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묘역및 묘지탐방 /10대 임금 연산군 묘역 탐방

조선 10대 임금 연산군 묘역 탐방 (자전거 탐방)

아베베1 2012. 1. 14. 00:46

 

 

   

조선 10대 임금 연산군 (燕山君)  묘역 탐방 (사적 제362호)

 

 조선 10대 왕 연산군과 왕비묘역  

 

 연산군은(1476-1506년) 성종 (成宗 1457-1494년)과 윤기무의딸 폐비윤씨 사이에  태어나 7살의 나니에 세자에 책봉되어

 19세에  조선왕조 제 10대임금이 되었다.

 연산군은 붓글씨를 잘쓰고 실록에 실려있는 시가 130여편이나 될 절도로 시를 잘짓는 임금이었다

 즉위 초에는 성종시대에 형성된 평화로운 풍요가 그대로 이어져 왔고 성종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사치풍조를 잠재우기

위하여 암행어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변방지역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을 회유하여 변방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하였다 

문신의 사가독서 (유능한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다시 실시하여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제조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묘역의 배치도

                 

                      연산군 묘역                   거창신씨 묘역

 

                               의정궁주 조씨(태종이방원의 후궁)  

 

            연산군의 사위 부마 는양위구문경의묘  연산군의딸 휘순공주묘   

 

  1 . 연산군묘

  2 . 거창시씨묘

  3. 의정공주조씨묘 (채종의 후궁)

  4. 연산군 사위 (부마능양위구문경)묘

  5.연산군딸 (휘순공주)묘  

  6. 곡장  7.망주석  8.비석   9 .상석   10. 장명등  11.향로석   12. 문인석

 

자료: 문화재청 자료 발췌 작성 

 

 

 

 

 

 

 

 

 

 

 

 

 

 

 

 

 

 

 

 

 

 

 

 

 

 

 

 

 

 

 

 

 연산군의 묘소와 역사를 같이한 은행나무

 

 

 

 

 최근에 공사중인 원당천 주변의 모습

 

 

연려실기술 제6권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성종



성종 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 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의 이름은 혈(娎)이고 덕종(德宗)의 둘째 아들이다.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천순(天順) 원년 정축 세조 2년 7월 30일 신묘에 세자궁에서 낳았다. 신사년에 처음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하였다가 성화(成化) 무자년에 현록대부 자을산군(顯祿大夫者乙山君)이라 더 올렸다. 기축년 11월 28일에 경복궁 안의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고 홍치(弘治) 7년 갑인 12월 24일 기묘에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서 세상을 떠났으니,왕위에 있은 지는 25년이요, 수(壽)는 38세였다. 명 나라 조정에서 강정(康靖) 온량(溫良)하여 즐거워하는 것을 강(康)이라 하고, 관락(寬樂)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 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인조 13년 을해에 세실(世室)로 정하였으며 능은 선릉(宣陵) 광주(廣州) 서학당동(西學堂洞)의 임좌이다. 을묘년 4월 6일에 장사 지냈으며 표석이 있다. 이다.
○ 비(妃)는 휘의신숙공혜 왕후(徽懿愼肅恭惠王后) 한씨(韓氏)는, 본관은 청주이며, 영의정 상당부원군 충성공 명회(明澮)의 딸이다. 경태(景泰) 7년 병자 10월 11일 정미에 연화방(蓮花坊)의 사제(私第)에서 탄생하였다. 성화 정해년에 가례를 거행하였으며 기축년에 왕비로 책봉되고,갑오년 성종(成宗) 5년 4월 15일 기사에 창덕궁의 구현전(求賢殿)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는 19세였다. 연산주(燕山主) 정사년에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휘호(徽號)를 올렸으며, 능은 순릉(順陵)이다. 파주(坡州) 공릉(恭陵)의 남쪽 산 묘좌이다. 갑오년 6월 7일에 장사 지냈다.
○ 폐비(廢妃) 윤씨(尹氏)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묘(起畝)의 딸이다.
○ 계비(繼妃) 자순화혜소의흠숙정현 왕후(慈順和惠昭懿欽淑貞顯王后) 윤씨(尹氏)는,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우의정 영원부원군 평정공(右議政鈴原府院君平靖公) 호(壕)의 딸이다. 천순 6년 임오 세조 7년 6월 26일 기축에 신창(新昌) 관아에서 탄생하였다. 성화 계사년에 뽑혀 들어와서 처음에는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가,기해년에 윤비가 쫓겨났으므로 경자년에 드디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연산주 정사년에 자순(慈順)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갑자년에 화혜(和惠)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가정(嘉靖) 9년 경인 중종 25년 8월 22일 기묘에 경복궁에서 세상을 떠나니, 수는 69세였으며 능은 선릉(宣陵) 경인 10月 29일에 성종대왕(成宗大王)의 능의 왼쪽 산 간좌에 장사 지냈다. 이다.
○ 아들 열 여섯과 딸 열 둘을 두었다.
사(嗣) 중종대왕(中宗大王)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낳았다.
첫째 딸 신숙공주(愼淑公主) 정현왕후가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첫째 아들 폐주(廢主) 연산군(燕山君) 융(㦕) 어머니는 폐비 윤씨이다.
둘째 아들 계성군(桂城君) 순(恂) 숙의(淑儀) 하씨(河氏)가 낳았다. 부인은 원주 원씨(原州元氏)인데, 첨정 증찬성 치(菑)의 딸이다.
셋째 아들 안양군(安陽君) 항(㤚) 귀인(貴人) 정씨(鄭氏)가 낳았다. 연산주 때에 화를 입었다. 시호는 공회(恭懷)이다. 부인은 능성 구씨(綾城具氏)인데 능천군(綾川君) 증 찬성 수영(壽永)의 딸이다.
넷째 아들 완원군(完原君) 수(㥞) 숙의 홍씨가 낳았고 시호는 소도(昭悼)이다. 부인은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니, 생원 증 찬성 하림(河臨)의 딸이다. 후취는 양천 허씨(陽川許氏)인데 별좌(別坐) 증 찬성 적(磧)의 딸이다.
다섯째 아들 회산군(檜山君) 염(恬)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죽산 안씨(竹山安氏)인데 찬의 증 찬성 방언(邦彦)의 딸이다.
여섯째 아들 봉안군(鳳安君) 봉(㦀) 귀인 정씨가 낳았는데 연산주 때에 화를 입었다. 부인은 평양 조씨(平壤趙氏)인데 판관 증 찬성 성기(成紀)의 딸이다.
일곱째 아들 견성군(甄城君) 돈(惇)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이고 봉사(奉事) 증 찬성 우호(友灝)의 딸이다.
여덟째 아들 익양군(益陽君) 회(懷)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영일 정씨(迎日鄭氏)인데 첨지 증 찬성 문창(文昌)의 딸이다.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아홉째 아들 이성군(利城君) 관(慣) 숙용(淑容) 심씨(沈氏)가 낳았다. 시호는 장평(章平)이다. 부인은 남평 문씨(南平文氏)인데, 인의(引儀) 증 찬성 간(簡)의 딸이다. 후취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며 군수 증 찬성 수중(守中)의 딸이다.
열째 아들 경명군(景明君) 침(忱)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며 첨정 증 찬성 첩(堞)의 딸이다.
열한째 아들 전성군(全城君) 변(忭) 귀인(貴人) 권씨(權氏)가 낳았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인데, 지중추 증 찬성 건(健)의 딸이다.
열두째 아들 무산군(茂山君) 종(悰) 명빈(明嬪) 김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인데 별좌(別坐) 증 찬성 수(銖)의 딸이다.
열세째 아들 영산군(寧山君) 전(恮) 숙용(淑容) 심씨가 낳았다. 부인은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니, 군수 증 찬성 순로(順路)의 딸이다. 후취는 경주 정씨(慶州鄭氏)이고 별좌(別坐) 증 찬성 홍선(弘先)의 딸이다. 시호는 충희(忠僖)이다.
열네째 아들 운천군(雲川君) 인() 숙의 홍씨가 낳았다. 아내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고 참의 증 찬성 인손(仁孫)의 딸이다.
열다섯째 아들 양원군(楊原君) 희(憘) 숙의 홍씨가 낳았다. 부인은 평양 조씨(平壤趙氏)이고 충의위(忠義衛) 증 찬성 경(經)의 딸이다. 후취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니 정(正) 증 찬성 종손(終孫)의 딸이다.
첫째 딸 혜숙옹주(惠淑翁主) 숙의 홍씨가 낳았다. 남편은 고원 위 문효공(高原尉文孝公) 신항(申沆)인데 본관이 고령(高靈)이다. 그 아버지는 참판 종호(從濩)이다.
둘째 딸 휘숙옹주(徽淑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풍원위(豐原衛) 임숭재(任崇載)인데 본관이 풍천(豐川)이며, 그 아버지는 사홍(士洪)이다.
셋째 딸 공신옹주(恭愼翁主) 귀인 엄씨(嚴氏)가 낳았다. 남편은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인데 본관이 청주(淸州)이다. 그 아버지는 낭성군 양호공(琅城君襄胡公) 보(堡)이다.
넷째 딸 경순옹주(慶順翁主) 숙용 심씨(沈氏)가 낳았다. 남편은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인데 시호는 영희공(榮僖公)이며 본관이 의령(宜寧)이다. 그 아버지는 부사 회(懷)이다.
다섯째 딸 경숙옹주(敬淑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여천위(驪川尉) 민자방(閔子芳)인데 본관이 여흥(驪興)이다. 그 아버지는 현령 종원(宗元)이다.
여섯째 딸 정순옹주(靜順翁主) 숙의 홍씨(洪氏)가 낳았다. 남편은 봉성위(奉城尉) 정원준(鄭元俊)인데, 본관이 봉화(奉化)이다. 그 아버지는 주부 현(鉉)이다.
일곱째 딸 숙혜옹주(淑惠翁主) 숙용 심씨(沈氏)가 낳았다. 남편은 한천위(漢川尉) 조무강(趙無彊)인데 본관이 양주(楊州)이며 그 아버지는 참봉 광세(光世)이다.
여덟째 딸 경휘옹주(慶徽翁主) 숙용 권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원위(鈴原尉) 윤정(尹鼎)인데, 본관이 파평이고, 그 아버지는 부사 승세(承世)이다.
아홉째 딸 휘정옹주(徽靜翁主) 숙의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의천위(宜川尉) 남섭원(南燮元)인데, 본관이 의령(宜寧)이고 그 아버지는 승지 흔(忻)이다.
열째 딸 정혜옹주(靜惠翁主) 귀인 정씨가 낳았다. 남편은 청평위(靑平尉) 한기(韓紀)인데,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그 아버지는 판서 형윤(亨允)이다.
열한째 딸 정숙옹주(靜淑翁主) 숙의 홍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평위(鈴平尉) 윤섭(尹燮)인데,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그 아버지는 정(正) 승류(承柳)이다.
○ 의경세자(懿敬世子 성종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세조는 자산군(者山君)을 궁중에서 양육하였다.
임금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국과 도량이 웅걸스러웠으므로 세조가 특별히 사랑하였다. 일찍이 같은 어머니 소생의 형인 월산군(月山君)과 함께 궁중에 있을 때, 마침 뇌성이 진동하여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내시 백충신(白忠信)이 곁에 있다가 벼락을 맞아 죽으니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벼락이 전상(殿上) 좌우 기둥을 때렸다.”고 기록되었다.좌우에 있던 사람이 모두 넘어지고 넋을 잃었으나 《오산설림》에는 “정희왕후(貞熹王后)도 얼굴 빛이 변하고, 여러 왕손들은 놀라서 어쩔줄을 몰랐다.”고 기록되었다. 성종은 전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세조는 더욱 이상히 여겨 일찍이 이르기를, “이 애의 기국과 도량은 우리 태조를 닮았다.” 하였다. 《오산설림》에는 “세조가 정희왕후에게 이르기를, ‘뒷날의 나라 일은 마땅히 이 애에게 맡길 것이니 이 말을 잊지 마시오.’ 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예종(睿宗)이 세상을 떠나니 아들이 어리고 어리석었으므로 정희왕후가 성종으로써 대를 잇도록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 예종이 세상을 떠나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안팎이 매우 불안하였다. 신숙주가 왕대비에게 아뢰기를, “속히 상주(喪主)를 결정하여 인심을 안정시키소서.” 하였다. 왕대비는 성종으로써 왕통을 잇게 하고 친히 정사를 보살폈다.
예종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월산군이 차례에 해당되나 정희왕후가 차례를 건너 뛰어 성종으로 위를 잇게 하였다. 성중은 나이가 겨우 열세 살이었으나 오히려 조정이 편안하고 일이 없었다. 권 충정공(權忠定公) 벌(橃)의 을사년 상소
○ 임금이 열세 살에 들어와 왕통을 잇고 학문에 독실하며 어질고 밝아서 태평시대의 성군이 되었다.
○ 임금은 총명하고 영걸스럽고 너그럽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며 경서와 사서에 통달하였는데 더욱 성리(性理)의 학문에 이해가 깊었으며, 백가(百家)의 글과 역법(曆法), 음악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달하고 활쏘기, 글씨, 그림도 또한 정묘(精妙)한 경지에 이르렀다.효도하고 우애함은 천성에서 나왔으며 제사는 사고가 있지 않는 한 반드시 몸소 지내고 몸을 삼갔다. 세 분 대비를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을 다했으며, 월산대군(月山大君)을 은혜와 예절로써 대우하고 종실 여러 친족들도 때때로 대궐 안으로 불러 보고 술을 내어 가인례(家人禮)를 행하여 매우 화락하였다.
○ 임금이 몸소 경안전(景安殿)에 제향(祭享)하고 경연으로 돌아오자 영경연(領經筵) 한명회(韓明澮)와 최항(崔恒)이 아뢰기를, “제사 지낸 후에 또 경연에 나오시니 옥체가 피로하실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임금은 “나는 하루의 시간도 아끼는데, 재계하는 날은 할 수 없지마는 제사지낸 후에는 경연을 정지할 수 없다.” 하였다.
○ 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지금 날이 점점 길어가니 임금께서는 경연의 석강(夕講)에 나가야 할 것이요, 내시들과 늘상 함께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였다. 원상(院相)김질(金礩) 등이 아뢰기를, “지금 한창 더위가 심한데 하루 동안에 세 차례나 경연에 나오시면 옥체가 피로하실까 염려되오니 주강은 정지하시고 또 석강도 편전에서 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임금은 “내가 촌각을 아끼는데 어찌 주강을 정지하리오. 그리고 조신들을 편복으로 접견할 수 없소.” 하였다.
대비가 임금이 쉴 사이 없이 글 읽는 것을 보고, “피로하지 않으시오?” 하니 임금은 “읽고 싶어서 읽으니 피로한 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첨재(僉載)》
○ 임금은 학문에 뜻이 독실하여 아침ㆍ낮ㆍ저녁의 세 때에 글을 강론하고 밤에도 옥당에 입직한 선비를 불러 강론을 마치고는 편복으로 마주 앉아 술을 내리면서 조용히 고금의 치란과 민간의 편리한 일, 병폐로운 일을 물으니 전각 안에는 촛불 하나만을 켰을 뿐이었다. 때로 밤중에 이르러 선비들이 크게 술에 취하면 어전 촛불[御前燭]을 주어 본원까지 바래다 주게 하였으니, 곧 당 나라 금련거(金蓮炬)의 고사와 같은 뜻이었다. 《용재총화》
○ 이때 혜장왕비(惠莊王妃)ㆍ회간왕비(懷簡王妃)ㆍ양도왕비(襄悼王妃)가 한 궁중에 거처했는데 임금은 세 분을 똑 같이 섬기었다. 또 임금은 대비를 위하여 날마다 작은 연회를 베풀고, 내수사의 여종 5~6명을 뽑아 속악(俗樂)을 익히게 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얼굴과 재예(才藝)가 뛰어났더니 항상 임금에게 추파를 보내었다.임금은 이를 깨닫고 그 부모에게 명하여 시집보내게 하고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부터는 궁중에서 작은 연회도 베풀지 아니하였다. 또 임금은 사고가 없는 한 날마다 세 번 경연에 나오고 세 번 대비전에 뵈러 갔으며 종실들을 불러 후원에서 술도 마시고 활도 쏘았다.종실들을 대하면 반드시 작은 술잔치를 베풀어 기생과 음악이 따르게 하였으니 이것은 태평시대의 좋은 일이지마는 논하는 이는 혹 말하기를, “연산군(燕山君)이 연락에 즐겨 빠진 것은 성종 때부터 귀와 눈에 배었으므로 그렇게 된 것이라.” 하니 애석한 일이다. 《전언왕행록(前言往行綠)》
○ 임금은 해서(楷書) 쓰는 법에 정통하여 글씨 모양이 사랑스럽고 단아하며 무게가 있었으니, 조송설(趙松雪)의 필법을 깊이 연구하여 얻은 바가 깊다. 또 묵화에도 뜻을 두었으니, 이는 모두 임금의 뛰어난 재능으로서, 모방하여 익히기를 힘쓰지 않아도 옛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때때로 필묵을 가까이 하여 약간 솜씨를 보인 것인데, 짧은 종이[寸牋]와 작은 서폭(書幅)들이 세상에 흩어져 이것을 얻은 자는 공경하며 감상하고 겹겹으로 싸서 간직하여 귀중히 여기기를 주옥보다 더하였다. 《용천담적기》
후일에 중종(中宗)은, 일찍이 성세창(成世昌)이 글씨를 잘 쓰고 필법을 볼 줄 안다고 하여, 궐내에 불러들여 간직했던 몇 장의 글씨를 내려주면서, “궐내에서는 성종과 용(瑢 안평대군)의 글씨를 분별하지 못하니 이것을 가려내어 들이라.” 하였다. 세창이 분류하여 아뢰었다.
○ 임금은 매양 월산대군(月山大君)을 궐내에 불러들여 작은 연회를 베풀고, 나가 있을 때에는 편지로서 서로 수창(酬唱)하기를 빠뜨린 날이 없었다. 참외를 내려주는 시에,

새 참외를 처음 맛보니 수정처럼 차구나 / 新苽初嚼水精寒
형제간의 친한 정의로서 어찌 차마 혼자만 먹고 보랴 / 兄弟親情忍獨看

하였다. 대개 그 우애의 지극함을 문자에서도 상상할 수 있었다. 《지봉유설》 《소문쇄록》
궁인의 상자 속에 들었던 휴지 조각을 내 보이는 이가 있는데 종이와 필체가 보통 것과 달랐다. 그 종이에 쓰이기를,

깊숙한 정자는 흐르는 물을 내려다 보고 / 幽亭瞰流水
높은 나무는 잔잔한 물을 굽어본다 / 高樹俯潺湲
화류(驊騮 준마)는 푸른 풀밭에서 우니 / 驊騮嘶靑草
봄이 푸른 산기슭에 있구나 / 春在翠微間

하고, 또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은 천 길이나 섰는데 / 絶壁立千仞
솔바람은 불어 그치지 않네 / 松風鳴未休
난간에 기대 선 무한한 뜻에 / 憑欄無限意
고향의 가을이 어렴풋 하네 / 依約故山秋

하고, 또

묻노니 형은 무슨 일로 세월을 보내는가 / 問兄何事送羲娥
상상하건대 거문고와 노래겠지 / 遐想洋琴與渭歌

하고, 또

친척들을 모으고 아름다운 기생을 부르니 / 期會親戚 聘招佳妓
의리는 비록 군신이지마는 은혜는 곧 형제이다 / 義雖君臣 恩則兄弟

하였다. 이것을 보건대, 임금의 평상시 희필(戱筆)임을 알겠다. 《소문쇄록》
○ 임금의 학문은 깊고 넓으며 문사(文詞)는 넓고 명백하였다. 글하는 선비 노사신(盧思愼) 등을 명하여 《여지승람》ㆍ《동국통감》ㆍ《삼국사절요》를 편찬하게 하고, 또 교서관에 명하여 서적을 많이 간행케 하였으니, 《사기(史記)》ㆍ《좌전(左傳)》ㆍ《사전춘추(四傳春秋》ㆍ《전한서(前漢書》ㆍ《진서(晋書)》ㆍ《당서(唐書)》ㆍ《송사(宋史)》ㆍ《원사(元史)》ㆍ《강목(綱目)》ㆍ《통감(通鑑)》ㆍ《대학연의(大學衍義)》ㆍ《고문선(古文選)》ㆍ《문한유선(文翰類選)》ㆍ《사문유취(事文類聚)》ㆍ《구소문집(歐蘇文集)》ㆍ《서경강의(書經講義)》ㆍ《천원발미(天原發微)》ㆍ《주자전서(朱子全書)》ㆍ《자경편(自警編)》ㆍ《두시(杜詩)》ㆍ《왕형공집(王荊公集)》ㆍ《진간재집(陳簡齋集)》 등이다. 그 밖에도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용재총화》
○ 세조의 정난(靖難)에 한 장사치가 공이 매우 컸던 터라 세조가 어필을 내리기를, ‘세 번 죽을 죄를 지어도 용서 받는다.[三死無與]’ 하였다. 임금(성종)이 처음 왕위에 오르자 그 장사치가 사람을 죽였는데 법 맡은 관원이 법대로 처단하기를 논죄하였더니, 그 장사치가 세조의 어필을 올렸다. 정희대비(貞熹大妃)가 교지를 내리기를,“선왕께서 손수 쓰신 유교(遺敎)가 있으니, 그를 용서해 주시오.” 하였다. 임금은 곤란해하며 말하기를, “선왕의 유교는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요, 사람을 죽인 자가 죽게 되는 것은 만세의 공법(公法)이니 어찌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로써 만세의 공법을 폐기하겠습니까.” 하였다. 대비는 “비록 그렇지만 선왕의 유교는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용서해 주오.” 하였다.임금은 두 번 세 번 반대하면서, “대비께서 저의 말을 듣지 않으시면 감히 나라 일을 맡을 수 없사오니, 원컨대, 다른 사람에게 나라 일을 맡기소서.” 하였다. 대비는 “그렇다면 임금이 알아서 하오.” 하였다. 임금은 그 장사치를 곤장으로 치게 하였으나 끝내 죽이지는 아니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
밀부(密符)를 만들도록 명하여 신숙주(申叔舟)ㆍ한명회(韓明澮) 등 두세 명의 중신에게 나누어 주어서 임금이 부를 적에 증거물로 삼게 하고 또 불의의 변고를 막도록 하였다.
○ 영안도(永安道) 관찰사 이계손(李繼孫)이 아뢰기를, “본도는 조종(祖宗)께서 탄생하고 일어난 땅이므로 주(周)의 기산(岐山)이나 한(漢)의 패읍(沛邑)과 같사오나 다만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기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거나 서울에 가서 벼슬한 사람은 백 명에 한, 두 사람도 못 되어 조정의 예의ㆍ풍속과 문물의 아름다움을 귀와 눈으로 접촉할 수 없기 때문에 풍기(風氣)와 습성에 국한되어 오로지 억세고 사나운 것이 풍속이 되고 활쏘기,말타기로 업을 삼고 있습니다. 학문하는 일에 대해서는 부형들도 가르치지 않고 자제들도 뜻을 두지 않으며, 공리만 서두르고 거짓을 일삼으며 예의를 버리고 기력만 숭상하게 되니, 습관이 풍속이 되어 드디어는 교만한 군사가 되고 맙니다. 지난번에 역적(이시애(李施愛))이 한번 일어나자 온 도민이 쏠리듯이 따라갔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고 배우지 못한 까닭입니다.기습(氣習)을 개혁시키고 교화를 밝히는 방법은 학교를 일으키고 영재를 기르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비록 육진(六鎭)이 궁벽한 곳일지라도 자질이 영특하고 민첩한 사람이 왕왕 있으니, 바라건대, 영흥부(永興府)의 향교에 학업이 정밀하고 해박하며 명망이 있는 문관을 교수로 임명하여 여러 고을의 총명ㆍ민첩한 소년들을 가려 모아서 가르치고, 또 향교에 노비와 토지를 주어서 그 경비로 쓰도록 하소서.” 하였다.
○ 2년 신묘 겨울에 혜성이 하늘에 나타났으므로 교지를 내려 직언을 구하였다. 임금이 보경당(寶敬堂)에 나와서 원상(院相) 김질(金礩)을 불러 조정의 득실과 민생의 이해를 의논하였다.대비가 교지를 전하기를 “나의 일가 친척 중에서 용렬한 무리들이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봉록(俸祿)만 먹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번에 혜성이 나타난 변괴는 아마 이에 관계된 것일 것이니 두려움이 실로 크다. 현명하고 준수한 선비로서 산림에 물러가 숨은 이를 마땅히 찾아서 불러 오라.” 하였다.
○ 3년 임진에 응방(鷹坊)에서 일찍이 해동청(海東靑 송골매) 한 마리를 길렀는데, 임금이 경연에 나가자 신종호(申從濩)가 아뢰기를, “지금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굶어 죽을 지경입니다. 이때야말로 전하께서 매우 걱정하고 부지런하실 때이온데, 지금 궐내의 응방에서는 해동청을 기르고 있으니 이는 전하께서 완호(玩好)에 마음이 없지 않은 것입니다.이것은 아마 하늘을 공경하고 정치를 부지런히 하는 실상이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은 “군자의 과실은 일식, 월식과 같은 것이니 내가 어찌 그 과실을 숨기리오.” 하고, 즉시 명하여 매[鷹]를 놓아 주게 하고 다시는 기르지 아니하였다.
○ 명하여 역대 제왕과 후비들의 본받을 만한 점과 경계할 점을 채록(採錄)하고 정리해서 세 편을 만들고, 이름을 《제왕명감(帝王明鑑)》, 《후비명감(后妃明鑑)》이라 하였다.
○ 임금이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다가 한 나라 조조(晁錯)의 상서(上書) 중에, “곡식을 생산하는 토지가 모두 개간되지 못했고 놀고 있는 백성이 모두 농사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대목에 이르니, 시강관(侍講官) 이맹현(李孟賢)이 아뢰기를, “신은 지금도 또한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중[僧]의 무리들이 군역(軍役)을 피하기를 도모하고 놀고 앉아 먹는 백성이 그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비록 다 쫓아버리기는 어려우나 청컨대, 승려되는 것을 금하는 법을 거듭 밝히소서.” 하였다. 임금은 “사헌부로 하여금 규찰케 하라.” 하였다.맹현(孟賢)은 또 아뢰기를, “옛날부터 제왕은 친히 밭 갈아서 자성(粢盛 곡식으로 만든 제물(祭物))을 만들고 후비는 몸소 누에를 쳐서 제사 지낼 예복을 만들었으니 이는 제사를 중히 여겨 근본(조상)을 잊지 않고 갚는 것입니다. 한 나라 문제(文帝)는 가의(賈誼)의 말에 감동되어 친히 적전(籍田)을 갈았습니다. 예문이 갖추어 있는데도 조종조(祖宗朝)에서 미처 시행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신은 원컨대, 임금께서 친히 적전을 갈아서 위로는 자성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농사에 힘쓰는 뜻을 모범 보이소서.” 하였다. 임금은 승지 김영견(金永堅)에게 명하여, “적전 가는 의식을 갖추어 아뢰라.” 하였다.
○ 6년 을미에 어떤 사람이 익명서를 승정원에 붙였는데 그 뜻은 대비가 섭정하는 폐단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에 대비는 임금에게 정사를 돌려 주니 임금은 굳이 사양하였으나 대비가 듣지 않았으므로 또 원상(院相) 한명회로 하여금 대비에게 아뢰게 하였다. 명회가 대비에게 아뢰기를,“지금 만약 대비께서 정사를 내놓으신다면 이는 동방의 백성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신이 평상시에 대궐에 들어와 안심하고 술을 마셨는데,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안심하고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대비는 따르지 않고 정사를 돌려주었다. 한명회가 아뢴 말에 온당치 못한 뜻이 있으므로 교지를 내려서 꾸짖었다.이에 양사에서 번갈아가며 세조가 언어가 불경한 죄로 양정(楊汀)을 죽이고 정인지(鄭麟趾)와 정창손(鄭昌孫)을 귀양 보냈던 일을 인용하면서 명회를 국문하기를 굳이 청했으나 왕은 따르지 아니하였다. 무령군(武靈君) 유자광(柳子光)도 글을 올려 명회의 말 잘못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자광이 다시 글을 올렸으나 말에 잘못된 점이 있어 파직되었다. 《야언별집》
○ 집현전이 폐지된 후에 독서당(讀書堂)도 폐지되었더니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먼저 홍문관을 열어 집현전의 옛 제도를 회복시켰다.
○ 7년 병신에 관각의 여러 사람이 건의하여 문신 중에 나이 젊고 자질이 총명 민첩한 채수(蔡壽)ㆍ양희지(楊熙止)ㆍ유호인(兪好仁)ㆍ조위(曹偉)ㆍ허침(許琛)ㆍ권건(權健) 등을 뽑아 휴가를 주고 장의사(藏義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후에 용산(龍山)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독서하는 곳으로 삼았으나 아무런 명호(名號)가 없었으므로 조위를 시켜 기문을 짓게 하고 아울러 ‘독서당’이란 세 글자로 액호(額號)를 걸게 하였다. 술과 음악을 내려 주고 승지를 보내어 낙성식(落成式)을 올렸다. 그 이튿날 감사하다는 글을 지어가지고 대궐에 나아갈 때 붉은 보로 싼 함을 메고 기생과 음악을 뒤따르게 하였다.
○ 명을 내려 신농(神農)ㆍ요제(堯帝)ㆍ순제(舜帝)ㆍ우왕(禹王)ㆍ탕왕(湯王)ㆍ은 고종(殷高宗)ㆍ주 문왕(周文王)ㆍ무왕(武王)ㆍ한 문제(漢文帝)ㆍ당 태종(唐太宗)과 주 문왕의 후비(后妃)ㆍ주 선왕(周宣王)의 강후(姜后)ㆍ제화(齊華) 맹희(孟姬)번희(樊姬)ㆍ한의 풍소의(馮昭儀)반첩여(班婕妤)명덕왕후(明德王后)ㆍ당(唐)의 문덕왕후(文德皇后)원헌황후(元獻皇后) 등의 모범될 만한 사적과 오왕 부차(吳王夫差)ㆍ한 무제(漢武帝)ㆍ진 무제(晋武帝)ㆍ당 명황(唐明皇)ㆍ덕종(德宗) 등 처음에는 현명하였으나 후에는 어두웠던 임금들의 사적을 그려서 병풍을 만들고 글 잘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그 위에 쓰게 하고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항상 보면서 권면ㆍ경계의 자료로 삼았다.
○ 8년 정유에 사축서(司畜署)에서 가축 기르는 비용이 많이 들므로 명하여 가축의 수를 줄이게 하였다. 호조에서 돼지 3백 마리를 사재감(司宰監)에 맡겨 포육(脯肉) 만들기를 청하니, 임금은 “3백 마리를 어찌 차마 한꺼번에 죽이겠는가. 재신(宰臣)과 종신(宗臣)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
○ 전에는 국왕이 탄생한 날에는 훈구(勳舊)의 신하가 절에 가서 재(齋)를 올리며 복을 빌었는데 임금은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말하지 않았는가. ‘복을 구하되 사특한 짓을 하지 않는다.’ 했으니, 어찌 부처에게 아첨하여 복을 구하겠는가. 그것을 폐지하라.” 하였다.
이때 주계정(朱溪正) 심원(深源)이 글을 올려 축수하는 재(齋)를 폐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은 손수 글을 써서 답하기를, “그대가 정도(正道)를 진술하고 이단(異端 불교)을 배척하여 나로 하여금 요ㆍ순 같은 임금을 만들고자 하니 내가 비록 덕이 적고 어두운 사람이지마는 실로 그대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지금 말한 것을 따르겠노라.” 하였다.
○ 12년 신축 11월에 장원서(掌苑署 화초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관아)에서 영산홍(映山紅) 화분을 하나 올리니, 임금은 “겨울철에 꽃이 피는 것은 인위(人爲)로 된 것이니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다시 올리지 말라.” 하였다.
○ 임금은 매양 경연에서 부지런히 강론을 듣고서도 오히려 범위가 넓지 못하다 하여 2품 이상 벼슬로서 고문될 만한 사람을 뽑아 차례로 참시(參侍)케 하고 그 칭호를 특진관이라 하였다.
○ 15년 갑진 5월에 명을 내려 조맹부(趙孟頫)의 서자(書字)를 모아 장온고(張蘊古)의 <대보잠(大寶箴)>을 새겨서 편전에 걸어 놓고 스스로 깨우쳤다. 친히 왕우칭(王禹儞)의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써서 승정원에 내려 주면서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우칭의 기문이 비록 집정(執政)하는 이를 위해 지었던 것이지만 벼슬 자리에 있는 백관들도 모두 이것으로 좌우명을 삼을 만하다. 하물며 승정원은 추기(樞機)의 처지에 있지 않는가.” 하였다. 《국조전모(國朝典謨)》
○ 임금은 일찍이 한재(旱災)로 인하여 각도에서 바치는 물품을 줄이게 하니 경상 감사가 아뢰기를, “해산물 같은 것은 구하기가 매우 쉬우니 종전대로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뜻으로는 비록 갸륵하지마는 임금이 아랫 사람을 사랑하는 정도 또한 간절한 것이니 그것을 바치지 말라.” 하였다.
○ 20년 기유에 장령 이승건(李承健)이 황해도로부터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이 향시에서 책문(策問)을 내어 본도의 여러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물으니, 영유 훈도(永柔訓導) 권계동(權季同)이 대답하기를, ‘오직 부처를 공양해야만 능히 구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씨가 바르지 못하고 그 말이 명교(名敎)에 해로운 점이 있기에 내쫓았습니다.” 하였다.임금은 “불교가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다. 대개 지각 있는 사람이면 이것을 당연히 물리칠 것인데, 계동은 남의 사표(師表) 되는 처지에 있으면서 유교를 배반하고 부처에게 아첨하여 불교로써 백성 구하는 방법을 삼으려 하니, 사도(邪道)로 백성을 미혹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있는가. 사헌부로 하여금 국문케 하라.” 하였다. 또 손수 쓴 글씨로 교지를 내려,
“내가 일찍이 중들이 천륜을 버리고 백성의 재물을 소모시키는 것을 미워하여 장차 그 뿌리를 뽑고 세상의 교화를 굳건히 하고자 했는데,지금 유생들이 나라에서 어진 사람을 들어 쓰는 시기를 당하여 요ㆍ순의 도리는 진술하지 않고 부처의 법을 주창하게 되니, 이는 나로 하여금 양(梁) 나라 무제(武帝)가 절에 가서 사신(捨身)하고 당 나라 헌종(憲宗)이 예불했던 것과 같이 하도록 하려 함이니, 마땅히 법을 맡은 관원으로 하여금 국문케 하여 먼 지방으로 내쫓게 하라.” 하였다.
○ 대사헌 허침 등이 아뢰기를, “듣건대, 왜인이 귤(橘)나무를 바치고 유구국(琉球國)의 사자도 또한 이상한 나무를 바쳤다 하니 만약 전하께서 이것을 받으시면 저들은 전하께서 먼 지방의 물건을 귀중히 여기신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다투어 와서 바칠 것이오니, 어찌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임금은 “지난번에 유구국에서 바친 나무는 약재이므로 받았다. 귤나무는 우리나라에서도 생산되니 받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지중추 고태필(高台弼)은 아뢰기를, “신은 제주 사람이온데 제주에서 진주 앵무배(眞珠鸚鵡杯)를 바치므로 백성에게 폐를 끼침이 많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것은 그 용도가 나라에 이로움은 없으면서 백성에게 폐만 끼치니 그것을 바치지 말라.” 하였다.
○ 24년 계축 6월에 임금이 병환이 났는데, 의원이 “즉어(鯽魚)라야만 병환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근시에게 이르기를, “지금은 한창 장마철이므로 고기 잡는 사람이 물에 빠질 염려가 있다. 어찌 나의 구복(口腹)을 위하여 백성에게 폐를 끼칠 수 있느냐.” 하였다.
○ 25년 갑인 겨울에 임금은 병환이 나서 오랫동안 병중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정사를 결재(決裁)하고 쉬지 아니하였다. 병환이 위독하자 의관을 갖추고 대신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였는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 임금이 글을 좋아하고 두 임금(세종ㆍ세조)을 계승하여 유림(儒林)을 사랑하며 장려함이 보통 규모보다 훨씬 뛰어났으니 당대 문장에 걸출한 선비들이 옥당에 빛났다. 조위(曹偉)ㆍ신종호(申從濩)ㆍ유호인(兪好仁)ㆍ김흔(金訢)ㆍ성희안(成希顔)이 더욱 우대를 받아 항상 저술한 것을 그날 그날 써서 바치었다.조위와 유호인이 모두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를 들어 외직을 원하므로 특히 쌀을 보내어 그 어버이를 우대하였다. 조위가 상사(喪事)를 당하자 치제(致祭)하여 그를 영화롭게 함으로써 임금의 은총이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에게 함께 미치니 사람마다 감동하였다. 인재를 고무하고 선비의 기운을 진작시켰으니 진실로 천년을 두고 있기 어려운 장한 일이었다.
성희안(成希顔)이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있을 때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복제를 마치었다. 임금이 편전의 문 밖에까지 나가 맞으며 그를 위로하고, 내시에게 명하여 매 한 마리를 주면서, “그대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공무의 여가에 이 매로써 사냥하여 맛있는 고기를 드리도록 하라.” 하였다.또 야대(夜對)할 적에 술과 과실을 주니 희안이 감자(柑子)와 귤 여 나무 개를 소매 속에 넣었다. 술이 취하여 정신을 잃었으므로 내시가 엎고 나가다가 소매 속의 과실이 떨어져 땅바닥에 흩어졌다. 그 이튿날 임금은 감자와 귤 한 쟁반을 옥당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어제 희안이 귤을 소매 속에 넣은 것은 어버이에게 드리려 한 것이므로 지금 내려준다.” 하였다.희안은 이 은혜를 마음 속에 깊이 새겨 죽음으로 갚으려고 생각하였는데, 마침내 반정의 의거를 일으켜 은혜를 갚았으니 임금의 선비 대우하는 정성과 사람을 알아 보는 밝음이 진실로 남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희안이 위태한 시국을 바로 잡아 안정하게 만들어 훈공(勳功)이 길이 국가에 남았으니 임금이 자기를 알아 주는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임금이 착한 일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함이 또한 지극하였다. 명 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허종(許琮)에게 말하기를, “당신 나라에는 임금은 있어도 신하는 없다.” 하였다. 정암(靜菴)의 연주(筵奏)
○ 재상 이영은(李永垠)과 이곤(李坤) 두 사람이 기생 하나를 함께 관계하고 서로 빼앗으려 하였는데, 간관이 죄를 논하여 파직하기를 청한 지가 여러 날이 되었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대궐에 나아가서 스스로 변명하고 서로 허물을 상대에게 돌리거늘,임금은 “옛날부터 사대부들이 아내와 첩을 서로 빼앗는 것은 쇠망해 가는 세상의 일이다. 나는 차마 이 세상을 쇠망해 가는 세상으로 볼 수는 없으므로 대간(臺諫)의 파직하라는 말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지 그대들에게 죄가 없다고 한 것은 아니니 물러가서 반성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송와잡기(松窩雜記)》
○ 임금은 경연의 강론이 끝나면 반드시 편전에 나오는데 육승지(六承旨)가 각기 소속 관청의 공사(公事)를 가지고 그 해당 관원들을 거느리고 와서 임금께 바치었다. 임금은 반드시 그 승지와 관원과 더불어 사리를 되풀이 연구하여 그것이 옳지 않으면 물러가서 다시 의논하게 하고 옳으면 반드시 묻기를, “이것이 당상관의 의사인가, 해당 관원의 의사인가?”하고 반드시 그 성명을 기록하여 훗날의 승진에 대비하였다. 수령과 변장들이 부임할 때에도 또한 반드시 한 사람씩 불러 보고 먼저 그 사람의 출신 내력과 친족 교우 관계를 묻고, 다음은 공사를 처리하고 군졸을 어루만지며 백성을 다스리고 외적을 방어하는 방법을 물어서 잘 하는 사람을 칭찬해 주고 또 이어 등급을 뛰어 승진시켜 주며,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내쫓고 아울러 그를 천거한 사람까지 죄를 주었다. 비록 시종하는 신하나 외국에 사신 가는 사람일지라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이러므로 지방관으로 부임할 사람이 자기가 그 임무를 감당하기 힘들게 여겨지면 문득 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감히 부임하지 못하였다. 《기재잡기(寄齋雜記)》
임금께서 한 수령이 특이한 정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 사람이 크게 쓸 수 있는 인물임을 알아보고 뽑아 올려 집의(執義)를 명했다. 삼사에서 글을 번갈아 올려 다툰 지 수일 만에 또 그 사람을 승진시켜 이조 참의로 삼았다. 삼사에서 또 극력 논란하자, 수일 만에 또 이조 참판으로 승진시켰다.삼사는 드디어 중지하고 다시 논란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만약 이를 그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정승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니 그만 중지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 사람은 후에 정승이 되었으며 과연 그 재능이 직무에 알맞았으니 이로써 나라 사람들은 임금이 사람을 잘 알아보는 데 감복하였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내시가 충청도로부터 돌아왔으므로 임금은 조용히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일을 묻고 이어 그 밖의 이야기도 물었다. 내시는 답하여 아뢰기를, “충주 목사(忠州牧使)에게 어떤 객(客)이 있었는데, 한 기생을 보고 매우 사랑했으나 기생은 냉정하게 대하였습니다.이별할 때에 객은 울면서 차마 작별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광문(廣文) 도사(都事) 이 좌석에 있었으므로 문객은 광문의 손과 기생의 허리띠를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광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나의 이별하는 서러움을 위로해 주지 못하는가.’ 하니 광문이 시 한 수를 지었는데 그 시에,

자지작(紫芝雀) 띠는 가는 허리에 둘리었고 / 紫芝雀帶橫腰細
흑서화(黑黍靴) 신은 발에 맞아 편안하다 / 黑黍張靴着足安

했으나 문객은 돌아다 보지도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싱긋이 웃으면서 이내 광문의 이름을 기둥에 써 두었다. 훗날에 특별히 광문을 홍문록(弘文錄)에 들게 하니 사헌부에서 이를 논란하였다. 임금이 불러 물으니 답하여 아뢰기를, “옛날부터 홍문록은 한 때의 공론(公論)을 채용하였으되 일찍이 임금의 특별한 명령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은 “권력 있는 이에게 쫓아 다녀서 얻은 것이 공정하냐? 명성이 임금에게 알려져 채용된 것이 공정하냐?” 하였다.그 사람 사헌부의 언관이 힘써 다투거늘 임금은 말 소리와 얼굴 빛에 노기를 띠며 나가라고 꾸짖으니, 그 사람은 벌벌 떨면서 나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임금이 다니는 길로 나갔다. 임금은 눈여겨 보다가 이윽고 좌우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제가 가야 될 길도 알지 못하면서 남의 앞길을 막으려 하는가.” 하였다. 광문이 결국 옥당에 들어 왔는데 아주 기특한 재주 있는 인물이었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임금은 당대의 인물을 이리저리 다루었는데 그 수단이 매우 능란하였다. 어느 날 임금이 후원(後苑)을 산보하고 있을 때 까치가 종이 한 장을 물고 가다가 우연히 임금 앞에 떨어뜨렸다. 그 종이를 살펴보니, 해변 고을 수령이 좌승지에게 선사한 물목 단자(物目單子)였다. 임금은 그 종이를 소매 속에 넣고 경영에 나가서 육승지를 불러 조용히 이르기를,“지방의 수령들이 음식물을 그대들에게 선사한다면 예의를 돌보지도 않고 받겠는가?” 하니, 여러 승지는 “어찌 감히 받겠습니까.” 하고 한결같은 대답을 하였다. 좌승지만은 자리를 피하여 물러가서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은 그렇지 못합니다. 신에게는 90세가 된 늙은 어미가 있사온데, 평소부터 교분이 두터운 한 수령이 어제 해산물을 신에게 선사했으므로 그것을 받았습니다.” 하였다.임금은 웃으며 소매 속에서 그 종이를 내어 보이고, “그대는 옛날 정직한 사람의 유풍을 지녔다고 이를 만하다.”고 하였다. 《축수편(逐睡篇)》
○ 임금이 친히 종묘에 제향하는데, 한 장령이 축관(祝官)이 되어 축 읽을 때를 당하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입이 붙은 것 같았다. 그 이튿날 임금이 그 사람을 풍산 만호(豐山萬戶)로 임명하니 간관이 논쟁하였다. 임금은 “명색이 문관이라 하면서 축문 한 자도 읽지 못하는구나. 활 쏘는 것은 안다 하니 한 성보(城堡)나 지키면 족하지.” 하였다. 2, 3개월 후에 불러서 다시 전일의 벼슬을 시켰다. 《오산설림(五山說林)》
○ 어떤 한 사람이 글을 올려 원통한 일 풀어주기를 원하였다. 임금이 “이 글을 누가 썼느냐?”고 물으니, “사인(士人) 강신(姜信)이 썼습니다.” 하였다. 곧 강신을 불러 해서와 초서를 써서 바치게 하더니, “해서는 비할 데가 없으리만치 잘 썼다.” 하고, 드디어 조지서 별좌(造紙署別坐)란 벼슬을 주고 자주 불러 보았다. 몇 년 동안에 벼슬 등급을 뛰어 판결사(判決事)에까지 이르게 하였는데, 역시 재능이 그 직무에 알맞았다. 《기재잡기》
○ 이번(李蕃)은 안강현(安康縣) 경주(慶州)에 소속되었다. 에 살았는데, 자질이 준수하고 얼굴이 단정하였다. 나이 20세가 되어 경주부(慶州府)의 향교에서 스승에게 배우고 친구를 사귀어 배우니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글씨도 또한 정묘하였다.임금께서 이번이 향시에 장원했던 작품을 보고 이를 칭찬하여 즉시 역마를 타고 오라고 명하여 종이와 붓을 주어 다시 시험해 보았다. 또 의복과 식품 비용까지 내려 주고 성균관에 머물게 하여 그 학업을 마치게 하니 많은 선비들이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이번은 기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그의 아들은 언적(彦迪)이다.
임금이 일찍이 밤에 놀다가 보니 멀리 삼각산(三角山)에 불이 밤새도록 켜져 있었다. 사람을 시켜 가서 보게 했더니, 서생이 등불을 달아 놓고 글을 읽고 있었다. 심부름 간 사람이 묻기를, “무엇하러 이렇게 부지런하며 고생하느냐?”고 하니 서생은 “과거에 급제하려고 한다.” 하였다. 임금은 그 사람에게 명하여 절구(絶句)를 짓게 하고 이내 급제를 시켜주었다. 《오산설림》
○ 임금이 밖에 나갔다가 어떤 사람이 까치집이 있는 나무를 베어 자기 집 문 앞에 세우는 것을 보았다. 사람을 시켜 물으니, 답하여 아뢰기를, “문 앞의 나무에 까치가 집을 지으면 과거에 급제한다 하는데, 문 앞에 나무가 없으므로 이렇게 함으로써 좋은 징험이 있기를 바라는 뜻에서입니다.” 하였다.또 물어 이르기를, “강송(講誦)을 잘 하는가? 제술(製述)을 잘 하는가?” 하니 답하여 아뢰기를, “다 잘 하는데도 수십 년 동안이나 과거에 억울하게 실패하였습니다.” 하므로 드디어 즉시 급제를 시켜주었다. 《오산설림》
○ 전 찰방(察訪) 이관의(李寬義)는 나이 75세가 되었는데, 이천(利川)에 살고 있었다. 성리(性理)의 학문에 깊었으므로 당시의 선비들이 모두 그를 추앙하였다. 계묘년에 손순효(孫舜孝)의 추천으로 불려 와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강송(講誦)하게 하고,서거정(徐居正)ㆍ허종(許琮)ㆍ이극기(李克基) 등에게 명하여 성리의 근원과 천지의 도수(度數) 및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세차역법(歲差曆法) 등을 논하게 하니 관의는 분변하여 대답함이 조금도 틀리지 아니하였다. 임금은 감사에게 명하기를, “전 찰방 이관의가 성리학에 정통하고 숙달했다 하므로 불러 시험해 물어보니 과연 듣던 바와 같았다.장차 크게 쓰려고 했으나 관의가 스스로 나이 많음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려고 하니, 내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의복을 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감사는 그 지방의 수령을 시켜 미곡을 주어 내가 그 사람을 표창하는 뜻을 보이게 하라.” 하였다.
○ 예문관 교리(藝文館校理) 최한정(崔漢楨)은 성품이 순량(醇良)하고 근실하기에 임금이 후한 대우를 하니, 승지 임사홍(任士洪)이 그를 시기하여 임금께 아뢰기를,“최한정은 나이 많으니 시독(侍讀)하는 데 적합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은 대답하지 않고 어필로써 한정의 이름을 쓰고 등급을 뛰어 대사헌으로 임명하니 사홍은 황공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으며, 사림(士林)들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용재집(容齋集)》
○ 임금이 장차 반궁(泮宮)에 행차하여 옛 글을 강론하고 직언을 구하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노사신(盧思愼)과 이승소(李承召)가 어떤 일에 대하여 아뢰었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아니한 일이 있었다.이칙(李則)이 나와 아뢰기를, “노사신과 이승소는 노성(老成)한 대신인데도 아뢴 바를 들어주시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성균관에 행차하여 다시 무슨 말을 구하시렵니까.” 하자 임금이 그 말에 마음을 움직였다.
○ 안계송(安繼宋)의 부인은 세종의 손녀 계양군(桂陽君) 증(璔)의 딸이다. 임금께서 친히 적전(籍田)을 갈고 돌아오다가 그 집에 들려 보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간할까 염려하여 흥인문(興仁門) 안의 둘째 다리에 이르러서야 타고 있던 연(輦)을 갑자기 배고개[梨峴]에 있는 계송의 집으로 가게 하였다. 간관이 과연 논란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계송의 아내는 몸에 무명베 검은 적삼을 입고 손수 길쌈을 하다가 허둥지둥하면서 임금을 영접하여 뵈었다. 임금은 특별히 계송에게 장악원 봉사(掌樂院奉事) 벼슬을 주고 바로 그 날에 사은숙배(謝恩肅拜)케 하고, 또 행차 중에 썼던 금ㆍ은 그릇을 모두 다 내려주게 하였다. 《안씨추록(安氏追錄)》 ○ 후손의 집에 임금이 앉았던 방석이 있어 항상 집 안에 달아 두었는데 해가 오래 되매 삭아서 없어졌다.
계송은 자는 자윤(子胤)이며, 스스로 박전경수(薄田耕叟)라 불렀다.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팔대손(八代孫)이다. 천성이 어리석어 시 짓고 술 마시는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벼슬은 직장(直長)으로 17년이나 있어도 옮기지 아니하였다. 《추강록(秋江錄)》
○ 명숙공주(明淑公主)가 임금에게 청하기를, “홍상(洪常)의 숙부 칭(儞)이 장흥 부사(長興府使)가 되었으나 아내가 병이 나서 부임하기가 어려우니 원컨대, 본직을 갈아 주소서.” 하니, 임금은 명하여 경직(京職)으로 임명하였다. 대사간 손비장(孫比長) 등이 차자를 올려,“홍칭의 사정(私情) 때문에 국법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니 기한을 정하여 쓰지 마소서.” 하였다. 임금은 편지로 답하기를, “대사간의 말이 대단히 바르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번 일은 사정이요, 공정한 것이 아니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오. 과실을 듣고 곧 고치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대들이 능히 그 직무를 다하니 나는 이를 매우 칭찬하노라.” 하였다. 《국조모열(國朝謨烈)》
○ 임금은 신하들을 접견할 때는 한 집안의 부자 사이처럼 하였으나 정사에는 엄숙하고 공경하니, 여러 신하들이 감히 실정을 숨기고 행실을 꾸미지 못하였다. 임금 앞에서는 서로의 잘잘못을 따져서 숨기거나 회피하지 않았으나, 대궐 문 밖에 나가서는 마음을 털어버리고 서로 기뻐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대개 임금의 뛰어난 밝음과 위엄있는 덕에 신하들이 감화를 받은 것이다. 《오산설림》
○ 임금은 큰 술잔으로 술 마시기를 좋아했다. 맑기가 물과 같은 옥 술잔 하나가 있었는데, 임금은 매양 술이 취하면 다른 신하에게도 이 술잔으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종실의 한 사람이 술을 마신 뒤에 이 술잔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 춤추다가 거짓으로 땅바닥에 넘어지니 술잔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것은 임금의 술 많이 마심을 은연히 간하는 뜻이었다. 임금도 또한 그것을 허물하지 아니하였다. 《오산설림》
○ 함경도의 유생 박원령(朴元齡)이 글씨를 잘 써서 일찍이 남의 소(疏)를 대신 써서 올렸다. 임금이 “누가 쓴 것이냐?”고 물으니, 박원령이 썼다고 대답하였다. 승정원으로 불러 술과 고기를 내려주고 화살통[箭筒]을 내어 주면서 그 거죽에 글을 써서 바치게 하고, 곧 임금은 손수 글씨를 쓴 병풍을 내려 주었다. 비록 작은 기예(技藝)라도 칭찬하고 장려함이 이와 같았다. 《필원잡기》
진사 박원령이 글씨를 조금 쓸 줄 알므로 임금은 이를 보고 칭찬하면서 그 고을에 글을 내리고 종이와 붓을 주어 장려하였다. 그 영광스러움이 향리에 빛나고 떨쳐서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작은 기예가 어찌 족히 임금의 칭찬을 받을 수 있으랴마는 임금은 자기가 능하다 하여 남의 잘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 장려함이 이처럼 마음에서 우러나왔던 것이다.이로 인하여 문장ㆍ서화(書畫)ㆍ공예 등 온갖 기술이 모두 격찬을 받아 진보되었으니, 이것으로 임금의 고무(鼓舞)ㆍ격려시키는 기틀이 특히 한 번 찡그리고 웃는 사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임금이 진심으로 좋아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비록 온갖 방법으로 권장ㆍ신칙(申飭)하고 과정(課程)을 엄격히 세웠더라도 다만 소란ㆍ번잡하고 퇴폐ㆍ나타(懶惰)함만 볼 뿐이지 능히 이처럼 깊이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였을 것이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지평 유경(劉璟)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죽음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조회에 나오시지 않고, 행차하실 때에도 음악을 폐지 하셨습니다. 예(禮)에 기년복(朞年服)은 임금은 입지 않고 대부(大夫)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니, 청컨대, 의(義)로써 정을 끊으소서.” 하였다.임금은 “조회에 나가는 것은 마땅히 아뢴 대로 할 것이지만은 대신의 죽음에도 오히려 차마 음악을 들을 수 없거늘, 하물며 친형의 시체가 지금 빈소에 있는데 내가 어찌 차마 음악을 듣겠는가.” 하였다. 《국조전모(國朝典謨)》
○ 임금이 한 왕자만을 매우 사랑하여 흔히 치우치는 일이 있었으므로 사헌부에서 이를 논란하였다. 임금은 즉시 성상소(城上所)의 장령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 글 한 구절을 써서 주었는데, 그 글에,

세상 사람이 늦은 가을 국화를 가장 사랑하나니 / 世人最愛霜後菊
이 꽃이 핀 뒤에는 다시 다른 꽃이 없기 때문이다 / 此花開後更無花

라 하였다. 그 사람이 눈물을 닦고 나갔는데 얼마 후에 임금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산설림》


 

[주D-001]세실(世室) : 종묘(宗廟)에 모시는 신주(神主)는 위로 4대(代)가 넘으면 옮기게 되는데 공덕(功德)이 높은 임금은 특히 옮기지 않고 영원히 받들게 되는데, 이것을 세실이라 한다.
[주D-002]가인례(家人禮) : 왕실에 있어서 조정례(朝庭禮)와 가인례가 있는데, 예를 들면, 조정례에서는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성종에게 신하가 되지마는, 가인례에서는 월산대군이 형이 되고 성종은 동생이 된다.
[주D-003]원상(院相) : 국상(國喪) 직후에 임시로 국정을 대리하는 책임자를 말한다.
[주D-004]금련거(金蓮炬)의 고사 : 임금 앞에만 쓰는 촛불인데, 당 나라 선종(宣宗)이 한림학사 영호도(令狐綯)를 불러서 밤 늦게까지 담화하다가 돌려 보낼 때에 금련거를 주어 앞에서 인도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5]밀부(密符) : 옛날 임금이 특정한 신하에게 신임의 표시로서 주는 것인데, 부(符)라는 것은 동철(銅鐵)로 만든 것으로 두 조각을 내어 한 조각은 임금이 지니고, 다른 한 조각은 장수나 지방관이 지니어 일이 있을 때에 마음의 표시[信標]를 삼았던 것이다.
[주D-006]적전(籍田) : 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토지로서, 그 토지에서 나는 수확으로 종묘의 제사를 받들고, 또한 임금이 친히 경작함으로써 백성에게 농사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주D-007]강후(姜后) : 주(周) 나라 선왕(宣王)이 어느날 강후와 동침한 다음날 아침에 늦게 일어났더니, 강후가 문 밖에 엎드려 사과하기를, “첩의 허물로 왕이 늦게 일어나시어 정사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8]맹희(孟姬) : 제(齊) 나라 화씨(華氏)의 딸이 예법을 지켜 정당한 예절을 갖추지 않으면 시집가지 않겠다 하여 늦도록 처녀로 있었더니, 임금이 듣고 후비로 맞아들였는데 이를 맹희라 하였다.
[주D-009]번희(樊姬) : 초(楚) 나라 장왕(莊王)이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번희는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0]풍소의(馮昭儀) : 한(漢) 나라 성제(成帝)가 풍소의를 데리고 상림원(上林苑)에서 동물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곰 한 마리가 뛰어나와 성제에게 덤벼들므로 풍소의가 곰 앞에 가로 막아섰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1]반첩여(班婕妤) : 한 나라 성제의 후궁이었는데 조비연(趙飛燕)에게 밀려나서 장신궁(長信宮)에 있었는데, 반첩여가 임금을 원망하고 저주한다고 참소한 자가 있어 성제가 반첩여를 잡아 문초하였더니, 반첩여가 아뢰기를,“저주는 귀신에게 비는 것인데, 귀신이 아는 것이 있다면 사특(邪慝)하게 하소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귀신이 만일 아는 것이 없다면 하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2]명덕왕후(明德王后) :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의 황후인데 어질고 검소하여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으므로 후세의 황후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주D-013]문덕황후(文德皇后) : 당 나라 태종이 하루 아침에 조회를 파한 뒤에 내궁에 들어가서 옷을 벗으면서 노한 어조로 “내가 장차 이 촌 늙은 이를 죽여 버리리라.” 하였다. 문덕황후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위징(魏徵)이 여러 신하들 앞에서 나를 모욕하였다.” 하므로 황후가 엎드려 절하며 “임금이 밝아야 신하가 직언(直言)을 하는 것이니 축하합니다.”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14]원헌황후(元獻皇后) : 당 나라 숙종(肅宗)의 어머니. 현종의 궁인으로서 숙종을 임신했을 때 현종이 낙태시킬려고 하였는데 꿈에 신이 두 번이나 나타나 그것을 막더니 과연 중흥주인 숙종을 낳았다.
[주D-015]장온고(張蘊古) : 당 나라 사람인데, 태종에게 대보잠(大寶箴)이라는 임금의 좌우명이 될만한 격언을 지어 올렸다.
[주D-016]왕우칭(王禹儞) : 송(宋) 나라 사람인데, 조회때 신하가 시간을 기다리는 휴게실에다 대루원(待漏院)이라는 대신을 경계하는 기문(記文)을 지어 붙였다고 한다.
[주D-017]추기(樞機) : 문을 여닫는 문지방인 돌저귀를 말하는데, 사람의 말[言語]하는 일을 추기에 비하였다. 승정원은 임금의 말[言語]을 관할하는 곳이므로 추기하고 하였다.
[주D-018]육승지(六承旨) : 조선시대, 승정원의 도승지ㆍ좌승지ㆍ우승지ㆍ좌부승지ㆍ우부승지ㆍ동부승지를 말하는데, 순위에 따라 육조의 일을 분담하여 맡아 보았다.
[주D-019]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ㆍ수찬을 선거ㆍ임명하는 기록을 말하는데, 교리ㆍ수찬의 선거는 먼저 칠품(七品) 이하의 홍문관원이 뽑힐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홍문관 부제학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의중의 사람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연산군은 이름은 융(㦕)이며, 성종(成宗)의 원자요, 폐비 윤씨(尹氏)가 낳았다. 성화(成化) 병신년에 나서 홍치(弘治) 을묘년에 왕위에 오르고, 정덕(正德) 병인년에 폐위되니 왕위에 있은 지 12년만에 연산군(燕山君)으로 강봉되어 교동(喬桐)으로 내쫓겼다.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나니 수(壽)가 31세였다. 묘는 양주(楊州) 해등촌(海等村)에 있다.
○ 폐비 신씨(愼氏)는 본관은 거창(居昌)이며, 영의정 승선(承善)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 의 딸이다. 연산이 폐위되자 위호를 낮추어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이 되고 정청궁(貞淸宮)에 나가 있다가 중종(中宗) 때에 세상을 떠났다. 묘는 망우리(忘憂里) 폐비 윤씨 묘의 국내(局內)에 있다. 제사 받드는 것은 외손 구엄(具渰)에게 전해졌는데, 구엄은 또 외손 이안눌(李安訥)에게 전해 주었다.
○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다.
첫째 아들 폐위된 세자 황() 정사년에 났다. 폐주(廢主) 9년 계해에 사자를 보내어 세자로 책봉하였다. 연산군이 이미 폐위되니 세자도 폐위되어 정선(旌善)으로 귀양갔다.
둘째 아들 인(仁) 처음에 창녕대군(昌寧大君)으로 책봉했다가 뒤에 그 칭호를 깎아버렸다.
딸 하나는 구문경(具文璟)에게 시집갔다. 처음에 능양위(綾陽尉)로 책봉했다가 뒤에 그 칭호를 깎아버렸다.
서자 성(誠) 처음에 양평군(陽平君)으로 책봉했다가 뒤에 그 칭호를 깎아버렸다.
서자 돈수(敦壽)
서녀는 신거홍(愼居弘)에게 시집갔다. 벼슬은 판관이다. 후취로 시집갔다.
○ 강희맹(姜希孟)의 집이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었는데, 폐주가 일찍이 그 집에 우거(寓居)하였다. 성종(成宗) 정유년에 원자(연산)가 병이 났으므로 그 집에 가서 치료하였다. 그 때 매양 정원의 소나무 밑에서 놀았는데 왕위에 오르고 나자 진시황(秦始皇)이 소나무 다섯 그루에 대부의 벼슬을 준 것처럼 그 소나무에 벼슬을 주고 금띠[金帶]를 둘러 주고, 또 그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말에서 내리게 하였는데 지금의 순청동(巡廳洞)이 바로 그 피마병문(避馬屛門)이라 한다.
○ 성종(成宗) 무신년 2월 6일에 세자빈을 맞이하였는데 그날은 아침부터 비바람이 세차게 일었다. 성종(成宗)이 편지를 세자빈의 아버지 좌참찬 신승선(愼承善)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에, “세상의 풍속은 혼인날에 바람 불고 비 오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나 대개 바람이 만물을 움직이게 하고 비가 만물을 윤택하게 하니 만물이 사는 것은 모두 바람과 비의 공덕이라.” 하였다. 점심 때부터 날씨가 개어 청명하였다. 《충민공잡기(忠敏公雜記)》에 있다. 신보(愼譜)에는 충민(忠敏)의 민(敏) 자가 민(愍)이라 쓰여있다.
○ 성종(成宗)이 인정전(仁政殿)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술이 반쯤 취하였는데 우찬성 손순효(孫舜孝)가 “친히 아뢸 일이 있습니다.” 하였다. 성종이 어탑(御榻)으로 올라오게 하였더니 순효는 세자이던 폐주(廢主)가 능히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을 알고 임금이 앉은 평상을 만지면서,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 하니, 성종은 “나는 또한 그것을 알지마는 차마 폐할 수 없다.” 하였다.순효는 거듭 아뢰기를, “대궐 안에 사랑하는 여자가 너무 많고 신하들이 임금에게 말을 올릴 수 있는 길이 넓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성종은 몸을 굽혀, “어찌하면 이를 구하겠는가?” 하니, 순효는 “전하께서 이를 아신다면 저절로 그 허물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입시한 신하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대간은 “신하로서 임금의 용상에 올라가는 것도 크게 불경한 일인데 또 임금의 귀에 가까이 대고 말하는 것은 더욱 무례한 태도이니 순효를 옥에 내려 가두소서.” 하고, 또 “순효가 비밀히 아뢴 것이 무슨 일입니까?” 하니 성종은 “순효가 나를 사랑하여 나에게 여색 좋아함을 경계하고 술 끊기를 경계하였으니 무슨 죄 될 것이 있으리오.” 하고 마침내 말하지 아니하였다. 《국조기사(國朝記事)》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오산설림》에는 모두 연월(年月)이 없는데 《조야첨재(朝野僉載)》에는 정미년에 이 기사가 있으니 어디에 증거했는지 알 수 없다.
○ 임금이 세자로 있을 때 허침(許琛)은 필선(弼善)이 되고, 조지서(趙之瑞)는 보덕(輔德)이 되었다. 폐주는 날마다 유희만 일삼고 학문에는 전연 마음을 두지 아니하였는데, 다만 성종의 훈계가 엄함을 두려워하여 서연에 억지로 나올 따름이었다. 동궁의 관원이 비록 마음을 다하여 강의를 하여도 모두 귀 밖으로 들었다. 조지서는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매양 나아가 강의할 때마다 책을 앞에 던지면서, “저하께서 학문에 힘쓰지 않으시면 신은 마땅히 임금께 아뢰겠습니다.” 하니 폐주가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허침은 그렇지 않고 부드러운 말로써 조용히 깨우쳐 주었으므로 폐주가 매우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벽 사이에 크게 써 붙이기를, “조지서는 큰 소인이요, 허침은 큰 성인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는 조지서를 위하여 매우 위태롭게 여겼다.폐주가 왕위에 오르고 갑자년의 화가 일어나자 먼저 조지서를 베어 죽이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허침은 우의정이 되어 비록 잘못된 것을 바로 잡지는 못했으나, 매양 왕의 명을 받들어 의정부에 앉아서 죄수를 논죄할 적에 주선하고 구원하여 살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 정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매양 피를 두어 되 가량 토하더니 분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인해 죽게 되었다. 《사재척언(思齋摭言)》
○ 연산군이 새로 왕위에 오르니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영명(英明)한 임금이라 일컬었으나 김종직(金宗直)은 늙음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갔다. 동향(同鄕)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지금 임금이 영명한데 선생은 어찌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왔습니까?” 하였다. 종직이 “새 임금의 눈동자를 보니 나처럼 늙은 신하는 목숨을 보전하면 다행이지 싶소.” 하였다. 얼마 안 가서 무오ㆍ갑자년의 화가 일어나니 사람들은 모두 그가 미리 안 것을 탄복하였다. <축수편(逐睡篇)>
○ 박영(朴英)이 처음 과거에 올라 선전관이 되었을 때 폐주가 성종이 기르던 사슴 새끼를 쏘아 그 사슴이 화살을 꽃은 채 피를 흘리면서 나오는 것을 보고는 바로 그날 병을 핑계하고 시골로 돌아갔으니 그 당시에 기미를 알고 미리 간 이는 오직 송당(松堂) 한 사람뿐이었다. 《명신록》
일찍이 성종이 사향 사슴 한 마리를 길렀는데 길이 잘 들어서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폐주가 곁에서 성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 사슴이 와서 폐주를 핥았다. 폐주가 발로 그 사슴을 차니 성종이 불쾌히 여기면서, “짐승이 사람을 따르는데 어찌 그리 잔인스러우냐.” 하였다. 뒤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폐주가 왕위에 오르자 그날 손수 그 사슴을 쏘아 죽였다. 《오산설림》
○ 10년 갑자에 여러 도의 크고 작은 고을에 모두 기생을 설치하게 하여 운평(運平)이라 부르고 운평 3백 명을 뽑아 서울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임사홍(任士洪)을 채홍사(採紅使)로 삼았다. 사홍이 백성에게 심한 해독을 끼치니 길 가는 사람도 그를 흘겨 보았다.
갑자년 이후에 창기로서 얼굴이 예쁜 자를 대궐 안으로 뽑아 들이니 처음에는 백 명 정도였던 것이 나중에는 만 명이나 되었다. 기생의 칭호를 고쳐 운평(運平)이라 했는데, 대궐 안에 들어온 자는 흥청(興淸)ㆍ계평(繼平)ㆍ속홍(續紅)이라 하고 가까이 모신 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 하고 임금과 동침한 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하였으며,장악원(掌樂院)을 고쳐 계방원(繼芳院)이라 하였다. 또 크고 작은 각 고을에 모두 운평을 설치하고 임금께 뽑아 올리는데 대비케 하였다. 흥청(興淸)의 보증인을 호화첨춘(護花添春)이라 하였다. 대신들을 나누어 보내어 홍준체찰사(紅駿體察使)란 칭호를 띠고 서울과 지방의 공천(公賤)의 처첩 및 창기 등을 전부 찾아 내어 각 원(院)에 나누어 두게 하였다.흥청과 운평들이 쓰는 화장 도구의 비용을 모두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니 백성들의 재산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해동야언》
○ 폐주는 새로운 명칭과 칭호를 많이 만들었으니 악공(樂工)은 광희(廣熙)라 하고, 기녀는 운평이라 했다가 승격시켜 가흥청(假興淸)이라 하고 또 승격시켜 흥청이라 하고, 운평의 뒤에 들어온 자는 속홍(續紅)이라 하였다. 입는 옷은 아상복(迓祥服)이라 하고 있는 곳은 연방원(聯芳院)이라 하였으며 원각사(圓覺寺)를 그 국(局)으로 삼았다.또 의성위(宜城尉) 성종의 부마 남치원(南致元) 의 집을 함방원(含芳院)이라 하고,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을 뇌양원(蕾陽院)이라 하고, 견성군(甄城君)의 집을 진향원(趁香院)이라 하여 흥청(興淸)과 광대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다. 선택에 뽑힌 자는 취홍원(聚紅院)에 거주하게 하였는데, 취홍원은 명정전(明政殿)의 오른쪽 숙장문(肅章門)에 있었다.
○ 질병가(疾病家)를 흠청각(欽淸閣)이라 하고, 자수궁(慈壽宮)을 회록각(會綠閣)이라 하여 일찍이 임금과 동침한 자를 이 곳에 살게 하였다. 늙은 나인이 자는 곳을 두탕호청사(杜蕩護淸司)라 하였다. 흥청의 식료품 저장하는 곳은 호화고(護華庫)라 하고 그 식품 공급을 맡은 자는 전비사(典備司)라 하였다.초상 장사에 관한 일을 맡은 나인이 있는 곳을 추혜서(追惠署)라 하고 제사에 관한 일을 맡은 나인이 있는 곳은 광혜서(廣惠署)라 했는데 효사묘(孝思廟)에 있었다. 포염사(布染司)를 설치하여 아상복(迓祥服)을 감독ㆍ제조케 하고 봉순사(奉順司)를 설치하여 사냥하는 그물과 도구를 실어오게 하였으며, 응방(鷹坊)에는 고안관(考按官)과 응사군(鷹師軍)이 있었다.말 기르는 곳을 운구(雲廐) 정릉(貞陵)에 있다.ㆍ기구(麒廐) 본사복(本司僕)에 있다.ㆍ인구(麟廐) 경복궁(景福宮)에 있다.ㆍ용구(龍廐) 금호문(金虎門) 밖에 있다. 라 하고, 의금부의 당직청을 고쳐 밀위청(密威廳)이라 하였다. 왕의 사명을 받들고 가는 자는 모두 승명(承命)이라 일컫고 아름다운 여자와 좋은 말을 각도에 가서 찾아 내는 자를 채홍준사(採紅駿使)라 하고,나이 어린 여자를 찾아 내는 자를 채청사(採靑使)라 하였다. 죄인을 섬에 감금하는 자를 진유근리사(鎭幽謹理使)라 하고 백성을 착취하고 온갖 물건을 독려해 거두는 자를 모두 위차(委差)라 하였다. 시사(時事)를 비난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모든 관원들에게 패(牌)를 차도록 하였는데 그 패에, “입은 재화(災禍)를 오게 하는 문이고[口是禍之門]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舌是斬身刀] 입을 다물고 혀를 깊이 간수해야만 몸이 편안하여 가는 곳마다 견고하리라.” 하였다. 명을 받고 밖으로 나가는 자는 모두 승명패(承命牌)를 찼으니 그 가장 빠른 것은 추비전(追飛電)이라 하고 그 승명이 가는 앞 길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죄가 사형에 이르렀다. 《소문쇄록》
순자(荀子)의 ‘왕제편(王制篇)’에, “채청(採淸)을 닦아 도로를 깨끗이 한다.” 했는데 그 주(註)에, “채(採)는 그 더러움을 버리는 것이고 청(淸)은 청결하게 한다는 것이니 모두 도로에 있는 더러움을 제거함이라.” 하였다. 연산군이 대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사족(士族)들의 처녀를 모두 거두어 오게 하고 그것을 ‘채청사(採靑使)’ 라고 불렀는데,그것이 미처 돌아오지 못하고 중종(中宗)이 왕위에 올라 연산의 더러움을 제거했으니,이상한 일이다. 《소문쇄록》
○ 성균관을 오락을 즐기는 장소로 만들고 공자 이하 모든 위패(位牌)를 옮겨 고산암(高山菴) 혹은 고암(高巖) 속이라 한다. 에 두었다가, 또 태평관(太平館)으로 옮기고, 이어 장악원(掌樂院)으로 옮겨서 풍암(楓巖)은 “또 서학(西學)으로 옮겼다.” 하였다.위패를 순서도 없이 깨끗치 못한 곳에 쌓아 두어 제사도 오랫동안 폐지하였으며, 강당(講堂)과 제사 올리는 집들은 흥청(興淸)의 음탕한 놀이 장소로 변하니 신과 사람의 분노가 극도에 달하였다.
○ 여러 선비를 쫓아내어 태학을 비우고, 무당을 모아 난잡한 제사를 그 안에서 벌렸다.
○ 4월에 소혜왕후(昭惠王后) 인수대비(仁粹大妃) 의 초상에는 역월지제(易月之制)를 따랐으며, 선왕의 제사 날에도 음악을 듣고 고기 먹기를 평시와 같이하였다.
이때 삼년상의 기일을 짧게 줄이는 제도를 행하고자 의논하니, 정현왕후(貞顯王后) 자순대비(慈順大妃) 가 예에 의거하여 옳지 않다고 고집하며, “나는 감히 그대로 따를 수 없다.” 하였다. 폐주가 몹시 성내며 “부인은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말로 대답하니, 왕후는 “내가 소혜왕후(昭惠王后)에게 죄를 얻을 것이 분명하다.”고 탄식하였다. 《용재집》
○ 이때 삼년상의 기일을 짧게 줄이는 법이 매우 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단성(丹城) 군사 나유문(羅有文)은 어머니 상사에 예대로 행하니 사람들이 모두 상옷 벗기를 권고했으나 그는 따르지 아니하였다.
○ 가을에 내도성(內都城)을 쌓고 성터 밖의 인가를 헐어버렸다.
○ 양주(楊州)ㆍ파주(坡州)ㆍ고양(高陽) 등의 고을을 폐지하고 그 땅을 비워 놀이터를 만들고 나머지 땅은 이웃 고을에 나누어 합쳤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중종(中宗) 초년에 그전대로 회복되었다.
폐주는 동쪽과 북쪽 백 리 거리에 표말을 세우고, 관사와 민가를 헐어버리고 통행을 금지하고 이를 범한 자는 사형에 처하였다. 어느 날 또 명을 내려 서쪽과 남쪽도 동쪽과 북쪽처럼 표말을 세우니 조정과 민간에서는 시사에 대한 말을 크게 기휘(忌諱)로 알았고, 말하는 사람은 죄가 불측한 죄를 당하였다. 이때 박원종(朴元宗)이 경기 감사로 있었는데 분연히 글을 올려 말하였다. 《용재집》ㆍ박평성(朴平城) 묘지(墓誌)
○ 응준방(鷹隼坊)을 후원에 두고 8도의 매ㆍ개ㆍ진귀한 새ㆍ기이한 짐승을 모두 잡아다가 기르고, 민간의 배를 빼앗아 경회루(慶會樓) 못에 띄워 놓고 채색 누각을 그 위에 지어 첫째 것은 만세(萬歲)라 하고, 둘째 것은 영춘(迎春)이라 하고, 셋째 것은 진방(鎭邦)이라 하였으니, 세 누각이 산처럼 높이 솟구쳐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폐주 자신이 율시 한 수를 지었으니 그 시에,

웅장한 산봉우리 공중에 솟구치니 / 壯氣仙峯聳碧霄
신령스런 큰 새우와 학이 시대를 맞추어 모였구나 / 神鰲靈鶴應詩稠
여러 영준이 함께 잔치하니 충성스런 마음이 합쳐지고 / 羣英咸宴忠臟合
외로운 귀신이 잡혀 갇히니 간사한 폐부가 타는구나 / 孤鬼幽囚譎腑焦
안개 누각ㆍ구름 창에 용선이 아득하고 / 霧閣雲牕龍舸逈
무지개 사다리에 노래와 피리소리 봉루(鳳樓)가 까마득하네 / 虹梯歌管鳳樓遙
누가 오락하려고 백성의 힘을 괴롭힌 것이냐 / 是誰留玩勞民力
모두 조선을 위하여 오래 살고 잘 사는 것을 표시함인데 / 都爲朝鮮表壽饒

하였다. 또 그네 놀이를 설치하여 여름이 지나도 걷지 않았다. 도성 백 리 안에 출입 금지의 표말을 세워 사냥하는 장소로 만들어 항상 말을 타고 내시 한 사람만 거느리고 개인 날이나 비오는 날이나 달려서 갔다 왔다 하였다. 따로 응사(鷹師) 만여 명을 두어 항상 사냥하는데 따라 다니게 하였다. 저자도(楮子島)ㆍ제천정(濟川亭)ㆍ장단석벽(長湍石壁)ㆍ장의사(壯義寺)의 수각(水閣)ㆍ영치정(迎置亭)ㆍ경회루(慶會樓)ㆍ후원(後苑) 등에서 흥청을 데리고 밤낮으로 놀았는데, 이것을 작은 거동이라 일컬었다. 광주(廣州)ㆍ양주(楊州)ㆍ고양(高陽)ㆍ양천(陽川) 등의 고을을 폐지하고 그 고을의 백성은 모두 쫓아 버리고 내수사(內需司)의 노비들을 살게 하였다. 또 나루 건너는 것을 금하고 노량진(鷺梁津)으로만 다니게 하니 길 가는 나그네가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으며, 나무꾼도 끊어졌었다. 서총대(瑞葱臺)를 쌓고 궁전을 크게 건축하였으므로 군사들도 또한 부역을 치르게 되니 민간에 소동이 일어나고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면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이 생겨 숭례문(崇禮門) 밖과 노량진 사이에 송장이 산더미처럼 쌓이었다.폐주도 스스로 자신이 옳지 못함을 알고는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경연을 폐지하고 사간원과 지평 두 사람을 폐지하고, 소를 올리고 신문고 두드리는 일들을 모두 폐지시켰다. 《풍암집화(楓岩輯話)》
○ 을축년에 광주(廣州) 사람 중에 난언(亂言)을 한 자가 있었으므로 고을을 폐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중종(中宗) 초년에 그 전대로 회복시켰다.
○ 을축년 봄에 서총대(瑞葱臺)를 쌓았다.
성종(成宗)때 후원(後苑)에 한 줄기에 아홉 가지나 되는 파[葱]가 났는데 이것을 서총(瑞葱)이라 하고 돌을 쌓아 재배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대를 쌓아 음란한 놀이하는 장소를 만들고 그 명칭을 서총대(瑞葱臺)라 하였다. 대를 쌓을 적에 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군사와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고역(雇役)을 하였으며,베[布]를 공출함이 너무 많아서 백성들이 능히 감당하지 못하여서 옷 속에 든 솜까지 꺼내어 베를 짰으니, 그 빛깔이 거무죽죽하게 절었고 자수[尺數]도 짧았다. 이로 인하여 지금도 품질이 나쁜 무명베를 서총대포(瑞葱臺布)라 한다. 《소문쇄록》
○ 창의문(彰義門) 밖에 수각(水閣)을 세웠다.
창의문(彰義門) 밖의 탕춘대(蕩春臺)에 석조(石槽)를 만들고 궁녀들과 음란한 장난을 하고 서교(西郊)에 연희궁(衍禧宮)을 짓고 왕래하면서 노닐었다.
○ 홍문관을 폐지하고 경연을 진독(進讀)이라 고쳐서 예문관으로 겸무(兼務)케 하였다. 예문관에 봉교(奉敎) 이하 네 사람과 주서(注書) 두 사람을 더 두고, 정언을 폐지하고 헌납 한 사람을 더 두었다.
○ 13년 병인 여름에 사간원을 폐지하고, 사관(四館)의 박사(博士)이하를 다른 관사에 나누어 소속시켜 본관의 직임을 겸직케 하였다.
대사간 유헌(柳軒)과 사간 강숙(姜叔)이 갑자기 귀양을 가게 되자 이어 사간원을 폐지하였다. 유헌(柳軒)의 이름 밑에 상세하다.
○ 폐주가 일찍이 내시를 보내어, “대간으로 하여금 기생들이 부를 가사를 지어 바치게 하라.” 하였다. 여러 관원들이 글을 읊조리면 생각을 하고 있는데 대사헌 이자건(李自健)이 홀로 아뢰기를,“기생을 위하여 시를 짓는다면 아마 성덕에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폐주는 즉시 짓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집의 이계맹(李繼孟)이 붓을 던지며 탄식하기를, “공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이 아마 뒷 세상의 나무람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양곡집(陽谷集)》
○ 바야흐로 연산군이 음탕한 짓을 할 적에 문관과 유생 삼색인(三色人)을 연(輦) 메는 인부에 충당시켰다. 어떤 사람이 대간도 충당시켜야 될지를 물으니 연산군이 “대간도 충당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에 놀러가는 곳에 연을 메고 갔으며, 때로는 글을 짓게 하고 상을 주었으니 유관(儒冠 유생)의 치욕이 극도에 달하였다.조광조(趙光祖)가 일찍이 중종(中宗)에게 “연산군이 유생들로 하여금 연을 메게 했는데도 선비로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붓과 벼루를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상 받기를 희망하여 선비의 기습(氣習)이 크게 무너졌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마땅히 선비의 기습을 고치고 추향(趨向)을 바로 잡는 일을 급선무로 하여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사대부의 아내로 궁중 잔치에 들어와 참예한 자는 그 성명을 옷섶에 쓰게 하고 얼굴이 예쁜 자는 나인을 시켜 단장이 잘못되었다고 핑계하고 구석진 방으로 끌어 들였다.
폐주는 남녀 관계의 행실이 더욱 추잡하여져서 선왕의 궁녀까지 음행한 일이 있을 뿐만 아니라, 외명부(外命婦)까지도 궁정에 잔치를 베풀어 주고 그 얼굴이 예쁜 자는 문득 끌어들여 간통하였다. 부끄러움이 없는 부인들은 궁중에 남아 있기를 원하기까지 하였는데, 그 중에 사랑을 받은 자는 자주 불러들여 유숙시켜 내보내고 그 남편은 벼슬을 승진시켜 주었다.월산대군(月山大君)의 부인 박씨(朴氏) 박원종(朴元宗)의 누이 를 세자를 보호해 주라고 핑계하고 대궐 안으로 끌어들여 강간하고, 그 관과 의복을 특이하게 해주고 은으로 만든 도서(圖書)를 쓰게 하여 품질(品秩)이 비빈과 같게 하였다. 또 그로 하여금 사은하게 하니 박씨는 부끄러워 자살하였다.
○ 판서 윤순(尹珣)의 부인 이씨(李氏)는 종실의 딸인데 폐주에게 사랑을 받았다. 중종 갑술년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윤순이 연산군에게 사랑을 입어 과거에 오른 지 5년만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었으며, 그 아내도 또한 연산군의 사랑을 입어 대궐에 드나들어 자못 추잡한 소문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윤순이 자헌대부로 승진된 것은 계집을 판 값이라.’ 하였습니다.지금에 와서도 오히려 벼슬을 그대로 하고 그 아내도 그 전처럼 대우하고 있으니, 뭇 사람의 평판이 비루하게 여겨 비웃고 있습니다.”고 아뢰었다. 그 후에 문정왕후(文定王后)를 책봉할 때 조광조(趙光祖)가 정언이 되었는데, “음탕하고 더러운 물건이 혹시 대례(大禮)에 참예될까 염려되니 성 밖으로 내쫓아 버리고 성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니 중종이 허락하였다. 《국조기사》
○ 생원 황윤헌(黃允獻)의 첩이 얼굴이 예쁘고 가야금을 잘 타니 구수영(具壽永)이 빼앗아 폐주에게 바쳤다. 폐주가 매우 사랑했으나 그는 성질이 사납고 괴퍅하여 말하고 웃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폐주는 그전 남편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드디어 황윤헌을 죽였다. 《황토기사(黃兎記事)》
○ 최유회(崔有淮)의 딸이 가야금을 잘 타더니 정승 한치형(韓致亨)이 끌어다가 구사(丘史)의 비(婢)를 만들고 그와 관계하였다. 뒤에 여자를 뽑아 올릴 적에 풍원위(豊原尉) 임숭재(任崇載)와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이 다투어 이 여자를 추천했는데, 구수영(具壽永)이 먼저 빼앗아 궁중에 바치니 폐주가 매우 사랑하여 숙의(淑儀)로 봉하였다.어느 날 연회를 하는데 최녀(崔女)가 갑자기 머리를 풀어 헤치고 통곡하므로 놀라서 물으니, “아버지가 병들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폐주가 노하여, “과연 죽었느냐?” 하고 내시를 시켜 가서 보게 하였다. 최유회는 병이 났으나 죽지는 않았었는데, 폐주가 노했다는 말을 듣고 이에 목매어 죽었다.내시가 돌아와 보고하니 폐주는 “혹시 거짓으로 죽었거든 반드시 형벌에 처하라.” 하였다. 형벌 맡은 관원이 송장을 매어 놓았다가 이튿날 아뢰니 폐주는 술이 깨어서, “후하게 장사해 주라.” 하고 참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소문쇄록》
○ 성세정(成世貞)이 영남 감사로 있을 적에 상주(尙州) 기생을 사랑하여 집에 데려다 두었더니, 폐주가 그 기생을 뽑아 들여 매우 사랑하였다. 어느 날 폐주는 그 기생에게, “너는 성세정이 보고 싶으냐?” 하였다. 기생이 “어찌 그런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가 저를 집에 두었지마는 사나운 아내를 무서워하여 서로 왕래가 없어 저를 외롭게 하고 괴롭혔으므로 어느 때나 마음이 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니,폐주가 “그렇다면 죽이고 싶으냐?” 하자, 기생이 “죽이는 것은 통쾌하지 않사오니 반드시 곤장을 쳐서 변방으로 귀양보내어 갖은 고생을 시킨 뒤에 죽여 주십시오.” 하였다. 폐주가 웃으면서 그 말대로 하여 세정을 세 번이나 옮겨 귀양가서 거의 죽을 뻔 하다가 중종(中宗)이 왕위에 오르자 죽음을 면하였다. 《장빈호찬(長貧胡撰)》
○ 총애 받는 기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동무에게 “지난밤 꿈에 예전 주인을 보았으니 매우 괴상한 일이구나.” 하였다. 폐주는 즉시 작은 쪽지에 무엇을 써서 밖에 내 보내었다. 조금 뒤에 궁인이 은쟁반 하나를 받들어 바치었는데 그 기생에게 열어 보게 하니, 그것은 곧 그 남편의 머리였다. 그 기생까지 아울러 죽였다. 《장빈호찬》
○ 어느 날 폐주가 승정원에 묻기를, “거문고를 잘 타고 그림을 잘 그리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사람을 보고자 한다.” 하니 승정원에서 훈도(訓導) 유우(柳藕)가 그런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연산주는 “승정원에서 시험해 보고 기다리라.” 하였다. 유우는 부름을 받고 승정원에 와서 시험을 보고 나갔는데 그 뒤에 다시 부르지 않았으니, 그에 대해 잊은 까닭이었다.그는 평생에 거문고를 부수고 그림 그리기를 끊고서, “매양 승정원에 가서 시험 보던 일을 생각하면 곧 땅을 파고 들어가서 싶은 심정이다.” 하고, 자제들에게는 거문고와 글씨를 익히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기재잡기》
○ 폐주의 황음(荒淫)하고 패란(悖亂)함이 날로 심해지자 신비(愼妃)는 매양 바른 말로 간하다가 여러 번 부당한 능욕을 당하였다. 당시 숙의(淑儀)의 노자(奴子)라고 칭하는 자가 사방에 흩어져서 물건을 독점하여 이익을 구하고 평민들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차지하였으나 공사(公私) 간에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신비는 매양 탄식하기를,“여러 궁인들이 나라의 정치를 어지럽게 하니, 나는 그 나쁜 것을 알면서 본받을 수 없다.” 하고, 일찍이 내수사(內需司)에 간절히 경계하기를, “만약 본궁의 노자들 가운데 횡포한 자가 있다고 들리면 반드시 먼저 매를 쳐서 죽이리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본궁의 노자들은 감히 그러하지 못하였다. 《소문쇄록》
등명사(燈明師) 학조(學祖)가 직지사(直指寺)에 있을 때 절에 좋은 반시(盤柿)가 있어 매양 두 바리씩을 내전에 바치고 비밀히 아뢰기를, “저의 절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사오니, 원컨대 본궁의 노자들을 시켜 해마다 와서 두세 바리씩 실어 가도록 하소서.” 하였다. 신비는 이르기를,“이것은 매우 쉬운 일이나 다만 과실이 잘 여는 해도 있고 잘 안 여는 해도 있으니 만약 안 여는 해에 본궁의 노자가 가서 정한 바리 수대로 징수한다면 영원히 폐단이 될 것이다.” 하였으니, 그가 뒷일을 염려함이 이와 같았다. 그의 척당(戚黨)중 지방 고을의 원이 있었는데, 잇[紅藍] 수십 두(數十斗)와 풀솜[雪綿子] 수십 근(數十斤)을 바쳤다. 신비는 이것을 물리치면서, “백성들이 못살고 있는데 이런 물건이 어디서 나왔느냐? 나는 차마 받아 둘 수 없다.” 하였다. 《소문쇄록》


 

[주D-001]저하 : 신하가 국왕에게는 전하라 부르고 세자에게는 저하라 부른다.
[주D-002]연산의 …… 제거했으니 : 청자(靑字)와 청자(淸字)가 음이 같기 때문에 옛 글에 있는 채청(採淸)과 연산(燕山)의 채청(採靑)이 음으로 부르기는 같은데 그것이 옛 글에 있는 더러움을 제거하는 징조가 된다고 본 것이다.
[주D-003]역월지제(易月之制) : 한 나라 문제(文帝)가 죽을 때에 유언하기를, “삼년상을 하지 말고 날자로서 달을 대신하라.” 하였으니, 말하자면 25일이 3년이 되는 것이다.
[주D-004]난언(亂言) : 행동으로 난을 일으키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그 말이 행동으로 나타났을 경우 반란에 속하는 것을 ‘난언’이라 한다.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복위



일찍이 성종(成宗) 기유년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했는데, 폐출되어 사약을 내린 일은 성종조에 나와 있다. 윤씨가 눈물을 닦아 피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하므로 건원릉(健元陵)의 길 왼편에 장사하였다.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세상을 떠나자 신씨는 나인들과 서로 통하여 연산주의 생모 윤씨가 비명으로 죽은 원통함을 가만히 호소하고 또 그 수건을 올리니 폐주는 일찍이 자순대비(慈順大妃)를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매우 슬퍼하였다. 시정기(時政記)를 보고 성을 내어 그 당시 의논에 참여한 대신과 심부름한 사람은 모두 관을 쪼개어 시체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기묘록》
윤씨가 죽을 때에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흰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전하여 뒤에 폐주에게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心病)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성종(成宗)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 <파수편>
○ 윤씨가 폐위된 뒤에 폐주가 세자로 동궁에 있던 어느 날, “제가 거리에 나가 놀다 오겠습니다.” 하므로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 때 대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네가 오늘 거리에 나가서 놀 때 무슨 기이한 일이 있더냐?” 하니 폐주는 “구경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소를 따라가는데,그 어미소가 소리를 하면 그 송아지도 문득 소리를 내어 응하여 어미와 새끼가 함께 살아 있으니 이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슬피 여겼다. 대개 연산군이 본성을 잃은 것은 윤씨가 폐위된 데 원인이 있는 것이지만 왕위에 처음 올랐을 때는 자못 슬기롭고 총명한 임금으로 일컬어졌었다. 《아성잡기(鵝城雜記)》
○ 병진년 봄에 폐비 윤씨를 복위하고 무덤을 옮기려고 의논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
○ 재상들에게 의견을 수렴하게 하였는데 잔혹하게 사람을 마구 죽이므로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였다. 예조 참판 신종호(申從濩)가 홀로 의논을 주장하기를, “폐비가 선왕(성종)에게 죄를 얻어 유교(遺敎)가 지금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구익부인(鉤弋夫人)이나 견후(甄后)와 같은 처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니 의논이 매우 올곧았다. 비록 임금의 위엄이 무서웠으나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니 포악한 폐주로서도 죄를 주지 못하였다. 《부계기문》 《소문쇄록》
사당과 신주 세우기를 의논할 때 신종호가 옛날 제도를 근거로 들어 아뢰기를, “장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신주를 만들어 귀신을 편안하게 하고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받드는 법입니다. 윤씨가 전하를 낳아서 길렀으니 마땅히 사당을 높여서 받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선왕께 죄를 얻었으니 예를 상고해 보면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삼가 살펴보건대, 한 나라 소제(昭帝)의 어머니 조첩여(趙婕妤)는 그를 위하여 원읍(園邑)을 두고 또 장승(長丞)을 시켜 지키기를 법대로 하였지마는 사당을 세웠다는 것은 상고할 데가 없습니다. 위현성(韋玄成)의 전기에, ‘효소태후(孝昭太后)의 침사원(寢祠園)을 수리하지 말라.’ 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다만 침사만 있고 서울에 사당이 없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위 나라 명제(明帝)의 어머니 견후(甄后)는 신하들이 주(周) 나라 강원(姜嫄)의 예(例)에 의거하여 따로 침묘(寢廟) 세우기를 청하니 그 의견을 옳다 하였습니다. 대체 강원(姜嫄)은 제곡(帝嚳)의 비이고 후직(后稷)의 어머니였습니다. 주 나라에서 후직을 높여서 시조를 삼았으니 강원(姜嫄)은 배향할 데가 없으므로 특별히 사당을 세워서 제사 지냈던 것입니다.견후와 강원은 그 일이 같지 않은데 끌어다 보기로 삼았으니 대개 당시에 억지로 끌어댄 말이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한 무제(漢武帝)와 위 문제(魏文帝)는 모두 유교(遺敎)가 없었으니 지금의 일과는 같지 않습니다. 폐비는 이미 종묘와는 관계가 끊어졌으니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로써 예를 어겨서는 안될 것입니다.비록 사당과 신주를 세우지 않고 묘에만 제사 지내어도 효도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의논이 비록 행해지지는 않았으나 다른 여러 의논이 능히 이 의논을 누르지는 못하였다. 《소문쇄록》
○ 이때 사당 세우는 문제를 의논함에 있어 대대적으로 위협을 가하여 아랫사람의 입을 막으니, 임금의 하고자 하는 일을 감히 거스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리 권달수(權達手)는 분개하여, “이것은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홍문관에서도 감히 다른 의견을 말하지 못하니 폐주가 노하여 그들을 모두 곤장을 쳐서 귀양 보내었다.
○ 사묘(私廟) 지금의 종부시(宗簿寺) 를 세워 제사 지내는 것은 원묘(原廟)와 같이 하고 그 무덤을 높여서 회릉(懷陵)이라 하였다. 지금은 묘의 석물은 없어지고 돌난간만 남아 있다.
폐주가 폐비를 위하여 효사묘(孝思廟)를 세우니 대사헌 김심(金諶)이 여러 대관(臺官)을 거느리고,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고 고집하여 뜰에서 10여 일이나 버티고 섰으나 피로한 기색이 없었다. 이에 폐주가 “전 대사헌은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정의를 알았는데 그대는 홀로 알지 못하니 어쩐 일이냐?” 하니,김심은 “전 대사헌은 다만 어머니가 있는 것만 알고 아버지가 있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는데 그 당시의 세론(世論)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 폐주가 그 어머니 윤비(尹妃)의 묘를 봉하여 회릉이라 하였다. 대사간 강형(姜詗)이, “선왕께서 금하신 것입니다.”고 간하니 폐주는 매우 노하였다. 갑자년 봄에 이르러서 그 전에 법을 들어 논하던 자를 다 죽였는데 강형의 집은 일족을 남김없이 멸망시켰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계해년 봄 2월에 ‘왕비를 폐하다[廢妃]’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야언별집》
○ 갑자년 봄에 폐주는 어머니 윤씨가 내쫓겨 죽은 것을 깊이 한하여 선조(先朝 성종조)의 옛 신하들을 거의 다 죽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 조에 상세하다. 또 윤씨를 높여 그 휘호를 극진히 올리고자 하여 조정의 신하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지당합니다.” 하였다. 응교로 있던 이행(李荇)이 동료들과 의논하고, “추숭(追崇)하는 전의식(典儀式)을 예에 있어 이미 극도로 다했는데,지금 다시 더 올릴 수 없습니다.” 하니, 폐주가 크게 노하여 잡아서 국문하게 하고 의논을 먼저 주창한 사람을 장차 사형에 처하려고 하니 이를 면하려는 이들은 힘써 변명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이때 응교 권달수(權達手)는 밖에서 잡혀 나중에 들어 와서는, “먼저 말한 사람은 나요, 이행(李荇)은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권달수는 죽음을 당하고 이행은 곤장을 맞고 충주(忠州)로 귀양가게 되었다. <용재행장>
앞서 권달수가 폐비의 사당 세우는 것은 선왕의 뜻이 아니라고 솔선해 말했는데 그 뒤에 폐주의 노여움이 더욱 심하였다. 홍문관과 대간 중에서 그 의논을 먼저 발언한 자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여 지나간 일을 다시 조사하여 먼저 말한 사람을 캐내어서 날마다 가혹한 형벌을 가하니 모두 먼저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미루어 땅 밑의 송장을 파내어 관을 쪼개게 하면서까지 자기의 죽음을 구차스럽게 면하려고 했는데,홀로 권달수만은 자기가 했다고 스스로 책임을 지고 죽은 동료들을 저버리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대간 가운데 먼저 말한 사람과 함께 옥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데 옥리(獄吏)가 그를 불쌍히 여겨, “홍문관과 대간 양편이 다 죽는 것보다는 한편이 책임을 지고 한편은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하니, 사헌부의 관원은 옥리의 뜻을 받아 들여 다시 “홍문관이 사헌부보다 먼저 말했다.”고 하였다.이에 권달수는 눈을 부릅뜨고 한참 눈여겨 보면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네가 과연 나를 본받을 수 있으랴.” 하고 즉시 붓을 휘둘러 공초를 쓰기를, “불초신 달수가 감히 이 말을 했으므로 구차히 숨겨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고 하였는데 다 쓰고난 뒤에는 얼굴빛도 변하지 아니하였다. 술을 주니 다 마시고는 형벌에 나아가는데 보통 때와 다름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용천담적기》


 

[주D-001]시정기(時政記) : 그 당시의 정사에 있어서 역사상 자료가 될 만한 것을 기록한 것.
[주D-002]견후(甄后) : 견후는 위(魏) 나라 문제(文帝)의 황후이요, 명제(明帝)의 어머니인데 폐출 당하여 죽음을 받았다. 뒤에 명제가 따로 사당을 세워 받들었다.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무오년의 사화(史禍)

유자광(柳子光)은 부윤(府尹) 규(規)의 서자이다. 건장하고 날래며 힘이 세었으며, 높은 곳에도 원숭이 모양으로 잘 타고 올라 갔다. 어릴 때 무뢰배가 되어 장기와 바둑이나 두고 활쏘기로 내기나 하고 새벽이나 밤길에 돌아다니다가 여자를 만나면 낚아 채어 간음하였다.유규(柳規)는 자광의 어미가 미천한 신분이고, 또 하는 짓이 이처럼 방종하고 패역하므로 여러 번 매질하고 자식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갑사(甲士)에 소속되어 건춘문(建春門)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자광은 글을 올려 스스로를 천거하였다. 세조(世祖)가 그를 기특히 여기고 불러다가 대궐 뜰에서 시험해 보았다.이어 전지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세조가 매우 사랑하였다. 병조 정랑으로서 문과를 보아 장원으로 뽑혔다. 예종(睿宗) 초년에 남이(南怡)의 모반을 고발하여 공신이 되어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으며 벼슬의 등급을 뛰어 1품(一品)의 관계(官階)를 얻게 되었다. 상시 자기 자신을 호걸이라 일컬었다. 천성이 음험하여 남을 잘 해쳐서,재능과 명망이 있어 임금의 사랑이 자기보다 위에 있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모함하니 사람들이 그를 흘겨보았다. 자광이 한명회(韓明澮)의 문호가 귀하고 성함을 질투하고 있었는데, 마침 성종(成宗)이 신하들의 간하는 말을 받아들임을 보고 기이한 의논으로써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고, “한명회가 발호할 뜻이 있습니다.”고 글을 올렸으나, 임금은 그를 죄주지 아니하였다.후에 임사홍(任士洪)ㆍ박효원(朴孝元) 등과 함께 현석규(玄錫圭)를 배제하려 하다가 계획이 실패되어 오히려 자기가 동래(東萊)로 귀양 갔다가 조금 후에 풀려 돌아 왔으나, 임금은 그가 정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인 줄 알므로 다만 공신의 봉작만 회복시켜 주고 실무에 당하는 관직은 주지 아니하였다.자광은 임금의 은택 입기를 희망하여 온갖 수단을 다 썼으나 되지 않으므로 마음속에 항상 불평을 품고 있었다. 이극돈(李克墩)의 형제가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있음을 보고는 능히 자기 일을 성취시켜 줄 수 있음을 알고 문득 몸을 굽혀 깊이 서로 결탁하였다. 《유자광전(柳子光傳)》 남곤(南袞)이 지은 것이다.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나왔다.
○ 자광이 일찍이 함양군(咸陽郡)에서 놀다가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나무 판에 새겨 벽에 달아 두었다. 후에 김종직(金宗直)이 이 고을에 군수로 와서 이것을 떼어 불태워 버리면서, “자광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럴 수 있느냐.” 하였다. 자광은 몹시 분하여 이를 갈면서도 김종직이 한창 임금의 신임을 받을 때였으므로 도리어 교분을 맺고 종직이 죽었을 때는 제문을 지어 울면서 그를 왕통(王通)과 한유(韓愈)에 비하기까지 하였다. 《동각잡기》
○ 김일손(金馹孫)은 일찍이 김종직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극돈(李克墩)이 일찍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 성종(成宗)의 초상을 당하였는데, 서울에 향을 바치지도 않고 기생을 싣고 다닌 일이 있었다. 김일손이 그 사실과 또 뇌물 먹은 일을 사초에 썼더니 이극돈이 고쳐 주기를 청했으나 그 청을 거절하자 김일손에게 감정을 품고 있었다. 《국조기사》
○ 김일손이 헌납이 되어 권세 있는 사람을 꺼리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며 글을 올려,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장차 우승유(牛僧儒)와 이덕유(李德裕)처럼 당을 만들 것이다.” 라고 논하니 이극돈이 크게 노하였다. 후에 사국(史局)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하기 위한 것이다. 이 열리자 이극돈이 당상이 되어 김일손이 쓴 사초에 자기의 나쁜 일을 상세히 쓴 것과 또 세조(世祖)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이것으로 자기의 원한을 보복하고자 하였다.어느 날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총재관(摠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김일손이 선왕(先王 세조)의 일을 거짓으로 꾸미고 헐뜯었으니 신하로서 이 같은 일을 보고서 임금께 알리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까. 나의 생각에는 사초를 봉하여 위에 아뢰어서 처분을 기다리면 우리들은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어세겸은 깜짝 놀라면서 답하지 아니하였다.얼마 지낸 뒤에 극돈은 유자광에게 의논하니 유자광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팔뚝을 뽐내면서, “이것이 어찌 의심하고 주저할 일입니까.” 하고 노사신(盧思愼)ㆍ윤필상(尹弼商)ㆍ한치형(韓致亨)을 찾아가서는 세조에게 받은 은혜를 잊을 수 없다는 점을 먼저 말하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놓은 뒤에 그 일을 말하였다.대개 노사신과 윤필상은 세조의 총애를 받던 신하이고, 한치형은 그 족당이 궁중에 관련되었으니 반드시 자기의 말에 따를 것으로 알고 말했던 것인데 세 사람은 과연 모두 그 말을 따랐다. 함께 차비문(差備門) 밖에 나가서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을 불러 내어 귀에 대고 한참 동안 이야기하고 임금께 아뢰었다.이전에 신수근이 승지로 될 적에 대간과 시종신들은 외척이 권력잡을 발단이라고 하며 옳지 못하다고 힘써 간하였더니, 신수근은 이들에게 감정을 품고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조정은 문신들의 수중에 있는 물건이니 우리들은 무엇을 하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와서 김일손 등에 대한 여러 사람의 원한이 뭉치고 뭉쳐 있었다.또 폐주가 시기하고 포학하여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글하는 선비를 더욱 미워하여, “명예를 구하고 임금을 능멸하여 나를 자유스럽지 못하게 한 자는 모두 이 무리들이다.” 라는 말을 하면서, 항상 마음이 답답하고 불쾌하여 한 번 통쾌하게 처치했으면 하면서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던 차에 유자광 등이 아뢴 말을 듣고, “이 나라에 충성한다.” 하면서,특별히 후하게 칭찬하고 남쪽 빈청(賓廳)에서 죄인을 국문하도록 명하고 내시 김자원(金子猿)을 시켜 왕명의 출납을 맡게하고 나머지 사람은 참여해 듣지 못하게 하였다. 검열(檢閱) 이사공(李思恭)이 뵈옵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유자광전(柳子光傳)》
○ 의금부 경력 홍사호(洪士灝)와 도사 신극성(愼克成)에게 명하여 곧 함양(咸陽)에 가서 김일손을 잡아오게 하였다. 또 액정서(掖庭署) 하예(下隸) 중에서 말 잘 달리는 자를 시켜 죄인을 잡아오는 걸음이 더디고 빠른 것을 도중에 살펴 빨리 보고하라 하였다.이때 김일손은 풍병(風病)으로 집에 있다가 잡혀 왔다. 폐주는 수문당(修文堂)에 나와서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는데, 노사신(盧思愼)ㆍ윤필상(尹弼商)ㆍ한치형(韓致亨)ㆍ유자광(柳子光)ㆍ신수근(愼守勤)과 주서(注書) 이희순(李希舜)이 국문에 참여하였다. 《야언별집》
○ 김일손을 국문할 때, “사초에 어찌하여 선왕조(先王朝 세조조)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 썼느냐?” 하니 공술(供述)하기를, “사기(史記)에 ‘이보다 먼저[先是]’란 말도 있고, ‘처음에 이르되[初云]’란 말도 있으므로 세조 때의 일을 추기(追記)에서 기록했으며,덕종(德宗)의 귀인(貴人) 권씨(權氏)의 일은 귀인의 조카되는 허반(許磐)에게 들었습니다.” 하였다. 또 소릉(昭陵) 회복을 청한 일을 국문하니, “선왕께서 숭의전(崇義殿)을 세우고 왕씨(王氏 고려왕조)의 후손을 봉하기에 성조(聖朝)에서 인정(仁政)을 행하기를 원한 때문에 소릉을 복위하자고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김일손이 일찍이 충청 도사가 되었을 때 글을 올려 소릉(昭陵)을 회복하자고 청한 때문에 아울러 국문한 것이었다. 또 후전곡(後殿曲)의 일을 국문하니, “옛날 서호(西湖)에 있을 적에 무풍부정(茂豐副正) 총(摠)이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와서 후전곡을 타는데, ‘그 소리가 매우 애처롭고 슬퍼서 태평 세상의 음곡은 아니다.’ 하고 함께 논의한 일이 있었으므로 사초에 쓴 것입니다.” 하였다.“사초를 함께 의논한 사람이 있느냐?”고 두 번 세 번 추궁해 물었으나, 다만 “신은 자백을 다 했으니 혼자 죽겠습니다.” 하였다. 홍사호(洪士灝)가 김일손의 집 문서를 수색하여 이목(李穆)의 편지를 발견하였는데 그 편지에 사초에 관계되는 일을 대개 말하면서 “그대의 사초는 성중엄(成重淹)의 방(房)에 있는데,중엄은 날마다 일을 기록하지 않는 점을 들어 당상이 기재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으나 나는 김계운(金季雲) 일손의 자 은 글자 한 자도 빠뜨림이 없이 다 기록했다고 말했다.” 하였다. 폐주가 홍사호에게 묻기를, “김일손이 오는 도중에 무슨 말을 하더냐?” 하니, “일손이 ‘이것은 반드시 이극돈이 사초를 고발한 것이다. 극돈의 일을 내가 사초에 썼더니 극돈이 깎아 버리기를 청했으나 내가 듣지 않았으므로 원한을 품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야언별집》
○ 허반(許磐)은 공술하기를, “덕종(德宗)의 소훈(昭訓) 윤씨(尹氏)의 일이 의심이 나서 김일손에게 말했더니, 일손이 필시 잘못 알고 권씨(權氏)로 여긴 것입니다.” 하였다. 《야언별집》
○ 이목(李穆)은 공술하기를, “노산군(魯山君)의 숙의(淑儀) 권씨(權氏)는 바로 권람(權擥)의 친족입니다. 그 논밭과 집과 노비를 권람이 다 차지하고 주지 않아서 숙의를 굶주리게 한 까닭으로 신이 일찍부터 권람을 하찮게 보았습니다.” 하였다. 이상 《야언별집》
○ 유자광이 옥사를 맡고 있었는데 매양 김자원(金子猿)이 임금의 명령을 전달할 때는 반드시 앞에 나아가서 공손하게 조심하는 태도를 다하여 그 명이 엄하고 혹독한 듯 하면, 스스로 임금의 마음을 안 것처럼 다시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면서 거듭 물러날 뜻이 있는 것처럼 하고서는 명을 다 듣고 물러 나와서는 매우 기뻐서는 스스로 자부하는 기색이 있었다.이어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지금은 조정의 중신을 바꾸어 배치할 시기이니, 마땅히 이러한 큰 조치가 있어야만 될 것이고 보통으로 다스려서는 안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 또 임금께 아뢰기를, “이 사람의 무리들이 매우 성하니 변고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방비를 엄밀히 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이에 금위병(禁衛兵)을 뽑아서 궁문 안팎을 경계하여 모든 사람의 드나드는 것을 단속시켰다. 옥에 갇힌 사람이 국문을 받으러 갈 때도 군사를 시켜 압송하게 하였다. 유자광은 오히려 옥사를 다스림이 느슨해져 제 뜻대로 다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죄 만들기를 계획하였다. 하루는 소매 속에서 책 한 권을 내 놓으니 바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이었다.그 중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 술주시는 유유(劉裕)가 임금을 죽인 죄를 꾸짖고 도연명(陶淵明)의 충분(忠憤)한 뜻을 표현한 것이다. 를 들추어 내어 여러 추관(推官)에게 두루 보이면서, “이것은 모두 세조를 가리켜 지은 것인데 김일손의 악한 행실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고 제가 주석을 달아 글귀마다 해석하여 폐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고 이내 아뢰기를,“김종직이 우리 세조를 비방하고 헐뜯었으니 마땅히 대역부도(大逆不道)로써 논죄하고, 그가 지은 글은 세상에 전파해서는 안 되니 아울러 모두 불살라 없애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폐주는 그 말을 따라 김종직의 시문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이틀 안으로 각기 자진해서 바치라 하고 빈청(賓廳)의 앞뜰에서 불사르게 하며,또 여러 도의 관사에 써 붙인 현판은 모두 그 곳에서 떼어 없애도록 하였다. 일찍이 성종(成宗)이 김종직에게 환취정(環翠亭)의 기문(記文)을 짓게 하여 문 위에 달아 두었었는데, 이것도 아울러 떼어 버리도록 청했으니 함양(咸陽)의 원한을 보복함이었다. 《유자광전(柳子光傳)》
○ 무오년 7월 17일에 교지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김종직은 초야의 천한 선비로서 세조조에 과거에 오르고 성종께서 경연에 뽑아 두어 오랫동안 시종의 지위에 있어 벼슬이 형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으니 임금의 총애와 은혜가 조정에서 으뜸이었다. 그가 병들어 벼슬에서 물러나니 성종은 오히려 그가 있는 고을 수령을 시켜 특별히 쌀과 곡식을 내려 주어 그 여생을 마치게 하였다.지금 그 제자 김일손이 편수한 사초 속에 부도한 말로 선왕조의 사실을 거짓으로 기록하고 또 그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기재하였는데 그 글 내용은 이러하다. ‘정축년 10월 □일에 내가 밀양(密陽)에서 경산(京山 성주(星州))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하룻밤을 유숙하였는데 그 날 밤 꿈에 풍채 좋은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걸치고 와서는 「나는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서초 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에게 죽음을 당하여 빈강(彬江 중국 남방에 있는 강)에 빠져 잠겨 있다.」 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 잠을 깨어 생각하니, 회왕은 남방 초(楚) 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 조선(朝鮮))의 사람이다. 땅이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있고 시대가 또한 천여 년이나 떨어져 있는데 내 꿈에 나타나는 것은 무슨 징조일까.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 비밀히 쳐죽여 그 시체를 물에 던졌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침내 글을 지어 그를 조문하노라. 하늘이 사물과 법측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그 사대(四大)오상(五常)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 사람에게만 넉넉하게 주고 동이 사람에게는 부족하게 준 것이 아니며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어졌으리오. 나는 동이 사람이고 천 년이나 뒤에 났는데도 삼가 초의 회왕을 슬퍼하노라. 옛날에 조룡(祖龍 진시황)이 어금니와 뿔을 휘두르니 사해의 물결이 모두 피로 물들었다. 비록 전어[鱣]ㆍ상어[鮪]ㆍ미꾸라지[鰍]ㆍ고래[鯢]인들 어찌 자신을 보전할 수 있으리오. 그 물에서 빠져 나오고자 하여 바쁘게 날뛰었다. 이때 6국(國)의 후손들은 세력이 없어지고 딴 곳으로 피란하여 겨우 평민과 같이 지냈다. 항량(項梁)은 남국(南國 초(楚))의 무장 집안의 자손으로서 진승(陳勝)에 뒤이어 일을 일으켰다. 회왕(懷王)을 찾아내어 백성의 바람을 따랐으니 멸망했던 초 나라를 다시 보존하게 되었다.건부(乾符)를 쥐고 천자가 되었으니, 세상에서 미씨(羋氏 초의성)보다 높은 이가 없었다. 장자(長者 유방(劉邦))를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게 하니, 또한 그 인의(仁義)를 볼 수 있겠다. 양처럼 패려궂고 이리처럼 탐욕스럽게 관군(冠軍 송의(宋義))을 함부로 죽였는데도 어찌 그 항우를 잡아 처형시키지 않았는가.아아, 형세가 그렇지 못하였으니 나는 회왕(懷王)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긴다. 길러 놓은 자에게 도리어 해침을 당했으니, 과연 천운이 어긋났도다. 침(郴)의 산이 험하여 하늘에 닿으니 햇빛이 어둑어둑 저물려 한다. 침의 물이 밤낮으로 흐르니 물결이 넘쳐서 돌아오지 않는다. 영원한 천지간에 한이 어찌 다하리오. 혼령이 지금도 정처 없이 헤매고 있구나.나의 마음이 쇠와 돌을 뚫을 만하니 왕(회왕)이 갑자기 꿈에 나타났도다. 주자(朱子)의 필법을 따르려니 생각이 불안하고 조심된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으니 영령(英靈)이 와서 흠향하기를 바라노라. ……’ 하였다. 그 글에 ‘조룡(祖龍)’이라 한 것은 진시황이니 종직이 의제(義帝 회왕(懷王))를 노산군(魯山君)에 비한 것이요.‘양처럼 패려궂고 이리처럼 탐욕스럽게 관군을 함부로 죽였다.’는 것은 세조가 김종서 죽인 것을 가리킨 것이며, ‘어찌 항우를 잡아 죽이지 않았느냐.’ 한 것은 노산군이 어찌 세조를 잡아 죽이지 않았느냐는 것이고, ‘길러 놓은 자에게 도리어 해침을 당했다.’는 것은 노산군이 세조를 잡아 죽이지 않았다가 도리어 세조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주자(朱子)의 필법을 따른다.’는 것은 김종직이 자기 스스로 주자인 체 하여 마음 속으로 이 부(賦)를 지어 《통감강목(通鑑綱目)》의 필법에 견준 것이다. 김일손은 그 글을 칭찬하여 ‘충분(忠憤)한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으니,생각해 보면 우리 세조 대왕이 불안하고 위태한 시기를 당해서 간악한 신하가 반란을 도모하여 화란(禍亂)이 거의 일어나려 할 때 역적의 무리를 베어 죽이니 종사가 위태한 지경에서 다시 편안해져서 자손들이 서로 계승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공업은 매우 높고 크며 덕은 백왕에 뛰어난데, 뜻밖에 김종직이 그 제자들과 더불어 세조의 덕을 비방하고 김일손을 시켜 사초에 무함하여 쓰기까지 하였으니,이것이 어찌 짧은 시일에 만들어진 것이랴.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몰래 가지고 있으면서 세조ㆍ예종ㆍ성종의 세 임금을 두루 섬겼으니 내가 지금 생각해 보니 참혹하고 떨림을 금하지 못하겠다. 해당한 죄명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이세영일기(李世英日記)》ㆍ《조야기문(朝野記聞)》
○ 유자광은 폐주의 노여움을 이용하여 한꺼번에 모조리 잡아 죽일 계획으로 윤필상(尹弼商) 등에게 눈짓하면서, “이 사람들의 죄악은 무릇 신하된 우리로서는 한 하늘 밑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니 마땅히 그 무리들을 찾아내어 모두 죽여 없애야만 조정이 맑고 깨끗해질 것이요,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무리들이 일어나 얼마 안 가서 다시 화란(禍亂)이 생길 것입니다.” 하니 좌우에 있는 이들이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노사신(盧思愼)은 손을 흔들며 말리기를, “무령(武靈 유자광)은 어찌 이런 말까지 하시오. 옛날 당고(黨錮의 일을 듣지 못했습니까. 금고(禁錮)의 법망(法網)이 날로 혹독하여 선비의 무리들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한(漢) 나라도 뒤따라 망했으니 청류(淸流)의 의논이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 될 것이요, 청류의 의논이 없어지는 것은 나라의 복이 아닌데 무령은 어찌 틀린 말을 하시오.” 하니,유자광은 조금 기가 꺾이었으나 범죄 사실에 관련된 사람은 남김없이 죄를 다스리고자 하였다. 노사신이 또 말리기를, “당초에 우리들이 임금께 아뢴 것은 사초의 일뿐인데, 지금은 지엽(枝葉)으로 연루되어 사초 일에 관계되지 않은 사람도 잡혀 갇힌 이가 날로 늘어나니 이것은 우리들의 본 뜻이 아니오.” 하니 유자광은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유자광전》
○ 이목(李穆)이 태학(太學)에 있던 시절 글을 올려 윤필상(尹弼商)을 간악한 귀신이라고 지목한 일이 있었고, 조순(趙舜)이 정언으로 있을 때 노사신을 논박한 일이 있었다. 이때에 와서 윤필상은 이목이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유로 무함하여 죽이고 또 노사신에게, “조순도 죽여야 될 것이오.” 하니 노사신은 “이것이 무슨 말이오?” 하고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 죄를 결정하는 날에 노사신이 홀로 의사가 같지 않으므로 유자광은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면서 힐난하였다.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임금께 아뢰었는데 폐주는 유자광 등의 의논을 따랐다. 이날 대낮에 캄캄해지며 비가 퍼붓고 큰 바람이 동남쪽에서 일어나 나무를 뽑고 기왓장을 날려 보내니, 성 안의 백성들이 엎어지고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유자광전》
○ 7월 27일에 난역(亂逆)한 신하를 처형했다는 사유를 종묘에 고하였으니 그 글의 대략에, “어찌 간사한 신하가 몰래 모반할 마음을 품고서 옛일에 가탁하여 문자에 드러낼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흉악한 사람들이 당을 지어 세조의 덕을 모함하고 헐뜯으니 난역부도(亂逆不道)한 죄악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하였다.사죄(赦罪)를 반포하는 글에는, “간사한 신하 김종직은 나쁜 마음을 품고 몰래 그 무리들을 모아 음흉한 계획을 시행하려고 한 지가 오래 되었다. 항적(項籍 항우)이 의제(義帝)를 죽인 일에 가탁하여 문자로 표현하여 선왕(세조)을 나무라고 헐뜯었으니 하늘에 닿을 정도로 악독한 죄를 진만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대역죄로 논단하여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게 하노라.그 무리 김일손ㆍ권오복(權五福)ㆍ권경유(權景裕)는 간악한 덩어리로 뭉쳐서 서로 호응하고 도와 그 글(조의제문(弔義帝文))을 칭찬하기를 충분에서 나왔다고 사초에 기록하여 영원히 뒷세상에 전하고자 했으니 그 죄가 김종직과 같다. 아울러 능지처참하도록 한다. 김일손을 또 이목(李穆)ㆍ(허반(許磐)ㆍ강겸(姜謙) 등과 더불어 선왕의 일을 거짓 꾸며서 서로 전하여 말하고 사초에 썼으니 이목과 허반도 목을 베어 죽이는 형벌에 처하고, 강겸은 곤장 백 대를 치고 가산을 적몰하여 먼 변방에 보내어 관노를 만들게 한다.표연말(表沿沫)ㆍ홍한(洪瀚)ㆍ정여창(鄭汝昌)ㆍ무풍부정(茂豐副正) 총(摠) 등은 난언죄(亂言罪)를 범했고, 강경서(姜景敍)ㆍ이수공(李守恭)ㆍ정희량(鄭希良)ㆍ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언을 알고도 고하지 아니하였으니 아울러 곤장 백 대를 치고 3천 리 밖으로 귀양 보낸다.이종준(李宗準)ㆍ최부(崔溥)ㆍ이원(李黿)ㆍ이주(李冑)ㆍ김굉필(金宏弼)ㆍ박한주(朴漢柱)ㆍ임희재(任熙載)ㆍ강백진(康伯珍)ㆍ이계맹(李繼孟)ㆍ강혼(姜渾)은 모두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혹은 나라의 정치를 비방하여 세상의 일을 비평했으니, 임희재는 곤장 백 대를 치고 3천 리 밖으로 귀양 보내고,이주는 곤장 백 대를 쳐서 먼 변방에 부처시키고, 그 나머지 사람은 모두 곤장 80대를 쳐서 먼 지방에 부처시키되 귀양 간 사람들은 모두 봉수(烽燧)ㆍ노간(爐干)의 역을 맡게 한다. 성중엄(成重淹)은 곤장 80대를 쳐서 부처시키고, 이의무(李宜茂)는 곤장 80대를 쳐서 도년(徒年)에 처한다. 역사를 편수하는 관원으로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않은 어세겸(魚世謙)ㆍ이극돈(李克墩)ㆍ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ㆍ김전(金詮) 등은 관직을 파면시키고, 홍귀달(洪貴達)ㆍ조익정(趙益貞)ㆍ허침(許琛)ㆍ안침(安琛) 등은 좌천시킨다. 신하가 무장(無將)하고 이미 부도한 죄를 처단하였으니,우레 소리 섞인 비가 내림으로써 마땅히 정국이 혁신되는 은혜를 입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에 좌의정 한치형(韓致亨) 등은 나아가 경하하였다. 《이세영일기》
○ 유자광은 바라던 일을 이루었으므로 의기양양하여 집에 돌아왔다. 이후로부터 자광의 위엄이 조정과 민간에 군림하였으니 조정에서는 그를 독사처럼 대하여 감히 그 뜻을 거스리지 못하고, 유림들은 기운이 꺾여서 발을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학문하는 곳은 두서너 달 동안에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고,부형들은 서로 경계하기를, “학문은 과거나 볼 만하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많이 하리오.” 하였다. 유자광은 스스로 훌륭한 계책을 얻은 듯이 꺼리는 일이 없었으니, 이익만을 탐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리들이 문간에 가득 차게 되었다. 견식이 있는 이는 가만히 탄식하기를, “무술년의 옥사는 정인(正人)이 간악한 무리를 공격한 것이고, 무오년의 옥사는 간악한 무리가 정인의 무리를 죄에 빠뜨린 것이다.20년 사이에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패했으니 나라의 치란도 이에 따라 달라졌다. 대개 군자가 형벌을 쓸 적에는 항상 너그러이 시행하는 데서 실수가 생기고, 소인이 원망을 보복할 적엔 반드시 남김없이 멸망시키고야 마니, 무술년에 군자들이 그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였더라면 어찌 오늘의 화가 있었으리오.” 하였다. 《유자광전》
○ 윤필상ㆍ노사신ㆍ한치형 등에게 각기 반당(伴倘 배종(陪從)하는 하인) 10명ㆍ노비 13명ㆍ구사(丘史) 7명ㆍ밭 100결(結)ㆍ옷의 안팎 감ㆍ구마(廐馬) 등 물건을 내려 주고 유자광 이하 사람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의금부 도사들에게는 말을 하사하였다. 《이세영일기》
○ 김종직의 죄를 추론(追論)할 때에 대간이 생전의 관작만 깎아 버리자고 청하였더니, 너무 가벼운 벌을 논했다는 이유로 모두 죄를 입었다. 《점필재문집(佔畢齋文集)》은 조위(曹偉)가 편집하고 홍석견(洪錫堅)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 간행하였는데, 조위는 연경(燕京)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홍석견은 유자광이 구원하여 중한 형벌을 면하게 되었으니,함양(咸陽) 사람들이 김종직의 사우(祠宇)를 세우고자 할 때 홍석견이 “이것은 그의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지 고을에서 공적으로 의논할 일은 아니다.” 고 하였으므로 이때에 유자광은 이 일을 들어 홍석견을 구원하였다. 《이세영일기》

[주D-001]사대(四大)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 있는 말인데, 도(道)ㆍ천(天)ㆍ지(地)ㆍ왕(王)의 네 가지가 크다는 것이다.
[주D-002]오상(五常) :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의 다섯 가지를 말한다.
[주D-003]6국(國) :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한(韓)ㆍ위(魏)ㆍ조(趙)ㆍ제(齊)ㆍ초(楚)ㆍ연(燕)의 여섯 나라를 말하는데, 모두 진(秦)에게 멸망 당하였다.
[주D-004]진승(陳勝) : 진(秦)의 2세 황제 때에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킨 사람.
[주D-005]건부(乾符) : 왕위를 말한 것이다.
[주D-006]당고(黨錮) : 동한(東漢) 말년에 간신들이 천하의 명사(名士)를 명당(明黨)이란 죄명으로 일망타진하여 금고시킨 것을 말하는데, 금고라는 것은 다시 벼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주D-007]봉수(烽燧)ㆍ노간(爐干)의 역 : 산 위의 봉화를 관리하고 관청의 횃불을 맡은 천역.
[주D-008]신하가 무장(無將)하고 : “신하는 장(將)함이 없어야 하는데 장하면 반드시 베인다.[人臣無將 將則必誅]”는 말이 《춘추전(春秋傳)》에 있는데, 여기서 장은 장차 임금을 어떻게 하려 한다는 뜻이다.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갑자년의 사화

갑자년 봄에 임금은 그 어머니가 비명에 죽은 것을 분하게 여겨 그 당시 논의에 참여하고 명을 수행한 신하를 모두 대역죄로 추죄(追罪)하여 팔촌까지 연좌시켰으니, 그때 사약을 가져갔던 승지 이세좌(李世佐)의 친족도 연좌되어 화를 입었다. 《국조기사》
윤필상(尹弼商)ㆍ한치형(韓致亨)ㆍ한명회(韓明澮)ㆍ정창손(鄭昌孫)ㆍ어세겸(魚世謙)ㆍ심회(沈澮)ㆍ이파(李坡)ㆍ김승경(金升卿)ㆍ이세좌(李世佐)ㆍ권주(權柱)ㆍ이극균(李克均)ㆍ성준(成俊)을 십이간(十二奸)이라 하여 어머니를 폐한 사건에 좌죄(坐罪)시켜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윤필상ㆍ이극균ㆍ이세좌ㆍ권주ㆍ성준은 죽음을 당하고 그 나머지는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으며, 심하게는 시체를 강물에 던지고 그 자제들을 모두 죽이고 부인은 종으로 삼았으며 사위는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연좌되어 사형에 처할 대상자 중에 미리 죽은 자는 모두 송장의 목을 베도록 하고 동성의 삼종(三從)까지 장형(杖刑)을 집행하고 여러 곳으로 나누어 귀양보내고, 《미수기언》에는, “한치형ㆍ윤필상ㆍ이극균ㆍ이파ㆍ성준ㆍ이세좌는 모두 그 가족을 멸망시켰다.” 하였다. 또 그들의 집을 헐어 못을 만들고 비(碑)를 세워 그 죄명을 기록하였다. 《미수기언》ㆍ《풍암집화》
○ 옥당의 여러 신하 즉 권달수(權達手)ㆍ박은(朴誾) 등도 모두 참혹한 형벌을 받았으니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국조기사》
○ 폐주의 음란한 행실과 잔학한 행위가 한창일 때 어떤 사람이 언문(한글)으로 폐주의 악행을 기록하여 거리에 붙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고하자 임금은 “이것은 그 당시 죄를 입은 사람의 친족들이 한 짓이다.” 하고 귀양간 사람을 다 잡아다 곤장을 치고 참혹하게 고문하였다. 또 온 나라에 언문을 익히지 못하게 하였다. 《동각잡기》
이때 신수영(愼守英)이 임금에게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렸는데, “익명서(匿名書)로 조정을 비방한 것은 죄를 지은 자들이 마음에 불평을 품고 원망한 것입니다.” 하여 드디어 갑자년에 사화가 있게 되었다. 《미수기언》
○ 봄에 응교 권달수와 이행(李荇) 등을 옥에 가두었는데, 권달수는 사형에 처하고 이행은 곤장을 쳐서 충주(忠州)로 귀양보냈다. 《용재집(容齋集)》 위의 윤비 복위(尹妃復位) 조에 상세하다.
○ 4월에 박은을 동래로 귀양보냈다가 6월에 서울 옥으로 옮겨 가두어 혹독한 고문을 하고 마침내 사형에 처하였다. 이행은 박은의 일에 연좌되어 다시 곤장을 치고 유배지로 돌려 보냈다. 《용재집》
○ 엄숙의(嚴淑儀)와 정숙의(鄭淑儀)를 안뜰에서 함부로 마구 때려서 죽이고, 즉시 그 흔적을 없애 버렸다. 그의 아들 안양군(安陽君) 항(㤚)과 봉안군(鳳安君) 봉(㦀)도 섬에 귀양보냈다가 조금 후에 죽였다. 인하여 말하기를, “행과 봉은 이미 그 아내와 인연을 끊었으니 그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라.” 하였다. 《연산사적록(燕山事蹟錄)》
이때 임금이 성을 내어 엄숙의와 정숙의를 때려 죽이니, 소혜왕후(昭惠王后)는 병들어 자리에 누웠다가 갑자기 일어나 바로 앉으면서, “이 사람들이 모두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니, 폐주가 자신의 머리로 몸을 들이 받았다. 이에 왕후는 “흉악하구나.” 하며 자리에 눕고 말하지 아니하였다. 《소문쇄록》
○ 이보다 앞서 임사홍(任士洪)과 박효원(朴孝元) 등은 서로 결탁하여 간악한 짓을 하므로 성종(成宗)은 그들이 정치를 어지럽게 할 사람인 줄 알고 쓰지 아니하였다. 임사홍의 아들 광재(光載)는 예종(睿宗)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숭재(崇載)는 성종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숭재는 성질이 음흉하고 간사하기가 그 아버지의 배나 더하였다.남의 첩을 빼앗아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그를 매우 총애하여 그의 집에 자주 행차하였다. 이에 사홍은 임금을 뵈옵고 울면서, “폐비(연산군의 어머니) 는 엄숙의ㆍ정숙의 두 사람의 참소로 사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은 드디어 두 사람을 죽이고 무도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여 조정에 있는 신하 백여 명을 죽였으니,지위가 높고 행동이 점잖은 사람과 명분과 절의를 지키는 선비 중에 죽음을 면한 이가 드물었다. 이 일은 모두 임사홍이 사적인 감정을 품고 임금을 유도한 것이다. 《국조기사》
○ 우리 조정(이조(李朝))에서 많은 인재를 배양한 것으로 치자면 성종만한 임금이 없었으나, 다만 임사홍의 간사함을 알지 못하여 채수(蔡壽) 등이 사홍을 논박할 때 그들을 함께 물리침으로 해서 임사홍의 간사함을 천천히 길러 연산군의 음란하고 포악한 행실을 돕게 하여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할 뻔 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축수편>
○ 공신옹주(恭愼翁主) 엄씨(嚴氏)가 낳았다. 는 한경침(韓景琛)에게 시집가서 일찍이 혼자 되었는데, 이 때에 아산(牙山)으로 귀양가면서 신주를 안고 가서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울고 전(奠)을 드렸다. 중종(中宗) 2년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9월 29일에 전교하기를, “무오년 사초 사건으로 그 무리들을 지방으로 귀양보냈는데, 그 당시에 간사하고 음흉한 무리들이 사사로운 정리로 죽일 자를 살리고 살릴 자를 도리어 죽였으니 이 무리들을 두었다가 어디 쓸 것인가. 모두 잡아 오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무오년의 무리들은 재주를 믿고 서로 결탁하여 조정의 일을 비난했으니, 난신을 처단하는 전례대로 모두 죄를 더 주라.” 하였다. 《국조기사》
○ 10월에 남효온(南孝溫)을 추형(追刑)하여 관을 쪼개고 시체의 목을 베었다. 그 아들 충세(忠世)도 죽였다.
성종 신묘년에 남효온이 소를 올려 소릉(昭陵)을 회복하자고 청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이때에 와서 역적으로 지목되고 죄 없는 사람도 얽어서 죄를 만들어 모두 죽였다. 갑자년의 사화는 무오년보다도 더 심하였다. 《국조기사》
○ 참찬 홍귀달(洪貴達)ㆍ응교 권달수(權達手)ㆍ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ㆍ이조 정랑 이유녕(李幼寧)ㆍ정자(正字) 변형량(卞亨良)ㆍ전한(典翰) 이수공(李守恭)ㆍ사간 곽종번(郭宗藩)ㆍ헌납 박한주(朴漢柱)ㆍ사간 강백진(康伯珍)ㆍ응교 최부(崔溥)ㆍ홍문 박사(弘文博士) 성중엄(成重淹)ㆍ좌랑 이원(李黿)ㆍ김굉필(金宏弼)ㆍ신징(申澄)ㆍ직제학 심순문(沈順門)ㆍ대사간 강형(姜詗)ㆍ직제학 김천령(金千齡)ㆍ부제학 정인인(鄭麟仁)ㆍ정언 이주(李冑)ㆍ보덕 조지서(趙之瑞)ㆍ승지 정성근(鄭誠謹)ㆍ현감 정여창(鄭汝昌)ㆍ정랑 성경온(成景溫)ㆍ교리 박은(朴誾)ㆍ참판 조위(曹偉)ㆍ감사 권주(權柱)ㆍ정랑 강겸(姜謙)ㆍ승지 홍식(洪湜)ㆍ환관 김처선(金處善)은 혹은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라는 이유로 혹은 바른 말로 간했다는 이유로 모두 참혹한 화를 당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은 모두 시체를 욕보였다.
○ 9월에 지난 날 폐비의 휘호를 반대하던 것을 다시 추론(追論)하여 이행(李荇)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니 거의 죽을 뻔하였고, 12월에 사형을 감면하여 곤장을 치고 함안(咸安)에 소속된 관노로 삼았다. 《용재집》
○ 당양군(唐陽君) 홍상(洪常)은 함평(咸平)으로 귀양갔다가 얼마 뒤에 안성(安城)으로 옮겼다. 또 거제(巨濟)로 귀양갔다가 제주(濟州)로 옮겼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불러 돌아왔다. 《용재집》
○ 을축년 가을 8월에는 또 익명서(匿名書)로 인하여 이행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였고 병인년 1월에 거제(巨濟)로 귀양보냈다가 가을에 다시 잡아 가두고 죽도록 곤장을 치게 하였는데, 유배지로 떠나려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마침내 면하였다. <용재행장>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병인년에 정국(靖國)하여 중종(中宗)을 추대하다



폐주가 들로 사냥을 나갈 때, 당시 진성대군(晋城大君)이었던 중중(中宗)이 모시고 따라갔다. 사냥을 마치고 난 뒤에 임금은 준마를 타고서 중종에게 말하기를, “나는 흥인문(興仁門)으로 들어갈 터이니 너는 숭례문(崇禮門)으로 들어오라. 나보다 뒤에 오면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하니 중종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영산군(寧山君) 전(恮)이 가만히 아뢰기를, “걱정마십시오.내 말은 임금이 타신 말보다 매우 빠른데, 내가 아니면 제어할 수 없습니다.” 하고, 즉시 하인 옷으로 바꾸어 입고 말고삐를 잡고 따라가니 말이 나는 듯이 달려갔다. 대궐 문에 이르니 조금 후에 임금이 이르렀다. 이에 중종이 죽음을 면하였으니 사람들은 “영산군과 그 말은 모두 중종을 위하여 때를 맞추어 난 것이다.” 하였다. 《부계기문(涪溪記聞)》 ○ 영산군은 곧 중종의 서형(庶兄)인데 그 당시 이름이 있었다. 후에 이과(李顆)의 옥사에 관련되어 정국공신(靖國功臣)에게 살해되었다 한다. 살펴보건대 이과의 옥사는 중종 2년에 있었고, 영산군은 중종 8년에 막개(莫介)가 반역을 고발한 박영문(朴永文)ㆍ신윤무(辛允武) 등의 옥사에 관련되어 귀양갔다가 이홍간(李弘幹)의 아룀으로 인하여 석방되었다.
○ 성희안(成希顔)은 성종(成宗) 때에 옥당에 뽑혀 들어가서 은혜와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 폐주가 왕위를 이은 뒤에 양화도(楊花渡) 혹은 망원정(望遠亭)이라 한다. 에 임금을 따라 놀러 갔다. 따라간 신하들에게 시를 짓도록 명하자 성희안이 “임금은 본래 청류(淸流)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글귀를 지으니, 임금이 매우 노하여 자신을 비난하는 글이라고 여겼다.이로 인해 드디어 이조 참판의 벼슬자리에서 떨어져 집에 있었다. 성희안은 평소에 뛰어난 지략이 있었는데 폐주의 어지러운 정사가 날로 심해지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반정(反正)할 뜻이 있었다. 그러나 함께 계획할 사람이 없으므로 도와줄 이가 없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중추 박원종(朴元宗)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처남인데,부귀한 집에서 자라났으나 기상이 크고 얽매임이 없어 시정(市井)에 드나들다가 무과에 올라 중요한 관직을 두루 지냈다. 풍채가 좋고 일찍 귀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무사들이 그를 높이 받들었다. 마침내 기절을 꺾고 글을 읽어 대의에 통하여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다. 또 그 누이가 임금에게 몸을 더렵혀 병이 나서 죽은 것으로 인하여 마음 속으로 항상 불평을 품고 분하게 여기었다.성희안은 박원종이 큰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여겼으나 서로 교분이 없었다. 동리 사람 신윤무(辛允武)란 이가 두 집에 다니면서 매우 친근하였으므로 성희안이 신윤무를 시켜 가만히 의향을 물어보니 박원종은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면서, “이는 내가 밤낮으로 마음 속에 품고 있던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성희안은 저녁에 박원종의 집으로 가서 서로 통곡하고,“우리가 평생에 충성과 절의를 지켜 왔으니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입니다. 대장부의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렸으니, 종사의 위태함이 경각에 있음을 보고 어찌 구제하지 않으리오.” 하고, 드디어 의논을 결정하였다. 몇 개월 지나는 동안 스스로 고립되어 성공하기 어려움을 염려하다가,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이 당대의 명망 있는 이라 그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그들의 의사를 알리니,유순정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이왕 이 일에 참여하여 들었으므로 마지못하여 따라올 뿐이었다. 드디어 신윤무와 군기시 첨정 박영문(朴永文)ㆍ사복시 첨정 홍경주(洪景舟) 등에게도 두루 알려서 각기 동지를 불러 모으게 하니 모여든 자는 대개 무사가 많았다. 이들은 의리는 헤아리지 않고 공을 세우기를 좋아했으므로 의논함이 없어도 의견이 서로 맞아 곳곳에서 좋아 날뛰었다. 《음애일기》 《동각잡기》
○ 박원종 등은 귀양갔던 이과(李顆)가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수령들과 함께 본도(本道)의 군사와 군마를 거느리고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시기를 앞당겨 먼저 거사하였다. 《기묘속록(己卯續錄)》
이때 유빈(柳濱)ㆍ이과ㆍ김준손(金駿孫) 등은 호남으로 귀양가 있었는데, 임금의 음란함이 날로 심하여 사직이 위태로움을 보고 중종(中宗)을 추대하려고 격서(檄書)를 서울로 보냈는데, 그 격서가 이르기 전에 벌써 반정(反正)이 되었다. 그 격서의 대략에, “태조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서 나라를 창업하였으며,세종은 덕화가 밝았고 성종(成宗)은 한결같이 선대의 법도를 따라 용도를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였기에, 백성이 편안하고 물질은 풍성하여 태평한 세상이 되었더니 뜻밖에 뒤를 이은 임금이 포학 무도하여 부왕의 후궁을 때려 죽이고, 옹주와 왕자를 귀양보내 죽이었다. 간언을 올리는 대간을 귀양보내고 죽였으며, 대신을 욕보이고 충직하고 선량한 신하를 죽여,이들 부자ㆍ형제들까지 연좌시키는 것이 진(秦) 나라 법보다 더 심하였다. 무덤을 파서 해골에까지 화가 미치게 되었으니 시체를 토막토막 베는 형벌과 뼈를 부수는 형벌은 무슨 형벌인가. 남의 아내와 첩을 빼앗아 마음대로 음욕(淫慾)을 행하고 남의 집을 부수어 원유(園囿)를 넓히었다. 선왕의 능침은 모두 여우와 토끼의 놀이터가 되고, 선성(先聖)의 사우(祠宇)는 곰과 범을 기르는 우리로 변하였다.세금을 한없이 많이 거두니 백성들은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종실 형제들의 아내와 첩까지도 핍박하여 서로 간통하고, 삼년상은 예로부터 다 행하는 것인데도 그 기한을 짧게 줄이고, 부모의 기일도 또한 모두 폐지시켰으니, 인륜은 무너지고 인도가 없어졌다. 그밖에 토목 공사와 노래ㆍ여색을 즐기고 못을 파며 대(臺)를 쌓고 사냥을 일삼으며 새ㆍ짐승과 화초를 좋아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많은 죄가 걸ㆍ주(桀紂)보다도 오히려 더 심하니, 백성들의 한때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만일 크게 간악한 자가 신기(神器 왕위(王位))를 엿보아 하루 아침에 일어난다면 왕조가 바뀌는 화가 생길 것이 두렵다. 성종이 26년 동안 신하들을 잘 대우하고 충의(忠義)를 배양한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이다.진성대군(晋城大君)은 성종대왕의 친 아드님이니 어질고 덕이 있어 온 나라의 칭송이 그에게 돌아간다. 이에 아무 아무 등은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아무 달 아무 날에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격서를 모든 도에 돌려서 기일을 약속하여 서울로 모일 것이니, 조정에 있는 공경(公卿)과 백관들은 마땅히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종실의 위태함을 붙들라. ……” 하였다. 《동각잡기》
○ 병인년 9월 2일에 폐주가 장단(長湍)의 석벽(石壁)에서 놀고자 할 때 따라가는 재상들에게 다만 하인 한 사람만 데리고 가게 하였다. 성희안(成希顔)은 그날 성문을 닫아 막고 진성대군을 추대하기로 벌써 계획이 이루워졌는데 폐주가 마침 장단에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였다. 장수와 병졸들은 분발하려는 생각에 기밀한 일이 이미 누설되었으므로 형세가 중지할 수 없게 되었다.이에 초하룻날 밤중에 장수와 병졸들을 훈련원에 모이게 하니 약속을 같이 한 모든 벼슬아치ㆍ군사ㆍ백성들과 풍문을 들은 자들이 다투어 달려왔으므로 골목과 길이 꽉 막히었다. 이에 부서를 나누어 변수(邊修)와 최한홍(崔漢洪)은 내성(內城) 동쪽을 지키게 하고 심형(沈亨)과 장정(張珽)은 내성 서쪽을 지키게 했는데, 창졸간에 군사가 없으므로 역군(役軍)들을 몰아서 호위하게 하였다. 성희안은 유순정ㆍ박원종과 함께 바로 광화문(光化門) 혹은 돈화문(敦化門)이라고도 한다. 앞 수백 보 쯤 되는 지점에 나아가서 말을 세우고 진을 쳤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밤 삼경에 창덕궁(昌德宮) 어귀에 진을 쳤다.” 한다. 박원종은 부채를 휘두르며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그 모습이 신과 같아 모두 “이 일을 먼저 발의한 이는 반드시 박영공(朴令公 박원종)일 것이다.” 하였다. 《음애일기》ㆍ《동각잡기》
○ 처음에 성희안이 우의정 김수동(金壽童)에게 가서 이 계획을 고하니 김수동은 “이는 나라의 큰 일이오. 나는 애초에 그 일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데 갑자기 한 재상의 말만 듣고 바쁘게 서둘 수 있겠는가.” 하고 곧 베개를 베고 누우면서, “그대는 내 머리를 베어 가라.” 하고 이어 목을 내밀어 책상 위에 얹었다.성희안이 진성대군을 세운다는 뜻을 고하니, 수동은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갈 것이니 그대는 먼저 가시오.” 하였다. 성희안이 일어나 나가자 수동은 천천히 의관을 정제하고 사람들을 벽제(辟除)하면서 왔다. 이때 성희안과 박원종 등은 모두 군복을 입고 창덕궁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김수동은 진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서는 곧장 윗자리로 가 앉았다.즉시 병조 판서를 불러, “그대들은 사람을 보내 진성대군(晋城大君) 집을 호위했느냐?” 하니, “미처 못했습니다.” 하므로, “마땅히 판서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호위하라.” 하였다.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해동악부》
○ 이때 형조 정랑 장정(張珽)이 칼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와, “진성대군의 저택이 매우 허술한데 어찌 시위를 아니하는가.” 하니, 세 대장(大將 성희안ㆍ박원종ㆍ유순정)은 두 손을 마주 잡으면서, “우리들의 실수이다.” 하였다. 이에 드디어 심순경(沈順經)을 보내어 위사(衛士)를 거느리고 가서 호위케 하니, 장정은 후에 일등공신으로 책정되었다. 《기재잡기》
운수군(雲水君) 효성(孝誠) 덕천군(德泉君)의 둘째 아들이다. 이등공신으로 책정되었다. 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시위하게 하였다. 《기묘속록》
○ 신윤무(辛允武)를 시켜 용사 이심(李)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연산군을 꾀어서 악한 짓을 하게 한 신수영(愼守英)을 먼저 쳐 죽이고 그 다음은 임사홍(任士洪) 좌참찬 과 신수근 좌의정 등을 쳐 죽이게 했으니, 신윤무는 이심을 시켜 쇠몽둥이를 가지고 길 왼쪽에 숨어 있게 하고,한편 별감 한 사람을 시켜 명패를 가지고 가서 대궐에 가도록 그들을 재촉하게 하였다. 그들이 놀라서 창황히 대궐로 가는데 이심이 힘껏 내려쳐서 말에서 떨어 뜨리니 머릿골이 다 쏟아져 나왔다. 신수근도 맞아서 땅에 떨어지니 종 하나가 그 위에 엎드려 제 몸둥이로 쇠몽둥이를 막았다. 이에 이심은 드디어 종까지 함께 쳐 죽였다. 신수겸(愼守謙)은 이때 개성 유수였으므로 일이 성공하기를 기다려 천천히 사람을 보내어 죽이기로 하였다.
신수근 등이 비록 권세를 빙자하고 임금의 총애를 믿어 사치하고 방자하였으나, 그 당시에 음란한 임금에게 아부하여 나라의 근본을 기울게 한 자가 어찌 그 사람뿐이리오. 그런데 홀로 이 세 사람만 베어 죽인 것은 신수근이 본래 교만하고 방자스러워 법규에 따르지 않았으며, 또 국구가 되면 세력이 강하여 제어할 수 없게 될까 염려한 까닭이었다. 《음애일기》
○ 이심은 네 사람을 죽였으므로 튀긴 피가 얼굴에 가득히 묻었고 의복도 전부 붉게 물들었다. 그 공로를 남에게 보이고자 며칠이 지나도록 낯을 씻지도 않았으며 옷을 바꾸어 입지도 않았으니, 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추하게 여겼다. 《음애일기》
○ 처음에 반정하려는 의논이 결정될 적에 세 대장이 “아무 아무는 죽여야 된다.” 하였는데, 강혼(姜渾)의 이름도 나왔다. 일을 일으키던 날에 유순(柳洵)을 묵은 정승이라 하여 부르니 유순이 달려갔다. 이때 시간이 삼경도 되지 않았는데 벽제(辟除)를 하면서 대궐에 나아가는 도승지 강혼을 만났다.이에 유순이 하인을 시켜 이르기를, “오늘은 너무 이르니 반드시 경고(更鼓)의 시간을 잘못 들었을 것이오. 영감(令監)은 내가 가는 대로 꼭 따라 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말 못한 일이 있을 것이오.” 하니, 강혼은 의아스럽게 여겨 이내 그 뒤를 따라갔다. 남소문(南小門) 어귀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훈련원에 사람과 말이 빽빽히 들어차고 등불이 휘황하였다. 유순은 말을 멈추면서,“오늘은 나를 뒤따라 잠시도 떠나지 마시오. 큰 일이 닥쳐 왔소.” 하니, 강혼은 그제야 매우 두려워하여 말에서 내려 유순을 가깝게 따라 나아가니 세 대장은 유순을 보고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하였다. 자리에 앉은 뒤에 박원종이 눈을 부릅뜨고 강혼을 보면서, “이 이가 누구요?” 하니 유순은 “강혼인데 내가 데리고 왔소.” 하였다. 박원종이 “전에 약속이 있어 먼저 죽이기로 했으니 지금 남겨둘 수 없소.” 하니,유순은 움찔하면서 말이 없었다. 유순정이 이를 보고 급히 박원종에게 “지금 요란한 시기에 서기(書記)할 사람이 없으니 서기를 맡겼다가 뒤에 죽여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박원종이 투덜거리다 말았다. 강혼은 드디어 소매를 걷어 올리고 붓을 잡고 이쪽 저쪽 다 받아 써서 능히 알맞게 하니 모두 다 잘한다고 하였다. 결국은 공신으로 책정되어 진천군(晋川君)이 되었다.
이로부터 강혼은 유순을 부형처럼 섬겨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가서 뵈옵고 새로운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올렸다. 유순이 죽은 후에는 그 부인을 섬겨 조금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기재잡기》
○ 구수영(具壽永)은 임금의 음란한 행실을 인도하고 악을 퍼뜨린 죄가 있어 아울러 죽이려고 했는데, 그 족질(族姪) 구현휘(具賢暉)가 반정의 계획에 참여했으므로 구수영에게 달려가서 고하였다. 구수영이 훈련원에 나아가서 살려주기를 애걸하니 박원종 등이 그를 용서해 주었다. 《음애일기》
구현휘는 곧 구수영의 동성(同姓) 서얼(庶孼)이었다. 용력(勇力)이 뛰어나 세 공신(성희안ㆍ박원종ㆍ유순정)의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곧 일을 일으키려 할 때 장차 구수영이 화를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세 공신이 밤에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수영에게 가만히 알려서 술과 안주를 가지고 함께 세 공신이 모인 곳으로 나아갔다.구수영은 구현휘의 소개로 세 공신을 보고, “일찍이 평소 궁궐에 드나들면서 올바른 말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임금의 뜻을 감히 거스리지 못하고 명대로 거행한 일이야 어찌 없었다 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척당이 된 관계로 처지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또 사위 구수영의 사위 두 사람은 안양군(安陽君) 항(㤚)과 임희재(任熙載)이다. 가 화를 입고난 뒤에는 더욱 감히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할 수 없었지마는 그 본 마음이야 어찌 척당의 연줄을 타고 또 그것을 믿고서 다른 사람을 해친 일이 있겠습니까. 나를 용서하든지 죄를 주든지 다만 오늘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세 공신도 그렇게 여겨 같이 술잔을 나누고 헤어졌다. 마침내 반정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뒤에 공신을 책정할 때 구수영은 2등공신이 되고 구현휘는 3등공신이 되었다. 구씨가승(具氏家乘) ○ 《기재잡기(寄齋雜記)》에는, “구수영은 박원종 등이 광화문(光化門) 밖에서 진을 쳤다는 말을 듣고 온 집안이 목놓아 울었다. 한 건장한 종이 있어,‘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으니 어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습니까.’ 하고 급히 좋은 안주와 술을 갖추어 말을 타고 종들을 거느리고 벽제 소리를 내며 몰려 가서 세 대장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세 대장은 밤새도록 한데서 앉아 있었으므로, 시장하여 먹고 싶던 차에 종이 안주와 큰 술잔을 차례로 바쳤더니 여러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묻지도 않고 문득 너댓 잔씩 다 마시고 나서야,‘이것이 뉘집 물건이냐?’ 고 물으니 종은 구수영을 가리키면서, ‘구대감께서 가져온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세 대장은 서로 돌아보면서 깜짝 놀랐다. 종은 ‘오늘의 모임에는 이것이 큰 공을 이룰 것인데 이것이 아니면 여러분들이 매우 시장하신데 어찌 큰 일을 마칠 수 있습니까.’ 하여, 드디어 구수영이 공신으로 책정되었다.” 하였는데,이 말은 너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광화문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는 사람들을 살리고 죽이고 할 명부를 이미 만들어 의논을 정하고 있었다.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면 당장 국구가 될 사람도 오히려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찌 좋은 술과 안주의 공으로 이심(李)의 쇠몽둥이를 피하고 도리어 공신으로 책정되었으랴.또 과연 술과 안주로 화를 면했다면 어찌 2등공신 13명 안에 들어갈 수 있으리오. 기재(寄齋)의 시대는 음애(陰涯) 보다도 더욱 멀었으니 전문(傳聞)이 잘못되었음은 괴이할 것이 못된다.
○ 이때 여러 사람의 의논이 “유자광(柳子光)은 일을 많이 겪어 꾀가 많으니 이 일을 알리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거사할 임시에 이르러서야 사람을 보내어 일러주고 또 만약 숨거나 머뭇거리면 때려 죽이겠다고 경계하였다. 유자광은 이 말을 듣고 말을 타고 군복을 입고 나갔다. 또 심부름하는 종을 시켜 두꺼운 유지(油紙) 비옷을 싸 가지고 따라오게 하니,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진중(陣中)에 와서 장수와 병졸을 파견할 때 급작스러워서 부신(符信)을 만들 만한 것이 없었다. 곧 유지를 오려서 부신을 만드니 사람들은 그 지혜에 탄복하였다. 《동각잡기》
○ 박원종은 심순경(沈順徑)과 더불어 교분이 매우 가깝고 정의가 아주 친하여 서로 간격이 없었으나 큰 계획이 결정되지 않은 날에는 오히려 감히 그 일의 단서를 발표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심순경을 대하여 술낌에 종사가 위태한 사실과 정사의 어지러운 일을 말하여 그 의사를 알아보니 심순경도 또한 동감임을 표시하였다.박원종은 그 누이가 죽으면서 반드시 원수를 갚아 달라는 부탁이 있었음을 남김없이 말하고 심순경은 또 그 가문의 화가 참혹했던 것을 말하였다. 이에 눈물을 거두고 의논을 정하고 나서는 비록 처자와 형제일지라도 이 일을 알리지 아니하였다. 일을 일으키는 날에 심순경은 그 어머니에게 “오늘은 여러 친구들과 교외에서 무예를 연습하고 활 쏘기를 겨루고자 하니 술을 마시고 얼근히 취해서 가겠습니다.” 하니 어머니가 술을 주었다.술을 다 마시고 난 후에 꿇어앉아 술 한 잔을 그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이것은 어머니의 장수를 비는 장수 술잔입니다.” 하니, 그 어머니는 웃으면서 받았으니 실상 그것이 영결하는 것인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의 누이는 종실 안현군(安賢君)의 아내인데 또한 술잔을 드리고 헤어졌다. 드디어 군기(軍器)와 군장(軍裝)을 검열하고 모두 가져 가서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았으나 집안 식구는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밤이 새고 일 되어 가는 기틀이 잡힌 뒤에야 그 기미를 깨달았다. 그 누이는 남편과 함께 이불을 쓰고 서로 붙들고 울면서, “나는 죄를 많이 얻었으니 장차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인정도 적구나. 이 사람아, 친동기가 한 방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알리지 않는구나.” 하였다. 안현군은 대개 종실 중에서 임금의 악을 인도하여 사랑을 받은 자였다.그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민망히 여겨 곧 사람을 시켜 심순경에게 말하였다. 순경이 박원종에게 간청하여 안현군을 불러서 일을 같이 하게 하여 마침내 공신에 참여되었다. 《기재잡기》
○ 폐인(嬖人 임금에게 총애 받는 내시 등) 전동(田同)ㆍ김효손(金孝孫)ㆍ강응(姜凝)ㆍ심금손(沈今孫) 등을 군영(軍營) 앞에서 베어 죽였다. 감옥의 문을 열어 죄수들을 내놓아 모두 군에 참가하게 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대궐 밖으로 진군하였다.
○ 해가 뜰 무렵에 벼슬아치들이 모두 모였으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 자도 있었다. 입직한 도총관 민효증(閔孝曾)과 참지 유경(柳涇)은 먼저 나가고 승지 이우(李堣)는 그 다음에 나갔다. 처음에 대궐 안에서는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까닭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임금은 차비문(差備門) 안에 앉아 승지를 불러 들어와 앉게 하고서,“이 같이 태평한 때에 어찌 다른 변고가 있으랴. 아마 흥청(興淸)의 본부(本夫)들이 서로 모여서 도적질하는 것이니 빨리 정승과 금부 당상을 불러 처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이우를 명령하여 열쇠를 가지고 대궐문을 돌아 다니면서 살피게 하였다. 이우는 먼저 사람을 보내어 사태를 알아 보게 하고 조정이 벌써 소속된 데가 있는 것을 자세히 알고는 그만 몸을 피해 밖으로 나가 버렸다.폐주는 이우가 벌써 나갔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서 윤장(尹璋)과 조계형(曹繼衡)의 옷소매를 잡았다. 두 사람은 거짓으로 공손히 하는 척하면서 소매를 뿌리치고 문구멍으로 빠져 나가려고 하였으나 조계형은 이때 임금의 총애를 받던 신하이므로, 문을 지키던 장사들이 상을 받으려고 붙들어 군영 앞에 나아갔다. 성희안(成希顔) 등은 그들을 모두 용서해 주었다.입직한 군사들은 혹은 수구(水口)로 빠져 나오기도 하고 혹은 성에서 줄에 매달려 넘어오기도 하며 다투어 군영 앞으로 달려갔다. 환관과 여러 색인(色人 궁중의 잡무를 맡는 사람들) 등은 모두 나가고 다만 후궁과 기생의 무리만이 서로 모여 목놓아 우니 소리가 밖에까지 진동하였다. 이에 군문(軍門) 안에서 회의를 열어 유자광(柳子光)ㆍ이계남(李季男)ㆍ김수경(金壽卿)ㆍ유경(柳涇)으로 하여금 머물러서 대궐 문을 지켜 도주할지 모르는 폐주를 지키게 하고,성희안 등은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 문 앞에 나아가서 자순대비(慈順大妃 성종의 계비이며 중종의 어머니)에게 처분을 청하니 조금 후에 문을 열고 그들을 들어오게 하였다.
○ 대비에게 아뢰기를, “지금 임금이 임금의 도리를 잃고 정사가 어지러워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종사가 매우 위태하므로 모든 관원과 백성들은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임금을 삼기 위하여 감히 대비의 명을 받으려고 합니다.” 하니, 대비는 “우리 아이가 어찌 중한 책임을 감당하겠오.지금 세자가 나이 장성하였으니 왕위를 이을 만하오.” 하고 사피하였다. 이에 유순(柳洵) 등이 여러 번 아뢰어서 명을 받았다. 《국조보감》
○ 성희안 등은 근정전(勤政殿) 서쪽 뜰에 나아가서 줄지어 앉고 유순정ㆍ정미수(鄭眉壽)ㆍ강혼을 시켜 진성대군을 그의 사저에서 맞아 오게 하였다. 진성대군이 평시서(平市署)의 이웃집으로 피해 가니 유순정 등은 이문(里門) 밖에 앉아 두 번 세 번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였다.이에 임금은 군복 차림으로 연을 타고 법물(法物)을 갖추어 나오니 저자에서는 가게 문을 닫지 않고 부로(父老)들은 만세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오시(午時)에 경복궁으로 들어가서 해가 저물기 전에 백관의 반열을 정하였다.
○ 유순 등이 의논하기를, “옛날부터 임금을 폐하고 새로 세울 적에 그 죄를 따진 것은 창읍왕(昌邑王)을 폐할 때 뿐이니 지금도 마땅히 잘 조처합시다.” 하고 승지 한순(韓洵)과 내시 서경생(徐敬生)을 창덕궁으로 보내어 폐주에게 국새(國璽)를 내놓고 정전(正殿)을 피해 나가도록 청하였다. 폐주는 “내가 내 죄를 안다.” 하면서 곧 국새를 내어 상서원(尙瑞院)의 낭관에게 주었다. 미시(未時)에 백관들이 전정(殿庭)에 들어와서 반열이 정해졌다. 《국조보감》
○ 대비의 교지를 선포하였는데, “우리나라가 백년 동안이나 덕을 쌓아 백성의 마음에 흡족하여 만년토록 튼튼한 왕업이 마련되었는데, 불행히도 사군(嗣君 연산군)이 임금된 도리를 잃어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모든 신하들이 말하기를, ‘종사(宗社)가 중요하니, 진성대군 휘(諱) 은 일찍부터 인덕이 있어 백성의 마음이 모두 쏠리었다.’ 하여 세우기로 하였다.내가 생각하건대 어두운 임금을 폐하고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고금에 통하는 의리이니 이에 여러 사람의 소원에 따라 진성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임금은 페하여 연산군(燕山君)으로 삼는다. 백성의 생명이 끊어지려다가 다시 이어졌으며, 종묘와 사직이 이미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게 되었다.” 하였다. 《국조보감》
○ 중종은 면류관과 곤룡포를 갖추어 입고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으며 이가 중종(中宗)이 되었다. 부부인(府夫人) 신씨(愼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백관의 하례를 받고 교지를 반포하여 모든 죄인을 사면하였다. 연산주 때의 나쁜 정사를 모두 고치게 하니 신하들이 천세를 부르며 기뻐 고함치는 소리가 우레 소리와 같았다. 《국조보감》
○ 김수동(金壽童)이 대궐에 들어가서 연산주를 폐하고 울면서, “노신이 죽지 않고 있다가 차마 이 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너무 인심을 잃었으니 또한 어찌 하겠습니까. 잘 보중(保重)하여 가시옵소서.”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은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을 폐했던 고사(故事)에 따라 전왕(前王 연산주)을 대궐 안으로 나오게 하고 대비에게 주(主 연산주)를 폐한 사유를 고하고자 하니 성희안(成希顔) 등이 말렸다. 폐하고 난 후에 전한(典翰) 김전(金詮)은 눈물을 흘리고 장순손(張順孫)은 춤을 추었다. 《음애일기》 《해동악부(海東樂府)》
대체 반정의 일은 성희안에게서 계획이 나와 박원종이 완성하였다. 위태함을 편안하게 만들고 재화를 복으로 변하게 하였으니 실로 우리나라가 만세(萬世)토록 뻗어나갈 사업이었다. 그러나 성희안은 성품이 과단성은 있었으나 학술이 없었으며, 유순정(柳順汀)은 천성이 너그럽고 나약하여 집념(執念)이 없었으며, 박원종은 추솔하고 사나우며 견식이 없었다.비록 충성과 절의에 북받쳐 공을 이루게 되었으나 일처리에 마땅함을 잃었으니, 전에 입은 은혜로 적신 유자광을 용납하여 뒷날의 화를 열어 놓고 자질구레한 인아친척(姻婭親戚)들에게 모두 철권(鐵券)을 주었으며, 뇌물의 많고 적음으로 훈공의 등급을 정하였으니 연거속구(連車續狗)의 허물은 지금까지도 비난거리가 되었다.
○ 폐주 연산군을 교동(喬桐)에 안치시키고, 폐비 신씨(愼氏)를 정청궁(貞淸宮)으로 나가 있게 하며 폐세자(廢世子) 황()ㆍ창녕대군(昌寧大君) 인(仁)ㆍ양평군(陽平君) 성(誠)과 돈수(敦壽)등은 모두 가마를 타고 귀양가게 하였다. 《국조보감》
변이 일어나던 처음에 폐주는 급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오라 했는데, 측근자들은 이미 밖으로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이에 폐주는 창황히 달려 들어가서 왕비에게 함께 나가서 간절히 빌자고 하니, 왕비는 “일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빌어본들 무엇이 도움되리오. 순하게 받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전일에 여러 번 간해도 끝내 고치지 않다가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스스로 화를 초래한 사람이야 비록 죽어도 마땅하겠지마는 이 불쌍한 두 아이는 끝내 어찌될고.” 하며 이내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니, 폐주는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들 무엇하리오. 뉘우쳐도 어찌 할 수가 없다.” 하였다. 날이 새기 전에 왕비는 대궐에서 나가는데 신었던 비단 신이 자주 벗겨져서 갈 수가 없었으므로,비단 수건을 찢어 신을 동여 매었다. 세자와 대군은 유모와 함께 청파촌(靑坡村)의 무당 집에 나가 있었는데, 해가 저물도록 먹지 못했으므로 무당이 밥을 대접하였다. 대군이 “어찌 새끼 꿩을 올리지 않느냐?” 하니, 유모는 울면서, “내일은 이런 밥을 얻어 먹어도 다행일 것입니다.” 하였다. 이를 보는 자도 또한 눈물을 흘렸다. 《장빈호찬(長貧胡撰)》
○ 대신들은 폐주를 안치시킬 절목(節目)을 의논하여 나인 4명, 내시 2명, 반감(飯監) 1명만 따라가게 하고, 당상관 한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호위하여 가게 하였다. 연산군은 붉은 옷에 갓을 쓰고 띠도 띠지 않고 내전문으로 나와 땅에 엎드리면서,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였다.평교자(平轎子)를 타고 선인문(宣仁門)ㆍ돈의문(敦義門)을 나올 적에 갓을 숙여 쓰고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연희궁(衍禧宮)에 유숙하고, 금포(金浦)에 유숙하고, 통진(通津)과 강화(江華)에 유숙하고 교동(喬桐)에 당도하였다. 따라갔던 장수 심순경이 복명하기를, “아무 탈 없이 모시고 갔습니다. 가는 길에는 노인과 아이들이 모두 달려와서 다투어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통쾌하게 여겼습니다.안치소(安置所)에 도착해 보니 둘레에 친 울타리가 좁고 높아서 해를 볼 수가 없었으며, 다만 작은 문 하나가 있어 음식을 통하였습니다. 울타리 안에 들어가자 시녀들은 모두 목놓아 울었습니다. 신이 하직을 고하니 말씀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고 수고했으니 고맙다.’ 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중종(中宗)이 전교하기를, “전왕의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안되었다. 나는 종사가 위태하고 신민이 추대하므로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길 수 없어 사피하지 못하고 이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전왕은 나와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였고 정의로는 형과 아우이다. 지금 날씨가 점차 추워지니 의복과 음식물을 실어 보내라.” 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신 등은 폐주에 대한 대의(大義)가 이미 끊어졌으니 감히 마음을 쏠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전교는 지극한 정의에서 나온 것이오니 의복과 음식을 내려 보냄이 마땅하옵니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교동(喬桐)에는 반드시 털옷이 없을 것이니 털옷과 어물(魚物)을 따로 보내고자 한다.” 하니, “전하의 명은 지당하십니다. 그러하오나 지나치면 거북스러움이 있으니 간신히 배고픔과 추위만 면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연산군은 평소 소행이 한없이 잔인ㆍ패려하여 사람 죽이기에 거리낌이 없었으니, 폐위되어 물러갈 적에 마땅히 형벌을 받을 줄로 알고 몹시 두려워하였다. 이 날 큰 바람이 일어나 배가 거의 뒤집힐 뻔 하다가 간신히 교동에 당도하였다. 좌우로 호위하여 고을 뜰에 들어감에 장수와 군사들이 둘러섰으니 땅에 엎드려 땀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 보지도 못하였다.반정하던 때에 세자와 왕자는 다 보전하지 못 하는 것이므로 궁에서 나갈 적에 신씨(愼氏)는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교동에 가서 별일 없다고 하니 신비는, “그 때에 여러 대장에게 청해서 귀양간 곳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고 탄식하였다. 《소문쇄록ㆍ국조기사》
일찍이 연산군이 절구를 지었으니

여러 어진 이들과 화정에 연회하여 / 時許群賢宴畵亭
꽃과 술을 즐기며 태평을 깨달았네 / 閑憑花酒覺昇平
어찌 다만 은혜 입은 것만 좋아하랴 / 何徒爭喜鴻私厚
모두가 충성하여 정성 바치게 하고자 하노라 / 咸欲思忠獻以誠

하였다. 또,

중현대의 모임이 은대보다 넓은데 / 重賢寬於會銀臺
봄 바람 길 위에는 붉은 준마가 달려 가네 / 春滿長途叱撥催
취해서 한가하게 달을 즐길 뿐만 아니라 / 不啻醉憐閒夜月
돌아올 때도 악대를 이끌고 다시 거닐어 오네 / 歸牽歌菅可重徊

하였다. 조신(曹伸)이 뒷날에 차운(次韻)하였으니,

남의 집 헐어서 정자를 만들고 / 撤人廬舍摠爲亭
많은 여자 뽑아서 운평을 만들었네 / 採却靑紅作運平
원훈과 간신을 다 죽이고 / 誅盡元勳屠諫輔
내시들만 남겨서 충성하게 하였네 / 只留皂帽表忠誠

하였다. 또

서총대 쌓느라고 만인이 죽었는데 / 萬人駢死築葱臺
춤을 춘 기생에게 비단을 내려주네 / 舞罷迓祥賜錦催
부끄러운 기색으로 여러 아우의 뼈를 찾고자 / 忸怩欲尋諸弟骨
문득 해상에서 잠시 거닐고 있네 / 却於海上暫徘徊

라 하였다.
○ 12월에 이르러 호위하는 장수가 연산군이 역질(疫疾)로 매우 고통받는다고 아뢰었다. 이에 중종이 의관을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으나 도착하기 전에 운명하였다. 시녀들은 “연산군이 죽음에 다달아 다른 말은 없었으며, 다만 신씨가 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신씨는 곧 그의 왕비였다.임금은 전교를 내리기를 “후한 예로 장사 지내 주고 또 조회와 개시(開市)를 정지하고 묘지기를 정함이 어떠한가?” 하였다. 대신은 의논하여 아뢰기를, “장사는 왕자의 예로써 지내줄 것이나, 조회와 개시를 정지하고 묘지기를 정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전교를 내리기를, “그렇다면 감사를 시켜 상사를 보살피게 하고, 본관(本官)은 묘소에 화재를 금하고 수목의 벌채를 금하게 하라.” 하였다. 《패관잡기》
○ 이에 공조참의 겸 경연참찬관(工曹叅議兼經筵叅贊官) 유숭조(柳崇祖)가 차자를 올렸으니 그 대략에, “전일에 전왕이 인심을 크게 잃어 종사가 위태할 뻔했는데, 두세 대신이 천명과 인심에 따라 왕대비의 명을 받들어 전하를 추대하니 전하께서는 신민의 추대에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는데,전왕을 받드는 정성은 더욱 돈독하여 재부(宰夫 가축을 잡는 천직)와 선감(膳監)과 사랑받던 여자와 시종과 장사들에게 호위를 맡겨 뜻밖의 변고를 방비하게 하고 의복과 음식물도 길 왕래가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내려주셨습니다. 불행히 역질을 만나 갑자기 승하하자 전하께서 매우 슬퍼하시어 수라상을 폐하시고 조회를 정지하면서 초상 장사의 예절을 다하려고 대신에게 의논하셨는데,대신이 의논해 아뢴 것은 아마 의리에 합당치 못한 듯 하옵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임금과 아버지는 한 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비록 아버지 구실을 하지 못하더라도 아들은 아들된 도리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순제(舜帝)가 어찌 고수(瞽瞍)가 완악하다고 생존했을 때에 섬기고 죽은 뒤에 장사 제사 지내는 예절을 폐지했겠습니까. 태갑(太甲)이 법도를 파괴하고 예절을 문란하게 하자 이윤(伊尹)은 그를 동궁(桐宮)에 내쫓아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깨닫기를 기다렸습니다. 태갑이 혹시 잘못을 뉘우쳐 고치지 못하고 죽었다면 초상 장사의 예절을 어찌 처리하였겠습니까.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은 정치를 문란히 하여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쁜 시호를 얻었지마는 왕의 칭호는 없애지 않았습니다.전왕은 종사에 죄를 얻었으니 종묘에 모셔 제사지낼 수는 없지마는 신하가 임금을 위해 치르는 초상 장사의 예절은 마땅히 이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장사에는 능의 의식을 쓰며 따로 사당을 세우고 중국에 부고를 하는 것이 정의와 의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송태조(宋太祖)가 공제(恭帝 후주(後周))에게,우리 태조가 고려 공양왕(恭讓王)에게 초상 장사를 치러 주고 시호를 올렸던 예절을 본받을 것입니다. 중국의 사신이 만약 이 일을 묻는다면 미리 대책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겉만 꾸며서 대답하는 것은 정성으로 중국을 섬기고 아랫 사람에게 보이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널리 의논케 하였더니 모두 시행할 수 없다 하였다.유자광은 그 말을 극력 배척하여 법 맡은 관원에게 맡겨 그 실정을 국문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며, 박원종은 “그 사람을 근시(近侍)의 자리에 있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중종은 경연관의 벼슬을 갈게 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유승조를 죄 주면 언로가 방해된다 하여 벼슬을 갈지 않기를 청하고 다투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동각잡기》
○ 중종(中宗) 11년 병자에 도승지 이자화(李自華)를 보내어 연산군의 묘에 제사지냈는데 그 제문에, “나는 보잘 것 없는 몸으로 국운이 중간에 비색함을 당하여 위로는 조종(祖宗)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신하에게 추대되어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으니 실로 두렵고 부끄러운 나의 마음이 어찌 끝이 있으리오.끝까지 서로 우애있게 지냄으로써 이 뜻을 풀고자 했는데, 한번 병들어 돌아갔으니 하늘은 어찌 그리 참혹한가. 세월이 흘러가니 추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도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제수를 드리고 삼가 나의 심정을 고하오니 제물은 극히 박하지마는 나의 적은 정성을 흠향하기 바라오.” 하였다. 《국조보감》 《동각잡기》
○ 병자년 10월에 참찬관(參贊官) 김굉(金硡)이 아뢴 말에 의하여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 줄 일을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폐비 신씨에게 자기 뜻대로 후사를 세우도록 하였다. 단종기(端宗記)에 상세하다.
○ 중종 13년 무인에 승지 권발(權橃)과 김정국(金正國)은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야 함을 극력으로 논했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단종기(端宗記)에 상세하다.
○ 중종 34년 기해에 한산 군수(韓山郡守) 이약빙(李若氷)이 소를 올려 연산군을 위해 후사를 세우기를 청하였다. 단종기(端宗記)에 상세하다.
○ 명종(明宗) 을사년에 이언적(李彦迪)이 의논해 아뢰기를, “전일에 사신이 북경에 갔을 때 중국 사람이 혹시 양로왕(讓老王 처음 반정하였을 때 중국에는 연산군이 자진하여 아우에게 양위하였다고 알렸다.)이 생존했는가, 별세했는가를 물으니 통역관이 감히 바른 말을 하지 못하고 별세한 것을 생존했다고 대답했으니 이것은 의리에도 미안할 뿐 아니라 뒷날에도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지금 상신(相臣)을 보내어 중국의 예부(禮部)에서 양로왕이 생존했는가, 별세했는가를 물으면 마땅히 사실대로 대답해야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쪽에서 만약 ‘그때에 왜 부고를 내고 시호를 청하지 않았느냐?’ 하면 대답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니 반드시 사리에 따라 잘 말해야 될 것입니다.또 ‘너희 나라의 통역관이 지난 겨울에 와서도 양로왕이 지금도 생존해 있다 했는데 어찌 그 말이 다르냐?’고 하면, ‘그때의 통역관은 아는 것이 없어서 창졸간에 잘못 대답한 것이 매우 해괴하니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되겠다.’고 대답해야 될 것입니다.” 하였다. 《회재집(晦齋集)》
○ 중종 때에 폐비 신씨가 세상을 떠났다.
○ 심언광(沈彦光)이 신비의 만장(輓章) 세 수(首)를 지었으니 그 첫째에,

꿈 같은 장추궁에 몇 해 봄을 지냈던가 / 一夢長秋度幾春
표령한 신세가 다시 슬프게 되었네 / 飄零身世更悲辛
매양 보통 부부간의 이별을 들어도 눈물이 흐르는데 / 每聞契濶堪流涕
하물며 그 당시에 신하된 사람이랴 / 何况當時北面人

하였고, 그 둘째에,

10년 동안 소후가 수궁에 있었는데 / 十年蕭后在隋宮
말로의 생애는 안정되지 못했도다 / 末路生涯逐轉蓬
술지하라고 한 말은 참으로 약석이었건만 / 述志一言眞藥石
임금은 오히려 깊은 충곡(衷曲)을 살피지 못하였네 / 乾心猶不省深衷

하였고, 그 셋째에,

한 시대의 충량은 모두 간하다가 죽었는데 / 一世忠良眞剖心
임금은 무슨 일로 날마다 음란했던가 / 君王何事日荒淫
그 당시에 중전이 덕이 있었으니 / 當年中壼多陰敎
계명계가 깊지 않은 것이 아니로다 / 不是鷄鳴戒不深

하였다. 《어촌집(漁村集)》 《신씨족보(愼氏族譜)》


 

[주D-001]창읍왕(昌邑王) : 한 무제(漢武帝)의 아들로서 소제(昭帝)를 계승하여 황제가 되었다가 덕이 없어 폐위되었다.
[주D-002]곽광(霍光) : 창읍왕(昌邑王)을 폐출하고 선제(宣帝)를 세운 대신.
[주D-003]철권(鐵券) : 공신에게 주어 영구히 보존케 하는 것.
[주D-004]연거속구(連車續狗) : 옛날 중국 남북조 시대에, “보궐(補闕 : 관명)은 수레를 잇달아 실을 정도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관직을 남발한 것을 조롱한 말이며, 또 서진(西晉) 때에, “수달피의 꼬리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잇는다.”란 말이 있는데 이것도 관직이 남발되어 벼슬아치가 다는 수달피의 꼬리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잇는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이러한 고사에서 공신이 너무 많은 것을 말하였다.
[주D-005]고수(瞽瞍) : 순(舜)의 아버지인데 완고하여 아들을 죽이려 하던 자이다.
[주D-006]태갑(太甲) : 은왕(殷王) 성탕(成湯)의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는데, 덕이 없어 이윤(伊尹) 등에게 동궁(桐宮)으로 추방 당하였다. 후에 그가 잘못을 깨닫고 고쳤으므로 다시 복위시켰다.
[주D-007]장추궁 : 한대(漢代)에 태후가 거처하던 곳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신비(愼妃)가 왕비 자리에 있었던 것을 말한다.
[주D-008]술지하라고 한 말 : 왕비 신씨(愼氏)가 연산군(燕山君)에게 바른 말로 경계한 것을 말한다.
[주D-009]계명계 : 《시경(詩經)》에 ‘계명편(鷄鳴篇)’이 있는데 여기에 왕후가 왕에게 정사에 부지런할 것을 권한 계명계가 있다.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연산조의 상신





정활(鄭佸)
정활은 자는 군회(君會) 혹은 경회(景會) 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요, 영의정 창손(昌孫)의 아들이다. 세조 을유년에 문과에 오르고, 을묘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올랐는데 1년이 못 되어 죽었다. 시호는 공숙공(恭肅公)이다.
○ 기절(氣節)이 있고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알고 있었다.
○ 성종 때에 대사헌이 되어 임금에게 아뢰기를, “정전(正殿)에서 여악(女樂)을 쓰는 것은 옛법이 아니오니 쓰지 마소서.” 하였다. 당시의 풍속이 무당을 숭상하였는데, 공은 무당들을 모두 성 밖으로 내쫓았다. 이조 판서로 있는 3년 동안 청탁이 행해지지 않았다. 좌의정이 되어 북경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어세겸(魚世謙)
어세겸은 자(字)는 자익(子益)이며, 본관은 함종(咸從)이요, 판중추 효첨(孝瞻)의 아들이다. 세조 병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형(文衡)을 맡았으며 익대(翊戴) 공신으로 함종부원군이 되었다. 을묘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무오년에 사초(史草)에 관한 일 때문에 정승에서 파면 당하였고 경신년에 죽으니 나이가 71세였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갑자년에 무덤이 화를 입었다.
○ 공은 기개가 활달하였다. 천성이 소탈하여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출세에 욕심이 없었으며 함부로 이록(利祿)에 관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비록 활쏘고 말타는 재주가 있었지만 한 번도 스스로 자랑한 일이 없었고 재직시에는 청렴하고 분명하여 가는 곳마다 공적을 남겼다.
○ 임인년에 성종(成宗)이 광릉(光陵)으로 행차를 하여 영전(影殿)을 봉선사(奉先寺)에서 참배하게 되었을 때 대사헌으로 있던 공이 따라 갔었다. 그때 절에서 백관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려 하니 공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당당하게 호종하는 신하가 중의 시식(施食)을 받으면 국체가 어찌 되겠습니까.또한 백관이 다 각기 먹을 것을 가지고 왔으니 밥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너는 먹기 싫거든 마음대로 하라.” 하니, 그와 대간들이 모두 먹지 않았다. <행장>ㆍ《동각잡기》
○ 일찍이 성종이 정사를 하던 날에 이조ㆍ병조의 당상관들과 육승지와 두의빈(儀賓 임금의 사위 즉 부마(駙馬))을 창경궁(昌慶宮) 대문 안으로 불러들이고 술이 두어 순배 돌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안에서 은병 세 개를 받들어 내왔다. 은병들은 모두 허리 양면에 금자로 어제시(御製詩)를 새겨 대군에게 준 것이었는데 향기로운 술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대군은 자리에 있는 이에게 시켜서 어제시에 화답하고 술을 부어 마시게 하였는데, 이에 내사(內使 임금의 명을 전달하는 내시)가 나와 왕명을 전하기를, “대군이 나의 졸작을 여러 재상들에게 보였다 하니 내가 매우 부끄러이 여기노라. 시가 별로 잘 되지는 않았으나 운자(韻字)는 있으니 여러 재상들은 화답하여 올리라.” 하였다. 그때 공이 지어 올린 시에,

겉에는 천금 글자가 빛나고 / 外耀千金字
안에는 만세춘이 가득찼네 / 中藏萬歲春
규장(奎章 임금의 문필)이 겨우 새어 나오자 / 奎章纔漏泄
술잔에 사람 벌써 취했어라 / 斟酌已醺人

하였다. 장편이어서 글귀가 많으므로 다 적지는 못한다. 《동각잡기》
○ 공이 병들었을 때 내의(內醫 궁내(宮內)의 의원)가 와서 진찰하고 침뜸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인생 칠십이면 희수(稀壽)요, 정승은 최고의 품계인데 두 가지를 모두 얻었거늘 다시 무엇을 바라 침뜸까지 하며 더 살고자 애쓰겠느냐.” 하고 마침내 죽었다. <행장>
○ 연산주 때에 공은 대신으로 있으면서 출근을 늦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오고당상(午鼓堂上)이라 일컬었으니 오정 북[午鼓]이 울릴 때쯤 하여 늦게 출근했기 때문이다. 《최금남전(崔錦南傳)》
○ 일찍이 팔도 도사(都事)를 지냈으므로 산천 풍토를 두루 보고 기록하였다.


한치형(韓致亨)
한치형은 자는 형지(亨之)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요, 좌의정 확(確)의 조카이다. 음관으로 벼슬하여 좌리 공신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이 되었다. 병진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질경공(質景公)이고 임술년에 죽으니 나이 69세였다. 갑자년에 화가 무덤에 미쳤다.
○ 공이 형조 판서로 있을 때 너무 부지런하여 늦게 퇴출하기 때문에 낭관(郞官)들이 견디지 못하여 아침 저녁으로 괴로워했다. 그 조카 건(健)이 정랑으로 있었는데, 한가한 날 가서 기다렸다가 조용히 말하기를, “함종부원군 어세겸(魚世謙)은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출해도 무관한데 아저씨께서는 그리 애쓰실 게 뭐 있습니까.” 하고 말하니,공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어함종(魚咸從)은 문장과 도덕이 출중하여 비록 직무에 태만하여도 오히려 취할 게 있지만 나와 너는 달리 뛰어난 점이 없으니 직책을 조심해 지키는 것이 옳지 않으냐. 내 뜻이 그러하다.” 고 하니 건이 부끄러워 물러갔다. 《충민공잡기(忠敏公雜記)》
○ 공이 남방으로 순찰하러 갈 때 종사관 두어 사람이 따라 갔었는데, 문득 보니 강가의 화사한 집에 꽃과 대나무가 둘러 있고, 수양버드나무에는 붉은색 준마를 매어 놓고, 폭건(幅巾 벼슬하지 아니한 선비가 한가히 있을 때 쓰는 건)을 쓴 선비가 난간에 기대어 매를 길들이는 것을 구경하고 있으니 종사관들이 한창 괴롭게 길가던 다음이라 그것을 보고 모두 부러워하였다.이에 공이 돌아다 보며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저 이에게 전옥서 참봉(典獄署叅奉)이라도 준다면 금방 저 집을 폐쇄해 버리고 말을 달려 조정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하였다. 《소문쇄록》


성준(成俊)
성준은 자는 시좌(時佐)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우의정 봉조(奉祖)의 조카로 세조(世祖) 기묘년에 문과에 오르고 무오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갑자년에 직산(稷山)으로 귀양가서 사형을 당하였으니 그의 나이 69세였다. 시호는 명숙공(明肅公)이다. 중종이 그의 충직을 표창하여 관직을 회복시키고 예장(禮葬)하였다.
○ 예종(睿宗) 때 장령으로 있다가 파면되었는데 얼마 안 되어 특별히 서용되었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마침 결직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시강원은 이미 파하였으나 성준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해서 직을 주라.” 하였다. 예종의 세자 시절 공이 강관(講官)으로 있었던 터라 보필하는 데 재질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같이 명한 것이다.
○ 무오년에 공이 영상이 되었는데, 하루는 내연(內宴)이 있어 재상들도 들어갔다. 한참 술이 얼큰할 때 폐주가 요염하게 생긴 한 기생을 껴안으니 공이 아뢰기를, “노신이 아직 죽지 않았사오니 전하는 결코 이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하니 연산이 꺼려서 그만두었다. 연산주가 겉으로는 공경하고 존중하는 체 하였지만 속으로는 싫어하였다.
○ 공은 기량이 크고, 총명이 출중하여 글을 읽으면 두어 번만 읽어도 곧 외워 잊지 않았으며, 활쏘고 말타는 데도 능하므로 동년배들이 모두 추앙하여 장상(將相)으로 기대하였다.
○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사간으로 있던 공이 글을 올려 시정(時政) 열일곱 건을 논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곧았다. 성종이 그 말을 받아들이고 특별히 통정(通政)으로 올리고 대사간을 제수하였다. 그때 오백창(吳伯昌)이 권문에 아첨하여 재상이 되었는데,공이 그의 탐람한 죄상을 들어 배척하니 말이 대신에게까지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성종이 대신을 위무하기 위하여 오백창과 함께 파직시켰다. 뒤에 전라 감사가 되어 어전에 하직할 때 임금이, “그대가 대간으로 있을 때 이미 충직함을 알았다. 항상 그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변함이 없으라.” 하였다.


이극균(李克均)
이극균은 자는 방형(邦衡)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요, 우의정 인손(仁孫)의 둘째 아들이다. 세조 병자년에 문과에 오르고, 경신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갑자년에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의 나이 68세였다.
○ 공이 인동(仁同)으로 귀양가서 사사(賜死) 당할 때 말하기를,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이러느냐.” 하고, 분기가 발발하여 유실(幽室 사약을 먹고 죽는 그윽한 방)에 들어 갔다가 다시 나와서 형관에게, “내 나이 장차 칠십이고 몸에는 온갖 병이 얽혔으니 지금 죽어도 한은 없다만 나라를 위한 공로가 있고 몸에 아무런 죄가 없음을 네가 돌아가 반드시 임금께 아뢰라.만약 그러하지 않는다면 내 넋이 있어 꼭 너를 벌하고야 말 것이다.” 하였다. 형관이 돌아가 그렇게 아뢰니 폐주가 더욱 노하여 뼈를 부수도록 하였다. 《소문쇄록》
○ 연산주가 선전관 이종례(李宗禮)ㆍ김우증(金友曾)ㆍ김수담(金粹潭) 등을 안으로 불러들여, “너희들이 이극균(李克均)을 아느냐?”고 물으니 모두 감히 대답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굳이 묻자 폐주의 뜻에 아부하여, “간신의 일을 감히 말에 나타낼 수 없습니다.” 하였다. 연산이 “그렇다.” 하였다. 《소문쇄록》


유순(柳洵)
유순은 자는 희명(希明)이며, 호는 노포당(老圃堂)이요,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세조 임오년에 문과에 오르고 병술년에 중시(重試)와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였다. 계해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궤장(几杖)을 하사 받았다. 정국(靖國) 공신으로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이 되었으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정축년에 죽었으니 그의 나이 77세였다.
○ 공은 문장에 능하였다. 어려서 남학(南學)에서 배울 때 ‘금릉사(金陵詞)’를 지었는데 글과 뜻이 노련하고 건전하여 사람의 입에 회자되었다. 비서(碑序)
○ 공은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으니, 형인 위(渭)가 매우 곤궁하게 지냈으므로 사시로 옷을 지어 보냈는데 반드시 가볍고 따뜻한 것을 골라 보냈다. 《이요헌집(二樂軒集)》 ○ 위(渭)는 포천(抱川)에서 살았다.
○ 성종(成宗) 때 부제학이 되었는데, 임금이 미인도(美人圖)를 내놓고, “시를 지어 올리라.” 하였다. 그 시의 끝 귀에, “임금이 스스로 여색을 멀리하여, 그림을 펴 보고도 오히려 한 번 눈살을 찌푸린다.” 하였다. 성종이 칭찬하고 공인을 시켜 병풍을 꾸미게 하였다. 《명신록》
○ 공이 독서를 즐겨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는 등불을 돋우고 처음 보는 책을 읽으면서 감탄하여, “노부(老夫)가 하마터면 이 책을 알지 못하고 죽을 뻔 하였다.” 하였다. 《패관잡기》
○ 갑자년 살육이 벌어지던 때 공은 수상(首相)으로 그 틈에 어름어름하여 겨우 몸을 보전하였고, 반정하던 때에도 수상으로 회의에 참여는 하였으나 놀래고 겁내어 어찌할 바를 몰라 황급히 말하기를, “성영감이 할 것인가? 유영감이 할 것인가?” 하였으니,그것은 성희안(成希顔)과 유순정(柳順汀)이 스스로 임금이 되려는 줄 알고 의심하여 말한 것이다. 그 마음 먹은 바를 더듬어 본다면 몸을 보존하고 나라를 팔아 먹으려 하는 것 뿐이니 장차 저런 정승을 무엇에 쓰랴. 《조야첨재》
○ 공은 평민 신분으로 일어나서 글과 글씨로 출신하고 좋은 벼슬을 두루 거치며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정승에 이르렀다. 폐주 때에는 수상으로 있으면서 전적으로 “네, 네” 대답하는 것만 일삼았다.반정 뒤에도 공신에 끼었으나 이미 더러워졌음을 자신도 알고 별로 주장하고 건의하는 것도 없었고 매사를 그럭저럭 하니 대간에서 상소를 하여 파면을 청하여도 벼슬을 사양하지 않고 있다가 기사(己巳)년 윤 9월에 천변으로 인하여 다시 탄핵되어 파면되었다. 《음애일기》
○ 아무리 직무가 번다하여도 독서를 그친 일이 없었다. 자학(字學)에도 매우 정밀하였고 의학ㆍ지리 공부에도 힘을 썼다.
○ 연산 때에는 수상(首相)이 되어 물러날 수도 없고 또 바로 잡으려 해도 기휘(忌諱)에만 저촉되므로 항상 속을 태우고 고민하였다. 중종(中宗) 때에 아뢰기를, “신이 반정 당시 수상으로서 변을 듣고 창황하여 어찌 할 줄을 몰랐는데도 공신에까지 참여하게 되었으니 태평 시대에 부끄럽습니다.” 하니, 듣는 이가 그 말이 옳다 하였다.


허침(許琛) 갑자년에 나고 62세에 죽다.
허침은 자는 헌지(獻之)이며, 호는 이헌(頤軒)이요,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성종(成宗) 을미년에 문과에 오르고 진현시(進賢試)에 합격하였다. 갑자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공은 그 형 종(琮)과 함께 명상(名相)으로 일컬었다. 그의 누님도 글과 행실과 식견이 있고 백 살이나 살아 그 문중에서는 지금까지도 ‘백 세 할머니’라고 일컫는다. 형제가 모두 누님을 극진히 섬기고 조정에 큰 일이 있으면 꼭 가서 물었다. 성종(成宗)이 윤비(尹妃)를 폐하려 할 때 형제가 물으니 대답하기를,“그 아들이 세자로 있는데 그 어머니를 죄 주고서 국가가 어찌 무고하겠느냐.” 하였으므로 종(琮)은 신병을 칭탁하여 나가지 않았고, 침(琛)은 반대 의견을 말했다가 체직되었다. 뒤에 폐주가 그때 폐비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는데 그는 홀로 면하였으니 사람들이 그 탁견에 감복하였다. 《식소록》
○ 부인 유씨(柳氏)는 공이 죽은 뒤 시묘살이를 하면서 조석으로 손수 전찬(奠饌)을 올렸다. 그때 단상법(短喪法)이 엄했는데도 예를 지켜 3년상을 마쳤다. 중종 2년에 정려(旌閭)하였다. 《여지승람》


박숭질(朴崇質)
박숭질은 자는 중소(仲素)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좌의정 은(訔)의 손자이며 부윤 훤(萱)의 아들이다. 세조 병자년에 생원과와 문과에 오르고, 갑자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나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정승에서 물러났다. 기사(耆社)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공순공(恭順公)이다.


강귀손(姜龜孫)
강귀손은 자는 용휴(用休)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요, 좌찬성 희맹(希孟)의 아들이다. 성종 기해년에 문과에 오르고 을축년에 우의정이 되고 진원군(晋原君)에 봉해졌다. 병인년에 북경(北京)에 갔다가 정묘년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호는 숙헌공(肅憲公)이다.
○ 신비(愼妃)의 오빠 수근(守勤)의 딸이 중종(中宗)의 잠저(潛邸) 때 부인이 되었다. 폐주 연산이 한참 거칠고 어지러울 때 신수근은 좌상으로 있었고, 공은 같이 우상으로 있었는데, 어두운 임금을 폐하고 밝은 임금을 세우려는 뜻이 있었다. 그때 마침 공이 북경으로 가게 되었는데, 하루는 수근과 만나 조용히 “매부[연산군]와 사위[중종] 중에 누가 더 가까운가?” 하고 심중을 떠보았더니,수근이 말하기를, “세자가 영명하니 다만 그를 믿을 뿐이오.”라고 대답하니 공은 아무 말도 않고 길을 떠났다. 날마다 말이 누설될까 염려하더니 북경에서 돌아오기 전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기묘속록(己卯續錄)》에는, “박원종이 그를 시켜 비밀히 수근의 마음을 떠 보았더니 수근이 말하기를,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세우는 일을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수근(愼守勤) 경오년에 나고 57세에 죽다
신수근은 자는 근중(勤仲) 또는 경지(敬之)이며, 본관은 거창(居昌)이요, 영의정 승선(承善)의 아들이다. 음관으로 벼슬하여 익창군(益昌君)을 습봉(襲封 봉작의 세습)했다. 병인년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고 반정 때에 죽음을 당하였다. 영종(英宗) 기미년에 단경왕후(端敬王后 수근의 딸)를 추복(追復)할 때 영상(領相)으로 증직하였다. 시호는 신도공(信度公)이다.
○ 반정 며칠 전에 박원종이 와서 공을 보고 장기를 두자고 청하여 짐짓 두 궁(宮)을 바꾸어 자신들의 뜻을 내비치니 장기 놀이에는 장(將)과 졸(卒)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장을 궁이라고 한다. 공이 장기판을 밀치며, “내 머리를 베라.” 하므로 원종이 그 뜻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국포집(菊圃集)》 <행장>
○ 인종(仁宗) 때 특명으로 복작(復爵)시켰다.
○ 이자(李耔)ㆍ남곤(南袞)ㆍ이행(李荇)이 항상 공을 헐뜯었는데, 곤은 본디 소인이고, 행은 복비(復妃) 논의를 강력히 방해했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자가 이렇게 한 것은 괴이한 일이다. 자(耔)는 남을 모함하는 이가 아닌데 이러하였으니 필경 누가 그를 속인 것이 아닐까. 자가 젊었을 때 심정(沈貞)과 함께 공부하였고 또 김안로(金安老)와는 동서간이 되는데, 그들이 모두 마음이 음험한 소인들이니, 아마도 이자가 그들이 모함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겠는가. 《국포집》
○ 공의 아우 수겸(守謙) 음관으로 벼슬하여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은 반정 때 개성 유수로 있었다. 박원종 등이 심복을 보내어 같이 거사할 것을 권유했더니 수겸이 대답하기를, “우리 형제의 마음이 정해진 지가 이미 오래이니 내 형에게 물어 보라.” 하고 이내 문을 닫고 10여 일이나 정무를 보지 않았다.9월 4일에 역사(力士)가 소매 속에 철퇴를 넣고 금오랑(金吾郞 죄인을 잡아가는 금부 도사)이라 일컬으며 내아(內衙 지방 수령의 관사의 내실)로 들어가 때려 죽였다. 그때 유모 예덕(禮德)이 쫓아 나와 철퇴를 막아 서더니 함께 죽었다. <신씨족보(愼氏族譜)>


김수동(金壽童)
김수동은 자는 미수(眉叟)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좌의정 질(礩)의 조카이고, 좌의정 사형(士衡)의 현손이다. 성종 정유년에 문과에 오르고 병인년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국(靖國) 공신으로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이 되었다.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임신년에 죽었으니 그의 나이 53세였다.
○ 공은 일찍 급제하여 주서(注書)가 되어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채수(蔡壽)가 당시 승지로 있으면서 공의 단정하고 진중함을 아꼈는데, 자신의 아들 채소권(蔡紹權 판서)의 아명(兒名)을 ‘수동(壽童)’이라 하였다. 《해동악부(海東樂府)》
○ 일곱 살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재주를 기특하게 여겼다. 글씨도 잘 썼는데 예서에 능하였다.
○ 공은 단정하고 무게가 있고 지혜가 많았다. 서생 때부터 수상이 되기까지 사람들이 그를 시비하지 못했다. 흉악하고 잔인한 연산주 때에 총애를 받아 정승으로 들어갔으나, 때에 따라 신축성 있게 처신하여 위로는 임금에게 죄를 입지 않았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였으니, 공의 힘으로 목숨을 보전한 이가 많았다.그때 벼슬아치들이 다투어 집을 사치하게 꾸미고 대문 밖에는 뇌물짐이 저자를 이루었으나, 공은 홀로 그렇지 않았다. 반정하는 날에 성희안(成希顔)이 가서 말하니 함부로 굽혀 따르지도 않고 조급히 굴지도 아니하고 조용히 헤아린 뒤에 행동하여 사림들이 공의 도량에 탄복했다고 한다. 《음애잡기》
○ 반정 초에 공에게 우상으로 기복(起復)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공이 말하기를, “신과 신의 아우 병조 참의 수정(壽正)이 지난 달에 친모 상을 당했을 때 연산 당시의 단상법(短喪法)으로 상복을 벗고 봉직해 왔는데 지금 새로운 시대를 당하였으니, 해직하고 나가서 상을 마치게 해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정부ㆍ육조에 명하여 상의하게 하였더니,유순(柳洵) 등이 말하기를, “국정 개혁 초에 경륜과 제도를 마련함에 있어 수동(壽童)이 없으면 안 되겠으니, 선조(先朝)에서 기복하던 법에 따라 정무에 종사케 하고, 수정은 해직하고 나가서 상을 마치도록 허락하소서.” 하였다. 중종(中宗)이 “옳다.” 하고 조금 있다 좌상으로 승진시켰다. 《국조보감》
○ 그 뒤에 다시 상을 마치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 박원종(朴元宗)이 갈리고 공이 수상(首相)으로 들어가니 인심이 조금 흡족해졌다. 《음애일기》
○ 중종조(中宗朝)에 사직하고 집에 나와 있다가 죽었다. 무오ㆍ갑자사화에 선비들이 많이 죽었는데, 현명한 공이 그때에 은퇴하지 못하고 또 반정한 뒤에야 은퇴하였다. 군자가 그에게 모든 것을 잘하기를 요구하노니 어찌 그를 위해 세 번 탄식하지 않겠는가. 《해동악부》
○ 연산 때 판의금으로 있었는데 형벌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적었다. 그가 추관(推官)으로 있으면서 너그럽게 조처하기를 힘써 공의 힘으로 살아난 이가 많았다. 병인년에 계모 상을 당했는데, 그때 단상제(短喪制)를 시행하여 위반하는 자에게는 죄가 무거웠다. 5월에 복제 기간이 끝나고 우찬성으로 불려 들어가니, 어머니 상에 정리를 다하지 못함을 송구하게 여겼다. 7월에 정승이 되었다.


[주D-001]정사를 하던 날 : 인물을 추천하여 임관하는 정례(定例)의 날이다.
[주D-002]남학(南學) : 서울에 동(東)ㆍ서(西)ㆍ남(南)ㆍ중(中)의 사부학당(四部學堂)이 있었는데, 그중의 남부학당을 말한다.
[주D-003]복비(復妃) : 여기서는 중종의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자는 의논을 말한 것이다.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연산조의 문형





홍귀달(洪貴達) 갑자화적(甲子禍籍)에 들었다.
홍귀달은 자는 겸선(兼善)이며, 호는 함허정(涵虛亭) 또는 허백당(虛白堂)이요, 본관은 부계(缶溪) 의흥(義興)이고, 함창(咸昌)에서 살았다. 세조 신사년에 문과에 올라 문형을 맡았으며 이조 판서와 참찬을 지냈다. 경원(慶源)으로 귀양가다가 단천(端川)에 이르러 사사(賜死)되었으니, 그의 나이 67세였다. 시호는 문광공(文匡公)이다.
○ 공은 문장이 전아(典雅)하고 강건하였으며 고풍이 있었다. 《해동악부》
○ 무오년 이후로 국가에 일이 많아 공이 걱정하여 몇천 자나 되는 소를 올렸다. 요약해 말하면, “임금이 어디에도 굽혀서는 안 되나 오직 대간에게는 굽혀야 할 것이니 굽혀서 그 말을 따라 정치의 업적이 높이 백 대 제왕에 뛰어 난다면 그야말로 잠깐 굽혀 영원히 펴는 셈이 된다.” 하였다.또 연산이 자주 사냥하는 것을 간하여, “요즘 안으로는 우레ㆍ우박 등의 천재가 있고 밖으로는 외적들이 트집을 잡고 있으니 마땅히 상하가 서로 덕을 닦아 재앙을 소멸시키고 환란을 막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냥이 비록 종묘에 제사지내기 위함이라 하오나 지금 죽임을 당하고 사로 잡힌 자들이 모두 선왕과 선후(先后)의 적자들이옵니다. 사냥을 하여 효도를 다하려 하나 조상들이 그것을 흠향하시겠습니까.” 하였고,매양 입시하게 되면 시간이 지나도록 아뢰니 연산이 자못 싫어했다. 또 10여 조목을 아뢰었는데, 모두 궁중의 비밀스런 일들을 들어 개유(開諭)하고 풍자하여 말이 매우 간절하고 곧았다. 연산주가 더욱 불평하여 그의 관직을 다 빼앗고 경기 감사로 내보냈다. 《명신록》
내가 허백당(虛白堂) 홍공의 글을 보고 대절(大節)을 알았으니 연산이 신하의 간하는 말을 거부함과 사냥하는 것을 논한 두 장의 상소를 보고서였다. 한참 연산이 음란하고 포학하던 때에는 사람을 희롱감으로 삼고 죽이기를 장난처럼 하여 옥당의 신하들을 내쫓고 간관을 파면시키며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떼죽음을 시켜 그 흉폭한 위엄을 감히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으니,그 위세가 마치 날뛰는 호랑이가 이를 갈며 입을 벌리고 사람에게 덤벼 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바른 의논을 굽히지 않고 반복하여 개유하여 그 임금의 욕심을 막고자 함이 마치 태평스런 조정에서 홀(笏)을 단정히 잡고 밝은 임금과 의논하는 것같이 하였다. 지금 백 년이 지난 뒤에도 공이 붓을 잡고 상소문을 적을 때 신색이 태연자약하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형틀을 마치 편안한 수레처럼 생각하는 기상이 우리 눈 앞에 보인다. 아, 장하다. 《우복집(愚伏集)》
○ 사랑받는 궁녀의 집에서 자주 무리한 일을 공에게 청탁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드디어 모함하여 북쪽 변방 경원(慶源)으로 귀양가게 하였다. 공이 집 사람들과 작별할 때, “내가 본래 함창(咸昌)의 한 농삿군으로 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본시 내 가졌던 것이 아니다. 출세한 것도 내가 한 것이요 실패한 것도 내가 한 것이니, 다만 옛날의 나로 돌아갈 뿐이다.무슨 원한이 있겠느냐.” 하고 태연히 길을 떠났다. 조금 뒤에 다시 경옥(京獄)으로 잡아 올렸는데 도중에 단천(端川)에 이르자 왕명을 받든 관원이 한 장의 공문을 내 놓았다. 공이 받아 보고 재배하며, “임금께서 나를 죽으라 명하셨다.” 하고 조용히 목조르는 형을 받았다. 《명신록》
○ 연산주가 왕자빈을 고를 때, 공의 둘째 아들 언방(彦邦) 홍문박사(弘文博士)의 딸이 용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위협하여 빈을 삼으려 했으나 공이 끝내 듣지 않았다. 그가 사사(賜死)되었을 때 아들 언충(彦忠)과 언방(彦邦)은 모두 섬으로 귀양갔다. 《축수편(逐睡篇)》 ○ 《명신록(名臣錄)》에는 네 아들이 모두 연좌되어 멀리 귀양갔다고 되어 있다. 언승(彦昇)은 진사, 언방(彦邦)은 홍문 박사(弘文博士), 언충(彦忠)은 직강, 언국(彦國)은 생원이다.
○ 공의 성품이 화평하고 포용성이 많아 어진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찾아오면 접대하여 친절히 이야기하고 모를 내지 아니 하였으나 의롭지 않은 일로 청하면 단연코 흔들리지 않았다.명 나라 사신 왕모(王某) 연산주가 처음 임금이 되자 명 나라에서 사신이 올 때 원접사(遠接使)가 되었었다. 가 매우 까다로와 남을 좀처럼 허여하지 않더니 공을 보고는 흔연히 오래 사귄 친구처럼 대하였다. 그 뒤에도 우리 사신들이 갈 때마다 꼭 공의 소식을 물었다.
○ 공은 물(物)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서책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탐독하였다. 문장이 넉넉하고 여유가 있으며, 깊고 넓은 물 같아서 생각대로 표현하기를 주로 하였다.
○ 남산 밑에 집이 있었는데 언덕에다가 초가로 정자를 만드니 세로와 가로가 겨우 두어 발(丈)이었다. 허백당이라 이름을 써 붙이고 매양 퇴근하면 복건을 쓰고 여장(藜杖)을 짚고 그 안에서 읊조리며 마치 세상을 잊은 것 같았다. 파직된 뒤로는 더욱 세상 일에 관계하지 않았다.그의 한 시귀에는, “산비 솔바람에도 역시 시끄러움을 싫어하노라.[山雨松風亦厭喧]”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친구들이 그의 풍채를 흠모하여 모여드는 이가 많아 즐거이 상대하여 술상을 벌려 놓고 회포를 풀며 투호(投壺)를 하거나 시를 읊었다. 보는 사람이 그가 정승을 지낸 귀인인 줄 몰랐다.평생에 남과 눈 한 번 흘긴 일이 없으나 다만 국사에 대해 말할 것이 있으면 침묵하지 않았다. 자제들이 때로, “왜 좀 참으셔서 집안 식구들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그는 “내가 역대 조정에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또 이미 늙었으니 지금 죽은들 무엇이 아까우냐.”고 말하며 끝내 고치지 않았다.
○ 병인년 반정 때에 공에게 일품직(一品職)을 증직하고 특히 부의를 보내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치렀다. 아들 언승(彦昇) 등이 귀양에서 풀려 나와 곧 단천(端川)으로 가서 관을 메고 남쪽으로 왔다.


성현(成俔)
성현은 자는 경숙(磬叔)이며, 호는 용재(慵齋) 또는 허백당(虛白堂)이라고도 한다 요,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공혜공(恭惠公) 염조(念祖)의 아들이다. 세조(世祖) 임오년에 문과에 오르고 병술년에 발영시에 합격하고 갑신년에 중시에 합격하였으며 예조 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문대공(文戴公)이며, 갑자년에 죽었다. 나이 66세 뒤에 화가 무덤에까지 미쳤고 두 아들은 귀양갔다. 중종 때 좌찬성으로 증직되었다. 저술에는 《용재총화(慵齋叢話)》 《허백당집(虛白堂集)》 《금낭행적(錦囊行跡)》 《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이 있다.
○ 호를 부휴자(浮休子)라 하고 또 ‘부휴자전(浮休子傳)’을 지어, “세상에 나서 사는 것이 마치 떠 있는 것 같고, 죽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쉬는 것 같으니 떠 있는 것이 무에 영화로우며 쉬는 것이 또 무에 슬프리오.” 하였다.
○ 죽을 때 유서에, “상례와 장례를 모두 간략히 하도록 하고 문 앞에서 상여를 소가 끌게 하고 만장(輓章)은 열 장으로 하여 나의 검소한 뜻을 나타내라.내가 임금의 은혜를 입어 벼슬이 육경에 이르렀으되 칭도할 만한 덕이 없으니 다만 표석(表石)이나 세우고 비를 세우지 말라.” 하였다. 연산주 말년에 공이 전일에 먼저 나서서 연산의 사랑하는 여인에 관한 일을 간하였다고 하여 묘를 파헤치는 화를 입었다.
○ 공은 성품이 소활하여 구애됨이 없고 순탄하여 남과 경쟁함이 없는 군자였다. 문장은 물처럼 솟아나고 산처럼 나왔다.
○ 홍(洪)가 자는 사부(士俯) 가 공의 아들 세창(世昌)과 친하였다. 한번은 정월 눈 내린 밤에 찾아가 동원(東園)별실에 앉아 밤중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뜰가에서 나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 창틈으로 내다 보았더니, 한 노인이 매화나무 아래에 눈을 쓸고 앉아서 허연 백발을 날리며 거문고를 뜯고 있었다.세창이 “나의 아버지라.” 하였다. 조금 있다가 손님이 와 있는 줄을 알고 곧 거두었다. 그 뒤에 홍(洪)이 매양 말하기를, “그때 달빛이 밝아 대낮 같고 매화 꽃이 만개했었는데, 백발은 바람에 날려 나부끼고 맑은 음향이 흐르니 마치 신선이 내려온 듯, 문득 맑고 시원한 기운이 몸에 가득참을 느꼈다. 용재(慵齋)는 참으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 할만 하다.” 하였다. 《기재잡기》


김감(金勘) 병술년에 나서 40세에 죽다.
김감은 자는 자헌(子獻)이며, 호는 선동(仙洞)이요,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성종(成宗) 기유년에 문과에 올라 처음에는 운각(芸閣) 승문원 에 봉직했고, 임자년에 휴가를 받아 호당(湖堂)으로 들어갔다. 정국(靖國)공신으로 연창부원군(延昌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 추천시(鞦韆詩)로 연산주에게 아첨하였다.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무오당적(戊午黨籍)





김종직(金宗直)
김종직은 자는 계온(季溫)이며, 호는 점필재(佔畢齋)요,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강호(江湖) 숙자(叔滋)의 아들이다. 세조 기묘년에 문과에 오르고 성종(成宗) 때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임자년에 죽으니 나이 62세였다. 무오년에 화가 묘에 미쳤다. 숙종(肅宗) 때 영의정을 증직하였다.
○ 공이 총각 때 날마다 수만 자(字)를 기억하고 20세 때에는 문명을 크게 떨쳤다. 어세겸(魚世謙)이 공의 시를 보고 찬탄하여, “나는 그의 종 노릇 밖엔 할 수 없다.”고까지 말하였다. 계유년에 진사, 기묘년에 문과에 올랐다. 성종(成宗)이 문사들을 뽑았는데 공이 제일이었다. 학문과 문장으로 당대의 영수(領袖)가 되었으니,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각각 그 그릇의 크고 작음에 따라 배워 얻는 것이 있었고, 한번 종직의 칭찬을 받으면 갑자기 유명한 선비로 되었다. 당대의 도학(道學)ㆍ문장가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쏟아져 나왔다.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김일손(金馹孫)ㆍ유호인(兪好仁)ㆍ조위(曹偉)ㆍ남효온(南孝溫)ㆍ홍유손(洪裕孫)ㆍ이종준(李宗準) 같은 여러 현인들은 그 중에도 뛰어났고, 그 밖에도 성공한 사람이 많았다. 《명신록》 《국조기사》
○ 공이 상주 노릇하는 3년 동안 조석 상식에 곡을 할 때마다 지나는 사람이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홍유손이 말하기를, “정성이 사람을 감동케 한다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로다.” 하였다. 《추강냉화》
○ 공의 체구가 왜소하여 어세공(魚世恭) 자는 자경(子敬) 이 농담으로, “그에게서 누가 재주를 빼앗아 간다면 한 어린 아이만 남을 거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깔깔 웃었다. <비명(碑銘)>
○ 성종이 처음 환취당(環翠堂)을 세우고 글 잘 짓는 신하들로 하여금 당기(堂記)를 지어 올리게 하고 공을 시켜 등급을 정하게 하였다. 그때 좌승지로 있었다. 서거정(徐居正)의 글이 겨우 삼하(三下)이고 나머지는 모두 낙제였다. 왕이 다시 공에게 명하여 짓게 하였는데, 붓을 들고 단번에 써내려가 한 자도 수정하지 않으니 임금이 크게 칭찬하고 인중 위에 걸게 하였다. 서거정이 문형을 맡은 지 26년 동안 사퇴하지 않았다. 하루는 그 조카에게 묻기를, “바깥 의논이 나를 어떻다 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모두들 너무 오래 문형을 잡고 있다고 싫어합니다.” 하였다. 거정이 실망한 빛으로, “내가 그만두면 필경 김종직이 맡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공을 시기해서 한 말이다. 어떤 이는 무오년의 화가 여기에서 싹텄다고 하는 이도 있다. 《부계기문(涪溪記聞)》
○ 고사(故事)에 대제학이 체직될 때는 나가는 이가 반드시 자신의 후임을 천거하게 되어 있었다. 서거정이 체직될 때 사람들은 모두 김공(金公)에게 촉망을 두었었는데, 거정은 그를 시기하여 홍귀달(洪貴達)을 천거하여 여론이 떠들썩하였다. 김시습의 시에, “평생토록 가소로운 일은 귀달이 문장을 잘한다는 것이라네.” 한 것은 아마 그를 조롱함일 것이다. 《부계기문》
○ 조의제문(吊義帝文)은 분명히 뜻이 있어 나온 것이다. 공의 문집을 상고해 보면, 도연명(陶淵明)의 술주(述酒)와 고풍(古風)에 화답한 시, 양 간문(梁簡文)과 당 문종을 읊은 두 수의 시 및 홍연(弘演)을 읊은 작품들이 모두 우연히 지은 것이 아닌 듯 하다.생각건대, 공이 탕(湯)과 무왕(武王)을 비난할 뜻이 있었다면 차라리 김시습처럼 서슴치 않고 행동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세조 기묘년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대부에 이른 처지에서 이러한 말을 작품에 나타낸 것을 보면 옛날 예양(豫讓)의 이른바 신하로서 두 가지 마음을 품은 자이니, 부끄럽다 하지 않겠느냐. 《명재집(明齋集)》
○ 그가 남효온(南孝溫)과 함께 단종조(端宗朝) 때 진사가 되었는데 《청야만집(靑野漫輯)》에 말하기를, “단종이 을해년에 손위(遜位)하였고 추강(秋江)은 곧 점필재의 문인이며 갑술년에 났는데, 점필재와 함께 단종조에 진사가 되었다는 것은 착오이다.”고 하였다. 세조가 즉위한 뒤 효온은 과거보기를 그만두었고,공은 곧 세조조(世祖朝)에 발신하였다. 그것은 늙은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당시 의논이 그를 부족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다. 그의 전후의 출처가 조금 분명치 못한 점이 있었으니 기왕 세조를 섬기게 된 바에는 조의제문(吊義帝文)은 지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때 사관이었던 김일손(金馹孫) 같은 이들이 사책(史冊)에까지 기록하기를,“그 글(조의제문)을 지어 충성된 울분을 표시하였다.” 고 한 것은 무슨 소견에서 나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결백하게 꾸준히 나간 이는 오직 매월당(梅月堂) 한 사람뿐이다. <축수편>
○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말하기를, “김종직(金宗直)은 학문(도학)하는 사람이 아니고 평생 사업이 오직 문장에 있었다. 그의 문집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고 하였다.
○ 공의 아버지 숙자(叔滋)는 야은(冶隱) 길재(吉再)에게 배워, 당시의 선비들로 약간 이름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공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이승건(李承健)이 한림(翰林)으로 있으면서 사초에 쓰기를, “남인(南人 영남인)들이 서로 추켜 올려서 선생은 제자들을 칭찬하고 제자들은 선생을 칭송하여 일당(一黨)을 지었었다.”고 하였는데, 그 뒤에 이극돈(李克墩)이 승건의 사초를 보고 매양 직필(直筆)이라고 일컬었다. <정암연주(靜庵筵奏)>


김일손(金馹孫) 갑신년에 나다.
김일손은 자는 계운(季雲)이며, 본관은 김해(金海)요, 호는 탁영자(濯纓子)이다.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이고 대대로 청도(淸道)에서 살았다. 김종직에게 수업하였다. 병오년에 생원에 장원하였고, 같은 해에 갑과에 오르고 벼슬이 이조 정랑에 이르렀다.
○ 공의 아버지 맹(孟) 자는 자진(子進) 은 벼슬이 집의에 이르렀다.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ㆍ기손(驥孫)ㆍ일손(馹孫)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모두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고 과거에 올랐다. 《허백정집(虛白亭集)》
○ 그가 청도에서 아직 과거에 오르지 못하고 있을 때, 매양 좌도(左道) 향시(鄕試)에는 장원을 하였다. 일찍이 별시(別試)에 나갔을 때, 두 형 준손과 기손은 공의 힘을 빌어 함께 초시에 합격하였다. 전시를 치르는 날이 되자 공은 두 형의 책문(策文)을 대신 지어주고 자기 것은 짓지 않았다. 그것은 형들에게 먼저 장원을 시키고 자기는 뒤에 과거를 보아 장원을 얻으려함이었다.두 형이 함께 과거에 올랐는데 준손(駿孫)이 첫째가 되었다. 후방 전시(後榜殿試)에서 고시관이 그의 작품인 줄 짐작하고 그를 시기하여 짐짓 둘째에 놓고, 민첨(閔怗)을 첫째로 합격시키니, 공이 듣고 성을 내며, “민첨이 어떤 사람이냐?” 하였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방목을 상고해 보니, 병오년의 장원은 민이(閔頤)이다.
○ 성종(成宗) 임인년에 기손과 일손(馹孫)이 함께 뽑혔는데, 문묘(文廟)에서 석채전(釋菜奠)을 올린 뒤에 책문(策問)을 내어 과거를 보았다. 일손이 첫째가 되고 기손이 둘째로 뽑혔다.왕이 친히 시권을 보고 기손(驥孫)을 갑과(甲科)로 발탁하고 특별히 공당(公堂)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방목을 상고해 보니, 기손(驥孫)과 준손(駿孫)이 임인년에 나란히 뽑혔다는데 아마 여기에 오자가 생긴 모양이다.
○ 공은 성품이 간략하고 높이 자처하여 남을 칭찬하는 일이 적었다.
○ 공은 강개하여 큰 절개가 있었고, 그릇과 도량이 컸으며, 또 문장이 하해같이 넓고 깊었다. 《명신록》
○ 그가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양남 어사(兩南御史)의 명을 받고 용인(龍仁)에 이르러 객관에 같이 묵었는데, 공이 강개하여 시사(時事)를 논함에 있어 과격한 말이 많았다. 정(鄭)이 누누히 말리며, “그렇게 말할 것이 아니라.”고 하니, 공이 문득 분연히 말하기를, “사훈(士勛 정광필의 자(字))도 이처럼 저속한 의논을 하니 어찌 차마 기절이 없는 썩은 선비 노릇을 할까보냐.”고 하였었다. 《월정만필》
○ 공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요, 묘당(廟堂)의 그릇이었다. 소장과 차자의 문장은 넓고 깊음이 큰 바다와 같았고, 인물을 시비하고 국사를 논의함은 마치 청천백일 같았다. 애석하도다. 연산군이 어찌 차마 그를 거리에 내놓고 죽였는가.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공은 실로 세상에 드문 선비였다. 불행한 때를 만나 화를 입고 죽었으나, 그 화의 본말과 신원(伸寃)을 다하지 못한 일은 후생으로서 자세히 알 수 없다. 공의 묘를 옮기던 때에 남곤이 지어 보낸 만시(輓詩)에 모두 갖추어 짓기를,“귀신은 아득하고 어두우며 천도는 진실로 알기 어려우니 귀신과 천도는 좋아하고 미워함이 인간과는 달라 화와 복을 항상 거꾸로 베푸는구나. 길고 긴 이 우주에 오래 사나 짧게 사나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니, 촉루의 즐거움이 인간의 임금보다 나은지 어찌 알랴. 달관으로 한 웃음에 부치니 뜬 구름처럼 아득하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세상에 이름난 사람은 한번 나기 매양 더딤이로다. 수백 년이 걸려서야 겨우 한번 보게 되네. 그를 보고도 성취시키지 못하니 태평의 다스림을 어느 때에나 보랴. 무슨 다행으로 나는 그대와 동시대에 태어났네. 서한(西漢) 시대의 문장이요, 송 나라 원풍(元豊)ㆍ희녕(熙寧) 시대의 인물이었네. 정치의 잘못됨을 한숨 쉬고 통곡하며 옳은 일이라면 용감히 하였도다. 강관의 무리들이 옆에서 이를 갈며 엿보는 줄 어찌 알았으랴. 큰 칼 쓴 죄인으로 문득 사형장으로 간단 말인가. 세상 만사에 없는 일이 없구나. 동해 바다가 끝없이 넓도다. 지금은 세상이 바로 되어가 혹독한 법도 풀어지고 선하고 악한 것이 구별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무오년의 원통함은 아직도 신설(伸雪)하지 못하는고. 춘추의 필법에는 내 임금의 허물을 휘(諱)하는 예가 있어 정공(定公)ㆍ애공(哀公)의 기록에는 숨긴 말이 많다 하나, 이렇게 춘추를 지은 성인은 하늘과도 같아서 후세 사람 따를 바 못되고 붓을 잡아 들은 대로 쓰는 것은 사가(史家)의 상례이다. 들은 바가 바르고 틀림이 있다 해도 그것은 한 사람의 사견(私見)이다. 그것을 정리ㆍ편찬하는 데는 실록청(實錄廳)이 있으니 허위로 된 것이면 깎으면 그만인데 다만 뱃속의 칼이 터럭 속의 흉터를 억지로 찾아냈네. 위(魏) 나라 사람들이 국악(國惡)을 써서 길거리에 보인 것과는 비할 것도 아니로다. 벼슬 자리에서 직무를 행하지 못했다면 그 죄는 매를 치면 될 것이요, 현능한 인재에는 특별히 용서하고 감형하는 옛법도 있는 바다. 이런 말씀 아뢰어 임금의 의혹을 풀어 드릴 이 없구나.10년의 세월이 지나니 식자들의 가슴에 영원한 슬픔이 맺혔도다. 성동의 낮은 언덕 초라하여 시체 감출 곳 되지 못하네. 사랑하는 자질들이 좋은 땅 가려 이장을 하려 하도다. 그대는 지금 하늘 위에서 굽어 보면 먼지만 자욱하리. 솔개나 굼벵이나 가리지 않는데 하물며 이땅저땅 상관하랴마는, 인간에서 구구하게 성묘하고 제사드리기 편리함을 취함이네. 처량하다, 목천현(木川縣)의 구불구불한 산기슭이여. 후일 도지(圖誌)를 편찬할 제 이 무덤 기록하여 빼지 마오.” 하였다. 끝구절은 김공의 묘가 마땅히 도지에 기록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그러나 그 뒤 《속 여지승람(續輿地勝覽)》을 편찬할 때에 낭관들이 그의 묘를 기록해 올렸더니 당상관 한 사람이 “그는 벼슬이 재상에 오르지 못하였고 또 근후한 사람도 되지 못하였다.” 하여 마침내 삭제하고 말았다. 이는 남곤(南袞)만도 못한 사람이라 하겠다. 《패관잡기》
○ 그의 생질 윤모(尹某)가 남곤을 찾아가 보니, 곤(袞)이 매우 탄식하며,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하였다. 윤(尹)이 말하기를 “공처럼 뛰어난 문장을 지닌 분이 이렇게까지 저의 외숙을 칭찬하고 부러워하시오.” 하니, 곤은 말하기를,“너희들이 바로 문장의 등급을 알지 못함이로다. 물에다 비하면 탁영(濯纓)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 어떻게 비교가 되겠느냐.” 하였다. 《월정만필》


권오복(權五福)
권오복은 자는 향지(嚮之)이며, 호는 수헌(睡軒)이요, 본관은 예천(醴泉 예천 권씨이며, 본성은 흔(昕)씨이다.)이다. 성종(成宗) 병오년에 진사ㆍ문과에 오르고, 교리로 호당(湖堂)에 참여했다가, 무오년에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죽었다. 문집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 문장이 맑고 건실하며 필법이 굳세고 힘이 있어 당시의 선비들이 높이 받들고 존중하였다. 일손과는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 손순효(孫舜孝)가 읍령(泣嶺)에 올라서 파괴령(破怪嶺)이라 이름을 고쳤더니, 공이 시를 지어,

반드시 탐천(貪泉)이 은지(隱之)를 그르친 것이 아니니 / 不必貪泉誤隱之
공연히 재[嶺] 이름을 가지고 무지한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말라 / 休將名字駭無知
구구하게 파괴(破怪)라는 이름이 도리어 괴이하게 생각되니 / 區區破怪還堪怪
읍령에다 타루비(墮淚碑)나 새기게 하소 / 泣嶺須刊墮淚碑

하였다. 《여지승람》
○ 공이 자작 시고(詩稿)를 김일손에게 고쳐 달라 하고 시 한 수도 지어 같이 보냈다. 그 시에,

뱀을 그리면서 발을 붙인 것을 졸(拙)하다 하지 말고 / 畵蛇着足休嫌拙
까뀌를 둘러 콧등에 붙은 흙 깎아 떼어 주오 / 須把風斤斲堊墁

하였다. 일손은 글로 답하기를,

내게 영인(郢人)의 자귀[斤]가 없는데 / 吾無風斤何以
어찌 향지(嚮之)의 콧등에 붙은 흙을 깎아 뗄 수 있겠느냐 / 斲嚮之之堊也

하였다. <본집(本集)>
○ 흉포하고 망극한 변을 당하여 죽음의 형틀이 앞에 있어도 꿋꿋이 정신 차려 조용히 죽음에 나갔다. 그 기절의 강하고 굳셈은 천품으로 타고났으니 과연 어떠한가. 아아, 만사가 끝나고 무덤은 닫혀 말이 없다. 오직 그 남기고 간 문장이 하늘에까지 빛나고 북두에까지 뻗혔으며 땅에 던지면 쇳소리를 내는 것이 오히려 그의 전형(典型)을 방불케 하고 무궁한 먼 생각을 자아내게 하니 그 무도한 형벌인들 어떻게 백세에 끼친 향기를 없앨 수가 있으랴. 교리 벼슬로 있다가 노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외임으로 나온지 3년 만에 잡혀 죽으니 그때 나이 32세였다. 《소고집(嘯皐集)》 서(序)
○ 유고(遺稿)는 흩어져 거의 없어졌는데, 그의 종손(從孫) 달성 부백(達成府伯) 권모(權某)가 주워 모아 출판하고 또 당시에 화를 입은 이의 명부를 책 뒤에 붙였다. 《서애집(西厓集)》ㆍ무오당적발(戊午黨籍跋)
○ 천계(天啓) 연간에 어떤 사람이 상을 당하여 묘지를 과천(果川) 지방에 정하였더니, 그 곁에 고분(古墳) 하나가 있었는데 이것이 공의 무덤이었다. 그 집에서 일을 시작한 지 며칠 지난 뒤에 자제 한 사람이 역사(役事) 감독을 하고 있었는데, 역군의 잘못으로 고분 앞에 계절(階節) 돌 몇 조각을 빼내게 되었다.그런데 그날 밤 꿈에 홍포(紅袍)를 입은 장자(長者)가 고분으로부터 나와 성낸 듯한 빛을 띄우므로 그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나아가 절하며 그 성명을 물었더니, 장자가 대답하기를, “나는 권한림(權翰林) 아무개다.” 하고, 무덤을 가리키며, “저게 나의 집이다. 근자에 역군들이 와서 내 집을 짓밟고 뜰 돌을 빼내어 심히 불안하게 하는데, 그대는 어찌 금하지 않느냐.” 하였다.그 사람도 선비이며, 본래 공의 사적을 잘 알고 있기에 청하여 묻기를, “선생이 ‘항우가 오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부(賦)를 지으신 분이 아니요?” 하니, “그렇다.” 하였다. 그 사람은 “예, 그러십니까. 빨리 고쳐 드리겠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꿈을 깨니 땀이 흘러 흥건히 온몸을 적시었다. 이튿날 고분 앞에 가서 깨진 곳을 고치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야승(野乘)》


권경유(權景裕)
권경유는 자는 군요(君饒)인데 뒤에 자범(子汎) 호는 치헌(痴軒) 이라 고쳤으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계묘년에 진사에 오르고 성종(成宗) 을사년에 문과에 올랐다. 남상(南床)으로 호당(湖堂)에 참여하고, 교리 벼슬을 하였다. 김일손(金馹孫)과 같은 날에 죽었다.
○ 공은 언어와 행동이 어리숙하였으며, 정사나 하는 일에 있어서도 어리숙하였다. <탁영자(濯纓子)> <치헌기(癡軒記)>
○ 성품이 맑고 곧아서 속사(俗士)들과 접촉하지 않았으며 간신(諫臣)의 풍모가 있었다. 교리로서 외직을 청하여 제천(堤川)으로 나가서 물처럼 맑고 깨끗하게 정사를 하니 백성들은 그를 사랑하였고 이속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 사관(史官)이 되었을 때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吊義帝文)을 실었더니,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이 연산주에게 말하여 내정(內庭)에서 국문을 하는데, 실정대로 불지 않는다고 붓을 던지고 소리를 질렀으나 강직하게 굽히지 않고 조용히 죽음을 받았다. 《사우언행록》
○ 성품이 강하고 굳세고 사물의 근본을 알았으며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추강집(秋江集)》


이목(李穆) 아들 세장(世璋)은 문과를 거쳐 감사가 되다.
이목은 자는 중옹(仲雍)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젊어서 김종직(金宗直)에게 배웠다. 열 아홉 살 기유년에 진사가 되고, 을묘년에 문과에 장원하였다. 호당에 참여하고 영안 평사(永安評事)가 되었다. 무오년에 화를 입고 갑자년에 화가 묘에까지 미쳤으니, 그때 나이는 28세였다. 공주충현서원(公州忠賢書院)
○ 공은 뜻이 높고 기운이 세찼다. 성종이 언젠가 병이 나서 대비가 무당을 불러 기도를 올리는데, 성균관(成均館) 안 벽송정(碧松亭)에다 굿을 차려 놓았었다. 공이 유생들을 데리고 나와 무당을 매질하여 내쫓았다. 무당이 궁중에 호소함에 대비가 크게 노하여 임금의 병환이 나은 뒤에 이 말을 고하였더니, 왕이 거짓 성을 내어 성균관에 명하여 그 유생들을 모두 적어 들이라 했다.유생들이 필경 크게 견책이 내리리라 생각하고 모두 피해 숨었는데 공은 혼자 숨지 않았었다. 왕이 조금 뒤에 대사성을 불러 전교를 내리기를, “네가 능히 여러 유생들을 인도하여 선비의 기습(氣習)을 바르게 하였으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하고, 특별히 술을 내려 주었다. 《명신록》
○ 윤필상(尹弼商)이 정승이 되어 마음대로 정사를 하는데, 마침 그때 가뭄이 들었다. 공이 상소를 올리기를, “윤필상(尹弼商)을 삶아 죽여야만 하늘이 비를 내리게 되리이다.” 하였다. 필상이 길에서 만나 그를 불러, “자네가 꼭 늙은 나의 고기를 먹어야만 하겠는가.” 하니, 공이 말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그 뒤에 필상이 왕에게 대비의 뜻을 따라 불교 숭상하기를 권하니, 공이 유생들을 거느리고 필상의 간사함을 논하여 간귀(奸鬼)로 지목하고 주살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친히 묻기를, “네가 어찌 정승을 귀(鬼)라고 욕하느냐?” 하니, 공이 아뢰기를, “그의 소행이 저러한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귀(鬼)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였다.임금이 장차 옥에 가두려하다가 다른 정승들이 힘써 구하므로 공주(公州)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그쳤다. 이 일로 인해 그가 곧다는 소문이 더욱 떨쳐졌다. 을묘년에 문과에 장원하였는데 무오년 옥사가 일어나자, 과연 필상(弼商)이 김일손(金馹孫)ㆍ권오복(權五福)과 함께 얽어 넣어 참혹한 화를 입었다. 사형에 임하여 기색이 조금도 평상과 다름이 없고, 스스로 절명가를 지었다. 필상은 그래도 한이 풀리지 않았다. 《명신록》


허반(許磐)
허반은 자는 문병(文炳)이며,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계묘년에 진사에 오르고 무오년에 문과(文科)에 올랐다.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있으면서 화를 입었다.
○ 공은 매우 언변이 뛰어나고 허탄스럽고 협기가 있어, 문무 사부(文武士夫)ㆍ의술ㆍ점복하는 이들과 가기(歌妓)ㆍ악공들이 모두 그 밑에 와 굽실거리니, 스스로 잘 났다 생각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내 손아귀에 들어 있다.” 고 하였다. 연산조 때 궁중 일을 조작해 말한 자라고 국문을 당하여 참형에 처해졌다. 《사우언행록》
○ 공이 성리학에 뜻을 두어 출세하는 데 욕심이 적고 일마다 옛것을 본받으려 하였다. 사우(師友) 김굉필(金宏弼)은 그의 천성이 단아함에 탄복하였다. 음관으로 벼슬하여 사직서 참봉이 되었다. 그때 좌상 홍응(洪應)이 제조로 있었는데, 공이 그에게 말하기를, “왕세자는 나라의 저군(儲君)이니, 뒷날 동방의 만 백성이 우러러 신뢰할 분인데, 지금 환시(宦侍)와 더불어 거처하면서 서연에 드시는 때가 적고 희롱하고 노는 때가 많다.” 하였다.


강겸(姜謙)
강겸은 자는 겸지(謙之)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요, 관찰사 자평(子平)의 아들이고, 대간 형(詗)의 아우이다. 성종 경자년에 문과에 올라 한림ㆍ옥당을 거쳐 직강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사형을 당했다.
○ 그는 정대하고 절조가 있었다.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


표연말(表沿沫)
표연말은 자는 소유(少游)이며, 호는 남계(藍溪)요,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문과 감찰 계(繼)의 아들이다. 성종 임진년에 문과에 오르고 병오년에 중시에 합격하였다. 호당에 참여하고 벼슬이 동지 성균관사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귀양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교류하던 이들은 모두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 공이 예문관에 봉직하고 있을 때 연회에 금육(禁肉 당시 국법으로 먹기를 금하는 고기)을 쓴 일이 있었는데, 임금에게 알려지게 되자 공도 연회에 참여한 죄로 같이 파면되었다. 그 뒤로 향회(鄕會)에 금육을 내놓는 데가 있으면 곧 일어서서, “다시는 법을 범할 수 없다.” 고 하였다.부모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家禮)대로 지켰다. 김종직이 그때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있었는데, 그의 행실로 천거하여 한 계급 올리도록 하였다. 《추강냉화》


홍한(洪澣) 신미년에 나다.
홍한은 자는 온진(蘊珍)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성종 을사년에 문과에 오르고 벼슬이 이조 참의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중종이 참판을 증직하였다.
○ 공은 성품이 강직하여 남을 칭도하는 일이 적었으니 권력 있는 귀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정여창(鄭汝昌) 경오년에 나다.
정여창은 자는 백욱(伯勗)이며, 호는 일두(一蠹)요, 본관은 하동(河東)이고, 함양(咸陽)에 살았다. 계묘년에 진사에 오르고 성종 경술년에 문과에 올라 한림을 거쳐 벼슬이 안음 현감(安陰縣監)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종성(鍾城)으로 귀양갔다. 갑자년 4월에 죽었으니 그때 나이 55세였다. 함양(咸陽)에 장사 지냈더니 갑자년에 화가 미쳤었다.중종이 우의정을 증직하고 치제하였다. 선조(宣祖) 때 문헌(文獻)이라 시호를 내리고, 경술년에 문묘에 배향케 하였다. 중종(中宗) 정묘년에 도승지를 증직하고, 또 정축년에 우의정을 증직하였다.
○ 공의 아버지 육을(六乙)이 의주 통판(義州通判)으로 있을 때 공은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명 나라 사신 장녕(張寧)이 지나가다 공을 보고서 기이하게 생겼다고 칭탄하며 여창(汝昌)이라 지어주고 해설하는 글까지 지어 주었으니, 여창이란 이름은 능히 가문을 창성하게 하리라는 뜻이다. 《명신록》 ○ 육을(六乙)은 벼슬이 병마우후(兵馬虞候)였다.
○ 포은(圃隱) 이후 우리나라 성리학은 실로 김굉필(金宏弼)로부터 주창되었는데, 뜻을 같이한 이가 곧 공이다. 김굉필은 이(理)에 밝고 공은 수(數)에 밝았는데, 불행한 때를 만나 비명에 죽었으니 애석하도다. 푸르른 하늘이라 어떻다 말하랴. 《병진정사록》
○ 공은 친구들과 사귀어 노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나, 오직 김굉필과는 지기(知己)로 삼아 늘 도학을 논의하고 글을 강론하며 서로 떠나지 않았다. 《명신록》
○ 어머니 최씨를 지극히 섬겨 한번도 뜻을 어기지 않았다. 하루는 어머니가 꾸짖기를, “아버지 없는 아이가 배우지 않아 어찌하느냐.” 하니, 공이 이 말에 감동하고 뜻을 굳게 하여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공부하였다.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을 찾아가 배우기를 청하자 옛사람들의 학문하는 법도로 가르쳤는데, 여러 해를 연마하니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더욱 정통하게 되었다. 《동유연원록(東儒淵源錄)》
○ 공이 젊었을 때 술을 좋아하여 하루는 친구와 과히 마시고 취하여 들에 쓰러져 밤을 새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꾸짖기를, “너의 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네가 이와 같이 행동하면 내가 누구를 믿고 살겠느냐.” 하였다. 그가 깊이 자책하고 공부에 힘써서 임금이 내리는 술이나 음복할 때 외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병진정사록》
○ 공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것을 마음 아파하여 스승에게나 친구를 찾아가는 외에는 늘 어머니 곁에 있으면서 어린아이처럼 어머니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으로 소일하였다.병오년에 어머니가 이질을 앓게 되자 향을 태우고 하늘에다 부르짖으며 제 몸을 대신하여 어머니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었는데, 기둥에 머리를 부딪쳐 피가 적삼을 적셨다. 《연원록(淵源錄)》
○ 일찍이 지리산에 구경가다 진산(晋山)의 악양동(岳陽洞)을 보고는 그곳의 산수를 사랑하여 섬진강(蟾津江) 어귀에 집을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장차는 그곳에서 늙으려 하였다. <행장>
○ 산수에 정을 붙여 풍월을 읊조리고, 혹은 강에 배를 띄워 노저으며, 혹은 시내에 낚시질을 하며, 때로는 소를 타고 쌍계(雙溪)ㆍ청학(靑鶴) 모두 동네 이름이다. 을 왕래하였다. 호숫가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편액을 악양(岳陽)이라 하고 공부하는 처소로 삼으니, 원근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붐비어 들었다. 《연원록》
○ 지리산에 들어가 3년 동안 나오지 않았다. 오경의 심오한 뜻을 다 깨쳤다. 성종이 경자년에 성균관에 명을 내려 경학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선비를 구해 들이라 하니, 관중(館中)에서 공이 제일이라 하였다. 지관사(知館事)로 있던 서거정(徐居正)이 그를 데려다 강경(講經)을 시키려 했으나 그가 하지 않았다. 《사우명행록》
○ 공의 아버지 육을(六乙)은 시애(施愛)의 난에 죽었는데 그때 공의 나이 어렸었다. 뒤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예절을 한결같이 가례에 따라 행하였다. 성종 경술년에 이조 참의 윤극(尹克)이 효행과 학식이 사림에 비길 사람이 없다고 공을 추천하였다. 특별히 소격서 참봉으로 불렀더니,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자식된 도리로 당연한 일일 뿐이다. 효행이라 할 것이 무엇 있는가.” 하고 소를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임금이 친히 붓을 들어 소장 끝에 “네 행실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구나.” 하고 쓰고, 벼슬 사양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나와서 이 해에 문과에 오르고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 현감(安陰縣監)이 되었다. 《사우명행록》
○ 연산(燕山)이 동궁으로 있을 때, 설서(說書)로 있던 공이 동궁을 올바른 길로 이끌려고 하자, 연산이 매우 싫어하였다. 마침내 외임(外任)을 구하여 갑인년에 안음 현감으로 나갔다. 《연원록》
○ 안음 현감으로 있던 시절 공무의 여가에 그 고을에서 총명한 자제들을 뽑아 서재(書齋)를 지어 거처하게 하고 친히 가르쳐 일과로 강독을 하게 하니, 학자들이 듣고 먼 데서도 찾아왔다. 봄ㆍ가을로는 양로예(養老禮)를 행하여 내외청(內外廳)을 베풀어, 안에서는 부인을 시켜 안 노인들을 대접케 하고,밖에서는 공이 관디를 하고 손수 접대하니 노인들이 모두 취하고 포식하여 가무를 즐겼다. 정사가 깨끗하여 백성들이 기뻐하였으니, 경내(境內) 백성들은 속임수로 공을 저버리지 말자고 서로 경계하였다. 《유선록(儒先錄)》
○ 안음현에 광풍루 제월당(光風樓霽月堂)이 있는데 그가 원으로 가서 세우고 이름 지은 것이다. 《여지승람》
○ 평생에 시 짓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나 오직 한 편의 시가 세상에 전하니,

바람에 잎사귀가 새록새록하니 / 風蒲獵獵弄輕柔
4월 화개(花開) 고을 벌써 보릿가을[麥秋]이로다 / 四月花開(縣名)麥已
두류산(頭流山) 천첩만첩 다 돌아본 후에 / 看盡頭流千萬疊
외로운 배로 다시 큰 강 따라 내려온다 / 孤舟又下大江流

라 하였다. 가슴 속에 한 점 티끌도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병진정사록》
○ 홀로 시를 전공하는 이를 취하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시란 성정에서 발로하는 것이니 어찌 힘써 공부할 것이랴.” 하였다. 《추강냉화》
○ 성품이 단정하고 침묵하며 몸가짐이 매우 엄하였다. 종일 단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처자들이 그 살이 드러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술도 마시지 않으며 고기 등속의 불결한 것도 먹지 않으며 쇠고기나 말고기도 먹지 않았다. 겉으로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지만 마음속은 항상 깨어 있었다.젊어서 성균관에 거재할 때 남들과 잠을 자는데, 코를 골면서도 자지 않는 것을 남이 잘 몰랐다. 어느 날 밤에 최진국(崔鎭國)에게 들켜 그 사실이 밝혀지자 온 관중이 떠들썩하고, “정모(鄭某)가 참선을 하느라고 자지 않는다.”고 말을 하였다. 《사우명행록》
○ 일찍이 향회(鄕會)에 쇠고기를 내놓은 자가 있었는데, 어떤 자가 금물(禁物)을 썼다고 관에다 일러바쳐 죄를 당하게 되니, 모부인(母夫人)이 그 일을 깊이 걱정스러워하였다. 공이 이로부터 결코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유선록》
○ 무오년에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귀양갔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환난(患難)은 성인도 면할 수 없는 일이다.” 하며 조금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종성(鍾城)으로 귀양간 7년 동안 태연히 있었다. 처음에 뜰에 피우는 화로를 돌보는 소임을 맡았었는데, 매양 사신이 공관(公館)에 들면 번번이 불피우는 심부름을 공손하게 잘 하였다. 《연원록(淵源錄)》 《경현록(景賢錄)》
○ 일찍이 《중용ㆍ대학주소(中庸大學註疏)》와 《주객 문답》 및 《진수 잡저(進修雜著)》 등을 지었는데, 무오년에 화가 일어나자 처자들이 모두 불살랐다. 《유선록》
○ 공의 학문은 주자(朱子)ㆍ정자(程子)를 기준으로 삼았으니, 글을 읽는데는 이치를 궁구함을 우선으로 삼고, 마음을 쓰는데는 속임이 없는 것을 위주로 하여 일용공부(日用工夫)가 성(誠)ㆍ경(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정치하는 율령(律令)과 조례(條例)에 이르러서도 끝까지 궁구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고을을 다스리는 데서 이미 그 단서를 볼 수 있었다.한훤(寒暄 김광필)과 함께 점필재(佔畢齋)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뜻을 같이 하고 도가 합치되어 막역한 사이로 지냈으며, 도를 논하고 학문을 강하여, 항상 함께 행동하였다. 애석하게도 그 좋은 말로 남긴 의논이 조금도 세상에 전하지 않고 평일의 저술이 무오년의 화에 불탔으니, 어찌 후학에게 한이 되지 않겠는가. 동계정온(桐溪鄭蘊) 소론(所論)
○ 김일손(金馹孫)이 일찍이 공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금대암(金臺庵)에 이르렀는데 중들의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는 김공이 감탄하여 말하기를,“이렇게 공부하는 방법이 정(精)하고 잡되지 않으며 진(進)하여 물러남이 없으니, 우리가 성현을 배우는 데에도 이렇게 공부를 하면 도를 얻을 날이 있지 않겠느냐.” 하였다. 산 꼭대기에 속설에 ‘성모묘(聖母廟)’ 라고 불리는 사당이 있었는데, 김공이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일찍이 ‘태산(泰山)이 임방(林放)만 못하겠느냐.’ 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김공이 그 말을 듣고 지내려던 제사를 그만두었다. 공은 이렇듯 동배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연원록》


무풍정(茂豊正) 총(摠)
무풍정(茂豊正) 이총(李摠)은 자는 백원(百源)이며, 태종대왕의 별자(別子)인 온녕군(溫寧君) 정(程)의 손자이다. 호는 서호주인(西湖主人)이며,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온 가족이 모두 멀리 절도(絶島)로 귀양갔다. 병인년 6월에 공의 아버지 우산군(牛山君) 종(踵)과 형인 용성정(龍城正) 원(援), 아우 한산부정(韓山副正) 정(挺)ㆍ화원부정(花原副正) 간(揀)ㆍ금천부정(錦川副正) 변(抃)ㆍ청양부정(靑陽副正) 건(揵) 등 여섯 부자가 동시에 화를 입었다.
○ 공은 시에 능하고 거문고를 잘 탔다. 양화도(楊花渡)에 별장을 짓고 작은 배와 고기잡는 그물을 마련하여 항상 손수 어선을 저으며 시인들을 맞아 날마다 좋은 시를 모으니 무려 천백 편이 되었다.
○ 일찍이 남효온(南孝溫)과 보제원(普濟院) 위에서 작별할 때 빈객들이 모두 춤추고 노래하는데, 공이 효온의 부채에다 시를 쓰기를,

서로 알고 지낸 8년 동안 / 相知八年內
만남은 적고 작별만이 잦네 / 會少別離多
천리로 떠나는 손을 잡고서 / 臨分千里手
눈물을 가리며 맑은 노래를 듣네 / 掩泣聞淸歌

하니, 좌중이 모두 붓을 놓았다고 한다. 《추강집》
○ 공은 남효온(南孝溫)ㆍ김일손(金馹孫)ㆍ강경서(姜景叙) 같은 이들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일찍이 들에 있는 정자에서 거문고를 타는데 그 음율이 살성(殺聲)을 발하므로 다음날 반드시 잡혀 갈 것을 짐작하였다. <족보(族譜)>
○ 공은 스스로 ‘구로주인(鷗鷺主人)’ 이라 부르며 고상ㆍ방종하여 구속받지 아니하였으니, 진(晋) 나라 시대의 기풍이 있었다. 서사(書史)를 읽고 시문을 배우며 음률을 해득하였으니, 모두 그 묘경(妙境)에 이르렀다. 김뉴(金紐)가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찬탄하며 말하기를, “정말 궁중의 모란꽃이 개인 하늘 아래 난만하게 핀 것 같도다.” 하니,이유추(李有秋)가 그 말을 듣고, “김(金) 재상이 귀가 있구나.” 하였다. 서호(西湖)에 정자를 짓고 늘 고기잡는 배를 띄워 놓으니 시인과 문사가 강 위에서 놀기를 끊이지 않았는데,속된 선비가 찾아오면 배를 저어 반드시 피하곤 하였다. 남효온의 시에, “왕손이 배를 저을 줄 안다.[王孫解刺舟]”는 것이 이것이다. 한 형과 네 아우가 모두 그럴듯한 인물이었고, 다섯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일시에 죽음을 받으면서도 웃고 이야기하며 태연하였다. 《사우명행록》
○ 중종이 도정(都正)을 증직하고 숙종 을유년에 정려(旌閭)하였다. 영종(英宗) 무오년에 군(君)으로 봉하고, 시호를 내려 소민공(昭愍公)이라 하였다.


강경서(姜景叙)
강경서는 자는 자문(子文)이며, 호는 초당(草堂)이요,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성종 정유년에 문과에 오르고 정사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점필재(佔畢齋) 문하인으로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회령(會寧)으로 귀양갔다가 뒤에 풀려 돌아왔다. 벼슬이 좌승지에 이르렀는데 뒤에 예조 판서를 증직하였다.
○ 공은 천성이 정직하고 강개하였다.
○ 일찍이 하인 하나가 공의 아들에게 달걀 몇 개를 보냈다. 부인 박씨(朴氏)가 물리치며, “어린아이라고 해서 어찌 남편의 맑은 덕에 누를 끼칠까보냐.” 하였다.
○ 부인 박씨(朴氏)는 공이 곤장을 맞고 귀양가는 것을 보고 슬퍼하여 음식을 끊어 이듬해에 죽었다. 중종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여지승람》


이수공(李守恭) 갑신년에 나다.
이수공은 자는 중평(仲平)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요, 영의정 극배(克培)의 손자이다. 성종 무신년에 문과에 장원하고, 벼슬이 전한(典翰)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종성(鍾城)으로 귀양갔다가 광양(光陽)으로 옮겨 갑자년에 사사(賜死) 당하였으니, 그때 나이 41세였다. 중종 초년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었다.


정희량(鄭希良) 기축년에 나다.
정희량은 자는 순부(淳夫)이며, 호는 허암(虛庵)이요,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임자년에 생원과에 장원하고, 을묘년에 문과에 올라 봉교(奉敎)로 임명되었다. 무오년에 의주(義州)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김해(金海)로 옮기었다. 갑자년에 괴이한 재앙으로 인해 모든 죄수를 놓아줄 때 돌아왔으나 갑자년 5월에 멀리 도망갔으니,어디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나이는 34세였고 아들이 없었다.
○ 공은 높은 절개를 좋아하여 나쁜 사람과 같이 있거나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학문을 널리 닦아 통달하였는데, 더욱 역학(易學)의 수(數)에 조예가 깊었다.
○ 성종(成宗)이 세상을 떠나 성복(成服)을 하고 나서, 대행왕(大行王 성종)을 위하여 불사(佛事)를 하는 문제에 대해서 성균관의 여러 유생들을 거느리고 글을 올렸는데, 말이 너무 박절했으므로 서해도(西海道 황해도)로 귀양갔다가 조금 후에 석방되었다. 그 해에 과거에 뽑혀 예문관에 있었는데, 또 궁중의 잘못한 일을 극력으로 논난하였다.
○ 무오년에 의주(義州)로 귀양갔다. 귀양가 있는 동안에 술을 빚어 마시니 그 술은 거르지도 않고 짜지도 않았으므로 술 이름을 ‘혼돈(混沌)’ 이라 하였으니 태고 때의 순박함을 숭상함이었다. 술이 취하면 번번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는,

나는 내가 빚은 탁주를 마시고 / 我飮我濁
나는 내가 타고난 천진(天眞)을 온전히 한다 / 我全我天
나는 술을 스승으로 삼으니 / 我乃師酒
성인(청주의 숨은 말)도 현인(탁주의 숨은 말(隱語))도 내 스승이 아니다 / 非聖非賢
자기의 즐거움을 즐기는 이는 마음으로 즐기게 되니 / 樂其樂者 樂於心
늙음이 장차 닥쳐옴도 알지 못한다 / 不知老之將至
사람들이 누가 나의 술 즐겨함을 알리오 / 人孰知餘之樂是 酒也

하였다. <본집>
○ 경신년에 김해(金海)로 옮기었다. 그 이듬해 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분상(奔喪)하지 못하여 늘 울적하고 슬픈 마음을 품고 있었으나 하늘에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참에 수로왕능(首露王陵)이 자못 영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애사(哀詞)를 지어 호소했는데, 글에 성명은 쓰지 않고 정(鄭)자를 나누어 전읍(奠邑) 두 자로 썼다.그날 밤 꿈에 눈동자가 겹으로 된 매우 위대한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너는 장차 놓여날 것이다.” 하였다. 공이 꿈을 깨어 여러 벗들에게 이야기하고 또 기록하여 간수해 두었더니, 그해 겨울에야 놓여 나왔다. 《금관지(金官志)》
○ 공은 젊을 때부터 글을 잘 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특히 시를 잘하였다. 성품과 기질이 강건하여 생과실을 몇 말을 먹어도 체하지 아니하였다. 또 술을 잘 마시어 일찍이 말하기를,“나는 탁주는 큰 그릇으로 세 그릇을 마시고 청주는 두 그릇을 마시며 소주는 한 그릇을 마시는데, 술에 따라 양(量)을 조금씩 줄이되 반드시 먼저 가슴을 씻는다. 잔으로 예를 차려 마시는 것은 좋아하지 않고, 다만 큰 사발로 거뜬히 기울이는 것을 좋아한다.” 하였다.
○ 공은 음양학(陰陽學)에 능통하였는데 서울 안에서 명운(命運)을 잘 추산(推算)하기로 소문난 사람에게 반드시 가서 질문해 보고는, “엉터리구나.” 하였다.다만 주부(主簿) 오순형(吳順亨)에게는 굴복하면서, “이 사람이 추산하는 것은 정확하여 허황한 점이 없는데, 다만 세상을 겁내어 그 재주를 다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추산하여 보았는데, 난 시[生時]가 확실하지 않았으므로 탄식하기를, “만약 아무 간지(干支)에 났으면 크게 귀하게 될것이고, 아무 간지에 났으면 말할 수 없이 나쁘다.” 하면서 매양 세상을 피해 도망갈 의사가 있었다. 김해(金海)로 귀양갔다가 놓여 와서 어머니 상을 입고 고양(高陽) 《사재척언》에는 풍덕(豊德) 또는 덕수현(德水縣) 남쪽이라 하였다. 에서 시묘 살이를 하였다.일찍이 말하기를, “갑자년의 화는 무오년보다도 더 심할 것이니 우리들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였다. 5월 5일에 종들을 밖에 내보내고 홀로 나가서 밭 두렁을 거닐고 있었다. 아이 종이 찾아오니, “너는 필관채(筆管菜)를 캐어서 저녁 반찬이나 준비하라.”고 보내버렸다. 아이 종이 돌아오니 공은 있지 아니하였다. 이웃 사람을 불러 사방으로 샅샅이 뒤를 밟아 찾았으나,다만 남강(南江) 조강(祖江)의 상류(上流) 가의 모래밭에 신 두 짝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반드시 강물에 빠졌을 것이라고 하여 잠수하는 사람을 모아 가지고 잠수와 배로 강의 위 아래를 두루 찾았으나 끝내 그 시체는 찾지 못하였다. 공의 친족 해평군(海平君) 정미수(鄭眉壽)가 각 고을에 공의 생김새와 복색을 알리어 찾아보자고 청하니,연산군은 “미친놈이 도망가서 죽었는데 무엇하러 찾느냐.” 하였다. 마침내 그 흔적도 모른 채 얼마 안 가서 갑자년의 화가 일어나니, 사람들은 “그가 자취를 피해 숨은 것이고 죽은 것이 아니라.”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상한 중이 서쪽 여러 산에 왕래하는데 일찍이 희량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분명히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하며, 혹은 “머리를 깎지 않은 채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가 되어 종적을 숨기고 왕래한다.” 하였다. 《사재척언》 《용천담적기》
○ 가천원(加川院)의 벽 위에 절구 두 수가 있는데, 그 절구에,

새는 무너진 담 구멍을 엿보고 / 鳥窺頹垣穴
중은 석양의 샘물을 긷네 / 僧汲夕陽泉
산과 물로 집을 삼은 손님아 / 山水爲家客
천지는 어디가 끝간 데인고 / 乾坤何處邊

하고, 또

전일 바람 비에 놀라 / 風雨驚前日
문명한 이때를 저버렸네 / 文明負此時
외로운 지팡이도 천지간에 노니 / 孤笻遊于宙
시끄러움이 싫어져 시까지 짓지 않으련다 / 嫌閙並休詩

하였다. 이행(李荇)이 마침 이곳을 지나다가 보고는, “이것은 반드시 허암(許庵 정희량(鄭希良))이 지은 것이라.” 하고 원(院)의 주인에게 물으니, “누더기를 입은 중이 조금 전에 이곳을 지나다가 쓴 것입니다.” 하였다. 이행은 데리고 다니는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혹은 말하기를,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써 놓고 남을 의혹시키는 것이니, 허암이 쓴 것이 아니다.” 하였다. 《명신록》 《용천담적기》
○ 사주 보는 사람 김륜(金倫)이 젊을 때 향산(香山)에서 놀다가 이천년(李千年)이란 도사를 만나 육칠 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술수를 배웠다. 후에 부모를 뵙기 위해 그를 작별하고 영동(嶺東)으로 돌아올 때, 기해년에 강서(江西)의 구룡산(九龍山)에서 만나기로 서로 약속하면서 손수 시를 써서 주었는데,

여든된 산속의 늙은 이는 / 八十山中老
삼팽(三彭)을 벌써 소제해 버렸네 / 三彭已掃除
인간 세상을 꿈꾸지 않을 것이며 / 人間應不夢
학(鶴)과 짝하는 외에 다른 뜻은 없도다 / 鶴伴意無餘
누운 평상에는 달빛만 차갑고 / 雪榻蟾光冷
구름 창에는 해 그림자가 희미하구나 / 雲牕日影踈
티끝없는 거울(맑음)이 / 誰知無累鑑
만 세 동안 절로 맑고 깨끗함을 누가 알리오 / 萬代自淸虛

하고, “정묘년 늦은 봄에 송죽처사(松竹處事) 우재(愚齋)가 쓰다.” 하였고, 또 단계(丹溪)에 이르러 시를 써서 주었으니,

한가함 얻어 한 번 취함이 하늘의 놀이인데 / 偸閑一醉是天遊
이 가운데 강바람은 손님을 만류하네 / 箇裏江風挽客留
탁목봉이 높으니 하늘이 가까운 듯 / 啄木峯高天若近
수림정 아래에는 땅이 둥실 뜬 듯 / 秀林亭下地疑浮
두 낭자의 혼백은 천 년 전의 일이고 / 二娘魂魄千年事
아홉 굽이 강물은 만고에 흐르네 / 九曲江聲萬古流
가슴 속에 진루가 오래 끼었더니 / 胷海久牽塵累擾
단계에 이른 이 날 내 근심을 씻도다 / 丹溪此日洗吾愁

하고, “계사년[黑蛇之歲]에 우옹(愚翁)이 쓰다.” 하였다. 공을 모시던 나이 열서넛된 아이에게도 역시 시를 써서 주었으니,

천지간에 집이 없는 산수 손님은 / 天地無家山水客
생애가 한□ 뜻은 평안하네 / 生涯一缺意如如
이끼 낀 산길은 흰구름에 잠겼는데 / 苔痕山路白雲鎖
달그림자는 맑고 차고 대그림자는 성기네 / 月影淸冷竹影踈



푸른 산에는 구름이 만 겹이고 / 碧山雲萬疊
푸른 바다는 끝없이 넓도다 / 滄海濶無邊
묻노니 무슨 일로 / 爲問緣何事
돌아갈 마음 대궐로 향하는고 / 歸心北闕懸

하였으니, 시의 격조가 높고 글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데리고 다니는 아이도 시 짓는 솜씨와 글쓰는 법이 보통이 아니었으니 그가 평범한 방사(方士)가 아님이 분명하다. 김륜(金倫)은 일찍이 공이 기록한 생년 월 일 시(生年月日時)의 오행(五行)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판사 신경광(申景光)이 점치는 것을 좋아하여 선비와 높은 관직에 있는 이의 오행(五行)을 기록해 두었는데 공의 사주도 역시 그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김륜이 서울에 왔다가 이것을 보고 놀라면서, “이것은 우리 스승 이천년(李千年)의 팔자라.”고 하였다. 이로써 그가 죽지 않았음을 더욱 믿게 되었다고 한다. 《사재척언》
○ 한 수재(秀才) 혹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이라고 한다. 가 산중에서 《주역(周易)》을 읽고 있었는데, 한 늙은 중이 곁에 있다가 그 태도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보고 이따금 구두의 틀린 것을 고쳐 주었다. 수재는 그 중이 허암인가 의심이 나서, “당신이 주역을 아시오?” 하니, 중은 “모르오.” 하고 사양하였다.또 “주역의 내용은 매우 깊어서 읽기 어렵소.” 하니, “선비의 주역 읽는 것을 보니 능히 통달하였소.” 하였다. 또 문답하기를, “당신이 정허암을 아시오?” 하니, “모르오.” 하였다. “허암은 정희량의 호입니다.” 하니, “그 성명은 자못 듣고 있으며 그 사람된 품도 대강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허암이 종적을 숨기고 나오지 않으니, 아까운 일입니다.” 하니,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정아무[鄭某 정희량을 말한다.]는 어버이의 상중에 시묘 살이를 하다가 상례를 마치지 못했으니 불효요, 임금의 명을 피해 도망갔으니 충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효도하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하여 죄가 크니 무슨 낯으로 다시 세상에 나오겠습니까.” 하고, 조금 후에 작별하고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축수편>
○ 사화가 일어나서 사림이 모두 살해되니, 집 안에 간수해 둔 사초도 보존된 것이 없었다. 후일에 연산군 일기 수정청(燕山君日記修正廳)에서 사초 구하기를 몹시 서두르니, 공의 자제들이 집 벽 속에서 사초를 찾아 바치었다. 이에 힘입어 일기를 편수하였으니 대개 사화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사초를 감춰 두었던 것이다.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


정승조(鄭承祖)
정승조는 자는 술이(述而)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성종(成宗) 갑인년에 문과에 올라 한림을 거쳐 감찰에 이르렀으며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


이종준(李宗準)
이종준은 자(字)는 중균(仲鈞)이며, 호는 용헌(慵軒) 또는 호를 장륙(藏六)ㆍ부휴자(浮休子)ㆍ상우당(尙友堂)ㆍ태정일민(太庭逸民)이라 하였다. 이요,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성종(成宗) 을사년에 문과 제 2등에 올라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으며, 무오년에 화를 입었다.
○ 공은 문장을 잘 짓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다. 일찍이 서장관이 되어 연경(燕京)으로 가다가 역관(驛館)에 있는 그림 병풍이 좋지 못함을 보고 붓으로 칠해버렸다. 역관(驛官)이 통역을 불러 힐문하니, 통역은 “서장관이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리므로 반드시 그 뜻에 만족하지 아니하여 그렇게 한 듯합니다.” 하니,역관이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 곳에 이르니, 새 병풍 두 벌을 펼쳐 놓았으므로 공이 한 편에는 글씨를 쓰고 한 편에는 그림을 그렸는데, 모두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보는 사람이 탄복하고 칭찬하였다.
○ 공은 당시에 풍류로 명성이 있었다. 일본 호송관(護送官)으로 임명되어 동래(東萊)에 이르렀는데, 나이 12, 3세 되는 기생이 있었다. 공은 그 기생을 몹시 사랑하여 이름을 방안아(榜眼兒) 공이 문과 제 2등이 되었었다. 라 고쳐주며, “네가 시집가기 전에 내가 재차 사신갈 명을 받는다면 너와 인연을 맺을 것이니, 네 이름을 고치는 것은 그 뜻을 표시하는 것이라.” 하였다. 공이 이 해에 북평사(北評事)로 임명을 받았으므로 남쪽과 북쪽이 멀리 떨어져 있어 다시 오지 못하였다. 《추강냉화》
○ 권경유(權景裕)는 공과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는데, 남효온(南孝溫)이 어느 날 공과 함께 달밤을 이용하여 권경유의 집에 이르니, 경유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신을 거꾸로 신고 나와 맞이하여 함께 달빛 아래 앉았다. 공이 짐짓 청수(淸瘦)한 태도로 대하니, 경유는 크게 탄복하고 꿇어앉아 옷자락을 받들었다. 밤새도록 실컷 이야기하다가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공인줄 알고 서로 크게 웃었다. 드디어 뜻이 통하는 벗이 되었다. 《사우명행록》
○ 신(申) 지평 아무개 이 집은 가난해도 술을 좋아하여 일찍이 자기의 호를 장륙(藏六)이라 하였다. 공은 그 호를 좋아하여 술 한 병과 그 호를 바꾸자고 청했으나, 신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 무오년에 북계(北界 함경도(咸鏡道))로 귀양가는데, 고산역(高山驛)을 지나가다가 옛적 송 나라 이사중(李師中)이 지은 “바른말 하다가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던 외로운 충성을 다른 이는 따르지 못하리라 자신한다.[孤忠自許衆不與]”는 율시 한 수를 벽 위에 써 놓고 갔다.감사가 이것을 임금에게 알리니, 연산주는 원망하는 뜻이 있다고 하여 잡아다가 국문하고 죽였다. 홍귀달(洪貴達)이 공을 구하려 했으나 되지 아니하였다.


최부(崔溥)
최부는 자는 연연(淵淵)이며, 호는 금남(錦南)이요, 본관은 탐진(耽津)이다. 성종 임인년에 진사과와 문과에 올랐고, 병오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호당(湖堂)을 거쳐 사간이 되었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 갔다가 갑자년에 죽음을 당하였다.
○ 공은 널리 학문에 통하고 잘 기억하였으며, 영웅호걸의 기상이 있어 구속을 받지 아니하였다.
○ 성종 때 공은 사간이 되었고 정광필(鄭光弼)과 남곤(南袞)은 좌우 정언(左右正言)이 되었다. 공이 계축(契軸)에 시를 썼는데 그 끝 글귀에,“뒷사람이 손으로 가리키고 어루만질 적에 누가 간사하고 누가 충성스럽다 할는지 모르겠네.” 하였으니, 이 글귀가 비록 우연히 지은 것이지만, 그 글 뜻을 음미하여 보면 오로지 정(鄭 충성됨)ㆍ남(南 간사함) 두 분의 뒷날 행사를 위해 말한 것인 듯하다. 《기재잡기》
○ 공은 나주(羅州)사람이고 응교가 되었다. 송흠(宋欽)은 영광(靈光)사람이다. 정자(正字)가 되었다. 같은 때에 옥당에 있었는데 함께 휴가를 얻어 시골로 내려갔다. 서로 시오 리 가량 떨어져 있었는데 어느 날 송흠은 공을 방문하였다. 서로 이야기하던 중에 공이 “그대는 무슨 말을 타고 왔느냐?” 하니, 송흠은 “역말을 타고 왔네.” 하였다.공은 “나라에서 주는 역말은 그대의 집까지이고, 그대의 집에서 내 집에 오는 것은 사사 걸음인데 어찌 역말을 타겠느냐.” 하였다. 조정에 올라와서 공이 이 뜻을 임금에게 아뢰어 그를 파면시켰다. 송흠이 공에게 와서 하직하니 공은 “그대같이 나이 젊은 사람은 이 후에도 마땅히 조심해야 될 것이다.” 하였다. 《전언왕행록》
○ 공은 교리가 되어 제주(濟州)에 왕명으로 심부름 갔다가 성종 19년 무신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이 되었다. 아버지의 상사(喪事)를 듣고 돌아오는 길에 표류하여 중국 절강 태주부(浙江台州府)로 갔었는데 중국에서 관원을 시켜 데려다 주었다. 성종이 공에게 ‘표해록(漂海錄)’ 을 지으라 하므로 그대로 서울에 머물러 지어 바치고 그 후에 아버지의 초상에 갔으니,사람들이 이 일을 가지고 그를 비난하였다. 공이 일찍이 중국 사람을 만나 명수(命數)를 추산해 보니, 다만 고시(古詩) “고소성 밖의 한산사, 밤 종소리가 객선(客船)에 들려오네.” 를 써 주므로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뒤에 표류해서 태주(台州)에 이르러 밤에 종소리를 듣고 물으니, 그 곳이 곧 한산사 고소성이었다. 《국조기사》


이원(李黿)
이원은 자는 낭옹(浪翁)이며, 호는 재사당(再思堂)이요,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익제(益齊)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고 박팽년(朴彭年)의 외손이다. 성종 기유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좌랑에 이르렀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나주(羅州)로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中宗) 초년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 공은 기상이 당당하여 절개를 위해 죽을 각오가 있었으니, 어린 임금을 부탁할 만 하였다. 《사우명행록》
○ 공의 아버지 공린(公麟) 벼슬은 현령이다. 이 박팽년의 딸에게 장가들어 혼례를 거행하던 날 밤 꿈에 늙은 첨지 8명이 절하면서 청하기를, “우리들은 장차 솥에 삶겨 죽게 되었는데, 만약 죽는 생명을 살려 주시면 후하게 은혜를 갚겠습니다.” 하였다. 공린이 놀라서 일어나 보니,음식 만드는 사람이 자라 여덟 마리로 국을 끓이려고 하므로 즉시 강물에 놓아 보내게 하였다. 자라 한 마리가 빠져 달아나기에 어린 종이 삽을 가지고 잡으려다가 잘못하여 그 목을 끊어 죽였다. 그날 밤에 또 꿈을 꾸니 7명이 와서 감사하였다. 그 후에 공린이 아들 8명을 낳았는데 이름을 오ㆍ귀ㆍ원ㆍ타ㆍ별ㆍ벽ㆍ경ㆍ곤(鼇 龜 黿 鼉 鼈 鼊 鯨 鯤)으로 지었으니, 그 꿈의 상서를 기념한 것이었다.모두 재주와 명성이 있었다. 공은 문장과 행의(行義)로써 더욱 세상 사람의 추앙을 받았는데 갑자년에 비명에 죽었으니, 그 징험이 더욱 뚜렷한 셈이다. 지금도 이씨(李氏)들은 자라를 먹지 아니한다. 《부계기문》
○ 팔 형제를 순씨(荀氏)의 팔룡(八龍)에 비하면서 공을 지목하여 자명(慈明)이라 하였다. 태상(太常 시호를 주는 것을 맡은 관청)에 있으면서 김종직(金宗直)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하자고 의논하였다는 이유로 무오사화 때에 죄를 만들어 나주(羅州)로 귀양보냈다.갑자년에 죄가 더하니 공의 종이 공을 업고 도망하려 하였으나 공은 “임금의 명은 피할 수 없다.” 하였다. 종은 이장곤(李長坤)의 일을 인용하여 울면서 권고하였으나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형장에 이르러서도 말이 더욱 굳세니, 연산주가 더욱 노하여 형벌을 가등(加等)하였다.
○ 남효온(南孝溫)이 일찍이 말하기를, “익재(益齋)의 후손이고 박팽년(朴彭年)의 외손이니, 두 집의 어짐이 한 사람에게 모이었다.” 하였다.
○ 공의 아우 별(鼈) 자는 낭선(浪仙)이다. 은 공과 더불어 울면서 교외에서 작별하고, 이 뒤로는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평산(平山)에 살면서 그 당(堂) 이름을 ‘장륙당(藏六堂)’이라고 하였다. 늘 소를 타고 술을 싣고 고을의 노인과 더불어 낚시질을 하고 혹은 사냥도 하였으니 시를 읊고 술을 따르며 해가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몰랐다. 매양 술이 취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내가 우는 닭을 죽이려고 하나 순같은 성인이 있을까 염려된다. 죽이지 않으려고 하나 역시 도척(盜跖)같은 횡포한 자가 있구나. 풍우가 휘몰아치는 밤에 울어 그치지 않으니 순과 도척이 함께 듣게 된다. 선과 악을 각기 힘쓰니 울지 않는 것은 닭의 천성이 아니다. 하였다. 《패관잡기》
○ 공은 타고난 자질이 호탕하고 영걸스러우며, 풍채가 뛰어나고 문장도 높고 깨끗하였다. 비록 방랑불우(放浪不遇)한 때라도 슬퍼하고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한 평생 서적을 많이 보았지마는 성인의 도를 훼방한 글은 읽지 아니하였다. 김일손(金馹孫)은 남의 문장을 추켜올리는 일이 적었는데 공의 ‘금강록(金剛錄)’을 보고는, “이보다 더 잘 지을 수 없다.” 하였다.


이주(李冑)
이주는 자는 주지(冑之)이며, 호는 망헌(忘軒)이요,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용헌(容軒) 원(原)의 증손(曾孫)이다. 성종 무신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을 거쳐 정언이 되었다. 무오년에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사형을 당하였다.
○ 공은 어질고 글을 잘 지었다. 시의 격조는 옛태가 있었으며 세상을 구제할 만한 재주가 있었다. 일찍이 정언이 되어 나라 일을 말할 때에는 강개하고 기절이 있었다. 임술년 봄에 남효온(南孝溫)이 귀양살이하는 진도(珍島)로 공을 방문하여 벽파정(碧波亭)에서 유숙하였다. 뒤에 연산주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사우명행록》


김굉필(金宏弼) 처음에는 호를 사옹(簑翁)이라 하다. 갑술년에 나다.
김굉필은 자는 대유(大猷)이며, 호는 한훤당(寒暄堂)이요,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공의 아버지는 뉴(紐)인데 무과에 올라 사용(司勇)이 되었다. 김굉필은 경자년에 생원과에 오르고, 갑인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고, 벼슬이 형조 좌랑에 이르렀다.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희천(熙川)으로 귀양갔다가 경신년에 순천으로 옮기었다. 갑자년에 화를 당했으니 나이 51세였다. 중종(中宗) 정묘년에 도승지를 증직하고 정축년에 특별히 우의정을 증직하였으며, 선조(宣祖) 을해년에 영의정을 증직하고 문경(文敬)이란 시호를 주었다. 광해군(光海君) 경술년에 문묘(文廟)에 배향하였는데, 배향된 오현(五賢) 중에서 공이 그 으뜸이다.
○ 공은 현풍(玄風)에 살았다. 젊을 때 호탕하고 뛰어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였으니, 거리에 놀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회초리로 때렸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보면 곧 피하여 숨었다. 장성하자 학문에 힘을 썼다. 처음에 김종직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김종직은 바로 《소학(小學)》을 가르치면서,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이 책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주염계(周㾾溪)의 광풍제월(光風霽月)같은 쇄락(灑落)한 인품도 역시 이에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공은 명심하여 게으르지 아니하였으니, 특출한 행실이 비할 데 없었다. 평상시에도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띠고 있었으며 밤중이 되어서야 잠을 자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 본부인 외에는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다.사람들이 혹시 나라의 일을 물으면 반드시, “소학을 읽는 동자가 어찌 알리요.”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었는데,

글을 업으로 삼아도 오히려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 業文猶未識天機
소학 책 속에서 그 전의 잘못을 깨달았네 / 小學書中悟昨非

하였다. 김종직이 이를 평하기를, “이 말은 성인이 되는 기초이니 허노재(許魯齋) 후에 어찌 그만한 사람이 없으리오.” 하였다. 나이 30이 된 후에 비로소 다른 글을 읽었으며, 후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으니 명양정(鳴陽正) 현손(賢孫) 이장길(李長吉)ㆍ이적(李勣)ㆍ최충성(崔忠成)ㆍ박한공(朴漢恭)ㆍ윤신(尹信) 등은 모두 그의 제자였다. 나이가 들고 덕이 높아져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고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기의 명성을 숨겼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고 있었다. 《명신록》 《사우명행록》
○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뜻이 같고 도가 합하여 특별히 서로 잘 지내었다. 도의를 연마하고 고금의 일을 토론하여 때로는 밤을 새우기까지 하였다. 일찍이 정여창이 공에게 장차 비방하는 논의가 일어날 것이니 제자를 모아 학문을 강론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권고했으나, 공은 듣지 않으면서,“중[僧] 육행(陸行)이 불교를 가르칠 때 그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어떤 사람이 말리면서, ‘화환이 두렵도다.’ 하니, 육행은 ‘먼저 도를 깨달아 안 사람이 뒤늦게 깨달은 사람을 깨우치는 법이니,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알리는 것뿐이다. 재화와 복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내가 어찌 간여하리오.’ 하였다 하니,육행은 비록 중이지마는 그의 말은 취할 점이 있다.” 하였다. 공에게 배운 이로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ㆍ금헌(琴軒) 이장곤(李長坤)ㆍ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같은 분은 모두 학행이 뛰어난 제자이었다.
○ 어머니 한씨(韓氏)는 성품이 엄하고 예법이 있었다. 공은 아침마다 안부를 살펴 대청 아래에서 절하였다. 혹시 불쾌한 기색이 있으면 공은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서 감히 물러가지 아니하고 공경과 효도를 다하여 어머니의 기뻐하심을 보고서야 물러 갔다. 일찍이 그 자제들을 훈계하기를,“너희들은 항상 마음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게을리하지 말 것이며 남이 혹시 너희를 비평하더라도 절대로 서로 맞서서 말하지 말아라. 남의 나쁜 점을 말하는 것은, 피를 머금었다가 남에게 뿜으려면 자기 입이 먼저 더러워지는 것과 같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이를 경계로 삼을 것이라.” 하였다. 《동유연원록》
내칙편(內則篇)을 모방하여 가범(家範)을 짓고, 의절(儀節)을 마련하여 자손들에게 가르쳐 더욱 인륜을 중시하게 하고, 아래로는 남녀 종들에게까지도 안팎의 직책을 분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으니 안의 일은 계집종에게 주관하게 하고, 그 명칭을 도주(都主)ㆍ주적(主績)ㆍ주사(主辭)ㆍ주포(主庖)라 하였으며 밖의 일은 사내종에게 주관하게 하고 그 명칭은 도전(都典)ㆍ전사(典辭)ㆍ전시(典廝)라고 하였다.능력을 헤아려 임무를 맡기는데, 절하고 꿇어앉고 작업하는 것에 모두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봉급의 차이도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비교하여 더 주기도 하고 감하기도 하였으며 길사와 흉사의 경비도 풍년 들고 흉년 든 것에 따라서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였다. 또 1일과 15일에 국법을 읽고 훈계를 듣는 규정이 있었다. 《경현록(景賢錄)》
○ 공은 늘 초립(草笠)을 쓰고 연자(蓮子) 갓끈을 매었다. 노년에는 단칸방에 단정히 앉아 책상을 마주 대하고 글을 보며 밤이 깊어도 자지 않으므로 연자(蓮子) 갓끈이 책상에 대질리어 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니 그 소리로 그가 아직도 글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유선록》
○ 공이 부참봉(部叅奉)이 되었을 때 귀복(鬼服 가장(假裝)한 옷)과 온갖 희롱을 일체 상관의 지시에 따라 행하였다. 공은 그 당시에 자신의 명망이 무거움을 알고 보통 사람과 구별되지 않으려고 힘썼다. 공은 처음에 호를 사옹(簑翁)이라 하면서, “비록 큰 비를 만나 밖은 젖어도 안은 젖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얼마 뒤에 바꾸면서 말하기를, “이름을 지어 날리는 것은 혼연히 처세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연원록》
○ 공은 유학을 진흥시키고 후생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멀고 가까운 지방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사모하여 찾아와서 그가 사는 마을에는 학도들이 거리를 메웠으니,경서를 배우려고 당에 올라도 자리가 좁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자기가 사는 시냇가에 작은 서재를 짓고 ‘한훤당(寒暄堂)’이라는 호를 붙였다. 또 가야산(伽倻山)에 내왕하면서 학문을 강구했는데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시에,

듣건대 김공이 거처하는 곳이 가야산이라 하니 / 聞說金公棲築倻山
응당 무이산(武夷山)이리라 / 應是武夷山者是也

한 것이 이것이다. 《연원록》
○ 정여창(鄭汝昌)이 안음(安陰) 현감으로 있을 때에 공이 방문하였다. 정여창이 금잔 하나를 만들어 두니 공이 책망하기를, “자네가 이런 소용 없는 일을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네. 후일에 반드시 이것으로 남을 그르칠 것이네.” 하였다. 그 후에 고을 원이 과연 이 때문에 장물죄(贜物罪)를 지었다고 하였다. 《경현록(景賢錄)》 ○ 순천(順天) 사람이 경현당(景賢堂)을 세워 제사지내었고 이귀암(李龜巖)은 《경현록(景賢錄)》을 지었다.
○ 갑자년에 형벌을 더하니 공이 명을 듣고는 목욕하고 관디를 갖추었는데 얼굴 빛이 변하지 아니하였다. 손으로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 “이것까지 상해를 받을 수 없다.”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이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나라 일에 대하여 별로 건의한 적이 없었다. 이에 공은 시를 지어 바쳤는데 그 내용인즉,

겨울에는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물 마시는 것이 도이지만 / 道在冬裘夏飮氷
날이 개면 행하고 장마지면 그침을 어찌 오로지 하랴 / 霽行潦止豈專能
난초도 세속을 따르면 끝내는 변하게 될 것이니 / 蘭如從俗終當變
누가 소는 밭갈고 말은 탈 수만 있음을 믿으리오 / 雖信牛耕馬可乘

하니, 김종직이 화답하기를

분수 밖의 벼슬이 대관에까지 이르렀으나 / 分外官聯到代氷
나라 일을 바로 잡고 세상 구제함을 내가 어찌 하리오 / 匡君救俗我何能
마침내 후배에게 오소(迂踈) 옹졸하다고 조롱 받겠지만 / 終敎後輦嘲迂拙
세리의 용렬함은 따를 수 없는 것이네 / 勢利區區不足乘

하였다 이는 대개 공이 시에 나타낸 뜻을 싫어한 것이었으니 이로부터 김종직과 서로 분리되었다. 《사우명행록》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이른바 서로 분리되었다는 것은 지금에 와서 그 당시 어느 때 어떤 일로 해서인지 상고할 수 없다. 지금 《점필재전집(佔畢齋 全集)》을 살펴보면, 다만 시문을 제일로 삼고 일찍이 도학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으므로 한훤당이 이것을 질문한 것이다.비록 스승과 제자의 분수가 중하다고 하지만 진실로 지기가 합하지 않으면 어찌 끝내 서로 분리되지 않겠는가. 또 어찌 어떠한 일에 드러나게 서로 배척해야만 서로 분리되었다고 이르리오. 《퇴계집(退溪集)》


붙임 신영희(辛永禧)
신영희는 자는 덕우(德優)이며, 호는 안정(安亭)이요, 본관은 영월(寧越)이다. 대제학 석조(碩祖)의 손자이다. 계묘년에 진사과에 올랐으나 과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다시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 호방하여 구속을 받지 않고 대절이 있어서 세속의 테두리를 벗어났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일찍이 말하기를, “지금 선비의 기개를 보면 옛날 동한(東漢) 시대 말기와 같으니 멀지 않은 시일에 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대는 속히 숨으라.” 하였다.공은 갑자기 직산(稷山) 사산(斜山) 아래로 가서 남효온(南孝溫)ㆍ홍유손(洪裕孫)들과 함께 죽림우사(竹林羽士)라 하였는데 문장과 행의(行義)가 한 시대의 영수가 되었다. 작은 당을 지어 당 이름을 안정(安亭)이라 하였다.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이 산장을 지나가다가 시를 지었는데,

마을 이름을 노인이라 하니 어찌 알지 못하랴 / 村號老人那不識
동네 이름을 빈사라 하니 이를 좋아해서 온다 / 里名貧士愛玆來
나뭇군 아이는 선비의 풍류가 멀어져 감을 알지 못하지만 / 樵兒不識風流遠
오히려 사산 별곡만은 부르고 있네 별곡(別曲)은 공이 지은 것이다 / 猶唱蛇山別曲回

하였으며, 김종직이 일찍이 공의 남정시(南征詩)를 보고, “이 시는 마땅히 청산 백석(靑山白石) 사이에서 읊어야 될 것이라.” 하였다. 《해동잡록》
김굉필이 일찍이 나를 책망하기를, “그대와 벌써 교분을 끊으려고 해도 정리상 차마 끊지 못했다.”고 하므로 내가 물으니, “그대가 아니었다면 능히 결단하였을 것이다.” 하였다.다시 물으니, “백공(伯恭) 남효온(南孝溫)과 백원(百源) 무풍정(茂豊正)과 정중(正中) 수천정(秀泉正)과 문병(文炳) 허반(許磐)은 모두 진(晋) 나라 선비들의 풍습이 있다. 진 나라는 청담(淸談)으로 폐해를 입었으니 10년이 못 가서 화가 이 무리들에게 미칠 것이다.나는 맹세코 지금부터 자네들과 다시 내왕하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후에 모두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신영희(申永禧)가 지은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
○ 김굉필이 신영희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화가 멀지 않은 시일에 일어날 것이니, 나같은 사람은 진실로 면할 수 없지마는 그대는 멀리 피하라.” 하고 드디어 서로 교분을 끊었다. 남효온(南孝溫)의 병이 위독하여 김굉필이 가서 문병하였으나 효온이 거절하고 보지 않으므로 굉필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효온은 벽을 향해 누워서 말 한 마디 없이 영원히 결별하였으니, 이는 굉필과 절교하는 것이었다. 굉필이 영희를 끊으려고 한 것과 효온이 굉필을 끊으려고 한 것은 세상 일이 어지럽고 위태한 관계로 철인(哲人)이 아니면 능히 화를 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연원록》
○ 공은 기개가 있어 세상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다. 남의 계집종을 관계하여 그 주인에게 욕을 보았으므로 마음에 불평을 품고 죽었다. 《소문쇄록》


붙임 수천부정(秀泉副正)
수천부정(秀泉副正) 정은(貞恩)은 자는 정중(正中)이며, 호는 설창(雪窓) 또는 월호(月湖) 또는 남곡(嵐谷) 이다. 익녕군(益寧君) 나(袳)의 아들이며 태종(太宗)의 손자이다.
○ 공은 음률이 세상에서 제일 뛰어났다. 슬프게 악기를 타면 길가는 사람도 반드시 울었다. 날마다 시와 술을 즐겼으니 무풍정(茂豊正)과 명성이 같았다.김굉필의 꾸짖음을 듣고는 자신의 옛 습관을 모두 고쳤으나 일부러 속된 태도를 취하면서 문을 닫고 밖에 나오지 아니하고 감히 예전 친구들과 내왕하지 아니했으니 과연 혼자 몸을 보전하였다. 사람된 품이 독실하고 겸손했으며 식견과 도량이 있고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사우명행록》


붙임 홍유손(洪裕孫)
홍유손은 자는 여경(餘慶)이며, 남양 향리(南陽鄕吏) 순치(順致)의 아들이다. 호는 조총(蓧叢) 또는 광진자(狂眞子)라고 하였다.
○ 일찍이 걸어서 영남(嶺南)으로 가서 김종직(金宗直)을 보고 두시(杜詩)를 배웠다. 김종직이 “이 사람은 벌써 안자(顔子)의 즐겨하는 뜻을 알았다.”고 하니 배우는 이가 모두 그를 따랐다.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히고 서울에 와서 김종직에게, “세상 일에 대하여 건의하지 않고 어찌 공연히 벼슬만 하고 있느냐.”고 간하였다. 또 “지금의 학자들은 모두 불교와 노자(老子)를 미워하면서도 행하는 일은 한 가지도 불교와 노자를 벗어난 것이 없다.둥글게 행하고 모난 것을 싫어함은 노자의 사상이고, 자기 혼자만 행하고 남을 걱정하지 않는 것은 불교라.”고 하니 김종직이 크게 미워하였다. 이로부터 매양 “여경(餘慶)이 간사하다.”고 하니 공도 또한 자기를 감추고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추강냉화》


조위(曹偉)
조위는 자는 태허(太虛)이며, 호는 매계(梅溪)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영의정 석문(錫文)의 종질(從姪)이다. 성종 갑오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을 거처 호조 참판이 되었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의주(義州)로 귀양갔다가 또 순천(順天)으로 옮겨졌다. 계해년에 죽으니 나이 50세이었으며 갑자년에 추형(追刑)하였다.
○ 재주가 뛰어나고 학식이 넓었다. 시문을 잘하여 문장으로 성종에게 크게 우대를 받았다.
○ 성종 때에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지방관으로 나갈 때 특별히 한 계급을 올려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임명되었다. 유호인(兪好仁)과 함께 임금의 우대가 극진하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동각잡기》
○ 매양 세말에 지은 시를 임금에게 올리게 하니 임금의 마음에 맞았으므로 그 부모에게 곡식을 내려주게 하였다. 군수로 있을 때 품계가 찼고 어버이 상을 당하자 또 부의(賻儀)를 내려 주었는데, 지방관에게 부의의 특전을 내리는 것은 그 전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소문쇄록》
○ 공은 김종직의 처남[妻弟]이다. 성종이 명을 내려 김종직이 지은 시문을 편집하게 하니 공이 조의제문(吊義帝文)을 문집 첫머리에 실었다. 연산 무오년에 옥사가 일어나자 유자광(柳子光)이 참소하기를,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실은 것은 자못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하니, 연산주가 크게 노하였다. 이때 공은 하정사(賀正使)로서 연경(燕京)에 가 있었는데, 연산주는 “공이 압록강을 건너오거든 바로 베어 죽이라.” 하였다. 공의 일행이 요동(遼東)에 이르러 비로소 그 말을 들었다. 공의 서제(庶弟) 신(伸)이 일찍이 요동에 점 잘 치는 사람 추원결(鄒源潔)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가서 길흉을 물으니 다른 말은 없고 다만 두 글귀의 시를 써 주었다. 그 시에,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을 뛰쳐 나오나 / 千層浪裡飜身出
응당 바위 밑에서 세 밤을 유숙한다 / 也須巖下宿三宵

하였다. 조신(曹伸)이 공에게 보고하기를, “첫 글귀는 화를 면할 듯도 한데, 아래 글귀는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서로 함께 슬피 울었다. 압록강까지 돌아와서 바라다보니 강가에서 관원이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일행은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으니 의금부 도사가 와서 형벌을 행하려는 것인 줄 알았다. 서로 마주 보고 목이 메이도록 울면서 생명이 경각간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는데,강을 건너서야 정승 이극균(李克均)이 그를 구해 내어 다만 잡아다가 문초하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일행은 기뻐하면서 그제야 점 치는 사람이 써 준 시의 첫 구절이 이것을 뜻하는 것임을 깨달았으나, 아래 글귀는 해석하지 못했는데, 마침내 죽지는 않고 곤장을 맞고 순천(順天)으로 귀양갔다가 병들어 죽으니 고향인 금산(金山)에 장사 지내었다.갑자년에 화가 일어나자 그 전의 죄를 추록(追錄)하여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었다. 시체를 끌어 내어 묘앞 바위 밑에 두고 3일 동안이나 내버려 두었으니 조신은 그제야 두 글귀가 모두 맞은 것을 깨닫고 괴이하게 여겨 탄식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병진정사록》


박한주(朴漢柱)
박한주는 자는 천지(天支)이며, 호는 우졸자(迂拙子)요,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성종 을사년에 문과에 올라 헌납에 임명되었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벽동(碧潼)으로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사형을 당하였다. 중종(中宗) 때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 공은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말이 곧고 간절하였다. 지방으로 나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어서는 고을을 태평하게 다스렸다. 연산군이 그를 불러 간관에 임명하였는데 공이 의견을 아뢰기를, “후원(後苑)에서 말을 달리고 공을 차며 용봉장막(龍鳳帳幕)을 펼쳐 놓고 잔치 놀음하는 때가 많으니, 임금께서 어찌 이러한 정사를 하십니까.” 한즉,연산군이 노하여 답하기를, “용봉장막이 네 물건이냐?” 하였다. 이에 박한주는 “이것은 모두 백성의 재력에서 나온 것이니, 신민의 장막이라 해도 옳을 것입니다. 어찌 임금님의 사사로운 물건입니까.” 하였다. 이어 노사신(盧思愼)ㆍ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탄핵하자 마침내 그들에게 무함을 당하였다.


임희재(任熙載)
임희재는 자는 경여(敬輿)이며, 본관은 풍천(豊川)이요, 사홍(士洪)의 아들이다. 무오년에 문과에 올라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김종직의 제자였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
○ 공은 글씨를 잘 썼다. 일찍이 한 절구를 병풍에 쓰기를,

요ㆍ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 祖舜宗堯自太平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지 / 秦皇何事苦蒼生
재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 不知禍起蕭墻內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 虛築防胡萬里城

하였다. 연산주가 어느날 갑자기 사홍의 집에 갔다가 이것을 보고, “누가 쓴 것이냐?” 하니, 사홍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이에 연산이 노한 기색을 띄면서, “경의 아들은 불초한 사람이다. 내가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의사는 어떠한가?” 하니, 사홍은 꿇어앉아 아뢰기를,“이 자식의 성질과 행실은 전하의 말씀처럼 온순하지 못합니다. 신이 아뢰고자 하다가 미처 아뢰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니 드디어 화를 입었다. 혹은 “공이 일찍이 그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자, 사홍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아들을 참소했다.”고 한다. 《국조기사》


강백진(康伯珍)
강백진은 자는 자온(子韞)이며, 본관은 신천(信川)이요, 김종직의 사위이다. 성종 정유년에 문과에 올라 사간이 되었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사형을 당하였다.


유정수(柳廷秀)
유정수는 자는 국준(國俊)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성종 계묘년에 문과에 올랐다. 무오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그때 장령의 신분으로 극력 구원하다가 마침내 곤장을 맞고 초산(楚山)으로 귀양가니 울분이 쌓여 병들어 죽었다. 아들 관(灌)은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계맹(李繼孟)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가다. 기묘당적(己卯黨籍)조에 상세하다


강혼(姜渾)
강혼은 자는 사호(士浩)이며, 호는 목계(木溪)요,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생원과에 장원하고 성종 병오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 갔다가 놓여 돌아왔다.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벼슬이 숭록대부 판중추(崇祿大夫判中樞)에 이르고 진천군(晋川君)으로 책봉되었다.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 공은 문명(文名)이 김일손(金馹孫) 다음이었다.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 연산주가 말년에 그 첩을 잃고 매우 슬퍼하여 여러 신하를 시켜 제문을 짓게 할 때 공이 제문을 지어 그 슬프고 쓰라린 형상을 지극히 다하여 표현하니, 연산주가 기뻐하였다. 이로부터 연산주에게 자못 사랑을 받았으나 선비들의 공론은 그를 천하게 여기었다.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도승지로서 반교문(頒敎文)을 짓게 되었는데, 문득 썼다가 도로 지워버려 문리(文理)를 이루지 못하니 사람들이 도깨비 글이라 하였다. 아마 밤에는 마음대로 행동하다가 밝은 날에는 스스로 기운을 잃은 것을 말한 것이다. 《음애일기》 《국조기사》
○ 공은 젊을 때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연산주에게 총애를 받게 된 뒤에는 학문을 가지고 음란한 정치를 아름답게 꾸며 아첨하였으니 궁인(宮人)의 애사(哀詞)재소(齋疏)를 짓는데, 그 곱고 아름다운 문장을 남김없이 표현하였다. 이로부터 임금의 은혜와 사랑이 날로 더하여 갑자기 승진하여 도승지가 되니, 관계(官階)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도승지의 직은 옮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청류(淸流)의 논의에 죄를 얻었다. 《음애일기》
○ 성몽정(成夢井)이 말하기를, “강혼이 대궐 안 여러 각(閣)의 아름다운 명칭을 지어 올려서 폐주에게 아첨하였으니, 문장은 비록 넉넉하나 어찌 귀하다 하리오.” 하였다.


[주D-001]촉루의 …… 나은지 : 《장자(莊子)》에서 나온 말인데, 죽은 사람의 두골(頭骨)이 남쪽만 향해서 앉아 있는 임금보다 걱정없고 편하기가 나으므로 바꾸지 않겠다고 한 우언(寓言)에서 온 것이다.
[주D-002]원풍(元豊)ㆍ희녕(熙寧) : 송(宋) 나라 원풍ㆍ희녕년간에 명현(名賢) 한기(韓琦)ㆍ부필(富弼)ㆍ소식(蘇軾) 등이 나온 시대를 말한 것이다.
[주D-003]한숨 쉬고 통곡하며 : 한 문제(漢文帝) 때의 가의(賈誼)가 상소하니, “지금 천하의 사세(事勢)는 통곡할 만한 것이 있고 한숨질만 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4]강관의 무리들 : 전한(前漢) 때의 문인 가의가 나이 젊고 재주가 있어 정치를 개혁할 것을 주창하였는데, 훈구대신인 강후(絳侯)ㆍ관영(灌嬰) 등이 헐뜯고 방해하였다고 한다.
[주D-005]뱃속의 칼 : 당대(唐代)의 재상 이임보(李林甫)가 입에는 꿀을 바르고 뱃속에는 칼을 품고서 사람들을 많이 해쳤다고 하는 고사에서 온 말.
[주D-006]위(魏) 나라 …… 보인 것 : 북위(北魏) 때의 사관들이 황실(皇室) 선대의 악한 것을 써서 돌에 새겨 큰 길가에 내보였다가 살육을 당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
[주D-007]솔개나 …… 않는데 :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인 열자(列子)가 “사람이 죽은 뒤에 땅 속에 묻히면 굼벵이들이 파먹을 것이요, 묻지 않고 숲 속에 버리면 까마귀나 솔개들이 쪼아 먹을 것이니 죽은 이에게는 묻는 것이나 묻지 않는 것이나 매한가지이다.”라고 한 말에서 온 말이다.
[주D-008]탐천(貪泉) : 중국 광동 남해현(南海縣)에 탐천이 있는데, 관리들이 그 물을 마시면 탐욕이 생기게 된다고 한다. 청렴한 관원인 오은지(吳隱之)가 “나는 마셔도 마음이 변하지 아니할 자신이 있다.” 하고 마시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읍령이나 탐천이란 이름에 상관없이 흐리고 깨끗함이 사람에게 달렸다는 뜻이다.
[주D-009]타루비(墮淚碑) : 진(晉) 나라의 현인 양호(羊祜)가 형주(荊州)에 있을 때의 덕을 사모하여 그 곳 백성들이 현산(峴山)에 세운 비를 말하는데, 사람들이 그 비 앞을 지날 때에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그 비를 ‘타루비’ 라 하였다.
[주D-010]영인(郢人)의 자귀[斤] : 영(郢) 땅의 사람이 자귀질을 잘 하여 남의 콧등에 흙을 조금 붙여 두고 그것을 깎는데 코를 다치지 않고, 또한 코의 주인도 자귀질의 솜씨를 믿기 때문에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
[주D-011]하늘에 …… 뻗혔으며 : 진 나라의 장화(張華)가 천문을 본즉 두우성(斗牛星)사이에 광채가 나므로 전환(電煥)에게 물었더니, “그 밑 땅 속에 반드시 보검(寶劍)이 있는 까닭이다.” 하여 전환을 두우성의 분야(分野)인 풍성(豊城)에 수령으로 보내어 땅 속을 파니 과연 보검이 나왔다는 고사가 있는데 여기서는 문장의 광채를 말한 것이다.
[주D-012]땅에 …… 내는 것 : 진의 문인 손흥공(孫興公)이 천대산부(天臺山賦)를 지어서 남에게 보이며, “이 글은 땅에 던지면 반드시 쇳소리[金聲]가 날 것이다.” 하였다.
[주D-013]태산(泰山)이 …… 못하겠느냐 :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로서 노(魯) 나라 권신 계씨(季氏)가 태산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것은 비례의 제사이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태산이 임방(일찍이 공자에게 예의 근본을 물은 제자)만 못해서 비례의 제사를 받겠느냐.” 했다고 한다.
[주D-014]간지(干支) : 육갑(六甲)의 갑(甲)ㆍ을(乙)ㆍ병(丙)ㆍ정(丁) 등은 간(干)이라 하고, 자(子)ㆍ축(丑)ㆍ인(寅)ㆍ묘(卯) 등은 지(支)라 하는데, 간과 지가 합한 갑자(甲子)ㆍ을축(乙丑) 등이 간지이다.
[주D-015]삼팽(三彭) : 도가(道家)의 서(書)에 의하면 사람의 몸 가운데, “삼팽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천상(天上)에 올라가서 사람의 죄악을 보고한다.”는 말이 있다. 수양한 사람은 삼팽이 없어져서 죽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주D-016]하늘의 놀이 : 《장자(莊子)》에서 나온 말인데, 사람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자유자재한 경지가 이룩되었음을 말한다.
[주D-017]두 낭자 : 《단계(丹溪)》에 두 낭자에 관한 고사가 있기 때문에 시에 그 말을 쓴 것이다.
[주D-018]방안아(榜眼兒) : 문과의 제2등 합격을 방안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표적으로 이름을 고쳐 준 것이다.
[주D-019]장륙(藏六) : 자라[鱉]가 네 발과 머리와 꼬리의 여섯 가지를 움추려 감추는 것을 ‘장륙’이라 하는데 이것은 몸을 보전하여 화를 피하겠다는 뜻이다.
[주D-020]팔룡(八龍) : 한(漢) 나라 순숙(荀淑)의 아들 팔 형제가 모두 훌륭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순씨 팔룡(荀氏八龍)’이라 하였다.
[주D-021]자명(慈明) : 순씨팔용(荀氏八龍) 가운데 가장 나은 사람.
[주D-022]내가 …… 염려된다 : 맹자의 말에, “닭이 울 때부터 일어나서 부지런히 착한 일만 하는 것은 순(舜)의 무리요, 닭이 울 때부터 부지런히 이익만 구하는 것은 도척(盜賊 중국 춘추시대의 몹시 악한 사람인데, 몹시 악한 사람을 비유한 말로 쓰인다)의 무리이다.” 하였다.
[주D-023]오현(五賢)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의 다섯 학자를 말한다.
[주D-024]주염계(周㾾溪)의 광풍제월(光風霽月) : 송(宋) 나라 문장가 황곡산이 같은 문장가인 주염계를 화창한 바람과 비 갠 뒤의 달[光風霽月]이라고 칭송하였다.
[주D-025]허노재(許魯齋) : 원(元) 나라 허형(許衡)의 호(號)가 노재인데, 평생에 주자(朱子)의 《소학(小學)》을 중히 여겼다고 한다.
[주D-026]내칙편(內則篇) : 《예기(禮記)》의 한 편명(篇名)인데 여자의 행실에 관한 교훈이 실려 있다.
[주D-027]무이산(武夷山) : 주자(朱子)가 서원(書院)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주D-028]안자(顔子) : 공자의 수제자. 그가 궁하게 살면서도 그 즐거워함을 변하지 아니 하였다는 말이 있다. 송 나라 주무숙(周茂叔)이 정자(程子)에게, “안자가 즐거워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라.” 하고 가르쳤다.
[주D-029]추형(追刑) : 살았을 때에 미처 형을 가하지 못하던 것을 죽은 뒤에 시체에 형벌을 가하는 것.
[주D-030]애사(哀詞) : 사람이 죽은 뒤에 그를 애도하여 지은 운문(韻文)으로 된 조사(弔辭).
[주D-031]재소(齋疏) : 절에서 재(齋)를 올릴 때에 쓰는 축원문(祝願文).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갑자화적(甲子禍籍)



윤필상(尹弼商) 성종조(成宗朝)의 상신(相臣)이다. 갑자년에 진도(珍島)로 귀양가서 화를 입었다.
한치형(韓致亨) 연산조(燕山朝)의 상신이다. 죽은 뒤에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당하였다.
한명회(韓明澮) 세조조(世祖朝)의 상신이다. 죽은 뒤에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당하였다.
정창손(鄭昌孫) 세조조의 상신이다. 죽은 뒤에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당하였다.
어세겸(魚世謙) 연산조의 상신이다. 죽은 뒤에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당하였다.
심회(沈澮) 세조조의 상신이다. 죽은 뒤에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당하였다.
이파(李坡) 성종조의 명신(名臣)이다. 죽은 뒤에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당하였다.
이극균(李克均) 연산조의 상신이다. 인동(仁同)으로 귀양갔다가 사약을 내려 죽음을 당하고 또 해골을 부수었다.
성준(成俊) 연산조의 상신이다. 직산(稷山)으로 귀양갔다가 살해되었다.


김승경(金升卿) 경술년에 나다.
김승경은 자는 현보(賢甫)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요, 계림군(鷄林君) 균(稛)의 증손(曾孫)이다. 계유년에 생원과에 오르고, 세조 병자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예조 참판ㆍ대사헌에 이르렀다. 갑자년에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당하였다.
○ 공은 승정원에 있으면서 직무에 성실하여 다른 관원들은 으레 은띠[銀帶]를 띠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금띠를 내려 주었다. 공은 직무를 볼 때 조심하였으며 행정 능력이 우수하였다. 더욱 옥사를 처결하는 데 장점이 있었으므로 죄수를 처결하다가 의심이 있는 것은 반드시 공에게 맡겨 처결하였다. 성종 계축년에 죽으니 나이 64세였다. <묘지(墓誌)>


이세좌(李世佐)
이세좌는 자는 맹언(孟彦)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광성군(廣城君) 극감(克堪)의 아들이며, 좌의정 극균(克均)의 조카이다. 성종 정유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형조 판서ㆍ판중추에 이르렀으며 광양군(廣陽君)에 책봉되었다.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 공의 숙부 극균(克均)은 성종의 고명(顧命)을 받은 대신으로서 연산주의 초기에 정치를 바로잡은 바가 많았으니 이에 연산주가 매우 앙심을 품었다. 일찍이 연산주의 어머니에게 사약을 내리던 날 공이 형방승지로서 약을 가지고 갔었고, 공의 아들이 또 이조 홍문관에 벼슬하고 있으니 수형(守亨)은 사인(舍人)이고, 수의(守義)는 한림(翰林)이고,수정(守貞)은 수찬(修撰)이었다. 임사홍(任士洪)과 유자광(柳子光)이 크게 시기하여 밤낮으로 연산주를 충동하여 옥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어느 날 임금과 신하가 같이 즐기는 잔치를 정전(正殿)에서 베풀었다. 재상들이 잇달아 술 두 잔을 올리면 연산주도 끝의 술잔을 재상에게 돌려 주었다. 재상들은 받아서 마셨는데 공은 끝의 술잔을 받아서 마시지 못하고 물러나왔다.이튿날 연산주는 “신하가 임금이 주는 것을 받아 마시지 못한다고 거짓 핑계하고, 또 남은 술방울을 임금의 옷에 뿌렸으니, 불경함이 이보다 더 심한 일이 없다. 이것은 큰 불경죄이니 세좌(世佐)를 옥에 가두라.” 하고 문서를 수색하게 하니, 모든 사대부들이 그 집에 명함을 남겨 두었는데, 이것은 설날 세배 인사를 하고 남겨둔 것이었다. 이들 중 서울과 지방의 여러 신하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옥에 가두게 하니,가주서 이희보(李希輔)도 옥에 갇히었다. 이에 연산주가 “너는 소신(小臣)이니 그와 상관이 없을 것이다. 남아서 승정원의 일을 보살펴라.” 하였다. 아마 이희보는 전에 궁인(宮人)의 만장을 지은 일로 사랑을 얻었던 까닭이다. 수일 후에 여러 신하들도 차차 놓여 나왔다. 《기재잡기》


권주(權柱)
권주는 자는 지경(支卿)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성종 신축년에 문과에 올라 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갑자년에 살해당하였으나 중종(中宗)이 즉위하여 좌참찬을 증직하였다.
○ 공은 총명이 뛰어나서 한 번 보기만 하면 잊지 아니하였다. 8세에 사서(四書)를 읽고, 10세에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통달하였으며, 13세에는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문구를 지었다. 대체(大體)를 지키고 절조가 있었으나 연산주 시대를 만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사우명행록》
박한주(朴漢柱)ㆍ이수공(李守恭)ㆍ강백진(康伯珍)ㆍ무풍정총(茂豊正摠)ㆍ최부(崔溥)ㆍ이원(李黿)ㆍ김굉필(金宏弼)ㆍ이주(李冑)ㆍ강겸(姜謙) 이상 9명은 모두 점필재(佔畢齋)의 제자로서,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사형당하였다.
정여창(鄭汝昌)은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가다가 도중에서 죽었다. 갑자년에 추형(追刑)을 당하였다.
조위(曹偉)는 무오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가서 죽었다. 갑자년에 추형을 당하였다. 이상 11명은 모두 무오당적(戊午黨籍)에 나타나 있다.


강형(姜詗)
강형은 자는 형지(詗之)이며,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성종 경술년에 문과에 올라 대사간이 되었다. 아우 겸(謙)과 함께 형제가 사형당하였으나 중종 초년에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 공은 너그럽고 공평하고 후하고 정직했으며, 또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사우명행록》
○ 아내 김씨는 먹지도 않고 슬피 울다가 다음 달에 죽으니, 중종 2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손자 온(溫)은 중종 때에 사인(舍人)이 되었고, 증손 사상(士尙)은 선조(宣祖) 때에 상신이 되었다.


홍식(洪湜)
홍식은 자는 지정(持正)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성종 계묘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승지에 이르고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남효온(南孝溫)
남효온은 자는 백공(伯恭)이며, 호는 추강(秋江) 또는 행우(杏雨)라 하였으며, 또 벽사(碧沙)라고도 하였다.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임자년에 죽으니 나이 39세였다. 갑자년에 추형(追刑)을 당하였으나 중종 병인년에 원통함을 씻어 주어 좌승지를 증직하고, 정조(正祖) 갑진년에는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주었다.
○ 공의 아버지 전(恮)은 일찍 죽었으므로 어머니 이씨(李氏)를 섬겨 효행이 소문이 났다.
○ 공의 사람된 품이 성질은 온화하고 담박하면서도 굳세고, 초월하면서도 법도에 맞았으며 가슴 속이 시원하고 깨끗하였다. 일찍이 김종직에게 배웠는데 종직은 감히 이름을 부르지 않고 ‘우리 추강(秋江)’ 이라 하였으니 이처럼 존경과 예우를 받았다. 《소문쇄록》
○ 공은 성품이 호방하고 강개하며 학문에 독실하고 옛것을 좋아하며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일찍이 청한자(淸寒子) 김시습(金時習)을 스승으로 삼아 세상 밖으로 돌며 세속에 관계하지 아니하였다. 나이 18세 때에 성종에게 글을 올려 소릉(昭陵) 복위(復位)를 청하다가 배척당했으나 흔들리거나 굽히지 아니하였다.
○ 소릉(昭陵) 회복하기를 청하는 소를 올릴 때,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미치광이라 하여 옛날 당(唐) 나라의 손창윤(孫昌胤)에 비하였다. 공은 물러와서 시를 지었으니, 그 시에, “북쪽 대궐에 일찍이 글을 올리니 뭇 사람의 평판이 자못 시끄럽구나. 부질없이 손자(孫子 손창윤)의 호를 얻었고 짧은 도롱이를 걸치고 추강에 왔도다.” 하였다. 이로부터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경치 좋다는 곳을 두루 찾으니, 그의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장(諡狀)>
○ 일찍이 <육신전(六臣傳)>을 지으니 제자들은 장차 큰 화가 닥칠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이에 공은 “내가 어찌 한 번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끝내 충신의 이름을 없애리오.” 하였다.
○ 공은 주계정(朱溪正 심원(深源)ㆍ안응세(安應世)와 더불어 벗을 삼았다. 진사과에 올랐으나 문과에는 시험보지 아니하였다. 어머니가 과거 보라는 말을 하면 때로 과거를 보기는 하여도 대수롭게 애쓰지 아니하였다. 기해년에 조신(曹伸)이 일본에 갔다가 시를 가지고 와서 보기를 청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서로 잘 지내었다.집이 고양(高陽)에 있으므로 나귀를 타고 서로 찾았다. 압도(鴨島)에서 같이 자면서 갈대로 불을 피우고 물고기와 게를 먹으면서 운(韻)자를 내어 시를 지었다. 조신의 소개로 김종직을 호남(湖南)에서 만났다. 매양 세상 일에 비분하여 더러 무악(毋岳)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서럽게 울다가 돌아왔다. 과격한 논조로 바른 말을 하여 비록 시국의 기휘(忌諱)에 저촉되어도 꺼려함이 없었으니,정여창(鄭汝昌)과 김굉필(金宏弼)이 경계하고 말려도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정ㆍ김 두 사람의 지조와 행실이 공과 다르면서 교분만은 서로 두터웠으니, 이른바 초(草)와 난초(蘭草)가 향기는 같기 때문이다. 《병진정사록》 《소문쇄록》
○ 공은 재주와 행실은 뛰어났으나 옷과 음식은 누추하였다. 항상 암말[雌馬]을 타고 다녔으므로 아이들과 부녀들이 따라 다니면서 웃었다. 천성이 술을 즐겼으나 어머니가 꾸짖으므로 지주부(止酒賦)를 짓고 10년 동안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다. 중풍을 앓아 다시 술을 마시다가 병이 그치니 부지주부(復止酒賦)를 짓고 5년 동안 마시지 아니하였다. 뒤에 병이 심해지자 술을 항용하였다.
○ 공은 손에 낚싯대를 들고 남포(南浦)에서 고기를 잡으며 대낮의 해가 환하게 비치는 것을 쳐다보고 탄식하였다. “사람이 사는 것이 곧으니 사람도 속일 수 없는데 하늘을 속일 수 있으랴.” 하고 드디어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좌우에서 굽어 살핀다.” 는 12자로 경지재명(敬止齋銘)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시장>
○ 또한 중에게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인간 세상은 어두워 지옥같은데 / 人世沉沉地獄深
가부(跏趺) 무슨 일로 관음보살을 염(念)하는가 / 跏趺何事念觀音
관계에 명성을 구하니 풍파가 사납고 / 求名宦海風波惡
추강에 낚싯대를 잡으니 장기(瘴氣)가 침노하네 / 把釣秋江瘴濕侵
성정(性情)을 수양하려고 하니 세간 도리를 떠나야 하고 / 欲理性情違世敎
산업을 경영하려고 하니 처음 먹은 마음을 저버리게 되네 / 謀營生産負初心
손에 《참동계(參同契)》를 잡고 / 不如手執參同契
소소한 단풍나무 숲에 돌아가 눕는 것만 못하구나 / 歸歐蕭蕭楓樹林

《상촌휘언(象村彙言)》
○ 연산주 갑자년에 공이 성종 때에 소릉(昭陵) 회복의 소를 울린 것을 추죄(追罪)하여 화가 묘에 미쳤다. 묘가 고양(高陽)에 있었는데 임금은 관을 쪼개고 시체를 양화도(楊花渡) 나룻가 모래밭 위에 버리고 가게 하였다. 남효온의 부인과 사위 네 사람 중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시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공의 아들 이름은 충서(忠恕)인데 정신병이 있었다. 이때에 함께 죽이라고 하니 충서는 큰 소리를 치면서 두려워함이 없었다. 추관(推官)이 “본래 미친 병이 들었으니 인간으로 칠 것도 못됩니다.”고 아뢰었다. 임금은 “미친 자가 세상에 있으면 무엇하겠느냐. 꼭 죽여 버리라.” 하였다. 그의 부인 조씨(趙氏) 호군(護軍) 견지(見知)의 딸 는 형장에서 시체를 지키다가 3일만에 밤에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이때 날씨가 추워서 시체가 다 얼었으므로 조씨는 밤낮으로 시체를 안고 자기 몸의 온도로 시체를 녹인 뒤에 염습하여 관 속에 넣었다. 장사와 제사를 예절대로 지내니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으나 그 시어머니는 조씨가 성품이 거세어 시체를 겁내지 않는다고 나무랐다. 《명신록》 《소문쇄록》
○ 공의 집안 사람들이 공의 유고(遺稿)가 다시 화의 발단이 될까 염려하여 모두 불 속에 넣었으므로 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아니하였다. 외손 유홍(兪泓)이 흩어져 없어진 나머지 유고를 모두 거두어 정리하니 약간 편이 되었다. 《명신록》


홍귀달(洪貴達) 문형(文衡)에 들어있다.


권달수(權達手)
권달수는 자는 통지(通之)이며, 호는 동계(桐溪)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성종 임자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벼슬은 교리에 이르렀다. 용궁(龍宮)으로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사형당하였으나 중종 때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 공은 천성이 강개하고 기절(氣節)이 있었다. 젊을 때 큰 뜻이 있었고 남보다 뛰어났다.
○ 공은 젊을 때 형 민수(敏手)와 함께 상을 당하여 율곡(栗谷)에 있는 어버이의 묘소에 여막을 짓고 있었다. 하루는 이안촌(理安村) 자기 집에서 여막 있는 묘소까지 걸어가다가 퇴판현(退板峴) 반석(盤石)에서 조금 쉬었다. 이때는 마침 늦은 가을이었으므로 누른 곡식이 들판을 덮고 있었다. 민수가 손으로 가리키면서,“아무개[某] 논둑[畦]에서 아무개 논둑까지 우리 집에 거두어 들인다면 편안히 앉아서 먹을 수 있는데.” 하니, 공은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고 침을 뱉고 일어났다. 뒤에 함께 연산주에게 벼슬하였는데, 공은 교리로서 폐비를 종묘에 모시는 일을 논할 때 ‘일이 불가하다[事不可]’고 강력히 주장하다가 사형당하였다. <파수편>
○ 공은 처음에 곤장을 맞고 용궁(龍宮)으로 귀양갔다가 갑자년에 서울로 잡혀오면서 영순리(永純里)에 들려 가족들과 영결하였다. 이때 김안로(金安老)가 함녕촌(咸寧村)에 있다가 술병을 가지고 가서 공을 맞았는데, 공은 한잔 가득히 기울이면서, “옛날부터 참소하는 간사한 자가 임금의 악을 인도하여 선비들을 해치고서 어떻게 제 몸을 보전하였던가.나는 죽지마는 꼭 내 눈을 뽑아 두었다가 그들이 멸망하는 것을 보리라.” 하며 강개하여 이내 눈물을 흘리니, 온 좌석에 있던 이가 모두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었다. 《용천담적기》
○ 공이 잡혀 올 적에 친구에게 “햇빛 아래 흰 기운이 공중에 뻗친 것을 나 혼자만 보았으니 내가 죽을 것이라.” 하였다. 《명신록》 ○ 상세한 것은 이행(李荇)의 시에 있다.
○ 공이 죽음을 당하자 부인 정씨(鄭氏)가 가슴을 두드리며 목놓아 우는데 눈물이 다하자 피가 잇달아 흐르기를 60여 일이나 계속하였다. 정씨는 목숨이 끊어질 때에 집안 사람에게 부탁하기를, “반드시 나를 남편의 해골 옆에 붙여 장사[祔葬]해 달라.”고 말을 마치고는 바로 운명하였다. 《용천담적기》에는, “슬피 울면서 먹지 않고 죽었다.” 한다.
○ 중종 정묘년에 경상 감사(慶尙監司) 장순손(張順孫)이 이 사실을 듣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게 하였다. 《국조보감》


박은(朴誾) 기해년에 나서 을묘년에 진사과에 오르고 아들 넷을 낳았다. 장남 인량(寅亮)은 문과에 올라 참판에 이르렀다.
박은은 자는 중열(仲說)이며, 호는 읍취헌(挹翠軒)이요,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병진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에 들어가고 수찬이 되었다. 갑자년에 동래(東萊)로 귀양갔다가 마침내 사형당하니 나이 26세였다.
○ 공은 정신과 골격이 맑고 눈썹과 눈이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속세사람 같지 않았다. 나이 15세에 문장을 잘하니 신용개(申用漑)가 보고 기이하게 여겨 딸을 시집 보내었다. 18세에 과거에 뽑혀 수찬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말을 하여 논란하니, 임금이 그를 꺼리고 재상도 또한 기뻐하지 아니하였다.글을 올려 유자광(柳子光)의 음험하고 간사한 정상을 남김없이 논하고 또 성준(成俊)과 이극균(李克均)이 유자광에게 아첨한다고 논하였다. 이에 성준 등이 크게 노하여 조정에 나아가 신문하기를 청하고 다른 일로 죄를 얽으니, 공은 같은 반열에 있는 이들과 함께 옥에 갇혀 면직되었다. 갑자년 4월에 동래(東萊)로 귀양갔다가 뒤에 서울 옥에 갇히어 고문을 받고 사형당하였다. 죽음에 이르러 하늘을 쳐다보고 세 번 크게 웃었다. 《명신록》
○ 연산주는 지난날 홍문관에서 자신이 사냥하는 것을 간했다고 그 허물을 들추고 홍귀달(洪貴達)의 소는 본전(本傳)에 들어있다. 먼저 의논을 꺼낸 사람을 찾아내어 죽이려고 하였다. 사냥을 간할 당시에 장순손(張順孫)은 부제학이었고 공은 수찬이었는데 이때에 심하게 고문을 당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책임을 미루었는데, 연산주는 공이 일찍이 강개하여 일을 의논하기를 좋아한다고 하여 드디어 베어 죽이고 처자도 연좌시켜 재산을 몰수하였다.
○ 일찍이 홍문관의 관원들이 서쪽 변방에 성을 쌓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고 논한 일로 권신(權臣)의 뜻을 거슬러 신문을 당하였다. 공은 어버이를 뵈려고 지방에 갔다가 조정에 돌아와서 이 말을 들었다. 그날 즉시 신문해서는 안된다고 진술하며 차자를 날마다 서너 번이나 올렸는데 말이 모두 격렬하였다. 10일이 지나도 소가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같은 반열에 있는 이가 모두 두려워하니,공은 분연히 말하기를, “재화와 복은 하늘에 달린 것인데 내가 그것을 어찌 할 수 있으리오.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충성이니 나의 도리를 다하고서 재화를 얻는 것은 두렵지 않다.” 하고 더욱 힘써 간하였다. 연산주가 마침내 윤허하였으므로 곧은 말 잘한다는 명성이 조정에 떨치었으나 좋아하지 않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묘지(墓誌)> ○ 《용재집(容齋集)》
○ 옥에 갇히고 관직이 파면되니 스스로 세속 사람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는 마침내 자연 속에 묻혀 지내면서 글을 짓고 술 마시는 일을 즐겨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술이 취하면 문득 붓대를 잡아 문장을 썼는데 모두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었다. 남곤(南袞)이 일찍이 칭찬하기를, “참으로 천재이다. 우리 동방에서 이만한 작품이 오래도록 없었다.”고 하였다. <묘지> 《용재집》
○ 일찍이 공이 천추사(千秋使 중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사절)를 따라 중국에 가서 중국의 음운(音韻)을 질문하니, 중국 사람이 공이 나이가 젊다고 만만히 보았다가 작품을 보고서야 놀라면서, “기특한 재주다. 기특한 재주다.” 하였다.


김천령(金千齡)
김천령은 자는 인로(仁老)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요, 판윤(判尹) 종순(從舜)의 손자이다. 성종 기유년에 진사과에 장원하고 병진년에는 문과에 장원하니, 휴가를 주어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벼슬은 직제학과 예문관 응교에 이르렀다. 계해년에 죽으니 나이 35세였다. 갑자년에 화가 무덤에 미쳤다. 중종이 반정하자 특별히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 공은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서 학술이 천연적으로 성취되었다. 일찍 진사과에 응시하여 시(詩)ㆍ부(賦)에 대한 성적이 으뜸이었으므로 성균관에 들었다. 여러 학생들과 대궐 문에 엎드려 소를 올리고 조정의 정무를 논박한 것이 두 번이나 되니, 사대부 사이에서 이따금 공의 이름을 말하여 드디어 이름이 크게 떨치었다.나이 28세에 그다지 출세가 늦지도 않았는데 말하는 이가 모두 공이 출세가 늦다고 하므로 과거 시험을 맡은 이도 공을 잃을까 걱정하였으나 공이 뽑혀 장원이 되니 세상에서는, “사람을 잘 얻었으니 나라의 경사이다.” 하였다. 《읍취헌집(挹翠軒集)》
○ 공은 외면은 온화하여 남을 용납하고 내면은 강하여 과단성이 있었다. 말을 할 때는 정직하고 일을 맡아서는 결단성이 있었다. 착한 일을 들으면 도와 주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악한 사람을 보면 미처 제거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홍문관 안에서 매양 나라 일에 대해 말할 때에 여러 사람의 논의를 취하는데,사람마다 각기 뒷일을 염려하고 꺼려하여 이러니 저러니 할 때에 공은 한 마디 말로 결판하고 뜬 말에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바른 말을 하려는 자는 공을 믿고 힘을 얻게 되었다. 장령이 되어 임금에게 아뢸 때에 경전을 인용하여 비교하고 지금 것과 옛날 것을 증거로 대니 명백하고 간절했으며 지리하고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아니하였다.말이 모두 임금이 듣기에 귀가 솔깃했으니,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서로 돌아다 보고 가만히 탄식하기를, “참으로 대관(臺官)답다.”고 하여 물러나서도 칭찬하는 말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명신록》
○ 공은 매우 가난하였다. 벼슬은 청관(淸官) 요직(要職)을 지냈으나 살림살이는 돌보지 아니하였다. 거처한 집은 자기 아버지가 물려준 집으로 겨우 처자를 거느리고 살 수 있을 정도였고 담도 없고 손님이 앉을 자리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아버지 없는 아우를 위하여 혼구를 갖추어 때를 놓치지 않고 장가보내니,당시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그가 죽었을 때 빈소 지을 곳이 없고 초상에도 아무런 준비가 없었으므로 장례 비용이 모두 벗들에게서 나왔으니, 이로써 공이 더욱 어진 것을 알겠다. 《읍취헌집》


홍언충(洪彦忠) 아래의 연산 절신(燕山節臣) 조에 있다.


주계군(朱溪君) 심원(深源) 아들 유녕(幼寧) 붙임
주계군 심원은 자는 백연(伯淵)이며, 호는 성광(醒狂) 또는 묵재(默齋) 또는 태평진일(太平眞逸)이라 한다. 요, 태종(太宗)의 현손이다. 갑자년에 화를 입었으나 중종때 흥록대부 정일품(興祿大夫正一品)으로 추봉(追封)되었다.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묘지기로 5호(戶)를 두었다.
○ 공은 성품이 방정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니 당시의 선비들이 다투어 그를 따랐다. 《미수기언》
○ 경서의 뜻에 밝고 행실이 발랐으며 의술에도 아울러 통하였다. 성품이 충직하고 효행이 있었으며, 무당과 불교는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평상시에도 관띠[冠帶]를 하고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 전강(殿講)에서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통달하여 명선대부(明善大夫)로 승진되니 그때 나이 25세였다. 전후 다섯 번에 걸쳐 글을 올려 정치의 도를 논하였다.또 조정에서 고모부 임사홍(任士洪)이 부도(不道 임금께 충성하지 않는다는 뜻)하고 다른 마음을 가졌다고 논하다가 조부에게 잘못 보이어 장단(長湍)으로 귀양갔으며, 또 이천(伊川)으로 귀양갔다. 그때 글을 올려 병든 부모님을 뵙겠다고 청하였는데 말이 간절하고 정성스러워서 임금이 허락하였다.정미년에 종친과(宗親科) 시험에 경서와 사서를 강하여 1등으로 뽑히니 풍악과 술을 내려주고, 2품으로 승진되었으나 군(君)으로 책봉되지는 않았으니, 전에 조부의 뜻을 거스른 과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명행록》
○ 공은 선견지명이 있었으므로 소를 올려 자기의 고모부인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힘써 밝혀 내어 마침내 임사홍을 외방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다. 연산주 말년에 임사홍이 권세를 잡게 되자 공을 참소하여 죽였다. 중종(中宗)이 반정하자 공의 충성과 절의를 가상히 여겨 관작을 추증하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공의 생각은, “내가 종실의 지친이 되었으니 마땅히 나라와 더불어 편안함과 걱정을 같이 나눌 것이지, 어찌 한 집안의 고모부에게 사정을 둘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의 소를 읽어 보면 늠름한 생기가 있다. 《패관잡기》
○ 공은 성리학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었다. ‘우후만망(雨後晩望)’ 이란 시에,

농사철 봄비에 살구꽃은 떨어졌는데 / 一犁春雨杏花殘
곳곳에 흩어진 사람들은 흰 물 사이에서 논을 가네 / 處處人耕白水間
나 홀로 아득한 강 위에 섰으니 / 獨立蒼茫江海上
서운한 기색으로 삼산을 바라 보노라 / 不勝怊悵望三山

하였다. 운계사(雲溪寺)란 시에,

나무 그늘은 길고 옅은데 돌은 울룩불룩 / 樹陰濃淡石盤陀
한 가닥 길은 빙빙 돌아 시내 언덕을 꿰뚫었네 / 一逕縈廻透澗阿
간간이 그윽한 향기가 코를 스치니 / 陳陳暗香通鼻觀
멀리서도 숲속에 남은 꽃이 있음을 알겠네 / 遙知林下有殘花

하였다. 《소문쇄록》
○ 공의 아들 유녕(幼寧)의 자는 영지(寧之)이며, 병진년에 문과에 올라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 높은 벼슬에 임용되었다. 이조 정랑으로 있다가 화를 당하였는데 온 집안에 남은 사람이 없었으니, 아우 유반(幼槃)은 함께 죽었으며 작은 아우 유정(幼靖)과 유녕(幼寧)의 아들 돈복(敦復)은 어린 나이로 종이 되었다. 이행(李荇)의 시주(詩註)에는, “유녕은 4월에 화를 당하고, 주계군(朱溪君)은 이해 가을에 화를 당했다.” 하였다.
○ 중종 정축년 8월 주강(晝講)에 조광조가 아뢰기를, “주계부정(朱溪副正) 심원(深源)은 겨우 스물 남짓한 나이에 성종이 임사홍의 간사함에 빠져서 그를 살피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홍이 고모부이기 때문에 한 집에 같이 거처하면서 그의 간사한 술책을 다 알았으므로 매우 통분하게 여기고, 성종이 편치 못하실 때 면대하기를 간절히 청하니 명을 전하기를,‘종사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면 서둘러 면대할 필요가 없다.’ 한즉 또 아뢰기를, ‘이것은 종사에 매우 관계되는 일입니다.’ 하니, 즉시 면대를 허락하였습니다. 임사홍의 간사한 형상을 남김없이 진술하기를, ‘이 사람은 훗날에 나라와 집안을 망칠 사람이니 조정에 용납해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라 위하는 그의 마음은 한결같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므로 친척 관계를 헤아리지 않고 아뢴 것입니다.그런데도 그 후에 성종은 임사홍을 멀리 물리치지 못하고 혼인까지 하여 기미를 막지 못했으니, 만약 천명과 인심이 돌아올 때(중종 반정)가 없었다면 나라가 거의 멸망했을 것입니다. 20세에 식견이 높고 밝아 온 나라 사람이 임사홍의 간사함을 알지 못했는데도, 홀로 이를 알아서 일신의 사사로움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분발하여 충성스러운 말을 임금 앞에서 당당히 아뢰었으니 이로써 그 사람의 절개와 의리를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보성군(寶城君)은 사위인 임사홍의 편이 되어 심원(深源)의 아버지(보성군의 아들)를 시켜 심원이 불효하다고 아뢰게 하였으나 성종은 그를 죄주지 아니하고, 그의 충효와 학술이 지극한 것을 사랑하여 장차 대사성에 임명하여 쓰려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찬집청(撰集廳)에서 충신도(忠臣圖)에 그를 올리려고 그의 얼굴을 모형하고 글을 짓기까지 하였는데,낭관 김안로(金安老)가 이를 저지시켰으니 김안로는 곧 채수(蔡壽)의 사위입니다. 심원은 채수의 척질(戚姪)이었으나 채수가 경박한 사람이니 심원같이 기상이 활달한 사람이 어찌 채수와 사귀겠습니까. 채수는 이 때문에 감정을 가지고 말을 만들어, ‘심원이 그 어머니에게 조석으로 문안하지 않았으니 어찌 충신 효자가 되리오.’ 하였습니다.지금 입시한 여러 신하들도 누가 이 사람이 대인군자(大人君子)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함에도 한 낭관의 말 때문에, 충성스럽고 의로운 이름을 지워버려 세상에 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영사(領事) 정광필(鄭光弼)도 아뢰기를, “심원의 일은 신처럼 자세히 아는 이가 없습니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에 신이 마침 심원의 사적을 맡아서 편찬했습니다.임사홍은 심원의 고모부인데도 심원은 분연히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임금에게 두 번이나 면대를 청하여 임사홍의 간사함을 힘써 진술하니, 성종께서 임사홍의 간사함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심원을 통해서였습니다. 그의 말이 증험은 되었으나 이 때문에 자신도 살해당하였으니 이를 말하려니 목이 메입니다.” 하였다. 대사헌 최숙(崔淑)도 아뢰기를, “주계는 절의가 지극히 장합니다.국가에서 마땅히 강상(綱常)을 세우고 절의를 숭상해야 하니 그렇다면 이같이 식견이 밝고 투철하며 나라를 위하여 사정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후세에 전해야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은 “심원의 일은 무슨 까닭으로 기록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표창하고 증직할 것을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라.” 하니 드디어 증직하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정암집(靜菴集)》


조지서(趙之瑞) 갑술년에 나다. 갑오년에 생원과에 장원하고, 진사과에 제2등으로 되다.
조지서는 자는 백부(伯符)이며, 호는 지족정(知足亭)이요, 본관은 임천(林川)이다. 가림백(嘉林伯) 천서(天瑞)의 후손이며, 성종 갑오년에 문과에 오르고 청백리에 들었다. 기해년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벼슬이 보덕에 이르고, 호당(湖堂)을 거쳐 응교가 되었다. 갑자년에 살해되어 시체가 강물에 던져지기까지 하였으나 중종 때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 공의 집안은 대대로 진주(晋州)에 살았다. 진주에 삼장원봉(三壯元峯)이 있었는데, 공이 사마초시(司馬初試)와 생원과와 중시에 모두 장원을 하자, 사람들은 그것이 공에게서 증험되었다고 하였다.
○ 공은 연산주가 동궁에 있을 때부터 보덕이 된 일은 연산군의 고사에 상세히 있다. 경계하고 비판함이 간절하고 지극하며 그 결점을 깊이 찔러 말하니, 연산주가 매양 그를 꺼려하였다. 갑자년 여름에 정성근(鄭誠謹)과 함께 잡혀 오니, 공은 스스로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줄 알았다. 그의 부인 정씨(鄭氏)는 충의백(忠義伯) 몽주(夢周)의 증손이었다. 대대로 산음(山陰)에 살았다. 공은 술잔을 들어 영결하면서, “내가 이번에 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조상의 신주를 어쩌면 좋소.” 하니, 정씨는 울면서, “마땅히 목숨을 바쳐 보전하겠습니다.” 하였다. 과연 공은 살해를 당하고 그 집은 적몰되니 정씨는 의탁할 데가 없었다. 이에 그 친정 아버지가 “시집이 이미 망했으니 친정으로 돌아와서 일의 종말을 보는 것이 어떠냐?” 하니,정씨는 의리를 내세워 거절하면서, “죽은 분이 나에게 조상의 신주를 부탁하였고 저는 목숨을 바쳐 보전하겠다고 승락했으니, 어찌 중간에 와서 변경하겠습니까. 또 죽은 분의 첩이 따로 집이 있으니 가서 의지할 것입니다.” 하고 신주를 안고 그 집에 가서 아침 저녁으로 곡하고 제사지냈다. 왕명을 전하는 중사(仲使)가 그 지방에 온다는 말을 들으면 곧 신주를 안고 집 뒤의 대숲 속에 엎드려 혹은 수일 동안이나 지내기도 하며 3년을 마치었다.중종이 반정하자 옛집을 도로 받아 제사를 받들었으니 온 고을 사람들이 그 여자를 칭찬하였다. 이우(李堣)가 진주 목사(晋州牧使)가 되어 고을 사람에게 그 사실을 물어 임금에게 아뢰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감사 장순손(張順孫)이 알렸다.” 한다. 이에 중종 정묘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게 하였다. 《음애일기》


정성근(鄭誠謹)
정성근은 자는 이신(而信)이며, 《잡록(雜錄)》에서는 겸부(兼夫)라 하였다. 본관은 진주(晋州)요, 판윤 척(陟)의 아들이다. 성종 갑오년에 문과에 올라 승지가 되었고 갑자년에 살해당하였다. 중종 때 이조 참판을 증직하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 공은 타고난 성품이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세상을 떠남에 매우 슬퍼하고 예절을 다하였으며, 성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홀로 3년상을 행하니, 갑자년에 괴이한 행실이라 하여 그를 죽였다. 그의 아들 승문원 박사 주신(舟臣)이 슬퍼하여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소문쇄록》
○ 주신의 아우 매신(梅臣)과 매신의 아들 원린(元麟)ㆍ원기(元麒)와 원린의 아들 효성(孝成)은 모두 효행이 있어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 공은 타고난 성품이 효성이 지극하여 관직에 있을 때 비록 사무가 분주하더라도 매양 초하룻날과 보름날을 지키어 반드시 부모의 묘에 가서 친히 제수를 만들어 제사지내기를 여막에 있을 때처럼 하여 종신토록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 공은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흔들리거나 굴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대마도(對馬島)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지나는 길에 매림사(梅林寺)라는 자못 깨끗한 절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청하기를, “배 안에서 오랫동안 답답하게 지냈으니 외국의 절일지라도 한 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하니, 공은 “너희들이 나 갈 것이지, 나는 필요가 없다.나는 이미 앉아서 다 상상하고 있다. 법당을 깨끗이 쓸고 부처를 놓고 향을 피우고 뜰에는 귤나무와 치자나무 따위의 과실 나무를 심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우리나라의 절과 무엇이 다르리오.” 하였다. 도주(島主)의 집에 이르니, 도주가 문밖으로 나와 조선의 왕명을 받아야 할 것인데 문 밖에 나오기를 꺼려하였다.이에 공은 밖에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통역을 시켜 두 번 세 번 독촉하여 왕명을 의식대로 공경히 받게 하였다. 일을 마치고 나서는 연회를 베풀어 도주가 공경히 왕명을 받은 것을 위로하였다. 도주가 폐백으로 바친 물건은 그림부채ㆍ차는 칼ㆍ후추[胡椒]ㆍ판향(瓣香)에 지나지 않았으나, 공은 일행이 얻은 것을 모두 거두어 한 그릇에 넣어 봉하여 떠나올 때 접대하던 왜인에게 주어 도주에게 돌려보냈다.그 후에 도주는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그 물건을 조선에 가지고 와서 나누어 주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그 청을 승인하자, 공은 아뢰기를, “신이 그곳에 가서는 받지 않다가 여기서 받으면 앞뒤 마음이 다르게 되니 원치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도 강제로 하지 못하고 물건을 왜인에게 도로 주어서 보내었다. 《소문쇄록》
○ 공은 한평생 곧은 절개를 지켰다. 연산주 시대에 불우하게 지내면서 강개하여 속요를 지어 밤중에 슬피 불러서 나라 사랑하는 뜻을 표시하였다. 김안로가 일찍이 그 노래를 취하여 한시(漢詩)로 번역하였는데, 그 첫째는,

내가 님 생각하는 마음으로 보아 / 以我思子心
님은 내 마음 같지 않도다 / 子無我心似
님의 마음이 진실로 같을진대 / 子心苟可似
세상에 어찌 이럴 수 있으리오 / 天下寧有是
비록 생각은 아니하나 / 思之縱無能
미워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만이다 / 無嫉猶可已

하였고, 그 둘째는,

복숭아와 오얏은 봄바람에 아첨하여 / 桃李媚恩光
아름다운 빛깔을 다투도다 / 競此色婉娩
늦은 국화도 마침내 꽃이야 피련만 / 老菊終亦花
외롭고 쓸쓸하니 누가 보아 주려나 / 寂歷誰省玩
서리 바람이 풀잎을 싹 쓸어 없애니 / 霜風掃卉空
외로운 향기만 가을 동산에 의탁하리 / 孤芳托秋苑

하였다. 《용천담적기》


심순문(沈順門)
심순문은 자는 경지(敬之)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요, 영의정 회(澮)의 손자이다. 병오년에 진사과에 오르고 을묘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 공은 강혼(姜渾)과 함께 사인(舍人)이 되었는데 그때 두 사람이 다 각기 사랑하는 기생이 있었다. 정붕(鄭鵬)이 경계하기를, “빨리 버리어 후회를 남기지 말라.” 하였는데, 강혼은 바로 버렸으나 공은 그 말을 따르지 아니하였다. 그 후에 두 기생이 궁중에 뽑혀 들어가서 연산의 사랑을 크게 받았으므로 공은 결국 비명에 죽고 말았다. 《병진정사록》
○ 공은 임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이유로 죄를 입었다. 연산주의 위엄이 이토록 극도에 달하니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하였다. 《정암연주(靜庵筵奏)》
○ 갑자년에 연산주가 죄도 없는 공을 죽이려고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삼정승 이하로 여러 신하들이 감히 다른 논의를 하지 못할 때 대사간 성세순(成世純)은 “직분이 간관에 있으면서 말없이 잠잠히 있으리오.” 하고, 헌납 김극성(金克成)은 “벼슬이 간관이란 명칭을 가진 자가 사람이 죄 없이 죽는 것을 보고 비록 제 몸을 아껴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게 됨은 어찌하랴.” 하니 정언 이세응(李世應)은 “그 말이 옳다.” 하였다.혹자는 말하기를, “만약 임금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반드시 순문(順門)과 함께 죽을 것이니, 결국 이익이 없는 짓이라.” 하였다. 이에 성세순과 김극성은 평상시처럼 이야기하고 웃으면서, “죽고 사는 것은 큰 일이니, 각기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늘 먼저 죽을 사람은 반드시 우리 두 사람일 것이고,그 다음은 정언일 것이라.” 하고 마침내 공이 지은 죄가 없음을 아뢰었다. 연산주가 비록 듣지는 않았지만, 또한 그들에게까지 죄를 주지는 아니하였다. 《패관잡기》
○ 공의 조부 회(澮)는 연산의 어머니인 윤씨(尹氏)에게 사약을 내릴 때 영의정이었다는 이유로 후일에 연산주가 관을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었으며 공도 살해당하였다. 그 후 얼마 안 가서 그의 아우 순경(順徑) 청성군(靑城君) 은 훈련 첨정(訓鍊僉正)으로 있으면서 내승(內乘)을 겸직하게 되어 입직하고 있었다.폐주는 대궐문 처마밑에서 잔치를 베풀고 있다가 장차 탕춘대(蕩春臺)로 옮기고자 하여 마구간[內廐]의 말을 몰고 오라고 독촉하므로 순경이 급히 먼저 말을 이끌고 오니, 비단 자리가 땅에 편 채 있고 술과 고기도 치우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그 위로 지나가면 반드시 큰 노여움을 살 것이므로 얼른 꿇어앉아서 그 자리의 이음매를 끊고 좌우로 잡아 제친 뒤에 말을 이끌고 나가니,폐주는 그가 창졸간에 잘 주선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여 특별히 절충 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시켰으니 생을 마칠 때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


정린인(鄭麟仁)
정린인은 자는 덕수(德秀)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무오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다.
○ 공은 얼굴이 흰 옥과 같았으며 의론이 뛰어났다. 사귈 만한 사람이 아니면 사귀지 않았으며, 근실하고 중후하며 명망이 있었다. 낭관으로 있다가 늦게야 과거에 올랐는데 벼슬이 통정대부에 이르렀고 그 후에 살해당하였다. 《사우언행록》
○ 공이 전한(典翰)으로 있으면서 단오날 문첩(門帖)으로 시를 써서 붙였는데, 그 시에, “궁인이 한가할 때 파리를 잡으니 옥 위에 어찌 파리똥 한 점의 티가 생기겠느냐.” 하였다. 연산주가 노하면서, “정린인이 내가 참소를 믿는다고 나무란 것이라.” 한즉 홍귀달(洪貴達)이 “신하가 임금에게 경계하는 말을 올리는 것이 예로부터 이러했던 것이니,감히 전하를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연산주는 거짓 놀라면서, “그렇다면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 하고 당상관으로 승진시키었다. 뒷날 문관과 무관의 활쏘기 시합에서 정린인이 첫째가 되니, 연산주는 “문과 무를 구비한 인재라.” 하면서 특별히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임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서 연산이 발이 희고 이마에 흰 점이 박힌 말을 구하라 하였는데, 이를 구하지 못하자 명을 거역했다고 베어죽였다. 《부계기문》


정붕(鄭鵬) 정해년에 나서 병오년에 진사과에 오르다.
정붕은 자는 운정(雲程)이며, 호는 신당(新堂)이요,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선산(善山)에 살았다. 성종 임자년에 문과에 올라 교리가 되었다. 갑자년에 곤장을 맞고 영덕(盈德)으로 귀양갔다. 중종이 반정하자 풀려 돌아왔으나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임신년에 죽으니 나이 46세였다.
○ 공은 풍채가 준수하고 견식과 도량이 원대하였다. 총각 때 숙부 석견(錫堅) 문과에 올라 이조 참판이 되었다. 이 그를 보고 중히 여겨, “이는 우리 집 옥수(玉樹)라.” 하였다. <행장>
○ 공은 체격이 크고 키가 8척이나 되었다. 김굉필(金宏弼)에게 배워 성리학을 연구하고 마침내 정미한 지경까지 나아갔다. 일찍이 말하기를, “《논어(論語)》같은 글은 내가 오랑캐에게 가르쳐도 능히 대의(大義)를 알게 할 것이라.” 하였다. 연산주 초년에 벼슬하였는데, 어느 날 다른 사람에게 “내 꿈에 문묘의 위패가 절로 옮겨졌다.” 하였다.뒤에 연산주가 심히 음란하여 성균관을 노는 장소로 만들고 위패는 깊은 산중 절로 옮기었으며 또 태평관(太平館)으로 옮겼다가 장악원으로 옮기니, 위패를 순서 없이 놓아 두고 제사도 오랫동안 폐지되었다. 혹은 말하기를,“문묘가 훼철(毁撤)될 것을 안 것은 아마 공이 미리 짐작한 것이면서, 꿈을 핑계한 것이라.” 하였다. 심순문(沈順門)이 죽으니 사람들은 공이 그에게 기생을 버리지 아니하면 마침내 화를 당하리라 하였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공이 교리로 있을 때 연산주가 옥당에게 묻기를, “내가 정성근(鄭誠謹)을 죽이려고 하는데 어떠하냐?” 하였다. 여러 동료들이 모여서 공을 기다리는 차에 공이 와서, “죽여야 합니다.” 하니, 모든 사람은 깜짝 놀라면서, “운정(雲程)이 이런 말을 하느냐?”고 하였다. 이에 공은 “한 사람이 죽는 것과 우리들이 다 죽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나은가?” 하니, 정성근이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명신록》
어떤 사람이 송당(松堂) 박영(朴英)에게 묻기를, “정선생이 옥당에서 말한 의론은 일에 따라 잘 처리했다고 할 수 있으나, 선비의 출처(出處)로서 말한다면 부족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니, 박영도 “그렇다.”고 하였다. 《명신록》
○ 공은 호방하고 기절(氣節)이 있었다. 갑자년에 교리로 있으면서 나라 일을 논의하다가 곤장을 맞고 귀양갔으나, 중종이 반정하자 불리어 돌아왔다.교리로 임명했으나 나가지 아니하므로 벗들이 나가기를 권하여 마지못해 나갔으나 얼마 안 가서 그만두고 돌아왔다. 다시 여러 번 임명됐으나 나가지 아니하므로 다른 사람이 그 연유를 물으니, “임금의 부르심이 간곡하기에 마지못하여 조정에 나갔더니 자못 마음을 놀라게 하는 일이 있으므로 고향에 물러가서 나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만 못했기 때문에 그만둔 것이다.” 하였다.“무엇이 마음을 놀라게 한 일이냐?” 하니, “임금에게 사은숙배 하려고 대궐에 나아가 승정원 문 앞에 이르니, 서각띠[犀角帶]를 띤 어떤 재상이 등을 돌리고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멈칫하고 두려워서 숨을 죽이면서 서 있었는데 조금 후에 돌아다 보는 그 얼굴을 보니 곧 홍경주(洪景舟)였다. 그 관직을 물어 보니 찬성이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섬뜩해서 몸을 빼쳐 물러나와 벼슬할 생각이 없어졌다.” 하였다. 좌의정 성희안(成希顔)이 임금께 아뢰어 특별히 교지를 내려 불렀는데, 그 교지에, “신야(莘野)의 밭 가는 첨지동해(東海)의 낚싯군도 도덕을 속에 간직하고 있으니 농사와 낚시질 속에 자취가 잠겼다.”는 말이 있었다. 이에 마지못하여 대궐에 나아갔으나 오래 머무를 뜻이 없어 청송(靑松) 고을이 한가하고 궁벽하므로 그 고을 부사로 임명되어 갔다. 성희안 이때 영의정 이 젊을 때부터 서로 친한 사이였으므로 편지로 백자(栢子 잣) 오렵해송(五鬣海松)을 세속에서 백자라 일컫는다. 와 벌꿀(백자와 꿀은 청송의 산물임)을 요구하니,그는 회답하기를, “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꿀은 민간의 벌통에 있으니 부사(府使)된 사람이 어찌 이를 얻겠느냐.” 하니, 성희안이 부끄러워서 사과하였다. 뒤에 곧 그만두고 돌아가서 벼슬하지 않고 죽었다. 《명신록》에는 “임신년에 임소(任所)에서 죽었다.” 한다. 그 사는 동리 이름으로 말미암아 신당선생(新堂先生)이라고 일컬어졌다. 《사재척언》 《명신록》
○ 공이 일찍이 귀양가게 되니 유자광(柳子光)이 독약을 주머니 속에 넣어 보내면서, “공이 이번 걸음에 아마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처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그것을 받아 간수하였다가 풀려 돌아온 뒤에 유자광이 귀양을 가게 되자, 간수해 두었던 독약 주머니를 그에게 돌려주면서, “이 물건은 지난 번에 나에게 준 것인데, 귀양가는 데 필요할 것이므로 지금 돌려준다.” 하였다. 《병진정사록》
○ 공은 유자광과 표종(表從) 관계에 있는 까닭으로 문안하는 예절만은 폐하지 않았지마는, 종이 그 집에 갈 때에는 반드시 삼노끈으로 그 팔을 단단히 묶어서 표를 하여 보냈다가 돌아오면 풀어 주었으니, 그것은 계집종이 아픔을 느껴 그 집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찍이 공이 대궐에 입직했을 때 온 집안에 양식이 떨어졌다.부인이 유자광 집에 꾸어 주기를 청하니, 유자광은 기꺼이 “친척간에는 서로 도와주는 것이 의리인데, 교리 정붕(鄭鵬) 가 너무 고집해서 그렇지, 내가 어찌 무심하리오,” 하고, 즉시 쌀푸대와 장 항아리를 노새에 실어서 보냈다. 공이 입직했다가 나와서 하얀 쌀밥을 보고 그 이유를 물어 알게 되자 밥상을 밀고 웃으며 일어나서,“내가 입직하던 아침에 비지를 사서 죽을 끓였는데도 조처하지 않은 것은 나의 실책이라.” 하고, 다른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쌀을 꾸어다가 유자광의 쌀을 꼭 맞추어 돌려 보냈으니, 그가 곤궁한 상황에서도 지조를 변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송와잡기》
○ 공은 일찍이 책상 위에 한 도안을 붙여놓고 보며 스스로 경계하니,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공의 학문이 정수한 지경에 도달한 것은 이 도안을 보면 알 것이라.” 하였다. 《명신록》


성중엄(成重淹)
성중엄은 자는 계문(季文)이며, 호는 청호(晴湖)요,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성종 갑인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을 거쳐 홍문관 박사가 되었다. 무오년에 사초의 일로 의주(義州)로 귀양갔다가 경신년에 하동(河東)으로 옮겨졌다. 갑자년 여름에 그전 죄로 곤장을 맞고 도로 하동으로 귀양갔다. 겨울에 귀양간 그 곳에서 화를 당하였다.


유헌(柳軒) 영의정 영경(永慶)의 증조
유헌은 자는 백여(伯輿)이며, 호는 낙봉(駱峯)이요,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성종 기유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 공은 성품이 엄하고 굳세며 도량과 기국이 있었다. 삼사(三司)에 두루 벼슬하면서 정직하여 굴하지 아니하였다. 연산주 초년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기휘(忌諱)에 크게 저촉되어 외직으로 나와 충청 수사(忠淸水使)가 되었으나 갑자년에 조정으로 들어와서 대사간이 되었다. 이때 신수영(愼守英)이 무함하여 사화를 만들자,공은 소를 올려 이를 논하고 이내 임사홍(任士洪)과 유자광(柳子光)의 간사하고 흉한 실상까지 아뢰었다. 또 이극균(李克均)이 죄도 없이 살해당한 원통함을 말하니, 연산주가 크게 노하여 즉시 제주(濟州)로 귀양보냈다. 사간 강숙돌(姜叔突)이 이를 간하다가 또한 귀양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내 사간원을 폐지시켰다. 《죽간한화(竹澗閒話)》 ○ 사간원을 폐지한 일은 병인년에 있었다.
○ 공은 중종(中宗)이 반정한 뒤에 풀려 돌아오다가 길에서 왜인(倭人)을 만나 살해당하였다. <과보(科譜)>


한훈(韓訓) 어릴 때의 이름은 학이(學而)이다. 병오년에 진사과에 올랐다.
한훈은 자는 사고(師古)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성종 갑인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정언에 이르렀다.
○ 옆 사람에 아랑곳없이 큰 소리로 청담(淸談)을 하였다. 연산주의 조정에서 글하는 선비를 억울하게 많이 죽였는데 공은 도망해 숨었다가 자진하여 나타나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은 그를 나무랐다. 《사우언행록》


곽종번(郭宗藩)
곽종번은 자는 지한(之翰)이며, 본관은 현풍(玄風)이요, 사간 종원(宗元)의 아우이다. 성종 경술년에 문과에 올라 장령이 되었다.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변형량(卞亨良)
변형량은 자는 형지(亨之)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요, 점필재(佔畢齋)의 제자이다. 신유년에 문과에 올라 정자(正字)가 되었다.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성경온(成景溫)
성경온은 자는 사아(士雅)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요, 영의정 준(俊)의 아들이다. 계해년에 문과에 올라 병조 정랑이 되었다. 갑자년에 곤장을 맞고 귀양갔다가 병인년에 약을 마시고 죽었다.
○ 공의 아버지 준(俊)이 화를 입었는데, 연산주는 성이 풀리지 아니하여 그 자손까지 남겨두지 않고자 하자, 공은 그 명을 듣고, “나의 생명을 어찌 남의 손에 욕되게 하리오.” 하고 즉시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신징(申澄)
신징은 자는 자성(子省)이며, 본관은 고령(高靈)이요, 장령 송주(松舟)의 아들이다. 성종 임자년에 문과에 올라 예문관에 들어갔다. 갑자년에 정언으로 있다가 매를 맞아 죽었다.


환관(宦官) 김처선(金處善)
김처선은 관직이 정2품이었다. 연산주가 어둡고 음란하였으므로 김처선이 매양 정성을 다하여 간하니, 연산주는 노여움을 속에 쌓아 둔 채 겉으로 나타내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궁중에서 임금이 처용(處容) 놀이를 하며 음란함이 도를 지나쳤다. 김처선은 집안 사람에게,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들어가서 거리낌없이 말하기를,“늙은 놈이 네 분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마는 고금에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연산주가 성을 참지 못하여 활을 당겨 쏘아서 갈빗대에 맞히자, 김처선은 “조정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오래도록 보위에 계시지 못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하였다.연산주는 화살 하나를 더 쏘아 맞쳐서 공을 땅에 넘어뜨리고, 그 다리를 끊고서 일어나 다니라고 하였다. 이에 처선은 임금을 쳐다보면서,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다닐 수 있습니까.” 하자, 또 그 혀를 자르고 몸소 그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 내었는데,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마침내 그 시체를 범에게 주고 조정과 민간에 ‘처(處)’ 자를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소문쇄록》
○ 권발(權橃)이 갑자년 시험에 합격했는데, 책문(策問) 시험에 합격되어 이름을 떼어 본 뒤에 시관이 시권 안에 처(處)자가 있는 것을 깨닫고 낙방시키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앞서 연산주가 노하여 조정과 민간에 처선(處善)이란 두 글자를 쓰지 못하게 한 까닭이었다. 권발은 뒤에 정묘년에 과거에 합격되었다. <행장>


김동(金同)
김동은 강녕부정(江寧副正) 기(祺)의 종이다. 연산주의 사랑하는 기생이 기의 집을 빼앗고서는, “기가 종을 시켜 저를 욕한다.”고 호소하였다. 이에 연산주는 노하여 기와 김동을 가두고 단근질로 신문하니, 김동이 “죄는 저에게 있고 주인은 이 일을 모릅니다.” 하였으므로 기는 죽음을 면하고 김동은 드디어 사형을 당하였다. 중종 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이자화(李自華)
이자화는 은산 훈도(殷山訓導)였다. 타고난 효성이 지극하여 성종(成宗)을 위하여 3년상을 입었다. 연산주는 처음에는 상으로 관직을 주고 정문까지 세웠으나 갑자년에 와서는 괴이한 행실이라 하여 잡아다 국문하였다.이때 자화는 공술하기를, “임금을 위하여 3년상을 입은 것은 명예를 구한 것이 아니고 망녕된 소견에 임금과 아버지는 같다고 생각한 까닭입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는, “이자화가 형벌에 다달아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하였다. 하고 조용히 죽으니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삼강행실(三綱行實)》


박인(朴氤) 붙임
박인은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이때 상주 노릇하는 기간을 법으로 짧게 줄이고 매우 엄격하게 시행했으나, 박인은 그 아버지가 죽었을 때 상복을 입고 여막에 거처하며 3년상을 마치었다. 중종(中宗)이 반정하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해동잡록》


장순손(張順孫) 중종(中宗)의 상신(相臣)이다. 상세한 것은 중종기에 들어 있다.
장순손은 젊었을 때 얼굴이 돼지 대가리처럼 생겼으므로 친구들이 그를 ‘돼지 대가리’라고 조롱하였다. 연산주가 성주(星州) 기생을 사랑하였는데 어느 날 종묘의 제사를 지낸 뒤에 제사에 쓰고 난 고기를 궁중에 드렸더니 기생이 보고 웃었다. 연산주가 까닭을 물으니 기생이 “성주사람 장순손의 얼굴이 돼지 대가리와 같으므로 사람들은 장을 가리켜 ‘돼지 대가리’라고 합니다.그래서 웃었습니다.” 하자 연산주는 크게 노하면서, “장순손은 반드시 너의 애부(愛夫)로구나. 빨리 돼지 대가리를 베어 바치라.” 하였다. 공은 이때 벼슬에서 물러나와 있었는데 잡아 오라는 명을 받고 길을 떠났다. 오다가 함창(咸昌) 공갈못[公儉池] 아래 갈림길에 이르니 고양이가 길을 넘어갔다. 이를 보자 공은 도사(都事)에게 청하기를, “내 평생에 과거보러 갈 적에도 고양이가 길을 넘는 것을 보면 반드시 합격했습니다. 오늘 우연히 이 고양이를 갈림길에서 보았고, 이 길로 가면 매우 빠르니 저 길을 따라 가기를 원합니다.” 하였더니 도사가 이를 허락하였다. 현(縣)에 이르러 선전관이 ‘돼지 대가리’를 빨리 베어 오라는 명령을 받들고 상주(尙州)까지 내려왔다는 말을 들었다.은밀히 중종반정(中宗反正)할 기미를 알았으므로 천천히 가서 조령(鳥嶺)에 이르렀더니 선전관도 되돌아와 조령에 이르렀는데, 벌써 반정이 성공하였으므로 공은 마침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축수편>


이행(李荇)
이행이 갑자년에 거제(巨濟)로 귀양가서 살아 있는 친구와 죽은 친구를 생각하여 절구(絶句) 10수(首)를 지었는데 각각 주(註)를 달았다. 그 시에 이르기를,

비방과 칭찬이 많은 사람의 입에 시끄러워도 / 毁譽紛紛萬口勝
이 사람의 마음 자리는 주저하지 않았다 / 此公心地不模稜
초 나라 강 어느 곳에 굴원의 자취를 찾으랴 / 楚江何處尋遣佩
원컨대 통을 얽어맨 오채승을 부치겠네 / 願寄纏筒五綵繩
순부(淳夫) 정희량(鄭希良)은 임술년 5월 5일에 스스로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 사람은 백운향(白雲鄕)에 있어야만 되는데 / 斯人合在白雲鄕
한 번 속세에 귀양오니 벽해(碧海)가 상전(桑田) 되었네 / 一謫塵區海變桑
광릉(廣陵)이 이제 끊어졌으니 / 痛器廣陵今已絶
이승에서는 다시 아양곡(峨洋曲)을 들을 수 없으리 / 此生無復聽峨洋
중열(仲說) 박은(朴誾)은 갑자년 6월 15일에 화를 당했다.
칼날을 무릅쓰고 혼자 나아가니 / 橫衢白刃獨能前
하늘이 요기로 햇빛을 가리우네 / 天遣妖氛翳日邊
꿈속에 만난 그대는 평소와 같은데 / 半夜夢魂如宿昔
두어 줄기 맑은 눈물은 요를 적시었네 / 數行淸淚濕寒氈
통지(通之) 권달수(權達手)는 갑자년 겨울에 나와 함께 두 번이나 옥에 갇히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어느 날 나의 손을 이끌어 하늘을 가리키면서, “햇빛 아래 흰 기운이 공중에 뻗친 것을 자네도 보았는가?” 하므로,나는 “못 보았다.” 하였더니 통지는 하늘을 쳐다보고 한참 있다가, “아 내가 죽을 것이다. 꼭 나를 두고 이른 것이다.” 하였다. 12월 1일에 화를 입었다. 근일 밤 나의 꿈에 통지가 평상시와 같으므로 함께 말한 것이다.
맑기는 가을 하늘에 흰 이슬이 맺힌 듯 / 澹若秋空白露溥
굳세기는 지주가 달아나는 물결을 진정하는 듯 / 剛如砥柱鎭奔瀾
백년에 전할 가야의 명행기는 / 百年名行伽倻記
의춘(宜春)의 글씨를 빌려 비단폭에 쓰려했도다 / 要倩宜春酒素紈
인로(仁老) 김천령(金千齡)은 계해년 9월에 병들어 죽었는데 갑자년에 다시 화를 당했다. 중열(仲說) 박은(朴誾)이 일찍이 인로(仁老)의 이름난 기행문을 초해 두었다가 사화(士華) 의춘(宜春)의 필적을 얻어 뒷 세상에 전하고자 하였다.
그 아버지 높은 절개는 가을 기운과 같고 / 乃翁高節倚秋明
경술과 문장은 한 나라 유경생(劉更生)이로다 / 經術文章漢更生
문벌이 마침내 한 번에 다 죽었는데 / 門地終須一網盡
요망한 여우는 어찌 다시 하늘 맑음을 기하는고 / 孽狐寧復忌天睛
영지(寧之) 이유녕(李幼寧)은 갑자년 4월에 화를 당했다. 그 아버지 주계군(朱溪君)은 일찍이 바른 말로 간사한 신하에게 거슬리어 이해 가을에 또한 화를 당하니 온 집안에 남은 사람이 없었다.
서남에서 세월이 거듭하니 / 憔悴西南歲月重
온갖 풍상이 붉은 수염을 희게 만들었네 / 風霜變盡紫髥茸
죽산 길가에서 창황히 만났더니 / 竹山路上蒼董面
맹렬한 불길은 마침내 백 길 소나무를 꺾었네 / 烈火終摧百丈松
계문(季文) 성중엄(成重淹)은 갑자년 겨울에 화를 당했다. 나는 갑자년 6월에 잡혀서 서울로 올라오다가 계문을 죽산(竹山) 길에서 만났는데 얼굴이 파리하여 서로 보아도 알 수 없었다. 이내 말을 꾸짖어 소리를 냄으로 그제야 계문인 줄 알았다. 서로 눈물을 뿌리고 흐느끼면서 작별하였다.
문성공의 후손으로 좋은 가문이니 / 文成之後是淸門
시례의 풍류가 근원이 있도다 / 詩禮風流自有源
사나 죽으나 몸은 보전하기는 너 혼자뿐이니 / 生死保身知汝獨
넉자 높이의 외로운 무덤이 한남촌에 있도다 / 孤墳四尺漢南村
선지(善之) 안처선(安處善)은 문성공(文成公) 향(珦)의 후손이다. 갑자년 4월에 병들어 죽었다.
남쪽 변방에서 서쪽 기러기를 만나기 어려운데 / 南塞難逢西鴈
밤새 바람 비는 부질없이 재촉하네 / 來夜來風雨謾相催
흰 머리 그대만이 강호에 있는데 / 白頭湖海惟君在
어디에도 다시 회포를 풀어볼 길이 없구나 / 懷抱無因得再開
사화(士華) 남곤(南袞)은 양덕(陽德)에 귀양갔다.
상산(商山)은 멀고 멀어 천 산이 막히었고 / 商山迢遞隔千峯
제수(濟水)는 넓고 넓어 만 길이 넘는구나 / 濟水汪洋過萬尋
공갈못가 한 잔 술로 / 公建池邊一盃酒
어느 때에 문자를 다시 토론할고 / 幾時文字更㪺深
숙달(叔達) 권민수(權敏手)는 상주(尙州)에 귀양갔었는데, 지난 해 가을에 내가 숙달을 공갈못[公儉池] 가에서 작별하면서 ‘公建池邊一盃酒, 西風爲助生離愁’ 란 글귀를 지었다.
가을인데 비만 오고 개인 날은 없으니 / 秋來陰雨不逢晴
동쪽 울타리 국화 줄기가 걱정스럽다 / 愁殺東籬菊花莖
죽다 남은 몸뚱이에도 마음만은 있어 / 九死一身心尙在
나의 여생에 태평 세상 볼까 하네 / 擬將餘齒看河淸

하였다.


윤석보(尹碩輔)
윤석보는 자는 자임(子任)이며, 본관은 칠원(漆原)이다. 임오년에 진사과에 올랐다. 성종 임진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갑자년에 강음(江陰)으로 귀양가서 을축년 12월에 죽었다. 병인년에 도승지를 증직하고 염근리(廉謹吏)에 기록되었다.
○ 공이 사간원에 있을 때 동료를 거느리고 바른 말을 올렸는데 말이 매우 위태롭고 간절하였다. 갑자년에 이르러 이 일을 소급하여 죄를 주어 강음으로 귀양 보냈다. 그 당시의 동료들 중에 죽은 사람이 많으므로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일이 벌써 오래되었으니 죽은 동료들에게 미룬다면 죄를 면할 수 있다.” 하였다.이에 공은 “나도 이 세상을 버릴 날이 멀지 않았는데 어찌 차마 저승에 간 사람에게 죄를 돌리리오. 설령 이로 인하여 죄를 면한다 하더라도 무슨 낯으로 돌아가 죽은 사람을 보겠는가.” 하였다.
○ 일찍이 공이 풍기 군수(豐基郡守)가 되었을 때 사내종 하나와 계집종 하나만을 데리고 갔다. 부인과 자식은 풍덕(豐德) 본집에 남겨 두었는데, 배고픔과 추위로 살아갈 수가 없었으므로 그 부인 박씨(朴氏)는 그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비단옷을 팔아서 1묘(畝)의 토지를 사서 두었다. 공은 이 말을 듣고 편지로 빨리 그 토지를 돌려주게 하고, “옛 사람은 한 자 한 치의 땅을 넓히는 일로 그 임금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가 있는데, 지금 내가 대부 군수(郡守)> 가 되어 녹을 먹으면서 토지를 사서 둘 수 있겠는가. 백성과 서로 물건을 팔고 사는 일로 나의 죄를 보태지 말라.” 하였다. 박씨는 마지못하여 그 밭을 돌려주었다. 후에 공이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을 때 부인 박씨가 임신 8개월의 몸인데도 말을 타고 가게 하고 가마를 타지 못하게 하였다. 박씨의 아우 중간(仲幹)이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있었는데, 관아의 살림살이가 매우 가난함을 보고 소금을 보내 왔다. 공은 즉시 이것을 돌려보내면서 그것으로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처럼 여겼다.
○ 공은 염근리(廉謹吏)로 뽑히었다. 임진란(壬辰亂) 후에 청백리의 명부가 없어졌으므로 공의 현손(玄孫) 상(詳)이 소를 올려 다시 포양(褒揚)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선조(宣祖)는 대신과 의논하여 특별히 명하여 다시 명부에 쓰게 하고 그 자손을 채용하게 하였다.


 

[주D-001]당 나라 손창윤(孫昌胤) : 고대에는 소년이 성인이 되어 관(冠)을 처음 쓸 때에는 손님을 청하여 관례(冠禮)를 행하고 두루 알렸으나 중세에는 그런 예식이 없었는데, 당 나라 때에 손창윤이 특별히 옛날 예법에 따라 아들의 관례를 행하고 조정에 와서, “나의 아들이 관을 썼습니다.” 하고 고하였다.이에 정숙칙(鄭叔則)이 발끈 성을 내면서, “나한테 무슨 상관이냐.”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손창윤을 비웃었다는 고사에서 시대에 맞지도 아니하는 해괴한 말을 하는 것을 조롱하는 뜻으로 쓰고 있다.
[주D-002]참동계(參同契) : 도가(道家)의 책 이름인데, 수양하여 신선되는 방법으로 주역(周易)에 연관시켜 해설한 책이다.
[주D-003]이는 우리집 옥수(玉樹) : 진(晉) 나라 사안(謝安)이 아름다운 자질(子姪)을 뜰에 난 지란옥수(芝蘭玉樹)에 비한 말이 있다.
[주D-004]출처(出處) : 출(出)은 출세하는 것이요, 처(處)는 집에 들어 앉아 벼슬하지 않는 것이니, 군자(君子)는 출처를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처세(處世), 처사(處事)란 뜻이다.
[주D-005]신야(莘野)의 …… 첨지 : 은(殷) 나라 이윤(伊尹)이 신(莘)땅의 들에서 밭을 갈고 있는 것을 탕왕(湯王)이 불러 국정을 맡겼다는 고사에서 온 말.
[주D-006]동해의 낚싯군 : 강태공(姜太公)을 말하는데, 주 나라 문왕(文王)이 낚시질하는 강태공을 맞아와서 국정을 맡겼다고 하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7]광릉(廣陵) : 진(晉) 나라 혜강(嵇康)이 거문고를 잘 탔는데 형을 받아 죽을 때에 거문고의 광릉산(廣陵散)이란 곡조를 타면서, “이 곡조는 세상에서 나만 알고 남에게 가르치지 않았더니 이제는 아주 끊어지고 마는구나.”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주D-008]아양곡(峨洋曲) :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잘 탔는데 종기(鍾期)만이 그 곡조를 들을 줄 알아서 한 곡조를 듣고는, “산이 높[峨峨]구나.” 하고, 또 한 곡조를 듣고는, “흐르는 물이 양양(洋洋)하구나.” 하였다. 종기가 죽은 뒤에는 백아가 거문고를 부수고 타지 않았다. 그것은 곡조를 알아 주는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주D-009]유경생(劉更生) : 한 나라 종실(宗室) 유갱생(유향(劉向))이 경학과 문장이 높고 국사를 걱정하여 자주 상소하였다.
[주D-010]염근리(廉謹吏) : 조정에 청렴하고 근신한 벼슬아치의 명록(名錄)을 만드는 관리.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燕山朝故事本末)
연산조(燕山朝)의 절신(節臣)





홍언충(洪彦忠)
홍언충은 자는 직경(直卿)이며, 호는 우암(寓菴)이요,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대제학 귀달(貴達)의 둘째 아들로서 을묘년에 문과에 올라 호당(湖堂)에 뽑혀 들어갔다. 벼슬은 교리에 이르렀다.
○ 17세 때에 ‘병상구부(病顙駒賦)’ 를 지어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일찍 과거에 올라 청관(淸官) 현직(顯職)을 지냈다.
○ 갑자년에 옛날 직언한 신하를 소급해 죄줄 때 시종신(侍從臣) 중에 죄를 면한 이가 드물었다. 공은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고 나서 담여(擔輿) 아래에서 조금 쉬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는 그의 옷이 피로 물든 것을 보고 가엾게 여겨 그것을 가리키면서, “참혹하도다.” 하니 공은 “이것은 홍문관 물이 든 것이라.” 하였다. 대개 홍문관 탄핵으로 죄를 받았다는 말인데 홍(弘)과 홍(洪)은 음이 같다. 국문을 마치고 귀양갔던 곳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김안로는 교외(郊外)에 나가 전송하였는데, 공이 “학문을 한 화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며 자못 고통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이에 김안로는 희롱하기를, “만약 자네에게서 지혜를 깎아 버리고 학식을 어둡게 하여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못하고 콩과 조를 서로 혼합하여 아무 것도 분변 못하는 그런 물건이 되라 하면 자네가 또한 그리 하겠는가?” 하니, 공은 탄식하기를, “무슨 말이냐. 떠돌아 다니며 고생하는 중에도 사람들이 혹 나를 기억해 주는 것은 학문 때문이고, 나그네 길에 온갖 고생을 하고 양식이 떨어졌을 때 사람들이 혹 나에게 양식을 대주는 것이 다 학문 때문이다. 바다 섬 속에 귀양가 있으면서 정신이 괴로운 중에 문묵(文墨) 아니면 즐거워할 일이 없으니, 학문의 공은 큰 것이다. 진실로 나로 하여금 마음으로는 착하고 악한 것을 가려내고 입으로는 옳고 그른 것을 말하게 하여, 남의 시기와 미워함이 내 한 몸에 모여서 이 세상에서 화를 당하게 한 것도 학문이지만 또 스스로 학문의 힘으로 저만큼 얻은 것이다. 그로하여 죄를 얻고 고통을 당할 적에 나의 학문을 미워하여 나를 어리석은 자로 돌리고 나의 지각을 빼앗아 미련하게 밥만 먹고 있을 뿐이라면 하늘 위에서 떨어져 구덩이 속으로 내려오는 것처럼 망연자실할 것이니, 비록 엎드러지고 자빠지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어찌 감히 이 짓을 하리오.” 하였다. 《용천담적기》
○ 진보(眞寶)에 귀양가서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을 스스로 단정하고 옛 사람을 모방하여 자신의 만장(挽章)을 짓고 묘갈명(墓碣銘)도 지었다. 그 묘갈문에, “대명(大明 명 나라) 천하 햇빛이 비치는 나라에 남자의 성은 홍(洪)이며 이름은 충(忠)이요 자는 직(直)이라. 반평생에 오활하고 옹졸함은 문자의 공이다. 32세에 세상을 마치니 명은 어찌 그리도 짧으며 뜻은 어찌 그리도 긴고. 옛 고을 무림(茂林)에 묘지를 정하니, 푸른 산이 위에 있고 물굽이 언덕이 아래에 있도다. 천추만세 뒤에 누가 이 들판에 지날는지. 반드시 이곳을 가리키고 배회하면서 슬퍼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동각잡기》
○ 연산주의 음란하고 포악한 행실이 극도에 달하자 반정할 기미가 있었다. 집안 사람이 권고하기를, “당세에 이름이 알려진 이장곤(李長坤) 같은 이도 망명하였는데, 공은 어찌 지금까지 가지 않습니까?” 하였다. 공은 “인륜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부자 관계가 그 첫째이고, 군신 관계가 그 둘째이다.나는 지금 아버지는 벌써 세상을 떠났으니 가장 중한 것은 다만 군신의 의리가 있을 뿐이다. 지금 만약 망명한다면 이는 아버지도 없는데 또 임금도 없게 되는 셈이 된다. 임금의 명을 어찌 도피하리오.” 하였다. 조금 후에 잡으러 왔으므로 공은 조용히 길을 떠났다. 가다가 유곡역(幽谷驛)에 이르러 자신의 만장을 지었다.조령(鳥嶺)에 이르러 중종(中宗)이 이미 왕위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공은 울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중종은 연산주 때 내쫓긴 사람을 먼저 뽑아 썼으니 장순손(張順孫)ㆍ이장곤(李長坤) 같은 이는 모두 좋아라고 나갔으나, 공은 끝내 나가지 않고 시 짓고 술마시는 것으로 스스로 즐겁게 지내다가 불행히 일찍 죽었다. 연산주를 위하여 절개를 지킨 사람은 오직 우암(寓菴)뿐이었다. <축수편>


유기창(兪起昌)
유기창은 자는 자성(子盛)이며,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무과에 올라 연산주 때에 정평 부사(定平府使)로 있다가 거제(巨濟)에 귀양갔다. 같은 때에 거제로 귀양간 사람이 세 사람 있었는데, 매양 서로 이끌고 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 보았다. 어느 날 금부 도사가 달려와서 한 사람을 잡아가서 죽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사람을 잡아가 죽이니 공은 홀로 있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명령오기만 기다렸다. 어느 날 급한 심부름군이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바라다보고 집안 사람을 불러 영결하였다. 심부름군이 도착하여 중종(中宗)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알리고 공을 병조 참지로 임명하고 그 아들 여림(汝霖)은 한림(翰林)으로 승진하게 되었다는 아들의 편지를 전하였다. 공은 편지를 보고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예전 임금을 위하여 울어야 되겠다.” 하고 자리를 깔고 북쪽을 향하여 큰 소리로 울었다. 아들에게는 편지로 답을 써서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섬기라고 말하고, 자신은 비인(庇仁)으로 돌아가서 한평생을 마칠 때까지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죽을 때 신주에 첨지중추(僉知中樞)만 쓰라고 단단히 타일렀다. 《후촌만록(後村謾錄)》


김숭조(金崇祖)ㆍ남세주(南世周)
연산주의 옛 신하 김숭조와 남세주는 중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 벼슬하지 않고 밖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한 사람은 청맹(靑盲)이라고 핑계하고 한 사람은 고질이 있다고 핑계하였다. 연산주가 쫓겨나고 중종조가 일어나는 천명을 어길 수 없음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의 주견을 지켜 세속을 따르지 않고 혼자 행하여 변하지 아니하였다. 《장빈호찬》
김숭조는 자는 희지(禧之)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을묘년에 문과에 오르고 정사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으며, 벼슬은 전한(典翰)에 이르렀다.
남세주는 자는 인문(仁文)이며, 본관은 고성(固城)이요, 이조 참판 금(琴)의 손자이다. 성종 정미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은 전한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