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묘역및 묘지탐방 /10대 임금 연산군 묘역 탐방

2012.1.13. 연산군묘역 주변 자전거 탐방

아베베1 2012. 1. 14. 01:03

해동야언 3
연산군(燕山君)


폐주(廢主 연산)가 세자(世子)로 있을 때 문정공(文貞公) 허침(許琛)은 필선(弼善), 사문(斯文) 조지서(趙之瑞)는 보덕(輔德)이 되었는데, 폐주가 날마다 놀며 장난치기를 일삼고 학문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다. 다만 성묘(成廟 성종)의 엄한 훈계가 두려워서 억지로 서연(書筵)에 나가기 때문에 동궁의 관원들이 비록 마음을 다해서 진강(陳講)하여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조지서는 천성이 굳세고 곧아서 매양 진강할 때면 책을 그 앞에 던지고 말하기를, “저하(邸下)가 학문에 힘쓰지 않으면 신은 마땅히 전하께 아뢰겠습니다.” 하니, 폐주는 매우 괴로워하여 원수같이 그를 보았다. 그러나 문정공은 그렇지 않고, 부드럽고 순한 말씨로 조용히 마음을 열어 깨우쳐주니 폐주가 매우 좋아하였다. 하루는 동궁의 관원이 진강하려고 입시하였다가 벽 사이를 쳐다보니 큰 글자로 “조지서는 큰 소인(小人)이오, 허침은 큰 성인(聖人)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를 들은 사람은 조지서에 대하여 매우 위태롭고 두렵게 생각하였다. 즉위하여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먼저 조지서를 목베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문정공은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비록 폐주를 바로잡지는 못하였으나, 매양 명을 받고 의금부에 앉아서 죄수를 논할 때마다 여러 방도로 힘을 써서 구제하여 살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 파직하고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피를 두어 되[升]나 토하였는데, 분한 마음과 번민으로 인해 죽었다. 조지서는 한갓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만 마음으로 삼아 사람과 역량(力量)을 잘 헤아리지 못하여, 심하게 저촉을 당하여 더욱 참혹한 화를 받았으니, 소광(疏廣)과 소수(疏受) 두 사람이 기미를 알고 멀리 물러나 마침내 위기를 면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재척언》
○ 홍치(弘治) 기유년(성종 20년) 5월 20일에 예조에 전지(傳旨)하기를, “폐비(廢妃 연산군 생모 윤씨)의 악한 소행은 사책(史策)에 밝게 나타났으며, 국인(國人)들이 함께 분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실은 천왕(天王)도 내쳤으니 어찌 다시 의논하겠느냐. 내가 덕이 박하여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여 위로는 우리 조종(祖宗)의 큰 덕을 더럽혔고, 아래로는 우리 신민들이 우러러 소망하는 것을 저버렸으니 부끄러운 마음을 어찌 끝이 있으랴. 그러나 천지와 조종의 은밀한 도우심에 힘입고 삼전(三殿)의 정성스러운 가르침을 받아서 내 자신은 이미 당(唐) 나라 중종(中宗)을 면하였고, 그 죄는 이미 진(晉) 나라 가후(賈后)가 분명하니, 이는 대신들이 함께 즐거워하고 하례하는 바이다. 나는 지금 옛일을 생각하다가 밤중에 탄식하여 홀로 앉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며칠이나 되는지 모른다. 비록 오래 음식을 주지 않더라도 영혼이 어찌 억울함이 있겠으며, 내가 어찌 가여워하리오마는, 어미가 아들 때문에 영화로움은 임금의 은혜이며, 뒤의 간악한 일을 방지함은 임금의 정치이다. 세자의 정(情)을 생각하면 어찌 슬프지 않으랴. 지금 그 묘를, ‘윤씨지묘(尹氏之墓)’라 하고, 묘지기 두 사람을 정하여 지방 수령으로 하여금 속절(俗節 제삿날 이외에 철이 바뀔 적마다 사당이나 묘소에 차례를 지내는 날) 에 제사를 지내게 하여 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또 영혼의 정을 감격하게 하여 비록 나의 백년 뒤라도 길이 고치지 말고 아비의 뜻을 따르라.” 하였다. 병진년(연산군 2) 봄에 연산군이 묘를 옮기기를 의논하니, 신종호(申從濩)가 그때 예조 참판이 되어서 홀로 성종(成宗)의 유교(遺敎)를 가지고 불가함을 지극히 말하여 임금의 위엄이 비록 진노하였으나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묘(廟)와 신주(神主)를 세우기를 의논할 때는, 옛 제도를 증거로 들어 말하기를, “장사를 지내면 반드시 신주가 있어서 신을 봉안하고, 반드시 사당이 있어서 제사를 받드는 것인데, 윤씨는 성상의 몸을 낳아 길렀으니 마땅히 사당의 모양을 높게 하여 받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조(先朝)에게 죄를 지었으니 예(禮)로 헤아려 보면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한 소제(漢昭帝)는 어머니 조첩여(趙婕妤)를 위하여 원읍(園邑)을 설치하고, 또 장승(長丞)으로 하여금 법에 따라 받들고 지키게 하였지만, 사당을 세운 것은 상고할 수 없습니다. 오직 《위현성전(韋玄成傳)》에, ‘효소태후(孝昭太后)의 침사(寢祠)는 수리하지 말라.’ 하였으니, 원(園)에는 침사만 있고, 경사(京師)에 사당이 없는 것은 명백하며, 위 명제(魏明帝)의 어머니 견후(甄后)에게는, 유사(有司)가 주(周) 나라 강원(姜嫄)의 전례에 의하여 별도로 침묘(寢廟)를 세울 것을 청하니 아뢴 것을 옳다고 하였는데, 강원은 제곡(帝嚳)의 후비(后妃)요, 후직의 어머니입니다. 주(周) 나라에서 후직을 높여서 시조(始祖)로 삼았으나 강원은 배향할 곳이 없기 때문에 특별히 사당을 세워서 제사하였으니, 그 일이 같지 않은데, 위(魏) 나라 신하들이 그 일을 인용하여 전례로 삼았으니, 이는 한 때 억지로 붙인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한(漢) 나라를 본받는다면 원침(園寢)은 우리 조정의 제도가 아니며, 위 나라를 본받는다면 억지로 붙인 오류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한 무제(漢武帝)와 위 문제(魏文帝)는 모두 유교(遺敎)가 없었으니, 지금의 사체와는 같지 않습니다. 폐비는 이미 묘(墓)에서 끊어졌으니, 전하는 사사로운 은혜 때문에 예(禮)를 해쳐서는 안 됩니다. 비록 묘를 세우지 않고 신주도 세우지 않고 묘(墓)에만 제사하여도 충분히 그 효도를 다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의논이 비록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주장한 논의가 매우 올바르기 때문에 모든 의논이 굽히지 못하였다. 《소문쇄록》
○ 교리 김일손(金馹孫)의 자는 계운(季雲)인데,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질이며 묘당(廟堂 조정)의 그릇이다. 상소문과 차자(箚子)의 글이 넓디 넓은 바다와 같고, 국사를 논의하고 인물의 시비를 가리는 데는 맑은 하늘의 해와 같았는데, 애석하게도 폐주(廢主)는 어찌하여 차마 기시(棄市 사형시켜 시체를 저잣거리에 버려두는 형벌)하였던가. 《사우언행록》
○ 김계운(金季雲)은 실로 세상에 드문 선비다. 상서롭지 못한 세상을 만나서 화(禍)를 입고 죽었다. 다만 그 화란의 시말과 그 죽은 뒤에 욕을 다 씻지 못한 일을 후생(後生)이 상세히 알 수가 없다. 남지정(南止亭 남곤)이 그 묘를 옮길 때의 만시(挽詩)에 자세히 실렸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귀신은 아득하고 어두우며 / 鬼神茫昧然
천도는 진실로 알기 어려워라 / 天道諒難知
좋아함과 미워함이 사람과 달라서 / 好惡與人異
화와 복을 항상 어긋나게 베풀도다 / 禍福恒舛施
유구한 이 우주에 / 悠悠此宇宙
수명의 길고 짧음이 다같이 없어짐이 슬프도다 / 脩短同蔑咨
어찌 알랴. 저승의 낙이 / 焉知髑髏樂
이승의 제왕과도 바꾸지 않을 것을 / 不易南面治
달관자는 한번 웃음에 부치겠지 / 達觀付一笑
아득히 떠 있는 구름같이 / 浮雲於渺瀰
오직 슬픈 것은 세상에 이름을 드날릴 사람은 / 獨憐名世人
그 나타남이 매양 늦어져 / 其出每遲遲
겨우 수백년 만에야 / 契闊數百年
한번 보는데 / 乃得一見之
나타났어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 見之又不遂
지극히 잘 다스려진 세상을 어찌 기약할 수 있으리 / 至治寧有期
내가 얼마나 다행인가 / 吾生亦何幸
그대와 때를 같이하여 세상에 태어났으니 / 得與君竝時
한 나라 서경의 문장이오 / 文章漢西京
송 나라 풍희의 인물일세 / 人物宋豐熙
크게 탄식하고 통곡하면서도 / 太息又痛哭
인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행하였네 / 當仁輒敢爲
어찌 알았으리 강관의 무리가 / 寧知絳灌屬
이를 갈며 곁에서 엿보아서 / 切齒從傍窺
묵직한 낭두목(머리를 씌우는 참혹한 형틀)으로 / 傫然囊頭木
갑자기 동시에서 죽임을 당할 줄을 / 遽及東市夷
만사가 없는 것이 무엇인가 / 萬事何所無
동해가 넓어서 가이 없도다 / 東海浩無涯
세상이 평정되고 법이 풀려서 / 世平法又弛
선과 악이 절로 가려졌는데 / 善惡自分歧
어찌하여 벗지 못할 억울함을 / 如何着甕寃
아직까지 펴지 못하였는고 / 尙未大敷披
춘추에 휘하는 전례를 일으켜서 / 春秋起諱例
정공과 애공에게 은미한 말이 많았도다 / 定哀多微辭
성인은 하늘과 같았으니 / 聖人與天同
후세에서 감히 따를 것이 아니요 / 後世非敢追
붓을 잡고 들은 것을 씀은 / 執筆書所聞
사가의 떳떳한 규법인데 / 史家之常規
들은 바가 옳고 그름 있으면 / 所聞有正謬
이는 곧 일가의 사견이로다 / 乃是一家私
사국에서 스스로 편찬함이 있으니 / 編摩自有局
거짓을 깎음은 마땅한 바인데 / 削僞乃其宜
오직 배 속에 칼이 있어서 / 只是腹中劍
억지로 털 밑의 흠을 찾도다 / 強覓毛底疵
어찌 원위의 사람이 / 豈比元魏人
장도규의 악을 나열한 것에 비교하랴 / 列惡張道逵
담당한 관원이 삼가지 못함이 있으면 / 當官有不謹
그 죄는 진실로 태형에 마땅하고 / 厥罪固當笞
어질고 유능한 이에게 또 죄를 감하는 것은 / 賢能又末減
팔의에 법받을 바가 있는데 / 八議在所師
이 말을 가지고 / 無人持此語
임금의 의심을 풀어줄 이가 없었도다 / 一決九重疑
세성(목성으로 약 12년을 주기로 운행함)이 일주하려 하니 / 歲星行欲周
길이 식자의 슬픔을 맺었도다 / 永結識者悲
비탈진 성 동쪽 흙에 / 坡陀城東土
초초하게 시체가 겨우 덮여 있어 / 草草難掩屍
사랑하는 아들과 조카가 / 情鍾有子姪
터를 잡아 옮기기를 도모했도다 / 卜兆謀遷移.
그대는 지금 하늘 위에 있어서 / 君今九天上
인간의 사는 모습을 내려다볼 걸세 / 俯視息相吹
솔개가 뜯는 것과 개미가 파먹는 것도 이미 가리지 않았는데 / 鳶蟻旣不擇
하물며 여기와 저기를 따지겠는가 / 況問彼與玆
산 사람 스스로 구구하게 / 人間自區區
세시의 제사에 편하게 하기 위함이로다 / 爲便歲時祠
처량하도다. 목천현에는 / 凄凉木川縣
중간에 꼬불꼬불한 산이 있으니 / 中有山逶迤
뒷날 도지를 편찬할 때에는 / 他年纂圖誌
묘를 마땅히 기록하고 빠뜨리지 않을 것이로다 / 錄墓當不遺
하였다.
끝 글귀는 대개 김계운의 묘를 마땅히 도지에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뒤에 《속여지승람(續輿地勝覽)》을 편찬할 때 낭관(朗官)들이 김계운의 묘를 기록해 올렸는데, 당상관(堂上官) 한 사람이 말하기를, “벼슬은 재상이 아니며, 또 행실을 삼가지 못했다.” 하고 드디어 지워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성세(盛世)의 공정을 다한 논의인가. 식자들은 김계운에 대하여 한스럽게 여겼다. 《패관잡기》
○ 권경유(權景裕)의 자는 문요(文饒)인데, 성품이 맑고 곧아 속된 선비와는 접촉하지 아니하고, 강직하여 간신(諫臣)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교리로 있다가 제천 현감(堤川縣監)을 자청하니, 행정이 물처럼 맑아 백성들은 사랑하고 아전들은 두려워하였다. 사관(史官)이 되었을 때에 점필재(佔畢齋)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편찬하였더니 재상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이 연산군에게 아뢰어 내정(內庭)에서 국문하였는데, 공초(供招)가 사실이 아니자, 붓을 던지고 소리를 높이며 꼿꼿하게 굽히지 않고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다. 《사우언행록》
○ 허반(許磐)은 양천(陽川)의 세족으로, 자는 문병(文炳)인데 계묘년에 진사가 되었다. 성학(聖學)에 뜻을 두어, 벼슬길에 나아가는 데는 청렴하며 일마다 옛 법도를 본받으려 하니, 사우(師友)인 대유(大猷 김굉필(金宏弼)의 자)가 그 단아함이 천성에서 나오는 것에 탄복하였다. 사직 참봉(社稷參奉)에 음보(蔭補)되었는데, 그때 좌의정 홍응(洪應)이 제조가 되었다. 문병이 말하기를, “왕세자(연산)는 나라의 다음 대를 이을 임금으로써 훗날 동방의 만 백성이 우러러 의지할 분인데, 지금 환관과 함께 거처하고 서연에 나아가는 때가 적고, 놀며 희롱하는 때가 많으니, 청컨대, ……” 하였다.
○ 허반의 자는 문병인데 매우 말솜씨가 있었다. 허탄하고 협기(俠氣)있는 문무(文武)의 선비와 의원ㆍ점쟁이의 무리와, 가기(歌伎)ㆍ악공(樂工)의 무리들이 모두 그 밑에서 분주하였으므로 스스로 뜻을 얻었다고 하여 말하기를, “나라 사람이 모두 나의 손안에 있다.” 하였다. 연산군이 궁내의 일들을 지어서 말한 죄를 국문하여 참수형에 처하였다. 윤빈(尹嬪)의 일을 가리킴.
○ 대사간 강형(姜詗)의 자는 형지(詗之)인데, 너그럽고 공평하며 순후하고 정직하였고, 직강(直講) 강겸(姜謙)의 자는 겸지(謙之)인데 정대(正大)하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는데, 연산조를 만나서 형제가 모두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 종실(宗室) 무풍정(茂豐正) 이총(李摠)의 자는 백원(百源)인데, 구로주인(鷗鷺主人)이라 자호(自號)하였다.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예법에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진(晉) 나라 시대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서사(書史)를 읽고 시문(詩文)을 배웠으며, 음률(音律)을 알아서 모두 극히 오묘하였다. 참판 김뉴(金紐)가 거문고 소리를 듣고 탄복하며 칭찬하기를, “정히 궁중의 모란이 맑게 갠 날 활짝 피어 화려한 것과 같다.” 하니, 유추(有秋 이여(李畬)의 자)가 말하기를, “김 재상(金宰相 김뉴를 가리킴)은 음률을 알아듣는 귀가 있다.” 하였다. 서호(西湖)에 집을 얽어서 오래도록 고깃배[漁艇]에 있으니, 시인(詩人)과 문사(文士)들이 강가에 이어져 끊이질 않았다. 속된 선비가 오면 스스로 노를 저어 반드시 피하였으니 추강(秋江)의 시에 이른바,
왕손이 배 부릴줄 알도다 / 王孫解刺舟
한 것이 이것이다. 그 형 문연(文淵)과 아우 이직(而直)ㆍ이열(而悅)ㆍ공택(公擇)ㆍ공간(公幹)은 모두 좋은 사람이다. 현 좌랑(佐郞)인 장곤(長坤) 이희강(李希剛)이 다섯 공자가 아버지 우산군(牛山君)을 따라 죽음에 나갔을 때도, 담소를 예사롭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 그 사람됨이 애석하여 눈물을 흘렸다.
○ 좌랑 이원(李黿)은 기상이 당당하여 목숨을 바칠 정도의 절의(節義)가 있고, 어린 임금을 부탁할 만한 재능을 지녔는데, 폐조 때에 문충(文忠)이라고 점필재를 시호한 일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이주(李冑)는 고성(固城) 사람인데 어질고 글을 잘하였으며, 용헌(容軒) 선생 원(原)의 증손이다. 《사우언행록》
○ 장령 이주의 자는 주지(冑之)이다. 시의 품격이 예스럽고, 세상을 구제할 재질이 있었는데, 폐조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임술년 봄에 내가 진도(珍島) 귀양지에 찾아가서 벽파정(碧波亭)에서 자고 작별하였는데, 평생의 일이 끝났음을 생각하였다. 《사우언행록》
○ 추강(秋江) 남백공(南伯恭)의 무덤은 고양(高陽)에 있었는데, 연산군이 부관참시를 명하였다. 그때 명을 받은 자가 무덤이 금표(禁標) 안에 있는 까닭으로 시체를 취하기 어려워서 양화도(楊花渡) 주변에 가져와서 형(刑)을 행하고 시체는 모래 위에 두고 갔는데, 남(南)의 아니와 사위 넷 중에서 시체를 거두어서 간직한 이가 하나도 없어서 지금은 그 소재를 알지 못한다.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이 충세(忠世)였다. 원래 미친 병이 있었는데, 이때에 함께 죽이도록 명하였을 때도 충세는 큰 소리하며 두려워하지 않았다. 추관(推官)이 본디 미친 병자는 사람으로 칠 수 없다고 품지(稟旨)하니, 연산군이 말하기를, “미친 자가 세상에 있으면 무엇하랴. 반드시 죽이라.” 하였다. 이미 죽임을 당하였는데 아내 조(趙)씨가 저잣거리에서 3일 동안 시체를 지키다가 밤에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날씨가 매우 추워서 시체가 뻣뻣하게 다 얼었는데, 조(趙)씨가 밤낮으로 시체를 안고 몸으로 언 것을 녹인 뒤에 염을 하고, 관에 넣었으며 장례와 제사를 예법에 맞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시어머니는 조씨가 모질어서 시체를 꺼리지 않는다고 꾸짖었으니, 이른바 이미 자기는 예(禮)로써 스스로 처신하지 못하고, 남을 예의에 어긋나게 처신하게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소문쇄록》이하 동
○ 정희량(鄭希良)의 자는 순부(淳夫)인데, 기운과 성품이 강건하여 생과일 두어 말[斗]을 먹어도 가슴이 아프지 않고 그러고도 술을 마실 수가 있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탁주는 큰 그릇으로 세 그릇, 청주는 큰 그릇으로 두 그릇, 소주는 한 그릇을 마시는데, 양이 조금씩 감하나 반드시 먼저 가슴을 씻어야 하므로, 술잔을 예법을 따지며 마시기를 즐겨하지 않고 다만 큰 사발로 많이 마시기를 즐겨한다.” 하였다. 문(文)을 익히고 시에 능하며 음양학(陰陽學)을 잘하여 서울 안에서 사주법으로 명성이 있는 사람에게 반드시 가서 질문해 보고 이르기를, “망령되고 용렬하다.” 하였다. 다만 주부(主簿) 오순형(吳順亨)에게는 굴복하고 말하기를, “이 사람의 추산(推算)은 반드시 정밀하고 확실하여 헛됨이 없으나 다만 세도(世道)에 겁을 내어 그 술법을 다하지 않는다.”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그 운명을 점쳐보고 때[時]와 벼슬[位]이 정하여지지 못한 것을 탄식하기를, “만약 아무 간(干 천간(天干))에 있으면 크게 귀하게 되고, 만약 아무 간에 있으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흉하다.” 하며, 항상 세상을 피해 도망할 뜻이 있었다. 과거에 올라 한림(翰林)이 되었는데, 무오년의 화(禍)에 의주(義州)로 귀양가서 김해(金海)로 옮겼다가 갑자년에 석방되었다. 어머니 상(喪)을 당해 고양(高陽)에서 시묘(侍墓)하였는데, 하루는 언덕 사이에서 홀로 산책하고 있었는데, 종이 찾아오니 속여서 말하기를, “너는 나를 위하여 산에 들어가서 필관채(筆管菜)를 뜯어 오너라. 내가 먹고 싶구나.” 하여, 종이 나물을 뜯어 가지고 돌아오니 보이지 않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찾았으나 종적이 없었다고 하니, 필시 물에 빠져서 죽은 것이다. 해평군(海平君) 정기수(鄭耆叟)는 바로 공의 아들인데, 연산군에게 군현(郡縣)에 영을 내려 찾기를 아뢰었으나, 연산군이 말하기를, “미친 놈이 도망가서 죽었는데, 찾아서 무엇하리오.” 하여 마침내 소식이 끊어졌다. 그때 사람들이 혹 그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가천원(加川院) 벽에 글을 쓴 것이 있는데, “새들은 쓰러진 집 구멍을 엿보고, 사람은 저녁 볕 샘물을 긷네. 산수(山水)로 집을 삼는 나그네는 하늘과 땅 어느 가에 있는고.” 하였다. 원주(院主)가 말하기를, “장삼 입은 중이 여기를 지나다가 썼다.” 하였는데, 혹은 순부(淳夫)인가 하고 의심하였다. 《소문쇄록》
○ 허암(虛庵 정희량의 호)은 젊어서부터 글을 잘한다는 이름이 있었고, 시에 매우 공교하였다. 늦게 과거에 올라서 내한(內翰)에 들어갔다. 점치기를 잘하여 사람의 길흉을 알아서 일찍이 말하기를, “갑자년의 화는 무오년보다 심하리라.” 하며 벼슬에 올라갈 계획을 하지 않았다. 연산조의 사화(史禍)가 일어난 것은 무오년에 있었는데, 허암이 일찍이 용만(龍灣) 적소(謫所)에 있었기 때문이다. 덕수현(德水縣) 남쪽에서 상주가 되어 있었는데, 하루는 종들을 흩어 보내어 큰 종은 땔나무를 하게 하고, 어린애는 나물을 뜯어서 저녁거리를 장만하게 하고는 혼자 빈 집을 지키므로 늙은 종이 심부름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시각을 지체하지 않고 돌아와보니 허암은 벌써 없었다. 이웃 사람을 불러서 사방으로 나가 자세히 찾아보았으나 다만 남강(南江)곧 한강 상류이다 모래에 벗어놓은 낡은 신발 한 켤레가 있는 것을 보고, 필시 강에 빠진 것으로 의심하고 뱃사공을 모아서 혹은 배로, 혹은 헤엄질 해서 강의 위아래를 두루 찾았으나 끝내 그 시체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얼마 안 되어 연산의 포학함이 날마다 더욱 심하여 죽이기를 아주 마음대로 하였으니, 이른바 갑자년 사화이다. 이때 허암이 세상에 있었으면 화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종적을 피하여 스스로 숨은 것이며 죽지는 않았다고 여겼다. 어떤 사람이 묘향산 옛 절에서 한 중을 만났는데, 비록 스스로 구걸하는 모양을 하였으나, 자못 세속 중의 거동이 아니므로 마음속으로 이상히 여겨서 훗날 그를 찾아 다시 방문하였으나 벌써 간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그가 허암(虛庵)이 틀림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길가에 있는 어느 원(院)의 벽에 두 절구(絶句)가 써 있는데 이르기를,
새들은 쓰러진 집 구멍을 엿보고 / 鳥窺頹院穴
사람은 저녁볕 샘물을 긷네 / 人波夕陽泉
산수를 집으로 삼는 나그네는 / 山水爲家客
하늘과 땅의 어느 가에 있는고 / 乾坤何處邊
전날의 비바람에 놀라서 / 風雨驚前日
문명한 이때를 저버렸도다 / 文明負此時
외로운 지팡이로 우주간에 노닐으니 / 孤笻游宇宙
시끄러운 세상 싫어서 시 조차 쉬노라 / 嫌閙竝休詩
하였는데, 이 시 역시 반드시 허암이 지었을 것이다.”고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일을 좋아하는 이가 쓰고 가서 사람들을 의혹하게 한 것이며, 허암이 아니다.” 하였다. 대개 물에 빠진 자는 기운이 다하면 시체가 반드시 떠서 나타나며, 혹 바람에 밀려서 강가에 붙어 있기도 하는 데, 만약 스스로 물에 빠졌으면 가까운 데서 그가 나오자마자 따라 나왔어도 끝내 보이지 않았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헌 신발을 언덕에 남겨두어서 사람들에게 물에 빠져 죽은 흔적을 보였으니 더욱 의심스럽다. 점을 쳐서 징험한 것이 매우 기이하고, 일을 먼저 아는 것이 많았으니, 어찌 반드시 화가 이를 것을 자각하고 머리를 깎고 목숨을 도망시킨 것이 아닐까. 세상에는 이러한 이술(異術)을 지닌 사람이 없지 않으니 반드시 죽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다만 어머니의 상(喪)을 마치지 못하였고 아버지가 집에 계시는데, 과연 세상을 버렸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혹 가족에게까지 연루(連累)가 될까 두려워서 차라리 윤리(倫理)를 어지럽히는 죄를 범할지라도 우선 집안을 위하는 계책에서인가. 모두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덕수(德水)에서 귀양살이할 적에 그가 살던 마을과 이웃하였는데, 마을에서 식견이 있는 이들이 모두 그렇게 말하였고, 또 말하기를. “궤변과 황당한 일을 좋아하는 자는 진실로 정상적인 이치로 저울질할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황매(荒昧)한 일을 믿어 천륜을 잘라 버리고 아무런 까닭없이 깊은 물속에서 갑자기 죽는 것은 더욱 인정에 가깝지 않으니, 이것이 죽지 않았다는 증명이 될 수 있다.”고도 한다. 《용천담적기》
○ 점치는 사람 김륜(金倫)이 젊었을 때에 평안도 향산사(香山寺) 등지를 유람하였는데, 한 방외사(方外士 속세를 떠난 사람)인 이천년(李千年)이라는 자를 따라다니며 여러 산을 유람하여 거의 6ㆍ7년이 되었다. 요술(妖術)을 배워가지고 부모에게 돌아가 뵐려고 작별하고 영동(嶺東) 본가로 왔는데, 곧 점을 쳐서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판단하였는데, 백에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이천년이 김륜에게, “기해년에 강서현(江西縣) 구룡산(九龍山)에 와서 나를 기다리라.” 말하고, 손수 시를 써서 주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80살 산중의 늙은이가 / 八十山中老
삼팽을 이미 쓸어 버렸네 / 三彭已掃除
인간에는 꿈꾸지 않을 터이니 / 人間應不夢
학을 짝지어 뜻을 다하네 / 鶴伴意無餘
구름 탑에는 달빛이 차갑고 / 雪榻蟾光冷
눈창에는 햇볕이 성근데 / 雪窓日影疏
뉘라서 알랴. 티끌 없는 거울이 / 誰知無累鑑
만대토록 스스로 청허한 것을 / 萬代自淸虛
하였다. 정묘년 3월 16일 송죽처사(松竹處士) 우재(愚齋) 고(稿). 그러나 비취(祕趣)만 기록하였으므로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또 단계(丹溪)에게 준 시에는,
한가한 틈에 흠뻑 취하여 천진한 이 놀이에 / 偷閑一醉是天游
강 바람은 손님을 만류하네 / 箇裏江風挽客留
탁목봉 높이 솟아 하늘에 닿은 듯 / 啄木峯高天若近
수림정 낮게 앉아 물 위에 떠 있는 듯 / 秀林亭下地疑浮
이랑의 맑은 넋은 천년을 전해오고 / 二娘魂魄千年事
아홉 구비 강 소리는 만고에 흘러가네 / 九曲江聲萬古流
가슴 속이 오랫동안 티끌에 더럽더니 / 胸海久牽塵累擾
단계가 오늘 내 시름 씻어주네 / 丹溪此日洗吾愁
하였다. 계사년 우재 씀. 그를 받들어 모시는 작은 종은 나이가 열 서너 살 가량인데, 또한 손수 써서 준 시에 이르기를,
천지에 집없이 산수에 노는 나그네가 / 天地無家山水客
생애는 한결같은 뜻이 유유하도다 / 生涯一向義悠悠
이끼낀 산길은 흰 구름에 잠겼는데 / 苔㾗山路白雲鎖
달빛이 맑고 시원하니 대 그림자가 흐르네 / 月影淸凉竹影流
하였고, 또 쓰기를,
푸른 산은 구름이 만첩이오 / 碧山雲萬疊
바다는 넓어 가이없도다 / 滄海闊無邊
묻노라 무슨 일을 인연으로 / 爲問緣何事
가는 마음이 북궐(궁중)에 달렸는고 / 歸心北闕縣
하여, 시격(詩格)이 고풍스럽고 필적이 기이하고 씩씩하여 모시는 아이까지도 시재(詩才)와 필법이 범상하지 않았으니, 보통 방사(方士)가 아님은 분명하다.
정희량(鄭希良)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연산조 을묘년에 과거에 올라서 예문관 검열이 되었는데, 무오년 사화에 귀향갔다가 얼마 되지 않아 석방되었다.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풍덕(豐德) 지방에서 여막살이 하였는데, 항상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갑자년이면 사화가 다시 일어날 것인데, 우리들도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였다. 임술년 5월 5일에 여막 문밖에 산보를 나갔다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므로 집안 사람이 이상히 여겨 자취를 찾아 강변에까지 오니 짚신 두 짝을 물가에 버려둔 것이 보이고, 간 곳이 없으므로 물에 빠져 죽은 것이라 하였다. 뒤에 서쪽 지방의 산에 있는 중이 말하기를, 이상한 중이 여러 산에 왕래하는 데 일찍이 정희량의 안면을 아는 이가 분명히 알아보았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머리를 길러서 방사가 되어 자취를 비밀히 왕래하며, 여러 산에 머물면서 혹 시구(詩句)를 중에게 주어서 세상에 전파되어 사람들이 다투어 입으로 외웠다고 한다. 김륜(金倫)이 일찍이 따라 다니면서 그가 기록한 생년월일시를 보았는데 오행(五行)이 매우 자세하였다. 김륜이 서울에 왔을 때 판서 신경광(申景洸)이 복서(卜書)를 좋아하여 선비와 고관들의 오행을 기록해 두고 항상 스스로 점쳐서 징험하였는데, 정희량의 오행도 그 중에 있었다. 김륜이 신경광을 찾아가서 좌담하는 사이에 곧 그 기록을 열람하다가 정희량의 오행을 보고는 문득 놀라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스승 이천년(李千年)의 사주이다.’ 하였다. 이 말로써 정희량이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사재척언》. 이하 동.
○ 성묘(成廟 성종)가 매계(梅溪) 조위(曺偉)에게 점필재(佔畢齋)가 지은 글을 찬집(纂集)하라고 명하므로, 매계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문집 머리에 기록하였다. 무오년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유자광(柳子光)이 연산군에게 참소하기를, “조위가 〈조의제문〉을 첫머리에 기록한 것은 자못 뜻이 있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아주 노하였다. 그때 매계는 하정사(賀正使)로 명 나라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연산이 강을 건너면 즉시 참수형에 처하도록 명하였다. 매계의 일행이 요동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듣고 일행이 놀라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매계의 서제(庶弟) 조신(曺伸)이 일찍이 요동 땅에 점을 잘 치는 추원결(鄒源潔)이 있음을 듣고 그곳에 가서 길흉(吉凶)을 물으니, 그 사람이 점을 쳐보고는 다른 말이 없고 다만 글 한 구절을 썼는데, “천층의 물결 속에서 몸을 뛰쳐 나와서 모름지기 바위 밑에서 세 밤을 잠자리라.〔千層浪裏飜身出, 也湏嚴下宿三宵〕” 하였다. 조신이 매계에게 돌아와 보고하니 매계가 말하기를. “첫구절은 화를 면한다는 것같으나 아랫 구절은 풀이하기가 어렵다.” 하고, 서로 민망하여 묵묵히 눈물을 머금었다. 행차가 의주 압록강까지 도착하니 강변에 관인(官人)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을 보고 일행이 놀라서, 금오랑(金吾郞)이 와서 처형할 사람을 기다린다고 하며 서로 울먹였다. 매계가 말하기를, “목숨이 경각에 있다.” 하고 하늘을 우러러 소리를 내지 못했다. 강을 지나며 정승 이극균(李克均)이 구원하여, 잡아다가 추문(推問)만 하는 것임을 알고 일행은 기뻐하고 다행히 여겼다. 이에 점쟁이의 글에, ‘천층 물결 속에서 몸을 뛰쳐 나오리라.’ 한 것은 곧 이것을 뜻한 것임을 알았지만 그 아랫 구절을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잡혀서 서울로 와서 끝내 죽음은 면하였으나 매를 맞고 순천으로 귀양갔다가 병으로 죽어서 금산(金山) 고향으로 반장(返葬)하였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연산군이 예전의 죄를 추가 기록하고 부관참시를 명하여 시체를 무덤 앞 바위 밑에 끌어내 두고 3일 동안 시체를 드러내고 거두어 장사지내지 못하게 하였으니, 조선은 비로소 요동 점쟁이의 두 시구가 앞뒤가 들어맞음을 기억하고 탄식해 마지 않았는데, 이것은 역시 궁구하기 어려운 이치가 있다. 《사재척언》
○ 우리 조종(祖宗)의 가법(家法)은 대신을 신임하였으므로 비록 연산군이 음탕하고 포학하였어도 재상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느 날 궁내에 잔치를 베풀어 대신도 들어왔다. 술이 취하자 연산군이 기생의 아리따움을 보고 몸소 친압하므로, 의정 성준(成俊)이 나아가 아뢰기를, “노신(老臣)이 죽지 않았으니, 전하는 결코 이와 같이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연산군이 꺼려서 그쳤다. 《병진정사록》
○ 연산군이 노하여 엄(嚴)씨와 정(鄭)씨 두 숙의(淑儀)를 때려 죽일 때, 소혜왕후(昭惠王后 덕종비(德宗妃) 한(韓〉씨. 연산의 조모)가 오랜 병으로 누워 있었다. 그때 갑자기 일어나서 똑바로 앉아 말하기를, “이들도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렇게까지 하오.” 하였다. 연산군이 머리로 소혜왕후의 옥체를 부딪치니 왕후가, “흉악하도다.” 하고, 드디어 누워서 말하지 않았다. 《소문쇄록》. 이하 동.
○ 연산군이 새로운 이름을 많이 만들었다. 악공(樂工)을 광희(廣熙)라 일컫고, 기녀(妓女)를 운평(運平)이라 일컬어서 승급하면 가흥청(假興淸)이 되고, 또 승급하면 흥청이라 했다. 운평으로 들어오는 자를 속홍(續紅), 입는 옷은 아상복(迓祥服), 거처하는 곳을 연방원(聯芳院)이라 부르며, 원각사(圓覺寺)를 국(局)으로 삼았다. 또 의성위(宜城尉)의 집을 함방원(含芳院)으로,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을 뇌양원(蕾陽院)으로, 견성군(甄城君)의 집을 진향원(趁香院)으로 하여 흥청과 현악기의 악공들이 열지어 살았다. 선발된 자는 취홍원(聚紅院)에 거처하였는데, 명정전(明政殿) 오른편 숙장문(肅章門)에 있었다. 질병가(疾病家)를 청환각(淸歡閣)이라 하고, 자수궁(慈壽宮)을 회사각(會絲閣)이라 하여 일찍이 임금과 가까웠던 자를 거처하게 하였다. 나인(內人)으로 얼굴이 쇠한 자가 거처하는 곳을 두탕호청사(杜蕩護淸司)라 하고, 흥청의 식료를 저장하는 곳을 호화고(護華庫)라 이르며, 그 음식 제공을 감독ㆍ관장하는 자를 전비(典備)라고 하였다. 호상(護喪)하는 나인의 처소를 추혜서(追惠署), 사제(祠祭)하는 나인의 처소를 광혜서(廣惠署)라고 하였는데, 서(署)는 효사묘(孝思廟)에 있었다. 포염사(布染司)를 설치하여 아상복을 감조(監造)하게 하였으며, 봉순사(奉順司)를 설치하여, 수레와 사냥하고 그물질하는 기구를 만드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응방(鷹坊)에는 고안관(考按官)이 있고, 응사군(鷹師軍)이 있었다. 말을 기르는 곳을 운구(雲廐)라 하여 정릉(貞陵)에 두고, 기구(麒廐)란 본래 사복시(司僕寺)이며, 인구(麟廐)는 경복궁에 두고, 용구(龍廐)는 금호문(金虎門) 밖에 두었다. 의금부 당직청을 밀위청(密威廳)으로 고치며, 봉사(奉使)하는 자를 모두 승명(承命)이라 하고, 미녀와 좋은 말을 각 도에서 뽑아 올리는 자를 채홍준사(採紅駿使)라고 하며, 소녀를 뽑는 자를 채청사(採靑使)라고 하였다. 해도(海島)에 죄인을 감금하는 자를 진유근리사(鎭幽謹理使)라고 하고, 백성의 재물을 긁어내고 모든 물건을 거둬들이는 자를 모두 위차(委差)라고 하였다. 아랫사람이 시사(時事)를 비난할 것을 염려하여 대소 신료에게 모두 패(牌)를 차게 하였는데, 그 글에, “입은 화의 문이오,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게 간직하면 몸이 어느 곳에서나 편하리라.” 하였다. 명령을 받은 자는 모두 승명패(承命牌)를 찼는데, 그 중에 가장 급속한 것을 추비전(追飛電)이라 하며, 승명을 범하는 자는 죄가 죽음에 이르렀다. 《소문쇄록》
○ 환관 김처선(金處善)은 벼슬이 정이품(正二品)으로써 연산군의 어둡고 거친 것을 항상 마음을 다하여 간언하니, 왕은 노염이 쌓였으나 발하지는 않았다. 연산군이 매번 궁중에서 스스로 처용희(處容戲)를 추며 주색에 빠지자, 김처선이 집안 사람에게, “내가 오늘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대궐에 들어가서 거리낌없이 극력으로 말하기를, “늙은 것이 네 조정을 섬겼고 대강 사기(史記)를 읽었사온데, 군왕과 같은 이는 고금에도 없습니다. 어찌 국체(國體)를 생각하지 아니하십니까.” 하니, 왕은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여 활을 힘껏 당겨서 갈비를 쏘아 맞히니 김처선이 말하기를, “조정의 대신도 죽임을 꺼리지 않는데, 이런 늙은 것이야 감히 죽음을 아끼리까. 다만 전하는 국왕의 자리가 오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또 한 화살로 맞혀서 땅에 엎어지자 앞으로 가서 그 다리를 끊고 일어나서 가라고 하니, 쳐다보고 말하기를, “임금도 다리를 분지르고 갈 수 있습니까.” 하니, 또 혀를 끊고, 직접 스스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흐트렸는데, 죽을 때까지 말을 끊지 않았다. 마침내 시체를 호랑이에게 주고 조야(朝野)로 하여금 처자(處字)는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소문쇄록》
○ 성종 때 후원에서 파가 났는데, 한 줄기에 아홉 가지가 있으므로 상서로운 파라 여기고 돌로 뜰을 싸서 재배하였다. 연산군은 이곳에 대(臺)를 쌓고 음탕하게 노는 장소로 삼아 이름을 서총대(瑞蔥臺)라 하였다. 대를 쌓을 때에 하도(下道)의 군민(軍民)들을 징집하여 부리는데, 수포(輸布 세포(稅布)바치는 일)가 많아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여 옷 속의 솜을 내어서 베(布)를 짜니 그 빛깔이 검고 길이가 짧았다.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 추악한 무명을 서총대포(瑞蔥臺布)라 말한다. 《소문쇄록》
○ 최유회(崔有淮)의 딸이 가야금에 능숙하였는데, 정승 한치형(韓致亨)이 끌어서 구사비(丘史婢)로 삼고 가까이 하였다. 연산군이 여자를 뽑을 때가 되어 풍원위(豐原尉)와 추천을 다투었는데, 지신사(知申事) 구수영(具壽永)이 먼저 빼앗아 궁중에 바치니, 연산군이 사랑하여 숙의(淑儀)로 봉하였다. 어느날 내족천회(內族千會)를 열어서 바야흐로 기악(妓樂)을 이끌고 왕의 행차가 연회 장소로 나가니, 최유회의 딸이 머리를 풀고 소리를 높여 통곡하므로 왕이 놀라서 급히 물으니, “아비가 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왕이 노하여 이르기를, “과연 죽었는가. 중사(中使)는 가보아라.” 하였다. 최유회는 그때 병이 들었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는데, 왕의 노함을 듣고 곧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중사가 돌아와 보고하니 왕이 말하기를, “혹시 거짓으로 죽었으면 반드시 처형하리라.” 하니, 형관(刑官)이 시체를 실어다가 매어 두고 이튿날 품지(稟旨)하였다. 술이 깨자 말하기를, “후하게 장사하고 참의를 증직(贈職)하라.” 하였다. 《소문쇄록》
○ 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은 인동(仁同)으로 귀양갔었는데, 연산군이 관원을 보내서 사약(死藥)을 내렸다. 관원이 와서 글을 여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하는가” 하며, 분개하는 기색이 등등하였다. 유폐된 방에 나갔다가 도로 나와서 관원에게 말하기를, “내 나이가 70이고 몸에는 병이 많으니, 내가 죽어도 무엇을 한하리오. 다만 나라에 공로가 있고 몸에 죄가 없으니 너는 모름지기 이 말을 돌아가 아뢰라. 그렇지 않으면 나의 영혼이 마땅히 너에게 벌을 줄 것이다.” 하였다. 돌아와서 연산군에게 아뢰니, 연산군은 더욱 노하여 심지어 시체의 뼈를 부수게 하였다. 《소문쇄록》
○ 연산군이 일찍이 선전관 4명을 불러서 이종례(李宗禮)ㆍ김우증(金友曾)ㆍ김수담(金粹潭)과 아무개 등이 궐내에 들어가니 묻기를, “너희들은 이극균을 아느냐?” 하니, 모두, “감히 모릅니다.” 하였으나, 굳이 물으므로 그 뜻에 아부하여 말하기를, “간신의 일은 형용해 말할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그렇다고 말하고는 가지고 있는 센 활을 내어 당기게 하였다. 모두 활이 굳세고 힘이 약해서 당길 수 없다고 대답하니 왕이 스스로 그 활을 잡고 당기려다가 그만두고 말하기를, “오늘은 술이 취해서 당길 수 없다.” 하며, 곧 입직하는 내금위(內禁衛) 등을 불러서 당기게 하니, 혹은 당기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억지로 당기는 자도 있었다. 이에 김수담에게 술을 올리라고 하여 왕이 마시고 돌려주었는데 입에서 먹다 남은 고기를 그 속에 함께 두었다. 한 사람이 술을 올리는데 의식을 알지 못하여 먼저 마시려고 하니, 왕이 급히 술잔을 빼앗으며, “네가 잘못이다. 이것은 내가 마셔야 한다.” 하고, 각각 그 자급(資級)을 물으니, 이종례가 자궁(資窮 당하관의 제일 높은 자리)이라고 대답하자 왕이, “너는 마땅히 당상(堂上)에 올라야 한다.” 하였다. 남은 사람은 모두 계급이 낮았고 어떤 이는, “신의 계급은 창신교위(彰信校尉)입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창신은 무슨 이름인가.” 하고, 곧 중관(中官)의 옥권아(玉圈兒)와 망아(網兒)를 집어 이종례의 머리를 싸고 다시 술을 올리게 하니, 이종례가 술을 먹지 못하고 자리에 토하였다. 왕이 성내어, “어찌 무례하냐.” 하니, 다른 사람이 나아가 말하기를, “천성이 본디 술을 먹지 못합니다.” 하였다. 곧 몰아내고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과 함께 말타기와 활쏘기를 하여도 되겠느냐.” 하고, 곧 집안에서 말에 오르니 말이 달리려고 하므로 선전관 두 사람이 힘써 붙들고 당겨서 놓지 않았는데 놓으면 담벽에 부딪쳐서 다치기 때문이었다. 왕은 나가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말에서 내렸다가 다시 탔는데, 여전히 당기고 있었다. 내관(內官)이 눈짓해서 놓게 하니, 드디어 한번 마당을 달리다가 돌아왔다. 임금의 대모(大帽)를 김수담의 머리 위에 얹고, 그 사모를 빼앗아 쓰고는 김수담으로 하여금 말을 달리게 하였다. 이튿날 이종례에게 승직(陞職)을 전교하였다. 《소문쇄록》
○ 권통지(權通之)의 이름은 달수(達手)인데, 일찍 과거에 올라 교리가 되었다. 연산주가 윤부인(尹府人)에 대해 입묘(入廟)할 일을 의논하는 데, 크게 위엄을 부려 아랫사람을 제압하므로 연산군이 하고 싶은 일을 감히 거스르지 못했다. 통지가 개연히 선왕의 뜻이 아니라고 하니 관중(館中)에서 감히 다른 말을 못했다. 연산주는 성을 내어 모두 매질하고 귀양보냈는데, 갈수록 노함이 더욱 심해서 옥당(玉堂)과 대간(臺諫) 중에서 그 논의를 먼저 주장한 자들은 곧 극형(極刑)하였다. 그때 예전 일을 소급해 다스렸는데 폐비(廢妃) 사건의 주창자를 적발하는 것이 날마다 심하고 혹독하니, 모두들 먼저 죽은 사람에게 허물을 미루어 묘를 파서 썩은 시체를 찢게 하고 구차하게 화를 면하려 하였다. 오직 통지만이 제 자신을 끌어서 자복하고, 죽은 동료를 저버리면서 자신이 살 계책을 삼지 않았다. 아울러 대원(臺員)으로 먼저 발론한 자와 함께 이미 형구가 갖추어졌으므로 옥리(獄吏)가 슬피 말하기를, “둘이 같이 죽는 것보다 차라리 죄를 한 사람에게로 돌리고, 한 사람은 사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대간이 옥리의 뜻대로 말을 고쳐서, 옥당이 대간보다 먼저 발의하였다고 하니, 통지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며 말하기를, “아무야, 아무야, 네가 과연 나를 본받아서 한 일인가.” 하고, 곧 붓을 빼앗아 공사(供辭)를 쓰기를, “불초 신달수가 감히 한 일이니, 구차히 숨겨서 살기를 도모할 수 없습니다.” 하고, 공초를 끝내고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술을 주니 서서 다 마시고 모두 평상시와 다름없이 형벌을 받으니 사람들이 칭찬하고 불쌍히 여겼다.
처음 권통지가 용궁현(龍宮縣)에서 귀양살다가 다시 잡혀 갈 때 영순리(永純里)를 지나며 가족과 영결하였다. 그때, 내가 함녕촌(咸寧村)에 있으면서 술병을 들고 찾아가보니, 통지가 술을 가득히 부어서 유쾌하게 마시고 내 손을 잡고 말하기를, “예로부터 참소하는 간신들이 임금의 마음에 맞추어서 악한 일을 행하여 사류(士類)를 살해하는 자가 어찌 끝까지 보전 한 적이 있는가. 나는 죽지만 눈을 빼두면 그 망함을 볼 것이외다.” 하니, 어조가 강개하였다. 이어 눈물을 흘리니 곁에 앉은 이들이 모두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다. 통지가 이미 불행하자 그 미망인은 슬피 울며 먹지 않아 죽었다. 성조(聖朝 중종을 가리킴)께서 통지에게 증직하고 부인에게는 열녀문(烈女門)을 세웠으니, 절개와 의리가 쌍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도다. 그 소리와 얼굴과 의기가 눈에 선하게 보이니,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프고 뼈에 사무치도록 애통하도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연산군이 예전 폐비의 일을 논한 신하들을 추죄(追罪)하였는데, 대간과 시종(侍從)으로써 죄를 면한 사람이 드물었다. 여러 날 궁정(宮庭) 밑에서 국문(鞫問)하였는데, 직경(直卿) 홍언충(洪彦忠)도 역시 갇혀 있었다. 고문이 그치자 업혀나와 잠시 감옥 밖에서 쉬고 있을 때, 내가 그 옷에 피가 묻은 것을 보고 측연히 가리키며 말하기를, “참혹하도다.” 하니, 직경이 말하기를, “이는 홍문관(弘文館)의 물에 물든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홍문관의 논열(論列)에 연좌되었는데, 홍(弘) 자는 홍(紅)과 음이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국문을 마치고 도로 유배지로 돌아가는데, 내가 또 성밖에서 기다렸더니, 직경이 말하기를, “평생에 학문을 한 화(禍)가 이 지경인가.” 하고, 자못 슬프고 괴로운 안색이 있었다. 내가 희롱하기를, “만약 자네 지혜를 없애버리고 학식을 어둡게 하여 선악(善惡)도 모르고 평범한 인간에 섞여서 아무 것도 모르는 한 물건이 되라고 하면 되겠는가.” 하니, 직경이 무색해 하며 말하기를, “궁하고 급한 중에 남이 혹 보살펴주는 것도 학문 때문이오, 객지에서 고생이 심하고 주머니가 비었을 적에 남이 혹 도와주는 것도 학문이며, 섬에 귀양가 있을 때 정신과 혼백이 위태하고 두려울 적에 글이 아니면 즐길 만한 것이 없으니, 학문의 공은 큰 것이로다. 나로 하여금 선악을 알고 시비를 말하여, 시기와 증오가 많이 모여서 세상에서 화를 초래하는 것도 진실로 학문이다. 또 내가 저렇게 힘을 얻었으나, 허물이 되고 틈이 쌓여서 고통과 해독을 받을 때를 당해서는 몸에 큰 더러운 흠이 있는 것과 같이 나의 학문을 돌아보고 병통으로 여길 뿐만이 아니다. 만약 내가 어리석음으로 돌아가고 나의 지각을 빼앗아서 미련하게 밥만 먹을 뿐이라면, 아득하게 하늘 위에서 똥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버리는 것과 같으니, 비록 일백 번 넘어지고 자빠질지라도 내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하리오. 왕왕 똥 구덩이 속에서 일어나서 하늘 위의 영광과 복록을 취하는 것을 온 세상이 모두 그렇게 한다. 하늘 위의 심한 위험은 똥 구덩이 속의 편하고 즐거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어찌 감히 내가 위험하다고 저쪽의 편함과 바꾸겠는가. 돌이켜 내게 있는 것을 생각하건대, 큰 보배가 몸에 있는 것같을 정도가 아닐세.” 하고, 입을 벌려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용천담적기》
○ 홍치(弘治) 갑자년(연산군 10)에 연산군이 심순문(沈順門)을 죄가 없는데도 죽이려고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삼공(三公) 이하가 모두 감히 이의(異議)를 말하지 못하는 데, 대사간 성세순(成世純)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간관의 직책에 있으면서 어찌 묵묵히 가만히 있으리오.” 하니, 헌납 김극성(金克成)이 말하기를, “명색이 벼슬이 간관으로 있으면서 사람이 죄 없이 죽는 것을 본다면 비록 몸을 아껴 말은 하지 않으나,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게 됨을 어찌하리오.” 하였다. 정언 이세응(李世應)은, “헌납의 말이 옳소,”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만약 뜻을 순하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심순문과 함께 죽을 것이나 끝내 유익할 것이 없다.” 하였다. 김극성과 성세순은 태연히 웃으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큰 일이니 각각 자신의 뜻대로 맡기는 것이 옳다. 오늘 먼저 죽을 이는 우리 두 사람이오, 다음은 정언이다.” 하고, 드디어 그 무죄한 실상을 아뢰었다. 연산군은 비록 듣지는 않았으나 죄는 주지 않았다. 《패관잡기》
○ 승지 정성근(鄭誠謹)의 자는 이신(而信)인데 성품이 굳세고 곧아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대마도(對馬島)에 사신으로 갔을 때 지나는 길에 매림사(梅林寺)가 있는데 매우 정결하였다. 함께 청하기를, “배 안에서 오래 술잔을 기울이는 것보다 특수한 지방의 절을 한번 가서 구경하지 않겠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갈 만하나 나는 갈 필요가 없다. 내가 벌써 앉아서 생각하니, 선방(禪房)과 중당(中堂)을 깨끗하게 쓸고는 부처를 안치하고 향을 피우며, 뜰에는 등(橙)ㆍ귤(橘)ㆍ포도 등 과수를 열지어 심었을 것이다. 이 정도에 불과할 것이니 우리 나라의 절과 무엇이 다르랴. 나는 가지 않겠다.” 하였다. 도주(島主) 집에 와서는, 도주가 문에 나와서 지명(紙命 왕명을 받는 예식)하기를 꺼려하므로, 공이 문밖의 걸상에서 통역을 시켜 두세 번 독촉해서 의식대로 지명을 마치게 하였다. 잔치를 베풀어 위로할 때 도주가 공경을 다해서 예물을 바쳤는데, 그림부채〔畫扇〕ㆍ패도(佩刀)ㆍ악초(握椒)ㆍ향(香)이었다. 일행이 얻은 물품을 모두 거두어서 한 그릇에 봉해 두었다가 돌아오려고 배가 출발할 때에 접대하는 왜인(倭人)에게 주어서 도주에게로 보냈다. 그뒤에 도주가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그 물품을 가져와서 나누어주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그 청을 받아들이니 공이 아뢰기를, “신이 그곳에 있을 때에 받지 않았는데, 여기 와서 받으면 전후의 마음이 다른 것이니, 진실로 원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억지로 할 수 없어서 도로 주어 보냈다. 성종이 승하한 후에 공이 홀로 3년상을 행하니, 이로 인하여 연산조에서 비명의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고, 공의 아들 주신(舟臣) 도 애통해하다가 죽었다. 《소문쇄록》
○ 승지 정성근(鄭誠謹)은 평소에 올곧았다. 일단의 충성된 마음은 서적에 실려 있어 덧붙여 말할 것이 없다. 연산조에 불우한 처지에 있으면서 강개한 마음으로 이곡(俚曲 시속 노래)을 지어서 밤중에 슬피 노래하며 그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스러운 감회를 붙였다. 내가 일찍이 그 소리를 따서 가사를 맞추었는데, 그 하나는,
내가 임 생각하는 마음을 / 以我思子心
임은 내 마음을 모르네 / 子無我心似
임 마음이 내 마음 같으면 / 子心苟可似
천하에 이런 일이 어찌 있으리 / 天下寧有是
생각하지는 못할지라도 / 思之縱難能
미워하지나 말아주오 / 無嫉猶可已
하였고, 그 둘째는,
도리꽃은 은광을 받으려고 / 桃李媚恩光
아름다운 그 빛을 서로 다투네 / 競此色婉娩
늙은 국화는 맨 나중 꽃이 피니 / 老菊終亦花
쓸쓸한 그 모양 누가 살피랴 / 寂歷誰省晚
서리 바람 풀을 휩쓸 때 / 霜風掃卉空
가을 동산 외로이 꽃다우리라 / 孤芳記秋苑
하였는데, 그 가락이 슬프고 아름다우며 그 가사가 원망과 곧음이 있었다. 배회하면서 임금을 그리는 정에 소리가 낮았다가 다시 높으니 역시 시인(詩人)이 남긴 뜻이다. 〈이소(離騷 굴원이 지은 글)〉의 슬픔, 〈장사부(長沙賦 가의(賈誼)가 지은 글)〉의 괴로움과는 비록 고아(古雅)하고 속된 차이는 있으나, 아득한 이 마음은 천년에도 통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흐르도록 할 것이다. 《용천담적기》
○ 관찰사 권주(權住)의 자는 지경(支卿)인데 총명이 뛰어나서 한번 보면 즉시 기억하였다. 8세에 사서(四書)를 읽었고 10세에 경사(經史)에 통하였으며, 13세에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말을 하였다. 대체를 지키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는데, 폐조를 만나 몸을 보전하지 못했다. 《사우언행록》
○ 정인인(鄭麟仁)의 자는 덕수(德秀)이다. 얼굴이 백옥 같고 의논이 뛰어나며 올바른 사람이 아니면 사귀지 않았으며, 신중하고 덕망이 있었다. 낭서(朗署)에 올랐다가 늦게 문과에 발탁되어 벼슬이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며, 폐조에서 벼슬하다가 참형(斬刑)을 당하였다. 《사우언행록》
○ 정언 한훈(韓訓)의 자는 사고(師古)이며 어릴적 이름은 학이(學而)이다. 명리를 떠난 고상한 이야기를 큰소리로 말하며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연산군이 함부로 문사(文士)들을 많이 죽이므로 드디어 도망해 숨었다가 뒤에 스스로 세상에 나와서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였는데, 식자들이 기롱하였다. 《사우언행록》
○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필상(尹弼商)이 젊었을 때 북경에 갔었는데, 점을 잘 치는 사람을 찾아서 평생의 운명을 물으니 말하기를, “평생의 수명과 지위가 모두 높으나, 다만 종말에 가서 삼림(三林) 아래에서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뒤에 널리 점쟁이에게 물어도 모두 삼림 두 글자를 해석하지 못했다. 연산조에 난을 만나 진원(珍原)으로 귀양가서 읍내 조그만 초가집에 붙여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저녁에 이웃 사람이 곁에 사는 밭매는 사람에게 청하기를, “내일은 아침 일찍 모두 상림(上林) 밭으로 모이라.” 하였다. 파평군이 우연히 묻기를, “어째서 상림밭이라고 하는고?” 하니, 주인집 사람이 말하기를, “여기서 5리를 못 가서 지명이 상림ㆍ중림(中林)ㆍ하림(下林)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한다. 파평군이 듣고 비로소 삼림 아래라는 말이 생각나서 집을 우러러보며 멍하니 상심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연산군이 사자를 보내어 죽이고, 친족과 자제도 모두 절도(絶島)에 유배되어 안치되었다. 그 시체는 들 밖에 엎드려진 채 달포 가량 거두지 않았으나, 새나 솔개가 먹지 않고 이웃 개도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사재척언》
○ 우리 동방에는 금과 은이 나지 않아서 본조(本朝)에서 전법(錢法)을 행하지 않고 면포(綿布)로만 화폐를 삼았다. 면포 35자[尺]가 한 필이 되고, 50필이 한 동(同)이 된다. 천 동이 넘게 쌓아둔 이가 없었는데, 근자에 재상 파평부원군 윤필상과 장사꾼 심금손(沈金孫)은 면포가 무려 천여 동이나 되었는데, 갑자년과 병인년 사이에 모두 뜻밖에 재앙을 만났다. 《소문쇄록》
○ 연산군의 비(妃)는 정승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연산군의 패역한 행위가 날로 심하여 항상 옳은 말로 간하였으나 번번이 무리한 욕을 당하였다. 그때 숙의전 사내종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으면서 재물을 빼앗고, 이익을 구하여 평민의 전지와 노비를 점령하였는데 빼앗아도 공사(公私)에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왕비는 항상 탄식하며 말하기를, “모든 궁인(宮人)들이 국정을 어지럽게 하니, 나는 그 잘못을 본받을 수 없다.” 하였다. 일찍이 내수사(內需司)에게 간절히 경계하기를, “만일 본궁(本宮)의 사내종이 횡포하면 반드시 먼저 때려 죽이라.” 하니, 이로 인하여 본궁의 사내종들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소문쇄록》
○ 등명사 학조(燈明師學祖)가 직지사(直旨寺)에 있을 때, 절에 좋은 둥근 감[圓柹]이 있어서 항상 두 바리[駄]를 내전(內殿)에 진상하였는데, 비밀리 아뢰기를, “우리 절이 서울에서 멀고 궁벽하니, 원하건대 본궁의 사내종을 시켜서 해마다 와서 두세 바리씩 실어 올리게 하소서.” 하니, 왕비가 말을 내리기를, “이는 매우 쉬운 일이지만, 다만 염려되는 것은 나무의 실과는 혹 여는 해도 있고, 혹 열지 않는 해도 있는데, 만약 열지 않는 해에 궁노(宮奴)가 가서 거두어서 정한 수량대로 바리에 실으면, 오래도록 무궁한 폐단이 될 것이다.” 하였으니, 깊이 생각함이 이와 같았다. 그 친척이 외군(外郡) 수령으로 있으면서 홍람(紅藍) 두어 곡(斛)과 목화 수십 근을 올리니, 왕비가 물리치며 이르기를, “백성들의 생활이 굶주림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 이 물건이 어디서 나왔는고. 나는 차마 받아두지 못하겠다.” 하였다. 《소문쇄록》
○ 《순자(荀子)》〈왕제편(王制篇)〉의 ‘수채청이도로(修採淸易道路)’를 주해에, .“채(採)는 그 더러움을 취해 버림을 뜻하고, 청(淸)은 청결하게 함을 뜻한다. 모두 도로의 더러움을 없애는 것이다.” 하였다. 연산군은 대신을 여러 도에 보내서 사족(士族)의 처녀들을 모두 징발하고 채청사(採淸使)라 하였는데, 돌아오기도 전에 반정(反正)이 되어 그 더러움을 없앴으니 이상하다. 《소문쇄록》
○ 연산군이 평소에 한 행위가 한없이 잔인하고 패려하여 형벌과 죽음을 당해도 거리낌이 없을 줄로 생각하였는데, 옮겨져 나갈 때에 두려움이 특히 심하였고, 자기가 받을 형벌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청하였다. 이날 큰 바람이 불어서 배가 거의 전복될 뻔하였는데, 간신히 교동(喬桐)에 도달하여 현정(縣庭)으로 옹위해 들어가 장졸들이 둘러서니, 연산군은 구부리고 엎드려서 땀을 흘리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으니 어찌 그다지도 부끄러웠을까. 그가 궁에서 나올 때 신비(愼妃)가,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였는데, 교동에 와서 편히 정돈하고 다른 일이 없으니, 신비가 탄식하기를, “그때 여러 장수에게 청하여 천소(遷所)로 따라가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하였다. 《소문쇄록》
○ 연산군이 일찍이 절구(絶句)를 짓기를,
여러 어진 이들 화정에서 잔치 베풀고 / 時許群賢宴畫亭
한가롭게 꽃과 술에 태평을 노래하네 / 閑憑花酒覺昇平
은혜가 두터운 것만 기뻐할 것인가 / 何徒爭喜鴻私厚
모두 다 충성 바칠 것을 생각하여라 / 咸欲思忠獻以誠
하고, 또
어진 이들 은대에 모아 두고 / 重賢寬許會銀臺
봄빛 가득찬 긴 길에서 꽃 피기를 재촉하네 / 春滿長途叱撥催
한가로운 달밤에 취하는 것만 사랑할 것인가 / 不啻醉憐閑夜月
노래 피리 짝하여 다시 놀리라 / 歸牽歌管可重回
하였다. 적암(適庵) 조신(曺伸)이 훗날 차운하기를,
남의 집 헐어내어 모두 다 정자로 삼고 / 撤人廬舍摠爲亭
예쁜 여인들을 뽑아다가 운평을 만들었네 / 採却靑紅作運平
원훈을 다 목 베이고 간보를 무찔러서 / 誅盡元勳屠諫輔
천관들만 남겨 두고 충성을 표창했네 / 只留皂冒表忠誠
만인을 다 죽여서 서총대 쌓아 놓고 / 萬人駢死築蔥臺
아상복 춤 그치자 비단 하사하기를 재촉했네 / 舞罷迓祥賜錦催
부끄럽도다, 죽은 동생 뼈 찾으려고 / 忸怩欲尋諸弟骨
바다 위에 잠시 배회하였네 / 却於海上暫徘徊
하였다. 《패관잡기》
○ 홍치 무오년 7월 17일에 전지하기를, “김종직(金宗直)은 초야에 있는 천한 선비로서 세조조에 급제하여 성종조에 경연(經筵)에서 등용되어 오랫동안 시종의 지위에 있었고, 형조 판서가 되어 은총이 조정을 기울였으며, 그가 병으로 물러가게 되어서는 성종께서 오히려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특별히 쌀과 곡식을 주어서 남은 생을 마치게 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 제자 김일손이 수찬한 사초(史草)에, 무도한 말로 선왕조(先王朝)의 일을 속여서 기록하였으며, 또 그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정축년 10월 모일에 내가 밀성(密城)으로부터 경산(京山)을 지나 답계역(踏溪驛)에서 잤는데, 꿈에 귀신이 칠장복(七章服)을 헤치며 점잖게 와서 스스로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 패왕(西楚覇王)에게서 죽음을 당하여 침강(郴江)에 잠겨 있다고 말하고는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꿈을 깨고 놀라서 말하기를, 「회왕은 남쪽 초 나라 사람이오, 나는 동이(東夷)의 사람이다. 서로 떨어진 거리가 만여 리나 될 뿐만 아니라, 시대의 차이가 역시 천여 년인데, 꿈에 와서 감응하는 것은 이 무슨 조짐인가. 또 역사를 상고하면 강에 던졌다는 말이 없는데 항우(項羽)가 사람을 시켜 비밀히 쳐서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인가. 이것을 알 수 없다.」하고, 드디어 글을 지어 조문하기를,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내어 사람에게 줌이여, 누가 그 사대(四大 인ㆍ의ㆍ예ㆍ지)와 오상(五常 오륜)을 높일 줄 모르랴. 중화라고 많고, 이적이라고 적은 것이 아니니 어찌 옛날에는 있고 지금은 없으랴. 그러므로 나는 동이(東夷)인이오, 또 천 년 뒤 사람이지만, 삼가 초 나라 회왕을 조상하노라. 옛 조룡(祖龍 진시황)이 위세를 떨치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출렁거렸도다. 전어ㆍ상어ㆍ미꾸라지ㆍ고래도 어찌 보전하랴, 그물에서 빠져나기에 급급하였네. 육국(六國)의 후예들이여, 숨고 달아나서 겨우 일반 백성이 되었도다. 항량(項梁)은 남국(南國)의 장수 집안으로써 어호(魚狐)의 뒤를 이어서 일을 일으켰도다. 왕을 찾아서 백성의 소망을 따름이여, 웅역(熊繹 초 나라 시조)을 불사(不祀)에 두었도다. 건부(乾符)를 잡고 왕위에 올랐으니, 천하에서 우씨(芋氏 초나라 성)보다 높은 이가 없도다. 장자(長者 패공(沛公)을 가리킴)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게 했으니 그 인의(仁義)를 알겠도다. 승냥이와 이리처럼 사납고 탐하여 경자관군(卿子冠軍)을 죽였으니, 어찌 항우를 거두어 처치하지 않았는고. 아, 형세가 그렇지 못하였으니, 나는 왕을 위해 두려웠노라. 도리어 해침을 받아 젓으로 담겨졌으니, 과연 천운(天運)이 어그러졌도다. 침현(郴縣)의 산이 높아 하늘에 닿았음이여, 햇볕이 희미하여 어두워지도다. 밤낮으로 흐르는 침강의 물이여, 물결이 거칠게 일며 돌아오지 않는도다. 장구한 천지같은 그 원한 어찌 다하리. 영혼은 지금까지 떠돌고 있도다. 내 마음이 금석(金石)을 꿰뚫으니 왕의 영혼이 꿈속에 나타났도다. 자양(紫陽 주자의 사필(史筆)을 따르려 함이여, 생각이 설레고 걱정되노라. 잔을 들어 땅에 강신하노니.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향할지어다.」하였다. 그 말에 ‘조룡이 위세를 떨친다.’ 한 것은, 조룡은 진시황인데 김종직이 시황을 세조에게 비유한 것이오, ‘왕을 찾아서 백성의 소망을 따름이여.’ 한 것은, 왕은 초 회왕의 손자 심(心)으로 처음 항량이 진(秦) 나라를 무찌르려고 손자 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로 삼았는데, 김종직이 의제를 노산(魯山 단종)에게 비유한 것이다. ‘승냥이와 이리같이 사납고 탐하여 마음대로 경자관군을 죽였다.’ 한 것은, 김종직이 승냥이와 이리같이 사납고 탐하는 것에 세조를 비유함이오, 경자관군을 마음대로 죽였다는 것은 세조가 김종서를 죽인 것을 가리킨 것이다. ‘어찌 거두어서 처치하지 않았는고.’ 한 것은, 김종직과 노산이 세조를 죽이지 않고 도리어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오, ‘자양의 사필(史筆)을 따르려 함이여, 생각이 설레고 걱정되노라.’ 한 것은 김종직이 주자로 자처하고 그 마음으로 이 부를 지어 강목(綱目)의 사필에 비긴 것이다 김일손은 그 글을 찬하기를, ‘충성과 비분한 마음을 붙였다.’ 하였다. 생각하건대, 우리 세조대왕은 국가가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때를 당하여 간신이 난(亂)을 도모하여 화란을 일으키려 하자, 역적들을 죽여 없애어 종묘사직이 위태하였다가 다시 편안하고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공업(功業)이 높고 높아 덕이 여러 왕중에서 으뜸이었다. 뜻밖에 김종직이 문도와 더불어 성덕(聖德)을 기롱하고, 김일손으로 하여금 사초에 속여서 쓰게 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하루아침에 된 일이랴. 반드시 몰래 임금에게 신하의 도리를 생각하지 않는 마음을 품고 세 조정을 섬긴 것이다. 나는 지금 생각하니 놀라고 두려움을 깨닫지 못하겠다. 그 죄명을 의논해 아뢰어라.” 하였다.
7월 27일에 난역(亂逆)으로 사형에 처하고 종묘에 고하였으니, 그 글의 대략에, “간신이 몰래 역모하려는 마음을 품고 옛일에 가탁(假托)하여 문자(文字)에 전파하였음을 어찌 뜻하였으리오. 여러 간흉들이 편들고 붙어서 성덕(聖德)을 속이어 비방하였으니, 난역무도하여 죄악이 크고 극진하옵니다.” 하였고, 사직에 고한 글의 대략에는, “속이는 말을 꾸며서 성덕을 비난하고 헐뜯었으니 죄가 부도(不道)에 해당하므로 대벽(大辟 사형)에 처함이 마땅합니다.” 하였고, 반사(頒赦)하는 교서에 이르기를,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세조 장헌대왕은 신무(神武)한 자질로써 나라가 위태롭고 간흉들이 자리 잡고 있을 때를 당하여 침착한 기밀과 슬기로운 용단으로 화란(禍亂)을 평정하여 천명(天命)과 인심이 스스로 붙어 있었으니, 성덕(聖德)과 신공(神功)이 여려 왕중에서 우뚝하게 높아서, 조종(祖宗)의 어렵고 크나큰 공업을 더욱 빛내었고, 자손에게 안락한 계책을 주어서, 계승하여 지금의 아름다움에 이르렀는데, 뜻밖에 간신 김종직이 화심(禍心)을 품고 몰래 당류를 얽어서 흉측한 꾀를 베풀려고 한 것은 오래되었다. 항적(項籍)이 의제(義帝)를 죽인 일을 가탁하여 문자로 표현하여 선왕(先王)을 꾸짖고 헐뜯었으니, 하늘에 넘치는 죄악은 용서할 수 없어 대역(大逆)으로 논죄하고 부관참시하며, 그 무리인 김일손ㆍ권오복(權五福)ㆍ권경유(權景裕) 등은 간악한 자를 편들고 무리지어 같은 소리로 서로 이끌어 그 글을 칭찬하여 충성과 비분한 마음에 격동된 바라고 하여 사초(史草)에 써서 오래도록 전하려고 하였으니, 그 죄가 김종직과 같으므로 함께 능지처참하게 하였다. 김일손은 또 이목(李穆)ㆍ허반(許磐)ㆍ강겸(姜謙) 등과 더불어 선왕에게 없는 일을 서로 전해서 고하여 사초에 기록하였으니, 이목ㆍ허반은 함께 참수형에 처하고 강겸은 형장(刑杖) 1백을 치고 가산을 적몰하여 먼 변방에 종으로 삼고, 표연말(表沿沫)ㆍ홍한(洪翰)ㆍ정여창(鄭汝昌)ㆍ무풍 부정(茂豐副正) 이총(李摠) 등은 난언죄(亂言罪)로 다스리며, 강경서(姜景叙)ㆍ이수공(李守恭)ㆍ정희량(鄭希良)ㆍ정승조(鄭承祖)는 난언을 알면서도 고하지 아니하였으니, 함께 형장 1백과 3천 리에 유형을 하고, 이종준(李宗準)ㆍ최부(崔溥)ㆍ이원(李黿)ㆍ이주(李冑)ㆍ김광필(金宏弼)ㆍ박한주(朴漢柱)ㆍ임희재(任熙載)ㆍ강백진(康伯珍)ㆍ이계맹(李繼孟)ㆍ강혼(姜渾)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로써 붕당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며, 때로는 국정(國政)을 기롱하기도 하고 시사를 비방하기도 하였으니, 임희재는 형장 1백을 쳐서 3천 리 유형에 처하고, 이주는 형장 1백을 쳐서 먼 변방에 부처(付處)하며, 이종준ㆍ최부ㆍ이원ㆍ김굉필ㆍ박한주ㆍ강백진ㆍ이계명ㆍ강혼 등은 모두 형장 80을 쳐서 먼 지방에 부처하되, 유형된 사람들은 모두 봉수정노간(烽燧庭爐干)의 역군으로 정하며, 수사관(修史官)은 김일손 등의 사초(史草)를 보고도 곧 아뢰지 않았으니, 어세겸(魚世謙)ㆍ이극돈(李克墩)ㆍ유간(柳澗)ㆍ윤효손(尹孝孫) 등은 파직하고, 홍귀달(洪貴達)ㆍ조익정(趙益貞)ㆍ허침(許琛) 등은 좌천시키고, 그 죄의 경중에 따라서 모두 이임 처결하여 삼가 이 사유를 종묘사직에 고하였다. 생각해 보면 보잘것 없는 내가 간당(奸黨)을 없애니, 떨리고 두려운 생각이 이미 깊으나 기쁘고 다행한 마음도 역시 간절하다. 지금 7월 27일 새벽 이전의 강도ㆍ절도 및 강상(綱常)에 관계된 일 외에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결정되지 않은 것이나 모두 용서하고, 전지가 있기 전의 일을 서로 고하고 말하는 자는, 죄를 줄 것이다. 아, 인신(人臣)은 거역하려는 마음이 없도다. 이미 무도한 죄는 굴복하고, 우레와 비가 해괘(解卦)를 지으니 마땅히 유신(維新)의 은혜에 젖을 것이다. 이에 교시하니 마땅히 잘 알 것으로 생각한다.” 하였다. 좌의정 한치형(韓致亨) 등이 하례하는 전(箋)을 올렸다. 그 대략에,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역적의 무리가 감히 반역의 마음을 품어 요망한 말에 가탁하고, 역모의 마음으로 방종하여 문서로써 전파하고 큰 죄를 자초하였으니, 대소 신민(大小臣民)이 함께 분노하고 모두 원수로 여기고 있습니다. 천지가 용납하기 어려우니 하늘의 벰을 어찌 면할 수 있으며, 우레가 벌써 울리니 음흉하고 간사함이 즉시 사라졌습니다.” 하였다. 〈이세영 자기(李世英自記)〉
○ 유자광은 부윤 윤규(尹規)의 서얼이다. 빨리 달리고 힘이 세었으며, 높은 곳을 잘 올라서 원숭이같았다. 어려서 무뢰배가 되어 노름으로 재물을 다투었으며, 밤과 새벽에는 길에 떠돌아다니며 놀다가 여자를 만나면 끌어다가 음행을 하였다. 윤규는 태생이 미천하고 이처럼 방종하고 패악하므로, 여러번 매질을 하고 자식이라 하지도 않았다. 처음에 갑사(甲士)에 속해서 건춘문(建春文)에 숙직하였는데, 글을 올려 스스로 천거하므로 세조가 그 사람됨을 장하게 여겨서 뽑아 썼다. 또 무자년에 고변(告變)한 공으로 훈(勳)을 받아서 계급이 1품 뛰어올랐다. 항상 호걸스런 선비라고 자칭하며, 성품이 음흉하여 남을 해치기를 좋아하여, 재능과 명예와 은총이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얽어 모함하려고 하였다. 한명회(韓明澮)의 집안이 귀하고 성대한 것을 시기하고, 또 성종이 바야흐로 간언하는 말을 받아들이기를 좋아함을 보고, 기묘한 논의로 임금이 좋아하는 바에 맞추려고 한명회가 발호할 뜻이 있다고 상소하였으나 임금이 죄를 주지 않았다. 뒤에 임사홍(任士洪)ㆍ박효원(朴孝元) 등과 더불어 현석규(玄碩圭)를 배척하려고 하다가 계책이 실패하여 동래(東萊)로 유형되었다가 곧 돌아왔다. 그러나 임금은 정치를 어지럽게 할 사람임을 알고 훈봉(勳封)만 회복시켰을 뿐이고, 일을 수행하는 직임은 주지 않았다. 유자광은 은택을 은근히 바라고 있는 계책을 다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항상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때 이극돈(李克墩) 형제가 조정에서 권세를 잡은 것을 보고 자신의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알고 문득 몸을 기울여 붙여서 깊이 서로 결탁하였다. 유자광이 일찍이 함양군(咸陽郡)에서 놀며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판에 새겨 벽에 걸었는데, 김종직이 이 고을 군수로 와서 말하기를, “어떤 인물이기에 자광(子光)이 여기에 감히 현판을 했느냐.” 하고, 곧 떼어서 불태우라고 하였다. 유자광은 분하여 이를 갈았으나 김종직의 은총과 예우가 바야흐로 높으므로 도리어 스스로 사귀기를 청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 만사(挽詞)를 지어 울며 왕통(王通)ㆍ한유(韓愈)에게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김일손(金馹孫)이 일찍이 김종직에게서 수업을 받았는데 헌납(献納)이 되자, 극언하기를 좋아하여 권귀(權貴)를 꺼리지 않고, 또 상소하여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서로 모해하여 곧 당쟁을 이루리라고 하여 이극돈이 크게 노하였다. 사국(史局)을 개설하게 되어 이극돈이 당상이 되었는데, 김일손의 사초에 자신의 악함을 매우 자세하게 쓴 것과, 또 세조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이극돈은 이로 인하여 자기의 원한을 갚으려 하였다. 하루는 사람을 물리치고 총재관(總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말하기를, “김일손이 선왕을 속여 헐뜯었는데, 신하로써 이런 일을 보고 임금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옳은가. 나의 생각으로는 그 사초를 봉(封)해서 아뢰고 위의 처분만 따른다면 우리들에게는 걱정이 없을 것같소.” 하니, 세겸은 놀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오래 후에 유자광에게 모의하니, 자광은 팔을 휘두르며 말하기를, “어찌 더디게 의심할 일이오.” 하고, 곧 노사신(盧思愼)ㆍ윤필상(尹弼商)ㆍ한치형(韓致亨) 등을 찾아 보고 먼저 세조에게서 은혜를 받아 잊을 수 없다는 뜻을 펴서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한 뒤에, 그 일을 말하였다. 대개 노사신과 윤필상은 세조의 총애받은 신하였으며, 한치형은 왕궁에 연친(連親 혼인으로 친족이 되는 것)이 있으므로 반드시 자기 말을 따를 것임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말한 것이다. 세 사람이 과연 모두 그 말을 따라서 함께 차비문(差備門)으로 나아가서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을 불러 귀를 대어 오랫 동안 말하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처음 신수근이 승지가 될 때 대간과 시종들이 외척(外戚)의 권세를 얻을 길을 열어주는 일이라고 하여 불가하다고 힘써 간하므로 수근은 원망을 품었고,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조정은 문신(文臣)의 손바닥 속에 있는 물건이니 우리들은 무엇을 하리오.” 한 일이 있었다. 이때에 모든 원망이 한곳으로 모이고 왕도 시기하고 포학하여 학문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더욱 문사들이 미워서 말하기를, “명예를 요구하고 윗사람을 업신여기니 내가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모두 이 무리들 때문이다.” 하고, 항상 마음이 답답하고 즐겁지 못하여 한번 쾌하게 위력을 베풀고 싶었으나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 그런데 유자광 등이 아뢰는 것을 듣고는 나라에 충성한다고 칭찬하고 특별히 후하게 대접하였다. 남빈청(南賓廳)에 국문해 가두라고 명하고 내수(內豎) 김자원(金子猿)으로 하여금 명령 출납을 맡게 하고, 다른 사람은 참여할 수 없게 했다. 유자광은 옥사(獄事)를 자신이 맡고, 이름이 매양 김자원에게 전교할 때는 반드시 그 앞에 나아가 공손한 태도를 극진히 하고, 그 전교가 만약 엄하고 각박하면 스스로 임금의 뜻을 얻었다고 하고 다시 더욱 엎드려 거듭 사례하려는 것처럼 하고 듣기를 마치었고, 물러가서는 기뻐하며 득의한 기색을 띠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크게 말하기를, “오늘은 이 조정을 새로 배치할 때이니, 모름지기 이와 같은 큰 처치가 있어야 할 것이고, 예사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들의 당류가 아주 성하여 변고를 측향할 수 없으니, 마땅히 엄밀히 방비해야 합니다.” 하고, 금위병(禁衛兵)을 뽑아서 궁문(宮門) 안을 막아 파수하여 출입을 엄하게 하고, 갇혀있는 사람들이 국문에 나아갈 때에도 군사들로 하여금 좌우에서 거느리며 가게 하고, 옥에 내릴 때에도 이렇게 하면서도 유자광은 오히려 옥사 다스리는 일이 점점 해이해져서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일을 꾸며내기를 도모하였다. 어느날 소매 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냈는데 바로 김종직의 문집이었다. 그 중에서 〈조의제문〉과 술주시(述酒詩)를 따서 추관(推官)에게 두루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모두 세조를 가리켜서 지은 것이니, 김일손의 악한 짓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이룬 것이다.” 하며, 스스로 주석(註釋)을 달고 글귀를 해석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고, 곧 아뢰기를, “김종직이 우리 세조대왕을 꾸짖고 헐뜯었으니 마땅히 대역무도로 논죄해야 하며, 그가 지은 글은 세상에 전하게 해서는 안 되니, 태우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좇아서 김종직의 시문(詩文)을 간직한 사람은 2일 안으로 각각 자진해서 바치게 하여 빈청(賓廳) 앞뜰에서 불살랐다. 그가 여러 도(道)의 관사(官舍)에 글을 써서 둔 현판은 그곳의 수령들로 하여금 걷어 없애게 하였다. 성종이 일직이 김종직에게 명하여 〈환취정기(環翠亭記)〉를 지어서 문 위에 걸어두었는데, 이것도 없애기로 정하였으니 함양(咸陽) 현판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함이었다. 유자광은 임금의 노염을 타서 일망타진할 계책으로 윤필상에게 눈짓해 말하기를, “이들의 죄악은 무릇 신하된 이에게는 불공대천의 원수이니, 마땅히 그 당류를 끝까지 추궁하여 아주 없애 버려야만 조정이 밝고 깨끗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남은 무리들이 다시 일어나서 오래지 않아서 화란(禍亂)이 일어날 것이다.” 하니 좌우가 말이 없었다. 노사신이 손을 내저으며 말리기를, “무령(武靈 유자광의 봉호(封號))은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당고(黨錮)의 일을 듣지 않았는가. 금고(禁錮)를 날마다 엄하게 하여 사류(士類)들로 하여금 자취를 용납할 수 없게 하여 한(漢) 나라가 따라서 망하였으니, 맑은 의논이 마땅히 조정에 있어야 한다. 맑은 논의가 없어지는 것은 나라의 복이 아닌데 무령은 어찌하여 말을 그릇되게 하는가.” 하여 유자광의 기세가 조금 줄었다. 그러나 옥사에 연좌되어 체포된 사람을 반드시 끝까지 치죄하려 하므로 노사신이 또 말리기를. “당초에 우리들이 아뢴 바는 사초에 관한 일인데, 가지와 잎사귀가 뻗어 나가듯 사초의 일에 관계되지 않은 자를 가두고 결박한 것이 날마다 많으니, 어찌 우리들의 본래 의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유자광이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죄를 정하는 날이 되어 노사신의 논의만 홀로 같지 않으므로 유자광이 성을 내어 힐난하고 각각 그 뜻을 아뢰었는데, 임금이 유자광 등의 논의를 따랐다. 이날 낮이 어둡고 비가 물 쏟아지듯 내리고, 큰 바람이 동남에서 일어나서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가니 성안의 사람들은 쓰러지며 다리를 떨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유자광은 의기양양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위엄이 안팎에 행하여 조정에서 독사같이 보고 감히 그 뜻을 거스르지 못하였으며, 유림(儒林)은 기운을 잃고 겁을 내어 글방[學舍]이 쓸쓸하게 되어 몇 달 동안 글 읽는 소리가 없었다. 부형들은 서로 경계하기를, “학문은 과거에 응시할 만하면 그만 둘 것이다. 무엇하러 많이 하느냐.” 하였다. 유자광은 바야흐로 스스로 계책을 성취했다고 하여, 다시 돌아보고 기탄하는 바가 없었으며 이익을 좋아하는 염치없는 무리들이 달라붙어서 문에 가득 찼었다. 식자들이 그윽히 탄식하기를, “무술년의 옥사는 올바른 무리가 간사한 무리를 쳤었는데, 무오년의 옥사는 간사한 무리가 올바른 무리를 쳤으니, 20년 사이에 한번은 이기고 한번은 패하여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짐이 서로 따랐다. 대개 군자가 형벌을 쓰는 것은 너그러운 데에 지나치고, 소인이 원수를 갚은 것은 반드시 죽여 없애야만 그치는 것이다. 만약 무술년에 군자들이 그 형벌을 다 썼더라면 어찌 오늘의 화가 있었으랴.” 하였다. 남곤의 〈유자광전〉
○ 이목(李穆)은 태학(太學)에 있으면서 윤필상을 지목하여 간귀(奸鬼)라고 상소하여 논박하였고, 조순(趙舜)은 정언(正言)이 되어서 역시 일찍이 노사신을 논박하였다.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 윤공과 노공이 다 정승으로 있었는데, 윤필상은 이목이 일찍이 점필재의 문하에 수업한 일을 무고(誣告)해 죽이고, 또 노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순도 죽어야 한다.” 하니, 노사신이 말하기를, “그 무슨 말이오.” 하고 끝내 듣지 않았다. 〈병진정사록〉
정붕(鄭鵬) 선생의 자는 운정(雲程)으로 영남 사람인데, 모습이 매우 커서 신장(身長)이 8척이었다.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마침내 정묘(精妙)한 경지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논어》와 같은 책은 내가 이적(夷狄)을 가르쳐도 능히 대의(大義)를 알게 하겠다.” 하였다. 연산조 때 처음 조정에 벼슬하였는데, 하루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문묘의 위판(位板)을 절로 옮기는 꿈을 꾸었다.” 하더니, 연산군이 음탕하고 난잡하여 성균관을 놀이판으로 만들고, 위판을 걷어 옮겨서 높은 산의 암자 속에 두었다가 다시 태평관(太平館)으로 옮기고, 또 장례원(掌禮院)으로 옮기는 등 그 차례가 없어 향화(香火 제사)가 끊어지자 신과 사람의 분노가 극에 달하였다. 그때 강혼(姜渾)과 심순문(沈順門)이 사인(舍人)이 되어 모두 사랑하는 기생이 있었는데, 선생이 두 공에게 경계하기를, “빨리 멀리해서 후회가 없게 하라.” 하였더니, 강혼은 버리고 심순문은 듣지 않았다. 그뒤에 두 기생이 궁중에 뽑혀 들어가서 지극히 총애를 받았는데, 심순문이 마침내 비법(非法)으로 죽으니,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문묘가 훼손될 것을 안 것은, 스스로 예측한 것인데 꿈으로 가탁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였다. 《병진정사록》


 

[주D-001]강관(絳灌) : 한 고조의 신하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영음후(穎陰侯) 관영(灌嬰).
[주D-002]삼팽(三彭) : 삼시신(三尸神)으로, 도교에서 사람의 몸안에 있으면서 수명ㆍ욕망ㆍ질병을 좌우하는 세 마리 벌레. 경신일(庚申日) 밤에 잠을 자면 하늘로 올라가 하느님에게 그 사람의 잘못을 고한다고 한다.
[주D-003]당고(黨錮)의 일 : 후한(後漢) 환제(桓帝) 때 환관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이응(李膺) 등이 그 무리를 공격했다가 도리어 파벌을 지어 조정을 비방한다는 무고를 당하여 종신 금고에 처해지고, 영제(靈帝) 때 다시 기용된 이응 등이 환관을 몰아내려다가 실패하여 이응 등 수백 인이 피살ㆍ처형되거나 유배되고 수감된 사건.

 

 

 

 

 

 

 

 

 

 

 

 

 

 

 

 

 

 

 

 

 

 

 

 

 

 

 

 

 

 

 

 

[주D-009]이집(李㙫) : 자는 노천(老泉). 호는 취촌(醉村), 본관은 덕수(德水). 숙종 정축년에 문과에 오르고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장숙(莊肅).

 

樊巖先生集卷之四十二
諡狀
贈左贊成行正憲大夫工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捴府都捴管李公諡狀 a_236_267a


濟恭讀常伯李公狀。未嘗不感歎於君臣際會之盛。又未嘗不欽服於我先王一政一令罔非孝思所236_267b推也。盖當英宗戊寅。上患銓部之以私不以公。躬行振淹滯政。親閱搢紳案。至公名敎曰。是合置淸選者。何至今淹屈。筵臣對曰。年已高。難保其在世也。翰林柳敍五曰。臣知其尙無恙也。於是特除司憲府掌令。趣令乘馹來。時。公淪落仁川庄舍已三十有餘年。聞命感泣。入城祇肅。上特召見諭之曰。爾豈非予同庚耶。爾以十八登第。先朝大奇之。點記注末擬。時予每見爾登筵狀矣。今予年六十五。爾亦六十五。追念舊事。安得不愴然。公拜稽首泣以退。翌日。特除同副承旨。序陞至左承旨。間拜兵曹參知。庚辰。以236_267c承旨隨駕至耆社。特加嘉善階。自是屢拜漢城府右尹,同義禁,兵曹參判。或再焉。或三焉。甲申。特加資憲階。拜知中樞府事。入耆老所。拜工曹判書。乙酉。以先朝舊臣。特加正憲階。自掌令至八座。所踐歷皆特除也。丁亥。爲都捴管。十一月四日。以微感卒。享年七十四。上慟惜殊甚。親製文遣禮官以祭。又降絲綸。示意深切。別加賵賻。又命議諡。後四年辛卯。上曰。若使李泰和在者。今年是回榜宴也。追念之不已。特用公之子光德付初仕。一歲中命陞六品職。仍除縣令。俾將母以養。後又命贈公左贊成。兼大提學。盖追236_267d賞公臨危切諫也。嗚呼。君臣之間。生死異數。古豈無也。而若英廟之於公。義君臣而恩父子者。載籍所罕覯也。然此非特英廟之知臣之明而然也。實感念先朝事耳。詩曰。永言孝思。昭哉嗣服。此雖一事。若使詩人詠歌英廟之孝。不亦曰永言矣乎。公諱泰和。字東章。自號丹庵。以肅宗二十一年甲戌正月十八日生。自幼聰穎絶人。始學書。一過目輒誦。年十二三。文辭夙就。十四。戲入東堂試闈呈券。遂發解。己丑。始治經。辛卯。赴會闈大闡。計治經月日。劣三年也。時參判公持平公兩世俱在堂。用放榜日。行前夫236_268a人洪氏見舅姑禮。吉慶盛事。一世驚動焉。選槐院。由正字陞博士。甲午。丁持平公憂。服闋。陞典籍移禮曹佐郞。戊戌。除大同察訪。瓜而遞。壬寅。除工曹佐郞。出爲沃溝縣監時。以參判公重牢禮。朝議特畀之也。癸卯。丁贈判書公憂。乙巳。以前任沃溝事。遭臺嘖謫渭原。實無根語也。丁未。蒙宥還仁川墓舍。辛亥。遭朴夫人艱。丁卯。遭本生權夫人艱。公平居事父母克孝。或有不安節。夜不交睫。禱以身代。朴夫人性畏雷。雷作。雖夜深必整冠入。左扶右將。至雷止乃已。前後居憂。身不脫縗麻。口不絶哭泣。遘瘧五朔。氣如縷若將朝236_268b夕盡。終不近魚肉。其在仁川。爲母夫人老。躬薪水手畚鍤。晨而出田畒。不暮無歸。人或言無已苦乎。公曰。凡事在乎心而已。心逸則雖勞而不勞。心勞則雖逸而不逸。及永感。飢寒困苦殆無所不至。篋無衣廚無烟。處之怡然。不復迹田疇。人始知前日之稼爲親非營生也。奉先祀務潔不務豐。家人或請以稱貸備羞。輒曰澗蘋沼芷。盡其誠而已。安用是苟簡爲也。友兄弟。酒一酌必分飮。饌一味必共噉。六十年如一日。事孀嫂。移事母以事。事大小。無不和顔稟議。御妻孥寬以濟猛。未見有疾言遽色而外內秩然。敎子姪每曰。236_268c孝悌本也。文藝次也。嚴其繩墨。俾不敢違越。性不喜華飾。子婦新歸。衣錦而見。卽令去之。婦女雖或赴他家宴。不敢近綺纈。常曰。士大夫留心錢糓。其餘不足觀也。又曰。錢至十繈是貨也。偶或得之。此心不寧。又曰。安貧。無如斷嗜欲節飮食。此公之居家言行之槩也。自戊寅以來。天眷隆渥。恩言鄭重。家人禮也。華衮褒也。其初被登對也。進退周旋。咸中儀節。上曰。李泰和之能間朝體。是乃不忘其五十年前堂后事也。不亦奇哉。人不可以京鄕論也。在乎賢否而已。又嘗呼寫傳旨。玉音甚低。公承寫無停筆。上異之曰。耳236_268d聰異乎常。又嘗命講三經首章。講訖。又命陳文義。褒賞甚勤。又嘗以試官侍上。上出揭御眞敎曰。念昔先朝出御眞。命諸臣仰瞻。而伊時入參者。今獨有李泰和一人。又嘗嘉公之顔貌豐潤。精力康旺。敎曰。人雖老。使筋力如此。何憂之有。此居鄕咬菜之效也。前後受帛者二。受饌者屢。奉御製手書四言句者再。公感激際遭。其在銀臺也。祁寒暑雨。未嘗言病。人後我先。未嘗爲勞。其在京兆也。剔姦於粧僞。必罰於怙勢。案無滯簿。訟無稱冤。有奸民始以非理斥。過五六朔隙。牒訴雲擾。換名更呈。公卽題之曰。此事某月日已236_269a判矣。仍杖其人。府吏服其明。郞僚咸稱之曰。聰明固不可及。公無私。尤罕見也。相臣李公亟稱於上前。至以爲恪謹牢確一心秉公。其在金吾也。命持獄案以入。而判堂猝有故。公以次堂替入。實未及詳閱。而考覈平反。咸得其當。筵臣莫不稱焉。騎曹之直也。則以書進軍號當上心。賜鹿皮以寵之。水部之判也。則五日一坐。國典也。前此。判堂以曹本閒局。鮮有行者。至坐單上徹。例以坐書塡而已。公計五日趣赴坐如法。雖風雨寒暑。三年不一闕。郞僚曹屬厭苦甚。人或爲之言。公曰。事雖小。其可以欺君乎。其他貢房236_269b之詳定。曹吏之遞代。換房立新䂓。畫一以行。以塞潛賂暗囑之徑。曹中莫不頌其便。參判李公吉輔亦稱歎之。子弟赴擧。曹吏有以能書名者。禁不敢帶入。雖曳白不恤焉。平日酒戶甚寬。及當官莅事。一盃卽止。唇不更沾。此公之居官事行之略也。公始雖以明經進。聰明旣富。重以勤篤。自釋褐來。卷未嘗離手。嘗督大同郵。觀察使李公肇以公年少講經科。頗易之。値進箋。以文屬之公。盖試之也。公立製以送。觀察使驚歎曰。吾輩赶不及。遂藏弆。其所自構。趣以公製寫焉。嘗大會蓮堂。拈韻賦律詩。公先唱之。觀察使歎曰。不236_269c但文藻富麗。尤著遠大氣像。遂閣筆。及其流落于仁也。講讀尤不輟。晨必起盥櫛整衣冠。展卷莊讀。遇有蘊奧處。輒合眼默誦。誦到三四遍。細繹而後乃止。時。或朝食不盈膓。終晝兼夜。讀聲猶自如。傍人悶之。公曰。飢時讀味。一倍深長。精神所及。尤覺淸新。始知喫緊工夫正在窮苦時矣。諸子百家。無所不覽。㝡所用力者。羲易魯論曾傳等書也。晩年爲肄習子弟地。口號功令文。凡大小科各體殆至千餘篇。然未嘗以詞翰自居。執謙殊甚。此在公雖曰䟽節。其窮居安命讀書稽古。有以基他日聖主之擧而用之者。其不在236_269d斯歟。李本慶州著姓。國朝左議政靖順公誠中。於公爲十一代祖。議政府舍人瑛。爲六代祖也。高祖諱蔓直長。曾祖諱齊漢縣監。祖諱禎參判。考諱夢呂成均生員贈判書。妣咸陽朴氏。進士慶遠之女。贈貞夫人皆以公貴也。本生考諱夢曅。司憲府持平。妣安東權氏。佐郞㻐之女。贈判書公。於公爲季父而無子。以公子之也。元配贈貞敬夫人豐山洪氏。承旨贈判書萬紀之女。繼配貞敬夫人南原尹氏。進士學海之女。洪夫人擧一男曰尊德。與公並時歿。尹夫人擧一男。縣令光德是也。縣令有二子。曰鋐曰鏗。濟恭嘗236_270a與公忝僚銀臺。敬以同周旋爲數年矣。啓狀雲委。卿宰棼集。而見公儼然在其座。不妄言笑。惟手閱堂后記注而已。遇事。吏或趨而問。徐以答皆中理。眼光閃爍。操履嚴確。若不可犯。卽之與語。溫溫然和氣可掬。余固覿德以醉。而伊後七八年之間。又見公屢典詞訟。請托不行。廷譽菀然。非英廟之聖。何以用公。非公之才具內蓄用無不適。亦何以晩年起廢致身於卿月之班而人莫敢指議也哉。盛世君臣之際。不可謂非千古奇事。藉手獻太常氏。以請易名之典。


海左先生文集卷之三十六
謚狀
贈左贊成行工曹判書李公謚狀 a_240_147d


丙申二月六日。英宗大王下敎曰。嗟哉。文政殿庭。以侍衛摠管。免冠流涕者。故判書李泰和也。予至今240_148a思焉。其贈秩以表其誠。其子光德。令選部陞叙調用。於是贈公左贊成兩舘大提學。嗚呼。我先王伊日下敎。實有以明天彝正人紀。使亂臣賊子裭魄。豈但爲一介臣之寵耀而已哉。雖然。公之精忠血誠。能感動聖人之心可知也。公諱泰和。字東章。自號丹菴。肅宗二十一年甲戌正月十八日生。辛卯。擢明經第。時年十八。選槐院。由正字。陞博士。甲午。丁持平公憂。服闋。陞典籍。移禮曹佐郞。戊戌。除大同察訪。滿考遞。壬寅。除工曹佐郞。出爲沃溝縣監。翌年。丁贈判書公憂。乙巳。以任沃溝時事。被言者搆誣。240_148b謫渭原。丁未。宥還。杜門仁川之鄕舍。三十有餘年。漠然與世相忘也。戊寅。英宗親視政。閱縉紳案。問知公尙無恙。特除司憲府掌令。趣令乘馹來。旣肅命。上召見諭之曰。爾非予同庚耶。尙記爾十八登第。先王大奇之。特點記注末擬。今子年六十五。爾亦六十五。追念舊事。寧不愴然。翌日。特除同副承旨。序陞左承旨。間拜兵曹參知。庚辰。以承旨隨駕至耆社。特加嘉善階。自是屢拜漢城府右尹,同義禁兵曹參判。甲申。特加資憲階。拜知中樞府事。入耆社。拜工曹判書。乙酉。以先朝舊臣。240_148c特加正憲階。自掌令至八座。皆特除也。丁亥。爲都摠官。十一月四日卒。壽七十有四。上爲震悼。親製文遣禮官以祭。贈賻有加。降絲綸。以眎傷惜之意。又命議謚。公每入侍。動被嘉奬。羣臣莫及也。其初被登對。進退周旋中儀節。上敎曰。李泰和之朝體。乃其五十年前堂后時履歷也。誠奇矣。人固不可以京鄕論。在賢否而已也。甞呼寫傳旨。玉音頗低。而公承寫不停筆。敎曰。其耳聡異常也。嘗命講三經首章。陳文義。褒賞不已也。甞見公顔貌精力豊旺。敎曰。此居鄕咬菜之效也。前後賜帛240_148d賜饌賜御製手書。不一再也。公之受知聖主。自其立朝始。而其晩暮際遇之隆深。旣卒而上心猶眷眷不忘者。盖有摡於文政殿庭事也。其爲喉司甚寒暑。未甞言病。啓狀雲委。卿宰棼集。而公端坐不苟言笑。惟手閱堂后記注而已。遇事則施爲中肯綮。其爲京兆。剔姦僞以明。制彊禦以法。有奸民。伺牒訴雲擾。換名呈五六朔前以非理見斥事。公題之曰。某月日已判此矣。卽杖其人。府吏驚歎。相臣李公於上前。亟穪以爲恪謹牢確。一心秉公。其爲金吾。命持讞案入。而判堂適有故。公替入。實未及詳也。而考240_149a覈平反。咸得當。筵臣莫不聳穪。水部之五日一坐。國典也。他判堂謂閒局。未甞有事。不甚赴坐。至坐單啓上。例以坐書塡。公則五日坐如法。風雨寒暑輒赴。三年如一日。僚屬甚厭苦之。或以爲言。公曰。雖小事。其可以欺君乎。貢房之詳定。曹吏之遞換。立新䂓。畫一以行。以塞賂囑之徑。曹中頌其便。子弟赴試。嚴禁能書曹吏之帶入。雖曳白不恤焉。公之竭誠盡職。報効知遇之恩者如此。公愛親有至性。有不安節。禱以身代。朴夫人嘗畏雷。雷作則趨就夫人側。左右扶將。至雷止乃已。在仁川窶甚。躬稼穡以爲養。日手240_149b畚鍤出野。與耘女耕夫。雜作田畒中。人曰不已勞乎。曰。心逸則勞而逸。心勞則逸而勞。我不爲勞也。辛亥丁卯。連遭朴夫人權夫人艱。前後持喪制甚嚴。甞遘疾五朔。氣息垂絶。而口不近滋味。尤謹祀事。務戒潔。不肯穪貸以辦羞曰。澗蘋沼芷。誠而已。安用苟簡爲哉。其於兄弟。一酒食必分。其事孀嫂。以事母者事之。每事必禀而後行。未甞爲疾言遽色。而壼內外肅然也。訓子姪。先孝悌而後文藝。俾不敢踰越繩墨。不喜芬華。子婦之新歸者衣錦。見卽令去之。婦女之赴讌會者。不敢近綺繡。甞曰。士大夫留心錢糓。其餘無足240_149c觀也。曰。錢至十繦。貨也。設得之。心不寧也。曰。斷嗜慾。節飮食而後。能安貧也。公之篤行淸修。可以移而爲忠者如此。公聡明絶人。於書過目成誦。其治經甫三年决科。著述敏贍。嘗丞大同觀察使李公肇。以進箋文屬公。其意以公年少講經科。實輕之也。及見所製。驚歎曰。吾不及也。遂以公製寫進。甞大集守宰拈韻賦詩。公詩先成。觀察使歎曰。文藻富麗無論。大有遠到氣像。蓋其藝業。得之窮約時者爲多。日閉戶讀書。遇蘊奧處。合眼誦三四過。必融會而後已。或朝夕羞不時繼而兀坐晝夜讀。讀聲琅然。語人曰。飢時讀書。240_149d精神益淸。而意味益深。子史百家。靡不涉獵。而尤深於羲易魯論曾傳書。顧巽不以詞翰自居。公之文學。可以輔而需世者如此。李氏本慶州人。國朝左議政靖順公誠中。於公爲十一世祖。議政府舍人瑛。爲六世祖。高祖諱藑。直長。曾祖諱齊漢。縣監。祖諱禎。參判。考諱夢呂。成均生員贈判書。妣咸陽朴氏。進士慶遠之女。贈貞夫人。皆用公貴。本生考諱夢曅。司憲府持平。妣安東權氏。佐郞㻐之女。贈判書公。於公爲季父而無子。以公爲子。元配贈貞敬夫人豊山洪氏。承旨贈判書萬紀之女。繼配貞敬夫人南240_150a原尹氏。進士學海之女。洪夫人有男尊德。與公並時歿。尹夫人有男。郡守光德是也。郡守有二男。長鋐進士。次鏗。光德以公事行。屬範祖爲狀。範祖念公之羣行多卓卓可紀。而獨所被丙申恩褒。實爲天下後世人臣之勸。故於此特三致意焉。用藉手乞易名之典。

 

동사일기 곤(東槎日記坤)
돈와 부군(遯窩府君)이 일본에 사신갈 때의 신장(贐章) 신묘년(1711, 숙종 37)
신장(贐章) [좌상(左相) 이집 노천(李㙫老泉)]


강가의 방초가 성포에 비치니 / 連江芳草映猩袍
벌써 이별의 시름이 머리 끝에 오른 줄 알겠네 / 已覺離愁上鬢毛
나라 떠난 마음은 대궐의 나는 봉에 달렸고 / 去國心懸翔闕鳳
시 읊는 기백은 산을 떠받는 자라를 누르리 / 吟詩氣壓戴山鼇
넓은 풍도로 임금 은혜 입었구려 / 卽知平步涵恩海
넓은 소견으로 사신길 가네 / 卻遣康莊視險濤
그대의 이번 걸음은 장한 뜻을 이룩하건만 / 此去騁觀酬壯志
언제나 한 군데 매여 있는 우리들이 가엾네 / 一方匏繫奈吾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