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의 의병활동/의민공 휘 강(의병장)

진주성(晉州城)의 함락과 명병(明兵)의 철환(撤還) 휘 기필

아베베1 2012. 6. 30. 12:04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0권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

동쪽으로 함안군(咸安郡) 경계까지 67리이고, 진해현(鎭海縣) 경계까지 79리이고, 남쪽으로 사천현(泗川縣) 경계까지 28리이고, 고성현(固城縣) 경계까지 66리이고, 서쪽으로 단성현(丹城縣) 경계까지 38리이고, 곤양군(昆陽郡) 경계까지 27리이고, 하동현(河東縣) 경계까지 67리이고, 전라도 광양현(光陽縣) 경계까지 94리이고, 북쪽으로 삼가현(三嘉縣) 경계까지 45리이고, 의령현 경계까지는 40리이고, 단성현 경계까지 4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가 8백 6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거타(居陁)라고도 한다. 인데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빼앗아서 주(州)를 설치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은 거타주를 분할하여서 진주총관(晉州摠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은 강주(康州)라 고쳤다.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정주(菁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太祖)는 또 강주라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는 목(牧)을 설치하였다가 14년에 진주라 고쳐서 절도사를 설치하고, 정해군(定海軍)이라 칭하며 산남도(山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이 안무사(安撫使)로 고쳤고, 뒤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조가 현비(顯妃)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진양 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시켰는데, 태종(太宗) 때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목으로 만들었다. 세조조(世祖朝)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반성현(班城縣) 주의 동쪽 52리에 있다. 고려 현종 때 본주에 내속시켰다. 일명 편월(片月)이고, 창름(倉廩)이 있다. 영선현(永善縣) 주의 동남쪽 48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일선현(一善縣)인데 경덕왕이 상선(尙善)이라 고쳐서 고성군(固城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초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고, 현종 때에 내속시켰다. 악양현(岳陽縣) 주 서쪽 1백 21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소다사현(小多沙縣)이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하동군에 예속시켰던 것인데 고려 현종 때에 내속시켰다.
『신증』 정덕(正德) 무인년에 악양현과 화개현(花開縣)은 진주와 거리가 멀어서, 백성들이 관곡(官穀) 출납에 노고가 많다 하여 여기에다 창(倉)을 설치하였다.
 살천부곡(薩川部曲) 주 서쪽 81리에 있다. 부곡의 장(長)은 머리를 깎았는데 승수(僧首)라 부른다. 화개부곡(花開部曲) 합포(陜浦)라 하기도 한다. 주 서쪽 1백 26리에 있다. 부곡의 장은 머리를 깎았는데 승수라 부른다.
【진관】 군 다섯 합천(陜川)ㆍ초계(草溪)ㆍ함양(咸陽)ㆍ곤양(昆陽)ㆍ거창(居昌)이다.
『신증』 거창은 현으로 강등되었다.
 현(縣) 여덟 사천(泗川)ㆍ남해(南海)ㆍ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하동ㆍ산음(山陰)ㆍ안음(安陰)ㆍ단성이다.
『신증』 거창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한 사람이다. 【군명】 거열성ㆍ거타ㆍ정주(菁州)ㆍ강주ㆍ진양ㆍ청천(菁川)ㆍ진산(晉山)ㆍ진강(晉康)ㆍ정해군(定海軍).
【성씨】 본주 정(鄭)ㆍ하(河)ㆍ강(姜)ㆍ유(柳)ㆍ소(蘇)ㆍ임(任)ㆍ강(康), 김ㆍ박 모두 내성(來姓)이다. 반성(班城) 형(荊) 형(邢)이라 한 데도 있다. 주(周)ㆍ옥(玉)ㆍ현(玄)ㆍ성(成), 김 속성(續姓)이다. 영선(永善) 양(楊)ㆍ한(韓)ㆍ임(林)ㆍ임(任). 복산(福山) 문(文) 송자(松慈)와 같다. 악양(岳陽) 도(陶)ㆍ오(吳)ㆍ임(任)ㆍ손(孫)ㆍ박, 김 속성(續姓)이다. 화개(花開) 김. 살천(薩川) 박.
【풍속】 습속이 시서(詩書)를 숭상하고, 넉넉하고 화려함을 숭상한다 모두 《지리지(地理志)》에 있다. 여염이 태평하여 밥짓는 연기가 서로 잇따랐다 하륜(河崙)의 〈촉석루기(矗石樓記)〉에 있다. 학문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하연(河演)의 〈사교당기(四敎堂記)〉에 있다. 농부와 누에치는 아낙이 일에 부지런하고 아들과 손자가 효도에 힘을 다한다 하륜의 〈촉석루기〉에 있다.
【형승】 영남 제일이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 “진양의 시내와 산의 훌륭한 경치는 영남에서 제일이다.” 하였다. 큰 산과 큰 강 이첨(李詹)의 서문에, “인물이 나서 국가에 도움 되게 하는 이는, 큰 산과 큰 강의 성하고 맑은 정기로 된 것이 많다.” 하였다. 동방의 육해(陸海)이다. 예전 사람이 진양을 평하기를, “진양은 동방의 육해이다. 수산물과 토산물을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것이 영남 여러 주의 반이다.” 하였다. 비봉산(飛鳳山)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望晉山)이 남쪽에서 읍한다. 하륜의 〈봉명루기(鳳鳴樓記)〉에, “비봉산이 북쪽에서 멈췄고, 망진산이 남쪽에서 읍한다. 긴 강이 그 사이에 흐르는데 동쪽과 서쪽 여러 산이 구불구불 사방을 둘렀다.” 하였다.
【산천】 비봉산 주 북쪽 1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지리산(智異山) 주 서쪽 1백 리에 있다. 상봉(上峯)을 천왕봉(天王峯)이라 하는데, 남원부(南原府)편에 자세히 적었다. 산 북쪽은 함양군 경계이다.
○ 고려 때에 명사가 이 산에 숨어 살았는데, 지조가 높고 행실이 깨끗하여 세상 일을 간섭하지 않았다. 그때 임금이 듣고 사신을 보내 맞아오려 하니, 사례하기를, “외신(外臣)이 아는 것이 없사오니 왕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한 다음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사신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보니 벽에다가, “한 마디 임금의 말씀 골에 들어오니, 이름이 인간에 떨어진 줄 비로소 알았네.”라는 한 구를 적어두고 북쪽 바라지를 통해 도망쳐 버렸다. 후세 사람들은 한유한(韓惟漢)이 아니었던가 의심한다. 《고려사》에, “유한이 여러 대로 서울에 살았으나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최충헌(崔忠獻)이 정사를 제멋대로 하여 벼슬을 파는 것을 보고, ‘난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고, 처자를 이끌고 지리산에 들어가 버렸다. 맑은 수양과 굳은 절조로써 외인과 교제하지 아니하니, 세상에서 그의 풍치를 높게 여겼다. 나라에서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아니하고 깊은 골짜기로 옮겨가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았다.” 하였다.
○ 고려 김부의(金富儀)의 시에, “험한 곳을 지나 태화봉(太華峯)에 오를까 의심되더니, 돌아오는 길에 도리어 석양이 붉음을 겁내네. 우연히 왕사(王事)로 인해 세상밖에 노닐지만, 도리어 당년의 양차공(楊次公)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 고려 김돈중(金敦中)의 시에, “오르고 올라 최상봉에 이르러, 진세를 돌아보니 한 조각만하구나. 노을 속에 배회하여 그윽한 정취를 얻었으니, 풍류는 진(晉) 나라 양공(羊公)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네.” 하였다.
○ 고려 중 정명(靜明)이 벗을 전송하는 시에, “그대는 곧 바로 천 봉우리 속에 들어갔다 하니, 몇 겹의 연기와 노을속에 있겠네. 흐르는 물 떨어지는 꽃에 가신 길 아득하니, 다른 해 어느 곳에서 그대 자취 찾을고.”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두류산(頭流山)이 가장 크다. 신선이 표피자리 깔았네. 나무 끝에 두 다리가 날고, 구름 속에 반신(半身)만 내놓네. 사람들은 삼무(三武)에게 곤란 당했음을 기롱하고, 혹은 진(秦) 나라를 피했다고 말하네. 어찌 그윽하게 살 곳이 없어, 풍진 속에 백발이 새로워졌나.”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내 들으니, 백두산이 남으로 와서 바다에 닿아 뿌리가 서리었다네. 멀고 멀리 3천 리에 멧부리가 연했는데, 험한 곳은 모두 관문(關門)으로 되었다네. 구불거리다가 정기가 모여 갑자기 솟아났는데, 천궁(天宮)이 정상에 있어 제사를 누리네. 천궁이 하늘과 한 자도 안 되는 거리여서, 뭇 산을 당기고 뭇 물 삼킨다네. 바람과 구름이 부벼대서 나무가 못 크고, 응달엔 6월에야 눈이 처음 녹는다네. 천태산(天台山)이 4만 8천 장이라지만, 이 산과 견주면 하늘과 땅이로세. 유인(幽人)이 은거하여 이 속을 다니면서 만 구렁 솔바람 소리 모두 다 겪었네. 문득 선부(仙府)를 찾아 옥피리를 부노라니, 그 소리 완연히 봉황 울음 같아라.” 하였다.
○ 이륙(李陸)의 〈유산기(遊山記)〉에, “지리산은 또 두류산이라 칭한다. 영남ㆍ호남 사이에 웅거하여서 높이와 넓이가 몇 백 리인지를 모른다. 목 하나, 부 하나, 군 둘, 현 다섯, 속읍 넷이 산을 둘러 있는데, 동쪽은 진주ㆍ단성이고, 남쪽은 곤양ㆍ하동ㆍ살천ㆍ적량(赤良)ㆍ화개ㆍ악양이며, 서쪽은 남원ㆍ구례ㆍ광양이고, 북쪽은 함양ㆍ산음이다. 높은 봉우리가 둘이 있는데, 동쪽은 천왕봉이고, 서쪽은 반야봉(般若峯)으로서 서로 거리가 백여 리나 되는데, 항상 구름에 가려 있다. 천왕봉에서 조금 내려와서 서쪽에 향적사(香積寺)가 있고, 또 서쪽으로 50리쯤에 가섭대(迦葉臺)가 있다. 대의 남쪽에 영신사(靈神寺)가 있으며, 서쪽으로 20여 리를 내려오면 넓게 트인 땅이 있는데, 편평하고 비옥하여 가로 세로의 넓이가 모두 6ㆍ7리 됨직하다. 간간히 하습(下濕)하여서 곡식 심기에 알맞다. 늙은 잣나무가 하늘에 치솟았으며, 낙엽이 쌓여서 정갱이까지 빠진다. 복판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끝이 없어 완전히 하나의 평야(平野)이다. 빙빙 둘러 남으로 내려오면, 시내를 따라 의신(義神)ㆍ신흥(新興)ㆍ쌍계(雙溪)의 세 절이 있고, 의신사에서 서쪽으로 꺾여서 20리 지점에 칠불사(七佛寺)가 있다. 쌍계사에서 동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불일암(佛日菴)이 있고, 그 나머지 이름난 사찰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몇 절은 모두 널판지로 덮었고, 거주하는 중이 없다. 오직 영신사만이 기와를 사용했으나 거주하는 중은 한두 명에 불과하니, 산세가 아주 험준하여 사람 사는 마을과 서로 닿지 않았으므로, 높은 선사가 아니면 안주하는 자가 드문 것이다. 물의 근원은 영신사 작은 샘물로부터 이 신흥사 앞에 와서는, 벌써 큰 냇물이 되어 섬진강(蟾津江)에 흘러드는데, 여기를 화개동천(花開洞天)이라 한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면 천불암(千佛庵)ㆍ법계사(法戒寺)가 있고, 천불암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자면 작은 굴이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임했고,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져서 매우 맑은 운치가 있는데,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 한다. 또 두 물이 있는데, 하나는 향적사 앞에서, 하나는 법계사 밑에서 나오며, 살천(薩川)에서 합쳐져 하나로 되어 소남진(召南津) 아래쪽으로 흘러 들어서 진주를 둘러 동쪽으로 가는데, 이것을 정천강(菁川江)이라 한다. 소남진이란 것은 산 북쪽 물이 동쪽을 돌아 오다가 단성현(丹城縣)에 이르러 서쪽으로 꺾인 것이다. 살천촌(薩川村)에서 20여 리를 가면 보암사(普庵寺)가 있다. 살천촌 앞쪽을 내산이라 하고, 바깥쪽을 외산이라 한다. 보암사에서 바로 올라가 빠른 걸음으로 하루 반이면 천왕봉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돌 벼랑이 가파르고 험하여 길을 찾을 수 없고, 또 느티나무와 노송나무가 하늘을 가렸으며, 밑에는 가는 대가 촘촘하고, 간혹 말라 죽은 나무가 천 길 벼랑에 걸쳐 있는데 껍질에는 이끼가 끼어 있다. 또 폭포가 멀리 구름 끝으로부터 그 사이에 내리쏟아 길이를 측량할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발길을 돌리지 못하겠고, 돌아보면 뒤를 볼 수 없다. 수십 개 나무를 베어야 비로소 한 자 넓이의 하늘을 볼 수 있다.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가끔 돌을 주워, 바위 위에 두고 길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벼랑과 골짜기 사이에는 얼음과 눈이 여름을 지나도 녹지 않는다. 6월에 서리가 처음 내리고 7월이면 눈이 오고 8월이면 얼음이 크게 언다. 첫 겨울이 되면 눈이 몹시 와서 골과 구렁이 모두 편평하여지므로 사람이 왕래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산에 사는 사람들이 가을에 들어갔다가 늦은 봄이라야 비로소 산에서 내려온다. 혹 산 아래에는 뇌성과 번개가 크게 치면서 비가 와도, 산 위에는 날씨가 청명하여 한 점 구름도 없기도 하니, 대개 산이 높아서 하늘에 가까우므로 기후가 평지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 대체로 산 밑에는 감과 밤나무가 많고, 조금 위에는 모두 느티나무이다. 느티나무 지대를 지나면 삼나무와 노송나무이다. 절반은 말라 죽어서 푸른 것과 흰 것이 서로 섞여져 있으며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맨 위에는 철쭉꽃만 있을 뿐인데, 나무 높이가 한 자 길이가 채 못 된다. 맛있는 나물과 진귀한 과실이 딴 산보다 많아서 산에 가까운 수십 고을이 모두 그 이익을 입는다.”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이 김종직(金宗直)의 〈두류록(頭流錄)〉 끝에 쓴 시에, “위태롭게 높도다. 산이 둥그스름하며 넓게 퍼졌음이여. 아래로 땅을 누르고 위로 하늘에 닿았네. 뿌리가 몇 천 백 리나 서리었는지 내 모르거니와, 우뚝하게 하늘 동남쪽에 중진(重鎭)이로다. 원기가 발설되고 천기가 뱉었다 머금었다 한다. 구름과 연기가 침침하게 중턱을 감췄고, 그윽한 골짜기엔 아름다운 나무가 많다. 처음 숲 기슭을 좇아 참 취미를 찾아서 선경을 샅샅이 깊이 더듬었네. 벼랑에 달린 나는 폭포가 비같이 쏟아지며, 우레처럼 아래로 깊은 못을 진동시킨다. 산이 깊을수록 물이 맑으니, 맑은 그림자가 쪽빛보다 푸르다. 몸이 최고봉에 오르니 뭇 멧부리가 쇠못을 꽂은 것 같구나. 손으로 은하수를 만질 듯 하늘과 가까운데, 하늘 바람이 머리털을 불어 차게 흩날린다. 부상(扶桑)과 약목(若木)은 어디쯤인가. 푸른 바다 만리에 맑은 이내 뜨고 큰 물결이 어지럽게 부딪쳐 신기루 빛이 서로 잠기네. 퇴계(椎髻)와 훼복(卉服)이 바다를 건너 잇따라오니, 성군의 덕화가 멀리 미쳤음을 볼 수 있네. 아래로 보니 수십 주(州)의 인간들이 아득하게 굼틀거리는 어린 누에 같다. 산의 높음은 더할 수 없고, 산 속은 즐겁기도 하다. 흔들거리는 패다(貝多) 잎이고, 펄럭거리는 우발담(優鉢曇) 꽃이라. 아름다운 꽃과 이상한 나무 다투어 피는데, 봄바람이 일렁거리니 향기가 그윽하다. 진기하고 이상한 이름 모를 새가 푸른 날개로 너울너울 춤춘다. 푸른 이끼가 길에 가득하니 속인(俗人)의 발자취 없어지고, 그윽한 바위 끊어진 벼랑에 붙여 감실(龕室) 열렸네. 은은한 절을 우러러보니, 찬란한 단청이 눈부셔라. 당간의 깃발은 아득하게 비치고 종과 북소리 은은하게 들린다. 이 속에 마땅히 은거한 군자 있어, 검푸른 눈동자 푸른 머리털의 팽조(彭祖)ㆍ노자가 많으리라. 구절장(九節杖) 짚고, 부용관(芙蓉冠) 쓰고, 쌍성(雙成 서왕모의 시녀)이 말고삐 끌고 왕모(王母)가 말을 몰리라. 구하(九霞)의 푸른 술을 마시고, 동정(洞庭)의 누런 감자로 안주한다. 영지와 요초가 나날이 자라고, 푸른 이무기 검은 사슴의 잠이 한창이라. 달밤 숲이 침침한데 신령스런 바람소리는 헌원(軒轅)이 풍악을 벌여서 관함(官函)을 두드리는 듯, 고운(孤雲)이 도를 듣고 그 지경에 웅경(熊輕) 조신(鳥伸)의 묘한 법 배운 지 오래였다. 커다란 필적이 푸른 절벽에 비치니, 천재에 미담을 남겼네. 세상 사람은 무엇 때문에 부귀만 생각하고 술에 빠지는가. 그대는 거기에 돌아가 누웠으니, 구름 숲은 본성이 달게 여기던 바이네. 내 지금 속세의 그물에 떨어졌으니, 허덕거림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마음으로는 그대와 함께 소원대로 좋은 땅 가리어 띠 암자 얽고 싶었네. 작은 관록을 탐내어 능히 가지 못하고, 고생스럽게 파리처럼 구하며, 동어(鮦魚)처럼 탐낸다. 한 몸의 마음과 일이 서로 어긋나니, 둥근 자루를 모난 구멍에 끼움과 무엇이 다르랴. 그대는 하늘 위에 학이요, 나는 언덕에 메추라기라. 몸을 기울여 남쪽을 바라보니, 조심하는 마음에 속이 타는 듯하네. 어찌하면 칡덩굴 부여잡고 새삼 덩굴 넘어뜨리며, 상상 꼭대기에서 긴 휘파람 불어 호연한 기운이 천지와 아울러 셋이 될꼬.” 하였다.
 청학동(靑鶴洞) 지리산 속에 있다. 주에서는 서쪽으로 1백 47리의 거리이다.
○ 이인로의 《파한집》에, “지리산이 백두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꽃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하게 잇따라서 대방군(帶方郡)에 와서는 수천 리를 서리어 맺히었는데, 산을 둘러 있는 것이 10여 주이다. 한 달이 넘게 걸려야 그 주위를 다 구경할 수 있다. 늙은이들이 서로 전해 오는 말에, ‘그 안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여, 엎드려서 몇리를 지나면 넓게 트인 지경에 들어가게 된다. 사방이 모두 옥토여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푸른 학이 그 안에 서식하는 까닭에 이렇게 청학동이라 부른다. 옛날 속세를 피한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 한다. 지난날 나는 최상국(崔相國) 아무와 함께 이 속세를 떠나 길이 숨을 뜻이 있어서 청학동을 찾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장차 대롱[竹籠]에 송아지 두세 마리씩을 담아가지고 들어만 가면, 속세와 서로 상관하지 않아도 되리라.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화개현에 이르러 신흥사에서 유숙하니, 지나는 곳마다 선경 아닌 데가 없었다. 천 바위가 다투어 빼어났고 만 구렁 물이 다투어 흐른다. 대 울타리 초가 지붕에 복숭아꽃이 가렸다 비쳤다 하니, 자못 인간 세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른바 청학동이란 것은 마침내 찾지 못하였다. 나는 바위에다가 시를 적기를, ‘두류산 멀고 저녁 구름 낮으막한데, 만 구렁 천 바위가 회계(會稽)와 같네. 지팡이 끌며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을 격해서 원숭이 울음소리만 들린다. 누대는 아득히 삼신산이 멀고, 이끼 끼어 네 글자가 쓰인 것이 희미하네. 신선이 있는 곳 그 어디런가. 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이 아득하기만 하네.’ 했다.” 하였다.
○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둥그런 지리산을 바라다 보니 만겹 구름에 항상 침침하여라. 뿌리가 백여 리 서리어 산세가 절로 빼어나니, 뭇 구렁이 감히 겨루지 못한다네. 층층한 멧부리와 가파른 돌벽은 기세가 뒤섞였고, 성긴 소나무와 푸른 잣나무는 차갑게 우거졌다. 시내가 감돌고 골이 굴러 별천지 되었는데, 한 구역 좋은 경치는 참으로 별천지로세. 사람 없어지고 세상 변해도 물은 제대로 흐르며, 초목이 우거져서 동서가 아득하다. 지금도 푸른 학은 홀로 깃드니, 벼랑에 붙은 한 가닥 길이 겨우 통하리. 좋은 밭 비옥한 땅이 편평하기 상과 같은데, 넘어진 담과 무너진 길이 쑥대 속에 묻혔구나. 숲이 깊으니 닭과 개 다니는 것 안 보이고, 해 지니 원숭이 울음만 들린다. 아마도 옛날에 은자가 살던 곳, 사람은 신선되고 산은 비었는가. 신선이 있고 없음은 논할 것 없고, 다만 높은 사람이 속세 벗어났음을 사랑한다. 나도 여기에 집 짓고 숨어서 해마다 요초 캐며 생을 마치고 싶다. 천태산(天台山) 지나간 일은 참으로 허황하고, 무릉도원 유적도 다시 몽롱하다. 장부의 출처를 어찌 구차하게 하랴. 제 몸만 맑게 하고 인륜을 어지럽힘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내 지금 노래 지으매 뜻이 무궁하니, 그날에 시 남긴 늙은이 우습기도 하여라.” 하였다.

옥산(玉山) 주 서쪽 55리에 있다. 우산(牛山) 주 서쪽 65리에 있다. 지리산의 남쪽 기슭인데, 형상이 소가 엎드린 것과 같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고려 때에 장군 강민첨(姜民瞻)이 이 산에다가 우방(牛房)ㆍ모방(茅房)의 두 절을 창건하였는데, 모방에는 민첨의 화상이 남아있다. 망진산(望晉山) 주 남쪽 6리에 있다. 영봉산(靈鳳山) 반성현(班城縣) 동쪽에 있다. 집현산(集賢山) 주 북쪽 40리에 있다. 단성현(丹城縣) 편에도 나왔다. 월아산(月牙山 달엄산) 월아 부곡에 있다. 와룡산(臥龍山) 주 남쪽 60리에 있다. 사천현(泗川縣) 편에도 나왔다. 송대산(松臺山) 주 동쪽 42리에 있다. 바다 주 남쪽 60리에 있다. 흥선도(興善島) 주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남강(南江) 주 남쪽 1리에 있다. 강의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지리산 운봉현(雲峯縣) 경계에서 나오고, 하나는 지리산 남쪽에서 나오는데, 주 서쪽에서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의령현(宜寧縣) 경계에서 정암진(鼎巖津)이 된다.
○ 최함일(崔咸一)의 시에, “오리들이 쌍쌍으로 물 차고 날며, 영산홍(暎山紅)이 유리 같은 푸른 물에 거꾸로 비친다. 화공이 그려내기 어려운 가지가지 의미는, 서생의 한 수 시에 다 들어가네.” 하였다.

섬진(蟾津) 악양현(岳陽縣) 서쪽에 있는데 주에서는 93리이다. 지리산 서남쪽 물이 구례현 용왕연(龍王淵)과 합쳐서 여기에 와서 섬진이 되며, 동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운당진(雲堂津) 주의 동쪽 15리에 있으니, 남강 하류이다. 소남진(召南津) 주 서쪽 29리에 있으며 단성현 신안진(新安津)의 하류이다. 반룡포(盤龍浦) 주 남쪽 79리에 있으며, 바다 개펄이다. 정천(菁川) 주 서쪽 3리에 있으니, 곧 남강 상류이다. 구라량(仇羅梁) 주 남쪽 60리에 있으며 바닷가 개펄이다. 흥선도에 들어가는 자는 여기를 경유하여야 한다. 금산지(金山池) 주 동쪽 20리에 있다. 부지(釜池) 주 북쪽 3리에 있다. 가차례지(加次禮池) 가차례 부곡에 있다.
『신증』 방어산(防禦山) 반성현 북쪽 15리에 있다. 방아산[帖山]이라고도 하는데, 속음이 비슷하다. 급암(鈒巖) 악양현 강변에 있다. 어선이 항상 여기에 정박한다.
촉석강(矗石江) 누선이 있다.
○ 조위(曺偉)의 시에, “누 밑에 긴 강 백길이 맑은데, 채색 배 비스듬히 끌며 거울 속에 흐른다. 해는 모든 집의 발 그림자를 흔들고, 바람은 10리 피리소리를 전한다. 산 아지랑이는 아른아른 절벽에서 나고, 물빛이 일렁거려 높은 성을 움직이네. 지척의 홍진길에 머리 돌리니, 갈매기 한 마리 가벼이 뜨는 것 부러워라.” 하였다.

강주포(江州浦) 사천현 경계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김양포(金陽浦) 곤양군 경계에 있으며 어량이 있다.
【토산】 닥종이[楮]ㆍ감ㆍ차 신라 흥덕왕(興德王) 때에 대렴(大廉)이 당(唐) 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오면서 차 종자를 가지고 와서 지리산에 심게 하였더니, 성덕왕(聖德王) 때에 비로소 무성하였다. ○ 하연(河演)의 신다(新茶) 시에, “진지(晉池) 풍미(風味)는 섣달 앞의 봄인데, 지리산 가에 초목이 새롭다. 금가루ㆍ옥 싸라기 달일수록 더욱 좋아, 깨끗한 빛깔과 빼어난 향기 맛이 더욱 진기하다.” 하였다. 대구(大口)ㆍ미역ㆍ잣[海松子]ㆍ청각(靑角)ㆍ해삼ㆍ꿀[蜂蜜]ㆍ전복[鰒]ㆍ생강ㆍ송이[松蕈]ㆍ석류ㆍ은어[銀口魚]ㆍ황어(黃魚)ㆍ옻ㆍ죽전(竹箭) 망진산ㆍ적량(赤良)ㆍ청암(靑巖)ㆍ급암ㆍ영선(永善) 등에서 산출한다. 매실. 『신증』 웅담ㆍ녹용ㆍ오미자ㆍ대ㆍ문어ㆍ낙지[絡締]ㆍ조기[石首魚].
【성곽】 촉석성(矗石城) 주 남쪽 1리에 있다. 석축인데 둘레가 4천 3백 59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성 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셋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 하륜(河崙)의 〈성문기(城門記)〉에, “옛날부터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돌고 도는 것은, 운수의 성하고 쇠함과 인사의 잘하고 못함이 서로 관계되어 그런 것이다. 옛날 사람은 인사를 닦아서 천운에 응하는 까닭에, 혹 도적의 난이 일어나도 마침내 근심이 되지 못하는 것이니, 내가 우리 고을의 성에 대해서 느낌이 있다. 내가 총각 적에 여기에서 유학하면서, 매양 허물어진 성의 옛터를 보았으나 그 연대를 알수 없고, 늙은이들에게 물어도 또한 증빙할 수 없었다. 이때에는 여염이 태평하여 밥짓는 연기가 연이었었다. 쥐새끼 같은 해구(海寇)가 가끔 일어났으나, 강주(康州) 길안(吉岸)의 토벌만으로도 족히 꺾어 부술 수 있었고, 합포진(合浦鎭)에서 군사를 나누어 구원하여서 우레처럼 엄하게 바람처럼 날려버렸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 수리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지 않았다. 내가 장성하여 벼슬에 종사한 지 10여 년 이래로, 바다 도적으로서 육지에 올라오는 것이 해마다 심하여 갔다. 정사년 가을에 조정 논의도 변방을 방비하는 것을 중히 여겨, 여러 도에 사신을 보내어 주ㆍ현의 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고을 사람이 옛터에다가 흙으로 쌓았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무너졌다. 사명을 받든 자가 그 책임을 어찌 면하리오. 기미년에 지금 지밀직 배공(裵公)이 강주에 진장(鎭將)으로 와 있으면서, 목사에게 공문을 보내 다시 수축하게 하고, 참좌(參佐)를 보내 공사를 감독하였다. 흙덩이던 것을 돌로 바꿔서 쌓게 하였으나, 공사가 반도 되기 전에 해구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강성군 산성(江城郡山城)이 있어서 한 고을 사람이 의거할 곳이 있었고, 해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이 좁고 지세가 높아서 많은 사람을 수용하지 못하고, 또 주의 치소(治所)에서 거리가 멀므로 갑작스런 사태에 능히 미칠 수 없었다.
해구가 물러간 뒤에 목사 김공이 백성의 뜻에 따라 영을 내리기를, ‘주의 성을 이제는 수축해야겠다.’ 하니, 듣는 자가 다 일을 하기를 원하였다. 장정들이 일을 고르게 하고 몸소 감독하여 며칠 안 되어 일을 끝마쳤다. 성 둘레는 8백 보이고, 높이는 세 길이 넘었다. 성문 셋을 설치하였는데, 서쪽은 의정(義正), 북쪽은 지제(智濟), 남쪽은 예화(禮化)이며, 문 위에는 모두 누를 지었다. 올라서 사면을 돌아보니 정천(菁川)이 서쪽을 둘렀고, 긴 강이 남쪽에 흐르며, 품자(品字)가 동쪽에 벌였고, 세 곳의 못물이 북쪽에 돌아 모인다. 또 성과 못 사이에 참호를 파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와서 꺾이어 또 남쪽으로 가서 강에 이르는데, 형세의 장함이 진실로 성위의 한 사람이 성밖의 백 사람을 당할 만하였다. 성이 완성되자 해적이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여 온 경내가 편안하였다.
아, 처음 시작하는 어려움이 다시 일으키는 어려움보다 못하고, 처음이 있게 하는 어려움이 마침이 있게 하는 어려움만 같지 못한데, 일은 반절이면서 공은 곱절인 것을 내가 김공한테서 보았다. 공의 이름은 중광(仲光)이다. 정사하는 데에 대체를 힘써서 어른의 풍모가 있다. 일찍이 제주 목사로 있었는데 반복하여 복종하지 않던 토속(土俗)이 그의 의(義)에 감복되었다. 조정에 돌아와서는 재상이 되었는데 다스리기 어려운 지방을 잘 다스렸다 하여 이 임명이 있었다. 판관 이군 사충(仕忠)도 단정한 사람으로서 공을 도와 이 성을 완성하였다.” 하였다.

【관방】 적량(赤梁) 주 남쪽 백 13리에 있다. 석성(石城)이 있는데, 둘레가 1천 1백 82척이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한 사람이다.

삼천진(三千鎭) 남쪽 74리에 있다.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2천 50척이다. 권관(權管)을 두어 방비한다.
【봉수】 대방산 봉수(臺方山烽燧) 주 남쪽 1백 14리에 있다. 남쪽으로 남해현(南海縣) 금산(錦山) 북쪽에 응하고, 북쪽으로 각산(角山)에 응한다. 망진산 봉수(望晉山烽燧) 남쪽으로 사천(泗川) 안점(鞍帖)에 응하고, 북쪽으로 광제산(廣濟山)에 응한다. 각산 봉수(角山烽燧) 주 남쪽 76리 지점에 있다. 남쪽으로 대방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곤양(昆陽) 우산(牛山)에 응하며, 북쪽으로 사천 안점에 응한다. 광제산 봉수(廣濟山烽燧) 주 북쪽 31리에 있다. 남쪽으로 망진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단성 입암산(笠巖山)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하륜의 서문에, “고을 객사가 두 번이나 화재를 만나, 다시 짓지 못한 지가 여러 해였다. 계미년에 지금 판서 광주(廣州) 안공(安公)이 좌사간대부로 있다가 목사가 되어 나갔다. 이에 옛터를 찾아 그전보다 제도를 조금 넓혀서 신축하였는데, 지금 목사 최공과 판관 은군(殷君)이 계승하여 더 수축하였다. 안공의 이름은 노생(魯生)이요, 최공의 이름은 이(迤)이며, 은군의 이름은 여림(汝霖)인데, 무두 훌륭한 관리로서 세상에 명성이 있다.” 하였다.
【누정】 봉명루(鳳鳴樓) 객관 남쪽에 있다. ○ 하륜의 기문에, “객사 남쪽에 예전 누(樓) 3칸이 있는데, 그 밑을 비게 하여 왕래할 수 있도록 한 것을 누문이라 하는데 이름이 없다. 그 곁에는 노목 수십 그루가 벌여 서서 바람을 머금고 햇볕을 가려서 서늘한 기운이 저절로 난다. 관가와 민가와 대숲과 꽃나무가 가렸다 비쳤다 서로 연접하였다. 산빛과 물빛이 그 밖에 비치고 유람하기에 알맞은 것이 실로 깊숙하고 넓게 트인 중간에 있다. 영목사 정헌대부 최공(崔公)이 이 주에 부임하여서는 모든 황폐한 것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에 이르기를, ‘주는 땅이 아주 남쪽이어서 여름 더위가 더욱 심하다. 사신과 빈객이 왕래할 때에 시원한 곳이 있어야 할 터인데, 촉석루는 허물어진 지가 이미 오래이고 또 공해(公廨)에 막혔다. 이 누를 수리하면 공역은 덜하고 일은 편리하겠다.’ 하고, 마침내 공인(工人)을 모아서 농사 여가에 일을 시켰다. 기울어진 것을 바루고 썩은 것을 갈아 넣었으며, 작고 비좁은 것은 더 보태어 늘리고, 단청을 칠하고, 봉명(鳳鳴)이라는 현판을 걸고, 주 사람 전 상주 목사(前尙州牧使)였던 전군(全君) 제(悌)에게 부탁하여 나에게 기문 짓기를 청하였다. 내 적이 생각하니, 봉(鳳)이란 것은 왕자(王者)의 상서이다. 옛날 주(周) 나라가 한창일 때에 봉황이 높은 뫼에서 울었다 한다. 지금 밝은 임금이 위에 계셔 몸소 인의를 행하고, 어진 이에게 맡기고 능한 자를 부리는데, 백성과 가까운 관직(지방관)을 더욱 중하게 여긴다. 최공은 자애하고 인후한 자질로, 외방에 나가 한 주를 맡아서 왕화(王化)를 펴매, 이에 봉명(鳳鳴)으로써 누 이름을 하였으니, 이는 문왕과 무왕의 덕으로써 우리 임금에게 기대하여 행여 봉이 우는 상서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일찍이 들으니, 한(漢) 나라 황패(黃霸)가 영천(穎川)에 태수로 있을 때에, 봉황이 관사에 오고 다스림이 천하 제일이 되었으므로, 조정에 불려들어가 승상이 되어, 공이 당시에 빛나고 명예가 후세에 전해 온다. 이것은 진주 사람이 최공에게 기대하는 것이며, 최공도 또한 스스로 힘씀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푸른 산이 둘러 물가에 임했는데, 우리 고을 좋은 경치 참으로 맑고 기이하네. 영천(穎川)의 치적을 오늘에 기대하고, 아각(阿閣)에 화하게 울던 것은 성한 시대를 상상하네. 대나무가 인가를 가려 보일락말락, 나무는 관도에 깊어 꾸불꾸불. 농옥(弄玉)을 불러 함께 타고 갈까나, 어찌하면 퉁소를 얻어 달 아래에 불까.” 하였다. ○ 박욱(朴彧)의 시에, “산에는 연이은 봉우리 있고 물에는 물가 있네. 진양의 좋은 경치 바라보매 기이하네. 옛 친구 서로 만나 흉금을 터는 곳, 걸각(傑閣)에 함께 올라 술잔 잡을 때로세. 누수(漏水)는 다했는데 시는 못 이루었고, 촛불은 다 타도 흥은 남았네. 우습다. 후령(緱嶺)에서 신선된 이여. 부질없이 퉁소 배워 세상 밖에서 불었네.” 하였다.

촉석루(矗石樓) 촉석성 안에 있다. ○ 하륜의 기문에, “누정(樓亭)을 짓는 것은 정사하는 자의 여사(餘事)이다. 그러나 한 누의 일어남과 황폐한 것으로서 한 고을 인심을 알 수 있고, 한 고을 인심을 인해서 한 시대의 세도를 알 수 있다. 그러하니 어찌 여사라 하여 하찮게 여길 것인가. 내가 이런 말을 한 지 오래였더니, 지금 우리 고을의 촉석루에서 더욱 믿게 되었다. 누는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 벼랑 위에 있는데, 내가 소년 시절 여러 번 올랐던 곳이다. 누 제도가 크고 높으며 확 트여서, 굽어 보면 긴 강이 밑에 흐르고, 여러 봉우리가 그 바깥에 벌여 있다. 여염집이 뽕나무와 대나무 사이에 보일락 말락하며, 푸른 석벽과 긴 모래밭이 그 곁에 연하여 있다. 농부와 잠부(蠶婦)가 그 일에 힘을 다하며, 아들과 손자는 효도에 그 힘을 다한다. 새들이 울고 날며, 물고기와 자라가 헤엄치며 자맥질하는 것 같은 것도, 한 구역의 동물로써 제자리를 얻은 것이 모두 볼 만하다. 또 누를 이름한 뜻은, 담암(淡庵) 백 선생(白先生)이 말하기를, ‘강 가운데에 뾰족뾰족한 돌이 있는 까닭으로 누 이름을 촉석이라 한다.’ 하였다. 이 누는 김공이 짓기 시작하였고 안상헌(安常軒)이 두 번째로 완성하였는데, 모두 과거에 장원한 분들인 까닭에 또 장원루(壯元樓)라는 명칭이 있기도 하다. 아름다운 제영(題詠)으로는 면재(勉齋) 정 선생(鄭先生)의 배율(排律) 육운(六韻)과, 상헌(常軒) 안 선생(安先生)의 장구(長句) 사운(四韻)이 있고, 또 운은(耘隱) 걸 선생(傑先生)의 여섯 수 절구가 있으며, 이분들의 운을 화답하여 계승한 이는 급암(及菴) 민 선생(閔先生), 우곡(愚谷) 정 선생(鄭先生), 이재(彝齋) 허선생(許先生) 같은 분이 있다. 모두 아름다운 작품으로서 선배의 풍류와 문채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고려 말기에 온갖 법도가 무너지매, 변방 수비 또한 해이해져서 왜적이 침입하니, 백성이 도탄에 빠졌고 누도 또한 잿더미로 되어 버렸다. 하늘이 성조(聖朝)를 열어 성신(聖神)이 계승하니, 정치 교화가 이미 밝아져서 은택이 나라 안에 젖고 위엄이 해외에 떨치니, 전일에 도둑질하던 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항복하기를 청하여 연달아 공물을 바쳤다. 바닷가 지역에 인구가 다시 빽빽하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이가 술을 잔질하며 서로 경사하기를, ‘오늘날 우리 눈으로 태평세월을 볼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은, ‘나의 다스림이 아직도 흡족하지 못하다.’ 하시어, 매양 교지를 내려 백성의 힘을 부리는 것을 엄금하여, 수령으로서 농사와 학교에 관계되는 일 외에는 감히 한 가지 역사도 마음대로 일으키지 못하였다. 고을 부로(父老) 전 판사 강순(姜順), 전 사간 최복린(崔卜麟) 등이 의논하기를, ‘용두사(龍頭寺)는 이 읍을 설치할 때에 함께 된 것이고, 촉석루는 한 지방 훌륭한 경치였는데 황폐한 지 오래 되었으나 다시 새롭게 하지 못하니, 이것은 우리 고을 사람들의 책임이다.’ 하고, 이에 각자 재물을 추렴하고, 고을 중으로서 용두사에 향을 올리는 단영(端永)에게 그 일을 주간하도록 하였다. 계사년에 판목사 권공충(權公衷)이 판관 박시결(朴施潔)과 함께, 부로의 말을 받아들여 강둑을 수축하되, 백성을 나누어 대(隊)를 만들고 대마다 한 무더기씩 맡겨서 농촌의 여러 해 걱정을 제거하게 하였더니, 열흘이 못 되어서 공역을 마쳤다. 다음에 누를 짓는 역사에 부족한 것을 도와주고, 놀고 있는 자들을 불러 모아서 그 힘을 다하게 하니 가을 9월에 이르러 완성하였다. 높은 누가 비로소 새로워져서 훌륭한 경치가 예전과 같았다. 내 이미 인심과 세도를 오르는 자가 물가에 풀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낳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의 불인(不仁)함으로써 백성의 삶을 해롭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밭에 모종이 한창 자라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자라게 하는 것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급하지 않은 일로써 백성의 농사 때를 빼앗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동산 숲에 열매 맺는 것을 보면 천지가 물을 성숙시키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의(義) 아닌 욕심으로 백성의 이로움을 침노하지 아니하기를 생각하고, 마당에 노적가리가 한창 쌓이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기르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법 아닌 생각으로써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 아니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이 마음을 미루어서 범위를 넓혀서 감히 제몸만이 홀로 즐기지 않고 반드시 백성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사람들도 모두 세도의 화함과 인심의 즐김이 실로 임금의 덕이 깊고 두터운 데에서 근원했다는 것을 알아서, 모두 화봉인(華封人)의 축수를 올리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로들이 간절히 마음 써서 이 누를 다시 일으킨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리오. 나도 치사할 날이 이미 가까우니, 필마(匹馬)로 시골에 돌아와서, 여러 부로와 함께 좋은 시절 좋은 날에 이 누에서 술잔을 들며 시를 읊조려 즐거운 바를 함께 즐기면서 여생을 마치고자 하나니, 부로들은 기다릴지어다.” 하였다.
○ 고려 정을보(鄭乙輔)의 시에, “황학(黃鶴)이라는 이름난 누, 그도 한때이었네. 최공이 일 좋아하여 시를 남겼다. 올라와 놀매 경치는 변함이 없건마는, 시 짓고 읊조리는 풍류는 성쇠가 있어라. 소 먹이는 두덕과 낚시터에는 가을 풀이 얕고, 거위 노니는 돌다리와 해오라기 섰는 물가엔 석양이 더디다. 푸른 산은 사방으로 모두 새그림인데, 분바른 계집 세 줄 서서 옛 노래를 부른다. 옥잔을 주고 받으니 산달이 오르고, 구슬 발을 걷으니 고개에 구름이 드리웠다. 난간에 기대어 머리 돌리니 건곤도 작은 듯, 이제야 우리 고을이 특별히 기이함을 믿노라.” 하였다. ○ 백문보(白文寶)의 시에, “누에 올라 옛날 놀던 때 생각하며, 억지로 강산에 답해 다시 시구를 찾는다. 나라에 어찌 난세를 평정할 현인이 없으리. 술은 나를 흔들어 노쇠한 나이를 비감케 하네. 지경이 맑으니 세속의 자취가 끊기기 쉽고, 좌석이 넓으니 춤추는 소매 휘두르기 어찌 방해되리. 붓에 먹찍어 속절없이 춘초구(春草句)를 짓고, 술잔 멈추며 또 죽지사(竹枝詞)를 부른다. 기생은 다가 앉아서 즐거움이 친밀하고, 사람은 시절과 함께 가기 싫어하네. 이 땅의 높은 정취는 참으로 속세가 아닌 듯, 적성(赤城)과 현포(玄圃)도 기이함을 독차지하지 못하리.” 하였다. ○ 백미견(百彌堅)의 시에, “유람하는 것은 시대 못 만남과는 관계없다. 호수와 산 좋은 경치가 시 읊기를 요구하네. 누구의 눈으로 일찍이 여기 터보아 집 지었나. 내 몸이 평안하여 쇠하지 않았음을 자랑한다. 기둥에 기대니 건곤은 끝난 곳이 없고, 물결을 짜놓은 듯한 발과 장막 반공에 드리웠다. 풍류의 가을 달을 이태백이 읊조렸고, 뱃노래 소리 저문 강에 어부가 노래한다. 얘기하고 웃으며 술 한 잔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갔다가 오는데 사흘 동안을 더디다고 하던가. 무성한 숲, 긴 대나무는 서남쪽 언덕에 있는데, 내 정자가 분수 밖에 기이함을 도리어 두려워하네.” 하였다.
○ 김구경(金久冏)의 시에, “촉석루에 올라서 한참 동안 머무니, 풍경이 나를 흔들어 시 짓고 싶어진다. 영운(靈運)의 뛰어난 재주 내 어찌 미치랴마는, 원룡(元龍)의 호기 온전히 쇠하지 않았다. 맑은 강, 낭떠러지엔 고기가 자주 뛰고, 큰 들판 긴 숲엔 바람이 더디 분다. 금술잔을 대해서 묵은 한을 삭이고, 은필(銀筆)을 가져 새 글을 쓴다. 처음으로 눈을 만나 찬 매화 맹동 같더니, 또 봄을 보니 고운 버들이 드리웠다. 떠나려다 멈칫거리며 다시 바라보니, 눈앞에 보이는 풍경 다 기이하여라.” 하였다. ○ 정이오의 시에, “인간을 굽어보니 고금이 되었건만, 기이한 경치는 올라도 다하지 않네. 서쪽에서 오는 두 줄기 물은 쪽빛이 합쳤고, 남쪽으로 가는 뭇 봉우리는 파란빛이 짙다. 세상 따라 행하고 멈춤은 두공부(杜工部)의 탄식이요, 백성보다 먼저 걱정하고 뒤에 즐김은 범문정(范文正)의 마음이로다. 강을 격한 옛 마을엔 바람과 연기 그대로인데, 서울서는 당년에 몇번이나 월 나라 노래를 읊었던고.” 하였다. ○ “흥했다 폐함이 돌고 돌아 바로 지금을 기다렸음인가. 산 꼭대기에 높은 누각이 반공에 임했네. 산은 들 밖에서 연했다 끊어졌다, 강은 누 앞에서 넓기도 깊기도 하네. 백설양춘곡(白雪陽春曲)은 선녀 같은 기녀의 노래요, 광풍제월(光風霽月)은 사또의 심사여라. 당시의 옛 일을 아는 이 없어, 고달픈 객이 돌아오며 홀로 읊조린다.” 하였다. 『신증』 허침(許琛)의 시에, “10년의 유람길 세상에 두루 돌았더니, 늦게야 선궁(仙宮) 몇 째 누(樓)에 기댔는고. 술을 많이 마셔 미쳤지 속물이 아니니, 높은 데 올라서 시 짓는 것 곧 맑은 놀음이네. 산에 가득한 소나무 숲엔 피리소리 움직이고, 한밤중 물결 위엔 흰 달이 떴어라. 햇살이 붉은 발에 비치니 봄 잠이 족하여, 제몸이 남쪽 고을에 체류하는 줄 모른다.” 하였다. ○ 유호인(兪好仁)의 시에, “창망한 호해(湖海)에 가장 명승이라, 하늘이 사신(詞臣)을 보내 이 누에 이르렀네. 막막한 강 언덕 꽃은 밝기가 비단 같고, 겹겹으로 연기 낀 나무 푸름이 흐르는 듯하다. 백년 풍물은 그 누가 구사(驅使)하랴. 한 돛대 술 실은 배는 제대로 남쪽으로 떠다닌다. 지는 해에 유하주(流霞酒) 취해 잠이 달게 든 곳, 일부러 이 몸을 고을에 머물게 한 듯.” 하였다. ○ 이우(李堣)의 시에, “서쪽으로 지리산을 연해 참으로 선경이라, 기이한 경치는 동쪽으로 강북(江北)의 누에 다 있네. 풍경은 영원히 봉악(鳳岳)에 머물러 있고, 번화함도 정천(菁川) 따라 흐르지 않는다. 3년 동안 풍월 두고 시 천 수 지었고, 한 번 웃으니 신세와 이름이 다 헛것인 것을, 대궐 향할 한쌍의 오리가 그리 멀진 않지만, 꿈속에도 묘연하니 중주(中州)가 아득해라.” 하였다.

쌍청당(雙淸堂) 촉석루 서편에 있다.
『신증』 능허당(凌虛堂) 곧 촉석루의 동쪽 누각이다. 조양관(朝陽館) 곧 봉명루의 동쪽 누각인데, 목사 정백붕(鄭百朋)이 건축한 것이다. 청심헌(淸心軒) 능허당 동쪽에 있다. 임경헌(臨鏡軒) 곧 촉석루의 서쪽 누각이다. 목사 이원간(李元幹)이 건축하였다.
【학교】 향교 주 동쪽 3리에 있으며, 사교당(四敎堂)이 있다. ○ 하연(河演)의 기문의 대략에, “우리 고을 학교에는 본래 강당이 없었다. 전 교관 조보인(趙寶仁)이 주 목사에게 의논하여 재목을 준비하였고, 지금 교관 강원량(姜元亮)이 부지런히 감독하여 완성하였다. 이에 당 이름을 사교라 하고, 나에게 편지를 보내 기문을 청하는 것이었다. 진주 고을은 지리산의 영기와 남해의 정기가 빚고 화합한 것으로서, 토지의 비옥함과 인물의 번화함이 딴 고을과 견줄 바가 아니다. 내 일찍이 들으니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이 이 향교에서 배워서 공업이 빛났고, 그 뒤에 인재가 더욱 성하였다 한다. 근래에 문경공(文敬公) 강보(姜寶)군과, 나의 선조 원정공(元正公) 휘(諱) 즙(楫), 어사대부 휘 윤원(允源) 및 정천군(菁川君) 하을지(河乙沚), 참찬 정을보(鄭乙輔)와, 조선 초기 이래로는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 문정공(文正公) 정이오(鄭以吾), 양정공(養正公) 하공복(河敬復)이, 모두 이 향교에서 공부한 뛰어난 분들로서 문과 무로서 모두 당시에 날렸다. 우리 고을의 지기의 신령함과 인물의 걸출한 아름다움은 세상에서 일컫는 바이다. 그러나 반드시 교양에 말미암지 않은 것이 아니다. 지금 여러 학생에게는 평상시 강독하는 데에도 편리함이 있고, 봄 가을 좋은 철을 당하면 성균관에서 과시(課試)하는 방법과 같이하여, 주목(州牧)과 교관(敎官)이 여가 있는 날에 여기에 놀러와서, 혹 책을 펴서 강문(講問)하며, 혹 제목을 내어 시 짓게 하여,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읊조리며 돌아오던 운취와 비슷하며,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즐거움을 즐기며, 역복(棫樸)과 한록(旱麓)의 흥기함이 있다. 비록 그러나 사교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 어찌 이것만을 위한 것이리오. 학문하는 데에는 두 길이 있다. 실제를 힘쓰는 학문이 있고, 명예를 힘쓰는 학문이 있다. 실제를 힘쓰고 외면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爲己] 학문이고, 명예를 힘써서 이름을 따르는 습속에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남을 위한[爲人] 학문이다. 사람이 나서 8세가 되면 모두 소학(小學)에 들어가서, 나아가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받기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먹는 음식과 행동과 언어에 학문 아님이 없다. 근본을 북돋우고 성정을 함양하여 차례를 따라 진보하며, 공부가 성취하기에 미쳐서는 덕성을 높이고 경학을 연마하면, 문장에 뜻을 두지 않아도 그 글이 의리의 근원에서 나오고, 정사에 뜻을 두지 않아도 정사하는 것이 도덕의 작용에서 발하게 된다. 이것은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아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하게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공자의 4교(四敎)라는 것은, 사람을 가르치되, 글을 배우고 행실을 닦으며, 충신(忠信)을 마음에 간직하게 한 것이니, 이 중에 충신이 근본이다. 당(堂)을 이름한 뜻이 깊고 간절하다. 학문하는 길에 무엇이 이보다 더하랴. 여러 학생이 마땅히 마음에 지녀서 나날이 새롭게 할 바이다. 하물며 성조(聖朝)에서 문을 숭상하는 교화로서 하늘이 선비를 많이 내어 편안하게 되는 때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다. ○ 강석덕(姜碩德)의 시에, “10년의 풍속과 교화가 민정에 흡족하니, 봉이 우는 높은 산이 정기를 모았네. 새로 전당(鱣堂 강당)을 여니 학문의 바다가 맑고, 항상 필진(筆陣)을 열어 시성(詩城)을 움직이게 한다. 가을이 깊으니 푸른 대는 바람을 머금어 맑고, 봄이 따뜻하니 청아(菁莪)가 비를 맞아 향기롭다. 성대한 교화로 오늘날에 길한 선비가 많으니, 고을의 선비들이 모두 경서를 궁구하네.” 하였다. ○ 이첨(李詹)이 성진(聖眞 공자의 화상)을 배알하는 시에, “공해(公廨)의 단청이 한 횃불에 없어졌으나, 완악한 도적들도 오히려 문방(文坊)을 보호할 줄 알았네. 10년 동안 교남(嶠南 영남) 풍진 속에, 홀로 의관 갖추고 소왕(素王 공자)을 배알한다.” 하였다.

【역원】 소촌역(召村驛) 주 동쪽 24리에 있으며 역승(驛丞)이 있다. 본도에 속한 역이 열 다섯이 있는데, 상령(常令)ㆍ평거(平居)ㆍ부다(富多)ㆍ지남(知南)ㆍ배둔(背屯)ㆍ송도(松道)ㆍ구허(丘虛)ㆍ관율(官栗)ㆍ문화(文和)ㆍ영창(永昌)ㆍ동계(東溪)ㆍ양포(良浦)ㆍ완사(浣沙)ㆍ오양(烏壤)ㆍ덕신(德新)이다. ○ 승(丞) 1명이다. ○ 정이오의 시에, “역에 나무 그늘 짙고 시냇물 흐르는데, 오랜 나그네 몸 고달파 잠깐 머문다. 말 발굽 남북으로 어느 때나 쉴까나. 강 위 인가에 죽루(竹樓)가 있네.” 하였다. 『신증』 금상(今上) 5년에 승을 없애고 찰방을 두었다.
영창역(永昌驛) 주 남쪽 52리에 있다. 문화역(文和驛) 주 남쪽 60리에 있다. 평거역(平居驛) 주 서쪽 10리에 있다. 정수역(正守驛) 주 서쪽 54리에 있다. 평사역(平沙驛) 주 서쪽 1백 19리에 있다. 소남역(召南驛) 소남진 서쪽에 있다. 안간역(安間驛) 주 북쪽 42리에 있다.
부다역(富多驛) 주 동쪽 59리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바람과 햇빛 맑고 고와서 가을 기운 높은데, 역정(驛程)의 단풍잎이 말 머리에 나부낀다. 전송하고 맞이하는 것은 오직 소나무인데, 길을 끼고 우뚝 서서 허리 굽히기를 부끄러워한다.” 하였다.
개경원(開慶院) 주 동쪽 2리에 있다. ○ 정이오의 기문에, “진주의 진산(鎭山)이 높직하게 구름 위에 솟았으며, 양 기슭이 길게 울퉁불퉁 옆으로 동서로 뻗었다가 다시 서로 감쌌다. 감싼 복판이 널찍하여 사방이 편평한데, 거기에 진주가 위치하였다. 두류산 동남쪽 산 골짜기 물이 모여서 강이 되어 남쪽으로 가로질렀다. 왼쪽으로 감싼 복판에 긴 두덕이 북에서 남으로 와서, 강에서 백 보 되는 곳에서 멈췄는데, 《군지(郡誌)》에서 이른바 옥봉(玉峯)이라 하는 것이다. 그 봉우리가 마치 나그네가 되어 절제를 받지 않는 것 같은 기상이 있으므로, 그곳에다가 원(院)을 짓고 개경(開慶)이라 하였는데, 이는 지기(地氣)를 누르려는 것이었다. 그 남쪽에 강물이 돌아 결(玦) 같고 띠 같으며, 멧부리들은 착잡하게 솟아서 병풍과 장자(障子) 같고, 석벽에 불상 같은 무늬의 그림이 있는데, 고을 사람이 불영암(佛影巖)이라 한다.
원이 처음에는 겹으로 된 누각이 층층으로 솟아나서, 맑은 물결과 푸른 석벽에 빛났던 것이나, 고려 말기에 왜구에게 진주가 함락되니 백성이 텅 비었고, 원에도 화가 미쳤다. 지금 경산 부사(京山府使) 하공(河公) 유종(有宗) 호보(浩甫)는 우리 고을의 효성스럽고 우애있는 군자이다. 일찍이 옛 제택 곁에다가 원 하나를 개설하고, 오가면서 올라다 보며 사정(思亭)의 뜻을 본받고, 또 혜택이 나그네에게도 미쳐서 유숙하는 데에 편리하게 하였는데, 지금 장자원(長者院)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재목과 기와를 모으고 공역을 헤아려 날을 정하는데, 마침 목백(牧伯) 박공 자안(子安)이 부임하여 하공에게 청하기를, ‘개경원이 이 고을에 도움 됨이 가장 크다. 사신이 왕래할 때에 경유하는 곳이고, 수령을 맞이할 때에 휴식하는 곳이다. 또 요충 지대에 해당되므로 나그네들이 잇따라서, 어깨가 맞닿고 소매가 부닥치니, 어찌 다른 역관과 견줄 것이겠는가. 그러니 원을 수리하지 않음은 수령의 허물이다. 그러나 공사(公舍)를 수선하느라고 딴 곳은 돌볼 여가가 없으니, 청컨대 먼저 개경(開慶)에 착수하여, 우리 고을 백성의 힘을 펴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호보가 의롭게 여겨서 허락하고 재목과 기와를 실어 나르며, 옛 제도보다 줄여서 달을 넘겨 완성하였으니, 홍무(洪武) 갑자년이었다. 장엄하고 화려함은 비록 예보다 못하나, 아래위 당과 행랑이 질서 정연하며 산뜻하여 볼 만하였다. 5년 뒤 무진년에 다시 재목과 재력을 갖추어서 장자원을 완성하였으니, 이것은 하공의 본뜻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선양공(單襄公)이 초(楚) 나라에 사신 가면서 진(陳) 나라를 지나다가 그 나라 냇물과 못에 제방과 돌다리가 없어서 길이 막힌 것 같으며, 나그네가 묵을 곳이 없음을 보고, 마침내 그 나라가 반드시 망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대개 성곽ㆍ도로ㆍ여사(旅舍) 등은 모두 삼대(三代) 시대부터 정사를 하는 요체이며, 주관(周官)에는 더욱 여기에 삼가하였다. 인인(仁人)과 군자가 그것이 황폐한 것을 보고는 모두 차마 그대로 두지 못하는 바이다. 이번에 개경원을 중건한 것을 호보는 자신의 공으로 하지 아니하고 목백(牧伯)에게 돌리니, 또한 착한 것을 남과 함께 하는 마음이다. 우리 고을 산수의 아름다움과 산에 오르고 물가에 임하는 즐거움은, 내가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여 허락된다면 마땅히 가서 눈으로 보고 마음에 얻게 될 것이니, 호보는 기다려 주오.” 하였다.

장박지원(長朴只院) 주 동쪽 49리에 있다. 축현원(杻峴院) 주 북쪽 30리에 있다. 분현현(盆峴縣) 주 동쪽 20리에 있다. 가수개원(可樹介院) 주 동쪽 59리에 있다. 섬진원(蟾津院) 섬진 언덕에 있다. 영창원(永昌院) 영창역 곁에 있다. 남제원(南濟院) 주 남쪽 4리에 있다. 어속원(於束院) 주 동쪽 62리에 있다. 추모원(楸母院) 주 서쪽 15리에 있다. 철소원(鐵所院) 주 북쪽 30리에 있다. 서정자원(西亭子院) 주 서쪽 5리에 있다. 소남원(召南院) 소남역 곁에 있다. 구라량원(仇羅梁院) 구라량에 있다. 신원(新院) 주 북쪽 40리에 있다. 차의원(車衣院) 주 북쪽 13리에 있으며 낙빈루(樂賓樓)가 있다. 응제원(應濟院) 주 서쪽 11리에 있다.
『신증』 【교량】 십수교(十水橋) 주 남쪽 28리에 있다. 사천(泗川) 경계이다.
【불우】 단속사(斷俗寺) 지리산 동쪽에 있다. 골 입구에 최치원(崔致遠)이 쓴 ‘광제암문(廣濟嵒門)’ 네 글자를 새긴 돌이 있다. 또 치원의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는데, 뒤에는 중 대감(大鑑)의 영당으로 되었다. 또 신라 병부령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중 신행(神行)의 비명과, 고려 평장사 이지무(李之茂)가 지은 중 대감의 비명과, 한림학사 김은주(金殷舟)가 지은 진정대사(眞定大師)의 비문이 있다.
○ 강회백(姜淮伯)이 과거하기 전에 이 절에서 글을 읽으면서 매화 한 그루를 손수 심었다. 그 뒤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므로, 그 매화나무를 정당매(政堂梅)라 하였다.

불일암(佛日庵) 서쪽으로 쌍계사(雙溪寺)와 10여 리 거리이다. 벼랑과 골짜기가 아주 가파라서 길을 낼 만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절벽 중간을 한 사람이 갈 수 있게 파서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가는 자로서 놀라 땀이 나며 머리 끝이 쭈뼛하지 않는 자가 없다. 암자는 벼랑에 달아 맨 듯한데, 밑이 수백 길이나 된다. 못이 두 곳인데 깊이를 알 수 없으며, 하나는 용추(龍湫), 하나는 학연(鶴淵)이라 한다.
천불암(千佛庵) 천왕봉 밑에 있다. 돌이 집처럼 생긴 것이 있는데, 수십 명을 들일 만하다. 안양사(安養寺) 섬진에서 동쪽으로 고개 셋을 넘어 60리에 이 절이 있다. 오대사(五臺寺)와 함께 훌륭한 절이라 일컫는다. 묵계사(黙契寺) 안양사 앞 냇물을 따라서 북쪽으로 가면 계곡 사이가 매우 험하고 좁은데, 40여 리를 지나 물의 근원까지 이르면 지역이 조금 트이고 토지도 또한 비옥하며 평평하다. 절이 지리산에서 가장 훌륭한 곳에 있다.
영신사(靈神寺) 지리산에 있다. 절 뒤 봉우리에 깎은 듯한 돌이 섰고, 그 꼭대기에 작은 돌이 평상처럼 놓여 있는데 좌고대(坐高臺)라 부른다. 속담에, “능히 그 위에 올라가서 절을 네 번하는 자는 불성을 깨친다.” 한다.
응석사(凝石寺) 집현산(集賢寺)에 있다. 하연(河演)의 조부의 진영(眞影)이 있다. 청곡사(淸谷寺) 달엄산[月牙山] 서쪽에 있다. 법륜사(法輪寺) 달엄산 동쪽에 있다. 향적사(香積寺) 천왕봉 밑에 있는데, 성모묘(聖母廟)의 향화(香火)를 위해서 세운 것이다. 와룡사(臥龍寺) 와룡산에 있다. 고려 현종(顯宗)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놀고 간 곳이다.
오대사(五臺寺) 살천현(薩川縣) 남쪽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다섯 봉우리가 벌여 서서 그 모양이 대 같은데, 절이 그 복판에 있으므로 절 이름으로 되었다. 또 수정사(水精寺)라 하기도 한다. 따오기알 만한 수정주(水精珠)가 있는데, 여의주(如意珠)라 부르며, 은으로 된 끈으로 얽어서 보배로 전해 온다. 절 중의 말에는, “구슬을 반 동이 물에다가 담그면 물이 곧 넘친다.” 한다.
○ 권적(權適)의 기문의 대략에, “절 주지 진억(津億)이 일찍이 동문승(同門僧) 혜약(慧約) 등과 더불어 탄식하기를, ‘출가한 자는 오직 한 가지 해탈만을 기약할 뿐인데, 진실로 이것을 빙자하여 높은 명예와 후한 이를 구한다면, 이것이 어찌 출가한 본심이리오.’ 하고, 이로부터 깊이 숨으려는 뜻이 있었다. 이에 이름난 산에 정사(淨社)를 지어서 동림(東林) 서호(西湖)의 유풍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알맞은 곳이 없었는데, 지리산 오대라는 황폐한 절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지리산은 해동의 큰 진산(鎭山)으로서 높고 깊고 넓고 큰 것이 천하에 견줄 데가 없으며, 오대사는 또 그 산의 남쪽에 있다. 그 산이 일어났다 낮아졌다 한 것이 다섯 겹이어서, 은은하게 대를 쌓아 놓은 듯한 까닭에 그것을 절 이름으로 한 것이다. 천 봉우리가 고리처럼 호위했고, 백 골짜기가 모여들어 현성(賢聖)이 그 속에 숨어 살고 있는 듯하여, 보는 자는 눈이 부시고 마음이 취하였다.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일찍이 남쪽에 갔다가 이곳에 와서 배회하며 두루 돌아보고, ‘여기가 큰 법이 머물 곳이다.’ 하였다. 진억선사(津億禪師)는 이 얘기를 듣고 용기를 내어 가서는 그곳을 발견하였다. 인하여 머물 터를 닦아, 시주를 모집하고, 몸소 목공을 거느리고 도끼를 잡고 빨리 지었는데, 집이 86칸이다. 선사는 수정 하나를 얻어서 아미타불상에 걸어서, 신심을 표명하고, 인하여 수정사(水精社)라 이름하였다. 송 나라 선화(宣和) 5년 계묘 7월에 짓기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 기유(己酉) 10월에 마쳤다. 3일동안 낙성법회를 베풀고, 엄천사(嚴川寺)의 수좌 성선(性宣)을 청해서 경을 설하였다. 임금께서 동남해 안찰 부사 기거사인 지제고 윤언이(尹彦頤)에게 명하여 향을 올리고, 이어 은 2백 냥을 하사하였다. 이로써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 신심이 쏠리어 와서 속인이 폭주하였다.” 하였다.

우방사(牛房寺) 우산에 있다.
지거사(智居寺) 지리산에 있다.
○ 정몽주(鄭夢周)가 주지 각경(覺冏)에게 부친 시에, “남으로 놀아 어느 곳에 시냇소리 듣는고. 지리산이 높고 높아 만 길이나 푸르네. 봄 원(院)에 해 길고 일 없으니, 사미가 와서 묘법연화경 배우리.” 하였다.

화엄사(華嚴寺)ㆍ신흥사(神興寺) 모두 지리산에 있다.
쌍계사(雙溪寺) 지리산에 있다. ○ 세상에 전하기로는, 최치원이 여기에서 글을 읽었다 한다. 뜰에 늙은 괴목(槐木)이 있는데, 거의 백 아름이나 된다. 그 뿌리가 북쪽으로 작은 냇물을 가로질러 서리서리 얽히어 다리 같으므로 절 중이 인해서 다리로 만들었다. 치원이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고을 입구에 돌 두 개가 마주 있어 문 같은데, 동쪽 돌에는 쌍계, 서쪽 돌에는 석문(石門)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또 옛 비가 있는데 비문은 치원이 지은 것이다. ○ 최치원이 이 절에 있으면서 호원상인(顥源上人)에게 부친 시에, “종일토록 머리 숙이고 붓끝을 희롱하니, 사람마다 입 다물어 맘속 말하기 어려워라. 진세를 멀리 떠난 건 비록 즐거우나, 풍정(風情)이 없어지지 않으니 어찌할꼬. 개인 놀 단풍 길에 그림자를 다투고, 비 오는 밤 흰 구름 여울에 소리 연했다. 읊조리는 마음 경치를 대해 얽매임 없으니, 사해의 깊은 기틀 도안(道安)을 생각노라.” 하였다.
영대사(靈臺寺) 지리산에 있다. ○ 정추(鄭樞)의 시에, “이끼 낀 길 지팡이 짚고 굽이굽이 내를 따라 가니, 대숲이 잠겼는데 시냇물 시끄러워 길이 더욱 아득하다. 지는 해 창자 끊어지는 곳, 구름에 연한 높은 나무에 소쩍새 운다.” 하였다.
용암사(龍巖寺) 반성현(班城縣) 영봉산(靈鳳山) 속에 있다. 고려 중 무외(無畏)가 거처하던 곳이다.
○ 고려 박전지(朴全之)의 기문에, “옛날에 도선(道詵)이 말하기를, ‘만약 세 암사(巖寺)를 창립하면 삼한이 통일되어 전쟁은 저절로 그치게 된다.’ 하였다. 그리하여 선암(仙巖)ㆍ운암(雲巖)과 이 절을 창건하였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 주 남쪽 5리에 있다. 여단(厲壇) 주 북쪽에 있다. 성모사(聖母祠) 지리산 천왕봉 꼭대기에 있다. 성모상(聖母像)이 있는데, 이마에 칼 흔적이 있다. 속설에는, “왜구가 우리 태조에게 격파 당해서 궁하게 되자, 천왕이 도우지 않은 탓이라 하며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로 찍고 갔다.” 한다.
강민첨 사(姜民瞻祠) 주 관청 안에 있다. 천희(天禧) 2년에 민첨이 거란 군사와 싸워서 공이 있었으므로, 본주(本州)를 목(牧)으로 승격시켰다. 그리하여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제사지낸다.
『신증』 【총묘】 하륜(河崙)묘 주 북쪽 오이방(梧耳方)에 있다.
【고적】 흥선폐현(興善廢縣) 곧 흥선도이다. 본래 고려 유질부곡(有疾部曲)인데 뒤에 창선현(彰善縣)으로 고쳐서 본 주에 와서 속하였고, 충선왕(忠宣王)이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왜구 때문에 인물이 모두 없어졌다. 지금은 직촌(直村)이다.
○ 원종 10년에 일본이 우리 변경을 침략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여기에 간직하였던 국사(國史)를 진도(珍島)에 옮겼다.

굴촌폐현(屈村廢縣) 주 서쪽 50리에 있다. 신라 때에 본주에 예속되었다. 가차례부곡(加次禮部曲)ㆍ어아부곡(於牙部曲) 모두 주 남쪽 10리에 있다. 침곡부곡(針谷部曲) 주 서쪽 15리에 있다. 율곡부곡(栗谷部曲) 주 서쪽 30리에 있다. 부곡부곡(釜谷部曲) 주 북쪽 5리에 있다. 인담부곡(鱗潭部曲) 영선현에 있으며 주와 30리 거리이다. 송자부곡(松慈部曲) 영선현에 있다. 월아부곡(月牙部曲) 주 동쪽 15리에 있다.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 선천(鐥川)이라는 명칭도 있으며, 주 서쪽 40리에 있다. 송곡향(松谷鄕) 주 남쪽 30리에 있다. 복산향(福山鄕) 영선현에 있다. 벌대소(伐大所) 주 서쪽 40리에 있다. 수곡소(水曲所) 주 서쪽 30리에 있다. 화곡소(火谷所)ㆍ대곡소(大谷所) 모두 주 동쪽 30리에 있다. 수대곡소(水大谷所) 주 남쪽 40리에 있다. 갈곡소(葛谷所) 주 동쪽 20리에 있다.
시중백(侍中柏) 정이오의 시중백 시의 서문에, “시중백이란 것은 개국공신 좌시중(開國功臣左侍中) 배극렴(裵克廉)이 심은 것이다. 지정(至正) 계묘년에 공이 진주에 목사로 와서 일으키고 세운 것이 많았다. 고을에 온 다음 해에 산중에서 어린 잣나무를 옮겨다가 관아 북헌(北軒)에다가 심었다. 그가 임기가 차서 갈려 간 뒤에 진주 백성은 공의 덕을 사모하여 그 나무를 사랑하는 것이 소공(召公)의 감당(甘棠)과 같았다. 대개 잣나무는 절개가 있어 사시를 통하고 천년을 지나도록 지엽이 변하지 않으니, 보통 초목과는 아주 다르다. 누구가 사랑하지 않으랴. 부자(夫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뒤에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하셨는데, 이는 그 절개를 사랑한 것이다. 공의 사랑하는 바가 성인의 뜻과 같으니, 그의 공이 개국의 으뜸으로 벼슬이 총재(冢宰)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정절(貞節)이라는 시호를 추증받음이 마땅하다. 지금 공이 간 지 48년이다. 조그마하던 잣나무가 푸르름이 하늘을 떨치고 뇌우(雷雨)를 밀칠 만큼 되었으니, 그 천연 그대로의 본성을 온전히 한 것이요, 공의 당시 정사 또한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절공 이후로 이 고을을 다스린 자가 또 몇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영목사 최공이(崔公迤)가 처음으로 이것을 읊조렸으니, 정절공에게 가만히 합함이 있는 것이다. 그의 시에, ‘덥고 싸늘함을 반백 년 겪었으니, 세한(歲寒)의 재목이 제세(濟世)의 현인과 합치되네. 손수 영재(鈴齋) 가에 심은 뜻 알고자 할진대, 맑은 바람을 남겨 후세에 전하세.’ 하였다.” 한다.
암석이서(巖石異書) 우리 태조(太祖)가 잠저에 있을 때에, 중이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지리산 바윗돌 사이에서 얻었다는 것이었다. 그 글에는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삼한(三韓)을 바로잡는다.’는 글귀가 있었다. 사람을 시켜 맞아 들이려 한즉, 벌써 가버려서 찾지 못하였다.
남지이조(南池異鳥) 신라 헌덕왕(憲德王) 13년에 헌창(憲昌)이 정주 도독(菁州都督)으로서 웅천(熊川)의 진장(鎭將)으로 옮겨 가서 배반하였다. 이보다 먼저 정주 태수의 청사(廳事) 남쪽 못 가운데에 이상한 새가 있었다. 몸 길이는 5척이나 되며 빛이 검고 머리는 다섯 살쯤 되는 아이 같았다. 주둥이 길이는 한 자 다섯 치이고, 눈은 사람 같으며, 목구멍은 다섯 되들이 그릇만 하였는데 3일 만에 죽었다. 당시 사람이, “헌창이 패망할 조짐이다.” 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구라량폐영(仇羅梁廢營) 각산(角山)에 있다. 예전에는 수군만호가 있었는데 지금은 고성현(固城縣) 사량(蛇梁)으로 옮겼다. 송대산성(松臺山城) 토축(土築)으로 둘레가 4천 73척이었는데 지금은 무너졌다. 성산성(城山城) 하나는 주 동쪽 44리에 있는데 토축이며, 둘레는 2천 8백 14척이고, 하나는 주 서쪽 48리에 있는데 석축이며, 둘레는 9백 77척인데, 지금은 모두 무너졌다.
『신증』 명진부곡(溟珍部曲) 영선(永善) 동쪽 15리에 있다. 고려 말기에 거제현(巨濟縣) 명진포(溟珍浦) 사람들이 여기에 우거하였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그들이 본토에 돌아갔으나 그대로 이름이 되었다. 진성부곡(晉城部曲) 주 동서쪽 15리에 있으며 산 꼭대기에 성터가 있다.
【명환】 신라 향영(向榮) 헌덕왕 때에 정주 도독이었는데, 헌창이 자기에게 붙으라고 협박하였으나, 향영은 몸을 빼어 달아나서 적에게 더럽힘을 당하지 않았다. 김흔(金昕) 헌덕왕 때에 강주 도독(康州都督)이 되었다. 복세(福世) 신문왕(神文王) 5년에 정주 총관이 되었다. 김암(金巖) 강주 태수였다. 왕봉규(王逢規) 경애왕 때에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였다. 당(唐) 나라 명종(明宗)이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
고려 왕해(王諧) 부사로 있었는데,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감복하였다. 동도 유수로 옮기게 되자 진주 백성은 눈물을 흘리며 유임되기를 원하고, 드디어 간절하게 조정에 청하기를, “우리 왕 사또를 1년 동안만 빌려 주소서.” 하여, 다시 재임되었다. 사람됨이 굳세고 정직하며 청백하여, 모든 계획한 바가 백성을 편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김준(金晙) 사록(司錄)으로 왔다가 청백하므로 여러 번 벼슬이 옮겨져서 좌습유 지제고가 되었다. 임민비(林民庇) 의종조(毅宗朝)에 원이 되었다.채정(蔡靖) 신종조(神宗朝)에 목사였다. 이행검(李行儉) 고종조(高宗朝)에 사록이었다. 전광재(全光宰) 고종조에 부사였다. 안진(安震) 통판이었다. 이우(李瑀) 재간이 있으므로 나와서 목사가 되었는데 유애(遺愛)가 있었다. 배극렴(裵克廉) 목사였다. 설장수(偰長壽).
본조 최이(崔迤) 영목사로 있었다. 안노생(安魯生)ㆍ조세안(趙世安)ㆍ임인산(林仁山)ㆍ정사(鄭賜)ㆍ안지귀(安知歸)ㆍ이영견(李永肩) 모두 목사였다.
『신증』 손소(孫昭) 목사였으며, 옥사를 잘 처결하고 정사가 너그러워서 백성이 애모하였다. 이우(李堣) 목사였다. 청렴하고 간결함으로 다스렸다.
【인물】 고려 하공진(河拱辰) 현종이 거란군(契丹軍)을 피해서 남쪽으로 간 다음, 공진이 표문을 받들고 거란 진영에 가서 군사를 돌리도록 청하였다. 거란 임금이 허락하고 드디어 공진을 억류하였다. 억류되어서는 내심으로 환국하려고 꾀하면서 겉으로 충성을 표시하니, 거란 임금이 매우 총애하였다. 공진이 좋은 말을 많이 사서 동쪽으로 나오는 길에다 두고서 돌아올 계책을 꾸몄다. 사람이 그의 계책을 고발하여 거란 임금이 공진을 국문하니, 공진이 사실대로 대답하고, 또, “신이 본국에 대하여 감히 두 마음을 갖지 못하옵는바, 살아서 대국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거란 임금이 의롭게 여겨서 용서하고, 절개를 고쳐 자기에게 충성하라 하였으나, 공진의 언사가 더욱 공손하지 않으니, 마침내 죽였다.
강민첨(姜民瞻) 목종조(穆宗朝)에 과거에 올랐다. 현종(顯宗) 때에는 대장군으로서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이 되어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응양 상장군 주국(鷹揚上將軍柱國)으로 발탁되었다가,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로 전임되었고, 추성치리 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의 호를 받았고, 병부상서로 죽으니,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추증되었다.
강창서(姜彰瑞) 어려서 본주 향교 소속의 생도로서 학업에 힘써서 글을 잘 지으니, 강 남쪽 학자로서는 그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희왕(熙王) 8년 봄에 성시(省試)에 가려는데, 아버지 사호(司戶)가 마침 죄에 걸려 옥에 갇혔다. 고을에 나아가서 방면하기를 청했으나 관원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네가 만약 장원 급제하면 방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옥사를 연기하고 기다렸더니, 과연 장원이 되었다. 금의환향하니, 목백이 막료와 주 아전들을 거느리고 성 밖에 나와서 맞이하고, 그의 집에 가서 크게 잔치를 베풀고 부모에게 술을 권해서 경축하니, 온 경내가 영화롭게 여겼다. 벼슬이 여러 번 옮겨져서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다. 강인문(姜引文) 박사 계용(啓庸)의 아들이다. 부자가 모두 유학으로 이름이 드러났다. 계용이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에 간 일이 있었는데, 원(元) 나라 조정에서 일본을 정벌하면서 계용이 길을 안다는 것으로 또 서장관으로 천거되었다. 풍파가 험난하였고 또 교전하던 때이므로 여러 번이나 죽을 뻔하였다. 돌아와서는 다시 벼슬하지 아니하고 자손에게도 선비노릇은 하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까닭에 아들 감찰어사 사첨(師瞻)과 손자 문하시중 창귀(昌貴)가 모두 아전으로서 벼슬길에 나아갔다. 증손 성민(性敏)이 학문을 좋아하여, 다시 선비로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재보(宰輔)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하을지(河乙沚) 충혜왕조(忠惠王朝)에 장원 급제하였고, 벼슬이 계림원수(鷄林元師)에 이르렀다. 하즙(河楫)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러서 진천군(晉川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시호는 원정(元正)이다. 하윤원(河允源) 즙의 아들이다. 충혜왕 말년에 과거에 올랐다. 공민왕조에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서 여러 장수를 따라 경성을 회복하여서 2등 공신이 되었다. 신돈(辛旽)이 정사를 마음대로 할 적에 홀로 아첨하지 않았다. 신우(辛禑) 초년에 대사헌으로 발탁되어, “그른 줄 알면서 그릇 판결하면 황천이 벌을 내린다.[知非誤斷皇天降罰]”는 여덟 글자를 목판에 써서 헌대(憲臺) 위에 걸어 놓고 일을 보았다. 상주가 되어 시묘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불렀으나 조서가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정을보(鄭乙輔) 상서 공부시랑으로 증직되고, 정천군(菁川君)으로 봉함을 받았으며 글을 잘 지었다. 강기(姜蓍) 나이 19세에 성균시에 합격하였다. 판도판서 문하찬성사를 지냈고,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의 호를 받았고,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함을 받았으며, 시호는 공목(恭穆)이다. 강회백(姜淮伯) 강기의 아들이다. 신우 초년에 과거에 올라 밀직제학을 지냈고, 본조에 들어와서 동북면 도순문사가 되었다. 《통정집(通亭集)》이 있어서 세상에 전한다.
본조 하륜(河崙) 고려 말기 과거에 올라 조정과 외방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경세제민의 재질이 있었다. 우리 태종(太宗)을 도와서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이 되어,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봉함을 받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하연(河演) 윤원(允源)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하경복(河敬復)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하한(河漢) 경복의 아들인데, 또한 무용(武勇)으로써 일컬었다. 벼슬이 중추에 이르렀고, 시호는 강장(剛莊)이다.
정이오(鄭以吾) 과거에 올라 벼슬이 도총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시를 잘하여 《교은집(郊隱集)》이 있다. 정척(鄭陟) 향공(鄕貢)으로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지중추원사 수문전 대제학(知中樞院事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고, 시호는 공대(恭戴)이다. 성품이 부지런하고 공손하며 청렴개결로 스스로 지켰으며, 조정의 의례에 건의한 바가 많았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말하기를, “세종(世宗)께서 ‘청직(淸直)’ 두 자로써 경을 칭찬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았다.” 하고, 의복과 말을 하사하였다.
강석덕(姜碩德) 회백의 아들이다. 벼슬이 지돈녕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대민(戴愍)이다. 《완역재집(玩易齋集)》이 있다. 강희안(姜希顔) 석덕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인순부윤(仁順府尹)에 이르렀다. 글을 잘한다는 명망이 있었고, 전서ㆍ예서ㆍ해서ㆍ초서 글씨가 그림과 함께 묘하였다. 강맹경(姜孟卿) 회백의 손자이다. 과거에 올랐으며, 지낸 벼슬은 모두 청요한 관직이었다. 세조조에 좌익(佐翼) 공신으로써 진산 부원군으로 봉함을 받았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강희맹(姜希孟) 희안의 아우이다. 정묘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으로써 진산군(晉山君)으로 봉함을 받았다. 벼슬이 의정부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시와 문이 정묘하였고,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이 있다.
하숙산(河叔山) 세조조(世祖朝) 친시에 장원하였다. 벼슬이 낙안 군수(樂安郡守)에 이르렀으며, 뒤에 병으로 인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강자평(姜子平) 정축년 과거에 장원하였다. 두 번이나 승지가 되었고, 벼슬이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아우 자순(子順)은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어 반성위(班城尉)가 되었다.
『신증』 정성근(鄭誠謹) 정척의 아들이며, 사람됨이 충효 정직하였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고, 일찍이 성종(成宗)을 위해 3년 동안을 심상(心喪)하였다. 연산조(燕山朝)에 죽음을 당했다. 아들 주신(舟臣)도 과거에 올랐으나 일찍 죽었다. 하숙부(河叔溥) 경복의 손자이다. 무과에 올라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청렴하고 간결함으로써 일컬었고, 시호는 경절(敬節)이다. 강귀손(姜龜孫) 희맹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랐고,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숙헌(肅憲)이다.유순정(柳順汀) 문무(文武)의 재질이 있었다. 정미년 과거에 장원하였고, 조정과 지방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말기에 성희안(成希顔)ㆍ박원종(朴元宗) 등과 함께 계책을 결단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강혼(姜渾) 일찍 과거에 올랐고, 문장을 잘하였다. 연산조에 승지가 되었다가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참여하여 진천군으로 봉함을 받았다.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강형(姜詗) 자평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가 연산조 갑자년에 죽음을 당했고, 금상(今上) 초년에 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신증』 【우거】 본조 조숙기(曺淑沂) 과거에 올라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다.
【효자】 신라 성각(聖覺) 스스로 거사(居士)라 호하고, 일리현(一利縣) 법정사(法定寺)에 의탁하였다. 뒤에 돌아와서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늙어서 병이 들자 다리 살을 베어 먹였고, 죽음에 이르러서는 장사를 지성껏 지냈다. 혜공왕(惠恭王)이 벼 3백 섬을 하사하였다.
고려 정유(鄭愈)ㆍ정손(鄭愻) 모두 지선주사(知善州事) 임덕(任德)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에 아버지를 따라서 하동군(河東郡)에 수자리 사는데, 왜적이 밤에 갑자기 닥쳐 군사들이 다 도망치는데, 임덕은 병들어서 말을 타지 못하였다. 형제가 부축하여 달아나는데 왜적이 뒤쫓아 왔다. 정유가 말을 타고서 두어 놈을 쏘아 죽이니, 왜적이 감히 달려 들지 못하였다. 그 중 한 놈이 칼을 뽑아 들고 돌진하여서 임덕의 뺨을 찌르므로 정손(愻)이 제 몸으로 가로 막으면서 또 네 놈을 베어 죽여, 임덕은 화를 면하였으나 정손은 마침내 적에게 죽었다.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유에게 종부승(宗簿丞)을 제수하였다.
강안명(姜安命)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부모가 매양 이웃 늙은이와 술을 마시고 즐거워하였으므로 안명은 아내와 함께 힘껏 준비하고 어려운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버이가 죽자 예보다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죽은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하였다. 홍무(洪武) 경오년에 정문을 세웠다.
하현부(河玄夫) 벼슬은 사직(司直)이다. 90세 된 어머니가 병이 들자, 똥을 맛보고 종기를 빨았다. 전후에 부모상을 6년 동안 입었다.
여효제(余孝悌)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버이를 힘껏 섬겼고, 어머니가 죽은 뒤에 3년 동안을 시묘하였다. 하루는 까마귀가 향안(香案) 위에 있던 사배(砂杯)를 물고 가버렸다. 효제는, “까마귀는 비록 미물이나 반포(反哺)하는 덕이 있는데, 나의 효성이 까마귀와 같지 못하므로 이것을 물고 가게 된 것이다.” 하면서, 깊이 탄식하였다. 꿈에 한 늙은이가, “슬퍼하지 말라. 3일이면 잔을 반드시 찾을 것이다.” 하였다. 기일이 되자 까마귀가 다시 물어다가 향안 위에다 두었다. 이 소문을 들은 자는 모두, “지성스러운 효도가 미물을 감동시킨 것이다.” 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본조 모순(牟恂) 세종조에 과거에 올라 좌사간대부를 지냈다. 일찍이 어머니의 종기를 빨아서 낫게 하였고, 뒤에 또 어머니가 병들자 똥을 맛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을 세웠다. 군만(君萬) 광대이다. 그 아버지가 밤에 범에게 물려갔다. 군만은 하늘에 통곡하면서 아침 되기를 기다려서 활과 살을 가지고 산에 들어갔다. 범이 다 먹고 양지 바른 곳에 있다가 군만을 보자 울부짖으면서 앞에 와서 먹었던 사지(四肢)를 토하였다. 군만은 살 한 개로 쏘아 죽이고, 칼을 뽑아 범의 배를 갈라서 남은 뼈를 다 거두어서 화장하였다. 득비(得妃) 그 아버지 김계남(金繼南)이 간질을 얻어 4년 동안을 낫지 않았다. 득비는 산 사람 고기를 먹이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제 왼쪽손 넷째 손가락을 잘라서 먹였더니, 그 병이 드디어 나았다. 성화(成火) 8년에 정문을 세웠다.
『신증』 김백산(金白山) 16세 때에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가므로 백산이 낫을 휘두르면서 범을 쳐서 아버지는 죽음을 면하였다. 성종(成宗) 9년에 정문을 세웠다. 박인(朴氤) 아버지가 죽었는데, 마침 연산군 때여서 상복의 기간을 짧게 하는 법이 엄하였다. 그러나 인은 최복(衰服)으로서 시묘살이 3년을 마쳤다. 금상(今上) 4년에 정문을 세웠다. 강응태(姜應台) 아버지가 나쁜 병에 걸렸으므로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먹게 하였더니 병이 나았다. 금상 11년에 정문을 세웠다.
【열녀】 고려 최씨(崔氏) 영암(靈巖) 사인(士人) 인우(仁祐)의 딸인데, 본주 호장(戶長) 정만(鄭滿)에게 시집왔다. 홍무(洪武) 기미년에 왜적이 진주에 침입하여 온 경내가 달아나 숨었다. 이때에 정만은 일이 있어 서울에 갔는데, 왜적이 마을에 마구 쳐들어왔다. 최씨는 30여 세로 자색이 있었다. 네 아들을 안고 산중에 숨었더니, 왜적이 사방으로 나와서 노략질하다가 최씨를 만나 칼을 들이대고 협박하였다. 최씨는 나무를 안고 항거하며 소리질러 꾸짖기를, “나는 죽을 뿐이다. 도적에게 더럽힘을 받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의롭게 죽겠다.” 하며, 꾸짖기를 말지 않으니, 왜적이 마침내 해쳐서 나무 밑에서 죽었다. 왜적이 두 아들을 포로로 잡아 갔고, 셋째 아들 습(習)은 겨우 여섯 살이었는데 시체 곁에서 울부짖고, 젖먹이 아이는 기어가서 젖을 빨아 피가 흥건하게 입으로 들어갔는데 잇따라 죽었다. 10년 뒤 기사년에 도관찰사 장하(張夏)가 조정에 알려서 정문을 세우고, 정습에게는 이역(吏役)을 면제하여 주었다.
『신증』 본조 정씨(鄭氏) 조지서(趙之瑞)의 아내이다. 연산군 을축년에 지서는 죽음을 당하고, 재산은 몰수되고 집에는 못을 팠다. 정씨는 그 곁에다가 초막을 얽고, 지서의 입던 옷을 설치하고, 제전(祭奠)을 드리면서 3년을 마쳤다. 금상 2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유맹상피진(遺氓尙避秦) 이색(李穡)이 융막(戎幕)에 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에, “두류산(頭流山)이 좋다는 말 들었다. 정천(菁川)이 막부 이웃이라지. 다만 공무가 적어지게 되면, 자주 나가서 유람함이 무슨 방해되랴. 괴상한 얘기는 진(晉) 나라 적 일을 듣는 것 같으려니, 남은 백성이 오히려 진 나라를 피하였으리. 그대는 능히 그들의 종적을 알겠는가, 사해는 아직도 한창 풍진이로다.” 하였다.
명성천하희(名城天下稀) 이색의 시에, “기실(記室)은 망년의 벗이요, 이름난 성으로 천하에 드물다. 강루(江樓)엔 서늘함이 좌석에 가득하고, 대숲 속 집에는 푸른 빛이 옷을 적시네. 홍시에 서리가 처음으로 무겁고, 뱅어는 가을이라 한창 살쪘겠네. 맑은 늪이라 응당 아직 끝남이 없으리니, 남쪽으로 바라보며 돌아가는 사람 전송한다.” 하였다. 영대사원운매곡(靈臺寺遠雲埋谷) 이색의 시에, “영대사 머니, 구름이 골을 묻었고, 촉석루 높으니, 나무가 하늘에 닿았네.” 하였다. 수점청산침벽호(數點靑山枕碧湖) 정여령(鄭與齡)의 시에, “두어 점 푸른 산이 푸른 호수 베개했는데, 공(公)은 이것이 진양도(晉陽圖)라 말하네. 물가에 초옥이 그 얼마인가. 그 중에 내 집 있는데 기울었는지 않았는지.” 하였다.
시원우과금단취(柹園雨過今丹脆) 최해(崔瀣)의 시에, “감나무 동산에 비 지나니 금단이 물러졌고, 밤나무 언덕에 서리 내리니 옥 껍질이 얼룩졌다.” 하였다. 진양가려증경처(晉陽佳麗曾經處) 민사평(閔思平)의 시에, “아름다운 진양은 일찍이 지난 곳, 노래하며 피리불던 누대를 꿈속에 자주 드네. 묻노라, 지금엔 지주(地主)가 없다 하는데, 강에 가득한 가을달을 누구에게 맡겼는가.” 하였다. 문무영재생락토(文武英材生樂土) 하연의 시에, “문무의 영재는 낙토에서 나고, 산천 맑은 기운은 이름난 성에 자욱하다.” 하였다. 장천평초풍연호(長川平楚風煙好) 정이오의 시에, “긴 냇물 질펀한 풀밭에 풍연이 좋고, 호탕한 피리와 애절한 거문고 소리에, 세월이 더디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치고, 관찰영(觀察營)을 두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진보】 적량진(赤梁鎭) 흥선도(興善島) 가운데에 있는데, 거리는 주에서 1백 10리, 서쪽 남해로 30리이며, 성의 둘레는 1천 2백 82척이며, 옛날 만호가 있었다. 숙종 14년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 수군동첨절제사 겸 좌조창영운차사(水軍同僉節制使兼左漕倉領運差使)가 있었다.

혁폐 삼천포보(三千浦堡) 남쪽으로 74리, 말문면성(末文面城)이다. 둘레가 2천 50척이며, 권관(權管)을 두었다가 뒤에 사천으로 옮겼고 또 고성(固城)으로 옮겼다. 우수영(右水營) 서남쪽의 남해 가에 옮겼다. 옛날에 만호가 있었고, 뒤에 고성의 사량(蛇梁)에 옮겼다. 각산수(角山戍).
【영아】 우병영(右兵營) 본조 태종 때 창원(昌原)에 설치하여 선조 36년에 촉석산성(矗石山城)에 옮겼는데, 앞은 장강(長江)에 임하였으며, 명승지로 삼았다. 속영(屬營) 진주 우영(右營)ㆍ상주 좌영ㆍ김해 별중영(別中營)이다.
○ 우영 인조 때 설치하였다.
○ 우영장 겸 토포사 1명이다.
○ 속읍은 진주ㆍ거창ㆍ하동ㆍ함양ㆍ곤양(昆陽)ㆍ합천(陜川)ㆍ초계(草溪)ㆍ남해ㆍ사천ㆍ단성(丹城)ㆍ산청(山淸)ㆍ안의(安義)ㆍ의령(宜寧)ㆍ삼가(三嘉)이다.

【관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ㆍ중군(中軍) 곧 병마우후(兵馬虞侯)이다. 심약(審藥)이 각 1인.
【토산】 대나무[竹]ㆍ석이버섯[石蕈]ㆍ오미자ㆍ웅담ㆍ녹용ㆍ백토(白土)ㆍ김ㆍ문어.
【성지】 송대산성(松臺山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73척이다. 영선고현성(永善古縣城) 동쪽으로 44리이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8백 14척이다. 굴촌고현성(屈村古縣城) 서쪽으로 48리이며, 둘레가 9백 77척이다. 진성부곡성(晉城部曲城) 동쪽으로 45리이며, 산위에 옛 터가 있다. 월아산목책(月牙山木柵) 동쪽으로 15리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설치하였는데, 옛 터가 있다. 척산성(尺山城)ㆍ당산성(堂山城)ㆍ신령산성(神靈山城) 이상 세 곳은 왜인이 쌓은 것이다.
【방면】 주내(州內) 군 안에 있다. 조곡(槽谷) 동쪽으로 처음이 2리, 끝이 25리이다. 금산(金山)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대여(大如)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갈곡(葛谷) 위와 같은데 본래 갈곡의 소재지이다. 가주(加住) 위와 같다. 가수개(加樹介)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가좌촌(加佐村)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상사(上寺)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반성(班城) 위와 같다. 오동(於東) 동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용봉(龍鳳) 위와 같다. 양전(良田) 위와 같다. 영이(永爾) 동남쪽으로 끝이 70리이다. 내진(內晉) 동남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외진(外晉) 위와 같다. 말문(末文) 남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90리이다.
창선도(昌善島) 곧 흥선도(興善島), 남쪽으로 처음이 1백리, 끝이 1백 20리이다. 적량(赤梁) 흥선도 가운데 있는데, 처음이 1백 10리, 끝이 1백 30리이다. 영이곡(永耳谷)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오읍곡(五邑谷) 위와 같다.영현(永縣)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70리이다. 성을산(省乙山) 동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금동오(金洞於) 동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송곡(松谷) 위와 같다. 소촌(召村) 동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이곡(耳谷) 위와 같다. 지곡(枝谷)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정촌(鼎村)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섭천(涉川) 남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나동(奈洞)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가차(加次) 본래 가차례(加次禮) 부곡인데, 서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평거(平居)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4리이다. 신풍(新豐)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부화곡(夫火谷) 위와 같다. 동곡(桐谷) 서남쪽으로 처음이 45리, 끝이 45리이다. 모태곡(毛台谷)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사죽(沙竹)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동물곡(冬勿谷)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성태(省台)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50리이다. 집현(集賢) 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0리이다. 명석(鳴石) 북쪽으로 40리이다. 대곡(大谷) 본래 대곡의 소재지였는데,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설매곡(雪梅谷)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비라(非羅)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침곡(針谷) 본래 침곡 부곡이었는데,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40리이다. 원당(元堂) 위와 같다. 이하(籬下)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수곡(水谷) 위와 같다. 단속(斷俗) 서쪽으로 처음이 55리, 끝이 60리이다. 서남(西南) 서쪽으로 35리이다. 정수(正守)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45리이다. 북평(北坪) 위와 같다. 운곡(雲谷)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55리이다. 종화(宗花)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대야(大也) 위와 같다. 본래 대야천(大也川)의 부곡이었는데, 일명 선천(鐥川)이라고도 한다. 청암(靑巖)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1백 30리이다. 가서(加西)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70리이다. 살천(薩川)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1백 20리인데, 일명 시천(矢川)이라고도 한다. 삼장(三壯) 위와 같다. 백곡(柏谷)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70리이다. 금만(金萬) 서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70리이다. 사월(沙月)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진성(晉城)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파지(巴只) 서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오산(吾山)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대평(大坪)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35리이다.
○ 오아(於牙) 부곡은 남쪽으로 10리, 율곡(栗谷) 부곡은 서쪽으로 30리, 부곡(釜谷) 부곡은 북쪽으로 5리, 인담(鱗潭) 부곡은 영선(永善)에 있는데, 주에서 30리 거리이다. 송자(松慈) 부곡은 영선에 있으며, 월아(月牙) 부곡은 동쪽으로 15리이다. 명진(溟珍) 부곡은 영선에 있으며 동쪽으로 15리인데, 고려 말에 거제(巨濟) 명진포(溟珍浦) 사람이 여기에 와서 붙어 살다가 본군에 와서 거제로 돌아갔다. 진성(晉城) 부곡은 동쪽으로 45리, 지금의 진성면(晉城面)이며, 송곡향(松谷鄕)은 남쪽으로 30리인데, 지금의 송곡면이다. 복산향(福山鄕)은 영선에 있고, 벌대(伐大)의 소재지는 서쪽으로 40리이며, 수곡(水曲)의 소재지는 서쪽으로 30리인데 지금의 수곡면이다. 화곡(火谷)의 소재지는 동쪽으로 30리이며, 수대곡(水大谷)의 소재지는 남쪽으로 40리이다.
○ 대야천(大也川) 부곡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7년에 남해의 왜인들이 토지를 잃고 임시로 붙어 살던 곳이다.

【진도】 남강진(南江津)ㆍ황류진(黃柳津) 주의 동쪽이다. 운당진(雲堂津) 동쪽으로 10리, 남강진 하류이다. 정천진(菁川津) 서쪽으로 3리, 남강 상류이다. 소남진(召南津) 서쪽으로 29리 단성(丹城) 신안진(新安津) 하류이다. 구라량진(仇羅梁津) 흥선도에 들어가는 자는 이 곳을 경유한다.
【교량】 십수교(十水橋) 남쪽으로 28리, 사천(泗川) 경계이다.
【창고】 읍창ㆍ군향창(軍餉倉)ㆍ제민창(濟民倉) 모두 읍내이다. 가산창(駕山倉) 우조창(右漕倉)이라고 하는데, 남쪽으로 40리 바닷가에 있다. 영조 경진년에 관찰사 조엄(趙曮)이 조정에 아뢰어 설치하여, 진주ㆍ곤양(昆陽)ㆍ하동ㆍ단성ㆍ남해ㆍ사천 및 고성 서북면, 의령 서남면의 전세(田稅)ㆍ대동(大同)을 거두어 수로로 서울에 이르렀다.
○ 진주목사 감봉 적량첨사(晉州牧使監捧赤梁僉使)가 거두어 바쳤다.
 별향창(別餉倉)ㆍ통창(統倉) 모두 말문면에 있다. 장암창(場巖倉) 가차례면에 있다. 영현창(永縣倉) 영선 고현에 있다. 반성창(班成倉) 반성 고현에 있다. 북창(北倉) 사상면(寺上面)에 있다. 강창 대산여면(代山如面)에 있다. 서창(西倉) 수곡면(水谷面)에 있다. 별회창(別會倉)ㆍ보군창(補軍倉)ㆍ양무창(養武倉)ㆍ조음포창(助音浦倉)ㆍ유황고(硫黃庫)ㆍ영고(營庫).
【목장】 진주장 흥선도 가운데 있다.
○ 감목관(監牧官) 1명 있다.
 【사원】 덕천서원(德川書院) 선조 병자년에 세우고 광해주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조식(曺植) 자는 건중(建中), 호는 남명(南溟)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벼슬은 전첨 증 영의정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최영경(崔永慶) 자는 효원,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며, 본관은 화순(和順)이다. 벼슬은 지평 증 대사헌이다.
○ 신당서원(新唐書院) 숙종 경인년에 세우고,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조지서(趙之瑞) 자는 백부(伯符), 호는 지족당(知足堂)이며 본관은 임천(林川)이다. 연산주 갑자년에 화를 입었으며 벼슬은 응교 증 도승지이다.
○ 은열사(殷烈祠) 고려 현종 신유년에 세우고, 광해주 때 사액하였다. 강민첨(姜民瞻) 본관은 진주인데, 벼슬은 병부상서 증 태자태보 상주국이며, 시호는 은열(殷烈)이다.
○ 창렬사(彰烈祠) 선조조에 세우고 뒤에 사액하였다. 김천일(金千鎰)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이며 본관은 언양이다. 벼슬은 판결사 창의사 증 영의정이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황진(黃進) 자는 명보(明甫)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벼슬은 충청 병사 증 좌찬성이며,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최경회(崔慶會)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이며 본관은 해주이다. 벼슬은 경상우병사 증 좌찬성이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장윤(張潤) 자는 명보(明甫)이며, 본관은 목천(木川)이다. 벼슬은 진주 목사 증 병조판서이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이의정(李義精) 벼슬은 현감이다. 이상 5현(賢)은 선조 계사년 6월에 본주에서 전사하였다.
○ 충민사(忠愍祠) 효종 임진년에 세우고 현종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김시민(金時敏) 자는 면오(勉吾)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벼슬은 우병사 증 영의정 상락부원군이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양산도(梁山濤) 자는 회원(會元)이며, 벼슬은 공조 좌랑 증 좌부승지이다. 김상건(金象乾) 김천일의 법관인데 벼슬은 사포별좌 증 좌부승지이다. 이준민(李俊民) 벼슬은 거제 현령 증 병조 판서이다. 강희열(姜熙說) 의병장이다. 조경향(曺慶享) 벼슬은 진해 현감이다. 최기필(崔琦弼벼슬은 판관 증 호조 참의이다. 유사(兪본관은 기계(杞溪)이며 의병장인데, 주부에 추증되었다. 이욱(李郁)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생원인데,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강희복(姜熙復) 의병장이다. 장윤형(張胤賢) 벼슬은 수문장 증 호조 좌랑이다. 박승남(朴承男) 벼슬은 판관이다. 하계선(河繼先) 유생인데,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최언량(崔彦亮) 본관은 삭녕(朔寧)이며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고종후(高從厚) 고경명(高敬命)의 아들로 의병 복수장이다. 벼슬은 임피 현령 증 이조 판서이며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이잠(李潛) 무과 출신으로, 적개의병장이다. 이숭인(李崇仁) 본관은 송경(松京)이며 무과 출신으로, 벼슬은 김해 부사 증 호조 판서이다. 성영달(成穎達) 본관은 창녕이며 무과 출신으로 벼슬은 경상 우병사이다. 윤사복(尹思復) 본주의 군관인데 벼슬은 첨정 증 호조 참의이다. 이인민(李仁民) 자는 자원(子元)이며 이준민의 아우이다.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손승선(孫承善) 의병대장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정유경(鄭惟敬) 벼슬은 주부이다. 김태백(金太白) 벼슬은 수문장이다. 박안도(朴安道) 유생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양제(梁齊) 선무랑이었다. 이상은 선조 계사 6월에 본주에서 전사하였다.
【고읍】 굴촌(屈村) 서쪽으로 50리, 본래 신라 현의 땅인데, 경덕왕 16년에 굴촌이라 고쳐 강주(康州)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초에 와서 소속되었다. 문화(文和) 동남쪽으로 60리, 본래 신라의 교화량(蛟火良)이었는데, 경덕왕 16년에 문화라 고쳐 고성군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 때에 와서 소속되었다. 흥선(興善) 흥선도 가운데 있으며, 남쪽으로 70리이다. 본래 고려 유질(有疾)의 부곡이었는데, 현종 때 창선(彰善)이라 고치고 내속되었다. 충선왕(忠宣王)이 흥선이라 고친 뒤에 왜구로 인하여 인물이 흩어져 죽자 인하여 폐해버렸다. 살천(薩川) 서쪽으로 80리, 그 설치를 혁폐하여 마치지 않았다. 뒤에 강등시켜 부곡으로 삼았다. 그 우두머리가 머리를 깎았으므로 중대가리[僧首]라 하였다.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진주성(晉州城)의 함락과 명병(明兵)의 철환(撤還)

계사년 5월 초에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적이 경성(京城)을 버리고 갔다는 것을 듣고 비로소 여송(如松)에게 패문(牌文)을 보내어 적을 추격(追擊)하라고 독촉하였다. 적이 간 지가 이미 수십 일이나 되었는데, 응창은 사람들이 자기가 적을 놓아 주고 쫓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 두려워 짐짓 이러한 조처를 취하여 보인 것이었다.여송은 실상은 적을 두려워하여 길에서 천천히 행진하며 어떤 때는 한 군데서 여러 날씩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겨우 새재[鳥嶺]를 넘었을 때 유경(惟敬)이 왜병의 진영에 있으면서 여송에게 군사를 돌리어 강화(講和)를 완결시키자고 청하니, 여송은 도로 돌아와 경성에 주둔하고, 적도 천천히 물러가는데 우리 군사들은 도로 연변에 좌우로 비키면서 감히 나와 공격하는 이가 없었다.
○ 적이 이미 물러가서는 바닷가에 나누어 주둔하였으니, 울산(蔚山) 서생포(西生浦)로부터 동래(東萊)ㆍ김해(金海)ㆍ웅천(熊川)ㆍ거제(巨濟)에 이르기까지 머리와 꼬리가 서로 잇닿았는데, 16개소의 진지가 모두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끼고서 성을 쌓고 참호를 파는 등 오래 머무를 계획을 하였다. 일설(一說)에는 왜병의 태반이 소굴로 돌아갔는데, 진해(鎭海)ㆍ창원(昌原)으로부터 동래ㆍ부산에 이르는 각 포구와 각 섬의 28부대는 행장(行長)ㆍ의지(義智) 등 5, 6명의 관할이고, 기장(機張)으로부터 울산에 이르는 14부대는 청정(淸正) 등 4, 5명이 거느리었는데, 그들은 모두 군사 만 명씩을 가졌었다고 한다. 여송이 드디어 여러 장수에게 부서를 나누어 유정(劉綎)을 성주(星州)의 팔거현(八莒縣)에 주둔하게 하고, 오유충(吳惟忠)은 선산(善山)의 봉계현(鳳溪縣)에 주둔하게 하고, 이영(李寧)ㆍ조승훈(祖承訓)ㆍ갈봉하(葛逢夏)는 거창(居昌)에 주둔하게 하고,낙상지(駱尙志)와 왕필적(王必廸)은 경주(慶州)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각각 군사 4, 5천 명씩을 거느리고 사면으로 적과 서로 버티고 있으면서 감히 나아가 공격하지 못하였다. 이들의 군량(軍糧)을 충청ㆍ전라도에서 가져갔는데, 험하고 막힌 데를 넘어 다니면서 여러 군영(軍營)에 나누어 주느라고 백성의 힘이 몹시 피곤하였다. 권율(權慄)을 시켜 유정의 군영에 있으면서 군사를 훈련하여 일을 거들어 주게 하고 또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를 파견하여 어기거나 태만함을 감독하게 하였다. 일설에는 유정ㆍ오유충은 각각 군사 4, 5천 명을 거느리고 성주와 대구에 진치고, 왕필적은 상주(尙州)에 진치고, 송대빈(宋大斌)ㆍ사대수(査大受) 낙상지 등은 호남에 내려가 위급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 그때 송응창이 적을 추격할 것을 독촉하였는데도 유정이 영남(嶺南)에 도착하여서 군사를 전진시키려고 하지 아니하므로 응창이 자못 그 미루적거림을 허물하였다. 여송이 정주(定州)로 돌아와 응창을 만나보고 적의 기세가 대단하다고 말하니 응창이 그 말을 믿고 도리어 강화(講和)하고자 하여, 우리나라가 여러 번 진격하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사용재(謝用榟)ㆍ서일관(徐一貫)을 보내어 명 나라 조정에서 보낸 사자(使者)처럼 꾸며가지고 적을 타이르는 한편 여송은 유격(遊擊) 주홍모(周弘謨)를 시켜 적의 진영에 가게 하니 이로부터 사람을 보내어 왔다갔다 하는 일이 연속하게 되었다.
○ 처음에 여송이 유경을 시켜 왜에게 바다를 건너 갈 것을 타이르고, 또 서일관(徐一貫)ㆍ사용재(謝用榟)를 시켜 일본의 낭고야[郞古邪 나고야]에 들어가 관백(關白 평수길(平秀吉))을 만나보게 하였다. 유경이 왜장 비탄(飛彈守)ㆍ구대부(久大夫) 등과 더불어 서울에 도착하자 여송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화친하기를 청하나 조선의 두 왕자(王子)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장차 무엇으로 복명(復命)하겠는가.” 하니 비탄수가 즉시 손수 편지를 써주며 부산의 진영에 가서 왕자를 데리고 돌아오게 하였다. 6월에 적이 비로소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과 김귀영(金貴榮)ㆍ황정욱(黃廷彧) 등을 돌려보냈다. 《계갑록(癸甲錄)》
○ 수길은 행장 등이 평양에서 패전하여 모든 왜병이 퇴각하였다는 말을 듣고 심히 성이 나서 새로 군사를 거느리고 비전주(肥前州)의 호실(護室)에 나와 주둔하고 있다가, 유경을 만나 화친을 맺으려 한다는 말을 듣자, 문득 이것으로 우리를 얽어매어 일을 그르쳐 주려는 간계를 품고 두 왕자와 대신들을 돌려보낼 것을 허락하고, 또 소서비탄수(小西飛彈守)를 사자(使者)로 보내어, 유경과 더불어 돌아와 명 나라 조정에 글월을 올리게 하는 한편 군사를 진주로 전진시켜 전년에 패전한 분을 씻겠다고 소리쳤다.
○ 처음에 행장이 유경을 전송하며 말하기를, “관백(關白)이 전년에 진주에서 패하였으므로 여러 장수가 모든 힘을 다하여 그 성을 쳐서 무찌르라고 하는 것을 내가 말리었으나 청정이 듣지 않으니, 일본의 군사가 반드시 진주로 향할 것인즉, 성을 비우고 나와 싸우지 말고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좋을 것이요.” 하니, 유경이 선산(善山)에 이르러서 우리나라 장수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 그때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이 각 도의 장수와 사졸을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였는데 명원은 선산(善山)에, 빈은 의령(宜寧)에 주둔하고,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ㆍ충청 병사 황진(黃進)ㆍ전라 방어사 이복남(李福男)은 각각 소속의 군사를 거느리고 모여들고, 감사 권율(權慄)은 새 군사를 거느리고 운봉(雲峰)은 넘어 모두 창녕ㆍ의령 등 고을에 진을 벌이니 관군과 의명이 모두 모이었다.권율이 거름강[歧江]을 건너 전진하고자 하니 곽재우(郭再祐)ㆍ고언백(高彦伯)이 말하기를, “적의 기세는 한창 치성한데, 우리 군사는 오합지중(烏合之衆)이 많고, 앞길에는 또 군량도 없으니 가볍게 전진할 수는 없다.” 하여 미적미적 결정하지 못하였다. 빈(薲)의 종사관 성호선(成好善)이 홀로 팔을 뽐내며 여러 장수들의 머뭇거림을 꾸짖고 율과 더불어 드디어 강을 건너 전진하여 함안(咸安)에 이르니, 성이 텅 비어서 모든 군사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풋감[靑柿]을 따먹으며 다시 싸울 마음이 없는데, 그 이튿날 적이 김해(金海)로부터 큰 병력으로 쳐들어온다는 보고가 왔다.이에 여러 사람들이 어떤 이는 마땅히 함안을 지켜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물러가 정암나루를 지켜야 한다고 하여, 떠들기만 하고 결정을 짓지 못하다가 적의 총소리가 들리자 모두 겁내어 다투어 성을 나가다가 다리줄[吊橋]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심히 많았으며 도로 정암나루로 건너와서 여러 장수는 모두 각기 흩어져 갔다.
○ 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과 판관(判官) 성수경(成守璟)은 명 나라 장수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일을 하는 임시 파견원(派遣員)으로 상주(尙州)에 있다가 적이 자기 고을로 향하였다는 말을 듣고 창황히 돌아온 지가 겨우 며칠밖에 안 되었었다.
○ 6월 15일에 적장 청정(淸正) 등이 30여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김해와 창원으로부터 물과 육지로 아울러 진군하니 선봉(先鋒)이 이튿날 함안(咸安)에 도착하였다. 그때 이빈ㆍ권율ㆍ선거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함안에 주둔하고 있다가 일시에 무너져 달아나니 그중 미처 도피하지 못한 자 중에는 짓밟히어 죽은 자가 많았다. 적이 함안을 불태워버리니 빈이 의령(宜寧)에 이르러 의논하기를, “흉악한 적이 반드시 진주를 함락시키고야 말 것이다.그렇다면 외로운 군사로는 보전하여 지키기 어려울 것이니 의병을 더 보내어 기세를 도와주는 것이 좋겠다.” 하니 곽재우가 홀로 이에 반대하여 말하기를, “권모(權謀)가 있는 자는 능히 군사를 쓸 줄 알고 지혜 있는 자는 적을 헤아릴 줄 아는 것이다. 지금 적병은 강성하고 정예하여 천하에 당할 수 없는 기세를 가지고 있는데, 3리(里) 밖에 안 되는 외로운 성을 어찌 능히 지킬 수 있겠는가. 또한 군사가 모두 성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안과 밖이 서로 응원하는 형세를 잃게 될 것이니, 나는 마땅히 밖에 있어서 응원을 하겠다.” 하고 성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이에 우감사(右監司) 김늑(金玏)이 성내어 말하기를, “장군이 대장의 명에 좇지 않으니 군법을 어찌하겠는가.” 하니 재우도 또한 성내어 말하기를, “내 한 몸의 죽고 사는 것은 처음부터 아까울 것이 없소 그러나 백 번 싸워 온 군사들을 어찌 차마 죽을 땅에 버릴 수 있단 말이요.” 하였다. 빈이 드디어 재우에게 정암나루를 맡아 지키게 하였다. 김천일이 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을 불러 창고의 곡식을 계산해 보니 수십만 석이 되었다.모든 장수들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성은 높고 튼튼하며 식량은 갖춰 있고 병기도 충분하니, 여기는 바로 오늘날 목숨을 바칠만한 곳이로다.” 하고, 즉일로 부서를 나누어 김천일과 최경회는 도절제(都節制)가 되고, 황진은 순성장(巡城將)이 되고, 각도의 관병(官兵)ㆍ의병의 장수들은 부대를 정하고 계엄(戒嚴)하여 변에 대비하였다.
○ 18일에 적병이 함안으로 부터 바로 정암나루로 건너오자, 재우는 형세가 서로 대적할 만하지 못하므로 물러났다. 군율ㆍ이빈ㆍ이복남 등은 물러나와 산음(山陰)으로 향하였다가 다시 전라도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적은 의령에 들어가 불지르고 노략질하였다.
○ 19일에 적이 진주로 향해 오는데, 산과 들을 메우고 총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척후병을 나누어 단성(丹城)ㆍ삼가(三嘉)를 향하고, 혹은 곤양(昆陽)ㆍ사천(泗川)을 향하여 응원의 길을 막았다. 선거이(宣居怡)ㆍ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晉州城)에 도착하여 말하기를, “많고 적음이 서로 현격한 차가 있으니 물러가 보전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니 천일이 성내어 꾸짖고 좇지 아니하므로 거이 등은 군사를 이끌고 도로 물러나와 빈(薲) 등과 더불어 함양으로 향하였다. 어떤 이는 운봉(雲峰)이라고 한다.
○ 21일에 적의 선봉 기병 수백 명이 마현(馬峴)에 이르러 군세를 시위하며 말을 달려 돌진하더니 이튿날 적의 대군이 이르렀는데, 그 형세가 바람 앞의 불길보다도 더하여 드디어 성을 포위하였다. 여러 날 동안 적의 기세는 날마다 치성해져서 구원병이 통할 수 없는데 적은 호각을 불어 서로 호응하여 한꺼번에 탄환을 발사하니 어지럽게 성안에 떨어지며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아침이 되어서 보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서로 베개하고 있었다. 하루는 경회(慶會)와 천일(千鎰)이 문루에 올라 바라보다가, “구원병이 많이 온다.” 하니, 여럿이 모두 크게 기뻐서 큰북을 치며 다투어 바라보니 멀고 가까운 백 리의 거리는 모두 적병이었다. 이에 천일이 슬피 탄식하기를, “하늘이 만약 정의(正義)를 도와서 우리가 공을 이루고 명 나라에 들어간다면 하란(賀蘭)의 고기를 회치고 구워서 함께 먹을 것이다.” 하였다.
○ 고성(固城) 의병장 최강(崔堈)ㆍ이달(李達)이 진주로 구원을 갔다가 적병의 세력이 지난해와 비교가 안 되므로 손을 대지 못하고 도로 고성으로 향하였다. 함안의 피난민으로 최강을 따라오던 자 3백여 명이 적의 포위를 당하여 거의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강이 말을 타고 달려들어 밤새도록 격전하여 선비와 백성들이 그의 힘으로 안전할 수 있었다. 이를 바라보는 자가 그를 가리켜 천고(千古)의 용장이라고 하였다.
○ 이여송이 낙상지(駱尙志)ㆍ송대빈(宋大斌) 등을 시켜 호남으로부터 나아가 진주를 구원하게 하는 한편 영남에 머물고 있는 장수 유정(劉綎)ㆍ오유충(吳惟忠)을 시켜 힘을 합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군사의 세력이 대적할 수 없으므로 모두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다.
○ 송응창이 행장의 진영에 글을 보내어 도로 들어가라고 책하니, 회답하기를 “일본은 지난 해 진주에서 죽은 자가 심히 많고 또 당신 나라 군사들이 여러 번 일본의 풀 베는 사람을 살해하였으므로, 관백(關白 수길(秀吉))이 명을 내려 진주를 공격하여 성을 무너뜨리고 참호를 메워서 전년의 원한을 씻으라고 한다.” 하였는데, 대개 청정이 이 거사(擧事)를 힘써 주장하여 기어코 진주를 함락시키고야 말려 하므로 유정이 글을 보내어 책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일월록》
○ 그때 진주에는 군사 6만 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전에 비하여 10배나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지킬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늙은 기녀(妓女) 하나가 홀로 근심하므로 천일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전에는 군사는 비록 적었으나 장수와 군사가 서로 사랑하고 명령이 한 군데서 나왔으므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군사를 도맡아 통솔하는 이가 없어 장수는 군사를 알지 못하며 군사는 장수를 익숙히 알지 못하므로 이 때문에 근심합니다.” 하였다. 천일이 요망한 말이라 하여 베어 죽였는데, 수일 후에 성이 함락되었다. 《부계기문》
○ 29일에 적이 진주를 함락시켰다. 창의사 김천일은 그 아들 상건(象乾)과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ㆍ충청 병사 황진(黃進) 이상의 세 사람은 진양(晉陽)에 삼충사(三忠祠)를 세웠다.ㆍ전라도의 복수대장(復讐大將) 고종후(高從厚)ㆍ우의병부장(右義兵副將) 고득뢰(高得賚)ㆍ좌의병부장(左義兵副將) 장윤(張潤)ㆍ의병부장(義兵副將) 이잠(李潛)ㆍ영광(靈光) 의병장 심우신(沈友信)ㆍ태인(泰仁) 의병장 민여운(閔汝雲)ㆍ해남(海南) 의병장 임희진(任希進)ㆍ도탄(陶灘) 복병장(伏兵將) 강희보(姜希甫)ㆍ의병장 이계련(李繼璉)ㆍ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ㆍ사천현감 김준민(金俊民)ㆍ남포 현령(藍浦縣令) 송제(宋悌)ㆍ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ㆍ의병장 강희열(姜熙說)ㆍ진해 현령 조경형(曹慶亨)ㆍ판관 최기필(崔琦弼)ㆍ좌랑 양산숙(梁山璹)ㆍ주부(主簿) 유복립(柳復立)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충청도의 수령(守令)으로서 충청 병사(兵使)를 따라 죽은 자로서 기록하지 못한 것이 많다.
○ 그때 천일은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 황진(黃進)은 7백 명을 거느리고, 경회(慶會)는 5백 명을 거느리고, 종후(從厚)는 4백 명을 거느리고, 윤(潤)은 3백 명을 거느리고, 계련(繼璉)은 백여 명을 거느리고, 변사정(邊士貞)은 그의 부장(副將) 이잠(李潛)을 보내어 3백 명을 거느리고, 여운(汝雲)은 2백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22일에 적의 대군이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문경원(聞慶院)의 산 중턱과 향교 앞길에 나누어 진을 쳤다.처음 성 안에서 교전하여 30여 명을 쏘아 죽이니 적이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물러가더니, 초저녁 무렵에 또 와서 크게 싸우다가 이경(二更)에 물러가고, 삼경(三更)에 또 왔다가 오경에 물러갔는데, 우리 군사가 쏘아 죽인 것은 그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았다.
○ 24일에는 적이 더 많이 와서 마현(馬峴)과 그 동편 쪽에 진을 치고, 25일에는 적이 동문(東門)에다가 흙을 메워서 큰 언덕을 만들고 거기에 흙집을 짓고서 성안을 굽어보며 총탄을 비 오듯이 쏘므로 황진(黃進)도 또한 성안에 높은 언덕을 마주 쌓았는데, 초저녁 때부터 시작하여 밤을 새우면서 황진이 옷과 전립(戰笠)을 벗고 친히 돌을 져나르니 성 안의 남자ㆍ여자들이 모두 감격하여 울며 힘을 다하여 도와 쌓아서 하룻밤 사이에 마치고 드디어 현자포(玄字砲)를 발사하여 적의 굴을 부숴뜨리니 적도들이 또 고쳐 쌓아 놓았다. 이날 적은 세 번 왔다가 세 번 물러가고 또 네 번 싸워 네 번 물러갔다.
○ 26일에 적이 나무 궤짝을 만들어 생가죽으로 싸서 각자가 짊어지고 이고 하여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와서 자성(子城 본성에 붙여 따로 쌓은 성)을 헐려고 하므로 성안에서 큰돌을 굴려 내리고 화살을 비 오듯이 쏘니 적이 또 물러갔다. 적이 또 동문 밖에다가 큰 나무를 연결하여 놓고 그 위에 판잣집을 설치하고 성안에 불을 놓자 초가집들이 일시에 연소(延燒)하였다.이에 예원(禮元)이 겁이나서 넘어지므로 천일이 예원 대신에 장윤(張潤)을 가목사(假牧使)로 삼았다. 그때 큰 비가 와서 활과 살은 모두 풀어져 늘어지고, 군사도 피로가 겹쳐 힘이 모두 빠져 늘어졌는데 적이 성중에 전단(傳單)을 던져 말하기를, “대국(大國)의 군사도 항복하였는데 너희 나라가 감히 항거하느냐.” 하자 성중에서 답하기를, “우리나라는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울 뿐이다. 더구나 명 나라 군사 30만 명이 지금 곧 추격하여 너희들을 남김없이 무찌를 것이다.” 하니 적이 팔뚝을 걷어붙이며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는 이미 다 물러갔다.”고 하였다. 이날 세 번 싸워 세 번 물러가고 밤에도 네 번 싸워 네 번 물러갔다.
○ 27일에 적이 동ㆍ서쪽의 두 성문 밖에다 다섯 개의 흙 언덕을 쌓아 올리고 연결하여 방책(防柵)을 만들어 성중을 굽어보며 끊임없이 총탄을 발사하여 성 안에는 죽은 자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적이 또 큰 궤짝을 만들어 네 바퀴가 달린 수레로 꾸며서 쇠 갑옷 입은 적병 수십 명이 궤수레를 둘러쓰고 성 밑에 와서 쇠 송곳으로 성을 뚫었다. 힘세기가 군중에서 제일가는 이종인(李宗仁)이 연거푸 적병 5명을 때려죽이니, 나머지가 모두 도망쳐 달아나므로 성중에서 드디어 불더미를 묶어 기름을 부어 가지고 던지니 궤 속의 적병이 모두 타 죽었다. 초저녁에 적이 다시 신북문(新北門)을 침범하였으나 종인이 힘껏 싸워 물리쳤다.
○ 28일 날 샐 무렵에 종인이 지키고 있던 성첩(城堞)에 돌아와 보니 예원이 밤 경비를 잘하지 못해서 적이 몰래 성을 뚫어놓아 곧 무너지게 되었으므로 종인이 크게 성내어 책하였다. 적이 성 아래로 육박해 왔으므로 성중에서는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니 적의 죽은 자가 심히 많았다. 적의 장수 한 명이 탄환에 맞아 죽자 뭇 왜병들이 시체를 끌고 갔다.진(進)이 성 밑을 굽어보면서, “오늘 싸움에 죽은 적이 매우 많아서 천여 명은 되겠다.”고 하는데 한 놈의 적병이 성 밑에 엎드려 있다가 쳐다보고 총을 쏘니 탄환이 나무판자에 빗맞고 튀어서 진의 왼쪽 이마에 맞아서 그만 죽었다. 그때 진(進)과 윤(潤)이 가장 힘써 싸우기로 모든 장수에 으뜸간다고 하여 온 성안이 의지하여 소중히 여기더니, 진이 탄환에 맞아 죽으니 성중이 두려워하였다.
○ 29일에 서예원으로 화진에 대신하여 순성장(巡城將)을 삼았다. 예원이 겁을 먹어 정신을 잃고 전립(戰笠)을 벗어 놓은 체 말을 타고 울며 가니, 경회가 군사들의 마음을 경동시킨다고 하여 곧 목을 베려 하다가 그만 두고, 장윤으로 순성장을 대신 삼았는데 얼마 안 되어 윤 또한 탄환에 맞아 죽었다. 미시(未時)에 동문의 작은 성이 비로 인하여 무너지자 적의 군사가 개미같이 붙어 올라오므로 종인이 친병(親兵 호위병)과 더불어 활과 화살을 버리고, 바로 창과 칼로 적을 치니, 죽은 적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적이 물러가서 다시 서북문에서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자 창의군(창의사 김천일의 군사)들이 무너져 달아나 모두 촉석(矗石樓)에 모였으므로 적이 드디어 성에 올라와 칼을 휘두르며 뛰어들었다. 이를 보자 예원이 먼저 달아나니 모든 군사가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고 종인도 탄환에 맞아 죽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천일을 부축하여 물러나 피하게 하였더니, 천일은 꿋꿋이 앉아 움직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여기에서 죽어야 한다.” 하고 드디어 강에 몸을 던져 죽었으며 적은 본성(本城)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들었다.이 때에 죽은 자가 6만여 명이나 되었다. 후일에 김늑(金玏)이 찰방(察訪)으로 하여금 가서 험시(驗視)하게 하였더니, 성 안의 시체는 겨우 천여 명이요, 촉석루에서부터 남강의 북쪽 언덕에 이르기까지에는 쌓인 시체가 서로 겹쳐져 있고, 청천강(菁川江 남강)으로부터 무봉(武峰)에 이르는 5리 사이에는 시체가 강을 덮어 떠내려가고 있었다. 백사가 지은 것으로 《일월록》에 전한다.
○ 이잠(李潛)ㆍ김준민(金俊民) 등은 화살이 이미 다하게 되자 곧 죽창(竹槍)을 가지고 맞대고 치며 싸웠으므로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죽었다. 《난중잡록》 ○《조야기문》에는 죽은 자가 만 명이라고 하였다.
○ 일설에는 적이 며칠을 두고 사람들(우리나라 백성)을 무찔러 죽여도 모두 죽일 수가 없으니 속여 말하기를, “사창(司倉)의 큰 곳간에 피해 들어가는 자는 죽음을 면한다.” 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마침내 창고 안에 들어가니 적이 드디어 불을 질러 모두 태워 죽였다고 한다. 《난중잡록》
○ 일설에는 종인이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면서 싸우다가 남강에 이르러서 왼쪽과 오른쪽 겨드랑에 적병 두 놈을 잡아 끼고는 물에 뛰어들며 크게 부르짖기를, “김해 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는다.” 하였다고 한다.
○ 준민이 홀로 말을 달려 거리에서 싸우면서 좌우로 돌격하니 적의 군사들이 이리저리 쓰러졌다. 온종일 달리는데 적의 탄환과 칼이 모두 맞추지 못하였다. 끝내 죽은 곳을 알지 못하였다.
○ 진사 문홍헌(文弘獻)ㆍ정자(正字) 오빈(吳玭)ㆍ참봉 고경형(高敬兄) 등이 모두 따라 죽었다.
○ 성안의 군사와 백성 중에 죽은 자가 6, 7만 명이나 되었고, 장사로서 빠져나온 자는 두서너 명뿐이었는데 정기수(鄭麒壽) 등 두어 사람은 남강으로부터 헤엄쳐 나와 살아 돌아왔다.
○ 천일과 경회와 진 세 사람에게는 모두 찬성(贊成)을, 종인에게는 병조 판서를, 준민에게는 형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 처음에 심유경(沈惟敬)이 부산(釜山)에 들어가 관백(關白)으로부터 항복하는 표문(表文) 2통을 받아왔는데 표문의 문체가 일본 사람의 글이 아니어서 의심하였었다. 지휘(指揮) 이영춘(李英春)이 또 소서비탄수(小西飛彈守)와 함께 명 나라 조정에 돌아가서 행장(行長) 등이 거짓 항복하는 표문으로 속이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데, 또 유경이 막 도착하자 진주가 함락되었으므로 왜적이 화친하겠다는 의사가 성실하지 않다 하여 드디어 소서비를 요동에 억류(抑留)하여 두고 오래도록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 그때 이덕형(李德馨)이 이여송의 접반(接伴使)로 있을 때에, 명 나라의 장수가 적이 거짓으로 화친을 청한다는 속이는 말을 듣고 머뭇머뭇 결정하지 못하고 날자를 미루어 기회를 놓쳤다. 하루는 여송이 적벽도(赤壁圖)를 내 보이므로 덕형이 시를 짓기를,

이기고 지는 것은 한 판 바둑인데 / 勝敗分明一局棋
병가(兵家)에서 가장 꺼리는 것은 머뭇거리며 의심하는 것일세 / 兵家最忌是遲疑
적벽강에서 전에 없던 큰 승전(勝戰)은 / 須知赤壁無前蹟
오직 장군이 책상을 찍을 때에 있었던 줄 알아라
 / 只在將軍斫案時

하였다. 그 말에 풍자가 있었으니 명 나라 장수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지봉유설》
○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을 해임하고 권율을 도원수 제도도 순찰사(都元帥諸道都巡察使)에 임명하였다. 그때 율은 함양(咸陽)에서 물러나와 남원(南原)에 있었는데, 명을 받고 도로 영남으로 향하다가 이빈(李薲)과 선거이(宣居怡) 등 여러 장수들이 함양에서부터 오는 것과 서로 만나 운봉(雲峰)에 머무르면서 대기하였다.
○ 사대수(査大受)가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에서 남원에 이르러 낙상지와 송대빈 두 장수가 진주를 구원하지 않은 것을 국문(鞫問)하였다. 낙상지와 송대빈이 남원으로부터 구례(求禮)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 7월 5일에 적이 전라도를 침공하였다. 고부 군수(古阜郡守) 왕경조(王景祚)와 전 판관 노종령(盧從齡) 등이 무너져 달아났다. 낙상지와 송대빈 두 장수가 물러나와 남원으로 돌아가니 적이 구례의 성과 못을 무너뜨려 뭉개버렸다. 호남의 백성들이 전일에 왜적을 경험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낮은 산이나 얕은 골짜기에서도 오히려 병화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모조리 도륙을 당하였다.
○ 이날 밤에 남원성을 지키던 군사가 일시에 성을 넘어서 흩어졌다.
○ 7일에 적병 수천 명이 성수령(星宿嶺)을 향하였다. 이빈ㆍ홍계남의 군사가 모두 무너졌다. 송대빈이 두골봉(頭骨峰)에 매복하였다가 스스로 천여 명을 거느려 항거하여 물리쳤다. 낙상지ㆍ사대수등이 길을 나누어 따라가 쫓으니 적이 드디어 순자강(鶉子江)을 건너가서 곡성(谷城)의 촌락을 불태웠다. 대빈이 군사와 더불어 돌아와 남원을 지켰다.
○ 8월에 송응창ㆍ이여송이 왜와 더불어 화친을 약속하고 인하여 명 나라 천자에게 아뢰기를, “왜놈들은 이미 모두 바다를 건너가고 다만 한두 진영만이 부산에 머물러 있으면서 명 나라에서 수길(秀吉)을 임금으로 봉해 주는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란을 겪은 나라에 명 나라의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무르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요양(遼陽)에 철환(撤還)하여서 위급에 대비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라는 조서가 내렸다. 유정(劉綎)의 군사 만여 명은 머물러 있어서 우리나라를 지키게 하고 유정을 도독(都督)으로 임명하였다.
○ 문안사가 명 나라 장수를 국경에서 문안하였더니 유황상(劉黃裳)이 회답하기를, “삼도(三都)가 비록 수복되었으나 머물러 지키는 군사가 2만 명도 못 되며 모두가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으니, 어찌 항상 왕국(조선)을 위하여 부산에서 지키고 있겠습니까. 두 왕자가 비록 돌아왔으나 나라 사람들은 그다지 기뻐하는 것 같지 않고 또한 나라에는 한 명의 쓸만한 군사도 없으니 능히 왜병이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다시 서쪽으로 달아나고자 하여도 오히려 임금의 앉은 자리가 오래도록 따뜻할 겨를이 없을까 두렵습니다.밤중에 분향(焚香)하고 고요히 앉아 스스로 마음에 물어보십시오. 장차 무엇으로써 자존(自存)하려 합니까. 이때에 하지 아니하면 마침내 할 수 있는 때가 없을 것입니다. 급히 8도의 40세 이하 20세 이상의 강장한 남자를 매도에 만 명씩 모집하여 유정(劉綎)에게 보내서 그 옷과 갑옷을 주어 부대에 편입하여 날마다 훈련을 받게 하며, 양곡을 저축하고 선척[船隻]을 정비하여 왜병의 오는 것을 대비하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패망하기를 서서 기다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우리 병부(兵部)에서 잠자는 것도 밥 먹는 것도 모두 폐하고 임금을 위하여 왜적이 물러간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임금을 위하여 간절히 근심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보고 말하기를, “유원외(劉員外)의 회답을 보니 비록 거만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가 우리나라를 근심하는 것은 지극하다. 대신들의 근심하는 것이 만약 모든 명 나라의 관원이 우리나라를 근심하는 것과 같다면 우리나라가 떨치지 않는 것을 어찌 근심하리요.” 하였다. 《일월록》
○ 명 나라 선비 제령(齊苓)이 황제에게 상소하여 송응창이 임금을 속이고 군사를 철수한 죄와 왜적이 그냥 주둔하고 있는 사실을 극력 말하였더니 아뢰는 글이 들어가기 전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 왜의 추장(酋長)이 또 명 나라에서 통혼하여 줄 것, 조선의 땅을 베어줄 것, 저를 임금으로 봉해 줄 것, 곤룡포(袞龍袍)를 줄 것 등 일곱 가지 일을 명 나라 조정에 요구하였다.
○ 송응창이 이미 돌아가며 우리나라에서 황진(黃進)을 명 나라에 보내어 적의 정세를 알리고자 하니 응창이 막아서 하지 못하였다.
○ 10월에 김수(金睟)를 보내어 적의 정세를 알리고 명 나라의 장수와 재상들이 속여 엄폐(掩蔽)한 사실을 모두 진술하여 장수와 재상이 과도관(科道官)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원망하여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모두 교활하고 간사하여 은덕을 원수로서 갚으니 인심의 험악하기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너희 나라가 나를 죽일까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 여송의 나이가 30여 세인데 처음 올 때는 얼굴과 모발이 매우 젊었더니 영남에서 돌아왔을 때는 수염에 흰 털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를 위하여 이렇게 반백이 되었다.”고 하였다.
○ 뒤에 임금이, 평양에 사당을 짓고 석성(石星)ㆍ이여송(李如松)을 제사지내며 이여백(李如栢)ㆍ장세작(張世爵)ㆍ양원(陽元)을 배향(配享)하게 하고 무열(武烈)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주D-001]하란(賀蘭) : 당 나라 안록산(安祿山)의 난리 때에 장순(張巡)이 수양(睢陽)을 지켜 싸우다가 군사를 가지고 있는 다른 고을의 하란(賀蘭)에게 구원을 청하였더니, 하란이 거절하여 수양이 함락되고 장순은 죽었다.
[주D-002]적벽강 …… 알아라 : 중국 삼국 시대에 조조(曹操)가 80만 군사를 거느리고 오(吳) 나라에 침입하여 손권(孫權)을 항복하라고 위협할 때에 손권의 신하들 사이에 항복하자는 사람이 많이 있었으므로 손권이 용단을 내려 칼로 책상을 찍으면서, “나더러 조조에게 항복하라는 자가 있다면 이처럼 찍으리라.” 하였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 임진년에 세웠다. :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김시민(金時敏)ㆍ양산숙(梁山璹) 이하는 동무(東廡)ㆍ김상건(金象乾)ㆍ김준민(金俊民) 거제(巨濟) 사람ㆍ강희열(姜希烈) 의병장이다.ㆍ조경형(曺慶亨) 진해(鎭海) 사람최기필(崔琦弼판관을 지냈다.ㆍ유함(兪晗)ㆍ이욱(李郁)ㆍ강희복(姜希復) 의병장이다.ㆍ장윤현(張胤賢)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ㆍ박승남(朴承男) 판관을 지냈다.ㆍ하계선(河繼先)ㆍ최언량(崔彦亮)ㆍ고종후(高從厚) 이하는 서무(西廡)ㆍ이잠(李潛) 의병장이다.ㆍ이종인(李宗仁) 김해사람ㆍ성영달(成穎達) 우후(虞侯)이다.ㆍ장윤(張潤) 사천(泗川) 사람ㆍ윤사복(尹思復) 첨정(僉正)을 지냈다.ㆍ이인민(李仁民)ㆍ손승선(孫承善) 의병대장(義兵代將)이다.ㆍ정유경(鄭維敬) 주부(主簿)를 지냈다.ㆍ김태백(金太白) 수문장을 지냈다.ㆍ박안도(朴安道)ㆍ양제(梁齊) ○ 또 충민사(忠愍祠)가 있는데 김천일과 황진(黃進)과 최경회(崔慶會)와 장윤(張潤)만을 향사한다.


健齋先生文集附錄卷之四
旌忠壇碑銘大提學李敏敍 a_047_061d


壬辰禍。賊屠城邑。殺長吏不可勝數。而晉介湖嶺爲賊衝。在我爲必守。在彼爲必爭。且一路創殘。州境獨完。南方諸將。皆保于晉。賊又先衄後奮。倂力必取。於是。晉終見屠。而忠義之士殲焉。始日本來寇。大勢兵047_062a踰鳥嶺。走李鎰。拉申砬。直搗京城。又分兵寇掠湖南。旣閑山不利。悉衆攻晉。千時。判官金公時敏。先賊之未至。糾合州兵。擊逐泗川, 固城賊。破賊將之據鎭海據金山者。威聲大振。回軍馳入城。大修守禦具以待賊。六月。賊果大至圍城。城中兵不滿千。賊將行長合諸屯賊十餘萬。攻圍六日。彼衆我寡。勢如壓卵。而公擧止安閒。有時吹笛鳴琴。軍中恃以爲安。督勵諸將。意氣奮發。士皆感泣。乘機赴節。捷出奇計。賊死傷如憤。知不可克。捲圍而退。賊退之日。公忽爲流丸所中。殞於城上。州民壯士。如喪父母。其明年。賊自平壤047_062b敗歸。以嶺爲巢穴。賊酋淸正憤前之不利。合兵復攻。時天朝以和誘賊。天將之進。賊在嶺南者。皆按兵不戰。摠兵劉綎移檄淸正使止兵。游擊沈惟敬力說行長。皆不聽。朝廷累下旨。督諸將進戰。都元帥金命元, 巡察使權慄以下官義兵皆聚宜寧。不敢先進。權慄責諸將。過江。至咸安。望見賊。皆潰。慄命元等先走。湖南倡義使金公千鎰。獨奮謂諸將曰。晉密邇湖南。實爲脣齒。無晉則無湖南矣。或欲空城避賊。以快其心者非計也。莫若竝力堅守。以遏賊勢。諸將不應。多散去。公與慶尙右兵使崔公慶會, 忠淸兵使黃公進, 義047_062c兵將高從厚, 泗川縣監張潤等。及諸將士十餘人。將兵入城。時金海府使李宗仁先入城矣。諸將兵僅數千。州民士女凡六七萬人。義兵將姜希悅李潛等繼至。牧使徐禮元素恇劫不知兵。凡守禦區畫。皆出千鎰。主客不相能。城本四面據險。其東稍平。至是部署諸軍。分城而守。黃進, 李宗仁, 張潤等各率兵。往來赴其急。約束旣定。人皆以死自誓。六月二十日。賊之前鋒。已至州境。吳宥, 李潛等出城詗賊。斬數級而來。城中鼓譟。千鎰遣梁山璹乞師劉綎。綎畏賊終不出師。其明日。賊大至圍城三帀。進薄城下。柵竹自蔽。從其047_062d內發砲丸如雨。城中人悉力拒守。賊又乘夜進逼東門。大呼登城。聲震天地。進等擊却之。一日。賊急攻西北隅。城幾陷。進奮劍督諸軍。登陴射賊。賊乃退。賊又築土山。臨城俯攻。進亦築高阜以當之。賊又設板屋置大木上。放火燒城中室屋。進用火砲碎之。時久雨。城一隅潰。賊遂乘之。金浚民力戰死之。賊又築五阜於城東西。登其上放丸。姜希輔死之。進乃放火箭焚柵。賊又作大櫃置四輪車上。被用者挽車逼城。進乃束火灌油而焚之。其後。賊潛來穴城。進等殊死戰。賊酋一人中丸斃。賊兵死者千餘人。賊退。進臨城視戰047_063a地。忽有賊丸中進左額而死。軍中使潤代進。旋又戰死。進, 潤智勇爲諸將最。而一時皆隕。士卒喪氣。賊因圮堞蟻附而上。宗仁等搏戰救之。旣已。賊趨西北躍入。禮元先走。諸軍大潰。千鎰等在矗石樓。與其子象乾及高從厚崔公慶會, 梁山璹等數十人。北面再拜。赴南江而死。李宗仁, 李潛, 姜希悅等十餘人。奮劍斫賊。力盡而死。宗仁將死。腋二賊赴水。大呼曰。金海府使李宗仁死於此。寔二十九日也。城旣陷。軍民皆被屠戮。無一人得脫。牛馬鷄犬亦不遺。夷城塡壕。堙井刋木。以快前憤。自是賊亦挫銳頓鋒。不能復振。湖南047_063b賴以全。蓋賊旣致死於晉。而諸公以弱卒守孤城。外援不至。終必折而不救。人人皆知之矣。然諸公誓死不去。力守於事去之後。要與城俱斃。以蔽遮湖南。忠壯義烈。固當與張巡匹美。而至其乘機立慬。出奇應卒。摧敗賊鋒無算。其功謀亦不可勝道者哉。其後累朝褒贈甚備。置彰烈祠。又設旌忠壇於近地之麓。祀以春秋。贈領議政金公時敏, 贈左贊成金公千鎰, 黃公進, 贈左參贊崔公慶會。在北南向。義兵將高從厚, 李潛, 金海府使李宗仁, 虞候成穎達, 泗川縣監張潤, 僉正尹思復, 學生李仁民, 代將孫承善, 主047_063c簿鄭惟敬, 守門將金太白, 宣務郞梁濟, 學生朴安道在西列。贈承旨梁山璹, 贈參議金象乾, 義兵將姜希悅, 巨濟縣令金俊民, 鎭海縣監曺慶亨, 判官琦弼, 贈主簿兪晗, 生員李郁, 守門將張胤賢, 義兵將姜熙復, 判官朴承男, 學生河繼先, 崔彦亮。在東列。晉城之事遠矣。而記功勳。著義烈。昭久遠者。闕然不圖。今御營大將徐公文重。觀察嶺南。過晉巡覽諸公死義之地。慨然興慕。大懼其久益昧沒也。遂與南鄕將士。謀所以彰示後世者。右兵使李公基夏主其事。統制使金公世翊佐其費。碑旣具。徐公請銘於不佞。047_063d不敢辭。乃爲之詞。嗚呼。晉城之事。豈不悲哉。寇再逞而勢益鷙。國方潰而援不至。主客相猜而輿尸凶。人衆雖多而聚蟻蜂。蒼黃叫號。卒就魚肉。獨使夫志土仁人。張空拳兮樹立卓。寧人謀之不臧。豈天意之祚惡。矗石高兮屹立。江流長兮萬古。紛煙愁兮雨泣。魂魄毅兮奮威怒。酌漂淸兮薦芳腯。祀春秋兮耿南土。
松亭先生文集卷之四
 
遊德山獐項洞盤石記 a_061_120c


自書院渡薩水。西北行數十里有洞焉。是謂獐項。窈而深。深而狹。其上下有松森列。其直如矢。自獐項過小菴。東北行數十步有石焉。是謂盤石。方而廣。廣而平。其左右有水環流。其鳴如佩。眞幽絶處也。昔南冥061_120d先生甞遊於斯。有十破牛脇之詩。用是諸君皆感慕踟蹰。睹其直而思其氣象。聆其鳴而慕其謦欬。余遂題一詩以吟曰。昔聞獐項有瑰觀。今日來尋薩水干。谷口兩崖懸似壁。澗心雙石矗如盤。春風已斷死牛脇。秋色空粧舞鳳顔。惆悵古人尋不見。洞天山月思無端。時同遊者六人。姜敏修士吉崔琦弼奎仲河憕子平吳長翼承及曺次磨二會。余亦與其數焉。是日也八月十八日丁卯享祀後。

硏經齋全集卷之五十九
 蘭室史科二
晉陽殉難諸臣傳 a_275_222d


萬曆壬辰。島夷犯晉州。金時敏拒戰却之。癸巳淸正復圍晉州。金千鎰,崔慶會等諸義師凡六七萬。形勢甚固。衆皆謂守城無虞。獨老妓憂之。千鎰問其說。對曰壬辰之役。城守雖寡弱。將卒相愛。號令如一。故能成功。今者兵雖衆而將不習兵。紀律少紊。妾實憂之。275_223a千鎰以爲妖言惑衆斬之。不數日而城陷。妓亦善料兵者。使諸公從其言。修紀律一節制。則安知不破賊如時敏也。然勢之所使。雖智者不得免。如李郭等九節度事是已。况下此者乎。諸公亦策之審矣。是時諸路多潰决。湖南獨爲國家地。而晉其要衝也。諸公苟一擧足則湖南陷爲賊藪。國家何恃而能自力於中興乎。是故死守孤城。事成則幸耳。不成則與城俱亡而不之恤。殆巡遠之志也。賊雖陷晉。而銳氣亦挫。終不能過晉而大猘。諸公之功。又不可少也。余故採諸臣事。以及別將幕士婢妾奴隷之屬。得四十餘人。爲275_223b之作晉陽殉節諸臣傳。
金時敏字勉吾。安東人。高麗名臣邦慶之後。世居木川。中武科。壬辰爲晉州判官。倭入寇。諸將欲棄城走。時敏令軍中敢言去者斬。收境內男女雜編行伍。爲死守計。已而擊靈山屯倭。救柳崇仁。又遏固城倭。會城陷乃還。聞倭犯泗川。與曺大坤馳至十水橋。遇倭走之。仍復泗川,固城,鎭海三城。於是軍聲大振。朝廷陞時敏爲牧使。時金沔檄時敏求救。時敏卽率精兵千人趍居昌。與沔合擊金山倭。斬數十級。居數日又戰遂走之。十月三日。倭分三道迫晉州。兵使崇仁275_223c軍潰。單騎馳請入城同守。時敏曰兵使入城。是易主將也。節制乖方不納。崇仁敗死。郭再佑聞時敏不納崇仁。歎曰此計足以完城。晉人之福也。時城中兵三千餘人。倭多張旗幟盖翣。着金假面。冠鷄羽。服餙奇詭倭將六人。分陣督戰。卒倭數千。從山上呼噪。放礟城中。時敏令軍毋動。俟倭氣衰。卽皷譟應之。夜吹笛樓上。以示整暇。倭大伐竹樹爲攻具。又作土山以臨城。時敏預具火器以待。已而賊肉薄來攻。時敏以銃殪山上倭。以火藥焚松障。以大砲碎竹編。十日夜倭佯退。已而潛還。急攻東門。後隊齊發。礟中城上人。時275_223d敏麾衆血戰。賊尸如麻。戰方酣一倭渠攻北城。萬戶崔德良等拒戰甚力。遲明少休。城中木石盖茨殆盡。會時敏中丸卧。昆陽郡守李光岳射殺倭渠一人。日中倭始退。焚屍而去。城中被圍十餘日而解。時敏初起兵。預煎焰焇。倣倭制鑄銃。常敎士。及是收其力。金誠一聞捷。馳入晉州。就時敏卧所慰之。聞于朝陞擢右兵使。時敏傷重。未聞命而卒。時敏素慷慨。臨戰輒北向流涕。悲不自勝。與其婦躬持酒食以餉士。及沒一郡士女哭失聲。本國被擄者書報監司曰倭每稱晉牧善戰。倭酋柴藤元帥者。平秀吉之從子。兵力最275_224a強。敗退昌原。忿恨而死。甲午議講和。倭言晉州之役。將官死者三百。軍兵死者三萬。必取當然後可以議和云。
鄭得說字君錫。河東人。文成公麟趾五世孫也。善騎射。以氣節自奮。中武科。累官泗川縣監。壬辰倭入寇。得說自選精騎。與晉州判官金時敏。合勦固城鎭海諸屯倭屢敗之。頃之倭犯晉陽。時敏乘城守。得說疾馳救之。時兵使柳崇仁亦以三百人。掎倭後與戰。軍潰。得說躍馬大呼。收散卒欲戰。會日暮士懾。獨得說志益勵。矢盡持鐵棍鏖戰。得說素乘白馬。倭目之曰275_224b白馬將軍。所至輒披靡。已而倭悉力圍之。得說力竭死之。事聞贈訓鍊院正。㫌其閭。得說每臨戰奮曰人臣惟當竭力殲賊。豈用首級以要功賞哉。子澤雷。光海時閉大妃于西宮。抗言不可。坐竄南海。仁祖反正。贈持平。
金千鎰字士重號健齋。高麗侍中就礪十四世孫。居羅州。千鎰生而父母相繼沒。鞠於外祖母。及長從一齋李恒,河西金麟厚遊。萬曆癸酉。以遺逸被徵侍經筵。甞講春秋。辨公私治亂之源。語甚剴切。壬辰倭大擧入寇。宣廟西狩。千鎰馳書前府使高敬命,前牧275_224c使朴光玉,前正郞鄭湛,前郡守崔慶會。告擧義事。宋濟民,梁山龍,山璹,林灌,李光宙,徐廷厚等從之。收鄕中兵三百人。器械亦粗完。乃以六月三日。登壇歃血。遂西行勤王。所過禁暴掠。三道之民以壺漿器械迎者相續。道聞龍仁師潰。軍情洶懼。千鎰以忠義激諭之。比至畿輔。無一人逃者。襲金嶺倭斬五十級。幷獲戰具。千鎰卽遣郭賢,梁山璹。奔問行在。進軍安山。欲與倭决戰。將佐皆曰我無後救。賊來益衆。輕戰必敗。移軍江都。收三江避兵船。西通龍灣。南引漕粟。北收都城。計之上也。千鎰然之。西至仁川重林驛將275_224d宿。千鎰曰此地夷曠。恐賊兵來襲。下令促食而發。黎明倭果來。驚曰是何神也。是時光海主撫軍伊川。聞千鎰擧義。諭曰今日國事。十去八九。賴諸君擧義。已迫都城。宗社存亡。唯諸君在。千鎰受命訖。卽令幕士沈秀峨回奏伊川。時從事林灌收三江舡數百以報。千鎰入江華。大修戰艦。軍勢益振。郭賢等至自行朝。朝廷拜千鎰判决事兼倡義使。上敎郭賢等曰歸語千鎰。盡心掃淸寇賊。俾予更見華山渭水。千鎰卛將士跪讀敎書。哭失聲。聽者無不流涕。千鎰甞遣人潛入城中。曉告我民爲內應。由是賊中動靜無不275_225a聞。千鎰與全羅兵使崔遠秋,義師禹性傳,京畿水使李蘋,忠淸水使邊良俊。領水師四百艘。直抵楊花渡。揭榜數秀吉罪。以挑城中倭。倭不敢出。上馳書諭曰江華非進取之地。宜下陸以戰。千鎰卽抄精卒數百。使林灌將之。屬全羅道巡察使權慄。相機進取。又上䟽曰臣入據孤島。非欲擁兵自衛也。控引三湖。宣達兩西。使流逋坌集。生靈按堵。國家之元氣。亦已壯矣。趙充國身履金城然後圖上方略。哥舒翰迫於嚴命。撫膺出關。敗不旋踵。兵事難以遙制。在島諸軍一朝而撤。上流失險。其勢必散。人心向背。間不容髮。是275_225b時倭譯等飛報。倭帥平朝允將掘康泰二陵。千鎰聞之大驚。卽送銀錦以應倭求。齎送五禮儀。俾驗我國山陵不藏寶玉。朝允乃止。時千鎰疾甚。恐一朝忽焉。乃陳言近日之弊。不可盡擧。撮其中有三。職任之數遞也。獻馘之不裒也。節制之多門也。以此望其同心討賊。不亦左乎。伏願殿下恒懷共天之讎。益堅卧薪之誓。則群下莫不刻厲。庶幾收恢復之功。上甚嘉納。皇明提督李如松從平壤而南。將攻都城倭。千鎰圖上京都形勢道路險夷。如松大悅。凡嚮導輸輓。一委千鎰主辨。京屯倭旣敗平壤。而憤殺都275_225c民殆盡。燒廬舍。火經旬不滅。時癸巳正月十四日也。都民之出城投千鎰者猶數萬。千鎰發粟以饋之。與忠淸兵使丁傑及李蘋再次楊花。築壘於仙游峯。截露梁。分陸兵鏖沙峴。俘倭而降者。相續於道。賊自知勢窮乞和。游擊沈維敬等許之。千鎰故捕斬倭以撓其計。維敬怒將罪之。千鎰辨甚力遂已。倭旣退。千鎰修掃宗廟。撫綏都民。俄而命千鎰追擊倭。千鎰方病。卽曰吾得死所矣。時倭屯嶺海間。將窺湖南。千鎰以爲湖南乃國家根本。晉州爲湖南保障。請于朝。死守晉州。以捍湖南。上可之。六月十四日。千鎰入275_225d晉州。與慶尙兵使崔慶會,忠淸兵使黃進,復讎將高從厚,義兵將張潤等分守。倭將淸正,行長等。以兵三十餘萬。水陸並進。敗郭再佑於鼎巖。且迫城擊斬十餘級。二十三日黎明。倭編竹木爲櫓盾。中列砲丸。仰攻城益急。我軍殊死戰却之。射中倭酋一人。賊築土山東門外。山上起屋。俯瞰城中。千鎰亦對築土山。架大礟擊山上賊。時総兵劉綎與遊擊吳惟忠屯星州,大丘。游擊王必迪屯尙州。游擊宋大斌副総兵査大受,參將駱尙志等在南原。都元帥權慄等退屯山陰。全羅兵使宣居怡等屯咸陽。千鎰告急而並不至。千275_226a鎰日夜巡城慰諭。士無叛志。倭以書投城促降。千鎰答曰吾有死爾。是時平秀吉遣大將政宗督戰。二十八日大雨城且壞。千鎰等相機捍禦。倭死者甚衆。已而黃進,張潤相繼中丸死。城中益洶洶。二十九日。諸倭四面環攻。倭帥植金團扇。指揮齊進以傅城。城上矢石俱盡。士以竹木刺之。會城頹。倭乘之入。我師大亂。中軍吳永念別將池得龍城守死。千鎰在客館。倭踰墻突入。將官張天綱以杖擊其腦而斃之。千鎰執弓劒登矗石樓以射賊。左右皆蒼黃分散。惟子象乾,從事官梁山璹,記室李榮老,軍官曺仁浩,李成哲,崔275_226b德男及天綱,牙兵鄭繼仁,金得鵬等。守千鎰不去。千鎰北面再拜。解所佩弓劒。抱象乹自投深潭。從者多溺死。事聞上震悼。贈左贊成。象乹贈左副承旨。千鎰次子象坤奔求父屍十餘日不得。招魂歸葬。
崔慶會字善遇號三溪。又曰日休堂。首陽人。高麗文憲公冲之後。生嘉靖戊午。及長從梁應鼎,奇大升遊。辛酉中司馬試。丁卯擧明經乙科。屢典嶺湖南郡。士民懷之。有繪像以祀者。文忠公朴淳薦其才可備文武用。上召見禁苑。命之射。特進一階。壬辰倭入寇。上西狩龍灣。慶會時居母憂。使從子弘載從高敬命275_226c擧義師。自與兄慶雲,慶長勸鄕父老聚粮餉募子弟以助之。會敬命敗死。麾下士文弘獻收散卒八百人。自詣慶會請曰。今主上蒙塵。宗社在腥膻中。公不可以不從戎。慶會沈思久之。乃墨縗登壇。自稱曰右義兵將。卽傳檄列邑。遠近響應。旬日有衆五千人。糧七百斛。遂整軍而前。直向畿輔。錦山,茂朱諸屯倭將趍全州。以窺湖南。湖南觀察使權慄促慶會進兵長水。與倭遇。慶會以五百騎迎擊敗之。錦山倭聞之。悉衆至。慶會匿兵大林中。以遊騎掠之。賊多死。我師乘其憊而薄之。倭懼還走錦山。慶會逐而圍之。相守275_226d日久。斥堠報城中烏鳥翔集。慶會使騎覘之。倭已棄城遁矣。卽抽兵躡後。皷譟踰牛峙。賊相踐藉。死者相續。一倭渠銀鎧金兜乘白馬。從數十騎而來。背負畵一軸。持寶劒長尺有八寸。慶會射殺之。收其畵。卽高麗恭愍王靑山白雲圖。倭有雌䧺神釰。釰卽其一也。時金時敏守晉州。賊圍之急。慶尙監司金誠一飛檄請援。慶會進兵入晉州境。倭憚之解圍去。以功超遷慶尙右兵使。翌年癸巳。天將議與倭連和。倭渠淸正乘其懈。自請秀吉曰乞盡力破晉。以泄前日之羞。仍進兵屠湖南。秀吉許之。六月淸正合諸酋兵數十萬。275_227a從聞慶至馬峴。營壘相屬。都元帥金命元移揭天朝游擊沈維敬。乞緩其鋒。維敬曰賊不可當。莫若空城而避之。當是時。倡義使金千鎰,復讎將高從厚俱在晉州。慶會曰晉卽湖南之喉。若棄而不守。是無湖南也。遂相與誓死守。慶會兵七百。千鎰兵五百。合諸將兵及本州軍民避兵士女凡六七萬人。翌日賊數十騎先至陳北山。俄而大軍繼至。翌日平明。賊皷譟迫城。飛丸集于堞。慶會麾兵鏖戰。日晡始退。是夜賊逼東城。却之。後數日賊逼東北隅。又走之。後數日賊築土山於東門外。上建板屋。乘之以窺城中。慶會以大275_227b砲碎之。賊又冐木櫃鱗次而進。投大石斃之。倭渠羽柴萬豐臣秀家飛書城中曰一城萬民。屠戮甚慘。可講和而免死。慶會答曰我已决死矣。天兵且至。汝其免劉乎。賊益怒。築土山五于西南門外。以竹柵自蔽。悉衆而戰。慶會以火箭燒竹柵。賊又推車迫城。車上置大櫃。櫃中賊用鐵椎城。慶會以炬投之。櫃焚而賊燋死。二十八日。西城將徐禮元不愼踐更。賊潛穿城。慶會力戰却之。二十九日。天忽大雨。東城崩。賊附而上。賊又乘西城大至。禮元走。諸軍大潰。或曰公可携銳士突圍。以圖後功也。慶會怒曰城亡與亡。我豈275_227c苟活者哉。時矢盡力竭。乃與千鎰及從厚登城南譙樓。北向再拜。相携赴江。家人收衣冠而葬。上聞而壯之。贈吏曹參判。予祭㫌閭。賜祠額曰褒忠。仁廟加贈左贊成。後二十年丙寅。晉人得古銅印於南江水中。篆曰慶尙右兵馬節度使印。慶會所抱以沈者也。帥臣馳聞。上親製銘以寵之。錄其孫。慶會兄慶長繼爲義兵將。子弘器侄弘載亦從軍。以功顯。妾論介長水妓也。慶會死。無慽容。盛餙以昡倭渠。倭渠艶而就之。遂因抱持墜江死。至今稱其地曰義巖。
高從厚字道冲號隼峰。招討使敬命長子也。年二十275_227d四登文科。由典籍拜臨陂縣令。尋入選知製敎。輒被彈去。壬辰倭冦深入。忠淸觀察使李洸發兵赴難。至公州而潰。從厚糾合散衆。前抵水原。路阻不得進。時敬命已倡義潭陽。從厚迎謁泰仁。轉往金溝。傳檄耽羅求戰馬。由金堤諸縣。收募兵粮。進攻錦山賊。與防禦使郭嶸分左右翼。蹴土城賊。賊多死傷不敢出。會日暮而退。從厚告于父曰我師旣勝。盍全師而反。相機更圖未晩也。今與賊對壘而宿。恐有變。敬命曰爾畏我戰死耶。我死職耳。從厚不敢復言。翌早賊果空壁出。先犯防禦軍。義軍隨潰。從厚馬躓荊棘中。方勒275_228a馬還救。從奴鳳伊貴仁疾告曰令公去已遠矣。從厚馳至三十里。始知父與弟俱殉。墜馬隕絶。欲徒手赴敵死。左右止之曰徒死無益。且念令公已沒。誰當收者。從厚俟賊退。以父弟屍歸葬。復欲起義兵。母號哭止之。從厚遂閉戶深處。晝不見日夜不燓燈。罕食飮。氣息將絶。母泣謂曰吾所以止汝者。冀汝生也。汝今將死。等死盍從汝志。從厚卽往請元帥。得領本道寺奴兵。傳檄遠近。收衆聚粮。以正字趙守準爲繼援將。且報軆府。以本州僧解政爲游擊將。以金獜渾高敬身等爲軍官。自號復讎義兵將。以正字吳玭爲從事275_228b官。吳郁爲副將。高敬兄者敬命庶弟也。願從之。從厚曰吾有母與弟。願叔護之。勿從我。敬兄曰吾聞兄弟之讐。不反兵。涕泣從之。妻李氏卛二子在安東。聞從厚起兵。前至黃溪農舍。使侍婢傳語請訣。從厚不許。遣二子往。長七歲季五歲。從厚置之膝上。撫其背曰吾謂汝已死。尙爾生耶。左右皆泣。不能仰視。從厚轉闘至嶺南。以忠義勵士。士飢而卒無叛意。時淸正合兵數十萬。圍晉州。從厚謝遣軍中欲去者。以四百餘人入晉州城。巡邊使檄從厚出。與宣居怡,洪季男等。合勢爲外援。城中將士愍從厚柴毁。亦勸從厚出。從275_228c厚不可。晉州被圍九日。黃進,金俊民,張潤相繼戰沒。牧使徐繼元恇怯先逃。諸軍大亂。走矗石樓。從厚知事不可爲。與金千鎰等投水死。敬兄,郁,玭,獜渾,奴鳳伊,貴仁亦赴水死。方從厚之投水也。其隣人泣言我習水。可負公而渡。從厚曰吾常恨不死錦山。今可求生乎。汝得生還。可以今日事具告吾家人。事聞贈都承旨。加贈吏曹參判。㫌閭。配其父褒忠祠。肅宗戊辰加贈吏曹判書。兩館大提學。贈謚孝烈。娣盧氏婦從妹安氏婦。亦値賊伏劒死。
黃進字明甫。長水人。翼成公喜五世孫也。長身美鬚275_228d髯。狀貌魁梧。以善射名。李宗仁以膂力自䧺。造門請交。約與同死。竟能如其志。丙子登武科。從討時錢部落。進所斬級甚多。有故人以罪充軍。立功乃得還。進悉以所獲與之。其人得赦。而進亦加二資。庚寅從其從叔允吉入日本。是時平秀吉治兵繕舟艦。將犯天朝。以前時水戰江浙。終不利。陰謀從朝鮮路。直趍遼東。遣平義智等覘我。我命允吉等報之。秀吉必欲伺釁爲兵端。使所至輒劫辱。進左右支吾。獨不挫。舟次海口。有二大鳥浮海。進射其一中之。其一未及飛。又射中之。觀者嘖嘖稱奇。倭人射帿。欲誇其能。邀我275_229a使觀之。進卽置小的於帿傍。矢發輒中。倭彎其弓。強不可開。傳觀之。莫不失色。將歸以重貨買二寶刀曰此虜不久必動。吾將用此物。及使還。皆云倭必大擧。獨副使金誠一大言無是理。廟堂信之。不修戰守備。進憤甚。欲上䟽請斬誠一。爲宗人所挽而止。進素好酒色。及是斷飮酒。不近婦人曰丈夫許國。不可徒死。惟習騎射。尋除同福縣監。路見瘦馬曰此良乘也。買以自隨。及與倭戰常騎之。壬辰倭果大至。上西幸龍灣。全羅監司李洸,慶尙監司金晬領兵至龍仁。遇賊師潰。進提縣兵設伏于水原沙橋爲聲援。賊旣迫。275_229b進始知洸等敗。斂兵爲殿。賊憚其勇不敢攻。比師還無所遺失。是時嶺以南皆陷賊。金時敏守晉州。爲湖南藩蔽。時敏病卒。嶺沿屯倭稍折而入湖南界。民皆荷擔而立。進旣引兵還。鎭守熊峙。以遏鎭安賊。已聞錦山賊將犯全州。進與諸將馳救。遇賊安鎭院。進射殺一倭將。因奮擊破之。以功進訓鍊判官。移守棃峙。會觀察使召進計事。進將行。夜半候吏報有兵馬聲。進方櫛髮。已而警報益急。吏士無人色。進櫛畢。又啗飰。徐令設備。自倚大樹以避丸。引弓射賊。捧矢者不能給一矢。輒貫數賊。賊不能支而走。伏尸數里。戰方275_229c酣。丸中進左脚。流血盈靴。意氣彌厲。會節制使權慄來援。卒大破之。倭人稱朝鮮三大捷。權慄之幸州也。李舜臣之閑山島也。黃進之棃峙也。而棃峙爲最云。遷訓鍊副正。體察使鄭澈以便宜授益山假守兼助防將。事聞卽爲眞。頃之從節度使宣居怡引兵北屯水原。進從數十騎往京城賊。至沙坪。猝遇敵。圍之數重。賊酋令曰是朝鮮名將黃某也。募生致之。進忽下馬。休息良久。躍上馬。揮鞭大呼馳出。士卒從之。進舞長刀斫殺倭無數。諸將謂進已死。及見全師而還。乃大驚。屢遷至忠淸兵使。賊棄京城走。進追至尙州275_229d赤巖。連戰大捷。倡義使金千鎰决守晉州。要進俱。進許之。郭再佑止之曰晉州城必陷。往則徒與之靡耳。進掀髥而笑曰吾與金公言。丈夫死耳。豈食言哉。進旣入城。城南矗石一面。臨江陡絶。東西北三面皆受敵。進令諸將屯守矗石。慶會,潤,從厚分守三面。進與千鎰自徼巡四門。部署甫定而外圍合。進,慶會有威名。千鎰沈機善應變。從厚治書䟽。詞旨激烈。遠近聳聽。四人者相與矢心殉城。城中倚以爲重。城被圍九日。賊死者以千數。然賊必欲甘心於晉。益添兵急擊。會天久雨。膠筋解。士不能彎弓。創而闘。外援不至。275_230a二十一日七戰七退。殺傷太當。礟中倭酋一人殺之。二十六日又七戰七退。平昌郡守高得賚死之。二十七日三戰三退。義兵將姜希悅死之。賊知城中力屈。投書促降。城中答曰天朝兵百萬將至。使汝隻輪不返。賊曰提督已乞和矣。城數崩。進親背木石。隨圮而築。千鎰晨夜手粥糜以哺。士卒皆感激。益致死。二十八日賊乘徐禮元無備。薄西北隅城。進督衆殊死戰。會賊酋中丸死。賊乃却。進欣然俯視曰今日之戰。積尸盈塹。誠大捷矣。有一賊潛伏仰放。丸中左額。進遂卒。事聞贈左贊成。賜謚武愍。予祭㫌閭。復家275_230b錄其後。享晉州彰烈祠。
張潤字明溥。木川人。高麗木川君彬之九世孫也。長八尺。沈勇有謀。少事儒業。博通經史。已而從事武藝。年三十一登武科。屢遷至訓鍊院正。是時倭釁已啓。中外洶洶。朝廷謂潤忠勇可使。除泗川縣監。俾當倭衝。明年倭果大至。潤將左道義兵。轉戰嶺湖間。前後數十戰。斬首虜甚多。時晉州將被圍。諸將散去曰。以一簣能障河决。非某等所知也。潤聞之慷慨。馳往見倡義使金千鎰,慶尙兵使崔慶會曰。晉州西南之咽喉。巡遠之守。其可已乎。遂嬰城守。凡八晝夜。賊不能275_230c支。將解去。潤爲飛丸所中死。城遂陷。事聞贈兵曹參判予祭。仁祖初㫌閭。孝宗壬辰。享晉州忠愍祠。加贈兵曹判書謚忠毅。
梁山璹字會元。系出耽羅。祖彭孫以節義顯。山璹生於明宗辛酉。稍長以父命師事牛溪成渾。渾爲黨人所齮齕。遂不復應擧。屛居羅州三鄕里。壬辰四月。倭人入寇。山璹入告母曰子欲死於國。母曰努力努力。吾家世受國恩。非他人比。山璹遂與兄山龍倡義南方。發數百人。聞金千鎰,高敬命等起兵潭陽。往從之。自隷於千鎰而西。時宣廟西狩龍灣阻絶。275_230d山璹與郭賢齎蠟書。自沁浮海。竟達龍灣。奏事行朝。上聞湖嶺義士起兵狀喜甚。卽召見山璹。垂涕勞之。特除工曹佐郞。山璹退而上䟽。陳恢復之策。報聞朝廷欲留之。山璹不肯曰受命于帥。當歸報。上呼山璹前曰歸語高敬命金千鎰。及時恢復。俾予識面目何狀。仍下壐書褒勞。卽授敬命招討使。千鎰倡義使。命李好閔爲敎書。諭湖嶺士民。山璹還而敬命已殉於錦山。只宣布於其軍。旣而入倡義軍中。陳朝廷德意。將士咸自奮勵。癸巳六月。倭還攻晉州。時巡邊使李薲,義兵將郭再佑屯丹城。左義兵將任啓英還泗275_231a川。獨慶尙兵使崔慶會,忠淸兵使黃進,巨濟縣令金俊民,左義兵副將泗川縣監張潤,復讐將高從厚,副將吳郁,義兵將李繼璉,閔汝雲,姜希輔等。各以兵入。奮義兵將姜希悅以元帥命守求禮。怒全羅兵使宣居怡助防將洪季男不救晉陽城。自奮馳入城。敵愾義兵將邊士貞亦聞晉陽急。亟遣副將李潛救之。時倭圍城甚急。山璹求救於天將劉綎。從厚旣爲書激烈。山璹又慷慨說城中危急狀。綎改容而聽。然知晉州必陷。竟不出師。山璹遂單騎馳還。從者洪涵又走。城被圍九日。戰數十百合。城因雨而圮。倭附焉。李275_231b宗仁鏖戰不退。倭又從西門入。牧使徐繼元恇㥘失次。諸軍大潰。山璹生長水邊。素善游。千鎰顧謂曰公可游而免。徐圖滅賊。山璹義不可。與千鎰北向再拜。投南江死。家人持遺衣招魂以葬。贈持平。尋加左承旨。從享忠愍祠。兄山龍弟山軜。與母避兵海島。倭至並投海死。妻李氏自刎死。
李宗仁松都人。少豪勇登武科。歷官至金海府使。癸巳倭圍晉州。宗仁帥所部先至。牧使徐禮元欲棄城走。宗仁曰義兵諸將方來會。棄去不可。禮元不聽。宗仁拔佩刀而恐之。禮元不敢走。及城陷。宗仁奮刀斫275_231c賊。轉闘至南江。腋左右各挾一賊。大呼曰金海府使李宗仁死於此。遂投水死。或言中丸死誤也。經略宋應昌奏于天朝曰宗仁力戰。殺賊尸如山積。生則保障。死則忠義云。事聞贈兵曹判書。
金俊民不知所自始。癸巳以巨濟府使。帥所部赴晉州。城陷躍馬巷戰。所向披靡。死亂軍中。贈刑曹判書。
宋悌字維則。南陽人也。少慷慨。甞讀唐書張巡傳。喟然嘆曰張中丞忠義之士也。大丈夫豈不爲張中丞事乎。平秀吉叛。昭敬王西行幸義州。悌以訓鍊院275_231d僉正。從乘輿。遂特拜唐津縣監。有惠政。縣民爲立遺愛碑。後數年。秀吉復叛。淸正進兵陷州縣。悌遂倡義往禦之。將行誓衆曰倭奴徧於四境。吾爲知縣。雖不能斬將搴旗。以酬國恩。又安能坐守孤城乎。諸將士莫不流涕。於是馳入晉州。與結城縣監金應鍵。十日嬰城。竟戰死。悌爲人剛方好義。城將陷。寄書其子曰豺狼充斥四方。余旣以身許國矣。誓當與此城俱亡。聞汝輩寄身山谷。待晉州匡復之日。來收吾骨於矗石之下。及城陷。淸正縛悌欲降之。悌厲聲罵曰爾雖鱗介。豈不聞張巡之言乎。吾頭可斷。義不可屈。遂275_232a死之。年四十七。淸正亦感其義。埋其屍於城門之南。表之曰朝鮮義士宋悌之墓。
柳彙進字彦遇。文化人。素倜儻好奇節。壬辰從金千鎰起兵。常爲軍鋒。及晉州陷。與千鎰俱死。年三十八。甞以軍功拜軍器主簿。後贈戶曹參判。子瓘,璜亦死丁酉之難。
李桂年保恩人。世居海南。壬辰之難。以訓鍊僉正。募義士二百。從金千鎰於晉州。城陷與千鎰同死。後贈兵曹參議。追享同縣忠武祠。
李光宙字天中。陽城人。中生員試。少事金麟厚。以行275_232b誼聞。壬辰之難。從金千鎰入江都。以功拜典艦別坐。癸巳沒於晉州。
李仁民字子元。全義人。左參贊俊民從弟。癸巳倡義師守晉州。城陷殉節死。
文弘獻字汝徵號敬菴。永寧人。性孝友。力學擧進士。時湖南人分輩流朋詆。獨弘獻持論和平。人以是稱之。壬辰之難。從高敬命爲從事。錦山師潰。弘徵收其散卒。請其婦翁崔慶會主之。身自裁决軍中事。及晉州陷。慶會謂曰君可緩死作後圖。弘獻不可竟死。配褒忠祠。肅宗辛未贈持平。
275_232c鄭庸字子常。晉州人。隷內禁衛。壬辰之難。以其老無所屬。聞金沔起兵卽赴之。沔甞戒庸毋戰。庸不聽。每戰摧陷先登。沔條上其功。差聞慶假守。庸力辭曰我武夫也。職當討賊。不當牧民。沔益重之。及沔卒。歸于崔慶會。慶會亦憫其老。使之歸。庸不可。竟死城中。後享黃巖別祠。
高得賚南原人。擧武科爲防踏僉使。以廉潔稱。辛卯倭人請和。得賚知倭亂將作。與里中少年。雜坐歌呼。仍問曰國家將亂。當損生乎。抑且逃難乎。一人言食祿而不可苟活。得賚笑頷之。壬辰從崔慶會爲副275_232d將。及慶會入晉州。行未發。朝廷除平昌郡守。郡吏來迎。得賚曰賊勢鴟張。寧可自安。竄身僻邑乎。竟從慶會同日死。宣祖予祭。贈右尹。配南原㫌忠祠。
鄭名世字伯時。晉州人。高麗文良公乙輔之後。幼警悟。萬曆乙亥中進士。己卯登明經及第。丙戌除海美縣監。壬辰倭冦大至。湖西士大夫上書軆察使。請名世爲義兵別將。轉戰于牙山平澤之間。其弟名遠以淸安縣監。戰死槐山。名世哭曰汝骨我收。我骨誰收。人知其必死。時倡義使金千鎰在咸安。名世馳赴之。癸巳六月入晉州。隨賊所薄。晝夜力拒。會黃進中丸275_233a死。城中推名世領進衆。城陷與千鎰,慶會北面四拜死之。事聞予祭㫌閭。贈都承旨。享長興忠烈祠。
李潛不詳其籍里。南原邊士貞倡義師。號曰敵愾義兵將。以潛爲副。聞晉州被圍。遣潛馳援。城陷死之。
金應健字景以。善山人。和義君奎祥六世孫也。年十七。從大父之平壤任所。天使裴用卿聞其勇武。與之角射奇之。共載入京城。薦于朝。明廟召見嘉之。將大用。特除宣傳官。萬曆癸未擢武科。癸巳以結城縣令。從節度使黃進同守晉州城。城陷死之。英宗己酉。贈兵曹參議。
275_233b柳復立字君瑞。完山人。世宗時名臣義孫後。其母文忠公金誠一娣也。早筮仕。爲宗簿寺主簿。壬辰之亂。誠一以慶尙道右監司守晉州城。復立往從之。協贊籌畫爲多。旣而誠一卒。倭大至。癸巳六月城不守。復立與金千鎰同死。年三十六。肅宗己亥。贈吏曹參判。英宗己酉㫌其門。
崔彦亮晉州人。曾祖卜獜官司諫院大司諫。癸巳之役。彦亮將募兵赴難。其妾止之曰妾聞食人之食死其事。今君一書生耳。毋徒死爲也。彦亮作詩示意曰睢陽城裏多男子。不獨當年食祿人。遂入城。城陷俱275_233c死。贈戶曹佐郞。
姜希說順天武士也。初從高敬命起義。錦山之敗。憤泣還鄕。召募義士。癸巳入晉州城戰死。
沈友信字公擇。靑松人。修撰達源孫也。中武科。歷官至洪州判官。壬辰之亂。都元帥金命元辟爲從事。屢與倭戰有功。從倡義使金千鎰入晉州。城陷北向四拜死。友信旣死。無人爲友信表章者。後有生員李章運者上䟽訟其寃。始贈兵曹參判。
泰仁義兵將閔汝雲,南海義兵將任希進,陶灘伏兵將姜希復,義兵將李繼璉,孫承善,兪晗,鎭海縣監曺275_233d慶亨,右兵虞候成永達,僉正尹思復,判官崔琦弼,朴承男,主簿鄭惟敬,守門將張胤賢,金太白,宣務郞梁躋,庠生李郁,諸生河繼先,朴安道等。幷同時殉難。英宗癸亥。各贈官有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