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군(府君)은 휘(諱)가 증(拯)이고 자는 자인(子仁)이며, 처음의 자는 인경(仁卿)이다. 중부(仲父) 동토(童土
윤순거(尹舜擧)) 선생이 ‘명재(明齋)’라는 두 글자를 손수 써서 주었던 것을 배우는 자들이 그대로 명칭으로 삼았다.
윤씨(尹氏)는 선계(先系)가 파평현(坡平縣)에서 나왔으니, 고려의 벽상공신(壁上功臣) 휘 신달(莘達)이 바로 시조(始祖)이다. 몇 대를 내려와서 휘 관(瓘)은 평융 좌리(平戎佐理)로 큰 공훈을 드러내었는데, 군중(軍中)에서도 항상 오경(五經)을 지니고 있었다. 영평백(鈴平伯)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이분이 동평장사(同平章事)를 지내고 시호가 문강(文康)인 휘 언이(彦頤)를 낳았다. 이로부터 대대로 명성과 덕망을 갖춘 사람이 배출되었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휘 곤(坤)이 태종(太宗)을 섬겨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서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으니, 시호가 소정(昭靖)이다. 그로부터 4대손이 되는 휘 탁(倬)은 관직이 대사성에 이르렀는데, 중종 기묘년(1519, 중종14) 연간에 경학(經學)으로 성균관을 오랫동안 관장하였다. 3세를 내려오면 휘 창세(昌世)에 이르게 되니, 바로 부군의 증조로서 이조 참판에 추증(追贈)되었다. 지극한 성품과 뛰어난 행실이 있었으니, 일이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지문(誌文)에 실려 있다. 조부는 휘가 황(煌)으로, 대사간을 역임하였고 호는 팔송(八松)이다. 선을 좋아하고 행실이 독실하였으며, 굳세고 강직한 인품의 소유자로서 큰 절개가 있었다. 인조 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여 누차 상소하여 힘껏 화의(和議)를 배척하였다. 김 문정공이 또한 그 묘지명을 지었다. 뒤에 특별히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내렸다.
고(考)는 휘가 선거(宣擧)인데, 병자년(1636, 인조14)ㆍ정축년(1637) 이후에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며 정학(正學)을 체득하고 대의를 밝혀 우뚝이 사문(斯文)과 세도(世道)의 비중 있는 인물이 되었다. 효종조와 현종조에 누차 예(禮)를 다해 징소(徵召)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뒤에 특별히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경(文敬)으로 내렸다. 배우는 자들이 노서(魯西) 선생이라 일컬었다.
비(妣)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생원(生員) 휘 장백(長白)의 따님이다. 바른 성정과 빼어난 재능을 갖추었고 경사(經史)를 환히 통달하였으며 옛날 열녀의 기풍이 있었는데, 강도(江都)의 난리에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
부군은 숭정(崇禎) 2년(1629, 인조7) 기사 5월 28일에 한양의 정선방(貞善坊)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무게 있고 기량(器量)을 타고나서 기쁨과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고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않았다. 7, 8세 때 마침 집안에 존장(尊長)이 없어서 조모 성씨(成氏) 부인이 여러 손자들에게 가묘(家廟)의 참례(參禮)를 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참신(參神)이 끝나자마자 여러 아이들이 갑자기 떼를 지어 웃어 댔지만 부군은 혼자 단정히 두 손을 마주 잡고 용모를 바르게 한 채 태도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성씨 부인이 이를 보고 팔송공(八松公
윤황(尹煌))에게 고하기를,
“이 아이는 특별한 아이입니다.”
하였다.
정축년(1637) 1월에 병화(兵禍)를 피해 강도에 있었는데, 성이 함락되자 이씨(李氏) 부인이 순절(殉節)하였다. 부군이 자씨(姊氏)와 함께 여종을 데리고 직접 관렴(棺殮)을 살피고 손수 수의(壽衣)를 정제하여 살고 있던 집의 대청 아래에 가매장하고, 흙을 모아 수북하게 덮고 돌 여덟 개를 사방 모퉁이에 묻고 가운데 숯을 뿌려서 표시하였다. 그런 뒤에 곡하며 작별을 고하고 떠났으니, 차분히 대처한 것이 성인과도 같았다. 이때 부군은 9세였고 자씨는 10세였다.
그러고는 모두 오랑캐에게 함락되었는데, 부군이 초혼(招魂)한 모시 적삼을 등에 지고서 한 달이 되도록 끝내 잃어버리지 않아 그것으로 혼백(魂帛) 세우는 예(禮)를 행하였다. 어지러운 적진(敵陣)으로 들어가게 되자 족보를 적은 작은 첩자(帖子)를 꺼내어 자씨에게 주면서,
“누이는 여자이니, 불행하게 서로 헤어지게 되면 이걸로 징표를 삼도록 하오.”
하였다. 뒤에 과연 서로 헤어지게 되어 자씨가 매번 우리나라 사람에게 보첩(譜帖)을 펼쳐 보이며 하소연하니, 마침내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속환(贖還)되었다. 부군은 어린 나이에도 이렇게 효성이 극진하고 사려가 범상치 않았다.
난리가 끝난 뒤에 조정에서 척화(斥和)를 주장했던 사람들의 죄를 소급하여 다스려 팔송공이 영동(永同)으로 유배되었으므로 부군도 따라가게 되었다. 나이가 어려서 빈소 곁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소리 내어 통곡하였다. 팔송공이 타이르기를,
“어른 옆에서는 슬픔을 다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하니, 그 뒤로는 단지 초하루와 보름에만 슬피 곡하고, 아침저녁으로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3년을 마쳤다. 기년(期年)이 지나도 소식(素食)을 하고, 어른이 고기를 권하면
“자식의 정사(情事)는 남들과 다른데 고기를 어찌 차마 먹겠습니까.”
라며 눈물을 주루룩 흘렸으므로 어른들도 끝내 강권하지 못하였다.
부군은 학업을 일찍 시작하여 가르치고 독려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겨우 10여 세 때 이미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외우고 제자(諸子)와 사서(史書)를 섭렵하였다. 어렸을 때 〈거미를 읊다[詠蜘蟵]〉라는 시를 짓기를,
거미가 매달려서 거미줄 치니 / 蜘蟵結網罟
가로지른 다음엔 위로 아래로 / 橫截下與上
잠자리야 너에게 부탁하노니 / 爲語蜻蜓子
조심하여 처마 밑엔 가지 말거라 / 愼勿簷前向
하였는데, 포저(浦渚) 조공(趙公
조익(趙翼))이 듣고 기특해하며 이르기를,
“이 아이는 그 뜻을 채워 나가면 인(仁)을 미처 다 쓰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임오년(1642, 인조20)에 문경공(文敬公
윤선거(尹宣擧))이 호남(湖南)의 금산(錦山)에 정착했는데, 시남(市南) 유 선생(兪先生
유계(兪棨))도 가족들을 이끌고 이사 와서 한집에서 함께 지내며 도의(道義)를 강론하였으므로 부군이 시남에게 수업하였다. 시남이 일찍이 기화(氣化)와 인사(人事)를 책제(策題)로 삼아 제생(諸生)에게 과제를 내주었는데, 부군의 대책(對策)을 보고 말하기를,
“양한(兩漢)의 문장이요 정주(程朱)의 의논이다.”
하였다. 부형과 사우들이 간혹 과거에 응시하기를 권하기도 했으나, 부군은 지극한 슬픔이 가슴에 있었기 때문에
‘이미 유자우(劉子羽)만 한 재주와 도량이 없을 바에는 차라리 병산(屛山)이 뜻을 지켰던 것을 배우는 편이 낫다.’고 여겨, 마침내
박사 가업(博士家業)을 사양하고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정해년(1647, 인조25)에 탄옹(炭翁) 권 선생(權先生
권시(權諰))의 사위가 되어 왕래하며 학업을 묻고 인하여 스승으로 섬겼다. 일찍이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金先生
김집(金集))에게 《주자서(朱子書)》를 물었는데, 선생이 이르기를,
“우리들 중에서 영보(英甫 송시열(宋時烈))가 이 책을 가장 많이 읽었으니 군은 그리로 가서 묻는 것이 좋겠다.”
하였고, 문경공도 그렇게 명하였다. 정유년(1657, 효종8)에 드디어 회천(懷川)에게 가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강(講)하고, 또한 스승으로 섬겼다.
대개 부군은 가르침에 설복되고 보고 감화받은 것이 가정에서 혼정신성(昏定晨省)할 때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여러 어른들의 문하에서 학문을 성취한 것이 또한
회옹(晦翁)이 호헌(胡憲), 이동(李侗), 유면지(劉勉之), 유자휘(劉子翬)에게 가서 배우고 주숙(朱塾)이 동래(東萊)에게 나아가 배운 것과 같았다.효종 무술년(1658, 효종9)에 학행(學行)의 선비를 천거하라는 명이 내리자 여러 재신(宰臣)들이 부군을 번갈아 천거하였다. 그리하여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연이어 의망(擬望)되었는데, 문경공이 나이가 아직 젊은데 이름이 너무 빨리 알려지는 것을 깊이 우려하여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시남 등 여러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류하였다. 이로부터 부군의 명망과 실덕(實德)이 점차 높아졌다.
현종 계묘년(1663, 현종4)에 이르러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연명으로 상소하여 함께 천거하였고, 시남도
온공(溫公)이 유기지(劉器之)를 천거한 고사를 본떠서 부군을 천거하는 것으로 명에 응하였다. 갑진년(1664)에 처음으로 내시 교관(內侍敎官)을 제수하고 을사년(1665)에 공조 좌랑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무신년(1668)에 두 차례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직 정장(呈狀)을 올려 체차되었다.
기유년(1669) 봄에 별유(別諭)로 징소하자 부군이 상소하여 정세(情勢)를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지난 정축년(1637, 인조15) 난리에 신의 어미가 강도(江都)에서 죽었습니다. 신은, 자식이 불효하여 비명에 어미를 잃고서도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한 채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며 남들처럼 말하고 웃고 먹고 옷을 입는 것을 스스로 통탄스럽게 생각합니다. 매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것만 같습니다.
오직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은 황천(皇天)이 우리 성주(聖主)를 보우하시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 대업(大業)을 크게 일으켜 사해(四海)에 아름다운 명성을 널리 떨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필부(匹夫)의 가슴에 사무친 사사로운 슬픔도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니, 그날 바로 죽는다 하더라도 지하에서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처럼 처신한 탓으로 소문이 과장되어 안으로는 허명(虛名)을 훔쳤다는 수치를 안고 밖으로는 인륜을 어지럽히는 전철을 밟게 되었습니다.
아! 만약 신이 실제로 재주와 학식이 있어서 사령(使令)을 맡을 만하다면 국가에 충성하고 집안에서 효도하는 것은 본래 두 가지 일이 아니니, 벼슬길에 나가 밝은 조정에 몸을 바치고 일마다 힘을 다함으로써 위로 성상의 큰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 남모르는 원통함을 푸는 것이 어찌 또한 신자(臣子)의 분수 밖의 일이겠습니까. 고인 중에서도 이를 행한 사람이 있으니, 자휘(子翬)의 형 자우(子羽) 부자가 이런 경우입니다.
신은 그렇지 않아서 타고난 기질이 이미 남만 못한 데다 변화하려는 노력마저 하지 않아 인순하는 것이 습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더구나 경술(經術)을 밝게 익혀 제왕(帝王)의 학문에 도움을 주고 세무(世務)에 환히 통달하여 국가의 일에 보탬이 되는 것을 어떻게 바라겠습니까. 지금 만약 스스로의 역량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단지 은총과 영광에 감격하여 마침내 원통함을 머금고 슬픔을 참고자 했던 초심(初心)을 바꾸어 단지 갓끈을 드날리고 인끈을 묶고서 벼슬살이하는 데로 귀결되게 할 뿐이라면, 조정에 나아가서는 이루는 바가 없고 물러나서는 지키는 바가 없어서 참으로
유씨(劉氏)의 죄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3월에 상이 온천에 행행(行幸)하여 또 거듭 유시하여 징소하였으나 정장하여 사양하였다.
4월에 문경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제(喪制)를 모두 문공(文公
주희(朱熹))의 《가례(家禮)》에 따라 행하였다. 교하(交河)에 장사 지내고 집으로 반곡(反哭)한 뒤 계씨(季氏) 농와공(農窩公
윤추(尹推))과 번갈아 가며 가서 시묘(侍墓)하기를 3년 동안 하였는데, 시묘할 때는 매일 새벽과 저녁마다 묘소에 올라가서 절하고 곡하여 슬픔을 다하였다. 이때 경기와 서울의 선비들이 많이 찾아와서 학업을 청하였는데, 부군이 주자(朱子)가 한천(寒泉)에서 시묘하던 때의 고사에 의거하여 때로 혹 강의하였다.
신해년(1671, 현종12) 여름에 삼년상을 마쳤다. 이에 앞서 문경공과 동토공(童土公)이
범씨(范氏)의 의장(義庄)과
여씨(呂氏)의 독법(讀法)을 본떠서 종약(宗約)을 세우고 종회(宗會)를 만들고는 한집안의 장유(長幼)를 인솔하여 학업을 익히게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부군이 ‘선친께서 별세한 지금은 종인(宗人)들을 훈도하고 이끌어서 인재로 양성하는 것이 평소 지니셨던 뜻을 계승하는 큰일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종인들을 모아 학규(學規)를 거듭 밝히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몸소 강(講)을 받고 과제를 내주어 인재를 배양하였다.
이해 여름부터 갑인년(1674) 여름까지 세자시강원 진선에 네 번, 장령에 한 번, 집의에 네 번 제수하였는데, 모두 상소와 정장으로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가을에 숙종이 즉위하여 두 차례 집의로 징소하였는데, 을묘년(1675, 숙종1) 1월에 상소하여 사직하고, 개인적으로 슬픔을 품고 통한을 숨긴 채 평생 숨어 지내고자 하는 뜻을 거듭 아뢰었다.
병진년(1676, 숙종2)에 유봉(酉峯)에 집을 짓고, 무오년(1678)에 공주(公州)의 청림(靑林)으로 이사하였다. 기미년(1679)에는 홍주(洪州)의 용계(龍溪)에 산수의 정취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이사하였는데, 원근에서 배우려고 찾아온 자들이 많았다. 마침내 서실(書室)을 짓고 경승재(敬勝齋)라고 이름을 붙인 뒤 학규를 만들어 가르쳤다.
경신년(1680)에 유봉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이해 여름에
조정이 일신(一新)되었다. 대신(大臣)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등이 상에게 아뢰기를,
“윤 모(尹某)는 본래부터 가학(家學)이 있고 성실히 실천하여 크게 사론(士論)의 추중(推重)을 받고 있으니, 조정으로 초치하여 연석(筵席)에 출입하게 하소서.”
하자, 마침내 두 차례 별유로 징소하였다. 이로부터 몇 해 동안 누차 집의, 사업(司業)을 제수하고, 또 누차 거듭 징소하는 유시를 내렸는데, 모두 상소와 정장으로 사양하였다.
신유년(1681) 여름에 두 차례 지진으로 구언(求言)하는 교지를 내렸는데, 부군이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그 대략에,
“아! 지금은 실로 말세(末世)여서 위망(危亡)의 상(象)을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모두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주(人主)는 명(命)을 개척할 수 있는 법이니, 전화위복의 기틀이 어찌 인주의 한 마음에서 벗어나겠습니까. 실심(實心)을 가지고 실공(實功)에 힘써서 쇠약한 나라를 부흥하고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아 재앙을 상서(祥瑞)로 돌림으로써 하늘에 빌어 명을 영원히 하는 것은 오직 전하께서 어떻게 하시느냐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술년(1682) 가을에 또 재이(災異)로 인하여 별유로 징소하였는데, 부군이 사양하는 상소에 덧붙여 아뢰기를,
“아! 세도(世道)의 도도함이 물이 날마다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습니다. 비록 변이(變異)가 없더라도 이미 한심스러워할 만한데, 인사(人事)와 천시(天時)가 서로 재촉하듯 하여 대소(大小)가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니, 마지막에 가서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위로 하늘에 핑계 대고 아래로 사람에게 핑계 대며 태만하게 세월을 허송하고 말아서는 안 될 것이니, 또한 오직 군신 상하가 함께 정신을 차려 반드시 한마음의 정성이 하늘에 통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이른바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책과 전화위복으로 삼는 방도를 착수할 곳이 있어 참된 공력이 확립되고 실질적인 효과가 나타날 것이요, 구구한 형식과 말단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바가 아닙니다. 천하의 일은 인주의 한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이러한 일을 어찌 다른 데서 구하겠습니까. 오직 성상의 입지(立志)가 어떠한지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때 대신이 또 선생의 덕망과 학문을 천거하며 특별히 발탁하기를 청하자 7월에 특별히 호조 참의로 올려 제수하였다.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처음에는 은거해야 할 사사로운 정리 때문에 실로 평생 산골에서 지낼 계획을 세웠고, 마지막에는 용렬하고 비루한 천품(賤品)으로 인하여 감히 분수에 넘치는 직위를 받들 수 없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융통성 없게 고집을 부리며 50년을 살았으니, 조정의 관점에서는 이른바 시험해 보지 않은 신하입니다. 옛날의 제왕은 반드시 정사를 아뢰게 해서 훌륭하면 받아들이고 밝게 시험하기를 공(功)으로써 하여 그 실질을 환히 알게 된 뒤에야 들어서 관작을 제수하였습니다. 어찌 깊은 골짝에서 나오지 않았는데도 단숨에 대부(大夫)의 높은 반열에 이르게 한 자가 있었습니까.”
하였다. 또 누차 상소하여 면직(免職)을 청하였으나 모두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현석(玄石) 박공(朴公
박세채(朴世采))이 이미 명에 응하여 입조(入朝)해서는 부군을 초치하여 나랏일을 함께하기를 청하였고, 부제학 조공 지겸(趙公持謙)도 정성을 다해 반드시 초치해야 한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상이 이에 특별히 체직을 허락하고 별유로 돈소(敦召)하였으나 부군이 사양하였다. 이때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는데, 부군이 노강서원(魯岡書院) 원재(院齋)에 거처하면서 왕래하며 강학(講學)하였다. 초하루와 보름에는 또 고을의 우수한 자제들을 모아 과송(課誦)하여 진작하고 권면하는 방도로 삼았다.
계해년(1683, 숙종9) 봄에 상이 특별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돈독한 예로 거듭 징소하고 데리고 오도록 하였으니, 이는 특별한 은수(恩數)였다. 사관이 세 차례 이르렀는데 성상의 유시가 갈수록 더욱 간곡하고 지극하였으니,
“전후로 징소할 때마다 절박한 사정을 나오기 어려운 첫 번째 이유로 들었는데, 이것은 절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아! 지금이 어떠한 때인가. 국가의 형세가 위태롭고 재이(災異)가 거듭 나타나서 상하가 근심하고 허둥대느라 편안히 먹고 자지도 못한다. 이러한 때에 그대가 세록(世祿)의 인사(人士)로서 한 가지 절개만을 지키며 향촌으로 물러가 누웠으니, 나랏일을 어찌 그리도 줄곧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것인가.”
라는 내용이 있었다. 부군이 힘껏 사양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라고 하고, 4월에 자진하여 교외로 나아가 상소하여 대죄(待罪)하였다. 상이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선유(宣諭)하고 데리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는데, 부주(附奏)하여 사양하기를,
“신이 이번에 올라온 것은 감히 외람되이 은혜로운 징소를 받아들이고자 함이 아닙니다. 단지 집에서 편안하게 지내며 줄곧 버티는 것이 신하 된 마음에 너무도 근심스럽고 황송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아와서 대죄한 것이요, 감히 서울 가까이 이르렀다고 해서 태도를 바꾼 것이 아닙니다.
지금 신은 이미 나가서 군주를 섬길 만한 재주와 학식이 없는데, 밖으로는 위명(威命)에 쫓기고 안으로는 본심을 잃어 중도에 뜻을 꺾고 진퇴(進退)에 근거함이 없어 거듭 사방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면,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성조(聖朝)에 수치와 욕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온화한 비답으로 돈독히 유시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 그대가 산림에서 덕을 쌓아 온 선비로서 이렇게 어려움이 많은 때에 오랫동안 초야에 숨어 지내며 줄곧 나랏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니, 과인이 서운해하고 사림이 실망한 지가 본디 오래이다. 얼마 전 부지런하고 간곡한 별유를 내렸고, 또 시세의 위태로움을 염려하는 정성이 있은 덕분에 척연히 생각을 바꾸어 상경하였으니, 내 마음이 기쁘고 다행스러울 뿐만 아니라 당면한 나랏일 또한 가망이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서계(書啓)를 보니 겸양하는 말이 더욱 간절해졌고, 이어서 또 귀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것은 모두 평소 나의 성신(誠信)이 미덥지 못했던 데서 비롯된 일이니 단지 스스로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오를 뿐이지만, 유독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함께 해 나가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이때에 그대를 기다리는 심정은 큰 가뭄에 비를 고대하는 것에 비길 정도가 아니다.”
하고, 연이어 근시를 보내어 입대(入對)하라고 독촉하였다. 이에 부군은 ‘이번에 한번 움직인 것은 본래 분의(分義)가 곤궁하므로 나아와 대죄하려 함이었는데, 근기(近畿)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무한한 은례를 입게 되었으니, 더욱이 하루라도 감히 지체하여 머무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상소를 남겨 놓고 물러나 귀향길에 올랐다. 상소의 대략에,
“이번에 신은 감히 소명(召命)을 받들기 위해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대죄하기 위해서 올라온 것입니다. 그런데 성조(聖朝)에서 관대하게 용서하고 죄를 주지 않으셨으니, 신의 분의로는 마땅히 쓸모없는 몸을 거두어서 속히 시골집으로 돌아가 성상의 은택에 무젖은 채 전야(田野)에서 분의를 다해야 할 뿐입니다.
근시를 보내 데리고 오도록 하는 예(例)에 대해서는 신이 근일의 상소에서 대략 그 단서를 드러내었습니다. 무릇 윗사람에게는 징소하는 예(禮)가 있지만 아랫사람에게는 진퇴(進退)의 의리가 있습니다. 의리가 만약 나아갈 만하다면 어찌 지키고자 하는데도 위에서 놔두지 않은 뒤에야 나아가겠습니까. 신처럼 미천한 자는 본디 말할 것이 못 되지만, 만약 절대로 나아가기 어려운 입장에 있는 선비에게조차 다시 그 의리의 가부(可否)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얽매어 초치하기만을 급하게 여긴다면, 윗사람은 속박하여 달려 나오게 하는 혐의가 있고 아랫사람은 끌리고 쫓겨서 허둥대는 근심이 있을 것이니, 예가 있고 의리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선비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으니, 세상에 나가는 것과 은거하는 것 두 가지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신의 미혹한 견해로는 이미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이상 물러나는 길밖에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승지가 아뢰자 상이 뒤쫓아 가서 데리고 돌아오라고 명하고, 특별 유시로 거듭 더욱 간곡하게 징소하였다.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이 귀한 법인데, 나의 정성과 예가 독실하지 못하여 마침내 초치한 유신으로 하여금 상소를 남겨 놓고 곧장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 어찌 내 마음이 서운하고 부끄러울 뿐이겠는가. 실로 국가와 사림의 불행이기도 하다.”
하였다. 부군이 감히 대번에 돌아가지 못하여 마침내 수원(水原)에 머물러 처분을 기다렸다. 승지가 또 두 차례 성상의 유시를 전하였는데, 돈독히 권면하기를 마지않는 내용이었다. 부군이 또 부주하여 간곡히 사양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계속해서 억지로 다그치는 것도 예우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 승지를 소환하였으므로 부군이 마침내 남쪽으로 돌아왔다.
이 행차 때 상이 자리를 비워 놓고 기다렸으니, 융숭한 예(禮)와 특별한 은수(恩數)가 근년에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정의 여러 공들이 모두
“한번 사은숙배(謝恩肅拜)하는 것은 분의로나 도리로나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하였고, 평소 친애한 사이로 불리던 사람들도 다 너무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지만 부군의 뜻은 확고하였다. 현석(玄石) 박공(朴公)도 찾아와서 조정에 나가 함께 나랏일을 도모하기를 힘껏 권하였는데, 부군이 개인적인 정세 외에 또 나갈 수 없는 의리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우리들이 지금 나가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나간다면 정치를 제대로 해야 할 것이네. 만약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우암(尤庵)의 세도(世道)를 변화시키지 않아서는 안 되고,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원한 관계를 풀지 않아서는 안 되고,
삼척(三戚)의 문호(門戶)를 닫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인데, 우리들의 역량으로 이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것도 하지 못하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속으로는 절대로 하지 못할 줄을 알면서 무턱대고 나가는 것을 나는 할 수가 없네.”
하니, 현석이 끝내 강요하지 못하였다. 부군이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화숙(和叔 박세채(朴世采))이 기미를 보지 못하는 걸로 봐서 조정에 오래 있지 못할 듯하다.”
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곧 이어서 이조 참의를 제수하였는데, 누차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에 특별히 한성부 우윤으로 올려 제수하였는데, 네 번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갑자년(1684, 숙종10) 봄에 사헌부 대사헌을 제수하였는데 또 세 차례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여름에 최신(崔愼)이라는 자의 상소가 있었는데, 부군의 사서(私書)를 끄집어내어 송상 시열(宋相時烈)을 위해 변무한다는 명목으로 부군이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헐뜯고, 문경공(文敬公)까지 침범하여 헐뜯기에 이르렀다. 현석이 상소하여 그 터무니없는 무함을 논하니, 상신(相臣) 김수항, 민정중(閔鼎重) 등이 아뢰기를,
“윤 모가 사감(私憾)으로 송시열을 헐뜯었으니, 다시는 유현(儒賢)을 대우하는 예로 대우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이로부터 시의(時議)가 시끄럽게 일어나, 위로는 대신(大臣)과 삼사(三司)로부터 아래로 향곡(鄕曲)의 어리석은 유생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뜻을 받들고 눈치를 살펴 무리 지어 비난하고 헐뜯었다. 부군은 한결같이 변론하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것을 의리로 삼고, 매번 문경공의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은 몸으로 비록 보답은 하지 못할지언정 어찌 차마 편론(偏論)을 만들어 거듭 만세의 죄책(罪責)을 입겠는가.”라는 말을 외며 친구와 문인들을 가르치고 경계하였다.
처음에 부군이 송상을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을 때 문경공이 가르치기를,
“우옹(尤翁)은 특출한 점에 있어서는 따라가기 어려운 사람이다. 너는 그의 좋은 점을 스승 삼되 병통 또한 몰라서는 안 된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하였다. 또 매번 송상이 선(善)을 수용하지 못하고 사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기질의 병통으로 여겼다. 그러다가 송상이 조정에 나가 세도(世道)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사의(私意)를 주장하여 국론(國論)이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누차 편지를 보내 진정으로 충고하고 경계하였고, 송상이 윤휴(尹鑴)와 예송(禮訟)으로 원수가 되었을 때는 또 너무 심하게 하면 안 된다는 것으로 거듭 경계하였다. 송상이 이를 자못 언짢게 여겨 번번이 자신에게 다른 마음을 가진 것으로 의심하였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재차 조정에 들어갔을 때 다시 한 통의 편지로 충고하고자 말을 무척 절실하고 지극하게 하였으나, 곧바로 송상이 서울을 떠나게 되었으므로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문경공이 별세하였다.
계축년(1673)에 이르러 부군이 연보(年譜) 및 현석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가서 송상에게 묘갈명을 청하고, 기유년에 쓴 편지를 아울러 보여 문경공의 간절한 유의(遺意)를 매듭짓고자 하였다. 송상이 행장과 연보에 도학(道學)의 연원을 일컬어 진술한 말과 전후에 충고한 말들이 실린 것을 보고서 이미 시기하고 성내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한 데다 기유년의 편지가 이를 더욱 격발하였다. 마침내 현석에게 편지를 보내어
강도(江都)의 일과
윤휴의 일을 가지고 뒤늦게 문경공을 억압하기를 마지않았다. 대개 문경공이 일생 동안 강도의 일을 스스로 허물하였으나 송상은 “허물 삼을 만한 의리가 없다.”라고 하였고, 또 처신을 바르게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윤휴를 배척하고 버렸었는데 송상도 서로 절교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갑자기 두 가지 일을 가지고 흠집을 내고 욕하는 자료로 삼고, 마지막에는
“죽어야 하는데도 죽지 않았고, 절교했다고 말만 하고 절교하지 않았네.”
하였으니, 나중의 수천, 수백 가지 기괴한 말들이 모두 이로부터 나왔다.
급기야 묘갈문이 완성되었는데, 그 내용이 현석의 행장을 칭탁하여 글을 엮어 조롱하고 따돌리는 것이었다. 부군이
“전편(全篇)의 주제가 이미 도의(道義)로써 기대하고 권면하는 뜻에 어긋나고, 또 붕우 사이에 애도하고 상심하는 정의(情誼)가 없습니다.”
라고 하며 편지를 보내 고쳐 주기를 청하였으니, 대개 덕을 형용한 것이 실제와 맞고 일을 말한 것이 사실에 근거하기만을 바란 것이었다. 송상은 혹은 고쳐 주겠다고 해 놓고 고치지 않기도 하고, 혹은 비꼬는 말로 조롱하고 헐뜯기도 하여, 억양하고 조종하며 계획적으로 흠집을 내려 하는 것이 거의 상정(常情)이 아니었다. 부군은 이를 계기로 기질의 문제로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로소 본원적인 병통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귀양지로 방문하게 되었을 때는 송상이 또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가
예설(禮說)을 바꾸어서 목숨을 구하려 했다고 말하였는데, 부군이 돌아가서 그 글을 보니 본래 예설을 바꾼 것이 아니었고, 또 그 예설이 송상이 직접 수정해 준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매우 의아하게 여겨 누차 편지로 질의하고 충고하였는데, 송상의 대답하는 말이 매우 장황하고 앞뒤가 어긋났다. 이로부터 본원에 대한 의심이 더욱 깊어져서 한 번 충고하는 글을 올리고자 하였으나, 바야흐로
곤액(困厄)을 당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헐뜯는 말의 빌미가 될까 염려하여 드러내지 못하였고, 간간이 경계하는 말을 하더라도 깊게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6)에 이르러서 송상이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조정으로 들어갔는데, 출처(出處)에 의리가 없고 언론과 하는 일이 또 대부분 사류(士類)를 만족시키지 못하여 평생 수립한 업적과 명망을 모조리 잃고 말았다. 선생이 더욱 상심하여 수백 글자에 달하는 편지를 엮어 기유년(1669, 현종10) 편지의 대지(大旨)를 거듭 말하였는데,
‘왕패병용 의리쌍행(王覇竝用義利雙行)’으로 강(綱)을 삼고 행기(行己)ㆍ접물(接物)ㆍ부험(符驗)ㆍ사공(事功)으로 목(目)을 삼되, 기질을 변화하지 못하고 학문이 진실하지 못한 것을 근본 원인으로 들었으며, 마지막에는
위 무공(衛武公)이 억계(抑戒)를 지어 자신을 경계했던 일과
한 무제(漢武帝)가 윤대(輪臺)와 관련하여 후회하는 조서(詔書)를 내렸던 일을 들어 권면하였다.
대개 기질의 문제로 보았던 평가가 심술에 대한 의심으로 변하였으나, 부자(父子) 양대(兩代)에 걸친 사우(師友)의 정의로서 끝내 침묵하고 있을 수 없어
비간(比干)이 한번 충언을 올리고 죽었던 일을 본받아 분명히 말하고 통절히 설파하여 본질적인 문제점을 다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척연히 뉘우치고 고쳐서 만절(晩節)을 수습하기를 바라서였고, 불행하게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차라리
옛사람이 문을 닫아걸고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던 의리를 본받고자 하였으니, ‘나를 알아주거나 나에게 죄를 주는 것이 거의 여기에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었다. 이는 세도(世道)를 위하고 국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문경공이 평소 보였던 정성을 마무리 짓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편지를 이미 완성하였으나 현석이 세도에 누가 될까 염려된다며 보내지 못하게 말렸는데, 부군은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여 사람을 통해서 편지의 대의(大意)를 먼저 전하게 하였다. 송상이 듣고서 크게 성을 내니, 이로 인하여 사설(辭說)이 분분하였다. 현석이 그 내막을 물어 왔으므로 부군이 답서를 보냈는데,
라는 말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 편지가 송상의 손에 들어가면서 최신(崔愼)의 상소가 마침내 나왔는데, 묘갈명의 내용에 유감이 있어서 그런다는 주장이었다. 이때 송상이 다른 사람의 말을 악의적으로 인용하여 문경공을 추하게 욕한 것이 또 한두 가지 일에 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부군이 진작 관계를 끊고 배척하지 않는 것을 사우들이 모두 의심하였으나, 부군은 오히려 차마 과감하게 끊지 못하고 다시 편지로 변론하고 질의하며 혹시라도 깨우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저쪽에서 말을 더욱 패만하게 하여 양친(兩親)까지 모욕함으로써 끝내 절교를 자처하였던 것이다.
대개 스승은 도(道)가 있는 바이므로 장차 스승을 통해 의심나는 점을 묻고 의혹을 밝히고자 하는데, 부군과 송상은 도가 이미 다르고 정(情)이 이미 괴리되어 의심이 나도 묻지 못하고 의혹이 있어도 해명하지 못하였으니, 예로부터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러한 의리는 없었다. 끝내는 그 심술의 간특함을 더욱 간파하게 되었고 또 망극한 무함을 입었으므로 사제 관계를 한결같이 유지하는 것으로는 자신의 도를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군의 마음가짐은 ‘불행하게 사생(師生)의 변고를 만났으니 묵묵히 자신의 도리를 다해야 할 뿐이다.’는 것이었으며, 지성으로 안타까워하고 불쌍히 여기는 뜻을 항상 가슴에 담고서 후세에 구실거리가 될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이해 겨울에 송상의 무리가 또 부군이 율곡(栗谷)을 무함했다고 하면서 중대한 사안에 의탁하여 모함하였다. 대개 부군이 일찍이 명촌(明村) 나공(羅公
나양좌(羅良佐))에게 보낸 편지에서 율곡이 초년(初年)에 불문(佛門)에 귀의했던 사실을 인용하여 문경공이 강도(江都)의 일로 비방을 입은 것이 그와 유사함을 밝혔는데, 이 과정에서 “입산한 잘못이 있다.”고 한 한마디 말을 이때 와서 자구(字句)를 끼워 맞추어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든 것이었다. 이로 인해 상소가 분분하게 이르렀으나, 상은
“개인적인 편지를 들추어내어 선현을 무함했다는 죄를 덮어씌우려 한다.”
라고 하며 배척하였다. 정묘년(1687, 숙종13)에 이르러 송상이 또 직접 상소하여 문경공을 무함하여 욕하되 하지 않는 말이 없었으니, 여기에 이르러서 어떤 의도하에 나온 행동인지가 더욱 여지없이 드러났으므로 사류들이 모두 놀라고 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명촌의 변무 상소가 나왔다.
무진년(1688)에 만암(晩庵) 이공 상진(李公尙眞)이 연석에서 부군의 심사(心事)를 아뢰어 스승을 배반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또 차자(箚子)를 올려 예우하기를 청하였다. 기사년(1689) 2월에 상이 부군을 처음과 같이 예대(禮待)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경오년(1690)에 이르러 대사헌을 제수하였으니, 이것은
접때의 사람들이 부군이 윤휴를 감싸고 율곡을 무함하여 욕보였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권력을 잡은 자들이 이를 끌어다 윤휴를 신구(伸救)하고 율곡과 우계를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하는 증거로 삼고, 또 관직과 품계를 회복시켜 고의적으로 모욕하고 멸시하려 한 것이었다. 부군이 마침내 상소하여 스스로 논핵하였는데, 그 대략에,
“어리석은 신은 어려서부터 이이와 성혼의 글을 외우고 익혔고, 성현이 전수한 학문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여 평생 연마하고 흠앙할 대상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두 공(公)이 사람들에게 무함을 입어 문묘의 종향(從享) 반열에서 내쳐지고 말았으니, 이는 연원이 끊어진 것이고 근본이 뽑힌 것입니다. 그러니 신의 종적이 어찌 다시 당세에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신의 갑자년(1684, 숙종10) 이후 일은 실로 두 가지 죄를 진 것입니다. 신은 송시열을 젊어서부터 스승으로 섬겼는데, 불행하게도 정의(情義)를 끝까지 보전하지 못하고 마침내
서찰에 관련된 일로 뜻밖에 시끄러운 단서를 만들어 수년간의 분란을 초래하였습니다. 신이 망언(妄言)으로 죄를 자초하고 모욕이 부모에게까지 미친 것에 대해서는 말할 겨를조차 없지만, 성명(聖明)께서 매번 조정의 논의가 분열되고 갈라지는 것을 근심하고 탄식하셨고, 끝내는 두 신하의 출향을 윤허하는 비답에서도 이 일을 언급하시어 두 신하에게 죄를 돌리는 듯이 하셨습니다. 이것은 수년 동안 조정을 시끄럽게 하고 선비들의 추향(趨向)을 괴리되게 하여 끝내는 위로 성상의 하교에 흠이 있게 하고 뒤미처 전현(前賢)에게 누를 끼친 것이니, 곰곰이 그 허물을 생각해 보면 모두가 신으로 인해서 비롯된 일입니다. 이것이 신의 한 가지 죄입니다.
윤휴 역시 선신(先臣)이 일찍이 친하게 지냈던 자인데, 예송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선신은 이미 그의 잘못된 처신을 배척했으나 충고해도 따르지 않았으므로 끝내 서로 절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지막에 드러난 그의 무상(無狀)함에 대해서는 더욱 다시 논할 것이 없는데, 접때
한 무리의 상소에서 매번 천신(賤臣)이 윤휴를 비호하였다고 하였으니, 그들이 억지로 끌어다 붙인 주장에는 없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간에 연신(筵臣)이 윤휴를 신구하면서 드디어 신을 거론하여 증거로 삼았으니, 비록 전에는 죄를 주려고 했고 뒤에는 끌어대어 이용하고자 한 것이지만 그것이 신의 실정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전에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숨을 죽인 채 죄를 기다렸고, 뒤에는 또 감히 주제넘게 글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본심을 드러내지 못한 채 그대로 침묵을 지킴으로써 바르지 못한 사람을 보증한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신의 두 번째 죄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박태보(
朴泰輔)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후로는 놀라움에 넋이 나가 살고자 하는 의욕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박태보는 신의 생질입니다. 당초에 비통한 나머지 성상을 향한 간절한 정성으로도 북받치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성명의 세상에 이런 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초야에 묻혀 있는 하찮은 몸이 감히 주제넘게 나설 수 없어 한마디 말씀을 올려 충성을 조금이나마 바치지도 못했으니, 신하 된 직분이 어그러지고 사람의 윤리가 끊어졌습니다.”
하였으니, 이에 앞서 기사년(1689, 숙종15) 4월에 중궁(中宮)이 폐위되었을 적에 박공(朴公)이 간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상소 말미에 언급하여 충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하교하기를,
“상소 중의 말뜻이 바르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한 태도가 많으니, 매우 놀랍다. 상소를 도로 내주라.”
하였다. 이어 집의 김일기(金一夔) 등이 아뢰어 관작을 삭탈하였다.
갑술년(1694) 여름에
곤의(坤儀)가 다시 바르게 되자 상이 특별 서용을 명하고 즉시 이조 참판을 제수하였다. 부군이 누차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식견이 어둡고 처신이 형편없어 초야에서 은거하는 몸으로 세도에 해를 끼쳤으니, 스스로 지은 죄가 죽음으로도 속죄할 수 없습니다. 신은 실로 주제넘게 감히 자세히 아뢰지 못하지만, 성상께서는 그 죄를 이미 속속들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였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이것을 죄로 들며 힘껏 사직하였다. 상이 연석의 하교에서 갑자년(1684, 숙종10)에 경솔히
두 상신(相臣)의 말을 들어준 것을 깊이 뉘우치고, 또 비지(批旨)에서 매우 정성스럽게 마음을 열어 보였다. 그 대략에,
“경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게 사면을 청하니, 지난날의 일로 불안하게 여기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스스로 깊이 뉘우쳐 예전처럼 관직에 임용하고 처음처럼 예대(禮待)하도록 하였으니, 반드시 경을 초치하여 나랏일을 함께 하고자 함은 실로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또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얼굴을 알지 못한다고 하유하고 연이어 사관을 보내어 간곡한 뜻으로 징소하였는데, 부군이 부주(附奏)하여 사양하기를,
“성상의 은총이 이처럼 간곡하니 저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흐릅니다.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 있는데 또한 어찌 한 번만이라도 천안(天顔)을 우러러 뵙고 싶은 지극한 바람이 없겠습니까. 단지 한 번 나가 뵙는 것으로는 큰 은혜에 보답할 수가 없는데, 하잘것없는 정성만 가지고 징소하는 거룩한 예에 답하는 것은 의리상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8월에 또 상소하여 거듭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는데, 성상의 비답이 더욱 간곡하였다. 그 대략에,
“유신(儒臣)을 대우하는 도리는 직사(職事)로써 얽어맬 필요가 없다. 만약 본직(本職)을 해임한다면
송조(宋朝)의 고사를 조금 모방하여 포의(布衣)로서 나와 만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부군이 또 부주하기를,
“포의로서 나와 만나라는 하교는 또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신은 세록(世祿)의 후예로서 본래 산림의 유일(遺逸)이 아니고, 용렬하고 비루한 미물(微物)로서 또한 고인(古人)과 같은 훌륭한 행실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내세울 것이 있다고 곧장 이렇게 상례(常例)를 크게 뛰어넘고 세상에 드물게 있는 거룩한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선신(先臣)은 효종대왕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입었습니다. 일찍이 선비 복장으로 인견하는 자리에 나오라는 명이 내렸으나 선신이 사양하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는데, 결국은 너그러이 용납해 주시는 성은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불초하고 미천한 신이 또 성조(聖朝)에서 이같은 총명(寵命)을 입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하였다. 이때 현석이 조정에서 편지를 보내기를,
“성상의 비답 가운데 ‘아직 얼굴을 알지 못한다.’는 하교와 ‘포의로 입대(入對)하라.’는 하교는 이전에 직사(職事)로 징소했을 때 오히려 버틸 수 있었던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하고, 상리(常理)와 정법(正法)을 따르도록 권면하였다. 부군이 답서에 이르기를,
“상리와 정법이야말로 바로 유자의 출처이지만, 나의 사사로운 정리는 이미 상리로써 자처하지 못하고, 보잘것없는 분수는 또 함부로 정법을 무릅쓰지 못합니다. 지금 ‘한번 나와서 등대(登對)하여 정세를 아뢰고 사퇴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세상에 어찌 얼굴만 한 번 내미는 출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성상이 반드시 한번 만나고자 하였지만 부군은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을해년(1695, 숙종21) 봄에 시강원 찬선(侍講院贊善)을 제수하고 사관을 보내어 별유(別諭)로 징소하였다. 상소하여 사양하자, 비지에 “포의로 입대하라.”는 명을 다시 거듭하였다. 4월에 또 이조 참판을 제수하였는데, 두 차례 정장하여 거듭 사직하였다. 우의정 신공 익상(申公翼相)이 부군의 평소 뜻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윤 모(尹某)가 끝내 필부(匹夫)의 뜻을 지켜 기꺼이 한 가지 절개를 고집하는 선비가 되려는 것은 그의 자처함이 남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그의 직임을 체차한 뒤 나아가서 조정의 정사를 묻고 관(官)에서 월름(月廩)을 보내 주게 한다면 선비를 대우하는 예절에 거의 부합할 듯합니다.”
하니, 영의정 남공 구만(南公九萬)이 아뢰기를,
“체직하는 것은 혹 예우하는 도리에 혐의가 있을 듯하고, 월름도 필시 받지 않을 것입니다. 상께서 그의 품계를 올리고 가난한 형편을 구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6월에 가서 주급(周急)하라는 명이 내렸는데,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공경히 받아서 족당(族黨)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뒤로도 조정의 하사가 있으면 모두 그렇게 하였다. 이달에 특별히 공조 판서로 옮겨 제수하였는데, 일곱 차례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부군은 사직소를 올리는 경우에, 전후로 내린 관직이 모두 분수 밖의 것이어서 전배(前輩)들이 혹 구함(舊銜)을 써서 새로 제수한 관직을 사양했던 사례처럼 골라서 쓰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단지 조정에서 명한 바에 의거하여 스스로 이름하되 자급(資級)의 규식을 갖추어 쓰지 않음으로써 구구한 뜻을 조금 드러냈었다. 이때에 와서는 반열(班列)이 더욱 높아져서 감히 한결같이 무릅쓰고 쓸 수 없었으므로 단지 재야 선비의 본분을 따라 ‘초망신(草莽臣)’이라고 일컬었다. 10월에 의정부 우참찬으로 옮겨 제수하였는데, 누차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하사한 은전을 사양하였다.
병자년(1696, 숙종22)에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를 겸직하게 하였다. 연신(筵臣)이 부군의 집안 형편이 가난하다고 아뢰자 주급을 명하였는데, 상소하여 하사한 물자를 환수해서 기민(饑民)을 구휼하는 물자에 보태기를 청하였다. 여름에 별유로 징소하였으나 두 차례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정축년(1697) 1월에 사관에게 명하여 전유(傳諭)하고 선소(宣召)하였다. 3월에 이조 판서에 제수하고 또 연달아 거듭 징소 전지를 내렸는데, 부군이 누차 상소와 정장(呈狀)으로 힘껏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또 주급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을에 대사헌을 제수한 뒤 거듭 전유하고 돈소(敦召)하도록 명하였는데,
“기억하건대 지난 계해년(1683)에 경이 나를 버리지 않고 분연(賁然)히 올라왔으므로 마음이 절로 기쁘고 위로되었는데, 도성 문을 지척에 두고 곧장 돌아갈 줄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 생각해도 한탄스러움과 실망스러움이 다 가시지 않았다. 내 마음이 이와 같은데 경이 어찌 나를 잊었겠는가. 포의(布衣) 차림으로 입대하라는 하교 또한 끝내 저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어찌 차마 대수롭게 않게 여기며 나오려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이 있었다.
무인년(1698)에 좌참찬을 제수하고 또 두 차례 거듭 하유하고 징소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때 전 현감 신규(申奎)가
노산군(魯山君)과
신비(愼妃)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두 차례 하문하였다. 부군이 전후의 수의(收議)에는 감히 우러러 대답하지 못했으나, 이때 와서는 ‘이것은 나라 안의 모든 신민(臣民)들이 지금까지 마음속으로 애통하게 여겨 온 일이다. 만약 이 일을 거행할 수 있다면 장차 성덕(聖德)을 빛나게 할 것이니, 구구한 뜻을 대략 아뢰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고, 마침내 예관 편에 부쳐 헌의(獻議)하기를,
“두 건의 논의는 실로 더할 수 없이 중대한 일로서, 200년간 원통하게 억눌려 있던 기운이 오늘에 와서 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밝으신 열성(列聖)의 영령이 위에 오르내리시는데 성상의 일념이 위로 천지와 통하니, 성덕(盛德)의 비상한 조처는 실로 성상의 결단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였다.
겨울에 사간(司諫) 정호(鄭澔), 부응교 김진규(金鎭圭) 등이 상소하여 부군이 스승을 배반했다고 헐뜯었는데, 상이 모두 엄히 배척하고 또 정호를 처벌하였다. 하교하기를,
“아비와 스승 가운데 누가 중하고 누가 가볍겠는가. 그 아비가 욕을 당하는데 아들 된 자가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선소하였다. 부군이 부주하여 초야에 은거하는 몸으로 세도에 해를 끼친 죄를 깊이 진달하였다. 이로부터
‘부사경중(父師輕重)의 의리’가 그대로 사류(士類)의 정론(定論)이 되었다. 부군이 이르기를,
“이와 같다면
‘한결같이 섬기고 목숨을 바친다.[一事致死]’는 말이 헛된 의리가 되니, 실로 온당하지 않다. 스승이라도 천심(淺深)과 경중(輕重)의 구별이 있다. 예컨대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에게 있어서 공자(孔子)는 군부(君父)와 동일하지만, 그 아래는 현격한 차등이 있는 것이다. 지금 만약 사생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일체 모두 부자간, 군신간의 윤리와 동등하게 여긴다면 이는 본디 불가하거니와, ‘부친이 중하고 스승이 가볍다.’는 것으로 하나의 설을 정한다면 이 또한 불가하다. 만약 ‘아비와 스승은 본디 경중을 나눌 수 없지만, 스승도 여러 등급이 있으므로 일체 다 군부와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한다면 고훈(古訓)에도 어긋나지 않고 저들의 마음도 승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기묘년(1699, 숙종25) 봄에 아들 행교(行敎)가 시종(侍從)의 관직에 제수되었다는 이유로 추은(推恩)하여 숭정(崇政)의 품계로 올렸는데, 부군은 은례(恩例)에 의지하여 높은 품계에 오르는 것을 극히 황공하게 여겨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을에 특별히 액례(掖隷)를 보내어 식물(食物)을 하사하고 기거(起居)를 물었으므로 상소하여 사은하였다. 이때 유생들 사이에서는 초치하기를 청하거나 변무하는 상소가 이어졌고, 태학(太學)에서는 유벌(儒罰)을 가하여 제명하는 일도 분분하였다. 부군이 깊이 우려하여 문인(門人) 한배주(韓配周)에게 편지를 보내 주장하는 잘못을 꾸짖었다. 그 대략에,
“여러 사람들이 매번 사론(士論)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이른바 사론이라는 것은 의리의 바름에서 나오는 것이니, 지금과 같은 일은 단지 편론(偏論)일 뿐이네. 이렇게 세도(世道)가 괴리되어 곳곳에 구멍이 생기고 상처가 낭자한 때에 은미한 일을 들추어내어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공격하면서 대체(大體)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사사로운 뜻만 만족시키려 드니, 이러한데도 오히려 사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접때의 일도 꼭 이와 같았으니, 세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거기에 원인이 있네. 지금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달리 방도가 없네. 선비 된 자가 의(義)를 먼저 행하고 논의는 뒤로 미루며, 충신(忠信)을 숭상하고 거짓됨을 경계하며, 공정함을 견지하고 사사로움과 치우침을 버리며, 화평함을 힘쓰고 음험(陰險)함과 사특함을 배척하여, 어떤 일이건 어떤 상황에서건, 크건 작건 간에 반드시 천리의 순수함을 구하여서 따르고 털끝만큼이라도 이해를 계산하고 따지는 사사로움이 섞여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네. 이렇게 하면 내 몸에 좋을 뿐만 아니라 당류(黨類)에도 좋고, 당류에 좋을 뿐만 아니라 세도에도 좋을 것이네. 그렇지 않다면
앞서 전복된 수레와 가는 길이 다르더라도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네.”하였다.
부군이
교산(交山)에 성묘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오랫동안 직명(職名)을 벗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히 기전(畿甸) 가까이 가지 못하다가, 경진년(1700, 숙종26)에 소명(召命)이 조금 뜸한 틈을 타서 선영에 영결하고자 길을 떠나 묘소 아래에 이르렀다. 정원(政院)이 이 사실을 아뢰었고, 보덕(輔德) 이진수(李震壽)가 또 상소하여 정성을 다해 초치하기를 청하였으며, 유생의 상소도 뒤이어 올라왔다. 상이 두 차례 사관을 보내어 거듭 징소하는 뜻으로 하유하였는데, 부군은 계해년(1683) 강외(江外)의 행차 때처럼 다시 은례(恩禮)가 내릴 것을 두려워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즉시 돌아왔다.
7월에 의정부좌찬성 겸 세자시강원이사를 제수하고 별유로 징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경은 유림의 숙덕(宿德)으로서 단지 나라 사람들의 본보기가 될 뿐만이 아니다. 경을 우대하고 의지하는 내 뜻이 융숭하고 정중할 뿐만이 아니어서 반드시 좌우에 초치하여 보도(輔導)에 힘입어 세도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지금 경을 발탁하여
이공(貳公)의 직책을 제수하고, 춘궁(春宮)의 빈사(賓師) 직임을 겸하게 하였다. 보도하여 성취시키는 일을 경과 같이 큰 덕망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또한 누가 그 책임을 맡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부군이 상소하여 또
숭자(崇資)는 과분하고 명기(名器)가 가볍게 된다는 것을 진달하고 모두 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8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하였는데, 부군이 분곡(奔哭)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대죄신(待罪臣)’이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이후로도 누차 소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계속 그렇게 칭하였다.
부군은 긴요한 직임을 오래 맡게 되면 연달아 누차 상소하여 반드시 해임되고야 말았고, 한가한 관사인 경우에는 번독하게 해 드릴 것을 두려워하여 간간이 특별 징소가 있을 때나 세말(歲末), 세초(歲初)를 이용하여 상소나 정장으로 사직하였다. 이해 겨울
궁정(宮庭)의 변고가 발생하여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사사(賜死)되었는데, 부군은 춘궁(春宮)이 어린 연세에 이런 변고를 당했다 하여 초야 백성으로서의 깊은 근심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직소를 올리면서 끝 부분에다 동궁을 보호하는 의리를 덧붙여서 아뢰기를,
“예로부터 국가가 패망하려 할 때는 변고가 한번 생겨나서 화란(禍亂)이 끝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고금의 물정(物情)과 세변(世變)을 통찰하시니 무엇인들 비추어 살피지 못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세자 저하께서 아직 어린 연령에 이렇게 큰 어려움을 당했으니, 우러러 믿을 분은 오직 지존(至尊)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질병을 걱정하고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며 다각도로 보살펴 돌보아 주는 것에 실제로 성상께서 관심을 기울이셔야 할 것입니다.
성인(聖人)의 자애로움에 그치는 지극한 정에다 사직의 중요함을 거듭 생각하시어 은근하게 거듭거듭 돌아보며 보호하고 안정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속으로 다 판단하고 계실 것이나, 신민들의 남모르는 근심과 지나친 우려 또한 어디엔들 이르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임오년(1702, 숙종28) 가을에 별유로 징소하였으나 두 차례 상소하여 거듭 사양하였다. 갑신년(1704)에 상이 신종황제(神宗皇帝)의 사당을 세워
강한(江漢)의 생각을 부치고자 예관을 보내어 하문하였다. 부군은, 이렇게 인심이 투박하고 나태하며 천리(天理)가 어둡고 꽉 막힌 날에 사당을 세우겠다고 하교한 것은 신인(神人)을 감동시킬 만한 일이니, 변변찮은 정성을 조금이나마 보이지 않는 것은 의리상 감히 할 수 없는 바이다 하고, 마침내 예관 편에 부쳐 헌의(獻議)하였다. 그 대략에,
“신종황제의 망극한 은혜는 실로 우리 동방 신민이 만세(萬世)토록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명나라를 종주로 삼는 의리를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는데, 성상께서 이런 생각을 하신 것은 귀신을 감읍(感泣)시킬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당을 세우는 논의는 실로 국가의 막중한 사전(祀典)이니, 미천하고 아는 것이 없는 신으로서는 감히 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에 후원(後苑)에 단(壇)을 세워 대보단(大報壇)이라 이름 붙이고 친히 제사 지냈다. 어제(御製) 시 한 수가 있는데, 부군이 공경히 그 시에 차운하여 충분(忠憤)을 드러내었다.
을유년(1705, 숙종31) 11월에 상이 선위(禪位)를 명하였는데, 부군이 사직소를 올리면서 대사(大事)를 갑작스럽게 단행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덧붙여 아뢰고, 더욱 덕을 공경히 하고 백성들의 일을 살피는 데 힘써서 하늘에 영원한 명을 빌기를 도모하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선위하겠다는 명을 거두었으므로 상소가 올려지지 않았다.
병술년(1706) 여름에 임부(林溥)라는 자가 상소하여 부군을 징소하기를 청하면서 부군이 나오지 않는 것은 한쪽 편 사람들이 동궁을 위태롭게 하려고 도모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므로, 상이 그 거짓됨을 통촉하고 죄를 주었다. 서울에 있는 문인들이 상소하여 해명하려고 하니, 부군이 듣고서 놀라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해명할 일이겠는가. 더구나 내가 살아 있으면서 남이 하도록 하다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이 같은 일은 모두가 직명(職名)을 지니고 있어서 생긴 것이다.”
하고, 마침내 상소하여 사직하고 아울러 유소(儒疏)의 무함을 언급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으로 위유(慰諭)하였다. 이때 부군이 이질(痢疾)을 매우 심하게 앓았는데, 사관이 아뢰자 어의(御醫)를 보내어 약을 가지고 가서 간병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므로 상소하여 사은하였다. 겨울에 또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하사하였는데,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해년(1707) 봄에 설서(說書) 이세덕(李世德)이 명을 받들고 와서 동궁이 이어 진강할 책에 대해 물었는데, 부군이 사양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세덕이 개인적으로 물은 데 대해 답하기를,
“성현의 경전(經傳)은 모두가 당연히 읽어야 할 책이지만, 초야의 보잘것없는 신하가 한 번도 서연(書筵)에 입시(入侍)한 적이 없으니, 어떻게 제대로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주제넘게 망녕되이 대답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근사록(近思錄)》과 《성학집요(聖學輯要)》는 가장 요긴하고 절실한 책일 듯합니다. 그러므로 감히 사사로이 귀하에게 말해 주어 시강하는 데 얼마간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하였는데, 이세덕이 이 내용을 덧붙여 아뢰자 마침내 《근사록》을 이어 진강하라고 명하였다. 가을에 특별히 액례를 보내어 식물을 하사하고 기거를 물었으므로 상소하여 사은하였다.
기축년(1709, 숙종35) 1월에 의정부 우의정을 제수하고, 사관이 와서 전유하고 선소(宣召)하였다. 부군이 극히 황송해하고 두려워하며 상소하여 간곡히 개정을 청하였는데, 성상의 비답이 매우 융숭하고 정중하였다. 비답의 대략에,
“이번의 우의정 임명은 내 뜻에 따른 것이었다. 경의 진퇴(進退)에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 것이 자연히 지난날과는 같지 않은데, 어찌 차마 나를 버리듯이 하고 수수방관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내 평생 경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경을 생각하는 일념(一念)이 잠시도 느슨해진 적이 없다. 그런데 경에게 어찌 유독 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여러 해 전에 누차 예를 갖추어 징소하였을 때 다행히 은거하려는 마음을 돌려 강교(江郊)에 이르렀으나,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실로 내 성의가 미덥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도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진다.
아! 국가의 형세와 조정의 기상이 무엇 하나 믿을 수가 없으니, 이러한 때에 부지(扶持)하고 조제(調劑)하는 책임을 경과 같은 산림의 숙덕(宿德)이 아니면 누가 맡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정성과 예를 더욱 독실히 하여 반드시 초치하고야 말려는 까닭이다.”
하였다. 부군이 네 번째 상소하였는데, 대략에,
“아! 초야에서 발탁하여 낭묘(廊廟)에 오르게 하는 일은 삼대(三代) 이후로 없었습니다. 만약 진정한 현인(賢人)이 이렇게 거룩한 때를 만났다면 어찌 아름다운 명을 받들어서 천하에 드날려 천고(千古)의 아름다움에 짝하지 않았겠습니까. 성상의 뜻은 본디 옛 성왕(聖王)의 거룩한 마음이지만 신이 적임자가 아닌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일찍이 갑술년(1694, 숙종20)에 ‘군신 간에 얼굴을 알지 못한다.’는 성상의 유시를 받들었습니다. 애틋한 성상의 권우(眷遇)가 신하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이었기에 10여 년 이래로 가슴에 맺혀 한순간도 감히 잊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하교가 또 여기에 미쳤으니, 받들어 읽는 동안 목이 메어 감격스러운 마음을 형용할 길이 없었습니다. 천은(天恩)의 망극함은 영원히 보답할 길이 없는데, 미천한 목숨은 명이 다하여 이미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니, 대궐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는데, 부주하여 사직하기를,
“강교로 나갔을 때의 일을 성상께서 번번이 하교하시니, 신은 실로 감격의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시에 박세채(朴世采)가 실제로 찾아와 권면하면서 대궐로 들어가 사은하기를 간곡히 권하였으나, 신은 분수를 돌아보고 의리가 두려워서 끝내 감히 따르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신도 스스로 한스럽게 생각됩니다. 만약 그때 한번 대궐로 들어가 용안(龍顔)을 우러러 뵙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죽음을 맞이했다면 다시 유감이 없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연이어 열네 차례나 상소하여 힘껏 사직하였다. 전후로 성상의 유시가 더욱 융숭하고 간곡하여,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70의 나이로 끝내 소명에 응했으니, 이는 진실로 우리 성조(聖祖)의 지극한 정성 덕분이었다. 경의 높은 연령과 밝은 덕이 선정(先正)에게 부끄럽지 않은데, 단지 나의 정성이 얕고 예가 박한 탓으로 조정에 나올 날이 아직까지 지연되고 있으니, 나는 실로 부끄럽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지난번 서계(書啓)를 보니, 경이 여러 해 전에 강교에서 수레를 돌렸던 일에 대해 자못 후회하는 뜻이 있었다. 여기에서 더욱 경의 정성을 볼 수 있거니와, 경을 생각하는 내 마음도 여기에 이르러 배나 더 간절해졌다.”
라는 말까지 있었다. 이때 수찬 심수현(沈壽賢)이 명을 받들고 와서 경연(經筵)에서 이어 진강할 책에 대해서 물었는데, 부군이 부주하여 대략 아뢰기를,
“삼가 강관(講官)의 말을 들으니 사서오경(四書五經) 이하로부터 《성학집요》에 이르기까지를 이미 두루 다 진강하였다고 합니다. 성현의 책 중에 무엇을 여기에 더 보태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성상께서 이미 진강한 책을 다시 더 정밀하고 익숙하게 공부하시는 데 달렸으니, 이렇게 하면 밝게 빛나는 경지에 도달하는 데에 반드시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주자(朱子)의 주차(奏箚)에서 논한 독서법이 실로 절실하고 지극한데, 삼가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을 것으로 생각되니 멀리 초야의 미천한 신에게 하문하실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고, 또 심수현의 개인적인 질문에 답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책은 충분히 읽고 정밀하게 연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예전에 배운 내용을 거듭 익혀 새로운 내용을 터득하는 것이 옛사람의 독서법이었습니다. 만약 이미 진강한 책 가운데 요지가 되는 것을 택해서 다시 깊이 연구하고 토론한다면 다른 책을 데면데면 보는 것보다는 실효가 있을 듯합니다. 《근사록》과 《대학혹문(大學或問)》은 가장 요지가 되는 책인데 어찌하여 지금까지 진강한 대상 속에 들어 있지 않습니까.”
하였다. 심수현이 이로써 덧붙여 아뢰니, 마침내 《근사록》을 이어 진강하라고 명하였다.
경인년(1710, 숙종36) 봄에 상의 체후(體候)가 오랫동안 미령(靡寧)하였는데 부군이 이미 나아가 문후를 여쭙지 못하였고, 가만히 앉아서 엄한 소명을 어긴 지도 1년이 다 되어 갔으므로, 마침내 고인이 현옥(縣獄)에서 대명(待命)한 예에 의거하여 읍저(邑底)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고는 열일곱 번째 상소하여 대죄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듣건대 사물의 이치가 극에 달하면 변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허명(虛名)이 이미 극에 달하였고, 직위를 훔친 것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며, 성상의 은례(恩禮)가 이미 극에 달하였고, 지은 죄가 이미 극에 달하였습니다. 한 몸에 있는 만 가지 일이 극에 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신이 이미 마음을 바꿔 명에 응할 길이 없다면 단지 죽음으로 나아가야 할 뿐입니다. 지금 혜택이 널리 미치고 큰 교화가 두루 젖어들어 만물이 기뻐하며 모두 제 살 곳을 얻었는데, 신은 홀로 천지 사이에서 두려워하고 조심하느라고 몸 둘 곳을 찾지 못해 촌로들과 함께 여유롭게 생을 영위하지도 못합니다. 신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며 내심 스스로 슬퍼합니다.”
하였다. 3월에 열여덟 번째 상소하여 비로소 체차하는 은혜를 입어 중추부(中樞府)에 부직(付職)되었다. 그리고 상의 체후도 회복되었으므로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문정공(文正公
윤황(尹煌))과 문경공(文敬公)에게 특별히 증직(贈職)하고 사시(賜諡)하는 명이 있었으므로 선묘(先廟)에 고하였다.
가을에 진연(進宴)한 일로 은혜를 미루어 기로 대신(耆老大臣)에게 의자(衣資)와 식물을 하사하였다. 부군은 ‘진실로 대신이라는 이름을 감당하지는 못하지만, 은혜를 미루어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이 서민 노인들에게까지 미쳤으니, 하사한 것이 조금 후하다고 해서 번독스럽게 사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공경히 받은 뒤 상소하여 사은하고, 이어 중추부의 직함 및 월름을 사양하였다.
이에 앞서 상국(相國) 최석정(崔錫鼎)이 《예기(禮記)》 책에 서로 얽히고 뒤섞인 부분이 많다고 여겨 유별(類別)로 편차하되 《중용》과 《대학》도 구경(舊經)에 의거하여 유별로 편차하는 대상에 포함시켰다. 또
책 말미에 강확(講確)한 사람을 기록하였는데 부군의 이름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이 일로 한쪽 편 사람들이 경서를 훼손하고 성인을 업신여겼다며 최상(崔相)에게 죄를 덮어씌웠고, 홍주형(洪胄亨)이라는 자가 또 강확했다는 명목을 빙자해서 상소하여 부군을 헐뜯고 욕하였다. 성균관 유생 박필기(朴弼琦) 등이 상소하여 무함한 것에 대해 변론하니, 상이 홍주형을 정거(停擧)하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정호(鄭澔)가 상소하여 홍주형을 신구(伸救)하였고, 또 곽경두(郭景斗)라는 자가 상소하여 추악하게 무함하였다. 이에 유생 이태우(李泰宇) 등이 또 상소하여 정호 등의 죄상을 아뢰니, 상이 홍주형과 곽경두를 정배(定配)하고 정호를 삭출(削黜)하라고 명하였다. 교리 홍우서(洪禹瑞), 이교악(李喬岳), 이택(李澤) 등이 등대(登對)하여 신구하니, 상이 또 정호 등 4인을 모두 멀리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향유(鄕儒)가, 강확했다는 명목을 핑계로 유현(儒賢)을 무함하고 욕보였으니 지극히 가슴 아프다.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위안하라.”
하였다. 부군이 부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불초한 몸으로 세도(世道)의 한 가지 누가 되어 번번이 조정에 소란을 일으킴으로써 국가에 수치와 욕을 끼쳤습니다. 끝내는 신 때문에 성상께서 크게 진노하시어 엄중한 처분을 내리시어 중외(中外)가 황공하고 의혹스러워하며 원근(遠近)이 놀라고 두려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대성인(大聖人)이 공평한 마음으로 사물에 대처하는 도리로 볼 때, 득실(得失)을 굽어 헤아리고 경중(輕重)을 참작하여 조용히 가르쳐 변화시킬 일에 불과합니다. 어찌 성상의 음성과 기색에 노여움을 드러낼 만한 것이겠습니까.
‘유현’이라는 호칭으로 말씀드리자면 더욱 어찌 미천한 신에게 견줄 바이겠습니까. 그런데 성상의 하교가 매번 여기에 미치니, 이것이 또 신이 내심 근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항상 귀신에게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설령 참으로 유현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을 금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번 그 잘못을 말했다고 해서 즉시 유현을 업신여긴 죄로 벌을 주었으니, 아랫사람을 놓고 말한다면 말세(末世)에 자신의 단점을 비호하여 남의 말을 막는 사사로움이요, 옛날의 군자가 자신의 잘못을 즐겁게 듣던 공평정대한 마음이 아닙니다. 또 윗사람을 놓고 말하더라도 남의 입을 막는 데에 가까운 행동이요, 사람의 마음을 승복시킬 만한 처사가 아닙니다.”
하였다. 또 상소하여 스스로 인책하고 처분이 과중했다는 것을 다시 아뢴 다음, 마지막에
뇌우(雷雨)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의리를 덧붙여 아뢰었는데,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위유하였다.
겨울에
서쪽 국경 지대에 해구(海寇)가 침략해 올 우려가 있었으므로 특별히 거듭 하유하여 징소하였는데, 부군이 부주(附奏)하여 분의(分義)가 미천한 데다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아 몸을 바칠 길이 없는 실상을 갖추 진달하였다. 문인(門人)이
“국가에 만약 사변(事變)이 생긴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자처(自處)하시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답하기를,
“송(宋)나라 때
정강(靖康)의 난리에 양구산(楊龜山
양시(楊時)), 윤화정(尹和靖
윤돈(尹焞)), 호 문정(胡文定
호안국(胡安國))이 모두 달려가지 않았고, 우계(牛溪) 선생도 삼현(三賢)의 일을 인용하여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에 달려 나가지 않는 것으로 미리 뜻을 정했었다. 더구나 나는 골짝에서 평생을 산 미천한 몸이니 골짝에서 죽는 것이 본디 나의 의리이다. 다만 그렇더라도 시세에 순응하는 의리가 있으니, 나는 응당 우리 왕을 따라서 한번 죽을 것이다.”
하였으니, 평소 정한 뜻을 명백히 드러낸 것이 이와 같았다.
신묘년(1711, 숙종37) 봄에 또 의자와 식물을 하사하였는데, 사양하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겨울에 문정공(文正公)과 문경공(文敬公)의 연시례(延諡禮)를 거행하였다. 상소하여 시호를 하사한 은혜에 사례하고 이어 사직하였다. 임진년(1712) 봄에 곤전(坤殿)이 두질(痘疾)을 앓다가 회복되었는데, 나아가 문후하지 못한 일로 상소하여 대죄하였다. 여름에 문경공의 유고(遺稿)를 편간(編刊)하였다.
계사년(1713) 봄에 액례를 보내어 식물을 하사하였는데, 상소하여 사직하고 사은하였다. 이에 앞서 문경공이 금산(錦山)에서 살 때에 시남(市南)과 함께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엮었고, 이산(尼山)으로 돌아온 뒤에는 또 나중에 수정한 본이 있었다. 이해 여름에 시남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가례원류》를 시남이 독자적으로 편찬한 책이라고 하며 시상(時相)에게 부탁하여 연석에서 아뢰었는데, 상이 이를 호남에서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시남이 부군에게 부탁하여 보유본(補遺本)을 만들게 했다고 하면서 와서 나중의 수정본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부군은 애당초 부탁받은 일이 없었으므로 처음에 함께 엮은 실상에 의거하여 말하였으나, 유상기가 남의 부추김을 받고서 부군이 이 책을 독차지하려 한다며 제멋대로 도리에 어긋난 말로 헐뜯다가 끝내 관계를 끊기에 이르렀다. 부군은 그가 미혹하여 잘못 행동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시옹(市翁)의 자손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실로 불쌍하게 생각할 일이지 노여워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7월에 학질에 걸렸는데, 약을 물리치고 들지 않으면서
“이 병이 어찌 약물로 효험을 볼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상이 듣고서 어의를 보내 간호하게 하고 병세를 계속해서 아뢰도록 하였으며, 또 이어서 어부(御府)의 약제(藥劑)를 보내게 하니, 부군이 임금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고 여겨 마침내 약을 드셨다. 또 특별히 액례를 보내어 병세를 묻고, 어주(御廚)의 진찬(珍饌)을 하사하였다. 겨울에 상소하여 사은하고, 인하여 중추부의 직함을 사직하였다.
“신이 이렇게 늙어서도 죽지를 않으니, 마음이 항상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두렵습니다. 이제 곧 숨이 넘어갈 듯한 위태로운 목숨이 어찌 약을 복용한다고 연명되겠습니까.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 온 것도 모두가 성상의 은혜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분수에 넘치는 직명을 여전히 지니고 있으니, 이제 곧 죽을 몸이 어찌 그대로 시일을 끌다가 참람하게 직명을 도둑질한 채로 죽어서 조정의 수치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성상이 비답을 내려 더욱 잘 조섭하라고 하유하였다. 이때 상이
방상(方喪)의 고제(古制)를 회복하고자 하여 하문하도록 명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신은 병석에 쓰러져 신음하며 천고(千古)의 군주들 가운데서도 탁월하신 성학(聖學)을 우러러 흠앙할 뿐입니다.”
하였다.
부군은 병이 깊어진 지 몇 달이 되었지만 오히려 세수하고 머리 빗는 일과 새벽의 사당 참배를 폐하지 않았다. 11월에 이르러서는 병세가 점점 더 중해졌고, 갑오년(1714, 숙종40) 1월에는 하루가 다르게 위독해졌다. 이에 동원(東源)에게 명하여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대한 유서(遺書)를 쓰게 하였다. 20일에는 여러 자손 및 병시중 드는 문인과 영결하고, 각각 가르치고 타이르는 말씀을 남겼으며, 사례(士禮)로 상을 치르라고 명하였다. 또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장례에 중국 물건을 쓰지 말아서 내 본뜻을 드러내도록 하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들이 간혹 재호(齋號)나 ‘선생’으로 명정(銘旌)을 쓰는데, 나는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계 선생은 묘표(墓表)에다 ‘창녕성모지묘(昌寧成某之墓)’라는 여섯 글자만 쓰도록 명했으니 이것을 법 삼을 만하다. 내가 죽은 뒤에 명정과 묘표는 의당 모두 여기에 따르되, 다만 일생 동안 징소(徵召)의 은혜를 입었으니 ‘모인(某人)’ 위에 ‘징사(徵士)’라는 두 글자를 쓰도록 하라. 신주(神主)를 쓸 때도 이에 따라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문인이 옳지 않을 듯하다고 의심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관함(官銜)을 쓰지 않는 것은 나의 보잘것없는 의리를 보이려 함이요, 징사라고 쓰는 것은 내가 국가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려 함이다.”
하였다. 또 두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천리 밖에 부모님을 장사 지내고 묘소 곁에 의지하여 살지 못했으므로 마음에 항상 통한이 되었다. 그래서 늘 나를 선영에 묻으라고 말하였고, 너희들이 그곳에 와서 살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이것은 그릇된 계획이다. 지금의 편론(偏論)은 장차 나라와 함께 망하고야 끝이 날 것이니, 살육(殺戮)으로도 부족해서 반드시 창칼을 겨누게 될 것이다. 사대부가 비록 이런 폐단을 바로잡고 고치지는 못할지라도 어찌 무익한 편론을 거듭하여 국가에 화를 끼칠 수 있겠느냐. 경기는 분잡하고 시끄러운 곳이므로 너희들이 반드시 그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모쪼록 나를 깊숙하고 정결한 곳에 묻고 그곳에 살도록 하여라.”
하였다. 23일은 이씨 부인의 기일(忌日)이다. 6, 7일 전에 동원에게 명하기를,
“내 병이 심하다고 해서 제사 날짜를 말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대개 정신이 혼미하여 혹시라도 잊을까 염려한 것이었다. 기일이 되어 말씀드렸는데, 그때 아침 해가 창으로 비쳐 들고 있었다. 부군이 흐느끼며 말씀하기를,
“선비(先妣)께서 목숨을 버리신 것이 바로 이때였다.”
하였다. 마침내 한참 동안 거애(擧哀)하고 나서는 병세가 크게 악화되었다. 입 안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서 시중들던 사람이 가만히 들어보니, “깊은 못에 임한 듯이 하고 살얼음을 밟는 듯이 한다.[如臨深淵 如履薄氷]”, “바른 도리를 얻고서 죽으면 그뿐이다.[得正而斃 斯已矣]”,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정직함이니,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생존하는 것은 요행으로 죽음을 면한 것이다.[人之生也直 罔之生也 幸而免]”, “군자는 ‘마친다’고 하고 소인은 ‘죽는다’고 한다.[君子曰終 小人曰死]”라는 등 몇 구절의 말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부녀자를 물리치라고 명하고, 자리를 반듯하게 하고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한 뒤 편안하게 돌아가셨으니, 바로 24일 신시(申時)였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노성산(魯城山)이 3일 동안 크게 울려 바람이 부는 듯하고 우레가 치는 듯한 소리가 났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문인들이 유교(遺敎)를 그대로 준행하여 사례(士禮)로 상례를 치렀다.
부음이 올라가자 상이 몹시 놀라 애도하며 누차 애통해하는 하교를 내리고, 특별히
동원(東園)의 비기(秘器)를 골라 보내도록 명하였다. 또 상수(喪需)와 제수(祭需)를 지급하게 하고, 3년 동안 월름(月廩)을 계속 지급하게 하였으며, 예장(禮葬)과 조제(弔祭)를 의식대로 거행하게 하였다. 동궁도 궁관(宮官)을 보내 조제하였다. 아들 행교(行敎)가 유지(遺志)에 따라 상소하여 예장을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월 19일에 공주(公州) 향지산(香芝山) 백운동(白雲洞) 좌묘(坐卯)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와서 참석한 원근의 인사가 1300여 인이었다.
이에 앞서 부군이 중추부의 직함을 지닌 뒤로 호조에서 의례적으로 월름을 실어 보냈는데,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또 상소나 정장도 번독스러울까 염려되어 단지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실어 보내지 못하게만 했었다. 이때에 와서 도신(道臣)이 아뢰자, 상이 그대로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아들 행교가 대궐로 나아가 상소하여 도로 바치기를 청하고, 아울러 3년 동안 월름을 계속 지급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다. 상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다가 나중에 또 하교하기를,
“살았을 때 받지 않았던 물자를 지금에 와서 그 아들이 감히 편안히 받지 못하는 것은 정리(情理)로 봐서 당연하다. 내렸던 명을 도로 거두어 그 뜻을 따라주되, 월름은 3년 동안 계속 지급하여 제수로 사용하게 하라.”
하였다.
부군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한쪽 편 사람들이 원수처럼 미워하기를 그만두지 않았고, 부제학 정호(鄭澔)가 또 《가례원류》 서문을 쓰면서 무함하여 욕하였는데, 상이 보고 진노하여 정호에게 죄를 주도록 하교하였다. 또 절구 두 수를 지어 추모하고 애도하기를,
유림은 도덕을 숭상하였고 / 儒林尊道德
소자 또한 일찍이 흠앙했었소 / 小子亦甞欽
평생 한 번 만나 보지 못했었기에 / 平生不識面
사후에 한이 더욱 깊어진다오 / 沒後恨彌深
하였으니, 성주(聖主)의 권우(眷遇)와 은례(恩禮)가 사후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병신년(1716, 숙종42)에 이르러 불행하게도
당인(黨人)이 용사(用事)하게 되자 교묘하게 참소하고 추악하게 무고하고, 심지어 문경공이 효묘(孝廟)를 무함하고 부군이 스승을 배반했다고까지 말하였다. 이에 대해 중외(中外)의 유생들이 맞서서 상소하여 신구하고 변론하였다가 모두 죄를 입었고, 정유년(1717)에는 끝내 양세(兩世)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였으므로 사림이 극도로 분통해하였다.
경종 임인년(1722, 경종2)에 이르러서 양호(兩湖)의 유생 김수귀(金壽龜) 등, 성균관 유생 황욱(黃昱) 등이 상소하여 그 억울한 무함을 변론하였고, 대신(大臣)이 또 전후에 무함을 입은 실상을 아뢰고 선생의 본뜻이 아님을 밝혔다. 이에 상이 마침내 양세의 관작을 회복하도록 명하고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니, 시법(諡法)에 ‘도덕이 널리 알려진 것[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예악이 밝게 갖추어진 것[禮樂明具]’을 성(成)이라고 한다. 여러 유생들이 용계(龍溪)의 옛 거처에 서원을 세워 제향(祭享)하였으며, 또 노강서원(魯岡書院)에 종향(從享)하였다.
부군은 덕성이 인자하고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되 의용(儀容)이 장엄하고 정중하며 도량이 깊고 넓었으니, 대개 타고난 성품이 이와 같았다. 그런 데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의 가르침을 통해 순차적으로 법도를 갖추어, 청소하고 응대하며 수건을 매고 버선을 신고 바지를 입는 등의 일상적인 일에서 그 근기(根基)를 함양한 것이 이미 조화로웠다. 장성해서는 한결같이 문경공의 법문(法門)을 준수하여 주경 궁리(主敬窮理)와 극기 궁행(克己躬行)을 친절히 강습(講習)하고 빈틈없이 힘썼으니, 대개 가정을 벗어나지 않고도 몸가짐과 학업이 이미 이루어졌다.
학문은 오로지 내면에 힘을 써서 인륜을 기본으로 삼고 엽등(躐等)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입지(立志)의 독실함에 있어서는
“성인의 성(性)도 나의 성과 같다. 배워서 성인에 미치지 못한다면 내 성에 힘을 다 쏟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고, 무실(務實)의 지극함에 있어서는
“모두가 실리(實理)여서 사물마다 근간이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무실은 위로도 통하고 아래로도 통하는 공부이다.”
하였다. 수기(修己)는 경(敬)을 위주로 하되 외면을 수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일찍이 잠시라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고, 존심(存心)은 성(誠)을 전일하게 하되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으로 공부를 삼아 한순간도 중단한 적이 없었다. 독서하여 그 이치를 궁리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진지(眞知)와 실득(實得)에 주안점을 두고 지루한 훈고(訓詁)에는 힘쓰지 않았고, 성찰하여 그 기미를 징험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자신에게 절실한 문제를 체인(體認)하는 것으로 요지로 삼아 공사(公私)와 의리(義利)를 정밀히 살폈다. 널리 배우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기괴하고 특이한 것을 숭상하고 좋아하는 병통을 배척하였으며, 간략함으로 돌이키는 공부를 귀하게 여기되 외물을 추구하고 이름을 따르는 폐단을 특히 경계하였다. 스스로 수양하는 실질을 힘쓰는 데는 반드시 충신(忠信)의 공부를 위주로 하고, 도(道)에 나아가는 법을 말함에 있어서는 매양
홍의(弘毅)의 가르침을 외웠다. 겸허하여 부족한 점이 있는 사람처럼 각고하여 스스로를 독책하였고, 무엇을 잃은 것처럼 급급하였으나 너그럽고 도량이 커서 박절하지 않았다.
늘 배우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학문은 뜻을 세우지 않으면 이루지 못하고, 처음 시작할 때 실질에 힘쓰지 않으면 끝내 이루지 못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예(禮)로써 사람을 가르쳤던 것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인간의 일상생활은 예가 아닌 것이 없다. 예가 없으면 귀와 눈을 돌릴 곳이 없고 손과 발을 둘 곳이 없으니, 더욱 하루라도 강구하고 익히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고, 또 이르기를,
“공문(孔門)의 학문은 독서를 근본으로 하였다. 지경(持敬)과 궁리(窮理), 수심(收心)과 양성(養性)이 모두 여기에 달렸으니, 이것을 놔두고는 의거할 바가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반드시 종사함이 있으면 자연히 하는 바가 있고, 미리 기대하지 않으면 기필함이 없으며, 마음에 잊지 않으면 중단함이 없고, 조장함이 없으면 엽등(躐等)하는 병통이 없다.
맹자(孟子)의 이 말은 실로 천고에 뛰어난 학문의 지결(旨訣)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른바 ‘자득(自得)’이라는 것은 성현의 가르침 밖에서 별도의 의리를 탐구해 내는 것이 아니다. 성현의 가르침 속에서 그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을 진정으로 알아내어 내 마음과 일치하여 간격이 없게 된다면 이것이 자득이고 이것이 진정한 학문인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선유(先儒)들이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논변한 것이 많은데, 율곡이 이른 바 ‘기발이승(氣發理乘)’이라는 단어는 실로 바뀔 수 없는 정론이 되었고, ‘이통기국(理通氣局)’ 4자는 또 조리가 분명하고 뜻이 잘 통하여 막힘이 없으니, 명리(名理)의 설이 여기에 이르면 거의 완벽하여 더 논할 바가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선현(先賢)이 말씀한 의리는 비록 동이(同異)와 득실(得失)이 있더라도 모두 공력을 쌓고 실제로 터득한 데서 나온 것이니, 후학이 또한 쉽게 단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 단지 각각 그 설에 나아가서 각각 그 뜻을 연구해야 할 뿐이니, 깊이 연구하고 음미하다 보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연히 진정으로 이해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했던 것이야말로 진정 성인이 되는 근기(根基)이다.”
하였고, 또 우리나라 선유 중에서 퇴도(退陶
이황(李滉))를 가장 사모하여,
“퇴도는 동방의 회옹(晦翁 주희(朱熹))이니, 회옹을 배우려 한다면 퇴도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였다. 이것은 모두 부군이 평소 참되게 실천하고 실질적으로 체득한 말씀이었다. 그러므로 내외(內外)가 함께 닦이고 지행(知行)이 아울러 정진되어 안으로 수양하고 밖으로 익힘으로써 표리(表裏)가 막힘이 없었으니, 동정(動靜)은 한결같이 천칙(天則)을 따르고 언행은 예도(禮度)를 어기지 않았다. 내면세계는 차분히 가라앉아 고요하면서도 깊고, 사람들을 접하는 데는 진실하고 순수하며 정성스럽고 독실하였으니, 겸손하고 공손하면서도 평탄하고 진실하며 온화하고 순수하면서도 광휘를 발하여 끝내 하나의 성(誠)으로써 덕을 이루었다.
행사(行事)에 나타난 것을 살펴보면, 평상시 거처할 때는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집 안을 깨끗이 청소한 뒤에 궤안(几案)을 정돈하고 반듯이 앉아 독서하였는데, 온종일 삼가고 조심하면서 어깨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시선을 바르게 하였다. 한가한 시간에도 숙연하기가 빈객이나 벗을 대한 듯하였고, 병을 앓을 때조차도 몸가짐을 조심하여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음식을 드시고 잠자리에 들고 일어나는 데도 정해진 법도가 있고, 의복과 지팡이, 신발 같은 것도 모두 정해진 자리가 있었으며, 위의(威儀)의 법칙 및 말하고 침묵하는 절목이 정연하여 각각 법도가 있었다. 만년에는 참된 공력이 쌓이고 오랜 세월 힘쓴 덕분에 행함이 순조롭고 이치가 터득되었으니, 일상적인 행동은 남들과 크게 다른 것이 거의 없었지만 저절로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여러 책들을 돌아가며 반복해서 읽고 깊이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한결같이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여 사람들과 강설할 때에는 마치 자신의 말을 외우는 듯이 하였다. 때때로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시경(詩經)》, 《서경(書經)》, 《중용(中庸)》, 《대학(大學)》 등 책을 묵송(默誦)하였다. 역사서 중에서는 《강목(綱目)》을 가장 사랑하였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이 책은 주자(朱子)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범례(凡例)가 엄정하고 사실이 완비되었으며, 선유(先儒)의 좋은 의논도 모두 채택되어 들어갔으니, 배우는 사람들은 익숙히 읽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리고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의 글까지도 통독하였다. 또 예학(禮學)에도 조예가 깊어서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예(禮)나 특수한 상황에서의 예를 물어 오면 일일이 예경(禮經)에 의거하고 여러 학설들을 인용하여 대답하였는데, 수답(酬答)에 막힘이 없고 내용과 형식이 곡진하게 맞았다. 부지런히 강송(講誦)하는 일을 노년이 되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의리를 탐구함에 있어서는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도 빈틈이 없었으나, 또한 일찍이 스스로 만족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저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어떤 문인이
“그러시면 장차 후인(後人)에게 은택을 주지 못하게 됩니다.”
라고 말했는데, 부군이 이르기를,
“책을 저술하여 입언(立言)하는 것을 어찌 후학(後學)이 감히 할 바이겠는가. 옛사람의 저술은 농기구를 만들고 질그릇을 굽는 것처럼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은 경전(經傳)으로부터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책에 이르기까지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본디 저술을 일삼을 필요가 없다. 배우는 자들은 단지 여기에 나아가서 익숙히 읽고 정밀히 생각하여 진정으로 알고 실제로 행하면 될 뿐이다. 만약 여기에 힘쓰지 않고 저술만 일삼아 전현(前賢)들보다 나아지기를 구한다면 이는 무실(務實)의 학문이 아니다.”
하였다. 천문(天文), 지리(地理), 율려(律呂), 상수(象數) 분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뜻을 두지 않고,
“나는 이런 것을 볼 여가가 없다.”
하였으며, 여기에 대해서 묻는 사람이 있으면
“공부해 본 적이 없어서 감히 억지로 설명하지 못하네.”
라고 답하였다.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안색을 살펴 뜻에 맞추었고, 봉양함에 있어서 어기는 일이 없었다. 부모상을 치를 때는 예법을 준행하여 감히 과도하게 곡읍(哭泣)하지 않았으나, 눈물로 상복의 소매가 다 삭았다. 이씨 부인이 비명에 돌아가신 것이 평생의 통한이 되어 부귀영화를 가까이하지 않고, 누추한 집에 살며 거친 음식을 먹는 고생을 감수하였다. 손위 누이와 동생에 대한 우애가 시종 한결같고 어린아이들을 어루만지고 돌보는 데에 은혜와 자애가 두루 미쳐 가정에 화기(和氣)가 가득 넘쳤다.
제사를 특히 엄격하게 받들어 때맞추어 제물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차분한 마음으로 깨끗이 재계하여 정성과 사랑을 다하면서도 집안 형편에 맞추어서 조촐하고 정갈하게 차리도록 힘썼다. 기일(忌日)에는 반드시 4일 동안 소식(素食)을 하고, 제사를 마치더라도 종일토록 슬퍼하는 마음이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선세(先世)의 기일에 혹 제사에 참여하지 못할 경우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조용히 앉아 날이 밝기를 기다렸고, 가묘(家廟)의 새벽 참배는 팔순의 연세에도 추위나 더위, 비바람을 이유로 폐하는 법이 없었다. 누군가 주자(朱子)가 70세에 장손(長孫)에게 제사를 물려주었던 뜻을 가지고 말씀드리자, 답하기를,
“근력이 감당할 만해서 하는 것이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또 사우(師友)들에게도 독실하였으니,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탄옹(炭翁
권시(權諰)), 시남(市南
유계(兪棨))의 기신에는 이틀간 소식을 하였는데 노년에도 이를 폐하지 않았으며, 신독재의 후손이 영락(零落)하자 기제 및 세사(歲祀)에 반드시 제수 마련을 도왔다. 친구의 상에는 반드시 곡위(哭位)를 만들어 곡을 하고, 또 소식하고 슬퍼하며 조문하고 부의를 전하여 정의(情誼)를 빠뜨리는 바가 없었다.
종족이 매우 많았으나 각각 사랑을 쏟았고, 존비(尊卑)와 친소(親疎)에 대해 반드시 친목을 다하였으며, 질병이 있거나 상이 나면 지극히 근심하고 슬퍼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선조(先祖)가 차별을 두지 않고 사랑하였던 마음을 늘 가슴에 새겨야 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한 사람의 선악(善惡)은 또한 한 집안의 영욕(榮辱)이다.”
하였다. 항상 공자(孔子)가 이른 바 “이익을 따라서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 “소인은 형벌을 두려워한다.”라는 등의 말로 종족들을 힘껏 이끌어 불의(不義)에 빠지지 않게 하였다. 종족 중에 선하지 않은 사람이 있더라도 엄한 말로 호되게 꾸짖는 법이 없이 반드시 조용하게 가르치고 타이르기를,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잘못이다.”
하고, 일에 따라 잘 인도하며 성의를 다하려고 노력하였다.
자질(子姪)을 가르치는 데는 반드시 문(文)ㆍ행(行)ㆍ충(忠)ㆍ신(信)과 겸공(謙恭)ㆍ퇴양(退讓)으로써 하였다. 과거 공부 역시 일찍이 금지한 적이 없었다. 이르기를,
“자제 가운데 지기(志氣)가 있는 자는 절로 이것을 탐탁해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무위도식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새로운 책을 읽지 못하게 하면서,
“비록 문장(文章) 공부를 하고자 하더라도 경서(經書)를 읽으면 어찌 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과문(科文)도 반드시 경전(經傳)을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고, 내외(內外)와 경중(輕重)의 나뉨에 대해서도 일찍이 자상하게 일러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손 중에 교훈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비록 성년이 되었더라도 곧바로 회초리를 들었고, 과실이 있으면 간혹 눈을 감고 단정하게 앉아서 말씀도 하지 않고 물러가라고도 하지 않은 채 한참을 기다렸다가 자신의 죄를 깨달은 뒤에야 비로소 사색(辭色)을 대략 누그러뜨렸다.
동원(東源)은 나면서부터 어리석고 노둔하였는데, 부군께서는 가르치는 방도에 온갖 힘을 다 기울였다. 항상
중인(衆人)이 분음(分陰)을 아끼는 뜻으로 밤낮없이 권면하였고, 간혹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쏟느라고 독서에 힘쓰지 않으면 또 훈계하기를,
“학문의 도리는 다른 것이 아니다. 마음에 불안한 바는 곧 의리에 불안한 바이니, 마음에 불안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웬만큼은 된 것이다. 비록 독서하지 못하더라도 모쪼록 이러한 생각을 잊지 않는다면 일상적인 생활과 행위가 모두 학문일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병중에는 병중의 공부가 있고, 말 위에서는 말 위에서의 공부가 있으며, 침상이나 측간, 앉고 눕고 걸을 때까지도 각각 당연한 공부가 있으니, 어느 곳인들 공부할 곳이 아니겠느냐.”
하고, 또 이르기를,
“일을 만나면 반드시 그 당연한 바의 이치를 추구해야 하니, 이것이 또한 궁리이다.”
하였으니, 당면한 상황에 알맞은 교훈으로 일러 주고 경계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향촌에서는 늘 몸가짐을 겸손하게 하고 온화하고 공경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였다. 현우(賢愚)와 친소를 모두 각각 예에 맞게 대하고, 흉례(凶禮)에 조문을 하고 혼례(婚禮)에 축하를 함에 정을 곡진히 하였다. 학문에 힘쓴다는 말을 들으면 칭찬하고 인정하여 진덕 수업(進德修業)을 권면하였고, 혹 과실이 있으면 불쌍히 여기며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인도하였다. 원근의 인사들이 줄지어 와서 찾아뵈면 비록 병이 있을 때라도 만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의관을 정제하고서 절하고 꿇어앉기를 조심스럽게 하였고, 온화하고 정성스럽게 응대하여 상서로운 화기(和氣)가 사람에게 배어들었다. 말과 표정에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종복(從僕)들을 욕하며 나무라지 않으니, 교활하고 거짓된 자가 정성을 바치고 모질고 사나운 자가 마음을 고쳤으며, 고을 사람들이 감화되고 사방이 존경하였다. 마을의 소민(小民)들도 모두 사모하고 좋아하며 사랑하고 신뢰하였으며, 평소 추향(趨向)을 달리했던 사람들도 한번 의용(儀容)을 접하고 나면 사사로이 공경하고 탄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한평생 겸양의 덕을 지켜 사도(師道)로써 자처하지 않고 문하의 선비들을 모두 붕우로 대하였으며, 각자의 재능에 따라 자상하게 열어 주고 이끌어 주었다. 가르침의 요지는 행의(行義)를 우선하고 문예(文藝)를 뒤로하며, 본실(本實)을 숭상하고 부화(浮華)를 생략하는 것으로, 반드시 명목을 좇지 말고 실질적인 공부를 하게 하였다. 문공(文公
주희(朱熹))의 《소학(小學)》, 《격몽요결(擊蒙要訣)》, 《주문지결(朱門旨訣)》로 먼저 그 대본(大本)을 세우고, 또 우계(牛溪)와 율곡(栗谷)이 정한 독서의 순서에 따라 차례차례 가르쳤다. 초학자(初學者)는 반드시 하학(下學)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며 〈초학획일도(初學畫一圖)〉를 게시하고, 배우는 자는 반드시 문로(門路)를 바르게 해야 된다고 하며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를 드러내었다. 의심나는 부분을 깨닫지 못하면 자상하게 비유하여 깨우쳐 주고, 범범하게 묻는 경우에는 반드시 다시 생각하게 하였으며, 상대가 묻지 못하는 것이나 알 수 없는 것을 먼저 억지로 설명하는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장황하게 강설하는 것을 보면 매우 싫어하면서,
“묻는 자는 의문을 해소하는 데에 오로지 뜻을 두지 않고, 답하는 자는 또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것에 가까우니, 이것이 심신(心身)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하였으니, 또한 배우는 자로 하여금 절실하게 묻고 일상적인 것을 생각하며 자신의 몸에 돌이켜 체인(體認)하고자 한 것으로서, 일찍이 입지(立志)와 무실(務實)의 가르침을 반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년(1684, 숙종10) 이후로는 문을 닫고 강의를 중단하였다. 간혹 상대방의 정성스러운 뜻에 감복하여 일러 주는 경우도 있었으나, 부귀한 집안의 자제는 비록 정성과 예를 극진히 하더라도 끝내 사절하면서,
“나는 세상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싶지 않다.”
하였다.
집안 살림이 매우 가난하여 잡곡밥과 나물 반찬도 떨어질 때가 있었지만 편안하게 받아들였고, 몸을 봉양하는 일로 마음을 쓴 적이 없었다. 만년에도 밥상에 반찬이 두 가지 올라오면 반드시 한 가지를 치우게 하였다. 사양하고 받는 문제에 특히 엄격하여 의(義)가 아닐 경우에는 지푸라기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일찍이 이르기를,
“젊었을 적에 벼슬살이하는 족인(族人)에게 벼룻집 하나를 달라고 했는데 선군자(先君子)께서 이를 나무라셨다. 그 이후로는 감히 남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였다. 수령(守令)과 방백(方伯)의 의례적인 선물도 두미(斗米) 이상은 모두 물리쳤고, 관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보내오는 선물은 하찮은 것이라도 받지 않았으며, 말년에 직위가 높아진 뒤에도 친지들이 의례적으로 보내오는 선물이 조금 많을 경우에는 조금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돌려보냈으니, 미세한 일에서 능히 삼간 것이 이와 같았다.
평소 마음가짐이 충성스럽고 어질어서 남과 절교하는 것을 깊이 경계하였다. 간혹 교제를 끊는 일이 있더라도 부군 쪽에서 먼저 절교한 적은 없었고, 절교한 뒤에도 상대의 과실이나 악을 말하는 법이 없었다. 항상 이르기를,
“저쪽이 만약 뉘우치는 마음을 갖는다면 어찌 그의 새로워진 면모를 허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이르기를,
“피혐(避嫌)의 길이 너무 넓은 것은 말세의 폐습이다.”
하고, 자질(子姪)들에게 피혐을 너무 과도하게 하지 않도록 경계시켰다. 일찍이 일가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회천(懷川) 및 유상기(兪相基)와는 내 자손만 관계를 끊을 것이요, 다른 사람들은 절교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부군은 어린 나이에 남모르는 슬픔을 가슴에 품었기 때문에 은거하여 절개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세상에 나갈 뜻을 버렸다. 그러므로 조정의 징소(徵召)가 연달아 내려도 번번이 개인적인 정리를 들어 힘껏 사양하였다. 계해년(1683, 숙종9)에 이르러서는 성주(聖主)가 간곡하게 초치하고 동지들이 함께 잡아당기고 조정의 신하들이 혹 잠시 뜻을 굽히기를 바랐지만 돌처럼 굳은 지조를 바꾸지 않았다. 만년에는 지위가 더욱 높아지고 예우가 더욱 융숭하여 삼공(三公)의 직책에 취임할 만도 했으나, 분열된 당론(黨論)과 무너진 세도(世道)는 더욱 손댈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종신토록 산골에서 은거하기로 정한 마음을 바꾸지 않은 것은 또한 지극한 슬픔이 마음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만약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와 같은 재주가 있다면 당연히 나가서 일을 할 것이요, 이미 나가서 나라를 안정되고 강성하게 만들어 복수설치(復讎雪恥)하는 계책에 뜻을 둔다면 청나라에 사신 가고 오랑캐 사신을 접대하는 것은 절목(節目)에 관계된 미세한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한번 해볼 만한 재주가 없다면 차라리 내 마음에 편안한 바를 지키는 쪽이 낫다.”
하였다.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이 일찍이 교지(敎旨)에서 청나라 연호를 삭제하여 출처(出處)의 절도(節度)를 삼기를 청했는데, 부군이 이르기를,
“그렇게 할 바에는 나가지 않았어야 한다. 이미 나간 이상 어찌 이러한 일에 구구하게 마음을 써서야 되겠는가. 이것은 일을 하는 모양새가 아니니, 끝내 명목상의 사업으로 귀결될 뿐이다.”
하였다. 항상
“하찮은 동남(東南)의 일만으로도 오히려 근심을 감당하지 못할 판에 어떻게 회복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라는 주 부자(朱夫子)의 말을 외우며 재삼 통탄하고 한스러워하였다.
부군은 비록 일찍이 나가서 세상을 위해 일한 적은 없었지만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지성(至性)에 근본하였다. 조정의 잘못된 정사, 허물을 꾸짖는 천재지변, 사방의 수한(水旱)ㆍ기근 등에 대해서 들으면 문득 수심 띤 얼굴로 우려하고 탄식하였고, 때때로 한밤중까지 잠들지 못하기도 하였다. 간혹 구언(求言)의 교지가 내려오면 비록 칩거하는 몸이라는 이유로 감히 분수를 넘어 헌의(獻議)하지 못했지만, 전후의 사양 상소에서 본원(本源)에 나아가 대의(大意)를 제시함으로써 애틋한 정성을 조금이나마 바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근시(近侍)가 어명을 받들고 이르면 전후(前後)로 사배(四拜)한 뒤 공경히 성지를 받들고, 왕인(王人)을 맞이하여 남쪽을 향해서 설치한 자리로 오르게 하였다. 그런 다음 북쪽을 향해 몸을 구부린 채 엄숙하게 앉아 숨소리조차 내서는 안 될 듯이 하면서, 먼저 성후(聖候)를 묻고 다음으로 먼 길을 온 노고에 사례하고 다음으로 황공하고 곤궁한 사정을 언급하였는데, 온화한 말씨와 겸손한 용모가 사람의 마음을 뭉클하게 감동시켰다.
중년(中年)에
회천(懷川)의 일을 만난 것은 실로 횡역(橫逆)이었다. 침범하여 욕보이고 꺾고 속박한 것이 거의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으나, 부군은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스스로를 지켜 그 권도(權度)의 바름을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옛 정의(情義)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우옹(尤翁)’이라고 칭하였고, 그가 직접 상소한 이후에는 ‘회천(懷川)’이라고 칭하였으나 또한 한 번도 그 성명을 지척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날조한 상소를 보면 거의 원수보다 심하게 대한 것인데, 가만히 생각하면 원망스럽거나 노여운 줄은 모르겠고 도리어 그 미혹됨이 불쌍하게 여겨지니, 이것이 내 성정(性情)과 기질의 부족한 점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나도 회천의 일에 잘못한 점이 없지 않으니, 사람들이 나더러 한 가지도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것도 편파적인 논의이다. 후세에 은혜와 원망이 모두 잊혀진 다음에도 반드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의가 있겠지만, 다만 반드시 나를 두고 스승을 배반했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혹 내가 겪었던 일을 거울삼아 사제(師弟)라는 이름을 싫어하는 사람이 나오게 된다면 이것은 내가 후세에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종제(從弟) 덕포공(德浦公
윤진(尹搢))이 일찍이 감탄하기를,
“우리 형의 의로운 처신은 어진 군자의 마음가짐이다.”
하였다.
저서로 문집 50권이 있고, 또 속집(續集)과
예서(禮書) 약간 권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행교(行敎)는 대사헌이고, 차남 충교(忠敎)는 부솔(副率)이며, 딸은 임진영(任震英)에게 출가하였다.
행교의 초취(初娶)는 도사(都事) 박태소(朴泰素)의 딸인데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재취(再娶)는 장령 송기후(宋基厚)의 딸로서 3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동원(東源)이고, 차남은 동준(東浚)이며, 막내 동함(東涵)은 진사이다. 딸은 현령 송익보(宋翼輔), 조한보(趙漢輔), 현령 오수채(吳遂采)에게 출가하였다. 충교는 한성량(韓聖亮)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동렴(東濂), 차남은 동엄(東淹)이며, 딸은 김상갑(金相甲), 권횡(權宖), 이정림(李挺霖), 이시연(李蓍延)에게 출가하였다. 임진영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사경(思敬)이고, 딸은 현감 박필기(朴弼基)에게 출가하였다. 동원은 1남 광집(光緝)이 있고 두 딸은 어리다. 동준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동렴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어리다. 동엄은 2녀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아! 동원이 태어난 것이 거의 부군께서 예순 가까이 된 때였으므로 평소의 언행을 보고 듣지 못한 것이 실로 많았고, 사리를 분별할 만한 나이가 되어서도 미혹하고 어리석고 거칠고 서툰 탓으로 일용(日用)과 동정(動靜)을 잘 관찰하여 묵묵히 깨달아 알지 못하였다. 타계하신 이후로 부군의 진실된 면모가 갈수록 유실되는 것이 두렵기에, 집안에 전해 오는 문자를 고찰하고 고로(故老)들이 전하는 기록을 증거 삼은 다음 가정에서 직접 본 한두 가지 일화들을 참고하여 연도별로 뽑아 기록하였다. 그러나 도덕의 고하(高下)와 조예(造詣)의 천심(淺深)은 어두운 식견이 미칠 수 없는 바일 뿐만 아니라 자손이 사사로이 말할 것도 아니기에 감히 함부로 논하지 못하였고, 또한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과장된 말을 함으로써 우리 조고(祖考)께서 평생 지키셨던 겸양의 덕을 손상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당세의 붓을 잡은 군자가 가련히 여겨 채택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정미년(1727, 영조3) 7월에 손자 동원(東源)은 삼가 기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