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의 의병활동/의민공 휘 강(의병장)

최균(崔均)은 임진란(壬辰亂)을 맞아 백의(白衣)로 의병을 일으켜 사천(泗川)과

아베베1 2012. 6. 30. 12:41

전주최공 문성공  휘 아

안렴사공파 세계도   거주지 경남 고성 


 1세 휘 아   2세 용생   3세 전우   4세 택   5세 사비  6세 자경  7세 수지  8세 이식  9세 윤신  10세 윤신
 11세 담  12 운철   13 균. 강               





 

최균(崔均){2}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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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평(汝平)
소호(蘇湖)
시호 의민(義敏)
생년 1537(중종 32)
졸년 1616(광세해군 8)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호국 > 의병

[상세내용]

최균(崔均){2}에 대하여
1537년(중종 32)∼1616년(광해군 8).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평(汝平), 호는 소호(蘇湖)최운철(崔云哲)의 아들이다.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주역》에 통달하였고, 특히 천문에 밝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생 최강(崔堈)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를 풍운장(風雲將)이라고 불렀다. 고성사천 등지에 진격하여 적병을 많이 참살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기고 수문장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뒤 1605년 배를 타고 침입한 적병을 형제가 힘을 합하여 격퇴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본디 벼슬에 뜻이 없었던 그는 혼미를 거듭하는 조정에 회의를 느껴 고향에 돌아가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며 지냈다. 사람들이 그 집을 효우려(孝友廬)라고 불렀다.

안빈낙도하며 금서(琴書)를 즐겼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80세에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민(義敏)이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雙忠錄

[집필자]

송정현(宋正炫)

 


정조9년 을사(1785,건륭 50)
3월3일(임자)
  예조가 함안(咸安)의 유학(幼學) 안경일(安慶一) 등의 상언(上言)에 대해 복계(覆啓)하였다.
  ○ 해조(該曹)가 아뢰기를,
“이번 각인(各人)들의 상언을 살펴보니, 함안의 유학 안경일은, ‘7대조(祖) 안관(安灌)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나이가 막 약관이 되어서는 이름이 궐에까지 알려져서 특별히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에 제수되었습니다.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실로 영외(嶺外)의 유종(儒宗)이었는데 임금께 알려질 길이 없어서 아직까지 파묻혀 있으니 증질(贈秩)의 은전을 입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비록 칭찬할 만한 아름다운 행실이 있더라도 추증(追贈)하는 은전은 매우 중요하니 수백 년 뒤에 단지 그 자손의 상언으로 인하여 대번에 시행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고성(固城)의 유학 최규찬(崔奎燦)은, ‘7대조 최균(崔均)은 임진란(壬辰亂)을 맞아 백의(白衣)로 의병을 일으켜 사천(泗川)과 진주(晉州) 등지에서 사력을 다해 왜적을 토벌했고 또 촉석루(矗石樓) 앞에서 곽재우(郭再佑)를 도와 종일토록 싸움을 독려해서 적이 밤을 틈타 도망하여 사천을 수복(收復)하니 고성과 진해(鎭海) 등의 현(縣) 일대가 믿고 의지하였는데 그 당시의 사적(事蹟)에서 확연하게 상고할 수 있습니다. 또 을사년(1605, 선조38) 해구(海寇)를 방비할 때에 앞장서서 무찔러 빠른 시일 내에 소탕하여 선묘조(宣廟朝)에서 글을 내려 가상함을 칭찬하셨지만 관계(官階)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그쳤습니다. 다른 예에 따라 증직(贈職)의 은전을 입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최균이 난리를 당해 의리에 따라 이런 남다른 공적을 세운 것은 비록 매우 가상하지만 오래된 일이라 믿기가 어렵고 추증의 은전은 경솔히 의논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 들어주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부여(扶餘)의 유학 이영원(李英元)은, ‘조부 이희지(李喜之)는 임금을 사랑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정성은 죽어도 후회가 없다고 맹세하여 흉도들이 가장 꺼리고 미워하는 바가 되어 제일 먼저 멸절되는 참혹한 해독을 입었습니다. 이번에 제신(諸臣)을 표창하는 날을 맞았는데 예전 그대로 벼슬을 하지 못한 포의(布衣)여서 똑같이 대해 주시는 은택을 받지 못했으니 특별히 유사(有司)로 하여금 추증할 것을 의논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이 다시 돌아온 해를 맞아 충절을 표창하는 은전이 두루 임금을 도와 추대하여 죽음을 바친 제신에게 미쳤습니다. 그런데 이희지 등 다섯 선비가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죽음을 걸고 충성을 바친 사람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똑같이 대해 주시는 은택을 입지 못했으니 그 자손이 소외되었다고 탄식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은전에 관계되므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니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이 공사(公事)가 유중(留中)인 축(軸)에 섞여 있어서 아직 판하(判下)하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다른 문서를 살펴보다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후에 하나로 결론지어 품처(稟處)하라.”
하였다.



고종 8년 신미(1871, 동치10)
  3월 16일(병오) 맑음
좌목
 이비의 관원 현황
○ 정사가 있었다. 이비(吏批)에, 행 판서 이승보(李承輔)는 패초에 나오지 않았고, 참판 임한수(林翰洙)와 참의 오준영(吳俊泳)은 나왔다.
고 판돈녕부사 이병상(李秉常)을 문청(文淸)으로, 고 이조 판서 윤치정(尹致定)을 문청(文淸)으로, 고 이조 판서 변치명(邊致明)을 효헌(孝憲)으로, 증 이조판서 김유형(金有亨)을 의민(義愍)으로, 고 평원군(平原君) 이림(李琳)을 정헌(定憲)으로, ㅇ증 공조판서 박동명(朴東命)을 충경(忠景)으로, 증 이조판서 임훈(林薰)을 효간(孝簡)으로, 증 좌찬성 김동헌(金東獻)을 효정(孝貞)으로, 증 좌찬성 이채(李采)를 문경(文敬)으로, 고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성사제(成思齊)를 정절(貞節)로, 고 지중추부사 임홍망(任弘望)을 효정(孝貞)으로, 고 이조 판서 박기수(朴紀壽)를 효문(孝文)으로, 고 이조 판서 박승휘(朴承輝)를 문정(文貞)으로, 증 영의정 이준(李準)을 숙헌(肅憲)으로, 고 이조 판서 이경증(李景曾)을 효정(孝貞)으로, 고 우참찬 정익하(鄭益河)를 충헌(忠憲)으로, 고 계성군(桂城君) 이순(李恂)을 희정(僖靖)으로, 고 금원군(錦原君) 이령(李岭)을 효문(孝文)으로, 고 영의정 강순(康純)을 장민(莊愍)으로, 증 병조판서 최희량(崔希亮)을 무숙(武肅)으로, 고 예조 판서 성수묵(成遂默)을 효헌(孝憲)으로, 증 이조판서 이민환(李民寏)을 충간(忠簡)으로, 고 형조 판서 이윤성(李潤成)을 효숙(孝肅)으로, 고 양원군(楊原君) 이희(李憘)를 정혜(貞惠)로, 고 봉화백(奉化伯) 정도전(鄭道傳)을 문헌(文獻)으로, 증 병조판서 송덕영(宋德榮)을 충장(忠莊)으로, 증 이조판서 겸 좨주 임성주(任聖周)를 문경(文敬)으로, 증 영의정 박신규(朴信圭)를 청숙(淸肅)으로, 증 병조판서 채이장(蔡以章)을 충정(忠貞)으로, 증 영의정 심호(沈浩)를 효숙(孝肅)으로, 고 좌참찬 이성규(李聖圭)를 효정(孝貞)으로, 고 우의정 임백경(任百經)을 문정(文貞)으로, 증 이조판서 윤심형(尹心衡)을 청헌(淸獻)으로, 증 좌참찬 안정복(安鼎福)을 문숙(文肅)으로, 증 이조판서 최균(崔均)을 의민(義敏)으로, 증 좌찬성 배흥립(裵興立)을 효숙(孝肅)으로, 증 이조판서 겸 좨주 김숙자(金淑滋)를 문강(文康)으로, 고 우참찬 김경선(金景善)을 정문(貞文)으로, 증 좌찬성 최현(崔俔)을 정간(定簡)으로, 증 병조판서 유응수(柳應秀)를 충장(忠壯)으로, 고 견성군(甄城君) 이돈(李惇)을 경민(景愍)으로, 고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을 정민(貞愍)으로 고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을 문익(文翼)으로, 고 경창군(慶昌君) 이산(李珊)을 효헌(孝獻)으로, 고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을 문충(文忠)으로, 고 우찬성 강시영(姜是永)을 문헌(文憲)으로, 증 영의정 이시원(李是遠)을 충정(忠貞)으로, 증 이조판서 이로(李魯)를 정의(貞義)로, 고 사신군(思信君)을 충헌(忠獻)으로, 고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를 정민(貞愍)으로, 증 호조판서 홍림(洪霖)을 충강(忠剛)으로, 고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을 양정(良靖)으로, 고 진안위(晉安尉) 유유(柳頔)를 효숙(孝肅)으로, 고 임성군(任城君) 이호생(李好生)을 정혜(靖惠)로, 고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을 효정(孝貞)으로, 고 완성군(完城君) 이천계(李天桂)를 효민(孝愍)으로, 고 종의군(從義君) 이귀생(李貴生)을 공안(恭安)으로, 증 호조판서 정옥량(鄭玉良)을 효정(孝貞)으로, 고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을 장소(章昭)로, 고 지돈녕부사 신명순(申命淳)을 정무(貞武)로, 고 지중추부사 이산두(李山斗)를 청헌(淸憲)으로, 증 이조판서 이준(李埈)을 문간(文簡)으로, 고 병조 판서 박계손(朴季孫)을 정절(貞節)로, 고 호조 전서(戶曹典書) 채귀하(蔡貴河)를 정의(貞義)로, 증 이조판서 박심문(朴審問)을 충정(忠貞)으로, 고 전성군(全城君) 이변(李忭)을 숙민(肅愍)으로, 고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를 효간(孝簡)으로, 고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를 효희(孝僖)로, 고 경선군(慶善君) 이백(李伯)을 효헌(孝憲)으로, 고 우의정 이서구(李書九)를 문간(文簡)으로, 증 좌찬성 송국택(宋國澤)을 효정(孝貞)으로, 증 영의정 이원정(李元禎)을 문익(文翼)으로, 증 이조판서 김익복(金益福)을 충경(忠景)으로, 고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을 정민(貞敏)으로, 증 이조판서 이제두(李齊杜)를 효헌(孝憲)으로, 증 이조판서 김회련(金懷鍊)을 충민(忠敏)으로, 증 이조판서 김익훈(金益勳)을 충헌(忠獻)으로, 증 이조판서 이홍무(李弘茂)를 충숙(忠肅)으로, 고 형조 판서 조용화(趙容和)를 문헌(文憲)으로, 고 신성군(信城君) 이우(李珝)를 충정(忠貞)으로, 고 해운군(海運君) 이연(李璉)을 효안(孝安)으로, 증 판돈녕부사 박진영(朴震英)을 무숙(武肅)으로, 고 호조 판서 이목연(李穆淵)을 문정(文貞)으로, 고 영의정 유전(柳琠)을 문정(文貞)으로, 증 이조판서 송희규(宋希奎)를 충숙(忠肅)으로, 고 예조 판서 서기순(徐箕淳)을 문청(文淸)으로, 고 회산군(檜山君) 이염(李恬)을 정간(貞簡)으로, 고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을 정간(貞簡)으로, 고 용성대군(龍城大君) 이곤(李滾)을 장의(章懿)로, 고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을 정민(貞愍)으로, 고 지사 강유(姜游)를 효헌(孝憲)으로, 고 이조판서 겸 좨주 이현일(李玄逸)을 문경(文敬)으로, 고 은전군(恩全君) 이찬(李襸)을 효민(孝愍)으로, 고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을 충정(忠貞)으로 시호를 정하였다.
박유현(朴有鉉)을 송라 찰방(松蘿察訪)으로 삼았다. 교서관 저작에 김창륜(金昌倫)을 단부하고, 정자에 백선행(白璿行)을 단부하고, 부정자에 옥경련(玉景鍊)을 단부하고, 기로소 수직관에 이기조(李基肇)를 단부하고, 검서관에 이상집(李象集)을 단부하고, 영해 부사(寧海府使)에 이정필(李正弼)을 단부하고, 영해부 안핵사에 박제관(朴齊寬)을 단부하였다. 좌승지 이만운(李晩運)에게 지금 가선대부를 가자하였는데, 이는 특별히 가자라하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전 가감역관 이면응(李冕應)은 나이가 70세여서 지금 통정대부를 초자하였는데, 이는 시종신인 수찬 이재만(李載晩)의 아비로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부사(府使) 이빈(李彬)에게 좌찬성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고 동지 이장한(李章漢)에게 병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형조 판서 이용상(李容象)의 2대이다. 고 학생 변취형(邊就衡)과 안광조(安光祚)에게 동몽교관을 추증하였는데, 이는 효행이 특이한 자를 추증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승지 권문해(權文海)에게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이는 학행(學行)이 특이한 자를 추증하라는 전지를 받든 것이다. 고 직장 현의준(玄儀俊)에게 호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였는데, 그는 오위장 현응호(玄膺祜)의 아비이다. 고 학생 이완영(李完榮)에게 공조 참판과 그에 따른 예겸을 추증하고, 이집홍(李集弘)에게 공조 참의를 추증하고, 이승원(李升源)에게 군자감 정을 추증하였는데, 이상은 창덕궁 위장 이규신(李圭信)의 3대이다.

고종 8권, 8년(1871 신미 / 청 동치(同治) 10년) 3월 16일(병오) 4번째기사 시호를 추증하다

 

충강공(忠剛公)으로,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양정공(良靖公)으로, 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효숙공(孝肅公)으로, 임성군(任城君) 이호생(李好生)정혜공(靖惠公)으로,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효정공(孝貞公)으로, 완성군(完城君) 이천계(李天桂)효민공(孝愍公)으로, 종의군(從義君) 이귀생(李貴生)공안공(恭安公)으로, 증 호조 판서 정옥량(鄭玉良)효정공(孝貞公)으로, 창원군(昌原君) 이성(李晟)장소공(章昭公)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신명순(申命淳)정무공(貞武公)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산두(李山斗)청헌공(淸憲公)으로, 증 이조 판서 이준(李埈)문간공(文簡公)으로,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계손(朴季孫)정절공(貞節公)으로, 호조 판서(戶曹判書) 채귀하(蔡貴河)정의공(貞義公)으로, 증 이조 판서 박심문(朴審問)충정공(忠貞公)으로, 전성군(全城君) 이변(李忭)숙민공(肅愍公)으로,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효간공(孝簡公)으로, 흥안군(興安君) 이제(李瑅)효희공(孝僖公)으로, 경선군(慶善君) 이백(李伯)효헌공(孝憲公)으로, 우의정(右議政) 이서구(李書九)문간공(文簡公)으로, 증좌찬성 송국택(宋國澤)효정공(孝貞公)으로, 증 영의정 이원정(李元禎)문익공(文翼公)으로, 증 이조 판서 김익복(金益福)충경공(忠景公)으로,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정민공(貞敏公)으로, 증 이조 판서 김회련(金懷鍊)충민공(忠敏公)으로, 증 이조 판서 김익훈(金益勳)충헌공(忠獻公)으로, 증 이조 판서 이홍무(李弘茂)충숙공(忠肅公)으로, 형조 판서 조용화(趙容和)문헌공(文憲公)으로,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충정공(忠貞公)으로, 해운군(海運君) 이연(李槤)효안공(孝安公)으로, 증 판돈녕부사(贈判敦寧府事) 박진영(朴震英)무숙공(武肅公)으로, 호조 판서 이목연(李穆淵)문정공(文貞公)으로, 영의정 유전(柳琠)문정공(文貞公)으로, 증 이조 판서 송희규(宋希奎)충숙공(忠肅公)으로, 예조 판서 서기순(徐箕淳)청문공(淸文公)으로 추증하였다.

회산군(檜山君) 이염(李恬)정간공(貞簡公)으로,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정간공(貞簡公)으로, 용성 대군(龍城大君) 이곤(李滾)장의공(章懿公)으로,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정민공(貞愍公)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강유(姜游)효헌공(孝憲公)으로, 이조 판서 이현일(李玄逸)문경공(文敬公)으로,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효민공(孝愍公)으로, 은언군(恩彦君) 이인(李裀)충정공(忠貞公)으로 추증하였다.
【원본】 12책 8권 17장 A면
【영인본】 1책 358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서명
현대어서명
청구기호
책수
雙忠錄 저자 崔均·崔堈(朝鮮) 著;崔祥甲(朝鮮) 編
쌍충록 간행년대 純祖23年(1823)
奎12665-v.1-2
4卷 2冊 판본 木版本 사이즈 30.7×19.9cm
본문

" 壬辰倭亂 때 義兵將인 崔均(1537~1616)·崔堈(1559~1614) 형제의 글을 모아 엮은 문집. 崔均의 후손 祥甲이 1823년(純祖 23) 편집, 道山書院에서 간행했다. 蘇湖 崔均의 字는 汝平, 본관은 全州.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동생 堈과 함께 義兵을 일으키고 風雲將이라 자칭하였다. 그는 周易·천문·지리에 통달했다. 固城·泗川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守門將에 인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丁酉再亂때도 동생과 함께 무공을 세워 通政大夫에 올랐고 1605년에는 濟州道 앞바다에 출몰하는 倭寇를 火攻으로 무찔렀다. 1624년 李适의 亂 때도 戰功을 세웠다. 만년에 嘉善大夫에 승진. 吏曹判書에 追贈, 固城의 道山祠에 祭享, 謚號는 義敏. 蘇溪 崔堈의 字는 汝堅, 본관은 全州, 1585년 武科에 합격,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均과 함께 固城에서 義兵을 일으켜 晋州·鎭海 등지에서 공을 세워 五衛都摠府 經歷이 되고 1605년 加里浦僉節制使에 승진, 火攻法으로 倭敵을 무찔러 順天府使에 올랐다. 1606년 慶尙左道水軍節度使, 五衛都摠府副摠管, 光海君때 忠淸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정치의 혼란으로 벼슬을 버리고 은퇴했다. 그뒤 捕盜大將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퇴했다. 兵曹判書에 追贈, 固城의 道山祠에 祭享, 諡號는 義肅. 책 첫머리에 柳尋春의 序가 있다. {권1}:世系(1世~20世), 詩 9수(次姜白川相思詞·亂定後歸故庄 등), 書 9편(答姜白川·與姜松窩 등), 實記(蘇湖公實記 ·蘇溪公實記). {권2}:龍蛇倡義事蹟·濟州勝戰事蹟·遺事(蘇湖公遺事·蘇溪公遺事)·補遺(本縣邑誌·趙公慶男山西雜錄·徐藥峯濱答姜白川書 ·李忠武公舜臣與姜白川書·察訪公答姜松窩書) 등. {권3}:敎加里浦僉使崔堈書·行狀·狀後識·碣銘·姜松窩贈蘇湖公詩·輓詞·道山祠奉安文·常享祝文. {권4}:祠宇上樑文·道內士林呈營請褒狀·本邑士林呈繡衣金學淳請褒狀·請贈時道內士林上言·本孫請贈上言·啓目 ·禮曹下本道關草·敎旨 등.<龍蛇倡義事蹟>은 倭寇가 釜山을 침입, 僉使 鄭撥과 東萊府使 宋象賢이 戰死하는 장면으로 부터 崔堈이 崔均과 함께 義兵을 일으켜 倭寇와 싸우는 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여기에는 1597년 日本이 재차 침입(丁酉再亂)할때 義兵을 다시 일으켜 적을 무찌른 내용도 들어 있다. <濟州勝戰事蹟>은 崔堈이 加里浦僉節制使로 있던 1605년 濟州 앞바다에 침입해온 日本海賊을 형 均과 함께 火攻法을 써서 무찌른 내용이다. 이때 均의 나이는 70이었다. <李忠武公與姜白川書>는 崔均·崔堈 형제의 義兵이 남쪽바다에 있는 倭兵을 무찌른 것을 기뻐해서 보낸 글이다. 壬亂 및 義兵史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서명
현대어서명
청구기호
雙忠錄
쌍충록
奎 12665
본문

壬辰倭亂 때의 義兵將 蘇湖公 崔均과 蘇溪公 崔堈의 遺文과 事蹟을 기록한 實記로‚ 4卷 2冊의 木版本이다. 1823年(純祖 23)에 최균의 후손 崔光岱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간행 경위는 卷4의 말미에 실린 <遺墨後敍>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二公이 교유했던 姜應璜의 후손인 咸陽 姜瑞龜의 집에서 우연히 두 사람의 亂中手墨이 나왔고 이에 후인들의 행장 등을 모아 비로소 간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崔均은 字가 汝平‚ 號는 蘇湖로 동생 堈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固城·泗川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또한 1624년 李适의 난 때도 전공을 세운 바 있으며‚ 항상 布衣로 자처하였다. 그리고 崔堈은 字가 汝堅‚ 號는 蘇溪로 晋州·熊川·鎭海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加里浦僉節制使로 있으면서 火攻法으로 왜적을 물리치기도 했다.柳尋春이 서문을 썼으며 총 4권이다. 卷1에는 世系와 詩 9수‚ 書 9편‚ 實記 2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卷2에는 <龍蛇倡義事蹟>·<濟州勝戰事蹟> 등과 遺事가‚ 卷3과 卷4는 附錄으로 行狀‚ 碑銘‚ 祝文‚ 上樑文 등 후인들의 기록과 <遺墨後敍>가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遺詩에는 次韻詩가 많고‚ 내용상으로는 ‘寒士意識’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次韻詩가 아닌 작품 가운데 <贈姜白川詩>에서는 포의로 자처했으나 국난을 당해 어쩔 수 없이 분신할 수밖에 없었던 심경을 고백했고‚ <亂定後歸故庄>에서는 10년 干戈를 겪고 故庄에 돌아온 감회를 읊었다. 두 사람은 白川 姜應璜 등과 친분이 두터웠던바‚ 詩 다음에 수록된 1592년 6월 15일부터 1594년 7월 16일까지 주고 받은 書簡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조선의 현실과 그에 대한 대처 방안 등이 폭넓게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實記에서는 安貧自守했던 평소의 생활과 난후 擧兵하는 과정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卷2의 <용사창의사적>은 임란의 상황과 최균이 동생 최강과 아들 振虎 등과 궐기하여 의병을 조직한 뒤 적과 대치하는 사정이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으며‚ <제 주승전사적>에는 최강이 1605년에 제 주도 해안에 출몰한 왜적을 火攻法으로 무찌르는 사정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壬辰倭亂 이후 소실되었던 두 의병장의 글들과 후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글을 모은 것으로‚ 전란문학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정환국)


 


 


고종 8년 신미(1871) 5월 3일(임진) 맑음

08-05-03[14] 서상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서상돈(徐相敦)ㆍ강문형(姜文馨)을 교리로, 조면호(趙冕鎬)를 장악원 정으로, 박종병(朴宗秉)을 감찰로, 장호근(張皓根)을 전적으로, 김규식(金奎軾)을 서학 교수(西學敎授)로, 권응선(權膺善)을 병조 정랑으로 삼았다. 증 병조판서 어재연(魚在淵)에게 충장(忠壯)의 시호를, 증 이조판서 이정(李)에게 충민(忠愍)의 시호를, 증 이조판서 겸 좨주 박성양(朴成陽)에게 정헌(定憲)의 시호를, 증 병조판서 최강(崔堈)에게 의숙(義肅)의 시호를, 증 병조판서 배명순(裵命純)에게 충숙(忠肅)의 시호를, 증 호조판서 최산휘(崔山輝)에게 효헌(孝憲)의 시호를, 증 이조판서 겸 좨주 김상악(金相岳)에게 문간(文簡)의 시호를, 고 좌참찬 임상원(任相元)에게 효문(孝文)의 시호를, 고 공조 판서 이희경(李熙絅)에게 정무(貞武)의 시호를, 고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에게 숙민(肅愍)의 시호를 내렸다.







南道 역사기행(54)-완도 가리포해전 대첩 최강장군 전적비(崔堈將軍戰績碑)


뉴스일자: 2012년11월21일 12시58분

전라남도 완도군은 인근에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청해진 수석공원, 해운사 완도군어촌민속전시관(莞島郡漁村民俗展示館)등 문화재와 관광지가 많고, 매년 8월에는 완도의 대표적인 문화관광축제인 장보고축제가 개최로 많은 사람이 체험학습 여행지로 찾는 명소로 급부상하고 있는 곳이다.

그곳을 가는 길 장군의 전적비 소재지 전라남도 완도군 적성포(완도 최남단에 위치한 당시의 가리포) 의숙공 최강장군 전적비(義肅公 崔堈將軍戰績碑)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 중기 장군인 의숙공 최강(崔堈, 1559∼1614)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그가 가리포 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에 부임한 전쟁이 끝났다고는 하나 임진왜란 후에도 왜군의 적지 않은 침범이 잦았다. 따라서 최강 장군은 가리포진에서 왜구를 완전히 섬멸함으로서 임진전쟁이 최종마무리 되었다고 보아야한다.

1605년 6월 8일 남망산 초소에서 연락이 왔다. 여서도 쪽에서 30여척의 왜 선단이 가리포쪽으로 오고 있다는 척후병의 전갈이었다. 

그러나 가리포 병력은 150여명 군선은 판옥선 한척과 병선5척이다. 그러나 지금 밀려오는 왜구선박은 30여척이 넘어 전상적인 맛대결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곳에 제주를 거쳐 큰 배들이 바다를 덮을 만큼 많은  석장포에 침입하였고 최강 장군은 군사를 매복시키고 조금 물 때와 만조시간과 가리포의 명칭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지형을 이용해 일부는 내만으로 유인해 수십척을 화공법(火攻法)으로 권응수와 정세아 등과 함께 적을 격멸시켰다.

일부 빠져나간 적군도 멀리 장수도까지 진격 나포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이때 왜적을 무찔러 공으로 선무원 종일등 공신으로 추대되면서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었다. 이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와 오위도총부 부종관에 역임된다.

 공의 관(貫)은 전주요, 성은 최씨, 이름은 강(堈)이며, 자는 여견(汝堅)이요, 호는 소계(蘇溪)라 한다.조선시대의 무신. 임진왜란 때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우고 화공법으로 왜적을 무찔렀다.

그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 여견(汝堅). 호 소계(蘇溪). 시호 의숙(義肅)이다.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균(均)과 함께 고성(固城)에서 의병을 일으켜 충무(忠武) 김시민(金時敏 1554~1592)과 합세하여 진주성싸움에서 공을 세웠고, 1593년 김해로부터 웅천에 침입하려는 적을 격퇴하였으며, 1594년 김덕령(金德齡 1567 ∼ 1596)의 별장으로 고성에서 왜군과 싸우는 등 의병장으로 활약한 충신이였다.

그러나 광해군 때 충청도수군절도사에  1613년(광해군 5) 김제남(金悌男)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문초를 받은 뒤 방송되었으나, 사직하게된다.

후일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퇴하고, 낙향하고 유유자적하다 56세로 죽었다. 1816년(순조 16) 형 균과 함께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고성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숙(義肅)이다.

이 같은 역사적인 의미를 담아 완도군은 최강장군의 가리포 해전 전적을 기념해 1993년 2월 이곳에 비를 건립했다.

가용리 군내리 대신리 대야리 망석리 장좌리 정도리 죽청리 중도리 화흥리로 구성된 완도읍은 이렇듯 중요한 군사요충지였다.

가리포(加里浦)에는 황칠(黃漆)이 유명했다. 해동역사(海東繹史) 물산지(物産志)에 "황칠은 지금 강진(康津)의 가리포도(加里浦島)에서 생산되는데, 가리포도는 예전에 이른바 완도(莞島)이다. 우리나라의 온 성(城) 가운데 오직 이 섬에서만 황칠이 난다."고 적고 있다. 고려도경에도 "고려의 나주도(羅州道)에서는 황칠이 나는데, 토산물로 진공(進貢)한다."했다. 가리포에서 난 황칠이다.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로  천문·지리·의술·병서 등에 능통했고 조선문학의 4대가로 불린 우의정 계곡(谿谷)·장유(張維 1587 선조 20~ 1638 인조 16)가 동시대를 살면서 호남 암행어사로 가리포진(加里海鎭)을 지나며 읊은 시를 감상해 본다.

남쪽 바다 파도만 넘실대는데 / 외로운 성 비스듬히 걸려 있도다 
돛단배 저 너머는 해가 뜨는 곳 / 한 잔 술 드노라니 신기루(蜃氣樓) 나타나네 
漲海波濤積 孤城睥睨懸 扶桑帆影外 蜃市酒盃前

썰렁한 날 울리는 뿔피리 소리 / 저녁 운무(雲霧) 헤치며 전선(戰船) 돌아오누나 
이제 훈련 마친 이층 배 갑판 위에 / 달빛 안고 쓰러져 자는 수병(水兵)들 
畫角鳴寒日 危㫌入暮煙 樓船罷擊櫂 戍卒月中眠
문화.김은희/
nox9109@naver.com








이순신 '생생한 필체' 담긴 친필 편지 원본 발견

 


부산포해전 후 친구 강응황에게 보내…의병장 최균 가문서 소장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 수군은 조선 수군의 주력부대가 돼 경상남도 연안에서 왜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거제 옥포해전, 사천 사천포해전, 통영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등 기념비적 전투를 여러 차례 치른 이순신은 이어 같은 해 9월 부산 앞바다에서 왜군 수군 전단

그 와중에 이순신은 먼 북쪽 용만(龍灣, 평안북도 의주)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받아들고 반가움을 금치 못한다. 편지는 앞서 그해 4월 선조의 피란 소식

이순신과 강응황의 관계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부산포해전 이후인 10월30일 이순신이 보낸 짧은 답장에서 그가 강응황을 벗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하루빨리 전세를 역전해 국난을 타개하기를 바라는 충정도 엿보인다.

 

'지난번 용만에서 보내온 편지는 꿈속에 그린 정의 의미가 아닐는지요. 재삼 펼쳐 읽어보니 편지 가득 간절한 뜻은 실로 내 친구 위서(渭瑞, 강응황의 자)의 마음

이 사람은 졸렬한 재주로 난국을 당하고 왜적의 우두머리가 재차 움직여 어지러운 세상이 된 가운데서 '근심 우(憂)' 한 글자만 생각났습니다. 다행히 별장(別將) 최균(崔均)과 최강(崔堈)의 힘을 입어 웅천(熊川, 경남 진해)의 적을 크게 이기고, 또 바다임금수레

이 편지는 그간 영인본으로만 내용이 알려졌으나 최근 이순신의 친필 원본이 새로 발견됐다. 원본은 편지 본문에도 언급된 의병장 최균의 후손이 소장하던 것으로, 얼마 전 '이순신의 리더십

원본 편지는 한때 화재를 당해 아래쪽 일부가 소실됐지만, 나머지 부분은 민간에서 400여 년간 보관

30여 년 전 만들어진 영인본은 글자가 상당히 퍼진 탓에 친필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웠으나 이번에 발견된 문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의 전문가

노 소장은 "그간 내가 발굴한 이순신의 문건 가운데 그의 필체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라며 "벗을 아끼는 마음과 더불어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일수록 자신의 본분과 책임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이순신의 충정이 담긴 글"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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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4/05/26 08:42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