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산행 /2012.6.5. 수락산 산행

2012.6.5. 수락산 산행

아베베1 2012. 6. 5. 16:38

 

 

 

 

 

 

 

 

 

 

 

 

 

 

 

 

 

 

 

 

 

 

 

 

 

 

 

 

 

 

 

 

 

 

 

 

 

 

 

 

 

 

 

 

 

 

 

 

 

 

 

 촌은집 ( 村隱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村隱集
판심제  村隱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07年刊
권책  3권 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14.9(㎝)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726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55
 저자
성명  유희경(劉希慶)
생년  1545년(인종 1)
몰년  1636년(인조 14)
 應吉
 村隱
본관  江華
특기사항  朴淳, 南彥經의 문인. 白大鵬과 함께 風月香徒로 불림
 가계도
 劉道致
 
 劉業仝
 
 裵氏
 
 劉希慶
 
 許氏
 
 劉舜民
 譯官
 劉禹民
 
 劉聖民
 
 劉士民
 
 劉逸民
 寧國原從勳
 劉希雲
 

기사전거 : 墓表(金昌翕 撰), 行錄(南鶴鳴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인종 1 1545 을사 嘉靖 24 1 2월 27일, 서울 大廟洞에서 태어나다.
명종 12 1557 정사 嘉靖 36 13 부친상을 당하다. ○ 여묘살이 중 水落山 선영을 오가던 南彥經의 눈에 띄어 후의를 입다.
명종 14 1559 기미 嘉靖 38 15 삼년상을 마치고 남언경에게 「文公家禮」를 배우다. ○ 모친이 이후 30여 년을 병석에 누웠는데 지성으로 봉양하다.
~ ~ ~ ~ ~ ~ ~ 思菴 朴淳에게 唐詩를 배우다.
선조 6 1573 계유 萬曆 1 29 楊州 牧使로 부임한 남언경을 도와 趙光祖를 위한 道峯書院을 건립하다.
~ ~ ~ ~ ~ ~ ~ 扶安邑을 놀러갔다가 名妓 癸生(본명은 香今, 호는 梅窓, 1573~1610)을 만나 풍류로 더불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48 왜란이 일어나 宣祖가 西幸하자 義兵을 모집, 賊勢를 정탐하다. ○ 친구인 書吏 白大鵬이 戰死하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50 宣祖가 공로를 듣고 하교하여 포상하다.
선조 34 1601 신축 萬曆 29 57 淨業院 하류에 ‘枕流臺’를 짓고 시를 읊으며 자적하고, 호를 ‘村隱’이라 하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65 詔使가 잇따라 나와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五部 부녀자의 반지를 거둬 충당케 하다. 이 공로로 通政大夫에 오르다.
광해군 7 1615 을묘 萬曆 43 71 柳夢寅이 〈劉希慶傳〉을 지어 칭송하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74 李爾瞻이 廢母論을 일으켜 五部의 父老들에게 상소하라고 위협하였으나 따르지 않다. 이 일로 평소 친숙하였던 그와 절교하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79 完平府院君 李元翼이 공의 절개를 아뢰자 인조가 가상히 여겨 嘉善階로 올려주다. ○ 6월, 畫工 李澄에게 부탁하여 〈林莊圖〉를 그리고 李好閔, 柳根 등에게 詩와 序를 청탁, 詩軸을 만들다. ○ 疎菴 任叔英의 喪에 옷을 벗어 염습해 주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80 사대부의 요청으로 함께 金剛山을 유람하다.
~ ~ ~ ~ ~ ~ ~ 永安尉 洪柱元의 잦은 방문을 받다. 그때마다 仁穆大妃가 酒饌을 내리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87 老人階로 嘉義大夫가 되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92 2월 6일, 졸하다. ○ 도봉서원 동쪽 楊州 莊義洞에 장사 지내다.
인조 24 1646 병술 順治 3 - 아들 劉逸民이 沈器遠 역모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寧國原從功臣에 봉해지고, 저자에게 資憲大夫 漢城府判尹이 증직되다.
~ ~ ~ ~ ~ ~ - 아들들이 芸閣 활자로 문집을 간행하다. (竹西病夫의 跋)
숙종 24 1698 무인 康熙 37 - 金昌翕이 묘표를 짓다.
숙종 31 1705 을유 康熙 44 - 洪世泰가 묘지명을 짓다.
숙종 33 1707 정해 康熙 46 - 증손 劉泰雄이 목판으로 문집을 중간하다. (金昌協의 序)

기사전거 : 墓表(金昌翕 撰), 墓誌銘(洪世泰 撰), 行錄(南鶴鳴 撰)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생전에 자신이 지은 詩 수백 수를 韓平公 李慶全에게 보여 주면서 刪定을 부탁하고 序(引)를 받아 1628년 1권의 시집으로 정리해 두었다. 이것을 저자의 사후에 여러 아들이 芸閣 活字를 써서 인출하였다. 《초간본》
그 뒤 저자의 손자 劉自勗이 저자와 여러 문인의 唱和詩를 모은 枕流臺錄과 林莊圖題詠을 합하여 다시 1권의 詩稿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과 초간본 1권의 시집을 합하여 金昌協에게 산정과 편차를 부탁하였다. 여기에 다시 저자 생전에 柳夢寅이 지은 〈劉希慶傳〉, 劉自勗의 부탁으로 金昌翕이 지은 묘표와 南鶴鳴이 지은 행록, 劉自勗의 아들 劉泰雄의 부탁으로 洪世泰가 지은 묘지명, 李敏求의 「東州集」에 실린 기사를 전재한 遺事를 합하여 부록 1권으로 묶어 1705년경 3권의 繕寫本으로 만들었다. 그 뒤 劉泰雄이 湖南의 萬戶로 나가게 되자 간행을 도모하여 1707년에 3권 2책의 木板本으로 간행하였다. 《중간본》
현재 초간본은 전하지 않으며, 중간본이 규장각(奎7263)과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07년 간행된 중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金昌協 撰), 引(李慶全 撰), 跋(李植, 竹西病夫 撰)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3권 2책으로 되어 있는 詩集이다.
권수에는 1707년에 쓴 金昌協의 序와 1628년에 쓴 李慶全의 引이 실려 있고, 목록은 없다.
권1에 실린 詩는 오언절구 13題, 육언절구 2題, 칠언절구 96題, 오언율시 49題, 오언배율 5題, 칠언율시 37題, 오언고시 3題로, 詩體別 분류에 저작 연대순 편차이다. 저자의 시를 편차한 바 있는 李慶全은 ‘淸高疎暢하여 옛 唐人의 調格을 잃지 않았다.’고 하였다. 律詩에 특히 능한 것으로 평가된다. 내용에는 〈懷癸娘〉, 〈贈癸娘〉 등 소싯적에 풍류를 함께 하였던 梅窓 癸生과 나눈 시가 여러 수이고, 각지의 산수를 유람한 편력으로 〈叢石亭〉, 〈登正陽寺天逸臺〉 등 金剛山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 淸平寺, 龍門寺, 中興寺 등의 사찰과 息影亭, 練光亭, 淸溪書齋, 金陵菊村 등을 읊은 시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道峯書院과 그 근처의 寧國洞, 牛耳洞, 枕流臺 등을 노래한 것도 많다. 권말에 李植이 1628년에 쓴 跋이 있는데, 저자가 생전에 자신의 詩集을 보여 주고받은 글로서 「澤堂集」에는 〈村隱詩集小引〉으로 실려 있다.
권2는 附錄으로, 柳夢寅이 지은 傳, 金昌翕이 지은 墓表, 洪世泰가 지은 墓誌銘, 南鶴鳴이 지은 行錄이 있고, 李敏求의 「東州集」 斲輪錄에 실린 시가 遺事로 수록되어 있다.
권3은 枕流臺錄이다. 枕流臺는 淨業院 하류에 지은 臺로서, 저자와 여러 문인이 수창한 詩와 記, 序들을 편차해 놓은 기록이다. 記序에는 任叔英, 李睟光, 曺友仁, 成汝學이 지은 〈枕流臺記〉 4편을 비롯하여 金玄成의 〈贈枕流主人序〉, 曺友仁의 〈遊枕流臺序〉, 지은이 未詳의 〈題枕流臺記後〉가 실려 있다. 酬唱詩에는 疎菴 任叔英의 序가 실려 있고, 任叔英, 車天輅, 李睟光, 申欽, 李達, 洪慶臣, 柳永吉, 李安訥 등과 차운한 시가 있다. 이어 1617년에 쓴 栗園과 李植의 後序, 1625년에 쓴 李埈의 후서가 실려 있다. 酬唱詩續錄에는 李植이 쓴 〈枕流臺賦詩圖序〉를 비롯하여, 李植, 嚴惺, 李昭漢, 韓興一, 呂爾徵, 李景稷, 洪瑞鳳, 崔鳴吉 등과 차운한 시가 있다. 이어 〈寧國洞林莊圖題詠〉이 附記되어 있는데, 1623년에 畫工 李澄에게 부탁하여 林莊圖를 그리고 李好閔, 柳根 등에게 詩와 序를 청탁, 詩軸으로 만든 것이다.
권미에는 1705년에 쓴 竹西病夫의 跋이 실려 있는데, 重刊 때 쓴 것이다.

필자 : 金圻彬

 매월당집 ( 梅月堂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梅月堂集
판심제  梅月堂詩集
간종  활자본(改鑄甲寅字)
간행년  1583年刊
권책  詩集 15권ㆍ文集 8권 합 9책
행자  10행 18자
규격  26.4×16.9(㎝)
어미  上下三葉花紋魚尾
소장처  日本 蓬左文庫
소장도서번호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3
 저자
성명  김시습(金時習)
생년  1435년(세종 17)
몰년  1493년(성종 24)
법명  雪岑
 悅卿
 梅月堂, 東峯, 淸寒子
본관  江陵
시호  淸簡
특기사항  南孝溫ㆍ安應世ㆍ洪裕孫 등과 교유
 가계도
 金元侃
 郞將
 金日省
 忠順衛
 仙槎張氏
 
 金時習
 
 南氏
 訓鍊院都正 南孝禮의 女
 安氏
 

기사전거 : 世系圖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세종 17 1435 을묘 宣德 10 1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나다.
세종 21 1439 기묘 正統 4 5 李季甸 문하에서 「중용」ㆍ「대학」을 읽다. ○ 세종의 부름을 받고 〈三角山詩〉를 짓다. 詩才를 인정받아 비단 50필을 하사받다. ○ ‘五歲童子’로 불리다.
세종 29 1447 정묘 正統 12 13 金泮ㆍ尹祥에게 수학하다.
세종 31 1449 기사 正統 14 15 모친상을 당하다.
~ ~ ~ ~ ~ ~ ~ 訓鍊院 都正 南孝禮의 딸과 결혼하다.
세조 1 1455 을해 景泰 6 21 三角山 重興寺에서 독서하던 중 단종이 遜位한 사실을 알고 서책을 태우고 승려가 되다. 法名을 雪岑이라고 하다.
~ ~ ~ ~ ~ ~ ~ 水落山(水落精舍)ㆍ金鰲山 등지에서 修道하다.
세조 4 1458 무인 天順 2 24 〈遊關西錄〉을 짓다.
세조 6 1460 경진 天順 4 26 〈遊關東錄〉을 짓다.
세조 9 1463 계미 天順 7 29 〈遊湖南錄〉을 짓다.
~ ~ ~ ~ ~ ~ ~ 孝寧大君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內佛堂에서 교정의 일을 맡다.
세조 11 1465 을유 成化 1 31 慶州 남산에 金鰲山室을 짓고 독서하다. 茸長寺 梅月堂書齋에서 「金鰲新話」를 짓다.
세조 13 1467 정해 成化 3 33 효령대군의 청으로 圓覺寺 낙성식에 참석하다.
세조 14 1468 무자 成化 4 35 금오산에서 〈山居百詠〉을 짓다.
~ ~ ~ ~ ~ ~ ~ 仙槎縣(蔚珍) 酒泉臺 옆에 우거하다. 근처 聖留窟에 머물다.
성종 12 1481 신축 成化 17 47 還俗하여 祖父의 祭祀를 지내다.
~ ~ ~ ~ ~ ~ ~ 安氏와 결혼하다.○ 부인상을 당하고 다시 산에 들어가 중이 되다.
성종 16 1485 을사 成化 21 51 〈禿山院記〉를 짓다.
성종 21 1490 경술 弘治 3 56 9월, 重興寺에 머물던 중 金馹孫ㆍ南孝溫의 방문을 받고, 함께 白雲臺ㆍ도봉산을 유람하다.
성종 22 1491 신해 弘治 4 57 雪岳山에 들어가다.
성종 24 1493 계축 弘治 6 59 2월, 鴻山縣 無量寺에서 졸하다.
선조 16 1583 계미 萬曆 11 - 王命으로 芸閣에서 문집을 간행하다.(李山海의 序)
현종 11 1670 경술 康熙 9 - 梅月祠(慶州)에 專祀되다.
숙종 11 1685 을축 康熙 24 - 彰節書院(寧越)에 享祀되다.
숙종 30 1704 병술 康熙 43 - 西山書院(咸安)에 享祀되다.
영조 38 1762 임오 乾隆 27 - 八賢祠(寧越)에 享祀되다.
정조 6 1782 임인 乾隆 47 - 이조판서에 추증되다.
정조 8 1784 갑진 乾隆 49 - ‘淸簡’의 시호를 받다.
- - 1927 정묘 - - - 후손 金鳳起가 문집을 간행하다.

기사전거 : 金時習傳(李珥 撰)ㆍ文集附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散失된 自書詩稿를 李耔가 구하여 이것을 補寫ㆍ추가하여 3권으로 엮고 1521년 序를 지었다. 그 후 朴祥ㆍ尹春年이 시문을 수집하고, 尹春年이 저자의 傳을 붙여 간행하였는데《舊本》, 구본은 전하지 않는다.
1583년(선조 16)에 선조가 芸閣에 명하여 改鑄甲寅字로 간행하게 하였다.《甲寅字本》 갑인자본은 구본을 증보한 것으로 보여지며, 권수에 이자ㆍ李山海가 지은 序 2편과 윤춘년ㆍ이자가 지은 傳 2편이 실려 있고 詩集과 文集으로 나누어 총 23권 9책으로 편차되어 있다. 이 본은 현재 국내에는 完本이 없고 日本 蓬左文庫에 完本이 소장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이 본의 傳寫本이 소장되어 있으며,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에는 零本 2책(권8~9, 권12~13)이 소장되어 있다.
그 후 인조 때 17권 9책으로 改刊되었다고 「朝鮮圖書解題」에 기술되어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1927년에 후손 金鳳基가 附錄을 부편하여 新活字로 간행하였다.《新活字本》 신활자본은 詩集 15권ㆍ文集 6권ㆍ부록 2권 합 23권 6책으로 되어 있으며, 附錄에는 여러 문헌에서 뽑은 저자관계 기록ㆍ서원봉안문ㆍ祭文 등이 실려 있다. 또한 畫像과 遺筆ㆍ世系圖가 첨부되어 있는데, 畫像과 遺筆에는 각각 宋時烈이 지은 跋이 실려 있다. 권미에 후손 金鳳起의 跋과 任事錄이 있다. 이 본은 현재 간송미술관, 고려대학교 만송문고,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규장각본에는 附錄이 빠져 있다.
文集과 별도로 詩集만이 1583년에 癸酉字로 간행되었는데, 완본은 전하지 않고 고려대학교 만송문고에 零本으로 소장되어 있다. 또한 關西ㆍ關東ㆍ湖南ㆍ金鰲를 유람하면서 지은 詩로 엮은 「四遊錄」이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간행 년도와 간행자는 모두 불명인데, 두 편의 後序로 보면 저자의 自書詩稿에서 「四遊錄」과 紀行詩 수십 수를 뽑고 권수에 肖像과 淸寒圖書를 첨부, 간행한 것이 初刊이고 그 후 초간본을 바탕으로 木板 1책으로 간행한 것이 중간본이다. 중간본은 문집 甲寅字本 이후에 慶州尹 尹貽永의 협조를 받아 간행된 것이다. 「四遊錄」은 현재 간송미술관, 고려대 만송문고, 규장각, 성균관대, 연세대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583년에 간행된 改鑄甲寅字本으로 日本 蓬左文庫藏本이다. 이 중 권13의 第11板이 권23의 제11판으로 錯簡되었으므로 同一本인 고려대학교 晚松文庫藏本에서 補完하였고, 또 권17의 제3판이 落張이므로 同本의 傳寫本인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에서 補寫하였다.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詩集 15권ㆍ文集 8권 합 9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1521년에 쓴 李耔의 序, 1583년에 쓴 李山海의 序와 尹春年이 지은 〈梅月堂先生傳〉 그리고 선조의 명으로 1582년에 지은 李珥의 〈金時習傳〉이 실려 있다. 이어 目錄이 있다.
詩集 권1~8에는 各體詩를 주제나 제재(내용) 혹은 문체별로 묶어 小題를 달아 편차하였다. 권별 소재를 보면, 권1에는 古風ㆍ紀行ㆍ述懷, 권2에는 詠史ㆍ詠東國故事ㆍ懷舊ㆍ時事ㆍ宮殿ㆍ陵廟ㆍ題人居室ㆍ居室ㆍ閑適ㆍ卽景ㆍ堂宇ㆍ城郭ㆍ田圃, 권3에는 仙道ㆍ釋老ㆍ隱逸ㆍ寺觀ㆍ節序, 권4에는 夢ㆍ晝夜ㆍ月ㆍ雨雪ㆍ風雲ㆍ山岳ㆍ江河ㆍ泉石ㆍ溪澗ㆍ樓閣ㆍ亭榭ㆍ園林ㆍ燕飮ㆍ菓實ㆍ書畫ㆍ文章ㆍ婦女ㆍ文房ㆍ器用ㆍ燈燭, 권5에는 食物ㆍ酒ㆍ茶ㆍ禽ㆍ獸ㆍ蟲ㆍ魚ㆍ竹ㆍ木花草, 권6에는 菜ㆍ菌蕈ㆍ投贈ㆍ簡寄ㆍ尋訪ㆍ酬答ㆍ惠貺ㆍ送別ㆍ遊賞ㆍ題詠, 권7에는 疾病ㆍ醫藥ㆍ傷悼ㆍ山居集句ㆍ調詞ㆍ樂章, 권8에는 歌ㆍ行ㆍ吟ㆍ和陶가 각각 실려 있다. 권9~14에는 遊覽時 지은 작품들을 엮어 편명을 달았는데, 권9에는 1458년에 엮은 〈遊關西錄〉, 권10에는 1460년에 엮은 〈遊關東錄〉, 권11에는 1463년에 엮은 〈遊湖南錄〉, 권12에는 1473년에 엮은 〈遊金鰲錄〉이 실려 있고 위 「四遊錄」 末尾에는 각각 後志가 첨부되어 있다. 권13에는 〈關東日錄〉, 권14에는 1486년경에 지은 〈溟州日錄〉이 실려 있다. 권15에는 賦와 雜體詩가 실려 있다.
권16 이하는 文集으로, 권16~17에는 雜著 20편, 권18에는 論 4편, 권19에는 贊 31편이 각각 실려 있다. 권20에는 傳(10편)ㆍ說(9편)ㆍ辨(3편)ㆍ序(1편)ㆍ義(8편), 권21에는 銘(8편)ㆍ箴(3편)ㆍ記(1편)ㆍ誥(1편)ㆍ篇(1편)ㆍ書(3편), 권22에는 騷賦(7편)ㆍ琴操(1편)ㆍ辭(1편), 권23에는 騷註(1편)ㆍ雜說(3편)이 각각 실려 있다.

필자 : 吳世玉
농암집 ( 農巖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農巖集(原集)
판심제  農巖集
간종  권1~34 활자본(芸閣印書體字), 권35~36 목판본
간행년  권1~34 1709年刊, 권35~36 1754年刊
권책  36권 18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권1~34 21.5×14.6(㎝), 권35~36 20.5×15(㎝)
어미  上黑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권1~34 奎4413, 권35~36 奎4547
총간집수  
권수제  農巖續集(續集)
판심제  農巖續集
간종  활자본(全史字)
간행년  1854年刊
권책  2권 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7×15.9(㎝)
어미  上白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547
총간집수  
권수제  農巖別集(別集)
판심제  農巖集
간종  활자본(鉛活字)
간행년  1928年刊
권책  4권 2책
행자  12행 28자
규격  21.3×15.8(㎝)
어미  上黑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15676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61~162
 저자
성명  김창협(金昌協)
생년  1651년(효종 2)
몰년  1708년(숙종 34)
 仲和
 洞陰居士, 寒碧主人, 三洲, 農巖
본관  安東
시호  文簡
특기사항  宋時烈, 李端相, 趙聖期의 門人. 老論 洛論의 종장
 가계도
 金尙憲
 청음집(淸陰集)
 金光燦  
 同知中樞
 金壽增
 谷雲, 參判
 곡운집(谷雲集)
 曺漢英의 女
 
 金壽興  
 退憂堂, 領議政
 퇴우당집(退憂堂集)
 尹衡覺의 女
 
 金壽恒
 文谷, 領議政
 문곡집(文谷集)
 安定羅氏
 羅星斗의 女
 金昌集
 夢窩, 領議政
 몽와집(夢窩集)
 朴世楠의 女
 
 金昌協
 
 延安李氏
 副提學 李端相의 女
 金崇謙
 早死
 관복암시고(觀復菴詩稿)
 朴權의 女
 
 金載謙(金淸祥)
 早死
 女
 
 徐宗愈
 
 女
 
 李台鎭
 
 女
 
 吳晉周
 
 女
 
 朴師漢
 
 女
 
 兪受基
 
 金昌翕
 三淵
 삼연집(三淵集)
 李世長의 女
 
 金昌業  
 老稼齋
 노가재집(老稼齋集)
 李涑의 女
 
 金昌緝
 圃陰
 포음집(圃陰集)
 洪處宇의 女
 
 金昌立
 澤齋
 李敏敍의 女
 
 女
 
 李涉
 
 女
 
 李挺岳
 
 女
 
 洪柱天
 
 女
 
 李重輝
 
 女
 
 宋奎濂
 제월당집(霽月堂集)
 女
 
 李光稷
 

기사전거 : 墓表(金昌翕 撰), 金光燦行狀(金壽恒 撰, 文谷集 卷21), 金壽恒行狀(金昌協 撰), 金壽恒墓表(金昌翕 撰, 三淵集 卷30)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효종 2 1651 신묘 順治 8 1 1월 2일, 果川 明月里 외가에서 태어나다.
효종 10 1659 기해 順治 16 9 外祖 羅星斗의 海州 任所에 따라가다.
현종 6 1665 을사 康熙 4 15 12월, 延安李氏 靜觀齋 端相의 딸과 혼인하다.
현종 9 1668 무신 康熙 7 18 2월, 祖父(金光燦)喪을 당하다.
현종 10 1669 기유 康熙 8 19 5월, 진사시에 합격하다. ○ 9월, 李端相을 곡하다.
현종 11 1670 경술 康熙 9 20 〈荀子性惡辨〉을 짓다.
현종 12 1671 신해 康熙 10 21 봄, 江華府에 가서 仲父 金壽興을 뵙고, 松京, 天磨山 등을 유람하다. 〈遊松京記〉를 짓다. ○ 8월, 金剛山을 유람하다. 〈東遊記〉와 〈東征賦〉를 짓다.
현종 14 1673 계축 康熙 12 23 11월, 부친 金壽恒이 燕京에 사신갈 때 松都까지 전송하다.
현종 15 1674 갑인 康熙 13 24 3월, 아우 金昌翕과 함께 安州로 부친을 마중가다. 成川府에 가서 伯父 金壽增을 찾아뵙다. ○ 6월, 尤庵(宋時烈)을 모시고 龍門山에 모여 講學하다. ○ 8월, 水原에 가서 尤庵을 배알하다.
숙종 1 1675 을묘 康熙 14 25 1월, 德源으로 귀양가는 尤庵을 鎭川에서 송별하다. ○ 윤5월, 豐德 龜巖書院에 가서 栗谷의 奉安儀式을 구경하다. 이어서 朴淵, 花潭을 유람하고 돌아오다. 〈西遊記〉를 짓다. ○ 7월, 부친을 따라 靈巖 謫所에 가다. ○ 8월, 月出山을 유람하다. ○ 10월, 서울로 돌아오다.
숙종 2 1676 병진 康熙 15 26 3월과 11월, 靈巖에 다녀오다.
숙종 3 1677 정사 康熙 16 27 9월, 영암에 가다. ○ 10월, 부친을 모시고 道岬寺를 유람하다. 서울로 돌아오다. 金昌集, 金昌緝과 함께 同福 赤壁, 昌平 勿染亭을 구경하다.
숙종 4 1678 무오 康熙 17 28 2월, 金昌翕, 金昌緝과 함께 三角山 重興寺에서 독서하다. ○ 金昌翕과 함께 谷雲에 가서 백부를 뵙다. ○ 가을, 부친이 鐵原으로 量移되자 龍仁에 마중갔다가 그대로 따라가다. ○ 尤庵에게 問目을 올리다.
숙종 5 1679 기미 康熙 18 29 8월, 永平 鷹巖에 집을 짓다. ○ 10월, 부친과 三釜瀑布를 구경하다. ○ 11월, 가족을 데리고 응암으로 들어가다. ○ 伯氏와 白雲山 普門庵을 유람하다.
숙종 6 1680 경신 康熙 19 30 2월, 隱求庵 記文을 짓다. ○ 3월, 부친이 영의정에 제수되어 서울로 돌아오다. ○ 여름, 응암에 들어가 독서하다. ○ 가을, 별시 초시의 對策에서 수석하다. ○ 겨울, 廣州에 가서 尤庵을 찾아뵙다.
숙종 7 1681 신유 康熙 20 31 五賢(栗谷, 牛溪, 龜山, 豫章, 延平)을 文廟에 從祀하자는 상소를 올려 윤허를 받다. ○ 尤庵에게 問目과 편지를 올리다.
숙종 8 1682 임술 康熙 21 32 10월, 아들 金崇謙이 태어나다. ○ 11월, 增廣別試 文科에 壯元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다.
숙종 9 1683 계해 康熙 22 33 2월, 병조 좌랑이 되다. ○ 4월,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인피하여 체차되다. ○ 6월, 都堂錄에 들다. 부수찬을 거쳐 수찬이 되다. 검토관으로 召對에 입시하다. ○ 7월, 부교리가 되다. ○ 12월, 헌납이 되다. 明聖王后가 승하하자 차자를 올려, 百官들의 喪服을 일체 古禮를 따르기를 청하다.
숙종 10 1684 갑자 康熙 23 34 1월, 교리가 되다.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송시열을 불러들이기를 청하다. ○ 2월, 헌납, 교리가 되다. ○ 5월, 「新本心經釋疑」 刊行에 대한 일로 왕명을 받들고 懷德에 가서 尤庵을 만나다. ○ 6월, 이조 좌랑이 되다. ○ 8월, 암행어사가 되어 嶺南을 염찰하다. ○ 10월, 교리, 헌납, 이조 좌랑이 되다. ○ 12월, 우암에게 「心經釋疑」에 대한 문목을 올리다.
숙종 11 1685 을축 康熙 24 35 1월, 지제교가 되다. ○ 2월, 부교리, 헌납이 되다. ○ 3월, 함경북도 兵馬評事가 되다. ○ 5월, 금강산, 鶴浦를 유람하다. ○ 6월에 鏡城에 도착하다. ○ 7월, 列鎭을 순찰하다. ○ 9월, 교리, 헌납이 되다. ○ 10월, 조정에 돌아오다. 이조 좌랑이 되다.
숙종 12 1686 병인 康熙 25 36 1월, 교서관 교리, 이조 정랑이 되다. ○ 2월, 수찬이 되다. ○ 3월, 이조 정랑이 되다. ○ 윤4월, 부교리, 헌납, 대왕대비존숭도감 도청낭청, 부교리가 되다. 왕명으로 「朱子大全箚疑」를 校正하다. 헌납이 되다. ○ 5월, 이조 정랑이 되다. ○ 6월, 장악원정, 집의, 동부승지, 우부승지가 되다. ○ 7월, 대사성이 되다. ○ 11월, 병조, 예조 참의가 되다.
숙종 13 1687 정묘 康熙 26 37 1월, 대사간이 되다. ○ 2월, 대사성이 되다. ○ 5월, 太學의 諸生들과 泮水堂에서 잔치를 열다. ○ 8월, 사직하여 체차되다. ○ 10월, 승문원 부제조가 되다. ○ 11월, 淸風 府使가 되다.
숙종 14 1688 무진 康熙 27 38 1월, 月嶽山을 유람하다. ○ 3월, 金昌翕과 함께 丹陽을 유람하다. ○ 遂庵 權尙夏와 함께 華陽洞에 가서 尤庵을 배알하다. 「朱子大全箚疑」를 講討하다. 우암과 葩谷, 屛川, 仙遊洞 등을 유람하다. 〈華陽諸勝記〉를 짓다. ○ 5월, 아들 金淸祥이 태어나다.
숙종 15 1689 기사 康熙 28 39 2월, 부친이 珍島로 귀양가고 仲父 金壽興이 長鬐로 귀양가다.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다. ○ 3월, 珍島에 가다. ○ 4월, 부친이 賜死되다. ○ 尤庵에게 편지하여 부친의 墓文을 청하다. ○ 5월, 부친을 楊州 栗北里 雪谷에 장사 지내다. ○ 아들 金淸祥이 죽다. ○ 尤庵을 곡하다. ○ 9월, 鷹巖으로 들어가다. ○ 12월, 拙修齋 趙聖期를 곡하다.
숙종 16 1690 경오 康熙 29 40 11월, 仲父가 謫所에서 졸하자 忠州에 가서 迎柩하다.
숙종 17 1691 신미 康熙 30 41 3월, 趙逢源의 喪에 加麻 3월복을 입다.
숙종 18 1692 임신 康熙 31 42 2월, 鷹巖의 舊居 동쪽에 農巖書室을 짓다. 옛 지명 籠巖을 農巖으로 바꾸고 자호로 삼다.
숙종 19 1693 계유 康熙 32 43 11월, 白雲山寺에서 독서하다. 「五子粹言」을 엮다.
숙종 20 1694 갑술 康熙 33 44 1월, 楊州 奉印寺에서 독서하다. ○ 4월, 호조 참의가 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 5월, 영의정 南九萬에게 편지를 보내 討罪를 엄하게 하지 않는 일을 힐책하다. ○ 가족을 데리고 楊州 金村에 우거하다. ○ 승문원 부제조, 홍문관 부제학이 되다. 사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다. ○ 6월, 대사간이 되다. 農巖으로 들어가다. ○ 8월, 동부승지가 되다. 이후 우부승지, 좌부승지가 되었으나 사직, 체차되다.
숙종 21 1695 을해 康熙 34 45 1월, 이조 참의가 되었으나 사직, 체차되다. ○ 3월, 農巖으로 들어가다. ○ 4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 체차되다. ○ 7월, 開城 留守가 되고, 8월, 형조 참판이 되었으나 사직하다. ○ 9월, 農巖에 들어가다. ○ 11월, 대사헌이 되다. 楊州 石室書院에 머물며 講學하다. ○ 12월, 사직, 체차되다.
숙종 22 1696 병자 康熙 35 46 2월, 滄溪 林泳을 곡하다. ○ 3월, 예조 참판이 되다. 農巖으로 들어가 상소하여 사직하다. 鐵原에 가서 伯氏 金昌集을 만나다. ○ 4월, 渼陰으로 돌아오다. ○ 5월, 홍문관 제학,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 체차되다. ○ 7월, 仁川府에 가서 장모 靜觀齋夫人을 찾아뵙다. ○ 黃柱河를 곡하다. ○ 8월, 농암에 들어가다. 原州에 가서 황주하의 장례에 참석한 뒤 淸平, 寒溪를 유람하다. 〈東征記〉를 짓다. ○ 9월, 이조 참판이 되다. 사직하여 체차되다. ○ 11월, 水原 萬義村에 가서 尤庵의 改葬에 참여하다.
숙종 23 1697 정축 康熙 36 47 2월, 동지경연사,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다. ○ 3월, 渼陰으로 돌아오다. ○ 윤3월, 諸生들과 道峯書院에 다녀오다. ○ 6월, 병조 참판,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다. ○ 8월, 三洲로 거처를 옮기다. ○ 11월, 廣州 水鍾寺에서 지내다.
숙종 24 1698 무인 康熙 37 48 7월, 대사헌이 되다. 사직, 체차되다. ○ 10월, 도봉서원에 다녀오다. ○ 11월, 모친을 모시고 伯氏 金昌集의 江華府 任所에 다녀오다.
숙종 25 1699 기묘 康熙 38 49 1월과 3월, 강화부에 다녀오다. 아우 金昌緝 등과 松都, 天磨山을 유람하다. ○ 4월, 伯氏를 따라 普門庵을 유람하다. 三洲로 돌아오다. ○ 5월, 兄子 金好謙을 곡하다. ○ 7월, 호조 참판이 되다. ○ 윤7월, 이조 참판이 되다. 농암으로 들어가다. ○ 9월, 강화부에 다녀오다. ○ 10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인피하여 체차되다. ○ 12월,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사직하다. 강화부에 다녀오다.
숙종 26 1700 경진 康熙 39 50 1월, 三洲로 돌아오다. ○ 3월, 농암에 들어가다. ○ 6월, 대사헌이 되었으나 사직하다. ○ 7월, 딸 吳氏婦를 곡하다. ○ 10월, 아들 金崇謙을 곡하다.
숙종 27 1701 신사 康熙 40 51 1월, 石串村 金昌業의 別墅에 우거하다. ○ 2월, 대사성이 되었으나 사직하다. ○ 3월, 伯父 金壽增을 곡하다. ○ 11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다. ○ 退溪와 栗谷의 四端七情說, 栗谷의 人心道心說을 논하다.
숙종 28 1702 임오 康熙 41 52 동지돈녕부사, 부제학, 예문관 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다. ○ 8월, 晚翠臺를 유람하다. ○ 10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여 체차되다.
숙종 29 1703 계미 康熙 42 53 2월, 딸 李氏婦를 곡하다. ○ 6월, 모친상을 당하다.
숙종 30 1704 갑신 康熙 43 54 2월, 權尙游에게 편지하여 〈思辨錄辨〉을 논하다.
숙종 31 1705 을유 康熙 44 55 8월, 삼년상을 마치고 三洲로 돌아오다. ○ 9월, 한성부 좌윤이 되다. ○ 11월, 대사간,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사직하다.
숙종 32 1706 병술 康熙 45 56 2월, 양관 대제학, 지성균관사가 되다. ○ 4월, 형조 판서, 예조 판서, 세자 우부빈객이 되다. ○ 7월, 좌부빈객이 되다. ○ 8월, 대사헌, 지춘추관사가 되었으나 사직하다.
숙종 33 1707 정해 康熙 46 57 4월, 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다. ○ 7월, 東郊에 있는 李濡의 鹿川 別業에 우거하다. ○ 9월, 문인들과 道峯書院을 방문하다. 李喜朝와 水落山 玉流洞을 유람하다. ○ 10월, 三洲로 돌아오다. 妙寂山을 유람하다.
숙종 34 1708 무자 康熙 47 58 윤3월, 형제들과 함께 金村에서 觀魚하고, 妙寂寺를 유람하다. ○ 4월 11일, 三洲의 正寢에서 졸하다. ○ 6월, 石室 선영에 장사 지내다.
숙종 35 1709 기축 康熙 48 - 9월, 門人 金時佐 등이 문집을 간행하다.(觀復菴詩稿序文)
숙종 36 1710 경인 康熙 49 - 가을, 문집이 중간되다.(年譜)
숙종 37 1711 신묘 康熙 50 - 靈巖 煙村書院에 배향되다.
숙종 39 1713 계사 康熙 52 - 가을, 石室書院에 배향되다.
경종 3 1723 계묘 雍正 1 - 석실서원의 享祀가 철거되다.
영조 1 1725 을사 雍正 3 - 봄, 석실서원의 향사가 회복되다. ○ 가을, ‘文簡’으로 시호를 내리다.
영조 30 1754 갑술 乾隆 19 - 安東 府使 趙暾이 문집을 補刻하고, 附錄을 追刻하다.(年譜跋)
철종 5 1854 갑인 咸豐 4 - 5代孫 金洙根이 續集을 간행하다.
- - 1928 무진 - - - 從9代孫 金甯漢이 原集을 三刊, 續集을 重刊하고, 別集을 增補하다.

기사전거 : 年譜,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門人 金時佐, 魚有鳳 등이 수습하고 편정하여 1709년(숙종 35) 9월에 저자의 아우 三淵 金昌翕에게 서문을 받아 芸閣印書體字本 34권 17책으로 印行한 것으로 보인다. 「杞園集」에 실려 있는 魚有鳳年譜에는 “1709년에 金時佐와 함께 선생의 문집을 編定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金昌翕은 1709년 9월에 본 문집의 서문을 짓고 같은 날에 저자의 아들 金崇謙의 詩集인 「觀復菴詩稿」의 서문을 지었는데, 〈觀復菴詩稿序〉에 “仲氏(金昌協)의 문집은 이미 印行에 들어갔고, 이 詩稿도 또한 첨부하여 인행하려 한다.”라고 하였으니, 본 문집은 당해 연도에 인행을 완료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초간본》 현재 규장각(奎4082), 장서각(4-5866), 국립중앙도서관(일산古3648-文10-81),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213)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곧 바로 1710년에 문집은 목판으로 重刊되었다. 年譜에는 “1710년 가을에 문집이 완성되었다.”하였고, 1854년에 金洙根이 지은 續集 跋文에는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째 되는 해에 문집이 비로소 이루어졌다.”라고 하였으며, 1928年刊 三刊本의 凡例에는 “원집 34권은 숙종 경인년(1710)에 三淵 金昌翕이 여러 門人들과 함께 편정하여 간행하였다.”라고 하였다. 한편 1710년에 金柱臣이 金昌翕에게 보낸 편지(與金進士昌翕書, 壽谷集 卷2)를 보면, 문집 草本에 실린 仲舅 羅良佐에게 올린 〈上仲舅書〉 가운데 3편의 刪削을 바라면서, 草本을 몇 건 인출하기는 하였지만 아직 널리 인출하지는 않았다 하니 刪去하고 다시 편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草本은 곧 1709년에 운각인서체자로 인행된 초간본을 말하는 것으로, 위의 기록들이 모두 이를 초간본으로 인정하지 않고 목판본 간행을 위한 초본 정도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간행 사실들을 그대로 인정하여 1709년 간행본을 초간본으로, 이때 간행된 본을 중간본으로 보았다. 중간본은 현재 규장각(奎4413),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811.98-김창협-농-판)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편차를 초간본과 비교해 보면, 권11 書에 〈上仲舅〉 1편, 〈與子益〉 1편 등을 增補하고 권12 〈上尤齋先生〉의 순서를 연도별로 바로잡아 재편하였으며 이 외 詩文의 편수와 편차는 거의 동일하다. 또한 간행 장소는 분명하지 않은데, 판목은 安東府 鳳停寺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위의 소장본들에는 후에 추각된 附錄이 합편되어 있다.《중간본》
그 뒤 1754년(영조 30)에 安東 府使 趙暾이 安東府에 보관되어 있던 판목이 많아 刓缺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문집을 대폭 補刻하였다. 이때에 世系, 年譜, 墓表, 墓誌銘으로 이루어진 附錄 2권 1책을 권35, 권36으로 편차하여 追刻하고, 일부 내용을 刪削, 再編하였다. 年譜는, 年譜跋에 의하면, 1753년경에 저자의 손자 金元行이 완성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이전에 저자의 문인 魚有鳳이 편차를 주도하였던 것이다.(魚有鳳年譜) 그리고 이때 권20의 〈答沈檍問目〉에서 禮論에 관련된 내용 일부, 〈答趙榮福〉, 권21의 〈送李伯祥歸歸去淵序〉 등을 산삭하였고, 권25 중에서 雜著를 권26으로 옮기고 권26 중에서 敎書, 上樑文 등을 권25로 옮겨 편차를 조정하였다.《補刻本》 현재 장서각(4-5867),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81)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은 결본이다.
그 뒤 1854년(철종 5) 8월에 5대손 金洙根이, 金壽恒 行狀 및 金壽恒의 碑文을 청하기 위해 尤庵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墓誌追記, 四端七情說 등을 모아 속집 2권 2책을 만들고 校訂하여 철활자(全史字)로 간행하였다.《속집》 현재 규장각(奎4547), 장서각(4-5865),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8, 일산古3648-文10-90),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당시 金洙根은 三淵 金昌翕의 年譜, 저자의 증손인 金履安의 문집 「三山齋集」을 아울러 이 全史字로 간행하였다.
1928년에는 從9代孫 金甯漢과 金甯漢의 從舅 徐相春 등이 原集 36권과 續集 2권을 鉛活字로 다시 간행하였다. 이때에 원집과 속집에서 빠진 저자의 시문 및 후인들의 글 가운데에서 저자와 관련이 있는 글을 수습하여 別集 4권을 만들어 함께 간행하였다. 권수 序文 뒤에 從玄孫 金邁淳이 지은 傳이 첨입되었고, 이어서 重刊凡例 및 원집, 속집, 별집의 전체 總目이 실려 있다. 여기서 重刊이라 한 것은 활자본 초간본을 인정하지 않은 표현이나 본고에서는 원집은 三刊, 속집은 重刊으로 보았다. 이 凡例에는 원집, 원집부록, 속집에 대한 간략한 간행기사가 실려 있으며, 安東 鳳停寺에 보관해오던 판목이 세월이 오래되어 刓缺된 부분이 많아 이제 활자로 다시 간행하며 아울러 遺文 약간 편을 모아 별집을 만들어 싣는다는 설명이 실려 있다.《원집삼간, 속집중간본》 현재 규장각(奎15676), 장서각(4-5868),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310, 古3648-文10-217),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D3B-213a)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본에는 보각본 간행 때에 산삭했던 글을 일부 다시 되살려 실었으며, 권25와 권26의 편차는 보각본 간행 때에 재편한 순서를 따랐다.
본서의 저본은, 원집 권1~34는 1709년에 인행한 운각인서체자본으로 규장각장본(奎4082)이며, 권35~36은 1754년 보각 때 추각한 附錄으로 역시 규장각장본(奎4413)이다. 속집은 1854년에 간행한 全史字本으로 규장각장본(奎4547)이고, 별집은 1928년 원집 삼간, 속집 중간 때 증보한 연활자본으로 규장각장본(奎15676)이다.

기사전거 : 序(金昌翕 撰), 年譜, 年譜跋(金元行 撰), 續集跋(金洙根 撰), 重刊跋(金甯漢 撰), 觀復菴詩稿序(金昌翕 撰, 觀復菴詩稿), 壽谷集, 杞園集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원집 36권, 속집 2권, 별집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原集은 권두에 1709년(숙종 35) 9월에 金昌翕이 지은 서문이 있고, 이어서 권1~34의 總目이 있다. 각 권의 권수에 권별 목록이 있다.
권1~6은 賦 4편과 詩 890여 수이다. 賦는 1671년(현종 12) 8월에 金剛山을 유람하고 지은 〈東征賦〉, 族姪 金時傑에게 지어준 〈憶遠賦〉, 바람에 쓰러진 소나무를 읊은 〈悲松樹賦〉 등이다. 詩는 1673년부터 1702년까지의 작품이 저작 시기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곳곳에 自註와 編者註가 붙어 있다. 권1은 1673년부터 1683년까지의 작품이다. 한겨울에 얼음 뜨는 사람들의 노고를 보고 1675년경에 지은 〈鑿氷行〉, 관청의 수탈을 피하여 산속에 숨어사는 농부에 대해 1678년에 지은 〈山民〉 등이 실려 있으며, 道岬寺, 重興寺, 赤壁, 勿染亭, 鐵原 등지에 갔을 때에 지은 시들이 실려 있다. 권2는 1684년부터 1686년까지의 작품이다. 明聖王后 挽詞, 금강산을 유람할 때에 지은 시, 評事로 鏡城에 다녀올 때에 지은 시, 燕京에 가는 崔錫鼎을 전송하는 시 등이 실려 있다. 권3은 1687년부터 1693년까지의 작품이다. 金萬基 挽詞, 太學의 諸生들과 泮水堂에서 잔치할 때에 지은 시, 淸風에 수령으로 나갔을 때에 지은 시, 島潭, 龜潭, 仙遊洞 등을 유람할 때에 지은 시 등이 실려 있으며, 아우 金昌翕과의 和韻詩가 많이 실려 있다. 권4는 1694년부터 1696년까지의 작품이다. 趙景望, 金聲大, 林泳 등에 대한 挽詩, 燕京에 들어가는 洪世泰에게 준 贈詩, 아들 金崇謙과 함께 배를 타고 幸州에 가면서 지은 시, 竹林亭을 읊은 시, 淮陽 府使 金鎭圭에게 부친 시 등이 실려 있다. 권5는 1697년부터 1698년까지의 작품이다. 淑徽公主, 沈權, 李秀彥에 대한 挽詩, 族姪 金時佐, 아들 金崇謙과의 차운시, 梅花를 읊은 詩 등이 실려 있다. 권6은 1699년부터 1702년까지의 작품이다. 1699년 49세 생일에 지은 시, 松都, 朴淵, 靈通寺 등을 유람하고 지은 시, 族兄 金盛迪을 哭한 시, 海州로 부임하는 李喜朝에게 준 贈別試 등이 실려 있다. 1702년에 지은 李涬 挽詩 9수가 끝에 실려 있고, 그 이후의 작품은 없다.
권7~9는 疏箚 60편이다. 靈巖 유생들을 대신해 煙村書院에 賜額할 것을 청한 상소, 豐德 유생들을 대신해 德水書院에 賜額할 것을 청한 상소, 永平 유생들을 대신해 玉屛書院에 賜額할 것을 청한 상소, 宋時烈을 조정에 머물게 할 것을 청한 상소, 五賢을 文廟에 從祀할 것을 청한 상소, 1683년 明聖王后의 초상에 百官의 喪服을 일체 古禮를 따를 것을 청한 상소, 부교리, 대사간, 부제학, 개성 유수, 형조 참판, 이조 참판, 대사헌, 한성 좌윤, 형조 판서 등의 벼슬을 사직하는 상소 등이 연도순으로 실려 있다.
권10은 啓 1편, 議 1편, 講義 1편이며, 玉堂故事가 첨부되어 있다. 啓는 1686년에 승지로 있을 때에 올린 것으로서, 승지 金斗明, 교리 李徵明 등을 신구하는 내용이며, 議는 1705년에 伯氏를 대신해서 지은 것으로, 顯宗大王 徽號를 追上하는 일의 當否를 논한 내용이다. 講義는 1683년 7월에서 9월까지 經筵에 나가 주로 「心經」을 강독하면서 주고받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권11~20은 書 288편이다. 인물별, 연도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권11에는 1687년에 外職을 구하는 일을 의논하는 내용으로 부친 金壽恒에게 올린 편지를 비롯하여 伯父 金壽增, 仲舅 羅良佐, 형 金昌集, 아우 金昌翕, 金昌業, 金昌緝, 從弟 金昌直, 조카 金濟謙, 아들 金崇謙 등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특히 羅良佐에게 보낸 편지는 懷尼是非와 관련하여 비난의 표현이 너무 심하다는 이유로 金柱臣이 刪去를 주장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권12에는 尤庵 宋時烈에게 올린 問目 및 權尙夏, 趙聖期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問目은 「書傳」, 「中庸」, 「孟子」, 「心經」 등에 대해서 의문 나는 조목을 질문한 것이다. 권13에는 林泳, 李喜朝에게 보낸 편지, 권14에는 閔以升에게 보낸 편지, 권15에는 權尙游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經傳에 대해 문답한 내용이 많다. 특히 權尙游에게 보낸 편지는, 朴世堂의 「思辨錄」에 대해 權尙游가 왕명을 받고 〈思辨錄辨〉을 짓고 질정을 부탁하자 이에 답변한 것이다. 권16에는 朴鐔, 金楺, 洪錫輔, 金載海, 李顯益 등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으며, 권17에는 南九萬, 李世白, 李濡, 李畬, 申琓, 崔錫鼎, 金構, 李頤命, 金柱臣, 吳泰周, 李徵明, 兪得一, 任埅, 金楷, 金聖最, 魚史衡, 권18에는 宋相琦, 金鎭圭, 閔鎭遠, 金克光, 崔昌大, 李宜顯 등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권19는 族姪 金時佐에게 보낸 편지인데, 「論語」에 대한 문목이 포함되어 있다. 권20에는 魚有鳳, 李命華, 愼無逸, 李夏坤, 吳晉周, 沈檍 등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권21~22는 序 38편이다. 同福 縣監 趙景望, 歙谷 縣令 金聖最, 洪川 縣監 洪澤普, 海州 牧使 李喜朝, 鎭川 縣監 金昌說, 鴻山 縣監 金時保 등이 任所로 떠날 때에 지어준 送序, 族姪 金時傑과 金時保가 保寧 茅島로 돌아갈 때, 南九萬이 燕京에 사신으로 들어갈 때, 李瑋가 금강산 유람을 떠날 때에 지어준 送序, 仲父 退憂先生의 61세, 외조모 淑人金氏의 80세, 伯父 谷雲先生의 70세 때에 長壽를 축원한 壽序 등이 있으며, 문집 「淸溪集」(洪葳), 「息庵集」(金錫胄), 「苔川集」(金地粹), 「東里集」(李殷相), 「村隱集」(劉希慶), 「滄溪集」(林泳)의 서문이 실려 있다.
권23~24는 記 22편이다. 그중 〈游松京記〉는 1671년에 仲父 金壽興의 任所인 江華府에 갔다가 오는 길에 金昌翕, 宋光涑 등과 함께 松京을 유람한 기록이고, 〈東游記〉는 1671년 8월에 金剛山을 유람한 기록이다. 또 1675년 朴淵과 花潭을 유람한 기록인 〈西游記〉, 1688년의 〈華陽諸勝記〉 등이 있고, 〈隱求菴記〉는 1680년에 지은 것으로서 君子의 出處를 논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 외에 淸淸閣, 不知菴, 有知堂, 三一亭, 使無軒 등에 대한 기문이 실려 있다.
권25는 題跋 16편, 雜著 9편이다. 題跋에는 兪得一의 〈騎牛歌〉, 柳成運의 〈西京摘言〉과 〈溟嶽錄〉, 李喜朝 형제의 〈海山酬唱錄〉, 鄭悏의 〈四游錄〉 등에 대한 발문, 「松潭集」(宋柟壽), 「訥齋集」(朴祥), 「泛翁集」(洪柱國), 「文谷集」(金壽恒) 등에 대한 발문이 실려 있다. 雜著에는 性惡論에 대해 논한 〈性惡論辨〉, 1674년에 淸 나라에 吳三桂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審敵篇〉, 周公을 논한 글, 「法言」과 「鹽鐵論」을 읽고 쓴 글 등이 실려 있다.
권26은 雜著 8편, 敎書 2편, 箋狀 4편, 上樑文 3편, 贊 2편, 銘 2편, 祝辭 1편, 婚書 2편이다. 雜著는 「春秋」의 義理, 性命 理氣에 대해서 出題한 策問, 太學 諸生들을 효유한 글, 水原에 尤庵의 祠宇를 營建할 때에 돌린 通文, 曆法 度數를 논한 글, 表廷俊의 事蹟을 기록한 글, 靜觀齋 李端相의 言行錄, 朴世采의 「心學旨訣」에 대해 의심스러운 곳을 논변한 글 등이다. 敎書는 함경도 관찰사 李世華, 강원도 관찰사 權是經에게 내린 것이고, 箋狀은 大殿의 탄일을 축하하는 賀箋, 淸風 府使 시절에 순찰사에게 올린 狀啓 등이다. 상량문은 芝洞新居, 三一亭 등에 대한 것이고, 贊은 宋時烈 畫像, 吳斗寅 畫像에 대한 것이며, 銘은 飯盂, 燈盞 등 雜器, 筆筒, 硯滴에 대한 것이다. 祝辭는 李德壽의 冠禮 때에 지어준 字辭이며, 婚書는 셋째딸과 아들 金崇謙의 婚事 때에 지은 것이다.
권27은 墓誌銘 18편이다. 從妹 兪命健 妻, 아들 金淸祥, 李忱, 金壽民, 四嫂 金昌業 妻, 金昌立, 金天錫, 李端相 妻, 伯舅 羅明佐, 亡女 吳晉周 妻 등에 대한 것이다.
권28은 神道碑銘 1편, 墓碣銘 3편, 墓表 6편, 行狀 2편이다. 신도비명은 吳斗寅에 대한 것이고, 묘갈명은 金盛遇, 吳斗寅 妻에 대한 것이다. 묘표는 金壽興, 金光烒 妻, 李行健, 金崇謙, 黃慶河 妻 등에 대한 것이며, 행장은 兪㯙, 金盛遇에 대한 것이다.
권29~30은 祭文 38편, 哀辭 6편이다. 祭文은 趙世煥, 金萬基에 대한 致祭文, 社稷. 三角山, 漢江 등에 지어 올린 祈雪 祭文, 北靑에 있는 李恒福 祠宇에 대한 賜額 祭文, 亡妹, 亡弟, 伯母, 季舅, 從子, 亡子, 亡女 등 가족 친지들에 대한 것이며, 哀辭는 亡妹, 外從祖母, 四嫂, 黃柱河, 鄭世沃 등에 대한 것이다.
권31~34는 雜識이다. 권31은 內篇 1, 권32는 內篇 2, 권33은 內篇 3이며, 권34는 外篇이다. 內篇 1~2에는 經傳, 朱子書, 「性理大全」, 「二程全書」, 太極圖, 「聖學輯要」, 佛書, 「大學衍義」, 「象村彙言」, 「谿谷漫筆」 등의 구절에 대해 저자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글, 南冥, 退溪, 栗谷, 大谷 등에 대한 인물평 등이 실려 있으며, 內篇 3은 「論語」 구절에 대한 글이다. 外篇은 李奎報, 李荇, 張維, 李植, 申欽 등의 詩文, 韓愈의 글, 「史記」, 宋詩, 碑誌文字 등을 논한 것으로 일종의 詩話雜說이다.
권35~36은 附錄이다. 世系, 年譜, 金昌翕이 지은 墓表와 墓誌銘이 실려 있고 끝에 金元行이 지은 年譜跋이 실려 있다.
續集은 上下 2권이다. 각 권 앞부분에는 권목록이 있다. 上卷은 先府君(金壽恒)行狀 上이고, 下卷에는 先府君行狀 下, 尤庵 宋時烈에게 보낸 편지 1편, 先府君墓誌追記 1편, 四端七情說 1편이 실려 있고, 끝에 5대손 金洙根이 1854년(철종 5)에 지은 발문이 붙어 있다. 尤庵에게 보낸 편지는 저자의 형제들이 1689년에 부친의 墓文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면서 간략한 行歷을 부쳐보낸 것이며, 先府君墓誌追記는 1695년에 伯氏를 대신해 지은 것이다.
別集은 4권이다. 각 권별로 권목록이 있다.
권1에는 詩 2편, 書 9편, 序 1편, 祭文 1편, 行錄 1편, 試策 1편이 실려 있다. 詩는 定平道安寺에서 吳羽達의 시에 차운한 시와 1698년에 吳羽達에게 준 시이며, 書는 吳羽達, 李韶, 梁澂, 李廷彙, 吳玄錫, 吳大夏 등에게 보낸 것이다. 序는 靜觀齋 李端相의 狀誌에 쓴 後序이고, 祭文도 李端相에 대한 것이다. 行錄은 朴成乾의 3대에 대한 것이며, 試策은 1680년(숙종 6)에 지어 올린 對策文이다.
권2~4는 附錄이다. 권2에는 저자에 대한 賜祭文 3편과 祭文 46편, 奉安文 2편, 祝文 1편이 실려 있다. 賜祭文은 1708년(숙종 34)에 李敏英이 지은 것, 1713년(숙종 39)에 魚有龜가 지은 것 등이다. 祭文은 金昌翕, 權尙夏, 趙正萬, 閔鎭厚, 魚有鳳, 徐文若 등이 지은 것이다. 奉安文은 靈巖 鹿洞書院, 楊州 石室書院에 배향할 때에 지은 것이다. 권3은 語錄으로, 문인 魚有鳳, 吳大濬이 기록한 것이다. 권4에는 諸家章疏, 諸家撰述, 諸家記述雜錄이 실려 있다. 諸家章疏는 石室書院에 配享할 것을 청한 疏, 文廟에 從祀할 것을 청한 소, 鹿洞書院에 賜額할 것을 청한 소, 무함을 변론한 소 등인데, 魚有鳳, 吳熙常, 宋相琦 등이 지은 것이다. 諸家撰述은 어유봉이 지은 〈朱子大全箚疑問目後序〉, 「五子粹言」의 서문, 「論語詳說」의 발문, 魚有龜가 지은 〈書帖後小跋〉, 從玄孫 金邁淳이 지은 〈扇畫贊〉 등이며, 諸家記述雜錄은 門人 師友들의 저술에서 저자 관련 기사를 뽑아 모아놓은 것이다.
권미에는 9대손 金甯漢이 1928년 2월에 지은 〈農巖集重刊跋〉이 실려 있다.

필자 : 朴憲淳
정재집 ( 定齋集 )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定齋集(原集ㆍ別集)
판심제  定齋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02年刊
권책  原集 9권, 別集 5권, 附錄 합 7책
행자  10행 19자
규격  20.6×15.8(㎝)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5263
총간집수  
권수제  定齋後集(後集)
판심제  定齋後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892年刊
권책  6권 3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8×16.3(㎝)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544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68
 저자
성명  박태보(朴泰輔)
생년  1654년(효종 5)
몰년  1689년(숙종 15)
 士元
 定齋
본관  潘南
시호  文烈
특기사항  尹拯, 南九萬의 조카. 崔錫鼎, 趙持謙, 林泳, 南鶴鳴 등과 교유. 己巳換局 때 節死
 가계도
 朴炡
 參判
 朴世圭
 
 朴世堅
 參議
 崔渷의 女
 
 朴世垕
 
 坡平尹氏
 尹宣擧의 女
 朴泰輔  
 
 全州李氏
 李厚源의 女
 朴弼謨  
 牧使
 辛受和의 女
 
 女
 
 李德海
 
 朴世堂
 判書, 西溪
 서계집(西溪集)
 宜寧南氏
 南一星의 女
 朴泰維
 持平
 慶州金氏
 金夏振의 女
 女
 
 李德孚
 
 海州鄭氏
 鄭의 女
 朴弼基
 
 朴弼謨  
 
 朴泰輔  
 
 光州鄭氏
 鄭時武의 女
 朴泰翰
 縣監
 李喜重의 女
 
 黃植의 女
 
 女
 
 李濂
 正郞
 女
 
 金弘錫
 文學
 側室
 
 女
 
 呂必建
 引儀
 女
 
 李永輝
 縣監

기사전거 : 行狀(南鶴鳴 撰), 諡狀(趙泰億 撰), 墓表(尹拯 撰), 朴世堂諡狀(崔錫恒 撰, 西溪集 卷21), 朴世垕墓誌銘(尹拯 撰, 明齋遺稿 卷36), 朴炡墓誌銘(朴世采 撰, 南溪集 卷76)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효종 5 1654 갑오 順治 11 1 5월 21일, 태어나다. 어릴 때, 後嗣없이 졸한 숙부 朴世垕의 후사가 되다. 생부 朴世堂에게 수학하다.
현종 7 1666 병오 康熙 5 13 생모 南夫人의 喪을 당하다.
현종 10 1669 기유 康熙 8 16 完南府院君 李厚源의 딸과 혼인하다.
숙종 1 1675 을묘 康熙 14 22 생원시에 합격하다. ○ 結城, 扶餘의 명승지를 유람하다.
숙종 3 1677 정사 康熙 16 24 3월, 謁聖試에 장원하다. ○ 전적이 되다. ○ 9월, 예조 좌랑으로서 상소하여,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의 進宴을 취소하도록 청하다. ○ 10월, 增廣別試試官으로서 「左傳」의 ‘美疢不如惡石’이라는 구절을 試題로 낸 일로 논척을 받고 宣川府로 유배되다.
숙종 4 1678 무오 康熙 17 25 5월, 석방되다. ○ 繼妣 鄭夫人의 喪을 당하다. ○ 12월, 敍用의 명이 내리다.
숙종 6 1680 경신 康熙 19 27 5월, 弘文錄에 들다. ○ 11월, 服喪을 마치고 부수찬이 되다. ○ 12월, 老母(尹夫人)의 봉양을 위해 수령이 되기를 청하자, 상이 옷감과 食物을 내리다.
숙종 7 1681 신유 康熙 20 28 1월, 1675년에 遠接使로 다녀와 ‘爾國臣强’이라는 明의 通官 張孝禮의 말을 전한 일로 곤경에 처한 吳始壽의 일이 다시 제기되자, 당시 譯官을 아울러 推鞫하도록 청하다. ○ 2월, 수찬이 되다. ○ 同月, 痘疹으로 승하한 仁敬王后의 喪次에 痘疹을 아직 앓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이 臨哭하지 못하자, 상소하여 臨哭하기를 청하다. ○ 6월, 吳始壽의 일에 대해 譯官을 먼저 推鞫하기를 청하자, 吳始壽를 신구하려는 것이라는 사헌부의 논핵을 받고 체차되다. ○ 10월, 부교리가 되다. 이후 지평, 부수찬이 되다. ○ 12월, 정언이 되다. 상소하여 상이 죄수의 啓覆을 뒤로 물리려는 것을 반대하다. ○ 同月, 교리가 되다. 상소하여 文廟 從祀의 陞黜을 가벼이 의논하지 말 것을 청하고, 驪陽府院君 閔維重을 위해 관직을 別設하기를 청하였던 이조 판서 李端夏를 논척하다. 이 일로 罷職 不敍의 명이 내리다.
숙종 8 1682 임술 康熙 21 29 2월, 筵臣, 兩司 등의 계달로 파직의 명이 환수되다. ○ 5월, 趙持謙, 林泳, 吳道一, 徐宗泰, 李畬와 함께 賜暇讀書하다. ○ 11월, 伊川 縣監이 되다.
숙종 9 1683 계해 康熙 22 30 3월, 상소하여 邑弊를 진달하다.
숙종 10 1684 갑자 康熙 23 31 7월, 교리 申啓華가 상소하여 소환하기를 청하다.
숙종 12 1686 병인 康熙 25 33 봄, 파직되어 돌아오다. ○ 3월, 형 朴泰維를 곡하다. ○ 10월, 李端夏의 아룀으로 부수찬에 제수되었으나 상소, 사직하여 체차되다. ○ 12월, 교리가 되다.
숙종 13 1687 정묘 康熙 26 34 1월, 부수찬이 되다. ○ 2월, 이조 좌랑이 되다. ○ 3월, 羅良佐가 宋時烈의 疏斥을 받은 尹宣擧를 변호한 일로 유배가게 되자, 상소하여 卞析하다. ○ 5월, 湖南 暗行御史가 되다. 啓本에서 전 관찰사 李師命이 征利한 행적들을 아뢰다. ○ 8월, 수찬, 이조 좌랑이 되다. ○ 9월, 長陵 遷葬 반대의 의논을 내놓다. 곧 부응교가 되다. ○ 10월, 應旨 上箚하다. ○ 筵中에서 流民의 火田, 賤妾子女의 贖身 문제 등 7條의 일을 아뢰다.
숙종 14 1688 무진 康熙 27 35 坡州 牧使가 되다. ○ 豐樂軒을 짓다. ○ 金剛山을 유람하다.
숙종 15 1689 기사 康熙 28 36 3월, 牛溪, 栗谷 兩賢의 黜享事를 本府에서 봉행하지 않아 면직, 집으로 돌아오다. ○ 유생 徐宗震 등을 대신하여 상소를 지어 兩賢의 復享을 청하다. ○ 4월, 仁顯王后가 내쳐질 위기에 儒生, 監察들을 위해 상소를 지어 주고, 散官을 대표하여 상소를 지어 올리다. ○ 이에 앞서 削黜되어 江陵으로 中途付處되는 외숙 南九萬을 전송하다. ○ 지어 올린 상소에 忌諱를 범하는 것이 많다 하여 곧 親鞫이 실시되자 吳斗寅, 李世華와 함께 上前에 나아가 사실대로 대답하다. 이튿날 다시 內兵曹에서 鞫問을 당하다. ○ 심한 고문을 받고 珍島 유배의 명을 받다. 아들, 사위 등에게는 削奪, 禁錮의 명이 내리다. ○ 5월 5일, 유배 길에 올랐다가 露梁津에서 졸하다. ○ 7월, 楊州 水落山 서쪽 長者谷에 장사 지내다. ○ 곧 官爵이 회복되다.
숙종 20 1694 갑술 康熙 33 - 4월, 中宮이 復位되다. 곧 資憲大夫 吏曹判書로 증직되고, 賜祭, 旌閭의 은전이 내리다.
숙종 24 1698 무인 康熙 37 - 南鶴鳴이 行狀을 짓다.
숙종 25 1699 기묘 康熙 38 - 尹拯이 墓表를 짓다.
숙종 27 1701 신사 康熙 40 - 坡州 유생 安裕 등의 상소로 李世華, 吳斗寅과 함께 豐溪祠宇에 並享되다.
숙종 28 1702 임오 康熙 41 - 부친 朴世堂이 楊州에서 문집을 간행하다.
경종 3 1723 계묘 雍正 1 - 1월, 응교 鄭壽期의 요청으로 諡號를 내리도록 명하다. ○ 10월, ‘文烈’로 시호를 내리다.
고종 29 1892 임진 光緖 18 - 6대손 星州 牧使 朴齊億이 문집을 重刊하다.(朴齊億의 跋)

기사전거 : 行狀(南鶴鳴 撰), 諡狀(趙泰億 撰), 墓表(尹拯 撰),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西溪 朴世堂의 아들로서, 1689년 기사환국 때 仁顯王后의 폐위를 막기 위해 지어 올렸던 상소로 인하여 심한 고문을 받고 유배길에 올랐다가 그 후유증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졸한 인물이다. 당시 朴世堂의 나이가 61세였는데 이후 저자의 遺稿를 수집, 편차하여 70세가 된 해를 전후해서 본격적으로 간행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1698년에는 저자의 외사촌으로서 同游하였던 南鶴鳴에게 명하여 行狀을 짓도록 하고, 1699년에는 尹拯에게 墓表를 부탁하여 받기도 하였다.(明齋遺稿 卷35) 뿐만 아니라 1698년 2월 16일에 朴世堂이 南鶴鳴에게 보낸 편지(與南敎官鶴鳴, 西溪集 卷19)를 보면, 刊印을 위한 板子와 錢粮은 이미 갖추어졌으니 人力만 마련된다면 板刻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하였고, 南鶴鳴이 낸 唐字活刻의 의견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설명하였다. 이렇게 1699년경에는 간행 준비가 거의 되었으나 간행이 완료된 것은 1702년(숙종 28) 10월경이었으니, 原集 9권, 別集 5권, 附錄 합 7책의 목판본이었다.
朴世堂이 1702년 10월 22일에 羅良佐에게 보낸 편지(與羅平康良佐, 西溪集 卷19)에서 刊出이 완료되었다고 하고, 衆議를 따라 간행이 이루어지는 쪽을 따르다 보니 刪定하는 즈음에 스스로 主張하지 못한 점이 많다고 아쉬움을 표하였다. 尹拯이 羅良佐에게 본집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소문만 듣고 언급한 이해 12월 14일의 편지(答羅顯道良佐, 明齋遺稿 卷15)에서도, 이른바 刪沒이란 것이 누가 한 일인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니, 실제 결정적으로 刪節된 부분이 있었던 듯한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朴世堂의 영향을 받은 지극히 少論的, 急進的인 글이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그렇지만 尹拯은 위의 편지에서, 그렇기는 해도 朴世堂의 눈을 거쳤으니 필시 斟酌한 바가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遺稿의 수집과 편찬을 주도한 것은 역시 朴世堂이었으니, 그리 무리한 刪節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 朴世堂이 편찬을 주도한 또다른 자취는 본집에 편지가 書와 簡牘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그러한 특징이 朴世堂의 「西溪集」에도 똑같이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西溪集」의 편지부분을 본집에서 보인 朴世堂의 분류 방식을 따라 편차한 소치인 듯하다.
결과적으로 朴世堂의 경향이 배여 있는, 時論이 싫어할 글이 여전히 적지 않게 실리게 되었던 것이다. 尹拯이 며칠 후 본집을 勘訂하고 나서 羅良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특히 程篁墩의 「心經附註」를 貶下하면서 退溪가 이의 疑義를 분명하게 짚지 않고 넘어간 것을 비판한 편지들에 대해 깊이 염려하였다. 이들 편지에서 저자는 ‘평생 「心經」을 믿지 않았다’는 말까지 하였으니, 당시 이 책을 중히 여기는 풍토에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문집이 간행된 이듬해에 朴世堂은 尤庵의 문인들에 의해 斯文亂賊으로 몰려 玉果에 유배되는 처분을 받았다가 취소되는 일까지 겪었지만, 그 이전에 朴世堂의 역량과 저자가 仁顯王后를 위해 節義를 세운 덕으로 본집이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간행이 이루어진 장소는 朴世堂이 우거하던 楊州였다. 1892년에 본집이 중간될 때 6대손 朴齊億이 지은 跋文에서, 前集(原集과 別集)의 板木이 楊州 石林寺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하였는데, 石林寺는 朴世堂이 발의하고 시주하여 건립되었고, 상량문과 石林庵記까지 써 주는 등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곳이다. 결국 1702년에 부친 朴世堂의 주도로 原集 9권, 別集 5권, 附錄 합 7책이 楊州에서 목판으로 간행, 보관되었던 것이다. 이 가운데 附錄은 板心題가 ‘定齋集卷之一’로 되어 있고 제1판부터 제6판까지 판차까지 매겨져 있어 당초 권1의 맨 앞에 실으려고 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초간본》 현재 규장각(奎5263, 6272), 장서각(4-6467),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44),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84),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데, 10行 19字本들이다.
이후 1892년(고종 29)에 6대손 星州 牧使 朴齊億이 원집과 별집을 重刊하면서 후집 6권을 追加하여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당초 저자의 증손 朴獻源이 1807년경 金山 郡守 재임 시 庵子를 지은 뒤 기존에 石林寺에서 보관중이던 원집과 별집의 판목을 옮겨 봉안하였던 것을 이때 朴齊億이 다시 星州의 靑巖庵으로 옮겨 봉안하여 重刊하였던 것이다. 朴齊億이 지은 跋文에 의하면, 朴齊億은 1891년 星州 牧使로 부임한 뒤 星州 雙溪寺에 보관중이던 「西溪集」의 판목을 사찰의 퇴락으로 인하여 靑巖庵으로 옮겨 봉안하고 거듭 修葺해 놓았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金山에 있는 본집의 판목을 점검하니, 당시 金山 郡守 申學休가 땔감으로 이 판목을 거의 반이나 쓴 상태였다. 이에 남은 판목을 靑巖庵으로 옮겨 와서 堂弟 朴齊崙에게 명하여 殘帙을 收理하고 遺缺을 刊補하도록 하는 동시에, 家藏되어 있던 後集 遺稿와 舊錄을 수습, 편차하여 6권의 後集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 跋文대로 보면 원집과 별집은 補刻된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重刊된 것이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0行 20字로 된 重刊本(원집과 별집은 811.98-박태보-정-가, 후집은 811.98-박태보-정-후)을 살펴보면, 行字나 글자체, 편찬 방식 등에서 원집, 별집과 후집이 비슷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곧 후집을 처음 간행하여 추가하고 원집과 별집도 板形에 맞추어 새로 重刊한 것이었다. 초간본과 비교하였을 때 수록 내용은 동일하고, 단지 總目과 卷別 目錄을 분리하여 실은 점, 권3에서 〈文東湖集跋〉을 맨 앞으로 실어 〈題韓文公縣齋詩後〉와 자리바꿈한 점, 권5에서 〈代儒生請建虎溪書院疏〉와 〈又辭職疏〉를 자리바꿈한 점, 별집 권2 제10판의 두 군데 등에 頭註를 첨가한 점, 맨 뒤에 補遺로 〈乙卯季冬題〉 등 詩 3수를 첨가한 점만 다르다. 그런데 이 별집의 補遺로 실린 詩 3수가 다시 後集 권1의 詩에도 각기 詩體로 분류되어 실려 있어 의문을 남기고 있다. 같은 시기에 간행된 것이라면 중복하여 실을 이유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원집, 별집과 후집이 함께 간행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또한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朴齊億의 跋文에서 설명된 판목의 이동 과정에서 重刊되어 바뀐 내용이 없고 楊州에서 초간된 본이 이동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별집 뒤에 붙은 附錄의 行狀도 후집 附錄에 중복되어 실려 있으니, 아마도 원집의 수록 내용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간행하면서 初刊 때 수록할 것으로 뽑혔다가 누락되었던 시 3수만 맨 뒤에 補遺라는 이름으로 실어 놓은 것으로 짐작된다.《중간본》 이 중간본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연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고, 후집만 소장된 곳은 규장각(奎5443), 장서각(4-6468) 등이다.
한편 後集은 이후 다시 改刻되었다. 권3의 제6판부터 趙泰億이 지은 諡狀이 실려 있었던 것을 빼고 그 다음에 실렸던 尹拯이 지은 墓表를 바로 연결시키면서 제6판만 木活字로 개각하였다. 또 권5의 愍節錄 6편 가운데 政院日記, 備忘記, 己巳錄을 빼고 역시 제5판부터 제15판까지 3편만 연결시켜 木活字로 개각하였다. 이렇게 개각한 이유는 알 수 없는데, 愍節錄의 경우 肅宗의 당시 발언 내용이 적혀 있던 부분들을 뺀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개각 시기도 1892년 이후겠지만 분명한 것은 알 수 없다.《개각후쇄후집》 이 본은 현재 규장각(奎3142)에 소장되어 있고, 권5ㆍ6만의 零本도 규장각(가람古819.53-B149j-v.5-6)에 있다.
본서의 저본은, 원집과 별집은 1702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奎5263)이고, 후집은 1892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중간본에 추가된 부분으로 규장각장본(奎5443)이다.

기사전거 : 跋(朴齊億 撰), 行狀(南鶴鳴 撰), 墓表(尹拯 撰), 西溪集(朴世堂), 明齋遺稿(尹拯)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原集 9권, 別集 5권, 附錄, 後集 6권 합 1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앞에 附錄까지의 目錄이 있고, 후집은 각 권별로 목록이 있다. 序는 없고 跋만 후집 맨 끝에 실려 있다.
原集 권1~2는 詩이다. 오언고시(27首), 칠언고시(12), 오언율시(28), 칠언율시(96), 오언절구(23), 칠언절구(111), 聯句(4), 詞賦(5)의 순으로 실려 있고, 각 체별로는 연대순 편차이다. 1670년 이후의 詩作들로, 1675년의 結城과 扶餘 유람, 1677년의 宣川府 유배, 1680년 이후의 관직 생활과 賜暇讀書, 1682년의 伊川 縣監, 1687년의 湖南 暗行御史, 1688년의 坡州 牧使와 金剛山 기행, 1689년의 己巳換局을 당한 때에 지은 시들이 주를 이룬다. 課作, 贈詩, 送別詩, 挽詩 등이 다수 실려 있고, 南鶴鳴(子聞), 형 朴泰維(士安), 申曅(季晦), 羅良佐, 외숙 尹拯과 南九萬 등과의 차운시가 특히 많다. 여러 곳에 저자의 自註가 실려 있고, 저자가 마지막으로 지은 〈典農村舍奉別舅氏藥泉南相公江陵謫行〉 시에는 南九萬의 아들 南鶴鳴이 적은 識가 附記되어 있다. 聯句는 1671년 朴世集, 朴泰素, 朴泰維와 함께 지은 〈枯木聯句〉 등이고, 詞賦는 〈次南子聞登樓賦韻〉 등이다.
권2 뒷부분은 箋(6), 狀(4), 箴(1), 銘(2), 贊(3)이다. 箋은 謝箋과 賀箋, 陳慰箋이고, 狀은 지방관 시절 觀察使와 巡營에 보낸 禮狀들이다. 기타 1674년의 〈防意如城箴〉, 1677년 알성시 장원 때의 〈湯盤銘〉, 代作한 〈齧雪贊〉 등이 있다.
권3은 祭文(19), 雜著(5), 題跋(8), 傳(4), 墓表(1)이다. 祭文은 朴泰素, 朴泰維, 朴熙壽 등의 제문과 陰陽山, 德津淵, 雲達山의 祈雨文 등이다. 雜著는 胡方平의 分卦配氣法을 논변한 〈卦氣辨〉, 금강산 正陽寺 歇惺樓의 重修를 위한 募文 등이다. 跋은 「龜亭集」(南在), 「東湖集」(文德敎), 潘南朴氏世譜의 발문 등이다. 傳은 11代祖 朴尙衷을 立傳한 〈潘南先生家傳〉과 그의 事蹟略, 10代祖 朴訔의 事蹟略 등이다. 墓表는 9代祖 朴葵에 대한 것이다.
권4는 行狀(1), 序(8), 記(11), 論(2)이다. 行狀은 형 朴泰維에 대한 것이다. 序는 南鶴鳴과 수창한 시를 모은 「唱和集」의 序, 李選 등에게 지어준 送序, 扶餘 遊覽詩의 序 등이다. 記는 結城 內浦의 遊歷記, 金應河 將軍의 逸事, 宣川 龍興寺, 伊川 天遊堂, 寧越 六臣祠堂의 기문 등이다. 論은 月課로 지은 것으로, 諸葛孔明의 통치 노력, 송 나라 李沆의 현실안주적 통치 형태를 각기 논한 것이다.
권4 뒷부분~권7은 箚(2), 疏(28), 啓(2), 議(1), 奏(1), 書(6)로, 본집에서 가장 비중이 두어진 부분이다. 箚 가운데 1687년의 玉堂 應旨箚는 넓게 聽納하고 분명하게 辨察하고 私己를 극복하도록 권면한 내용이다. 疏는 1677년 예조 좌랑 재직 때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의 進宴을 취소하도록 청한 소부터 1689년 기사환국 때 搢紳을 대표하여 올린 소까지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대부분이 사직하면서 소회를 아뢴 상소이다. 1681년 吳始壽의 일, 상의 仁敬王后 喪次 臨哭, 文廟 從祀 陞黜의 일, 이조 판서 李端夏의 일 등으로 올린 상소, 1683년 伊川 縣監으로서 邑弊를 진달한 상소, 1687년 외조부 尹宣擧를 변호한 羅良佐를 위하여 卞析한 상소, 1689년 牛溪ㆍ栗谷 兩賢의 文廟 復享을 청한 상소, 저자의 죽음을 불러온, 仁顯王后를 내치지 말도록 청한 상소 등이 실려 있다. 啓 가운데 1687년 湖南 暗行御史 廉察啓本 別單에서는 前 관찰사 李師命이 取利의 길을 열어 놓은 점 등 12條를 지적해 놓았다. 기타 長陵 遷奉을 반대한 議와 月課로 지은 擬奏 1편씩이 실려 있다. 書는 南鶴鳴, 趙衡輔, 朴世采, 羅良佐 등에게 보내고 답한 것이다. 특히 南鶴鳴에게 답한 편지는 程篁墩의 「心經附註」의 의문점을 물은 데 답한 것이고 趙衡輔에게 보낸 편지도 이와 관련한 것인데, 평생 「心經」을 믿지 않았다는 구절에서 저자의 학문적 경향을 볼 수 있다. 본집이 간행된 뒤 이 편지들을 본 尹拯은 後患이 있을까 우려하기도 하였다. 羅良佐에게 보낸 편지는 宋時烈의 공척을 받은 尹宣擧의 江都事 등을 변석한 헌납 金斗明이 지은 상소의 미비점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권8~9는 簡牘(149)이다. 같은 편지를 권7의 書와 이곳의 簡牘으로 구분하여 편차한 것은 중요도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형태는 저자의 부친이자 본집 편차를 주관한 朴世堂의 「西溪集」에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외숙 南九萬과 尹拯, 종형 朴泰尙, 羅良佐, 羅碩佐, 南鶴鳴, 朴弼純, 李澤, 李濡, 金構, 林泳, 崔錫鼎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南九萬에게는 朝廷의 사정을 묻고 의논하거나 지방관 재직 상황을 말하였고, 尹拯에게는 「心經」에 대한 질문, 母親 喪禮 절차, 懷尼是非의 상황, 「近思錄」과 易義의 의논 등을 위하여 편지를 보냈다. 羅良佐에게는 懷尼是非 와중의 尹宣擧에 관한 일 등을 의논하였고, 林泳에게도 「心經」의 의문 등에 대해 논하였다.
別集 권1은 狀牒(10), 斷訟案(1)이다. 狀牒은 伊川 縣監 시절에 賑政, 減役, 進上物膳, 量田, 獄囚推覆 문제 등으로 巡營에 올린 것과 坡州 牧使 때 巡營에 올린 乞免狀이다. 斷訟案은 私婢 論介와 幼學 金好敏의 相訟에서 論介의 손을 들어준 決案으로, 伊川이나 坡州 수령때의 일인 것으로 보인다.
권2는 增損投壺儀節이다. 世傳하는 投壺格圖를 增損하고 古禮의 뜻을 곁들여, 우연히 넣는 것보다는 精密함을 중시하는 儀節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끝에 林泳이 南鶴鳴에게 편지하여 이에 대해 평한 글을 붙여 놓았다.
권3은 追尤錄이다. 1677년 증광별시 試官으로서 「左傳」의 ‘美疢不如惡石’이라는 구절을 試題로 낸 일로 인해 논척을 받고 宣川府로 유배, 이듬해 석방되고 서용되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해 놓았다. 禮訟의 불씨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長子를 놓아두고 次子를 세우는 일을 비유하여 인용되는 이 구절을 試題로 내어 결국 南人들의 논척을 받았으나 숙종의 배려로 서용되는 데 이르렀던 것인데, 동료 試官들의 公緘과 敍用의 명을 거두도록 청하는 啓辭가 함께 실려 있다.
권4~5는 坎流編 上下이다. 1680년 11월 부수찬에 제수된 뒤 내외 관직을 거치고 1687년 5월에 호남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의 일까지 기록, 정리되어 있어 이 기간의 저자 행적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附錄은 1698년에 외사촌 南鶴鳴이 지은 行狀이다. 板心題와 板次로 미루어 보면 맨 앞에 실어 저자의 행적을 강조하려고 계획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後集 권1은 사언고시(1), 오언고시(5), 칠언고시(2), 오언율시(11), 칠언율시(29), 오언절구(14), 칠언절구(38), 칠언배율(3)이다. 같은 제목으로 원집에 실리고 남은 시, 月課로 지은 시, 代作詩 등이 대부분이다.
권2는 疑(2), 義(2), 策(2), 箴(1), 箋(3), 表(5), 奏(1), 祭文(1), 記(1), 疏(5), 啓(1), 上言(1), 補遺(4)이다. 1674년의 初試와 1675년의 生員試 때 지은 疑와 義, 1686년과 이듬해 東堂試 때 낸 策題, 〈守口如甁箴〉, 大殿과 巡營에 올린 箋, 〈賀聖節表〉, 謝恩表, 月課로 지은 擬表와 擬奏, 永昭殿에 올린 祭文, 1675년에 지은 石城縣 客館 門樓의 記文, 1680년 부수찬 때 올린 待罪疏, 이듬해와 1687년의 수찬 辭職疏, 1681년의 지평 辭職啓, 1679년에 장모 完南夫人을 대신하여 지은 것으로, 유배중인 두 아들 李週와 李選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석방하여 달라고 청한 上言 등이 실려 있다. 補遺는 4편의 擬表로서, 앞에 실린 表와 함께 편차되어 있던 것을 板刻 과정에서 빠뜨려 판각이 끝난 뒤에 보충하여 넣은 것으로 보인다.
권3~6은 附錄이다. 권3에는 南鶴鳴이 지은 行狀이 다시 실렸는데, 附錄의 체제를 갖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 趙泰億이 1723년 지은 諡狀, 尹拯이 1699년 지은 墓表와 墓誌後記가 있다. 권4는 成揆憲, 李寅燁, 徐宗泰, 崔錫恒, 尹拯, 朴世采 등이 지은 祭文, 姜錫範이 지은 哀詞, 崔錫鼎, 崔昌大, 李亮淵이 지은 追慕詩들이다. 권5~6은 己巳愍節錄으로, 己巳年에 搢紳을 대표하여 지은 疏, 당시의 政院日記, 禁府文案, 備忘記, 疏箚, 家藏되어 온 己巳錄, 李濂이 적은 臨終記言, 부친 朴世堂이 적은 記聞, 諡望, 坡州 豐溪祠, 鷺江書院, 家廟 등의 賜祭文, 伊川 花岑書院, 義城 八賢祠, 洪州 龍溪書院 등의 祭祝文, 贈諡를 청한 鄭壽期의 筵奏, 先生事實記略 등이다.
맨 뒤에 6대손 朴齊億이 1892년에 지은 跋文이 실려 있다.

필자 : 金炅希
속동문선 제9권
 칠언절구(七言絕句)
수락산 성전암(題水落山聖殿庵)

김시습(金時習)

산중에 나무 치는 소리가 정정한데 / 山中伐木響丁丁
곳곳의 그윽한 새는 늦게 갠 날을 희롱한다 / 處處幽禽弄晩晴
바둑을 파하고 개울 늙은이 돌아간 뒤에 / 碁罷溪翁歸去後
푸른 그늘에 책상을 옮겨 놓고 황정을 읽네 / 綠陰移案讀黃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