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공 문성공 휘 아
안렴사공파 세계도 거주지 경남 고성
1세 휘 아 | 2세 용생 | 3세 전우 | 4세 택 | 5세 사비 | 6세 자경 | 7세 수지 | 8세 이식 | 9세 윤신 | 10세 윤신 |
11세 담 | 12 운철 | 13 균. 강 |
| ||||
3월3일(임자) |
예조가 함안(咸安)의 유학(幼學) 안경일(安慶一) 등의 상언(上言)에 대해 복계(覆啓)하였다. ○ 해조(該曹)가 아뢰기를, “이번 각인(各人)들의 상언을 살펴보니, 함안의 유학 안경일은, ‘7대조(祖) 안관(安灌)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나이가 막 약관이 되어서는 이름이 궐에까지 알려져서 특별히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에 제수되었습니다.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실로 영외(嶺外)의 유종(儒宗)이었는데 임금께 알려질 길이 없어서 아직까지 파묻혀 있으니 증질(贈秩)의 은전을 입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비록 칭찬할 만한 아름다운 행실이 있더라도 추증(追贈)하는 은전은 매우 중요하니 수백 년 뒤에 단지 그 자손의 상언으로 인하여 대번에 시행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고성(固城)의 유학 최규찬(崔奎燦)은, ‘7대조 최균(崔均)은 임진란(壬辰亂)을 맞아 백의(白衣)로 의병을 일으켜 사천(泗川)과 진주(晉州) 등지에서 사력을 다해 왜적을 토벌했고 또 촉석루(矗石樓) 앞에서 곽재우(郭再佑)를 도와 종일토록 싸움을 독려해서 적이 밤을 틈타 도망하여 사천을 수복(收復)하니 고성과 진해(鎭海) 등의 현(縣) 일대가 믿고 의지하였는데 그 당시의 사적(事蹟)에서 확연하게 상고할 수 있습니다. 또 을사년(1605, 선조38) 해구(海寇)를 방비할 때에 앞장서서 무찔러 빠른 시일 내에 소탕하여 선묘조(宣廟朝)에서 글을 내려 가상함을 칭찬하셨지만 관계(官階)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그쳤습니다. 다른 예에 따라 증직(贈職)의 은전을 입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최균이 난리를 당해 의리에 따라 이런 남다른 공적을 세운 것은 비록 매우 가상하지만 오래된 일이라 믿기가 어렵고 추증의 은전은 경솔히 의논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 들어주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부여(扶餘)의 유학 이영원(李英元)은, ‘조부 이희지(李喜之)는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정성은 죽어도 후회가 없다고 맹세하여 흉도들이 가장 꺼리고 미워하는 바가 되어 제일 먼저 멸절되는 참혹한 해독을 입었습니다. 이번에 제신(諸臣)을 표창하는 날을 맞았는데 예전 그대로 벼슬을 하지 못한 포의(布衣)여서 똑같이 대해 주시는 은택을 받지 못했으니 특별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추증할 것을 의논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이 다시 돌아온 해를 맞아 충절을 표창하는 은전이 두루 임금을 도와 추대하여 죽음을 바친 제신에게 미쳤습니다. 그런데 이희지 등 다섯 선비가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죽음을 걸고 충성을 바친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똑같이 대해 주시는 은택을 입지 못했으니 그 자손이 소외되었다고 탄식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은전에 관계되므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니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이 공사(公事)가 유중(留中)인 축(軸)에 섞여 있어서 아직 판하(判下)하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다른 문서를 살펴보다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후에 하나로 결론지어 품처(稟處)하라.” 하였다. |
| ||||
3월 16일(병오) 맑음 |
좌목 | |
○ 정사가 있었다. 이비(吏批)에, 행 판서 이승보(李承輔)는 패초에 나오지 않았고, 참판 임한수(林翰洙)와 참의 오준영(吳俊泳)은 나왔다.
고 판돈녕부사 이병상(李秉常)을 문청(文淸)으로, 고 이조 판서 윤치정(尹致定)을 문청(文淸)으로, 고 이조 판서 변치명(邊致明)을 효헌(孝憲)으로, 증 이조판서 김유형(金有亨)을 의민(義愍)으로, 고 평원군(平原君) 이림(李琳)을 정헌(定憲)으로, ㅇ증 공조판서 박동명(朴東命)을 충경(忠景)으로, 증 이조판서 임훈(林薰)을 효간(孝簡)으로, 증 좌찬성 김동헌(金東獻)을 효정(孝貞)으로, 증 좌찬성 이채(李采)를 문경(文敬)으로, 고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성사제(成思齊)를 정절(貞節)로, 고 지중추부사 임홍망(任弘望)을 효정(孝貞)으로, 고 이조 판서 박기수(朴紀壽)를 효문(孝文)으로, 고 이조 판서 박승휘(朴承輝)를 문정(文貞)으로, 증 영의정 이준(李準)을 숙헌(肅憲)으로, 고 이조 판서 이경증(李景曾)을 효정(孝貞)으로, 고 우참찬 정익하(鄭益河)를 충헌(忠憲)으로, 고 계성군(桂城君) 이순(李恂)을 희정(僖靖)으로, 고 금원군(錦原君) 이령(李岭)을 효문(孝文)으로, 고 영의정 강순(康純)을 장민(莊愍)으로, 증 병조판서 최희량(崔希亮)을 무숙(武肅)으로, 고 예조 판서 성수묵(成遂默)을 효헌(孝憲)으로, 증 이조판서 이민환(李民寏)을 충간(忠簡)으로, 고 형조 판서 이윤성(李潤成)을 효숙(孝肅)으로, 고 양원군(楊原君) 이희(李憘)를 정혜(貞惠)로, 고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을 문헌(文獻)으로, 증 병조판서 송덕영(宋德榮)을 충장(忠莊)으로, 증 이조판서 겸 좨주 임성주(任聖周)를 문경(文敬)으로, 증 영의정 박신규(朴信圭)를 청숙(淸肅)으로, 증 병조판서 채이장(蔡以章)을 충정(忠貞)으로, 증 영의정 심호(沈浩)를 효숙(孝肅)으로, 고 좌참찬 이성규(李聖圭)를 효정(孝貞)으로, 고 우의정 임백경(任百經)을 문정(文貞)으로, 증 이조판서 윤심형(尹心衡)을 청헌(淸獻)으로, 증 좌참찬 안정복(安鼎福)을 문숙(文肅)으로, 증 이조판서 최균(崔均)을 의민(義敏)으로, 증 좌찬성 배흥립(裵興立)을 효숙(孝肅)으로, 증 이조판서 겸 좨주 김숙자(金淑滋)를 문강(文康)으로, 고 우참찬 김경선(金景善)을 정문(貞文)으로, 증 좌찬성 최현(崔俔)을 정간(定簡)으로, 증 병조판서 유응수(柳應秀)를 충장(忠壯)으로, 고 견성군(甄城君) 이돈(李惇)을 경민(景愍)으로, 고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을 정민(貞愍)으로 고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을 문익(文翼)으로, 고 경창군(慶昌君) 이산(李珊)을 효헌(孝獻)으로, 고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을 문충(文忠)으로, 고 우찬성 강시영(姜是永)을 문헌(文憲)으로, 증 영의정 이시원(李是遠)을 충정(忠貞)으로, 증 이조판서 이로(李魯)를 정의(貞義)로, 고 사신군(思信君)을 충헌(忠獻)으로, 고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를 정민(貞愍)으로, 증 호조판서 홍림(洪霖)을 충강(忠剛)으로, 고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을 양정(良靖)으로, 고 진안위(晉安尉) 유유(柳頔)를 효숙(孝肅)으로, 고 임성군(任城君) 이호생(李好生)을 정혜(靖惠)로, 고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을 효정(孝貞)으로, 고 완성군(完城君) 이천계(李天桂)를 효민(孝愍)으로, 고 종의군(從義君) 이귀생(李貴生)을 공안(恭安)으로, 증 호조판서 정옥량(鄭玉良)을 효정(孝貞)으로, 고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을 장소(章昭)로, 고 지돈녕부사 신명순(申命淳)을 정무(貞武)로, 고 지중추부사 이산두(李山斗)를 청헌(淸憲)으로, 증 이조판서 이준(李埈)을 문간(文簡)으로, 고 병조 판서 박계손(朴季孫)을 정절(貞節)로, 고 호조 전서(戶曹典書) 채귀하(蔡貴河)를 정의(貞義)로, 증 이조판서 박심문(朴審問)을 충정(忠貞)으로, 고 전성군(全城君) 이변(李忭)을 숙민(肅愍)으로, 고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를 효간(孝簡)으로, 고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효희(孝僖)로, 고 경선군(慶善君) 이백(李伯)을 효헌(孝憲)으로, 고 우의정 이서구(李書九)를 문간(文簡)으로, 증 좌찬성 송국택(宋國澤)을 효정(孝貞)으로, 증 영의정 이원정(李元禎)을 문익(文翼)으로, 증 이조판서 김익복(金益福)을 충경(忠景)으로, 고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을 정민(貞敏)으로, 증 이조판서 이제두(李齊杜)를 효헌(孝憲)으로, 증 이조판서 김회련(金懷鍊)을 충민(忠敏)으로, 증 이조판서 김익훈(金益勳)을 충헌(忠獻)으로, 증 이조판서 이홍무(李弘茂)를 충숙(忠肅)으로, 고 형조 판서 조용화(趙容和)를 문헌(文憲)으로, 고 신성군(信城君) 이우(李珝)를 충정(忠貞)으로, 고 해운군(海運君) 이연(李璉)을 효안(孝安)으로, 증 판돈녕부사 박진영(朴震英)을 무숙(武肅)으로, 고 호조 판서 이목연(李穆淵)을 문정(文貞)으로, 고 영의정 유전(柳琠)을 문정(文貞)으로, 증 이조판서 송희규(宋希奎)를 충숙(忠肅)으로, 고 예조 판서 서기순(徐箕淳)을 문청(文淸)으로, 고 회산군(檜山君) 이염(李恬)을 정간(貞簡)으로, 고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을 정간(貞簡)으로, 고 용성대군(龍城大君) 이곤(李滾)을 장의(章懿)로, 고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을 정민(貞愍)으로, 고 지사 강유(姜游)를 효헌(孝憲)으로, 고 이조판서 겸 좨주 이현일(李玄逸)을 문경(文敬)으로, 고 은전군(恩全君) 이찬(李襸)을 효민(孝愍)으로, 고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을 충정(忠貞)으로 시호를 정하였다. 박유현(朴有鉉)을 송라 찰방(松蘿察訪)으로 삼았다. 교서관 저작에 김창륜(金昌倫)을 단부하고, 정자에 백선행(白璿行)을 단부하고, 부정자에 옥경련(玉景鍊)을 단부하고, 기로소 수직관에 이기조(李基肇)를 단부하고, 검서관에 이상집(李象集)을 단부하고, 영해 부사(寧海府使)에 이정필(李正弼)을 단부하고, 영해부 안핵사에 박제관(朴齊寬)을 단부하였다. 좌승지 이만운(李晩運)에게 지금 가선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이는 특별히 가자라하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전 가감역관 이면응(李冕應)은 나이가 70세여서 지금 통정대부를 초자하였는데, 이는 시종신인 수찬 이재만(李載晩)의 아비로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부사(府使) 이빈(李彬)에게 좌찬성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고 동지 이장한(李章漢)에게 병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형조 판서 이용상(李容象)의 2대이다. 고 학생 변취형(邊就衡)과 안광조(安光祚)에게 동몽교관을 추증하였는데, 이는 효행이 특이한 자를 추증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승지 권문해(權文海)에게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이는 학행(學行)이 특이한 자를 추증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직장 현의준(玄儀俊)에게 호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그는 오위장 현응호(玄膺祜)의 아비이다. 고 학생 이완영(李完榮)에게 공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이집홍(李集弘)에게 공조 참의를 추증하고, 이승원(李升源)에게 군자감 정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창덕궁 위장 이규신(李圭信)의 3대이다. 고종 8권, 8년(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3월 16일(병오) 4번째기사 시호를 추증하다
충강공(忠剛公)으로,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은 양정공(良靖公)으로, 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은 효숙공(孝肅公)으로, 임성군(任城君) 이호생(李好生)은 정혜공(靖惠公)으로,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은 효정공(孝貞公)으로, 완성군(完城君) 이천계(李天桂)는 효민공(孝愍公)으로, 종의군(從義君) 이귀생(李貴生)은 공안공(恭安公)으로, 증 호조 판서 정옥량(鄭玉良)은 효정공(孝貞公)으로,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은 장소공(章昭公)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신명순(申命淳)은 정무공(貞武公)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산두(李山斗)는 청헌공(淸憲公)으로, 증 이조 판서 이준(李埈)은 문간공(文簡公)으로,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계손(朴季孫)은 정절공(貞節公)으로, 호조 판서(戶曹判書) 채귀하(蔡貴河)는 정의공(貞義公)으로, 증 이조 판서 박심문(朴審問)은 충정공(忠貞公)으로, 전성군(全城君) 이변(李忭)은 숙민공(肅愍公)으로,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는 효간공(孝簡公)으로,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는 효희공(孝僖公)으로, 경선군(慶善君) 이백(李伯)은 효헌공(孝憲公)으로, 우의정(右議政) 이서구(李書九)는 문간공(文簡公)으로, 증좌찬성 송국택(宋國澤)은 효정공(孝貞公)으로, 증 영의정 이원정(李元禎)은 문익공(文翼公)으로, 증 이조 판서 김익복(金益福)은 충경공(忠景公)으로,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은 정민공(貞敏公)으로, 증 이조 판서 김회련(金懷鍊)은 충민공(忠敏公)으로, 증 이조 판서 김익훈(金益勳)은 충헌공(忠獻公)으로, 증 이조 판서 이홍무(李弘茂)는 충숙공(忠肅公)으로, 형조 판서 조용화(趙容和)는 문헌공(文憲公)으로,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는 충정공(忠貞公)으로,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은 효안공(孝安公)으로, 증 판돈녕부사(贈判敦寧府事) 박진영(朴震英)은 무숙공(武肅公)으로, 호조 판서 이목연(李穆淵)은 문정공(文貞公)으로, 영의정 유전(柳琠)은 문정공(文貞公)으로, 증 이조 판서 송희규(宋希奎)는 충숙공(忠肅公)으로, 예조 판서 서기순(徐箕淳)은 청문공(淸文公)으로 추증하였다. 회산군(檜山君) 이염(李恬)은 정간공(貞簡公)으로,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은 정간공(貞簡公)으로, 용성 대군(龍城大君) 이곤(李滾)은 장의공(章懿公)으로,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은 정민공(貞愍公)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강유(姜游)는 효헌공(孝憲公)으로, 이조 판서 이현일(李玄逸)은 문경공(文敬公)으로,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은 효민공(孝愍公)으로,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은 충정공(忠貞公)으로 추증하였다.
【원본】 12책 8권 17장 A면
【영인본】 1책 358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고종 8년 신미(1871) 5월 3일(임진) 맑음08-05-03[14] 서상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서상돈(徐相敦)ㆍ강문형(姜文馨)을 교리로, 조면호(趙冕鎬)를 장악원 정으로, 박종병(朴宗秉)을 감찰로, 장호근(張皓根)을 전적으로, 김규식(金奎軾)을 서학 교수(西學敎授)로, 권응선(權膺善)을 병조 정랑으로 삼았다. 증 병조판서 어재연(魚在淵)에게 충장(忠壯)의 시호를, 증 이조판서 이정(李)에게 충민(忠愍)의 시호를, 증 이조판서 겸 좨주 박성양(朴成陽)에게 정헌(定憲)의 시호를, 증 병조판서 최강(崔堈)에게 의숙(義肅)의 시호를, 증 병조판서 배명순(裵命純)에게 충숙(忠肅)의 시호를, 증 호조판서 최산휘(崔山輝)에게 효헌(孝憲)의 시호를, 증 이조판서 겸 좨주 김상악(金相岳)에게 문간(文簡)의 시호를, 고 좌참찬 임상원(任相元)에게 효문(孝文)의 시호를, 고 공조 판서 이희경(李熙絅)에게 정무(貞武)의 시호를, 고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에게 숙민(肅愍)의 시호를 내렸다. |
南道 역사기행(54)-완도 가리포해전 대첩 최강장군 전적비(崔堈將軍戰績碑) | |
| |
|
이순신 '생생한 필체' 담긴 친필 편지 원본 발견
부산포해전 후 친구 강응황에게 보내…의병장 최균 가문서 소장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 수군은 조선 수군의 주력부대가 돼 경상남도 연안에서 왜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거제 옥포해전, 사천 사천포해전, 통영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등 기념비적 전투를 여러 차례 치른 이순신은 이어 같은 해 9월 부산 앞바다에서 왜군 수군 전단
그 와중에 이순신은 먼 북쪽 용만(龍灣, 평안북도 의주)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받아들고 반가움을 금치 못한다. 편지는 앞서 그해 4월 선조의 피란 소식
이순신과 강응황의 관계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부산포해전 이후인 10월30일 이순신이 보낸 짧은 답장에서 그가 강응황을 벗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하루빨리 전세를 역전해 국난을 타개하기를 바라는 충정도 엿보인다.
'지난번 용만에서 보내온 편지는 꿈속에 그린 정의 의미가 아닐는지요. 재삼 펼쳐 읽어보니 편지 가득 간절한 뜻은 실로 내 친구 위서(渭瑞, 강응황의 자)의 마음
이 사람은 졸렬한 재주로 난국을 당하고 왜적의 우두머리가 재차 움직여 어지러운 세상이 된 가운데서 '근심 우(憂)' 한 글자만 생각났습니다. 다행히 별장(別將) 최균(崔均)과 최강(崔堈)의 힘을 입어 웅천(熊川, 경남 진해)의 적을 크게 이기고, 또 바다임금의 수레
이 편지는 그간 영인본으로만 내용이 알려졌으나 최근 이순신의 친필 원본이 새로 발견됐다. 원본은 편지 본문에도 언급된 의병장 최균의 후손이 소장하던 것으로, 얼마 전 '이순신의 리더십
원본 편지는 한때 화재를 당해 아래쪽 일부가 소실됐지만, 나머지 부분은 민간에서 400여 년간 보관
30여 년 전 만들어진 영인본은 글자가 상당히 퍼진 탓에 친필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웠으나 이번에 발견된 문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의 전문가
노 소장은 "그간 내가 발굴한 이순신의 문건 가운데 그의 필체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라며 "벗을 아끼는 마음과 더불어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일수록 자신의 본분과 책임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이순신의 충정이 담긴 글"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4/05/26 08:42 송고
'전주최씨의 의병활동 > 의민공 휘 강(의병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주성(晉州城)의 함락과 명병(明兵)의 철환(撤還) 휘 기필 (0) | 2012.06.3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