담장을 넘어 피하였던 데서 나온 말이다. 《淮南子 齊俗訓》 《孟子 滕文公下》
[주D-011]정자(程子)의 …… 설명함으로써 : 정자가 선비로서 세상에 나가 임금을 섬기지 않고 자신을 깨끗이 하는 경우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말한다. 《주역》 〈고괘(蠱卦) 상구(上九)〉에 “왕후를 섬기지 않고 그 일을 고상히 한다.[不事王侯 高尙其事]”라고 하였는데, 이천(伊川) 정이(程頤)는 선비가 세상에 나가 임금을 섬기지 않고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는 경우를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즉, 도덕을 갖추고도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고결하게 스스로를 지키는 경우, 만족한 데서 그치는 도리를 알고 물러나서 스스로를 보존하는 경우, 자신의 능력과 분수를 헤아리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는 경우, 청렴함과 고결함으로 스스로를 지켜 천하의 일을 좋게 여기지 않고 홀로 그 몸을 깨끗이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정이는 또 “이들은 비록 처한 바의 대소(大小)와 득실(得失)은 있어도 모두 진퇴(進退)가 도(道)에 부합하는 자들이다.”라고 하였다.
[주D-012]삼척(三戚)의 …… 것 : 현종의 장인인 청풍 김씨(淸風金氏) 가문과 숙종의 장인인 광산 김씨(光山金氏) 및 여흥 민씨(驪興閔氏) 가문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D-013]옛사람이 …… 것 : 삼백편은 《시경(詩經)》을 가리킨다. 한나라 소제(昭帝)가 붕어한 뒤에 창읍왕(昌邑王)이 대통을 이었다가 음란한 행동을 일삼아 폐위되었는데, 이때 창읍왕의 사(師)로 있던 왕식(王式)도 여러 신하들과 함께 감옥에 갇혀 죽게 되었다. 사건을 다스리던 사자(使者)가 왕식에게 “사(師)라는 자가 어찌 간하는 글을 올리지 않았는가?”라고 하자, 왕식이 대답하기를, “저는 《시경》 305편을 조석으로 왕에게 가르쳤습니다. 충신과 효자를 다룬 시는 왕을 위해서 반복하여 외웠고, 위망(危亡)에 이르고 도를 잃은 임금에 관련된 시는 눈물을 흘리며 왕을 위해 진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간하는 글이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자가 왕식을 감사(減死)하는 것으로 논죄하였다. 《漢書 卷86 王式傳》
[주D-014]강도(江都)의 일 : 병자호란 당시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동지들과 목숨을 바치기로 약속했으나,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러서는 미복 차림으로 섬을 탈출하였던 일을 말한다.
[주D-015]윤휴의 일 : 윤휴(尹鑴)와 교제한 일을 말한다. 《명재연보》 권1의 숭정(崇禎) 47년 조에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주D-016]예설(禮說) : 이유태가 지은 〈갑인설(甲寅說)〉로, 갑인년(1674, 현종15) 제2차 예송 때 복제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이유태는 본래 1차 복제(服制) 논의에서 송시열과 같이 기년복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제2차 예송이 일어나자 이유태가 〈갑인설〉을 지어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당시 이유태는 이것을 송시열에게 보여 주면서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 달라고 청하였고, 송시열은 내용 가운데 일부를 수정하여 돌려주었다. 그 뒤에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고 송시열이 귀양을 가기에 이르렀는데, 송시열로부터 예론에 대한 종래의 견해를 뒤집어 화를 모면하려 했다는 지목을 받고 절교당하기에 이르렀다. 《草廬集 卷7 甲寅說, 年譜 卷3, 韓國文集叢刊 118輯》 《宋子大全 附錄 卷7 年譜6, 韓國文集叢刊 115輯》
[주D-017]곤액(困厄)을 …… 때였으므로 : 현종 말에 발생한 2차 예송(禮訟)에서 서인(西人)이 패배하면서 송시열이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장기(長鬐)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다시 거제도(巨濟島)로 이배(移配)되는 등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던 것을 말한다.
[주D-018]왕패병용 의리쌍행(王覇竝用義利雙行) : 사공(事功)을 이루기 위해서 왕도(王道)와 패술(覇術)을 겸하여 쓰고 의리(義理)와 사리(私利)를 함께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송나라 진량(陳亮)이 이학(理學)의 공리공담을 반대하고 사공과 실질적인 효용을 중시한 것에 대해서, 주희(朱熹)가 “이것은 사공을 위해서는 원칙을 무시한 채 왕도와 패술을 겸하여 쓰고 의리와 사리를 함께 행해야 한다는 말이다.”라고 비판하였던 말이다. 《晦庵集 卷36 與陳同甫書》 명재는 송시열이 정치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적한 것이다.
[주D-019]위 무공(衛武公)이 …… 일 : 춘추 시대 위 무공이 95세의 나이가 되어서도 위의(威儀)를 경계하는 시를 지어서 날마다 곁에서 외우도록 함으로써 늘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려고 노력했던 일을 말한다. 《詩經 大雅 抑》
[주D-020]한 무제(漢武帝)가 …… 일 : 한 무제가 일생 동안 서역(西域)을 개척하느라 국력을 탕진하였는데, 만년에 이르러서 이를 깊이 뉘우치고 서역의 윤대국(輪臺國) 땅을 포기한다고 공표하여 신민들에게 용서를 비는 조처를 취했던 것을 말한다. 《漢書 卷96 西域傳》
[주D-021]비간(比干)이 …… 일 : 죽음을 각오하고 간하겠다는 뜻이다. 비간은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의 숙부이다. 주가 음란무도한 행동을 일삼자 미자(微子)는 나라를 떠나고 기자(箕子)는 미치광이처럼 행동했는데, 비간은 “신하 된 자로서 죽음을 각오하고 간언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간하였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史記 卷3 殷本紀》 《論語 微子》
[주D-022]옛사람이 …… 의리 :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평소 친분이 깊었던 송익필(宋翼弼)의 처사에 실망하여 “문을 닫아건 채 사람들의 얼굴을 대하지 않고 죽고 싶을 뿐이다.” 하였던 것을 말한다. 《牛溪集 續集 卷5 與子文濬書, 韓國文集叢刊 43輯》
[주D-023]동춘(同春)이 …… 말 : 기관(機關)은 권모술수와 같은 말이다. “모두가 기관이다.[都是機關]”라는 말은 송준길(宋浚吉)이 송시열을 두고 권모술수를 일삼는다고 비판한 말을 가리키는데, 이에 대해서는 송시열과 명재 쪽의 주장이 다르다. 명재 후손들의 주장은, 당시 이유태가 송시열에게 준 장문 편지에서, 송준길이 송시열과 이유태 두 사람을 두고 “모두가 기관이다.”라고 하면서 특히 송시열이 더 심하다고 지목했다는 것이다. 한편 송시열 쪽에서는, 1669년(현종10) 동춘당 송준길과 민정중(閔鼎重)의 손자가 같은 해 사마시에 합격한 것을 축하하는 잔치 석상에서 송준길이 송시열에게 “언제 행장을 재촉하겠는가?”라고 묻자, 송시열이 “내가 어찌 행장을 재촉할 일이 있겠는가.” 하였고, 송준길은 “모두가 기관이구먼.”이라 하여 둘이 함께 웃었다고 한다. 즉 송시열이 귀향하려는 것을 알아챈 송준길이 언제 떠날 것인지를 물었는데, 송시열이 날짜를 미리 정하면 국왕으로부터 관학(館學) 유생들까지 모두 만류하고 나설 것을 염려하여 날짜를 미리 정하지 않고 기회를 보아 떠나기로 작정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농담을 했다는 것이다. 송준길의 이 말을 놓고 송시열과 명재의 사후에까지 양쪽 문인과 후손들 사이에서 공방이 펼쳐졌다. 《宋子大全 隨箚 卷6, 韓國文集叢刊 116輯》 《芝村集 卷3 上東宮辭大司憲仍爲師門辨誣書, 韓國文集叢刊 170輯》 《素谷遺稿 卷14 黃江問答辨》 “오로지 권모술수만 쓴다.[專用權數]”라는 말은 이유태가 〈갑인설(甲寅說)〉 문제로 송시열과 소원해진 뒤에 송시열을 비판한 말인 듯하나, 이유태의 말이나 글이 《명재유고》와 《초려집(草廬集)》에 모두 보이지 않아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다.
[주D-024]접때의 사람들 : 1684년(숙종10)에 상소하여 명재를 공격했던 송시열과 그 제자들을 가리킨다.
[주D-025]권력을 …… 삼고 : 권력을 잡은 자들은 당시의 집권 세력인 남인을 가리킨다. 남인이 1689년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집권한 뒤에 윤휴에 대한 복관을 청하면서 명재가 그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겼다는 등의 말을 하였고, 이이와 성혼을 문묘(文廟)에서 출향하기를 청할 때는 명재가 1681년 나양좌(羅良佐)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율곡은 실로 입산한 잘못이 있었다.”라는 등의 구절을 끌어다 썼던 것을 말한다. 《承政院日記 肅宗 15年 2月 26日》 《肅宗實錄 15年 3月 19日》
[주D-026]서찰에 관련된 일 : 명재가 1681년(숙종7)에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썼다가 보내지 않은 의서(擬書)를 1684년(숙종10)에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宋淳錫)이 박세채의 집에서 몰래 베껴 가서 송시열에게 보임으로써 양쪽의 갈등이 극화된 일을 말한다. 《명재연보》 권1 숭정 54년ㆍ57년 조에 보인다.
[주D-027]한 무리 : 송시열과 그 문인들을 가리킨다.
[주D-028]곤의(坤儀)가 …… 되자 : 숙종의 계비(繼妃)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복위(復位)된 일을 말한다.
[주D-029]두 상신(相臣)의 말 : 1684년(숙종10)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이, 명재가 송시열을 헐뜯었다며 예대(禮待)하지 말도록 청했던 것을 말한다.
[주D-030]송조(宋朝)의 고사 : 유현(儒賢)을 우대하기 위해 관직을 제수하지 않고 임금이 접견했던 전례(前例)를 말한다.
[주D-031]노산군(魯山君) : 조선의 6대 왕 단종(端宗)이다. 서인으로 강등되어 죽었다가 1681년(숙종7)에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으며, 1698년에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주D-032]신비(愼妃) : 중종(中宗)의 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를 가리킨다. 중종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왕후가 되었으나,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로서 반정에 반대했던 신수근(愼守勤)이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그 뒤 복위하자는 논의가 몇 차례 거론되었으나 무산되다가 1739년(영조15)에 이르러 복위되었다.
[주D-033]부사경중(父師輕重)의 의리 : 스승보다는 부친이 더 중하다는 숙종의 판결을 가리킨다.
[주D-034]한결같이 …… 말 : 자신을 낳아 준 아비,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 준 스승, 먹고살 수 있게 해 준 임금을 똑같이 섬기고 그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말이다. 《小學集註 卷2 明倫》
[주D-035]접때의 일 : 이에 앞서 송시열이 명재와 윤선거를 공격하고 배척했던 일을 가리킨다.
[주D-036]앞서 …… 것이네 : 앞서 전복된 수레는 송시열을 위시한 노론 세력을 가리킨다. 송시열과 그 문인들이 윤선거 부자를 공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였으나, 이 무렵에 와서는 숙종이 당시의 조처에 회의를 품고 명재를 예우하는 등 노론 쪽의 행위를 부정적으로 보는 처분을 내렸기 때문에 한 말이다. 이때 명재를 공격한 정호(鄭澔)를 파직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즉, 편파적인 시각으로 정치적 보복을 하려 들다가는 노론과 마찬가지로 곤경을 겪게 될 것이라고 소론 인사들에게 경고한 말이다.
[주D-037]교산(交山) : 교하현(交河縣) 법흥향(法興鄕)에 있는 양친의 묘소를 가리킨다.
[주D-038]이공(貳公) : 의정부 찬성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주D-039]숭자(崇資) : 숭품(崇品)과 같은 말로 종1품 관계(官階)를 지칭한다. 좌찬성이 종1품이므로 말한 것이다.
[주D-040]궁정(宮庭)의 변고 :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궁궐 안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인현왕후가 죽기를 기도했다가 인현왕후 사망 후에 발각된 일을 말한다.
[주D-041]성인(聖人)의 …… 정 : 《대학장구》 전(傳) 3장에서 문왕(文王)의 덕을 칭송하기를,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그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에 그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그치고, 아비가 되어서는 자애로움에 그치고, 국인과 더불어 사귀는 데는 신의에 그쳤다.[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 爲人父 止於慈 與國人交 止於信]”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42]강한(江漢)의 생각 : 강한은 본래 《시경》 〈대아(大雅)〉의 편명(篇名)으로, 주(周)나라 선왕(宣王)이 소공(召公)을 보내어 회남(淮南)의 오랑캐를 평정하게 한 공을 찬미한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명나라 신종황제가 임진왜란 때 원병(援兵)을 보내 준 은혜를 생각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주D-043]주자(朱子)의 …… 독서법 : 주희(朱熹)가 〈행궁편전주차(行宮便殿奏箚) 2〉에서 논한 독서법이다. 주희는 “학문을 하는 방도로는 궁리(窮理)보다 더 우선할 것이 없는데, 궁리의 요점은 반드시 독서하는 데 있으며, 독서하는 법은 순서를 따라서 정밀함에 이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정밀함에 이르는 근본은 또 몸가짐을 공경히 하고 뜻을 견지하는 데 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명재는 이것을 정해년(1707, 숙종33)에 이세덕(李世德)이 왕명을 받들고 와서 왕세자의 진강 책자를 물을 때도 언급한 바 있다. 《晦庵集 卷14》
[주D-044]책 말미에 …… 기록하였는데 : 강확(講確)이란 책을 엮을 때 의심나는 부분에 대한 의견을 물어서 확정한 것을 말한다. 《예기유편(禮記類編)》 권14 부록에 강확한 사람 7명과 참정(參訂)한 사람 14명의 이름이 실려 있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45]뇌우(雷雨)가 …… 의리 : 왕이 죄 있는 사람을 관대하게 용서하는 것을 뜻한다. 《주역》 〈해괘(解卦) 상(象)〉에, “뇌우가 일어남이 해(解)이니, 군자가 보고서 과실을 저지른 자를 사면하고 죄 있는 자를 관대하게 처분한다.[雷雨作 解 君子以 赦過宥罪]”라고 하였다. 명재는 원 상소에서 “바람과 벼락은 하루 종일 위엄을 보이는 일이 없고, 우레와 비는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은택이 있습니다.[風霆無竟日之威 雷雨有作解之澤]”라고 하며 자신을 비난했다가 처벌받은 신하들을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다. 《明齋遺稿 卷8 辭召命待罪疏, 韓國文集叢刊 135輯》
[주D-046]서쪽 …… 우려 : 청나라에서 해적 소탕에 나섰는데, 관병에게 살해되고 남은 적도들이 배를 타고 도주하자 예부(禮部)에서 황제의 뜻으로 조선에 자문(咨文)을 보내 방어에 유의하라고 통지하였으므로 조정에서 대비책을 강구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肅宗實錄 36年 9月 28日》
[주D-047]정강(靖康)의 난리 : 송나라 정강 2년(1127)에 금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수도 변경(卞京)이 함락되고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이 포로로 끌려간 변고를 가리킨다.
[주D-048]방상(方喪) : 임금상의 복제(服制)를 부모상과 같이 3년으로 하던 고제(古制)로,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주D-049]동원(東園)의 비기(秘器) : 궁궐에서 사용하는 관곽(棺槨)을 말한다. 동원은 한(漢)나라 때 관곽을 제조, 관리하던 관서로, 조선에서는 장생전(長生殿)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주D-050]살게 …… 똑같다지만 :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니 섬기기를 똑같이 해야 한다. [民生於三 事之如一]”라는 말에서 나온 구절이다. 세 분은 자신을 낳아 준 아비,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 준 스승, 먹고살 수 있게 해 준 임금을 말한다. 《小學集註 卷2 明倫》
[주D-051]논사(論思)의 장관 : 당시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정호(鄭澔)를 가리킨다.
[주D-052]대로(大老) : 명재를 가리킨다. 학문, 도덕 등을 겸비한 국가의 원로대신이나 유현(儒賢)에 대한 극존칭으로, 숙종 대에는 거의 송시열(宋時烈)에게만 사용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명재가 우의정에 제수된 1709년(숙종35) 무렵 그를 조정으로 초치하라는 유림의 상소에 대한 비답 등에 숙종이 명재를 ‘대로’로 지칭한 사례가 보인다. 《承政院日記 肅宗 35年 3月 12日, 4月 11日》 《肅宗實錄 42年 閏3月 18日》
[주D-053]당인(黨人)이 용사(用事)하게 되자 : 노론 김창집(金昌集)이 좌의정이 된 것을 가리킨다. 《명재연보》 권2 숭정 90년 조에 보인다.
[주D-054]홍의(弘毅)의 가르침 : 증자(曾子)가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아서는 안 되니,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論語 泰伯》
[주D-055]맹자(孟子)의 이 말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반드시 여기에 종사하고 미리 효과를 기대하지 말아서 마음에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라.[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 勿助長也]”라는 말로, 본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주D-056]염락관민(濂洛關閩) : 송나라 때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로, 송대의 대표 이학자(理學者)들을 가리킨다.
[주D-057]중인(衆人)이 …… 뜻 : 진(晉)나라 때 도간(陶侃)이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禹) 임금은 성인(聖人)임에도 불구하고 촌음(寸陰)을 아꼈으니, 중인은 분음(分陰)이라도 아껴야 한다.”라고 하였다. 《晉書 卷66 陶侃列傳》 《小學集註 卷6 善行》
[주D-058]갑자년 : 송시열의 제자 최신(崔愼)이 상소하여 배사론(背師論)을 제기한 해이다.
[주D-059]하찮은 …… 말 : 동남(東南)은 남송(南宋)의 조정을 가리킨다. 주희(朱熹)가 1188년에 올린 봉사(封事)에서 남송의 군신(君臣)이 강화(講和)를 주장하며 무사안일에 빠진 것을 지적하고, “기강이 해이해져 온갖 문제점이 속출하니, 하찮은 동남의 정국이 이러한데 어느 겨를에 국력을 결집하여 국가의 회복을 도모하겠는가.”라고 한탄하였다. 《晦庵集 卷11 戊申封事》
[주D-060]회천(懷川)의 일 : 부친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墓碣銘) 문제로 스승 송시열과 회니시비(懷尼是非)가 벌어지고 끝내는 의절했던 일을 말한다.
[주D-061]예서(禮書) : 《의례문답(疑禮問答)》으로, 1743년(영조19)에 증손 윤광소(尹光紹)가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모두 8권이다.

 

 명재유고 제32권
 발문(跋文)
《정재수첩(定齋手帖)》의 발문 신사년(1701, 숙종27)


아아, 이 책은 바로 우리 사원(士元 박태보(朴泰輔))과 명촌(明村) 나현도(羅顯道) 씨가 주고받은 서간을 모은 것이다. 명촌은 이 글들이 오랜 시간이 흐르다 보면 산일(散逸)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것을 모아 이 첩을 만들고는 근간에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가 손수 쓴 필적을 어루만지면서 그를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흘렀다. 사원은 생전에 매번 명촌에 대해 경복(敬服)하면서 말하기를, “확고하게 정도를 지키는 그의 태도는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다.” 하였는데, 지금 명촌이 이렇게까지 부지런히 그의 유묵(遺墨)을 수습하여 추모의 의미로 책을 만든 것을 보면 아아, 지기(知己)라고 이를 만하다.
이 책의 하권(下卷)은 바로 명촌이 변무(辨誣)하기 위해 상소하던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옛날 율곡 선생께서 ‘선(善)으로 의논을 진정시키고 불선으로 의논을 진정시키는 설[善定不善定之說]’을 말씀하셨는데, 만약에 선생께서 이런 정황을 보셨다면 뭐라고 하셨을지 모를 일이다. 지금 세도(世道)가 도도하여 거의 그 끝을 알 수 없는 지경이다. 후세에 이 책을 보는 자 가운데에는 반드시 장차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아, 애달프다.

[주D-001]명촌이 …… 일 : 1687년(숙종13) 2월에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윤선거의 행적에 대해 비난하자, 윤선거의 문인인 명촌 나양좌(羅良佐) 등이 그에 맞서 변무하는 상소를 올린 일을 말한다. 《국역 명재유고 12 명재연보 60년 정묘》
[주D-002]율곡 …… 말씀하셨는데 : 한국문집총간 44집에 수록된 《율곡전서(栗谷全書)》 권7 〈대백참찬인걸소(代白參贊仁傑疏)〉에 보인다. 분분한 의논을 진정시키는 방법에 선으로 진정시키는 방법과 불선으로 진정시키는 방법이 있는데, 군자가 모든 일을 합당하게 하여 사람들을 심복시키는 것이 선으로 진정시키는 방법이고 소인이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에게 화를 입혀 사람들이 감히 자기 말을 어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불선으로 진정시키는 방법이란 것이다. 윤증이 율곡의 말을 인용한 것은 송시열이 불선의 방법으로 여론을 호도하였다고 비판한 것이다

명재유고 제32권
 발문(跋文)
생질 박사원(朴士元)의 가첩(家帖) 뒤에 쓰다 정사년(1677, 숙종3)


아아, 이 책은 우리 박형 숙후(朴兄叔厚)의 유적(遺蹟)을 기록한 것이다. 대체로 박형이 세상을 떠난 뒤에 우리 누님이 그의 책 상자를 수습하여 삼가 보관해 오고 있었는데, 양아들 박태보(朴泰輔)가 장성하자 일가들에게 있던 그의 서찰까지 모아서는 죽 이어 붙여 장정(裝幀)하여 이 첩을 만들고, 거기에 다시 그 집안에서 기록한 유사(遺事) 몇 가지를 취해다가 덧붙였다. 근간에 그 가첩을 꺼내어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마치 그의 말소리와 모습을 다시 접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일찍이 박형이 자질이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나고 뜻이 원대함에도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슬퍼하였는바, 이것이 비록 지엽적인 그의 필묵이기는 하지만 보는 자들 또한 그 재덕의 일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쓴 글은 내가 대략 그의 묘지문(墓誌文)에 기록한 바 있는데, 이를 보면 옛사람이 “밝고 밝은 그 마음을 오히려 알 수 있을 듯하다.”라고 한 말이 실감나며, 그 글을 되풀이하여 읽다 보면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나는 여기에서 또 다른 감회가 일어난다. 자식은 부모의 슬하에서 태어나 부모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리워하는 마음이 줄어들어 세월이 갈수록 그만큼 잊히지 않는 경우가 거의 드물다. 지금 대를 이은 양자는 태어난 것이 늦어서 양부를 직접 보지 못했으면서도 양자로서의 도리에 최선을 다하고 망자(亡者)를 섬기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부모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 맺혀 있고 얼굴에 드러나는 등 매사 부모를 추억하며 잊지 않는다.”라고 한 뜻을 실천하는 데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손때가 묻은 글들을 공경히 받들어 죽을 때까지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다하였으니, 진실로 효심이 독실하지 않으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아아, 박형은 후손이 대대로 번성하는 복을 누릴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내가 듣기에 사람의 행실 중에 효도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하니, 효도는 실로 모든 행실의 근본인 것이다. 지금 양자가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하였으니,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훈계를 할 필요도 없이 이런 효성을 임금에게 옮겨 충성을 다할 것이다. 부지런히 배우고 직분을 다함으로써 훌륭한 명성이 밝게 빛나 부모의 이름을 더욱 드러냄은 물론, 효도하는 집안의 기풍이 후손들에게 영원히 미쳐 가게 될 것이니, 이것이 어찌 효도의 결정체가 아니겠는가. 대를 이은 양자는 이 점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주C-001]박사원(朴士元) : 박태보(朴泰輔, 1654~1689)로, 사원은 그의 자이다. 박태보는 원래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서계의 형 박세후(朴世垕)가 후사(後嗣) 없이 요절하자 그의 양자로 들어갔다.
[주D-001]박형 숙후(朴兄叔厚) : 박태보의 양아버지 박세후(朴世垕, 1627~1650)로, 숙후는 그의 자이다. 명재에게는 자형(姊兄)이 된다.
[주D-002]스스로를 …… 글 : 박세후가 자신의 일기에다 스스로를 반성하고 경계하는 내용의 글을 적어 놓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명재가 쓴 그의 묘지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明齋遺稿 卷36 潘南朴君墓誌銘》
[주D-003]옛사람이 …… 말 : 주희(朱熹)가 말하기를, “윤화정(尹和靖)이 한 서실의 이름을 삼외재(三畏齋)라고 하였는데, 이는 《논어》의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인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년에, 성현이 제시하신 ‘기운을 다스리고 마음을 기르는 요점’을 작은 종이에 손수 써서 벽에 붙여 놓고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나는 삼가 생각건대, 선현들은 이처럼 덕행과 학업을 닦는 데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죽은 뒤에나 그만두었으니, 그 밝고 밝은 마음을 오히려 알 수 있을 듯하다.” 하였다. 《心經附註 卷2 禮樂不可斯須去身章》 여기서는 박세후가 자신을 경계하는 글을 써서 스스로를 반성한 자세가 윤화정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박세후의 글을 보면 주희의 그 구절이 생각난다는 뜻이다.

명재유고 제34권
 제문(祭文)
사원(士元)에게 제사 지낼 때의 제문


유세차 숭정 기사년(1689, 숙종15), 초하루가 병인일인 6월 10일 을해일에 유봉(酉峰)에 병들어 칩거해 있는 이 사람은 사원이 땅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도 가서 영결하지 못하게 되었기에, 동생 윤졸(尹拙)을 대신 보내어 영전에 술 한 잔을 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지어 고하는 바이다.
아아, 인재를 찾기가 어렵다는 탄식은 삼대(三代) 때부터 있어 왔는데, 더구나 지금과 같은 말세에 더욱이 어찌 쉽게 찾을 수 있겠는가. 그대와 같은 재주를 옛사람에게 비해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세에서 찾아본다면 그 걸출함에 짝할 사람이 없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 그대는 총명함이 매우 뛰어나고 사리에 대한 고찰이 철저하므로 그 역량을 확충해 가면 선현(先賢)의 학문을 충분히 계승할 수 있으며, 식견과 사려가 매우 깊은 데다 견지한 뜻이 강하고 바르므로 그 뜻을 행해 간다면 세도(世道)의 중임(重任)을 충분히 맡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비루함으로는 그대를 따라갈 수 없지만 내 심지 확고부동하여 실로 평생 뜻을 같이할 것을 기약하였는데, 그대가 어찌 갑자기 이런 지경에 이름으로써 세인들이 일컬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대가 단지 공원로(孔原魯)나 추지완(鄒志完)이 이룬 정도를 행하였고 성대한 조정에 간언(諫言)한 사람을 죽였다는 오명을 끼치게 한 정도로만 인식되게 하였는가. 아아, 하늘이여. 도대체 이 세상에 그대를 태어나게 하고 그대에게 재능을 부여해 준 것은 과연 무슨 뜻이었단 말인가.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그 당시에 뇌성벽력이 쳐서 하룻밤 사이에 원통한 피가 조정의 뜰에 뿌려졌는데, 그때 그대의 일편단심은 귀신이 옆에 있었어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었고 비록 사람들이 대신 죽고자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대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서도 구차하게 모면하려 하지 않았고 죽음에 임해서도 임금을 속이지 않았으니, 그때 몸은 비록 죽어 갔지만 견지한 뜻만은 빼앗을 수 없었다. 그때 그대의 철석같이 단단한 심장과 충의로 뭉쳐진 간담은 밝은 태양과 빛을 겨룰 만큼 열렬한 것이었으니, 이와 같은 신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후일 성상께서 비록 후회하였지만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되돌릴 수 있었겠는가. 아아, 그때 그 뜰 안에 가득 모여 있던 자들치고 그 누군들 사람의 마음이 없었겠는가마는, 임금의 잘못을 익숙하게 보면서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니, 저 비루한 사람들을 어찌 꾸짖을 것이 있겠는가. 우리 조정의 인후(仁厚)한 기풍이 하루아침에 끊어지고 병들게 되었다는 탄식이 어찌 곽임종(郭林宗)의 사사로운 통곡에 그칠 뿐이겠는가.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재앙이나 복이 바라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이르러 오는 경우는 모두 천명이라고 할 수 있기에, 군자는 원칙대로 행하면서 그 천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바르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곧으면서도 남의 단점을 들추는 일이 없이 논의는 항상 대체(大體)를 따르고 각박한 것을 중시하지 않으며 기개와 절조는 충후한 데에 바탕을 두어 일찍이 편벽된 적이 없는 그대로서는, 의당 형벌의 화를 당하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결국에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듣건대 그대가 국문장에 나아갔을 때 또 그 태도가 차분하고 언사가 분명하여 듣는 사람들을 절실하게 만들고 뭔가를 느끼게 하는 논리만 있었고 저촉이 되거나 반발을 부르는 기운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런 화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 그대의 천명이 아니겠는가. 그 기이한 화를 당한 행적을 보면 그대의 선조(先祖)인 반남(潘南) 문정공(文正公)과 거의 같다. 문장(文章)이나 지행(志行)도 모두 최고의 수준이라고 할 만한데, 문정공의 경우에는 자손들이 번성하여 지금까지 우리 동방의 으뜸가는 가문이 되었다. 이를 보면 하늘이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것이 오래될수록 더욱 드러나는 법인데, 어찌하여 그대에게 있어서만은 유독 한 점의 혈육도 남겨 두지 않았단 말인가. 그 재앙은 같은데 받은 복이 같지 않으니, 공의 경우에는 명이 거듭 불행한 것이 또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너무나 불쌍한 우리 누님이 일찍 남편의 상을 당하고 그대를 얻어서 아들로 삼았는데, 그대는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일가가 모두 칭송하고 부러워하였다. 게다가 그대는 또 묘령의 나이에 입신양명하여 누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것으로 봉양하였으니, 이는 우리 백고모(伯姑母)에게 이혜중(李惠仲)이 있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작년에 그대가 파주(坡州)의 관아에 있을 때 누님의 면전에서 만년의 복을 경하드렸는데, 그때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우리 누님이 노년에 또 이런 혹독한 고통으로 애간장이 녹아도 호소할 곳이 없게 될 줄을. 아아, 하늘이여.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나로서는 그대에게 기대한 것이 실로 많았다. 우리 선친이 남긴 글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있는데, 내가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탓으로 선친께 욕을 끼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 그 문집을 일찍 세상에 내놓아서 취모멱자(吹毛覓疵)의 빌미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장차 세상의 분란이 다소 진정되기를 기다려 그대에게 그 문집의 편정(編訂)을 맡겨 간행함으로써 영구히 후세에 남길 작정이었다. 그리고 또 나는 항상 사람들이 참소를 당하는 재앙이 실로 후세에까지 유전되는 것을 애통하게 여겼다. 예컨대 율곡(栗谷)이 입산(入山)했다는 비방이나 우계(牛溪)가 선비를 죽였다는 무함 같은 것이 그것으로, 이는 단지 당시의 혼란 속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일종의 사악한 설이 지금까지 전습되어 그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선친께서 당하신 일도 어찌 양현(兩賢)보다 심하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한 줄기 정기(正氣)를 지닌 채 거센 물결 속의 지주(砥柱)처럼 우뚝하게 서서 명실의 구분을 매우 분명히 하고 공사(公私)를 확실히 분변함으로써 사류(士類)의 나아갈 방향을 인도하고 세상의 교화를 돕는 것을 내 오직 그대에게 의지하려고 했었는데, 이러한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사문(斯文)의 대들보가 무너지는 바람에 다른 부류들이 은밀히 좋아하고 있으니, 우리 도(道)에 있어서의 재앙을 또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지난번에 내 조카 가교(可敎)를 잃었는데 지금 다시 그대를 잃고 말았으니, 노쇠함과 병으로 인해 죽을 날이 가까운 나로서는 이 실낱같은 목숨을 누구에게 의탁한단 말인가. 도와주는 사람 없는 맹인처럼 또한 죽기 전까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아, 너무나 애통하다.
나는 처음에 그대가 고문을 당하던 당일에 죽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하늘이 실로 그대를 살리려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였고, 또 피와 살이 터지고 문드러진 뒤에도 평소와 같이 정신이 의연하였다는 얘기를 듣고는 또 ‘마음이 가는 곳에 기운도 반드시 따라가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결국 끝내는 무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대가 남쪽으로 오면 큰길에서 만나 악수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러 날 소식이 없다가 부음이 갑자기 이르러 오니,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끝났으니, 너무나 슬프고 애통할 뿐이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다가 도리어 죄를 더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다가 그 봉양을 다 마치지 못하고 말았다. 또 평소에 지니고 있던 포부가 이제는 한결같이 모두 수포가 되고 말았으니, 그대 스스로 불행을 애도해 보건대 그대 또한 어찌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너무나 슬프고 애통하며 이제 모든 것이 끝나 버리고 말았다.
지금 그대의 대인(大人)께서 그대를 장차 거처하고 있는 곳의 옆 산기슭에 묻으려 하고 있는데, 인간 세상 부자간의 정리에서 오는 그 애통함을 어찌 차마 다시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재주가 없는 아들이 병사하였더라도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그대처럼 상리(常理)에서 크게 벗어난 죽음을 당한 경우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나는 병든 몸으로 칩거하고 있는 중이라 사람 간의 도리를 거의 못하고 있기에, 달려가서 마주하고 한 번 통곡한 뒤에 그대의 관이 땅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홀로 궁벽한 산골짜기에서 울고만 있을 뿐이니, 나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아아, 그대가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은 뒤로 정신이 하나도 없어 한 달이 지나도록 진정할 수가 없다. 오래 이 세상에 남아서 끝없는 세상의 변화를 눈으로 보기보다는 차라리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고 싶지 않다. 곧 있으면 나도 저승으로 그대를 따라가지 않겠는가. 글로 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고 통곡으로도 내 슬픔을 다 풀 길이 없다. 밝고 밝은 영령은 부디 이런 마음을 알아주길 바란다. 아아, 너무나 슬프고 애통하다.


 

[주C-001]사원(士元) : 박태보(朴泰輔, 1654~1689)의 자이다. 호는 정재(定齋)이다. 박세당(朴世堂)의 아들인데, 숙부인 박세후(朴世垕)에게 입양되었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던 도중에 노량진에서 죽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豐溪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주D-001]공원로(孔原魯)나 추지완(鄒志完) : 공원로는 송나라 인종 때의 신하인 공도보(孔道輔, 1086~1139)로, 원로는 그의 자인데, 1033년에 곽 황후(郭皇后)가 폐위되자, 황후를 경솔히 폐위시켜서는 안 된다고 간하다가 지방으로 좌천된 인물이다. 《宋史 卷297 孔道輔列傳》 추지완은 송나라 철종(哲宗) 때의 신하인 추호(鄒浩, 1060~1111)로, 지완은 그의 자인데, 철종과 휘종(徽宗) 2대에 걸쳐 유 황후(劉皇后)의 복위를 간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방으로 좌천된 인물이다. 《宋元學案 卷35 陳鄒諸儒學案 鄒浩》
[주D-002]하룻밤 …… 뿌려졌는데 : 숙종조에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박태보가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것이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궁궐 뜰에서 국문을 당하였다. 그 당시 박태보는 온갖 고문을 당하여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말투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고 한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3]후일 …… 후회하였지만 : 박태보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안 되어 숙종이 크게 후회하면서 관직의 회복을 명하였고, 그 뒤 1694년(숙종20)에 중궁을 복위시키고 박태보에게 정경(正卿)을 추증하고 사제(賜祭)와 정려(旌閭)를 하도록 조처하였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4]곽임종(郭林宗)의 사사로운 통곡 : 곽임종은 후한(後漢) 때의 명현(名賢)인 곽태(郭太, 128~169)로, 임종은 그의 자이다. 그는 학문과 덕망이 뛰어나 당대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영제(靈帝) 건녕(建寧) 원년(168)에 태부(太傅)인 진번(陳蕃)과 대장군 두무(竇武)가 환관의 전횡을 막기 위해 모살(謀殺)하려다가 실패한 일이 벌어진다. 그 일로 오히려 진번과 이응 등 100여 명이 피살되고 이어 700여 명이 유배당하거나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때 곽태가 이 소식을 듣고는 들에서 통곡하며 말하기를, “현인이 이제 사라졌으니 나라가 병들게 되었다는 시가 있는데, 이제 한나라도 망하게 되었구나.[人之云亡 邦國殄瘁 漢室亡矣]” 하였다 한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주D-005]반남(潘南) 문정공(文正公)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충신인 박상충(朴尙衷, 1332~1375)으로, 반남은 그의 호이다. 자는 성부(誠夫)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당시 친명파(親明派)의 한 사람으로 친원파(親元派) 이인임(李仁任)을 주살할 것을 주장하여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귀양 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壄隱逸稿 卷4 附錄 遺事》
[주D-006]그대에게 …… 말인가 : 박태보는 이후원(李厚源)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모두 요절하였고 딸 하나만 남았다. 그래서 형 박태유(朴泰維)의 작은아들인 박필모(朴弼謨)를 후사로 삼았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7]누님이 …… 삼았는데 : 박태보의 아버지는 박세당(朴世堂)이다. 박세당은 형 박세후(朴世垕)가 일찍 죽자 박태보를 그의 후사(後嗣)로 보냈는데, 이 박세후의 부인이자 박태보의 양어머니가 바로 명재의 누나이다.
[주D-008]묘령의 나이에 입신양명하여 : 박태보는 1675년(숙종1)에 22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677년 24세 때 알성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09]백고모(伯姑母)에게 …… 있다 : 이혜중은 이민적(李敏迪, 1625~1673)으로, 혜중은 그의 자이다. 이경여(李敬輿)의 아들로, 작은아버지 이정여(李正輿)에게 입양되었는데, 이정여의 부인이 바로 명재의 고모이다. 여기서는 명재의 고모가 이민적을 헌신적으로 키웠고 이민적도 효성이 지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박태보도 명재의 누나에게 지극한 효자였다는 말이다.
[주D-010]작년에 …… 경하드렸는데 : 1688년(숙종14)에 박태보가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나가게 되고, 그해에 명재의 누나 환갑연을 파주 관아에서 치렀는데, 이를 말한 것이다. 《明齋遺稿 卷35 朴士元墓表》
[주D-011]노년에 …… 줄을 : 기사환국 때 박태보가 고문을 받고 유배 가다가 죽은 것을 말한다.
[주D-012]율곡(栗谷)이 입산(入山)했다는 비방 : 율곡 이이(李珥)가 젊은 시절에 잠시 금강산(金剛山)에 입산하여 선(禪)에 뜻을 둔 것을 두고 명재 당시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라는 설이 유포된 것을 말한다.
[주D-013]우계(牛溪)가 …… 무함 : 기축옥사(己丑獄事) 때에 우계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억울하게 죽도록 했다는 경상도 유생들의 상소로 성혼의 관직이 추탈(追奪)되기도 한 것을 말한다.
[주D-014]오늘날 …… 일 :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의 성이 함락되자 남한산성으로 가서 병든 부친을 뵙고 죽겠다고 하고는 미복(微服) 차림으로 빠져나온 것을 두고 노론(老論)으로부터 공격받은 일을 말한다.
[주D-015]그대의 대인(大人) : 박세당을 말한다.
[주D-016]그대를 …… 있는데 : 박태보는 양주(楊州) 수락산(水落山) 서쪽 장자곡(長者谷)에 매장되었다.

명재유고 제34권
 제문(祭文)
누님에게 제수를 올리고 고하는 글 신미년(1691, 숙종17)


아아, 누님께서는 항상 동생들이 노병으로 칩거하여 자주 못 찾아오는 것을 매우 아쉬워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생들이 모두 이렇게 왔는데, 누님은 어디로 가셨단 말입니까. 이제는 이미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져 그 모습을 뵐 수 없게 되었으니, 평생 후회하고 애통해한들 다시 어떻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아아, 너무나 애통합니다. 매번 편지에서 “빨리 죽어 이 끝없는 슬픔과 번뇌를 영원히 잊고 싶다.”라고 소원하시더니, 이제야 누님은 그 소원을 이루게 되셨습니다. 그러나 부모 잃고 근근이 살아가는 이 동생들로서는 이제 더 이상 믿고 의지할 분이 없게 되었는데, 이것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아아, 너무나 애통합니다.
작년에 참화를 겪은 뒤라 속히 누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잠시 상을 치른 곳에서 멀어지면 슬픔과 고통의 만분의 일이나마 덜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말씀드렸더니, 끝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올봄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을 뒤에는 그렇게 하겠다.”라는 말씀이 있으셨기에, 바야흐로 집 한 채를 지어 가족들이 단란하게 모여 살면서 시봉(侍奉)할 계획을 세우고는 날마다 오직 그 날짜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화가 전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또 하늘에서 이르러 올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아아, 하늘이여. 한번 묻고 싶습니다. 우리 누님의 착하고 훌륭한 덕행과 지극히 어진 심성으로는, 사리로 헤아려 볼 때 의당 온갖 복을 내려 주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이렇게 심한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아, 너무나 애통합니다.
금릉(金陵)의 구묘(舊墓)는 산운(山運)으로 볼 때 적합하지 않다 하여, 누님의 무덤을 이곳에 임시로 두기로 하였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님은 반드시 구묘 가까이로 돌아가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뼈와 살은 땅속에 묻혀도 혼기(魂氣)는 통하는 법이니,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또 새로 쓴 아들의 무덤도 뒤에 있으니, 우선 서로 의지하고 있다가 내년 봄에 구묘를 이장할 때 옮겨 합장해도 그다지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 의탁할 곳이 그 집안인데, 이 박씨 집안이 영락해 있다 보니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그 형세상으로는 서로 합치는 것이 옳지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다시 그 집안에서 잘 헤아려 누님의 무덤이 있는 이곳으로 구묘를 옮겨 모심으로써 길이 제사를 받드는 데 편리한 방책을 쓰는 것도 한 가지 방도가 될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고 보니 더욱 오열을 하게 됩니다. 아아, 너무나 슬프고 애통합니다.
이제 동생들이 오래 여기에 머물 수가 없어 복토(復土)를 한 뒤에는 다시 돌아가려 합니다. 와서도 뵐 수가 없고 간다 해도 말이 없으니, 이 답답한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본래는 이 글을 통해 평소의 애통한 심정을 다 드러내어 누님과 길이 영결하려고 하였으나, 눈물이 앞을 가리고 슬픔으로 가슴이 먹먹하여 붓을 잡아도 글이 되지 않습니다. 내년에 이장할 때 잦아드는 이 목숨이 만약 생존해 있으면 다시 와서 통곡하게 될 것이니, 그때 다시 글을 지어 저의 속마음을 고하겠습니다. 아아, 누님은 아마도 나의 말을 듣고 나의 슬픔을 아실 것입니다. 아아, 너무나 슬프고 애통합니다.


[주C-001]누님 : 박세후(朴世垕)에게 시집간 누님을 말한다. 남편이 일찍 죽자 박태보를 후사(後嗣)로 삼았다.
[주D-001]참화 : 박태보가 참혹한 고문을 받고 유배 가다가 죽은 것을 말한다.
[주D-002]금릉(金陵)의 구묘(舊墓) : 금릉은 지금의 김포(金浦)이고, 구묘란 박세후의 묘소를 말한다.
[주D-003]이곳 : 양주(楊州) 수락산 서쪽 산기슭을 말한다.
[주D-004]새로 …… 무덤 : 박태보의 무덤을 말한다.
[주D-005]내년 …… 것입니다 : 박세후의 무덤이 산운이 좋지 않다 하여 이듬해 봄에 이장하려고 하는데, 그때 누나의 무덤도 옮겨서 같이 합장해도 늦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명재유고 제34권
 제문(祭文)
서계(西溪)에게 제사 지낼 때의 제문 계미년(1703, 숙종29)


아아, 너무나도 애통하여라 / 嗚呼哀哉
우리 공은 / 惟公
반남공 맥을 이은 후손이시고 / 潘南一脈
선조 야천 유풍을 이어받았지 / 冶川遺風
공의 재덕 밖으로 환히 빛났고 / 英華彪外
진실함과 신의를 맘에 지녔네 / 忠信在躬
나간 때가 시대와 서로 어긋나 / 進與時違
물러나서 곤궁함을 고수하였지
/ 退而固窮
천지에 부끄러움 하나 없도록 / 俯仰無怍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네 / 一其始終
아아, / 嗚呼
나라의 큰 동량이 될 만하다고 / 人嘗期公
사람들이 공에게 기대했었지 / 可當棟隆
그러나 불러도 안 움직인 건 / 招麾不動
금세엔 오직 공이 유일하다네 / 今世惟公
어째서 높은 자리 마다하고서 / 曷不廊廟
시골집에 파묻혀 은거하였나 / 而沒蒿蓬
탐욕을 청렴하게 만드는 절개 / 廉頑一節
그 어찌 크나큰 공이 아니랴 / 抑豈非功
아아, / 嗚呼
큰아들 직언하다 목숨을 잃고 / 大兒死直
작은아들 충언으로 목숨 잃으니 / 小兒死忠
한집안에 훌륭한 이 다 모인 건 / 一家萃美
고금에 어느 집안 이와 같으랴 / 今古誰同
양주 땅에 위치한 수락산 서쪽 / 水落之西
도봉에서 보자면 동쪽 언덕에 / 道峯之東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묻히니 / 父子同歸
그 정기 더욱더 크다 하겠네 / 正氣彌穹
아아, / 嗚呼
어느새 세도 이미 땅에 떨어져 / 世道旣喪
시비와 흑백이 뒤섞인 세상 / 緇素相蒙
쏙닥쏙닥 참소하는 못된 이들이 / 緝緝翩翩
번번이 임금을 기만하였네 / 儘欺天聰
그러나 사람 마음 쉬이 안 속고 / 人心難誣
천리는 자연스레 공변되나니 / 天理自公
백 년 뒤엔 가렸던 진실 드러나 / 百載之後
어둠을 깨치고서 훤히 밝으리 / 昭如發矇
아아, / 嗚呼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는 나 / 後死殘喘
온갖 감회 마음에 교차한다네 / 百感縈中
의리로는 조문이 당연하지만 / 義當素車
칩거한 벌레와 똑같은 신세 / 身作蟄蟲
술 한 잔에 이 글로 유식하자니 / 緘辭侑觴
마음 다 표현할 길이 없구나 / 言不盡衷
말은 비록 다 하지 못한다 해도 / 言雖不盡
그대와 내 마음 서로 통하리 / 方寸可通
아아, 너무나도 애통하여라 / 嗚呼哀哉

초본(初本)
아아, 지난 경진년(1700, 숙종26) 가을, 마지막으로 선영(先塋)을 찾아 하직을 드리기 위해 떠난 길에 누이의 무덤까지 돌아보고는 공과 함께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그때 공은 나의 얼굴이 속티를 벗지 못하였다고 하였고, 나는 공의 총명이 줄지 않은 것에 대해 감탄하였습니다. 봄추위와 가을더위처럼 사람이 늙어 강건한 것은 결국 오래갈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서로 웃으며 이별하였는데, 이 이별이 실로 영원한 이별이 될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어느덧 무덤에서 공을 장사 지낼 날이 다가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저는 근근이 명을 이어 가는 거의 죽어 가는 목숨이라 장사(葬事)에 가 볼 길이 없습니다. 이에 대략 슬픈 감회를 적어 멀리서나마 술 한 잔을 올려 유식(侑食)하게 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아아, 공은 반남공의 후예이고 야천의 후손입니다. 공은 재덕이 밖으로 환히 드러났고 진실함과 신의를 안에 지녔으며, 그 뜻과 식견은 심원(深遠)하였고 지조는 확실하게 지키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기국과 역량은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다들 공이 정계에 나가서 중요한 지위에 오르면 당연히 임금을 바로잡고 정사를 바르게 하는 공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명(召命)을 받고도 움직이지 않은 절조를 지녔기에 나라의 위대한 야인(野人)이 되셨습니다. 이미 그 뜻이 시대와 어긋나서 물러나겠다고 일찍 판단한 뒤로는, 명리의 길은 영영 끊어 버렸고 안빈낙도하는 빈한한 선비가 되어 농사짓고 나무하는 것을 생애로 삼았으니, 그 뒤로는 단지 고상한 풍도와 우뚝한 의표가 세상 밖에 초연한 것만 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공이 비록 조정에서 뜻을 펼치지는 못하였지만, 탐욕스런 사람을 청렴하게 만들고 나약한 사람이 확고한 뜻을 지니게 만드는 것으로 세도(世道)에 도움을 준 점에서는, 어찌 그 공(功)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공은 본래 예문관과 홍문관에서 활약한 분이므로 경연(經筵) 석상이나 정부의 고위직이 알맞은 자리인데, 나무하는 거친 시골에서 노닐며 산골에서 험난하게 사는 길을 택하였으니, 마음은 비록 형통하였으나 몸은 여의치 못했고 뜻은 비록 펼쳤으나 도(道)는 굴곡졌다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두 아들이 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명하였으나 큰아들은 직언을 하다 죽고 작은아들은 충언으로 죽었습니다. 비록 그 맑은 이름과 빼어난 절조가 크게 나라와 집안의 빛이 되기는 하였지만 난초가 꺾이고 구슬이 깨지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본 셈이니, 집안사람의 정리(情理)로 볼 때에는 세간에 보기 드문 참혹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아, 그리고 올여름의 일은 또 뜻밖에 벌어진 일인데, 이는 쏙닥거리며 참소하는 무리들이 임금을 기만한 것입니다. 만약 자애로운 성상의 특별 배려가 아니었다면 먼 섬으로 유배 갔다가 유골을 수습해 와야 하는 지경을 거의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어찌 공의 집안처럼 선을 행하는 데에 힘을 기울이며 굽히지 않고 바른 도리를 지켜 가는 집안에 유독 이러한 재앙이 많단 말입니까. 아아, 너무나 애통합니다.
공의 이른바 《사변록(思辨錄)》은 차분히 오랫동안 침잠하여 연구한 것을 기록하여 권질(卷帙)을 이룬 것입니다. 비록 간간이 선현의 뜻을 넘나드는 곳이 있기는 합니다만, 생각해 보면 공의 뜻이 어찌 감히 이설(異說)을 세우려는 데에 있었겠습니까. 요컨대 의심을 질정(質正)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회재(晦齋)나 포저(浦渚) 같은 여러 선정(先正)들도 일찍이 했던 것입니다. 현석(玄石)이 이른 바 “한집안 내에서 의견이 비록 다르더라도 집안을 위하는 취지에서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 적절한 비유라고 할 만합니다. 신미년(1691, 숙종17) 중하(仲夏)에 석림(石林)의 회합에서 형이 상자에서 그 책을 꺼내 보여 주었는데, 나는 그때 누님을 잃은 슬픔이 극심하여 그 책을 차분히 보지 못하고 《논어》와 관련된 설만 대략 보았습니다. 대부분 모두 평이하면서도 절실한 것으로 구이지학(口耳之學)의 공허한 설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에 마음으로 매우 기뻐하면서 ‘한가한 가운데 얻은 것으로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만 책을 보는 데 있어 너무 얕게 보고 너무 국한 지어 보려는 병폐가 있는 듯하여 대략 저의 견해를 피력하여 논변하였으나 의견이 일치되지는 않았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설의 경우에는 미처 두루 연구하지 못하였기에, 돌아온 뒤에 그 책을 빌려 와서 한번 검토할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눈이 침침하고 정신이 혼미한 데다 글을 짚어 가며 읽는 것은 이미 포기한 상태라 다시 생소한 공부를 할 수가 없었기에 끝내는 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타고난 능력 면에서 생각이 꽉 막히다 보니 곳곳에서 일을 간과함으로써 친구 간의 직분을 크게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을 꼭 늦다고만 할 수는 없고 타산지석도 나의 옥을 다듬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기에, 편지를 써서 대략이나마 저의 견해를 피력하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아직 답장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형의 생각은 과연 어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변록》에서 사람을 논한 대목[論人]의 경우에는 작은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사람의 청탁(淸濁) 구분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은 실로 사문(斯文)과 세도(世道)에 관계되는 것이지만 곧은 말과 바른 의론을 하기에는 지금은 적당한 때가 아니니, 옛사람의 이른바 《삼보결록(三輔決錄)》처럼 별도로 논저(論著)를 하여 후세에 남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사람에게 써 준 글에서 등한하게 말씀하심으로써 일에 도움도 되지 않고 결과적으로 재앙만 초래하게 되어 또다시 성대한 조정에 누를 끼치게 하였는데, 그것은 어째서 그런 것입니까. 이러한 생각들을 고명한 공에게 질정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모두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아, 나라에 별일이 없을 때에 시골로 돌아가 일생을 마쳤으며, 이제는 땅속으로 편안히 돌아가 부자와 형제가 같은 산에 묻히게 되셨습니다. 살아서는 연연한 것이 없고 죽어서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아아, 공으로서는 다시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오직 황혼 녘에 홀로 서 있으면서 친척과 친구들을 거의 다 떠나보낸 채 뒤늦게 죽는 저의 괴로운 심정을 누가 다시 알아주겠습니까. 자리를 마련하여 공의 무덤을 향해 곡하고 자식을 대신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는데, 정신이 혼몽하여 속마음을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아아, 너무나 애통합니다.


[주C-001]서계(西溪) :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호이다. 자는 계긍(季肯)이고 호는 잠수(潛叟) 또는 서계이다.
[주D-001]반남공(潘南公)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의 충신 박상충(朴尙衷)으로, 반남은 그의 호이다. 자는 성부(誠夫)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간신 이인임(李仁任)을 주살할 것을 주장하여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귀양 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壄隱逸稿 卷4 附錄 遺事》
[주D-002]야천(冶川) : 박소(朴紹, 1493~1534)의 호이다. 자는 언주(彦胄)이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주D-003]나간 …… 고수하였지 : 박세당은 1668년(현종9)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로 당쟁에 혐오를 느껴 양주(楊州) 석천동(石泉洞)으로 물러나 학문 연구에만 힘을 쏟은 것을 말한다.
[주D-004]큰아들 …… 잃고 : 큰아들은 박태유(朴泰維, 1648~1686)이다. 1683년(숙종9) 지평으로서 남인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역모를 조작한 김익훈(金益勳)을 탄핵하다가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그곳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죽었다.
[주D-005]작은아들 …… 잃으니 : 작은아들은 박태보를 말한다.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정재(定齋)이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는 도중에 죽었다.
[주D-006]아버지와 …… 묻히니 : 박세당과 박태유의 무덤은 양주 수락산 서쪽 장자곡(長者谷)에 있다.
[주D-007]올여름의 일 : 박세당이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는데, 그 내용에 이경석을 폄하하는 내용이 있다 하여 결국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소척(疏斥)을 받았고 그 결과 삭탈관작(削奪官爵)과 문외출송(門外黜送)의 처분을 받은 것을 말한다.
[주D-008]만약 …… 것입니다 : 이경석의 일로 문외출송의 처분을 받고 박세당은 도성 밖으로 나가 대죄하였는데, 처음에는 대간의 계사로 옥과(玉果)에 원찬(遠竄)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판윤(判尹)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원찬의 명이 환수되어 5월에 석천(石泉)으로 돌아갔다.
[주D-009]회재(晦齋)나 …… 것입니다 : 회재는 이언적(李彦迪)의 호이다. 그는 주희의 성리학에 근본을 두면서도 자율적인 학문 자세와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예를 들면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치보망장(格致補亡章)’을 인정하지 않고 경(經) 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으로 옮기려고 한 것이 그 실례이다. 포저(浦渚) 조익(趙翼)도 《곤지록(困知錄)》ㆍ《중용주해(中庸註解)》ㆍ《대학주해(大學註解)》ㆍ《서경천설(書經淺說)》 등을 지었는데, 주희의 장구(章句)와 다른 내용이 많았다고 한다.
[주D-010]한집안 …… 것 :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한 말은, 집안 내에 의견이 서로 달라도 결과적으로는 집안을 위한 것이듯이 경전의 글 뜻을 다르게 보더라도 결국은 경전의 근원적 의미를 찾으려는 데로 귀결되므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남계집(南溪集)》 권82 〈의정부좌의정시문효포저선생조공행장(議政府左議政諡文孝浦渚先生趙公行狀)〉에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주D-011]신미년 …… 회합 : 명재는 신미년(1691, 숙종17) 3월에 누나의 상을 당하여 4월에 양주(楊州)로 달려가 곡(哭)하고 그곳 석림사(石林寺)에 머물렀는데, 그때 박세당이 사서(四書)에 대한 《사변록(思辨錄)》을 가지고 와서 의의(疑義)를 논한 것을 말한다.
[주D-012]삼보결록(三輔決錄) : 한대(漢代)의 조기(趙岐)가 장안(長安)의 고적(古蹟)과 인물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西溪先生集卷之十一
 碑銘 五首
領議政完城府院君崔公神道碑銘 a_134_224d


才足以救一代危亡之禍。識足以破衆論疑似之惑。忠則爲社稷之計策而身家不顧。勇則撫虎狼之爪134_225a吻而顧色不懾。斯皆爲天下之至難而君子之所深與也。若相國文忠公者。其志槩所存。功業所立。豈不亦炳朗前後。卓絶今昔也哉。雖其苦心血誠。可質神明。獨得之見。不同於衆。深至之論。難諧於俗。所以訾議四起。幾沈一世。天定終必勝。人心不可誣。蓋不待百年。先生長者並公時而稱公者。其言漸出。學士大夫後公時而談公者。其論漸平。至是則公之平日自靖於心者。可以有辭于天下後世而無愧色矣。公諱鳴吉。字子謙。姓崔氏。其先全州人。自高麗至本朝。名德相望。曾大父諱嶪。氷庫別提贈吏曹判書。大父134_225b諱秀俊。不仕。贈左贊成。父諱起南。永興府使贈領議政。三世贈官。皆以公貴。議政公號晩翁。少游牛溪之門。文行著名。爲時所擠。宦不達。母全州柳氏。觀察使永立女。公生以宣祖十九年丙戌乙巳。爲生員狀元。仍擢文科。申玄軒謂人。子謙雖羸疾。終必爲名世器。選槐院。己酉。薦史館不就。敍典籍數年中。歷監察諸曹郞。坐事削黜。丙辰丁內艱。己未丁外艱。光海失道。虐殺永昌。幽閉大妃。公與諸公。密議建大策。諸公謁仁祖於私第。公獨不肯曰。義無私謁。久之。議不時決。公以爲引日持久。大事易敗。乃自卜日定計。134_225c癸亥三月癸卯。奉仁祖承大統。迎大妃於西宮。首除吏曹佐郞。轉正郞。夏。擢拜參議。是冬。策靖社功臣一等。進階。封完城君。參判吏曹。甲子春。逆适稱兵。大駕南巡。公爲摠督副使。會張元帥破賊於鞍嶺。乙丑春。上箚論官制。宜稍復古。以正治本。不果用。爲副提學。移大司憲。俄拜副學。箚陳十二事。皆切中時病。上之始踐大位。追尊元宗爲大院君。尊仁獻王后爲啓運宮。及丙寅仁獻薨。上欲服三年。朝議引爲人後不貳斬。合辭爭之。上又欲服杖期。諸臣又力請降服不杖期。以上弟綾原爲喪主。公獨言134_225d父爲士。子爲天子諸侯。葬以士。祭以天子諸侯。今日之禮。唯此爲的證。旣而。諸公論說紛紜。莫適所定。公又上劄萬餘言。極論降服立後之失曰。殿下乃承重也。非出繼也。直承祖統而目以爲人後。君之父母而待之以旁親。其蔽將至於毀禮制滅大倫。可不懼哉。仍請立別廟而自主祭。重忤朝議。被參解職。丁卯春。北兵渡浿。長驅深入。朝野洶懼。旣師及平壤。則騰書於我以要和。公以爲敵張甚。宜巽辭緩其鋒。諸公意合。令張新豐爲書答其意。然敵人進兵不已。上出幸江都。而北使再以和未求見上。公復言兵134_226a交使在其間。可聽。朝延從之。北兵至平山而和始決。於是師退不復東。時敵近而行朝兵單弱。上下危怖。計唯在和。但不敢言。及至敵退。則又紛然以和咎公。言者交章請貶竄。不許。公旣不安於朝。久處江上。秋。遷章陵。將過都城。衆議以私親之喪。不當穿城以過。欲發民治道城東峻坂。公獨爭以爲不可。大臣亦悟乃止。啓運旣禫。將合祔。公復請別建廟稱禰制樂章。爲論者所斥。求出觀察京畿。至己巳。前後輩論議不合。有老少之目。昇平愬於上。指名流五六人爲朋黨。上怒甚。竄世堂先公及兪公伯曾,羅公134_226b萬甲。而張公維。亦出補羅州。公極陳前後輩相責望。非爲朋黨。上感悟。三學士俄皆放還。張公亦徵。時公掌治軍籍成。進階。明年。拜右參贊。毛文龍旣死。陳繼盛代領其衆。劉興治又殺繼盛而代之。我欲興兵問罪。公曰。椵島雖飢疲。衆猶數萬。困獸猶能傷人。況數萬之衆。懷必死之心。憑依險阻。今乃環守孤島。曠日糧竭。欲戰則難。欲罷損威。動衆越海。不計農時。與死寇角。非計也。後兵果不發。辛未春。召諸功臣於春暉堂。世子及兩王子皆侍上。親擧觴勸酒。又賀公新得男。一時以爲榮。夏。上欲追崇章陵。廷議134_226c爭不可。欲請之天子。又以爲不可。五月。特授公副提學。蓋上意以公持論稍異廷臣。欲以自助。公又劄陳廷臣議禮之失。且申別廟之說曰。加隆之擧。禮無明文。事涉義起。廷議不同。而奏請居先。朝廷之不敢承順。固也。議禮以來。于今九年。老師宿儒。旁搜廣引。皆非今日的證。獨葬以士。祭以諸侯。最爲可据。臣之所執。只此耳。壬申。拜宗伯。兼藝文提學。上敎曰。聖人之孝。以尊親爲大。考廟不可久在陋巷。禰位不可遂空。令禮官速議。公又請倣光武故事。建別廟。上嚴責之。蓋公所請。唯在別廟。減之爲降服。加134_226d之爲追崇。皆非公意。故始忤朝議。終被上責。冬。拜吏曹判書。進崇政。授兩館大提學。又兼體察副使。公前後秉銓。破朋黨恢公道。進賢才退罷軟。選用得人。世稱中興以來。秉政公明。以公爲首。乙亥春。解銓。夏。長地官。丙子春。以疾免。夏。長夏官。又以病辭。秋。判漢城。是年春。淸人始稱帝使來。朝議欲無納其書。但以口語拒之。公謂彼跨據大漠。無所受制。肆然稱帝。誰復禁止。而必欲藉口於我。其心或難知。若但拒以口語事。暗昧無證。如使反其辭以誣我。我則何以自解於天下。今宜爲一書。言大號不可僭。臣節不可易。因134_227a將虜書及我所答。聞于皇朝。飭兵馬以待其變。彼以春信弔祭爲名而已。悖者乃八固山及蒙古王子書也。報其禮而拒其悖。於計爲宜。今特有早晩。等是被兵。但不可朦朧以見賣。輕絶以促兵。北使果以不受書。發怒徑歸。公知必有兵。見上曰。虜使徑歸。渝盟必矣。請早講戰守。時朝議紛然。斥和而無備敵之策。公獨深憂之。上箚曰。近日臺諫皆斥和。而廟堂無定算。旣不用言者決戰守。又不用臣策以緩禍朝。虜騎長驅。生靈魚肉。宗社播越。咎將誰任。臣願體臣帥臣。開府關西。約束諸將。有進無退。移書瀋陽。備134_227b陳大義。因探虜情。使彼無他意。姑守兄弟之約。內修政事。以爲後圖。如其不然。堅守龍灣。決於一戰。雖計未萬全。猶愈於束手待亡。一向媕婀。欲言進戰。不無疑懼。欲言羈縻。又恐謗議。江氷將合。禍迫目 前。特汝議定。我已渡江者。不幸近之矣。公知倉卒挑釁。憂在必亡。每欲巽辭緩禍。得以其間爲戰守策。冒衆議屢陳計。言者爭以主和攻公。公又言石晉時景延廣激契丹之怒。桑維翰請遜辭以謝出。帝不聽。其後不能自存。始復請稱臣。契丹不許而晉遂亡。朱子於綱目敗延廣。胡安國亦譏延廣。輕背信好。自生釁端。亡其134_227c身以及其君。夫人臣謀國。不存遠慮以致亡。其事雖正。罪不可逃也。宣祖時。天朝諸將倦用兵有和計。令我請於天朝。成渾謂可許。李廷馣繼發。將被罪。渾憐其忠。於上前救解。宣祖大怒。自是論者攻渾益急。渾言韓胄伐金。先儒罪之以危社稷。張南軒亦言金不可伐。此以宗社爲重。而相時度力爲義耳。今日旣無石晉兵力。又非祖宗之讎。是非得失。不難定矣。議者謂丁卯和固不害。今虜已僭號。不可通使。彼之僭號。非我所當問也。臣爲此羈縻之言者。非敢不顧是非。徒爲利害之說。酌之以時義。參之134_227d以往迹。信其必然。嘗竊以國弱虜強。姑守丁卯之約。緩數年之禍。築城儲糧。益固邊備。斂兵觀釁。計無出此。出入爭議。焦唇乾舌。不自知止。豈有他哉。閔宗國之將危。一身利害。不暇計耳。群議又譁然改之。十一月。還天官。十二月。淸主自將伐我前鋒。輕騎疾馳。數日至西郊。十四日。上幸江都。至南門。而敵騎塞路。上駐駕御城樓。召群臣問計。時事急。上下失色。不知所出。公進曰。事在呼吸。不可緩也。臣以單騎逆之。責其渝盟。彼若意不在好。肆其兇暴。臣死劍下。若不拒臣。客主相遇。往復難問。躊躇之頃。可以得間。近134_228a京之固。無如南漢。請回駕馳入。以觀其變。上曰。計則可矣。卿獨捨命投虎口。以解君之急。古人所難。嗟歎而遣之。公又言李景稷慷慨有氣節。請與俱。及辭行。徹禁兵。二十騎使從出城。從騎皆散。公獨與李公及一軍校疾馳。及於沙嶺而遇敵騎。駐馬與語。詰其敗盟興兵之故。敵將但請早決和戰。公故久與之。言語反復。日且昃矣。於是上得東出水溝門。馳入南漢。公與敵騎俱行入都城。以所與敵言者。聞於行朝。至明日將夕而不得報。敵人大怒。以公欺己。欲害公。或不可曰。和未成。不可遽殺。進兵南漢。公等歸134_228b入見上。執手勞公曰。使廷臣皆如卿忠。豈有今日。因嗚咽流涕。時城中兵不滿萬。不能分堞以守。而敵騎大至。被山布野。圍城數重。旁出四劫。上下凜凜不保朝夕。然敵猶日遣人索和曰。和成。兵可卽罷矣。顧群議紛紛。攻和益峻。大臣持不決。公獨慨然曰。今日之計。和與戰耳。而欲戰兵弱。言和則忌。一朝城陷。上下魚肉。置宗社何地。被圍四十餘日。城幾陷者數矣。援絶糧竭。薪蒭並盡。敵以飛礟擊碎。城無完堞。人心崩沮。欲和者益多。於是而和書始成。金公尙憲痛哭於朝。手裂其書。公拾而補之曰。裂書者不可無。而134_228c補書者亦宜有。諸公皆憂不免靑城之辱。公獨曰。虜非貪我土地。其意止在於和。保無他虞。江都陷而敗報至。敵又誇我以俘獲。滿城震駭。乃有城下之盟。實丁丑正月晦日。師退而上始還都。四月。進登右揆。時煨燼盈目。庶事草草。公進以慰勉君心。退以彌縫朝政。內外稍定。上自下城後。常悒悒臨朝不怡。公諫上以爲志者。萬事之本。氣又輔志以行。養其志氣。不撓不挫。然後功可以成。一不如意。參爾摧喪。天下事無可爲。興衰傾否。更何望乎。又曰。夏有一成少康以興。越棲會稽。句踐以霸。況今國家境土無缺。134_228d祖宗德澤未艾。號令無壅於四方。財力尙餘於三南。唯在殿下立志如何。苟欲有爲。何憂不濟。公之苦心調護。其言如此。又請復署事改官制罷。銓曹郞薦。臺諫避嫌。稍正謬規。以爲撥亂刷恥之圖。下公卿議。言多異同。卒不行。又請令諸道錄陣亡將士及忠臣烈女。次第旌褒。戰場胔骼。募人掩瘞。官爲設祭。俘人贖還。制其價多少。毋得踰越。在途無資者。運粟以濟。以此所還甚衆。秋。進左揆。亂後。牛多疫死。農告病。公謂禍劇於兵。嚴屠禁。益鑄鋤斸。給貧民以利耕。下城日。約無召我兵以犯中國。是秋。竟來徵兵。李延陽請134_229a遣公以辭。公赴瀋。言我之事明三百年矣。興兵助攻。義不可。反覆爭論。淸人不能奪。其還贖俘人數千以歸。戊寅秋。進上相。北人復侵中國徵我兵。公以爲城下之盟。勢窮力屈。計非得已。今日助兵。義不可許。不肯從。淸人大怒。嘖言日至。擧朝大震。公言於上曰。我一二大臣。爲此事死。始有辭於天下後世。況此臣實主之。請往自當。於是復赴瀋。旣至則諸貴人列坐於堂。引公入詰曰。誰沮助兵。公對曰。我爲上相。無所不當。知事出於我。不敢逃死。淸主義而釋之。終公在相府。一不助兵。始公之行。人謂必死。公亦自度不免。134_229b以喪具隨。親戚子弟。皆哭送於道。公乃夷然。己卯。上寢疾久。而宮中有巫蠱獄。辭連貞明公主家。密旨令公窮其獄。公執不可。事下。又爭之力。上益怒。故遣公使于瀋。而責三司以不論公之罪。公道封章乞罷曰。臣所以不忍於公主者。不敢負先王也。不敢負殿下也。使臣待懷一切。輕起大獄。是誠難信之臣殿下安所用之。又反復江充李泌事。然以此獄終不竟到龍灣。疾甚不可行。朝廷許副价致命。庚辰春。乞解得請。二月。歸至京。又坐事罷。壬午秋。復拜相。屢祈免。敦勉不已。出視事。至十月而又赴瀋。丁丑。具134_229c請成。本末移咨陳都督弘範。冀得轉聞于皇朝。海道險遠。往來斷絶。書之必至。不可知。欲更得可往者。必歸報。會西邊獲一僧名獨步。舊居香山。游椵島。因亂不得還。轉入中國。留洪承疇軍中。戊寅秋。承疇遣獨步。歸詗東事。而爲巡江卒所得。西帥林慶業。送至京。公與語。謂堪屬此事議。白上具奏文及移咨軍門。遣獨步泛海。復入中國。至辛巳秋。中國還我俘。而獨步又與俱來得回咨。略曰。貴國苦情。天人共鑑。歷世貞順。勞不可泯。雖暫迫時勢。見窘於虜。豈復忍督過。安心協力。以效桑楡。時公居閑矣。申平城爲相。請134_229d公更撰咨文。再遣獨步。淸人覘知之。怒我來詰。捐萬金得不究。及洪承疇兵敗降。備言其事。我不知也。會李烓潛商事覺。淸人挾世子縛致烓鳳凰城。烓欲謁國陰事以祈生。遂告獨步事。於是淸人責我大臣來置對。事將不測。議者或謂事無證。不如諱之。公曰。彼知漢船往來。今不以實。益其疑。且事不可知。終至跡露則禍必重。不如以實禍。止吾與慶業死而已。上以公故。猶豫不忍決。遂行至龍灣。或謂公曰。前後送僧。皆出慶業。終不得免死。等死以委之。公可脫禍。非有負也。公曰。不可。初欲立名義於天下。臨死生則134_230a委諸人以自免可乎。諸公歎曰。忠臣烈士。固不當如是耶。時慶業亦被逮道亡命。公旣至鳳城。淸人盛兵威。引公于庭。問誰主遣僧。公曰。我實爲之主。而林慶業裝遣。旣非王命。又不與諸人謀。於是以其對。致之瀋陽。淸主使械送公。幽之北館。北館者。死獄。癸未。始移南館。時金公尙憲。李公敬輿。亦同拘一館。華人俘瀋者嗟歎言曰。東方卿相。爲中朝被執於此者三人。足見其重義也。公幽縶四年。危辱備至。常讀易不輟。甲申。淸人入燕。略定南北。乙酉。始歸我世子及兩王子。公與諸公同還。秋。寓居鎭川。結茅臥龍溪134_230b上。冬被召入都。丙戌。賜廢姜死。公乞全恩。不許。是秋。公疾甚。御醫來視。分御膳以賜。旣殆則候問相望。竟以丁亥五月十七日。告終于家。上爲之五日不御肉。三日輟朝。中使視喪。官尤殯殮。內出衣被以襚。三年致祿。所以哀恤。出於例後。上臨朝喟然曰。安得忠於上如崔完城者乎。是年八月。葬于淸州治北大栗里負坎之原。前夫人仁同張氏。右贊成晩之女。後夫人陽川許氏。宗廟令嶙之女。皆祔葬。初張夫人無子。公取從子後亮爲嗣。後許夫人生子後尙。時之士大夫。旣立後而子生。使所生子主祀。流而爲俗。公134_230c以爲父子已定。天倫有序。不可易也。請於朝。以後亮主祀。因著爲令。後亮卒官漢城左尹。襲封完陵君。後尙官止應敎。側出一女。適僉知具鐄。左尹男長錫晉縣令。次錫鼎領議政。次錫恒監司。女適進士尹濟明,正郞申轂。應敎以錫鼎爲後。公資性英果。有沈機遠識。處大議當大難。慮安而色定。勇往直前。未嘗游移兩端。沮奪衆口。望之而體不勝衣。接之而聲出金石。其所得於天者蓋如此。少游白沙,玄軒之門。二公皆深見推許。與趙公翼,張公維,李公時白。早年定交。講磨切磋。至老不變。世稱四友。學士大夫。咸歸美焉。襟134_230d懷坦夷。不設畦畛。勇於改過。樂於從善。人規其失誠心開納。喜形於色。及際遭中興。聖君在上。賢士滿朝。公以元勳。職居樞要。身任經濟。每欲保合群才。改紀庶政。以固國勢。以禦外侮。其所區畫。見於章奏。莫不精確。然前困禮論。後激和議。枘鑿不入。終不克大展。可勝歎哉。然別廟之說。折衷變禮。根据經史。以明禰祖之失。至於和議。審量時義。初不欲橫挑強敵。自速顚覆。又不忍以宗社之重。從溝瀆之諒。此與明之嘉靖。宋之靖康。不可比論也甚明。而人或眩於名實。絀心徇跡。至欲同科而共譏。不亦舛乎。臨事善斷。134_231a剖析是非。若指諸掌。衆言叢雜。卓守不撓。每至上前。論事堅執。上或厲聲。公輒更辨。必極所言。一日。延陽進對。見公反覆固爭。得請乃已。出謂公曰。小事何爭之力。公曰。事無大小。皆有是非。豈可委以細事而苟徇人主意乎。延陽歎服後嘗曰。大臣爭是非於上者。唯公而已。又曰。完城事業。其大者有八。反正贊臣復之業一也。議禮明父子之倫二也。單騎赴敵。以緩其鋒三也。冒謗主和以存宗社四也。力拒徵兵。視死如歸五也。送信天朝。以身自當六也。善處人骨肉七也。不染朋比八也。延陽知公最深。故134_231b其言如此。張谿谷每稱公曰。赤心殉國。不避死生子謙眞社稷臣也。李公敬輿曰。屈子之忠。忠而過。遲川之忠。亦過於忠者也。世堂竊觀公精硏經傳。會通典訓。上下四子所得者深。故其見於事業。發諸論議。皆本於此。固非膚學淺識遽能窺其一二。所以詆疵紛然。蜂起蝟集。猝不可解。嗚呼。末流滔滔。一往不返。大迷其源。至於如此。無足異也。雖然。此於公奚損。要之可質於百世耳。公之文章。理趣爲主。至於奏議。世皆推以筆端有舌。所著詩文十九卷。經書記疑若干冊。世堂旣嘗序公遺集矣。今相國又屬以墓刻之銘。不134_231c敢辭。謹據誌狀。敍次事行。系之銘曰。
天生英彥。以爲一世。棟梁舟楫。乃扶乃濟。無我或戾。繄我所賴。玆惟文忠。厥功之大。羽翼明聖。蕩除陰沴。乾坤泰寧。日月廓霽。章陵服議。群儒多蔽。毛皮藩壁。外鍵內閉。尊親未定。大義將晦。公獨奮舌。剖疑破滯。天秩民彝。待我昭揭。大運靡恒。衣裳變改。愍予東土。先罹毒害。滔天勢壯。捲地鋒銳。身餌虎口。爲社稷衛。孤城援絶。江都又潰。爾我相顧。小大憒憒。曾無一人。遠算深計。竭忠殫力。奔走內外。非公是仗。孰當救敗。四封如舊。七廟以祭。保我家邦。迄于萬載。134_231d曁玆北人。脅之反吠。誓心守義。甘於殞斃。北館幽幽。經年縶繫。敵知憚敬。大難卒解。嘻公功烈。古無匹對。我銘神道。擧迹之最。刻之金石。永久靡替。
西溪先生集卷之十一


西溪先生集卷之十二
 碑銘 五首
領議政白軒李公神道碑銘 a_134_245a


詩曰。雖無老成人。尙有典刑。典刑有無。治亂存亡係焉。老成。又典刑所自出。老成今不可復見。幸其典刑之猶在。所以能保我子孫黎民。嗚呼。老成之於有國也。其係之者亦重矣。書曰。無侮老成人。老成之重如此。有侮之者。則天下之不祥。莫大焉。敢於爲不祥者。134_245b亦必有不祥之報報焉。此天之道也。可不懼乎。公諱景奭。字尙輔。號白軒。定宗第十子德泉君厚生六代孫也。曾祖咸豐君諱繼壽。大父贈左贊成諱秀光。父同中樞贈領議政諱惟侃。母開城高氏。大護軍漢良女。公生宣祖二十八年乙未十一月十八日。幼學於兄孝敏公。每映窓讀書。家貧歲饑。嘗朝出忍飢晏歸。見大夫人對食。少隱以待食畢。其誠孝如此。年十三。尊公爲開城都事。淸陰爲經歷。深奇公曰。非吾輩所及。光海五年。成進士。癸亥仁祖反正。登第補槐院。入史局爲檢閱,奉敎。甲子。移注書。李适叛。上134_245c南幸。百官逃竄。從駕者。承旨韓孝仲。公與內官二人而已。江津無船。夜黑如漆。孝敏公帥湖南未赴。在南岸搜一船。迎駕旣渡。上坐繩床達明。公兄弟侍立不離左右。徒步隨駕達公州。駕還。遷典籍歷正言。爲修撰。乙丑。爲正言。請値開筵得面啓。兩司入筵中。始此。歷獻納,副校理。丙寅秋。遷吏郞。賜暇讀書。登重試第一。丁卯。淸兵入。體察使張晩辟公隨師西出。因督餫關東。三月還行朝。始師出無見兵。又大雨。群議欲少留。公謂朝廷必以行三日。不渡臨津爲罪。不如且進翌日得報。果如公言。歷修撰,直講。有金134_245d垣者爲人所嗾。疏誣名流。公亦與不安。屛鄕庄數月還。戊辰。拜吏郞。昇平欲用敗弁李一元爲西邊守。公曰。敵必謂我無人。乃止。孝立獄起。爲問事郞。進通政。秋。拜承旨。轉左副。鍾城土民朴仲男投虜。己巳春。與虜使來。將賜坐殿上。公爭之。賜茶亦後。仲男氣挫。三月。廷試第二選。書堂特命仍帶秋乞養。出牧楊州。庚午秋。親病歸在楊。盡蠲積逋。吏諫不從。果坐格久散。辛未。爲衛將。例乘肩輿。公獨步行。壬申春。還銀臺。賜柑遺親。公感激賦詩。薦紳傳和。四月。進右承旨。公久居喉舌。封內旨多所匡益。夏。章陵追崇。進嘉善。尊134_246a公長公已躋二品。父子兄弟。並居宰列。人榮之。六月。遭內艱。甲戌。又遭外艱。丙子。制除。連拜副學都憲。是春。淸人稱號使來。時議欲斬使絶。和使跳去。朝野洶洶。公白上曰。不顧時勢。橫挑強寇。其來必矣。不可不深思。權儆已坐贓當斬。公論其冤免死。十二月。淸兵大擧入。上將幸江都。出南門。敵騎已迫沙嶺。公急詣駕前。上御門樓。進公問。公言事急。宜走保南漢。上問金瑬。瑬請幸江都。公固爭。上從公。公請遣將前拒敵兵。又從之。時倉卒。公步趨南漢。拜副學。旣受圍。請三司名流皆爲督戰。御史編行伍警晝134_246b宵。上沈思稱善。天大雨雪。士卒暴露。公又請令大小官解衣分兵士。張覆師人如挾纊。公與石門,東岳,谿谷。居開元寺。公夜輒一再起。步詣行宮問起居。退則相携痛哭。各勉忠義。及上出城。涕淚汪汪不禁。上愍之。使無隨行。丁丑正月。扈還。拜知申。移副學,都憲。還知申。將改題廟主。疑所就。公請就廟內行之。又請視事接下宜頻。諸司逐日開坐。無使郡邑吏役。久滯京邸。皆從之。歷副學,大憲,工參。還副學。上箚陳戒六七事。又言尹煌斥和。編管宜釋。皆嘉納。時淸人立三田碑。徵其文。上命張維,趙希逸撰進。並不134_246c滿彼意。咆喝益急。上乃面命公曰。句踐不恥臣妾。以圖自強。今日唯適彼意。無或層激。公僶勉承命。貽書石門曰悔學文字。又有詩愧負浯溪百丈崖。公意可見。戊寅。箚請紓民力。修江都無發南民。築南漢無闊大。收布運米。皆可矜察。拜大提學。七月。拜吏參。因講請敬天怒消民怨蠲征役。皆嘉納。是日。講詩至樂只君子。殿天子之邦。上太息泣下。公與李公時白皆流涕。觀者莫不感動。時柳碩,朴啓榮,李烓等。齮齕淸陰。上素不快。桐溪,淸陰。頗入其說。公言尙憲,蘊不可罪。勿偏蔽。辭褫亞銓。己卯春。進吏判。庚辰春。進134_246d祕疏。時遣僧獨步入中國。公與完城密議。公引獨步入密室。涕泣送之。三月。辭解文衡。淸人詰代質。公亦奪官。冬。特敍。與李植議撰國書。拜都憲。時趙錫胤論事罷。許啓等欲緩淸陰入瀋被罪。公言二事。卽從之。辛巳春。拜右參贊。還大憲。夏旱。以平讞失宜。冤鬱莫伸爲言。上召見。放死囚四人。旱甚。又請疏釋。申中外毋濫刑獄。罷內獄。捐內貢。停造第。接臣僚。訪民隱。通上下情。無忘南漢益戒謹。嘉納。秋。守貳師赴瀋。上引見。勖以善導。公到瀋。請日開書筵。令賓客迭講。隨事切諫。世子亦敬禮之。嘗密進書。極論闕失。毀134_247a草不傳。淸人憚餼牽。使諸質白耕而食。督入農丁。公力爭不可曰。吾受任來。苟便於國。敢顧身。淸人亦不敢強。又詰責多端。彌縫非一。淸陰與朴潢,曹漢英久被幽辱。公入瀋三日。密白世子圖緩。世子與公謀。行賂用事。淸主召問世子。許遣還。令貳師同出。諸公之卒無事。皆公力。人無知者。壬午三月。更入瀋。夏還朝。七月復入。先是。漢船到宣川。方伯鄭太和縱歸。淸人後覺。遣公覈問。八月東還。馳聞其狀。朝廷使公留査無入京。只罷監司沈演,兵使金應海。促公還報。公不得已。九月。還入瀋以告淸人怒。欲廣致邊守134_247b及將領於瀋參詰。公力辨。但令宣川守就對。淸人又謂公中途徑返數來詰。公恐朝廷受責。不自明其實。淸主乃謂不傳命不見王而還。鎖之東館。已而。送鳳凰城。與諸人同拘幽。時世子隨淸將。先至鳳凰城査其事。公至欲謁世子。不許。時大臣以下被拘者多。各捐貲緩禍。公獨不肯曰。必不至死。宮師用金。自我始不可。冷山北海。固所甘心。後諸公盡還公獨被拘最久十二月。放之東歸。令不得收敍癸未。拜參贊。甲申。李右相敬輿入瀋。以擅用諸錮被拘。公乞罷三疏得解。同李植,李明漢改修宣祖實錄。世子134_247c請用被錮諸臣。乙酉春。使來始許甄收。拜大憲。四月。拜吏判。盡公正。戒僥濫。拔淹滯。詢訪人才。疏名爲簿。隨缺補擬。巖穴幽隱必致意。如兩宋,權諰,李惟泰諸人。始通顯路。實在公時。昭顯卒。議群臣服未決。公與李植,李楘。疏請白袍烏帽。卒哭而除。從之。九月。進拜右相。十月雷變乞免。陳修德弭災數。引公卿以下。詢得失察賢耶。禮招金集等。用兪伯曾,洪茂績等言地。又請書古箴戒辭。周禮十二荒政。劉向六正六耶。揭左右並內外省署郡邑廳壁。使出入觀省。嘉納。是年饑旱。公專管賑事。多所濟活。賑畢。尙多餘穀。分畿134_247d內補糶糴。又隨時積著備水旱。常平法始此。丙戌春。姜氏獄起。公與諸大臣爭論。天威震疊。至擧公及白江曰。二人吾待之甚厚。豈意負我至此。姜文星等就獄。公言旣無告者。又非辭連。不當開此路。三月。使燕解相。六月還。丁亥二月。拜左相。夏旱乞免。因請通下情。開言路。恤民隱。八月。病甚免。戊子夏。還左相。時上春秋高。違豫多。群臣罕進見。公前後請引接咨詢。又取漢文唐宗事及虞書數章與無逸爲一編投進。請燕處觀省。因乞風日淸和時。數召儒臣。論經史商政治。冬入對。極言災異及館學敎廢。宜設司業。薦鮮134_248a于浹窮經篤行。又請擇敎官訓童蒙。申鄕約正俗習。召見內外官詢弊瘼。嘉納。公常憂敎弛俗偸。有意振勵。至是。議擧呂氏鄕約。簡條目布中外。令禮曹觀察主行。公去位而法廢。朴遾忤旨斥補。公請優臺諫。不宜用聰明疑下。又言金集,宋時烈等。至誠招之。安得不來。又言宋孝宗去妃嬪珠玉。崔有源爲執義。焚臨海君馬鞍。去奢自宮禁。行法自貴近。紀綱不憂不立。己丑二月入對。言民生日困。宜使諸臣盡言闕失。誠心開納。又言宜受直言。如李敬輿,洪茂績。斷無他意。李應蓍,沈被罪旣久。皆請收錄。又言貴近私占山134_248b澤。致民失業。宜盡革罷。夏。冊世孫。公言金集,宋浚吉,宋時烈宜召責以輔導。又請修繕慈母城。江都設烽燧。上深然之。五月。仁祖薨。初終易服及復襲。一依五禮儀。從容審愼。不失倉卒。世子欲公除後嗣位。公率群臣屢勸進。始勉從。時金尙憲入臨。旣殯將歸。公啓留。馹召金集,宋浚吉,宋時烈,權諰,李惟泰等。四方名士。咸集朝廷。撰大行行狀。賜鞍馬。山陵退壙蓋石體大。請剖爲二。轝輦勿用錦綵。昭先王儉。金集進喪禮。古今異同。公辨其可否以上。六月請對。上衰服臨見。引明宗卽位開筵。李彥迪134_248c首勸學。請引接講論。又任賢以誠。嘉納。長陵有異議。趙翼請博詢。公言不可。浮議乃定。八月。進領相。讓左議政金尙憲。不許。反哭。停城門橋梁祭。正典禮。金尙憲論吏判沈詻事。臺議多岐。上欲譴言者。校理金弘郁坐挽詞將被罪。公爲言。皆從。十月入對。上憂災異。公言不獨天災。敎化不明。許稠勸世宗嚴上下分。先朝鄭曄,金堉兼大成。責成效。又言賞罰得中。人心悅服。因及王叔文事。時自點新敗。黨附被罪或過。故山陵畢。乞解不許。時右相堉。請行大同。左相翼。請變講法。公言大同宜先試湖西。講法。意非134_248d不好。行之難。上稱善。公言烏府銀臺百司綱紀。宜久承旨。擇臺官使百司勤職。又言學要明理。治要識體。修德省刑。列爲其目。庚寅二月。淸使六輩來。上新卽位。慨然奮發。淸人疑我。客聲旣至。朝野洶洶。請往察事機。上難公行。公言見危授命。人臣之節。辭甚激切。乃許。請起李敬輿議國事。又詢鄭太和於家。上稱善。公至灣上。淸使始東渡。聞公來。咆咻少止。公馳聞。卽日東歸。是行。初多危之。聞此。人情少安。上亦喜。使大臣皆會闕。待公入。卽引對賜柑。淸使至京。齎書二道。一九王書。一皇勅。責我挾倭請修繕。仁134_249a祖末。東萊府使盧協。慶尙監司李㬅啓倭情。後因使請修繕城池甲兵備南寇。見疑淸人。至是執此。欲甘心當事。公在灣上。譯官李馨長密言當者禍不測。公不爲動。旣還宿留朝堂。與諸公出入。密講所對。淸使集公卿兩司。庭詰數事。語輒歸責于上。公對曰。過在臣。王不知也。詰作表誰。趙絅對受廟堂指。公曰。吾爲首相。事皆吾責。末後詰倭情于盧協,李㬅。皆抵諱不以實對。淸使大怒。公徐曰。倭誠叵測。此輩恇怯失對耳。淸使厲聲曰。誰爲奏。必王爲之。公曰。爲此者我。鄭譯曰。公獨爲耶。曰。然。屢問無異辭。命壽高聲134_249b問領相獨爲。餘不與耶。衆默然。獨李基祚曰。此豈首相獨爲。吾輩皆與。於是退絅及㬅,協。獨留公責欺罔。良久出。是日。皆謂禍在呼吸。惴惴無人色。公家人以凶具待外。公獨安閑。應對如響。觀者無不竦然。淸人亦相目東國唯李相一人。上聞曰。領相爲國忘身。固自如此。李基祚初不與。獨能對爲有光。諸人慙公。卽就吏待罪。上慰諭曰。卿忠質神明。安心勿慮。夜出千金。求爲公地。明日駕臨。使館使言公及趙絅當死。上反覆力爲之解。乃言歸稟皇上。姑栫棘白馬。上賜公手札。相見有日。宜自愛。號宗室女義順134_249c公主遺九王。元斗杓,申翊全送至燕。九王喜。猶不赦公等。將復遣李時白。會麟坪從燕歸。言其意亦不深怒。秋。淸使又至。上郊勞。數爲言遣麟坪代延陽。李基祚爲副。撤籬勞問公。麟坪旣至。淸欲致諸人於燕。更覈。使臣力乞。始聽歸田里不得用。李敬輿亦被錮。獨㬅,協爲直。上遣使賜柑宣意。辛卯二月。至都外。近侍迎勞。明日召見。賜月俸。公在白馬。危禍日迫。色無怨悔。唯玩讀經史。著自警詩自警主一箴。時與龍洲。杯酒酬和。或杖屨巖壑。旣還。多居江郊。時從知舊觴詠。秋。游關東濱海諸郡。上許乘驛。冬。還疏論趙134_249d錫胤,兪㯙,李愛億事。壬辰春。又議囚罪不至死忤旨。疏陳尙德緩刑。乃解。秋。拜領敦寧。再辭得許。癸巳春。應旨上箚十六條。皆令議行。特拜領敦寧。甲午春。箚請推孝施仁。尙儉去侈。明日引對。溫諭懇惻。公言災異屢見。宜修德回天。嘉納。趙錫胤,朴長遠論徐元履被譴。公爭之。不從。三月。親郊閱。校理南龍翼進諫。上怒。正言兪瑒。承旨尹得說。大諫閔應協。爭之。上益怒。公力言得解。夏。有水進箚。請先民後兵。毋以末害本。罷選女停內貢及土木織造。所言多行。秋。淸人怒。公住京乞解。得許。因與月俸。九月。南游。還陳民瘼。134_250a許施。時用議者言。垂意武事。公言民怨天怒。宜長慮。却顧無招患。嘉納。十二月。北使至。譙讓益急。時公之子爲邑安峽。聽公往從。賜酒饌藥物于東郊。至縣二月。徙鐵原。游淸平昭陽。俄促公還。乙未夏。至京。乞隨分閑住勞勉甚。至與月俸。明日召見賜酒。陳民瘼。許施。公面乞退處。辭月俸。不許。七月旱。言敬大臣先德敎。金弘郁親屬不宜錮。多從之。選湖堂。命就公議。丙申五月。兪㯙言事被鞫。公涕泣不寐。秉燭草疏。時上盛怒。疏入。繼有諸大臣言。㯙得減死。因旱疏決命。公入侍。議釋澂潚及昭顯第三子。公又請減兪㯙罪。134_250b從之。丁酉。因災。請嚴宮禁。去奢侈。蠲逋欠。平冤獄。敦風敎。省刑罰。作戒文告中外。又言無規近利。勿拘常規。奮發有爲。皆優批。冬。入對。上詢湖南大同。請算歲入。量物價。定可否。從之。戊戌夏。特還西樞。入對言。言過者容之。乃可謂優容。西北風俗鄙夷。骨肉相殘害。請北兵使及江界滿浦間用文士。從之。十月。入對。上語及敎化。請躬行。又責宗伯,都憲,京尹,方伯以風敎。選大司成。奬善。十一月。爲領敦寧。己亥春。入對言。賑事。朝廷摠其綱。擇委道臣守令。減兵額。使孤寡無怨。五月。孝宗昇遐。議慈懿服。禮官引子朞。或言134_250c當三年。宋時烈等主朞。引賈公彥四種。公以時制當朞。領相鄭太和意同。沈之源,李時白,李厚源,元斗杓聯名獻議。世子從之。言者請群臣絰杖。公謂改舊制不可。及啓殯。言者又請追服衰。公言與朱子時不同。中改未當。反覆陳辨。事遂寢。撰進行狀。賜鞍馬。山陵卜水原。民家多毀。又卜健元陵內。而上意在水原。三箚爭之。乃從。夏。鏡城判官洪汝河疏詆李厚源。諸臣請罪汝河。公以爲不可。從之。是年。北路饑。冬雷。公言推恩施惠。發倉蠲役。無牽有司。無拘流例。庚子春。東民饑。又請發倉。朴長遠忠信可委。皆納。當134_250d事欲解兪棨。春秋子命胤處史官。公謂不可。上從之。公管內局。兩殿疾平。賜鞍馬。官子弟。修孝宗實錄。命公摠裁。秋大侵。又請蠲貸節用緩刑。松都有獄。儒生與賈人牽引連逮。留守南老星窮治儒生。公爲言老星恚。誣公受賂。遣瞽卜流謗都下。公上章出郊。李敏迪等言老星誣詆元老。於是朴世模等。劾老星。上屢遣承旨諭。公乃入謝。辛丑夏。參贊宋浚吉。請移尹善道近地。公言宜納。七月。史畢。公以災旱乞停宴。掌令許穆請早定國本。公言元子生。告廟頒赦。是國本已定。領相鄭太和亦從公。事遂寢。壬寅134_251a春。湖南賑恤御史。淸退稅換租。公言宜從曰。或以此爲弊。習爲要民。以恤民爲要民。必至刻民而虐用。因擧先朝有爲國爲民之說。嘗進言違道干譽。固可惡也。視違道虐民則有間。況爲民便是爲國。豈可分而爲二。此說若行。民不堪命矣。仁祖深然之。及孝宗時。亦嘗言。至是三爲上言之。夏。徐必遠上疏。語侵公。公乞退。因出郊。屢勉諭乃還。徐公後自悔造謝。交益深。蓋服公雅量容己。癸卯。仁宗當祧永寧殿。制狹將改。公領其事。上欲增大左右翼室。倣正殿。公力言不可。事得已。畿內量田。郡縣坐田縮。當受134_251b杖。公言下其等而責多。非均田意。且長民。官不宜杖。甲辰。公年七十。乞致仕疏七上不許。入對申懇。猶不許。冬。因對語及敎化。鄭太和言公居位頗有設施。宜委之。明日。宗伯就公議。頒布中外。其規模節目。與己丑同。因災入見。請採群言。毀主第之奢者。停尙方織造。釋內獄囚。收用朴長遠。乙巳秋。幸溫泉。公任居留。駕還。復賜鞍馬。官子弟。冬。因災陳戒。凡八事。丙午春。又言四事。三月。幸溫泉。公留都。恩賜視前。丁未春。趙聖輔,李垕竄逐。承旨下吏。李䎘等七人又被譴。公諫不從。四月。請對復言。仍及洪萬容,南二星斥補非罪。134_251c二人得不斥。幸溫泉。公又留都。行朝大臣。復及諸竄。上念公言許量移。戊申。因災陳六戒。聖學敎化刑獄守令賦役奢侈。春。賜米帛。公辭。因請發倉濟饑。八月。幸溫泉公。又居留。十月。賜公几杖。屢辭不許。將設耆老宴。又力辭。有司具禮。致几杖賜樂。宣內外醞。完平後五十年始有。一世聳歎。己酉三月。將幸溫泉。爲公老不任居留。箚請早回鑾。仍言平昔朝端。納履相繼。今日帳殿。未有奔問。聲色。拒人千里。今亦近之耶。殿下所當念。嘉納。初宋時烈名重一世。公在仁祖朝屢薦。時烈至京。布衣草屨造門。公以均敵盡134_251d禮。孝宗初。又首乞招徠。時烈名位旣崇。敬重尊尙。見於書牘。得公箚而怒。醜詆公。公瞿然陳箚曰。宋時烈疏斥臣。臣甚愧怍。臣短箚所言。不敢不審。上慰諭之。懷川。領袖儒林。言論是非。無敢議。至是。雖其門士。皆疑之。同春亦對公駭歎。蓋公己亥議禮。不從四種說。懷川撰寧陵誌。引匪風下泉。公以語太露。請删定。又因同春言。請撤尹善道圍籬。懷川欲結婚公家。又不諧。故積疑蓄怒非一日。公坦然不置懷。平居。未嘗擧其長短。夏。疾甚。三章乞解。不許。出居江上。近侍臨諭。七月。始還。又遣近侍諭意。時有神德祔廟134_252a議。率百僚廷請。閱月始從。儀度多出於公。公與夫人俱大耋無恙。庚戌正月合卺回日。子孫進壽。鶴髮相對。杯觴迭獻。觀者艶歎。金澄劾李殷相,吳挺緯罪。公言其當寬。澄疏侵公。後澄坐贓下獄。公言澄爲母壽。罪可恕。當受訊。又言其不可。從之。辛亥春。掌令趙世煥言事被罪。公病中箚諫。九月。疾劇。二十四日。卒于正寢。壽七十七。曰氣起寢屋。久乃滅。訃聞。震悼不已。弔祭賵賻。皆優典。卿大夫至小民。咸相弔。有官於外者。率致賻襚。有司以禮治具。十一月。葬廣州西樂生負壬之原。從先兆。公容貌秀偉。天資仁恕。子諒愷悌。134_252b恬靜淸修。未嘗爲崖異詭激。矯飾矜詡。忠厚和順。粹於面目。忿厲嚴猛。不見容色。望之儼然。人不敢狎。事親有至性。兩尊人大耋無恙。周旋言笑。皆形至愛。親疾夜不解衣。及喪哀慼。葬祭誠禮殫盡。前後六載。毀幾滅性。朔望參拜流涕。諱日哀臨。若在袒括。盡月不與宴樂。每上墓。失聲號慟。爲先祖建祠具田。修墳壟置守塚。雖外家。亦經紀其祀。凡祭。老不廢澡浴。戒子孫罔敢怠。或身不與祭。聞鷄盥濯。衣冠致敬。事長公如嚴父。仲兄早沒。嫂老無嗣。衣服奉養。不使乏闕。壽辰令節。具饌進觴。敎子孫先小學。後及他書。平居。不134_252c許語朝政說人長短。唯勑身修行。諸族多貧窶。必使有以資活。疾病濟其醫藥。昏喪極力周恤。身先臨問。幼少無敢後。內外宗族。莫不依仰。又與隣里修約。略爲條目。至今守之。公自釋褐。聲掩前輩。二十年間。遂登台鼎。上而人主眷注。下而朝野想望。及至孝宗委任益專。公又殫竭忱誠。而遽有庚寅之事。雖迫於強隣。恩禮之隆。他相莫望。事大小咨詢。言稱元老。公每引經據義。幾諫明議。必主乎仁厚惻怛。或至流涕。上輒動容。儆災求言。必以敬天愛民。戒喜怒。納諫諍。崇節儉。恤刑獄爲言。反覆諄切。言無不誠。上134_252d皆虛心嘉納。十年間。際遇如一日。及顯宗世。位望益隆。中外倚重。遐鄕婦孺。能誦白軒。朝廷待遇旣異。公亦巨細必盡。上知至誠。及耋老。就問大事。尊禮無二。今上沖年。聞公名德。求一識。特許入見。公勤謹不懈。趨朝必先受命。禱雨必敬必誠。歸不解公服。伏於庭中。待雨乃起。公禱未嘗不雨。遇旱而聞公禱雨。都人皆喜曰。今當得雨。平居。聞朝有美政。喜不能寐。災異闕失。憂形于色。有封事朝服。拜送。受批亦然。駕動不得從。必伏而俟。有賜雖微物。朝服庭受。可薦薦之。行己接物。一於誠而不苟。常曰。士以正直忠厚134_253a爲本。正直不忠厚則刻。忠厚不正直則懦。論人擧長置短。看文求大略細。論囚讞議。先生後死。幽枉必欲伸。愛人好生。天性然也。立朝務持大體。至爲人謀事。纖悉周密。尤篤親舊。軫其喪病。恤其子孫。僕隷下賤。毋使失所。見蟲草木。不忍傷害。由是賢愚貴賤。心悅誠服。稱爲仁人。然體貌等威。截然而嚴。規模法度。確乎其守。臨大事決大疑。必傅古誼。老而步履不愆。容儀莊肅。每會朝。進止循度。百僚竦敬。平生律己。必準小學。於論語。得力尤多。旣老。案常置近思錄朱書。每誦。莊敬日強。安肆日偸。早起夜寢。端坐終日。大寒盛134_253b暑。不變常節。服陋食淡。居第狹陋。無所增飾。平生無玩好嗜欲。或問公亦有癖乎。曰無。唯嗜好文字。謂癖亦可。深戒聲色絶鄙俚。把杯吟詩。間以談謔。風流溢發。和氣襲人而儀度不爽。性喜讀書。手不釋卷。七十有程課習胡傳。喜昌黎愛杜詩。唯不讀老莊異端。少從趙纘韓。受古文。詞源滂沛。操筆立就。絢爛濃艶。不作詭奇劖晝之辭。年德旣高。文章益重於世。碑版誌狀題詠記跋之謁。盈箱溢篋。揮灑不倦。屢掌試。所取多知名。爲公卿聞人者甚衆。筆法翩翩有姿媚。求者不絶。詩文甚富。散軼居多。刊行五十卷。今上庚申。134_253c金錫胄,金壽恒,閔鼎重等。爲上言擢授孫羽成六品官。使無廢祀。夫人全州柳氏。觀察使穡女。慈惠莊淑。治家有法。公敬重之。卒以甲寅九月十四日。祔公墓左。銘曰。
三朝元老。一代忱臣。國忘其家。主不顧身。丹誠炳日。素節凌霜。險阻艱難。亦旣備嘗。至信所孚。能感豚魚。德全行高。彤管屢書。恣僞肆誕。世有聞人。梟鳳殊性。載怒載嗔。不善者惡。君子何病。我銘載石。人其來敬。
134_253d西溪先生集卷之十二


西溪先生集卷之十二
 碑銘 五首
判敦寧府事李公神道碑銘 a_134_237a


公諱正英。字子修。號西谷。出宗姓。定宗十五子。其十德泉君厚生。三世至咸豐君繼壽。爲高祖。曾祖贈替成諱秀光。大父同知諱惟侃。父戶曹判書孝敏公諱景稷。以孝旌閭。母寶城吳氏。僉知景智女公。生光海八年丙辰六月十六日。生三月而母沒。同里靑平君沈惀憐之。使妾邊氏收鞠。其夫人尹氏。又親自提誨。靑平多在外郡。携公以行。年十二。始還京。孝敏往視。公猶未識嚴顏。責平語之而後知。拜跪於前。涕泣134_237b滂沱。坐客皆揮淚。自是受學家庭。大父尙無恙。孝敏兄弟躬奉志養。公鷄鳴盥櫛。從詣大父所。扶持抑搔。甚宜尊公意。暇則讀書不輟。繼母李夫人嘉歎不已。孝敏在憂服。公不應公車。丙子。登第。旋遭兵難。孝敏公扈駕南漢。公侍李夫人入江都。負米採薪。以供朝夕。及江都陷。奉母出走。棄子不顧。丁丑。補槐院。戊寅。入史局。爲檢閱待敎。移注書。轉奉敎。遷典籍。因親嫌不詷。庚辰。遭外憂。執喪盡禮。壬午制除。爲禮曹佐郞。遷正言。褫爲兵郞。還正言。移司書。癸未。從世子瀋中。隨事規諫。鄭命壽假威恫喝。欲以索賂。世子134_237c憂之。公獨言儲君在此。亦小朝廷。有問自當對辨。何必遠煩。本朝宜以此申論。命壽氣沮不敢言。冬。從世子東還。褫拜禮郞。坐罷。敍兵郞。乙酉。遭內憂。丁亥制除。由兵郞爲弘文副修撰。戊子。廉問嶺東南。由修撰轉校理。間爲正言。己丑冬。寫進長陵哀冊。以資淺。但賜廏馬。兼漢學敎授。廉問畿內。庚寅。爲獻納,修撰。坐罷旋敍。辛卯。爲校理。入侍面論副提學李之恒貪汚。諫官反斥公。以是當下吏。賴言者得釋。然罷閑者久。後之恒敗。特敍還修撰。兼司書。坐罷。敍校理爲吏曹佐郞。又考中解官。復拜修撰。轉吏曹正郞。134_237d兼文學。趙錫胤,朴長遠言事竄謫。公疏諫忤旨辭褫。甲午。遷副應敎。洪宇遠以言被罪。臺閣旣請收還旋停。玉堂駁褫言官。上怒並黜補外。公爲嘉山縣監。嘉山小縣。當孔道。又武人爲宰。其民困疲。公至息勞蘇瘠。撫摩疾痾。米鹽財賄。簿書井井。吏不容奸。橋梁館宇饔餼之具。賓旅所待。咸無乏闕。申鄕約擇良師。以敎子弟。親自勸勵。二年之間。民風丕變。關西俗多豪強武斷。邑有黠胥倚使府。凌官吏奪民產。至爲榜楚。私脅窮弱。公治其罪而還其所奪。胥又計逞怨毒。公知狀以言巡使。請究其罪。旣諾中改。公竟杖殺。此134_238a胥小民歌舞。公亦以擅殺被逮。或勸公無以實對。不從。配春川。特移江西嘉山。民冤公爲民而被罪。問遺相續。防護道路。傍邑亦多來者。鄕士與民。各爲公立碑以頌治。明年放還。丁酉。敍宗簿正。移尙衣正。改舍人兼弼善,輔德。三爲司諫。還收李敏求收敍。連爲應敎,副應敎。七月。進同副承旨。轉至左而褫。歷刑議參知。己亥。還銀臺。褫爲參知。還左承旨。書進大行銘旌。進階。庚子。爲副摠管。移兵曹參判。拜大司諫。論政疵民瘼。褫爲知申。辛丑。使燕。還爲右尹兼同義禁。還大諫。爭趙珩鞫問。上怒削官。甲辰。敍觀察關西。公134_238b習知民力凋弊。源於管餉掊剋。悉蠲煩苛。唯以節縮爲本。倉庾所積。倍簁於舊。詢民疾苦。驛聞罷行。邊塞城壘。遐僻之地。從前罕到。無不躬歷。聚其子弟。各試以藝。恤窮愍老。資其衣絮。嘉孝褒烈。表厥宅閭。行至其家。厚加存撫。邊氓鼓舞。有生初見。丙午春。秩滿爲禮曹參判。有俘逃回事覺。來問朝廷。留公使對。馳至灣上。淸使究詰。通官從而脅持。公不爲之動。日與儐使投壺射帿。朝廷許行賂。公不肯曰。通官固不能爲力。無益於事。然竟遭臺參。謂用賂過。敍拜刑參。移兵參爲知申。褫爲左尹。戊申。歷知申,刑參,大諫。爲亞銓134_238c被彈。爲戶參。以節使進階。爲判尹。又以關西時事被劾。收新資。朝廷初念民弊。減餉糶而收布。旋又寢。公謂爭利失信不可。上聽公隨便塡額。其補換文簿具在。鄭萬和代公指爲減價混錄。入爲諫長。陰嗾同僚。朴公長遠謂公淸謹自守。寧有是事。陳疏訟公。公自是捲入海島。不就召命。辛亥。拜開城留守。飢疫相仍。盡心賙救。全活甚衆。未幾。擢授刑曹判書。改判尹爲儐使。冬。充節使。俄兼謝恩爲副。前後赴燕。橐中只書籍而已。還爲知樞。遷冬官。癸丑。董役遷陵。進階正憲。間下吏坐罷。敍爲知義禁。甲寅。又長冬官。董役134_238d山陸。進崇政。秋。又董崇陵之役。事竣。進崇祿爲吏曹判書。又遭彈褫爲知樞。以不赴召。坐罷。敍判尹。尹鑴斫取禁松。公因乞解論之。群小媢嫉益甚。鑴始被嚮用。一時靡然。獨公謂鑴操心不端。及鑴敗。人皆許公先見。坐事解職。爲判中樞長秋官。褫還判尹。丙辰。上大妃尊號。爲副使進輔國。爲知樞兼判尹。移判敦寧兼判義禁。坐崇陵莎草事。下吏罷。敍判敦寧兼長秋官。丁巳。又坐試題犯忌。下吏配鐵原。戊午。宥歸海莊。敍判敦寧。兼秋官。褫拜判尹。坐飛書解職。旋還判尹。特授左贊成。被劾去位。褫還敦寧兼判尹。庚134_239a申。堅,枏獄起。夜拜判義禁。留門召入參鞫。以微事解。兼長冬官。移春官。充儐使西出。壬戌。拜秋官長。癸亥。又兼判義禁。甲子。因慶賜食物。盡分之族黨榮賜。乙丑。引年乞致仕。不許。參耆社。丙寅。疾劇。又請休致。遣醫視疾。賜藥物。公疾已不可爲。扶坐手草疏以謝。戒身後事纖悉。斂葬從儉素。祭祀務簡潔。勿請諡。屛婦人不近。臨絶。精神不爽。親戚來問人與爲訣。悠然長逝。歲丙寅四月二日年七十一。訃聞。輟朝市。弔祭致賻如禮。是月有閏五月三日。葬于果川北鵲峴負酉之原。去孝敏公墳隴五里而近。關西士民。相與致賻134_239b如趨令。公孝友天得。濡染庭訓。質行過人。以不逮吳夫人爲至痛。見子母乳哺。輒恒然悲泣。每當諱日。無異初終。臨沒。謂諸子曰。吾生不識慈顏。死若有知。當歸侍膝下。葬我於山足幸矣。孝敏公居憂毀瘠。竭力扶護。親未受衣。不敢先寒服。事靑平內外如父母。卒若喪父而無服。邊氏死。立主以祀。常泣謂諸子曰。向非沈氏。吾安能有今日事。季父白軒公如父母。事無大小皆稟。所敎無不行。在關西得異味。不敢先嘗。旣卒。不籬喪側。朞而後復寢。待兄弟姊妹。盡其友愛。仲兄貧甚。待公擧火。子女嫁娶。須公資送。及沒。收鞠幼134_239c稚。其季子就學。泣施楚撻曰。不如此而能成人。吾何忍也。及其擢第。公又泣曰。今可以見吾兄於地下矣。與姊接屋。朝夕往省。味少必分。兄女染癘。親自救護子弟更諫不聽。周恤窮族。顧助婚喪。必殫其力。敎子嚴。侍坐終日。非問不敢言。過必峻責不恕。常置自警編案上。事君行已。視爲準則。自在瀋中。受知寧陵。御札宸章。留藏箱篋。傳爲家寶。有時盥手莊誦。悲泣不已。不喜抉摘細故以沽直名。一心奉公。夙夜匪懈。尤謹溫室之戒。未嘗語人。當按獄而人問獄情則曰。已忘之。出入闕庭。進上有常。謙恭和厚。接人無疾言134_239d遽色。宴處絶倦意惰容。淨掃一室。几案必整。終日危坐。言笑甚罕。金公佐明。朴公長遠。俱一時勝流。皆與許心相友。每誦昌黎人之所趨僕之所傲曰。可以警末俗。世之多公以此。而怒公亦由此。脫略財賄。遼瀋之行。裝齎未具。一奴以百金自買。受其半而還之。及東歸。橐有餘資。悉與同行。醫嘗有人要公築防爲田。謝不肯。屢長詞訟。庭無私謁。位班三事。門可張羅。早事筆硏。旁通篆籕。上自殿宇扁額。下至搢紳碑碣。多出公手。喜投襄射帿。早近杯觴。時有酒失。及赴關西白軒作書戒之。終身不復飮。晩歲築室西郭外。拓園134_240a林聚圖書。扁曰保晩。以終餘年。前夫人靑松沈氏。府使長世女。卒先公四十七年。初葬吳夫人墓下。後祔公。一男一女。男晩成牧使。女適參判宋光淵。後夫人文化柳氏。學生基善女。通達博洽。後公五年卒。亦祔公同穴異室。一男六女。男大成持平。女適縣監金昌國,學生洪致祥,承旨尹趾仁,進士曹夏彥,府使沈廷輔,士人任士元。晩成無子。取弟子眞儒爲後。大成五男二女。長卽眞儒。次眞儉,眞休,眞伋,眞偉。光淵,昌國,廷輔。皆無子。洪致祥一男泰猷。尹趾仁四男。長審。餘幼。曹夏彥四男。長命宗。餘幼。任士元五男。皆幼。眞儒134_240b二男一女幼。大成以宋參判所爲狀。來求墓刻之銘辭不獲。謹据狀敍次功行。系之以詩曰。
石門白軒。世歸其賢。惟孝惟忠。誰與齊肩。有嗣厥聲。勿懈于先。執行醇實。載貞以堅。可鎭躁競。宜莫我姸。公孤有位。耆耋有筵。戴玉垂犀。進退躚躚。刻銘山石。陳辭不愆。來之信之。歷祀萬千

西溪先生集卷之十四
 碣銘 七首
護軍朴公墓碣銘 a_134_279b


公諱東緯。字士經。姓朴。籍羅州之潘南。八代祖尙衷。高麗末爲右文館直提學。當主禑初。諫倍明事元。非先王意。爲奸臣所害。本朝追諡文正。七代祖訔。佐太宗爲左相。諡平度。四傳而至諱兆年。卒官吏曹正郞。是爲公曾大父。大父諱紹。爲司諫。中宗時欲格金安老之再用。被逐歸嶺南以終。有弟曰儒士諱緝。賢有行而早沒無嗣。朴松堂英表其墓。及司諫府君之且卒。使少子諱應寅後儒士府君曰。吾弟而不祀。134_279c死能瞑吾目乎。是爲敦寧都正府君。而公則都正府君之少子也。母淑夫人密陽卞氏。察訪希訥女。以宣祖九年丙子十月七日生公。自少志不苟。年二十四而從兄以功當任。子弟勸公仕甚勤。卒不從。丙午。丁外憂。壬子擧進士。戊午。見時將亂。避居禮山。至癸亥春。有事至京。具綾城夫人。於公爲甥。公過訪。夫人問公歸在何日。公曰。在明日。夫人苦止之曰。宜少遲。綾城亦云。公見其家。多置弓矢。翌日早行。不留綾城。竟至舍所。問進士安在舍者。對今曉已歸矣。綾城怊悵良久而去。弘濟擧事。蓋以是日。後綾城嗔公。人亦134_279d多公之能自遠跡也。是年。補齋郞。秋。遭內艱。丙寅。除典設別檢。歷東部,司僕主簿,工曹佐郞,正郞,軍器,司宰,掌樂,繕工僉正,廣興守,與籤。外則監連山,淳昌二縣而已。孝宗六年乙未。以耆耋陞秩通政。丁酉五月十四日。卒于陽城。壽八十二。夫人和順崔氏。察訪孝源之女。先公卒。窆于廣州之狎鷗亭。後公卒而又因葬陽城。至己亥幷遷。合祔于楊州之袈裟坪都正府君墓左負子之原。公有三男四女。男梠判官,彬,榗。女適韓駿發,曹敬瑋判官,柳俔進士,鄭晩世。梠子世燮,世爀生員,世煜,世承旨。彬于世煕縣監,世熀,世134_280a炫,世美,世兼。榗子世榮,世瑩,世謍。韓駿發子相翊,相揆生員,相老。曹敬瑋子一興。柳俔子世慶。鄭晩世繼子河一。餘不盡載。公二兄皆早沒無子。長嫂李親老。未有兄弟。常泣請於都正府君。以傳重移之公而已。得伸其私情。辭指哀切。都正府君。合宗族而聽焉。及丙午之喪而公竟受重。公之少也。家門方貴盛。能不懈擧業。筆亦精。其終屈名途。則有命焉。家屢空。處之晏如。其老也。常撫弄諸孫。至見嬉笑。過則必嚴責。崔夫人者順。敬事君子。今雲仍衆多冠諸族。公終收未食之報考如此。世具狀。屬世堂以墓銘。謹銘曰。
134_280b冶川五子。都正爲季。出後諸父。實自先意。都正三子。公又其季。二兄早亡。故承宗祀。秉守庭訓。行已謙謙。乃僉工正。乃典宗籤。以多子孫。以登壽耇。天之報善。疑薄疑厚。載銘玆石。敬示諸後。

 西溪先生集卷之十四
 碣銘 七首
漢城判官朴公墓碣銘 a_134_280b


公諱梠。字汝奐。姓朴。望潘南。九代祖尙衷。高麗右文館直提學。八代祖訔。左議政。諡平度。高祖諱兆年。吏曹正郞。曾祖諱緝。贈戶曹參判。祖諱應寅。敦寧都正。考諱東緯。護軍。妣淑人和順崔氏。先代事。詳具護軍府君墓碣。公生以宣祖三十一年戊戌八月十八134_280c日。少則力擧業不中。晩而補童蒙敎官。序陞造紙別提。遷司評。公訟理。出爲漣川縣監。撫困瘠。裕蓄藏。新廨宇。秩滿歸。後由監察。遷漢城判官。甲午春。丁內艱。制除。復爲監察。又出爲新昌縣監。時護軍府君。年踰八袠。迎至陽城。陽城距縣不遠。朝夕致養。甘毳之味。未嘗缺。丁酉。護軍府君。竟卒于陽城。以憂歸。後八年甲辰閏六月二日卒。壽六十七。其年十月。葬于廣州之狎鷗亭。及配姜氏卒而遷公之塋。合窆于麻田。己巳四月三日。復還狎鷗亭之篤兆而改負丁。姜氏籍晉州。生員渭興女。後公十六年。而以庚申閏八月七134_280d日卒。壽八十五。公之事護軍府君也。不敢去左右。不敢自便適。疾病則廢寢食。前後遭憂。哀毀踰制。平居未嘗設惰慢之容。雖貧窶甚而能安素守分。不求榮仕。知舊或居銓地。罕至其門。訓誨子孫有法則。姜淑人。仁淑嘉惠。配德無違。生四男四女。男世燮世爀世煜,世。世爀生員。世今承旨。女長適金宇一。次金濡縣令。次洪景至。次許。世燮子泰階。世爀子泰詹生員。泰期,泰登生員。世煜子泰明生員。泰國,泰茂。世子泰舒參奉,泰鎭生員。金宇一子老成,大成,晩成,彥成九成。金濡子命圭生員。洪景至子錫禹。許134_281a瓊。餘多不記。世屬其族兄世堂以公墓銘。謹敍次。系之銘曰。
官終府縣。不豐於身。食報在後。十子百孫。是宅云何。屢改復還。孝子之孝。萬歲其安。


西溪先生集卷之十四
 碣銘 七首
榮川郡守朴君墓碣銘 a_134_281a


府君諱世樑。字廈卿。其先羅州之潘南人。文正公尙衷。當高麗末。文章節行。齊聲圃,牧。子訔入本朝。策功佐命。官終左相。諡平度。五傳而至高祖諱紹。卒官司諫。追諡文康。曾祖諱應福。大司憲。大父諱東望。吉州牧使。父諱潾。僉正。母綾城具氏。綾海君宬之女。134_281b仁祖十四年丙子。避兵江都。殉節旌閭。府君生六年戊辰三月十三日。顯宗元年庚子。補敬慕殿參奉。辛丑。轉繕工奉事。癸卯。擧進士。甲辰。遷濟用直長。又遷宗簿主簿。尋改監察。冬爲陽智縣監。乙巳。遭外憂。戊申。還宗簿主簿。移工曹佐郞。爲新昌縣監。癸丑。秩滿歸。乙卯。補宣惠郞。秋。爲歙谷縣令。丁巳。罷官。僑居安邊之鶴浦。築孤山下。至庚申復起爲監察。尋除咸興判官。病免。辛酉。補宣惠郞。兼長興主簿。長興有積弊。主事者請就諸郞選擇任之。故有是除。壬戌。授溫陽郡守。復爲主事者難其去。不許出。乙丑。歷工曹134_281c正郞,漢城庶尹。夏。出爲大興郡守。戊辰。坐事罷。辛未。補儀賓都事。改工曹正郞。秋。出爲榮川郡守。三年以病歸。終于城南舊第。實癸酉七月四日。壽六十六。九月十三日。葬于鐵原鶻坡先壟西負丁之原。府君天資坦易。不修邊幅。與人絶畦畛。人亦樂與之交。少游同春之門。同春喜府君眞率。奬歎不已。府君晩從吏仕。所至儉節。能祛弊蘇殘。其在繕工及長興。一意釐革。當事諸公。亦請久任。責其成效。一官五年。近事所無。尤長治邑。所至輒有異績。其爲新昌。當辛亥大饑。夙宵殫慮。全活甚多。未嘗自言于人。趙宗著廉問湖134_281d西。還言一路荒政。當以君爲最。然不在當問。不敢以聞。今掌令。泰昌府君從兄弟子。其言可信。嘗從府君于新昌。見其淸白飭躬。便易近民。不察察於細務。不規規於末節。百事簡約。坐衙無鼓吹。出門無皁隷。非疾病無兼味。非大暑不張蓋。每當農月。吏役皆聽歸田。守衙纔數人。所須薪藁。使僮僕取給。暇則短巾便服。荷杖逍遙。有時民不能識也。治民一以德惠。民愛之如父母。呼爲生佛。民有悍獷。不母其母。隣里畏不敢言。一日被其母赴愬。收繫縣獄。傍近之人。臚列其罪。請無赦。府君愀然曰。彼亦人。不敎而殺。不祥。擧母134_282a子之恩。善惡之分。譬曉之。民感悟請自新。府君釋其罪。厚遺而遣之。令歸以餽母。民遂折節爲善良。以孝見稱鄕隣。時民田有麥穗兩岐或四五岐者。餘一田之半。民咸異之。欲言使府。以明德政府君力沮之。乃止。是年夏。旱甚。秧苖盡枯。一夕雨驟至。環縣境大霔。民及時揷秧。獨占有年。是皆泰昌所親覩。中牟三異。不足多也。其爲歙谷。亦惠政洽然。民皆愛樂。鑄鐵爲碑頌德。府君外若疏宕。不經意世務。內實沈毅有智。常曰。國家兵政太疏。猝値邊警。恐有土崩之憂。西北地。素多山。氓人皆驍健。習砲丸以獵爲生。歷險踰阻。134_282b耐飢能寒。募致數萬。厚廩食精訓鍊。得其死力。前無敵矣。平日之言每如此。及疾革。夢語諄諄。唯此一事。反復不已。口呼遺疏。屬藁未半。遽至溘然。嗚呼。非素所蓄于中。欲一吐而未能者。臨沒。豈至是哉。恬靜不喜芬華。歷仕三十餘年。居處服用。無異寒士。睦於宗族。無事問遺多闕。至嫁娶喪葬。殫力周恤。求衾棺槨。不少吝也。配延安金氏。縣令垕女。聰慧勤敏。善於內治。以丁卯二月二日卒。壽五十六。祔葬墓左。一男二女。男泰範。女佐郞李相仁。士人沈壽浚側生。一女幼泰範有二男。弼愼一幼。沈壽浚二男。,湙。謹系之銘134_282c曰。
寬簡臨下。民吏悅也。倫節爲政。儲藏溢也。兩岐之麥。聞古有說。一同之雨。澤今不缺。天人符應。寧不信然。鑱詩在石。示後千千。

西溪先生集卷之十四
 碣銘 七首
處士朴君墓碣銘 a_134_282c


府君諱瀏。字仲遠。姓朴。羅州之潘南人。高祖吏曹正郞贈左贊成諱兆年。曾祖司諫贈領議政文康公諱紹。號冶川。祖大司憲諱應福。父吉州牧使諱東望。母光山盧氏。生員守謹女。以宣祖三十八年乙巳六月十五日。生府君。幼能勤學。旣早孤失怙。益自勉勵。134_282d長而攻擧業。文藻華蔚。時輩所推。歲丙子。丁盧夫人憂。是冬。北兵至而南漢圍。明年和成。由是慨然絶意榮名。居廣州月川。潛心性理諸書。求用力於內。仁祖二十二年甲申十二月十八日。竟以疾終。年四十。乙酉。葬鐵原鶻坡。從先兆也。後四十三年而改窆于山北負巽之原。西距牧使公墓五十許步。府君志操端潔。飭行甚高。尤謹受辭。不近非義。甚至蔬菜細微。必問所從。惟恐浼已。敎子亦嚴。使不敢語及貸利。家貧窶。敝袍糲飯。處之晏如。人或勸仕。初如不聞。沖然自守。以終其世。鄕里親識。美其行義。姪壻李金浦壽134_283a翼,崔參判逸。尤所敬服。及府君沒。乃言于衆曰。若君者。眞古之高行處士。宜以處士稱。從之。府君不喜嘲詠。亦時託興。有古詩幾篇。趙松谷復陽謂詩雅健。當不讓石洲。娶安東權氏縣監恰女。端莊和順。媲德無違。後府君一年而卒。年四十三。合葬鶻坡。有三男二女。男長世樞。次世樟掌令。次世櫶。女適金尙堅,房世貞。世樞一女。適李湋。世樟一男四女。男泰夏。女適進士李彥緯,宗室杭,李世發,李萬稷。世櫶一男一女。男泰昌掌令。女適正字洪克濟。金尙堅一男一女。男萬甲。女適李後相。銘曰。
134_283b遭世之亂。隱不求仕。泊然內守。絶去外累。趣高操礪。志潔行治。敝袍糲飯。以沒其齒。我銘示後。誰歟徵此。


西溪先生集卷之十四
 碣銘 七首
學生朴君墓碣銘 a_134_283b


君諱世櫶。字汝村。朴姓。其先羅州之潘南人。十世祖尙衷。仕高麗爲右文館直提學。今追諡文正。九世祖訔。佐太宗爲左相。諡平度。傳五世至諱紹。中宗時爲司諫。排金安老。反見㧖以終。是爲君高祖。曾大父諱應福。大司憲。大父諱東望。卒官吉州牧使。父諱瀏。端潔修飭。不幸早世不仕。母安東權氏。縣監恰之女。君以仁祖十一年癸酉五月四日生。幼穎異。八134_283c歲。知綴文。甲申。失怙。乙酉。失恃。君纔年十二三。執喪哀戚。三年不茹蔬。旣長。攻藝業。屢中庠選。游沙川金克亨之門。專勤不懈。甚爲所愛重。常留與講討。尹石湖文擧亦見君曰。異日玉立朝端。必此人也。君溫良開爽。喜怒不遽。口無戲言。人不敢加以非禮。修身飭行。動以古人自期。書九容九思於坐間。錄小學嘉言善行之尤切已可爲法者。心惟目存。致參前倚衡之功。平居。衣冠必正。容止必端。處兄弟待交友。必盡其誠。從祖母之窮老而居比屋者。事之尤謹。一味必先。君以戊戌歲卜居于坡州之釜谷。至顯宗元年庚134_283d子十一月。有疾。就醫京城。十七日。卒于京。得年二十八。明年辛丑二月十一日。葬于坡州之白石面牛居里負酉之丘。後二十六年而鄭孺人卒。則祔葬居右而異樹焉。鄭孺人。望草溪。護軍元俊女。夙慧工翦。製善治飪。勤於紡績。爲二親所愛。家營第力中屈。凡資費之煩。皆出於孺人之十指。及笄而歸于君。不以貧窶見色。自君沒後。毀服憂居。數十年如一日。敎子女有法。女之嫁也。授以內訓及居家雜儀曰。必以是爲範。子泰昌纔毀齒。則託於叔。有時親往視兒不令歸。雖病亦然。家甚匱。爲兒肄業。必殫力營辦。兒有客必134_284a問其爲士與否。是則喜否則不樂。深痛君之抱才而早世。每戒泰昌曰。未亡人。日夜徒望汝之有成。以遂先君之志。及其長。使受業於其族父玄石。相國泰昌。竟以今上二十一年登第。今爲兵曹正郞。孺人之敎也。孺人卒於乙丑九月九日。享年五十七。慈仁寬厚。親疏貴賤。必用其誠。比喪。隣嫗村婦。哭泣賻遺。有一子一女。女壻洪克濟。承文正字。泰昌生三男。弼琦,弼琥,弼瓚。一女幼。洪克濟一男亦幼。泰昌具狀請於其族父世堂。俾爲碣銘。銘曰。
山何蜿蜿。水何彎彎。一堆之丘。人在其間。其人如玉。134_284b逝不復還。千秋萬年。爲我悲酸。

西溪先生集卷之十四
 碣銘 七首
掌令朴君墓碣 a_134_284b


府君諱世樟。字汝擇。朴姓。籍潘南。十世祖右文館直提學諱尙衷。當高麗末。以忠諫遘禍。本朝追諡文正。九世祖左議政平度公諱訔。佐太宗。有功有德。高祖司諫贈領議政文康公諱紹。號冶川。著名中宗時。曾祖大司憲諱應福。祖吉州牧使諱東望。考處士諱瀏。操履高雅。潛心經籍。自丙丁後。不應擧選。隱德以沒。母安東權氏。縣監恰之女。端莊和順。府君以仁祖七年己巳十月三日生。幼受學家庭。資又聰敏。134_284c歲甲申乙酉。荐遭巨創。旣免喪。孤惸自立。力於擧業。不以困貧少沮。年二十九。中丁酉進士。今上五年已未。登第。年五十矣。明年庚申。例授典籍。轉禮曾佐郞。遷慶尙都事。辛酉。爲兵曹佐郞。壬戌。轉正郞。掌試咸鏡南道。還爲淳昌郡守。甲子。免歸。乙丑。爲持平。轉司藝。改掌令。已而爲奉常副正。丙寅。還掌令。旋爲宗簿正。五月。出爲寧越郡守。明年丁卯。遘疾。以四月九日。卒于官。壽五十九。是年六月辛酉。葬鐵原鶻坡負巽之原。從先兆。府君慈良溫雅。恬靜自守。不喜交游。常曰吾守吾拙。何求於人。視世之躁競干進。以爲深134_284d恥。居家尤篤孝友。有弟貧不能與之同居。及其早沒。終身悼恨。收撫孤幼如己子。長姊窮居。奉之甚勤。衣食之物。資助無缺。再爲郡。儉約畏愼。勤於奉公。晨夕整冠服。坐衙無勌色。民有牒訴。題判纖悉。不憚其煩。或規不宜至此。曰。我雖疲。民卽便。謂情僞一斷必不再愬。以是所居。詞訟稀簡。惡黨比尤甚。其爲淳昌。南方俗喜標榜。甲乙爭鬨。翻覆與奪。視牧守爲俯仰。府君至而罪其譸張妄愬者曰。後復有擠排異已。當視此斷不貸。衆皆悅服。在寧越。歲大飢。計口賑窮乏。捐邑入火粟。立常平法。紓民民賴之。府君沒。一時名勝。134_285a爲詩以悼之。有曰潘南大賢後。暮世古心人。曰掇皮看古態。對面見眞心。足以槩其平素所蓄絶異於衆。爲人信服如此。


西溪先生集卷之十四
 碣銘 七首
記曾祖墓碣重刻豎置顚末 此文。因文多難刻。改用下文。 a_134_285a


謹按所聞。先祖父在安東時。鐫勒此石。舁致先墓。踰嶺行五六百里。乃達于此。其勤至矣。歲卽萬曆四十四年丙辰而撰與額。皆時賢之選。金公玄成書。尤世所寶。適會時事之變。廢黜之議。及於西宮。於是民彝將墜。而公亦獲罪。役故中已。石不可以時建置。其初憂在傷缺。瘞土中。反爲土蝕而致缺落。又懼久則134_285b愈訛。出諸土。露而置之。搨數紙以藏于家。歲月寢遠。頻經喪亂。事迄未就。今六十一年。而碣上之字。已不可識矣。觀者嗟傷而子孫益懼。由是少長聚謀。謂何以上追先志。退無後責。請於宗人。玆獲其助。得以量功授事。改治舊石。以庶曾孫世培主事。令玄孫泰維摸舊本上石。揭于墓左。其舊本因藏。嗚呼。事固有待而成。非人力也。顧今諸父皆已棄世。吾兄弟不肖。門戶益以衰替。若不可振。然令大事克就。卒究先志者。殆天之有待乎時也。事始于丙辰。卒成于丙辰。此豈人力所得爲也。語曰。天道周星。物極必反。噫其然乎。134_285c曾孫世堂謹識。
舊刻此碣。屬世之多故。而其揭之不以時。歲月寢久。文字剝滅。諸子孫懼而合謀。改治其石。卽舊搨本摸勒。立諸墓左。因存舊年月以示後。蓋去今六十一年云

 

 

 동성군은 신립 장군의 아드님으로 저의 방조  만호 필신의 외손 되시는 분이시다 

    

   軍覆溺歿。母貞敬夫人全州崔氏。萬戶弼臣女

 

西溪先生集卷之十四

 墓表 十五首
東城君申公墓表 a_134_285c


公諱景禋。字子精。姓申。平山人。前世有崇謙者。爲高麗太祖。將死於桐藪之戰。六世祖文僖公槩。相世宗。曾祖文節公鏛。顯中宗時。祖諱華國。不仕。父諱134_285d砬。判尹。當宣祖時。翦北虜爲名將。及南寇迫畿。遽以市井子弟數千人。迎戰忠州江上。軍覆溺歿。母貞敬夫人全州崔氏。萬戶弼臣女。萬曆十八年十月二十八日生公。二兄。平城府院君景禛。東平君景裕。公實其季。三歲孤。二十六。中武擧。拜宣傳。敍都摠府都事。己未。丁內艱。辛酉。服除。時光海昏虐。殺弟幽母。平城密有匡世志。公與協心謀畫。平城旣爲朴承宗所忌。黜戍曉星。後事一委公。與昇平,延平往來計議。卒奉仁祖反正。初授喬桐縣監。旋擢延安府使。未上。超拜京畿水軍節度使。其冬。榮功二等。進封東城134_286a君。甲子春。李适叛。將兵入衛。從駕公州。行扈衛大將事。适誅復之任。乙丑。節度湖南。丁卯。有虜難。以萬餘人。入援未至。虜去乃還鎭。後十年間。鎭海西莅水原。統制三道。乙亥。爲捕盜大將。丙子。南漢受圍。屬體府爲中軍。常奮力抗敵。城中賴之。丁丑春。圍解勞。進資憲。拜統制使。時經亂重南邊。故出再鎭。辛巳。知敦寧兼扈衛捕盜大將。壬午。復節度京畿水軍。癸未春。平城病。思公上爲召。未至而平城卒。特任公御營大將。公自平城卒後。哭不輟。因成疾。五月三十日。竟卒。年五十四。上震悼輟朝。七月。葬于廣州牛峙艮134_286b原。公丰彩美髥。資性端愨。琴臺之禍。至痛在心。終身不食魚。事平城如父。服訓不懈。及貴異居。日常省在傍。遇親舊。必篤恩義。居藩閫。率著廉謹。御軍有威惠。士樂爲用。掌盗善鉤距。人服其明。自以受上恩遇而値時艱難。居常感奮。思捐軀命。前夫人高興柳氏。早卒。葬判尹墓傍。後夫人全州李氏。護軍星吉女。通書史有閫範。年七十二而卒。祔葬公墓。公無子。李夫人生一女。適濟用正李慶果。嘗欲以平城少子都正垓爲嗣。未及請而歿。公卒後大臣爲言追以垓後公。垓二子。汝晳縣監。汝哲判書。李慶果三子。燾,黯,勳。二134_286c女。適鄭載漢進士,朴明義。



 西溪先生集卷之十四
 墓表 十五首
西溪樵叟墓表 a_134_290d


134_291a樵叟姓朴。世堂其名也。其先兩世貞憲,忠肅。並顯於仁祖之世。叟生四歲而忠肅公棄背。八歲而遭寇難。孤貧失學。及十餘歲。始受業於其仲兄。亦不自力。年三十二。當顯宗初元。用科第登仕。列侍從八九年矣。自見才力短弱。不足有爲於世。世又日頹。不可以救正也。乃解官去。退居東門之外。去都郭三十里水落山西谷中。名其谷石泉洞。因自稱西溪樵叟。臨水爲屋。不治籬樊。植以桃杏梨栗繞其居。種爪開稻畦。賣樵爲生。當農月。身未嘗不在田間。與荷鋤負耒者相隨行。初亦間赴朝命。後屢召不起。居三十餘年而134_291b終。壽踰七十。葬於其所居宅後百數十步。嘗著通說。明詩書四子之指及註老莊二書以見意。蓋深悅孟子之言。以爲寧踽踽涼涼無所合以八。終不肯低首下心於生斯世爲斯世。善斯可矣者。此其志然也。


西溪先生集卷之十六
 行狀 二首
刑曹判書李公行狀 a_134_326a


公諱奎齡。字文瑞。姓李氏。其先韓山人。文孝公穀,文靖公穡父子。爲高麗名臣。文靖當革代之際。不肯屈134_326b節。本朝爲之優禮尊寵。垂光于史冊。文靖生種德。知密直司事。生孟畛。判中樞。又三傳而至允蕃。爲大司諫。又再傳而至希伯。爲史官爲諫臣。卒延安府使。是爲高祖。曾大父諱大秀。郡守。大父諱顯英。吏曹判書諡忠貞。有名仁祖之世。父諱徽祚。歷官州縣。卒僉知中樞。母贈貞夫人廣州李氏。郡守斗瞻女。李夫人嘗夢大星入懷。以天啓乙丑三月初九日生公。幼而端秀。隨姆游戲。有老人過而見之曰。兒異日必貴。忠貞公尤鍾愛。期以遠大。方五六歲。見人論呂后殺韓信。謂功大不可殺。公從傍曰。使信不死。安知不爲134_326c漢之患耶。坐中咸奇之。丙子後。僉樞公以重臣子。質瀋中。李夫人挈公南。寓居居昌。趙龍洲絅時亦僑寄傍近。公年十三。往受業。爲趙公所賞許。三年而僉樞公自瀋歸。公亦還京。甲午中司馬兩試。是冬。除自如察訪。戊戌。遷掌樂直長。宋同春見公以爲非終屈庶官者。己亥。陞典獄主簿。改引儀兼參軍。辭褫。旋授刑曹佐郞。庚子。爲交河縣監。勤吏事。邑大治。李公敏敍在邑中深服曰。牧民當如是。時方量田主事者。督責列邑靡然。公獨一視饒瘠。爲之上下。田賦無濫。交民至今賴之。壬寅春。登第。秋。例兼記事官。癸卯。解歸。甲134_326d辰。拜持平。先是。徐公必遠與宋相國時烈爭事。相詆語多激。議者非之。公欲追劾徐公。未及發而同僚先避。公擧以自列見褫。因此特補北靑判官。時徐公亦不安于朝。出按北藩。公旣與徐公相見面。規其闕略。不爲悔謝。徐公歎服。及還。延譽簪紳。聞者兩美之。是冬。有爲公言者。入爲直講。乙巳。拜正言。從幸溫泉。是年亢旱無麥。請蠲賦恤困。褫爲直講。改刑曹正郞。俄出爲京畿都事。兼記注官。丁未。入爲正言。時特旨除張善澂兵曹參判。臺閣爭之。又下嚴批。公上疏。引宣祖時執義辛應時入對。論沈義謙事。以爲外戚不134_327a宜特除。臺閣不可摧折。今日臺啓。實循公議。疏入十三日。始下批褫公職。然特除亦竟寢。冬。選入弘文館爲校理。戊申己酉庚戌連在玉堂。論講筵久廢。宮闈奢侈。閭巷效尤。若不躬率以正。無以革此弊。復乞循輿情。躋祔神德王后太廟事。竟從。其間爲持平者再。正言者一。弼善者一。又再爲執義,司諫。宗簿正,掌樂正亦各一。秋。出爲安東府使。府爲嶺南劇邑難治。嚴明莅下。淸白自持。尤留意興學養士。聚子弟講讀。邑多豪右。歲逋官糴。或至累百斛而不償。吏不敢問。公立科條。治其尤橫猾不畏令者。民皆及期輦輸無134_327b敢後。明年辛亥。歲大侵。散所收糴賑施飢餓。又約己節用。捐廩蓄㣥。以補其缺。擇尤困極瀕於溝壑者。按籍計口。給饘粥資。或有增口而冒食者。掾吏請抄汰之。公不聽曰。與其抄汰之過。令窮餓絶餔。無寧容其僞冒而官受欺於民耳。且方阻飢。人人各愛其父母妻子爲救死計。何忍槩以好冒而不之恤乎。民以此全活者衆。時有令郡邑毋得受流民。公謂盡吾民也。何分彼此。不可立視其爲道路之莩。設置茇蘧。糜粥以養之。親自臨視。復擇鄕望有幹者主之。於是境無道殣。御史及按部者相繼褒聞。奬以表裏。安東之民。134_327c至今言吾輩不死。李侯之賜。十餘年後。國有騷屑。多憂流遷。安東人相謂李侯家南來。吾屬當爲之主。少報厚德。冬。除校理。臺啓仍任。壬子秋。復以校理召還。因進對。言今停講閱歲。外謂若罷宂官。當先玉堂。勸上懋學。癸丑。爲執義。因早與同僚箚陳七事曰。立志必篤。求治必誠。開講筵。啓言路。愼辭氣。嚴宮禁。省宂兵。夏。擢同副承旨。時由三司進銀臺者絶少。纔數人而已。褫爲兵曹參知。俄還喉司。序至左副。甲寅春。爲戶曹參議。夏。遷禮曹。仁宣王后之喪。禮官議大王大妃服。引古禮定以大功。非近俗所行。爲異者紛134_327d然不已。至是。人有獻疏訐其失。召政府六曹三司。會議賓廳。大臣復執前議。上盛怒。竄領議政金壽興。公以同議。待罪城外。八月。顯宗昇遐。今上嗣位。不得已入就職。冬。遷大司諫。引前事免。再除亦不拜。乙卯春。丁內憂。丁已制除。爲靑松府使。不赴。侍僉樞公。寓龍山江上。戊午春。復授竹山府使。僶勉赴官。抑奸猾。恤困窮。政修事擧。畿內州縣。出役多門。小民奔命不暇。公爲之方便。以紓其力。每西使之至。列邑騷然。竹山一境。獨休晏無事。民大愛樂之。至鑱崖頌德。爲旁縣者。喜公治。就問術。退而行之。其邑亦治。民曰。134_328a我之庇。公之賜也。並爲公立碑其境。事聞。命增秩。爲臺官所格。庚申。移拜水原府使。宋相國時烈。致書賀公曰。大水籠山。咫尺不聞人語。獨仁聲聒於耳邊。冬。入爲吏曹參議。思恢公道淸仕路。崔寬之按海西。黜爲郡者二人。皆有力於朝而無治能。以是人謂其不畏強禦。公擧以擬諫長。時亞銓卽被黜人之弟。欲沮之而不得衆。以是難公。辛酉春。解銓。間歷戶曹,銀臺。復還銓曹。九月。遭外憂。率禮罔愆。癸亥制除。更入銓曹。甲子。遷秩。觀察京畿。嚴考課公聽斷。一於守法。而干囑不行。乙丑。乞解得請。有訟屈者就京兆自理。詆134_328b公以私於所親。判尹朴信圭上章斥公。語多不擇。臺閣欲論之。公聞曰。我雖非有私。實不能遠嫌。安得謂彼爲非。臺官深服公之言。遂止。夏。拜吏曹參判。以前事力辭不就。坐罷已。復起觀察嶺南。幅員旣大。饒簿牒。多弊政。俗又喜訟。公至而案牘無滯。黜汚吏不少貸。一路肅然。値歲飢。轉粟以賑。民賴以全。行部至安東。髫白擁馬曰。昔公活我。今公又來哺我。夾道而拜。至不得行。丙寅。以罰金事。充副价赴燕。所贈金帛。不以一絲汚橐。行李蕭然。衣被而已。冬。還拜大司憲。以罰金之未能準減自劾。褫拜都承旨。又辭免。丁卯春。134_328c爲兵曹參判。俄移吏曹。前此崔相國錫鼎爲副提學。疏辨尹公拯之被誣。於是上怒罷崔。及敍公首擬崔西銓。時議譁然斥公。公曰。畏罪求合。我不能爲也。陳疏自列。卒又見罷。秋。敍拜大諫。褫爲工曹參判。冬。轉兵曹。復拜大諫。上從謁園陵歸。前衛未戒而駕已先發。從官多顚倒失次。公疏論乘輿進止。不宜輕遽。賜優批。間褫爲刑參。戊辰春。還大諫。李相國尙眞入對。言尹拯不當削逸。退又箚論。下敎切責。辭極嚴厲。公上疏切諫。嘉納。收還批旨。有宮嬖斥田海西。大爲民害。復論之。解諫職爲左尹。旋拜都憲。大臣134_328d奉影幀南下。道路供具。過於豐侈。公請推兩道方伯。後因臺僚。欲論李選持論偏律已疏。公意不合。避褫。秋。復爲都憲。會朴世采被召造朝。言罪人杭事。上怒甚斥罷。而大臣南九萬,呂聖齊請對論救。上益怒。安置兩相北塞。公率諸僚。伏閤爭之。復入對極言。終不納。褫爲戶參。還都憲。林泳自以朴世采門人。陳章乞免。嚴批特罷。公又爭之不得。時莊烈王后久違豫。諸罪謫者多蒙疏釋。獨不及南,呂及金萬重。公言之。並不納。十月。爲都承旨。因冬雷。又言君道亢高。威怒暴發。禮遇之儒。慢罵斥退。股肱大臣。栫園134_329a絶塞。無非爲累於聖德而不豫於天心者。自兩大臣竄逐。人皆諱言。苟不優容忠讜。闕失無聞。天恐愈甚。答批深責。蓋雷變已過數日。納言之地。不聞箴戒。公入而始有是事。褫爲都憲。時有後宮之毋乘轎入闕。持平李益壽,李彥紀等發吏補治。上盛怒。杖殺吏。而褫兩持平。廷臣陳論者多。上意猶未解。公疏言向日過擧。實所未有。諸臣殫論。亦示悔悟。則固當褒賞。勸勵群工。而思點尙靳。臣恐終不能取信於臣民。優批嘉納曰。七情難制。唯怒爲甚。予一時之忿。致此之過。反躬慙悔。必加意本源。庶可以去粗暴之病。134_329b而無頻復之悔。已而。褫爲右尹。病不參殯殿哭班。大臣素憾公故坐罷。因是不安出郊。己巳正月。敍軍銜。累疏不就。蓋見時事將非。未幾。群不逞得志而有四月之事。公退寓龍山。杜門屛迹。不與世聞。冬。除左尹不就。庚午。又除鐵原府使。時嚴旨數下。責不就官者。公旣辭不獲。勉赴。至壬申解歸。僑寄楊州邑中。甲戌夏。盡逐用事者。召復舊人。特除大司憲。屢辭不許。始赴召。中宮旣復位。公與諸僚。論己巳諸人之罪。朝議必欲誅殛。公獨謂順旨與請廢。其罪差殊。今置此等極典。設有請發之人。無以加其法。我朝仁厚立134_329c國。不幸近日每當飜覆。輒至誅戮。所傷多矣。今日之議。務在平久。何事於快心。於是啓竄罪重者十餘人而止。論者以爲得體。兼左副賓客。充特進。入侍經席。推論君德。以及時政民隱。數反復。上常傾聽。歷工參進刑曹判書。視事數日。人服公明。兼都摠管。引年乞休。優批不許。尋辭褫爲知樞。八月。復拜大司憲。屬微疾。以十五日。易簀于皇華坊第。壽七十。訃聞。上震悼。慶壽節輟樂。停朝二日。弔祭如例。世子遣宮僚來弔。致棺一具。公姿性端美。居家孝友。事父母敬順無違。服勤至老。處昆弟姊妹。歡愛周洽。其早沒134_329d者。撫養孤寡。恩意篤至。先廟祭奠。非病不攝。曲事庶母不失意。接人以誠款。處事必詳盡。衣無華采。食無重肉。聲色玩好。尤泊然也。行不爲皎厲以求異。至利義之辨。確守不撓。常持謙挹簡於交游。颺歷淸華。不藉沒引。每有升進。逡巡退避。人以爲賀。公獨不怡。以爲官高責重。無以稱塞也。所在盡職。內則出入三司貳銓選長喉舌。外則佩郡符持藩節。淸愼儉約。不以絲豪自累。閔相國鼎重謂人曰。李令才足辦事。淸白過人。以治著聞。不亦宜乎。申相國翼相。是公夫人之弟。常稱公謹於取與。廉操可法。尤守法不私。人莫敢134_330a干。在秋曹。公有女異居。其家人犯禁。白公請除。公不許曰。自我禁自我除。不可但當爲汝入贖而已。遂分騶直與之爲贖。深惡黨比。持論平正。不喜絞訐。立朝四十年。名行無玷。常存韋布之志。不變氷蘗之操。雖屢經世變。超然文網之外。己巳以還。捿遲近郊。賃郵田僦民屋而居之。時至屢空。晩年官高祿厚。家無餘財。喪賴賻贈而辦。以是年十月初三日。葬于驪州治北梧里谷負亥之原。從先兆也。前夫人高靈申氏。贈領議政湸之女。資性端淑。承君子事尊章。敎子女待僕御。恩義法度。皆可則也。生以壬戊。卒以乙巳十二134_330b月十四日。初葬長湍瑞谷先塋之側。至乙亥。遷祔公墓左。一男明恒。有才行。官止軍資判官。二女。適進士兪德基,別檢張梡。後夫人尙州黃氏。府使埏之女。一女一男。女適朴弼健。早沒。男明彥進士。內外孫總若干人。記昔公之因召赴闕也。過問田間。坐語移晷。略及一時論議可否。又自言已老矣。欲早求退。無意久留。此二事。皆公所自能行其言者。特有得不得焉。則繫於天。非公志也。寧不可惜乎。世堂於公。自前代有中表之誼。分素不淺。而少則拙廢。晩復屛蟄。固不能與公數相從游。深恨在此。今進士君來求文。使論次134_330c公事行終始。則意在於假其薄陋。以請一世之賢人君子言能信後者。揭爲墓道顯刻之銘。故不敢辭。謹據其所爲家狀。敍述如此。儻賜採擇。豈勝萬幸。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약천(藥泉)의 별장에서 남운로(南雲路)에게 주다 4수


약천은 광진(廣津) 강가에 있는데 운로의 작은 집이 있다. 내가 가서 여기에서 이별하였다.

호해에서 서로 그리며 세월을 보냈는데 / 湖海相望歲月空
강산에서 또 이렇게 잠깐 함께하노라 / 江山又此暫時同
표표히 헤어져 동서로 흩어지리니 / 飄飄觧袂東西散
먼 길 어떻게 소식을 통할 수 있을까 / 路遠何緣信耗通

강을 따라 아득한 백운 속으로 들어가니 / 緣江路入白雲賖
붉은 밤과 누런 배 달린 두서너 집 있다오 / 赤栗黃梨三兩家
멀리 바라보니 새로 지은 집 가장 깊은 곳에 / 遙見深處
솔 드리워 그늘진 언덕에 작은 시내 비껴 흐르네 / 低松陰畔小溪斜

처음 이곳에 집 지음 뜻이 없지 않았으니 / 初營此地非無意
만년을 쉬며 한가롭게 지내려 해서였지 / 應有休閑歲晩期
오늘날 도리어 와서 지나는 길손 되니 / 今日却來爲過客
아득한 세상만사 뉘라서 먼저 알리오 / 悠悠萬事孰先

그대에게 들으니 호중에 승경 있는데 / 聞君見說湖中勝
꽃을 심을 만한 곳 유난히 많다지 / 勝處偏多可種花
어찌하면 가솔 데리고 그대 따라 은거해서 / 安得將家隨共隱
모내기하고 게 잡으며 생애를 보낼 수 있을는지 / 秧苗罛蟹送生涯


 

[주C-001]약천(藥泉)의 …… 주다 : 이 시에 남구만이 차운한 시가 한국문집총간 131집에 수록된 《약천집(藥泉集)》 권1에 〈광진별서차서계박형계긍세당운(廣津別墅次西溪朴兄季肯世堂韻)〉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시는 남구만의 시 아래 원운(元韻)으로 실려 있다.
[주D-001] : 《약천집》 권1 〈광진별서차서계박형계긍세당운〉에 ‘茅’로 되어 있다.
[주D-002] : 《약천집》 권1 〈광진별서차서계박형계긍세당운〉에 ‘更’으로 되어 있다.
[주D-003]孰先 : 《약천집》 권1 〈광진별서차서계박형계긍세당운〉에 ’復誰’로 되어 있다.
[주D-004]호중(湖中) : 호서(湖西) 지방으로, 약천 남구만이 호서의 결성(結城)에 살았다.

서계집 제7권
 서(書) 7수(七首)
남 상국(南相國) 구만(九萬) 에게 보내는 편지


근자에 무더위가 심한데 삼가 대감의 체후가 만복하실 줄로 압니다. 지난번 면직을 바란다는 편지를 받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조정에 나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성상의 은택이 융성하여 진실로 본래의 뜻을 고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부디 날마다 훌륭한 계모를 진달하여 힘써 대신의 직분을 다하시고, 한갓 진퇴(進退) 하나만을 가지고 자신을 결백하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옛사람을 보건대, 나아가서도 하는 일이 있었고 물러나서도 하는 일이 있었으니, 지위에 있어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고 지위를 떠나도 말할 만한 것이 없는 근대의 명공(名公)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세당은 성대한 보살핌을 받아 겨우 병든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절박한 사정이 있어 감히 털어놓겠습니다. 저의 돌아가신 조부와 선친은 법례(法例)로 볼 때 모두 사시(賜諡)의 은전을 받아야 마땅하거늘 4, 5십 년이 지나도록 지금까지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 저희 형제들이 불초하여 일찍 청원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형들은 앞뒤로 돌아가셔 버렸고 저는 또 죽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이러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기라도 한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한이 될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마침 다행히 가질(家姪)이 번임(藩任)에 제수되어 분에 넘치는 총명(寵命)을 받고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법례대로 은전을 청하여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말았으면 하는데, 은전을 청하자면 모름지기 신빙할 시장(諡狀)을 구하여 태상시(太常寺)로 하여금 근거할 자료가 있도록 해야 합니다. 다행히 선덕(先德)이 민멸되지는 않아 돌아가신 조부의 행실을 기록하는 일은 이미 태학사(太學士)에게 허락받았으나, 선친의 벼슬한 행적에 대해서는 그 시장을 짓는 일을 집사 외에는 부탁드릴 곳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번거롭게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삼가 태형(台兄)께서는 필시 거절하지 않으실 줄로 생각되니, 부디 힘써 글을 지어 유명(幽明) 간에 영광이 되게 해 주시기를 매우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이 일은 사리상 찾아뵙고 부탁드려야 하지만 병든 몸이라 편지로 대신하니, 몹시 죄송스럽습니다. 조금이나마 헤아려 용서해 주십시오.


 

[주D-001]가질(家姪)이 번임(藩任)에 제수되어 : 가질은 서계의 형 박세견(朴世堅)의 아들 박태상(朴泰尙 : 1636 〜 1696)을 가리킨다. 박태상은 1687년(숙종 13)에 함경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인 1688년에 그의 임지(任地)인 함흥 감영에서 위 두 선조의 연시례(延諡禮)가 열렸다.

서계집 제8권
 잡저(雜著) 6수(六首)
석림암(石林庵) 상량문(上梁文)


누대가 신선의 거처와 비슷하니, 화려한 것은 한갓 업(業)만 지을 뿐이다. 쑥대가 족제비의 길을 막고 서 있으니, 고고(枯槁)함은 의당 인연을 따르기 마련이다. 한 줌의 띠풀을 덮는 것으로도 이미 충분하니, 오장기(五丈旗)를 세울 일이 뭐가 있으리오. 이에 암자를 짓기를 도모하니, 애오라지 여기에서 편히 쉬려 하노라. 여러 도인(道人)들은 인세(人世)를 떠나 물외(物外)에 노닐도다. 청산(靑山)과 녹수(綠水)는 가는 곳마다 고향이 아님이 없고, 곡방(曲房)과 동궁(洞宮)은 일평생 꿈속에서도 생각한 적이 없어라. 우연히 석천(石泉)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노니, 금사(金沙)의 기이한 경치보다 못하지 않도다. 세계는 무궁한데 서천(西天)의 영취산(靈鷲山)을 늘 제일로 꼽고, 방역(方域)은 구별이 있는데 동토(東土)의 선부봉(仙鳧峯)은 지금 짝을 찾기 드물도다. 비록 탁석(卓錫)의 옛 자취에 부끄럽긴 하지만 결사(結社)의 고사를 따를 만하도다. 300척이나 높게 세운 징관(澄觀)의 경영이 참으로 우습고, 어이하면 천만 칸을 얻을까 한 자미(子美)의 돌올(突兀)이 부러울 것 없도다. 시내의 구름은 방문으로 들어가고 산속의 아지랑이는 뜰에 가득하도다. 선지(禪枝)에는 뱁새가 잠시 편안히 깃듦을 기뻐하고, 기수(祗樹)에는 녹원(鹿苑)의 법륜(法輪)을 빨리 굴림에 놀라도다. 문득 파인(巴人)의 속된 노래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영장(郢匠)을 돕노라.

아랑위 들보를 동쪽으로 드니 / 兒郞偉抛梁東
선부봉 연못에 햇살이 붉은 노을을 쏜다 / 鳧池日射霞紅
나는 듯한 폭포가 산허리에서 쏟아지니 / 飛流直下半嶺
그 누가 한 가닥 무지개를 맑은 허공에 걸었는가 / 斷霓誰挂晴空

아랑위 들보를 서쪽으로 드니 / 兒郞偉抛梁西
관로가 앞 시내 저편에 있도다 / 官路只隔前溪
분주히 남북으로 오가는 사람들 / 擾擾南來北去
모두 보니 얼굴에는 먼지요 발에는 진흙이로다 / 摠看面埃脚泥

아랑위 들보를 남쪽으로 드니 / 兒郞偉抛梁南
푸른 못에 작은 바위의 그림자가 비췄구나 / 小巖倒影碧潭
늦봄이라 두견새는 바위 위에서 우는데 / 巖上杜鵑春暮
꽃비는 흩날려 선실로 들어가네 / 雨花飛入禪龕

아랑위 들보를 북쪽으로 드니 / 兒郞偉抛梁北
가로놓인 묏부리 천 길 우뚝 솟았도다 / 橫岡千仞峻仄
한송은 사철 내내 푸름을 변치 않으니 / 寒松不改四時
곧바로 쌍수와 함께 일색이로다 / 直共雙樹一色

아랑위 들보를 위로 드니 / 兒郞偉抛梁上
다만 하늘이 공활하도다 / 但覺天宇空曠
진종일 흐렸다 갰다 기약을 한 듯하니 / 鎭日陰晴如期
선성이 현신한 것보다 외려 낫다오 / 勝似仙聖現相

아랑위 들보를 아래로 드니 / 兒郞偉抛梁下
정원의 소쇄함이 더욱 좋도다 / 更喜庭院蕭洒
한가하여 포단에 앉아 편안히 조노니 / 無事蒲團穩眠
공연한 길손이 귀찮게 하는 일 어찌 있으랴 / 何曾閑客攪惹

삼가 바라건대, 상량(上梁)한 뒤에 산 빛은 더욱 푸르고 물빛은 더욱 맑으리라. 소나무 사립문이 늘 닫혀 있으매 곧 상천축(上天竺) 하천축(下天竺)으로 옮겨 가고, 초동의 노래가 서로 화답하매 문득 대승경(大乘經) 소승경(小乘經)을 읽으리라. 맹수와 독충은 모두 멀리 사라지고, 백족(白足)과 적자(赤髭)는 늘 탈이 없으리라. 두 재(齋)만으로도 거처하기 넉넉하리니, 천불(千佛)이 이곳을 보호하리라.


 

[주D-001]쑥대가 …… 있으니 :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더구나 인적도 없이 명아주 잎이나 콩잎이 족제비의 길을 막고 있는 먼 골짜기로 도망가 있는 사람은,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뻐할 것이다.”라고 한 말이 보인다.
[주D-002]오장기(五丈旗) : 진(秦)나라의 아방궁(阿房宮)은 크기가 동서는 500보나 되고 남북은 50장이나 되어서 위로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로는 5장(丈)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주D-003]금사(金沙) : 금사는 인도(印度)에 있는 아뇩달지(阿耨達池)를 가리키는데, 금빛 모래가 가득하다고 한다.
[주D-004]영취산(靈鷲山) : 불교의 성지(聖地)로 불리는 인도에 있는 산인데, 부처가 이곳에서 다년간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주D-005]선부봉(仙鳧峯) : 수락산에 있는 봉우리 이름이다.
[주D-006]탁석(卓錫)의 옛 자취 : 탁석은 석장(錫杖)을 꽂는다는 뜻으로, 곧 석장을 날려 터를 잡은 양(梁)나라 보지 선사(寶志禪師)의 고사를 가리킨다. 서주(舒州)에 있는 잠산(潛山)은 풍광이 매우 뛰어난 곳이다. 보지 선사와 백학도사(白鶴道士)가 잠산의 가장 빼어난 산기슭에 서로 터를 잡으려고 다투다가, 양 무제(梁武帝)의 주선으로 백학도사는 학(鶴)을 날려 그 자리로 보내고, 보지 선사는 석장을 날려 보내어 먼저 그 자리에 도착시키는 자가 터를 차지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결과 보지 선사의 석장이 백학도사의 학보다 먼저 산기슭에 날아가 꽂혔다고 한다. 《神僧傳》
[주D-007]결사(結社)의 고사 : 결사는 원래 승려들이 단체로 모여서 수행하는 것이다. 혜원법사는 동진(東晉)의 명승(名僧)이다. 혜원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흰 연꽃을 심고 혜영(慧永)ㆍ유유민(劉遺民)ㆍ뇌차종(雷次宗) 등 18명과 백련사(白蓮社)라는 단체를 결성하였는데, 사영운(謝靈運)ㆍ도잠(陶潛)ㆍ육수정(陸修靜) 등도 참여하였다. 호계(虎溪)는 동림사 앞에 있는 시내로, 혜원법사가 손님을 전송할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호랑이가 울었다 한다. 하루는 도잠ㆍ육수정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를 지나 호랑이가 울자,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8]300척이나 …… 우습고 : 한유(韓愈)의 송승징관(送僧澄觀) 시에 “불에 타고 물에 휩쓸려 아무것도 없는 터에 우뚝이 삼백 척이나 높게 솟았도다.〔火燒水轉掃地空 突兀便高三百尺〕”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韓昌黎集 卷7》
[주D-009]어이하면 …… 없도다 : 자미는 두보(杜甫)의 자(字)이다. 두보의 모옥위추풍소파가(茅屋爲秋風所破歌) 시에 “어이하면 너른 집 천만 칸을 얻어 천하에 가난한 선비들 크게 비호하여 모두 즐거운 얼굴로 풍우에도 움직이지 않고 산처럼 편안히 있을런가.〔安得廣厦千萬間 大庇天下寒士俱歡顔 風雨不動安如山〕”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杜少陵詩集 卷10》
[주D-010]선지(禪枝)에는 …… 기뻐하고 : 선지는 절에 있는 나뭇가지라는 뜻이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나무 한 가지에 불과하다.〔鷦鷯巢於深林 不過一枝〕”라고 한 말이 보이는데, 이는 곧 석림암이 승려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주D-011]기수(祗樹)에는 …… 놀라도다 : 기수는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말하는데, 인도 중부 마가다국 사위성(舍衛城) 남쪽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있는 절로, 부처와 그 제자들이 설법하고 수도할 수 있도록 수달장자(須達長者)가 세웠다고 한다. 녹원(鹿苑)은 녹야원(鹿野苑)을 말하는데, 석가가 성도한 지 삼칠일(三七日) 만에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굴려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 등 다섯 비구(比丘)를 제도한 곳이라고 한다. 이는 석림암이 설법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주D-012]파인(巴人)의 …… 불구하고 : 파인은 수준이 낮은 시를 가리킨다.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이란 글에 고사가 보이는데, 어떤 사람이 영중(郢中)에서 처음에 하리파인(下里巴人)이란 노래를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는데, 양아해로(陽阿薤露)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으며, 양춘백설가(陽春百雪歌)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었다. 이와 같이 곡조가 높을수록 그에 화답하는 사람이 더욱 적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서계가 하찮은 재주에도 불구하고 상량문을 지음을 말한다. 《文選 卷45》
[주D-013]영장(郢匠) : 영장은 기량이 훌륭한 목공을 가리킨다. 《장자》 서무귀(徐无鬼)에 “영(郢) 땅의 사람이 코끝에 백토(白土)를 파리 날개처럼 묻혀 놓고 장석(匠石)을 시켜 깎아 내게 하였다. 장석이 바람을 일으키며 도끼를 휘둘러 마음대로 깎아 냈는데도 코를 조금도 다치지 않았고 영 땅의 사람도 전혀 동요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라고 하였다.
[주D-014]아랑위(兒郞偉) : 아랑위는 대들보를 여러 사람들이 ‘어영차’ 하고 힘을 모아 들 때 나는 의성어이다. 상하(上下) 사방(四方)의 여섯 방향으로 들보를 들기 때문에 육위(六偉)라 하기도 한다.
[주D-015]쌍수(雙樹) : 사라쌍수(沙羅雙樹)의 준말로, 학수(鶴樹)라고도 한다.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장소에 서 있었던 나무 이름으로, 사찰 경내에 있는 나무를 가리킨다.
[주D-016]백족(白足)과 적자(赤髭) : 모두 고승(高僧)을 가리키는 말이다. 백족은 위(魏)나라의 승려 담시(曇始)로, 발이 얼굴보다 깨끗하였다고 한다. 비록 흙탕물 속에 맨발로 다녀도 발이 전혀 더러워지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고 불렀다. 《神異下 釋曇始》 적자는 천축(天竺)의 불타야사(佛陀耶舍)로 수염이 붉었다고 한다. 《비파사(毗婆沙)》를 잘 해설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적자비파사(赤髭毗婆沙)’라고 불렀다. 《高僧傳 譯經中 佛陀耶舍

서계집 제9권
 지명(誌銘) 14수(十四首)
망실(亡室) 숙인(淑人) 의령 남씨(宜寧南氏) 묘지명(墓誌銘)


숙인(淑人)의 선조는 본관이 의령(宜寧)이다. 10대조 재(在)가 태종(太宗) 때 재상을 지냈고, 8대조 지(智)가 세종(世宗) 때 재상을 지내어 삼대(三代)에 두 번 재상을 지냈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대대로 환족(宦族)이 되어 경도(京都)에 거주하였다. 부친 휘(諱) 일성(一星)은 벼슬이 금성 현령(金城縣令)에 이르렀으며, 모친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강릉 부사(江陵府使) 업(曗)의 따님이다.
숙인은 19세에 박씨(朴氏)에게 시집왔다. 박씨는 아버지를 잃고 집안이 가난하여 자립하지 못한 나머지 10여 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다가 벼슬길에 오르고 나서야 처가를 나와 따로 살림을 꾸렸다. 숙인은 평소 가난한 살림을 불평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고생을 겪는 바람에 고질을 앓아 여러 해 동안 낫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아들 태유(泰維)가 여질(癘疾)에 걸리자 숙인은 지나치게 걱정하여 새로 생긴 병과 원래 있던 병이 함께 일어나 24일을 심하게 앓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아, 애통하도다.
숙인은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7년 정묘년(1627, 인조 5) 3월 20일에 태어나 병오년(1666, 현종 7) 5월 17일에 몰(沒)하였으니, 나이가 겨우 마흔이었다. 남편의 관작이 3품(品)이므로 이제 숙인에 봉해졌다. 그해 8월 20일에 양주(楊州) 치소(治所) 남쪽 20리 수락산(水落山) 서쪽 기슭 장자곡(長者谷) 신좌(辛坐)의 언덕에 장례하였다.
아들 둘은 태유와 태보(泰輔)이다. 태유는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며, 태보는 생원(生員)인데 양자(養子)로 나가 숙부(叔父)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숙인은 성품이 자애 유순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다. 이간질하는 말을 가정에서 행하지 않았고 비복(婢僕)에게 매질을 가하지 않았으며, 자매와 동서 간에 화락함을 잃지 않았고 무당이나 점쟁이를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평생을 마쳤으니, 이 몇 가지로도 그 행실을 알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수명이 길지 못하여 두 아들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나에게 슬픔을 남기고 말았으니, 슬프고 슬프도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죽어서 앎이 없다면 / 死而無知乎
어찌 굳이 무덤을 바꾼 뒤에 편안하겠는가 / 何必改而後安
만약 앎이 있다고 한다면 / 如曰有知乎
또 어찌 생전과 다르겠는가 / 又何以異夫其生之年
내 마음이 이미 이 무덤을 사랑하노니 / 惟吾心旣愛斯丘
남은 내가 뒤에 묻힐 것이요 죽은 당신이 먼저 묻혔도다 / 將存者後而沒者先
누가 우리 자손이 되어 / 誰爲吾子孫
경솔히 요즘 사람들의 개장하는 풍습을 본받으리오 / 而輕效今之人

서계집 제9권
 지명(誌銘) 14수(十四首)
우승지 박공(朴公) 묘지명


공은 성은 박씨(朴氏), 휘는 원도(元度), 자는 중헌(仲憲), 호는 죽창(竹窓)이니, 그 선조는 나주(羅州)의 반남(潘南) 사람이다. 10대조 상충(尙衷)이 고려 말엽에 우문관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간신이 나라를 팔아먹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격분하여 극언(極言)하다가 끝내 화를 당하였는데, 고려도 결국 망하고 말았다. 300년이 지난 뒤 문정(文正)으로 추시(追諡)되었다. 문정공의 아들 평도공(平度公) 은(訔)은 우리 태종(太宗)을 도왔으며, 평도공의 아들 세양공(世襄公) 강(薑)은 세조(世祖)를 보좌하여 공신에 책록되었으니, 박씨는 대대로 공훈과 덕업을 세워 사책(史策)에 나열되어 있다.
공은 세양공의 8세손이다. 증조 휘 여(瓈)는 진사(進士)이고, 조부 휘 대하(大夏)는 마지막 관직이 나주 목사(羅州牧使)이다. 부친 휘 욱()은 진사이다. 문장과 행실이 있었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현달하지 못하였다. 모친은 전의 이씨(全義李氏) 광림(光林)의 따님이다.
공은 인조 4년 병인년(1626) 9월 24일에 태어났다. 5세에 그 형이 사책(史冊)을 읽는 소리를 듣고 능히 제왕(帝王)의 세차(世次)를 암기하였는데, 어긋나지 않았다.
23세에 진사에 응시하였다. 이해 무자년(1648, 인조 26)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곡을 하다가 갑자기 피를 토하더니 이때부터 병을 얻어 상복을 벗은 뒤에도 병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누차 시험장에 달려갔으나 병이 발작하는 바람에 대부분 답안을 작성하지 못하였으며, 작성했을 때에는 시험을 주관하는 이에게 칭찬을 받은 적이 많았으나, 끝내 역시 떨어지고 말았으므로 마침내 물러나 명경과(明經科)를 준비하였다.
현종(顯宗) 4년 계묘년(1663)에 비로소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규례에 따라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에 제수되었다. 6품(品)에 서용되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다가 체차되어 전적(典籍)에 배수되었다. 감찰(監察)로 이임(移任)되었고 공조 좌랑으로 전직되었다.
병오년(1666, 현종 7)에 외직으로 나가 청안 현감(淸安縣監)이 되었다. 공이 태학(太學)에 있을 당시 당로자(當路者)가 뇌물을 받았는데, 대헌(臺憲)에 있던 이가 탄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이에 같은 재사(齋舍)를 쓰던 동학(同學)이 희롱하는 말을 지어 당로자를 조롱하였는데, 당로자가 격노하여 공이 꾸민 일로 여겼다. 과거 길이 험난하고 벼슬길이 말살된 것도 모두 이때의 일에 연좌되어서였다. 현종이 온천(溫泉)에 행행하려고 할 때 공이 현감에 제수된 이튿날 하직 인사를 하러 행궁(行宮)으로 달려갔는데, 책응(策應)할 일이 많고 번잡하였으나 일에 따라 조리 있게 잘 처리하였다. 현이 난을 겪은 이후로 관아를 수리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60여 칸의 건물을 지었는데, 백성들이 수고롭게 여기지 않았다. 고을 백성 가운데 매〔鷹〕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어 관아에 송사를 한 종형제가 있었는데, 매를 놓아주고 의리로 책망하자 모두 참회하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조심스럽게 법령을 준수하고 너그럽게 정사를 하였으며, 부역을 시키고 권농을 하기를 모두 조리 있게 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농사가 큰 기근이 들자 백성들이 더 머물러 주기를 요구하였으므로 진휼해 준 다음, 신해년(1671) 가을에 해직하고 돌아왔다.
임자년(1672)에 다시 전적에 제수되고, 병조 좌랑으로 이임되었다.
계축년(1673)에 정랑으로 전직되었다. 마침 영릉(寧陵)을 옮기려고 하였다. 공은 이미 병조의 몇 가지 업무를 겸하고 있었는데 또 도감(都監)에 분속되는 바람에 사무가 무더기로 몰려들었으나 잘 처리하여 적체시킴이 없었다. 그 당시 광성(光城 김만기(金萬基))이 병조 판서를 맡고 여양(驪陽 민유중(閔維重))이 능사(陵事)를 감독하였는데, 모두 그 민첩함에 감복하여 몹시 기중(器重)하였다. 곧이어 지평에 배수되었다. 관리 가운데 여사(轝士)에게 돈을 받은 자가 있었는데, 일이 발각되자 상이 진노하여 대중들 앞에서 효시(梟示)하기를 명하니, 공이 간쟁하기를 “관리는 응당 죽여야 하지만 법례에 따라 공초(供招)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노하여 윤허하지 않았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喪)에 대신들이 예(禮)를 논의하는 일로 죄를 받아 조정이 흉흉하였다. 공이 또 동료들과 극력 간쟁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금상 초 시사(時事)가 변하려 할 적에 대각(臺閣)이 마침 모두 병을 핑계로 인피(引避)하였는데, 도승지 오시수(吳始壽)가 “방종하고 해이하다.”라고 하며 상의 노여움을 격발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대간(臺諫)들이 또 이 일 때문에 나가지 않았는데, 공만 홀로 대각에 나가 오시수에 대해 “기회를 틈타 곤경에 빠뜨리고 알력을 조성한다.”고 논척(論斥)하니, 의논하는 이들이 장하게 여겼다. 그 당시 새로 들어와 용사(用事)하던 이가 송시열(宋時烈)을 몹시 극렬하게 공격하였는데, 공이 송시열이 무고당한 것을 변론하여 바로잡아 주다가 이 때문에 체직당하였다. 공은 평소 어느 한쪽을 편드는 의논을 하지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처음으로 당인(黨人)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을묘년(1675, 숙종 1)에 외직으로 나가 충청 도사(忠淸都事)가 되었다.
병진년(1676)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무오년(1678)에 상복을 벗고 황주 판관(黃州判官)이 되었다. 황주는 대로변에 있는 고을로 자주 벼슬아치를 바꾸는 바람에 아전이 이 틈을 타 야금야금 훔쳤다. 서사(西使)가 왕래할 때 희름(餼廩)의 재물에 대해 대부분 명목과 수효를 불린 다음, 이를 상인에게 대여(貸與)해 주고 상인과 함께 간교하게 이익을 도모하였는데, 공은 부임하자마자 이러한 실정을 모두 파악하였다. 따라서 아전이 훔친 세포(稅布) 2000여 필을 적발하는 한편, 아전과 더불어 간교하게 이익을 도모한 상인을 체포하여 죽이려고 하니, 상인이 스스로 죽게 된 것을 알고는 죽음을 면할 수 있을까 싶어 즉시 죄를 자복하였다. 이어 영송(迎送)하는 재물에 대한 비용이 얼마면 족한지를 낱낱이 실토하였는데, 상수(常數)와 비교해 보니 감액이 절반도 넘는 것이었다. 이에 공이 상인을 풀어 주고, 그가 말한 내용을 모두 기록하여 보관한 다음, 훗날 객사(客使)가 오면 이를 기준으로 객사를 응접하는 비용을 마련하게 하니, 대접하는 음식물이나 보내는 재물이 조금도 모자라거나 남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로부터 항구적인 제도를 정하니, 공사(公私)가 비로소 소생하였다. 황해도와 평안도의 군읍(郡邑)은 성곽이 무너졌는데도 감히 쌓지 못하고 군병이 피폐한데도 감히 가다듬지 못한 채 전수(戰守)에 대해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한 지가 40여 년이었는데, 공이 은밀하게 군사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정비하자 모두 정예가 되고 예리해졌다. 일이 보고되자 특별히 비단을 하사하여 포장하였다.
경신년(1680)에 지평으로 부름을 받아 돌아왔으나, 황주에 있을 때 이미 풍토병에 걸렸기 때문에 공직(供職)하지 못하고, 체차되어 병조 정랑에 배수되었다. 장령으로 천직되었다가 곧 체차된 다음, 접위관(接慰官)에 충원되었으나 또 병 때문에 가지 못하였다. 마침 조정에서 헐뜯는 자가 있자 외직으로 나가기를 요구하였다.
신유년(1681)에 풍덕 부사(豐德府使)가 되었다.
임술년(1682)에 면직되어 돌아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서용, 배수되었다.
계해년(1683)에 경성(鏡城)에서 옥사(獄事)를 안찰한 다음 돌아와 우통례(右通禮)에 배수되었다. 판교(判校)로 이임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령 부사(富寧府使)에 배수되었다. 그 당시 부령의 무산(茂山)을 분할하여 부(府) 하나를 신설하였는데, 조정에서 신구(新舊)가 업무를 주고받는 데에는 모름지기 규획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고 하여 공을 간택하여 임명한 것이다.
갑자년(1684)에 병으로 면직되어 돌아왔다.
을축년(1685)에 서용되어 판결사(判決事)에 배수되었는데, 재직하는 동안 청탁이 행해지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 사적인 일로 찾아와 요구한 일이 있었는데, 알아듣게 타일렀는데도 자꾸 찾아오자 마침내 그 소장(訴狀)에 판결하기를, “안타깝다, 장사덕이여. 세 번이나 내 문에 찾아왔구나.〔可惜張師德 三及吾門〕”라고 하고, 그 송사를 기각시키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고 격노하였다. 이 때문에 권세가들의 환심을 많이 잃었다. 아무개가 대사헌이 되어 다른 일로 공을 탄핵하려 하자, 혹자가 말하기를, “저 사람이 일찍이 송사에 관한 일로 공을 저버렸다고 해서 공이 이런 일을 해서 되겠는가.”라고 하니, 마침내 부끄러워하며 중지하였다.
병인년(1686)에 형조 참의로 전직되었으며, 우부승지에 배수되었다가 우승지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여러 번 은대(銀臺)에 있었으며, 간간이 병조 참의나 형조 참의가 되기도 하였는데, 공은 평소 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극력 외직을 요구하였다.
정묘년(1687)에 외직으로 나가 부평 부사(富平府使)가 되었다.
기사년(1689) 봄에 이르러 곧바로 스스로 면직하고 돌아와 용산(龍山)에 우거하였다. 얼마 뒤 4월의 일이 일어났는데, 공은 오두인(吳斗寅), 이세화(李世華) 등 여러 사람들이 이미 죄를 받고, 또 금령을 내려 봉장(封章)을 받지 않으며 정청도 중지하였다는 소리를 듣고는, 몹시 슬퍼하고 울울해한 나머지 문밖 출입을 끊고 객을 사절한 채 오직 서책만 읽으며 자적(自適)하였다.
경오년(1690, 숙종 16) 가을에 수원(水原)으로 성묘(省墓)를 갔다가 그 참에 형을 문안하였는데, 감기에 걸려 날로 위독해졌다. 이에 거의 일어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는 아들 휘등(彙登)에게 말하기를, “접때 내가 네 어미에게 말해 놓았으니, 너는 물어보고 그대로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떠나기에 앞서 부인에게, “훗날 나를 염습하여 장사 지낼 적에, 부디 우리 부모의 상례보다 사치하게 하지 마시게.”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이로써 아들에게 경계한 것이었다. 임종하던 날에도 신기(神氣)가 어지럽지 않았다. 누이의 아들이 병문안을 왔는데 오히려 누이가 건강한지를 물었으며, 시봉하는 이로 하여금 부축하여 앉히게 한 다음 옷을 갈아입고 운명하였으니, 향년 65세이다. 공이 졸한 날은 9월 9일이며, 11월 21일에 수원 왕계산(旺啓山) 을좌(乙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 민씨(閔氏)는 성여(聖與)의 따님이다. 2남 3녀를 길렀는데, 장남 휘등(彙登)은 진사이고 다음은 세등(世登)이며, 딸은 권익륭(權益隆),이기보(李箕輔),최창진(崔昌振)에게 시집갔다. 휘등은 3남을 낳았고, 이기보의 처는 2남 2녀를 낳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스러웠는데, 부모를 잃자 추모하여 마지않은 나머지 한가하게 있을 때마다 처연(悽然)하게 슬피 탄식하였으며, 생신이 되면 종일토록 몹시 슬퍼하였으므로 식구들이 이에 감동하여 차마 주연을 베풀지 못하였을 정도였다. 형님 한 분이 계셨는데, 몹시 우애하고 공경하였다. 형은 수원에 살고 공은 경도(京都)에 살았는데, 벼슬살이를 할 때라도 여가가 나기만 하면 그 즉시 필마로 달려가 문안하였으며, 옷가지나 음식물이 비록 박하더라도 반드시 나누었다. 특히 권세와 이익에 덤덤하여 늘 단정하게 거처하고 출입을 드물게 하니, 이웃 사람이 기이하게 여겨 “저 사람은 요즘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할 정도였다.
아, 정명(精明)하고 강과(剛果)한 공으로 말하면, 재주는 번극한 정무(政務)를 재단하기에 충분하고 민첩함은 급박한 정황에 대응하기에 충분하니, 시속을 따라 영명을 취하더라도 역시 스스로 당세에 능력을 펼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도 마침내 분수를 미루어 세상에 구함이 없고 정도를 지켜 지조를 바꾸지 아니하여 궁달(窮達)과 화복(禍福)이 그 마음을 얽어매지 못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어려운 점이라 할 것이다. 시문(詩文)이 뛰어났으나 문장을 담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짓는 일은 더더욱 드물어 세상에는 아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간간이 시문을 지으면 역시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세당(世堂)과 공은 모두 평도공(平度公)의 9세손으로 항렬을 따지면 형제간이 된다. 공의 아들 휘등(彙登)이 족형(族兄)의 아들 태순(泰淳)이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공의 무덤에 넣을 묘지명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묘갈로 말하면 이미 이부공(吏部公)에게 부탁했습니다. 지문(誌文)은 외인(外人)에게 구해서는 안 되는바, 오직 우리 종씨(宗氏)가 지어야 합니다.”라고 하기에, 세당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받아서 명을 짓는 바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한나라 중세 무렵 / 在漢中世
처음으로 박씨가 나오니 / 朴始肇姓
성덕을 갖춘 후손에 / 盛德之後
유택이 끝이 없었네 / 澤流無竟
고려가 망할 적에 / 王氏告終
문정공이 절개를 드날리니 / 文正著節
평도공과 세양공이 / 平度世襄
선조의 공렬을 돈독히 하였네 / 克篤前烈
이를 갈고 다듬어 / 菑之斲之
후손에게 남겨 주니 / 以遺厥孫
실추시키지 아니하고 / 弗隕弗墜
납언에 올랐다네 / 是登納言
출처에 한결같았으며 / 屈伸匪異
세도에 따라 부침하였네 / 升降與世
어찌하여 일찍 돌아가셨는가 / 胡又不延
역시 하늘의 잘못이라오 / 亦天之戾
왕계산의 언덕에 / 旺啓之丘
소나무 심고 잣나무 심으니 / 植松蒔柏
부디 베지 말지어다 / 戒其勿翦
아 공의 무덤이라네 / 繄公所宅


 

[주D-001]안타깝다 …… 찾아왔구나 : 장사덕(張師德)은 송나라 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효우 근신(孝友謹愼)하여 가법(家法)이 있었고 세도가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찍이 왕단(王旦)이 한 관료에게, “내가 평소 임금에게, ‘장사덕은 명문의 자제로 선비의 조행이 있다.’고 말했는데, 뜻밖에 나를 두 번이나 찾아와서 장원 급제를 하였으니, 참으로 가석한 일이다. 영화란 운명에 있으므로 조용히 기다려야 하는 것인데, 만약 지레 진출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주D-002]4월의 일 :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 사건을 가리킨다.


서계집 제11권
 비명(碑銘) 5수(五首)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공(崔公) 신도비명


재주가 한 시대의 위망(危亡)의 화(禍)를 구제할 만하고 식견이 의심스런 중론(衆論)의 미혹을 깨뜨릴 수 있으며 충성은 사직의 계책을 위하여 일신과 집안을 돌아보지 않고 용기는 호랑이의 발톱과 이빨을 어루만지면서도 두려운 기색이 없는 것, 이는 모두 세상에서 지극히 어려운 것으로서 군자가 깊이 허여하는 바이다. 상국(相國) 문충공(文忠公) 같은 분은 간직한 지조와 세운 공업이 어찌 전후에 밝게 빛나고 고금에 우뚝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 국사를 위한 고심(苦心)과 임금을 위한 혈성(血誠)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만했으나 독자적인 견해는 중의(衆議)에 부합하지 못하였고 심오한 의논은 세속과 화합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헐뜯는 논의가 사방에서 일어나 거의 한 세대 동안 매몰되어 있었으나 하늘이 정한 이치는 결국에는 반드시 이기고 사람의 마음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니, 채 백 년이 못 되어 선생과 장자(長者) 가운데 공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공을 칭찬하는 자들의 말이 차츰 나오고 학사(學士)와 대부(大夫) 가운데 공보다 후대에 나온 사람으로서 공을 이야기하는 자들의 논의가 점차 공평해졌다. 이에 이르렀으니 공이 평소 스스로 의리에 편하게 여겼던 바에 대해서 천하와 후세에 할 말이 있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공은 휘는 명길(鳴吉), 자는 자겸(子謙), 성은 최씨(崔氏), 본관은 전주(全州)이니, 고려로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명망과 덕행이 있는 분이 계속 이어졌다. 증조 휘 업(嶪)은 빙고 별제(氷庫別提)를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수준(秀俊)은 벼슬하지 않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기남(起南)은 영흥 부사(永興府使)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대가 추증된 것은 모두 공이 존귀해졌기 때문이다. 의정공(議政公)은 호가 만옹(晩翁)이니, 젊어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문장과 행실로 이름이 드러났으나 세상의 배척을 받아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모친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관찰사 영립(永立)의 따님이다.
공은 선조(宣祖) 19년 병술년(1586)에 태어났다. 을사년(1605, 선조38)에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장원하였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신 현헌(申玄軒 신흠(申欽))이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자겸이 비록 병약하나 끝내는 반드시 이름을 떨치는 인물이 될 것이다.” 하였다. 승문원에 분관(分館)되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1)에 사관(史館)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전적에 서임(敍任)되었고 수년 동안에 감찰(監察)과 제조(諸曹)의 낭관을 두루 맡았으나 일에 연루되어 삭출(削黜)되었다.
병진년(1616)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기미년(1619)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광해(光海)가 도리를 잃어 영창(永昌)을 학살하고 대비(大妃)를 유폐(幽閉)하자 공이 제공(諸公)과 더불어 비밀히 논의하여 중대한 계책을 세웠다. 제공이 사저(私邸)에서 인조(仁祖)를 뵙고자 하였는데 공만 홀로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사사로이 뵙는 의리는 없다.” 하였다. 한참이 지나도록 논의가 제때에 결행되지 못하니, 공이 “시일을 오래 끌면 대사를 그르치기 십상이다.”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거사할 날짜를 잡고 계책을 정해 계해년(1623, 인조1) 3월 계묘일에 인조를 받들어 대통(大統)을 잇게 하고 대비를 서궁(西宮)에서 맞이하였다. 먼저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정랑으로 천전되었다. 여름에 참의에 발탁되었다. 이해 겨울에 정사 공신(靖社功臣) 1등(等)에 책록되고 자급이 올랐으며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이조 참판이 되었다.
갑자년(1624) 봄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대가(大駕)가 남쪽으로 파천하자 공이 총독 부사(摠督副使)가 되어 장 원수(張元帥 장만(張晩))와 만나 안령(鞍嶺)에서 역적을 격파하였다.
을축년(1625) 봄에 상차하여 관제(官制)를 논하여 의당 옛 제도를 차츰 회복하여 다스림의 근본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부제학이 되었고 대사헌으로 이배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제학에 배수되어 12가지 일을 차자로 진달하였는데 모두 시폐(時弊)에 꼭 맞는 것이었다.
상이 처음 대위(大位)에 올랐을 때 원종(元宗)을 추존하여 대원군이라 하고 인헌왕후(仁獻王后)를 높여 계운궁(啓運宮)이라 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4)에 인헌왕후가 훙서(薨逝)하매 상이 삼년복을 입고자 하였는데 조정의 논의가 “남의 후사(後嗣)가 되면 참최(斬衰)를 두 번 입지 않는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합사(合辭)하여 쟁론하였다. 그러자 상이 또 장기(杖期)의 복을 입고자 하였는데 제신(諸臣)이 또 부장기(不杖期)로 강복(降服)하고 상의 아우 능원군(綾原君)을 상주(喪主)로 삼을 것을 극력 청하였다. 그러나 공은 홀로 말하기를, “아비가 사(士)이고 아들이 천자(天子)이거나 제후(諸侯)이면 사의 예로써 장사 지내고 천자와 제후의 예로써 제사 지내는 법이니, 오늘날의 예는 오직 이것만이 확실한 전거가 된다.” 하였다. 이윽고 제공의 논의가 분분하여 예법을 정하지 못하자 공이 또 만여 자의 차자를 올려 강복과 입후(立後)의 잘못을 극론하여 아뢰기를, “전하는 승중(承重)한 것이지 출계(出繼)한 것이 아닙니다. 곧바로 조부의 대통을 이었는데 남의 후사가 된 것으로 간주하고 임금의 부모인데 방친(旁親)으로 대한다면 그 폐단이 장차 예제(禮制)를 무너뜨리고 대륜(大倫)을 멸절시키는 데에 이를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별묘(別廟)를 세워 몸소 제사를 주관할 것을 청하였는데, 거듭 조정의 의논에 거슬려 탄핵을 받고 해직되었다.
정묘년(1627) 봄에 북쪽 오랑캐의 군대가 패수(浿水)를 건너 내달아 나라 안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오니, 조야가 두려워하였다. 적의 군사가 평양(平壤)에 이르러서는 우리에게 글을 보내 강화를 요구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적이 한창 기세가 올랐으니, 부드러운 말로 답하여 그 예봉을 늦추어야 합니다.” 하니, 제공의 뜻이 일치하여 장 신풍(張新豐 장유(張維))으로 하여금 글을 써서 적들의 뜻에 답하게 하였으나 적들은 진병(進兵)을 그만두지 않았다. 상이 도성을 나가 강도(江都)로 행행하였는데 오랑캐의 사신이 재차 강화 문제로 와서 상을 뵙기를 청하였다. 공이 다시 말하기를, “교전이 있기 전에는 사신이 그 사이에서 왕래하는 법이니, 들어줄 만합니다.” 하였는데 조정이 따랐다. 오랑캐의 군대가 평산(平山)에 이르러 화약이 비로소 맺어지니, 이에 적의 군대가 물러나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다. 당시 적병은 가까이 닥쳤는데 행재소(行在所)의 군대는 단약(單弱)하여 상하가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계책은 오직 화약을 맺는 것뿐이었지만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적이 물러간 뒤에는 또 화약을 맺은 것을 분분하게 공의 탓으로 돌렸다. 언자(言者)가 교대로 소장을 올려 벼슬을 떼고 찬축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조정에 있는 것이 편치 않아 오래도록 강가에 거처하였다. 가을에 장릉(章陵)을 옮길 때에 상구(喪柩)가 장차 도성을 지나가게 되었다. 중의(衆議)가 사친(私親)의 상구가 도성을 통과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백성을 동원하여 도성 동쪽의 비탈에 길을 닦고자 하였는데 공이 홀로 쟁변하여 불가하다고 하였고 대신 또한 잘못임을 깨달아 마침내 중지하게 되었다. 계운궁(啓運宮)의 담제(禫祭)가 끝나 합부(合祔)하려고 하였다. 공이 다시 별도로 묘(廟)를 세우고, 예(禰)라 칭하고, 악장(樂章)을 만들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논자들의 배척을 받아 경기도 관찰사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기사년(1629, 인조7)에 이르러 선후배들 간의 논의가 일치하지 못하여 노서(老西)와 소서(少西)의 색목(色目)이 있게 되었다.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가 상에게 참소하여 명류(名流) 5, 6인을 붕당으로 지목하니, 상이 매우 노하여 세당(世堂)의 선공(先公) 및 유공 백증(兪公伯曾), 나공 만갑(羅公萬甲)을 귀양 보내고 장공 유(張公維)도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보외(補外)하였다. 공이 선후배들이 서로 책망한 것이지 붕당을 지은 것은 아니라고 극력 진달하니, 상이 느껴 깨닫는 바가 있어 세 학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귀양에서 풀려 돌아오고 장공 또한 부름을 받았다. 당시 공이 군적(軍籍)의 정리를 맡아 이를 완성하여 자급이 올라갔다.
이듬해에 우참찬에 배수되었다. 모문룡(毛文龍)이 죽자 진계성(陳繼盛)이 대신 그 무리를 거느렸는데 유흥치(劉興治)가 또 진계성을 죽이고 대신 거느렸다. 우리나라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묻고자 하니, 공이 말하기를, “가도(椵島)의 무리가 비록 굶주리고 지쳤으나 그래도 그 무리가 수만에 달합니다. 곤궁에 처한 짐승도 오히려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수만의 무리가 반드시 죽겠다는 마음을 품고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고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마침내 외로운 섬을 포위하여 시일을 끌다가 식량이 고갈된다면, 싸우자니 어렵고 그만두자니 위엄이 손상될 것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바다를 건너가 농사철을 헤아리지 않고 죽기를 각오한 도적과 대치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후에 과연 군사를 발동하지 않았다.
신미년(1631, 인조9) 봄에 여러 공신들을 춘휘당(春暉堂)으로 불렀는데 세자 및 두 왕자가 모두 시립하였다. 상이 친히 술잔을 들어 술을 권하고 또 공이 새로 득남한 것을 치하하니, 세상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여름에 상이 장릉을 추숭하고자 하였는데 조정의 논의가 불가하다고 다투었다. 그러자 또 천자에게 주문(奏聞)하고자 하였는데 또 불가하다고 하였다. 5월에 특별히 공에게 부제학을 제수하니, 이는 상이 공의 지론이 조정의 신하들과는 다소 다르다고 여겨 도움을 받고자 해서였다. 공이 또 차자를 올려 예제에 대한 조정 신하들의 논의가 잘못되었음을 진달하고 거듭 별묘(別廟)를 세울 것을 주장하여 아뢰기를, “추숭의 거조는 예경(禮經)에 분명한 글이 없고 의리에 맞게 예제를 바꾸는 일에 관계됩니다. 조정의 논의가 같지 않은데 중국 조정에 주청(奏請)부터 먼저 하고자 하니, 조정이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제를 논의한 지 지금 9년째입니다. 그간 노사숙유(老師宿儒)가 두루 전거를 찾고 널리 예문을 인용하였으나 모두 오늘날에 맞는 전거는 아니었습니다. 오직 사(士)의 예(禮)로 장사 지내고 제후의 예로 제사 지내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전거가 됩니다. 신이 쟁집(爭執)하는 것은 다만 이것뿐입니다.” 하였다.
임신년(1632)에 예조 판서에 배수되고 예문관 제학을 겸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성인의 효도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을 으뜸으로 여기니, 아버지의 사당을 오래도록 누항(陋巷)에 둘 수 없고 아버지의 신위(神位)를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다.” 하고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속히 논의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또 광무제(光武帝)의 고사를 따라 별묘를 세우기를 청하니, 상이 엄히 책망하였다. 공의 소청이 오직 별묘를 세우는 데에 있고, 낮추어 강복(降服)하는 것도 높이어 추숭하는 것도 모두 공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정의 논의를 거슬렀고 끝내는 상의 책망을 받은 것이다. 겨울에 이조 판서에 배수되었고 자급이 숭정대부로 올랐다.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에 제수되고 또 체찰 부사(體察副使)를 겸하였다. 공이 전후로 전조를 맡고 있는 동안에 붕당을 깨뜨리고 공도(公道)를 넓히며 어질고 재주 있는 자를 나아오게 하고 무능하고 나약한 자를 퇴출하여 제대로 된 사람을 선발하여 등용하니, 세상 사람들이 중흥(中興) 이래로 인사의 공정함은 공이 으뜸이라고 칭송하였다.
을해년(1635, 인조13) 봄에 전장(銓長)에서 해면(解免)되었다. 여름에 호조 판서가 되었다.
병자년(1636) 봄에 질병으로 사면하였다. 여름에 병조 판서가 되었으나 또 병으로 사직하였다. 가을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이해 봄에 청나라가 비로소 칭제(稱帝)하고 사신을 보내왔다. 조정의 논의는 그 글을 받아들이지 말고 단지 구두로만 거절하고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큰 사막 지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제재를 받을 대상이 없으므로 제멋대로 칭제하였으니, 누가 다시 금제(禁制)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기어이 우리한테서 구실을 찾고자 하니, 그 속셈을 알기 어렵습니다. 만약 단지 구두로만 거절하게 되면 일이 불분명해져 증거가 없게 됩니다. 만일 저들이 도리어 그 말을 뒤집어 우리를 무함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써 스스로 천하에 해명하겠습니까. 지금은 의당 답서 하나를 만들어 대호(大號)를 참칭해서는 안 되고 신절(臣節)을 바꿀 수 없음을 말하고, 이어 오랑캐의 글과 우리의 답서를 황조(皇朝)에 보고하는 한편으로 군사를 신칙하여 변란에 대비해야 합니다. 저들은 춘신사(春信使)와 조제(弔祭)를 명분으로 내세울 뿐입니다. 사리에 어긋난 것은 팔고산(八固山) 및 몽고(蒙古) 왕자(王子)의 글이니, 예에 관한 요구에는 대답하고 사리에 어긋난 것에 대해서는 거절하는 것이 마땅한 계책입니다. 지금은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어차피 병화(兵禍)를 입는 것은 매일반이니, 공연히 불분명하게 처리하여 우리를 이용하게 하거나 경솔하게 거절하여 병화를 재촉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오랑캐의 사신이 과연 글을 받지 않은 것 때문에 노하여 지레 돌아갔다. 공이 반드시 침입이 있을 것을 알고 상을 뵙고 아뢰기를, “오랑캐의 사신이 곧장 돌아갔으니, 맹약을 어기는 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일찌감치 전쟁에 대비하소서.” 하였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여 척화(斥和)만 주장했지 적을 막을 계책이 없었다. 공이 홀로 이를 깊이 염려하여 상차하기를, “요즈음 대간(臺諫)은 모두 척화를 주장하나 묘당에는 정해진 계책이 없습니다. 대간의 말을 받아들여 결전하지도 못하고, 또 신의 말을 받아들여 재앙을 늦추려고도 않으니, 노기(虜騎)가 휘몰아쳐 와 생령(生靈)이 어육(魚肉)이 되고 종사가 파천(播遷)하게 된다면 그 허물은 장차 누가 떠맡겠습니까. 신은 원하건대, 체신(體臣)과 수신(帥臣)이 모두 관서(關西)에 개부(開府)하고 제장(諸將)과 약속하여 오직 전진만 있고 후퇴는 없게 하는 한편으로, 심양(瀋陽)에 글을 보내 대의(大義)를 모두 개진하고 이어 오랑캐의 정황을 탐지하여, 저들이 다른 생각을 품지 않았다면 우선은 형제지약(兄弟之約)을 지키면서 내부적으로 정사를 닦아 후일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용만(龍灣)을 굳게 지키면서 한바탕 결전해야 하니, 비록 이것이 만전지책은 되지 못하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런데 나아가 싸우자는 말을 하자니 의구심이 없지 않고 화친의 주장을 펴자니 또 비방이 두려워 내내 미적거리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강물이 얼게 되면 화가 목전에 닥칠 것이니, 이른바 ‘너희들이 논의를 정하는 사이에 나는 이미 강을 건넌다.’라는 말과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하였다. 공이 창졸간에 적이 도발해 오면 반드시 멸망의 근심이 있을 줄 알고 매양 부드러운 말로 답하여 병화를 늦추는 동안 싸울 계책을 세울 시간을 벌고자 하여 중의(衆議)를 무릅쓰고 누차 계책을 진달하였으나, 화의를 주장한다고 언관이 공을 공격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석진(石晉) 때에 경연광(景延廣)이 거란(契丹)의 분노를 자극하자 상유한(桑維翰)이 공손한 말로 사죄하기를 청하였으나 출제(出帝)가 듣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스스로 보전할 수가 없어 비로소 다시 칭신(稱臣)하기를 청하였으나 거란이 허락하지 않아 진나라가 드디어 멸망하였습니다. 주자(朱子)가 《통감강목(通鑑綱目)》에서 경연광을 폄하하고, 호안국(胡安國)이 경연광을 비난한 것은 약속과 우호를 가볍게 배반하고 스스로 흔단(釁端)을 만들어 그 몸을 망치고 나아가서는 그 임금을 망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신하가 국가의 계책을 세우면서 먼 앞일까지 내다보지 못해 멸망에 이르게 했다면 그 일이 비록 바르더라도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선조 때에 천조(天朝)의 장수들이 싸우는 것이 싫어 화의할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천조에 청하게 하였는데 성혼(成渾)이 허락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정암(李廷馣)이 성혼의 뒤를 이어 주장하여 장차 죄를 입게 되었는데 성혼이 그 충성심을 가엾게 여겨 상 앞에서 신구(伸救)하니, 선조가 대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논자들의 성혼에 대한 공격이 더욱 치열하였는데 성혼이 말하기를, “한탁주(韓侂冑)가 금(金)나라를 공격한 것을 두고 선유(先儒)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였다고 책망하였고, 장 남헌(張南軒 장식(張栻)) 또한 금나라를 칠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종묘와 사직이 중하기 때문에 시세(時勢)를 살피고 역량을 헤아리는 것을 의롭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석진만큼의 병력도 없는 데다가 또 북쪽 오랑캐가 조종(祖宗)의 원수도 아니니, 시비와 득실을 정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의하는 자들은 “정묘화약(丁卯和約)이 진실로 해롭지는 않으나, 지금 오랑캐가 이미 대호(大號)를 참칭하였으니, 상호 사신을 왕래할 수 없다.” 하는데, 저들이 대호를 참칭하는 것은 우리가 물어야 할 바가 아닙니다. 신이 이렇듯 강화론(講和論)을 주장하는 것은 감히 시비를 돌아보지 않고 한갓 이해에 관계된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의(時宜)를 참작하고 지난 사적을 참작해 보건대 필연적인 형세임을 확신해서입니다. 신이 일찍이 마음속으로 ‘나라는 약하고 오랑캐는 강하니, 우선은 정묘화약을 지켜서 몇 년 동안 전쟁의 화를 늦추어 그 사이에 성을 쌓고 군량을 비축하여 변방의 수비를 더욱 굳건히 하며 군사를 갈무리해 두고 저들의 빈틈을 엿보아야 하니, 이보다 나은 계책은 없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입술이 마르고 혀가 타도록 조정에서나 물러나서나 쟁변하면서 스스로 그만둘 줄 모르는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이겠습니까. 종사와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근심할 뿐, 일신의 이해를 헤아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니, 군의(群議)가 또 들고일어나 시끄럽게 공격하였다.
11월에 도로 이조 판서가 되었다. 12월에 청주(淸主)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를 공격하여 그 선봉이 경기(輕騎)를 휘몰아 수일 만에 서교(西郊)에 이르렀다. 14일에 상이 강도(江都)로 행행하는 길에 남문(南門)에 이르렀는데 적기(敵騎)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상이 어가를 멈추고 성루(城樓)에 올라 군신(群臣)을 소집하여 계책을 물었다. 당시 사세가 급박하여 상하가 사색이 되어 무슨 계책을 내야 할지 몰랐는데 공이 나아와 아뢰기를, “일이 경각에 달려 있으니,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신이 단기(單騎)로 저들을 맞이하여 맹약을 저버린 것을 책망하겠습니다. 저들이 만약 우호에 뜻이 없어서 멋대로 포악을 부린다면 신은 칼날 아래에서 죽을 것이고, 만약 신을 거부하지 않아서 쌍방이 서로 만나 문답하게 된다면 그 사이에 시간을 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서울에서 가까운 튼튼한 성으로 남한산성만 한 곳이 없으니, 어가를 돌려 그곳으로 들어가 사태의 변화를 관망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계책이 옳다. 하지만 경이 홀로 목숨을 내놓고 호구(虎口)로 들어가 임금의 위급을 풀어 주고자 하니, 이는 고인도 어려워하던 바이다.” 하고 탄식하면서 보냈다. 공이 또 아뢰기를, “이경직(李景稷)이 강개하여 기절(氣節)이 있으니 함께 가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하직하고 떠날 때에 금병(禁兵) 20기를 거두어 그들로 하여금 공을 따라 성을 나가게 하였는데 따르던 기병이 모두 흩어졌다. 공이 이공(李公) 및 군교(軍校) 한 명과 더불어 급히 말을 몰아 사령(沙嶺)에 이르러 적기와 마주쳤다. 말을 멈추고 더불어 이야기하여 맹약을 무시하고 군사를 일으킨 까닭을 따지니, 적장이 다만 강화할 것인지 싸울 것인지를 일찌감치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공이 일부러 그와 함께 오래도록 수작하면서 말을 반복하였는데 해가 기울려고 하였다. 이 틈에 상이 동쪽으로 수구문(水溝門)을 나와 어가를 달려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공이 적기와 더불어 도성으로 들어와서 적과 더불어 이야기한 바를 행재소(行在所)에 아뢰었다. 이튿날 해가 저물도록 통보를 받지 못하자 적들이 대로하여 공이 자신들을 속였다 하여 공을 해치고자 하였는데, 혹자가 불가하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강화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죽여서는 안 된다.” 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였다. 공 등이 돌아와 상을 뵈니, 상이 공의 손을 잡고 위로하기를, “조정 신료들이 모두 경처럼 충성스럽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일이 있었겠는가.” 하고는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당시 성 안에 있는 군사가 채 1만이 되지 않아 성가퀴를 분담하여 지킬 수가 없었는데 적기가 대대적으로 이르러 산과 들을 뒤덮었다.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고 사방에서 위협하니 상하가 두려워하여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적들이 오히려 날마다 사람을 보내어 강화를 요구하기를, “강화가 이루어지면 군대를 즉시 철수하겠다.” 하였다. 그러나 군의가 분분히 일어 강화의 주장을 더욱 준엄하게 공격하여 대신이 망설이며 결정을 하지 못하니, 공이 홀로 개연히 말하기를, “오늘의 계책은 강화하든 싸우든 양단 간에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싸우자니 군사가 약하고, 강화를 주장하자니 거리끼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성이 함락되어 상하가 어육이 된다면 종묘와 사직을 어디에 두겠습니까.” 하였다. 포위되어 있던 40여 일 동안에 성이 거의 함락될 뻔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원군은 끊어지고 식량이 고갈되었을 뿐 아니라 땔감과 말먹이도 모두 떨어졌다. 적이 포를 쏘아 성곽을 공격하여 성곽에 온전한 성가퀴가 하나도 없게 되니, 사람들의 기가 완전히 저상되어 강화하고자 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리하여 강화의 글이 비로소 작성되었는데 김공 상헌(金公尙憲)이 조정에서 통곡하면서 손으로 그 글을 찢으니, 공이 주워서 붙이며 말하기를, “문서를 찢는 자가 없어서도 안 되겠지만 붙이는 자도 있어야 합니다.” 하였다. 제공이 청성(靑城)의 치욕을 면키 어렵다고 근심하였으나 공이 홀로 말하기를, “오랑캐는 우리의 영토를 탐내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이 다만 강화하는 데에 있습니다. 다른 염려가 없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강도가 함락되어 패보(敗報)가 이르고 적이 또 우리에게 사로잡은 포로를 과시하니, 온 성 안이 두려워하고 놀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으니, 실로 정축년(1637, 인조15) 정월 그믐날의 일이었다. 적의 군대가 물러가자 상이 비로소 환도하였다.
4월에 우의정에 올랐다. 당시 전란의 참화가 눈에 가득하여 모든 일이 경황이 없었는데 공이 나아가서는 임금의 마음을 위로하고 물러나서는 조정을 수습하니, 내외가 다소 안정되었다. 상이 성하지맹을 맺은 뒤로 늘 우울하여 조정에 임했을 때 기쁜 기색이 없었다. 공이 상에게 간언하기를, “뜻〔志〕은 만사의 근본이고 기(氣)는 또 뜻을 돕는 것이니, 그 뜻과 기를 길러 굽히거나 꺾이지 않을 수 있게 된 뒤에야 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한 번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여 기운이 저상되고 만다면 천하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쇠미한 나라를 부흥하는 일을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하(夏)나라는 사방 10리의 땅을 가지고도 소강(少康)이 부흥시켰고 월(越)나라는 궁벽한 회계(會稽)로 내몰려 있었으면서도 구천(句踐)이 패업(霸業)을 이루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국가의 영토는 결손된 바가 없고 조종(祖宗)의 덕택은 아직 다하지 않아 호령이 사방에 막히지 않고 재력이 오히려 삼남(三南)에 남아 있으니, 오직 전하께서 뜻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큰일을 하고자 한다면 어찌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하였으니, 공이 임금을 위로하는 데에 고심하여 그 말이 이와 같았다. 또 의정부가 육조(六曹)의 일을 서리(署理)하던 제도를 회복하고 관제를 개정하며, 전조(銓曹)의 낭천(郞薦)과 대간의 피혐 제도를 혁파하여 조금씩 잘못된 규례를 바로잡아 난리를 극복하고 치욕을 씻을 계책으로 삼기를 청하였는데, 공경(公卿)에게 내려 논의에 부쳤을 때에 의견이 분분하여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또 제도(諸道)로 하여금 전사한 장사(將士) 및 충신과 열녀를 기록하여 차례로 포장하도록 하며, 전장의 시신을 사람을 모집하여 묻어주고 관(官)에서 제사를 지내주기를 청하였다. 포로를 속환(贖還)할 때에 그 대가의 다소를 정하여 그 한도를 넘지 않도록 하고 길양식도 없이 돌아오는 자를 곡식을 운반하여 구제하니, 이 때문에 속환된 자가 매우 많았다.
가을에 좌의정으로 올랐다. 난리 뒤에 역병으로 죽은 소가 많아 농민이 어려움을 호소하자 공이 그 화(禍)가 병화보다 극심하다고 하고 도살을 엄히 금하였고, 호미와 괭이를 더 많이 주조하여 빈민에게 지급해서 농사에 이용하도록 하였다. 성하지맹을 맺은 날에 우리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을 범하는 일이 없기로 약속하였는데도 마침내 이해 가을에 와서 군사를 요구하자 이 연양(李延陽 이시백(李時白))이 공을 보내어 거절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공이 심양에 가서 말하기를, “우리가 명나라를 섬긴 지 300년이 되었으니 군사를 일으켜 공격을 돕는 것은 의리상 불가하다.” 하면서 반복하여 쟁론하니, 청인(淸人)이 그 뜻을 꺾지 못하였다. 돌아올 때에 포로 수천 명을 속환하여 왔다.
무인년(1638, 인조16) 가을에 영의정에 올랐다. 북쪽 오랑캐가 다시 중국을 침범하여 우리에게 군사를 요구하자, 공이 말하기를, “성하지맹은 형세가 급박하고 역량이 달려 어쩔 수 없이 나온 계책이었습니다. 오늘날 군사를 돕는 것은 의리상 허락할 수 없으니,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청인이 대로하여 힐책하는 글이 날마다 이르니, 온 조정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우리 한두 사람의 대신이 이 일을 위해 죽어야만 비로소 천하와 후세에 떳떳이 할 말이 있게 됩니다. 더구나 이 일은 실로 신이 주도하였으니, 가서 스스로 감당해 보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다시 심양에 가게 되었다. 도착하니 여러 귀인들이 당(堂)에 열좌(列坐)하고 있었다. 공을 맞아들이고 힐책하기를, “누가 군사를 돕는 일을 저지하였습니까?”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상상(上相)으로 있으니, 주관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이 일이 내게서 나왔으니, 감히 죽음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청주가 의롭게 여기고 풀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공이 상부(相府)에 있는 동안에는 한번도 돕는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처음에 공이 떠날 때에 사람들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하였고 공 또한 스스로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고 여겨 상구(喪具)를 가지고 갔다. 친척과 자제가 모두 길에서 곡송(哭送)하였으나 공은 태연하였다.
기묘년(1639, 인조17)에 상이 오래도록 몸져누워 있었는데 궁중에 무고(巫蠱)로 인해 옥사가 일어났다. 공초(供招)에서 정명공주(貞明公主)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자 밀지(密旨)로 공으로 하여금 그 옥사를 철저히 조사하게 하였는데 공이 불가하다고 쟁집하였고 일이 맡겨지자 또 힘껏 쟁변하니 상이 더욱 노하였다. 그래서 공을 심양에 사자로 보내고 나서, 공의 죄를 논하지 않았다고 하여 삼사(三司)를 문책하였다. 공이 도중에 소장을 올려 파직을 청하기를, “신이 차마 공주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감히 선왕(先王)을 저버릴 수 없고 감히 전하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신이 한갓 원칙을 고수한다는 생각만 품고 경솔하게 큰 옥사를 일으킨다면 이야말로 참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이니, 전하께서 그런 신하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고, 또 강충(江充)과 이필(李泌)의 일을 반복하여 개진하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해서도 옥사가 끝내 종결되지 않았다. 용만(龍灣)에 이르러 병이 심해져 가지 못하게 되자 조정이 부사(副使)를 대신 보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경진년(1640) 봄에 사직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2월에 돌아와 경사에 이르러 또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임오년(1642) 가을에 다시 영의정에 배수되었다. 누차 사면을 청하였으나 돈유하여 마지않았으므로 나와 일을 보았다. 10월에 이르러 또 심양에 사신으로 갔다. 이에 앞서 정축년(1637)에 화약(和約)을 청한 본말을 갖추어 도독(都督) 진홍범(陳弘範)에게 이자(移咨)하여 그를 통해 황조(皇朝)에 보고될 수 있기를 바랐으나 해로(海路)가 멀고 험난하며 왕래가 단절되어 글이 반드시 전달되리라는 것을 장담할 수 없었으므로 다시 갈 만한 사람을 구해 글을 전한 다음 반드시 돌아와 보고하게 하려고 하였다. 마침 서변(西邊)에서 승려 한 사람을 구했는데 이름은 독보(獨步)이고 전에 살던 곳은 향산(香山)으로, 가도(椵島)에 들어갔다가 난리로 인해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으로 들어가 홍승주(洪承疇)의 군중에 머무르게 되었다. 무인년(1638, 인조16) 가을에 홍승주가 독보를 보내 우리나라로 돌아와 사정을 엿보게 하였는데 강을 순찰하던 군졸에게 붙잡혔다. 평안 병사 임경업(林慶業)이 경사로 보냈는데, 공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해 보고는 이 일을 맡길 만하다고 생각하여 논의한 다음 상에게 아뢰어 주문(奏文) 및 군문(軍門)에 보내는 자문을 갖추어 독보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다시 중국에 들어가게 하였다. 신사년(1641) 가을에 이르러 중국이 우리의 포로를 돌려보냈는데 독보가 또 그들과 더불어 와서 회자(回咨)를 받게 되었다. 그 회자는 대략 “귀국의 괴로운 정상은 하늘과 사람이 함께 알고 있는 바입니다. 대대로 절개를 지키고 순종한 그 공로가 민멸될 수 없으니, 비록 잠시 시세(時勢)에 내몰려 오랑캐에게 곤경을 당하고 있으나 어찌 차마 귀국을 독책(督責)할 수 있겠습니까. 안심하고 협력하여 뒤에라도 충성을 다하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공은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다. 신 평성(申平城 신경진(申景禛))이 정승이 되어 공에게 다시 자문을 지을 것을 청하여 재차 독보를 보냈다. 청인이 이를 탐지하고 우리에게 화가 나서 와서 힐책하였으므로 만금(萬金)을 주고서야 일이 무마될 수 있었다. 그런데 홍승주가 싸움에 패해 항복하게 되자 그 일을 다 발설하였는데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마침 이계(李烓)가 한인(漢人)과 잠상(潛商)한 일이 드러나 청인이 세자의 위엄을 빌려 이계를 포박하여 봉황성(鳳凰城)으로 데리고 갔는데 이계가 국가의 기밀을 고해바치고 살고자 하여 드디어 독보의 일을 고하였다. 이에 청인이 우리 대신에게 와서 답변할 것을 요구하니, 일이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논의하는 자 중에 혹자가 “일이 증거가 없으니 발뺌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저들이 중국의 배가 왕래한 것을 알고 있으니, 지금 사실대로 밝히지 않으면 저들의 의심만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일이란 어찌될지 모르는 법입니다. 끝내 자취가 드러나는 데에 이른다면 재앙이 반드시 클 것이니, 사실대로 밝혀 재앙이 나와 임경업이 죽는 것에서 그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공으로 인해 주저하며 차마 결행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이 떠나 용만에 이르니, 혹자가 공에게 말하기를, “전후에 걸쳐 승려를 보낸 것은 모두 임경업의 계책이니, 끝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가 죽기를 기다려 그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면 공은 화를 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그를 저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불가합니다. 처음에 명의(名義)를 천하에 세우고자 했다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어서는 남에게 전가하여 자신만 화를 모면하는 것이 가한 일이겠습니까.” 하니, 제공(諸公)이 차탄하며 말하기를, “충신과 열사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당시 임경업 역시 붙잡혔으나 도중에 도망하였다. 공이 봉황성에 이르자 청인이 군사의 위용을 성대히 갖추고서 공을 뜰로 인도하여 누가 승려를 보내는 일을 주관하였는지를 물으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실제로 주도하였고 임경업이 보냈으니, 이미 왕명으로 한 일도 아니고 여러 사람들과 모의한 것도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그 답변을 심양으로 보냈는데, 청주(淸主)가 공을 형틀에 묶어서 압송하게 하여 북관(北館)에 가두었으니, 북관은 사수(死囚)를 가두는 옥이었다.
계미년(1643, 인조21)에 비로소 남관(南館)으로 옮겨졌다. 당시 김공 상헌(金公常憲), 이공 경여(李公敬輿)도 같이 남관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중국 사람으로 심양에 포로로 잡혀 온 자가 차탄하며 말하기를, “동방의 경상(卿相)으로 중조(中朝)를 위하여 이곳에 잡혀 온 자가 세 사람이니, 의(義)를 중시함을 족히 볼 수 있다.” 하였다. 공은 붙잡혀 갇혀 있는 4년 동안에 갖은 위험과 치욕을 당하면서도 늘 《역경(易經)》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갑신년(1644)에 청인이 연경(燕京)에 들어가 대략 남북을 평정하였다.
을유년(1645)에 비로소 우리 세자 및 두 왕자가 돌아왔는데, 공과 제공도 함께 돌아왔다. 가을에 진천(鎭川)에 우거하면서 와룡계(臥龍溪) 가에 띳집을 엮었다. 겨울에 부름을 받고 도성으로 들어왔다.
병술년(1646)에 폐빈(廢嬪) 강씨(姜氏)를 사사(賜死)하자 공이 은혜를 온전히 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해 가을에 공의 병이 심해지자 어의(御醫)를 보내 간병하였고 어선(御膳)을 나누어 주었으며, 위독하게 되어서는 문병하는 사자가 연이어 나왔다. 마침내 정해년(1647, 인조25) 5월 17일에 집에서 운명하였다. 상이 공을 위해 5일 동안 고기를 들지 않았고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다. 중사(中使)가 상사(喪事)를 살피고 관에서 염빈(殮殯)을 도왔으며 내탕(內帑)에서 옷과 이불을 내어 치부(致賻)하였고 3년 동안 녹봉을 지급하도록 하였으니, 애휼(愛恤)의 은전(恩典)이 규례를 벗어난 것이었다. 후에 상이 조정에 임하여 한숨을 쉬며 이르기를, “임금에 대한 충성이 최 완성(崔完城)만 한 자를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해 8월에 청주(淸州) 치소(治所)의 북쪽 대율리(大栗里) 감좌(坎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전 부인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우찬성 만(晩)의 따님이고, 후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종묘서 영(宗廟署令) 린(嶙)의 따님인데 모두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처음에 장씨 부인에게 아들이 없어서 공이 조카 후량(後亮)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는데 뒤에 허씨 부인이 아들 후상(後尙)을 낳았다. 당시 사대부들은 이미 후사를 세운 뒤에 아들을 낳으면 소생자(所生子)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풍속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공은 생각하기를, ‘부자 관계를 이미 정했고 천륜에 차서가 있으니 바꿀 수 없다.’ 하고 조정에 청하여 후량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이를 법으로 만들게 되었다. 후량은 마지막 벼슬이 한성부 좌윤이었고 완릉군(完陵君)에 습봉(襲封)되었다. 후상은 벼슬이 응교에 그쳤다. 측실에게서 나온 1녀는 첨지 구횡(具鐄)에게 시집갔다.
좌윤의 아들로 장남 석진(錫晉)은 현령이고, 그다음 석정(錫鼎)은 영의정이고, 그다음 석항(錫恒)은 감사이다. 딸은 진사 윤제명(尹濟明), 정랑 신곡(申轂)에게 시집갔다. 응교는 석정을 후사로 삼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영민하고 과감하였으며 생각이 깊고 식견이 넓었다. 큰 논란거리를 만나거나 큰 난리를 당해도 생각이 안정되고 기색이 편안하였다. 자신의 견해를 용맹하게 밀고 나가 일찍이 우유부단하게 행동하거나 중론에 뜻이 꺾인 적이 없었다. 멀리서 보면 매우 연약해 보이나 가까이 다가서면 목소리가 금석(金石)에서 우러나오는 듯하였으니, 공이 하늘에서 타고난 자질이 대개 이와 같았다. 젊어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현헌(玄軒 신흠(申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두 공이 모두 깊이 인정하고 허여하였다. 조공 익(趙公翼), 장공 유(張公維), 이공 시백(李公時白)과 일찍부터 교유를 맺어 절차탁마하였는데 늙어서도 우정이 변치 않자, 세상에서 사우(四友)로 일컬었고 학사(學士)와 대부(大夫)가 모두 아름답게 여겼다. 흉금이 넓어 경계를 짓지 않았으며 허물을 고치는 데에 용감하고 선을 따르는 것을 즐거워하여 남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면 진심으로 받아들여 기쁨이 얼굴에 드러났다. 중흥의 시대를 만나 성군(聖君)이 위에 계시고 현사(賢士)가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공은 원훈(元勳)으로 중추가 되는 직임을 맡아 몸소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자임하여 매양 군재(群才)를 고루 등용하고 서정(庶政)을 개혁하여 국세(國勢)를 튼튼히 하고 외침을 막고자 하였으니, 장주(章奏)에 드러난 계획 치고 정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앞서서는 예론(禮論)으로 곤경을 당하였고 뒤에는 화의(和議)로 배격을 받아 논의가 시론에 부합하지 못하여 끝내 뜻을 크게 펴지 못하였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별묘(別廟)를 세우자는 주장은 변례(變禮)에서 절충하고 경사(經史)에서 근거하여 예조(禰祖)라 부르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밝혔고, 화의의 주장에 이르러서는 시의(時義)를 깊이 헤아려 애당초 함부로 강한 적을 자극하여 전복(顚覆)을 자초하지 않으려고 하였고, 또 스스로 목을 매는 필부의 하찮은 절개를 우선시하여 막중한 종사를 저버리는 일을 차마 하지 못하였다. 이는 명나라 가정(嘉靖) 때와 송나라 정강(靖康) 때의 일과는 함께 견주어서 논할 수 있는 바가 아님이 매우 분명한데도 사람들 중에는 혹 명분에 현혹되어 마음을 굽혀가며 남의 견해를 추종하여 같은 죄목을 붙여 함께 기롱하고자 하니, 사리에 어긋난 것이 아니겠는가. 일에 임해 결단을 잘하였으니, 시비를 가리는 것이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분명하여 중론이 분분할 때에도 굽히지 않고 주장을 견지하였다. 매번 상 앞에 나아가 일을 논할 때에 주장을 고집하였으니, 상이 혹 큰소리를 내면 공은 번번이 다시 분변하여 기어이 하고자 하는 말을 끝까지 다하였다. 어느 날 연양군(延陽君)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가 공이 반복해서 한사코 쟁변하여 허락을 받은 뒤에야 그만두는 것을 보고 나와서 공에게 이르기를, “작은 일을 무엇 때문에 그토록 힘써 간쟁합니까?”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일이 크든 작든 모두 시비가 있는 법이니, 어찌 작은 일로 치부하여 구차하게 임금의 뜻을 따르겠습니까.” 하니, 연양군이 탄복하였고, 후에 “대신 가운데 임금과 시비를 다투는 자는 오직 공뿐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완성(完城)의 사업으로 그 큰 것이 8가지이니, 반정(反正)에 참여하여 나라를 바로잡아 부흥한 것이 첫째요, 예제(禮制)를 논하여 부자(父子)의 인륜을 밝힌 것이 둘째요, 단기로 적진에 나아가 그 예봉을 무디게 한 것이 셋째요, 비방을 무릅쓰고 화의를 주장하여 종사를 보존한 것이 넷째요, 군사의 징발을 극력 거부하면서 죽음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것이 다섯째요, 천조(天朝)에 글을 보내고서 스스로 그 책임을 감당한 것이 여섯째요, 남의 골육을 잘 대한 것이 일곱째요, 붕당에 물들지 않은 것이 여덟째이다.” 하였으니, 연양군이 공을 가장 깊이 알았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은 매양 공을 칭송하기를, “일편단심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자겸(子謙)은 참으로 사직과 명운을 같이한 신하이다.” 하였고, 이공 경여(李公敬輿)는 말하기를, “굴원(屈原)의 충성은 충성스러우나 지나쳤고 지천(遲川)의 충성 또한 지나치리만큼 충성스러웠다.” 하였다.
세당이 삼가 보건대, 공은 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경훈(經訓)에 통달하였고 사서(四書)를 숙독하여 터득한 것이 심오하였다. 그러므로 사업에 나타나고 논의로 드러난 것이 모두 이를 근본으로 하였으니, 원래 학문이 얕고 식견이 천박한 자가 대번에 그 한두 가지라도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질책과 비방이 벌 떼처럼 일어났던 것은 이러한 점을 대번에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호라, 말류(末流)가 도도히 흘러 한번 가서는 돌아오지 않아 그 근원을 전혀 찾지 못하니,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이 공에게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공에 대한 평가는 백세가 지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공의 문장은 논리와 지취(志趣)를 위주로 하였고 주의(奏議)의 경우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붓끝에 혀가 달렸다고 칭찬하였다. 공의 저작은 시문(詩文) 19권과 《경서기의(經書記疑)》 약간 책이 있다. 세당이 일찍이 공의 유집(遺集)에 서문을 썼는데 지금 상국이 또 신도비명을 부탁하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삼가 묘지(墓誌)와 행장에 의거하여 차례대로 사적(事蹟)을 기록하고 그 끝에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영준한 인물을 내어 / 天生英彦
한 시대의 / 以爲一世
동량과 주즙으로 삼았다네 / 棟梁舟楫
큰 집을 부지하고 큰 내를 건너게 하여 / 乃扶乃濟
혹여라도 우리를 어그러지게 하지 않았으니 / 無我或戾
우리가 의지하는 바였다네 / 繄我所賴
문충공은 / 玆惟文忠
그 공적이 크다네 / 厥功之大
밝으신 성상을 보좌하여 / 羽翼明聖
재앙을 말끔히 제거하였으니 / 蕩除陰沴
그 덕에 천지가 안정되었으며 / 乾坤泰寧
일월이 밝게 드러났다네 / 日月廓霽
장릉의 복제를 논의할 때 / 章陵服議
유자들 거개가 정견을 잃어 / 群儒多蔽
모피로 울타리를 둘러치고 / 毛皮藩壁
안팎으로 빗장을 잠갔다네 / 外鍵內閉
추존의 예제가 정해지지 않아 / 尊親未定
대의가 장차 흐려지려 하거늘 / 大義將晦
공이 홀로 분연히 의견을 개진하여 / 公獨奮舌
의혹을 분변하고 편견을 깨뜨렸으니 / 剖疑破滯
천륜과 인륜이 / 天秩民彝
동방에서 밝게 드러났다네 / 待我昭揭
대운이 항구하지 않아 / 大運靡恒
의상이 바뀌고 말았으니 / 衣裳變改
가엾도다 우리 동토가 / 愍予東土
먼저 그 해독을 입었도다 / 先罹毒害
하늘을 삼킬 듯한 기세로 / 滔天勢壯
질풍처럼 짓쳐 내려오거늘 / 捲地鋒銳
호랑이의 아가리에 몸을 던져 / 身餌虎口
사직을 수호하였다네 / 爲社稷衛
고립된 성에 원군 끊어지고 / 孤城援絶
강도마저 궤멸되니 / 江都又潰
놀라 서로 돌아보며 / 爾我相顧
너 나 할 것 없이 혼란에 빠졌을 뿐 / 小大憒憒
일찍이 한 사람이라도 / 曾無一人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네 / 遠算深計
충성을 다하고 심력을 다해 / 竭忠殫力
안팎에서 분주히 주선하였으니 / 奔走內外
공에게 기대지 않았다면 / 非公是仗
그 누가 패망을 구했으리오 / 孰當救敗
영토를 그대로 보전하고 / 四封如舊
종묘에 제사할 수 있었으니 / 七廟以祭
우리나라를 보전하여 / 保我家邦
만년토록 이어지도록 하였다네 / 迄于萬載
이들 북쪽 오랑캐가 / 曁玆北人
천조를 치도록 위협하자 / 脅之反吠
의리를 지킬 것을 맹세하고 / 誓心守義
기꺼이 죽고자 하였네 / 甘於殞斃
북관 깊고 어두운 곳에 / 北館幽幽
몇 해를 갇혀 있었으나 / 經年縶繫
적들이 두려워하고 공경하여 / 敵知憚敬
큰 곤경에서 끝내 벗어났네 / 大難卒解
아 공의 공렬은 / 嘻公功烈
고인 중에도 필적할 이가 없도다 / 古無匹對
내가 지은 신도비명은 / 我銘神道
큰 행적만 들었으니 / 擧迹之最
금석에 새겨 / 刻之金石
영구히 민멸되지 않게 하노라 / 永久靡替


 

[주D-001]광무제(光武帝)의 고사 : 광무제가 처음에 낙양(洛陽)에 사묘(私廟)를 세웠다가 중랑장(中郞將) 장순(張純)의 말을 듣고는 즉시 헐고 사친묘(四親廟)를 용릉(舂陵)으로 옮긴 일을 말한다. 《後漢書 卷35 張純列傳》
[주D-002]석진(石晉)……않았습니다 : 석진은 오대(五代) 때 후당(後唐)에 이어 석경당(石敬塘)이 세운 후진(後晉)을 가리킨다. 후진은 거란의 도움으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16주(州)를 거란에 떼 주고 칭신하고 있었는데 경연광이 신하의 호칭을 없애고 손자라고만 칭하자는 주장을 역설하자 거란이 노하여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이에 경연광이 “우리 진나라는 10만 명의 사람들이 칼을 갈고 있으니, 싸우고 싶다면 오라.” 하여 거란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이에 상유한이 공손한 말로 사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출제가 듣지 않았다. 《舊五代史 卷88 景延廣列傳, 卷89 桑維翰列傳》
[주D-003]한탁주(韓侂冑)가……것 : 송나라 영종(寧宗)이 즉위하여 오 태후(吳太后)가 수렴청정했을 때, 한탁주가 신임을 받아 평원군 왕(平原郡王) 평장군국사(平章軍國事)가 되었는데, 전횡이 극심하였다. 뒤에 중원을 회복하여 자기의 지위를 강화할 목적으로 금나라와 무력 충돌을 극력 주장하다가 패하였다. 이에 그의 머리를 함(函)에 담아 금나라에 보내 사죄하였다. 《宋史 卷474 韓侂冑列傳》
[주D-004]청성(靑城)의 치욕 : 송나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가 재궁(齋宮)인 청성궁(靑城宮)에서 금나라에 포로로 잡히고, 금나라 말제(末帝)가 청성궁에서 원나라에 포로로 잡힌 일을 말한다.
[주D-005]강충(江充)과 이필(李泌)의 일 : 강충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의 간신으로, 자신의 영리를 도모하기 위해 무고(巫蠱)의 일로 태자를 무함하여 옥사를 일으켰는데 태자가 궁지에 몰린 나머지 군사를 일으켜 강충을 참하고 자살하였다. 《漢書 卷97上 外戚傳》 이필(李泌)은 당나라 사람으로, 현종(玄宗)ㆍ숙종(肅宗)ㆍ대종(代宗)ㆍ덕종(德宗)을 두루 섬겼는데 덕종이 태자를 폐하려 하자 온 가족을 담보로 삼아 태자의 무죄를 보증하겠다고 울면서 아뢰니 덕종이 감동하여 중지하였다. 《舊唐書 卷130 李泌列傳》
[주D-006]폐빈(廢嬪) 강씨(姜氏)를 사사(賜死)하자 :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인 강씨가 인조의 애첩 조 소용(趙昭容)의 무고로 사약을 받고 죽은 사건을 말한다. 《仁祖實錄》
[주D-007]모피로 울타리를 둘러치고 : 허례(虛禮)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이른다. 《오백가주창려문집(五百家注昌黎文集)》 권2〈귀팽성(歸彭城)〉 시에 “모피를 제거하지 못하였다.〔未能去毛皮〕”라는 말이 보이는데, 그 주에 “모피는 허례(虛禮)이다.” 하였다.

서계집 제12권
 비명(碑銘) 5수(五首)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이공(李公) 신도비명


공은 휘는 정영(正英), 자는 자수(子修), 호는 서곡(西谷)으로 종성(宗姓) 출신이다. 정종(定宗)은 아들이 열다섯이니, 그 열 번째가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이다. 3세(世)를 지나 함풍군(咸豐君) 계수(繼壽)에 이르니, 이분이 공의 고조가 된다. 증조는 증(贈) 찬성(贊成) 휘 수광(秀光)이요, 조부는 동지중추부사 휘 유간(惟侃)이요, 부친은 호조 판서 효민공(孝敏公) 휘 경직(景稷)으로 효성으로 정려(旌閭)가 섰다. 모친 보성 오씨(寶城吳氏)는 첨지중추부사 경지(景智)의 따님이다.
공은 광해 8년인 병진년(1616) 6월 16일에 태어났다.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모친이 돌아가니, 동향 사람 청평군(靑平君) 심륜(沈惀)이 가엾게 여겨 첩실(妾室) 변씨(邊氏)로 하여금 거두어 기르게 하였고, 그 부인 윤씨(尹氏)가 또 직접 가르쳤다. 청평군이 외군(外郡)에 있는 경우가 많아 공을 데리고 가니, 12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경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효민공이 가서 보았으나 공이 아직 부친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다. 청평군이 말을 해 준 뒤에 알게 되어 부친에게 절을 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비 오듯 눈물을 쏟으니, 좌객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때부터 가정에서 수학(受學)하였다. 조부가 아직 무양(無恙)하여 효민공 형제가 몸소 극진히 봉양하였다. 공은 닭이 울면 일어나 소세하고 머리를 빗고서 부친과 숙부를 따라서 조부의 처소에 이르러 부축해 드리고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가려운 곳을 긁어드리는 것을 할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고 한가할 때는 글 읽기를 쉬지 않으니, 계모(繼母) 이씨 부인(李氏夫人)이 가상히 여기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효민공이 복상(服喪) 중이었을 때에 공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등제하였다. 곧이어 병난(兵難)을 만나 효민공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어가(御駕)를 호종하니, 공이 이씨 부인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들어가 쌀을 져 나르고 땔나무를 하여 조석으로 공궤(供饋)하였다. 강도가 함락되자 모친을 모시고 나오면서 자식은 버린 채 돌아보지 않았다.
정축년(1637)에 괴원(槐院)에 분관(分館)되었다.
무인년(1638)에 사국(史局)으로 들어가 검열과 대교가 되었으며 주서로 옮겨졌다가 봉교에 천전되고 전적으로 승천(陞遷)하였으나 친혐(親嫌)으로 인해 조용되지 못하였다.
경진년(1640)에 부친상을 당하여 집상(執喪)에 예를 다하였다.
임오년(1642)에 상기를 마치고 예조 좌랑이 되었으며 정언으로 천전되었다. 체차되어 병조 좌랑이 되고 다시 정언에 제수되었으며 사서에 이직되었다.
계미년(1643)에 세자를 따라 심양(瀋陽)에 가서 일에 따라 올바르게 규간(規諫)하였다. 정명수(鄭命壽)가 노적(奴賊)의 위세를 빌려 공갈하고 협박하여 뇌물을 얻고자 하였다. 세자가 걱정하자, 공이 홀로 아뢰기를, “저군(儲君)께서 여기에 계시니 또한 작은 조정입니다. 묻는 것이 있으면 당연히 스스로 답변해야 하지 어찌 멀리 있는 본조(本朝)까지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답을 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에 정명수가 기가 꺾여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겨울에 세자를 따라 우리나라로 돌아와 예조 좌랑에 체배(遞拜)되었으나 일로 인해 파직되었으며 병조 좌랑에 서용되었다.
을유년(1645, 인조23)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정해년(1647)에 상기를 마치고 병조 좌랑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
무자년(1648)에 영동(嶺東)과 영남(嶺南)을 염문(廉問)하였고 수찬을 거쳐 교리에 천전되었으며 중간에 정언이 되었다.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 겨울에 장릉(長陵)의 애책문(哀冊文)을 써서 올렸는데 자급이 낮다 하여 단지 구마(廐馬)만 하사하였다. 한학 교수(漢學敎授)를 겸하였고 기내(畿內)를 염문하였다.
경인년(1650)에 헌납과 수찬이 되었다.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곧 서용되었다.
신묘년(1651)에 교리가 되었다. 입시하여 임금 앞에서 부제학 이지항(李之恒)의 탐오함을 논핵하였는데 간관이 도리어 공을 배척하였다. 이 때문에 하옥되었으나 언관(言官)의 말에 힘입어 풀려났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파산(罷散) 상태로 있었다. 뒤에 이지항이 실각하자 특별히 서용되어 다시 수찬이 되었고 사서를 겸하였다. 그러나 일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교리로 서용되었다. 이조 좌랑이 되었으나 고과를 중(中)으로 맞아 또 해직되었다가 다시 수찬에 배수되었고 이조 정랑에 천전되고 문학을 겸하였다. 조석윤(趙錫胤), 박장원(朴長遠)이 일을 말하다가 찬적(竄謫)되자 공이 상소로 간하였는데 임금의 뜻에 거슬려 정사(呈辭)하여 체차되었다.
갑오년(1654)에 부응교로 천전되었다. 홍우원(洪宇遠)이 간언으로 인해 죄를 입었는데 대각이 이미 명을 환수하기를 청해 놓고 곧바로 정지하였다. 옥당이 언관을 논박하여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노하여 모두 출척하여 보외(補外)하였다. 그래서 공이 가산 현감(嘉山縣監)이 되었다. 가산은 작은 고을로 대로(大路) 변에 위치해 있고 또 무인(武人)이 수령이다 보니 그 백성들이 곤궁하고 피폐하였다. 공은 부임하여 지친 자를 쉬게 하고 파리한 자를 소생시키고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었으며, 미염(米鹽)과 재물을 부서(簿書)에 정연하게 기록하니 아전의 간사한 행위가 용납될 수 없었으며, 교량과 관우(館宇) 및 응접에 소용되는 기구 등 빈려(賓旅)를 맞이하기 위한 것들을 모두 부족하거나 결여되지 않게 하였으며, 향약(鄕約)을 정비하고 좋은 스승을 골라 고을의 자제를 가르치고 몸소 권면하고 힘쓰니, 2년 사이에 민풍(民風)이 크게 변하였다. 관서(關西)는 호강(豪强)과 무단(武斷)의 풍속이 많았다. 고을에 교활한 아전이 있었는데 감영의 위세를 믿고서 관리를 능멸하고 백성의 재물을 빼앗았다. 심지어 매질까지 해가며 곤궁하고 약한 자들을 사사로이 위협하자 공이 그 죄를 다스리고 빼앗은 재물을 돌려주었다. 서리가 또 앙갚음하려고 계책을 꾸미자 공이 그 정황을 알고 순사(巡使)에게 말하여 그 죄를 끝까지 처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순사가 이미 승낙해 놓고 다시 태도를 바꾸었다. 공이 마침내 이 서리를 장살(杖殺)하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그렇지만 공 역시 함부로 죽인 것으로 인해 체포되었다. 혹자가 공에게 사실대로 대답하지 말도록 권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춘천(春川)으로 귀양 갔다가 특별히 강서(江西)로 이배(移配)되었다. 가산의 백성들이 공이 백성을 위하다가 죄를 입은 것을 원통해하여 위로하고 음식을 주는 발길이 이어졌고 도로에서 보호하였으며, 인근 고을에서도 온 자가 많았다.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각각 공을 위해 비문을 세워 덕정을 칭송하였다. 이듬해에 풀려나 돌아왔다.
정유년(1657, 효종8)에 종부시 정에 서용되었다. 상의원 정으로 옮겼으며, 사인으로 이배(移拜)되었고 필선과 보덕을 겸하였다. 세 차례 사간이 되어 이민구(李敏求)를 서용하라는 명을 환수하게 하였다. 연이어 응교, 부응교가 되었다. 7월에 동부승지로 승진하고 좌승지에 이르러 체차되었다. 형조 참의와 참지를 역임하였다.
기해년(1659)에 은대(銀臺)로 돌아왔고 체차되어 참지가 되었으며 다시 좌승지가 되었다. 대행왕(大行王)의 명정(銘旌)을 써서 올려 자급이 올랐다.
경자년(1660, 현종1)에 부총관(副摠管)이 되었으며, 병조 참판에 옮겨 제수되었다. 대사간에 배수되어 정사의 잘못과 백성의 폐막에 대해 논하였으며, 체차되어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신축년(1661)에 연경(燕京)에 사신을 갔고 돌아와 우윤이 되었으며 동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다시 대사간이 되어 조형(趙珩)을 국문(鞫問)하는 것에 대해 간쟁하니, 상이 노하여 관작을 삭탈하였다.
갑진년(1664, 현종5)에 서용되어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공은 민력의 피폐가 관향곡(管餉穀)을 마구 거두는 데에서 기인한 것임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번다하고 가혹한 것을 모두 견감해 주고 오직 절약하여 비용을 줄이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니, 창고에 쌓인 곡식이 전보다 몇 배가 늘게 되었다.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조사하여 역말로 조정에 보고하여 혁파하였으며, 변새(邊塞)의 성루(城壘)는 멀고 외진 곳이라 종전에는 이르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모두 몸소 일일이 순시하였으며, 그곳 자제들을 모아서 각각 그 기예를 시험하고 곤궁한 자와 늙은 자를 불쌍히 여겨 옷감을 마련해 주고 효자와 열부를 포상하여 정문(旌門)을 세워주었으며, 행차가 그 집에 이르면 후히 무휼(撫恤)하였다. 그리하여 변방의 백성들이 뛸 듯이 기뻐하였으니, 난생 처음 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병오년(1666) 봄에 임기가 차 예조 참판이 되었는데 포로가 도망하여 돌아온 일이 발각되어 우리 조정에 힐문하려고 사신이 나오게 되자 공으로 하여금 머물러 대응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만상(灣上)으로 달려가니, 청나라 사신이 끝까지 캐묻고 통관(通官)이 따라서 위협하였다. 그렇지만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날마다 빈사(賓使 김좌명(金佐命))와 더불어 투호(投壺)를 하고 활쏘기를 하였다. 조정이 뇌물을 주는 것을 허락하였지만 공은 내켜하지 않고 아뢰기를, “통관은 본디 힘을 쓸 수 없으니, 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대간의 탄핵을 당하고 말았으니, 뇌물을 지나치게 썼다는 이유였다. 서용되어 형조 참판에 배수되었고 병조 참판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지신사가 되었으며 체차되어 좌윤이 되었다.
무신년(1668)에 지신사, 형조 참판, 대사간을 역임하였고 이조 참판이 되었다가 탄핵을 당하였으며 호조 참판이 되었다. 절사(節使)가 되어 다녀온 공으로 자급이 오르고 판윤이 되었으나 또다시 관서 때의 일로 탄핵을 받아 새로 받은 자급을 환수당하였다. 조정이 처음에는 민폐(民弊)를 염려하여 관향(管餉)의 조곡(糶穀)을 줄이고 포(布)를 거두었으나 이내 다시 중지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이익을 다투다가 믿음을 잃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여 상이 공에게 편의에 따라 수량을 채워 넣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그 보충하고 바꾼 내역이 문부(文簿)에 갖추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정만화(鄭萬和)가 공의 후임이 되어 공이 값을 줄이고 뒤섞어 기록했다고 지목하였고, 내직으로 들어와 간장(諫長)이 되어서는 은밀히 동료를 사주하여 공을 논핵하게 하니, 박공 장원(朴公長遠)이 “공은 청렴과 근실함으로 자신을 지켰으니,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는가.” 하면서 소장을 올려 공을 변호하였다. 공은 이로부터 가솔을 모두 이끌고 해도(海島)로 들어가서는 소명(召命)에도 나오지 않았다.
신해년(1671, 현종12)에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배수되었다. 기근과 역병이 계속 이어졌는데 공이 마음을 다해 구휼한 덕에 목숨을 건진 자가 매우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조 판서에 발탁되고 판윤으로 이배되었으며, 빈사(賓使)가 되었다. 겨울에 절사(節使)에 충차(充差)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은(謝恩)을 겸하게 되어 부사(副使)가 되었다. 전후로 연경에 사신을 다녀올 때에 보따리에 든 것은 서적뿐이었다. 돌아와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공조 판서로 옮겼다.
계축년(1673)에 천릉(遷陵)하는 역사를 감동(監董)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자급이 올랐다. 중간에 일로 인해 하옥되어 파직되었으나 서용되어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갑인년(1674)에 또 공조 판서를 맡았고 산릉(山陵)의 역사를 감동하여 자급이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올랐다. 가을에 또 숭릉(崇陵)의 역사를 감동하였다. 일을 마치고 나서 자급이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오르고 이조 판서가 되었으나 또다시 탄핵을 당해 체차되고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소명에 나오지 않은 일로 파직되었다가 판윤에 서용되었다. 윤휴(尹鑴)가 금송(禁松)을 작벌(斫伐)하자 공이 해직을 청하면서 이를 논하니, 군소배(群小輩)들이 더욱 공을 미워하였다. 윤휴가 비로소 중용되어 온 세상이 그에게로 쏠렸으나 유독 공만이 윤휴를 두고 마음가짐이 바르지 않다고 하였는데 윤휴가 실각하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공의 선견지명을 인정하였다. 일에 연루되어 해직(解職)되어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형조 판서를 맡았으며 체차되어 다시 판윤이 되었다.
병진년(1676, 숙종2)에 대비(大妃)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로 부사(副使)가 되어 사신을 다녀온 공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자급이 올랐고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판윤을 겸하였다. 판돈녕부사로 이배되었으며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숭릉의 사초(莎草)에 관한 일로 하옥되어 파직되었다가 판돈녕부사에 서용되었으며 형조 판서를 겸하였다.
정사년(1677, 숙종3)에 또 시제(試題)가 기휘(忌諱)를 범한 일로 하옥되어 철원(鐵原)으로 귀양 갔다.
무오년(1678)에 용서를 받고 해도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판돈녕부사에 서용되었으며 형조 판서를 겸하였다. 체차되어 판윤에 배수되었다. 투서(投書)에 연루되어 해직되었으나 이내 다시 판윤이 되었다. 특별히 좌찬성에 제수되었으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체차되어 다시 판돈녕부사가 되었으며 판윤을 겸하였다.
경신년(1680)에 허견(許堅)과 이남(李柟)의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한밤중에 판의금부사에 배수되어 유문(留門)한 상태에서 부름을 받고 들어가 국문에 참여하였으나 작은 일로 인해 해직되었다. 공조 판서를 겸하였고 예조 판서에 옮겨 제수되었으며 빈사(賓使)가 되어 서도(西道)에 나갔다.
임술년(1682)에 형조 판서에 배수되었다.
계해년(1683)에 또다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갑자년(1684)에 경사(慶事)로 인해 음식을 하사하자 모두 족당(族黨)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하사를 영예로 여긴 것이다.
을축년(1685)에 나이를 이유로 치사(致仕)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기사(耆社)에 참여하였다.
병인년(1686)에 병이 심해져 또다시 치사하니, 어의(御醫)를 보내 병세를 살피게 하고 약물을 하사하였다. 공은 병이 이미 손을 써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아 손수 소장을 써서 사은하였고, 사후(死後)의 일을 빠짐없이 세세히 일러주었는데, 염습과 장례는 검소함을 따르고 제사는 간소하고 정갈하게 하는 데에 힘쓰며 시호를 청하지 말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부인을 물리치고 가까이 있지 못하게 하였고, 임종 때에 정신이 맑지 못하였으나 친척과 문병 온 사람들과 작별하고 평온히 서거하니, 병인년 4월 2일의 일이요, 향년 71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철조시(轍朝市)하였고, 조제(弔祭)와 치부(致賻)를 예법대로 하였다. 이달 윤5월 3일에 과천(果川) 북쪽 작현(鵲峴)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효민공의 묘소와 5리(里) 떨어진 곳이다. 관서의 선비와 백성들이 서로 부의를 전하는 것이 마치 명령에 달려가는 것 같았다.
공은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고 가정의 훈도를 받아 품행이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 오씨 부인을 여읜 것을 지극한 통한으로 여겨 어미젖을 먹고 있는 아이를 보면 문득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렸고 매번 기일(忌日)이 되면 시종일관 애통해하였다. 임종 때에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살아생전에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죽어서 만약 지각이 있다면 돌아가 슬하에서 모실 것이니, 나를 어머니의 무덤 발치에 묻어주면 다행이겠다.” 하였다. 효민공이 거상(居喪) 중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몸이 야위자 온 힘을 다해 보살펴드렸고 부친이 옷을 입지 않으면 감히 먼저 방한복을 입지 않았다. 청평군 내외를 부모처럼 섬겨서 청평군이 돌아가자 복만 입지 않았을 뿐 아비를 잃은 듯이 하였으며, 변씨가 죽자 신주를 세우고 제사하였다. 항상 자식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지난날에 심씨(沈氏)가 아니었다면 내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계부(季父) 백헌공(白軒公 이경석(李景奭))을 부모처럼 섬겨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모두 여쭈었고 가르침을 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관서(關西)에 있을 때에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감히 먼저 맛을 보지 않았으며, 계부가 돌아가자 궤연(几筵)을 떠나지 않았고 1주기가 지난 뒤에야 평상시의 침소로 돌아와 거처하였다. 형제와 자매를 대할 때에 우애가 지극하였으니, 중형(仲兄)이 매우 곤궁하여 공에게 의지하여 끼니를 이었고 자녀들을 성취시킬 때에도 공의 도움이 꼭 필요하였으며, 중형이 죽자 어린 조카들을 거두어 양육하였다. 그 막내가 와서 공부하게 되자 울면서 회초리를 치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지 않고서도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내가 어찌 차마 이리 하겠는가.” 하였는데 그 조카가 급제하였을 때에 공이 또 울면서 말하기를, “이제야 우리 형님을 지하에서 뵐 수 있겠구나.” 하였다. 손위 누이와 옆집에 살았는데 조석으로 가서 살펴보고 적은 음식이라도 반드시 나누어 먹었다. 형의 딸이 역병에 걸리자 몸소 구완하여 자제가 반복하여 말렸는데도 듣지 않았다. 곤궁한 친족을 두루 보살펴 혼인과 상사에 돌보아 주고 도움을 줄 때에 반드시 그 힘을 다하였다. 자식을 가르칠 때에는 엄하게 하였으니, 자식들이 종일토록 시좌(侍坐)하고 있으면서 공이 묻지 않으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고, 자식들의 잘못은 반드시 준엄하게 책망하여 용서하지 않았다. 항상 《자경편(自警編)》을 책상 위에 놓아두고 사군(事君)과 처신(處身)의 준칙으로 삼았다.
심양에 있을 때부터 영릉(寧陵)의 지우를 입었는데 어찰(御札)과 어제(御製)를 상자에 간직해 가보로 전하였고 이따금 깨끗이 손을 씻고 엄숙하게 낭송하면서 서럽게 울곤 하였다. 작은 일을 들추어내어 곧다는 이름을 얻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봉공(奉公)하여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온실(溫室)의 경계를 본받아 일찍이 사람들에게 공무에 관해 말한 적이 없었으니, 옥사(獄事)를 다스릴 때에는 사람들이 옥사의 상황에 대해서 물으면 벌써 잊었다는 말로 답하였다. 궐정(闕庭)에 출입할 때에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고 겸손하고 성실하며 온화하고 관후하여 사람들을 대할 때에 급하게 말하거나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으며 한가로이 있을 때에 지루해하는 마음과 게으른 모습이 전혀 없었다. 방을 깨끗이 소제하고 궤안을 반드시 정돈하고서 온종일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말을 하거나 웃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김공 좌명(金公佐命)과 박공 장원(朴公長遠)이 모두 당대의 빼어난 명류(名流)였는데 이들과 모두 마음을 허여해 벗으로 사귀었다. 늘 한 창려(韓昌黎 한유(韓愈))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는 내가 하찮게 여기는 바이다.”라는 구절을 암송하면서 말하기를, “말속(末俗)을 경계할 수 있다.” 하였으니, 세상이 공을 훌륭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이고 공을 노여워하는 것도 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공은 재물에 초연하였다. 심양에 다녀올 때 여장(旅裝)이 갖추어지지 않자 노복 하나가 백금(百金)을 주고 자신의 노비 문서를 샀는데 그 반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었고, 돌아올 때에 자루에 남은 노자가 있자 모두 동행했던 의원(醫員)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공에게 제방을 쌓아 밭을 만들 것을 요구하였으나 공은 거절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차 사송(詞訟)을 담당하는 아문의 장(長)을 맡았으나 뜰에는 사사로이 청탁하러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며 지위가 삼공(三公)의 반열에 있었으나 대문이 쓸쓸하여 참새 그물을 칠 수 있을 정도였다. 일찍부터 필연(筆硯)에 종사하여 전주(篆籒)에 두루 통하였으니, 위로 전각의 편액(扁額)으로부터 아래로 진신(搢紳)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투호와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일찍부터 술을 가까이하여 이따금 술로 인한 실수가 있었는데 관서(關西)에 부임하게 되었을 때에 백헌공이 글을 써서 경계하니, 종신토록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만년에 서교(西郊) 밖에 집을 짓고 동산을 가꾸고 도서(圖書)를 모았는데 ‘보만(保晩)’이란 편액을 걸고서 여생을 보냈다.
전 부인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부사(府使) 장세(長世)의 따님으로 공보다 47년 먼저 별세하였다. 처음에 오씨 부인의 묘 아래에 장사 지냈다가 뒤에 공의 무덤에 부장(祔葬)하였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만성(晩成)은 목사이고, 딸은 참판 송광연(宋光淵)에게 시집갔다. 후 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학생(學生) 기선(基善)의 따님으로 학문에 두루 통달하고 지식이 해박하였다. 공보다 5년 뒤에 별세하여 역시 공의 무덤에 부장하였는데 묘혈(墓穴)은 같이 쓰고 묘실(墓室)은 달리하였다. 1남 6녀를 두었으니, 아들 대성(大成)은 지평이고 딸은 현감 김창국(金昌國), 학생 홍치상(洪致祥), 승지 윤지인(尹趾仁), 진사 조하언(曺夏彦), 부사 심정보(沈廷輔), 사인(士人) 임사원(任士元)에게 시집갔다.
만성은 아들이 없어 아우의 아들 진유(眞儒)를 데려와 후사로 삼았다. 대성은 5남 2녀를 두었으니, 맏이는 바로 진유이고 그다음은 진검(眞儉), 진휴(眞休), 진급(眞伋), 진위(眞偉)이다. 송광연, 김창국, 심정보는 모두 아들이 없다. 홍치상은 1남을 두었으니, 태유(泰猷)이다. 윤지인은 4남을 두었으니, 맏이는 심(審)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조하언은 4남을 두었으니, 맏이는 명종(命宗)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임사원은 5남을 두었으니, 모두 어리다. 진유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어리다.
대성이 송 참판(宋參判)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신도비명을 부탁하였다.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행장에 의거하여 공적과 행적을 차례로 기술하고 그 끝에 시를 붙인다. 시는 다음과 같다.

석문공과 백헌공에 대해서는 / 石門白軒
세상이 그 어짊을 허여하였나니 / 世歸其賢
그 효성과 그 충성을 / 惟孝惟忠
뉘라서 필적하겠는가 / 誰與齊肩
공은 선대의 명성을 이어 / 有嗣厥聲
선대보다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 勿懈于先
독실하게 실천하여 / 執行醇實
절조를 굳게 지켰다네 / 載貞以堅
분경(奔競)의 풍조를 누를 만하였으니 / 可鎭躁競
곱게 보지 않음은 당연한 일 / 宜莫我姸
공은 우뚝하게 지위에 있다가 / 公孤有位
나이 일흔에 기로소에 들었고 / 耆耋有筵
옥관자에 서각대를 두르고서 / 戴玉垂犀
단아한 모습으로 진퇴하였네 / 進退躚躚
빗돌에 명문을 새기니 / 刻銘山石
그 내용 틀림이 없다네 / 陳辭不愆
후세 사람들이 이를 믿고서 / 來之信之
천년만년 제사를 받들리라 / 歷祀萬千


 

[주D-001]자경편(自警編) : 송나라의 종실 조선료(趙善璙)가 《언행록(言行錄)》의 체재를 본받아 송대의 명신(名臣)과 대유(大儒)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기록한 책이다. 세종이 이 책에 매우 감명을 받아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게 하였고, 성종(成宗) 때에는 양성지(梁誠之)의 상소로 이 책을 간행한 바 있다. 《欽定四庫全書摠目》《世宗實錄》《成宗實錄》
[주D-002]온실(溫室)의 경계 : 공무와 궁중의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외부에 누설하지 않는 가르침을 말한다. 온실은 한(漢)나라의 장락궁(長樂宮) 안에 있는 전각의 이름으로, 한나라 성제(成帝) 때 공광(孔光)이 상서(尙書) 벼슬을 하면서 공무상의 일을 가족에게 일체 말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가족들이 “온실전 안에는 무슨 나무가 심어져 있습니까?”라고 물었으나, 공광이 거기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81 孔光傳》
[주D-003]대문이……정도였다 : 청탁하러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 드물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120〈급정열전(汲鄭列傳)〉의 태사공왈(太史公曰)에 나오는 적공(翟公)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로, 한(漢)나라 적공이 정위(廷尉)가 되었을 때에는 손님들이 문에 가득하더니, 정위에서 파면되고 나자 오는 손님은 없고 문전에 참새만 모여들어 새 그물을 칠 만하였다고 한다.
[주D-004]석문공(石門公) : 이정영의 부친 이경직(李景稷)으로 그의 호가 석문(石門)이다. 《晩靜堂集 卷18 判敦寧李公謚狀, 韓國文集叢刊 163輯》

서계집 제14권
 묘표(墓表) 15수(十五首)
서계 초수(西溪樵叟) 묘표


초수의 성은 박이고 세당이 그 이름이다. 그 선조는 정헌공(貞憲公 박동선(朴東善))과 충숙공(忠肅公 박정(朴炡)) 양대에 걸쳐 모두 인조조(仁祖朝)에 현달하였다.
초수는 4세에 충숙공을 여의었고, 8세에 오랑캐의 난리를 만났으며, 부친을 여읜 데다 가난하여 제대로 배우지 못하다가 10여 세에 비로소 중형(仲兄)에게 수업하였지만, 그나마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32세인 현종 1년(1660)에 문과에 입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시종신의 반열에 8, 9년간 있었는데, 재주와 역량이 보잘것없어 세상에서 큰일을 하기에 부족한 데다 세상도 날로 도가 쇠해져 바로잡을 수 없다고 여기고는 마침내 관직을 벗어버리고 물러나 도성에서 30리 떨어진 동문(東門) 밖 수락산(水落山) 서쪽 계곡에 거주하였다. 그 계곡을 석천동(石泉洞)이라 이름하고 이로 인해 자칭 ‘서계 초수’라 하였다.
물가에 집을 지을 때 울타리를 치지 않고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배나무, 밤나무를 집 주위에 둘러 심고, 오이를 심고 밭을 개간하고 땔감을 팔아 생활하였다. 농사철에는 늘 밭에서 지냈으며, 가래를 메고 쟁기를 진 자들과 어울려 다녔다. 처음에는 간간이 조정의 명에 나아가기도 했지만 뒤에는 누차 불러도 가지 않고 30여 년을 살다가 생을 마치니, 나이 70이 넘었다. 머물던 집 뒤쪽으로 백수십 보 되는 곳에 안장하였다.
일찍이 《통설(通說)》을 지어 《시경(詩經)》, 《서경(書經)》, 사서(四書)의 뜻을 밝히고, 《노자(老子)》와 《장자(莊子)》 두 책을 주해하여 뜻을 드러냈다. 맹자(孟子)의 말씀을 매우 좋아하여, 차라리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며 합치되는 바가 없이 살다 죽을지언정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 세상에 맞춰 살면서 남들이 선하다고 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자에게 끝내 고개 숙이고 마음을 낮추지 않겠다고 생각하였으니, 이는 그 뜻이 그러한 것이다.


 

[주D-001]이 세상에……여기는 자 : 공자(孔子)가 향원(鄕原)을 묘사한 글로, 《맹자》〈진심 하(盡心下)〉에 보인다.

 

 서계집 제16권
 행장(行狀) 2수(二首)
형조 판서 이공(李公) 행장


공은 휘는 규령(奎齡), 자는 문서(文瑞), 성은 이씨이다. 그 선조는 한산인(韓山人)이다. 문효공(文孝公) 곡(穀)과 문정공(文靖公) 색(穡) 부자가 고려의 명신이 되었다. 문정공이 왕조가 조선으로 바뀔 때에 절개를 굽히지 않았는데, 본조에서 예우하고 존중하여 사책(史冊)에 그 사실을 밝게 드러내었다. 문정공이 종덕(種德)을 낳으니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이고, 이분이 맹진(孟畛)을 낳으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이다. 또 3대를 전하여 윤번(允蕃)에 이르러 대사간이 되었다. 또 2대를 전하여 희백(希伯)에 이르러 사관(史官)과 간신(諫臣)이 되었고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관직을 마쳤으니 이분이 바로 고조이다. 증조 휘 대수(大秀)는 군수이다. 조부 휘 현영(顯英)은 이조 판서이고 시호는 충정(忠貞)인데 인조(仁祖) 당시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부친 휘 휘조(徽祚)는 주현의 수령을 두루 지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벼슬을 마쳤다. 모친 증(贈) 정부인(貞夫人)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군수 두첨(斗瞻)의 따님이다. 이 부인(李夫人)이 일찍이 큰 별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천계(天啓) 을축년(1625, 인조3) 3월 9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준수하였다. 유모를 따라 놀고 있었는데 어떤 노인이 지나가다가 공을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후일에 필시 존귀하게 될 것이다.” 하니, 충정공이 더욱 사랑하여 원대(遠大)한 일을 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5, 6세 때에 어떤 사람이 여후(呂后)가 한신(韓信)을 죽인 일에 대해 논하면서 “한신의 공이 크니 죽인 일은 잘못이다.”라고 하는 것을 보고, 공이 곁에서 말하기를, “가령 한신이 죽지 않았다면 한나라의 우환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하니,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병자년(1636, 인조14) 이후에 첨추공(僉樞公)이 중신(重臣)의 자제라고 하여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가자 이 부인이 공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거창(居昌)에 우거(寓居)하였다.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당시에 역시 인근에 우거하였으므로 공이 13세에 조공에게 나아가 수업하여 인정을 받았다. 3년 만에 첨추공이 심양에서 돌아오자 공 또한 서울로 돌아왔다.
갑오년(1654, 효종5)에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 진사 두 시험에 급제하였다. 이해 겨울에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에 제수되었다.
무술년(1658)에 장악원 직장(掌樂院直長)으로 천직되었는데, 송동춘(宋同春 송준길(宋浚吉))이 공을 보고 “끝내 서관(庶官)에 머물고 말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기해년(1659)에 전옥서 주부(典獄署主簿)로 승진되고, 인의 겸 참군(引儀兼參軍)으로 개차되었으나 사체(辭遞)하였으며, 이내 형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경자년(1660, 현종1)에 교하 현감(交河縣監)이 되어서 관리의 일을 부지런히 수행하여 읍이 크게 다스려졌다. 이공 민서(李公敏敍)가 읍내에 있다가 깊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목민관(牧民官)은 이와 같아야 한다.” 하였다. 당시에 양전(量田)이 한창 벌어져 일을 주관하는 자가 독책(督責)하자 열읍(列邑)의 수령들이 모두 그대로 순종하였으나 공만 홀로 한결같이 토지의 비옥함과 척박함에 따라 상등과 하등의 등급을 조정하여 전세(田稅)를 지나치게 거두는 일이 없었으니, 교하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은택을 입고 있다.
임인년(1662) 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가을에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예겸(例兼)하였다.
계묘년(1663)에 해면하고 돌아왔다.
갑진년(1664)에 지평(持平)에 배수되었다. 이보다 앞서 서공 필원(徐公必遠)이 상국(相國) 송시열(宋時烈)과 쟁론한 일이 있었는데, 서로 헐뜯어 격렬한 말이 많으니 의논하는 자들이 그릇되게 여겼다. 공이 서공을 뒤미처 논핵하려 하다가 미처 언급하지 못하였는데 동료가 먼저 피혐하자 공이 이 일을 거론하여 스스로 논열하여 체차당하였다. 이 일로 인해 특별히 북청 판관(北靑判官)에 보임되었다. 당시에 서공 또한 조정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외직으로 나가 함경 감사를 맡고 있었다. 공이 서공과 서로 대면해서도 그의 결함을 규계(規戒)하고 후회하거나 사죄하지 않았는데, 서공이 탄복하였다. 서공이 도성으로 돌아오기에 이르러 벼슬아치들에게 공을 칭찬하니 이 일에 대해 들은 이들이 두 사람 모두를 찬미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을 위해 말해 주는 이가 있어 내직으로 들어와 직강(直講)이 되었다.
을사년(1665, 현종6)에 정언(正言)에 배수되어 온천에 행행하는 상을 시종하였다. 이해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보리마저 없을 지경이었으므로, 공이 세금을 견감하여 곤궁한 백성을 구휼하기를 청하였다. 체차되어 직강이 되고 형조 정랑으로 개차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직으로 나가 경기 도사(京畿都事)가 되었고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였다.
정미년(1667)에 내직으로 들어와 정언이 되었다. 당시에 상이 특지(特旨)를 내려 장선징(張善澂)을 병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대각(臺閣)이 간쟁하였으나 또 엄한 비답이 내리자, 공이 상소하여 선조조(宣祖朝)에 집의(執義) 신응시(辛應時)가 입대(入對)하여 심의겸(沈義謙)을 논한 일을 인용하여 “외척을 특별히 제수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고 대각의 논의를 꺾어서는 안 되니, 오늘 대계(臺啓)는 실로 공의(公議)를 따른 것입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13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비답이 내렸는데, 공이 체직을 당하긴 하였지만 장선징을 특별히 제수하는 일 또한 마침내 중지되었다. 겨울에 홍문관(弘文館)에 선발되어 들어가서 교리(校理)가 되었다.
무신년(1668, 현종9), 기유년(1669), 경술년(1670)에 연이어 옥당에 있으면서 강연(講筵)이 오래도록 폐지된 일을 논하고, 궁중의 사치함을 여항(閭巷)에서 따라 하고 있으니 만약 몸소 바른 도리로 솔선수범하지 않는다면 이 폐단을 개혁할 길이 없다고 논하였다. 그리고 또 여론에 따라 신덕왕후(神德王后)를 태묘(太廟)에 올려 부묘(祔廟)할 것을 청하였는데, 마침내 상이 그대로 따라주었다. 그 사이에 지평이 된 것이 두 번이고, 정언이 된 것이 한 번이고, 필선(弼善)이 된 것이 한 번이고, 또 거듭 집의와 사간이 되었고, 종부시 정(宗簿寺正)과 장악원 정(掌樂院正)이 된 것이 또 각각 한 번씩이었다.
가을에 외직으로 나가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었다. 안동부는 영남에서도 정사가 번잡한 고을로 다스리기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었으나 공이 엄명(嚴明)하게 아랫사람을 대하고 청백(淸白)하게 스스로를 지켰으며, 학교를 흥기시키고 선비를 양성하는 데 더욱 유의하여 자제들을 모아 강독하였다. 읍내에 세력가가 많아 한 해에 포흠(逋欠)한 관가의 환곡이 혹 수백 곡(斛)이 되는데도 갚지 않으나 서리들이 감히 따지지 못하였다. 공이 과조(科條)를 세워 그 가운데 더욱 방자하고 교활하여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다스리니 백성들이 모두 기한에 맞춰 운송하여 감히 늦는 자가 없었다.
이듬해인 신해년(1671)에 큰 흉년이 들자 거두어들인 환곡을 나누어 주어 굶주린 이들을 진휼하였고, 또 자신을 절제하고 비용을 절약하며 녹봉을 덜어 내어 비축해서 그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다. 그 가운데 더욱 곤궁하여 거의 죽을 지경인 자를 가려 호적을 살펴 식구를 계산하여 죽을 쑬 거리를 지급하였는데, 혹 식구를 불려 허위로 더 받아먹는 자가 있었다. 연리(掾吏)가 이를 가려내기를 청하였는데 공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지나치게 가려내어 곤궁하고 굶주린 이들로 하여금 먹을거리가 끊어지게 하기보다는 그들의 허위를 용납하여 관이 백성들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이 낫다. 또 한창 굶주려 저마다 그 부모와 처자를 사랑하여 나름대로 죽음에서 구할 계책을 궁리하고 있는데 어찌 차마 이들을 모두 일률적으로 속임수를 부린다고 몰아붙여 구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살아난 백성들이 많았다.
당시에 유리걸식하는 자들을 받지 말라는 명이 군읍(郡邑)에 내렸으나 공이 이르기를, “이들은 모두 우리의 백성들이니, 어찌 피차를 구분하겠는가. 그들이 도로에서 굶어 죽어 시체가 되는 것을 가만히 서서 볼 수는 없다.” 하고는 장막을 설치하여 죽을 쑤어 먹였다. 그리고 공이 친히 가서 살펴보고 다시 향리의 명망 있는 사람 가운데 간국(幹局)이 있는 자를 가려 주관하게 하였다. 이에 경내의 도로에 굶어 죽은 시신이 없었다. 어사 및 관찰사가 서로 이어 포상할 만하다고 보고하니 상이 표리(表裏)를 하사하여 장려하였다. 안동 백성들이 지금까지 말하기를, “우리들이 죽지 않은 것은 이후(李侯)의 은혜 덕분이다.” 한다. 10여 년 뒤에 정국이 급변하는 소란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피난해야 할까 염려하였는데, 안동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후의 집안이 남쪽으로 내려온다면 우리들이 마땅히 맞이하여 후한 은덕에 조금이나마 보답해야 한다.” 하였다. 겨울에 교리에 제수되었다가 대계(臺啓)로 인하여 잉임되었다.
임자년(1672, 현종13) 가을에 다시 교리로 소환(召還)되었다. 진대(進對)하는 기회에 아뢰기를, “지금 강연이 정지된 지 한 해가 지났으므로 외부 사람들이 ‘만약 쓸데없는 관원을 파직하려면 옥당을 먼저 파직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여, 상에게 학문에 힘쓰도록 권면하였다.
계축년(1673)에 집의가 되었다. 가뭄으로 인하여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일곱 가지 일을 진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뜻을 세우기를 반드시 독실히 하고〔立志必篤〕, 정치를 함에 반드시 성의를 다하고〔求治必誠〕, 경연을 열고〔開講筵〕, 언로를 열고〔啓言路〕, 말씨를 삼가고〔愼辭氣〕, 궁금을 엄격히 하고〔嚴宮禁〕, 용병을 줄이는〔省冗兵〕것이었다. 여름에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당시 삼사(三司)를 거쳐 은대(銀臺)로 승진하는 자는 매우 적어 겨우 몇 사람뿐이었다. 체차되어 병조 참지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후사(喉司)에 제수되었고 차례에 따라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갑인년(1674) 봄에 호조 참의가 되었다. 여름에 예조로 천직되었다. 인선왕후(仁宣王后 효종의 비(妃))의 상에 예관(禮官)이 대왕대비(大王大妃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을 의논하되 고례(古禮)를 인용하여 대공(大功)으로 정하였는데, 근래 풍속에 행하는 바가 아니었으므로 이론을 제기하는 자들이 분분하여 그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소장을 올려 그 잘못을 들추어낸 자가 있었다. 상이 정부와 육조와 삼사의 관원을 불러 빈청(賓廳)에서 회의하게 하였는데 대신이 또다시 전의 의논을 그대로 고집하자, 상이 크게 노하여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찬배(竄配)하였다. 공은 복제를 함께 의논했다고 하여 도성 밖에서 대죄(待罪)하였다. 8월에 현종(顯宗)이 승하하고 금상(今上 숙종(肅宗))이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니, 공이 부득이 조정에 들어와 직책에 나아갔다. 겨울에 대사간으로 천직되었으나 전의 일을 끌어대어 해면되었고, 다시 제수되었으나 역시 사은숙배하지 않았다.
을묘년(1675, 숙종1) 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정사년(1677)에 상복을 벗자 청송 부사(靑松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첨추공을 모시고 용산(龍山)의 강가에 우거하였다.
무오년(1678) 봄에 다시 죽산 부사(竹山府使)에 제수되자 마지못해 부임하여 간사한 이를 억제하고 곤궁한 이를 구휼하니 정사가 제대로 거행되었다. 기내(畿內)의 주현(州縣)은 부역에 동원되는 종류가 너무 많아 백성들이 명령을 따르기에 분주하여 겨를이 없었는데 공이 방편을 만들어 내어 백성들의 힘을 덜어 주었다. 매양 서사(西使)가 이를 때마다 열읍(列邑)이 떠들썩하였는데 죽산 경내만은 아무런 일 없이 편안하니, 백성들이 크게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벼랑에 글을 새겨 공덕을 칭송하기까지 하였다. 이웃 현의 수령이 공이 고을을 잘 다스리는 것을 기뻐하여 와서 방법을 묻고는 물러가 그 방법대로 행하니 그 고을 역시 다스려졌다. 백성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보호를 받은 것은 공의 은혜 덕분이다.” 하여 아울러 공을 위해 그 경내에 비(碑)를 세웠다. 일이 보고되자 자급을 더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대관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경신년(1680)에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이배(移拜)되자, 상국 송시열이 서찰을 보내 공에게 하례하기를, “큰물이 산을 감싸 지척에서도 사람의 말소리 들리지 않는데 유독 공이 어진 정사를 펼친다는 평판만이 귓가에 떠들썩하게 들립니다.” 하였다. 겨울에 내직으로 들어와 이조 참의가 되어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로(仕路)를 맑게 하기를 생각하였다. 최관지(崔寬之)가 해서 관찰사(海西觀察使)로 있으면서 군수 두 사람을 축출하였는데, 모두 조정에 세력은 있으나 정사에는 무능한 자들이었다. 이 일로 사람들이 최관지가 권세 있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칭찬하니, 공이 천거하여 간장(諫長 대사간(大司諫))에 의망(擬望)하였다. 그런데 당시 아전(亞銓 이조 참판)이 바로 축출당한 사람의 아우였으므로 이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공을 어렵게 여겼다.
신유년(1681, 숙종7) 봄에 전직(銓職)에서 해임되었다. 그 사이에 호조와 은대를 거치고 다시 전조(銓曹)로 돌아왔다. 9월에 부친상을 만나 예제(禮制)를 준수하여 허물이 없었다.
계해년(1683)에 상복을 벗자 다시 전조로 들어왔다.
갑자년(1684)에 품계가 올라 경기 관찰사가 되었다. 법에 따라 고과(考課)를 엄격하게 하고 송사를 공정하게 하여 청탁이 통하지 않았다.
을축년(1685)에 해면을 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송사에 패한 어떤 자가 경조(京兆)에 나아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공이 친한 사람을 두둔하였다고 비방하였다. 판윤(判尹) 박신규(朴信圭)가 소장을 올려 공을 배척하였으나 그 말이 대부분 채택되지 않았다. 대각(臺閣)이 이 문제에 대해 논하려 하니, 공이 듣고 말하기를, “내가 비록 친한 사람을 두둔한 일이 없다 하더라도 실로 혐의를 멀리 떨쳐버리지 못하였으니 어찌 저 사람을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관(臺官)이 공의 말에 깊이 감복하여 드디어 논의를 중지하였다.
여름에 이조 참판에 배수되었으나 전의 일로 힘껏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은 바람에 파직되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영남 관찰사에 기용되었다. 영남은 폭원(幅員)이 매우 넓어 처리해야 할 공문서가 넘쳐나고 정사에 폐단이 많았으며 풍속이 또 송사를 좋아하였다. 공이 부임해서는 공문서를 지체하는 일이 없고 조금도 가차 없이 탐관오리를 축출하니 영남 지방이 숙연해졌다. 흉년을 만났으나 곡식을 옮겨 구휼하니 백성들이 그 덕분에 온전할 수 있었다. 부내(部內)를 순행하다 안동에 이르니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이 공이 탄 말을 둘러싸고 말하기를, “옛적에 공이 우리들을 살려 주었는데, 지금 공이 또 우리들을 먹여 주러 오셨다.” 하고, 길 양쪽에서 절을 하는 바람에 심지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병인년(1686, 숙종12)에 벌금에 관한 일로 연경(燕京)에 가는 사은부사(謝恩副使)에 충원되었다. 청나라에서 준 금백(金帛)을 조금도 전대에 넣지 않아 행장이 단촐하였고 옷과 이불뿐이었다. 겨울에 돌아와 대사헌에 배수되었으나 벌금을 준감(準減)시키지 못했다고 해서 스스로 탄핵하였다. 체차되어 도승지에 배수되었으나 또 사면하였다.
정묘년(1687) 봄에 병조 참판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조로 이직되었다. 이보다 앞서 상국(相國) 최석정(崔錫鼎)이 부제학이 되어 소장을 올려 윤공 증(尹公拯)이 무고당한 것을 논변하였다. 이에 상이 진노하여 최석정을 파직하였다. 최석정이 서용되기에 이르러 공이 최석정을 서전(西銓)에 수의(首擬)하니, 시의(時議)가 떠들썩하게 공을 배척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죄를 두려워하여 시의와 합치되기를 구하는 짓을 나는 할 수 없다.” 하고, 상소를 진달하여 스스로 논열(論列)하니 마침내 또 파직되었다. 가을에 서용되어 대사간에 배수되었고, 체차되어 공조 참판이 되었다. 겨울에 병조로 전직되고 다시 대사간에 배수되었다. 상이 원릉(園陵)을 전알(展謁)하고 돌아올 적에 전위(前衛)가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어가가 먼저 출발하는 바람에 종관(從官)들이 대부분 전도되어 차서(次序)를 잃고 말았다. 공이 소장을 올려 어가의 나아가고 그침은 갑작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논하니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그 사이에 체차되어 형조 참판이 되었다.
무진년(1688) 봄에 도로 대사간이 되었다. 상국 이상진(李尙眞)이 입대(入對)하여 윤증(尹拯)을 삭일(削逸)해서는 안 된다고 아뢰고, 물러나서 또 차자를 올려 논하니, 상이 하교하여 몹시 책망할 적에 말씀이 매우 엄하였다. 이에 공이 소장을 올려 간절히 간하니 상이 가납하고 비지(批旨)를 환수하였다.
총애받는 궁인이 해서(海西)에 전지(田地)를 개척하여 백성들에게 막대한 해를 끼쳤는데 공이 다시 이 일을 논하다 간직(諫職)에서 해임되고 좌윤(左尹)이 되었으며, 곧바로 도헌(都憲)에 배수되었다. 대신이 영정(影幀)을 받들고 남쪽 지방으로 내려갈 적에 도로에서 지나치게 풍성하고 사치스런 대접을 받았는데, 공이 두 도(道)의 방백(方伯)을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다. 후일 대료(臺僚)가 이선(李選)이 주장하는 의논이 편벽되고 자신을 단속함이 엉성함을 논하고자 하자 공은 뜻이 대료와 맞지 않아 인피(引避)하여 체차되었다. 가을에 다시 도헌이 되었다. 마침 박세채(朴世采)가 소명을 받고 조정에 나아와 죄인 이항(李杭)의 일을 말하니, 상이 매우 진노하여 척파(斥罷)하였다. 이에 대신 남구만(南九萬)과 여성제(呂聖齊)가 청대(請對)하여 논구(論救)하였는데 상이 더욱 진노하여 두 상신(相臣)을 북쪽 변방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공이 동료들을 거느리고 합문(閤門)에 엎드려 간쟁하고 다시 입대하여 극력 아뢰었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체차되어 호조 참판이 되고 도로 도헌이 되었다. 임영(林泳)이 스스로 박세채의 문인이라고 하여 소장을 진달하여 해면을 청하니, 상이 엄한 비지를 내려 특별히 파직하였다. 공이 또다시 간쟁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당시에 장렬왕후(莊烈王后)가 오래도록 미령하여 귀양 간 죄인들이 대부분 풀려나는 은혜를 입었으나 남구만과 여성제 및 김만중(金萬重)에게만 그 은혜가 미치지 않아 공이 아뢰었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월에 도승지가 되었다. 겨울철 우레로 인하여 또 아뢰기를, “임금의 도가 너무 과하여서 갑작스럽게 위엄과 노여움을 부려 예우해야 할 유현(儒賢)을 모욕하여 물리치고 고굉(股肱)의 대신을 먼 변방에 천극(栫棘)하였으니, 이 모두가 성덕(聖德)에 누가 되고 천심(天心)에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두 대신이 찬축(竄逐)되면서부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꺼리니 진실로 충성스러운 말을 관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잘못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상의 노여움이 더욱 심하고 비답을 내려 깊이 책망하였습니다.” 하였다. 대개 우레의 변괴가 일어난 지 이미 며칠이 지났으나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 경계의 말이 들리지 않았는데, 공이 들어와 비로소 계사(啓辭)를 올리는 일이 있었다. 체차되어 도헌이 되었다.
당시에 후궁(後宮 장 희빈(張禧嬪))의 어미가 옥교(屋轎 덮개 있는 가마)를 타고 대궐에 들어왔는데 지평 이익수(李益壽)와 이언기(李彦紀) 등이 관리를 보내 체포하여 치죄하였다. 이에 상이 몹시 노하여 관리를 장(杖)을 쳐서 죽이고 두 지평을 체차하였다. 조정의 신하 가운데 이 일에 대해 진달하여 논한 자가 많았으나 상의 마음이 그래도 풀리지 않았다. 공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지난날의 잘못된 거조는 실로 고금에 없었던 일이고 제신들의 극론에 대해 또한 뉘우치고 깨닫는 마음을 보이셨으니, 진실로 포상하여 신하들을 권면해야 하는데 은전을 아직도 아끼시니, 신은 끝내 신민들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실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납하기를, “칠정(七情)이 모두 제어하기 어려우나 오직 분노가 가장 제어하기 어려우니, 내가 일시의 분노로 이러한 허물을 짓고 말았다. 몸에 돌이켜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여 반드시 본원(本源)인 마음에 주의하여야 거의 조포(粗暴)의 병통을 제거하고 빈복(頻復)의 후회가 없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윽고 체차되어 우윤(右尹)이 되었다. 병으로 빈전(殯殿)의 곡반(哭班)에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대신이 공에게 평소 서운한 감정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이로 인해 불안하여 교외로 나갔다.
기사년(1689, 숙종15) 1월에 군함(軍銜)에 서용되었으나 누차 상소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니, 대개 시사(時事)가 장차 잘못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령(不逞)한 무리들이 뜻을 얻어서 4월의 일이 발생하였다. 공은 용산(龍山)으로 물러나 우거하여 두문불출하면서 세상과 단절하였다. 겨울에 좌윤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경오년(1690, 숙종16)에 또 철원 부사(鐵原府使)에 제수되었다. 당시에 엄한 교지가 수차례 내려 관직에 부임하지 않은 자를 책망하였는데, 공은 이미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마지못해 부임하였다. 임신년(1692)에 이르러 해면되어 돌아와 양주(楊州) 읍내에 우거하였다.
갑술년(1694) 여름에 용사(用事)한 자를 모두 축출하고 소명을 내려 옛 신하를 복직시킬 때에 공에게 특별히 대사헌을 제수하였는데, 누차 사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여 비로소 소명에 나아갔다. 중궁이 복위(復位)되고 나서 공이 동료들과 더불어 기사년(1689) 제인(諸人)들의 죄를 논하였는데, 조정의 논의가 반드시 이들을 주살(誅殺)하고자 하였다. 공만 홀로 이르기를, “군주의 뜻에 순종한 것과 중전의 폐출을 청한 것은 그 죄가 같지 않은데 지금 이들을 극형에 처하게 하려 하니 가령 중전을 폐출하기를 청한 사람이 있더라도 더 이상 시행할 법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조정은 인후(仁厚)함으로 나라를 세웠는데 불행하게도 근자에 매양 시국이 바뀔 때마다 주륙(誅戮)하는 데 이르러 상해를 입은 자가 많습니다. 오늘의 논의는 되도록 공평하고 정당하게 해야지 어찌 마음에 통쾌하도록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고는 이에 계청(啓請)해서 죄가 중한 자 10여 인을 찬축하는 데서 그치니, 논자들이 사체를 얻었다고 여겼다. 좌부빈객(左副賓客)을 겸하고 특진관(特進官)에 충원되었다. 경연에 입시하여 군덕(君德)을 논하는 과정에서 시정(時政)과 민은(民隱)을 수차례 반복하여 언급하였는데 상이 항상 경청하였다. 공조 참판을 역임하고 형조 판서로 승진하여 일을 보았는데 며칠 만에 사람들이 공의 공명정대함에 심복(心服)하였다.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나이가 많다 하여 관직을 그만두기를 청하였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사체(辭遞)하여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8월에 다시 대사헌에 배수되었으나 경미한 질병에 걸려 15일에 황화방(皇華坊)의 집에서 역책(易簀)하니, 향년 70세였다. 부고가 전해지자 상이 놀라고 슬퍼하여 경수절(慶壽節)에 음악을 정지하고 이틀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조문과 제사를 규례대로 하였으며, 세자는 궁료(宮僚)를 보내어 조문하고 관(棺) 일구(一具)를 장만해 주었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단정하고 준수하였다. 집 안에 거처할 적에 효도하고 우애하였으니, 부모를 섬길 적에는 공경하고 순종하여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아 늙음에 이르도록 시중을 들었으며, 형제자매 사이에 처할 적에는 기쁨과 사랑이 두루 넘쳐흘렀다. 형제자매 중 일찍 죽은 자에 대해서는 그가 남겨둔 과부와 고아를 위로하고 양육하는 데 은의(恩意)가 돈독하고 지극하였으며, 선조 사당에 제사를 지낼 적에는 병이 들지 않았으면 남에게 대신 주관하게 하지 않았으며, 서모(庶母)를 곡진히 섬겨 마음을 잘 맞추어 드렸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정성스런 마음으로 하였고 일을 처리할 적에는 반드시 치밀하게 하였다. 옷은 화려한 채색 비단을 입지 않았고 음식은 두 가지 고기반찬을 들지 않았으며 성색(聲色)과 완호(玩好)에 대해서는 더욱 담박하였다. 행실은 청고(淸高)하게 한다고 하여 특이함을 구하지 않았고, 이익과 의리를 분별할 때를 당해서는 자신의 뜻을 확고하게 지켜 굽히지 않았으며, 항상 몸가짐을 겸손하게 하고 교유를 신중히 하였다. 청요직을 두루 지냈으나 남의 도움을 받지 않았고 매양 승진될 때마다 머뭇거리며 물러나 피하였다. 사람들이 하례하였으나 공은 홀로 기쁘게 여기지 않고 “관직이 높고 책임이 막중한 자리는 책임을 다할 수 없으니 현재 맡고 있는 직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할 뿐이다.” 하였다. 내직으로는 삼사(三司)에 출입하였고 이조 참판과 도승지가 되었으며 외직으로는 군수와 감사가 되었으나 청신(淸愼)하고 검약(儉約)하여 털끝만큼도 스스로 누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상국 민정중(閔鼎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 영공(李令公)은 재주가 일을 해내기에 충분하고 청백(淸白)이 남보다 뛰어나니 맡은 일을 잘 다스린다고 알려지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상국 신익상(申翼相)은 바로 공의 부인의 아우인데, 공이 취하고 주는 데에 삼가니 청렴한 절조를 본받을 만하다고 항상 칭찬하였다. 더욱 법을 엄히 지켜 사사로움을 용납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감히 청탁하지 못하였다. 추조(秋曹)에 있을 적에 따로 살고 있는 공의 딸이 그 집안사람이 금령을 범하자 공에게 아뢰어 금령을 없애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공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내가 만든 금령을 내가 없애는 일은 불가하다. 다만 너를 위해 속전(贖錢)을 마련하여 들이게 해 줄 뿐이다.” 하고는 드디어 마초 값〔騶直〕을 나누어 속전을 마련해 주었다. 공은 당여(黨與)를 심히 미워했고 지론(持論)이 평정(平正)했으며, 남의 과실을 꾸짖기를 좋아하지 않아 조정에 벼슬하는 40년 동안 명성과 품행에 흠이 없었다. 항상 벼슬하기 전의 초심을 마음에 간직하고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지조를 변치 않아 비록 세변(世變)을 누차 겪었으나 초연히 법망에 걸려들지 않았다. 기사년(1689, 숙종15) 이후로 근교에 머물러 우전(郵田)을 빌리고 민가를 세내어 거처하였는데 때때로 양식이 자주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고, 만년에는 관직이 높고 녹봉이 많았으나 집에 남은 재물이 없어 부의(賻儀) 덕택에 상을 치를 정도였다. 이해 10월 3일에 여주(驪州)의 치소 북쪽 오리곡(梧里谷) 해좌(亥坐)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전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증 영의정 양(湸)의 따님이다. 타고난 성품이 단정하고 정숙하여 남편을 받들고 시부모를 섬기며 자녀를 가르치고 노복을 대할 적에 은의(恩義)와 법도(法度)가 모두 본받을 만하였다. 임술년(1622, 광해군14)에 태어나 을사년(1665, 현종6) 12월 14일에 졸하였다. 처음에 장단(長湍) 서곡(瑞谷)의 선영 곁에 안장하였다가 을해년(1695)에 이르러 공의 묘소 왼쪽으로 옮겨 부장(祔葬)하였다.
1남 명항(明恒)은 재행(才行)이 있었으나 관직이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에 그쳤다. 2녀는 진사 유덕기(兪德基)와 별검(別檢) 장완(張梡)에게 출가하였다.
후 부인 상주 황씨(尙州黃氏)는 부사(府使) 연(埏)의 따님이다. 1녀 1남을 두었으니, 딸은 박필건(朴弼健)에게 출가하였는데 일찍 죽었고, 아들 명언(明彦)은 진사이다. 내외손은 모두 약간 명이다.
기억하건대, 옛적에 공이 소명을 받고 대궐로 달려갈 적에 세당(世堂)이 머물던 시골에 방문하여 오랜 시간 앉아 이야기하며 당시 논의의 가부를 대략 언급하였고, 또 공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으니 일찍 물러나고자 한다. 오래 머물 생각은 없다.” 하였다. 이 두 가지 모두 공이 그 말을 스스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공의 말대로 된 것도 있고 되지 않은 것도 있으니, 하늘에 달린 것이지 공의 뜻이 아니었다.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세당은 공과 선대로부터 중표(中表 내외종(內外從))의 정의(情誼)가 있어 정분이 얕지 않으나 젊어서는 졸렬하였고 만년에는 다시 칩거하는 바람에 진실로 공과 더불어 자주 종유하지 못하였으니, 이 점이 매우 한스럽다.
지금 진사군(進士君)이 와서 글을 구하면서 공의 사행(事行)의 전말을 기술하게 하니, 그 의도가 나의 비루함을 빌려 당대의 현인군자로서 그 말이 후세에 신뢰를 줄 수 있는 자에게 묘도에 새길 신도비명을 지어주기를 청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감히 사양하지 않는다. 삼가 그가 지은 가장에 의거하여 이상과 같이 서술한다. 혹 채택해 주신다면 더 없는 다행이겠다.


 

[주D-001]여후(呂后)가 한신(韓信)을 죽인 일 : 한(漢)나라 때 한신과 은밀히 내통하던 진희(陳豨)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여후가 소하(蕭何)와 모의하여 진희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반역자의 죽음을 축하하러 오라는 구실로 칭병(稱病)하던 한신을 속여서 하례(賀禮)하러 궁중으로 오도록 하였다. 한신이 오자 장락궁(長樂宮)의 종을 걸어두던 방인 종실(鐘室)에서 한신을 처형하였다. 《漢書 卷34 韓信傳》
[주D-002]장선징(張善澂) : 1614~1678. 자는 정지(淨之), 호는 두곡(杜谷), 본관은 덕수(德水)로 계곡 장유(張維)의 아들이고 효종(孝宗)의 비(妃)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오빠이다.
[주D-003]신응시(辛應時)가……논한 일 : 선조(宣祖)가 특지를 내려 명종비(明宗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 심의겸(沈義謙)을 대사헌으로 삼자, 정언 정희적(鄭熙績)이 경연에서 외척에게 특지를 내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아뢰었는데, 선조가 성난 목소리로 “그 사람의 현능(賢能) 여부에 달렸을 뿐이니 외척이 무슨 문제인가.” 하니, 정희적이 크게 기가 꺾였다. 이에 집의 신응시가 나아가 아뢰기를, “희적의 말은 공론(公論)이니 전하께서 너무 지나치게 꺾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宣祖實錄 6年 8月 1日》
[주D-004]신덕왕후(神德王后) : 태조(太祖)의 계비(繼妃)인 강씨(康氏)이다. 오랫동안 부묘(祔廟)되지 못하다가 1669년(현종10)에 부묘되었다.
[주D-005]벌금에 관한 일 : 남구만(南九萬)이 장효례(張孝禮)의 말을 경솔히 믿고 청나라와 소〔牛〕를 교역하는 일을 중지하기를 청하자, 청나라 예부(禮部)에서 패만(悖慢)한 말로 우리 국왕을 모욕하고 은(銀) 1만 냥을 벌금으로 내게 하였다. 이 일 등 몇 가지 사안으로 사은사를 파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肅宗實錄 11年 8月 16日》《承政院日記 肅宗 12年 5月 3日》
[주D-006]이항(李杭)의 일 : 박세채(朴世采)가 차자를 올려 이항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지 말고 이항의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 직임을 파직하여 여러 종친들과 균등하게 대하기를 청하였다. 이 일로 박세채는 파직되었다. 이항은 인조(仁祖)의 친손자이자 숭선군(崇善君) 이징(李徵)의 아들로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졌다. 《肅宗實錄 14年 7月 13日ㆍ14日》
[주D-007]빈복(頻復) : 《주역(周易)》〈복괘(復卦) 육삼(六三)〉에 “육삼은 돌아오기를 자주함이니,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리라.〔六三 頻復 厲 无咎〕” 하였고, 전(傳)에 “삼(三)은 음(陰)의 조급함으로 동(動)의 극(極)에 처하였으니, 돌아오기를 자주하여 견고히 하지 못한 자이다.” 하였다. 돌아온다는 것은 허물을 반성하고 개과천선한다는 뜻인데, 자주 돌아온다는 것은 돌아와서 견고히 지키지 못하고 다시 잘못을 저지른다는 뜻이다.
[주D-008]4월의 일 :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시작된 지 4개월 만인 1689년(숙종15) 4월 21일에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폐출시킬 것을 언급하였다. 장 희빈(張禧嬪)에 대한 총애와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과 그의 형 민정중(閔鼎重)이 서인의 거물이었으므로 인현황후에 대한 분노를 더욱 가중시켜 마침내 대사헌 목창명(睦昌明) 등이 송시열(宋時烈)을 처벌하라고 요청한 자리에서 인현왕후의 폐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숙종은 4월 23일인 인현왕후의 생일날을 기하여 폐출을 명하였다. 《肅宗實錄》
[주D-009]역책(易簀) :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을 말한다. 증자(曾子)가 임종 시에 일찍이 계손(季孫)에게 받은 대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자신은 대부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깔 수 없다 하고 다른 자리로 바꾸게 한 다음 운명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禮記 檀弓上》

 서계집 제16권
 유사(遺事) 2수(二首)
셋째 형의 유사를 서술하다


선형(先兄 박세후(朴世垕))이 일찍 돌아가신 탓에 재주가 당시에 쓰이지 않고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세당은 또 용렬하고 비루하여 선형의 아름다운 행적을 서술해서 후세에 드러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선형의 탁월한 행실과 빼어난 기상이 끝내 가려져 드러나지 못하게 하고 말았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지금 중형(仲兄 박세견(朴世堅))이 선형에 대해 기록하는 데에 그 대강이 대략 갖추어질 것이다. 세당은 엉성함이 더욱 심하여 평소의 행사에 대해서도 도무지 기억하는 바가 없는 탓에 그중 한두 가지라도 찬술하여 빠뜨린 내용을 보충할 수가 없으매 소루(疎漏)한 점이 많음을 알겠으니, 한탄스러움을 금할 길이 있겠는가. 삼가 알고 있는 몇 가지를 아래에 갖추어 기록하니 혹 중형이 선형에 대해 기록하는 데에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선형을 천양(闡揚)하고 선양(宣揚)하여 불비(不備)한 바를 갖추어 선형의 불후의 선행(善行)을 영원히 후세에 전하여 백세 뒤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었음을 알게 해 주길 현형(賢兄)에게 깊이 바란다.

군은 강직하고 방정한 자질과 견고하고 확고한 의지를 지녔으며, 풍도(風度)가 침중하고 심원하며 기국(器局)이 엄중하고 단정하여,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말을 하기도 전에 드러나니 사람들이 바라보고 두려워하였다.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반드시 시종일관하였으니, 글씨를 쓰는 작은 일에 있어서도 또한 일정하게 꾸준히 하였다. 고서(古書)를 독송(讀誦)하면서 익힐 적에 처음 계획했던 바를 중도에 폐한 적이 없었으니, 일찍이 《맹자(孟子)》를 읽을 적에 7일 만에 100번을 채웠다. 이처럼 부지런하고 민첩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10세부터 관례를 할 때까지 중형에게 수업하고 외부의 스승을 종유(從遊)한 경우는 드물었다. 중형이 지극히 부지런히 아우들에게 일과(日課)를 부과하였는데 군이 매우 엄정하게 실천하였다.

형제가 모두 일찍 부친을 여의고 선부인(先夫人)의 슬하에서 자랐는데 세당 등이 죄악이 너무도 커서 하늘이 혹독한 재화(災禍)를 내려 인조(仁祖) 27년인 기축년(1649, 효종 즉위년) 3월에 선부인이 자식들을 버리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세당 등은 어리석고 우둔하여 슬픔을 잊고 지금까지 구차히 살기만을 도모하였으나 군은 선부인의 상을 당한 뒤로 예제(禮制)에 지나칠 정도로 애훼(哀毁)하여 매양 새벽과 저녁에 곡읍(哭泣)할 적마다 목 놓아 슬피 통곡하고 흐르는 눈물이 얼굴을 뒤덮었는데 1년이 지나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효종(孝宗) 1년인 경인년(1650)에 조모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와 외조모 정부인(貞夫人) 이씨가 연이어 돌아가시고 중형 또한 자주 앓으니, 군이 상심하고 애통해하여 홀로 거처할 적마다 눈물을 흘리고 오열하여 옷소매가 온통 젖었으나 그래도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세당이 곁에서 고하기를, “하늘이 우리 집안에 재화를 내렸는데 형님이 또 근심으로 살려는 뜻이 전혀 없으니, 어찌 효를 다하는 도리이겠습니까.” 하니, 군이 말하기를,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뿐이다.” 하였다. 이에 함께 눈물을 삼킬 뿐 애통해하는 마음을 풀도록 권유하지 못하였다.
오호라. 군이 마침내 이해 여름에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고 병이 위중하게 되어서도 고기반찬을 드시지 않았다. 그래서 어찌 해 볼 방도가 없는 지경에 이른 다음에야 억지로 고기반찬을 올렸으나 이미 구원할 수 없었다. 숨을 거두려 할 즈음에도 정신이 혼란하지는 않아 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각각 당부를 하고, 말을 마치자 별세하였다. 오호라, 애통하다. 오호라, 애통하다.

군이 돌아가신 뒤로 지금 21년이 되었다. 세월이 오래될수록 세당은 나이는 점점 많아졌으나 마음은 더욱 거칠어져 아직도 유사(遺事)를 수집하여 영원히 후세에 전해지기를 도모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세당 등의 죄이다. 세당은 일찍이 ‘사람은 고금에 다름이 없으니 지금 사람이 어찌 모두 옛사람만 못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옛적의 현인은 혹 곤궁하게 살다 요절하여도 오히려 누군가의 한마디 말을 얻어 후세에 이름이 드러나 민멸되지 않고 전해졌다. 그런데 근대의 선비는 그렇지 않으니 비록 당세에 명성을 수립하고 사업이 성대하며 또 그 사적을 선양하는 자가 모두 문장에 능한 사람으로서 수천 여 자를 써서 자세히 묘사하였어도 천천히 그 내용을 살펴보면 기록할 만한 한 가지 일도 없어서 길게는 채 100년이 되지 않아 민몰되어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니 설령 안회(顔回)나 원사(原思)와 같은 어진 이가 있더라도 누가 그들의 어짊을 일컬을 수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전해지고 전해지지 않고는 내용이 많은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입언(立言)이 어떠한지에 달려 있을 뿐이다.
탁월한 식견과 고명한 언론을 지닌 현형(賢兄)이 군이 세상에 살아 있을 적에 다행히 서로 의기투합하여 절차탁마(切磋琢磨)하고 교학상장(敎學相長)하였고 보면 현형이 군에 대해 제대로 알고 말할 것이니, 필시 세당 등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극진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형의 한마디 말을 얻으면 죽은 군이 불후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세당 등으로 하여금 지극한 정을 펴서 죽은 군에 대해 유감이 없게 만드는 것이니, 이는 모두 현형의 은혜이다. 슬프고 다행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슬프고 다행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세당은 눈물을 뿌리며 삼가 적는다.


 

[주D-001]안회(顔回)나 원사(原思) : 안회는 춘추 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자는 자연(子淵)이다. 공자가 제자 안연(顔淵)을 칭찬하여 “어질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 누항(陋巷)에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다, 안회여.” 하였다. 《論語 雍也》 원사는 춘추 시대 송나라 사람인 원헌(原憲)으로, 사(思)는 그의 자이다. 가난하게 살았으나 의지가 굳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노나라에서 몹시 곤궁하게 지낼 적에 자공(子貢)이 사마(駟馬)가 끄는 수레를 타고 원헌을 방문하여 말하기를, “아, 선생은 어찌하여 이렇게 병이 들었습니까?” 하자, 원헌이 대답하기를, “나는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배워서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병이라 한다 하니, 지금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이 아니라오.” 하였다. 《莊子 讓王》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호 상인(湖上人)이 동간(東澗)의 유거(幽居)로 재차 방문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그 얼굴을 알았다. 이에 시를 지어 사례하다.


고마워라 상인이 수고로이 나를 방문하여 / 多謝上人勞就訪
멀리서 병석 들고 앞 시내 건너왔네 / 遠携甁錫渡前溪
두 번 찾아온 뜻 지극하니 임구가 얕고 / 兩來意至林丘淺
한 번 만나 마음 투합하니 도속이 같네 / 一見心投道俗齊
한가한 구름 때로 산봉우리 그리워한다 곧 말하지만 / 卽說閑雲時戀岫
지친 새 오랜 뒤에 둥지로 돌아감 무어 해로우랴
/ 何妨倦鳥久還棲
산을 갈라 반을 나누어 준다면 머물 수 있겠는가 / 劈山分半能留否
대사는 동봉을 차지하고 나는 서봉을 차지하리라 / 師占東峯我占西


 

[주D-001]병석(甁錫) : 승려가 사방을 돌아다닐 때 반드시 휴대하는 물병과 바리때, 석장(錫杖)이다.
[주D-002]한가한 …… 해로우랴 :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에서 나오고, 새는 날기에 지쳐 돌아올 줄을 아네.[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 하였다.
[주D-003]산을 …… 준다면 : 마음이 맞는 두 사람이 경치 좋은 한 구역을 나누어 나란히 은거하는 것을 뜻한다. 송(宋)나라 장영(張詠)이 포의(布衣)로 있던 시절, 화산(華山)에 은거하고 있는 희이(希夷) 선생 진단(陳摶)을 만나서 “원컨대 화산 반쪽을 나누어 살고 싶은데 되겠습니까?” 하니, 진단이 “공에게는 당연히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한 데서 온 말이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홍 교리(洪校理) 만형(萬衡) 에 대한 만사


그대를 곡하며 비통해하니 통달한 이 아닌 듯하여라 / 哭君而慟疑非達
단표누항의 안자보다 처지가 나았는걸 / 也勝簞瓢顔子淵
당상의 양친 모두 백발노인이고 / 堂上尊親俱白髮
규중의 청상 아직도 한창 나이라오 / 閨中孀婦尙靑年
알겠어라 따져 보아도 어이할 수 없는 이 마음 / 須知計較情無奈
헤아려 보니 몹시도 한스러울 뿐이라오 / 只是思量恨已偏
고개 돌려 영주를 바라보니 꿈속 같은데 / 回首瀛洲如夢裡
잠깐 이별에 황천이 막힌 슬픈 심정 어이 말하랴 / 何言暫別隔重泉


 

[주C-001]홍 교리(洪校理) : 홍만형(洪萬衡, 1633~1670)으로,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숙평(叔平), 호는 약헌(藥軒)이다. 수찬, 교리, 병조와 이조의 좌랑 등을 지냈다.
[주D-001]단표누항(簞瓢陋巷) : 밥을 담는 대그릇과 물을 뜨는 표주박으로 빈한한 살림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어질도다, 안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 물로 누추한 시골에서 지내자면 남들은 그 곤궁한 근심을 감당치 못하거늘, 안회는 도를 즐기는 마음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雍也》
[주D-002]영주(瀛洲) : 당 태종(唐太宗)이 문학관(文學館)을 열어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등 18명을 뽑아 특별히 우대하고 번(番)을 셋으로 나누어 교대로 숙직하며 경전을 토론하게 하였는데, 이를 세상 사람들이 ‘등영주(登瀛洲)’라 하여 전설상 신선이 산다는 산인 영주에 오르는 것에 비겨 영광으로 여겼다. 《資治通鑑 卷189 唐紀5 唐高祖武德4年》 조선 시대에는 특히 홍문관(弘文館)을 영관(瀛館), 한림원(翰林院) 즉 예문관(藝文館)을 영봉(瀛蓬)이라고 일컬었다. 여기서는 홍만형이 홍문관의 교리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산(山) 자를 세 번 사용한 중여(仲餘)의 시에 차운하다


산을 사랑한다 말하나 산에 부끄럽나니 / 說着愛山羞着山
근래에 봉두난발로 새카맣게 산을 잊었다오 / 邇來蓬鬢摠忘山
진실로 알겠구나 내가 마음을 저버린 자임을 / 固知我爲負心者
한 번 묻노니 그대는 참으로 산을 사랑하는가 / 試問君能眞愛山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윤 참판(尹參判) 집(鏶) 에 대한 만사


교목과 같은 세가를 / 世家如喬木
왕실이 믿고 의지하였네 / 倚庇在王室
생각건대 옛적 반정 초기에 / 惟昔反正初
유로가 장절을 드러내었지
/ 遺老著壯節
살펴보건대 공이 본조에 서서는 / 觀公立本朝
전대의 공렬을 저버리지 않았고 / 而不負前烈
선조에서는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켰으니 / 先朝振頹綱
영걸스런 위엄이 상설처럼 엄숙하였네 / 英威肅霜雪
비록 부월의 위엄 씀이 없었지만 / 雖無斧鉞用
반열에 있는 이들에게 늠름함 떨쳤지 / 凜凜凡在列
초옥과 유사한 일 발생하자 / 事有類楚獄
중론이 실로 비등하였는데 / 群議實沸聒
성상의 마음 천륜에 돈독하여 / 聖懷篤天倫
전철을 차마 밟지 못하였네 / 不忍蹈前轍
대부로 대사간의 직임을 맡았으니 / 大夫御史長
성상의 예우가 본래 남달랐는데 / 禮遇本殊絶
곧장 의금부로 넘기게 하니 / 立遣付廷尉
형옥에서 몹시도 곤욕을 당하였네 / 困僇劇徽紲
국량이 좁은 사람들 무엇을 하랴 / 轅駒何所爲
만조의 관원들 입을 다물고 말았네 / 滿朝甘囚舌
공에게 간직을 맡기를 부탁하니 / 屬公居諫職
공이 쟁론하여 홀로 분발하였네 / 抗論獨奮發
쟁론한 바는 대체를 보전하는 일이었고 / 所爭存大體
뜻은 임금을 잘 보필함 귀하게 여기니 / 意貴補袞闕
뇌정 같은 노여움 말끔히 사라지고 / 雷霆爲收霽
성상의 마음 매우 기뻐하였네
/ 天心甚開悅
납언으로 직위와 품계 높아지니 / 納言階秩峻
장려와 발탁이 실로 특별했지 / 獎擢信特達
군주가 어질면 신하는 곧기 마련이니 / 君仁則臣直
고인이 어찌 헛되이 말했으리오 / 古人豈虛說
지금까지 직언하는 선비들이 / 至今謇諤士
예리함과 매서움 꺾지 않았네 / 銛劌不摧折
노성한 공이 일심을 유지하니 / 老成秉一心
삼대에 걸쳐 황발이 엄숙하였네
/ 三世儼黃髮
오히려 곧은 성정이 누가 되었으니 / 尙以孤直累
시속은 꾸밈을 중히 여기기 때문 / 時俗重塗抹
참판의 지위 충분하지 못하였고 / 貳棘位未充
정승의 의망 오래도록 막혔어라 / 巖軸望久鬱
오호라 어진 대부가 / 嗚呼賢大夫
질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도다 / 一疾遽云沒
세모에 향기로운 계수나무 시들고 마니 / 歲暮芳桂傷
흐르는 물처럼 변하는 세가를 슬퍼하네 / 逝川悲世閱
하늘의 보답 후손에게 풍성하여 / 天報豐於後
지란이 집안에 가득하네 / 芝蘭滿階闥
다만 차탄스럽기는 효성스런 노래자가 / 獨嗟老萊孝
어버이 봉양하려는 뜻 마치지 못한 것이라네 / 養親志未畢
내 일찍 두 아들과 사귀어 / 夙忝二郞契
이응의 집안에 인사 올렸지 / 膺門容刺謁
상여가 동문을 나갈 적에 / 素車東門道
병으로 몸소 상여 줄 잡지 못하고 / 病違躬助紼
거친 말로 만사를 애써 지으니 / 勸挽以荒詞
눈물 닦으매 소매가 젖는구나 / 拭淚衣袂徹


 

[주C-001]윤 참판(尹參判) : 윤집(尹鏶, 1601~1669)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순보(純甫), 호는 성계(星溪)이다. 1636년(인조14)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교리, 승지, 대사간, 대사성, 예조와 이조의 참판 등을 지냈다.
[주D-001]교목(喬木)과 같은 세가(世家) : 교목은 몇 대에 걸쳐서 크게 자라난 나무이고, 세가는 대대로 벼슬한 양반 가문이다. 여러 대에 걸쳐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한 명가(名家)를 비유하는 말이다.
[주D-002]반정(反正) …… 드러내었지 : 윤집의 부친 윤지경(尹知敬, 1584~1634)이 인조반정에 호응한 것을 말한다. 윤지경의 자는 유일(幼一)이고, 호는 창주(滄洲)이다.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淸)나라와의 척화(斥和)를 강력히 주장하여 윤황(尹煌)ㆍ윤형지(尹衡志)와 함께 삼윤(三尹)으로 당시 사람들로부터 높이 칭송받았다.
[주D-003]초옥(楚獄)과 …… 기뻐하였네 : 승지 유도삼(柳道三)이 취중에 인평대군(麟坪大君)에게 ‘소인(小人)’이라고 칭할 것을 ‘소신(小臣)’이라고 잘못 칭하였는데, 서변(徐忭)이란 자가 그 말을 전해 듣고 고변하였다. 이에 대사간 유철(兪㯙)이 유도삼의 망발이 작은 일이 아니므로 파면시켜야 한다고 청하였는데, 효종이 노하여 말하기를, “유철은 유도삼이 망발한 것을 사실로 만들고자 하니,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전날 서변을 꾀인 자는 틀림없이 유철일 것이다. 내가 임금이 되어 아우 하나도 보전하지 못하겠는가?” 하고, 대사간을 체직시키고 의금부에 투옥시켜 엄하게 국문하도록 하였다. 사간(司諫) 윤집(尹鏶)이 이 소문을 듣고 독계(獨啓)하자 왕의 노여움이 약간 풀렸고, 드디어 유철은 사형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안치하였다. 《燃藜室記述 卷30 孝宗朝故事本末》 초옥은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안충(顔忠)ㆍ왕평(王平) 등이 모반(謀反)한 옥사(獄事)를 말한다. 이 옥사에 연루된 자가 수천 명이나 되어 여러 해 동안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랑(寒朗)이 공정하게 처리하여 많은 무죄한 사람을 풀어 주었다. 이때 명제는 한랑의 마음을 잘못 알고 매우 노여워하여 그를 감옥에 가두려고까지 하였으나, 끝내 한랑의 청을 받아들여 무고한 자 1000여 명을 풀어 주었다. 《後漢書 卷41 寒朗列傳》
[주D-004]납언(納言)으로 …… 높아지니 : 윤집이 승지로 승진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5]군주가 …… 마련이니 : 위 문후(魏文侯)가 신하들에게 묻기를, “과인은 어떤 군주인가?” 하니, 신하들이 모두 “임금께서는 어진 군주입니다.” 하였다. 다음으로 적황(翟黃)이 “임금께서는 어진 군주가 아닙니다.” 하였다. 문후가 “그대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 하니, 적황이 “임금께서 중산(中山)을 정벌하고서 아우를 봉하지 않고 장자를 봉하였으니, 신은 이로써 임금께서 어진 군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하자, 문후가 크게 노하였다. 다음으로 임좌(任座)에게 묻기를, “과인은 어떤 군주인가?” 하니, 임좌가 “임금께서는 어진 군주입니다.” 하였다. 문후가 “그대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 하니, 임좌가 “신은 들으니 그 군주가 어질면 그 신하가 곧다고 하였습니다. 앞서 적황의 말이 곧았으니, 신은 이 때문에 임금께서 어진 군주인 줄 알았습니다.” 하였다. 《新書 雜事1》
[주D-006]노성한 …… 엄숙하였네 : 황발(黃髮)은 본래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가 다시 누런빛을 띠는 것으로 장수한 노인을 뜻한다. 여기서는 윤집과 부친 윤지경(尹知敬), 조부 윤담무(尹覃茂)까지 3대가 모두 노성한 사람이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주D-007]지란(芝蘭) : 지란옥수(芝蘭玉樹)의 준말로, 훌륭한 자제를 뜻한다. 진(晉)나라 때 큰 문벌을 이루었던 사안(謝安)이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 하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마치 지란과 옥수가 자기 집 뜰에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79 謝玄列傳》
[주D-008]노래자(老萊子) :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겨 70세가 되어서도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하여 색동저고리를 입었으며, 물을 떠가지고 당에 오르다가 거짓으로 넘어져 땅에 엎어져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냈으며, 새 새끼를 가지고 부모 곁에서 장난치며 놀았다고 한다. 《小學 稽古》
[주D-009]이응(李膺) : 후한(後漢) 사람으로 워낙 명망이 높아서 선비들이 그로부터 인정을 받으면 명성이 높아지므로 그의 접대를 받는 것을 등용문(登龍門), 즉 용문(龍門)에 오른다고 하였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李應》 여기서는 서계가 참판 윤집(尹鏶)의 집안에 인사 올린 것을 비유하였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윤 판관(尹判官) 주(湊) 에 대한 만사


황갑에 함께 급제한 사람은 진계방이요 / 黃甲差肩陳季方
함께 얘기 나눈 백미는 마원상일세 / 白眉交語馬元常
이정이 적막하니 후일이 슬프고 / 鯉庭寂寞悲他日
홍서가 어긋나니 밤 서리 한스럽네 / 鴻序乖離恨夜霜
짧은 비의 첫머리엔 창수사라고 적혔고 / 題首短碑蒼水使
긴 베개엔 자미랑의 머리만 비었구나 / 空頭長枕紫薇郞
명명한 화복은 참으로 알기 어렵나니 / 冥冥倚伏眞難會
혁혁한 가성을 이어 후손이 현달하리라 / 奕葉家聲載冕裳


 

[주D-001]황갑(黃甲)에 …… 진계방(陳季方)이요 : 황갑은 옛날 과거(科擧)에서 갑과(甲科) 급제자(及第者)의 이름을 황지(黃紙)에 썼던 데서, 즉 갑과 급제자를 말한다. 계방(季方)은 후한(後漢) 진심(陳諶)의 자인데, 그의 형 진기(陳紀)와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어서 난형난제(難兄難弟)라는 말이 생겼다. 《後漢書 卷62 陳寔列傳》 참판 윤집이 윤주(尹湊)ㆍ윤심(尹深)ㆍ윤원(尹源) 3형제를 두었는데, 윤심이 1660년(현종1) 증광문과 갑과에 서계와 함께 급제하였다. 그러므로 형인 윤주를 진기에, 동생인 윤심을 진심에 비유한 것이다.
[주D-002]함께 …… 마원상(馬元常)일세 : 백미(白眉)는 형제나 제자나 자제들 중에서 걸출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마량(馬良)은 자(字)가 계상(季常)인데, 형제 다섯 사람이 모두 재명(才名)이 있었으나 그중에 마량이 가장 뛰어났다. 고을 사람들이 “마씨 집 오상 중에 백미가 가장 훌륭하다.[馬氏五常 白眉最良]”라고 했는데, 형제 다섯 사람이 모두 ‘상(常)’ 자로 자를 삼았고, 마량의 눈썹 가운데 흰 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三國志 卷39 蜀書 馬良傳》 여기서는 3형제 중 윤주가 맏형이므로 마원상에 비유한 듯하다.
[주D-003]이정(鯉庭) : 부모가 서 계신 뜰을 가리킨다. 리(鯉)는 공자(孔子)의 아들의 이름으로 자(字)가 백어(伯魚)인데, 뜰에 계신 공자의 앞을 지나다가 시(詩)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받은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季氏》
[주D-004]홍서(鴻序)가 어긋나니 : 홍서는 기러기가 날아가는 행렬이다. 여기서는 3형제 중 윤주가 죽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5]짧은 …… 적혔고 : 《오월춘추(吳越春秋)》 권6 〈월왕무여외전(越王無余外傳)〉에 “우(禹)가 치수(治水)하기 위해 형산(衡山)에 이르러 백마(白馬)의 피로 제사 지냈으나 조짐이 좋지 못하자, 산에 올라 하늘에 우러러 하소연하였다. 꿈에 붉은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자신은 ‘현이창수사자(玄夷蒼水使者)’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산신(山神)의 책을 얻으려 한다면 재계를 하라.’ 하였다. 이에 우가 3달 동안 재계한 뒤에 금으로 장식한 책을 얻어서 치수의 요체를 터득하였다.” 하였다. 《두시택풍당비해(杜詩澤風堂批解)》 권20 〈계하송향제소배황문종숙조알(季夏送鄕帝韶陪黃門從叔朝謁)〉에, “어진 아우가 오래전에 창수사가 되었나니, 두릉인보다 나은 이름난 집안 없도다.[令弟尙爲蒼水使 名家莫出杜陵人]” 하였다. 여기서는 윤주가 판관을 지냈으므로 비석에 판관 아무개라고 적혔다는 뜻으로 말한 듯하다.
[주D-006]긴 베개엔 …… 비었구나 : 긴 베개는 여러 사람이 함께 벨 수 있게 만든 베개로, 이를 베고 자는 것은 형제간에 우애가 좋음을 뜻한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은 우애가 지극하여 처음 즉위하자 긴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서 형제들과 잠자리를 함께하였으며, 다섯 개의 휘장[幄]을 궁전에 설치하고 형제 왕들과 번갈아 그곳에 거처하면서 이를 오왕장(五王帳)이라 일컬었다. 뿐만 아니라 형제 중 설왕(薛王) 업(業)이 병들었을 때 친히 약을 달이다가 돌개바람이 불어 수염이 불에 그슬렸는데도 “왕이 이 약을 마시고 병이 낫는다면 어찌 수염이 아까우리오.” 하였다. 《通鑑節要 卷40 唐紀 玄宗》 자미랑(紫薇郞)은 당(唐)나라 때 중서성(中書省)에 자미화(紫薇花)를 많이 심었으므로 중서성을 자미성(紫薇省)이라 이름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사간원(司諫院)을 달리 이르는 말로 쓰였다. 여기서는 윤주가 사간원의 벼슬을 지냈으므로 자미랑이라 한 듯하며 형제간에 나란히 잠을 자는데 윤주의 머리만 비었다는 뜻이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진사(進士) 정차주(鄭次周)의 시에 차운하다


졸렬한 계책 자연 생활이 변변찮으니 / 拙計自然生活微
그윽한 거처 왕래하는 이 드물도다 / 幽棲眞覺往來稀
산도 있고 물도 있고 구름까지 겸하였으니 / 有山有水兼雲是
중인 듯 신선인 듯 다만 속인 아니로세 / 疑釋疑仙但俗非
두보 아내의 근심 어찌 수척함을 겁냄이리오 / 杜甫妻憂那怯瘦
양홍 부인의 공경 살찜이 해로울 것 없어라 / 梁鴻婦敬不妨肥
묻노니 그대 한가함과 바쁜 일 알려 한다면 / 問君欲識閑忙事
사람은 번화한 거리에 나는 낚시터에 있다네 / 人在街頭我在磯


 

[주D-001]두보(杜甫) …… 겁냄이리오 : 이백(李白)의 〈희증두보(戱贈杜甫)〉에 “반과산 꼭대기에서 두보를 만났는데, 머리엔 삿갓 썼고 해는 마침 정오였네. 묻노니 작별한 뒤로 어찌 그리 수척해졌는가, 모두 종전에 괴로이 시 읊조렸기 때문일세.[飯顆山頭逢杜甫 頭戴笠子日卓午 借問別來太瘦生 總爲從前作詩苦]”라고 하였다. 《李太白集 卷25 補遺》
[주D-002]양홍(梁鴻) …… 없어라 : 양홍은 후한 부풍(扶風) 평릉(平陵) 사람으로 가난하면서도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같은 현에 사는 맹광(孟光)은 살찌고 못생겼으며 피부가 검었는데 돌로 만든 절구를 들 정도로 힘이 세었다. 30세에 양홍에게 시집와서는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베로 만든 치마를 입고 남편을 감히 마주 보지 못하고 밥상을 눈썹 높이에 맞추어 들며 부부간에 서로 공경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梁鴻》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즉사(卽事)


새로 흰옷 짓고 오건 만들어서 / 新裁白服製烏巾
털어 입고 돌아와 먼지 묻히지 않노라 / 擺拂歸來不受塵
벼슬길 일찍이 안온하였다 말하기도 싫증나니 / 懶說層霄曾穩步
한 골짜기에 다시 한가히 지냄 몹시 사랑하네 / 深憐一壑更閑身
뜻에 맞으니 꽃도 따라 활짝 웃고 / 意中有會花同笑
기심 없으니 새가 절로 찾아오네 / 心裏無機鳥自親
인생 백년에 채 반을 살지 않았지만 / 三萬六千吾未半
여생은 청산 속의 사람이 되리라 / 餘生拚作臥雲人


 

[주D-001]기심(機心) …… 찾아오네 :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매일 해오라기와 친하게 놀아서 해오라기가 사람을 피하지 않았는데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내일은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서 내가 보게 하여라.” 하였다. 이튿날 바닷가에 가니 해오라기들이 공중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는 전에는 해오라기를 어떻게 하겠다는 기심이 없었기 때문에 해오라기들도 무심하게 대하였고 뒤에는 ‘해오라기를 잡겠다’는 기심이 있었기 때문에 해오라기가 피한 것이다. 《列子 卷2 黃帝》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새집


다섯 칸 새집 시일 걸려 이루어지니 / 五間新屋經時就
숲의 제비 산의 새 함께 낙성하누나 / 林燕山禽共落成
우뚝 선 봉우리들 집을 둘러싼 그림이요 / 擁戶畵圖千嶂立
졸졸 흐르는 샘물 상에 퍼지는 거문고라 / 繞床琴筑一泉鳴
문 앞의 못엔 고기 잡아 기를 만하고 / 門前池可求魚養
울 아래 밭은 송아지 빌려 갈 만하여라 / 籬下田堪借犢耕
세상일 많지 않고 그윽한 정취 넉넉하니 / 世事不豐幽意足
남들이 웃건 말건 졸렬히 삶을 도모하리 / 從他人笑拙謀生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해백(海伯) 정공(鄭公) 륜(錀) 에게 받들어 올리다


사신 갔다 동쪽으로 돌아오매 온갖 고초 겪었으니 / 西使東還備苦甘
만리 길 서로 따름 세 사람이 함께했지 / 相隨萬里共人三
몸의 상처는 씻어도 흉터 고스란히 남았고 / 體瘢經洗痕全見
팔이 부러져 치료하려 해도 의술을 몰랐네 / 臂折求醫術未諳
한 지방 풍속 관찰하매 한가함을 어찌 얻겠는가마는 / 一路觀風閑詎得
물가의 두어 칸 작은 집 외려 늙을 만하네 / 數椽臨水老猶堪
기약건대 공께서 천 자루 붓을 부쳐 준다면 / 期公略寄千丸墨
오만을 대신해서 국감지기를 허여하리 / 許代烏蠻負局柑


 

[주C-001]정공(鄭公) : 정륜(鄭錀, 1609~1686)으로,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극념(克恬)이다. 1644년(인조22)에 별시에 급제하여 정언, 장령 등 대간의 여러 관직 및 승지를 역임하였고 1668년(현종9)에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서장관인 서계와 함께 북경에 다녀왔다.
[주D-001]오만(烏蠻)을 …… 허여하리 : 미상(未詳)이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우연히 읊다


세상과 동떨어진 외진 곳이 이미 사랑스럽고 / 已憐境僻紅塵遠
한낮에도 한가로운 텅 빈 산이 더욱 좋아라 / 更愛山空白日閑
소나무 그늘 구름 그림자 속 거닐다가 앉고 / 行坐松陰雲影裏
시내 소리 새소리 가운데 웃으며 말하네 / 笑言溪響鳥聲間
응당 성부와 벼슬살이 함께하지 않으리니 / 不應軒冕同腥腐
끝내 우둔하고 완고한 내겐 임천이 제격이로다 / 終是林泉合鈍頑
옛적부터 은거한 이 졸렬한 선비가 많았나니 / 自昔卷藏多拙士
명성이 나면 상안에 또한 누가 되리라 / 高名知亦累商顔


 

[주D-001]성부(腥腐) : 추악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기한간의주(寄韓諫議注)〉에 “국가의 성패를 내 어찌 감히 알리오, 비린내 나고 썩은 것에 난색을 표하고 풍향을 먹노라.[國家成敗吾豈敢 色難腥腐餐楓香]” 하였다.
[주D-002]상안(商顔) : 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 동쪽에 있는 상안산(商顔山)을 말한다. 진(秦)나라 말엽, 한(漢)나라 초엽에 상산사호(商山四皓), 즉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산가(山家)


푸른 소나무 뿌리 아래엔 작은 못 맑고 / 蒼松根下小潭空
푸른 이내 낀 봉우리 앞엔 오솔길 나 있네 / 翠靄峯前細逕通
이 산가와 비슷한 곳을 알려 할진댄 / 要識山家相似處
응당 그림 속에서나 찾아야 하리라 / 應須覓向畵圖中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한거(閑居)


선생이 가난하면서 자랑하길 좋아한다 사람들 비웃건만 / 人笑先生貧好誇
일마다 도연명의 집보다 낫다고 스스로 말하네 / 自言事事勝陶家
사시에 소나무 빛이 온 숲에 비추고 / 四時松映千林色
삼월에 복사꽃이 모든 그루에 피누나 / 三月桃開萬樹花
문 앞에 녹음이 없음을 한하지 않고 / 未恨門前無綠蔭
울 아래 국화 있음에 손색이 없어라 / 不慙籬下有黃華
게다가 겨루어 볼 풍류가 한 가지 더 있으니 / 更爭一着風流在
차조를 심어서는 오이를 심는 만큼 고상하긴 어렵지 / 種秫難高似種瓜


 

[주D-001]문 앞에 녹음(綠蔭) : 도잠(陶潛)이 집 주위에 다섯 그루의 버들을 심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일컫고, 〈오류선생전〉을 지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古文眞寶後集 卷2》
[주D-002]울 아래 국화 : 도잠의 〈잡시(雜詩)〉에,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古文眞寶前集 卷2》
[주D-003]차조를 심어서는 : 진(晉)나라 도잠이 팽택 영(彭澤令)이 되었을 때, 너무도 술을 좋아한 나머지 공전(公田)에다 모두 술 담글 차조를 심게 했던 일화가 전한다. 《宋書 卷93 隱逸列傳 陶潛》
[주D-004]오이를 심는 : 진(秦)나라 때 일찍이 동릉후(東陵侯)에 봉해진 소평(召平)이 진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스스로 평민의 신분이 되어, 장안성(長安城)의 동문 밖에서 오이를 심어 가꾸며 조용히 은거했는데, 특히 그 오이가 맛이 좋기로 유명하여 당시 사람들이 ‘동릉과(東陵瓜)’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史記 卷53 蕭相國世家》 여기서는 소평에 비겨 시골에서 한가로이 지내는 서계 자신의 풍류가 차조를 심은 도잠보다 더 고상하다는 뜻으로 쓰였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촌락의 거처


남북의 이웃집엔 꽃들이 이어져 피었고 / 南鄰花接北隣花
동서의 채마밭엔 오이가 연이어 달렸네 / 東圃瓜連西圃瓜
봉우리 그림자 사람을 전송해라 시내 길은 굽이돌고 / 峯影送人溪路轉
흰 구름 깊은 곳에 선가가 자리하고 있구나 / 白雲深處有仙家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세모(歲暮)


한 해가 가고 오매 기쁜 마음 줄어들고 / 歲去年來歡意減
한 해가 오고 가매 늙은 모습 늘어가니 / 年來歲去老容催
묵은 해 지나감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데 / 不堪舊歲抛將去
새해 다가옴을 어이 견딜 수 있으랴 / 可耐新年逼得來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화숙(和叔) 상국 박세채(朴世采) 이 송도(松都)로부터 배천(白川)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한집안 여러 종형제 육십 인에 / 一家群從六十人
그 가운데 누가 또 가난하지 않은가 / 於內何人又不貧
흉년 들어 도읍에 머물 수 없어서 / 都邑年荒留未得
그대 이 봄에 해변에서 유락하겠지 / 念君流落海邊春


[주C-001]화숙(和叔) :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자이다. 서계의 6촌 아우로, 호는 현석(玄石)ㆍ남계(南溪),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성리학자로서 1694년(숙종20) 좌의정이 되었고, 황극탕평설(皇極蕩平說)을 주장하였다. 저서에 《심학지결(心學至訣)》, 《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補集)》 등이 있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거처를 묻길래 의답(擬答)하다


그대 산인이 거처하는 곳을 물으니 / 君問散人居住處
경화로 가는 냉천 앞길 / 冷泉前路向京華
그 길 동쪽 시냇가 높은 언덕 위에 / 路東溪畔高原上
띠로 인 지붕 솔 울타리 친 집이라오 / 茅屋松籬只一家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도봉(道峯)


모르겠어라 시내 서쪽 산 몇 겹인지 / 不識溪西山幾重
옥부용이 첩첩으로 늘어선 듯하여라 / 森森倚疊玉芙蓉
나의 집은 동쪽 언덕 아래에 있나니 / 我家住在東岡下
문은 제일봉을 마주 대하였다오 / 門對當頭第一峯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마음의 근심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시절이 이미 저물다

시절이 이미 저무니 / 節旣闌矣
눈발이 매섭게 날려 날씨 차고 / 霰雪憯以寒兮
한 해가 다 끝나가니 / 歲行盡矣
바람이 매섭게 불어 빠르구나 / 風猋烈以迅兮
구름 속 고니 낮게 날아 빙빙 도니 / 雲鵠之低回兮
어쩌면 그 날개 꺾여서가 아닌가 / 或乃摧其翼矣
동굴 속 다람쥐 찡그려 신음하니 / 穴鼯之嚬呻兮
또한 그 배를 주려서가 아닌가 / 無亦餓其腹矣
시운은 또한 각기 만남이 있으니 / 時命且各有値
군자는 편안함을 이에 얻는다오 / 君子安斯得矣

 


마음의 근심 충충하건만 / 心憂兮忡忡
나의 근심 알아주는 이 없고 / 人莫我測知
노래의 괴로움 오오하건만 / 歌苦兮嗚嗚
나의 괴로움 애처롭게 여겨주는 이 없어라 / 人莫我憐悲
그만이로다 / 已矣乎
오오함은 괴롭지 않음을 스스로 괴로워함이니 / 嗚嗚者自苦不苦
저가 또한 어찌 애처롭게 여기겠으며 / 彼亦奚悲
충충함은 근심스럽지 않음을 스스로 근심함이니 / 忡忡者自憂不憂
저가 또 어찌 알아주겠는가 / 彼又曷知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춘첩(春帖) 3장(章)


신년에 신년이 되었음을 기뻐하고 / 新年喜新年
기쁜 일 자주 생김을 기뻐하네 / 喜事喜頻頻
곡식은 풍년 들고 전원엔 과실 익어 / 田穀豐登園果好
태평 시절에 한가한 사람 되었으면 / 太平時節作閑人

신년에 신년이 되었음을 좋아하고 / 新年好新年
좋은 일 자랑할 만함을 좋아하네 / 好事好堪誇
남쪽 마을 사람 노래 북쪽 마을 이어지고 / 南里人歌賡北里
동쪽 집 늙은이 서쪽 집과 부유함을 자랑했으면 / 東家翁富鬪西家

신년에 신년이 되었음을 즐거워하고 / 新年樂新年
즐거운 일 다시 흡족함을 즐거워하네 / 樂事樂更愜
집집마다 찧은 곡식 창고에 넘쳐나고 / 家家舂粟溢囷倉
사람마다 지은 옷 상자에 가득했으면 / 人人製衣盈箱篋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윤자인(尹子仁) 증(拯) 이 시 세 수를 보내왔기에 차운하여 사례하다


풍우 몰아치는 거리에서 분주했고 / 風雨街頭走
연하 자욱한 골짜기에서 거처하니 / 煙霞谷口居
한가함과 바쁨 전후에 다르건만 / 閑忙前後異
이내 신세는 고금에 같다오 / 身世古今如
명분에 어긋나지 않게 하려 함이지 / 未欲爲名誤
세상과 소원해지려 해서가 아니라오 / 非緣與俗疏
은근한 마음으로 나의 안부를 물어 / 勤心相問訊
멀리서 서찰을 보내 주었구려 / 遠枉故人書


개구리는 턱을 듦을 즐거워하고 / 䵷愜持頤樂
오리는 다리 이어 줌을 근심하니 / 鳧懷續脛憂
짧고 긺은 진실로 취향이 다르고 / 短長誠異趣
작고 큼은 교유를 함께하지 않네
/ 小大不兼游
성품이 괴팍하여 화합하기 어려울까 저어하고 / 性牾嫌難合
재주가 엉성해 주밀하지 못할까 두렵다오 / 才疏懼未周
차라리 충조의 계획을 따르리니 / 寧從蟲鳥計
이곳이 바로 머리 묻고 살 곳일세 / 是處便埋頭


승경을 함께 구경하지 못하고서 / 勝地違攀袂
빈 울타리에 말 매던 일 생각하네 / 空籬憶繫驂
문선에 어찌 한이 적겠는가 / 聞蟬寧少恨
제봉에 속절없이 부끄러움 많다오 / 題鳳漫多慙
이 세상이 그대를 어찌 버렸는가 / 斯世君何棄
지금 세상을 견딜 수가 없구려 / 今時我不堪
머리 긁으매 흰머리 뒤덮으려는데 / 搔頭絲欲遍
아득히 멀리 강남을 바라본다오 / 迢遞望江南
‘今’이 어떤 본에는 ‘明’으로 되어 있다.


[주C-001]윤자인(尹子仁) : 자인은 윤증(尹拯, 1629~1714)의 자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명재(明齋)ㆍ유봉(酉峯),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수차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남인에 대한 입장이 달라 서인이 둘로 나뉜 후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저서에 《명재유고(明齋遺稿)》 등이 있다. 서계의 셋째 형인 박세후(朴世垕)의 부인이 바로 윤증의 동생이다.
[주D-001]개구리는 …… 즐거워하고 :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며 살아감을 말한 것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개구리가 동해에 사는 자라에게 말하기를, ‘나는 즐거워. 밖에 나오면 우물 난간 위에서 깡충 뛰놀고 안에 들어가면 깨어진 벽돌 끝에서 쉬며 물 위에 엎드릴 때는 두 겨드랑이를 물에 찰싹 붙인 채 턱을 들고 진흙을 찰 때는 발이 빠져 발등까지 잠겨 버리지. 장구벌레와 게와 올챙이를 두루 보아도 나만 한 것이 없다네. 대체로 구덩이 물을 온통 내 멋대로 하며 무너진 우물 안의 즐거움에 편히 머물러 있다는 것 이것 또한 최고일세.’ 하였다. 동해의 자라는 그 말을 듣고 우물 안에 들어가려 했으나 왼발이 채 들어가기 전에 오른쪽 무릎이 꽉 끼어 망설이다 뒤로 물러나서는 개구리에게 동해의 커다란 즐거움에 대해 말해 주었다.” 하였다.
[주D-002]오리는 …… 근심하니 : 만물은 제각각 천성(天性)대로 살 수밖에 없음을 말한 것이다. 《장자》 〈변무(騈拇)〉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으나 이를 길게 이어 주면 근심하고, 학의 다리가 비록 길지만 이를 자르면 슬퍼한다.” 하였다.
[주D-003]짧고 …… 않네 : 짧음은 오리를, 긺은 학을, 작음은 개구리를, 큼은 자라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서계 자신과 취향이 다른 사람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주D-004]차라리 …… 따르리니 : 개구리나 오리처럼 분수에 만족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주D-005]문선(聞蟬) : 매미 소리를 듣고 벗을 그리워함을 말한 것이다. 주자(朱子)의 〈답여백공(答呂伯恭)〉에 “수일 사이에 매미 소리가 더욱 맑으니 들을 적마다 고풍을 사모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數日來 蟬聲益淸 每聽之 未嘗不懷高風也]”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33》 여기서는 서계가 윤증(尹拯)의 풍도를 사모함을 말하였다.
[주D-006]제봉(題鳳) : 진(晉)나라 여안(呂安)이 벗 혜강(嵇康)을 찾아왔는데 마침 혜강은 집에 없고 그의 형 혜희(嵇喜)가 마중하자 여안이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에 ‘봉(鳳)’ 자를 써 놓고 갔다. 혜강이 돌아와서 그것을 보고 ‘범조(凡鳥)’로 파자(破字)하였다. 즉 혜희가 범상한 인물이므로 더불어 사귈 만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太平廣記 卷235 交友》 여기서는 윤증이 서계를 찾아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 것을 말한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집 동쪽 시내 남쪽의 돌 위에 아름드리 누운 소나무가 있는데 가지는 서리고 잎은 무성하여 다른 소나무와는 아주 다르다. 매양 여름철이면 그 아래에서 휴식하였는데 금석을 녹일 정도의 혹독한 더위에도 시원한 그늘이 변하지 않았다. 임자년(1672, 현종13) 봄에 많은 눈이 내려 산의 나무들이 모두 쓰러졌고, 이 소나무도 눈에 눌려 꺾이고 말았다. 옛적에 두 공부(杜工部)의 〈남수가(楠樹歌)〉를 읽었는데, 읽을 때에는 오히려 깊이 깨닫지 못하였다. 고인이 한 그루 나무에 이처럼 애석해하였으니 그 뜻이 공연하지 않다. 시 한 수를 읊어 깊은 감회를 적는다.


바위에 기대어 물에 드리운 아름드리 소나무 / 倚巖覆水百圍松
붉은 갑옷 푸른 수염으로 먼 봉우리 대했구나 / 赤甲蒼髥對遠峯
비치는 달빛에 이슬에 놀란 학 울음 자주 들리고 / 流月頻聞警露鶴
내닫는 우레에 못에서 나온 용 별안간 보았네 / 奔雷瞥見拔潭龍
서늘한 그늘 유인이 쉬기에 알맞았는데 / 陰凉合被幽人息
신령함 조물주에게 용납되기 어려웠어라 / 靈怪難爲造物容
나무 쓰러짐을 한스러워함은 고금이 똑같나니 / 顚倒古今同一恨
초당의 시 읊는 늙은이 가슴에 피눈물 흘렸네 / 草堂詩老血垂胸


 

[주C-001]두 공부(杜工部)의 남수가(楠樹歌) : 두보(杜甫)가 성도(成都)의 초당(草堂)에 거처할 때 고목이 바람에 뽑힌 것을 슬퍼하여 지은 〈남목이 비바람에 뽑힌 것을 한탄하다[柟樹爲風雨所拔歎]〉라는 시를 가리킨다. 《杜少陵詩集 卷10》 두 공부는 두보가 공부 원외랑(工部員外郞)을 지냈으므로 이른 말이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거위털이 공중에서 흩어져 내리고 / 鵝毛散洒從空下
학의 깃이 땅위에 살포시 내려앉네 / 鶴羽飄零委地來
시가가 금체를 둔 것이 합당치 않아 / 不合詩家有禁體
잘못 두개회란 문자를 쓰게 하누나 / 錯敎喚作豆稭灰


 

[주D-001]금체(禁體) :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여음 태수(汝陰太守)가 되어 취성당(聚星堂)에 모여 연회를 베풀고 눈[雪]에 대한 시를 짓게 하면서, 설부(雪賦)에 흔히 등장하는 옥(玉), 월(月), 이(梨), 매(梅), 연(練), 서(絮), 백(白), 무(舞), 아(鵝), 학(鶴) 등의 글자를 쓰지 못하게 했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詩人玉屑 卷9》
[주D-002]두개회(豆稭灰) : 짚을 태운 재라고도 하고 콩대를 태운 재라고도 하는데, 눈이 내리려 하는 하늘빛이나 눈을 비유한다. 소식(蘇軾)의 〈기정도상견매화희증계상(岐亭道上見梅花戲贈季常)〉에 “야점에서 처음 죽엽주를 마시고 나니, 강 구름은 두개회를 떨어뜨리려 하네.[野店初嘗竹葉酒 江雲欲落豆稭灰]” 하였는데, 이 시는 왕면(王勉)이 눈을 읊은 시에, “하늘이 두개회를 떨어뜨려서, 검은 오얏이 이에 따라 흰 매화로 변하게 하네.[上天燒下豆稭灰 烏李從敎變白梅]” 한 데서 온 말이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흰 수염을 뽑다


턱에 난 세 가닥 흰 수염을 처음 보고서 / 頷鬚初見三莖白
소나무 가지 돌아보니 푸른 잎 무성하네 / 松頂回看萬葉靑
속된 몸이라 쉬이 쇠하는 내가 한스럽고 / 恨我易衰緣骨俗
신령한 뿌리라 늙지 않는 소나무가 부러워라 / 羨渠難老爲根靈
장생불사는 예부터 신선이 비결을 남겼건만 / 長生自古仙留訣
짧은 꿈을 지금도 사람들 깨지 못하누나 / 短夢如今人未醒
내일 복령을 모쪼록 가서 자를 터이니 / 明日茯苓須去斸
늦었지만 외려 여생을 보전할 수 있으리 / 縱遲猶可保餘齡


[주D-001]짧은 …… 못하누나 : 부귀영화를 누리는 한바탕의 부질없는 꿈을 깨지 못한다는 뜻이다. 남가일몽(南柯一夢)의 고사를 차용한 것으로, 순우분(淳于棼)이라는 사람이 오래된 괴수(槐樹) 아래서 술에 취해 잠깐 잠이 든 사이에, 괴안국(槐安國)에 들어가 왕의 부마(駙馬)가 되고 30년 동안 남가 태수(南柯太守)를 맡아 부귀영화를 다 누리는 꿈을 꾸었는데 깨서 보니 자기가 노닐던 곳이 바로 뜰 앞 큰 괴목(槐木) 아래였고 그곳에 개미굴이 있어 개미들이 드나드는 것이 보였다 한다. 《類說》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태보(泰輔)에게 보이다


한 걸음 갈 적에 한 걸음 천천히 감을 잊지 마라 / 一步無忘一步遲
더디 감은 안온하고 빨리 감은 위태로운 법 / 遲行安穩疾行危
일찍이 머뭇거리며 사람들의 뒤에 처져서 갔으니 / 逡巡曾落人叢後
범씨의 아들이 바로 너의 스승이니라 / 范氏之兒是汝師


[주C-001]태보(泰輔) : 서계의 둘째 아들인 박태보(朴泰輔, 1654~1689)로,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珍島)로 유배가던 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저서에 《정재집》 등이 있다.
[주D-001]범씨(范氏)의 아들 : 미상(未詳)이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이 동래(李東萊) 하(夏) 에 대한 만사


형창에서 한 주머니의 빛을 나누어 비췄는데 / 螢窓分照一囊輝
붕새의 길에서 되돌아보니 만리를 날아갔지 / 鵬路回看萬里飛
늙고 병든 몸으로 홀로 무한한 눈물 흘리니 / 衰病獨霑無限淚
오래된 침류당은 옛적 놀던 때와 다르구나 / 枕流堂古曩遊非


[주C-001]이 동래(李東萊) : 이하(李夏, 1636~1675)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하경(夏卿)이다. 동래 부사, 승지를 지냈다.
[주D-001]형창(螢窓)에서 …… 비췄는데 : 진(晉)나라 때 차윤(車胤)이 학문에 힘썼으나 집이 가난하여 기름을 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여름이면 반딧불을 주머니에 넣어서 그 빛으로 책을 보았다 한다. 《晉書 卷83 車胤列傳》 여기서는 옛적에 어려움 속에서 서계가 이하와 함께 공부한 것을 말한다.
[주D-002]붕새의 …… 날아갔지 :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 갈 때에는 물결을 치는 것이 3천 리나 되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나 올라가 6개월을 가서야 쉰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하가 원대한 포부를 펼치기 위해 벼슬에 오른 것을 말한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태상(泰尙)이 부친 시에 차운하다


사람들 만족하기 어려움 근심하지만 나만 여유로움 즐거워하니 / 衆憂難足獨娛餘
공교한 자 그 누가 졸렬한 자를 부러워하겠는가 / 巧者誰憐拙者歟
두 해 동안 벼슬살이에 시달리면서도 스스로 면치 못하니 / 兩歲勤劬自不免
일생 동안 한가로이 지냄과 과연 어떠한가 / 一生閑放果何如
날이 개면 나가 시냇가의 돌을 밟고 / 日晴去踏溪中石
저물녘에 돌아와 서가 위의 책을 빼드네 / 天暮還抽架上書
백부가 물러나 늙은 뒤에 물러남을 한하였으니 / 白傅退休曾恨老
나는 오히려 조금 일찍 티끌 찌든 소매 떨쳤네 / 吾猶差早拂塵裾


[주C-001]태상(泰尙) : 서계의 둘째 형인 승지공 박세견(朴世堅)의 장남 박태상(朴泰尙, 1636~1696)으로, 자는 사행(士行), 호는 만휴당(萬休堂)ㆍ존성재(存誠齋),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인품이 담박 청수하여 요직을 여러 번 지냈으나 항상 가난하였고, 인재 등용에 공도(公道)를 철저히 실천하였다.
[주D-001]백부(白傅) : 태자소부(太子少傅)에 임명되었던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를 가리킨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백낙천시집(白樂天詩集)》에 〈목련〉 세 수가 실려 있다. 그 병서(幷序)에 이르기를, “목련 나무가 파협(巴峽)의 산곡(山谷) 가운데 있는데, 큰 것은 키가 5장(丈)으로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다. 원줄기는 푸른 버들 같은데 흰 무늬가 있으며 잎은 계수나무와 같은데 두터우면서 크고 주맥이 없으며 꽃은 연꽃과 같은데 꽃송이와 꽃술만 다르며 4월 초에 비로소 핀다.” 하였는데, 아마 백낙천이 충주 자사(忠州刺史)로 있을 때 보았을 것이다. 지금 삼각의 여러 산에도 목련이 있는데 키가 1장 남짓이며 원줄기는 약간 희며 잎은 두텁고 크며 꽃은 연꽃과 같으며 4월에 처음 피니, 백낙천이 본 것과 매우 유사하다. 다만 시들어 떨어지는 것은 다른 나무와 같고 잎에 주맥이 있고 꽃이 흰색인 것은 같지 않다. 그러나 이 꽃은 매우 아름다우니 곱고 깨끗하여 속되지 않음으로 볼 때 응당 선품(仙品)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경성의 귀인들이 많이들 캐서 뜰에 심어 놓고서 완상거리를 삼는다. 가령 낙천이 이 꽃을 보았더라면 파협의 목련보다 더 애지중지하였을 것이다. 나는 이 꽃이 사람을 만나지 못해 끝내 절로 드러나지 못함을 몹시 안타깝게 여겨 절구 세 수를 읊어 그 감회를 적는다.

성정이 유사하니 꽃 피는 시절이 같고 / 性情近似同時節
품색이 조금 구분되니 백홍이 다르구나 / 品色差分異白紅
누가 충주의 사군에게 말하겠는가 / 誰向忠州使君道
해동의 꽃이 파협의 꽃보다 낫다고 / 海東花好勝巴中

황금으로 백낙천의 시를 구하지 말고 / 黃金莫購白家詩
계림의 상국에게 알려주도록 하라 / 與報鷄林相國知
만약 산중의 목련을 그려 보낸다면 / 若畫山中木蓮去
다시 몇 편의 시를 쉽게 얻으리니 / 更須多得幾篇詞
낙천(樂天)의 〈화목련기인(畫木蓮寄人)〉이란 시가 있다.

부처가 되지는 못해도 신선 되기엔 넉넉한데 / 作佛未應優作仙
해산이 원하지 않아 서천을 원하였구나
/ 海山不願願西天
애석하구나 이 꽃을 보내 주는 사람 없어 / 此花可惜無人送
다만 파남의 홍목련만 읊은 것이 / 只賦巴南紅木蓮

[주C-001]목련(木蓮) : 《백낙천시집(白樂天詩集)》 권18에 〈목련수도(木蓮樹圖)〉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D-001]화목련기인(畫木蓮寄人) : 《백낙천시집》 권18에 〈화목련화도기원낭중(畫木蓮花圖寄元郎中)〉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D-002]부처가 …… 원하였구나 : 이 목련이 신선의 세계라 할 수 있는 해산(海山) 즉 파협(巴峽)의 산곡(山谷)에 있지 않고, 부처의 세계라 할 수 있는 서천(西天) 즉 삼각산(三角山)에 자라게 되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또 태상(泰尙)의 시에 차운하다


남들은 버리고 싫어하지만 나는 그것을 취하니 / 人棄人嫌我取餘
어찌 본심에 맡기고 분수를 따름이 아니겠는가 / 委心隨分豈非歟
늙어 도실을 편안히 여김을 비슷하다 말하기 어려운데 / 老安陶室難言似
가난해도 안표를 즐김을 감히 같다 이르겠는가 / 貧樂顔瓢敢謂如
객이 간 뒤에 무료하여 다시 바위를 대하고 / 客起無聊還對石
꽃이 피자 흥취 일어 책도 보지 않는다네 / 花開有興不看書
다시 논하노니 그대 좋은 곳을 알아야 하리 / 更論好處君須識
곤히 잠들매 솔바람이 옷자락에 가득 불어옴을 / 睡困松風吹滿裾


[주D-001]도실(陶室) : 도연명의 집을 말한다. 도연명이 팽택 영(彭澤令)으로 있다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는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와 소나무와 국화를 심고 한가롭게 살았다. 〈귀거래사〉에 “술잔을 가져다 스스로 따르고 뜰의 나뭇가지를 돌아보며 얼굴을 편다. 남쪽 창에 기대 오만함을 부치고 무릎이 용납하기 쉬움을 알겠다.[引壺觴以自酌 眄庭柯以怡顔 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 하였다.
[주D-002]안표(顔瓢) : 안연(顔淵)의 표주박으로 빈한한 살림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어질도다, 안회여! 한 소쿠리의 밥과 한 표주박 물로 누추한 시골에서 지내자면 남들은 그 곤궁한 근심을 감당치 못하거늘, 안회는 도를 즐기는 마음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雍也》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외숙(外叔) 이 원주(李原州) 위국(緯國) 에 대한 만사

백발에 홍안이라 그 모습 신선 같았는데 / 白髮紅顔貌若仙
작은 처마 낮은 집 들판 구름 속에 있었지 / 小簷低屋野雲邊
난리에 나라를 위해 몇 번이나 몸을 바쳤던가 / 幾當危亂徇宗國
쓸쓸히 묘전을 지킴을 한스러워 하지 않았네 / 不恨蕭條守墓田
용천을 덮어 가려 광채가 드러나지 않았고 / 匝閉龍泉光未見
홍보를 베개 속에 숨겨 비술이 전하지 않았네 / 枕藏鴻寶術虛傳
흉보를 듣고는 마음이 놀라고 애통하니 / 耳聞凶報心驚慟
한번 인사를 올린 지 지금 오 년이 흘렀다오 / 一自拜床今五年

[주C-001]이 원주(李原州) : 이위국(李緯國, 1597~1673)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태언(台彦), 호는 운포(雲浦)이다. 원주 목사 등 여러 곳의 지방관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청렴하고 강직하다고 알려졌다. 초서와 예서에도 능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주D-001]용천(龍泉) : 오(吳)나라 때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에 늘 자기(紫氣)가 감돌기에 장화(張華)가 예장(豫章)의 점성가(占星家) 뇌환(雷煥)에게 물었더니 보검의 빛이라 하였다. 이에 풍성(豐城)의 감옥 터의 땅속에서 춘추 시대에 만들어진 전설적인 보검인 용천(龍泉)과 태아(太阿) 두 보검을 발굴했다 한다. 《晉書 卷36 張華列傳》 여기서는 이위국의 훌륭한 재능이 발휘되지 못한 것을 비유하였다.
[주D-002]홍보(鴻寶) : 한(漢)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베개 속에 비장(秘藏)하던 도술 서적이다. 《漢書 卷36 劉向傳》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우연히 이 위공(李衛公)의 평천(平泉) 수석(水石)을 기억하다가 느낌이 있어 3수

하나의 돌 지금과 같다고 다시 말하지 마라 / 一石如今更勿言
평천이 끝내 잔약한 후손의 소유 되지 않았네 / 平泉終不屬孱孫
일생 동안 부지런히 애씀 모두 무익하니 / 人生勤苦都無益
후세의 자손 누가 조상을 생각하겠는가 / 末葉誰能念本根

자손들이 보호하고 지키리라고 감히 바랐겠는가 / 敢望子孫能保守
오직 자신이 죽은 뒤 그 사이에 묻히길 구하였지 / 唯求身死葬其間
묘 앞에 만고에 우뚝 높이 솟은 수많은 돌 / 墓前萬古峩峩石
후인들이 와서 보는 것을 막지 못하네 / 不阻後人來借看

그를 따를 수 없어 그를 따르지 않으니 / 由他不得不由他
남긴 말이 지성스러웠으나 한만 부질없이 더하였네 / 遺語雖勤恨謾多
죽은 뒤에 자신의 몸도 오히려 헤아릴 수 없는데 / 死後此身猶未料
그 나머지 온갖 일들이야 그가 어이하겠는가 / 其餘萬事奈渠何

[주C-001]이 위공(李衛公) : 당(唐)나라 경종(敬宗)ㆍ무종(武宗) 때 재상을 지내고 상서좌복야 태자소보 위국공(尙書左僕射太子少保衛國公)에 추증된 이덕유(李德裕)를 가리킨다. 평천장(平泉莊)은 그의 별장으로 둘레가 40리인데, 그 안에 100여 개의 정자와 누대, 천하의 기화이초(奇花異草), 진귀한 소나무, 괴석이 있어 그 경치가 완연히 선경(仙境)과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손의 심한 사치로 말미암아 마침내 패망하고 말았다. 《劇談錄 李德裕》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태소(泰素)의 시에 차운하여 북막(北幕)으로 부임하는 태상(泰尙)을 전송하다

구월에 해지고 낡은 솜옷 몸에 걸쳤으니 / 九月身穿故絮袍
풍설 속에 쓸쓸함 견딜 줄 멀리서 알겠구나 / 遙知風雪耐蕭騷
창해가 드넓어 집으로 돌아올 꿈 끊어지고 / 歸庭夢斷滄溟濶
철령이 높아 대궐 바라보매 근심 간절해라 / 望闕愁懸鐵嶺高
두 대에 걸쳐 받은 은총 아직 갚지 못했으니 / 兩世恩榮猶未報
한 기간 동안 변방 살핌을 감히 수고롭다 말하랴 / 一期征戍敢言勞
옛적에 일찍이 나도 변경을 맡아 다스렸으니
/ 昔年曾亦游邊土
일이 없는 지금에는 백발이 부끄럽구나 / 無事如今愧二毛

[주C-001]태소(泰素) : 서계의 중형(仲兄)인 승지공(承旨公) 박세견(朴世堅)의 아들 박태소(朴泰素, 1640~?)로, 백부인 박세규(朴世圭)의 양자가 되었다. 자는 사수(士受)이고, 병조 좌랑을 지냈다.
[주D-001]한 기간 …… 다스렸으니 : 박태상(朴泰尙)이 1673년(현종14)에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는데, 서계도 1666년에 함경도 병마평사(咸鏡道兵馬評事)를 지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회룡사(回龍寺)의 승려 풍열(豐悅)에게 부치다 2수

열공이 나의 안부 물으러 동강 아래로 왔는데 / 悅公問我東岡下
내가 병들어 혼몽히 지내며 죽으려 할 때였지 / 我病昏昏欲死時
지금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으나 / 今日扶頭能起坐
공을 생각해도 볼 수 없기에 공에게 알게 하노라 / 思公不見遣公知

징공이 떠나자마자 열공이 왔기에 / 澄公纔去悅公來
강석의 먼지를 거듭 쓸어 내었어라 / 講座塵埃再掃開
다시 호계에서 한바탕 웃어 준다면 / 儻復虎溪容一笑
그대와 폭포를 구경하고 돌아오리라 / 與君同賞瀑泉回

[주D-001]징공(澄公) : 승려 법징(法澄)을 가리킨다.
[주D-002]호계(虎溪)에서 …… 준다면 : 호계는 중국의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앞에 있는 시내이다. 진(晉)나라 혜원 법사(慧遠法師)가 이곳에 있으면서 손님을 보낼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문득 호랑이가 울었다. 하루는 도잠(陶潛), 육수정(陸修靜)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내를 건너자 호랑이가 우니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고 한다. 《東林十八高賢傳》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망월사(望月寺)의 승려 청휘(淸暉)에게 부치다 2수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11월 11일 밤에 비가 내리다

깊은 밤에 등잔불을 홀로 가까이하니 / 夜深燈火獨相親
작은 베개 낮은 침상의 병든 몸이라오 / 小枕低床病後身
상상건대 폭포의 얼음이 다 부러졌으리라 / 想得瀑泉氷折盡
누워 듣건대 찬비가 자주 섬돌에 떨어지니 / 臥聞寒雨滴階頻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고신선곡(古神仙曲) 4수

영서를 쪼개어 시험 삼아 한 번 태우니 / 劈破靈犀試一燃
온갖 괴물들의 실체가 환히 드러났네
/ 紛紛百怪失重淵
옥황상제가 높이 통명전에 납시어 / 玉皇高御通明殿
예전대로 조화의 권세를 되찾았네 / 依舊收還造化權

홍란과 취봉이 날마다 울며 나니 / 紅鸞翠鳳日飛鳴
현포에서 동쪽으로 보매 바로 적성이로다 / 玄圃東看是赤城
귤 속의 대국을 탐닉하지 말지어다 / 莫要橘中耽對局
맑은 상계의 풍운을 길이 얻을 것이니 / 風雲長得上界淸

지초 밭에서 사슴이 노는 것도 터무니없는데 / 芝田戲鹿亦無端
공작이 푸른 여울물을 마심은 막아야 하리 / 孔雀須防飮碧湍
이는 선가의 좋은 닭이나 개와 같으니 / 同是仙家好鷄犬
그릇된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갈까 근심스럽네 / 更愁非意輒相干

곤륜산에 부신 날리고 봉영에 편지 보내 / 飛符崑閬牒蓬瀛
크게 금단을 조제하여 온갖 정기를 모았네 / 大劑金丹聚百精
서둘러 화로에 넣어 구전금단을 이루니 / 急就爐中成九轉
도규로 떠내어 아래로 억만창생 구원하네 / 刀圭下救萬蒼生

[주D-001]영서(靈犀)를 …… 드러났네 : 영서는 영묘(靈妙)한 서각(犀角)으로, 이를 태우면 밝은 빛을 낸다고 한다. 진(晉)나라의 온교(溫嶠)가 여행을 하다가 무창(武昌)의 우저기(牛渚磯)에 당도하였는데, 사람들이 물속에 괴물이 산다고 하였다. 이에 온교가 무소의 뿔에 불을 붙여서 물속을 비추자 물속에 있던 기이한 모습의 괴물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晉書 卷67 溫嶠列傳》 여기서는 임금이 지혜가 밝아 역적의 간사한 실상을 환히 알았음을 뜻한다.
[주D-002]통명전(通明殿) : 옥황상제의 궁전을 이른다.
[주D-003]홍란(紅鸞)과 …… 나니 : 홍란은 전설 속의 붉은색의 선조(仙鳥)이고, 취봉(翠鳳)은 천자가 타는 푸른 깃으로 장식한 봉황 모양의 수레이다. 여기서는 훌륭한 인물들이 조정에 나와 임금과 함께 정사를 살피는 것을 비유하였다.
[주D-004]현포(玄圃)에서 …… 적성(赤城) : 현포와 적성은 모두 전설에 신선이 산다는 산을 가리킨다.
[주D-005]귤 속의 대국 : 옛날에 파공(巴邛) 사람이 자기 귤원(橘園)에 대단히 큰 귤이 있으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겨 쪼개어 보니, 그 귤 속에 수미(鬚眉)가 하얀 두 노인이 서로 마주 앉아 바둑을 두면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중에 한 노인이 말하기를, “귤 속의 즐거움은 상산(商山)에 뒤지지 않으나, 다만 뿌리가 깊지 못하고 꼭지가 튼튼하지 못한 탓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따서 내리게 되었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6]공작이 …… 하리 : 두보(杜甫)의 〈적소행(赤霄行)〉에 “공작은 소에 뿔이 있는 줄 알지 못하고, 목말라 샘물 마시다 소뿔에 받히누나. 푸른 하늘과 선경을 왕래해야 하니, 푸른 꼬리 황금 무늬로 욕을 당하는 것도 피하지 않네.[孔雀未知牛有角 渴飮寒泉逢觝觸 赤霄玄圃須往來 翠尾金花不辭辱]”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14》
[주D-007]선가의 …… 개 : 《신선전(神仙傳)》에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임종할 때 먹고 남은 단약(丹藥) 그릇을 뜰에 놓아두었더니, 닭과 개가 핥아 먹고 모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으므로, 천상에서 닭이 울고 구름 속에서 개가 짖었다.” 하였다.
[주D-008]도규(刀圭) : 약(藥)을 뜨는 숟가락을 말하는데, 전하여 선약(仙藥)을 의미한다.
[주D-009]急이 …… 있다 : 대본에는 ‘急作徐’로 되어 있는데, 《서계집》에서는 이 경우 ‘急一作徐’의 형태로 표기하였다. 대본에 ‘一’ 자가 빠진 듯하므로 ‘一’ 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어느 곳 종소리 귀에 또렷이 들리는가 / 何處鍾聲偏到耳
서쪽 봉우리 절 안에 달 밝을 때라오 / 西峯寺裏月明時
오 년 만에야 청휘 대사 얼굴 알았나니 / 五年方識暉師面
달 보고 종소리 들으며 밤마다 생각노라 / 見月聞鍾夜夜思

세속에 이르지 않은 지 벌써 오래되었으니 / 不到塵中應已久
잠시 서계로 온 일 또한 잊기 어려워라 / 暫來溪上亦難忘
대사가 다른 산으로 가려 한다고 하니 / 聞師欲向他山去
한번 들러 초당에서 쉬는 것이 어떠하리 / 甁錫何妨歇草堂
서계집 제2권
 시(詩)○석천록 상(石泉錄上) 무신년(1668, 현종9)에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석천에 거처한 이후에 지은 것이다.
낙엽. 기암(畸庵)의 시에 차운하다.

높은 가지에서 잎새 하나 톡 떨어지더니 / 琤然一片隕高林
땅 가득 우수수 낙엽이 흩날리는구나 / 滿地紛紛已不禁
연못 속엔 겹겹의 그림자 텅 비었고 / 潭裏隨空重疊影
섬돌 가엔 짙은 그늘 사라졌어라 / 砌邊俄失淡濃陰
갈림길에서 이별하자니 정을 어이 견딜까 / 臨歧握手情何耐
시냇가에서 시를 적으니 한이 유독 깊어라 / 緣澗題詩恨獨深
다만 밤을 이어 다 날려 떨어질까 두려우니 / 只恐連宵飄落盡
위현이 다시 상음을 연주하지 말기를 / 危絃休更奏商音
제3연이 어떤 본에는 ‘가을 매미 이슬 삼키매 때가 속절없이 늦었고, 여인이 도랑 가에 서니 홀로 한이 깊어라.[玄蟬咽露時空晩 紅袖臨溝恨獨深]’로 되어 있다.

[주C-001]기암(畸庵) : 정홍명(鄭弘溟, 1582~1650)의 호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자용(子容), 또 다른 호는 삼치(三癡),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버지는 우의정 정철(鄭澈)이며, 송익필(宋翼弼)과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부제학, 대사성 등을 지냈다. 매우 총명하여 제자백가서에 두루 통하였으며 고문(古文)에도 밝았으나, 김장생의 영향으로 경전(經傳)을 으뜸으로 삼았고 예학에도 밝았다. 저서에 《기암집》, 《기옹만필(畸翁漫筆)》이 있다.
[주D-001]위현(危絃) : 팽팽한 현(絃)으로, 바짝 쪼여서 높은 소리가 나는 현악기의 줄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가을바람이 세차게 부는 소리를 뜻한다.
[주D-002]상음(商音) : 오음(五音)의 하나로, 상조(商調)를 위주로 한 슬프고 애절한 음악의 가락이다.

 

 서계집 제3권
 시(詩)○석천록 중(石泉錄中)
최 사간(崔司諫) 후상(後尙) 에 대한 만사


덧없는 세상에 부침하는 것이 한바탕 꿈이로되 / 浮世升沈夢一場
그대를 앎이 하도 난숙해 그리움이 깊다오 / 知君爛熟費思量
한가한 뜨락 저녁 참에 쉴 때면 인간의 지극함을 보았고 / 閑庭晩憇看人極
따뜻한 이불 아침에 잘 적에는 바쁜 객을 비웃었지 / 暖被朝眠笑客忙
필탁이 이웃 술을 훔친 것은 그 꾀가 절로 졸렬했으되 / 畢卓偸隣謀自拙
유령이 아내를 속인 것은 그 뜻이 오히려 고매했다네 / 劉伶賺婦意猶長
은대와 옥서를 아이들 일인 양 치부하더니 / 銀臺玉署兒曹事
홀로 풍륜을 몰아 광막한 하늘로 가셨구려 / 獨駕風輪廣莫鄕


 

[주C-001]최 사간(崔司諫) : 최후상(崔後尙, 1631~1680)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주경(周卿)이며,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의 아들이다. 1654년(효종5)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4년 춘당대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선발되었다가 예문관 검열을 거쳐 홍문관 응교에 이르렀다.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주D-001]필탁(畢卓)이 …… 것 : 필탁은 진(晉)나라 때 호무보지(胡毋輔之), 사곤(謝鯤), 완방(阮放), 양만(羊曼), 환이(桓彜), 완부(阮孚), 광일(光逸)과 함께 팔달(八達)로 일컬어지던 사람으로 예법(禮法)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날마다 청허담(淸虛談)을 나누며 술을 몹시 즐겼다. 한번은 이웃집에 술이 익은 것을 알고는 한밤중에 실컷 훔쳐 마시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잠들었다가 붙들려서 봉변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한다. 《晉書 卷49 畢卓列傳》 《小學 嘉言》
[주D-002]유령(劉伶)이 …… 것 : 유령은 진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술을 몹시 즐겼다. 아내가 술을 끊으라고 읍소하자, 유령이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끊을 수는 없다. 귀신에게 빌고 맹세를 해야겠으니, 주육을 마련해 달라.” 하였다. 주육을 마련해 주었더니 유령이 꿇어앉아서 빌기를, “하늘이 유령을 내어 술로 이름을 얻었기에, 한 번에 한 섬을 마시고 다섯 말로 해정(解酲)을 합니다. 부인의 말은 들을 것이 아닙니다.” 하고는 그 주육을 또 실컷 먹고 잔뜩 취했다고 한다. 술을 예찬한 〈주덕송(酒德頌)〉이 전한다. 《晉書 卷49 劉伶列傳》

서계집 제3권
 시(詩)○석천록 중(石泉錄中)
도성(都城)에 들어가며


십 년 동안 산림에서 편안하게 지내다가 / 十年林下棲蹤穩
하루아침에 허둥지둥 벼슬길에 나아가네 / 一日塵中逐影忙
우스워라 석천거사의 뜻이여 / 堪笑石泉居士意
종내엔 황량해지고 만 것이 아니랴 / 到頭無乃便荒涼


 

[주D-001]석천거사(石泉居士) : 서계의 별호이다. 양주(楊州) 석천에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자호한 것이다. 1703년(숙종29)에 《사변록(思辨錄)》과 관련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지목을 받고 문외출송(門外黜送)의 처분을 받아 옥과(玉果)로 원찬(遠竄)되었다가 이곳으로 돌아와 임종을 맞았다. 《西溪集 卷22 附錄 年譜》

 

 

서계집 제3권
 시(詩)○석천록 중(石泉錄中)
익릉(翼陵)에 올리는 만사


계액에 천 가지 복을 맞아들이고 / 桂掖千祥迓
초궁에 백 가지 예를 행하였도다 / 椒宮百禮將
밝음은 성명을 받들었고 / 竝明承日曜
부덕은 군덕을 짝했다오 / 合德配乾剛
경계를 올림은 문계에서 드러났고 / 進戒聞雞著
사치를 싫어함은 복련에서 드러났네 / 嫌奢服練彰
나라엔 경사가 흘러넘쳤고 / 八區流慶澤
삼전엔 기쁨이 극진했도다 / 三殿盡歡康
종사의 노래에 손뼉 칠 날 기다렸더니 / 佇抃斯螽詠
끝내 보적이 땅에 묻힘에 놀랐도다 / 終驚寶翟藏
아, 하늘이 돌보지 않으시거늘 / 嗚呼天不弔
뉘라 땅인들 가없다 생각할쏘냐 / 誰謂地無疆
궁촌의 백성들 함께 슬퍼하였고 / 窮谷同悲慕
성상께서도 절절히 애통해하셨네 / 重宸切慟傷
나들이 나가시듯 화장을 하시고 / 出游陳粉黛
먼 길 떠나시매 묘터를 잡았도다 / 卽遠卜陵岡
그윽한 능묘는 적막한데 / 寂寞玄閭閟
빛나는 옥책은 찬란하구나 / 揄揚玉冊光
오직 정고하고 전일한 곤범은 / 唯應貞壹則
만고토록 주강에 비견되리 / 萬古比周姜


 

[주C-001]익릉(翼陵) : 숙종의 비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의 능호이다. 1680년(숙종6)에 승하하여 고양(高陽)의 익릉에 장사 지냈다. 서오릉(西五陵) 가운데 하나이다.
[주D-001]계액(桂掖) : 왕후가 거처하는 궁전이다.
[주D-002]초궁(椒宮) : 왕후가 거처하는 집으로, 초방(椒房)이라고도 한다. 산초는 열매가 많이 열리므로 자손의 번성을 바라는 뜻에서 초궁이라 이름했다 한다.
[주D-003]문계(聞雞) : 닭 울음소리를 듣는다는 말이다. 《시경》 〈계명(雞鳴)〉에 “닭이 이미 울었으니 조정에 신하가 가득합니다 하니, 닭이 우는 것이 아니라 창승의 소리로다.[雞旣鳴矣 朝旣盈矣 匪雞則鳴 蒼蠅之聲]” 하였다. 이는 고대의 어진 왕비가 밤에 임금을 모시다가 날이 샐 무렵이면 임금을 깨워 정사에 최선을 다하라고 경계하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인경왕후가 계명의 경계를 다하였다는 의미이다.
[주D-004]복련(服練) : 거친 명주로 만든 대련복(大練服)을 입었다는 말이다.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황후인 명덕마황후(明德馬皇后)는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의 딸이다. 13세에 선발되어 태자궁(太子宮)에 들어와 아들을 두지 못해 뒷날의 장제(章帝)를 양자로 들여 친자식처럼 길렀다. 뒤에 왕후로 책봉되고 장제가 즉위한 후 황태후(皇太后)로 높여졌다. 매우 검소하여 언제나 대련복을 입고, 치마는 가장자리를 싸지 않았다고 한다. 《後漢書 卷10 明德馬皇后紀》
[주D-005]종사(螽斯)의 노래 : 자녀를 많이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종사(螽斯)〉에 “메뚜기가 많이 모였으니 마땅히 네 자손이 많겠구나.[螽斯羽 詵詵兮 宜爾子孫振振兮]” 하였는데, 집주(集註)에 “메뚜기는 한 번에 새끼를 99마리나 낳는다.” 하였다.
[주D-006]보적(寶翟) : 붉은 비단에 꿩 무늬를 수놓은 왕후의 옷을 말한다. 여기서는 인경왕후를 가리킨다.
[주D-007]주강(周姜) :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비이자 문왕(文王)의 조모(祖母)인 태강(太姜)을 말한다. 《시경》 〈사제(思齊)〉에 “공경을 다하는 태임이 문왕의 어머니이시니, 시모 주강께 효도하사 경실의 효부가 되시다.[思齊太任 文王之母 思媚周姜 京室之婦]” 하였다.

 

 서계집 제3권
 시(詩)○석천록 중(石泉錄中)
남 판서(南判書) 중휘(仲輝) 이성(二星) 에 대한 만사


예순의 화함을 잘 화하셨으니 / 善化六十化
쉰아홉 해가 모두 잘못된 것이로다
/ 五十九皆非
꿈은 어이하여 오랫동안 아니 깨나 / 夢奚久無覺
상은 응당 끝내 돌아감을 얻었네 / 喪應終得歸
현묘함의 뿌리는 물초에 오묘하고 / 玄根妙物初
지극한 승화는 일기를 민멸시키네
/ 至化泯一幾
더구나 세상 밖의 웅대함을 전하니 / 況傳世外鉅
자못 인간의 미미함과는 달라라 / 頗異人間微
금은의 누대처럼 웅장했고 / 滉盪金銀臺
일월의 빛처럼 찬란했어라 / 照曜日月輝
어찌 알랴 자부가 깊어 / 安知紫府深
절로 현비와 통하지 않을 줄 / 不自通玄扉
장과 단술은 옥처럼 맑고 / 瓊玉作漿醴
붉은 비단은 무지개 같네 / 霓羽蛻紫緋
고락은 곧 몹시 분명하니 / 苦樂乃甚辨
남면이야 어찌 바라리오 / 南面寧詎希
지상에 남은 이 몸은 / 顧此地上者
비루하여 경지 엿보지 못하네 / 鄙特未窺圻
못난 내가 다시 무얼 할까 / 區區更奚爲
돌아보매 유독 어긋남이 많았으니 / 撫己獨多違
젊은 날엔 종유하지 못했고 / 少日不可追
늙어서는 더욱 부끄러웠네 / 臨老增嗟欷
당시 스무 해를 끼쳐 주시어 / 當時垂廿載
모시며 서실에서 함께했었지 / 偃仰共書幃
논쟁의 숲과 변론의 동산에서 / 談藪與辯囿
분란을 풀거나 논박을 가했지 / 解紛或攻圍
조카들도 솥발처럼 우뚝하여 / 阿咸鼎足雄
우레 같은 논변 마구 날았지 / 霆雹交橫飛
온축한 포부를 마침 펼칠 수 있어 / 蓄之會能施
지난날 사간원에 벼슬하심을 보았지 / 昨見官紫薇
불쌍하다 이 사위 된 사람은 / 自憐坦腹郞
앙상하게 병들어 머리털도 듬성듬성 / 羸病髮疏稀
인사엔 언제나 희비가 있는 법 / 人事有悲喜
영욕은 천기에나 물어보아야지 / 盈虧問天機


[주C-001]남 판서(南判書) 중휘(仲輝) : 남이성(南二星, 1625~1683)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중휘, 호는 의졸(宜拙)이다.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예조 참판에 재직하면서 동지 겸 사은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 판서를 지냈다. 왕명을 받들어 어록(語錄)을 고교(考校)하여 《어록해 (語錄解)》를 찬하여 1669년(현종10) 현종에게 진정하였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서계에게는 처숙부가 된다.
[주D-001]예순의 …… 것이로다 : 거원(蘧瑗)은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현대부(賢大夫)이다. 그의 자가 백옥(伯玉)이므로 흔히 거백옥(蘧伯玉)이라고 부른다. 《장자(莊子)》 〈칙양(則陽)〉에 “거백옥은 나이 예순에 예순의 화를 하였다.[蘧伯玉行年六十而六十化]” 하였고,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 “나이 쉰에 사십구 년의 잘못됨을 알았다.[年五十而知四十九年非]”라고 하는 유명한 고사가 전해 온다.
[주D-002]상은 …… 얻었네 : 귀(歸)는 전귀(全歸)라는 말로, 부모님께서 온전히 물려주신 몸을 훼상함이 없이 온전히 돌아갔다는 의미이다. 증자(曾子)가 병이 심해졌을 때 제자들을 불러 “이불을 걷고 나의 발과 손을 보아라. 《시경》에 ‘전전긍긍하여,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고, 엷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라.[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 하였으니, 이제야 나는 이 몸을 훼상시킬까 하는 근심을 면했구나. 소자들아!” 하였다.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論語 泰伯》
[주D-003]현묘(玄妙)함의 …… 민멸시키네 : 현묘함의 뿌리란 도의 근원이고, 물초(物初)는 사물이 생성되는 시초이다. 지극한 승화는 죽음을 뜻하고 일기(一幾)는 일기(一期)와 같은 말로 사람의 일생을 뜻한다. 즉 우주의 운동 작용으로 사람이 태어났다 죽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주D-004]현비(玄扉) : 무덤의 문, 즉 저승과 통하는 문을 말한다.
[주D-005]사위 된 사람 : 원문의 탄복랑(坦腹郞)을 말한다. 서계 자신이 남이성(南二星)의 조카 사위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때 치감(郗鑒)이 왕도(王導)의 집안에서 사윗감을 고르려고 자신의 문생(門生)을 왕도의 집에 보냈더니, 다른 신랑감들은 모두 잘 보이려고 점잔을 빼고 몸가짐을 조심하였다. 그러나 왕희지(王羲之)만은 동상(東床)에서 배를 드러내고 태연히 누워 있었으므로 그 기개를 높이 사 사윗감으로 정했다고 한다. 《世說新語 雅量》

 

서계집 제3권
 시(詩)○석천록 중(石泉錄中)
속담 풀이 4수


까마귀 검고 백로가 희다고 / 烏黑鷺羽白
백로가 날아와 까마귀 비웃네 / 鷺來笑烏黑
백로야 웃지 마라 / 烏謝謂鷺言
나는 부럽지 않다 / 汝白吾不伏
내 깃털 검다지만 / 吾雖毛羽黑
속은 본디 하얗고 / 肉膚本潔白
네 깃털 희다지만 / 汝縱毛羽白
속은 외려 검어라 / 肉膚反陋黑
겉 다르고 속 다를 바에야 / 表裏各不同
속이 흰 것만 하겠느냐 / 寧如內潔白

가마 밑도 검고 솥 밑도 검어 / 釜底黑鼎底黑
솥 밑이 검다지만 가마도 희진 않으니 / 鼎底雖黑釜未白
가마 밑아 솥 밑 검다 웃지 마라 / 釜底莫笑鼎底黑
시꺼먼 검댕을 본디 누가 취했나 / 由來此醜誰所取
모두 장군이 배를 저버리지 않은 격일세 / 摠爲將軍不負腹

말 가는 데 소도 가니 / 馬亦行牛亦行
소가 느리고 말이 빠르다 한들 / 牛行雖遲馬行速
말이 가는 백리 길을 소도 간다네 / 馬行百里牛亦得
내 천천히 감세 그대 먼저 가게 / 牛言我後君且先
저녁에 여관 문 앞에서 만나세나 / 日暮期君店門前

비둘기야 센 척하지 마라 / 斑鳩子爾莫强
육격을 채 못다 길렀으니 / 養來六翮猶未齊
어찌 능히 앞산 등성 넘어가나 / 那能便越前山岡
인생살이 모름지기 분수를 알아야지 / 人生分量須自知
어려운 일 닥치면 후회해도 늦는 걸 / 事到難時悔已遲


[주D-001]장군이 …… 격 : 송(宋)나라 태위(太尉)인 당진(黨進)은 장군으로서 평소 지략이 부족했다. 하루는 당진이 배불리 먹고 배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너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였다. 이에 어떤 가기(家妓)가 말하기를 “장군은 이 배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이 배는 장군을 저버렸으니, 조금도 지략을 낸 적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夜航船》 여기서는 가마나 솥 모두 배만 불룩할 뿐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으므로 시꺼멓다는 비난은 모두 자신이 초래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주D-002]육격(六翮) : 튼튼한 날개를 뜻하는 말이다. 공중에 높이 나는 새는 여섯 개의 강한 깃털을 지니고 있다 한다.

 

 서계집 제3권
 시(詩)○석천록 중(石泉錄中)
삼종제(三從弟) 영월 군수(寧越郡守) 세장(世樟) 에 대한 만사


지난해 며느리 죽고 손자도 죽더니 / 去年婦沒孫折閼
금년엔 자신도 가고 딸도 요절했네 / 今年身逝女夭殞
이태에 걸쳐 온 집안 거의 다 죽었도다 / 兩年闔門死略盡
창천이여 어이하여 이다지도 잔인한가 / 蒼天胡爲此偏忍
어릴 적부터 글 배웠으나 보람도 없고 / 自少攻書不償勤
머리털 다 세어서야 겨우 말직 얻었지 / 纔得一名鬢變鬒
외진 고을에 벼슬하면서도 늘 웃으며 지냈고 / 遠郡棲棲常自笑
요진엔 끌어 줄 이 아무도 없었네 / 要津寂寂誰相引
한적함 좋아하고 졸박함 지킴이 천성이기에 / 愛閑守拙性所便
풍진에서 영걸들 좇는 것에 게을렀었지 / 懶向風塵逐鷹隼
산협의 고을살이도 그냥저냥 지내며 / 峽中佩符亦聊爾
복령을 먹으며 목숨 늘리려 하였지 / 要啖茯苓延壽紀
일찍이 석청을 구해 내게 부쳐 왔고 / 曾求崖蜜寄我來
내게 합약을 보내와 노년을 견뎠지 / 遣吾合藥扶衰齒
슬프도다 한평생이 흐르는 냇물 같으니 / 堪悲百歲同逝川
갑자기 한 차례 병으로 일어나지 못했다지 / 奄忽一疾聞不起
길이 멀어 달려가 곡할 방법이 없으매 / 道遙無由往哭之
상여가 고향으로 올 날만 손꼽고 있었는데 / 計日喪來近故里
널을 실은 배 한 척 강을 따라 내려와 / 孤舟載柩下江流
동쪽 나루에서 기슭에 대고 동주로 가 버렸네 / 東津傅岸歸東州
내가 소식을 받은 것이 하루 늦는 바람에 / 我得報書遲一日
문 앞을 지나가도 몰랐으니 유명에 부끄럽도다 / 過門不省慙冥幽
남들도 오히려 포복하여 곡하거늘 / 念在凡民尙匍匐
형제 항렬에 영원히 아득해짐을 참으랴 / 忍同行路終悠悠
그대와 동갑인데 그대 가 버렸으니 / 與君同甲君已矣
내가 살아 있은들 죽은 거나 진배없지 / 雖吾存者理應休
피눈물로 가슴 적시며 돌아가는 구름 바라보노라니 / 沾膺血淚看歸雲
백발로 쓸쓸하게 홀로 남았구나 / 獨自蕭條餘白頭


[주C-001]영월 군수(寧越郡守) : 박세장(朴世樟, 1629~1687)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여택(汝澤)이다.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1686년(숙종12) 영월 군수가 되었다가 이듬해 관아에서 순직하였다. 《西溪集 卷14 掌令朴君墓碣》
[주D-001]요진(要津) : 나루는 물을 건너는 곳이므로 사환(仕宦)을 거쳐 중요한 지위에 있는 자를 비유한 것이다. 〈고시(古詩)〉에, “어찌 고족을 채찍질하여, 먼저 요로의 나루를 차지하지 못했는가.[何不策高足 先據要路津]” 하였다. 《文選》
[주D-002]합약(合藥) : 여러 약제를 배합하여 만든 약이다.

 

서계집 제3권
 시(詩)○후북정록(後北征錄) 무진년(1688, 숙종14) 봄에 짓다. ○ 형의 아들 판서공 박태상(朴泰尙)이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감영에서 선대의 시호를 맞았다. 선생께서 그곳에 갔을 때 지은 것이다.
박태보의 시 〈산을 나오다[出山]〉에 차운하다


무슨 일로 떠나는 걸음 이리 더딘가 / 問余何事去遲遲
옆 사람에게 바보로 비쳐질까 부끄럽구나 / 慙愧傍人怪得癡
화산의 삼봉이 절경이 아니더냐 / 西嶽三峯非絶好
반랑이 산을 떠날 때를 보아라 / 試看潘閬背山時


[주B-001]박태상(朴泰尙) : 1636~1696.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행(士行), 호는 만휴당(萬休堂)으로 우승지 박세견(朴世堅)의 아들이다. 홍문관 제학, 세자우빈객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으로 중궁복위 옥책문(中宮復位玉冊文)을 찬진하였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687년(숙종13)과 1688년 사이에 정쟁 때문에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 《明齋遺稿 卷41 吏曹判書朴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36輯》

 

서계집 제3권
 시(詩)○후북정록(後北征錄) 무진년(1688, 숙종14) 봄에 짓다. ○ 형의 아들 판서공 박태상(朴泰尙)이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감영에서 선대의 시호를 맞았다. 선생께서 그곳에 갔을 때 지은 것이다.
수락산(水落山)을 바라보며


몇 봉우리 아득하게 구름 사이로 들어가 / 數峯迢遞入雲間
푸른 산 저편에 운모가 산뜻하게 반짝이네 / 雲母輕明隔翠鬟
우스워라 노년에 눈이 온통 흐릿해 / 自笑老年全眼錯
사람 시켜 물어야겠네 무슨 산이냐고 / 倩人要問是何山


[주B-001]박태상(朴泰尙) : 1636~1696.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행(士行), 호는 만휴당(萬休堂)으로 우승지 박세견(朴世堅)의 아들이다. 홍문관 제학, 세자우빈객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으로 중궁복위 옥책문(中宮復位玉冊文)을 찬진하였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687년(숙종13)과 1688년 사이에 정쟁 때문에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 《明齋遺稿 卷41 吏曹判書朴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36輯》

 서계집 제4권
 시(詩)○석천록 하(石泉錄下)
재종형(再從兄) 박세훈(朴世塤) 에 대한 만사


서리같이 수염 허연 내 나이 예순에 / 吾年六十鬢如霜
종형제들 많지도 않은데 또 형을 곡하네 / 群從非多又哭亡
목을 축인 술잔이 적은 것도 한스러운데 / 已恨酒曾沾口少
몸을 덮은 이불이 짧은 것이 가련하네
/ 還憐衾不掩身長
간두의 옛 낚시는 바람에 줄이 끊어졌고 / 竿頭舊釣風絲斷
강가의 새 정자는 빗속에 풀이 황폐하네 / 江上新亭雨草荒
작은 비석도 없이 산골짝에 장례하니 / 葬寄峽山無短碣
누가 있어 이분이 황향임을 알리오 / 誰知扇枕是黃香


[주D-001]목을 …… 가련하네 : 생전에 술을 좋아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많이 마시지 못하였으며, 사후에 시신을 덮을 이불조차 변변찮았다는 말이다.
[주D-002]황향(黃香) : 후한(後漢)의 황향은 자가 문강(文强)으로 강하(江夏) 안륙(安陸) 사람이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만을 봉양하였는데, 여름에는 베개와 잠자리에 부채질하여 서늘하게 하고 겨울에는 몸으로 이불을 따뜻하게 하여 어릴 적부터 효성으로 이름났으며, 경전에도 박학하여 ‘천하무쌍 강하황동(天下無雙江夏黃童)’이라 일컬어졌다. 《後漢書 卷80上 文苑列傳 黃香》 박세훈의 효성이 지극하였다는 말이다.

 서계집 제4권
 시(詩)○석천록 하(石泉錄下)
운로(雲路) 상공(相公)이 언사(言事)로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되다


연영에서 면대하였다고 저녁에 들었는데 / 夕聞丞相對延英
아침에 압송되어 북쪽을 향해 떠나는구나 / 禁押朝來向北行
격렬한 곧은 말 만승 천자를 놀라게 하고 / 激烈危言驚萬乘
쓸쓸한 외진 바다 외로운 성을 곁하였네 / 蕭條窮海傍孤城
뉘라서 대궐에 들어 의심을 풀어 주기를 생각할까 / 何人叩陛思氷釋
명주는 마음을 비우고 목숨 건 간쟁을 기다리리 / 明主虛襟待血爭
오늘날 조정의 신하는 모두가 단단하니 / 今日在廷皆斷斷
끝내 현자를 버리는 이름을 감수하게 하겠는가 / 肯令終受棄賢名


 

[주C-001]운로(雲路) …… 위리안치되다 : 운로는 남구만(南九萬)의 자이다. 영의정으로 1688년(숙종14)에 장 귀인(張貴人)에 대해 간언한 박세채(朴世采)를 변호하고,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 전평군(全坪君) 이곽(李漷)에 대해 간언하다가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되었다.
[주D-001]연영(延英) : 당(唐)나라 때의 궁전인 연영전(延英殿)으로 연영문(延迎門) 안에 있었다. 정례적인 때가 아닌 경우 천자가 연영전에서 대신을 소대(召對)하였다 한다. 여기서는 궁궐을 가리킨다.
[주D-002]단단(斷斷) : 마음이 정성스럽고 전일(專一)한 모양을 형용한 말이다. 《대학장구》 전 10장에 “만일 어떤 한 신하가 단단할 뿐 다른 기량은 없으나 그 마음이 곱고 고와 남을 용납함이 있는 듯하여[若有一个臣 斷斷兮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라고 한 말이 보인다

서계집 제4권
 시(詩)○석천록 하(石泉錄下)
휘릉(徽陵)에 대한 만사


중흥의 아름다운 덕과 짝이 맞으니 / 匹合中興美
상서로운 일이 노래에 실려 있네 / 休祥載頌謠
사기를 넘도록 영광되이 임했으며 / 光臨踰四紀
삼조에 걸쳐 지극한 봉양을 받았네 / 至養備三朝
성대한 정렬은 임사보다 뛰어나고 / 盛烈超任姒
신묘한 공적은 요순과 짝할 정도라오 / 神功配舜堯
자생의 은덕이 더욱 두터우니 / 資生德彌厚
보답을 받을 이치 분명하다네 / 受報理斯昭
신하들은 헌수하며 손뼉을 치고 / 上壽臣工抃
기로들은 추은을 기대하였네 / 推恩耆耄翹
육괴가 멀리 떠날 줄 어찌 알았으리 / 那知六騩遠
만년토록 장수하기를 축수하였다오 / 方祝萬年遙
슬피 사모함은 궁곡의 백성들도 똑같고 / 悲慕同窮谷
따르고 싶은 마음은 구천에 간절하네 / 攀追切九霄
영의를 조석으로 배설하고 / 靈衣晨暮設
보책을 옥돌에 아로새기네 / 寶冊玉珉雕
강전은 오래도록 공허하고 / 絳殿長虛闃
현궁은 영원토록 적막하리라 / 玄宮永寂寥
뉘라서 동사의 붓을 잡을까 / 誰持彤史筆
왕후의 교화를 묘사하기 어려우리 / 陰化想難描


 

[주C-001]휘릉(徽陵) :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의 능이다. 본관은 양주(楊州), 아버지는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이다. 1638년(인조16)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688년(숙종14)에 승하하여 양주의 휘릉에 장례하였다.
[주D-001]사기(四紀)를 …… 임했으며 : 왕비로 책봉된 뒤 48년이 넘도록 살았다는 말이다. 12년이 일기(一紀)이니, 사기는 곧 48년이다.
[주D-002]삼조(三朝)에 …… 받았네 : 왕비로 책봉된 뒤 효종, 현종, 숙종대에 이르기까지 봉양을 받았다는 말이다.
[주D-003]임사(任姒) :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과 무왕(武王)의 어머니 태사(太姒)의 합칭으로, 예부터 이를 어진 후비의 전범으로 일컫는다.
[주D-004]자생(資生) : 자뢰하여 생겨남을 말한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단(彖)〉에 “지극하다, 곤의 원이여. 만물이 의뢰하여 생겨나도다.[至哉坤元 萬物資生]”라고 하였다.
[주D-005]육괴(六騩) : 여섯 필의 괴마(騩馬)로, 왕비를 가리킨다. 《진서(晉書)》 권19 〈예지 상(禮志上)〉에, “황후는 운모(雲母)를 유화(油畫)한 안거(安車)를 타고 여섯 필의 괴마가 끌었다.” 하였다.
[주D-006]따르고 …… 간절하네 :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黃帝)가 형산(荊山) 아래에서 솥[鼎]을 주조하여 완성하자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를 태우고 승천하였는데, 이때 신하와 후궁 70여 명이 용을 타고 함께 하늘로 올라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용의 수염을 잡으니 수염이 뽑혀 떨어지면서 황제의 활과 검(劍)이 함께 떨어졌다. 이에 남은 백성들은 수염이며 활과 검을 끌어안고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었다 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주D-007]강전(絳殿) : 붉은 궁전으로, 왕비의 처소를 가리킨다.
[주D-008]현궁(玄宮) : 어두운 집으로, 군왕의 무덤을 가리킨다.
[주D-009]동사(彤史) : 고대 궁중의 여관(女官)으로, 궁중의 기거 따위를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서계집 제4권
 시(詩)○석천록 하(石泉錄下)
의령(宜寧) 상국(相國)이 호중(湖中)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2수

 서계집 제4권
 시(詩)○석천록 하(石泉錄下)
약천(藥泉)의 시에 차운하여 신 상인(信上人)에게 주다

회운동은 따로 하나의 별천지니 / 晦雲也自一乾坤
솔바람 서늘하고 꽃기운 따뜻하다오 / 松籟涼爭花氣溫
고승이 늘 석장을 걸어 두기에 알맞으니 / 只合高僧常掛錫
속사들 멀리서 수레를 돌리게 해야 하리 / 須敎俗士遠回轅

[주D-001]회운동(晦雲洞) : 수락산(水落山) 서쪽에 있다.
서계집 제4권
 시(詩)○석천록 하(石泉錄下)
최방(崔汸)에 대한 만사

산속에서 멀리 읍내 거처를 바라보며 / 林棲遙望邑中居
때때로 내 집에 오시던 지난날을 생각하네 / 憶昨時蒙枉弊廬
담소를 못 나눈 지가 몇 해이던가 / 不接笑談年幾籥
갑자기 떠나셨다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구려 / 忽聞傾逝淚盈裾
선조의 아름다운 명성 끝나기도 전에 / 前賢未覺芬芳歇
자손들이 가업을 훌륭하게 이었다오 / 諸子猶看緖業餘
나이는 같건만 생사가 갈리니 / 齒髮相同異生死
옛정은 이제 무덤에 막혔구려 / 舊情從此隔玄閭
 서계집 제4권
 시(詩)○석천록 하(石泉錄下)
석림암(石林庵)의 승 묘찰(妙察)이 누차 조르기에 이 시를 지어 주다

곡기 끊으려니 공부 익지 않았고 / 絶粒功未熟
신을 삼으려니 흉년을 만났네 / 捆屨遇飢年
다만 채륜의 기술 배워 / 聊學蔡倫技
짐짓 문자의 인연을 붙이네
/ 故黏文字緣

[주C-001]석림암(石林庵) : 지금의 수락산(水落山) 석림사(石林寺)를 말한다. 1671년(현종12) 석현(錫賢)과 그의 제자 치흠(致欽)이 창건하였다. 서계가 〈석림암기(石林庵記)〉와 〈석림암상량문(石林庵上梁文)〉을 지어 주었고, 뒤에 서계의 아들 박태보(朴泰輔)가 김시습(金時習)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중창하였다.
[주D-001]신을 …… 만났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허행(許行)의 무리들이 신을 삼고 자리를 짜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곧 신을 삼는다는 것은 자신의 본업에 전념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산승 묘찰(妙察)이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하며 수행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즉 신을 삼아 길을 떠나려 해도 흉년이 든 해라 볏짚이 없어 미투리를 삼을 수 없다는 뜻이다.
[주D-002]채륜(蔡倫)의 …… 붙이네 : 석림암에서 종이를 만들어 그 종이를 가지고 서계에게 시를 써 달라고 채근했다는 의미이다

 

 

 서계집 제4권
 시(詩)○석천록 하(石泉錄下)
약천(藥泉) 상공이 파담(琶潭)으로 돌아가려 하다 2수


여러 조정 섬길 제 은총이 대단했으니 / 寵辱頻驚事累朝
정신은 여전하건만 귀밑털은 세었구나 / 精神不減鬢毛凋
문득 대궐 사직하고 전원으로 돌아가니 / 却辭丹陛田園去
홍곡이 표연히 푸른 하늘에 있구나 / 鴻鵠飄然在碧霄

어렸을 적부터 서로 친하여 / 自從稚齒卽相親
예순 해를 만났다 헤어졌다 / 六十年間聚散頻
오늘 서계에서 또 이별하노니 / 今日又來溪上別
다시 만날 날 그 언제일까 / 不知重會在何辰


 

[주C-001]파담(琶潭) : 남구만(南九萬)의 퇴거지인 용인의 비파담(琵琶潭)을 가리킨다. 비파소(琵琶沼)라고도 불린다. 현재 용인시(龍仁市) 처인구(處仁區) 모현면(慕賢面) 갈담리(葛潭里)에 있다.
[주D-001]홍곡(鴻鵠)이 …… 있구나 : 홍곡은 상산사호(商山四皓)처럼 온 나라의 중망을 받는 큰 인물로, 전하여 세자를 보좌할 우익(羽翼)의 뜻으로 쓴 말이다. 한 고조(漢高祖)가 여후(呂后)가 낳은 태자를 폐하고 척 부인(戚夫人)이 낳은 여의(如意)로 바꾸려 하였다. 이때 동원공(東園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ㆍ하황공(夏黃公)이 여후가 낳은 태자를 끝까지 보호하여 바꾸지 못하게 하니, 한 고조가 척 부인을 위로하여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홍곡이 높이 날면 대번에 천리를 가니, 우격이 이미 이루어지면 사해를 횡단하지. 사해를 횡단하니 어찌할 수 없도다.[鴻鵠高飛 一擧千里 羽翮已就 橫絶四海 橫絶四海 當可奈何]” 《史記 卷55 留侯世家》 당시 연잉군(延礽君)을 세제(世弟)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에 맞서 남구만이 희빈(禧嬪) 장씨(張氏)와 세자를 보호하려 하였기 때문에 이 고사를 끌어 쓴 것이다. 1696년(숙종22) 희빈 장씨의 사사가 결정되고 남구만은 용인의 비파담(琵琶潭)으로 퇴거한다. 1698년 1월에 서울에 들어와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뒤에 치사(致仕)를 청하고 다시 비파담으로 돌아가는데 이 시는 이 무렵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서계집 제4권
 시(詩)○석천록 하(石泉錄下)
윤군(尹君) 계흥(繼興) 에 대한 만사 3수

무덤가에 계수나무는 빨리 자라겠지만 / 桂生墳上應無日
산중에 꽃 피는 것은 봄이 되어야겠지 / 花發山中定及春
서글피 시내에 임하매 초당은 좋건만 / 怊悵臨溪草堂好
한가로이 읊조리며 두건 젖혀 쓴 사람 다신 없으리 / 閑吟不復岸巾人

이원이 일찍이 반곡에서 살았지만 / 李愿曾亦棲盤谷
끝내 산신령이 저버린 마음 비웃었네
/ 終使山靈笑負心
어이 같으랴 당년에 송아지 안고 들어가 / 何似當年抱犢入
돌아간 뒤로 무덤이 더욱 적적한 것과 / 沒來營兆更深深

그 옛날 동천의 아름다운 놀이에 초대받았을 때 / 洞裏淸遊昔見招
시냇가 반석에 앉으매 흥이 유난히 많았지 / 臨流坐石興偏饒
뉘 알았으랴 아름다운 일 끝내 쓸쓸해질 줄 / 誰知勝跡終蕭索
빈산이 더욱 적막해짐을 어이할 수 없네 / 無那空山更寂寥

[주D-001]이원(李愿)이 …… 비웃었네 : 이원은 당(唐)나라 임담(臨潭) 사람으로 서평왕(西平王) 이성(李晟)의 아들이다. 이원이 벼슬에서 물러나 태항산(太行山) 남쪽 반곡(盤谷)에 은거하려 하자, 한유(韓愈)가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를 주어 이별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원은 고관으로서 세 번이나 절도사를 지내고, 여악(女樂)을 좋아하고 사치를 즐겼으며 도박에 빠진 인물로서 은거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황탄한 생활과 사치로 패가망신하여 세인의 비웃음을 샀다. 《古文眞寶後集 送李愿歸盤谷序 小序》
[주D-002]송아지 안고 들어가 : 근심과 걱정이 없는 복지(福地)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구천을 뜻한다. 제 환공(齊桓公)이 한 번은 사슴을 쫓아 산골짜기에 들어갔다가 한 노인에게 지명을 물으니 우공(愚公)의 골짜기라 하였다. 그 산마루에 평탄한 분지(盆地)가 있어 난리 때에 피란민이 송아지를 안고 올라가 화를 모면했으므로 포독복지(抱犢福地)라 하였다. 《太平御覽》

약천집 제27권
제문(祭文)
서계(西溪) 박형(朴兄)에 대한 제문

계미년 9월 갑진삭 16일 기미에 부제(婦弟)인 의령 남구만은 자형(姊兄)인 서계 박공(朴公)의 부음을 멀리서 듣고 삼가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보내어 영연(靈筵)에 올리며 제문을 고합니다.

이 아우는 형과 / 維弟與兄
나이는 같으나 달이 늦으며 / 年同月後
또 저의 누님이 / 且我之姊
형에게 시집가 아내가 되었으니 / 歸兄爲婦
정의(情誼)는 형제와 같고 / 情比天倫
의리는 존경하는 벗과 같았습니다 / 義則畏友
약관 시절에 종유하여 / 勝冠從游
이제 백발에 이르니 / 今至白首
어질고 미련함은 비록 다르나 / 賢愚雖懸
서로 정은 친하였습니다 / 相與則厚
형은 일찍 용퇴하여 / 兄早勇退
세속을 초탈하였는데 / 超脫科臼
이 아우는 명예와 이익을 탐하여 / 弟耽名利
진세에 매몰되었으니 / 乾沒塵垢
높은 풍도를 우러러볼 때마다 / 每仰高風
더욱 나의 추한 모습 느꼈습니다 / 益覺我醜
지난번 죄를 받고 귀양 갔다가 / 頃從罪謫
석방되어 전원으로 돌아오니 / 放還畎畆
산천이 멀리 막혀 / 山川隔遠
그리운 생각 간절하였습니다 / 戀思紛糾
서로 만나기를 어찌 바라리오 / 會面何望
소식 또한 끊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 阻音亦久
세상일이 다단하여 / 世事多端
별별 일이 다 있었습니다 / 靡所不有
어이하여 세상 밖에 있는데 / 胡處物表
마침내 많은 구설수를 듣는단 말입니까 / 乃增多口
하늘과 인간 중에 / 於天於人
어디와 합하고 어디와 합하지 않았습니까 / 孰畸孰偶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 / 不得其解
장차 누구에게 묻겠습니까 / 將問誰某
그러나 밖에서 이르는 것은 / 然於外至
이미 밀치고 받지 않았습니다 / 旣擠不受
본래 얻고 잃음이 없으니 / 本無得喪
어찌 좋고 나쁨이 있겠습니까 / 安有休咎
병환을 막 걱정하고 있었는데 / 方憂美疢
부음이 손에 이르니 / 赴書及手
아마도 이 세상을 슬퍼하여 / 豈悲斯俗
사는 것을 구차하게 여겨서입니까 / 謂生爲苟
백 세에 미치지 못하니 / 未及百年
어찌 장수했다고 말하겠습니까 / 何足曰壽
이 아우는 잔약하고 병들어 / 念弟孱病
날로 노쇠함에 이르니 / 日就摧朽
갈 날이 장차 임박하여 / 逝將朝暮
형을 좌우에서 따르리다 / 隨兄左右
이로써 스스로 위로하며 / 用此自慰
서글픈 마음 달랩니다 / 不令心剖
멀리서 제문을 봉함하여 / 遙封誄文
닭과 술을 올리며 / 副以雞酒
계당을 바라보고 / 瞻望溪堂
한 종을 절하여 보냅니다 / 拜送一走
말은 이에 그치나 / 言則止此
뜻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 意不可斗
약천집 제27권
제문(祭文)
다시 서계를 제사한 글

계미년 10월 계유삭 18일 경인에 부제인 의령 남구만은 멀리서 자형인 서계 박공의 빈소(殯所)를 열 날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다시 닭과 술을 올려 영결하는 슬픔을 다하고 제문을 고합니다.

사람의 삶은 / 人之生也
죽음과 서로 붙어 있으니 / 與死相離
혹 지하에서 / 或冀泉下
다시 서로 만날 날이 있기를 기약합니다 / 更有前期
함께 살았을 때에도 / 方其俱生
어긋남이 많았는데 / 亦多參差
하물며 다시 함께 죽더라도 / 况復同死
어찌 서로 따르리라 보장하겠습니까 / 安保追隨
가령 그렇다 해도 / 藉令其然
어찌 반드시 알겠습니까 / 其可必知
만약이라는 말은 / 假設之言
다만 슬픔을 위로할 뿐입니다 / 秪以慰悲
지난번 제문을 지어 / 前者操文
형에게 고하기를 / 告兄有辭
스스로 죽음이 임박하여 / 自謂朝夕
서로 만나 볼 날이 멀지 않다고 하였는데 / 相見不遲
반복하여 생각해 보니 / 念之反覆
또한 그러할까 의심스럽습니다 / 亦有然疑
살아서는 이미 저와 같았고 / 生旣已矣
죽어서 또 이와 같으리니 / 死又若斯
아득한 이 작별 / 茫茫此別
두 번 만날 기약이 없습니다 / 再逢無時
이로써 슬픔을 생각하면 / 以此思哀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 寧有其涯
조재하는 저녁에 / 祖載之夕
유지를 부여잡지 못하고 / 未攀柳池
하관하는 날에 / 下壙之日
상여 줄을 끌지 못하였습니다 / 未牽繂碑
천 리 멀리서 제문을 봉함하여 / 緘言千里
닭 한 마리와 술 한 잔을 올리니 / 隻雞一巵
긴 회포를 부침이 / 長懷所寄
오직 여기에 있다오 / 唯在于玆

[주D-001]조재(祖載) : 조(祖)는 상례(喪禮)에 발인(發靷)하기 전에 지내는 조전(祖奠)을 이르고, 재(載)는 관(棺)을 상여에 실음을 이른다.
[주D-002]유지(柳池) : 유(柳)는 유거(柳車)로 장례 때에 사용하는 수레이며, 지(池)는 영구(靈柩)에 사용하는 장식품으로 대나무를 엮어 채롱처럼 만든다.

 

西堂私載卷之四
 
淸風亭宴遊記 a_186_240a


孟子曰。聞伯夷之風者。頑夫廉懦夫有立志。又曰。伯夷聖之淸者。堯舜周公孔子。皆古之大聖人也。堯舜周公孔子之後。堯舜周公孔子。此堯舜周公孔子之無所以爲萬古186_240b 一堯舜周公孔子也。設令後之人。德如堯舜。學如周公孔子。則以堯舜周公孔子而並稱之。不亦宜乎。彼伯夷者。亦萬古一伯夷也。聞伯夷之風者。猶足令懦者立而頑者廉。設令人有伯夷之所能爲而能爲之者。是亦伯夷已。人之慕之。其將如何耶。夫三代以前。人物衆矣。而其淸操高節。獨有一伯夷而已焉。則况能於三代之下一偏邦之中。以伯夷心爲心。卓乎其不可及者。可不謂之今之伯夷乎。昔我光廟龍興於潛邸也。虎奮之士。翊戴之佐。孰非端宗臣也。而終皆啚麟閣而列鼎享。成謹甫五六人。獨抗義而磔而死。然彼猶有必死之責。若東峰者。特一編氓。乃於186_240c 千萬人中捨身以立慬。夫樂利而違害。乃恒人之情。彼東峰亦豈不計之熟也。惟以爲綱常不可墜也。義理不可泯也。凜乎秋霜之氣。欝然蟠其胷腹。輪囷而不自制焉。遂佯狂而去之。人有室家之樂。而我則棄之如弊屣。人有軒冕之榮。而我則望望焉若凂已。此東峰之所以爲伯夷之淸者也。噫。去伯夷今幾千年矣。雖三尺童子。皆莫不聞其名。而慕其風。聞首陽二字。颯爽如淸飆入懷。至以其高歌採蕨之形。摸畫於壁上者有之。獨於數百年東峰之事。忽視而汎聽。甚矣。人之好古而遺今。如是哉。庚申歲。西溪朴公就東峰舊遊之所。營起一小院。以奉其啚像。俾春秋牲酒186_240d 以薦之。於是幾滅之跡。復煥於世。而惟其處地深僻。齋舍低窄。過者無登望之樂。居者無遊覽之勝。密邇新庙。戴襲遺風。盖無其所。士友齗齗。咸以爲不可無亭於其傍也。於是。任君彦甫及余二人。始發論。以今己酉初秋。謀搆一小閣於前崗之稍高處。月餘而功告訖。七八章甫。與之宴以落之。亭下川流。激激而逝。無一點塵埃氣。諸人醉後濯面。爽然而覺益淸矣。予樂而語之曰。流之潔潔無塵。其如東峰之淸者乎。抑首陽之餘流歟。少焉。山風自樹間生。醉夫迎之。不覺襟懷洒然。予又樂而起立曰。風之淸兮。來東峰之高風者耶。風之高兮。接首陽之淸風者耶。於是。名其亭186_241a淸風亭。遂爲之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