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연촌공 휘 덕지/연촌공과 관련된 서원

崔德之 등의 祠宇에 賜額해 줄 것을 청하는 文獻緯 등의 상소 (승정원일기의내용)

아베베1 2012. 2. 9. 23:53

 19대 조고 연촌 할아버지 자료

  한국사 자료   

 

 조선전기의 초상화 유지 초본이다 보물 594호로 지정  전남 영암에 녹동서원에 보관중이다

 

19대 조고 전주최공 문성공 휘아 문화시중 5세손 예문관 직제학 남원부사 문종조 명신

 휘 덕지   

 

 

 

 

 

 

숙종 38년 11월 19일 (무술) 원본474책/탈초본25책 (27/30)
1712년 康熙(淸/聖祖) 51년

 

 

 

 崔德之 등의 祠宇에 賜額해 줄 것을 청하는 文獻緯 등의 상소


○ 幼學文獻緯等疏曰, 伏以, 尊賢建祠, 士林衛道之至意, 揭虔宣額, 國家尙德之盛典。是以尊之斯有祠, 祠之斯有額, 下必申其懇, 上輒准其請者, 實次第當行之事也。惟我國家, 崇儒重道, 褒德尙賢, 聲敎所曁, 文四行缺然, 此固出於高山景仰之誠, 同得於秉彝好德之天, 而亦莫非國家風厲振作之效, 有以致之也。苟有可尊之賢而不尊, 祠可請之額而不請而賁之, 則不但爲多士之羞, 其爲有慊於聖朝倡導之化者, 豈淺淺哉? 此臣等所以敢陳。故直提學崔德之及其孫忠成, 故領議政臣金壽恒及其子判書臣昌協, 立祠尊祀之大略, 以祈宣賜恩額之典者也。夫四臣事績本末, 固非如臣等晩出蒙士, 所可揄揚其萬一, 而略敍鄕邦之所傳誦, 平昔之所覩記, 以備裁察, 伏願殿下, 少垂省納焉。蓋聞崔德之, 當我世宗時, 歷踐翰苑三司, 而後以南原府使, 退居本邑, 取孟子在心養性之訓, 以名其所居之書樓, 留心正學, 杜門不出。及文宗卽位, 召拜直提學, 奬以純實, 且將貿用, 而上書乞骸, 長往不返。噫, 發軔榮途, 卿相在前, 而芥視富貴, 賁趾丘園, 其高風淸節, 足以立懦廉頑, 而玩書樓三字之扁, 可知其存養之工, 觀聖祖一言之褒, 可得其純實之資, 則其所立之高, 所存之正, 實有遠過於人, 而足爲後來之師範也。抑臣等於此(臣等於此), 又有所感焉。德之之退歸, 在於文廟, 一時名賢, 送行惜去, 見於篇什者甚多, 而六臣之詩若文, 竝在其中, 稱慕企羡之意, 溢於言外, 則德之之於六臣, 可謂合志同方, 而其後國家多故, 六臣者終不免焉, 然則德之之退, 有若見幾知微者然, 此豈常人所可及者, 而至今聞風者, 尙且咨嗟想像, 有所興起, 則其樹立之卓, 有補於世敎, 亦豈下於當日自靖之諸臣哉? 此尤聖朝之所宜亟加褒闡, 不可少緩者也。至如其孫忠成, 受學於四行缺着工向裹四字缺書, 循環誦讀, 微辭奧旨數字缺融解, 而尤用力於朱子全書, 體驗躬行, 以爲一生受用之資。雖以微臣等之蒙陋, 未能窺測其所造之至於何極, 而以其見於外者言之, 平居儼然, 終日矜莊, 而接人應物, 渾是一團和氣, 聽其辭氣, 覿其德容, 莫不心醉而起敬。以故士林歸仰, 望若山斗, 此固遠邇之所同然, 而薰腴所被, 在臣等爲尤深且切, 使窮鄕僻邑之人, 得知學問之根基, 爲人之規範者, 實壽恒之賜也。若乃昌協, 早襲庭訓, 躬服儒行, 亦嘗隨壽恒, 往來于玆邑, 臣等亦嘗得其爲人, 而景服之有素矣。蓋其仕於朝也, 經筵啓沃, 發揮心學, 章奏勤懇, 講明治體者, 莫非學問中流出, 而及其屛處之後, 尤以斯道爲己任, 囂囂畎畝, 矻矻墳典, 潛心於格致誠正之學, 着力於操存涵養之功。刻厲奮發, 眞知力踐, 參訂論辨, 提示幽眇之旨, 造詣成就, 幾臻高明之域。雖其苦心靡改, 確節難拔, 終未得羽儀朝端, 翊贊儒化, 使一世之人, 咸被其澤, 而其有補於世敎, 作範於後學, 則雖謂之儒門之大宗師, 不爲過矣。是以一邑多士, 興敬於想像傾慕之餘, 感發於耳目濡染之地, 協力建祠, 以祀德之於前, 而且以配焉。齊聲倡義, 竝享壽恒於後, 而又以昌協配焉。以伸一方景仰崇奉之意, 而第以遐遠樸愚, 尙未能請額于朝, 使前賢妥靈之所, 不得列於邦家之祀典, 而聖朝右文之化, 不得宣於海嶠之下邑, 此實臣等之罪也。玆敢重繭於百舍之外, 齊籲於九重之下。伏乞聖明, 數字缺察四臣者之德邃學, 淸芬遺韻, 合爲士林以下缺。答曰, 省疏具悉。疏辭, 令該曹稟處。

> 수사관
修史官
正憲大夫工曹判書 集賢殿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臣鄭麟趾
嘉善大夫中樞院副使 同知春秋館事臣金銚
嘉善大夫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 世子左副賓客臣李先齊
通政大夫集賢殿副提學 知製敎 經筵侍講官兼春秋館編修官臣鄭昌孫
通政大夫集賢殿副提學 知製敎 世子左輔德兼 春秋館編修官臣辛碩祖
通政大夫司諫院左司諫大夫 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臣崔恒
果毅將軍虎賁侍衛司上護軍兼知兵曹事 春秋館編修官臣盧叔仝
中訓大夫集賢殿直提學 知製敎 世子左弼善兼春秋館記注官臣李石亨
中訓大夫集賢殿直提學 知製敎 世子右輔德兼春秋館記注官 知承文院事臣申叔舟
中訓大夫藝文館直提學兼春秋館記注官臣崔德之
奉正大夫直集賢殿知製敎 世子右弼善兼春秋館記注官臣魚孝瞻
奉列大夫直集賢殿知製敎 世子右弼善兼左中護 春秋館記注官臣金禮蒙
奉列大夫成均司藝 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臣金淳
通德郞集賢殿校理 知製敎 世子右文學兼春秋館記注官臣梁誠之
通善郞集賢殿校理 知製敎 經筵副檢討官兼春秋館記注官臣李芮
奉直郞守史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臣金之慶
奉直郞守成均直講兼春秋館記注官臣金閏福
承議郞守集賢殿副校理 知製敎 世子右司經兼春秋館記事官臣李宜堪
承議郞集賢殿修撰 知製敎 經筵司經兼春秋館記事官臣尹起畎
承議郞成均注簿兼春秋館記事官臣金命中
進勇校尉行右軍攝副司直兼承文院副校理 春秋館記事官臣趙瑾
宣敎郞守成均注簿兼中部儒學敎授官 春秋館記官臣洪禹治
宣敎郞守承文院副校理兼春秋館記事官臣芮承錫
宣敎郞集賢殿副修撰 知製敎 經筵司經兼春秋館記事官臣尹子雲
宣敎郞司贍注簿兼春秋館記事官臣李孝長
宣務郞守成均注簿兼西部儒學敎授官 春秋館記事官臣李仁全
宣務郞行藝文奉敎兼春秋館記事官臣柳子文
務功郞藝文奉敎兼春秋館記事官臣金孝宇
通仕郞藝文待敎兼春秋館記事官臣金勇
通仕郞行藝文檢閱兼春秋館記事官臣韓瑞鳳
通仕郞行藝文檢閱兼春秋館記事官臣吳伯昌

 

 

  • 여지도서
  • 慶尙道
    • 咸陽
名宦 新羅 令忠 憲德王十四年態川都督 憲昌反脅武珍 完山等州爲己屬完山長吏 崔雄令忠遁走至京告之王卽拜令忠 速含郡太守位級食 원주 崔致遠 致遠寄海印曾希朗詩下題防虜太監天嶺郡太守崔致遠新增 顯廟朝庚戌享于栢淵書院 원주 本朝宋希璟 李次若 崇仁之子 원주 蔡倫 崔德之 曹尙治 鄭從韶 知郡 원주 舊增金宗直 邑人追慕爲立生祠新增 顯廟朝庚戌享于栢淵書院 원주 曹偉新增崔漢侯 勸農興學治化大行邑人進慕立碑官至大司諫 원주 趙宗道 丁酉倭亂收義兵入黃石山城死之 肅廟朝享于安陰黃巖忠烈祠 원주

 

 

  • 여지도서
  • 全羅道
    • 靈巖
壇廟 社稷壇 在郡西門外 원주 文廟 在鄕校 원주 城隍祠 在郡南門外 원주 厲壇 在郡北城外 원주 鹿洞書院 在郡南三里直提學 崔德之俎豆所康熙己巳孫忠成配享甲戌領議政 金壽恒并享辛卯其子昌協配享 肅廟朝癸巳 賜額 원주 忠節祠 在郡南六十里 贈參判 鄭運俎豆所壬辰鄕人立祠 肅廟朝辛酉 賜額 원주

 

 

  • 여지도서
  • 全羅道
    • 靈巖
人物 高麗 崔知夢 初名博涉經史又精於卜筮太祖聞其名使占夢得吉兆曰必將統御三韓太祖喜改名知夢官至 太師敏休配享景宗廟庭焉 원주 本朝崔德之 烟村全州人登文科官至藝文館直提學 文廟朝見機告老而退六臣及一時明公皆作詩送之高其明哲鄕人營立書院 賜額鹿洞 원주

 

崔忠成 德之之孫天資超越見識高明受業於金宏弼讀聖賢書不掇晝夜南秋江所著師友錄極稱美之配享鹿洞書院 원주 崔吉男 德之之後 宣廟丁酉倭亂再逞國儲磬竭吉男以義穀輸納於南原兵賴無飢朝廷褒其功 除典牲

 

  • 여지도서
  • 補遺篇 (全羅道)
    • 完山誌
塚墓 乾止山 諺傳 司空公墓在此 英宗命掘土驗其瑩 堿而無所得遂掘去傍近民塚置監官山直定標禁養方伯守臣恪謹守護以存 崇奉之禮焉 원주 三韓國大夫人崔氏 全州柳氏鼻祖贈掌令 柳濕妻也 원주 在府東城外標石里 원주 懷安大君 芳幹 在府東十里龍進面法史山西麓 원주 政堂文學 李文挺
<하권1027-2>

在府西南三十里伊南面 續龍洞 원주 大提學 崔瀁墓 在府東五十里所陽面 大勝洞 원주 完城君 李伯由 在府西二十里伊東面馬田里 원주 直提學 崔德 在府東二十里所陽面周德里 원주 參判 李瓊仝 在府西南三十里伊南續龍洞 원주 監司 崔弘僴 在府西南五十里伊東面笁山 원주 召募使 李廷鸞 在府南三十里仇耳洞 面長波洞 원주 湖城君柱墓 在府北十里許草谷面乾止山 원주 監司 宋英耉 在府北四十里紆東面塔里 원주 司諫 李興浡 在府西南二十里雨林谷面三山 원주 獻納 李起浡 在府北二十里助村面嶶山 원주 監司 蘇斗山 在府北二十里紆東面山亭里 원주
  • 여지도서
  • 補遺篇 (全羅道)
    • 完山誌卷下
人物名臣 高麗 崔均 自幼力學出郡仁宗朝登第累遷少府主簿時宰相 崔允儀奉旨擇文士詳定禮儀首居其選後允儀臨絡犻薦王授閣門祗侯明宗朝以禮部侍郞兵馬副使擊西京趙位寵柀執遇害贈禮部尙書 원주 崔陟卿 以吏登第毅宗初授京山府判官秩滿還京足不至權門者十餘年後再爲耽羅令累轉監察御史左正言知制誥官至禮部侍郞 秘書監 원주 李俊陽 以淸白達毅宗朝官至平章事 원주 崔甫淳 之子平章事文定 원주 柳光植 風儀環偉淸儉節欲況重寡言高宗朝平章事 원주 柳韶 光植之子性剛亢許可不事産華位至平章事 원주 崔誠之 甫淳四世孫忠宣王時人官至僉議贊成事光陽君謚文簡公 원주 柳邦憲 官至門下平章事貞簡 원주 崔得枰 廉貞自守人皆敬憚官至選部典書致仕歷事烈宣肅三朝而忠宣尤器重之 원주 崔宰 得抨之子忠肅朝登第王以有父風除監察持平忠
<하권1030-3>

惠卽位乃裭其職及王被執如元凡王所設置悉皆更革立都監以宰爲判官歎曰王之失德而非王自爲乃左右逢之耳逢之於前揚之於後吾實恥之稱疾不出恭愍朝封完山君之貞 원주
崔龍甲 擢第一人及第 원주 李資乙 擢第一人及第與崔龍甲俱有文才名 원주 崔七夕 有將師材 원주 崔龍角 改名永濡 侍中 之子櫂壯元爲海州牧使恭愍朝紅巾之亂賊兵犯境殉節後達忠烈祠于海州鵂巖 원주 李文挺 官至政堂文學 원주 崔瀁 晩六 圃隱 鄭夢周甥姪登文科官至寶文閣大提學我 太祖龍興之日退居本府大勝洞享祀于西山祠今廢 원주 本朝崔府 官至判書靖簡 원주 李伯由 文挺之孫開國功臣封完城君 원주 柳義孫 登第官至吏曹判書有文名 원주 李思哲 登第靖灘功臣官至左議政 원주 崔德之 存養堂 太宗朝人登文科集賢殿直提學 원주 崔敬之 登第官至弘文館副提學 원주 李瓊仝 文挺四世孫擢重試官至兵曹參判以文章名於世 원주 李繼孟 墨巖登文枓
<하권1030-4>

官至左贊成日文平 원주
柳軒 登第官至大司諫 원주 柳崇祖 登第官至成均同知 원주 李廷鸞 文科官至府尹壬辰倭亂公先紏義旅常語子弟曰足底黑子汝等宜知之蓋死節之意已定終安全湖詳載名臣錄 원주 宗室湖城君 德源君 之曾孫初封湖城今卜居于本州萬曆壬辰倭寇猝迫都城失守宣祖大王播越龍湾公紏合義旅由海都謁于 行在所倭兵已屯平壤公奮力泣血自請先鋒直向平壤連日摶戰殺賊無數遂奏捷 上大喜進封湖城君錄宣武原從功一等賞賜田全州地 원주 黃璞 武科壬辰亂戰亡錦山事聞 贈兵使旌閭 원주 崔虎 武科壬辰倭亂戰亡錦山郡兵曹參判旌閭 원주 李富永 ■力過人武科宣傳官戊午 天朝有深河之役徵兵 本朝以姜弘立都元師 金景瑞副之領兵赴授金將軍以助防將亦在行中檄公爲偏裨而從馬與賊遇於富車嶺劉都督喬遊擊相繼敗衂姜弘立 金景瑞皆投降惟助防一軍獨當巨寇矢石如雨而畫夜力戰虜兵累却忽狂風大起雲霧四塞砲路旣迷兮
<하권1031-1>

又折勢無奈何而猶且身冒白刃手釰當賊所格殺無數虜遣人誘降公與金將軍罵不絶口虜亦義之嘖嘖稱之曰柳下兩將眞忠臣也募生擒不得能身被十餘創貫賊箭而歿韓忠立 徐福男 崔得宗自軍中脫身而歸細傳其顚未焉遂招溾而歸葬於牧丹洞 원주
宋英耉 瓢翁登第官至慶尙監司光海朝廢 母議起公守正抗義力斥邪論士咸猗重 원주 李興浡 雲巖登文科官玉果縣監 仁廟賓天守制三年贈吏曹參議癸酉以忠節 命旌閭 원주 李起浡 西歸 興浡生員丙寅虜使來公與伯氏抗疏請斬來使丁卯文科爲大同察訪與本方伯及諸員奉審箕子殿公獨不拜及丙子亂公與兄興浡翰林 梁曼容倡率義旅行至淸州遇胡騎公挺釰大喝追斬九級長驅而進未及南漢三十里聞 大駕出城北首痛哭累拜養士春坊終不就陳情曰臣白牌至下大夫皆書大明年號知有大明而巳 顯廟贈都承旨 英宗甲子以忠節 命旌閭 원주 李尙眞 晩庵 府尹 廷鸞曾孫文科官至右議政己巳壼議將廢以原任大臣瀝血抗章被
<하권1031-2>

北靑選入淸白吏 원주
卓祥 壬辰倡義丁酉殉節官至佐郞旌閭 원주 金億萬 武科官至訓鍊院判官壬辰倭亂聞 大駕去邠之報與弟守門將 億熙及其子部將 北望痛哭伏釰赴義幸州之捷斬獲甚多錄宣武原從勳贈左承旨明年庚午 命旌閭 원주 金億熙 億萬弟武科守門將壬辰倭亂與兄赴敵多捷贈兵曹參議以忠節旌閭 원주 金㥧 億萬第四子武科部將以壬辰忠節贈兵曹參判命旌閭 원주

 

 

 

잡지명 삼천리 제8권 제1호
발행년월일 1936년 01월 01일
기사제목 눈물의 寧越이여, 歌談 「端宗哀史續」
필자 玄哲
기사형태 소설

눈물의 寧越이여, 歌談 「端宗哀史續」

玄哲
文宗게옵서 寶體의 靡寧이 날로 沈重하시매 일지 못하실 줄 아시고 그 해 5월 端年 즉 文宗大王게서 5월 14日에 昇遐하섯으니까 도라가시기 아흐래 전날 저녁에 集賢殿 學士들을 모다 잔치를 排設하게 하섯으니 이 잔치는 달은 잔치가 안이다. 文宗게옵서 당신의 千秋後에 나어린 世子 즉 端宗大王의 後事를 다시 한 번 더 付托하시고자 하심이엿음니다. 勿論 昇遐하실 當時에 公式으로 3公6卿과 朝庭 重臣에게 顧命이 잇을 것이나 그러한 公式 보담도 私式으로 마지막 集賢殿 學士들이나 불너서 世子를 付托하시고자 하심은 이 集賢殿 學士라고 하는 것은 世宗大王게서 一國에 才學이 兼備한 靑年 學者들을 모와 後日 國家에 忠良을 만들고자 特別이 設置한 機關이니 君臣間이라도 公的보담 私的으로 父子, 兄弟와 같은 親密이 잇고 世宗, 文宗 兩朝에 잇서 公私를 勿論하고 받은 恩寵으로 <151> 말하면 그 太半이 端宗大王의 後事를 付托하고자 하심이엿음니다.
엇젼 일인지 世宗大王으로 붙어 文宗, 심지어 그 어머님 되시는 顯德王后까지 시라도 臨終 하실 때에 늘 이 端宗大王의 後事를 퍽으나 念慮하시던 일로 보와서라도 결코 偶然치 안타고 볼 수 밖에 없음니다.
이 날 端午를 期約하여 最後로 學士들을 불으시니 其當時 首班으로 鄭麟趾, 申叔舟, 金淑滋, 李孟均, 徐居正, 梁誠之, 魚孝膽, 金礩, 姜希顔, 李石亨, 金守溫, 李季甸, 李芮, 成侃 等과 萬古忠臣인 成三問, 朴彭年, 河緯地, 李塏, 柳誠源, 外, 李甫欽, 權節, 元昊, 崔德之, 奇處, 李孟專, 曹尙治 등 文官이 入侍하엿고 武官으로써는 死六臣의 한 분이신 兪應芓가 叅席하게 되엿음니다.
임군의 봄으로 臣下들에게
賜饌하시는 일은 듬음이 안이라
오늘 저역 모임의 君臣의 잔치는
어리신 世子의 後事를 付托하시는
意味 깊으신 모음이시라
붓는 술잔에 눈물이 어렷고
淸雅한 노래에 哀愁가 잠겻도다
임군의 손을 들어 左右를 돌아보사
文宗 『오늘 밤 이 잔치가 아마도 寡人과 卿들과 今世에서는 마지막 노리인가 하니 所懷가
잇는대로 조금도 謙讓말고 鬱積한 懷抱나 풀어보세.』
하시면서 文宗大王게서 먼저
「임군은 病이 깊고」
「世子는 나이 여트니」
「*人의 千秋後에」
「큰 바람이나 일잔을가」
「어듸서 猛士를 어더」
「四方을 돌여볼고」
朴彭年이 이러서며
목이 메여 하는 노래
「金生廲水라 하니」
「물마다 金이 나며」
「玉出崑崗이라 하니」
「뫼마다 玉이 날가」 <152>
「아모리 女必從夫라 한들」
「임마다 쫓을소냐」
눈물겨워 하는 소래
成三問이 뒤를 이어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蓬萊山 第一峯에」
「落落長松이 되여잇서」
「白雲이 滿乾坤할 際에」
「獨也靑靑 하리로다」
그 소리 끝을 이어
李塏가 이러서며
「가마귀 눈비마자」
「검은 것이 힐야손가」
「夜光 明月珠가」
「밤인들 어더우랴」
「임 向한 一片丹心이야」
「變할손 잇을소냐」
精忠大節의 끌어올으는 마음
하염없는 눈물로 끛을 매지니
밤이 깊어 어너듯 5更이로다
어듸선지 울여오는
無常의 쇠북소리
하염없는 人生의
恨겨운 설음뿐일너라
이렇게 君臣이 모여 하로 밤 뜻잇는 잔치로 밤이 새는 줄을 몰을 동안에 어느듯 東方이 임의 히여질야 함에 모도가 술이 취하고 疲困하므로 鄭麟趾가 이러서 俯伏하며
麟趾 『殿下를 뫼시고 오늘같이 뜻깊은 하로밤을 지내오니 聖恩이 罔極하온지라, 粉骨碎身이 되온들 어찌 臣子로써 오늘 이 밤에 이 일을 잊을 리가 잇겟음니까. 伏願殿下는 臣 등을 믿삽고 寢殿에 듭시게 하심이 좋을가 하옵내다.』 文宗 『오호, 卿은 學士의 首班이요, 世子의 傳師라. 先大王이 특히 卿을 寵愛하시와 世子를 卿에게 付托하신 것이니 泛然할 바 안이나 寡人도 <153> 또한 卿에게 다시 한 번 더 付托하는 것이니 寤寐間이라도 이 말을 잊이마오.』
하시는 눈물겨운 말슴을 남기시고 寢殿으로 듭실 적에 술이 취해서 잠든 學士들에게는 친이 덥흐시던 비단 衾寢을 덥허주섯음니다. 이렇게 臣下를 사랑하시고 世子를 念慮하시던 文宗大王게오서 國運이 不幸해서 그러한 지 그 해 5月 14日에 3公6卿과 重臣들에게 顧命하시고 昇遐하섯으니 端宗大王이 12歲로써 極登하시고 朝庭에 가득찬 어진 臣下들이 물샐 틈 없이 어리신 人君을 도와 善政에 努力하는대 그때에 端宗大王게는 叔王이요. 맛지 되시는 首陽大君에게 휘둘이게 되섯으니 首陽大君이 뜻을 달이 먹고 韓明澮와 權擥 등으로 더부러 첫재로 鄭麟趾, 申叔舟 등을 매수해 가지고 하로밤에 前朝의 忠良之臣 200餘 名을 斫殺하고 端宗大王을 讓位하시도록 하고 首陽大君이 國王이 되시니 이 어른이 世祖大王이시고 해는 乙亥 6月이요. 端宗 4年이며 寶齡이 겨우 15살이올시다. 이 통에 前朝 臣下가 많이 죽엇을 뿐 안이라 兄弟 叔侄間 宗親에 누구를 勿論하고 自己에게 가깝지 못하면 모조리 죽엿으니 大君 중에 第1次로 犧牲된 이가 그 다음 아우되는 安平大君父子분이엿음니다. 乙亥 6月 11日에 形式으로는 讓位라고 햇지만은 其實은 억지로 寶位를 내놓게 하고 端宗大王을 上王이라는 尊號를 드리엿더니 丙子 6月에 死六臣의 復僻運動이 이러나자 鄭麟趾, 申叔舟 등의 主張으로 魯山君으로 降封하고 承旨를 上王게 보내여.
承旨 『傳敎바드시요.』
하므로 上王게서 震怒하시와
上王 『이놈, 傳敎라니 내게 傳敎내릴 사람이 이 天地에 어듸 잇단 말이냐. 괴심한 놈! 빨
물너가거라.』
承旨가 이 말을 듯고 惶忙하여 어물어물하거늘 上王게서
上王 『이 놈 안 갈터이냐. 당장에 목을 빌 놈 같으니 석 가지 못해!』
하시니 承旨도 엇지 하지 못하여 大闕로 도라가서 當時 政府에 이 말을 전하니 朝庭이 다 놀나며 나 어리신 上王이 점점 英敏해 가시매 그 중에도 第一 많이 걱정되는 사람이 領議政 鄭麟趾와 左贊成 申叔舟이엿음니다. 이 두 사람이 웨 第一 걱정이 되는냐 하면 世宗大王게와 文宗大王게 第一 많이 恩寵을 받아왓고 또 第一 많이 幼主 즉 端宗大王의 後事를 付托받은 만치 端宗大王이 점점 英敏해 가신다니까 그것이 큰 걱정이라, 申叔舟가 鄭麟趾를 보고 <154>
申 『大監! 魯山이 나이 들어 갈수록 점점 英敏해가니 그것을 살여 두엇다는 우리에게 무슨
禍가 및일는지 몰으니 어떠케 없세일 道理를 해야 하지 안켓음니까?』
鄭 『글세올시다. 前朝 兩殿게 恩寵을 많이 받은 만치 魯山에게 대해서는 우리 둘이를 미워
하는 사람이 第一많으니 아주 이 禍根을 없이할야면 魯山을 處置하는 것이 第一인대 이 일
에 대해서 3公6卿이 啓本을 올여도 不允하시고 司憲府에서 啓本을 올여도 不允하시며 甚至
於 宗親으로 하여금 啓本을 올여도 不允하시는 形式을 取하시니 그 尊意를 알 길이 대단이
어렵소이다.』
叔舟 『大監 그것을 그리 짐작하지 못하심니까. 우에서도 우뢰같으신 尊意야 없겟음니까마는
私分으로 치면 親 조카이고 그 兄님 되는 文宗이나 또는 그 아버님 되는 世宗大王의 갸럭한
聖君의 元孫으로써 天資가 英敏한 君主를 까닭없이 물이치고 그를만한 罪도 없이 處置한다
는 것이 於心에 무얼하서서 本意이신즉 그러치 안으시나 周圍에서라도 그리자고 하여 不得
已 그렇게 하시는 形式을 짓고자 하심이 分明하니 大監이나 下官이 百官과 宗親을 모도 움
즉이는 한편 무슨 말꺼리 될 만한 事實을 做出해서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두 번에 안되면
세 번, 네 번, 내지 수 십번 수 백이라도 이 일이 끗날 때까지 끛임없이 啓本을 좀 해봅시다
.』
配 麟趾와 申叔舟 사이에 이러한 議論이 잇은 지 얼마 안이 되여서 6月 19日 承旨가 軍資正 金自行과 內侍府事 洪得敬을 다리고 僉知 魚得海는 軍卒 50名을 거나리고 義禁府都事 王邦衍과 한가지 輩도 안인 屋轎를 가지고 와서
承旨 『近日 日氣도 매우 덥삽고 上監게옵서 上王마마를 오래동안 뵈옵지 못하시와 하로 東郊에서 消暢하시고자 御駕를 뫼시고 景福宮으로 動駕하서서 한가지 東郊로 擧動하시자 하옵시와 그대로 알외옵내다.』
上王 『그레…』
하시고 上王의 생각에는 안이가서도 좋을 것이나 요 며칠 전에 70老人되시는 花山府夫人 즉 上王의 外祖母님 되시는 이를 逆謀라는 罪名으로 목을 비인 일이 잇섯음니다. <155> 아모리 罪가 잇다고 하더래도 女子이요. 또 70當年일 뿐만 안이라 王室의 尊視이니 죽일 일이 잇으면 死藥하는 것이 올을 것인대 넘어나 심한 것과 또 宗廟에서 顯德王后 즉 端宗大王 어머니 되시는 이의 位牌를 上王이 보시는 압에서 金礩이가 마당에다가 팽개친 일이 잇서 이렇은 말슴 저렇은 말슴이라도 좀 해볼가 하시는 생각으로 疑心없이 屋轎에 올으시다 막 큰 길로 나가시니까 미리 다 짜농은 일이라 宣傳官이 말을 타고 급히 와서
宣傳 『아뢰옵나이다. 上監에 압서 日氣가 심히 덥삽고 行次에 대단이 괴로우실 뜻하오니 바
로 東大門으로 幸行하옵시면 우에서는 自內로 東小門으로 動駕하시와 길에서 만나시기로 하
시겟다 하옵시니다.』
하니 上王게서도 그를 뜻하시와 東大門으로 한 10里나 나가서도 아모 動靜이 없는지라 多少 疑訝하게 생각을 하시는 중 華陽亭에 이르니 揮帳과 幕次의 施設이 잇는지라 여긔가 王과 서로 만날 곳인가 하시고 當到하시니 意外로 *時 安璐가 혼자 잇서 俯伏奏曰
安 『殿下게옵서 朝庭公論이 上王게옵서 서울에 게시오면 姦慝한 무리들이 亂을 꾸미기 쉽사
오니 이는 宗社에도 쫓이 못하옵고 上王게도 이롭지 못한 일이온즉 얼마동안만 山水가 絶勝
하고 風景이 明媚한 寧越府에 가 게시오면 人心이 安定되옵고 姦輩들이 물너간 뒤에는 다시
서울로 모서 올 것이오니 그리 洞燭하옵시고 平安이 動駕하옵시기를 바라옵나이다.』
하니 일이 임의 이렇게 計考로 속여서 꿈인 것을 그 자리에서 號令하섯자 아모 所用이 없을 것이라 오직 黙黙히 게실 동안에
安璐는 그대로 도라가 버리고
無嚴한 軍卒은 星火와 같이
御駕를 모라서 東으로 東으로
九重宮闕에 자라신 몸이 十里박 길을 몰으시거던
江原道 山골 깁흔 寧越을
꿈인들 생각 하섯을 것인가
三伏의 무더운 해ㅅ빛 밑에서
엿세를 지나 當到한 곳이 <156>
寧越府 西便 淸冷里 山구석
괴딱지 같은 접시집 속에
기우러진 기동 떠러진 窓살
압 山은 이마바지 하게 되엿고
뒤ㅅ뫼는 내려눌여 덜미를 칠 뜻
엇지면 人間의 無常이 이리도 심한가
抑鬱한 가슴을 부더처 않고
一章의 노래로 秋情을 하소연하니
「원통한 새가 한 번」
「임금의 집을 나오매」
「외로운 몸 짝그림자가」
「풀은 山 가운데에 빛이엿도다」
「그짓잠으로 밤마다 잘야고 하여도」
「그짓잠도 잘수가 없고」
「그윽한 恨을 해마다 없에랴 하여도」
「그 恨이 없어지지를 안이하는구나」
「소리는 새벽 뫼ㅅ뿌리에 끊어지고」
「쇠잔한 그림자만 히여잇는대」
「피가 봄 골자구니에 흘으니」
「떠러지는 꼿만 붉어 잇도다」
「하눌은 귀가 먹어」
「이 슲은 하소연을 듯지 못하는대」
「엇지 이 愁心잇는 사람에게만」
「호을로 듯기는고」
이렇게 哀怨 極痛한 歲月도
하로가 가고 잇틀이 가서
丙子年 끗날이오 丁丑年 설이 되니
千萬가지나 얼키인 설음이
더욱 오날 새로워라.
龍袍를 입으시고 하염없이 안지시사
上王 『오호! 오늘 저녁이 丙子年 마지막 가는 날이로구나. 歲月도 참 빨으다.』 (來號續) <157><151-157>

 

 

  • 동사략
  • 紀年東史約卷之十二 朝鮮茅亭李源益 編
    • 本朝紀
丁丑世祖二年
英宗天順後元年
遣使于, 賀帝復位也 원주 明遣翰林修撰 陳鑑等賜錦幣大赦, 遠接使 朴元亨 원주
元亨酬唱若故舊, 臨還執手揮涕, 曰古人有千里神交者, 況累月相從乎,
降封上王爲魯山君, 遷于寧越, 降大妃爲夫人, 流錦城大君 , 國朝寶牒云乙亥降封君顯德王后遷陵誌文云丙子五月遜于外皆誤也 원주
提學 尹士昀因市民金正水言, 宋玹壽 權完 女冊妃時以膢入宮 원주 謀逆命鞫之取服敎, 曰前日宗親百官皆言上王得罪宗社, 不宜安居京師, 予固不允, 欲保初心, 今煽亂之徒, 繼踵不息, 予豈得以私恩不顧宗社之重, 特從群議降封魯山君, 出居寧越, 厚奉衣食以保終始, 乃命僉樞 魚得海率軍護送, 軍資正 金自行, 內侍府事 洪得孜從行, 又遣宦官安璐餞子華陽亭上, 王謂, 曰成三問之謀, 吾知之而不啓是吾罪也, 時, 禁府都事 失其姓名 원주 陪上王至寧越西江淸冷浦, 夜坐曲灘峯上哀而作
<12권01_0499-2>

後人金止男翻聲爲詞 원주 曰, 千里遠遠道, 美人離別秋。 此心無所着, 下馬臨川流。 川流亦如我, 鳴咽去不休。 上王尋移寓於客舍東軒, 諺傳淸泠浦潦水沈沒移于客舍 원주 每登觀風梅竹樓, 夜使人吹笛有詞, 曰月白夜蜀魄啾, 一作月欲低蜀魂啼 원주 含愁情, 倚樓頭, 爾啼悲, 我聞苦, 無爾聲, 無我愁寄語世上苦勞人, 愼莫登春三月子規樓, 一作子規啼明月樓 원주 又, 曰一自冤禽出帝宮, 孤身雙影碧山中。 假眠夜夜眠無假, 窮恨年年恨不窮。 聲斷曉岑殘月白, 血流春谷落花紅。 天聾尙未聞哀訴, 何奈愁人耳獨聰。 時越境旱, 上王焚香禱雨雨, 輒注, 每淸曉袞龍袍翼善冠據榻而坐, 過者皆起敬入謁,
副提學 曹尙治卒,
尙治旣歸終身坐不西向聞上王子規詞, 痛哭賡韻, 曰子規啼子規啼。 夜月空山何所訴, 不如歸不如歸, 望裏巴岑飛欲度。 看他衆鳥摠安巢, 獨向花枝血謾吐。 形單影孤貌憔悴, 不肯尊崇誰爾顧。 鳴呼人間冤恨, 豈獨爾, 義士忠臣增慷慨, 激不平屈指難盡數, 臨歿自題一頑石, 日魯山副提學 曹尙治之墓, 又自序, 曰魯山朝者明非今日之臣也,
<12권01_0500-1>

不書資階者, 著其不能濟君之罪也, 書副提學者, 以其不沒實也, 書逋人者言其亡命逋逃之人也, 囑其子樹之墓, 子孫畏禍埋之,
巡撫 宋侃復命于寧越,
, 官嘉善, 受上王命巡撫南方, 將還, 聞上王遜于寧越, 直入寧越, 復命辭歸, 痛哭失聲, 守校愕然欲收之, 有老吏私謂校, 曰君當謹所守而已, 奈何欲禍人乎, 守者乃止, 遂徑還礪山, 杜門絶世事, 及凶聞至, 走入窮山, 哭盡哀服喪三年, 隱於興陽 馬輪村山亭後十餘年, 家人跡而得之, 或縱酒大醉, 狂走岐路, 或登臨山水大哭, 人皆目之爲狂, 自號西齋, 携兩弟以終土人稱其地, 曰西齋洞, ○時, 有宮奴禿同典農寺奴尹生者, 持西瓜胡桃謁上王於越, 刑曹執之, 當斬, 上只命杖治之,
集賢校理 具人文, 覲上王于寧越,
人文睡翁, 與崔恒 朴彭年爲道義交, 擢科至集賢校理, 文宗嘗夜宣醞, 命賜貂衾, 侍寢殿側其寵遇如此, 及上受禪, 人文成三問議出處三問欲從仕人文, 曰我則自廢矣, 未幾, 忤旨外補, 遂投紱歸海美舊廬, 托靑盲非相, 則足, 不出戶, 語家人, 曰時淸我眠方開, 一日三問洪州來訪夜飮, 鴈一句詩, 曰誓將心裏鐵鑄得袖中椎。 人文沈吟不答, 三問, 曰怖死耶, 人文喟然太息, 曰天象人事吾察之審矣, 一死不足恤,
<12권01_0500-2>

其如事敗則禍吾, 君何哉, 三問遽曰吾醉矣, 遂罷及六臣死, 人文仰天歎, 曰求仁得仁亦何尤乎, 至是, 托病愈堅, 然時稱浴溫泉, 獨携小奚童出經月, 乃還, 顔貌瘁甚, 戚戚有不可掩者, 家人默揣其往覲越中而終不自言, 後人名之, 曰杜門洞,
錦城大君 議擧兵事覺賜死, 革順興府分屬基川 榮川 奉化三邑,
錦城順興府使 李甫欽, 大田掌令老而飛文 원주 嘗慷慨流涕, 議復魯山, 賜金頂子珊瑚纓, 曰主辱臣死, 予豈忍坐而待死, 使之草檄, 曰姦臣用事誘掖宗親, 放默主上, 社稷傾覆, 今同心匡救, 神祗監玆, 將發順興兵迎魯山踰嶺會有官奴潛聽之, 因侍女竊檄走京師, 基川縣監 金孝洽聞之疾逐奮其檄上變, 甫欽知事露亦馳啓上, 乃遣少尹, 尹慈等按治賜錦城死, 盡誅黨與竹溪水爲赤, 錦城初繫獄一日, 裸身挺出不知所在, 一府大擾, 忽又自至, 曰我若逃避, 汝不得追矣, 然衆人死不如一人死也, 談笑自若, 整衣冠據胡床而坐, 金吾郞要拜殿牌錦城曰吾君在寧越遂東向慟哭四拜, 已飮藥未殊乃縊殺之, 甫欽坐單檄被誅, 錦城嘗與南中義士議事於府前銀杏樹下及事敗焚其樹民謠之曰順杏復順興復順興復魯陵復後百餘年杏樹忽⊙蘖而邑復又百年餘魯陵復位邑人設壇樹下祭錦城及同死諸人○正宗御製祭錦城大君曰讀魯陵誌不涕非人死六生六爲臣盡臣奮于宗英錦城烈烈魯衛之親夷齊之節投荒賦鵬大嶺之南黃昏望美百粵巉巖珊瑚長纓鹿盧短鍔誰我從者與之偕作太守嚮慕有甲藏服灑血爲書月晦星蒙禍迫速獄變起屬垣非昧曆數又知吾君整衣拜訣不西而東始起於忠義竟死於鳥叫望帝草緣王孫鳴鳴竹溪長統雲旙 원주

<12권01_0501-1>

十月 二十四日 원주 , 魯山君卒, 時春秋十七在位三年在上王位二年葬于郡北冬乙旨洞 원주
一本作王室之胃幼也之辟適丁一否運遜于僻邑
錦城被禍, 廷議朋興申叔舟乃獨啓, 曰去年李塏等以魯山爲名, 今亦欲挾魯山倡亂, 魯山君不可安居也, 政府宗親繼之, 至是, 賜死, 禁府都事 王邦衍持藥到寧越, 踧踖不敢入府, 隷促之邦衍不得已入, 伏庭中, 魯山君具翼善冠袞龍袍出御堂中, 問所以來, 邦衍不能對魯山君顔色不變, 乃, 曰予無受旨處不可下庭, 汝來殺我, 邦衍等不敢仰視, 有一貢生常待側者, 請自當之, 以一條弓弦繋頸, 從座窓穴引之, 繩不足繼以布帶以縊之, 貢生行未出門九覈流血卽斃 원주 卽酉時也, 或云魯山錦城敗自盡此當時權臣奸媚之筆癸酉丙子實錄類如此 원주 雷雨大作, 咫尺不辨, 人物烈風拔木, 黑霧彌空, 徑夜不散, 時侍女從人爭投郡之東江, 浮屍滿江, 後人名爲落花巖○越郡諺傳村氓以事入官路遇魯山乘白馬螣蹋向東谷去氓伏謁道傍問官家將向何處魯山顧謂曰吾將往太白山矣氓拜送入官則已遇變矣 원주 戶長嚴興道往來獄街, 哭泣修棺, 官奴適作棺畏火置郡獄取而用之 원주 翌日率吏民營葬于冬乙旨, 興道族黨懼禍爭止之, 興道, 曰爲善被禍吾所甘心
<12권01_0501-2>

或云魯山被害復沈于江玉體泛泛洄洑去而復還十指如玉浮于水面陪吏 逸其名 원주 家有漆棺乃潛收玉體殮而葬之未幾又有昭陵之變命掘而沈之江吏不忍掘佯若掘去而還掩之或云被害之初棺殮不具只藁草爲殯一日有年少山僧來哭甚哀自言有通名蒙恤之分留連數日一夕負屍而逃一云焚之山谷一云投之江中今之陵臺謂之虛葬也未知孰是自後郡守相繼暴死傳爲凶地郡守 朴忠元具奠物以祭之其夜死而復甦祭文曰仁明之主 王室之胄適丁否運遜于僻郡 一片靑山萬古冤魂庶幾降臨式歆苾芬從此無患邑人有吉凶禍福皆就祀焉○魯山君夫人宋氏願處東郊, 瞻望魯陵, 自朝家營室于東門外, 號英嬪夫人別構草屋, 永美亭洞 원주 素衣素食, 以終天年, 初申叔舟以功臣請受夫人爲婢, 上靳之,
宋玹壽, 鄭悰, 流漢南君⊙, 永豐君 , 等尋卒,
臨瀛大君 鄭昌孫, 曰⊙ 玹壽同罪, 不可獨生, 鄭獜趾亦疏請之, 乃命絞玹壽, 流⊙皆死謫中, 時被死人崔沔 李方貞 朴閏 金得誠 李祥孫 權完 李貴 金印平 柳岱 尹奇 金得祥 吉由
<12권01_0502-1>

崔璨 曹熙 徐盛 金謙 許遂 洪九成 汝玉峯 崔永孫 崔白滌 陳有蕃 趙由禮 睦孝智 成文治 李聞禮 李敬 申之益 申之仲 申之謹內官嚴自治竝載東鶴寺魂記○初尙文宗女敬惠公主寧陽尉時主少國疑人心憂畏以懿親爲上王所倚重及被禍公主從謫流離困阨而無怨誹色婦道益虔生男以生女告提絜遣孤哀毁盡節貞憙王后聞公主實有男將入宮中私自養育年七歲嬉戱宮中上問之后曰文宗血屬只有此兒敢率來私育上置膝上噓唏流涕名曰眉壽於是遣使迎公主于光州賜宅一區睿宗嘗曰敬惠公主之子豈可以亂臣子論也眉壽官至贊成慱雅好古望重於世魯山夫人屬後事眉壽世奉祭祀魯山忌辰忽有聲怳惚言餠盡矣卽更備餠以薦又嘗薦杮婢故落一顆令兒拾啖婢忽拘攣自伏庭中良久乃甦曰有王者具袞冕坐使人綁縳而責之解衣肩臂有鐵索痕云 원주
和義君 卒于益山,
東當作束 綱當作剛
, 自魯山遜位和義君每獨居涕泣沾襟, 時宰聞之, 皆欲殺六臣事發, 上問此輩可置法乎, 和義君不對, 及錦城死, 乃爲魯山疏, 辨語多不諱, 遂得罪竝三子廢
<12권01_0502-2>

錮謫益山, 禁防甚密, 墻外設鹿角墻, 內掘井取給, 外人不得通, 竟瘐死, ○成聃壽眉叟, 與成三問同祖, 石瑢父熺校理丙子酷受刑訊, 閉口不言, 謫金海, 廢錮聃壽足跡一不及都門, 有至性高識, 旣隱居不以世族自著, 從子夢井按道物色求之茅屋, 蕭然土床, 無席遺之席, 却不受, 曰此不合貧賤家也, 時罪累子孫, 或有就職, 聃壽竟不起, 釣魚江上, 悠然自適, 嘗有詩曰把竿終日越江邊, 垂足滄浪困一眠。 夢與白鷗飛海外, 覺來身在夕陽天。 ○金時習悅卿梅月堂, 或東峯, 碧山 淸隱 淸寒子, 生八月語遲而神警臨文, 口不能讀意, 則皆曉, 人號神童, 世宗召致政院試之, 曰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應聲, 曰聖主之德, 黃龍翻碧海之中, 賦三角山詩, 曰 東 聳三峯貫太淸, 登臨可摘斗牛星。 非徒岳峀興雲霧, 能使王都萬歲寧。 上, 曰欲親引見, 恐駭人聽直韜晦, 敎養待年長成, 就將大用, 賜帛五十疋, 使自運遂各綴其端曳之而出, 於是聲振一國稱, 曰五歲而不名, 二十一讀書三角山聞, 魯山遜位, 閉戶不出者, 三日, 乃大哭, 盡焚其書, 發狂陷于溷廁, 而逃之緇門, 僧名, 雪岑, 爲人貌瘦身短, 豪邁英發, 簡率勁直, 傷時憤俗, 氣菀不平, 自度不能隨世低仰, 遂放形骸遊方之外, 域中山川足跡殆遍, 聰悟絶人,
<12권01_0503-1>

不俟傳授而通貫文籍, 凡世間人事之得失是非貴賤死生至於性命, 理氣陰陽, 幽顯可知而言者一寓於文章, 故其爲辭也, 水湧風發, 山藏海潏, 神倡鬼酬, 聞見層出, 雖少玩索存養之功, 橫說竪論不失儒家宗旨, 自以聲名早盛, 而一朝逃世, 心儒跡佛, 故作狂易之態, 以掩其實, 有欲受學者逆擊以木石, 或彎弓將射, 以驗其誠, 喜開山田, 雖綺紈家臾, 必役耘穫, 以是鮮終始傳業者, 好白樹題詩, 諷詠良久輒哭而削, 或刻木爲農夫形置案側, 熟視亦哭而焚之, 見除目非人望, 則必哭, 曰斯民何罪。 時金守溫 徐居正皆待以國士, 居正方趨朝, 時習衣藍縷帶索遇諸市, 仰首呼, 曰 綱 中 居正字 원주 安穩, 居正駐軒笑語, 一市駭視守溫知館事, 以孟子梁惠王論, 試諸儒, 時習聞之笑, 曰非此老不出此題, 乃走草成篇, 曰試瞞此老, 守溫讀未終遽問, 曰悅卿近住何寺, 其論大略以爲梁惠僭王, 孟子不當見云, 年四十七爲文以祭祖父, 曰罪列三千不孝爲大, 沈滯異端末蹃方悔, 遂娶安氏女爲妻, 放曠如舊一日, 見領相 鄭昌孫過市, 大呼, 曰彼漢宜休, 人危之絶交, 與南孝溫, 宗室貞恩安應世, 洪
<12권01_0503-2>

有孫爲方外交, 孝溫問我所見何如, 曰穴窓窺天君則何如, 曰廣庭仰天, 妻沒復還山作頭陁形, 喜遊江陵 襄陽間, 答襄陽柳自漢書, 曰其三歲能綴文, 作桃紅柳綠三月暮, 珠貫靑針松葉露等句, 五歲讀中庸 大學李季甸門下, 政丞許稠, 曰余老矣, 以老字作句某應聲, 曰老木開花心不老, 許擊節歎賞, 曰此神童也, 旣而心事相違顚沛之際, 世宗顯陵相繼賓天, 故舊喬木盡爲鬼簿, 而異敎大興, 斯文凌蔑, 某之志已荒凉矣, 遂伴髠者遊山水, 然不欲以異道顯世, 故光廟屢召而不就, 處身益以疎曠, 使人不齒, 呼牛呼馬皆便應, 又聖上登極用賢從諫, 冀欲筮仕十餘年前, 復於六籍, 溫熟稍精。 而屢見身世相違。 如鑿枘孰知余之素志, 故復放浪於山水間矣, 將製長鑱, 用斲苓朮, 萬樹凝霜修仲由之縕袍, 千山積雪整王恭之鶴氅, 與其落魄而居世, 孰若逍遙而送生云, 居中興寺最久, 每雨後山水添流坐湍急處, 沈吟作詩, 或律或絶, 五言古風, 書于葉, 放流且書, 且放葉盡, 乃還, 申叔舟以同抱之友, 聞其入城使其主人勸酒醉臥, 輿入於叔舟之室, 酒醒知其見欺驚起欲去, 叔舟
<12권01_0504-1>

其手, 曰悅卿何不一言耶, 乃出太公, 子陵二叟鈞魚圖示之, 時習作詩, 云風雨蕭蕭拂釣磯, 渭川魚鳥已忘機。 如何老作鷹楊將, 終使夷齊餓採薇。 桐江江上釣烟波, 生計蕭條一箇簑。 漢殿若無星象動, 千秋定不累名加。 仍緘口絶裾而去, 自是踪跡益秘, 喉音淸禁能出商聲, 皓月中骨每詠楚騷, 一過輒淚下, 醉則曰不見我英廟, 流涕甚悲, 後入金鰲山作新話藏石室, 曰後世必有知岑者皆述異寓意也, 又作元子虛夜遇錄弘治癸丑終于鴻山無量寺, 遺戒無燒葬權厝寺側, 三年啓殯面如生, 以爲佛竟茶毗之畵老少二像自贊, 曰爾形至藐, 爾言太侗, 宜爾置之邱壑之中, 縣宰沈宗直始建閣安像名曰節義祠扁以淸風後移其閣於鄕校傍李滉梅月別是一種異人近於索隱行怪以所値之世適然遂成其高節耳 원주 趙旅主翁漁隱, 上受禪時在太學, 登明倫堂揖諸生歸隱于伯夷山下, 謝絶人間事, 日用事爲動循天, 則不露痕跡, 不欲人知之, 客至啖蔬糲, 所與言非桑麻是野談, 鄕人知有孝友之行, 而其篤學蘊中人無得以稱焉, 嘗自卜於鼎巖江上, 曰江水絶, 吾子孫乃亡, 又, 曰吾子孫當世居
<12권01_0504-2>

院北若衰替移五峯相對處可大昌, 咸安有書院李孟專 元昊 金時習 成聃壽 南孝溫并享賜額, 世稱六臣生者, ○李孟專伯純, 號耕隱, 金宗瑞之死以司諫退老網障村, 托以盲聾謝絶親朋, 雖家人妻子莫能測識, 惟與金宗直友披露心曲, 應答無礙, 曝穀爲鷄雀啄盡而任其攤棄。 卒終。 ○權節端操栗亭, 膂力絶倫, 慱通群書, 爲集賢校理, 世祖知有文武大才, 日, 臨其第杯酒款, 密屬以大事, 節輒稱醉聾終不對。 及受禪除僉知 監司皆不應, 遂謀出處于從子, 爲鞱晦之術, 托以狂易見人輒稽首。 曰干戈息肩。 國家太平。 聖主萬年。 手書格言, 敎子孫七十三卒。 ○元昊 原州人, 子, 自其謝病歸鄕里, 與世相絶, 及魯山遜位就越之西。 築室名以觀瀾, 或臨流嘯詠, 或閉戶著書。 晨夕瞻望涕泣, 以寓戀君之忱, 魯山被害, 服方喪三年, 制畢歸原州舊廬, 卽霧巷 원주 不出戶庭, 後又入酒泉縣山谷中, 從子判書 孝然屛徒御踵門請見堅不許。 上除戶曹參議召之, 以死自擔不應命, 坐必東向臥必東首以終焉, 蓋以寧越在舊居之東也, 其孫叔康以史官直筆被禍, 遂取平生著述及疏章, 盡焚之, 且戒其諸子勿讀書求名利,

 

崔德之烟村 迃叟, 歷翰苑 玉堂, 以南原府使
<12권01_0505-1>

退居靈巖 永保村, 扁其室, 曰存養, 癸酉之亂, 國家多故, 炳幾保身, 世稱明智, 謂之烟村霧巷, 比六臣較高者固也, ○尹譓, 以禮曹郞棄官入山, 臨終書忠孝二字屬其子, ○柳自湄 曼殊曾孫, 文科至監察, 禪授之際, 走入首陽之神光寺。 晩移西山, 遺誠治喪勿用浮屠法, 且, 曰吾不能死於君, 勿葬先人側也, ○申末舟 叔舟弟, 有文學, 靖難後超遷至大司諫, 然常悒悒不樂, 遂棄官歸淳昌。 自號歸來亭。 上以叔舟故亦不之罪, ○趙崇文 副正 子, 武科至節度使, 子哲山成三問爲中表, 及上王遜位, 崇文哲山, 曰事已至此, 惟有一死而已, 語及時事相對涕泣, 與六臣同謀事覺被禍, ○李啓基玄山, 禪授後遞交河守, 歸常騎牛佩酒上下山谷, 使女僮引道, 男僕撞錚, 曰病自如此, 自己丑以後一意改之, 曰病已愈矣, 南孝溫記其事, ○洪勻士族人。 少以武士屬內禁衛, 上王遜位後, 忽得狂易疾丏乞於市, 得酒一甁則歸, 不滿必劫市婦而足之, 然取一掬而止, 約一酒家日必一往, 醉輒唱歌, 還家如是者十餘年, 短褐不掩脰, 人皆稱洪丏子, 類穢跡, 潔身之爲而人莫之知也,

<12권01_0505-2>

李仁孫右議政, 仁孫集後孫沈毅剛果諳錬舊典有五子克培 克墩 克增 克均 克堪皆貴顯 원주
○世子卒謚懿敬, 時春秋二十 원주 世子偶因感冒失和, 移處上之舊邸, 上亦移御親視醫藥, 命申叔舟同議及病亟, 玉顔如平生而氣息已盡, 上曰脩短命也, 其嗣皆幼, 不可不傳其貌以遺之, 召畵師崔涇 安貴生。 占分寸草圖而藏之, ○或說上一日酣寢夢見顯德王后挺劍至, 曰奮國足矣, 殺吾子何也, 卿有天命雖不可犯當殺卿子, 卽走東宮, 上驚悟時世子暴中惡已無及矣,
顯德王后爲庶人遷昭陵。
鄭獜趾等言。 顯德王后母及弟自愼謀及伏誅, 其父已追廢爲庶人, 六臣被禍時使自愼通于其母俾達於上王故母子被刑追廢其父 원주 魯山君已降封, 其母不宜尙保名位, 請廢爲庶人, 改葬從之, ○初, 昭陵夜半有婦人哭聲自陵中出云。 將壞予室, 予將疇依, 聲動村里, 未幾遷陵, 先剖石室, 欲曳出梓宮, 重不能勝, 人皆憂懼爲文祭之, 乃遷動暴置數日, 以民禮收葬,
海陽大君 , 明照初字平甫 원주 爲世子, 貞憙王后誕生時春秋八歲 원주

<12권01_0506-1>

申叔舟右議政, 兼典文衡, 議政文衡始此 원주 ○祀圜邱, 賜酺受賀,
初, 東方白檀君感生祭天, 以報本, 祭天壇在摩尼山 원주 而麗羅濟及高麗皆因襲, 太祖築圓邱於南郊, 祀天檮雨, 太宗亦祈穀於圓邱, 旋以非天子不得祭天罷之, 會天旱, 人有言秦在西故只祭白帝, 我國在東亦宜祭靑帝, 卞季良亦言檀君自天而降, 非天子分封之地, 高皇帝亦知我國之祭天, 許以議從本俗法守舊章, 蓋謂海外之國始受命於天也, 太宗從其言, 復祀, 世宗時議者終以爲不便罷不擧者有年, 至是。 上深納梁誠之郊天享帝之語, 決意復祀, 命有司具儀註以冕服行祀, 如儀受百官賀, 賜諸道大酺三日, 行君臣同宴禮,
領議政 鄭獜趾上疏乞骸骨, 不許, ○慶尙道進嘉禾却之,
時, 上謂諫官, 曰予卽位以後言官不得盡言, 一則以予備嘗艱厄, 民之疾苦言之不介意, 一則以予好佛言之必怒, 一則小事言之必, 曰瑣瑣, 一則以予有嚴威言之恐罪, 以此進退商量不能展職, 予知其弊久矣, 言官宜知無不言, 有以體君安民爲慮, 又謂史官 金利用, 曰予之先, 史官亦言之對, 曰規諫非小臣之任也, 上, 日史官失言矣, 命罰以酒, 今後講武, 史官必備二員。 從實詳記, 承旨等亦須記之, 我國記事之文, 不及中國, 但求不爽實而已, 工拙不必論也,

<12권01_0506-2>

可疑
群臣上尊號, 曰承天體道烈文英武, ○始令注書記注, ○定宗臣封爵之制, 以顯祿以下爲階 원주 ○常參時 陳刑名以爲例, 小交龍旂一纛一五衛旗五大角一小角一招搖旂一皆忠義奉持角則吹螺赤 원주 ○纂國朝寶鑑東國通鑑,
竝命申叔舟撰成, 又改五禮儀, ○時, 印大藏經陝川海印寺, 遣敬差官 尹贊董其役, 令各道伯, 助其費印, 五十件分藏名山巨刹, 紙凡三十八萬八千九百餘帖,
親試取姜子平等十三人, 別試取吳凝等十三人, 重試取李永垠等二十一人, ○以崔恒大提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