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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을 기다리며 (농암선생 한시)

아베베1 2011. 12. 29. 06:04

 

 

 

 

 

 

 

농암집 제5권

 

 벗을 기다리며

밤에 무우단(舞雩壇)에서 술을 마시며 여수례(旅酬禮)를 행하다.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로 운자를 나누어 시를 지었는데 나는 ‘공(空)’ 자를 얻었다.


골짝 안 신선의 집 구름 속에 묻혔는데 / 洞裏仙家住白雲
복사꽃이 우수수 붉은 비 흩날리네 / 桃花紅落雨紛紛
우리 벗님 언제 오나 서글피 기다릴 제 / 佳期悵望知何許
만장봉 저 너머로 석양이 뉘엿뉘엿 / 萬丈峯西日已曛

         

 

      도봉산(道峯山)에 들어서며

 

      삼만 그루 복사꽃 만발한 꽃길 / 桃花三萬樹
     무릉도원 들어가는 기분이로세 / 似入武陵行
     시냇물은 언제부터 흘러내렸나 / 流水何時有
     거친 길 예로부터 뻗어 있었지 / 荒塗自古橫
      해 기울자 야윈 말 걸음 늦어도 / 日斜羸馬緩
     다순 바람 겹옷이 한결 가벼워 / 風暖裌衣輕
     십육 년 전 본 산을 다시 대하니 / 十六年前面
     푸르른 산봉우리 한결 새롭다 / 蒼峯刮眼明

 

 

 밤에 무우단(舞雩壇)에서 술을 마시며 여수례(旅酬禮)를 행하다.

‘공산무인 수류화개(空山無人水流花開)’로 운자를 나누어 시를 지었는데 나는 ‘공(空)’ 자를 얻었다.


봉우리 높이 솟은 도봉산이여 / 峨峨道峯山
숲 나무 울창하다 서울 동쪽에 / 鬱鬱神京東
그 아래 일백 굽이 흐르는 시내 / 下有百折溪
수석 서로 어울려 영롱하다오 / 水石相玲瓏
삼나무며 소나무 흰 구름 닿고 / 杉松矯白雲
줄사철이 청풍나무 타고 오르네 / 薜荔裊靑楓
옛 현인 은거하여 소요하던 곳 / 昔賢所盤桓
사당 안에 놓인 제기 엄정하여라 / 俎豆儼明宮
선현의 곧은 절개 되새겨보니 / 曠世挹遺烈
진한 감동 나약함을 떨쳐 세우네 / 感慨激懦衷
삼월이라 늦봄에 이곳 찾으니 / 我來三月暮
초목은 그새 벌써 녹음 짙은데 / 草樹已葱蘢
여러 명의 푸른 옷 우리 유생들 / 侁侁靑衿子
무우단 부는 바람 함께 쏘일 제 / 共追舞雩風
조용한 뜰 늙은 괴목 그늘이 지고 / 閒庭老槐陰
해묵은 제단에는 붉은 꽃 날려 / 古壇飛花紅
사흘 동안 머무는 즐거움이란 / 留連三日歡
취한 밤과 맑은 대낮 가릴 것 없네 / 夜飮淸晝同
주나라 예법 따라 예를 행하며 / 揖讓用周禮
두 말들이 술동이 비지 않으니 / 朋樽殊不空
거문고를 탈 것이 무어 있으랴 / 點瑟何用鼓
샘 소리가 다름 아닌 거문고 가락 / 鳴泉自絲桐
세속의 얽매임을 떨쳐버리자 / 物累良已遣
깊고도 조화로운 도심이로세 / 道心穆以融
한번 웃고 세상 속 되돌아보니 / 一笑顧世間
봄날의 아지랑이 가물거리고 / 野馬春濛濛
도봉산 봉우리만 구름 위 솟아 / 獨有雲表峯
풍진 속에 떨어지지 아니하였네 / 不墮塵
벗들이여 여러분께 당부하거니 / 歎息謂諸子
영원히 이끗 명예 멀리했으면 / 永謝利名叢



 

 


 

농암집 서
농암집 서(農巖集序) [김창흡(金昌翕)]


나의 중씨(仲氏) 농암 선생(農巖先生)이 별세한 이듬해에 문인 김시좌(金時佐) 등이 선생의 유문(遺文)을 수집ㆍ선별하고 편차를 정하여 30여 권으로 묶었다. 그러고는 인쇄하여 간행하기에 앞서 나에게 서문 한마디를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아, 선생의 높고 크고 심원하고 정밀한 학덕은 이 문집으로 다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나처럼 학문이 깊지 못한 사람은 이 문집조차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선생의 진면모를 어떻게 다 드러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형제들 중에 선생과 가장 나이가 비슷하고 많은 경험을 공유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부모님이 좌우에서 손잡고 이끌어 주시던 어린 시절부터 장성하여 어른이 되고 또 노년에 이르기까지, 나는 선생과 한 밥상에서 밥을 먹고 선생에게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선생이 학업에 전념했던 장소는 어디이며, 선생이 즐겨 읽고 읊조렸던 글은 어떤 글인지를 낱낱이 보아 왔다. 그리고 선생은 학문의 순서를 차근차근 밟아 천근한 데서 심오한 경지로 들어가서는 뛰어난 문학서와 철학서를 두루 섭렵하였는데, 나는 그 과정에서 도저히 따라잡기 어려운 선생의 높은 경지를 보아 왔다. 이러한 내용으로 서문을 쓰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선생은 총기를 타고나 지혜가 남달랐는데, 겨우 일여덟 살을 지나면서부터 침식을 잊을 정도로 서책에 마음을 쏟았다. 때로는 집안사람이 선생을 한참 찾다가 책장 한구석에서 발견하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면 선생은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고요히 앉아 있곤 하였다. 이윽고 서고에서 나와 단정히 앉아 글을 읽으면 그 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을 쪼개듯 낭랑하였고 높고 낮게 반복되는 음조가 오묘한 가락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무지한 아녀자와 아이들도 그 소리에 반하여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처럼 귀를 기울일 정도였다.
선생이 진사시에 입격한 것은 약관(弱冠)이 되기 전이었다. 그 당시 조야(朝野)는 태평하고 가문은 번성하였으니, 선생은 시운을 타고 두각을 드러내어 유감없이 문장솜씨를 발휘함으로써 예악 정치의 시대적 요청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저 옛날 자연(子淵)과 자운(子雲)이 문장으로 나라를 빛냈던 그와 같은 업적을 선생에게 기대하였다.
그러나 을묘년(1675, 숙종1) 이후로 선생은 날로 험해지는 세상과 기울어져 가는 가운(家運)으로 인해 매우 불우하였다. 선생은 남북으로 떠돌며 온갖 역경을 다 겪었는데, 당시 선생의 자취는 월출산(月出山)과 보개산(寶蓋山) 부근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이때 선생은 부화(浮華)한 문장을 차츰 거두고 실질적인 학문을 추구하여 특별한 맛이 없는 담박한 것을 즐겼다. 경전의 복잡다단한 주석을 연구, 세세한 부분까지 빠짐없이 종합 정리하고 중요한 핵심을 낱낱이 분석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엄밀한 교감(校勘)과 정정(訂正)이 쌓여 책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또 마융(馬融)과 정현(鄭玄)이 이루었던 것과 같은 훈고학의 성취를 선생에게 기대하였다. 그 뒤에 선생은 조정에 논사(論思)의 직임으로 있었는데, 그 당시 경연석상에서 종종 두각을 드러내어 은연중에 유림에서의 명망과 지위가 높아졌다.
아, 그러나 마침 기사환국(己巳換局)이 터지고 말았다. 선생은 이때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가 집을 짓고 살며 농암(農巖)이라는 호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임금에게 버림받고 은거하는 몸으로, 세상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도 날로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처음 품었던 뜻을 단단히 지켜 오직 염(濂)ㆍ낙(洛)ㆍ관(關)ㆍ민(閩)의 학문만을 추구하였다. 선생이 천명에 순응하여 참된 본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자세를 끝까지 견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학문에 대해 논하자면,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 이후에는 그 등급을 셋으로 대별할 수 있으니, 문장(文章)ㆍ훈고(訓詁)ㆍ유자(儒者)의 학문이 그것이다. 이천 선생(伊川先生)까지만 해도 생도들에게 이 점을 말해 주어 근본에 힘쓰도록 권면하였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유자의 학문으로 곧장 들어가지 못하고 초사(楚辭)ㆍ고시(古詩)ㆍ병서(兵書)ㆍ선서(禪書) 등에 어지럽게 마음을 썼는데, 이는 소년시절의 습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탈피해 나갔다. 이와 같은 주자의 실례로 볼 때, 성인의 자질을 타고나 처음부터 사리에 밝은 자가 아니라면 이러한 습관에 빠지는 것은 면할 수 없다 하겠다. 선생의 학문이 외연(外延)을 확장했다가 유자의 학문으로 수렴되면서 대략 세 번의 변화를 겪었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선생의 고유한 특성은 오직 간결 평이함뿐이었다. 선생은 그 진리를 체득한 마음에서 발로하여 말과 행동으로 표출된 일들이 어느 것 하나 툭 트이고 공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글을 지을 때에는 옛사람의 글을 답습하거나 표절하지 않은 결과 모든 글이 독창적이었고, 경전을 해석할 때에는 천착하거나 견강부회하지 않은 결과 논리가 순하였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참된 본성을 보존하고 사물의 이치를 두루 깨치는 심오한 경지에 나아간 것도 요컨대 오직 간결 평이함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문집을 보는 사람이 초년과 만년의 작품을 구별하여 순수한 도(道)와 잡박한 문(文)으로 분간하려 아무리 애를 쓴다 하더라도, 모든 글이 한결같은 것을 어찌하겠는가. 《시경(詩經)》에 “의젓한 몸가짐 빈틈이 없어, 무엇이 훌륭하다 꼽을 수 없네.[威儀棣棣 不可選也]”라고 하였다. 선생의 글도 이처럼 순수한 것을 따로 꼽을 수가 없으니, 또 어찌 문(文)과 도(道)를 분리하여 논할 수 있겠는가. 불완전한 문(文)은 도(道)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문(文)을 짓는 방법에는 세 가지 요체가 있으니, 첫째, 이치가 정밀하고 분명하지 않으면 안 되고, 둘째, 기운이 왕성하지 않으면 안 되고, 셋째, 언어 구사가 무르익지 않으면 안 된다. 수레가 아름답게 꾸며져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르익은 언어 구사와 같고, 물이 깊어 물건이 뜰 수 있는 것은 왕성한 기운과 같다. 이 두 가지는 오래전부터 깨끗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육경(六經)에 실려 있었다. 육경은 순전히 이치를 밝힌 글인데도, 천지에 충만한 왕성한 기운과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찬란한 아름다움까지 이처럼 모두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경에서는 이 세 가지 요체를 모두 지목해 낼 수 있다 하겠다.
그러나 팔대(八代) 이후로는 천하의 문(文)이 분해되어 세 가지 요체를 두루 갖추지 못하였으니,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룬 위대한 문(文)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므로 문장가의 문은 유창함과 수사적인 기교만 추구하고, 경학자의 문은 진지함과 질박함에만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이른바 유자(儒者)의 문(文) 중에, 《속경(續經)》처럼 참람되고 《법언(法言)》처럼 거짓된 것은 순전히 남에게 보이기 위해 주관 없이 지어진 것으로 그 내용과 형식이 모두 잘못되었으니, 단연코 육경을 해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장가이면서 유자인 창려(昌黎 한유(韓愈))는 기운이 왕성하고 언어 구사가 무르익었다. 그러나 〈원도(原道)〉와 〈사설(師說)〉 같은 작품은 겨우 몇 편에 불과하였고 〈모영전(毛穎傳)〉과 〈송궁문(送窮文)〉 같은 작품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나았다. 심지어 크고 넓은 규모의 맹자(孟子)를 깎아내려 사마상여(司馬相如)와 동렬에 세우고 흐리멍덩한 우적(于頔)의 문장을 추켜세워 육경에 비기기까지 하였으니, 심하다 하겠다. 이처럼 무리하게 아첨하고 실없었던 그에 대해 주공(周公)의 마음과 공자의 생각을 지녔다는 둥, 태양처럼 빛나고 옥처럼 깨끗하다는 둥 칭송을 하다니, 아, 참으로 황당하다.
구양수(歐陽脩)는 수준이 낮긴 해도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아름답고 조리 있는 그의 문장에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심오한 이치를 융합하면 유감이 없을 텐데, 애석하게도 이 두 가지가 한데 어우러진 작품을 만나 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선생은 바로 그러한 것을 완비한 경우이다. 실로 지나치게 말해도 과장되지 않은 말이 있는 법인데, 선생에 대한 나의 이 평가가 그러한 경우라고 자부한다.
선생은 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점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천하의 지극한 이치를 말하려면 말만 많아지고 이치를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선생은 간결한 말로 그 이치를 다 드러내었다. 둘째, 어지러운 중론(衆論)을 꺾으려면 말투가 격해지고 논리가 빗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선생은 부드러운 말투로 막힘 없는 논리를 폈다. 셋째, 긴 문장을 끝맺을 즈음이면 말의 흐름이 급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선생은 신중하고 여유롭게 마무리를 지었다. 선생의 글을 보면, 숨어 있던 이치가 가을달처럼 환히 빛나고, 이견(異見)에 대한 논박이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긴 문장의 말미에 조화로운 음악이 울리는 듯하다. 한자(韓子)의 “이치를 환히 알면 문장도 논리가 분명하고, 성품이 느긋하면 문장도 여유롭다.”는 말도 선생의 문장을 찬미하기에 미진하다 할 것이다.
천지간에는 실로 사리에 어긋나거나 잡된 것이 섞이지 않아 사람의 마음과 통하는 순한 기운과 조화로운 소리가 있다. 그것은 저절로 형상과 음률을 이루는데, 조금이라도 작위(作爲)를 가했다 하면 곧 그 기운과 소리에서 멀어져 그러한 형상과 음률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선생은 이미 오래전에 그러한 글을 써내었으니, 본디 별개인 문(文)과 도(道)가 선생의 글에서는 일체가 되었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말세에, 그것도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문(文)을 짓는 세 가지 요체를 모두 갖추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 가지 뛰어난 점을 한 몸에 지녔으니,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선생의 글을 가지고 선생의 인품을 추론해 보면, 온화하고 순리로운 성품이 내면에 쌓여 아름다운 광채가 밖으로 드러난다는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다.
아, 내가 삼주(三洲)에서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던 저녁이면, 선생은 종종 잔뜩 미간을 모으고, “문인(文人)의 악업(惡業)이 끝날 때가 없구나. 《역경(易經)》을 읽는 내 만년 공부에 해로울 텐데.”라고 말하곤 하였다. 여기에서, 내실을 추구하는 선생의 공부가 노년으로 갈수록 한층 더 면밀해졌고 묵묵히 실천하여 성취한 것은 덕행이 있어서였으며, 나이 예순을 앞두고도 꾸준한 변화를 멈추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점도 문인(門人)들이 알아두어야 할 것이기에 아울러 서술하였다.
숭정(崇禎) 기원후 82년 기축(1709, 숙종35) 9월에 아우 창흡(昌翕)이 삼가 짓다.

[후서(後序)]
전에 나는 이 문집에 대해 “모든 글이 한결같아 순수한 도(道)와 잡박한 문(文)으로 분간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각 문체별 글의 수준도 그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그러나 유자후(柳子厚)가 서술(敍述)과 비(比)ㆍ흥(興)을 별개의 창작 기법으로 분리한 뒤로 사람들은 마침내 “서술과 비ㆍ흥은 주안점이 완전히 다르므로 두 가지를 다 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니,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자후가 말한 ‘기세가 높고 힘차고 광대하고 심후한 것’과 ‘미려하고 전아하고 운율이 맑고 유장한 것’이, 그 체재와 격조에 있어 방정하고 원만함은 사실 차이가 있다. 그러나 지류(支流)는 둘이지만 근원은 하나이니, 이들은 본디 합치되는 것이다. 곧, 옛사람들의 언어를 상고해 보면, 그것이 비록 사실과 심정을 자세히 서술하는 말이라 해도 뜻을 다 표출할 말이 부족하면 왕왕 반복하고 소리를 길게 뽑아 저절로 성률에 맞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과 영탄(詠嘆)을 규칙화한 비ㆍ흥은 그 길이를 다소 변화시킨 것일 뿐이니, 어찌 서술과 완전히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서술과 비ㆍ흥은 서로 융통성 있게 넘나들기 때문에, 문장을 짓는 사람들도 시인의 여유로운 맛과 소인(騷人)의 맑고 깊은 맛을 과소평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맛을 터득하여 운용한 사람으로는 누구보다 구양수(歐陽脩)를 꼽을 수 있는데 선생도 그러했으니, 이는 온후한 성품과 해맑은 기상이 구양수와 같아서였다. 그러나 구양수는 시의 격조로 문장을 짓는 것은 잘하면서도 시의 격조로 시를 짓지는 못하였으니, 이 어찌 습속에 얽매여 진솔 담박함을 잃어버린 때문이 아니겠는가. 반면에 선생은 주자(朱子)를 바탕으로 완적(阮籍)과 곽박(郭璞) 이전 시대의 문학적 기풍을 섭렵함으로써 진솔 담박함을 추구하였고, 옛것을 모범으로 삼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방향으로 운율을 연마하였다. 그 결과 처한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감흥을 고금을 넘나드는 격조로 자유로이 표출하면서도 진솔 담박함이 자연히 담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시가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 수준의 고하를 막론하고 문장과도 동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 선생은 고대의 순박한 악(樂)과 시(詩)가 붕괴된 뒤에 태어나 강개한 마음으로 순(舜) 임금과 탕(湯) 임금의 음악을 생각한 나머지, 그 음악이 마치 귓전에 쟁쟁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글을 읽을 때면 장구(章句)를 풀이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마음에 맞는 대목이 있으면 늘 낭랑하게 독송하고 힘차게 읊조리며 마치 옛사람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처럼 오랫동안 되풀이하여 음미하였다. 그리고 비록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길 수 있는 사람의 시구라 해도 반드시 반복해서 낭송하게 한 다음 운율의 조화와 시어의 적절함을 평가하였으니, 선생이 자득한, 성정(性情)을 읊은 시는 실로 보통 사람의 시와 다른 것이었다.
비ㆍ흥을 구사한 것이 적합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언어를 조탁한 것이 노련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이 두 가지로 선생의 글을 평가하는 기준을 삼아서는 안 된다. 이와는 별도로 글 이면에 구성지고 해맑게 배어나는 것이 있으니, 가락이 맑으면서도 음운이 부드러워 듣는 즉시 이해가 되고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선생의 글이 제대로 글을 읽고 음운을 살필 줄 아는 이들의 인정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문장을 보면 시가 그 속에 들어 있고 시를 보면 음악이 그 속에 들어 있으니, 종합하여 보면 이 또한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글이 한결같은 것이라 하겠다.


 

[주D-001]자연(子淵)과 자운(子雲) : 자연은 왕포(王褒)의 자이고 자운은 양웅(揚雄)의 자로, 모두 한(漢)나라 때 문장가이다. 왕포는 선제(宣帝) 때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을 지어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으며, 양웅은 성제(成帝) 때 〈감천부(甘泉賦)〉, 〈하동부(河東賦)〉, 〈우렵부(羽獵賦)〉, 〈장양부(長楊賦)〉를 지어 문명을 떨치고 뒤에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 등 철학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주D-002]크고 …… 세우고 : 한유(韓愈)가 이부(吏部)에서 치른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에 낙방한 뒤 최입지(崔立之)에게 보낸 답서에서 “굴원(屈原), 맹가(孟軻), 사마천(司馬遷), 사마상여(司馬相如), 양웅(揚雄) 같은 옛 호걸 선비들이 혹시 이 시험에 급제한다 하더라도 필시 하찮은 시험에 관계한 것이 부끄러운 나머지 벼슬하지 않고 그만두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昌黎文集 卷16 答崔立之書》
[주D-003]흐리멍덩한 …… 하였으니 : 우적(于頔)은 당 헌종(唐憲宗) 때 재상이다. 한유는 그가 지은 〈문무순성악사(文武順聖樂辭)〉, 〈천보악시(天寶樂詩)〉, 〈독채염호가사시(讀蔡琰胡笳辭詩)〉 등의 작품을 읽고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양자운(揚子雲)이 ‘〈상서(商書)〉는 범위가 크고 넓으며 〈주서(周書)〉는 논조가 분명하고 바르다’ 하였는데, 당신의 문장은 그처럼 범위가 광대하며 논리가 분명하고 바르다.”라는 내용으로 극찬하였는데, 이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昌黎文集 卷15 上襄陽于相公書》
[주D-004]주공(周公)의 …… 하다니 : 당(唐)나라 이한(李漢)이 지은 〈창려문집서(昌黎文集序)〉 내용이다.
[주D-005]한자(韓子)의 …… 말 : 한자는 한유를 가리킨다. 한유가 위분(尉汾)에게 보낸 답서에서 뛰어난 문장은 우선 내실이 탄탄하게 다져진 다음에 이루어진다는 뜻을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昌黎文集 卷15 答尉遲生書》
[주D-006]문인(文人)의 악업(惡業) : 남의 가문의 묘도문자(墓道文字)를 짓는 등 문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만년의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를 악업이라 한 것이다.
[주D-007]후서(後序) : 1928년에 후손 김영한(金甯漢)이 《농암집》의 삼간본(三刊本)을 간행하였는데, 이 삼간본은 원집과 속집에 수록되지 않은 내용을 묶어 별집을 만든 다음 원집, 속집, 별집을 합부(合附)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때 김영한이 원집 말미에 김창흡(金昌翕)이 쓴 후서(後序)를 수록하였는데, 이 후서는 본 번역서의 대본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나, 자료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므로 번역하여 덧붙인 것이다.

 

 

농암집 제5권
 시(詩)


 

 

 

농암집 제7권
소차(疏箚)
영암(靈巖) 유생을 대신하여 지은 연촌서원(煙村書院)의 사액(賜額)을 청하는 소 경신년(1680)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조정에서 벼슬했던 인물들 중에 일단 들어가면 물러나지 않고 녹을 끌어안고 총애를 탐하다가 신세를 망친 사람은 많고, 결연히 물러나 부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 상황을 고찰하여 논하자면, 이들은 또 모두 쇠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화를 당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신을 온전히 할 방도를 궁리한 끝에 벼슬하지 않은 경우이거나, 이미 최고의 명성과 지위를 누렸기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 그리한 것일 뿐입니다. 성군(聖君)의 시대를 만나 임금이 크게 등용할 의향이 여전한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떠난 경우는 수백 수천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더구나 절조(節操) 하나만으로 자족하지 않고 대도(大道)에 뜻을 두며, 유유자적 한가로이 지내지 않고 실천에 힘쓰는 경우로 말하자면 어찌 더욱 뛰어나 그와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먼 고을의 어리석은 선비로서 견문이 넓지 못하지만 한 가지 들은 것이 있습니다. 세종(世宗), 문종(文宗) 때에 신(臣) 최덕지(崔德之)가 있었으니, 그는 한림원(翰林院)에서 출발하여 옥당(玉堂)과 대각(臺閣)을 거치고,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있다가 물러나 영암에서 지내면서 서재를 지어 존양(存養)이라고 편액을 달고 두문불출하였는데, 당시는 세종의 만년이었습니다. 문종이 즉위했을 때 불러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고 순수하고 진실하다고 칭찬하며 계속 등용하려 하였는데, 조정에 있은 지 2년도 못 되어 사직소를 올리고 돌아와서 끝내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정치와 교화는 세종, 문종 때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뛰어난 인재들이 시운(時運)을 타 구름같이 모여들고 경학과 문장에 밝은 선비들이 진기하고 뛰어난 식견으로 줄지어 조정에 서서 모두 공명(功名)을 떨쳤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시절이었습니다. 최덕지의 그 훌륭한 재주로 그들과 어울릴 때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니 만일 느긋하게 따라가며 시운에 편승하였더라면 경상(卿相)의 자리에 올라 공명이 찬란했을 터인데, 벼슬을 버리고 멀리 떠나서 변방 산천에 은둔한 채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는 경중의 구분에 밝고 영욕(榮辱)의 경계를 초월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니, 저들 기미를 살펴 화를 피하는 자들과 지위가 극도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는 자들의 경우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은둔한 선비는 대부분 스스로 고상함을 표방하여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고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면서 마음 쓰는 것이 없었으니, 이들이 비록 부귀의 유혹에 빠져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는 자들보다는 낫다 하나, 그 역시 도(道)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지금 최덕지는 귀향하여 마침내 맹자(孟子)가 말한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한다.[存心養性]’는 말을 택하여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가 바른 학문에 마음을 두고서 덕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일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분명해진 뒤에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고,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가 치밀해지면 부귀와 빈천을 취하고 버리는 기준이 더욱 명백해진다.” 하였는데, 최덕지로 말하면 이에 가깝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에 기록된 것이 소략하여 그의 말과 풍격을 상세히 상고해 볼 수 없으니 애석합니다.
그러나 그 높은 지조와 바른 마음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 후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손자 대에 이르러 최충성(崔忠成)이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특출한 재주와 독실한 학문으로 수제자라 일컬어졌으니, 이는 그 사우(師友)의 연원이 본디 그럴 만했을 뿐만 아니라 선조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최덕지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이미 200여 년이 흘렀는데도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도 변치 않아서 남쪽 고장을 찾아오는 사대부는 반드시 이른바 존양루(存養樓)라는 곳을 방문하여 그의 초상 앞에 예모를 갖추고 탄식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하곤 하니, 그가 남기고 간 영향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또한 깊다 하겠습니다.
지난 경오년(1630, 인조8)에 온 읍의 선비들이 힘을 모아 사당(祠堂)을 세워 최덕지를 향사하고 최충성을 배향하였는데, 향사하는 일이 세월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여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먼 지방의 고루한 곳인 관계로 아직까지 조정에 사액(賜額)을 요청하지 못하여 사류(士類)의 수치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는 현인을 높이고 도를 중시하여 선비들이 행하고 싶어하는, 사문(斯文)의 누락된 전례(典禮)를 모두 흔쾌히 행하고 계시니, 신들은 지금 이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여럿이 함께 와서 대궐문 아래에서 명을 청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최덕지의 출처의 전말과 학문의 대체가 사류의 존경을 받을 만함을 살피시고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편액을 하사함으로써 그를 표창하시어 먼 지방의 선비들이 현인을 존경하는 성심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시고, 후세에도 보고 느끼는 점이 있어 분발하게 하시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신들은 우러러 기원해 마지않습니다.


 

[주C-001]영암(靈巖) …… 소 : 작자의 나이 30세 때인 1680년(숙종6)에 지은 소로서, 작자의 부친인 김수항(金壽恒)이 전라도 영암에서 귀양살이할 당시에 작자가 부친을 만나기 위해 그곳에 여러 번 왕래한 적이 있었던 인연으로 대작한 듯하다. 연촌서원은 세종과 문종 때의 문신인 최덕지(崔德之)와 그의 손자 최충성(崔忠成)을 향사(享祀)하는 서원으로, 전라남도 영암의 사류들이 1630년(인조8)에 세운 것이다. 당시에 최덕지의 생존시에 그린 초상화인 영정(影幀)이 그가 거처하던 존양루(存養樓)에 봉안되어 있었다. 《煙村遺事》
[주D-001]존양루(存養樓) : 최덕지가 남원 부사를 그만두고 내려와서 건립하여 거처하던 곳으로 영암 덕진면(德津面) 영보리(永保里)에 있는데, 존양당(存養堂)이라고도 한다.

 

저의 19대 조이신 연촌 휘 덕지의 사당이시다

이런 인연으로 지금도 연촌 선생과  손자이신 산당공  문곡 김수증 선생과 김수항 선생을 지금도 모시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