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 휘 수강 수약 수기 등 /휘 수기 (守紀)

제문 [최수기(崔守紀)ㆍ신구(申絿) 등]

아베베1 2012. 6. 7. 13:12

 

농암집 서
농암집 서(農巖集序) [김창흡(金昌翕)]


나의 중씨(仲氏) 농암 선생(農巖先生)이 별세한 이듬해에 문인 김시좌(金時佐) 등이 선생의 유문(遺文)을 수집ㆍ선별하고 편차를 정하여 30여 권으로 묶었다. 그러고는 인쇄하여 간행하기에 앞서 나에게 서문 한마디를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아, 선생의 높고 크고 심원하고 정밀한 학덕은 이 문집으로 다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나처럼 학문이 깊지 못한 사람은 이 문집조차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선생의 진면모를 어떻게 다 드러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형제들 중에 선생과 가장 나이가 비슷하고 많은 경험을 공유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부모님이 좌우에서 손잡고 이끌어 주시던 어린 시절부터 장성하여 어른이 되고 또 노년에 이르기까지, 나는 선생과 한 밥상에서 밥을 먹고 선생에게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선생이 학업에 전념했던 장소는 어디이며, 선생이 즐겨 읽고 읊조렸던 글은 어떤 글인지를 낱낱이 보아 왔다. 그리고 선생은 학문의 순서를 차근차근 밟아 천근한 데서 심오한 경지로 들어가서는 뛰어난 문학서와 철학서를 두루 섭렵하였는데, 나는 그 과정에서 도저히 따라잡기 어려운 선생의 높은 경지를 보아 왔다. 이러한 내용으로 서문을 쓰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선생은 총기를 타고나 지혜가 남달랐는데, 겨우 일여덟 살을 지나면서부터 침식을 잊을 정도로 서책에 마음을 쏟았다. 때로는 집안사람이 선생을 한참 찾다가 책장 한구석에서 발견하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면 선생은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고요히 앉아 있곤 하였다. 이윽고 서고에서 나와 단정히 앉아 글을 읽으면 그 소리가 마치 금석(金石)을 쪼개듯 낭랑하였고 높고 낮게 반복되는 음조가 오묘한 가락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무지한 아녀자와 아이들도 그 소리에 반하여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처럼 귀를 기울일 정도였다.
선생이 진사시에 입격한 것은 약관(弱冠)이 되기 전이었다. 그 당시 조야(朝野)는 태평하고 가문은 번성하였으니, 선생은 시운을 타고 두각을 드러내어 유감없이 문장솜씨를 발휘함으로써 예악 정치의 시대적 요청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저 옛날 자연(子淵)과 자운(子雲)이 문장으로 나라를 빛냈던 그와 같은 업적을 선생에게 기대하였다.
그러나 을묘년(1675, 숙종1) 이후로 선생은 날로 험해지는 세상과 기울어져 가는 가운(家運)으로 인해 매우 불우하였다. 선생은 남북으로 떠돌며 온갖 역경을 다 겪었는데, 당시 선생의 자취는 월출산(月出山)과 보개산(寶蓋山) 부근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이때 선생은 부화(浮華)한 문장을 차츰 거두고 실질적인 학문을 추구하여 특별한 맛이 없는 담박한 것을 즐겼다. 경전의 복잡다단한 주석을 연구, 세세한 부분까지 빠짐없이 종합 정리하고 중요한 핵심을 낱낱이 분석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엄밀한 교감(校勘)과 정정(訂正)이 쌓여 책자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또 마융(馬融)과 정현(鄭玄)이 이루었던 것과 같은 훈고학의 성취를 선생에게 기대하였다. 그 뒤에 선생은 조정에 논사(論思)의 직임으로 있었는데, 그 당시 경연석상에서 종종 두각을 드러내어 은연중에 유림에서의 명망과 지위가 높아졌다.
아, 그러나 마침 기사환국(己巳換局)이 터지고 말았다. 선생은 이때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가 집을 짓고 살며 농암(農巖)이라는 호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임금에게 버림받고 은거하는 몸으로, 세상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도 날로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처음 품었던 뜻을 단단히 지켜 오직 염(濂)ㆍ낙(洛)ㆍ관(關)ㆍ민(閩)의 학문만을 추구하였다. 선생이 천명에 순응하여 참된 본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자세를 끝까지 견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학문에 대해 논하자면,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 이후에는 그 등급을 셋으로 대별할 수 있으니, 문장(文章)ㆍ훈고(訓詁)ㆍ유자(儒者)의 학문이 그것이다. 이천 선생(伊川先生)까지만 해도 생도들에게 이 점을 말해 주어 근본에 힘쓰도록 권면하였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유자의 학문으로 곧장 들어가지 못하고 초사(楚辭)ㆍ고시(古詩)ㆍ병서(兵書)ㆍ선서(禪書) 등에 어지럽게 마음을 썼는데, 이는 소년시절의 습관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탈피해 나갔다. 이와 같은 주자의 실례로 볼 때, 성인의 자질을 타고나 처음부터 사리에 밝은 자가 아니라면 이러한 습관에 빠지는 것은 면할 수 없다 하겠다. 선생의 학문이 외연(外延)을 확장했다가 유자의 학문으로 수렴되면서 대략 세 번의 변화를 겪었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선생의 고유한 특성은 오직 간결 평이함뿐이었다. 선생은 그 진리를 체득한 마음에서 발로하여 말과 행동으로 표출된 일들이 어느 것 하나 툭 트이고 공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글을 지을 때에는 옛사람의 글을 답습하거나 표절하지 않은 결과 모든 글이 독창적이었고, 경전을 해석할 때에는 천착하거나 견강부회하지 않은 결과 논리가 순하였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참된 본성을 보존하고 사물의 이치를 두루 깨치는 심오한 경지에 나아간 것도 요컨대 오직 간결 평이함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문집을 보는 사람이 초년과 만년의 작품을 구별하여 순수한 도(道)와 잡박한 문(文)으로 분간하려 아무리 애를 쓴다 하더라도, 모든 글이 한결같은 것을 어찌하겠는가. 《시경(詩經)》에 “의젓한 몸가짐 빈틈이 없어, 무엇이 훌륭하다 꼽을 수 없네.[威儀棣棣 不可選也]”라고 하였다. 선생의 글도 이처럼 순수한 것을 따로 꼽을 수가 없으니, 또 어찌 문(文)과 도(道)를 분리하여 논할 수 있겠는가. 불완전한 문(文)은 도(道)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문(文)을 짓는 방법에는 세 가지 요체가 있으니, 첫째, 이치가 정밀하고 분명하지 않으면 안 되고, 둘째, 기운이 왕성하지 않으면 안 되고, 셋째, 언어 구사가 무르익지 않으면 안 된다. 수레가 아름답게 꾸며져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무르익은 언어 구사와 같고, 물이 깊어 물건이 뜰 수 있는 것은 왕성한 기운과 같다. 이 두 가지는 오래전부터 깨끗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육경(六經)에 실려 있었다. 육경은 순전히 이치를 밝힌 글인데도, 천지에 충만한 왕성한 기운과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찬란한 아름다움까지 이처럼 모두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경에서는 이 세 가지 요체를 모두 지목해 낼 수 있다 하겠다.
그러나 팔대(八代) 이후로는 천하의 문(文)이 분해되어 세 가지 요체를 두루 갖추지 못하였으니,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룬 위대한 문(文)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므로 문장가의 문은 유창함과 수사적인 기교만 추구하고, 경학자의 문은 진지함과 질박함에만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이른바 유자(儒者)의 문(文) 중에, 《속경(續經)》처럼 참람되고 《법언(法言)》처럼 거짓된 것은 순전히 남에게 보이기 위해 주관 없이 지어진 것으로 그 내용과 형식이 모두 잘못되었으니, 단연코 육경을 해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장가이면서 유자인 창려(昌黎 한유(韓愈))는 기운이 왕성하고 언어 구사가 무르익었다. 그러나 〈원도(原道)〉와 〈사설(師說)〉 같은 작품은 겨우 몇 편에 불과하였고 〈모영전(毛穎傳)〉과 〈송궁문(送窮文)〉 같은 작품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나았다. 심지어 크고 넓은 규모의 맹자(孟子)를 깎아내려 사마상여(司馬相如)와 동렬에 세우고 흐리멍덩한 우적(于頔)의 문장을 추켜세워 육경에 비기기까지 하였으니, 심하다 하겠다. 이처럼 무리하게 아첨하고 실없었던 그에 대해 주공(周公)의 마음과 공자의 생각을 지녔다는 둥, 태양처럼 빛나고 옥처럼 깨끗하다는 둥 칭송을 하다니, 아, 참으로 황당하다.
구양수(歐陽脩)는 수준이 낮긴 해도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다. 아름답고 조리 있는 그의 문장에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심오한 이치를 융합하면 유감이 없을 텐데, 애석하게도 이 두 가지가 한데 어우러진 작품을 만나 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선생은 바로 그러한 것을 완비한 경우이다. 실로 지나치게 말해도 과장되지 않은 말이 있는 법인데, 선생에 대한 나의 이 평가가 그러한 경우라고 자부한다.
선생은 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점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천하의 지극한 이치를 말하려면 말만 많아지고 이치를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선생은 간결한 말로 그 이치를 다 드러내었다. 둘째, 어지러운 중론(衆論)을 꺾으려면 말투가 격해지고 논리가 빗나가는 경우가 있는데, 선생은 부드러운 말투로 막힘 없는 논리를 폈다. 셋째, 긴 문장을 끝맺을 즈음이면 말의 흐름이 급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선생은 신중하고 여유롭게 마무리를 지었다. 선생의 글을 보면, 숨어 있던 이치가 가을달처럼 환히 빛나고, 이견(異見)에 대한 논박이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긴 문장의 말미에 조화로운 음악이 울리는 듯하다. 한자(韓子)의 “이치를 환히 알면 문장도 논리가 분명하고, 성품이 느긋하면 문장도 여유롭다.”는 말도 선생의 문장을 찬미하기에 미진하다 할 것이다.
천지간에는 실로 사리에 어긋나거나 잡된 것이 섞이지 않아 사람의 마음과 통하는 순한 기운과 조화로운 소리가 있다. 그것은 저절로 형상과 음률을 이루는데, 조금이라도 작위(作爲)를 가했다 하면 곧 그 기운과 소리에서 멀어져 그러한 형상과 음률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선생은 이미 오래전에 그러한 글을 써내었으니, 본디 별개인 문(文)과 도(道)가 선생의 글에서는 일체가 되었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말세에, 그것도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문(文)을 짓는 세 가지 요체를 모두 갖추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 가지 뛰어난 점을 한 몸에 지녔으니,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선생의 글을 가지고 선생의 인품을 추론해 보면, 온화하고 순리로운 성품이 내면에 쌓여 아름다운 광채가 밖으로 드러난다는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다.
아, 내가 삼주(三洲)에서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던 저녁이면, 선생은 종종 잔뜩 미간을 모으고, “문인(文人)의 악업(惡業)이 끝날 때가 없구나. 《역경(易經)》을 읽는 내 만년 공부에 해로울 텐데.”라고 말하곤 하였다. 여기에서, 내실을 추구하는 선생의 공부가 노년으로 갈수록 한층 더 면밀해졌고 묵묵히 실천하여 성취한 것은 덕행이 있어서였으며, 나이 예순을 앞두고도 꾸준한 변화를 멈추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점도 문인(門人)들이 알아두어야 할 것이기에 아울러 서술하였다.
숭정(崇禎) 기원후 82년 기축(1709, 숙종35) 9월에 아우 창흡(昌翕)이 삼가 짓다.

[후서(後序)]

전에 나는 이 문집에 대해 “모든 글이 한결같아 순수한 도(道)와 잡박한 문(文)으로 분간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각 문체별 글의 수준도 그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그러나 유자후(柳子厚)가 서술(敍述)과 비(比)ㆍ흥(興)을 별개의 창작 기법으로 분리한 뒤로 사람들은 마침내 “서술과 비ㆍ흥은 주안점이 완전히 다르므로 두 가지를 다 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니,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자후가 말한 ‘기세가 높고 힘차고 광대하고 심후한 것’과 ‘미려하고 전아하고 운율이 맑고 유장한 것’이, 그 체재와 격조에 있어 방정하고 원만함은 사실 차이가 있다. 그러나 지류(支流)는 둘이지만 근원은 하나이니, 이들은 본디 합치되는 것이다. 곧, 옛사람들의 언어를 상고해 보면, 그것이 비록 사실과 심정을 자세히 서술하는 말이라 해도 뜻을 다 표출할 말이 부족하면 왕왕 반복하고 소리를 길게 뽑아 저절로 성률에 맞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과 영탄(詠嘆)을 규칙화한 비ㆍ흥은 그 길이를 다소 변화시킨 것일 뿐이니, 어찌 서술과 완전히 다르다 할 수 있겠는가. 서술과 비ㆍ흥은 서로 융통성 있게 넘나들기 때문에, 문장을 짓는 사람들도 시인의 여유로운 맛과 소인(騷人)의 맑고 깊은 맛을 과소평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맛을 터득하여 운용한 사람으로는 누구보다 구양수(歐陽脩)를 꼽을 수 있는데 선생도 그러했으니, 이는 온후한 성품과 해맑은 기상이 구양수와 같아서였다. 그러나 구양수는 시의 격조로 문장을 짓는 것은 잘하면서도 시의 격조로 시를 짓지는 못하였으니, 이 어찌 습속에 얽매여 진솔 담박함을 잃어버린 때문이 아니겠는가. 반면에 선생은 주자(朱子)를 바탕으로 완적(阮籍)과 곽박(郭璞) 이전 시대의 문학적 기풍을 섭렵함으로써 진솔 담박함을 추구하였고, 옛것을 모범으로 삼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방향으로 운율을 연마하였다. 그 결과 처한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감흥을 고금을 넘나드는 격조로 자유로이 표출하면서도 진솔 담박함이 자연히 담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시가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 수준의 고하를 막론하고 문장과도 동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 선생은 고대의 순박한 악(樂)과 시(詩)가 붕괴된 뒤에 태어나 강개한 마음으로 순(舜) 임금과 탕(湯) 임금의 음악을 생각한 나머지, 그 음악이 마치 귓전에 쟁쟁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글을 읽을 때면 장구(章句)를 풀이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마음에 맞는 대목이 있으면 늘 낭랑하게 독송하고 힘차게 읊조리며 마치 옛사람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처럼 오랫동안 되풀이하여 음미하였다. 그리고 비록 대수롭지 않게 들어 넘길 수 있는 사람의 시구라 해도 반드시 반복해서 낭송하게 한 다음 운율의 조화와 시어의 적절함을 평가하였으니, 선생이 자득한, 성정(性情)을 읊은 시는 실로 보통 사람의 시와 다른 것이었다.
비ㆍ흥을 구사한 것이 적합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언어를 조탁한 것이 노련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이 두 가지로 선생의 글을 평가하는 기준을 삼아서는 안 된다. 이와는 별도로 글 이면에 구성지고 해맑게 배어나는 것이 있으니, 가락이 맑으면서도 음운이 부드러워 듣는 즉시 이해가 되고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선생의 글이 제대로 글을 읽고 음운을 살필 줄 아는 이들의 인정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문장을 보면 시가 그 속에 들어 있고 시를 보면 음악이 그 속에 들어 있으니, 종합하여 보면 이 또한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글이 한결같은 것이라 하겠다.


 

[주D-001]자연(子淵)과 자운(子雲) : 자연은 왕포(王褒)의 자이고 자운은 양웅(揚雄)의 자로, 모두 한(漢)나라 때 문장가이다. 왕포는 선제(宣帝) 때 〈성주득현신송(聖主得賢臣頌)〉을 지어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으며, 양웅은 성제(成帝) 때 〈감천부(甘泉賦)〉, 〈하동부(河東賦)〉, 〈우렵부(羽獵賦)〉, 〈장양부(長楊賦)〉를 지어 문명을 떨치고 뒤에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 등 철학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주D-002]크고 …… 세우고 : 한유(韓愈)가 이부(吏部)에서 치른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에 낙방한 뒤 최입지(崔立之)에게 보낸 답서에서 “굴원(屈原), 맹가(孟軻), 사마천(司馬遷), 사마상여(司馬相如), 양웅(揚雄) 같은 옛 호걸 선비들이 혹시 이 시험에 급제한다 하더라도 필시 하찮은 시험에 관계한 것이 부끄러운 나머지 벼슬하지 않고 그만두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昌黎文集 卷16 答崔立之書》
[주D-003]흐리멍덩한 …… 하였으니 : 우적(于頔)은 당 헌종(唐憲宗) 때 재상이다. 한유는 그가 지은 〈문무순성악사(文武順聖樂辭)〉, 〈천보악시(天寶樂詩)〉, 〈독채염호가사시(讀蔡琰胡笳辭詩)〉 등의 작품을 읽고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양자운(揚子雲)이 ‘〈상서(商書)〉는 범위가 크고 넓으며 〈주서(周書)〉는 논조가 분명하고 바르다’ 하였는데, 당신의 문장은 그처럼 범위가 광대하며 논리가 분명하고 바르다.”라는 내용으로 극찬하였는데, 이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昌黎文集 卷15 上襄陽于相公書》
[주D-004]주공(周公)의 …… 하다니 : 당(唐)나라 이한(李漢)이 지은 〈창려문집서(昌黎文集序)〉 내용이다.
[주D-005]한자(韓子)의 …… 말 : 한자는 한유를 가리킨다. 한유가 위분(尉汾)에게 보낸 답서에서 뛰어난 문장은 우선 내실이 탄탄하게 다져진 다음에 이루어진다는 뜻을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昌黎文集 卷15 答尉遲生書》
[주D-006]문인(文人)의 악업(惡業) : 남의 가문의 묘도문자(墓道文字)를 짓는 등 문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만년의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이를 악업이라 한 것이다.
[주D-007]후서(後序) : 1928년에 후손 김영한(金甯漢)이 《농암집》의 삼간본(三刊本)을 간행하였는데, 이 삼간본은 원집과 속집에 수록되지 않은 내용을 묶어 별집을 만든 다음 원집, 속집, 별집을 합부(合附)하여 간행한 것이다. 이때 김영한이 원집 말미에 김창흡(金昌翕)이 쓴 후서(後序)를 수록하였는데, 이 후서는 본 번역서의 대본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나, 자료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므로 번역하여 덧붙인 것이다.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제문 [최수기(崔守紀)ㆍ신구(申絿) 등]


석실서원(石室書院) 재생(齋生)

유세차 무자년(1708, 숙종34) 6월 병오삭 1일 병오에 석실서원 재생 최수기(崔守紀), 신구(申絿) 등은 삼가 술과 안주를 농암 김 선생의 영전에 올리며 글을 지어 고하나이다.

선비로서 뒤늦게 태어나 / 士之生晩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 / 而有長懷
이 누추한 세상에서 / 陋矣斯世
누구와 함께 돌아갈까 / 孰與爲歸
단지 공자와 맹자 / 唯彼洙泗
정자와 주자가 있건만 / 與夫濂洛
이들 군자의 풍도는 / 君子之風
천고 이전이라 아련할 뿐 / 千載云邈
오직 선생이 나오시어 / 惟先生出
우리에게 큰 다행이니 / 我幸之厚
우리보다 빠르지 않고 / 不自我先
우리보다 늦지 않았네 / 不自我後
선생의 자질은 / 先生之質
시원스럽고 깨끗하며 / 淸通灑落
선생의 학문은 / 先生之學
정대하고 진실하여 / 正大淳實
선현도 의심한 바를 / 往賢所疑
선생이 밝혀내었고 / 先生發揮
세속 학자 천착한 바를 / 俗學所鑿
선생이 바로잡았다 / 先生正之
고정을 추종하여 / 追古考亭
거의 가까웠으니 / 乃庶幾焉
실로 하늘이 선생을 내어 / 天實生之
사문을 돕도록 하였다 / 以相斯文
중년에 물러나 은거하니 / 中年退藏
식자들이 한탄했으나 / 有識歎傷
경륜의 재주를 거두어 / 斂其經綸
우리 고을에 베풀었다 / 以施吾鄕
미수의 북쪽 / 渼水之陰
석실산은 / 石室之山
선정 위패 봉안한 곳 / 先正所安
높은 풍도 사라지지 않았네 / 高風不刪
선생은 이곳에서 / 先生於此
가르침을 베푸니 / 乃設其敎
도를 지니신 분을 / 道之所存
누군들 사모하지 않으랴 / 孰敢無慕
선비들은 책을 들고 / 挾筴于于
먼 곳에서 찾아오니 / 有來自遠
맹자처럼 즐겁게 가르치고 / 鄒聖樂育
공자처럼 게을리 않았네 / 宣尼不倦
서원을 열어 강론하며 / 講開白鹿
향음례와 향사례를 행하니 / 禮行飮射
글 읽는 소리 넘쳐흘러 / 洋洋絃誦
날마다 강당이 북적거렸네 / 日滿黌舍
선생이 자리에 앉아 / 先生在座
의관을 정제하면 / 冠屨儼然
모두들 둘러싸고 읍하며 / 環拱嚮挹
신명처럼 공경하였네 / 敬若明神
감히 나쁜 짓 하지 못하고 / 不敢不善
의롭지 않은 일 하지 않으며 / 不爲非義
우리 선생에 대하여 / 於我先生
모두 경외하였네 / 咸有嚴畏
예로써 사양한 이도 나오고 / 有能禮讓
효도하고 공경한 이도 나온 것은 / 有能悌孝
이 또한 선생이 / 亦惟先生
잘 인도해 준 덕택이었네 / 有以善導
보고 느껴 얻은 바에 / 觀感所得
나아가는 방향이 바로잡히니 / 趨向一正
아, 선생이여 / 嗟哉先生
우리의 스승이자 우리의 어른이라 / 我師我長
오래도록 살면서 / 庶其壽考
후학을 돕기 바랐는데 / 率惠後學
하늘이 남겨 두지 않으니 / 天不憖遺
우리가 백번 죽어도 살릴 수 없구나 / 百身莫贖
산이 무너지는 고통이 / 山頹之痛
누군들 없겠나마는 / 人孰無斯
유독 우리 고을 선비들은 / 獨吾鄕士
죽도록 슬픔을 잊지 못하네 / 沒世其悲
문곡(文谷)과 청음(淸陰)은 / 惟文與淸
선생의 부친과 증조이니 / 乃考乃曾
삼대를 합사(合祀)해야 한다는 / 三世合食
선비들의 논의가 일어났네 / 士論方興
모습은 비록 멀어졌으나 / 典刑雖遠
빼어난 풍도 가까이 하리니 / 英爽可親
우리가 선생을 섬김은 / 我事先生
죽으나 사나 다를 게 없네 / 無亡與存
이렇게 간소한 제수 갖추어 / 具玆醪羞
슬픈 마음 고하나니 / 以告哀惻
아, 선생이여 / 嗚呼先生
우리의 술잔을 거절하지 마소서 / 毋吐我爵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녹동서원(鹿洞書院) 사제문(賜祭文) 숙종 계사년(1713, 숙종39) [어유귀(魚有龜)]


지제교 어유귀(魚有龜) 지음

계사년 6월 병자삭 12일 정해에 국왕은 신 예조 정랑 길경조(吉景祖)를 보내어 고 직제학(直提學) 최덕지(崔德之), 고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고 사인(士人) 최충성(崔忠成), 고 판서 김창협(金昌協) 네 신하의 영전에 하유하고 제사를 지낸다. 국왕은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도학이며 절행은 / 道學節行
세상이 존경하고 따라야 할 일 / 世所矜式
어질고 덕 있는 자 향사하라는 / 祀賢饗德
이 나라에 정해진 법이 있다네 / 邦有典則

강직하고 올곧은 학문을 지녀 / 侃侃直學
명망과 내실 모두 성대했는데 / 望實俱赫
영릉이라 세종 때 마침 만나서 / 遭際英陵
만리 전도 앞길이 창창하다가 / 進途方闢
고을 수령 인끈을 던져 버리고 / 一投州紱
월출산 산기슭에 편히 누워서 / 高臥月出
문 닫고 성현 글을 익혔었는데 / 杜門講學
무엇보다 맹자의 말씀 궁리해 / 玩賾鄒說
존양이란 편액을 걸어 붙이고 / 堂扁存養
힘쓰기를 깊고도 정밀히 하자 / 用功微密
문종께서 마침내 가상히 여겨 / 文廟乃嘉
조정이라 대궐로 불러와서는 / 召致內閣
순결하고 진실함 치하하시어 / 賞其純實
은총이며 예우가 두터웠건만 / 恩顧優渥
상소로 물러감을 자청하고서 / 尺疏乞骸
처음의 신분으로 다시 돌아와 / 復遂初服
심산계곡 속에서 생을 마치니 / 終身邱壑
무너진 세상 풍속 감화되었네 / 風勵頹俗

그 뒤에 가정교훈 영향을 받아 / 庭訓所漸
태어난 손자 또한 어질었나니 / 有孫亦賢
스승의 문하에서 덕성 기르고 / 薰德師門
어린 나이 묘령에 도에 뜻 두어 / 志道妙年
식견이 고매하고 행실 독실해 / 識高行篤
마침내 가문 전통 계승하였네 / 遹紹家傳

어허, 나의 어질고 유능한 보좌 / 繄我良佐
이 나라의 귀감이 분명했거니 / 邦國蓍龜
충직하고 순수한 절조에다가 / 忠純其操
씩씩하고 공손한 자질을 지녀 / 莊穆其資
이름난 조부에게 직접 배우고 / 親炙名祖
큰 스승 문하에서 갈고닦은 뒤 / 切磋大老
들은 바를 높이고 아는 걸 행해 / 尊聞行知
평소에 지닌 포부 크게 펼쳤네 / 大展抱負
세상의 도덕 풍속 책임지고서 / 身任世道
음기를 억누르고 양기 붙들며 / 抑陰扶陽
한 절개로 세 조정 섬기는 동안 / 一節三朝
도덕 업적 한층 더 빛이 났었네 / 德業彌章
의정부 들어온 게 네 번이었고 / 四入中書
남쪽에 귀양 간 게 두 번이거니 / 再遷南裔
오로지 우리 경의 진퇴에 따라 / 惟卿進退
시운의 길흉 성쇠 점칠 수 있어 / 占時否泰
무진 기사 그 당시 생각노라면 / 永言龍蛇
슬픔이며 후회를 어이 가누랴 / 曷勝悼悔
저기 저 영암 땅을 돌아다보면 / 睠彼朗山
충성스런 경의 넋 서린 곳으로 / 是卿湘沅
내 남쪽 선비들을 계도했는데 / 迪我南士
남긴 교훈 아직도 그대로 있어 / 餘敎斯存
학문을 강습하던 생각 일어나 / 淇竹興思
세상 떠날 때까지 잊지 못하네 / 沒世不諼

그리고 또 상서는 지혜 출중해 / 嶷嶷尙書
선대의 아름다운 자취를 밟아 / 趾美先躅
시례의 가업 전통 계승하였고 / 業承詩禮
재덕의 도량 인품 가슴에 품어 / 器鞰珪璧
경연에서 왕도정치 토론을 하고 / 經幄討論
바른말로 임금을 인도하다가 / 昌言啓沃
불행히도 중도에 변고를 만나 / 中罹變故
황량한 골짝으로 은둔하였네 / 遯于荒谷
성현 학문 부단히 스스로 닦아 / 俛焉自修
일심으로 도리를 탐구하였고 / 一心求道
주자 연원 거슬러 올라가서는 / 探溯紫陽
빗장 열고 심오한 이치 더듬어 / 叩抽鍵奧
진정으로 알았고 실천했기에 / 眞知實踐
조예가 날로 더욱 정밀해지자 / 造詣益精
유학을 붙들어서 보호하였고 / 扶植世敎
후생이 따라 배울 모범이 되니 / 模範後生
기풍이며 영향이 두루 미치어 / 光塵所曁
선비들 너나없이 흠모하였네 / 衿紳均慕

앞 시대와 뒤 시대 현인 네 사람 / 前後四賢
이 고장에 자취를 남기었는데 / 跡留斯土
조부와 손자 서로 대를 이었고 / 祖孫相望
부자가 아름다움 함께 하였네 / 父子並美
선비들이 다 함께 상의한 끝에 / 多士協謀
사당 세워 제사를 지내 주면서 / 立廟以祀
오른쪽 위치에다 배향을 하되 / 齊享于右
차례대로 줄지어 봉안하였네 / 列配其次
아름다운 편액을 이에 내리어 / 玆宣華額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했는데 / 俾聳瞻聆
백록동 서원 이름 서로 같아서 / 名叶鹿洞
천년을 사이 두고 함께 빛나네 / 輝映千齡
제관 보내 제물을 올리게 하니 / 遣官致酹
희생도 살 오르고 술맛도 좋다 / 牲酒肥香
영령들이여 부디 강림을 하여 / 靈其來格
아무쪼록 이 술잔 받아 들게나 / 庶歆此觴


[주C-001]녹동서원(鹿洞書院) 사제문(賜祭文) : 녹동서원은 1630년(인조8)에 전라도 영암(靈巖)에 세웠는데, 1713년(숙종39)에 사액하면서 고유한 글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인 최덕지와 함께 배향된 성종 때의 학자 최충성 및 농암의 부친 김수항, 농암 등의 순으로 열거하며 공덕을 기렸다.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석실서원(石室書院) 사제문 순조 계해년(1803, 순조3)


양주(楊州) 고을 동쪽에 / 維楊之東
석실이 웅장하니 / 石室巖巖
태산을 노나라가 / 譬彼泰山
우러러봄 비슷해 / 魯邦所詹
바른 정기 모인 곳 / 正氣攸萃
철인 계속 일어나 / 哲人代興
나라의 기강 되고 / 國以綱紀
사류는 모범 있네 / 士有儀刑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

순수한 충의에다 덕 높은 노인 / 精忠宿德
기개 있는 선비요 명상으로서 / 烈士名相
법도와 도량 모두 심후하였고 / 範宇淵凝
말씀 기운 봄처럼 온화했는데 / 辭氣春盎
중간에는 나라의 불행을 만나 / 中丁艱否
생강 계피 맛보다 훨씬 더 맵게 / 薑桂愈辣
조정에서 의용을 엄숙히 하자 / 正色巖廊
무너진 풍속 또한 변화되었네 / 頹俗爲率
다급한 상황에서 의리와 이욕 / 熊魚倉卒
차분하게 올바로 판단을 하여 / 判自從容
남루에서 폭파한 맹렬한 불길 / 南樓烈焰
피어올라 창공에 서리었다네 / 上蟠蒼穹
기분 좋다 훌륭한 아우 또 있어 / 樂有賢弟
춘추대의 평소에 익히 밝히니 / 大義講熟
청사에 그 이름이 찬란히 빛나 / 煌煌靑史
백이숙제 미덕과 짝을 이뤘네 / 匹美孤竹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사문을 대표하는 인물에다가 / 斯文宗主
천하의 지체 높은 노인으로서 / 天下大老
손으로 강상 윤리 높이 받들고 / 手擎天常
몸으로 세상 도덕 책임졌나니 / 身任世道
문공이라 주자의 소학 교훈과 / 文公小學
아성이라 맹자의 호연지기로 / 孟氏浩氣
강직하고 방정한 정신을 지녀 / 剛方正直
전전긍긍 언제나 조심하였네 / 戰兢臨履
깃대 털 뜯어 먹던 충성에다가 / 忠炳齧旄
맨발로 칼날 밟는 용맹으로서 / 勇邁蹈刃
일만 번 꺾이어도 동해 향하는 강이요 / 江宗萬折
일천 길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절벽이라 / 壁立千仞
노공 어른 근황이며 / 潞公安否
사마군실(司馬君實) 성명을 / 司馬名姓
부녀자와 애들도 모두 알았고 / 婦孺皆知
하인이며 종들도 존경하였네 / □□亦敬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

가문엔 바른 학통 이어받았고 / 家傳正學
나라는 어진 보필 의지했나니 / 國倚良弼
덕망과 명성 도의 좋은 덕목을 / 德望名義
세 조정 한 절개로 지키었다네 / 三朝一節
상서로운 봉황과 기린으로서 / 瑞鳳祥麟
너나없이 즐겁게 바라봤으니 / 爭覩爲快
경 한 몸의 진퇴와 영욕에 따라 / 身之詘伸
세상 운수 성쇠가 달라졌다네 / 世以否泰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

큰 그릇 기본 자질 받고 태어나 / 天挺偉器
영특하고 엄하고 순수했는데 / 英特莊粹
잔등에 무거운 짐 짊어지고서 / 脊硬擔負
몸으로 법도 준칙 실천하였네 / 躬蹈繩矩
안정 선생 호원(胡瑗)의 학칙에다가 / 安定學規
문공(文公)이라 주자의 교훈 익히고 / 文翁儒化
마침내 의정부의 재상이 되자 / 爰登黃閣
군자는 믿고 소인은 두려워했네 / 正恃邪怕

문정공(文貞公) 이단상(李端相)

시례의 연원 계승하여 / 詩禮淵源
의리를 깊이 탐구하고 / 理義芻豢
명예의 굴레 용퇴하여 / 勇退名韁
도학의 영역 도달했네 / 默造道岸
영지의 줄기 읊조리고 / 靈芝詠秀
태극의 묘리 완미하며 / 太極玩妙
화양의 의기 투합하여 / 華陽襟契
물처럼 환히 통했다네 / 秋水相照

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

지혜가 밝디밝고 기품도 간결 / 明通簡潔
옥처럼 온화하고 금처럼 정갈 / 玉潤金精
나가고 들어앉는 분수 다하고 / 出處盡分
알고 또 실천하는 공부 겸하여 / 知行兼程
유학을 붙들어서 보호하였고 / 扶植世敎
후생이 따라 배울 모범이 되니 / 模範後人
삼주 마을 하늘의 밝은 달빛에 / 三洲朗月
기풍이며 영향을 느낄 만하네 / 怳挹光塵

여기 이곳 한 서원에 / 惟玆一院
모신 군자 여섯인데 / 凡六君子
형제 서로 앞다투어 / 壎篪競奏
선대 미덕 계승했고 / 堂構紹美
사우들과 어울리어 / 曁厥師友
한 마음에 같은 연원 / 一揆同貫
별들 모임 아닐쏘냐 / 豈聚星比
자양의 찬 합당하다
/ 合紫陽贊
거둥길이 아득하여 / 輦路莽蒼
그저 감회 일어날 뿐 / 起予曠感
허나 정수 남아 있어 / 光垂精英
이내 눈에 보이는 듯 / 髣髴入覽
공신 자손 주나라 때 / 有菀喬木
대대로 녹 주었나니 / 周士亦世
제관 보내 제향 올려 / 伻來致侑
교화 널리 베푼다오 / 風動無際


 

[주D-001]깃대 …… 충성에다가 : 한무제(漢武帝) 천한(天漢) 원년(기원전 100)에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나간 소무(蘇武)가 커다란 흙구덩이 속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음식을 주지 않자 사신의 깃대에 달린 털을 뜯어 먹으며 연명하면서도 항복하지 않았다. 곧 김상헌이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영수로 심양(瀋陽)에 끌려가 감옥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절개를 굽히지 않은 것이 소무의 경우와 비슷하므로 인용한 것이다. 《漢書 卷54 李廣傳》
[주D-002]노공(潞公) : 송나라 때 노국공(潞國公)에 봉해진 명재상 문언박(文彦博)을 말한다. 인종(仁宗), 영종(英宗), 신종(神宗), 철종(哲宗) 등 네 조정에서 50년 동안 장수와 재상 등 요직을 맡아 치적을 이루었다. 김상헌의 경우가 그와 비슷하므로 인용한 것이다.
[주D-003]사마군실(司馬君實) : 송나라 명재상 사마광(司馬光)을 말한다. 문언박과 같은 시기에 재상을 역임하였는데, 이 또한 김상헌을 그에 견준 것이다.
[주D-004]호원(胡瑗) : 송나라의 성리학자 호원(993~1059)으로 자는 실지(實之), 호는 안정(安定)이다. 범중엄(范仲淹), 손복(孫復)과 더불어 송초(宋初) 삼선생(三先生)으로 불린다. 저서로 《주역구의(周易口義)》, 《홍범구의(洪範口義)》가 있다.
[주D-005]별들 …… 합당하다 : 후한(後漢) 말기의 명사 진식(陳寔)이 그의 아들 기(紀)와 심(諶)을 대동하고 순숙(荀淑)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팔룡(八龍)이라 불리는 순숙의 여덟 아들인 검(儉)ㆍ곤(緄)ㆍ정(靖)ㆍ도(燾)ㆍ강(江)ㆍ상(爽)ㆍ숙(肅)ㆍ부(敷) 등이 한 자리에 어울려 시중을 든 일이 있었다. 이때 천문을 관장하는 태사(太史)가 하늘에 덕성(德星)이 한 지점에 모인 것을 보고 500리 떨어진 곳에 현인들이 모였다고 천자에게 아뢰었다. 이로 인해 영천(潁川)에 있는 진씨의 정자를 취성정(聚星亭)이라 불렀는데, 송나라 주희(朱熹)가 그 정자를 수리하고 당시의 상황을 그린 병풍을 만들어 거기에 서문과 함께 찬(贊)을 지어 붙였다. 석실서원에 봉안된 여섯 사람이 김상용을 필두로 가족과 사우 관계로 이루어졌으므로 인용한 것이다. 《朱子大全 卷85 聚星亭畫屛贊》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제문 [김창흡(金昌翕)]


아우 창흡(昌翕)

유세차 무자년(1708, 숙종34) 6월 임오삭 5일 병술에 아우 창흡은 떡이며 술 등 제물로 중씨(仲氏) 농암 선생의 영전에 삼가 제사를 올립니다.
아, 가슴 아픕니다. 제가 중씨와 형제로 살아온 지 56년인데, 중씨와는 두 살 터울로 태어나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이날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지나간 세월을 회상해 보면 통곡하거나 허둥대던 날들이 대부분이고 예법을 챙기면서 화락하게 지내던 날들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이 때문에 앞으로라도 서로 의지하여 산림 속에서 10년 동안 함께 살아 보자고 기약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씨가 세상을 떠났으니 제 몸은 이제 반쪽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하에 애처로운 자 가운데 우리 형제와 같은 경우가 또 없으나, 그 신세와 운명을 가지고 논하면 사람들은 이 아우보다도 중씨를 더 가엽게 여깁니다. 아, 살아서는 남들처럼 살아 보지 못하고 죽을 때는 남들의 죽음보다 더 참혹하였기에 저 길가는 행인도 울먹이고 왕래하던 문객들도 괴로워하는 바이니, 골육지간이야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너무도 슬픕니다. 대체로 중씨의 인의 도덕에 감복하여 현달하고 번창할 것을 축원했던 사람은 ‘어쩌면 그렇게도 상응하는 보답을 받지 못했단 말이냐.’ 하고, 가슴속에 쌓은 경륜을 대강 알아 그 문장과 경학(經學)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어찌 십중 한둘이라도 시험해 보지 못했단 말이냐.’ 하면서 혹은 복이 극에 이르자 다시 깎아 줄인 것이라 하여 천도(天道)에 유감을 표하는가 하면 혹은 국가의 운이 시들어 유능한 인물이 죽었다고 한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仁)을 좋아하고 재주를 아낀 나머지 대체로 모두 극도로 애통해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중씨 당사자의 처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저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우의 우매한 소견으로 평소에 중씨의 광대한 마음의 실체를 알고 있었으니 가슴이 훤히 트여 아무런 간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아름다운 물건과 좋은 일에 관해서는 자기 자신이 이미 그것을 거부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미 천지간의 한 죄인으로 자처하였으므로 곤궁이 곧 자신의 분수가 되었으니, 어찌 복을 받는 것에 대해 마음이 편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일찍이 유현(儒賢)의 출처에 대해 가르침을 받든 적이 있습니다. 중씨께서는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이 도를 크게 행한 사례는 워낙 오래전의 일이니 차치하고, 공자와 맹자 같은 성현도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으며, 정자와 주자 같은 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났으나 겨우 환장각(煥章閣)에서 시강(侍講)하거나 행궁 편전(行宮便殿)에서 차자로 아뢰는 정도에 불과하였으니, 현자가 가는 길이 험난하여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의 바른 법을 버리고 수준을 낮추어 시대 상황에 따라 업적을 이루거나 임기응변의 수단을 부린다면 구차한 것이다. 더구나 그보다 더 하찮은 것으로서 경륜이 천도를 통달하지 않아 견강부회를 일삼거나 문장이 지리를 아우르지 않아 곱게 꾸며 대는 것을 공으로 삼는 경우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견지에서 논한다면, 대체로 세상에서 중씨를 위해 유감을 표한 것들은 모두 중씨께서 이미 거부한 복이며 국가를 위해 도움 주기를 원한 것들은 그저 한두 가지 폐단을 바로잡아 보자는 생각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처지를 슬퍼한 것이지, 마음을 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백년의 운명을 이야기하면서 그 득실을 따진 자는 일개 한 사람을 위해 슬퍼한 것이고, 당대의 재주를 논하면서 세상을 떠난 것을 애석해하는 자는 겨우 한 나라를 위해 애도한 것입니다. 오직 사문(斯文)을 유구한 세월 동안 강구해 왔지만 오히려 완전히 밝히지 못한 일이 곧 식자의 마음에 맺힌 한이며 또한 중씨가 눈을 감지 못한 점입니다. 곧 직(稷)이나 설(契)과 같은 업적을 이루는 것이 그의 소임이 아니고, 따로 스스로 짊어진 짐이 매우 컸으며, 왕자교(王子喬)나 적송자(赤松子)와 같은 장수를 누리는 것이 그의 기대가 아니고, 늙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끈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서 그 유감을 말하는 것이 비로소 중씨의 마음을 아는 진정한 눈물이 될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천지는 자연의 도가 있고 성인은 경전의 이치가 있으며 대현(大賢)은 훈고(訓詁)의 의리가 있습니다. 천지가 말하지 않은 것을 성인이 말하니 이것은 천지가 성인을 기다린 셈이 되고, 성인의 경전 가운데 분명하지 않은 것을 대현이 풀이하니 이것은 성인의 경전이 훈고를 기다린 셈이 되며, 훈고로 다 풀이하지 못하고 남겨 둔 것은 후대의 학자가 다뤄 주기를 기다렸으니, 이 또한 주자의 심오한 뜻입니다. 그런데 주자 이후로 의리가 크게 밝아져 더 이상 강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말은 사람들의 안목을 어둡게 하기 쉽습니다. 만일 이런 설이 맞는다면 주자 이후에 학문하는 자는 과연 예법만 지키고 학문은 널리 닦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주자가 “내가 한 공부를 나와 똑같이 하지 않는다면 나의 경지를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주자를 모르면서 또 누구를 감히 말하겠습니까. 중씨께서는 매번 이 아우와 이에 관해 언급하면서 세상 유자들의 고루한 식견에 통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 주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오도(吾道)의 학통이 우리 동국으로 들어와 황무지가 개척되자 오랑캐의 고루한 풍속이 약간 바뀌었으며, 주자의 학문에 대해 도산(陶山 이황(李滉))이 깊이 연구하고 석담(石潭 이이(李珥))이 드러내 밝힌 일은 바뀐 풍속으로 인해 생긴 뛰어난 경우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리는 무궁하고 문견은 한계가 있는 법이므로 이따금 결함이 미봉한 데서 생기거나 잘 꾸민 것이 도리어 본의를 어둡게 만들기도 하였으니, 도가 밝아지기 어려운 사정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한편, 또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안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마음인데 비뚤어지거나 올바로 되는 것이 고개를 들거나 숙이는 사이에 좌우되고, 어두워지기 쉬운 것이 눈인데 눈동자를 돌리는 사이에 백태가 낍니다. 이 때문에 혹은 성현의 말씀을 왜곡하여 자기의 뜻에 맞추는가 하면 혹은 남북의 갈림길을 분간하지 못하면서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다 마음과 눈이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어쩌다가 다행히 잘못 이해한 오류를 면할 경우에는 또 마음이 흡족하고 입이 무거워 그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내지 못하니, 이는 곧 연평(延平 이통(李侗))의 논변이 회옹(晦翁)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지 못한 이유이며 자후(子厚 장재(張載))의 필력이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경외심을 일으킨 이유입니다. 수레는 일단 꾸며 놓은 다음에 사람이 그것을 사용한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과연 맞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널리 배우고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드문 뛰어난 인재가 있으면 무난히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도학이란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실체를 온전히 갖춰야 하는 점이 있고, 인품에는 단점과 장점을 은폐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고금의 인물을 대상으로 본심을 지켜 보전하고 실천을 독실하게 한 경우를 찾아보면 우리 중씨처럼 뛰어난 자가 사실 없는 것은 아니나, 도리를 묻고 배우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이 아우는 우리 중씨에게만 하늘이 가르쳐 주고 신령이 풀이해 주어 그 능력을 독차지하게 하였다고 봅니다. 대체로 하늘로부터 얻은 자질이 사실 총명한 데다 공평한 마음을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비범한 논변의 재능을 겸비하였으니, 이것을 두고 다 갖추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수면처럼 반듯하여 만물이 기준을 취하는 것은 공정한 것이고 거울처럼 맑아 사물의 형체를 계속 비추더라도 지치지 않는 것은 밝은 것인데, 대지의 기반이 바르게 자리를 잡고 하늘의 밝은 빛이 내리비추는 가운데 느긋하게 물러서고 여유롭게 전진하면서 그 중앙으로 들어가서는 장차 그대로 일생을 마칠 것처럼 하면서 털끝만큼이라도 노력을 그만두려는 뜻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얕고 깊은 데를 순서대로 섭렵하되 어렵고 쉬운 것을 가리지 않아, 헝클어진 실오리가 손길에 닿으면 풀리고 응어리져 뭉친 부분이 칼집이 들어가면 결에 따라 갈라졌습니다. 처음에 뭔가를 훤히 알았을 때는 마음을 비워 느긋하게 음미하였고, 나중에 그것을 문장으로 써낼 때는 착오가 없어 통쾌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눈이 마음을 따라 밝아져서 참모습을 보게 되고 붓이 혀와 일치되어 오묘한 풀이가 나온 것입니다. 서로 간에 전달하는 묘리를 논한다면 마음과 눈, 붓과 혀가 하나로 융화되었고, 훤히 통달한 공효를 따진다면 경전의 가르침과 천지의 이치가 모두 각기 기다렸던 결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으니, 앞서 이른바 주자가 후세 사람이 자기의 미진한 부분을 천명해 주길 기다렸던 그 인물이 곧 우리 중씨가 아닐까 합니다.
대체로 고상하고 훤히 트인 자질로 겸허하게 각고의 공력을 들였으니, 이는 세상에 드물게 나오는 인물이며, 또 천리를 받들어 따르는 정신이 위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몸을 조정에 두지 않고 적막한 임야에 내던진 것은 아마도 총명을 더욱 배양하여 크게 키울 만한 업적을 이루려고 한 것일 것입니다. 이는 대체로 한두 글자의 분명한 뜻을 가지고 한 세상의 이상 정치를 얻어내려 하지 않은 것으로서, 차라리 당대의 조정이 유능한 보좌를 잃게 할지언정 주자에게 충신이 없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으니, 이 또한 하늘이 한번 세상에 파견한 뜻이 있지 않았는가 합니다. 남헌(南軒 장식(張栻))이 주자가 한가로운 가운데 학업을 닦는 것을 가지고 아마도 하늘의 뜻일 것이라고 하였는데, 역시 옛날이 오늘날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용히 중씨의 속마음을 헤아려 보면 중씨 또한 하늘이 부여한 책무가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더욱 정진을 거듭하였으며 질병을 이유로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강하여 쉬지 않는 하늘의 덕을 따르고 옛 성인을 높은 산처럼 우러르며 느긋하게 일신의 영욕과 세상의 성쇠를 다 잊고서 끼니조차 잊을 정도로 학문을 닦고 이미 얻은 학문을 즐겨 근심 걱정을 몰랐으니, 또 어찌 그 수명이 이 정도에서 멈출 것이라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아, 애통합니다. 아, 애통합니다.
평소에 진정으로 주자에게 충성을 바치려고 원하였으나 그 소원을 이룬 것은 겨우 몇 권의 차목(箚目)이 있을 뿐입니다. 그 나머지 손을 대지 못한 것으로서 결함을 척결하고 숨은 뜻을 밝혀 주길 대기하고 있는 삼례(三禮)의 많은 내용과 《주역(周易)》의 심오한 의미에 관해서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미처 착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가슴속에 처량하게 나열되어 있으면서 오늘을 교화하고 후대에 전수하려 한 것들이 장차 이 세상을 하직함과 동시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후학의 귓전에 넘쳐흐르는 그 고명한 말씀과 오묘한 논리는 아직도 여운이 감돌고 있는데 마침내 날로 멀어지고 날로 잊혀 가게 되었습니다.
요즘 중씨가 남긴 책 상자를 살펴보다가 이것저것 기록해 놓은 문자를 열람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강절(康節 소옹(邵雍))이 66세 때 지은 〈노거음(老去吟)〉 시를 기록하고,
이내 나이 십 년만 되돌린다면 / 使我却十年
그런대로 큰일을 이루겠건만 / 亦可少集事
어이하랴 무심한 천지 사이에 / 如何天地間
세월 다시 돌아올 이치 없으니 / 日無再中理
그 밑에 주를 달기를, “내 나이가 지금 52세이니 강절과 견주어 볼 때 13년이 더 남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한창 새로운 깨달음이 있는 것을 기뻐하며 앞을 향해 한층 더 노력하면서 더 늙기 전에 큰일을 성취함으로써 늙은 뒤에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려 하였으니, 그 뜻이 장대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수명을 더 늘려 소옹(邵翁)의 나이 정도에 이르러 본디의 소원을 이루었더라면 한가로이 음양의 이치를 음미하며 장차 번개를 채질하고 바람을 잡아 올라타는 조화를 부리는 영역으로 들어가 그 수준이 여유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8, 9년을 하늘은 장차 누구에게 주려고 중씨에게서 떼어냈단 말입니까.
삼가 생각건대, 중씨는 이 유학에 대해 정관(靜觀 이단상(李端相))의 문하에 있을 때부터 이미 그 단서가 열렸고, 중간에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의 문정에 출입하여 거의 문장을 가지고 세상에 표방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가문이 화를 당해 자신을 폐기한 뒤로 화려한 것을 줄이고 또 줄임으로써 숙련된 것은 생소해지고 생소한 것은 숙련이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돌아보면 이 아우가 골육 중에서 스승을 얻은 일은 마치 자유(子由 소철(蘇轍))가 자첨(子瞻 소식(蘇軾))에게 배운 경우와 같았습니다. 처음에 절차탁마한 것은 다만 문자를 가지고 하면서 밝은 식견과 민첩한 재주를 내심 견주어 보기도 하였으나 중씨가 진보하는 속도는 말 10필을 몰더라도 따라잡을 수 없음을 알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내가 걸으면 걸어가고 달리면 달려가다가 내 수레를 앞질러 가는데 발에 흙먼지도 묻지 않고 저 멀리 달려감에 이르러서는 뒤쪽에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장성하여 뜻이 전일하지 않을 때 시를 품평하고 문장을 논하면서 중씨가 두보, 이백을 거론하면 이 아우도 두보, 이백을 거론하고 시대를 거슬러 포조(鮑照), 사조(謝脁), 조식(曹植), 유정(劉楨)까지 올라가 함께 즐겼고, 중씨가 한퇴지(韓退之), 구양수(歐陽脩)를 거론하면 이 아우도 한퇴지, 구양수를 거론하고 시대를 거슬러 반고(班固), 사마천(司馬遷), 《좌전(左傳)》, 《국어(國語)》까지 올라가 중씨를 따라 좋아하였습니다.
하던 일이 게을러지고 마음이 주변의 상황에 따라 달라진 데다 한번 죄인이 되어 온갖 인연이 모두 허무해진 뒤에는 서리가 내리고 물이 줄어들어 근본을 돌아보는 때가 되었습니다. 중씨가 수(洙), 사(泗), 염(濂), 낙(洛)을 거론하면 이 아우도 수, 사, 염, 낙을 거론하여 즐기는 취향이야 변했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일념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이전에 좋아하던 두보, 이백, 한퇴지, 구양수가 이제는 수, 사, 염, 낙으로 변하였고 이전에 미산(眉山 소식(蘇軾)과 소철(蘇轍)) 형제가 문장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던 아름다운 전례를 뒤따라 이루어 보려 했던 것이 이제는 하남(河南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함께 도학을 강론했던 전례를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서로 다정하게 학문을 연마하여 무한한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세상길은 험난하고 사우(師友)의 도가 닫혀서 문밖을 나가더라도 갈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간혹 한번 나가 뜻에 맞는 벗을 찾아보면 가는 곳마다 생소하여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결국 서글픈 심정으로 돌아와 중씨를 모시고 소리를 길게 뽑아 시가를 읊조리노라면 고저장단의 가락이 잘 들어맞는 상대가 곧 여기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곤 하였습니다. 오경(五經) 백가(百家)와 삼재(三才) 만상(萬象)에서부터 구주(九州) 오악(五岳)의 온갖 기괴한 것까지 거론할 대상으로 삼아 모이고 흩어지는 이치에 관해 토론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토론을 시작하면 반드시 끝까지 하여 온종일 이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등불 아래에서 첫닭이 울 때까지 계속하면서 지친 줄 몰랐습니다.
이따금 헤어져 따로 지내더라도 만나면 반드시 새로운 강론이 있고 운치도 있었습니다. 산이며 강물로 인해 서로를 향한 우리 형제의 정신은 막히지 않았으니, 우뚝 솟은 설악산의 백연(百淵 백담(百潭))이며 넘실대는 미호(渼湖)의 삼주(三洲) 사이에 높은 허공의 솔개와 깊은 물속의 고기가 서로 오가는 데에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습니까. 산 위의 밝은 달과 물가의 맑은 바람을 한가로이 읊조리고 즐기는 데에 흉금이 쏠려 있었기에 이처럼 속세를 초월했던 것입니다. 다만 저 한계령(寒溪嶺) 한 구역은 일찍이 중씨가 발자취를 남겼으나 백연은 찾아오지 못했습니다. 백연 곁에 나의 정사(精舍)가 이루어지면 그곳에서 학문을 익히는 낙을 중씨와 함께 누릴 생각이었고, 중씨도 이곳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조만간에 중씨의 건강이 회복되면 중씨를 모시고 흰 구름, 밝은 달과 어울려 고사리를 캐던 절사(節士)의 옛터를 더듬고 계수나무 숲에 노닐던 은자의 여운을 찾으면서 한두 명의 선비를 모아 시를 짓던 고사를 함께 따라 했으면 하는 생각이 가슴에서 늘 떠나지 않았으나,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씨가 강석(講席)을 펼 만한 산속의 새 절에서 삼례(三禮)와 《주역(周易)》에 관한 연구를 곧 마무리할 생각이었으나 만년의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생사가 그만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겨울 백연에서 이 아우가 편지 한 통을 써서 깊은 산속 얼음과 눈 덮인 가운데 반가운 벗이 멀리 찾아왔다는 소식을 알렸더니 중씨가 기뻐하며 보내 준 답장에 너무도 부러워하는 말씀이 있었고 끝에는 또 서글퍼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 이것이 중씨의 마지막 글이 되었습니다. 서로 헤어진 뒤로 6, 7개월 동안 남을 가르치면서 식견이 부족한 것을 알고 가슴에 가득 쌓인 의문과 멀리 돌아다니며 산수를 보고 느낀 감정들을 돌아가는 날을 기다렸다가 모두 낱낱이 토로하려 하였습니다만, 막상 중씨의 병상 아래에 당도해서는 삼키고 뱉어내지 못하여 답답한 가슴을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앞으로 이 아우가 살아 있을 세월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이 답답한 가슴을 안고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게으른 이 아우가 조금이나마 올바로 서고 약간의 도리를 알게 된 것은 중씨의 가르침 덕분이었으며, 그 때문에 오늘의 이 아우가 있는 것입니다. 흉변을 만나고부터는 간담이 다 뭉개지고 살아갈 맛이 뚝 떨어지니 지금 이와 같은 의식으로 어찌 다시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학업에 힘을 쏟을 수 있겠습니까. 헤아려 보면 이제부터 중단되어 마침내 평소에 권장해 주던 뜻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이 점이 또 슬퍼지는 부분입니다. 저를 사랑하고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산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합니다만, 따져보면 이것은 제 속마음을 알아주는 말이 아닙니다. 백원(百源)과 나부(羅浮)에서도 나름대로 할 일이 있으니, 제가 어찌 시끄럽고 어지러운 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세월을 보낼 일거리는 그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품에 안고 나의 옛 은거지로 돌아가 심력을 다해 연구하되, 중씨가 편찬한 차목(箚目)을 참고하여 그 내용을 막힘없이 알게 된다면, 그런대로 정신이 중씨와 서로 가까워져 생사가 우리를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 이 아우가 태만해지는 때가 있으면 그때마다 중씨의 고명한 영혼이 자나 깨나 통하는 때에 일깨워 주어 공부가 퇴보하지 않도록 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미치니 오장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기타 가족 형제들의 슬퍼하는 심정과 정각에 쌓인 서적을 처리하는 문제와 궤연에서 곡하는 부녀들이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고, 말을 한다 하더라도 이루 다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사문(斯文)의 영원한 아픔이 크다고 할 수 있으므로 오로지 이를 위하여 끝없이 하소연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아, 애통합니다.


 

[주D-001]삼례(三禮) : 《의례(儀禮)》와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이다.
[주D-002]백원(百源)과 나부(羅浮) : 백원은 중국 하남성(河南省) 소문산(蘇門山) 지역의 지명으로 송나라 소옹(邵雍)이 은거했던 곳이고, 나부는 중국 광동성(廣東省) 동강(東江) 북쪽에 위치한 산 이름으로 진(晉)나라 갈홍(葛洪)이 도를 닦았던 곳이다. 여기서는 설악산이나 금강산 등 우리나라의 명산을 가리킨다.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제문 [권상하(權尙夏)]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숭정(崇禎) 81년 무자년(1708, 숙종34) 5월 20일 을미에 안동(安東) 권상하는 근자에 돌아간 삼주(三洲) 선생 김공(金公)의 장례(葬禮)가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병 때문에 직접 가서 영결하지 못하고 종자(從子) 섭(燮)으로 하여금 대신 영전에 닭과 술로 전(奠)드리게 하면서 고합니다.

아, / 嗚呼
화양동이 적막해지자 / 華陽寂寞
선비들은 의지할 곳을 잃고 / 士失帲幪
다투어 공리를 좇느라 / 功利趨競
도의는 어두워졌는데 / 道義昏蒙
이 세상을 돌아보니 / 顧瞻斯世
우뚝 선 이는 공뿐이라 / 卓立者公
원근의 선비들 귀의하여 / 遠近歸仰
모두들 종사(宗師)로 삼았네 / 洽然師宗
공의 밝고 슬기로움은 / 蓋公明睿
하늘에서 타고났는지라 / 得之於天
천하의 모든 책을 / 凡天下書
두루 꿰뚫었다네 / 無不貫穿
마음을 다잡고 연구하여 / 刻意硏窮
조금도 남기지 않았으니 / 細大不捐
드러내어 문장을 지으면 / 發爲文章
끝없이 넓고도 깊었다네 / 浩浩淵淵
무엇보다 주자의 글을 / 最於朱書
더욱 전심으로 공부하여 / 用工益專
정밀하고 오묘함 깨달아 / 精透妙契
심오한 근원을 환히 보았네 / 洞見奧原
끝내 성취하게 될 바를 / 畢竟所就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 靡有涯量
어찌하여 오늘에 와서 / 云胡今日
이다지도 바삐 떠났는가 / 乘化斯忙
조야가 모두 탄식하고 / 朝野咨嗟
사림이 모두 슬퍼하네 / 士林哀傷
나처럼 어리석은 이도 / 若余窾啓
동지의 무리에 끼어서 / 忝居輩行
한벽루와 한수재에서 / 碧樓寒齋
오래 절차탁마하였고 / 磨切日長
스승을 함께 모실 적에는 / 共陪皐比
산수 아름다운 고을이었네 / 水石之鄕
이 지극한 즐거움은 / 謂此至樂
옛날에도 없다고 여겼는데 / 終古莫當
상전벽해 누차 변하여 / 滄桑屢變
서로 헤어져 애를 태웠네 / 雲樹傷情
잊지 못하는 그대가 / 所懷伊人
물 저편에 있어 만나진 못해도 / 在水一方
연달아 편지를 주고받으니 / 札翰聯翩
이치와 의리가 상세하여 / 理義消詳
수레의 두 바퀴 새의 두 날개처럼 / 如車兩輪
함께 서로 도왔었는데 / 若翼偕翔
이제는 지난 일이 되었으니 / 今成陳迹
어찌 창자가 끊어지지 않으랴 / 曷不摧腸
마치지 못해 한스러운 건 / 所嗛者存
주서차의 손질하는 일이라네 / 箚疑之修
공은 병들고 나는 우둔하여 / 公病我鈍
그저 허송세월하였기에 / 拖過悠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 覺寢身跳
책을 펴니 눈물이 흐르네 / 開卷涕流
부지런히 계속하여 / 庶幾孜孜
지난 잘못 갚으려 했으나 / 以續前尤
이제는 질정할 곳 없으니 / 然無可質
이 한스러움 끝이 있으랴 / 此恨何休
지음이 없어지니 / 知音已矣
아양곡 끊어져
/ 絃斷峨洋
세상에 남은 이 늙은이는 / 白首人間
쓸쓸히 그림자만 바라보네 / 顧影涼涼
세월은 빨리도 흘러가 / 日月易邁
곧 장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 將掩玄堂
멀리 외딴 산에 숨어 / 遠蟄窮山
병석에 누워 있자니 / 病臥在床
상복도 입지 못하고 / 加麻非服
상여도 따를 수 없네 / 素車無路
슬픔 담은 글을 보내 / 緘辭寓哀
영원히 작별한다오 / 一訣千古
아, 슬프구나 / 嗚呼哀哉


[주D-001]지음(知音)이 …… 끊어져 :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산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연주하니, 그의 벗 종자기(鍾子期)가 듣고서 “산이 드높다.” 하였고, 백아가 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연주하니, 종자기가, “강이 넘실거린다.” 하여, 백아의 마음을 알아보았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 흔히 지기지우가 세상을 떠난 것을 비유한다. 《呂氏春秋 本味》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제문 [이희조(李喜朝)]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유세차 무자년(1708, 숙종34) 6월 병오삭 8일 계축에 연안(延安) 이희조는 삼가 맑은 술과 계절 음식의 제물로 근자에 고인이 되신 자형(姊兄) 농암 선생 김공의 영구 앞에 공경히 제를 지내며 아룁니다.
아, 슬픕니다. 옛사람의 말에 이르기를, “백순(伯淳)이 복이 없으니 천하의 사람들도 복이 없다.” 하였는데, 지금 공의 불행이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불행입니다. 사림은 장차 누구를 따를 것이며 학자는 장차 누구에게 귀의하겠습니까. 조정은 장차 누구를 믿고 의지하며 백성들은 장차 누구를 바라보겠습니까. 저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에게 병통이 있다 한들 누가 고쳐 주며 잘못이 있다 한들 누가 깨우쳐 주겠습니까. 의심스러운 것은 누가 해결해 주겠으며 가려진 것은 누가 틔워 주겠습니까.
아, 슬픕니다. 저와 공은 이름으로는 형제였지만 의리로는 실로 벗이었으니, 함께 노닐며 책선(責善)하고 절차탁마한 지가 44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르치고 인도한 공로와 깨우치고 알려 준 도움으로 말하자면 스승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제가 병들고 쇠약해져 만사를 포기하였다가 바야흐로 예전에 들은 것을 수습하여 공에게 나아가 강론함으로써 노년에 이르러 도학의 일부분이라도 엿보게 되기를 바랐는데, 공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미친 사람이나 바보처럼 어리둥절하고, 의지할 데가 없어 갈 곳을 모르고 헤매게 되었습니다.
회옹(晦翁)이 이른바, “왼팔은 놔두고 오른팔을 잃었다.”라는 말은 오늘 나의 마음을 먼저 말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저의 슬픔이 여기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지난날 저의 선친은 도를 품은 채 행하지 못하였고 수명도 길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고, 공과 창계(滄溪 임영(林泳))가 선친의 문하에 있었기 때문에 선친이 남긴 글을 교정하고 그 사적을 찬술하여 후대에 전하게 되었습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남은 책이 한두 가지 있었는데, 창계는 비록 죽었으나 공이 의연히 남아 있었기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가르침을 받아 유감이 없게 될 것이라 여겼는데, 미처 완성하지 못하였으니 이 또한 한스러운 일로 길이 남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아, 공의 고매한 인품과 확고한 출처, 올바른 학문과 탁월한 문장은 지금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지난 시대에도 드물었습니다. 다만, 살아 있을 적에 때를 만나지 못하고 화를 당하여 스스로 버려졌기에 임금과 백성을 요순 때처럼 만들겠다는 뜻을 펴지 못했습니다. 자임했던 일은 훌륭한 말씀을 저술로 남기고 인재를 양성하는 두 가지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또 서하(西河)의 슬픔이 맺힌 일로 인해 한 번 병에 걸린 것이 빌미가 되어 지녔던 뜻을 미처 다 이루지 못했으니, 아,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먼 후대에 반드시 공이 당한 일을 슬퍼한 나머지 감개하여 눈물을 흘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공은 일찍이 저의 망제(亡弟) 낙보(樂甫 이하조(李賀朝))의 제문을 지었는데, “삼주(三洲)의 물가와 영지동(靈芝洞)에서 나는 내 아들을 데리고, 그대는 그대의 형을 따라서 함께 노닐었는데, 이제 다시는 그렇게 할 수 없구나.” 하였습니다. 그 말이 너무나도 슬퍼 차마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공이 또 세상을 떠나고, 저 또한 환란을 겪은 뒤로 더욱 노쇠해졌으니, 어찌 오랫동안 죽지 않고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장담하겠습니까. 조만간 함께 돌아간 뒤에 공의 아들, 나의 동생과 함께 이 세상에서처럼 노닐 수 있다면 어찌 꼭 삼주와 영지동에 있어야만 즐겁겠습니까. 다만, 저승의 일이 과연 어떠한지 알 수 없을 뿐입니다.
얼마 전 제가 감옥에서 나와서야 비로소 공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산중으로 돌아와 우선 편지를 보내려 하였는데, 편지를 부치기도 전에 급보가 도착하였습니다. 제가 정신없이 서둘러 갔지만 밤이 깊어서야 도착하니, 공은 이미 죽은 지 오래였습니다. 만약 내가 이리될 줄 일찍 알았다면 어찌 곧바로 공의 처소로 가서 얼굴을 보며 영결하지 않았겠습니까. 아, 슬픕니다. 공의 생사에 사문(斯文)의 흥망과 세도의 성쇠가 달려 있으니, 구구한 개인적인 슬픔은 참으로 말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러나 늙은 누이의 병이 아직 위독하고 후사로 삼은 손자는 아직 어리니, 눈에 보이는 것마다 마음을 상하게 하고 가는 곳마다 간장이 끊어집니다. 게다가 집에 가득한 책과 강산의 바람과 달이 더욱 저로 하여금 공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게 하여 슬픔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차마 이곳 삼주 근처를 다시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장사 지낼 날이 다가왔습니다. 한 잔 술을 공경히 올리며 눈물과 함께 기울입니다. 쇠북처럼 맑은 목소리, 옥처럼 온화한 모습을 아득히 접하는 듯하니, 공의 영령이 어둡지 않다면 흠향하기를 바랍니다. 아, 슬픕니다.


 

[주D-001]백순(伯淳)이 …… 없다 : 백순은 송나라 정호(程顥)의 자이다. 정호가 세상을 떠나자 당시의 재상인 부필(富弼)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한 말이다. 《伊洛淵源錄 卷3》 여기서는 농암을 정호에 견주어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뜻으로 쓰였다.
[주D-002]왼팔은 …… 잃었다 : 주자의 〈우제장경부전찬문(又祭張敬夫殿撰文)〉에 보인다. 《晦庵集 卷87》
[주D-003]서하(西河)의 슬픔 : 아들을 잃은 아비의 슬픔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 있을 때 아들을 잃고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실명하는 데 이르렀다. 《禮記 檀弓上》
[주D-004]감옥에서 나와서야 : 이 글의 저자 이희조는 1708년(숙종34)에 부친 이단상(李端相)의 장지(葬地)가 역촌(驛村)을 점유하였다는 이유로 이세덕(李世德)에게 고발당하여 관아에 잡혀가 조사를 받았던 일이 있었다.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제문 [송의석(宋懿錫) 등]

송의석(宋懿錫) 등

유세차 무자년(1708, 숙종34) 6월 병오삭 2일 정미에 송의석, 송현석(宋玄錫), 신용여(申用汝), 이만근(李萬根), 이기하(李紀夏), 이지침(李志沈), 이희성(李希聖), 구문기(具文沂), 이경(李璟), 임홍태(任弘泰), 오두표(吳斗杓), 이후(李郈), 이상(李瑺), 우홍채(禹洪采) 등은 삼가 술과 안주를 차려 돌아가신 농암 김 선생의 영전에 올리고 글로 고합니다.

아, 선생이여 / 嗚呼先生
한 시대의 사표로다 / 師表一代
흉금은 시원하고 깨끗하며 / 胸次洒落
자질은 영특하고 순수하여 / 資品英粹
맑고 밝은 별빛과 달빛이었고 / 玉衡氷壺
상서로운 난새요 기린이었네 / 祥鸞瑞麟
가정의 가르침 이어받고 / 承訓家庭
스승의 덕을 따라 배워 / 考德師門
학문은 참으로 올바르니 / 學問誠正
공맹의 근원을 소급하고 / 溯源洙泗
문장은 순박하고 고우니 / 文章古雅
의리에 근본을 두었도다 / 根本義理
경연에서 임금에게 강론하여 / 經幄論思
머지않아 태평성대 이루려다 / 指日賁飾
세상사 뒤바뀌어 / 世故變嬗
산림에 숨었도다 / 退藏丘壑
예악을 강론하여 / 絃歌講藝
후학을 일깨웠으며 / 開牖後學
도의로 강마하여 / 道義磨礱
선비들이 출처를 바로했네 / 士正趣舍
마음의 덕을 보고 느끼니 / 心德觀感
풍속이 어질고 두터워져 / 俗有仁厚
원수도 흠잡기 어려웠고 / 讎怨難疪
부녀와 아이들도 따랐다네 / 婦孺咸服
허나 하늘이 남겨 두지 않아 / 天不憖遺
잔병으로 갑자기 돌아가니 / 微痾奄忽
나라는 피폐해지고 / 邦國其瘁
우리 도는 망했구나 / 吾道之喪
임금은 애도를 금치 못하고 / 紫宸興悼
선비들은 우러를 곳 잃었네 / 靑衿失仰
더구나 우리는 한 고을에 살면서 / 矧在鄕隣
오랫동안 교제를 맺어 왔는데 / 久辱容接
지칠 줄 모르는 가르침 / 亹亹淸誨
진지하고 간곡하여 / 殷殷穩席
바라보면 뜨거운 태양 같고 / 瞻之烈日
다가가면 따스한 봄바람이라 / 卽焉春風
문하를 출입하노라니 / 周旋門屛
삼밭의 쑥과 같아졌네 / 庶幾麻蓬
모시게 되어 매우 기뻐하면서 / 喜甚得御
비루한 마음 싹틀까 경계했는데 / 戒切萌鄙
사람의 일 갑자기 변하니 / 人事遽變
하늘의 이치는 알기 어렵구나 / 難諶者理
처음에는 이 시대를 위하여 / 始挺人豪
호걸을 내놓은 것 같더니만 / 若爲斯時
어진 데도 장수하지 못하여 / 仁亦不壽
도를 조금도 베풀지 못하였네 / 道未小施
세상은 이제 긴 밤으로 접어드니 / 世將長夜
사람들은 어찌 그리 복이 없는고 / 人胡無祿
공사가 모두 희망을 잃고 / 公私缺望
원근이 함께 애석해하네 / 遠邇同惜
아, 우리 무리들은 / 嗟哉吾黨
이제 누구를 본받으랴 / 於何矜式
강산과 고택에서 / 江山故宅
옛 자취 언뜻 보니 / 轉眄陳迹
삼주 물은 오열하며 흐르고 / 三洲咽流
삼산 봉우리는 푸르기만 할 따름 / 三山攢翠
선생의 목소리 까마득하니 / 邈矣謦欬
하염없이 눈물만 흐른다네 / 潸焉涕泗
이미 묘소 자리를 정하여 / 佳兆已卜
멀리 떠날 날 다가왔기에 / 遠期斯迫
간소한 제물 마련하여 / 敢具菲薄
이 정성 바치나이다 / 陳此悃愊

[주D-001]삼밭의 쑥 :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쑥이 삼밭에 나면 붙들어 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蓬生麻中 不扶而直]”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글쓴이가 농암의 곁에 있으면서 자연히 그 덕에 감화되었다는 뜻이다.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제문 [어유봉(魚有鳳)]

문인 어유봉(魚有鳳)

아, 슬프다. 하늘은 큰선비와 이름난 현자를 흔하게 내놓지 않는데, 이들로 하여금 장차 이 도를 가지고 이 세상에 혜택을 주게 하고자 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뜻을 얻은 사람은 적고 불우한 사람은 많았으니, 이 백성들은 어찌 그리도 복이 없는가. 그렇지만 말을 군주가 들어주지 않고 도가 시대와 맞지 않으면 미련 없이 돌아가는 것도 군자의 상도(常道)일 따름이다. 간혹 크나큰 액운을 당하고 망극한 화란을 만나 자취를 감추고 숨어서는 도를 품은 채 죽는 사람이 있으니, 이는 또 얼마나 불행한 운명이란 말인가. 하늘이 이왕 군자에게 부귀영화를 주지 않았다면 한가로이 자유를 즐기고 태산과 북두처럼 오랜 수명을 누리게 하여, 위로는 중요한 우리 도를 부지하고 아래로는 후학의 기대에 부응하게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도리어 상화(喪禍)로 해독을 끼치고 질병으로 곤욕을 치르게 하며 끝내는 서둘러 빼앗아 가니, 도대체 신명의 이치는 어찌 그리도 참혹하며 하늘의 뜻은 어찌 그리도 어두운가.
우리 선생은 영특하고 빼어난 자질을 지니고서 예의 있는 문헌가의 후예로 태어나, 이미 약관 때부터 가통을 잇는 학문이 있었다. 나라를 빛낼 만한 글솜씨로 전시(殿試)에 급제하니 사대부들이 놀라 경하하였고, 청요직의 반열에서 홀(笏)을 바로잡으니 관각(館閣)에 광채가 더하였다. 조정에 들어가서 우리 임금에게 아뢴 것과 밖으로 나와서 같은 반열의 사람들에게 권면한 것은 순전히 제왕의 도와 인의의 말에서 나왔기에 선한 무리들이 그로 인해 의기가 양양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무진 기사년의 참화가 일어나 나라가 피폐해지자, 어버이를 잃은 우리 선생의 슬픔은 천지가 다하도록 끝이 없었다. 비록 하늘의 해가 다시 밝아져 억울함을 다 씻어 내고 소명이 빈번하여 각별한 예우를 받았으나 무슨 마음으로 다시 벼슬길에 오르겠는가. 관복과 인끈을 헌신짝처럼 버린 채 한가로이 깊은 산골짜기와 들판의 물가에서 단사표음(簞食瓢飮)으로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좌우에 도서를 두고 자신과 세상을 모두 잊고는 오로지 도만을 음미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동방의 진정한 학문의 맥이 여기에 있게 되었으니, 선생이 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받은 존경은 비단 홀로 남은 영광전(靈光殿)이나 우뚝 솟은 지주산(砥柱山)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늘은 덕과 선을 쌓은 집안에 화를 내린 일을 후회하지 않고서 거듭 혹독한 상화(喪禍)를 내리고 환란으로 핍박하기를 그치지 않아, 10년 동안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렸다는 근심이 쌓이게 하고 한 노인도 남겨 두지 않는다는 탄식을 일으키게 하는가? 하늘이 선생을 낳은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도가 당시에 쓰이지 못하였거늘 수명은 또 어찌하여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하게 하였는가? 사문은 누구를 의지하며 군자는 누구를 믿을 것인가? 덕은 백세에 전할 만하나 한 명의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인은 만물을 이롭게 할 만하나 열 식구를 돌보지도 못하게 하였나? 우리 당의 선비라면 어찌 큰 소리로 소리치며 길이 애통해하면서 하늘을 탓하고 귀신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아, 슬프다. 지금 선생의 이름을 외는 사람들이 반드시 그 덕을 아는 것은 아니며, 선생의 덕을 우러르는 이들이 반드시 그 깊이를 완전히 다 본 것은 아니다. 선생이 조정에 우뚝 섰을 적에는 맑은 이름과 바른 명망으로 추중하였으며, 물외(物外)로 훌쩍 떠나서는 고상한 풍도와 자유로운 운치로 인정하였다. 선생이 말하여 문장을 이룬 것과 집에 가득한 저서를 보면 문장이 풍부하고 뛰어나다고 여겼으며, 휘장을 내리고 몰두하여 고개를 숙이고 읽다가 고개를 들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 경학에 정통하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참되고 절실하게 도를 추구하며 은미하고 정밀하게 이치에 나아가서 초연히 상달(上達)하는 묘리가 있고 어렴풋이 날로 드러나는 실제가 있어 속된 학문의 잘못을 인습하는 고루함을 깨뜨리고 여러 학설의 터럭만 한 차이까지 분별하여 거의 주자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다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선생이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학문이 올바르며 견식이 밝고 터득한 바가 높았기에 안과 밖을 꿰뚫고 은미한 것과 드러난 것을 하나로 합하였기 때문이다. 흉금이 쇄락(洒落)하고 기상이 화락하여 용릉(舂陵)의 제월(霽月)이나 하남(河南)의 춘풍(春風)과 비슷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의 어리석고 노둔한 이들을 깨우치고 비루하고 인색한 사람들의 가슴을 녹일 만하였다. 그럼에도 오히려 한 가지 장점도 없는 것처럼 겸손하고 하나도 모르는 사람처럼 정성스럽게 겸손한 태도로 날마다 더 진보해 나가는 것을 추구하였다. 오로지 의리가 무궁한 줄만 알고 세월이 부족한 줄은 알지 못한 채, 저 멀리 이 도의 지극한 곳까지 이르고자 하였다. 이것이 선생이 지닌 원대한 점이니, 어찌 무지몽매한 소자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이겠는가.
다만 선생이 언어로 남겨 영원히 전하도록 한 내용은 정심하고 치밀하며 명백하고 깔끔하니, 후대의 군자들 중에는 필시 선생이 남긴 저서를 반복하여 읽어 마음이 열리고 눈이 밝아져 선생의 학문을 참으로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다.
아, 슬프다. 내가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을 청한 지가 이제 20년이 되었다. 선생은 내가 무지하고 용렬하여 함께 의논하기에 부족하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간절히 인도하고는 원대한 사업에 힘쓰도록 권면하고 정밀한 이치를 알려주었다. 나는 썩은 나무는 아로새길 수 없고 절름발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데도 선생의 사람을 가르치는 인(仁)과 남을 이루어 주는 지혜에 감격하였다.
다만, 근래에 선생은 손님을 사양하고 일을 줄여 고질병을 치료하는데 전념하였고, 나 또한 세상일에 얽매어 아침저녁으로 찾아뵙고 의심스러운 뜻을 다 강론하지 못하였다. 만나기는 하였으되 흡족하지 못한 일도 있었고, 편지를 보냈으나 하고픈 말을 다 개진하지 않은 일도 있었으며, 뜻을 머금은 채 터놓지 못한 일도 있었고 여쭙기는 하였으나 의문을 다 해소하지 못한 일도 있었는데, 비단 내가 부지런히 그만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생 또한 계속해서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늘의 도는 믿기 어려우니 혹시라도 수명을 더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고, 게다가 아직 늙지 않으셨으니 고질병이 다시 나을 수도 있으므로, 도를 강론하고 학업을 전수하는 선생의 공이 더 이상 유감이 없게 되고, 뜻만 크고 행동이 미치지 못하는 나 역시 결국은 은혜를 받게 되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가 이뤄지기 어려워 갑자기 산이나 대들보가 꺾이듯 선생이 돌아가시고 말았다. 선생의 모습이 영원히 사라졌으니 방황한들 어디로 가겠는가. 그만이로구나, 우리 도가 끝났으니 누가 내 마음의 슬픔을 알아주겠는가. 오직 노둔한 나 자신을 채찍질하여 예전에 들은 것을 반복하여 익히며 몸가짐을 살피고 행실을 삼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선생의 가르침에 만분의 일이라도 부응하여 위대한 군자의 문하를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나의 심정을 안다면 영령도 불쌍히 여기시리라. 무릎을 꿇고서 제문을 읽고 술잔을 올리면서 한 번 통곡을 하고 영원히 작별을 한다.

[주D-001]홀로 남은 영광전(靈光殿) : 마지막 남은 국가의 원로를 비유한다. 영광전은 한(漢)나라 궁전 이름인데, 한 경제(漢景帝)의 아들 노공왕(魯恭王)이 많은 궁전을 세웠으나, 한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지자 도적의 침해로 인해 다 무너지고 영광전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文選 卷11 魯靈光殿賦》
[주D-002]이 사람이 …… 근심 :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공자의 제자 염백우(冉伯牛)가 병에 걸리자 공자가 찾아가 창문을 통해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릴 리가 없는데 운명인가 보다.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亡之 命矣夫 斯人也 而有斯疾也]” 하였다.
[주D-003]한 노인도 …… 탄식 : 《시경(詩經)》 〈소아(小雅) 시월지교(十月之交)〉에, “한 노인도 남겨 두지 않아 우리 임금을 지키지 못하게 한다.[不憖遺一老 俾守我王]”라는 말이 보인다. 대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말이다.
[주D-004]용릉(舂陵)의 …… 춘풍(春風) : 용릉은 송(宋)나라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가 살던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의 지명이다. 제월은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약칭으로, 황정견(黃庭堅)이 〈염계시서(濂溪詩序)〉에서 주돈이의 사람됨을 묘사한 말이다. 하남은 역시 송나라의 유학자 정호(程顥)의 고향이며, 춘풍은 주광정(朱光庭)이 그를 비유한 말이다.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영암(靈岩) 녹동서원(鹿洞書院) 배향 봉안 제문 [어유봉(魚有鳳)]

문인 어유봉(魚有鳳)

삼가 생각건대 선생은 / 恭惟先生
세상에 드문 뛰어난 이로 / 間世英雋
기쁘게도 어진 아버지 있어 / 樂有賢父
일찍부터 좋은 가르침 받았네 / 早襲嘉訓
더욱 높은 경지에 이르자 / 凌高邁往
선현처럼 되려는 뜻을 품고 / 志希先哲
자나 깨나 주자 생각하며 / 寤寐考亭
그 경지를 엿보았네 / 洞窺堂室
깊이 생각하여 깨달으며 / 潛思妙契
끊임없이 날마다 새로워졌고 / 日新不已
시원스럽고 화락하여 / 淸通和樂
안팎이 모두 순수하였네 / 表裏純粹
진정한 군자로서 / 允矣君子
나라의 기둥이었으나 / 邦國之楨
망극한 때를 만나자 / 遭時罔極
벼슬을 헌신처럼 버리고 / 脫屣簪纓
세상 밖에 홀로 서서 / 獨立世表
산림에서 도를 맡아 / 任道丘園
사문이 여기에 있으니 / 斯文有在
명성과 덕망이 더욱 높아졌네 / 名德彌尊
풍도를 듣고 덕을 목도한 이들이 / 聞風覿德
사방에서 우러러보았는데 / 四方仰止
더구나 이곳 낭주는 / 矧玆朗州
아름다운 발자취가 이르렀던 곳이네 / 徽躅攸曁
지난 갑인년과 을묘년에 / 粤在甲乙
군자의 도가 비색해져서 / 君子道否
문곡(文谷)이 남쪽으로 유배되어 / 文老南遷
공경 대신의 의표가 의젓하였네 / 赤舃几几
이때 선생은 / 維時先生
집안에서 학문하여 / 詩禮于庭
토론하고 강습하니 / 討論講習
그 말씀을 많은 이가 몰려와서 들었다네 / 謦咳羣聽
다행히 먼 지방 사람들도 / 幸哉遐逖
덕과 의에 훈도를 받아 / 薰炙德義
죽어도 잊지 못함은 / 沒世之思
우리 선비들 똑같았네 / 均我人士
옛적에 우리 고장에 / 昔有鄕賢
연촌이란 현자 있어 / 曰維烟村
높다란 사당에다 / 有翼明宮
조부와 손자를 제사하는데 / 祀祖侑孫
누구를 함께 제향하였나 / 誰其並享
문곡이 왼편에 있다네 / 文老于左
이제 선생을 배향하니 / 今配先生
예에 맞는 일이로다 / 於禮則可
해와 달이 찬란하고 / 日月其良
성대한 의식 갖추니 / 縟儀斯備
다른 시대 두 성씨를 / 兩氏異代
한곳에 함께 제사한다네 / 一體同祀
고을은 찬란히 빛나고 / 鄕邦有光
보고 듣는 이 모두 공경하니 / 瞻聆俱聳
선한 본성 모두 지녔기에 / 民彝同好
누군들 공경하지 않으리오 / 孰不欽奉
아름다운 푸른 대나무를 볼 때 / 綠竹之猗
군자의 아름다운 덕을 잊을 수 없네 / 有斐不諼
바라건대 보살펴 주시고 / 尙冀啓佑
길이 흠향하소서 / 永歆苾芬

양정 축문(兩丁祝文)

정밀하게 학문을 강론하고 / 講學精密
심도 있게 도에 나아갔네 / 造道深崇
드높은 풍도와 크나큰 덕은 / 高風碩德
후학이 존숭하는 바이네 / 後學所宗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석실서원(石室書院) 배향 봉안 제문 계사년(1713, 숙종39) [어유귀(魚有龜)]

어유귀(魚有龜)

성대하도다 선생이여 / 猗歟先生
세상에 드문 영걸이로다 / 間世英傑
맑고 순수하여 / 淸明溫粹
금옥 같은 바탕으로 / 金玉其質
일찍부터 분발하여 / 早自奮發
문장이며 경술을 / 文章經術
집안에서 전수받고 / 家庭薰襲
사우들과 강론하였네 / 師友講說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나아가 / 精思遠詣
힘써 선현들을 따랐으며 / 力追前哲
조정에 올라서는 / 揚于王庭
경연에서 모시면서 / 經幄密勿
임금의 덕과 도를 / 天德王道
긴밀하게 도왔다네 / 啓沃深切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 乃長國子
몸소 이끌어 가르치되 / 敎由身率
도와 의로 나아가게 하니 / 迪以道義
선비들이 마음으로 기뻐하였네 / 多士心悅
장차 예악으로 태평성대 / 庶幾賁治
이룰 것만 같았는데 / 笙鏞黼黻
무진 기사년에 이르러 / 歲在龍蛇
우리 도가 갈가리 찢기자 / 吾道磔裂
깊은 산속으로 몸을 숨기고 / 竄身荒谷
육년 동안 슬픔을 머금었네 / 六載含恤
다시 세상이 뒤바뀌자 / 逮至更化
상소하여 피눈물 흘리면서 / 尺疏瀝血
물러나 살기로 맹세하고 / 矢義自靖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렸네 / 脫屣簪笏
미호라 한 굽이의 / 渼湖一曲
움막집에 거처하며 / 棲遲蓬蓽
좌우에 도서를 두고 / 左圖右書
전념하여 마주하며 / 專心對越
오래 깊이 파고들어 / 沈潛積累
연구가 정밀하였네 / 硏究微密
자나 깨나 주자 생각하며 / 寤寐紫陽
그 경지를 꿰뚫어 보고 / 洞窺堂室
《주서차의(朱書箚疑)》 교정하여 / 箚疑是訂
숨겨진 뜻 드러내니 / 發前未發
선비들이 바람에 쏠리듯 / 遠邇風動
찾아와 수업을 청하였네 / 有來叩質
일깨우고 인도함에 / 提撕誘掖
미진함이 없었으니 / 兩端俱竭
온 세상이 우러러보아 / 一世宗仰
어두운 길거리의 해와 별 같았네 / 昏衢日星
그런데 하늘이 남겨 두지 않아 / 天何不憖
산이 무너지고 대들보 꺾이니 / 山頹樑折
사문이 의지할 데 없어 / 斯文無託
애통한 마음 한이 없네 / 痛悼靡歇
어찌 위패를 받들어 모셔 / 曷不尸祝
바라보며 그리워하지 않을쏘냐 / 瞻懷髣髴
이 석실을 돌아보니 / 眷玆石室
사당이 우뚝하도다 / 靈宮有屹
두 어른은 주벽이요 / 二老主享
세 선비를 함께 배향하니 / 三彦同腏
조부의 덕과 의리 / 賢祖德義
부친의 성대한 풍도 / 名父風烈
이 모두 계승하여 / 是繼是承
선조를 빛내었네 / 有光先轍
정관재(靜觀齋)의 경우는 / 至於靜觀
군사부일체의 의리로 / 義存事一
여기에 배향함이 / 於焉升配
참으로 인정에 맞는다고 / 允合情秩
모든 이가 함께 호소하자 / 僉謀齊籲
성상도 거절 않고 허락하여 / 聖兪罔咈
모든 의식을 갖추니 / 縟儀孔備
날짜 또한 길하도다 / 日月其吉
강당과 사우를 돌아보니 / 回瞻講宇
일찍이 강론하던 곳이라 / 丈席曾設
마치 영령이 있는 듯한데 / 英靈若在
제기(祭器)를 늘어놓았네 / 俎豆斯列
둘러보면 서글프게 하는 / 俯仰悽愴
찬 강물과 가을 달이라 / 寒水秋月
바라건대 보살펴 주고 / 尙垂啓佑
영원토록 흠향하소서 / 永歆芬苾

[주D-001]두 어른 : 김상용(金尙容)과 김상헌(金尙憲)을 말한다.
[주D-002]세 선비 :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이단상(李端相)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