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당선생집 제9권 / 서(序)
연촌 최 선생의 집에 전하는 시문록 뒤에 쓴 글[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叙]
옛날 경태(景泰 1449~1456) 연간에 아조(我朝)에 덕이 순일하고 절조(節操)가 드높았던 정학지사(正學之士)가 있었으니, 연촌(煙村) 최 선생이 바로 그분으로서 이름을 덕지(德之)라 하였다.
일찍이 금근(禁近 시종신(侍從臣)을 말함)을 거쳐 주부(州府)의 목민관으로 나갔다가, 이를 또 즐겁게 여기지 아니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영암(靈巖) 영보촌(永保村)으로 돌아가서는, 서루(書樓)를 지어 존양(存養)이라 편액(扁額)을 내건 뒤 거기에서 생을 마칠 것처럼 지내었다.
그러다가 현릉(顯陵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선생에게 소명(召命)을 내리면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이르러 다시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향리로 돌아가자, 조정에 함께 있던 현경(賢卿)과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떠나는 길을 전송하면서 선생의 사적(事跡)을 높이 기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존양루(存養樓)에 제(題)하는 글을 짓기도 하고, 또 선생의 가대인(家大人 부친)인 참의공(參議公 이름은 담(霮)임)이 장수(長壽)를 누리고 훌륭한 자손을 둔 데 대해 일시에 찬송하는 작품도 많이들 내놓았다.
이 모든 시문(詩文)가 필적(筆迹)들을 최씨의 자손들이 대대로 지키면서 그지없이 조심스럽게 보관해 왔는데, 급기야 정유왜란(丁酉倭亂)을 겪는 바람에 존양루가 소실(燒失)되면서 간편(簡編)들도 함께 산일(散逸)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고향 사람들이 선생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서 제사를 올리게 되었고, 선생의 7대손인 전 참봉(參奉) 정(珽)이 또 타고 남은 시문(詩文)을 수습하여, 그나마 90여 수(首) 정도를 찾아낸 뒤 영원히 전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나에게 발문(跋文)을 써 달라고 요청해 왔다.
내가 삼가 살피건대, 선생은 순실(純實)한 행동이 성유(聖諭)에 드러나게 될 정도로 순덕(純德)의 소유자였고, 중년에 봉록(俸祿)을 마다하고 산해(山海)에 자취를 숨겼으니 고절(高節)의 인사라 할 만하며, 존심 양성(存心養性)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를 편액(扁額)으로 내걸어 자신을 깨우쳤으니 정학지사(正學之士)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다 해도 백세(百世)의 사범(師範)이 된다고 할 것인데, 더구나 이를 모두 아울러 지니고 있는 분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한편 생각건대,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은 경태(景泰) 2년인 신미년(1451, 문종 1)의 일이었다. 그런데 4년 뒤인 계유년과 7년 뒤인 병자년에 국가에 변고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진신(縉紳)들이 많이 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이 그야말로 이런 기미를 미리 환하게 알아 몸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될 법도 하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는 선생의 명지(明智)를 더욱 일컫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고찰해 보건대, 현릉(顯陵)이 일찍 빈천(賓天 임금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함)하여 노산(魯山 단종(端宗))이 갑자기 왕위를 내 주게 된 것은 하늘의 운수와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선생의 지혜가 아무리 밝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 될 줄이야 추측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선생은 세묘(世廟 세종(世宗))의 조정에서도 대방(帶方 남원(南原)의 옛 이름임)의 인끈을 풀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또 떠나야만 할 무슨 어려운 일이 발생하기라도 했었던가.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도는 가득 차면 무너뜨리고 겸손하면 더해 준다.[天道 虧盈而益謙]”고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화락한 군자는 신명이 위로해 준다.[愷悌君子 神所勞矣]”고 하였다. 선생의 급류 용퇴(急流勇退)는 그야말로 천도(天道)와 신명(神明)이 도와준 것으로서, 저절로 대란(大亂)에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이니, 어찌 눈치 빠르게 화(禍)의 기미를 살피다가 도망치는 자들과 견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이 시문록(詩文錄)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두루 살펴보건대, 안평(安平)과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의 호임)에 대한 일은 차마 말할 수가 없지만, 가령 하동(河東)이나 고령(高靈) 범옹(泛翁)이나 사가(四佳)같은 제공(諸公)으로 말하면 훈명(勳名)은 비록 성대해도 정절(情節)의 측면에서는 혹 부족한 점이 있고, 성근보(成謹甫 근보는 성삼문의 자(字)임) 등 제인(諸人)으로 말하면 자정(自靖)한 점은 있지만 규족(葵足)처럼 보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니 선생의 맑은 복과 완전한 명성에 비교해 본다면, 어떻다고 해야 하겠는가.
아, 이 문집을 살펴보노라면, 그 시문들을 통해 선생의 심지(心志)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될 뿐만이 아니요, 세태(世態)를 논한 것이나 기인(其人 단종을 가리킴)을 향한 정성이 또한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숭정(崇禎) 병자년 7월 보름에 덕수 후학 이식은 쓰다.
- [주-D001] 4년 뒤인 …… 되었다 :
- 단종(端宗)이 즉위한 계유년(145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부자를 강화에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한 일과, 세조(世祖) 2년인 병자년에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던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을 사형에 처했던 일을 말한다.
- [주-D002] 천도는 …… 더해 준다 :
-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나오는 말이다.
- [주-D003] 화락한 …… 위로해 준다 :
- 대아(大雅) 한록편(旱麓篇)에 나오는 말이다.
- [주-D004] 급류 용퇴(急流勇退) :
- 한창 벼슬이 높아질 때에 물러나 명철 보신(明哲保身)하는 것을 말한다. 송(宋) 나라 전약수(錢若水)에게, 어떤 노승(老僧)이 끝내 신선은 되지 못하겠지만 벼슬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是急流中勇退人”이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聞見前錄 卷7》
- [주-D005] 하동(河東)이나 …… 사가(四佳) :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이면서 호가 범옹인 신숙주(申叔舟), 호가 사가정(四佳亭)인 서거정(徐居正)을 가리킨다.
- [주-D006] 자정(自靖) :
- 각자 의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뜻을 정해서 결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미자(微子)의 “스스로 뜻을 정해서 각자 선왕에게 고하라. 나는 여기를 떠나 숨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 [주-D007] 규족(葵足)처럼 …… 못하였다 :
- 몸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제(齊) 나라 포견(鮑牽)이 난세(亂世)에 처하여 남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고발했다가 발이 끊기는 월형(刖刑)을 당했는데, 이에 대해 공자(孔子)가 “포장자의 지혜는 해바라기보다도 못하구나. 해바라기는 그래도 잎사귀를 가지고 제 다리를 가려서 보호해 주는데.[鮑莊子之知不如葵 葵猶能衛其足]”라고 비평한 고사가 있다. 포장자는 포견을 가리킨다. 《春秋左傳 成公 17年》
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敍
[DCI]ITKC_MO_0326A_0100_010_0230_2003_A088_XML DCI복사昔在景泰間。我朝有淳德高節正學之士。曰煙村崔先生名德之。嘗由禁近。出守州府。又不樂而退歸靈巖永保村。築書樓。扁以存養。若將終身。顯陵卽位。召拜藝文直提學。明年冬。又告老而歸。同朝賢卿名士。賦詠贐行。以高其事。且爲存養樓題識。又先生家大人參議公有壽有後。一時多贊頌之作。凡茲詩文筆迹。崔氏子孫。世守之甚謹。及丁酉倭亂。存養樓燬而簡編隨以散逸。今其鄕人。旣爲先生立祠祀之。先生七代孫前參奉珽。又收拾燼餘詩文。尙得九十餘首。以圖不朽之傳。乃以題跋之辭命植。植竊惟先生純實之行。著於聖諭。淳德也。中歲納祿。遯迹山海。高節也。存心養性。揭扁自警。正學也。有一於是。尙可師範百世。況兼有之者乎。抑先生之退。當景泰二年辛未。越四年癸酉,七年丙子。國家禍故相繼。縉紳多及焉。則先生之擧。誠若炳幾保身者然。以此世尤稱其明智。以余攷之。顯陵賓天之促。而魯山遜位之遽。此天數也。先生雖明智。安能推測及此。且先生在世廟朝。已解帶方之印。彼時又何難之可違耶。易曰天道虧盈而益謙。詩曰愷悌君子。神所勞矣。先生急流勇退。道與神謀。自不蹈於大亂。豈規規焉審幾逃禍者之足儗也。今就是卷。閱其人物。則安平,節齋之事。不可言也。若河東,高靈,泛翁,四佳諸公。勳名雖盛而情節或歉。成謹甫諸人。自靖則有之而葵足莫衛。其視先生淸福完名。當何如也。噫。觀斯集者。不但据其詩文。知先生之所存。論其世尙其人。亦可以見先生之不可及矣。崇禎丙子七月之望。德水後學李植識。- 녹동서원은 영암에서 최초로 건립되었고, 또 영암 유일의 사액서원이다. 본래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를 제향하기 위해 1630년(인조8)에 건립된 존양사(存養祠)라는 문중 사우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이 지역으로 유배되어 온 김수항이 1695년(숙종21)에, 그리고 그의 아들 김창협(金昌協)이 1711년에 추배(追配)되었다. 이에 앞서 1642년부터 전주 최씨 문중을 중심으로 청액상소 활동을 추진하다가, 1680년 김창협을 소두(疏頭)로 한 청액상소가 있었고, 이후 영암 및 전라도 유생들의 활동이 있었으며 1712년 옥오재 송상기(宋相琦)의 청액상소를 끝으로 1713년에 녹동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農巖集 卷7 代靈巖儒生請煙村書院賜額疏》 《김경옥, 朝鮮後期 靈岩士族과 書院-全州崔氏家門의 成長과 鹿洞書院의 建立事例-, 湖南文化硏究 제20집, 1991, 36~39쪽》
- 문곡집 제4권 / 시(詩) 146수
남으로 온 지 네 해 동안 발걸음이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연촌의 사원이 지척에 있는데 한 번도 참배하지 못했지만, 우러르는 마음은 그득하였다. 지금 북으로 옮겨 가는 때를 당하여 입으로 부른 절구 한 편을 최군 선석, 보석 형제에게 보여 주면서 그 구구한 심정을 말하고는 아울러 사원의 여러 선비들에게 보여 주다. 최군은 연촌의 후손이다
〔南來四載 足不出門外 煙村祠院在咫尺 而未展一謁 然其瞻仰則多矣 今當北遷 口占一絶 示崔君宣錫保錫昆季 以道其區區 兼示院中諸章甫 崔君卽煙村後孫也〕
탁월한 학식에 맑은 풍모 소부의 짝으로 / 卓識淸風疏傅儔
높은 이름 길이길이 월출산과 함께 남으리니 / 高名長與月山留
길 잃은 나그네의 슬프고 궁한 걸음은 / 迷塗有客悲窮轍
남은 사당 우러르며 한번 부끄러워합니다 / 瞻仰遺祠更一羞- [주-D001] 연촌(煙村) :
-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호이다. 최덕지의 자는 우수(迂叟) 또는 가구(可久)이고, 본관은 전주(全州)로, 최담(崔霮)의 아들이다.
- [주-D002] 소부(疏傅) :
- 한나라 선제(宣帝) 때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역임한 소광(疏廣)을 가리킨다. 그가 태자소부(太子少傅)를 지낸 조카 소수(疏受)와 함께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천자와 태자가 그의 빼어난 학식과 풍모를 기려 몸소 황금을 하사했으며, 공경대부들이 동도문(東都門) 밖에까지 나와 성대하게 전별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3 送楊巨源少尹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