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연촌 유사

연촌유사 (烟村遺事)(15-16c) (규장각)

아베베1 2012. 2. 5. 09:13

 

문집명

연촌유사 (烟村遺事)(15-16c)


간략서지

古 4650-20烟村 崔德之의 문집. 1책.


간략해제 1805(순조 5) 崔世榮이 편찬하였다. 표지에는 문집명이 ≪烟村集≫으로 되어 있고‚ 序·目錄·판심 등에는 모두 ≪烟村遺事≫로 되어 있다. 또 목록과 <先生出處事蹟>의 卷頭에는 ≪연촌유사≫로 제목을 달고 번호를 매기고‚ <論貢法踏驗便否疏>의 권두에는 ≪烟村遺稿≫로 제목을 달고 번호를 매기고 있다. 이상의 경우처럼 문집명이 일관성이 없지만 서문과 발문을 보면 문집 제작 당시 ≪연촌유사≫를 만들려고 했다는 주장을 확인할 수 있어 본문집의 제목을 ≪烟村遺事≫로 통일한다. 본 문집에서 소 1편과 시 3수만이 최덕지의 저술이고‚ 대부분은 최덕지의 관직 사퇴를 연유로 쓴 전별시와 그가 학문을 연마한 존양루의 제영시로 되어 있다. 또 부록으로 <叅議公遺事>는 최덕지 부친의 2수의 시를 말하고 <少尹公墓碣>은 호조참의를 지낸 그의 셋째 형 최득지를 가리킨다.
편저자

최덕지 (崔德之)


저자개요

1384-1455 (우왕10-세조1)字: 可久‚ 號: 烟村·存養·迂叟‚ 本貫: 全州‚ 父: 霮‚ 母: 全州 朴氏


저자내용

1405(태종 5) 식년문과에 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三司의 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 때 존양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되었는 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해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리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西山祠·남원의 舟巖書院·영암의 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내용제목 烟村遺事 내용개요 청구기호 古 4650-20
권수 권제목:
제목 없음.

1805. 宋煥箕(1728-1807)가 ≪연촌유사≫의 중간에 즈음하여 최덕지의 후손 爀과 趾欽의 부탁으로 서문을 짓게 되었다. 송환기는 자신의 선조인 송시열이 최덕지의 ≪연촌유사≫에 발문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 직접 ≪연촌유사≫를 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하다 이번을 기회로 보게 되었다고 술회함. 전란으로 최덕지의 시문집이 전란으로 소실되어 본 문집에는 一疏‚ 二詩 밖에 수록되지 않았지만 당대 제현들의 제영을 보면 그의 덕망을 알 수 있다고 함. 또 여러 서와 발 중에서 澤堂 李植이 최덕지를 淳德·高節·正學으로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최덕지의 ≪연촌유사≫를 편집하면서 동시에 그의 손자인 崔忠成(1458-1491)의 ≪산당집≫을 편집했는데 송환기 본인이 두 사람 문집의 서문을 쓰면서 문집을 검토해 보니 최씨 가문의 世德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先生出處事蹟 (1) 

최덕지의 가계·관직·절의 등을 기록하고 있다. 남원부사를 끝으로 나이를 들어 사직한 뒤 영암의 영보촌에서 존양루를 짓고 존심양성의 연구에 몰입했다. 영암은 벽촌으로 문교의 영향을 받지 못하다가 최덕지의 노력으로 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또 영조대에 와서 향인들이 사우를 건립하여 그의 학덕을 추모하려고 한 일을 적고 있다.


烟村遺稿∕論貢法踏驗便否疏 (1) 

이 소는 조세의 단위와 면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토지의 등급을 정해 조세를 징수하게 되면 토질의 다양함과 작황의 불규칙함이 조세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특정 경작지를 몇 등급이라고 규정하더라도 실제 경작지가 규정된 등급에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토지의 등급 단위보다는 경작지 소출을 단위로 조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경작자의 태만‚ 소출량에 대한 민과 관의 조작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제도의 운용의 문제이지 제도 존폐와 관련이 없다고 반란을 제기한다. 손실답험법은 자연재해나 병충해로 손실된 작황을 경작지에서 실측하여 조세의 면제 정도를 결정하는 제도이다. 관리와 민이 이 제도를 악용할 소지가 있지만 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실보다는 득이 더 많다고 주장한다.


題存養樓(二首)


貢院唱和詩: 序(朴彭年)‚ 原韻-幷小序(河演)‚ 次韻(李思哲‚ 名氏失傳‚ 申叔舟‚ 成三問‚ 辛碩祖‚ 河緯地‚ 徐居正‚ 崔德之‚ 李石亨‚ 姜希孟‚ 柳誠源) 退休時送別詩序(李芮): 有美辭送崔先生-東文選載錄(柳誠源‚ 成三問‚ 李塏‚ 河緯地‚ 鄭麟趾‚ 申叔舟‚ 辛碩祖‚ 徐居正‚ 金淡‚ 尹子雲‚ 徐岡‚ 李孝長‚ 崔善復‚ 李承召‚ 韓瑞鳳‚ 尹起畝‚ 朴元貞‚ 沈愼‚ 金潤福‚ 金之慶‚ 金孝寧‚ 金禮蒙‚ 辛永孫‚ 洪若治‚ 金勇‚ 金鉤‚ 崔恒‚ 崔興孝)‚ 跋(朴彭年)追詠(金宗瑞‚ 安止‚ 金銚‚ 金先齊‚ 鄭麟趾‚ 河演‚ 安崇信‚ 權孟孫‚ 鄭鄰‚ 李石亨‚ 失其姓名‚ 李淑瑊‚ 成任)


제목 없음.

存養樓記 (20) 


제목 없음.

1446. 최덕지 본인의 부탁으로 그와 동년인 紆山 宋乙開가 지었다. 먼저 존양루의 위치와 조경을 설명하는데 특히 주위 풍광의 아름다움을 봄날 꽃을 보면 그림 속에 있는 듯하고 가을날 달을 마주 대하고 있노라면 학을 타고 노는 듯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는 존양루에서 손님이 찾아오면 신발을 거꾸로 끌며 반갑게 맞이하고 루에 올라 <伐木> 시를 읊조리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그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 주위에서 그의 마음은 선수의 즐거움에만 얽매여 있으니 병통이 아닌가‚ 또 어느 겨를에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길러서 루각의 이름에 부합될 수 있겠는가‚ 결국 그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잡으려는 게 아닌가(捕風繫影) 라는 말이 있었다. 이에 대해 송을개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군자의 마음은 진실로 포착하기 어렵다. 일례로 범중암은 악양루에 올랐지만 루의 장관을 즐거움으로 삼지 않고 세상에 앞서 근심했고 세상보다 뒤에 즐거워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 최덕지도 일찍 출사하여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도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포부가 조정에서 반영되지 않자 관직에 물러났다. 루각의 명명은 물에 나아가 이치를 터득하여 자신을 수양하려는 것(卽物觀理)으로 보아야 한다. 일례를 든다면 강산의 험준함을 보고서 명예가 사람을 압도함이 태행산이 수레를 엎어버림보다 심각하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題存養樓(李石亨‚ 愼幾‚ 尹自堅)‚ 次韻(崔孝孫‚ 崔興孝‚ 高等宗‚ 奇虔‚ 金國光‚ 辛永孫‚ 金晐‚ 閔孝悅‚ 李徽‚ 朴居明‚ 元自直‚ 金連枝‚ 安德孫)‚ 追詠(愼喜男‚ 閔德鳳‚ 崔鳴吉‚ 李景奭‚ 崔應亨‚ 崔珽)‚ 題存養書院-幷序(金壽恒)


題烟村先生畵像 (26) 

金鎭商(1684-1755)이 최덕지의 관직에서 조기 사직한 일과 유상에 나타난 얼굴에 가득찬 소탈하며 질박한 기상을 읊고 있다.


書院請額疏 (27) 

金昌協(1651-1708)이 제진했고 신유(1681) 생원 柳章玉 등 85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 최덕지가 관직을 조기 사직하고 존양사를 지어 정학 연구에 진력한 점을 들어 사원의 사액을 요청하는 글. 관직에 한 번 그만둘 줄 모른 채 봉록에 연연하고 군주의 총애를 탐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산림에 은둔하는 사류 중에는 자신의 고결함을 기치로 내걸고 優游放曠하며 현실의 문제를 무시한다. 후자는 부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보다는 낫지만 올바른 처신이라고 할 수 없다. 최덕지의 경우 治化가 융성했던 세종과 문종 대에 벼슬살이하면서 일찍 사퇴하고 맹자의 존심양성을 추구하기 위해 존양사를 짓고 정학 연구에 매진했다.


畵像贊 (29)  사태 전환의 미묘한 전기를 포착하여 위험한 상황에 생활하면서 더욱 편안함을 누렸던 최덕지의 학덕을 칭송함. 愼天翊(1592-1661)이 지었다.
畵像改粧贊 (29) 

제목 밑 소기를 보면 1610년 4월에 龍山에서 개장하고 1635년 2월에 德津橋에 봉안했다고 한다. 최덕지의 명철보신을 칭송함.


亂後文稿收錄誌 (29) 

1621. 먼저 구양수의 三不朽로 글을 시작한다. 세 가지는 몸 수양이라는 도덕의 측면‚ 사업의 실시라는 공업의 측면‚ 언어적 표현이라는 문장의 측면이다. 세 가지 중 가치면에서 보면 문장이 가장 뒤쳐지지만 문장이 남아 있지 않으면 덕과 공업을 알 수 없게 되니‚ 문집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그의 문집은 임진왜란으로 거의 일실되었다. 그 와중에 자손들에게 문집의 일부 남아 있었지만 탈오가 많았다. 정유왜란이 발생하자 앞의 유문과 화상을 창졸 중에 羅州 細花里에 묻어 두었다. 왜적이 물러가고 난 뒤 1년만에 파보니 다행히 보관상태가 양호했다. 후손 珽이 지었다.


烟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叙 (31) 

1630. 정유재란으로 존양루가 소실되고 얼마 안 남은 문집이 산일되었다가 향인들이 최덕지를 위해 사우를 건립하게 되자‚ 그의 7대손 정이 남아 있는 시문과 제현들의 시 90여수를 묶어 문집을 간행하게 되었다. 최덕지의 학덕에 대해 순실한 행실이 군주의 고유문에 나타나 있음으로 淳德함을 알 수 있고‚ 관직을 조기 사직하고 산과 바다로 자신의 형적을 숨겼으니 高節이고‚ 존심양성을 표방하고 루락의 편액을 쓰고 경계로 삼았으니 正學임을 알 수 있다고 평가한다. 또 최덕지가 관직을 조기에 사퇴함으로써 단종과 세종의 왕위 분쟁에 연루되지 않은 점을 두고 명철보신으로 보는 시각을 반대한다. 정치적 사건은 천수이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명지하더라도 예상할 수 없다. 李植(1584-1647)이 지었다.


烟村先生遺事跋 (32) 

최덕지의 8대손 榮夢과 邦彦이 구본의 탈오를 교정하여 문집을 중간하려고 할 때 宋時烈(1607-1689)이 쓴 발문. 송은 최덕지의 ‘손실답험’이 ≪주자대전≫에도 자주 보일 뿐만 아니라 주희가 열성적으로 실현하려고 했고‚ ‘業去稅存’ 4자의 경우 주희가 당시 현실에 통탄하며 개혁을 하려다 吳禹圭의 중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사실을 500여년이 지난 뒤 최덕지의 글에서 다시금 확인하게 되니 이식의 평가 중 정학이라는 말이 실제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의 말 중 업거는 주자의 주장과 조금 차이가 있고‚ 많은 서발문 중에 이식의 글이 가장 자세하고 인용의 전거도 풍부하지만 知幾 부분은 조금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題烟村崔先生遺事後 (33)  

최덕지의 후손 방언의 부탁으로 朴世采(1631-1695)가 쓴 글. 최덕지는 완전한 덕성으로 세상의 모범이 되어 사람들도 그의 현능의 사실은 알지만 왜 현능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모른다고 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烟村崔先生家錄後跋 (34) 

송시열의 발문 중에 이식의 글을 일부 회의하는 귀절이 있었는데‚ 최덕지의 후손이 이 점의 해명을 위해 李端夏(1625-1689)에게 부탁하여 쓰게 된 글.


附元直學碣銘畧 (36) 

생육신의 한 사람인 元昊의 묘갈명에서 최덕지 관련 사항을 전재한 글. 최덕지는 관직을 조기 사직한 연유로 단종과 세조의 왕위 계승 분쟁에 연루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덕지의 출처를 성삼문의 절의와 異塗同歸로 보고 “김시습은 오늘날의 伯夷이고 사육신은 오늘날의 方練이고 烟村霧巷도 사육신과 견주더라도 뒤지지 않는다”라는 구절에 대해 무항은 원호가 거처하던 장소이고 연촌은 최적지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최덕지를 높이는 이유로 그의 見幾勇退를 들고 있다.


권말 권제목:附錄(叅議公遺事)
문집명 동원집 (東園集)(17c)
간략서지 奎 15487東園 崔珽의 문집. 1책.
간략해제

최정의 9世孫의 필사본인데 간행자와 간행 연도는 알 수 없다. 전반부는 최정이 7대 선조인 崔德之의 遺稿를 정리할 때 쓴 글을 비롯하여 銘文‚ 記‚ 제문 등을 실었다. 다음에 詩와 최정에 대한 행장‚ 제문 등이 나오고 맨 끝에 목록이 나온다. 盤銘에 대한 再叙와 記異‚ 79편의 詠詩에서 인물과 사물을 회화적으로 묘사한 것이 독특하다. 목록은 본문의 순서와 상관없이 장르별로 소개하였다.


편저자 최 정 (崔珽)
저자개요

1568-1639 (선조1-인조17)字: 大圭‚ 號: 棄井·東園‚ 本貫: 全州‚ 父: 應鳳‚ 母: 全州 李氏


저자내용 서울에서 태어났다. 1605년(선조 38)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蔭官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광해군 연간에 昌陵 參奉‚ 사옹원 참봉을 지냈다. 仁穆大妃가 유폐된 것에 반발했으나 李爾瞻과 인척 간이므로 화를 면했고 이후 歸去來辭를 짓고 전라도 영암으로 落鄕하였다. 인조 반정 이후 사옹원 봉사를 지내기도 했으나 다시 영암으로 내려와 獨樂齋를 짓고 逍遙하며 지냈다. 정묘호란 때 세자가 南下하자 陪從하였다. 詞賦에 능했다.
내용제목 東園集 내용개요 청구기호 奎 15487
권수 권제목:
제목 없음.

1610. 7대조인 崔德之(烟村‚ 1384-1455)의 畵像을 改粧할 때 쓴 贊이다.


亂後烟村文稿收錄誌 (1) 1621. 선조 최덕지의 遺集을 정리하며 쓴 誌이다. 최덕지는 태종에서 문종 연간에 남원 부사‚ 예문관 직제학을 등을 지내고 퇴거한 인사이다. 家藏한 元本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많이 散逸되었기에 崔珽이 남은 遺稿 등을 정리하여 手書 1본을 만들고 훗날 간행되기를 희망한다고 적었다.
棄井說 (2) 1596. 집에 있는 古井으로 自號하며 지은 글이다. 우물의 본성은 사람과 사물을 이롭게 하는 것인데 이것이 폐기되는 이유가 우물이 自棄해서인지‚ 아니면 사람이나 하늘이 그런 것인지를 自問하며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강조하였다.
烟村出處事蹟 (3) 선조 최덕지의 이력과 사적을 짧게 서술한 글이다.
送任祥雲士秀郵亭詩序 (3) 1604. 出仕하는 任祥雲을 보내며 쓴 글이다. 15년간 同苦同樂하며 교유한 내용과 더욱 精進할 것을 당부하였다.
重造盤銘狀銘 (5) 1625. 구유를 깎아 盤과 牀을 만들고 銘文을 쓰면서 그 과정을 서술한 글이다. 선조 최덕지가 1444년(세종 26) 存養樓를 세울 때 있었던 구유가 못쓰게 되자 5개의 盤과 1개의 牀을 만들고 物質이 世傳되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회를 서술하였다. 盤銘‚ 牀銘‚ 銘後叙를 附記하였다.
再叙 (6) 1625. 盤과 牀을 매개로 꾼 꿈에 대해 쓴 글이다. 밤 늦도록 잠 못 이루고 소요하다가 새벽녘에 깜박 잠들어 개미의 나라인 槐安國에 가는 꿈을 꾸게 되었다. 거기에서 수많은 인물들과 제도를 보고 태평한 기상을 느끼게 되었다.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회화적이다.
記異 (9) 盤과 牀을 매개로 꾼 꿈에 대해 쓴 글이다. 밤에 계속되던 비가 개고 날씨가 맑아지자 다시 잠이 들었다. 지난 번에 槐安國으로 이끌었던 童子들이 나타나 편지를 주었는데 거기에는 天人들이 쓰던 盤과 案을 내리니 대대로 물려 쓰면 재앙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七十九詠跋 (10) 1630. 79개의 사물을 소재로 쓴 詠詩에 대한 跋이다. 金季雲이 48詠을 짓고 쓴 발문의 일부를 인용하고 그에 대해 구속된 면모가 있다고 평하면서 본인이 퇴거하여 여러 사물에 가탁하여 시를 지은 심정을 서술하였다. 末端이 缺落되었다.
上明府李公 (12) 李公(?)에게 보낸 편지이다. 79詠詩와 그에 대한 跋을 보내면서 시의 효용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詠詩의 소재를 일일이 소개하였다. 末端이 缺落되었다.
存養祠記 (14) 1633. 선조 최덕지를 기려 세워진 存養祠에 대한 記이다. 존양사는 1630년(인조 8)에 鄕人들이 月山의 아래에 세웠다. 최덕지의 이력을 소개하고 德行과 문장을 칭송하였다.
存養祠贊-幷序 (17) 1633. 存養祠記를 짓고 나서 미진한 점을 보충하기 위해 쓴 存養祠에 대한 贊이다. 주로 그의 學德이 후세에 미친 영향을 서술하였다.
二翠亭記 (17) 1633. 二翠亭에 대한 記이다. 松竹의 성질을 빗대어 이취정이라 명명한 연유‚ 건립 과정 등을 서술하였다.
見山臺記 (19) 인근의 산천을 감상할 수 있는 見山臺를 만들고 쓴 記이다. 때에 따라 달라 보이는 서울과 주변의 산세에 대해 묘사하였다.
梅橘亭記 (21) 梅橘亭에 대한 記이다. 군자 같은 성질을 가진 매귤로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고 정자의 주인에게 勉勵할 것을 당부하였다.
送鳳州通判沈仲秀序 (22) 1636. 判官이 되어 鳳州에 가는 沈仲秀를 전송하는 글이다.
祭崔判官-公遠-文 (23) 1637. 判官을 지낸 崔公遠(1591-1637)에 대한 祭文이다.
祭沈天安-浹-文 (23) 1637. 沈浹에 대한 祭文이다.
祭沈天安發引上京時文 (24) 1638. 沈浹을 서울로 發引할 때의 祭文이다.
祭沈佐郞-統-文 (24) 1638. 좌랑을 지낸 沈統(1567-1638)에 대한 祭文이다. 어릴 때부터 교유하였고 사돈 관계를 맺었다.
辭次歸去來辭 (25) 歸去來辭를 次韻하여 지은 辭이다. 은거하고자 하는 뜻을 나타내었다.
詩 (26)

五言短律: 送鄭孝直仍贈伯仲淑季僉兄足下-十首 五言四律: 訪愼晦時述懷-二首‚ 祭梅橘亭-二首‚ 悼亡‚ 大風後得膏雨感興贈鄭孝直-三首‚ 附鄭孝直次韻‚ 挽崔判官公遠-二首 七言短律: 謹次存養樓元韻‚ 題存養樓-三首‚ 詠梅‚ 詠竹‚ 詠烏竹‚ 詠菊‚ 詠蓮‚ 詠草蘭‚ 詠木蘭‚ 詠假蘭‚ 詠倭躑躅‚ 詠山茶花‚ 詠芍藥‚ 詠四季花‚ 詠石榴‚ 詠海棠‚ 詠眞松‚ 詠山松‚ 詠橘‚ 詠梧‚ 詠冬柏‚ 詠春栢‚ 詠玉梅‚ 詠黜唐‚ 詠杜鵑花‚ 詠芭蕉‚ 詠葡萄‚ 詠雪吐花‚ 詠金縢花‚ 詠杜冲‚ 詠蜀葵花‚ 詠桃‚ 詠三色桃‚ 詠紅桃‚ 詠碧桃‚ 詠僧桃‚ 詠櫻桃‚ 詠杏‚ 詠梨‚ 詠栗‚ 詠柿‚ 詠棗‚ 詠李‚ 詠郁李‚ 詠林禽‚ 詠桑‚ 詠槐‚ 詠柳‚ 詠楡‚ 詠樗‚ 詠楓‚ 詠百日紅‚ 詠木瓜‚ 詠命者‚ 詠川椒‚ 詠山桅子‚ 詠玉簪花‚ 詠凡扇草‚ 詠決明草‚ 詠滅葉花‚ 詠紅花‚ 詠渦家菜‚ 詠冬葵子‚ 詠蕪菁‚ 詠土卵‚ 詠芥‚ 詠薑‚ 詠蘘荷‚ 詠奇苔‚ 詠王苽‚ 詠冬苽‚ 詠茄子‚ 詠瓢子‚ 詠水芹‚ 詠韭‚ 詠紵‚ 詠麻‚ 詠川芎‚ 詠當歸‚ 詠鄭孝直‚ 寒食日贈辛上舍連壁-二首‚ 八月子夜書懷寄隣仲酬萬歲叔‚ 題金將軍碧流亭-四首‚ 挽沈天安‚ 挽崔克涵-三首 七言四律: 送任祥雲士秀郵亭詩-二首‚ 在安老曳杖歌‚ 奉呈明府二翠亭詩-七首‚ 送沈通判仲秀之任用芝崖韻‚ 附芝崖原韻‚ 訪愼時悔述懷-二首‚ 題梅橘亭‚ 感興用僉鄭韻-五首‚ 悲采吟-三首‚ 笑矣歌‚ 更用前韻‚ 仲夜口吟‚ 獨坐懷諸友‚ 別僉鄭更用前韻書懷‚ 有人傳京客詩聞而有感遂正其失塗改其韻‚ 別鄭孝直有感而作-二首‚ 在龍山入城醉甚落馬歸魯直家臥門外作‚ 記夢六韻


附挽詞 (42)

崔珽에 대해 柳公信이 쓴 짧은 만사이다.


附女婿柳廷衍祭文 (43)

최정에 대한 제문이다. 사위 柳廷衍이 썼다.


行狀 (43) 1828년 趙鍾永이 쓴 최정의 행장.
墓誌銘 (45) 李正履가 쓴 최정의 묘지명.
跋 (46)

1863년 申應朝가 쓴 최정의 발문.


目錄 (47) 문집의 목록이다.
棄井集後序 (51) 東園集의 後序이다. 9世孫이 썼다. 최정은 棄井이라고도 自號하였으므로 棄井集後序라고 하였다. 광해군과 인조 연간에 깨끗하게 절개를 지킨 것을 伯夷‚ 叔弟에 비교하였다. (이경구)
서명
현대어서명
청구기호
책수
烟村遺事 저자 崔德之 저
연촌유사 간행년대 1805년(순조 5).
古4650-20
1책 판본 사이즈 16.5×10.5㎝.
본문

"조선초의 문신 崔德之(1384~1455)의 시문집. 1805년(순조 5) 崔世榮이 편찬하였다. 권두에 宋煥箕의 서문이 실려 있다. 최덕지의 자는 可久, 호는 烟村․存養, 본관은 全州다. 1405년(태종 5) 式年文科에 同進士로 급제한 뒤 監察 등 三司의 淸要職을 거쳐, 김제군수․남원부사 등을 역임하고, 사직한 뒤에는 영암의 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藝文館直提學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致仕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도 年老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詩賦를 지어주고 路資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친 인물로 평가된다. 전주의 西山祠, 남원의 舟巖書院, 영암의 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文肅이다. 송환기의 서문에 이어 목록이 있고 뒤이어 최덕지에 대한 出處事蹟이 수록되어 있다. 그 다음 최덕지의 저작인 〈論貢法踏驗便否疏〉 1편과 〈題存養樓〉 2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어 朴彭年의 〈貢院唱和詩序〉와 河演의 元韻에 이어 차운시들이 모두 11수 수록되어 있는데, 申叔舟․成三問․河緯地․徐居正․姜希孟 등과 함께 최덕지의 시도 수록되어 있다. 이후 차례로 최덕지가 사임할 때 李成이 써 준 〈退休時送別詩序〉와 柳誠源․成三問․李塏․河緯地․鄭麟趾․申宿舟 등이 지은 송별시가 수록되어 있다. 또 朴彭年의 跋, 金宗瑞․安止․金銚․李先齊․鄭麟趾 등의 追詠, 宋乙開의 〈存養樓記〉, 李石亨 등 3인의 〈題存養樓〉 3수, 崔孝孫 등 13인이 〈題存養樓〉에 차운한 시 16수, 崔鳴吉․李景奭 등 6인의 追詠 16수, 金壽恒이 지은 〈題存養書院〉 1수, 金鎭商이 지은 〈題烟村先生畵像〉 1수, 金昌協의 〈書院請額疏〉, 愼天翊의 〈畵像贊〉과 〈畵像改粧贊〉, 후손 珽敬이 쓴 〈亂後文稿收錄誌〉가 실려 있다. 끝으로 李植의 後敘 (〈烟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敘〉), 宋時烈․朴世采․李端夏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元昊의 碣銘이 간략하게 붙어 있다. 부록으로 〈參議公遺事〉와 〈諸公讚詩〉, 〈小尹公墓碣〉이 수록되어 있다.최덕지의 글은 疏 1편과 詩 3수일 뿐인데, 〈論貢法踏驗便否疏〉는 일정한 크기의 논밭에서 일정한 양을 거두게 된 공법과 논밭에 가서 실제로 작황을 조사, 조세를 알맞게 정하는 損實踏驗法의 편리 여부를 가지고 고심하는 世宗에게 踏驗法을 시행하도록 권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조선 초기의 세법관계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또, 박팽년의 〈貢院唱和詩序〉는 당시 科場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안순태)

 

 

 


택당선생집 제9권 / 서(序)

연촌 최 선생의 집에 전하는 시문록 뒤에 쓴 글[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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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경태(景泰 1449~1456) 연간에 아조(我朝)에 덕이 순일하고 절조(節操)가 드높았던 정학지사(正學之士)가 있었으니, 연촌(煙村) 최 선생이 바로 그분으로서 이름을 덕지(德之)라 하였다.
일찍이 금근(禁近 시종신(侍從臣)을 말함)을 거쳐 주부(州府)의 목민관으로 나갔다가, 이를 또 즐겁게 여기지 아니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영암(靈巖) 영보촌(永保村)으로 돌아가서는, 서루(書樓)를 지어 존양(存養)이라 편액(扁額)을 내건 뒤 거기에서 생을 마칠 것처럼 지내었다.
그러다가 현릉(顯陵 문종(文宗))이 즉위하여 선생에게 소명(召命)을 내리면서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제수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이르러 다시 늙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향리로 돌아가자, 조정에 함께 있던 현경(賢卿)과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떠나는 길을 전송하면서 선생의 사적(事跡)을 높이 기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존양루(存養樓)에 제(題)하는 글을 짓기도 하고, 또 선생의 가대인(家大人 부친)인 참의공(參議公 이름은 담(霮)임)이 장수(長壽)를 누리고 훌륭한 자손을 둔 데 대해 일시에 찬송하는 작품도 많이들 내놓았다.
이 모든 시문(詩文)가 필적(筆迹)들을 최씨의 자손들이 대대로 지키면서 그지없이 조심스럽게 보관해 왔는데, 급기야 정유왜란(丁酉倭亂)을 겪는 바람에 존양루가 소실(燒失)되면서 간편(簡編)들도 함께 산일(散逸)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고향 사람들이 선생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서 제사를 올리게 되었고, 선생의 7대손인 전 참봉(參奉) 정(珽)이 또 타고 남은 시문(詩文)을 수습하여, 그나마 90여 수(首) 정도를 찾아낸 뒤 영원히 전할 방법을 모색하면서, 나에게 발문(跋文)을 써 달라고 요청해 왔다.
내가 삼가 살피건대, 선생은 순실(純實)한 행동이 성유(聖諭)에 드러나게 될 정도로 순덕(純德)의 소유자였고, 중년에 봉록(俸祿)을 마다하고 산해(山海)에 자취를 숨겼으니 고절(高節)의 인사라 할 만하며, 존심 양성(存心養性)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를 편액(扁額)으로 내걸어 자신을 깨우쳤으니 정학지사(正學之士)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중에 한 가지만 있다 해도 백세(百世)의 사범(師範)이 된다고 할 것인데, 더구나 이를 모두 아울러 지니고 있는 분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한편 생각건대,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은 경태(景泰) 2년인 신미년(1451, 문종 1)의 일이었다. 그런데 4년 뒤인 계유년과 7년 뒤인 병자년에 국가에 변고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진신(縉紳)들이 많이 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 조정을 물러난 것이 그야말로 이런 기미를 미리 환하게 알아 몸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될 법도 하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는 선생의 명지(明智)를 더욱 일컫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고찰해 보건대, 현릉(顯陵)이 일찍 빈천(賓天 임금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함)하여 노산(魯山 단종(端宗))이 갑자기 왕위를 내 주게 된 것은 하늘의 운수와 관계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선생의 지혜가 아무리 밝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 될 줄이야 추측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선생은 세묘(世廟 세종(世宗))의 조정에서도 대방(帶方 남원(南原)의 옛 이름임)의 인끈을 풀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또 떠나야만 할 무슨 어려운 일이 발생하기라도 했었던가.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도는 가득 차면 무너뜨리고 겸손하면 더해 준다.[天道 虧盈而益謙]”고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화락한 군자는 신명이 위로해 준다.[愷悌君子 神所勞矣]”고 하였다. 선생의 급류 용퇴(急流勇退)는 그야말로 천도(天道)와 신명(神明)이 도와준 것으로서, 저절로 대란(大亂)에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이니, 어찌 눈치 빠르게 화(禍)의 기미를 살피다가 도망치는 자들과 견줄 수가 있겠는가.
지금 이 시문록(詩文錄)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을 두루 살펴보건대, 안평(安平)과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의 호임)에 대한 일은 차마 말할 수가 없지만, 가령 하동(河東)이나 고령(高靈) 범옹(泛翁)이나 사가(四佳)같은 제공(諸公)으로 말하면 훈명(勳名)은 비록 성대해도 정절(情節)의 측면에서는 혹 부족한 점이 있고, 성근보(成謹甫 근보는 성삼문의 자(字)임) 등 제인(諸人)으로 말하면 자정(自靖)한 점은 있지만 규족(葵足)처럼 보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니 선생의 맑은 복과 완전한 명성에 비교해 본다면, 어떻다고 해야 하겠는가.
아, 이 문집을 살펴보노라면, 그 시문들을 통해 선생의 심지(心志)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될 뿐만이 아니요, 세태(世態)를 논한 것이나 기인(其人 단종을 가리킴)을 향한 정성이 또한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숭정(崇禎) 병자년 7월 보름에 덕수 후학 이식은 쓰다.
[주-D001] 4년 뒤인 …… 되었다 : 
단종(端宗)이 즉위한 계유년(145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부자를 강화에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한 일과, 세조(世祖) 2년인 병자년에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던 성삼문(成三問) 등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을 사형에 처했던 일을 말한다.
[주-D002] 천도는 …… 더해 준다 : 
겸괘(謙卦) 단사(彖辭)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3] 화락한 …… 위로해 준다 : 
대아(大雅) 한록편(旱麓篇)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 급류 용퇴(急流勇退) : 
한창 벼슬이 높아질 때에 물러나 명철 보신(明哲保身)하는 것을 말한다. 송(宋) 나라 전약수(錢若水)에게, 어떤 노승(老僧)이 끝내 신선은 되지 못하겠지만 벼슬에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으로 “是急流中勇退人”이라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聞見前錄 卷7》
[주-D005] 하동(河東)이나 …… 사가(四佳)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이면서 호가 범옹인 신숙주(申叔舟), 호가 사가정(四佳亭)인 서거정(徐居正)을 가리킨다.
[주-D006] 자정(自靖) : 
각자 의리에 입각하여 자신의 뜻을 정해서 결행하는 것을 말한다. 《서경(書經)》 미자(微子)의 “스스로 뜻을 정해서 각자 선왕에게 고하라. 나는 여기를 떠나 숨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7] 규족(葵足)처럼 …… 못하였다 : 
몸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제(齊) 나라 포견(鮑牽)이 난세(亂世)에 처하여 남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고발했다가 발이 끊기는 월형(刖刑)을 당했는데, 이에 대해 공자(孔子)가 “포장자의 지혜는 해바라기보다도 못하구나. 해바라기는 그래도 잎사귀를 가지고 제 다리를 가려서 보호해 주는데.[鮑莊子之知不如葵 葵猶能衛其足]”라고 비평한 고사가 있다. 포장자는 포견을 가리킨다. 《春秋左傳 成公 17年》



煙村崔先生家傳詩文錄後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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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在景泰間。我朝有淳德高節正學之士。曰煙村崔先生名德之。嘗由禁近。出守州府。又不樂而退歸靈巖永保村。築書樓。扁以存養。若將終身。顯陵卽位。召拜藝文直提學。明年冬。又告老而歸。同朝賢卿名士。賦詠贐行。以高其事。且爲存養樓題識。又先生家大人參議公有壽有後。一時多贊頌之作。凡茲詩文筆迹。崔氏子孫。世守之甚謹。及丁酉倭亂。存養樓燬而簡編隨以散逸。今其鄕人。旣爲先生立祠祀之。先生七代孫前參奉珽。又收拾燼餘詩文。尙得九十餘首。以圖不朽之傳。乃以題跋之辭命植。植竊惟先生純實之行。著於聖諭。淳德也。中歲納祿。遯迹山海。高節也。存心養性。揭扁自警。正學也。有一於是。尙可師範百世。況兼有之者乎。抑先生之退。當景泰二年辛未。越四年癸酉,七年丙子。國家禍故相繼。縉紳多及焉。則先生之擧。誠若炳幾保身者然。以此世尤稱其明智。以余攷之。顯陵賓天之促。而魯山遜位之遽。此天數也。先生雖明智。安能推測及此。且先生在世廟朝。已解帶方之印。彼時又何難之可違耶。易曰天道虧盈而益謙。詩曰愷悌君子。神所勞矣。先生急流勇退。道與神謀。自不蹈於大亂。豈規規焉審幾逃禍者之足儗也。今就是卷。閱其人物。則安平,節齋之事。不可言也。若河東,高靈,泛翁,四佳諸公。勳名雖盛而情節或歉。成謹甫諸人。自靖則有之而葵足莫衛。其視先生淸福完名。當何如也。噫。觀斯集者。不但据其詩文。知先生之所存。論其世尙其人。亦可以見先生之不可及矣。崇禎丙子七月之望。德水後學李植識。



녹동서원은 영암에서 최초로 건립되었고, 또 영암 유일의 사액서원이다. 본래 연촌(烟村) 최덕지(崔德之)를 제향하기 위해 1630년(인조8)에 건립된 존양사(存養祠)라는 문중 사우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이 지역으로 유배되어 온 김수항이 1695년(숙종21)에, 그리고 그의 아들 김창협(金昌協)이 1711년에 추배(追配)되었다. 이에 앞서 1642년부터 전주 최씨 문중을 중심으로 청액상소 활동을 추진하다가, 1680년 김창협을 소두(疏頭)로 한 청액상소가 있었고, 이후 영암 및 전라도 유생들의 활동이 있었으며 1712년 옥오재 송상기(宋相琦)의 청액상소를 끝으로 1713년에 녹동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農巖集 卷7 代靈巖儒生請煙村書院賜額疏》 《김경옥, 朝鮮後期 靈岩士族과 書院-全州崔氏家門의 成長과 鹿洞書院의 建立事例-, 湖南文化硏究 제20집, 1991, 36~39쪽》

문곡집 제4권 / 시(詩) 146수

남으로 온 지 네 해 동안 발걸음이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연촌의 사원이 지척에 있는데 한 번도 참배하지 못했지만, 우러르는 마음은 그득하였다. 지금 북으로 옮겨 가는 때를 당하여 입으로 부른 절구 한 편을 최군 선석, 보석 형제에게 보여 주면서 그 구구한 심정을 말하고는 아울러 사원의 여러 선비들에게 보여 주다. 최군은 연촌의 후손이다

〔南來四載 足不出門外 煙村祠院在咫尺 而未展一謁 然其瞻仰則多矣 今當北遷 口占一絶 示崔君宣錫保錫昆季 以道其區區 兼示院中諸章甫 崔君卽煙村後孫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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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학식에 맑은 풍모 소부의 짝으로 / 卓識淸風疏傅儔
높은 이름 길이길이 월출산과 함께 남으리니 / 高名長與月山留
길 잃은 나그네의 슬프고 궁한 걸음은 / 迷塗有客悲窮轍
남은 사당 우러르며 한번 부끄러워합니다 / 瞻仰遺祠更一羞
[주-D001] 연촌(煙村) : 
최덕지(崔德之, 1384~1455)의 호이다. 최덕지의 자는 우수(迂叟) 또는 가구(可久)이고, 본관은 전주(全州)로, 최담(崔霮)의 아들이다.
[주-D002] 소부(疏傅) : 
한나라 선제(宣帝) 때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역임한 소광(疏廣)을 가리킨다. 그가 태자소부(太子少傅)를 지낸 조카 소수(疏受)와 함께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천자와 태자가 그의 빼어난 학식과 풍모를 기려 몸소 황금을 하사했으며, 공경대부들이 동도문(東都門) 밖에까지 나와 성대하게 전별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3 送楊巨源少尹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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