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리 서원 전고 /천문전고

역법(曆法)

아베베1 2012. 1. 9. 17:00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 자운봉의 모습이다 (2012.1.8 도봉산 산행시)

 

고려조에 전주최문 휘 최성지 ,조선조 영의정  휘 최석정의 휘가 기사에 나온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

천문전고(天文典故)
역법(曆法)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에 대내마(大奈麻) 덕복(德福)이 당 나라에 들어가서 역법을 배워 와서, 처음으로 그 법을 써서 역서를 만들었다. 《문헌비고》
○ 고려(高麗) 때에는 별로 역서를 두지 않고 당 나라 《선명력(宣明曆)》을 그대로 본받아 사용하였는데, 장경(長慶) 임인년으로부터 그 후 태조(太祖)가 개국할 때까지 자못 1백 년이 지나자 그 역서가 이미 틀려졌다. 그 전에 틀려진 것은 당 나라에서는 이미 역서를 고쳐, 이로부터 역서를 모두 22차례 고쳤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그냥 사용하다가, 충선왕 때에 이르러 원 나라 《수시력(授時曆)》으로 고쳐 사용하였으나 개방(開方)의 수학(數學) 방법은 전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교식 일절(交食一節)은 오히려 선명력의 옛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으니, 휴식 가시(虧食加時)는 천문(天文)에 합하지 아니하였다. 일관(日官)이 제멋대로 앞뒤를 억지로 맞추었으나 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 고려 말까지 능히 고치지 못하였다. 정인지의 《고려사》
○ 세종 계□에 예문 제학(藝文提學) 정인지 등에 명하여 《칠정산 내외편(七政算內外編)》을 지었다. 처음에 고려 최성지(崔誠之)가 충선왕을 따라 원 나라에 들어가서 《수시력법(授時曆法)》을 얻어 돌아와서 추보(推步)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일월 교식(日月交食)하는 것과 오성(五星)이 행하는 도수는 오히려 곽수경(郭守敬)의 산술(算術)을 알지 못하였다. 우리나라가 개국하여서도 역법은 《수시력》을 그대로 썼다.《수시력》에 일월 교식과 오성의 입성(立成)이 빠졌으므로 임금이 정인지ㆍ정초(鄭招)ㆍ정흠지(鄭欽之) 등에게 명하여 추보(推步)하도록 하니, 명 나라 《대통통궤(大統通軌)》를 취하여 조금 첨삭해서 합하여 《내편(內篇)》을 만들고, 또 《회회역법(回回曆法)》을 얻어 이순지(李純之)ㆍ김담(金淡) 등에게 명하여 상고하고 바로잡게 하여 《외편(外篇)》을 만들었다.
○ 인조(仁祖) 갑신년에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김육(金堉)이 상소하기를, “황제(黃帝) 때 이래로 옛 역법 육가(六家)의 뒤에 한 나라 무제(武帝) 때에 이르러 낙하굉(洛下閎)이 《태초력(太初曆)》을 만들었는데, 동한 말까지에 무릇 세 번 역서를 고치고, 위 나라로부터 수 나라에 이르는 동안에 13번 고치고, 당 나라 역서는 8번 고치며, 오대(五代)의 여러 나라에는 팔가(八家)의 역서가 있었고, 남송과 북송 때에는 역서를 11번 고쳤습니다.이렇게 다만 역서가 오래되어 차이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보는 것이 각각 정밀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하여 역서를 이와 같이 자주 고쳤습니다. 원 나라 초에 이르러 곽수경ㆍ허형(許衡) 등이 역법에 밝아서 입차(立差)를 매우 정밀하게 하여 영(盈)하고 축(縮)하며 더디고 빠르며 더하고 감하는 차이가 있었습니다.지원(至元) 18년 신사년을 역원(曆元)으로 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데 무릇 3백 65년이 되도록 일식ㆍ월식이 조금도 틀림이 없으니, 후세에서 교묘한 역서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천문(天文)의 운행이 쉬지 않으므로 조그만 차이가 날로 쌓여 많아져서 저녁과 새벽의 중성(中星)의 위차(位次)가 조금씩 틀려지고, 주천(周天) 도수가 이미 꽉 찼으니 마땅히 변할 것입니다.서양(西洋) 역서가 마침 이때에 나왔으니 이야말로 역서를 고칠 기회이나 다만 한흥일(韓興一)이 가져 온 책에 이론만 있고 입성(立成)이 없습니다. 대개 이 글을 지을 만한 사람이라야 능히 이 글을 알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비록 10년을 연구하여도 처음과 끝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중국에서 병자ㆍ정축년 사이로부터 이미 역서법을 고쳤으니, 곧 내년의 신력(新曆)에는 반드시 우리나라 역서와는 틀린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신력 중에 만약 묘하게 합치되는 곳이 있거든 마땅히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도모하소서. 이번 사신 중에 일관 한두 사람을 동행시켜 흠천감(欽天監)에 탐문하여 역법을 추고하고, 의심나고 어려운 점을 알아 오면 추측하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문헌비고》
○ 효종(孝宗) 계사년에 처음으로 시헌력법(時憲曆法)을 행하였다.
○ 만력(萬曆) 때에 서양 사람 리마두(利瑪竇)가 중국에 들어왔는데, 천문력법(天文曆法)에 있어서 산법(算法)과 혼천의(渾天儀)를 운용하는 것이 옛날보다 매우 뛰어났다. 숭정(崇禎) 때에 예부 상서(禮部尙書) 서광계(徐光啓)와 우참정(右參政) 이천경(李天經)이 서양의 방법에 의거하여 《일월오성력지(日月五星曆指)》 및 《혼천의설(渾天儀說)》을 바치었으니, 이것이 《시헌력(時憲曆)》의 기본이 되었다.
○ 서양 사람 탕약망(湯若望)이 시헌력을 만들었다. 숭정 초년에 비로소 그 법을 사용하여 중국에서 시행하였으며, 청 나라에서도 그대로 계승하여 썼는데 그 법이 매우 정묘하였다. 김육이 관상감 제조로 있을 때에 그 법을 배워 익히기를 아뢰어 청하였다. 병술년에 사신이 되어 연경에 들어갈 때에 역관(曆官) 두 사람을 거느리고 가서 탕약망에게 배우려 하였다.그러나 경비가 삼엄하여 출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책만 사가지고 돌아왔다. 김상범(金尙範) 등을 시켜 힘을 다해서 정밀히 연구하여 대략 그 개요를 알았다. 신묘년 겨울에 또 김상범을 보내어 많은 뇌물을 주고 흠천감에서 배워 와서 계사년으로부터 처음으로 그 법을 사용하여 역서를 행하였다. 그러나 오성산법(五星算法)은 아직 알아 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을미년에 또 김상범을 보냈으나 불행하게도 도중에서 죽었으므로 그 법을 마침내 다 전하지 못하였다. 《잠곡집(潛谷集)》
○ 숙종(肅宗) 무자년에 관상감 추산관(推算官) 허원(許遠)이 연경에 들어가서 시헌법(時憲法) 칠정표(七政表)를 흠천감에서 사가지고 돌아와서 그대로 추보하여 비로소 시헌력 오성법을 사용하였다.
○ 영종(英宗) 원년에 ‘신수시헌칠정법(新修時憲七政法)’으로 고쳐 사용하였다.
○ 서광계가 지은 《숭정력지(崇禎曆指)》에 숭정 원년 무진 천정동지(天正冬至)를 역원(曆元)으로 삼았더니, 우리나라 숙종조에 이르러 쌓인 위차(位差)가 점점 많아졌다. 매각성(梅瑴成)이 《숭정력지》를 미루어 넓혀 숭정 후 57년 갑자년 천정 동지를 역원으로 삼으니 곧 우리나라 숙종 10년 갑자이다. 칠정(七政)도 모두 여기에서부터 계산을 시작하였다.영종 을사년부터 처음으로 그 법에 의하여 일월과 오성의 교식(交食)을 추보하였다. 요즈음 서양사람 갈서니(噶西尼)가 또 말하기를, “태양과 지구가 반경(半徑)의 차이가 있다.” 하고, 각성(瑴成)은 3분이라고 정하였다. 그러나 지금 추측으로는 겨우 10초(秒)의 청기(淸氣)ㆍ몽기(蒙氣)의 차이가 있다. 각성은 지평상(地平上)이 34분이 되고, 높이가 45도이니 다만 5초가 있다고 정하였다.그러나 지금 추측에는 지평상이 겨우 32분이며, 높이가 45도요, 오히려 59초가 있다. 일월ㆍ오성의 천(天)에 관한 것을 각성이 ‘평원(平圓)’이라고 정하였으나, 지금 추측에는 타원이 되어 두 끝의 직경이 길고 두 허리의 직경이 짧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의 경도ㆍ위도가 모두 조금씩 차이가 있으므로 드디어 숭정 후 96년 계묘를 역원으로 삼아서 일전(日躔)ㆍ월리(月離)의 교식을 고쳤다. 영종 갑자년부터 전리 교식(躔離交食)은 갈서니의 법을 따라 하고, 오성은 매각성의 법을 썼다. 《문헌비고》
○ 《금헌휘언(今獻彙言)》에, “동지 후의 나머지 날수로 명년 윤달을 정한다.” 하였는데, 가령 하루가 남으면 내년 1월에 윤달이 있고 이틀이 남으면 2월에 윤달이 있으며, 만약 나머지가 13일이 되면 명년에는 윤달이 없다 한다. 융경(隆慶) 5년 신미 선조 4년 에 동지 후의 나머지 날수가 4일인데 6년 임신에 일관이 2월을 윤달로 하였더니, 학관(學官) 어숙권(魚叔權)이 일찍이 《휘언》을 보았으므로 윤달을 잘못 만들었다고 고집을 세워서 영관상감사(領觀象監事)를 시켜, “다시 추산(推算)하라.” 하였다.그러나 일관이 오히려 자기 소견대로 고집하여 잘못되지 않았다고 힘써 변명하였는데, 그 뒤에 《대통력(大統曆)》을 보니 과연 그해 윤달이 2월에 있었으므로 일관이 죄책을 면하였다. 일관 남응년(南應年)이 말하기를, “《작력식언(作曆式言)》에 동지 후의 나머지 날수로 윤달을 정하면 이 법이 혹 부합하지 않는 곳이 있었으므로 그달 안에 중기(中氣)가 없는 달을 윤달로 하는 것이 바로 역수(曆數)에 합당하다.”고 말하였으니,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월정만록(月汀漫錄)》
○ 현종(顯宗) 기유년 강희(康熙) 8년 에 예부(禮部)에서 흠천감에 통첩하기를, “이미 반포한 역일(曆日)을 다시 계산해 보니 윤달이 8년 12월에 들 것이 아니라 9년 정월에 들 것이다. 법에 의하여 본월(本月)의 일월ㆍ오성을 추산하라.” 하였다.
○ 보(補): 고(故) 정승 최석정(崔錫鼎)이 성력(星曆)을 알았으므로 일찍이 관상감 교수(敎授)를 겸한 일이 있었다. 《일득록(日得錄)》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
천문전고(天文典故)
첨성(瞻星)


세종(世宗) 2년 경자 3월에 임금이 내관상감(內觀象監)을 설치하여 첨성대(瞻星臺) 세우기를 명하고, 또 천문(天文)에 밝고 산수(算數)에 지극히 정밀한 사람을 뽑아 천문을 맡기려 하였다. 그런데 전 관상감 정(前觀象監正) 이무림(李茂林)이 정영국(鄭榮國)ㆍ최천구(崔天衢)ㆍ박유신(朴惟新)ㆍ김흥국(金興國)ㆍ이대정(李大禎)ㆍ정강(鄭剛) 등의 이름을 뽑아서 들이었다. 전 관상감 정 윤사웅(尹士雄)이 장흥(長興)으로 물러나 살았는데, 불러서 역마(驛馬)를 타고 올라오게 하였다. 임금이 때때로 혼자 미행으로 친히 첨성대에 임하여 사웅에게 명하여 천도를 논란하다가 술을 내려주고 파하였다.
○ 10월 보름날에 지진이 크게 일어나고, 20일에 혜성(彗星)이 동쪽에 나타났다. 곧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크게 놀라 몸소 첨성대에 올라가 관측하였다.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을 줄이며, 음악을 중지하고 형벌을 줄여 옥문을 활짝 열며, 중외에 크게 사면하는 명을 내려, 두려워하고 삼가 반성함으로써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니, 7일 만에 혜성이 없어졌다.
○ 임금이 이르기를, “천문관의 수고로움을 오늘 목격하게 되었다. 천문관에게 벼슬을 설치하여 직책을 맡겼던 본래의 의도가 진실로 가벼운 것이 아니로다.” 하였다. 윤사웅을 가자하여 남양(南陽)을 제수하며, 이무림에게 광주(廣州)를, 최천구에게 부평(富平)을, 정영국에게 인천(仁川)을 제수하였다. 모두 서울 부근에 임명하는 것은 혹 천재지변이 뜻밖에 일어나면 자주 불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박유신이 때마침 당번을 궐(闕)하였으므로 곧 명하여 옥에 가두고, 여러 번 형벌을 주어 거제도로 귀양보냈는데 마침내 풀려 돌아오지 못하였다.
○ 이로부터 비로소 천지성신(天地星辰)에 제사하는 예를 시행하였으니, 제단을 소격서(昭格署)에 쌓아 사웅 등을 시켜 택일하여 예를 시행하도록 했다.
○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미관(微官)의 무리들에게 하루 동안에 특명으로 네 큰 고을 수령의 책임을 제수하오니 듣는 사람 중에 놀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청컨대, 빨리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연일 두 번씩 아뢰었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고 비답하기를, “나는 덕 없는 사람으로 참람히 임금자리에 올라 삼가고 부지런하지 못하였으므로 하늘로부터 꾸지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조야의 여러 신하 가운데 한 사람도 하늘에 응하는 자가 없었다.오직 이 무리들만이 여러 날 밤낮으로 몸에서 띠를 풀지 못하고, 눈을 붙이지 못하면서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였다. 혹시 이 무리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결단코 천상(天象)에 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너희들이 편안히 앉아 잘 먹는 것에 비할 수 없으니, 번거롭게 방해하지 말고 빨리 이들을 부임케 하라.” 하였다. 또 상의원에 명하여, 각각 겨울 갖옷 한 벌씩을 식년마다 새로 만들어 주게 하고, 내의원에서 날마다 술 5병씩 주게 하였다.
○ 3년 신축에 남양 부사 윤사웅, 부평 부사 최천구, 동래(東萊) 관노(官奴) 장영실(蔣永實)을 내감(內監)으로 불러서 선기옥형(璇璣玉衡) 제도를 토론하여 연구하게 하니 임금의 뜻에 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영실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너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계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 무리를 중국에 들여보낼 때에 예부에 자문을 보내어 《조력학산(造曆學算)》과 각종 천문 서책을 무역(貿易)하고 보루각(報漏閣)ㆍ흠경각의 혼천의(渾天儀) 도식을 견양(見樣)하여 가져오게 하라.” 하고, 은냥(銀兩)ㆍ물산(物産)을 많이 주었다.
○ 4년 임인에 사웅 등이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천문에 대한 여러 가지 서책을 사오고, 양각(兩閣)의 제도를 알아 왔으므로 곧 양각 혼의 성상도감(兩閣渾儀成象都監)을 설치하여 사웅 등에게 감조(監造)하게 하였다.
○ 7년 을사 10월에 양각을 준공하여 임금이 친히 내감(內監)에 가서 두루 보고 이르기를, “기이하다. 훌륭한 장영실이 중한 보배를 성취하였으니 그 공이 둘도 없다.” 하였다. 곧 면천(免賤)시키고 가자하며 실첨지(實僉知)를 제수하고 겸하여 보루사(報漏事)를 살피게 하여 서울을 떠나지 않게 하며, 감조관(監造官) 윤사웅 등 세 사람에게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
○ 5월 7일 밤에 임금이 친히 첨성대에 가서 관(管)을 들여다 보고 측후하면서 이르기를, “노인성이 어디에 있느냐.” 하니, 윤사웅 등이 남쪽 하늘을 가리키며 아뢰기를, “남극 노인성이 저기에 있사온데 시력이 모자라 보이지 않습니다. 남극에 가깝고 높이 있사온데 제주(濟州) 한라산과 서북은 백두산ㆍ설한점(雪漢岾) 상봉에 올라가면 보인다 하오나, 살펴볼 길이 없습니다.” 하였다.임금이 사웅에게 명하여 제주도로 가게 하고, 무림과 천구는 백두산과 설한점으로 나누어 보내어, 금년 추분으로부터 명년 춘분까지 남극 노인성을 보고 오라 하여 명일내로 가게 하였다.
○ 8월 병오에 한라산에서 관측하던 윤사웅, 백두산에서 관측하던 이무림, 설한점에서 관측하던 최천구 등이 모두 구름이 끼었기 때문에 보지 못하였다고 장계를 올리고 헛되이 돌아왔다.
○ 12년 경술 정월에 또 명하여 세 사람을 각각 관측하러 가게 하였다. 10월에 무림ㆍ천구는 바다가 어두워 남극성을 바라보지 못하고 돌아왔으나, 12월에 사웅은 춘분에는 보지 못했으나 추분에 바다가 맑고 하늘이 개어 남극성을 밝히 보고 도형을 올렸다. 임금이 친히 첨성대에 와서 자세히 묻고 술을 주고 그리하여 사웅을 가자하였다. 《서운등록(書雲騰錄)》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
천문전고(天文典故)
의상(儀象)


신라(新羅) 효소왕(孝昭王) 때에 중 도증(道證)이 당 나라로부터 돌아와서 천문도(天文圖)를 올리었다. 성덕왕(聖德王) 때에 비로소 누각(漏刻)을 만들었다. 《문헌비고》
○ 태조(太祖) 무인년에 물시계를 종가(鐘街)에 두었다.
○ 을해년에 천문도를 돌에 새겼다.
○ 세종 임자년에 대제학 정인지ㆍ정초(鄭招)에게 명하여 간의대(簡儀臺)를 짓게 하고,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천(李蕆), 호군(護軍) 장영실에게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먼저 목간의(木簡儀)를 만들고, 드디어 구리를 녹여 모든 의상(儀象)을 만들었다. 첫째는 대소간의(大小簡儀), 둘째는 혼의(渾儀)ㆍ혼상(渾象), 셋째는 현주 천평 정남 앙부일귀(懸珠天平定南仰釜日晷), 넷째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다섯째는 자격루(自擊漏)인데 무오년에 준공되었다. 세종조(世宗朝) 조에 상세하다.
○ 경회루(慶會樓) 북쪽에 돌을 쌓아서 대를 만들었는데 높이는 31척, 길이는 47척, 넓이는 32척으로 하여 돌난간으로 둘렀다. 그 꼭대기에는 간의를 두고, 간의 남쪽에는 정방형의 안(案)을 두었다. 대의 서쪽에 동표(銅表)를 세웠는데 높이 5배(倍) 8척의 얼(臬)에다 푸른 돌을 깎아 규(圭)를 만들고, 규면(圭面)에 장(丈)ㆍ척(尺)ㆍ촌(寸)ㆍ분(分)을 새기어 경부(景符)를 써서 일중영(日中影)을 취하고 이기(二氣)의 영(盈)ㆍ축(縮)을 추측하였다.
○ 간의의 제도는 대간의는 《원사(元史)》에 기재한 곽수경(郭守敬)의 법에 의거하였다. 소간의는 정(精)한 동(銅)으로 부(趺)를 만들며 수거(水渠)로써 빙 둘려서 자오(子午)를 표준하고, 지평(地平)을 정한다. 적도환(赤道環)의 면(面)에 주천도(周天度) 3백 65도 4분도의 1을 나누어서 동서로 운전하여 칠정 중외관 입숙도분(七政中外官入宿度分)을 측정하고, 백각환(百刻環)은 적도환(赤道環) 안에 있는데, 면(面)에 12시 백각(百刻)을 나누어 낮이면 해 그림자로 알고, 밤이면 중성(中星)으로 헤아린다.사유환(四游環)은 규형(窺衡)을 받아서 동서로 운전하고 남북으로 낮추었다 높였다 하여 규측(窺測)하기를 기다리며, 이에 기둥을 세워서 3환(環)을 관통하게 하여 기울이면 사유(四游)가 북극을 표준하고 적도는 하늘의 중심을 표준하며, 곧게 서면 사유가 입운(立運)이 되고, 백각이 음위(陰緯)가 된다.
○ 정초가 소간의에 명(銘)을 짓기를, “천도가 한정이 없으므로 기계도 역시 간편함을 숭상한다. 옛날 간의는 층층으로 기둥을 세웠는데 지금 이 기계는 가지고 다닐 만하다. 그 사용법은 간의와 같으니 대개 간편한 중에도 또 간편한 것이다.” 하였다.
○ 혼의(渾儀)ㆍ혼상(渾象)의 제도는, 혼의는 원 나라 선비 오징(吳澄)이 지은《찬언(纂言)》에 기록한 것과 같이 하여 칠목(漆木)으로 하고, 혼상은 베에 칠하여 만들었는데 둥글기가 탄환 같다. 둥글기는 10척 8촌 6분이다.종횡으로 주천(周天) 도분(度分)을 그어 적도가 가운데 있고, 황도는 적도 안팎 출입이 각각 24도 약(弱)이다. 중외관성(中外官星)을 벌여 놓아 하루에 한 번 돌아서 한 도수를 지나게 하고, 해를 황도에 달아 놓아 매일 꼭 1도씩 퇴행하여 하늘의 운행과 합하게 하며, 격수(激水)하는 기륜(機輪)은 감추어져 보이지 않게 하였다.
○ 일귀(日晷 해시계)의 제도는, 현주(懸珠)는 방부(方趺)의 길이를 6촌 3분으로 기둥을 부(趺)의 북쪽에 세우고, 못을 부의 남쪽에 파고 십자(十字)를 부의 북쪽에 긋고 추를 기둥머리에 달아 십자와 서로 맞보게 하여 수준(水準)을 기다릴 필요없이 자연히 평정된다. 백각(百刻)을 작은 바퀴에 새겼는데, 바퀴는 직경이 3촌 2분이고, 자루를 만들어 기둥에 비스듬히 꽂았으며, 바퀴 가운데에 구멍이 있어 한 개의 가느다란 줄을 꿰어 위로 기둥 머리에 매고, 아래로는 부(趺) 남쪽에 매어 줄의 그림자 있는 곳으로써 시각을 알게 한다.천평(天平)은 그 제도가 현주와 대개 같으나 오직 못을 남북쪽에 파고 기둥을 부 가운데 세우고 노끈은 기둥 머리에 꿰었는데, 들어서 남쪽을 가리키는 것이 다르다. 정남(定南)은 부의 길이가 1척 2촌 5분이 되고, 두 머리의 넓이는 4촌이요, 길이는 2촌이 되고, 허리의 넓이는 1촌이요, 길이는 8촌 5분이 된다. 가운데에 둥근 못이 있어 직경이 2촌 6분이요, 물도랑을 두어 두 머리를 통해서 기둥 곁에 둘렀으며, 북쪽 기둥은 길이 1척 1촌이고, 남쪽 기둥은 길이 5촌 9분이요, 북쪽 기둥이 1촌 1분으로 남쪽 기둥보다 3촌 8분이 낮다. 아래에 각각 바퀴가 있어서 사유환(四游環)을 받았으며, 환은 동서로 운전하는데 반주천도수(半周天度數)를 새겨 도마다 4분하여 북쪽 16도로부터 1백 67도까지 이른다.가운데가 비어 쌍환(雙環) 모양 같고, 나머지는 전환(全環)이 되어 안에는 한 금을 중심에 긋고 밑에 모난 구멍이 있는데, 직거(直距)를 가로 걸쳤으니 거(距)의 가운데가 6촌 7분이다. 비어서 규형(窺衡)을 받았으며, 규형은 위로 쌍환을 꿰고 아래로는 전환에 임하여 남북으로 저앙(低昻)하고 평평하게 지평환(地平環)을 설치하되 남쪽 기둥 머리와 같이 하여 하지의 해 출몰 시각을 표준하며, 반환(半環)을 지평 아래 가로 설치하여 안에 백각(百刻)을 나누어 모난 구멍에 맞보게 하고, 부(趺) 북쪽에 십자(十字)를 그어 추(錘)를 북쪽 바퀴 끝에 달아서 십자와 서로 맞보게 하니, 역시 평형(平衡)을 취하는 데 쓰는 것이다.규형(窺衡)은 매일 태양이 극도(極度) 분(分)에 투입되어 해 그림자가 정원(正圓)이 될 때에 모난 구멍으로부터 반환(半環)의 시각을 내려다보면 비록 정남침(定南針)을 쓰지 아니하여도 남쪽을 정하고 시각을 알 수 있다. 앙부(仰釜)는《원사(元史)》에 기록한 곽수경의 법을 따른다.
○ 김돈(金墩)이 앙부일귀(仰釜日晷)에 명을 짓기를, “무릇 베풀어 시행하는 것으로 시간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를 녹여 그릇을 만들었으니 그 모양이 가마솥과 같다. 원거(圓距)를 가로 설치하였으니 자(子)와 오(午)가 상대되고, 구멍이 굽이를 따라서 도니 점이 개자(芥子)씨 놓은 것만하다. 낮의 도수는 안에 있으니 주천(周天)의 반이다.신의 형상을 그린 것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함이다. 각(刻)과 분(分)이 또렷하니 해가 투영됨이 분명하다. 길가에 두는 것은 보는 이가 모이기 때문이니, 앞으로는 백성들이 지을 때를 알겠구나.” 하였다.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의 제도는 구리로 바퀴를 만들어 적도를 표준하였는데 자루가 있고, 바퀴의 직경은 2척이며, 두께는 4분이고, 넓이는 3촌이다. 가운데에 십자(十字)의 거(距)가 있어 넓이가 1촌 5분이고, 두께는 바퀴와 같고 십자 중에 축이 있는데 길이는 5분 반이며, 직경이 2촌이고, 북쪽편에 중심을 깎아 파서 일리(一釐)의 두께만 남겨 가운데 개자씨만한 둥근 구멍이 있다.
축으로는 계형(界衡)을 꿰고 구멍으로는 별을 본다. 아래에는 서려 있는 용이 있어 바퀴 자루를 머금었으니, 자루 두께는 1촌 8분인데, 용의 입에 1척 1촌이 들어가고 밖에 3촌 6분이 나왔다. 용 아래에 대가 있어 넓이 2척이고, 길이 3척 2촌이며, 도랑이 있고, 못이 있으니 평(平)함을 취한 것이다. 바퀴 윗면에 세 환(環)을 두었으니,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ㆍ‘일귀백각환(日晷百刻環)’ㆍ‘성귀백각환(星晷百刻環)’이다. 주천도분환은 밖에서 운전하는데 밖에 두 귀가 있어 직경이 2척이며, 두께는 3분이고, 넓이는 8분이다.
일귀백각환은 가운데 있어 들지 아니하는데 직경이 1척 8촌 4분이고, 넓이와 두께는 외환(外環)과 같다. 성귀백각환은 안에서 운전하는데, 안에 두 귀가 있으며 직경이 1척 6촌 7분이고, 넓이와 두께는 중환ㆍ외환과 같다. 귀가 있는 것은 운전하기 위한 것이다. 3환 위에 계형(界衡)이 있는데 길이는 2척 1촌이고, 두께는 5분이며, 넓이는 3촌이다. 두 머리 가운데가 비어 길이가 2촌 2분이며, 넓이는 1촌 8분이다. □은 3환의 그은 것을 가리는 것이다.
허리의 중간 좌우에 각각 한 용이 있어서 길이가 1척인데 모두 정극환(定極環)을 받치고 있다. 두 환이 있으니 외환ㆍ내환 사이에는 구진대성(勾陳大星)이 보이고, 내환 안에는 천추성(天樞星)이 보이는데, 남북 적도를 정한 것이다. 외환은 직경이 2촌 3분이고, 넓이는 3분이며, 내환은 직경이 1촌 4분 반이고, 넓이는 4리며, 두께는 모두 2분이 조금 작은데 서로 십자(十字)로 접속하였다. 계형 두 끝 빈 곳의 안팎에 각각 작은 구멍이 있고, 정극외환(定極外環) 양변에 역시 작은 구멍이 있는데, 가는 노끈으로 여섯 구멍을 꿰어서 계형 두 끝에 매단 것은 위로 일성을 측후하고 아래로 시각을 고찰하려는 것이다.
주천환(周天環)에는 주천도(周天度)를 새겨 매도에 4분을 만들고, 일귀환(日晷環)에는 백각을 새겨 각마다 6분을 만들며, 성귀환(星晷環)에도 역시 일귀환과 같이 새겼는데, 다만 자정이 새벽 전 자정을 지나는 것이 주천의 1도 지내는 것과 같이 된 것이 일귀환과 다르다. 주천환을 쓰는 방법은 먼저 수루(水漏)를 내리어 동지에 새벽 전 자정이 되면 계형으로 북극 제이성(第二星) 있는 곳을 측후해서 바퀴 가에 기록하여 주천 초도(初度)의 시초에 해당하게 한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면 천세(天歲)는 반드시 □하니 《수시력(授時曆)》으로써 고찰하면 16년이 조금 지나면 1분이 퇴보하고, 66년이 조금 지나면 1도가 퇴보하였다. 이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다시 측후하여 바로잡아야 한다. 북극 제2성은 북신(北宸)에 가까워 붉게 반짝이어 뭇사람이 보기 쉬운 까닭에 그것으로써 측후하였다. 일귀환 쓰는 법은 간의(簡儀)에 성귀환 쓰는 법과 같다.
첫해의 동짓날 새벽 전 야반(夜半) 자정을 기하여 하늘 초도(初度)를 시초로 삼아서, 1일 1도, 2일 2도, 3일 3도로 3백 64일에 이르면 3백 64도가 된다. 다음해 동짓날 자정에 3백 65도가 되는데, 1일에는 영도(零度) 3분, 2일에는 1도 3분이 된다. 또 다음해 동짓날에 3백 64도 3분이 되며, 1일에는 영도 2분, 2일에는 1도 2분으로 3백 64일에 이르면 3백 63도 2분이 된다. 또 다음해의 동짓날에 3백 64도 2분이 되고 1일에는 영도 1분, 2일에는 1도 1분이니, 3백 65일에 이르러 이에 3백 64도 1분이 된다. 이것을 일진(一盡)이라 하는데 한 바퀴가 다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 소간의(小簡儀)는 두 벌인데, 하나는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 주었다. 앙부일귀는 두 벌인데 안에 시신(時神 짐승 그림으로 12시를 나타낸 것)을 그린 것은 대개 어리석은 백성들이 꾸부려 들여다보고 시각을 알게 함이다. 하나는 혜정교(惠政橋) 가에 두고, 하나는 종묘 남쪽 거리에 두었다.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네 벌을 만들어 하나는 만춘전(萬春殿) 동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에 주며, 둘은 동계ㆍ서계 원수영(元帥營)에 나눠 주었다.
○ 김돈(金墩)이 일성정시의에 명을 짓기를, “요임금이 역상(曆象)을 흠정(欽定)하고, 순임금은 기형(璣衡)을 쓰니, 역대로 서로 전해 가며 제작이 더욱 정밀해졌으며, 의(儀)니 상(象)이니 하여 명칭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 굽어 살피고 우러러 관찰하여 백성에게 역서(曆書)를 주었으나 시대가 더욱 내려오자 제도가 폐하여졌다.
책(策)이 비록 있으나 누가 그 뜻을 알 것이냐. 성신(聖神) 세종대왕이 때맞춰 나시어 요순의 제도를 계승하시니, 표(表)ㆍ누(漏)ㆍ의(儀)ㆍ상(象)이 모두 옛 제도를 회복하였다. 시(時)가 백각(百刻)이 있어 낮과 밤이 다르니, 해를 측후하는 데는 기계가 갖추어지지 아니함이 없고, 밤을 겸해서 측후하고자 새로 의(儀)를 만들었다. 그 이름이 무엇인고, ‘일성정시(日星定時)’라 하며, 그 사용함이 어떠한고. 별을 보며 해 그림자를 측정한다.
그 바탕은 구리로 만들었는데 제작은 비할 데가 없다. 먼저 둥근 바퀴를 설치하고 거(距)를 가로 설치하니, 남쪽과 북쪽이 낮고 높은 것은 적도의 규모를 모방한 것이다. 대(臺)에 용(龍)이 서리어 입에 바퀴 자루를 머금었으며, 도랑이 있어 못에 연(連)함으로써 수평을 이루게 된다. 바퀴 위에 3환(環)이 스스로 서로 의지해 붙었으니, 바깥 것을 ‘주천(周天)’이라 하여 도(度)와 분(分)이 벌여 있고, 안으로 2환이 있어 일환(日環)과 성환(星環)이 길을 나누었다.
성환의 각(刻)은 하늘 도수와 같이 하였는데, 안팎은 구름이요, 가운데만은 단단하게 굳었다. 형(衡)은 전면을 가로질렀고, 축(軸)은 그 가운데를 꿰었으며, 축을 파서 구멍을 만들었는데 겨자씨 같고 바늘 같다.
형(衡)의 끝을 비워서 도(度)ㆍ각(刻)을 분명히 표시하였고, 두 용이 축을 끼고 정극환(定極環)을 받들었다. 환이 안팎이 있어 별이 둘 사이에 보이는데, 그 별이 무슨 별이냐. 구진(勾陳)ㆍ천추(天樞)로다. 남쪽ㆍ북쪽이 정하여졌고 동쪽ㆍ서쪽이 서로 기다린다. 측후를 하는 데는 줄을 사용하여 관찰하니 바로 환 위에 걸쳐서 아래로 형 끝에 꿰었다.
해 측후에는 둘을 쓰고, 별 측후에는 하나로 한다. 제좌(帝座)는 붉고 밝아서 북극에 가깝다. 줄을 사용하여 엿보니 가히 시각을 알겠다. 먼저 누수(漏水)를 내리니 이에 자정(子正)을 알겠다. 윤(輪)과 환(環)을 표지(表誌)하였음은 천주(天周)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밤마다 주천(周天)하여 도(度)와 분(分)이 시종(始終)한다. 그릇이 간이하고 정미하여 사용함이 주밀하다. 몇 번이나 선철(先哲)을 겪었어도 이 제작이 오히려 부족하였는데, 우리 임금께서 하늘을 예측하여 이 의(儀)를 비로소 만드셨네. 희화(羲和 벼슬 이름)에게 주셨으니 만대에 보배될 것이다.” 하였다.
○ 자격루(自擊漏)의 제도는 파수호(播水壺)가 네 개인데,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수수호(受水壺)는 두 개인데 물을 갈 때에 번갈아 쓴다. 길이는 11척 2촌이며, 원(圓)의 직경은 1척 8촌이고, 살 두 개는 길이가 10척 2촌이다. 면(面)에 12시를 표시하고, 매시마다 8각을 나누어 초정(初正) 나머지 분(分)을 모두 백각으로 하여 각마다 12분을 만들었다.
야전(夜箭)은 옛날에는 21개였던 것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이 복잡하여 다시 《수시력(授時曆)》에 의거하여 밤과 낮에 승강(升降)을 나누어 비율이 대략 이기(二氣)에 1전(箭)이 해당되니 무릇 12전이다. 이에 사신목인(司晨木人)을 만들어 시각을 따라 스스로 보고하도록 하였는데, 집 세 채를 지어서 동쪽채 안에는 2층을 설치하여 윗층에는 3신(三神)을 세워 하나는 시(時)를 맡아 종을 치게 하고, 하나는 경(更)을 맡아 북을 치게 하며, 가운데 층 아래에는 평륜(平輪)을 설치하여 12신(神)을 벌여 각각 철조(鐵條)로 간(幹)을 삼아 오르내릴 수 있게 하고, 각각 시패(時牌)를 잡아 번갈아 시를 알리도록 한다.
그 기계를 운전하는 방법은 가운데 집채 사이에 다락을 만들어 위에 파수호를 벌였고, 아래는 수수호를 두며, 호 위에 모난 나무를 세웠다. 가운데는 공(空)하고 면(面)은 허(虛)한데 길이가 11척 4촌이며, 넓이는 6촌이고, 두께는 8분이요, 깊이가 4촌이다.
공(空)한 가운데에 격(隔)이 있어 면에서 1촌쯤 들어가고, 왼쪽에 구리 판자를 설치하여 길이는 살[箭]을 표준하고 넓이는 2촌이다. 판자 면에 12구멍을 뚫어 작은 구리 환(丸)을 받게 하니 크기가 탄환만하였다. 구멍에 모두 기계가 있어 열고 닫게 하여 12시를 주장하고, 오른쪽에도 구리 판자를 설치하였는데 길이는 살을 표준하고 넓이는 2촌 5분이며, 판자 면에 25구멍을 뚫어 역시 작은 구리 환을 받기를 왼쪽 판자와 같이 하고, 12살을 표준하니 무릇 12판자이다.
절기를 따라 번갈아 쓰여 경(更)ㆍ점(點)을 주장하고, 수수호에는 살을 띄워 살 머리에 가로쇠를 받쳐 젓가락같이 하니, 길이는 4촌 5분이고, 병(壺) 앞에 함(陷)이 있다. 함 가운데 비스듬히 넓은 판자를 설치하여 모가 난 머리는 속 빈 나무 밑에 접속하고, 꼬리는 동쪽 집채 자리 아래 달하였다. 격(隔) 넷을 설치하여 각도상(角道狀)같이 하고, 격 위에 큰 쇠 철환을 안치하였는데 크기는 달걀만하였다.
왼쪽 12는 시(時)를 주장하고, 가운데 5는 경(更)과 경마다 초점(初點)을 주장하고, 오른쪽 12는 점(點)을 주장하니, 그 탄자[丸]를 안치한 곳에는 모두 환(環)이 있어 열고 닫는 것이 있다. 또 횡기(橫機)를 설치하여 그 기(機)의 모양이 숟가락 같아서 한 끝은 굽어서 환(環)을 걸 수 있으며, 한 끝은 둥글어 탄자를 받게 한다. 중간 허리에는 모두 둥근 축(軸)이 있어 저앙(低仰)하게 하고, 그 둥근 끝이 구리통의 구멍에 당(當)하게 하였다.
구리통이 두 개가 있어 비스듬히 격(隔) 위에 설치하였는데, 왼쪽은 길이가 4척 5촌으로, 원(圓)의 직경은 1촌 5분이며, 시(時)를 중심하여 아랫면에 12구멍을 뚫었다. 오른쪽은 길이가 8척으로, 원의 직경은 좌통(左筒)과 같은데 경점(更點)을 주장하여 아랫면에 25구멍을 뚫었다. 구멍마다 모두 기계가 있어 처음에는 구멍이 모두 열려서 구리 판자에 작은 탄자가 떨어져 기계에 닿으면 기계가 스스로 구멍을 가리어, 다음 환(環)이 굴러 지나가는 길이 되어 차례차례로 모두 그러하다.
동쪽 집채 자리 윗층 아래 왼쪽에 짧은 통 2개가 달려 있는데, 한 개는 탄자를 받고, 한 개는 안에 기계 숟가락을 설치하여 숟가락의 둥근 끝이 반만 나와 탄자를 받게 하며, 통 밑 오른쪽에 둥근 기둥과 모난 기둥을 각각 둘씩 세웠다. 둥근 기둥은 가운데가 공(空)하여 안에 기계를 설치하였는데 모양은 역시 숟가락 같고 반은 나가고 반만 들어 있으며, 왼쪽 기둥에는 다섯이고, 오른쪽 기둥에는 열이다.
모난 기둥에는 비스듬히 작은 통을 꿰어 기둥마다 각각 넷씩 설치하였는데 한 끝은 연꽃잎 모양을 하고, 한 끝은 용의 입모양을 하였다. 연꽃잎은 탄자를 받고, 용입은 탄자를 토하게 하였으니 용입과 연꽃잎은 위와 아래에 서로 마주본다. 그 위에 따로 달린 짧은 통 두개가 있어 한 개는 경탄자[更丸]를 받고, 한 개는 점탄자[點丸]를 받게 한다. 오른쪽 모난 기둥 연꽃잎 아래마다 각각 세로로 짧은 통 둘과 가로로 짧은 통 한 개를 붙이는데, 그 가로된 짧은 통 한 개는 왼쪽 모난 기둥 연꽃잎 아래에 접속한다.
왼쪽 둥근 기둥의 다섯 숟가락과 오른쪽 둥근 기둥의 다섯 숟가락은 그 둥근 끝이 각각 용입에 해당하며, 연꽃잎 사이의 오른쪽 둥근 기둥의 다섯 숟가락은 그 둥근 끝이 반만 곧은 통 안에 들어간다. 누수(漏水)가 아래로 수수호(受水壺)에 닿으면 뜬 살[浮箭]이 점점 올라가서 왼쪽 구리 판자 구멍의 기계를 건드리며, 작은 탄자가 떨어져 내려 굴러 구리통에 들어가 구멍을 따라 떨어지고, 그 기계를 건드리면 기계가 열리어 큰 탄자가 떨어져 굴러, 자리 아래 달린 짧은 통에 들어가서 떨어져 기계 숟가락을 움직이며, 곧 기계 한 끝이 통 안으로부터 위로 사시신(司時神)의 팔목에 닿아 곧 종을 친다.
경점(更點)도 역시 그러하다. 다만 경탄자는 달린 짧은 통에 들어가서 떨어져 기계 숟가락을 건드려 왼쪽 둥근 기둥 가운데로부터 위로 사경신(司更神) 팔목에 닿아 북을 치고 굴러 점통(點筒)에 들어가 다시 초점 기계를 건드려, 오른쪽 기둥 가운데로부터 위로 사점신(司點神)에 닿아 징을 쳐서 연꽃잎 아래 있는 곧고 작은 통에 멎는데, 그 굴러들어가는 곳에 기계를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경탄자의 길을 막고 경탄자가 굴러 들어감에 의하여 막히었던 경탄자의 길이 열리게 되며 나머지 경(更)도 모두 그러하다. 오경이 끝남을 기다려 빗장을 빼고 낸다. 매경(更) 2점 이하의 탄자는 아래 달린 짧은 통에 닿아 굴러 연꽃잎에 들어가서 그 점(點)의 기계를 건드리고, 다음 점의 탄자가 굴러서 역시 그 점의 기계를 건드리고 멈춘다.
그 탄자를 멈추는 통에 구멍이 있어 빗장을 걸쳐 닫게 하고, 다섯 개의 탄자가 떨어져 맨 아랫 기계를 움직이면 기계에 연결된 쇠줄이 차례차례로 모든 빗장이 빠져 잎쪽의 3개의 탄자가 일시에 한결같이 떨어진다. 시(時)를 주장하는 큰 탄자가 굴러 떨어져 짧은 통에 닿아 굴러서, 둥근 기둥 통에 굴러들어가 떨어지면 가로지른 나무의 북쪽 끝을 누른다.
나무 길이는 6척 6촌이요, 넓이는 1촌 5분이며, 두께는 1촌 7분이다. 가로 지른 나무 가운데에 중심을 맞추어 짧은 기둥을 세우고, 가로지른 나무를 끼고 둥근 축(軸)으로 받아 아래 위로 저앙하게 한다. 가로지른 나무 남쪽 끝에 손가락만한 둥근 나무를 세웠는데, 길이가 2척 2촌으로 시신(時神)의 발 아래에 당한다. 발 끝에 작은 윤축(輪軸)이 있어서 큰 탄자가 떨어져 북쪽 끝을 누르면, 남쪽 끝이 올라가서 신(神)의 발을 받들어 자리 중간층 위에 오르게 하고, 가로지른 나무 북쪽 끝의 북쪽에 작은 판자를 세워서 열고 닫을 수 있게 한다.
판자에 쇠줄이 있어서 위로 시(時)를 주장하는 매달린 통의 기계 숟가락에 연결되었는데, 숟가락이 움직이면 판자가 열려서 앞의 탄자를 나오게 하고, 가로지른 나무 남쪽 끝이 낮아지면 시신(時神)이 바퀴면에 돌아오고 다음 시신이 즉시 대신 올라온다. 그 바퀴를 굴리는 방법은 바퀴 바깥쪽에 길이 한 자 가량 되는 작은 판자를 가로지르고 그 가운데를 4, 5촌 가량 파고 구리 판자를 그 위에 가로 걸쳐 비스듬히 기울인 모양으로 하여 한 끝에 추(軸)를 설치하여 열리고 닫히게 한다.시(時)가 끝나서 바퀴면에 돌아오면 발끝의 쇠바퀴가 구리 판자에 순조롭게 굴러 내려와서 잠깐도 머물지 않게 하며, 다음의 시신(時神)도 역시 그러하다. 모든 기계가 다 감추어져 보이지 아니하고 바깥에 보이는 것은 갓[冠] 쓰고 띠를 맨 나무로 만든 사람뿐인데, 이것이 자격루 제작의 대략이다. 그 기계를 설치한 집 이름을 ‘보루각(報漏閣)’이라 하고, 또 천추전(千秋殿) 서쪽에는 작은 집을 짓고 종이를 발라서 높이 7척 가량이나 되는 산(山)을 만들어 그 집 가운데에 넣어 둔다. 또 그 집 안에 옥루기륜(玉漏機輪)을 설치하여 물의 힘으로 움직이게 하고 금으로 해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탄환만하였다. 해가 오색 구름에 둘리어 산중턱으로 다니는데, 하루 한 번 산을 돌아 낮에는 산 밖에 보이고, 밤에는 산 가운데로 비스듬한 모양이 하늘의 운행하는 도수의 극(極)에 대한 원근(遠近)ㆍ출입(出入)의 등분을 표준하여 각각 절기(節氣)를 따라 천일(天日)과 맞게 한다.
해 아래 4명의 선녀(仙女)가 금목탁(金木鐸)을 들고 구름을 타고 사방에 서 있는데, 인(寅)ㆍ묘(卯)ㆍ진(辰)의 초정(初正)에는 동쪽에 서 있는 선녀가 항상 진동(振動)하고, 사(巳)ㆍ오(午)ㆍ미시(未時)의 초정에는 남쪽에 서 있는 선녀가 항상 진동하는데, 서북 양쪽도 모두 그러하다. 아래로는 4신(神)이 각각 그 방위에 서서 모두 산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청룡(靑龍)이 인시(寅時)에는 북쪽으로, 묘시에는 동쪽으로, 진시에는 남쪽으로 향하고, 사시에는 도로 서쪽으로 돌아보고, 주작(朱雀)이 다시 동쪽으로 향하여 차례차례로 향하는 방위를 청룡처럼 한다. 다른 것도 이와 같았다.
산 남쪽 비탈에 높은 대(臺)가 있어서 사신(司辰) 1명이 붉은 비단 공복(公服)을 입고 산을 등져 서 있고, 무사(武士) 3명이 모두 갑옷과 투구를 갖추었는데, 1명은 종 치는 방망이를 쥐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여 서 있으며, 1명은 북채를 잡고 북쪽에 가까운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라보고 서 있고, 1명은 징채를 쥐고 역시 남쪽에 가까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시(時)가 될 때마다 사신(司辰)이 종 맡은 자를 돌아보고, 종 맡은 자는 역시 사신을 돌아보며 종을 치며, 경(更)마다 북 맡은 자가 북을 치고, 점(點)마다 징 맡은 자가 징을 친다. 서로 돌아보는 그 모양은 역시 같고, 경ㆍ점과 징ㆍ북의 수(數)는 항상 같은 법칙이다. 또 그 밑 평지 위에는 12신(神)이 각각 그 자리에 엎드리고, 12신 뒤에는 각각 구멍이 있어서 항상 닫혔다가 자시(子時)가 되면 쥐 뒤의 구멍이 스스로 열려 옥녀(玉女)가 시패(時牌)를 쥐고 나오며 쥐가 앞에서 일어나고, 자시가 지나면 옥녀가 도로 들어가고 그 구멍이 다시 스스로 닫혀지며 쥐는 도로 엎드린다.
축시(丑時)가 되면 소 뒤의 구멍이 스스로 열려 역시 옥녀가 나오고 소가 역시 일어난다. 12시가 모두 그러한데, 또 오위(午位) 앞에는 대(臺)가 있고, 대 위에는 의기(欹器)가 있으며, 그 북쪽에 관인(官人)이 금병을 쥐고 물을 붓는데, 물시계의 남는 물을 써서 줄줄 계속 흘러 내리게 되어 있다. 의기가 비었을 때엔 기울어지고, 물이 알맞게 차면 반듯하고, 가득차면 엎어져서 모두 옛 사람의 교훈과 같다. 이것의 운용은 오로지 기계가 스스로 행하고 스스로 종을 쳐서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아니하니 그 이름을 ‘흠경(欽敬)’이라 하였다.
○ 흠경각(欽敬閣)이 준공된 것은 무오년 정월 1일 병술이었고, 보루각(報漏閣)은 그보다 앞서 갑인년에 이미 준공되었으므로, 그해 7월 1일 병자부터 비로소 새 물시계를 사용하고, 서운관생(書雲觀生)들에게 번갈아 숙직하고 감독하게 하였다.
○ 김빈(金鑌)이 지은 보루각의 명(銘)에, “음양(陰陽)이 차례로 교대하여 낮과 밤이 엇갈리도다. 천도(天道)는 묵묵히 돌아가고, 지공(地功)은 자취가 없도다. 천지(天地)의 도(道)를 도와서 이룩하여 해시계와 물시계를 만들었도다. 황제(黃帝) 때로부터 창조(創造)하여 시대마다 제도가 달랐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 제도가 서툴다가 비로소 큰 제도를 만들었으니 우리 임금의 깊고 총명하심이로다. 옛날에는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사용하였고 또 물시계를 만들었도다. 파수호(播水壺)가 네 개이고, 수수호(受水壺)가 두 개이다. 낮과 밤의 교대는 각차(刻差)에 의하여 시작되도다.
여기에 셈대[籌]를 세워 이륙(二六)으로 나타내고, 목탁을 치고 징을 치는 것은 혹 측후가 어긋날까 함이로다. 나무로 신인(神人)을 새겨 만들어 지켜보는 관리가 필요 없도다. 신인을 안치하여 물시계를 살피게 하고, 높은 집을 지었도다. 동쪽 채에는 상하로 자리를 설치하였는데, 위쪽에 3신(神)이 있어 종ㆍ북ㆍ징을 나누어 쥐었네. 닭 대신(代身)으로 신인이 부르짖는데 그 소리가 질서 있도다. 아래 12신은 신패(辰牌)를 가졌는데 편편한 바퀴 면에 둘러서서 차례로 올라오며 시를 알리도다. 그 기계의 움직임은 가운데 집에 징험하도다.
층루로 간격(間隔)을 하여 호(壺)를 서로 연결하였도다. 구리 판자 2개를 만들어서 구멍을 뚫어 살[箭]을 맞추었도다. 기계를 더하여서 탄자를 받게 하여 호 앞에 세웠도다. 살이 올라가서 기계를 움직이니 탄자가 떨어져 구르도다. 신인의 아랫쪽에 탄자 구르는 길이 가로로 비스듬하도다. 두 갈래가 넷이 되니 길이 통한 듯하도다. 통을 좌우로 이어서 탄자가 들어가는 것을 받도다. 통에 기계 구멍이 있어 통ㆍ판자의 수효와 맞추었도다. 특별히 큰 탄자가 있어 통가에 벌였도다. 번갈아 기계를 건드리니 번개처럼 빠르도다. 기계가 닿는 곳에 사신(司辰)이 제 구실을 다하도다. 귀신과도 같으니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도다. 위대하다.
이 넓은 규모여, 하늘에 순응하여 만들었도다. 제도가 조화와 같으니 규모가 틀리지 아니하도다. 이에 짧은 시간도 아껴 써서 여러 가지 공적을 빛내도다.
버드나무를 꺾어 울타리를 만들어도백성이 스스로 의혹하지 아니하도다. 이리하여 표준을 세워 영원히 보여 주도다.” 하였다.
○ 15년에 새 제도의 천문도(天文圖)를 새기었다. ○ 임금이 고금의 천문도를 참작하여 28수의 거리ㆍ도수 및 12부위(部位)의 궁(宮)에 드나드는 별의 도수를 일일이 《수시력(授時曆)》으로 측후한 바에 의하여 부지런히 새 천문도를 만들어 돌에 새기고, 또 이순지(李純之)에게 명하여 선유(先儒)의 의논과 역대의 제도를 모아 의상(儀象)ㆍ해시계ㆍ물시계ㆍ천문ㆍ역법 등 모든 글을 편찬하게 하였다.
○ 24년에 측우기를 만들었다. ○ 구리를 녹여 그릇을 만들어 ‘측우(測雨)’라 이름하였는데, 길이는 1척 5촌이며, 둘레는 7촌이었다. 대(臺)를 서운관(書雲觀)에 쌓아 놓고 그릇을 그 위에 설치하여 비 온 뒤에는 항상 서운관의 관원들로 하여금 주척(周尺)으로 물 깊이의 분촌을 측량하여 알리게 하고, 측우기 제도와 주척의 양식을 모든 도(道)에 발표하여 여러 읍에 각각 하나씩 만들게 하여 객사(客舍)의 뜰 가운데 두고, 비 온 뒤에는 항상 고을 원이 친히 물 깊이의 분촌을 관찰하여 아뢰게 하였다.
영종조에 세종조의 옛 제도에 의하여 측우기를 만들었다.○ 성종(成宗) 22년에 규표(窺標)를 만들었다. 전교하기를, “요사이 관상감(觀象監) 관원이 경(更)ㆍ점(點)의 시(時)를 실수하여 간혹 사경(四更)에 3번, 삼경에 4번 북을 치니 매우 불가하다. 옛글을 상고하여 보면, ‘아무 시에는 아무 별이 보이고, 아무 별이 아무 곳에 보이면 날이 밝는다.’ 하였으니, 천시(天時)는 자연적으로 그 도수가 있는 것이니, 관상감 제조(提調)와 김응기(金應箕) 등을 시켜 하늘의 운행하는 도수를 참고하여 규표 3개를 만들어 1개는 대궐 안에 들여 놓고, 1개는 승정원에 두고 1개는 홍문관에 두어서, 천시를 측후하여 물시계의 착오를 살피게 하라.” 하였다.
○ 25년에 영의정 이극배(李克培)에게 명하여 구리를 녹여 소간의(小簡儀)를 만들게 하였는데, 세종조의 소간의에 의거하여 적도단환(赤道單環)과 사유쌍환(四遊雙環)의 직경이 모두 2척이었다.
○ 중종 21년에 관상감이 아뢰기를, “오늘날 모든 의상(儀象)의 기구가 모두 세종조 때에 설치한 것이온데, 별의 위치가 간혹 깎여서 떨어진 데가 있사오니, 수리하기를 바라옵니다. 모든 의상이 모두 단벌이므로 만약 수리하게 될 때에는 다른 측후할 기구가 없사오니 다시 여벌을 만드소서.” 하였더니, 임금이 윤허하고 명하여 여벌을 만들어 내관상감(內觀象監)에 두게 하였다.
○ 명종 3년에 관상감에 명하여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홍문관에 두게 하였다.
○ 임진왜란 때, 서운관에 있는 의상(儀象)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로부터 10년 뒤 신축년에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본국(本局)에 겸임하였을 때에 오래되면 그 제도가 전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더니, 우연히 옛 간의(簡儀) 방법을 적은 글과 늙은 공인 2명을 구하여 사각(史閣)의 기록을 참고하여 옛 제도의 회복을 아룄더니 임금이 특히 윤허하였다. 때가 난리 뒤였기 때문에 공사는 크고 힘은 약하여 우선 그 정밀하여 만들기 어려운 누기(漏器)ㆍ간의(簡儀)ㆍ혼상(渾象) 같은 것을 만들어서 뒷사람으로 하여금 제도를 알게 하고, 기타 규표(圭表)ㆍ혼의(渾儀)ㆍ앙부(仰釜)ㆍ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 기구는 함께 만들 겨를이 없었다. 백사중수(白沙重修) 의상(儀象) 서문(序文)
○ 흠경각은 일찍이 선덕(宣德) 갑인년에 경복궁 강녕전 옆에 창건하였었는데, 중도에 불이 나서 타버리고 가정 갑인년에 옛터에 재건하였더니 또다시 병화를 만나고, 만력 갑인년에 창덕궁 서린문(瑞麟門) 안에 다시 지었다. 세종조 때에 만든 일성정시의는 그대로 보존되었었다. 효종 병신년에 흠경각을 헐어버리고 만수전(萬壽殿)을 지었다. 《잠곡집(潛谷集)》
○ 만력 갑인년에 이충(李沖)이 역사를 감독하여 흠경ㆍ보루 두 각을 창덕궁에 세웠다가 뒤에 흠경각은 철폐하여 만수전 터가 되고, 보루각은 지금까지 시강원 동쪽에 있는데, 물시계와 사신목인(司辰木人)이 남아 있으며, 또 지금 관상감은 성종조 때에 지은 것으로 소간의가 남아 있다.
○ 현종(顯宗) 10년에 좨주(祭酒) 송준길(宋浚吉)이 흠경각의 옛 제도를 회복할 것을 아뢰었더니, 임금이 이민철(李敏哲)에게 명하여 《채씨순전주(蔡氏舜典註)》에 의하여 구리를 녹여 혼천의를 만들게 하였다. 혼천의를 만들었으나 내리고 올릴 수가 없어서 실제로 사용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대로 여러 번 수리하여 제정각(齊政閣) 가운데 안치해 놓고,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부지런하게.” 하는 뜻을 나타내었다. 정종(正宗) 때 또 서운관 제조 서호수(徐浩修)에게 명하여 수리하게 하였다.
○ 숙종(肅宗) 13년에 이민철에게 명하여 현종조의 옛 혼천의를 중수해서, 제정각을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남쪽에 세워 안치하게 하였다. 상신(相臣) 최석정(崔錫鼎)이 감독하였다.
○ 34년에 안중태(安重泰)ㆍ이시화(李時華) 등에게 명하여 혼천의의 여벌을 만들게 하였다.
○ 34년에 관상감에서 탕약망(湯若望)의《적도 남북총성도(赤道南北總星圖)》를 올리었다.
○ 영종(英宗) 임자년에, 숙종조 때에 만든 혼천의의 여벌이 오래되어 어긋나므로 임금이 안중태에게 명하여 중수하게 하고, 규정각(揆政閣)을 경희궁(慶熙宮) 옛 경덕궁 흥정당(興政堂) 동쪽에 세워 안치하게 하였다.
○ 태조 을해년에 천문도를 돌에 새겨 경복궁에 두었더니, 오래되어 닳아버렸으므로 숙종 때에 인본(印本)을 구하여 다른 돌에 고쳐 새겨 관상감에 두고 작은 집을 지어 보호하였다. 영종 경인년에 태조 을해년의 구판(舊板)이 경복궁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곧 명하여 관상감에 옮기게 하고, 각을 세워 신판(新板)과 함께 넣어두고 임금이 손수 각 이름을 ‘흠경각’이라 쓰고 또 기문을 지었다.


 

[주D-001]버드나무를 …… 만들어도 : 《시경(詩經)》동방미명편(東方未明篇)에, “버들을 꺾어 동산에 울타리를 하였다.”는 글귀가 있는데, 이것은 누수(漏水)를 맡은 관리가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것을 풍자하여 변변치 못한 버드나무 울타리에 비유한 것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
천문전고(天文典故)
후기(候氣)

성종(成宗) 13년 임인 11월 병신일에 예조 판서 이파(李坡), 좌승지 이세좌(李世佐), 좌부승지 강자평(姜子平), 행사과 김귀지(金貴枝), 교리 이창신(李昌臣), 수찬 이응기(李應箕)에게 명하여 옛 가관회비(葭管灰飛)의 제도를 고찰하여 동지(冬至)의 기(氣)를 측후하게 하고, 무술일 새벽에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심사하여 보니 과연 징험이 있으므로 이파 등에게 각각 활 한 장(張)씩을 주고, 김귀지는 한 계급을 가자하였다. 《문헌비고》
○ 기를 측후하는 법은 흙집을 세 겹으로 만들어 문을 닫고 틈이 없도록 반드시 주밀하게 바른다. 문의 방위는 밖을 자(子)로 하고 가운데를 오(午)로 하며, 안에는 다시 자(子)로 하여 방 가운데 붉은 비단을 펴서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나게 한다. 신위(辰位)에 율관(律管)을 묻어 나무로 누르고, 안은 낮게 하고 밖은 높게 하여 그 끝이 땅과 나란히 되게 하며, 엷은 비단으로 덮는다. 중추(仲秋) 백로(白露)에 갈대를 캐어 태워서 재를 만들어 대통 끝에 두어 기를 측후하는데, 기가 이르면 재가 날아간다. 기가 움직이면 재가 흩어지고, 물건이 움직이면 재가 모인다.
○ 중종 기묘년 12월에 임금이 이르기를, “중실(重室)에서 기를 측후하는 것은 처음에 김안국(金安國)의 건의로 설치하였던 것으로 실험을 마치면 그만두려 했다. 그런데 영사(領事) 정광필(鄭光弼)이 말하기를, ‘비록 항상 행하여도 무방하다.’ 하는 까닭에 지금까지 폐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왕 때에도 역시 실험하고는 즉시 폐지하였으니 진실로 항상 행하지 못할 것이다.이제 이미 실험을 하였는데, 끝내 그만둘 수 없겠느냐.” 하고 관상 제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관상감이 아뢰기를, “중실에서 기를 측후하는 것은 선왕 때로부터 혹시 다만 동지에 황종(黃鐘)의 율(律)을 실험하였사온데, 보통 황종으로 12율의 근원을 삼았기 때문에 비록 다만 황종 1관(管)을 실험하더라도 역시 11기(氣)의 응하고 불응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러면 다만 동지에 1관(管)만 묻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 명(明) 나라 한방기(韓邦奇)는 악학(樂學)에 정통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기를 측후하는 제도는 본래 천하 만국에 행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낙양(洛陽)은 세상의 복판으로 온 들이 황토이니 객토(客土) 2, 3척을 걷어버리고 세 겹의 흙집을 쌓아 12관(管)을 비스듬히 묻고 중추 백로에 물속의 갈대를 캐어 불태워 재를 만들어 대통 끝에 채워 실험하면 징험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는 음악에서는 다만 천지(天地)의 중(中)을 본뜬 것이므로, 무릇 그 율관(律管)을 징험하는 것도 중(中)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비록 주부자(朱夫子)의 성(聖)스러운 지혜로도 능히 민월(閩越)에서 실험하지 못한 것은 민월 땅이 남쪽에 치우친 까닭이다.” 하였다. 그런데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징험이 있어 여러 번 시험해도 틀리지 아니하니 웬일일까. 우리나라의 경기ㆍ충청도의 사이가 낙양(洛陽)ㆍ영천(頴川)의 양성(陽城)과 함께 북극(北極)의 출지(出地) 36도로서 남북의 중(中)에 위치하여 기가 이르면 재가 날아가는 것이 이와 같으니, 당시에 기를 측후하던 곳이 함춘원(含春苑) 관상감 등의 곳에서 벗어나지 아니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문헌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