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휘 보천 (사상공) 관련기록/16세

16세손 10대조고 관련 자료 사위 정근 관련자료

아베베1 2012. 7. 8. 11:40




農圃集跋

農圃集跋文[鄭相點]      

             
先祖遺集與附錄。往歲戊子。左君吳公重周之莅統藩也。先人蓋嘗請而登諸梓。太常之狀。卽其後所成。且未有弁卷之文。常以不得竝刊爲恨。頃年相點求得閔中丞之序。遂幷狀文及先祖檄文見佚而追得者。欲繼入刊。以遂先志。顧私力未易就矣。適左尹公之世侄。復持是節。余又以先人之所以請於左尹公者請焉。公乃倂惠板材與雕手。踰旬而功訖。斯集之竟得完整。皆賴於前後吳公之力。余烏得無感哉。且先祖龍蛇之烈。集中諸公所記。固爲詳實。尙恨有未盡闡者。蓋不論所與抗之賊將耳。當時賊將淸正,行長二酋爲魁。而淸正視行長尤雄焉。異日晉陽之破。閑山之衊。摠淸正爲之。其鷙悍有如是矣。而方其分攻北入。蹂殘一路。臬帥鎭宰。竄伏縛執。無敢誰何。儻非公糾率白徒。制梃奮呼。落觜距而剪爪翼。則賊乘累勝之威。售射天之計。渡江直西。震驚乎遼廣之境。亦無異矣。而卒回翔躑躅。逃遁而晦焉。至於殲賊之夥。尤爲諸陣最。雖以平壤之勝。斬馘僅六百。幸州延安。又復下焉。而若公長坪之捷。一戰所斬。已過八百餘級。雙浦鏖殺之壯。人至畫圖而傳之。其功烈誠卓矣。夫敵之堅脆。當論其將。將苟强焉。其勝莫難。故武侯鹵城之敗司馬懿。朱子特書之。以見其難。然則公之摧敗淸正者。亦豈非於其莫難克者。能取金勝。而一無有論及此者。是可慨也。敢於卷尾著之如此。覽者勿以子孫之私言。而尙克以是益知公之鴻績則幸矣。皇明甲申後百十五年戊寅暮春上澣。玄孫相點。謹識




순암선생문집 제26권

 행장(行狀)
처사 불우헌 정공 행장(處士不憂軒鄭公行狀) 갑진년



공의 휘는 상점(相點)이고, 자는 중여(仲與)이며, 본관은 수양(首陽)인데, 고려 때 시중(侍中) 휘 숙(肅)의 후손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역(易)이란 분은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을 섬겨 관직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도공(貞度公)인데, 바로 공의 11대조이다. 4대를 지나 진사로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휘 희검(希儉)이란 분에 이르렀는데, 이분은 백씨(伯氏)인 허암 선생(虛菴先生) 희량(希良)이란 분과 함께 수학하였다. 연산군(燕山君)의 정치가 혼란한 때를 당하여 허암이 은둔하자, 참판공도 과거(科擧)를 그만두고 시(詩)를 읊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기면서 호를 계양어은(桂陽漁隱)이라 하였으니, 세상 사람이 그의 절의를 훌륭하게 여겼다. 또 3대를 지나 호가 농포(農圃)이고 휘가 문부(文孚)인 분에 이르렀는데, 이분은 문무(文武)의 재능을 겸비하였다. 선조(宣祖)의 임진왜란 때 북평사(北評事)로서 의병을 일으켜 토적(土賊)을 주벌하고 왜적을 몰아냈으니, 그 일이 국사(國史)에 기록되어 있다. 관직은 병조 참판이었는데, 인조(仁祖) 갑자년(1624, 인조 2)에 시안(詩案)에 연루되어 무함을 받아 화를 당했다. 뒤에 비록 신원(伸寃)되어 이상(貳相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렸지만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일을 슬퍼하고 있으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고려 때부터 농포공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사이에 대대로 관직을 계승하였으니 실로 우리 나라의 이름난 성씨이다. 증조의 휘는 대륭(大隆)인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지극한 효성을 타고났으며, 가화(家禍)를 당한 이후로 애통한 마음을 지닌 채 백씨(伯氏) 진사공(進士公) 모(某)와 함께 남쪽으로 진양(晉陽)에 와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로 자손들이 그 고장에 그대로 눌러 살았다. 조부의 휘는 유인(有禋)이다. 선고의 휘는 구(構)이고 호는 노정헌(露頂軒)인데, 지조와 기개를 지녔고 문장을 숭상하였으며, 성품이 고결하고 남에게 은혜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다. 증, 조, 부 3대가 모두 은거하며 출사하지 않은 것은 선조의 뜻을 따른 것이다. 선비(先妣)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통덕랑(通德郞) 석운(碩運)의 딸이자 현감(縣監) 시중(時重)의 손녀로서 부덕(婦德)을 지닌 현숙한 분인데, 명릉(明陵 숙종의 능호) 계유년(1693, 숙종 19) 11월 17일에 고을의 동쪽에 있는 용암리(龍巖里)의 사가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때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기억력이 뛰어나 외우기도 잘 하였는데, 7, 8세 때에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시구를 많이 지었다. 11세 때에 동지(冬至)에 대해서 지은 시에,
북두 자루가 자방(子方)에 돌아오자 / 斗柄初回壬癸間
하늘의 양기가 땅 속에서 자라나네 / 天陽一氣地中生
하니, 노정공이 기이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이치를 연구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 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정씨(鄭氏)의 가문을 다시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12세 때에 경서(經書), 사서(史書)를 모두 통달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기이한 병에 걸려 근 10년이 지나서야 병이 약간 회복되었다. 그런데 ‘병은 조금 나았을 때 더해진다’는 경계에 유의하여 과거(科擧)를 그만두었으며, 단지 독서하고 수양하는 데에만 힘쓰면서 번화한 세상의 명리(名利)와 부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갖지 않았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받들어 어기지 않았고, 장사 지내고 제사 지내는 데는 모두 예절대로 하였다. 임자년(1732, 영조 8)에 노정공이 관찰사(觀察使)에게 미움을 받아 체포되어 달성(達城)의 관저에서 죽었는데, 공은 애통한 심정이 너무도 깊어 종신토록 달성 땅을 밟지 않았다. 먼 곳에 시집간 누이가 있었는데 차마 오래 떨어져 있지 못하여 자주 찾아가 보는 일을 늙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으며, 서제(庶弟)도 사랑하여 어루만지기를 친아우처럼 하였다.
예법으로 가정을 다스렸으므로 집안이 엄숙하여 내외의 분별과 장유(長幼)의 질서가 엄격하였고, 여러 자손들을 옳은 도리로써 가르치고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는 기색을 보이지 아니하였기에 모두가 가르침을 따르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을에서 자제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모두 공의 집안을 모범으로 삼았다.
사람을 접대할 적에는 너그럽고 화평하게 대하고 진심을 환히 내보였으므로 찾아오는 손님과 벗들이 걸핏하면 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친절하게 접대하여 그들의 환심을 모두 샀다. 그리고 이 때 당론(黨論)이 유행하여 사람들이 각자 편견을 가졌지만 공은 모두 의리에 따라 절충하여 말하고 자신의 호오(好惡)에 따라 어느 한쪽을 비판하거나 편들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과오를 말한 적이 없었으므로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공을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그리고 곤궁한 사람을 구제해 주는 경우에는 인정과 의리가 모두 극진하였다. 취할 만한 한 가지 재주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생활하지 못하는 사람은 데려다 기르기도 하고 지도하여 성취시키기도 하였는데, 그러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전에 외가댁의 눈먼 종이 먼 길에 얻어먹으면서 찾아왔기에 공이 가엾게 여기고 점치는 법을 가르쳐 주어 그로 하여금 점을 쳐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하였고, 자신의 어린 종이 실명하였을 적에도 역시 그에게 점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남을 구제하는 인자한 마음은 천시하는 사람도 버리지 않았으니, 그것이 바로 군자의 마음가짐인 것이다.
공은 본성이 청렴 결백하여 손으로는 돈을 만지지 않고 입으로는 재물을 말하지 아니하면서 늘 《맹자(孟子)》의 “불의(不義)의 재물은 하찮은 물건도 갖지 않는다.”는 뜻을 지녔다. 함안(咸安)에 있는 큰 사찰(寺刹)은 바로 사자(士子)들이 학업을 공부하는 곳이었다. 그 절의 중들을 통영(統營)에 역부(役夫)로 소속시키려 하자 중들이 매우 두려워한 나머지 공이 통제사(統制使)와 친밀하다는 말을 듣고 공에게 한 번 말해주기를 요청하였고, 그 결과 그 일이 잘 해결되었다. 이에 중들이 공의 주선을 은혜롭게 여겨 1백 꿰미의 돈을 가져와 사례하였는데, 공은 웃으며 되돌려 보냈으며, 이후로 여러 아들에게 다시 그 절에 가서 공부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말을 사서 수년 동안 기르며 타다가 가족이 다시 본전을 받고 판 적이 있었는데, 공이 그 일을 알고 가족에게 말하기를, “수년 동안 타고 다니다가 어떻게 본전을 받고 팔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말을 산 사람을 뒤쫓아가 다시 값을 깎아 차액을 돌려주자 그 사람은 놀라 감사해하며 돌아갔다. 사람들이 이 일을 정도에 지나친 처사라고 하니, 공이 이르기를, “당신들은 비록 정도에 지나친 일이라고 말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의 마음에 불안하다.” 하였다.
공이 평소에 좋아한 것은 단지 서적(書籍)뿐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서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사서 간직하기도 하고 빌려서 베껴 놓기도 하였으므로 장서(藏書)가 수천 권이 되었다. 그리고 처가댁에서 서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끝내 한 번도 빌려오지 않으면서 여러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처가댁은 내가 혐의를 피해야 할 대상이다.”라고 하였다. 노정공이 본시 글씨를 잘 썼는데,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서 조송설(趙松雪 조맹부(趙孟頫)의 호)의 서첩(書帖)을 빌려와 미쳐 돌려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서첩의 주인도 자손이 없이 죽었다. 이에 공은 그에게 촌수가 먼 일가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서첩을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가서 돌려주었다. 그리고 집에 있는 한호(韓濩)의 서첩을 매제(妹弟)인 송군(宋君)이 매우 좋아하였으므로 공이 주려고 마음먹은 지 오래였는데, 송군이 죽자 공이 제문에 그 뜻을 말하고 주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가 사소한 것이지만 사람마다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공은 병을 요양하며 한가롭게 지낼 때에도 매우 아픈 때가 아니면 서책을 하루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과 담론할 적에는 고금의 일을 끌어대어 말하고 경서(經書), 사서(史書)의 내용을 논하였으며, 심지어 백가(百家), 패사(稗史), 잡설(雜說)까지도 모두 알았다. 사람들과 이야기할 경우에는 말이 진지하여 끊이지 않았으므로, 문학의 선비들 가운데 따르며 교유하는 사람이 많아 방문 밖에는 신발이 늘 가득하였다. 그리고 과거(科擧)의 문장에는 종사하지 않았지만 박람하여 쌓은 학식이 많았으므로 시문(詩文)을 지으면 문리가 정세하였으니, 학사(學士) 오원(吳瑗)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는데, 오원은 바로 공의 외척으로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공은 또 인륜에 성실하여 처신이 엄정하였으니, 어렸을 때 정자(程子)가 주공숙(周恭叔)에게 “짐승보다도 못하다.”라고 책망한 대목을 읽고는 그 말을 종신토록 마음에 지녔으며 아내 이외의 여색을 돌아보지 아니하여 마치 처자처럼 몸을 단속하였다. 그의 청백하고 고상한 지조와 화평하고 인자한 마음은 타고난 성품이 그러한 것이었지만 모두 독서하여 실천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공은 비록 학자라고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그 행실의 고상하기란 당대의 학자라 일컬어지는 사람들도 흡사하게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이 널리 대중을 사랑했고 교유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마음에 서로 허여한 친구는 몇 사람에 불과하였는데, 우리 선군(先君)이 그러한 친구 중의 한 분이시다.
공의 병이 위독할 때 자손들이 곁에 둘러앉아 울자, 공이 말리며 말하기를,
“그러지 말라. 내가 계유년에 태어났는데, 오늘이 있을 것을 알았다. 사람의 생사는 일정한 이치이니 비통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며 전혀 죽음을 슬퍼하는 뜻이 없었다.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였는데 바로 정해년(1767, 영조 4) 4월 7일이었고, 향년은 75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남주(南州)의 고사(高士)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고, 장사 지내는 날에는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왔으며, 그 해 7월 어느 갑일(甲日)에 영봉산(靈鳳山) 묘좌(卯坐)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
유고(遺稿) 2권이 있고, 또 시송(詩誦) 2편이 있다. 임자년(1732, 영조 8)에 걱정스러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정력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고금의 시율(詩律)을 암기하면서 중간에 자신의 논평을 가하였고 만년에 또 추가하여 완성하였으니, 전후 각 1편이 모두 외우고 기억하여서 기록한 것이다. 여러 아들들이 그 시송을 가져와 본문(本文)과 대조해 본 결과 한 자도 틀린 곳이 없었으니, 공의 총명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것이 이러하였다.
배위 안동권씨(安東權氏)는 통덕랑(通德郞) 수창(壽昌)의 딸이자 문관 목사[文牧使] 우형(宇亨)의 손녀인데, 현숙하고 화순하여 시가에 들어와 도덕에 위배되는 일이 없었다. 시부모를 섬기고 부군을 공경하며 자녀를 가르치고 비복을 거느리는 거조가 모두 법도에 맞았고, 인자한 은택이 이웃 사람들에게 미쳤으므로, 지금까지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다. 공의 가정은 본시 풍요(豊饒)로웠는데 중년에 재산이 탕진되었다. 그러나 부인이 어려운 살림살이를 맡아 애써 모으고 빈틈없이 꾸렸으므로 공으로 하여금 집안 살림에 대한 걱정이 없게 하였고 공도 생활의 경비에 대해서 물은 적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이 훌륭한 인물이 된 데에는 부인의 내조가 한 몫을 했다.”고 하였다. 부인은 갑술년(1694, 숙종 20) 12월 28일에 태어나 병자년(1756, 영조 32) 1월 27일에 별세하였다. 처음에 영봉산(靈鳳山) 을좌(乙坐)의 자리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는데 병신년(1776,영조52) 2월에 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고을의 서쪽에 있는 마동(馬洞)의 경좌(庚坐)의 자리에 이장하였다.
7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단(壇)은 일찍 죽었고, 둘째 육(堉)은 학문과 덕행이 있어 사우(士友)들의 추대를 받았는데 공이 죽고 나서 너무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건강을 상하여 상복을 벗자마자 죽었다. 셋째는 훈(壎)이고, 넷째 근(墐)은 숙부 상림(相臨)의 양자로 갔고, 다섯째는 기(垍)이다. 장녀는 박인혁(朴仁赫)에게 출가하였고, 여섯째 아들은 전(㙉)이며, 차녀는 강간(姜稈)에게 출가하였고, 일곱째 아들은 식(埴)이다.
단은 분성(盆城) 허구(許榘)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현의(鉉毅)를 낳았다. 육은 한산(韓山) 이맹화(李孟和)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진의(鎭毅), 탁의(鐸毅), 강의(鋼毅), 찬의(鑽毅)이고 사위는 박지원(朴之源)이다. 훈은 진양(晉陽) 하한장(河漢章)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명의(銘毅), 굉의(鈎毅), 황의(鎤毅)이고 사위는 권무중(權懋中)이며, 측실(側室)이 2남 1녀를 낳았는데 사위는 박우상(朴羽祥)이고 두 아들은 어리다. 근은 초취가 함양(咸陽) 여선함(呂善涵)의 딸인데 아들을 두지 못했고, 재취는 완산(完山) 최보천(崔普天)의 딸로 1녀를 두었으나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형의 아들 탁의를 양자로 삼았는데 일찍 죽었고, 서자(庶子), 서녀(庶女)가 두 명씩인데 아들은 약의(鑰毅), 경의(鏡毅)이고 사위는 이단중(李端中), 손은역(孫恩繹)이다. 기는 함안(咸安) 조희팽(趙希彭)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한 명은 감의(鑑毅)이고 한 명은 어리며, 사위는 권경(權燝), 하석규(河錫圭)이다. 박인혁은 2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형천(馨天)이고 사위는 이종운(李宗運), 권태중(權泰中)이며 나머지 아들과 딸은 아직 어리고 출가하지 못했다. 전은 진양(晉陽) 강필주(姜弼周)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을 두지 못하여 형의 아들 황의를 양자로 삼았다. 강간은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사현(師顯)이고 사위는 윤석보(尹碩輔)이며, 두 딸은 어리다. 식은 진양 하덕원(河德遠)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연의(鍊毅)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공의 친손, 외손, 증손, 현손이 80여 명이다.
나는 늘 기억나는데, 어렸을 때 보니 노정공(露頂公)과 우리 조부님께서 서로 만나시면 기뻐하셨고 공과 우리 선군께서 서로 만나시면 기뻐하셨다. 서로 만났을 때 웃는 모습이 화기가 애애하였고 성의가 서로 미더워 어느 분이 주인이고 어느 분이 손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공의 넷째 아들 근(墐)이 가장(家狀)을 지어서 그의 아우 기(垍)에게 주고는 천리의 먼 길을 달려와 나에게 이르게 하기를,
“우리 집의 일이 바로 공의 집의 일이니, 공께서 우리 양가의 교분을 생각하신다면 선친의 덕행을 기록하는 글은 공이 아니고 누가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근, 기씨 형제와 나는 선대의 세의(世誼)를 대대로 지키며 사귀어왔으므로 서로의 마음은 천리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환히 통하는 사이이니, 당대에 문장을 잘하는 훌륭한 사람이 없지 않은데도 기필코 나에게 행장의 글을 받으려는 것은 그 뜻의 소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비록 몽매하고 고루하여 문장을 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금 80세의 나이에 재주가 줄고 생각이 사라져서 실로 이 일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의리상으로는 감히 사양할 수 없었기에 이상과 같이 삼가 서술하였다.


不憂軒鄭公墓碣銘 並序○甲辰 a230_229b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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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相點。字仲與。首陽人。高麗侍中肅之後。入我朝。有左贊成貞度公易遂大顯。公其十一世孫也。四世至進士希儉。與伯氏虛菴先生希良同學。値喬桐主政亂。虛菴遯世。公亦廢擧。詩酒自娛。號桂陽漁隱。世高其節。又三世至諱文孚號農圃。有文武全才。宣廟壬辰。以北評事。倡義起兵。誅土賊逐倭冦。事在國乘。官至兵曹參判。仁祖甲子。坐詩案被禍。後雖伸理。贈貳相謚忠毅。而人至今悲之。於公爲高祖。曾祖諱大隆。贈左承旨。性至孝。自罹家禍。抱痛含恤。與伯氏進士公某。南奔晉陽。不與世相通問。子孫因居焉。祖諱有禋。考諱構。號露頂軒。有志槩尙文詞。性高簡喜施與。三世皆隱德不出。遵先志也。妣淸州韓氏。通德郞碩運女。縣監時重孫也。賢有婦德。以明陵癸酉十一月十七日。生公於州東龍巖里第。公幼聦敏。甫齠齔作句。多驚人語。十一歲冬至。有詩曰斗柄初回壬癸間。天陽一氣地中生。露頂公奇之曰。兒當爲窮理之儒。人謂必能再立鄭氏。十二通經史。尋嬰奇疾。幾十年後疾稍平。因謝公車。惟以讀書頤養爲務。視世之名利紛華。泊如也。性孝友。養志無違。喪祭如禮。有妹遠適。不忍久離。源源省視。到老不替。撫愛庶弟如敵己。以禮範家。閨門肅穆。子孫衆多。敎以義方。不少假以色辭。皆能遵承不愆。鄕黨視爲準則。待人之際。寬弘坦易。洞見心腑。欵接賓友。無不得其歡心。黨論橫流。各執偏見。而公皆折衷義理。不以私好惡低仰。未嘗言人過失。以是人皆愛而敬之。賙恤窮困。恩義兼至。或畜養或指導而成就之者。非一二數。公養疾居閑。非甚病。書未嘗一日去手。援據古今。出入經史。與人語。亹亹不休。雖不從事於功令之文。而博覽多積。發爲詩文。詞理精到。嘗爲吳學士瑗所稱賞。吳卽公戚屬之親切者也。公持身嚴整。幼讀程子責周恭叔禽獸不若之語。而終身佩服。無房外之色。脩飭如處子焉。其淸高絶俗之操。寬和慈良之心。雖天禀使然。而率皆得之於讀書體行中出來。制行之高。非當世所稱學者之所能髣髴也。迨疾革。子孫環侍涕泣。公止之曰。無以爲也。我生癸酉。知有今日。死生常理。不足爲悲。了無怛化之意。考終於正寢。卽丁亥四月七日也。享年七十五。訃聞。遠近嗟惜曰。南州高士亡矣。靷窆之日。數郡畢至。用其年七月某甲。葬于靈鳳山之卯坐原。公取易樂天知命之義。名其軒曰不憂。有遺稿二卷。又有詩誦二篇。記古今詩律而間施評隲。皆誦憶而成者也。配安東權氏。通德郞壽昌女。文牧使宇亨孫。賢淑和婉。入門無違德。仁惠之澤。及於鄰里。至今稱誦。公家素饒。中歲剝落。夫人勤苦拮据。綜理微密。使公無內顧之憂。而公亦未嘗問有無費。人謂公之賢。夫人亦與有助焉。生于甲戌十二月二十八日。卒于丙子正月二十七日。初權厝于靈鳳山乙坐。丙申二月。以宅兆不吉。遷窆于州西馬洞庚坐原。生七男二女。男長壇早歿。有一子鉉毅。次男堉有文行。公歿後過毁致疾。纔服闋而歿。有四子鎭毅,鐸毅,鋼毅,鑽毅。一女婿朴之源。次壎有三子銘毅,鈜毅,鎤毅。一女婿權懋中。庶出二子一女。次墐出后叔父相臨。取兄子鐸毅爲嗣。一女未笄。庶子女各二。次垍有二子。鑑毅一幼。二女婿權燝,河錫圭。次㙉取兄子鎤毅爲嗣。次?有三子一女。幷幼。長婿朴仁赫二子四女。次壻姜稈一子三女。內外曾玄八十餘人。天之報施。其在斯乎。遂爲之銘曰。首陽玄胄世烜爀。跨歷兩代簪纓續。忠毅罹讒久末暴。三世含恤飄南服。公趾其美韞于櫝。劬書禔躬聊自樂。自天申佑餉壽福。有子七人慶遠毓。靈鳳宅兆垂千億。



 順菴先生文集卷之二十六 / 行狀

處士不憂軒鄭公行狀 甲辰 a230_319a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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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相點。字仲與。首陽人。高麗侍中諱肅之後。入我朝。有諱易事太祖太宗。官至左贊成。贈領議政。諡貞度公。卽公之十一世祖也。四世至進士贈吏曹參判諱希儉。與伯氏虛菴先生希良同學。値燕山政亂。虛菴遯世。公亦廢擧。詩酒自娛。號桂陽漁隱。世高其節。又三世至諱文孚號農圃。有文武全才。宣祖壬辰。以北評事。倡義起兵。誅土賊逐倭冦。事在國乘。官兵曹參判。仁祖甲子。坐詩案被誣罹禍。後雖伸理。贈貳相謚忠毅。而人至今悲之。於公爲高祖。自麗至農圃公上下累百載。世襲簪笏。寔東國之著姓也。曾祖諱大隆。贈左承旨。性至孝。自罹家禍。抱痛含恤。與伯氏進士公某。南奔晉陽。不與世相通問。子孫仍居焉。祖諱有禋。考諱構。號露頂軒。有志槩尙文辭。性高簡喜施與。三代皆隱德不出。遵先志也。妣淸州韓氏。通德郞碩運女。縣監時重孫也。賢有婦德。以明陵癸酉十一月十七日。生公於州東龍巖里第。公幼聦敏善記誦。甫齠齔。作句多驚人語。十一歲冬至。有詩曰斗柄初回壬癸間。天陽一氣地中生。露頂公奇之曰。兒當爲窮理之儒。人謂必能再立鄭氏。十二通經史。尋嬰奇疾。幾十年後。疾稍平復。而有少愈之戒。因謝公車。惟以讀書頤養爲務。視世之名利紛華。泊然若無知也。性孝友。養志無違。喪祭以禮。壬子歲。露頂公見忤於臬司。至於被逮。因卒於達城邸舍。公痛深。終身不踐達城之地。有妹遠適。不忍久離。源源省視。到老不替。撫愛庶弟如敵己。以禮範家。閨門肅穆。內外之別。長幼之分。截如也。子孫衆多。敎以義方。不少假以色辭。皆能遵承不愆。鄕黨之敎子弟者。必指公家爲準則。待人之際。寬弘坦易。洞見心腑。賓友之往來者。動以百數。隨遇欵接。無不得其歡心。黨論橫流。各執偏見。而公皆折衷義理。不以私好惡低仰。未嘗言人過失。以是人皆愛而敬之。賙恤窮困。恩義兼至。凡有一藝之可取而不能自振者。或畜養。或指導而成就之者。非一二數。嘗有外家瞽奴轉乞來謁。公憐之。敎以占繇。使之賣卜自活。有小僕失明。敎亦如之。其仁恕濟物之心。不以賤惡而棄斥之。寔君子之用心也。素性廉潔。手不接錢貝。口不談貨利。恒有一介不取之意。咸安有巨刹。卽諸子肄業之所。將役屬於統營。寺僧大懼。聞公與統帥親密。要公一語。事得解。寺僧德之。以百緡錢爲禮。公笑而却之。自後戒諸子勿復居業于其寺。又嘗買馬畜之數年。家人復賣受本直。公知之。語家人曰。服乘數歲。豈有受本直之理。追買馬者。還减價授之。其人驚謝而去。人或以此爲過中。則公曰。雖曰過中。我心不安也。公平生嗜好惟在書籍。聞人有書。或購而置之。或借而傳錄。藏書幾千卷。而聘家多畜書。終不一借。語諸子曰。此吾所以避嫌處也。露頂公素善書。嘗借人趙松雪帖。未及還而棄世。帖主亦歿而無嗣。公聞其有踈族。袖其帖而往歸之。家有韓濩帖。妹婿宋君甞愛玩不已。公欲贈而心之久矣。宋君歿。祭文道其意而遺之。此等事皆屬微細。而非人人可能也。公養疾居閑。非甚病。書未嘗一日去手。與人談論。援據古今。出入經史。至於百家稗乘雜說。無不淹貫。與人語。亹亹不休。文學之士。多從之遊。而戶外之屨常滿矣。雖不從事於功令之文。而博覽多積。發爲詩文。詞理精到。嘗爲吳學士瑗所稱賞。吳卽公戚屬之親切者也。公篤於人倫。持身嚴整。幼讀程子責周恭叔禽獸不若之語。而終身佩服。無房外之色。修飭如處子焉。其淸高絶俗之操。寬和慈良之心。雖天禀使然。而率皆得之於讀書體行中出來矣。公雖不以學自居。其制行之高。非當世所稱學者之所能髣髴也。公雖泛愛博交。而心期相許者。不過若而人。而我先君其一也。迨疾革。子孫環侍涕泣。公止之曰。無以爲也。我生癸酉。知有今日。死生常理。不足爲悲。了無怛化之意。考終於正寢。卽丁亥四月七日也。享年七十五。訃聞。遠邇嗟惜曰。南州高士亡矣。靷窆之日。數郡畢至。用其年七月某甲。葬于靈鳳山之卯坐原。有遺稿二卷。又有詩誦二篇。甞於壬子歲憂遑中。欲驗精力。暗記古今詩律而間施評騭。暮年又足成之。前後各一篇。皆誦憶而得者也。諸子退考本文。無一字錯。聦明之絶人。有如此者。配安東權氏。通德郞壽昌女。文牧使宇亨孫。賢淑和婉。入門無違德。事舅姑敬君子。誨子女御婢僕。咸中法則。仁惠之澤。及於鄰里。至今稱誦。公家素饒。中歲剝落。夫人勤苦拮据。綜理微密。使公無內顧之憂。而公亦未嘗問有無費。人謂公之賢。夫人亦與有助焉。生于甲戌十二月二十八日。卒于丙子正月二十七日。初權厝于靈鳳山乙坐。丙申二月。以宅兆不吉。遷窆于州西馬洞庚坐原。生七男二女。男長壇早歿。次堉有文行。爲士友推詡。公歿後過毁致疾。纔服闋而歿。次壎。次墐出後叔父相臨。次垍。女長適朴仁赫。次男㙉。次女適姜稈。次男?。壇娶盆城許榘女。生一子鉉毅。堉娶韓山李孟和女。生四子一女。子鎭毅,鐸毅,鋼毅,鑽毅。壻朴之源。壎娶晉陽河漢章女。生三子一女。子銘毅,鈜毅,鎤毅。壻權懋中。側室二子一女。婿朴羽祥。餘幼。墐初娶咸陽呂善涵女。無子。再娶完山崔普天女。有一女未笄。以兄子鐸毅爲嗣。早逝。庶子女各二。鑰毅,鏡毅。李端中,孫恩繹。垍娶咸安趙希彭女。生二子二女。子鑑毅。婿權燝,河錫圭。一子幼。朴仁赫生二子四女。子馨天。婿李宗運,權泰中。餘未行。㙉娶晉陽姜弼周女。無子。取兄子鎤毅爲嗣。姜稈一子三女。子師顯。婿尹碩輔。餘幼。?娶晉陽河德遠女。生三子一女。子鍊毅。餘幼。內外曾玄八十餘人。鼎福常憶幼少時見露頂公與我王考相遇驩如也。公與我先君相遇驩如也。相遇之際。色笑欵恰。誠意交孚。不知誰是主而誰是客也。今公之第四胤墐修家狀。授其弟垍。走千里而諭鼎福曰。我家事卽公家事。公若能念我兩家交誼。則先人撰德之文。舍公而誰。墐,垍氏之與鼎福世修先義。靈犀一點。隔千里而相照。非無當世文章鉅公。而必受狀於鼎福者。意有在也。鼎福雖昧陋無文。而今在耋期之年。才退思渴。誠不足以當此。然義不敢辭。謹序如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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鼓山先生續集卷之三 / 墓碣銘

孝子宣傳官權公墓碣銘 幷序       

      
故宣傳官權公衣履之藏。在咸陽縣東南五里橋洞向亥之原。鄕人過者。不以官稱。稱孝子之墓云。日公之孫矩夏。排纘公事行。不遠千里。來謁麗牲之文。屢辭非其人。不獲。乃按狀而敍之曰。公諱懋中。字哲彥。安東人。始祖幸。高麗太師。入我朝。有諱仲達。右議政花原君謚忠憲。世襲簪組。至諱濬。輔德。號霜巖。値昏朝蹭蹬。仁廟改玉。始以文識政事著名。生諱克有。參奉。號愚川。於公爲五世祖也。曾祖諱會亨。贈左承旨。祖諱壽龍。贈戶曹參判。祖妣姜氏。以烈被旌褒。梅山洪文敬先生。記其閭。考諱翰。兵馬節度使。志氣卓犖。兼有文行。性潭宋文敬公。銘其墓。妣貞夫人密陽朴氏。鎭球之女。婦德甚茂。公自髫齔。事親以孝。得一味。忘其口而獻諸父母。及出就外傅肄業。有暇則雖一日。十次來候父母。日間所見聞。一一告達。爲樂其心志也。親癠。衣不解帶。藥餌之供。溲矢之濯。必躬自爲之。己酉。節度公捐舘于淸州任所。公哭踊過度。絶而復甦。嗌不粒食。母夫人强之少進。致哀盡禮。三年如一日。日侍母夫人。不暫離。志物俱養。母夫人未曾經痘。痘入隣里。輒躬奉出避。調護愈至。先是。爲榮親登武科。而未嘗枉道求仕。不得亦不戚戚。四十以後。尤專心奉養。不復跡京洛。壬戌。自上特除宣傳官。盖念節度公政績而乃爾也。旣蒙異數。進塗方闢。而公以事親日短。一謝便歸。離側廑十六日也。庚午。丁內憂。公年已不毁。毁瘠幾危。雖服吉後。見父母手澤則泣。哭諱如袒括。祭必親檢籩硎。以致如在之誠。人或勸之仕。則曰。親旣不在。誰爲爲之。縱或得之。秪增我風木之痛耳。一鄕章甫。擧公行義。轉聞于朝。哲廟癸亥。命旌其閭曰孝子之門。祭酒宋公來煕。爲之記。是爲公孝之終始也。若其事叔母如母。爲繼祖曾兩宗。營產立後。恩遇庶弟妹五人。甚篤。國哀成服前。啗素着布巾。以終三年。泛愛衆。至使洞民哀死致奠。又皆孝之推也。公以純廟辛巳八月二十七日卒。距其生英廟丁卯二月三日。壽七十五。初葬本縣嚴川鷹峯。後移于此。配海州鄭氏。農圃文忠公文孚之後。其考壎也。孝友仁睦。六親咸稱。先公四十三年沒。壽三十六。墓祔。擧一男二女。男思祖。女適盧錫臨,申學祖。繼配昌寧成氏。仁齋某之後。其考壽仁也。性行峻正。治家有法。後公二十年沒。壽七十。生一男夭。別葬鷹峯子坐。思祖二男。䂓夏,矩夏。三女。適盧光淵及第。鄭煥範,許爁。䂓夏二男。秉律,秉度。二女。適邊榮,鄭煥益。矩夏二女。適姜秉魯,鄭醴源。公容貌端粹。性度剛潔。飭躬甚嚴。不失尺寸。閨門之內。肅如也。見邪佞。若將浼焉。其隨節度公在子舍也。惟恐貽累。聲色玩好。未嘗一接。閉門劬書。吏校罕見其面。家甚貧。室屋湫隘。衣食薄陋。處之晏如也。公雖從事韎韋。恰有敦詩說禮之風。常喜讀易曰。潔淨精微之理。吾不敢知。但於行己處世。不爲無益云。噫。爵祿之辭。聖人幷列於蹈白刃。其難何如也。而惟公顧養。如脫弊屣。苟非深愛加人一等。何以與此。然則公之畢生沉滯。飛不盡翰。雖似可惜。其重如此。其輕如彼。實公之志也。又何憾乎。是可銘。銘曰。
不以三公。換一日養。古聞其言。絶意進取。終身親側。今見其人。一孝爲質。宜其羣行。焯焯出倫。有如不信。盍觀其里。綽枻巋然。橋洞之山。高三尺者。惟公之藏。過此不式。是不曾讀。烝民首章


  錦谷先生文集卷之十一 / 記

孝子權公㫌閭記        

      
哲宗大王十四年癸亥。命旌孝子權公懋中之閭。遠近欽聳。今年春。其孫規夏,矩夏等。始具棹楔。跋履十舍。謁予願有記。夫孝者。子職之所當爲。故實不待朝家以旌賞威刑勸懲而後能者也。然而世敎衰。民不興行。其能養口體而盡疏節者。亦鮮矣。是以朝家之特加旌表門閭者。所以樹風聲礪薄俗。誠不可已也。謹按公安東人。安東之權。肇自高麗太師諱幸。是後冠冕奕舃。以下幾世。入本朝。有諱濬號霜巖。登文科。當昏朝。沉滯下僚。及反正。以文識政績著于世。仕至輔德。卽公之六世祖也。高祖諱釴進士。贈司僕正。曾祖諱會亨贈左承旨。祖諱壽龍贈戶參。考諱䎐兵使。屢杖閫鉞。兼有文行。妃貞夫人密陽朴氏。學生鎭球女。婦德甚備。公胚胎淵源。信厚純篤。不失赤子心。其爲孝一出天性。婉容愉色。深得養志之道。溫凊滫瀡。亦竭供職之誠。節度公捐舘於淸州任所。公哭踊踰制。絶而復蘇。喪葬之節。盡其哀敬。至于終制。少無懈怠。常在母夫人之側。白首嬰戱。深愛藹然。自上特除宣傳。卽赴謝恩。以親病呈遞而還。其意只欲專心於歸養。後遭內憂。式禮罔愆。一如前喪。平生操履。謹拙簡重。不以貧窶有所經心。處兄弟湛樂。敎子姪以義。接待宗族。亦盡敦睦。居家而政無不備。處鄕而人無間言。匝境公議合辭陳白于營邑。轉達紸纊。竟蒙褒典。予不孝孤露。今讀公狀。不禁三復。忍涕而感歎也。且其狀摭實無溢辭。謹撮其大較。書之如右云。